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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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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애송시 6
2015년 06월 16일 21시 49분  조회:6055  추천:0  작성자: 죽림
이수정. 1934년 경남 남해 태생. 원광대 졸업. 1984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물구나무서기


  따분할 땐 물구나무서기를 해 보아라
  어린 날 기쁨들이 줄지어 달려온다
  발까지 매만져주는 체온 같은 세상인 걸...

  23.5도 기울기로 돌아가는 지구본
  그대로 두 지축을 물구나무 세우면
  부황증 앓는 생명들이 허물벗고 환하랴.


       역사 앞에서
       --분단조국


  오뉴월이 이러하랴
  숨막히는 무풍지대

  동강 난 메아리는
  빛 바랜 채 나뒹굴고

  비릿한
  어둠의 계곡만
  죄어드는 저 밀실.

  광기의 시간들이
  앗아갈 것 다 앗아가

  한 시대의 오지랖은
  공동으로 얼룩지고

  하늘엔
  쿨럭이는 강만
  덩그렇게 걸렸다
.

 

  이숙희. 1950년 경북 안동 출생. 1983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을 받은
바 있는 그는 자연 속에서 향유할 수 있는 순수한 감성의 제요소를
원초적인 삶에 교차시켜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현재 대구 동덕국민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고향 1


  방학이면 할머니 사는
  아버지 고향으로 간다
  겨울 벌판에 채곡히 쌓인 짚더미
  앙상하고
  허허한 나무까지도 우리에겐
  싱그러웠다
  몇 개의 개울을 건너고
  송림 우거진 숲에서
  도깨비는
  후두둑 떨어지는 솔방울에 자지러지고

  더러는
  때깔 고운 감이 예닐곱 남은
  마을들을 지날 때
  까치가 먹을 양식이라고 오빠는
  말했지
  고운 감이 떨듯 달린 외로움도 사랑
  하라고

  농부들이 빈 들을 건너
  나뭇짐 한다발씩 지고 오고

  촌 아이들 언덕에서 연을 날린다

  기름먹인 한지에 할아버지는
  방패처럼 활을 휘어 명주실 매고
  꽁꽁
  언 강을 지나 뒷산 오르면
  멍석처럼 펀펀한 구름떼 위에
  하늘은 선명한 얼굴로 다가오고

  날이 저물면
  노을이 되어 돌아오는 연의 그림자
  날이 저물면
  노을이 되어 돌아가는 나의 그림자


       새


  우리의 시작은 날개를 흔드는
  거기서 이어진다
  우리의 울음은
  노래로 살아 남아
  석자 혹은 넉자 그 이상 크기의
  나무 위에서 날개 부비며
  생사의 확인을 위해
  이녁의 물동이에 나뭇잎 하나
  띄우고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부리로 벌레 또는 나무의 진을 쪼며
  달빛에 몸 적시는
  생존이 끝날 때
  다시
  긴 노래로 몸을 태우기도 한다

 

  이승철.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1983년 "민의" 2집에 '평화시장에 와서'
외 8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 광주에서 활동하는 "글과 현장"
기획간사로 있으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분단으로 야기된 동족의
아픔과 현실의 고통에 주목, 시적 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정든 임


  저기 붉은 흙 황토산 마루에
  정든 임, 살고 있어
  우리가 꿈물결 굽이 속일망정 잊으랴.
  이젠 차마 압삔으로도 못 누를 애절함
  마디마디 엮어,
  그토록 긴긴 밤 상처뿐인 나날에
  기다렸던 사람아.
  오직 단 한분, 황토산 임
  모진 목숨 부여잡고 에헤라 돌자갈 길 지나오며
  지금껏 그 누굴 위해 살았나, 눈물겨운 사람들.
  찬 서리 강산마다 몰려와 찢기어진 분단 깊어만 가고
  침묵뿐인 산천에 받은기침 울려 퍼지는 지금
  이내 청춘에 쌓인 그리움 확확 불타오르는데,
  꽃 지고 새떼마저 떠난 들녘에 당신 오려는가.
  그때까지 내 못 기다려,
  오직 단 한분, 황토산 임 찾아
  설움 많은 시대에 살다가
  넘어져도 일어서서 눈 흡뜨고 다리 절며
  에헤 간다 에헤 간다 에헤야 간다.
  가을 억새 울음에 사무친 숨결 실어
  막막한 세상 모진 파도에 타고 가네
  오늘 이 출발에는
  저 거리 저 등 굽은 사람들 함께 하느니
  얼마나 많은 기다림에, 설레임 속에
  아픈 넋을 깨물며 참고 진저리치며
  서슴없이 젊은 목숨 부대껴 쌓는데,
  우리야 청청하게 살아오는 정든 임 못 보겠느냐
  살아서 한세월 못 맞이하겠느냐, 이 사람아.


       오월비


  저 비를 알아, 오월비
  오월산에 오월강에 더러운 것 다 벗어 꽃물 지는 비
  움츠러든 넋쪼가리 있어 한풀한풀 적시며
  육신에 그대 부끄러운 육신에 저며파고 떨구는 비
  저 부르짖음을 아는가, 당신
  오월의 자식들이 죽음을 마다 않고 각목 든 손길에
  뼈마디에 움푹 패인 아버지 잔주름에 머리칼에 꽂혀
  천년 원한에 시름겨운 비
  때론 송곳처럼 때론 솜털처럼 살과 살의 그늘에 나려
  아스팔트에 대인시장 좌판대에 와서 머무는
  비, 그날의 결단이었다
  죽음을 넘어 끝내 압제를 거부하기에 죽음과 한몸이 되던
  오월의 아들딸들이 맞이하던 비
  광주천에 가서는 피 맑은 강물이 되던 우리여
  그 누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으랴
  그렇지만 그걸 송두리째 녹슬게 하던 너--옥빛 함성 실비여
  너무 시련에 가득차다 이 삶
  눈매 서글픈 외론 비문에 쓰디쓴 소주를 붓고
  망월리에 붙박혀 못 떠나는 사람아
  너무 곤혹스럽다 오월비
  젖은 새처럼 힘겹게 파닥거리지만, 이걸 우리 손으로 깨부셔야 하는
시절에
  너는 무얼 하느냐
  싸움터에 와서 쌈 싸우느냐
  유복자는 살아, 지금도 싸워 싸워 싸우는데
  어쩜 녹두의 부릅뜬 눈으로 흰옷자락의 피묻음으로 오는
  오월비여, 너는
  두번 다시 탄식이 아니었다 더더욱 그건
  빗물이 아니었다 진달래꽃보다 더 붉은
  피의 뒤범벅 생명의 깨어남이었다
  오월 광주에 내리는 저 억척같은 비는.

 

  이승하. 1960년 경북 김천 출생.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의 압력을 아이러니로
드러내는 그는 소홀히 하여 묻히거나 잊혀져 가는 '우리것'에 대한 질긴
애정을 풍자와 해학을 통한 시세계로 접근하고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재학하고 있으며 '대중시'의 동인이다.

       내림굿


  찔레꽃 떨어지는 새벽의 마을에서
  살아왔다 앓아왔다 내 사람아
  계면조의 울음일랑 묻어 두고
  한 손엔 부채 한 손엔 방울을 흔들며
  내 애간장 태울 대로 다 태워, 에라
  되집고 돌아서 널뛰듯 춤을 추랴

  헤매던 넋 하나 돌아오고 있다
  서러움에 지펴 이렇듯 몸 쑤시면
  차라리 악에 받쳐 세찬 도리질이야
  같이 죽어 영원히 같이 살 것을
  눈 못 감고 죽은 너는 먹장구름이야
  내 얼굴에 퍼붓는 너는 굵은 빗방울이야

  고샅을 돌아나오면 꼭 네 생각이 났다
  피었다 지고 졌다 또 피어나는
  찔레꽃 산길에서 하나가 되었던들
  오냐, 남치마 일월대 홍철릭 신칼
  내가 살아 삶의 내력을 풀어 간다면
  너는 다가와 죽음의 내력을 들려주어

  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 팔 휘저으며
  왔느냐 어디를 갔다가 예 왔느냐
  수많은 영육 밤의 수렁에 빠졌는데
  얼마를 더 살겠다고 굿당 앞에 서
  튀는 율동이 되어, 만개한 꽃송이 되어
  햇살을 향한 인무라니... 내 사람아.


       백수광부의 처에게


  새도록 누워 뒤척이던 저 강이
  새벽을 향해 흘러 내 가슴께에 차오른다
  숙취의 새벽이다 내 아낙이여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을 흘러
  마을을 하나씩 일으키고
  들판의 곡식을 마저 익게 하라
  산은 그대 잘 익은 젖가슴처럼
  솟아있도다
  야밤에 융기되는 그대 젖에 의해서
  한 사내가 튼튼히 완성되어 왔다
  도도히 흐르는 시간
  말릴 수 없는 시간의 물결이 흘러간다
  내 검은 머리칼 휘날리며 몸을 던졌다 아낙이여
  마디마디 쑤시고 저린
  노래를 불러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노래라도 불러 취해서 바라보면
  죽은 것도 산 것도 다를 게 없도다
  하나의 계절이 온전히 저물어
  말술과 땀으로 온 누리가 젖을 것이다
  희끗희끗 세어질 것이다 다 잊자고 그대 그토록
  마셨는가 마셨다 취하였다 다만 내 이대로
  잠들고 싶다 기나긴 잠
  죽음과 삶이 어우러진 잠을 향해
  단호한 몸짓으로 백수의 사내가 도하하는 날
  아낙이여, 오래 울어
  아름다운 이여
  강이 되어 산 아래 그냥 드러눕는구나
  그를 사랑한, 그가 사랑치 않은.

