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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3. 파란많은 사행길 5)
2015년 08월 17일 13시 12분  조회:1824  추천:0  작성자: 옛날옛적
    조선국의 사신들이 계빈에 온지 보름이란 긴 시간이  지나서야 일본국의 관백은 국서를 써서 겐쇼오를 시켜 가져왔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본국의 국서를 받아본 조선국의 사신들은 그만 아연실색하고말았다. 소위 <<국서>>라고 쓴 관백의 글은 오만무례하기가 짝이 없어 차마 소리내여 읽을수가 없었다. 그는 조선국왕을 <<각하>>라고 하대했는가 하면 례폐를 <<방물(方物)이라 했고 조선의 선구자가 <<조정>>에 왔다는 등등으로 망발이 수두룩했는데 그 다음의 글은 더구나 말이 아니였다.
 
<<... 내가 태여날 때 나의 모친께서는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던것이요. 관상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고 <일광이 비치는곳에 빛을 받지 않는곳이 없느니라.장년이 되면 팔방에 어진 바람이 불게 될것이고 사해에 위엄있는 이름이 덮일것을 어찌 의심하리오...>라고 말하였소. 사람으로 태여나서 인간세상에서 비록 100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내 으스름한 이곳에서 쓸쓸히 이대로 있을수 있겠소? 나의 소원은 다름이 아니라 오직 아름다운 이름을 동양3국에 떨치는것뿐이요...>>
 
   남의 나라의 존엄이란 꼬물만치도 돌보지 않는 일본관백의 오만무례한 글을 보고 김성일은 눈에 불이 일었으나 황윤길과 허성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있었다. 그들은 어쨌든지 일본국의 회답문서를 받았으니 그것을 본국에 돌아가서 임금한테 바치면 통신사의 임무를  다 완수했다고만 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겐쇼오상, 귀국 관백의 회답문서는 례의에 너무도 어긋나오. 그 엉터리문구를 고치주지 않는다면 우리 사신들은 결사코 이대로 귀국하지 않겠소....>>
    김성일은 겐쇼오에게 서면으로 항의를 표시하고나서 조선사신으로서의 강경한 태도를 표명하면서 두 나라의 친선을 위해서 매사에 부디 신중한 태도를 취할것을 강렬히 요구하였다.
    김성일의 서면항의를 읽어보고 발뺌할 방법이 없게 된 겐쇼오는 즉석에서 <<각하, 방납, 령납>> 등의 문구를 고치였다. 그러나 그 나머지 문구는 이핑게저핑게를 대면서 고쳐주지 않았다.
    <<이젠 저놈들과 더 다투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것 같소. 이젠 그들이 주는 국서를 받고말기오.>>
    <<아무리 엉터리 국서라도 받아가지고 돌아가면 조정에서 료량해서 처리하지 않겠소.>> 
    황윤길이 국서를 받으려 하자 허성도 인차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  이처럼 나라를 욕되게 하는 글에는 비록 죽음으로 다투어도 우리가 제마음대로 처사했다는 죄를 입지 않을것아라 할수 없는인데 한몸의 리해득실을 지나치게 념려하여 왜인들앞에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서는 <돌아가 복명하고나면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할것이요.>라고 말한다면 그게 무슨 태도요?>>
    황, 허 량인의 애매한 태도에 결이 난 김성일은 목에 피대를 세우며 도리를 따졌으나 황윤길은 결국 회답문서를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대저 사신일행의 일은 권한이 령공에게 있고 서장관마저 부동하니 나같이 어리석은자야 어쩌겠소.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도 천번 생각에 어찌 한번 실수가 없겠소? 앞날에 후회가 되거든 오늘 내가 말하지 않았다고 탓하지는 마시오.>>
    황윤길이 회답문서를 받고 돌아서자 성이 난 김성일은 이렇게 침을 꽂고말았다.
