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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9.충혼은 천추에.
2015년 08월 18일 19시 16분  조회:1757  추천:0  작성자: 옛날옛적
서정시방 :
   19. 충혼은 천추에
     어느덧 11월달이 찾아왔다. 령남전초에 임진년의 첫 겨울이 찾아왔다. 거위털같은 하얀 눈송이들이 춤추는듯 펄펄 날리며 피에 물든 이 땅을 두텁게 덮어주었다.
     이달말에 김성일은 조정의 추천을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초기에 관병과 의병들간의 여러가지 모순을 지혜롭게 해결하고 관병과 의병이 배합작전을 잘 조직해준데다가 진주성방위를 훌륭하게 조직한 그의 빛나는 공적을 조정에서는 아주 높이 평가했던것이다.
참혹한 전쟁터를 청소하고난 김성일은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정세를 예측하면서 금후의 투쟁방안을 구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진주성방위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굳게 뭉친 군민의 거대한 력량을 절실히 느꼈고 분명한 상벌제도의 단맛을 보았었다. 앞으로 남은 투쟁에서 군민들이 힘과 지혜를 더욱 충분히 발휘시키게 하기 위해서 김성일은 조정에 장계를 써올려서 자기의 독특한 정치주장을 내놓았다. 
김성일은 임진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왜적들과 용감히 싸운 관군과 의병 그리고 특수한 기여를 한 사민들에게 그들의 공로와 능력에 따라 관직을 제수할것과 서자와 적자, 부동한 파벌, 량반과 상민간에 통혼을 허락할것과 종출신으로 군인이 되여 적과 싸운 사람들에게 천한 사람의 지위를 고쳐줄것을 주장하였다.
    여러해동안 거듭되는 고역에 농사한번 옳게 짓지 못하여 국고가 텅 빈데다가 전쟁의 피해를 맞아 농사를 아예 짓지 못한 령남지방에는 겨울이 찾아오니 기근과 악역이 날로 심해졌다. 먹을 식량이라곤 구경하기도 어려워 날마다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겨우겨우 모진 목숨을 이어가는 백성들가운데는 온 몸이 퉁퉁 붓고 대소변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이름모를 몹쓸 병에 걸려 드러눕거나 죽는 사람이 수없이 늘어났다.
(식량도 의원도 없는 판에 당면한 재앙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이르는 곳마다에서 백성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목격하고난 김성일의 가슴은 칼로 에이는드것만 같았다.
    어느날 저녁무렵, 성밖에 나와 뜨거운 머리를 식히려고 산책하던 김성일은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죽은 송장의 각을 떼여가지고 가는 한 늙은이를 보았다. 그가 무슨 원쑤가 있어서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헤칠가? 궁금증이 나서 알아보았더니 남의 무덤을 판 사람은 굶어죽어가는 집안식구들을 살리려고 죽은 사람의 고기를 구하러 온것이였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서는 살지 못하게 된 세상, 사람이 환장을 하지 않고서야 죽은 사람의 고기까지 뜯먹으려 할가!
    기막힌 참경을 보고난 김성일은 정신이 아찔해지며 금시 혼도할것만 같았다.
    백성들이 처한 극심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김성일은 각 고을에 공문을 내려보내서 식량이 있을만한 사람들한테서 식량을 얼마간이라도 받아내도록 한뒤 각 고을에 진제장(赈济场)을 설치하여 극심한 기근으로 사경에 처한 백성들을 구해내도록 하고는 밤낮없이 각 진제장을 돌아다니며 구재사업을 감독했다.
식량을 늘여먹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하여 산간벽지를 신바닥이 다 닳토록 돌아다닌 김성일은 늙은이들한테서 소나무잎이 인체에 해롭지 않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친히 쌀가루를 빻아서 솔잎에 버무른 뒤 쪄가지고 <<송엽미(松叶米)라는 대식품을 만들어서 친히 맛을 보았다. 비록 송엽미가 떨떠름하긴 했지만 그래도 식량으로 얼마간이라도 보탤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송엽미                 >>를 만들어서 식량을 늘이는 방법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쌀알마저 구경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니 <<송엽미>>를 만들어 끼니를 에운다는것도 그저 빈 생각뿐이였다. 