 

  이신강. 1943년 오사카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1985년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동강시'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혼돈과 무질서의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에 "밤의 기행"이 있다.

       손


  울음소리 요란하게
  세상을 다 잡아보겠다는
  신생아의 손
  독립선언서를 들고 서 있는
  손병희선생의 손
  소리가 들리는
  유관순의 손
  손기정의 손

  약지를 자른
  안중근 의사의 손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손
  이순신의 손
  혜초스님의 손
  우장춘 박사의 손
  한석봉과 그 어머니의 손
  율곡을 길러낸 신사임당의 손
  논개의 손

  아아, 나라를 망치는 장여의 손
  박영호의 손
  안희태의 손
  하늘에 떠도는 KAL 승객의 손
  버마로 출발하며 흔들던 열 일곱 사람의 손
  부들부들 진땀나는 사천만의 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나의 손.


       기차역에서


  창밖엔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기차역 층계를 사람들이
  몰려 내려가고
  몰려 올라가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들이 흔드는 손과
  보내는 사람들이 흔드는 손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가벼운 가방을 든 사람들과
  무거운 가방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
  역마다 사람은 넘치고
  지네같은 기차가 마술처럼
  사람을 토해내고
  사람을 들이 마시며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었다.
  승차역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역에 내리기도 하고
  함께 탄 사람들이
  다른 역에 내리기도 하고
  종착역을 가려다가
  도중에 내리기도 하면서...
  멀리 갈수록 자리는 비어갔다.
  역마다 내린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버스나 택시를 갈아타고 혹은 걸어서
  얼마나 더 가 보았을까.
  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갔을까.
  모래바람 숨막히는 사막으로 갔을까.

  마지막 한 사람도 쓸쓸하게 종착역의 홈을 빠져나갔다.
  그 사람이 빠져나간 종착역, 거기서부터
  출발하려는 사람들이 또 올라오고 있었다.
  가벼운 가방을 들었거나
  무거운 가방을 끌면서
  결국은 내리고야 말 승차를 시작하고 있었다.
  내리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의 어깨와 어깨가 비껴가고 있었다.
  창밖엔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로 기웃기웃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이영유. 1950년 서울 출생. 건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연극
연출과 소극장 연극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는 그는 1982년 "우리세대의
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시가 언어로 만드는
연극이라면, 연극은 육체로 조립하는 시'라는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 "그림자 없는 시대"가 있으며 현재 "한글세대 시인과 시"를
책임편집하고 있다.

       자유에 대하여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말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배나무는 시원하다 봄에
  싹이 돋는 모든 식물은 시원하다
  시원한 것은 배고픈 것이다
  배고픈 것은 서양적인 자유에
  해당되는데,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밥이 필요하다
  움트는 배나무 가지가 저절로
  흔들리는 데에도 자유가 필요하다
  말이 없음은 그것이 아주 많은 말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기고
  몸부림치는 것도 자유이다.
  배가 고플 때 비로소 밥을
  생각한다는 것은 봄바람에
  떨림의 이유를 감춘 싹트는
  배나무의 욕망과 같다.

  모름지기 떨림이란 자유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사슬 6

       --잠들면 아무것도 모른다. 꿈과
더불어 밤을 이야기할 뿐


  저녁이다, 해가 기울어지는 도시의 저녁이다. 바로 누우면 해가
오른쪽으로 행로를 잡는 저녁이다. 벌판 가운데 잡풀들과 잡풀들의 이름
없는 흔들림으로 바람이 부는 것을 ?깨닫는 저녁이다. 벌판의 변경과 눈을
뜨고 바로 볼 수 있는 가시권 안의 떨림과 기시권 밖의 요란함과 익명의
아우성이 땅거미를 내어쫓는 벌판과 잡풀들의 사망으로 익숙해진 도시이다.
그렇다.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르는 사람이 어깨를
잡아도 대꾸를 하지 말자. 그냥 가는 거다. 흔들리지 말고 빛 속으로 빛
속으로, 어둠이 젖는 빛 속으로 물방울의 아우성처럼 사라지는 거다.
이유가 없다. 이유를 대지 말자. 어둠이 조급한 것처럼 빛도 여유있는 것은
아닐 것. 흔들리는 모든 것은 두렵다. 빛이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심 즐겁다. 아, 그러나 괜찮다. 즐거움은 그것 말고도 (저것에 대해서)
또 있다. 열심히 빛을 읽자. 눈이 부시나 눈이 부신 만큼 빛을 읽어서 외어
두자. 저녁이라고 말한다. (저녁이어야 한다) 결코 초조하지 않았으므로
강제로라도 여유를 갖게 됐으므로 즐겁다. 볼 수 없는 모든 것들의 흔들림,
흔들거림--접시는 사기로 만드는 것이다--사기다. 사기는 스스로 비약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하는 가운데 말과 말 사이를 유성처럼 떠돌 뿐. 아이는
즐겁다.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본,
그 하늘 만큼 엄마는 즐겁지는 않다.

  아들은 타살당한 애비의 원수를 갚는다. 그러나 아내는 타살된 남편의
복수를 하지는 않는다. 단지 제 목숨이 즐거울 뿐이다. 불이 탄다. 불에
타는 것은 밤이다. 밤은 타지 않는다. 어두움의 밤은 처음처럼 스스로 어둠
속에서 홀로 검정색일 뿐.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즐겁지 않다. 즐겁지
않은 나는 기쁘지도 못하다. 오로지 무엇엔가 열중할 수 있는 일에
스스로를 붙잡아 매둘 것 (또 이런 메모도 보인다) 한 사내가 우연찮게
태어나 제맛을 잃어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게 될까 하는 게산.
그러나 이런 것들까지도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 별 이유 없이 도시는,
한낮의 도시는 잡초처럼 잡초에 묻은 이슬처럼 밤을 기다린다. 이 얼마나
기다림이란 산문적인지 기겁을 할 지경이다. 모든 것을 모두에게 말하고
말하고, 한 말을 또 되풀이해야 하는지.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새로 배우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죽어 버리겠다.

  이 부질없는 얽어맴. 얽혀서 얽히는 재미. 재미가 없으면서도 스스로
풀지 못하는 사슬. 말에 대하여 말이 지시하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인사.

 

  이우영. 1941년 경기도 이천 출생. 중앙대와 고려대학 대학원을 졸업했고
세종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0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데뷔했으며 간결하게 조여진 언어로 원형에의 회귀를 노래하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대합실에서 만난 사람들" "하나를 위한
서곡" "귀향일기"가 있으며 현재 한국체육대학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해 겨울


  이야기를 즐겨 들으면
  자라서 가난하다고
  옛날에 할머니 말씀

  그해 겨울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지

  꾸리를 감으며 하시던 말씀
  세월은 잠깐이라고
  너도 커서 어른이 되면
  아버지  된다고

  그해 겨울 유난히도
  바람이 매웠지

  이제 나는 아버지 되고
  할머니 말씀처럼 헛그지 못하지만
  이 겨울 돌아갈 곳이 없어
  돌아가 들려 줄 말이 없어

  오늘처럼 눈이 많이 내렸지
  그해 겨울
  할머니 가시던 날


       편지


  지금은 밤이고 가을입니다
  저 달도 시름겨운 밤이옵니다
  새벽달이 홰를 치는 모꼬지거든
  놋양푼에 정한수를 떠놓옵시고
  구름이 저 달을 가리우거든
  가락지를 정한수에 띄우옵소서.

 

   이은경. 1953년 경남 함안 출생. 1981년 "시문학"지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의 작품은 무한한 우주 안에 일회성을 인식한 유한자가 느끼는
삶의 편린을 소박한 언어로 표현하여 주목받고 있다. 현재 작품에
전념하면서 '배토'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무가지 사이로
        흐르는 바람


  한 치씩 더 자란 나무가지와 한 치씩 더 뻗은 바람의 머리칼이
어울렸구나 동해 앞바다 몰래 빠져나와 나풀나풀 생모시를 흔드는 바람아
새벽이면 엎드려 두 손 모으고 나무야 나무야 높이 솟아라 천 번 만 번
외우는 소망의 뜰에 말쑥한 몸매로 여린 가지 흔들려고 너는 왔구나 치솟는
빌딩의 모서리 토막토막 잘린 칼바람 무서워 무서워 왁자지껄 끓어 오른
전열 속의 불바람 지겨워 지겨워 달려 와서 등 식히는 고가 대청마루에
쏴아 하고 울음 쏟는 동해 바람아 주름접힌 내 눈 언저리 적셔 놓고
문지르고 다시 적시는 나무가지 사이로 흘러 온 바람아.


       속도 제한 구역


  눈발 흩날림.
  경부 고속도로 쾌속시야
  안개에 포위됨.
  생사의 분개점
  안막이 흐림.
  천리 밖 컴퓨터
  동동발 굴림.
  단절의 체온
  급하강.
  백기의 행렬
  낮은 음성의 고해성사.
  영하의 심장
  파도 타기
  껄껄 웃음.
  멀리 뜨거운 피
  텔레파시 복선만 그음.
  구원은 통 트는 아침
  햇살 위에 얹혀 있음.

 

  이은미. 1961년 인천 출생. 홍익대 국문학과 졸업. 1984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는 '내항 문학회'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작고 평범한 것들에 대한 진한 애정이 소박하고
다감한 언어로 표현되는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대우전자에
근무하고 있다.

