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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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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박남수 - 새 댓글:  조회:3324  추천:0  2015-12-18
  새 壹.                                                    1                      박남수 하늘에 깔아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쭉지에 파묻고 따스한 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ㅡ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새 貳.   이른녘에 넘어오는 햇살의 열의(熱意)를 차고, 산탄(散彈)처럼 뿌려지는 새들은 아침 놀에 황금의 가루가 부신 해체(解體). 머언 기억에 투기(投企)된 순수의 그림자.               새 參.   나의 內部에도 몇 마리의 새가 산다. 은유(隱喩)의 새가 아니라, 기왓골을 쫑, 쫑, 쫑, 옮아 앉는 실재(實在)의 새가 살고 있다. 새가 뜰로 나리어 모이를 쫓든가, 나무 가지에 앉든가, 하늘로 날든가,   새의 意思를 죽이지 않으면,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족히 산다.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쫑, 쫑, 쫑, 기왓골을 옮아 앉으며 조그만 自然이 된다.                  새 四.   바람에 갈대가 우는 발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포인타는 코를 저으며 갈밭을 허비다가 코를 들었다. 코의 방향으로 뚫린 포수(砲手)의 총구, 새는 투망(投網)처럼 하늘에 뿌려지고, 펑, 울린 맑은 공기의 구멍. 구멍에서 그려나가는 파동의 끝에 날개는 너울 너울 기울며, 떨어져간 한 마리의 새.   펑, 소리의 에코. 새들의 Vie는 진공지대에 울린 총소리 속에 있었다.   갈밭이 갑자기 물결치더니 머리를 내어민 포인타의 입에 물리인 피 묻은 총소리 키가 넘는 갈대가 우는 발 밑으로는 역시 물이 흐르고 있었다.          ㅡ 박남수, 『 신의 쓰레기 』, 모음출판사, 1964.         이 시에 등장하는 새는 애써 꾸미지 않은, 가식이 없는 절대 순수로 표상된다. 또한 천상과 지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존재로 새는 외연적 의미를 넘어 순수 실제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위의 시에서 포수는 순수한 존재로 남아 있는 '새'에게  한 덩이 납이 담긴 총으로 그 절대순수를 위협한다. 하지만 포수가 매번 쏘는 것은 순수 그 실체가 아닌 '한 마리의 상한 새'에 불과한 더러운 현실, 비순수에 지나지 않는다. 즉 순수한 '새'는 파괴될 수 없는 이데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새가 순수의 실체라면 그러한 순수를 깨뜨리고 파괴하는 자인 포수, 인간은 비순수의 비유로 대립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 마리 상한 새 등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과 현대문명이 순수가치를 파괴하고 있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실제에 있어 포수는 '한 마리 상한 새'만을 손에 쥐게 되고 결국 부패를 순수로서 그리고 부조리의 진리로서 포획하고 있는 것이다. 박남수는 '새'라는 시를 통해 순수라는 것이 얼마나 다다르기 힘든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자연과 인간의 대비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생무상을 느끼고, 욕심버리며 있는 그대로 살아가야 됨을 다시 느낀다.                 박남수(朴南秀, 1918∼1994)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1937년 평양의 숭인상업학교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여 1941년 쥬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고 돌아와 곧바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진남포지점에 입사하였다. 1946년에는 조선식산은행 평양지점장으로 승진, 1·4후퇴 당시 국군을 따라 월남하였다.   1954년 《문화예술》 편집위원,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회원 및 심의위원회 의장, 1959년 《사상계》 상임편집위원, 한양대학교 문리대 강사(1973)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가족들을 미리 미국으로 보내놓고,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다가 구하지 못하고 1975년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살다가 1994년 9월 17일 미국 뉴저지주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 발표는 1933년 《조선문단》에 희곡 〈기생촌 妓生村〉이 입상된 것에서 비롯된다. 그 뒤 그는 시작(詩作)으로 전환하여 《시건설 詩建設》과 《맥 貘》 등의 시 전문지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가 문단에 본격적으로 데뷔한 것은 1939년 《문장 文章》에 3회에 걸쳐서 정지용(鄭芝溶)의 추천으로 〈심야 深夜〉·〈마을〉·〈주막 酒幕〉·〈초롱불〉·〈밤길〉·〈거리 距離〉 등 6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초롱불》(동경 삼문사, 1940)·《갈매기 소묘(素描)》(춘조사, 1958)·《신(神)의 쓰레기》(모음사, 1964)·《새의 암장(暗葬)》(문원사, 1970)·《사슴의 관(冠)》(문학세계사, 1981)·《서쪽 그 실은 동쪽》(인문당, 1992)·《그리고 그 이후》(문학수첩, 1993)·《소로 小路》(시와 시학사, 1994) 등 8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82년 김종한(金鍾漢)과 함께 지식산업사에서 ‘한국현대시문학대계’ 21권째로 펴낸 시집과 1991년 미래사에서 출간한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등 2권의 시선집, 그리고 같은 해 삼성출판사에서 간행된 재미 3인 시집 《새소리》 등을 통해 총 350여 편의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밖에 〈현대시의 성격〉을 비롯하여 몇 편의 평론과 잡문이 있으나, 그 수에 있어서 극히 제한된 것으로 보아 그는 일생을 통하여 오로지 시작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훌륭한 표현만이 예술가의 특권이며, 사상을 사상으로만 제공한 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라고 한 그 자신의 말과도 같이, 박남수는 실지 시작에서도 청각(聽覺이나 시각(視覺)을 통한 선명한 이미지와 시어구사로서 표현을 가다듬고 있다.   흔히 그를 일컬어 ‘새’의 시인이라 하고 있듯이, 그는 선명한 이미지와 그것을 통한 순수성의 지향이 시적 특색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박남수의 시세계는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적 심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적 지향은 ‘새’의 상징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는 말년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낯선 땅에 살면서도 민족시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시인으로 이미지의 조형성(造形性)과 현대적 지성(知性)을 바탕으로 한 주지적 서정시를 쓴 것이다. 수상경력으로는 제5회 아시아자유문학상(1958)과 공초문학상(空超文學賞, 1992)을 수상했다.     참고문헌 『현대시해설』(조남익, 세운문화사, 1977) 「박남수론」(김춘수, 『심상』, 1975.6.) 「새와 순수」(박태수·정한모·김재홍 편저, 『한국대표시평설』, 문학세계사, 1983)   /(한국학중앙연구원)   시인 박남수 시세계(1) 이미지의 시인, 새의 시인,빛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박남수는 1930년대말 문단에 데뷔한 이래로 1994년 타계하기까지 약 50여년 동안 여러 편의 시집 간행과 활발한 문학활동을 전개해 왔다. 습작기 때부터 이미 이미지즘에 경도되어 이미지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감각의 세계와 언어표현의 암시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노력을 지속했던 박남수는 1939년 "심야","마을","밤길", "거리" 등이 정지용에 의해 추천되어 지를 통해 정식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박남수의 작품세계는 활동 시기상 경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첫 시집인 "초롱불"의 출간 이후 약 18년의 공백기가 있었고,네번째 시집 "새의 암장"이후에는 도미하여 약11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다섯번째 시집 "사슴의 관"을 발행하고 또다시 10여년 후부터 작고 시까지 작품활동을 지속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 창작상의 명백한 공백기는 곧바로 시적 경향의 변모양상과 일치하는 면모를 보인다. 박남수가 문학활동을 시작하던 1930년대말은 리얼리즘에 대한 강한 회의가 함께 모더니즘이 풍미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활동을 전개했던 박남수 문학을 언어의 건축물로 간주하고 예술성을 강조했던 당시의 모더니즘적 시관을 바탕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특히 초기의 그의 시는 선명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이미지즘에 경도되는 경향을 보여 '감각의 세계-감각 위에 세워진 미학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표현과 예술화를 시창작에서 중요한 원리로 내세웠던 그는 단순한 언어와 사물의 일원적 형상화에서 탈피하여 중기로 갈수록 사물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하는 차원에서 발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초기 중기 후기의 뚜렷한 변별적 양상은 시인이 하나의 경향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시정신을 모색해 나간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대체로 초기와 중기의 경향에 집약되어 있는 박남수 시에 대힌 기존의 연구들에서 한걸음 나아가 후기에 이르기까지 박남수의 시세계를 총체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로써 새로운 견해의 제시보다는 전체적인 시세계의 종합을 통해 박남수 시에 대한 채계적인 조망이 가능해지리라 본다. 2. 감각의 환기와 이미지의 창조 박남수의 시작활동 시기였던 1930년대는 현대시에 대한 자각이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시를 편내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던 시각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술품으로 간주한 모더니즘적 사고는 시형식의 예술화를 강조하고 언어의 세련성을 추구하는 공통적 속성을 보인다. 박남수는 그의 초기 시론에서 이러한 모더니즘적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예술가란 틔없는 구슬을 깎어 다른 하나의 세계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훌륭한 표현만이 예술가의 특권이다. 전달에 끄치는 예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훌륭한 표현이란 '짧고 비약적인 함축있는 언어로 자기의 의욕한 세계를 틈없이 그리여 내는 것이다. 절약미처럼 동양의 특징적인 것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를 정복하지 못한 예술가처럼 불쌍한 것은 없다. 박남수가 주장한 언어예술에 대한 견해는 이미지즘이나 주지주의로 대표될 수 있는 1930년대의 모더니즘적 시창작 태도와 일치한다. '함축적 언더'를 중시하는 언어의식이나 예술가의 특권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자작을 강조하는 이러한 언어관 혹은 시관은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박남수 시의 대표적인 시작 태도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초기의 박남수 시에는 특히 이미지스트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시기 박남수가 주력했던 것은 감각을 환기시키는 이미지의 창조이다. 관념은 배제된 채 감각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주류를 이루는 초기시집『초롱불』에 실린 시편들은 대부분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 하에 '빛'이라는 대립적 이미지들을 제시함으로써 어둠 속에서의 빛의 의미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별하나 보이지 않은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조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따라 초롱불은 어디를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상한 곳을 지나 묺어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는 초롱불..... -「초롱불」전문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에 간신히 불빛이 발하고 있는 초롱불의 이미지는 강렬한 빛의 이미지라기 보다는 이제 곧 소멸될 것 같은 아주 약한 불빛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이 불빛은 어두운 밤을 지켜주는 의미로서의 빛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둠에 의해 그 빛을 잃어가는 나약한 이미지로서의 빛일 뿐이다. '별하나 보이지 않는 밤'의 위력이 더 크게 작용하고 초롱불의 이미지는 시각적 의미를 상실하고'풀짚는 소리'인 청각적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음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셋 외롭고나 이윽고 훌닥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뚝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밤길」전문 위 시의 배경은 한 여름밤의 시골이다. 빗방울이 내리는 밤에 듬성듬성 지키고 있는 등불의 이미지는「초롱불」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멀리 보이는 산턱이라는 거리감 때문에 등불의 존재는 더욱 외롭고 나약한 여린 이미지로 제시되고 이것은 간신히 불빛을 내고 있는 어두운 밤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홀딱 지나간 번개불'에 어리는 사나이의 모습은 비내리는 밤에 끊어진 논둑길을 달려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짐작케 한다. 박남수의 초기의 시편들에서 보이는 빛의 이미지는 대체로 감각적 이미지로 제시되면서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고독하고 불안한 정조로 일관되는 특성을 보인다. 람푸불에 부우염한 대합실에는 젊은 여인과 늙은이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네가 가문 내가 어드케 눈을 감으란 말인가 -「거리」에서 토방마루에 개도 으수륵이 앉어 술방을 기웃거리는 주막..... 호롱불이 밤새워 흔들려 흔들린다. -「주막」에서 등도 켜지 않은 여관방 창가에 앉아 내 눈이 안개 끼인 포구 밖으로 건너가자 강 건너 제도에 등불이 하나 외로이 달린다. -「진남포」에서 시간적 배경은 대체로 어두운 밤이며 등불이나 호롱불,램프불 등과 같은 빛의 이미지는 어둠의 기세에 눌려 함몰되어 가는 쇠잔한 빛으로 일관한다. 빛의 밝음을 몰아내는 '어둠'이나 '밤'은 화자가 처한 위태롭고 불안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초기시들은 주로 향토성이 강한 시골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이것은 박남수가 모더니스트들이 지향했던 언어의 절제와 감각화를 추수하면서도 전통적 공간을 끌어들여 그만의 독창적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전통적 소재를 회화적 이미지와 접합시키는 시인의 노력은 도시문명 공간 속에서 소재를 채택하고 도시 문명을 비판하려 했던 당시의 모더니즘 시인들과는 구분되는 변별성을 갖는 것이다. 요건대 언어의 빛깔과 향기에 관심을 기울인 초기 시편들은 감정을 절제하고 언어를 감각화 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여 선명하고 치밀한 이미지들을 제시했다는 데서 이미지스트로서의 미학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3. 이미지의 세계, 존재론적 의미와의 만남 박남수의 시세계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초기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발전한다. 언어 표현을 위한 도구나 사물과 인간의 매개체로서 인식하던 태도를 유지하되 단순한 사물의 이미지 제시나 시적 형상화 차원에서 한걸음 나아가 사물에 내재하는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성찰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구조가 한층 복잡해지고 사물의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병치시키려는 노력이 중기 시편들에서 드러난다. 감탕을 먹고 탄생하는 연꽃의 아기가 이끼 낀 연못에 웃음을 띄운다. 지금 한창 별을 빨고 있는 이승의 뒷녘에서는 외롭게 떨어져 가는 후일의 후광 구천에 뿜는 놀의 핵심에서 부신 상이 타면 나는 어둠에 연소하는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잉태」전문 이 시에서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 빛의 이미지 속에서 복합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탄생하는 아기는 이승의 공간에서 '별을 빨고'있고 생명이 다 해 사라져야 하는 '나'는 저승의 공간을 향해 떠나려 하는 대립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은 삶과 죽음이라는 단순한 대립에서 끝나지 않는다. 탄생하는 '연꽃'의 이미지를 통해 우주적 생명력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융합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생성과 소멸,즉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인 차원은 상승과 하강이 동일시되고 있는 빛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며 의미의 폭을 심화시킨다. 어둠과 빛이 대립적 이미지로 제시되던 초기시의 경향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제시되고 있는 빛의 이미지는 화자의 내부에서 빛이 어둠을 불사르고 어둠이 곧 빛을 연소시키는 상태로 융합되고 있는 것이다.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의 잔치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아침 이미지1」전문 위의 시는 사물들이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아침이 되면 빛에 의해 활기를 찾는 정경을 이미지의 제시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의 핵심적 요소인 밀려나는 어둠과 찾아오는 아침-빛-의 관계는 대립적인 이미지 구도를 형상하고 있다. 나아가 이미지의 대립은 소멸과 생성이라는 의미로 확대되고 하강과 상승이라는 관념의 대립으로까지 연결된다. 중기 시에서 두드러지는 박남수만의 독특성이라면 그것은 '빛'과 더불어 '새'의 이미지가 시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는 그 특성상 순수성과 비약 그리고 상승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새의 이미지는 지상과 하늘이라는 양자 세계의 매개적 존재로 기능하기도 한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해에 지나지 않는다. -「새 1」에서 이 시에서 새는 맑고 깨끗한 순수의 표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교태나 가식이 없는 순수성은 화자가 동경하는 직접적 대상이다. 그러나 포수의 설정으로 새의 본질인 순수성은 위협을 받게 되고 결국 포수가 겨냥한 새의 순수성은 '피에 젖은 한 마리의 새'에 불과한 비순수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포수의 출현은 이 작품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가면서 결말로 치닫게 만든다. 새의 이미지는 하늘의 이미지에서 땅의 이미지로 즉 상승의 이미지에서 하강의 이미지로 변화되고 새의 천상을 향한 비약은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다닐 때 존재 의미를 부여받던 새는 포수와 대립적 관계 속에서 순수성이라는 본질을 상실한 죽음의 새가 되고 만다. 시인과 순수는 결과적으로 단절된 관계에 놓여 있으며 시인이 지향한 순수라는 가치는 허상으로 존재한다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3. 사람은 모든 원생의 새 어느 기억의 숲을 날며 가지 무성한 잎 그늘에 잠간씩 쉬어가는 원생의 새 지평과 하늘이 맞닿는 곳에서 새는 땅으로 꺼져들던가 하늘은 증발되어 그 형상을 잃는다. 당신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산새가 죽어, 눈에 끼던 흰 안개 같은 것, 커어피를 마시며 아침 두시, 분명 어딘지 모를 어느 숲의 기억에서 당신은 날아왔다. 나의 내벽에 메아리가 되어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에서 이 시에서도 '새'의 이미지는 시인의 존재론적 태도를 밝히는 중요한 매개로 작용한다. 새와 화자는 동일시되고 있으며 원시적 생명력을 지닌 '원생의 새'로 존재한다. 그리고 기억의 숲을 날던 산새가 죽어가면서 보는 흐릿한 안개빛은 화자가 떠올리는 원시적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환치된다. 초기시에서처럼 철저한 대상의 즉물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시에서처럼 철저한 대상의 즉물적 이미지의 세계만으로 일관하는 태도에서는 벗어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적인 삶과 존재의미에 대한 추구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구 그리고 물질문명에 대한 역사적 비판의식 까지 갖춤으로써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미지로 확대되는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4. 주관적 정서의 표출과 순환론적 인식의 전개 미국으로 이민간 후 박남수는 한동안 시작활동을 중단하다가 10여년이 지난 후 다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러한 문학적 공백은 시인의 작품 세계의 변모와 직결된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초기와 중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구했었던 모더니스트적 면모에서 벗어나 직설적이고 심정적인 시어들을 통해 시인의 삶의 흔적을 진솔하게 제시하는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후기 시편들에서는 시인이 미국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심정이나 자아의 실존에 대한 의식 등이 현실의 공간과 밀착되어 나타난다. 특히 존재에 대한 상실감을 그린 시편들이 다수 창작되어 도미 후 시인의 현실 적응이 어려웠음을 짐작케 해 준다. 맨하탄 어물시장에 날아드는 갈매기 끼룩끼룩 울면서 서럽게 서럽게 날고 있는 핫슨 강의 갈매기여 고층건물 사이를 길 잘못들은 갈매기 부산 포구에서 끼룩 끼룩 서럽게 서럽게 울던 갈매기여 눈물 참을 것 없이 두보처럼 두보처럼 난세를 울자 슬픈 비중의 세월을 끼룩끼룩 울며 남포면 어떻고 다대포면 어떻고 핫슨 강변이면 어떠냐 날이 차면 플로리다 쯤 플로리다 쯤 어느 비치를 날면서 세월을 보내자구나 -「맨하탄의 갈매기」전문 중기시집『갈매기의 묘소』이후 지속적으로 새의 이미지를 지향해 왔던 경향은 후기시에서도 계속되는데 이 시에서도 '갈매기'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투사한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사물이다. 원래 부산 포구에 날고 있어야 하는 갈매기가 머나먼 맨하탄 핫슨강변에 날고 있다는 설정은 제 갈 길을 잃어버린 화자의 심정과 직결된다.  서글픈 갈매기의 운명은 화자가 급기야는 자아에 대한 체념의식으로 확대되어 더 나은 삶을 위해 비행하던 갈매기의 이상은 사라지고 아무 곳에나 정착해 살면 된다는 무의지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새를 통한 귀소의식이나 회귀본능은 삶에 대한 전망이 부재하는 현실 속에서 시인의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자아 치유의 방법인 것이다. 낳고 자라서 죽음으로 탄생되는 것은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가장 순수한 흙이되어 태양이 쪼이고 바람이 부는 풍광 속에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어 산다. 영원, 영원을 산다 -「풍광 속에서」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죽음을 소멸로 보지 않고 있다. '죽음으로 탄생'된다는 표현을 통해 죽음이란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순환론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죽음과 겨울의 이미지는 삶과 계절의 끝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상태로 '영원'성을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탄생과 성장, 노화와 죽음이라는 인생의 역정이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계속해서 순환되는 것처럼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완성이며, 새로운 시작이자 탄생이 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나뭇가지에 달려 꽃이 피었을 때,꽃은 비로소 지기 시작한다. 한잎 두잎 모양새를 망가트리고 빛갈을 지워, 이제 꽃은 꽃이 아니라 열매 열매로 맺혔을 때 이윽고 빠개져 땅으로 쏟아진다. 쏟아진 열매는 줄기를 세우고 뿌리를 내린다. -「회생1-소생」에서 위의 시에서 꽃이 지면서 남긴 열매다. 다시 줄기를 세우고 뿌리를 내리는 순환적인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꽃은 순간적인 존재로 곧 소멸되지만 소멸의 순간에 맺힌 열매는 잘 무르익어 다시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과정을 겪는다. 생과 사의 경계는 다시 무너지고 결과적으로 소멸은 곧 생성으로 연결되어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과정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려는 후기 시의 경향은 지상과 천상의 통합적이고 일원적인 시, 공간의식에 근원을 둔 것이다. 객관성의 성취가 불가능한 자아 상실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이항대립적 공간과 의미를 통하여 합일에 이르는 무화의 경지에 돌한 시적 작업은 시인이 전 생애를 통해 추구해 온 가치관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남수의 후기시는 이미지의 기능은 약화되고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갖가지 현상들에 대한 발견과 의미 부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철저하게 객관화된 세계의 모습을 지양하고 자아를 투사한 대상들을 통해 자아의 내면 상태나 주관적 정서의 세계를 형상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아 상실감이나 귀소의식, 순환론적 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일원론적 관점하에서 자연으로 표상되는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작업을 완성하기 이르게 된는 것이다.  5. 맺음말 정서를 이미지화하고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지속해 나간 시인 박남수는 전통적인 서정성의 지적 극복과 철저한 이미지의 추구로 문단에서 그 독특성을 인정받아 왔다. 이러한 즉물적 이미지의 창조에 주력했던 초기 시의 경향은 중기로 접어 들면서 사물의 객관화된 이미지와 그 너머에 자리하는 존재의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한층 심화된 시세계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이미지에 집중하되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로 확산시켜 주관적 정서를 내면화하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확대시켜 이미지의 존재론적 의미간의 거리를 좁혀 들어가는 탁월성을 발휘한 것이다. 박남수의 시는 사물의 회화적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면서 철저히 인간적 감정을 배제했던 초반기에서 후반기 작품으로 갈수록 현실 공간에 밀착되고 점차 사물의 이미지가 화자의 주관적 정서를 투사시킨 대상으로 변화한다. 대립적 이미지들의 오묘한 배합과 통합의 시도는 대상의 순수성과 함께 존재성의 결합과 조화를 창조해 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모더니스트로서 이미지스트로서의 외래적 시 경향을 추구하면서도 전통적인 소재와 배경을 취택해 시 언어의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했던 박남수 시의 특성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강점으로 작용한다 한 수 있다. 오랜 작품 생활동안 이미지의 구현이라는 시적 태도를 견지해 온 박남수 시인은 지속적으로 '빛'이나 '새', 기타 식물적 이미지들을 객관성을 지향하면서 내면화된 의미를 추구해 왔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이미지의 표면화에 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물과 존재 사이의 간격을 좁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 상승과 하강, 지상과 천상의 거리감을 극복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일원화시키는 역량을 발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상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객관적 통찰력 그리고 통합적 세계인식은 현대시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차지한다 할 것이다.          시인박남수의 시세계(2)   마을     박남수       외로운 마을이 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음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 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대룩대룩 겁을 삼킨다.     -제재:정오의 농촌마을 -주제: 한가롭고 평화로운 농촌 마을의 정경 -출전; 문장 9호 1939년       종소리                         박남수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한국의 명시[종로서적]에서   박남수 시인의 시의 이미지는 詩想이 시각과 청각의 의미를 언어화 하는 기교 면에서 탁월한 발상이 전제되여 있다 그 만큼 많은 생각을 갖었엇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종소리"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꽃에서는 웃음이 되고/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소리 그 자체를 두고 탐미하는 마음은 종소리에 대한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적 이미지화 하여 보다 깊은 사실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종소리는 아픔의 크기 만큼 더 멀리 퍼진다 참고 견디는 아픔에서 소리가 증폭되어 가루 가루 가루가 되여 보이는 종소리는 삶의 여정이리라.     새     박남수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분석과 감상 이 시의 문화적 맥락은 몇 가지로 접근할 수 있다. 흔히 이 시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맥락에서 '새'를 순수한 자연, '포수'를 인간.'납'을 인간의 문명, '상한 새'를 파괴된 자연으로 해석하여, 순수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문명을 고발하는 시로 해석한다. 일리 있는 해석이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이 시를 '존재와 인식'이라는 맥락에서 '새'를 인식 대상, '포수'를 인식 주체, '납'을 인식 수단인 언어로 해석하여, 언어를 수단으로 해서는 결코 존재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한계를 노래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흔히 그를 일컬어 ‘새’의 시인이라 하고 있듯이, 그는 선명한 이미지와 그것을 통한 순수성의 지향이 시적 특색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박남수의 시세계는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적 심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적 지향은 ‘새’의 상징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아침이미지'/박남수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1.머릿말 이미지의 시인, 새의 시인, 빛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박남수는 1930년대말 문단에 데뷔한 이래로 1994년 타계하기까지 약 50여년 동안 여러 편의 시집 간행과 활발한 문학활동을 전개해 왔다. 습작기 때부터 이미 이미지즘에 경도되어 이미지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감각의 세계와 언어표현의 암시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노력을 지속했던 박남수는 1939년 "심야", "마을"," 밤길", "거리" 등이 정지용에 의해 추천되어 지를 통해 정식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박남수의 작품세계는 활동 시기상 경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첫 시집인 "초롱불"의 출간 이후 약 18년의 공백기가 있었고, 네번째 시집 "새의 암장" 이후에는 도미하여 약11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다섯번째 시집 "사슴의 관"을 발행하고 또다시 10여년 후부터 작고 시까지 작품활동을 지속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 창작상의 명백한 공백기는 곧바로 시적 경향의 변모양상과 일치하는 면모를 보인다. 박남수가 문학활동을 시작하던 1930년대말은 리얼리즘에 대한 강한 회의가 함께 모더니즘이 풍미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활동을 전개했던 박남수 문학을 언어의 건축물로 간주하고 예술성을 강조했던 당시의 모더니즘적 시관을 바탕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특히 초기의 그의 시는 선명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이미지즘에 경도되는 경향을 보여 감각의 세계-감각 위에 세워진 미학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표현과 예술화를 시창작에서 중요한 원리로 내세웠던 그는 단순한 언어와 사물의 일원적 형상화에서 탈피하여 중기로 갈수록 사물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하는 차원에서 발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초기 중기 후기의 뚜렷한 변별적 양상은 시인이 하나의 경향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시정신을 모색해 나간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대체로 초기와 중기의 경향에 집약되어 있는 박남수 시에 대힌 기존의 연구들에서 한걸음 나아가 후기에 이르기까지 박남수의 시세계를 총체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로써 새로운 견해의 제시보다는 전체적인 시세계의 종합을 통해 박남수 시에 대한 체계적인 조망이 가능해지리라 본다. 2. 감각의 환기와 이미지의 창조 박남수의 시작활동 시기였던 1930년대는 현대시에 대한 자각이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시를 편내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던 시각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술품으로 간주한 모더니즘적 사고는 시형식의 예술화를 강조하고 언어의 세련성을 추구하는 공통적 속성을 보인다. 박남수는 그의 초기 시론에서 이러한 모더니즘적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예술가란 틔없는 구슬을 깎어 다른 하나의 세계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훌륭한 표현만이 예술가의 특권이다. 전달에 그치는 예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훌륭한 표현이란 '짧고 비약적인 함축있는 언어로 자기의 의욕한 세계를 틈없이 그리여 내는 것이다. 절약미처럼 동양의 특징적인 것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를 정복하지 못한 예술가처럼 불쌍한 것은 없다. 박남수가 주장한 언어예술에 대한 견해는 이미지즘이나 주지주의로 대표될 수 있는 1930년대의 모더니즘적 시창작 태도와 일치한다. '함축적 언더'를 중시하는 언어의식이나 예술가의 특권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자작을 강조하는 이러한 언어관 혹은 시관은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박남수 시의 대표적인 시작 태도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초기의 박남수 시에는 특히 이미지스트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시기 박남수가 주력했던 것은 감각을 환기시키는 이미지의 창조이다. 관념은 배제된 채 감각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주류를 이루는 초기시집『초롱불』에 실린 시편들은 대부분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 하에 '빛'이라는 대립적 이미지들을 제시함으로써 어둠 속에서의 빛의 의미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별하나 보이지 않은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조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따라 초롱불은 어디를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상한 곳을 지나 묺어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는 초롱불..... -「초롱불」전문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에 간신히 불빛이 발하고 있는 초롱불의 이미지는 강렬한 빛의 이미지라기 보다는 이제 곧 소멸될 것 같은 아주 약한 불빛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이 불빛은 어두운 밤을 지켜주는 의미로서의 빛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둠에 의해 그 빛을 잃어가는 나약한 이미지로서의 빛일 뿐이다. '별하나 보이지 않는 밤'의 위력이 더 크게 작용하고 초롱불의 이미지는 시각적 의미를 상실하고'풀짚는 소리'인 청각적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음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셋 외롭고나 이윽고 훌닥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뚝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밤길」전문 위 시의 배경은 한 여름밤의 시골이다. 빗방울이 내리는 밤에 듬성듬성 지키고 있는 등불의 이미지는「초롱불」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멀리 보이는 산턱이라는 거리감 때문에 등불의 존재는 더욱 외롭고 나약한 여린 이미지로 제시되고 이것은 간신히 불빛을 내고 있는 어두운 밤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홀딱 지나간 번개불'에 어리는 사나이의 모습은 비내리는 밤에 끊어진 논둑길을 달려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짐작케 한다. 박남수의 초기의 시편들에서 보이는 빛의 이미지는 대체로 감각적 이미지로 제시되면서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고독하고 불안한 정조로 일관되는 특성을 보인다. 람푸불에 부우염한 대합실에는 젊은 여인과 늙은이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네가 가문 내가 어드케 눈을 감으란 말인가 -「거리」에서 토방마루에 개도 으수륵이 앉어 술방을 기웃거리는 주막..... 호롱불이 밤새워 흔들려 흔들린다. -「주막」에서 등도 켜지 않은 여관방 창가에 앉아 내 눈이 안개 끼인 포구 밖으로 건너가자 강 건너 제도에 등불이 하나 외로이 달린다. -「진남포」에서 시간적 배경은 대체로 어두운 밤이며 등불이나 호롱불,램프불 등과 같은 빛의 이미지는 어둠의 기세에 눌려 함몰되어 가는 쇠잔한 빛으로 일관한다. 빛의 밝음을 몰아내는 '어둠'이나 '밤'은 화자가 처한 위태롭고 불안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초기시들은 주로 향토성이 강한 시골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이것은 박남수가 모더니스트들이 지향했던 언어의 절제와 감각화를 추수하면서도 전통적 공간을 끌어들여 그만의 독창적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전통적 소재를 회화적 이미지와 접합시키는 시인의 노력은 도시문명 공간 속에서 소재를 채택하고 도시 문명을 비판하려 했던 당시의 모더니즘 시인들과는 구분되는 변별성을 갖는 것이다. 요건대 언어의 빛깔과 향기에 관심을 기울인 초기 시편들은 감정을 절제하고 언어를 감각화 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여 선명하고 치밀한 이미지들을 제시했다는 데서 이미지스트로서의 미학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3. 이미지의 세계, 존재론적 의미와의 만남 박남수의 시세계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초기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발전한다. 언어 표현을 위한 도구나 사물과 인간의 매개체로서 인식하던 태도를 유지하되 단순한 사물의 이미지 제시나 시적 형상화 차원에서 한걸음 나아가 사물에 내재하는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성찰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구조가 한층 복잡해지고 사물의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병치시키려는 노력이 중기 시편들에서 드러난다. 감탕을 먹고 탄생하는 연꽃으 아기가 이끼 낀 연못에 웃음을 띄운다. 지금 한창 별을 빨고 있는 이승의 뒷녘에서는 외롭게 떨어져 가는 후일의 후광 구천에 뿜는 놀의 핵심에서 부신 상이 타면 나는 어둠에 연소하는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잉태」전문 이 시에서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 빛의 이미지 속에서 복합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탄생하는 아기는 이승의 공간에서 '별을 빨고'있고 생명이 다 해 사라져야 하는 '나'는 저승의 공간을 향해 떠나려 하는 대립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은 삶과 죽음이라는 단순한 대립에서 끝나지 않는다. 탄생하는 '연꽃'의 이미지를 통해 우주적 생명력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융합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생성과 소멸,즉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인 차원은 상승과 하강이 동일시되고 있는 빛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며 의미의 폭을 심화시킨다. 어둠과 빛이 대립적 이미지로 제시되던 초기시의 경향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제시되고 있는 빛의 이미지는 화자의 내부에서 빛이 어둠을 불사르고 어둠이 곧 빛을 연소시키는 상태로 융합되고 있는 것이다.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의 잔치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아침 이미지1」전문 위의 시는 사물들이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아침이 되면 빛에 의해 활기를 찾는 정경을 이미지의 제시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의 핵심적 요소인 밀려나는 어둠과 찾아오는 아침-빛-의 관계는 대립적인 이미지 구도를 형상하고 있다. 나아가 이미지의 대립은 소멸과 생성이라는 의미로 확대되고 하강과 상승이라는 관념의 대립으로까지 연결된다. 중기 시에서 두르러지는 박남수만의 독특성이라면 그것은 '빛'과 더불어 '새'의 이미지가 시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는 그 특성상 순수성과 비약 그리고 상승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새의 이미지는 지상과 하늘이라는 양자 세계의매개적 존재로 기능하기도 한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해에 지나지 않는다. -「새 1」에서 이 시에서 새는 맑고 깨끗한 순수의 표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교태나 가식이 없는 순수성은 화자가 동경하는 직접적 대상이다. 그러나 포수의 설정으로 새의 본질인 순수성은 위협을 받게 되고 결국 포수가 겨냥한 새의 순수성은 '피에 젖은 한 마리의 새'에 불과한 비순수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포수의 출현은 이 작품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가면서 결말로 치닫게 만든다. 새의 이미지는 하늘의 이미지에서 땅의 이미지로 즉 상승의 이미지에서 하강의 이미지로 변화되고 새의 천상을 향한 비약은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다닐 때 존재 의미를 부여받던 새는 포수와 대립적 관계 속에서 순수성이라는 본질을 상실한 죽음의 새가 되고 만다. 시인과 순수는 결과적으로 단절된 관계에 놓여 있으며 시인이 지향한 순수라는 가치는 허상으로 존재한다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3. 사람은 모든 원생의 새 어느 기억의 숲을 날며 가지 무성한 잎 그늘에 잠간씩 쉬어가는 원생의 새 지평과 하늘이 맞닿는 곳에서 새는 땅으로 꺼져들던가 하늘은 증발되어 그 형상을 잃는다. 당신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산새가 죽어,눈에 끼던 흰 안개 같은 것, 커어피를 마시며 아침 두시, 분명 어딘지 모를 어느 숲의 기억에서 당신은 날아왔다. 나의 내벽에 메아리가 되어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에서 이 시에서도 '새'의 이미지는 시인의 존재론적 태도를 밝히는 중요한 매개로 작용한다. 새와 화자는 동일시되고 있으며 원시적 생명력을 지닌 '원생의 새'로 존재한다. 그리고 기억의 숲을 날던 산새가 죽어가면서 보는 흐릿한 안개빛은 화자가 떠올리는 원시적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환치된다. 초기시에서처럼 철저한 대상의 즉물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시에서처럼 철저한 대상의 즉물적 이미지의 세계만으로 일관하는 태도에서는 벗어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적인 삶과 존재의미에 대한 추구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구 그리고 물질문명에 대한 역사적 비판의식 까지 갖춤으로써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미지로 확대되는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4. 주관적 정서의 표출과 순환론적 인식의 전개 미국으로 이민간 후 박남수는 한동안 시작활동을 중단하다가 10여년이 지난 후 다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러한 문학적 공백은 시인의 작품 세계의 변모와 직결된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초기와 중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구했었던 모더니스트적 면모에서 벗어나 직설적이고 심정적인 시어들을 통해 시인의 삶의 흔적을 진솔하게 제시하는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후기 시편들에서는 시인이 미국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심정이나 자아의 실존에 대한 의식 등이 현실의 공간과 밀착되어 나타난다. 특히 존재에 대한 상실감을 그린 시편들이 다수 창작되어 도미 후 시인의 현실 적응이 어려웠음을 짐작케 해 준다. 맨하탄 어물시장에 날아드는 갈매기 끼룩끼룩 울면서 서럽게 서럽게 날고 있는 핫슨 강의 갈매기여 고층건물 사이를 길 잘못들은 갈매기 부산 포구에서 끼룩 끼룩 서럽게 서럽게 울던 갈매기여 눈물 참을 것 없이 두보처럼 두보처럼 난세를 울자 슬픈 비중의 세월을 끼룩끼룩 울며 남포면 어떻고 다대포면 어떻고 핫슨 강변이면 어떠냐 날이 차면 플로리다 쯤 플로리다 쯤 어느 비치를 날면서 세월을 보내자구나 -「맨하탄의 갈매기」전문 중기시집『갈매기의 묘소』이후 지속적으로 새의 이미지를 지향해 왔던 경향은 후기시에서도 계속되는데 이 시에서도 '갈매기'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투사한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사물이다. 원래 부산 포구에 날고 있어야 하는 갈매기가 머나먼 맨하탄 핫슨강변에 날고 있다는 설정은 제 갈 길을 잃어버린 화자의 심정과 직결된다.  서글픈 갈매기의 운명은 화자가 급기야는 자아에 대한 체념의식으로 확대되어 더 나은 삶을 위해 비행하던 갈매기의 이상은 사라지고 아무 곳에나 정착해 살면 된다는 무의지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새를 통한 귀소의식이나 회귀본능은 삶에 대한 전망이 부재하는 현실 속에서 시인의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자아 치유의 방법인 것이다. 낳고 자라서 죽음으로 탄생되는 것은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가장 순수한 흙이되어 태양이 쪼이고 바람이 부는 풍광 속에서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어 산다. 영원,영원을 산다 -「풍광 속에서」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죽음을 소멸로 보지 않고 있다. '죽음으로 탄생'된다는 표현을 통해 죽음이란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순환론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죽음과 겨울의 이미지는 삶과 계절의 끝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상태로 '영원'성을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탄생과 성장,노화와 죽음이라는 인생의 역정이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이 계속해서 순환되는 것처럼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완성이며,새로운 시작이자 탄생이 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나뭇가지에 달려 꽃이 피었을 때,꽃은 비로소 지기 시작한다. 한잎 두잎 모샹새를 망가트리고 빛갈을 지워,이제 꽃은 꽃이 아니라 열매 열매로 맺혔을 때 이윽고 빠개져 땅으로 쏟아진다. 쏟아진 열매는 줄기를 세우고 뿌리를 내린다. -「회생1-소생」에서 위의 시에서 꽃이 지면서 남긴 열매다 다시 줄기를 세우고 뿌리를 내리는 순환적인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꽃은 순간적인 존재로 곧 소멸되지만 소멸의 소멸의 순간에 맺힌 열매는 잘 무르익어 다시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과정을 겪는다. 생과 사의 경계는 다시 무너지고 결과적으로 소멸은 곧 생성으로 연결되어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과정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생성과 소멸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려는 후기 시의 경향은 지상과 천상의 통합적이고 일원적인 시,공간의식에 근원을 둔 것이다. 객관성의 성취가 불가능한 자아 상실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이항대립적 공간과 의미를 통하여 합일에 이르는 무화의 경지에 돌한 시적 작업은 시인이 전 생애를 통해 추구해 온 가치관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남수의 후기시는 이미지의 기능은 약화되고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갖가지 현상들에 대한 발견과 의미 부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철저하게 객관화돈 세계의 모습을 지양하고 자아를 투사한 대상들을 통해 자아의 내면 상태나 주관적 정서의 세계를 형상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아 상실감이나 귀소의식,순환론적 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일원론적 관점하에서 자연으로 표상되는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작업을 완성하기 이르게 된는 것이다.  5. 맺음말 정서를 이미지화하고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지속해 나간 시인 박남수는 전통적인 서정성의 지적 극복과 철저한 이미지의 추구로 문단에서 그 독특성을 인정받아 왔다. 이러한 즉물적 이미지의 창조에 주력햇던 초기 시의 경향은 중기로 접어 들면서 사물의 객관화된 이미지와 그 너머에 자리하는 존재의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한층 심화된 시세계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이미지에 집중하되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로 확산시켜 주관적 정서를 내면화하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확대시켜 이미지의 존재론적 의미간의 거리를 좁혀 들어가는 탁월성을 발휘한 것이다. 박남수의 시는 사물의 회화적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면서 철저히 인간적 감정을 배제했던 초반기에서 후반기 작품으로 갈수록 현실 공간에 밀착되고 점차 사물의 이미지가 화자의 주관적 정서를 투사시킨 대상으로 변화한다. 대립적 이미지들의 오묘한 배합과 통합의 시도는 대상의 순수성과 함께 존재성의 결합과 조화를 창조해 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모더니스트로서 이미지스트로서의 외래적 시 경향을 추구하면서도 전통적인 소재와 배경을 취택해 시 언어의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했던 박남수 시의 특성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강점으로 작용한다 한 수 있다. 오랜 작품 생활동안 이미지의 구현이라는 시적 태도를 견지해 온 박남수 시인은 지속적으로 '빛'이나 '새', 기타 식물적 이미지들을 객관성을 지향하면서 내면화된 의미를 추구해 왔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이미지의 표면화에 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물과 존재 사이의 간격을 좁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상승과 하강, 지상과 천상의 거리감을 극복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일원화시키는 역량을 발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상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객관적 통찰력 그리고 통합적 세계인식은 현대시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차지한다 할 것이다.     《마을》 외로운 마을이 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을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대록대록 겁을 삼킨다. ({문장} 9호, 1939.10) 이 시는 그의 첫 번째 추천작으로 평화로운 농촌의 여름날 오후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낸 서경적 경향의 서정시이다. 향토적 분위기의 간결한 시어와 '나른나른'·'대록대록'과 같은 의태어를 3연 7행의 짧은 형식에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효과적인 표현을 이루고 있다.  1연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부분으로 시골 마을의 정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느낀 이미지를 평화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2연에서는 무대를 하늘로 옮겨, '솔개'가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고 있는 원경을 그리고 있으며, 3연에서는 시선을 땅으로 이동하여 솔개에게 겁먹고 뜰안 한구석에 숨어서 눈알만 대록대록 굴리고 있는 암탉의 모습을 근경으로 나타내고 있다. 겁을 삼킨 '암탉'의 눈알을 클로즈업시켜 생동감 있는 표현을 이루는 한편, 오수에 잠겨 있는 외로운 마을 속으로 녹아들게 함으로써 이 작품을 더욱 평화롭고 한가로운 분위기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와 같이 평화로운 농촌의 정경을 풍경 그 자체로 표현해 낼 수 있었던 시작 능력이 있었기에 박남수는 후일 주지주의 시인으로 변모한 후에도 그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 등과 같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롱불》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주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 따라 초롱불은 어디로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 상한 곳을 지나 무너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 ……. ({문장} 10호, 1939.11) 이 시는 박남수의 두 번째 추천작으로 그의 초기시가 지향했던 섬세한 서정과 토속적인 시세계를 짐작하게 해 주는 작품이다. '초롱'이란 대나무를 잘게 잘라 만든 살 위에 종이를 씌우고, 그 속에다 촛불을 켜는 기구이다. 그것을 막대기에 매달아 들고 다닐 때면, 촛불이 꺼질 듯 흔들린다. 이 '초롱불'은 문명의 발달로 인해 점차 사라져 가는 모든 전통적인 것의 대유로, 시인은 이것을 통해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초롱불'·'원두막'·'옛 성터' 등과 같은 향토적 정서를 드러내는 시어로써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2·3·4연을 모두 산문투의 문장으로 배치시킴으로써 유장한 리듬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일반적 산문시와는 달리 간결한 느낌을 주고 있다. 1연에서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풍경을 제시하여 초롱불을 잃어버린 화자의 정황을 드러내고 있으며, 2연에서는 '초롱불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과 '풀 짚는 소리 따라'라는 구절을 통해 소멸되어 가는 우리의 향토적인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고 있다. 3·4연에서는 초롱불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산턱 원두막'이나 '무너진 옛 성터'를 찾아갈 때면, 언제나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던 초롱불이었지만,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을 통해 이제는 더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문명의 이기(利器)에 밀려 사라져 버리는 현실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5연에서는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의 아련한 모습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말없음표 속에 함축하고 있다. 《밤 길》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 셋 외롭고나. 이윽고 홀딱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둑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 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문장} 12호, 1940.1) 청록파 세 시인이 등단 초기에 주로 자연을 노래한 것과는 달리, 박남수는 그들과 같은 {문장}지 출신이면서도 특유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일제 식민지 하의 농촌을 소재로 현실 상황을 암시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이 시는 그의 세 번째 추천작으로 그의 초기시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멀리 산턱에 등불 몇 개가 보이는 어느 농촌 마을의 여름 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개구리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댄다. 한 사내가 논둑이 끊어진 탓인지 번개치는 개천 길을 달려가고, 번개가 그치자 조용하던 논에서 다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서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여름 밤의 서경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시제가 '여름 밤'이 아닌 '밤길'로 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작품 전편에 깔려 있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전반부의 동적 이미지와 후반부의 정적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방법을 통해 더욱 짙은 어둠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2행으로 구성된 연과 1행만으로 구성된 연을 교차시키는 시행 배열 방법으로 교묘한 리듬감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과거 시제의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주관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 상황으로 시상을 제시하고 있다. 《아침 이미지》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사상계}, 1968.3) 이 시는 제목이 말해 주듯 아침에 대한 근원적 본질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박남수는 모든 사물의 원초적 세계로 돌아가, 그 본질적 건강성을 회복하는데 주력하는 시작(詩作) 방법의 하나로 이미지를 중시하였다. 그는 "감각적 체험과 관련 있는 모든 단어가 이미지가 될 수 있으며, 그것들이 생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상상력에 호소하도록 의도된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창작된 이 시는 결백한 서경적 조소성(彫塑性)에 의한 생생한 이미지로써 건강한 아침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의 신선한 감각은 이 시의 최대 장점이지만, 이 시는 가슴에서 나온 감흥(感興)의 시가 아닌, 두뇌로 쓰는 지적(知的)인 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논리적이라거나 작품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 12행의 단연시인 이 시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추보식 구성으로 기·승·전·결의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2행의 첫째 단락에서는 물상의 생성을 어둠 속에 있던 '새'·'돌'·'꽃'이 아침이 되어 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로 쓰이는 어둠을 이 시에서는 '낳고'·'낳는다'라는 표현을 통해 '온갖 물상'을 잉태하는 생명의 모태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3∼5행의 둘째 단락에서는 어둠이 아침과 자리를 바꾸는 모습을 서술함으로써 어둠의 소멸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굴복한다'는 표현은 어둠이 사라져 버린다는 뜻이다. 6∼10행의 셋째 단락에서는 물상의 잔치를 노래하고 있다. 밤새도록 어둠 속에서 '무거운 어깨'로 있던 물상들이 마침내 아침 햇살을 받음으로써 자연적 생의 율동을 회복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의욕적인 삶의 움직임으로까지 확대된 건강한 모습을 회화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이라는 구절은 시각을 청각으로 전이시킨 공감각적 이미지의 표현이다. 11∼12행의 넷째 단락은 아침의 신비로움을 '개벽'이라는 시어로 집약하여 시상을 응결시키고 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삼라만상이 아침 햇살이라는 생명수를 받아 먹고 긴 잠에서 깨어나 힘차게 날개를 퍼덕거리는 것 같은 아침의 생동감이 '아침이면, / 세상은 개벽을 한다'는 시행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같이 생동감 넘치는 아침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많은 동사(動詞)를 사용하는 한편, 이러한 아침에서 얻어진 밝고 신선한 느낌을 회화적 이미지로 그려냄으로써 이미지스트로서의 박남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종소리》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시집 {새의 암장}, 1970) 이 시는 박남수의 후기 대표작으로 관념의 표상으로만 인식하기 쉬운 '종'을 세련된 감각과 심상의 조형(造形)으로 형상화하여 자유를 향한 비상(飛翔)과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주지적 계열에 속하는 이 작품은 표현 형식면에서도 시인의 지성적 통제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전 4연이 모두 4행씩인 질서 있는 구성과 함께 각 연의 종결 방법이 동일하다. 즉, 1·2연과 3·4연을 각각 부사형과 서술 종결 어미로 끝맺고 있어 주지주의 시인으로 변모한 그의 후기시 세계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청동의 벽'인 종의 몸체를 '칠흑의 감방'으로, 울리지 않는 상태의 종소리를 어두운 감옥에 가두어 놓은 '억압'으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울려 나오는 종소리를 '푸름'·'웃음'·'악기'·'뇌성' 등으로 변신하며 퍼져 나가는 '자유'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종소리는 '청동의 표면'에서 떠난 한 마리 '진폭의 새가' 된 다음, 마침내 '광막한 울음'을 우는 거대한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간의 삶과 꿈, 그리고 역사를 잉태하고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퍼져 나는 것이다.  《훈련》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 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 보고 국도 끓여 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 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 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시집 {그리고 그 이후}, 1993) 박남수는 언어 표현의 암시성을 중시하는 이미지의 시인이다. 시사적(詩史的) 측면에서 그는 정지용과 김영랑에 버금가는 언어와 형태미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아울러 언어에 형이상학적 깊이도 부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철저한 모더니스트인 그의 시적 경향은 암시적인 이미지로 사물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함축시킴으로써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성을 지적(知的)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서정을 이미지화하였다.  그러한 작품 세계를 일관되게 보여 주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 생활시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음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는 평범한 사실의 제시로만 그치는 하나의 산문적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고도의 시적 장치나 비유로 장식되어 있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생생한 감동의 깊이를 전달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인간 존재의 진실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시인이 노년에 이르러, 그것도 아내의 죽음을 체험한 후 더욱 깊어진 삶의 깊이를 담담한 어조로 보여 주고 있다.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후, 시인은 늙어 불편한 혼자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을 단순히 '불편하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이 어찌 불편함뿐이겠는가?  그러므로 그 '불편함'의 이면엔 그가 아내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숱한 부침(浮沈)의 긴 세월을 동고동락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팬티 /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 남편의 고충'까지를 예견한 아내가 그러한 불편을 대비하여 자신에게 이런저런 집안일을 '훈련'시켰다는 것을 알고 그간 성가시다며 짜증을 냈던 자신의 무지함을 뉘우치는 과정을 통해 아내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 생의 진솔함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불편'을 겪을 때마다 시인은 아내의 빈 자리를 깨닫게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깊이 인식하고 준비하는 생의 원숙함이 드러나 있다.     박남수(朴南秀, 1918 ~ 1994) 생애 1918년 5월 3일 ~ 1994년 9월 17일 출생 평안남도 평양 분야 문학 작가 시인.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밤길’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감각적 이미지에 의해 대상을 지적으로 포착하는 경향을 보이며, 문명의 비정성을 모더니즘적 기법으로 고발하는 시를 주로 썼다. 시집으로 “초롱불”(1940), “갈매기 소묘”(1958), “새의 암장”(1970), “그리고 그 이후”(1993) 등이 있다. 작품 새 1 이 시는 생명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인간의 인위성과 파괴성에 대립시켜 문명 비판적 주제를 제시한 작품이다. 1 ~ 2연에서 화자는 순수하고 꾸밈과 거짓이 없는 ‘새’의 모습을 통해 자연의 순수함을 보여 준다. 이렇게 자연의 순수함을 반복하여 제시하는 이면에는 인간 문명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인 눈길이 자리 잡고 있다. 3연에서는 ‘포수’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의 대조를 통해 사람의 손에 의해 파괴된 자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인간이 순수라고 느끼는 자연물이나 감각 등은 인위적으로 만들려 하거나 강제로 가지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상문 종 소리 이 시에는 '나'는 '종 소리'를 의인화한 것인 바, 오랜 인종 끝에 역사의 질곡을 박차고 나가는 시인의 자유를 향한 비상(飛翔)과 신념을 이 시는 노래하고 있다. 소리가 청동의 벽에 갇혀 있는 동안, 즉 종이 울리지 않는 동안은 칠흑의 감옥과도 같다고 화자는 말한다. 오래 인종(忍從) 끝에 '나'는 '진폭의 새'가 되고 '울음'이 되고 '소리'가 되어 청동의 표면을 떠난다. 그 종 소리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들의 '푸름'을 되찾아 주고, 꽃의 '웃음'을 되찾아 주고, 천상의 '악기'를 울리게 하여 역사의 질곡에 갇힌 세상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한다. 소리가 청동의 벽에서 풀려나는 순간 그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물론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 이 시에는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이 시의 어조는 우람하고 그에 걸맞게 포괄하는 세계도 광막하다. 참신하고 질감 있는 심상 속에 삶과 역사의 심상까지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를 한국 모더니즘 시에서 드물게 성공적인 것으로 돋보이게 한다. 아침 이미지 이 시는 서경적 이미지의 생생한 모습으로 건강한 아침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이미지의 신선한 감각은 이시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전 12행의 단연시인 이 시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추보식 구성으로 기·승·전·결의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2행의 첫째 단락에서는 물상의 생성을 어둠 속에 있던 새·돌·꽃이 아침이 되자 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로 쓰이는 어둠을 이 시에서는 ‘낳고’, ’낳는다’라는 표현을 통해 온갖 물상을 잉태하는 생명의 모태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3∼5행의 둘째 단락에서는 어둠이 아침과 자리를 바꾸는 모습을 서술함으로써 어둠의 소멸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굴복한다는 표현은 어둠이 사라져 버린다는 뜻이다. 6∼10행의 셋째 단락에서는 물상의 잔치를 노래하고 있다. 밤새도록 어둠 속에서 무거운 어깨로 있던 물상들이 마침내 아침 햇살을 받음으로써 자연적 생의 율동을 회복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의욕적인 삶의 움직임으로 까지 확대된 건강한 모습을 회화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이라는 구절은 시각을 청각으로 전이시킨 공감각적 이미지의 표현이다. 11∼12행의 넷째 단락은 아침의 신비로움을 개벽이라는 시어로 집약하여 시상을 응결시키고 있다. 어둠 속에 묻혀있던 삼라만상이 아침 햇살이라는 생명수를 받아먹고 긴 잠에서 깨어나 힘차게 날개를 퍼덕거리는 것 같은 아침의 생동감이 ‘아침이면, /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는 시행속에 함축되어 있다. 거리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9년에 발표된 시로, 어느 기차 간이역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이별하는 상황을 담고 있다. 이별이라는 안타까운 상황을 처절하고 사무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아주 담담하고 객관적인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담담한 어조는 서술자가 상황 밖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있는, 즉 등장인물들과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등장인물들이 이별하는 이유는 작품 속에 제시되어 있지 않기에 독자들이 상상해 볼 수 있고, 시대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일제 하 어려운 생활 속에서 경제적인 보탬이 되기 위해 며느리가 고향을 떠나는 상황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1, 3, 5연은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2, 4, 6연은 시아버지의 대사로 교차하여 구성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343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김현승 - 가을의 기도 댓글:  조회:3961  추천:0  2015-12-17
//김현승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3연이 각각 내용이 달리 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형성하였다. 제1연에서 '낙엽들이 지는 때'는 생의 종말을 뜻한다. 그 종말 앞에서 우리는 모든 가식을 다 벗어던지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제2연의 '오직 한 사람'은 다른 의견도 있지만, '신(神)'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3연에는 이 시의 시상이 집중되어 있다. '굽이치는 바다'는 화자의 인생 행로인 것이다. 희로애락의 삶의 현장, 험난한 세파를 거쳐 그가 새로이 들어선 곳이 '백합의 골짜기'다. '백합'은 성서에서도 순결한 신앙 또는 신앙인으로 자주 비유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환희의 세계에 다다른 상태가 '백합의 골짜기'다. 그는 이곳에 그냥 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후에 다다라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마른 나뭇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는 시적 화자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절대 고독의 경지, 고절한 단독자의 실존 심상으로 화자의 고독한 영혼의 모습이다. 이 시에서 가을은 내면의 충실을 기하는 시기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신과의 만남을 가지는 계기로 다루어져 있다. 시인 자신도 단순한 서정 외에 좀더 깊은 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 이 시를 썼다고 한다. =======================================     김현승(金顯承,1913년 ~ 1975년)-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다형(茶兄). 평양 출생. 기독교 장로교목사인 아버지 창국(昶國)과 어머니 양응도(梁應道)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목회지(牧會地)를 따라 제주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7세 되던 해에 전라남도 광주로 이주하여 기독교계통의 숭일학교(崇一學校)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숭실전문학교 문과 3년을 수료하였다. 그 뒤 모교인 숭일학교 교사(1936), 조선대학교 교수(1951∼1959), 숭전대학 교수(1960∼1975),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1970) 등을 역임하였다. 문단활동은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 장시(長詩)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 양주동(梁柱東)의 추천으로 ≪동아일보≫(1934)에 게재되면서부터 시작된 이후, 낭만적 장시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읍니다>(1934)·<새벽 교실(敎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 뒤 1953년부터 광주에서 계간지 ≪신문학 新文學≫을 6호까지 간행하였으며, 이때의 시로 <내가 나의 모국어(母國語)로 시(詩)를 쓰면>(1952)이 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정신과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을 시로 형상화하여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었다. 제1시집 ≪김현승시초 金顯承詩抄≫(1957)와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1963)에 나타난 전반기의 시적 경향은 주로 자연에 대한 주관적 서정과 감각적 인상을 노래하였으며, 점차 사회정의에 대한 윤리적 관심과 도덕적 열정을 표현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이미지들의 특징은 가을의 이미지로 많이 나타나는데, 덧없이 사라지는 비본질적이고 지상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꽃잎·낙엽·재의 이미지와, 본질적이며 천상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뿌리·보석·열매의 단단한 물체의 이미지의 이원적 대립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표현한 시적 방법의 특징은 절제된 언어를 통하여 추상적 관념을 사물화(事物化)하거나, 구체적 사물을 관념화하는 조소성(彫塑性)과 명징성(明澄性)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후기 시세계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제3시집 ≪견고(堅固)한 고독≫(1968)과 제4시집 ≪절대(絶對)고독≫(1970)의 시세계는 신에 대한 회의와 인간적 고독을 시적 주제로서 줄기차게 추구함을 보여준다. 1974년에는 ≪김현승전시집 金顯承全詩集≫을 펴냈고, 유시집(遺詩集) ≪마지막 지상(地上)에서≫(1977), 산문집 ≪고독(孤獨)과 시(詩)≫(1977)가 간행되었다. 문학개설서로는 ≪한국현대시해설≫(1972)이 있다. 1955년 제1회전라남도문화상, 1973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광주 무등산도립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가을의 기도/김현승 시 정영택 곡 이성진 외 실내악 연주   시 '눈물' 전문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1977년 6월26일 세워진 이 시비는 시인의 1주기에 세우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내고향이 낳은 시인의 시비는 우리가 세우자는 전남 문협의 결의로 '김현승시비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한 결과 쉽게 목표액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비의 비신은 높이 360cm,넓이 140cm인데, 이 비신에 높이 240cm,넓이 120cm의 시문석을 낀 '십자형'시비로 무게가 10톤이나 된다. 돌은 전북 황등산 화강석으로 설계는 박춘상이 했고 글씨는 장전 하남호가 썼다.   1913년 4월 4일 목사인 김창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다형은 일곱살때인 1919년 광주로 이사, 생애의 대부분을 광주에서 보냈다. 문학소년이었던 그는 1932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 본격적인 시작에 몰두하던 1934년 양주동교수에 의해 동아일보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초기시는 자연에 대한 예찬과 동경이 짙게 풍기는 민족적 로멘티시즘 혹은 민족적 센티멘탈리즘이었다. 이에 대해 시인은 '전자는 민족의 이상과 희망을 위한 20대의 꿈이고, 후자는 나라잃은 한이 맺힌 민족의 환경'이라 했다. 자연에서 소재를 얻었으되 자연을 그냥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미에 풍자와 해학과 기지가 있는 20년대에선 다소 색다른 시를 그는 썼다.   해방이 된 1946년 광주숭실학교 교감에 취임하면서 약10년동안의 침묵을 깨고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한 다형은 초기시에서 볼수 없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였다. 그 대표적인 시가 바로 '눈물'이다. 이 시는 그가 사랑하던 어린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기독교적 신앙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심화된 생명의 순결성이 엿보인다.    이 작품에 대해 시인은 '외향적인 웃음보다는 내향적인 눈물에서 인생의 미와 가치를 찾으려 한다'고 덧붙혔다. 이 시기에 인구에 회자되는 또 하나의 대표시가 바로 '가을의 기도'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구비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나뭇가지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집 를 중심으로 한 중기시의 특징은 가을과 기도, 눈물과 사랑, 그리고 신과 고독의 율조가 짙게 배어 있다. 그의 이러한 고독의 율조는 시집 (1968), (1970)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시 '절대고독'은 그의 말기 시의 본향이 되었다.    1955년 제1회 전라남도 문화상과 1973년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던 다형은 1975년 4월 10일 숭전대학교 채플시간에 기도중 지병인 고혈압으로 졸도, 다음날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권 갑하 시인)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 - 김수영"에 대하여 . "폭탄과 교훈과 시사를 한국시단에 던지던 김수영은 너무도 일찍 가고 말았다. 그는 과게에 만족하는 시인이 아니었다.언제나 앞을 내다보고 오늘의 정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기만족을 모르는 시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리었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자책을 받았고, 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시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인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                                                                             (김현승)     무등산 자락에 있는 다형 김현승님의 시비... 님은 갔어도 시는 영원하리라...   김현승    Ⅰ. 머리말  시인 김현승은 기독교 문인으로서의 생애(1913~1975)를 이루어 간 사람이다. 그의 아호는 다형(茶兄)이다. 그는 중학생 시절인 1927년부터 40년간의 시작 활동을 통해 270편의 시를 6권의 책에 남겼다.  김현승 시인은 1913년 전북 익산 출신인 아버지 김창국과 황해도 은율 사람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양응도 사이의 차남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숭실중학과 당시의 유일한 신학교엿던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1917년 제주도의 성내교회로 첫 부임을 하였다. 그곳에서 3년을 지낸 뒤 김현승이 7세때 부친의 전근에 따라 광주로 오게 되었다. 광주 승일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중학에 진학하기까지 약 10년간을 광주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가정환경 때문에 서양 선교사와의 접촉이 많았고 기독교 문화속에서 성장함으로써 경건한 종교 의식과 생활 분위기는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인간과 종교의 영원한 신비에 대해서 써나간 그의 시적 소재와 주제 면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이 깊에 뿌리 박힌 그의 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시에 나타난 정신사적 맥락을 살핌에 있어 과 으로 대표되는 인간적 사고의 삶, 와 로 대표되는 종교적 사고의 삶과의 관계라 할 것이다. 왜나하면 그의 시와 삶속에 나타난 이 두가지 요소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정신사적 면모를 파악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김현승의 일생을 통한 시작을 인간중심의 세계관과 신 중심의 세계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그 관계에 따른 시인의 삶과 시정신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기독교가 그의 삶에 끼친 전반적인 영향을 알아보려 한다.   Ⅱ. 김현승 문학의 시기별 분류 제 1기 : 시대적 불행에 대한 인식을 민족적 센티멘털리즘으로 표현 (1934~1945)  “나는 그 시절의 시풍은 나 자신이 생각할 때 민족적 로맨티시즘이 아니면 민족적 센티멘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중략)…그리고 그 무렵 나의 시에는 자연미에 대한 예찬과 동경이 짙게 풍기고 있었다.…(중략)…불행한 현실과 고초(苦楚)의 현실에 처한 시인들에게 저들의 국토에서 자유로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아무도 거기서는 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자연뿐이었다.” -굽이쳐가는 물굽이같이  문단에 데뷔하여 해방 전까지 발표된 시는 18편이며, 이 중 16편이 『김현승시전집』중『새벽 고독』이라는 시집 이름으로 합본하여 수록되었으나 2편은 어느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때의 시풍은 로맨티시즘과 민족적 센티멘탈리즘으로서 낭만적인 서정을 구가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띄게 된 이면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던 우리의 민족적 울분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며, 젊은 혈기에도 맞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이야기 하고 있다.1) 당시의 시인들이 노래하는 자연은 두가지 방향으로 설정될 수 있다. 한가지는 자연에 안주한 도피주의적 경향이며, 또 한가지는 자연을 상대로 하되 기지, 풍자, 현실에 대한 불만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경향이었는데, 김현승은 후자에 속하는 시인으로 볼 수 있다. 제 2기 : 인간 내면 세계에 대한 성찰 (1934~1960년대 초)  "나는 지금까지 내가 등한히 하였던 나의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너무도 外界的인 자연에만 치우친 나머지 인간의 내면적인 자연은 몰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외계로부터 내면의 세계로 관심을 돌렸다“ -굽이쳐가는 물굽이같이  생존의 문제로 인해 10여년간 시작 활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김현승은 새로운 고민에 봉착하게 되었다. 조국이 광복된 현실에서 시의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의 로맨티시즘이나 민족적 센티멘탈리즘은 이미 그 막을 내린 후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의 생활속 깊이 뿌리박힌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경건한 기도와 신앙심을 노래하고 인간의 내변적인 본질을 추구, 생명과 희망을 노래하였다. 또 사회 정의와 민족애의 시를 강렬하게 토로하기도 하였다.2)   제 3기 : 신보다는 인간에 의한 인간적 삶의 본질을 추구 (1960년대 중기~1972)  “정신상의 문제로는 나는 인간으로서 새로운 고독에 직면해야 하였다. 이것은 앞서 말한 사회적인 이유로서의 고독과도 그 성질은 다르다. 그것은 한마디로 신을 잃은 고독이다. 내가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거대한 믿음이 무너졌을때에 허공에서 느끼는 고독이었다.…(중략)…나의 고독은 구원에 이르는 고독이 아니라, 구월을 잃어버리는, 구원을 포기하는 고독이다. 수단으로서의 고독이 아니라 나의 고독은 순수한 고독 자체일 뿐이다.” -나의 문학백서  『견고한 고독』『절대 고독』의 두 시집이 간행되었던 시기다. 제 1기와 제 2기에서는 신앙을 전제하고 시작활동을 했으나 제 3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신앙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고독의 세계로 가라앉게 되며 이러한 고독의 추구 결과 견고한 것들에 대한 지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제 2기의 시에서부터 복선을 드러내고 있는데 신성과는 결부된 자연과 양심의 견고함을 바탕으로 사회정의를 노래하던 그의 시에는 이미 신성 보다는 인간적 삶의 중요성이 더욱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인간 본질의 문제에 대한 시적 형상화 작업은 근본적으로 유일신에 대한 부정과 신앙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고독에로의 방향 전환으로 나타났다.    제 4기 : 인간적 삶의 한계와 허무를 깨닫고 오로지 절대자인 신에게로의 감사와 참회의 기도를 시로 형상화 (1973~1975)  “그러나 내가 쓰러지고 나서는 나의 지대한 관심이 매우 달라져 버렸다. 지금 나의 애착과 신념은 결코 시에 있지 않다. 따라서 시에 대한 야심이나 욕심이 그 전과는 매우 달라졌다. 지금의 나의 심경은 시를 잃더라고 나의 기독교적 구원의 욕망과 신념은 결단코 놓칠 수 없고 변할 수 없다.” -나의 생애와 나의 확신  김현승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타계하기까지 2,3 년의 짧은 기간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에 대해 쓰러지기 이전의 생애는 양적으로 거의 나의 일생에 해당하는 세월이었고, 쓰러진 후 지금까지의 생애는 2, 3년에 지나지 않으나 질적으로 나의 두 개의 생애는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3) 제 3기에서 신을 상실하고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며 존엄성의 이념인 자유를 가지고자 하는 순수의지로서의 고독을 탐구하였으나 제 4기에 와서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신에게 귀의함을 보여준다.    Ⅲ. 종교 - 김현승 문학의 전반적 주제  “기본적으로 내 시에 아는 듯 모르는 듯 세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성경일 것이다.…(중략)…예수의 말은 모두가 구체적이며 시적이다. 그의 행동도 그렇다. 그의 온 생활 자체가 시다. 나는 사복음을 읽으면 예수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시를 읽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고결하고 인정많고 고독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이 예수의 언행을 어려서부터 읽었다. 그러므로 이 훌륭한 시가 내 시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내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것인가.”  김현승 시인의 삶에서 그의 종교인 기독교를 빼놓고는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그가 잠시 신을 버리고 고독을 갈구 하였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절대적인 고독 마저도 그의 신앙을 더욱 굳히기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다형 김현승 시인의 문학관에 대한 전기적 배경과 그의 시 세계에서 나타난 기독교적인 특성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시적 운율을 나타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시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적 특성을 이루게 하였던 해방 이전까지의 성장 및 작품 활동 배경과 해방 이후의 생에와 작품 활동 배경 그리고 생애의 변천과정에서 나타나는 그의 시의 특성을 살펴봄 으로써 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삶의 현상과 그의 시 세계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환경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 에게서도 발견해 볼 수 있었고, 앞으로 그 누구의 작품을 읽던간에 그가 살아온 삶의 질곡에 대해서 알아 본 후에야 제대로 그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할수 있으리라 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보다 못한 나의 시”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대목과 “시를 버릴지언정 나의 구원이신 나의 신앙을 다시금 떠날 수 없다”고 함으로써 누구나 추구해야 할 인간 본연의 절대자로의 귀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결과적으로 인간 본연의 가치추구의 완성도를 보여주었고, 그의 시를 통하여 올바른 문학적 탐구 정신을 잘 마무리한 시인의 삶을 이룩하였음을 엿 볼 수 있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 맥락 읽기 1. 시의 화자는 누구인가? 2. 시의 화자가 이야기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3. 시의 화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4. 시에서 화자가 말하는 방식의 특징은 무엇인가? 5. 시의 화자가 대상을 향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6. 시 속에 나오는 ‘가을’은 어떤 특징을 가진 주는 계절인가? 7. 3연의 내용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8. 시의 화자가 대상을 향해 원한 것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시 맥락 생각해 보기 1. 나 2. 신 3.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소서’라고 문장을 끝내고 있어, 신을 향한 기도를 행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해 줄 것, 겸허한 존재가 되게 할 것, 한 사람을 택해 사랑하게 할 것, 홀로 있게 할 것 등을 바라고 있다. 6. 낙엽들이 지며, 열매를 맺는 비옥한 느낌을 준다. 7. 한 마리의 까마귀는 굽이치는 바다를 건너고 백합이 가득한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를 만나는 모습을 통해 세월의 격랑을 헤치고 시련을 극복한 다음에 오는 작은 보람, 어쩌면 보잘것 없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그것에 대해서도 신에게 감사를 드리며 소중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8. 가을이라는 계절을 내면의 충실함을 위한 시기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다듬으면서 신과의 만남을 차분히 준비하고자 하는 화자의 바람을 담은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자료 1. 김현승 탐구 작가연보       [김소월 초상] 남풍(南風), 다형(茶兄) -1913년 광주 출생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중 교지에 투고한 시 이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 -1937년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1951년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 -1955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1960년 숭전대학교 문리대 교수 -1973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75년 사망 주요작품: 시집 : 『김현승 시초』(1957),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절대 고독』(1970), 『김현승 시전집』(1974), 『마지막 지상에서』(1977), 『김현승의 명시』(1987),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1989) 대표작품: 가을의 기도, 가을, 눈물, 플라타나스, 아버지의 마음 참고사이트:       자료 2. 작가 생가, 작가 시비       [김현승 시비: 전남광주 무등산] [김현승 시비]     [김현승시집 표지]       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 온다. //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 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눈물 더러는 沃土(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플라타나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음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이 시는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맞이하여 마음의 충실함을 갈망하는 기도조의 시이다. 가을은 그 종말을 보면서 사람들이 많은 깨달음을 얻는 계절이기도 하다. 1연에서 ‘낙엽들이 지는 때’는 생의 마지막을 뜻한다. 생의 마지막 앞에서 화자는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되고 있다. 2연에서 ‘오직 한 사람’은 화자가 믿는 신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그 신을 택하고 믿으며 따르겠다는 말로 보인다. 3연에서 ‘굽이치는 바다’는 화자의 인생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다의 굽이치는 모습처럼 많은 인생의 고생을 거친 그가 새로이 들어선 곳이 ‘백합의 골짜기’이다. 하지만 그는 이 ‘백합의 골짜기’에 안주하지 못하고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르게 된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는 화자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절대 고독의 경지이며, 화자의 고독한 영혼의 모습이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가을이라는 계절을 배경으로 이 계절을 자신의 내면의 충실함을 위한 시기로 생각하고, 낙엽이 떨어지는 때가 되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다듬으면서 그러한 차분한 마음을 바탕으로 신과의 만남을 가지게 되는 계기로 삼는 화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시이다.       ※ 김현승은 ‘기도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독백적인 기도 형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고 있다. 그의 시적 경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아래 글을 읽으며 “-하게 하소서…”식의 어투가 시인의 정서 표현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와 「가을의 기도」를 통해 시인은 어떤 의미를 표현하고 싶었을지를 생각해 보자.       기도와 시적 언어         김현승은 자기를 뒤돌아보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밝히고 있다. 반성과 다짐이라는 독특한 시 세계를 그의 시는 펼쳐 보이고 있다. 이럴 경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시 형식은 어떤 방식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1950년대 남다른 시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의 시의 형식적 특징을 살피려는 것이다.    우선 그것은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독백적인 기도 형식을 가진 언어를 통하여 시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한 인간이 과거를 극복하고 참된 자아를 각성할 수 있는 단계에 가능한 이런 시 형식은 독백체를 쓰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참된 자아를 각성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미완성이나 부끄러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 양심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게 된다. 이 때 쓰이는 방식이 바로 고백체이다.    특히 기독교인이었던 김현승은 자신과 익숙한 기도와 찬송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기도와 찬송은 종교적인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언어적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도라는 기독교인의 일상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는 위상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점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가진 언어 안에서 시를 선택하는 것과 시를 위하여 언어를 확장하는 일인데, 후자는 적극성을 띠우는 대신 실패하기 쉽고, 전자는 비진취적이면서도 작품으로서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시를 이렇게 쓴다」, 『전집』2.         이런 방법 중에서 김현승이 선택한 것은, 기교주의나 모더니즘적인 수법의 시에서 보이는 후자보다는 전자인 ‘고전적인 수법’이다. 그 자신 일제 강점기에 시를 쓸 때에는 시대 조류에 편승하여 모더니즘적인 형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독자적인 시 세계를 만드는 단계에서는 이를 현명하게 극복하고 있다. 자신과 가장 익숙한 언어를 통하여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선택한 익숙한 언어가 기도이며 노래이다. 그의 많은 시가 기도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아울러 언어, 특히 서양 전래의 기도 형식에 어떻게 하면 ‘모국어’를 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는 사상보다는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시는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감동의 핵심을 먼저 언어로 붙잡는다. 그리고 그 한 구절을 중심으로 그 감동을 정리하고 확대시켜 한 편의 시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 전체는 외울 수 없어도, 반짝이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몇몇 시 구절은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시는 분명히 언어의 심미적 세계에 의존하는 서정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리고 있는 서정의 세계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형식과 미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시의 언어와도 다르다. 이제 다음 시를 읽으면서, 이런 그의 시적 언어 탐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를 살펴보자.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시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하게 하소서……”라는 어투의 기도 형식을 빌리고 있는 이 시는 그의 전기 시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유나 상징과 같은 시적 기교보다는 종교인에게 일상적 언어인 기도는 소망을 직접 서술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다. 그의 시작의 출발점이 모더니즘의 기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특히 모국어로 자신을 채워달라는 기도의 내용은 그 자신이 얼마나 언어와 시를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나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의 시에는 시적 화자의 정서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기도 형식은 비유가 아니고 직접적인 기원인 것처럼 말이다. 형식상 기도 형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에 표현된 ‘기도하고, 채우고, 사랑하고, 택하고, 가꾸고, 있고’ 등과 같은 동사들은 ‘기도하게, 채우소서, 사랑하게, 택하게, 가꾸게, 있게’의 형태를 띠게 된다. 자신의 바람을 신에게 보내는 기도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시에서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이미지는 ‘낙엽이 지는 때’이며,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비옥한 시간’이다. 자연의 계절인 가을처럼 인생에서 불혹(不惑)을 넘은 나이는 이런 나이다. 특히 소박하고 겸허하게 살고자 했던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자인 김현승에게는 더욱 그랬다. 기독교적인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백합의 골짜기’, ‘까마귀’와 같은 형상들이 이 시에 구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형상의 의미 역시 그렇게 어려운 설명이 필요한 시어들은 아니다.  우리 시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시적 전통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김현승의 시는 새롭게 출발하고 있다. 순수 서정시의 지나친 시어의 조탁이나 모더니즘의 난해한 비유, 이미지, 참여시의 어중간한 시적 언어와는 한결 다른 모습이다. 그의 시는 화려한 기교나 수사보다는 평범한 일상 언어를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1950년대 다른 시인들과도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또한 이 시는 자신의 현재, 즉 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의 소중한 열매를 맺는 시간을 맞이할 수 있게 한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세월의 격랑을 헤치고 시련을 극복한 다음에 오는 작은 보람, 어쩌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다. 한 마리의 까마귀는 굽이치는 바다를 건너고 백합이 만발한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김현승은 이것을 소중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서정주가 온갖 시련을 겪고 피어나는 국화에서 모진 세파에 시달리다가 돌아온 성숙한 누나의 모습을 만났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그가 기도와 노래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은 전기 시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기도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교육론Ⅱ』, 윤여탁, 서울대학교출판부:서울, 1999.         ※ ‘기도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 김현승은 8·15 해방, 6·25, 4·19라는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시를 발표해 왔다. 부정과 불의가 난무한 현실과 양심과 도덕이라는 내면 간의 갈등 사이에서 그는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써 왔는지, 그리고 비윤리적 현실 앞에서 신에게 순수의 양심과 의지를 지키고 회복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은 어떤 의미와 한계가 있을지에 대해 아래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보자.   김현승은 8·15 해방, 6·25, 4·19를 거치는 동안 발생한 사회부조리와 혼란 속에서 도덕적·윤리적인 문제를 지키기 위해 양심으로 맞서는 의지를 보여준다.   나는 기독교 신교의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배웠고, 현세보다 내세가 더 소중함을 배웠다. 신이 언제나 인간의 행동을 내려다보고 인간은 그 감시 아래서 언제나 신앙과 양심과 도덕을 지켜야 한다고 꾸준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아마도 비교적 단순하고 고지식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나이가 먹은 뒤에도 이 신앙과 양심과 도덕을 곧이곧대로 믿고 지키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인간들의 실제적인 현실은 양심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서 양심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살고 있다. 이른바 선험적인 원리와 경험적인 실전과는 너무도 차이가 심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정치다. 나는 불행히도 선진국에선 살아보지 못하였지만 후진국의 정치는 더욱 양심과는 멀다.   위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과 양심, 그리고 도덕을 배웠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부정과 불의가 난무하여 양심과 도덕과는 거리가 멀자 그는 종교와 윤리의식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플라타너스」 전문           그는 자연을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로 보고 동반자적 실체로 인식한다. 여기에서 그가 기독교 정신의 조화로운 관계에서 신과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타너스를 ‘너’로 지칭하여 동반자적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플라타너스가 가지고 있는 싱싱한 푸른 잎, 든든한 가지 등이 요인이며 그 나무의 실체는 바로 생명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식은 당시의 정치상과 사회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것은 나의 안에서 물과 피로 육체를 이루어 가도, 너의 밝은 은빛은 모나고 분쇄되지 않아 드디어는 무형하리만큼 부드러운 나의 꿈과 사랑과 나의 비밀 살에 박힌 파편처럼 쉬지 않고 찌른다. 모든 것은 연소되고 취하여 등불을 향하여도, 너만은 물러나와 호올로 눈물을 맺는 달밤…… 너의 차거운 금속성으로 오늘의 무기를 다져가도 좋을, 그것은 가장 동지적이고 격렬한 싸움!     - 「양심의 금속성」 전문           1958년에 발표된 이 시에는 먹는 것은 물과 피이고 육체를 이루지만 ‘너’ 즉 ‘양심’만은 항상 은빛으로 빛나고 부서지지 않는 견고성을 지니고 있다고 양심의 가치를 표현해 내고 있다. “무형하리만큼 부드러운” ‘꿈’과 ‘사랑’과 ‘비밀’의 마음에 양심의 가책이 “파편처럼 쉬지 않고” 찌르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일구어내고 있는 종교적 양심에 의한 자기 성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은 “호올로 눈물”을 흘린다는 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불변의 양심을 ‘금속성’에 비유하여 양심의 가치와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시에서 그의 무한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를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들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 「가을의 시」전문           이 시는 구원의 시이다. 경건한 기도로 가난한 이웃들의 아픔에 희망의 빛을 주고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구원을 청한다. 그리고 가을에는 풍성한 결실 뒤에 빈 가지마다 “위대한 공허”를 주어 고독이 진리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가을의 ‘허공’을 통하여 눈물을 사랑하면서 진리와 빛을 얻고자 하는 깨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윤리적 현실 앞에서 신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추구하고 기원하면서 순수의 양심과 의지를 지키고 회복하고자 기도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가을의 기도」전문           그의 기도는 신앙적 의식에서 비롯된 모국어와 사랑, 그리고 고독이다. 절대의존의 신 앞에서 그는 신과 인간이 보다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반성의 기도를 하면서도 계속 기도하도록 해 달라는 고백과 요청은 신에 대한 자신의 굳은 의지의 발산인 것이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에서 볼 수 있는 고독의 요청은 인간의 순수 가치, 즉 경건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영혼의 요청으로, 신에 대한 경건성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신과 현실과의 관계를 끊는 고독이 아니라, 신과의 관계를 더욱 굳게 하기 위한 티끌 하나 없는 순수 기도의 시이며 일종의 영혼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시는 대부분 ‘가을’을 소재로 구체화되고 있다.   『한국현대시인연구 하』, 문덕수 외, 푸른사상:서울, 2001.       ※ 김현승 시인과의 스승과 제자라는 인연을 추억하고 있는 다음 글을 읽으면서 김현승 시인은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의 시 지도 방식과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 주위 사람들의 김현승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평가 등이 그의 시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보자.       나의 스승 다형(茶兄) 선생   - 문병란(시인)         우리말 가운데서 가장 고귀하고 존경스러운 말은 ‘어버이’, ‘스승’, ‘임금’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군사부일체’라는 윤리덕목을 내세웠을 것이다. 어버이는 혈연적 관계니까 너무도 당연시되고, 임금은 권력적 최고 기반이니까 거부감의 대상이어서 진정한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혈연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면서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서 ‘스승상’은 최고의 위치가 아닐까.    학문이나 문학이나 모두 그 뿌리가 있고 인맥이 있게 마련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란 있을 수 없다. 서구의 문학사에서도 버질이 있어 단테가 나왔고 단체가 있어 세익스피어, 그가 있어 밀턴이 나왔다고 한다. 위대한 학문이나 문학 작품은 모두 전단계의 스승에 이어서 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1959년 10월 ≪현대문학≫이란 문예지 신인 추천제도를 통하여 김현승 시인의 인도를 받아 문단에 첫발을 디뎠다. 조선대학교 재학시절 문과대 국문학과 지도교수였던 김현승 교수님께 시 창작연습 시간에 써서 제출한 작품을 통해서였다. 좀처럼 접근하기 힘들고 깐깐하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던 그분은 습작기 학생들을 칭찬하지 않았다. “이건 시 비슷할 뿐 시가 아니다.”, “이건 유행가 가사만도 못하다.”고 혹평을 한다는 말을 선배들한테서 들은 바도 있었다. 엄하고 꽤 까다로워 지도받기가 수월하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김현승 시인의 명성을 듣고 그분의 문하생이 되기 위하여 조그만 문재를 믿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저학년인 내겐 접근 기회도 오지 않았다. 그것은 교양과목이나 시론·문예사조론 강의를 듣고서도 짐작이 갔다. 1분만 지각해도 절대로 입실을 허가하지 않았고, 당시 적당한 대학교재가 없던 시절, 그분은 노트나 원고뭉치를 가지고 와서 읽어주며 받아쓰라는 형식의 강의였는데 끝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면 문장의 도중에도 딱 중단하는 성미였다. 일면 괴팍하고 적당히 얼버무려 넘기거나 타협하지 않는 매우 엄격한 교수로 통했다. 용모도 40대의 후반이셨던 연령에 비해 깡말라 육덕이 전혀 없는 당신의 「자화상」이라는 시에서처럼 ‘사랑이고 원수고 몰아쳐 허허 웃어버리는/비만한 모가지일 수 없는 나’, ‘모질고 사특하진 않으나,/신앙과 이웃들에 자못 길들기 어려운 나’의 싯구와 같이 학생들도 엉석부리는 일은커녕 일상적 질문도 수월치 않았다.    시골에서 문학 전집에 나오는 괴테나 바이런의 시들을 낭독하고 그 당시 교과서에 등장한 생명파나 청록파 시인들의 시에서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 서툴기만 한 시학도로서 한없이 우러러뵈는 그분한테서 시재를 인정받기란 사실상 까마득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내었다. 습작노트에 가득 써놓은 50여 편의 시를 그분에게 바치기로 하였다. 상급 학년이 되기 전 안달이 나서 미리 그분의 인정을 받고 싶어 시도한 나의 노력이었다. 1개월 후, 그것도 내가 자청하여 강평을 원했더니 군데군데 시 비슷한 구절은 있지만 통일성이 모자라고 정말로 시가 된 구절은 두 행뿐이라고 평하였다. 상당한 칭찬을 예감했던 나는 너무도 엄한 혹평에 아찔하였으나 한편 오기가 생겨나 “이 영감을 기어코 굴복시키리라” 이런 뚝심도 생겨났다. 노트를 가져가겠노라고 했더니 다음에 쓴 시와 비교할테니 놔두고 가라고 하셨다. 얼마 후 그보다 많은 습작시를 다시 바쳤음은 물론이다. 당시 당신께서는 현대문학이나 사상계, 신동아 등에 일년에 4편 정도 발표하는 ‘실패작 없는 과작의 시인’이셨으니, 이 ‘다작의 돈키호테 같은 시학도의 다산성’에 어안이 벙벙하였을 것이다. 허나 두 번째 노트의 평을 듣지 못한 채 나는 1957년 8월 학보병으로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 가서 고달픈 훈련병으로서 병영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영에서 문안 편지를 올렸더니 두툼한 무게의 답신을 보내주셨다. 위로와 격려, 그리고 나의 시재에 대한 애정어린 다독거림이 들어있었다. 시재를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 가혹한 평을 한 것은 더 나은 작품을 쓰라는 격려였다는 것 등 한없이 따뜻한 스승님의 애정이 담겨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바친 습작노트 중에서 「고별」이라는 시 한편을 당시 지방신문인 ≪전남일보≫ 학생시란에 발표하여 그것을 오려가지고 편지와 동봉해 주셨다. 나는 그때 ‘아, 이것이 스승이구나.’하고 감격의 눈물이 솟구쳤다. 그 덕분에 나는 이미 시인으로 통했고 그 시는 많은 전우들이 돌려가면서 읽고 때묻고 닳아질 정도였으나 제대할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최일선에 가서도 시지망생이었던 소대장급인 이서인 중위, 유승국 소위 등과 일과 종료 후 시와 인생을 함께 토론하기도 하였고, 살벌한 군영에서 ‘영원의 여성’이라는 시적 부드러움이 많은 전우들에게 위안의 힘을 발휘하였는지 특별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김현승 은사님의 따뜻한 제자 사랑의 배려가 아니었더라면 나의 시의 싹이 제대로 자랄 수 있었겠는가. 학보병 복무기간 1년 6개월을 마친 후 복학하여 다시 은사님의 문하가 되었다. 스승께서는 퍽 반겨주셨으며 더욱 시작에 정진하라는 격려를 주셨다.    1959년 신학기 첫 시간 김현승 지도교수의 시 창작연습 시간이었다. 그분은 칠판에다 ‘가로수’라고 썼다. 당신께서도 잡지의 청탁을 받았으니 이 시간은 같은 제목으로 시를 쓰자고 말씀하셨다. 너무도 놀란 첫 시간, 우리는 모두 원고지를 꺼내놓고 시상을 모아 구상하기 시작했다. 90분 후 나는 두 편의 작품을 마련했다. 한편은 형태미를 실험한 가벼운 시였고, 한편은 병영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감회에서 시상을 이끌어낸 시였다.  아무튼 그 시간에 쓴 당신의 작품 「가로수」는 사상계에 발표(1959)했고, 나의 시는 현대문학지에 초회 추천작으로 게재(1959)되었다. 학우들이 책방에 가보니 ‘너의 시가 추천작으로 게재되어 있더라’하여 알았지, 은사님께서는 추천했다는 말씀마저도 하지 않았다. 병영에 보내준 신문에 게재한 「고별」에 이어 두 번째 베푼 스승의 커다란 온정이었다. 나도 그 후 40년이다. 교단 생활을 하고 정년퇴임했는데, 이처럼 제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뒤돌아보게 되었다.    한번은 학우들이 저 찡그리고 계시는 김현승 교수를 웃게 할 수 있느냐 내기를 걸자고 하였다. 나는 자신 있다고 말하여 성공하였다. 까다롭지만 한번 문을 열어주시면 커피도 사주시고 당시 오두막이라는 경양식집에 가서 오트밀을 곁들여 먹는 비후까스도 사주셨다. 좋은 커피 감정법도 가르쳐 주셨으며 그분은 신동아에 유명 다방의 커피맛에 대하여 쓴 덕분에 커피를 공짜로 마신다 하였다. 커피 감정에 대한 자부심이 시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강했다. “커피는 세 번 마신다. 다방 문 들어서자마다 우선 확 풍기는 커피 내음을 코로 마신다. 두 번째는 종업원이 갖다놓은 커피잔의 까만 빛깔을 눈으로 마신다. 세 번째는 잘 저은 커피를 한 모금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궁글린다. 그러면 좋은 커피는 혓바닥 위에 맹물처럼 빙그르르 구르지만 나쁜 커피는 입안과 이 사이에 텁텁하니 스며버린다.” 그래서 나도 그분에게서 배운 커피 감정법을 제자들에게 대물림으로 풀어먹곤 했다. 그분의 아호가 커피를 좋아해서 다형(茶兄) 아닌가.    1913년 4월 4일에 태어나 1975년 4월 11일 숭전대학교 채플시간에 기도하시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기까지 62년간 사시다 『마지막 지상에서』(1974)를 최후의 시집으로 남기고 영명하셨다. 당신 가문에서 신봉하는 청교적 기독교 가풍에 의하면 가장 경건하고 행복한 임종을 맞이한 축복받은 시인이 아니었던가 한다.    죽기 전에 사람을 칭찬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미 고인이 된 그분을 두고 생각할 때 교육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일생동안 일관하여 순수한 자아탐구의 시세계를 노래한 시인으로서 경건하고 성실한 삶을 살다간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었다.    그분의 시적 특성이 응결된 대표시집 『견고한 고독』이나 『절대고독』에 나타난 경건하고 청교도적인 절대적 고독의 시는 신을 향한 단독자로서의 실존적 자각을 통해 인간적 대결을 지어보이는 표현을 담고 있어, 우리 시단의 독특한 경지가 아닌가 한다. ‘순수시’, ‘절대시’, ‘사상시’ 이런 용어에 가장 잘 알맞은 시를 찾으려면 단연 다형 김현승의 시를 제쳐놓고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삼류 시인은 ‘모방’하고 일류 시인은 ‘표절’한다는 역설이 있다. 모방은 아류, 표절은 완전히 소화하여 창조한다는 뜻이리라. 과연 나는 스승의 시를 흉내냈는가 감쪽같이 훔쳤는가. 감히 그분의 문하로서 누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내가 뭐 논문감이 되나』, 우리문학기림회, 새미:서울, 2002       ※ 아래 글을 읽으며 시인이 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정서에 어조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리고 두 번째 제시문에 인용된 시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의 사용된 어조의 특징과 그 효과에 대해 적어 보자.       어조와 시의 유형 시의 어조가 제재와 독자 그리고 화자 자신에 대한 태도라고 할 때 이것은 벌써 지향점의 차이에 따라 어조가 달라지고 이 어조의 차이가 시의 여러 유형이 된다.  첫째 유형으로 전달이 화자(발신자)를 지향해서 언어의 ‘정감적’ 기능이 우세해지는 경우다. 서정시는 외침소리(아! 오! 하는 외침소리는 언어의 표현적 기능만 작용한 경우다.)를 발전시킨다는 진술은 여기에 해당된다. 이것은 전달내용에 대한 화자 자신의 정서적 반응이 강조되는 유형이다. 따라서 이 때 어조는 감탄·정조의 양상을 띤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량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 심훈, 이 시의 어조는 매우 격렬하고 그만큼 화자 자신의 정감적 반응이 강조되고 있다. 서정시의 목적이 자기표현이고 서정이 자기표현의 주종이 되는 이상, 사실 서정시는 일인칭 화자 ‘나’를 지향하는 표현적 기능이 우세해지기 마련이다. 주정시는 그 표본이다. 그러나 20년대 초 감상적 낭만시처럼 언어의 표현기능이 지나치면 그만큼 미적 가치는 소멸되는 것이다.  둘째 유형으로 전달이 청자(수신자)를 지향함으로써 대화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경우다. 이인칭 ‘너’를 지향할 때 언어는 ‘사동적’(지령적) 기능이 우세해진다. 이것은 전달내용에 대한 청자의 반응을 요구함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이 유형의 시에서 어조는 명령·요청·권고·애원·질문·의심 등의 양상을 띤다. 이 때 일인칭 화자가 이인칭 ‘너’에 대하여 종속적이냐 아니냐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 그럴듯한 녀석들은 대학원에 들어가 사랑보다 책 사 읽기에 바쁘고 하나 둘 기성복에 몸 맞추며 여편네와 허가받은 작부밖에 모르는 사내들 속절없이 외로워 당신은? 안녕히 비워 두셨나요 예고없이 비 내릴 때 오세요. ㈀은 신석정의 전원적 목가시 이고, ㈁은 김현승의 신앙시 이고, ㈂은 김수영의 이고, ㈃은 이윤택의 배역시 이다. 열거된 이 모든 구절들은 형식상 청자의 반응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두드러지게 청유형이나 명령형 어미가 사용되고 있다. 이런 유형은 ㈀과 ㈁의 작품처럼 서정적일 수도 있지만 개화기 시가처럼 목적시에 가장 어울리는 형태인 것이다. 서간체 형식의 시, 송가(찬가), 식민지 시대의 선동적인 카프시, 정치적 투쟁가 등도 이 범주에 속한다.  셋째, 전달이 맥락을 지향할 때 언어의 지시적(정보적, 표상적) 기능이 우세해지는 유형이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렇게 전달이 작품의 제재 곧 화제의 지향일 때(3인칭 또는 탈인칭의 지향일 때) 어조는 정보전달에 적합한 소개·사고 등의 사실적·명시적 양상을 띤다. 학생들의 교복이 자율화된 시대 운전기사 강씨네는 연탄방에서 산다 마누라는 안집의 빨래를 해 주지만 밥은 따로 해먹는다. 미스터 강은 레코드로얄을 끈다. - 김광규, 중에서 이 시에서 화자의 존재는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객관적 보고자의 중립적 역할을 하고, 우리는 작품이 환기하는 관련상황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묘사시, 서술시, 참여시, 리얼리즘시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반사실주의적 추상시(절대시)는 언어의 지시적 기능의 가장 약화된 시유형이다.  넷째, 언어의 시적(미적) 기능이 우세해지는 경우다. 이것은 전달이 텍스트(메시지) 자체에 지향하는 경우다. 여기서 텍스트 자체를 지향한다는 것은 표현방법에 지향한다는 뜻이다. 시적 기능은 말할 것도 없이 미적 효과를 목표로 한 것이며, 따라서 이 기능은 본질적으로 시를 시답게 하는 기능으로서, 시에 우세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따로 유형화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하면 시적 기능은 모든 시에 우세하면서 정감적 기능이나 지시적 기능, 또는 사동적 기능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난히 시적 기능이 우세한 경우가 있다. 김영랑의 순수시나 김춘수의 무의미시(추상시)가 그것이다. 활자 사이를 코끼리 한 마리가 가고 있다.  잠시 길을 잃을 뻔하다가 봄날이 먼 앵두밭을 지나 코끼리는 활자 사이를 여전히 가고 있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는 않는 코끼리 코끼리는 발바닥도 반짝이는  은회색이다. - 김춘수, 이 무의미시는 화자나 청자의 존재는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작품 밖의 어떤 대상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만이 보일 뿐이다. 따라서 지시적 기능이 무화되어 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람한 코끼리가 활자 사이를 걸어가는 비논리적 이미지의 결합방법에 관심이 초점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의 어조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친숙한 인간의 어조가 아니라 익명의 어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이 어조는 화자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조는 궁극적으로 화자의 문제다. 왜냐하면 어조는 화자의 인격이나 신분 또는 마음의 상태 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또한 어조는 청자의 신분, 정신상태도 드러낸다). 화자는 현대시론에서 매우 주목되고 있으며, 미학상의 여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시론』, 김준오, 삼지원:서울, 2002       주기도문, 빌어먹을 - 박남철 지금 하늘에 계신다 해도 도와 주시지 않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나라를 우리 섣불리 믿을 수 없사오며 아버지의 하늘에서 이룬 뜻은 아버지 하늘의 것이고 땅에서 못 이룬 뜻은 우리들 땅의 것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고통을 더욱 많이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미움 주는 자들을 더더욱 미워하듯이 우리의 더더욱 미워하는 죄를 더, 더더욱 미워하여 주시고 제발 이 모든 우리의 얼어 죽을 사랑을 함부로 평론치 마시고 다만 우리를 언제까지고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두시겠습니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제 아버지의 것이 아니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밤낮없이 주무시고만 계시는 아버지시여 아멘       ※ 도움말   - 시의 어조는 제재와 독자, 화자 자신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강한 요소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어조의 차이로 인해 시가 여러 유형으로 나뉘게 된다. 시를 쓸 때만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어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데 도움을 받게 된다. 시 속에서는 작가가 직접 등장하지 않고 화자를 통해 이야기하게 되므로 시의 어조는 화자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어조는 궁극적으로 화자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의 어조는 시의 내용과 정서 표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제시문을 통해 인용된 시는 제목에서 우선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기도조의 어조를 취한 것으로 보이나, ‘읊어 보시오’처럼 명령형(그것도 일흔 번이나 읊어 보라는 명령)을 사용하고 있고, 신을 향해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두시겠습니까?’라는 반항적 어조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일용할 고통, 미워하는 죄, 얼어 죽을 사랑, 주무시고만 계시는 아버지’ 등의 어구를 통해서도 고통받는 현실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신을 향해 극도의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김현승의 시에서는 기도조의 어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고, 신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어 두 시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어조는 시의 내용과 정서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 외의 요소에 의해서도 시를 통한 감정 표현이 달라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시 감상을 하여야겠다.       ☞       광주=뉴시스=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 시인의 기념사업 등과 맞물려 광주에서 문학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광주시와 다형 김현승시인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김현승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등과 맞물려 '광주문학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 (다형의 동생인 김현구 선생). ... 1913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현승 선생은 교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7세때 광주 양림동으로 이사와 숭일학교와 숭실전문학교 등을 수료했다. 숭일학교 교사(1936)와 조선대학교 교수(1951-1959), 숭실대학 교수(1960-1975)를 거쳐, 한국 문인협회 부이사장(1970) 등을 역임했다. 다형은 한국전쟁때 광주에서 문학잡지 '신문학'을 4호까지 발간했으며, 이 과정에서 황순원의 '소나기'가 신문학을 통해 세상의 빛을 봤다. 또 다형은 문단에서 쟁쟁한 역할을 하고 있는 문병란, 손광은, 진헌성, 이성부, 오규원, 문순태, 이근배, 김종해, 김종철 시인 등 40여명을 '현대문학'에 추전, 문단에 입문시켰다. 손광은 김현승시인 기념사업회 회장은 "다형 선생은 광복 후의 혼란기에 김기림류의 모더니즘과 정지용류의 감각적 이미지즘에 경도돼 있던 우리나라 시단에 지성적 감수성을 개척하고 새로운 한국 현대시를 정립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며 "6.25때 자칫 단절될 뻔했던 시문학사는 물론 문학사의 맥을 이어온 것도 큰 업적이다"고 밝혔다.    
