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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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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 시모음
2015년 06월 15일 22시 36분  조회:8902  추천:0  작성자: 죽림

   - 안찬수 -

 

그대가 쓰는 시는
밥이 아니다
반찬이 아니다
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쓰는 시는
숟가락인가
밥을 먹기 위한 
숟가락인가
그대가 쓰는 시는
젓가락인가
반찬을 집어먹기 위한
젓가락인가
그대가 쓰는 시는
그릇인가
물을 마시기 위한
그릇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의자인가
군림하기 위한 의자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담배인가
피우다가 버린 담배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휴지인가
섬세한 항문을 닦는
휴지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꽃인가
무덤 위에 피는 꽃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가을바람인가
꽃잎 떨구는 가을바람인가

아니면
그대가 쓰는 시는
총알인가
온몸으로 날아가 박힌 총알인가
분노인가
열정인가 
꿈인가
도화선인가
깃발인가
혁명인가
혁명보다 깊은 사랑인가

아, 무엇인가
내가 쓰는 시는
내가 쓰는 시는

 

 

   - 최하림 -

 

  눈이 지천으로 오는 밤에 시를 써야지
  머리를 눈에 박고 써야지
  눈 속을 걸어가는 사내 몇
  불을 찾는 사내 몇
  겨울까마귀 몇
  죽은 자들도 그런 밤엔 불을 찾아
  몇날이고 몇밤이고 언덕을 넘겠지 그들의 목소리
  벌판을 헤매겠지. 그들의 불을 찾으러? 꿈꾸는 불? 그 불 속에
  밤차가 달리고 겨울까마귀들이 공중을 떠돌겠지
  --겨울까마귀가 중부 지방엔 없어요, 여보.
  중부지방이 아니야, 내가 말하는 건...
  나는 그 살도 뼈다귀도 안다 바람이 그들 소리로
  하늘을 울리는 걸 안다 당신도 그 소리를 알았으면 좋겠어
  아이들도 이웃도 그 나라의 바다쪽으로
  검은 머리를 빗겨내리며
  붉은 불빛 속에서 마음을 드러내고
  어머님이 나를 보시듯, 그래 어머님이...

  오오 떠오르는 어머님이여
  그날 저녁도 우리는 어둔 거리를 헤맸읍니다.
  세종로 우체국 옆 담뱃가게에서 솔을 한갑 사고, 거스름돈을 받고, 어느
술집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면서 거리 끝까지 걸어갔댔읍니다.

 

 

詩는

    - 조병화 -

 

시는 공기처럼 우주 어디에나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걸 볼 수 있는 시인에게만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보고 감지할 수 있는 감성이 있고
그걸 처리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그걸 말로 잡을 수 있는 재능이 있고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둘 지혜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둔 그 시를
아름답게 닦고, 다듬어서
고독한 영혼들에게 뿌려 주는 것이다

사막의 이슬처럼.
별처럼.

 

 

  시는 술이다

           - 정공채 -

 

  시를 읽는 동안에
  나직이 따뤄지는
  흰빛
  술의 잔의 가득함.

  시를 읽고 있는 동안에
  오고 있는
  따사로운 불빛의 가득한 점등.

  시를 읽고 있는 동안
  가버렸던
  마차의 삐걱대는 바퀴가
  싣고 오는 가을.

  시끄럽지 않은
  밤의
  저 푸른 별의 얼굴.
  잊어버린
  도시의 밤하늘!
  이 모두가 시를 읽고 있는 동안에
  조용히 혼자의 술.
  희디흰 혼자의 술.

 

 

 

시냇가

       - 박귀례 -


  언제부터인가
  내 숲 속의 시냇가는
  하늘 사닥다리가 보이는
  기도의 밀실
  무릎 꿇고.
  남 몰래 앓던 피부병 알몸
  철벙 담겄다.산 너머--
  어디서 내려오는
  붉은 보랏빛 일몰인가.
  티눈 같이 솟구던
  비늘꽃 간데 없고
  윤기 자르르
  피어나는 속살 배냇짓하여라.

 

 

시대병 환자(時代炳患者)

          - 박세영(朴世永) -


솔개미가 빙빙 단엽기(單葉機)*같이 날른다.

소란한 도시는 떠는 듯 무장을 하였다.


청년단원들이 나팔을 불고 지나 가고

트럭이 쉴 새 없이 도심지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납작한 보루같이 그 병원의 집 위론 고사포(高射砲) 둘이 솟았다.

금방에 나르던 솔개미가 사라지니

연기가 무럭무럭 콩크리트의 굴둑은 길기도 하다.


내 눈이 미쳤나 보면 볼수록 늘어가는 고사포,

공장마다 솟는 굴둑,

이리하여 도시는 완연히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독까스를 마신 질식한 사나이,

시대병 환자다.

그러나 나를 환자라고 보는 이가 없다.

보아주는 이조차 없다.

 

* 단엽기 : 몸체 양편에 한 개 씩의 날개가 달려 있는 비행기.

 

 

시를 생각하며

         - 조태일 -

 

도무지 시를 생각할 수 없도록
바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눈을 감고 두근거리는 가슴 열어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남들이 그렇게 소중히 하는
가정까지를 버리는가.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질서를 버리는가.

도무지 시를 사랑할 힘마저 빠져
지쳐 늘어지고 싶은 날엔
살을 꼬집어 아파아파하며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육신과 영혼을 이끌고 지옥까지 들어가는가.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나라 앞에서 초개처럼
하나뿐인 목숨까지 열어놓고 바치는가.

시를 안 쓰고는 못 배길 그런 날은
오랫동안 버렸던 펜을 들기 전에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목숨 걸고 자기를 주장하는가
속으로 차오르는 말을 풀어놓는가

시보다 더 자유로운 세계를 찾아서
나는 시를 썼던가. 쓸 것인가.

 

 

시인

    - 김광섭 -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 아름팍 안아 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에 二천원 아니면 三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죽은 있는데
타는 노을에 가고 없다

 

 

시인(詩人) 
          - 김동리 -

온갖 것 생각하고 느낌에 겨운 이

시인 아닌 사람 있을까

죽음에 눈물 짓고

삶을 다시 가다듬는, 그리고

아아 부드러운 눈길 스칠 때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이 있을까

파초잎을 두들기는 한밤의 빗소리

사랑은 멀리 두고 저녁녘의 함박눈

이를 모두 그 누가 시 아니라 하느뇨

말을 꼬부려 얽어 내는 마음의 무늬

이는 더욱 다듬어진 시

그러나 이 보다 우주(宇宙)를 고아 내는

그러한 참된 시는 흔치 않으리

 

 

 

시인과 농부

         - 조석구 -


  비인칭 주어로
  살고 있는 그리움
  불규칙 동사로 저무는 하루

  그대 슬픔이 누워 있는 언덕에
  잡초로 꺾인 서러운 꿈이
  들꽃으로 서 있다

  향기도 없이 쓸쓸하게
  바람에 기대어

  들빛을 꺾어
  들바람을 꺾어주던 그대의 손엔
  물꼬를 보고 오는
  저문 삽이 들려 있구나

  아, 나는 들꽃을 안고 울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울었다

  누군가 가지고 놀다버린
  이 시대의 상황이 노을에 젖고
  가난이 강물로 흐르는
  황토흙 길 끝 그대 집에
  해바라기 노오랗게 피고
  은빛 램프 켜지는 날
  나는 다시 한번 울고 싶다

 

 

 

시인들

     - 오규원 -

 

자원 전쟁 시대 유류 전쟁 시대 그러나 걱정 마라, 우회 전쟁 시대, 이 글은 패배 전쟁 시대의 이 얘기가 아니니 오해 마라. 시는 언제나 패배이니 승리는 오해 마라. 시인의 나라는 높은 산골짜기에 있다.
시인의 나라는 잎이 바싹거려도 살이 바싹바싹 부서지는 골짜기에 있다. 골짜기에는 실속 없는 장난 애매모호한 대화 무능한 노랫소리가 구름이 되어 산허리를 졸라맨다. 그때마다 산의 키가 항상 구체적으로 자란다.
산속 골짜기에는 李箱이 병신들과 함께 누워 히히닥거린다. 늙은 여자 사이에서 릴케가, 동성 연애가 랭보가 낄낄낄 웃으며 보고 있다. 도망가는 여자 앞에 꽃을 뿌리는 병신 素月을 보며 萬海가 이별을 찬미하는(이별이 아름답다는 것은 흉한 거짓말이다!) 염불을 외운다.
시는 추상的이니 구상的은 오해 마라. 시인은 병신이니 안 병신은 오해 마라. 지금 한국은 산문이다. 정치도 산문 사회도 산문 시인도 산문이다. 산문적이기 위한 전쟁 시대, 시인들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끌려가지 못하는 병신들만 남아 제복도 없이 아, 시를 쓴다.

 

 


     시인에게

           - 강창민 -

 

  그대가 잠들어 쓰는 시
  떨리는 신경을 몰래 늘이어
  어제는 어떤 꿈을 서럽게 짰는가

  가난한 만큼 확실한 꿈을 꾸라, 그대여
  꾸어도 빼앗기지 않고
  빼앗겨도 더욱 넉넉해지는
  그것이 무엇인가 말하라

  가위에 눌려
  그대가 소리쳐 부르던 이름은
  눈 뜨면 늘
  노란 나비처럼 사라지고 말았지.

  다시 잠들려 애쓰는 그대여
  뜰에 나가 겨울 비를 맞으며,
  통금에 잠긴 어둔 골목을 보고 섰으면
  누가 보고 싶은지 말하라.

  그대가 잠깨어 쓰는 시
  무서워무서워 고쳐 썼다가
  다시 적고 만 그 노래
  그것을 불러라, 바보야

 

 

 

 시인 학교

     - 김종삼 -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 기에 있음.

 

 

 

시월의 기도문

             - 정일근 -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천고마비보다 시고시인비이게 하소서
  서정성으로 둔갑하는 누이의 가을 사랑 속에서도
  번번이 결별의 비수는 빛나고
  안경을 벗은 안맹의 여린 내 시선으로도
  반도를 움켜쥐는 바람의 손길이며
  한반도의 툭툭 불거진 슬픔의 힘살들이 환히 보입니다
  하여 시월 속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이제는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소서
  시월에는 유신이게 하지 마소서
  가을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즐거이 일하고 놀이합니다
  하누님 당신은 늘 그대로 하늘에서 쉬시고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월의 공산 같은 달밤이 오면
  아이들, 낙엽, 대통령, 바보, 눈물, 풀꽃 모두 모여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
  높은 더욱 낭낭히 높은 목소리로 시를 읽게 하소서

 

 

  - 최문수 -


  이제 나는
  허리를 더 구부리며 살아야 한다고,
  하루를 발갛게 물들인
  서쪽의 황혼이 두 눈알을 찌를 땐
  더 더욱 팔근육에 힘을 당겨야 할 꺼라고
  셋이레 지난 내 씨알 연호가 운다
  소젖먹고 자라는 녀석의 눈동자에서
  이슬젖은 풀잎들의 발성을 들으며
  나는 비로소 아늑해야 할 땅이 되었음을 안다
  군용담요 위, 비취타올을 들판 삼아
  한 웅큼씩 싸고 누워있는 녀석의
  싱싱한 풀밭을 볼 때마다
  나는
  시가 한 그릇 일용할 양식이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신록
  -  서정주(徐廷柱) -
 
어이 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 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번 날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내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내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신문지 밥상 

       - 정일근 -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궁시렁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 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말씀 철학

 

 

신부 
     - 서정주 -

 

新婦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 
郞하고 첫날밤은 아직 앉아 있었는데, 新郞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 
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읍니 
다. 그것을 新郞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新婦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읍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면 달아나 버렸읍니다. 
그러고 나서 四十年인가 五十年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 
이 생겨 이 新婦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新婦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 
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읍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제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 
아 버렸읍니다.

 

 

신의주-단동(丹東)에서
           - 신경림 -  


낮은 지붕들이 처마를 맞댄 
골목으로 들어가면 대포집이 보일거야 
판자문을 밀고 들어서면 자욱한 담배 연기 
돼지고기가 타고 두부찌개가 끓고 
어디서 본 듯한 같은 주름들 
귀에 익은 웃음소리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겠지 
오래간만이라고 왜 이제서 왔느냐고 
다가와 잡는 손들도 있을 거야 
나는 울지 않을 거야 
마디마다 기름때가 낀 
못 박힌 거친 손들을 잡더라도 

 

 

신이 내게 묻는다면

                - 천양희 -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신정동 1

        - 전광옥 -


  오늘은 비 그리고 조금씩
  바람 모두가 우울 조금씩

  버스를 타고 그 옛날 논두렁
  밭고랑 너머 신정동 친구
  찾아온 진창길 골목
  골목을 지나며 아직도 판자집
  비탈진 그들의 삶을 끓이며
  자식으로 어둠을 낳아
  아들 딸로 키우며
  자꾸 구석 구석으로만 몰아세우는
  바람 속에서
  술에 안주를 내는 친구는 한잔
  안녕 안녕 모두가 무사 웃으며 쓸쓸히
  사시나무 그늘로 흔들리면서 친구는 한잔
  이제는 괜찮다 그렇게
  힘차던 패기 하나가 밀리고 눌려 오늘은
  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술을 따른다

  친구여
  비탈길에서도 달려 내려가야 하는
  리어카처럼
  밑불 때문에 자기도 타 버려야 하는
  나중된 구공탄처럼
  결국은 익사할 금붕어의 아가미처럼
  어지럽게 돌므로써 살아가는 팽이처럼
  이제
  우리는 우리로서 산다

  버스를 타고 그 옛날 논두렁
  밭고랑 너머 신정동 친구
  찾아온 진창길 쓸쓸히
  술오른 친구의 여윈 눈 속에
  가깝게 쪽박산이 솟아오르고
  그 어깨 위로 비가 내리고 잇다
  마른 풀잎들 흔들거리며 온몸을 내맡긴 채
  흔들리며 비에 젖고 있다

 

 

  신중산층 교실에서.1 -- 단 몇 개의 귀

                    - 고광현 -


  아카시아 향기가 결코 토종꿀을 낙태하지 못하는 길들여진 못난 황무지의
일벌들을 유혹하던 오월 나는 나의 무조건반사는 숨겨 놓고 그녀들에게
묻는다

  왜 아카시아 향내에 피냄새가 섞여 있을까?

  그녀들은 한결같이 꽃대궁 깊숙이 더듬이를 박으며 나의 질문을
정신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한결같이 나는 그때서야 나의 비글함을
고백하며 그녀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대, 아동기의 놀이, 팝송과
텔리비전 그리고 학교 수업시간의 설득력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들이 한결같이 이 나라의 가장 큰 희망과 절망, 가장
큰 사랑과 증오, 가장 작은 민주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서양사의 구린 곱똥
한 토막씩을 책받침 가운데 끼워 갖고 다니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보강시간에 내 말들의 어처구니 없음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나의 말들은 마른 수수깡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면서 사방의 콘크리트 벽에
혈관이 터져 그녀들의 실내화 밑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나는 잠시
그녀들 앞에 서 있어야 되는 당위성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시간은 가끔 바늘 끝 위를 밟으며 단 몇 개의 귀속에
재빨리 낱말들을 챙겨 넣고 있었따 이러한 시간의 재빠른 동작을 맹종의
태극기 맞은 편 벽에 화석이 되어 붙어 있는 한복 입은 십육 세 소녀가
동지처럼 훔쳐보고 있었다

  한편 실내화 밑창을 물들이던 내 말들은 번화가 쇼윈도우의 명도 높은
채색혁명이 되어 그녀들의 책받침 속 우상인 시스터 보이의 얼굴에
밑화장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책받침을 빼앗아 둥그렇게 휘어
보인다

  오! 놀랠만한 금속성 휴머니즘

  나는 책받침의 유연성을 통해서 그놈이 제 조국에서 노래부를 때 수 명이
깔려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는 토픽 뉴우스와 신식민지 처녀들이 먹물
속으로 익사하는 것을 감동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너 그동안 너희 학생들에게 얼마나
거짓말 시켰냐?" 나는 당당하게 원색이 된 내 말들의 설 땅과, 설 땅의
확보와 교과서와 책받침 그리고 팝송이 만들어 내는 함수관계를 변명처럼
풀어보였다 그것은 만세 부르다 죽은 처녀가 훔쳐 본 몇 개의 귀의 부활

  그후 나는 그 몇 개의 귀와 오월 날벼락에 떨어진 아카시아 꽃잎을 주워
모아 질긴 항아리에 막소주를 풀어 밀주를 담았다 그 밀주는 지금
발효중이다

 

 

실내악

       - 서경온 -


  주전자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여름 의상잡지를 본다
  맨발에 가죽샌들을 신고
  흰 모자를 쓴 여자들이 웃고 있다.

  나는 붉은 포도주 한 병과
  검은 빵 두 덩이를 가지고 있다
  여름은 몇 개의 순은 나이프와
  크리스탈 술잔을 가지고 있다.

  불현듯 물이 끓어오르면
  사과쨈과 버터는 녹아나기 시작하고
  눈부신 목덜미와 무릎을 드러내고
  겨울 식탁 가까이로 다가오는 여자들.

  섭섭하지만 단호하게
  내가 뷸꽃의 심지를 내리면
  창밖에서 탭댄스를 하던 마른 나무들이
  마네킹처럼 멈춰 서 있다.

 

 

 

심산 풍경

     - 이은상 -

 

 도토리, 서리나무 썩고 마른 고목 등걸,
천 년 비바람에 뼈만 앙상 남았어도,
역사는 내가 아느니라 교만스레 누웠다.

풋나기 어린 나무 저라서 우줄대도
 숨기신 깊은 뜻이야 나 아니고 누가 알랴.
다람쥐 줄을 태우고 교만스레 누웠다.

 

 

 

  심지 하나로 녹으면서

         - 한광구 -

 

  말씀의 우유였으면 합니다.
  조용한 축복이었으면 합니다.
  따스한 입김이었으면 합니다.

  마른 바람만 질주해오고
  흔들리는 윤곽뿐입니다.
  몇 번씩 마음으로 넘어지는
  검은 그림자 넘실거립니다.
  죽어가는 피톨들은 앙금으로 가라앉아
  굳어져 갑니다.
  부서지는 낱말들이 시나브로 떨어져
  금속성 울림만 시끄럽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심지 하나로 녹으면서 가라앉는
  지금은 중년,
  하늘엔 구름 가고,
  밤새 기울이던 술잔도 덧없이 넘어지고
  분노하거나 슬퍼하던 일들도 하얗게 바랬으니
  살아가는 일이 경건한 아침입니다.

 

 

 

심화心火 
     - 박아지朴芽枝 -


벗아! 그대의 밝은 눈에 
 이슬이 맺혀 방울방울 
 그 무슨 서름인가야

 그대의 고운 눈섭 
 수심이 어리어 깊고 깊어 
 그 무슨 시름인가야

 그대의 꼭담은 입 
 말 없이도 내가슴 울리네 
 진정이 얽히인 탓이겠지야

 소박한 나의 글발은 
 그대를 위로 할줄 모르네 
 아 ! 이 붓을 꺾어 버릴가야

 눈물이길래 가슴에 스며들고 
 수심으로 해 소리없이 노래하네 
 소리없는 노래가 시가 아닌가야

 

 

   십월

      - 황동규 -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탁소리 목탁소리 목탁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이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 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커지기
시작하는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만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10월
     - 기형도 -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 곳으로 모으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되어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은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10월의 노래

          - 허소라 -

 

  가늘고 긴 여름 노래 끝나고
  이제 세상은 거대한 지휘봉,
  사랑의 비밀구좌인 당신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하였읍니다.
  은박지에 새겨진 악보
  한 음계씩 창을 닦으며 오를 때
  어디선가 쿵, 울리는 당신의 기침
  모든 그을음은 투명으로 빛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이사이 것은 가이사의 창고로
  나뉘고 있었읍니다.
  비로소 끝이 보이는 시간
  어차피 날지 못하는 닭들은
  그들의 자유를 알로 밀어내고
  옷을 벗은 우리는
  제 몸의 가장 단단한 곳에
  피리구멍을 내고
  가을의 노래를 불렀읍니다.
  지은 죄 벗으려고
  칼날 되어 불렀읍니다.

 

 

십자가

     - 윤동주 -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읍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읍니다.

 

 


    - 김기택 -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둥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는 것이다.

 

 

 

소곡(小曲)
     - 박목월 -


불이 켜질 무렵 
잠드는 바람같은 
목마름

진실로 
겨울의 해질 무렵 
잠드는 바람같은 
적막한 명목(暝目).

 

 

소금인형 

       - 류시화 -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소금별

     - 류시화 -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빡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소경되어지이다

         - 이은상 -


 뵈오려 안뵈는 님 눈 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되어지이다.

 

 

 

소녀의 마음 
           - 황석우 -

 

소녀의 마음은 봄 잔디 풀 ! 
그는 밟으면 으크러지고 
그는 불때면 타진다.

소녀의 마은은 유리 풍경 
그는 바람 부딪치면 울리고 
그는 내던지면 깨진다.

 

 

소녀상

      - 송영택 -

 

이 밤은

나뭇잎이 지는 밤이다

 

생각할수록 다가오는 소리는

네가 오는 소리다

언덕길을 내려오는 소리다

 

지금은

울어서는 안된다

다시 가만히 어머니를 생각할 때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듯

내가 별을 바주서면

잎이 진다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서

또 가까이에서

 

 

3. 소년대한(少年大韓) 
                             - 최남선 -
        

  1 
 크고도 넓으고도 영원한태극/자유의 소년대한 이런덕으로 
 빛나고 쯔거웁고 강건한태양/자유의 대한소년 이런힘으로 
 어두운 이세상에 맑은광채를/빠지는 구석없이 젖어두어서 
 깨끗한 기운으로 타게하라신/하늘의 불인직분 힘써다하네 
 바위틈 산ㅅ골중 나무끝까지/자유의 큰소리가 부르짖도록 
 소매안 주머니속 가래까지도/자유의 맑은기운 꼭꼭타도록 
  2 
 우리의 발꿈치가 돌리는곳에/우리의 기딘깃발 향하는곳에 
 아프게 앓는소래 즉시끄고  /무겁게 병든모양 금시소생해 
 아무나 아무든지 우리를보면/두손을 버리고서 크고빛난것 
 청하여 달라도록 만들것이요/청하지 아니해도 얼른주리라. 
 3
 한수야 벙어리야 귀머거리야/문둥이 절름발이 온갖병신아 
 우리게 의심말고 나아오너라/딜겨서 어루만져 낫게하리라 
 우리는 너의위해 화편가지고/신령한 <뱁티즘>을 베풀양으로 
 발감게 짚신으로 일을해가는/하늘의 뽑은나라 자유대한의 
 뽑힌바 소년임을 생각하여라.

