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진주성의 대승첩
8월 11일, 김성일은 조정에서 파견한 선전관을 만났다. 그는 선전관한테서 김성일을 경상좌도 감사로 임명한다는 임금의 교지를 받았다. 이 교지는 선조왕이 6월 1일에 내린것이였는데 왜적들에 의해 교통이 두절된데서 두달남짓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받게 되였던것이다.
<<지금 주상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5월초에 서울이 적들에게 강점당하고 6월중순에 평양성이 빼앗기는바람에 대왕께서는 서울을 떠나 개경에 들렸다가 지금은 의주에 피난해 와 계시고 왕세자(광해군)는 안협( 安峡)에 남아 있소이다.>>
김성일의 물음에 대답하고난 선전관은 그동안 조정의 정황에 대해 일일이 이야기해주었다. 김성일은 령남일대의 전투정황과 금후의 방비책을 론한 장계를 써서 선전관에게 주고나서 새 임지로 떠날 준비를 했다. 새 임지로 갑자기 떠나고나면 이곳의 지도력량이 약화되고 또 군민들의 사기도 내려갈것 같아 그는 관군과 의병장들을 모아놓고 방비책을 면밀히 검토하느라고 잠시도 편안히 앉아있을 사이가 없었다.
학봉선생이 조정의 명에 의해 경상우도를 떠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기둥같이 믿어오던 관군이며 의병들은 안타까와서 눈물을 흘리였다. 초계의 선비 리대기(李大期)는 학봉선생이 경상좌도로 부임되여 가는것을 말리는 글을 써왔고 섬천유생 박이문(朴而文)과 함양유생 정유명(郑惟明)등 선비들은 <<김성일을 경상우도에 남아있게 해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상소문을 써서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다. 상소문의 한토막은 다음과 같다.
<<... 오늘날의 대사는 의병이 해놓지 않은것이 없고 의병들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으킨것은 김성일의 공로이나이다.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김성일을 자애로운 어버이와 같이 여기고있으며 그를 장성같이 믿고있고 만번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나이다. 우리 우도는 령좌(岭左: 경상좌도)와 호남(湖南:전라도)사이에 있는데 왜적들이 밤낮으로 호남을 노리면서도 감히 쳐들어가지 못하게 된것은 우리의 초유사가 사민들의 마음을 얻어 사수한 보람이나이다. 만약 김성일이 없어서 방어가 엄밀하게 되지 못한다면 우도(右道:경상우도)의 여러 고을이 피비린내나는 땅으로 될것은 물론이고 호남의 50개 주도 보전할수 없게 되나이다. 오늘날 나라에서 믿고있는 곳은 오로지 전라도 한개 도요 전라도 하나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전하의 국사도 다되는것이 아니겠나이까? 오호라, 김성일이 가거나 남아있는것이 어이 령우(岭右: 경상우도)의 의병들의 승패에만 관련되리오...>>
김성일은 경상좌도(庆尚左道)로 질러가는 길이 적들에게 막혀 바로 질러가지 못하고 북쪽으로 우회하여 가게 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에서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기실 김성일을 환영하고 배웅하는 사람들의 눈물투성인 얼굴들을 보면 장례대오나 다름이 없었다.
<<초유사어르신, 어르신께서 령우(岭右)를 떠나시면 우리 우도(右道)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간단 말입니까? 좌도(左道)로 가시지 말고 여기 남아계십시오.>>
백성들은 김성일을 따라 가고 막아서며 이런 말을 거듭하였다. 그는 말등에서 내린 뒤 백성들에게 경의를 표하고나서 그들을 설복하였다.
<<경상좌도나 우도는 호남지방을 지키는데 있어서 서로 갈라놓을수 없는 한 지방입니다. 제가 좌도에 가있더라도 우도의 일을 수수방관하지는 않을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마음한뜻이 되여 적들과 목숨걸고 싸운다면 그까짓 왜적들은 두려울게 없습니다. 우리 다 같이 결사적으로 싸워서 우리의 삼천리 금수강산을 꼭 지켜냅시다.>>
코마루가 시큰해져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김성일은 배웅하는 군민들에게 연신 손을 젓고나서 말안장에 올라 앞으로 나아갔다.