342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김춘수 - 꽃을 위한 序詩 댓글:  조회:4294  추천:0  2015-12-17
    꽃을 위한 서시(序詩)   김춘수(金春洙)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시어, 시구 풀이]  시방 : 지금. 금시  위험한 : (함축) 사물의 본질적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짐승 : 무지한 존재의 상징어  손 : (상징) 일상적인 행위의 표상  미지(未知)의 : 아직 모르는, (함축) 인식되지 않은  까마득한 : 무지의 상태를 상징하는 ‘어둠’을 더욱 의식화하는 시적 효과를 가져 옴  존재(存在) : (함축) 인식, 삶  무명(無名)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음, (함축) 앞의 ‘미지’와 의미 상통하는 낱말/인식되지 않은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 나는 지금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한 존재이다.(상징법. 현재법)  까마득한 어둠 : ‘무지의 상태’의 상징이다. 즉 ‘너’의 존재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 : 삶이라는 불안정한 상태. ‘까마득한 어둠’과 더불어 존재론적 입장에서 사물 자체에 대한 인식에 회의(懷疑)를 드러낸 표현이다.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 자신의 의식을 깨우기 위한 자세로 지난 추억을 일깨우고. 대상이 자아[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서는 계기를 보여 준다.  나의 울음 : 존재의 의미를 밝히려는 시적 자아의 노력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신부’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꽃을 말한다. 언제나 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로 작자의 의식 세계를 결론적으로 정리하여 형상화하고 있는 중심어이다. 여기서 ‘·····’은 시상을 정리하기 전의 침묵으로, 이를 통하여 시적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핵심 정리]  지은이 : 김춘수(金春洙, 1922- ) 시인. 경남 충무 출생. 사물의 사물성(事物性)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시를 주로 쓰며, 특히 시에 있어서 언어의 특성을 다른 어떤 시인보다 날카롭게 응시하며 존재론적 세계를 이미지로 노래하였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관념적, 철학적, 주지적  어조 :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남자의 목소리  심상 : 비유적, 상징적 심상  구성 :    1연  사물의 내재적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나    2연  아무런 의미도 부여 받지 못하고 있는 존재    3연  어둠을 비추기 위해 자기 의식을 일깨움    4연  깨어 있는 의식으로 대상에 대한 추구 노력    5연  사물의 본질적 의미는 언제나 미지의 상태  제재 : 꽃  주제 : 꽃(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의미 추구  출전 : (1959)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구체적인 심상을 제시하지 않고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명상적인 세계에 대한 사색의 과정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난해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시는 존재 탐구라는 주제 의식을 토대로 하여 쓰여지는 것으로, 시를 정서 표출의 과정으로 보기보다는 존재 그 자체를 규정하는 진실한 세계로 보는 데서 창조된다. 따라서, 시적 의미는 모두 ‘존재의 본질 규명’이라는 한 가지 명제에 집중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에서 ‘너’와 ‘신부’는 시적 자아가 끊임없이 추구해 오던 존재의 본질을 상징한다. ‘나’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 채 존재 탐구를 향해 고난의 몸짓을 거듭하지만, 존재는 얼굴을 가리고 좀처럼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이 바로 화자의 진술 내용의 핵심이다.    이 시에서 ‘꽃’은 사물에 내재해 있는 본질 혹은 본질적 의미로 해석된다. 1연에서 ‘나’를 위험한 짐승이라고 하는 까닭은 ‘너(꽃, 사물)’의 참된 의미를 잡으려고 내가 손을 뻗치는 순간 그 대상이 되는 사물의 본질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꽃’ 즉 대상의 참모습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2연이 노래하듯이, 꽃은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행위가 있어야 가능한데, 존재의 참모습으로서의 꽃은 인식될 수 없으므로 이름도 없이 머무르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3연에 보이는 ‘무명(無名)의 어둠’이란 이처럼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는 세계의 상황을 간결하게 압축한 구절이다. 시인은 이 괴로운 세계 속에서 밤새도록 운다. 그리고 그의 깊은 슬픔은 4연의 독백처럼 존재의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를 떠돌다가 마침내 돌에 스민 금(金)으로 차갑게 굳어질 것이라고 예감된다. 울음으로 표출된 슬픔이 ‘돌개바람’이 되어 떠돌다가 석탑 속의 금으로 응결되리라는 시상은 매우 예리하고도 참신하다. 5연은 이러한 안타까움과 슬픔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나’의 간절한 부름으로 끝맺어진다. ‘얼굴을 가리운 신부’는 곧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꽃’이요, 존재의 본질에 해당한다.       김춘수 시비 위치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산 자연휴양림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1922. 11. 25 경남 충무~2004. 11. 29 경기 분당.) 시인. 서구 상징주의 시이론을 받아들여 초기에는 그리움의 서정을 감각적으로 읊다가, 점차 사물의 본질을 의미보다는 이미지로 나타냈다.   경기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1942년 퇴학당했으며 사상이 불순하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윤이상·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노동자를 위한 야간중학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46~48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향·김수돈 등과 동인지 〈노만파 魯漫派〉를 펴냈다. 1952년 대구에서 펴낸 〈시와 시론〉에 참여해 〈시 스타일 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6년 유치환·김현승·송욱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펴냈다. 해인대학교·부산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64년 경북대학교 교수로 취임, 1978년까지 재직한 뒤 이듬해 영남대학교로 옮겨 1981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81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신군부 정권에 참여하여 정계에 진출한 것에 대해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1986년 한국시인협회장, 1991년 한국방송공사 이사를 역임했다.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거리에 비 내리듯                                      거리에 비 내리듯  비 개인 다음의  하늘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꼬꼬리새 무릎을 보라. 발톱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네 입술  네 목젖의 얼룩을 보라.  면경(面鏡)알에 비치는  산과 내  비 개인 다음의 봄바다는  언제나 어디로 떠나고 있다.                 가을 저녁의 시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시 1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를 밟고 갈 때 허물어진 세계의 안쪽에서 우는 가을 벌레를 말하라. 아니 바다의 순결했던 부분을 말하라. 베고니아의 꽃잎에 듣는 아침 햇살을 말하라. 아니 그 울음과 굴뚝을 말하고 겨울 습기와 한강변의 두더지를 말하라.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를 밟고 갈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네가 가던 그날은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능 금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분 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처 용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인동(忍冬) 잎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처용단장(處容斷章)                                     - 1의 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히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 1의 2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내가 만난 이중섭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부두에서                                                   바다에 굽힌 사나이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셔지지 않는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떼가 놓친 그 바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金春洙)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감각적. 회화적. 환상적,  신비적, 주지적 ▶어조 : 차분하면서도 객관적임 ▶표현 : 현재형의 시제를 사용하여,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표현함.     각 문장은 의미 전달이 단절된 채, 서술적 이미지만으로 연결됨. ▶심상 : 시각적 ▶구성 :      1행 : 샤갈의 그림 속의 세계      2-4행 : 사나이의 모습에 나타난 생명감      5-9행 : 샤갈의 마을을 덮는 눈의 모습      10-12행 : 눈 속에 소생하는 생명      13-끝 : 맑고 순수한 생명의 이미지 ▶제재 : 눈 ▶주제 : 봄의 맑고 순수한 생명감 ▶출전 : 김춘수 시선집(詩選集     ■ 내용 연구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샤갈의 마을은 실재의 공간이 아니고 환상적인 세계이다. 특별히 샤갈의 마을이라고 한 것은 샤갈의 특징 그림('눈 내리는 마을', '나와 마을')에서 연상된 것일 수 있으나 샤갈이 환상적이고 초현실주의적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라는 데서 연상된 이미지일 수도 있다.] - 환상 속의 세계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귀와 눈 사이의 태양혈이 있는 곳)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 : 순수하고 맑은 생명감)이(퍼져 나가는 봄의 생명감) 바르르 떤다.[봄을 바라고 섰는 - 바르르 떤다 : 눈을 맞는 사나이 모습에 드러난 봄의 생명감이 동맥과 말초 신경을 거쳐 정맥에까지, 곧 전신에 퍼져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상적 언어 서술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중시한 표현이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 사나이의 모습에 나타난 생명감 눈[생명의 활동을 자극하고 봄을 재촉함]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눈송이들이 휘날리는 모습 - 활유법)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눈은 수천 - 굴뚝을 덮는다 : 수많은 눈송이들이 분분히 날리며 지붕과 굴뚝을 덮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활유법으로 사용하여 능동적인 현상으로 묘사함으로써 시 전체가 주는 '생명감'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 샤갈의 마을을 덮는 눈의 모습 3월(三月)에 눈(생명을 주는 힘)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조그마한 크기의 물체를 일컫는 말 / 메말랐던) 겨울 열매(생명체 / 추위를 견뎌낸 생명)들은 다시 올리브(목서과의 상록 교목.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황백색의 향기로운 꽃이 핌)빛(올리브 빛은 순수하고 맑은 생명감)으로 물이 들고[샤갈의 마을에 -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 3월의 눈이 겨울 동안 메말랐던 열매들에게 올리브빛(노란빛이 도는 녹색) 새 생명을 부여한다는 의미다.] - 눈 속에 소생하는 생명 밤에 아낙들은(토속적 시어)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봄의 맑고 순수한 생명력) 아궁이에 지핀다(아궁이나 화덕에 나무를 넣어 불을 피운다.).[밤에 아낙들은 - 아궁이에 지핀다. : 불은 맑고 순수한 생명감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으로, 아낙들의 마음 속에 곱게 흐르는 봄의 생명감이 연상된다. 새봄의 아름다움을 흰눈과 아궁이 속의 불의 선명한 색채 대비를 통해 이미지화함] - 맑고 순수한 생명의 이미지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샤갈의 마을에는 → 특별히 샤갈의 마을이라고 한 것은, 샤갈의 특징적인 그림('눈 내리는 마을' '나와 마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샤갈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의 그림을 주로 그리는 화가라는 데서 연상된 이미지일 수도 있다.  * 삼월에 눈이 오는 샤갈의 마을 →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  * 정맥의 떨림 → 봄의 생명감을 감각적으로 표현함.  * 봄을 바라고 섰는 ~ 바르르 떤다. → 눈을 맞는 사나이의 모습에 드러난 봄의 생명감이 동맥과 말초신경을 거쳐 정맥에까지, 곧 전신에 퍼져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상적 언어 서술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중시한 표현이다.  *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내려오는 눈 → 맑고 순수한 생동감과 생명력을 효과적으로 표현함, 활유법  * 올리브빛으로 물이 드는 쥐똥 만한 겨울 열매들 → 추위를 견뎌내고 봄에 새롭게 생명력을 얻은 열매 올리브 빛은 '순수하고 맑은 이미지'를 나타냄.  *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 → 맑고 순수한 봄의 생명력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함.         ■ 이해와 감상 1 이 시는 의미를 찾기보다 대상의 순수한 이미지를 감상하기에 좋은 시다.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신비스러움과 자연의 조화로운 정신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이다. 현대적 시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춘수는 관념의 시를 쓰던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면 관념과 의미를 해체하고 대상이 갖는 순수한 이미지만을 추구하는 무의미의 시를 쓴다. 이 시도 그런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시의 각 행들은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심상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하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에 나오는 샤갈의 마을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적 세계이다. 이런 세계를 배경으로 '눈'과 '새로 돋은 정맥', '올리브빛', '불' 등의 이질적인 시어들은 모두 독자적인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순수하고 맑은 생명감이라는 공통적인 심상을 연상시켜 준다.   이 작품은 '꽃'을 주제로 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김춘수의 초기 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시에는 시인이 줄곧 관심을 기울인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면서도 아주 낭만적인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샤갈의 마을'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공간이다. 그 공간은 샤갈의 그림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김춘수에 의해 독창적으로 변용되면서 아름답고 따뜻한 시적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샤갈의 그림처럼 따뜻하고 낭만적이며 신비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고, 천사나 올리브 열매들은 신비한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또 가난한 서민들의 삶에 내리는 따뜻한 눈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이미지가 이미지로 단순화되기보다는 충만한 시적 의미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 이해와 감상 2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신비스러움과 자연의 조화로운 정신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이다. 현대적 시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춘수는 관념의 시를 쓰던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면 관념과 의미를 해체하고 대상이 갖는 순수한 이미지만을 추구하는 무의미의 시를 쓴다. 이 시도 그런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시의 각 행들은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심상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하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에 나오는 샤갈의 마을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적 세계이다. 이런 세계를 배경으로 '눈'과 '새로 돋은 정맥', '올리브빛', '불' 등의 이질적인 시어들은 모두 독자적인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순수하고 맑은 생명감이라는 공통적인 심상을 연상시켜 준다.       ■ 김춘수(金春洙)  1922년 경남 충무시 동호동 출생. 경지중학을 졸업하고 니온대한 예술과 3학년 중퇴. 통영중학교. 마산고등학교 교사. 마산대학 교수. 부산대학 연세대학(부산분교) 강사를 거쳐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1946년 해방 1주년기념 사화집 에 시'애가'를 발효하면서 시작을 시작했으며, 대구지방에 발행된 동인지 에 시 '온실'외 1편을 발표. 첫 시집 가 발행됨으로써 문단에 등단, 이어 시 , , , 를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주로 , , , 등에서 창작활동과 평론활동을 전개했다. 시집으로는 첫 시집 외에 ,,
341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김수영 - 풀 댓글:  조회:6569  추천:0  2015-12-16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갈래 : 자유시, 주지시, 참여시  *어조 : 감정을 절제한 목소리  *성격 : 상징적, 의지적, 주지적, 참여적  *운율 : 반복과 대구에 의한 리듬 형성  *특징 : 대립 구조  *제재 : 풀  *구성   ① 제1연 : 풀의 나약함 - 수동적인 모습(바람에 나부껴 눕고 우는 풀)  ② 제2연 : 풀의 생명력 - 수동성→능동성(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 - 나약함 → 강인함.  ③ 제3연 : 풀의 넉넉함 - 능동성 강조(→능동성과 여유까지 지닌 풀)    - 마지막 행의 '풀뿌리' : 끈질긴 삶을 표현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적인 시어 선택으로서 곧 일어설 것                             임을 전제로 한 침묵임.    - 눕고 일어남 : 삶의 반복성  *주제 : 민중(民衆)의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불의의 교통 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으로, 반서정성(反抒情性)과 참여시의 기치를 높이 든 그의 후기시 세계를 한눈에 보여 주고 있다.  60년대 민중문학을 신동엽과 함께 이끌고 온 김수영은 투철한 역사 인식과 건강한 민중성에 기초를 둔 신동엽과는 달리 모더니즘 속에서 자라난 모더니즘의 비판자로서, 4·19를 계기로 해서 강한 현실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시의 진수를 보여 줌으로써 마침내 이성부, 이시영, 조태일로 이어지는 1970년대 민중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풀'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생명체로서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천대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온 민중, 민초(民草)를 뜻하며, 이와 반대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세력, 곧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독재권력, 외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바람에 의해 눕는 풀의 수동성과 바람에 앞서는 풀의 능동성, 그리고 바람을 넘어서는 풀의 넉넉한 생명력을 통해 민중의 끈질긴 저항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즉, 이 시는 사회적 상황이 나빠져[날이 흐리고, 흐려서] 폭력화되었을 때[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민중은 무기력하게 짓밟히지만[풀은 눕고 울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권력에 맞서 싸워 이기는[바람보다 먼저 웃는] 인류 역사의 총체적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평이한 우리말 시어와 '풀·바람', '눕다·일어나다', '울다·웃다' 등의 시어를 과거시제에서 현재시제로 반복적으로 진행하면서 표현함으로써 '풀'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을 뚜렷이 드러내 주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자연 현상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하여 중후하면서도 명징(明澄)한 현실주의적 의미를 제시하는 시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 김수영(金洙暎, 1921 ~ 1968) 생애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 출생 서울 분야 문학 작가 시인. 서울 출생.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즘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으나, 점차로 강렬한 현실 의식과 저항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시정(詩情)을 탐구하였다. 시집으로 “달나라의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74) 등이 있다. 작품 눈 이 시는 순수한 삶을 지향하는 화자의 소망과 의지를 대립적인 시어의 활용과 시구의 반복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1연은 ‘눈은 살아 있다’ 라는 문장을 반복, 변형하여, 순수한 생명력을 지닌 ‘눈’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2연에서는 ‘기침을 하자’ 라는 문장을 반복, 변형하여, 순수한 내면 의식을 지향하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기침을 하도록 권유받는 ‘젊은 시인’은 곧 화자인 동시에 시인 자신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기침을 하는 행위’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살고 있는 화자의 내면 의식에 잠재해 있는 속물적 근성, 소시민성, 현실과 타협하려는 부정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을 정화하여 순수하고 정의로운 삶을 회복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3연에서는 ‘눈’으로 대표되는 순수의 세계는 오로지 자신에 대한 정화와 성찰에 매진하고 있는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임을 알려 준다. 한편 4연에서는 화자의 가슴에 불순한 ‘가래’가 고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가래’는 기침을 통해 뱉어 내야 하는 불순하고 부정적인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살아 있는 눈’을 바라보며, 가래를 뱉는 행위는 현실의 더러움을 정화하고 순수한 삶에 도달하고자 하는 화자의 소망과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상문, 지학, 창비 폭포 이 시는 ‘떨어진다’ 라는 시어의 반복을 통해 ‘폭포’의 역동적 이미지에 어울리는 힘 있는 리듬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폭포’라는 자연물을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연은 ‘폭포’의 외형적 모습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 시의 전체 내용을 개관하여 제시하고 있다. 2연은 1연에서 제시한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에 화자가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여 표현한 것이다. ‘규정할 수 없는’ 폭포의 ‘고매한 정신’은 현실적 효용이나 세속적 욕망 따위의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일체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인간의 정신적 지향을 나타낸다. 3 ~ 4연에서 폭포는 화자가 처한 현실적 상황을 비유하고 있는‘밤’을 뚫고 떨어진다. 잘못된 현실을 비판하는 ‘곧은 소리’는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양심의 소리이며, 그것은 또 다른 ‘곧은 소리’를 불러일으키는 자기희생적 선구자의 소리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 5연은 역설적 표현을 통해 폭포의 절대적 자유로움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끝맺고 있다. ‘높이도 폭도 없이/떨어진다.’ 라는 모순된 표현은 폭포가 지향하고자 하는 정신, 곧 부정적 현실에 안주하는 소시민적이고 안이한 삶의 태도를 과감히 거부하고 절대적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시인의 치열한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비상(한철우) 풀 이 시는 김수영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발표한 유작(遺作)으로, ‘풀’과 ‘바람’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민중의 건강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그린 작품이다. 이 시에서 ‘풀’은 세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자연물로,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 온 민중, 민초(民草)를 뜻하며, 이와 반대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세력, 곧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 독재 권력과 외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연에서는 풀의 수동적인 모습을, 2연에서는 바람보다 빨리 눕지만 먼저 일어나는 풀의 모습을 노래하여, 민중들이 시대 상황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면모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모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어 3연에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과 권력의 횡포를 지혜롭게 견뎌 내는 민중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즉, 이 시는 폭력적인 시대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권력에 짓밟히는 듯 보이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고통을 이겨 내는 민중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국어) 미래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고백하고 있다. 화자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땅 주인’, ‘구청 직원’, ‘동회 직원’과 같이 가진 자, 힘 있는 자에게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이발쟁이’, ‘야경꾼’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없는 자에게는 사소한 일로 흥분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커다란 부정과 불의에는 대항하지 못하면서 사소한 것에만 흥분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함으로써 화자는 자기모멸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또한 절정 위에서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는 자신의 방관자적 자세를 확인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비판하고 반성하게 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아무 죄 없는 소설가를 구속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권력에 정면에서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의식을 폭로하며 진지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천재(정재찬), 신사고 파밭가에서 이 시는 ‘묵은 사랑’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희망하면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묵은 사랑’과 연결되는 시구는 ‘잃는 것’이고 ‘새로운 사랑’과 연결되는 시구는 ‘얻는다는 것’이다. 즉, 화자는 새로운 사랑을 얻는다는 것이 묵은 사랑에 대한 집착과 미련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깨달으며 새로운 사랑을 향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조적인 시각적 이미지(색채 대비)와 동일한 문장 구조의 반복, 일상생활 속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통해 주제 의식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비상(우한용) 푸른 하늘을 이 시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투쟁과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1연에서 시인은 노고지리를 예찬한 어느 시인의 표현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푸른 하늘을 자유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제압한다는 것은 단순히 즐겁게 노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따. 노고지리가 자유롭게 날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는 도외시한 채, 다만 자유로운 비상만을 노래한 것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2연은 그것을 설명해 주는 부분으로,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는 것은 '무엇을' 이라는 분명한 목표와 피로 대유된 투쟁, 그리고 고독을 함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다시금 그러한 혁명적 행위가 고독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함으로써 혁명이라는 미명하에 휩쓸리기 쉬운 타락상을 경계시키고 있다. 흔히 이 구절은 일반 대중과의 연대감을 획득하지 못한 엘리트 의식의 표출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전체 문맥을 고려해 보면 혁명에 수반되는 허탈감이나 승리의 기쁨 같은 일체의 감정을 배제함을 물론, 실패에서 오는 좌절까지도 견뎌낸다는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시여, 침을 뱉어라 비평문. 이 글은 김수영의 시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글쓴이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시의 내용과 형식, 참여시 등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먼저 시를 쓰는 것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으로 그것이 곧 시의 형식이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산문의 의미, 모험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시의 본질은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으며, 언제나 모험의 의미를 띠며 산문의 정신과 통한다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글쓴이는 참여시가 정치적 · 개인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시적 대응 방법으로, 내용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 詩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詩의 存在 (본고는 1968년 4월에 발표된 김수영의 산문으로, 1968년 4월에 부산에서 김수영 팬클럽의 주최로 열린 문학 세미나에서 발표한 연설문.) 본문 편집 나의 시에 대한 思惟(사유)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 만한 명확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족탑을 생각해 볼 때, 시의 탐침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부터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詩作上으로는 그러한 明晳(명석)의 開陣(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의 오늘의 세미나의 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破算(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詩作은 로 하는 것이 아니고 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으로 하는 것이다. 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의 대답은 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나는 이미 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고 시사한 것만큼, 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속칭 이나 을 쓰게 된 것은―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고, 이런 의미의 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 는 본질적인 의미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제1의적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논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개진, 하이데거가 말한 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엇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대 음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엘리엇도 그의 온건하고 주밀한 논문 「시의 음악」의 끝머리에서 라는 말로 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을 해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 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留保(유보)로서의 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侵攻(침공)적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隱性的(은성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더 精銳化(정예화)―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睡眠(수면)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는 말은 사실은 이 하는 말이 아니라 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는 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起點(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援軍(원군)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은 한 얼마든지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의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 멍텅구리는 과 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 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 얼간이들이 자유당 때하고만 비교해 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 있다. 부산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울의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커녕 막걸리를 먹으러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메콩 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한 일이 아니다.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 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시인은 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김수영 육필시(왼쪽)와 일기. ㆍ‘긴장하지 말라구요 사회주의 동지들’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言論의 自由라고 趙芝薰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政治의 自由라고 張勉이란/ 官吏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년 ‘金日成萬歲’ 미발표작.) 김수영 시인(1921~68)의 시 15편과 일기 30여편 등 미발표 작품들이 9일 공개됐다. 이 작품들은 다음달 고인의 40주기를 맞아 김수영 문학세미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이 부인 김현경 여사와 접촉하면서 발굴됐다.  원고는 10여권의 수첩과 노트, 서류 봉투와 엽서, 광고지, 심지어 시멘트 포대에 쓴 것 등 그 형태가 다양하다. 1954년부터 61년 사이에 쓴 것이 대부분이며 날짜를 명기하지 않은 번역원고와 번역용 영시 필사본도 있다. 일기에는 미발표 시와 미완성 소설, 구상 중이던 소설에 대한 메모, 책을 읽으며 발췌한 문장 등이 기록돼 있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해제를 통해 “김수영의 시와 사유가 날 것 그대로 소용돌이치는, 가히 김수영 문학의 ‘진본’이라고 해도 좋을 귀중한 문학사적 자료들”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金日成萬歲’와 ‘연꽃’ 등 이념적 성향의 시 두 편이 눈길을 끈다. 김 교수에 따르면, 60년 10월 쓰인 ‘金日成萬歲’는 당시 최대의 금기어였던 ‘김일성만세’라는 다섯 음절을 통해 언론자유의 문제를 고발하고 있으며, 61년 3월 쓴 ‘연꽃’에서는 ‘긴장하지 말라구요/ 사회주의 동지들’이라는 구절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반동의 시대를 견디기 위한 자기 위안을 보여준다. 더불어 50년대 쓴 시 ‘꽃’ ‘탁구’ ‘대음악’ ‘나의 피’ 등의 작품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가열찬 정신의 힘과 비극적 속도감으로 시대의 중압과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의 치열한 시 세계가 빛을 발하는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일기는 시인의 인간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나의 머리 안의 많은 부분을 아직도 차지하고 있는 여자에의 관심을 나는 없애야 한다. 오직 문학을 위해서만 내 몸은 응결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1954·11·25) 등에서는 문학에 대한 치열한 다짐이 엿보이며 “허탈하고 황막한 생활”로 인한 우울함을 문학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결연함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생전에 소설을 발표한 적이 없지만, 한때 소설쓰기에 골몰했던 흔적도 발견된다. “앉으나 서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다. 좋은 단편이여, 나오너라(1955·1·5)” “시를 쓰러 나온 것이 아닌데 또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시를 썼다(1956·2·9)”는 일기 구절에 더해 공개된 수첩 일부는 표지에 아예 ‘fiction’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공개된 자료는 이번에 발굴된 자료의 80%에 해당되며 나머지는 출판사 측이 정리하고 있다. (공개된 미발표작품과 일기는 계간 ‘창착과비평’ 여름호에 등재.)  =========================================================================================== “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탄압받는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당신의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_볼테르     출생 1921. 11. 27, 서울 종로 사망 1968. 6. 16, 서울 수유동 국적 한국 요약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많은 시론을 발표했다. 1949년 김경린·박인환·임호권·양병식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면서 모더니스트로서 각광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生硬性)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에 겪어야 했던 방황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목차 펼치기 개요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본관은 김해. 생애 서울 관철동에서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효제보통학교 6학년 때 뇌막염을 앓아 학교를 그만둔 뒤, 1936년 선린상고에 들어가 1941년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 미즈시나[水品春樹]에게 연극을 배웠다. 1943년 겨울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지린 성[吉林省]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미8군 통역, 모교인 선린상고 영어교사와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맡으며 여러 직장을 돌아다녔다. 1956년부터는 집에서 닭을 기르며 시창작과 번역에만 전념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68년 6월 15일, 집 앞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그 다음날 숨졌다. 서울 도봉동에 있는 누이 김수명의 집 뒷동산에 잠들어 있다. 1969년 5월 1주기를 맞아 문우와 친지들이 그의 마지막 시〈풀〉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많은 시론을 발표했다. 1949년 김경린·박인환·임호권·양병식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면서 모더니스트로서 각광을 받았다. 여기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꾀하려는 시인의 진지한 태도를 잘 보여준 것이다. 〈공자의 생활난〉·〈사령 死靈〉 등의 초기시에서는 '느낀다, 생각난다, 본다'와 같은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를 많이 썼다. 사물에 대한 인식은 전통적이며 상식적인 태도와 방법을 뛰어넘고자 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이 처음부터 왜곡되어 있음을 깨달은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生硬性)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에 겪어야 했던 방황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1959년에 펴낸 첫 개인시집 〈달나라의 장난〉은 이런 시정신을 잘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시인들 가운데 김춘수와 함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그의 문학적 업적은 '반시론'(反詩論)에 있다. 그의 반시론은 1960년대 시의 주류인 참여시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시적 경향, 즉 모더니즘을 청산하고 현실과 역사, 시대와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시는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에서 과거의 자기를 부정하고,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가에서도 일대 변화를 보였다. 그가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초월적 태도와 조화의 논리에서 참여적 태도와 분열의 세계관으로 바꾸고, 또 세련된 간접표현 대신 독설과 요설이 뒤섞인 직설법을 쓰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4·19혁명과 그 정신이 퇴색되어간 현실에 있었다. 시 〈사령 死靈〉·〈그 방법을 생각하며〉·〈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에서는 1960년대 현실이 '자유·민주·정의·혁명' 등을 내세웠던 4·19정신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며 절망했다. =================================================================       김수영의             포로생활                                      /맹문재     근래에 김현경 여사의 증언에 의해 한국전쟁 동안의 김수영 시인 행적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김현경은 『김수영의 연인』(책읽는오두막)이라는 에세이집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뒤 필자와의 대담에서(『푸른사상』, 2014년 가을호) 한층 더 상세하게 밝혔다. 근래에 박태일이 발굴한 김수영의 산문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해군』, 1953년 6월호)도 도움을 준다. 지금까지 시인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부인에게도 두어 번밖에 말하지 않았을 정도로 생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수영 전집』(민음사)에 따르면 김수영은 1950년 9월 문화공작대로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어 평남 개천에서 1개월 군사 훈련을 받고 순천에 배치되었다가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탈출해 서울로 돌아오지만,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부산 거제리 수용소로 이송되어 미 군의관 피스위치와 가깝게 지내다가 1953년 12월 석방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 상황을 보충 및 수정하고자 한다. 김수영은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있었다. 어느 날 답답하다고 외출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의용군이 된 것이다. 1950년 8월 23일 전후였다. 김수영의 미완성 소설 작품인 「의용군」을 보면 그 일은 어느 정도 자발성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월북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이남에 남아 그동안에 혁혁한 투쟁도 한 것이 없는 순오는 의용군에 나옴으로써 자기의 미약한 과거를 사죄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라거나, “ 이것이 순오의 의용군을 지원할 때부터의 신념이었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자기가 공산주의를 잘 인식하고 파악하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자랑도 생기었다.”라는 구절에서 유추되는 것이다. 김수영은 다른 의용군들과 함께 충무로 근처에 있는 일신초등학교에서 하루를 묵은 뒤 북으로 이동했다. 「의용군」에 따르면 의정부를 거쳐 삼팔선을 넘은 뒤 임진강을 건너 전곡을 지나 연천까지 이르렀다. 실제로는 개천까지 갔다. 김수영은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에 실망했다. 인민군에 대한 공포와 억압은 물론이고 북쪽 사회의 빈약한 모습에 실망한 것이다. “순오는 대체 사회주의 사회의 발달이란 어떤 곳에 제일 잘 나타나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기차 안 구조로 보아 이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진보의 진상이라면 침을 뱉고 싶었다.”라거나, “미국의 문명보다도 훨씬 더 앞서 있을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던 사회주의 사회의 문명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빈약한 것이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김수영은 개천에서 훈련받고 순천에 배치된 즈음 탈출했다. 개천과 순천에서의 생활은 부인에게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의 시작품인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 포로 동지들에게」에서 “내가 6․25 후에 개천(介川) 야영 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라거나, 산문인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에서 “열대여섯 살밖에는 먹지 않은 괴뢰군분대장들에게 욕설을 듣고 낮이고 밤이고 할것없이 산마루를 넘어 통나무를 지어날르던 생각을 하면 포로수용소에서 받는 고민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토로한 것을 보면 많은 고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수영은 북쪽으로 진격한 국군 및 유엔군과 인민군의 전투가 벌어진 틈을 타 도망쳤다. 김수영이 국군에 투항하지 않은 이유는 북한 의용군으로 처리되면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가 국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살아남으려고 낙오자처럼 꾸몄다. 그런데 그것이 큰 착오였다. 국군의 입장에서는 낙오자들을 전선에 끌고 다니기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처형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영은 다른 낙오자들과 함께 밤중에 저수지로 끌려가 사격을 당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와 기적적으로 총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어 나와 근처의 민가에 들어가 쪄놓은 옥수수를 먹고 덤불 속에서 한잠 자고 남쪽으로 향했다. 옥수수를 쪄놓은 민가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는데 간밤의 총소리에 겁이 나 도망을 쳤는지, 아니면 끌려가 죽음을 당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김수영은 남쪽으로 도망쳐오다가 후퇴하는 소련군 부대를 만났다. 소련군이 제공하는 군복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함께 이동하면서도 부단하게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고, 어느 날 밤 마침내 성공했다. 그리고 탈출해오다가 미국 흑인 병사들이 운전하는 트럭들을 보게 되었다. 전방에 기름을 나르는 트럭들이었다. 김수영은 손에 피를 흘리며 소련군 군복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민간복을 구해 입고 큰길로 나가 한 트럭을 세웠다. 자초지종 얘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영어를 잘한 덕분이었다. 충무로의 집 앞까지 왔는데, 파출소 소장한테 붙들렸다. 술에 취한 파출소 소장은 김수영을 보자마자 빨갱이라고 욕하며 구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식구들이 인민군의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다리에 피가 철철 흘렀지만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이튿날 중구지서로 넘겨졌다. 그곳의 지하에서 역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던 중 트럭에 타라는 명령을 받았다. 탈 힘이 없었지만 타지 못하면 시체가 되어 청계천변에 버려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울면서 부탁해 간신히 탈 수 있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가 배를 타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갔다. 1950년 10월 말 무렵이었다. 이 부분은 좀 더 고증이 필요하다. 김수영의 산문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에 따르면 “이태원육군형무소에서 인천포로수용소로 인천포로수용소에서 부산서전병원으로 부산서전병원에서 거제리 제十四야전병원으로― 가족 친구 다 버리고 왜 나만 홀로 포로가 되었는가!”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산문에 따르면 뒷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이송되기도 하지만 또다시 부산 거제리로 돌아온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김수영은 부산 거제리 수용소에서 대부분을 보낸 것이다. 포로수용소에서(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인지, 부산 거제리 수용소에서인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김수영은 상처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젊은 미군 장교에게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치료를 받는데, 그 일로 김수영은 미군 야전병원의 통역관이 된다. 포로수용소는 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 간의 살상, 폭동, 구타 등으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김수영은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한 인민군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또한 견딜 수 없는 억압과 적막감에 시달렸다. 김수영은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리하여 흔들리는 이를 하나씩 뽑으며, 아픔을 느끼며, 역설적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의용군으로 북에서 겪은 경우에 비해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임 간호사(김현경 여사는 노 여사라고 증언했다)와 브라우닝 대위와의 사랑도 힘을 주었다. 1952년 12월, 김수영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석방은 온양에서 이루어졌는데 원래의 날짜보다 다소 늦춰졌다.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안전상 이유에서였다. 김수영은 막상 자유의 몸이 되자 길 한복판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영등포에 있는 어머니한테 가야 할지, 아내와 아들한테 가야 할지 망설여진 것이다. 결국 석방될 때 받은 담요 2장을 팔고 경기도 화성군 발안면 조암리로 향했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 포로 동지들에게   김수영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나는 원래가 약게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진실을 잊어버려야 하는 내일의 역설 모양으로 나는 자유를 찾아서 포로수용소에 온 것이고 자유를 찾기 위하여 유자철망(有刺鐵網)을 탈출하려는 어리석은 동물이 되고 말았다 「여보세요 내 가슴을 헤치고 보세요. 여기 장 발장이 숨기고 있던 격인(格人)보다 더 크고 검은 호소가 있지요 길을 잊어버린 호소예요」   「자유가 항상 싸늘한 것이라면 나는 당신과 더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살아 있는 포로의 애원이 아니라 이미 대한민국의 하늘을 가슴으로 등으로 쓸고 나가는 저 조그만 비행기같이 연기도 여운도 없이 사라진 몇몇 포로들의 영령이 너무나 알기 쉬운 말로 아무도 듣지 못하게 당신의 뺨에다 대고 비로소 시작하는 귓속이야기지요」   「그것은 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지요 누가 거제도 제61수용소에서 단기 4284년 3월 16일 오전 5시에 바로 철망 하나 둘 셋 네 겹을 격(隔)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들어갔는가」   나는 그들이 어떻게 용감하게 싸웠느냔 것에 대한 대변인이 아니다 또한 나의 죄악을 가리기 위하여 독자의 눈을 가리고 입을 봉하기 위한 연명을 위한 아유(阿諛)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명이 지루하다고 꾸짖는 독자에 대하여는 한마디 드려야 할 정당한 이유의 말이 있다 「포로의 반공전선을 위하여는 이것보다 더 장황한 전제가 필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어마어마한 전과(戰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싸워온 독특한 위치와 세계사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위하여 출발하고 포로수용소에서 끝을 맺은 나의 생명과 진실에 대하여 아무 뉘우침도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볼 필요가 없다 꽃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꽃 같은 밥을 먹었고 꽃 같은 옷을 입었고 꽃 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의 꽃을 이마 우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왔다   그것이 너무나 순진한 일이었기에 잠을 깨어 일어나서 나는 예수 크리스트가 되지 않았나 하는 신성한 착감(錯感)조차 느껴보는 것이었다 정말 내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나오려고 무수한 동물적 기도(企圖)를 한 것은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용서하여 주시오 포로수용소가 너무나 자유의 천당이었기 때문이다 노파심으로 만일을 염려하여 말해두는 건데 이것은 촌호(寸毫)의 풍자미(諷刺味)도 역설도 불쌍한 발악도 청년다운 광기도 섞여 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어떤 친구를 만났더니 날더러 다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어봅니다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은 포로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간 억류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빨리 38선을 향하여 가서 이북에 억류되고 있는 대한민국과 UN군의 포로들을 구하여내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나는 정말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북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상병(傷病) 포로들에게 말할 수 없는 미안한 감이 듭니다」   내가 6․25 후에 개천(介川) 야영 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 북원(北院) 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順天) 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中西面) 내무성(內務省) 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평양을 넘어서 남으로 오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내가 만일 포로가 아니 되고 그대로 거기서 죽어버렸어도 아마 나의 영혼은 부지런히 일어나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대한민국 상병 포로와 UN군 상병 포로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였을 것이다 「수고하였습니다」   「돌아오신 여러분! 아프신 몸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우리는 UN군에 포로가 되어 너무 좋아서 가시철망을 뛰어나오려고 애를 쓰다가 못 뛰어나오고 여러 동지들은 기막힌 쓰라림에 못 이겨 못 뛰어나오고」   「그러나 천당이 있다면 모두 다 거기서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넘어진 반공 포로들이 다 같은 대한민국의 이북 반공 포로와 거제도 반공 포로들이 무궁화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자유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반항의 자유 진정한 반항의 자유조차 없는 그들에게 마지막 부르고 갈 새날을 향한 전승(戰勝)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그것은 자유를 위한 영원한 여정이었다 나직이 부를 수도 소리 높이 부를 수도 있는 그대들만의 노래를 위하여 마지막에는 울음으로밖에 변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여!   나의 노래가 거치럽게 되는 것을 욕하지 마라! 지금 이 땅에는 온갖 형태의 희생이 있거니 나의 노래가 없어진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청춘과 그리고 그대들의 영령을 위하여 잊어버릴 것인가!   자유의 길을 잊어버릴 것인가!       [발굴 원문] 김수영 시와 산문   “이승만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하라”   ⊙ 변한 것은 양장, 융기한 젖통이의 모습, 미스 킴 등이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개성의 결핍 ⊙ 어용시인·아부시인들은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자격을 상실한 자들 ⊙ 1960년 4·19, 4·26사태를 정확하게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인의 자격이 없어   [편집자 註] 시는 김수영의 한자 표기를 그대로 실었다. 다만 시어는 표준어규정에 따랐다. 산문은 원문을 충실히 유지하되 한글맞춤법을 따랐으며 한문으로 된 단어를 국한문체로 옮겨 썼다. (자료 제공=공연예술자료가 김종욱씨)         한강변   관광도로가 곧 생긴다고 벌써 부터 땅값이 들먹거리는 얼음 창고 자리 옆의 큰 나무 선 낭떠러지는 현기증이 나서 안된다. 盧(노)씨 지붕이 보이는 왕년의 미두왕 조준호 네 땅이라나 하는 전나무가 선 골짜기가 좋은데 명동의 ‘은성’ 마담과 그의 일당들이 이사를 왔고 유현목감독의 장인 되는 분이 二百평 가량 땅을 사 놓았고 이대 음악과를 나온 서울시장의 조카딸 되는 미인이 그 부근에 살고 있는 것을 안지 부터는 그쪽도 가지 않게 된다. 四, 五年 전 까지 일본 사람들이 만든 못 쓰게 된 風雨計(풍우계)가 섰던 붉은 벽돌의 얼음창고 서쪽의 시멘트로 된 얼음창고 두동은 그러고 보니 그 동안에 상당히 역사가 바뀌었다. 영화촬영소를 하다가 납공장이 됐다가 지금은 캐비닛 공장 그 옆의 바라크집은 걸레 만드는 공장 福(복)자와 禧(희)자를 그린 캐비닛이 트럭이나 구루마에 실려 갯벌 길옆을 돌아 나오고 古鐵 부스러기를 실은 트럭이 또 그 갯벌 옆길을 돌아 들어 간다. 관광도로는 이 공장 앞마당을 자르고 風雨計가 선 벽돌 탑을 부수고 나갈 모양이다. 잘 됐다. 第二漢江橋(제이한강교)를 지나서 앞으로 運河(운하)가 생기면 汽船(기선)이 정박할 예정이라는 蘭芝島(난지도)까지 뻗칠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도 밤섬에서는 땅콩들을 모래 위에 심고 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는 국민학교 아이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와서 동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는 밤섬의 이 신기로운 여름 열매.   (출처=《女像》 1965년 8월)           아침의 誘惑   나는 발가벗은 아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山林과 時間이 오는 것이다 서울驛(역)에는 花環(화환)이 처음 生기고 나는 秋收(추수)하고 돌아오는 伯父(백부)를 期待(기대)렸다 그때 도무지 모-두가 미칠 것만 같았다 무지무지한 坑夫(갱부)는 나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것은 千字文이 되는 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스푼과 성냥을 들고 炭鑛(탄광)에서 나는 나왔다 물 속 모래알처럼 - 素朴(소박)한 習性(습성)은 나의 아내의 밑소리부터 始作(시작)되었다 어느 敎科書(교과서)에도 嫉妬(질투)의 感激(감격)은 무수하다 먼 時間을 두고 물속을 흘러온 흰모래처럼 그들은 온다 U.N委員團(위원단)이 每日(매일)오는 것이다 花環(화환)이 花瓣(화판)이 서울驛에서 날아온다 모자 쓴 靑年이여 誘惑(유혹)이여 아침의 誘惑이여     (출처=《自由新聞》 1949년 4월 1일)   [편집자註-2003년 민음사판 에는 8행의 ‘탄광’을 ‘여관’으로 표기했다. 또 11행 ‘감격’을 ‘○○’라고 쓴 뒤 주석을 달아 ‘판독할 수 없어 복자(覆字)로 처리했다’고 밝혔다. 14행 ‘화환이 화판이’를 ‘화환이 화환이’라고 오독(誤讀)했다. ‘화판’은 ‘꽃잎’을 뜻하는 말이다.]     內室에 감금된 愛慾의 탄식   - 여성의 욕망과 그 한국적 비극   남존여비의 철학           대체로 한국 하급 사회의 부인들은 교육도 없고 취미도 없고 교양도 없고, 일본의 하류부인의 단정한 품과 중국 농가 부인들의 친절한 맛에 비해서 너무나 비교가 안 되고, 입고 있는 옷은 때가 새까맣게 절어서 흰 옷인지 까만 옷인지 분간이 안 가고 세상에 태어나서, 남의 아내가 되면 자기의 옷은 개의치 않고 다만 남편의 옷만 빨게 마련인지, 어떤 개울엔 가 보아도 천을 물에 담가서 널찍한 돌 위에 펼쳐 놓고 빨랫방망이를 양손으로 번갈아 휘두르면서 불이 나게 두들기고 있는 여자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렇게 마구 두들긴 천은 물에 헹궈서 모래 방죽에다 말리는데 정성껏 두들긴 보람이 있어 볕을 받은 빨래는 눈이 부시도록 희고 윤이 난다.   여름옷은 그대로 참을 수도 있지만, 춘추복의 바지저고리 같은 것은 솜을 넣은 것을 뺄 때마다 뜯어서 빼어 빨고 나서 또 넣고 꿰매야 하니 여자의 일생은 실로 뼈저린 고행(苦行)인 것이다.   농촌의 아내들은 온 식구들의 옷 바라지를 하는 것 이외에 부엌 안 일체를 한다. 쌀 빻기, 키질, 물 긷기도 아내의 일, 무거운 짐을 머리에 얹고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아내의 일, 절구질을 하고 물동이를 이고 먼 곳에 있는 우물에까지 다니는 것도 아내들이 도맡아 하는 일이다.   아침에는 제일 먼저 일어나고, 밤에는 제일 늦게 잠자리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피로한 손으로 밤에는 바느질을 하고, 실을 꼬고 베를 짜는 것도 아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이 할 일, 그 밖에 적지 않은 아이 어미가 되면 쉴 때도 일을 할 때에도 세 살이 되기까지는 노상 등에 업고 다녀야 하는 비참한 꼴이라니, 농부의 아내가 되어서 무슨 낙이 있고 무슨 즐거움이 있는지 도시 모를 일이다. 몇 년이 지나서 며느리를 보게 되기까지는 이 고통은 도저히 면할 길이 없다. 불쌍하게도 그들은 서른만 되어도 벌써 쉰 살이나 되어 보이는 노상(老相)을 하고, 마흔이면 이가 다 빠지고 할머니 소리를 듣는다. 사랑에 취하는 젊음이 언제 있었는지, 청춘의 방황은 그들에게서는 찾아볼 길이 없고, 나날이 지옥 같은 시집살이어니, 마음에 위안을 주는 신랑은 그저 귀신을 섬기는 일 정도다.   상류로 갈수록 여자는 격리되어서 절대로 세상과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 부인은 집에 있어서, 내실이라는 방안에 처박혀서 남자의 방을 향해 창문도 열어 놓지 못하게 되어 있고, 방문자는 몇 번을 찾아가도 내실이 어디인지 추측도 할 수가 없다. 부인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된다. 정중한 유폐리(幽閉裡)에 있는 부인은 물론 교육도 없고, 교양도 없다. 그저 저속한 생물(生物)로서 취급되고 있다. 그러면 남자는 여자보다 무엇이 나은 게 있는가. 다만 오래된 관습으로 여자에 대해서 존경을 강요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배우고 수양하는 것은 남존여비(男尊女卑)를 가리키는 천박한 철학, 간단한 역사 그 밖의 다소의 문학뿐이다.   다만 남자로 태어났다는 우연한 팔자 때문에 성년이 되면 이유 없이 여자의 존경은 일층 더 두터워진다.   여성은 안방 재산   부인의 격리유폐는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습관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조(李朝) 초기에 사회의 도의(道義)가 퇴색하고 음비(淫卑)의 풍조가 성한 시대에 시작된 것 같다. 그 후 5백년 동안을 면면히 전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기원은 남편이 그의 아내의 소행(素行)을 의심한 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남편이 그의 친구를 의심한 데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서울의 부패는 특히 상류계급의 문란한 기풍은 놀랄 만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남편이 그의 아내를 감추고 딸을 감추고, 타락한 남성에게 근접하는 것을 꺼려하고, 미천한 상년이 아니면 문밖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어느 틈에 풍속화되어서 법률 이상으로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의 외출은 사람 눈을 피해서 밤에만 하게 하고, 낮에 나갈 때에는 밀폐된 가마나 조군을 타고, 그런 것에 타지 않는 것은 미천한 노동자의 계집뿐이다.   언젠가 민비(閔妃)가 배알(拜謁)했을 때 전하(殿下)는 “나는 서울 거리를 나가 본 일이 없다우. 그 밖의 곳은 더 말할 것두 없구” 하고 말씀하셨다.     이 글은 ‘버드 비숍’이라는 영국 여자의 《한국(韓國)과 그 인방(隣邦)》이라는 저서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저자는 1893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전국의 방방곡곡을 답사하고 외국 여자로서는 최초의 방대한 한국 기행문을 남겨 놓았는데 어떤 대목은 우리들이 뻔히 다 알고 있는 일이면서도 포복절도할 지경의 재미있는 데가 많다.   “한국여성의 비극적인 애욕상(愛慾相)”에 대해서 쓰라는 청을 받고 보니 나는 우선 위에 인용한 구절들이 생각이 나서 좀 길지만 구태여 인용해 보았다. 사실 나보고 쓰라면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의 생활에 대한 이처럼 간명한 조감도(鳥瞰圖)를 쓸 자신이 없다. 내 얼굴은 내가 모른다. 또 못난 얼굴은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그저 억지로 남이 본 내 얼굴을 꾸어온 셈이다.   性보다 돈을 숭배   지금 이런 글을 읽고 과거를 회상해 보면 끔찍끔찍하게 변한 점도 많지만 끔찍끔찍 변하지 않은 점도 많다. 변한 것은 노출된 양장, 융기한 젖통이의 모습, 미스 킴, 데이트, 트위스트 등이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개성(個性)의 결핍이다.   아직도 신문 4면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는 성의 개방 같은 문제도 여자의 개성의 자각이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 주위를 둘러볼 때, 정말 연애의 감정이 솟아나올 만한 여자가 없다. 판에 박은 듯한 양장, 하이힐에 핸드백은 정말 구역질이 난다. 여자가 보는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 저녁에 백 원에 몸을 파는 종삼네 집 골방에도 핸드백만은 계절에 맞추어서 4, 5개가 걸려 있다.   봉건의 노예이던 여자는 지금 금전으로 그 상전이 탈을 바꾸어 있을 뿐 상전은 여전히 상전대로 엄존한다.   내가 아는 어떤 불란서까지 갔다 온 멋쟁이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는 걸핏하면 “돈은 돈이고, 섹스는 섹스이지요” 하면서 돈 있는 늙은이하고 살면서, 가끔 오입을 하기도 하는 자신을 자못 현대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데, 그것이 현대적이라고 보기가 좀 수상한 것은, 그 늙은 남편이 이름난 부자인데도 그 여자는 그보다 더 부자인 어떤 가정의 브로커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여복(女福)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나의 주위에서 보는 여자들은 돈 있는 여자나 돈 없는 여자나 모두가 돈의 귀신들뿐이다. 세계의 조류가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면 그뿐이겠지만, 한국의 젊은 현대여성들은 성(性)보다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돈을 숭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중류 이상의 교양 있는 계급으로 올라갈수록 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자들의 성 생활을-나아가서는 애정생활을 마멸시키고 있는 또 하나의 암(癌)이 있는데, 그것은 영화다. 섹슈얼한 할리우드식 영화. 그것을 본뜬 무수한 국산영화들. 이것을 보고 온 둘의 잠자리에서 실제로 재현해 보고 싶은 유혹도 생기겠지만 잘 안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골 여자들이 좀 더 행복할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서울에 가고 싶은 생각에 눈물을 짜고 고민을 하고 있는 한 행복하지는 않다.   순천인가에 가서 오입을 해 본 일이 있는데, 서울로 치면 종삼네 집 여자들이, 손님방에 들어올 때면 다소곳이 반절을 하고 들어오는 것은 퍽 좋게 보였다.   (출처=《女像》 1964년 10월호)       책형대에 걸린 詩   - 인간해방의 경종을 울려라         4·26(1960년 이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편집자註) 전까지의 나의 작품 생활을 더듬어 볼 때 시(詩)는 어떻게 어벌쩡하게 써왔지만 산문(散文)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감히 써 볼 생각조차도 먹어 보지를 못했다.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말하자면 시를 쓸 때에 통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캄푸라쥬(camouflage, 위장·은폐-편집자註)’가 산문에 있어서는 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자유(自由)뿐이 아니다. 태도(態度)의 자유조차도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처럼 6·25 때에 포로생활까지 하고 나온 이 사람은 슬프게도 문학단체(文學團體) 같은 데서 떨어져서 초연하게 살 수 있는 자유가 도저히 없었다. 감정(感情)의 자유 역시 그렇다.   이를 테면 같은 시인끼리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불쾌(不快)한 일이 있더라도 그런 감정을 하여서는 아니 되고 그런 태도를 극력 보여서는 아니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作品)이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저주(咀呪)가 아니면 비명(悲鳴)이 아니면 죽음의 시(詩)가 고작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앞으로 이에 대한 복수(復讐)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요사이는 시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 4·26이 전취(戰取)한 자유는 나의 두 손 아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나는 정말 이 벅찬 자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눈이 부시다. 너무나 휘황하다. 그리고 이 빛에 눈과 몸과 마음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잠시 시를 쓸 생각을 버려야겠다.   지난날의 낡은 시단(詩壇)의 과오(過誤)나 폐습(弊習)을 나는 여기서 재삼(再三) 뇌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렇듯 숨 막힐 듯한 괴로운 시대 속에서 과감하게 자기의 세계를 지켜 가면서 싸워 온 시인이 현(現) 시단(詩壇)의 기성인(旣成人) 중에서도 몇 사람은 있다는 것을 나는 여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어느 나라의 시단이고 진짜 시인보다는 가짜 시인이 훨씬 더 많은 법이고, 요즈음 세간(世間)의 여론(輿論)의 규탄을 받고 있는 소위 어용시인(御用詩人)이나 아부시인(阿附詩人)들은 이미 그들이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먼저 시인으로서는 완전히 자격을 상실한 자들뿐이다.(아니 애당초 시인이 되어 보지도 못한 자들뿐이다.) 그러니까 그까짓 것은 하등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여기 말하고 싶은 것은 4·26 이전의 우리나라의 시단의 작품들이 대체로 낡은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시로서 합격된 작물(作物) 중에 특히 더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객관적으로 볼 때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반영할 수 있는 제작(製作)상의 모험적 기도를 용납할 수 있는 시대적 혹은 사회적 여백(餘白)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한데, 이와 같은 고민을 처절히 체득한 시인이라면 4·26은 그에게 황금(黃金)의 해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이러한 시인들만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4·26의 역사적 분수령을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고 넘어온 기성시인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 새 시대의 선수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는지는 확언하기 힘든다.   ‘책임은 꿈에서 시작된다’는 유명한 서구의 고언(古言)이 있는데 이 말은 4·26을 계기로 해서 새로운 출발의 자세를 갖추고자 하는 젊은 시인들이 필히 느꼈어야 할 기본인식이다. 이 인식의 감득(感得)이 없이는 새 시대의 출발은 불가능하다. 4·26의 해방은 꿈의 해방이다. 이제야말로 꿈을 가지라. 구김살 없는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 이와 같은 꿈은 여직까지는 맛볼 수 없었던 태도의 자유와 감정의 자유를 투박하게 요구한다. 여기에 과실즙이나 솥뚜껑 위에 어린 밥풀 같은, 달콤하고도 거룩한 시인의 책임이 있다. 시인들이여! 새로운 시인들이여! 이제야말로 인간 해방의 경종(警鐘)을 울려라.   나는 4·19 전에 어느 날 조지훈(趙芝薰) 형하고 술을 마시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는 이 나라는 구원(救援)을 받지 못한다’고 ‘휘트먼’인가의 말을 차용(借用)하여 가면서 기염(氣焰)을 토한 일이 있었는데 요 일전에 윤돈(倫敦·런던-편집자註)에 있는 박태진(朴泰鎭) 형한테서 온 4·26 해방을 축하하는 편지 속에 ‘새로운 정부가 선물(한) 시(詩)를 모르는 녀석들이 거만하게 구는 한, 구제(救濟)가 없겠지요’라는 말이 또 있어서 요즈음은 만나는 사람마다 중이 염불하듯이 이 말을 전파(傳播)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면 반드시 시작품(詩作品)을 신문이나 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을 냉담하게 보고 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어울리지 않게 날뛰는 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나는 극언(極言)하건대 이번 4·26사태를 정확하게 파악(把握)하고 통찰(洞察)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資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나의 친척에 모(某) 국민학교 교감이 있는데 이 작자가 4·19 날의 데모를 보고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학생들도 이제 볼장 다 봤어. 그런 폭도(暴徒)들이 어디 있어’ 하며 밤새도록 부부싸움을 했다나. 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校監)은 모두 다 모름지기 이승만(李承晩)의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택일(兩者擇一)하여라.   4·26 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흥분한 탓이려니 해서 도봉산(道峰山) 밑에 있는 아우 집에 가서 한 이틀 동안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는데 서울에 와 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 고약해져서 시를 쓰지 못할 만큼 거칠어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윤리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磨滅)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 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   (출처=《京鄕新聞》 1960년 5월 20일)   [편집자註-책형대(?刑臺)는 죄인을 기둥에 묶어 세워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행하던 틀을 말한다.]       해운대에 핀 해바라기           무더운 날은 신경질이 더 나는 법이다. 밤잠이 부족하거나 하여 머리가 휴지통같이 뒤숭숭한 아침이면 사랑에 대한 갈망이 불안한 마음과 엉키어 온 가슴을 서로 잡는다.   S는 아담하고 정숙한 여자이었다. 나의 모―든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불안도 그의 앞에서는 태양 앞에 자취를 감추는 무수한 군성(群星)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그가 알게 된 것은 해운대 넓은 바닷물 속에서였다. 어느 날 나는 학교의 학생들을 데리고 수영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그때 S도 여학생들을 인솔하여 온 부산 모 여학교 간호원이었다. S가 인솔하여 온 여학생들 중에서 자개바람을 일으키고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한 것을 내가 데리고 간 학생 중의 제일 수영을 잘하는, 반에서도 제일 키가 크고 말썽도 제일 잘 부리는 학생이 구하여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나와 S는 그 후 일요일이고 토요일이고 서로의 시간이 허락하는 한 번번이 바다에서 만났으며 ‘우끼(튜브-편집자註)’를 타고 될 수 있는 대로 물빛이 짙은, 뭇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까지 가서는 사랑이 통하는 이성(異性)에게만 신(神)이 용납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웃음을 웃고,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도 천천히 잊어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놀았다.   바다에다 모―든 몸과 마음의 피곤을 씻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산을 넘어 집을 향하여 돌아갈 때면 S의 눈에서는 눈물까지 나왔다.   S에게는 여자다운 원한이 있었다. 그가 학교에서 ‘간호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학교의 교만한 여교원들 틈에 끼어서 자기 직업의 열등성(劣等性)을 그는 나에게 종종 하소연하였다.   “단 한 사람을 못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해요.”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남편을 가리키는 이야기인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면서도 나는 재우쳐 그의 가정 내막을 물어보기를 사양하였다.   나도 처자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S의 노골적인 정열(情熱)은 눈앞에 숨 가쁘게 느끼고 있는 나에게 S가 남편과 아이를 가진 여자라고는 설마 믿어지지 않았다.   “어린아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S는 나에게 도리어 이러한 아픈 질문을 하고 놀리었다.   “빨리 사모님 모시고 와서 같이 사세요. 젊은 부부가 아무리 피난생활이라 하지만 서로 떨어져 있으면 좋지 않아요.”   하는 S의 말에,   “나는 당신만 있으면 그만이오.”   하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우리들의 사랑은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대포알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깊어만 갔다.   “개자식!” 이런 욕인지 애교인지 알 수 없는 S의 말을 나는 너그러운 미소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나는 그의 입술 한번 훔쳐 보지 못하였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S는 나의 성격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보다도 많은 S의 나이와 지혜가 저 허허 바다와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그 위에 깜박거리는 아침의 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S는 나를 완전히 자기의 사랑의 포로(捕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여름도 가고 구월 초승 어느 날 밤 나는 환도를 앞두고 비로소 S의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인사하세요. 앞으로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친해 주세요.”   하고 S는 방 한구석에 앉은 몸집이 큰 남자를 나에게 소개하였다. 이것이 S의 남편이었다. 그 이외에 S에게는 아들이 하나, 딸이 하나 있었다.   “내년에 중학교 시험을 보아야겠는데 어떻게 될지 근심이에요.”   하고 S는 돌아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자기의 아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미소를 던졌다. 나도 미소로 대답하였다.   S와 S의 남편인 검고 무트듬한 건축기사라는 사나이와 눈이 큰 딸아이와 나는 한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극도의 흥분과 당황과 비분과 어색하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의 남편이 맹인(盲人)이라는 놀라운 비극을 밥상을 받기 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끌어 가리켜 주는 대로 눈이 먼 건축기사는 묵묵히 기계적으로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만화를 번역해 주셔서 아이들이 여간 좋아하며 읽지 않습니다. 자주 놀러 오십시오.”   하고 이 맹인은 나에게 치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S가 자기가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미국 만화를 번역해 달라는 것을 틈이 있는 대로 정성껏 번역하여 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환도 후 학교의 교편생활을 그만두고 기자생활을 하게 된 나는 S의 아름다운 이름을 나의 ‘팬 네임’으로 즐겨 쓰고 있다. S의 이름을 쓸 때마다 잃어버린 해운대의 넓은 바다가 생각이 나고, S의 어디인지 ‘모나리자’를 닮은 가냘픈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머리 위에 떠오르고, 그보다도 토건사고로 실명을 하고 아내가 벌어다 주는 것으로 답답한 삶을 하고 있는 가련한 건축기사의 일이 몹시 가슴에 사무친다.   그리고 아예 S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출처=《新太陽》 1954년 8月號)       [발굴] 의 시인 김수영의 시와 산문   반세기 만에 빛을 본 번뜩이는 시와 산문   ⊙ 1964년 여성잡지 《女像》 8월호에 시 실어 ⊙ 사후 44년이 지나도 날카롭고 비판적인 작가정신 읽을 수 있어       반시(反詩)의 시인, 타협하지 못했던 직선(直線)의 산문가 김수영(金洙暎·1921~1968)의 시와 산문이 세상에 나왔다.   《월간조선》 8월호와 9월호에 걸쳐 공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김수영 전집》(민음사刊)에서 빠진 것으로 시와 산문, 번역문, 시월평을 망라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서슴없고 가장 치열한 양심의 극(劇)”(유종호)이란 표현처럼, 날카롭고 비판적인 작가정신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시인이 타계한 지 44년이 지났으나 지금의 시각에서 읽어도 손색이 없다.   먼저, 시 은 1965년 8월호 여성잡지 《여상(女像)》에 게재됐다. 모래섬에 불과하던 여의도에 개발바람이 일던 1960대 중반의 어수선한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여의도의 땅을 돋우기 위해 인근 밤섬을 폭파하기 직전의 이야기다. 시인은 ‘아직도 밤섬에서는/땅콩들을 모래 위에 심고/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는…’이라며 추억에 잠긴다. 그러나 그 어조는 무척 쓸쓸하다.   또 1949년 4월 1일자 《자유신문(自由新聞)》에 게재됐던 시 의 시어(詩語)를 일부 복원해 《월간조선》에 다시 싣는다. 그동안 마이크로필름 보관상태가 나빠 의미전달이 불가능했던 오탈자(誤脫字)를 바로잡은 것이다.   直線의 산문가     김수명 선생과 김수영(오른쪽).         1964년 《여상》 10월호에 실린 산문 은 ‘여성의 욕망과 그 한국적 비극’이란 어깨제목을 달고 있다. 시인은 ‘남자가 여자보다 무엇이 나은 게 있느냐’고 반문하면서도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가 돈의 귀신’이라고 비꼰다. 직설적이며 타협하거나 비켜 가지 않는 ‘직선의 산문가’다운 표현이다.   1960년 4·19와 4·26(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일) 이후인 5월 20일자 《경향신문》 4면에 실린 〈책형대에 걸린 시(詩)>는 김수영의 날카로운 산문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책형대(?刑臺)란 죄인을 기둥에 묶어 세워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행하던 틀을 말한다. 시인은 ‘… 시대의 윤리 명령은 시(詩)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고 선언한다. 시대에 편승하거나 권력에 기대는 작가들을 ‘아부시인’, ‘어용시인’으로 규정하며 시인 휘트먼의 말을 빌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 이 나라를 구원받지 못한다’고 썼다.   성인취향의 잡지 《신태양》의 1954년 8월호에 실린 는 에피소드 형식의 콩트, 혹은 단편소설 같은 이야기다. 실화인지 가공의 얘기인지 헷갈린다. 작품을 발표한 1954년은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부산·대구 등지에서 통역관, 선린상고에서 영어교사를 하던 시절이다. 실제로 이 작품 속의 ‘나’는 학교 선생이다.     누이 김수명이 오빠의 작품을 널리 알려     김수영시비 앞에 선 김수명 선생.     김수영 선생은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준(儁)은 1983년 4월 사망했고, 둘째 우(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81년과 2003년 민음사에서 《김수영 전집》을 펴낼 때, 누이동생 김수명(金洙鳴·78)씨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문학》 편집장 출신의 수명씨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오빠의 작품을 찾고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월간조선》의 발굴에 대해 그는 “평생을 오빠의 작품을 찾고 다듬는 일을 해 왔는데, 아직도 작품이 남아 있느냐?”며 놀라워했다.   한국문단에서는 ‘동생 김수명이 없다면 김수영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도 없었을 것’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누이는 오빠의 시가 세상의 조명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빠가 생전에 선별해 준비해 두었던 작품들을 한 자, 한 획 다치지 않고 살려서 1981년 출간한 전집에 묶을 수 있었지요. 또 1981년판에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누락·발굴 작품도 보완해 2003년 한글판으로 새 전집을 펴냈습니다. 이번에 새로운 전집을 준비 중인데 새로운 작품을 찾게 됐으니 기뻐요.”   그는 “시인 김수영이 한국시단에 끼친 영향은 아주 크다”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정신, 시를 통해 실천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오빠는 언어를 통해 자유를 읊었고, 또 자유를 살았다”고 회고했다.   시인의 작품에 대한 독자나 평론가의 오독(誤讀)은 없었을까. 김수명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엔 좁은 소견으로 많이 속 끓이기도 하고, 안타까워한 적도 있어요. ‘왜 그 깊은 뜻을 알려 하지 않고 껍질만 보나’고요. 이젠 원칙을 두고 있습니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이상, 모든 것은 독자의 몫이요 평론가의 몫이라고요.”     김수영과 도봉산   김수영 조카 김민.     시인 김수영은 도봉산에 본가가 있었고 선영도 그곳에 있었다. 김수명씨는 “수복 후 도봉산 텃골 선영에 생활터전을 삼게 됐다”며 “그곳에서 닭도 기르고 돼지도 길렀다”고 했다.   “이후 오빠 묘도 그곳(도봉산)에 썼다가 1994년 폐묘하게 되어 조상 유해와 함께 화장을 해 모셨습니다. 1998년 우리 가족은 그곳을 떠났지요. 제가 그곳에서 20대에서 60대까지 살았으니 오빠 생전에도, 사후에도 함께한 공간이랄 수 있겠죠.”   현재 도봉구 방학3동 문화센터 건물 1~2층에 시인의 자료관이 조성되고 있다. 시인의 육필원고, 저서, 김수영론과 관련한 자료, 시인의 작품이 포함된 서적, 시인의 애장도서와 애장품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시인 김민은 김수영의 조카다. 2001년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2007년 처녀 시집 《길에서 만난 나무늘보》를 펴냈다. 김민씨는 “제가 태어나기 넉 달 전에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도봉산 선영에서 태어나고 자라서인지 ‘김수영시비’에 자주 올라가곤 했다”고 말했다.   “큰아버지 시 중 제일 좋아하는 시편이 입니다. 이 시처럼 꾸밈이 없고 솔직하면서도 가슴이 찡해져 오는 것, 이 점이 김수영 시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요?”⊙   / 월간조선.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라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도봉산 하산길 막바지에 김수영 시비가 있다.  그의 대표작은 .         김수명은 출판사에 경리를 근무하다가, 나중에는 "현대문학"의 편집장 자리에 올라, 김수영의 시가 문단에 조명을 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시인 김수영의 여동생 김수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김수영에 대한 평가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김수명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김수명은 당시 문인들에게 "한국의 잉그리트 버그만"으로 칭송될 정도로 아름다워서, 많은 문인들이 그녀에게 구애를 했다고 한다. 김수명이 편집장으로 있었을 당시, 현대문학은 작가들로 넘쳐났으며, 자신이 알기로도 그녀를 짝사랑했던 작가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시인 황동규씨가 김수명에게 헌사한 시를 발표했다는 기사와 함께 사진을 발견했다. 기사에 따르면, 황동규씨의 아버지 황순원과 김수명은 반 세기에 걸친 정신적 우정을 나눴고, 황동규씨도 김수명과 오랜 기간 술친구를 했다고 한다.  사진은 김수영과 김수명 남매를 찍은 것으로, 김수영은 길다란 얼굴에 다소 냉소적인 모습이며, 김수명은 정말로 잉그리트 버그만을 연상케 하는 우아함과 단아함을 지닌 분위기를 지녔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미인형이 아닐 수 있으나, 사실 화장을 하지 않고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어떤 여자가 미인으로 보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녀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던 것은, 문인들에게 보여주었던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 도봉구에 '김수영문학관' 연 누이동생 수명씨 "오빠가 이걸 원할까? 객쩍다 이거예요. 살아 있으면 '이게 뭔 짓이야?' 할 것 같은데, 세상이 변하니 오빠도 바뀌어야죠(웃음)." 시인 김수영(1921~1968)의 누이동생 김수명(79)씨는 듣던 대로 '미인'이었다. 젊은 시절 당대의 문인들이 앞다퉈 연정을 쏟아냈던 단아한 미모가 잔설처럼 남아 있었다. 그가 앞장서 지난달 27일 개관한 '김수영문학관'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오빠가 생전에 선별해 넘겨준 원고들을 1976년부터 선집과 전집으로 묶어왔어요. 내가 나이가 있으니 이 자료들 보관할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는데 2011년 6월 도봉구청에서 제의가 왔지요. 본가와 묘소가 도봉구에 있고, 구청장(이동진)이 시인 김수영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더라고요."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 커다란 성취를 남긴 시인의 명성에 비해 문학관이 너무 작고 외진 곳에 있지 않으냐 묻자, "너무 커도 허술해 보인다"며 그가 웃었다.   김수명씨가 생전의 김수영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1000여점의 육필 원고를 오동나무에 넣어 보관한 수장고를 자랑스러워했다. 작은 사진은 1961년 막내동생 졸업식에 모인 김수영 가족. 오른쪽에서 둘째가 김수명씨(왼쪽 사진).   8남매 중 다섯째인 김수명씨가 큰오빠인 김수영의 육필 원고를 보관하게 된 것은 그가 국내 최장수 문예지인 '현대문학' 편집장이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그저 시 한 편 실어주는 것만으로, 화가들은 잡지 표지에 자기 그림 한 편 실어주는 것만으로 고마워하던 시절이었죠. 김환기, 박노수, 이상범 화백 등 누구나 할 것 없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니까요." 현대문학 시절을 얘기하다 그가 눈시울을 붉혔다. "(편집장 맡을) 자격은 없었는데 내가 살림은 잘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원고료라는 걸 드려보자 제안했죠. 한번은 오빠가 시 한 편 가져왔길래 원고료 3000원을 봉투에 넣어 드렸더니, 그걸 앞 저고리에 넣으면서 '아, 이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하는 거예요. 고까짓 3000원을 받고는 아이처럼 좋아서…. 아이고, 또 눈물 나네." 까다롭고 괴팍하기로 유명한 시인 김수영에 대한 누이의 사랑은 애틋했다. "어렸을 땐 오빠가 미웠어요. 큰아들 노릇을 전혀 안 했으니. 아버지는 장남인 오빠가 은행가가 되기를 바라셨는데, 훌쩍 일본으로 유학 가 학비를 대라고 하니 화가 나셨겠죠. 집에 있을 때도 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만 앉아있는 오빠는 '무서운 사람' '별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어요. 어머니 생전에 기자가 와서 '김수영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시인입니다' 하니까, 어머니가 '그 알량한 시인? 나는 고무신 한 짝이라도 사주는 아들이 좋아' 하셨지요(웃음)." 철이 들면서 시 쓰는 오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오빠 원고를 보면 단 한구석도 고칠 데가 없어요. '이게 뭐지?' 하고 의문이 가는 문장이 없다고요. 마침표 하나도 찍었다 지웠다가 또 찍었다 지웠다가…. 어떻게 이렇게 시를 쓸까, 팔불출처럼 오빠의 시에 감탄하고 감탄했지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김수영의 시는 '사랑의 변주곡'이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사그라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산이….' 김수영의 시라고 다 좋았던 건 아니란다. "4·19 때 거칠게 쓴 시들은 좀 그래요. 좀 더 승화됐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또한 시인 김수영의 모습입니다." 문인 지망생이었지만 "오빠에게 모든 재능을 빼앗겨버렸다"며 웃는 김수명씨는 최고의 시인으로 미당 서정주를 꼽았다. "오빠가 따를 수가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시인 김수영이 버스에 치여 마흔일곱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날을 동생은 또렷이 기억했다. "다행인 게 오빠가 쓰러지고 한 번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와 헤어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김수영문학관은 벌써 문인들의 사랑방이 된 듯했다. '그리운 성산포'의 시인 이생진이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자 그가 반색하며 맞았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 그에게 물었다. "누구는 시인 김수영을 '푸른 늑대'라고 하던데요?" 김수명씨가 답했다. "양심이었죠. 시대의 양심! 오빠를 참여시인이다, 민중시인이다 하는데, 그건 오빠 작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해서예요. 그냥 시인이죠. 김수영은 어떤 이념 같은 것에 묶일 사람이 아니예요."   오랫동안 묻혀 있던 무언가가 ‘발굴’ 된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크나큰 기쁨이다. 발굴된 것이 역사적 유물이나 예술 작품임은 물론이고, 재능을 숨기고 있었던 예술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모든 것이 빛을 본 순간, 그 사실은 역사가 되고 작품은 가장 큰 조명을 받는다. 발굴은 일반적으로는 땅 속에 파묻힌 것을 파내는 일을 뜻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지상으로 드러내는 일’을 말한다. 무언가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것은 언제나 인류의 가장 중요한 숙제이며 숙원이었다.  9일 발굴된 김수영 시인의 미공개 작품  지난 12월 9일, ‘영원한 청년 시인’ 김수영 시인의 미공개 작품이 한 계간지를 통해 공개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3년 만에 발굴된 시다. 그가 생전에 남긴 작품이 많지 않은 탓에 이번에 작품이 발견된 것은 우리 문학사에 매우 뜻 깊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렇게 발굴된 작품은 문학사가 될 뿐만 아니라 시대를 기록하는 자료로 쓰이기도 한다. 오랫동안 묻혀 있다 잊혀질 뻔한 작품들은 거의 그 시대의 뼈 아픈 모습을 담고 있는데, 당시의 시대상의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작품들은 그 자체만으로 역사가 되기도 한다.  세대의 고뇌와 함께 작가 개인의 아픔까지 담겨 있는 작품은 이제 더 이상 ‘미공개’ 작품이 아니다. 세상의 빛을 본 ‘역사적’ 작품으로 사회적∙문학적 기록이다. 때문에 이번 시간에는 최근 발굴된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비롯, 그 동안 문학사에서 귀중한 자료로 기억되는 거목들의 미공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거목들이 남긴 작품을 찾아내 그들의 생과 작품세계를 갈무리 하는 일 또한 우리 문학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현대 시의 거대한 뿌리, 김수영  전쟁 중 느꼈을 외로움이 느껴지는 작품    실낱같이 잘디 잔 버드나무가 / 지붕 위 산 밑으로 보이는 객사에서/ 등잔을 등에 지고 누우니 / 무엇을 또 생각하여야 할 것이냐 // (중략) // 만나야 할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가야 할 곳도 가지 못하고 / 이제는 나의 천직도 잊어버리고 / 날만 새면 / 차디찬 곳을 찾아 / 차디찬 곳을 돌아다닌다 - 1953년 作 ‘그것을 위하여는’ 중에서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매우 독창적인 시론가로 꼽히는 김수영 시인. 그의 평론은 발표될 때마다 중요한 문학적 쟁점으로 떠올랐고, 날카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김수영은 죽은 뒤에 더 높이 평가를 받은 시인으로, 그가 죽은 뒤 등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근대적 자아 찾기, 정체성 찾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 시인이자 시 세계 속에 정치 문화와 질타, 비판 등을 담아낸 명실상부한 현대 시인이다. 그가 죽은 뒤 40여 년의 시간 동안 유족들은 원고 보관에 심혈을 기울였다. 부인 김현경 여사는 시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작은 종이쪽 하나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누이 김수명 선생은 자택에 화재가 났을 때 시인의 원고들을 제일 먼저 챙겨 나왔을 정도였다. 그 작품은 을 통해 2009년 공개되었다.  그 뒤 최근 발굴된 ‘그것을 위하여는’는 김수영 시인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6.25 전쟁 직후에 발표한 시로, 1953년 10월 3일자 연합신문에 발표된 것이다. 고서 수집가인 문승묵 씨가 발굴해 제공, 계간지 에 공개되었다. ‘그것을 위하여는’은 김수영 시인이 시인으로서의 천직을 잊어버리고 부산에서 차가운 곳을 전전하며 살아갔던 때를 기억하게 하는 작품으로 자유롭고도 우둔한 ‘생각’의 공간으로 그가 들어갔음을 느끼게 한다. 전쟁 중 시인이 느꼈을 외로움과 삶이 느껴지는 이번 미공개 작품은 김수영 시인의 초기 작품으로 그의 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그린                              소설가 황순원   역사적 의식을 놓지 않았던 서정적 작품   황천 간 우리누나 / 그리운 누나 / 비나리는 밤이면 / 더욱 그립죠// (중략) //그리운 누나 얼굴 / 생각날 때면 / 창밧게 비소리도 / 설게 들니오 - 1931년 作 ‘누나 생각’ 중에서 소설문학이 추구할 수 있는 예술적 성과의 한 극치를 시현한 소설가 황순원. 그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바로 다. 간결하고 세련된 문제로 소설 미학의 전범을 보여주는 그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에 대한 애정을 고루 갖춘 작품을 많이 집필했다. 서정적인 작품으로 많이 기억되는 그의 문학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근대화가 제창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긴 기간 동안 우리 정신사에 대한 적절한 조명을 이룬 작가이기도 하다.  지난 9월 경희대학교는 황순원 작가의 동요와 시, 단편 소설 등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초기 작품을 대거 발굴했다고 밝혔다. 국문과 김종회 교수가 발굴한 황 작가의 작품은 동요ㆍ소년시ㆍ시 65편, 단편소설 1편, 수필 3편, 서평ㆍ설문 각 1편 등 모두 71편으로, 이중 앞서 공개된 작품을 제외하면 60여 편이 새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발굴된 작품은 황순원의 등단 직후인 1930년대 전반 작품이 대부분이며, 한국전쟁 이후 작품도 일부 포함돼 있다. 서정성과 사실성, 낭만주의와 현실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황순원 작가의 문학세계가 어떻게 발아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요소가 들어 있는 미공개 작품은 9월 23일 열린 ‘제8회 황순원 문학제’에서 공개되었다.  순수 자연의 시인, 천상병 삶과 죽음의 경계를 느낄 수 있는 시    등대에 불이 켜진다. 바다로 향하여. 하늘은 / 무수한 갈매기떼처럼 가버리었다. / 황혼이 어두어져가는 저쪽에서 여자처럼 있었다. / 그 수평선을 가는 것은 항해하는 상선(商船)이 아니고/내일의 나의 내일의 항구(港口)별이여 - 1952년 作 ‘태양 빛나는 만지의 시’ 전문 ‘문단의 마지막 순수 시인’ ‘문단의 마지만 기인’이라 불리는 의 천상병 시인은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압축한 시를 주로 집필했다. 위 시는 천상병 시인이 1952년 10월 동인지 ‘제2처녀지’에 실은 ‘별’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별’은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순옥 씨가 발굴한 것으로 2007년 공개되었다. 공개되었을 당시 1950년대 동인지와 일간지에 실린 시 4편, 평론 1편, 편지글 1편 등 모두 6편의 작품이 새롭게 발굴되어 세상의 빛을 보았다.  목순옥 씨는 미공개 작품을 공개하며 “발굴된 시를 읽다 보면 바다가 보이는 마산에서 자란 시인의 풍부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고 전하며 “풀벌레 소리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시인의 서정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 뒤 2009년에는 집 안에 있던 서류봉투에서 ‘세월’이라는 시도 발굴되었다. 삶의 슬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한 이 시는 그가 1988년 간경화증으로 치료를 받고 나서 퇴원한 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다. 천상병 시인의 숨겨진 미공개작은 대부분 그의 부인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2007년 발굴된 네 편의 시와 한 편의 평론글은 을 통해 출간되었다.  ‘4.19’ 시인, 신동엽 시대 상황에 따른 슬픔이 절절히 묻어난 작품   꽃들의 음악 속 / 말발굽소리 들리면 / 내일 고구려 가는 石工의 주먹아귀 / 막걸리 투가리가 부숴질 것이다. /오 답답한 하늘 / 국경 그어진 두 토막 // 오 雜草 무성한 休戰地의 / 녹 쓴 京義線 레일이어 - 1963년 作 ‘태양 빛나는 만지의 시’ 중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신동엽 시인의 별명은 ‘4.19’ 시인이었다.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던 그는 4.19 혁명의 기억을 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완성시켰다. 그 후 장편서사시 을 발표하고 간암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가 타계한지 40주년이 된 2009년 발굴된 작품은 이런 그의 작품세계가 절절히 녹아있는 시 2편이다. 1963년 7월 발행된 동인지에서 발굴된 시는 분단의 민족적 아픔을 절절하게 노래한 ‘태양 빛나는 만지의 시’와 12행으로 이뤄진 간결한 시 ‘십이행시(十二行詩)다.  두 편의 시 모두 1963년 3월 출간된 신동엽 시인의 생전 유일한 시집 는 물론, 이후 출간된 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미공개작이었다. 발굴된 시는 그의 초기 작품으로 당시 시대 상황의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들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심층적인 상처가 채 다스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극단적인 유미주의에 치우친 경향을 보였다. 한국전쟁 당시 입산했던 체험을 분단의 아픔이라는 민족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두 시는 발굴 당시 시인 작품세계는 물론 시대적 상황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        김수영 문학관은 아파트 단지 건너편, 새삼스러운 곳에 있다. 김수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유시인으로,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처음 읽었던 나는 그에게 퍽 매료됐었다. 김수영 문학관 앞에 서니, 그의 글을 찾아 읽었던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설렜다. 왠지 모르게 김수영의 시는 용기가 되었다. 거창하거나 웅장하지도 않았고, 마냥 예쁜 모습을 노래한 것도 아니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았는데 그 시 한 구절, 한 구절 힘이 있었다. 그때처럼 그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약간의 긴장과 함께 문학관 안으로 들어갔다.   ▲ 중간)장질부사와 뇌막염 등 병을 앓고 난 직후   김수영은 해방 후 한국 시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시인이다. 이전 인제 박인환 문학관에 갔을 때에도 그의 이름을 발견했었다. 박인환 시인이 그 당시 문학인의 술집이었던 ‘모나리자’에 술값 대신 맡긴 만년필을, 자신을 우습게 여겼던 친구에게 줬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김수영이었다. 김수영에게 시는 고상한 예술이 아니었다. 현실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고, 그는 자신의 문학과 사회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가 사용한 어휘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어였고 특유의 반복기법으로 독자적인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는 보통학교 시절 6년 동안 줄곧 성적이 뛰어났으나, 14살에 장질부사에 걸려 폐렴과 뇌막염을 앓았다. 그는 곧 회복했고, 이후로 다양한 일을 했다. 연극의 연출과 배우를 담당하기도 했고, 영어 선생님도 했다. 1945년 「묘정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발표를 계기로 문학의 세계에 들어왔다. 1946년 문학의 길에 접어든 그는 김병욱, 박인환 등과 함께 ‘신시론 동인’을 결성했다. 여기서부터 박인환과의 인연이 시작된 듯했다.     문학관은 1, 2층 전시실과 3, 4층 작은 도서관, 강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김수영 시인의 삶의 궤적을 연대순으로 볼 수 있고, 한국전쟁 등 현대사에 따라 달라진 그의 시를 확연히 비교할 수 있다. 김수영 문학관은 세련되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김수영의 대표작 「풀」이었다. 관객들의 걸음걸이에 따라 화면상의 풀이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었다.   ▲육필원고. 1950년대. 한국전쟁의 영향. 왼)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 오) 봄밤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는 나의 욕망과 철학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을 만족시켜준 것이 이 포로생활이었다고 생각한다. (중략) 나의 시는 이때로부터 변하였다. 나의 뒤만 따라오는 시가 이제는 나의 앞을 서서 가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모두가 무서운 일이요, 꿈결같이 허무하고도 서러운 일뿐이었다.  – 산문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 1953, 《해군》 6월호에서   김수영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한 의용군에 강제 동원되었다. 훈련소로 간 그는 유엔군과 인민군의 혼전을 틈타 야간 탈출을 감행했으나, 경찰에 체포당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그곳에서 끔찍한 대립과 살상을 경험한 후, 약 3년 동안 갇혀 있다 석방됐다. 그는 이러한 경험이 그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설움의 원천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육필원고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 포로 동지들에게」 (1953.5.5)   「나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위하여 출발하고 포로수용소에서 끝을 맺은 나의 생명과 진실에 대하여 아무 뉘우침도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볼 필요가 없다 꽃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꽃 같은 밥을 먹었고 꽃 같은 옷을 입었고 꽃 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의 꽃을 이마 위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왔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중에서   김수영은 시대의 흐름을 시 안에 담고자 했다. ‘내가 움직일 때 세계가 함께 움직이기를 바란다’고 할 정도로 그는 과장이나 생략 없이 솔직하게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했다. 비속한 현실을 그리기 위해서는 비속어를 사용했고,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직설적인 문장을 택했다.     문학관 한 벽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김수영을 만난 감상을 글로 쓰거나 그림을 그려 전시할 수 있다. 그의 짧은 삶을 안타까워하는 이도, 그의 영원한 젊음을 찬양하는 이도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종이. 그중 한 장에 그려진 그의 모습이 어쩐지 실제의 김수영과 많이 닮아있을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시작(詩作)’이라 하여 직접 시를 지어볼 수도 있다. 김수영 시인의 시와 산문에 자주 쓰이던 단어를 집자하여 시어 막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으로 본인만의 시를 짓는 것이다. 한 구절 지어볼까 했으나 괜한 멋쩍은 마음에 나무막대를 이리저리 옮겨보기만 했다.   모든 언어는 과오다. 나는 시 속의 모든 과오인 언어를 사랑한다. 언어는 최고의 상상이다. – 산문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에서   한쪽에는 낭송실도 마련되어 있다. 터치스크린과 마이크가 있는 현대식 기계에 본인의 목소리로 낭송하고, 그것을 간직할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갔다. 제2전시실에는 그의 육필원고뿐 아니라 지인과 주고받은 서신, 그가 글을 쓰던 탁자 등 그의 생활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그의 일기장을 볼 땐, ‘봐서는 안 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엿보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시 「잠꼬대」    10월 6일 시 「잠꼬대」를 쓰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썼는데, 현경한테 보이니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에 대한 고발장인데, 세상의 오해 여부는 고사하고, 현대문학지에서 받아줄는지가 의문이다. 거기다가 거기다가 조지훈도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가? *이 작품의 최초의 제목은 「ooooo」. 시집으로 내놓을 때는 이 제목으로 하고 싶다.   10월 18일 시 「잠꼬대」를 자유문학에서 달란다. 「잠꼬대」라고 제목을 고친 것만 해도 타협인데, 본문의 를 로 하자고 한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고치기 싫다. 더 이상 타협하기 싫다. 하지만 정 안 되면 할 수 없지. 부분만 언문으로 바꾸기로 하지. 후일 시집에다가 온전하게 내놓기로 기약하고. 한국의 언론자유? Goddamn이다!   이 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표현의 자유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다. 김수영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말대답은 ‘권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문 「창작 자유의 조건」에서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라고 말했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는 김수영이 자신이 쓰고 있는 참여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 시에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온몸의 시학’이 표현되어 있다.   아아, 행동에의 계시. 문갑을 닫을 때 뚜껑이 들어맞는 딸각 소리가 그대가 만드는 시속에서 들렸다면 그 작품은 급제한 것이라는 의미의 말을 나는 어느 해외 사화집에서 읽은 일이 있는데, 나의 딸각 소리는 역시 행동에의 계시다. – 산문 「시작 노트2」에서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셸리의 시 「서풍의 노래」 번역을 위한 단어정리 노트   그는 생활비를 위해 영어와 일본어로 된 문학을 번역했다.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시작한 번역은 그의 시와 산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번역에 열중했고, 그 작업을 통해 김수영만의 문학 세계를 정밀하게 형성해 나갔다. 능통한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그였기에, 그는 해외서적도 원서로 읽었다. 그는 현대 영미 시인(예이츠, 오든)과 철학자(하이데거)의 책을 즐겨 읽었다.     ▲왼 위) 지인들로부터 받은 서신 / 오 위) 『엔카운터』지 봉투와 뒷면에 쓴 「사랑의 변주곡」초고 왼 아래) 좌탁, 하루 일과를 적어놓은 노트 / 오 아래) 금연(禁煙) 금주(禁酒) 금다(禁茶) 메모   김수영은 『엔카운터』지(문화자유회의의 영국 지부 기관지)를 정기구독했다. 그는 봉투 뒷면을 이용해 메모하거나 시 쓰기를 즐겨 하였고, 일기를 꾸준히 쓰는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하루 일과노트와 일기를 보면 문학과 일상생활 모두에 성실했던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메모 중에는 금연(禁煙), 금주(禁酒), 금다(禁茶)도 있었다. 그 옆으로는 ‘합법적인 도적들에게 자진해서 납공을 하지 말아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의 서재는 고풍스러웠다. 의자가 여섯 개 딸린 테이블과 멋스럽게 쓰인 글자, 그의 풍류를 나타내는 듯한 도자기가 있었다. 저렇게 커다란 테이블이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커다란 테이블은 김수영 씨에게 시와 에세이와 번역을 자리를 바꿔가면서 쓸 수 있게 했다. 시를 쓸 때는 동편으로 향해 앉았고, 에세이를 쓸 땐 북쪽으로, 번역인 경우에는 남으로 향해 앉았다고 한다. – 소설가 최정희    제2전시실에는 독서대가 마련되어 있다. 김수영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김수영 관련 서적들과 논문을 열람할 수 있다.   ▲박일영 씨가 김수영 시인에게 준 초상과 메모, 그 옆으로는 김수영의 생이 담긴 흑백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김수영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1968년 6월 15일, 밤 11시 10분경 귀가하던 길, 그는 집 근처에서 버스에 부딪혀 다음 날 아침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은 동료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던 동료 박두진시인이 그를 기리는 조시를 썼다.   김수영 형/ 김수영 형/ 지금 우리는 김 형을 마지막 보내고/ 김 형은 우리 앞을 마지막 떠나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이 사실/ 김 형과 우리의 이 마지막 고별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김 형도 그러시겠지요/ 너무나 갑자기인 너무나 가혹한/ 너무나 애석하고 아픈 이 충격을/ 우리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김 형은/ 우리의 현실의 어떤 난폭한 무질서에 의해/ 강탈을 당했고 이별을/ 고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는/ 김 형을 강제로 빼앗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중략)/ 영복을 누리소서/ 1968년 6월 18일 문우 박두진   ▲왼) 김수영 문학상 상패(민음사 제정) / 오) 김수영 두상 조각상(1985년 조각가 이해주 제작)   김수영 문학상은 1981년 이 발간되면서 제정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이 상은 두세 번에 걸친 심사과정을 공개하고 각 심사위원의 심사평을 발표하는 등 당시의 문학상 심사로는 파격적인 절차를 거쳤다. 이 과정 자체가 치열한 양심의 시인이었던 김수영 시인의 시정신을 이어받았다 하여 후보에 오른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김수영 문학상은 다른 문학상에 비해 상금이 많지 않았으나 젊은 문학인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인상으로 간주되었다.     문학관을 나오면서 재미있는 원고를 발견했다. 초등학생 6학년이 남긴 것이었다. ‘김수영처럼 집중해서 시를 쓰고 싶다’는 바람이 낯설고 엉뚱했다. 어쩌면 훗날, 이 글을 쓴 날을 기억하며 멋진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학관을 나와 해설사 아주머니께서 이야기하신 방학동 은행나무를 찾았다. 그녀는 여기까지 왔으면 꼭 봐야만 하는 나무라고 호들갑스레 말씀했다. 문학관을 왼쪽에 끼고 걷다 보니, 어느새 웅장한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이 나무는 서울시 지정 보호수 제1호로, 높이 24m, 둘레 9.6m, 수령 600년 된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이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는 일화도 있다. 주민들 모두 이 편안한 그늘 터와 신성한 나무를 아끼는 듯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미완성이었지만 끝까지 봄이었다. 그는 반항하는 젊음이었고 양심 있는 청춘이었다. 김수영이 왜 우리 시의 가장 벅찬 젊음이라 소개되겠는가. 그는 난해하면서도 새로웠고, 엉뚱하면서도 현대적이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시는 계속해서 외치고 있다. 아직 김수영 문학관을 찾는 발걸음이 뜸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앞으로 많은 이들이 시인 김수영의 흔적을 찾아, 끊임없이 그의 시를 노래하기 바란다.    3년 전에 죽은 나의 오빠는 시인이었다. 그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시인이었다. 명색 장손이었건만 끝내 아들노릇도 오빠노릇도, 그리고 지아비나 아버지, 그 어느 구실도 못 하고 그는 오직 시인으로 살다 죽었다. – 김수명 [출처] 시대의 흐름을 표현한 시인, 김수영을 찾다(오직 시인으로만 살다 죽은 그 김수영)|작성자 독서토론 인천남     ======================================================================= ...쓰고 있다. 그는 작품이 써지지 않거나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혹은 저 자신의 인간적인 갈등이나 딜레마에 부딪힐 때마다 거의 발광 상태로 진통을 겪었다. 그런 발작은 먼저 그의 가족을 극단적으로 괴롭히는 일로 나타난다. 그가 평화신문에 있다가 태평양신문 문화부에 옮겼을 때 이봉구 등과 다방 '분홍신'의 마담에 빠져서 서로 라이벌이 된 적도 있지만 그의 연애는 순수할수록 도리어 황량했다. 그의 결혼생활의 잠정적인 파탄, 그리고 연애 따위의 갈등이나 시인으로서의 고민이 1950년대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가족을 해체하는 일로 나타난 것이다. "노루꼬리 같은 내 피 빨아먹지 마라. 이것들아, 왜 나만 빨아먹느냐." 이런 독설을 새파랗게 질린 가족에게 퍼부어댄 것이다. 날마다 술에 취해서 거의 날마다 욕을 퍼부었다. 그는 그가 탕진한 유산 따위에는 전혀 가책도 가지지 않고 폐허생활의 생계 일부분을 그의 수입으로 충당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그가 통속적으로 구두쇠라는 의미 밖에서 예술가에게 있는 피해의식이나 이기주의가 그런 것으로 솟아난 것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한테도 대들었다. 그렇게 아무도 그를 달랠 수 없다. 다만 그의 첫째 누이 김수명의 말만은 곧잘 들었다.  "오빠!"라고 한번 부르면 그 '오빠'라는 싱싱하고 이국적인 음성에 의해서 이제까지 발광하던 그가, "응, 내가 왜 이러지?"라고 격정을 가라앉힌다. 오빠라는 대명사는 국어 속에서 분명히 우수한 단어다. 오빠라고 하면 올케라는 말고 함께 청결한 친밀감과 어떤 종류의 세련된 관능까지도 유발한다. "오빠 밤이 깊어요. 자야지." "그래, 자야겠다." 그런 일이 있었던 다음 날에는 눈깔사탕 한 봉지나 군고구마 한 아름을 사들고 올 때도 있다. 그의 영훤한 소년 기질이 그럴 경우에 강조된다. 그런 애정을 아직도 풀리지 않은 가족이 거절하면 또다시 가족은 동란을 치러야 한다.아마도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욕을 퍼부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자신의 어떤 콤풀렉스를 증오하기 때문에 옥을 퍼붓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는 찰나로 절망하고 찰나로 발광했다. 그리고 찰나적으로 후회하고 찰나적으로 희열에 파묻혔던 것이다. 그의 성욕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는 프로이트 모델케이스의 시인인 것이다. 그는 날마다 파괴되어야 하고 다시 날마다 그 자신이 회복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은 시시포스적인 감정이 되풀이에 의해서 그 되풀이의 틈에 뮤즈가 혼란 속에서 떨어져나올 때 시를 쓴다. 그런 가족이 그와 함께 폐허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김수명은 구호물자시장에 가서 낡은 밤색 투피스를 사 입고 文化堂에 첫 출근을 했다. 그것이 프리마돈나의 운명 , 그녀 자신의 운명이 개막된 사실은 그녀 자신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곳에 취직되기 전에 그녀는 오빠에게 취직을 부탁했지만 그러나 시인의 요령 없는 처세술은 누이의 취직을 성취시킬 사회적 의지나 기교를 가질 수 없었다. 결국 네 일은 너 혼자서 하는 거야라는 퉁명스러운 말뿐이었다. 그런 말에도 용기를 얻어서 그녀는 그 당시 高大新聞의 기자 모집에 응했다. 약간 명을 뽑는데 응시자는 4500명이었다. 전쟁 직후의 失業社會를 말해준다. 불합격이었다. 그러나 편집국장 吳周煥이 그녀를 특별히 기억했다가 그의 친구가 있는 문화당에 소개한 것이 그녀의 취직이었다.  그 무렵 문화당의 자매기관으로서 편집실 일부는 현대문학사가 있었다. 조연현 오영수가 있고 김구용이 있다가 나간 뒤 박재삼이 있었다. 任相淳의 미망인 趙衣雪이 있었다. 그 당시의 현대문학은 빚투성이였고 주간 조연현은 그것을 꾸려나가느라고 온갖 굴욕을 견디고 있었다. 수금이 되지 않아 판매의 실적이 없었던 현상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황순원 허윤석 그리고 원응서 들이 거의 날마다 출입했다. 허윤석의 직선적이며 섬세한 김수성, 오영수의 우여곡절의 풍토성 사이에서 황순원의 노한 눈알처럼 영리한 이지가 어울려서 "아따 이것 보래이" "간나새끼 민하구나"따위의 농담이 꽃을 피웠다.  그들은 김수명을 데리고 곧잘 낚시질의 여가도 보냈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들 중 한 순수작가의 식물성에 이끌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현대문학사의 여사원 조의설이 거액의 공금을 횡령, 도주한 뒤로 김수명이 현대문학사로 옮겼다. 조인현은 조의설사건 때문에 사표를 냈으나 반려되었다. 조연현은 훨씬 전부터 김수명을 그들과 함께 일하도록 문화당 간부에게 졸라댔지만 정작 늦게 그 부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부터 현대문학사는 경리가 안정되고... ...     2013년 11월 27일, 도봉구 방학3동에 이 그의 생일날에 맞춰 개관. 사후 45년 만에 눈 내리는 시인의 생일날.             김 시인 동생인 김수명씨(사진 왼쪽)는  당시 [현대문학]의 편집장으로 많은  문인들에게 "한국의 잉그리트 버그만"으로 통했답니다.       저의 국민대학교 대학원 문창과 스승이신 윤후명 시인, 강민 시인, 천양희 시인 등등 유명 시인의 모습이 대거 보입니다전관 4층의 김수영문학관은 1층과 2층은 시인의 전시 공간으로, 3층은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꾸몄고, 4층은 시인을 추모하는 각종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강당이 마련됐습니다. 시인 김남조, 문학평론가 유종호 등 당시 지인들이 보낸 편지와 시 179편, 산문 123편, 번역 43편 등과 박두진 시인이 친필로 쓴 추모시도 함께 전시됐습니다.               김수영 선생님의 유품이 정리돼 있는 공간에서 김수영시인이 직접 쓴 '풀' 육필 원고와 일기장, 탁자와 스탠드 등. 도봉구 방학동 주민인 김수영 시인의 여동생인 김수명씨는 오빠의 유품 전체를 기증했다고 합니다.       김수영 부인 김현경   인물에 대한 회고담은 당대성과 맞물려서 최대한 객관화된 언술을 펼치지만, 살아남은 자의 입장에서 그 숙제를 떠안고 애도를 완성하는 쪽으로 입장이 기울든가, 죽었지만 여전히 유효하고 계속해서 유효할 영원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입장이 기울 수밖에는 없다. 숙제를 떠안고 애도를 완성하려면 인물을 직시해야 하고, 영원성을 부여하려면 인물을 신화화해야 한다. 직시를 통해선 남겨진 자의 극복할 몫이 전수되고 신화화를 통해서는 남겨진 자의 의지처가 확보된다.     나는 이 두 가지 중에서 숙제를 떠안는 방식을 좋아한다. 숙제는 출구와 같다. 사방이 자물쇠로 꼭꼭 잠겨 있는 듯한 이 현실에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인물이 신화화되는 것을 좋아하지 못한다. 신화화된 인물은 숭배되기 마련이고, 그 어떤 위대한 인물도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어떤 스승에 대해서도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싶어서다.    인물에 대한 회고담이 우리에게 왜 필요할까. 작고한 인물을 다시금 불러내어 그에 대해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서다. 왜 다시 생각해야 할까.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를 다른 거울로 비추어 보고 반성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반성 이후에 오롯이 남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숙제를 풀기 위해서다. 그러나 숙제를 푸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어떠한 역할에 대한 향수를 지나치게 갈구하곤 한다. 우상을 만들고 적도 만들고 자꾸만 제대로 살았을 것만 같은 시대를 재현하고 싶어해한다. 그런 욕망이 회고담을 제공하거나 요구한다.    그러나 사람은 우상이 될 수 없다. 단지 우상으로 덧칠된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이 덧칠 중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라 하는 부분은 어쩌면, 우리의 우상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순간일지 모르겠다. 우상이되 평범한 우리와 닮은 구석이 있는 우상. 인간적인 우상. 우상 숭배의 가장 편안한 방식이다.       ▲ (김현경 지음, 책읽는오두막 펴냄). ⓒ책읽는오두막   시인 김수영의 미망인 김현경 여사가 쓴 (책읽는오두막 펴냄)을 읽었다. 김수영의 작품을 자주 꺼내 읽는 나에게 이 책은 김수영의 사적 영역에 초대되는 즐거움을 주었다. 그의 키가 178센티미터였다는 것도 알았고, 그가 어떤 옷을 즐겨 입었는지도 알았고, 그의 집필 습관과 집필 공간도 엿보았다. 1년에 12~13편 정도의 작품을 썼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가 비교적 살 만해졌을 때에 교통사고를 당해 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살만해졌을 때에 쓰인 시가 '풀'이라는 사실을 알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문학적 태도와 생활의 태도 사이에서 절룩이며 지침과 부침에 시달리는 나 같은 소심한 시인에겐 그 역시 지침과 부침에 시달렸고, 그의 아내도 그로 인해 지침과 부침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 사연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그게 위안이 되었다기보다는 길고 긴 한숨이 나왔고, 설움(김수영의 전문 용어)이 밀려왔다. 그 설움은 김수영 식 독기를 수반한 것이어서 좋았다. 자기모순을 노려보다 한 차례 허물어진 뒤 찾아오는 독기어린 의지.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고 김수영은 말했다. 이 책의 2장에 소개된 김수영의 한 편 시와 그 시가 쓰인 경위를 따라가자니, 시인이 지향하는 문학적 환경과 시인이 몸담고 있는 시대적 환경과 시인이 꾸려가야 할 생활의 환경, 이 세 가지 현실 모두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독한 시를 썼던 듯 싶어진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시대와 싸울 겨를이 없을 만치 치열하게 자기와 싸우는 것으로 시대와 싸우는 시인. 이 책을 다 읽고 나자 내게 요약된 김수영의 초상이다.    인물에 관한 회고담이 추억을 완성하기 위한 목적과 인물을 완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뉠 수 있다면 이 책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한 목적에 가깝다. 글의 흐름과 구성 방식은 인물의 사적 영역을 보완해서 인물을 완성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필자가 자신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문장을 풀어나가고 있는 걸 목격하게 된다. 연인에 의해 재구성된 회고담이라 두 사람 간의 사랑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고, 특히 김수영의 사랑보다는 김수영이 어떤 여인을 사랑했는지, 연인에게 시인이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가 더 비중이 크다. 그래서 이 책을 덮고 나니, 이미 신화화된 김수영이 좀 작아진 느낌이 든다. 회고록이 신화화된 한 인물의 인간미를 지향해서 좋았지만, 그게 이 책의 집필 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여서 미묘한 모순이 독후감으로 내게 남았다. 이 모순은 어쩌면 사랑의 모순이자 시인을 사랑한 자의 어쩔 수 없는 모순이지 않을까. 더군다나 속물됨과 성(인군)자 사이에서 자기모순을 앓던 염결한 김수영이었으니까.    김수영은 소위 "불침번의 세계"(고은의 발문에서)에서 생을 연소한 시인이다. 그런 그가 연인은 어떻게 사랑하였을까. 그의 시에서는 물론 이에 대해서마저도 불침번이었다. '성', '죄와 벌' 같은 시에선 잔인하거나 우스꽝스러울 만큼 불침번이었다. 김수영의 연인의 사랑은 그 반대에 가깝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렇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도, 그의 생활에 대해서도 최선에 최선을 다했다. 모든 멍에를 짊어진 사람처럼. 눈먼 사랑처럼. 한 사람은 불침번을 서듯 시를 썼고, 한 사람은 불침번을 서듯 사랑을 다했다. 시인은 사랑에 대해서도 불침번을 서듯 했고, 시인의 연인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서듯 살았다.    은 김수영의 신화화를 완결 짓기 위한 출발을 했는가 싶었지만, 신화화에 실패한 느낌이 든다. 김수영의 인간미를 보태기 위한 많은 구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자신을 혹독히 까발리듯 써놓은 시들 덕분이었다. 덕분이라는 표현은 이 실패가 좋았다는 의미다. 회고록이 자주 지향하는 신화화는 내가 김수영에게서 배운 시정신과 반대 방향에 있으니까. 어쩌면 김수영은 훗날 자신의 일대기가 미화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 그런 시들을, 그 적확하고 신랄한 언어로 써놓은 것은 아닐까.    추억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추억은 완성될 리 없다. 기억은 언제나 제멋대로이고 자기증식을 일삼으며, 그래서 부실해지기 일쑤다. 추억을 완성하려 할 때 기억의 왜곡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것이다".** 불가능한 완성을 불가피하게 애쓸 때, 불가능한 완성을 더 아름답게 추억하려 애쓸 때 삶은 더 아름답게 지탱된다. 시대의 모순과 시인의 모순과 사랑의 모순, 그 모든 모순을 애써 껴안는 불가능의 체험은 김수영의 아내였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 중요하진 않지만, 필자가 정지용 시인을 만난 대목과 칼(KAL)기 납북 사건을 기술한 부분은 연대기가 좀 맞지 않는다. ** 르네 샤르, 소설 (패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세계사 펴냄)에서 재인용했다. -필자 주)   김소연 시인   [출처] [프레시안 books] 김현경의 -- 속물과 성인 사이, 김수영을 끌어안은 그녀!|작성자 석지끄태     김수영시인님의 육필원고           김수영시인님 가족사진               회 고 김수영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리었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시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 - 시인 김현승 그러나 우리는 기려 기억할 것입니다. 한 시대를 바르고 진실하게, 순정하고 양심의 지시대로 살아보려던 김형의 예리한 지성, 성실한 행동력, 참다운 시인으로서의 자세와 그 찬연한 업적을 우리들의 우정과 우리의 문학사는 길이 기억하고 전승할 것입니다. - 시인 박두진 그가 어느 날 대폿집에서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신형, 사실 말이지 문학하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무슨 무슨 주의의 노예가 될 순 없는 게 아니겠소?” 그러나 그의 커다란, 사슴보다도 천 배, 만 배 순하디 순한 눈동자를 기계문명의 부속품들은 궁지로 몰아넣으려했다.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은 죽지 않았다. 위대한 민족시인의 영광이 그의 무덤 위에 빛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민족의 알갱이들은 다 알고 있다. - 시인 신동엽 이윽고 양주동 선생의 소개를 받고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시인이 걸어 나왔다. 검은 싱글에 후리후리한 키의 그는 약간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백한 듯이 보이는 피부에 검고 깊던 두 눈, 시를 낭독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할 만큼 그가 내게 준 인상은 깊었다. 그가 바로 김수영이었던 것이다. - 시인 김   철 평 론 김수영의 시는 우리 시의 가장 벅찬 젊음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탐구적이고 가장 준열하고 우상 파괴적이며 가장 유연한 시적 양심이었다. 김수영은 탕진됨을 모르는 가능성이자 안타까운 미완성이었다. - 문학평론가 유종호 그럴듯한 언사를 농함으로써 시 자체와의 만남을 회피하고 심지어 시를 죽이기까지 하는 작태는 오늘날 그 어느 때 못지않게 극성스럽다. 혹은 ‘민중시’ 혹은 ‘순수시’에 관한 논의들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름이 붙는 작품들 자체에도 그러한 혐의를 걸게 되는 일이 흔하다. 김수영의 살아있음을 올바로 증언하는 산 자의 책무가 막중해진다. 그것은 김수영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의 삶을 삶답게 만들려는 노력의 일부인 것이다. - 문학평론가 백낙청 김수영의 생애는 하나의 전형을 이루고 또 그것을 통하여 우리 시대에 있어서의 예술가의 의미를 밝혀준다. 그는 예술가의 양심을 넘어서 인간의 양심을, 예술가의 자유를 넘어서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하였다. 그의 자유로운 언어는 사실이나 감정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의 언어이고 자신의 모든 상황에 대한 완전한 의식을 포착하려는 데서 나온다. 그는 시에 있어서 무엇보다 거짓을 미워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워했던 것은 감정이나 태도의 거짓 꾸밈이었다. 그에게는 일체의 정립된 언어, 고정된 언어는 부정직한 것이었다. 그의 행동으로서의 시의 언어의 이상은 완전히 정직한 언어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예술가적 양심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자유로운 언어는 사실이나 감정에 있어서 완전히 정직한 언어이고 그러한 언어는 비판적 언어였다. 이 비판은 자기비판을 포함하여 언어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위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언어는 언어행위 한가운데에 스스로의 행위를 살피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 밀착되어 있으며 빠른 속도로 스스로를 앞지르는 언어가 된다. 비판적 각성이 언어의 자기몰입과 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문학평론가 김우창 김수영은 우리 시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시에 시적으로 된 말을 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이 시적 힘을 지니도록 시를 썼다. 이 점에서 그는 자유시의 이상을 실천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에게 시는 소란한 현실 위에 걸리게 될 예쁘고 평화로운 액자도 아니었고, 삶의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찾아가는 망명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 현실로 발견하는 일이자 그것을 정신화 하는 일이었고, 현실의 확장이자 그 전복이었다. 시적 감수성과 심미감의 폭이 넓어지면 아무리 난폭하거나 실망스러운 현실도, 아무리 조야하고 생경한 언어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과 깊고 감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시가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 문학평론가 황현산 김수영의 시에 있어서 중심적인 주제는 사랑이다. ‘인간 상실로부터의 인간 회복이 시인의 임무’임을 말했을 때, 요컨대 그는 인간을 가난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노력 속에서 시작의 본질을 보았고, 그런 한에서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의 죽음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우러나온 중대한 결론이 사랑이며 이 사랑이야말로 현실에 대한 그의 관심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했다. - 문학평론가 김종철 김수영은 해방 후 한국시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시인이다. 그에게 시는 일상에서 벗어난 고상한 예술이 아니라 현실과 싸우는 양심의 산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학과 사회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다. 사소한 개인의 일상에서부터 정치 현실까지 다양한 소재가 그의 시에서 새로운 표현을 얻었다. 그가 사용한 어휘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어였고 특유의 반복기법으로 독자적인 리듬을 만들어내었다. 난해하면서도 새롭고, 엉뚱하면서도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한 그의 시는 1960년대 이후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한국인이 처한 서러운 현실을 고스란히 껴안은 김수영의 시는 자유와 사랑의 세계를 꿈꾸었다. 그는 자유가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였다. 그가 추구한 자유는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으로서의 자유였다.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으려는 양심과 세상을 바로 보려는 그의 정직은 비속한 현실을 그리기 위해 비속어를 사용했고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직설적인 문장을 사용했다. 그의 시 쓰기는 사랑의 작업이었고 자신의 시가 세계사의 전진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 내가 움직일 때, 세계는 같이 움직인다. 이것이 김수영이 희망한 시의 영광이자 기쁨이었다. - 문학평론가 이영준               * 참고 사진   1. 본가 원형 사진 :     2. 본가 입구 사진     3. 시비와 묘소 원형 사진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에서. ==================================================================================   시인 김수영     시작(詩作)은 로 하는 것이 아니고 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으로 하는 것이다. 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시여, 침을 뱉어라」중에서 거짓을 배격하고 구속과 억압을 거부한 시인, 자유시인 김수영. 자유와 사랑을 노래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 김수영. 그는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김수영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예술을 향한 열정을 간직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그 시작은 연극을 통해서였다. 이후 1945년, 광복의 기쁨을 안고 가족과 함께 만주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 이듬해 김수영은 제2집에 시 를 발표하며 자신의 예술적 무대를 연극에서 문학으로 옮기기에 이른다. 김수영의 시에서 한국 현대시 사상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상적인 말의 차별이 사라졌다. 이것은 시와 삶을 완전히 일치시키려는 김수영의 치열한 노력과 극단적인 정직성이 낳은 결실이었다. 광복 후, 그의 삶에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1950년 민족상잔의 아픔 6·25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였다. 당시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던 김수영은 의용군에 징집되었고 두 달 만에 훈련소에서 탈출, 서울로 돌아왔지만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김수영에게 자유의 의미를 뼛속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52년 겨울, 석방되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환경에서 살아나온 그에게 서울은 서러운 곳이었다. 물질적 궁핍과 문화적 후진성, 독재정치와 분단 현실 그리고 서양 문물의 파도는 김수영에게 깊은 번민을 주었으나 김수영은 꿈과 감정을 다루는 예술가로서의 자세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충격을 줄 수 있는 진정한 시, 자유로운 시를 쓰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959년 출간된 시집『달나라의 장난』은 김수영 생전에 출판된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으로 이 시기의 시들은 바로 살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과 슬픔의 극복이 중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다. 1960년 봄, 김수영의 시적 세계를 변화하게 만든 큰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이 그것이다. 통제와 억압의 시대, 자유를 갈구하는 민중의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던 그때. 시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다고 했다. 4·19혁명 이후 김수영의 시는 현실에 대한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자유. 자유와 사랑이었다. 한편 4·19혁명을 통해 자유의 참뜻을 현실적으로 체득했던 그는 4·19혁명이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고 깊은 회의에 빠져 자기풍자와 현실비판의 시들을 절규처럼 썼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김수영 시에서 자유의 이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고 이로부터 그의 유명한 온몸의 시학이 탄생한다. 김수영의 산문은 그의 시에 못지않은 명문으로 꼽힌다. 특히 산문「시여, 침을 뱉어라」는 독자에게 시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시론이자 인식의 틀을 깨는 혁신적인 시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시론에서 김수영은 예술로서의 시와 구체적 현실을 일치시키는 시를 주장했다. 시인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을 추구하지만 시가 되는 순간 그것은 가능한 현실로 바뀐다. 독자는 그 시로부터 새로운 현실을 보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의 언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운 우리말이며 이러한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김수영은 주장했다. 거칠고 힘찬 어조 속에 가득 찬 자기반성과 폭로, 사회현실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통해 현실 참여와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던 김수영. 하지만 그의 시는 삶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다. 1968년,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48세 그 짧은 생을 마감한다. 김수영 사후, 김동리, 박목월 등 한국의 대표적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먼저 간 시인을 추모하고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망 1주기를 맞아 서울 도봉산 기슭에 시비를 세운다. 문인들과 독자들로 구성된 290여명의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 만든 성금을 바탕으로 건립된 김수영의 시비에는 1970년대 이후, 우리 시의 새로운 길을 열게 한 김수영의 대표작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 시 이 새겨져 있다. 현대 문명과 현실을 비판하던 서정적 모더니스트에서 자유와 저항을 부르짖던 참여시 작가로, 모질고 격한 비바람 같았던 우리 역사와 함께 서서 시대와 함께 변모하고 고뇌했던 시인 김수영. 그는 떠났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삶과 현실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시비 안내 김수영 시인 타계 1년 후인 1969년 고인의 선영인 도봉동에 건립된 이후 1991년 도봉산으로 이전되어 현재 도봉서원 앞에 위치해 있다. 시비에 새겨진 구절은 그의 마지막 작품「풀」의 두 번째 연이며 글씨는 시인의 자필원고를 확대한 것이다. 작가 연보 1921년 11월 27일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1924년 조양 유치원에 들어가다.   1928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에 들어가다.   1935년 경기도립상고보에 응시하나 장티푸스, 뇌막염, 폐렴 등 악화된 건강상의 이유로 선린상업학교 전수부에 들어가다.   1942년 영어와 주산, 미술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일본 유학차 도쿄로 건너간다.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들어갔던 조후쿠 고등예비학교를 그만두고 미즈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에 들어가 연출수업을 받다.   1943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겨울에 귀국하여 종로6가 고모집에서 머물다가 그 당시 연극계를 주도하던 안영일을 찾아가 그의 밑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듯하다.   1944년 봄, 가족들이 있는 만주 길림성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길림극예술연구회에 참여, 무대에 서기도 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9월 김수영 가족은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시「묘정의 노래」를 ≪예술부락≫에 발표, 이 작품의 발표를 계기로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한다.   1946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나 그만두고 영어학원에서 강사, ECA통역 등을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9월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의용군에 강제 동원된다. 유엔군과 인민군의 혼전을 틈타 야간 탈출을 감행,  서울 충무로의 집 근처까지 내려왔으나 경찰에 체포당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얼마 후 수용소 내 미 야전병원의 통역관이 된다.   1952년 11월 28일, 충청남도 온양「국립구호병원」에서 석방되다.   1958년 11월, 제1회 을 수상하다.   1959년 첫 시집『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에서 출간하다.   1968년 4월, 부산에서 열린 펜클럽 주최 문학세미나에서「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 6월 15일, 밤에 귀가하던 길에 버스에 부딪혀 의식을 잃고 다음날 6월 16일 아침 8시 50분에 숨을 거두다.                                        
   도라산역에서 막혔다.   경의선 열차를 타고...임진강역에서 내리고...자유의 다리를 건너 도라산역에 도착했다. 황량한 바람이 불고 철길은 여기서 막혔다. 저 하늘 우리 땅을 쳐다보며 참 답답하고 서글펐다. '휴전선'- 도대체 뭐란 말인가?     박봉우 시인의 시비 앞에서 오래 서있다. 신영복 님의 글씨를 오래 음미하다. 신영복글씨체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다. 이런 시간에 이런 시(詩)가 있고 이런 글씨가 있어서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 아닌가...                            휴전선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高句麗) 같은 정신도  신라(新羅)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意味)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廣場)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休息)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어야 하는가  아무런 죄(罪)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감상의 길잡이] 박봉우의 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육성(肉聲)의 시'이다. 그의 시는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불의와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이른바 참여시의 특성을 갖는다. 50년대의 전쟁과 폐허로부터 60년대의 민주 혁명과 군사 독재, 70년대의 속 빈 강정 같은 풍요 속에서 느끼는 정신적 빈곤감, 80년대의 민주화 열망 등 광복 이후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달려온 우리 사회를 온몸으로 맞닥뜨리고 시를 쓴 시인이다.  이 시는 1956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얼마 안 되는 당시 상황에 대단히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과 적대감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을 갈망하는 시인의 절규가 완곡한 산문 율조의 형식으로 절제되어 나타나 있다. 화자는 1·5연에서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155마일 휴전선을 마주하고 있는 민족의 분단 상황을 이상할 만큼 담담한 어조로 제시하고 있다. 화자는, 휴전선이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꽃'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꽃'은 실제의 꽃이라기보다는 전쟁은 일시 멈추었지만, 더욱 깊어진 증오심으로 대치해 있는 분단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요런 자세'라는 구절에서 '요런'은 '겨우 이것 밖에는 안되는'의 의미로, 일시 포성이 멈추기만 했을 뿐,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닌 분단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화자의 심리가 내재해 있다.  2연에서 화자는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의 휴전선의 모습을 통하여 팽팽한 긴장감으로 대립하고 있는 남과 북의 현실을 제시하고 있다.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 같은 정신'이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 같은 이야기'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오늘날의 민족 상황을 비판하는 한편, 지금은 비록 남과 북이 허울좋은 이데올로기로 분단되어 있더라도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라며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이냐며 하루빨리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민족의 큰 소망으로 발전한다.  3연에서는 분단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분단은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이며, '정맥'이 끊어진 신체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화자는 분단 상황이 계속되면 될수록 민족사는 더욱 '야위어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며 절망하고 있다.  4연에서 화자는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함으로써 동족 상잔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 '모진 겨우살이'와 같았던 6·25의 비극적 체험을 겪은 바 있는 화자는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이 바람에 쓰러지는 것 같은 전쟁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며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라고 외친다. 아무리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죄없는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정치 지도자들의 허황된 정치 논리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참여시 ▷ 어조 : 격정적, 통한적, 현실 고발적 ▷ 표현 : 의문사의 종결 → 안타까움의 심정을 영탄적으로 표현 ▷ 제재 : 전쟁으로 인한 슬픔 ▷ 주제 : 분단의 비극과 그 극복의지 ▷ 출전 : ○ 구성 ▷ 1연 : 믿음 없는 대치 상황 ▷ 2연 : 불안한 평화의 남과 북 ▷ 3연 : 반목과 질시의 세태 비판 ▷ 4연 : 멀어지는 관계 ▷ 5연 : 전운 상존의 비극성 ○ 시구 풀이 ▷ 산(1연) : 국토의 대유 ▷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1연) : 국토 분단의 적대적 상황, 불안한 현실 ▷ 얼굴(1연) : 우리 민족의 상징 ▷ 꽃(1연) : 일시적 평화 상태, 불안전한 상황의 한시적 삶 ▷ 유혈(流血)(3연) : 전쟁의 대유 ▷ 광장(3연) : 삶의 공간 ▷ 정맥은 끊어진 채(3연) : 남북이 분단되어 단절된 채 ▷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4연) : 전운(戰雲)의 상징어 ▷ 모진 겨우살이(4연) : 참혹한 전쟁 ▷ 요런 자세(5연) : 휴전으로 어정쩡한 평화가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상황     [출처] 박봉우의 휴전선|작성자 머거주기     임진강역에 있는 박봉우의 시비(詩碑)에 대해서 시비를 좀 걸어야겠다. 남북분단의 현장 임진각을 코앞에 둔 상징적 장소에 분단의 아픔과 처절한 극복의 염원을 노래한 한국시문학사의 대표작 '휴전선' 詩碑를 세운 건 정말 참 잘한 일이다. 詩도 詩이지만 신영복 선생의 글씨와 함께 태극 지향의 둥근 조형 또한 맘에 들고 적절하다. 그런데 문제는, 시비가 서 있는 자리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임진강역의 옆면 한 구석에 여러 방치물들과 함께 버려진 것처럼 쓸쓸하기 때문이다.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뿐더러 주변이 지저분하여 마치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조차 든다.  임진각이나 '자유의 다리' 주변, 평화누리공원 등 많은 사람들이 눈여겨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자리는 얼마든지 있다. 그게 어렵다면 역사 앞이나 최소한 산책길의 나무 아래라도 괜찮을 것이다. 새 자리를 찾아 옮겨야 한다. 시의 한 구절처럼 '요런 자세로 ....' 이렇게 서 있어서야 쓰겠는가. 2014년 1월 20일 눈 덮인 아픔의 현장에서 박봉우의 '휴전선'은 또다른 아픔을 주었다.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치유와 포용이다.        휴전선   박봉우(1934∼1990)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상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1956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 당선작으로, 당시 시인들이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를 천착하거나 현실과 유리된 자연이나 내면세계를 노래할 때, 민족 분단 현실에 주목한 작품으로 민족문학의 밑거름이 되고 '분단 극복 문학' 또는 '통일문학'의 가능성을 선구적으로 보여 준 작품이다.  박봉우는 '휴전선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평가는 분단 문제나 통일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이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임을 말해 준다. 당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대립 상황 속에서도 한쪽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지 않고, 분단 문제를 고도의 시적 감각으로 형상화해 낸 박봉우의 이러한 선지적 인식은, 당시로서는 그리고 지금의 평가에 있어서도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묘사하거나 전쟁의 비참함을 고발한 1950년대 시와는 차별성을 띠고 있다는 것, 분단 문제를 시적 상징 속에 고도로 매개화했다는 것,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로 제시될 것임을 드러낸 것 등이 박봉우의 시가 갖는 중요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6.25의 참상과 휴전,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실감나게 하는 현실 고발적인 시다. 60년대 반공 이데올로기의 열악함 속에서도 시인의 강인한 의지를 표출하여, 민족의 대화와 화해만이 공존의 길이라는 예언자적이고 선지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대적인 억압을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용기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미래를 선취한 시인의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력이다. 이 시의 생명력은 바로 현재적 가치를 그대로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339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구상 - 초토(焦土)의 시 8 댓글:  조회:3989  추천:0  2015-12-15
