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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 시모음
2015년 06월 14일 21시 22분  조회:3691  추천:0  작성자: 죽림

삶과 세상에 대해
맑은 눈으로 마주 서기


인문적 사유의 중요한 힘 중 하나는 '성찰'입니다. 성찰이란 '자신의 삶과 세상에 대해 맑은 눈으로 마주 서는 일'을 말합니다. 삶의 길을 가다가 한 번씩 멈추어 서서 내가 가고 있는 길을, 그리고 그 길을 품고 있는 세상을 맑은 눈으로 둘러보고 살펴보는 일입니다. 성찰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자각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존경하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수업 틈틈이 수업 진도와는 무관한 특별한 활동과 발표를 하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귀찮아하고 싫어하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분은 그런 시간에 더욱 열정적이시고 꿋꿋하셨습니다. 그분의 특별한 수업 활동들 중 하나가 '묘비명 쓰기'였지요.

어느 날 선생님은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깨끗한 종이를 한 장씩 꺼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제 너희는 모두 죽었다. 그리고 너희 무덤 앞에는 묘비가 하나씩 서 있다. 지금부터 자기 무덤 앞에 새겨 넣을 묘비명을 적어봐라."

얼마 살지 않아 아직 살 날이 더 창창하게 남아 있는 청춘들한테 죽음, 무덤이 다 무슨 소린지, 게다가 묘비명을 쓰라니…. 모두들 황당해 했고, 늘 선생님 수업 방식에 불만이 많던 아이들은 또 이상한 걸 시킨다며 노골적으로 씩씩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젊디젊은 나이에 묘비명을 쓰려고 고민을 하다 보니 아, 이건 죽음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삶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하기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담긴 삶의 문제임을 한 장의 깨끗한 백지 위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묘비명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의 나와 솔직하게 마주서야 했고, 또 앞으로의 삶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30대 후반이셨던 선생님은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큰 병으로 홀연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에겐 갑작스러웠지만 선생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병중에도 자신의 몸이 허락하는 마지막까지 우리와 무언가를 나누기 위해 아니, 오롯이 주시기 위해 학교엘 나오셨던 것입니다. 

여름 방학 중 모둠을 나누어 무언가를 조사하기 위해 돌아다녀야 하는 과제를 내 주셨던 선생님은 끝내 그 과제 검사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며칠 후 우리는 그 분의 영정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운구 행렬이 학교 운동장을 지나며 선생님의 영정 속 모습을 마지막으로 뵐 때 아이들은 그냥 펑펑 울었습니다. 평소에 선생님에 대해 무척 불만이 많던 친구들까지 머리를 숙인 채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다 큰 남자 고등학생들이 그렇게 울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날 이후 수업 중 특별한 활동이나 방학 중 별난 과제는 다시 없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찰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특별히 내게는 진정한 교사상을 일깨워주시고는 아주 먼 곳으로 가셨습니다. 무덤도 없는 그분의 묘비명은 그날 운동장에서 함께 울었던 우리들 가슴에 오롯이 새겨져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삶을 위한 기념비, 묘비명

이제 내가 교사가 되어 아이들에게 묘비명을 써 보게 합니다. 먼저 살다 간 이들의 인생이 담겨 있는 묘비명은 사뭇 엄숙하게 삶과 관련한 인문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이 남긴 유언이나 묘비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날들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100년 가까운 생을 살며 제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고, 192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묘비에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happen)"라는 엉뚱한 글귀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귀는 재치 있는 말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의 말대로 '우물쭈물하다' 생의 소중한 기회나 순간들을 그냥 놓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고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은 성직자이자 사회운동가로, 또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종파를 떠나 전 국민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공동선의 추구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분의 삶의 자취는 묘비명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추기경의 묘비에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사목 표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목 표어란 사제가 신도를 지도해 구원의 길로 이끌고자 어떻게 지도하겠다는 큰 방향을 담아 정한 것입니다. 이 사목 표어처럼 그분은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 길을 제시하려 노력했고, 또한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살아가는 일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부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분은 유품도 소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40년이 훨씬 지난 낡은 사제복과 쓰던 것을 버리지 않고 모아온 안경 5점이 모두였다고 합니다. 선종(천주교에서 '사람이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뜻하는 말)하시기 전 남기신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씀은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삶으로 보여주신 추기경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듯 묘비명은 단지 죽음 앞의 기념비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의 기념비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간적 삶의 기념비'를 생각하는 일. 이것이 바로 인문적 사유입니다.
 