       보길도의 5월


  갠 날이면 멀리 남끝섬이 보인다고들 했다.
  거룻배가 삐걱삐걱 들어서는 날이면
  수선스레 뭍 풍물이 섞여 들고
  어쩌다 하늘이라도 갈앉을라치면
  물먹은 자갈밭은
  창자 빠지는 소리로 하늘을 불러댔다.
  그때가 5월이라
  동백이 진다고들 했다.
  그때가 5월이라
  유채도 샛노랗게 흐드러지고
  그때가 5월이라
  왼섬이 가랑비 속에 흐르기도 했다.
  그렇게 보길도엔 5월이 묵어갔다.

  불쑥 소리없이 찾아든 사람닮은 6월이,
  보길도의 5월에 그만 가슴을 비우고는
  우지근한 열풍만을 안은 채
  섬을 돌아 뭍으로 돌아와 앉은 후.

  보길도엔 아직도 5월의 순한 사람들이
  까치발로 서서 남끝섬을 보고 있으리라.


       슬픔


  하늘로 오른다면 어떨까

  덩어리져 쏟아지는 유성의 물결.

  긴 장마 끝
  지붕 위로 떠어지는 후박잎의 추락.

  시선도 젖어드는 늦가을 밤
  코 끝에서 만나보는 첫눈의 감촉.
  그것도 아니면,

  여위신 아버님
  휘저으며 가시는 당신의 걸음
  그 폭폭마다 묻어나는
  시리디 시린 눈물.

 

  이은봉. 1954년 충남 공주 출생. 숭전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4년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삶의 문학" 편집동인으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민족, 민중 문학에 참여하고 있는 시인이다. 현재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시집 "좋은 세상"을 갖고 있다.

       사루비아


  골목길 어디
  부서져 딩구는 장난감 병정들
  그 먼 장난감 병정나라로
  즈의 사내
  오오, 미운 사랑을 찾아서 떠난
  누이야
  네 아이 슬픈 보조개
  네가 남긴 설움이
  여기 이렇게 한점
  붉은 눈물로 피었고나.


       남새갈기


  남새를 갈아보려는 것이다
  장독대 옆 두어 평 남짓
  그것도 땅뙈기라고 흙을 고르다 보면
  연탄재만 풀풀 날려다니고
  그저 콘크리트 비닐조각들
  그래도 그냥 말 수야 있겠냐며
  뭣이라도 좀 심어보자는 것이다

  하기는 요만치의 농사라도
  이 산번지에서나 지을 수 있는 일
  누이와 뒷방 아줌마와 함께
  치닫는 가슴 옥죄며
  되지않게 나는
  둑을 치고 이랑을 돋워보는 것이다
  아직은 건강한 지구의 뒤켠
  오래오래 지켜나가야 하지 않겠냐며
  도시의 한쪽 끝
  버티고 서서
  한바탕 신명을 돋워보는 것이다.

 

  이정숙. 1939년 만주 태생. 198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와 같은 해
"한국문학"의 신인상을 수상, 등단한 그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는
절박함을 시로서 승화시키고 있다. 현재 "소설문학"에 근무하고 있다.

       편도선


  고달픈 신열이었읍니다.
  육신이 먼저 까부라지면
  정신도 고개를 못 추스르고
  어찔어찔 쓰러지는 입원이었읍니다.

  티끌처럼 작은 이 몸 하나,
  쓰러져도 더하기 빼기엔
  흔적도 없을 삼라만상.

  온몸 성하게 돌아갈 적엔
  삼천 번을 넘게 외던 이야기도
  첫구절부터 외국어였읍니다.

  영혼이 날개를 달아도
  헐벗은 몸 하나는 짐짝같아서
  도솔천 가는 길은 멀었읍니다.

  육신의 아픔, 사지의 즐거움이
  혼백까지 다스려 버려서
  찍어 바를 미안수도 없는 날이면
  산천초목은 주근깨투성이.

  팥알만한 편도선 한 알이
  부처님도 예수님도
  못 부르게 했읍니다.

  몸살이 팔다리를 꺾어오는 밤이면
  베드로처럼 세 번 이상 도리도리
  어려울 것 없는 파문.

  나에겐 맡기지 마십시오.
  춤추는 혼백의 날렵한 심지는
  소관 밖으로 밀려납니다.

  고달픈 신열이었읍니다.
  육신이 먼저 까부라지면
  정신도 고개를 못 추스르고
  어찔어찔 쓰러지는 입원이었읍니다.


       문상


  그 영혼이
  나들이를 떠났다고 합니다
.
  주인 없는 자리에
  명함 놓고 돌아서듯
  향 피우고 일어설 때
  답례로 만장이 펄럭였다고 합니다.
  격식이 수월찮은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도착한 모든 사람이 떠난다는
  합의가
  파약처럼 여겨지면
  상주는 짐승처럼 슬프다고 합니다.
  사씨댁 상가라고
  등불 켠 골목에서
  산 사람이 만난 죽음은
  얼굴이 없었다고 합니다
.
  영혼을 신이 데리고 나가서
  얼굴은 없는 채
  곡성으로만 남아 있는 죽음은
  수월찮은 격식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만난 죽음에서
  마지막 만난 죽음까지
  죽음은 그저 어디서나
  내 세상 얘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

 

  이창기. 1957년 인천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문예중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독특하고 개성있게
표현하여 주목받고 있다.

       문득 고요하게
         하옵소서


  귀뚜라미는 늘 귀뚜라미가 우는 저녁을
  가지고 있었지만 끝내 이별은
  돌아오지 않았다 강물 위를
  뛰어다니던 이름도 기억의 밖에서
  문득 고요하다

  잠자는 바람의 내부에 촛불이 켜지면
  안경을 벗어도 죽은 사람들의 꿈이
  보인다 그 꿈과 어울리면
  창을 부수고 반짝이는 죽음의 나라에 애인들
  가자 아무 이름도 없는
  모래 위를 발자국도 들고 가자
  그림자도 벗어버리고 꿈에 묻혀
  문득
  이
  순
  간
  에


       우리가 파문이듯


  1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견디세요 소주 반 병과 약간의 안주
  오이 한 조각과 쇠소리 노련한 안전을 말이 말이 아니라는
  말의 처지와 아버지가 악이라는 사무침을 치약 냄새나는
  웃통을 벗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토하세요 일기를 외쳐대듯
  어제도 내일도 이해되지 않는 황홀함 역력한 울음이
  오래도록 숨어서 날이 새도록 깊어지는
  밤,
  무릎, 물렁뼈, 불굴의 묘

  2
  절벽을 밀면서 엿장수가 가고 있어요 무딘 가위 소리에
  절벽이 점점 날카롭게 갈라지고 있어요
 주위에 나뭇잎들도
  반씩 잘라져요 속고 있는 거예요 잘린 부분마다 온통
  낙인이 찍혀 있어요 기념 우표처럼 세 살 버릇이지만
  이미 사랑도 세 살 버릇이지만

  3
  파란 불은 가시고 노란 불은 돌아 가시고 빨간 불은 서시고
  숨쉬고 마치고 느끼고 묻고 따오고 말줄이고 하는 표와
  할 말 없음표 웃김표 조용함표 구속시킴표
  자유스럼표 술취함표 춤추기표 잠자기표 헤어짐표
  겉돌기표 박수침표 말속임표 등의 아직 탈옥하지 않은
  표들과 함께 살게 하자 우리 말 속에 쌍소리처럼
  영원하게 살게 하자 아 살게 하자 정식형
  불빛도 없는 열 + 자 복판에 나도 섰소

  4
  내 이름이 황인종으로 위장한 나를 의심하지 않듯
  나무는 개처럼 자라고
  나는 입사용 이력서의 위 사실과 틀림없이
  자거나 깨어 있으며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하고
  담배를 피우면 담배를 피우는 자세를 취하며
  잠을 자면 눈을 감아야 하는 줄도 아는
  종종 병신 같은 나를
  김 회장님의 친구이면서도 눈꼽만큼도
  의심할 줄 모른다

  5
  사람들이 살아가는 순간에도 TV드라마처럼
  음악이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헤어지거나 사랑할 때
  또는 복통이 일거나 현기증이 날 때도
  그에 어울리는 색깔의 음악이
  유유히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거짓말처럼 사는 우리가 파문이듯


  이충이. 1943년 전남 목포 출생.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미래시'의 동인이기도 한 그는 투명한 서정과 이미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토속성 짙은 시를 쓰고 있다
. 현재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다.

       당신의 자리


  세상 밖으로만 늘 가신다
  안에서는 살 수 없다며
  돌다리 밑 잡초더미 깔고 누워
  남은 이들에게도 고생 남기지 않겠노라
  아버지는 혼자 다짐하신다
  마른 검불로 짓눌린 당신의
  아픈 목울음을 누가 알랴

  시린 가슴 속에 인줄 치고
  사립문짝 미시며
  부끄럼 하나 없는 백발로
  수십 년 해오던 일
  아침에 작파해 버리시고
  그저 가는 거라며
  밖으로 나가는 데는
  노잣돈도 필요없고
  널짝이불도 필요없고
  둘둘 거적으로 말아버리듯
  늘 떠나신다
  재로 뿌려
  냇물에 흐르라며
  당신의 가시는 길
  저녁의 고샅길에
  내가슴 속 빗금을 떨구고 있다

  엄동설한
  맨발도 게염치 않으시니
  가져갈 게 무어 있느냐며
  그냥 떠나신다
  꺼억꺼억 하늘 우러러
  나는 울고 섰고
  당신의 어둠 끝에서
  당신은 흰 무명으로 빛나고 있다
  오
  정녕 당신도 아무것도 세울 수 없으며
  내게 남길 것도 없사옵니다.