    구상 시 모음                            초토(焦土)의 시·8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기도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거듭남                                                    저 성현들이 쳐드신 바  어린이 마음을  지각(知覺) 이전의 상태로 너희는 오해하지들 마라! 그런 미숙(未熟)의 유치란  본능적 충동에 사로잡히거나 독선과 편협을 일삼게 되느니,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린이 마음이란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자기가 자신에게 이김으로써 이른바 '거듭남'에서 오는  순진이요, 단순이요,  소박한 것이다.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오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날개                                                        내가 걸음마를 떼면서 최초에 느낀 것은  내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이제 칠순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느끼는 것도 내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손길을 향하여  기우뚱대며 발걸음을 옮기던 때나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에 매달려 어찌 어찌 살아가는 이제나 내가 바라고 그리는 것은  '제트'기도 아니요,  우주선도 아니요, 마치 털벌레가 나비가 되듯 바로 내가 날개를 달고 온 누리의 성좌(星座)를 꽃동산 삼아  첫사랑 어울려 훨훨 날으는  그 황홀이다.         네 마음에다                                              요즘 멀쩡한 사람들 헛소리에  너나없이 놀아날까 두렵다. 길은 장님에게 물어라. 해답은 벙어리에게 들으라.  시비는 귀머거리에게서 밝히라.  진실은 바보에게서 구하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길은 네 마음에다 물어라.  해답은 네 마음에서 들으라.  시비는 네 마음에서 밝히라. 진실은 네 마음에다 구하라.         시                                                            우리가 평소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이 아무리 말을 치장해도 그 말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느니 하물며 시의 표상(表象)이 아무리 현란한들  그 실재(實在)가 없고서야 어찌 감동을 주랴? 흔히 말과 생각을 다른 것으로 아나 실상 생각과 느낌은 말로써 하느니 그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렷다. 그리고 이웃집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도 누구나 그 주인보다 더 맛볼 수 있듯이  또한 길섶에 자란 잡초의 짓밟힘에도  가여워 눈물짓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시는 우주적 감각*과 그 연민(憐憫)에서 태어나고 빚어지고 써지는 것이니  시를 소유나 이해(利害)의 굴레 안에서  찾거나 얻거나 쓰려고 들지 말라! 오오, 말씀의 신령함이여!                            * 하이데거의 "언어와 사고"에서의 말.                             * 폴 발레리의 시에 대한 정의.       시심                                                       내가 달마다 이 연작에다가  허전스런 이야기를 고르다시피 하여  시라고 써내니까 젊은 시인 하나가 하도 이상했던지 "그러면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겠네요"하였다. 그렇다!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정녕, 하나도 없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다가 시다. 아니, 사람 누구에게나  또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에는 진·선·미가 깃들어 있다. 죄 많은 곳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듯이 말이다.*  그것을 찾아내서 마치 어린애처럼  맞보고 누리는 것이  시인이다.                        * 성서의 로마서 5장 20절         어른 세상                                                네 꼬라지에 어줍잖게  그리 생각에 잠겨 있느냐고  비웃지 말라. 내가 기가 차고 어안이벙벙해서 말문마저 막히는 것은 글쎄, 저 글쎄 말이다. 이른바 어른들이 벌리고 있는 이 세상살이라는 게, 그 모조리 거짓에 차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정의를 외치며 불의를 행하고 저들은 사랑을 입담으며 서로 미워하고 저들은 평화를 내걸고 싸우며 죽인다. 내가 주제넘어 몹시 저어되지만  어느 분의 말씀을 빌려 한마디 하자면 저들이 어린이 마음을 되찾지 않고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듯이  저들이 어린이 마음을 되찾지 않고선 이 거짓세상의 그 덫과 수렁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홀로와 더불어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白 蓮                                                      내 가슴 무너진 터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솟아난 백련 한 떨기 사막인 듯 메마른 나의 마음에다  어쩌자고 꽃망울 맺어 놓고야 이제 더 피울래야 피울 길 없는 백련 한 송이 왼 밤 내 꼬박 새어 지켜도 너를 가리울 담장은 없고 선머슴들이 너를 꺾어 간다손  나는 냉가슴 앓는 벙어리 될 뿐 오가는 길손들이 너를 탐내 송두리째 떠간다 한 들 막을래야 막을 길 없는 내 마음의 망울진 백련 한 송이 차라리 솟지야 않았던 들  세상없는 꽃에도 무심한 것을 너를 가깝게 멀리 바랠 때 마다  퉁퉁 부어오르는 영혼의 눈시울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혼자 논다                                                  이웃집 소녀가  아직 초등학교도 안들어 갔을 무렵  하루는 나를 보고  ㅡ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  그러길래  ㅡ 유명이 무엇인데?  하였더니  ㅡ 몰라!  란다. 그래 나는  ㅡ 그거 안좋은 거야!  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ㅡ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  하고 물었더니  ㅡ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ㅡ 잘 했어! 고마워!  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  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구상 具常 (1919 - 2004)                                             칠곡군 구상문학관 內   구상문학관은 구상 시인의 생존 시기였던 2002년 10월 4일 개관했다. 예술의 전당을 설계하신 김석철 설계사가 설계했는데 전체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전시실이고 2층은 도서실과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다. 2층 도서실은 기증받은 책(2만 5천권)으로 구상시인의 서고를 재현했다 한쪽에는 열람실로 마련해 두었다. 그리고 문학관 마당 한쪽에는 ‘그리스도폴의 강’ 시비가 있다. 2008년 10월 28일에 시비제막식이 있었다. 그리고 문학관 자리는 원래 집이 있던 자리로 ‘관수재’를 새로 복원하였다. 예전에 이중섭 화가도 와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문학관 전시실에는 구상 시인의 흉상, 박정희대통령이 보낸 친필서한, 중광스님이 구상시인의 마음이라고 그려놓은 그림, 김기창 화백의 그림, 전국을 여행 다니면서 가져온 돌도 있고, 시인이 도자기류를 좋아해서 그런지 도자기류가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중광스님이 빚은 도자기도 있다. 이외에 시인의 소장품과 작품,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문화적인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뽑은 세계 200대 문인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시인 구상(1919년 ~ 2004년) 그리스도폴의 강  구상시비. 시비는 (주)현대화섬 손상모 대표이사의 재정 지원으로 독특한 한글서체를 창조한 류영희 서예가가 글씨를 쓰고 석공예 명장 윤만걸씨가 제작했다. 구상(1919. 9.16-2005.5.11) 시인은 서울 이화동 출신이다. 어머니가 43세 되던 해에 구상시인을 낳았기 때문에 어릴 때 만득이라고 불렀다. 아버님이 왜관 베네딕트 수도원의 교욱사업을 하였고 형이 구대준 신부였다. 그런 가정환경으로 인해 신부가 되려고 하였으나 문학을 하게 되었다. 6.25때는 종군작가단의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53년부터 74년 까지 왜관에서 기거를 했는데 이때 왜관사람들은 ‘병원집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후 서울에서 생활을 했는데 집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한강을 주제로 강 연재시를 계속 쓰다 63빌딩이 생기면서 ‘강’시를 못썼다고 한다. 중광 작품 지극히 자기 고백적인 성찰의 시다. 구상시인은 이렇게 평생을 기독교적 존재관으로 살며 그것을 투명한 시적예지로 받아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건국신화와 선불교적 명상, 노장사상까지 포용하는 사상적 기반을 바탕에 두고 시를 써왔다. 맑고 투명한, 거기에다 사상적 통합을 시로써 이루어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k씨가족-이중섭 작- 구상 시인은 산보다 강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시인이 자란 원산시 외곽에 있던 덕원이라는 마을 앞에는 마식령산맥으로부터 흘러와 송도원 바다로 흘러가는 적전강이 있었는데 구상 시인은 이 강을 바라보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해방감을 맛 보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구상 시인이 장성해 가면서 일반적인 경치나 풍경으로써의 강보다 인식의 대상으로써 강을 바라보게 된 것은 그리스도 폴이라는 가톨릭 성인의 설화와 헤르만 헤세의 소설《싯다르타》를 접한 게 영향이다. 거기 주인공들은 강을 회심의 수도장으로 삼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저러한 강에 대한 상념이 시인으로 하여금 강을 연작시의 소재로 삼게 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시인이 여의도에 살아 날마다 한강을 마주하고 있고, 시골집도 왜관이라 낙동강을 자주 접하는데서 오는 친근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시인은 60편을 완성하면서 강을 회심의 일터로 삼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구상 시인은 또 하나 남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너무나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때문인지 문학은 항상 인생의 부차적인 것이요, 주된 것은 종교, 즉 구도요, 그 생활이었다. 그래서 구상 시인은 일본에 가서 대학에 입학할 때도 명치대학 문예과와 일본대학 종교과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결국 종교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신심을 가다듬기 위하여 복음의 묵상서《나자렛예수》와 신심시선《말씀의 실상》을 펴냈다. 관수제  세계 200대 문인 반열에 오른 구상선생의 선양과 한국시문학에 끼친 업적을 보존하고 22년간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한 관수재를 복원하여 시인의 삶과 문학과 구도자적 정신세계를 영원히 이어가고자 건립. 집필실이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렀던 관수재는 관람객들에게 시인의 문학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 구상문학관(칠곡)|작성자 천병학   첫 소설집 펴낸 소설가 구자명씨       현대인들은 숨막힐 듯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서운 속도경쟁과 치열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쫓기듯 바쁘게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진정 인간다운 게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한번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최근 첫(2003) 소설집 (나무와 숲)을 펴낸 소설가 구자명(임마쿨라타 46)씨는 물질 만능주의와 속도 지상주의가 판치는 현대사회에서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일까 라는 화두를 던진 게 이 소설집 이라며 이 책이 한번쯤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고 말했다.   은 1997년 마흔이라는 늦깎이 나이로 작가세계 를 통해 등단한 구씨가 그동안 발표했던 중·단편 소설 7편을 모은 것으로 이 책 제목이기도 한 연작소설 건달 이 대표작이다. 구씨는 구상 시인의 딸로 대를 이어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드문 경우.   소설 의 주인공 지대평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정적 의미의 건달이 아니라 뭔가를 기를 쓰고 성취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기에 힘들여 일하지 않고 사는 유유자적한 인물입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많은 이들이 한번쯤 꿈꾸는 삶이기도 하죠.  구씨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문흥술 교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상상력은 물론 탄탄하면서도 흥미로운 서사 구조와 유려한 묘사를 겸비하고 있다 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삶이야말로 타락한 우리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고 평했다.  구씨는 이번 소설집 출간을 서둘렀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아버지 구상 시인에게 첫 작품집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구상 시인의 딸은 아버지의 문학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수사적 표현이 적어 따분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이를 먹으면서 화려한 꽃이나 열매가 없는 아무 옷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나무의 미학을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현란한 수사나 표현으로 독자들을 기만하지 않는 아버지의 작품 세계를 점점 더 이해하게 됩니다.  구씨는 아주 지혜로우면서도 여유롭게 사는 자유인을 다룬 장편 소설을 구상 중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건달 결정판으로 왕건달 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소설 주인공처럼 그렇게 여유롭게 사느냐는 질문에 구씨는 바쁘게 사는 거나 그렇게 살고 싶은 거나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 면서 소설을 통해 작가인 나 자신에게도 한번 실험해보고 싶다 고 웃었다.                  구상 선생님의 따님이신 구자명 소설가   [출처] 구상시비 / 그리스도폴의강|작성자 사랑비   소설가 구자명, 「바늘구멍으로 걸어간 낙타」 출간   "아버지, 저를 사랑하시나요?"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쉽지 않은 주제다.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밟으며,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문학을 하는 문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시(詩)를 피해 도망다녔다"는 소설가 구자명(임마쿨라타·52)씨도 그랬다. 지천명이 넘어서야 아버지의 문학이 새삼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고 구상(세례자 요한?1919~2004) 시인의 외동딸인 구씨가 올해(2015)로 타계 5주기를 맞은 부친과의 가슴 뭉클한 추억을 털어놓았다. 최근 펴낸 신작 에세이집 「바늘구멍으로 걸어간 낙타」(우리글/240쪽/9500원)를 통해서다. 에세이집에는 자연과 문화, 신앙, 가족, 일상 등을 주제로 각종 지면을 통해 발표한 산문 50여 편이 실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구자명이 바라본 구상 시인'이다. 두 돌을 넘지 않은 자기 엉덩이를 아버지가 철썩철썩 내려친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저자는 수 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온 "아버지, 저를 사랑하시나요?"라는 물음을 끝내 묻지 못한 것이 속상하고 안타깝다.  "왜, 물어보지 않았던가? 물어보기만 했더라면, 틀림없이 아버지는 '사랑하고말고!'라고 말씀으론 못해도 고갯짓으로라도 대답하셨으리라는 걸 나는 안다. 왜냐하면 그분이 마지막 병고의 고통 속에서도 이따금 나를 향해 보내는 무언의 눈빛이 그러했기 때문이다."(165쪽) 구씨는 자신이 부모 돼 똑같은 부성(父性)의 길을 걷게 돼서야 답장을 쓴다. 당신은 평생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한번도 심심할 틈 따윈 없어 보이는 '몹시도 꽉 찬 보름달' 같았다고. 그는 "문학에의 피 말리는 정진, 수많은 지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와 보살핌, 우주만물의 섭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바치는 나날의 진지한 기도에서 아버지의 실존을 찾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조광호 신부(인천가톨릭대 조형예술대학 교수)는 "책을 읽어가다 보면 때로는 눈물겹고 때로는 안타까운 치열한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작가와 함께 길을 가는 동행자가 된다"고, 조창환 시인(아주대 인문학부 교수)은 "그녀가 하느님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진실한 공감의 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각각 추천사에서 적었다. 표지 그림을 비롯해 책 곳곳에 실린 삽화들은 서양화가인 남편 김의규(가브리엘·54)씨의 작품이다.    곽승한 기자 
  보리 피리/한하운​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 인환 (人寰): 인간의 세계 * 기산하 (幾山河): 산하가 그 몇 해인가     ​1955년 한하운 시인의 제2시집 [보리피리]에 수록된 표제시이다.  평생을 나병으로 고통받은 시인인 한하운의 시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이 극한적 상황에서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가,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나병이라는 천형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의지는 적극적이고 전투적이기보다는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갖는데, 그것이 그의 시에서 뿜어내는 서정이며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낭만풍의 시인 듯하지만, 실은 천형인 나병으로 일생을 암담하게 살다간 시인의 인간 존재에 대한 절규가 담긴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천형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청운의 꿈과 연인을 버리고 방랑하면서 한맺힌 생을 살았으며,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이 시는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 불던 보리 피리에 대한 추억이 시인을 고향의 언덕으로 이끌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와 지나간 것에 대한 동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에 대한 그리움, 성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그리움이다. 인간의 세계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 인간 세계에 대한 편입 욕망을 숱한 방랑의 세월에 묻어두고 눈물짓고 있는 것일까. 천형이라는 나병 환자로서의 비애, 성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 고향과 유년에 대한 그리움, 방랑의 한이 고향의 언덕을 눈물의 언덕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시 전편에 애잔하게 흐르는 보리 피리 소리는, 방랑 생활의 극도의 애절함과 좌절감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피리를 부는 행위는 천형의 병을 앓고 있는 서정적 자아가 자신의 존재론적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행위라 할 것이다. 또한 '피 ㄹ 닐니리'는 서정적 자아의 좌절감과 애절함을 피리 소리에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뛰어난 처리라 할 것이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시인 한하운과 서울신문기자 오소백(부분)   1953년 10월15일 오후 ‘서울신문’ 편집국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청년이 나타났다. 오소백은 시청 출입기자를 통해 그가 유명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란 것을 알고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사회부 차장 문제안에게 한하운에 관해 정확히 취재하도록 지시했다. 마침 얼마 전에 한 주간신문에서 한하운이 실존인물이 아닌 유령인물이라 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던 터라 알리바이와 확증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하운은 운동선수처럼 몸이 튼튼해 보였다. 시인은 기자의 물음에 답한 후 앉은자리에서 한 편의 시를 썼다. ‘보리피리’였다. 오소백을 비롯한 사회부 기자들은 한하운이 돌아간 뒤 시를 보고 매우 놀랐다. ‘보리피리’를 낭독하며 모두 좋은 시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한하운이 만진 펜에 레프라(leprae·나병)균이 붙었다고 소란을 피운 통에 오소백은 원고지로 펜을 똘똘 말아 휴지통에 내던졌다. 그리고 10월17일자 신문에 “하운(何雲) 서울에 오다, ‘레프라 왕자’ 환자수용을 지휘”라는 3단 제목으로 한하운에 관한 기사와 그가 쓴 시 ‘보리피리’를 실었다.   ‘서울신문’은 문둥이 시인이라는 특이한 인물에 대해 떠돌던 소문을 해소하는 동시에 그의 근황을 소개하면서 천형(天刑)으로 여겨지던 문둥병에 걸린 불우한 인간이 보리피리 불며 산과 들을 방랑하는 모습을 노래한 시를 특종으로 내보낸 것이다. (정진석/외국어대 교수, 신동아 '정진석의 언론,  현대사 산책')                                                                      * 1920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출생. 본명은 한태영(韓泰永). * 1936년 한센병으로 진단을 받았고, * 1943년 중국 배이징(北京)대학 농학원을 졸업하고,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와 용인에서 근무. * 1945년 한센병이 재발하여 실직하였다. * 1946년 함흥학생운동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 1948년 월남하여 서울 명동에서 구걸하며, 전국을 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 1949년 첫시집 [한하운시초(詩抄)]를 간행하였고, * 1955년 두번째 시집 [보리피리]를 간행하였다. * 1973년 그의 사회적 공로를 기리며,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 1975년 사망했다.  * 저서로는 자서전[나의 슬픈 반생기](1958)와 자신의 시해설집 [황토길](1960)을 냈다.             ♣ 보리피리 - 한하운 詩 - 조념 曲 - Bar.윤치호 -Ten.김진원 ♣ 보리 피리 불며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그리워 삘닐리리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불며 꽃청산 어릴 때 그리워 그리워 삘닐니리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삘닐니리 닐니리 닐니리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보리피리 불며 방랑에 기산아 눈물의 언덕을 지나 삘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닐 니 리 리 ~ ~ ♬ ♪ ♬ ♪ 시인 한하운(1920~1975).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문둥이'였다.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36년 17세의 나이에 한센병 진단을 받았다. 중국 베이징대학 농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해 도청에 근무하며 양양한 미래를 시작하던 25세에 다시 악화되어 직장도 그만 두고 숨어들었다. 이때 이름도 하운(何雲, 어찌 내 인생이 떠도는 구름이 되었느냐)으로 바꾸었다. 1946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월남했다. 구걸을 하며 연명하다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보리피리〉를 읽다보면 말 그대로 '천형(天刑)'을 짊어지고 살았던 그의 삶과 세월이 떠오른다. 보리피리를 불며 가는 '꽃 청산', '인환(인간의 세계)의 거리', '방랑의 기산하(많은 산과 들)'는, 그의 고향 함경도 함주에서부터 남쪽 끝 섬 소록도까지 이르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사월의 고향 들판에서 불었던 보리피리를 불며 그는 내내 그 멀고 먼 거리를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온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낭만풍의 노래인듯 하지만, 실은 천형인 나병으로 일생을 암담하게 살다간 시인의 인간 존재에 대한 절규가 담긴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천형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청운의 꿈과 연인을 버리고 방랑하면서 한맺힌 생을 살았으며,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이 시는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 불던 보리 피리에 대한 추억이 시인을 고향의 언덕으로 이끌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와 지나간 것에 대한 동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에 대한 그리움, 성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그리움이다. 인간의 세계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 인간 세계에 대한 편입 욕망을 숱한 방랑의 세월에 묻어두고 눈물짓고 있는 것일까. 천형이라는 나병 환자로서의 비애, 성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 고향과 유년에 대한 그리움, 방랑의 한이 고향의 언덕을 눈물의 언덕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작곡자 : 조 념 (趙念, 1922 - 2008) 보리피리를 작곡한 것은 1953년 시가 쓰인 무렵이다. 그는 시에 굽이굽이 숨은 한에서 전쟁을 겪고 난 한을 발견했다고 한다. "시에 마땅한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던 차, 꿈속에서 아름다우면서 스타일이 신선하고 특이한 선율을 들었습니다, 어찌나 감격스러운 곡이었는지... '아, 이 노래다!' 하고 탄성을 부르며 따라 불렀지요. 꿈에서 깬 후에도 기억에 생생한 선율을 오선지에 적었습니다" 보리피리는 며칠 후 중앙방송국(KBS) 라디오의 전파를 탔고, 1971년 그의 작곡집 "황토길" 을 발간할 때 이곡 (보리피리)을 수록했다. 1922년 함북 혜산진 출생. 1944년 일본 동양음악학교 졸업. 샤피로에게 작곡을, 도락텐베르크에게 바이올린을 사사. 중앙고 교사, 수도사대, 경기여대, 관동대 강사. 보리피리, 흰눈이 내린다, 물안개, 너의 가을 등 가곡 80여 곡, 연가곡"황토길", 바이올린 소나타, 교향곡 피아노곡 다수. 작품집 : 가곡집 "황토길", 바이올린 소나타 "소리 봄" "세레나데" 번역서 "베토벤" 등... 1945년 12월 창단공연을 가진 고려교향악단에서 제1바이올린을 맡기도 했던 조념은 해방 이후 좌우 대립과 한국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현실을 한국적 어법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남한에서 리얼리즘 음악 창작 작업의 맥을 이은 소중한 음악인"이다. 가곡집 '황톳길' '조념예술가곡집' '베에토벤 번역본(신들러 원저)', 제3교향곡 '통일'과 제4교향곡 '산하' 악보집을 펴냈고, 2001년 블라디보스톡 국립교향악단 (안드레이 디슈이닌 지휘) 연주로 러시아에서 제4교향곡 '산하'를 초연했다. 중앙대와 경기대, 세종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그는 한국작곡가회 자문위원, 음악예술연구회 회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중앙위원, 민족음악인협회 고문 등으로 활동 하였다. 한하운 시모음..  ~~~~~~~~~~~~~~~~~~~~  나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을 두구 나눠도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이올시다. 벌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  답화귀(踏花歸)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지네  함박눈인 양 날리네 깔리네  꽃 속에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꽃이 달빛에 졸고  봄달이 꽃 속에 졸고  꿈결 같은데  별은 꽃과 더불어  아슬한 은하수 만리(萬里) 꽃 사이로 흐르네.  꽃잎이 날려서  문둥이에 부닥치네  시악시처럼 서럽지도 않게  가슴에 안기네.  꽃이 지네  꽃이 지네  뉘 사랑의 이별인가  이 밤에 남몰래 떠나가는가.  꽃 지는 밤  꽃을 밟고  옛날을 다시 걸어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  도라지꽃  도라지꽃  도라지꽃  첩첩  산 두메.  산력(山曆)은  목석(木石)  바람에  도리 머리  도라지꽃  도라지꽃.  도라지꽃  도라지꽃  산 두메  산세월(山歲月).  산새야  우지마  바람에  산곡조(山曲調)  도라지꽃  도라지꽃.  ~~~~~~~~~~~~~~~~~~~~  라일락꽃  라일락꽃  밤하늘의 은별 금별  은하수 흐르는 별  날이 새면  땅 위의  성좌(星座) 흐르는 별  별들이 꽃핀  라일락꽃  별  라일락꽃  소녀의 눈  눈물 겹도록 귀여운 눈  눈동자  반짝이는  사랑  사랑이 너무 진한  라일락꽃  ~~~~~~~~~~~~~~~~~~~~  무지개  무지개가 섰다.  무지개가 섰다.  물 젖은 하늘에  거센 햇살의 프리즘 광선 굴절로  천연은 태고의 영광 그대로  영롱한 칠채(七彩)의 극광으로  하늘과 하늘에 궁륭(穹륭)한 다리가 놓여졌다.  무지개는 이윽고 사라졌다  아쉽게  인간의 영혼의 그리움이  행복을 손모아 하늘에 비는 아쉬움처럼  사라진다 서서히......  만사는  무지개가 섰다 사라지듯이  아름다운 공허였었다.  ~~~~~~~~~~~~~~~~~~~~  벌(罰)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罰이올시다.  아무 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罰이올시다.  ~~~~~~~~~~~~~~~~~~~~  보리피리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  봄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좁은 지역에도 한 포기의 꽃을 피웠더냐.  하늘이 부끄러워  민들레꽃 이른봄이 부끄러워.  새로는 돋을 수 없는 빨간 모가지  땅속에서 움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계절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  ~~~~~~~~~~~~~~~~~~~~  삶  지나가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웠다.  여기 있는 것 남은 것은  욕(辱)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마는.  아 꽃과 같던 삶과  꽃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葛藤)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잠깐이라도 이 낯선 집  추녀밑에 서서 우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  여인(女人)  눈여겨 낮익은 듯한 여인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느리고 내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습 걸음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입술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보지!  ~~~~~~~~~~~~~~~~~~~~  자화상  한 번도 웃어 본일이 없다  한 번도 울어 본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 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이냐  한 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배워 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 머리에  찔름 찔름 다섯 자보다 좀 더 큰 키로 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온 땅을 덮는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우 윈도우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  전라도 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지까디비(地下足袋) : 일할 때 신는 발가락 부분이 찢긴 일본식 운동화  ~~~~~~~~~~~~~~~~~~~~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고향  원한이 하늘을 찢고 우는 노고지리도  험살이 돋친 쑥대밭이 제 고향인데  인목(人木)도 등 넘으면  알아보는 제 고향 인정이래도  나는 산 넘어 산 넘어 봐도  고향도 인정도 아니더라  이제부터 준령(峻嶺)을 넘어넘어  고향 없는 마을을 볼지  마을 없는 인정을 볼지  ~~~~~~~~~~~~~~~~~~~~  귀향(歸鄕)  고향으로 가는 길은  자꾸만 뜨거워지는 것은  달랠 길 없어  한때의 잘못된 죄는  꽃도 없는 캄캄한 감옥 속에  벌을 몸으로 치르고  이제 법조문보다  자유로운 고향길을 가는데  산천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고향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산에서 들에서  뻐꾸기가  누구를 부르는가  누구를 찾는가  내 마음같이 흔건히 울고 있는데  산천은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고향도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정말 법조문이 무엇인가  자유가 무엇인가  인생도 알듯하는데  산천초목을 엽록소 싱싱하게 푸르러  하늘과 바닷빛  아스라한 하늘 끝간 데  영원에서  영원으로  생명이 넘쳐 흐르고......  ~~~~~~~~~~~~~~~~~~~~  개구리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  고구려 무용총 벽화  얼마나 아름다운 무덤인가  옛 그대로의 꿈을 지닌 채  아직도 숨쉬는 명맥(命脈)  어화  어화야  아득히 천지개벽  보라구름 헤치고  풍악도 닐리리 쿠 웅 덕  아기는  무지개 고흔 예상(霓裳) 소매를  나비처럼 하느리 하느리 춤추며  날아 날듯 돌아서  에야라난다  에야라난다  풍악을 울려라  무고(霧鼓)는 두 두 둥  아기는  뭉게뭉게 여름구름 가슴에 피어  아기는  참을 길 없어  허리춤에 부서질듯 부서질듯 하늘하늘  지화자 지화자  에헤라 에헤라 내 사랑아  에라 만수  에라 만수  오래오래 국태민안을 빌며  옥피리를 닐리리  춤추는 아기는  청의(靑衣) 허리를 사르르 돌려  태평건곤(太平乾坤) 고구려의 영화를 부르는데  풍악은 더욱 요란해  지화자 만만세  지화자 만만세  ~~~~~~~~~~~~~~~~~~~~  고오·스톱  빨간 불이 켜진다  파란 불이 켜진다.  자동차 전차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모두들 신호를 기다려 섰다.  나도 의젓한 누구와도 같이  사람들과 사람들 틈에 끼어서  이 네 거리를 건너가 보는 것이다.  아 그러나  성한 사람들은 저이들끼리  앞을 다투어 먼저 가버린다.  또다시 빨간 불이 켜진다  또다시 파란 불이 켜진다.  또다시 자동차 전차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모두들 신호를 기다려 섰다.  또다시 나도 의젓한 누구와도 같이  사람들과 사람들 큼에 끼어서  이 네거리를 건너가 보는 것이다.  아 그러나  또다시 성한 사람들은 저이들끼리  앞을 다투어 먼저 가 버린다.  또다시 나에게 어디로 가라는 길이냐  또다시 나에게 어디로 가라는 신호냐.  ~~~~~~~~~~~~~~~~~~~~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푸른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적조(寂照) 속 자비의 열반(涅槃)  서라벌 천년을 미소하시는  인욕 유화(忍辱柔和)의 상호(相好)  말숙한 어깨  연꽃 봉오리의 젓가슴  몸은 보드라운 균제(均齊)의 선에 신운(神韻)이 스며서  유백색 가사는  몸을 휘어 감아 가냘프게  곡선이 눈부신 살결을 보일락  자락마다 정토(淨土)의 평화가 일어 영락(瓔珞)이 사르르  제 세상의 음률 가릉빈가(音律迦陵頻伽) 소리  청초한 눈동자는 천공(天空)의 저쪽까지  사생  사생의 슬픔을 눈짓하시고  대초월(大超越)의 자비로,  신래(神來)의 비원으로,  요계 혼탁(요季混濁)한 탁세에 허덕이는 중생을 제도(濟道)하시고  정토 왕생(淨土往生)시키려는 후광(後光)으로 휘황(輝煌)하시다  돌이  무심한 돌부처가  그처럼  피가 돌아 생명을 훈길 수야 있을까  갈수록 다정만 하여  아 문둥이 우는 밤  번뇌를 잃고  돌부처 관세음보살상 대초월의 열반에  그리운 정 나도 몰라  생생 세세(生生世世)  귀의하고 살고 싶어라  ~~~~~~~~~~~~~~~~~~~~  국토편력(國土遍歷)  이 강산 가을 길에  물 마시고 가 보시라  수정에 서린 이슬 마시는 산듯한 상쾌이라.  이 강산  도라지꽃 빛 가을 하늘 아래  전원은 풍양과 결실로 익고  빨래는 기어이 백설처럼 바래지고  고추는 태양을 날마다 닮아간다.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빛도 고운 색채 과잉의 축연  그 사이로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은  하늘과 구름과 가즈런히 멀기도 한데  마을 느티나무 아래  옛날이나 오늘이나 흙과 막걸리에  팔자를 묻은 사람들이  세월의 다사로움을  물방아 돌아가듯이  운명을 세월에 띄워 보낸다.  전설이 시름없이 전해지는  저 느티나무 아래서  나는 살아 왓었다.  저 느티나무 아래서 나를 기르신  선조들이 돌아가셨다.  저 느티나무 아래서 저 사람들과  적자생존의 이치를 배웠다.  이제 나보고 병들었다고  저 느티나무 아래서 성한 사람들이  나를 쫓아내었다.  그날부터 느티나무는 내 마음속에서  앙상히 울고 있었다.  다 아랑곳 없이 다 잊은 듯이  그 적자생존의 인간의 하나 하나가  애환이 기쁨에 새로와지며  산천초목은 흐흐 느끼는 절통(切痛)으로  찬란하고 또 찬란하다.  아 가을 길 하늘 끝간 데  가고 싶어라 살고 싶어라.  황톳길 눈물을 뿌리치며  천리 만리 걸식 길이라도  국토 편력 길은 슬기로운 천도(天道)길이라.  ~~~~~~~~~~~~~~~~~~~~  나혼유한(癩婚有恨)  흙이 있다. 하늘의 구름과 푸른 지평은  넓기만 한데  문둥이가 살 지적도는 없어  버림받은 사내와 버림받은 계집이  헌 신짝에 짝을 맞추는 것이  어쩌면 울고 싶은 울고 싶은  하늘이 마련한 뼈아픈 경사냐  신부는  오늘만이라도 성냥개비로 눈썹을 그리고  인조 면사포에 웨딩 마아치는 들리지 않으나  5색 색지가, 색지가 눈같이 퍼붓는데  곱게 곱게 다가서라  진정 그와 그만의 짐승들만이  통할 수 있는 인정이 사무쳐  양호박 울둑불둑 얼굴이 이쁘장해  연지바른 신부, 너 모나리자여  서식(棲息)의 허가(許可) 없는 지대(地帶)에서  생명(生命)의 본연(本然)이 터지는 사랑을 허락하니  하늘이 웃어도 할 수는 없어  애당초 족보가 슬퍼함을 두렵지도 않고  오늘은 이 세상에 왔다가  내일은 저 새상에 간다고 하니  오, 문둥이의 결혼이여  분홍빛 치마폭으로 신랑방 문을 가려라  어서 어서 태양 앞에 새롭게 다가서라  ~~~~~~~~~~~~~~~~~~~~  냉수(冷水) 마시고 가련다  산천아 구름아 하늘아  알고도 모르는 척할 것이로되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를 말라.  구름아 또 흐르누나  나는 가고 너는 오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너와 나의 헛갈리누나.  아 아 하늘이라면  많은 별과 태양과 구름을 가졌더냐  이렇듯 맑은 세월도  푸른 地平도 건강한 生도 평등할 幸도  나와는 머얼지도 가깝지도 못할  못내 허공에도 끼어질 틈이 없다.  삼라만상은 상호부조의 깍지를 끼고  을스꿍  저 좋은 곳으로만 돌아가는가  산천아 내 너를 알기에  냉수 마시고 가련다.  기어코 허락할 수 없는 생명을 지닌  내 목으로 너를 들이키기엔  너무나도 시원한 이해이어라.  ~~~~~~~~~~~~~~~~~~~~  데모  --함흥 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1946. 3. 13)--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 소리와 함께  만세 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아우성 소리 바다 소리.  아 바다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  ~~~~~~~~~~~~~~~~~~~~  도처춘풍(到處春風)  봄길 유걸(流乞)길은  도처 춘풍(到處春風)  진달래꽃  아지랑이 녚 십리  마을은 피리 소리  제비는 지구 남남(남남).  거지는 도처 춘풍  봄이 한 세월  진칫집 새악시는  뉘 새악시  혼가(婚家)술 마시면  쉬이 문뒹이 장가 가네.  ~~~~~~~~~~~~~~~~~~~~  리라꽃 던지고  P양,  몇 차례나 뜨거운 편지 받았습니다.  어쩔 줄 모르는 충격에  외로워지기만 합니다.  孃이 보내주신 사진은, 얼굴은  오월의 아침 아카시아꽃 청초로  침울한 내 병실에 구원의 마스콧으로 반겨줍니다.  눈물처럼 아름다운 양의 淸淨無垢한 사랑이  회색에 포기한 나의 사랑의 창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의학을 전공하는 양에게  이 너무나도 또렷한 문둥이 병리학은  모두가 부조리한 것 같고  이 세상에서는 안될 일이라 하겠습니다.  P양  울음이 터집니다.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이 사랑을 아끼는  울음을 곱게 그칩시다.  그리고 차라리 아름답게 잊도록  덧없는 노래를 엮으며  마음이 가도록 그 노래를  눈물 삼키며 부릅시다.  G선의 엘레지가 비탄하는  덧없는 노래를 다시 엮으며  이별이 괴로운 대로  리라꽃 던지고 노래부릅시다.  ~~~~~~~~~~~~~~~~~~~~  * 막다른 길 *  저 길도 아닌  이 길이다 하고 가는 길.  골목 골목  낯선 문패와  서투른 번지수를 우정 기웃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  뒷골목으로 가는 길.  저 길이 이 길이 아닌  저 길이 되니  개가 사람을 업수여기고 덤벼든다.  ~~~~~~~~~~~~~~~~~~~~  막다른 길  쓰레기통과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운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죽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아직도 살아 있는 목숨이 꿈틀 만져진다.  배꼽 아래 손을 넣으면  37도의 체온이  한 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뭉클 쥐어진다.  이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나의 목숨은  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  ~~~~~~~~~~~~~~~~~~~~  명동(明洞)거리 1  진가(眞價)를 잃어버린 상품들이 진열장 속에 귀양산다.  사람들은 모두들 덤과 에누리로 화류병을 사고 판다.  본적도 주소도 없는 사생아들의 고향…  간음과 유혹과 횡령과 싸움으로 밑천을 하는 상가  신사 숙녀들의 영양을 충당시키기 위해서는  날마다 갈아붙는 메뉴 위에 비타민 광고가 식욕을 현혹한다.  캄플 주사 대신에 교수형을 요리하는 집집의 쓰레기통 속에는  닭의 모가지 생선 대가리들의 방사하는 인광 인광.  ~~~~~~~~~~~~~~~~~~~~  명동(明洞)거리 2  명동 길 외국 어느 낯선 거리를  걸어가는 착각에 허둥거린다.  알아볼 사람 없고 누구 하나 말해 볼 사람 없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 거리 에트랑제는  시간과 과잉이 질질 흐르는 사람 틈에 끼어  물결처럼 물결처럼 떠 간다.  누드가 되고 싶은 계집들이 꼬리를 탈탈 터는데  노출 과다에 눈이 맴도는 눈 허리에 기름이 돈다.  누구 하나 같이 갈 사람 없어  극장 광고판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나는 담배 꽁초를 다시 피워 문다.  청춘이 시장끼 들고  돈과 계집이 그리워지는 거리에  나 혼자 에뜨랑제는  누드가 되고 싶은 게집과 계집을  따라가는 사내들 틈에 끼어 어둠을 걸어간다.  ~~~~~~~~~~~~~~~~~~~~  명동(明洞)거리 3  수캐 같은 계집들이  꼬리를 치고 간다.  돼지 같은 사내들이  계집을 귀속재산(歸屬財産)처럼  네것 내것같이 공것같이  영호 부인(零號婦人)으로 스페어로 달고 간다.  유행이라면  벌거벗는 것도 사양치 않는 계집들이  밀가루 자루 같은 것  마다리 자루 같은 것  허리끈도 없이 뒤집어 입고  말하자면  잠옷으로 걸어가는  이 거리 명동 거리는  벽 없는 공동 침실의 입구.  말초 신경에다 불을 켜 놓고  원숭이 광대줄 타는 허기찬 요술이  하나 밖에 없는  국산 민주주의를 낳고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개나팔을 불기만 한다.  언제나 명절 같은 이 거리  언제나 명절 같은 이 거리에  수캐 같은 계집과  돼지 같은 사내가  어디라 할 것 없이  거리라 할 것 없이  꽉 꽉 차 있다.  놀고 먹는 거리는  대폿집 당구장 다방  극장 댄스홀 바아  화식(華食) 양식(洋食) 왜식(倭食)  한식(韓食) 집집 또 또......  세상이 삶이  혼나간 미친년 웃음 같애서  베이비 당구장  슬로트 머신에 진종일 달라붙은 사람들이  털컥 털커덕  털컥 털커덕  시끄럽기만 하다.  나이롱 양말같이 질긴 계집이  나이롱 양말같이 질기지 못한 계집이  포동거리는 사육(謝肉)은  실속이 없는 숟가락 같은  의이(擬餌)의 낚시밥이 되어  하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한 떨기 꽃도 피어날 수 없고  한 마리 새도 울 수 없는  이 거리 명동 거리에  수캐 같은 계집과  돼지 같은 사내가  사람이 망가진 인조 인간들이  네온 불 원색을 밟는 부나비가  벌레 먹은 서울 어두운 골짜기를 헤맨다.  ~~~~~~~~~~~~~~~~~~~~  목숨  쓰레기통과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운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죽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아직도 살아 있는 목숨이 꿈틀 만져진다.  배꼽 아래 손을 넣으면  37도의 체온이  한 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뭉클 쥐어진다.  이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나의 목숨은  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  ~~~~~~~~~~~~~~~~~~~~  백목란(白木蘭)꽃  눈 오는  하늘에서 선녀 오시는  흰 목란(木蘭)꽃  옛 공주님의  연모(戀慕)가  산하를 헤매며...... .  눈물보다 간절한  사춘(思春)의 노출.  여체의 내밀(內密)한 개현(開顯).  유색(乳色)의 부활, 봄이여.  눈 오는  하늘에서 선녀 오시는  백목란꽃  ~~~~~~~~~~~~~~~~~~~~  백조  새하얗게  하늘을 덮고  새하얗게  땅을 덮어  하늘에서 눈 오듯  백조가  흰 눈처럼  낙동강  겨울물에 내려......  하늘에 나래치는 백조는  흰 편지  흰 편지는  소식같이  남북을 오가는  통일의 천사  북에서 오는  소원의 천사  ~~~~~~~~~~~~~~~~~~~~  버러지  새살이 하려 찾아온  또 새손댁 금실기가  바램에 부풀은 눈시울에  똑똑히 삶을 그린 눈썹이 시물구나  손가락 떨어지면  손목은 뭉뚝한 몽두리 됐다  분에 못견딘 삶이래서  내 몽두리도 마구마구 휘어때린  매 맞는 땅바닥은 태연도 한데  어이 억울한 하늘이 울음을 대신하나  한 가지 약을 물어 천 가지를 바래며  전설로 걸어가면 신기(神奇)를 만나련가  이 실천이 꿈이련가  꿈이 실천이련가  큰 목적을 위하여  이 몹쓸 고집을 복종시키자  인내만이 불행을 달래어 두고  의심만이 나와 소근거리자  버러지 버러지 약 버러지  놀래 자지러진  네 너로 네딴으로 죄없단 빛이  누두둑 푸른 피 흘려 흘려  헒 짙은 목덜미에  왕소름을 끼친다  내가 버러지를 먹는지  버러지가 나를 먹는지  ~~~~~~~~~~~~~~~~~~~~  부엉이  미움과 욕으로 일삼는 대낮에는  정녕 조상을 끄려서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약보다는 좋은 효험(效驗)이라 생각하였다.  부엉이는 또한  싸움으로 일삼는 낮에사  푸른 나무 그늘 바위 틈에서  착하디 착하게 명상하는 기쁨이  복이 되곤 하였다.  모든 영혼이 쉬는 밤  또 하나의 생명과 영혼이 태어나는 밤  이 밤이 좋아서 신화는  부엉이를 눈을 뜨게끔 하였다  어둠 속에서  별이 반짝이며 이슬을 보낸다  나무가 숨쉬며 바람을 보낸다  꽃이 피려고 향을 훈긴다.  ~~~~~~~~~~~~~~~~~~~~  비 오는 길  주막도 비를 맞네  가는 나그네  빗길을 갈까  쉬어서 갈까  무슨 길 바삐 바삐  가는 나그네  쉬어갈 줄 모르랴  한잔 술을 모르랴  ~~~~~~~~~~~~~~~~~~~~  비창(悲愴)  차이코프스키의 이  이 격리된 나요양소(癩療養所)에  국경도 없이 차별도 없이  또 세균학도 없이  뇌파에 흐흐 느끼어 온다.  지금 나는 옛날 성하던 게절에 서 있고  지금의 나는 여기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수없이  떠내려온 하류에서  불시 나는 나의 현실을 차 버린다.  두 조각 세 조각 산산이 깨어진다.  지금  모든 것이 깨어진다.  차이코프스키의 만이  영원으로 가는 것이다.  ~~~~~~~~~~~~~~~~~~~~~  사향(思鄕)  내 고향 함흥은  수수밭 익는 마을  누나가 시집갈 때  가마 타고 그 길로 갔다  내 고향 함흥은  능금이 빨간 마을  누나가 수줍어할 때  수수밭은 익어갔다  ~~~~~~~~~~~~~~~~~~~~  山가시내  산두메  하 좁아  앞뒤 산을  빨랫줄 치네  울 아범  뭐 보고  이 산골에  사나  나이찬 가시내는  뻐꾹새 울면  머리채 칠렁이어  숨만 가쁘네  ~~~~~~~~~~~~~~~~~~~~  삼방(三防)에서  사람도 올 수 없이 막았다  구름도 올 수 없이 막았다  바람도 올 수 없이 막았다  그래서 삼방이라 하였는가  하늘을 찌르는 칠전팔도(七顚八倒)의 험산이  모조리 올 것을 막아버린 천험비경(天險秘境)에  구비구비 곡수(曲水)는 바위에 부딪혀 지옥이 운다.  죽음을 찾아가는 마지막 나의 울음은  고산(高山) 삼방 유명을 통곡한다.  죽음을 막는가  바람도 없어라  부엉이는 슬피 우는가  하늘이 쪼각난 천막에  십오야 달무리는  내 등뒤에 원을 그린다.  ~~~~~~~~~~~~~~~~~~~~  상달  가을 들판에  이삭들이 익으면  황금의 왕국  흙의 영가는  조국 산신(産神)에  상달 풍년 고사인데  굶주림을 허리끈으로  양식삼아 졸라매던  보리고개 보리고개  눈물이 도네  이제 풍양한  황금의 왕국은  연가(戀歌)가 에헤라 데헤라  ~~~~~~~~~~~~~~~~~~~~  생명의 노래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히려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 꽃같이 서러워라  한세상  한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  서울의 봄  햇빛 난난(暖暖)  꽃이 난난(暖暖)  나비 낭낭(浪浪)  봄이 서울인가  창경원인가.  아가씨 낭낭(浪浪)  세월이 난난(暖暖)  세상이 난난(暖暖)  봄이  꽃인가  사람인가.  ~~~~~~~~~~~~~~~~~~~~  손가락 한 마디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 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  쉬이 문뒹이  쉬이 밭에  쉬이 깜부기  쉬이 밭에  쉬이 깜부기 따먹고  쉬이 병이  쉬이 병이 든  쉬이 문뒹이  쉬이 문뒹이  ~~~~~~~~~~~~~~~~~~~~  신설(新雪)  눈이 오는가.  나요양소(癩療養所)  인간 공동묘지에  함박눈이 푹 푹 나린다.  추억같이......  추억같이......  고요히 눈 오는 밤은  추억을 견뎌야 하는 밤이다.  흰 눈이 차가운 흰 눈이  따스한 인정으로 내 몸에 퍼붓는다.  이 백설 천지에  이렇게 머뭇거리며  눈을 맞고만 싶은 밤이다.  눈이 오는가.  유형지(流刑地)  나요양소  인간 공동묘지에.  하늘 아득한 하늘에서  흰 편지가 소식처럼  이다지도 마구 오는가.  흰 편지따라 소식따라  길 떠나고픈 눈오는 밤이다.  ~~~~~~~~~~~~~~~~~~~~  양녀(洋女)  먼 열두 바다를 건너 오너라구  저리 황새처럼 멋없이 긴 다리를  벗었나 보다.  바다마다의 밀물에 깎이운 허리를  만곡선(彎曲線) 가느랗게 졸라맨 계집들.  해풍에 퇴색한 머리칼 날리며  걸음걸이 사내들처럼 히히대며 간다.  하늘 높이 비행기가 날을 때면  하늘을 우러러 돌아가고 싶은 저들의 고국도 있어  하늘 빛 향수에 눈이 푸른 계집들.  ~~~~~~~~~~~~~~~~~~~~  양자강(揚子江)  지구의 한 토막이 무너져  둥 둥 떠 간다  웅대(雄大) !  말문이 막힌다  지축을 쪼개어  기만년 흘러가는 양자강  슬픔처럼  외로움처럼  큰 땅이 떠 간다......  ~~~~~~~~~~~~~~~~~~~~  어머니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신  말이 없는 어머니.  ~~~~~~~~~~~~~~~~~~~~  업계(業界)  소년아  네 무엇을 찾으려고  또 하나 그 위태한 눈을 떴니.  하늘 한가 둥둥 구름 떠가는  높고 푸른 지엄을 우러러  어리디 어린 보람을 조약돌로 팔매쳐 보는 것.  아서라  네 아무리 하늘 끝간 델 보았다 하자......  눈물로 걸음걸음 이르런 곳  그래 여기가 바로 어느 동서남북이란 말이냐.  아득히 하늘 아득히 바라보던  ··  너의 망원경 렌즈에 아련한 부끄러움을  어찌 할테냐.  ~~~~~~~~~~~~~~~~~~~~  여가(애염가) 驪歌(愛染歌)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  한식에 소복(素服)이 통곡할 때에  부평(富平) 성계원에 진달래 피면  이 세상 울고 온 문둥이는 목쉬어  진달래 피빛 몽오리는  그리움에 엉긴 앵혈  봄마다 피는  옛날의 진달래꽃은  무너질 수 없는  님이 쳐다보는 얼굴  앞날이 없는 문둥이는  돌아서 돌아서면서 무너지는 가슴에  다시는 뵈올 수 없는 것은  다신 뵈올 수 없는 것은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  ~~~~~~~~~~~~~~~~~~~~  여수(旅愁)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죽자고 살아보자던사람.  만나보자고 찾던 사람.  한번은  만나봤어야 할 사람이였지만  어쩐지  망설였던 사람.  세상과 문둥이는 너무나 담이 높아  얼마나 얼마나 많이 울어서 무너뜨려야 할 담이 높아  서로 길이 헛갈리누나  이제 그 사람을 찾아 온  천리땅 대구(大邱)길은  경(慶)  그 사람은 가고  허전한 여수(旅愁)는  그런대로 사랑했던 까닭인가.  ~~~~~~~~~~~~~~~~~~~~  戀主님  얼마나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못견디게 그리웁기에  한 시도 잊을길 없어  구름 위 상상봉에 올라  하늘 아득히  님 오시는 길이라도 보고 싶어  꽃피는 날인가  기러기 오는 날인가  비오는 밤  눈오는 밤을 가리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청승스러운 것인지  눈물인들 울음인들 어찌하랴  한평생 기다리는  하늘보다 높은 높은 사랑이여  연주(戀主)님이여  ~~~~~~~~~~~~~~~~~~~~  열리지 않는 門  감기에는  ····  아스피린 하얀 정제를  두어개만 먹으면 낫는다.  빈혈증에는 포도당 주사요  매독에는 606호를 맞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또  신농씨(神農氏)의 유업을 받아서  가지가지 초근목피로  용하게 병을 고치는 수도 있다고 한다.  의학박사도 많고  약학박사도 많고  내과 외과 소아과  치과 신경과 피부과  병원도 많기도 한데.  그러나 병원 문은 집집이 닫혀 있다  약국이란 약국은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제 막 인력거 위에 누워서 가는  환자가 있다.  아니  하얀 가운을 입고  하얀 마스크를 건  의사 선생님과 간호부가  바쁘게 내 앞을 지나간다.  ~~~~~~~~~~~~~~~~~~~~  윤회(輪廻)  가랑잎이 우수수 굴러간다  지난해 가랑잎이 굴러간 바로 그 위에  올해의 가랑잎이 굴러간다  이제 사람이 죽었다  지난해 죽은 사람의 시간 바로 그 시간에  지금 사람이 또 죽었다  모두가  지금 있는 것 그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또 미래에도 있을 지금의 바로 그것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 미래에 똑같은 그것이  영원으로 이어주는 것이다  윤회(輪廻)  우수수 가랑잎이 굴러간다  ~~~~~~~~~~~~~~~~~~~~  은진 미륵불(恩律 彌勒佛)  논산 땅 은진 미륵불(恩津彌勒佛)  돌로 천년  살아 오신 육십 오척  몸 길이가  얼굴 길이가  갓 길이가  균형을 잃은  웅장한 험절의 어처구니 없는  옛날의 불구자.  앙데팡당의 뉘 석장이  그지 없는 인간고의 초극상(超克像)을  스핑크스로 아로새겼나.  비원(悲願)에 우는 사람들이  진정소발(眞情所發)을  천년 세월에 걸쳐  열도(熱禱)하였건만  미륵불은  도시 무뚝뚝  청안(靑眼)으로  세월도  세상도  운명도  그렇게만 아득히 눈짓하여  생각하여도 생각하여도  아 그 마음  푸른 하늘과 같은 마음  돌과 같은 마음  불구한 기립(起立) 스핑크스로  세월도  세상도  운명도  집착을 영영 끊고  영원히 불토(佛土)를 그렇게만 지키는 것인가.  ~~~~~~~~~~~~~~~~~~~~  인골적(人骨笛)  아득히 아득히 몇 억겁을 두고 두고  울고 온 소리냐, 인골적 소리냐  엉 엉 못살고 죽은 생령(生靈)이 운다  아 천한(千恨) 절통의 울음이 운다  몽고라 하늘 끝 아시아의 북벽(北僻)  유수(幽愁)와 사막의 맛서는 통고사(通古斯) 죽음의 밤에  라마승은 오늘밤도 금색묘당(金色廟堂)에  신에 접한다고 인골적을 불며  상형문자 같은 주부(呪符)의 경전을  회색에 낡은 때묻은 얼굴로 악마를 중얼거린다  라마는 몽고의 신  천상천하 다시 또 없는 제왕의 제왕  이 절대자는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도  심지어 나어린 처녀의 첫날밤 마수걸이도  교권의 절대 앞에 지상에도 천국에도 없는  오, 오소리티여  신성과 은총과 구원이  인골적 울음없이는 금와무결(金와無缺)이 있을 수 없다고  선남선녀의 부정(不淨)없는 생령을  생사람 산채로 죽여 제물로  도색(桃色)이 풍기는 뼈다귀를 골라 피리감으로  다듬어 다듬어서 구멍 뚫어서 피리로 분다  강동이라 인골적  몽고의 오소리티여  인골의 피리 가락은  낮이나 밤이나 삭북(朔北)의 유수(幽愁)와 몽매한 암흑에  교권 정치의 우미(愚迷)한 고집의 절대 앞에  생과 환희를 모르는 채  영영 쓰러진 사랑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시혼(屍魂)이  사막의 풍우로 버려진 풍장(風葬)의 시혼이  사막에 떠돌아 위령(慰靈)없는 처절한 원차(怨嗟)로  그 몹쓸 자. 바이칼 살풍(殺風)에 산산히 부서진 사령(死靈)이  단장(斷腸) 터지는 곡소리가, 무수한 곡소리가  한가닥 인골의 피리에 맺혀 우는 호원(呼寃)  천한절통(千恨切痛)의 울음으로 흐흐 느낀다  교권의 독성의 자행과 착취  그 악순환은  옥토 몽고 대평원을 고비 사막으로 황폐시킨다  성길사한(成吉思汗) 세계정패(世界征覇)의 대제국이  암흑으로  성병으로  완전히 멸망으로 잠겨 버렸다  천지 창조의 신은  한 떨기 꽃에  한 마리 새에  한 가람 강물에  평화와 행복의 계시와 은총을 주셨으니  신을 매복(賣卜)한 라마의 악의 업보(業報)는  천지 창조의 신의 분노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삼라만상의 태반인 산천마저 사막으로  한 떨기 꽃도 피어날 가지 없이  한 마리 새도 쉴 나무 숲도 없이  별이 쉬어 갈 샘물도 없이  천애(天涯) 지애(地涯) 평사만리(平砂萬里)로 황폐시켰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유린한 채  나라를 망해 먹고  민족마저 망해 먹었다  라마승은  제트기 날아가는 원자(原子)의 이 찰나에도  사랑의 뼈다귀 인골의 피리를 불며  악마의 경전을 중얼거리며  아직도  절대지상(絶對至上)이라는 교권으로  생살여탈권  나어린 처녀의 첫날밤 마수걸이를  오, 오소리티여  인골의 피리는 엉 엉  못살고 죽은 선남 선녀의 생령이  한 떨기 꽃을  한 마리 새를  한 가람 강물을 찾으며 운다  인골적  인연(人煙)이 끝인 황사만리(荒砂萬里) 절역(絶域)에  엉 엉  천한절통의 울음으로 흐흐 느낀다  ~~~~~~~~~~~~~~~~~~~~  자벌레의 밤  나의 상류(上流)에서  이 얼마나 멀리 떠내려온 밤이냐.  물결 닿는 대로 바람에 띄워보낸 작은 나의 배가  파도에 밀려난 그 어느 기슭이기에.  삽살개도 한 마리 짖지 않고……  아―여기서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보아야 하나.  첩첩한 어둠 속에 부표처럼 떠서  가릴 수 없는 동서남북에 지친 사람아.  아무리 불러보아야  답 없는 밤이었다.  ~~~~~~~~~~~~~~~~~~~~  작약도  -인천여고 문예반과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에  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  갈매기 소리없는 서해에  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  소녀들의 바다는  진종일 해조음만 가득찬 소라의 귀  소녀들은 흰 에이프런  귀여운 신부  밥짓기가 서투른 채  바다의 부엌은 온통 노래소리  해미(海味)가에 흥겨우며  귀여운 신부와  한 백년 이렁저렁 소꼽놀이  어느새  섬과  바다와  소녀들은 노을 활활 타는 화산불  인천은 밤에 잠들고  소녀들의 눈은 어둠에 반짝이는 별, 별빛  배는 해각(海角)에 다가서는데  소녀들의 노래는   선희랑 민자랑 해무(海霧) 속에 사라져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안녕  또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  ~~~~~~~~~~~~~~~~~~  창경원  꽃 보러 꽃이 가지요  꽃 볼려고 단 한 분 삶을 봤지요  꽃이 꽃을 기다리지요  피고 질 삶이 기다리지요  꽃이 꽃을 보지요  사람이 꽃이지요  꽃이 사람이지요  꽃을 밟고 사람이 오지요  꽃이 사람을 밟고 돌아가지요  ~~~~~~~~~~~~~~~~~~~~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天下大將軍·地下女將軍)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동구 밖에 서서......  장승의 직절 조각(直截彫刻)이  무엇 때문에 눈알을 부라리나  무엇 때문에 이빨을 내세우나.  이 형(形)의 의미는  주력(呪力)인가,  이 위대한 미분화(未分化)는  조상들의 지성과 행동이런가,  원시가 현대문명을 넘어선  오늘의 쉬르 레알리즘.  시원의 미(美)  원시의 생명력.  이 괴위(魁偉)한 조형 언어(造形言語)는  그것은 노(怒),  그것은 공(恐),  그것은 이(異),  그것은 기(奇),  그것은 혁(혁),  그것은 경(驚),  그것은 탄(嘆),  그것은 허(虛),  그것은 포(怖),  그것은 의(疑),  그것은 응(凝),  그것은 보(보),  그것은 살(殺),  그것은 사(死),  그리고 원(願),  그리고 기(祈),  그리고 도(禱).  ............  ............  억울린 백성들이  생존의  길흉화복의  액막이 살(煞)풀이를,  하늘과 땅을 믿고  하늘과 땅만을 믿고 살 수 없어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에  매달려  마음의 수호신이라 믿던  이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도  이제 동구(洞口)에서 볼 수는 없는  원시의 알리바이.  오늘의 후예는  오늘은 오늘  오늘을 살아가는 오늘만의 오늘은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의 조형 언어(造形言語)가  눈망울, 가슴으로 불이 당겨져  그 마음 노(怒),  그 마음 공(恐),  그 마음 이(異),  그 마음 기(奇),  그 마음 혁(혁),  그 마음 의(疑),  그 마음 응(凝),  그 마음 탄(嘆),  그 마음 보(보),  그 마음 살(殺),  그 마음 사(死),  그리고 원(願),  그리고 기(祈),  그리고 도(禱).  ......... .........  ......... .........  ~~~~~~~~~~~~~~~~~~~~  청지유정(靑芝有情)  내가 울고 싶어서  파랑 잔디를 찾아갑니다.  남 몰래 한(恨)이 가도록 울고 싶어서  파랑 잔디를 찾아갑니다.  인간 폐업  천형 원한(天刑怨恨)을 울었읍니다.  몇 백번 죽음을 고쳐 죽어도  자욱 자욱 피 맺힌  그리움과 누우침이 가득찬  문둥이 아니겠읍니까  실컷 울어봐도 유한(有恨)이 가시지는 않아  그래도 울음이 울음을, 눈물이 눈물을  달래 주는 자위가 그립습니다.  눈 감고 눈 감고 누워서 조는  미령(靡寧)의 피로한 몸에  폭신한 파랑 잔디는  생명의 태반인 양  지령(地靈)의 혈맥이 이다지도  내 혈관에 싱싱한 채 순환합니다.  ~~~~~~~~~~~~~~~~~~~~  추석(秋夕) 달  추석 달은 밝은데  갈대꽃 위에  돌아가신 어머님 환영(幻影)이 쓰러지고 쓰러지곤 한다.  추석 달은 밝은데  내 조상에  문둥이 장손은 다례도 없다.  추석 달  추석 달  어처구니 없는 8월 한가위  밝은 달이다.  ~~~~~~~~~~~~~~~~~~~~  추야원한(秋夜怨恨)  --어머님의 옛날에......  밤을 새워 귀뚜라미 도란 도란 눈물을 감아 넘기자  잉아 빗는 소리에 밤은 적적 깊어만 가고  청상스리 한숨쉬며 이어는 듯한 그리움에 앞을 흐르는 밤  눈물은 속된진저 오리 오리 슬픈 사연을 감아 넘기자  바람에 부질없이 문풍지도 우는가.  무삼일 속절없는 가을 밤이여!  ~~~~~~~~~~~~~~~~~~~~  추억(追憶) 1  처녀야  네 야멸찬 그 눈시울 속에  도향(桃鄕)을 뒤로 한 사라진 길이 있고  고향으로 동아갈 길이 보인다  네 휘능청 구비친 허리말에  옛 머슴아의 사나운 달빛이 감겼댔지.  산악처럼 웅장한  네 젖가슴을 헤치려던  너무나도 엄숙한 그 뉘의 대답이었나  생지짝 비단 치마말이 찢어졌기에  추억도 흘려버렸지......  옛일도 빠쳐트렸지......  처녀야  네 야멸찬 그 눈시울 속에  도향(桃鄕)을 뒤로 한 사라진 길이 있고  고향으로 동아갈 길이 보인다  네 휘능청 구비친 허리말에  옛 머슴아의 사나운 달빛이 감겼댔지.  산악처럼 웅장한  네 젖가슴을 헤치려던  너무나도 엄숙한 그 뉘의 대답이었나  생지짝 비단 치마말이 찢어졌기에  추억도 흘려버렸지......  옛일도 빠쳐트렸지......  ~~~~~~~~~~~~~~~~~~~~  추억(追憶) 2  일곱해 맞이 해해맞이  기울어진 지구가 되어  쩔뚝이며 빗길로 찾아와 보니  모난 하늘이 동쪽으로 삐뚤어졌네  어느새 동쪽으로 삐뚤어졌네.  오늘도 붉은 꽃 파리는  머언 해중(海中)으로 흘렀나 본데  기다렸던 해변은  그 여인의 넑인 양 슬픔인 양  추루룩 추루룩 울고만 있네.  ~~~~~~~~~~~~~~~~~~~~  추우일기(秋雨日記)  아치라운 일이다  네 싸늘한 서글픔을 눈으로는 노려보지 말아라  모두다 모두다 다 이름있는 모든 것이다  가느다란히 정맥에 살아서 숨 쉬는  나무여 풀이며 잎잎 떨어지는데  싹 다린 옥색 모시치마 사뿐히 꽂아지른 옷맵시  참다 못하여 부서질 듯이 돌아서면서  흐느껴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가  ~~~~~~~~~~~~~~~~~~~~  추추야곡(秋秋夜曲)  잘못 살아온  서른살 짜리 부끄러운 내 나이를  이제 고쳐 세어 본들 무엇하리오만.  이 밤에 정녕 잠들 수 없는 것은,  입술을 깨물며 피를 뱉으며  무슨 벌이라도 받고 싶어지는 것은......  역겨움에 낭비한 젊음도, 애탐에 지쳐 버린 사랑도,  서서 우는 문둥이도 아니올시다.  별을 닮은 네 눈이 위태롭다고  어머니의 편지마다 한때는 꾸중을 받아야 했읍니다.  차라리 갈수록 가도 가도 부끄러운 얼굴일진댄  한밤중 이 어둠 속에 뉘우침을 묻어 버리고.  여기 예대로의 풍토를 그리워하면서  무척도 새로 돋아나고 싶은 보람을 딩굴며  잠들지 못하는 이 밤이 깊어만 갑니다.  ~~~~~~~~~~~~~~~~~~~~  춘인(春因)  꽃샘바람은  꽃이 시새워서 분다지만.  초근목피에 주린 배를 채우면  메슥 메슥 생목만 올라  부황증(浮黃症)에 한속(寒粟)이 춥다.  노고지리는  포만증(飽滿症)을 새기느라  진종일 울어야 하지만  아예 배고픔을 내색않는 문둥이는  얼마나 울어야 하는 이야기인가.  굶주림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  아지랭이는  아지랭이는  비실 비실 어질병만 키운다.  ~~~~~~~~~~~~~~~~~~~~  하운(何雲)  나 하나 어쩔 줄 몰라 서두르네  산도 언덕도 나뭇가지도.  여기라 뜬 세상  죽음에 주인이 없어 허락이 없어  이처럼 어쩔 줄 몰라 서두르는가.  매양 벌려둔 저 바다인들  풍덩실 내 자무러지면  수많은 어족(魚族)들의 원망이 넘칠 것 같다.  썩은 육체 언저리에  네 헒과 균과 비(悲)와 애(哀)와 애(愛)를 엮어  뗏목처럼 창공으로 흘러 보고파진다.  아 구름 되고파  바람이 되고파  어이없는 창공에  섬이 되고파.  ~~~~~~~~~~~~~~~~~~~  한강수(漢江水)  한 오백년  한강수  서울을 흘러  노래보다는  헐벗은 어머니의  눈물이 많은 푸른 한강수.  오백년  오천년  종적도 없이  종적도 없이  흘러만 가.  한가람 시도 없이  아직도 역사 바깥으로만  못다 흐른 물 천리  겨레에 흐르는 메마른 천리 물.  물에 뜬 인생이라  강물은 흐른다  세월은 흐른다.  ~~~~~~~~~~~~~~~~~~~~  한여름밤의 빙궁(氷宮)  한여름밤의 빙궁(氷宮)은 기적  홀리데이·온·아이스 쇼  음악은   불꽃빛 조명  무희는 춤추다 숨끊기는 신음을  하르르 하르르 한발 딛고  빙글빙글 도는 피루에트가  영육(靈肉)을 활활 불사르는 분신(焚身) 불사조  장엄한 시(詩). 움직이는 시  이어 군무(群舞)는  은어 은어떼가 무리져 흘러가는  빙상의 발레  뭉게뭉게 오르는 흰 빙무(氷舞)는  영원으로 가는 환상  휘황찬란한 조명이  빙상에 교차하는 추상적 영상은  해프닝 전위예술  움직이는 미술 룸직이는 시  한여름밤의 빙궁은  우의등선(羽衣登仙)할려는 천일야(千一夜)  ~~~~~~~~~~~~~~~~~~~~  해변에서 부르는 파도의 노래  바다 !  억겁(億劫)을 두고  오늘도 갈매기와 더불어 늙지 않는 너의 청춘,  말 못할 가슴속 신음 같은  파도 소리  한시도 쉴 새 없이 처밀고 처가는  해식사(海蝕史).  바다의 꿈은 대기 만성(大器晩成)인가  영겁을 두고 신념의 투쟁인가  바다는 완성한다 !  욕망이 침묵하는 그 속에서  황혼이 깃들어  저녁 노을의 빛·빛·빛  변화가 파도에 번질거린다.  ~~~~~~~~~~~~~~~~~~~~  향수  내 고향 함흥은  수수밭 익는 마을  누나가 시집갈 때  가마타고 그 길로 갔다  내 고향 함흥은  능금이 빨간 마을  누나가 수줍어할 때  수수밭은 익어갔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  흉월(凶月)  문둥이 쉬 문뒹이야  육두(肉頭) 세상 달이 떴네  우린 언제 사람이였나  평생 유걸(流乞)하다 죽는 거지  장타령 버꾸놀음  품바 품바 잘 하네  문둥이 쉬이 문뒹이야  남의 세상 달이 떴네  지옥의 도깨비들  죽음을 잔치하네  장타령 버꾸놀음  품바 품바 잘도 하네.  ~~~~~~~~~~~~~~~~~~~~  - 한하운(韓何雲): (1919 ~ 1975)  본명: 한태영(韓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생  이리농림학교, 북경대 축산학과 졸업. 1949년 "신천지"에 "한하운 시초" 등을 발표하고 등단.  자신이 고통을 겪었던 나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위하여 사회사업에 힘썼다.  그의 시는 대체로 자신의 개인사와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나병 환자로서의 쓰라린 체험에 근거한 자아인식이 나타나 있는 경우가 많다.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는 그의 개인적 이력을 살피는 것이 특별히 요구되지는 않는다.  그가 나병환자였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한편, 운명과 정면 대결함으로써  오히려 영혼의 밑바닥으로부터 울려오는 소리를 전할 수 있었다.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정음사 1949  시집 인간사 1955  시집 인간사 1956  시집 1962  시집 문화교육출판사 1962  시집 무하출판사 1964  시집 삼중당 1975  시집 한림출판사 1979  시집 지문사 1983        
337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李壽福 - 봄비 댓글:  조회:2738  추천:0  2015-12-15
  봄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항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   * ​시새워 벙글어진 : 다투어 피어날 * 향연(香煙) : 향이 타며 나는 연기​​   1955년에 [현대문학]에 발표하였으며, 1969년 이수복 시인의 시집 [봄비]에 수록된 표제시이다. 이 시는 봄의 아름다운 정경을 그리면서 이를 배경삼아 돌아오지 않는 님에의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표면상으로 볼 때는, 머지 않아 다가올 아름다운 봄날의 모습에 대한 상상일 뿐이지만, 1연에서 보이는 '서러운 풀빛'이라는 표현이 그다지 단순한 봄날의 정경 묘사로 이루어진 시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봄날에 돋아나는 풀빛이 왜 서러운 것인가? 그것은 그의 마음에 어떤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제4연에서 확인되는데, 봄이 오면 따뜻한 날씨와 함께 대지 위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봄의 상징인 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향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비유함으로써, 그의 임은 이 세상에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는 봄의 아름다움이 아름답고 기쁘게만 여겨지지는 않는 것이다. 반면에 2연과 3연에 나오는 종달새와 꽃밭의 풍경은 그야말로 조금도 그늘도 없이 밝고 아름다운 봄의 모습 그대로이다.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 2,3연도 결국 4연의 내용확인을 통해 서글픈 봄풍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시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봄풍경이라는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푸르른 빛의 연속적인 이미지가 '서러움'의 정서를 계속 심화시키면서 마지막에 '죽음'의 의미로 집약되고 있다. 이 시의 애상은 시적 자아의 '죽음'에 대한 의식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봄비 내린 뒤에 더욱 더 푸르게 짙어 갈 자연 풍경을 바라보면서 시적자아는 '죽음'으로 그 인식을 옮겨 가는데, 봄비를 받아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자연물에서 생명이 아닌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이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담백하고 소탈한 자신의 인생과 시를 통해 겸손하고 고결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해 보여준이수복은 박재삼(朴在森), 이동주(李東柱) 등과 함께 1950년대 한국의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두산백과)   * 이 시는 봄비를 보며 곧 다가올 봄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대지를 적시는 봄비를 바라보며 비가 그치면 강나루 긴 언덕의 풀빛이 더욱 푸르러지고 종달새가 노래하며, 처녀애들의 화사한 얼굴과 꽃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아툴 것이라고 그려 본다. 여기에서 화자가 그리는 강나루 언덕, 보리밭의 종달새, 꽃밭과 처녀애는 실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 화자의 마음 속에 있는 것, 즉 관념화된 대상일 뿐이다. 이것은 임과 이별한 화자가 겨우내 고통스러워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봄의 생명력을 지닌 풀빛이 서러운 것이나, 아지랑이가 임 앞의 향연과 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는 봄의 생명력에 대한 묘사를 통해 임과의 이별로 인한 애상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서 유사한 모티브의 한시 '송인'(정지상)과 차별점을 지닌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1924년 전라남도 함평(咸平)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예과(豫科)를 마쳤다. * 1954년 서정주(徐廷柱)에 의해 시 이 [문예]에 추천되고, 1955년 , 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 (1956), (1957), (1958), (1958), (1958), (1959) 등의 작품을 [현대문학]에 발표했다. * 1957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1963년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해 1965년 졸업했다. * 순천고교와 전남고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병행하며 작품활동을 한 시인은 19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 [봄비](1969)를 남겼다. 전라남도 문화상(1955)과 현대문학상 신인상(1957) 등을 수상했다. 2010년 유고시와 소설 등을 모아 [봄비와 낮달]을 출간했다. ==========================================================================     모란송1               /이수복     아지랑이로, 여릿여릿 타오르는 아지랑이로, 뚱 내민 배며 입언저리가, 조금씩은 비뚤리는 질항아리를.....장꽝에 옹기옹기 빈항아리를 새댁은 닦아놓고 안방에 숨고 낫달마냥 없는듯기 안방에 숨고. 알길없어 무장 좋은 모란꽃 그늘..... 아떻든 하늘을 고이 다루네. 마음이 뽑아보는 우는 보검에 밀려와 보라치는 날빛같은 꽃 문만 열어두고 한나절 비어놓은 고궁 안처럼 저만치 내다뵈는 청자빛 봄날       1958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시이다. '아지랑이로'는 어휘의 회기이다. 1행에서 한번 등장했던 아지랑이'는 의미의 심도가 '여릿여릿 타오르는'의 수식을 받아 더욱 깊어진다. 두개의 큰 맥락은 텍스트 전체를 구성하는 비어 있는 항아리와 비어있는 하늘이며 이 두개의 구문은 모란꽃의 이미지를 투사하기에 적합한 의도로 시 텍스트에서 작용한다. 즉 이 두개의 구문에 의해 모란꽃이라는 상황모델은 명세화 된다. (우리시대의 시인연구)   ​ ◈ ​동백꽃                       /이수복   동백꽃은 훗시집간 순아누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 눈녹은 양지쪽에 피어 집에 온 누님을 울리던 꽃. 홍치마에 지던 하늘비친 눈물도 가널피고 씁쓸하던 누님의 한숨도 오늘토록 나는 몰라...., 울어야던 누님도 그리움을 울리던 동백꽃도 나는 몰라 오늘토록 나는 몰라...., 지금은 하이얀 촉루가 된 누님이 매양보며 울던 꽃 빨간 동백꽃     1954년 [문예]에 발표한 시이다. 동백꽃과 누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아닌 실행가능화의 관계에 의해 설명이 가능한데, '동백꽃'은 누이가 눈물을 흘린다'는 행위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되,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은 아니다. 이 택스트의 상황 모델은 동백꽃인데 동백꽃을 상세화 하기 위한 구문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 몇가지의 어휘항목들로 집약할 수 있다. 먼저 '매양 울던 꽃'의 상황은 중간의 점검과정을 필요로 한다. 시적화자는 동백꽃을 보면 왜 항상 '눈물'이라는 정서가 유발되는지가 동백꽃 자체에 들어 있는 어휘항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동백꽃과 눈물은 그 정보성에 있어서 아무런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휘 항목에서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고 동백꽃이 아니라면 동백꽃이 피어있는 정황 또는 장소를 탐색해 보아야 한다. 텍스트 탐색 방향은 2연으로 넘어가게 되고 2연에서 밝혀지는 '동백꽃이 피어있는 장소' 즉 '집'이라는 공간에 의해 동기화 된다. 시집간 순이 누님이 당면하게 된 곳은 탈고향의 정서일 것이며 거기에서 순이 누님은 '집으로 대표되는 고향'의 정서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순이 누님의 새로운 환경인 '타향'은 '고향'의 집을 더욱 그립게 만들었을 것이고, 집에 돌아온 순이 누님을 반기는 것은 눈 녹은 양지쪽에 피어 있는 동백꽃이다. 이 텍스트 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붉음'의 시각적 이미지와 연결된 눈물인데, 누이의 눈물을 붉음의 이미지로 환원시켜 표현한 것은 서러움의 강도를 예시하는 것이다. '홍치마에 지던 눈물'과 씁쓸하던 누님의 한숨'을 '나는 모르는 채 세월을 보내야 했던 회한의 정서가 집약되는 구문은 마지막 연이다. 동백꽃을 둘러싸고 있는 정황은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정조이며, 이정조는 서러움이 기반이 되고 있고 이 서러움의 색깔은 피눈물의 이미지를 간직한 '붉은 색'이다. 투명한 눈물과 또 다른 붉은 눈물의 이미지를 '동백꽃'이 표현하는 데 있어, 텍스트 생산자는 여러가지 정황을 의의의 연속성을 기반으로 결속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시대의 시인연구)   ​     ​   광주시 양림동 사직공원에 있는 이수복 시인 시비.   1994년 2월에 광주직할시에서 건립하였으며 조각은 문옥자, 글씨는 정광주 작품.              시비 위에는 봄비를 맞고 싹터 오르는 새싹이 보이네요   이수복 시인은 전남 함평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으며   수피아여고, 광주일고, 전남고, 주암고에서 근무.   ========================================================                                   상(像)․상(想)의 시학                                    -이수복론                                                                                        1. 서론    한 시인의 생애를 생각할 때, 이수복은 극히 보기 드문 시인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온갖 현실적 영광을 한 몸에 받았고 받고 있는 미당(未堂)은 논외라 하더라도, 생존시에 받지 못한 가치를 죽어서나마 새롭게 조명받게 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등단이후 죽기까지 줄기차게 시를 써왔던 이수복에게 시인이 가지는 명예는 사치에 불과하다.1) 그렇다고 이수복이 현대시문학사에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갖추어야할 외부적 배경이 초라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는 학연과 인맥과 문단매체 모두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1950년대 문단은 서울문리대 출신들의 제스처가 통하던 시대이다.2) 이일, 오상원, 홍사중, 김정옥, 박이문 등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김동리와 황순원을 벗어나 1920년대 「해외문학파」를 방불케한 외국문학 수입의 전초기지였다. 그들의 학연이 60년대 ‘현대시 동인’ 들과 이어져 한국문단의 한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수복은 1944년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여 1946년 서울대학교 예과를 졸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그가 서울대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서울문리대 출신들의 문학 풍토에 편승했더라면 오늘날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전통시인으로 각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정주는 정부다3). 이 말은 그의 언어가 가지는 독창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문단에서 차지하는 그의 영향력을 여실히 증명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수복은 그러한 서정주 정부의 사람이다. 이수복과 서정주의 인연은 각별하다. 한국 전쟁 중 서정주는 광주에서 지낸다. 이 때 서정주가 사경을 헤매며 병마에 시달릴 때 그를 간병하고 돌봐준 사람이 김현승과 이수복이다.4) 이러한 사적 인연 이후 1954년 이수복은 정식으로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게 된다.5) 이러한 인맥은 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적 자질을 떠나 시인 이수복에게는 가장 큰 시적 자산일 수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문인들이 대거 월북하거나 납북된 이후 남한 문학계는 새로운 문학지 출신들이 문단의 중심세력으로 급속하게 성장한다. 《현대문학》은 이들의 산파역 중 하나이다.6)이처럼 권력화한 매체를 통해 이수복은 내내 작품을 발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복을 시인으로서 기억하거나 누군가 그의 작품을 연구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시가 각광받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그의 고립적 삶의 태도이다. 그는 평생 광주를 벗어나지 않은 지역성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서정주와 관계하여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현대문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성을 보였다. 지역적 고립은 50~60년대를 풍미했던 외래 편향적 지적 풍토와 현실 인식에서 그를 제외시켰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체의 편협성은 그를 전통적 서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루한 시인으로 각인시켰을 것이다.  비록 이수복이 한 권의 시집만을 남기고 있지만, 시집에 실린 34여편과 묶이지 않은 나머지 80여편은 간단히 이해될 시는 아니다. 그의 시는 50~60년대 어떤 시인보다 난해하며 감각적이다. 그는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해외 원전을 통해 지적 영역을 끊임없이 넓힌 독서광이었다7). 뿐만 아니라 그는 전통적 서정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제 이수복 시 연구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하면서, 본고는 그의 생애와 시의 고립성으로부터 화두를 꺼내고자 한다. 그것은 자신이 소유한 외적 배경을 십분 활용하지 않고 오히려 소박하게 자신의 시적 세계를 이끌 수 있었던 그 시적 원동력의 기원을 규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수복은 한국적 서정의 정통성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충실했던 시인의 전범이라 할 것이다.   1) 문학사에서 이수복을 언급한 것은 김준오가 유일한 것 같다. 그는『한국현대문학사』(현대문학, 1995년, 386면)에서 이수복을 1960년대에 전통적 세계와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파로서 활동을 계속한 부류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 외 이수복에 대한 언급은 전무한 형편이다. 2) 고  은,『1950년대』(민음사, 1973), 354~364면 참조. 3) 고  은,「서정주 시대의 보고」, 《문학과 지성》, 1973. 봄호. 181면 참조. 4) 서정주,『미당자서전2』(민음사,1994), 333~335면 참조. 5) 1954년 《문예》3월호에 〈동백꽃〉을, 1955년 《현대문학》3월호에 〈실솔〉을, 6월호에 〈봄비〉를 추천받는다. 6) 윤지영, “1950~60년대 시적 주체 연구”, 서강대학교, 2002, 118~134면 참조. 7) “그는 독서광이었다. 어느 일요일 날 내가 찾아갔을 때 그는 셰익스피어의 햄렛을 읽고 있었다. 책은 영국 현지에서 최근에 출판된 것을 손철 선생이 사온 것이었다. 손철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수복은 그 원전을 완독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범대순, 「목요칼럼-범대순의 세상보기」,《광주타임스》, 2001. 3. 8) [출처] 이수복론|작성자 새 들    
336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박인환 - 목마와 숙녀 댓글:  조회:4316  추천:0  2015-12-15
목마와 숙녀 (문화방송....  가수 박인희 시낭송)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져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의 초기시는 해방 후 외국군대의 진주와 좌우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좌익에 가까울 정도의 진보적인 색깔을 드러낸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 박인환의 시는 전쟁과 살육을 용인할 수도, 용인할 수도 없는 고뇌 속에서 비극적인 선택을 강요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다는 양심적 가책은 결국 전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우익 쪽으로 선회하게 한다. 이러한 입장은 박인환 뿐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대부분의 남쪽 사람들의 경우에도 해당될 것이다.  전후 박인환의 시는 극심한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주의적 양상을 보여준다. 삶의 터전은 무너지고 전쟁에 나갔던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쟁이 민족의 통일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준 것도 아니다. 전쟁은 어느 편이건 패배의 상처만 남긴 채 막대한 인명의 손실과 천만에 가까운 이산가족과 더불어 끝나고 만 것이다. 희생자들의 죽음에 값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이러한 전쟁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은 당시 휴전회담 반대라는 거대한 민족적 분노로 그 좌절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를 생각할 때 허무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은 단지 민족해방과 자유수호라는 명분으로 색칠해진 살육, 운명의 장난에 불과했을 뿐인 것이다.  남아있는 것은 폐허와 허무의식, 그리고 모멸적인 삶 뿐이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삶이다. 여기서 그의 의식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않고 허무적 센티멘탈리즘에 빠져들게 된다.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서 자행된 무수한 살육과 파괴, 그것은 인간적인 의지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상황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나약성을 말해줄 뿐이며 그것은 자신을 포함한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노리개가 된 인간 자체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얻은 것 없이 단순한 살육과 파괴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시인이 추구해왔던 인간적인 가치와 인간성에 대한 신뢰에 깊은 상처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전쟁 전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고 그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박인환에게는 불가능했던 것처럼 보인다. 전쟁 기간 중의 비인간적 체험 때문에 다시는 미래를 꿈꿀 수 없고 과거에 대한 회상만이 가능한 것이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과거의 청춘의 추억만이 박인환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박인환의 죽음 직전에 씌어진 것으로 이야기되는 , 등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 시에 드러나는 것은 인생에 대한 허무와 과거에 대한 회고적 센티멘탈리즘이다. 이들 시가 깊은 천착을 통해 적극적으로 현실을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박인환을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의지의 부족에 원인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 역시 박인환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전쟁 때문에 고통받고 전쟁을 마음 속에서 합리화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의 비극을 보게 된다.  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 형식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애도의 밑바닥에는 전후 박인환의 인생에 대한 허무와 회의가 짙게 깔려 있다. 박인환은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허무감을 제시하고 그것을 전쟁으로 인한 사랑과 인생, 문학의 죽음이라는 우리 현실에 비유적으로 관련시키고 있다. 버어지니아 울프가 절망적인 현대적 상황 때문에 인간에 대한 모든 가치와 신뢰를 상실하고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듯이 시인의 현실 역시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만큼 절망적이며 이는 곧 전쟁으로 인한 가치상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단락은 버어지니아 울프의 삶의 지향과 절망에 대한 우리의 이해로 이끌어간다. 각 구절은 "―해야 한다"라는 당위를 나타내는 종결어미로 끝나고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모든 가치가 훼손된 절망적인 상황을 다시금 인식시킴으로써 다시는 그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 시인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 처량한 목마소리,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가 서로 어울려 하나의 등가체계를 형성하며 진지하게 살고자 했지만 페시미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인생을 버린 늙은 여류 작가와 같은 삶의 포기에 도달치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녀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처량한 목마소리를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들어야 하며 동면을 거쳐 비로소 새로운 청춘을 찾은 뱀처럼 눈을 뜨고 인생의 쓰디쓴 술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은 인생의 통속성과 죽음의 무의미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처량한 목마소리, 쓰러지는 술잔 소리와 대비되어 인생의 허무와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에 대한 서러움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동시에 전후 박인환의 인생에 대한 절망감, 허무감을 잘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인생은 통속적인 것인데 자살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지만 실제로 절망 속에서 끝내 자살로 삶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류작가와 우리 전후의 절망적인 삶이 대비되어 있는 것이다.  박인환은 시집 후기에서 현대를 불안과 위기의 시대로 파악하고 반인간, 반생명적인 현대문명의 산물들로부터 진정한 시민정신, 즉 시의 원시림을 추구하려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때 시민정신이란 폭넓은 개념으로 제반 비인간적인 현대문명의 산물들과 대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크게 비인간적인 것과 대립되어 순수한 인간성, 인본주의의 추구와 신식민지적 음모와 대립적으로 민족의 주체적인 삶의 추구를 의미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인본주의적 입장은 현대의 모든 가치, 사상의 위기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든 사상과 교리가 결함을 노출하고 위기를 드러내는 현대 사회에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의 본능과 체험 뿐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 대한 입장 역시 이러한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삶과 이반되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의 추종이나 현실과 유리된 복고적인 감상, 토속주의를 거부하고 순수한 본능과 체험에 의지하여 현실을 파악하고 현대문명의 여러 모순과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인환의 시는 몇차례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6.25 이전의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그의 순수한 생명과 인간적 가치에 대한 추구, 그리고 민족 현실에 대한 관심이다. 순수한 삶과 인간적 가치에 대한 추구는 문명적인, 비인간적인 것과 순수한 인간적 욕구나 생명의지, 반항 등의 대립을 통해 제시되며 민족적 현실에 대한 관심은 해방직후 외세의 진주로 인한 신식민지적 문화의 침투와 민족문화 내지는 민족 정신의 대립을 통해 나타난다.  6.25 중의 그의 시는 주로 전쟁의 파괴와 살육에 대한 절망, 그리고 전쟁 상황 속에서의 실존적 선택의 문제가 중심이 되며 전후 박인환의 시는 살육과 파괴에 복종한 인간성에 대한 절망으로 인한 좌절과 허무감,그리고 센티멘탈리즘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반생명적인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원시림, 즉 인간성의 탐구라는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박인환은 결코 현실과 무관한 딜레탕트도, 전형적인 속물주의자도 아님을 알 수 있다.오히려 박인환의 시는 초기시에서부터 현실에 대한 강한 관심을 보여주며 전쟁과 관련된 시들은 파괴와 살육으로부터 인간적인 것을 지키려는 한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절망, 그리고 비극적 선택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시 이데올로기 편향의 전쟁시들 가운데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것이다.  전후의 감상적 허무주의 역시 전쟁을 합리화할 수 없었던 50년대 가혹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흔히 지적되는 것처럼 소녀적인 감상으로 처리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나타난다.  한편 그의 시는 초기 시에서 후기시까지 전체 변화과정을 통해 초기의 진보적 경향으로부터 반공적인 이념으로 선회하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변화는 전쟁이 강요하는 비극적인 선택과 관련된 것으로 우리 사회의 분단 고착화 경향을 반영해준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자기 점검     윤성택        ◦ 톡특한 문체 ( ⇒ 내 시에 진정 독특한 그 무엇이 있는가 ) ◦ 원활한 이미지 전개 ( ⇒ 하나의 문제를 중심축(통일성)으로 이미지를 전개하였는가 ) ◦ 절실한 내용의 진실성 ( ⇒ 절실한 내용을 진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 ◦ 인식과 체험 중심 ( ⇒ 관념 대신 인식, 습관 대신 체험 중심 / 관념의 서술 지양 ) ◦ 정서와 인식의 조화 ( ⇒ 정서에 비해 의식이 너무 앞서지 않았는가 ) ◦ 시적 표현 ( ⇒ 산문(에세이)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는가 ) ◦ 시적 진실성 추구 ( ⇒ 재주를 경계한 채 하나의 진실을 의젓하게 이끌어가고 있는가 ) ◦ 선명한 주재의식 ( ⇒ 주재의식이 선명해야 거기에 걸맞는 표현상의 기교나 독자성이 나타남 ) ◦ 생략 + 상징어 + 은유법 = 좋은시 ( ⇒ 생략된 표현, 상징적인 언어, 은유법 = 좋은시 ) ◦ 적절한 묘사 ( ⇒ 시는 설명이 아니고 묘사임. 지나치게 설명적이지 않은가 ) ◦ 튼튼한 구조 ( ⇒ 표현 하나하나에 긴장관계를 유지하면 구조적으로 튼튼한 시가 형성됨 ) ◦ 관념어 남용 ( ⇒ 일상적인 관념어의 남용이 흠이 되지는 않는가 ) ◦ 소재의 승화 ․ 의미 확대 ( ⇒ 소재에 대한 승화(의미 확대)는 잘 되었는가 ) ◦ 상념 ․ 감상주의 ( ⇒ 포장된 상념, 자기 정서에 빠지지 않았는가 ) ◦ 군말 삭제 ( ⇒ 공연한 군말을 붙이지 않는가 ) ◦ 공적인 언어 승화 ( ⇒ 개인적인 체험을 공적인 언어구조로 승화시켰는가 ) ◦ 소재를 구체적이고 깊이 이해 ◦ 역동적 속도감 유지 ( ⇒ 알맞은 속도감, 역동적 이미지 처리 ) ◦ 무리한 비약 ․ 난해시 ( ⇒ 무리한 비약이 있거나 난해하지 않은가 ) ◦ 지나친 압축 ․ 생략 ( ⇒ 지나친 압축, 생략, 경한(가벼운) 시류는 없는가 ) ◦ 불필요한 표현 ( ⇒ 마음의 부피가 엷어 부질없는 포즈를 취하지는 않는가 ) ◦ 명료성 ( ⇒ 지나치게 서술하여 명료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 ◦ 불필요한 언어 ․ 한자 남용 ( ⇒ 불필요한 언어 반복과 한자 남용 지양 )             ◦ 나의 시에서 진정 독특한 그 무엇이 있는가? ◦ 하나의 문제를 중심축으로 통일성 있는 이미지를 전개하였는가? ◦ 절실한 내용을 진실성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 관념의 서술 대신 구체적인 인식을, 습관 대신 체험을 중심으로 적었는가? ◦ 정서에 비해 인식이 너무 앞서가지 않았는가? ◦ 산문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는가?(시적 표현 중심) ◦ 재주를 경계한 채 하나의 시적 진실성을 의젓하게 추구하고 있는가? ◦ 선명한 주재의식으로 거기에 걸 맞는 표현과 독창성이 있는가? ◦ 생략된 표현, 상징적인 언어, 은유법을 잘 구사하였는가? ◦ 시는 설명이 아니고 묘사임. 지나치게 설명적이지 않은가? ◦ 표현 하나하나에 긴장관계를 유지하면 구조적으로 튼튼한 시가 됨. ◦ 일상적인 관념어 남용이 흠이 되지는 않는가? ◦ 소재를 잘 승화시켜서 의미를 부드럽게 확대하였는가? ◦ 허위로 포장된 상념, 자기 주관적 감사에 빠지지 않았는가? ◦ 공연한 군말을 붙이지 않는가? ◦ 개인적인 체험을 공적인 언어로 승화시켰는가? ◦ 소재를 구체적이고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 ◦ 알맞은 속도감을 유지하며 역동적으로 이미지를 처리하였는가? ◦ 무리한 비약, 너무 난해하지는 않은가? ◦ 지나친 압축, 생략, 경한(가벼운) 시류는 없는가? ◦ 불필요한 표현(포즈)을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 지나치게 서술하여 주재의 명료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 불필요한 언어 반복, 한자 남용하지는 않은가?   ==================================================   세월이 가면 / 박인환                                      51. 목마와 숙녀 / 박인환                                         박인환 시인 연보   1926년.8.15. :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 159번지에서 박광선과 성숙형사이의 4남2녀중 맏이로 출생(본관 : 밀양)   1933년(8세) :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36년(11세) :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으로 이사 후 다시 종로구 원서동 134번지로 이사(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편입) 1939년(14세) : 3월18일 덕수공립보통학교 졸업, 4월 2일 경기공립중학교(5년제) 입학  1940년(15세) : 원서동 215번지로 이사   1941년(16세) : 3월16일 경기공립중학교 자퇴, 한성학교 야학을 다님.    1942년(17세) :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   1944년(19세) : 명신중학교 졸업.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 입학                       (당시에는 의과, 이공과,농수산과 전공자는 징병에서 제외됨)  1945년(20세) : 8.15 광복 후 평양의학전문학교 학업을 중단하고, 종로3가 2번지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 개업                       (마리서사는 헌책방으로 많은 문인들이 교유하는 장소가 됨)    1946년(21세) : 12월 '국제신보' 주간 송지영의 추천으로 『거리』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그러나 국제신보의 전신인 산업신문을 1947년에 창간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확인이 필요함)   1948년(23세) : 입춘을 전후하여 '마리서사' 폐업. 봄에는 덕수궁에서 이정숙과 결혼                       김경인,양병식,김수영,임호권,김명욱등과 함께 동인지"신시론"제1집을 발간,                       자유신문사 입사,  시『나의생애에 흐르는 시간들(세계일보)』", 『지하실(민성)』과                       산문『아메리카의 영화시론(신천지 5월호)』,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신천지 10월)』등을 발표                       12월 8일 세형(장남) 출생   1949년(24세) : 김경린,김수영,임호권,양병식 등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로 시민들의 합창' 발간                       7월 1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무부 친안국에 체포되었다가 석방 후 경향신문 입사                       동인 중 김수영, 양병식, 임호근이 빠지고 이한직, 조향, 이상로 등이 새로 가담한 '후반기' 동인 결성    1950년(25세) : 9월25일 세화(딸) 출생, 6·25 발발 후 9.28 수복때 까지 지하생활을 하다가 12월8일 대구로 피난   1951년(26세) : 5월에는 육군 소속 종군 작가단에 참여. 10월에 경향신문 본사가 부산으로 내려오자 부산에서 기자 생활                       부산시 광복동 골목에 두 평짜리 방을 얻어서 피난 생활   1952년(27세) :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특집에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이라는 산문을 기고(6월16일)                        경향신문사 퇴사 후 대한해운공사 입사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어떠한 날까지』,『부드러운 목소리로이야기할때』등을 씀    1953년(28세) : 3월 '후반기' 동인과 함께 이상(李箱) 추모의 밤'을 열고서 시낭송회 개최, 5월31일 세곤(차남) 출생                       휴전협정 타결 7월중순경 서울에 옛집으로 돌아옴, 환도 직전 부산에서 "후반기" 해산 결정                       김규동, 이봉래, 이진섭, 오종식, 허백년, 유두연 등과 함께 ' 영화평론가협회' 발족    1955년(30세) : 3월 5일 대한해운공사의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 여행(3월 22일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항 도착)                       4월 10일경 귀국 후 『19일간의 아메리카』를 조선일보에 기고(5월13일 및17일)                       10월 15일 대한 해운공사 퇴사 후 '박인환 선시집' 출간. 아시아재단에서 주관하는 '자유문학상' 후보에 오름   1956년(31세) : 3월 17일 '이상 추모의 밤' 개최. 3일간의 폭음으로 3월 20일 저녁 9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9월 19일 구리시 망우리 묘소에 문우들이 박인환 시비 건립   1976년(20주기) : 장남 세형이 시집 '목마와 숙녀(근역서재)' 출간   1982년(26주기) : 김규동, 김경린 등이 추모 문집 '세월이 가면' 출간   1986년(30주기) : '박인환 전집(문학세계사)' 출간   2000년(44주기) : 인제군청, 내린문학회, 시전문지 시현실이 공동주관으로 '박인환문학상' 제정   2005년(49주기) :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 박인환(문학사상사)" 출간   2006년(50주기) : 문승묵이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 박인환 전집(예옥)' 출간                        맹문재가 '박인환 깊이 읽기(서정시학)' 출간       
335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서정주 - 국화옆에서 댓글:  조회:4270  추천:0  2015-12-14
서정주(徐廷柱, 1915 ~ 2000)     폰트확대| 폰트축소| 공유하기|   인쇄 미리보기| 문의 원본사이즈보기   생애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 출생 전라북도 고창 분야 문학 작가 시인. 전북 고창 출생. 호는 미당(未當). 1936년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으로 인간의 원죄 의식을 주로 노래하였으나, 후에 불교 사상과 샤머니즘 등 동양적인 사상을 노래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 “화사집”(1941), “신라초”(1960), “질마재 신화”(1975) 등이 있다. 작품 자화상 이 시는 시인이 초기에 쓴 시로 강렬한 생명 의식과 원시적 관능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제목 ‘자화상’이 보여 주듯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자아의 존재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종의 아들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 왔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이런 삶을 ‘바람’에 비유한다. 이는 바람처럼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뿌리 뽑힌 삶을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삶의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화자에게 더욱 굳세게 살아갈 힘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찬란히 틔어 오는 아침에 그의 이마에 얹힌 ‘시의 이슬’로 나타난다.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는 ‘시의 이슬’은 삶의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얻은 정신적 · 예술적 결정체로 볼 수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상문/(화작) 지학 견우의 노래 이 시는 일 년에 단 하루, 칠월 칠석에만 재회하는 ‘견우직녀’ 설화를 배경으로 하여, 화자인 견우가 청자인 직녀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이 시에서 전제하고 있는 바는 견우와 직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이별이다. 견우는 이러한 운명적 이별을 수용하고 있다. ‘물살’, ‘바람’, ‘은핫물’과 같은 장애물은 단순히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더욱 성숙한 사랑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로 형상화되어 있다. 또한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이별의 아픔을 수용할 때 사랑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견우는 암소를 먹이고 직녀는 비단을 짜며 만날 날을 기다림으로써 만남의 순간을 위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설화의 견우와 직녀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수록교과서 : (국어) 천재(박영목) 춘향유문(春香遺文) - 춘향의 말 3 고전 소설 ‘춘향전’을 모티프로 삼아 새로운 시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이 시는, ‘춘향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세 작품 중 마지막 작품이다. 제목의 ‘유문(생전에 남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옥에 갇힌 춘향이 죽음을 앞두고 이몽룡에게 남긴 유서의 형식으로 각색되어 있는데, 시적 화자인 춘향은 세속적 차원을 넘어선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1~2연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화자 춘향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상황이 제시되고 있다. 3~4연에서는 화자가 소망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3연의 ‘저승(=죽음)’, 4연의 ‘천 길 땅 밑(=저승)’과 ‘도솔천(兜率天)의 하늘(=극락)’ 조차 결국은 도련님의 곁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은 시간과 공간,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선 화자 춘향의 영원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5연에서 화자는 영원한 사랑 속에서 임과의 새로운 만남을 꿈꾼다. 이러한 화자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불교의 윤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검은 물 → 구름 → 소나기’로 연결되는 자연 현상을 통해 이러한 불교적 상상력을 구체화하고 있다. 화자는 ‘천 길 땅 밑’을 흐르는 ‘(검은) 물’을 거쳐 ‘도솔천의 하늘’을 나는 ‘구름’이 되고, 그 ‘구름’이 다시 ‘소나기’가 되어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에 비를 퍼붓는, 오랜 윤회의 과정을 통과하여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기에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천재(정재찬)/(국어) 교학 국화 옆에서 이 시는 국화가 개화하는 자연 현상과 국화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성숙한 삶의 아름다움과 연관지어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1, 2, 4연에서는 한송이 꽃이 피어나기까지의 아픔과 온갖 어려움을 노래한다. 생명 탄생의 힘든 과정을 상징하는 봄에 처절하게 우는 소쩍새, 여름의 천둥, 가을밤의 무서리는 화자 자신의 잠 못 이룸과 더불어 한 송이 국화꽃과 신비스런 인연을 맺으며, 국화꽃이 피어나는 데 영향을 미친다. 3연은 이렇게 피어난 국화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국화의 아름다움은 젊음의 시절을 다 지나 보내고, 거울 앞에서 자신을 돌이켜 보는 누님의 모습과 일치된다. 이 부분에 나타난 누님의 모습은 그리움, 아쉬움 등과 같은 온갖 젊음의 시련을 거쳐 지니게 된 성숙한 삶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국화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곧, 이러한 성숙한 삶의 아름다움인 것이며, ‘국화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화자가 지향하고자 하는 삶의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미래엔/(국어) 신사고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이 시는 외할머니의 집 뒤안에 있던 툇마루를 매개체로 하여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의 추억과 외할머니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앞부분에서는 외할머니의 집 뒤안에 있던 먹오딧빛 툇마루의 의의가 제시된다. 일상적 삶을 공유하며 세대 간의 교감이 이어져 오는 공간이라는 툇마루의 상징적 의미는 ‘손때’라는 시어를 통해 형상화된다. 툇마루를 문지르는 행위는 자연스레 툇마루가 번질번질하게 닦여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툇마루를 거울에 비유하여 화자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툇마루는 화자의 어린 시절 모습을 비추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뒷부분에서는 툇마루에 얽힌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툇마루에서 외할머니가 주신 오디 열매를 먹으며 숨을 바로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한 장의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어린 시절 화자의 얼굴이 나란히 비치는 장면은 세대 간의 교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시의 주제 의식을 구현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국어) 비상(우한용) 신선 재곤이 이 시는 앉은뱅이인 ‘재곤이’를 보살피는 ‘질마재’ 공동체 구성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그린 작품이다. 장애를 가진 ‘재곤이’를 배려하고 끼니와 추위를 견딜 옷과 불을 늘 뒤대어 주는 마을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재곤이’가 없어진 이후 천벌을 받을까 봐 걱정을 한다. 질마재 마을의 인정이 바닥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선도에 지식이 있다는 ‘조 선달’ 영감이 ‘재곤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신선살이’를 하러 하늘에 갔다며 마을 사람들의 긍정적 인식을 이끈다. 이러한 ‘조 선달’ 영감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재곤이’의 죽음을 ‘신선살이’를 간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는 바람직한 귀결을 바라는 선인들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정주의 시 속에서는 초월적 존재의 신뿐만 아니라,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신적인 속성을 가지고 신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독특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서정주가 세계와 우주를 범신론적, 범재신론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천재(김윤식), 비상(우한용) 화사 이 시는 “시인 부락” 2호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의 첫 시집 “화사집”(1941)의 제목으로 이름 붙여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작품은 서정주 초기 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서정주 시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서정주의 초기 시풍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시풍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인간의 원죄 의식과 원초적 생명력을 통한 관능적 욕망과 원죄적 세계관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사’는 원죄 의식을 느끼게 하고 저주스러우며 징그러운 동물임과 동시에 한편으로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을 지녔고,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을 지닌 아름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심지어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화사’를 화자의 젊은 날 추억인 ‘우리 순네의 고양이 같은 입술’과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유혹적인 뱀의 고운 입술을 통해 ‘우리 순네의 입술’을 연상하고 있을 만큼 다분히 관능적이다. 귀촉도 이 시는 전통적 소재를 빌려 떠나간 임에 대한 화자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귀촉도’란 흔히‘ 소쩍새’, ‘접동새’로 불리는 새로, 이 작품에서는 사랑하는 임의 죽음에 대한 한(恨)을 상징하고 있다. 화자가 사랑하는 임은 다시 오지 못하는 저승길, 즉 ‘서역 삼만 리’, ‘파촉 삼만 리’로 떠나 버렸다. 화자와 사랑하는 임과의 거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퍼 눈물이 아롱아롱 맺힐 뿐이다. 차라리 사랑하는 임이 살아 계실 때 ‘머리털을 엮어 신이나 삼아 줄걸’이라며 지극한 정성을 쏟지 못한 아쉬움과 후회의 정서를 내비치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한(恨)으로 승화되어 ‘목이 젖은 새’, ‘제 피에 취한 새’인 ‘귀촉도’로 귀결된다.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이기에 화자의 그리움은 응어리져 피맺힌 눈물을 이루게되는 것이다. 추천사-춘향의 말 1 이 시는 화자인 춘향의 말을 통해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노래한 작품으로, 그네 타는 행위를 지상적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고뇌의 상징적 표현으로 형상화하고있다. 1연에서 춘향은 향단에게 '머언 바다로/배를 내어 밀듯이' 그네를 밀라고 말하는데, 이를 통해 화자인 춘향이 그네 타는 행위를 땅 위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저 높은 하늘로 오르려는 상징적 행동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연에서는 춘향이 지상 세계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를 밀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을 포함한 현실의 세계가 자신의 소망을 실현할 수 없도록 답답하게 가로막혀 있어서 탈출하고 싶기 때문이다. 3연에서 그녀가 가고자 하는 곳은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하늘'로 표현된다. 이곳은 1연의 '바다'와 의미가 통하는 초월적 이상 세계이다. 춘향은 자유롭게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처럼 이 세상을 벗어나 하늘 속의 존재가 되도록 자신을 밀어 올려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이 세상의 인연에 얽매여서 땅을 디디고 살아갈 운명이다. 따라서 4연의 독백 '서(西)으로 가는 ~ 갈 수가 없다' 라는 시구는 인간의 이러한 운명적 한계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 준다. 아무리 높이 하늘을 향해 차고 올라도 그네는 다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5연에서 그네의 이러한 움직임은 춘향이 가진 간절한 초월 의지와 그 필연적인 좌절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춘향은 자신을 밀어 올려 달라고 말한다. 파도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떨어져 내려오듯이 자신의 소망도 끝내 달성될 수는 없지만, 이 지상적 인연을 벗어나려는 괴로운 노력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동천 이 시는 완숙한 경지에 이른 화가가 그려 낸,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시 전체가 5행, 3음보 율격의 한 문장으로 된 이 작품은 고도의 상징적 표현을 통해 삶의 본질과 관련된 주제를 간결한 형태 속에 깊이 있게 녹아 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는 풍경은 한겨울의 춥고 어두운 밤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고, 한 마리 매서운 느낌을 주는 새가 날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풍경에서 시인은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초승달은 그의 마음 속에서 아주 오랜동안 그리움으로 맑게 씻어 낸 님의 고운 눈썹이며, 하늘의 새는 그것을 아는 듯 시늉을 하며 비끼어 날아간다는 것이다. 이같이 달과 새가 함께 있는 ‘동천’은 이 시의 공간적 배경으로 정중동(靜中動)의 역설과 고도의 긴장을 보여 준다. 또한, 추운 겨울 밤 하늘에 투명하게 떠 있는 달(절대적 생명의 가치)과 그것을 알고 비껴 날아가는 매서운 새(영원과 무한의 절대적 가치를 동경하는 인간)의 거리는 천상과 지상, 절대성과 유한성 사이의 숙명적 단절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극의 두 요소가 ‘동천’이란 공간적 배경 속에서 함께 배치됨으로써 생명의 초월적 경지를 추구하는 시인의 시적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신부 이 시는 시집 “질마재 신화”의 맨 첫머리에 실린 작품으로, 한국 여인의 매서운 절개를 짧은 이야기체로 형식으로 엮어 놓고 있다. 이 시는 내용상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산문시이다. 전반부는 순간적인 오해로 인해 첫날밤 신부를 버리고 달아난 신랑의 이야기로, 행위의 초점이 신랑에게 맞추어져 있다. 신랑은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하고 달아나 버린다. 신랑의 조급한 성질과 지각 없는 판단이 비극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후반부는 40~50년이 지나, 신랑을 기다리다 매운 재로 변한 신부의 이야기로 신부의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40~50년이 경과한 뒤, 생명이 없음에도 신부가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매운 재'가되어 버렸다는 것은 일부종사하는 열부(烈婦)로서의 매서운 신념을 암시하면서, 유교적 이념의 정신 세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초록 재, 다홍 재’는 그 현세적 가치를 뛰어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하나의 신화(神話)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신부는 ‘초록 재와 다홍 재’가 되어서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음으로써,이 이야기 속의 신부는 현실적인 열녀(烈女)의 세계를 뛰어넘어 육신의 세계를 초월한 영적인 세계로 존재하게 된다. 무등을 보며 이 시는 한국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1952년 시인이 광주로 내려가 조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지낼 때, 굶주림에 시달리는 비참한 현실과 창 너머로 보이는 의젓한 무등산의 모습이 너무나 대비가 되어 썼다고 한다. 눈부신 햇빛 속에서 우뚝 서 있는 무등산의 꿋꿋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면서, 물질적인 궁핍이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사람의 타고난 본성까지 가리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여유 있고 넉넉한 태도로 가난을 극복하자는 지혜를 읽어 내고 있다. 1연에서는 가난이 우리들의 타고난 본성까지 가릴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가난이란 한낱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타고난 마음씨'는 물질적인 궁핍으로 인하여 찌들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2연에서는 푸른 산이 그 기슭에 기품 있는 향초(香草)를 기르듯이,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자식들을 소중하고 품위 있게 기를 수밖에 없다는 의연한 긍정의 자세를 취한다. 3연과 4연에서는 서로 기대어 의지하고 있는 산처럼 때때로 힘겹고 괴로운 삶의 시련이 닥치더라도 지애비와 지어미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5연에서는 물질적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인 자세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형상화하고 있다. 가시덤불 쑥구렁과 같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옥돌처럼 묻혔다고 생각하는 여유 있고 넉넉한 삶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시적 화자의 생각이다. 꽃밭의 독백-사소 단장 이 시는 '사소 설화'를 모티프로 인간 세계의 유한성과 인간 본질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구도(求道) 정신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시인 자신이 원문에 덧붙여 기록한 바 있듯,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사소'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을 가기 전 그녀의 집 꽃밭에서 한 독백을 가정하고 있다. 화자는 '구름'과 '바닷가'를 통해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경험하고, '산돼지'나 '산새' 같은 인간 세계의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개벽하는 꽃'이 화자의 눈에 띄게 된다. 하지만 화자는 헤엄칠 줄 모르는 아이가 수면에 자신의 얼굴이나 비춰 보듯, 그렇게 꽃의 '닫힌 문'을 뚫어져라 바라만 본다.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화자는 결국 '꽃'을 향해 애타게 소리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벼락과 해일' 같은 형벌과 고통을 만난다 할지라도 감내하겠다는 것은, 상처를 입더라도 경계를 넘어서겠다는 뜨거운 열망의 표현이다. ============================================================================ 서정주              "국화(菊花) 옆에서"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 시를 단순히 문맥상의 의미를 좇아 읽자면, 제124연을 읽고 그 다음에 제3연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이 시는 국화꽃이 핀 어느 순간의 느낌을 집중적으로 노래하기 전에 그것이 피기까지의 과정에 세 개의 연을 배당하고 있다. 제124연이 그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현실적인 발상이고 과장된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과학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하잘것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의 탄생을 위해서는 전우주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확인시켜 준다. 3연에서 국화꽃이 독특하게 의인화되어 있음을 본다. 독특하다는 말은 전통적인 시가(詩歌)가 흔히 국화꽃을 지조 있는 선비에 비유하고 있음에 비해, 이 시인의 국화꽃을 '누님'에 비유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애인이나 아내가 아니고 '누님'이라는 것은 국화꽃에 대한 '나'의 혈연적인 친근감을 나타내 준다. 지은이는 그의 자작시 해설에서 '젊은 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미의 영상∼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정일(靜逸)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을 이 시에 담았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제 124연은 단순히 국화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의 시적 표현임이 드러난다. 봄이 20대라면 여름은 30대 그리고 국화꽃이 피는 가을은 인생의 40대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뒤안길'이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결코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가 형성되기까지의 비통과 불안과 방황과 온갖 시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방황과 방랑 끝에 비로소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한 여인이 자성(自省)의 '거울'에 비춰 본 자신의 과거이다. (정희성, 신경림 '한국 현대시의 이해' 참고) ========================================   고창에는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근대의 동학농민혁명의 발상까지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접할 수 있는 고장으로 굵직굵직한 문화유산들이 도처에 산재해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인 동양최대의 고인돌 군락지, 구름속에 참선한다는 선운사,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전봉준, 판소리를 정착시킨 신재효, 그리고 미당 서정주(徐廷柱, 1915 - 2000)가 있다. 올해가 미당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미당은 학창시절 누구나 암송했을 ‘국화옆에서’의 시인으로 기억된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쪽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개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전문     흥덕 교차 지점을 지나 신록에 빨려들다 보니 도립공원선운사다. 먼저 일주문 쪽으로 1974년 고창 라이온스클럽에서 건립한 미당 서정주 시비를 찾아 시비에 표기된 대로 감상해본다.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전문               옛날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막걸리집을 찾았지만 이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뻘쭘 해 했을 미당의 심정을 알만하다. 미당은 1915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호 미당(未堂)은 ‘덜 된 집’, ‘늘 소년이려는 마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안 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퇴학을 당한다. 그 후 석전 박한영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가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 무렵 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잡지 을 창간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해방 후 순수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파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결을 한다. 이후, 서라벌예대와 동국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왕성한 문학 단체 활동을 하게 된다.미당은 약 70년의 창작기간 동안 한국시사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처녀시집 부터 83세에 펴낸 마지막 시집 까지 총 15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천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쓴 현역 시인이었다. 미당은 우리말을 다루는 천부적인 감각과 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시 언어로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일제말기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로 친일 행적을 남기고 군부 독재 치하에서의 행적으로 역사적 현실인식의 부족을 지적받기도 한다. 그의 생가 선운리에 개관한 은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리모델링하여 2001년 가을 개관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당 시 전집 발간 등 그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일고 있는 가운데 문인들이 뜻을 모아 금년 초 ‘미당문학회’가 결성되었다. 이밖에도 고창에는 1981년 고창문화원에서 건립한 가사는 전하지 않고 제목과 유래만 高麗史樂志, 增補文獻備考 등에 전하는 의 비(碑)가 선운사 입구에 있다. 고창읍 신재효 고택의 고창무장 사거리와 상하면 송곡리에 등이 있다. (양규창 / 시인. 전라북도문학관 사무국장) ================================================================================   신부(新婦)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알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잡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시집‘질마재 神話’(1975)   * 돌쩌귀 : 문짝을 여닫게 하기 위해 문설주에 달아 둔, 쇠붙이로 만든 암수 두 개로 된 한 벌의 물건.   ■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집 의 맨 첫머리에 실린 작품이다. 는 미당(未堂)의 문학이 원숙기에 접어든 시기에 간행된 시집으로서 초기의 퇴폐적, 상징적 ‘원죄 의식(原罪意識)’에서 벗어나 ‘신라’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거쳐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정취에 몰입한 시기에 간행된 것이다.  이 시집에 담긴 대부분의 시는 대체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용도 그야말로 보편적인 한국인의 질박한 삶 그 자체를 담고 있어 가장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신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성격 : 낭만적, 토속적, 신화적 ▶ 심상 : 초록, 다홍의 색채 심상이 선명히 대비되어 있음. ▶ 어조 : 서사적이며 평이한 어조 ▶ 운율 : 산문적 내재율 ▶ 구성 : 짤막한 이야기 속에 한 여인의 인생 전체를 담아 놓은 ‘서사적 구성’ ▶ 제재 : 신부(新婦) ▶ 주제 : 여인의 정절(貞節)   ■ 연구 문제 1.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일견 유교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가 않다.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미적(美的) 정서를 150자 정도로 서술하라. 주제면에서 분며 이 시는 유교적인 정서인 ‘여인의 절개’를 겉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여인의 정절이 고귀함을 강조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인의 현실적 가치관이었던 유교의 열녀 사상을 뛰어넘은 신화적, 토속적 정서를 그 미학(美學)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   2. 이 시가 독자에게 특이한 인상을 주는 까닭을 구성상의 특징과 관련하여 한 문장으로 쓰라. 짤막한 이야기 속에 한 여인의 인생 전체를 담아 놓은 서사적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특이한 인상을 준다.   3. 이 시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존재로서의 신부(新婦)를 표상하고 있는 시구를 찾아 쓰라. ‘초록 재와 다홍 재’   ■ 이해와 감상 1 한국 여인의 매운 절개를 놀랍도록 담담하고 짧은 이야기체로 엮었다. 여인의 절개란 어김없이 고통과 슬픔, 한(恨)의 여운을 남기는데, 이 작품에서는 강렬한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괴로움과 한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묘한 안정감을 준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첫날밤의 신부가 신랑의 오해로 말미암아 소박을 당하였지만, 40년인가 50년 -이 시간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한다 하겠다.- 이 지난 뒤까지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고 우연히 들린 신라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이로써 여인네의 정절의 삶이 완성된 것이다.  이 시의 강렬한 인상은 이미 생명이 없는 존재이면서도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있는 ‘초록 재와 다홍 재’의 신부에 연유한다. 오히려 철부지이며 지각 없는 신랑에 비해 철저히 유교적인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매서운 신념을 지닌 신부는, 그러나 현실적인 열녀(烈女)의 세계를 뛰어넘는다. 신부는 ‘초록 재와 다홍 재’가 되어서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음으로써 육(肉)의 세계를 넘은 영(靈)의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서정주 문학의 독특한 미학(美學), 즉 현실적 세계관이었던 유교의 정절이 교묘한 토속적 심미 의식(審美意識)을 통해 신화적 세계관의 경지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 가요 '정읍사'와 관련된 망부석 전설, 신라시대 박제상의 아내가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치술령 고개 위에 선 채로 돌이 되었다는 전설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 이해와 감상 2  이 시는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인해 신부가 40~50년을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어야 했고,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비극적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신비주의적인 내용에다 다분히 관능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 읽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재가 되어버리는 신부의 비극으로 인해 그저 웃어 버릴 수만 없게 만든다. 또한 40~50년 동안 신방을 기다리고 있던 신부에게서 고전적 절개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신부의 수동적이고 침착한 기다림과 신랑의 조급성이 대립됨으로써 처절한 비극이 유발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한 신랑에게 신부는 40~50년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저항으로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자기 소멸이라는 더 큰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다시 말해, 신랑은 자신의 성급하고 지각없는 판단으로 인해 신부를 소박한 채 40~50년을 철저히 잊어버리고 지냈지만, 그 무관심은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비극을 탄생시킨 것이다. 40~50년이란 그 긴 세월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우연히 들른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로 내려앉는 신부의 소리없는 반항이 나타나면서 비로소 신랑은 ‘안쓰러운’ 뉘우침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록 재’와 ‘다홍 재’는 신부의 영적 존재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작품을 한 차원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철저한 속물적 근성의 신랑에 대비되는 신부는 전통적인 윤리관을 대변하는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현세적․육체적 세계를 초월하는 영적(靈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메일 | 인쇄 우하 서정태 시인이 드림줄을 붙들고 서 있다. 자신을 낮추는 집이란 뜻에서 ‘우하정( 又下亭)’이란 현판을 달았다. [고창=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우하(又下) 서정태는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의 동생이다. 우하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미당길 14번지에 산다. 길 건너 미당길 16번지에 미당 생가가 있다. 미당 생가는 우하 생가이기도 하다. 그 집에서 미당이 났고, 8년 뒤 우하가 태어났다.  우하는 올해 아흔이다. 3년 전 미당 생가 건너편에 자리잡았다. 초가 지붕을 올린 흙집을 지었다. 싱크대 딸린 방에서 홀로 숙식을 해결한다. 그날(14일)도 취나물로 한끼를 막 해결한 참이었다.  “꽃 피었나 보려고 나와 있었지.”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촉촉한 눈망울이었다. 서울서 온다는 기자를 기다렸던 게 분명했지만, 그는 괜히 꽃 핑계를 댔다. 아흔 살 노인인지라 우하는 잘 걷지 못했다. 처마에 달린 드림줄을 잡고서야 겨우 서 있었다. 툇마루에서 바라보면 부모님과 미당 내외의 산소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묘살이 하는 셈”이라고 우하는 얼굴을 무너뜨리며 웃었는데, 얼핏 미당의 얼굴이 포개졌다.  미당과 우하는 어려서 한 방에서 지냈다. 가운데 누이가 있었으나, 미당은 우하를 특히 아꼈다. 미당의 시적 기질은 어려서부터 압도적이었는데, 우하는 그런 형을 따라 시인이 되고 싶었다.  미당이 열아홉 살 때다. 동생의 동시를 옮겨 적고, 자신의 시를 덧붙여 공책 한 권을 만들었다. ‘무지개’라고 이름 붙인 가족 문집. 그곳에서 『화사집』(1941)이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하는 평생 미당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사람들은 그를 ‘미당 동생 서정태’라 불렀다. 우하는 첫 시집을 준비했으나, 한국 전쟁통에 없던 일이 됐다.  “내가 시를 쓴 건 전적으로 미당의 영향이야. 그런데 미당은 내 시를 한 번도 칭찬해준 적이 없었지.”  우하는 시를 접고, 기자가 됐다. 1946년 민주일보로 출발해 전북일보에서만 30년간 일했다. 그런 가운데 미당은 한국의 시성(詩聖)으로 자리잡았으나, 친일 논란도 벌어졌다. 우하가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1943년 전북 정읍의 어느 여관에서다. 우하가 물었다. “형님, 조선이 일본에 영원히 먹히는 거요?” 미당이 답했다. “한민족이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역사는 먼 훗날 비로소 또렷해지는 거다.” 그 때 우하는 조선 사람이 사라지진 않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분명히 알아주면 좋겠어. 미당은 시인이지 혁명가가 아니여. 젊어서 미당은 내게 벽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미당 문학이 좀 더 의미 있게 남도록 마지막 역할을 하고 싶어.”  우하는 딱 한 번 시집을 냈다. 86년 동아출판사가 펴낸 『천치의 노래』다. 미당이 그를 불렀다. “네 시 참 좋더구나.”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이었다. 그 시집의 서문을 미당이 썼다. ‘네가 쓴 시들이 부디 명이 길어서 나와 너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래 살아있는 것이 되기만을 바랜다. 1986년 1월 29일. 미당 서정주.’  우하는 요즘도 시를 쓴다. 혹 두 번째 시집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우하가 자작시 ‘내 사랑하는 사람(오른쪽 시)’을 읊기 시작했다.   12년 전 형의 육신은 저 편 세상으로 건너갔다. 또 그 아래에서(又下), 동생의 육신도 형을 따라 갈 것이다. 집을 나서려는데, 우하가 말했다. “자네, 또 볼 수 있을까?” 그날, 미당길에 꽃은 만발했는데, 미당 생가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내 사랑하는 사람                    - 서정태 꼭꼭 숨어라 보이지 않게 숨어라 내 어릴 적 술래잡기 사랑한 사람 찾아 나섰으나 보이지 않네 뻐꾸기 울음에 칡꽃 피는 질마재 너머 첩첩산중 절간에나 계실까 돌문 굳게 닫힌  수도원에 계실까 내 사랑한 사람 아무 데도 아니 계시니 이제는 서산에 해도 질 무렵 저승에라도 가서 찾아 보려나 ================================================================================  남은 일                - 서 정 태   걸친 것 다 벗어버리고 다 그만두고 초가삼간 고향집에 돌아오니 알몸이어서 좋다   아직은 춘분이 멀어서 바람끝 차가웁지만 방안이 아늑해서 좋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바깥세상에 한바탕 꽃피는 걸 바라다볼 일일뿐   ----------------------   미당 서정주시인 친동생 서정태 시인(90세)             미당 서정주 탄생 100년 - 미당 동생 서정태 시인, 서정주를 말하다 [스페셜 리포트 | 미당 서정주 탄생 100년] “톨스토이에 심취 넝마주이로 산 적도… 친일? 왜정 말기를 안 살았으면 말을 말아” 주간조선 [2341호] 2015.01.19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78번지에서 생을 받았다. 올해는 미당 탄생 100주년이다.  선운리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생가와 하나의 담을 사이에 두고 아담한 한옥이 한 채 서 있다. 생가의 별채에는 미당의 동생 시인 서정태가 홀로 기거한다. 젊은 날 전북에서 기자생활을 30년간 한 그는 2013년 두 번째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를 펴냈다. 미당에게 시를 쓰는 아우가 있다는 사실은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거목(巨木)의 그늘에 가려졌던 것일까. 지난 1월 13일 미당이 태와 뼈를 묻은 부안면 선운리를 찾았다. 생가는 미당시문학관에서 50여m 거리에 있다. 생가의 뒤쪽에는 소요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마을 양옆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아늑하다. 마을 저 멀리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간척사업 전에는 마을 바로 아래까지 파도가 밀려오곤 했단다. 미당의 육신은 나지막한 산등성이에서 태어난 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먼저 폐교가 된 선운분교를 개조해 만든 미당시문학관을 찾았다. 서동진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미당시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찬찬히 둘러보아도 1시간 반이면 미당의 삶과 시 세계가 이해되기 쉽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육필 원고, 파이롯트 잉크, 마라톤 타자기, 원형 책상, 옷장, 모자, 지팡이 등 시인의 혼과 체취를 물씬 풍기는 물건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봄 여름 가을에는 하루 평균 150명 이상의 문학 순례객이 이곳을 찾는다. 그중에서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문학평론가와 시인들이 미당을 평가한 내용이었다. ‘서정주는 시의 정부(政府)다’(고은), ‘우리는 미당 선생의 죽음을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이제 바다의 것, 하늘의 것, 우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이어령), ‘서정주의 손에서는 우리 일상생활의 무엇이든지 그대로 시가 되어 버린다’(김우창), ‘독재자조차 훔쳐가고 싶었던 그의 시의 혼’(문정희), ‘인간이 만든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과 미당의 시이다’(이남호). 서동진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생가 옆의 별채로 찾아갔다. 문패에는 ‘우하(又下) 서정태’라고 되어 있었다. 우하정(又下亭)이다. 서 해설사가 “선생님 저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여닫이 창호문이 열렸다. 손으로 뜬 자주색 스웨터를 입은 백발의 노시인이 “어서 오세요”라며 씩 웃었다. 서정주는 5남매의 장남. 둘째인 서정태는 1923년생이다. 큰형 정주와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다. 93세인데도 혈색이 좋았고 말할 때 발음이 거의 새지 않았다. 황토로 벽이 마감된 방은 13㎡(4평) 정도의 크기였는데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침대, 책상, 좌상, TV, 그리고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주방이 마련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혼자 다 해먹어요”라고 말했다. 미당은 2000년 12월 24일 향년 86세로 별세했다. 부인 방옥숙 여사와 사별한 직후 2개월 반 동안 곡기를 끊고 맥주만 마시며 연명하다 부인 곁으로 따라갔다. 서정태 옹은 2000년 12월 24일 그날 미당을 임종했을까. “삼성의료원 형님 병실에 있다가 오후 6시쯤 거처로 왔어요. 오후 9시쯤 질부가 전화를 해서 오늘 돌아가실 것 같다고 말해요. 그래서 내가 ‘내가 보니까 2~3일은 더 살 것 같던데’ 하고 끊었지요. 그러고 있는데 11시쯤 운명하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그날 눈이 무지하게 많이 내렸어요.” 이렇게 말하고는 병실에서 형님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형님이 담배를 한 대 피고 싶다고 했는데 제가 주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데요. 돌아가시기 전날에 맥주 한 잔을 마셨습니다. 형님이 아프기 전에는 제가 형님을 찾아갈 때마다 맥주 한 박스를 사들고 가곤 했죠.” 여덟 살 위의 형은 어린 동생에게 형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형제만이 간직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나랑 미당이랑 여덟 살 차이요. 형님이 열세 살 때부터 다섯 살 동생인 나를 데리고 잤어요. 나는 형님의 애정을 많이 받고 자랐지요. 내가 자다가 깨어 귀신이 보인다며 무서워할 때마다 형님은 저를 안아주시곤 했지요.” 미당은 부안에서 줄포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열다섯에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에 다니던 중 광주학생운동 지지 주모자로 연루돼 퇴학을 당한다.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온 형님이 아버지와 겸상을 하며 식사를 하는데 형님이 퇴학당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땡그랑’ 하는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가 밥을 드시다 숟가락을 떨어뜨렸습니다.” 미당은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서회 사건’에 몰려 또다시 퇴학을 당한다. 독서회 사건이란 일부 학생들이 당시 불온서적으로 분류되던 사회주의 사상 관련 책을 돌려 읽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두 번씩이나 퇴학조치를 당하자 미당은 아버지로부터 미운털이 박힌다. 그러나 동생에게 형은 전혀 달랐다. “나에게 형은 ‘절대’여. 우리 형님이 절대 최고였어요.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아주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을 가져왔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형을 미워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그런 형을 왜 미워하실까 생각했어요.(웃음)” 미당을 아는 모든 이들이 미당을 천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생은 형을 어떻게 느꼈을까. “내게는 천재보다는 절대적인 대상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눈칫밥이 계속되자 미당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집에 계속 있을 수 없으니까 아버지 돈 300원을 훔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한 겁니다. 그런데 친구집에서도 하루이틀이지 계속 있을 수 없잖아요. 친구들이 학교 간 시간에는 부립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한 겁니다. 거기서 재미있는 소설을 읽기 시작해 문학에 빠져든 겁니다. 열일곱에서 열아홉 나이에 문학의 세계에 들어간 겁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 미당이 젊은 시절 넝마주이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사연이 궁금했다. “(웃음) 문학에 빠져 살다 바로 톨스토이주의에 심취한 결과지요. 톨스토이주의가 바로 휴머니즘 실천 아니요? 거기에 영향을 받아 넝마주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요. 그때 마포다리 밑에 거지들이 많았는데, 거기 가서 거지들과 어울렸지. 겉멋이 잔뜩 든, 옷도 멀쩡하게 입은 사람이 넝마주이를 하고 종로길, 정동길을 다녔으니 어땠겠어요? 그래서 한때 형님은 장안의 명물로 불렸소.(웃음)” ‘이상한 넝마주이’ 소문은 장안에 퍼졌다. 조선불교 대종사 석전 스님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대종사가 미당을 보자고 했다. 열아홉 살 청년이 당돌하게 톨스토이를 얘기하는 걸 듣고는 석전 스님은 불교 공부를 권한다. 이렇게 되어 머리를 깎고 참선과 함께 불교 공부를 시작한다. 문학 천재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유년기에 가족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있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이 그런 경우다. 미당의 경우는 외할머니 영향이 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니여. 생가에서 개울을 따라 70m쯤 가면 외갓집이었어. 형님은 보통학교 때 서당을 다녔는데, 서당도 외갓집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 형님은 틈만 나면 외갓집으로 달려갔고. 그때마다 외할머니께선 ‘우리집 강아지 왔능가’ 하면서 누룽지, 고구마 같은 것을 주셨지. 그런 거 받아먹는 재미에 형님은 외갓집을 들락날락하셨고. 우리 외할머니는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유충렬전 등을 전부 외우고 있던 분이셨지. 형님이 가실 때마다 이런 구전설화를 얘기해 주셨고, 형님은 전날 다 듣지 못한 것을 또 들으려 외갓집에 가곤 했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머리에 다 박힌 거겠지.” 고창군 흥덕읍에서 부안면 선운리로 가다 보면 고갯길이 나온다. 질마재다. 미당은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어린 시절 각인된 고향의 이야기와 고향의 땅, 바다, 바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질마재 신화’의 해일 편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서정태 옹의 설명이 계속된다. “선운리 사람들은 밑바닥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어떤 흐름 같은 게 있지. 일종의 풍류(風流)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유년기부터 소년기·청년기를 거치면서 머릿속에 들어간 이런 풍류가 시로 나오는 것이라고 보면 될 거야.” 알려진 대로 1936년 미당은 동아일보에 시 ‘벽’이 당선되어 일약 시인으로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 미당은 20대 중반에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 김기림의 부탁으로 ‘조선일보 폐간 시’를 쓰기도 했다. 1941년에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을 냈다. ‘자화상’ ‘귀촉도’ 등은 ‘화사집’에 수록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미당은 이른바 친일시 6편을 쓴다. 70년 시작 활동 중 쓴 시 1000편에서 6편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동생은 형의 ‘친일’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지가 궁금했다. “미당을 보고 친일했다고 하는데, 왜정 말기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그땐 경찰서를 주재소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일본 경찰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아세요? 일부러 주재소 앞을 안 지나고 빙 돌아가곤 했을 때여. 미당이 고창경찰서에 붙잡혀 가 49일 만에 풀려난 적이 있어. 왜 붙잡혀 간 줄 알어? 학생들이 연극을 하다 불온하다고 붙잡혔는데 조사해 보니 서정주 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거야. 그래서 잡혀간 거지.”  서 옹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친일은 일제와 친하게 지내면서 군수, 경찰부장, 경찰서장, 고등계 형사를 지낸 사람들을 친일이라고 해야 맞지. 형님은 목에 칼을 들이대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시를 쓴 것이지. 그런 시를 안 썼으면 오지게 좋았겠어. 하지만 안 쓰곤 못 배기니까. 힘 없는 나약한 시인이니까 쓴 것이지.” 6·25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당은 마포구 공덕동 301번지에서 어머니, 아내 방옥숙, 아들, 누이동생, 그리고 서정태와 살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미당은 조지훈, 서정태 등과 함께 육군 소속 정훈국에서 활동하다 가족을 피신시킬 겨를도 없이 동생과 함께 한강을 건너게 된다.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며 정훈 활동을 한다. 그러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여 부산으로 후송되었고 동생과 재회한다. “형님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 건 아마도 서울에 남은 가족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계속 들리니까 죄책감으로 그리 되었겠지요. 그러다 9·28 서울수복 때 서울 공덕동 집으로 가서 가족이 무사한 것을 보고 처음으로 웃으셨어요. 그리고는 정신착란 증세는 말끔히 사라졌지요.” 미당의 가족 사랑은 유별나다. 아내 방옥숙을 모델로 쓴 시만도 여러 편이 된다. 물론 어머니에 대한 시도 있다. 시인 동생은 형님의 시 중에서 어떤 시를 특히 좋아할까. 그는 “다 좋아하는데(웃음)”라며 특정하지 않으려 했다. 서정태 옹은 조금 생각하는 듯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거북이에게’ ‘귀촉도’ ‘국화옆에서’….” 서정태 옹은, 기자가 ‘거북이에게’는 처음 들어본다고 말하자 시를 암송했다. “거북이여 느릿느릿 물살을 저어/ 숨 고르게 조용히 갈고 가거라. / 머언 데서 속삭이는 귀속말처럼/ 물니랑에 네리는 봄의 꽃니풀,/ 발톱으로 헤치며 갔다 오느라….” 그는 미당 생전에 시를 꾸준히 발표했고, 시집도 한 권 냈다. 미당은 동생의 시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1948년도 당시에 우리나라 유일한 문예지가 ‘문예’였어요. 매월호에 내 시가 게재돼 솔찬히 인기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형님은 한 번도 칭찬해 준 적이 없어. 내가 66살에 첫 시집 ‘천치의 노래’가 나올 무렵이었지. 형님이 ‘너 시집 낸다고 하던데 서문은 누구한테 써 달라고 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김광균씨에게 부탁할 거라고 했더니 형님이 ‘내가 써주마’ 했지요. 제 시를 형님이 다 읽고는 처음으로 ‘야, 니 시 좋더라’고 하셨어요.” 부모가 큰 성취를 했을 경우 때로는 자식에게 부모 명성이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어땠을까. “어렸을 때는 조금 그랬지요. 누구한테 나를 소개할 때 ‘서정태’라고 하지 않고 ‘서정주 아우’라고 했으니. 사실 그게 못마땅했어요. 그런데 50이 넘고부터는 그걸 다 초월했지. 훌륭한 형님이 있으면 좋은 거지, 안 그래요?” 1시간40분에 걸친 인터뷰 동안 기자는 서 옹의 기억력에 놀랐다. 그는 유년기부터 있었던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시와 등장인물까지. 오히려 너무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답변이 곁가지로 빠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가히 천재적인 기억력이었다. 시인 동생이 보는 미당은 어떤 시인이었을까. “미당도 명예욕은 있었겠지. 그래서 상을 많이 받았잖아.(웃음) 미당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남는 영원한 시인이 되길 원했을 것이여.” 인터뷰를 끝내고 자리에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서 옹이 말했다. “4월 13일에서 18일 사이에 한번 꼭 오세요. 그때 여기 오면 선계(仙界)가 따로 없어요. 예전에는 (지금) 논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요. 오죽하면 이 동네를 선운리라 했겠어. 신선 선(仙), 구름 운(雲)을 써서. 내 그때까진 안 죽고 있을 테니까.(웃음)” 선운리와의 첫 만남에서 기자는 천재가 태어나는 땅은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통영이 그랬는데 선운리도 그랬다. 자신의 마지막을 처음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서정태 옹은 생을 시작한 집 옆에서 시를 쓰며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 생몰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 2000년 12월 24일 (향년 85세) 학력: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데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수상:2000 금관문화훈장  외 2건 경력:1977 한국문인협회 회장  외 4건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의  아버지는 고등교육을 마친지식인이었으며, 따라서 미당 서정주도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리라고 보여진다.   그의 시  "자화상" 에서 자신을 키운건 8할이 바람이었다  라고 고백 하였고, 이 구절은 그의 삶을 거론 할때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유복한 삶을 보냈다....   그의 창씨개명 이름은 "다쓰시로 시즈오"이다 이후 친일을 시작함.   1942년 7월 13일 매일 신보에 실린" 시의 이야기라는 평론" 1943년 9월1일~13일  의" 인보정신" 1944년 12월 9일 "마쓰이 오장 송가" 1943년 국민문학의 10월의 "항공일" 1943년 조광 10월호의 "스무살된 벗에게"의 수필,  12월호의 "보도행이라는 르포" 등 거의 친일 행각으로 친일 매국 행위를 하였다.   지금 까지 발견된 친일 시는 10개...다른 친일 시인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중요한건 " 강도가 너무 심했다"   창씨 개명 후 얼마 안되어 광복...  미당 서정주의 변론은 기가 차고 말문이 막힌다..   "일제 치하에 몇백년은 더 갈줄 알았다"  그래서 친일 행각을 했다라고 했다...ㅜㅜㅜㅜ   서정주의 제자인 조정래는 그의 친일 행각은 당연히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평했다/   그런데 서정주는 니가 내 제자인데 그럴수 있냐고 크게 화를 내며 쫏아내기도 했다.   그가 죽기전에 언론에서 친일 행각에 질문하자.   거  뭐 잘 보아달라고 하고 끝내버렸다.(반성은 없이 작고함)   서정주가 다른 친일 행각 시인들보다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는   바로 죽을 때 까지 반성하고 사죄를 한적이 없는 이유다.   서정주는 백석 시인이 표절시인이라 해서 백석시인이 묻혔다가   백석시인도 친일 행각 전력?이 있다.(해방후 이북에 남음)   서정주의 아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 할까? 그는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수 있다. 자식으로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서정주가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건 저 사람 보다 천재였던 사람이 모두 먼저 돌아간 이유다...)   => 백석( 이북에 남음) =>윤동주(독립운동) =>현진건(절필)   즉, 이런 사실인데 아직도 솔직히 반성하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후ㅠ...       글꼴조정 공유하기 북마크
334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박두진 - 靑山道 댓글:  조회:2770  추천:0  2015-12-14