9월 4일, 초계에서 락동강을 건너 밀림속에서 고난의 행차를 한 김성일은 현풍-령산- 밀양- 경산 등 지경을 거쳐 함양성안에 들어갔다. 함양에서 부근의 각 고을을 지킬 수령들을 임명하고 다시 길을 떠나 신녕에 이른 김성일은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을 다시 만났다. 선전관은 김성일에게 다시 경상우도감사(庆尚右道监司)로 임명한다는 국왕의 조서를 내주고나서 선조왕이 몽진하여 의주에 와서 쓴 <<경상도사민들에게 고하는 글>>을 내여주었으며 의주에서 쓴 선조왕의 시도 한수 보여주었다.
김성일이 선조왕이 쓴 시를 읽어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의주에서
리연
관산의 달빛아래 통곡을 하고
압록강 물바람에 마음 상했네.
조정의 신하들 이 난리 겪고서도
더러운 파벌싸움 계속하려나.
(义州蒙尘时作
李昖
痛哭关山月 伤心鸭水风。
朝臣今日后 尚可更西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선조왕의 글과 파벌싸움의 페단을 통탄한 선조왕의 시를 읽고난 학봉 김성일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선조왕이 좀더 일찍 깨달았더면 우리의 국토가 이 지경이 되였겠는가? 이제와서 그 누구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김성일은 경상좌도에서 벌어진 정황을 간단히 적어서 선전관에게 주고나서 그를 돌려보내였다.
해가 진 뒤 김성일은 공관뜨락에 나와 동켠하늘을 바라보았다. 둥그스럼한 달은 하늘에 두어발이나 떠올라있었다. 손꼽아 헤여보니 어느덧 음력 8월 12일이였다. 추석명절도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둥근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김성일의 눈앞에는 고향집에 계시는 학발이 된 숙모님과 사랑하는 처자식, 그리고 친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얼른거렸다. 나라일이 바빠 근 1년동안이나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리운 고향집이였다. 김성일의 머리속에는 림종때도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과 형님들의 산소에 제때에 찾아가서 성묘도 하지 못한것이 몹시 죄송스러웠다. 안동까지 거리가 이틀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그는 생전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고향에 잠간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밤중에 말을 몰아 고향집으로 떠나갔다.
고향집에 돌아와 친인들을 잠간 만나보고나서 선친의 묘지를 찾아가서 성묘를 마치고난 학봉 김성일은 다시 집에 들릴새도 없이 곧바로 남으로 말을 몰았다.
9월 14일 대구로 달려온 김성일은 대구 동화사(栋华寺)를 찾아갔다. 대구부사 박진(朴晋)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성일은 동화사에서 잠간 다리쉼을 한 뒤 박진을 앞세우고 대구성을 한바퀴 돌면서 대구성의 방비시설을 세심히 검사하였다. 저녁에 그는 동화사에서 박진과 같이 밤을 새워가면서 대구를 수비할 방안과 책략을 토의하였다.
김성일은 이튿날 대구성안의 관병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정체로운 연설을 하였으며 대구를 떠나기 직전에 그는 박진에게 관군측에서 의병들을 업신여기고 의병투쟁을 시기하거나 방해하는 행위가 절대 발생하지 않도록도록 해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였다.
9월 16일, 대구를 떠난 김성일은 팔개- 하빈(河濱)을 지나 개산강포(开山江浦---지금의 멍덕나루터)에서 락동강을 건너 경상우도땅으로 돌아왔다.
17일에 고령에 이른 김성일은 서쪽으로 이틀간 말을 달려 거창으로 돌아와 김수를 만났다. 조정의 임명장을 김수에게 보이고난 김성일은 김수한테서 감사의 병부를 인계받은 뒤 즉시 산음성안으로 달려갔다.
산음공관에서 김성일은 조종도, 리로와 박성(朴惺:1549—1606)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들을 만났다. 그들은 김성일이 경상좌도의 감사로 임명되여 산음을 떠나자 부패무능한 김수의 지휘를 받지 않으려고 심산속에 들어가 숨어있었었다. 그들은 산속에서 김성일이 다시 산음으로 돌아와서 경상우도의 감사로 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산을 내려왔던것이였다. 그들은 한자리에 둘러앉아 서로의 승리를 축하하고 금후의 투쟁방법을 토론하고 투지를 고무하였다.