       무심사로


  간천을 따라 내려갔다
  구겨진 아내의 가슴
  마름질하듯

  무심천변
  사월의 꽃잎 한둘
  떨어진다
  들리지 않는 신음소리려니
  마른 손 놓고
  자갈밭에 앉아 있다

  아내는 지금 설운 산행
  땅속 그루터기 그 밑에
  묻어버리는 것이려니
  죽어서야 기른 새끼 모여들듯
  뒷날
  이 땅에서 꽃으로 피어
  색색 나비나 모으려니
  이제서야 한 세상 등짐으로 하고
  간천을 건너간다.

 

  이해영. 1948년 서울 출생. "시문학"지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현재
시작에만 전념하면서 "전북일보" "전북문학" 등에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풍부한 감성이나 감각적인 아름다움 대신 내면의 세계를 깊이
통찰하면서 가능한 인생의 본질을 관념적으로 개성있게 표현하고 있다.

       기억 속의 바다


  바다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그대를 만났다.

  다리가 없는
  긴 바다는
  허리띠처럼 풀리어져
  누워 있었다.

  강물처럼
  댓님처럼
  드러누운 기억 속의
  바다.

  그 흐름 속에
  그대와 나는 떠 있었다
.

  한 마디 말도
  나눔이 없이
  오직 전생의 눈짓만 교차한
  그대와 나

  그 헛헛한 욕기를
  부채질하며

  바다는
  장강인 양
  다리도 없이 누워 있었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우리들의 의식에서
  그 죽음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삶의 통로를 통해 본
  우리의 예견이
  그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욱히 연기가 내리듯
  우리 생의
  암울이 내리고

  그것이 커져서 마침내
  우리의 사랑을
  덮고 있었다.

  오직
  피맺힌 생생함으로
  밝혀 든
  명부의 등불.

  암울히 빛나는
  그
  빛둘레에서
  우리는
  어둡게 타오르는
  죽음에의 의지를
  읽고 있었다.

  이미
  깨쳐 버릴 수 없는
  크나큰 기대로
  타오르는
  죽음에의 원망을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그 죽음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현암. 1944년 청주 출생. '미래시'의 동인이기도 한 그는 1982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시의 양식과 접촉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삶의 의미를 재확인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현재 충북 장연국민학교에 근무 중이다.

       산


  가만히 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발 끝을 움찔거려
  콩 밭 하나 일궈 놓고
  어느덧 뒤꼍에 내려와 섰다.

  말이 없지만
  말이 없는 게 아니다.

  겨우내 울고 싶어서
  붉은 진달래도 피워내고

  목소리 가다듬어
  골짝 물 내려 보낸다.

  보아도 보아도
  합장하고 섰다.

  바람을 불러
  정자 하나 지어 놓고
  먼먼 하늘만 우러르고 있다.


       곱사춤


  젓가락 장단에 집힌 신명
  수숫매디 분질러 입술에 끼우고
  희멀겋게 웃는 일그러진 얼굴.
  글쎄, 남 다 클 때 키도 못컸남.
  백 오십을 다 못 채운 체구
  구부러진 등에 나이롱 바가지 넣어
  앙징한 두 팔로 허공을 그러쥐며
  한 순배 술이 돌아라
  춤 사위마다 흔들리는
  어지러운 세상사여.
  귀 먹고 등 굽은 설움
  서른 네 해 전 울던 산 마루 위로
  흰자위만 허연 눈이 쏟아지며
  지금은 뻐꾸기 소리만 자지러지는데
  얼쑤, 얼쑤, 어께를 들먹이며
  와락 울 것 같은 하늘의 푸르름을
  찢어진 외눈으로 치어다 보고
  일어설랴 힘 쓰는 그는 천사여.
  그를 보고 웃는 내사 곱사여.

 

  이혜선. 1950년 경남 함안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세종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81년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역사와
공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존재의 본질을
찾으려는 작품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시인의 집' 동인이며 현재 명성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후예들


  함박꽃이 피는 덕수궁 뒷뜰에 한마당 벌어진 사당패 춤을 본다. 꽹과리
소리에 열두 발 상모, 쾌자자락 너풀대며 환한 대낮에 춤추는 칼. 푹푹
인왕산 허리춤 찔려 피 보면 미치는 승냥이같이 바람 으르릉으르릉거려
앞발을 두드린다. 양반님네 상투끝 산호 동곳의 누런 해가 진다. 한 치씩
내려앉는 청자하늘 아랫도리. 강변 탈바가지 닮은 할머니가 아파트창에
젖은 눈을 내다본다. 긴 막대기로 지구같은 접시를 돌리는 사내 웅크린
저승 몇 계단 쯤에서 웃고 있다.


       한가윗날에


  오늘은
  햇빛 밝은 가을날
  오곡이 무르익어 더욱 밝은 날
  이 나라 하늘 땅 하그리 많은 새들이
  하늘빛 닮아 마음 흰 학들이
  달빛같이 흰 날개를 달고
  산마다 들마다 무리지어 만나는 날

  이 나라 황토흙 분이라도 피어
  언덕 위의 새빨간 감 가지의 감같이
  저마다 한 덩이 쪼대흙되어
  저마다 한 뿌리 진달래되어
  만나서 껴안고 정에 겨워 웃는 이
  만나서 볼 부비며 울음 우는 이

  오래 전 흙으로
  고이 돌려보낸 피 한 사발
  오늘 비로소 새 한 마리 오누나
  이 나라 하늘 떠도는 맑은 빛되어
  이 나라 기름진 땅 흐르는 물되어

  돌아와 볼 부비는 날
  껴안고 불타오르는 날
  산에서
  들에서
  떨어지는 잎새 위에
  햇빛 밝은 풀꽃 위에
  한 줄기 향연되어 타오르는 날
  저 어둠에 잠긴 혼불도 불러
  밝디밝은 보름달로 떠오르는 날

  오늘은
  조선사람들을 만나는 날
  장롱 깊이 간직한 날개옷 꺼내 입고
  남쪽나라 북쪽나라 넘나들며 만나는 날
  하나되어 만나는 날

 

  이효윤. 1949년 전남 강진 출생. 1982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의 시는 담담한 서술로 자연의 순리를 드러내며 이미지의
자연스런 결합으로 시적형상화에 성공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거울 앞에서


  시냇물이 시냇물을 보고 싶으면
  시냇물을 따라 시냇가로 간다

  사슴이 사슴을 보고 싶으면
  사슴을 따라 사슴한테로 오듯이

  서리매가 서리매를 보고 싶으면
  서리매를 따라 서리매한테로 가고

  순이가 순이를 만나지 못해
  순이가 보고 싶어 순이를 그리워하며
  순이가 죽어가는 밤

  솔바람이 솔바람을 보고 싶으면
  솔바람을 따라 솔바람한테로 온다.


     함곡관 밖으로
      가는 길에서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다가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배암 한 마리를 본다.

  산하는 이미 청색 깃발을 내리고 황색 깃발을 게양하는 여름도 끝 그금밤
어디쯤인가 본데.

  한 뿌리에서 태어난 콩은 솥에서 울고 콩깍지는 아궁이에서 울며 오늘
아침도 이름만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긴 행렬의 발자욱 소리.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해 징그러운 언어들의 비늘을 달고 2연과 4연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냇물의 그림자여.

  작대기를 들고 쫓아가서 단번에 두 동강 내버리고 다시 휘파람 불며
함곡관 밖으로 길을 재촉한다.

 

  이희목. 1938년 경북 월성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3년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소박하고 간결한 문체로 전원적인
풍경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현재 무산중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보리밭


  보리밭 물결 사이
  밝고 오는 여인의
  나들이 옷자락
  강은 비로소 제 얼굴을 가진다.

  연두빛 바람에
  눈을 뜨는 풀꽃의
  꽃자리마다
  열려오는 청명
  하늘.

  놀란 멧새
  흘린 울음
  한 점 구름으로 날고 있다.


       4월


  바람은 종일
  검불만 날리고

  갈래산 중턱
  삭정이 패는
  소리 들린다.

  대밭으로 몰리는
  새떼들의
  한낮

  호밀밭 혼잣길에
  아지랭이가 타고
  4월은 환하게
  환하게 비어 있다.

 

  이희자. 1947년 충남 금산 출생. "월간문학"지를 통해 데뷔했으며,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어찌보면 산다는 것이 기다림의
연속인 듯싶다는 그는, 초록이 움트는 계절을 딛고 파지로 뒹구는 가을
잎새를 그리며, 서 있는 자리에서 갈망을 넉넉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에 임하고 있다.

       천천리의 새벽비


  말했다
  밤새 옹크리고 내가
  고하지 못한 말 
  문 밖에서 그가
  전하고 있었다

  어둠의 목을 감고
  진종일 기다리던 조바심을
  천천히 식히며,
  숨겨온 말 낱낱이
  쏟아놓고 있었다

  아침이 가까워올수록
  비는 점차 거세어지고
  천천리 마을로 치닫는 그의
  말소리도 빨라져 갔다

  이젠,
  어떤 것으로도 지킬 수 없는
  기도실 안의 나
  쉬임없이 부서져 내리는
  사랑의 젖은 발길질에
  온몸 내맡기고 있었다


       미륵사 5층석탑


  다시 바람이 와 흔들어도
  돌은 두께로 앉은
  이끼만 쌓고
  언덕의 막바지에서
  더는 나아갈 길 없어
  마련없는 약속만 목을 늘어뜨린다

  지등 몇
  초파일의 하늘에다
  명줄을 올려
  상수리나무의 단잠을 깨우고,

  벽층 타고 오른 질경이풀들
  내 기다림을 올려준다
  내려다 보아도 닿지않는
  산 너머 그 너머 마을

  앉아서 버티는 궁금증에
  탑은 또 조금씩 또 조금씩
  제 몸을 헐어가고 있다

 

  이희찬. 1954년 전북 전주 출생. 198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그의 작품은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 불가항력적인
자신의 고뇌에 대한 실존주의적 문제 제기 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현재 인쇄소에 근무중이다.