     청산도(靑山道)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 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 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1949년 출간한 박두진의 시집 [해]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박두진의 시는 어떤 근원적인 것에서 시상을 얻어 시를 형상화하는 시인이다. 그의 초기 시, 특히 시집 [해]의 근원적인 요소는 ‘해’와 ‘산’으로 나타난다. 그가 노래한 시 의 ‘산’은 정지된 채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산이 아니라, 생동감 있는 생명을 지닌 움직이는 산이다. 그래서 시인은 물의 이미지로 ‘산’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산’은 순수한 평화와 아름다운 서정으로 가득찬 생명의 공간이다.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은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한 해방 직후의 시기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세상은 티끌과 벌레로 들끓고 있고 어둠의 세력들로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시인은 밝은 햇살로 가득찬 건강한 공간과 ‘볼이 고운 사람’이 존재하는 미래상을 보여 줄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산’은 시적 화자로 하여금 가슴에 담겨진 생각들을 토로하게 하고, 시적 화자는 ‘산’을 통해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토로하게 되는 것이다. 박두진은 자기의 개성적인 산문적 운율을 이 작품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흐름이 빠르면서도 유려한 그의 운율은 그 자체가 건강한 생명의 흐름을 나타낸다. 시적 화자가 바라는 세계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맑고 건강하고 순수한 세계가 틀림없이 도래할 것을 열망하고 있다. (김원호, 홍현다랑 '박두진의 청산도 시감상과 분석') ​   * 이 시는 '청산'을 의인화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향한 간절한 소망을 화자가 '청산'에게 호소하는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청산'은 화자의 소망을 들어주는 대상이며 동시에 화자가 바라는 순수한 이상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곳에서 화자는 '볼이 고운 사람'을 간절히 기다리는데, 이는 '청산'이 화자가 원했던 이상적인 공간이기는 하지만 아직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불완전한 세계임을 확인해 준다. 따라서, '청산'은 이상향의 실현이 멀지 않은 가능성의 공간, 즉 미래 지향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현실 인식에 바탕하고 있으나 강한 생명력을 지닌 미래 지향적인 이상향을 설정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광복 직후에 씌어진 이 작품은 건강한 이미지를 지닌 청산이라는 자연물을 소재로 삼아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시인 특유의 이상향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이야기한 산문시이다. (두산백과)                                                                         * 1916년 3월 10일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였다. *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됨으로써 시단에 등단하였다.  * 1946년 박목월(朴木月), 조지훈(趙芝熏) 등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한 이래, 자연과 신의 영원한 참신성을 노래한 30여 권의 시집과 평론·수필·시평 등을 통해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연세대·우석대·이화여대·단국대·추계예술대 교수와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 아세아자유문학상(1956)·삼일문화상(1970)·예술원상(1976)·인촌상(1988)·지용문학상(1989) 등을 수상했다. * 저서에 [거미의 성좌], [고산식물], [서한체], [수석연가], [박두진문학전집] 등이 있다.         * 고향 (故鄕) /박두진    故鄕 이란다  내가 낫 자라난 故鄕 이란다  그 먼, 눈 날려 휩쓸고 별도 얼어 떨던 밤에 어딘지도 모르며 내가 태여 나던 곳  짚자리에 떨어져 첫소리치던 여기가 내가 살던 故鄕 이란다 靑龍山 옛날같이 둘리워 있고  우러르던 예 하늘 푸르렀어라 구름 피어 오르고 송아지 울음 울고  마을에는 제비 떼들 지줄대건만  막쇠랑 북술이랑 옛날에 놀던 동무 다 어디가고  둘 이만 나룻 터럭 거칠어졌네 二十年 흘렀는가 덧 없는 歲月  뜬 구름 돌아 오듯 내가 돌아 왔거니  푸른 하늘만이 옛처럼 포근 해 줄뿐 故鄕은 날 본듯 하여 또 하나 어디엔가 그리운 故鄕 마음 못내 서러워 눈물져 온다 엷은 가을 볕  외로운 산기슭에 아버님 무덤 산딸기 빠알갛게 열매져 있고  그늘진 나무 하나 안 서 있는곳  다른 새도 한마리 와서 울지 않는다  石竹이랑 산菊花랑 한 묶음 산꽃들을 꺽어다 놓고  아버님  부를 수도 울 수도 없이 한나절 뷘산에 목메여 본다  어쩌면 나도 와서 묻힐 기슭에 뜬 구름 바라보며 호젓해 본다         ​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창간호 1936 개관: 정열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5행의 짧은 글 속에 쏟아 넣은 시다. 5행은 모두 '말라, 달라, 생각하라'는 명령형 어미로 맺고 있어 시의 어조가 단호하고 힘이 있다. 화자는 젊은 화가다. 묘지의 모습은 한 폭의 살아있는 그림이다. 성격: 정열적, 낭만적 운율: 각운 어조: 1. 정열적 삶을 원하는 젊은이의 낭만적 목소리          2. 강렬하고 단호한 명령형의 어조 특징: 촉감, 색감 대조 구성 1행: 빗돌을 세우지 말라 - 인습의 거부 2행: 무덤 주위에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3행: 보리밭을 보여 달라 4행: 해바라기는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5행: 노고지리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주제: 정열적인 삶에의 의지 표현의 특징: 이 시의 형태상의 특징으로 시행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내용상 삶에의 의지가 점점 강렬하게 노래되고 있다는 것과 걸맞는 형식적 배려라 할 수 있다. 각 행은 '세우지 말라' '심어 달라' '보여 달라' '생각하라' 등 단호한 명령형으로 끝이 나고 있다. 이러한 단호한 명령형 어조는 서술되고 있는 삶에의 의지, 정열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감상:  1.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다. 화자가 젊어서 죽은 화가로 되어 있다. 다섯 행 모두가 '말라, 달라, 생각하라' 따위의 단호한 명령형으로 종결되고 있고, '해바라기, 보리밭'같은 소재가 주는 강렬한 이미지와 어울려 정열적인 삶에의 의지가 표현된 작품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화자인 청년 화가 나는 자신의 무덤에 '차가운 빗돌'을 세우는 대신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말한다. 죽음을 거부하고 정열적인 삶에의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일 터이다. 해바라기 줄기 사이로 '보리밭'을 보여 달라는 당부도 강렬한 생명의 욕구를 나타낸 것이다. 계절을 달리하는 해바라기와 보리가 한자리에 놓일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들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고 육신의 죽음에도 아랑곳없는 끊임없는 삶에의 욕구이다. 그래서 화자는 해바라기가 '태양같이 화려하던 나의 사랑'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날아오르는 나의 꿈'으로 생각되기를 바란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며 못다 한 사랑과 꿈을 노래하는 이 시의 화자는 화가로 되어 있지만 이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안타깝기 그지 없다.  2. 시적 화자 '나'는 부재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를 고려할 때 죽은 청년 화가 L로 추측된다. 따라서 '해바라기의 비명'은 이미 죽은 청년 화가 L이 자신의 죽음을 노래하는 형식을 취하여 죽음을 초월한 그의 삶에의 열정, 의지를 형상화한 시라고 할 수 있다. 1행에서 '나'는 '차가운 빗돌(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한다. '차가운 빗돌'이 생명의 부제, 죽음을 상징한다고 할 때 이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치 않으려는 의지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2행에서는 빗돌 대신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한다. '나'가 화가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는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고호의 '해바라기'라는 작품을 연상케 하는 구절이다. 해바라기란 항상 태양을 향하는 식물로서 정열을 상징한다. 죽음을 초월하는 삶에의 강렬한 의지, 정열이 해바라기로 표상되고 있다.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는 3행 역시 생명의 충일함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행이다. 해바라기가 삶에의 정열, 의지를 표상한다면 '끝없는 보리밭'은 풍성한 생명력을 표상한다.  4행에서는 자신의 무덤가에 심어논 해바라기를 보며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을 생각하기를 당부한다. 자신의 정열적인 사랑과 삶이 죽음을 초월하여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5행에서는 보리밭 사이를 날아오르는 노고지리를 보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으로 생각하기를 당부한다. 꿈을 잃지 않고 살았던 자신의 삶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부분으로서 시적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함형수: 1914-1946 함북 경성 출생. 함흥고보 재학시절 학생운동에 참여, 퇴학당했고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 거기서 서정주, 김동리 등을 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을 창간. 시 '해바라기의 비명' '형화' '홍도' '그애'등 4편의 작품을, 이어 2집에는 '소년행'이란 큰 제목 아래 '무서운 밤' '조개비' '해골의 추억' '회상의 방' '유폐행' '소 있는 그림' '부친후일담' 등 7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해바라기의 비명'은 호평을 받아 시단의 주목을 끌었다. 가난으로 학교를 중퇴한 뒤, 노동자 숙소 등을 전전, 그 후 만주에서 소학교 훈도가 되었으나 만주순회의 한 여배우와 동거생활을 하다 그녀가 도망, 해방 직후 정신이상으로 북한에서 사망했다. 시집은 없고 약간의 시편들이 흩어져 있다. 동경의 꿈과 소년적인 애수를 읊은 것이 그의 시세계다.         만주(연변)에서 한 여배우와 동거하다 실패하고 시인은 해방 직후 정신이상으로 북에서 사망했다.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라고 명한 끝 행은 김수영의 선행(先行)을 보는 듯. 그는 시집이 없다. 시인마다 명편이 있지만 그는 이 시로 우뚝 서 있다. 해마다 피는 노오란 해바라기가 함형수의 詩碑이다.         + 묘비명  나는 꽃잎 한 장보다 작았지만 세상의 꽃잎들이 웃어 주었다 감사하다. (김종·시인, 1948-) + 어느 시인의 묘비명     이 몸은 생전에도 보이지 않게  살기를 윈했고 그렇게 살았으니  나의 시행詩行과 시행의 사이  해와 달 별들이 보이면 그 뿐!  (박희진·시인, 1931-) + 다시 墓碑銘  나를 받아주지 않고  내가 삼키지도 못한  세계  그 어지러운 세계와  씨름하던 시간들을  여기 내려놓다.  (박재화·시인, 1951-)  + 묘비명(墓碑銘)  태아는 긴 슬픔을 준비하면서도 저는 슬퍼할 줄 모른다. (유용선·시인) + 묘비명  물은 죽어서 물 속으로 가고 꽃도 죽어 꽃 속으로 간다 그렇다 죽어 하늘은 하늘 속으로 가고 나도 죽어서 내 속으로 가야만 한다. (박중식·시인, 1921-) + 묘비명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시인, 1941-) + 슬픈 묘비명 나 죽거든, 사랑하는 친구여 내 무덤 위에 버드나무를 심어다오. 그늘 드리운 그 가지를 좋아하느니 창백한 그 빛 정답고 그리워라 내 잠든 땅 위에 그 그늘 사뿐히 드리워다오. (알프레드 뒤 뮈세, 프랑스 시인, 1810-1857) + 시인의 비명(碑銘)  언제나 사랑에 굶주렸으되  목마름 끝내 채우지 못하였네  평생 막걸리를 좋아했고  촌놈을 자랑으로 살아온 사람,  아이들을 스승처럼 섬겼으며  흙을 시의 벗으로 삼았네  사람들아, 행여 그가 여길 뜨거든  그 이름 허공에 묻지 말고  그가 즐겨 다니던 길 위에 세우라  하여 동행할 벗이 없더라도  맛있는 막걸리나 훌훌 마시며  이 땅 어디 어디 실컷 떠돌게 하라  (배창환·시인, 1956-) + 어느 뉴펀들랜드 개의 묘비명  여기에  그의 유해가 묻혔도다.  그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되 허영심이 없고  힘을 가졌으되 거만하지 않고  용기를 가졌으되 잔인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덕목을 가졌으되 악덕은 갖지 않았다.  이러한 칭찬이 인간의 유해 위에 새겨진다면  의미 없는 아부가 되겠지만  1803년 5월 뉴펀들랜드에서 태어나  1808년 11월 18일 뉴스테드 애비에서 죽은  개 보츠웨인의  영전에 바치는 말로는 정당한 찬사이리라.  (바이런·영국 시인, 1788-1824) + 오펜부르크의 어떤 묘비명  오펜부르크의 묘지공원을 산보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묘비명 하나  한평생 마리아 베크만을 사랑했었던  철학박사 프리츠 베크만 씨는  1882년 3월 10일 생  1969년 11월 5일 몰  그녀와 함께 여기 고이 잠들어 있다  본 적도 없는 한 사내의 맑은 영혼이  내 시간의 짧은 한 자락을 즐겁게 했다  (이수정·시인) +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시인, 1914-1946) + 꽃의 묘비명 - 어떤 임종을 위하여  내 이승을 떠나는 날  별이여 너는 더욱 빛나거라  울음소리는 이미 귀에 들리지 않고  내가 지상에서 조용히 사라질 때  태양이여 너는 어김없이  나의 창문을 다시 찾아오너라  내가 앉았다 간 자리에  찬란한 꽃들 그대로 피고  빈 의자 하나 없는 만원인 땅 위에  바람이여 너는 여전히 정답게  구름을 움직이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주어라  삶의 애증은 이미 부질없는 누더기  썩은 육신에 깃들일 나비 한 마리 날지 않거니  내가 흘린 눈물 한 방울 남김 없는 땅 위에  너 찬란한 일월이여 더욱더 오래고 빛나거라  이미 고백은 늦어 버린 때  내 무덤은 하나의 삶의 마침표 길고 긴 어둠이어라  용서받기에도 이미 늦어 버린 때  내 무덤 위엔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 두지 말라. (문병란·시인, 1935-) + 미리 쓰는 나의 묘비명 흙에서 왔다가 소란한 세상의 지상을 잠시 거닐다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고요하다 평안하다. (정연복·시인, 1957-)
332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윤동주 - 서시 댓글:  조회:3013  추천:0  2015-12-14
  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에 창작되었고,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48)에 수록되어 있다. 윤동주의 「서시(序詩)」는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 중의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를 어렵지 않게 암송할 수 있을 것이고, 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이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이 친숙함이 오히려 시인의 마음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은 아닐까? 잎새, 바람, 별 같은 편안하고 쉬운 단어들이 이 시를 무작정 쉽고 편안하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시인은 고작 잎새에 이는 사소한 바람에도 괴로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서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것들이 아닌, 죽어 가는 나약한 것들을 사랑해야겠다고 말한다. 시를 꼼꼼히 읽고 행간을 음미하다 보면, 세상을 사랑하는 시인의 간곡한 마음이 느껴진다. 제목이 알려 주다시피 이 시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페이지에 놓인다.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서시」가 보여 주는 시 세계를 좀 더 깊고 풍요롭게 만날 수 있다. (이남호/교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윤동주의 시')   * 이 시를 읽으면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순수한 열정과 신념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시적 자아의 치열한 정신을 우리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고백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란 극히 미세한 도덕적 갈등을 가리킨다. 더구나 그것이 절대적 존재인 '하늘'을 기준으로 삼은 '부끄럼'과 연결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그의 고백은 지극히 사소한 도덕적 결점조차 스스로 용납지 않으려는 영혼의 소유자임을 증명해 준다.  그러한 삶의 연장선 위에서 자아는 미래에 대한 삶의 결의를 다진다. 확신과 의도를 나타내는 종결어미를 씀으로써 자아의 의지는 더욱 준열하기만 하다.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것,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자신이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라면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것, 이러한 의지가 미래지향적인 어조 속에서 시적 자아의 적극적인 실천 의지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한 행으로 처리된 제2연에 이르게 되면, 시적 자아의 관심은 다시 현실적 상황으로 돌아온다. 그는 지금 어둠(밤) 속에 서 있으며, 순수함의 표상인 '별'을 지켜나가기란 너무도 힘들어 보인다. 결국 이 작품은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는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백(表白)한 시다. 그래서 더욱 진솔(眞率)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백적인 시가 감상에 흐르거나 관념에 빠지기 쉬운데, 이 시는 적절한 시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서정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현대시목록, 인터넷) ​ * 윤동주의 서시(序詩)​ ​​ 1941년 11월 20일. 그의 나이 24세 때 그날의 일기를 적듯 자아성찰로 쓴 시이다. 한마디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 같은 의문의 명제에 성스럽기까지 하는 텍스트(text)이다. 감상상 확연히 이처럼 세 연으로 나뉜다. 고백(과거) --- 괴로워했다. 맹세(미래) --- 걸어가야겠다. 성찰(현재) --- 스치운다.  인류의 역사는 특정의 그 어떤 빛깔을 거부한다. 그것만을 수용하기 보담 차라리 반사하는 흰 빛이다. 그것은 화합의 이데올로기이요, 또한 거부의 몸짓인 비둘기의 날개짓이다. 비상에는 자기 무게만큼 부담이 따르는 법이다. 권리 이전 개인에게 의무가 있듯이 행위 이전 속일 수 없는 자아(自我)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조상의 얼과 자취를 외면하지 않는 그것이 민족적 양심이라면 그 이전 올바르게 태어나겠다는 자궁 속 태아의 손짓 발짓이 바로 그것이다. 태아의 그 손짓 발짓은 원초적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모체의 유액 속에서 유영이 원초적 우주공간 속 개체적 실존을 잉태했으니, 그는 엄밀한 의미에선 서로가 하등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근본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노아의 방주시에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한 배를 탔듯이 인류의 항해 그 역시 거듭되는 방주인 것이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지성(知性)은 냉철하되 갑속에 든 칼이다"란 말이 있다. 이 말을 경구삼아 일반은 어떻게 풀이하는지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헤아린다면 `지성의 속성` 그 일단의 풍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도 지금 시적 자아인 `나`는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 그 시절 조선의 시인은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동족에게 강요하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사지에다 조선의 젊은이를 몰아넣었으니, 역사의 참괴를 이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참으로 지성이란 동서(東西)가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어야만 하는지.  이광수의 이 차마 부끄러움을 뛰어넘어 `진실`의 실체가 되던 시절, 사르트르와 앙드레 말로는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 프랑스를 위한 필사의 탈옥을 감행했으니 남이라 해서 무조건 깎아내리고 이편이라 하여 덮어버리고 맹신 복종하는 무리적 본성이 우리는 없었던가를 새삼 성찰해야 할 당위성을 지녀야 할 때이다. 그래서도 이 `서시(序詩)`는 앞으로 시인만의 프리루드(prelude: 서문)가 아닌 민족의 `서시(序詩)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어차피 또 한차례 거듭될 수밖에 없는, `노아의 방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환/기자, 오마이뉴스 '민족의 명시 45') ​                                       * 1917년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출생. * 1931년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 1933년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 1935년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 1941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 * 1943년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 1945년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 1948년 그의 자필 유작 시와 수필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집이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 유고집은 31편의 대표시가 3부로 구성되어있으며, 어두운 시대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 * 윤동주는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윤동주는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처녀작은 , 등이다.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 , ,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 , , ,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는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해맑은 시로 평가받고 있다.  1968년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발췌)(두산백과)                     ​ ◇ 순결한 영혼의 시대적 고뇌  윤동주는 자선 원고를 묶은 후 6편의 시를 더 썼다. 「참회록」을 제외하면 도쿄의 릿쿄 대학 영문과를 다니면서 쓴 시들이다. 그는 유학 생활을 하며 퍽 고독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때 씌어진 시편들에는 이국 생활의 쓸쓸함과 함께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한 담담한 신념이 담겨 있다. "남의 나라"에서 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  그러나 이듬해인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떠나기 전 윤동주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 16일 이국의 감옥에서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마쳤다. 죄명은 "사상 불온, 독립운동, 비일본신민(非日本臣民), 온건하나 서구 사상 농후" 등이었다.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그의 내면의 여정은 미완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투명하게 비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사진 속의 온화하고 순한 시인의 얼굴이 그대로 연상된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윤동주의 시들처럼 시인의 내면을 맑고 선명하게 비춰 주는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은 시인이 가혹한 시대를 깊이 있게 고뇌하고 정직하게 살아내려고 했으며, 그로 인한 번민과 갈등을 솔직 담백한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시대의 어둠을 함께 하며 그 어둠 속에 스스로를 묻으려 했다. 생전에 변변히 발표된 적 없던 그의 시들 역시 시대의 어둠에 함께 묻힐 운명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윤동주의 영혼과 그의 시들은 시대의 가혹한 어둠을 함께 함으로써, 더욱 순결하고 밝게 지금까지도 빛나고 있다. (발췌) (이남호/고려대 교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윤동주. 대한민국 시인.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항일운동 혐의로 인한 투옥과 이른 죽음은 그를 영원한 저항시인, 청년시인으로 남게 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4년간 다녔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정과 주변에서 지금도 시인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교정에 남아 있는 시인의 흔적, 윤동주기념관   연세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한창 공사 중인 백양로를 지나면 왼쪽 벤치 옆에 자그마한 시비(詩碑)가 보인다. 거기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짧은 시가 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의 . 시비 뒤로 보이는 핀슨홀(Pinson Hall)은 연희전문 시절 학생 기숙사로 쓰였던 건물이다. 이곳은 학생 윤동주가 1938년에 입학해 2년 동안 머문 공간이기도 하다. 1922년 준공되었다는 아담한 건물 안에는 시인의 그 시절 흔적을 모아놓은 윤동주기념실이 있다. 기념실 입구에서 낡은 사진 몇 장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인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선한 눈매. 그가 남긴 시를 닮은 모습이다. 기념실 내부는 건물만큼이나 아담하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증언을 통해 재현해놓은 시인의 책상이다. 낡은 책상 위에는 당시 시인이 즐겨 읽었다는 책 몇 권, 펜과 잉크, 그리고 시가 담긴 육필 원고가 있다. 그는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문예지 《새명동》을 만들 만큼 일찍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당시 최고의 국어학자였던 최현배와 역사학자 손진태의 강의를 들으며 민족에 눈을 떴다고 한다. 전시실 중앙에는 시인이 태어난 명동촌의 막새기와가 있고, 그 옆에는 최현배의 《우리말본》이 놓여 있다. 연희전문 기숙사에 머물던 시인은 고향과 민족을 생각하며 시를 써나갔을 것이다.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시인의 언덕   시인은 연희전문 입학 2년 만에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경복궁 서쪽 누상동은 지금 서촌이라 불리는 지역에 있다. 서촌에는 윤동주뿐 아니라 시인 이상과 화가 이중섭의 집도 있었다.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곳은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화가 박노수와 이상범의 집도 서촌이었다. 지금 서촌에 문화예술인들이 몰려들고 있는 게 어쩌면 이런 전통을 잇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머물던 시인은 종종 효자동길을 따라 인왕산에 올라 시상을 다듬곤 했다. 눈 아래 펼쳐지는 식민지 경성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와 민족의 앞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시인이 오르던 인왕산 자락에 ‘시인의 언덕’이 있다. 창의문 맞은편 길로 난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서울성곽 앞으로 이곳이 윤동주 시인의 언덕임을 알리는 자그마한 표지석이 있다. 그 옆에는 를 새긴 시비가 있고, 아래로는 옛날 시인이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서울의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바로 아래에는 윤동주문학관이 자리 잡았다. 인왕산 자락에 버려져 있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다. 느린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가압장처럼, 우리 영혼에 아름다운 자극을 주는 시인의 작품을 기념하는 공간을 만들었단다. 그의 시처럼 순백색 외관은 맑은 날이면 더욱 아름답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중앙의 낡은 우물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의 생가에 있던 우물을 옮겨온 것이란다. 이 우물 옆에 서면 그가 다니던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한다. 아마도 에 나오는 우물이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 홀로 찾아가선 /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 가을이 있습니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후략)” 전시실 우물 옆으로 시인의 일생이 담긴 사진 자료들과 친필 원고 영인본이 보인다. 그리고 그가 평소에 즐겨보던 책들의 표지가 한쪽 벽 가득 붙어 있다. 백석 시집과 정지용 시집, 영랑 시집… 이 시집들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갈고 닦았으리라. 시인의 우물은 제2전시실로 이어진다. 용도 폐기된 물탱크의 윗부분을 열어서 중정(中庭)을 만들고 ‘열린 우물’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에 저장되었던 물의 흔적이 벽체에 그대로 남아 있어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느끼도록 했다. 열린 우물은 제3전시실의 ‘닫힌 우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옛날 물탱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침묵하고 사색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시인의 일생과 시세계를 담은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1941년 11월, 졸업을 앞두고 있던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그때까지 써놓은 시 가운데 18편을 뽑고 거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그리고 3부를 필사해서 1부는 자신이 갖고, 다른 1부는 같이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 나머지 1부는 연희전문 은사인 이양하 교수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윤동주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출판 보류를 권했다.  이듬해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시인은 결국 자신의 시집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고 만다.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지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유고시집이 되어 시인 정지용의 발문을 달고 1948년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윤동주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남아 있다. 여행정보   윤동주기념관 주소 :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50 문의 : 02-2123-2253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주소 :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문의 : 02-2148-4175  
331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李陸史(264) - 청포도 댓글:  조회:5271  추천:0  2015-12-14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나라를 잃고 먼 이역 땅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향수와   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고 밝은 내일에의 기다림을   노래한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다.       오늘은 청포도, 절정, 광야 등 어두운 시대상황에서 명징한 언어로   불멸의 독립의지를 노래한 민족시인,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닌 몸을 던져 싸운 실천시인   이육사(이원록)에 대해 살펴본다.                 1.출생과 어린 시절       1904년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난 육사,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항일 투사의 집안인데, 그의 투철한 항일 정신은   이런 가풍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이 아닐지?       한편 어릴 때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그는 17살 때   대구로 가 교남학교(대륜고등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후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도쿄 쇼오소쿠 예비학교에서 공부하다    1925년 귀국하는데,       그의 수필이나 평론에 보이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나   서구문학이나 사상에 대한 깊은 조예는   바로 이같은 교육경험 때문으로 봐야겠지...                 2.독립투쟁       귀국 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그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3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는데,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라   호를 육사(陸史)로 정하게 된다.       참고로 그는 처음에는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로    '戮史'란 필명을 썼는데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는   집안 어른의 권고로 다시 바꾼 것이다.                 이육사(李陸史)ㆍ문학로드 안내           시인ㆍ독립운동가(1904.4.4 ~ 1944.1.16)   호 : 육사 본명 : 원록(源祿)   작명 : 활(活) 출생 : 경북 안동        조부 치헌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서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귀국하여 대구에서   조양 회관을 중심으로 문화 활동을 벌였다.   1926년부터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 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호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렸다. 그 때의 수인번호 이육사(二六四)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젓 시「말」을 발표했고 이후 총 39편의   시를 남겼다.   이듬해에 북경과 남경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과정을 마쳤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 1월 16일 마흔의 나이에 북경주재 일본 영ㅇ사곤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서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 도 강인한 필치로 민족의지를 노래했다.     1968년 대통령표장, 1977년 건국포장,1983년 문화훈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등이 수여되었다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옛날 하늘이 처음 열릴떄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지 못하였느리라!   끊임없는 세월 동안 부지런한 계절이 피었다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노라   지금은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리라   그리하여 오랜 세월 뒤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황혼                          이육사     내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 의 반짝이는 별들 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속 그윽한 수녀들 에게도,   시멘트 장판위 수인들 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은 얼마나 떨고 있는가.   ​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 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쏘는 토인들 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 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줄 모르나 보다.                이육사 - < 절정 >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시비 위치 :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 좌측 숲속)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李陸史 1904∼1944)   시인·독립운동가. 본명은 활(活).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 육사는 호인데 대구형무소 수감번호인 264에서 취음한 것이다. 중국 베이징[北京(북경)] 조선군관학교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대구지점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것을 비롯하여 1929년 광주(光州)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번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43년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송치된 뒤 1944년 베이징감옥에서 죽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잡지를 발간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5년 30살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19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윤곤강(尹崑岡)·김광균(金光均)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하고, 목가풍의 시 《청포도》 《교목(喬木)》 등을 발표, 상징주의적이면서도 호사한 시풍으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였다. 그의 시작세계는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의식과 비애, 《광야》 《꽃》에서 보인 초인의지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저로는 친지들에 의해 발간된 《육사시집(1946)》 《광야(1971)》,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에서 부르리라(1981)》 《이육사전집(1986)》 등이 있다. 1968년 안동에 육사시비가 건립되었다.     이육사 청포도시비   본문 주소 :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234-17 문의 : 054-270-6681(호미곶면주민센터)   상세설명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 '청포도'로 유명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시비(詩碑)가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호미곶에 우뚝 서 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고, 시비 조형물 디자인은 영남대 홍성문 교수, 비문은 아동문학가 손춘익씨, 글씨는 서예가 정현식씨가 각각 맡았다.   이육사는 이 시를 통해서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했다.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특히 식민지 치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과 대립하면서,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다.   청포도,하늘,푸른바다,청포 등 청색 이미지와 흰 돛단배,은쟁반,하이얀 모시수건 등 흰색 이미지는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상징적인 소재이다.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가 듬뿍 담긴 '청포도'는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된 매체로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담고 있다.   또 '그가 찾아올 그 날'이란 대목은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를 의미하며, '청포입은 손님'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하고 있다. '은쟁반'은 화해로운 미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을 암시하고 있다.     교통안내 대중교통: 시내에서 200번 좌석버스 이용시 구룡포 종점(환승센타) 하차 후 호미곶행 버스 이용 (40분간격) 자가용 이용 : 시내에서 구룡포, 감포 방면 31번 국도 이용하여 구룡포읍내 진입 후 925번 지방도 이용하여 대보방면으로 20분정도 가다보면 우측 해안에 위치.   =============================================================================   이육사 문학관과 이육사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4.3km에 위치함   이육사(李陸史)에 대하여     1904년∼1944년. 시인·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성(眞城).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명은 원록(源綠) 또는 원삼(源三).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한다. 개명은 활(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작품발표시 ‘육사’와 ‘二六四’ 및 활(活)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황(滉)의 13대손인 가호(家鎬)이며, 어머니는 허길(許吉)로, 5형제 중 둘째아들이다.                                                                                    이육사 생가터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천 소재의 옛 백학서원(白鶴書院)인 백학학교(白鶴學校)와 보문의숙(普文義塾)·교남학교(嶠南學校)를 다니고 1926년 북경 조선군관학교, 1930년 북경대학(北京大學)사회학과에 적을 둔 적이 있다 하나, 그 연도나 사실여부가 확인된 것이 아니다. 경력은 항일운동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1925년에 형 원기(源琪),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관헌에게 붙잡혀, 북경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북경감옥에서 죽었다. 문단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 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 春愁三題〉·〈황혼 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청포도 샘   그뒤 《신조선》·《비판 批判》·《풍림 風林》·《조광 朝光》·《문장 文章》·《인문평론 人文評論》·《청색지 靑色紙》·《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수필·문학평론·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원조(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청포도 靑葡萄〉(문장, 1939.8.)·〈절정 絶頂〉(문장, 1940.1.)·〈광야 曠野〉(자유신문,1945.12.17.)·〈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의지(超人意志)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는 “내 골ㅅ방”과 같은 육사의 의식공간은 항시 쫓기고 있는 불안한 마음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빼앗긴 조국에 대한 망국민의 비애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을 그의 시에 새겨놓은 것이다. 1968년 시비가 안동에 건립되었다. 유저로 《육사시집》 외에, 유고(遺稿)재첨가본 《광야》(1971), 그의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曠野)에서 부르리라》(1981)·《이육사전집》(1986) 등이 있다.       이육사의 출생과 고향     육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육사는 수필 [계절(季節)의 오행(五行)]에서 " 내 동리(洞里)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洞里)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이라고 고향을 이야기한다. 육사가 살던 시절에 이 마을은 백여호가 살아가는 규모였던 모양이다.    육사가 태어난 날은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시절을 보낸다.                                                                                             육우당 유허지비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 손이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요. 가장 많은 독립유공포상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다. 이렇나 강직한 저항성이 퇴계 학통에서 나왔는데 , 그가 곧 퇴계의 후손이다. 그의 문학적 기질도 역시 퇴계학통의 연장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문학관 가는 길목의 퇴계 종택                                                                               퇴계종택전경   육사의 집안은 저항성이 강한 성격을 보였다. 이곳 원촌은 하계와 함께 항일 투쟁사에 우뚝 선 마을이다. 하계 출신 예안 의병장 이만도는 일제강점에 단식으로 순국항거한다. "친일적인 행위나 태도를 인정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고와 생활자세가 돌연변이로 어느날 갑작스럽게 만들어지기 힘든 일이다. 정신적 틀, 전통적 규범이 육사를 길렀다"라고 김희곤 교수는 쓰고 있다.      맏형인 원기는 대구로 이사 후 부모를 모시고 동생을 거느리며 어려운 살림을 도맡았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펼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가난하고 힘든시절이었다. 육사의 형제들은 우애가 대단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한다.    마을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다. 육사는 어린시절 동리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보면서 흰 돗단배에 대한 시상(詩想)을 키웠으리라. 지금도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가로 가서 둑길을 걸으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느껴져 온다.                                                                                       포항 호미곳에 세워진 청포도 시비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이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생가 李陸史 生家 원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현소재지 : 경북 안동시 태화동 672-9번지. 분      류 :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0호.  지  정 일 : 1973. 8. 31.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이며 애국시인 육사 이활李活(1904~1944)의 생가로, 건축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옮겨지기 전의 육사 생가 모습.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다. 대문 맞은편인 서쪽 끝에도 내당과 외당을 잇는 판벽이 있고 일각문이 있었는데, 이렇게 앞뒤 一자집만으로 평행 배치하고 양쪽에 맞뚫리는 문이 있는 집은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된 홑처마 3량가三樑架의 一자 집이며, 안채는 맞배지붕, 사랑채는 팔작지붕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칸수와 칸 사이가 모두 같고, 방과 마루, 부엌 등이 똑같은 공간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대문은 내당과 외당의 동편 끝에 판벽을 늘어세우고 한가운데 문주를 세워 기와를 이었다.   원래 안동군 도산면에 있던 것을 1976년 4월 안동댐 수몰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겼는데, 안동 시내로 옮겨진 후에는 한쪽 일각문 자리에 대문이 서고 원래의 대문 자리는 이웃집 돌담이어서 담장도 대문도 없게 되었다.             후손인 이원종이 관리를 맡고 있다. 옛 집터에는 1993년에 청포도를 새긴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李 陸 史  출전 :《朝鮮日報》(l936·10·23∼29)  노신 약전-부저작 목록-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이며 자(字)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점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야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후 동경에 건너가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연에 귀국하야 절강성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회문학운동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문학에 대하야 자연주의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 정부교육부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연 도하문 대학교수로서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주임교수의 직에 있다가 1928년 이것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맹아일간』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련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맹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年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중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가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제거하였다. 형년 56.  주요한 작품으로는 {아Q정전(阿Q正傳)} {눌함( 喊)}{방황(彷徨)}{화개집(華蓋集)}{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약(藥)}{공자기(孔子己)} 등이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엿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불란서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의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팔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과 인제는 고인이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을 불명케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여사를 중심으로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열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뒤 3일이 지난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 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 『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阿Q의 正傳을 다읽고 났을때 나는 아직까지 阿Q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견디겠다』고 한『로망·로-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阿Q의 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阿Q들은 벌써 『로망·로-랑』으로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 많은 阿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난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阿Q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정신의 삼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紅樓夢)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같은 것은 속인의 할 일이라 하여나치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동성파와 사기당과 원수단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지(胡適之)박사는 『문학개량 추의}라는『문학혁명론』을 1917年 신년호에 게재하여 진도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운동을 방해코저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 보았으나 1918년 4월 호에 노신의『광인일기』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 화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것은 그 후 얼마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속에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하면 곳 붙들고 말하기를----- 중국의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개 망상광의 일기체의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열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열마나한 해독을 끼처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송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적 사회의 성장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중에 한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둬적거려 보았다. 역사란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씨여져 있었다. 나는 밤잠도 안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자가 씌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소설의 일편은『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을 맞는다. 실로 이 한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 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데따라 문학화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이(孔乙已)』『藥』『明日』『一個小事件} {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후 1921년 북경신보문학부간에 그유명한 『阿Q正傳』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현화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가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의 심리에 생활의 『디테일스』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가지 조건이 되겠지만는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테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孔乙己』의 공을기나 『阿Q正傳』의 阿Q가 모두 일파이 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孔乙己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여지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이금십구적 주책가 어느때까지 쓰여져있는데로 언제인지 행방이 부명된 체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농민인 阿 Q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혁명 떠들어 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얼어난 폭도의 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 (피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야) 피살되는 阿Q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가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阿Q가 공을 이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개의 정신도 없으며 우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개 쥐여질리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레얄 리스틕}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 였으니 당시 『阿Q正傳』이 發表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阿Q 時代』이 였으며 노신의 『阿Q正傳』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지식군들은 『阿Q相』이라거나 『阿Q時代』라는 말을 평상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개의 재료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야 일실하여있는 노신정신을 다시한번 음미해보는데 적지않은 흥미를 갖게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것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나 하나 문제가 엇지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문제는 그의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後年『눌함』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로으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을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하려니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 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 이였겠지만은 이꿈도 결국은 깨여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해도 또 아무리강상해도 무의미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밖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中略---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하기로 했다 (눌함자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하남』 등에 쓰든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희납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빠이론』과 파란의 복수시인 『아담·미케뷧치』『항가리』의 애국시인『베트피 ·산더--』 『필립핀』의 문인으로 서반아 정부에 사형받은『리샬』등의 작품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서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은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녀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닭게 한 것은 물론 이래기천년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여졌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였다.  그럼으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阿Q도 여기서 비로서 영생하였스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항 무한을 쫓겨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부촌이 때마침 프로 문학론이 드셀때인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보았다. 그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阿Q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作品에서 우리는 눈딱고 보아도 푸로레타리아的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것이서 노신이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수 있는 푸로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민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반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해서 그의『四五』전후의 작품을 프로 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러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 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해서 작가 노신의 명의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서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수있을까? 생각컨대 이것은 매우 곤난하다. 現在의 이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테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해도 용이치않다. 어떤 사람이 즉 이런 문제를 제출한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그래도 좋다. 왜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양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럼으로 프로 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기피 현실의 핏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 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中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전 모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삼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를 소뿌르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를 뿌르 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는파에 대해서는 무엇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전투자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 보담 만은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료해하야 장래를 추단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랄』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 시준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父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든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生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느면 안될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려나가기 더 바밨다.}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 한 안복파의 수령 단사서의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의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오십여명 체포령을 내렷다. 우리 노신은 이 오십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이 결정되어 그 익년 가을 『뽀로듼』等이 고문으로 광동에오고 『전국민적공사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 일계단인 광동시기에는 프로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지 였다』  그래서 급진교수들은 교육부총장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수백여명의 사상자가 낳다. 그때 노신은 북경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병원이나 공장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이래 최암흑일에 지』하였다는 명문은 단사서로 하여금 기자에 내려안게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중략--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속화개집)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콜키-』이든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양리 ·발뷰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오십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단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폐타는 광동일성만 노동자 농민급진지식분자 삼천여명을----하였으며 한때는 『혁명의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여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악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하는 것은 대권로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더 생기있는 것이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더 아낌이 없시------(而己集)  이 글은 그가 심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보인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그가 상해에 왔을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불만과 극좌적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찰스키--』들의 문학론과 『싸벳트』의 문예정책을 번역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던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가 마저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난한 수형에 의하여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점괴히 알며 붓을 놓기로 한다. -了-      이륙사는 노신을 만나 보았을까?    - 이륙사(李陸史) 의 공과(功過)문제                김병활(金秉活)         목차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5) 고쳐 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5. 맺음말 참고문헌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1세기 동아시아 문학의 방향을 탐구함에 있어서 中國, 韓國, 日本 등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공명을 일으키고 상호 이해하고 대화와 담론을 할 수 있으며 공동연구도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 접점중의 하나가 바로 3국 문단에 모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魯迅연구이다. 중국과 일본이 현대문학 연구 분야에서 한국보다 한발 앞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일부 정치적인 요소도 작용하였겠지만 공동으로 담론할 수 있는 하나의 접점-노신연구를 돌출이 내세운 데 있다고 본다. 근년에 한국에서도 노신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비교문학의 시각으로 중한현대문학을 연구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추세로 발전한다면 중한문화교류는 증일 교류보다 못지않은 수준과 태세를 갖출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취지에서 본 논문은 노신에 대한 한국에서의 수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면서 중점적으로 이륙사의 을 텍스트로 이륙사의 노신관(魯迅觀)을 분석하고 일부 문제점도 제기하려 한다.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20세기 20-30년대에 한국에서 노신(魯迅)을 소개한 중요한 논문 중에는 이륙사(李陸史)의 이 있다. 이 문장은 노신이 서거된 지 4일후인 1936년 10월 23일부터 에 5기로 나누어 연재되었다. 이 문장의 집필속도의 빠름과 내용의 광범성은 당시 한국의 노신연구 분야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비교문학의 수용이론에 따르면 똑 같은 작품일지라도 독자들의 이해와 반응은 다종다양하다. 한국에서의 노신수용도 마찬가지로 부동한 문인들과 독자들은 부동한 수용입장에 따라 부동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륙사의 이 발표되기 전에 한국에는 이미 양백화(梁白華)가 번역한 일본학자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의 논문 에서 처음으로 노신을 거론하였고 1931년 1월에는 정래동(丁來東)이 장편논문 을 에 20기로 나누어 연재하였다. 1934년에는 신언준(申彦俊)의 가 한국 지 제4기에 발표되었다. 이밖에 노신의 소설작품이 한국에서 널리 번역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시기에 노신은 한국문단에 광범히 알려진 중국작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 노신을 부정적 시각으로 본 문인들도 있었다. 이경손(李慶孫)은 1931년 2월에 라는 문장을 에 2기로 나누어 발표하였는데 당시 항간에서 떠돌던 노신의 일상생활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두로 쓰면서 노신에게는 새로운 창작이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고 노신이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담한 것을 시답지 않게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이경손은 후일에 한간(漢奸, 매국적)으로 전락한 장자평(張資平)을 노신보다 더 월등한 것으로 보고 정래동의 노신론에 대해서도 관점 상 다소 별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륙사의 은 일반적인 추도문의 수준을 초월하였고 학술적 연구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정음사의 출판으로 된 에서는 제목을 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이륙사는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주로 노신, 호적, 서지마(徐志摩)에 치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노신을 숭배하였다. 그가 30년대 초반에 이미 좌익 켠에 선 노신을 숭앙하였기 때문인지 그의 조카 이동영(李東英)교수는 지난 세기 70년대에 이륙사의 사상은 어느 정도로 사회주의계통에 속하며 아마 그 자신은 ‘한국의 노신’이 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1) 이륙사가 노신에 대해 경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노신연구는 경향성이 선명하다. 때문에 그는 노신을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 ‘문화의 전사’라고 높이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노신의 부보를 듣고 더없이 비통해하였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 시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노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서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2) 노신에 대한 이런 심후한 감정은 그 앞서 노신을 소개하고 평론한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이륙사는 에서 를 분석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돌리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노신의 백화소설 가 발표된 후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그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였다.”“이 주인공들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하였다.”“어린이를 구하자”는 말은 “당시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순결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노신을 가리킴--필자 주)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이였다.” 이런 평가는 그 경향성이 아주 선명하며 노신에 대한 숭배와 노신의 반대편에 섰던 복고(復古)파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륙사는 에서 을 분석하였는데 그 관점은 대체로 정래동, 신언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유명한 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일인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그는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Q시대였으며 노신의 이 발표될 때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라거나 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해 1월에 이광수는 작가들에게 톨스토이의 와 같은 빛나는 사시적 작품을 창작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부정적 예로 노신을 거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신의 나 는 노신의 소설가적 재분의 표현으로는 영광일지는 모르나 그 꽃을 피게한 흙인 중국을 위하여서는 수치요 모욕이다. ... 관우, 장비는 아Q와 공을기로 퇴화해버린 것이다.”3) 여기에서 이광수는 본의가 여하하든지간에 노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오독(誤讀)’하고 있는바 노신의 창작동기와 작품의 사회적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륙사는 9개월 후에 쓴 에서 의 현실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이광수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실로 수많은 아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 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시고탑로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4)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이 노신의 잡문을 거의 거론하지 않은데 반해 이륙사는 노신잡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노신잡문에 대한 해독을 통해 노신의 사상발전을 연구하려고 시도하였다. 노신의 문학관에서 홀시할 수 없는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이륙사는 정래동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래동은 소설작품에 대한 연구에 치우면서 잡문연구를 멀리하였기에 노신 문학관에 대해 일부 편차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는 “노신은 철두철미 문예는 혁명에 인연이 가장 먼 것임으로 암만 문학자가 혁명, 혁명하고 떠들어도 제3선의 전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여 왔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이륙사는 노신이 국민성을 개조하고 봉건제도를 개변하려는 목적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노신에게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이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 작품이 산출하는데서 문호 노신의 위치는 높아갔고 아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5) 뿐더러 이륙사는 노신의 잡문집 에 수록된 잡문들을 인용하면서 노신이 진화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 단계’에 들어섰다고 찬양하였다.   이 대목은 이륙사가 노신이 중국좌익문단에 합세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는 이륙사가 한 아래의 말에서 진일보 입증할 수 있다. 국민당의 쿠테타로 하여 상해에 모여온 ‘원기 왕성한’ ‘젊은 프로학자’들이 극좌적인 태도로 노신을 공격할 때 노신은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차르스키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프로문학을 건설”하였다.6) 당시에 ‘카프’계통의 작가, 비평가들이 노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이륙사의 이런 견해는 특별히 주목되는 점이다.   이륙사는 북양군벌정부와 국민당 당국이 노신을 박해한데 대해서도 통분해마지 않았다. 그는 노신의 창작생애가 너무 짧은 것을 애석해하면서 노신이 후기에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원인은 국민당정권의 박해로 하여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에 더 바쁘게”한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관점은 이경손처럼 노신에 대해 편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노신의 후기에 창작원천이 고갈되었다고 폄하하는 의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이륙사의 생평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일부 남아있다. 이것을 구명하는 일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이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러 면에서 자술과 가설을 고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심중히 고증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제기하고 논의하려 하는데 우려심도 없지 않아 있다. 광복 전 많은 한국문인들이 친일경향을 나타낸데 반하여 이륙사는 독립투사, 저항시인으로 추대되어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더없이 귀중한 존재로 나서고 있다. 이런 이륙사에게서 흠집을 찾아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어쩐지 위구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사명이라고 자처해 온 이상 아는 대로 연구 선색을 제공하고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것은 한국에서 이미 정설로 된 듯싶고 무릇 이륙사의 생평을 거론하면 반드시 그와 노신과의 만남이 빠지지 않고 소개된다. 예컨대 김학동(金㶅東) 편저로 된 에서는 이륙사와 노신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은 그 표제와는 달리, 노신문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라 할 수 있다. 육사는 중국에 있을 당시 노신을 직접 만났을 뿐만 아니라, 노신의 소설 을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때 육사는 호적, 서지마, 노신 등을 포함한 중국근대문학에 경도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개는 완전히 이륙사의 자술에 근거한 것이다.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노신과 만난 경과에 대해 이륙사는 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 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괘아’를 입은 중년 늙은이가, 생화에 쌓인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란 것을 말하고 난 10분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큼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였다.     이상의 서술에서 우리는 이륙사가 노신을 더없이 존경했다는 것, 노신도 생면부지의 조선청년을 아주 따뜻이 대해주고 초면에도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분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아래에 이 기술을 권위인사와 학자들의 서술과 대조해 보자.    양행불의 장례식 상황에 대해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권위인사인 정사원(程思遠) 주필로 된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월 20일 오후 2시, 폭우가 쏟아졌다. 양행불 장례식은 만국 빈의관 영당(靈堂)에서 거행되었다. 국민당 특무들은 또 동맹의 기타 지도자들을 암살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었다. 송경령, 채원배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만국 빈의관에 가서 의연히 조문을 하였다. 노신도 조문하러갈 때 집을 나서면서 열쇠를 두고 나갔는데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각오를 보여주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노신은 비를 무릅쓰고 귀로에 올랐는데 그 비속에 충만된 피비린내를 감수한 것 같았다.7)    중국의 노신연구 학계에서 권위학자들인 임비(林非), 유재복(劉再復)이 쓴 에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6월 20일, 양전(楊銓,양행불-필자 주)의 장례식이 만국 빈의관에서 거행되였다. 국민당특무들은 채원배와 노신을 암살하련다는 요언을 사처에 퍼뜨리었다. 이 날 오후 노신은 이미 희생될 사상적 준비를 충분히 하고 아주 침착하게 옷을 갈아입고 대문 열쇠를 조용히 허광평에게 넘겨주었다. ... 그리고는 정오에 온 허수상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심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몇 십 명의 조객들은 문어귀에 서서 감시하는 특무들을 멸시하면서 가슴을 뻗치고 회장에 들어섰다. 송경령과 채원배는 이미 양전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8)          이 몇 가지 서술을 대조해 보면 일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륙사는 노신이 송경령과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의 기술에 의하면 양행불의 장례식에 송경령(宋慶齡)과 채원배(蔡元培)가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고 노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노신의 이 날 일기에도 “점심에 계시(季市, 許壽裳--필자 주)가 왔는데 오후에 둘이 함께 만국 빈의관에 가서 양행불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라고 적혀있다.9) 임비, 유재복의 기술에는 송경령과 채원배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빈의관의 양행불 영구 앞에 서있었고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허수상이라고 하였다. 보다싶이 과 임비, 유재복의 의 기술은 이륙사가 에서 한 기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신과 동행하여 만국 빈의관에 들어온 사람은 송경령이 아니라 허수상이며 송경령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채원배와 함께 양행불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는 것이다.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노신의 반만 사상에 대해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의 상호 단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고려한 모양인지 별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노신은 당시 시대적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분명히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노신이 1933년에 만족(滿洲族)의 대표적 의상인‘마괘아’를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그냥 입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마괘아’는 중국어로 ‘馬褂’, ‘馬褂兒’라고 하는데 기마민족인 만주족들이 말 타고 싸우는데 편리하도록 허리까지 짧게 만든 웃옷이다. 명 왕조 이전에 중국의 한족들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리 드리운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만족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마괘아’와 같은 만족의상을 입기 시작하였다. 청조말기에 조정이 부패해 지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한족들에게는 반만 사상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구국, 애국을  ‘만청(滿淸)’정부를 반대하는 것과 직결시키기도 하였다. 손중산이 조직한 동맹회의 誓約盟書에도 라고 쓰여 있고10) 노신이 일본에 있을 때 가담한 광복회의 서약서에도 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한다.11)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의 노신도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 간 후 제일 먼저 청 왕조가 한족들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머리태를 베여버리고 “나는 나의 피를 조국에 바치련다(我以我血薦軒轅)”고 선언하였고 또 한족들의 강산을 광복하려는 에 가담하였다. 이런 경향은 그의 문학작품에서도 간간이 노출되고 있는데 에서 丁擧人의 금은보화를 실어간 신해혁명시기의 ‘혁명당’도 바로 명왕조의 말대황제인 숭정(崇禎)황제를 기리고 명 왕조를 ‘광복’하려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노신의 수필 에서도 노신은 한 고향사람인 범애농이 일본에서 무턱대고 자신을 반대할 때의 감수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제일 미운 것이 만주족이라고 생각했댔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버금이고 제일 미운 것은 범애농이였다.” 여기에서 노신은 젊은 시절부터 청조의 만족통치에 대단한 적개심을 가지였고 한족으로서의 민족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처음에는 주변사람들의 풍습에 따라 간혹 ‘마괘아’를 입기는 하였으나 1927년 1월 후부터는 ‘마괘아’와 ‘서양 마괘아’라고 칭하는 양복을 한 번도 입지 않았고 서거할 때까지 줄곧 한족들의 대표적의상인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필자가 노신이 1902년부터 1936년까지 남긴 사진 114점을 조사해 보았는데 1926년까지의 사진 40점 중에 ‘마괘아’를 입은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것도 대체로 敎師직과 교육부 공무원으로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마괘아’를 입은 장소였다. 1927년 1월부터 서거할 때까지의 74점 사진 중에는 ‘마괘아’를 입은 사진이 한 점도 없다.12) 아마 청조 시기 근 300년 입고 있던 ‘마괘아’를 관습의 힘에 의해 하루아침에 벗어버리지 못하다가 점차 반만 사상이 의상에까지 신경 쓰게 된 것이 아닌가고 추정된다. 혹자는 이륙사가 중국 의상문화를 잘 알지 못해 두루마기를 ‘마괘아’로 잘못 인식하지 않았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륙사가 노신이 두루마기 위에 ‘마괘아’를 입었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이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 1991년 7월에 북경 노신박물관에서 일보던 張연구원한테도 이 일을 자문해보았는데 그도 단마디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에 따르면 R씨는 상해 불란서 조계지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 편집원이다. 그는 노신과 사전에 아무런 약속이 없는 상황 하에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한 무명의 조선청년을 노신에게 스스럼없이 소개할 수 있는 미스터리 식 인물이다. 사실 이날 노신은 국민당 특무들에게 피살될 각오를 하고 집 열쇠마저 두고 나왔으며 추도식은 특무들의 삼엄한 감시 밑에 있었고 일기도 좋지 않아 폭우가 억수로 퍼부었다. 이처럼 열악한 천기와 수시로 총알이 날아올 수 있는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노신이 이륙사와 같은 무명의 조선청년을 만나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있었겠느냐가 의문스럽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노신은 언제나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공적인 장소에서는 냉혹할 정도로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중국문인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찾아볼 수 있는 자료에는 노신이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서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륙사의 기술과  임비, 유재복의 다음과 같은 기술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후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 처량한 애도곡이 울리는 가운데, 비애에 찬 흐느낌 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선서하는 듯하였다. 영별이외다! 하지만 당신이 채 걷지 못한 길을 우리 모두가 걸어갈 것입니다.                                                                                       -- 임비, 유재복     이와 달리 이륙사의 기술처럼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것은 노신의 종래의 성격, 이미지 그리고 장소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서 역시 중국인들에게 잘 접수되지 않는 점이다. 낭만주의 시인인 곽말약(郭沫若)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일런지 모르지만 노신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륙사의 에 왜 이런 묘사가 나왔겠는가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노신은 양행불 추도식이 있은 이틑날에 일본 벗(樋口良平)에게 시 한수를 써서 증송하였는데 이 시는 후에 라는 제목으로 많은 저서에서 수록되고 있다. 시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豈有豪情似舊時,        花開花落兩由之,        何期淚灑江南雨,        又爲斯民哭健兒。13) (대의: 그 옛날 호기와 격정 어디로 갔나        꽃이 피고 지여도 할 말이 없구나        어느새 눈물이 강남의 비 되어 쏟아지는데        여기 백성들 또 건아를 위해 통곡하누나 )      이 시에서 ‘눈물이 강남의 비’로 되었다거나 ‘건아를 위해 통곡’한다는 것은 단지 문학적 표현으로서 이 시를 근거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고는 할수 없다. 아마도 이 시가 항간에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는 것으로 와전되지 않았는가고 추정된다.   5) 고쳐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이륙사 관련저서에는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이 모두 ‘1932년 6월 초’로 되어있다. 김학동 편저로 된 (새문사, 1986)에서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을 1932년 6월 초라고 쓰고 있고 심원섭 편주로 된 (집문당, 1986)의 작가연보에도 “1932년 (29세) 6월 초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나다.”라고 쓰여 있다. 이동영 편으로 된 (문학세계사,1981)의 에는 “1932년 6월 초 어느 날 중국과학원의 부주석이요 국민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의 호상소인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났으며...”라고 적혀있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의 진실성 여하를 잠시 제쳐놓더라도 이 연보는 틀린 것이다. 양행불의 장례식은 1933년 6월 20일이다. 여기에서 우선 연도가 틀리며 일자도 틀리게 적혀있다. 양행불이 암살된 날은 6월 18일 (일요일)이고 장례식은 6월 20일 (화요일)인데 이륙사는 ‘6월 초’의 어느 ‘토요일’ 아침에 조간신문에서 양행불 피살 기사를 읽었고 그 뒤 3일후에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쓰고 있다. 이는 기억의 오차라고 추정할 수도 있는데 주석을 달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왕의 연보에서 이륙사의 1932년 행적이 잘못 되였으면 1933년의 행적도 따라서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것을 자그마한 기억오차로만 간주하지 말고 보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심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고 있다.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집필되었기에 오차가 나타난 것은 피면할 수 없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지금 을 출판할 때마다 이런 오차에 대해 주해를 달지 않고 그대로 답습한다면 독자들에게 그냥 ‘오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는 여러 개 판본으로 된 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모두 똑 같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문장의 순서에 따라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노신이 1917년에 귀국하여 절강성의 사범학교와 소흥 중학교 등에서 리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는 문제 - 노신은 1902년에 일본 유학을 갔고 1909년에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고 1912년에 교육부에 취직하였다. 그가 작가적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18년에 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2) 노신이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 심안빙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문학연구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지 않았고 회원으로 된 적도 없다. 다만 문학연구회의 결성을 지지, 성원하였을 따름이다.   3) 1928년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상해에서 지를 주재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1927년 4월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직하였고 동년 9월에 광주를 떠나 10월에 상해에 이주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지가 간행되지 않았고 그 후 1930년 1월에 지가 창간되었는데 노신이 이 간행물의 주필로 되었다.      4) 노신이 1931년에 상해에서 체포되었다는 문제 - 1931년에 ‘좌련 5烈士’중의 유석(柔石)이 체포될 때 노신의 도서출판 계약서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특무들은 노신의 집 주소를 대라고 핍박하였으나 유석은 시종 불복하였다. 이런 정세에서 노신은 친우들의 서신들을 불살라버리고 일본인 우치야마(內山完造)씨의 도움을 받아 온 가족이 황륙로 화원의 한 일본 여관에 피신하였다. 사람을 질식케하는 작은 방에서 노신 일가는 하나의 침대를 사용하면서 한 달 동안이나 피신생활에 시달리었다. 아마 이 일이 외부에는 노신이 체포되었다고 와전된 듯싶고 이륙사도 그 소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5)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에 서거하였다는 문제 - 현존 자료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 국민당 어용단체인 라는 조직이 없었다. 노신은 임종 전에 트로츠키 파 진중산(陳仲山)과 논쟁을 벌린 일은 있다.   6) “유명한 오사(五四)운동이나 오주(五州)운동”- ‘오주’운동은 ‘오삼십’(五卅)운동의 오기(誤記)이다. ‘5.30’운동은 1925년 상해에서 일본제국주의와 북양군벌정부가 파업에 나선 상해의 방직노동자들을 참살하여 발생한 혁명적운동이다.   7) 1926년 4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 장개석의 쿠데타는 ‘1927년’의 오기이다.                  5. 맺음말     이륙사의 은 학술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를 평론하려한 정래동이나 신문기자 신분으로 노신의 생활을 살펴보려 한 신언준과는 달리  노신 숭배자이며 저항시인으로서의 이륙사의 숭배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에 접근하고 높은 평가를 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갖고 있다. 때문에 일부 에서 을 으로 고친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 문장은 노신서거 후 4일 만에 발표된 장편추도문이기에 일부 문제점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필자는 이 논문을 집필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다. 독립투사이고 저항시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이륙사의 자술에서 흠집을 찾아내고 문제점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는데 동료들의 권고로 포기하였었다. 필자는 종래로 이륙사를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이륙사의 독립투사로서의 공적과 저항시인으로서의 위상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진실을 구명하여야한다는 학자의 사명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비근한 예로 일본 학자 와타나베 죠우(渡邊 襄)씨는 노신을 숭배하는 입장이면서도 노신의 자술에서 ‘환등(幻燈)사건’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많은 정력을 투입하여 조사, 연구하였다. 그리고 논문 를 발표하였다.14) 이처럼 자신이 숭배하는 문인일지라도 진실은 구명되어야 한다는 태도는 아마 모든 학자들의 공동한 인식일 것이다. 거기에 또 돋보이는 것은 중국학자들이 이 논문을 중요시하고 학술논문집에 실어준 것이다.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해외의 한 俗人이 거론한다는 것이 실로 외람되고 죄송스러운 줄은 알고 있는 바이지만 순전히 학술적 입장에서 출발한 본문의 취지를 넓은 아량으로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김학동 편저: , 새문사, 1986 심원섭 편주: , 집문당, 1986 이동영 편: , 문학세계사, 1981 《魯迅日記》:《魯迅全集》15捲, 人民文學齣版社,1981 林非、劉在復:《魯迅傳》, 中國社會科學齣版社,1981 程思遠 主編:《中國國民黨百秊風雲》,延邊大學齣版社,1998 《魯迅》(影集):北京魯迅博物館 編輯,文物齣版社,1976    주: 1) , 제290페이지  2) , 정음사, 1980, 제76페이지    3) , 1936년 1월 6일 4) , 정음사, 1980, 제77페이지  5) 동상서, 제83페이지  6) 동상서, 제88-89페이지  7)  《中国国民党百年风云》, 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 1998, 第424-425页  8) 《魯迅傳》: 林非、劉再復,中國社會科學出版社,1981年,第312-313頁  9) 《魯迅日記》:《魯迅全集》第十五卷,第85頁,人民文學出版社,1981  10) 《中国国民党百年风云》,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1998, 第44页  11) 동상서,第37页  12) 《魯迅》:北京魯迅博物館編輯,文物出版社,1976  13) 《魯迅全集》15卷, ,第85頁, 人民文學出版社, 1981  14) 《日本學者中國文學硏究譯叢》(第三輯),吉林敎育出版社, 1990, 第154頁     《朝鲜-韩国学语言文学研究(3)》(民族出版社‘北京’2006.2)           이육사시인의 따님 이옥비여사님 /     이육사선생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여사님(70)과 함께          벚꽃 아래서      해 지는 모습이 너무 신비해서...          명자나무꽃 옆에서          안동댐에 있는 이육사시비 '광야' 앞에서     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옥비여사님은 아버님의 유업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8년부터 서울에서 안동에 내려와서 살고 계십니다. 육사선생님께서 돌아가실 때 만 3살이었기 때문에 아버님에 대한 것은 글과 어머님을 통해 들었지만 살아있는 동안 아버님의 유업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자그마한 체구로 오늘은 윷판대(광야 시 무대)를 오르시고 내일은 왕모산 칼선대(절정 시 무대)를 오르시며 하루해가 짧은 듯이 동분서주하고 계십니다. 여사님은 궁중요리를 비롯하여 각종 음식도 잘 하시고 꽃꽂이 또한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을 갖고 계셔서 지금은 안동에서 꽃꽂이도 가르치고 계십니다... ====================================================================== 육사 시비 이건 후 안동댐으로 이건 후의 육사 시비(광야) 앞에서. 아랫줄 좌로 부터 신동집 시인, 신석초 시인, 이효상 국회의장, 육사의 장조카 이동영 교수, ?, 김대진 국회의원 뒷줄 좌로 부터 이승희 안동군수, 서기원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장, ?, 양태식 경북도지사,맨 뒤 육사의 양자 이동박. |2011.04.02. | 중국 연변작가協 올해 만주서 '이육사 문학제' 개최  자정순국 안동 선비 渡滿 100주년 기념          나라 빼앗긴 경술국치의 분노를 자정순국으로 보여주었던 안동지역 선비들이 ‘왜(倭)의 땅에서 하루라도 살 수 없다’며 엄동설한 칼바람 추위 속에 만주로 향했던 ‘도만(渡滿) 100주년’을 맞아 중국 연변 조선족 작가들이 안동을 찾았다.    도만 100주년을 맞아 올해 만주지역에서 ‘제1회 이육사 문학제’를 마련할 계획으로 안동 이육사문학관과의 업무 협의와 매일신문사 및 의성군이 함께 마련하는 ‘의성 산수유 꽃바람 국제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안동간고등어생산자협회 측의 안내로 안동을 찾은 중국 길림성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회장 등 조선족 문인들은 31일 일제의 저항시인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온 향토출신 이육사 시인의 도산면 생가와 이육사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이날 연변 조선족 작가들은 이육사문학관에서 육사의 딸 옥비 여사와 이영일 관장, 이위발 사무국장 등 문학관 관계자들과 만나 도만 100주년 기념행사로 만주지역에서 마련할 계획인 ‘제1회 이육사 문학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이육사 선생의 나라사랑과 항일 저항운동이 스며있는 문학세계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으며 만주지역 문학제에 서로 긴밀한 협의를 가지기로 했다. 이들은 한국국학진흥원과 도산서원, 의성국제연날리기대회장과 지역 특산품인 안동간고등어 공장을 차례로 방문하고 하회별신굿탈놀이 관람과 1일 안동문화원, 2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100년 전 만주 항일투쟁 당시를 회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향산 이만도 선생을 비롯해 숱한 선비들이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자정순국으로 보여주면서 일제에 항거했으며 이듬해인 1911년 석주 이상룡, 백산 김대락 등 지역 선비들이 문중 식구들과 함께 만주로 향해 한국독립운동사 50년사에 길이 남는 해외 항일운동이 시작된 해였다.    조선족 시인 김승종(48) 씨는 “만주지역 항일투쟁이 시작된 지 100년째인 올해 이육사 문학제를 만주에서 열 수 있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며 “안동지역의 많은 문인들도 이육사 문학제에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매일신문)   2011-04-01  AM  09:00:00 【안동】만주항일투쟁 개시, '도만 100주년'기념 조선족 문인 내한      중국 길림성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회장 등 조선족 문인들이 만주 항일투쟁이 시작된 지 100주년째(도만 백주년)인 올해를 맞아 독립운동의 성지인 안동을 찾아 왔다. 시인과 소설가인 이들은 31일 오전 일제의 저항시인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온 향토출신 이육사 시인의 도산면 생가와 이육사문학관을 둘러보았고, 1일 안동문화원과 4월 2일 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100년 전 만주 항일투쟁 당시를 회고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들은 이어 한국국학진흥원과 도산서원, 의성국제연날리기대회장과 지역 특산품인 안동간고등어 공장을 차례로 방문하게 되며 하회마을 전수관에 들러 하회별신굿탈놀이도 관람한다.   이들은 도만 100주년 기념행사로 올해 중에 만주지역에서 제1회 이육사문학제를 열기로 하고,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조영일 관장, 이옥비 여사를 비롯한 관계자를 만나 행사개최에 대한 논의를 했다.   1910년은 향산 이만도 선생 등 많은 지역 애국지사들이 나라 잃음을 애통해 하며 목숨을 버리고 순국한 했다.   바로 그 이듬해인 1911년은 안동지역에서 많은 독립지사들이 고향을 버리고 떨쳐 일어나 일제히 만주로 나가서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기 시작한 해로, 올해가 바로 그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1910년이 정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듬해인 1911년은 역동적인 투쟁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직접 초청한 조선족 시인 김승종(48)씨는 "항일투쟁이 시작된지 100년째인 올해 이육사문학제를 만주에서 열 수 있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면서 "안동지역의 많은 문인들도 이육사문학제에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1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 연변대학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09-23 10:43:49 ]  학술세미나에서 우상렬교수가 론문을 발표했다. 9월 22일,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량심을 지키고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한국 안동이 낳은 저명한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중국조선족대학생들의 반일 력사의식을 고양하는것을 취지로 한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이육사시인의 외동딸 이옥비 녀사가 참석한 가운데 연변대학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는 범사회적인 문학외면에 직면하여 문학후보군체들의 참여를 주도하고저 진행하는 문학제로서 대학캠퍼스로부터 문학인재를 양성하자는 취지로 진행되는 유일한 대학생문학축제로 연변작가협회와 한국안동시이육사문학관 주최, (주)안동간고등어 협찬으로 이루어졌다. 《청포도》, 《광야》, 《절정》 등 시작품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육사시인의 문학제는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항일운동을 하고 북경감옥에서 옥사한 등 시인의 활동범위와 중국조선족대학생들이 참여한다는것이 계기가 되였다. 연변작가협회 당조서기 안국현이 대상 수상자 리영 학생에게 시상했다. 금상 수상자들 은상 수상자들 동상 수상자들 이번 문학제 학술세미나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우상렬 교수가 《저항시인의 독립정신과 문학적 성과》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고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김호웅 교수가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어 진행된 문학상시상식에서 최경위, 민봉화 등 6명 학생이 동상을, 한지영, 유린식, 조소연 등 5명 학생이 은상을, 허미령, 리위 등 4명 학생이 금상을 수상하고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08급 리영학생이 《필름사진기》(외 3편)로 대상을 수상했다.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제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연변작가협회 리사인 김승종시인이 연변작가협회의 앞으로 유치한, 중국내 유일한 조선족(한글문장을 쓰고 응모에 참가하는 기타 민족 대학생도 포함.)대학생문학제이다. 연변대학을 출발점으로 조선어(한국어)학과가 설치된 중국의 대학들에서 륜번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제2회 문학제는 2012년에 북경에서 진행된다. ============================================================= 제2회 《이육사문학제 및 학술세미나》 연변과기대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09-10 16:52:38 ]  9월 10일 오후, 연변작가협회와 한국 안동 이육사문학관 공동 주최,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의 후원으로 제2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 및 학술세미나》가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이하 과기대)에서 개최되였다. 지난해 한국안동간고등어회사와 연변작가협회가 손잡고 제1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 및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었다.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량심을 지키고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한국 안동이 낳은 저명한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조선족대학생들의 반일 력사의식을 고양하는것을 취지로 한 이 문학제는 항일투사이며 시인인 이육사선생의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기리고 중국에 이육사선생을 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도 있다. 문학제는 조선족대학생을 상대로 펼쳐지는 문학제로서 대학생들의 작품을 선정하여 문학상을 시상하는 동시에 우리의 말과 글을 사랑하고 배우는 재학중인 기타 민족학생들의 한국어(조선어)작품을 선정하여 한국어문학상을 시상한다. 이육사문학관 조영일 관장이 한국어문학상 금상 수상자 유혜영에게 시상했다. 과기대 김진경총장이 이육사문학상 대상 수상자 량옥화에게 시상했다. 이육사문학상 금상 수상자들. 문학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한국어과 09급 유혜영, 장연 등 4명 학생(한족)이 동상을, 과기대 한국어과 09급 범길평(만족), 장총(한족) 등 3명 학생이 은상을, 과기대 한국어과 09급 양결(한족)학생이 금상을 수상했다. 이육사문학상 시상식에서는 연변대학 사범분원 10급 최역문, 과기대 상경학부 11급 양기원 등 4명 학생이 동상을, 과기대 상경학부 09급 박예령, 연변대학 사범분원 11급 림해연 등 3명 학생이 은상을, 과기대 컴전통 08급 리상우, 연변대학 사범분원 11급 김향매 등 3명 학생이 금상을, 과기대 국제무역 10급 량옥화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시상식에 이어 이육사시인의 《청포도》, 《광야》, 《절정》, 《꽃》 등 시작품들이 중·한 시인들에 의하여 랑송되였다. 학술세미나에서 론문을 발표하는 연변대학 김경훈(오른쪽)교수. 문학제 학술세미나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교수인 김경훈박사가 《이육사 시의 구조 연구》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고 한국의성문인협회 회장 장효식시인이 토론을 진행하였다. 문학제에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최국철이 개회사를 하고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김진경총장과 안동문인협회 장은주회장이 축사를, 이육사문학관 조영일 관장이 페회사를 했다. 주최측과 수상자 일동이 합영을 남겼다.       ================================================== 제3회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제》 연변대학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12 17:14:12 ]  연변대학사범분원 정철(가운데)학생이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 경상북도와 안동시청이 주최하고 안동이육사문학관과 연변작가협회가 주관하는 제3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안동간고등어회사와 안동병원, 연변대학의 후원으로 9월 12일 오후 연변대학 예술학원 극장에서 개최되였다.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최국철이 개회사를 하고있다.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최국철은 개회사에서 문학후비군 양성을 주목표로 하는 유일한 문학제로서의 《이육사문학제》는 대학생들의 참여의 장으로 조선족대학생들과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고있는 타민족대학생들의 대형문학행사의 하나로, 명실상부한 대학생문학제로 거듭나고있다고 지적, 기성문인들과 바야흐로 문단에 등단하는 대학생들과의 상호 련대와 협동을 적극 추진하고 상호 교류와 우의를 증진하는 중요한 무대로 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제1부로 진행된 이육사문학세미나에서는 북경제2외국어대학 김영옥교수가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에서 나타난 랑만성 고찰》이란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고 중앙민족대학 어문학부 오상순교수가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육사문학세미나에서의 오상순(왼쪽)교수와 김영옥교수. 제2부 이육사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우상렬교수의 수상작선정보고에 이어 시상식이 진행되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설치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절강월수외국어대학의 능적, 려양과 산동공상학원의 오소진 등 3명 학생이 동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번역석사연구생 왕연, 산동공상학원의 수취홍 등 2명 학생이 은상을, 산동공상학원의 원시가학생이 금상을 수상했다.   산동공상학원의 원시가학생이 한국어문학상 금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문학상 시상식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2년급 박복금, 연변대학사범분원 2009년급 리미란 등 10명 학생이 우수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0년급 조문학부 민해인, 연변대학사범분원 2011년급 유홍 등 8명 학생이 동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0년급 신문학부 리나, 연변대학사범분원 2009년급 최려나 등 5명 학생이 은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1년급 석사연구생 김단, 심양리공과대학 유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1년급 조문학부 류서연 등 3명 학생이 금상을, 연변대학사범분원 2012년급 정철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금상수상자들인 김단(왼쪽 두번째), 류서연 학생 시상식에서 연변대학당위 부서기 량인철, 안동이육사추모사업회 권부옥리사장,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문학연구소 오상순부소장이 축사를 하였다. 시상식에 이어 김경숙, 여환숙, 강수완 등 한국의 시인들과 연변랑송협회 송미자회장이 이육사의 《광야》, 《청포도》, 《꽃》, 《황혼》 등 시를 랑송하였다.   이날 문학제에는 연변대학, 산동공상학원, 절강월수외국어대학, 심양리공대학 등 10여개 대학에서 온 학생들과 연변대학, 연변작가협회, 한국 경상북도, 한국안동시청, 안동이육사문학관, 안동병원, 안동간고등어회사 등 주최측의 대표 250여명이 참가하였다.       ====================================================================== 제4회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제...                                           2015년 제5회 연변이육사문학제(9월 18일~21일) 제5회 이육사문학제 연변대학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9-18 17:55:21 ]  9월 18일 오후,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가 주최하고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이육사문학관이 주관한 《제5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안동병원과 안동간고등어회사의 후원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개최되였다. 연변작가협회 당조성원 정봉숙은 개막사에서 문학후비군 양성을 주목표로 하는 유일한 문학제로서의 《중국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제》는 대학생들의 참여의 장으로 조선족대학생들과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고있는 타민족대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형문학행사의 하나로, 명실상부한 대학생문학제로 거듭나고있다고 지적, 기성문인들과 바야흐로 문단에 등단하는 대학생들과의 상호 련대와 협동을 적극 추진하고 상호 교류와 우의를 증진하는 중요한 무대로 되였다고 하면서 이같은 의의있는 행사를 조직하고 후원해준 경상북도 안동시와 이륙사문학관 그리고 후원단체들에 감사를 드렸다. 문학제 제1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세미나에서는 한국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유성호교수가 《저항으로서의 이륙사시와 그 서지적 사항》,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우상렬교수가 《이륙사와 중국 현대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였다. 웃줄 좌로부터 정봉숙, 리봉우, 군부옥, 이옥비, 유성호, 우상렬, 김경훈, 조영일. 제2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교수이며 연변작가협회 겸직부주석인 김경훈이 수상작선정보고와 수상자명단을 발표하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타민족대학생들을 상대로 설치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길림화교대학 장성양, 치치할대학 왕정정 등 5명이 우수상을, 대련민족대학 리로, 정주경공업대학 초근근 등 8명이 동상을, 남경대학 리연, 산동대학 온애륜 등 7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양문연, 손효 등 4명이 금상을, 산동대학 록미교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문학상 시상식에서는 북경화공대학 김지이, 중앙민족대학 최의단 등 15명이 우수상을, 회해공학원 류연정, 연변대학 정희정 등 13명이 동상을, 천진외국어대학 최려영, 화동사범대학 차경나 등 10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김소연, 김은령 등 5명이 금상을, 연변대학 강미홍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상 대상 수상자 연변대학 강미홍(가운데). 시상식에 이어 김경숙, 김희선 등 한국의 시인들과 연변랑송협회 송미자, 박송천 등 랑송인들이 이륙사의 《광야》, 《청포도》, 《노정기》, 《절정》 등 시들을 랑송하였다. 문학제에서 연변대학조선-한국학학원 당위서기 리봉우와 이륙사추모사업위원회 리사장 권부옥이 축사를 하고 이륙사선생의 딸 이옥비녀사가 답사를 하였으며 한국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관장 조영일이 페막사를 하였다. 부분적인 수상자들과 함께. 이번 문학제에는 연변대학과 타지역 20여개 대학들에서 온 수상자 및 연변작가협회,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안동병원, 안동간고등어회사 등 주최측과 후원측의 대표 250여명이 참가하였다. 문학제가 진행되는 동안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중한시인들의 시화전이 있었다.                     ▲이육사 선생 따님 이옥비 여사가 꽃을 올리며...   상해 로신공원 內 윤봉길의사 기념비앞에서... =========================== 안동문화원 원장님과 함께... /////////////////////////////////////////////////////////////////////////////////////================ 상해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에서(2015년 9월 20일) =================================================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두 달 동안 기거했다는 초가집   무너져 내리는 역사의 현장...안타까웠다...    이육사문학관측에서 처음으로 찾아 가는 이육사 순국감옥  감옥이었던 건물 입구에서 제를 올리는 따님 이옥비여사 손병희 교수, 이옥비여사, 권부옥이사장, 조영일관장  이육사 순국감옥- 영세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잡초와 쓰레기로 폐허처럼 어지러웠다.  그날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인이 이곳에 갇혀있었다는 예기를 들었다는 거주 주민  고문을 당했다는 지하감옥 이육사 순국한 일본령사관 북경감옥을 가르키는 여행 가이드    
330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심훈 - 그날이 오면 댓글:  조회:3404  추천:0  2015-12-12
  그 날이 오면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그날이 와서 육조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구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필경사의 심훈선생 문학관   기념관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임.        ▲ 원형대로 복원된 심훈의 집        ▲ 상록수 상징의 무쇠 조각품      ▲ "그날, 쇠가 흙으로 돌아가기전에 오라" 2001년 심 훈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당진군 출신의 조각가가  사철 푸른 상록수를 상징해 무쇠로 만든 조각품.         그날이 오면 심훈선생 당진필경사          심훈 선생의 얼굴이 새겨진 조각의 뒷면에 새겨진 글    "내가 화가가 된다면... 반 고흐의 필력을 빌어 뭉툭하고 굵다란 선이 살아서 용같이 꿈틀거리는...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가 새겨져 있음.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초가흙집으로 남아있는 필경사, 농촌 한가운데 이 조그만 초막에서 가 쓰여졌다고.            ▲ 필경사 옆의 독립유공자 표지석 심훈 선생은 1901년 9월 12일 서울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 1915년 경성제일고보(후의 경기중)에 입학 3·1운동 때(제일고보 4학년, 19세 때)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체포 나중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름 그 곳 지강대학 국문학과에 입학.   심훈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로도 재직          ▲ 기념관 내 선생의 초상화      ▲ 약력(연보) 그리고 선생은 193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곳 당진으로 내려와 한동안 아버지와 한집에 살던중  1934년에 독립하여 살집을 직접 설계하여 짓게 되는데 그 집이 바로 필경사랍니다.   필경사는 심훈문학의 산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선생은 필경사에서 창작에 전념하게 되는데 여기서 농촌계몽소설로 유명한 대표작인  ‘상록수’를 비롯해 ‘영원의 미소’ ‘직녀성’등을 집필하였으니까요.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에 당선되었죠.   1930년대 일제 강점기 하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청년들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 ‘상록수’. 잠깐 내용을 볼까요.   상록수는 다 알다시피 샘골강습소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다가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여성독립운동가 최용신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죠.   상록수 주인공인 채영신은 신문사 주최 학생 계몽 운동에 참가한 이후 동혁과 동지로서의 애정을 느끼게 되고 농촌운동에 앞장설 것을 약속합니다. 채영신은 예배당을 빌려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일본 경찰의 저지를 받자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모금운동을 펼쳐 학교를 세우지만 준공식날 축사를 하던 영신은  과로로 쓰러지고 동혁은 동지의 배신을 경험하고 울분을 참지 못해 농우회관에 불을 지릅니다. 목숨을 걸고 농촌 계몽 운동에 앞장서는 채영신. 이를 이어가려는 박동혁 등  당시 젊은 지식인들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굳건한 의지가 잘 묘사되어 있는 작품이죠. 이렇듯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작품들은 대부분 민족 의식과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계몽주의 문학의 전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 훗날 '그날이 오면'의 초고가 된 선생의 옥중 편지(왼쪽 맨 아래)등을 기록한 활동상황판. 이 편지는 그의 어머니께 쓴 것입니다.      ▲ 어머니께 쓴 편니 확대본      ▲ 상록수 등 선생의 작품집 모음    ▲ 중국 유학 등 선생의 활동상 개요도      ▲ 문예활동      ▲ 영화활동에도 활발했던 선생의 열정      ▲ 조카들과 다정한 한때(왼쪽 아래)      ▲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들이자 작품의 배경이었던 지인들과 함께...     ▲ 상록문화제 행사 앞서 소개한 심훈의 시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그날이 오면’은 1919년 심훈이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어머님께 보낸 편지글중 일부라고 합니다. 그동안 발표된 심훈의 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생은 1936년 9월6일, 너무 이른 나이에 급서하여 그의 문학 새계는 더 펼쳐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선생은 상록수를 직접 각색하고 감독을 맡아 영화로도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서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 옹이  다시 구입해서 관리하다가 당진시에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251-12 041-360-6883       ***           심훈 시인의 시비 동작구 흑석동에 있음.   심훈기념관  
329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박목월 - 청노루 댓글:  조회:4643  추천:0  2015-12-12
  박목월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나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록집](1946)     이 시는 이상향에 가고 싶어 하는 청노루의 소망을 담은 시이다. 또는 봄날에 이상향에 대한 상상의 한 장면이다.   화자는 이상향을 그린 한 폭의 동양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림의 시간적 배경은 ‘봄눈’ 놓는 봄이다. 공간적 배경은 ‘자하산’이다. 화자는 멀리서 ‘자하산’을 보고 있다. ‘머언 산 청운사’의 ‘머언’이 이를 알려준다. ‘청운사’는 오래된 절이다. 그러므로 ‘낡은 기와집’이라 말하고 있다.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에서 ‘자하산’이 공간적 배경임을 알 수 있고 ‘봄눈’에서 시간적 배경을 알 수 있다. ‘산은’의 ‘은’은 ‘자하산’이 실제의 산이 아니라 화자의 상상 속의 산임을 암시한다. ‘은’의 용법에는 ‘상상’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자기의 상상의 세계를 알려줄 때 ‘--은 --라 하고 하자’를 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하산’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산이고 ‘자하’는 ‘전설에서, 신선이 사는 곳에 서리는 노을이라는 뜻으로, 신선이 사는 궁전을 이르는 말’이므로 ‘자하산’은 세외도원 내지는 신선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하산’에 봄이 오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나’ ‘열 두 구비’가 모두 푸르러 진다. 이 때 이곳에 있는 ‘청노루/ 맑은 눈’을 보면 ‘도는/ 구름’이 비춘다. ‘청노루’ 또한 세상에는 없는 짐승이다. 이를 볼 때 ‘자하산’은 세외 도원, 이상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화자는 한 폭의 동양화를 큰 틀에서 세심한 곳까지 보는 것 같다. 큰 산에서 사슴의 눈동자에 비치는 구름까지.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면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의 의미가 불확실해진다. 왜 세외 도원에 있는 ‘청노루’가 ‘도는/ 구름’을 보는 것인가? 세외 도원에 있다면 바랄 것이 없는 이상향인데 ‘구름’을 보는 것인가? 이러한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약간 관점을 바꾸어 시를 보도록 하겠다. 물론 전개될 시해석은 필자의 상상에 의하여 왜곡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시를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필자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묵인하고 갈 수가 없다. 읽으시는 분들은 이렇게 보니 재미 있다 정도로 읽어주시기 바란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을 바라보는 인물은 화자가 아니라 ‘청노루’이다. 화자는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을 바라보는 ‘청노루’를 관찰하고 있다. ‘청운사/ 낡은 기와집’이 있는 ‘산은 자하산’이다.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청노루’는 과거에 이곳에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머언’ 곳에 있다. ‘청노루’는 회상한다.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나는’ ‘자하산’의 ‘열 두 구비를’ 마음껏 뛰놀았다. 그러나 지금은 선계에서 나와 멀리서 ‘자하산’ ‘청운사’를 바라보고 있다.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은 ‘청노루’가 ‘청운사’를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청운’은 ‘푸른 구름’이다. 그러므로 ‘구름’은 ‘청운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무슨 이유인지 낙원에서 나와 낙원을 그리워 하는 내용을 담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청노루’는 화자가 객관화된 사물이라 할 수 있고 ‘자하산’의 ‘청운사’는 화자가 꿈꾸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20060929금후0621   참고 자작시 해설   이 작품을 쓸 무렵에 내가 희구한 것은 '핏발 한 가락 서리지 않은 맑은 눈'이었다. 나이 50이 가까운 지금에는 나의 안정(眼睛)에도 안개가 서리고, 흐릿한 핏발이 물들어 있지만 젊을 때는 그래도 '핏발 한 가락 서리지 않은 눈으로 님을 그리워하고 자연을 사모했던 것이다.   또한 그런 심정으로 젊음을 깨끗이 불사른 것인지 모르겠다. 어떻든 그 심정이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을 그리게 하였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청노루'가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는 분이 있었다. 물론 푸른빛 노루는 없다. 노루라면 누르스름하고 꺼뭇한 털빛을 가진 동물이지만, 나는 그 누르스름하고 꺼뭇한, 다시 말하자면 동물적인 빛깔에 푸른빛을 주어서 정신화된 노루를 상상했던 것이다. 참으로 오리목 속잎이 피는 계절이 되면 노루도 '서정적인 동물'이 될 것만 같았다.   또 청운사나 자하산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어느 해설서에 '경주 지방에 있는 산 이름'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 것을 보았지만 이것은 해설자가 어림잡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기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내가 창작한 산명이다. 나는 그 무렵에 나대로의 지도를 가졌다. 그 어둡고 불안한 일제 말기에 나는 푸근히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가 그리웠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은 어디나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바라진 땅뿐이었다. 강원도를 혹은 태백산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내가 은신할 수 있는 한 치의 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의 깊숙한 산과 냇물과 호수와 봉우리와 절이 있는 마음의 자연 지도를 그려보게 되었다. 마음의 지도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태모산(胎母山), 태웅산(太熊山), 그 줄기를 받아 구강산(九江山), 자하산(紫霞山)이 있고, 자하산 골짜기를 흘러 잔잔한 호수를 이룬 것이 낙산호(洛山湖), 영랑호(永郞湖), 영랑호 맑은 물에 그림자를 잠근 봉우리가 방초봉(芳草峰), 그 곳에서 아득히 바라보이는 자하산의 보랏빛 아지랑이 속에 아른거리는 낡은 기와집이 청운사(靑雲寺)이다.   - 박목월, 『보랏빛 소묘』중에서 =================================================================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1946)      (1) 주제 : 봄의 정취. 아름다운 이상향의 봄 정경   (2) 박목월(1916-1978) 본명 박영종(朴泳鍾). 경북경주 출생.‘청록파’ 한국적인 자연과 전통 정서/민요조 율격이 주를 이루며/향토성 짙은 시/가족적 유대/로 체온을 나누는 시를 썼다. 만년에는 신앙심 깊은 시. 시집 , 등   (3) 정중동(靜中動): 정적 (청운사, 기와집, 산) 동적(녹는 봄눈, 피어나는 속잎, 내려오는 청노루, 흐르는 구름) (4) 색채 이미지(푸른색, 보라색, 초록색, 하얀색)- 한 편의 담채화같은(5) 'ㄴ'음(비음)을 반복 사용함으로써 아늑하고 은은한 분위기를 돋움. (6) 시상 전개 : 원경 ---> 근경 (7) 표현 : 묘사적 심상, 율격의 변조(2·3조의 변조와 4음보) (8) 화자의 목소리 : 절제된 목소리 (9) ㉠청노루 - 중심소재, 깨끗한 이미지. 푸른빛 (10) 청초한 푸른빛을 주로 구사한 이유는 ? 암담한 상황을 벗어난 이상적 생명의 고향을 노래하기 위해   (11)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이라기보다는 시인의 내면 속에서 이상화된 자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2) 박목월의 해설 : 그 어둡고 불안한 일제 말기에 나는 푸근히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가 그리웠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은 어디나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바라진 땅뿐이었다. 그래서 나 혼자의 깊숙한 산과 냇물과 호수와 봉우리와 절이 있는 마음의 자연 지도를 그려보게 되었다. 마음의 지도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태모산(胎母山), 웅산(太熊山), 그 줄기를 받아 구강산(九江山), 자하산(紫霞山)이 있고, 자하산 골짜기를 흘러 잔잔한 호수를 이룬 것이 낙산호(洛山湖), 영랑호(永郞湖), 영랑호 맑은 물에 그림자를 잠근 봉우리가 방초봉(芳草峰), 그 곳에서 아득히 바라보이는 자하산의 보랏빛 아지랑이 속에 아른거리는 낡은 기와집이 청운사(靑雲寺)이다.   하관     ①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②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③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④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⑤㉡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박목월(1959)   (1) 주제 : 죽은 아우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2) 평범하고 쉬운 일상적 시어 속에 중의적 표현 (3) 하강(下降)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시어들 ① ~내렸다 ② ~내리듯 ③ ~하직했다 ④ ~눈과 비가 오는 ⑤ ~떨어지면 (4)  ㉠ 좌르르 - 의성어가 주는 효과 :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간접적으로 제시, 감정의 절제 ③ 하직(下直)했다 - 중의적표현, 흙을 떨어뜨리다/작별하다 ④⑤ - 이승 ㉡ 열매 - 익으면, 떨어지는 현세의 삶의 질서, 보편적인 인간의 죽음 삶과 죽음에 대한 화자의 달관의 태도가 집약된 시어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 박목월1946       (1) 주제 : 체념과 달관의 경지 (2)  표현상 특색과 효과 ㉠간결한 형식미-감정의 절제와 압축된 시어 ㉡짙은 향토적 색채-'강나루', '밀밭', '술 익는 마을' -향토성. ㉢민요조의 율조-3·4·5조 율조의 3음보격 ㉣시각적 이미지 효과-'구름에 달 가듯이', '타는 저녁 놀' ㉤색채의 대비적 표현-'강', '밀밭', '하늘'은 푸른 색, '구름'은 흰 색,'저녁 놀'은 붉은 색 ㉥후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의 조화(4연) - 술 익는 → 저녁 놀 ㉦주제연의 반복-구성의 안정감, 주제의 강조 효과   (3)‘구름에 달 가듯이'의 의미와 통하는 한자 성어 - 행운유수(行雲流水), 유유자적(悠悠自適) (4) '나그네'의 성격 - 속세를 벗어나 유유자적하고자 하는 마음의 상징으로 현실에 대한 체념적 자세이자 생에 대한 달관의 경지로 이해할 수 있다. 억압에 대항하는 저항적 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5) '길은 외줄기'  - 홀로 걸어가는 나그네의 고독감을 표현 (6)'남도 삼백 리'의 거리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자. - 시인의 서러운 정서를 담은 시어로 정감의 추상적 거리 (7) 각 연의 끝맺음을 대체로 명사 - 정서와 의미의 응축, 간결미와 함축미의 강조, 여백과 여운의 효과 (8) 그림에 비유할 때, 연상되는 그림 - 청(靑), 백(白), 홍(紅)의 색채감을 통해 볼 때, 담채화(淡彩畵)가 연상 (9)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보낸 시 ‘완화삼’에 대한 화답 시이다.     이별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별리(제1-4연)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끊어질 수 없는 인연(제5-7연)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순응과 초극(제8,9연) 박목월(1968)   (1) 주제 :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인연과 그리움. (2) 박목월(1916∼1978) 본명은 영종. 경북 월성군 출생. 1939년 에 추천되어 등단.1946 (3) 성격 : 인간적, 전통적/ 어조 : 소박하고 친근한 어조 (4) 표현 : ①방언-소박한 정감 ②반복과 점층-그리움과 안타까움 심화            ③되풀이되는 질문('뭐락카노') 속에 이별의 정한을 드러냄. (5) ㉠ 강 -  이별의 공간, 삶과 죽음의 간격     ㉡ 밧줄 - 결합, 인연/ 삭아 내림 - 이별, 시간과 인연의 소멸     ㉢ 나도 곧 따라갈 터이니 이별인사를 하지 말자.     ㉣ 재회의 약속 (6) 제2연의‘목소리’는 운명적 상황의 비극적 인식에서 오는 '물음'     ‘뭐락카노.뭐락카노.뭐락카노...’     제9연의‘목소리’는 운명적 순응에서 오는 초극의 '대답'     ‘오냐,오냐,오냐....’ 이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7) 이별에 대한 화자의 자세는? 순응, 초극       부산 지하철 1호선 부전역 2번 출구 앞 박목월 시비                                 문학계 거장들의 육필원고   한국현대문학관 1997년 11월 8일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에 위치한 계원조형예술대학 내에 설립됐는데 원래 명칭은 ‘동서문학관’이었다. 2000년 7월 1일 서울시 중구 장충동 파라다이스 빌딩 별관으로 옮기면서 ‘한국 현대 문학관’으로 개칭됐다. 구하기 힘든 주요 문학작품의 초판본 2000여 권, 육필원고 1000여 점, 사진자료 1500여 점, 영상자료 4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청준, 박경리, 전숙희, 피천득, 김남조 선생 등  박종화,  이태준, 유진오, 이효석, 김동인, 심훈 선생 등 최정희, 한무숙, 손소희, 하근찬, 이청준, 박경리, 황순원, 김동리 선생 등 ​ ​ 이상의 『애야(哀夜)』 ​ ​ 김소월의 『기분전환』                                                          김억의 『님의 마음』 ​ ​ 서정주, 박재삼, 피천득, 허영자 선생 등 ​ ​   한용운, 박목월, 윤동주, 조지훈, 김광림, 신석정 선생 등         4월의 노래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그것은 연륜이다                                         어릴적 하찮은 사랑이나 가슴에 백여서 자랐다.  질 곱은 나무에는 자주 빛 연륜이 몇 차례나 몇 차례나 감기었다.  새벽 꿈이나 달 그림자처럼 젊음과 보람이 멀리 간 뒤 ...... 나는 자라서 늙었다.  마치 세월도 사랑도 그것은 애달픈 연륜이다.         길처럼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산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 뵈일 듯 말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 길은 실낱 같다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무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 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난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윤사월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하관(下棺)                                        관(棺)을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가정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산도화 1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사는것이 온통 어려움 인데 세상에 괴로움이 좀 많으랴 사는 것이 온통 괴로움인데 그럴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면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속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서로 서로가 돕고 산다면 보살피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산다면 오늘 하루가 왜 괴로우랴 웃는 얼굴이 웃는 얼굴과 정다운 눈이 정다운 눈과 건너보고 마주보고 바로보고 산다면 아침마다 동트는 새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어려운 일 돕고 살자 마음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적막(寂寞)한 식욕(食慾)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素朴)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者)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渴求)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달                                                          桃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혹은 외동면(外東面)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挑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이 후끈한 세상에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그 너르고도 후끈한  '우리'들의 생활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간'이 빚어지고  남과 더불어 짜는  그 오묘한 생활의  그물코에  오늘의 보람찬 삶  세상에는  완전타인이란 있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든든한 밧줄로 서로 맺어져  우리는 서로 돕게 된다.  다만 에고의 색맹자만이   나와 남사이에 얽혀진  그 든든하고 따뜻하고  신비스러운 밧줄을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이 후끈한 세상에  오늘의 찬란한 아침이 열린다.         뷸국사                                                       흰 달빛 자하문   달 안개 물 소리   대웅전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우회로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凝結)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昏睡)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螺旋通路)를 내가 내려간다.         이별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어머니의 언더라인                                       유품으로는  그것 뿐이다.  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  우리 어머니의 성경책.  가난과  인내와  기도로 일생을 보내신 어머니는  파주의 잔디를 덮고  잠드셨다.  오늘은 가배절  흐르는 달빛에 산천이 젖었는데.  이 세상에 남기신  어머님의 유품은  그것 뿐이다.  가죽으로 장정된  모서리가 헐어 버린  말씀의 책  어머니가 그으신  붉은 언더라인은  당신의 신앙을 위한 것이지만  오늘은 이순의 아들을 깨우치고  당신을 통하여  지고 하신 분을 뵙게 한다.  동양의 깊은 달밤에  더듬거리며 읽는  어머니의 붉은 언더라인  당신의 신앙이  지팡이가 되어 더듬거리며  따라가는 길에  내 안에 울리는  어머니의 기도소리        빈 컵                                                       빈 것은 빈 것으로 정결한 컵.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를 마른 가지로 타오르는 겨울 아침에. 하지만 세상에서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의 샘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의 손이 장미를 꽂는다. 로오즈 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인 죠세피느 불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의 중심에.         심야의 커피                                                1  이슥토록  글을 썼다  새벽 세 時  시장기가 든다  연필을 깎아 낸 마른 향나무  고독한 향기,  불을 끄니  아아  높이 靑과일 같은 달.      2  겨우 끝맺음.  넘버를 매긴다.  마흔 다섯 장의  散文(흩날리는 글발)  이천 원에 이백원이 부족한  초췌한 나의 분신들.  아내는 앓고……  지쳐 쓰러진 萬年筆의  너무나 엄숙한  臥身.      3.  사륵사륵  설탕이 녹는다.  그 정결한 投身  그 고독한 溶解  아아  深夜의 커피  暗褐色 深淵을  혼자  마신다.         이런 詩                                                    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치며 아는 체 하는 그런 詩, 대수롭지 않게 스쳐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詩, 읽고 나면 아,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詩,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詩 슬며시 하늘 한자락이 바다에 적셔지 듯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詩,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詩.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카드에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ㅡ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ㅡ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참말로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누굴 기다릴까.   ㅡ 네 개의 까만 눈동자.   ㅡ 네 개의 까만 눈동자.    그런 날에 외딴집 굴뚝에는 감실감실 금빛 연기, 감실감실 보랏빛 연기,   ㅡ 메리 크리스마스   ㅡ 메리 크리스마스           박목월 朴木月 (1916. 1. 6 ∼ 1978. 3. 24)             