아사(饿死)에 직면한 령남백성들을 구해낼 방도가 정말 없단 말인가? 합당한 방도를 찾기 위해 전전불매하던 김성일은 부득불 다시 전라도도사에게 사람을 보내여 약간의 식량이라도 얻어다가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왜적들이 진주성에서 참패당하고 일시 물러나긴했지만 오래잖아서 놈들이 각지의 군사를 끌어모아 다시 대거침범할것을 예견한 김성일은 진주성방위를 위해 온갖 심혈을 몰부었다. 김성일은 지난번의 진주성방어에서처럼 오직 칼과 활만 가지고서는 조총을 쏘아대면서 쳐들어오는 왜적들을 막아내기 어렵다는것을 절실히 느꼈었다. 우리 군사들의 장비를 개선하는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그는 산음현감 김락(金洛)에게 지곡사(智谷寺)에 가서 화약을 만들고 조총을 제조하도록 지시하고나서 각 고을의 성벽수리와 군사들의 훈련정황을 돌아보고 여가만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곡사로 찾아와서 무기만드는 일을 친히 지도하고 감독하기도 했다. 전란의 뒤수습을 하고 닥쳐올 새 전투를 준비하는 그에게는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이고 쌓여 잠시도 한가히 보낼수가 없었다. 
     산음현의 아문에서 바삐 도느라 설이 언제 지나간줄도 몰랐고 정월 한달을 부근의 고을을 돌아다니며 일을 포치하고 감독한 그는 한해에 한번밖에 없는 음력설에도 집에 한번 다녀올수가 없었다. 이미55세의 늙은이로 된데다가 몸에 여러가지 병까지 지닌 학봉 김성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할지역에서의 크고 작은 일들을 빠짐없이 처리하다나니  두 눈확이 푹 꺼져들어가고 피골이 상접하여 회오리바람만 불어도 금 넘어질것만 같았다.
     <<감사어르신, 신체를 돌봐가며 일을 보십시오. 감사어르신께서 몸져 누우시면 령남의 일은 어쩌겠습니까?>>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김성일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려난 관원들이 좀 쉬여가면서 일하라고 권하면 김성일은 대수롭지 않은듯 호탕하게 웃을 뿐이였다.
    <<하하하하, 내 걱정은 말고 자네들이나 건강에 류의하게나.>>
이때는 조선을 구원하려고 온 명나라군대의 제독 리여송(李如松)의 부대와 김응서의 부대가 협력하여 평양성을 탈환한 뒤였다. 김성일은 금후에 대적할 전략방안을 면밀히 짜기 위하여 리로를 평양으로 보내여서 평양탈환후의 명나라 군사들의 남하(南下)정황을 알아보게 한 뒤 경상우도의 병마절도사로 승진된 의병장 김면과 같이 앉아 평양탈환이후의 적의 동향을 분석하고 적아쌍방의 군사력을 비교하고나서 관군과 의병이 잘 배합하여 앞으로 쳐들어올 적들을 물리칠 작전방안을 여러모로 토론하였다. 
산음에서 적정을 알아보려고 거창을 떠난 김성일은 이르는곳마다에서 의병장과 군관들에게 군대의 규률을 엄격히 정하고 차질없이 집행하여  무적의 대오로 만들수 있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어느덧 늦은 겨울도 다 지나가고 화창한 봄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봄이오면 밭을 갈고 곡식을 심어야 했다. 그러나 입에 풀칠도 할 식량도 없는 령남지방에서 무엇으로 곡식을 심는단 말인가? 올한해만 농사를 짓지 못하면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더라도 백성들은 다 굶어죽고말것이였다. 