이때 왜적들은 대량의 병력을 진주성함락에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나라의 곡창이자 북진의 관문인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광분하는 왜적들은 서해구의 한산도(闲山岛)에서 수군절도사 리순신에게 격파당하고 진주에서는 김성일, 김시민, 곽재우 등에게 격퇴당했으며 리치(梨峙)에서는 권률, 황진에 의해 참패를 당하여 왜적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근방의 초목까지 피비린내가 슴배이게 되였다.
왜적들은 전주까지 잠간 들어갔다가 또 조헌(赵宪 1544--1592), 처영( 处英--僧将 서산대사의 제자) 과의 치렬한 전투끝에 대패하여 전라도를 함락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왜적들은 전라도로 쳐들어가려면 오로지 진주성을 함락하지 않고는 결코 안된다는것을 새삼스레 깨닫고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몸부림치고있었다.
김성일이 경상좌도로 떠나간 때였다. 진주성의 방위가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지만 판관 김시민은 경상우도 감사 김수의
<<진양은 지켜낼수 없으니 버리고 평야에 나가 싸우는것만이 생로를 찾을수 있다. 지금 우지가 위급하니 어서 우지로 와서 김면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고는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에 자리잡고있는 김면의 휘하로 들어갔었다. 김시민은 사랑암(沙郎岩)에서 김면부대와 련합하여 적들과 싸웠다. 김면은 칼을 휘두르고 말을 달리면서 김시민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가에서 김공을 우대하는것은 오늘날을 위한것이요. 남자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퇴각해서는 안될 일이요.>>
김시민이 활을 쏘면서 적진에 돌입하여 왜적 몇놈을 련거퍼 꺼꾸러뜨리니 적군은 붕괴되고말았다. 한 이틀뒤에 또 적과 싸워서 그는 수많은 왜적의 머리를 베여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불행하게도 적의 칼에 맞아 오른쪽 팔이 상하였다. 그는 김면의 휘하에서 그냥 머무르면서 상처를 치료하고있었다.
9월 19일 거창에 이른 김성일은 진주성이 비여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당장 김면의 군영에 가서 김시민을 잡아오라!>>
김성일의 명령을 받은 수하의 군관이 김시민을 묶어가지고 거창으로 돌아왔다.
<<김공은 자신이 지은 죄를 알고있소?>>
김성일의 엄숙한 질문에 자신의 착오를 자각한 김시민은 고개를 푹 떨구고 감사의 처분만을 기다리고있었다.
<<진주성을 비워놓는다는것은 호남지방을 적들에게 밑기는것과 같소...>>
김성일은 김시민이 진주성을 버린 착오를 엄숙하게 비판하고나서 손수 포승을 풀어주었다. 그는 김시민을 위로하고나서 그에게 진주성을 수비할 중책을 다시 맡겼다. 감사의 너그러운 처분에 감복한 김시민은 즉시 진주로 돌아와서 군기를 조련하였는데 그중에 유명한것은 거북수레였다. 거북수레는 모양이 거부기 같이 생겼는데 겉은 철편으로 덮여있고 총을 쏠 구멍을 여러개 만들어놓아서 적들을 겨냥하기 매우 편리했고 또 적의 조총알이 뚫고들어올수 없어서 위력이 대단하였다.
김성일은 곤양군수 리광악을 시켜 진주성에 들어가서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을 사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대세의 어려움을 미리 간파한 김성일은 호남의 의병장들인 최경회, 임계영 등에게 구원을 청하여 그들이 진주경내에 있는 사천창(萨川苍)에 주둔하면서 진주성의 외곽을 수비하는 한편 수시로 진주성안의 정황을 알아보고 량곡과 병장기를 공급해주도록 포치했다.
9월하순부터 왜적들은 진주성의 전초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김성일은 조정의 지시에 좇아 상주판관 정기룡(郑起龙),성주목사 정신홍 등의 관할하에 있는10여개 군현의 수령들을 임명한 뒤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진주성 수호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동쪽에는 삼가의 의병장 윤탁(尹铎),의녕가장(宜宁假将)곽재우, 초계가장 정언충(郑彦忠)을, 북쪽에는 섬천가장 김준민을, 서쪽에는 전라도의 의병장 최경회를 남쪽에는 고성가장 조응도(赵凝道)와 복병장(伏兵将) 정유경(郑惟敬)을 배치하여 시시각각 전투태세를 갖추고 한쪽에서 일이 생기면 다른쪽에서 성원하고 협조하도록 지시하였다.