328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조지훈 - 승무(僧舞) 댓글:  조회:5135  추천:0  2015-12-12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 생애 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 출생 경상북도 영양 분야 문학 작가 시인, 국문학자. 경북 영양 출생. 본명 동탁(東卓). 1939년 “문장”지를 통하여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 등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동양의 회고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에의 향수, 민족의 한(恨)을 고전적 운율로 노래하였으며, 박두진, 박목월 등과 “청록집”(1946)을 간행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공저), “풀잎 단장”(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이 있다. 작품 낙화(落花) 이 시는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살아가는 화자가 떨어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꽃이 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대자연의 섭리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동틀 무렵, 별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귀촉도의 서러운 울음소리도 사라진 후에, 화자는 미닫이창에 은은히 붉게 비치는 꽃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꽃이 떨어지면서 드러내는 은은한 붉은빛은, 세상을 피해 꽃과 함께 살아가는 화자의 서글픔이 담겨 있는 빛깔이라고 할 수 있다. 낙화를 본 화자는 자신의 내면 상태로 시선을 돌린다. 세상을 피해 은둔자적 삶을 살아가는 화자는 꽃이 지는 광경을 통해 삶의 무상감과 절망감을 토로하는 것으로 시상을 마무리한다. *수록교과서 : (문학) 지학 완화삼(琓花衫) - 목월(木月)에게 이 시의 제목 ‘완화삼’은 ‘꽃을 완상하는 선비의 적삼’이라는 뜻으로 ‘꽃을 즐겨 구경하는 선비’를 말한다. 이 시는 제목에서도 드러났듯이 ‘완화삼’, 즉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데, 그 선비는 구름과 물길처럼 흘러가는 유랑의 삶을 사는 나그네이다. 차가운 산길을 오르내리며 마을을 옮겨 다니는 나그네는 구슬픈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다가 들른 강 마을에서 술 익는 냄새가 가득하고 저녁 노을빛이 눈에 어리는 가운데 ‘꽃잎에 젖어’ 잠시나마 무념무상의 경지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 시간은 순간일 뿐이고, 이 밤이 지나고 나면 꽃은 질 것이라는 점을 나그네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 이라고 말하며 애상감에 젖어든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나그네의 한과 애상감은 시각, 후각, 청각 등의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독문) 창비 고풍 의상 이 시는 전통 의상을 입고서 춤을 추는 여인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예스러운 어투로써 고전적 미감을 추구하는 시적 화자의 풍류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봄밤이고, 공간적 배경은 풍경 소리가 울리는 전통적인 기와집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런 은은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여인은 회장 저고리와 치마, 그리고 운혜와 당혜와 같은 전통적인 의상을 하고 있다. 이런 의상으로 추는 춤 사위는 저고리의 정적인 우아함과 치마의 동적인 아름다움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섬세하게 춤 사위를 묘사하면서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밝도소이다, 골라 보리니, 흔들어지이다’와 같은 예스러운 어투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분위기를 한층 돋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와 같은 표현을 통해 고전미에 흠뻑 도취된 화자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배경이나 인물, 그리고 동작 등은 모두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시인은 고전적인 우아미를 형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황수 이 시는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산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한시의 시상 전개 방식인 기승전결과 선경 후정(先景後情)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시는 앞부분에서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제시하고, 뒷부분에 가서 비애감에 젖어 있는 화자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있다. 첫째 문장에서는 벌레 먹은 기둥과 빛 낡은 단청, 새들이 둥우리를 친 추녀의 모습을 통해 무기력하게 망해 버린 왕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문장에서는 큰 나라(중국)를 섬기다 왕조가 거미줄을 쳤다(패망)는 진술을 통해 중국을 섬기던 과거 우리 나라의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 셋째~다 섯째 문장에서는 몰락한 왕궁에 서서 느끼는 화자의 정서가 심화되고 있다. 봉황이 울어 본 적이 없다는 표현을 통해 조선 왕조의 무기력함을 한탄하면서, 이제는 나라의 주권마저 없는 현실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살아갈 위치를 상실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여섯째 문장에서 화자는 망국의 현실에서 느끼는 자신의 슬픔을 봉황새에 감정 이입시켜 표현하고 있다. 망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비애감을 봉황새라는 간접적인 대상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슬픔을 내면화하는 지사적인 품격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승무 이 시는 ‘승무(僧舞)’라는 춤을 통해 세속적인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4음보의 율격이나 소재면에서 전통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체 9연의 이 시는 춤을 추는 동작의 순서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1~3연은 여승이 춤을 추기 직전의 모습을 ‘고깔 → 머리 → 볼’로 시선을 이동(위 → 아래)시키면서 묘사하고 있다. 4연은 춤의 시 · 공간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밤의 정적미를 드러내고 있다. 전체 구성면에서 볼 때, 가장 앞에 올 부분이다. 5~8연은 승무의 춤사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5연은 급박한 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6~7연은 춤사위 중 별을 바라보는 여승의 모습을 통해 세속적 번뇌의 종교적 승화를 기원하는 여승의 내면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8연에서는 유장한 춤의 모습을 합장에 비유함으로써 승무에서 느껴지는 경건성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9연은 1연과의 수미 상관의 구조를 통해 시상을 마무리함으로써 정적미와 함께 승무의 계속되는 여운을 전해 주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하이얀, 감추오고, 모두오고, 감기우고’ 등의 시적 허용과 ‘이 밤사, 삼경’과 같은 예스러운 표현, 그리고 수미 상관의 구조 등은 이 작품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세속적 번뇌의 승화라는 주제 의식에 기여하고 있다. 다부원에서 이 시는 6·25 전쟁 당시의 다부원 전투 현장을 보고 느낀 시인의 감회를 적은 작품이다. 종군 작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창작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실적이고도 강렬한 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전쟁사에서 볼 수 있는 전쟁이 주는 참혹함이 나타나 있지만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시인의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역을 휴머니즘의 시선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1~3연은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고 한달 동안 치열하게 싸웠던 참혹한 전쟁의 현장이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는 표현을 통해 전쟁의 상처가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음을 제기하고 있다. 4, 5연에서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시적 화자는 6, 7연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군마와 적군의 시체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고발하고 있다. 8, 9연에서는 '한 하늘 아래 목숨받아' 태어난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싸워 이제는 시체가 되어 썩고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간고등어 냄새'를 통해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10, 11연에서는 죽은 자도 산 자도 인식이 없고 바람만 부는 모습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황폐함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전쟁사와의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산상의 노래 이 시는 광복을 맞이한 시적 화자의 기쁨을 비유적 표현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하지만 시인은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민족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이상을 염원하고 있다. 광복 전의 화자의 모습을 '시들은 핏줄', '메마른 술' 등으로 표현하여 생명력을 상실한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러한 모습에 '종소리'와 '피'가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러한 광복을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또 다시 '높으디높은 산마루'에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고 있다. 과거처럼 울고 있지는 않지만 민족의 미래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는 선구자로서의 화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조론 중수필.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태를, 간접적 체험을 사례로 들어 비판하고 있는 수필이다. 또한 민영환,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에는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비난받는 자들이라도 열심히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박혀 있는 지조의 개념을 다양한 일화와 속담을 통해 적절하게 설명하고, 단정적인 어투와 힘이 넘치는 문체로 변절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한편 지조 있는 삶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비상(우한용) 시의 비밀 수필. 이 글은 저명한 시인인 글쓴이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해 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소재의 선정, 시상의 구상, 구상의 언어적 구현, 원하는 표현을 얻기 위한 노력, 창작의 고통, 개요 짜기, 퇴고 등 시 ‘승무’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순서에 따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글 전반에 걸쳐 예술에 대한 글쓴이의 해박한 지식과 섬세하고 치밀한 미적 감각, 표현 하나하나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작가 정신 등이 잘 나타나 있어 글쓴이가 왜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멋 설 수필. 이 글은 ‘멋’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가을 달밤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글쓴이는 삶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펼친다. ‘멋’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소개하며 삶에 힘겨워 하는 이들과 복을 찾아다니느라 애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멋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현재 자신의 처지에 만족해하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를 멋으로 규정하고 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 속에 있으며, 이러한 삶이야말로 멋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고풍스러운 말투와 다양한 수사법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승무   ■ 조지훈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군말】 이 시는 민족적 정서, 전통의 아름다움, 불교적 선미(禪美)라는 조지훈의 초기 시 세계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소재가 되고 있는 승무란 승려가 붉은 가사에 장삼을 걸치고 고깔을 쓰고 장단의 변화에 따라 추는 춤[독무(獨舞)]을 말한다. 1~3연에서는 승무의 모습―그중에서도 머리 부분을 묘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 정작으로 고와서’나 뒤에 보이는 ‘외씨보선’, ‘복사꽃 고운 뺨’ 등으로 미루어 승무를 추는 사람은 젊은 여승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 여승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로 감추고 있다. 그 고깔의 날아갈 듯 가벼운 움직임을 화자는 한 마리 나비와 같다고 말한다. 언뜻 보이는 여인의 볼에 흐르는 빛은 고와서 서럽고,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 무대에서 여인은 춤을 시작한다. 길고 넓은 소매를 휘어 감으며 돌아설 듯 날아가는 여인의 들린 발에 사뿐히 신겨진 외씨버선을 느꼈을 순간 화면은 정지되고,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아진 여인의 까만 눈동자와 복사꽃 고운 뺨에 흐르는 두 방울이 클로즈업된다. 여인의 그 눈물로 인해 이 번뇌는 춤과 함께 밤하늘의 별빛으로 멀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여인의 춤이 세사(世事)에 시달리며 겪은 번뇌를 이기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임을 알게 된다. 다시 춤이 이어진다.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은 거룩한 합장(合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번뇌를 떨쳐 버리려는 혼신의 몸짓이다. 밤은 깊어져 삼경(三更, 밤 12시 전후)인데 여인의 하얀 고깔은 나비처럼 날아갈 듯하다. 아니, 나비가 되어 번뇌와 함께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시는 승무를 추고 있는 여인의 외적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여인이 마음속의 번뇌를 춤으로 흩어 버리고자 하는 내면의 소망까지 그려 내고 있다.       「승무」의 창작 과정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 묘사를 뒤로 미루고 직입적으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 그다음, 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곡절(曲折)로 들어갈 것, 그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靜止)하는 찰나의 명상(冥想)의 정서를 그릴 것, 관능(官能)의 샘솟는 노출(복사꽃 고운 뺨)을 정화(淨化)(별빛)시킬 것, 그다음 유장한 취타(吹打)에 따르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翹翹)한 달빛과 동터 오는 빛으로써 끝맺을 것. 이것이 그때의 플랜(계획)이었으니, 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 동안 퇴고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된 한 편의 시를 겨우 만들게 되었다.퇴고하는 데에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장삼(長衫)의 미묘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마침내 여덟 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 버리고 나서 단 두 줄로 요약하고 말았다.     서울 남산 꽃동산 건너편에는 조지훈 시비가 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불린 조지훈선생이다.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인으로  한학을 공부했던 조지훈이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나와 한학과 불교, 현대문학을  어우르는 전통과 선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시인이다.  '   파초우'는 조지훈이 스스로 '방랑시편'이라고 했던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자연을 떠돌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자로, 저녁에도 소리를 매개로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신을 성찰한다.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드기는 저녁 어스름 창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조지훈선생은 자연과 벗한다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 시비-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앞, 문과대학 뒤)       [조지훈(趙芝薰) 시비 -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 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는 한 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합장(合掌)인양 하고   이 밤사 뀌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선생의 삶]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선생은 1920년 12월 3일(음)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서 조헌영(趙憲泳) 공과 유노미(柳魯尾) 여사의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전통적인 유학 집안에서 성장한 선생은 「고풍의상」(1939. 4), 「승무」(1939.12), 봉황수」(1940.12)가 「문장」지에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3월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낙향하여 향리에서 은거하였다. 1946년 박목월, 박두진 시인과 함께 「청록집」을 출간하여 광복이후 한국 현대시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1947년 10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풀잎단장」「조지훈시선」「역사 앞에서」「여운」등의 시집과 「시의 원리」「한국문화사 서설」「한국민족 운동사」등의 논저를 간행하였다. 시인이자 논객으로 폭넓은 사회활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1968년 5월 17일 숙환으로 타계하였다. 2006년 9월 29일 조지훈시비건립추진위원회 시비 제호와 전면의 시 글씨 이 동 익, 조각 전 항 섭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義憤)이 터져 노도(怒濤)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 때 나는 그런 줄 모르고 연구실(硏究室) 창턱에 기대앉아 먼 산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午後) 2시(二時)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議事堂)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쩐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나의 두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늬들 가슴속에 그렇게 뜨거운 불덩이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氣槪)가 없다고 병든 선배(先輩)의 썩은 풍습(風習)을 배워 불의(不義)에 팔린다고 사람이란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을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 자라 악을 쓰며 지켜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너희 그 청명(淸明)한 하늘같은 머리를 나무램 했더란 말이다. 나라를 찾고 침략(侵略)을 막아내고 그러한 자주(自主)의 피가 흘러서 젖은 땅에서 자란 늬들이 아니냐 그 우로(雨露)에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늬들이 어찌 민족만대(民族萬代)의 맥맥(脈脈)한 바른 핏줄을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희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현실(現實)에 눈감은 학문(學問)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실 너희 선배(先輩)가 약했던 것이다. 기개(氣槪)가 없었던 것이다. 매사(每事)에 쉬쉬하며 바른 말 한마디 못한 것. 그 늙은 탓, 순수(純粹)의 탓, 어찌 가책(苛責)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한 사람은 늬들뿐이라고. . . . .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행(行)하기는 옳게 행(行)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 떼에게 정치를 맡겨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 중 알았더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르칠게 없는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나마 깨우쳐주겠다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쑥스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하늘도 경건(敬虔)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자유(自由)를, 정의(正義)를, 진리(眞理)를 염원(念願)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永遠)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1960. 4. 20.         [건립 취지문]   조지훈 선생 시비 건립은 고대인의 오랜 소망이었다. 평소 선생을 존경하던 제자들은 30여년 전부터 안암의 언덕에 선생의 시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한국 인문학의 요람이요, 지성의 산실인 고려대학교 문과대학과 국어국문학과 설립 60주년을 계기로 마침내 이를 실현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우회,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우회, 민족문화연구원, 고대신문 동인회 그리고 고려대학교 재직 국어국문학 전공 교수 등을 비롯하여 여러 문인 및 독지가들의 정성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제 선생의 초기 대표작 「僧舞」(「조지훈시선」수록본)와 제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긴 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를 돌에 새겨 비를 세우니 고대인은 물론 고려대학교 교정을 찾는 젊은 세대에게 선생의 섬세한 서정과 개결한 정신이 생생하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조지훈문학관으로 가다...   어떤 이 있어 나에게 묻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사느뇨?”하면 나는 진실로 대답할 말이 없다. 곰곰이 생각노니 살기 위해서 산다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산다는 그것밖에 또 다른 삶의 목적을 찾으면 그것은 사는 목적이 아니고 도리어 사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에서 부질없이 허다한 목적을 찾아낸들 무슨 신통이 있겠는가. 도시, 산다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판이니 어째 살고 왜 사는 것을 모르고 산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 조지훈, 1958년 에 발표한 ‘멋 설(說)’ 중에서          누군가 내게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는다면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 것 같다. 삶의 목적을 찾으려 했지만 아직 헤매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그 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고, 그림 그리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리라.    소란스러운 여름. 하필이면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이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는 수 없이 며칠 미루었더니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은 몸이 간지러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괜스레 방을 뒤집고, 소설책을 넘겼다. 장마가 어느 정도 지나간 무렵 영양으로 향했다. 아직 가는 비가 내렸지만, 촉촉한 비 냄새와 회색의 하늘은 낭만적이기만 했다.        많이 아는 사실이지만, 영양의 고추 사랑은 엄청났다. 네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영양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로등에 달린 앙증맞은 빨간 고추는 흐린 하늘 덕분인지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영양군은 경상북도 내에서도 해발이 가장 높은 곳으로, 경북 북부의 3대 오지 (봉화, 영양, 청송) 중 한 곳이다. 영양은 문학의 고향으로 불리는데, 조지훈 시인뿐 아니라, 시 「내 소녀」를 남긴 오일도(1901~1946) 시인과 소설가 이문열이 영양 출신이기 때문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약 20분을 달려 선바위에 도착했다. 문학관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선바위에 관한 설화를 읽었기에 그 정경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운룡지에 지룡의 아들인 ‘아룡’과 ‘자룡’형제가 있었다. 그들이   역모를 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남이장군이 물리쳤다. 그는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아서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고, 반란을 잠재웠다. 남이장군이 물길을 돌린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다.    선바위를 한참 바라보던 때, 엄마와 함께 온 듯한 여자아이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바위에 선이 많아서 선바위에요?” 엄마는 저 멀리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신선 바위라서 선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말했더니 곧 엄마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선바위로 향하며 생각 없이 내디딘 길은 ‘외씨버선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 조지훈, 「승무」 중에서   길 이름은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에서 땄다. 전체 구간이 나와 있는 지도를 보면 언뜻 버선의 선 모양을 닮기도 했다.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영양까지 약 170km 정도이고, 총 13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선바위 관광지가 속해 있는 구간은 오일도 시인의 길이었고, 그 이후로 조지훈 문학길이 이어진다. 조지훈 문학길은 영양 전통시장에서 조지훈 문학관까지 총 13.7km다.      ▲ 영양 서석지. 중요 민속문화재 제108호    지도를 따라 꽤 오랜 시간 걷다 보니 서석지에 도착했다. 서석지는 광해군 5년에 정영방 선생이 만든 연못으로, 담양의 소쇄원, 완도 세연정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민간 연못 정원으로 선정되었다. 서석지 입구에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손님을 맞고 있었다. 기와집 한 채와 연못, 돌담이 전부였다. 사진으로 미처 담지 못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연못을 가득 덮고 있는 커다란 연잎과 분홍의 연꽃 위에는 빗방울이 자리하고 있었다.    택시에 올랐다. 서울로 가는 막차가 네 시쯤 있었기 때문에 주실 마을까지 서둘러 가야 했다. 삼십 분가량 달렸더니 조지훈 문학관과 주실 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왔다. 주실 마을 입구에 있는 ‘주실쑤’에서 내렸다. 마을은 ‘시인의 숲’, 일명 ‘주실쑤’라 불리는 보호 숲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마을 길을 따라 주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유롭다’는 말이 어울리는 동네였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추밭은 넓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풍수지리에 대한 주실 마을 사람들의 믿음은 이전부터 남달랐다 한다. 마을엔 예로부터 마을 전체를 통틀어 우물이 하나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주실이 배 모양의 지형이라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할 것이며, 우물을 파면 동네에 인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도 주실에는 우물이 없고, 50리나 떨어진 곳에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한다.        ▲ 지훈문학관의 현판은 그의 아내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썼다.     주실 마을에 있는 가장 큰 기와집으로 향했다.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인 조지훈 시인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문학관이었다. 문학관 내에 그의 대표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지훈의 학창 시절 모습과 장남 광렬이 그린 지훈의 모습(20대, 30대, 40대 초반, 40대 후반)     조지훈 시인의 본명은 조동탁으로, 1920년 주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창작해보기도 하고, 당시의 소년들로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피터팬』,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서구의 문화를 접했다. 지훈은 열한 살에 형 세림과 함께 를 조직, 마을 소년의 중심이 되어 문집 『꽃탑』을 펴냈다. 는 가난과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북간도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처참하고 애절한 모습을 소인극으로 공연하는 등 항일의식을 나타냈다. 이 때문에 지훈 형제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졌는데, 시인은 당시를 ‘열여섯 살짜리와 열세 살짜리 어린 형제가 외가에 다니러 가도 경찰의 내방을 받던 웃지 못할 감시의 세월’이라고 기억하였다.     일제강점기, 지훈은 현실을 비통해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고,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을 도왔다. 같은 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전원이 검거되는 바람에 지훈은 또다시 시골로 피신해야 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문인은 라는 친일문학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지훈도 의 입회를 강요받았으나 추천 시 몇 편 발표한 것이 무슨 시인이겠느냐는 태도로 입회를 피해 스스로 붓을 꺾었다.    ▲ 지훈문학관 정경   그는 광복 이후에 시 창작과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고, 교육자로 사는 삶도 시작했다. 그러나 곧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났고, 그의 가족사에 시련이 닥쳤다. 할아버지는 마을이 공산화되자 자결하였고, 어머니는 전쟁 때 얻은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아버지와 매부는 납북되고, 하나뿐인 남동생은 익사하는 커다란 수난을 겪은 것이다. 이러한 참변은 그에게 시에 대한 열망을 앗아갔다. 그는 새로운 시를 창작하는 작업보다는 이미 발표된 자신의 시들을 펜으로 정서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그 이후, 지훈의 육필시집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지훈은 지사로서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시인이면서도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돕는 등 민족문화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훈은 고전적인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했고, 대표작으로 「승무」, 「낙화」, 「고사」 등이 있다. 그의 시에는 한국의 고전적인 미의식과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동양적인 자연관, 그리고 불교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현대시의 주류를 잇는 역할을 했다.   지훈은 고전적인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했고, 대표작으로 「승무」, 「낙화」, 「고사」 등이 있다. 그의 시에는 한국의 고전적인 미의식과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동양적인 자연관, 그리고 불교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현대시의 주류를 잇는 역할을 했다.        “『문장』지 추천시 모집에 응모하여 그 제1회로 「고풍의상」이 당선된 것은 1939년 봄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고풍의상」은 서구시를 모방하던 그 때까지의 나의 습작을 탈각하고 자신의 시를 정립하려고 한 첫 작품이었으나 실상은 강의시간에 낙서 삼아 쓴 것을 그대로 우체통에 넣은 것이 뽑힌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민족문화에 대한 나의 애착, 그중에서도 민속학 공부에 대한 나의 관심이 감성 안에서 절로 돌아 나온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나의 역정」(『고대문화』)중에서    조지훈 시인은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 삼 회 추천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고풍의상」 이후, 열한 달에 걸쳐 「승무」와 「봉황수」를 지었고,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 자주빛 호장을 받친 회장저고리 / 회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 곡선을 이루는 곳 /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 조지훈 「고풍의상」 중에서     ▲왼쪽 사진, 왼쪽부터)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 오른쪽 사진) 청록집과 청록시선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하여 등단한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은 광복 후 1946년, 합동 시집인 『청록집』을 냈다. 이를 계기로 이들 세 사람을 ‘청록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록집』은 현대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자연을 노래한 시집으로, 당시 유행하던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을 담은 시가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전 정신의 부활과 순수 서정시를 담고 있다.     조지훈과 박목월, 박두진은 매우 달랐다. 청록파 시인 셋이 걸어갈 때면 항상 지훈이 가운데서 걷고 두진과 목월이 양옆에서 걷곤 했는데, 지훈은 성큼성큼 걸어 앞섰으며, 두진은 매번 뒤처졌고 그 둘 사이엔 목월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걸을 때 모습을 보면, 지훈은 항상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걷고, 두진은 직선적인 자세로 정면을 응시한 채 걸었으며, 목월은 고개를 숙이고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고 한다. 이렇듯 걷는 모습이 다르듯이 이들의 성격이나 시 세계 또한 달랐다. 지훈은 고전미와 선미를 드러냈고, 두진은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읊었으며, 목월은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을 민요풍으로 노래하였다.      ▲ 『풀잎단장』 / 『창에 기대어』 / 『조지훈 시선』       『풀잎단장』은 조지훈 시인의 첫 개인 시집이다. 삐뚤빼뚤 쓰인 표지 글씨 ‘풀잎단장’은 당시 만 7세인 맏아들 광열이 크레용을 사용하여 쓴 것이다. 『창에 기대어』는 그의 첫 수상집으로,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수필, 감상문 등을 한자리에 모아서 펴낸 책이다. 『조지훈 시선』으로 지훈은 1956년에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조지훈 시선』이후 그의 시집에는 역사의식이 담겼다. 1959년 발간된 『역사 앞에서』는 광복 직전∙직후의 시편들이 함께 실려 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던 지훈이었지만,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역사의 증언자나 저항시인이 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시편은 『여운』(1964년)에도 계속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정리하는 뜻에서, 그동안 빠졌던 시편을 함께 간추려 출판한 시집 『여운』은 지훈의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 지훈은 긴 여운을 남긴 채 50도 안 된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지훈이 생전에 사용했던 여러 유품도 볼 수 있었다. 그가 30대 중반에 착용한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던 부채, 행사 때 주로 사용하던 넥타이와 안경 등을 보니, 그가 생전에 꽤 멋쟁이였을 것 같다. 한쪽 벽면에는 부인 김난희 여사가 서예와 회화로 남편의 시를 표현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힘찬 붓의 놀림과 섬세한 색감이 조지훈 시인의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오른쪽 그림) 지훈의 막내아들(조태열)이 고등학생 때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     조지훈이 서재에서 집필할 때 쓰던 문갑과 서예도구 문학관에는 유독 지훈의 초상화가 많았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그린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감수성과 어머니의 그림 실력을 물려받아서였는지, 그 그림들은 하나같이 감각적이었다.           문학관의 끝, 한쪽 벽면에는 조지훈 시인 삶의 단상을 보여주는 백 개의 사진이 걸려 있다. 맞은편에는 투병 중에 여동생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가 흘러나와,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볼 수 있다.         ▲ 호은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밖으로 나오니 멈췄던 비가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에는 애매한, 간지러운 빗방울이었다. 가방으로 머리를 감싸고 조지훈 시인이 태어난 호은종택으로 향했다. 호은공 조전이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앉은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그 집은 주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일부 불탄 것을 1967년 복구하였으며, 경북 북부 지방의 일반적인 반가 형식인 ‘ㅁ자형’ 몸채에 ‘ㅡ자형’ 대문채가 결합한 형태다.       어디선가 빗방울 튀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물이 고인 석조가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개구리가 생물인지 조형물인지 결국 확인하지 못했다. 혹시나 내게 뛰어오를까 봐 발걸음 하나 뗄 때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은종택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삼불차’가 있다. 이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첫째는 재불차(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 둘째는 인불차(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셋째는 문불차(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다. 이러한 삼불의 정신은 수백 년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주실 조 씨들로 하여금 언제나 당당하게 인생을 살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 지훈시공원   호은종택과 문학관 뒤편에 지훈시공원이 있다. 산골짜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조성한 공원에는 지훈의 동상과 함께 시비 27편이 세워져 있다. 한 작품씩 감상하며 나무계단을 따라가다 보니 쉴 수 있는 쉼터와 자그마한 공연장이 있었다.      ▲ 정자에서 바라본 조지훈 시인의 동상과 승무 시비   얇은 紗(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빈 臺(대)에 황촉 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 梧桐(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방울이야 /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번뇌)는 별빛이라 //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합장)인양 하고 //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삼경)인데 / 얇은 紗(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 조지훈, 「승무」     ▲ 월록서당. 경북유형문화재 제172호  (현판의 글씨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 선생이 직접 쓴 것)     주실 마을을 뒤로하니 입구였던 마을 길이 출구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월록서당이었다. 지훈은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영양보통학교에 몇 년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이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가 일제의 교육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지훈이 선대의 가학을 이어받아 가문을 지키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학∙조선어∙수신∙역사 등의 과목을 공부하였다. 월록서당은 늘 머릿속으로 생각해오던 서당의 모습이었다. 계단과 대청마루 사이에 턱이 높아, 올라가려면 다리에 힘을 많이 주고 펄쩍 뛰어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   민들레 꽃 - 조지훈(趙芝薰)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 꽃 한송이도 애처럽게 그리워 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인가 소리쳐 부를수는 없는 아득한 거리에서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 오리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세상 온전히 뒤에 남을것   잊어버린다. 못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조지훈(趙芝薰) / 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東卓). 지훈은 호. 경북 영양에서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독학으로 검정 고시에 합격한 후 혜화 전문 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 전문 강원의 강사를 지냈으며, 광복 후 조선 문화 건설 협회 회원 및 명륜 전문 강사를 거쳐 사망 때까지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9년에 지에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에 동기생인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을 간행하여 이후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초기 시는 민족적 정서와 자연 등을 소재로 삼았고, 후기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1957년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 고려대 민족 문화 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를 기획, 등의 논조를 남겼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시집으로 등과 수필, 평론집으로 , 역서로 이 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가 건립되었다.   조지훈시인의 주도 18 단계를 아시나요? 조지훈 선생님은 '신출 귀몰의 주선' 혹은 '행동형의 주걸'이라고 불리셨다고 합니다. 밤새 눈 한번 붙이지 않고 통음을 하셔도 절대 자세를 흐트리는 법이 없으셨다고해요.   이런 선생님께서 술을 마시는 격조, 품격, 스타일 그리고 주량 등을 따져 만드신 선생님만의 주도 18 단계중에 여러분은 어떤 단계이신가요? - 1. 부주(不酒): 술을 아주 못 마시지는 않으나 안 마시는 사람 (9급) 2. 외주(畏酒):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8급) 3. 민주(憫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겁내는 사람 (7급) 4. 은주(隱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며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까워서 홀로 숨어 마시는 사람 (6급) 5. 상주(商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좋아도 하지만 무슨 잇속이 있어야만 술값을 내는 사람 (5급) 6. 색주(色酒): 성생활을 위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 (4급) 7. 수주(睡酒):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3급) 8. 반주(飯酒): 밥맛을 돋구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2급) 9. 학주(學酒): 술의 진경(珍景)을 배우면서 마시는 사람. 주졸(酒卒) (1급) 10. 애주(愛酒):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도(酒徒) ≪1단≫ 11. 기주(嗜酒): 술의 참맛에 반한 사람. 주객(酒喀) ≪2단≫ 12. 탐주(耽酒): 술의 진경을 터득한 사람. 주호(酒豪) ≪3단≫ 13. 폭주(暴酒):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4단≫ 14. 장주(長酒): 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 주선(酒仙) ≪5단≫ 15. 석주(惜酒):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6단≫ 16. 낙주(樂酒):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함께 유유자적 하는 사람. 주성(酒聖) ≪7단≫ 17. 관주(關酒):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게 된 사람. 주종(酒宗) ≪8단≫ 18. 폐주(廢酒): 술로 인해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열반주(涅槃酒) ≪9단≫ =======================================================================    조지훈 시인을 찾아가다                     法門 박태원 시인      북한강문학비 건립과 북한강문학제 추진계획의 일환으로 남양주시의 문화유산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남양주시는 중앙에 솟아있는 천마산(해발 810m)을 축으로 하여 시청사가 위치하는 금곡동과 평내동,호평동,오남읍,화도읍,조안면,와부읍,양정동,진접읍이 빙둘러 안주하고 있다. 외곽으로는 축령산(879m),서리산,주금산,불암산(508m),수락산(638m),예봉산(683m),운길산(610m),문안산이 병풍처럼 둘러 서고, 남쪽으로는 북한강이 산과 산사이의 협곡을 도도히 흐르고 있어서 산과 계곡, 강의 풍광을 즐기며 살 수 있는 전원도시이다.  현재 남양주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문화축제로는 세계야외공연축제, 다산문화제, 퇴계원산대놀이, 남양주청소년백일장, 도곡도예전, 남양주합창제, 실학축전(경기도), 몽골문화촌, 국악공연, 무용공연 등이 있다.  북한강문학제가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남양주시의 대표적인 문학축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문학창작과 감상의 즐거움을 작가와 독자가 서로 향수(香受)하며 올바른 비평으로 문학적 심미안을 열어주고 한국문학사상과 정서의 지평을 넓혀야 하겠다.  창작 능력의 고양을 위해서는 문학 이론과 문학 예술의 전형성을 습득하고 세계 속에서 한국의 정서와 사상을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문화의 세기인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사이버문학이 작가와 독자를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연결하는 문학의 마당이 되어 있으므로 전체 사이버 문학클럽이 하나로서 네트워크될 수 있도록 조치하면 각 클럽의 개성을 발전시키면서 전체인 한국문학의 발전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야외문학제에서는 시, 수필, 단편소설을 낭송하거나 시화전, 시사전을 열어 발표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현장에서 여러 가지 테마의 문학투어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강 야외예술공연장 인근에 있는 금남산 등산코스, 두물머리 다산기념관, 모란미술관, 금남유원지 나루터, 남양주 영화촬영소, 운길산 수종사 등이 문학예술기행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세미나를 개최하여 강연과 토론을 통하여 문학사상의 비젼을 넓혀야 하겠다.  남양주시에 연고가 있는 문인, 지사, 선비들의 유적과 작품을 발굴하고 정리 연구하여 발표하는 일도 앞으로의 과제이다.     우선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조지훈 시인의 묘소(위치:마석우리 심석고등학교.마석교회 뒤)를 탐방하고 선생의 삶과 사상,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감상하기로 한다.    조지훈 시인의 묘소는 천마산 봉화산 송라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양지바른 기슭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모친(全州 柳씨)의 분묘 앞에 나란히 누워있다. 1920년 경북 영양군에서 출생한 조지훈 시인은 지병으로 인하여 48세인 1968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귀천하셨다. 형은 젊은 나이에 돌아 가시고, 어린 자신에게 한학을 가르쳐 주시고 사랑해 주시던 할아버지(趙寅錫:구한말 서헌부 대간)는 1950년 7월에 자결하셨다. 아버지(趙憲永 :한의사,초대.2대 국회의원)도 6.25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셨으니 육친을 別離한 고통이 심하셨을 것이다.   절망의 일기 어디로 가야하나 배수의 거리에서/문득 이마에 땀이 흐른다//아침밥이 모래같다/국물을 마셔도 냉수를 마셔도/밥알은 영 넘어가지 않는다//마음이 이렇게도/육체를 규정하는 힘이 있는가//마포에서 인도교 다시 서빙고 광나루로/몰려나온 사람들 몇 십만이냐//붉은 깃발과 붉은 노래와 탱크와/그리고 사면초가 이 속에 앉아//넋없이 피우는 담배도 떨어졌는데/나룻배는 다섯척 바랄 수도 없다//아 나의 가족과 벗들도 이 속에 있으련만/어디로 가야하나 배수의 거리에서//마침내 숨어 앉은 절벽에서/한 척의 배를 향해 뛰어내린다//헤엄도 칠 줄 모르는/이 절대의 투신//비오던 날은 개고 하늘이 너무 밝아 차라리/한강의 저 언덕에서 절망이 떠오른다 처참한데//아 죽음의 한순간 延期    선생은 20세 되던 해에 김난희씨와 결혼하여 3남1여를 슬하에 두었으며, 묘비명은 청록파 시우인 박두진 시인이 쓰셨다. 선생은 19세의 약관(若冠)의 나이에 “고풍의상”,“승무”,“봉황수”로 시단에 나왔고, 일제 강점하의 이차대전말기의 암울과 강개를 오직 시와 학문과 참선으로 오대산 깊숙이 숨어서 달래었다. 선생은 학문과 詩, 志氣가 鼎足의 균형을 이루어 당대에 크게 명성을 떨쳤다. 순수한 良心의 문사이며 대쪽같은 선비셨다. 시집으로 “풀잎단장”(1952), “조지훈 시선”(1956), “역사앞에서”(1959), “여운”(1964)을 발간 하였고, “한국민족문화사 서설”,“한국민족운동사”를 저술하였다. 조지훈 시인은 21세에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방한암(초대 종정)선사께서 주석하시는 오대산 월정사에 가서 불교외전 강사를 하였다. 이곳에서 詩禪一如를 모색했으며 시어의 압축과 상징을 얻었다.   화체개현(花體開顯)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해방 후에는 문화전선의 전위가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산상(山上)의 노래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굽이굽이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6.25 골육상쟁의 비통함을 목도하고 “다부원에서“를, 4.19혁명의 파도치는 감격을 노래하는 ”혁명“을 남겼다.   다부원에서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묻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혁명 아 그것은 洪水였다./골목마다 거리마다 터져나오는 喊聲/백성을 暗默 속으로 몰아넣는//양심과 純情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른/푸른 샘물이 넘쳐 흐르는/쓰레기를 걸레 쪽을 구더기를 그/罪惡의 구덩이를 씻어내리는/아 그것은 波濤였다./東大門에서 鐘路로 世宗路로 西大門으로/逆流하는 激情은 바른 民心의 새로운 물길,/피와 눈물의 꽃波濤/東大門에서 大韓門으로 世宗路로 景武臺로/넘쳐흐르는/이것은 義擧 이것은 革命 이것은/안으로 안으로만 닫혔던 憤怒//온 長安이 출렁이는 이 激流 앞에/웃다가 외치다가 울다가 쓰러지다가/끝내 흩어지지 않는 피로 물들인/온 民族의 이름이여/일어선 자여//그것은 海溢이었다./바위를 물어뜯고 왈칼 넘치는/不退轉의 意志였다. 고귀한 피값이었다.//正義가 이기는 것을 눈 앞에 본 것은/우리 평생 처음이 아니냐/아 눈물겨운 것/그것은 天理였다./그저 터졌을 뿐 터지지 않을수 /없었을 뿐/愛國이란 이름조차 차라리/붙이기 송구스러운/이 빛나는 波濤여/海溢이여!   조지훈 시인의 시의 편력은 심미주의, 禪의 미학, 방랑시, 생명에의 향수, 애정, 사회시로 변천하는데, 이는 묘사시에서 상징시, 실제시(實際詩)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고전적 우아미를 무용(승무), 의상(고풍의상), 건축(봉황수), 도자기(향문)에서 발견하였고, 감정과 생각을 초탈하여 자연을 직관으로 관조하는 선의 적적한 美(마을,고사,산방)를 구현하고, 나아가 格外의 본성은 생명에의 경외심으로 발현되어 자연의 생명과 동화되어(흙을 만지며,화체개현,밤,창) 역사의 질곡에서 고통받는 동포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됐다.(패강무정,다부원에서,혁명) 1948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민족의 사상과 정서의 미학을 연구하여 정리하였다. 한국민족의 사상의 뿌리를 하,은,주 이전의 東夷文化圈인 고대국가 배달국,단군조선에서 찾았다. 천인합일의 샤머니즘적인 사상과 정서가 한국민족의 마음 근저에 은근히 흐르고 외래의 사상,종교,문화의 알맹이를 융섭하여 한국전통의 문화를 이어왔다고 밝혔다.단군시대의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三一철학과 天地人합일사상은 원효,의상,퇴계,이이,정약용,최제우로 이어져 내려 왔으며, 원융무애한 격외의 멋이 한국민족정서의 미학적인 특징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지조론을 저술하여 일관되게 순수한 一心을 지키는 것이 선비의 지조이며, 역사는 혼탁한 세사의 와류에 흔들리지 않는 지사에 의하여 관조된다고 하여 문인의 道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조지훈 지조론 *【해설】 조지훈의 교훈적 중수필. 1960년 3월 [새벽]지에 발표. 1962년 같은 표제의 수필집이 발행되었다. 은 1950년대 자유당 말기의 극도로 혼란하고 부패한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이 과거에 대한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 지도자들 마저 어떤 신념이나 지조도 없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는 세태를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한 글이다.  이 작품에서는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지조를 적절한 예시와 속담, 일화 등을 통해 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1950년대의 부정과 부패로 일관한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 정권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는 이들을 단죄함으로써 민족사의 새로운 자각과 지평을 열어 나가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개관】 ▶작자 : 조지훈 ▶갈래 : 중수필, 교훈적 수필 ▶성격 : 논리적, 사회적, 공적(公的), 경세적(警世的), 교훈적, 설득적 ▶문체 : 한문투의 강건체, 의고체(擬古體) ▶특징 : 비교와 대조 등의 표현 기법과 적절한 인용 및 예시 사용 ▶구성 : 서론 본론 결론의 3단 구성 ▶제재 : 지조(志操) ▶주제 :  -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지조 강조  - 지조를 지키는 삶의 중요성 ▶출전 : [새벽](1960. 3) *【표현상 특징】 다양한 일화를 제시하여 지조와 변절의 의미를 이해시킴. 정치인의 옳지 못한 행태를 준열하게 비판함. 변절을 고정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범한 범절이나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는 그 변절이 용서될 수 있다는 열린 시각을 취함. 비교와 대조 등의 표현 기교와 적절한 인용 및 예시 사용했고, 단정적인 어투와 힘이 넘치는 문체로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고 있다. *【어휘·어구 풀이】 :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지켜 나감 : 위엄이 있는 엄숙한 차림새 : 곤란하고 고통스러움 : 타일러 깨우침 : 정권을 이용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 : 권모와 술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인정이나 도덕도 없이 권세와 중상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쓰는 술책. : 청렴하고 결백하며 공평하고 정대함 : 청렴하고 결백하며 강직하고 씩씩함. : 침을 뱉고 욕을 마구 퍼부음 : 음탕한 여인과 같은 : 홀아비 : 아내를 여읜 뒤 아내를 다시 맞음 : 본능적 욕구에 의해 발생되는 고통 : 웃음을 참을 수가 없음 : 무슨 일이 그러려니 하고 저 혼자 속으로 믿고 겉에 드러냄 : 간사한 재주와 지혜 : 남을 욕함. :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 : 부부가 아닌 남녀가 합의하여 육체적으로 관계함 : 몇 해 전으로부터 지금까지. 근래 : 같은 궤도. 같은 선상에 있음 : 다스리지 : 현철하고 정조가 곧은 아내. : 지사인 시인 : 임금의 재결. 옳고 그름을 가리어 결정함 : 매천의 붓 아래에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 : 배고픔을 좀 참으라 : 어지러운 정치 : 가난하기가 마치 물로 씻은 듯 심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음. : 지조를 지닌 분들은 생활의 모습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말하여, 지조를 지키는 일이 범상(凡常)치 않음을 강조한 표현. : 이 글을 쓰는 이유, 즉 정치가들이 지조를 지키며 올바른 정치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러난 부분이다. : 변절자들은 나름대로의 핑계거리를 돌려대지만, 그 결과는 오욕(汚辱)을 자취(自取)하는 것이다. : '국민 총력 연맹 조선어 학회 지부'라는 어용 단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지킨다는 민족적인 일을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비난받지 않는 것과는 달리, 민족을 위한 아무런 업적이 없이 변신(變身)만을 한 이들은 변절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 매천의 붓에 한 번 오르면, 이에 완전한 사람이 없다. 평생 의를 위해 지조를 지킨 황매천 시인의 모습이 잘 나타난 표현으로, 그의 필봉 또한 매우 날카롭고 비판적이어서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현 세태의 보편적 분위기를 일러주고 있다. 지조를 지키기 어려운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전문】  조지훈 지조론 『- 변절자를 위하여 -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확고한 집념)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엄숙한 차림새)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깨우침의 각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정치가와 경제활동하는 상인의 결합)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떠다님)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전체의 충정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廉潔,청렴과 결백), 공정(公正), 청백(淸白), 강의(剛毅,굳고 의연함)한 지사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침뱉고 꾸짖음)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 환락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極言)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아내를 여읜 뒤 새 아내를 얻음)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와 고위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떡거리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뿌린다고 굶주리고 얻어 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이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 놓는 것은 분반(噴飯,웃음이 터져 나옴)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 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자시(自尊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기이한 성벽)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 단재(신채호)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들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이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교활한 슬기)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綻露)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에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變節)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의 변절자로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전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침을 뱉음)되기는 했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 , 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愚), 육당, 춘원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말의 대일 협력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벋겨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숙제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 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만근(輓近) 30년래에 우리 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 남로당의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년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착 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이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 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늦게 배운 잘못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 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 깨달음이 갑작스러움)히 깨우치라. 한일합방 때 자결한 지사시인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을 보면 민충정공, 이용익 두 분의 초년 행적을 헐떧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의 탁류 - 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형색은 딱하기 짝이 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小忍飢.배고픔을 조금 참다)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아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으로 소일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씻은 듯하다)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초연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고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병을 내 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 밥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쏠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小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이 있다. 야당에서 권력으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중요한 요직)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 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良心)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개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는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全文)   *【감상】 이 글은 1960년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상 모습을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지조란 역사의 개관적 상황을 냉철히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올바른 길을 판단하고 그것을 초지일관(初志一貫) 밀고 나가는 것이다. 또한 세태에 따라 다소 태도를 바꾸더라도 개과천선(改過遷善)으로서의 변절(變節)일 때는 도리어 지조를 찾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변절은 단순하게 '절개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옳은 신념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태를, 간접적 체험을 사례로 들어가며,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민충정공,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에는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비난받는 자들이라도 열심히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의 전반부에서는 지조의 정의와 가치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이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개진하고 지조에 관한 자신의 신조를 펼쳐 보인다. 아울러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개진하고 지조에 관한 자신의 신조를 펼쳐 보인다. 아울러 지사와 정치가는 다른 것임을 유연하게 인정하면서도 난국의 지도자는 직업 정치인보다도 지사적 품격을 갖춰야 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이 수필은 정치적 혼란기에, 권력에 야합하면서 스스로 신의를 저버린 정치 지도자에 대한 준열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변절자를 겨냥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하다. 자기 생활의 기록으로서의 수필은 이처럼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과 관련되어 있다. 작가는 정치 지도자를 일반 민중과 구별한다. 일반 민중은 지조를 꺾고 살아도 되지만, 정치 지도자만큼은 변절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작가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위해 이 글을 썼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만큼, 그만한 책임도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에게 지조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지조는 우국지사의 충성심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정직성, 신의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일반 민중에게는 지조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 말은 일반 민중의 인격을 무시해서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정치 지도자에게 지조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생각을 바꾸면                          /박 완 서---  그들은 그런 대로 재미가 있을지 몰라도 당하는 쪽에선 고문과 같았다. 나중에는 참다못해 느네들한테 노래할 자유가 있는데 나한테는 왜 안 할 자유가 없냐?고 외치고 말았다. 너무 진지하게 외쳤던지 나름대로 흥청거리던 분위기 일순 서먹해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아지는 게 아니었다.  (중략 : 유신 시절 남들이 자유를 외칠 때 이를 남의 일인 듯이 외면하고 있었다는 고백이 이어져 나온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데서 자유를 찾는 자신의 모습이 더 부끄럽다는 진술이 담겨 있다.)  나는 나의 유치함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고약한 기분은 다음날까지 계속됐다. 7,80년대를 끽소리 한 마디 못 하고 살아남은 주제에 고작 노래방에서 웬 자유씩이나, 그 생각만 하면 창피하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그런 자기 혐오는 나는 왜 노래도 못할까? 하는 열등감으로 이어져 온종일 우울했다. 그러고 있는데 고등 학교 동창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왜 목소리가 그 모양이냐고 먼저 이쪽의 우울증을 짚어 내기에 나는 왜 노래도 못 할까? 하면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친구는 딱하다는 듯이 네가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허게, 라고 말하는 게 하닌가. 나는 그 한 마디를 뛸 듯이 반기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확인까지 했다. 기분이 담박 맑아졌다. 노래도 못 한다고 생각할 적엔 나 같은 건 이 세상에서 무용지물(無用之物)과 다름없더니,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느냐는 소리를 들으니까, 노래만 빼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줄줄이 떠올랐다.  10년 전 참척(慘慽)을 당하고 가장 힘들었던 일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하는 원망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는 거였다. 원망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부끄러움까지 겹쳤다. 저 여자는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저런 일을 당했을까? 수군거리면서 손가락질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이 나만 보고 흉보는 것 같아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어도 하늘이 부끄럽고 땅이 부끄러웠다. 슬픔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게 원망과 치욕감이었다. 하늘도 부끄럽고 땅도 부끄러웠고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피할 곳이 없으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때 만난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한 마디 말이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       ▲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조지훈 묘역          풀잎 단장(斷章)                                          - 조지훈 -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1952)-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사색적, 선(禪)적, 산문적 ◆ 표현 : 그윽한 어조와 서술적 이미지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단장 → '짧은 시가나 문장'이란 의미로, 완전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글을 가리킨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겸손의 표현    * 무너진 성터 ~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        → 화자가 현재 서 있는 시적 공간으로, 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 떠가는 구름이 있는 언덕에 화자는 서 있다. 바람은 강한 성도 무너뜨리고, 단단한 바위도 깎아 버리는 큰 힘을 지닌 것으로, 화자가 현재 있는 언덕은 이 같은 바람이 지금도 불고 있음을 떠가는 구름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        → '조찰히'는 '깨끗하다'의 의미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풀잎을 표현한 것이다. 이 부분만 볼 때 바람은 풀잎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긍정적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다르게 접근해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풀잎은 현재 성과 바위에 비해 연약한 존재이면서 그것들과는 달리 시련(=바람)을 참고 견디며 시간의 흐름에 그 영혼을 내맡기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 풀잎과 화자가 서로 동화(同化)되는 모습을 형상화함.    * 우리들 →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풀잎과 화자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공동체 의식이나 동질감을 드러낼 때 쓰이는 표현이다. 전반부에서 화자와 풀잎은 서로 구분된 관계였지만, 3행과 4행을 거치며 화자는 풀잎과 동화됨을 느끼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너와 나는 '우리'로 보다 가까워지게 됨.    * 아름다운 분신        → '우리'와 의미상 유사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분신이란 풀잎에 대한 화자의 동질감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 '고달픈 얼굴'은 화자와 풀잎을 아우르는 표현으로 화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보고 고달픈 얼굴이라는 주관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고, 동시에 이 표현을 통해 화자의 처지 또한 추측해 볼 수 있다. 화자 또한 풀잎처럼 세상의 힘겨움으로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모진 바람을 묵묵히 견뎌내는 풀잎을 보며 '웃으며 얘기하노니'라 하여 교감(=동병상련)과 함께 풀잎으로부터 삶의 위안을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        → 시적 공간인 언덕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때의 흐름'은 의미상 바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 한 떨기 영혼 →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묵묵히 바람을 견디며 서 있는 풀잎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유를 통해 화자의 경회감을 드러내고 있다.     ◆ 제재 : 풀잎 ◆ 주제 : 고달픈 삶의 체험과 생명에의 외경감            운명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삶 [시상의 흐름(짜임)] ◆ 1~2행 : 화자가 서 있는 언덕의 풍경(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 떠가는 구름) ◆ 3~4행 : 풀잎을 바라보는 화자의, 자연에 동화된 감정 ◆ 5~6행 :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옹호 ◆     7행 : 화자의 풀잎에 대한 경외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고 있으며, 와 같은 총체적인 상황 인식의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시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또는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키며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풀잎 단장』의 표제시로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잎을 새롭게 조명하여 생명의 신비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풀잎이란 단순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적 존재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과도 같이 조그만 고통에도 동요하고 번뇌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시인은 풀잎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자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의 반성적 타자(他者)로 설정한 풀잎을 통해 주어진 운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는 여유로움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지친 영혼을 내맡기는 삶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이 시의 시상 전개를 살펴보자.   → 1행에서는 풀잎이 피어 있는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고 있다. '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는 풀잎의 생명력이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2~4행에서는 허무하고 뜬구름 같은 인생을 관조하면서 한 줄기 바람에 산뜻하고 깨끗하게 온갖 고뇌를 씻어 버리는 것 같은 풀잎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연에 동화된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5~6행에서는 영탄적 어조로 바뀌면서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된다. 작자의 인간관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옹호의 시선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 행에서는 시적 자아의 풀잎에 대한 경외감이 드러난다. 풀잎을 통해서 대자연의 질서를 느끼고 있다.   2. 이 시의 시상 전개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이 작품은 우주의 조화와 생명 감각을 형상화한 시로, 자연의 위대성에 대한 자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3. 이 시에서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행을 찾아보자.   → 5행 :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된다.   4. 시적 화자가 생명 현상에 대해 경건한 동화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자.   →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5. 이 작품에 드러난 '풀잎'의 자세를 생각해보자.   → 풀잎은 주어진 숙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혀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그 영혼을 내맡기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6. 이 시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심리적 태도를 살펴보자.   → 의연함, 담담함, 고고함, 경건함   7. 이 시에서 '풀잎'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 이 시의 '풀잎'은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자재(自在)하는 존재로, 이 시에서 '풀잎'은 단순한 자연물도 아니고 어떤 사회 정치적 함의를 지닌 상징물도 아닌, 생명의 무한한 신비를 담고 있는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것은 무한한 우주와 자연에 비해 볼 때 아주 미미하고 연약하고 유한하지만, 그와 같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겸허하게 수용할 줄 아는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풀잎'은 지고지순한 존재로 고양된다. 이때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자신을 둘러싼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풀잎'이 인간의 가장 본래적인 모습(혹은 조지훈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임은 말할 것도 없다.   8. 이 시에서 자연의 원리가 지속과 변화라는 두 가지 법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시어를 찾아보자.   → 바위, 구름 : 풍설에 깎여 왔지만 한 곳을 지키고 있는 '바위'는 변하지 않는 자연이며, 아득히 손짓하며 더가는 '구름'은 늘상 변화하는 자연이다. 이 둘의 대조는 자연의 원리가 지속과 변화라는 두 가지 법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9. '고달픈 얼굴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에 나타난 화자의 심리적 태도를 생각해 보자.   → 세속적 삶의 어려움을 자연 친화와 교감을 통해서 화해하고 극복하려고 한다. :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는 어느 새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작은 존재로 축소된다. 즉 '나'는 '풀잎'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대자연의 일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자연)'과 고달픈 삶을 사는 '나(인간)'는 친화와 교감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세속적 삶의 어려움을 자연과의 친화와 교감을 통해서 화해하고 극복하고자 한다. \\\\\\\\\\\\\\\\\\\\\\\\\\\\\\\\\\\  '이상 연구'로 사학도 소리를 듣다  종국이 의 ‘이상편’에서 쓴 바에 따르면, 이상은 생전에 단편 9편, 수필 약 20편, 그리고 시 99편을 남겼다고 돼 있다. 제2권(시집)에 실린 작품을 일별해보자. 먼저 ‘척각(隻脚)’ 등 미발표 유고 9편, 오감도(烏瞰圖) ‘시(詩) 제1호’부터 ‘시(詩) 제15호’까지 15편, 다시 ‘오감도’ 편의 8편, ‘무제’ 편의 13편, ‘이상한 가역반응’ 편의 7편, ‘이단(易斷)’ 편의 5편, ‘3차각설계도’ 편의 7편, ‘위독(危篤)’ 편의 12편, ‘건축무한육면각체’ 편의 7편 등 모두 83편이 실려 있다. 말미의 부록편에는 일어로 쓰여진 미발표 유고 9편 등의 일어 원문을 실었다.  본문에 앞서 일문 시 역자인 유정씨의 한 마디에 이어 ‘미발표 유고’ 9편을 직접 번역한 종국의 한 마디도 언급돼 있다. 이어진 ‘소개의 말’에서는 그가 미발표 유고 9편을 입수한 경위를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상이 도쿄에서 작고했을 때 그의 미망인이 도쿄에서 가지고 나온 고인(이상)의 사진첩 속에 밀봉돼 있던 것을 그 후 20년간 유족(부인)-모친-누이동생 손을 거치면서도 사진첩으로 여기고 보관해 오다가 이번 간행을 계기로 우연히 발견해 입수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제작연도는 알 수 없으나 지질 등을 미루어 볼 때 이상이 도쿄 시절에 쓴 것이라는 것이 종국의 평가다. 종국은 자신의 눈앞에서 그 밀봉된 것을 뜯고 작품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고인의 많은 말인 양 감개무량했다”고 적었다.  마지막 제3권은 수필 18편을 싣고 있다. 부록으로 이상 연구, 이상 약력, 작품연보, 관계문헌일람 등을 실었다. 이 책에서 주목할 대목은 부록편이다. ‘이상 연구’는 앞서 밝혔듯이 1년 전(1955년) 12월에 에 ‘이상론 1’로 발표한 글을 독립된 형식으로 수정, 개작한 것이다. 그의 첫 ‘이상 작품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지는 “스스로 ‘최후의 모더니스트’가 되어버린 이 ‘비극의 담당자’는, 절대자의 폐허에서 발생하는 모든 속도적 사건-절망, 부정, 불안, 허무, 자의식 과잉, 데카단, 항거 등 일체의 정신상의 경향-을 그의 문학에다 반영함으로서, 실로 보기 드문 혼돈, 무질서상(相)을 일신에 구현하고 만 것이었다”에 압축돼 있다고 본다. ‘이상 약력’ 항목의 끝에서 ‘본 약력은 의 기록을 실지조사에 의하여 정정보필(訂正補筆)한 것임’이라고 밝힌 걸로 봐 ‘선집’에서 오류가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작품연보’ 항목에서도 ‘본 연보는 실지조사로서 확인함 것임’이라고 밝혀 편찬 과정에서 꼼꼼한 현장조사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3권 말미에 ‘발(跋)’, 즉 발문이 실려 있는데 본문만큼이나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아직 그는 문단에 얼굴조차 제대로 내밀지 못한 형편인데 문인을 거쳐 벌써 ‘사학도’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R형(兄)’이라는 사람한테서 ‘형! 형은 그만 사학도가 되셨구먼요’라는 얘길 들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는 그간 ‘사이비 사학도’가 겪은 고통, 어려움 등을 마치 작심했다는 듯이 털어놓고 있다.  “단 한 항(項)의 약력을 확인하고저 어떤 경우에는 5, 6개소(個所)를 찾고, 7, 8종-20여 권-의 문헌을 뒤적였으니 그런 나를 ‘사학도’라 한 R형(兄)의 말에 조금도 과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도 일자 미상(未詳)이 태반인 ‘약전(略傳)’ 밖에 쓸 수 없을 때, 참 20년이라는 세월의 무서움이 통감되었다. 출판을 위해서만 그 막대한 원고를 10독(讀)했음을 고백하며, 그 외의 일은 속상하던 말과 고심담(苦心談)은 차라리 잠잫고(잠자코) 말기로 한다...”  그가 발문 첫 줄에서 “이 전집은 ‘젊은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드리는 정성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앞의 ‘젊은 세대’는 누구이며, 또 뒤의 ‘젊은 세대’는 누구인가? 나는 앞의 ‘젊은 세대’는 종국 자신과 같은 또래의 세대이며, 뒤의 ‘젊은 세대’는 그보다는 조금 어린 세대를 지칭한 것이라고 본다. 을 엮어낼 당시 종국은 27세였다. 그러니 아직은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러나 그보다 너댓 살만 어려도 상당한 세대차이가 있다. 즉 1945년 해방 당시 종국은 16세로, 경성농업학교 3학년을 마칠 때였다. 일반학교로 치면 중학교 3학년 졸업반이다. 종국의 경우 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너댓 살 아래인 아우뻘들은 일어가 자유롭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일제시대의 사안을 일제시대를 경험한 선배 세대들이 후배들에게 ‘서비스’하겠다는 그런 의미로 봐야할 것이다. ‘선물’이라는 용어가 바로 그 증좌인 셈이다.  이런 나 나름의 해석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문학평론가 방민호도 얼핏 그런, 즉 나와 비슷한 생각(?)을 암시하고 있어 반가웠다. 그는 (향연, 2003)에서 “1929년생 임종국, 1932년생 고석규, 1934년생 이어령, 1936년생 김윤식 가운데 이렇게 언어를 넘어 현실과 역사로 직접 육박해 들어간 것은 ‘친일문학론’(평화출판사, 1956)을 쓴 임종국 뿐이었다”고 썼다.  김윤식은 8월 초 전화인터뷰에서 “임 선생 세대가 일본말을 배운 마지막 세대다. 임 선생은 일본책을 볼 줄 알고, 또 일본말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1936년생인 나는 일본말을 배워서 공부했다. 이상 연구나 친일문학 연구는 그들 세대가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마지막 5년’을 시봉(侍奉)한 김대기(1955년생, 전 ‘지평서원’ 대표, 경북 포항 거주)에게 “언어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변하는 것이어서 옛날 용어를 지금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힘들다”며 자신이 생전에 직접 그런 것들을 처리(연구)하려 했다고 김대기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지만 짚고 넘어 갈 게 하나 있다. 은 실질적인 편자가 임종국이라는 사실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판권란의 ‘편자’ 항목에는 엄연히 ‘임종국’ 석 자가 박혀있다. 그런데 스파인(책등)이나 판권란 박스 하단에는 이와는 별도로 ‘고대문학회 편’이라고 박혀 있다. 그러면 대체 고대문학회의 실체는 무엇이며, 또 출간과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당시 고대문학회 회원이자 종국과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몇 들어보자.   고대문학회 주최 '문학의 오후' 행사에서 특강을 하는 조지훈(사진-박노준 제공) 시인 인태성에 따르면, 고대문학회는 조지훈을 따르는 고려대 내의 문학도 모임이었다고 한다. 회원은 10여 명 정도. 여기서 를 발행했는데 이 매체는 고대 출신 문학도들의 창작활동을 독려하는 터전이 되었다. 종국이 ‘이상론’을 여기에 발표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박희진(1931년생, 서울 수유리 거주)에 따르면, 당시 조지훈은 고대출신 모든 문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종국이 이상 연구를 시작한 것도 조지훈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당시 조지훈은 국문과 교수였는데, 이들은 국문과 학생들은 아니었지만 (종국-정치학과, 인태성․박희진-영문과) 조지훈을 따랐다. 이들은 나중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대개 문단에 데뷔했다. 종국이 나중에 신구문화사에 취직할 때도 조지훈의 추천으로 들어갔을 정도로 조지훈은 이들의 ‘후견인’ 같은 존재였다. 을 ‘고대문학회 편’으로 한 것은 이런 전후 사정 속에서 하나의 ‘공동작업’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 같다. 앞서 언급한대로 인태성은 실지로 종국의 작업을 도와주기도 했다.  (* 이들보다는 후배이자 역시 고대문학회 회원 출신인 박노준(1938년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전 한양대 인문대 교수)은 1956년 4월에 입학했는데 신입생들에게 제1집을 무료로 나눠주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제2집을 내지 못하자 고대문학회는 동호인 모임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이들은 출판활동 대신 1년에 두 세 차례 문학발표회를 가졌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 서울은 제대로 복구되지 않아 종로의 YMCA 건물도 파괴된 채 그대로였다. 이들은 일부 성한 YMCA 건물을 빌려 행사를 갖기도 하고 더러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3층 꼭대기에 있던 ‘음악궁전’을 빌려 ‘문학의 오후’ 행사를 갖곤 했다. 조지훈이 연사로 나와 특강을 하기도 했는데 전후 폐허에서 문화에 굶주린 청년들에겐 단비 같은 행사였고, 그래서 인기도 대단했다. 한동안 후속호를 못내던 는 1960년 2학기 초 무렵 학교측의 제작비 지원(절반)으로 제2집을 발행하게 됐다)  - 조지훈과 고대문학회  한편 당시 조지훈은 의 ‘주간교수’를 맡고 있으면서 이곳에 이들이 글을 쓸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종국도 에도 더러 글을 기고했었다. 인태성은 종국이 에 ‘이상시론’을 쓴 걸 보고 찾아가서 만났다고 했다. 또 법학과 학생으로 당시 의 기자(나중에 편집국장 역임)로 활동하고 있던 신근재(1929년생, 서울 수유리 거주, 전 동국대 일문과 교수)는 “임종국이 에 투고할 글을 가지고 자주 신문사 출입을 해서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종국의 첫 부인이 된 이선숙도 이곳에 소설을 연재했다.(신근재 증언) (* 은 국내 대학신문의 효시로, 초창기에는 부정기적으로 간행됐다. 창간초기 편집, 광고를 모두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했었다. 서울대의 의 경우 전시연합대학 시절 창간된 것으로, ‘범(汎)대학신문’ 성격을 띄고 있다. 제호에 ‘서울대’라는 특정학교 교명을 못박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지훈의 화신’(신근재 증언)이라고 불린 박희진은 조지훈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종국, 인태성(이상 모두 52년 입학)보다 2년 앞서 1950년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한 박희진은 피난 시절인 1952년 대구 임시교사에서 조지훈을 처음 만났다. (* 종국은 박희진이 두 살 아래였지만 대학 입학이 2년 빨라서 선배 대접을 했었다)  당시 조지훈은 ‘공초 오상순’을 강의하고 있었다. 조지훈의 첫 인상은 큰 키에 머리는 장발이었고 얼굴은 하얗고 수즙은 표정이었다고 박희진은 기억하고 있다. 박희진은 그간 써놓은 시 몇 편을 조지훈 앞에 꺼내놓으며, 작품평을 감히 부탁했다. 시를 훑어본 조지훈은 “이만하면 수준작이다. 신문에 발표해도 되겠다. 내가 알선해 주겠다”며 적극적으로 호의를 보였다. 이후 박희진은 조지훈을 따르게 됐고, 그런 인연으로 성북동 조지훈의 댁으로 자주 놀러가기도 했었다.    종국을 아끼고 물심양면으로 지도해줬던 조지훈 선생 종국과 조지훈가(家)와의 인연을 한 줄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번 일로 지훈의 부인 김난희(1922년생, 서울 미아리 거주) 여사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아직도 전화 속에서 들려온 김 여사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마치 옛 연인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종국에 대해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김 여사의 회고담.  “지훈 선생님은 종국씨의 정신 사상, 즉 반일사상 같은 것을 좋아해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셨다.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이 성북동 집으로 자주 놀러오곤 했는데 종국씨도 더러 왔었다. 언젠가(그가 타계하던 1989년 가을임) 선생님 생각이 나서 왔다며 밤을 한 자루를 가지고 집(성북동에서 압구정동으로 이사함)으로 찾아왔었다. 동행이 한 명 있었는데 그때 호흡하는 게 안좋아 보였다. 들어오시라고 해서 겨우 차 한 잔 대접했는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식사도 한 끼 차려드리지 못하고 그렇게 가시게 한 게 못내 마음이 아프다. 참으로 순박하고 좋은 분이셨는데 너무 일찍 가셔서 안타깝다. 내 마음에 가장 잊지 못하고 기억에 남는 분이 바로 그 분이다”  (* 김 여사는 전화통화 내내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스승 지훈 만큼이나 스승의 아내도 그를 아꼈던 것 같다. 1989년 종국이 타계하자 김 여사는 그의 빈소를 찾아가 유가족들을 위로했다.(박노준 ․ 김대기 증언) 그러나 이번 전화통화에서 김 여사는 자신이 문상을 갔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올해 연세가 82세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면서도 종국의 아내 근황을 물으며 만나보고 싶다고 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김 여사는 미아리 원룸에서 둘째아들의 손녀와 같이 살고 있는데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했더니 늙은이 사는 집에 보여줄게 없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종국의 이상(李箱) 관련 대목은 이 정도에서 서서히 마무리를 해야겠다. 다만 두 가지만 짚어보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그의 이상 연구에 대한 총평, 그리고 그가 엮어낸 에 오류는 없는가 하는 점이다. 간행사에서 그는 “종래의 전재된 작품- 등 기타-에서 허다한 미스가 발견될 때 편자는 극히 불쾌하였다. 이 점 ‘미스의 전무(全無)’를 위하여 주의를 특히 거듭했으니 대과(大過)는 없으리라 자부 하겠다”고 쓴 바 있다. 상당히 자신 있어 하는 인상을 풍긴다. 물론 ‘10독(讀)’을 했다고 하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모름지기 완벽이란 없다. 그런 전제에서 보면 그의 작업 성과에도 무지에서 비롯됐든, 아니면 자료의 한계에서 비롯됐든 오류는 필시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위 두 가지 사항을 동시에 짚어주는, 똑떨어지는 연구논문이 한 편 있다. ‘오류’를 지적한 대목에서는 예시도 많고, 아주 꼼꼼하게 지적해 놓았다. 조해옥씨(한남대 강사)가 쓴 ( 제2호, 2003. 1, 이상문학회)가 그것이다. 아마 종국이 생존해 이 논문을 보았다면 필시 조해옥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먼저 총평부터 보자.  조해옥은 종국의 이상 문학 연구가 갖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이후로 이상 문학에서 논의될 수 있는 영역들을 골고루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꼽았다. 요약하면 이상 연구의 선구자이자, 기초를 닦았다는 얘기다. 특히 종국이 이상의 개인 이력이나 개인적 편견으로 이상의 작품들을 재단하지 않고 객관적 시각으로 작품 자체를 해석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이상연구’는 작품분석에서 충분한 근거를 통해 이상 문학의 특질을 찾아내는 데는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즉 “그는 이상문학적 특질로 ‘절망’을 제시하고, 그 부산물로 부정과 허무와 불안을 들고 있지만 외부적 정치현실과 내부적 의식으로만 절망의 원인을 밝히고 있을 뿐 좀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표피적인 원인 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점이다.  - 의 오류들  다음은 의 오류 부분. 먼저 조해옥은 “이상의 작품집을 처음 집대성한 임종국의 작업은 이상 문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상 문학 연구를 활발하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상 문학작품 원전을 임종국이 수정하고 정리하면서 원전의 의미가 명확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집대성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발행하였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가 에서 범한 오류는 후대에서 제대로 바로잡히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원전을 확인하는 노력 없이 임종국의 이상전집을 그대로 텍스트로 삼는 연구행태와 전집 발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덧붙인 걸 보면 그렇다. 그에 따르면, 종국의 이후 발간된 이어령판(, 갑인출판사, 1978), 이승훈판(, 문학사상사, 1989)에서도 원전의 원전을 오기한 부분은 수정되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임종국판보다 원전에서 더 멀어진 경우도 있단다.  그러면 조해옥 등이 찾아낸 구체적인 오류 실태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우선 과 임종국의 에서 동일하게 범한 오류로, ‘시(詩)제8호 해부(解剖)’의 “진실(眞實)”이 “진공(眞空)”으로 바뀐 것, ‘정식(正式)III’의 “시간을”의 “을”이 빠진 것, ‘소영위제(素榮爲題)’의 “네거짓말네농담(弄談)”에서 “말”이 빠진 것 등이 발표 당시의 이상의 시 원문과 다르게 표기된 부분들이다. 이어 ‘시(詩)제5호’에서 “모후(某後)”의 “모(某)가 임종국 전집과 이어령 전집, 이승훈 전집에서 “전(前)”으로 바뀌어 표기돼 있다. 또 ‘아츰’의 “유췌(惟悴)한”이 그간의 이상전집들(김승희판 전집을 제외한 임종국, 이어령, 이승훈판 전집)은 모두 “초췌(焦悴)한”으로 바뀌었다.  놀랄 만한 사실도 있다. 역시 조해옥의 논문에 나오는 얘기다. 종국이 이상의 일문시를 번역하면서 외래어에는 음절마다 모두 방점을 찍어 놓았는데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런 방점이 찍힌 상태를 그대로 이상의 시 텍스트로 삼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는 후학들이 원전을 전혀 안찾아 봤다는 얘기다. 하나 더. 조선건축회가 펴낸 의 1931 8월호에는 하는 큰 제목 아래 ‘2인(二人)....1....’, ‘2인(二人....2....’ 등을 시작으로 총 8편의 일문시가 실려 있다.  그런데 임종국 전집에서 대신 라는 큰 제목이 붙어 있다. 이상이 라는 큰 제목을 붙인 것은 에 1934년 7월 24일부터 그해 8월 8일까지 게재했던 국문시 ‘시(詩) 제1호’부터 ‘시(詩) 제15호’를 실으면서 붙였던 큰 제목인 것이다. 임종국 전집 이후에 간행된 이상전집류에서 이것이 수정된 적은 없다. (* 종국은 1966년에 간행한 개정판에서는 이를 바로 잡았다)  한편 종국은 1956년 (전 3권) 출간(태성사)한 지 10년 뒤인 1966년 출판사를 바꿔 문성사에서 단행본 한 권으로 개정판을 냈다. 조용만의 서문은 그대로 실렸으나(제목은 ‘初版 序’), 달라진 것은 종국의 초판의 간행사 대신 ‘개정판 서(序)’와 ‘범례’가 별도로 추가된 점이다. 그런데 추가된 두 곳에 참고할 점이 적지 않아 보인다. 초판 간행 이후 10년간에 벌어진 일들이 더러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초판은 반년이 안 돼 매진됐으나, 1959년 12월, 즉 초판이 3년 뒤 3판 발행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절판됐다고 한다. 그러나 첫 출판사와의 신의 때문에 그 사이 추가 출판 수요가 있었음에도 출판사를 옮기지 못하다가 최종적으로 태성사에서 더 이상 출판을 할 수 없게 되자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게 됐다는 것.  눈여겨 볼 대목은 간행 후 문학계와 출판계의 변화상이다. 초판 발행 후 이를 바탕으로 이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재검토가 이상 문학의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자평했다. 또 하나는 출판계에 전집물 발행이 유행처럼 번져갔다는 것. 이를 두고 종국은 “4×6판 전 3권, 총 2천여 면(쪽)의 이상전집이 반년 미만에 매진되자 출판계에 전집 붐이 일어나면서 무슨 전집, 무슨 전집… 형형색색의 기획 출판물이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실 그 초판이 발간될 당시만 해도 많은 출판사들은 그 계획을 냉소했으며, 덕분에 편자가 원고 보따리를 싸들고 우왕좌왕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리하여 편자는 감히-자화자찬이라고 냉소할 분도 없잖겠지만-이상전집의 간행은 문학사상 또는 출판사상 아울러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범례’는 전반부는 초판의 간행사와 유사하다. 다만 초판의 부록은 그대로 살리되 ‘이상 문학의 난해성에 비추어, 또 대중의 이해에 자(資)하기 위해서’ 부록을 대폭 보강했다. ‘제5부 해성과 감상’이 그것이다. 이밖에 일문 작품은 원문과 역문 2종을 같이 수록하면서 역자 및 작품명도 공개했다.  즉 유정(柳呈)은 일문시 ‘오감도’의 8편과 ‘이상한가역반응’의 6편, 김수영(金洙暎)은 유고집 중 ‘유고(遺稿)1’ 이하의 전부(단 ‘유고4’ 및 ‘회한의 장(章)’은 제외), 김윤성(金潤成)은 ‘유고4’, 그리고 편자 임종국은 ‘3차각설계도’의 7편, ‘건축무한육면각체’의 7편, 유고집 중 ‘집각(集脚)’~‘최후(最後)’의 9편과 ‘청령’(蜻蛉), ‘한개(個)의밤’ 및 ‘회한의 장’ 등이다. ...      
327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김기림 - 바다와 나비 댓글:  조회:3386  추천:0  2015-12-11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이 시 또한 李箱이상을 기리며 쓴 시로 이해된다. 하얀 피부에 나비수염 백구두를 신고 주피터가 된 이상, 까마귀가 된 이상, 산 오뚝이가 된 이상, 나비가 된 이상 이상은 흰나비가 되여 쫒기 듯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다. 이상의 작품 속에는 여러 번 나비 이야기가 나온다.   나비가 의미하는 바는 烏瞰圖 詩第十號 오감도시제10호 "나비"에서 보면 “나비”의 상징은 “조국의 독립 의지를 펼치는 임시정부 레지스탕스”를 이르는 말로 그려지고 있다. “나비”의 상징은 이상과 김기림, 이태준, 박태원 등이 공유한 Allegory알레고리이다.   김기림은 이상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으며 이상의 멘토Mentor이기도 했다. 이상의 재능을 보고 프랑스로 같이 유학을 가자고 권유하기도 했고 이상 사후 가장 애석해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독립투쟁, 레지스탕스 활동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상이 일본에 건너간 이유는 행동파 독립군이 되어 윤봉길처럼 의거를 하려 했던 것이다. 그 활동 내용은 그의 작품 “종생기” “파첩” “봉별기” “날개” “실화” “황소와 도깨비”등등의 작품 속에 우거지 쓰레기처럼 기록해놓았다. 소설 "날개"속에는 그 계획을 알리는 통지문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 간 후 독립군 본진에서 작전취소를 통보한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그의 계획은 누설되어 실패하고 만다. 배신자가 있었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   그의 작전 개시일은 1937년 3월 3일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 1937년 2월 12일 사상불온자로 경찰에 구속된다. 일경이 어떤 제보도 없이 무작위 불심검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이 비밀을 제보한 것일까? 꿈도 펼치지 못 한 체 3월 16일 죽음 일보직전에 새파란 초생달이 되어 풀려나왔다. 3월 새파란 초생달 병상의 이상을 마지막 방문한 친구도 김기림이었다. 혹? 이상의 허리에 새파란 고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이상의 애처로운 사연을 김기림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글로 남겼다... 李箱 관하여- ...             작가명 김기림 영문/한자명 金起林 이메일 홈페이지 소개 허윤회(문학박사)   시인?평론가. 호는 片石村. 함북 성진 출생. 김기림은 1930년대 시와 시론 분야에서 동시에 두각을 나타낸 문인이다. 그는 주로 모더니즘에 입각하여 시를 제작하고 시론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더니즘이란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최재서는 「주지주의 문학이론」을 통하여 T. E 흄, 올더스 헉슬리, 허버트 리드, T. S. 엘리엇 등의 생각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있다. 흄을 통하여 전파된 모더니즘이란 가치관의 혼란으로 야기된 현실의 새로운 질서를 요망한다는 의미에서 ‘고전주의적’ 이다. 김기림의 문학관 역시 최재서의 그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고전주의적인 의미에서 모더니즘의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이다. 김기림은 ‘9인회’ 회원으로서 정지용?박태원?이태준?이상 등과 교류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여러 후배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에서 모더니즘 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정지용이나 이상처럼 시의 질적인 성취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측면을 김기림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김기림은 『바다와 나비』(1946)에서 이미지즘의 경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 「새노래」에서 보여주는 그의 목소리는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전언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기림이 1940년 무렵 낙향하여 그의 고향에서 교사직을 맡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의 제자로서 시인 김규동의 전언에 의하면 김기림은 문학도 문학이지만 물리라던가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 자신 『과학개론』등의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근대문명이 안겨준 과학과 이성에 대한 확신은 그의 문학관 여기저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해방이후에 「시론」, 「시의 이해」, 「문학개론」, 「문장론신강」 등의 여러 괄목할 만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해방이전의 이론적 탐색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 형편인데 애석하게도 이에 대한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없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그의 이름이 복자로 가려진 상태에서, 여러 비판의 화살을 받고 있었지만, 외국의 여러 시에 대한 소개와 이론이 범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기림의 『시론』이라는 조그마한 책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시에 대하여 공부하려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시론』이라는 책에서 위안과 불만과 고통의 편린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김기림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처음으로 뚜렷한 시론을 가진 시인이었다.《문장》   출생일 1908년 출생지 함북 성진 주요 장르 시 ○시비 있는 곳 : 서울 송파구 보성고등학교 ○글쓴이 태어난 곳 : 함북 학성군 학중 (1908. 5. 11. - ?(납북))                                                      김기림(金起林.1908.5.11∼?) 시인                                                      1. 생애와 활동.   시인, 문학평론가. 본명 인손(仁孫), 필명 편석촌(片石村), 함북 학성군 학중(鶴中) 출생. 1921년 서울 보성고보(普成高普) 중퇴, 1930년 일본 니혼(日本)대학 문학예술과 졸업, 이후 도호쿠(東北)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고향인 함경도의 경성중학에서 영어 교사를 하다가 1930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 활약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특히 시 창작과 비평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문학 활동은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한 33년경부터 본격화되어, I.A.리처즈의 주지주의(主知主義) 문학론에 근거한 모더니즘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고, 그러한 경향에 맞추어 창작에 임하기도 하였다. 1935년 장시 를 발표하고 이어서 발간된 첫 시집 (1936)는 현대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주지적인 성격, 회화적 이미지, 문명 비판적 의식 등을 포함한 장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시집 (39)에서는 이미지즘이 더욱 분명한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8ㆍ15광복 후 월남하였으며 [조선 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정치주의적인 시를 주장하였고, 서울대학ㆍ연세대학ㆍ중앙대학 등에서 문학을 강의하다가 6ㆍ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월북 작가로 분류되었다가 1988년 3월 해금 되었다.   1990년 6월 9일 서울 보성고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다. 김광균, 구상, 조병화, 김규동, 박태진 등 김기림의 동료와 그로부터 시를 배웠던 원로시인들에 의해 세워진 이 시비에는 그의 대표 시 가 새겨 있다.  2. 시인과 지식인   시인은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마음이 청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면 그 청정이란 무엇일까? 첫째는 어린아이 와 같이 천진난만한 마음이요. 둘째는 선정(禪定)이다. 속정(俗情)을 끊고 마음을 가라앉힌 상태를 말한다. 김기림이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은 후자다. 김기림은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여러 가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지성을 갖춘 인간의 사유와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학을 하려거든, 시인이 되려거든 우선 물리, 화학, 수학, 역사, 영어 이것 모두를 착실히 잘하는 것이 급선무다.” “누구든지 서정시 한두 편은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시인이 되기 어렵고 논문 한두 편 썼다고 비평가가 되게 아니다.”라는 김기림의 주장을 음미하면서, 나는 그가 문인이기보다는 지식인으로서 살고자 하였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3. 김기림의 문학세계.    김기림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적 모더니즘 문학 운동을 선언하고, 자연발생적 시를 배격하고 주지성을 강조하였으며, 감상성을 거부하면서 문명 비평의 정신을 앙양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론과 창작을 겸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하였다. 김기림은 30년대 모더니스트 시인으로서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는 이전의 한국시에 대해 두 가지의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1920년대 전반기 시단의 주류를 이룬 낭만주의 시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20년대 후반기 시단의 주류를 이룬 사회주의 시에 대한 것이다. 그는 과거의 낭만주의 시가 감수성의 분열 상태를 일으켰다고 보고 그 극복책으로서 형이상학적인 시의 이념을 제시한 바 있다. 이것은 물론 외국문학이론에 힘입은 것이지만 어떻든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이바지한 셈이 된다.    한편, 김기림은 사회주의 문학에 대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이 부분은 임화(林和)와의 기술주의 논쟁 속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김기림은 이미지스트[Imagist] 시인들처럼 단순한 감각적 이미지들을 의미와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시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고자 했는데 그의 이러한 시적 인식 태도는 이데올로기의 경직화 현상을 빚은 프로 파 시인들과는 판이한 양상을 보여 주었다.  *‘김시태 한양대 교수, 동아일보(1988. 1. 19)’에서 인용.  4. 김기림의 대표작.     김기림은 절반의 성공을 이룬 시인으로 평가된다. 김기림의 시론보다 시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점, ‘감상적인 로맨티시즘 부정’이라는 시론의 주장과는 달리 시에서의 농후한 감상성, 문명 비판의 차원이 피상적인 점 등 때문이다. 특히 ‘모더니즘론’은 김기림을 평가하는 데 핵심적인 사항이 된다. 평가의 핵심은, 일제 말기 김기림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 모더니스트’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초기부터 가졌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냐에 있다.     김기림의 작품은 시적 공감과 심정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를 그린 김기림다운 일련의 작품인 ‘공동묘지’ ‘못’ 등으로 평가해야만 하며 해방공간에서의 김기림의 좌파 활동 역시 1930년대 초기부터 김기림이 지향했던 ‘지성’과 ‘현실 간여’의 인식론적 지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일제 말기 ‘모더니즘론’ 또한 1930년대 초기 모더니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제목 : 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는 1920년대 낭만주의 병적 감상성과 경향 파의 정치적 관념을 부정한 이른바 모더니즘 운동의 대표작이다. 초기 시 에서 자주 보이던 낯선 외래어의 사용이나 경박함이 배제되고,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연약한 나비와 광활한 바다와의 대비를 통해 `근대`라는 엄청난 위력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1930년대 후반 한국 모더니스트의 자화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 시는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S. 스펜더`의 시 제3연과 유사성을 지닌 것으로, 그의 시에서는 두 마리의 나비가 익사하는데, 김기림의 시에서는 나비가 바다로 내려갔다가 지쳐서 되돌아온다. `나비`는 생명체 곧 인간을, `바다`는 죽음 또는 영원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제목 : 공동묘지.  일요일 아침마다 양지 바닥에는  무덤들이 버섯처럼 일제히 돋아난다  상여는 늘 거리를 돌아다 보면서  언덕으로 끌려 올라가곤 하였다  아무 무덤도 입을 벌리지 않도록 봉해 버렸건만  묵시록의 나팔 소리를 기다리는가 보아서  바람소리에조차 모두들 귀를 쭝그린다  호수가 우는 달밤에는  등을 일으키고 넋없이 바다를 굽어본다.   `공동묘지`에 나타나는 무덤의 이미지는 묵시론 적인 예언자의 목소리를 깔고 있을 뿐 아니라 역동적인 생명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늘 돌아다보면서 끌려 올라가는 상여’의 이미지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힘으로 끌리어가는 피동성과 죽음의 이미지를 거느린다. 입을 벌리지 못하도록 강제 당한 무덤의 이미지에는 강제성과 굴욕 성이 있다. 그러나 그 무덤은 ‘묵시론 적인 나팔 소리’에 귀를 쫑긋하는 내적 에너지와 생명력을 가진 것이다. 호수가 우는 달밤에 등을 일으키는 무덤은 신비적이고 미묘한 분위기를 아우른다. ‘넋 없이 바다를 굽어보는’ 무덤 이미지에는 예언자의 시선이 깔렸다. 이 같은 예언자적이고 엄숙한 ‘죽음’의 이미지는 일제 말기를 살면서 시의 장래를 예견하고 우리말의 운명을 조심스럽게 낙관했던 지식인 김기림 목소리의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김기림의 예언자적 인식과 침묵의 수사(조영복/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에서 인용.  5. 시인의 임무.   사람들은 내게 “당신은 왜 일상을 그리지 못하는가?” “당신은 왜 김소월처럼 아름다운 서정시를 창작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이 땅에 시인들은 일상을 김소월같이 노래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기림은 집안에서 ‘감상적인 로맨티시즘’에 젖어서 일상을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집 밖으로 뛰쳐나가 일터에서, 거리에서 현실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집안에서 창작을 하는 시인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집 밖에서 현실에 비판적으로 간여하는 시인(詩人)은 ‘무엇을 쓸 것인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그려야 하느냐에 일생을 바친 김기림 같은 시인을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을까?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온몸과 마음으로 고민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임을 생각하면, 죽어가는 인간성과 파괴되고 있는 자연을 외면하는 것은 시인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기림은 `시의 장래`에서 시인의 임무를 ‘내일의 발견’이며 ‘생존의 신념’이라고 정의 했다. 나는 그의 절박한 물음을 외면할 수가 없다. “내일을 예감하고 생존의 신념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당신은 무었을 쓰고 있는가?” 
326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오장환 - 고향 앞에서 댓글:  조회:4863  추천:0  2015-12-11
▣ 오장환(吳章煥) 문학관   ▶주      소 : 충북 보은군 회인면 회인로5길 12 (도로명)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 (지번) ▶전      화 : 043-540-3776   ▶관람시간 : 오전 9:00 ~ 오후 5:00 (휴관 :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포함) ▶문의 : 보은군청 : 충북 보은군 보은읍 군청길 38(이평리 40-2)                                    보은군청 문화관광과                                    Tel. 043)540-3731~3735    Fax. 043)540-3379 시외버스터미널- 삼산로(서쪽) - 삼산교 - 속리산(상주)방면 우측도로 - 후평사거리에서 회인(청주)방향 - 동정삼거리에서 회인(청주)방향 - 차정삼거리에서 회인(청주)방향 - 송평삼거리에서 회인(청주)방향 - 회인로(서쪽) - 회인5길에서 좌회전 - 오장환문학관 자동차 이용 경부고속도로 방면 경부고속도로 → 당진상주고속도로 → 회인IC 송평사거리에서 청주 /회인 방면으로 우회전 → 회인5길에서 좌회전 → 오장환문학관 보은방면 보은군 → 보은제일로 우편사거리에서 청주/회인방면으로 우회전 → 회인5길에서 좌회전 → 오장환문학관    ▶주변관광: 속리산, 법주사, 만수계곡, 삼년산성, 서원계곡, 선병국 가옥, 하얀민들레생태마을 ▶오장환 문학관 오장환 시인은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4남 4녀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회인공립 보통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 경기도 안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습니다.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오장환은 정지용 시인을 만나 시를 배우게 됩니다. 문예반 활동을 하며 이라는 교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고, 1933년 2월 22일에 발간  된 임시호에 오장환의 첫 작품인 [아침]과 [화염]이라는 두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후 [시인부락],[낭만],[자오선] 등의 동인으로 참가하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였으 며 이 시기에 발표한 시집 [성벽]과 [헌사]를 통하여 '시단의 새로운 왕이 나왔다'는  찬사를 듣게 됩니다. 상에서 해방을 맞이한 오장환은 [병든 서울]을 통해 해방의 기쁨을  감격적으로 노래했습니다.   [병든 서울]은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최종후보에 오르는 등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 으며 또한 詩 [석탑의 노래]는 1947년 중학교 5,6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오장환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던 시기에 전국을 돌며 몸을 아끼지 않는 활발한  문화활동을 벌렸습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테러가 자행되면 서 몸을 심하게 다치고 북으로 가게 됩니다. 이후 오장환은 북한과 소련에서 지병 신장병을 치료하면서 소련기행시집 [붉은기]를 마지막 으로 발표하고 한국전쟁 중 34세의 젊은 나이에 신장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1988년, 광복 후 40여 년간 논의조차 불가능했더너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루어져  이후 오장환 문학계에 대한 연구논문을 비롯 전집, 평론,시집 등이 발간되었으며, 초창기의 시와 동시, 장편시 등의 자료들이 속속들이 발견되었습니다. 1996년에 제1회 '오장환문학제'가 개최되어 현재까지 매년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2005년 오장환의 생가복원 및 문학관 건립을 위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보은군은 2006년 총사업지 8억 3000만원을 투입해 전시관 299.2㎡와 생가 73.52㎡로 구성된 '오장환 문학관'을 건립했습니다.  ▶대중교통 : 버스  216 (오동육교방향), 216 (회인방향),                    버스  216-1 (오동육교방향), 216-1 (회남방향) 도보 이용                     오장환 문학관 모습       오장환 문학관 전시관     제일먼저 영상실에서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스승 정지용 시인과의 만남과 남포 적십자병원에서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 오장환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단막극 형식의 영상과 오장환 시인의 대표시 12편을 해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오장환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오장환 문학관' 안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오장환 모습   오장환 시인은 정지용,이육사,서정주 시인과 함께 시를 쓰며 우리나라 역사의 격동기에 가장 활발한  문학 작품 활동을 한 시인으로 ' 서정주,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운 시인이랍니다.                     오장환 詩集 -「성벽」,「병든서울」,「헌사」,「나 사는곳」,「에세닌 시집」,「붉은기」등    일제 강점기에 많은 인사들이 친일파로 일본 앞잡이 노릇을 했지만 신장병을 앓으며 궁핍하게 해방을 맞이하지만 오장환은 단 한편의 친일시를 쓰지 않았다. 詩 '절정의 노래'는 당시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오장환  詩 세계는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 [성벽, 헌사] : 모더니즘 지향,                                 * [나 사는곳] : 향토적 삶을 배겨으로 하는 서정의 세계                                * 이후 [병든 서울] : 사회 변혁을 열망하는 프로레탈리아 문학을 지향     오장환의 대표적인 詩-고향 앞에서, 나의 노래     고향 앞에서                      - 오장환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 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 지운다. 간간이 잣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   -이 작품에는 시인의 고향에 대한 인간적 애정이 담겨 있다. 고향의 정겨운 모습과 아늑하고 따뜻한 품이 그리운 화자가 봄 기운을 느껴 고향을 찾아간다. 그러나 아직 '다 녹지 않은 얼음장'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화자는 한기를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상황을 '진종일/나룻가에 서성거리다/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라는 2연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결국 화자는 고향 가까운 주막에서 하루를 묵게 되는데 고향에 얽힌 추억을 주인집 늙은이와 이야기하면서 장꾼들에게 고향 소식을 물어 본다. 4연과 6연에는 화자가 살았던 고향의 모습이 그려진다. 산기슭에 있는 선산 무덤 속에는 조상이 잠들어 있고, 전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집집마다 누룩을 띄워 술을 빚던 정겨운 마을. 그 마을을 그리워하며 그 마을에 가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오장환 또한 여러 동인지에 참여하면서  박두진, 이중섭, 정지용, 이육사, 서정주, 김광윤 여러 친구들을   두었어며, 정지용 시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중섭 시인은 그의 詩集 표지 그림을 그려 주었습니다.   오장환의 사망소식을 듣고 이중섭은 '추모'라는 그림을 그려 그의 죽음을 추도했다고 합니다.                     오장환 문학관 외부모습   오장환 문학관과 생가 사잇길       시비 -'나의 노래' ▼     오장환 문학관 우측으로 가을 국화꽃이 반겨줍니다               '오장환 생가'를 문학관에서 유리창으로 바라보고 찍음       오장환 생가-1918년 5월 15일 이곳에서 탄생   오장환 생가 마당에 들어서서   1996년 '제1회 오장환 문학제'가 개최되어 매년 열리는데 문학제에는 백일장, 시그림, 그리기대회, 시낭송 대회, 문학 강연 등이 열려 보은을 비롯하여 오장환을 사랑하는 전국의 문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325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류치환 - 깃발 댓글:  조회:2597  추천:1  2015-12-11
  깃발/ 류(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向)하여 흔드는 영원(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1936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유치환의 시 작품이다.  이 시의 원제는 「기빨」이며, 1934년 가을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표 당시 제7, 8행은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삼가한”이었으나, 1939년 시집 [청마시초]에 수록하면서 “아아 / 애닯은”으로 고쳐 연민과 애수의 분위기를 강화하였다. 9행 단연의 이 시는 진술에 의거한 관념적 표현을 위주로 하는 다른 시들과 달리, 주도적 모티프인 깃발을 다양하게 표상했다.  여기의 깃발은 이상향을 동경하는 순정을 뜻한다. 깃발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려 이상이나 이념을 실현하려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며 펄럭이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즉 ‘해원’이란 표현과 연결되는 이상향에 대해 끝없이 동경하나 끝내 이상향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순정과 애수의 깃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에 대해 갖는 존재의 허무와 고뇌, 그리고 비원을 연민과 애수의 정서로 제시함으로써 삶에서 비롯되는 애환의 배후를 탐구하려는 초기의 시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 은 1939년에 나온 『청마시초』에 수록된 작품으로, 시적 배경이 바닷가임을 볼 때 어린 시절부터 자란 시인의 고향 체험이 이 시를 쓰게된 계기가 된 듯하다.  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과 인간의 존재 양식이 띤 모순과 부조리를 재발견할 수 있다. 이상향(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시지프스 신처럼 무모하게 이상향에 도달하려는 모순과 부조리를 은 인간 존재의 양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지닌 인간은 힘차게 나부끼며 그곳에 도달하고자 내적 몸부림을 쳐보지만, 이념의 푯대 끝에서만 나부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어찌할 수 없는 비극적 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가고자 하나 갈 수 없음을 인식한 후에는 그 마음이 '애수'가 되고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 되어, "하강"의 이미지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마음 상태는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대립적 갈등 그 자체로 머물러 있게 된다. 더구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의지로까지 발전하면서도 결국 좌절의 비애로 귀결지어지게 된다.  한편으로 이 시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오늘날 일상적인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구속은 견디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세계, 죽음이 없는 세계, 제약받지 않는 평화의 세계, 갈등이 없는 세계 등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한 조건이 해결될 수 없기에 인간의 존재는 비극적이지만, 그러한 조건으로부터 탈피할 수 없는 것 또한 인간의 비극이다. 이 시는 시인이 지니고 사는 높고 그윽한 이념이 한없이 외롭고 애달픈 것임을 형상화해 놓은 작품인지도 모른다. (현대시 해설, 인터넷) ​​ * 정지용의 '향수'와 유치환의 '깃발'​  그리움, 향수를 다룬 시일지라도 정지용의 '향수'와 유치환의 '깃발' 사이에는 확연히 다른 바가 있다. 정지용의 '향수'는 철저히 향토적이며 가족의 체취가 물씬 배어나는, 알뜰한 흙에 묻힌 그리움 그래서 필자는 이를 백(魄)적 넋의 향수라 한 바 있고, 유치환의 '깃발'은 그와 너무나 대조적인 시의 맛을 보여주는 것으로 불안, 허무적이며 정착의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 가볍게 어딘지 모르게 한없이 떠나가야 할 것 같은 표류의 정서, 이를 일러 필자는 혼(魂)적 넋의 향수라 말하고 싶다.  백(魄)은 무겁고 깊이 가라앉는 성격이 있고, 혼(魂)은 가볍고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기 어려운 철저히 나그네의 나부끼는 옷자락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수행하지 못한 사람이 죽어 혼과 백이 날아가고 땅으로 묻혀 헤어지게 되면 다시 고향 찾기 어렵게 된다. 그러기에 혼과 백이 헤어지기 전에 사람은 알뜰히 수행하여 원래의 고향, 일러 피안(彼岸) 또는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찾아가야 한다. (국제신문 '능지스님의 자유')​                                                         * 1908년 경남 통영 출생. 호 청마(靑馬). 유치진의 동생으로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보(東萊高普)를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 1931년 [문예월간]지에 시 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데뷔, 그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을 계속, * 1939년 제1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간행하였다.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을 비롯한 초기의 시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 그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읊은 시 , 등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들을 수록한 것이 제2시집 이다. * 1945년 광복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교편을 잡는 한편 시작을 계속, * 1948년 제3시집 [울릉도], 1949년 제4시집 [청령일기]를 간행하였고, * 1950년 한국동란 때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여 라는 종군시집을 펴냈다. 그후에도 계속 교육과 시작을 병행,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 예술원공로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1967년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 오랜 세월 동안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있다.                           * 석굴암대불/유치환   목 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 천년(千年)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목숨이란! 목숨이란 ㅡ 억 만년을 원(願) 두어도 다시는 못 갖는 것이며 이대로는 못 버릴 것이매       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 연 잎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 없이 지새는 흰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寂寂)히 눈 감고 가부좌하였노니.           ◇ ​ ​유치환은 4264년(서기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靜寂'으로 등단했다. 시 '깃발'은 그 5년 뒤 '조선문단'에 발표되었다 했으니 시인의 나이 28세 때 일로 작시 경력 길지 않은 시기에 그의 대표적 시를 출산시켰다고 볼 일이다.  유치환의 청년 시대는 일제의 침탈 잔학성이 더 심해지고 그의 가세는 기울어 불안한 생활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시 '정적'이 발표된 다음 해 평양까지 올라가 사진관을 열어보기도 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화신연쇄점에 근무하기도 하는 등 삶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고난의 질곡을 끌고 다녔다. 20대 중반 가난과 고난에 그렇게 이끌려 다니면서도 타오르는 시심을 끊임없이 가꾸어 올렸기에 '깃발'과 같은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아우성은 외침과는 다르다. 외침은 오로지 개인적이고 작은 소리에 지나지 않지만, 외침과 외침들이 많이 모여 동시에 한마음으로 소리 낼 때 아우성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전달되는 메시지와 의미가 더 크고 진폭도 큰 것이 아우성이다. 그 아우성이 귀에 소리로 전달될 수 없다면 때로 얼마나 답답하고 기막힌 일이 될 것인가. '소리 없는 아우성' 그것은 그렇게 기막히고 말로 못할 사연을 깃발에 전가하여 표출한 것이다. '노스탈쟈' 곧 그리움이나 향수는 그리는 대상을 만나거나 거기에 도달하게 될 때 해소되기 마련이다. '영원한 노스탈쟈'는 그 해소의 길이 없다는 말이 된다. '해원'은 평원(平原)에 대치되는 말이다. 풀 푸른 평원이 눈앞에 전개되었을 때 맨발로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내달릴 수 있다면 행복한 순간이 되지 않을까? '해원'은 마음껏 내달려 밟아 달라는 듯 풀 푸른 지평이 아닌, 거부와 경고의 몸짓을 끝없이 내 펼친 물결 푸른 바다 위엔 안타까운 상상만 내달릴 수 있을 뿐 아니겠는가.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그것은 주체할 수 없이 밀어닥치는 유치환의 애상과 그리움의 표상이다. '바람' 그것은 유치환의 시에 단골 격으로 등장하는 허무, 불안정의 대명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치환은 올곧은 선비, 소박하면서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의 시인이었다. 소년 같은 순수한 정의 소유자 유치환이 허무의 심회를 벗지 못하고 많은 시간 거기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었다고 보인다. 지사다운 품격의 소유자 유치환이 언제나 내세웠을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의 시심이 백로처럼 날개 펴고 비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324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이용악 - 전라도 가시내 댓글:  조회:4175  추천:1  2015-12-11
‘북방의 시인’ 이용악(1914~1971) 전집이 출간됐다. 곽효환, 이경수, 이현승 등 중견 이용악 연구자 3인이 이용악 탄생 100주년(2014년)을 기념해 2년 간 작업한 결과물로, 시인이 남쪽에서 발표한 시뿐 아니라 월북 후 낸 시 전편, 북에서 발표한 유일한 산문집 ‘보람찬 청춘’과 좌담회 자료까지 이용악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른 것이 특징이다.   이용악은 1914년 11월 23일 함북 경성에서 태어났다. 극심한 가난 속에 성장한 그는 1935년 시인문학 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으로 등단한 뒤 시집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등을 발표했다. 일제 식민치하의 비참한 삶과 간도 유이민들의 슬픔을 시로 승화한 이용악은 1930년대 후반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불렸다. 해방 후 좌파 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의 회원으로 활동한 시인은 한국전쟁 중 월북했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이용악의 시 세계는 여기까지다. 1988년 월북문인 해금 후 윤영천 인하대 교수가 펴낸 ‘이용악 시전집’에는 월북 전 그가 낸 네 권의 시집만이 담겼으며 그마저도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이번 전집의 저자들은 “같은 월북 문인인 백석의 시 연구가 북에서의 시적 여정까지 포괄하는 쪽으로 발전하는 데 반해, 이용악의 시는 월북 전에 국한돼 기존 전집으로는 확대된 연구 지평을 감당할 수 없다”는 발간 의의를 밝혔다.   한국전쟁 때 월북한 이용악 시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조명한 이용악 전집이 출간됐다. 1957년 북에서 출간된 리용악 시선집(위쪽)을 비롯해 등단부터 타계까지 시인의 모든 작품을 집대성했다. 소명출판 제공   전집은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에는 연구자들을 위해 이용악의 모든 시를 발표 순서대로 원문 그대로 실었고 2부에는 독자들을 위해 같은 시를 현대어로 풀어 썼다. 시집에 미수록된 시는 월북 이전과 월북 이후로 나누어 실었다. 3부에는 산문과 좌담 및 설문 자료를 발표 순으로 배열했다. 눈에 띄는 것은 시인이 월북 이후 발표한 이른바 북한시들이다. 해방 이전 민중의 고달픈 삶을 서정적 시어로 품었던 시인은 해방 이후 미국에 대한 증오와 좌편향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월북 이후 쓴 작품에는 이 같은 방향성이 더욱 고착화하는 한편 체제선전적인 경향을 강하게 띤 것을 볼 수 있다. “어질고 근면한 이 사람들 앞에 / 약속된 풍년을 무엇이 막으랴 / 쌀은 사회주의라고 굵직하게 써 붙인 / 붉은 글자들에 모든 시선이 즐겁게 쏠리고 // 허연 구레나룻을 쓰다듬다가 /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던 칠보 영감/ ‘산 없는 벌판에 쌀산이 생기겠군’”[‘덕치마을에서(1)’ 일부?리용악 시선집(1957)] 이용악의 작품 세계가 변화한 계기는, 그가 월북 후 북한 시단에서 주류로 활동한 보기 드문 시인이라는 점과 1953년 당의 숙청을 받아 6개월 간 집필 금지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는 점에서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 중 한 명인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이자 시인은 1955년에 발표된 이용악의 유일한 산문집 ‘보람찬 청춘’이 시인의 부활에 한 몫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번 전집에서 최초로 전문이 공개된 ‘보람찬 청춘’은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아이가 영웅적 노력을 통해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로, 산문이지만 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곽 시인은 “1950년대 북한에서 유행한 오체르크(실화 문학)의 일종”이라며 “2만부를 인쇄했다는 데서 판매용이 아닌 체제선전용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시인이 주류 문단에 복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 밖에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용악 생애 연보와 작품 연보, 연구 서지 등도 알차다. 저자들은 “이용악은 일제에 의해 절멸한 현실주의와 서정성을 한데 아우른 시적 성취로서 돌올한 시인”이라며 “이번 전집은 시인의 재북 시기까지 포괄함으로써 시인의 문학 세계뿐 아니라 북한의 누락된 문학사를 복원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황수현기자  ==========================================================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여 다투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거처로는 땅을 좋다고 하고, 마음은 깊은 것을 좋다고 하고, 사귀는 데는 어진 것을 좋다고 하고, 말은 진실한 것을 좋다고 하고, 정치와 법률은 다스려짐을 좋다고 하고, 일에는 능숙한 것을 좋다고 하고, 움직임에는 때에 맞음이 좋다고 한다. 오직 싸우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록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  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노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이용악(李庸岳, 1914~1971)은 한국의 시인이다. 함경북도 경성 출신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조치대학(上智大學)을 졸업했고 1939년 귀국하여 주로 잡지사 기자로 일했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5년, 신인문학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광복 후 서울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소속으로 〈노한 눈들〉,〈짓밟히는 거리에서〉,〈빛발 속에서〉등의 시를 발표하며 ‘미제와 이승만을 괴뢰도당으로 반대하는 문화인’ 모임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인민군의 서울 점령 때 출옥하여 자진 월북했다. 한국 전쟁 중에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등의 시를 발표했으며 월북한 지 21년이 지난 1971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는 《북국의 가을》,《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낡은 집》,《슬픈 사람끼리》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분수령》,《오랑캐 꽃》등이 있다. ............................................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먹었느냐고 묻지 말라/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라"(시 '나를 만나거든')던 시인 이용악(1914~1971)! 그는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두만강 건너 우리의 강'을 건너 할아버지는 소금을 밀수입했고 친척들은 그 강을 건너 아라사(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두만강을 건너 밀무역 행상 중 아버지는 객사하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는 국숫집을 하며 어린 자식들을 키웠다. 시인 또한 서울에서 동경에서 품팔이 노동을 하며 고학했다. 이야기성과 체험의 구체성이 두드러진 그의 시들을 읽는 일은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개인사, 가족사,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읽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북간도 어느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가 만났다. 사내는 언 발로 눈보라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며 날이 밝으면 다시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한다. 가시내는 석 달 전에 북으로 달리는 '불술기(기차)' 속에서 치마를 뒤집어쓴 채 이틀을 울며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팔려왔다. 그런 두 남녀가 국경 너머에서 만나 겨울밤 내 지나온 내력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다.    그 밤 내 사내가 '가시내야'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것도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 전라도 가시내는 한없이 차고 한없이 차진 느낌이다. 고향을 떠나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고 울었던 가시내, 지금은 남실남실 술을 치는 가시내. 때로 싸늘한 웃음을 보조개를 소리 없이 새기는 가시내, 까무스레한 얼굴에 눈이 바다처럼 푸른 가시내, 간간이 전라도 사투리가 섞이는 가시내…. 이 함경도 사내처럼 나는, 그 전라도 가시내를 만난 것만 같다. 전라도 개펄의 바지락 조개 같고 세발낙지 같고 때로 꿈꿈한 홍어 같기도 했으리라.    그 밤 내내 함경도 사내가 피워 올리는 북쪽 눈포래 냄새와, 전라도 가시내가 피워 올리는 남쪽 바다 냄새에 북간도 술막이 흥성했겠다. 그 술막의 술독 바닥났겠다. 눈에 선한, '흉참한' 시대를 살았던 그 전라도 가시내. "너의 노래가 어부의 자장가처럼 애조롭다/너는 어느 흉작촌(凶作村)이 보낸 어린 희생자냐"(제비 같은 소녀야-강 건너 주막에서)!     시인 정끝별   ================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낭만적. 비극적  표현 : 서사 지향적  구성 :     1연  두 주인공 제시     2연  두 사람의 해후     3연  두 사람의 동화(同化)의 시작     4연  가시내의 비극적 삶     5연  두 사람의 동화의 절정     6연  사내의 떠남  제재 : 전라도 가시내  주제 : 만주 유이민들의 생활과 애환  출전 : (1939) 이해와 감상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규모로 발생했던 유이민 중 이른바 '팔려 간 여인'을 시적 소재로 다룬 작품으로 서사성이 강화된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서사성이라는 것은 시 속에 인물들 또는 한 집단이 겪은 이야기가 녹아 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두 주인공의 범상치 않은 삶이 그 서사성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1연에서는 이 작품을 구성하는 두 주인공이 제시된다. 여인은 얼굴이 검고 눈이 푸른 '전라도 가시내'이고 화자인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이다. 두 주인공의 출신 지역을 '전라도'와 '함경도'로 시인이 배치한 까닭은 둘 사이의 지리적 거리와 관계 없이 온 민족의 처지가 두 주인공과 같았음을 암시하고 위해서이다. 2연에서 이들은 일제의 경계가 삼엄하고 인심이 흉흉했던 국경 지방의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에서 해후한다.  3연부터 5연까지는 '나'와 '전라도 가시내'가 만난 짧은 하룻밤의 정황이 형상화되어 있다.  3연에서 '나'는 이 술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련을 거친 인물로 제시되는데 그것은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점이나 '눈포래'를 뚫고 온 점에서 나타난다. 나와 여인은 술을 마주하며 기나긴 이야기에 빠지고 자신들이 같은 운명에 있음을 깨달아 간다. 여인의 그늘진 가슴 속에 있는 사연을 들으며 동화되어 가는 것이다.  4연에서는 여인이 북간도로 팔려 오던 때의 심리적 정황이 제시되고 있다. '천리 천리 또 천리'는 모두 삼천리, 곧 여인의 고향인 전라도와 지금 북간도 땅과의 거리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정신적 거리이기도 하다. 여인은 석 달 전에 곧 단풍잎 붉은 늦가을에 이 곳으로 팔려 왔던 것이다. 그는 북간도로 팔려 오는 기차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온 것이다. '불술기'는 '불수레'의 함경도 방언인데 의미상으로는 '기차'를 비유하고 있다.  5연에서 화자의 여인은 드디어 취흥 속에 동일화된다. 그것은 이 둘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공속감에서 우러나온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동질감을 확인하였고 여인은 오랜만에 정신적 벗을 만나, 잊었던 자신의 고향 생각에 하룻밤을 지샌다. 여기서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사투리로 봄 노래를 부르는 것은 여인에 대한 지극한 연민의 표현이다.  6연에서는 화자의 처지가 한 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못 내리고 또 날이 밝으면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하는 신세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부분은 이 화자 역시 유이민이거나 민족을 위해 싸우는 투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수난사라는 기본 서사를 축으로 하여 한 여인과 사나이의 만남을 형상화한 작품으로서, 화자가 여인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불안하고 냉혹한 현실 속에서 한 여인에게 느끼는 연민과 고향 정서를 형상화하였다. 따라서 이 작품은 화자의 담담한 어조 속에 한 시대의 역사가 농밀하게 펼쳐져 있는 식민지 시대 유이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 작가 소개 이용악(1914 - 1971) : 시인. 함북 경성 출생. 1935년 시 ‘패배자의 소원’을 [신인문학]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6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담한 다음, 6.25 때 월북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현실 속에서 만주 등지로 떠돌며 살아야 했던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시로 형상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시집으로 [분수령](1937), [낡은집](1938), [오랑캐꽃](1947) 등이 있다.   ◈ 시 전문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 그믐 눈보라→힘든 환경.      시간적 배경 밤이 시간적 배경, 힘든 현실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시간상으로 밤이 깊어감의 표현. 관념의 시각화.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                                     ▲1연 : 고향에 대한 향수(현재)   걸어온 길가에 찔레꽃 한 송이 없었대도           위안이 될 만한 소박하고 조그마한 행복 나의 아롱범은 아롱무늬의 범=표범(=시적화자),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당당하게 헤쳐 온 자기 자신에 대한 비유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후회 없음, 당당함의 표현(서정주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 자옥 : 발자국, 자신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의미. 어깨에 쌓여도 햐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2연 : 살아온 삶에 대한 당당함(현재)   철없는 누나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곱슬머리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어린 시절 고향에서 말로만 들었던 우라지오. 어린 시절 화자의 동경의 대상 울 어머닌                                                                                   ▲3연 : 과거의 추억 회상→어머니, 누나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주셨지.            러시아 사람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졸듯졸듯 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밤이 깊어질 때까지(늦은 밤까지)                                     ▲4연 : 과거의 추억 회상→마우재 말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헤치고 들어오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아름답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어머니의 다정함과 따스함.                                     ▲5연 : 과거의 추억 회상→어머니의 입김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새→어린 시절 우라지오를 동경하던 화자의 기억들. ● 귀성스럽다 : 수수하면서도 마음을 끄는 맛이 있다. 제법 구수한 맛이 있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7연고 연결해서 해석할 것→가만히 있지 말고 어린 시절 우라지오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펴던 것처럼 고향으로 날아갈 수 있게 날개를 펼쳐라. 감각적(시각적)인 표현.                                     ▲6연 : 어린 시절에 대한 적극적 회상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 서 있는 현재의 상황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자유롭게 고향으로 가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담아낸 객관적 상관물 날고 싶어 날고 싶어. →고향에 돌아가어 싶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강조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 곳 기억 속에서 조차 가물가물한 고향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껍다.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상황 인식→절망.                                     ▲7연 : 귀향에 대한 소망과 절망   등대와 나와 고향을 그리지만 갈 수 없는 화자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존재. 객관적 상관물.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화자의 꿈과 소망 ※ 여기서 ‘밤’의 기능 :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더욱 떠올라게 하는 시간 가도오도 못할 우라지오.                                     화자가 고향에 가지도 고향에서 누가 오지도 못하는 절망적이고 폐쇄된 공간.                                     ▲8연 : 고향에 그리움과 갈 수 없다는 절망감   ◈ 시 구조화   과거의 삶 → ← 현재의 삶 고향 우라지오 꿈 많고 행복했던 유년시절 우라지오를 동경함 고향을 떠나 절망감을 체험하는 성인 고향을 그리워함       ◈ 내용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감상적, 회고적, 애상적 ● 어조 :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목소리 ● 제재 : 어린 시절과 현재의 삶 ● 특징   ① 과거의 우라지오와 현재의 우라지오를 대비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   ② 향토색 짙은 시어의 사용   ③ 현재 - 회상 - 현재의 순서로 시상이 전개 ● 주제 : 고향과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고향에 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 ● 출전 : (1937)   ◈ 이해하기 먼 이국을 떠돌던 시적 화자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때문에 우라지오에 가까운 항구를 찾는다. 우라지오는 시적 화자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로만 듣고 동경하던 항구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그 곳은 어린 시절 그가 동경하던 세계가 아니다. 오직 추위와 외로움이 있을 뿐이다. 시적 화자는 그 곳에서 과거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고향을 그리워하나, 고향으로 갈 길이 전혀 없다. ‘우라지오의 바다는 두껍다’는 말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음을 암시한 말이다. 시적 화자는 이런 속에서 공중을 나는 멧비둘기처럼 날아서 고향의 가족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 시가 창작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 시는 일제에 의해 가족 공동체가 해체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의 작가 이용악은 일제 치하의 혹독한 현실에 의해 만주, 간도, 시베리아 땅을 떠돌아야 했던 조선인들의 삶을 시로써 묘사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한 계열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다.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화자를 통해 작가는 일제 강점기하의 가족 해체 현상을 고발하고 있다.   ◈ 심화 학습 1. 시적 화자에게 ‘우라지오’의 의미 시적 화자는 지금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 서서 고향을 그리고 있다. 고향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그에게 ‘우라지오’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고향에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우라지오’ 가까운 곳에 와 있는 지금의 그에게 ‘우라지오’는 춥고 외로운 타향일 뿐이다.   2. ‘멧비둘기’의 기능 이 시에서 화자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멧비둘기가 되어 자신이 그리워하는 고향으로 날아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여기서 멧비둘기는 화자에게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자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화자의 심정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 주는 사물이라 할 수 있다. ===================================================================     ▶李庸岳 (1914~1971) ▶ 이용악 일대기 낡은 집  현실인식의 심화과정(현실성과 민중성) 거주공간 (父․家)의 상실(가족주의의 해체와 개인주의의 대두) 개인사적 운명의 측면에서 오랑캐꽃  상징적 현실인식 - 유이민적 세계의 반영 시적 화자의 탈락 - 「오랑캐꽃」의 대상화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개인적인 정서를 뛰어넘어 민족 공동체의 정서로... 현실의 모순에 대한 시인의 대응 방식 비교    이용악, 그의 시 속으로 ▶李庸岳 (1914~1971) 1914년 11월 23일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에서 이석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일본 상지대학교 신문학과에 입학, 이 무렵 김동환의 시를 숙독하고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창작활동은 1935년 《신인문학》에 시 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39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인문평론》의 편집기자로 근무하였다. 1946년 2월 8일 서울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 1차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시부위원으로 임화, 정지용, 김광균, 오장환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전국문학가동맹 주최 ‘해방기념조선문학상’에 가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과 함께 최종심까지 올랐다. 1947년 8월 오장환의 권유로 남로당에 입당하여 남로당 서울시 문련 예술 과원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8월 ‘남로당 서울시 문련 예술과 사건’이로 구속,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1950년 6.25 전쟁중 출감하였다. 이용악의 시는 민족의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한 ‘투박한 생활의 시’에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한 세계인식의 시’로, 그리고 행방 후에는 ‘이념지향적인 시’로 변모하였다.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에서는 피폐한 농촌현실과 이농, 유랑과 국외이민, 그리고 도처에 진행되던 굶주림과 죽음의 비참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노래했고, 시집 《오랑캐꽃》에서는 유랑민의 아픔을 서정적인 언어로 노래했다. ∙작 품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현대시인전집 1, 1949) * 권영진, 『한국 현대시 해석』, 숭실대학교 출판부 ▶ 이용악 일대기 이용악은 함경북도 경성읍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했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금을 얻기 위해 일찍부터 달구지에 소금을 싣고 러시아 국경을 넘나들었고, 아버지도 이런 국경 무역의 과정에서 객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객사한 뒤 어머니는 국수 장사, 떡 장사, 계란장사 등으로 생계를 꾸려 세아들을 모두 고급 학교에 진학시키는 억척스러움을 보였다. 이처럼 이용악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이 몸에 배어 있다. 고향에서 경성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와서 고등보통학교를 마친 그는 1934년 일본 유학을 떠나, 동경에 있는 상지 대학 신문학과에 입학한다. 유학 기간에 신인 문학(1935. 3)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동경에서 김종한과 함께 동인지「 2인」을 간행했다. 그는 유학 시절에 품팔이, 노동꾼으로 학비를 조달하면 최하층민의 생활을 경험한다. 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찌꺼기 등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동인지를 발간하는 문학적 열정을 보였다. 또 그는 방학이 되면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간도 등을 다니면서 그들의 처참한 삶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용악의 이런 삶은 시집 분수령(1937). 낡은 집(1938)을 통해 결실을 보게 된다. 또 이 시기에 그는 민족 해방 운동에 가담하여 여덟 번이나 일본 경찰에 붙들려서 무서운 고문을 받았다. 1939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최재서가 주관하는 인문 평론 편집부 기자로 있으면서, 시 , 1, 2등을 발표했다. 친일 색채가 짙은 이 잡지에 시를 발표한 것 때문에 훗날 친일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   [출처] 이용악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작성자 쩡으니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五月)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三百)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934년 [문학(文學)]에 발표하였으며, 1935년 간행된 [영랑시집(永郞詩集)]에 수록되었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기다리는 정서’와 ‘잃어버린 설움’을 대응시키고 있다. ‘모란’은 그의 정신적 거처로서 이상(理想)의 실현에 강한 집념을 보여주는 대상이다. 그가 참고 기다리고 또 우는 것도 모란이 피고지는 까닭이다. ‘삼백 예순 날’은 모란이 피는 날과 그것이 피기를 기다리는 시간의 연속으로 보람있는 날이지만, 그 감정의 밑바닥에는 무엇을 잃은 상실감과 허무의식이 깔려있다. 향제(鄕第: 고향집)의 뜰에 정성들여 가꾼 수많은 모란과 그것들이 피기를 기다리는 ‘오월’, 시인이 기다리고 또 보내기를 꺼려하는 ‘봄’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모란이 피는 오월이 가면, 또 다시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봄’은 시인이 살던 시대상황으로 식민치하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실의와 좌절감에서 벗어나 그들의 보람과 이상이 꽃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봄’의 상징적 의미는 어느 하나로만 한정할 수는 없다.  보다 더 큰 이상과 가치의 세계로까지 확대되는 보람과 목적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시는 ‘슬픔’이나 ‘눈물’이 겉으로 노정되어 있지 않고, 그것들을 곱고 아름다운 율조에 의해 순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랑은 여기서 우리 말이 갖는 율조를 다듬고 깎은 시행의 정돈으로 서정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 이 시의 화자는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그가 기다리는 것은 모란이 만발하는 순간, 즉 봄이 절정에 이르는 때이다. 그러나 이 순간이 지나면 봄은 끝이 나고 모란의 지극한 아름다움 역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데, 화자의 슬픔이 여기에 자라잡고 있다. '모란'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모란이 개화하여 절정에 이르는 시간은 설렘과 기대를 동반하지만, 절정의 아름다움은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이후는 하강과 소멸의 과정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 지상의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속성인 것이다.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화자에게 봄의 찬란한 순간은 기쁨의 순간인 동시에 슬픔의 순간이기도 하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 ​김영랑의 시세계 ​ 영랑의 시는 순수 서정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많은 시가 의미를 크게 강조하거나 관념에 비중을 두기보다는 언어의 미적 구조와 음악성에 치중한다는 점에서는 순수시라고 볼 수 있으며, '내 마음'이라는 주관적 감정의 표출에 몰두한다는 점에서는 서정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순수 서정의 세계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상징시로서의 면모와 이미지즘의 측면이 드러나기도 하며, 또한 존재론적인 생의 인식이 발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에 비관적인 현실 인식과 부정적인 세계관이 일관되게 흐른다는 것은 중요한 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보다 적극적, 투쟁적으로 강조되어 나타나지 않을 뿐이며, 이것조차 언어 미학적인 섬세한 배려가 시의 표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시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시야말로 시의 의미와 가락, 그리고 형식이 유기적으로 잘 통합됨으로써 현실 인식이 미의식으로 탁월하게 상승된 예술시의 한 모델이 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가 당대 현실의 참상과 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영랑이 시종일관 언어 미학에 끈질긴 집념을 가진 것은 당대 일제의 포악한 파시즘에 시인이 대처할 수 있는 예술적 응전 방식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로 판단된다. 그가 보여 준 한국의 정통적 서정과 가락에 대한 뜨거운 애정, 향토적 정감의 소중함에 대한 재발견의 노력, 그리고 그에 따른 한국어의 시적 가치와 그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깊이 있는 신뢰와 실천적 탐구야말로 바람직한 시인의 사명 완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재홍, 한국현대시인연구)​​           *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 본명은 윤식(允植). 영랑은 아호. *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 *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 1919년 휘문의숙 재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 1945년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 1950년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自選)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과 고향 강진에 세워졌다.                             ​ * 김영랑 생가 방문기 '북은 소월, 남은 영랑'이라 하여 '진달래꽃'을 쓴 김소월(1902.8.6~1934.12.24) 시인과 더불어 우리 시문학사에 쌍벽을 이루는 시인 김영랑(金永郞, 1903.1.16~1950.9.29). 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시는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 시린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고 있다. 영랑생가의 안채 오른 편에 딸린 자그마한 마당에 들어서자 영랑이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란 시를 쓴 장독대가 놓여 있다. 그 장독대 주변에 보란 듯이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시는 1930년 어느 날 영랑이 누이가 장독을 열 때 단풍 진 감나무 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오-메 단풍 들것네'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쓴 시다. 지금은 장독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가 되어버린 장독대 뒤편에는 몸뚱이를 이리저리 뒤틀어 꼰 동백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그 중 가운데, 가지를 비스듬하게 장독대 쪽으로 엎드리고 있는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동백나무가 영랑이 우리나라 최고 춤꾼이었던 최승희와의 사랑을 부모님 반대로 이루지 못해 목을 매달고 죽으려 했다는 나무다.  "첫 부인과 사별한 영랑은 2년 뒤 18세 때 이화여전을 나와 하숙하던 강진보통학교 여교사마재경과 열애에 빠진다. 하지만 그 사랑은 영랑이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끝을 맺는다. 그 뒤 귀국한 영랑은 22세 되던 해 정지용 등과 만나며 최승일의 누이동생인 숙명여학교 2학년 최승희(13세)와 약 1년 동안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다." 김선태 교수는 "영랑은 1년 중 6개월을 서울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최승희와의 사랑도 양가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실을 맺지 못했다"며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는 이유로, 최승희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각각 반대했다"고 설명한다.  김 교수는 "이때 영랑이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발각되어 목숨을 건진다"며 "영랑은 그 다음 해 숙부의 중매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와 교편생활을 하던 김귀연과 재혼해 슬하에 7남3녀(2남인 김현복은 생후 1년 뒤 사망)를 두게 된다. 김귀연이 호적상 본부인이 된 셈"이라고 밝힌다. 김 교수는 "영랑은 사실 일본 유학 때 음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딴따라' 운운하는 부모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영문학을 했다. 그의 시에 음악성이 깔린 것도 이 때문"이라며, "부유한 지주집에서 태어난 영랑은 고향에서 친구들과 중등학교(금릉중학교)을 설립하기도 하고,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 사랑채로 가는 마당 한 귀퉁이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그 모란이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며 바싹 마른 열매를 을씨년스럽게 매달고 있다. 영랑의 시혼이 담긴 모란 열매를 오래 바라보며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읊다가 오른쪽에 있는 사랑채로 향한다. 사랑채 안에는 마네킹이 된 영랑이 지금도 시를 쓰고 있다.   (발췌)(이종찬/기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강 물                                                     잠 자리 서뤄서 일어났소 꿈이 고웁지 못해 눈을 떳소 벼개에 차단히 눈물은 젖었는듸 흐르다못해 한방울 애끈히 고이었소 꿈에 본 강물이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언덕을 혼자서 지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강물은 철 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꿈도 떠실고 갔소 꿈이 아닌 생시 가진 설움도 작고 강물은 떠실고 갔소.       5월 아침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즈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마는 이 아침 새 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을 흔드오 자랑찬 새 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버렸대서야 불혹이 자랑이 아니 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밀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인가 보오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이고 내사 불혹을 자랑턴 사람.       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지반추억(地畔追億)                                   깊은 겨울 햇빛이 따사한 날 큰 못가의 하마 잊었던 두던길을 사뿐 거닐어가다 무심코 주저앉다 구을다 남어 한 곳에 쏘복히 쌓인 낙엽 그 위에 주저앉다 살르 빠시식 어쩌면 내가 이리 짖궂은고 내 몸 푸를 내가 느끼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어지다? 못물은 치위에도 달른다 얼지도 않는 날세 낙엽이 수없이 묻힌 검은 뻘 흙이랑 더러 들어나는 물부피도 많이 줄었다 흐르질 않더라도 가는 물결이 금 지거늘 이 못물 왜 이럴고 이게 바로 그 죽음의 물일가 그저 고요하다 뻘흙속엔 지렁이 하나도 꿈틀거리지않어? 뽀글하지도 않어 그저 고요하다 그 물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 하나도 없어? 햇빛이 따사롭기야 나는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꼈는데. 여나문해? 그때는 봄날이러라 바로 이 못가이러라 그이와 단 둘이 흰 모시 진설 두르고 푸르른 이끼도 행여 밟을세라 돌 위에 앉고 부풀은 봄물결 위에 떠노는 백조를 희롱하여 아즉 청춘을 서로 좋아하였었거니 아! 나는 이지음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끼는데.       발 짓                                                     건아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듸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에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어놓은 바람이어니 포근히 옮겨 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다리 날아본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발표 당시의 제목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오월(五月)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춘향(春香)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두견(杜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千)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구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 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붐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듸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 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 소리 쇤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승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지고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山)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북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 - 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 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물소리                                                    바람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 셈 소리 없든 못할소냐   새벽 잠결에 언뜻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뜻 씻기우느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으라 나는 그윽히 저 창공의 銀河萬年을 헤아려보노니         수풀 아래 작은 샘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보는 수풀 속의 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을 쏟아져 동이 가를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얼켜져 잠긴 구름 손결이 온 별나라 휘흔들어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녁 그대 종종걸음 훤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워도 그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세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밤 내 혼자 나려가볼꺼나 나려가볼꺼나       사랑은 하늘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숲향기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내 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미움이란 말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김영랑 金永郞 (1903. 1. 16 - 1950)                                                              본명은 윤식(允植)이다.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세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    [작품 및 경향]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 등 6편과 7수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작활동 시작.  초기 -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 회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비애의식(悲哀意識)은 영탄이나 감상(感傷)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정감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1940년 전후 - , , ,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남. 이러한 죽음의식은 초기시에서와 같이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민족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해방 후- ,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시집으로는 과 자선시집 이 있다.     [김영랑論]   *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준 김영랑   김영랑(1903-1950)의 본명은 김윤식으로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강진 보통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휘문 의숙을 다니다가 3.1운동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휘문 의숙을 중퇴한 김영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강진의 자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의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박용철은 오랜 숙의 끝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 창간호를 1930년에 발간하게 된다.   1930년은 김영랑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해 3월에 간행된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시단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20편이 넘는 작품을 1930년 두 달 동안에 한꺼번에 발표했던 것이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 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경향시 위주였던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시에 대한 인식 변화시켜 김영랑의 시에는 '내 마음'이라는 어휘가 유달리 많이 보이는데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내면의 순결성을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은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에 제시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은빛의 강물, [제야]에 제시된 맑은 샘물과 밤의 심상, [가늘한 내음]에 제시된 보랏빛 노을의 고요한 아름다움, [내 마음 아실 이]에 나오는 향맑은 옥돌의 심상 등은 모두 마음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예들이다.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영랑 서정시의 출발은 바로 이 순결성에 있었다. 이 순결성이 그의 시를 아름다운 해조와 서정주의의 극치로 몰아간 것이다. 그 순결한 마음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대응되므로 분명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순결성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랑은 자연의 맑고 깨끗한 정경을 통해 마음의 순결성을 보여 주었는데, 자연의 정결한 모습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황홀감을 갖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본래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의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이 가져다주는 극치의 아름다움은 그의 정신을 몽롱케 할 정도로 황홀감을 안겨 준다. 저녁놀이 물드는 보랏빛 하늘, 밤 깊이 흐르는 물소리와 찬란한 별떨기, 은색으로 황홀히 빛나는 달빛, 맑은 가을날의 고요한 정경, 이 모든 것이 자연미의 한 정점을 보인 것이어서 시인은 그 황홀감에 가슴 설레며 몸둘 바 몰라 한다.   그런데 이 황홀한 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모란이 한번 흐드러지게 피어 그 찬란한 빛을 불태웠다가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쉽게 소멸하는지 모른다. 자연의 순결성도 현실 세계의 혼탁함 때문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의 황홀한 아름다움 또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영랑의 자연 인식은 비극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 비극성이 그의 심혼을 긴장시키고 그의 서정시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모란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비탄과 상실의 감정이 남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뚝뚝'이라는 시어를 통해 모란이 무정히 사라져 버리는 정경을 소리로 나타내는가 하면, '떨어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버리고'라는 시행을 통해 처절한 상실의 순간과 상실 뒤에 오는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삼백예순 날을 계속 울고 지낸다는 과정적 표현을 배치하여 그리움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한편으로 영랑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시인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적 장단과 호응을 이루며 하나의 정경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오롯한 미의 원광을 두르게 된다. 가령 영랑의 [오월] 같은 시는 봄 들판의 약동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인데 시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여 심미감을 높이고 운율의 변화를 통하여 흥겨운 율동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정적 표현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우리 시의 역사에서 귀중히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표현 상의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 맑고 깨끗한 자연의 정경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 표현   김영랑의 시에서 인생과 사회에 대한 발언이 중심을 이룬 작품은 아주 적다. 현실에 대한 반응을 보인 예로는 [거문고]라든가, [독을 차고], [우감(偶感)], [춘향]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김영랑의 시가 우리에게 어떤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오월]처럼 자연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 작품은 그런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만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한 자연에 대한 상상도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비유와 표현의 구사도 언어사용의 폭을 넓힘으로써 실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와 절묘한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영랑의 시는 그 나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내 마음을 아실 이 1) 작품 선정의 취지와 지도 방법  이 시는 여성적인 어조로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여성적 어조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우리말 시어와 어우러지면서 섬세한 정서를 자아내는 한편 시의 음악성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부드럽고 다양한 어미와 압축된 시어를 사용하여 서정적 운율을 형성하고 있는 이 시를 학습함으로써 학생들은 운율을 형성하는 자질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를 지도할 때는. 학생들 스스로가 시의 운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낭송 테이프를 미리 준비하거나 시의 분위기에 맞는 배경 음악을 준비하고 학생들이 음악에 맞춰 시를 낭송하도록 하여 우리말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지도한다. 2) 작품 지도안 1. 내용 구성 제재 : 내 마음 주제 :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출전 : (1931)  1연 : ‘내 마음을 아실 이가 있다면'이라는 상황을 가정함.    -      가정제시  2연 : 내 마음을 아실 이에게 내 마음을 내어 드리겠다는 다짐.  -  다짐  3연 :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까 봐 두려움.         -                    회의적 물음 제기  4연 : 내 마음을 아실 이는 없다는 단정을 내림.       -                   그리움 2. 이해와 활동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추구한 서정성과 음악성을 ‘그리움’이라는 전통적 정서와 결합시킴으로써 맑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우리말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은 여성적 정조(情調)와 어울려 임을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언어적 장치를 이루고 있다. 모음과 유음 계통의 시어가 음악성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으며,‘이슬 같은’의 영롱한 이미지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의 열정적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적 화자의 내적 독백으로 전개되는 이 시는 스스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면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1연에서는‘내 마음을 아실 이가 있다면’이라는 가정의 이면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임을 찾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2연에서는‘티끌’, '눈물', '보람' 등의 시어를 사용해 내 마음을 아실 이에게 내어 드릴 ‘내 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3연에서는 그러한 '내 마음'을 알아줄 임을 만나고 싶은 충동과 함께 그러한 임을 꿈에서나마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회의적 물음을 제기한다. 4연에서 '향 맑은 옥돌', ‘불'의 이미지는 다시 시적 화자의 사랑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이 시는 꿈과 현실, 소망과 좌절의 갈등구조로 되어 있으며, 가정과 자문자답(自問自答)은 그러한 갈등 구조를 표현하는 시적 장치가 되고 있다. 어구풀이 : 날 같이 : ‘나 같이'의 방언.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 : 마음 속에 나타나 자신을 깨우치는 조그마한 잘못이나 가책.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뉘우침의 눈물.   푸른 밤 ~ 같은 보람 : 맑은 날 밤에 곱게 내려앉는 이슬처럼 아름다운 삶의 보람.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 맑고 순수한 사랑이 변함 없고 은근하게 타오름을 뜻한다. '내 마음을 아실 이' 3. 작가 사전 김영랑(金永郞, 1903~1950) : 시인. 전남 강진(康津) 출생. 부유한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다. 1930년 박용철·정지용 등과 함께 동인으로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섬세하면서도 깨끗한 언어 감각과 예민한 감수성, 잘 다듬어진 시어로 고독한 내면 세계를 노래한 그의 시는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집에 , 등이 있다. 3) 자료실 돋보기 1. 김영랑과 '시문학파'  김영랑은 1930년대 일제의 문화적 탄압이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모국어의 가치를 보존하고 다듬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인 1930년대의 시단은 많은 시인들이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찾아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던 시기로, 그는 섬세한 서정을 세련된 언어와 율동적인 음조로 표현하였다. 그는 전라도 지방의 서정을 수용하면서 토속어와 의성어, 의태어 및 부사어와 사투리를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가능성을 넓혔다.  1930년 박용철에 의해 창간된 순수시 동인지 은 순수시 운동의 모태로, 3호까지 간행되었으며 , 으로 계승되었다. 김영랑은 이 에 시를 발표하면서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파’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들은 우리말을 조탁(彫琢)하여 시어의 음악성을 살리고 시적 정서와 표현 기교를 섬세하게 가다듬어 시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시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와 사회 현실을 외면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2. 더 찾을 거리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작품 해제 : 이 시는 '봄' 과 그 봄의 막바지에 피어나는 '모란'을 결합시켜 모란이 피어 있는 시간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시인은 봄과 모란을 함께 잃게 되는 순간을 절정의 순간으로 포착하고 있으며, 따라서 봄은 찬란함의 세계인 동시에 슬픔의 세계가 된다. 이러한 역설적 인식이 '찬란한 슬픔의 봄'으로 축약되어 제시되어 있다.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작품 해제 : 시의 각 연 1행과 2행은 모두 '-같이'로, 마지막 행은 '-고 싶다'로 끝나고 있다. 이 시는 하늘을 우러르고 싶고 바라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소박한 소망은 역설적으로 시적 화자가 처해 있는 현실이 불행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4) 참고 자료  김영랑의 시가 발휘한 음악성의 탁월함은 다양한 사건의 반복 현상이 시의 음악성을 살리는데 얼마나 효과적인 것인지를 시인이 인식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리듬이란 본래 등시성을 가진 사건의 반복적 재현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영랑의 시에는 바로 이와 같은 사건의 반복이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김영랑의 시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 단위의 반복으로 말미암아 음악성이 고조된다. 첫째, 음소 단위의 반복적 재현, 둘째, 음절 단위의 반복적 재현, 셋째, 단어 혹은 어절 단위의 반복적 재현, 넷째, 문장 구조의 반복적 재현, 다섯째, 시행과 연 단위의 반복적 재현, 여섯째, 다양한 음수의 반복적 재현 등이 그것이다.  - 정효구, ‘1930년대 순수 서정시 운동의 시대적 의미’, 김은전 외, (시와 시학사, 1991) 참고문헌   김은전 외, (시와 시학사, 1991) 김학동, (민음사, 1977)