<성묘와 벌초에 관한 시 모음> 


+ 성묘   

봄비가 외투자락을 적시며 오고 있다 
희망을 위해 읽었던 어둠의 교과서 같은 
한 많은 우리 어머니 
여기 묻히셨다 
(이우걸·시인, 1946-)


+ 성묘 

성묘를 하러 갔습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삼십 년을 주무십니다 

나는 할아버지 얼굴을 모릅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나를 
잘 아신다고 아빠가 
말했어요 

내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부르면 
할아버지는 잠에서 깨어나 
반갑다고 하십니다 

추석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정영숙·아동문학가)


+ 성묘 - 할아버지 산소에서

할아버지 산소에 갔습니다
아무 말씀도 없으셨지만
생전에 묵묵히 밭을 매실 때처럼
잔디를 키우고 계셨습니다
새파랗게 키워 놓고 계셨습니다
둘레에는 꽃들도 몇 송이 피워 놓고.

―할아버지, 안녕하셔요
인사를 드리니
―그래, 많이도 컸구나
대답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미처 다듬지 못한
잔디의 키를 가지런히 매만지고
엎드려 고개 숙였더니
구름을 불러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할아버지, 내년에 또 찾아뵐 게요
할아버지가 산과 함께 키운
나무와 풀들의 손을 잡고
험한 산길을 내려오면서 생각해 보니

아주 멀리 떠나신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곁에 계셨습니다.
(박두순·아동문학가)


+ 省墓

어린 나를 앞세우고    
성묘하러 가시던
아버님의 산소를 찾는다.            

성묘길에 오르면
한풀 꺾인 햇살처럼
자상해지시던 아버님.

"우리 손자 오느냐고
아버지께서
반가워하실 게야."

아버님이 
아버님의 아버님으로부터
들으셨을 말씀.
       
그날의 나처럼        
황금 날개의 여치나 쫓는 
자식놈에게 들려준다.

구절초 핀 등성이를 오르면
초가을 바람이듯
쓸쓸해지시던 아버님.

모시옷 차려 입으시고
성묘하러 가시던
아버님의 산소를 찾는다.
(손광세·시인)


+ 첫 성묘길에 

이제 그만 
산을 내려오는데 
어머니 
자꾸만 날 불러 세운다 

돌아보면, 
봉분 위로 나직나직 
햇살 쓸리는 소리 

어머니 
살아서도 빈방 지키시더니 
....... 
어느새 

바람으로 다가오신 어머니 
희끗해지는 머리칼 쓸어 주며 
등 떠미신다 

그만, 어여 내려가라고
(고증식·교사 시인, 1959-)


+ 벗의 성묘

폐암으로 변산에 잠든 
그를 보러 
따스한 친구들 하향했네. 

결의 사내들 여섯 
서로를 일컬으니 
'따스한 친구들'이랬다. 

격포항이 내려다보이는 솔숲 
허허로운 공터에 
드러누운 그 

그날이 5주기 
기일인 줄은 
알고나 있는지 

벌초하려고 엎드리자 
깔깔거리며 풀잎 흔들어 
서러움이 반가움이라는 그. 
(손정모·교사 시인, 1955-)


+ 성묘 
    
구름으로 가시다 
영에 달아 머무시나 
한 초도 변함없이 
오래도록 굽어보실 이 
이처럼 멀리서는 
너무 짧은 내 몸뚱이여, 

드릴 꽃송이 보다 
마음만 다그쳐져 
아이들 손목 잡고 
읍 올리는 마음 

한 삽 
고운 떼라도 되어 
당신 전에 머물게.
(문인귀·시인, 1939-)


+ 성묘·1 

설날 아침 
큰집 작은집 조카들 앞세우고 
장형 아우 같이 
성묘 드릴 제 
올 한 해도 
들은 말 들은 데 버리고, 
본 말 본 데 버리라 
가슴은 따뜻해야 이뿐 꽃을 안는다 
환한 햇살 넘실거려 
돌아서는 발길 가벼운데 
어머니는 서낭당 고개 다 넘도록 
손사래 치신다. 
(강대실·시인, 1950-)


+ 성묘(省墓) 

아버지, 아직 남북통일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고은·시인, 1933-)


+ 성묘 가는 길 

아버님 천식소리 매미소리처럼 들려오던 
그 고개 이미 아니었다 
포크레인 낮게 깎이고 골라진 길섶 
이제는 아버님의 기침소리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의 부족함의 일부, 
나의 견고함의 전부였던 

그 슬픔조차 
아스라이 사라지고 
우리는 살아 있고 
그는 누워있다 

언제인가 그를 미워했고, 
따라 배웠으며 

지금에서야 알았다, 
내가 사랑한 것과 
내가 미워한 것조차 
사랑이었음을 

맑고 고운 강물조차 
우리네 삶처럼 고여 
물꽃이 되어 흐르고 

이미 그 강물 아니다 
이미 그 길섶 아니다 
(김영환·시인이며 정당인, 1955-)


