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4년 2월,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가 돌아와 복명한 학봉 김성일은 특승통정대부부호군(特升通政大夫副护军) 에 성균관대사성(成均馆大司成 성균관의 최고직무) 겸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调)에 홍문관부제학(弘文馆副提学)에 또 부승지 첨지중추부사(副承旨 佥知中枢府事) 등 여러가지 직무를 맡았다.
학봉선생이 대사성이 되여 성균관에 돌아와보니 성균관의 형편은 어지럽기 말이 아니였다. 동인이요 서인이요 하는 붕당싸움에 공부하는 선비들도 말려들어 옥신각신하는바람에 랑랑하던 성균관에는 적막이 깃들었고 선비들은 공부는 뒤로하고 심심소일하며 허무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학봉선생이 알아보니 그것은 선조 22년에 있은 기축옥사(己丑狱事)를 겪은 뒤부터 더해졌던것이였다.
기축옥사라는것은 대학자인 수우당(守愚堂)최영경(崔永庆 1529--1590이 무함을 받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 일이였다. 최영경은 대학자인 남명(南溟) 조식(曹植)의 문인이였는데 학문이 뛰여나서 조야에 명망이 높았었다. 그는 개혁파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참봉(参奉) 주부(主簿), 도사(都事) 등 관직은 임명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집에 돌아와서 <<당론(党论)>>이란 저서를 쓰고있었다. 그 뒤 조정에서의 거듭되는 부름에 못이겨 교정청랑관(校正厅郎管)이란 벼슬을 받고 경서를 풀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선조 22년에 정여립(郑汝立)이 일으킨 란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었다. 정여립은 본래 부산 동래사람이였는데 성질이 사납고 잔인했으나 통솔력이 있는데다가 두뇌가 명석하여 경서(经书)와 백가제서(百家诸书)에 능통하였다. 률곡 리이와 성혼(成浑)의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면서 스승의 총애를 받아왔으며 선조16(1583)년에는 례조좌랑(礼朝左郎)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수찬(修赞)벼슬에 올랐으나 미구에 사직하고말았다. 그는 본래 당파싸움때 서인의 편에 서있었댔는데 선조 18년에 수찬으로 된 후에는 당시 조정에서 세력이 더 컷던 동인들한테 알랑거리면서 이미 세상을 뜬 률곡선생의 뜻을 배반하는 일들을 수다히 저질렀고 박순, 성혼 등 학자들을 마구 비판하기 시작하였다가 그만 선조왕의 불만을 자아냈었다.
임금의 총애를 잃었으니 벼슬길이 막혔다고 생각한 정여립은 불만을 잔뜩 품고 조정에 불만을 품은 선비들을 찾아 사귀다가 성망이 점점 높아지자 국권을 찬탈하기 위해 안깐힘을 썼었다. 그는 진안, 죽도 등지로 가서 서실(书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였는데 무릇 조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면 그들의 직위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한데 모아 보름에 한번씩 무술을 배워주었다.
선조 20년에 전주부윤(全州府尹)남언경(南彦经)의 요청을 받고 변경에 침입한 왜놈침략자를 물리친 정여립은 그 기회에 자기의 세력을 넓혔었다. 그는 <<대동계>>라는 비밀조직을 전국 각지로 확대하고 기인(奇人),모사(谋士) 등을 모아놓고 <<정감록(郑监录)》이란 책을 리용하여
<<오래잖아 리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성하게 된다.>>라는 요언을 퍼뜨려서 전국 유생들과 백성들의 민심을 혼란시켰었다.
<<정감록>>이란 조선조 중엽이후 민간에 성행하게 된 , 나라의 운명, 생민의 존망에 관한것을 예언한 미신적인 책이였다. 이 책은 조선조의 선조(先祖)리심(李沁)아란 사람이 장래에 대흥자(大兴者)가 될 정씨의 조상 정감(郑监)이란 사람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적었다는 책의 하나였다.
선조 22년에 <<정감록>>에 관한 소문이 퍼져서 조정에까지 올라가자 비밀이 루설될가봐 두려워난 정여립은 리조정권을 뒤집어엎고 왕위를 찬탈할 음험한 계획을 수하의 사람들과 토의하였다.
정여립은 작전부서(作战部署)를 면밀히 짰는데 겨울에 한강의 얼음이 언 기회를 리용하여 황해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로 쳐들어가서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군사권을 탈취하려고 획책했었다.
그런데 바람새지 않는 담벽이 없다고 비밀리에 획책한 일이 그만 안악군수 리축의 귀에 들어가고말았다. 리축은 재령군수 박충간과 신천군수 한웅인 등 사람들과 토의 한 뒤 급히 사람을 띄워서 조정에 이 비상사태를 보고했었다.