10월초순이 되자 왜적들은 수만명의 군사를 몰고와서 진주성에 대한 포위망을 늘이기 시작했다. 진주성이 포위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급히 몰아 의녕으로 달려온 김성일은 의녕에 총지휘부를 설치해놓고 진주성안에 편지를 보내여 진주목사 김시민에게 곤양군수 리광악과 여러 장졸들이 한마음한뜻으로 협력하여 지혜롭게 싸운다면 진주성의 사수는 반드시 성공할수 있다고 지시,격려하고나서 화살 등 대량의 병장기를 사이길로 성안에 보내주어 김시민이 외원이 없는 상황에서도 여러날을 견지해낼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10월 무자(戊子)일이였다. 왜장 우시등원랑(羽柴藤元郎)이 3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안으로 쳐들어가면서 연변(沿边)의 여섯개 고을을 점령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아군은 천여명이나 손실을 보았다. 경인일에 왜적은 또 세갈레로 나누어서 바로 진주성으로 달려들었는데 놈들의 선봉대인 기병 천여기는 벌써 진주성의 동켠산우에 올라섰다.
이때 왜적과의 싸움에서 대패한 경상우도 병사 류숭인(柳崇仁)이 필마단기로 진주성앞에 이르러
<<빨리 성문을 열어달라!>>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군권을 틀어쥐고있는 무능한 병사를 성안에 받아들였다간 성의 방어계획이 어지럽게 될것을 우려한 김시민은 결단을 내리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만일 우리가 류병사를 성안에 받아들이면 지휘자를 바꾸어야 할것이다. 그렇게 되면 통제가 약화되여 두사람이 다 아무 일도 못하게 될것이고 진주성도 수비해낼수 없다.>>
부하들에게 단호하게 말하고난 김시민은 류숭인을 보고
<<적정이 위급하여 성문을 경솔히 열수 없나이다. 병사께선 성밖에 남아서 성의 수비를 원조하는것이 좋겠나이다.>> 라고 대답하고 성문을 끝내 열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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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목사김시민
진주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류숭인은 부득이 돌아나오다가 왜적을 만나 사천현감 정득열(郑得悦)과 오배량권관(吾背梁权管) 주대청(朱大清) 등과 함께 적들과 싸우다가 전사하고말았다. 그리하여 김시민의 결단으로 인해 진주성은 적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되였다.
임진일에 왜장 우시등원랑은 다시 진주성을 물샐틈없이 포위하였다. 그때 성안의 우리 군사는 통틀어 3천 8백명밖에 되지 않았다. 김시민은 군사를 나누어서 각 성첩들을 지키면서 대기하고있었다. 김시민은 탄환이 비발치듯하는데도 음식을 가지고 태연자약하게 성루를 돌아다니면서 군사들의 기갈을 덜어주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들에게
<<이 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성안의 수천수만명의 군민들이 왜적놈들의 칼끝에서 원귀로 될것이다.>> 라고 설유하였다.
군사들은 한마음한뜻이 되여 적들과 죽기로써 싸웠다. 전투가 장기간 계속되는바람에 화살이 곧 떨어지게 되였다. 성을 넘어가서 감사에게 련락할 사람을 구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김시민은 후한 상을 주기로 하고 영리(营吏) 하경해(河景海)란 사람을 파견하였다. 밤중에 성을 몰래 넘어서 감사 김성일을 찾아간 그는 화살 백여부를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성안에서는 계속 화살을 사용하면서 적과 싸울수 있었다.
진주성이 포위된지 여러날이 되고 후원군도 오지 않았지만 성안의 군민들은 평상시와 같이 꿈쩍하지 않고 태연하게 성을 지키였다. 김시민은 술과 밥을 지어 군사들을 먹여주며 그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어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왜적과 싸울 결의를 다지였다.