    12월 11일에 귀국길에 오른 사신들은 중도에 병고관(兵库关)에 들리였는데 부근에 사는 일본국의 추장들이 선물을 가져왔었다. 사신일행은 그들이 가져온 선물을 반가이 받아 나눠가졌다. 선물에 대해 티끌만한 흥미도 없는 김성일은 떠날 때 받은 선물을 려관에 있는 일본의 중들에게 몽땅 나눠주고 빈손으로 배에 올랐다.
16일 야밤에 다시 돛을 올린 배는 이튿날 아침에 감포(监浦)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일행이 감포에서 묵는동안 감포에 사는 중 차오산(车五山)이 찾아왔다. 시를 유달리 즐기는 차오산은 학봉선생과 하루종일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다가 해가 질 무렵에야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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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사(西山寺) 김성일 시비나가사키현 쓰시마 이즈하라. 이즈하라의 서산사(西山寺) 김성일 시비 / 나가사키현 쓰시마 이즈하라. 이즈하라의 서산사(西山寺)에 있는 김성일(金誠一) 시비(詩碑). 김성일이 통신부사로 쓰시마에 들렀을 때 이곳에 체류하면서 통신사를 영접한 승려 겐쇼[玄蘇)]와 시를 주고 받았다. 2000년 의성김씨 문중에서 그중 한 수를 골라 시비를 건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성일 [金誠一] (두산백과)
 
 
    20일에 다시 닻을 올린 돛배는 구호관(龟户关)을 지나 적간관(赤间关)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바다에서 세찬 풍랑이 일기 시작하였는데 여러날을 기다렸어도 풍랑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곳에서 10여일을 체류한 사신일행은 정월10일 일지도(一枝岛)에 들렸다가 대마도로 돌아왔다.
부관 평이지는 연회를 베풀고 조선사신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신일행이 대마도를 떠날 때 평이지는 사신들과 수행인원들에게 금비녀를 하나씩 선사하였다. 
 (사신의 임무는 완성하지 못하고 개인의 배를 채우다니, 이런 선물은 절대로 받을수 없다.)
 김성일은 대마도를 떠날 때 받은 선물을 몽땅 섬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오직 석창려( 石菖蒲)와 종려(棕榈 )나무 화분을 몇개만 가지고왔다. 조선국에 그런 나무가 없었기때문이였다.
    사신일행을 실은 룡선은 현해탄을 건너서 2월초에 부산 동래항에 무사히 도착했는데 사행에 왕복 8개월이나 걸렸던것이다.
      일본땅에 들어서면서부터 왜놈들에게 겁을 집어먹고 오직 굴종만을 일삼던  황윤길은 동래관에 들어가자마자 조정에 계를 써올렸다. 그는 일본국에서 당장 대량의 군사를 발동하여 조선으로 쳐들어올듯하다고 불어대면서 그것으로 자신이 일본에서 받은 치욕을 감추어보려고 시도하였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부사 김성일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해변을 떠나자부터 주위를 살펴보니 고을마다 성벽을 쌓느라 한창이였다. 추운 겨울에 누더기옷을 걸치고 무거운 돌을 메여나르는 민부들의 처참한 모양은 차마 눈을 뜨고 두번 다시 볼수 없었다. 피골이 상접한 민부들이 돌을 메여나르다가 걸려 넘어지기만 하면 감독은 벼락같이 호령을 치며 채찍질하기가 일쑤였다. 일하다가 상한 사람들은 길가에 시체같이 쓰러져있었건만 어느 누구하나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고을밖을 나오면서 김성일은 벌판을 돌아보았다. 논두렁자리는 보였지만 벼끌태기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지난해에 곡식을 심지 않은것 같았다. 농민들이 농사를 짖지 못하고서야 나라창고에 식량이 있을수 있겠는가? 적의 침입을 막겠다고 농민들을 모두다 성쌓는데 몰아갔으니 기아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아무리 성을 쌓아놓은들 적들이 쳐들어오면 지켜낼수 있겠는가? 국록을 먹는 수천수만의 대신, 관리들이 백성들의 이 피눈물나는 고통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왜 아무런 감촉도 느끼지 못하는것일가? 김성일은 이 모든 불행에 자기의 책임도 한몫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책의 한숨을 쉬였다.