     리브 울만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한 비망록


  1
  난 알지
  스웨던 여배우 리브 울만이
  동아프리카 피난민촌을 방문했을 때
  유리파편 같은 충격이
  그녀 눈동자에 박힌 것을
  세상에서 제일 풍요한 나라 미국
  미국에서도 톱스타인 그녀가
  불안한 전쟁 속
  목마른 한발 속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지

  난 알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하루종일 길에서
  구호식량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들
  야위고 쭈글쭈글한 할머니 같은 여인들
  나중에 나이를 알아보니
  마흔 한 살 자기보다도 젊은 여인들
  내 아들이 배고파 내 아들이 배고파 내 아들이 배고파
  일이십 명도 아니고
  일이백 명도 아니고
  일이천 명도 아니고
  내 딸이 배고파 내 딸이 배고파 내 딸이 배고파
  떼뭉쳐 그릇을 들고
  우두커니 서서 거지가 되어

  난 알지
  그녀 입술 차마 열리지 않았을 것을
  당장 마실 한 방울의 물이
  당장 먹을 한 조각의 빵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말 아예 꺼내지도 못했을 것을
  한 노인을 만나 그 모자 참 좋습니다
  칭찬말 들려주니까 오히려
  자기 모자를 찢어 발겨
  씹어버리는 것을 보고
  크게 당황 암말도 못했을 거라는 거
  난 알지

  난 말하고 싶어
  그녀가 돌아 본 이 주일의 끝
  쫓기듯 뉴욕으로 돌아오던 날
  그녀가 자기의 아파트에서 가졌던
  기자와의 인터뷰를

  보통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이상의 주의를 기울일 만한
  보통 이상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굳게 굳게 믿고 싶어 난

  2
  지금까지 누려온 풍요로움에 대하여 당연하게 여겨 왔는데 이제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데레사 수녀처럼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은 아주 드문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은 전적으로 남을 위해 살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세계의 저쪽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지는 않겠습니다

  목격한 참상을 리포터로 발표함은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유명도를 이용 사람들의 관심을 동아프라카 사람들에게 돌리게 하겠읍니다

  올 가을까지는 일체 영화일을 쉬겠읍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가난함과
부유함의 불균형에 대한 책을 쓸 계획입니다

  3
  나는 노래하고 있네
  기근의 고통을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동정심 가득
  맑고 깊은 눈동자를 가질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을

  나는 노래하고 있네
  내 동족은 아니지만 내 동족처럼
  내 슬픔은 아니지만 내 슬픔처럼
  따뜻한 마음의 심지불 태워 줄
  네 사람 다섯 사람 여섯 사람을

  나는 노래하고 있네
  이 순간 뼈만 앙상한 한 명이 죽고
  이 순간 뼈만 앙상한 열 명이 죽고
  이 순간 뼈만 앙상한 백 명이 죽고
  이 순간 뼈만 앙상한 천 명이 죽는
  동아프리카의 처절한 비탄에 대하여
  함께 이마를 짚고 고민할
  일곱 사람 여덟 사람 아홉 사람을

  4
  리브 울만 여사님
  편지 늦어 죄송합니다
  당신의 연민의 정은 참으로
  온 인류 가족이 함께 할
  양심의 깃발입니다

  오늘 마음의 문이 열리면
  내일 눈의 문이 열리고
  내일 눈의 문이 열리면
  다음 날 사랑의 문이 열립니다

  게속 수고하여 주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사랑을 위한 독후감


  1
  솔로몬의 아가서를 읽으면 술람미 마을 양치는 목동과 포도원을 지키는
처녀 두 사람의 가슴 속에 하얗게 꽃핀 첫사랑이 참 아름답네
  죽음 같이 강한 사랑이 되려고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사과나무를 지나
예루살렘 궁궐로 날아가는 산비둘기 울음 소리가 들리네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사상을 대적하는 화염검도 보이고 생명 나무
동산을 지키듯 오직 한 사랑을 지키는 무화과 속살같은 심장도 보이고
  이글이글 불꽃이여 거룩하고 거룩한 불꽃이여 평범한 사람들에겐 참
무섭고도 무서운 사랑이여
  닮아보려고 닮아보려고 애를 써도 온전히 채울 수가 없어서 한 평생
감동적인 모범 사랑으로 남겠네

  2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읍니다
  당신을 위하는 순결한 마음
  날마다 배양되는
  해맑은 사랑으로

  내 생명이
  당신의 생명이라 해도 좋고
  당신의 생명이
  내 생명이라 해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읍니다
  당신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
  날마다 성숙하는
  크낙한 사랑으로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이라 해도 좋고
  당신의 영혼이
  내 영혼이라 해도 좋습니다

 

  임문혁. 1949년 충남 당진 출생. 방송통신대학과 국제대 국문과를 졸업.
198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자연과
사물과 특히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고
싶다는 원을 가지고 시작에 임하고 있으며, 현재 경기여고에 재직하고
있다.

       물의 비밀


  모올래
  너를 만나면
  뜨는 무지개
  부드럽게 휘어지며
  내게로

  가슴에 꽃이
  꽃이 피었네
  다년간 창문이 열려 있고
  열매, 열매가 맺히네
  곁에서 울리는 목소리, 아하
  나는 풀이란다

  네 오면 금새 푸르러지는
  풀잎이란다

  알 듯
  모를 듯
  은밀한 비밀

  창문만 열리면
  속삭임만 스치면
  산도
  들판도
  싱싱하게 일어서는
  신비한 비밀이란다


       딱 둘만 남게 된다면


  이 세상에
  딱 둘만 남게 된다면
  하나에게 있어
  하나는
  얼마나 소중할까

  이 세상에
  딱 둘만 남게 된다면
  하나의 고독은
  하나가 덜어주고
  하나의 병고는
  하나가 보살펴주고
  하나의 열매는
  하나와 나누어 먹고
  하나의 일은
  하나가 도울 수밖에 없는데

  그러므로
  하나는 하나가 아니요
  둘이며,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난데

  이 세상에
  딱 둘만 남았을 때
  하나가
  없다면?

  그런데, 우주에는
  딱 하나씩만 살고 있는 별도
  있다고 한다.

 

  임석래. 1946년 함남 흥원 출생. 건국대 국문과 졸업. 1981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한 그는 언어의 조율이 영혼의
반향에 리얼리티를 증폭시키고 또 그 역반응에 의한 삶의 확대가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겨울


  바람 앞에 바람
  바람이 맞붙었음

  바람과 바람이 서로
  엉키고 뒤엉켜 넘어지고

  쌓인 눈가루가 휘말려
  하늘로 솟구쳐 바람기둥이 되고

  나는 바람기둥에 기대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휘날리며

  이 겨울 기침 한번 못하는
  재주도 재주씩이나 쳐주고 있는

  어금니 썩은 이빨로
  치과에 나가

  아-- 하고
  입 벌리고 있음


       4월
       --진달래 앞에서


  내가 네
  살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네가 내
  살 속에 들어와
  머물 때

  불 놓은
  동토의 신열

  문드러진 동상
  살점 속에서
  절정에 오른
  그대, 그대들의 불꽃

  세상
  너절한 살 속의
  확실한 포옹

 

  임승빈. 1953년 충북 보은 출생. 청주대 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으며, 1983년 "월간문학"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닌 그의 시는 종래의 전통적이고
향토적인 소와 함께 소재의 영역을 넓히고 수용하고자 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으며, 현재 청주 대성중학에 근무하고 있다.

       세 개의 유년


    1. 가을산

  갈참나무 잎 하나가 떨어지면서 산 가득히 하늘은 내려와 앉았읍니다. 꼭
갈참나무 잎만이 하늘을 내려오게 할 수 있는지는  내가 산빛으로 크는
갈참나무가 되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갈참나무와 하늘이 그토록 가깝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그 후로 나는 내가 하나의 잎사귀되어 내려 앉으면 우리가 사는 마을
가까이 하늘도 아주 내려와 앉으리라는 꿈을 아무래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죠.

    2. 우리들의 힘

  관직을 버리셨다는 우리 할아버지는 가끔 낚시를 즐기셨는데요 해질녘
무연히 찌를 보시다 힘차게 낚시대를 채어 올리면
  문득 어깨 위로 푸른
  조각달 하나

  그 순간 나는 보았어요
  앞산 양지봉이 부르르 몸을 떠는 모습을

  새벽녘 돌아오신 할아버지 손에 들려진 것은 보퉁이 하나의 무게, 그러나
거기엔 팔딱이는 '고승리' 내 고향 숨결이 담겨 있었어요.

  지금은 못도 없고 세월도 없어 하늘엔 비늘 푸른 달도 없구요, 할아버지
낚싯대만 뾰족이 서서 솔개가 맴을 도는 푸른 하늘만 지그시 눈 감은 채
찌르고 있는 거예요.

    3. 아버지는 두릅나무 새 순만 따고

  장대를 들고 아버지는 두릅나무 새 순을 따고 저만큼 물러앉은 까치 한
마리 고즈너기 아버지를 내려다 보고 있어요.