     가혹한 기근과 곡종난을 해결하기 위해 골몰하던 김성일은 3월 4일에 조정에 장계를 써서 <<사람의 시체를 식량으로 삼는>> 극도에 이른 령남의 기황과 당장 씨붙임을 해야 할 절박한 상황을 회보하면서 호남지방으로부터 량곡 몇만단을 시급히 보내줄것을 간청하였다.
    며칠뒤 남방지방의 사태를 조사하려고 조정에서 파견한 서애 류성룡이 삼남도체찰사(三南都体察使)로 되여 령남지방으로 내려왔다. 같은 고향(안동)사람으로서 한 스승(퇴계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또 평소에 마음과 뜻이 서로 맞았던 류성룡을 만났기에 김성일은 이 긴박한 정황을 더욱 잘 반영할수 있었고 또 그의 도움을 쉽게 받을수 있었다.
    김성일이 두번 써 보내온 장계와 류성룡의 주선으로 하여 조정에서는 호남에 있는 량곡 2만단을 령남으로 보내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결정은 결정일 뿐이였다. 아무리 곡창지대라고하는 호남지방일지라도 남는 량곡이란 별로 없었다. 여러해동안 지속되는 부역바람에 농사를 변변히 짓지 못하여 전란전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크고작은 몇차례의 전쟁피해를 겪고나니 국고에는 량곡이 거의 비여있었다. 호남지방에서는 조정의 명을 받들었지만  자지방의 특수사정에 의해 량곡 만단(万石)을 보내주기로 답복하였다.
3월달에 들어서면서 전란후의 가지가지 독한 병이 류행하여 백성들가운데는 물론이고 의병들가운데도 많은 사람이 불시로 쓰러져 숨지군 했다. 이 불행은 의병도대장이자 경상우도병사로 있는 김면장군에게도 덮쳐들었다. 
3월 12일, 호남, 호서의 군병을 동원하여 개령에 진을 치고 선산(善山)의 적을 격멸하려는 작전계획이 정해졌고 대오까지 다 되었을 때 김면장군 우연히 란후에 류행되는 독한 병에 걸려 쓰러졌는데 그는 쓰러지자마자  그만 불행하게도 운명하고말았다. 
    경상우도의 병사요 의병도대장인 김면의 죽음은 의병활동은 물론이요 전반 임진전쟁에 있어서 아군에게 비할바없는 큰 손실이였다. 김면이 악역에 쓰러졌다는 비보를 받고난 김성일은 대경실색하였다. 그는 부랴부랴 말에 올라 거창에 있는 공관으로 달려갔다. 며칠전까지도 의병을 훈련시키며 멸적의 투지를 닦던 그 굳센 사나이가 갑자기 저세상사람이 되였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칠성판우에 고이 누워있는 김면장군의 시체를 들여다보고난 김성일의 가슴은 찢어지는듯 아팠다. 그는 김면장군이 역병에 걸려  작고했다는 장계를 써서 급히 조정에 올려보내고나서 김면이 의병투쟁을 발기하고 조직하고 령도하여 둔 빛나는  공훈을 열렬히 찬양한 동시에 그의 영령을 위문하는 글을 지어 김면의 령전에 올리였다.
    전국 의병의 반수를 넘게 차지하는 령남의병의 과반인 5천여명의 의병을 통솔하던 김면이 돌연 사망하고나니 학봉 김성일의 어깨에  진 짐은 더더욱 무거웠다. 이젠 경상우도의 감사일도 맡아해야지만 김면이 맡아하던 병사직도 대행해야 했고 의병도대장이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도 잠시는 그가 다 맡아보아야 했으니 한몸을 열두 동강이 내여도 다 해내기 어려웠다.