 


 소나무 옆구리

          - 나희덕 -

 

어떤 창에 찔린 것일까
붉게 드러난 옆구리에는
송진이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기어가던 개미 한 마리
그 투명하고 끈적한 피에 갇혀 버린 것은
함께 굳어가기 시작한 것은

 

놀라서 버둥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춘 개미,
그날 이후 나는
소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제 목숨보다도 단단한 돌을 품기 시작한
그의 옆구리를 보려고

 

개미가 하루하루 불멸에 가까워지는 동안
소나무는 시들어 간다
불멸과 소멸의 자웅동체가
제 몸에 자라고 있는줄도 모르고

 

 

소네트

        - 김용진 -

 

  천 년 버리기 싫은
  쪽? 내 마음이라 하여도
  어찌하면 유월
  모래밭에 묻을까 내 사랑.
  바람 설찬 그리움.
  항아리처럼 갓도는 공허.
  진종일
  이마 앞을 보채다가
  돌아 가는 아지랭이.
  꽃이란 꺾이면 
  해바라기라 하지만 
  봄처럼 
  사슴처럼
  눈짓 아름찬 별이고저.

 

 

  소리

     - 곽문환 -


  강물처럼
  파문이 여울지는
  숨결
  가슴 풀어 잠재우고

  불에 그을린
  몸짓으로
  먼 지평을 달리는
  이단자...

  어디엔들
  머물 곳 없으랴만
  쫓고
  쫓기우는
  시류의 둘레만
  맴돌다
  끝내 되돌아오는
  애절한 여운.

  단 한번
  항변의 그 서슬찬
  목소리로
  가슴마다 녹슬은
  실어증을 지워줘야겠다.

 

 

 

소망

     - 한상원 -


  무성한 잡초밭 하늘을 서성거리다가
  실이 끊겨 정처없이 흘러가다가
  어드메 고목 가지에 걸려
  파르르 꼬리를 떨고 있는
  지연이 되었다가,
  짙게 깔린 어둠 속 묘지
  소름끼치게 무서운
  맹수들의 울음을 들으며
  묘석에 쪼그리고 앉아
  저편 하늘을 응시하는
  학이 되었다가,

  이제 먹구름 비바람 천둥이 지나가면
  한아름 목련을 안고 다가올
  나의 봄,
  그 땐 고고한 몸짓으로
  휘파람을 불며
  눈이 부시게 찬란한 하늘에
  훨훨 비상하리라

 

 

소야(小夜)의 노래

         - 오장환(吳章煥) -


무거운 쇠사슬 끄으는 소리 내 맘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자유(自由)는 곁에 있으나

풋풋이 흰눈은 흩날려 이정표(里程表)* 썩은 막대 고이 묻히고

더러운 발자국 함부로 찍혀

오직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

어메야, 아직도 차디찬 묘(墓) 속에 살고 있느냐.

정월(正月) 기울어 낙엽송(落葉松)에 쌓인 눈 바람에 흐트러지고

산(山)짐승의 우는 소리 더욱 처량히

개울물도 파랗게 얼어

진눈깨비는 금시로 나려 비애(悲哀)를 적시울 듯

도형수(徒刑囚)* 발은 무겁다.

 

* 이정표 : 육로(陸路)의 이정을 기록한 일람표. 정리표(程里表).

* 도형 : 조선 시대의 오형(五刑)의 하나. 곤장 10대와 복역 반 년을 한 등급으로 하여, 5등급까지 있었음.

 

 

 

소연가(小戀歌 ) 

              - 서정주 -

  
머리에 石南꽃을 꽂고 
내가 죽으면 
머리에 石南꽃을 꽂고 
너도 죽어서…… 
너 죽는바람에 
내가 깨어나면 
내 깨는 바람에 
너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죽어서도 살아나서 
머리에 石南꽃을 꽂고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소지

     - 류후기 -


  바람 올린다
  시름시름 헤쳐 온 날 손 매듭에
  굳은 살 끼고 한 가치 꿈 배어 있으련만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하여
  흙 묻은 손으로 소지해 올린다
  소문은 풍년이라
  다져진 목소리로 들려 오지만
  휜칠한 근력에도 쭉정이 고이는
  쩌엉 쩡 못은 운다
  품값은 또 어느 해인고,
  따지자면 이 땅에 발 붙인 죄
  오나가나 힘 부치는 다만
  택호를 부르기도 숨이 차구나
  영동댁 영동댁 바람을 부리신다는
  할머니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노을 
                     - 서상만 -

 

덩구덩 북소리가 섞여 있다, 가죽회초리에 뚜들겨 맞아 
게거품 물고 바다는 미쳐서 
갈기갈기 제 옷을 찢어발겨 흔든다 
한 무리 눈알 부릅뜬 소 떼 울고 간 저녁바다 물결 위에
시뻘건 노을이 엎질러져 뉘엿댄다 
수 만 번 불러도 말 못하는 것이 끝없이 흘러가는 
저 피 묻은 서쪽하늘

 

또 날이 저문다, 푸른 묘등 위로 길이 저문다 
수평선 멀리 굼실대는 돛배 하나, 또 다른 저녁을 향해
한 점 먹물로 번진
겁 없는 목숨들의 징징거림도 보인다

 

가끔 부블부글 끓어오르다가, 차갑게 식었다가, 바람에
스스로 제 몸을 맑히는 먼 불국의 목어처럼
간기에 젖어 눈 멀어버린 
백발의 파랑을 치다가 어느 뭍으로 스며들어
하얀 소금꽃이 되고 싶은,
덩구 덩덩 북소리 들리면
바라만 보아도 찔끔찔끔 눈물 나는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바다

 

 

소쩍새

    - 장만영 -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 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 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 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 박연준 -

 

내 나쁜 몸이 당신을 기억해
온몸이 그릇이 되어 찰랑대는 시간을 담고

 

껍데기로 앉아서 당신을 그리다가
조그만 부리로 껍질을 깨다가
나는 정오가 되면 노랗게 부화하지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눈을 감아
감은 눈 속으로 현란하게 흘러가는 당신을
낚아! 채서!
내 길다란 속눈썹 위에 당신을 올려놓고 싶어
내가 깜박이면, 깜박이는 순간 당신은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내 이름을 길게 부르며 작아지겠지?
티끌만큼 당신이 작게 보이는 순간에도
내 이름은 긴 여운을 남기며
싱싱하게 파닥일 거야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내 눈은 깜빡깜빡 당신을 부르고
내 길다란 속눈썹 위에는
당신의 발자국이 찍히고 

 

 

속도 제한 구역

          - 이은경 -


  눈발 흩날림.
  경부 고속도로 쾌속시야
  안개에 포위됨.
  생사의 분개점
  안막이 흐림.
  천리 밖 컴퓨터
  동동발 굴림.
  단절의 체온
  급하강.
  백기의 행렬
  낮은 음성의 고해성사.
  영하의 심장
  파도 타기
  껄껄 웃음.
  멀리 뜨거운 피
  텔레파시 복선만 그음.
  구원은 통 트는 아침
  햇살 위에 얹혀 있음.

 

 

 

속의 바다21 -處容의 노래-

              - 전봉건 -

 

춤을 춘다
아직도 나는 춤추고 있어
나는 맨발이지
모래는 자꾸 반짝이면서 뜨겁다
물새가 난다
바다는 무수한 깃발을 흔들고 있어
감정과 빛의 깃발을 무수히 흔들고 있어
내가 노래할 수야 있지
내가 선언할 수야 있지
한 그루의 꽃나무는 꽃으로 해서 향기로웁다
가야금의 한 줄은 바람으로 해서 소리를 울린다
한 사람의 남자는 여자로 해서 언어를 가진다
내가 선언할 수야 있지
내가 노래할 수야 있지
그러나 이제 바다가 모래를 들먹이는 거기에
네가 있어 알몸인 네가 있어
내 백옥유리의 이로 네 발바닥을 물다가
내 만두삽화를 네 가슴에 묻느다 해도
다시 하늘은 우리 머리칼 언저리서 열리지 않고
구름은 우리의 손가락을 삼키면서 흐르지 않아
해는 다시 우리 등허리에 와서 황금의 배를 비벼대지 않아
허나 춤을 춘다
나는 아직도 춤을 추고 있어
나는 日蝕의 아들
이 모래의 반짝임과 뜨거움과
저 물새의 비약이 허망일지라도
오오 바다가 흔드는 감정과 빛이 무수한 허망의 깃발일지라도
아직도 나는 춤을 추어
오오 일식의 춤을 추어
   

 

   - 박남수 -

 

 물상이 떨어지는 순간,
휘뚝, 손은 기울며
 허공에서 기댈 데가 없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소유하고
 또 놓쳐 왔을까.

 

잠깐씩 가져 보는
 허무의 체적(體積).

 

그래서 손은 노하면
 주먹이 된다.
주먹이 풀리면
 손바닥을 맞부비는
 따가운 기운이 된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빈 짓만 되풀어 왔을까.

 

손이
 이윽고 확신한 것은,
역시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손

    - 이신강 -


  울음소리 요란하게
  세상을 다 잡아보겠다는
  신생아의 손
  독립선언서를 들고 서 있는
  손병희선생의 손
  소리가 들리는
  유관순의 손
  손기정의 손

  약지를 자른
  안중근 의사의 손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손
  이순신의 손
  혜초스님의 손
  우장춘 박사의 손
  한석봉과 그 어머니의 손
  율곡을 길러낸 신사임당의 손
  논개의 손

  아아, 나라를 망치는 장여의 손
  박영호의 손
  안희태의 손
  하늘에 떠도는 KAL 승객의 손
  버마로 출발하며 흔들던 열 일곱 사람의 손
  부들부들 진땀나는 사천만의 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나의 손.

 

 

 

손가락 한 마디

            - 한하운 -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 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손무덤
                 -박노해-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 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 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 상가처럼
외국 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 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 흐르고
프로 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
선진 조국의 종로 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 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 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 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손수건

     - 문덕수 -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씨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발딱발딱 살아나는 슬픔

 

 

 

솔베이지 노래를 주제로 한 시

               - 김규화 -

 

  -페르귄트의 말

  그러면 그대, 베틀에서 내려오게.
  우리들의 사랑은 저 빙산
  깊으디 깊은 살얼음 속
  영원한 청춘으로 갇히어 있으니.
  세월은 그대 베틀에서 날올을 짜며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 놓으며
  돌아온 영웅, 백발의 나에게
  한조각 꿈과 방랑의 지팡이
  회한의 가지 위에 걸어두게 한다.
  그러면 그대, 베틀에서 내려오게.
  우리들의 사랑은 저 들판
  한점 소리 없는 바람으로
  잠자다 깨어 있는 푸른 이마.
  영원 속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허깨비의 우리들.
  훠어이훠어이 춤이나 추어 보세

 

 

솟구쳐 오르기 
               - 김승희 -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의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솟대 
       - 김필연 -

 

얼마나 아리면 저리도 기인 꼿발로 섰을까
가슴에 안으면 저려서 가슴에 묻으면 아려서
기인 기다림 풀어풀어 기러기 나래 위에 올려놓았나
행여 높으면 보이려나  나래 타면 행여 닿으려나
오늘도 기인 기다림 속절없이 높아만 가고
한 뼘 길어진 꼿발은 아린 가슴으로 야위어 가는가

 

얼마나 그리우면 저리도 기인 꼿발로 섰을까
가슴에 안으면 저려서 가슴에 묻으면 아려서
깊은 그리움 풀어풀어 기러기 나래위에 올려놓았나
행여 높으면 보이려나  나래 타면 행여 닿으려나
오늘도 기인 기다림 속절없이 높아만 가고
한 뼘 길어진 꼿발은 아린 가슴으로 야위어 가는가

 


     송가

     - 이형기 -

 

  나는 아무것또 너에게 줄 것이 없다
  다만 무력을 고백하는 나의 신뢰와
  그리고 이 하찮은 두어 줄 시밖에.

  내 마음 항아리처럼 비어 있고
  너는 언제나
  향그러운 술이 되어 그것을 채운다.

  정신의 불안과 그보다
  더 무거운 생활에 이끌려
  황막한 벌판
  또는 비내리는 밤거리의 처마 밑에서
  내가 쓰디쓴 여수에 잠길 때
  너는 무심코 사생에 주었다
  토요일 오후의 맑은 하늘을.

  어쩌면 꽃
  어쩌면 잎새
  어쩌면 산마루에 바람소리
  흐르는 물소리

  아니 이 모든 것은 전체와 그밖에
  또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한 토지와
  차운 대리석!

  아 너는 진실로 교목같이 크고
  나는 너의 그늘 아래 잠이 든
  여름철 보채는 소년에 불과하다.

 

 

 

송광사에 와서

          - 이근배 -


아직도 흐르고 있느냐 
조계산이 온몸으로 끌어안던 
밤의 살 냄새를 다 씻지 못하고 
물소리는 저대로 치닫고만 있느냐 
피가 비칠세라 
뼈가 드러날세라 
사랑은 숨죽여 안개속에 묻히더니 
그 입덧은 자꾸 기어나와 
국사전 뒤뜰에 부스럼 같은 
상사화로 피어났구나 

눈에 보이는 것도 
본래는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름이야 열 번 백 번 
바뀐들 어떠랴 
산에 오면 나도 
산이 되어야 할 텐데 
감로탑 앞에 서면 나도 
머리 깎은 돌이 되어야 할 텐데 
왜 내겐 물소리 뿐이지 

저 삐죽삐죽한 상사화들이 
내 잃어버린 사랑으로 보이지 
왜 나는 물소리가 되지 못하지 
헛것들에게 갇혀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있지

 


송 신(送信)

       - 신동집 -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 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송실이 누님

     - 김용락 -


  시오리 갑티재 넘어
  달밤의 박꽃 같이 환한 얼굴
  비단결같이 고운 마음씨 속에는
  항상 물고기 몇 마리쯤은 넉넉히 기를 여유를 갖고 사는
  송실이 누님
  태어나던 기축년 그 이듬해 여름 전란통에
  젖배 곯고 돌림병 돌아 벌써 죽었을 목숨
  아직도 그때 흔적으로 코 밑에 두어 개 마마자국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가끔씩 부끄럽지 않느냐고 내가 묻기라도 하면
  콩타작하다가 넘어져서 생꼈다고
  슬쩍 웃어 넘기는 재치도 보이곤 하던 누님이
  시집가던 날
  나는 집모퉁이 흙담벽에 얼굴을 묻고 참 많아도 울었었지
  마을을 몇 개 지나고 큰 강을 건너
  실배기 마을 송가 성을 가진 더벅머리와 혼인을 치르니
  드디어 송씨 가문의 지체 있는 맏며느리요
  그 호칭도 송실이로 바뀌었는데
  더벅머리 총각 마음씨 순박하기가 또한
  시월 첫서리에 무른 감홍시 같으니
  두 사람은 필시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라
  낢마다 밤마다
  서로 얼르고 위하여 아들딸 낳고
  한 살림 일궈 너른 들판의 쑥대같이 사는데
  어느 날부터 마을에 이상한 풍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드디어는 물 막고 댐을 만들어
  온 마을이 물 속에 잠긴다고 하니
  정든 집 땀흘려 가꾼 논밭 전지 두고
  고향땅을 떠나야 하는
  하루 아침에 수몰민 신세 된 송실이 누님
  어린 남매 손목 짭고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타향이 다 타향인지라
  그래도 친정집 가까운 갑티재 넘어
  갈대 마을에 터를 잡으니
  제 값 제대로 받은 보상금은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난생 만져보기 힘든 큰 몫돈이라
  괜히 마음 설레어
  마을 주막에 출입을 시작하던 송서방이
  어깨 너머로 배운 솜씨로 노름판에 끼어들어
  하룻밤 새 전재산을 몽땅 털리고
  풀죽은 모습으로 돌아와 며칠을 앓아 누워도
  묵묵부답 상한 속마음을 나타내지 않고
  다시 논밭 일궈야겠다며
  집안 식구들 뒷바라지에만 열중하던
  속 넓고 이해심 많던 누님
  나는 그 송실이 누님을 볼 적마다
  어쩐지 한국판 '여자의 일생'을 보는 것 같아
  코끝이 찡하기도 하지만
  오늘도 갑티재 위로 흰 구름이 떠가고
  갈대꽃이 바람에 춤추는 것이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 줄 아는
  송실이 누님의 지혜를 보는 것만 같다

 

 

송아지가 아프면

               - 손동연 -

 

송아지가 아프면 온 식구가 다 힘없네

외양간 등불도 밤내 잠 못이루네

토끼라도 병나면 온 식구가 다 앓네

순덕이 큰 눈도 토끼처럼 빨개지네5

 

 

송인(送人(님을 보내며)

                       - 정지상 -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하수진고)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송화강 뱃노래 
                - 김동환 -

 
새벽하늘에 구름장 날린다. 
에잇,에잇 어서 노저어라 이배야 가자. 
온길이 천리나 
갈길은 만리다.

산을 버렸지 정아야 버렸나? 
에잇,에잇 어서 노저어라 이배야 가자. 
몸은 흘러도 
넋이야 가겠지.

여기는 송화강 강물이 운다. 
에잇,에잇 어서 노저어라 이배야 가자. 
강물만 운더냐 
장부도 따라운다.... 

 

 

 

사기등잔과 함께

              - 박재천 -

 

  이미 불태운 것들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
  이제 불타고 있는 것들은 사라져 또 어디를 가리
  닳아 버린 심지, 거뭇거뭇 남아 있는 석유찌꺼기, 군데 군데 흠이 간
싸구려
  등잔 하나를 닦으며
  불꽃 한 줄기 피워 손에 들고 있느니
  불타오를수록
  남아있는 뼈와 살이 무게를 또한 느끼느니

  어느 별의 회답이 이리 더딘가
  한밤중이면 깨어나 앉아
  지난 시간의 그림자들을 개어 먹을 가느니
  밤을 밝힐수록 검게 빛나는 이 어둠을 온몸에 받아들이며
  내가 만들어 띄우는 불꽃
  한 줄기
  언뜻언뜻 별처럼 어려보여라.

 

 

 

사냥

       - 윤형근 -


  그 해에 우리는 사냥을 배웠지
  모자에는 오색의 멋진 깃털 꽂고
  가뿐한 엽총을 휘휘 내두르며 인디안처럼
  양양한 기성을 뿜어내었지.

  그 해에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배운 건
  말을 타고 험준한 산령을 치달으며
  타이탄 같은 짐승들과 대결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사냥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 사냥은 누구에게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었지
  우리는 항상 날솟는 매의 꿈을 꾸는 사냥꾼이었지만
  그 큰 사냥에서는 오히려 표적이 되었어.

  누구는 영리한 회색곰처럼 덫을 알아내고
  누구는 허둥지둥 겨냥을 피하느라 주눅이 들어
  교묘하게 거미의 보호본능을 본받아 가지만

  우리의 사냥은 어쩔 수 없어
  더 큰 사냥의 불질과 찬 그림자에 쫓겨
  암굴에 숨어들고 상징의 깃털을 잃어도 우리의 사냥은
  우리의 탄생과 피의 순환이 점거한 깃발이니까.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사람이 그리운 날.3

      - 신대철 -

 

  눈 쌓이지 않는 산모퉁일 몇 개 돌아 들면 이름 안 붙여진 계곡에 이름
안 붙여진 산 속이 있고 지리 모르는 길가엔 스스로 묻히려고 산 속에 드는
풀꽃들,파헤쳐진 애장 몇, 산 속엔 가을에도 인간은 살지 않았구나.

  산이 키운 한 인간을 버리고
  인간이 키운 한 인간을 버리고
  한 인간을 찾아

  떠도는 눈, 눈발.

