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이 항서(降书)받고 조선에 돌아온 후
인피(人皮) 삼백장(三百张)을 년년(年年)이 조공(朝贡)하니
인종(人种)이 점점(渐渐) 줄어 매년(每年)에 주사백근(朱砂百斤)
구리쇠 삼천근(三千斤)씩 대신으로 조공하니
국페(国币)1)가 진갈(尽渴)이라 왜왕(倭王) 다시 사신 보내
선조왕께 주달(奏达)하되 매년 삼백명씩
수자리2) 사오리다. 선조대왕 인후(仁厚)하야
특별히 허락하니 매년에 삼백명씩
동래관(东来舘)에 들어와서 수자리 사는것이
양호우환(养虎牛患) 되였구나.이때는 어느때뇨?
무신(戊申)년 이월에 선조대왕 승하하니
양주땅 이십리에 목릉(穆陵)3)이라 이름짓고
왕비릉도 동원이라 광해주(光海主)4) 시위(弑位)5)하니
부인은 문화유씨(文化柳氏)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로다.
방약무인(旁诺无人) 행(行)하다가 여의중(如意中)에 졸(卒)하니
두 내외(内外) 묘소(墓所)가 양주땅에 있다더라.
원종대왕(元宗大王)6) 추존(追尊)하니 그 왕비 뉘시든고
능주구씨凌州具氏) 부인이오 부원군은 사맹(思孟)이라
김포땅 사십리에 장릉(章陵)7)이라 이름짓고
왕비릉도 동원이라
기해(己亥)년 삼월일에 인조(仁祖)8)대왕 반정(反政)하니
그 왕비 뉘시든고
청주한씨(清州韩氏) 부인이오 부원군은 준겸(浚谦)이라
둘째왕비 뉘시든고 양주조씨(扬州赵氏) 부인이오
부원군은 창원(昌远)이라 십사년간 무사(无事)타가
병자호란(丙子胡乱)9) 일어났네. 야망 많은 호천자(胡天子)가
십만군사(十万军士) 거나리고 조선항복 받으려고
배를 타고 나올적에 송파지위(松坡之威) 와산지호(卧山之虎)
그 기세(气势) 대단하다. 호천자(胡天子) 돌아갈 때
왕자(王子) 둘을 잡아갔네. 맏이는 소현세자(昭贤世子)10)
둘째는 봉림대군(凤林大君)11) 두 형제를 앞세우고
삼학사(三学士)12)를 잡아다가 저희 나라 돌아갔네
삼학사 죽일적에 기름가마 끓였구나
삼학사의 거동보소 기름가마 들어가며
추상(秋霜)같이 호령(号令)한다. “금수(禽兽)같은 호천자(胡天子)야
우리 말 들어봐라 요순우탕 문무주공(尧舜禺汤 文武周公)
사천년학문(四千年学问)을랑 일조(一朝)에 다 버리고
칼부림 너희 풍속(风俗) 삼천리(三千里)에 퍼뜨리며
무엇이 부족하야 인의레지(仁义礼智) 우리 조선
비감생시 항복받나? 일월(日月)이 소연(昭然)커늘
짐승같은 이놈들아 어서 바삐 죽여다오.”
호천자 대노(大怒)하야 셋을 함께 죽인 뒤에
소현세자 불러놓고 개연(慨然)히 하는 말이
“너의 소원 무엇이냐?”
소현세자 하는 말이 “페하(陛下)앞에 놓인 벼루
가지는게 소원이오.” 호천자 허락하니
그 벼루 어떻던고 조화로운 용연(龙砚)이라
글자를 쓰려하면 저절로 물을 토(吐)해
많도적도 아니하니 보배(宝贝)는 보배로다.
봉림대군 불러들여 소원을 물었더니
고국에 돌아가서 부모처자(父母妻子) 만나는게
소원이라 대답하여 호천자 허락했네
봉림대군 하신 말삼 “삼학사의 혼백(魂魄)을
대우(待遇)하야 모시고서 귀국함이 소원이오.”
호천자 웃으면서 흔연(欣然)히 하는 말이
“그 생각 기특(奇特)하고 죽은 신하 원통하다
송죽(松竹)같이 굳은 절개 일월(日月)같이 빛난 충절(忠节)
고국고혼(故国孤魂) 끼쳤으니 조선인물(朝鲜人物) 두렵도다.