   거창을 떠나 단성에 들렸던 김성일은 4월초에 진주성으로 돌아왔다. 김시민의 후임으로 진주목사가 된 서례원(徐礼元)이 그를 맞아주었다. 지혜나 용맹에서 서례원은 김시민과는 비길바가 못되였다. 김성일은 그에게 극심한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과 진주성두리에 포대(炮台)를 쌓는 임무를 맡겼다. 그는 친히 진주성의 기타 수비시설을  완비시키는 동시에 조총과 화전(火箭) 등 신식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다그치며서 감독을 늦추지 않았다. 
     며칠뒤  호남지방에서 보낸  만단의 량곡과 곡종이 들어왔다. 령남백성들의 생명곡인 식량과 곡종을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 김성일은 각 고을의 책임자들에게 량곡을 나눠주면서 급한대로 당면한 기황을 극복하고 씨붙임을 다그치도록 하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봄이 서서히 찾아들면서 날씨가 점차 따뜻해졌다. 송림속에 쌓였던 눈도 가뭇없이 녹아버렸고 얼었던 땅우에도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산나물이 나오면 기근을 해결하는데 좋다고 사람들은 날이 하루라도 빨리 가기를 고대했다. 그런데 봄이 찾아오니 생각밖의 큰 화근이 생겼다. 가혹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썩고  피물이 내물을 이뤘던 진주성안팎은 훈풍이 불어오자 피비린 냄새와 악취가 진동하며 코를 찔러 사람들이 숨쉬기조차 어렵게 되였다. 땅속에 묻혀 겨울을 나고난 병균들은 날씨가 따뜻해지니 재빨리도 번식하여 온 사방으로 퍼졌다. 진주성안에는 악성병이 류행되기 시작하여 이집저집에서 정정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병독은 온 진주성을 휩쓸었다. 하루에도 수십명씩이나 죽어가니 진주성안은 마귀의 굴과 같아 날마다 곡성이 그칠새 없었다.
    4월 19일,무서운 악질병은 감사 김성일에게도 무자비하게 덮쳐들었다. 불시에 그는 온 몸이 불덩이같이 달아올랐고  목구멍이 부어올라 음식을 목안으로 넘길수 없게 되였다.  그러나 북부전선에서 패배를 당하고나서 호남진격의 길을 열려고 미쳐날뛰는 왜적들과의 새로운 격전을 앞두고 진주성의 수비사업에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 그는 아무리 아파도 병석에 드러누워있을수 없었다. 진주성과 생명을 같이하고 진주백성들과 고락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한 김성일은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공관을 나와 일터를 돌아보았다. 수하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진주성의 북쪽에 새로 쌓은 신북문(新北门)의 성루우에 올라가 앉은 그는 군민들이 포태를 쌓는 일을 친히 지휘하고 감독하였으며 무기를 만드는  곳에는 믿음직한 사람들을 보내여서 일의 진척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지팡이를 놓고는 한걸음도 뗄 수 없는 감사께서 이를 악물고 병마와 싸우면서 친히 일터에 나와 모든 일을 지휘한다는것을 안 군민들은 깊이 감동되여 그이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일하려고 저마다 안깐힘을 내였다. 포태시설은 빨리도 완비되여 갔다. 그런데 그와 함께  김성일의 병세도 점점 더 악화되여 갔다.
     <<감사어르신, 모든 일은 우리들이 맡아할터이니 안심하고 돌아가서 잠시 쉬십시오.>>
      수하 관원들은 학봉선생이 아예 쓰러질가봐 몇번이고 통사정했다.
      <<지금은 약 한첩 구할수 없는 형편인데 침소에 돌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있는것이 가장 편안하오.>>
    김성일은 상을 찡그리며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한쉴참도 되지 않아 그는 성루에서 기절하여 쓰러지고말았다.