 

 

 

사람 하나 있다

      - 김종기 -

 

 

둥근 세월을 담고  

단촐하게 사는 사람 하나 있다  

진실한 가슴을 열고

알뜰하게 사는 사람 하나 있다

 

빛깔 무리를 물감으로 풀어

사물을 똘똘히 화폭에 형상화하듯

시원히 노래를 부르는 사람

그리하여 섬섬하게 아름다워지는 사람

그 사람이 슴벅거리며 눈시울을 적시는

볼그레한 행복이 있다

 

깊숙히

마음의 고갱일

지며리 키우는 사람

사람 하나 있다

 

 

사랑

     - 박천최정순 -

 

꽃 시들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몸은 죽어가도 향기는 남는 것

눈 감을 때까지 온전한 생명체인 것을

 

 

 

사랑

    - 이은상 -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말진 부디마오
 타고 다시 타서
 재될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반타고 꺼질진댄
 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 초차
 마저 탐이 옳소이다

 

 

 

사랑

       - 김수영 -

 

어둠속에서도 불빛속에서도 변치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간 너의 얼굴은

 

 

 

사랑 
     - 장만영 -


서울 어느 뒷골목
번지 없는 주소엔들 어떠랴
조그만 방이나 하나 얻고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숨바꼭질하던
어린적 그때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꼬옹꽁 숨어 산들 어떠랴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단 한사람
찾아 주는 이 없은들 어떠랴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가난한 우리 들창을 비춰 줄 게다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깊은 산 바위틈
둥지 속 산비둘기처럼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의지하며
순아, 우리 단둘이 살자

 

 

 

사랑법          
      - 강은교 -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은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 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불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ㅡ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사랑
-老子의 운을 빌려

대안 스님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아름답지 않는 것까지

다 보아 버린 사람이다

착하다 말하는 사람은

이미 악한 것을 알고 다 알고 있느니

아름다움은 아름답지 않는 것을 낳고

착함은 착하지 않는 것을 낳는다

그런데 너는 왜? 자꾸?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려 하느냐

겨울이 올 때 봄이 함께 오듯이

사랑은 언제나 이별과 함께 온다

거룩한 그 사람  없어도 존재하듯

사랑이란 말하지 않아도

뜨겁게 속삭이는 말이려니

사랑은 찾거나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니


 

사랑은

     - 조병화 - 

 

사랑은 아름다운 구름이며
보이지 않는 바람
인간이 사는 곳에서 돈다

 

사랑은 소리나지 않는 목숨이며
보이지 않는 오열
떨어져 있는 곳에서 돈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
받아도 받아도 모자라는 목숨

 

사랑은 닿지 않는 구름이며
머물지 않는 바람
차지 않는 혼자 속에서 돈다

 

 

사랑에게

        - 김석규 -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루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사랑의 고통 

             - D.H 로렌스 - 


                                         작은 시냇물
                                         황혼 빛으로 흐르고
                                         푸르스름한 하늘이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 풍경
                                         이것은 거의 황홀의 경지

                                         다들 잠자리에 든 시간
                                         모든 말썽과 근심과 고통이
                                         황혼 아래로 사라져 버렸네

                                         이젠 황혼과 시냇물의
                                         부드러운 흐름뿐
                                         시냇물은 영원히 흘러서 가리라

                                         그대 위한 사랑 여기 있음을
                                         나는 깨닫는다
                                         내 사랑을 본다
                                         황혼과 같은 정체를 본다

                                         내사랑, 큰사랑, 아주 큰사랑
                                         일찍이 보지 못한 사랑
                                         작은 불빛과 불똥과 온갖 장애물
                                         말썽과 근심과 고통으로 보지 못한 사랑

                                         그대 부르고 나 대답하고
                                         그대 원하고 나 완수하고
                                         그대는 밤 난 낮
                                         이것으로 완전하고 충분한 것
                                         그대와 나 또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알 수 없어라
                                          왜 우리는 그래도 고통스러운가!

 

사랑 잠언

         - 김대규 -

 

  누구나
  몸에 걱정 하나
  마음에 병 하나를
  깊이 깊이 묻고 사나니.

  그 몸 아픔,
  그 마음 켕김.

  걱정도 그윽해지면
  영혼의 노래 되고,
  병도 잘 다스리면
  육신의 복음 되나니.

  거기에 이르는 길은
  오직 사랑뿐.
  그 밖의 다른 구원을
  얻으려 하지 말라.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사랑은 죽지 않는다

                 - 강태기 -

 

사랑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움직인다.

죽지 않기에 어쭙잖은 시를 쓰고, 이야기하고

오페라 보러 가고, 술 생각나고, 바깥 구경한다.

간혹 엉뚱한 생각을 하고 얼버무릴 때도 있다.

생명. 움직이는 것은 아름답고 그대 또한 이름다우니

아아, 사랑이여. 우리들의 목숨이여.

 

사랑은 죽지 않는다

사람이 죽는다

 

 

 

사랑을 위한 독후감

           - 이희찬 -


  1
  솔로몬의 아가서를 읽으면 술람미 마을 양치는 목동과 포도원을 지키는
처녀 두 사람의 가슴 속에 하얗게 꽃핀 첫사랑이 참 아름답네
  죽음 같이 강한 사랑이 되려고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사과나무를 지나
예루살렘 궁궐로 날아가는 산비둘기 울음 소리가 들리네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사상을 대적하는 화염검도 보이고 생명 나무
동산을 지키듯 오직 한 사랑을 지키는 무화과 속살같은 심장도 보이고
  이글이글 불꽃이여 거룩하고 거룩한 불꽃이여 평범한 사람들에겐 참
무섭고도 무서운 사랑이여
  닮아보려고 닮아보려고 애를 써도 온전히 채울 수가 없어서 한 평생
감동적인 모범 사랑으로 남겠네

  2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읍니다
  당신을 위하는 순결한 마음
  날마다 배양되는
  해맑은 사랑으로

  내 생명이
  당신의 생명이라 해도 좋고
  당신의 생명이
  내 생명이라 해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읍니다
  당신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
  날마다 성숙하는
  크낙한 사랑으로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이라 해도 좋고
  당신의 영혼이
  내 영혼이라 해도 좋습니다

 

 


사령
     - 김수영 -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사루비아

      - 이은봉 -


  골목길 어디
  부서져 딩구는 장난감 병정들
  그 먼 장난감 병정나라로
  즈의 사내
  오오, 미운 사랑을 찾아서 떠난
  누이야
  네 아이 슬픈 보조개
  네가 남긴 설움이
  여기 이렇게 한점
  붉은 눈물로 피었고나.

 

 

 

사모곡

     - 감태준 -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

 

 

사막

     - 안초근 -


  어느날 운명은 문 두드리고 들어와
  무거운 짐 지고
  끝없이 모래 언덕을 걷게 했는지 몰라

  꿈은
  오아시스도 신기루도 아닌
  뵈지 않는 초원을
  내음으로 그리며

  망루처럼 높은 목에
  긴 속눈썹이 늘 젖어
  낙타는 먼 산을 바라본다.

 

 

 

 

사막 (沙漠)

            - 조병화 -   

 

사막은 항상 추억을 잊으려는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하더라
사막엔 지금도 <마리네. 디트리히>가 신발을 벗은 채 절망의 남자를 쫓아가고 있다고 하더라

사막에 피는 꽃은 이루지 못한 사랑들이 줄줄 피를 흘리며 새빨갛게 피어 있다고 하더라

사막의 별에는 항상 사랑의 눈물처럼 맑은 물이 고여 있다고 하더라
시인이라는 나는 지금 서울 명동에서 술을 술술 마시고 있는데 
항상 이런 인간 사막에 살고 있는 것 만 같아라
사막이여 물은 없어도 항상 나에게 밤과 별과 벗을

사막은 항상 네 마음 가까이 사랑이 떨어질 때 생긴다고 하더라   

 

 

 

사(死)의 예찬(禮讚) 
           - 박종화 -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 때 아니라.
그러나 보라!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 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토(朱土) 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번쩍이는 진리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냐.
아! 그렇다. 영겁(永劫) 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聲帶)가
찢어져 해이(解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념(激念)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은 흐트러진 만화경(萬華鏡) 조각
아지 못할 한 때의 꿈자리이다.

마른 나뭇가지에
곱게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가지마다 걸고
봄이라 노래하고 춤추며 웃으나,
바람부는 그 밤이 다시 오면은
눈물나는 그 날이 다시 오면은
허무한 그 밤의 시름 또 어찌하랴?

얻을 수 없나니, 찾을 수 없나니,
분(粉) 먹인 얇다란 종이 하나로,
온갖 추예(醜穢)를 가리운 이 시절에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나니.
아, 돌아가자.
살과 혼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의 거리로 돌아가자.

 

 


사슬 6     - 이영유 -

       --잠들면 아무것도 모른다. 꿈과
더불어 밤을 이야기할 뿐


  저녁이다, 해가 기울어지는 도시의 저녁이다. 바로 누우면 해가
오른쪽으로 행로를 잡는 저녁이다. 벌판 가운데 잡풀들과 잡풀들의 이름
없는 흔들림으로 바람이 부는 것을 ?깨닫는 저녁이다. 벌판의 변경과 눈을
뜨고 바로 볼 수 있는 가시권 안의 떨림과 기시권 밖의 요란함과 익명의
아우성이 땅거미를 내어쫓는 벌판과 잡풀들의 사망으로 익숙해진 도시이다.
그렇다.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르는 사람이 어깨를
잡아도 대꾸를 하지 말자. 그냥 가는 거다. 흔들리지 말고 빛 속으로 빛
속으로, 어둠이 젖는 빛 속으로 물방울의 아우성처럼 사라지는 거다.
이유가 없다. 이유를 대지 말자. 어둠이 조급한 것처럼 빛도 여유있는 것은
아닐 것. 흔들리는 모든 것은 두렵다. 빛이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심 즐겁다. 아, 그러나 괜찮다. 즐거움은 그것 말고도 (저것에 대해서)
또 있다. 열심히 빛을 읽자. 눈이 부시나 눈이 부신 만큼 빛을 읽어서 외어
두자. 저녁이라고 말한다. (저녁이어야 한다) 결코 초조하지 않았으므로
강제로라도 여유를 갖게 됐으므로 즐겁다. 볼 수 없는 모든 것들의 흔들림,
흔들거림--접시는 사기로 만드는 것이다--사기다. 사기는 스스로 비약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하는 가운데 말과 말 사이를 유성처럼 떠돌 뿐. 아이는
즐겁다.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본,
그 하늘 만큼 엄마는 즐겁지는 않다.

  아들은 타살당한 애비의 원수를 갚는다. 그러나 아내는 타살된 남편의
복수를 하지는 않는다. 단지 제 목숨이 즐거울 뿐이다. 불이 탄다. 불에
타는 것은 밤이다. 밤은 타지 않는다. 어두움의 밤은 처음처럼 스스로 어둠
속에서 홀로 검정색일 뿐.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즐겁지 않다. 즐겁지
않은 나는 기쁘지도 못하다. 오로지 무엇엔가 열중할 수 있는 일에
스스로를 붙잡아 매둘 것 (또 이런 메모도 보인다) 한 사내가 우연찮게
태어나 제맛을 잃어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게 될까 하는 게산.
그러나 이런 것들까지도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 별 이유 없이 도시는,
한낮의 도시는 잡초처럼 잡초에 묻은 이슬처럼 밤을 기다린다. 이 얼마나
기다림이란 산문적인지 기겁을 할 지경이다. 모든 것을 모두에게 말하고
말하고, 한 말을 또 되풀이해야 하는지.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새로 배우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죽어 버리겠다.

  이 부질없는 얽어맴. 얽혀서 얽히는 재미. 재미가 없으면서도 스스로
풀지 못하는 사슬. 말에 대하여 말이 지시하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인사.

 

 

 

사슴

    - 노천명 -

 

목아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질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사수(射手)의 잠
            - 박기영 -


그날, 어둠 쌓인 슬픔 속에서
내가 버린 화살들이
어떤 자세로 풀밭 위에 누워 있는지 모르더라도
나는 기억해내고 싶다. 빗방울이
모래 위에 짓는 둥근 집 속으로 생각이 젖어 들어가면
말라빠진 몸보다 먼저 마음이 아파오고,
머리 풀고 나무 위에 잠이 든 새들이 자신의 마당에 떨어진
별들의 그림자를 지우기도 전에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어떻게 스스로의 이름을 가슴에 새겨둘 수 있는지.
추억의 손톱자국들 무성하게 자란 들판 너머로
노랗게 세월의 잎사귀 물들어 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는 벽에 기대어서도
하늘 나는 새들의 숨쉬는 소리 들을 수 있고,
숲에 닿지 않아도 숨겨진 짐승의 발자욱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접혔던 전생의 달력을 펴고
이마에 자라난 유적의 잔가지를 헤치고 들어가면
태양계 밖으로 긴 고리를 끌고 달아나던 혜성이, 내가
땅 위에 꽂아 둔 화살의 깃털을 잡기도 전에
진로를 바꾸어 해보다도 더 큰 빛을 바하며 내 품안으로 되돌아 오는 것도
나는 이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땀 젖은 웃도리를 벗고 가만히
어둠과 함께 별자리에 떠 있으면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등 뒤에다 새겨 둘 수 있을 것 같다.
태양의 곁에 누워서 자전의 바퀴를 굴리지 않더라도
어떻게 걱정에 쌓인 별이 저녁이면 다시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까닭을
역마살이 낀 내 잠의 둘레에
밤이면 어떤 별들이 궤도를 그리며 떠돌고 있을 것인지.
 

 

 

4.19날 육사시비 앞에서

          - 김용락 -


  4.19날 아침
  내리는 빗속을 걸어서 육사시비 앞에 당도했다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고
  '지금 눈내리고'라고 음각된 비면이 비에 젖어
  더욱 깊게 보인다
  오늘이 바로 4.19 사반세기라는데
  길가의 풀들은 비에 젖어 청청하게 솟아오르고
  뒹구는 돌조차도 힘이 올라 소리치는 듯하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어깨를 맞대고 무심히 거리를 오간다
  비를 맞으며
  나는 잠시 고개를 숙여본다
  그때. 당신이 북경의 차디찬 감방 속에서
  젊은 한시절을 보낼 때
  그날, 또다른 당신들이 서울 한복판 거리에서
  젊은 한시절을 송두리째 날려 보낼 때도
  아무 울분없이 강은 저렇게 잔잔히 흘러갔고
  역사도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그냥 스쳐갈까
  이 소도시에서
  그날의 참뜻을 새기며 고개를 숙인 아침
  강건너 보리밭이 푸른 깃발을 흔들며 다가오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무어라고 기르칠 것인가
  어느 선배 시인의 말처럼
  편하게 살라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정직하게 살라하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 위에서
  여전히 나는 아이들에게 편하게 살라고만 가르칠 것인가
  어느덧 속옷마저 후줄근히 비에 젖는
  4.19날 아침 육사시비 앞에서 말을 잊은 채
  나는,

 

 

 

4월

   - 이희목 -


  바람은 종일
  검불만 날리고

  갈래산 중턱
  삭정이 패는
  소리 들린다.

  대밭으로 몰리는
  새떼들의
  한낮

  호밀밭 혼잣길에
  아지랭이가 타고
  4월은 환하게
  환하게 비어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티 에스 엘리엇 -
 
<황무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

 

 

 

4월--진달래 앞에서

        - 임석래 -


  내가 네
  살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네가 내
  살 속에 들어와
  머물 때

  불 놓은
  동토의 신열

  문드러진 동상
  살점 속에서
  절정에 오른
  그대, 그대들의 불꽃

  세상
  너절한 살 속의
  확실한 포옹

 

 

 

4월의 회상

         - 양성우 -


들어보아라 지금도 광화문 그 부근에 가서 
한나절 귀기울여 들어보아라
시린 목덜미를 움츠려가며, 다친 팔다리를
어루만지며 여기저기 숨죽이며 들어보아라
온몸에 시뻘건 피투성이로
길바닥에 나뒹굴며 발을 구르며
죽어간 영혼들의 신음소리가 구천에 가득 차서
번쩍이면서 성난 물결로 밀려오지 않느냐

 

바람이어라 진흙 위에 뜨겁게 일어나는
바람이어라 끈끈한 설움 짓씹어가며
우수수 우수수 몰아쳐오는 눈물이어라
서울의 칼날뿐인 하늘 아래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4월 그 아침.
남은 목숨으로 치달으면서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가던 햇살이어라
총창 끝에 쓰러지며 난자당하며
우수수 우수수 몰아쳐오는 바람이어라
진흙 위에 뜨겁게 일어나는 바람이어라


사방에서 피비린내만 나더라
어디서나 총든 놈만 즐거워하고,
날마다 사람들은 밥이 되어서
억울하게 부자들의 밥이 되어서
안개처럼 흐르다가 사라져가고,
사방에서 증오만 사라져가고
사방에서 피비린내만 나더라

 

대낮에 흘린 피가 날아올라서
칙칙한 밤하늘의 큰 별이 되고,
대낮에 흘린 피가 스며들어서
먼지뿐인 이 땅의 큰 꽃이 되어
이글이글 타오르며 손짓하면서
찢어진 가슴팍에 긁어대면서
한밤에도 악몽 속에 소리치며 온다.

 

들어보라 빼앗긴 사람들아
한세월 땅속에 눈물로 고여서
적막강산 바라보며 눈물로 고여서
지금도 광화문 그 부근에 살며
밤새워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4월 영혼들의 신음 소리를
한나절 귀기울여 들어보아라
물묻은 휴지처럼 군화 끝에 채이며
얼음 위에 떠도는 빼앗긴 사람들아
들어보아라
온몸에 시뻘건 피투성이로
소리치며 소리치며 오지 않느냐
지금도 광화문 그 부근에 살며..... 
 

 

사진

    - 이성복 -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갈 때 아버지가 우겨서

딴 이름의 학교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친구들 보기 창피하다고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던 학교 들어가 처음 교복 입고

노란 교표 달린 모자 쓰고 찍은 내 사진을

아버지는 늘 지갑 속에 넣고 다니셨습니다

점심 값 아끼느라 호떡이나 인절미 사 먹고

그 먼 퇴근길 버스도 안 타고 걸어오시던

아버지는 그토록 내가 자랑스러웠나 봅니다

시험 잘 보고 와도 창찬 한번 안 하던 아버지,

뭘 좀 잘못하면 눈만 흘기시던 아버지,

정말 내가 잘못한 날에는 자기 종아리 걷고

혁대 풀어, 나보고 때리라고 하였습니다

언제까지 아버지가 지갑 속에 내 사진을

넣고 다니셨는지 모르지만, 올여름이면

아버지 돌아가신 지 십 년. 지금 내 지갑 속엔

이십 년도 더 된 아이들 사진이 있습니다

어느 봄날 아파트 공터에서 첫째는 동생 목을 감고

둘째는 쪼그리고 앉아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녀석들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취직도 안 하고 빈둥거리지만, 지갑 속에서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깔깔거리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지갑 속 그 아이들을 바라보듯이,

육십 년대 후반 회사 그만두고 쉬는 동안

아버지는 이따금 내 사진을 들여다보셨겠지요

빳빳한 교복 컬러에 턱을 묻은 그 아이가

언젠가 그의 가난과 실직과 시들한 살림살이를

하루아침에 바꿔주길 바라셨겠지요

평생 울컥, 화내는 취미밖에 없었던 아버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경로당 두루마리 휴지를

한 움큼 뜯어 오다 창피당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유리문 너머 아버지 입관하실 때도,

영정사진 앞세우고 산을 오를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린 독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진찍기

       - 원재길 -


  한 손으로 나무 큰 줄기를 잡고 서서
  웃고 있다 너는
  덤덤하게 웃는 법을 알고 있었구나
  배경으로 아코디언을 닮은
  하늘 색 건물이 들어온다
  낭하를 거니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
  원을 이루어 머리를 맞대고
  계단참에 둘러앉은 기독학생회의
  통성 기도소리
  들린다 하, 들리지 않는다
  움직이지마라움직이지마라
  네 허를 찔리울라
  나무는 어마한 높이에서
  수 천 잎새들의 밑면을 일시에 내보였다가
  짠, 감추고
  바람이 분다
  우리가 흔들려야 옳은 건지
  세상이 통째로 흔들려야 옳은 건지

  이제는 알도록 애쓰마
  우리는 이쁘게 흔들리는 나무들
  우리는 어깨를 맞대고 햇살을 부비며
  기쁘게 자라나는 나무들
  이만하면 빛은 적당하다
  이를 악다물면 못 써
  억지로 웃지는 말어
  네가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건지
  나무가 너를 지탱하고 있는 건지
  눈치채게 해선 안 돼
  풀밭에 막 내던진 사과 씨
  일백원 짜리 음료수 컵
  아직 깨지 않은
  안개 낀 날의 취기와 미망을
  걸핏 깨질 것 같은 정신머리를
  잠시만 접어두어
  자연스레 감잡고 있거라
  자 찍는다 즐거운
  사진찍기
  일생은 버거운 꿈
  저버리고 싶은 몸.
  아무쪼록 마음은 밑뿌리까지
  건강해야 해
  저버리진 말어 아무쪼록
  너와 서로 지탱하고 서 있는
  이 어마한 나무 줄기처럼.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인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끓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 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 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이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아득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게 밸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늦잠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 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사투리

       - 박목월 -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새카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라기보다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냄새가 난다
약간 이슬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안이 마르는 
황토흙 타는 냄새가 난다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향(思鄕)

          - 한하운 -


내 고향 함흥은 
수수밭 익는 마을 
누나가 시집갈 때 
가마 타고 그 길로 갔다

 

내 고향 함흥은 
능금이 빨간 마을 
누나가 수줍어할 때 
수수밭은 익어갔다

 

 

사행시초

     - 강우식 -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방은 하나의 사과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속
  누가 그 순수한 외계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둘)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물구비를 넘어나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셋)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팍에 새삼 피어 오르는 쓰린 눈물이여.

  (넷)

  계집애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 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다섯)

  낙엽은, 한 여자가 생리일에 꾸겨버린 색종이처럼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가을날
  무덤 속같이 생각이 깊어버린 여자 곁에서
  사랑이여, 우리가 할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샤보뎅

    - 김종문 -

 

하늘에서 모래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간은 바람결에 소리를 내며

이루고 있었다. 평원과 산을

생각하는 모래알처럼.

 

인간이 죽어간 폐허 위에

집을 지으며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었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생각하며.

 

사막에서 떠나 살 수 없는 체념에서 해골바가지를 들고

오아시스를 찾는 여정을 다듬어 가고 있었다.

 

태양이 흘리며 간 적은 피자국들은

뉘의 눈에도 띄우지 않았다.

태양의 유형처럼

 

하늘에서 모래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사막

저 멀리 사막 사이를 가고 있었다.

검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운 여인이

 

 

삭주구성(朔州龜城)
              - 김소월 -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삭주구성은 산을 넘은 육천리요

 

물맞아 함빡이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가며 아니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텐고

삭주구성은 산넘어

먼 육천리

 

 
산 
- 김소월 -

 


산(山)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山)새는 왜 우노, 시메산(山)골

영(嶺)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七八十里)

돌아서서 육십리(六十里)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帰), 불귀(不帰), 다시 불귀(不帰),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不帰).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十五年)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山)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三水甲山) 가는 길은 고개의 길.

 

 

  산

    - 최하림 -

 

  바람으로 천둥으로 또 설움으로 가야지
  우리 뒤에 있고 지금은 앞에 있는 저
  검은 산 붉고 푸른 산
  옥수수잎이 하늘을 울리는 밭머리
  몇날 며칠을 두고 소란스러운 마을을 지나서
  시도 버리고 서쪽으로
  뛰어간 사람도 버리고 썩어문드러진 천둥이
  한꺼번에 쩌르릉쩌르릉 천지를 울리며
  사람들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밤이 오기 전에
  산 너머 구름 너머 그림자보다 빠르고 쓸쓸하게 가야지


 

 

  - 김광림 -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伽倻山)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海印寺)

열 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微笑)가 돌아.