왜적들은 무수한 가면구이며 일산이며 쇠탈바가지, 새털 벙거지차림을 해가지고 낮도깨비시늉을 하면서 나타났다. 두목 여섯명이 나누어져서 독전하고 저격수 수천명이 산우에서 일제히 성안으로 사격을 해대니 성안은 번개가 일고 우뢰가 우는듯 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군사들에게 경동하지 말고 반격할 기회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놈들의 총소리가 약해질 때를 기다려 포를 쏘고 함성을 울리며 응전하게 하였고 밤이면 사람을 시켜서 성문루에 올라가서 피리를 불게 하여 성안사람들이 편안히 지내고있다는것을 적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적들의 사기를 꺾어놓았다.
의병장 최강과 리봉이 고성에서 후원하러 와서 망진산(网陈山)에 올라가 수많은 홰불을 잡고 북을 치고 웨쳐대니 산천을 진동하였다. 그리고 곽재우는 그의 부하 심대승(沈大承)을 보내여 군사 200명으로 야간에 진주 뒤산에 올라가서 호각을 불고 홰불을 들고 성안의 군사들과 호응하면서
<<홍의장군이 남쪽군사와 련락하여 그 대군이 즉시 도착할것이다.>>라고 웨쳐대니 왜적들은 크게 놀라 어쩔줄 몰라했다.
김성일의 지시에 좇아 의병장 최경회도 군사 2000명을 인솔하여 아군의 량곡을 많이 쌓아둔 사천창에 주둔하면서 적들이 량곡을 태우지 못하도록 굳게 지켰고 섬천가장 김준민은 진주의 북쪽에 있는 단계와 단성에서 적들을 돌연습격하여 격파하고 한후장 정기룡도 사천에서 왜적의 진공을 물리쳤다.
왜장 우시등원랑은 졸개들을 각방면으로 내보내여 후원군을 막게하는 한편 대나무와 소나무를 많이 베여다가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우리 군사들이 모르게 가만히 축대를 쌓았다. 김시민이 아침에 나와보니 축대는 이미 다쌓아져있었는데 대나무사다리를 만들어 수천개를 비늘모양으로 련결하여놓고 그것을 다시 멍석으로 덮어가지고 여러놈이 한꺼번에 기여오를수 있도록 만들었었다. 놈들이 쌓은 3층축대는 진주성안을 내려다볼수 있게 되였는데 놈들은 그우에 올라가서 성안으로 조총을 마구 쏘아대는것이였다.
적들의 음모를 간파한 김시민은 미리 불도구를 준비해두었었다. 그는 종이에 화약을 싸서 나무단속에 넣어두고 성우에는 대포를 여러개 설치하고 큰 돌맹이를 쌓아두었다. 성첩(城堞)안에는 큰 가마에 물을 끓이고 쇠를 달구고 미름쇠를 준비하고 대기했다. 아군이 현(玄字)총으로 놈들의 축대우에 있는 왜적들을 한놈두놈 쏘아 떨구니 왜병들은 두려워서 감히 축대우에 오르지 못하였다.
병신일 4경쯤 되자 우시등원랑은 졸개들에게 명령하여 홰불을 켜들고 각 부대가 짐을 가득 싣고 퇴각하는척 하고는 홰불을 일제히 꺼버리고 진주동문밖에 몰려들었다. 왜적들은 제가끔 사다리 한개, 방패 한개씩 들고 다가들어 대가리를 싸매고 한꺼번에 성우로 기여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에 있는 놈들은 수많은 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성우에 서있지 못하게 하였다.
김시민은 침착하게 군사들을 지휘하여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활, 총, 진천뢰(달려드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퍼부었고 돌맹이에 (震天雷),질려포(疾藜炮)를 가지고 달려드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퍼부었고 돌맹이에 쇠무이며 불붙는 나무단이며 끓는 물, 마름쇠를 마구 쏟아놓았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놈들은 불길을 덮어쓰고 끓는 물에 데고하여 공격무기가 몽땅 못쓰게 되였다. 왜적들은 덤비는 족족 거꾸러져 시체가 성밑에 첩첩이 쌓이였다.
전투가 한창 진행될 때 왜적놈들의 또 한떼가 밤을 타서 갑자기 성북쪽으로 달려들었다. 북쪽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퇴각하게 되였는데 그때 만호(万户)최덕량(崔德良)등이 한사코 저항하자 흩어졌던 군사들도 다시 모여들어 적들을 아침까지 막아내였다.