    <<감사어른께서 졸도하셨다!>>
    <<학봉선생께서 혼도하셨다!>>
     김성일이 성루에서 쓰러졌다는 놀라운 소문은 회오리바람같이 온 진주성안에 퍼지여 사람들은 몽둥이에 정수리를 얻어맞은것 같이 얼떨떨해졌고 일손도 서툴어졌다.   
    진주성의 방비시설을 돌아보러 나갔던 박성, 조종도, 리로 등 장령들도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신북문 성루로 올라왔다. 그들은 혼미하여 쓰러진 학봉선생을 담가에 눕혀가지고 성루에서 내려와서 진주공관에 모셨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보다 몇배, 몇십배 중하다고 생각한 학봉 김성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산에 나가 약초를 캐여 탕약을 달이고 미음을 쑤어서 한술씩 한술씩 목안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학봉선생의 병세는 아무런 호전이 없었다. 전쟁전부터 질병에 걸렸는데다가 전란후 과도한 로역으로 병이 골수에 사무쳤는데 또 외부에서 침입해온 악성병까지 걸렸으니 무슨 방법으로 구해낸단 말인가? 수하관원들이 근 열흘동안 눈한번 붙이지 못하고 곁에서 극성스레 구호했지만  효험을 보지 못한 학봉 김성일은 4월 29일 56세의 아까운 나이를 일기로 한많은 세상을 영영 떠나고말았다. 이날 조선은 저명한 학자이며 시인이고 탁월한 정치가이며 열렬한 애국애민의 명신을 잃었고 령남인민들은 자기들이 한없이 존경하는 어버이를 잃었다.
     진주성안은 갑자기 광명을 잃었고 이르는 곳마다에는 흐느낌과 곡성이 흘러넘쳤고 용용한 남강도 슬픔에 잠겨 쉴새없이 울며 흘렀다.
     학봉선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성밖으로 새여나가면 왜적들이 또 이 기회에 돌연습격을 감행할것을 우려한 박성, 조종도, 리로 등 장령들은 상사를 비밀리에 치르기로 토의하였다. 그들은 전란후에 학봉선생의 신변을 돌보려고 아버지곁에 와서 일보던 김성일의 둘째아들 김련(金涟)과 김성일의 생질 류복립(柳复立)을 상주, 상제로 하여 상사를 간소하게 치르고 비밀리에 사람을 띄워서 안동에 부고를 전하였다. 
    5월초에 학봉선생의 큰아들 김집(金潗)이 부친의 부음을 받고 안동 내앞마을 (川前洞)로부터 말을 타고 진주로 달려왔다. 그는 학봉선생이 평소에 쓰던 유물과 그가 남긴 유고를 수습하고나서 령구를 지키고있었다. 불행은 마귀마냥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며칠뒤 학봉선생의 둘째아들 김련도 악성병에 전염되여 진주성안에서 숨을 거두고말았다.
    학봉선생이 세상뜬지 두달도 못되여 가등청정(加藤清正)이 수십만의 왜적을 거느리고 진주성을 쳐들어왔다. 충청도병사 황진(黄进),창의사(倡议使)김천일(金千镒),경상도병사(崔庆会)와 거제현령(巨济县令 김준민(金俊民),김해부사 (金海府使) 리종인(李宗仁)등 장령들의 지휘하에 진주성의 군민들은 결사적으로 적과 싸워 적들의 여러차례의 진공을 물리쳤으나 결국에는 병력과 군량의 부족으로 인해 일일이 장렬하게 전사하고말았다. 그리하여 학봉선생이 사망한지 두달만인 6월 29일에 진주성은 왜적들에게 점령당하고말았다. 학봉선생의 생질인 류복립도 진주성이 함락당할 때 함께 희생되고말았다. 
학봉선생의 령구를 지키고 있던 맏아들 김집은 왜적들이 진주성을 함락하고난 훨씬 뒤인 11월달에 부친의 령구를 받들고 안동의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학봉선생이 임진왜란 당시에 지은 시편과 기타 수많은 소중한 원고들은 추호의 손실이 없이 안동본가에 가져다 보존할수 있어서 문화유산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되였다.