사태가 한쪽으로 기울어진것을 알게 된 정여립은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정옥남과 함께 진안, 죽도 등지로 도망쳐다니면서 숨어살았다. 그러나 뛰따라 온 관군의 물샐틈없는 포위망에 갇힌 그는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고 갖은 애를 다 쓰다가 탈출할 가망이 도저히 보이지 않자 그만 칼을 뽑아 자결하고말았었다.
그런데 정여립의 란에 길삼봉(吉三峰)이란 사람이 들어있었다. 길삼봉은 본래 천안의 한 비천한 종이였는데 불한당이 되여 민간에 많은 해를 끼쳤었다. 조정에서 체포령이 내렸지만 요리조리 용캐도 몸을 피해 붙잡히지 않은 그는 정여립의 란이 일어나자 <<대동계>>에 가담한 뒤 정여립의 모사로 되여 신병(神兵)을 이끌고 지리산과 계롱산(鸡笼山)에 웅거하고있었는데 그 세력이 너무 커서 조정에서는 그를 어쩌지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조정안에서 최영경을 시기하던 자들가운데서 어떤놈이
<<길삼봉의 배후조종자는 바로 최영경이다>> 라는 닉명상소문을 조정에 올려보냈었다.
길삼봉을 잡지 못해 혈안이 되였던 선조왕은 사실의 정확여부도 조사해보지 않고 대뜸 최영경을 잡아다 가두고 문초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기축옥사(己丑狱事)였다.
기축옥사가 있은 뒤 조정에서는 개혁파인 신하들을 몰아내는 요사한 바람이 일었었다. 사림의 기운이 막혀지고 당파싸움이 날로 더해지니 조정안은 물론이요 인재를 양성하는 장소인 성균관안의 선비들사이에서도 의론이 두갈래로 갈라져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옥신각신하였다. 당시 대사성으로 있던 사람도 학생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여 학생들을 자기의 당파로 끌어가려고 애를 쓰고있었다.
성균관의 기풍을 바로 잡는것은 나라의 운명과 관련되는 중대한 일이라는것을 절실히 느낀 선조왕은 당파싸움을 반대하고 바른 말을 잘하는 김성일을 성균관의 최고책임자인 대사성으로 임명했었다.
<<학봉 김성일이 성균관의 대사성으로 되였다!>>
놀라운 소식은 조정안은 물론이요 당쟁에 끼여들어 옥신각신하던 학생들속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학봉선생께서 대사성으로 되였으니 성균관도 이젠 해볕을 보게 되였군.>>
김성일을 우러르는 학생들이 이렇게 말하며 기뻐할 때 그에 대해 의심을 품은 학생들은 실망에 잠겨 말했다.
<<보나마나 학봉선생은 남인을 지지하고 서인을 동정하던 우리를 타격할거야.>>
그러나 성균관의 학생들의 추측은 조금도 들어맞지 않았다. 대사성에 취임한 학봉 김성일은 취임하자마자 성균관의 선비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나서 자기를 환영하던 학생이든 자기를 반대하던 학생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이 당쟁의 소용돌이속에 끼여들지 못하도록 준절히 타일렀다.
<<...배우는 자는 오직 글을 읽는것만이 본분이다. 사물의 리치를 연구하고 도를 의론하자면 오로지 공부하는데만 힘을 기울여야 한다. 조정의 시비득실에는 선비들이 참여할 필요가 없다. 하물며 륜리를 밝게하는 신성한 명륜당(明伦堂)은 사사로운 싸움을 하는곳이 아닌만큼 어진 사람이 되려는 선비들이 명륜당을 떠나서야 될 일인가? 공부하는 본분을 돌보지 않고 날마다 놀기나 하고 한담이나 지꺼리는것으로 금싸래기같은 세월을 허송한다면 몸과 마음에 아무런 리익도 없을것이고 도리여 군자로 되는 길에서 버림을 받게 될것이다. 나라에서 선비를 배양하는 목적이 어찌 이런데 있겠느냐...>>
나라에 단 하나라도 더 많은 인재를 배양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충만된 학봉 김성일은 학생들의 과거를 묻지 않고 어떤 학생이든 추호의 차별도 없이 지성으로 가르치였다. 그는 조정에서 맡은 많은 일들을 서둘러 완수하고서는 짬을 타 성균관에 들려서 선비들에게 친히 <<심경( 心经)>>, <<근사록(近思录 )>> 등 책의 내용을 전수하면서 학생들을 성현이 되는 길로 인도하였다.