전투가 약간 뜸해졌다. 성안에는 나무막대기나 돌맹이까지도 거의 다 써버렸고 가옥의 지붕이란 지붕도 다 벗겨지고 타서 없어졌다.그런데 승리를 눈앞에 두고 설루를 돌아보던 김시민은 불행하게도 시체속에 숨어있던 한 왜적의 탄알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 위기일발의 시각에 곤양군수리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하면서 왜장 한놈을 쏴죽였다.
그날 점심때쯤 되자 수천명의 졸개를 잃고난 왜장 우시등원랑은 졸개들을 이끌고 마침내 퇴각하기 시작했다.이때를 타서 리광악은 김시민이 만든 거북수레를 몰고 함성을 지르면서 적을 추격하였고 진주성안에 있던 군사들도 일제히 성밖으로 나와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도망가는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겼다.
당황망조하는 우시등원랑은 포로한 녀인들과 략탈한 소와 말 및 군용물자를 길에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이때 김준민이 단성에서 달려와서 도망가는 적들에게 또 무리죽음을 안겼고 최강도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더러 목도 자르고 포로도 하여가지고 돌아왔다.
진주성방위의 승리를 예측한 김성일은 곽재우에게 의녕에 매복해있다가 도망치는 왜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다 잡아죽이라고 명령했었다. 그런데 적들이 퇴각을 시작하자 살성이 일어난 곽재우는 김성일의 명령을 어기고 사사로이 의녕을 떠나 적진에 쳐들어가서 적들을 수없이 베여넘겼다. 그 바람에 비록 많은 적을 죽였지만 의녕방면의 매복권에는 빈틈이 생겨서 패잔한 적들이 의녕을 빠져나가 뺑소니치고말았다.
물샐틈없는 포치로 적들을 그물안의 고기로 만들어놓았다가 뜻밖의 변이 생겨 포위권안에 든 적들을 놓쳐버리고만 김성일은 화가 상투끝까지 치오르고 낯빛이 철색으로 변하였다.
<<군령을 위반한 곽재우를 당장 나포하라!>>
감사의 추상같은 엄명을 받은 수하군관들은 곽재우를 나포하려고 의녕으로 떠나갔다.
<<곽재우는 이번에 군령을 어겨 죄가 크지만 진주성방위에서 대공을 세웠고 앞으로 그를 써야 할 일이 많으니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곽장군께서 립공속죄할 기회를 한번만 주십시오.>>
김성일의 수하장령들인 박성, 오운 등 사람들이 김성일에게 재삼재사 용서를 빌자 김성일도 마음이 좀 누그러져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감사의 명령을 받고 의녕에 온 군관들이 곽재우에게 감사의 나포령을 전하자 곽재우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령공께선 어찌하여 지난날같이 감사와 강하게 맞서 싸우지 않소이까? 대공을 세운 장령을 이렇게 박대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나이까?>>
이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곽재우를 표창하기는 커녕 상사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를 씌우는 감사의 처분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긴 수하군관들이 불평을 부리며 곽재우를 부추겼다.
<<다른사람의 명이라면 나는 절대 듣지 않을것이요. 하지만 나는 김성일의 명령만은 결코 어길수사 없소. 어서 결박을 지으시오.>>
곽재우는 부하들의 강권을 뿌리치고 결박을 짓게 한뒤 나포하러 온 군관들을 따라 감사부로 찾아갔다.
<<곽공은 지은 죄를 알고있소?>>
김성일은 고개를 푹 숙인 곽재우를 쏘아보며 엄숙하게 물었다.
<<일시적 충동으로 감사의 령을 어겨 전략포치를 헝클어놓았으니 죄가 큽니다. 감사의 어떤 처분이든 달갑게 받겠소이다.>>
<<곽공은 의병장이기에 군령을 어긴 후과가 얼마나 엄중한가를 나보다 잘 알것아니오?요 이번에 으례 군법에 따라 처벌해야 되겠지만 공이 잘못을 뉘우쳤으니 이번만은 용서하셌소. 일후 싸움에서 대공을 세워 과오를 미봉하시오.>>
김성일은 손수 곽재우의 결박을 풀어주고나서 군대의 기강은 군대의 생명이라는것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밤과 낮을 이은 십여일간의 혈전끝에 오만한 왜적들의 호남침공과 호서(湖西: 충청도 일대)진격의 망상은 령남군민들의 반격에 의해 산산이 깨어지고말았다.