+ 첫 성묘를 가서였습니다 
  
상석에 음식을 차려놓고 
술을 따라놓고 
윤진이와 주화가 절을 했습니다 
주화의 친구 수현이도 절을 했습니다 

당신 무덤 옆에 앉아 
술을 마시고 
생수를 마시고 
상석에 차려졌던 음식을 먹으면서 
당신의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너무 급작히 당한 일이라서 
아무 경황이 없던 그때와는 다르게 
나무가 보이고 하늘이 보인다고 
당신의 형수님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낯설고 어색한 당신의 무덤만이 보였습니다 

술을 마신 김에 노래나 부르자고 했습니다 
당신을 위로해 드리자고 했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카세트 있는 
라디오를 가져오자고 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들려드리자고 했습니다
(구순자·시인)


+ 성묘 길

뜨거운 피가 흐르던 
저승의 가족과 상봉하는 
가장 뜨거운 나들이 길 
이런 길을 한해 한번 가 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상큼한 가을을 마시며 
서로 닮은 사람들과 눈웃음치며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것 
고조 부모보다도 증조 부모가 
조부모보다도 아버지가 더 뜨겁다 

혈액형과 촌수도 촌수지만 
이승을 등진 섭섭함이 더 진해서 
아버지의 무덤이 
내 가슴을 가장 뜨겁게 달군다 

성묘 길 
세대 차니 종교니 하는 것은 
부차적인 그들만의 문제이고 

얼굴을 모르거나 
오래된 이별을 그리워하며 다녀오는 길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겐 분명히 
아름답고 즐거운 길이다.
(최홍윤·시인) 


+ 성묘 끝나고 -2006 설날 아침에 

할아버지 묘를 지키는 조선향나무 

마른 가지 몇 개 걸쳐놓은 
초라한 둥지에서 
하늘빛 요요히 흐르는 산새 알을 
발견했다 

산자락엔 쌓인 눈 아직 흰데 
알에서 묻어나는 
다스운 온기 

새들이 놀랠까봐 
모두들 숨죽이며 서두르는 하산 길
(김용화·시인)


+ 벌초 
  
고개 숙인 벼 태풍으로 물에 잠기던 날 
먼 산 보며 담배연기 날리던 
텁수룩한 아버지가 여기 누워 있다 

예초기에 잘려나가는 머리카락과 수염 
어이 시원해! 

여치를 따라 봉분 위로 달음박질하는 
손자놈의 통통 튀는 웃음 

남색 가을하늘 한 폭 끊어 
새 이부자리를 마련해 주면 

초가을 볕 아래 하루가 참 맑다. 
(전홍준·시인)  
  

+ 벌초 

내일 모래가 추석 
아버지는 나무손잡이가 달린 
구식 머릿기계로 
아들의 머리를 깎으셨다 

바람이 들어오는 헛청 그늘에서 
왜정 때 썼다는 고물 기계로 
밤송이 같던 아들의 머리를 
팔월 박덩이 같이 깎아 놓으셨다 
  
내일 모래가 추석 
아버지 무덤에 가서 벌초를 한다 
윙윙거리는 신형 예초기 칼날에 
풀들이 바스라져 눕는다 

달덩이 같은 무덤이 솟아올랐다 

벌초가 끝나고 
무덤가에 앉아 숨소리를 듣는다 
하늘 어디쯤 
아들의 머리를 깎고 계실 
아버지의 낡은 기계소리를 듣는다
(정군수·교사 시인, 1950-)


+ 어떤 벌초 

봉분의 잡초처럼 돋아난 머리 
고운 손길처럼 어루만지고 

세파에 찌든 
하얀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져 
발 밑에 쌓이는 세월의 흔적 더미 

그 더미 속에 
조용히 쪼그리고 있는 
무언의 메아리 
은유처럼 다가오는데 

머리카락 계곡에 
차곡차곡 입 벌리고 있는 
곰삭은 인생유전 

바라볼수록 지나온 마디가 저려오는 듯한데
(반기룡·시인)


+ 벌초

청솔가지 숲 속에서 
까치 부부가 통곡을 한다 

세월을 망각한 죄인을 
질책하려는 것인가 
슬픈 한숨의 노래인가 

목관 속에 영면하는 
저승간 부모님의 안식처 
시간과 더불어 삭아내려 
저 울음으로 환생한 것인가 

언제나 사립문 밖에서 
새 소식 전해오던 저 소리가 
한 줌 흙이 된 오매의 귓전에 
생생히 울려오는 뜻 있어 

잿상에 절하지 말고 
어버이 살아 생전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지성으로 바쳐드리렴 