한사람도 두지 말고 개개인명 다가져라.”
고국(故国)을 돌아오니 인조대왕 거동보소
세자가진 벼루보고 분기(愤气)가 대발(大发)하여
”이것이 무엇이냐?” 벼루를 들어치니
이마에 바로맞아 참혹히 죽었구나.
부자간 중한 천륜 어이 그리 할짓인가?
인조대왕 하신 말씀 “개같은 놈의 물건
벼루를 얻어오니 제가 어이 사람이냐?”
불공대천 원쑤라고 대보단에 기록한다.
인조대왕 반정할 제 반정공신 원두표(元斗杓)13)는
쇠도끼 손에 들고 남대문(南大门) 깨뜨리고 소원성취(所愿成就) 하얐으니
그런이의 소행(所行)은 도끼정성 이아닌가?
서문(西门)밖 이완(李浣)14)이는 옥새를 훔쳐다가
<옥새판서(玉玺判书)> 이게로다. 골육상쟁 (骨肉象征)이 임금이
벼루가진 그 혐의로 세자(世子)를 죽였으니
후복(后福)이 장원(长远)할가 한양사직(汉阳社稷) 살펴보면
국(国)쪽으로 내려오며 부자(父子)간 불목(不睦)하고
형제간 불화(不和)하고 숙질(叔侄)간 불화한 중
재변(灾变)도 많이 나니 예의지국(礼仪之国) 수치로다.
슬프다 국운이여 국상이 또 나신다
을축(乙丑)년 오월일에 인조대왕 승하하니
춘추가 오십이라 파주땅 구십리에
장릉(长陵)15)이라 이름짓고 왕비릉도 동원이오
양주땅 이십리에 계비릉(继妃陵)은 휘릉(辉陵)16)이오
효종(孝宗대왕17)즉위하니 그 왕비 뉘시든고
덕수장씨(德州张氏)부인이오 부원군은 장유(张维)로다
즉위하신 며칠만에 대보단(大报坛)18)을 펼쳐놓고
병자호란(丙子胡乱) 생각하니 지난 일이 어제같다
분심(愤心)이 울적(郁积)하야 이완을 불러들여
복수(复仇)하기 의논할제 시 한수 지었으니
그 내용 들어보소 “원하노니 강한 군사
이십만병(二十万兵) 거나리고 구원성과 바람진을
물결같이 짓부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옥경성(玉京城)에 돌아오리” 이완의 거동보소
지모장사(智谋壮士) 가려내고 정병(精兵)을 조련(操练)하고
장중(帐中)에 검단(剑断)한다. “중원을 들어가면
호왕(胡王)머리 어디 갈가 병자년(丙子年)에 지은 원쑤
신등(臣等)이 갚으리다. 삼학사 죽은 혼백(魂魄)
아무려면 무심(无心)하랴 인신(人神)이 상합(相合)하면
무슨 일을 못하리까 선대왕(先大王) 욕보심과
소현세자 원통함과 삼학사의 억울함과
전하의 분하심을 일조에 설치(雪耻)하면
국태민안(国泰民安) 하오리다” 효종대왕 대희(大喜)하야
“놀랍도다 이완이여 국치(国耻)를 씻어보자”
효종대왕 하신 일은 역적(逆贼)을 죽이잖고
옥계하(玉阶下)에 불러들여 그 뜻을 시험(试验)한후
“너희 얼굴 살펴보니 역적은 꾸몄으나
너희 원망 못하리라” 한사람도 죽이잖고
녹(禄)으로 길렀는데 효종대왕 마음속에
역적되는 그놈들은 범인(凡人)과 다른지라
북변(北变)이 있을 때에 뽑아서 쓰려 했네
그때부터 조선땅에 역적이 자꾸 난다.