김성일의 피타는 노력으로 오래잖아 성균관의 면모는 점차 일신하였다. 배움의 길을 버리고 귀향하였던 많은 선비들이 다시 성균관으로 찾아들었고 성균관에는 배움을 첫자리에 놓는 새로운 기풍이 생겨 아침이나 저녁이나 글읽는 소리가 그칠새 없이 울려퍼졌다.
학봉 김성일은 수우당 최영경이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가 불행하게 말라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분을 금할수 없었다.
(조정에 3정승 6판서가 있고 문무백관이 있는데 이렇게도 억울한 안건을 바로잡아줄 사람이 하나도 없단말인가? 바른 말을 하다가 간신들에 의해 역적으로 몰릴가봐 숨을 죽이고 제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려하면서 남이 당한 억울한 일은 먼산의 불보듯 수수방관한다면 관리로서 국록을 타먹기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김성일은 자신이 바른말을 하다가 최영경처럼 죄인으로 몰리여 옥중원혼(狱中冤魂)이 되더라도 충신의 지조만은 굽힐수 없다고 생각하고 임금께 상소를 올릴수 있는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
어느날 선조왕이 경연을 베풀 때였다.유관 학자가 진강을 마치자 선조왕이 경연에 참석한 과원들을 보고 물었다.
<<경들은 이 기회에 과인에게 아뢸 말이 없는고?>>
<<전하, 소신은 주상님께 긴히 아뢸 말이 있소이다. >>
김성일이 선조왕의 앞에 다가가서 부복하고 이렇게 서두를 떼자 선조왕과 경연에 참석했던 신하들의 의아한 눈길은 일제히 김성일에게로 향해졌다.
<<그래 무슨 요긴한 청이 있는고? 일어나서 이야기하오.>>
<<전하, 소신이 알아본데 의하면 <기축옥사>는 간신들이 꾸며낸 억울한 안건이오니 상감님께서 명찰하옵소서.>>
<<그건 도대체 어찐 영문인고?>>
선조왕은 자기가 친히 처리한 안건이 억울한 안건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소신이 알건대 최영경과 정여립은 하등의 관계도 없나이다. 정여립이 벼슬을 사퇴한것은 란을 일으키기 위한데 있었고 최영경이 당시 조정의 임명을 사절한것은 그가 학문을 닦기 위해서나이다. 그리고 최영경이 길삼봉의 막후조종자라는 말은 추호의 근거도 없는 요언이오며 리치적으로 추호도 맞지 않나이다. 최영경은 대대로 한성에서 살아온 량반가문의 출신이옵고 길삼봉이란 역적놈은 동래사람으로서 노비출신입니다. 출생지역이나 신분에 천양지차인 량반과 노비가 어찌 서로 알수 있고 또 반역을 도모할 뜻을 함께 의논할수 있었겠나이까?...>>
선조왕은 청산류수같이 흘러나오는 김성일의 도리에 맞는 말에서 자신의 실책을 절실히 느꼈으나 김성일이 최영경과의 친분으로 인해 일부러 최영경을 비호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 경은 혹시 최영경과 사사로운 친분관계가 있어서 그를 신구(伸救)하는것이 아닌고?>>
<< 천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신은 최영경이란 사람의 얼굴조차 한번 본적도 없사옵니다. 신은 평소에 최영경이 의롭고 착한 일을 행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었고 또 그분이 절개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뛰여난 인재임을 알고있을뿐입니다. 그분은 평소에 의론하는것이 당당하여 기피하는 일이 없었기에 간사한 무리들의 원쑤로 되였나이다. 지금 간신배들이 때를 노리다가 그분을 얽매여가지고 함정에 몰아넣고 역적과 한무리로 취급하게 되였으니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만고에 어디 있겠나이까?>>
선조왕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면서 <<기축옥사>>에 대해 김성일이 보는 견해를 다 말하도록 하고 의심스러운데는 따지고 물었다.