 

 

   - 이형기 -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 김광섭 -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 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데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高山)도 되고 명산(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 이현암 -


  가만히 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발 끝을 움찔거려
  콩 밭 하나 일궈 놓고
  어느덧 뒤꼍에 내려와 섰다.

  말이 없지만
  말이 없는 게 아니다.

  겨우내 울고 싶어서
  붉은 진달래도 피워내고

  목소리 가다듬어
  골짝 물 내려 보낸다.

  보아도 보아도
  합장하고 섰다.

  바람을 불러
  정자 하나 지어 놓고
  먼먼 하늘만 우러르고 있다.

 

 

산길

     - 양주동 -


  1
  산길을 간다, 말 없이
  호울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그윽히 들리는

  산길을 간다, 말 없이
  밤에 호올로 산길을 간다.

  2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별 안 보이는 어두운 수풀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멀다.

  3
  꿈같은 산길에
  화톳불 하나.

  (길 없는 산길은 언제나 끝나리)
  (캄캄한 밤은 언제나 새리)

  바위 위에
  화톳불 하나.

 

 

 

  산 넘고 물 건너

               - 양주동 -

 

  산 넘고 물 건너
  내 그대를 보려 길 떠났노라.

 

  그대 있는 곳 산 밑이라기
  내 산 길을 토파 멀리 오너라.

 

  그대 있는 곳 바닷가라기
  내 물결을 헤치고 멀리 오너라.

 

  아아, 오늘도 잃어진 그대를 찾으려
  이름 모를 이 마을에 헤매이노라.

 

 

 

산 너머 남촌에는

             - 김동환 -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였다 이어 오는 가느단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산 넘어 저 노을이

            - 이기반 -

 

  하늘에 뜬 바다
  빠알갛게 속 태우다
  살갗도 노오랗께 에이다가
  하이얗게 아픔을 쓸어낸 그 자리
  누구도 열지 못한 시원의 우주인가.

  머나먼 수평에 뜬
  씨줄 날줄을 청실 홍실로 엮는
  뜨거운 시의 가슴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순정을 앓다가
  끝내는 벗어 보인 알몸같은 것.

  무변의 공간
  그득히 출렁이는
  베토벤의 음정마저
  신비의 층계를 오르내릴 때
  산산이 부서지는 심장의 파편들이
  저승으로 침몰하는가
  이승으로 부상하는가

  하늘에 뜬 바다
  산 넘어 저 노을이
  오늘을 살라 먹고 내일을 잉태하는
  그 머나먼 나라
  하이얗게 개벽하는 꿈밭에
  꼬옥 둘이서만 태어나고 싶다.

 

 

 

산낙지를 씹으며

         - 백남천 -


  그대들의 산 것들은
  해남반도 울돌목 들 돌아
  우수영 시퍼런 물살 빠지는
  진도대교에 가면 있더라
  서러운 조선조 유배지 섬마을 좌판엔
  그마나 긁어먹던 흙손 팽개쳐진
  산낙지 발 끝 집념같은 흡착력
  짠내 나는 삶이 있더라

  남도 사투리 모양 구슬픈 물수리
  살아 있노라 저 바다 울어대는 날
  산낙지 칼질하는 섬마을 아낙
  차라리 그건 한반도 땅끝마을
  버얼겋게 녹슨 닻이었더라
  산 것이라곤 한번 제대로
  죽여보지 못한 당신들의 어머니
  그 뉘가 이 얼어붙은 세월
  지친 눈물로 칼을 씻기우는가

  살아 꿈틀 입천장에 들러붙은
  도막난 절규를 처절히 씹지 않곤
  살 수 없는 저 갯바람
  구비구비 그리운 묵시되어
  진물 난 반도사를 긴 세월 더듬는데
  내뱉지 않고 넘기는
  우리들의 이 쓸쓸한 해감맛은
  부디 큰 별이 될거나

  한반도 그 오월 주먹밥같은 귀신
  달군 화젓가락 같은 힘찬 취기로
  한울님의 인고를 지피우며
  조국의 풋물 같은 가슴패기에
  아침바다 마중 나가는 뱃머리에
  빛나는 새벽별되어
  사르는 꽃불로 수놓을거나
  그대들 그리움 모두어 산낙지를 씹을 적마다.

 

 

 

산도화(山桃花) 1
           -  박목월  -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렵기 (山獵記)  

            - 허 민 -

 

 
추석 이튿날 그와 바람없는 골에 들어 
산새들이 먹다남긴 山果 를 따며

산밖을 나가는 날의 설움을 잊어보려고
가재 웅크린 개울에서 노래도 불렀더니라

 

전설도 없는 이 산천 깊숙한 넌출아래
가지고 오신 괴로움 모다 묻어두어서

 

사람들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 짐승들로 하여
다양한  봄날을 기다려 파 내도록 당부하였드니라

 

허울차게 태고의 꿈이 감긴  교목(喬木) 에 
유원(悠遠) 한 한숨을 보여주시는 너드렁이 비탈

 

머루랑 다래랑 으름이랑 한 껏 그와 노나먹으며
철없이 잠들었더니라.

 

 

산문에서

     - 김용옥 -


  길이 끝나는 곳에
  돌아앉아 면벽한 겨울의
  흰 이마가 보인다.

  차갑게 말문을 닫은 바람이
  석간수 아래 얼어붙고
  눈 맑은 산새는 아침마다
  빛의 울음을
  눈 속에 물고 온다.

  동안거에 들어간
  선방 앞 댓돌에
  햇빛 한자락
  혼지 비추다 돌아가고,
  흰 고무신이
  달빛 고인 뜨락에 내린다.

  아랫마을의 등불이
  뿌옇게 번져보이는 이 산속,
  제 안으로 빛을 내리는
  촛불의 흔들림에
  어디선가
  얼음이 깨어진다.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


누이야 
가을산 그리매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뛰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산비둘기

     - 김상환 -


  이야기처럼 첫눈이 내리는
  산마을의 겨울 창가로
  전나무 숲이 요요(괴괴하고 쓸쓸함)하고
  우리는 어쩌다
  카키색 마루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닫힌 방 안에서 
  떠나 있음에 대해 골몰하며
  조금씩
  야
  위
  어
  갔
  다.

 

 

 

산소 호흡기

         -  박천 최정순 -

 

숨소리 거칠어 가슴만 타는데 
틈틈이 시간 물어

대답한다.

밤 한 시에요

밤 한 시 오 분에요 
밤 한 시 십 분에요

아직 그것밖에 안 되었니 아침은 아직 멀었네.

이놈에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데

산소호흡기

…산소호흡기…

더 이상 말할 기력 없으신지 손짓만 한다.

무슨 말인가 궁금하기만 하다

날이 밝자

이별 선물 산소통 사 산소호흡기 해드렸다

아버지 얼굴에 웃음꽃 활짝 피며

얘야, 시원하다

말문이 트인다.

불효자식 마지막 선물

산소호흡기 받고

아버지,

흡족히 웃는다.

어머니와 나는,

돌아앉아 눈물 쏟는다

 

 

 

산수도

      - 신석정 -

 

  숲길같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 구름 한가히 하늘을 지난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바람이 넘어 닥쳐 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시내물 여운 옥인 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 흘러 만 년만 가리...

  산수는 오로지 한폭의 그림이냐?

 


 산수갑산

           - 김억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어디메냐
  아하 산첩첩에 흰구름만 쌓이고 쌓였네.

  삼수갑산 보고지고
  삼수갑산 아득코나
  아하 촉도난이 이보다야 더할소냐.

  삼수갑산 어디메냐
  삼수갑산 내 못가네
  아하 새더라면 날아 날아 가련만도.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보고지고
  아하 원수로다 외론 꿈만 오락가락.

 

 

 

산상(山上)의 노래

         - 조지훈(趙芝薰) -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산유화
        - 김소월 -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피네
갈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 만큼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야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지네
갈봄 여름없이 여름없이
꽃이 지네 꽃이 지네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 -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산에 오르며

         - 홍신선 -

 

  탕! 앞산에서 총소리가 울렸읍니다. 몰면서 앞산에서 어느새 몰이꾼이 된
소리들이 골짜기를 뒤지며 올라갔읍니다. 겨울이라 살아있는 것은 없었읍니다.
지나간 자리에 추위나 잔뜩 부둥켜 안고 서 있던 나무들이 그 시린 귀들이
풀썩풀썩 떨어져 굴렀읍니다.

  서로의 어깨를 찍어 누르며 죽은 칡넝쿨이나 마른 새꼬치풀 시엉풀들이 무슨
흔적처럼 남아 있었읍니다. 망가진 몸짓, 망가진 정신만 가지고 여기저기 남아
있었읍니다. 무서움들이 정체 모를 사람들처럼 나타나곤 했읍니다. 가다가 어느
골짜기에선 소문없이 무서움이 된 19**년도 만났읍니다. 갈수록 무서움이 깊어지고
보이는 것은 없었읍니다.

  보이는 것은 없었읍니다. 이 보이지 않는 일들만이 기침을 컥컥하며 판을 치고
있었읍니다. 마음 내버린 눈 코 내버린 때까치 새들이, 이상한 생들이 망가져
떨어져 있었읍니다. 맨 위에는 골짜기를 만들고 올라온 능성이만이 오똑 앉아
있었읍니다. 위는 위대로 가려서 보이지 않았읍니다. 보이지 않는 일, 무서움 속을
우리는 다시 걸어 내려왔읍니다.

 

 

 

산에 언덕에

        - 신동엽 -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산죽 그늘 아래

        - 박기동 -


  이 깊은 겨울의 끝
  바늘 끝으로 네 마음을 그으면
  타오르는 푸른 오랑캐꽃
  잎 포개어 밤 깊이 뉘우치리니
  붉은 달이 넋 놓고 부서지는
  산죽 그늘 아래
  깊은 잠 모두 깨어 서걱이고
  손톱 밑을 파고드는
  얼음의 바늘귀마저 풀어지고

 

 

산정묘지 1 山頂墓地 1
                              - 조정권 -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天上의 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山頂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 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바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天上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면서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處所에 뿌려진 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 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나 자신에게 축복을 주는 휘황한 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던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 
영혼이 그 위를 지긋이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

 

 

 

산제비  
    - 박세영 -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에도 상상봉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 자 누구냐? 
너희 몸에 알은 체 할 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꿰여 
마술사의 채찍 같이 
가로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희는 장하구나 

하루 아침 하루 낮을 
허덕이고 올라 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 다오 

나는 차라리 너희들 같이 
날개라도 펴보고 싶구나 
한숨에 내닫고 단숨에 솟치여 
더 날을 수 없이 신비한 
너희 같이 돼보고 싶구나 

창들을 꽂은 듯 희디흰 바위에 
아침 붉은 햇발이 비칠 제 
너희는 그 꼭대기에 앉아 
깃을 가다듬을 것이요 

산의 정기가 뭉게뭉게 피여 오를 제 
너희는 마음껏 마시고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들을 것이다 

멧돼지가 붉은 흙을 파헤칠 제 
너희는 별에 날아 볼 생각을 할 것이요 
갈범이 배를 채우려 
약한 짐승을 노리여 어슬렁거릴 제 
너희는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전하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알려 주는 
천리조일 것이다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휘정거리고 안개를 헤쳐라 

땅이 거북등 같이 갈라졌다 
날아라 너희는 날아라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구름을 모아는 못 올가! 
날아라 빙빙 가로세로 솟치고 내닫고 
구름을 꼬리에 달고 오라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헤쳐라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박인환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륙(殺戮)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 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아 최후로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살인자의 술
               - 보들레르 -


아내가 죽었어, 난, 자유야!
그러니 실컷 마실 수 있지.
전에 한푼 없이 돌아 올 때면
그년 고함에 신경이 갈기갈기 찟겼지.

이제 난 왕처럼 행복하이,
공기는 맑고, 하늘도 희한 한지고
내가 년에게 반하게 된 것도
그래 이런 여름철 이였지.

가슴을 찟는 이 지독한 갈증
그걸 풀려면 아마도
그년 무덤을 채울 만큼의
술이 필요 할걸.
실은 년을 우물속에 던졌거든

그리고 그위에다 우물 변두리
돌들을 모조리 밀어넣기까지 했것다,
-잊을 수 있다면 잊고 싶으이 !
무엇으로도 우릴 떼어놓을 수 없는
우리 애정의 맹세를 위해서,
우리 사랑의 도취의 멋진 시절처럼
다시 화해하기 위해서.
난, 그날 밤, 년에게 컴컴한
길가에서 만나자고 애원 했겄다.

년이 왔어! -미친 것이 !
다소간에 우리 모두가 미쳤거든 !
무척 지친 꼴이 였지만 년은
아직도 예쁘더군! 그리고 난 또
너무나 년을 사랑했지! 그래서
말한거야 "이승에서 꺼져라"고

이 내맘을 이해할 놈 아무도 없어,
이 머저리 주정뱅이중 단 한놈 이라도
병에 찌든 밤마다 술로 수의를 삼을
그런 생각을 한적이 있었던가?

쇠로 만든 기계인양
불사신의 이 불한당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일찍이
참 사랑을 안적이 없어.

그 응큼하게 홀리는 마술이며
아비규환의 다급한 불안의 연속,
그 독약의 병들이며, 그 눈물,
그 쇠사슬과 해골 부딪는 소리나는 사랑은 !

이제 난 자유롭고 외톨이구나 !
오늘 밤 난 죽도록 취하리라,
그땐 두려움도 회한도 없이
땅바닥 위에 벌떡 누울테다.
그리고 개처럼 잠들리라!

돌이며 진흙따윌 실은
육중한 바퀴의 달구지건,
미칠 듯 질주하는 화차건.
죄많은 내 머릴 짓이기든가
한 허리를 동강내도 무방하이,

그 까짓일, 난 신이나 악마나
성탁처럼 일체 개의치 않거든 !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3·1날이여! 가슴아프다

                     - 김광균 -

조선독립만세 소리는 
나를 키워준 자장가다 
아버지를 여읜 나는 
이 요람의 노래 속에 자라났다 
아 봄은 몇 해만에 다시 돌아와 
오늘 이 노래를 들려주건만 
3·1날이여 
가슴아프다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 
겨레와 겨레의 싸움 속에 
나는 이 시를 눈물로 쓴다 
이십칠년전 오늘을 위해 
누가 녹스른 나발을 들어 피나게 울랴 
해방의 종소리는 허공에 사라진 채 
영영 다시 오지 않는가 
눈물에 어린 조국의 깃발은 
다시 땅 속에 묻혀지는가 
상장(喪章)을 달고 거리로 가자 
우리 껴안고 목놓아 울자 
3·1날이여 
가슴 아프다

 

 

 

삼십세

         - 최승자 -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삼월

    - 김현정 -

 

 

 

산수유, 매화년들이 발광을 한다.

아침부터 창밖은 대낮처럼 환하다.

가지런한 머리카락들

바람을 몰아온다.

목에 두른 머플러

관공서에 걸린 국기처럼 펄럭인다.

동네 어귀에 서 있는

오랫동안 애인 없던

측백나무, 초록 손을 흔든다.

전봇대에 걸려 있는 오선지 위로

참새들, 사분음표처럼 내려앉는다.

 

 

방안에서는 여전히 보일러가 돈다.

어제 입었던 잠바에서

삐져나온 오리털이

애완견의 사료 그릇에 떨어져 있다.

창문을 열자

작전회의를 끝낸 바람부대가

널려 있는 휴지조각

마구 흩날린다. 내 몸도

잠깐 흩날릴 뻔한다.

문득 한 마디 떠오른다.

삼월에는 빗질을 하지 말고 외출을 하자.

 

 

 

삼월은

      - 이태극 -

 

  진달래 망울 부퍼 발돋움 서성이고
  쌓이던 눈도 슬어 토끼도 잠든 산 속
  삼월은 어머님 품으로 다사로움 더 겨워.

  멀리 흰 산이마 문득 다금 언젤런고
  구렁에 물소리가 몸에 감겨 스며드는
  삼월은 젖먹이로세, 재롱만이 더 늘어.

 

 

 

삼수갑산(三水甲山)
수갑산(三水甲山)-차안서삼수갑산운(次岸曙三水甲山韻) 
          - 김소월 -

 

 

삼수갑산(三水甲山) 내 왜 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뇨

오고 나니 기험(奇險)타 아하 물도 많고 산첩첩(山疊疊)이라 아하하


내 고향을 도로 가자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삼수갑산 멀드라 아하 촉도지난(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아하하


삼수갑산이 어디뇨 내가 오고 내 못 가네

불귀(不歸)로다 내 고향 아하 새가 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내 못 가네

오다 가다 야속타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아하하

 

 

 

삼팔선
       - 김동명 -


옥문(獄門)
굳게 닫힌 옥문 일다
일천만의 옥수제군, 경계하라 악역을,
그리고 도난을 제군의 주위는 자못 불결하고도 소란하다

자 저 사내들은 무슨 이야기가 저리도 장황 하담,
남은 불붙는 향수에 까맣게 입술이 타는데,...
에잇, 주먹으로 우리들의 이 주먹으로
그만 와지끈 지끈 때려 부실수는 없나.

아아 저 곰의 발바닥 같이 생겨 먹은 상관을 본대두
우리들의 잘못 걸린것 마는 틀림 없구나.

철벽(鐵壁),
까마득히 높이 솟은 철벽(鐵壁)일다.

여기는 약소민족 해방의 성부대가 몰고온
붉은 도야지 떼의 도살장.
볼스비키즘의 넋은 버얼서
저들의 약탈품과 함께 우라지오스도꾸에 상륙한지 오래다.

아아 아름다운 악마,그러나 알고 보니 무서운 역신이여!
우리들의 환자는 가엾게도 제 하라비를 모르는 것이 특징이더구나.

허나 요행으로 五十年, 그렇다 오십년은 책입져도 좋다.
단연 방역 무요.

사선(死線),
불사조도 울고넘는 현대판 아리랑 고개.
구즌비 휘뿌리는 첩첩 칠흑 아니래도
『으흐 으흐흐,...』귀곡성이 처량쿠나.

굶어 죽은 넋 총 맞어 죽은 넋 짓밟히어 죽은 넋, 온갖 억울한 넋들이
『삼팔선이 여기드냐.』 더위잡고『으흐, 으흐흐,...』

아아 민족 광전의 수난 일ㅅ다.
역사의 악희, 운명의 조롱이 어찌 이대도록 심하뇨.

배를 갈라.
창자를 뿌리어도, 창자를 뿌리어도,...

 

 

 

삼학년  
         - 박성우 -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삽 
    - 정진규 -


 삽이란 발음이,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땅을 여는 연
 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
 까 속내가 있다 삽,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그
 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한 자정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
 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오
 늘도 나를 염하며 마른 볏집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상리과원
       -  서정주(徐廷柱) -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나 낙동강 상류와도 같은 융륭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뜨리는 몸뚱이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송아리들을 달았다. 멧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 새끼들이 조석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만 마리의 꿀벌들이 온종일 북 치고 소고 치고 맞이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묻혀서 누워있는 못물과 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워서 때로 가냘프게도 떨어져 내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 잎사귀들을 우리 몸 위에 받아라도 볼 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들과 나란히 마주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분면과, 한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속에 이것들이 잦아들어 돌아오는 ― 아스라한 침잠이나 지킬 것인가. 
하여간 이 하나도 서러울 것이 없는 것들 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 하는 미물 하나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섣불리 우리 어린 것들에게 설움 같은 걸 가르치지 말 일이다. 저것들을 축복하는 때까치의 어느 것, 비비새의 어느 것, 벌 나비의 어는 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숭어리의 어는 것에 대해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 받는 슬픔이란 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 
이것들의 초밤에의 완전귀소가 끝난 뒤, 어둠이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과 산과 냇물을 까마득히 덮을 때가 되거든,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가리켜 보일 일이요, 제일 오랜 종소리를 들릴 일이다. 
 

 

 

상리마을 내리는 안개는

         - 박찬 -


  바람도 제 갈길을 잃고 스러지는 골짜기
  무슨 부끄러운 몸뚱아리 감추려고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헤매는 혼백 거두어 가려고
  하늘의 문 열어놓고 흐느끼는가

  무슨 흉한 징조로 대꽃은 피고
  음정을 잃고 찢어지는 하늘

  매운 고추냄새도
  아린 손끝도 아랑곳없던
  물맛 같은 백성들
  흔들리는 어깨 위로 떨어지는 천둥 번개여
  황토, 질척거리는 땅바닥에 코박고 죽은 하늘이여

  보드랍던 신록의 숨결
  대숲은 마른 피바람 소리만 웅웅거리고
  시신들의 서걱이는 발자욱 소리 들려오는

  상리마을 내리는 안개는
  부끄러운 이 땅의 설운 혼들이
  하늘까지 쳐 놓은 하얀 장막인가

 

 


 상사(想思)
        - 김남조 -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골수(骨髓)에 전화(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상수리나무들아

       -이은봉 -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너희들이 좋구나 너무 좋아 쓰다듬어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그러다가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나, 너희들 들쳐 업는구나 너희들, 나 들쳐 업는구나

 

우거진 잎사귀들 속, 흐벅진 저고리 속

으흐흐 젖가슴 뭉개지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그렇구나 네 따뜻한 입김,

 

부드러운 온기 속으로

나, 스며들고 있구나 찬찬히

울려 퍼지고 있구나

너희들 숨결, 오래오래 은근하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껍데기들아

껍데기 두툼한 네 몸속에서 작은 풍뎅이들,

속날개 파닥이고 있구나 어린 집게벌레들, 잠꼬대하고 있구나

 

그것들, 그렇게 제 몸 키우고 있구나

내 몸에서도 상수리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쌉쌀하구나 아득하구나 까마득히 흘러넘치는구나.