 
<<선생께서는 강의정대(刚毅正大)한 기상을 지니시고 만장절벽우에 우뚝 선 뜻을 갈아 정색(正色)을 하고 조정에 나서시니 문무백관들이 무서워서 떨었고 이역의 사신을 맡으시니 오랑캐들이 두려워하면서 그의 말에 복종했고 미쳐날뛰는 왜적들이 사나운 기세에 강남이 보장의 그늘도 없을 때 조정의 명을 받들고 눈물을 씻으며 창을 잡고 싸움터에 나서니 충성스런 간(肝)과 의로운 담(胆)이 해와 달과 같이 빛나 초목들이 빛을 잃었다. 선생이 이런 일을 성취하게 된것은 어느것이나 다 평소에 닦은 학문으로부터 미루어 나오지 않은것이 없다. 선생은 일찌기 도산문하(陶山门下:퇴계 리황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시여 공경하는것을 위주로하여 그 근본을 세우시고 의(义)를 정(精)하게 하여 그 사용에 힘썼으니 지(知)는 명(明)하고 행(行)은 준(峻)하였으며 덕(德)은 구비(具备)하고 재질은 구전(俱全)하였다. 그리하여 대난(大难)을 당하고 대적(对敌)의 나날에도 남달리 우뚝 서서 두려움없이 성기(声气)를 움직이지 않고 운용이 신속하여 인심이 향합(向合)하였다.>> 
 
  〈〈충의는 골수에 스며있고 도리는 심장에 찼도다(忠义骨髓 道理心脏)>>
 
    이 두편의 글은 학봉선생의 문인(门人)인 정전( 郑佺)과 망우당(忘忧堂)곽재우의 막역지우인 정구(郑逑)가 학봉선생의 제문(祭文)에 쓴 글인데 학봉선생의 학문과 공적 그리고 그의 인품에 대한 가장 공평한 평가로 된다.
학봉선생이 불행히 서거한 뒤 조정안팎에서는 그의 거룩한 공로와 빛나는 일생에 대해 날따라 깊은 인식을 갖게 되였다. 
 김성일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던 송암 리로는 <<룡사일기(龙蛇日记 주: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과 이듬해인 계사년에 쓴 일기로서 그 두해가 룡해와 뱀의 해라고 해서 룡사일기라고 함)》라는 책을 써내여 그와 함께 있었던 임진(壬辰),계사(癸巳) 량년간에 벌어졌던 비장한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겼고 학봉선생을 숭상하던 동인들은 더 말할것 없고 서인파벌에 들었던 택당 리식(泽堂 李植 1584--1647)등 학문이 깊은 명신들도 많은 글을 써내여 그의 빛나는 일생을 구가하였다. <<선조실록(宣祖实录)》》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实录)》에도 그의 공적을 구가한 내용이 많은 편폭을 차지하고있었다.
  학봉선생이 돌아간 이듬해인 선조 27년 2월 6일, 조정에서 조회가 있을 때 령부사(领府亊)김응남(金应男)은 선조왕에게 김성일은 령남의 전란에 모든 힘을 다 바쳤으므로 마땅히 관작을 추증해야 된다고 아뢰였고 옥당(玉堂)김우옹(金宇翁)도 <<김성일은 초유사가 되여 의병을 규합하고 힘 다하여 적을 방어하였기에 왜적들이 크게 사악하지 못하고 령남,호서의 백성들이 모두 잔존(残存)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김성일의 힘입니다.>>라고 아뢰였다.