  아버지와 까치를 나는 함께 두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까치 때문에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를마음 그리고 있을 거라는 추측은 아무래도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새 순을 따는 아버지의 이마 가득히 밀려와 푸르게 부서지는 하늘.
그것이 더욱 높아 보이는 것은 저만큼 떠나지 않는 까치 때문.
  아버지는 이제 새 순 끝에 묻어 있는 봄 햇살도 따고 기억의 먼
유역에 핀 바람도 잡아 당기면서, 딸 수 없는 세월만 더 높은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이죠.


       입술들


  비
  내리고 있다

  세워 둔 포크레인이 한 대
  녹슨 날끝으로 꿈에 젖는다

  꽃의 눈자위가 짙다
  그 짙은 그늘 속으로 쓸리는
  쓸리는 몸짓 가득
  돋아나는 상처

  도망하지 못한 하늘 한 구석
  세월마저 다 거부한 입술들이
  허공에 뜬 슬픔으로 만나고 있다

  슬픔도 아닌 것으로
  울고 있다

 

  장경린. 1957년 서울 출생. 방송통신대 졸업. "문예중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자유와 자유에 대한 책임에의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현재
한국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허리운동


  이 얼 싼 쓰
  유 류 치 빠
  명동 2가 83번지 화교소학교
  열 살 남짓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앞으로 굽혔다가
  뒤로 젖혔다가
  허리운동을 합니다
  뽀얀 모래먼지 이는 운동장
  담장을 타고 넘는
  이 얼 싼 쓰
  우 류 치 빠
  조국은 크고 머나먼 나라
  굽혀도 굽혀도
  손 끝에 발등이 닿지 않는
  머나먼 나라


       인물화


    1
  두 다리 덜미잡힌 방아깨비처럼
  온몸을 주억거리며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고려에서 코리아로
  고무신을 꺾어신고 달리는
  사람을 보았읍니까?
  쿵 쿵 쿵 쿵
  그들이 달리는 시간은
  언제나 삼경이고
  역사와 역사 사이
  사랑과 사랑 사이를
  교묘히 빠져나온 그들의 이목구비는
  오늘 따라 유난히 수려합니다.
  무교동에서
  영등포에서
  비어홀에서

    2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수초 그늘에 고개를 처박고 죽은 달
  젠장.
  바람이 불면 쩍 쩌억 금이 가던데
  위험해. 그저 앞만 보고 가라니까
  어른어른 거리다 사라져 버리는 저 달빛 속으로?

    3
  06시 40분. 부활하려면 20분이나 남은 시간. 숙면으로 완벽하게 무너진
그 사내의 나이는 그런대로 아직은 쓸만 합니다. 먼지 털고 방수액을 바른
다음, 눈 코 입 귀를 틀어 막으면 누가 보더라도 번듯한 항아리 같습니다.
불만과 욕정 또는 소주와 소시민성을 담기에 편리한 자루 같습니다.

  07시.
  자, 일어나 부활하십시요.
  출금을 서두르십시요.

    4
  지하철을 타고
  꾸벅꾸벅
  통조림 속 고등어 건데기처럼 꿀렁이면서.

 

  장정일. 1962년 경북 성서 출생. 성서중학을 졸업했고, 동인지 "국시"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성, 아침"(공저)이라는 시집을
출간하기도 한 그는 사회의 수많은 부조리에 대해 냉소를 보내는 한편
지나친 엄숙주의나 혈기방장의 의협심을 극복하고 일상적인 즐거움으로
가득찬 시세계를 갖고 있는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운동'
동인이며 현재 대구에서 시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강정간다


  알고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같이 환한 얼굴 빛내며 꼭 물어보면
  금방 대답이라도 해줄 듯 자신있는 표정으로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내가 아는 사람들은
  총총히 떠나간다. 울적한 직할시 변두리와 숨막힌
  스레이트 지붕 아래 찌그러진 생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제비처럼 잘 우는 어린 딸 손 잡고 늙은 가장은 3번 버스를 탄다
  무얼하는 곳일까? 세상의 숱한 유원지라는 곳은
  행여 그런 땅에 우리가 찾는 희망의 새가 찔끔찔끔 파란
  페인트를 마시며 홀로 비틀거리고 있는지. 아니면
  순은의 뱀무리로 모여 지난 겨울에 잃었던 사랑이
  잔뜩 고개 쳐들고 있을까
  나는 기다린다. 짜증이 곰팡이 피는 오후 한때를
  그리하여 잉어비늘 같은 노을로 가득 처진 어깨를 지고
  장석 들그럭거리는 대문 앞에 돌아와 주름진 바짓단에 묻은
  몇 점 모래 털어 놓으며, 그저 그런 곳이더군 강정이란 데는
  그렇게 가봤자 별 수 없었다는 실망의 말을 나는 듣고 싶었고
  그러나 강정 깊은 물에 돌팔매 하자고 떠났거나
  여름날 그곳 모래치마에 하루를 누워 즐기고 오겠다던 사람들은
  안 오는 걸까, 안 오는 걸까 기다림으로 녹슬며 내가 불안한 커텐
  젖힐 때. 창가의 은행이 날마다 더 큰 가을우산을 만들어 쓰고
  너무 행복하여 출발점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강정떠난 사람처럼 편지 한 장 없다는 말이
  새롭게 지구 한 모퉁이를 풍미하기 시작하고
  한솥밥을 지으신 채 오늘은 어머니가, 얘야 우리도
  강정 가자꾸나. 그래도 나의 고집은 심드렁히
  좀 더 기다렸다. 외삼촌이 돌아오는 걸 보고서, 라고 우겼지만
  속으로는 강정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지경.
  형과 함께 우리 세 식구 제각기 생각으로 김밥의 속을 싸고
  골곡 나설 때, 집사람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가게
  정리나 하고 천천히 따라가겠다는 김씨가
  짐작이나 한다는 듯이 푸근한 목소리로
  오늘 강정 가시나 보지요. 그래서 나는 즐겁게 대답하지만
  방문 걸고 대문 나설 때부터 따라온 조그만 의혹이
  아무래도 버스 정류소까지 따라올 것 같아 두렵다.
  분명 언제부터인가 나도 강정가는 길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밤에도 두 눈 뜨고 찾아가는 그 땅에 가면 뭘하나
  고산족이 태양에게 경배를 바치듯 강둔덕 따라 늘어선
  미류나무 높은 까치집이나 쳐다보며 하품하듯 내가
  수천 번 경탄 허락하고 나서 이제 돌아나 갈까 또 어쩔까
  서성이면, 어느새 세월의 두터운 금침 내려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망각 속에 가두어 놓고
  그제서야 메마른 모래를 양식으로 힘을 기르며
  다시 강정의 문 열고 그리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끈끈한 강바람으로 소리쳐 울어야 하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행복한 얼굴로 사람들이 모두 강정간다


         지하인간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장종권  1955년 전북 김제 출생  성균관 대학을 졸업했으며 1983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현재 인천 광성중학교에 재직하고
있으며 "3막 7장"(공저)이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바람불


  내가 돌이었으면 나무였으면 산아
  항상 네 살 속에 나를 섞을 수 있었다
  내가 꽃이었으면 산호였으면 여자여
  항상 네 살냄새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눈감고 내가 아니기를
  너를 떠나는 내가 아니기를
  바다여 깊은 뜻으로 이해한다
  이해한다
  속살 다 비치도록 고운 네 옷
  얼굴 붉히며 들여다보는 발톱
  머릿결로 치마폭으로
  흩날리는 본능
  나는 너의 한 묶음 꽃이 되지 못하고
  너의 부끄러운 타인이 되어
  배암이 되어


       안테나


  어른들이 십자가 밑에서
  두 손 모으는 일요일
  아이들은 골목에 모여
  안테나를 세운다

  손 칼 삼아 구덩이 만들고
  개똥 모아 거름 묻고
  이놈 실례 저놈 실례 물을 삼고
  발길로 씨팔 흙 돋우어
  꽁꽁 다진 안테나

  외계인아 와라, 오지 않고
  하나님아 와라, 오지 않고
  할아버지도 와라, 오지 않고
  잠자리나 와라, 오지 않고

  잎이 돋는다
  서슬 푸른
  거짓말이 돋는다
  참말이 돋는다


  전광옥  1956년 서울 출생  1984년 "현대문학"지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으며, 꿈과 현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시를 쓰고 있다  현재 출판사에서 편집일을 맡아 보고 있다

       신정동 1


  오늘은 비 그리고 조금씩
  바람 모두가 우울 조금씩

  버스를 타고 그 옛날 논두렁
  밭고랑 너머 신정동 친구
  찾아온 진창길 골목
  골목을 지나며 아직도 판자집
  비탈진 그들의 삶을 끓이며
  자식으로 어둠을 낳아
  아들 딸로 키우며
  자꾸 구석 구석으로만 몰아세우는
  바람 속에서
  술에 안주를 내는 친구는 한잔
  안녕 안녕 모두가 무사 웃으며 쓸쓸히
  사시나무 그늘로 흔들리면서 친구는 한잔
  이제는 괜찮다 그렇게
  힘차던 패기 하나가 밀리고 눌려 오늘은
  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술을 따른다

  친구여
  비탈길에서도 달려 내려가야 하는
  리어카처럼
  밑불 때문에 자기도 타 버려야 하는
  나중된 구공탄처럼
  결국은 익사할 금붕어의 아가미처럼
  어지럽게 돌므로써 살아가는 팽이처럼
  이제
  우리는 우리로서 산다

  버스를 타고 그 옛날 논두렁
  밭고랑 너머 신정동 친구
  찾아온 진창길 쓸쓸히
  술오른 친구의 여윈 눈 속에
  가깝게 쪽박산이 솟아오르고
  그 어깨 위로 비가 내리고 잇다
  마른 풀잎들 흔들거리며 온몸을 내맡긴 채
  흔들리며 비에 젖고 있다