 

 

 

   상사화의 단조음

                  - 장충열 -


                   먼 길을 돌아도 제자리에 설 수밖에 없다

                   노을에 어리는 가녀린 모습이 우련한데

                   꽃대궁은 날마다 비운의 전설을 탄주한다

 

                   물기찬 눈에 어려 서로 그리던 흔적은

                   어둔 하늘가에 서글픈 덧칠만 하고 있다

                   언제나 갈망의 구도構圖는 마음의 그림일 뿐

                   하나로 묶는 자물쇠는 어디에도 없다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하여 피워올린 상사相思의 빛깔이

                   지친 기다림으로 서서히 사그라진다

                   벅찬 공기 속에서 꿈꾸었던 만남은

                   이토록 세월을 두고 기나긴 벌罰로 내리는가

 

                   바람결에 파문 일어 고통의 가락 전해지려나

                   거리가 좁혀지면 손 닿을 듯 비탈로 다가서고

                   거리가 멀어지면 잃어질 듯 아슬히 흐려진다

 

                   아무도 모르게 정적을 깨는 심오한 떨림

                   하나의 선線에서 복제된 영혼은

                   끊임없이 서로의 모습을 찾고 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한하운(韓何雲) -

지나가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웠다.

여기 있는 것 남은 것은
욕(辱)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마는.

아 꽃과 같던 삶과
꽃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葛藤)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잠깐이라도 이 낯선 집
추녀밑에 서서 우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싸늘한 이마

           - 박용철(朴龍喆) -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왼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뚜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길 잃은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한 즐검이랴

 

 

쌈지골목
          - 博川 최정순 -

 

우리네 전통 거리 인사동

수많은 골동품 수예품 미술품

눈으로 손으로 이어진 고아한 맵시

골목골목 화려하고 찬란한

꽃으로 만발하였었지

외국인들마저 눈에 불을 켜고

끊임없이 소리 높여 감탄하던 곳

무계획 무차별 신개발

사랑방 터전 허물어져

세월의 칼날 팔다리 잘려나가고

악세서리 잡화점만 매소부처럼 늘어섰네.

주머니 골목이라 쌈지골목

명맥의 맥박만 겨우 헐떡이며

오가는 사람 처량한 눈길 주니

나이 들어 내침 당하는 나의 모습 같아

애처롭기 그지없네.

 

 

새 

  - 김종삼 -

또 언제 올지 모르는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새 한 마리가 가까이 와 지저귀고 있다. 
이 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고운 소리가 
천체에 반짝이곤 한다. 
나는 인왕산 한 기슭 
납작집에 사는 산사람이다.

 

 


   - 천상병 -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 
새날이라 새가울고 꽃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 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 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가 나무 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일도 있었다고 
나쁜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마리 새.

 

 

 

새 1/박남수

 

 1

하늘에 깔아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쭉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새 2


이른 녘에 
넘어오는 햇살의 열의를 
차고, 
산탄처럼 뿌려지는 새들은 
아침놀에 
황금의 가루가 부신 해체. 
머언 기억에 
投企된 순수의 그림자.


새 3


나의 내부에도 
몇 마리의 새가 산다. 
은유의 새가 아니라, 
기왓골을 
쫑, 
쫑, 
쫑, 
옮아앉는 
실재의 새가 살고 있다.

새가 뜰로 나리어 
모이를 쪼든가, 
나뭇가지에 앉든가, 
하늘로 
날  
든가,

새의 意思를 
죽이지 않으면,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족히 산다.

새는 나의 내부에서도 
쫑, 쫑, 쫑 
기왓골을 옮아앉으며 
조그만 자연이 된다.


새 4


바람에 갈대가 우는 
발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포인타는 코를 저으며 
갈밭을 허비다가 코를 들었다. 
코의 방향으로 뚫린 
포수의 총구, 
새는 투망처럼 하늘에 뿌려지고, 
펑, 
울린 맑은 공기의 구멍. 
구멍에서 그려나가는 파동의 끝에 
날개는 너울 
너울 기울며, 떨어져간 
한 마리의 새.

 *

펑,
 
소리의 에코. 
새들의 vie는 
진공지대에 울린 총소리 속에 있었다.

  *

갈밭이 갑자기 물결치더니 
머리를 내어민 
포인타의 입에 물리인 
피 묻은 갈대가 우는 
발 밑으로는 
역시 물이 흐르고 있었다.

 

 

 

  - 이숙희 -


  우리의 시작은 날개를 흔드는
  거기서 이어진다
  우리의 울음은
  노래로 살아 남아
  석자 혹은 넉자 그 이상 크기의
  나무 위에서 날개 부비며
  생사의 확인을 위해
  이녁의 물동이에 나뭇잎 하나
  띄우고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부리로 벌레 또는 나무의 진을 쪼며
  달빛에 몸 적시는
  생존이 끝날 때
  다시
  긴 노래로 몸을 태우기도 한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 류시화 -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새 날의 기원

        - 김해강(金海剛) -

 

1.

새해라, 첫 아침

동녘 한울엔 붉은 햇살이 뻗혀오르나이다

무릎꿇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한껏 떨리옵니다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새로운 붉은 해가 돋아오르사이다

새로운 힘이 뛰고, 새로운 기쁨이 피어날

가장 경건한 아침이 열려지이다


2.

해마다 첫새벽이 오면 비옵는 마음

이해라 다름이 잇사오리까마는

팔짚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더욱 두근거리옵니다.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적은 일이옵든 큰일이옵든

하고 많은 가운데 한 가지일지라도

이 해에만은 뜻대로 일우어짐이 있어주소서


3.

새해를 맞이하옵는 마음

가슴이라도 베여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어깨라도 끊어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오오 새 날이여!

이 땅에 열리소서. 힘차게 열리소서.

이 땅에 빛나소서. 아름다이 빛나소서.


-계유원단(癸酉元旦)에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새로 돋는 풀잎들을 보며

                   - 오승강 -

 

  누이는 영해로 시집가고 재행길
  일가붙이 모여
  신랑을 다루며 웃고 들썩일 때
  서른 한 살 처녀인 고모는
  외딴 방에서 그 소리 귓전으로 들으며
  쓸쓸히 피 쏟아가며 죽어
  우리 식구들 경황없어
  이리뛰고 저리뛰며 그 죽음을 숨길 때도
  오늘처럼 세상은 봄이 와서
  주검 아래서도 풀잎 돋는 소리
  새들 두런거리는 소리 들렸었고
  내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며
  침묵속으로 또 빠져들 때
  세상엔 더 많은 꽃들이 피어
  내 더 쉽게 슬퍼지던 것을
  또한 무엇엔가 홀린듯
  경황도 없이.

 

 

 

새를 위하여

        - 황인숙 -


  우리는 서로 얼마나 닮았는가, 새여
  그대 날개에 돋는 소름으로
  땅거미를 지나칠 때
  나무들은 둥지를 기울여 보인다
  일기장 갈피에서
  잘 마른 시간이 너울너울 떨어져
  부리 끝을 스친다

  나무를 지워버리렴
  그 둥지가 여기가 아니고
  항상 저 너머인 나무
  항상 한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날으는 순간만 (여기)일 새여

  내 굴 입구의 금빛 나무가 쓰러지며
  내뻗은 검지 손가락에
  지평선이 걸려 터졌을 때
  내가 방향을 버리고 고개를 쳐들었듯
  그대 나무를 지워버리렴

  글쎄 그대가 왜 날개에 소름이 돋아
  땅거미에 걸려 바둥거릴 것인가?
  나무를 지워버리렴
  그러면 그대는
  어디서나 자유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둥지를 위해서는 날을 것 없이
  온 벽이 부드럽다

 

 

새벽

   - 이병철 -

 

닭아

가만 가만  

숨 쉬면서

오래 밤을 숨쉬면서

 

어스럼

벼달 딸이

눈에 삼삼 그리면서

얼마나 이 아침을 기디렸느냐

샅샅이

어둠을 털고 내려와

 

벼슬

그윽히 목을 뽑아 울어라

하믈까지 울어라

얼마나 이 아침을 기다렸느냐

 

 

새벽의 노래 1

       - 박 몽 구 -


삶에 쫓긴 사람들 사이에

세워져 있는 빙벽

찬바람에 눈을 닫고

당신을 생각노라면

끊긴 실매듭처럼 제멋대로 얽힌 내 속은

어린 날의 철길처럼 죽 펴진다

수정시계 같은 몰인정한 완벽함

굳어버린 표정보다는

거짓 없이 바람을 얻는 풀처럼

등이 다 벗겨져도

아프지 않을 친구야

문득 끝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당신 얼굴이 내 가슴 깊이

들어와 밝은 눈이 되면

구겨진 휴지처럼 무의미하던 책들도

다시 갓 길어올린 숭어의

파닥임으로 아가오고

막혔던 길 환희 트이네

원한 같은 살과 살

끝내 만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피부를 넘어

하나가 된 친구여

우리들의 맞잡은 손

사막에 물이 흐르게 하고

목마른 사람들 한 모금씩 축여

벽을 넘어 얼음을 깨고 갔으면......

 

 

새벽의 노래 2

 

찬바람 씽씽

지울 수 없는 음지를 거느린

빌딩들의 키에 막혀

가슴 없는 사람들의 무표정에 가려

당신의 머리 끝 보이지 않아도

나 언제나

당신 곁 맴도는 순환열차

제아무리 시간의 벽이 매서워

우리를 각자의 시간으로 떼어 보내도

풍족한 자리를 함께 해

보이지 않게 이마를 맞대네 친구여

말 없는가 하면

벌써 자목련 미소를 띤 친구여

네 서늘한 미소로 하여

진종일 의미 없는 글을 붙이고 자르던

내 가슴은 아스파라거스 생생한 의미를 띠고

일을 위한 일에 붙박여 있는 나일지라도

내일의 꿈을 꾼다 친구여

 

새벽의 노래 4

 

천리향은 날개를 달지 않았어도

그 향기 천리를 간다던가

꿀벌의 그리움은 망원경을 보지 않고도

험한 산 깊은 강도 마다 않고

수백 리를 날아

그를 마음놓고 맡길 꽃에게 간다던가

까치집 흔들리는 바람 소리뿐인

이 좁은 방에서

깔지 않아도 더욱 또렷한 기찻길 따라

그대 검은 머릿결 찾아가네

낙엽이 쏠리면서 나그네 수심 다 거두어가듯

말 없어도 내 해진 가슴을 다 알고 있는

그대 보석 같은 침묵을 만나러 가네

묶이지 않는 자유 한줌 찾아

천리 밖에서도 이토록 그대를 환히 보네 

 

 

 

 새 우 잠 
              - 이가림 -


전세에서 전세로 쫓겨다니는 
변두리 내 식구들, 그 무슨 기다림에도 길든 
30촉 전등불의 정다움을 찾아 
눈 내리는 자갈밭 술 취해서 간다 
밤마다 새우처럼 허리 구부리고 
나는 어린 딸의 발가락을 만지며 잔다 
이 石花 껍질 같은 지구의 한모퉁이 
살아 있는 몇 마리 새우들 
고달픈 어미는 가로로 쓰러지고 
새끼들은 세로로 쓰러져서 
차디찬 식은땀의 잠꼬대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싸움이냐 
꿈속에서도 깊은 바다 밑을 헤매며 
검은 상어에게 쫓겨다니는 길뿐이니 

 

 

 

새 이야기

          - 이성복 -


지금 새의 발끝에서 오리나무 가지가 
알아듣는 이야기,오라비의 손이 놓인 
누이의 어깨처럼 오리나무 가지가 느끼는 
이야기, 오리나무 혼자서 견디는 이야기

 

 

새의 암장

      - 박남수 -

 

새의 암장

사방이 갇힌 새장

날개가 무슨 소용 있으랴

갑자기 새장속 세상에 날고 있는 것 같다.

 

 

샘물이 혼자서

         - 주요한 -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사이로

  하늘은 밝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생각과 사이

        - 김광규 -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생명

     - 김남조 -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벌어지고 피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 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께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생명의 서(書) 
                     - 유치환 -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여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물선언

      - 윤인영 -


  모른 체
  못본 체
  못들은 체
  한 포기 풀잎이 될 것이다

  한 방울의 이슬이면 족하다
  한 방울의 빗물이면 족하다

  세상 안에서
  바람을 토하는 풀잎이 될 것이다
  세상 밖에서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원시의 풀잎이 될 것이다

  하늘은 우산의 넓이면 족하다
  땅은 방언의 철로부근
  반평쯤이면 족하다

  아침에 파릇하고
  저녁에 시들어버리면 족하다
  얼굴은 없어도 족하다

  그대로 흘러가는 속에서
  살아가면 족하다
  그대로 흘러가는 속에서
  죽어가면 족하다

  그대로
  흘러가는
  속에서.

 

 

 

생(生)의 감각(感覺)

          - 김광섭(金珖燮) -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는 것이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런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시킨 -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

 

슬픔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기필코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난 것은 모두 그리워만 진다.

 

 

 

서도 여운(西道餘韻)- 옷과 밥과 자유

                   - 김소월 -

 

 
공중에 떠다니는

저기 저 새요

네 몸에는 털 있고 깃이 있지

 

밭에는 밭곡식

논에는 물베

눌하게 익어서 숙으러졌네

 

초산(楚山)지나 적유령(狄踰靈)

넘어선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니?


 

 

서리꽃

        - 유안진 -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서림사 2

     - 박현서 -


  처녀 죽은 수살귀들이
  수십 년씩 자란
  음모의 숲에 묻혀
  울고 있다.

  풀벌레 숨소리에도
  숲은 흔들리고
  늪엔 파문이 인다.

  서성이던 산사의 밤안개가
  밤의 깊은 곳을 더듬고 있다.

  늪은
  또 한 차례 전의를 모으고
  몸서리치며
  격랑에 떨고 있다.

  언제까지나
  마르지 못하는
  숲 속의
  늪
  이제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서 시(序詩)
         -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 이시영 -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들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서시

         - 이석 -


        --사연

  방 안에서 살빛이 낡고
  문 밖에서 바람을 느끼는 날
  몇 번 더 불같은 아픔을 견디어야
  썩돌이 숨트는 노래를 부르릿까

  오늘도 저 하늘 뜬구름에게
  마지막 열망을 던져보는
  서글픈 하루

  어찌하여 지금은
  시와 술이 서로 의리를 끊고
  그날의 징소리에 입맞이 쓸까

  저 먼 하늘
  누런 햇볕 속에 반짝이던
  백마의 흰 갈기
  그 빗질하는 바람을 타고
  오늘을 살았는가

  그 시정 어느 거리
  황폐한 웃음 인족에 좇기어
  절며 뒤퉁거리는 닭이 되어
  중도 속도 아닌 시인이 되어
  오늘 오늘을 살았는가

 

 

 

서산 사투리 1

     - 김순일 -


  내 얼굴에는 늘 바보스럽게 헤에 웃는 웃음이 붙어다녀서 사람되기는 다
틀렸다고 한다 피사리를 가서도 피대신 벼를 뽑아 놓고도 헤에 웃는다고
주인한테 퇴박맞고 이른 새벽부터 논두렁에 나와 웃는 그 웃음소리만 들어도
하루종일 재수없다고 사람들은 투덜댄다. 막거리 냄새만 맡고도 절로 나오는
그 바보스런 웃음 때믄에 술맛이 없다고 잘 끼워주지도 않고 초상집 시신
앞에서까지 웃는다고 뺨을 맞으면서도 헤에 웃는다.
  병원엘 가 보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절에도
갔었지만 헤에 웃는 나를 내려다 보시던 부처님이 한바탕 웃어대더니 지성들릴
게 따로 있지 어서 가라고 한다.
  '무슨 웃음이 그렇지 부처님도 꼭 바보스럽구먼'
  나는 시무룩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오면서 별 희한한 일이라도
엿본 듯이 헤에 웃는다.

 


       서산 사투리 16


  눈이 내리는 밤
  시골은
  눈빛만으로도 훤했다

  등잔불 및에서
  콧구멍이 까매지도록
  '흙'을 읽었고
  어쩌다
  촛불을 켰을 때
  너무 환해서 황송했다

  요즈음은
  그믐밤도
  대낯처럼 밝은 세상
  30W 불빛에서는
  아예 일손을 놓는다

  세상은 점점
  밝아지는 것일까
  어두워지는 것일까

 

 

 

서울

    - 박재릉 -

 

  저렇게 하늘이 얕아서 쓰겠는가?
  광화문부터 종로를 사뭇 걸어가노라면
  지붕이며, 유리창이며, 간판이며, 모두들
  저렇게 얕게 하늘 가까이 들러붙어...

  연변의 경복궁은 저만큼 먼발치서 차라리
  안 보이는 뒷뜰의 그 응향의 먼지 낀 냄새들을 쭈그리고 앉아
  낡은 섬돌의 이끼 낀 침묵들을 묵묵히 맡고 섰다.

  아, 그 누가 알 것인가?
  머언 그 옛적 머언 그 조선 시절에
  구중에서 안락하게 살다 간 이들이
  지금은 무릎까지 시려 오는 그 제단에서 드디어는 떠나
  저기, 저 눈부신 빛들을 화사히 줏어 입고들 나와 선 것을...
  층층벽으로, 모퉁이로, 길가로
  바람에 채일 듯이 싸늘히 선
  낯선 저 얼굴들 위에, 눈빛 위에, 몸짓 위에.

  그리고 그 예리한 빛들이, 지금은
  지붕 위에서 다락키 만큼 높은 그 끝까지 다가붙어
  위태로이 그 위를 닿으려고 저마다 날카롭게 빛이 선 것을...

  그래도 그래도 꺼질 듯이 흩날려 버릴 듯한
  이 서울이 끄덕도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저 삼각이나 북악 만큼 든든한 마음끼리
  이 바닥을 깊이 움켜잡고 있는
  힘 있는 어느 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렸다.

  돌이... 걸이... 돌이... 걸이 엇갈린 아우성들...

  고층을 오르내리는 그믈을 뜨는 손짓과 손짓들...
  앞뒤 물의 낯들... 엇갈린 선과 선들...
  수연이 그리워, 눈물이 그리워, 슬픔이 그리워, 그늘이 그리워...
  제 콧날 위의 하얀 제 별도 못 떠받아
  서울은 나부껴, 하얗게 가루처럼 나부껴
  ...

 

 

 

서울 길 
       - 김지하 -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 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도현 -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서울로 간다는 소

                 - 이광수 -

 

  깍아 세운 듯한 삼방 고개로
  누른 소들이 몰리어 오른다.

꾸부러진 두 뿔을 들먹이고
  가는 꼬리를 두르면서 간다

  움머움머 하고 연해 고개를
  뒤로 돌릴 때에 발을 헛짚어,
  무릎을 꿇었다가 무거운 몸을
  한 걸음 올리고 또 돌려 움머.

  갈모 쓰고 채찍 든 소장사야
  산길이 험하여 운다고 마라.
  떼어두고 온 젖먹이 송아지
  눈에 아른거려 우는 줄 알라.

  삼방 고개 넘어 세포 검불령
  길은 끝없이 서울에 닿았네.
  사람은 이 길로 다시 올망정
  새끼 둔 고산 땅, 소는 다시 못 오네.

  안변 고산의 넓은 저 벌은
  대대로 네 갈던 옛터로구나.
  멍에에 벗겨진 등의 쓰림은
  지고 갈 마지막 값이로구나.

 

 

 

서울야곡 2002

         - 원구식 -

 
정충보다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휴지에 싸여 더럽기 그지없는 쓰레기통에, 
냄새나는 무책임한 하수구에, 
때로는 변기 속에 머리를 처박고 
죽음의 유영을 할 것이다. 
폐기된 욕망의 찌꺼기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법! 
의심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큰 쓰레기통이 
그대 머리위에 있음을. 


정충의 집보다 안락한 곳도 없을 것이다. 
따뜻한 양수 속에 
자잘한 물방울들이, 
이유도 없이 뽀글거리며 
산소를 터뜨려 주는 어머니의 자궁. 
골고다의 언덕보다 단단한 골반이 
생명을 보장하는 그 곳. 
태고의 미역줄기들이 하염없이 떠도는 그 곳, 
따서 먹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그 곳,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한 몸뚱어리를 
안심하고 터억 맡길 수 있는 그 곳.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그 곳. 


봄비를 맞으면서 
정충처럼 남산을 걸어갈 때, 
나는 보았다. 

하늘 아래 가장 많은 십자가들이 반짝이는 서울의 붉은 밤을. 신 
생의 아침은 혼돈 속에 오는 것. 세상은 좀더 썩어야 할 것이다. 역 
사도 사랑도 이데올로기도 좀더 썩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도저 
히 더 이상 썩을 것이 없을 때, 희디흰 이빨을 소유한 혼돈의 종결 
자가 더 이상 두드릴 배신의 뒤통수가 없을 때, 신생의 아침이 정충처럼 꿈틀거리며 서울의 자궁을 두드릴 것이다. 이렇게....... 

아, 
어느 님이 버리셨나. 
하루가 천 날 같은, 
천 날이 하루 같은, 혼돈의 꽃다발을.......

 

 

 

서울의 유서

            - 김종철 -

 

  서을은 간을 앓고 있다
  도착증의 언어들은
  곳곳에서 서울의 구강을 물들이고
  완성되지 못한 소시민의
  벌판들이 시름시름 앓아 누웠다
  눈물과 비탄의 금속성들은
  더욱 두꺼워 가고
  병든 시간의 잎들 위에
  가난한 집들이 서로 허물어지고
  오오 집집의 믿음의 우물물은
  바짝바짝 메마르고
  우리는 단순한 갈증꽈
  몇개의 죽음의 열쇠를 지니고 다녔다
  날마다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양심의 밑둥을 찍어 넘기고
  헐벗은 꿈의 알맹이와
  약간의 물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밤마다 죽음의 깊은 지하수를
  매일매일 조금씩 길어 올렸다
  절망의 삽과 곡괭이에 묻힌
  우리들의 시대정신에서 흐르는 피
  몇장의 지폐에 시달린 소시민의 운명들은
  탄식의 밤을 너무나 많이 싣고 갔다
  오오 벌거숭이 거리에
  병들은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새벽 두시에 달아난 개인의 밤과
  십년간 돌아오지 않은 오딧세우스의 바다가
  고서점의 활자 속에 비끌어매이고
  스스로 주리고 목마른 자유를
  우리들의 일생의 도둑들은 다투어 훔쳐 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죽음의 눈들은
  집집의 늑골 위에서 숨죽이며 기다리고
  콘크리트 뼈대의 거칠거칠한 통증들은
  퇴폐한 시가의 전신을 들썩이고
  오염의 찌꺼기에 뒤덮인
  오딧세우스의 청동의 바다는
  몸살로 쩔쩔 끓어 올랐다
  그때마다 쓰라린 고통의 서까래는
  제풀에 풀석풀석 내려앉고
  우리가 앓는 성병 중의 하나가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어디서나 단순한 목마름과
  죽음의 열쇠들은 쩔렁거리고
  세균으로 폐를 앓는 서울은
  매일 불편한 언어의 관절염으로 절뚝이며
  우리를 소시민의 가슴에 들어 와 몸을 떨었다.