효종대왕 거동보소 십여년이 지나도록
북벌만 위주(为主)하고 다른 공로(功劳) 별로 없네
을해(乙亥)년 오월사일 효종대왕 승하하니
여주땅 백육십리 영릉(宁陵)19)이라 이름하고
왕비릉도 동원이라
현종(显宗)20) 즉위하니 그 왕비 뉘시든고
청풍김씨 부인이오
부원군은 뉘시든고 김우명(金祐明)이 분명하다
허약한 현종대왕 즉위는 하였으나
정치는 둘째하고 병치료에 진력(尽力)했네
현종대왕 효성보소 효종대왕 국상후에
용포를 아니 입고 상복만 입었으니
대사간의(大司谏议) 조운이 복지(伏地)하여 이르는 말
“자고급금 제왕에겐 옥체(玉体)에 상복(丧服) 없소
용포를 입으셔야 국태민안(国泰民安) 하오리다”
현종대왕 하신 말씀 “인군(人君)은 부모 없나
요순우탕 문무주공 용포를 벗었으니
이런 인군 중재(众在) 로다.” 슬프다 세월이여
십오년 국왕으로 편하실 때 그리 없고
의약(医药)을 위주(为主)타가 경인(庚寅)년 팔월보름
현종대왕 승하하니 양주땅 삼십리에
숭릉(崇陵)21)이라 이름하고 왕비릉도 동원이라
주1) 국폐(国币):나라의 돈
2) 수자리:예전에, 국경을 지키는 일이나 그 일을 하는 병사를 이르던 말
3)목릉(穆陵)조선 선조와 그의 비인 의인 왕후 및 계비인 인목 왕후의 무덤
4)광해주(光海主):일명 광해군 조선조 제15대왕(1575~1641,) 재위 1608~1623
5)시위(弑位):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함
6)원종(元宗) : 이름은 부(琈). 본관은 전주(全州). 인조의 아버지이다. 선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인빈 김씨(仁嬪金氏)이다.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을 맞아 인조 및 능원대군(綾原大君)·능창대군(綾昌大君)을 낳았다. 인조가 즉위한 뒤 왕으로 추존하였음.
7) 장릉(章陵):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조선 16대 인조(1623-1649)의..생부 원종의릉.
8)인조(仁祖)조선 제16대왕, 재위 1623∼164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종(倧)이다. 자는 화백(和伯)이다. 호는 송창(松窓)이다. 선조의 손자로, 정원군(定遠君 : 추존왕 元宗)의 맏아들이다.
9)병자호란(丙子胡乱):병자호란은 1636년 병자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조선과 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청의 홍타이지가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가서 항복한 치욕의 란.
10)소현세자(昭显世子):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 2월 5일(음력 1월 4일) ~ 1645년 5월 21일(음력 4월 26일))는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적장자이다. 성명은 이왕(李汪)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종(봉림대군)의 동모형이다.
11)봉림대군(凤林大君):소현세자의 동생 후일의 효종.
12) 삼학사(三学士):조선 시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중국 청나라에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끝내 살해 당한 세 사람의 학사 홍익한(洪翼漢)[1586~1637], 윤집(尹集)[1606~1637], 오달제(吳達濟)[1609~1637]를 말한다
13)원두표(元斗杓): 원두표(1593년 ~ 1664년)는 조선후기의 문신, 공신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였으며 서인 중진으로 원당의 당수였다.
14)이완(李浣):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아버지는 인조반정 공신인 수일(守一)이며, 어머니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귀년(貴年)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 효종 때 북벌계획에 깊이 관여하면서 군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15) 장릉(长陵):조선 제16대왕 인조의 장릉(長陵)은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하고 있다.
16)휘릉(辉陵):万花筒今上제16대왕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의 릉호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에 있음.
17) 효종(孝宗):조선 제17대왕, 재위 1649∼165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호(淏)이다. 자는 정연(靜淵)이다. 호는 죽오(竹梧)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8) 대보단:명나라가 망하고 병자호란으로 남한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군신이 절치부심하면서 대명절의(大明節義)를 부르짖던 무렵 청나라에 불복한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1704년(숙종 30)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발의로 만들어졌다.
19)영릉(宁陵): 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에 있는 효종의 릉.
20)현종(显宗):조선 제18대왕으로서 재위 1659∼1674. 이름은 연(棩). 자는 경직(景直). 효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21)숭릉(崇陵): 제18대 현종(1641~1674)과 명성왕후 김 씨(1642~1683)의 능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1641년 봉림대군(효종)이 선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경기 구리시 인창동 산 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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