  문무백관들의 한결같은 요구에 근거하여  선조33(1600)년에 조정에서는 김성일에게 선무원종공(宣武原从功) 1등을 기록하고 가선대부에 리조참찬 겸 지경의금부(知经筵 义禁府),춘추관 (春秋馆),성균관사 (成均馆事), 홍문관제학(弘文馆提学),예문관제학 (艺文馆提学),세자좌부빈객 (世子左副宾客)등의 관직을 추증(追赠)하였고 70여년이 지난 숙종(肃宗:조선조 제19대왕  재위 1674∼1720.)2년인 1676년에는 또 자헌대부(资宪大夫)리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5위도총부총관( 五卫都摠府摠管),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등의 관작을 추증하였으며 <<문충(文忠)》아란 시호(谥号)를 내리였다.
학봉선생의 6권으로 된 문집은 인조(仁祖 :조선조 제 16대왕 재위1623--1649)27년인 1649년에 목판으로 인쇄되였고 5권으로 된 속집(续集)은 정조(正祖 :조선조 제22대왕 재위 1776--1800)6년인 1782년에 간행되였으며 그 나머지 문집부록 4권은 철종(哲宗: 조선조 제26대왕 재위 1849--1863) 2년인 1851년에 림천서원(临川书院)에서 간행하면서 문집과 속집을 편제에 같이 넣어 출판하였다.
  뛰여난 정치적 경륜과 학자다운 랭철한 안목 그리고 애국애민의 충정으로 일관된 학봉선생의 저작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몇세기의 시간이 흐르면서도 계속 학자들을 배양하고 탐관오리들을 질책하고 인민들을 교육하고 침략자들을 타격하는데 커다란 정신적 힘으로 작용했다. 리조말년에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령남의 사민들은 학봉선생의 <<초유문>>을 돌리면서 의병투쟁을 세차게 벌리였다. 
 학봉선생의 글이 일제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정신적포탄과 같다는것을 느낀 백성들은 그 글을 보배같이 간주하였고 왜놈들은 그것을 벼락같이 무서워하였다. <<한일합방>>이 체결된지 8년만인 1918년에 일본경찰들은 학봉선생의 문집을 배일서적(排日书籍)이라는 이름을 걸고 령남지방에 널리 분포해있던 수백질(数百帙 )의 책을 압수해가지고 안동경찰서마당에서 불살라버렸으며 경상북도 안동시 송연동(松硯洞)에 자리잡은 학봉선생의 정원(亭苑)에 있는 림천서원의 문집장판각(文集藏版阁)의 문을 봉쇄해버렸다.
  그러나 암흑은 광명을 타승할수 없고 퇴보는 전진을 가로막을수 없으며 인민들의 지향은 영원히 막을수 없었다. 포악무도한 일본침략자들은 학봉문집을 영영 없앨수 없었는바 그 문집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광명을 보게 되였다.
  1972년에는 학봉선생의 전집이 영인(影印)되여 출판되였고 1976년에는 조선글로 번역된 <<학봉전집>>이 출판되여 세상에 나옴으로 하여 많은 독자들의 안목을 끌었으며 우리 민족의 보귀한 문화유산으로 되여 력사와 함께 영존하고있다.
  학봉 김성일에 대한 연구는 정치계, 학술계에서 간단없이 진행되고있다. 1985년 봄부터 한국의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학봉선생이 남겨놓은 전적(典籍),고문서(古文书),친필초고본(亲笔草稿本),유물(遗物) 등 13000여점을 정리하여 자료집을 내고자 그 작업을 추진하고있으며 503점이나 되는 보귀한 문화재를 보관하고 전시할 기념관인 운장각(云章阁)을 건립하였다.
4백년의 세파속에 한 인간에게 내려졌던 시기,질투와 편견은 말끔히 가셔지고 정직한 학자로서, 탁월한 애국애민의 전범(典范)으로서의 거룩한 형상만이 우리앞에 남아있게 되였다.
  백의동포의 자랑스런 학자이고 청렴한 정직한 관리의 귀감인 학봉 김성일은 영원히 인민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을것이다. 
  1990.9 집필 2001-2002년<<료동문학>>에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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