322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김광균 - 外人村 댓글:  조회:2914  추천:0  2015-12-11
.서울 혜화역 대학로 흥사단 앞     @@시비에 오자가 보인다.ㅡ 시비의 마지막련 에서 이 아니라 원작의 으로 돼야... 시비를 세움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원작을 존중해야... ================================================= 김광균 시인. 개성(開城) 출생. 개성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무공장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시를 썼다. 1930년 《동아일보》에 시 《야경차(夜警車)》를 발표한 뒤 36년 <시인부락> 동인이 되었다. 다음해 <자오선(子午線)> 동인으로 시 《대화》를 발표하였으며,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金起林)의 영향을 받아 회화적 시론을 실천하였다. 39년에는 제 1 시집 《와사등(瓦斯燈)》을 펴냈고, 47년 제 2 시집으로 《기항지(寄港地)》를 출간하였다. 그의 시는 이미지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드물게 감상적 요소가 포함되어 소시민의 따뜻한 서정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도시적 소재와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이미지의 공간적인 조형(造形)을 시도한 점에서 주목받았다. 6·25발발 뒤 실업계에 투신, 문단과는 거의 인연을 끊었으며 제 2 시집 이후 문단 고별 시집 《황혼가(黃昏歌, 1969)》를 출간했다. 시집으로는 《추풍귀우(秋風鬼雨)》가 있고 문집(文集)으로는 《와우산(臥牛山)》 등이 있다.     은수저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 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김광균1946 (1) 주제 : 아이를 잃은 슬픔과 아버지의 정   (2) 김광균(1914-1993)경기 개성. 모더니즘 시인. 온건하고 차분한 회화적인 이미지에 치중함. 1930년대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시의 전기였던 주지시 운동을 몸소 실천한 시인.‘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 ‘연금사와 같이 모든 무형적(無形的)인 것을 일정한 형태로 바꿔 놓고야 만족하는 시인’, ‘청각과 시각 그리고 직관의 마술적 배합을 꾀하는 시인’이라고 평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김광균은 회화적 수법을 매우 세련된 감각으로 작품에 구현해 모더니즘을 정착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시집으로 (1939), (1947) 등이 있다.   (3) 감정의 절제 : 한 행이 짧은 한 문장 형식으로 표현함. (4) 어조 : 냉정하고 차분한 어조 (5) ‘눈물’이라는 단어가 한 번 나오지만 나머지는 슬픔을 직접 지칭하는 말을 최대한 아낌으로써 슬픔을 객관화 (6) 은수저 - 죽은 아이 (7) 방속(현세, 이승의 공간, 삶) 먼 들길(저승, 죽음..)   (8) 주제상 유사한 작품 : 박목월‘하관’, 정지용‘유리창’, 김현승‘눈물’,   이광수‘비둘기’, 이성교 ‘밤비’, 유치환‘삼 년 후’   은 아우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나머지 작품은 죽은 자식에 대한 슬픔을 그리고 있다. 은 그리움이 가장 절실하게 표현 는 한 행이 한 문장의 호흡으로 이루어져 냉정하고 차분한 어조은 슬픔의 감정을 객관적인 어조로 침착하게 표현 은 슬픔을 종교적 차원에서 승화시키고 있어 네 작품 중 슬픔의 정조가 가장 약함.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1938) (1) 주제 :  현대인의 고독감과 우수, 불안 의식   (2) 김광균 : 김기림, 정지용과 더불어 30년대 모더니즘 시를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직접적으로는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시의 음악성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김기림의 말처럼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회화적인 시를 즐겨쓴 이미지즘(imagism) 계열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도시적 소재를 바탕으로 공감각적 이미지나 강한 색채감,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 등의 기법을 시에 차용(借用)했으며, 특히 사물의 한계를 넘어 관념이나 심리의 추상적 차원까지도 시각화하였다. 그의 시에는 기계 문명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감과 삶의 우수와 같은 소시민적 정서가 짙게 깃들여 있다. (3)*1930년대 주지시  [최재서(이론 도입) → 김기림(작품 창작) → 김광균(결실)]   (4) 주지시 심상 : 시각적, 촉각적, 공감각적 이미지(1연/시각적, 2연/시각적, 3연/공감각적) 어조 : 비정한 현대 도시 문명 속에서 방향 의식을 상실한 지식인의 고독한 어조 구성 :    1연   현대인의 무정향성(無定向性) - 방향 감각을 잃은 현대인    2연   무정향성의 근거 - 개체의 문제가 시대적 상황으로    3연   어둠의 정서 - 개체의 문제로 집약    4연   도시적 삶의 중압감과 비애    5연   현대인의 당면 문제   (5)  ㉠ 와사등 - '가스'의 일본식 음차표기입니다. ㉡ 차단한(차다+ㄴ) - 차디찬, 아련히 비치는 등불의 모습 ㉢ 등불 = 신호(은유),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사물이다. 등불을 보고 화자는 자신의 어두운 내면에서 떠나라는 신호로 보고 있다. ㉤ 슬픈 신호 - 그러나 갈 곳을 모르는 화자에게 떠나라는 그 신호는 슬플 뿐..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화자(지식인,현대인)의 슬픈 심정이 드러난다. ㉣ 호올로 - 고독감/ 어딜 가라는 - 방황, 지향점이 없음 ㉥ 해가 날개를 접고 --> 황혼(저녁 무렵), 도시에 어둠이 깔리는 것을 해가 날개를 접는다고 표현함, 감각적이고 회화적인 표현들... ㉦ 늘어선 고층 빌딩들(원)은 묘석(보조) 같고 - 직유법          현대 도시 문명----> 묘지의 비석, 죽음과 종말의 이미지 ㉧ 야경(원)은           잡초(보조)인 양 - 직유법   현대 도시 문명------> 무질서함과 헝클어진 이미지 ㉦㉧ 현대인의 고독감과 비애가 사회적인, 시대적인 문제임을 드러냄   ㉨ 어둠(시각)이 피부에 스미다(촉각) -공감각적 이미지(시각의 촉각화) ㉩ 눈물겹고나, 비애 - 삶의 비애감 ㉪ 그림자 - 고독하고 쓸쓸한 모습의 현대인 ㉫ 슬픈 신호기(보조관념) - 원관념(등불)   (6)현대문명에서 느끼는 화자의 심정을 나타낸 말-호올로(고독감), 비애 (7)‘떠남’의 의미는? 현대인의 불안 의식 (8) 수미쌍관         외인촌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馬車)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電信柱)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少女)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1935)     (1) 주제 : 현대인(도시인)의 고독과 우수 제재 : 외인촌의 풍경 (2)주지시 성격 : 회화적. 감각적. 주지적. 이국적 표현 : 이국적 정서. 도시적 우수 심상 : 회화적. 시각적. 공감각적 구성 : 시간의 흐름(저녁→밤→아침)     1연 (저녁) 산협촌―원경(遠景)  2, 3연 (저녁)) 작은 집들과 시냇물, 화원지의 텅 빈 풍경―근경(近景)     4연 (밤) 외인 묘지의 밤 정경   5,6연 (아침) 성교당의 종 소리 (3) 주지주의 시로서 회화적 요소를 중시하였다. 수채로 된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에서 도시인의 고독과 우수를 느낄 수 있다. 외인촌의 이국적인 정취를 사실적으로 그려내 낯설고 쓸쓸한 세계를 홀로 떠도는 이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4)  외인촌 - 외국인이 사는 마을, 이국적인 정서, 화자는 외인촌의 풍경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5) 이국적인 시어들 파--란 역등, 마차, 전신주, 화원지, 꽃다발, 외인묘지, 시계, 고탑, 성교당, 종소리 (6) 시간의 흐름 : 저녁 무렵 --> 밤 --> 아침 (7) 저녁 풍경 : 마차 전신주 위엔 노을에 젖은 구름이 걸려 있다. 바람이 불고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다.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시든 꽃다발이 있다. (8) 밤 풍경 :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에 가느다란 별빛이 내린다. (9) 아침 풍경 :빈 하늘에 걸려 있는 마을의 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고, 낡은 교회당 지붕 위에선 종소리가 울리고 있다. (10) 화의 심정은? 외인촌의 적막하고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서 고독감을 느낀다. 그 고독감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11) 소리마저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곳을 찾으면?(공감각적 심상) ①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 ② 분수처럼 흩어지는 종소리         ㉠추일서정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1940)   (1) 주제 : 가을날의 풍경과 서정 (2) 한시 형태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조 ㉠추일서정 : 선경 - 가을날의 풍경(秋日)/후정 - 고독감(抒情) (3) 화자는 쓸쓸한 가을날의 풍경 속에 외로이 방황하는 어떤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4) 이 시의 지배적 정서와 그 정서가 행위로 구체화된 시어 - 고독한, 황량한 ---> 돌팔매 (5) ㉡ 낙엽(원관념)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보조관념) - 은유법 : 여름의 화려함과 활기를 잃어버리고 땅에 떨어진 낙엽의 쓸쓸한 모습을  망명 정부의 가치가 없어진 지폐 조각으로 비유   ㉢ 도룬 시(폴란드의 도시 이름)의 가을 하늘 - 황폐해진 도시의 가을같다는 표현   ㉣ 길(원)은 구겨진 넥타이(보조)처럼 - 직유법 : 구불구불한 시골길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넥타이의 형상을 빌어 멀어질수록 좁게 보이는 길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 일광(日光)(원)의 폭포(보조) - 은유 : 눈부시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어려 아득히 이어져 있는 시골길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 ㉥ ‘사라지고’의 주체는? 길. 길이 가을 햇살 속으로 사라지고(활유)   ㉦ 담배 연기(보조)를 내뿜으며 -(원관념)기차의 연기 - 은유 : '조그만 담배 연기'는 기관차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사물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재치와 감각이 돋보인 구절이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 근육과 뼈대)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의 모습 = 나목(裸木)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 공장 - 근대문명의 상징, 날카롭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냄.  '흰 이빨'의 이미지 때문에 공장 지붕은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위협하는 야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철책(鐵柵 :쇠살로 만든 울타리) ㉪셀로판지 구름 - 옅은 구름 : 이국적(異國的)이고 근대적인 감수성을 자극하는 시어-불길한 분위기   ㉫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 공감각적 심상. (청각의 촉각화)   ㉬ 돌팔매 하나 :화자의 심경을 행위로 드러냄. 무기력하고 하릴없어 돌팔매나 던지는 자신을 그려내고 있다.   ㉭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 던진 돌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           설야(雪夜)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야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1938) (1) 주제 : 눈 오는 밤의 정경과 그리움. 눈 내리는 밤의 애상 (2) 서정시 (김광균의 ‘주지시’와 구별하자) (3)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회화적. 애상적  심상 : 시각적. 공감각적  표현 : 현재법을 사용하여 시적 긴장감을 얻고 있음   (4) ‘눈’의 보조관념 :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잃어버린 한 조각, 차단한 의상   (5) ‘눈’의 의미는? 화자의 추억, 그리움의 매개체   (6) 화자의 심리 변화 : 그리움 -> 서글픔 -> 가슴이 메여 옴-> 추억, 설렘 ->슬픔   (7)  ㉠ 그리운 소식(보조)이 소리 없이 흩날리다...(원)-눈발:은유 ㉡ 호롱불이 꺼져가는 모습 -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 ㉢ 흰 눈(원)은 옛 자취(보조)인 양 : 직유 ㉣ 허공같은 빈 마음에 켜진 등불 - 추억을 회상, 그리움이 일어남 ㉤ 화자는 내리는 눈을 감상하며 추억에 잠기기 위해 뜰로 나감 ㉥ 머언 곳 - 추억의 여인은 화자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음... 실제의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로 봄. 여인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 ㉦ 여인의 옷 벗는 소리(보조) : 원관념은 ‘눈이 내리는 소리’ ㉧ 잃어진 추억의 조각(보조) : 원관념은 ‘눈’ ㉨ 추회, 설렘 - 지난 일에 대한 뉘우침, 안타까움으로 설렘 ㉩ 호올로 - 화자의 처지, 외로움 ㉪ 차단한 - 차디찬, 여인의 냉대 ‘눈’에서 느껴지는 차가움과 화자에 대한 여인의 냉대 ㉫ 내 슬픔 - 이루지 못한 사랑  
321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李箱 - 오감도 / 거울 댓글:  조회:5306  추천:1  2015-12-11
      이상 (본명: 김해경) 1910~1937 대표작: 오감도, 날개, 거울 등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요절한 시인 겸 소설가 이상(김해경·1910~1937) 탄생 100주년을 기념,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전시회 마련.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은 ‘李箱의 房(이상의 방)’ 기념전을 열고 이상의 육필원고와 사진들을 전시. 이상 출생일인 9월23일에 맞췄다.  한글 원고인 ‘오감도’ 4·5·6호를 비롯해 ‘이상한 가역 반응’, ‘파편의 경치’, ‘모조진주제조법’ 등의 원고 27점과 가족사진 4매를 포함, 보성고 시절 사진 1매, 경성공고 시절 사진 31매 등 사진 56점을 전시한다. 보성고, 경성공고 때의 사진이 상당수이지만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 등 그 동안 보기 힘들었던 사진들도 눈에 띈다.  이 자료는 대부분 이어령(76) 전 문화부 장관이 수집한 것들이다. 이 전 장관은 1960년대 뒷골목 고물상까지 뒤져가며 이상의 자료를 찾아냈다고 한다. 전시를 여는 영인문학관 강인숙(77) 관장은 이 전 장관의 부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전시에는 생존 문인들과 화가가 그린 이상의 초상화와 후학들의 헌사를 모은 코너도 준비됐다.  특히, 이상의 문학비에 얽힌 부인 변동림(1916~2004·수필가 미술평론가)과의 사연을 소개해 주목된다. 불과 몇 달밖에 이상과 살지 못한 변동림은 이상의 사후 반세기가 지난 후 이상의 문학을 향한 오마주를 돌에 새겼다. 변동림은 이상의 아내였다가 나중에 화가 김환기(1913~1974)와 재혼한 이화여전 출신 자유 연애주의자다.  강 관장은 “한일합방이 된 후에 태어난 이상은 식민지 교육을 받고 자란 첫 세대”라며 “일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불령선인’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혔다 죽은 그의 삶은 1930년대 식민지 지식인의 비극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상이 상징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며 “이상은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고 평했다.  =========================================================   '천재 시인 이상, 그는 누구인가?'   27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 "한국 현대시 최고의 실험적 모더니스트이자 한국 시사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상은 어두운 식민지 시대에 돌출한 모던보이이며, 그의 등장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 사상 최고의 스캔들로 평가 받습니다. 알쏭달쏭한 아라비아숫자와 기하학 기호의 난무, 건축과 의학전문용어의 남용, 주문과도 같은 해독불능의 구문으로 이루어진 시들. 자의식 과잉의 인물, 도저한 퇴폐적 소재 차용, 띄어쓰기 거부, 위트와 패러독스로 점철된 국한문 혼용 소설들. 그의 모더니즘 문학과 비일상적 기행은 이 스캔들의 원소를 이룹니다.   생전의 이상에게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근대파 시인'이라고 갈채를 보낸 바 있는 김기림은 그의 죽음에 대해 "제 스스로 혈관을 따서 를 쓴 이상의 죽음이 한국문학을 50년 후퇴시켰다."며 크게 슬퍼하기도 했죠.   이상은 20세기 한국 문학사에서 명멸한 숱한 인물 가운데 가장 문제적 인물이며, 그의 연작시 는 한국 현대 문학사 1백년 동안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적 작품입니다.         그럼, 이상의 작품 중에서 그의 대표작이자 국어시간에 한번 쯤은 들어보셨을 오감도(시제1호)를 오랜만에 한번 보고 넘어갈게요. :)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이상 오감도 (시제1호)       烏瞰圖 詩第一號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혓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오감도 시제1호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人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는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30회를 예정으로 연재된 시인데요, 독자들의 강한 반발로 15회만에 중단되었습니다. 작품이 너무 이상하다는 이유로 '조선중앙일보 신문사를 폭탄테러 하겠다'는 항의까지 나왔다고 해요... =_=;;   그만큼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힘들고 난해한 시였던 는 현대인의 불안감,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의 암울함 등을 파격적으로 그려낸 초현실주의 시로, 위에서 소개한 역시 억눌린 실존적 불안을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위 시에서는 13이라는 숫자를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상이 생각했던 의미를 정확히 알긴 힘들지만     1) '13일의 금요일'과 같은 불길한 숫자의 상징   2) 당시 우리나라가 13도(十三道)였다는 것으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   3)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예수와 12인의 제자(1+12=13)를 상징   4) 시간적 개념에서 시계 시간(12시)의 부정, 시계 시간이 끝난 탈옥의 시간   등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이상의 친구 구본웅이 그려준 이상 초상화         김연수의 은 이상을 가장 심층적이면서 흥미롭게 다룬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헷갈리실 수도 있어요. (저도 그랬으니...-0-;) 이 부분은 책 마지막에 나오는 해설 '또다른 원본을 찾아서 - 김성수(문학평론가)'를 읽어보시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 까 싶습니다. :)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가'에 대한 기준은 이 소설에서 다루는 이야기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우연과 운명, 믿음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는 작품이었구요. :)           천재시인 족두리 쓰다...     천재 검색하기" style="color: rgb(51, 51, 51); text-decoration: none;" target="_blank" title="">시인 이상(1910∼1937)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한눈에 보여주는 다수의 미공개 사진이 공개됐다. 오는 10일 '2010 이상의 방(房)-육필원고·사진전'을 개막하는 검색하기">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은 2일 문학평론가 검색하기">이어령씨가 평생 수집한 이상의 미공개 사진과 이상의 부인이었던 변동림 여사(1916∼2004)와 생전에 주고받은 편지 등 한국문학사의 공백을 메울 희귀 자료를 전격 공개했다. 강인숙 관장은 이어령씨의 부인이다.  공개된 사진들은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 여사를 비롯, 보성고등학교와 경성공고 시절의 이상을 망라하고 있다. 촬영 장소도 파고다공원과 남산 약수터, 세검정 옛터 등으로 다양해 마치 이상의 감춰진 앨범을 보는 듯하다. 사진들 가운데는 이상이 1934년 친구 김해림의 혼인식에 들러리로 참석한 모습과 1924년 경성공고 2학년 때 남한산성으로 원족을 간 한국 학생들만의 야유회, 그리고 경성공고 교련 시간에 장총을 들고 있는 모습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경성공고 재학 당시 연극반으로 활동했던 이상은 족두리를 쓴 여인의 모습으로 동창생 오석환(한국희관사장)과 원용석(전 검색하기">경제기획원 장관) 사이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강 관장은 "이어령 선생은 1960년대부터 서지학자를 직접 고용해 뒷골목 고물상까지 뒤지게 해서 이상의 육필 원고들을 수집했으며 이번에 공개하는 사진들은 대부분 원용석씨의 앨범에서 찾아낸 것으로 이미 고증을 거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령씨는 수집 과정에서 이상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12월12일'을 발굴, 공개하기도 했다.  전시회에는 뉴욕에서 일시 귀국했던 이상의 전 부인 변동림 여사(후일 이름을 김향안으로 개명하고 검색하기">김환기 화백과 재혼)가 1987년 이어령에게 보낸 편지도 공개. 변 여사는 같은 해 11월 14일자 편지에서 "이어령 선생. 동봉하는 사진들 보시면 한용진 조각가의 작품을 짐작하실 줄 압니다. 그리고 에스키스를 보시면 문학비가 어떻게 조형될 것을 짐작하실 줄 믿습니다. 대석 사면 중 전면에 '문학비', 후면 또는 양 측면에 선생의 생각하시는 '이상' 글들을 넣어주십시오. 가벼운 마음으로 떠납니다"라고 적었다.  강 관장은 "이 편지는 향안 여사가 이어령 선생에게 이상의 문학비에 대한 것을 부탁하기 위해 쓴 것으로 디자인과 레이아웃에 대한 것까지 직접 챙겼으면서도 그녀는 문학비 제막식에 나타나지 않았다"면서 "(결혼 후 몇 달 만에 도쿄로 떠난) 이상에 대한 노여움과 그의 문학에 대한 평가를 구분할 줄 알았던 것처럼 환기의 아내로서의 설 자리도 깔끔하게 지키면서 이 일을 마무리 했다"고 말했다. 조각가 한용진씨는 1986년 6월 변 여사의 주문대로 문학비를 설계했으며 이에 따라 1987년 12월 높이 3m50㎝, 둘레 앞 1m, 둘레 옆 2m50㎝의 크기의 문학비가 서울 방이동 보성고교 교정에 세워졌다.  전시회에는 1980년대 뉴욕에서 2년 동안 체류했던 문정희 시인이 직접 김향안 여사를 만난 짧은 소회도 공개. 문씨는 "그해 여름, 뉴욕 소호에서 만난 그녀는 차갑고 도도했다. 그녀는 오래 전에 살았다는 시떼섬의 추억과 퐁피두의 전시를 꿰뚫고 있었다. '사람의 몸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있는 줄 몰랐어.' 영어와 프랑스어가 능한 그녀의 한국말은 더 아름다웠다"고 적었다.  강 관장은 "이상은 카프카처럼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 너무나 짧게 살다가 목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난해한 문학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아야만 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은 지금 한국문학사에서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정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출처] 의 천재시인 이상과 김연수 소설 ebook|작성자 리디북스         烏瞰圖 오감도 시제 1호 -   13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13인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第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의 아이가 무섭다고 그리오. 第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2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 아이가 무섭다고 그리오. 第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13人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13人의 아이는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中에1人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 1인의 아이가 무서운 아이라도 좋소 그中에2人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 2인의 아이가 무서운 아이라도 좋소. 그中에2人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 2인의 아이가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소. 그中에1人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 1人의 아이가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人의아해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13인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오감도1" 해설      ///김영범  "오감도1"은 구어체시이다.  영국 시인들이 수백 년 전부터 시는 구어체로 써야 한다고 했는데, "오감도1" 바로 그런 구어체시란 말이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 교육에서는 추상적 상징적 시라 왜곡 하는가.  장르적 특성을 규명 할 줄 몰라서 그런 거라 사료 되다.  모든 문학 장르에는 장르 고유 특성이 있고, 시의 가장 두드러진 장르적 특성은 함축적 내포적 문장 속에 형상화 된 운율이 내재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시라는 문장에서는 반드시 운율의 정체가 확인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운율의 정체란?  현재 대한민국 교육에서는 운율과 음률(리듬)을 동일한 것이라 하나, 운율의 정체를 파악해 보면 운율과 음률(리듬)은 하등 연관성조차도 있을 수 없다.  운율의 정체는 함축적 내포적 문장 속에 형상화 된 운율이 내재되어 있어야 된다는 논리상, 시 문장 속에 형상화 되어 내재된 의미 이기 때문이다.  함축이란 이고,  내포란 이다.  그러므로 함축적 내포적 문장이란 [속에 지니어 드러나지 않는 한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성질이 전체가 되는 속성]이 되는 문장이라는 뜻이 된다.  유명 시로 예를 든다면 김영랑님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이라는 한 개념이 [속에 지니어 드러나지 않는 한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성질이 문장 전체의 통일성에 부합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쉽게 설명하면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은, 실제 모란과 상관없는 시어로, 주권이 매개물화 된 것이다.  즉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함축적 내포적 의미는 "주권을 찾을 때까지는"는 이란 말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 상황에 맞게 시인이 인위적으로 형상화해 내재 시킨 운율적 의미는 주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함축적 내포적 문장 속에 형상화된 운율이 내재 되어 있어야 한다는 장르적 특성을 충족시킨 문장으로, 진정 시인의 경지에 도달한 시임이 증명 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나의 봄을 기다릴 테요/주권을 찾을 때까지는 나는 나의 봄을 기다릴 테요/이와 같이 '모란'을 모두 '주권'을 바꾸어 보면 내재된 형상화 되어 내재된 운율적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모란이 피기까지는" 역시 영국 시인들이 말하는 구어체詩이다.  영국 시인들이 말하는 구어체시란 한자로 具語體詩이기 때문이다. 즉 영국 시인들이 말하는 구어체시란 뜻은, 시와 운율의 독특한 관계상 형상화 되어 내재된 운율적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뜻에서 시는 구어체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시와 운율의 관계는 서로 떨어져서는 존립조차 불가한 관계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학문적 요점을 정리하면  주제 : 조국의 해방(독립)을 갈구함.  내재율 : 존재의 괴리감을 형상화함.  율격 : 의식의 생리적 발현을 고찰.  성격 : 염원시류.  운율적 갈래 : 운율시.  "오감도1" 역시 구어체 시라 하는 이유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처럼 함축적 내포적 문장 속에 형상화 된 운율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장르적 특성을 충족시키고 있어서다.  "오감도1"을 정확히 분석하려면 먼저 '까마귀 오烏'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시에서는 까마귀 오가 아니라 '탄식 할 오'자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오감도란 제목은 일제 감점기 시절의 살벌한 풍경을 토대로 탄생된 것이라서, 오감도란 곧 탄식을 굽어 본다는 의미란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시인의 눈에 비친 강점기 세상을 탄식하며 풍자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에 구어체시라는 것이다.  아해라는 한자 표기 역시 '아이 아'가 아니라 '굶주릴 아' '종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아해란 곧 굶주린 종을 뜻한다는 것이다.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13인의굶주린종들이도로를질주하오/가 된다는 것으로, 운율적 의미는 독립(해방)에 굶주린 조선의 13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나름의 생을 살아간다는 뜻이죠.  그러므로 학문적 요점을 정리해 보면  주제 : 주권의 부재에 대한 탄식.  내재율 : 내적 구속을 형상화함.  율격 : 존재감에 대한 생리적 고찰.  성격 : 풍자시류.  운율적 갈래 : 운율시.          이상(李箱)의 삶을 찾아서 이상(李箱)의 삶을 찾아서   큰아버지 집에서 양자 생활  이상은 한일합방이 되던 해 가을 서울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일자무학의 고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 생가의 위치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 없으나 궁내부 활판소에 근무하다 활판 기계에 손가락을 잘린 뒤 차렸다는 아버지의 이발소는 운영이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은 두 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큰아버지에게 대이을 아들이 없어 통인동 154번지의 큰아버지 집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다. 총독부의 기술 관리였던 큰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은 윤택했지만 고종 때 증조부가 정3품 벼슬을 지낸 강릉 김씨 문중의 증손이 된 사실은 이상에게 적잖은 갈등을 안겨 준 듯하다. "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와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제2호) 이상이 스물세 살 때까지 살았던 통인동 본가는 그가 에서 "10대조의 고성"이라고 한 것처럼 꽤나 큰 한옥이었던 모양이다. 본채에 행랑채와 사랑채까지 딸린 300여 평의 넓은 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의 옛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광화문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꺾어 300미터쯤 가다 보면 길 왼편에 상업은행 지점이 있다. 은행 왼편 골목길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의 오른편이 바로 이상이 이십일 년 간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다. 이 집은 현재 십여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여러 채의 한옥들이 들어서 있고 길가 쪽으로는 인쇄소, 책 대여방, 열쇠 가게 등이 영업중이다. 이들 가게는 물론이고 골목안 복덕방에서도 이 일대가 일세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 이상의 옛 집터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제비' 다방 : 의 무대  각혈을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이상은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이 곳 술집에서 기생 금홍을 만난 이상은 청진동 조선광무소 1층을 사글세로 얻어 '제비'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 다방 뒷골목에 금홍과 살림까지 차려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된 의 무대를 만들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는 이상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의 혹평과 비난 때문에 연재는 중단되었지만 열화 같은 찬반 양론이 일었고 '구인회' 가입 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제비' 다방은 경영난으로 폐업하여야 했고 인사동의 카페 '쓰루(학)' 광교다리 근처의 다방 '69'와 명동의 '무기(맥)'를 잇달아 개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상은 1936년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수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여사)과 결혼,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으나 건강 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암담한 현실을 뒤로 하고 혼자 동경으로 떠난다. 이듬해 2월 죽음 직전의 혼곤한 상태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경에 체포된 이상은 신병 악화로 한 달여 만에 석방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부인 변동림과 마지막 해후를 했다. 1937년 4월 17일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골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보다 한 이십 일 정도 먼저 타계한 소설가 김유정과 함께 합동 영결식이 치러지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만 이십육 년 칠 개월의 삶이었다. "날개를 펴지 못한 천재 시인" 이상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송파구 방이동 보성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고 동문들과 부인 변동림 여사가 1990년 5월 건립한 이 문학비는 이상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 조각으로 만들었으며 문학비 앞에 이상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를 새긴 시비를 따로 마련했다.      글꼴조정 공유하기 북마크   인기 Q&A 질문목록 이전다음 현재페이지12345   오픈지식 목록 이전다음 현재페이지123456789 TOP           거울 / 李箱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요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요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 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해와 감상   *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 거울 밖의 세계의 소리가 거울 속에 들리지 않는다. 거울 속 세계는 밖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조용한 세상이다. *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 : 자기와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딱한 것은 거울 속의 귀만이 아니라 그와(자신의 자아와) 의사소통이 안되는 일상의 나도 될 수 있다. *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요 : 각각의 세계가 정반대로 뒤집혀 있다. 각각의 세계에서의 나는 서로 악수(화해와 통일)를 할 수 없다. * 외로된 사업 : 거울 속의 나는 현실의 나와 전혀 무관하게 참된 나를 찾는 사업을 하고 있다. 서로 단절과 고립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이상이 즐겨 사용한 거울 모티프가 그 중심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상적 자아[현상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본질적 자아] 사이의 갈등, 즉 자의식(自意識)을 드러낸 대표적 작품이다. (거울 모티프가 중심 구조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 작품으로는 이 시 외에도「오감도 제15호」와 「명경」이 있다). 이 시에서는 자의식의 세계를 표상하는 거울을 매개로 하여 두 개의 ‘나’가 설정되었는데, 이에 따라 전체는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단락은 1~3연으로 거울 속의 자아를, 둘째 단락은 4~5연으로 거울 밖의 자아를 보여 주며,셋째 단락은 마지막 6연으로 거울 밖의 자아와 거울 안의 자아의 관계를 드러내 준다.   이에 따르면,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는 거울에 의해 비추고 비치는 관계에 있으나, ‘내말을알아듣지못하거나’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로 사사건건 반대며 서로 만나지 못한다. 모든 물체를 정반대로 비추는 거울의 본질상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는 두 자아의 공존과 함께 두 자아 사이의 단절과 분열, 갈등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자아분열(自我分裂)의 모습이다.     참된 자아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고 ‘거울 속의 나’가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아닌가 하지만,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악수도 받을 줄 모르는 자아임을 깨닫고 나서 그가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라 하며 두 자아 사이에 상대적 유사점을 발견하고나서 그 거울 속의 자아가 참된 자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자의식의 거울은 ‘거울 속의 나’를 만나 보게 해 주는 매체는 되지만, 참된 자아를 탐구하는 데에는 저해 요소임을 깨닫는다. 즉 자의식의 거울을 통해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했지만, 자의식의 거울 때문에 발견한 ‘나’가 참된 자아인지 아닌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갈등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라 하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적으로 본다면, 일상적 자아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고 자아관을 확보한다. 이때 자아의 통일성은 거울에 비친 상을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비로소 구성된 것이다. 즉, 자아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동일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렇게 거울에 비친 상을 통해 구성된 동일성은 자기 소외적 성격을 지니게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는, 현상적 자아인 ‘나’와 자의식에 존재하는 본질적 자아인 ‘또 다른 나’의 대립과 모순을 통하여 참된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비극적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 이상의 초현실주의 문학에 대하여 : 초현실주의란 이지에 의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현실을 초월한 잠재의식의 세계를 담는 것인데, 이것은 현대적 물질문명의 발달 속에서 진부한 일상적 자아와, 잠재의식 속의 본래적 자아가 서로 분열함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회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자기 성찰의 방법으로 탐구하는 것이 초현실주의다. 1930년대는 일제 식민지하이지만, 도시 문명은 급속한 발달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로 말미암은 현대인의 자아분열을 李箱이 초현실주의로 그려낸 것이다.       ▶   * 이상 : 시인 소설가 본명은 金海卿 서울 출신...                            李箱의 마지막 행적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일본 도쿄 제국대 부속병원에서 이상(李箱)이 27세로 세상를 떴다. 그는 1936년 10월 새로운 문학을 모색하러 도쿄에 갔다가 죽기 두 달 전 '거동 수상자'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본명 김해경이 아닌 이름으로 '그리 온건하달 수 없는 글귀'를 적은 공책이 그의 하숙집에서 나왔다. 한 달 동안 조사를 받다가 추운 유치장에서 폐결핵이 악화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성에서 급히 달려온 아내 변동림에게 그는 "멜론이 먹고 싶다"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한 뒤 숨을 거뒀다. 한 때 '레몬'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멜론'이 맞다는 게 최근 연구 결과다.   올해는 이상 탄생 100주년이다. 1910년 9월 23일 경성에서 태어난 이상은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라는 시 '오감도'를 내 놓아 천재와 광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이상과 절친했던 김기림은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라며 "상(箱)이 소속한 20세기 악마의 종족들은 번영하는 위선의 문명을 향해 메마른 찬 웃음을 토할 뿐"이라고 옹호했다.   '박재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묻는 소설 '날개'를 쓴 이상의 삶은 196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시대를 앞선 천재의 상징으로 꼽혔다. '구속이 없는 자유, 자유로운 감각, 질서에 대한 충동의 우위, 상상력의 해방, 이런것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상문학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권영민 서울대 교수)   도쿄 시절 이상은 서양을 흉내낸 일본의 '모조된 현대'를 비웃었고 하숙집에서 소설 '종생기'등 10편을 왕성하게 썼다. 곧 귀국하려던 참에 느닷없이 니시간다(西神田)경찰서에 끌려갔다. 이상은 병원에서 "예의 명문(名文)에 계원(係員)도 탄탄하더라"며 우스갯소리도 던졌지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이 경찰서에서 쓴 수기를 포함한 일본 경찰 기록은 공개된 적이 없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시인 윤동주 시비 건립 위원회'가 옥사한 시인의 재판 기록을 찾아내기 위해 일본 검찰에 조사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상 탄생 100년을 맞아 우리 정부나 연구자들이 니시간다 경찰서에서 보낸 이상의 마지막 행적 자료도 일본 관계기관에 요청할 필요가 있다. ...4월17일, '박제가 된 천재' 이상 떠난 날.                                                                                                              ///백해현  논설위원 ==========================================================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로 시작해서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로 막을 내리는 소설 ‘날개’의 소설가이자  ‘권태’의 수필가, ‘오감도’와 ‘거울’의 시인 이상(李箱), 김해경이  1937년 오늘(4월 1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결핵  으로 콜록콜록 피를 토하고 숨졌습니다. 경찰에 의해 거동수상자로 체포돼  돌보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조선의 천재’는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李箱, 1910년 9월 14일 - 1937년 4월 17일)은 한국의 근대 작가이다.  강릉 김씨이고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12년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 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6년 동인지 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내고 그만두고,  에 ‘지주회시’, 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이해,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종생기' ,'권태', '환시기' 등을 쓰고,  '봉별기'가 에 발표되었다.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절벽- 이상(1910~37)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 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시인 이상. 그를 말할때는 항상 앞에 '천재'라는 단어가 붙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 부르는데는 대체로, 그의 파격적이며 난해한 시들과  괴짜에 가까운 삶(+요절)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곤 한다.  그는 우리 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음력 8월 20일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한말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셋이 잘린 뒤 이발소를 차린 김연창(金演昌)씨였다. 해경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네 살이 되던 해 그는 총독부 상공과 기술관으로 있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렇게 백부의 양자가 된 것은 해경이 태어날 무렵부터 급격히 기운 가세 때문이었다. 백부는 어린 해경에게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부성애를  베풀지만, 백모는 이와 달리 증오와 소외를 맛보게 했다.  그는 권위적인 양부모와 무능력한 친부모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이 심했으며,  이런 체험이 그의 문학 저변에 나타나는 불안의식의 뿌리이다.  이상은 시대의 불행과 환멸을 자양분으로  초현실주의 문학을 키워나갔다.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技手가 되었다. 1931년 처녀작으로 시   를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고,  1932년 동지에 시를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근무시절,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표지도안 현상 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는 등  그림과 도안에 재능을 보였다.    1933년 3월 결핵의 객혈로 건축技手직을 사임하고 백천온천에 들어가 요양했다. 이때부터 그는 결핵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1933년 늦여름 어둑어둑해질 무렵. 백단화(白短靴)에 평생 빗질 한 번 해본 적  없는듯한 봉두난발, 짙은 갈색 나비 넥타이, 구레나룻에 얼굴빛이 양인(洋人)처럼 창백한 사나이, 중산모를 쓴 키가 여느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꼽추,  키가 훌쩍 큰 또 다른 사나이, 이렇게 셋이서 종로를 걸어간다.  "어디 곡마단 패가 들어왔나 본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일행을 보고 한마디씩 던진다.  백구두의 사나이가 갖고 있던 스틱을 들어 공연히 휘휘 돌려대다가 느닷없이  "카카카.!"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스스로 생각해도 일행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운  까닭이다. 그들이 백천 온천에 갔을 때도 경성에서 곡마단 패가 왔다고 애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세 사람 가운데 백단화에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바로 이상(李箱.1910~1937)이고, 중산모를 쓴 꼽추는 화가 구본웅이다. 의탁하고 있던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이상은 학교에서 현미빵을 파는 고학을 하며 어렵게 보성고보를 졸업한다. 그가 식민지 건축 기술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경성고등공업학교 (서울공대의 전신)에 들어간 것은 백부의 소망 때문이다.      "해경아, 앞으로 너는 건축과를 가야 한다. 나도 병들고 네 아비도 늙고 가난하지 않느냐. 적선동(해경의 친가)은 식량이 떨어질 때도 많은 모양이 더라. 세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는 곯지 않는단다. 그러니 가난한 환쟁이는 안 돼"  백부는 그를 설득한다. 이상이 "오감도" "삼차각 설계도" "건축 무한 육면각체" 등 건축과 깊은 관련을 지닌 표제어를 자주 쓰고 아라비아숫자와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하고 수식(數式)보다 난해한 시들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 고등공업  시절의 영향이다.  1933년 이상은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 지 23년 만에 가족과 합치나 불과 보름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버린다. 이상은 폐결핵 요양 차 구본웅과 함께 백천온천으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술집 여급 금홍을 만난다.  "몇 살인구?" "스물 한 살이에요"  "그럼 내 나이는 몇 살이나 돼 뵈지?" "글세, 마흔? 서른 아홉?"  이때 금홍은 겨우 스물한 살이고, 금홍의 눈에 마흔이 넘은 것으로 비치던 이상은 알고 보면 스물세 살이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자 백부의 유산으로  청진동 조선광무소 건물 1층을 전세내어 "제비"다방을 개업한다.  금홍을 불러들여 마담으로 앉히고, 아울러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그는 실험정신이 강한 시를 써오다가 1936년 소설 〈날개〉를 발표하면서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이상은 "나는 추호의 틀림없는 만 25세 11개월의 홍안 미소년(紅顔美少年)이다. 그렇건만 나는 노옹(老翁)이다"라고 쓴다. 이상은 찰나적인 행복감에 젖었다.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금홍이와 나는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과거래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제비"는 당대의 일급 문인들인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정인택. 윤태영. 조용만 등이 단골이었다.    친구 정인택과 권순옥의 결혼식에 사회자로 참석한 이상. (동그라미 아래)  이들 부부는 이상과 더불어 삼각관계의 주인공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방의 경영은 여의치 않고, 금홍은 외간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곤 한다.  이상은 금홍이의 "오락"을 돕기 위해 가끔 P군의 집에 가 잤다. P군은  소설가 박태원이다. 금홍의 문란한 남자 관계를 방임. 방조하던 이상은  때로 금홍의 난폭한 손찌검에 몸을 내맡긴 채 자학을 꾀한다.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사흘을 돌아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그렇게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금홍이는 집에 없었다.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 팽개쳐놓고 나가버린 것이다. "제비"다방은 두 해 만인 1935년 9월 문을 닫았다.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 이상이 20년을 살았던 집.  4년 전에는  이 집이 헐릴 위기에 놓였으나 ‘김수근 문화재단’이 어렵게 매입했다.  김원 재단 이사장(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은  이 집을 원상 복원해서 ‘이상 기념관’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 유쾌하오"로  시작되는 소설 "날개"는 바로 금홍과의 동거 체험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가정(家庭)     문을 암만 잡아다녀도 안열리는 것은 안에 생활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졸른다. 나는 우리집 내문패 앞에서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나는 밤 속에 들어서서 제웅처럼 자꾸만 멸해간다.     식구야 봉한 창호 어데라도 한구석 터놓아다고 내가  수입되어 들어가야     하지않나. 지붕에 서리가 내리고 뾰족한 데는 침처럼 월광이 묻었다.     우리집이 앓나 보다. 그리고 누가 힘에 겨운 도장을 찍나 도다. 수명을     헐어서 전당  접히나 보다. 나는 그냥 문고리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어     달렸다.문을 열려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  1936년2월에 발표    1934년 시 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했다.  1936년 《조광(朝光)》지에 《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고  같은 해에 《동해(童骸)》《봉별기(逢別記)》등을 발표하고 폐결핵과  싸우다가 갱생(更生)할 뜻으로 도쿄행을 결행했다.  1937년 2월, 사상이 불온하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감했다.  그리고 그해 4월 17일 오전 4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26년 7개월...  아내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귀국했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돌보는 이 없어 훗날 유실되고 말았다.  “5월 돌아온 유해는 다시 한 달쯤 뒤에 미아리 공동 묘지에 묻혔고  그 뒤 어머니께서 이따금 다니며 술도 한잔씩 부어놓고 했던 것이, 지금은  온통 집이 들어서 버렸으니 한줌 뼈나마 안주할 곳이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생전에 ‘삼촌 석비 앞에 주과가 없는 석상이 보기에 한없이 쓸쓸하다’던  오빠 자신은 석비는커녕 무덤의 자취마저 없으니 남은 우리들의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습니다.”  (김옥희 ‘오빠 이상’-이상 전집에서)        서울 송파구 보성고교에 설치되어 있는 이상 문학비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이상의 마지막 말 한마디.    "날개를 펴지 못한 천재 시인" 이상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송파구 방이동 보성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고 동문들과 부인 변동림 (卞東琳) 여사(이상이 죽은 뒤 수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여사)가 1990년 5월 건립한 이 문학비는 이상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 조각으로 만들었으며 문학비 앞에 이상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를 새긴 시비를 따로 마련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이상과 아내 변동림 즉 김향안(金鄕岸 1916~2004),  김환기 화백의 가계도를 발견하고 수수께끼 한가지를 풀었다.  오래전 김환기 화백의 부인이자, 환기 미술관을 설립한  김향안여사가 이상의 아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의 이복 이모인 김향안을   구본웅이 소개하여 이상의 부인이 되었다.  이상이 죽은 후 변동림은   화가 김환기와 재혼하였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구본웅의 외손녀이다.      구본웅이 그린,  친구이자 이모부인 이상의 초상화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이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金鄕岸 1916~2004)  구본웅은 2살 때 척추를 다치고 곱추가 된 화가로 별명은 한국의 로트렉으로  불렸다. 변동림(卞東琳)은 서양화가 具本雄의 계모 변동숙의 이복동생으로 그 시대에 경성여자보통고등학교(경기여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문학활동을 하기 시작하였고, 1936년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李箱)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3개월 만에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1937년 4월 도쿄[東京]에서 뇌출혈로 사망한 뒤, 1944년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와 재혼하였다. 그녀는 이상, 김환기라는 두 천재의 동반자였다. 1944년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와 결혼 하면서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1955년 김환기와 함께 불란서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평론을 공부하였고, 196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付岩洞)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저서로는 수필집 《파리》 《우리끼리의 얘기》 《카페와 참종이》와 김환기의 전기(傳記)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가 있다.*  김향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 지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 첫 남편 李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또 그녀가 김향안으로서 30년을 함께 한 김환기의 아내였을 때에는,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가진 예술가의 동반자로 살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상·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이상(李箱)'이라는 필명 유래  이상에게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생인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이름은 구본웅(具本雄). 구본웅은 몸이 불구이고 약해서 학교에 꾸준히 나가지 못해 나이는 이상보다 4살이나 위지만 같은 학년 같은 반에 편성되었다. 꼽추이고 4살이나 나이가 많은 구본웅과 아무도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지만 이상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으며 이상은 구본웅을 4년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그렇게 그들은 특별하고도 아주 진지한 우정을 쌓아갔다.  동광학교를 거쳐 1927년 3월에 보성고보를 졸업한 김해경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했다. 그의 졸업과 대학입학의 축하선물로 구본웅은 사생상(寫生箱)을 선물했다. 사생상이란 스케치박스를 말한다. 그간 사생상을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했던 이상이 사생상을 선물 받고 날아갈 듯 기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구본웅에게 고마운 나머지 자신의 필명에 사생상의 '상자'를 의미하는 箱자를 넣겠다고 흥분했다. 김해경은 아호와 필명을 함께 쓸 수 있게 호의 첫 자는 흔한 성씨(姓氏)를 따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고 구본웅도 흔쾌히 동의하자 김해경은 사생상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니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성씨 중에서 그 성씨를 찾기로 했다. 두 사람은 권(權)씨, 박(朴)씨, 송(宋)씨, 양(楊)씨, 양(梁)씨, 유(柳)씨, 이(李)씨, 임(林)씨, 주(朱)씨 등을 검토했다. 김해경은 그 중에서 다양성과 함축성을 지닌 것이 이씨와 상자를 합친 '李箱'이라 생각했고 구본웅도 그 절묘한 배합에 감탄했다.  이상의 연애에 관해    그를 키워준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자 그는 적선동의 가난을 정리한 후 효자동으로 옮겨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그는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 그러나 그의 한량기질이 가만히 잠들어 있을 리 없었다. 사흘을 못 참고 장고 소리 나는 곳으로 찾아간 그는 바로 이곳에서 운명의 여인인 금홍을 만났다. 그는 금홍에 대해 '보들레르의 흑인 혼혈 정부 잔느 뒤발을 닮은 데다가, 모든 남자들이 한 번 정도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여자'라 찬사를 늘어 놓았다. 여자에 대한 호평에 박한 그가 금홍에 대해 이 정도로 평한 것은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져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천성적으로 예쁜여자를 좋아하던 그는 그녀의 매력에 금새 도취되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금홍을 비롯해 이상은 전생애를 통해 여러 여급과 사랑을 나누었다. 금홍과 헤어진 다음 만났던 권순희 역시 미모를 자랑하는 여급이었고, 또 유일한 정식 아내였던 변동림도 이상의 묵인 하에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간통 사건을 일으켰고, 후에 여급으로 일했다. 이상은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이들은 그에게 잠시 동안 위안을 주는 여급일 뿐, 그를 오랫동안 지탱해주는 반려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여급하고만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또 애인과 다른 남자들과이 관계를 방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대한 답은 그가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다시말해 그는 여자를 가지려고도, 또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보통남자들이 바라는 열녀형의 양처를 가진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그녀들에게 바랬던 것은 생활의 안정이나, 안정된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여자들에게 문학 소재 혹은 아이디어를 원했다. 이들은 실행활에서 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문학적인 면에서는 그가 문학 속으로 침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그녀들과 나누었던 경험은 소설과 시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금홍은 '날개', '봉별기', '지주회시' 등에, 또 마지막 여자였던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비 정상적인 직업의 여성들을 택했고, 또 성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던 그는 그녀들의 외도를 묵인해주어야 했다. 더구나 이상의 여자들은 그의 특이한 습성을 이해할정도로 너그러웠고 그중에서도 금홍은 그와 이러한 성향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그의 사랑을 비교적 오랫동안 독차지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다방 뒷골방에 마련했던 조그만 살림방은 그의 대표작인  '날개'의 무대가 되었다.    한동안 금홍은 마담으로 '제비' 카운터에서 일하고, 이상은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밤에 밖으로 기어나오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그의 제비다방 시대는 1933년 7월 14일 개업으로부터 1935년 9일, 파산하기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가장  격렬한 사랑마저 이렇게 금방 끝나고 만 것은 폐병 때문에 성기능도, 보석을 사줄 만한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여자에게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 했던 그는 1933년 여름부터 1934년 여름까지 이상이외의 남자를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몰입했던 금홍에게조차 불성실하게 행동했다. 같이 산 지 1년이 지나자 금홍은 이상에 대해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이야. 게다가 돈도 벌어올 줄 모르고'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로 그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금홍에게 천대를 받던 1934년 그는 에 발표한 '오감도'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1933년과 1934년은 화려한 문단 등단뿐 아니라 파산, 금홍과의 파경으로 가득찬 해였다. 당시 그가 느꼈던 좌절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하루는 나는 이유없이 금홍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금홍이가 너무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금홍과 서먹해질 즈음 그는 동인들과의 만남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금홍이  나간 직후 그는 잠시 카페 '쓰루'에 있었던 여급 권순희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여복 없는 그에게 이도 오래갈 리 없었다. 그녀를 짝사랑 하다 자살소동까지 일으킨 친구 정인택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채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결혼식의 사회까지 맡아주었던 것. 그후 그는 박태원, 김유정과 어울려 다니면서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심신을 소모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그가 했던 한마디는 그의 생활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    '제비'다방과 금홍을 잃은 후 그는 아버지의 집을 저당잡혀 인사동에 카페  '쓰루'와 광교 근처에 다방 '69'를 개업했다가 곤 망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명동의 '무기'를 설계해 개업하려했으나 중도금이 없어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빈민촌으로 가족을 이사시킨 이상은 묵묵히 따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력 사이에서 방황했다. 금홍에 이어 권순희와도 실연하고만 그는 패배감에 젖어 잠시 시골로 잠적했다. 그곳에서 그는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듯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어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1936년, 이상은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해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다. 그녀는 단편과 수필을 몇편 발표했던 신인이자, 이상의 지기인 구본웅의 배다른 동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상이 가까이 했었던 여성 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여성인 셈이었지만,  이것도 이상의 운명이었을까? 간단한 결혼식을 거친 후 곧 동거에 들어간 그녀는 이상의 가족과 전혀 교류가 없었던 금홍과는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이상의 여자는 모두 여급이었다는 전설을 다시 확인 시켜주는 셈이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대로 가족과 변동림을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다. 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너무나도 동경하던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자마자 20대였던 조숙한 천재시인 이상은 스믈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종생기'를 끝으로 자신의 생을 마쳤다.    박제가 된 천재. 이상(李箱)  4월17일은 20세기 한국문학이 낳은 걸출한 모던 보이 이상(1910∼1937·사진)이 도쿄제대 부속병원에서 28세의 일기로 요절한 날이다. 이상의 기일에 즈음해 권영민 서울대교수가 '이상 전집'(전 4권·웅진문학에디션 뿔)을 출간했다. 10년 넘는 작업을 통해 난해하다는 이유로 방치됐거나 잘못 해석되어 온 텍스트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니가타대학 후지이시 다카요 교수의 자문을 구하러 수차례 일본을 방문했을 정도로 정성을 들인 결과물이다.  사람의 숙명적 발광은 곤봉을 내어미는 것이어라  사실 且8氏는 자발적으로 발광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듯  且8氏의 온실에는 은화식물이 꽃을 피워 가지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가 태양에 마주쳐서는  히스무레한 광을 내었다.  ('且8氏의 出發' 일부)  예컨대 이상의 시 가운데 '且8氏의 出發'(차8씨의 출발) 의 '且8'은 시 본문에  등장하는 '곤봉'이란 단어와 함께 남자의 성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권 교수는 "그 결과 이 시는 성애(性愛)를 다룬 작품으로 완전히 잘못 해석돼 왔다"  며 "且에 8의 한자'八'를 더하면 사람의 성인 구(具)가 되고, 따라서 이 시는  섹스 시가 아니라 이상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에게 바쳐진 작품"이라고  진단했다. 구본웅이 늘 쓰고 다녔다는 높은 중산모(具)와 마른 체구에 기형적인  곱사등이의 형상(8)을 형상적으로 암시하기 위한 게 '且8氏'라는 해석이다.  이상은 화가 구본웅의 예술적 감각에 대한 상찬과 함께 그 불구의 모습에 대한  연민의 정을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 '買春(매춘)'의 진짜 제목을 둘러싼 논란도 명쾌하게 정리했다.  시 '買春(매춘)'의 경우 기존의 전집에서 '賣春'으로 표기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해석으로 폐결핵으로 병약해진 이상이 '買春(매춘)', 즉  '젊음을 사다'라는 새로운 의미의 말을 만들어놓은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상 자신이 즐겨 사용한 파자(破字)의 방법을 그 제목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지요."  권 교수는 전집에 이어 '이상 텍스트 연구-이상을 다시 묻다'도 곧 발간할 예정이며 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는 내년 4월에 맞춰 이상 문학을 키워드로 정리한  문학사전도 준비하고 있다.  정철훈 기자 [출처] 박제가 된 천재 · 이상(李箱) · 김해경|작성자 나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 다시 날개를 달다  살아 생전 내내 폐결핵에 짓눌린 육신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소개로 알게 된 변동림(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의 이복 자매)과의 짧은 사랑도 끝나버렸지만 이상 문학의 정신세계는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박태원과 김기림 등이 쓴 13편의 주옥같은 추도문을 낳았다. “여보, 상(箱)-   당신이 가난과 병 속에서 끝끝내 죽고 말았다는 그 말이 정말이오? 부음을 받은 지 이미 사흘, 이제는 그것이 결코 물을 수 없는 사실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이 마음이 섧구료…이제 당신은 이미 없고 내 가슴에 빈 터전은 부질없이 넓어 이 글을 초(草)하면서도 붓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여러 차례요.”(박태원 ‘이상 애사’, 조선일보 1937. 4. 22)   “상(箱)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이 아니리라. 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길어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상은 오늘의 환경과 종족의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김기림 ‘고 이상의 추억’, 조광 1937. 6)  그러나 장례식 이후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힌 이상을 찾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고개를 넘어 공동묘지에 묻히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므로 미아리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속설대로 이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죽어서까지 쓸쓸했던 그의 유골은 한국전쟁 이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없어지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 변동림 역시 에세이집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비목(碑木)에 묘주(墓主) 변동림을 기입했을 뿐 웬일인지 나는 그 후 한번도 성묘하지 않았다.”   아내 변동림은 남편과 사별한 지 7년만인 1944년 5월 1일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다. 결혼식 주례는 화가 고희동, 사회는 시인 정지용과 화가 길진섭이 섰다. 이상과의 결혼생활 4개월 동안 낮과 밤이 없이 즐긴 밀월을 월광(月光)으로 기억할 뿐이라는 변동림은 재혼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김향안으로 고쳤다.  한국전쟁과 4·19, 5·16 등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이상은 잠시 잊혀진 시인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날개’ ‘오감도’ 등 작품이 중등 교과서에 실리고 문단과 학계 등에서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은 다시 날개를 달았다. 해마다 100편이 넘는 이상 관련 논문이 발표될 정도로 그는 한국문학의 중심이 됐다.   문학평론가 이어령과 김윤식이 각각 ‘이상론’과 ‘수심을 몰랐던 나비’를 내고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화가로서의 이상’, 수학자 김용운이 ‘이상 문학에 있어서의 수학’, 정신의학자 조두영이 ‘이상의 인간사와 정신 분석’, 권영민 서울대 교수가 ‘이상 텍스트 연구’를 발표하는 등 분야별로 이상의 생애와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이 가운데 고은 시인이 펴낸 ‘이상 평전’(민음사, 1974)은 이상의 고독과 사랑, 삶과 문학, 꿈과 파멸 등을 전방위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고은은 이 책에서 이상을 “자신의 고민을 시대에 만화처럼 투여한 행복한 파산자”라고 규정한 뒤 “이상 문학은 이 땅의 현대문학에 대한 음습한 주부(呪符)이며 한국 모더니티의 흑사병”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수많은 꿈이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의 난해   그 난해의 현대였다.   원(圓)보다   각도의 기수였다.   도시의 자식아   도시의 자식아.”(고은 ‘만인보’ 중에서)   혹한이 맹위를 떨친 14일 서울 방이동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이상 문학비를 찾았다. 1926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제17회 졸업생인 이상을 기리기 위해 보성고 동문들과 김향안 여사가 1990년 5월에 세운 문학비는 시인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추상조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오감도’를 새긴 시비가 따로 마련됐다.   혼자 일본으로 떠나 유골이 되어 돌아온 이상을 용서할 수 없었던 김향안 여사는 반세기의 무관심 끝에 2004년 숨지기 전 ‘오감도’에 대해 글을 남겼다. “이상의 문학은 쉬르의 영향은 받았지만, 그리고 막 태동한 실존의식이 움트기도 했지만 ‘오감도’는 쉬르도, 다다도 아니다.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 구라파에 유행한 개념의 예술-시는 보고 그림은 읽는-을 시도한 것이다.”(김향안 ‘월하의 마음’, 환기미술관 )  사랑을 버리고 이상을 좇아 떠난 이도, 평생의 회한을 털고 화해의 손을 내민 이도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만 지금,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열세 명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오감도’가 유난히도 추운 겨울에 애달픈 추억을 많이 남긴 천재 시인의 넋을 달래고 있었다.   “13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適當)하오.)   제(第)1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第)2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중략)   제(第)13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人)의아해(兒孩)는무서운아해(兒孩)와무서워하는아해(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適當)하오.)   13인(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광형 선임기자        이상 문학비           이상의 생가 - 서울 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154-10 18통 9반       李箱의 여동생 김옥희氏의 회고   □ 오빠 이상(李箱) - 김옥희  '이상' 그러니까 큰오빠 해경의 생활을 말하라는 의 청을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이 었습니다. 그것은 문학인도 아닌 시중의 일개 주부가 할 구실이 못 된다는 것과 또 너무도 불행했던 오빠의 지난날의 생활을 들춘다는 것은 나에게 지나치게 벅찬 고역이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오빠 가신 지 이미 삼십 년의 세월이 갔고, 또 가히 천명을 안다는 내 연륜 으로 지나친 감상에만 젖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붓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혹 내 이 글이 오빠 이상의 생활과 문학을 알고자 하는 분들에게 티끌만큼의 도움이라도 되 었으면 하는 것이 내 염원입니다. 이제 이 땅에 무덤마저 없는 큰오빠가 이 일을 알면 어떤 표정을 할까? 회억(回憶)의 비감 속에서도 빙그레 웃음짓는 그 독특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빠의 문학은 감히 내가 말할 소임의 것이 아닐 것 같아 여기서는 주로 오빠의 생 활, 즉 그의 성장에서 운명까지 생활의 단편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오빠와 나의 연차는 6년, 어느 가정 같으면 사생활의 저변까지 샅샅이 알 수 있는 사이겠습 니다마는 우리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것은 작은오빠 운경도 아마 그러할 것입니다.(작은 오빠는 통신사 기자로 있다가 6·25때 납북됨) 왜냐하면 큰오빠는 세 살 적부터 우리 큰아버지 김연필 씨 댁에 가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큰오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큰댁 큰어머니나 또 우리 어머니(이상의 생모)께 들어서 알 뿐입니다. 오빠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에 손이 가시는 어머니-의지 없으시어 지금까지 내가 모시고 있는-께 들은 오빠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부터 적기로 하겠습니다.  오빠의 생활은 어쩌면 세 살 적 큰아버지 댁으로 간 일부터가 잘못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란 글에서 「그동안 나는 나의 성격의 서막을 닫아버렸다」고 말한 것처럼, 오 빠의 성격을 서막부터 어두운 것으로 채워 준 사람은 우리 큰어머니였다고 집안에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 공업학교 계통의 교원으로 계시다가 나중에 총독부 기술직으로 계셨던 큰아버지 김연 필 씨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큰오빠를 양자 삼아 데려다 길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시던 큰어머니께 작은오빠가 생겼으니 큰오빠의 존재가 마땅치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두 돌 때부터 천자문을 놓고 '따, 지'자를 외며 가리키는 총명을 귀여워 못 배겨 하시는 큰 아버지, 그래서 모든 일을 어린 큰오빠와 상의하시는 큰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큰어 머니가 오빠를 어떻게 대했을까 하는 것은 능히 상상할 수가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도 총명하더니 재주 있어도 명 없으니......」  오빠의 지난날을 생각하는 어머님 말씀처럼 그의 총명과 재주가 명 때문에 발휘 못 된 그 먼 원인이 우리 가정적 비극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참 원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해경이 어디 갔느냐?」고 찾으시는 큰아버지의 끔찍한 사랑과 큰어 머니의 질시 속에서 자란 큰오빠, 무던히도 급한 성미에 이런 환경을 어떻게 참아냈는지 모 릅니다. 하기는 그랬기에 외부로 발산하지 못한 울분들이 그대로 내부로 스며들어 폐를 파 먹는 병균으로 번식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가운데서도 공부는 무척 했었 나 봅니다.  한글을 하루 저녁에 모두 깨우쳐 버렸다는 수재형의 오빠는, 일곱 살 때에야 홍역을 치러서 아주 중병을 앓았는데, 그 고열에도 머리맡에 책을 두고 공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니 말입니다.  1926년, 그러니까 오빠가 열일곱 싸 때 보성고보(普成高普)를 졸업했습니다. 그사이의 고생 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점심시간에 현미빵을 교내에서 팔아 그것으로 학비를 댔다고 하는데, 후에 오빠가 다방 같은 장사를 시작한 것도 아마 이 때부터 싹튼 돈에 대한 집념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빠는 또 어릴 때부터 그림을 매우 잘 그렸습니다. 무엇이든지 예사로 보아 넘기는 일이 없는 그는, 밤을 새워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그것을 종이에 옮겨 써보고, 그려 보고 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더라고 합니다. 열 살 때인가 당시 '칼표'라는 담배가 있었는데, 그 껍질에 그려져 있는 도안을 어떻게나 잘 옮겨 그렸는지 오래도록 어머니가 간직해 주었다고 합니다. 보성고보 때 이미 유화를 그렸는데 어느 핸가는 이라는 그림을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된 일도 있었습니다.  고보를 나오자 그 해에 경성공고 건축과에 입학한 것은 아마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빠 아니 스무 살이 되던 1926년에 고공을 졸업하고 그 해 총독부 내 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갓나온 정열과 그 당시 큰아버지의 직장 이 또한 그곳이었기 때문에 처음은 일본인 과장들과도 그리 의가 틀리지 않게 일을 한 모양 입니다만 오빠성질에 봉급자 생활 그것도 일본 사람들과의 사이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을 리 가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오빠로서는 큰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오래 견디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해 12월인가 지의 표지 도안 현상에 일등과 삼등으로 당선된 것으로만 보 아도 그사이 큰오빠의 의욕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듬해인 1931년부터 시작(詩作)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또 그해에 오빠의 그림 가 선전에 입선되었습니다.  김해경이라는 본 이름이 이상으로 바뀐 것은 오빠가 스물세 살 적 그러니까 1932년의 일입 니다. 건축 공사장에서 있었던 일로 오빠가 김해경이고 보면 '긴상'이라야 되는 것을 인부들이 '이(李)상'으로 부른 데서 이상이라 자칭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깁니다. 그때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시가 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빠의 건축 기사로서의 면목은 발휘되었던 것으로 전매국 청사가 오빠의 설계에 의해서 건축되었고, 지금의 서울 문리대 교양학부로 생각되는 대학 건물도 오빠가 설계한 것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며칠씩이고 직장을 쉬고, 그런가 하면 나왔어도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서 해를 보내던 오빠 의 당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무슨 어려운 일을 맡기면 그 기한 안에 는 자동 계산기처럼 정확하게 해다 놓더라고 합니다. 꾸깃꾸깃한 종이 쪽지 하나를 꺼내 놓 으면 이미 일은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니,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것이었는지 알 길 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 과장 한 사람과는 아주 뜻이 통했는데 그 뒤에 온 후임인가 아니면 다른 과장인가, 어쨌든 다른 한 사람과는 몹시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매사에 서로 의견이 충돌되었다고 합니다.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답답한 정황이 아마 이러한 오빠의 직장 생활에서 얻어진 '이미지'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빠의 불행한 생활이 표면화된 것은 1933년 3월 오빠가 직장을 버리던 날로부터 시작되었 습니다. 하기는 사표를 내던지고 억압된 직장을 떠난 일이 오빠로서는 시원하기까지 했을 것입니다마는 이해부터 각혈이 시작되었으니 불행의 시초로밖에 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흔히 각혈로 인한 건강을 오빠의 사직 이유로 말합니다마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본인 과 장의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박차고 나온 오빠였습니다.  오빠의 몸은 그때부터 극도로 쇠약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만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서양 사람 같은 흰 얼굴, 많은 수염, '보헤미안 넥타이', 겨울에도 흰 구두......」그런 모습으로 배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 것은 이 무렵의 일입니다. 오빠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 났으니 말입니다마는 오빠만큼 몸단장에 무관심한 사람도 좀 드물 것입니다. 겨울에 흰 구두를 신고 멋으로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있는 대로 여름에 한 켤레 신었던 흰 구두를 겨울에, 다시 여름에 그렇게 신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빠는 집에 들어오면 항상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그 누워있 는 동안에 무엇을 생각하고 또 쓰곤 했습니다. 마침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나가게 되었습니 다. 오빠는 벽에 걸린 외투를 입었는데, 벗었을 때 상의를 외투와 함께 벗어 걸었던 것을 그냥 입었던 탓에 한쪽 상의 소매가 팔에 꿰어지지 않고 외투 소매만 꿰었으니 상의의 소매 하나가 외투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길 가는 여인들이 이것을 보고 크게 웃었는데도 오빠는 무관심했습니다. 친구가 그 모 양을 보고 고쳐 입으라고 해도 내처 가는 데까지 그대로 갔답니다.  이렇게 몸단장을 하지 않는 큰오빠는 머리도 항상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오빠가 빗질하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오빠는 빗질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앉으 면 일부로 머리를 흐트려 놓곤 했습니다. 이발은 넉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셈이었으나 그나 마도 친구가 억지로 데리고 가다시피 해야 따라가는 형편이었습니다. 까무잡잡하고 긴 수염 과 언제나 흐트러진 머리, 거기다가 허술한 옷차림이 오빠의 여윈 체구를 더욱 초라하게 만 들었습니다.  이렇듯 몸단장에 아주 관심이 없던 오빠가 배천 온천에 가서 우연히 알게 된 여자가 흔히 금홍이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병약한 몸에 밤새 술을 마시고 기생과 사귀었으니 그 건 강은 말이 아닐 정도였을 것입니다.  종로 2가에 '제비'라는 다방을 낸 것은 배천 여행에서 돌아온 그 해 6월의 일입니다. 금홍 언니와 동거하면서 집문서를 잡혀 시작한 것이 이 '제비'다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집 문서를 잡힐 때 집에서는 감쪽같이 몰랐다고 합니다. 도시 무슨 일이고 집안과는 의논이 없 던 오빠인지라, 집문서 잡힐 때라고 사전에 의논했을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만, 설령 오빠가 다방을 내겠다고 부모님께 미리 말했다고 하더라도 응하시진 않았을 것입니다.  오빠는 늘 돈을 벌어 보겠다고 마음먹은 모양이지만 막상 돈벌이에는 소질이 없었던 것 같 습니다. 더구나 장사, 그것도 다방 같은 물장사가 될 이치가 없습니다. 돈을 모르는 사람이 웬 물장사를 시작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일입니다만, 거기다가 밤낮으로 문학하는 친구들과 '홀' 안에 어울려 앉아서 무엇인가 소리 높이 지껄이고 있었으니 더구나 다방이 될 까닭이 없었습니다.  이 무렵 오빠와 자주 어울리던 문인들은 구보, 상허, 편석촌, 지용 등이었으며 이 밖에도 오빠가 속해 있던 구인회(九人會) 동인으로 이효석, 이무영, 조용만-이런 분들이 오빠와 가까이 지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다방에들 몰려 있다가 이내 어디론지 사라져 얼근히 취해 가지고는 여럿이서 저희 집에도 가끔 들르곤 했습니다.  친구분들 얘기로는 큰오빠가 밖에서 술을 마실 때면 노래도 곧잘 불렀다고 하며 더듬거리는 소리로 이야기도 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술 마시고 친구와 동행일 때말고는 집안 식구와 거의 말을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집에 오면 으레 이불을 둘러쓰고 엎드려서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기가 일쑤였습니다. 도 무지 집안 식구와는 상대도 않고 자기 일만 하고 있어도 부모님께서는 오빠 일에 아예 참견 하려 들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빠가 쓰던 방은 늘 지저분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나서 집안 식구가 별로 드나들지도 않았 는데, 오빠가 있을 때는 더욱 출입을 삼갔고 방을 비우면 그때서야 겨우 들어가 방을 치우 곤 했을 뿐입니다.  큰오빠가 다방을 경영할 즈음, 나는 이따금 우리 집 생활비를 얻으러 그곳에 간 일이 있습 니다. 오전 열한 시나 열두 시 그런 시간이었는데, 그때야 부시시 일어난 방안은 언제나 형 편없이 어지럽혀져 있었는데, 지금도 그 방안이 기억에 선한데 그것은 방이라기보다는 '우 리'라고나 할 정도로 그렇게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저게 너의 언니니라'고 눈짓으로만 일러 줄 뿐 오빠는 금홍이 언니를 한 번도 제게 인사 시켜 준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금홍이 언니와는 가까이서 말을 걸어 본 일이 없었 습니다.  그러나 금홍이 언니를 이렇게 소홀히 취급했던 오빠도 집안일에는 여간 애를 태우지 않았습 니다. 내가 돈을 타러 갈 때면 으레 주머니를 털어서 몇 푼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몽땅 제 손에 쥐어 주시곤 했으니 말입니다.  다방을 경영할 무렵에도 오빠는 를 발표했고 또 '하술'이란 이름으로 신문 소설에 삽화도 그리는 등 창작 활동을 하 는 한편, 돈벌이를 위해 그런 대로 힘을 다한 흔적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곤란했던 우 리 가정의 생활을 위해 장남으로서의 의무를 다해 보려고 그 앓는 몸으로 온갖 힘을 기울인 오빠를 생각할 때 그지없이 가엾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바깥일은 집에 와서 절대 이야기 않던 오빠도 부모에 대한 생각은 끔찍이 했던 것 같습니 다. 지금 살아 계신 어머니도 큰오빠가 어머니에게 늘 공손했고 뭘 못 해드려서 애태우곤 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편안히 모시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 던 큰오빠를 어머니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계십니다.  큰오빠는 어머니께뿐만 아니라 아버님이나 동생들에게도 퍽 잘했습니다. 세 살 아래인 작은 오빠 운경에게나 저에게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여느 집의 형, 오빠에 못지않았습니다. 별로 말이 없어도 언제나 다정하게 동생들을 보살펴 주었고 친절하고 너그러운 오빠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큰오빠는 정말 착하고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한 번도 동생들에게 매질을 한 일도 없고 호되게 꾸중을 한 일도 없습니다.  돈을 못 벌어 생활인으로는 부실했을지 몰라도 가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퍽 원만했던 큰오 빠는 또 친구들과의 우정 관계도 모범적이었다고 듣고 있습니다. 사리 판단도 퍽 정확했던 모양으로 친구들 사이에 무슨 시비가 벌어지면 큰오빠가 중재를 맡고 나서서 화해를 시키곤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오빠를 천재, 또는 기인 혹은 괴팍한 사람으로 이야기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가 그저 범상한 사람으로 가정과 친구들 사이에서 착하고 평범하게 살아보려고 애쓴 줄로 알고 있습니다.  1935년은 오빠에게 있어서 가장 불운한 해였습니다. 까먹어 들어가던 '제비' 다방은 그 해 9월경에 폐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인사동에 '학'이라는 카페를 인수했는데 이것도 곧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종로에서 다시 다방 '69'라는 것을 설계했으나 개업도 하기 전에 남의 손에 넘겨 주고 말았고 명치정에서 다시 시작한 다방 '맥(麥)' 또한 같은 운명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잖아도 돈이 있을 수 없던 오빠가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빠의 자학과 부전의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임이 언니와 처음 알게 된 것은 그 전이겠지만 오빠와 임이 언니와 동거를 하고 명색 결혼 식을 올렸던 것은 오빠가 스물일곱 살 때 일입니다. 아마 지금 내무부 건너편 청계천과 을 지로 중간쯤으로 생각되는 수하동 일본 집 '아파트'에 오빠는 우거하고 있었습니다.  창문사에서 구인회의 동인지 을 편집하고 있던 오빠는 그것이 1집만 나오고 그 만되자 황금정으로 이사를 하고 거기서 임이 언니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유월이었다 고 생각되는데 그때 칠팔 명 '구인회' 동인들이라고 생각되는 분들과 신흥사에서 형식만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작품 연보로 보아서 가장 많은 작품을 여러 가지 장르에 걸쳐 여러 곳에 발표한 것이 이 해 였다고 기억됩니다. '절름발이' 세월에 '절름발이'부부 생활이었으나마 오빠에게 그만큼 위 안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임이 언니는 사실 우리 가족과는 상당히 가까이 내왕이 있었습니다. 특히 운경 오빠와는 자 주 만나 친밀히 이야기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임이 언니의 사랑도 결코 오빠를 행복하고 안정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빠는 임 이 언니와 동거 생활을 하던 바로 그 해 동경으로 떠났습니다.  친정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오빠는 여느 때처럼 집에 들어와서는 이삼 일 동안 좀 다녀올 데 가 있노라고 그러고는 집을 나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머니에게는 이상한 예 감이 있어 골목까지 나갔는데 오빠도 자꾸만 돌아보곤 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세상에 서의 마지막 작별이라는 것을 혈맥끼리가 서로 통한 것인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그날부터 사나흘 동안을 온통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과 한시도 앉아 있 을 수 없는 안절부절못한 속에 날을 보냈다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자꾸만 되풀이하여 말 씀하십니다. 그때 이미 아버지도 사경에 계시었고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었는데 떠나는 오 빠의 심중은 가히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오빠는 이삼 일 갔다 온다는 동경에 갔 습니다.  극도로 쇠약한 몸에 그나마도 생리에 맞지 않는 도시 동경에 간 오빠는 10월에 건너가서 피 를 토하면서 한겨울을 나고, 그리고는 이듬해인 1937년 3월 '니시간다' 경찰서에 갇히는 몸 이 되고 말았습니다. 까치집같이 헝클어진 머리며 그 많은 수염을 달고 다녔으니 사상불온 의 혐의를 받음직도 한 일입니다.  심한 고문도 받았겠지만 워낙 뼈만 남은 오빠의 몸에 더 이상 손을 댔다가는 변을 당할 것 같아서인지 한 달 남짓 만에 병으로 보석이 되었습니다.  동경에 있는 친구들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그때는 이미 회춘할 가망이 전 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료를 맡았던 일본인 모 의학 박사는 「어쩌면 젊은 사람을 이 렇게까지 되도록 버려두었을까, 폐가 형체도 없으니......」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문 밖에 넘치도록 들어서는 동경 유학생들 틈에서 오빠의 임종은 그리 외로운 것은 아니었 나 봅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간호와 위문이 오빠가 세상에서 얻은 마지막 호강이 었습니다.  몸은 다 죽어 가면서도 정신은 말짱해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쉬지 않고 무슨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어떤 주사 하나에 힘을 얻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는 곧 쓰러졌다는데, 아마 이 세상에 남겨 두고 가는 많은 할 일을 위한 최후의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임이 언니도 마지막 병상에 달려갔고 유골도 언니의 손으로 환국(還國)하게 되었습니다. 오 빠가 돌아가신 것은 1937년 4월 17일, 유해가 돌아온 것은 5월 4일의 일입니다. 그리하여 큰오빠의 스물여섯 해를 조금 더 산 파란 많은 일생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야릇한 것은 오빠가 죽기 하루 전날인 4월 16일 아버지와 큰아버지께서 한꺼번에 숨 을 거두어 우리 집안은 이틀 사이에 세 어른을 잃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빠는 아버지 와, 양부나 마찬가지인 큰아버지를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에 여읜 셈이지만 병이 하도 중태 라서 그 비보조차 듣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빠가 가신 지 서른 해가 된 오늘날 유물 중에서 가장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오빠의 미발 표 유고와 '데드 마스크'입니다. 오빠가 돌아가신 후 임이 언니는 오빠가 살던 방에서 장서 와 원고 뭉치, 그리고 그림 등을 손수레로 하나 가득 싣고 나갔다는데 그 행방이 아직도 묘 연하며, 오빠의 '데드 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 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니께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 쉽기 짝이 없습니다.  5월에 돌아온 유해는 다시 한 달쯤 뒤에 '미아리' 공동 묘지에 묻혔고 그 뒤 어머니께서 이 따금 다니며 술도 한 잔씩 부어 놓곤 했던 것이, 지금은 온통 집이 들어서 버렸으니 한줌 뼈나마 안주의 곳이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생전에 「삼촌석비(三寸石碑) 앞에 주과(酒果)가 없는 석상(石床)이 보기에 한없이 쓸쓸하다」던 오빠 자신은 석비는커녕 무덤의 자취마저 없으니 남은 우리들의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습니다.  「망령이 있다치고」어디메쯤 오빠 시비 하나라도 세웠으면 하는 나의 의욕은, 그러나 하루 의 생활마저 다급한 지금의 처지로서는 한갓 부질없는 염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964.12)  ========================================================== 서울 통인동 이상 생가     ... ...       [출처] [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 이상(李箱)|작성자 꿈꾸는자 [출처] 李箱의 막 행적|작성자 무전여행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신석정(1939) (1) 주제 : 현실적 갈등과 고통이 없는 평화의 세계, 이상향을 지향   (2)신석정(1907-1974))  전라북도 부안. 1931년 3호부터 동인으로 참여.  목가적(牧歌的)인 서정시를 발표. (1939), (1947), , ,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다.   (3)  1-4연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망 (비둘기) 5-8연   순결한, 순수한 삶에 대한 갈망 ( 양 ) 9-11연  보람 있는 삶, 풍요로운 삶에 대한 동경 (능금)   (4) 중심 소재 셋의 의미 - (비둘기) - 평화로운 삶, (양) - 선량한 삶, - (능금) - 보람, 풍요로운 삶 -‘평화와 순수 속에서만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다.’는 뜻   (5)  '능금'의 상징적 의미 - 일차적으로는 풍요로운 가을을 뜻하며, - 상징적 의미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 평화와 안식이 있는 풍요한 삶   (6) 어머니 - 평화와 안식의 세계를 상징, 대지(大地)의 모성(母性)을 상징, - 시 전체에 안정감을 주는 효과,  '나'에게 '그 먼 나라'를 제시해 주는 존재이다.   (7)  '그 먼 나라'의 이미지 - 이상향, 고요하고 한가로운 곳,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곳, 넉넉하고도 안락한 곳, 소박한 곳 등의 이미지   *참고< 전원시, 목가시> 신석정은 김동명, 김상용 등과 함께 전원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초기작인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같은 시들은 이러한 전원시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본래 전원시란 목동들이 부르는 노래로, 전원의 아름다움이나 단순하고 소박한 전원 생활을 예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양의 경우 이러한 전원시의 작자는 목동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목가시라고도 한다. 그러나 동양의 전원 문학은 대부분 농업 활동이 그 배경이 되며, 낙향한 선비가 주된 창작자였다. 이러한 전원 문학의 효시로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들 수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1930년대에 이르러 신석정, 김상용, 김동명 등에 의해서 이런 전원시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이 시들은 주로 도시를 떠난 전원의 소박하고 순수한 삶을 동경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일제의 군국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낭만적인 이상향으로의 탈출을 기도한 것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꽃덤불   ㉠태양(太陽)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 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내갔다.                                         (36년간의 식민지하 회상) 다시 우러러 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신석정(1946) (1) 주제 : 광복의 기쁨과 새로운 민족 국가 수립의 염원 (2) 참여시 성격 - 상징적, 서술적, 독백적 어조 - 감회에 젖은 회상적 어조, 기원의 어조. 비판적, 관조적 어조 (3) ㉠ 태양 - 광복, 해방 ㉡ 독립투쟁의 노력이 지하에서 이루어짐 ㉢ 달빛, 밤 - 암울한 식민지 상황 태양 ㉣ 식민지하의 조국, 민족의 피폐한 삶의 터전 ㉤ 애국지사의 죽음 ㉥ 탄압을 피하기 위한 도피와 유랑 ㉦,㉧ 회유와 압력에 굴복한 변절과 전향 ㉨ 이 하늘 - 불완전한 해방조국 ㉩ 겨울밤, 달은 아직 차고 -  좌·우의 이념적 대립(민족의 분열), 신탁통치(식민지 경영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바뀜) ㉪ 오는 봄 - 민족의 화해가 이루어질 것을 암시 ㉫ 꽃덤불 - 완전한 해방의 공간, 민족의 화합된 조국, 참된 자주국가     슬픈 구도(構圖)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 국권 상실의 절망적 현실 자각과 외로움     ㉡꽃 한 송이 피어 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 잃어버린 삶의 터전-불모성 강조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 국권 상실의 암담한 절망적 현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 하늘 별이드뇨.                       ▶ 절망적 상황에서의 별의 동경-구원의 염원   신석정(1939)   (1) 주제 : 참담한 조국의 현실과 독립에의 소망 절망감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함께 드러남. (2)‘슬픈 구도(構圖)’의 의미 -'슬픈 구도' = ‘슬픈 그림’ - 당시의 지구(인류) 현실은 제국주의를 부르짖는 강대국가들에 의해 약소국가, 민족들이 식민지화 되어 가고 있 던 불행하고 암울한 시대였다. - 시인은 식민지하의 조국의 현실, 인류의 현실을‘슬픈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3) 그림으로 표현된 지구의 모습은? - 화자‘나’, 어두운 밤하늘,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그 아래 푸른 산, 그 산은 꽃도, 새도, 노루도 없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불모의 땅이다.   (4)지구 -당시 전 세계가 제국주의에 의해 핍박받고 있음을 인식한 표현 (5) ㉠ 푸른 산 - 부정적인 이미지, 불모지의 땅. 죽은 자연의 모습이다. 식민지하의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삶의 터전   ㉡ 꽃 - 아름다운 세계 ㉢ 새 - 평화의 세계 ㉣ 노루 - 자유의 세계 --->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고, 노루가 뛰어노는 세계를 지향 ---> 화합과 평화와 자유가 있는 세계를 지향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 밤- 암담한 현실 ㉥ 무수한 별들 중에서 화자가 지향하는 별(광복,희망,이상세계)을 소망함 -->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함. 별에 대한 동경         신석정 辛夕汀 폰트확대| 폰트축소| 공유하기|   인쇄 미리보기| 문의   출생 1907. 7. 7, 전북 부안 사망 1974. 7. 6 국적 한국 요약 주로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시를 썼다.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공부했으며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5년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을 펴냈고, 1970년 마지막 시집으로 〈대바람 소리〉를 펴냈다.  그는 노장의 철학과 도연명에 경도돼 반세속적이며 자연성을 강조하는 시풍을 갖게 됐으며 특히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경어체를 많이 썼다. 김기림은 그를 '현대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목가적 시인'이라 평가하였다. 그의 시는 비참하고 암울한 시대상황에 대한 초월적 거부의 방향으로 나아가 목가적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목차 펼치기 신석정 신석정, 1934년 10월 김기림과 함께, 석정문학관 소장,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 개요 1930년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고, 주로 전원적인 시를 썼다. 특히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경어체를 많이 사용했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 釋靜·石汀), 필명은 소적(蘇笛)·서촌(曙村). 생애와 활동 원본사이즈보기 신석정 신석정 생가, 석정문학관 내,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1930년 서울로 올라와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박한영의 가르침을 받아 1년 동안 불전을 배웠으며, 이때 회람지 〈원선 圓線〉을 편집했다. 6·25전쟁 뒤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냈고,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5년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가르쳤다. 1961년 김제고등학교 교사, 1963년부터 정년퇴직할 때까지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문학세계 원본사이즈보기 신석정 신석정, 비사벌초사에서 부인 박소정여사와 단란하던 한 때(1970), 석정문학관 소장,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 1924년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시 〈기우는 해〉를 발표한 뒤, 〈선물〉(시문학, 1931.3)·〈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문예월간, 1932.1)·〈봄의 유혹〉(동방평론, 1932.7~8) 등 초기에는 목가적인 전원에 귀의하여 생(生)의 경건한 기쁨과 순수함을 노래했다. 그뒤 잡지 〈시원〉·〈조광〉 등에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을 펴냈고, 1947년 2번째 시집 〈슬픈 목가〉를 펴냈다. 시집 〈슬픈 목가〉는 1935~43년에 쓴 시 33편으로 꾸며졌다. 6·25전쟁 이후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밖에 시집으로 〈빙하 氷河〉(1956)·〈산의 서곡〉(1967)·〈대바람 소리〉(1970) 등을 펴냈는데, 이중 〈산의 서곡〉은 이전의 시풍과 달리 현실과의 갈등을 노래한 시들로 꾸며졌다. 저서로 〈중국시집〉(1954)·〈매창시집〉(1958)과, 이병기(李秉岐)와 함께 펴낸 〈명시조감상〉(1958) 등이 있다. 1958년 전라북도문화상, 1968년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원본사이즈보기 신석정 석정문학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  
319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백석 - 고향 댓글:  조회:4482  추천:0  2015-12-11
  시인 백석이 노래한 ‘고성가도固城街道’     세계의 명작이라고 하는 문학작품은 거의가 작가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하여 소설이나 시의 형식으로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자크의 이나 스탕달의 이나 헤르만 헤세의, 예이츠의 등에서 보듯 실제로 그렇다. ​   ​ ​   그런 면에서 고찰해 보면 이 지구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백석만큼 자신의 고향을 노래한 시인도 드물다. 유년시절 저절로 듣고 익혔던 고향의 사투리로 고향의 맛깔스런 음식과 고향의 풍속과 고향의 산천을 시로 노래한 시인도 아마 백석을 따라올 시인은 드물 것이다. ​ 시인이 사랑했던 여인들 ​   백석의 유명한 시에 나오는 ‘나타샤’는 ‘자야’란 여인으로 알려져있다. 백석과 한때 동거했던 여인으로 2010년 3월 11일에 열반한 ‘무소유’의 법정스님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하여 길상사란 절을 짓게 한 김영한 여사가 바로 이 시에 나오는 ‘자야’다.   ‘자야子夜’는 본래 중국의 진나라 여성의 이름인데 그녀가 만든 노래가 애조를 띠고 있었으므로 이런 형식의 노래를 ‘자야가’라고 했다. 자야는 당시 사랑했던 여인의 대명사였던 모양이다.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야를 사랑해서     노늘밤은 폭폭 눈이나련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폭폭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사와 나는     눈이 폭폭 쌓이는밤 힌당나귀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마가리에살쟈     눈은 폭폭 날리고     나는 나탸사를 생각하고     나탸사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운 폭폭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알 응알 울을 것이다     - 《여성》3권 3호(1938.3)에 발표        (당시 표기한 그대로 게재) ​ ​ ​   ‘자야’를 만나기 전에 백석이 운명적으로 만났던 또 다른 한 여인이 있었다. 통영의 ‘난’이란 여인이었다.   ‘난’은 누구였기에 백석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난’은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다고 한다. 백석 자신도 새카만 머리털이 가늘고 부드러우면서 속눈썹이 길게 자란 큰 눈이 아름다우며 약간 높은 코가 잔등선이 부드럽게 내려와 보기가 좋고 키도 중키요 어깨며 다리며 균형 잡힌 체격으로 세종로를 걸라갈라치면 참 멋이 질질 흐르는 당대의 미청년이었다. 같은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던 여류시인 노천명이 백석에게 핑크빛 눈길을 주었던 것도 그만큼 백석이 잘났기 때문일 것이다.   백석은 북쪽 끄트머리 평북 정주 태생으로(본명은 백기행 1912∼1995) 남쪽 끄트머리인 고성과는 별스런 인연이 없었을 것인데도 백석은 그의 많지 않은 시 중에서 ‘남행시초’라는 부제로 란 흔치 않은 지명으로 된 시를 남겼다.   가 세상에 나온 것은 순전히 통영의 사랑했던 여인과 백석의 관계 때문이다. 백석의 통영에 얽힌 사연과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935년 6월 백석은 조선일보사 동료인 신현중의 여동생 신영순(당시 교사) 백석의 절친한 친구 허준(평북 용천 출신의 소설가)의 혼인 기념 축하모임에서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이화고녀 학생이었던 통영여자 난(본명은 박경련)을 만나 백석은 흡사 전기에 감전이라도 먹은 듯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다. 난은 신현중의 누나인 신순정이 통영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의 제자였으니 신현중과는 자연스레 잘 아는 사이였다. 신순정이 포천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이화고녀를 다니던 난은 옛 스승 댁을 자주 드나들었고 허준과 결혼하는 신현중의 여동생과는 가족처럼 지내었기에 혼인 축하모임에 참석을 했던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면 용감해지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던가. 백석은 친구 허준 내외의 통영 신행길에 허준의 처남인 신현중과 함께 따라나선다. 친구도 친구지만 필시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된 여인(박경련)과 그 여인을 낳은 통영과 장차 처갓집이 될지도 모를 그 여인의 집을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그는 첫 통영 나들이 길에서 시이란 시를 썼다.   넷날엔 統制使가이었다는 낡은港口의처녀들에겐 넷날이가지않은 千嬉라는이름이많다.   미억오리같이말라서 굴껍지처럼말없시 사랑하다가죽는다는   이千姬의하나를 나는어늬오랜客主집의 생선가시가있는 마루방에서맞났다.   저문六月의 바다가에선조개도울을저녁 소라방등이붉으레한마당에 김냄새나는비가날였다.      -《조광》1권 2호 (1935.12)에 발표 ​   시에 나타낸 ‘천희’라는 이름이 통영 지역에는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통영에서 느낀 처녀의 이미지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것인데, 겉으로는 통영 처녀들에 대해서 말하는 듯하나 사실은 난을 향한 백석 자신의 애틋한 사랑 그 자체라고 하겠다. 애틋한 가슴앓이로 그는 “천희의 하나”인 난을 통영에서 만났다. 백석의 나이 스물네살. 난은 봄꽃 같은 스무 살이었다.   1936년 1월 초순 백석은 신현중과 함께 난을 만나러 다시 통영으로 간다. 가기 전 전보를 쳤다. ‘만나러 간다. 조선일보 백석’ 난은 전보를 받고 처음에는 백석이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백석이 결혼 피로연에서 만난 사람인 것을 알고 난은 난처했다. 백석의 관심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기에 전보를 어머니 서말수에게 알렸더니 그녀는 “도적놈이 온다.”고 펄쩍 뛰었다고 한다. 난은 서둘러 상경을 하면서 사촌 오빠인 서병직에게 부탁을 한다. “오빠! 내다 가고 나면 시인 백석이란 분이 올낀데 잘 대접해 주이소.”   난은 통영에서 배를 타고 마산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고 백석은 대구, 삼량진을 경우해 마산에 이르고 마산서 배로 통영에 닿았다. 서로 길이 엇갈린다. 백석의 상실감이 어떠했을지 쉬이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 두 번째 통영 나들이에서 통영의 풍물과 난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과 절절한 사랑을 백성 특유의 긴 음색과 호흡으로 노래한 시가 지금 통영시 명정동 충렬사 앞에, 백석이 난을 만나보려고 서성거렸음직한 길모퉁이 여백에 시비로 서 있다. ​ ... ▲ 백석 시비​ ​     舊馬山의 선창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잘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파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山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가웃하는 처녀는 錦이라든이 같고     내가 들은 馬山 客主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같고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 산다는데     明井공은 산을 넘어 冬柏나무 푸르른 甘露 같은 물이 솟는 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약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冬柏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冬柏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넷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조선일보》1936년 1월 23에 발표, ‘南行詩抄’라는 부재가 있음 ​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배에서 내려 보고 싶은 사람을 빨리 만나려고 간창골을 지나 서문고개를 급히 넘어가는 백석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왔으나 떠나고 없고 대신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을 것 같은 그녀의 집과 동네를 기웃거리며 충렬사 입구 돌층계 계단에 앉아서 시를 쓰고 있는 백석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럼 시는 어떤 사유로 세당 밖으로 나오게 됐을까? 먼저 란 시를 음미해 보자       고성固城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른하지 않는 마을은     해바른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였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운 건반밥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     고성가도 - 백석     - 《조선일보》(1936. 3. 7) ​ ​   ​   백석은 친구 허준의 통영 신행길에 따라갔다가 난을 만난 이후 1936년 1월에 다시 통영에 내려왔으나 서로 길이 어긋나 만나지 못했음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 후 백석은 다시 통영에 내려와 난의 어머니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게 된다. 아마 친구 신현중도 함께 동행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때가 1936년 봄이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의 시에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였구나”라는 구절에서 알 수가 있다. 이 구절을 또한 이 시의 압권이다. 백석은 통영에서 신현중의 친구인 서병직의 도움으로 청혼을 하게 되어 기분이 좋아 술을 마시고 통영 밤바다를 배를 타고 유람을 한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고성에서 삼천포를 거쳐 진주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하는 코스를 택한 듯하다.   는 백석이 통영에서 청혼을 한 후 고성을 지나가면서 쓴 시다. 그날이 고성장날 이었던 같다. 봄날의 날씨가 너무나 화창하여 해고 하늘 높이 둥둥 떠 있는 마을에는 개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한적한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양지바른 마당에는 방석 위에 맷돌이 놓여있고 햇살에 눈이 부시도록 고운 건반乾飯밥(세반細飯-찐 찹쌀을 말리어 튀겨 대강 빻은 가루 또는 잔치에 쓰는 약밥)과 산과 마을에 지천으로 핀 빨간 진달래와 노란 개나리가 서로서로 색감을 뽐내고 있다. 건반밥이 빨갛고 노랗다기보다 지천으로 핀 진달래와 개나리로 인해 건반밥이 빨갛고 노랗게 보였을 것이다.   건반밥을 고성에서는 통칭 ‘꼬드밥’으로 불렀다. 꼬드밥은 찹쌀을 시루에서 찐 밥으로 술을 담기 위해 덕석에 말리는데 배고픈 아이들이 오다가다 이 꼬드밥을 주인 몰래 한주먹 먹다가 들켜 혼나기도 한 밥이다.   백석은 햇살에 건반밥울 말리는 것을 곧 있을 잔치를 위한 것이고 잔치하는 사람들의 신명과 흥을 돋우기에 즐거운 거이라 했다. 흐믓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건반밥을 말리는 그 마을에는 또 당홍唐紅(약간 자줏빛을 띈 붉은색)치마와 노란 저고리를 입은 갓 시집온 새아가씨들이 신혼의 즐거움에 흠뻑 젖어서 웃고 살고만 있을 것 간다고 했다. 참으로 멋진 전개다. 잘 그려진 한 폭의 봄날을 풍경을 보는 듯하다. ​ ​ ​   이 시를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백석의 일행이 차를(당시에는 목탄차였음)타지 않고 통영에서 걸어서 고성으로 왔다는 느낌이 든다. 차를 타고 왔다면 “개 하나 얼른하지 않는 마을은/해바른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와 같은 풍경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을은 어디였을까? 아마도 월평리였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통영에서 고성으로 오자면 마을다운 마을은 월평리가 아니었을까. 1936년대의 월평리 마을 풍정을 마치 사진 찍듯이, 그러면서 그곳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긍정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백석 ​   난과 백석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1936년 12월 백석은 친구 허준과 함께 통영을 방문하여 박경련과의 혼인할 뜻을 전한다. 백석이 다녀간 뒤 1937년 3월 중순경 난의 어머니는 서울에 살고 있는 통영의 거물급 인물인 친오라버니 죽사竹史 서상호를 만나 외동딸의 혼사 문제를 상의하려고 상경한다. 백석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서상호는 그가 아끼고 신임하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조선일보사 동료인 백석의 집안 내력이니 사람 됨됨이를 수소문한다.   그러나 믿는 도끼레 발등을 찍힌다고 했던가. 시현중은 친구 백석에 대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전함으로 인해 혼사는 깨어지게 된다.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말을.   백석의 친구 신현중은 그런 정보쯤은 숨겨줄 만도 했을 것이나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 자신이 난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백석과 난의 혼사가 깨어진 그 자리에서 신현중이 대뜸 서상호에게 자신이 사윗감으로는 어떠냐고 묻는다. 서상호는 평소 신현중을 아껴왔기에 단박에 승낙을 하게 된다. 1937년 4월 7일에 결혼을 했으니까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월 먹듯한 결혼이었다.   백석은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훗날 그 소식을 접한 백석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때의 심경을 난(박경련)은, “워낙 급하게 치러진 결혼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나는 그때 신현중 씨나 백석 씨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여기까지가 통영과 백석과 난과의 사이에 얽힌 사랑 이야기다. ​ ​   ​   우리나라 시문학사에 있어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백석은 훗날 못다 이룬 사랑과 믿었던 친구에 대한 배신과 아픔을이란 시를 통해 더러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더러는 분노와 섭섭함으로, 더러는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으로 담담히 밝혀 놓았다. ​ [출처] 시인 백석이 노래한 ‘고성가도固城街道’ /고성여행/고성 가볼 만한 곳|작성자 쇳디   고향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귀신이 제 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옛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귀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괸 수선화 한 폭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 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냇내 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의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워놓아야 하겠습니다.   밤이 아직 샐 때가 멀고 또 복밥을 먹을 때도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바느질그릇이 있는 데로 가서 무새헝겊이나 얻어다가 알록달록한 각시나 만들면서 이 남은 밤을 당신께서 좋아하실 내 시골 육보름밤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육보름으로 넘어서는 밤은 집집이 안간으로 사랑으로 웃간에도 맏웃간에도 누방에도 허청에도 고방(광)에도 부엌에도 대문간에도 외양간에도 모두 째듯하니 불을 켜놓고 복을 맞이하는 밤입니다, 달 밝은 마을의 행길 어디로는 복덩이가 돌아다닐 것도 같은 밤입니다. 닭이 수잠을 자고 개가 밥물을 먹고 도야지 깃을 들썩이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새 옷을 입고 복물을 긷는다고 벌을 건너기도 하고 고개를 넘기도 하여 부잣집 우물로 가서 반동이에 옹패기에 찰락찰락 물을 길어오며 별 같은 이야기를 재깔재깔하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또 복을 가져오느라고 달을 보고 웃어가며 살기같이 여우같이 부잣집으로 가서는 날쌔기도 하게 기왓골의 기왓장을 벗겨오고 부엌의 솥뚜껑을 들어오고 곱새담의 짚날을 뽑아오고……. 이렇게 허물없는 즐거움 속에 끼득깨득하는 그들은 산에서 내린 무슨 암짐승들이 되어버리는 밤입니다.   그러다는 집으로 들어가서 마음 고요히 세 마디 달린 수숫대에 마디마다 콩 한 알씩을 박아 물독 안에 넣는 밤인데, 밝은 날 산 끝이라는 웃마디, 중산이라는 가운데 마디, 해변이라는 밑마디의 그 어느 마디의 콩이 붇는가를 보고 그 어느 고장에 풍년이 들 것을 점칠 것입니다.   그러다는 닭이 울어서 새날이 되면 아홉 가지 나물에 아홉 그릇 밥을 먹으며, 먹으면 몸 쏠쐐기가 쏜다는 김치와, 먹으면 김 맬 때 비가 온다는 물을 자꾸 먹고 싶어 하는 밤입니다.   이렇게 해서 육보름의 아침이 됩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해뜨기 전에 동리 국수당의 스무나무가지를 쪄오래서 가시가시에 하이얀 솜을 피우고, 그 솜밭 속에 며칠 앞서부터 스물이고 서른이고 만들어놓은 울긋불긋한 각시와 새하얀 할미를 세워서는 굴통담에 곱새담에 장독담에 꽂아놓는데, 이렇게 하면 이 해에는 하루같이 목화밭에서 천근 목화가 난다고 믿는 그들의 새 옷 스척이는 소리도 좋게 의좋은 짝패들끼리 끼리끼리 밀려다니며 담장마다 머물러서는 목화 따는 할미며 각시와 무슨 이야기나 하는 듯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닭이 우나?) 아 닭이 웁니다. 나는 이만 이야기를 그치고 복밥을 기다리는 얼마 아닌 동안 신선과 고사리와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이나 생각하겠습니다.     *육보름날- 음력으로 매월 열엿새 날. (이 글에서는 정월 대보름 다음날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 *웃간- 윗방  *맏웃간- 가장 위쪽에 있는 방 *누방_ 다락방 *살기- 삵괭이 *곱새담- 풀, 짚으로 엮어서 만든 담 *솔쐐기-송충이 *스무나무-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굴통담- 굴뚝담 ********************************************************************************   백석  1912∼1963. 시인. 본명은 기행(夔行).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 ‘白石(백석)’과 ‘白奭(백석)’이라는 아호(雅號)가 있었으나, 작품에서는 거의 ‘白石’을 쓰고 있다.  1929년 정주에 있는 오산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8·15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함흥 소재)· 여성사 · 왕문사(旺文社, 일본 동경) 등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였다. 한때 그는 북한에 남아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치가 않다. 백석은 그 시대 어느 문학 동인이나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을의 유화(遺話)〉·〈닭을 채인 이야기〉등 몇 편의 산문과 번역소설 및 논문을 남기고 있으나, 그는 실지로 시작 활동에 주력하였다. 1936년 1월 33편 시작품을 4부로 나누어 편성한 시집 ≪사슴≫을 간행함으로써 그의 문단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기까지 60여 편 시작품을 그가 관여했던 ≪여성≫지를 위시하여 당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분단 이후 북한에서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한마디로 백석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그 마을에 전승되는 민속과 속신(俗信) 등을 소재로 그 지방 토착어(土着語)를 구사하여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과 철학의 단면을 제시한 것이다. 어린 시절로 회귀하여 바라다보는 고향은 대개 회상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상투이지만, 백석은 그 체험조직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의 어린 눈에 비쳐진 고향의 원초적인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환기되는 정서의 순화를 의도하고 있다. 그는 마을의 민속이나 속신 같은 것을 재현시키면서도 자신의 감정이나 주관의 개입 없이 언제나 객관적인 입장에 섰다.  그 마을 자연과 소박한 주민들의 원초적인 ‘삶’의 리얼리티를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이룩한 이런 시적 성취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新文學思潮史(現代篇)(白鐵, 白楊堂, 1949), 白石詩全集(李東洵 편, 創作社, 1987), 白石全集(김학동, 새문社, 199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子夜 김진향 여사의 회고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26세, 내가 스물 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 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함흥 교사시절 그는 하숙을 했고, 나도 하숙생활을 했다. 영생학교는 반룡산 밑에 있었고, 그의 하숙은 학교에서 한 오 리쯤 떨어진 함흥 근교 중리(中里)라는 곳에 있었다. 그때 나는 함흥 히라다 백화점에 볼일이 있어서 갔었던 것이다. 그의 첫 인상은 외국 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 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뜨끔하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늦은 밤이면 반드시 내 하숙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때 하숙집 부근 길목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곳 진열대에는 젊고 예쁜 여자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앞에만 오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마치 '당신 밖의 아무 여자도 나는 싫소.'라는 뜻을 나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어느 날 내가 서점에 들렀다가『당시(唐詩)선집』하나를 사왔는데, 백석은 그 책을 한참 읽고 나더니 문득 나에게 '子夜(자야)'란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자야'란 물론 당나라 시인 이백의「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는 중국 동진의 한 여인 '자야'라는 이가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간 남편과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 노래이다. "長安一片月 / 萬戶 衣聲 / 秋風吹不盡 / 總是玉關情 / 何日平胡虜 / 良人罷遠征"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37년 늦가을이었다. 그는 어느 날《여성》잡지 한 권을 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왔다. 그는 책을 뒤적뒤적하더니 한 곳을 펼쳐 코밑에 쑥 들이밀었다. 보니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바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작품 아래쪽에는 한 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빈 백사장에서 우두커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를 읽다가 문득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 당신이 이야기를 귾는 것만 같구려" 란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대뜸 말꼬투리를 잡아 "내가 끊긴 무얼 끊어요?" 했더니 그는 "밤낮 날더러 장가들라고 했잖았소!" "당신 머릿속에서는 지금도 나를 떠나라 하고 있지?" "왜 내 말이 잘못되었소?"라며 연거푸 정색을 하고 빠른 말로 말했다. 사실 나로서도 그런 말 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나는 그에게 장가들기를 권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백석 어머니는 그때 쉰이 넘어서 손자 없는 것을 늘 허전하게 여겼다고 한다. 겨울방학이 되어 백석은 서울 그의 부모 슬하에 가서 여러 날 있다 오게 되었다. 불과 며칠을 서로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함흥으로 줄곧 편지를 써 보내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배달되어 오는 것처럼. 편지글은 다정다감한 문체였으며 '오늘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오….' 라는 식의 하루 일과를 모두 깨알같이 써서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지가 뚝 끊어지더니 열흘 정도 소식이 없었다. 몹시 궁금히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에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부모가 하도 맞선을 보라 해서 맞선을 보았다는 것과 그게 가책이 되어 편지를 못 내었노라는 내력을 말했다. 그는 평소 부모 말씀을 퍽 두렵게 여기는 듯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도 부모가 새악시 선을 보라 하면, 그는 그것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런 성품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운했다. 나는 속으로 '흥, 그대가 총각이라지…. 야,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그래, 내가 피해줄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편지가 끊어진 그 열흘 동안 맞선만 본 게 아니라 초례(醮禮)까지 치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장가든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 나에게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시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위가 너무도 야속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이불이랑 짐 보따리를 꾸려서 낮 11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아주 내려와 버렸다. 193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청진동에서 11칸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動)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내 가슴은 사뭇 그리움으로 두근거려 왔다. 부리나케 그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해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오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含怨(함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출근하기 위해 밤차로 함흥으로 떠났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그해 초여름, 서울에서는 전선(全鮮)고교대항축구대회가 열렸는데,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하고 서울에 나타났다. 약 한 주일가량 출장인 것 같았는데, 그는 오던 첫날만 학생들을 연습장에 데려다주고는 줄곧 나의 청진동 집에서 기거하다시피 했다. 내가 "학교 아이들은 안 돌보고 왜 자꾸 여기만 계셔요?"라고 재촉도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떼를 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녔다. 이들 중 몇몇이 서울 학생지도 합동단속교사에 적발되었고, 교사는 학생들을 힐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 학생이야?" "함흥 영생고보입니다." "서울은 무슨 일로 왔지?" "축구시합에 출전하러 왔습니다" "인솔교사는 어디 갔어?" "몰라요, 저희들도 오던 날 운동장에서 한 번 뵌 후론 다시 못 만난걸요." 일이 이렇게 되자, 함흥 영생학교는 온통 벌집 쑤신 듯하였고, 특히 고참교사들 노여움은 대단하였다. 당시 영생학원 이사장으로 있던 이 모 씨는 평소 학교일에 매우 열성적이었던 백석을 퍽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다른 교사들 보기에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라 해서, 같은 영생학원 계열 여학교로 전보 발령을 했다. 그 난감한 경황을 무릅쓰고, 백석은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 영생 여고보에서 한 학기인가를 근무했다. 방학 때 다시 서울에 왔었는데, 그때 이미 함흥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그는 사표를 써서 우편으로 부쳤다. 그런 며칠 뒤에 조선일보 출판부 옛 직장에서 나와 달라는 연락이 왔고, 이로부터 백석의 서울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함흥 영생학교시절 아동문학가 강소천과 목사 김관석이 백석에게 영어를 배웠다. 지난날 함흥에서 거주한 적이 있는 시인 이기형은 그 무렵 백석이 '함흥 최고 멋쟁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백석은 한 평범한 교사에 불과했지만, 이미 시집『사슴』을 내어 문학적 명성이 높았던 터라, 그는 함흥 문학 지망생들의 詩 뿐만 아니라, 습작소설까지도 자상하고 꼼꼼하게 지도해주었다고 한다.   백석과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시절은 그가 교사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詩「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친구와 이 집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꼬리곰탕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식당 안방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옛 청진동 시절 추억에 젖었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우리 둘은 참으로 행복하였다. 워낙 서로 만족하였고, 아무런 빈틈이 없었으며, 오직 서로에게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밖에 아무런 것에도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늘 나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려고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어떤 일에도 절대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불편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단정한 젠틀맨이었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비록 밖에서 화난 일이 있었어도 혼자 가만히 참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언제 화를 내고 있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말수도 적었고, 어떤 때에도 남의 결점을 화재로 떠올리는 법이 없었다. 이런 그의 성격을 까다로운 편이라고 할까.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조차 누구에게 신세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때 청진동 집에는 늘 와서 부엌일을 보고 잔심부름도 해주는 찬모가 있었는데, 나는 그가 찬모에게 무엇을 시키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처럼 말수가 적던 백석도 일단 시에 관한 화제로 옮겨지면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요절한 일본작가 아꾸다까와(芥川龍之介)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또 다른 일본 문인들 이야기도 재미있게 했던 것 같다. 내가 문학을 모르니 다만 웃기만 하고 들을 뿐,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무렵 《삼천리(三千里)》지에 두어 편의 수필을 필명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종로 네거리 한청빌딩 부근에서 과일 파는 상인들의 밤 풍경을 쓴 것인데, 나의 글이 실린 책이 나오던 그날은 하루 종일 함박눈이 펑펑 왔다.) 일본 문인들을 화제로 떠올리긴 했지만, 그는 일본말 쓰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일찍이 일본 유학도 다녀왔으니 일본말도 잘했을 것이나, 그는 일본말을 써야 할 때, 거기에 바꿔 쓸 수 있는 우리말을 애써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담화 때는 주로 표준말을 썼지만, 그의 억양은 짙은 평안도 말씨였다.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그는 야릇한 고향 사투리를 일부러 강하게 쓰는 습관이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천정을 '턴정' 정거장을 '덩거장', 정주를 '덩주', 질겁을 '디겁', 아랫목을 구태여 '아르궅' 따위로 쓰는 식이었다. 