 

 

 

 

서풍西風 
             - 셸리 -

 

       1

오, 세찬 서풍이여 , 너, 가을의 숨결이여,
요술사 앞에서 망령 달아나듯, 보이지 않는 네 앞에서
쫒겨  휘날리는구나, 죽은 잎사귀들이,

누렇고 검고 열 오른듯 붉은,
역병疫病에 걸린 자들의 무리가. 오, 너는
날개 돋힌 씨앗들을 어두운 지하의 겨울 잠자리로

몰고가니, 무덤 속의 시체처럼
씨앗들 저마다 싸늘하게 지하에 묻혀 있으나 마침내
네 누이, 파란 봄 바람은

꿈꾸는 대지 위에 나팔을 불어대어
(양떼처럼 향기로운 꽃봉오리  대기 속으로 몰아 기르고
들과 산을 생동하는 색깔과 향내로 채우게 되리.)

너, 움직이지 않는 곳이 없는 세찬 정기精氣여, 파괴하면서
동시에 보존하는 자여, 들으라, 오, 들으라!
 
          2
 
가파른 하늘의 소란 속에서, 너 흘러가는 힘에 의해서
대지의 죽어가는 잎사귀들처럼, 하늘과 대양의 엉클어진 가지로부터
떨어져 흩어지는구나, 구름조각들이.

비와 번개의 예언자들이, 그 다가오는
비바람의 머래채들은 네 푸른 하늘의 파도를 타고
마치 어떤 사나운 *<미내드>의 머리에서

솟아 오른 빛나는 머리칼처럼
아득한 지평선 끝으로부터 높은 하늘
꼭대기까지 뻗어 있구나, 너, 죽어가는

해의 만가挽歌여, 네게는 이 저물어가는 밤 하늘도
수중기로 뭉쳐진 네 모든 힘으로 바쳐진
커다란 분묘의 <돔>과 같으리.
그리고 그 뭉쳐진 대기층으로부터
시커먼 비와 번개와 우박이 쏟아져
나오리라, 오, 들으라!

 

          3

 

너는 새파란 지중해를 여름의 꿈에서 깨웠구나.
지중해는 그 때 *<베이이>만의 부석浮石 섬 가에서
수정같은 제 물결이 돌돌 말리는 소리에 위로받으며 누워서
해 묵은 궁전들과 누각들을 꿈속에서 보았다.
그 궁전 , 누각들은, 파도 속에서 더욱 강렬히 반짝이는
햇볕에 떨며, 파란 이끼와 꽃들로 뒤덮혀 있었다.
그 이끼, 곷들의 향기로움, 생각만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누나! 너 가는 길 위해
대서양 위에 탄탄坦坦히 펼쳐있는 군세軍勢들도
갈라져 이랑 되고, 바다 깊은 곳에서는
태양의 수액樹液 없는 잎사귀 지닌 미끈거리는 나무들과
바다 꽃들이 네 소리 알아보고
갑자기 기겁하며 재빛이 되어
떨며 꽃과 잎이 우수수지는구나. 오 들으라!

 

           4

 

내가 만일 불어가는 한 잎의 죽은 잎사귀이며
너와 날아가는 한 점의 재빠른 구름장이며
오, 분방奔放한 자여! 비록 너 만큼은
분방치 못할지라도 네 힘에 깔려 할닥이며
네 힘의 중동을 나눠 가지는 한 이랑 파도라면
만약 네 하늘 나는 속력을 앞지른다는 것이

거의 환상같지만은 않았던 그 옛날처럼
소년시절이라도 되어, 하늘을 방랑하는 네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이렇게, 심한 괴로움 속에서 기도하며

너와 겨루지는 않았으리라.
오, 파도처럼, 잎사귀처럼 구름처럼 일으켜다오.
나는 가시밭 인생에서 쓰러진다! 피 흘린다!

세월의 중압 밑에 얽매어 쓰러지고 있다.
세차고 민첩하고 자존심 강해, 너와 너무나도 같은 이 사람은.
 
            5
 
저 숲과 꼭 같이 나를 네 거문고 되게 하라.
저 숲의 잎사귀들처럼 내 입사귀 떨어진들 그 어떠리!
네 거센 소란한 음악도
 
나와 저 숲의 슬프나 감미로윤, 깊은 가을의 
정조情調를  느끼게 되리라, 사나운 정기인 너,
내  정신이 되라! 격렬한 자여, 너는 나 되라!
그리고 이 시를 주문삼아
 
불 꺼지지 않는 화덕에서 재와 불꽃을 흩어내듯
인류에게  내 말을 퍼뜨려라!
네 입술을 통해 아직 잠 깨지 않은 세상 향해

예언자의 나팔 소리 되라! 오, 바람이여,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느냐?

 

 

 서풍부
         - 김춘수 -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꽃인듯 눈물인듯
 어쩌면 이야기인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떠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두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꽃인듯 눈물인듯 어쩌면 이야기인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석고상

     - 소재호 -


  떠나가는 강을 바라보며 한줌씩
  창틈의 빛살로 연명하던 목숨.
  창밖을 내다보면
  도시가 그의 어둠을 끝내고
  깃발에게 바람을 메기며
  겨우 하나 남은 심장으로
  무거운 길을 연다.

  바람은 바람다운 입술로
  혓바닥으로
  우리가 소망하던 그림을 위해
  눈앞을 막아서는 캄캄한 것들에게
  목탄에 불을 일군다.

  귀 절이게
  강은 다시 돌아오고
  고적대처럼 돌아오고
  도마뱀 꼬리 팔딱거리며
  끊어져 나갔던 손발이 숲속에서
  수많은 분신으로 살아나와
  수레를 미는 천만의 눈빛.

  강가 버드나무 위
  물살을 가늠하는 높이에서
  찢긴 흰 옷자락
  아픈 생명을 흔든다.

 

 

 

석남꽃

         - 서정주 -

 

머리에 석남(石南)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나 죽는 바람에
네가 놀래 깨어나면
너 깨는 서슬에
나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죽어서도 살아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 볼꺼나

 

 

 

석류(石榴)

        - 曺 雲 -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은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빠개 젖힌
이 가슴.

 

 

 

석류꽃

         - 서정주 -

 

춘향이

눈썹

넘어

광한루 넘어

다홍치마 빛으로

피는 꽃을 아니는가?

 

비 개인

아침 해에

가야금 소리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무주 남원 석류꽃을...

 

석류꽃은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구름 넘어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우리는 뜨내기

나무 기러기

소리도 없이

그 꽃 가마

따르고 따르고 또 따르나니...

 

 

 

석류꽃

     - 이해인 -

 

  지울 수 없는
  사랑의 화인
  가슴에 찍혀

  오늘도
  달아오른
  붉은 석류꽃

  황홀하여라
  끌 수 없는
  사랑--

  초록의 잎새마다
  불을 붙이며
  꽃으로 타오르고 있네

 


석 문(石門)

       - 조지훈 -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석상(石像)의 노래
                 - 김관식 -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 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선동 저수지   - 박태일 -
       --죽지가 3


  선동은 푸른 동리
  버들숲 푸른 물가로 물방개 빙빙 돌고
  찔레꽃 골담초 사래 아래
  의령 박가 내 사촌들 발을 씻는 곳
  발을 씻다 흘러가는 닭털을 건지고 우는
  두돌나기 조카 저수지 안기슭에 지붕 올린
  고모 작은아버지 볼우물 이쁜 작은엄마
  선동 오르는 길 올랐다 물줄기로 떠돌면
  이제는 고인 물 하얗게 물때 낀 사금파리
  길을 이루어 물자새 새끼들 물가로 오르고
  방기 당기 물수제비 잠기는 사이사이
  강갈매기 발 접어 하늘 건너
  어디로 가나 고여 지새는 일가
  이냥 작아지는 무덤으로 차례 누워
  베롱나무 베롱꽃 흩는 버릇을
  어쩔까 아버지 마시던 물을 아들이 마시고
  그 물에 고인 할아버지를 손자가 찰방이는 바닥
  날개짓 요란하게 솟는 까마귀 한 마리
  오후 내 선동 물가에 서서
  꿈같이 한 세월이 다시 일가를 이루어
  저들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점점이 햇살이 찍어내는 물살 뒤로 바라보며
  내 아들과 이별한다.

 

 

 

선사의 잠

       - 이병천 -


  1
  길 끝에서 어둠이 온다
  우리가 질주해온 길을 역류하며
  내디딜수록 풀 길 없이 조여지는
  어둠

  바람은 낮게 포복하기 시작하고
  올마다 빛나던 옷을 벗은 나무들이
  빈 계절에 갇혀 떨고 있을 때나
  덤불에 잠복한 내 일상의 그늘까지 흔들려
  기다리자, 흩어지는 기운을 다독이고 있을 때

  그리고 안쪽에서부터
  겨울 숲이 울기 시작한다

  2
  쉴 곳을 찾지 못한 숫사자가 울고 있다
  가장 빠른 새벽에 이빨을 닦는 내 돌칼이
  덧없는 눈발을 받으며 허기를 채우고
  어둠은 뿌리를 내려
  무너지지 않는 가설의 집을 세운다

  세상에 출가한 바람이 돌아오거 있다

  3
  돌아가야 한다
  들짐승떼가 하루의 안식을 포기하고
  분노의 발톱을 겨누기 전에
  꺾여지는 두 개의 다리로 두 개의 계곡과
  산을 넘으면 닿을 수 있는 곳
  아내는 잊지 않고 동굴 밖의 가등이나
  사랑의 불씨를 밝혀두지만
  빈손이 찾아내는 길은 언제나
  물고기처럼 미끄러져 도망친다

  4
  인내의 아내여
  우리의 기억 속 허망한 늪으로
  첫눈이 쌓인다
  다시 부끄러운 우리를 맨몸으로 하고
  낮 동안의 숨가쁜 사냥을 연습하자
  무딘 돌칼은 오늘
  들짐승의 급소를 놓치고 땅에
  머리를 감추기도 했지만
  익숙하게 그대의 숨을 졸라본 뒤
  내 상처를 맡기고
  밝은 아침이며 어둠을 털어내며
  밖에 나서리라

  5
  산천의 온갖 것들이 뒤척일 때마다
  역사의 밤은 거듭 일어나
  제 땅의 잠들을 허락하지만 
  꿈에 쫓기는 것일까 들새 한 마리
  울고 간 밤하늘에
  누군가의 떠돌던 혼백이 걸려 빛나고 있다

  6
  홀로 오면서 깊어지는 잠의
  위선에게 말하리라

  그대의 품속
  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7
  그러나, 무엇이었을까
  새벽마다 그 천년의 잠을 깨우며
  부르는 소리

  수없이 얽힌 소리의 실타래를 따라서
  빼놓지 않고 우리를 깨우던 것은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1

               - 문덕수 -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 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란 우주(宇宙)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는다. 

 

 

선에 대하여

       - 손동연 -


  청솔밭 길을 따라
  청솔밭 길을 따라 뻐꾹 뻐꾹
  선산에 들면 낮은 어깨 드러낸 잔풀들 너머로 연신 출렁여 오는
  큰 무덤 작은 무덤 더 웃대 웃대꺼정의 생 엎드린
  그 아득함이여 어서 온 어서 온
  내 새끼야 덥석 손 잡아주던 밀양손공의 잔등 벗겨진 황토흙
  바라보노라니 눈물난다 사람들아
  이곳에 흐린 발 풀 때
  그들 덕에 한 상 잘 받던 물아 나무야 풀벌레야 아는가
  앞산 뒷산을 들었다 놓는 환장한 이 뻐꾸기 울음 속으로
  징검징검 놓고 가는 저들의 둥두럿한 선을
  아득하여라 이마 위로 하염없이
  몇 채씩의 궁전을 세웠다가 허물고 다시 세우는 구름의 노동이
  한창인 것을, 그게 뭐 별거냐고
  베옷 한 벌 빌어 입고 잠시 들렀을 따름인 세상
  어슬렁어슬렁 뒷짐지고 돌아서는구나 사람들아
  저들이 벗어놓은 버선코의 선을 가면
  거기 초가지붕이 대숲 아래 휘더니라
  달빛도 창호 흰 살에 묵화 한 폭 치더니라
  어딜 가나 만나는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의
  우리나라 널 뛰는 남끝동치마도 흔들리는 댕기의 선도
  연신 출렁여 오는 이 무덤의 선보다 더 깊고 그윽하랴
  청자로도 백자로도 감히 어쩌지 못할 선이
  선을 불러 업어 먹장빛 또 한 세상 넘어가고 있음을
  바라보는 일 절로 흥겨워진다.

 

 

 

선인장의 역설

        - 박홍원 -

 

  스스로의 뼈를 부수어 만든 마름쇠
  살갗에 박고,
  결식으로 발돋움하는 내핍의 사구
  선인장은 혼신으로 부르짖고 있다.

  발부리는 땅 속을 헤매지만
  연륜을 몰라
  가도가도 심해 빛 심해같은 마음으로
  맹물을 마시며 푸르른 목숨.

  능선인가, 골짜긴가,
  아슬한 정점 어디인가,

  몇 십 구비 그 끝에 피어나는
  태초의 정적 속에 빛살 터지는
  그러한 아침이 오기는 올까?

  온 몸이 눈이요, 이파리요, 꿈
  온 몸이 팔다리인
  두리뭉수리,

  포화 지나간 거리의
  벽돌 조각 사이나
  바람마저 메마른 어느 벌판에 던지워도
  스스로의 샘물에 목 추기며
  잃지 않는 균형으로 너는 있고,

  한 발짝만 들어서면
  너의 마음 언저리
  피안에 잇닿아 출렁이는 강물은

  태양을 부르는 풋풋한 육성인 양...

 

 

 

禪雲寺 洞口 (선운사 동구)
            - 서정주 -

 

禪雲寺 고랑으로 
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읍니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니다.

 

 

선취(船醉) 1

            - 정지용 -

 

배난간에 기대서서 휘파람을 날리나니
새가만 등솔기에 八月달 해ㅅ살이 따가워라.

 

金단초 다섯 개 달은 자랑스러움, 내처 시달픔.
아리랑 쪼라도 찾어 볼가, 그전날 불으던,

 

아리랑 쪼 그도저도 다 닞었읍네, 인제는 버얼서,
금단초 다섯 개를  삐우고 가쟈, 파아란 바다 우에.

 

담배도 못 피우는 숳닭 같은 머언 사랑을 
홀로 피우며 가노니, 늬긋늬긋 흔들 흔들리면서.

 

선취(船醉) 2


해협이 일어서기로만 하니깐 
배가 한사코 기어오르다 미끄러지곤 한다.

 

괴롬이란 참지 않어도 겪어지는 것이 
주검이란 죽을 수 있는것 같이.

 

뇌수腦髓가 튀어나올랴고 지긋지긋 견딘다. 
꼬꼬댁 소리도 할 수 없이

 

얼빠진 장닭처럼 건들거리며 나가니 
갑판은 거북등처럼 뚫고 나가는데 해협이 업히랴고만 한다.

 

젊은 선원이 숫제 하-모니카를 불고 섰다. 
바다의 삼림森林에서 태풍이나 만나야 감상할 수 있다는 듯이

 

암만 가려 드딘대도 해협은 자꼬 꺼져들어간다. 
수평선이 없어진 날 단말마의 신혼여행이여!

 

오직 한낱 의무를 찾아내어 그의 선실로 옮기다. 
기도도허락되지 않는 연옥에서 심방尋訪하랴고

 

계단을 나리랴니깐 
계단이 올라온다.

 

도어를 부등켜안고 기억할 수 없다. 
하늘이 죄여 들어 나의 심장을 짜노라고

 

영양令孃은 고독도 아닌 슬픔도 아닌 
올빼미 같은 눈을 하고 체모에 기고 있다.

 

애련愛憐을 베풀가 하면 
즉시 구토가 재촉된다.

 

연락선에는 일체로 간호가 없다. 
징을 치고 뚜우 뚜우 부는 외에

 

우리들의 짐짝 트렁크에 이마를 대고 
여덟시간 내- 간구墾求하고 또 울었다. 
  

 

 

설날 아침 
           - 김동리 -
 

새해라고 뭐 다른 거 있나

아침마다 돋는 해 동쪽에 뜨고

한강은 어제처럼 서쪽으로 흐르고

상 위에 떡국 그릇 전여 접시 얹혀 있어도

된장찌개 김치보다 조금 떫스름할 뿐

이것저것 다 그저 그렇고 그런 거지

그저 그렇고 그렇다 해도 그런대로

한 해 한 번씩 이 아침에 나는

한복으로 옷이나 갈아 입는다

 

 

 

설야(雪夜

         - 김광균 -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워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追憶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香氣도 없이
 호올로 차디 찬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설야(雪夜)

     - 김후란 -

 

흰눈이 지상을

깨끗이

덮는 날은

 

대지의 침묵이

흰 눈에

겁탈당하는 날은

 

절반쯤 감은

신부의 눈으로

이 허구(虛構)를 감내하는 날은

 

강물도 목이 잠긴

유현(幽玄)한 수묵화 한 폭.

 

 

설야의 장

      - 공중인 -

 

  새하얀 장미의 탄식과도 같이
  눈 내리는, ^6 236^마리아^356 3^의 밤!

  옛날의 그이를 사모쳐
  새하얀 공간에 가득히
  그려 놓은 새하얀 그림들이
  일시에 무너지듯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가 없는 추억을 묻히고
  밤을 묻히고, ^6 236^청춘^356 3^이 작별한
  나의 마음을 묻힌다.
  밤이 새도록 쉴 새 없이
  머언 그이의 사라진 발자욱처럼

  꽃과 나비와 낙엽들의
  쓰러져 하염없는 사연처럼
  눈은 내 고독의 숲을 내려 쌓인다.

  아- 이러한 밤에
  ^6 236^예수^356 3^는 태어났는가!
  바람들이 남기고 간
  이 새하얀 영원의 여백.

  하늘과 땅이 융합하는
  그 설백한 사랑의 노래는,
  그지없는, ^6 236^운명^356 3^을 우는
  나의 혼을 갈앉히우며
  세계를 덮는다.
  ... 눈 내리는 밤에.

 

 

 


설악산

    - 이은상 -

 

 설악산이여!
이 밤만 지나면
 나는 당신을 떠나야 합니다.
당신의 품속을 벗어나
 티끌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마지막 애닯은 한말씀
 애원과 기도를 드립니다.

설악산이여!
내가 여기와
 흐르는 물 마셔 피가 되었고
 푸성귀 먹어 살과 뼈되고
 향기론 바람 내 호흡되어
 이제는 내가 당신이요
 당신이 나인걸 믿고 갑니다.

설악산이여!
내가 사는 동안
 무슨 슬픔이 또 있으리이오.
아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통분할 일이 겹칠적이면
 언제나 사랑의 세례를 받으려
 당신만을 찾으리이다.

 

 


       설정

         - 강말주 -


  1
  눈이 내려
  내 가슴에도 내려
  소복이 쌓이는 고향 생각

  밟고 가면 지워질까
  마냥 걸어도

  그래도 좇아오는
  길고 긴 행렬.

  눈길은 철길처럼
  산모퉁이 돌아서 갔다.

  2
  가도 아니 가도
  고향길은 먼 천리길

  천리길 시린 한이
  발길에 맺혀
  나, 눈사람이 되어 주저앉겠네.

  할 말이 많아 눈이 오는가
  오도가도 못하는
  눈사람도 고향은 있어.

 

 

 

 

설화(雪 花

     - 이외수 -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時를 쓰면

눈이 내린다는 말 한 마디

 

어디선가

나귀 등에 몽상의 봇짐을 싣고

나그네 하나 떠나가는지

방울소리 들리는데

창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함박눈만 쌓여라

 

숨죽인 새벽 두 시

생각나느니 그리운이여

나는 무슨 이유로

전생의 어느 호젓한 길섶에

그대를 두고 떠나왔던가

 

오늘밤엔 기다리며 기다리며

간직해둔 그대 말씀

자욱한 눈송이로 내리는데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時를 쓰면

울고 싶다는 말 한 마디

이미 세상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온 한 생애가 부질없구나

 

하지만 이 時間 누구든 홀로

깨어있음으로 소중한 이여

보라 그대 외롭고 그립다던 나날 속에

저리도 자욱히 내리는 눈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길 하나

그대 전생까지 닿아있음을

 

 

  - 정현종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박시교 -

 

나는 가끔

사람들 사이에서

섬이 된다


살면서 가슴 베일 일 잦은 상처 많은 섬


세파에

밀려 떠도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섬이 된다

 

 

 

섬 7

    - 최준 -


  그 섬에 시계탑을 세우면서 사람들이
  시계를 쳐다보고 바다에 나가는 시간을
  앉아서 기다리고 무료한 기다림을 달래기 위하여
  잠을 껴안는다 소나무 그늘을 찾아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잠든다 이제는 해시계가 필요 없으므로 사람들은
  태양과 결별한다 날이면 날마다
  굿당만 소란하고 섬의 이마에 얹힌 태양 녹슬고
  바다에 이르는 언덕길만 길어지고 깊어져서
  섬의 전신을 덮고 있는 그늘 살찌고
  섬은 무거워진다 바다로 서서히 침몰해 간다
  꿈속의 시계소리 속으로 사람들은 용해되고
  거슬러 올라가는 태양의 길목에서 들숨 날숨
  섬은 익사한다 시계탑과 더불어
  태양이 마저 녹슬기 전에

 

 

 

섬에 누워

      - 홍희표 -

 

  섬이 날 가두고
  회오리 바람으로 날 가두고

  원산도 앞에는 삽시도
  삽시도 앞에는 녹도.