진주성에서 취득한 승리는 수군절도사 리순신장구이 한산도에서 거둔 해상에서의 승리, 권률장군이 지휘한 행주산성대첩과 더불어 세계전쟁사에서 길이 남을 유명한 <<임진3대첩(壬辰三大捷)>>을 이루고있다.
수만이나 되는 왜적들의 거듭되는 침공을 물리치고난 김성일은 관병들이 잠시 휴식정돈하는 시간을 타서 <<진주수성승첩장(晋州守城胜捷状)을 써서 진주성을 수비한 경과를 조정에 상세히 보고하였다. 그는 장계에서 진주성 수호에 떨쳐나선 장병들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거북수레를 제작하고 외원이 결핍한 상황에서 외로운 성을 지혜롭게 지켜낸 김시민의 공적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김성일의 보고를 받은 선조왕은 김시민에게 경상우도 병사라는 관직을 내렸다. 그러나 몸에 치명상을 입은 김시민은 조서를 받기도 전에 불행하게도 운명하고말았다.
진주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친부모를 잃은것 같이 슬퍼하였으나 소리내여 울지 못하였다. 김시민이 죽은 소식이 성밖으로 새여나가면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올가봐 발상도 하지 못하였다.
진주성에서 참패를 당한 우시등원랑은 거창으로 쫓겨가 있으면서 분통이 터져 그만 죽어버렸다.
아군의 진주성에서의 크나큰 승리는 호남과 호서의 광대한 지역을 확보하게 되였고 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관군과 의병 그리고 전국 인민들에게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었다. 진주대첩이 있은 뒤 김성일은 진주성에 들어가서 고난과 각가지 시련을 겪어낸 영웅적 장병들과 백성들을 위로하려고 산음을 떠났다.
<<감사어르신, 지금 개녕방면에 있는 왜적들이 지례쪽으로 쳐들어오고있나이다.>>
<<감사어르신, 지금 성주방면에 있는 왜적들이 고령을 침범하여 형세가 자못 위급하나이다.>>
마상에서 뜻밖의 급보를 거듭 접한 학봉 김성일은 산음으로 돌아가서 군사를 이끌고 의녕--삼가--거창--안음읍을 지나 고령방면으로 진군하였다. 김성일은 고령, 지례방면에서 왜적들과 혈전을 벌린 의병들을 도와 적들의 침공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거듭되는 전란으로 하여 군영에는 식량이 떨어진지 오래였고 백성들은 산나물로 연명해간지 여러날이 되였다. 당장 식량을 구해들이지 않는다면 왜적들과 계속 싸워갈수 없다는것을 깊이 느낀 김성일은 촌찰방(村察访)김수회(金寿恢)를 불러들여 전라도도사 최철견(崔铁坚)에게 보내여서 군량과 구황곡(救荒谷)을 청해오도록 하였다.
고령에서 전투를 마치고 다시 산음으로 돌아온 김성일은 이번 전투에서 지휘에 복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 정인홍수하의 한 군관을 처벌하였으며 당시 명성이 대단한 의병장 정인홍과 김면(金沔)에게 군대에 기강이 엄하게 서도록 일련의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성일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임진왜란초에 의병활동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김면에게 국내의 의병을 총지휘하는 의병도대장(义兵都队长)이란 직무를 내리였다. 그런데 김면이 의병도대장의 직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조정에서는 김면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여 임금의 거가를 호위하러 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조정의 새로운 명을 받은 김면은 즉시 행장을 수습하고 북상하여 임금의 거가를 호위할 채비를 하고있었다.
(지금 령남의 형세가 이렇듯 위급한데 의병도대장더러 거가를 호위하러 가라는 명령이 지당한가? 진주성을 지켜낸 김시민마저 없는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5천여명이나 되는 의병을 통솔한 김면까지 조정에서 데려간다면 이곳 령남을 어떻게 사수한단 말인가?)
김성일은 무슨 방도를 써서라도 김면만은 아곳에서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작심하였다. 그는 령남수호의 전략적수요에 근거하여 김면을 계속 령남에 남아있도록 해달라는 장계를 써서 급히 조정에 올려보낸 동시에 김면더러 조정의 답복이 올 때까지는 잠시 그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신신당부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보낸 장계를 받아보고 령남방위의 안전을 위해 김면이 계속 령남에 남아있으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도록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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