그의 식사 공궤(供饋)는 매우 수월한 편이었다.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들었지만, 육류보다는 나물반찬을 비교적 더 좋아했다.   한번은 함께 시내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푸줏간 앞을 지나는데, 그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하고 말했다. 정말 그는 푸줏간을 제일 질색했다. 함께 살면서 보니 그에겐 이처럼 드러나 보이는 이상한 습관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집 안방 창문을 여닫을 때도 그는 잠금쇠 만지기를 피하여 손이 잘 닿지 않는 창문틀 위쪽이나 아래쪽을 겨우 밀어서 여닫곤 했다. 한번은 함께 전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길이었다. 전차가 길모퉁이를 돌 때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그때까지 머리 위 손잡이를 불결하다며 아무것도 잡지 않고 그냥 서 있던 그는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창유리에 갖다 대면서 몸의 중심을 유지했다. 또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와 악수하고 난 뒤에는 곧 그가 눈치 채지 않게 수도간으로 나와 꼭 비누로 손을 씻곤 했다. 보다 못한 내가 몇 차례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수건을 달랄 때 일부러 안 주곤 했더니, 그 뒤 그 습관만큼은 조금 고쳐진 것 같았다.   그는 각별히 즐기는 취미나 오락은 없었다. 술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경음가(鯨飮家)는 아니었고 오히려 애주형에 가까웠다. 책으로는 모리악의『예수전』, 중국작가 변윤(邊潤)의 『요불이전(了不以前)』을 즐겨 보았으며, 심심할 때면 잡지《문에춘추》를 보거나 일본시집을 뒤적거릴 정도였다. 그 목소리는 참 다정스럽고 부드러웠으며, 청으로서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내가 아는 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집에 빅터상표의 고급 유성기가 하나 있었지만 한 번도 거기에 손대는 걸 못 보았고, 가요 · 창극 같은 데도 무관심했다. 그 무렵《조광》지가 요청해온 설문란에 그가 자신의 취미를 '西道唱(서도창)'과 '타이프라이팅'이라 쓴 것을 보았는데, 이 '서도창'이 직접 부르는 걸 말하는 것인지 소리꾼 노래를 듣는 걸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다만 말없이 묵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러다가는 잡지보고, 시집보고…. 하였을 뿐이다. 그의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무렵 청진동으로 그에게 부쳐져오던 편지 겉봉에는 '백기연(白基衍)'으로 씌어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가 몹시 기뻐하던 모습을 꼭 한번 본 적이 있다. 언젠가 내가 시내 본정(명동의 일제 때 이름) 부근엘 나갔다가 상점 쇼윈도에서 넥타이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얼핏 그것이 백석에게 매우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사와서 드렸더니 그 얼굴 표정에는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튿날 그는 내가 사온 넥타이를 매고 출근 했는데, 저녁때 와서는, "여보, 오늘 ××를 만났는데, 이 넥타이 참 좋데" 라고 했다. 그는 그 뒤 여러 날 동안 줄곧 그 넥타이만 매었고, 퇴근 후에는 예의 그 말을 꼭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제 그 소리 오늘 또 하네. 어쩌면 그게 그렇게도 좋을까' 했지만, 내심 그 말이 듣기에 즐거웠다. 이 넥타이 이야기는「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시에서 "언제나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백석은 사람을 만나 그가 먼저 주도해서 교제를 이끌어간다거나, 누구를 새로 사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 백석이나 그의 시에 홀딱 반해버린 사람이 아주 그에게 제 스스로 엎어져오기 전에는 도무지 사교 능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얼른 보기에 무심한 편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중에서도 함대훈, 허준, 정근양, 그리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조○○는 비교적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다.   도쿄 외국어학교 노어과를 나온 일보(一步)함대훈은 황해도 풍천 출생 노문학자로서 소설도 몇 편 썼다. 그는 조선일보 출판부 주임으로 있었으며, 편집국장을 지낸 함상훈과 형제지간이었는데, 괄괄한 성격에다 대단한 호주(豪酒)였다. 당시 그는 청운동에 살았는데, 우리 청진동 집에 가장 자주 놀러왔던 백석 친구였다. 나중에는 그가 아무 때건 불쑥 찾아오는 것이 너무 싫어서, 내가 백석에게 "함대훈 씨가 싫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당신이 좋다고 하던걸" 하면서 꼭 친구와 나를 함께 두둔하곤 했다. 그래도 줄곧 내가 못마땅한 얼굴로 "함씨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에요?"하면 "아냐, 그는 정말 당신이 좋대"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함대훈은 그때 무슨 잡지를 만들던 최남주 여동생 최옥희와 열애에 빠져 있었다.   평안도 용천 출신 소설가 허준은 1935년 10월 조선일보에 시「모체(母體)」를 발표하면서 백석과 비슷한 시기에 문단에 나왔는데, 이듬해《조광》지에「탁류」란 단편소설을 쓴 뒤 아주 소설 쪽으로 돌아섰다. 백석과는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서로 심지(心志)가 꽤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그는 낙원동에 살면서 자주 왔었는데, 매우 큰 체격으로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으며, 술을 좋아했다. 백석이 허 씨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시까지 쓴 걸 보면, 그와 남다른 우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사로서 문필생활을 겸하던 정근양, 그는 앞서도 말한 바처럼 백석과 조선일보 장학생 동기였고 청진동 집에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났을 때, 정도 서울을 떠나 북지(北支)산서성 임분현이라는 곳에 가서 병원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한 사람 친구는 서울 어느 중학 영어선생을 하던 조○○였다. 그는 우리 집에서 놀다 밤이 늦어 돌아갈 때면, 그때마다 우리를 앞에 세워놓고 "그대들 둘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인고…." 하면서 부러운 듯 말했다. 사실 백석과 나는 서로 다른 기질 때문에 오히려 잘 맞았는지 모른다. 한쪽이 뾰족한 성품이면 다른 한쪽은 좀 둥글둥글한 것이 인간관계의 조화가 아닐까.   그밖에 백석과 평소 가까이 지냈던 이들은 문학평론가 백철이 있다. 그는 백석보다 네 살 위였지만 동향선배로서 친밀하게 지냈고, 함흥 영생학원에도 한때 같이 있었다. 1935년 시집『사슴』이 나온 직후, 서울 태서관에서 가진 출판기념회 발기인 명단 이름들은 몇몇을 빼곤 대부분 백석과 조선일보에 함께 몸을 담고 있던 문인, 화가들이었다. 또 그들은 대개 백석의 시를 남달리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안석영(安夕影)은 서울 토박이로 본명이 석주(碩柱)였다. 일찍이 1921년 나도향(羅稻香)의 동아일보 연재소설『환희』삽화를 그렸던 그는 한국 삽화계 선구자이다. 30년대 중반 안 씨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는데, 워낙 잘생긴 얼굴에 다재다능하여, 나중에는 언론계를 떠나 전적으로 영화에만 몰두하였다. 백석보다는 11년 위였는데, 서로 각별히 따르고 위하였다.   김규택(金圭澤)은 웅초(熊超)란 호를 가졌던 분으로,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나와 역시 조선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던 화가였다. 일본 호세이대학 불문과를 나온 여천(黎泉) 이원조(李源朝)는 경북 안동사람으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아우였는데, 그때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 언제나 한복차림이던 그는 늘 자신이 양반고장 사람임을 자랑삼아 말했고, 그것을 날마다 들어온 사람들은 "여보, 그 양반타령 좀 작작허우"하며 싫은 소리를 하였다. 깔깔한 샌님 같던 그도 일단 술이 취하면 주사(酒邪)가 대단해서 모두들 슬금슬금 뺑소니치는 모습이었다. 함경도 출신 시인 편석천(片石村) 김기림은 백석보다 4년 위였는데, 그도 일찍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사슴』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즉시 서평을 써줄 정도로 그는 백석 시를 좋아했다.   정현웅은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작품「여인상」이 특선으로 뽑힌 서양화가로서 당시 백석과 함께《여성》지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잡지 삽화로 백석 프로필을 그리면서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스케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얼굴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삽화 말을 썼다. 한편 백석이 평소에 문학적 재능을 자주 칭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동문학가 강소천이다. 용률(龍律)로 함남 고원 태생인 그는 백석보다 불과 3년 밑이었으나, 만학으로서 백석에게 직접 문학을 배운 제자였다.   1939년 서울 명동입구 미도파 건너편에 '제일다방'이라고 있었다. 이 다방은 당시 경성일보 학예부에 있던 일본인 기자 기쿠지(菊池)의 아내가 경영하던 곳으로, 이른바 재경(在京)문인 예술가들 아지트였다. 언제 어느 때건 가보면 낯익은 문인 몇몇은 꼭 눈에 띄었다. 공작새 꽁지깃으로 장식한 세련된 실내장식에다, 이름 있는 유화도 여러 점 운치 있게 걸려 있는 꽤 분위기 있는 다방이었다. 한 번은 그곳으로 오라는 전갈이 와서 가보니 백석은 함대훈, 백철 등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정쩡하게 합석이 되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양인은 번갈아가며 내 얼굴이 예쁘다느니 어떻다느니라는 말을 자꾸 거듭하여 면전에서 몹시 난처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백석은 혼자 웃고만 있었다.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난 뒤에 길에서 허준, 정근양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도 "김(金)은 어째 갈수록 예뻐져?" "백석이 장가를 두 번씩이나 들고도 곧장 도망 나온 까닭을 인제야 알겠구먼."이라고 큰소리로 떠들어 그때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 적이 있다.   1939년 유월 어느 아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석은 그날 충청도 진천으로 한 주일 가량 출장을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여자 육감으로 그가 먼젓번처럼 필시 장가들러 가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약속한 한 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번에도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틀림없이 돌아오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달갑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차디찬 성질, 그리고 나를 향한 열정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청진동 집에서 조선일보까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는 찾아가기는커녕 전화 한 번 조차 걸지 않았다. 점차 매섭게 타오르는 내 가슴속의 독(毒)과, 또한 내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내 성격을 백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또 몹시 초조하게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없는 빈방에 혼자 남아서 무척 공허한 심정이 들었고, 내 가슴 속의 공허감은 차츰 매몰찬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매몰찬 복수라는 게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기껏해야 연전에 내가 몰래 함흥을 빠져나오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서 한동안 멀리 떠나 있고자 했던 것뿐이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채로…. 웬만한 살림을 대충 챙겨서 나는 명륜동 언덕으로 숨어버렸다. 지금 성대 뒤쪽이었는데, 1930년대 후반 그곳 부근 앵두나무, 능금나무, 배나무 따위를 심어놓은 과수원이 많았고, 주택들도 드문드문 서 있는 변두리에 불과했다. 지난 날 부통령을 지냈던 장면(張勉)씨 집이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다.   어느 석양 무렵이었는데,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누가 "자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일일까? 그는 내가 잠적한 이곳을 모를 텐데….(그가 어떻게 내 거처를 찾아내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불가사의로 생각한다.) '자야'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백석뿐일 텐데…. 부르는 소리는 두 번 세 번 거듭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어찌 되었건 나가놓고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황급히 나갔더니, 그가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 달 만에 다시 만났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척 독이 나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는 순간 다시금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좋아서 마음이 시루리 풀리듯 스르르 풀려 버렸다. 그러나 나는 백석 부모가 못내 원망스러워졌고, 또 예의 그 독한 마음은 불쑥불쑥 치밀었다. 그는 본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족두리를 풀어 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색시를 내버려두고 집을 나온 것이다. 내가 알기로 백석이 사모관대하고 장가를 든 것은 두 번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마다하고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1939년 동짓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중국 북경, 소주(蘇州),항주(杭州) 상해 등지를 거쳐 한 달 만에야 돌아왔다. 떠날 때 내 행선을 백석에게 알리지 않았다. 다녀와서도 나는 그에게 여행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그 또한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알리지도 않고 중국을 다녀온 처사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앵돌아진 속으로 '당신께선 지금 저 때문에 화나시게 해서 송구스럽지만, 당신도 제가 겪은 고통을 한번쯤 겪어보셔야 해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그저 묵묵해지기만 했고, 서로 일과를 화제로 떠올리지도 않았으며, 이런 우리들 사이는 심상찮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하루는 그가 보낸 메시지가 왔다. 왕십리역 대합실 구내다방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때 왕십리란 보잘것없는 초가와 들판뿐인 아주 시골이었는데,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종점인 왕십리까지 가서 내리면 사방에서 거름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사람들 눈을 피하려고 그 변두리 먼 곳까지 나오라 했던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대뜸 자기와 함께 만주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이러한 권유는 함흥시절부터 심심찮게 들어오던 터라 조금도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 표정은 너무도 심각한 듯 여겨져서,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나는 그때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그는 만주 신경(新京)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나에게 단 한마디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돌이켜보면 그 만주행은 함흥에서부터 계획해오던 것이었고, 또 그가 재차 서울로 와서 옛 직장을 다시 나가고 한 해를 머무른 것도 결국은 나 때문에, 내가 마음에 걸러서였던 것 같다. 나 아니었으면, 그는 진작 함흥에서 만주로 곧장 떠나갔으리라. 그가 만주 땅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깊은 속뜻을 내 얕은 여자 소견으로 어찌 감히 짐작인들 했으랴만…. 그는 내가 자기 권유대로 쉽게 만주로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에서 이런 대목을 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만주 신경시절 백석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작가 송지영(宋志英)씨 술회로는 백석이 그때만큼은 고향 부모에게 매달 약간의 송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 무렵 항상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송씨가 "그 옷, 서울의 김이 보냈구려"하고 농을 걸면, 백석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이후 백석은 실직상태가 되어서 만주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되었던가보다. 그가 이렇게도 모진 고생을 했었다는 생각을 하면 온통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 시절 만주의 쓸쓸한 하숙방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그 詩「흰 바람벽이 있어」를 통해, 나는 필시 내 모습으로 짐작되는 부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있다. 깊은 밤에 그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이 시에서 그의 맑고 고결한 정신은 이미 세속을 훨씬 떠나 있는 듯하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 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흡사 그가 눈앞에 당장 되살아온 듯 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말 속에는 평소 그 성품, 현실에 임하던 그 모습 같은 것이 그대로 생생하게 스며 있다.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것도 헤아려보면 모두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 끓듯 끓어 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내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 텅 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사실 10여 년 전부터 나는 그 전집을 내 손으로 엮어보려고 틈날 때마다 흑석동 살던 백철 씨와 의논해왔었다. 그 무렵, 백철은 어느 신문칼럼에서 시인 백석을 일컬어 "한국시사에서 소월 다음가는 귀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뒤 병을 얻어 내 포부를 도와주지도 못하고 타계해버렸다. 이미 그의 전집이 세상에 나왔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백석의 여인1-자야의 사랑)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 있어 ' 기자는 또 한 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   자야子夜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간 기생이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며 몇 편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여성. 백석과는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교원으로 있던 시절에 만났으며, 그 뒤 두 사람은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우여곡절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백석,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 이동순'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백석의 많은 시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詩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백석白石   1912. 7. 1  평북 정주~1995 (사망한 것으로 전해짐) 본명은 기행(夔行)이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조선일보〉에〈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의〈고요한 돈 강〉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뒤 귀국하여 협동농장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에 시집〈사슴>〈여우 난 곬족(조광,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무술(巫術) 소재가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이용악 詩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서 해금 뒤 최초로 영남대 이동순 교수에 의해 시집〈백석 시전집.1987)〈흰 바람벽이 있어.1989)과 논문이 출간되고, 이후, 여러 작가들에 의해 많은 시선집 시 해설집 논문 등이 나왔다.   子夜는 백석의 여인 중에서 잘 알려진 분이다. 이동순 교수(영남대)가 백석 문학이 해금되던 해, 자야 여사를 직접 면답해 얻은 자료가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 담긴 '백석,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이동순과 자야여사가 구술하고 이동순 시인이 정리 조력한 자야여사의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이다.   백석의 女人에는 여러 여인이 등장한다, 한 분은 지금 옮기는 자야이고, 그리고 부모님이 정처해준 부인, 백석의 절친한 친구 신현중과 결혼해버린 통영의 란, 그리고 김진세 누이 등이다.   세월과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고 가난과 외로움과 쓸쓸함에 사랑의 처지가 눈물 앞에 뉘여 가며 흔들릴 때 그의 사랑도 定處도 그의 조국인 조선의 울도 변해간다.   함흥에서 서울에서 통영에서 의주에서 만주에서 북한에서 백석의 여인도 운명처럼 여러 여인이 등장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백석의 심중에 남은 여인이 란이라면, 여인의 심중에 남아 있게한 사랑이 자야의 백석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의 사랑, 아니 여인의 시인에 대한 사랑이야기 오늘은 이생진 시인님 시를 빌어 1편-자야의 사랑을 보낸다.   "천재시인 백석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사후,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은 같은 해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일하게 된다. 백석과 김영한의 극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이루어진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이러한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해준다. 신윤국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앉았다. 그는 여러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그 배경이 순진했다고 한다.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나갈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나게 되면 스승을 특별 면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지만, 함흥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우연히 함흥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함흥에서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사랑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의 外的인 도피 그때 백석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우곤 했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 여러 시인들이‘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 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비슷한 시기 천재작가 이상(李箱)은 황해도 배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잠시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살림을 차렸고, 현재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다방을 연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여성’에 발표한 ‘바다’와‘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백석은 어느 날 ‘바다’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 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 “이 詩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을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1937년, 여성)   두 사람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목 어느 신의주 변방에서 1948년 잡지 ‘학풍’에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이 작품이 서울로 보내져 학풍에 실리게 됨으로서 백석이 서울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 당시 백석의 단절한 심경이 절절히 배인 이 시는 지금 많은 시인들의 애송시가 되었다. 즉 남한에 알려진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백석이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 작품은 1987년까지 금지도서가 되었다. 까닭은 해방이후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함흥과 정주를 마음대로 오가며 문학 활동을 하던 백석은 한반도 허리가 잘리면서 북쪽을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월북 작가가 아닌 재북작가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자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고 자야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자야여사(김영한)는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이 많은 사랑의 지난날을 털어놓는다.   이동순 시인은 그 때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자야가 글 솜씨가 있는 데다 1953년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 학구파였기에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자야는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입원을 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백석은 1930년대 모더니즘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유일한 사례였다면서 백석의 작품이 수능시험에 까지 출제된다는 것은‘월북 시인’에서 ‘재북 시인’으로 완전한 복원을 의미한다”(이동순 교수)   생전의 자야 여사(김영한)는 백석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 詩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5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이시영. 정양 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백석은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남겨지고 북한에서 죽었다. 그의 시(詩)와 비련(悲戀)의 사랑, 그리고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많은 독자 숨결이 되어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旻影 시인)   *참고인용-자야여사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1995) *참고인용-'수능 시인’백석과 기생 자야의 비련의 사랑/조성관 주간조선차장대우 *참고인용-"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여사의 회고/이동순" 에서   자야 김진향 선생님과 인연-국립국악원 정악단 문현(음악학.文學博士)   자야 선생님은 한때 가곡으로 인연을 가진 바 있다. 작고하시기 약 4-5개월 전부터인가-기억도 가물가물해졌지만-자야 선생의 가곡 스승이었던 하규일 명인으로부터 배운 가곡을 복구시키고 싶다며 제가 몸담고 있는 국립국악원에 문의를 해 오셨고, 이리해서 필자는 장구를 잡고 지금도 정악단 단원으로 있는 대금에 김상준씨와, 거문고에 윤성혜씨와 함께 작고하기 직전까지 그가 사시던 한강이 창문너머 보이던 동부이촌동 한 아파트를 일주일이면 1-2 회 정도씩 드나들며 선생이 부르는 여창가곡을 반주하곤 했었다. 연습할 때마다 그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직접 해 두셨고, 그가 작고하신 뒤 이를 CD 5-6장 분량으로 복각하여 반주했던 우리들이 나누어 가진 바 있다.   사실 선생은 이렇게 댁에서 연습하신 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을 때 녹음실 기자재로 정식으로 녹음 제작하여 보관해 놓으시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작고하시기 전날 밤, 이날도 우리 일행은 선생의 가곡 반주를 해 드렸던 날이었는데, 그날 새벽 갑자기 작고하셨던 것이다. 우리 일행이 가곡반주를 위해서 동부이촌동 댁을 드나들 때에도 이미 호흡기 계통에 문제가 있으셔서 예전의 낭랑했을 목소리는 빛을 잃어 가쁜 호흡을 뿜어내며 긴 노래를 힘겹게 하시곤 했었다.   선생이 기거하던 넓은 아파트에서 선생 뒷바라지를 위해 한 부부 내외와 함께 거처하면서, 특히 선생이 숨이 턱에 차서 호흡곤란이 발생할 때면 항상 남자로부터 응급치료를 받았던 선생이었다. 작고하시던 그날도 호흡곤란이 일어났을 때 빠른 응급처치를 받았더라면 더 사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날은 그 타이밍을 놓쳤던 것이다. 자야 선생은 위 소개 글에서도 적혀 있듯이 많은 이름을 가지고 계셨다. 한 가지 더 추가할 이름이 있으니 '김진향(金眞香)'이다. 그의 妓名이다. 이 기생 이름으로 (서울 : 도서출판 예음, 1993)이라는 책을 남기셨다. 국악계에서는 김진향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   註-이상 글은 국악원정악단(시조창 권위자). 흰 바람벽에 비취 본 그리움!   한때는 몹시 원망스럽기조차 했던 사무친 모정, 하늘이 내신 지극하던 효심! 도저히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조차 할 줄 모르던 순진 효심! 어찌타 우연히 당기어진 정열의 불길을 억누를 수 없어 본의 아니게 자기 양심을 속이고 부모님까지 배반하면서 사랑하는 조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등을 돌리고 마셨던 것일까 급기야 북풍한설 모진 겨울에 북만주 호지로 멀리 떨어져 외롭고 삭막한 도피성 이주를 겁없이 결행하시고 만 당신. 비단 부모님을 원망해서도 아니었으리라. 고루하고 암담한 구태속에 잠들어 있는 봉건사회를 당신은 피끓는 청춘의 벅찬 용맹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좌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개화의 길에서 온몸으로 봉건사회에 맞선 또다른 방식의 저항이요, 온건한 방식의 복수였다. 하지만 당신은 그 황막하고도 외로운 호지에서 생각하신 것이라곤 오직 부모님의 따스한 품속이었을 것이다. 고국의 산천, 서러워하던 사랑의 슬픔에 목메인 외침만 낭자한 선혈처럼 뿌리셨으리라. 나는 이처럼 갖가지 깊은 추억의 정념에 젖어서 애달픈 환상의 필름만 거꾸로 돌려보기 만 한다. 갑자기 모질게도 추운 날에 찬물에 담근 시어머님의 시퍼러둥둥하고도 앙상한 손마디가 비친다. 그 찬물과 굵은 손마디! 생각만 해도 가슴속이 꽁꽁 얼어들고 후들후들 뼈마디가 다 져려온다. 인생은 고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궂은 일, 슬픈 일, 한 세상 겪어오신 어머님의 거칠고 굵은 손마디는 순일무잡한 항심(恒心)을 그대로 보여주신다. 그 거칠어진 손길도 이제 그만 거두어들이시고, 지금쯤은 안방나님으로 고이 따스한 아랫목에 누워 계신다. 어머님께서는 누우신 채로 퇴침 돋우시고 우리 둘을 찾아서 부르신다. 우리는 쥐걸음으로 옴슬옴슬 조용히 가서 뵈오니 어머님께서는 몸이 불편하시다. 기침도 하시고 이마엔 열이 느껴진다. 우리는 공손히 어머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아서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들으며 나는 어머님의 팔다리를 가만가만 주물러 드린다. 진정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냉정한 세상이 말할 수 없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이제 와 뉘우치는 불효의 뜨거운 눈물, 다 무슨 소용 있으리.   다시 영상의 화면은 바뀌어진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과 소망하던 어린것을 옆에 끼고 저녁 밥상에 함께 둘러앉아 있는 한 가족이 있다. 그 집은 먼 앞대의 조용한 개포가에 있는 나지막한 집이다. 아내는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서 대구국을 끓여놓고 나누 먹으며, 하루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한다. 참으로 단란한 풍경이다. 꿈에서도 그리던 단란한 가정을 당신은 작품 속에서나마 하나의 영상으로 비치어 본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애달프고 얼룩진 환상이다. 어느틈에 당신의 눈매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다. 내 눈에도 뜨거운 피눈물이 줄줄이 흘러서 두 볼을 타고 마냥 흘러내린다. 불현듯 나는 당신의 어린 자식을 포대기로 들쳐업는다.그리고는 우르르 당신께로 달려가서 그 쓸쓸하고 허전한 무릎 위에 내려 놓는다. 당신은 흐뭇하면서도 측은한 표정으로 무릎 위의 아기를 본다. 당신의 코끝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아기의 이마에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다 나는 기어이 당신의 어깨에 매달려 흐느끼고야 만다.   지금 내 눈앞에는 이런 애절한 환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진실로 당신이 만주로 가자고 했울 때, 나는 이것저것 헤아리지 않고 내 낭군님을 따라가야 했었으리라. 그것이야말로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신 당신께 대한 진정한 내 보답의 길이 되었으리라. 당신은 부모님께서 지천명이 지나도록 손자를 안겨드리지 못하는 것을 늘 송구스러워하였다. 당신의 부모님께서도 아들이 이런 소망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한 것을 항상 한탄하신다고 말했다. 이대로 손자를 끝내 못 보게 되면 조상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신다고 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낯이 화끈거려서 둘아 앉았고,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나 자신의 처지가 몹시도 한스러웠다. 자식이야 당신보다 내가 사실은 더 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갈등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모르셨던 것같다. 그 시절 문외(門外)의 자손을 갖는다는 것은 실로 큰 비극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큰 소란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의 그 소망을 끝내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가슴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잠잠히 기라앉아 있던 슬픔과 아쉬움이 하염없이 솟구쳐오른다.   -- (문학동네, 1996) 에서     자야子夜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갔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된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며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여성. 백석과는 백석이 함흥의 영생고보 교원으로 있던 시절에 만났으며, 그 후 두 사람은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지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는 우여곡절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백석,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와 1996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에서 '힌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백석의 많은 시]가 [자신-자야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詩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라는 詩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김영한이 창작과 비평사에 기증한 2억 원을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백석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백석이 분단 이후에 발표한 시의 의미   이승하     백석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쓸쓸해진다. 처연해지고, 서글퍼지고, 슬퍼진다. 왁자지껄한 잔칫집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시절 북방 오지의 궁핍함이 느껴져 처연해진다. 여승이 된 이와 북관 계집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인생이란 것이 뭔지, 문득 서글퍼진다. 남신의주 유동의 어느 목수네 집에서 손깍지베개를 하고 누워 있는 백석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그런데 그의 시편 가운데 가장 큰 쓸쓸함을 안겨주는 것은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후에 북한에서 쓴 10여 편의 시다. 『사슴』의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읽는 것 자체가 가슴 아프기 때문에 1988년 해금 조치 이후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백석론 가운데 1959~61년에 『조선문학』에 발표된 시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온전한 백석론을 쓰고자 할 때, 분단 이후의 백석 시를 논외로 쳐서는 안 된다. 이는 일제 강점기 말의 시 태반을 ‘암흑기의 시’ 혹은 ‘친일시’로 간주하여 논외로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연구자의 직무유기다. 시인의 고뇌를 생각하지 않고, 친일의 논리를 따지지 않고, 작품의 문학성을 논하지 않고 일괄하여 ‘구더기’ 취급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이다. ‘백석 대표시 해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간행된 고형진의 『백석 시 바로 읽기』(2006)와 ‘백석 시 전편 해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간행된 이숭원의 『백석을 만나다』(2008)는 모두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에서 끝난다. 이러면 독자들은 이 시가 백석의 마지막 작품인 줄 알게 된다. 그렇지 않다. 백석은 그 작품 발표 후에도 적지 않은 시를 썼다.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르는, 분단 이후에 북한에서 쓴 백석의 시에 대해서도 이제는 논의를 해야 한다. 설사 이 행위가 백석이 쌓아올린 높다란 탑을 금가게 하는 일이 될지라도 온전한 백석론 작성을 위해서는 분단 이후의 시가 제외되지 말아야 한다.     1996년에 발간된 정효구의 한국현대시인연구 제14권 『백석』편에는 작품연보가 부록으로 나와 있다. 거기에는 북한에서 간행되는 문예지 『조선문학』 142호에 5편이, 145호에 2편이, 151호에 2편이, 172호에 3편이 발표되었다고 제목까지 나와 있지만 작품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조선문학』은 142호가 1959년 6월에, 145호가 같은 해 9월에 나왔다. 151호가 1960년 3월에, 172호가 다음해 12월에 나왔다. 즉, 백석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는 작품 발표를 하고 있었다. 김재용은 1997년에 초판 간행한 『백석전집』의 증보판을 2003년에 내면서 제2부 ‘8․15 이후’에 동화시(童話詩) 12편, 시 13편, 평문 4편, 정론 3편을 발굴하여 수록하였다. 게재지면을 알 수 없는 제3부 ‘보유’편에는 시 2편, 산문 7편이 실려 있다. 2011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에는 시가 15편, 산문 4편이 추가된다. 15편은 주로 『아동문학』지에 실린 동시인데, 『새날의 노래』에 실린 시도 3편 수록되어 있다. 시 16편의 발표지면은 다음과 같다.     (중략) 『시와 표현』 2011년 가을호에 수록     1962년 10월 무렵,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백석의 창작활동이 중단된다.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작활동이 중단되는 것으로 보아 당은 백석에게서 펜을 빼앗은 것이 확실하다. 이때부터 북한에서 나오는 어느 문예지에서도 백석이라는 이름은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바로 그 전에 백석은 그 조합에서나마 목숨을 부지하자는 생각에서 공산당 혁명을 예찬하고 공산주의의 승리를 확신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일종의 아부를 한 것인데, 아무리 목숨이 소중하다고 해도 이런 시를 써야만 했던 것일까. 1995년에 사망할 때까지 백석은 시를 썼는지 안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에 발견된 시는 없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일본을 돌며 백석의 행적을 취재했던 소설가 송준은 백석의 미망인 리윤희와 장남 화제가 1999년 2월 중국 조선족을 통해 보내온 서신과 말년의 백석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김재용의 『백석전집』과 이숭원의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에도 실려 있다. 백석은 농사일을 하다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석의 두 번째 부인 리윤희 씨에 따르면 백석과는 1945년 말 북한에서 결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백석은 월북한 시인이 아니다. 임화, 설정식, 이태준, 김남천처럼 월북했다 숙청당한 문인이 아니라 북한에서 살던 재북 시인이다. 그래서 숙청을 당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33년을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이것 또한 분단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백석, 시(詩) 속에 맛을 담다]   백석은 1930년대 문단은 물론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매우 독특하고 유별난 존재다. 오래도록 잊혀졌던 시인인 그는 1988년 해금 이후 단박에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백석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음식을 소재로 한 시들이 많다는 점이다. 당대의 모던보이 중 하나로 손꼽히던 그가 토속적이고 평범한 음식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무엇인지, 또 그의 시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그의 시와 그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통해 소개한다.    - 연사: 소래섭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1강: 백석, 근대의 갈림길에 서다 백석의 이력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을 중심으로 백석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시인이었는지 살펴본다. 또 식민지와 서구화라는 이중의 과제 앞에 놓여 있었던 1930년대 문인들의 공통된 운명과, 그러한 운명에 맞선 백석의 행로는 어떠했는지 들여다본다. 다룰 작품은 , 등이다. ... ...   ==================================================== 시인약력    백석 시인의 본명은 기행(夔行).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펴냈다.  샛별같은 모국어에 실린 민족현실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 영역을 농촌 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 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민중들이 믿어왔던 지식인들은 참으로 그 모습이 말이 아니게 달라져서 소일본인화되어 버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이라곤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는 강연,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선무성 시국강연 따위로 분주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 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역시 동향인 시인 김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채로 소월이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소월의 문학에는 민요적 틀에 실어서 표현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 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닥불' 전문    이 시의 첫연에 나오는 사물들은 생물, 무생물의 구분을 따로 나눌 것 없이 우리들의 유년체험과 친숙하게 맞닿아 있는 모닥불의 재료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요긴하고 쓸모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없게 되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거나 아예 버려진 하찮은 사물들끼리 모여서 이처럼 따뜻한 모닥불의 광휘와 온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1∼2연에 등장하는 각 낱말 끝에 '∼도'라는 특수조사가 낱낱이 붙어 있는 것은 모닥불이라는 공간이 애틋한 소외존재들이 서로 만나는 평등한 장소임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시적 장치로 여겨진다.    백석의 시세계에서 또하나 돋보이는 것은 농촌적 정서를 아주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는 관서지방 농촌공동체의 여름, 저녁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휑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 오는 저녁' 전문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료에서는 백석이 프로문인들의 몇 차 월북때 북으로 올라 갔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기록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이 맨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방 토호로서 대대로 살아오던 많은 주민들이 대량으로 집단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경도 주민과 평안도 주민을 서로 적절한 배수로 섞바꾸어 살게 하는 인위적 강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지역성을 가장 농도 짙게 포괄하고 있는 방언을 소멸시킴으로써 지역 감정을 무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 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이 발간된 이후 백석의 시는 문학인에 대한 금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조치인가를 그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백석의 문학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백석처럼 그동안 금지라는 강제에 매몰되어 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지듯 일거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의 상당수는 백석을 비롯한 이찬, 오장환, 임화, 이용악, 설정식, 정지용, 김기림, 박아지, 여상현, 조벽암, 조영출, 권환 등 많은 금지 시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단시대 남한의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에 종사했다.(위의 시인들 가운데 권환 같은 시인은 고향인 마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시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넌센스까지 있었다) 그들의 학생 시절에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문인들이라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주된 모범적 교본이었고,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일제말의 황민문학 계열이나 순수문학 계열, 또는 분단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 계열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해금문인들의 작품을 대하는 전후 세대들의 정서적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단 이후 냉전시대의 남한 문학이 나타내 보여왔던 작품의 성향이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이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제 백석의 문학작품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문학사에 편입되고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신진 문학연구가들에 의해 백석의 작품은 주요 단골 연구 테마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집 발간 이후 가장 최근에 발간된『백석전집』(김재용 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편이 넘는 연구 논문, 학위 논문, 또는 평론들이 학계와 문단에 제출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후 세대 시인들에 의해 백석의 문학 작품과 시정신은 깊은 영향의 수수관계로 재창조되어서 계승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석 문학의 특징은 상실되어가는 고향의식의 회복, 이를 통한 제국주의 문화의 극복, 전통 문화유산에 대한 따뜻한 긍정,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북방정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백석의 시는 우선 문체상의 개성이 다른 시인들에 비해 매우 뚜렷하다. 그가 즐겨 쓰고 있는 방법들은 대개 회고체, 방언체, 구어체, 의고체, 연결체, 만연체, 아동 어투의 독백체 등이며, 이는 민중적 정서를 농도짙게 풍겨나게 하는 기대를 갖고서 구사된다. 시인 자신의 유소년 시절의 체험과 고향 정서로써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들이 어김없이 회고체를 채택하게 하는 것이며,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지역의 방언이 그의 시작품의 방언적 토대가 되고 있다. 특히 구개음화가 되지 않은 구어체를 그대로 표기하므로써 생생한 현장감을 드높이고 있다. '금덤판,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녕감, 니차떡, 석박디, 데석님, 디운구신, 녀귀' 따위가 그 사례이다. 더불어 작품의 서사적 구조로 독자들을 이끌어 들이는 하나의 장치로써 연결형이 구사되고 있는 듯하다. ∼고, ∼며, ∼는데, ∼도 등이 가장 빈도수가 높은 연결형 어미와 조사들이다. 백석의 시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표기형태는 '슳븐' '얹헜다' 등의 분철(分綴)과 '울ㄴ다' '알ㄴ다' '달ㄴ' 등에서 보여주는 ㄹ과 ㄴ의 자음겹침 형태이다. 이는 작중 화자가 사투리로 직접 말하는 듯한 생동감을 드높이기 위해 시도하는 형태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기법들은 정서법의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 있지 못한 시기에서 의고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시인 자신의 의도와 배려가 강력히 담겨 있는 부분이다.    백석의 시는 형태면에서도 독특한 변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가 대체로 서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사례가 많으므로 담시, 서술시, 이야기시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그 외적 양식이 줄글 형태의 산문적 성격으로 구현되는 것은 당연하다. 띄어쓰기도 시작품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낭송하기에 편리하도록 한 차례의 낭송호흡에 필요한 일정한 어절을 서로 통합하여 띄어쓰기 규칙성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백석 시의 원문을 주의해서 지켜보면 이런 점들이 당시 정서법 체계의 무질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세심한 배려에 기인된 것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연(聯)에 관한 부분에서도 아예 연구분이 없는 비연시 형태와 분명하게 연 구분을 획정하고 있는 연시 형태가 거의 반반씩 균형을 이룬다. 비연시 형태에서는 시「비」의 경우처럼 단 2행으로 전체 형태가 완결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청시(靑枾)」「산비」처럼 3행 형태도 있다. 그런가 하면 4행형과 5행형 이상도 다수 있다. 연시 형태는 시「초동일(初冬日)」처럼 특이한 2연형이 있고, 기타 3연형에서 5연형 이상까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으나 이 가운데 단연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3연형이다. 줄글 형태는 행구분과 연구분을 모두 벗어난 산문시의 형태인데 백석은 이러한 형태도 더러 구사하고 있다. 백석의 시를 곰곰히 읽다 보면 그의 시가 조선 후기의 서정적 분위기가 감도는 사설시조의 형태를 방불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 황정을 캐어들고 집으로 돌아 들제 방경에 나는 꽃은 의건을 침노하고 벽수에 우는 새는 유수성을 화답한다 문앞에 다달아는 막대를 의지하여 사면을 살펴보니… 뜰 가운데 들어서니 섬돌밑에 어린 난초 옥로에 눌러 있고 울가에 성긴 꽃은 청풍에 나부낀다… 대수풀 우거진데 이슬바람 서늘하다.       -안민영의 사설시조 중 일부  2) 한 십리 더 가면 절간이 있을 듯한 마을이다 낮기울은 볕이 장글장글하니 따스하다… 뒤울안에 복사꽃 핀 집엔 아무도 없나보다 뷔인 집에 꿩이 날어와 다니나 보다 울밖 늙은 들매남ㄱ에 튀튀새 한불 앉었다 … 어데서 송아지 매--하고 운다 골갯논드렁에서 미나리 밟고 서서 운다   -백석, 「황일」 부분    장면을 따라서 포커스가 서서히 공간 이동을 해가는 관찰자의 시점도 그렇거니와 형태와 분위기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이 서로 많이 느껴진다. 백석이 사설시조에 평소 애착을 가졌다는 그 어떤 자료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전통적인 문학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체득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백석의 시를 율격면에서 고찰해보더라도 여러가지 흥미있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전집을 두루 일별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행의 율격 형식들을 볼 수 있다.    1)장 ― 단 ― 장    2)단 ― 장    3)장 ― 단 ― 장 ― 단 ― 장 ― 단    4)장 ― 단 ― 단 ― 단 ― 장 ― 단 ― 단 ― 단     이러한 율격 형식들은 무작위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작품의 효과를 예견하고 있는 시인 자신의 치밀한 배려가 깃들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질서를 갖고서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1)은 「산비」와 같은 전형성을 지닌다. 2)는 「청시」에서 그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다. 3)은 긴 행과 짧은 행을 규칙적으로 교체 반복해가는 방법이다. 4)는 한 줄의 긴 행 다음에 짧은 행을 세 줄 반복하고 나서 다시 긴 행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행 형식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고, 더불어 주제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적절한 형태를 선택하고 있다.    「연잣간」과 같은 시는 2행 반복율이 특징이고,「바다」는 3행 반복율로 보인다. 운율법으로는 일종의 각운 형식을 방불하게 하는 것이 가장 많다.「대산동(大山洞)」「물닭의 소리」「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안동」「목구(木具)」「수박씨 호박씨」「적막강산」등의 시작품에서 그러한 운율 형식을 느낄 수 있다. 또하나 특이한 점은 시「황일(黃日)」의 결말 부분처럼 줄글 형태의 끝에 부분적 정형율을 삽입하는 경우이다. 줄글을 곧장 읽어내려갈 때 발생될 수 있는 분위기의 따분함이나 단조로움을 극복시키려는 의도적 장치로 여겨진다. 이러한 계열의 한 갈래로서「오리 망아지 토끼」「오금덩이라는 곳」등의 시작품처럼 작중 화자나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삽입한 형태도 있다.    한편 백석 시의 특징적인 분위기 가운데는 이미지의 구사가 유난히 독특한 면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추억을 환기시키거나 토속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불러 일으킬 때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는 회고적 상상적 이미지이다. 이와 더불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가지 감각 기관의 민감한 반응을 작용시켜 현장의 생동하는 느낌을 더욱 실감나게 고조시킨다. 시「동뇨부(童尿賦)」와 같은 경우는 1연의 '누어 싸는 오줌이 넓적다리를 흐르는 따끈따끈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으로 표현된 촉각적 이미지, 2연의 '첫    여름 이른 저녁 터앞에 밭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로 표현된 후각적 이미지, 3연의 '새끼오강에 한없이 누는 잘 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쪼로록 하는 소리'로 표현된 기발한 청각적 이미지, 4연의 '막내고무가 잘도 받어 세수를 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말갛기도 샛맑았다는' 색채 형용의 이미지가 한 편의 시작품속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져 기이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 「북관(北關)」에서 명태창란젓을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라는 후각적 이미지와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이라는 미각적 이미지로 연결 통합시키고 있는 부분들은 백석 시만의 독특한 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석의 시작품 세계에 전반적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이미지는 고향과 관련된 이미지와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이다. 이것은 시인 자신의 고향이 정주(定州)라는 작은 포구이기도 한 사실과 시인이 교사 생활을 하던 곳도 함흥 바닷가 연안 지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관심이 바다쪽으로 쏠리게 되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 세계와 그 분위기가 가장 일치되는 공간에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된다는 설명과도 관련된다.「가키사키(枾崎)의 바다」「이즈 코쿠슈(伊豆國湊) 가도」「통영」「바다」「삼천포」「함주시초(咸州詩抄)」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계절 이미지도 빈번히 등장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은 시인 백석에게 있어서 그리움과 애틋함, 아름다움, 슬픔, 쓸쓸함 등으로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따라서 백석의 시는 어떤 고정된 계절 이미지에 구속되어 있질 않고 모든 것이 온유함과 쓸쓸한 분위기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의 시제들도 대다수가 과거 시간이거나 현재의 시점을 지키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특히 유소년 체험을 회상하는 과거 시제가 월등히 두드러진다. 현재 시제를 지키는 작품들은 대개 방황과 좌절을 표현하는 경우로 한정된다.  백석 시의 소재 제재적 측면    백석의 시에서 다른 소재들에 비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소재는 음식물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그의 시전집을 통틀어 음식물 소재는 대략 150여종이나 된다. 이 음식물들을 살펴 보면 별반 특이한 음식이 많은 것은 아니나 아무튼 우리의 토착적인 음식 문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외래 문화, 즉 제국주의적인 일본 문화의 침탈을 시인이 의식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적 분위기가 강렬히 풍겨나는 토속 음식들을 열거하고 집착을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주된 음식물이나 기호물, 또는 그 재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막써레기, 돌나물김치, 백설기,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물구지 우림, 둥굴네 우림, 도토리묵, 도토리 범벅, 광살구, 찰복숭아, 반디젓,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 두부, 콩나물, 뽂운 잔디, 도야지 비게, 무이징게국, 찹쌀탁주, 왕밤, 두부산적, 소, 니차떡, 쇠든 밤, 은행여름, 곰국, 조개송편, 죈두기 송편, 밤소, 팥소, 설탕든 콩가루소, 내빌물, 무감자, 시라리타래, 개구리의 뒷다리, 날버들치,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 미역국, 술국, 추탕, 엿, 송이버섯, 옥수수, 노루고기, 산나물, 조개, 김, 소라, 굴, 미역, 참치회, 청배, 임금알, 벌배, 돌배, 띨배, 오리, 육미탕, 금귤, 전복회, 해삼, 도미, 가재미, 파래, 아개미젓, 호루기젓, 대구, 건반밥, 명태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 힌밥, 튀각, 자반, 머루, 꿀, 오가리, 석박디, 생강, 파, 청각, 마늘, 노루고기, 국수, 모밀가루, 떡, 모밀국수, 달재생선, 진장, 명태, 꽃조개, 물외, 꼴두기, 당콩밥, 가지냉국, 싱싱한 산꿩의 고기, 김치가재미, 동티미국, 밤참국수, 게산이알, 취향이돌배, 만두, 섭누에번디, 콩기름, 귀이리차, 칠성고기, 쏘가리, 35도 소주,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끓인 술국, 도야지 고기, 기장차떡, 기장쌀, 기장차랍, 기장감주, 기장쌀로 쑨 호박죽,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과일, 오두미, 수박씨, 호박씨, 멧돌,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얼얼한 댕추가루,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감주, 대구국, 닭의 똥, 연소탕, 원소라는 중국떡, 고사리, 가지취, 뻑꾹채, 게루기, 약물, 깨죽, 문주, 송구떡, 백중물     도합 148종이 넘는다. 이 음식물들의 종류를 가려뽑아서 보면 백석의 시에서 동원된 음식들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먹는 생활 음식들의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시골 아이들이 어릴 적에 주워 먹던 길바닥의 닭똥도 있고, 젓갈에 가자미식혜 등의 지역 음식도 보인다. 거의 대다수가 민중적 향취가 느껴지는 음식물들이며, 동물성보다는 식물성 음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의 구체적인 명칭도 상당수인 바 야생 동물, 가축, 물고기, 곤충 따위의 동물적 소재와 과수, 야생초, 약초, 해초, 채소, 과일, 곡식 등의 식물적 소재를 모두 추출하여 대비해보면 식물성이 약간 많다. 동물적 소재는 모두 72종 가량이 된다.    지렝이, 박각시, 주락시, 개구리, 자벌기, 거미, 찰거머리, 버러지, 노랑나비, 벌, 딱장벌레, 파리떼, 노루(복작노루), 곰, 멧도야지, 승냥이, 배암, 산토끼, 잔나비, 여우, 쪽재피(복쪽제비), 다람쥐, 도적괭이, 땅괭이, 호랑이, 당나귀, 오리, 개(강아지), 도적개, 얼럭소새끼, 도야지, 닭, 말(망아지), 토끼, 노새, 게사니, 소(송아지), 멧새, 물총새, 짝새, 까치(까막까치), 꿩(덜걱이), 멧비둘기, 어치, 제비, 물닭, 뻐꾸기, 갈새, 뫼추리, 갈매기, 물총새, 백령조, 꼴두기, 붕어, 농다리, 게, 굴, 소라, 조개(가무락 조개), 참치, 꼴두기, 전복, 해삼, 명태, 호루기, 대구, 칠성고기(칠성장어), 가재미, 도미, 반디, 미꾸라지, 쏘가리    대부분의 동물들이 맹수류가 아니라 평화스러웁고 양순한 성질의 동물들이다. 이러한 동물들의 선택에서도 시인의 기질이나 품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기에 비해 식물적 소재들은 도합 79종이나 되는데 거의 모두가 시골 생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돌나물,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도토리, 살구나무, 찰복숭아, 배나무, 무이, 찹쌀, 왕밤, 천도복숭아, 콩가루, 섭구슬, 박, 감나무, 산뽕, 땅버들, 석류, 수리취, 송이버섯, 도라지꽃, 옥수수, 아카시아, 미역, 수무나무, 아주까리, 밤나무, 머루넝쿨, 재래종의 임금나무, 돌배, 벌배, 다래나무, 갈부던, 복사꽃, 들매나무, 삼, 숙변, 목단, 백복령, 산약, 택사, 금귤, 파래, 동백나무, 진달래, 개나리, 당콩, 머루, 쑥국화꽃, 자작나무, 바구지꽃, 강낭, 귀리, 모밀, 피나무, 버드나무, 호박씨, 수박씨, 이깔나무, 바구지꽃, 오이, 마늘, 파, 감자, 쉬영꽃, 뻑꾹채, 게루기, 고사리, 갈매나무, 싸리, 이스라치, 가지, 함박꽃     이러한 식물들의 성격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물들의 이미지와 어울려서 작품 세계의 아늑하고 민중적인 삶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적어도 시작품속에서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구별이 느껴지지 않는 합일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천부적으로 참된 슬픔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의 고귀함 등을 타고난 시인적 기질의 소유자이다. 백석이 자신의 문학적 아포리즘을 구체적으로 밝힌 글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신경에서 거주하던 시절 {만선일보(滿鮮日報)}(1940.5.9∼10)에 발표한 하나의 짧은 시평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나 기질을 짐작하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당시 시인 박팔양이 함께 신경에 와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발간된 박팔양의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에 대한 서평을 위의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백석은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진실로 높고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것이 마음을 제사들오어 이것이 아니면 안심하지 못하고 입명(立命)하지 못하고 이것이 아니면 즐겁지 않은 때에 밖으로 얼마나 큰 간난(艱難)과 고통이 오는 것입니까? 속된 세상에서 가난하고 핍박을 받어 처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은 복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서름차지 아니하겠습니까? 시인은 슬픈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안흔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魂)입니다. '외로운 것을 즐기는' 마음도, 세상 더러운 속중을 보고 '친구여!'하고 부르는 것도, '태양을 등진 거리를 다떨어진 병정 구두를 끌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마음도 다 슬픈 정신입니다. 이렇게 진실로 슬픈 정신에게야 속된 세상에 그득찬 근심과 수고가 그 무엇이겠습니까? 시인은 진실로 슬프고 근심스럽고, 괴로운 탓에 이 가운데서 즐거움이 그 마음을 왕래하는 것입니다.  -박팔양, 백석시 서평 "슬픔과 진실" 중    이 글속에서 백석이 말하는 '슬픈 정신'은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과 뭇사물에 대한 크나큰 연민이 아닐까 한다. 모든 것을 다 내 마음속에 애틋하게 수용하고, 특히 모든 소외된 사물들에 대하여 따뜻한 가슴으로 끌어안으려는 불교적 자비심, 혹은 기독교적인 긍휼이나 사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 '생명을 아끼는 마음' 등은 모름지기 시인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필수 덕목이자 품성인 것이다. 백석의 시가 유난히 작고 가냘프고 여린 것, 외롭고 못난 사물과 가여운 생명들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에 있을 것이다. 잘나고 거만하고 자신을 뻐기는 존재나 화려한 사물들은 적어도 백석의 문학적 관심에서 일단 벗어나 있다.    다음으로 백석의 시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아동 유희 및 무속적 의식이나 민속 행사, 민중 의약 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백석의 시가 주로 농도짙은 설화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주로 이러한 소재들을 표현하고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분위기라 하겠다. 거의 25종이 훨씬 넘는 아동 유희와 의식, 의례, 행사들이 도입되어 있는 바 그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즘생을 쫓는 깽제미 소리  2)한 밤에 섬돌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3)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4)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어서 구신간 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5)자신을 신장님 딸년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6)뒤울안 살구나무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  7)밑구멍에 털이 멫자나 났나 보자고 한 가즈랑집 할머니  8)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신리고모  9)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두르는 귀먹어리 할아버지  10)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력사  11)날기멍석을 저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가진 조마구, 조마구네 나라,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  12)이불우에서 하는 광대넘이  13)인두불에 구어먹는 은행여름  14)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다 물총새가 되어버린 산골아이들  15)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 그 상우에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술잔  16)달밤에 목매 죽은 수절과부  17)섣달 내빌날 밤에 내리는 눈을 정한 마음으로 받아서 눈세기물을 만들어 고뿔, 배앓이, 갑피기에 쓰는 내빌물  18)남편은 행방불명, 딸은 병으로 죽고, 혼자 남아 기어이 여승이 되고만 여인  19)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 제 병을 낫게 할 약을 알고 있는 소  20)어스름 저녁국수당 돌각담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어놓고 비난수하는 새악시  21)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례히 흉사가 있다는 무서운말  22)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  23)아홉명이 회를 쳐먹고도 남아서 한 깃씩 나눠가지고 갔다는 크디큰 꼴뚜기의  이야기  24)방안의 성주님, 토방의 디운구신, 부뜨막에 조앙님, 고방시렁에 데석님, 굴통의 굴대장군, 뒤울안 곱새녕아래 털능구신, 대문간의 수문장, 연잣간의 연자방구신, 발뒤축의 달걀구신  25)칠월백중, 쥐잡이, 숨굴막질, 꼬리잡이, 가마타고 시집가는 노름, 장가가는 노름, 조아질, 쌈방이, 바리깨돌림, 호박떼기, 제비손이 구손이    무속의식, 구비문학적 설화, 민간 요법, 생활 설화, 유희, 노동과 관련된 서사, 자녀 교육과 관련된 훈계, 식민지의 험한 세월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가정의 불행, 속담, 전설 등으로 구성된 이 소재들에는 모두 우리 민족의 삶에서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정서들이 짙게 배어 있다 하겠다. 그리하여 백석의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제는 잃어버린 옛 추억의 시간을 회상시키고, 동시에 현실의 각박한 세태로부터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묘한 작용력을 가졌다. 백석은 앞서의 아포리즘에서 '낮고 거즛되고 겸손할 줄 모르는' 세태를 비판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추억의 회상과 연민을 경험하고 나면 훨씬 맑고, 그윽하고, 슬퍼할 줄을 알며, 따스한 가슴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다음으로는 백석의 시에 나타나는 인물의 유형과 그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것은 백석의 문학이 지니고 있는 지향과 가치관을 보다 확연히 꿰뚫어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다. 앞의 소재 탐구에서도 알아본 바 있거니와 백석의 시는 민중적 삶의 정서와 그 분위기를 환기하는 일에 혼신의 문학적 정열을 기울였다. 그것은 인물 유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절대 다수가 낮고 평범한 민중적 신분들이며,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하며 가난한 서민들이다. 시인이 굳이 이러한 인물들과 그들의 구체적 생활을 담으려 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가장 다수의 사람들의 처지를 대변하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는 역할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갖고 있었던 듯하다. 친족 집단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방계 집단을 중심 인물로 등장시켜서 우리 모두가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던 민족이었음을 강력히 환기하고자 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다. 특히 식민지 시대의 제국주의 침탈과 문화적 유린속에서 민족의 주체성이 완전히 말살되어가는 위기에 직면하여 시인의 자기인식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러한 관심을 극대화시키도록 추동했을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점에서 동시대의 비평가 박용철이 누구보다도 먼저 시인 백석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정확하게 했던 것 같다.    박용철은 백석의 시를 '전반적으로 침식받고 있는 조선어에 대한 혼혈 작용 앞에서 민족의 순수를 지키려는 의식적 반발의 표시'로 보았던 것이다. 최원식 교수는 백석의 시가 방언을 다루되 그 방언에 머물러 있질 않고 오히려 방언의 경계를 넘는 보편성을 지적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섣부른 관념이 좀체 투과하기 어려운 놀라운 개체성, 즉물적 육체성으로 견고하기 때문에 백석의 시가 들큼한 낭만주의의 고향 타령이 결코 아니라는 점. 둘째 모더니즘에 의거하면서도 그 모더니즘을 도리어 비판하는 특이한 방법으로 식민지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들을 침통히 응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백석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지방을 보는 눈], 실천문학 40호, 1995. 겨울호, 225면) 한편 백석의 시를 근대인으로서의 절실한 내면적 목소리로 해석한 김재용의 분석도 눈길을 끄는 해설로 평가된다.(「근대인의 고향상실과 유토피아의 염원」,『백석전집』, 실천문학사, 1997)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 유형들은 어림잡아 100여 사례가 훨씬 넘는데, 다음에 정리한 인물 유형들을 분석 정리하는 작업도 꽤 의미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1)쇠메든 도적  2)예순이 넘은 가즈랑집 할머니, 막써레기 피우는 무당, 구신의 딸      3)곰이 돌보는 산골 아이  4)진할머니 진할아버지  5)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곰보 말수  6)하루에 베 한 필 짠다는 신리 고모  7)신리 고모의 딸 李女, 작은 이녀  8)열여    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같은 입 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모  9)토산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10)육십리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떄가 많은 큰골 고모  11)큰골 고모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12)배나무접을 잘하는, 술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쑥 뽑아놓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13)삼춘엄매(숙모), 사촌누이, 사촌 동생들  14)밤늦도록 유희하고 노는 친척 아이들  15)이른 아침에 부엌에서 함께 의좋게 일하는 시누이 동세  16)한번 찾아와선 갈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 17)술을 밥보다 좋아하는 삼춘 18)귀먹어리 할아버지  19)재당  20)초시  21)문장 늙은이  22)더부살  이 아이 23)새사위, 갓사둔  24)나그네  25)주인 26)손자 27)붓장사 28)땜쟁이 (29)어려서부터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자라나 불쌍하게도 몽둥발이가 된 할아버지  30)먼 타관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배  31)산비탈 외딴 집에 사는 모자  32)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 소도적놈  33)닭보는 할미  34)밤오줌 마려워 잠깬 아이  35)시집갈 처녀, 막내 고모  36)마을의 소문을 퍼뜨리는 일가집 할머니  37)오리치를 놓으러 간 아배  38)물코를 흘리며 흙담벽에 붙어 서서 물감자를 먹는 아이들  39)논두렁에서 개구리 뒷다리를 구어먹는 아이들  40)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들어진 주막집 아들 아이 범이  41)말을 몰고 이 장 저 장을  옮겨다니는 장꾼들  42)첫아들을 낳은 나이 어린 산부  43)컴컴한 부엌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늙은 홀아비  44)새벽에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물지게꾼  45)도야지를 몰고 시장으로 가는 사람  46)떠돌아 다니는 순례중(객승)  47)벌판의 간이역에서 경편철도의 열차를 막 내려서는 젊은 새악시  47)달밤에 목매 죽은 수절 과부  48)거적장사  49)남편은 행방불명, 딸은 병사하고 혼자 남아 비구니가 되어버린 여인  50)방안으로 들어온 거미새끼를 바깥에 버리고 불쌍한 생각에 젖는 시인  51)집터 치고 달구질하고 달밤에 노루고기를 구어 먹는 산골사람들  52)산나물캐는 수양산의 늙은 노장스님  53)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  54)어스름 저녁 국수당 돌각담 수무나무 가지에 여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추고 비난수를 하는 새악시들  55)벌개늪 옆에서 바리깨를 두드리는 동네사람들  56)방뇨를 하는 잠없는 노친네들  57)물기에 젖은 왕구새 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 앓는 사람  58)얼굴이 핼쓱한 병든 처녀  59)메기수염을 한 청배장수 늙은이  60)머루넝쿨 속에서 키질하는 산골 여인  62)너무도 가난하여 열다섯 어린 나이에 늙은 말꾼에게 시집간 정문집 가난이  63)물에 빠져 죽은 건너마을 사람  64)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애기무당  65)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비에 젖어 약물을 받으러 오는 두메 아이  66)앓는 아비  67)무당의 딸  68)어장 주인  69)일본말에 능한 황화장사 영감  70)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  71)더꺼머리 총각  72)주막집 앞에서 품바타령 부르는 문둥이  74)당홍치마 노란 치마입은 새악시  75)시골마당에 볏짚같이 얼굴이 누우런 사람들  76)노루새끼를 팔러 장에 나온 산골 사람  77)자박수염난 공양주  78)저고리에 남색 깃동을 단 돌능와집의 안주인  79)산골여인숙에서 목침에 새까만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  80)석가여래같은 얼굴을 하고 관공(관우)의 수염을 드리운 북관의 늙은 의원  81)북관의 계집  82)봄날을 즐기려 길거리에 나온 사람들  83)맑고 가난한 친구  84)빚을 얻으러 온 사람  85)허리도리가 굵어가는 중년여인  86)꼴뚜기 회를 나누어 먹는 뱃사람들  87)여름밤 멍석자리에 나와 앉아 바람을 쐬는 사람들  88)밤참국수를 받으러 간 아배  89)플렛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귀이리차를 마시는 여행객들  90)옹기장사  91)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  92)털도 안뽑은 도야지 고기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꿀꺽 삼키는 사람들  93)닭의 똥을 먹을 것으로 알고 주워 먹는 산골 아이  94)목욕탕에 앉아서 혼자 소리를 꽥꽥 지르는 중국사람  95)마음씨 좋은 중국인 지주 노왕  96)적막강산을 느끼는 작중화자  97)아내와 집을 잃고 부모형제마저 모두 이별한 외로운 사람  98)소수림왕  99)광개토대왕  100)일본인 주재소장  101)일본인 주재소장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손등이 갈라터진, 삼촌을 찾아가는 어린 소녀  102)제사를 지내는 늙은 제관  103)수박씨와 호박씨를 익숙하게 까먹는 중국인들  104)시인의 친구 정현웅, 허준  105)도스토옙스키, 죠이쓰  106)촌에서 온 아이 몇몇 역사적 인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농민들이거나 중심에서 비켜난 주변적 인물 유형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남에게 고통과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호소하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자신의 일상적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민초들인 것이다.    시인 백석은 영문학을 공부한 일본유학생 출신이었지만 귀국후 그의 활동은 이처럼 민족언어를 통한 민족본체성의 유지와 확보를 위한 노력에 바쳤다. 그의 시는 단 한마디도 민족주체를 말하지지 않았으나 동시대 어느 누구의 시보다도 더욱 진한 민족주체의 정신적 토양을 확고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시에서는 1930년대 중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까지의 황량한 시대를 배경으로 전형적인 한국인의 표상들이 그려져 있다. 메기수염을 한 늙은 과일장수, 앓는 아버지를 위하여 약물을 받으며 오는 갸륵한 산골소년, 굿판에서 날이 시퍼런 작두를 타는 애처러운 애기무당, 민물고기를 잘 잡는 뻐드렁니 소년, 주막집에서 왁자지껄한 떠돌이 장사꾼들, '여우난골'이라고 불리는 지역마을의 주민들, 객주집의 병들어 누운 창백한 소녀의 표정, 달밤에 고민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목매어 자결한 수절과부, 타관가서 돌아오지 않는 가장, 또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고향집의 아내와 아들, '가즈랑집'이라는 택호로 불리는 혼자 사는 할머니, 오리덫을 놓고 기다리는 아버지와 아들, 초겨울 양지바른 흙담벽에 붙어서 코를 흘리며 감자를 먹고 있는 산골 소년들, 논두렁 개구리를 잡아서 구어먹는 소년들, 평안도의 어느 금광 입구에서 옥수수를 파는 한 여인의 슬픈 생애와 그 내력, 산골 여인숙에서 반들반들하게 기름때가 오른 목침을 베고 하루밤을 자고간 한없이 마음이 참담했던 식민지의 백성들, 일본인 순사의 집에서 서름구덩이로 식모살이를 하면서 손들이 거북등처럼 얼어터진 불쌍한 소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사람들은 일제강점하를 살아갔던 민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요, 또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원초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백석이 처음 등단했을 때의 작품은 소설 이었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대감이라고 불리는 아들과 과부인 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과부가 온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미곡상을 하는 양고새의 아이를 배지만, 양고새가 바라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을 출산하므로서 끝내 버림받은 몸으로 마을에서 멀리 쫓겨가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후에 발표한 소설 에 등장하는 다리를 못쓰는 지체장애자 덕항녕감과 앞을 못보는 소경 저척노파에 관한 이야기도, 그리고 그들을 버리고 달아난 양아들 부부도 시인의 말로 표현하자면 '낮고 거짓되고 겸손할 줄 모르는 우리 주위'에 대한 시인의 신랄한 비판의식의 표현이다. 닭을 매개물로 하여 욕심 많은 디평령감과 농촌 청년 시생이 사이에 벌어진 묘한 갈등과 암투, 그리고 어부지리로 닭을 얻은 걸인 노파 바발할망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도 와 같은 계열로서 가난하고 못생긴 사물, 소외된 존재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자 하는 백석 문학의 기본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 백석은 항상 힘없고 사는 것이 어려우며 고통스러운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의 아픔과 애환을 생생하게 그리고 정감이 감도는 필치로 그리려 하였고, 또 그것을 정감이 담뿍 감도는 필치로 그려서 보여주었다.    요즘같이 말이 타락할대로 타락해서 말이 지닌 본래의 질서, 본래의 기품이 현저히 상실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지난 날 민족언어의 질서를 회복하려고 혼자서 안간힘을 쓰던 한 시인의 눈물겹고도 아름다웠던 시정신을 다시금 가슴으로 느끼며 오늘의 우리를 새로운 긴장으로 가다듬고 추스려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318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정지용 - 향수 댓글:  조회:3681  추천:0  2015-12-10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요점 정리 주제: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 제재:고향의 정경 성격:향토적,감각적,회고적,시각적--자유시,서정시 출전:(1927.3) 표현상 특징: * 시각적 이미지 중시 -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의 대상이 주로 등장됨 * 참신하고 선명한 감각성 * 인간의 근원적 정서의 표출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회고적 기법으로 처리 * 서경과 서정의 교차를 통한 내적 리듬의 형성 * 후렴구를 통한 의미의 강조(주제를 부각시킴) 및 형태상의 균형  시의 구성 :  제 1 연 :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향 마을을 둘러싼 자연적인 공간을 제시, 넓은 들판과 실개천의 대조 -넓은 벌판과 그 벌판 동쪽 끝으로 흐르는 옛이야기가 얼켜 있는 실개천이 있는 곳이요, 실개천은 물장구치며 놀기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던 곳이요, 그 곳은 또한 어린아이들이 잠자리와 메뚜기를 잡으려고 뛰어다닐 때, 얼룩백이 황소가 울음을 울며 지나던 곳이다. 시적 화자는 봄의 시골 모습인 벌판 실개천과 황소를 그리워하고 있다. 제 2 연 : 겨울밤 풍경과 아버지에 대한 회고 - 질화로의 재가 식어지면, 문틈으로 찬 바람소리가 들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던 방이다. 계절로 보면 겨울이다. 질화로가 있는 겨울은 여러 가지를 연상시켜 준다. 질화로에 밤을 구워 먹으면서, 옛날 이야기를 듣던 구수한 고향을 떠오르게 한다. 겨울에 즐기던 연날리기 불놀이 윷놀이 등을 그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며, 동시에 늙으신 아버지에 대한 관심과 걱정은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기도 하다. 제 3 연 : 시적 화자의 유년기의 직접적인 경험 회고 - 고향의 흙 속에서 자란 온정이 감도는 마음, 그리운 파란 하늘, 화살놀이를 하면서 뛰놀던 풀섶 등을 그리워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다. 맑고 깨끗한 품성을 길러준 고향의 소박한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제 4 연 : 누이와 아내에 대한 회고 - 고향에 있는 어린 누이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시골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여인들의 모습이다. 궂은 일에 온갖 고생을 참고 지내던 조강지처의 모습과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함께 보낸 누이를 그리워하면서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도 그리워 하고 있다. 제 5 연 : 단란한 농가의 정경 - 하늘에 있는 별, 서리 까마귀 우짖고 지나가는 지붕과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 구수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은 가정의 단란함을 떠올리게 한다. 어휘와 구절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 : 옛마을이 유서깊은 전설의 터전임을 암시  황소 : '온순,평화,한가로움'의 이미지 해설피 : 소리가 느릿하고 길며 약간 슬픈 느낌이 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 금빛 게으른 울음 : 공감각적 표현(청각→시각) 해설피, 게으른 : 농촌의 한가함을 대변해 준다. 질화로, 짚벼개 : 전형적인 농가의 방안 환기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시간의 경과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활유(의인화), 바람이 분다(지나간다) 엷은 졸음 : 살풋 든 졸음을 감각화한 표현 아버지 : '자애'의 이미지 짚벼개 : '휴식'의 이미지 흙에서 자란 마음과 파란 하늘빛의 대조 :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그것과 조응 함부로 쏜 화살 : 上昇的 지향성과 함께 유년기의 순수 풀섶 : 풀이 많이 난 곳 이슬 : '청신함'의 이미지 함초롬 : 가지런하고 고운 모양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 역동적 심상 원관념 - 검은 귀밑머리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평범한 사철 발 벗은 아내 : 가난을 암시 누이 : '理想,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순결'의 이미지 아내 : '현실, 생활과 속세'의 이미지 성긴 별 : 드문드문 돋아난 별 서리 까마귀 : 가을 까마귀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와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의 대조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 황량하고 싸늘한 초겨울의 분위기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 집안의 따뜻한 분위기 초라한 지붕 : 가난을 암시 이해와 감상 정지용의 초기시의 하나로서, 1930년대에 지니게 되는 이미지스트의 시풍과는 달리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주정적(主情的)으로 노래했다.  그는 충북 옥천(沃川)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도쿄에 유학하던 1923년 경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공간은 당시의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보편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그런 뜻에서 이 작품은 특정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서서 한국인이 지닌 향수의 보편적 영상으로 수용될 만하다. 작품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각 부분마다 고향의 모습을 회상하는 연이 먼저 오고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독백이 이어짐으로써 간절한 그리움을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의 수법은 무척 단순한 것이지만, 그 어떤 복잡한 기교보다도 절실하게 시인의 심경을 나타내 준다. 다섯 부분의 구성은 순탄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교묘하다. 첫째, 셋째, 다섯째 부분은 포근함과 아름다운 꿈이 서려 있는 고향의 모습이다. 둘째, 넷째 부분은 가난하고 고단한 삶의 모습이 담긴 고향을 보여 준다. 작품 전체는 결국 이 두 가지 빛깔로 채색된 고향의 모습이 차례로 엇갈리면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두가 사랑스럽고 그리운 삶의 원천으로 절실하게 결합하는 데에 바로 시인이 노래하는 향수의 깊은 호소력이 있다. 참고 자료 정지용의 시 세계와 문학사적 의의 : 정지용은 휘문 고보 시절 박팔양 등과 함께 습작지 을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1920년대 중반부터 모더니즘 풍의 시를 써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 무렵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향수'와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그린 '카페 프랑스'같은 작품이 주목된다. 그러나 정작 정지용의 시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1930년대 이후이다. 1930년대 첫머리부터 그는 의 동인으로 참여, 김영랑과 함께 순수 서정시의 개척에 힘을 썼다. 그러나 김영랑이 언어의 조탁과 시의 음악성을 고조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인 데 비해, 정지용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표현의 방법을 개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의 장기로 여겨지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의 구축, 간결하고 정확한 언어 구사가 바로 그것이거니와, 이를 통해 그는 한국 현대시의 초석을 놓은 시인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그는 사상적인 면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보여 주는데, 한때는 카톨릭 신앙에 기초한 신앙시를 쓰기도 했고, 1930년대 말에는 동양적 은일(隱逸)사상에 기대어 '장수산', '백록담' 같은 시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시적 변모를 보여 주면서도 그의 시는 줄곧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1930년대 말부터 지의 심사 위원으로 있으면서 정두진, 박목월, 조지훈, 김한직, 박남수 등 많은 시인들을 문단에 소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6 25를 전후하여 납북되어 현재 생사를 모른다. 한때 월북 시인으로 분류되어 문학사에서 다루어지지 않았으나 1988년에 해금되었다.    1927년 3월' 조선지광'에 실린 '향수' 정지용의 '향수'를 ​1930년에 채동선이 작곡하였고 1989년에는 김갑이 작곡하여 테너 박인수. 가수 이동원이 듀엣으로 불러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 잊고 있던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향수를 많은 가수. 배우.성악가들이 불렀지만 그래도  '박인수&이동원이 ​제일 좋다  
317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한용운 - 님의 침묵 댓글:  조회:3089  추천:0  2015-12-10
  『한용운 선생 생가지 (韓龍雲 先生 生家址)』 종목; 충남 기념물 제 75호  |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탄생지  |  면적; 484㎡  |  지정일; 1989. 12. 29. 소재지;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  |  전화; 041) 642-6716  |  관리자; 홍성군 관람안내; 매주 월요일 휴관  |  답사일; 2014. 09. 30(火), 충남 홍성의 역사 인물답사     충남 홍성의 역사 인물 답사여행, 에 이어 두번째로 찾은 곳은 독립운동가요 승려이자 시인이셨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 「만해 한용운선생 생가」였습니다. 이곳에는 한용운 선생의 생가(生家), 사당인 만해사, 민족시비공원, 만해문학체험관 등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여유롭고 조용한 자연 속에서 만해 선생의 주옥같은 시편들과 함께 그의 애국정신도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한용운 선생 생가지 전경, 이곳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는 홍성8경 중 제 3경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 소개,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 75호로 지정된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 안내문,           ▲ 한용운 선생 생가지,     【한용운 선생 생가지】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 선생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호는 만해(萬海).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는데, 이 신간회는 후에 학생 의거와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전개되고 추진되었다. 저서로 『님의침묵』,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 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에 복원하였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가장 먼저 한용운 선생 생가를 둘러보았습니다.       싸리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본채가 있고 바깥쪽에는 흙담 화장실,           문화재 표지석과 싸리나무 울타리 그리고 그 너머에는 만해 선생의 생가,         늙은 감나무 아래에서 본 생가 전경,       생가 가운데방 문에는 선생의 시 "님의 沈默"이 걸려 있고 방안에는 사진에 걸려있습니다.             가운데 방문 위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轉大法輪(전대법륜, 진리의 변화를 설명한 글)" 서각이 걸려 있습니다.         생가 후원에 있는 우물과 장독대,         초가의 양 옆에 1칸을 달아낸 모습,             한용운 선생 생가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ㄱ자 형태의 초가,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禁門(금문)" 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당 신문(神門),             금문 아래에서 본 만해사(卍海祠, 사당), 스님이셨던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당.         만해사 금문 앞에서 바라본 만해체험관,           민족시비공원에서 바라본 한용운 선생 생가와 사당, 이제 시비공원으로 민족시를 찾아 나섭니다.       한용운 선생의 '복종' 시비가 가장 먼저 반깁니다.     복종 服從  |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는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민족시비공원길은 아름다운 소나무 숲속 오솔길을 따라 약 3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새긴 시비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백석(白石 白奭, 1912~1996) 시인의 "모닥불"부터 하나 하나 음미해보며 걷는 길이 참 좋았습니다.         동문수학했던 김남주(金南柱, 1946~1994) 형의 시 "자유"도 읊어 보았습니다.     자유  |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 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민족시비공원 산책로와 만해정(卍海亭),             민족시비공원 앞 감나무에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감들이 붉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민족시비공원 앞에 세워진 한용운 시비(韓龍雲 詩碑, 왼쪽 사진)와 나손 김동욱 문학비(羅孫 金東旭 文學碑),     알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自嘲 자조  |  나손(羅孫) 김동욱(金東旭, 1922~1990, 국문학자)   하늘 위에 구름이 떠가면 / 잠시 기다리자 새소리가 들리면 잠깐 멈춰서자 그리고 구름 위에 아무소리 없이 태양이 가는 굉음을 들어보자       만해 선생의 어록비와 "나룻배와 行人" 시비 ​ ​ 나루ㅅ배와 行人  |  한용운   나는 나루ㅅ배 /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루ㅅ배 / 당신은 行人       만해 한용운 선생이 기초한 3·1독립선언문의 공약삼장(公約三章),             한용운 선생 생가터에 있는 민족시비공원 전경,         한용운 선생 생가터에 있는 만해문학체험관,         만해문학체험관 옆에 세워진 선생의 흉상,         만해문학체험관 내부, 이곳에는 6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어린이 체험실에는 만해 탁본교실과 300여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초상화,   萬海堂龍雲大禪師之眞影(만해당용운대선사지진영)이라 쓰여 있고 그의 대표 시인 "님의 沈默"이 함께 쓰여 있습니다.             만해 연보와 님의 침묵 재간본,         만해 한용운 선생, ​ ​ ​   ​ [출처] [충남 홍성] 한용운 선생 생가지(韓龍雲 先生 生家址)_충남기념물 75호|작성자 엽토51       한용운 - 님의 침묵(沈默)               님의 침묵(沈默)                             한용운 /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이시고 시인이신 만해 한용운님의 시 님의 침묵.     이 시는 88편이 실린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가 된 작품. 님의 침묵은 제목이 말해 주듯이 `님이 침묵하는시대' 의 님을 잃은 슬픔과 새로운 신념을 노래한 서정시. 식민지의 조국, 그의 시대를 님이 침묵하는 시대로 보다.     [출처] 한용운 - 님의 침묵(沈默) [아름다운 시]|작성자 귀공자 ================================================== 만해 한용운님의 일화 모음   ▶城谷의 神童  선생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기억력과 이해력이 뛰어나 가끔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동(神童)이라고 불렀으며, 선생의 집은 신동집으로 통했다 한다.   어느날 선생이 서당에서 《대학 大學》을 읽으면서 책의 군데군데 시커멓게 먹칠을 하고 있었다. 이상이 생각한 훈장(訓長)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자(程子)의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아홉 살 때에 《서전 書傳》을 읽고 기삼백주(朞三百註)를 자해(自解) 통달했다고 하는 천재였지만, 훈장은 또 한번 놀랐다. ▶비녀가 소용없다  선생은 1912년을 전후하여 장단(長湍)의 화장사(華藏寺)에서 〈여자단발론 女子斷髮論〉을 썼다. 당시 남자들에 대한 〈단발론〉이 사회적 물의를 크게 자아내고 있을 때 감히 여자의 단발을 부르짖은 것은 선생의 선각적인 일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원고는 지금 전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런데 그 무렵 선생은 "앞으로 20년쯤 후가 되면 비녀가 소용없게 된다."고 예측하였으며 좋은 금비녀를 꽂고 있는 부인을 보면,  "앞으로 저런 것은 소용없게 될텐데......"하였다는 것이다.   ▶어서 덤벼 봐라  선생이 고성(高城) 건봉사(乾鳳寺)에 계실 때였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한 그 지방의 어떤 부자를 만났다. "이놈, 중놈이 감히 인사도 안 하고 가느냐? " 하고 지나쳐 가려는 선생을 가로막고 시비를 걸었다. 선생은 못 들은 척하고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자, 그 부자는 따라와서 덤벼들었다. 선생이 한번 세게 밀었더니 그는 뒤로 나동그라져 언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선생이 절로 돌아온 얼마 후 수십 명의 청년들이 몰려와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놈들 어서 덤벼 봐라.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하고 드디어 화가 난 선생은 장삼을 걷어붙이고 힘으로써 대결하였다. 치고 받고 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자그마한 체구였으나 어릴 때부터 남달리 힘이 세었던 선생을 당하는 사람이 없어 하나둘씩 꽁무니를 뺐다. 강석주(姜昔珠) 스님은 선학원(禪學院) 시절의 선생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선생은 기운이 참 좋으셨습니다. 소두(小斗) 말을 놓고 그 위를 가부좌(跏趺坐)를 한 채 뛰어넘을 정도였으니까요. 팔씨름을 하면 젊은 사람들도 당하지 못했지요." 선생은 심우장(尋牛莊)에서 종종 선학원을 찾아갔는데 혜화동을 거치는 평지길을 택하지 않고 삼청동 뒷산을 넘어다니셨다. 이때 선생을 따르던 저는 당시의 일이 이렇게 생각난다. "삼청동 뒷산을 넘을 때 선생은 어찌나 기운이 좋고 걸음이 빠른지 새파란 청년이었던 제가 혼이 났었지요. 그저 기운이 펄펄 넘쳤어요. 선생은 보통 걸음으로 가시는데 저는 달음박질을 해도 따라가지를 못했어요." 또 조명기(趙明基)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만해 선생은 힘이 셀 뿐 아니라 차력(借力)을 하신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요. 왜경이 뒤쫓을 때 어느 담모퉁이까지 가서는 어느 틈에 한길도 더 되는 담을 훌쩍 뛰어넘어 뒤쫓던 왜경을 당황케 했다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커다란 황소가 뿔을 마주대고 싸울 때 맨손으로 달려들어 두 소를 떼어놓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지요." 아무튼 선생은 남다른 역사(力士)이기도 했다. ▶痲醉하지 않은 채 받은 手術  선생이 만주 땅 간도(間島)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떤 고개를 넘다가 두서너 괴한(怪漢)들이 쏜 총탄을 목에 맞고 쓰러졌다. 피가 심하게 흘러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환상으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하얀 옷을 입고 꽃을 든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인의 모습인데, 미소를 던지면서 그 꽃을 선생에게 주면서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고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 중국 사람의 마을을 찾아가서 우선 응급치료를 받고 곧 한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의사는 큰 상처여서 매우 아플테니 마취를 하고 수술하자고 했으나 선생이 굳이 마다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마취를 하지 않았다. 생뼈를 깎아내는 소리가 빠각빠각 날 뿐 아니라 몹시 아플텐데도 까딱 않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견뎌냈다. 의사는 "그는 인간이 아니고 활불(活佛)이다"고 감탄하며 치료비도 받지 않았다 한다. ▶네 郡守지, 내 군수냐 선생이 백담사(百潭寺)에서 참선(參禪)에 깊이 잠겨 있을 때 군수가 이곳을 찾아왔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영접을 하였으나 선생만은 까딱 않고 앉아 있을 뿐 내다보지도 않았다. 군수는 매우 괘씸하게 생각하여, 저기 혼자 앉아 있는 놈은 도대체 뭐기에 저렇게 거만한가!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선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왜 욕을 하느냐?" 고 대들었다. 군수는 더 화가 나서,뭐라고 이놈! 넌 도대체 누구냐?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선생은 "난 한용운이다."하고 대답했다. 군수는 더욱 핏대를 올려 "한용운은 군수를 모르는가! "하고 말하자, 선생은 더욱 노하여 큰 목소리로, "군수는 네 군수지, 내 군수는 아니다."라고 외쳤다. 위엄 있는 이 말은 군수로 하여금 찍 소리도 못하게 하였다.   ▶僧侶娶妻論의 辯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발표했을 때 이중에 들어있는 승려취처론에 대한 시비가 벌어졌다. 이때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당면문제보다도 30년 이후를 예견한 주장이다. 앞으로 인류는 발전하고 세계는 변천하여 많은 종교가 혁신될텐데 우리의 불교가 구태의연(舊態依然)하면 그 서열에서 뒤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금제(禁制)를 할수록 승려의 파계(破戒)와 범죄는 속출하여 도리어 기강(紀綱)이 문란해질 것이 아닌가. 후세 사람들은 나의 말을 옳다고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나라로서 제대로 행세를 하려면 적어도 인구는 1억쯤은 되어야 한다. 인구가 많을수록 먹고 사는 방도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 인구가 일본보다 적은 것도 수모(受侮)의 하나이니 우리 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 ▶月南 李商在와의 訣別  3·1운동을 준비할 때, 선생은 이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호응을 가장 널리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종교단체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측의 이상재 선생을 만나서 대사(大事)를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월남은  "독립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고 무저항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오."라고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선생은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본위(他力本位)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하고 주장했다.  이같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선생은 월남과 정면 충돌하였기 때문에, 월남을 지지하는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선생의 의견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월남이 가담했더라면 3て1운동에 호응하여 서명하는 인사가 더욱 많았겠지만...... 죽음을 초월한 용맹이 극히 귀하다."고 한탄했다. 서명서에 기명 날인이 잘 되면 백명 이상은 되리라던 예측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죽기 참 힘든 게로군  선생은 3·1운동의 준비 공작을 서두르는 동안 여러 인사를 만났다. 박영효(朴泳孝)와 한규설(韓圭卨)과 윤용구(尹用求)들을 차례로 접촉해 보았다. 그러나 대개는 회피하고 적극적인 언질을 피하였다. 서울의 소위 양반과 귀족들은 모두가 개인주의자요, 국가와 민족을 도외시한다고 한탄하며  "죽기 참 힌든 게로군! "하고 말했다. ▶당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선생은 최린(崔麟)의 소개로 천도교 교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의암은 조선 갑부 민영휘(閔泳徽)て백인기(白寅基), 그리고 고종(高宗)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조선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자가용 자동차까지 가지고 있었다. 선생이 3て1운동에 천도교측이 호응해 주기를 요구했더니 먼저 이상재는 승낙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손 선생께선 이상재 선생의 뜻으로만 움직입니까? 그러면 이 선생이 반대하니 선생도 그를 따르렵니까? 그러나 이미 대사(大事)가 모의되었으니 만일 호응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하고 힘의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말을 하였다. 이 말에 적이 놀란 의암은 자기를 총대표(總代表)로 내세우는 조건으로 서명을 승낙했다. 의암의 이 승낙으로 천도교의 여러 인사들은 의암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기미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김병조(金秉祚),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정춘수(鄭春洙) 네 사람을 제외한 29인이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너무 심하여 선언서를 낭독할 겨를조차 없었다. 부득이 선언서의 낭독을 생략하여 연설로 대신하고 축배를 들게 되었다.  최린의 권고로 만해 선생이 앞에 나서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 선언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  간단하고 짧은 연설이지만 선생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한 셈이었다. ▶가짜 권총   3·1운동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당대의 거부 민영휘(閔泳徽)를 찾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하므로 선생은 권총을 끄집어내었다. 민영휘는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돕겠노라고 맹세했다. 이때 선생은 힘있게 쥐었던 그 권총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 권총은 다름아닌 장난감 권총이었다. 탐정 소설에나 나오는 듯한 흥미있는 이야기지만 선생의 이런 수단은 오직 독립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취해진 비장한 행위였다.  민영휘는 맹세한 터라 "비밀리에 모든 협조를 하겠소. 그에 필요한 비용도 주겠소. 그러나 이후부터는 다시 나를 찾지 말고 내 아들 형식(衡植)과 상의하여 일을 추진시켜 주기 바라오. 부디 성공을 비오."라는 간곡한 뜻을 말했다.  민형휘는 이 일이 있은 후 선생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조선 독립을 도왔고, 선생이 별세하였을 때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 郭鍾錫과 萬海   만해 선생은 3·1운동을 계획하면서 독립선언 서명자 가운데에 유림(儒林) 출신의 인사가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는 것을 개탄했다. 서울에는 유림 지도자들이 있으나 거의 친일에 기울어져서 경남 거창(居昌)에 사는 대유학자 면우(면宇) 곽종석 선생을 찾아갔다.   만해 선생은 면우 선생에게 먼저 세계 정세를 알리고 독립운동의 참가 여부를 물으니 즉석에서 협조할 것을 쾌락하고 곧 가사(家事)를 정리한 뒤에 서울에 올라가 서명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면우 선생은 공교롭게도 독립 선언일을 몇일 앞두고 급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자기 인장을 갖고 만해 선생을 찾아 뵙게 하였다.   ▶獄中에서의 大喝  3·1운동으로 투옥되어 있을 때, 최린은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을 차별대우할 뿐만 아니라 압박하고 있다는 말들을 하며 총독 정치를 비판했다.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선생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니, 그럼 고우(古友)는 총독이 정치를 잘한다면 독립 운동을 안 하겠다는 말이오! "라고 하였다. ▶監房의 汚物  민족 대표들은 모두 감방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그대로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평생을 감옥 속에서 살게 되지나 않을까? "  그들이 속으로 이러한 불안을 안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극형에 처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선생은 태연자약하였으나 이런 얘기를 전해들은 몇몇 인사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 모스?? 지켜보던 선생은 격분하여 감방 안에 있는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취소해 버려라! "라고 호통을 치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日本은 敗亡한다  독립 선언 서명자들이 이 법정에서 차례로 신문(訊問)을 받을 때, 선생은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왜 말이 없는가? "라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재판관을 꾸짖었다.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 "  신문이 계속 되자, 선생은 "할 말이 많으니 차라리 서면으로 하겠다."고 지필(紙筆)을 달래서 옥중에서 장문의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의 書〉를 썼다.  여기에서 선생은 조선 독립의 이유, 독립의 자신, 독립의 동기, 민족의 자유 등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총독 정치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결심공판(結審公判)이 끝나고 절차에 따라 최후 진술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생은  "우리들은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정치란 것은 덕(德)에 있고 험(險)함에 있지 않다. 옛날 위(魏)나라의 무후(武侯)가 오기(吳起)란 명장(名將)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내려오는 중에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을 자랑하다가 좌우 산천을 돌아보면서 "아름답다 산하의 견고함이여, 위국(魏國)의 보배로다"하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오기는 이 말을 듣고 "그대의 할 일은 덕에 있지,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적이 되리다"고 한 말과 같이, 너희들도 강병만을 자랑하고 수덕(修德)을 정치의 요체(要諦)로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고립하여 마침내는 패망할 것을 알려두노라."라고 말했다. 과연 선생의 말씀대로 일본은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쫓겨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예견했던 선생은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바로 그 전해에 별세하였다.   ▶ 마중받는 인간이 되라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간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출감하던 날, 많은 인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독립 선언 서명을 거부한 사람이요, 또 서명을 하고도 일제의 총칼이 무서워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었다. 선생은 이들이 내미는 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얼굴둘만을 뚫어지게 보다가 그들에게 침을 탁탁 뱉았다. 그리고는,  "그대들은 남을 마중할 줄은 아는 모양인데 왜 남에게 마중을 받을 줄은 모르는 인간들인가."라고 꾸짖었다. ▶鐵窓  哲學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약 1개월 뒤,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이때의 연제는 철창 철학이었는데 회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일제의 임검으로 온 경관은 미와(三輪)란 일본 형사였다. 연설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해산 명령은 물론이며, 현장에서 연사를 포박해가는 때였으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선생은 임검에 거슬리지 않게 하면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약 2시간 동안이나 연설을 하였는데 맨 마지막에는 비장한 어조로  "개성 송악산(松岳山)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滿月臺)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善竹橋)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矗石樓)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목 씻는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오래 계속되었으며, 이 일본 경찰관까지 박수를 쳤다고 한다.   ▶島山과 萬海  만해 선생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나라의 장래를 의논한 일이 있다.  이때 도산은 우리가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西北) 사람들이 맡아야 하며, 기호(畿湖)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만해 선생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도산 선생은 기호 사람들이 오백년 동안 정권을 잡고 일을 잘목했으니 그 죄가 크며, 서북 사람들은 오백년 동안 박대(薄待)를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다. 그후부터 만해 선생은 도산 선생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 인도에도 金允植이 있었구나  3·1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그전에 일제가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반납한 일이 있다. 이것은 독립 운동의 여운이 감도는 당시에 취해진 민족적인 반성이었다. 이 일이 있은 몇달 뒤 인도(印度)에서는 우발적인 일치랄까,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촉이라고 노래한 바 있는 시인 타고르가 영국에서 받았던 작위를 반납하였다. 이것은 간디의 무저항주의적인 반영(反英) 운동의 자극을 받은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인도에도 김윤식이 있었구나"하는 묘한 비판을 하였다. ▶神이여, 自由를 받아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저명 인사들의 강연회를 열었을 때, 선생은 마지막으로 자유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여러분, 만반진수(滿盤珍羞)를 잡수신 후에 비지찌개를 드시는 격으로 내 말을 들어 주십시오. ...... 아까 동대문 밖을 지날때 과수원을 보니 가지를 모두 가위로 잘라 넣았는데 아무리 무정물(無情物)이라도 대단히 보기 싫고 그 무엇이 그리웠습니다"하는 비유를 들어 부자유(不自由)의 뜻을 말하자, 청중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부자유를 과수원의 가지 잘린 나뭇가지에 비유한 것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자유를 빼앗긴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입회 형사는 그 뜻을 모르고 박수를 하는 청중들에게, 고작 과수원 전정(剪定) 이야기인데 박수를 하느냐고 청중의 한 사람에게 따졌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재치 있게도,  "낸들 알겠어요. 남들이 박수를 하니 나도 따라 쳤을 뿐이지요"라고 임기웅변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잠시 폭소가 터졌다고 한다. 선생은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하고 자유를 구걸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부자유할 때 신도 부자유하고 신이 부자유할 때 사람도 부자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가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고 열을 뿜었다.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 하는 이 말을 그때 참삭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自 助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의 선전 겅연회가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만원을 이룬 가운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로 유성준(兪星濬) 선생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 취지에 대하여라는 열변에 이어 만해 선생은 자조라는 연제로 불은 뿜는 듯한 열변을 토했다. 말끝마다 청중의 폐부를 찌르는 선생의 독특한 웅변은 청중들을 열광케 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  선생은 웅변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말이 유창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목소리 또한 맑고 힘찼다. 그리고 선생이 강연을 하게 되면 으레 일제의 형사들이 임석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청중들을 매혹시키는지 그들조차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고 한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소련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국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슬아슬한 자문자답식 강연에, 임석했던 형사들은 차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청중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일본일까요? 남들은 모두들 일본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고 합디다" 선생의 능수능란한 강연은 이렇게 발전해 갔다. 임석 형사가 눈에 쌍심지를 켠 것은 바로 이때다.  "중지! 연설 중지! "  그러나 선생은 아랑곳없이 어느새 말끝을 다른 각도로 돌려놓고 있었다.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소련도 아니요, 미국도 아닙니다. 물론 일본도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는 말입니다."  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청중들은 박수갈채를 했다. 이쯤 되니 일제 경찰들도 더 손을 못 대고 머리만 긁을 뿐이었다. ▶昭和를 燒火하다  선생이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으로 있을 때 공문을 전국에 돌려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해 온 봉투의 뒷면에는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날이란 글자가 찍혀있었다. 이것을 본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천여장이나 되는 그 봉투들을 아궁이 속에 처넣어 태워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생은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 하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훌훌 사무실을 떠나버렸다. ▶나를 埋藏시켜라   선생은 젊은이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모든 기대를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젊은 후진들이 선생 자신보다 한걸음 앞장서 전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공부도 더 많이 하고 일도 더 많이 하여 선생 자신과 같은 존재는 오히려 빛이 나지 않을 정도로 되기를 바랐었다. [출처] 만해 한용운님의 일화 모음|작성자 나무  
한국 대구 수성못가 세워진 리상화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리상화 그는 근대 시사에 큰 자취를 남긴 대구가 낳은 시인으로 폭풍처럼 살다 간 파란의 생애는 우리 근대사와 많이 닮아있다. 43년의 짧은 생을 살면서 조국의 참담한 현실에 울분과 통곡이 있었기에 시인에게, 통곡, 역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저항적 서정시를 우리에게 물려 준 게 아닐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잠시 감상해 본다...              
315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김동환 - 국경의 밤 댓글:  조회:2507  추천:0  2015-12-10
   김동환 시비 위치 : 경북 김천시 대항면 김천문화공원                산 너머 남촌에는 (1).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릿 내음새, 아~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 데나.   (2).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아~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 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아~어느 것 한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 나. ~ ~ ~ ~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릿 내음새, 아~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 데나.   (3).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은 타고서 고이 들리네.      김동환 (金東煥 1901∼?)단어장에 추가요약 시인. 호는 파인. 본관은 강릉. 설명 시인. 호는 파인(巴人). 본관은 강릉.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생. 소설가 최정희(崔貞熙)의 부군(夫君).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를 거쳐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동양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1924)》로 추천받고 문단에 등장, 한국 최초의 서사시(敍事詩) 《국경의 밤》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신경향파에 속했으나 향토적이며 애국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민요적 색채가 짙은 서정시를 주로 썼다. 일제시대에 《삼천리(三干里)》지를 창간·주재한 것을 비롯해 1938년 순문예지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발간하였다. 작품으로는 시 《신랑신부(1925)》 《쫓겨가는 무리(1925)》 《파업(罷業)》, 희곡 《바지저고리(1927)》 《자장가 부르는 여성(1927)》, 소설 《전쟁과 연애》 등을 발표했고, 수필집 《나의 반도산하(半島山河, 1941)》 《꽃피는 한반도(1952)》, 시집 《승천(昇天)하는 청춘(1925)》,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과 합작한 《3인시가집(三人詩歌集, 1929)》 등이 있다. 6·25 때 납북되었고, 이후 평남일보교정원을 거쳐 1958년까지 재북(在北)평화통일위원회의 중앙위원으로 있었으나 현재는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 -김동환   제1부 < 1 >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巡査)가 왔다 - 갔다 -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 밤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北國)의 겨울 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 2 >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어이!"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處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재실이 벌부(筏夫) 떼 소리언만.   < 3 > 마지막 가는 병자(病者)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로운 바람 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變)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處女)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쓸어안고 흑흑 느껴 가며 운다. 겨울에도 한삼동(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끊는 소리언만.   < 4 >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 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把守幕)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빠알간 불빛이 보인다. 까아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을 부르면서.   < 5 >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 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 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깜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 벌에는 외아지 백양(白楊)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 안고 춤을 춘다. 아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處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 놓으면서.   ((작품 해설)) "국경의 밤"은 전체 3부 7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이다. 국경 지대인 두만 강변의 작은 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현재-과거-현재"의 시간 구조를 채택하여, 밀수꾼 병남(丙南)과 그의 아내 순이, 그리고 순이의 첫사랑이었던 청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북국의 겨울밤이 주는 암울한 이미지를 통해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고통과 불안을 형상화했다는 점에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일제 시대 많은 우리 백성들은 만주에 가서 살았다. 강제로 이주되어 간 사람도 있었고, 독립 투쟁을 하기 위해 간 사람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그리워하였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참담한 현실과, 쫓기는 자, 소외된 자의 비극적 좌절 체험을, 국경 지방 한겨울밤의 삼엄하고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극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의 전편에는 순이, 병남, 청년(옛 애인) 간, 또는 순이와 상황간의 갈등이 순이의 내부에서 관념적, 낭만적으로만 일어나고 있어, 서사시로서의 특징인 영웅화나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제재나 주제가 개인 단위의 정서 표출에 있지 않고 민족사와 그 운명에 대해 치열한 관심을 보여, 1920년대 감상적(感傷的)인 서정의 세계와 획을 긋는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느낌) 1장을 읽어보면 조국을 그리워하는 시. 이 시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한번 읽어 볼만한 좋은 시.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져 산(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1923) (1) 주제 : 이별의 아쉬움. 지난날에 대한 회상에 오는 그리움   (2)김소월(1902-1934) 본명 정식(廷湜). 평북 정주 출생 동인. 1920년 '낭인(浪人)의 봄'을 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고,‘진달래꽃’은 1922년 지에 실렸으며, 127편이 실린 시집 은 1925년에 나왔다. 1934년 12월 사업의 실패와 세상에 대한 실의로 고민하다가 음독 자살하였다. 통설에 따르면 민요시만 쓰다가 1926년부터 절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근에 짙은 저항성이 담긴 그의 말기 작품이 많이 발굴되었다. 대표작으로 ‘초혼’, ‘금잔디’, ‘가는 길’, ‘산유화’, ‘진달래꽃’, ‘접동새’,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등이 있다.   (3) 서정시  율격 : 3음보. 7,5조의 변형  의의 : 우리 민족의 내면에 흐르는 보편적 정한(情恨)을 진솔하게 표현 (4) 까마귀, 강물 - 머뭇거리고 있는 화자를 재촉하는 객관적 상관물 (5) 화자의 내적 갈등(머무름떠남)이 해소되지는 않고 있다. (6) 김소월 시의 특징 ㉠향토성: 대체적으로 향토적인 풍물, 자연, 지명을 소재로 삼음 ㉡민요풍: 오랜 세월 동안 겨레의 정서 생활의 가락이 되어 온 민요조의 리듬으로 이루어졌다. ㉢민족 정서: 시의 주제와 심상은 민족의 설움과 한(恨)의 정서를 활용, 민족의 보편적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철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김소월(1922)   (1) 주제 : 떠난 임(만날 없는 임)에 대한 강한 그리움   (2) 반어적 표현 “ 잊었노라 ” - 절대 잊지 못하겠다는 표현   (3) 과거 시제와 미래 시제가 공존하는 시제상의 모순이 나타난다.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25호(1922.7)   (1) 주제 : 이별의 정한(恨)   (2) 수미상관 - 1연과 4연, 기승전결의 구조 (3) 운율 : 7.5조의 변형, 3음보, -오리다 (각운) (4) ㉠ 역겨워-마음에 거슬리고 싫어서. ㉡ 유교적 전통 사회의 여성이 지닌 인종과 체념 ㉢ 향토성 ㉣ 진달래꽃 - 화자의 사랑, 정성 한국 꽃의 대유.  '헌화가', 정철의 '관동별곡'을 거쳐 한국 서정시의 소재적 전통을 형성한다. 애정시의 소재적 전통을 잇는다 ㉤ 아름-한 아름, 두 팔을 벌려 껴안은 둘레의 길이, 음악성 ㉥ 산화 공덕(散華功德), 임이 가시는 길에 축복이... ㉦사뿐히-발소리를 내지 않고 가볍게 살짝. ㉧즈려-눌러, 평안도 사투리. 가시는 임으로 하여금 진달래꽃을 밟게 하는 것은 가시는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과 축복의 표현이다. 이별의 한을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자기희생적 어조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 인고(忍苦)의 자세 반어법, 도치법 '속으로 몹시 울겠다.'는 뜻의 반어.     길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 현실적 상황     오늘은   또 몇 십 리(十里)   어디로 갈까.                         ▶ 떠돌이의 고달픈 신세     산(山)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 방향 상실감     말 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定州郭山)   차(車) 가고 배가는 곳이라오.               ▶ 자기 위안과 연민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 방향 상실의 비애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 방향 상실의 비애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 유랑인의 비애(현실적 상황) 김소월 (1925)   (1) 주제 : 유랑민의 비애와 정한 (2) 길 : 유랑인의 길(떠돌아다니는 삶의 여로) (3) 자문자답형식(문답법), (4)  ㉠가마귀 - 불안한 심리를 반영. 감정이입, 답답한· 우울한분위기 더함 ㉡기러기 - 선망의 대상. (정착할 곳을 향해 날아감, 방향이 있음) 화자와 공통점은 나그네, 차이점은 - 기러기(선망) ---목적지(정착)를 향해 날아감----- 공중(희망의 공간)  ↕                                               ↕ 나--------------목적지 없음, 방황-----㉢열십자 복판(운명의 기로)   (5) ㉣갈 곳 없는 떠돌이로서의 비애와 절망감을 단적으로 드러낸 시 전체의 결구로서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구절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1924)     (1) 주제: 인생과 자연의 근원적 고독,           고독하고 순수한 삶의 모습 (2) 어조 - 애상적, 영탄적 (3) 소재 - 꽃(고독감의 표상) (4)  ㉠ '갈'= 가을. 계절의 순서를 바꾼 의도 - 낯설게 함으로써 변화를 꾀하고, 율격의 흐름(음악성)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의도이다. ㉡ ‘저만치’- 작중 화자와 꽃 사이의 거리, 인간과 자연의 거리  '나'와 거리가 있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 꽃도 다른 꽃들과 떨어져 홀로 있음을 의미함.  '나'와 ‘꽃’- 외로운 존재 대상과의 거리를 설정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인 고독(외로움)을 형상화함 ㉢ 새 - 감정이입. 즉, 화자의 고독감과 외로움이 새에게 부여됨. 외롭고 쓸쓸한(고독한) 그 감정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 산 - 산(山)이라는 영원자에 포용되는 일체감 (4) 나, 꽃, 새 = 모두 외로움과 고독감을 지닌 존재---> 산에 포용됨 존재의 본질이 고독감임을 말함 (5) ㉤꽃이 지네 - 존재의 소멸 (6) 화자가 말하는 존재의 본질은? - 고독감 (7) 이 시의 주된 정서는? 고독감     산(山)   ㉠산새는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령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은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김소월(1922.10)     (1) 주제 : 떠나야 하는 상황과 그 미련 (2) 화자의 위치          들(떠나온 방향)-----화자---->고개---> 삼수갑산 - 화자가 가려는 방향은 삼수갑산이다. - 그러나 그 전에 ‘고개(령)’를 넘어야 하는 길이다. - 화자는 떠나온 길에 미련(정)이 남아서 돌아서기도 한다.   (3) ㉠산새 - 감정이입. - 산새는 제 고향 깊은 산골로 돌아가려고 하지만‘령[고개]’을 넘어야 하는 힘든 상황 앞에서 울고 있다. - 화자 자신도 삼수갑산을 향해 길을 떠나고 있지만 앞에 놓인 눈 내리는 고개를 넘어야 하는 힘든 상황이다.   ㉡ 눈 - 화자의 힘든 상황에 더해지는 고난, 시련   (4) ‘삼수갑산’의 의미는? 이상향이 아니다. 떠나온 곳은 십오 년 정분이 있는, 따뜻한 사람냄새가 있는 공간이다. 하루 동안 팔십 리를 걸으면서 그 중 육십 리는 되돌아 간 거리이다. 즉, 화자는 어떤 외적인 상황에 의해서 떠나온 것이지 삼수갑산을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삼수갑산은 화자가 의지하려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 곳은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화자는 ‘불귀,불귀,불귀...다시 불귀...’라고 말한다.   (5) 눈이 녹는 들(떠나온 방향)눈이 내리는 산(떠날 길)       ===================================================== 1925년 발간 생전 유일 시집…시작가 9천만원 (서울=연합뉴스) = 김소월(1902∼1934)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 초판본이 경매에 나왔다. 경매사 '화봉' 등에 따르면 경매에 나온 '진달래꽃'은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에서 간행한 시집으로, 책 제목과 같은 시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 후일',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초혼' 등 작품 127편이 16부로 나뉘어 수록돼 있다. '진달래꽃'은 총판매소에 따라 중앙서림 총판본과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으로 나뉘는데 이 책은 중앙서림 총판본이다.     현재 이 책과 같은 중앙서림 총판본 1책과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 3책 등 모두 4책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난 김소월은 오산학교 교사인 안서 김억의 지도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20년 '낭인' 등을 '창조'지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1922년 '개벽'지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원망하지 않고 진달래를 뿌리며 축복하는 내용의 '진달래꽃'을 발표하며 큰 주목을 받게 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하략)' 그러나 김소월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에 입학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한 그는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1934년 12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불과 33살이었다. 경매는 오는 19일 진행된다. 시작가는 9천만원이며 평가액은 2억원이다. 국내 근현대 문학서적 경매 사상 최고가로 낙찰된 책은 2014년 11월 19일 팔린 백석의 시집 '사슴'으로 알려져 있다.   ====================================     ▶         [OSEN=] 한국의 20세기 최고시인으로 꼽히는 김소월(1902~1934년)의 생전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1925년 발행)이 한국현대문학 경매사상 최고액인 1억 3500만 원에 낙찰됐다.    19일 서울 종로구 회봉문고에서 열린 제35회 화봉현장경매에 출품된 『진달래꽃』은 시작가 9000만 원에 경매를 시작, 경합 끝에 한국현대문학 사상 단일 시집은 물론 단행본 통틀어 최고액에 팔렸다.    『진달래꽃』은 그동안 중앙서림(中央書林)과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 총판본 등 두 종류가 매문사(賣文社) 한 출판사에서 같은 날짜에 나온 동본이종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경매사 화봉의 현장경매에 출품된 작품은 중앙서림 총판본이다.   이번에 출품된 『진달래꽃』은 지난 2011년 2월22일 문화재청 고시 제 2011-61호로 고시된 등록문화재(제470-1~4호) 4책과 동일한 판본으로 국내에 5권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극희귀본이다. 화봉 측은 이 시집의 평가액을 2억 원으로 매겨놓았다. 낙찰가는 평가액에는 다소 못미치는 1억 3500만 원이었다.   매문사판 『진달래꽃』은 10.5×14.7cm 크기의 234쪽 분량이고, 저작 겸 발행인이 김소월의 본명인 김정식(金廷湜), 발행소는 매문사, 인쇄소는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매소는 중앙서림으로 돼 있다. 발행일은 1925년 12월 26일, 정가는 1원 20전이다.    『진달래꽃』에는 김소월의 대표작인 ‘진달래꽃’을 비롯해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초혼’, ‘먼 후일’ 등 주옥같은 작품 127편이 16부로 나뉘어 수록돼 있다.   여태껏 한국 시집 가운데 경매 시장에서 최고액으로 낙찰된 것은 백석(1912~1996년) 시집 사슴으로 2014년 11월 19일 경매사 ‘코베이’에서 7000만 원에 팔렸다. 그 시집은 저자인 백석 시인이 이육사 시인의 동생이자 평론가인 이원조에게 친필 서명, 기증한 것이다. 사슴 역시 국내에 열 권 남짓 남아 있는 희귀본이다.    2015년 1월 21일엔 경매사 ‘코베이’에 출품됐던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1948년 발행)이 1300만 원에 낙찰된 적도 있다. ======================================================= 진달래꽃/김소월    진달래꽃/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金素月]은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입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외 많은 명시를 남겼습니다.   이하는 시인 김소월[金素月]의 생애 및 활동사항.   김소월 연보 출생 1902.8.6~ 사망 1934.12.24 1902 음력 8월 6일 평북 구성에서 장남으로 출생. 본명 김정식. 1907 조부가 독서당을 개설하고 훈장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 시작. 1909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남산소학교에 입학. 1915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오산중학에 입학. 스승 김억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 수업 시작. 1916 홍실단과 결혼. 1920 에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22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 1923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길에 오름. 10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1924 귀향해서 조부의 광산일을 도움. 영변 여행을 다녀와서 김동인, 김찬영, 임장화 등과 함께 동인이 됨. 1925 시집 《진달래꽃》 발표. 시론 을 5호에 발표. 1926 7월 평안북도 구성군에 동아일보 구성지국 개설, 지국장 역임. 1927 3월 동아일보 지국 폐쇄. 발표. 1929 조선 시가협회 회원 가입. 1934 12월23일 장에서 아편을 사가지고 와 음독함. 다음날 아침 8시경 시체로 발견됨. 평북 구성에 안장됐다가 후에 서산면 평지동 왕릉산으로 이장.          
313    소식 前后적벽부 댓글:  조회:2857  추천:0  2015-10-13
【苏轼文·前赤壁赋】 壬戌之秋,七月既望,苏子与客泛舟游于赤壁之下。清风徐来,水波不兴。举酒属客,诵明月之诗,歌窈窕之章。少焉,月出于东山之上,徘徊于斗牛之间。白露横江,水光接天。纵一苇之所如,凌万顷之茫然。浩浩乎如冯虚御风,而不知其所止;飘飘乎如遗世独立,羽化而登仙。 于是饮酒乐甚,扣舷而歌之。歌曰:"桂棹兮兰桨,击空明兮溯流光。渺渺兮于怀,望美人兮天一方。"客有吹洞箫者,倚歌而和之,其声呜呜然:如怨如慕,如泣如诉;余音袅袅,不绝如缕;舞幽壑之潜蛟,泣孤舟之嫠妇。 苏子愀然,正襟危坐,而问客曰:“何为其然也?”客曰:“月明星稀,乌鹊南飞,此非曹孟德之诗乎?西望夏口,东望武昌。山川相缪,郁乎苍苍;此非孟德之困于周郎者乎?方其破荆州,下江陵,顺流而东也,舳舻千里,旌旗蔽空,酾酒临江,横槊赋诗;固一世之雄也,而今安在哉?况吾与子,渔樵于江渚之上,侣鱼虾而友麋鹿,驾一叶之扁舟,举匏樽以相属;寄蜉蝣与天地,渺沧海之一粟。哀吾生之须臾,羡长江之无穷;挟飞仙以遨游,抱明月而长终;知不可乎骤得,托遗响于悲风。” 苏子曰:“客亦知夫水与月乎?逝者如斯,而未尝往也;盈虚者如彼,而卒莫消长也。盖将自其变者而观之,而天地曾不能一瞬;自其不变者而观之,则物于我皆无尽也。而又何羡乎?且夫天地之间,物各有主。苟非吾之所有,虽一毫而莫取。惟江上之清风,与山间之明月,耳得之而为声,目遇之而成色。取之无禁,用之不竭。是造物者之无尽藏也,而吾与子之所共适。” 客喜而笑,洗盏更酌,肴核既尽,杯盘狼藉。相与枕藉乎舟中,不知东方之既白。 Rén xū zhī qiū, qī yuè jìwàng, sū zi yǔ kè fànzhōu yóu yú chìbì zhī xià. Qīngfēng xú lái, shuǐbō bù xīng. Jǔ jiǔ shǔ kè, sòng míngyuè zhī shī, gē yǎotiǎo zhī zhāng. Shǎo yān, yuè chū yú dōng shānzhīshàng, páihuái yú dòuniú zhī jiān. Báilù héngjiāng, shuǐ guāng jiē tiān. Zòng yī wěi zhī suǒ rú, líng wànqǐng zhī mángrán. Hào hào hū rú féng xū yù fēng, ér bùzhī qí suǒ zhǐ; piāo piāo hū rú yí shì dúlì, yǔhuà ér dēngxiān. Yúshì yǐnjiǔ lè shén, kòu xián ér gē zhī. Gē yuē:"Guì zhào xī lán jiǎng, jí kōng míng xī sù liúguāng. Miǎomiǎo xī yú huái, wàng měirén xī tiān yīfāng."Kè yǒu chuī dòngxiāo zhě, yǐ gē ér hé zhī, qí shēng wū wū rán: Rú yuàn rú mù, rú qì rú sù; yúyīn niǎoniǎo, bù jué rú lǚ; wǔ yōu hè zhī qián jiāo, qì gū zhōu zhī lí fù. Sū zi qiǎorán, zhèngjīnwēizuò, ér wèn kè yuē:“Hé wéi qí rán yě?” Kè yuē:“Yuè míngxīng xī, wū què nán fēi, cǐ fēi cáomèngdé zhī shī hū? Xī wàng xià kǒu, dōng wàng wǔchāng. Shānchuān xiāng móu, yù hū cāngcāng; cǐ fēi mèng dé zhī kùn yú zhōu láng zhě hū? Fāng qí pò jīngzhōu, xià jiānglíng, shùn liú ér dōng yě, zhú lú qiānlǐ, jīngqí bì kōng, shāi jiǔ lín jiāng, héng shuò fù shī; gù yīshì zhī xióngyě, érjīn ān zài zāi? Kuàng wú yǔ zi, yú qiáo yú jiāng zhǔ zhī shàng, lǚ yú xiā ér yǒu mílù, jià yī yè zhī piānzhōu, jǔ páo zūn yǐ xiāng zhǔ; jì fúyóu yǔ tiāndì, miǎo cānghǎi zhī yī sù. Āi wúshēng zhī xūyú, xiàn chángjiāng zhī wúqióng; xié fēi xiān yǐ áoyóu, bào míngyuè ér zhǎng zhōng; zhī bùkě hū zhòu dé, tuō yí xiǎng yú bēi fēng.” Sū zǐ yuē:“Kè yì zhīfū shuǐ yǔ yuè hū? Shì zhě rú sī, ér wèicháng wǎng yě; yíng xū zhě rú bǐ, ér zú mò xiāozhǎng yě. Gài jiāng zì qí biàn zhě ér guān zhī, ér tiāndì céng bùnéng yīshùn; zì qí bù biàn zhě ér guān zhī, zé wù yú wǒ jiē wújìn yě. Ér yòu hé xiàn hū? Qiě fū tiāndì zhī jiān, wù gè yǒu zhǔ. Gǒufēiwú zhī suǒyǒu, suī yī háo ér mò qǔ. Wéi jiāngshàng zhī qīngfēng, yǔ shān jiān zhī míngyuè, ěr dé zhī ér wéi shēng, mù yù zhī ér chéngsè. Qǔ zhī wújìn, yòng zhī bù jié. Shì zàowù zhě zhī wú jìn cáng yě, ér wú yǔ zǐ zhī suǒ gòng shì.” Kè xǐ ér xiào, xǐ zhǎn gēng zhuó, yáo hé jì jǐn, bēipánlángjí. Xiāng yǔ zhènjí hū zhōu zhōng, bùzhī dōngfāng zhī jì bái. 【苏轼文·后赤壁赋】 是岁十月之望,步自雪堂,将归于临皋。二客从予过黄泥之坂。霜露既降,木叶尽脱,人影在地,仰见明月,顾而乐之,行歌相答。已而叹曰:"有客无酒,有酒无肴,月白风清,如此良夜何!"客曰:"今者薄暮,举网得鱼,巨口细鳞,状如松江之鲈。顾安所得酒乎?"归而谋诸妇。妇曰:"我有斗酒,藏之矣,以待子不时之须。"于是携酒与鱼,复游于赤壁之下。江流有声,断岸千尺;山高月小,水落石出。曾日月之几何,而江山不可复识矣。予乃摄衣而上,履谗[山旁]岩,披蒙茸,踞虎豹,登虬龙,攀栖鹘之危巢,俯冯夷之幽宫。盖二客不能从焉。划然长啸,草木震动,山鸣谷应,风起水涌。予亦悄然而悲,肃然而恐,凛乎其不可留也。反而登舟,放乎中流,听其所止而休焉。时夜将半,四顾寂寥。适有孤鹤,横江东来。翅如车轮,玄裳缟衣,戛然长鸣,掠予舟而西也。 须臾客去,予亦就睡。梦一道士,羽衣蹁跹,过临皋之下,揖予而言曰:"赤壁之游乐乎?"问其姓名,俯而不答。"呜呼!噫嘻!我知之矣。畴昔之夜,飞鸣而过我者,非子也邪?"道士顾笑,予亦惊寤。开户视之,不见其处。 [Sūshì wén·hòu chìbì fù] shì suì shí yuè zhī wàng, bù zì xuě táng, jiāng guīyú lín gāo. Èr kè cóng yǔguò huáng ní zhī bǎn. Shuāng lù jì jiàng, mù yè jǐn tuō, rényǐng zài dì, yǎng jiàn míngyuè, gù ér lè zhī, xíng gē xiāng dá. Yǐ ér tàn yuē:"Yǒu kè wú jiǔ, yǒu jiǔ wú yáo, yuè báifēngqīng, rúcǐ liángyè hé!"Kè yuē:"Jīn zhě bómù, jǔ wǎng dé yú, jù kǒu xì lín, zhuàng rú sōngjiāng zhī lú. Gù ān suǒdé jiǔ hū?"Guī ér móu zhū fù. Fù yuē:"Wǒ yǒu dǒujiǔ, cáng zhī yǐ, yǐ dài zi bùshí zhī xū."Yúshì xié jiǔ yǔ yú, fù yóu yú chìbì zhī xià. Jiāng liú yǒushēng, duàn àn qiān chǐ; shāngāo yuè xiǎo, shuǐluòshíchū. Céng rì yuè zhī jǐhé, ér jiāngshān bùkě fù shí yǐ. Yǔ nǎi shè yī ér shàng, lǚ chán [shān páng] yán, pī méng rōng, jù hǔ bào, dēng qiúlóng, pān qī gǔ zhī wēi cháo, fǔ féngyízhī yōu gōng. Gài èr kè bùnéng cóng yān. Huà rán cháng xiào, cǎomù zhèndòng, shān míng gǔ yīng, fēng qǐ shuǐ yǒng. Yǔ yì qiǎo rán ér bēi, sùrán ér kǒng, lǐn hū qí bùkě liú yě. Fǎn'ér dēng zhōu, fàng hū zhōngliú, tīng qí suǒ zhǐ ér xiū yān. Shí yè jiāng bàn, sìgù jìliáo. Shì yǒu gū hè, héng jiāngdōng lái. Chì rú chēlún, xuán shang gǎo yī, jiárán cháng míng, è yǔ zhōu ér xī yě. Xūyú kè qù, yǔ yì jiù shuì. Mèng yī dàoshi, yǔyī piánxiān,guò lín gāo zhī xià, yī yǔ ér yán yuē:"Chìbì zhī yóulè hū?"Wèn qí xìngmíng, fǔ ér bù dá."Wūhū! Yī xī! Wǒ zhīzhī yǐ. Chóuxī zhī yè, fēi míng érguò wǒ zhě, fēi zi yě xié?"Dàoshi gù xiào, yǔ yì jīng wù. Kāihù shì zhī, bùjiàn qí chù. ======================================   소동파 '적벽부'에 대하여                                   - 유중하(연세대 중문과 교수) 소식(蘇軾·1037~1101)은 북송의 문인으로 지금은 쓰촨성(四川省)에 속하는 미주(眉州) 미산(眉山)출생이다.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황주(黃州)에 유배되었을 때 그 인근의 동파라는 곳에 설당(雪堂)을 짓고는 동파거사로 호를 지었다.아버지 소순(蘇洵),아우 소철(蘇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라 일컬어지며,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이들 삼부자가 함께 이름을 올릴 정도로 문장에 뛰어난 집안 출신이다.아울러 서예와 회화에도 탁월한 성취를 이뤄 가위 전통 문인의 완전한 상을 구현한 인물로 일컬어진다.1069년 처음으로 벼슬에 들었으나 당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이 주동이 된 변법(變法)을 채택했는데,소식은 거기에 반대하여 구법(舊法)을 주장했다.중국 각지를 떠돌면서 유배생활을 하거나 지방관리를 지내면서 도처에 그의 족적을 남긴 바 있는데,특히 항주(杭州)에서 재직하던 시절 그곳 절경의 하나인 서호(西湖)에 쌓은 제방을 소동파의 이름을 따 소파(蘇坡)라 이름지은 것은 유명한 일화에 속한다. 동아시아의 문인들이 가장 즐겨 다룬 소재는 무엇이었던가.통계를 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마 술과 달일 것이다.서양문학의 두 뿌리를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 잡았을 때 아폴론이 바로 태양을 의미하는 것과 날카로운 대비를 이룬다고 보면 그리 틀린 진단은 아니겠다.해와 달의 대조는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문명적 상징에 다름아닌 것이다.지금부터 약9백여년 전인 1082년의 어느 하루,동아시아라는 달나라의 한 문인이 읊은 달밤의 정취가 세월의 단절을 넘어 아직도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물론 그것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라는 천하의 명문을 통해서다. 오뉴월 더위가 물러나고 추(秋) 칠월도 보름을 넘긴 이튿날,기망(旣望)이다.황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동파는 그 달을 즐기는 일을 잊을 리 없었다.마침 부근 강가에 적토(赤土)와 암벽이 수려한 곳이 있어 뱃놀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술을 마련하고 손을 불러 강에 배를 띄웠다.청풍이 소슬하게 불고 달은 휘영청 밝았겠다.술잔을 들어 권커니 잣거니 몇 순배가 돌자 주흥이 도도해지면서 절로 노랫가락이 좌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어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마침 좌중에 피리를 잘 부는 손이 있어 피리소리가 흥을 돋우면서 은은히 울려퍼지는데 소동파가 듣자하니 곡조가 흥에 겨운 것만은 아니었다.원한을 품은 듯 그리움을 펴듯,우는 듯 호소하는 듯 하면서 외로운 뱃전에 울려퍼지는 것이었다.술자리를 마련한 동파는 옷깃을 여미고는 피리 부는 손에게 그 까닭을 물을 수밖에.그러자 피리를 불던 손이 답하기를 『`달빛이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난다'(月明星稀 嗚鵲南飛)는 구절은 조조(曹操)의 시구가 아니옵니까” 손은 바야흐로 예전의 `적벽대전'을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옛적 오나라 손권(孫權)의 장수인 주유(周瑜)가 위나라의 조조를 쳐부수던 적벽의 옛일을 회고한 것도 지당한 일이라.강가 저 건너편으로 그 적벽과 흡사한 광경이 펼쳐져 있거늘.싸움에 임하여 강에 당도한 바,절경을 앞에 놓고 창을 내려놓은 다음 시를 지어 경관을 읊은 것이 어찌 영웅다운 행동이 아닐손가.하지만 지금 그들 두 영웅은 간 곳이 없고,강건너 적벽만이 남아 그들을 떠올리게 할 따름이니 어찌 인생무상이 아닌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피리 불던 손은 인생이란 본시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장강의 무궁함이 부럽기만 했던 것이다.하지만 소동파가 누군가.송대 문인의 정점에 소동파가 자리하고 있다 함은 그가 단순히 글재주를 농간하던 인물이 아니라 그의 세계를 보는 눈높이야말로 가위 천고의 일품이기 때문이 아닌가. 동파는 넌지시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의 한 구절을 끌어들여 공자의 가르침을 떠올린다.『흐르는 물이 저와 같아서 주야를 가리지 않는도다』(逝者如斯夫 不含晝夜).그리고는 흐르는 장강 물을 바라보며 손에게 이렇게 한 수 가르친다.물은 줄었다 늘었다 하는 모양새가 변화하기를 무상키도 하건만 불변하는 만물의 본체(本體) 입장에서 보자면 물(物)과 아(我),곧 객관 사물과 주체가 무한한 생명에 뿌리박고 있지 않은가.그리 본다면 장강의 무궁함이 무엇이 부러울 게 있는가.하늘과 땅 사이에 터잡고 있는 일체가 제각기 주인이 있어 실로 나 개인의 소유일 수 없나니.터럭 한 자락도 취할 것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강 위를 부는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이 있어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눈으로 마주치면 빛을 발하는 법이라.아무리 취해도 막을 자 없으며,아무리 쓴다 해도 다함이 없거늘.이를 두고 조물주의 무진장한 창고라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물과 아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청풍과 명월이 바로 내것이 아니면서도 온전히 내것일 수 있는 까닭은 내가 바로 청풍이고 명월인 탓이 아닌가.사심을 떠난 경지에 이르면서 지공무사(至公無私)의 경지에 이르면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주객의 이분법 장벽을 훌쩍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소동파가 손에게 들려준 대답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묘리란 자명하다.탐욕을 버리고 개아(個我)를 넘어서는 것이 그것이다.나아가 `무소유'를 통한 `충만'함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서구의 근대적 합리주의란 실은 이른바 타자를 제 이익에 맞게 취하고 재단하여 억지로 동일하게 만드는 탐욕에 기인한 것임은 이미 탈현대의 여러 사조들이 누누이 지적하고 있는 바가 아닌가. 이제 곧 한가위다.이런 멋진 달밤을 맞아 독자들이여.소동파의 `적벽부'를 한번 읊조리는 것도 멋지지 않겠는가.한가위 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가족과 단란(團欒)의 정을 나누는 것도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네 고유의 정분을 나누는 방식이 아닐까마는,이번 보름달에는 새로운 염원을 달에 빌어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다.그런 점에서 북송 때 소동파라는 한 문인이 내세운 바 있는 `쓰임새를 절검함으로써 취함에 분수를 기하라'(節用以廉取)는 견해나 `널리 이익만을 탐하는 무리'(廣求利之門)를 흰눈으로 흘겨보는 소동파의 눈길이 케케묵은 낡은 소리일 수만은 없음도 물론이다.    