상경하는 사신들의 행차는 산간지대에 들어서서 북으로 북으로 내달렸다. 안동이 멀지 않았다. 백설을 떠인 아기산이 멀리 내다보였다. 그리운 고향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학봉 김성일의 눈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숙모님과 사랑하는 안해와 자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아물거린다. 총망히 사행길에 나서느라 이야기 한번 마음껏 나눠보지 못한 그들이 한없이 그리웠다. 
 행차가 고향마을에 들어섰다. 아들, 며느리며 손자, 손녀 그리고 고락을 함께 하던 고향마을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행차를 맞아 우루루 달려왔다. 김성일의 행차가 고향집앞에 이르렀다. 일흔고개를 넘은 숙모님께서 죽장을 짚고 사랑하는 조카를 기다리고있었다.
     행차가 고향집앞에 와서 멈춰서자 김성일은 차에서 내려 먼저 숙모님한테 절을 올렸다.
     <<아버지, 어서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맏아들이 김성일에게 절을 올리고나서 그의 팔소매를 지그시 잡아당겼다.
     <<나는 사신의 임무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는데 어이 우리 집안으로 들어갈수 있겠느냐? 고향집에 왔으니 고향의 물맛이나 보고가야겠구나..>>
    시아버지의 말씀이 떨어지기 바쁘게 맏며느리가 공기에 찬물 한그릇을 정히 담아가지고 와서 공손히 올렸다.
    물을 쭉 들이키고난 김성일은 숙모님께 절을 올리고나서 안해와 자식들을 돌아보며 잘있으라고 분부하고나서 다시 차우에 올랐다...
    며칠을 닫는 말에 채찍질을 하여 서울로 올라온 사신들은 궁궐안으로 들어가서 선조왕을 만났다.
    <<지금 일본국의 정세는 어떻던고?>>
    국서를 받고난 선조왕의 물음에 황윤길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전하, 신이 보건대 오래지 않아 병화가 있을줄로 아나이다.>>
    황윤길은 일본의 형세를 무시무시하게  그려놓느라  장황설을 늘여놓았다.
    김성일의 머리에도 일본국에서 조만간에 전쟁을 발동하여 조선으로 쳐들어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 일본에서 오래잖아 쳐들어온다는 말이 퍼지면 조정안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것이 아닌가? 인심이 모래알같이 흩어진 이 어지러운 판국에 전쟁발생설이 퍼지고나면 백성들이 어이 안심하고 살아갈수 있단 말인가? 아직 일본에서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당장 쳐들어올것이란  확실한 근거도 없는데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미리 퍼뜨리는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다. 지금 황윤길이 저렇게 말하는것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본사람들앞에서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나라의 존엄을 여지없이 손상시킨 죄과를 덮어감추기 위한 수작임이 분명하다.) 
김성일은 들끓는 민심을 단 얼마라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황윤길의 보고를 부정하고싶었다.
    <<경의 생각도 역시 그러한가?>>
    선조왕의 눈길이 학봉 김성일에게로 돌려졌다.
    <<전하, 신이 보건대는 아직 사태가 그 정도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엄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나이다.>>
     김성일은 자신의 대답이 좀 과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대답하는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대들이 보건대 일본 관백의 상(相貌)는 어떻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얼핏 보아도 두눈에 불이 펄펄 일고있는데 담량이 상당히  큰것 같소이다.>>
     임금의 물음에 황윤길이 이렇게 대답하자 학봉 김성일은 아니꼬운 생각이 들어서  그의 대답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대답을 하였다.