  파도가 날 가두고
  피몽둥잇 바람으로 날 가두고

  프랑크톤 위에는 조각달
  조각달 위에는 왕보리나무.

  젖은 예수님 걸어오고
  다리꺾인 게 걸어오고

  오, 열 두 입이 목메인 섬
  오, 하늘로 흘려보낸 섬.

 

 

 

섬진강1
         - 김용택 -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3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오는 저녁길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 익어 정들었으니
  이 땅에 정들었으리.
  더 키워 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섬진강 18
       --나루


  섬진강 나루에 바람이 부누나
  꽃이 피누나
  나를 스쳐간 바람은
  저 건너 풀꽃들을
  천번만반 흔들고
  이 건너 물결은 땅을 조금씩 허물어
  풀뿌리를 하얗게 씻는구나
  고향 산천 떠나보내던 손짓들
  배 가던 저 푸른 물 물 깊이 아물거리고
  정든 땅 바라보며
  눈물 뿌려 마주 흔들던 설운 손짓들
  두고
  꽃길을 가던 사람들
  지금 거기 바람이 부누나
  꽃이 피누나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던 뱃길
  뱃전에 부서지며 갈라지던 물살을 보며
  강 건너 시집 간 누님도 객지로 가고
  공장 간 누이들은 소식도 없다가
  남편 없는 아기엄마 되어
  밤배로 몰래 찾아드는
  타향 같은 고향 나루
  그래도 천지간에 고향이라고
  이따금 꽃상여로 오는 사람들
  빈 배가 떠 있구나
  기쁜 일 슬픈 일 제일 먼저
  숨가쁜 물결로 출렁이던
  섬진강 나루에
  지금도 물결은 출렁이며
  설운 가슴 쓸어
  그리움은 깊어지는데
  누가 돌아와서 이 배를 저을까
  오늘도 저기 저 물은 흘러, 흘러서 가는데
  기다림에 지친 물결이 자누나
  풀꽃이 지누나.

 

 

 

섬진강 강물 먹고

      - 김필곤 -


  일어서거라
  겨우살이 댓닢처럼 일어서거라
  병자년 산사태에 죽은 넋이랑
  피아골 전투의 전우들 넋이랑
  겉보리 까스라기처럼 일어서거라

  경상도 보리문동이 바람아
  전라도 호랑이 바람아
  지리산 화전민의 화난 바람아
  섬진강 강물 먹고
  반야봉 고사리 날것으로 먹고
  억새풀 울음으로 일어서거라

  도시것들
  노고단 언추리꽃 다 파가기 전에
  눈 속에 피어나는
  화개 칡꽃 향기로 일어서거라

  바람아
  바람아
  섬진강 강물 먹고 일어서거라.

 

 

 

   섬 1, 편지

      - 송재학 -


  아우로부터 편지가 왔다.
  고등 2년 때 가출한 그를 찾으러
  갈꽃 피는 여수 남쪽 섬을 간 적이 있었다.
  흙바람 가득한 섬은 아우의 행방보다
  더 나를 사로잡았고, 지금도 그를 보면
  흙바람같다.
  아우는 밤에 홀로
  사고한다고 썼다, 그리고
  편지 끝에 원서비용으로 6만원이 필요하다고
  부기했다.
  나는, 시골 관청의 8급 주사보이고
  점심은 사무실에서 시켜먹고 화투를 쳤고 가끔
  여자들이 도시에서 찾아왔다, 밤에는 그러나
  혼자 잠들고팠다.
  안개는 무시로 깔려와
  기관지를 자주자주 다치더니
  나는 몇칠의 병가를 내고 버스를 탔다.
  아우는 지방대학의
  철학과와 신축도서관에 묻혀지냈다.
  그의 흙바람내 나는 서랍을 뒤져보았다.
  스스로 고독한 짜르라 칭한 아우의 비망록
  악필이었던 글씨는 여전했고
  끝없는 단상과 부호같은 일기, 반 년 전부터 복용하는
  아이나와 에탐부톨이 칼로 자른 넋처럼
  하얗게 빛났다.
  결재화일과 대차대조표를 뒤적이다가
  봉화, 영양, 안동, 예천으로 출장을 떠나며, 나는
  혼자일 때는 머나먼 섬까지의 뱃시간을 베끼고.
  문득문득 아우가 보낸 편지가 왔다, 아우는
  회의주의학파의 색인을 정리하고
  나는 시를 쓰다 관두다 했다, 사흘마다
  숙직실에서 밤을 새웠다, 유리창은 늘 두텁게 서리끼고
  연탄가스는 조금조금 스몄다, 아침이면
  퉁퉁 부은 얼굴로 출근 도장을 찍고
  1,300원의 숙직비로 점심을 때우거나
  겨울 문예지를 샀다.
  아우는 19세기 러시아지성사를 번역해갔다, 나는
  섬이 외로움으로 깊어진 밤에
  이윽고 술을 마실 뿐.
  아우는 읽던 책을 건넸다, 나는 사람과 싸우며
  며칠을 끙끙거리고 아우는 아침마다
  스타디그룹에 나갔다.
  아우로부터 편지가 왔다, 밤에 스피노자 * 를 읽으면
  집 근처 신기료 사내는 마치
  우리들 보행의 자유를 위해 신발을 고치는
  도시의 스피노자처럼 보인다고 적었다.
  편지 끝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부기했다, 나는
  싸늘한 숙직실 유리창에
  서리 흔적으로 섬이라고 써보았다.

  *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시계유리알을 닦았다

 

 

성묘        
       - 고은 -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소금장수로
 이땅을 도도신 어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스양버들을 보셨지요.
 그리고 어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면서
 하얀 소금을 한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西道)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딸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떠다시 이 땅에 태아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장수가 되십시요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요.

 

 

 

성벽(城壁)

     - 오장환(吳章煥) -

 

세세전대만년성(世世傳代萬年盛)하리라는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그러나 보수(保守)는 진보(進步)를 허락치 않어 뜨거운 물 끼언고 고추가루 뿌리든 성벽은 오래인 휴식에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턱어리처럼 지저분하도다.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성불사(成佛寺)의 밤

         - 이은상 -

 

成佛寺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主僧)은 잠이 들고 객(客)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뎅그렇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일 젠 또 들릴까 소리나기 기다려져
 새도록 풍경 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성씨보(姓氏譜) - 오래인 관습,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 오장환 -


내 성은 오씨(吳氏).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룰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 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구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성장한 아들에게

                - 작자미상 - 

 

내 손은 하루 종일 바빴지.

그래서 네가 함께 하자고 부탁한 작은 놀이들을

함께 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너와 함께 보낼 시간이 내겐 많지 않았어.


난 네 옷들을 빨아야 했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해야 했지.

네가 그림책을 가져와 함께 읽자고 할 때마다

난 말했다.

“조금 있다가 하자, 애야.”


밤마다 난 너에게 이불을 끌어당겨 주고,

네 기도를 들은 다음 불을 꺼주었다.

그리고 발 끗으로 걸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지.

난 언제나 좀 더 네 곁에 있고 싶었다.


인생이 짧고,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갔기 때문에

한 어린 소년은 너무도 빨리 커버렸지.

그 아인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으며

자신의 소중한 비밀을 내게 털어놓지도 않는다.


그림책들은 치워져 있고

이제 함께 할 놀이들도 없지.

잘 자라는 입맞춤도 없고, 기도를 들을 수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어제의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


한 때는 늘 바빴던 내 두 손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길고

시간을 보낼 만한 일도 많지 않지.

다시 그때로 돌아가. 네가 함께 놀아 달라던

그 작은 놀이들을 할 수만 있다면.

 

 

성터에서

      - 김상억 -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의지의 고독한 여백이었읍니다. 속으로 운 바위의
노여움이며, 그렇게 참은 이끼의 고요한 노래 더불어, 나는 성터에서
숨가쁘지 아니하였읍니다. 진작 그가 깃발을 묻고 황폐함으로 하여 그의
정력이 이념보다 더 아롱져 있는 곳. 허허히 산 이마에 휘불리면서 지평을
가꾸신 그의 시도가 있고자 한 높은 의미이며 일체였음과 같이, 나는 그의
태초의 자리에 나를 지우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성탄제(聖誕祭)

         - 김종길 -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신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성탄제

         - 김종길 -

 

가슴에 눈물이 말랐듯이
눈도 오지 않는 하늘


저무는 거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동녘 하늘에 그 별을 찾아본다.


베들레헴은 먼 고장
이미 숱한 이날이 거듭했건만


이제 나직이 귓가에 들리는 것은
지친 낙타의 울음 소린가?


황금과 유황과 몰약이
빈 손가방 속에 들었을 리 없어도


어디에 또다시 그런 탄생이 있어
추운 먼길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


나의 마리아는
때 묻은 무명옷을 걸쳐도 좋다.


홍롱불 켠 판잣집이나 대합실 같은 데라도
짚을 깐 외양간보다는 문명되지 않는가?


허나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
오늘 하룻밤만의 감상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잠 오듯 흰 눈이라도 내리렴
함박꽃처럼 선의의 흰 눈이라도 내리렴!

 

 

스물여섯번째의 산책

          - 이능표 -


  철로 연변
  걸어가다 나는 솟아오른다, 뒤틀리는
  백의민족의 혈관 속을 돌아나오는
  바람은 짐승처럼 울고 있는데
  살을 벗어던진
  숲 속을 거듭 돌아나오는
  바람은 뜨겁게 울음을 놓는데

  끝없이 펼쳐진,
  명백한 이 약속의 땅에서 먹구름은 피어나는데.

  얼음장을 딛고
  자라온 풀뿌리는 더 자라 다오, 팔다리를 휘저으며 날아가는
  오늘도 내 무거움을 증거해다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향해 열려 있는가, 그리고

  살아 있는 풀벌레는 합창한다, 합창하라.
  흘러간 철길에 스며 있는
  피의 얼룩은 침묵한다, 침묵하라.

  불빛이 든다.

  백의민족의 걸음걸이를 이어받은 당당한 별...
  나는,
  숨가쁜 탄생을 예비할 때 무엇을 하는가?

  스물여섯 번째의
  얼음장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이 닿는 곳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나는 노래하고.

  엄동의
  무너진 터에서 나무는 잎을 맺고 뿌리를 뻗치고
  햇빛같은 나라는 세워지고 국민들은 모여든다.
  무성한,
  풀벌레는 아직도 합창하고 또는 침묵하고
  여기서도 나는 솟아오른다.

  어느 일요일

  내가 노래하는 것은, 노래의 귀
  이전에 한 사내가 노래한 노래의 눈, 코와 또 입
  가장 고귀한 것은
  팔뚝에는 따뜻한 핏줄이 고동치고
  근원이신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들이 살고 간
  이 거룩한 땅!

  철로 연변

  빨리 달려온 열차는 빨리 끊어지고
  느릿느릿
  그러나 열차보다 더 빨리
  이 막중함은 솟아오른다. 주름 접힌 물로써 언제든지 떨어지면서.

 

 

스승의 날 근처에서

                 -  博川 최정순 -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던가 하필 스승의 날 다음 날 텔레비에 이런 프로가 방영되다니 구제불능의 학생을 어쩔 수가 없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착하고 순진한 어느 여교사가 언성을 높히며 회초리를 들었다고 악동 친구 학생이 스마트폰인가 뭔가로 녹음하고 촬영하여 당한 학생에 건네서 학부형이 득달같이 찾아와 폭언 폭력을 과시하고 경찰에 고소하고 그야말로 난장판을 쳤던 게 아니던가 사회의 잘못인가 학생의 잘못인가 선생의 잘못인가 스승의 날 근처의 마음만 쓸쓸하네 창밖에는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봄비만 하염없이 내리고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 김종삼 -

 

그해엔 눈이 많이 나리었다. 나이 어린 
소년은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어디에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눈이 많이 나려 쌓이었다. 
바람이 일면 심심하여지면 먼 고장만을 
생각하게 되었던 눈더미 눈더미 앞으로 
한 사람이 그림처럼 앞질러 갔다. 

 

 

스카이 라운지  -반도 호텔 옥상 스카이 라운지에서  
             - 조병화 -
 

반도 호텔 옥상 글래스 룸은
서울의 스카이 라운지

 

노을이 번지는 유리창 안에서
이국종 사보텐처럼 술을 마신다

 

하강하는 항공기처럼
가벼운 날개를 밤이 내리면

 

서울은 창 밖에 북국
쓸쓸한 고도(古都)
부부의 화해처럼 깊어만 간다

 

영원한 정지 속에
호흡처럼 가는 생존

 

서울 옥상에서 술 마시는 이방의 베가본드는
친절과 교만의 미소를 놓고 간다

 

별이여
영원한 성(性)의 슬픔이여
어쩔 수 없이 옷을 벗는 나의 여인이여
조국이라는 이름의 땅이여
고독은 자유항
밤이라는 언덕이여

 

반도 호텔 옥상 글래스 룸은
서울의 스카이 라운지

 

밤과 별과 마음이 번지는 유리창 안에서
이국종 사보텐처럼 술을 마신다

 

 

슬픈 구도(構圖)
           -  신석정  -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 하늘 별이드뇨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

               - 조영출(趙靈出) -

 

눈 쌓인 허허 벌판

피ㅅ방울 흘리며 걸어간 발자욱

세찬 바람에 쏠리는 눈보라야

너는 이 발자욱 앞에 네 광란을 멈춘 일이 있었드냐.


눈싸락 차운 국경의 빙판

피 눈물 방울 흘리며 떠나간 발자욱


서슬이 푸른 아수라*의 별들아

너는 이 발자욱 뒤에 네 체포를 멈춘 일이 있었드냐.


오오 슬픈 압제의 밤은

가슴을 찔러 흐른 피에

사상(思想)이 꽃처럼 피다


눈보라 속에 파묻힌 님의 눈동자

마음의 광채


금ㅅ줄을 띠운 토방(土房)의 등불마다

강보의 어린 울음이 터져 올랐다.


님은 가고

여기 어린 생명은 살고

칼날이 선 울타리 속에

이 어린 목숨이 살어

 

지금 오오 지금

이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


보라 저 푸른 하늘

저 태극기 꽂힌 지붕을 넘어오는

흰 비둘기

붉은 태양


오호 붉은 태양아

슬픈 역사의 밤은 영원히 밝었느냐.


* 아수라(阿修羅) : 불교에서 이르는, 싸움을 일삼는 나쁜 귀신.

 

 

 

슬픔

     - 이은미 -


  하늘로 오른다면 어떨까

  덩어리져 쏟아지는 유성의 물결.

  긴 장마 끝
  지붕 위로 떠어지는 후박잎의 추락.

  시선도 젖어드는 늦가을 밤
  코 끝에서 만나보는 첫눈의 감촉.
  그것도 아니면,

  여위신 아버님
  휘저으며 가시는 당신의 걸음
  그 폭폭마다 묻어나는
  시리디 시린 눈물.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鄭浩承) -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슬픔은 누구인가

             - 정호승 -

 

  슬픔을 만나러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우리들 생의 슬픔이 당연하다는
  이 분단된 가을을 버리기 위하여
  우리들은 서로 가까이
  개벼룩풀에 몸을 비비며
  흐느끼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황토물을 바라보며 무릎을 세우고
  총탄 뚫린 가슴 사이로 엿보인 풀잎을 헤치고
  낙엽과 송충이가 함께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 형제여
  무릎으로 걸어가는 우리들의 생
  슬픔에 몸을 섞으러 가자.
  무덤의 흔적이 있었던 자리에 숨어 엎드려
  슬픔의 속치마를 찢어내리고
  동란에 나뒹굴던 뼈다귀의 이름
  우리들의 이름을 지우러 가자.
  가을비 오는 날
  쓰러지는 군중들을 바라보면
  슬픔 속에는 분노가
  분노 속에는 용기가 보이지 않으나
  이 분단된 가을의 불행을 위하여
  가자 가자
  개벼룩풀에 온몸을 비비며
  슬픔이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가지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승무

   - 조지훈 -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설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똥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양 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쓰레기장불

         - 고형렬 -


  쓰레기장에 빨간 불을 놓았다.
  이것은 옛날 몽둥발이의 모닥불이 아니고
  집채로 들고 갈 태풍이 아니다.
  타는 그 옛새끼오리, 헌신짝, 짚검불... 개터럭이
  아니라, 거진 50년 가까운 세월에
  맥주 캔, 나일론, 시집, 말, 지갑, 지루하다. 병, 소, 지루하다
  무슨 여름 낮이 15시간이나 되나
  구름장이 떨어져 이 쓰레기장불.
  뭐가 타서 다시 기름이 된다는 무슨 불사조같은 헛소리다. 손찌검을
하거라
  타는 건지 죽는 건지 알 길이 없는
  이 쓰레기장불. 어떤 것들의 혼귀가 묻혔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활화산이나
  50년 갖다 버린 구역질 나는 악취
  밀크, 초컬릿, 화장품, 프라스틱, 병균,
  흙도 쇠도 가죽도 유리도 똥도 시체도 음식물 찌꺼기도.
  갑자기 어깨를 물지게를 벗듯 벗고 싶다.
  여기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쓰레기장, 한 번 불꽃을 보지 못했던 쓰레기장 연기를 바라본다
  샛강 여닐곱 둑을 건너는 그곳에
  오리무중 속에 보인다
  석유 한 초롱 갖다 붓고 올까, 창자 속에 들어가 불이 되는 소주
  쓸어가자. 쓰레기장 그리로 그리로
  없을 때까지. 대비와 잔털 잘린 몽당 비와 갈퀴와, 아니면 불도우저로
쓸어
  태워서 묻자. 청산하고 싶어, 나도
  사랑, 노래, 비, 언어, 양말, 시멘트, 피, 눈물, 칼, 술, 책, 집...
집, 집
  내 몸 속의 쓰레기장 불
  쓰레기장 불

 

 

 

수(首)

     - 청마 유치환 -

 

십이월의 北滿(북만)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가성) 네거리에
匪賊(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한천)에 模糊(모호)히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律(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除(제)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法度(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烈(험렬)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暝目(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思辨(사변)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恩惠(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어는 현대어로 풀어썼고, 생략된 부분은 괄호를 넣어 해설을 곁들였다>

 

수(首)/청마 유치환


십이월의 북만(北滿)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에 모호히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律)의 처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人命)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除)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열(險烈)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한 사변(思辯)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수난의 장

     - 구상 -

 

  1
  우 몰려 온다. 돌팔매가 날은다.
  머슴애들은 수수깡에 소똥을 꿰매 달고
  어른들은 고꽹이를 휘저며 마구 쫓아 오는데
  돌아 서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선지피가 쏟아지는 이마를 감싸 쥐고서
  어머니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이제 어디메로 달려야 하는가.

  2
  쫓기다가 쫓기다가 숨었다.
  도갓집으로 숨었다.
  애비 욕 애미 망신 고래고래 터뜨리며
  벌떼처럼 에아싸고 빙빙 돌아 가는데
  나는 얼른 상여 뚜껑을 열어 제치고
  벌떡 드러누워 숨을 죽엮다.

  3
  피를 토한 듯 후련해지는 가슴이여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지는 마음이여
  사람도 토까비도 얼씬 못하는 상여 속에서
  나는 어느 새 달디 단 꿈 한 자리를 엮고 있고나.

  4
  상여 속에서 송장처럼 잠들은
  사나이 얼굴은 십상 달같이 흴게다.
  어쩌면 상달같이 깜찍한 여인이 별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상처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있어야 ? 풍경
  나의 달가운 꿈 속의 꿈이여.

  5
  추억의 연못 가엔 사랑의 연꽃도 한 송이 피었으리.
  다 홍신은 벗어 놓고 외로움에
  장승처럼 못 박혀 있는
  또 나의 사랑.

  6
  꽃다발처럼 화려한 상여를 타고
  림보로 향하는 길 위엔
  곡성마저 즐겁구나
  소복한 나의 여인아
  사흘만 참으라.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 장석남 -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수박을 먹으며

         - 유영 -

 

  이 물신한 수박의 살은 안토니오에게 손을 잡히고 홍조를 띠던 그 옛날
크레오파트라의 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야무진 씨앗은 내 하라버지이 하라버지 또 그 하라버지의 사복에
시달리던 머리털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려청자 같은 이 껍질은 중국 땅에 웅비하던 저 고구려 무사의
근육이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물신한 단맛에서 봄 여름 내내 손길이 끊일 길 없던 어느 산골
아낙네의 따스한 입김이 서린다.

  아낙네 옆에서 풀을 뜯던 갓난아이의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빛을 더하고 맛을 돋구고 부피를 가늠하던 조화의 안간힘이 땀이
혓가에 서린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단물에서 신의 피가 번진다.

  그리고 해와 달과 하늘과 땅이 각기 선물을 들고 수박으로 뛰어들던
고함소리가 들린다.

 

 

 

수라
      - 백석 -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하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디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아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이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수련별곡(垂蓮別曲

           - 김춘수 -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 땐가 다시 한번 
낙화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번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 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 이고 받든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떱디떫던 눈웃음은 누가 가지리오?

 

 

수수께끼

        - 조태일 -

 

  질문은 다소 강압적이겠지만
  답변은 자유로와야 합니다.
  질문은 다소 상상적이겠지만
  답변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첫번째 문제 풀어볼까.
  태양에 붙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낮?
  두번째 문제 풀어볼까.
  달에 붙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밤?
  세번째 문제 풀어볼까?
  섬에 달린 것이 무엇인가요?
  육지?
  네번째 문제 풀어볼까.
  풀잎에 축 처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땅덩어리?
  다섯뻔째 문제 풀어볼까?
  말소리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
  여섯번째 문제 풀어볼까?
  팔다리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몸뚱어리?
  일곱번째 문제 풀어볼까?
  대왕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백성?

  아이고 정신없어라.

 

 

수수깡을 씹으며

              - 정양 -

 

     떡 한 쪼각 주면 안 잡어먹지
     떡 한 쪼각 더 주면 너
     안 잡어 먹지
  이 땅의 호랑이들은 처음에는
  떡 한 쪼각만 달라고 하더란다.