       관법 4
       --별에게


  1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인다

  깊이 모르게 넓은 어둠의 냄새에 젖어
  출렁이는 너는, 난파선의 돛대
  끝에 매달려 부서지는 수기^256^ 색 바랜
  어머니의 이마
  우표 없는 편지

  어디서부터 읽어내려가야 하나

  2
  아버지,
  만주로 떠나시던 새벽의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지던 이슬방울들 여전히
  아무것도 붙들지 못하고^256^ 나는
  떠나왔어요  유해처럼 돌아온
  육십평생 아버지의 세월 위로 터벅
  터벅 아버지를 마나기 위해^256^ 나는
  떠다녔어요, 그 터벅거리는 절망과 희망 사이로 흐르는 입만
  살아남은 흙먼지들이 튀기는 침 같은
  피의 강물 위에서 나는 수없이
  만났어요, 제가 어둠인 줄도 모르고
  그늘을 쓸면서 살고 있는 누이를^256^ 때도 없이
  가래 끓는 소리로 기우는 썰물의 가난한 등줄기를, 언제나
  밀려나는 자만 밀어내는 바람 속에서^256^
  함께 밀리면서 나는 보았어요 취하여
  비틀거리는 골목의 끝에서 밀리고
  밀려서 이제는 더 밀려날 데 없는 사랑을^256^
  바닥이 없는 누이의 방을 돌아 나오며
  보았어요, 신학대학을 따라 둘러친 철조망을
  부끄러운 양심의 아랫도리를 지키는 정조대
  도난경보기가 달린 사랑의 치욕스러움을
  보았어요, 바람은 어디서나 불고 골목을 따라
  골목의 끝보다 더 깊이 내려앉은 하늘을

  봄이 보고 싶어요 오늘, 석간신문 위로
  죽은 황새가 흘러 지나가고 내 몸에서
  폐수 냄새가 나요  때아닌
  박쥐가 날아오르고 있어요 어디까지
  가야 하나^256^ 어둠이 날개 치는 소리를 지나
  --떠나올수록 갈 길은 멀어져요,아버지

  3
  피 토하며 사는 것이 어디
  네 가슴뿐이냐 까욱  누이 이마 위로
  깃 빠진 까마귀 울음
  몇 방울 지나가고^256^ 그 눈물방울을 따라가면
  어깨를 끼고도 낯선 사람들
  피를 토하며 살고 있더라 바람에
  밀리면서^256^ 혹은 버티면서, 오늘밤

  너의 편지를 답장으로
  다시 너에게 부친다  그러나
  (잊지 마라, 바람은 언제나 밀려나는 자만 밀어낸다)

 

  전연옥.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애정을 갖고 그것을 시화함으로써 진솔한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곤충채집


  생물학을 전공한다는 조카의 자연공책 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나는
궁금했지만 기도해야지 못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몸뚱이 한줄기 자유로운
바람결에도 날개 부비지 않는 적막을 위해 푸른 곰팡이 꽃처럼 피어나는
표본실 찬 담벼락에 이마를 기대고 이 강산 호랑나비 목청 좋은 말매미를
위해

  자정이 넘자 내 몸을 뚫고 들어오는 예리한 핀침에 의해 나는 표본되었다
숲에는 아직도 곤충들이 살고 있는지 굳어오는 손끝을 움직이며 나는
황홀하지만 풀 한포기 없는 이곳에서 나는 무얼 먹고 사나 포충망 가득히
날아오르는 날개를 바라보며 조카는 내 몸 깊숙이 또 한 개의 핌침을 박고
한 방울의 에테르로 나를 잠들게 하지만 무엇일까 자꾸만 살고 싶어지는 이
이유는


       제비붓꽃


  친구를 따라 강남에 가서 살꺼나
  애인을 따라 섬에 가서 살꺼나
  이대로 서로의 경계선이 되어
  석삼년 애간장을 태워도 오지 않을
  엽신을 기다리며 살아갈꺼나

  기다림 하나만으로 일생의 안부를 묻고
  내것이 아닌 침잠의 슬픈 얼레도 풀다가
  맨발 아래 차가운 물소리와 함께
  한평생 고질병에 이를 갈며 살아갈꺼나

  아아 내일이 되어도 아지 못할
  이 징그러운 소망의 잔뿌리들이여
  이제 나는 홀로 자유로와야 하겠네

 

  전원책. 1953년 경남 울산 출생. 경희대 법대를 졸업하고 군법무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1977년 연작시 '해동다작'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남이에게"가 있다.

       해동단장(초)


    1. 내 어머니 두레박 속

  내 어머니 두레박 속엔
  살아 퍼덕이는 바다가 담겨 있읍니다
  내안으로 질풍처럼 달아나던 하늘로 그득합니다
  내려다 보면 그냥 허공일 뿐이지만
  좀더 다가가서 보면
  고조선의 잠의 뿌리가
  예까지 뻗어 수초처럼 일렁입니다
  나는 그 실뿌리를 타고 들어가
  관능의 질긴  육질의 끝까지 올라가
  황홀했던 소년으로
  깊이 잠긴 장인의 잠을 두드립니다
  정갈하게 다듬어지는 노래를 듣습니다
  음계의 맨끝에 쌓인 숲에는
  풀풀 날리는 햇덩이의 살도 있읍니다
  온 세상은 그냥 잠든 채입니다
  내 어머니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진주로 만들어진 마을이 있어
  내 팔매질로도 다하지 못한
  하늘만으로도 그득합니다
  나는 그 속에서 이른 아침이면
  눈부셨던 아이로 일어나
  이만큼 자라날 수 있읍니다

    2. 해동청 일수

  불어도 불어도 당신은 더는 커지지 않는 풍선입니다
  이 세상 강풍을 다 쏟아 넣었읍니다
  내 잠 어느 귀퉁이쯤
  당신은 온 누리에 내리는 햇살의 중량을
  홀로 감당하고 있읍니다
  그 감동을 받들고 섰읍니다
  나는 문득
  바람이고 싶다가
  폭풍우이고도 싶다가
  터질 듯 터질 듯한 꽃봉오리이기도 합니다
  그 위를 밤새 실눈 뜬 꽃뱀이 넘어가고
  십년이 뭉텅 지났읍니다
  그 십년을 또 일순에 뛰어넘는
  해동청 일수가 있읍니다
  나는 그냥 당신의 종이기도 하다가
  영겁을 날아 화석이 되기도 합니다

    4. 신라의 아이들은

  오는 비 맞으러 뛰어나간 아이는
  신라의 하늘 밑을 내닫고 있읍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수로부인의 기슴팍까지 걸어 들어가
  음악책이나 그네 사독 어디에서쯤
  소나기 한줄기를 쏟아 놓습니다
  개나리 꽃송이 환한 속살마다
  투명했던 하늘에서
  왜 먹구름은 울까요
  개운포 가는 신라 성왕의
  터벅대는 발자국소리도 들려옵니다
  그 발자국마다 폭우가 그득합니다
  열릴 듯 열릴 듯 열리지 않는
  홍수같은 내 잠 근원입니다

    6. 불의 눈

  싯붉은 불 뿜어내고
  말라죽은 신석기시대가 누워 있읍니다
  잠은 많은 세월을 퇴적하여
  긴 해안선이 되어 있읍니다
  무시로 불어내리는 태백의 바람이
  숱하게 지워가지만
  만조의 아침이면 다시 솟읍니다
  이 바다가 다시 한 바다가 되어
  빛나는 불의 눈 되쏟으려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더러는 깊이 모를 잠 속으로
  더러는 행방모를 바람에 품어져
  달아난 관능입니다
  설령 이 바다가 꿈꾸는 중이라
  아이들의 밝은 눈엔 형형하게 되살아나는
  고조선의 동해라 하더라도
  동세의 동해라 하더라도
  아무도 그 세월을 건질 수 없읍니다
  그 심연을 건질 수 없읍니다

    9. 별밭

  땅 위에도 별은 숱합니다
  줄기마다 굵은 놈들이 듬직해져 있읍니다
  별 하나마다 쏟아놓은 푸른 빛이
  이내 바다로 변해 한 마을을 넘실댑니다
  나는 매일밤 별밭에 가서
  조금씩 떨리며 가라앉는 눈물을 봅니다
  눈물도 이내 바다로 변해
  꿈 하나
  세상 하나를 넘실대고 있읍니다
  아마 삼킬 것이지요

 

  정대호. 1958년 경북 청송 출생. 경북대 국문학과 졸업. "분단시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일개인의 갈구와 열망이 부분적인 것에서
전체적인 것으로 확산, 보편적 차원에서의 자유와 사랑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되고 있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1983년에 시집으로
"다시 봄을 위하여"를 출간한 바 있다.