평소에 학봉과 가까이 지내던 신하들은 이번에 김성일이 바른말을 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것 같아 두손에 땀을 쥐여짰다. 그러나 김성일은 그런 눈치는 추호도 못느낀양 임금이 묻는 말에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경의 말을 듣고보니 최영경은 정말 억울하게 죽었군. 비록 늦었지만 형조(刑曹: 형법을 다스리는 기관)에서는 최영경의 죄를 풀어주고 그 사람의 원래의 관작을 회복해주오.>>
선조왕이 <<기축옥사>>를 바로잡자 보수파 신하들은 마음속으로 고야(苦也)를 불렀고 개혁파 신하들은 쾌재(快哉)를 불렀다. 조정의 다수 신하들은 김성일의 담략에 탄복을 금하지 못하면서 그를 더욱 존경하였고 그를 은근히 두려워도 하면서
<<이제야 세상일이 바로 되어가는군>>하고 말하며 즐거워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한해전부터 조정에서는 변경의 고을마다 성벽을 쌓고 성벽밑에 함정을 파는데 로동력을 수없이 동원하였다. 선조왕과 조정의 대신들은 오직 성벽을 높이 쌓고 함정만 깊이 판다면 아무리 강한 적들이라도 성안으로 쳐들어올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것이였다. 그리하여 들일을 할만한 사나이들은 거의 전부가 민부로 끌려가게 되였다. 농촌에는 농사지을만한 일군이 없게 되니 농토의 태반은 페답이 되였고 백성들의 원성은 이르는곳마다에서 쏟아져나왔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국토와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친히 목격한 김성일은 이런 비상사태가 그냥 지속되게 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느꼈다. <<민유방본(民唯邦本)》이라는 관점을 주장하는 그는 몇몇 신하들과 의논한 뒤 <<성쌓는 일을 중지할데 관하여>>라는 탑자를 써서 선조왕에게 올렸다. 그 글중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지금 성을 쌓고 성밑에 마른 도랑을 파는 등 여러가지 일로 일군들을 징발(徴发)하고있는데 시기를 가리지 않고 다만 눈앞에 닥친 일만 처리하는것에서 만족을 삼고 농민들을 내몰아 단번에 큰일을 성사시키겠다고 닥달하니 봄에서 겨울까지 끝나는 날이 없게 되여 봄에 밭갈이를 못하고 여름에 김매기도 못하게 되였습니다. 밭갈이와 김매기를 하지 않고 가을에 수확을 어떻게 기대할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듣건데 변강고을의 밭은 올해에 개간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고 하니 그 요역(徭役)의 고통스러움은 어떠하겠습니까? 토목지역(土木之役)은 지금까지 몇해가 되였으니 도끼소리는 심산을 울리고 <어영차>소리는 고을안을 흔듭니다. 큰 나무도 귀신이 운반한것이 아니라 모두다 백성들의 힘으로 옮겨진것입니다.
요역의 대가는 하늘에서 내리우거나 땅에서 나오는것이 아니고 모두 아낙네들의 수공(手工)에서 나오는것입니다. 올해도 이렇게 하고 명년에도 이렇게 하면서 유한한 민력(民力)으로 끝날줄 모르는 역사(役事)를 치르게 되니 잔여한 백성들은 고생이 어떠하겠습니까? 여러 고을은 소조(萧条)해지고 촌락은 공허해져서 많은 집들은 호랑이, 이리의 소굴이 되고 전야는 가시나무숲으로 변하고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구중(九重)의 깊은 곳에 계시오니 당하(堂下)가 천리인지라 농가의 피페함이 이 지경에 이른줄을 어찌 아시겠습니까? 부역의 과중함과 조달(调达)의 수고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이 원망하여 화기(和气)를 손상시킨것은 이루 다 말할수 없습니다. 군정의 한가지 일을 말할진대 <정예함을 소중히 여기고 수효가 많은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것>은 옛날의 잘한 정치인것입니다. 지금 두려운것은 섬나라 오랑캐가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지고 조정과 엇서는것입니다. 민심을 잃고나면 금성철벽(金城铁壁)과 예리한 병갑(兵甲)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학봉선생의 글은 조리가 정연하였고 어디까지나 실사구시적인 태도였고 나라와 백성을 한없이 사랑하는 충정으로 끓어번졌다. 자칫하면 지고무상의 임금을 모독했다는 큰 죄를 덮어쓸 위험이 도사렸지만 오로지 나라와 인민만을 맘속에 새겨두고 단두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결연히 써올린 이 탑자는 조정안의 많은 신하들의 공허한 두뇌에 충격을 주었고 선조왕의 마음까지 움직여놓았다.
<<병조에서 료량하여 타당히 처사하라!>>
경연석상에서 선조왕이 이렇게 명을 내리자 병조에서는 전략상의 요충지만 틀어잡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곳에는 성을 쌓고 함정을 파는 일을 모두 정지하기로 하였다.
조정의 새로운 명이 내려 토목지역이 경감되자 기름가마같이 끓던 남방 각 고을의 백성들의 원성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고 부역에 끌려갔던 민부들도 한시름놓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일을 할 차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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