  고개고개 너머 어쩌면 그리
  고개도 많은지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산모퉁이
  첩첩한 고갯마다
  안 잡아 먹히어 다행스러운
  숨이 가쁘다.
  굶어죽게 생긴 자식들
  산 너머 두고
  수수깡이나 씹으며 돌아가는 길
  가진 떡을 다 주어도 소용없는 고갯길.

     치마저고리 벗어주면 더
     안 잡어 먹지
     고쟁이까지 벗어 보이면 정말로
     안 잡어 먹지
  부끄럼도 욕됨도 잊어버린
  이 고개의 알몸,
  아무리 시달려도 소용없는 알몸,
     팔뚝 하나 띠어주면
     안 잡어먹지
     정갱이 하나 띠어주면
     안 잡어먹지

  고개고개 너머 어쩌면 그리
  고개도 많은지
  소용없는 정갱이 소용없는 허벅지 소용없는
  엉덩짝 소용없는 젖퉁이...
  기다리다 지친 자식들
  산 너머 두고
  넋 달아났으므로 아픔도 없는
  아무 소용없는 피비린내만
  소름끼치며 흩어지더란다.

  고을마다 피먹은 이야기들이
  깨물어도 깨물어도 소용없는
  수수깡으로 자라서 쓰러진다.

 

 

 

수선화
    - 김동명 -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날으는 
애닯은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 
가엾은 넋은 아닐까.

부칠 곳 없는 정열은 
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 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대는 신이 창작집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 
또한 나의 작은 애인이니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수선화

        - 함윤수 -

 

  슬픈 기억을 간직한 수선화
  싸늘한 애수 떠도는 적막한 침실.

  구원의 요람을 찾아 헤매는
  꿈의 외로움이여,

  창백한 무명지를 장식한 진주 더욱 푸르고
  영겁의 고독은 찢어진 가슴에 낙엽처럼 쌓이다.

 

 

 

수유리의 침묵

          - 김창완 -

 

  꽃샘바람 불리라 미리 알았다 해도 피고야 말
  진달래 무더기로 져 길 위에 나뒹군다.
  짓밟혀도 아프단 말 못하는 꽃잎 짓밟고
  손등으로 눈 비비며 황사속 더듬어 수유리 찾아가니
  꽃샘바람은 좁은 내 어깨 다시 움츠리게 하고
  말라붙은 입술도 트게 한다 그러니 침묵해야지.
  저물녘 두꺼워지는 산그늘 속으로 들어가는데 나에게
  내 키보다 훨씬 큰 그림자 앞세우고 돌아오는 나에게
  그러니 침묵해야지 아직은 침묵해야지 일러 주는 이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이냐는 물음에조차 입 다문다.
  돌에 새긴 그대들의 주먹 만큼 내 주먹은 단단하지 못하고
  돌에 새긴 그대들의 가슴 만큼 내 가슴은 뜨겁지 못해
  쓰다듬어 보아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내 손바닥엔
  감옥에서 보내온 아우의 편지가 구겨져 있을 있을 뿐
  형님, 형님이란 말이 돌멩이처럼 날아와 나를 때린다.
  작은 돌멩이들아 너희가 왜
  날아가 새 되지 못하고 떨어져 뒹굴며
  이 외면당한 변두릿길에서 짓밟히고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침묵해야지
  돌멩이들조차 그렇게 일러주는 수유리
  짙어지는 어두움.

 

 


순아

    - 박세영 -


순아 내 사랑하는 동생,
둘도 없는 내 귀여운 누이
내가 홀홀이 집을 떠날 제

너는 열 여섯의 소녀.

 

밤벌레같이 포동포동하고
샛별 같은 네 눈,
내 어찌 그 때를 잊으랴.
순아 너, 내 사랑하는 순아,
너는 오빠 없는 집을 버리려고
내가 집을 떠나자마자
서울로 갔드란 말이냐.

 

집에는 홀어머니만 남기고,
어찌하면 못살어
놈들의 꼬임에 빠져 가고 말었더냐.
어머닌 어쩌라고 너마저 갔더란 말이냐.

 

그야 낸들 목숨이 아까와 떠났겠니,
우리들의 일을 위하여
산 설고 물 설은 딴 나라로,
달포나 걸어가지 않었겠니.

 

어느듯 그 때도 삼년 전 옛 일,
내 몸은 헐벗고 여위고
한숨의 긴 날을 보냈을 망정,
조국을 살리려는 오즉 그 뜻 하나로
나는 양식을 삼었거니.

 

너, 내 사랑하는 순아!
빼앗긴 조국은 해방이 되여
왜놈의 넋이 타 버리고,
오빠는 미칠듯 서풍모냥 왔는데도
너는 병든 몸으로 돌아오다니.

 

딴 시악씨드냐,
그 고왔던 얼굴이 어디로 가고
내 그 옛날 순이는 찾을 길 없고나.

 

가여워라 지금의 네 모습
어쩌면 그다지도 해쓱하냐,
어린 너의 피까지 앗어가다니
놈들의 공장 악마의 넋이 아직도 씨였니.

 

그러나 너, 내 사랑하는 순아,
집을 돌보려는 너의 뜻 장하고나,
낮과 밤, 거리거리로
입술에 북홍칠하고 나돌아다니는
오직 행락만 꿈꾸는 시악씨들보다야.

 

왜놈의 턱찌끼를 얻어먹고 호사하며,
침략자와 어울리여 민족을 팔아먹으랴던
반역자의 노리개가 아닌 너 순아
차라리 깨끗하고나,
조선의 순진하고 참다운 계집애로구나.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눈을 밝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무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붙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무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 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 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떼,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 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불씨,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내린 숲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 
              되는 
              불씨, 불씨를 분다.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순환의 바퀴

           - 최승호 -

 

눈사람이라는 게 이미 순환의 바퀴이기 때문에 대륙횡단 열차의 바퀴 같은 것을 굳이 발 없는 눈사람에게 달아서 굴러가게 할 필요는 없다. 눈사람은 시냇물로 달려가는 바퀴이고 강으로 돌아다니는 바퀴이며 맑은 날이면 하늘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그 바퀴는 들꽃 속으로 들어가고 나무 꼭대기로 오르며 샘에서 다시 굴러나온다. 공중 목욕탕에서 솟아오르는 수증기를 보며 누가 바다 밑에서 팔 없이 헤엄치던 눈사람을 기억할까.

 

 

 

숨길 수 없는 노래2

             - 이성복 -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숨어서 우는 노래

              - 조병화 -


내 영혼은 
숨어서 우는 노래로 가득합니다.

내 사는 
숨어서 우는 노래로 젖어 있습니다.

아, 그렇게 
내 긴 생애는 숨어서 우는 노래입니다.

 

 

 

숨어우는 바람소리

           - 김연숙 -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

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

김이 나는 차 한잔을 마주하고 앉으면

그 사람 목소리인가 숨어 우는 바람소리

 

*둘이서 걷던 갈대밭 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

 잊는다 하고 무슨 이유로 눈물이 날까요

 아아 길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

 쓸쓸한 갈대숲에 숨어 우는 바람소리

 

 


 숨은 꽃

           - 장석주 -

 

  1
  너... 숨은
  꽃이 아름답다

  겨울 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또아리를 틀고
  짓누르는 땅거죽 헤집고 돋는 초록의 들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태연히 떠나갈 수는 없다

  핏방울 떨어지듯 앙징맞게 맺힌 꽃망울이여
  숨어서 앙칼지게 쏘아보는 꽃이여

  2
  징그러워라, 상처 아문 뒤 철죽보다 더 짙은 붉음으로
  타는 이 삶이 괴로움은 죄보다 더 가시같다

  세상에 태어나 이 괴롬보다 더 큰 괴롬은 없었다
  널 향한 미친 피의 참을 길 없는 줄달음질에
  난 서릿발 풀린 흙덩이마냥 부서지고 싶었다
  그러나, 보라... 삶은 징그럽고도 다정한 것,
  가량비 흐릿한 저 들녘에 하염없는 꽃상여 행렬을...

  우린 더욱 살아봐야 하리,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것
  살아서 타는 괴롬으로 더욱 생생히 빛나야 하리

 

 

술래의 편지

      - 박정희 -

 

  겨울이 다 간 뒤에
  나에겐 추위가 다가왔오.

  하루에 한 번
  봄에 앓던 학질은

  하루에 두 세 번
  여름 독감으로 이어졌오

  쇳물 녹이는 불가마에
  앉아서도

  나는 춥고
  또 추웠오.

  주사 바늘에 꽂혀
  파닥이는 검은 사지

  살아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거듭하던 죽음.

  창 밖으로 떼지어 날으는 잠자리
  눈부신 아이들의 술래잡기

  발돋움해도 당치않는
  높은 창 너머도

  달려가 잡히는
  술래가 되고 싶소.

  영영 달아나지 않는
  당신의 술래가 되고 싶소.

 

 

 

숯불

   - 서경온 -


  네 앞에 어찌
  내 괴로움 설 수 있으랴

  몸 사룬 불꽃에 또다시
  천연히 입술 대는
  저 무서운 사랑

  부러워라

  한 줌의 흰 재로
  육신 벗어두고
  맨발로 승천하는
  빠알간 춤

  어지러워라.

 

 

 

숲에 대한 응시 1

          - 박기영 -


  그대는 한참동안이나 내 뒤에 서 있는 나무였거나
  나무의 뒤에 숨어, 울고 있는 숲이었다
  빽빽이, 언덕을 덮으며 날들과 함께 슬픔이 자라고
  한 잎의 흔들림이 한 숲을 안개로 묻을 때까지
  나는 물방울 하나로 맺혀서 물방울 하나만큼의 무게로
  아픔 속을 공기처럼 떠돌았다. 생애 전부가
  숲에 묻히고, 숲 하나가 한 하늘을 이룰 때까지
  얼마나 많은 물방울과 흙들이 뿌리 속에서 남몰래
  뭉쳤다 풀어져야 하는지.
  기억이 닿지 않는 어느 선상의 시간에 이르러
  씨앗 속에 갇힌 내 몸을 흔들던 바람은
  지금 어느 나무가지에서 발생한 중력들로 이루어져,
  온 숲을 태양의 입김으로 펄럭이게 할
  태풍의 눈으로 자라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인력이 미치지 않는 범위 밖에서 땅위를 걷던 나무들이
  아무 산등성이에서나 멈춰 자라나고, 그 나무 끝에서 자라난
  아주 투명한 햇살의 한 줄기가 세월과 함께
  공기 속을 마음대로 물들이고, 길가 돌들이 일제히 눈떠
  내게로 걸어 올 때. 나무의 아들인 나와 풀의 딸인 그대가 만나
  한 세상 이루지 못하면 이 땅 그 무엇이 한 하늘을 이룰 것인가

 

 

 

숲의 전설

       - 하재봉 -


  하눌님의 아내를 닮은 나는 새벽이슬과 함께
  이 숲에 왔다 언제나 나뭇잎은 부드러웠고
  맛있는 열매가 번갈아가며 열렸으므로
  그는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도끼를 놓고
  땀을 씻고 있었다 내 투명한 옷은 아름다웠다

  나는 안다 아직 내가 그를 충분히 길들이지 않았음을
  공기만 먹고 살았는데 햇빛만 입고 살았는데
  내가 나뭇잎을 보고 말을 건넸을 때
  수런거리던 뿌리들의 마음처럼 그가
  바위 뒤에 숨어 내 옷을 눈여겨 보고 있음을
  나는 모두 투명하게 안다

  두 아이를 잠재운 이 저녁 새삼스레
  오막살이의 낮은 자리에 누워, 한때 내
  나비처럼 살던 곳을 바라본다 모르는 사람이
  오늘은 무척이나 많이 죽어 어지럽게
  푸른 별이 켜지고 덩달아 달도 크게 웃는데
  말못하는 나무 부둥키고 나는 울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내가 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맨살에 찬물을 끼얹을 때
  왜 마른 번개가 숲을 태우고 천둥이
  말 달리며 구름 위를 지나갔는가를
  내가 그의 몸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투명한 살이 다른 그 무엇으로 변해버렸음을

  나는 모른다 늙은 열매만 툭 툭
  발등 위로 떨어져 내 몸은 자꾸 무거워지고
  별들은 별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내 귀는
  나무껍질처럼 두꺼워져 알아 들을 수 없다
  숯장수인 내 애인은 속도 모르고 밤새도록
  불타는 아궁이 속으로 나무뭉치를 집어 넣었다

  날이 새면 그는 허리춤에 도끼를 꽂고
  더 높은 나무 찾아 나간다 성이 다른 짐승들
  고함 질러 다른 숲으로 몰아내고 사정없이
  밑둥을 찍어간다 그의 여자인 나는
  태양보다 뜨겁게 숯가마에 불을 지펴야 하지만, 별아
  네가 다시 내 뜰의 공기들이 될 수만 있다면

  구름아 새야, 내가 다시 너의 잔등에 엎드려
  서 있고 누워 있는 산이랑 들판이랑 굽어볼 수만 있다면
  좀 먹고 색 바랜 궤짝 속의 날개옷
  나는 날 수가 없구나 잠자는 아이들 품에 안고
  옛날의 우물 곁에 다시 서 본다 나무짐을 진 그가
  돌아오기 전에 아직도 두레박은 있을 것이다

 

 

 

 


   - 문인수 -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쉬인

      - 장정일 -
 

솨람들은 당쉰이 육 일 만에

우주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틀리는 말입니다요

그렇습니다요

당신은 일곱째 날

끔찍한 것을 만드쉈습니다요

 

그렇습니다요

휴쉭의 칠 일째 저녁

당쉰은 당쉰이 만든

땅덩이를 바라보쉈습니다요

마치 된장국같이

천천히 끓고 있는 쇄계!

하늘은 구슈한 기포를 뿜어 올리며

붉게 끓어올랐습지요

 

그랬습니다요

끔찍한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온갖 것들이 쉼히 보기 좋왔고

한없이 화해로웠습지요

그 솨쉴을 나이테에게 물어보쉬지요

천년을 솰아남은 히말라야 솸나무들과

쉬베리아의 마가목들이

평화로웠던 그때를

기억할 슈 있습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때

쇄상을 처음 만들어보았던 쉰출나기

교본도 없는 난처한 요리솨였습지요

끓고 있는 된장국을 바라보며

혹쉬 빠뜨린 게 없을까

두 숀 비벼대다가

냅다 마요네즈를 부어버린

당쉰은 서툰 요리솨였습지요

 

그래서 저는 만들어졌습니다요

빠뜨린게 없을까 생각한 끝에

저는 만들어졌습니다요

갑자기 당신의 돌대가리에서

멋진 쇙각이 떠오른 것이었습지요

기발하게도 <나>를 만들자는 쇙각이

해처럼 떠오른 것이었습지요

 

계획에는 없었지만 나는

최후로 만들어지고

공들여 만들어졌습니다요

그렇습니다요

드디어 나는 만들어졌습니다요

그러자 쇄계는 곧바로

슈라장이 되었습니다요

제멋돼로 펜대를 운전하는

거지 같은 자쉭들이

지랄 떨기 시작했을 때!

 

그런데 내 내가 누 누구냐구요?

아아 무 묻지 마쉽시요

으 은 유 와 푸 풍자를 내뱉으며

처 처 천년을 장슈한 나 나 나는

쉬 쉬 쉬 쉬인입니다요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세 개의 유년

        - 임승빈 -


    1. 가을산

  갈참나무 잎 하나가 떨어지면서 산 가득히 하늘은 내려와 앉았읍니다. 꼭
갈참나무 잎만이 하늘을 내려오게 할 수 있는지는  내가 산빛으로 크는
갈참나무가 되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갈참나무와 하늘이 그토록 가깝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그 후로 나는 내가 하나의 잎사귀되어 내려 앉으면 우리가 사는 마을
가까이 하늘도 아주 내려와 앉으리라는 꿈을 아무래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죠.

    2. 우리들의 힘

  관직을 버리셨다는 우리 할아버지는 가끔 낚시를 즐기셨는데요 해질녘
무연히 찌를 보시다 힘차게 낚시대를 채어 올리면
  문득 어깨 위로 푸른
  조각달 하나

  그 순간 나는 보았어요
  앞산 양지봉이 부르르 몸을 떠는 모습을

  새벽녘 돌아오신 할아버지 손에 들려진 것은 보퉁이 하나의 무게, 그러나
거기엔 팔딱이는 '고승리' 내 고향 숨결이 담겨 있었어요.

  지금은 못도 없고 세월도 없어 하늘엔 비늘 푸른 달도 없구요, 할아버지
낚싯대만 뾰족이 서서 솔개가 맴을 도는 푸른 하늘만 지그시 눈 감은 채
찌르고 있는 거예요.

    3. 아버지는 두릅나무 새 순만 따고

  장대를 들고 아버지는 두릅나무 새 순을 따고 저만큼 물러앉은 까치 한
마리 고즈너기 아버지를 내려다 보고 있어요.

  아버지와 까치를 나는 함께 두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까치 때문에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를마음 그리고 있을 거라는 추측은 아무래도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새 순을 따는 아버지의 이마 가득히 밀려와 푸르게 부서지는 하늘.
그것이 더욱 높아 보이는 것은 저만큼 떠나지 않는 까치 때문.
  아버지는 이제 새 순 끝에 묻어 있는 봄 햇살도 따고 기억의 먼
유역에 핀 바람도 잡아 당기면서, 딸 수 없는 세월만 더 높은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이죠.

 

 

 

세속도시의 즐거움 2

           - 최승호 -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세월

   - 송찬호 -

 

무지막지한 세월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호각을 불며 급히 뛰어오는 발자국소리

좌판이 엎어지고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았던

여자들이 파리떼같이 놀라 흩어지고

 

톺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법에 따라 흐르는 저 세월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대문을 닫고 방문을 안으로 잠가도

하수도로 거꾸로 넘쳐들어오고 벽 틈으로 새어들어와 물줄기는

부엌살림을 마루로 옮겼다가 책상으로 장롱 위칸으로 옮기더니

방살림마저 다락으로 옮겨놓고 드디어 가족들을 지붕 한쪽으로 몰아세웠다

물살이 무릎을 핥다 허벅지 속을 넘보고 작은 젖가슴을 밀어뭉개자

아이가 엉망으로 울부짖었다 엄마, 난몰라 몰라 세월이 날 망쳤어 !

수치가 무엇인지를 알자 여자애들은 금세 처녀가 되었다

 

물이 점점 불자 사람들은 상한 가슴을 뜯어 제방을 쌓았다

가파른 둑 위에서 두 여자가 뒤엉킨 채 굴러떨어졌다

떠내려가지 않으려 서로 풀포기 같은 머리채를 잡고 놓지 않았다

찢긴 옷 사이로 알몸이 드러나도 그것은 수치가 아니었으므로

누구 하나 싸움을 말리거나 치부를 가려 주지 않았다

몇몇 사내가 둑방 군데 군데 말뚝을 박고 낄낄거리며 떠나갔다

배가 부른 어린 신부도 아버지의 손에 끌려 횡단보도가 지워진

거리를 질퍽거리며 지나갔다 들러리 여자애들이 깔깔거리며 뒤따라갔다

 

잠깐씩 햇볕이 들자 사람들은 둑방에 나와 앉아

젖은 가슴을 말리며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다시 세월을 기다렸다

때가 되면 숨막히게 차오르던 이 분노의 수위도 조금씩

잦아들리라 세월이 스치고 간 자국마다 깊은 주름이 생긴

늙은 이마를 지우고 아이들은 새로 낙서를 할 것이었다

모든 것을 쓸고 간 끝도 보이지 않는 그 거리로 사람들은

정처없이 뗏목을 띄웠다 어깨띠를 두른 한 무리의 세월이

느릿느릿 거리를 따라 행진해갔다 창문을 열고 창녀들이 꽃을 던졌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

 

지금 그 사람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셋방살이 다섯 식구 

         - 박영희 - 


사람이 잠들면      

코에서 찬바람이 나는 것인디       

아이 글씨       

자는 줄 알았던 마누라 코에       

살짜그니 손을 대본께       

더운 바람이 나더란 말이시       

가운데에는       

자식놈 셋이 잠들어 있제       

통통배 엔진처럼 가슴은 요동을 치제       

암만 더듬어도       

마누라가 있는 곳은 섬이더란 말이시       

마누라는 그 섬에서       

애타게 통통배를 기다리는디       

그것이 워디 쉬운 일이여야제.  

 

 

  - 최명자 -


  쑥밭, 쑥밭이 되어 버리던 날에
  고향을 떠나
  슬픈 여행을 시작했다
  무작정 길을 떠났다

  쑥쑥 자라야 할 봄날에
  한약방으로 쑥탕으로
  온몸을 태우고 바스라지면서
  태어남을 원망했다
  난 왜 장미가 아니라 쑥이며
  왜 목련이 아니라
  흔코 천한 쑥이 되어
  귀함보다 천함을
  보살핌보다 뜯김을
  더 많이 받아야 되는거냐며
  서럽게 물었다

  붉은 꽃잎 하나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 죽어가면서
  한스럽게 울었다

  쑥밭에서 쑥이 조상인 내가
  살아감에 순응하지 못하고
  서러워할 때
  넌 내게 대답했다

  보리고개에 가난한 역사가
  널 먹었고
  단오날 새벽에 촌색시
  널 찾아오리니
  희망과 사랑 속에
  항상 푸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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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 애송시 4 2015-06-16 0 4834
595 애송시 3 2015-06-16 0 5088
594 애송시 2 2015-06-16 0 5968
593 애송시 1 2015-06-16 0 10287
592 꽃, 상징사전 2015-06-16 0 4627
591 시와 방언 2015-06-15 1 4625
590 "ㄱ" 시모음 2015-06-15 0 6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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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 짧은 시 모음 2015-06-15 1 18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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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시조쓰기 외우기 추고하기 2015-06-14 0 4253
569 墨梅의 香氣 2015-06-12 0 4398
568 1월 ~ 12월 詩 2015-06-12 0 4247
567 현대시조의 길 2015-06-12 0 4026
566 시적 기법 2015-06-12 0 4160
565 민중시에 대하여 2015-06-12 0 3933
564 시의 현실 참여 2015-06-12 0 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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