     <<신이 일본 관백이란 놈의 상을 얼킷 보니 그놈의 눈은 마치 쥐눈깔 같고 체통 또한 왜소하여 대장부의 기상이란 꼬물만큼도 보이지 않았으니 별로 두려울것이 없다고 생각되옵나이다.>>
    사신으로 일본에 갔던 두 신하의 말이 서로 물불같이 판이하니 선조왕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였고 문무백관들도 모두 제나름으로 자기의 주장을 내놓았다.
     대궐을 나오면서 서애 류성룡이 김성일을 외딴곳에 불러서 가만히 물었다.
     <<공의 말과 황윤길의 말이 완전히 판이한데 만약 병화(兵祸)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겠소?>>
     <<낸들 어찌 왜적이 조만간에 반드시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장담할수 있겠소만 황상사의 말이 너무나도 과도해서 분위기를 눅잦히느라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소.>>
    이때 백사 리항복(白沙 李恒福:1555--1618)이 김성일의 곁에 다가와서 일본의 국세가 어던가고  물었다. 김성일은 전쟁을 도발하려고 망녕되게 날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남방을 방어함에 있어서 민심을 소동시켜 적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방선이 먼저 깨여질것만 같아서 나는 부득불 그렇게 대답했던것이요.>>
 한개 부사의 신분으로 출국하여 정사의 비굴한 행위와 날카롭게 맞서 싸우고 나라의 존엄을 지킨 충신이였건만 일시적 과격한 말 한마디로 하여 그는 력사에서 오래동안 억울하게도 오점을 찍히우고말았다. 일년후에 왜구가 조선으로 대거 침습해왔으니 결국 황윤길은 출국하여 일본의 국정을 실사구시로 반영한것으로 되였고 김성일은 동인의 립장에 서서 서인을 공격하기 위해 거짓보고를 한것으로 인정되고말았다. 김성일의 말로 인해 조정에서는 국방을 강화하지 못한것으로 되였으니 그의 죄는 이만저만이 아닌것으로 도장찍혔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몇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선조왕은 학봉선생의 주장이 매우 정확했음을 시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임진년 7월 22일 선조왕이 의주로 몽진가서 내린  <<경상도 사민들에게 아뢰는글>>은 그점을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즉위한지 25년이 되였지만 인덕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 혜택이 아래로 처지지 않았고 지혜가 만물을 살피지 못하여 정치에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본심만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끼는것을 념원하였다. 다만 근년에야 정치에 폐단이 많고 군정이 해이하여진것을 알았다. 성벽은 높고 못은 깊으며 병장기가 예리하여 적의 침략을 막을수 있다고 생각하고 중외에 선양하고 감독을 엄하게 하여왔다... 
그러나 성벽이 높아갈수록 국력은 날로 약화되고 못이 깊어갈수록 백성들의 원망은 날로 깊어져서 이같이 쉽게 성벽이 허물어질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더군다나 궁문은 안단속이 철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령세한 리권에 롱간되고 형벌과 옥사가 공평하지 못하여 화기(和气)를 해쳤고 또 왕자가 산과 못가운데 좋은곳을 골라 차지함으로써 령세민들이 생업을 잃고 굶주림에 신음하는 소리가 온 사방에 퍼졌으니 백성들이 나를 원쑤로 생각한다해도 어찌 변명을 할 말이 있겠는가? 
소관(所管)관원에게 임명하여 모두 혁파(革破)하여 돌리도록 하였다. 내 어찌 이와 같은 일을 다 알가마는 몰랐다는것 역시 나의 허물이거니 생각하고 후회한들 무엇하랴. 차라리 희생이 되여 천지신명(天地神明)과 종묘사직(宗庙社稷)의 령전(灵前)에 사죄드리고싶다. 너희들은 나로 하여금 버릇을 고쳐 유신(维新)을 도모할수 있게 하라... 날뛰는 왜적들은 해를 쏘아 떨어뜨릴 흉계를 품고서 혹은 나에게 반역을 강요하기도 했고 또 나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강요하기도 하였다. 내가 대의를 지켜 놈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더니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무리들은 나의 큰 덕을 잊고 작은 원한에 분풀이를 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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