내 무덤가 벌초 말고 
내 마음속 원심을 뽑아 
어둔 세상 속에 불을 지펴 
양심의 불쏘시개 되렴. 
(윤덕명·시인, 선문대학교 교수)


+ 벌초 

이 사람들아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있나 

전에는 
낫질로 조용조용 
도란도란 이야기 하면서 
이발을 하니 
편안히 잠도 잘 왔는데 

윙~윙~ 윙~ 
기계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편한 것도 좋지만 
기계는 정말 싫어 
옛날이 그리워....
(이문조·시인)


+ 벌초

큰물 몇 차례 지나간 뒤 
누워있는 아버지 위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아버지가 억센 잡초에 
포로가 되어 수풀 속에 갇히셨다 
아버지가 함부로 돋아난 가시덩굴에 
손발이 묶이셨다 
불시에 아버지에게 뿌리를 내려 
몸 갉아먹는 풀 베어버린다고 
날 선 낫을 들었다 
살 속 깊이 박혀 있어서 
팔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튀어나온 뼈가 앙상하다 
아버지에게 달라붙어 
피 빨아먹고 기생한 세월들이 
낫질 한 번에 
수북하게 무덤으로 쌓였다 
언젠가 아버지의 단단한 城을 무너뜨리려고 
나의 가슴에 불을 지른 적이 있었다 
이제 봉분 같은 아버지 가슴에 
활활 불을 지른다 
아직 푸릇푸릇 살아있는 목숨이 
온몸을 뒤틀면서 한 소리 하고 있다 
변신한 생이 짙고 매워서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길 막히기 전에 어서 떠나야 한다고 
아버지의 남은 생을 마구 파헤쳤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성묘 ― 벌초

어느 것이 묘인지 
어느 것이 길인지 
정말 자랄 대로 끝까지 자라서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그래도 찾아야겠기에 
예초기로 조금씩 조금씩 
제거해 나가자 

어느덧 눈물인지 땀방울인지 모를 
끈끈한 액이 
얼굴이며 전신을 적시며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조상의 분신 앞에서 
위치 분별 않고 흐른다. 
(전병철·시인)


+ 벌초

처서를 사흘 앞두고
흐르는 땀에 목욕하며
벌초를 한다

뵙지도 못한 시아버지 묏등에 올라
잘하지도 못하는 낫질로
묵은 옷을 갈아입혀 드린다

지하에 계신 시아버지 적적하실까봐
언제부턴가 땅벌가족
뫼 옆에 집을 지어 호위한다

아들 며느리 큰손자 작은손자
비지땀을 흘리며 벌초하는데
어디선가 그분의 혼령인 듯
검은 나비 한 마리 날아와
대견한 듯 우리를 한동안 지켜보다
멀리 멀리 날아간다.
(홍경임·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 벌초하는 날 

편안히 엎드린 양지쪽 봉분들 
예초기의 잉잉 소리에 슬몃 고개를 든다 
아래쪽에서부터 올라가며 
헛기침 소리 요란한 
둘째 큰아버지의 웃자란 머리칼을 
곱게 다듬어드린다 
지금도 다정하게 함께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언제나 대문까지 나와 손잡아주시던 
두 분, 저 먼 둔덕 위에서 
따사로운 햇살처럼 달려나와 
풀 뽑는 내 손을 잡아주신다 

"조상님들을 다 불러 놓았네" 
당숙 아주머니의 말씀 

9월의 하늘보다 말끔히 
다듬어진 둔덕에서 
봉분들이 어깨를 맞대고 해바라기하고 있다
(이솔·시인, 서울 출생)


+ 벌초하던 날

폭우가 깎아버린 비탈의 사면에서
아버지는 칡넝쿨 칭칭 감아 무사했다
간혹 둘레석 틈새로 풀뿌리 삐져나와
세상과 교통할 때면
자꾸 낮아지는 봉분 속으로 아버지
진흙 한 움큼 입 틀어막고,

정점을 향한 아버지의 달리기는
죽어서도 진행형이었다
굴비두름처럼 엮어놓은 새끼들
속속 빠져나간 자리
천형(天刑)처럼 칡이 얽히고
먹이사슬 맨 밑바닥에서 우리 일가의 얇은 족보는
홀랑홀랑 저 혼자 넘겨졌다

양수 속 떠도는 태아로 돌아가
움켜쥔 주먹에 버리지 못한 세상
이제는 놓아보세요
후두둑 풀섶에서 튀어나오는 산모기떼
세상은 사소하고 부질없다고
산아래 누구네 묘자리던가 예초기 돌리는 소리 들린다
세상이 바뀌는 소리 들린다

상수리 열매 떼구르 발 밑에 흘려보내며
아버지, 조금씩 세상을 내려놓는다.
(고경숙·시인,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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