312    70년대 김지하 시 <<五賊>> 댓글:  조회:2397  추천:0  2015-10-08
1.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옛날 상달 초사훗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아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고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시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쬭 남북간에 오종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 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가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소굴이렷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의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 만한 도둑보가 겉붙어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하루는 다섯놈이 모여 십년전 이맘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날이날로 느느니 기술이요 쌓으느니 황금이라, 황금 십만근을 걸어놓고 그간에 일취월장 묘기(妙技)를 어디 한번 서로 겨룸이 어떠한가 이렇게 뜻을 모아 도(盜)짜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시합을 벌이는데 때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 날씨는 화창, 바람은 건 듯, 구름은 둥실 지마다 골프채 하나씩 비껴들고 꼰아잡고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泌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 쌌는다.   2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해 입고 돈으로 모자해 쓰고 돈으로 구두해 신고 돈으로 장갑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지, 금단추, 금넥타이 핀, 금카후스보턴, 금박클, 금니빨, 금손톱, 금발톱, 금작크, 금시계줄. 디룩디룩 방댕니, 불룩불룩 아랫배, 방귀를 뽕뽕뀌며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저놈 재조봐라 저 재벌놈 재조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치고 간장치고 계자치고 고추장치고 미원까지 톡톡쳐서 실고추과 마늘 곁들여 나름 세금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왼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 이쁜 년 꾀어서 첩삼아 밤낮으로 작신작신 새끼까기 여념없다 수두룩 까낸 딸년들 모조리 칼쥔놈께 시앗으로 밤참에 진상하여 귀뜀에 정보얻고 수의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샀다가 길뚫리면 한 몫잡고 천(千)원 공사(工事) 오원에 쓱싹, 노동자임금은 언제나 외상외상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할애비요 구워삶는 재조는 뙤놈술수 빰치겄다. 또 한놈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끓는 목소리로 응승거리며 나온다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공양 휘휘감고 혁명공약 모자쓰고 혁명공약 배지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들고 대갈일성, 쪽 째진 배암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잡농(雜農)으로! 건설이닷, 모든집은 와우식(臥牛式)으로! 사회정화(社會淨化)닷, 정인숙(鄭仁淑)을, 정인숙(鄭仁淑)을 철두철미하게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올빼미야, 쪽제비야, 사꾸라야, 유령(幽靈)들아, 표도둑질 성전(聖戰)에로 총궐기하랏! 손자(孫子)에도 병불(兵不) 후사, 치자즉 도자(治者卽盜者)요 공약즉 공약(公約卽空約)이니 우매(遇昧)국민 그리알고 저리멀찍 비켜서랏, 냄새난다 퉤 - 골프 좀 쳐야겄다. 3 셋째놈이 나온다 고급공무원 나온다. 풍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콱다문 입꼬라지 청백리(淸白吏) 분명쿠나 단 것을 갖다주니 쩔레쩔레 고개저어 우린 단것 좋아 않소,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구 어허 저놈 뒤좀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이쪽보고 히뜩히뜩 저쪽보고 혜끗혜끗, 피두피둥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이빨꼴이 가관이다. 단것 너무 처먹어서 새까맣게 썩었구나, 썩다못해 문들어져 오리(汚吏)가 분명쿠나 간같이 높은 책상 마다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앉아 공(功)은 쥐뿔도 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한손으로 노땡큐요 다른 손은 땡큐땡큐 되는 것도 절대 안돼, 안될 것도 문제 없어, 책상위엔 서류뭉치, 책상밑엔 지폐뭉치 높은 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請)해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구름아 물어보자 요정(料亭)마담 위아래로 모두 별탈 없다더냐. 넷째놈이 나온다 장성(長猩)놈이 나온다 키크기 팔대장성, 제밑에 졸개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온몸이 털이 숭숭, 고리눈, 범아가리, 벌룸코, 탑삭수염, 짐승이 분명쿠나 금은 백동 청동 황동, 비단공단 울긋불긋, 천근만근 훈장으로 온몸을 덮고 감아 시커먼 개다리를 여기차고 저기차고 엉금엉금 기나온다 장성(長猩)놈 재조봐라 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한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먹고 엄동설한 막사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하면 땀이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막사지을 재목갖다 제집크게 지어놓고 부속 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놈 군기잡자 주어패서 영창에 집어놓고 열중쉬엇 열중열중열중쉬엇 열중 빵빵들 데려다가 제마누라 화냥끼 노리개로 묶어두고 저는 따로 첩을 두어 운우서수 공방전(雲雨魚水攻防戰)에 병법(兵法)이 신출귀몰(神出鬼沒) 마지막놈 나온다 장차관이 나온다 허옇게 백태끼어 삐적삐적 술지게미 가득고여 삐져나와 추접무화(無化) 눈꼽낀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호호 아이 간지럽사와요 이런 무식한 년, 국사(國事)가 간지러워? 굶더라도 수출이닷, 안팔려도 증상이닷, 아사(餓死)한놈 뼉다귀로 현해탄에 다리놓아 가미사마 배알하잣! 째진 북소리 깨진 나팔소리 삐삐빼빼 불어대며 속셈은 먹을 궁리 검정세단 있는데도 벤쯔를 사다놓고 청렴결백 시위코자 코로나만 타는구나 예산에서 몽땅먹고 입찰에서 왕창먹고 행여나 냄새날라 질근질근 껌씹으며 켄트를 피워물고 외래품 철저단속 공문을 휙휙휙휙 내갈겨 쓰고나서 어허 거참 달필(達筆)이다. 추문듣고 뒤쫓아온 말잘하는 반벙어리 신문기자 앞에 놓고 일국(一國)의 재상더러 부정(不正)이 웬말인가 귀거래사(歸去來辭) 꿍얼꿍얼,자네 핸디 몇이더라? 4 오적(五賊)의 이 절륜한 솜씨를 구경하던 귀신들이 깜짝 놀라서 어마 뜨거라 저놈들한테 붙잡히면 뼉다귀도 못추리것다 똥줄빠지게 내빼 버렸으니 요즘엔 제사지내는 사람마저 드물어졌겄다. 이라한참 시합이 구시월 똥호박 무르익듯이 몰씬몰씬 무르익어가는데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나라망신시키는 오적(五賊)을 잡아들여라 추상같은 어명이 쾅, 청천하늘에 날벼락치듯 쾅쾅쾅 연거푸 떨어져내려 쏟아져 퍼붓어싸니 네이- 당장에 잡아 대령하겠나이다, 대답하고 물러선다 포도대장 물러선다 포도대장 거동봐라 울뚝불뚝 돼지코에 술찌꺼기 허어옇게 묻은 메기 주둥이, 침은 질질질 장비사돈네팔촌 같은 텁석부리 수염, 사람여럿 잡아먹어 피가 벌건 왕방울 눈깔 마빡에 주먹혹이 뛸 때마다 털렁털렁 열십자 팔벌이고 멧돌같이 좌충우돌, 사자같이 으르르르릉 이놈 내리훑고 저놈 굴비엮어 종삼 명동 양동 무교동 청계천 쉬파리 답십리 왕파리 왕십리 똥파리 모두 쓸어모아다 꿀리고 치고 패고 차고 밟고 꼬집어뜯고 물어뜯고 업어메치고 뒤집어던지고 꼰아 추스리고 걷어팽개치고 때리고 부수고 개키고 까집고 비틀고 조이고 꺾고 깎고 벳기고 쑤셔대고 몽구라뜨리고 직신작신 조지고지지고 노들강변 버들같이 휘휘낭창 꾸부러뜨리고 육모방망이, 세모쇳장, 갈쿠리, 긴 칼, 짧은 칼, 큰칼, 작은칼 오라 수갑 곤장 난장 곤봉 호각 개다리 소다리 장총 기관총 수류탄 최루탄 발연탄 구토탄 똥탄 오줌탄 뜸물탄 석탄 백탄 모조리 갖다 늘어놓고 어흥 - 호랑이 방귓소리 같은 으름장에 깜짝, 도매금으로 끌려와 쪼그린 되민증들이 발발 전라도 갯땅쇠 꾀수놈이 발발 오뉴월 동장군(冬將軍) 만난 듯이 발발발 떨어댄다. 네놈이 오적(五賊)이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날치기요 날치기면 더욱 좋다. 날치기, 들치기, 밀치기, 소매치기, 네다바이 다 합쳐서 오적(五賊)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날치기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펨프요 펨프면 더욱 좋다. 펨프, 창녀, 포주, 깡패, 쪽쟁이 다합쳐서 풍속사범 오적(五賊)이 바로 그것 아니더냐 아이구 난 펨프이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껌팔이요 껌팔이면 더욱 좋다. 껌팔이, 담배팔이, 양말팔이, 도롭프스팔이, 쪼코렛팔이 다 합쳐서 외래품 팔아먹는 오적(五賊)이 그아니냐 아이구 난 껌팔이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거지요 거지면 더더욱 좋다. 거지, 문둥이, 시라이, 양아치, 비렁뱅이 다합쳐서 우범오적(五賊)이란 너를 두고 이름이다. 가자 이놈 큰집으로 바삐가자 애고 애고 난 아니요, 오적(五賊)만은 아니어라우. 나는 본시 갯땅쇠로 농사로는 배고파서 돈벌라고 서울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은 어젯밤에 배고파서 국화빵 한 개 훔쳐먹은 그 죄밖엔 없습네다. 이리바짝 저리죄고 위로 틀고 아래로 따닥 찜질 매질 물질 불질 무두질에 당근질에 비행기태워 공중잡이 고춧가루 비눗물에 식초까지 퍼부어도 싹아지없이 쏙쏙 기어나오는건 아니랑께롱 한마디뿐이겄다 포도대장 할 수 없이 꾀수놈을 사알살 꼬실른다 저것봐라 오적(五賊)은 무엇이며 어디있나 말 만하면 네 목숨은 살려주마 꾀수놈 이말듣고 옳다꾸나 대답한다. 오적(五賊)이라 하는 것은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란 다섯 짐승, 시방 동빙고동에서 도둑시합 열고 있오. 으흠, 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정녕 그게 짐승이냐? 그라문이라우, 짐승도 아조 흉악한 짐승이지라우. 옳다됐다 내새끼야 그말을 진작하지 포도대장 하도좋아 제무릎을 탁치는데 어떻게 우악스럽게 처 버렸던지 무릎뼈가 파싹 깨져 버렸겄다, 그러허나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사(死)는 사(私)요, 공(功)은 공(公)이라 네놈 꾀수 앞장서라, 당장에 잡아다가 능지처참한 연후에 나도 출세해야겄다. 꾀수놈 앞세우고 포도대장 출도한다 범눈깔 부릅뜨고 백주대로상에 헷드라이트 왕눈깔을 미친듯이 부릅뜨고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소리소리 내지르며 질풍같이 내닫는다 비켜라 비켜라 안비키면 오적(五賊)이다 간다 간다 내가 간다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우당우당 우당탕 쿵쾅 오적(五賊)잡으러 내가 간다 남산을 훌렁넘어 한강물 바라보니 동빙고동 예로구나 우레같은 저 함성 범같은 늠름기상 이완대장(李浣大將) 재래(再來)로다 시합장에 뛰어들어 포도대장 대갈일성, 이놈들 오적(五賊)은 듣거라 너희 한같 비천한 축생의 몸으로 방자하게 백성의 고혈빨아 주지육림 가소롭다 대역무도 국위손상, 백성원성 분분하매 어명으로 체포하니 오라를 받으렸다. 5 이리 호령하고 가만히 들러보니 눈하나 깜짝하는 놈 없이 제일에만 열중하는데 생김생김은 짐승이로되 호화찬란한 짐승이라 포도대장 깜짝놀라 사면을 살펴보는데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이게 어느 천국이냐 서슬푸른 용트림이 기둥처처 승천하고 맑고 푸른 수영장엔 벌거벗은 선녀(仙女) 가득 몇십리 수풀들이 정원 속에 그득그득, 백만원짜리 정원수(庭園樹)에 백만원짜리 외국(外國)개 천만원짜리 수석비석(瘦石肥石), 천만원짜리 석등석불(石燈石佛), 일억원짜리 붕어 잉어, 일억원짜리 참새 메추리 문(門)도 자동, 벽도 자동, 술도 자동, 밥도 자동, 계집질 화냥질 분탕질도 자동자동 여대생(女大生) 식모두고 경제학박사 회계두고 임학(林學)박사 원정(園丁)두고 경제학박사 집사두고 가정교사는 철학박사 비서는 정치학박사 미용사는 미학(美學)박사 박사박사박사박사 잔디 행여 죽을세라 잔디에다 스팀넣고, 붕어 행여 죽을세라 연못속에 에어컨넣고 새들 행여 죽을세라 새장속에 히터넣고, 개밥 행여 상할세라 개집속에 냉장고넣고 대리석 양옥(洋屋)위에 조선기와 살쩍얹어 기둥은 코린트식(式) 대들보는 이오니아식(式) 선자추녀 쇠로치고 굽도리 삿슈박고 내외분합 그라스룸 석조(石造)벽에 갈포발라 앞뒷퇴 널찍터서 복판에 메인홀 두고 알매달아 부연얹고 기와위에 이층올려 이층위에 옥상트고 살미살창 가로닫이 도자창(盜字窓)으로 지어놓고 안팎 중문 솟을대문 페르샤풍(風), 본따놓고 목욕탕은 토이기풍(風), 돼지우리 왜풍(倭風)당당 집밑에다 연못파고 연못속에 석가산(石假山), 대대층층 모아놓고 열어재킨 문틈으로 집안을 언 듯보니 자개 케비넷, 무광택 강철함롱, 봉그린 용장, 용그린 봉장, 삼천삼백삼십삼층장 카네숀 그린 화초장, 운동장만한 옥쟁반, 삘딩같이 높이 솟은 금은 청동 놋촉대, 전자시계, 전자밥그릇, 전자주전자, 전자젓가락, 전자꽃병, 전자거울, 전자책, 전자가방, 쇠유리병, 흙나무그릇, 이조청자, 고려백자, 거꾸로 걸린 삐까소, 옆으로 붙인 샤갈, 석파란(石坡蘭)은 금칠액틀에 번들번들 끼워놓고, 산수화조호접인물 (山水花鳥蝴蝶人物) 내리닫이 족자는 사백점 걸어두고, 산수화조호접인물 (山水花 鳥蝴蝶人物) 팔천팔백팔십팔점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백동토기, 당화기, 왜화기, 미국화기, 불란서화기, 애태리화기, 호피담뇨 씨운테레비, 화류문갑 속의 쏘니녹음기, 대모책상 위의 밋첼카메라, 산호책장 곁의 알씨에이 영사기, 호박필통에 꽂힌 파카만년필, 촛불켠 샨들리에, 피마주기름 스탠드라이트, 간접직접 직사곡사 천장바닥 벽조명이 휘황칸칸 호화율율. 여편제들 치장보니 청옥머리핀, 백옥구두장식, 황금부로취, 백금이빨, 밀화귓구멍가게, 호박밑구멍마게, 산호똥구멍마게, 루비배꼽마게, 금파단추, 진주귀걸이, 야광주코걸이, 자수정목걸이, 싸파이어팔지 에어랄드팔지, 다이야몬드허리띠, 터키석안경대, 유독 반지만은 금칠한 삼원짜리 납반지가 번쩍번쩍 칠흑암야에 횃불처럼 도도무쌍(無雙)이라! 왼갖 음식 살펴보니 침 꼴깍 넘어가는 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소털구이, 돼지콧구멍볶음, 염소수염튀김, 노루뿔삶음, 닭네발산적, 꿩지느라미말림, 도미날개지짐, 조기바톱젓, 민어 농어 방어 광어 은어 귀만 짤라 회무침, 낙지해삼비늘조림, 쇠고기 돈까스, 돼지고기 비후까스, 피안뺀 복지리, 생율, 숙율, 능금, 배 씨만 발라 말리원서 금딱지로 싸놓은 것, 바나나식혜, 파인애플화채, 무화과 꽃닢설탕 버무림, 롱가리트유과, 메사돈약과, 사카린잡과, 개구리알구란탕, 청포우무, 한천묵, 괭장망장과화주, 산또리, 계당주, 샴펭, 송엽주, 드라이찐, 자하주, 압산, 오가피주, 죠니워카, 구기주, 화이트호스, 신선주, 짐빔, 선약주, 나폴레옹 꼬냑, 약주, 탁주, 소주, 정종, 화주, 째주, 보드카, 람주(酒)라! 아가리가 딱 벌어져 닫을 염도 않고 포도대장 침을 질질질질질질 흘려싸면서 가로되 놀랠 놀짜로다 저게모두 도둑질로 모아들인 재산인가 이럴 줄을 알았더면 나도 일찍암치 도둑이나 되었을 걸 원수로다 원수로다 양심(良心)이란 두글자가 철천지 원수로다 6 이리 속으로 자탄망조하는 터에 한놈이 쓰윽 다가와 써억 술잔을 권한다 보도 듣도 못한 술인지라 허겁지겁 한잔두잔 헐레벌떡 석잔넉잔 이윽고 대취하여 포도대장 일어서서 일장연설 해보는데 안주를 어떻게나 많이 쳐먹었는지 이빨이 확 닳아없어져 버린 아가리로 이빨을 딱딱 소리내 부딪쳐가면서 씹어뱉는 그 목소리 엄숙하고 그 조리 정연하기 성인군자의 말씀이라 만장하옵시고 존경하옵는 도둑님들! 도둑은 도둑의 죄가 아니요, 도둑을 만든 이 사회의 죄입네다 여러도둑님들께옵선 도둑이 아니라 이 사회에 충실한 일꾼이니 부디 소신껏 그길에 매진, 용진, 전진, 약진하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또 바라옵니다. 이 말끝에 박장대소 천지가 요란할 때 포도대장 뛰어나가 꾀수놈 낚궈채어 오라묶어 세운뒤에 요놈, 네놈을 무고죄로 입건한다. 때는 가을이라 서산낙일에 객수(客愁)가 추연하네 외기러기 짝을찾고 쪼각달 희게비껴 강물은 붉게 타서 피흐르는데 어쩔꺼나 두견이는 설리설리 울어쌌는데 어쩔꺼나 콩알같은 꾀수묶어 비틀비틀 포도대장 개트림에 돌아가네 어쩔꺼나 어쩔꺼나 우리꾀수 어쩔꺼나 전라도서 굶고살다 서울와 돈번다더니 동대문 남대문 봉천동 모래내에 온갖구박 다 당하고 기어이 가는구나 가막소로 가는구나 어쩔꺼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사정 누가있어 바로잡나 잘까거라 꾀수야 부디부디 잘가거라. 7 꾀수는 그길로 가막소로 들어가고 오적(五賊)은 뒤에 포도대장 불러다가 그 용기를 어여삐 녀겨 저희집 솟을대문, 바로 그곁에 있는 개집속에 살며 도둑을 지키라하매, 포도대장 이말듣고 얼시구 좋아라 지화자좋네 온갖 병기(兵器)를 다가져다 삼엄하게 늘어놓고 개집속에서 내내 잘살다가 어느 맑게 개인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하니 이때 또한 오적(五賊)도 육공(六孔)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 이런 행적이 백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人口)에 회자하여 날같은 거지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 길이 전해오겄다.    
311    李陸史 청포도 댓글:  조회:3930  추천:0  2015-09-16
  The Poet And I / Frank Mills       청 포 도     이 육 사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1939년 8 월             이육사 李陸史 , 1904.5.18~1944.1.16 1904년 4월4일(음) 경북 안동의 도산면 원천리 불미골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원록(源綠)이며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하였다. 호인 육사(陸史)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 서 옥고를 치루었는데, 그때의 수인번호 二六四를 따서 지었다. 이육사는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 하는 시를 썼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의 병장 凡山 許衡의 딸인,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에서 6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 어났다. 이육사는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 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에 가입했으며, 그 해 10월경 의 임무를 받 고 북경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 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 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 다. 1933년 귀국해 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다.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 다.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 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북경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 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문학세계는, 1933년〈신조선〉에 발표한 시〈황혼〉이다. 이어 발표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 풍림1936. 12> 〈노정기 - 자오선1937.12> 〈연보 - 시학1939. 3> 〈청포도 - 문장1939. 8>〈 교목 - 인문평론1940.7>〈파초 - 춘추1941.12> 등을 발표했다. 〈청포도〉는 '7월', '은쟁반', '모시수건' 등의 시어를 써서 밝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청포도'라는 한 사물을 통 해 끊임없는 향수와 기다림, 미래를 향한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절정 - 문장1940.1>〈광야 - 자유신문1945.12.17>에서 보이듯이 일제강점기의 민족 적 비극을 소재로 강렬한 저항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꺼지지 않는 민족적 의지를 장엄하게 노래했다는 점이 특징 이다. 특히 유작으로 발표된〈광야〉는 저항시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1946년 신석초·김광균 등이〈육사시집〉을 펴냈다. 이후 1956년 재간본과 1964년 재중간본이 나왔고, 재중간본을 펴낼 때 시집 이름이〈청포도>로 바뀌었다. 또한 1971년에는 이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와 작품연보가 추가된〈광야〉라 는 시집이 발행되었다.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육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육사문학관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7월에 건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과 관련,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 생활 모습 등도 재현해 놓았으며, 2층은 낙동강 이 굽이쳐 흐르는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탁본체험코너, 시상 전망대 등 이 갖춰져 있다. 그동안에는 안동시에서 관리를 해오다 2008년 12월 1일부터 (사)이육사추모사업회로 위탁되어 운영을 하게 되었다. (사)이육사추모사업회는 선생의 나라사랑과 사상을 기리는 지역 내 순수민간단체로, 대표에 최유근 전 이육사연구회 회장, 초대 이육사관장으로 조영일 한국문협 이사가 내정되었다. 이육사문학관이 전문문학인들이 운영주체가 되어 이 루어짐으로써 문학관 본연의 기능을 되찾아 많은 문학인들이 즐겨찾는 문학관으로 거듭나며,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청량산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하여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도 자리매김 하고 있다. 또한 육사선생의 따님인 옥비 여사가 육우당에 기거하면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안동문화원 문예창작반 회원들 이 이육사 문학관 해설사로 봉사를 하고 있다. 육우당-六友堂 원래의 이육사 생가는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자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에 이건 보존되고 있으며, 이집에서 애국지사 이원기 선생을 비롯하여 육사,원일,원조,원창,원홍 6형제분이 태 어나셨다하여 당호를 육우당이라 한다. 이 건물은 생가를 본뜬 모형 집으로 구조는 "二"자 형태이며 앞쪽은 사랑채로 방 두칸, 중간 마루 한 칸이고 뒤쪽 안채 는 반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지어졌다. 사랑채의 오른편은 팔작 지붕인 반면 왼편은 맞배지붕이 특이하나 수리 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사진 오른쪽)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메인가 내가 부르는 노래는 그 밤에 강건너 갔소 - 중 마지막 연 - ■ 내가 바라던 손님, 고달픈 몸으로 모시두루마기 입고 건너 오기를 기다리던 강, 이제는 메말라 개천으로 흐른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작품해설.. ●감 상 :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어 조 : 식민지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은 대립되고 있어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는 어조임 ●표현상의 특징  -시각적 이미지(이상적 세계를 구현하는 소재)  - 청색 : 청포도, 하늘, 푸른 바다, 청포  - 흰색 : 흰 돛 단 배,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구 성 : 6연 각 2행 (내용상 3단락)  제1~2연 :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  - 청포도 :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되어 나오는 매체  제3~5연 :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  - 그가 찾아올 그 날 :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  - 청포 입은 손님 :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  제6연 : 손님을 맞을 마음가짐과 준비 자세  - 은쟁반, 모시 수건 : 화해로운 미래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  ●주 제 :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  ●출 전 : [문장](1939),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  작품감상... 민족적인 바탕이 순수한 시의 바탕이 되고,시의 순수성이 민족의 현실과 결합하여 예술로서 승화되는 것이 육사의 두드러진 장점이다.그러기에 이 작품은 향토색 짙은 시와 순수성과 시적 인식이 뛰어난 육사의 대표적 서정시라는 평가와 함께,민족의 수난을 채색하여 끈질긴 민족의 염원을 시화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따라서 이 시를,청포도라는 사물에 대한 아름답고 신선한 작가의 감각을 표현한 서정시로 보느냐,또는 청포도로서의 어떤 의미를 상징한 시로 해석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육사 시의 거의가 애국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그 특색인 만큼,이 작품처럼 순수한 감각적인 시에도 그의 특징인 애국적인 요소가 배어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그러나 포도를 따먹는 것까지 조국 광복을 기다리는 사실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어색한 노릇인 것 같다.따라서 청포도가 익는 7월에 찾아오는 청포 입은 손님을 기다리는 주인의 흐뭇한 정서가 주조로 되어 있고,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청포 입은 손님이 암시하는 조국 광복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공감이 서려 있다고 봄이 타당한 것 같다.       이육사의 詩精神   [빛나는 정신과 서정의 적극성]  암흑 속에서 빛나는 별을 노래하고 “오는 날”의 기쁨을 노래한 이육사는 거짓된 희망이나 자기 위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이육사는 결코 현실의 위압에 압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현실의 위압을 넘어서는 빛나는 정신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을 기다리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의연한 모습이나 “서릿발 칼날 진”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을 보여 주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육사의 기다림은 치유된 세계, 해방된 삶을 윤리적으로 강렬히 소망하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는 손님”(「청포도」)이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위해 “하이얀 모시 수건”을 준비하고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은 마땅한 미래를 구성하는 적극적인 행위와 의지이다. 서정성 넘치는 「청포도」는 그러한 적극성이 도달한 세계이다. 여기서는 풍성한 마을의 역사가 복원되고, 무한한 하늘을 인간이 호흡한다. 그것은 황폐화한 현실의 재건이자 자연과 인간이 이룬 조화와 화합이다. 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바라던 사람과 함께 우주의 기운이 충만한 청포도를 함께 먹는 일상의 향유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의 근본 조건이다. 「청포도」는 정치적 해방을 싸안으면서도 뛰어넘는 해방된 세계이자, 그 세계를 향유하는 행복한 삶의 공간이다.[출처]디지털안동문화대전    이육사 생가- 도산면 원천동 소재     [註]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이황의 후예로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활(活), 자는 태경(台卿)이다. 북경조선군관학교와 북경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저항시를 발표하면서 항일 정신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그 후 계속적인 항일 운동으로 수없이 옥고를 치르다가 북경 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작품에 시집 『청포도』, 유고집 『육사 시집』이 있다 이육사 생가는 원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 있었는데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 위치인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 왔다. 이건 후 한쪽 일각문(一角門) 자리에 대문이 서고, 원래의 대문 자리는 이웃집 석축이어서 담장도 대문도 없다. 옛 집터에는 1993년 「청포도」를 새긴 시비가 건립되었다.   이육사  생가 - 안동시 태화동 소재   [출처] 청포도 -이육사|작성자 솔로  
310    영국 명시인 - 테드 휴즈 댓글:  조회:2847  추천:0  2015-08-03
여우                                 테드 휴즈[영국]             테드 휴즈[(Ted Hughes(1930-1998)]       나는 상상한다, 이 한밤 순간의 숲을. 다른 무엇인가가 살아있다. 시계의 고독 곁에 그리고 내 손가락들이 움직이는 이 백지 곁에.   창문을 통해 나는 아무 별도 볼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비록 더 깊지만 더욱 가까운 무엇인가가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어둠 속에 내리는 눈처럼 차가이, 살포시, 여우의 코가 건드린다 잔가지를, 잎사귀를. 두 눈이 도와준다, 이제 막 그리고 또 이제 막, 막, 막   나뭇사이 눈 속에 산뜻한 자국들을 남기는 하나의 움직임을, 그리고 개간지를 대담히 가로질러 온.................... 몸뚱이의 절름거리는 그림자가 그루터기를 지나 움푹 팬 곳에서   꾸물거리고, 눈 하나가 푸른 빛이 퍼지고 짙어지면서, 찬란히, 집중적으로, 제 임무를 다하여   마침내, 여우의 날카롭고 갑작스런 진한 악취를 풍기며 머리의 어두운 구멍으로 들어온다. 창문에는 여전히 별이 없고, 시계는 똑딱거리며, 백지에는 글자가 박힌다.   "The Thought-Fox" by Ted Hughes(1930-1998)       I imagine this midnight moment's forest: Something else is alive Beside the clock's loneliness And this blank page where my fingers move. Through the window I see no star: Something more near Though deeper within darkness Is entering the loneliness:   Cold, delicately as the dark snow, A fox's nose touches twig, leaf; Two eyes serve a movement, that now And again now, and now, and now   Sets neat prints into the snow Between trees, and warily a lame Shadow lags by stump and in hollow Of a body that is bold to come   Across clearings, an eye, A widening deepening greenness, Brilliantly, concentratedly, Coming about its own business   Till, with a sudden sharp hot stink of fox It enters the dark hole of the head. The window is starless still; the clock ticks, The page is printed.           테드 휴즈; 실비아 플라츠에게 자살의 고통을 주고  또 실비아가 죽은 후 그녀의 시집을 내주었던 영국의 유명시인 . 그의 시강의는 매력적이었고 동물처럼 살아있었다. 여우를 보면 그가  언어에 생명성을 불어넣는 방법의 사례시로  떠오른다.  죽은 생각들을 살려내는 언어의 소생술을 가진 시인. 그러나 그는 아내를 죽게 했다.   테트 휴즈가 자신의 부인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를 회상하며 쓴 88편의 시를 모은 것이 「생일 편지」(Birthday Letters)인데, 1998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테드 휴즈는 이 시집을 낼 당시 암에 걸려 있었는데 9개월 후에 타계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테드 휴즈가 고른 산스크리스트어에서 번역된 문구가 써있다고 한다.                         Sylvia Plath Hughes                        1932 - 1963                  Even among fierce flames            The Golden lotus can be planted.             (격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이라 해도             황금빛 연꽃은 심겨질 수 있다)        
309    향수 原本 詩 댓글:  조회:2224  추천:0  2015-07-31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308    녀류시인 - 김남조 시모음 댓글:  조회:4244  추천:0  2015-07-23
김남조 시인 내 문학의 저수지는 예수님이다 신고 김남조 시인 내 문학의 저수지는 예수님이다블로그 원본 시 낭송 모음 신고 김남조 시인 "나와 심장이 함께 살아온 것을 아프고 나서 깨달았죠" 신고 [김남조 시인 시모음] 신고 김남조 시인 내 문학의 저수지는 예수님이다 신고 김남조 시 모음 67편 ☆★☆★☆★☆★☆★☆☆★☆★☆★☆★☆★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것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내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보통 사람 김남조 성당 문 들어설 때 마음의 매무새 가다듬는 사람, 동트는 하늘 보며 잠잠히 인사하는 사람, 축구장 매표소 앞에서 온화하게 여러 시간 줄서는 사람, 단순한 호의에 감격하고 스쳐가는 희망에 가슴 설레며 행운은 의례히 자기 몫이 아닌 줄 여기는 사람, 울적한 신문기사엔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한밤에 잠 깨면 심해 같은 어둠을 지켜보며 불우한 이웃들을 골똘히 근심하는 사람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겨울 꽃  김남조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 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 꽃 앞에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되었어 ☆★☆★☆★☆★☆★☆☆★☆★☆★☆★☆★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그대 있음에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물망초  김남조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날 잊으려 바라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잊는 꽃 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 잎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이  큰배 같던 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 빛 연보라는  못잊어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 사랑  김남조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 사랑의 말  김남조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 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 사랑한 이야기  김남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 상사(想思)  김남조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 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骨髓에 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 아가(雅歌) 2  김남조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나 네게로 가리 ☆★☆★☆★☆★☆★☆☆★☆★☆★☆★☆★ 연하장  김남조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 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드린다.  ☆★☆★☆★☆★☆★☆☆★☆★☆★☆★☆★ 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가난한 이름에게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검은 벽의 검은 꽂그림자 같은 어두운 香料(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에 특별하기로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 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론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란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 울면서 눈감고 입술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 가을 햇볕에  김남조 보고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찟고 나오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되고  바람속에 몸을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너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 겨울나무  김남조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리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 나의 시에게  김남조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船窓(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쓸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呪言(주언)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 너에게  김남조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 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 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 다시 봄에게  김남조  올해의 봄이여 너의 무대에서 배역이 없는 나는 내려가련다 더하여 올해의 봄이여 너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일도 나는 알아 버렸어 애달픔 지고 순정 그 하나로 눈흘길 줄도 모르는 짝사랑의 습관이 옛 노예의 채찍자국처럼 남아 올해의 봄이여 너의 새순에 소금가루 뿌리러 오는 꽃샘눈 꽃샘추위를 중도에서 나는 만나 등에 업고 떠나고 지노니  ☆★☆★☆★☆★☆★☆☆★☆★☆★☆★☆★ 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지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산에 와서 김남조 우중 설악이  이마엔 구름의 띠를  가슴 아래론 안개를 둘렀네  할말을 마친 이들이  아렴풋 꿈속처럼  살결 맞대었구나  일찍이  이름을 버린  무명용사나  무명성인들 같은  나무들,  바위들,  청산에 살아  이름도 잊은 이들이  빗속에 벗은 몸 그대로  편안하여라  따뜻하여라  사람이 죽으면  산에 와 안기는 까닭을  오늘에 알겠네 ☆★☆★☆★☆★☆★☆☆★☆★☆★☆★☆★ 산에 이르러 김남조 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숲과 들판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雲霧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대죄待罪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地下의 돌들과 뿌리들이  이 분으로 하여 강녕康寧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이 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오늘 새삼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에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해주시는가 ☆★☆★☆★☆★☆★☆☆★☆★☆★☆★☆★ 산에게 나무에게 김남조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왔네  그들은 주인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 상심수첩 김남조 1  먼 바다로  떠나는 마음 알겠다  깊은 산 깊은 고을  홀로 찾아드는 이의 마음 알겠다  사람세상 소식 들으려  그 먼길 되짚어  다시 오는 그 마음도 알겠다  2  울며 난타하며  종을 치는 사람아  종소리 맑디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천 몇만 번을  사람이 울고  종도 소리 질러야 하는가  3  층계를 올라간다  한없이 올라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층계를 내겨간다  한없이 내려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이로써 깨닫노니  층계의 위 아래는  같은 것이구나  4  병이 손님인양 왔다  오랜만이라며 들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커다란 책을 펴들고 그 안에 쓰인 글시,  세상의 물정들을 보여준다  한 모금씩 마시는 얼음냉수처럼  천천히 추위를 되뇌이며 구경한다  눈물 흐르는 일이 묘하게 감미롭다  5  굶주린 자 밥의 참뜻을 알듯이  잃은 자 잃은 것의 존귀함을 안다  신산에서 뽑아내는  꿀의 음미를.  이별이여  남은 진실 그 모두를  바다 깊이 가라앉히는 일이여  6  기도란  사람의 진실 하늘에 바침이요  저희의 진실 오늘은 어둠이니  이 어둠 바치나이다  은총은  하늘의 것을 사람에게 주심이니  하늘나라 넘치는 것  오늘 혹시 어둠이시면  어둠 더욱 내려주소서  7  전신이 감전대인 여자  바람에서도 공기에서도  전류 흘러 못견디는 여자  겨울벌판에서도 허공에서도  와아와아 몸서리치며 다가오는  포옹의 팔들. 팔들  8  그를 잃게 된다  누구도 못바꿀 순서란다  다른 일은 붙박이로 서 있고  이 일만 바람갈기 날리며 온다  저만치에,  바로 눈 앞에.  지금,  아아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9  제 기도를 진흙에 버리신 일  용서해 드립니다  그간에 주신 모든 용서를 감사드리며  황송하오나 오늘은 제가  신이신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아아 잘못하실 수가 없는 분의 잘못  죄의 반란 같은 것이여  전심전령이 기도 헛되어  하늘은 닫히고  사람은 이런 때 울지 않는다  10  아슴한 옛날부터  줄곧 걸어와  마침내 오늘 여기 닿았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더는 아무 일도 생기잖을  마지막 땅에  즉 온전한 목마름에 ☆★☆★☆★☆★☆★☆☆★☆★☆★☆★☆★ 새 달력 첫 날 김남조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그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 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니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 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 못낼  사랑과 인내  먼 소망과  인동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날에 바친다 ☆★☆★☆★☆★☆★☆☆★☆★☆★☆★☆★ 새 김남조 새는 가련함 아니여도  새는 찬란한 깃털 어니여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여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여도  탱크만치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 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면  이로써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 새로운 공부 김남조 마술을 배울까나  거미줄 사이로  하얗게 늙은 호롱불,  욕탕만한 가마솥에  먹물 한 솥을 설설 끓이며  뭔가 아직도 모자라서  이상한 약초 몇 가지 더 넣으며  혼 내줄 사람과  도와줄 이를  따로이 가슴서랍에 챙겨 잠그고  빗소리보다 습습하게  주문을 외는  동화속의 마술할머니  마술을 배울까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먹물 가마솥에  좋은 풀도 많이 넣는  마술 할머니  내가 그녀의 제자 되어  새로운 공부에 열중해 볼까나  유년의 날  써커스의 말 탄 소녀를 본후  온세상 노을뿐이던  흥분과 부러움을  적막한 이 세월에  되돌려 올까나  마술을 배울까나  ☆★☆★☆★☆★☆★☆☆★☆★☆★☆★☆★ 새벽 외출 김남조 영원에서 영원까지  누리의 나그네신 분  간밤 추운 잠을  십자가 형틀에서 채우시고  희부연 여명엔  못과 가시관을 풀어  새날의 나그네길 떠나가시네  이천 년 하루같이  새벽 외출  외톨이 과객으로 다니시며  세상의 황량함  품어 뎁히시고  울음과 사랑으로  가슴 거듭 찢기시며  깊은 밤  십자가 위에 돌아오시어  엷은 잠 청하시느니  아아 송구한 내 사랑은  어이 풀까나  이 새벽에도  빙설의 지평 위를  청솔바람 소리로 넘어가시는  주의 발소리  뇌수에 울려 들리네  ☆★☆★☆★☆★☆★☆☆★☆★☆★☆★☆★ 새벽에 김남조 나의 고통은  성숙하기도 전에  풍화부터 하는가  간밤엔  눈물 없이 잠들어  평온한 새벽을 이에 맞노니  연민할지어다  나의 몰골이여  다른 사람들은  고난으로  새 삶의 효모와 바꾸고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맨몸 으깨어  피와 땀으로 참회하고  준열히 진실에 순절하되  목숨 질겨서  그 몇 번 살아 남는 것을  나의 고통은  절상 순간에  이미 얼얼하게 졸면서  죄와 가책에도  아프면서 졸면서  결국엔  지난밤도 백치처럼 잠들어  청명한 이 새벽에  죽고 싶도록  남루할 뿐이노니 ☆★☆★☆★☆★☆★☆☆★☆★☆★☆★☆★ 새벽전등 김남조 간밤에 잠자지 못한 이와  아주 조금 잠을 잔 이들이  새소리보다 먼저 부스럭거리며  새벽전등을 켠다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  불면의 도랑은 비릿하게  더 깊은 골로 패이고  이제 집집마다  눈물겨운 광명이 비추일 것이나  미소짓는 자, 많지 못하리라  여명黎明에 피어나는 태극기들,  독립 반세기라 한 달 간  태극기를 내걸지자는 약속에  백오십 만 실직 가정도  이리했으려니와  희망과의 악수인 건 아니다  참으로 누구의 생명이  이 많은 이를 살게 할 것이며  누구의 영혼이  이들을 의연毅然하게 할 것이며  그 누가 십자가에 못박히겠는가  심각한 시절이여  잠을 설친 이들이 새벽전등을 켠다 ☆★☆★☆★☆★☆★☆☆★☆★☆★☆★☆★ 생명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먼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이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은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소녀를 위하여 김남조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 송(頌) 김남조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느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枕上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 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걸  그저  온마음 더워오고  내 영혼 눈물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빛 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 슬픔에게 김남조 정적에도  자물쇠가 있는가  문 닫고 장막 드리우니  잘은 모르는  관 속의 고요로구나  밤에서 밤으로  어둠에 어둠 겹치는  유별난 시공을  너에게 요람으로 주노니  느릿느릿 흔들리면서  모쪼록  소리내진 말아라  오히려 백옥의 살결  따스해서 눈물나는  아기나 하나 낳으려무나  소리 없이 반짝이는  눈물 빛 사리라도 맺으려무나  나의 슬픔이여 ☆★☆★☆★☆★☆★☆☆★☆★☆★☆★☆★ 시인(詩人) 김남조 1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2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明燈명등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3  진정한 玉옥과 같은  진정한 詩人시인  우리시대  이 목마름  4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靜菽정숙에  첫 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 시인에게 김남조 그대의 시집 옆에  나의 시집을 나란히 둔다  사람은 저마다  바다 가운데 섬과 같다는데  우리의 책은  어떤 외로움일는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와 보는가  우리는 그 바람을 알아보는가  시인이여  모든 존재엔  오지와 심연,  피안까지 있으므로  그 불가사의에 지쳐  평생의 시업이  겁먹는 일로 고작이다  나의 시를 읽어 다오  미혹과 고백의 골은 깊고  애환 낱낱이 선명하다  물론 첫새벽 기도처럼  그대의 시를 읽으리라  다함 없이 축원을 비쳐 주리라  시인이여  우리는 저마다  운명적인 시우를 만나야 한다  서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도 진맥하여  피와 이슬을 마시게 할  그 경건한 의사가  시인들말고  다른 누구이겠는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뭉쳐 폭발하는  이 물량의 시대에  유일한 결핍 하나뿐인 겸손은  마음에 눈 내리는 추위  그리고  이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 앞에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죄인이다  시인이여  막막하고 쓸쓸하여  오늘 나의 작은 배가  그대의 섬에 기항한다 ☆★☆★☆★☆★☆★☆☆★☆★☆★☆★☆★ 심장이 아프다  김남조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 아버지 김남조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 아침 기도 김남조 목마른 긴 밤과  미명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 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침 은총 김남조 아침 샘터에 간다  잠의 두 팔에 혼곤히 안겨 있는  단 샘에  공중의 이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이날의  첫 두레박으로  순수의 우물, 한 꺼풀의 물빛 보옥들을  길어올린다  샘터를 떠나  그분께 간다  그분 머리맡께에 정갈한 물을 둔다  단지,  아침 광경에 눈뜨실 쯤엔  나는 언제나 없다  은총이여  生金보다 귀한  아침 햇살에  그분의 온몸이 성하고 빛나심을  날이 날마다  고맙게 지켜본다 ☆★☆★☆★☆★☆★☆☆★☆★☆★☆★☆★ 안식 김남조 이제 그는 쉰다  처음으로 안식하는 이를 위해  그의 집에  고요와 평안 넉넉하고  겨우 깨달아  그의 아내도  바쁜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손을 씻으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바쁜 일이라곤 없어라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그가 만지던 것  오래오래 어루만지는 사이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  가슴 안의 구명으로  솔솔 빠져나가고  머릿속에 붐비는 피도  옥양목 흰빛으로  솰솰 새어나가누나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남루한 그녀 영혼도  빨아 헹구어  희디하얗게 표백한다면  절대의 절대적 절망  이 숯덩이도  벼루에 먹 갈리듯  풀어질 날 있으리니  슬퍼 말아라  슬픔은 소리내고 싶은 것  조용하여라  달빛 자욱한 듯이  온 집안 가득히  그가 쉬고 있다 ☆★☆★☆★☆★☆★☆☆★☆★☆★☆★☆★ 안식을 위하여 김남조 겨울나무 옆에  나도 나무로 서 있다  겨울나무 추위 옆에  나도 추위로 서 있다  추운 이들  함께 있구나 여길 때  추위의 위안 물결 인다 하리라  겨울나무 옆에 서서  적멸한 그 평안  숙연히 본받고 지노니  휴식 모자라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는  내 자식들이  쉬라고 쉬라고 엄마를 조르는  그 당부 측은히  헤아린다 하리라  안식의 정령이어  산 이와 죽은 이를  한 품에 안아 주십사 비노니  겨울바람의 풍금  느릿느릿 울려 주십사고도 비노니  큰 촛불, 작은 촛불처럼  겨울나무와 내가  나란히 기도한다 하리라 ☆★☆★☆★☆★☆★☆☆★☆★☆★☆★☆★ 어떤 소년 김남조 꽃 배달처럼  나의 병실을 찾아온  소년에게  내 처지 지금 감방 같다 했더니  그 아이 말이  저는 어디 있으나  황무지며 사막이예요. 란다  넌 좀 낙관주위가 돼야겠어  놀라는 내 대꾸에  그건 비관주의보단 더 나쁜 거예요  헤프고 바보그럽고  맥빠져 있으니까요, 란다  아이야  천길 벼랑에서  밑바닥 굽어본 일  벌써 있었더냐  온몸의  뇌관이 저려들면서  허공에 두 손드는  시퍼런 투항도 해보았더냐  더하기로는  심장 한가운데를 쑤시던  사람 하나가  날개 달아  네 몸 두고 날아갔느냐  .... 아이야 ☆★☆★☆★☆★☆★☆☆★☆★☆★☆★☆★ 어머님의 성서(聖書) 김남조 고통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성숙해지며  크낙한 사랑처럼  오직 침묵합니다  복음에도 없는  마리아의 말씀, 묵언의 문자들은  고통 중에 영혼들이 읽는  어머님의 성서입니다  긴 날의 불볕을 식히는  여름나무들이,  제 기름에 불 켜는  초밤의 밀촉이,  하늘 아래 수직으로 전신배례를 올릴 때  사람들의 고통이 흘러가서  바다를 이룰 때  고통의 짝을 찾아  서로 포옹할 때  어머님의 성서는  천지간의 유일한 유품처럼  귀하고 낭랑하게  잘 울립니다 ☆★☆★☆★☆★☆★☆☆★☆★☆★☆★☆★ 연 김남조 연 하나  날리세요  순지 한 장으로 당신이 내거는  낮달이 보고파요  가멸가멸 올라가는  연실은 어떨까요  말하는 마음보다 더욱 먼 마음일까요  하늘 너머 하늘가는  그 마음일까요  겨울하늘에  연 하나 날리세요  옛날 저승의 우리집 문패  당신의 이름 석자가  하늘 안의 서러운  진짜 하늘이네요  연하나  날리세요  세월은 그렁저렁 너그러운 유수  울리셔도 더는 울지 않고  창공의 새하얀 연을  나는 볼래요 ☆★☆★☆★☆★☆★☆☆★☆★☆★☆★☆★ 영원 그 안에선 김남조 이별의 돌을 닦으며  고요하게 있자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잎들이  잠시  최후의 기도를 올리듯이  아무것도 허전해하지 말자  가을나무의 쏟아지는 잎들을 뜯어 넣고  바람이 또 무엇인가를  빚는다고 알면  그만인걸  눈물 다해  한 둘레 눈물 기둥  불망인들 닦고 닦아  혼령 있는 심연 있는  거울이 되도록만 하자  이별의 문턱에 와서  마지막 가장 어여쁘게 내가 있고  영원 그 안에선  그대 날마다  새로이 남아 계심을  정녕 믿으마  말로는 나타 못낼  위안의 저 청람빛,  하늘 아래 생겨난 모든 일은  하늘 아래 어디엔가 거두어 주시리라 ☆★☆★☆★☆★☆★☆☆★☆★☆★☆★☆★ 오늘 김남조 1  눈 오늘 강물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 뿐이다  2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 올해의 성탄 김남조 정직해야지  지치고 어둑한 내 영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밀한 광기  또 오욕  모든 나쁜 순환을 토혈인 양 뱉고  차라리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워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지등을 들고 성당에도 가지만  자욱한 안개를 헤쳐  서먹해진 제 영혼을 살피는 날이다  유서를 쓰는,  유서에 서명을 하는,  다시 그 나머지 한 줄의 시를 마지막인 양 끄적이는  어리석고 뜨거운 나여  만약에 만월 같은 연모라도 품는다며는  배덕의 정사쯤 쉽사리 저지를  그리도 외롭고 맹목인 열에  까맣게 내 두뇌를 태워 가고 있다  슬픔조차 신선하지가 못해  한결 슬픔을 돋우고  어째도 크리스마스는 마음놓고 크게 우는 날이다  석양의 하늘에 커다랗게 성호를 긋고  구원에서 가장 먼 사람이  주여, 부르며 뿌리째 말라 버린 겨울 갈대밭을  달려가는 날이다 ☆★☆★☆★☆★☆★☆☆★☆★☆★☆★☆★ 은혜 김남조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주시던 날  그날 하루의  은혜를  나무로 심어 숲을 이루었니라  물로 키워 샘을 이루었니라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그리움이게 하신  그 뜻을 소중히  외롬마저 두 손으로 받았니라  가는 날 오는 날에  눈길 비추는  달과 달무리처럼 있는 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너를 남겨 주실 어느 훗날  숨 거두는 자리  감사함으로  두 영혼을 건지면  다시 은혜이리 ☆★☆★☆★☆★☆★☆☆★☆★☆★☆★☆★ 음악 김남조 음악 그 위험한 바다에 빠졌었네  고단한 도취에 울어버렸네  살아 보아도  내 하늘에 무궁한 구름은  哀傷,  많은 詩를 썼으나 어느 한 귀절도  나를 건져 주지 못했다  사람 하나  그 복잡한 迷惑에 반생을 살고  나머지 쉽사리 입는  상처의 버릇  눈 오는 숲  나무들의 화목처럼  어진 일몰 후  편안한 밤처럼 ……  있고 싶어라  참말은 무섭고  거짓말은 부끄럽워 ☆★☆★☆★☆★☆★☆☆★☆★☆★☆★☆★ 의자 김남조 세상에 수많은 사람 살고  사람 하나에 한 운명 있듯이  바람도 여러 바람  그 하나마다  생애의 파란만장  운명의 진술서가 다를 테지  하여 태초에서 오늘까지 불어 와  문득 내 앞에서  나래 접는 바람도 있으리라  그를 벗하여  나도 더 가지 않으련다  삶이란 길가는 일 아니던가  모든 날에 길을 걷고  한 평생 걸어 예 왔으되  이제 나에게  삶이란  도착하여 의자에 앉고 싶은 것  겨우겨우 할 일 끝내고  내명 얻으려 좌선에 든  바람도사 옆에서  예순 해 걸어온 나는  예순 해 앉아 있고 싶노니 ☆★☆★☆★☆★☆★☆☆★☆★☆★☆★☆★ 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김남조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 테니까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 인인(隣人) 김남조 보이지 않는 고운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보이지 않게 곱고 괴로운 영혼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그것은  인기척없는 외딴 산마루에  풀잎을 비비적거리며 드러누운  나무의 그림자 모양  쓸쓸한 영혼  쓸쓸하고 서로 닮은  영혼이었느니라  집 가족 고향이 다르고  가는 길 오는 길 있는 곳이 어긋난도  한바다 첩첩이 포개진 물 밑에  청옥빛 파르름한 조약돌이  가지런히 둥그랗게  눈뜨고 살아옴과 같았느니라  영혼이 살고 잇는 영혼들이 마을에선  살경이 부딪는 알뜰한 인인  우리는 눈물겹게 함께 있어 왔느니라  짐짓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손짓으로  철따라 부르는 소리였느니라  철 따라 대답하는  마음이었느니라 ☆★☆★☆★☆★☆★☆☆★☆★☆★☆★☆★ 잠 김남조 그의 잠은 깊어  오늘도 깨지 않는다  잠의 집  돌벽 실하여  장중한 궁궐이라 하리니  두짝 문 맞물려 닫고  나는 그  충직한 문지기라  숙면의 눈시울이어  평안은 끝없고  만상의 주인이신 분이  잠의 恩賜를  그에게 옷 입히시니  자장가 없이도  잠은 더욱 깊어라  그의 잠은 깊고  잠의 평안  한바다 같아라  잠의 은사를 배례하리니  세월이 흘러  내가 잠들 때까지  잠을 섬기는  나는 그 불침번이리 ☆★☆★☆★☆★☆★☆☆★☆★☆★☆★☆★ 장엄한 숲  김남조 삼천 년 된 거목들의 숲은  겨우내 끝이 안 보이는 설원雪原  나무들은  그 눈 벌에 서 있습니다  어느 겨울  그 중의 한 나무가  눈사태에 떠밀려 쓰러질 때  하느님이  품 속에 안으셨습니다  나직이 이르시되  아기야 쉬어라 쉬어라 ……  하느님께선  이 나무가 작은 씨앗이던 때를  기억하시며  거대한 뿌리에서 퍼져나간  젊은 분신들도 알으십니다.  쉬어라 쉬어라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날  자애로운 안도安堵이셨습니다  가령에  삼천 년을 노래해온 새가 있다면  쉬어라 쉬어라고 하실 겝니다  이 나무 기나긴 삼천 년을  장하게 맥박쳐 왔으니까요  레드우드 품종의  그 이름 와워나로 불리우는  이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수면이요 안식이며  이후 삼천 년 동안  그는 잠자는 성자일 겝니다  장엄한 숲에서  이 겨울도  끝이 안 보이는 아득한 설원에서  ☆★☆★☆★☆★☆★☆☆★☆★☆★☆★☆★ 저무는 날에 김남조 날이 저물어 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 간다  사람의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 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지던 그 마음도  세월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이 품안에  눈감는 것  ☆★☆★☆★☆★☆★☆☆★☆★☆★☆★☆★ 정념情念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 참회  김남조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평안스런 그대 김남조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 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있는  겨울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모두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 평행선  김남조 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테어 났기에 어쩔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 질까 두려워 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 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 하느님의 동화 김남조 절망이 이리도 아름다운가  홍해에까지 쫓긴 모세는  황홀한 어질머리로 바다를 본다  하느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이르시되  너의 지팡이로 바다를 치면  너희가 건널 큰 길이 열릴 것이니라.  하느님께선  동화를 쓰고 계셨다  지팡이 끝이 가위질처럼  바다를 두 피륙으로 갈라  둥글게 말아 올리며  길을 내는 대목,  동화는  이쯤 쓰여지고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  물을 쳤으되  실바람 한 주름이 일 뿐이더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믿음으로 길이 열려  그들이 모두 바다를 건넜다  홍해 기슭 태고의 고요에  홀로 남으신 하느님,  오늘의 동화는  괜찮게 쓰인 편이라고  저으기 즐거워 하신다 ☆★☆★☆★☆★☆★☆☆★☆★☆★☆★☆★ 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후 조 김남조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마주 불러 볼 정다운 이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선다 갓 추수를 해간 허허한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철 인생의 백가지 가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었음을 눈 멀 듯 보고 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한 개의 그리움 별이여 이 타는 듯한 가책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 같이 늙어진 정복한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에 그 옛날에 이러 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애뜯는 한 마음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없는 얘기 거리라도 될까 우리들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    
307    가나다라 순으로 된 시인 클릭해 보기 댓글:  조회:3882  추천:0  2015-07-21
  [시인모음 목록 가나다 순으로 보기]         ㄱ 강유정 강인한 강은교 고원 고은 고정희 곽재구 구상 기형도 김광균 김규동 김기림 김남조 김남주 김동환 김명수 김명인 김상옥 김상용 김소월 김수영 김승희 김억 김영랑 김용택 김정란 김정환 김준태 김종해 김지하 김진경 김창완 김초혜 김춘수 김현승 김혜순     ㄴ 나태주 노천명 노향림     ㄷ 도종환     ㅁ 마광수 마종기 모윤숙 문덕수 문병란 문정희 문태준 시모음 민영 민용태     ㅂ 박남수 박남철 박노해 박덕규 박두진 박목월 박몽구 박봉우 박세영 박영희 박용래 박용철 박인환 박인환(박재삼) 박정대 시모음 박판식 시모음 백석 변영로     ㅅ 서정주 설정식 송기원 송수권 신경림 신달자 신동엽 신석정 신석초 심훈     ㅇ 양성우 양주동 오규원 오상순 오세영 오장환 오탁번 유안진 유진오 윤동주 이가림 이근배 이기철 이동순 이병기 이상 이상화 이성복 이성부 이승훈 이시영 이용악 이육사 이윤택 이은상 이제하 이하석 이형기 이호우 임화     ㅈ 장정일 전봉건 정양 정인보 정지용 정진규 정현종 정호승 정희성 조병화 조정권 조지훈 조창환 조태일 조향 주요한     ㅊ 천상병 천양희 최남선 최동호 최두석 최승자 최승호 최하림     ㅍ 피천득     ㅎ 하재봉 하종오 한용운 한하운 허영자 허형만 홍윤숙 황금찬 황동규 황명 황순원 황지우            
306    일본 천재시인 - 테라야마 슈우시 댓글:  조회:3815  추천:0  2015-07-18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1935-1983)의 첨예한 아방가르드 시 나의 이솝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         1. 초상화 속에 그만 실수로 수염을 그려 넣어버렸으므로 할 수 없이 수염을 기르기로 했다.   문지기를 고용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문을 짜 달기로 했다.   일생은 모두가 뒤죽박죽이다 내가 들어갈 묘혈(墓穴) 파기가 끝나면 조금 당겨서라도 죽을 작정이다.   정부가 생기고 나서야 정사를 익히고 수영복을 사고나면 여름이 갑자기 다가온다. 어릴 때부터 늘 이 모양이다.   한데 때로는 슬퍼하고 있는데도 슬픈 일이 생기지 않고 불종을 쳤는데도 화재가 발생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여 개혁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바지 멜빵만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은 인간이 만드는 가장 작은 바다이다.       개가 되어 버렸다. 법정에서 들개사냥꾼이 증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개가 되어 버렸을까? 개가 되기 전에 당신은 나의 아는 사람 중의 누구였습니까? 크로스워드 퍼즐 광인 교환처(交換妻) 선원조합 말단회계원인 부친 언제나 계산자를 갖고 다니는 여동생의 약혼자 수의(獸醫)가 못되고 만 수음상습자 숙부 하지만 누구든 모두들 옛날 그대로 건재하다. 그러면 개가 되어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세계는 한 사람의 개 백정쯤 없어도 가득 찰 수 있지만 여분인 한 마리의 개가 없어도 동그랗게 구멍이 뚫리는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러 갔다가 한 덩이 빵을 사서 돌아왔다.     4. 고양이……다모증(多母症)의 명상가 고양이……장화를 신지 않고는 아이들과 대화가 되지 않는           동물 고양이……먹을 수 없는 포유류 고양이……잘 안 써지는 탐정소설가 고양이……베를리오즈 교향악을 듣는 것 같은 귀를 갖고           있다 고양이……재산 없는 쾌락주의자 고양이……유일한 정치적 가금(家禽)     5. 중년인 세일즈맨은 갑자기 새로운 언어를 발견했다. 마다가스칼語보다 부드럽고 셀벅로찌어語보다도 씩씩하고 꿀벌의 댄스 언어보다 음성적이며 의미는 없는 것 같고 표기는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고 새들에게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새로운 언어다.   라고 세일즈맨은 그 언어로 말을 하고 나는 해석하여 감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년인 세일즈맨은 가방을 든 채 벤치에서 죽고 친척도 없이 신분증명서만이 그의 죽음을 증명했다. 나는 그가 발견한 새로운 언어로 그의 죽음을 증명했다. 말을 걸어 봤으나 아이들은 웃으며 도망치고 일꾼들은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빵집에서는 빵도 팔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 새로운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인지 새로운 언어가 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말을 거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다.     라는 새로운 언어가 통할 때까지 지나가는 그들 사물의 folklore 가라앉는 석양을 향해 나는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6. 불행이란 이름의 고양이가 있다. 언제나 나에게 바싹 붙어 있다.     7. 도포이송한 와우여 한도포이송 여와우 송도포이한 우여와 포송이한도 우와여   여우와 한 송이 포도를 종이에 쓰고 한 자씩 가위로 잘라 흐트렸다간 다시 아무렇게나 나열해 봅니다. 말하기 연습은 적적할 때의 놀이입니다.   *《일본현대시선》 도서출판(1984년 간행. 박현서 역)에서 발췌         일본 천재시인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1935-1983)의 첨예한 아방가르드 시, 『나의 이솝』을 소개하며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로 주말을 맞았다. 사방에서 단풍드는 소리, 간간히 빗소리에 섞인다.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시집 몇 권을 샀다. 늦었지만 올해의 노벨상시인 토마스트란스트뢰메르의 와 W.H. 오든의 시집, 그리고 마야코프스키의 책도 샀다. 모두 밋밋하고 잘 와 닿지 않는다. 원작이 시원찮아서 그럴 리는 없고 역시 번역의 문제점일 것.  어쨌든 시로써 나에게 다가서지는 않는다. 한글번역본과 영문번역본이 함께 편집된 도서출판의 책에는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 소식이 전해진 바로 다음 날 내가 졸역(拙譯)했던  시 도 이미 번역돼 수록돼 있음을 알았다.   사온 책을 덮고 일본 시인,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1935-1983)의 시를 읽는다. 그의 전위적인 시는 번역시라기보다도 원어로 읽는 느낌에 가깝다. 이 괴짜배기 시인은 아방가르드의 진미를 적나라하게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유혼, 인생관을 한 편의 시 속에 그토록 알뜰하게 쏟아 부었다. 내가 그의 시를 만난 것은 오랜 유랑에서 돌아와 문학에 다시 몰입하기 시작한 1980년 중반의 일이다. 혼자 경주로 3박4일 무전여행을 작정하고 떠났다가 중도에 경주남산을 포기하고 이틀 만에 돌아와 서울역 근처 헌책방에 처박혀 몇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내 눈에 번쩍 들어온 한 권의 헌책. 그 책이 바로 이다. 이 책에는 22명의 일본 현대시인의 시가 소개돼 있으나 그 어떤 시인도 나를 반기지 않았다. 다만 이 번역본이 나온 1984년 바로 전해인 1983년에 약관의 나이 48세로 요절한 테라야마 슈유시가 그처럼 나를 애타게 나를 기다리다가 떠나버린 것이다. 그것은 전혀 이 아니라 나에게는 안타까운 필연. 문학청년이던 고등학교 시절 좋은 시에 목마르던 때에 시인 조향(조섭제)을 만난 사건 이후 또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를 번역한 박현서 시인(1931년 김해 출생. 시집 1958년 간행)에게도 깊은 경의를 표한다. 박 시인을 찾아내고 싶으나 아는 사람이 전무하다.  그는 테라야마 슈우시를 제대로 이해한 시인이자 번역자일 것이다.   김영찬//    [출처]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1935-1983)의 첨예한 아방가르드 시 |작성자 banyantree  
305    명시인 - 주요한 댓글:  조회:4080  추천:1  2015-07-17
가신 누님 /주요한  강남 제비 오는 날  새 옷 입고 꽃 꽂고  처녀 색시 앞뒤 서서  우리 누님 뒷산에 갔네  가서 올 줄 알았더니  흙 덮고 금잔디 털어  병풍 속에 그린 닭이  울더라도 못 온다네  섬돌 우에 복사꽃이  피더라도 못 온다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가을 멧견 / 주요한  비 와서 강물은 벌겋고  무너진 산길이 석양에  그 벗은 다리를 쉬일 제  내 곤한 꿈도 쉬임이다.  조밭에 방울이 요란하고  어지러운 새떼는 들을 건너며  바람결에 소울음 멀리 들릴 제  내 마음은 가만히 눈감습니다.  솔밭에 송진냄새 그윽하고  우거져 익어가는 풀 숲에서  흙과 `가을'이 향기로울 때  내 감각은 물고기같이 입 벌립니다.  그러나 저녁이 몰래 와서  모든 요란을 그 옷자락에 쌀 때라야  나의 오관은 비밀을 뚫어보고  더 오묘한 소리를 알아냅니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가을은 아름답다 / 주요한  빗소리 그쳤다 잇는  가을은 아름답다.  빛 맑은 국화송이에  맺힌 이슬 빛나고  꿩 우는 소리에 해 저무는  가을은 아름답다.  곡식 익어 거두기에 바쁘고  은하수에 흰 돛대 한가할 때  절 아래 높은 나무에  까마귀 소리치고  피 묻은 단풍잎 바람에 날리는  가을은 아름답다.  물 없는 물레방아 돌지 않고  무너진 섬돌 틈에서  달 그리운 귀뚜라미 우지짖는  멀리 있는 님 생각 간절한  한 많은 철이여!  아름다운 가을이여!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그 봄을 바라 / 주요한  푸른 물 모래를 비추고 흰 돛대 섬을 감돌며,  들 건너 자줏빛 봄안개 설움 없이 울 적에,  서산에 꽃 꺾으러, 동산에 님 뵈오러  가고 오는 흰옷 반가운, 아아 그 땅을 바라,  그대와 함께 가 볼거나……  뜨거운 가을 해, 묏전에 솔나무길이 못 되고,  어린 아우 죽은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적은 동리 타작마당, 잠자리가 노는 날,  꿈 같은 어린 시절 찾으러, 아아 그 산을 바라,  그대와 함께 가 볼거나……  아침에 저녁에 해묵은 느릅나무 가마귀 울고  담장에 가제 푸른 넝쿨, 다정한 비 뿌릴 제  섬돌빛 누런 꽃을 뜯어서 노래하던,  지붕 낮은 나의 고향집, 아아 그 봄을 바라,  그대와 함께 가 볼거나……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금속의 노래 / 주요한  여기는 옛날의 투르키의 미인 파는 장터  각색 금속이 색을 자랑하는 실험이올시다  먼저는 날카롬과 열렬을 자랑삼는 경금속  칼리와 소다 석유병 속에 갇혀 지내며  언제나 맑은 증류수에 춤출 날을 꿈꾸나니  여러분 참으로 생명도 끊는 사랑을 구하시거든  가성칼리의 뜨거운 키쓰를 마다 맙시오  다음에는 소복 입은 알루미늄 칼슘 마그네슘  연하고 겸손한 마음성이지만  마그네슘은 불에 사르면 별같이 빛나고  칼슘은 뜨거운 생석회가 됩니다.  그러나 알루미늄같이 온 세상 살림을 가볍게 하는  얌전하고 일 잘하는 색시는 또 없을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화려치 못한 아연 속된 철 취미가 높지 못한 동  그러나 천하에 많고 많은 부엌 며느리 같은  그네의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올시다  신비한 푸른색 가진 백동 그와 한쌍인 붉은 코발트  가장 옷 잘차리기는 누런 치마의 카드뮴 등황색의 크롬  수은은 여승같이 세상을 버린 이  그러나 순홍과 주토의 붉은 빛이 수은계로 온 것은  잊지 못할 것의 하납니다  무거운 `연' 젊은 라듐이 천만 세기를 늙어서 된 `연'  예범 있고 깨끗한 `은' 참 말레디  한빛의 아름다움을 몸소 가르치는 은  교만한 금보다도 가면 쓴 백금보다도  은은 더 사랑스럽습니다  여보시오 여기는 투르키의 미인시장  각색 금속이 색을 자랑하는 실험실이올시다  봉사꽃, 세계서관, 1930  꽃 / 주요한  꽃이 핀다, 님의 웃음이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핀다.  그 꽃을 손으로 꺾었더니  꽃도 잎도 다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님의 웃음  마음 속 길이 간직했더니  그 속에 피어나 꽃이 되어  이 타는 속을 미칠 듯이.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꽃밭 / 주요한  나팔꽃이 피었네,  백일홍이 피었네,  봉사 나무예 맺은 씨가  까맣게 여물었네.  봉사씨 여물었어도  새벽엘랑 빗지 마라.  봉사 나무에 맺힌 이슬  치마 자락 다 즐쿤다.  봉사 나무에 거미줄이  빗은 머리 얽어 준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남국의 눈 / 주요한  푸른 나뭇잎에 나려 쌓이는  남국의 눈이 옵니다.  오늘밤을 못 다 가서 사라질 것을―  설운 꿈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푸른 가지 우에 피는 흰 꽃은  설운 꿈 같은 남국의 눈입니다.  젊은 가슴에 당치도 않은  남국의 때아닌 흰눈입니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노래하고 싶다 / 주요한  맑은 물에 숨쉬는 고기같이,  푸른 하늘에 높이 뜬 종달새같이  순풍에 돛 달고 닫는 배같이  그렇게 노래하고 싶다.  그렇게 자유롭게.  흰 모래에 반짝이는 햇빛같이  언덕에 부딪히는 흰 물결같이  물결과 희롱하는 어린애같이  그렇게 노래하고 싶다.  그렇게 무심하게.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농부 / 주요한  비 개인 뒤에 농부는 논에 나갔다.  바람이 산봉우리로 나려와서  김 오르는 밭이랑과 논두렁으로  춤을 추며 지나갔다.  검은 물새가 논에서 논으로  놀리는 듯이 소리치면서 날아갔다.  기나긴 여름해가 말없이 쪼이는 것은  농부의 속을 헤아려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기다릴 줄 아는 우리 농부는  자랑하듯 긴 한숨을 들이마시고  시방은 무섭게도 푸르른 넓은 벌에  금빛 물결이 흐늑일 가을을 확실히 보았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누이야 / 주요한  누이야 나가 봐­라 나무 새에  어제 비에 앵도가 얼마나 익었나  익었거든 따다가  샘물에 씻어라.  광주리에 따다가  샘물에 씻어라.  광주리가 없거던  치마자락에  따 오너라  경신(庚申)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눈 / 주요한  인경이 운다. 장안 새벽에 인경이 운다.  안개에 싸인 아침은 저 높은 흰구름 우에서 남모르게 밝아오지마는 차디찬, 벗은 몸을 밤의 앞에 내어던지는 거리거리는 아편(阿片)의 꿈 속에서 허기적거릴 때, 밤을 새워 반짝이는 빨간 등불 아래 노는 계집의 푸른 피를 빠는 환락(歡樂)의 더운 입김도 식어져 갈, 장안의 거리를 동서(東西)로 흘러가는 장사(葬事) 나가는 노래의 가­는 여운(餘韻)이 바람 치는 긴 다리 밑으로 스러져갈 때, 기름 마른 등불이 힘 없고 긴 한숨 소리로 과거(過去)의 탄식(嘆息)을 겨워하면서 껌벅거릴 때, 꿈 속에서 꿈 속으로 웅웅하는 인경소리가 울리어간다. 새벽 고하는 인경이 울리어간다. 눈이 녹는다. 동대문(東大門) 높은 지붕 우에 눈이 녹는다. 청기왓장 냄새, 낡아가는, 단청(丹靑) 냄새, 멀리 가까이 일어나는 닭소리에 밤마다 뚝딱이는 도깨비떼들도 아름드리 기둥 사이로 스러졌건마는, 문(門) 아래로 기어드는 바람소리는 아직도 처창(悽愴)한 반향(反響)을 어둑신한 천정(天井)으로 보낼 때마다, 아아 무슨 설움으로 가슴 막힌 바람소리를, 들으라 저기 헐어져가는 돌담장에서, 해마다 뻗어나는 머루잎 아래서 바람이 슬프게 부는 피리소리를. 흩어지는 눈에 섞여서 슬픈 그 소리가 나의 마음 속에 부어 내린다. 아아 눈이 녹는다. 새파란 이끼 우에 떨어지는 눈이 녹는다.  까치가 운다, 장안 새벽에 까치가 운다. 삼각산(三角山) 나무수풀에 퍼붓는 눈에 길을 잃고서, 어제 저녁 지는 해 빨간 구름에 표해두었던 길을 잃고서, 눈 오는 장안 새벽을 까치가 울며 간다. 까치가 운다.  아, 인경이 운다, 은은히 일어나는 인경 소리에 눈이 쌓인다. 장안에 넓고 좁은 길이 눈에 메운다. 님을 못 뵈고 죽은 색시의 설움에 겨운 눈물이 눈이 되어 나린다. 먼저 해 봄바람에 지고 남은 흰 복사꽃이 죄 품은 선녀의 뜨거운 가슴에서 흘러 나린다. 안개에 싸인 아침은 저 높은 구름 우에서 남모르게 밝아오지마는, 바람조차 퍼붓는 눈은 장안거리를 가로막고 외로 메운다. 그침 없이 끝없이 쌓인다, 쌓인다, 쌓인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눈 오는 날 / 주요한  1 까맣게 덮누르어 퍼부어 나리는다  먼 거리 암암하고 행인조차 끊겼으니  장안이 빈들 같아야 가슴 활닥하고녀  2 저녁녘 된바람에 쌓인 눈 보라치네  밤 눈을 밟고 가니 빠각빠각 소리난다  두어라 예 듣던 소리로다 내 반기어 하노라  3 녹이다 남은 눈이 기와 끝에 엎드렸네  앓아서 누운 아이 창문으로 내다보며  꼬리 긴 강아지 같다고 혼자 좋아하더라  4 인왕뿌리 깔린 눈을 무심하게 보지 마소  작년 이맘때 그 속에서 보던걸세  아직껏 남아 있는 그들 역시 저 눈 볼 것을  5 눈 녹아 길이 지니 찬 날이 되려 좋다  털조끼 껴입고 아쉰 소리 하지 마라  불땔 것 없는 동포가 하나 둘만 아니다  6 오늘도 신문 보니 몽고라 시비리는  영하 칠십 도 춥던 중 첨이란다  집 없는 망명객들을 생각하며 사노라  7 불끄고 누워봐도 눈이 말똥말똥하네  밤 귀에 완연한 것 눈 나리는 소리로다  세상 한(恨) 도맡은 듯하여 잠 못 이루어 하노라  봉사꽃, 세계서관, 1930  눈결 / 주요한  삼림(森林) 같은 님의 눈이  나의 얼굴에 쏘일 때  나의 눈과 마주칠 때,  나의 가슴은 바람같이 떨립니다.  시냇물 같은 님의 눈결  나의 가슴 속을 흐를 때,  나의 붉은 뺨을 씻을 때,  나의 피는 물고기같이 헴칩니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늙은 농부의 한탄 / 주요한  팔자란 것이 있느냐고  아들놈은 그러지만  없다는 것 거짓말이  지난해 풍년 들어  곡식말 남았던 것  팔아서 호미 사니  호미 값이 더 비쌌네  안 팔고 겨울나면  비싼 값 받을 것을  누구는 모를까봐  핏집 볏집 노적가리  난 데 없는 불에 타니  불은 웬 불인가  이것이 팔자의 불  올해도 풍년일세  빚 갚고도 남은 것은  큰년의 혼수흥정  옥에 가서 삼 년이나  못 나오는 아들놈의  옷이라도 들여 볼까  침침칠야 잠든 밤에  된 소나기 웬일이냐  동이 터졌고나  산이 떠나가나 보다  구들에 물들었다  일어나라  사람 살려라  번갯불 번쩍 할 적마다  미친년 머리같이  흐트러진 양버들나무  한 길 넘는 모래에  곡식도, 집도, 세간도  큰년, 작은년  할미강아지, 검정소  다 묻히고 남은 것은  지붕하고 내하고라  먹을 것 망쳤으니  사람까지 잘 삼켰지  이 몸 혼자 살았으니  이것이 팔자의 목숨  황금 같은 벼를 베어  도조 주고 빚 물면  남을 것 무엇 있나  남을 것 없을 바엔  물 속에 잘 썩었지  살아서 굶을 바엔  물귀신 잘 되었지  서리 치고 눈 날린다  홑옷 입고 땅을 파니  손등 얼어터질란다  하루 종일 파고 파도  죽 끓일 것 모자라네  철로길 고쳐 놓면  누가 타고 댕길 건가  철로길 생긴 뒤로  못사는 놈 더 불었네  지은 죄가 있다 하면  농부된 것 밖에 없네  탕수물에 풍덩실  죽지 못한 죄 뿐일세  옥에 갇힌 아들놈  팔자 없다 떠들더니  네가 다시 세상 나와  팔자 잘 타거들랑  팔자 없는 세상을  만들고 살아 봐라  동해바다에도 해가 진다.  이놈에 두 눈에서  눈물이 솟으니  세상도 다 기울었나보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드을로 가사이다 / 주요한  드을로 가사이다―  등불많은 거리를 지나서  달빛만 있는 드을로.  장터에는 싸움이 벌어졌고  전등 불 밑에는 술과 노래가  밤의 거리의 보기 싫은 것을  모두 나타내는 때  드을로 가사이다―  조고만 다리를 지나서  바람부는 드을로.  풀로 덮인 길에 `여름밤'이  벗은 몸으로 맞아 주는 곳  수수잎의 속삭이는 소리 밖에  우리의 귀를 어즈러일 것 없는 곳  드을로 가사이다―  영혼과 영혼이 `땅'의 향기 우에  하나이 되는 드을로.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등대 / 주요한  등대에 불은 꺼졌다 살았다,  그대 마음은 더웠다 식었다.  등대는 배가 그리워 그러하는지,  그대는 내가 싫어서 그러하는지.  배는 그리워도 바위가 막히여  밤마다 타는 불 평생 탈 밖에.  싫다고 가는 님은, 가는 님은,  애초에 만나지나 않았던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마음의 꽃 / 주요한  정성들여 물 주어도  마르는 나무를……  바람 비 안 맞혀도  지는 꽃을……  꽃은 시들고  나무는 말랐으니  버리리까  그대여 서릿발 차고  바람 많으나  행여나  오는 봄  기다리리까  그대를 위하여  정성들인  한 포기 꽃……  마음의 꽃……  어리석은 꽃……  봉사꽃, 세계서관, 1930  목탁소리 / 주요한  -이 중 한 푼 주시오면  극락세계 가오리다-  얼음 녹아 탁수소리  가지 우에 꾀꼴 소리  봄날이 완연컨만  목탁소리 웬일인고  갔던 봄 왔건만은  오마던 님 왜 안 온고.  -이 중 한 푼 주시오면  극락세계 가오리다-  버들줄에 피릿소리  중치는 목탁소리  강남제비 왔건만은  님의 소식 왜 안온고.  을축동(乙丑冬)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물꽃 / 주요한  꽃은 잔다 맑은 물 밑에  꽃은 잔다 흰 모래 우에  꽃은 잔다 그 맑은 향내  그 고운 빛이 물에 잠겨서  바람이 와서 꽃을 깨웠다  물결이 뛰어서 꽃을 깨웠다  그러나 꽃은 깨지 않는다.  꿈 하나 없는 고운 잠에서  꽃은 잔다 때가 오도록  꽃은 잔다 기다리면서  운명이 정한 한낱소리가  꽃을 불러 깨울 때까지  봉사꽃, 세계서관, 1930  반딧불 / 주요한  호박꽃에 반딧불,  호박 넝쿨에도 반딧불,  옷 축이러 나갔더니  풀밭에도 반딧불.  불 꺼라 방등 꺼라.  반딧불이 구경하자.  파랗게 붙는 불은  반딧불이 불이다.  발갛게 타는 불은  내 맘 속에 불이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복사꽃이 피면 / 주요한  복사꽃이 피면  가슴 아프다.  속 생각 너무나  한없으므로.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봄비 / 주요한  봄비에 바람 치여 실같이 휘날린다  종일 두고 뿌리어도 그칠 줄 모르노네  묵은 밭 새 옷 입으리니 오실 대로 오시라  목마른 가지가지 단물이 오르도록  마음껏 뿌리소서 스미어 들으소서  말랐던 뿌리에서도 새싹 날까 합니다.  산에도 나리나니 들에도 뿌리나니  산과 들에 오시는 비 내 집에는 안 오시랴  아이야 새 밭 갈아라 꽃 심을까 하노라  개구리 잠깨어라 버들개지 너도 오라  나비도 꿀벌도 온갖 생물 다 나오라  단 봄비 조선에 오나니 마중하러 갈거나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부끄러움 / 주요한  뒷동산에 꽃 캐러  언니 따라 갔더니  솔가지에 걸리어  다홍치마 찢었습네  누가 행여 볼까 하여  지름길로 왔더니  오늘따라 새 베는 임이  지름길에 나왔습네  뽕밭 옆에 김 안 매고  새 베러 나왔습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불놀이 / 주요한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江)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 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냄새, 모래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不足)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江)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시원히 오늘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우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强烈)한 열정(熱情)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煙氣),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苦痛)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사월(四月)달 따스한 바람이 강(江)을 넘으면, 청류벽(淸流碧), 모란봉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졸음 오는 `이즘'의 형상(形象)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여린 기생의 노래, 뜻 밖에 정욕(情慾)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이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밑창에 맥없이 누우며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없는 장고소리에 겨운 남자(男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慾心)에 못 견디어 번뜩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뜻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大同江)을 저어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愛人)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靑年)의 어두운 가슴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確實)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사랑 / 주요한  나는 사랑의 사도외다  사랑은 비 뒤의 무지개처럼  사람의 이상을 무한히 끌어올리는  가장 아름다운 목표외다  사랑은 마치 물고기를 번식케하며  기이한 풀과 바위를 감춰두며  크고 적은 배를 띄우는  깊이 모르는 바다와도 같사외다.  그처럼 넓고  그처럼 깊사외다.  그러나 사랑은 또  바위를 차고 모래를 깨물며  천길을 나려치는 폭포외다.  그 나가는 길에 거침이 없사외다.  사랑은 튀어 오르는 화산같이  잔인한 세상을 향하야  뜨거운 분노를 폭발케 하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통일  사랑은 무한히 참으며  사랑은 가장 용감하외다.  사랑은 평화를 위하야  땅 위에 싸움을 퍼치며  사랑은 의를 위하야 붉은 피로  역사를 물들였사외다.  나는 사랑의 사도외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싸우지 않으면 안되겠사외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피를 뿜지 않으면 안되겠사외다.  학대 받고 짓밟힌 인류가 있는 동안  사랑은 나를 명령합니다.  ××의 기빨을 앞세우라고―  짓밟힌 그만을 위함이 아니고  짓밟는 그까지 위함이 사랑의  위대함이외다  이 분노와 이 싸움은  그러므로 더욱 거룩하외다.  나는 이 세기를 향하야 싸움을 걸겠습니다.  싸우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외다  미워하지 않는 사랑은 값없사외다.  노함이 없는 사랑은 헛되외다  나는 이 세기를 향하야  사랑의 돌격전을 걸겠습니다.  나는 사랑의 사도외다  오직 사랑함으로써  나는 바른 손에 칼을 잡았사외다.  오직 사랑함으로써  나는 왼손에 ××을 들었사외다.  나는 참으로  사랑의 사도외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삶 / 주요한  1  `삶'이란,  `행복'이란,  무엇?  아는 자는 누구?  그래도 알자면  애타고 설워……  그러나 봄빛이  나를 끄으니,  꿈 속에  잠기고저.  2  어둠과 밝음의  분별치 못할 새틈  봄잠을 설깨어  깨끗한 마음에  깨닫도다―  비고 또 빈 세상.  아, 그 설움의 위로여.  그러나 해 돋고  인간의 소리  귀를 울리면  분주한 마음  하염 없이  끝없는 길에  다시 서도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삶?죽음 / 주요한  `삶'은 지는 해, 피의 바다,  강하고 요란한 하늘이여.  `죽음'은 새벽, 흰 안개  깨끗한 호흡, 소복한 색채.  `삶'은 펄럭이는 촛불,  `죽음'은 빛나는 금강석,  `삶'은 설움의 희극,  `죽음'은 아름다운 비극,  끓는 물결 산을 삼키려 할 때  돛대에 부는 바람의 통곡―  소리 없이 부어 쌓이는 밤 눈에  가득한 웃음을 던지는 가벼운 달빛―  `삶'은 `죽음'에 이르는 비탈길,  `죽음'은 새로운 `삶'의 새벽,  아, 미묘히 섞어 짜는 `죽음'의 실로,  무거운 `삶'의 폭우에 성결한 광택을 이루리로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새벽꿈 / 주요한  나는 깨었다, 졸음은 흙 속에 스러지고  해는 없으되 낮같이 밝은 언덕가으로  나는 가비엽게 걸어간다, 흰 수풀  흰 나무 있는 데 길은 끊어지고  두터운 구름 그 끝에 일어난다  넓으나 넓은 언덕 우에 무거운 마음은  바깥 찬 기운과 슬치는 듯하여 더욱 무겁고  허둥거리는 발은 허공(虛空)을 차고 땅에 엎드리니  어디선가 이상(異常)한 앓는 소리 귀를 친다.  아아 이 언덕 저편 끝에 한 마리 누런 개 사슬에 끌려  힘없는 저항(抵抗)의 신음(呻吟)으로 털 뽑힌 모가지,  길게 느리우고 상(傷)한 발톱은 흙을 깬다.  아아 나의 눈은 어둡고 어깨는 떨려  더운 눈물은 가슴에서 끓어 오르며  밟고 섰는 땅은 흔들리고 기울어, 갑자기!  가슴 식는 두려움이 내 몸을 한없는 땅 밑으로 떨어뜨린다.  아아 나는 새벽에 잠깨었으나  나의 마음은 한때도 가라앉지 않지  막을 수 없는 어떤 사슬 쉴 새 없이  나의 가슴을 이끄는 듯하여  낮은 베개 우에 뜻 없는 눈물 쏟고 있었도다,  아침 햇빛, 나의 속 어두운 담벽에 비치는 날까지.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샘물이 혼자서 / 주요한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하늘은 맑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생의 찬미 / 주요한  1[其一]  비아, 비아, 비아, 병아리는 우물에  빠져 죽었다.  닭, 닭, 닭, 암탉은 우물을  싸고 돌았다.  눈빨간 삵이 나다니는 밤에도  이슬 찬 아침, 소리개 뜨는 낮에도  그 뒤에는 바람 부는 저녁이  자취 없이 기여들 때까지도  닭, 닭, 닭, 암탉은 우물을  싸고 돌았다.  밤이 가고 아침이 왔다―  물우에 뜬 것은 암탉의 시체,  닭의 등에 업은 것은 병아리의 시체  우물은 모른 체하고 푸른 하늘  거꾸로 비쳤다  닭, 닭, 닭 암탉의 우는 소리  다시 없었다  2[其二]  검은 진흙에서도 연꽃이 피네  니나니, 나니나  보이진 않아도 뿌리가 살았는 걸세  새는 노래하고 하늘은 맑다.  태양은 장천 웃고 있다  실개천 모여서 대동강 되네  니나니 나니나  한바다 향해서 모인 때문일세.  새는 노래하고 하늘은 맑다  태양은 장천 웃고 있다  두드리고 두드리면 바위도 갈라지네  니나니, 나니나,  그러나 그것은 직심이 있어야 하네.  새는 노래하고 하늘은 맑다  태양은 장천 웃고 있다  3[其三]  하루, 한 주일, 한 달이라도  너는 먹을 것 없이 견디겠느냐  ―그는 잠자코 ?그리하겠오?  홑옷 밖에 입을 것 없이라도  눈보라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그는 잠자코 ?그리하겠오?  친구의 친척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하는 고향도 영원히 못 볼 것이다  ―그는 잠자코 ?그리하겠오?  고랑을 채우고 챗죽으로 때리고  나중에 갈 곳은 감옥의 쇠문이다  ―그는 잠자코 ?그리하겠오?  인제는 네 목숨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 죽는지는 알릴 수 없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아기의 꿈 / 주요한  벌써 어디서 다듬이 소리가 들린다―  별이 아직 하나 밖에 아니 뵈는데.  달빛이 노니는 강물에 목욕하려  색시들이 강으로 간다.  바람이 간다―아기의 졸리는 머리 속으로.  수수밭에 속삭이는 소리를  아기는 알아듣고 웃는다.  아기는 곡조 모를 노래로 대답한다―  어머님이 아기 잠을 재우려 할 적에.  어머님의 사랑하는 아기는  이제 곧 잠 들겠습니다.  잠들어서 이불에 가만히 뉘인 뒤에  몰래 일어나 아기는 나가겠습니다.  나가서 저기 꿈같은 흰 들 길에서  그이를 만나 어머님 이얘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머님은 아기가 잘도 잔다하시고  대림질할 옷을 풀밭에 널어  아기의 웃는 얼굴에 입 맞추고 나가시겠지오.  그럴 적에 아기는 앞강을 날아 건너  그이 계신 곳에 가 보겠습니다.  가서 그이에게 어머님 이 얘기를 하겠습니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아침 처녀 / 주요한  새로운 햇빛이여, 금빛 바람을 일으켜, 일으켜,  나의 몸을 불어가라, 홧홧 달은 이마를, 뺨을, 두 귀를  나의 강한 애인에게 나의 `뜻'을 가져가면서.  이슬에 젖은 길이여, 빛나라, 빛나라, 나에 앞에  스스로 가진 힘을 의심 없이 깨닫기 위하여.  빛나라 잠깨기 시작한 거리거리여  불붙는 동편 하늘로 숨차게 걸어갈 때에.  아름다운 새벽이여 둘러싸라.  희고흰 새벽 안개여 더운 젖통을 씻으라  나의 깨끗한 살의 단 냄새가  모든 강한 애인의 가슴에 녹아 들기 위하여.  아, 땅이여, 붙들라, 나를,  너의 질긴 풀줄기로 나의 벗은 발을 매어  시원치 않은 이 몸을 너의 풀밭에 끌어 엎지르라.  이슬에 젖은 아침이여, 빛나라, 빛나라, 그때에  안타까운 나의 사랑을 뜨거운 그의 가슴에 비추기 위하여,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영혼 / 주요한  그렇게 완전하던 통일이  의지와 정이  아는 것과 바라는 것이  분명히 속일수 없이 하나이 되었던,  그의 개성이  다만 그 살의 흩어짐으로  아주 스러진다는 것이,  흔적도 없어졌다는 것이,  참일까.  그 영혼은―영혼이란 말을 쓸 수 있다면―  어리더라도 분명히 `그이'였었다.  아직도 피려는 꽃 봉오리라 하여도  누가 몰라 보았으랴.  더구나 그의 높은 희망, 겸손한 이상  생각의, 사랑의 파동이 적거나 크거나  큰 이 만큼, 적은 이 만큼 울리었었다.  물 한 방울도 있으면 없이할 수 없다는 것을,  사라진 줄 아는 `힘'도  반드시 우주 안에 숨어있다는 것을,  물질'보다도 `세력'보다도  더 확실한 더 힘있는  통일된 `의식'의 전부,  그 신기한 `개성'이  살이 식을 때에 더욱 굳세지고  더욱 맑아지던 그 `영혼'이  다만 어떠한 순간에  아주 스러졌다는 것이,  아니 있었던 것과 꼭 같이 된다는 것이  참일까, 참일까.  (1924년 12월 30일 누이동생이 죽음)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옛날의 거리 / 주요한  조고만 복잡 조그만 시름, 조고만 행복,  새벽 물장수 석양녘에 주정꾼  궂은날 땅에 기는 연기  객줏집 부엌에 물이 들어  오오, 거리여!  고르지 못한 팔다리로  처마 낮은 가갓집을 젖먹이듯 헤가리던  나의 거리여.  장마날, 나막신을 위하여 진땅을 예비하고  또 겨울, 얼어붙은 네 비탈에서  아이들의 얼음지치기, 할머니 한탄  세배 다니는 남녀의 차린 옷이  찬바람에 푸덕거릴 때  거리여  네 뺨이 아침 해에 불그레하였었다.  비 오고, 밟히고 바람 불어  울둑불둑 굳은 땅을  짐 실은 구루마가 털석거리고  먼눈 파는 아이가 돌뿌리에 넘어질 때  너는 참지 못하여 연해 웃었다.  달빛조차 얼어서 더 밝은 밤  밤엿장수 길게 외치는 소리,  희미한 방등 밑에 잦은 다듬이 방맹이가,  네 외로운 가슴에 얼마나 울렸을까.  또 봄이 와서 먼 산에 아지랑이가 노닐어도  꽃구경 가는 아낙네의 흰 신이 한가로워도  너는 먼지 이는 구석에 흐릿한 그림자를 지키노라고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너는 때로 한숨도 지으면서  이끼 덮인 수구로 빠져  굽은 소나무로 깎아 놓은 다리를 건너며  또, 새벽 민물에 나룻배를 건너  빨래소리도 못 들은 체하고  거리여, 너는  시냇물과 입맞추고  겸손하게 촌길과 손을 결렸었다  길고긴 여름밤에  부지런히 골목집을 찾아 들어가  수절하는 과부의 긴 한숨을 위로하고  속타는 며느리의 눈물을 마시었다.  너는 어느 때에 한번이나  싫다 하였나, 더럽다 하였나, 못 참을라 하였나  너를 둘러싼 꿈 속의 평화  대대로 전하는 게으름  너는 그를 불쌍하게 보았을지언정  나무라지는 않았다.  너는 놀랄 만한 참을성으로  그네가 그네의 행복을 찾도록  한결같이 기다렸었다.  그적에 나는 너의 몸가짐 눈짓을  너의 가슴에 따스함을  오오, 거리여  알았었다, 들었었다, 만졌었다.  그렇거늘 그렇거늘  오늘 너는 나를 몰라보고  나도 너와 초면이 되었다.  네 좌우에 있는 초라한 전들이  멀찍이 물러나서 곁눈질만 한다.  너는 네 우에서 아무런 비극이 생겨도  거리여, 거리여  너는 그렇게 변했다  너는 그렇게 변했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외로움 / 주요한  나는 옛날 성도(聖徒)의 걸음으로  외로움의 깊은 골에 홀로 나려가며  추억의 무거운 바다, 물 밑에 엎드려  나의 난 날과 모든 해를 이로 짓씹고,  지난날의 뜬생각 우에 재를 뿌리려 한다.  나는 내 몸을 누르는 각색(各色) 옷을 벗어 던지고  붉은 살로 얼음과 뜨거움을 능히 견디며  도올 줄 모르는 나의 상처를  찬바람과 날카론 빗으로 문질므로  나의 살에 참된 사랑을 맛보기를 원한다.  외로움은 뜨거움 없는 빛과 같다.  지금 이 기이한 굴 안에 광채가 가득하매  그 빛은 얼음같이 찬바람을 토한다,  나는 눈을 열 수 없고 물고기같이  외로움의 찬 빛을 호흡하며 부침(浮沈)한다.  아아 `사랑한다'는 모든 것  몇 천년 인류의 모든 겨레가 입으로 부르던  각색(各色) 가지의 `사랑'이란 말  그는 죽어 떨어진 꽃잎에 불과하다,  오직 이 광채 휘황한 슬픔과 아픔의 날에  죽는 듯이 빠르게 나의 핏줄기는 뛴다.  물소리가 멀리 들린다, 외로이,  여기 밤과 어둠이 없다,  그러나 그 빛이 차기 얼음 같고  그 밝음은 잔혹히 뚫어보는 눈동자 같으매  스스로 헤아리고 사모하는 마음은  이 외롬의 쓴 빛 아래 더욱 간절하니  나는 이를 악물고 감사의 눈물로, 여기서  신(神)에게 나의 발가벗은 기도를 드리리라.  아아 그러나 이상하다, 고요한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오는 듯이 마음 속 깊은 데서  병에 넘치는 물같이 벼랑에 떨어지는 꿈같이  형언할 수 없는 고감(苦感)과 쾌감(快感)을 가지고 온다.  나의 다문 입술은 때때로 떨리며  두 어깨는 어린아이와 같이 격노하였다.  이 같은 불안 속에 나는 소리를 들었노라.  `전에 슬픔의 바다에 잠기기 않은 자  또한 기쁨의 구름다리를 못 오르리라.  이미 있은 자, 시방 있는 자, 장차 있을 자,  너의 눈물을 네 환상 우에 쏟으라  거기서 너의 쓴 사랑을 찾으리로다'  폭풍우가 와서 나를 친다.  벗의 발자취 빈 공기를 통하여 가까이 온다.  색색의 그림자, 꿈, 혹은 나를 괴롭게  혹은 나를 즐겁게, 나의 귀와 눈과 살에 온다.  그러나 시방 나의 몸은 차고 또 더워  그 밖에 차기가 맑은 유리와 같고  그 안에 덥기가 풀무에 놀뛰는 화신(火神) 같다.  이리하여 기꺼운 침묵이 새벽처럼 와,  광채가 황홀한 기이한 굴속에  나는 맑게 개인 이지(理智)로 내 몸을  또 그 모든 지나간 날과 해를 잘 보며  후회도 없고 탄식도 없이 현황(眩惶)함도 다 가고,  소녀와 같이 순일(純一)한 애탐으로  제 몸과 그 모든 장래 올 날에 사랑을 붓는다.  이제 몸소 단련하는 외롬의 굴에 있으며,  언 바람과 칼 같은 광채에 붉은 상처를 내어주고  변함 없고 다만 하나인 불꽃의 `사랑'은  깜박임 없는 열정의 눈으로 영원히 지키도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우리집 / 주요한  우리집 동편 담 밑에는 돌창을 파고  서편 담은 곁집 담벼락으로 대신하였소.  그 담에 붙어 있는 닭이 홰를 가리운 듯이  비스듬히 뻗어난 살구나무, 첫여름에  막대기로 떨구는 선 살구의 신맛이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가지를 꺾어다 꽂았던 포풀라가  곧은 줄로 자라나서 네 해에는 제법,  높이 부는 겨울 바람에 노래를 칩니다.  나 많으시고 무서운 할아버님 안 계신 틈에  지붕에 오르기와 매흙 깐 마당 파기도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봄에는 호미 들고 메 캐러 들에 가며  가을엔 맵다란 김장무 날로 먹는 맛도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해마다 추석이면 으레히 햇기장쌀에  밀길구미 길구어 노티를 지지더니  늙으신 할머님 지금은 누구를 위하여…….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이야기 / 주요한  고운 손에 새로운 `날'을 든 봄이  초록색 긴 치마를 입고 걸어옵니다.  눈­속에서 생겨난 토끼 새끼가 봄을 맞으러 산기슭에서 벌판으로 뛰어갑니다  아―봄이 옵니다. 햇빛에 반뜩이는 시냇물 우에, 주둥이 샛노란 병아리 빽빽 하는 소리를 따라, 산에도 들에도 한결같이 즐거운 노래를 퍼치는 봄이 올 적에  그리하고, 아름다운 새벽이 세계 우에 웃으면서 나타날 적에  네 바구니를 가진 네 처녀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들어가보지 못한 가시덤불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꼭대기에는 더 없는 향기를 피우는 만첩꽃이 바다의 물결같이 가득히 핀 것이 보입니다  용감한 네 처녀는 돌 많고 엉키는 넉지 많은 산비탈을 얼마 못 올라가서  가시나무로 세운 담장을 만났습니다  첫째 처녀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가시덤불로  나의 보드라운 살을 뜯지 않고는  이 산 우에 못 올라간다 하면  나는 싫소, 나는 올라가지 않겠소.  그까짓 꽃은 가지고 싶지 않소?하고  옆구리에 끼었던 바구니를 가시넝쿨에 던지니, 이상타, 별안간에  그의 몸은 세 처녀 앞에서 없어지고  아까 떠나온 산기슭 마른 흙 우에 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세 처녀는 그들의 흰 치마와 아름다운 뺨이 찢어지고 붉은 피에 물들기까지 애를 써서  더욱 더욱 우르르 가시담장을 넘어 올라갔습니다  얼마 더 안 가서 그들은 시꺼먼 물이 죽은 듯이 고인 넓은 못가에 다다랐습니다  그 못 속에서 아지 못할 손이  무서운 소리와 함께 손짓하여 부르는 것도 같고 저편 언덕에는 깊은 안개 속에  날샌 두 눈이 말없이 이편을 노려보는 듯도 합니다  어디선지 조고만 배가 젓는 이도 없는데 저절로 언덕에 와 닿았습니다. 둘째 처녀가 말합니다  -저 물은, 나의 깨끗한 살을 더럽힐 터이지,  저 되인 안개는 나의 숨을 막으려 한다  무엇하러 이런 데까지 찾아왔을꼬  아까 그 애와 함께 돌아갈 것을-  하고, 옆구리에 꼈던 바구니를 검은 물 우에 내어던지니  이상타, 별안간에, 그의 몸은 두 처녀 앞에서 없어지고 산기슭 마른  흙 우에 한 걸음 먼저 떨어진 그의 동무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두 처녀는 서슴지 않고  저절로 물 우에 떠가는 배를 잡아타고  안개와 내가 자욱한 언덕에 나렸습니다  두 바구니를 가진 두 처녀는 밤중 같은 어둠 속으로  길도 없는 산골을 더듬어 올라갑니다  그것은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  화려하게 핀 꽃들이 어둠을 뚫어, 그렇게 똑똑히  바라보이는 까닭이올습니다.  그러는 새에 안개도 벗어지고  두 바구니를 가진 두 처녀는  바라고 바라던 산꼭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꽃은 간 데 없고, 다만 한층 더 높이  한층 더 험한 산이 그 앞에 솟아올랐습니다  겨우 뵐 만한 그 감감한 꼭대기에는  지금껏 보던 것보다도 더욱 훌륭한 꽃들이 수없이 피어서  바람 불 적마다 흐늑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에 어디선지 모를 곳으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보아라 네 앞에 있는 끝 없는 싸움을-  그러나 셋째 처녀는 기를 써서 소리를 높여  -오오 다시 나를 속이지 말라  미련함으로 세운 너의 비석(碑石)이 다만 너를 웃어주리로다-  이렇게 괌치고, 옆구리에 꼈던 바구니로 앞에 막힌 산을 치니  이상타, 별안간에 그의 몸은 다른 처녀 앞에 없어지고  산 밑에 마른 흙 우에 그를 기다리는 두 동무 곁에 있었습니다  넷째 처녀는 슬픈 맘으로 동무의 스러진 편을 둘러보다가  다시 정신을 수습하여 한층 더 험하고 가파로운 산을,  아침에서 낮으로, 낮에서 저녁으로  빛과 어둠이 번갈아 차지하는 때를 더듬어  쉴 새 없이 고생과 외롬의 사이에  꿈으로 보는 산 우의 꽃을 향하여  그의 끊임 없는 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산 아래서는 마음 약한 세 처녀가  이제 저의 남은 한 동무가 마저 내려와서  전 같은 넷의 친한 사이를 지을 때를  날을 두고 달을 두고 기다립니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왔습니다  그 여름도 지나고 깨끗한 가을도 지나며  또 바람 찬 겨울까지 지나서  또 다시 노란 눈동자 가진 새 봄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리는 동무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자장가 / 주요한  뒤뜰에 우는 송아지  뜰 앞에 우는 비둘기  언니 등에 우리 아기  숨소리 곱게 잘 자지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전원송(田園頌) / 주요한  전원으로 오게, 전원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을 가져오나니.  익은 열매와 붉은 잎사귀―  가을의 풍성은 지금이 한창일네.  아아, 도회의 핏줄 선 눈을 버리고  수그러진 어깨와 가쁜 호흡과  아우성치는 고독의 거리를 버리고  푸른 봉우리 솟아오른 전원으로 오게, 오게.  달이 서리 온 밭도랑을 희게 비추고  얼어붙은 강물과 다리와 어선 우에  눈은 나려서 녹고 또 꽃 필 적이  우리들의 깊이 또 고요히 묵상할 때일세.  전원으로 오게 건강의 전원으로  인공과 암흑과 시기와 잔혹의 도회  잠잘 줄 모르는 도회달과 별을 향하여  어리석은 반항을 하는 도회를 떠나오게.  노래는 드을에 가득히 산에 울려나고  향기와 빛깔은 산에서 드을로 퍼져간다  아름다운 봄! 양지에 보드랍게 풀린  흙덩이를 껴안고 입 맞추고 싶은 봄.  그러나 보라 도회는 피 빠는 박쥐가 깃들인 곳  흉한 강렬의 신 앞에 사람 사람이  피와 살과 자녀까지 바쳐야 하는  도회는 문명의 막다른 골, 무덤.  전원으로! 여기 끊임 없는 샘물이 솟네,  여기 영원한 새로움이 흘러나네,  더운 태양과 강건한 대지의  자라나는 여름의 전원으로!  아아, 그때에 새 예언자의 외치는 소리가  봉우리와 골짜기를 크게 울리리니  반역자가 인류의 유업을 차지하리니  위대한 리듬의 전원으로 오게, 오게.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조선 / 주요한  어떤 이는 무리진 달을 사랑하고  안개 끼인 봄밤을 즐기지마는―  어떤 이는 봄물에 드린 버들개지를  황혼의 그윽한 그림자를  오동잎 떨어지는 가을을  소 소리 처량한 가을의 저녁을  떠나는 목선의 배따라기를  그 끊였다 잇는 곡조를 사랑하지마는  오, 조선의 자연이여 오직 나는  너의 위대한 여름을 껴안으련다.  논물에서 떠오르는 김도 뜨겁고  붉은 산에 쬐이는 햇빛은 더 붉어  솔나무 향기가 코를 찌르고  석양 맞은 황소의 큰 울음 할 제  아아, 너의 홍수와 소낙비와  기운찬 바람 뜨거운 바람 돌개바람  번갯불 우뢰소리 뭉게뭉게 오르는 구름  산과 골짜기 뻗어 나가는 산맥들과  또 시냇물과 다리와 나룻배와  기심꾼의 구슬땀과 노랫가락  그늘진 나무와 샘물과 폭포와  바위에 기는 덩굴과 우거진 수풀  보라, 저기 아침 해가 땅을 물들이니  벌판으로 가득한 곡식들의 행진곡  수수는 깃발 들고 벼는 발을 맞춰  물결처럼 군대처럼 열을 지어서  앞으로 앞으로 영원한 `희망'으로  조선사람의 가슴을 채워주는―  아, 여름은 나의 고향 나의 조국  그의 품은 나를 단련하는 풀무 불  해외에 떠다닐 때에 생각을 이끌어 가고  일에 지쳐 곤할 때에 새 기운을 돋우는  나의 집, 나의 어머니, 조선의 여름―  어떤 이는 봄과 달을 사랑하고  처량한 가을을 노래로 읊지마는  조선의 자연이여, 오직 나는  너의 위대한 여름을 껴안으련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지금에도 못 잊는 것은 / 주요한  지금에도 못 잊는 것은  안개 속에 돗 달고 가던 배.  바람도 없는 아침 물결에  소리도 없이 가 버린 배  배도 가고 세월도 갔건마는  안개 속 같은 어린 적 꿈은  옛날의 돗 달고 가던 배같이―  안개 속에 가고 오지 않는 배같이―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채석장 / 주요한  핑, 핑, 핑, 지구의 근육을 뚫으는 강철의 소리 여름날 뜨거운 빛이 뜨거운 바위에 부어 나릴 때 푸른 숲과 흰 들의 중간에서 인생의 합창소리는 일어난다.  -노래하자 태양아, 나무숲아, 흐르는 시내야 올라가자 선구자야  깨트려라 새 길을,  우리에게 주라, 위대한 힘을 막을 자 없는 힘을-  핑, 핑, 핑, 꾸준히 쉬지 않고, 거기 기울여라 너의 전부를,  바위를 깨무는 의지를 신념을, 강철의 심장을, 그날에 산은 평지가 되고 바다와 바다가 서로 통하리니  -노래하자 바람아, 소낙비야, 무성한 숲들아, 올라가자 선구자야  깨트려라 새 길을,  우리에게 주라, 위대한 힘을 막을 자 없는 힘을-  여름날 뜨거운 볕이 구릿빛의 근육을 태운다 흰 들, 붉은 흙, 푸른 산소리와 빛깔의 군악  여름이다 여름이다 그늘 깊은 산의 여름, 광활한 드을의 여름  생명은 한낱의 기구다, 닳아서 버리는 `정'과 같이 우주의 의지에 그 전체를 싸워 희생하는 행진곡이다.  그러나 얼마 없어 해결은 오리니, 화강석의 깊은 뚫리리니  -노래하자 우렁찬 시절아, 불타는 여름아 올라가자 선구자야  깨트려라 새 길을,  우리에게 주라, 위대한 힘을 막을 자 없는 힘을-  핑, 핑, 핑, 최후의 일격이다 준비는 다 되었다,  폭약은 장치되었다 불을 그어댈 사람은 나오라, 위대한 승리에 취할 사람은 나오라, 나오라, 나오라,  여름날 자연은 모두가 잠잠하게 불붙는 광경 잠잠한 것은 힘세다, 위대하다, 오, 잠잠한 합창의 소리  너는 듣느냐 그 소리를 `최후의 일격이다, 준비는 다 되었다'  -노래하자 태양아, 나무숲아, 흐르는 시내야 올라가자 선구자야  깨트려라 새 길을,  우리에게 주라, 위대한 힘을, 막을 자 없는 힘을-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페놀탈렌 / 주요한  뜨거운 페놀과 순결한 탈렌이  낳은 따님 페놀탈렌  핏빛의 붉은 사랑은 감추었건만……  남달리 열렬한 가성칼리를 그려  변함 없는 붉은 가슴 끓건만  방울방울 떨어지는 가성액에  파문을 지으며 가슴의 한 끝이 뛰건만  찬바람같이 휩싸는 희류산의 시기에  애처롭게 스러지는 그 붉음  아아 페놀탈렌에게는 산과 가성……  사람의 따님께는 사랑과 버림이……  봉사꽃, 세계서관, 1930  푸른 하늘 아래 / 주요한  푸른 하늘 아래  오늘 또 빛이 찼다,  오늘 또 더움이 있다,  오늘 또 새들이 높이 뜬다.  어떤 때는 외로운 지붕이 비에 젖었다.  또 언제는 가장 높은 가지 우에  저문 해를 느끼는 바람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 새들은  잿빛과 누런빛의 보드라운 머리털을,  그 속에 숨긴 사랑을,  지혜롭게 흔들며  아무도 모르는 이상(異象)의 세계에  그들의 더운 가슴을 내어준다.  오, 이날 이 감춘 귓속말,  보이지 않는 활개침,  아름다운 누리에 그려 내는 여러 낱 굽은 줄,  또한 새여 더욱 너의 미끄러운 잔등이  나래 밑에 가늘고 붉은 다리가  나의 입술을 이끈다.  아, 밝은 날, 퍼지는 빛,  두텁고 가뿐 목숨 우에  춤추고 솟아오르는 곱다란 생물,  이날에 한갓 새 힘을 돋우어,  견딜 수 없이 움직여서,  그침 없이 노래하여서,  더, 더, 기쁜 소식의 때를  끝 날까지 두어 두려고, 간직하려고,  쓰다듬고 기르려고―  놀뛰고 춤추고 솟아오르는 곱다란 생물들이여.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풀밭 / 주요한  봄날 풀밭에 누워서  눈감고 조용히 들으면  어디선가 미묘한 음악이,  하나도 아니요 여럿이,  수천 수만의 숨소리가,  귀를 막아도 울려오는,  선녀의 합창하는 소리가,  사면으로 일어나서,  내 신경을 진동합니다.  그것은 무수한 생명이  검은 흙 속에서 때를 헤는  신비의 곡조입니다.  시방 그 조용한 속에 있는 `힘'을  나는 듣습니다 맡습니다 만집니다.  태양과 공기가 그 `힘'으로  내 영혼을 멱감깁니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하늘 / 주요한  구름 없이 맑은 하늘 우에  웃음 띤 아침해가 돋아 오른다.  바람과 찬비는 다 어디 갔나  저 하늘 볼 때마다 놀뛰는 가슴,  그 속에 숨겨둔 애타는 생각을  저 파란 하늘 우에 놓아주면은  금(金) 같은 소리 되어 님의 귀에,  불 같은 별이 되어 님의 속에,  나의 소원(所願)을 갖다주련만.  구름 없이 맑은 하늘 우에  웃음 띤 아침해가 돋아오른다.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해의 시절 / 주요한  말 없은 불길은 하늘을 태우며,  향기로운 밀꽃은 땅을 채웠다.  뜨거운 흙을 벗은 발로 밟으면서  드을의 감각 속에 나는 안긴다.  논물이 햇빛을 비추어 번득이면,  나려오는 그 빛과 뜨거움은 몸을 곤하게 한다.  때때로 느리게 부르는 노래도 귀에 즐거우며,  사람들은 서늘한 그늘을 찾아 무거운 발을 옮긴다.  불붙는 태양은 우리의 머리를 치장하고,  솟아오르는 샘물은 우리의 발을 씻는다.  모든 혈관은 더위에 불어 올라, 머리 수그린 드을꽃이여!  땀 흐르는 긴장에 헐떡이는 땅!  오, 해여, 무거운 바다를 녹이고,  모든 밝음의 자연을, 인생을  그침 없는 풀무 속에 집어 넣는 해의 시절이여!  오, 이러한 날에 나의 생명은 저기 끓도다.  저기 산 우에 걸어가리라―나무껍질에 흐르는,  향기 있는 송진냄새와, 햇빛에 피어난,  빛 독한 꽃의 길을 더운 벌겅 흙의 길을.  거기서 나는 쉬리라―쉬는 풀 밑에.  거기서 나는 쉬리라―수군거리는 나무 그늘.  아, 마치 즐거운 뜰에 있는 것같이  나는 취하였다―땀 배인 땅을, 동편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을,  떠다니는 구름을, 소낙비를, 넘치는 홍수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마음껏 껴안는다―흙에 묻힌 시절을 흙에서 피어난 이 시절을.  이삭 익어가는 벌판에서, 솟아오른 산꼭대기에서, 마음은 춤추며  마음은 꿈뀌인다.  곡식 냄새가 내 몸을 둘러싼다.  숨은 것 없이 하늘에 빛나는 드을!  어지러운 벌이떼, 눈부시는 흰 치마.  아 나는 천천히 걷는 네 좁은 길을,  나의 애인의 가슴인가 의심한다.  해여, 바람이여 지금 내 가슴에 넘쳐오라.  풀무 불에 제 튼튼한 팔을 두드리는 이상한 대장장이처럼,  사른 열정으로 나의 가슴을 달구리라.  해를 물어 간다는 용감한 붉은 개같이  지금 나는 이 연한 두 손을 그 불 속에 넣으리라.  위대한 계절이여, 나를 위하여 차리는 화려한 잔치에,  오직 하나인 내 불꽃의 `말'을 금으로 새기리라.  나는 네 푸르른 바람에 쉬는 것보다,  네 달금한 피곤을 맛보는 것보다,  다만 네 가슴에 더욱 뜨거운 침묵의 길을 불로 닦으리라.  오, 모든 사람의 여름이여,  질기고 질긴,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시절이여,  어떤 광채 많은 새벽에,  고대하는 나의 마음을 실어가려 하느냐―  길이 불에 싸인 너의 위대한 조국으로!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황혼의 노래 / 주요한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황혼에 나가겠습니다  수수밭 사이에 뚫린 길로  오고 가는 손님의 흰옷이  언덕에서 그림같이 보일 적에  그이를 맞으러 나가겠습니다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그이를 맞으러 나가겠습니다  그이가 참으로 오실 때는  황혼이 아기의 눈을 가리워서  색색의 오식을 다 가져간 뒤에야  그이의 참 모습을 잘 볼 수 있어요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황혼에 나가겠습니다  저 언덕에서 기다리노라면  먼저 나의 모양을 알아보실 터이지요  그리고 아기는 혼자서 노래부르면  그이는 그 노랫소리를 잘 아실 터이지요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그이를 맞으러 황혼에 나가겠습니다.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 삼천리사,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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