       레미에게 *
  ( * 레미:레바논 평화를 호소하는 다섯살의 여가수)


  너는 레바논의 철부지 다섯살
  기독교가 무엇인지 회교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인종이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네 아저씨 오빠들을 보면서
  이제 그만 총을 쏘세요 우리가 장미를 심을 테야요 *
  ( * 조선일보 84년 7월 29일)
  장미가 그립긴 하여도 총알이 왜 먼전지 모르는 레미에게
  평화가 좋긴 하여도 총알이 왜 먼전지 모르는 레미에게
  레바논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총알을 말할 수 있겠지
  이제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 다시 총을 잡은 레미와
  아직 더 어려서 총알이 무언지 모르는 레미들도
  살 부비는 종교도 이념도 벌거벗은 생활을
  그렸고 그릴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총을 잡았고 잡을 것이라 생각하며
  레바논의 많은 레미들은 평화를 노래할 것이다
  노래하고 총을 잡으면서도 행복한 레미야
  너는 이념이나 사상을 말하지 않는구나
  머리 뒤에 더 큰 주먹이 보여도
  네가 그런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레미야
  너도 자라 민족이 무언지 땅이 무언지 알면서
  다시 총을 잡을 레미야
  평화가 좋긴 하여도 아저씨 오빠가 쏘는 총알을
  미워하지 말아라 레미야
  네가 선 땅이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움은
  총알에 피가 묻은 네 땅에 서 있기 때문이지
  조국에서도 이방인이 된 팔레스타인 이웃을 보면서
  민주는 유태인의 말이 아니라는 이웃을 보면서
  그래도 네 땅에서 평화를 말할 수 있는 레미야
  네 아저씨 오빠가 종교도 이념도 벌거벗고
  잡은 총 쥐고 머리 위 주먹을 쏠 수 있을 때
  응원가라도 불렀으면 좋겠지 레미야
  네가 부르는 평화의 노래로 네 아저씨의 총알이
  자랑스럽지 레미야
  하지만 지금은 누가 누굴 쏘느냐
  총알 잡고 울어라 레미야 네 눈물이 막을 수 있다면
  더 깊은 노래를 불러라 네 노래가 사랑의 총알이 될 수 있다면


       미국으로 입양가는
          아이들에게


  좋아하지 말아라 이 땅을 떠나면서
  누가 길러줄지 모르며
  반도를 떠나는 아이들아
  굶주림을 위하여 삶을 위하여
  이 땅을 떠나는 너희들
  신문은 쉽게 적응하고 온순하다고
  너희들을 자랑하며 말하지만
  그건 결코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감사할 때 감사해야지 내 땅에서 쫓겨나
  남의 밥을 먹는다고 기마저 죽어서야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너희들
  이 땅에서 먹여주지 못하고 보내는 우리들
  부끄러움과 죄 지은 마음으로
  무어라 말할 수도 없지만
  코 높은 백인들 양육보증 요구할 때
  말 한마디 못하고 떠맡기는 우리들
  늘 죄스럽고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뜨거운 피 속에
  우리들의 얼음같은 염치가 숨어 있음을
  우리들의 부끄러운 피 흐르고 있음을
  아시아의 동쪽 작은 반도 너희들이 태어난 강물임을
  머리 속에 남겨서 기 죽어서야
  떳떳하게 살아라 이 땅을 떠나서도
  밥그릇을 위해서 양육을 위해서 떠나가는 너희들
  떠나서도 이 땅의 강물을 잊지 말았으면
  먹여주지 못하고 내 땅에서 보내는 우리들
  염치같은 부탁이지만
  좋아하지 말아라 내 땅을 떠나면서
  울지는 말아라 살아가는 쓰라림 속에서
  그 땅의 강물도 너희 몸속 흐르며
  때로는 거부를 일으키지만
  흐르고 흐르면 흑, 백의 명암 속에서
  그 물도 너희 살이 될 수 있음을
  살아가면서 너희들의 눈과 귀도 염색하여 줄 수 있음을
  너희들도 깨닫게 되지만
  너희들이 울면 내 땅에서 보내는 사람들이야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 없단다
  울지는 말아라 내 땅에 쫓겨난대서
  기뻐하지 말아라 내 땅에서 쫓겨나면서

 

  정동주. 1949년 경남 진양 출생. 1983년 시집 "농투산이의 노래"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제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산업화의
혼란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찾기 위해, 찾아낸 인간성의 승화를 위해
과거의 역사와 현실 상황 속을 넘나들며 문제의 근원을 찾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순례자"와 "논개"가 있다.

       이삭줍기


  앞서거니 뒷서거니 풀잎에 가을 듣는 날
  바인더가 흘려버린 벼이삭을 줍는다
  기계를 믿은 어리석음의 흔적을 줍는다

  맨손으로 먹이를 집어먹던 날부터
  숟가락 혹은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오늘까지의 거리는 손바닥과 손등의
  그저 거기서 거기까지일 뿐
  원시채집경제는 아직도 흙에 살아 있고
  벼이삭 줍는 뜻은 목숨의 노래

  이삭 하나에서 한 계절이 열린다
  이슬이 발목 적시고
  달콤한 바람 불던 날 아침의
  들길에서 만난 김씨와 나누는 인사는
  원시보다 낮은 곳에서
  문명보다 높은 곳으로 소리없이
  와닿는 곡식들의 키를 짐작하는
  들새들 눈매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인데

  이삭 하나에서 한 시대가 보인다

  오지그릇 장수였다던 고조할아버지
  짚세기 자욱마다 괴어 있는
  사람 아래 사람들 목이 진 눈물이
  떨리며 숨어 삭아 어룽진 거,

  참봉댁 머슴이었던 증조할아버지
  거덜난 삶의 팍팍한 황톳길
  낮도 밤 같은 한평생 주름살이
  무잠뱅이 기운 자욱으로 드러나는 거,

  일제 때 징용 가서 객사한
  빈혈 묻은 할아버지의 조국 하늘과
  6^256^25 때 탄알 지고 가다 행방불명된
  울 아버지 검정고무신에 흥건하게
  괴어 있을 피냄새에 엉겨붙는 파리떼
  파리떼처럼 그날 그날의 높이를
  날아보다 사라지는 하루살이 같은 거,

  월남땅 정글에서 전사한 큰형의 그
  비폭력 논리가 방위세로 부정되는 것과
  중동땅 어느 모래펄에서
  산소용접기를 손에 쥔 채 죽었다는
  작은형 적금통장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빈 공간 같은 거

  이삭 하나에서 이상기류가 흐른다

  들바람이 농약 냄새에 시들고
  열어놓고 살던 사립문 뜯어낸 그 자리
  철문 달아 굳게 닫은 채 이웃 사람들
  빚더미 위에서 의료보험카드를
  그리워한다

  씨 뿌리는 사람들 단속하는 문서들과
  말 잘 듣는 사람들 다스리는 구호들이
  피임약을 팔고 냉장고를 팔며
  곡식값을 주무르고 대학은 자꾸
  인가되는데 자꾸 높아지는데
  거친 손바닥에 앙금진 노동은
  목타는 침묵일 뿐 술이 취하면
  논값과 서울의 아파트값을 자꾸
  견주어보며 깊어지는 막소주의 유혹

  그래도 그냥은 죽을 수 없는 까닭이 있어
  지난 여름 병든 들녘 바라보며 흘리던
  땀의 이름을 씹으며 씹으며,

  입 없는 농투산이 처진 어깨로 지고
  가는 국제적인 무게의 채무를 생각하며,

  아이들 키보다 빨리 자라는
  이자의 속도를 생각하며,

  컬러로 꾸며진 정책에 가리워져
  아직도 흙 속에서 영양분을 빨다가
  흙 속에 묻히는 20세기 문명을 생각하며,

  기계의 시꺼먼 이빨자욱마다
  짓무른 생존의 살냄새가
  가마니로 포장되어 팔려가는 이 시대,

  이 시대의 구석지고 메마른 땅에서
  오늘도 허리 굽혀 이삭을 줍는다


       전설


  바람 난 처녀 총각
  단오 무렵 보리밭에서 껴안고 뒹군다
  지나던 밭 임자 먼산 보며 하는 말
  풍년이로다 어허, 만사 풍년이로다

 

  정두리. 1947년 경남 마산 출생. "한국문학"지에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새싹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개인적인 경험을 인식의 단위로 단순화시키고 재구성함으로써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진정한 자아를 확보한다. 시집으로 "유리안나의 성장"
"겨울 일기" "낯선 곳에서 다시 하는 약속"과 동시화집 "꽃다발"이 있다.

       데레사씨 꽃가게


  마르면서 붉어지는 분홍 장미는
  물구나무로 매달린 채
  벌써 한 달째다

  한 웅큼 잽싸게 따라와 뿌려진 바람과
  알맞게 고루 배인 햇살로 피어난 꽃도
  여기서는 가끔 기가 죽는다

  시들어빠진 마른 꽃이 팔려나가는 곳도
  이곳이다

  반쯤 피다 만 나리꽃
  하루에 두세 번 피고 지는 알라딘 꽃
  꽃들은 절대로 소리내며 웃지 않는다

  근시인 데레사씨
  꽃말 따위로 부질없는 야담을 만들지 말라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요즘은
  제 냄새 풍기며 사는 법을 배우노라고
  피는 꽃은 다르지만
  지는 꽃은 닮았더라고
  꽃들이 못 알아듣게시리
  가만가만 이야기하곤 하였다


       우리들의 이름자


  뉴욕 라구아디아 공항에서 만난
  내 언니는 눈화장이 흐미하도록 울었다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달라진 것을 살피고
  확인한 지난 밤
  엇갈리는 밤과 낮을 탓하며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빨간 집 이층에서 잘수록 모자라는 잠에 항복이다
  길 건너편 집
  제약회사 그만 두고 이민 온 부부와
  과일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그 남자는 무교동의 저녁을 추억하고
  그의 아내는 그런 일쯤이야 일축하고 웃는다
  못 견딜 미움도 없어져 버리는
  뜨내기 기분이
  더러 다행일 수 있겠다 싶은 식탁엔
  석필로 썼다 지웠던 우리들의 이름자
  이적지 잊고 있던 어릴 때의
  아명까지 버젓이 나타나고
  되물릴 수 없는 하얗고 동그란 얼굴의
  계집아이 하나가
  목소리가 달라져서 턱을 괴며 앉았고
  쥐포 굽는 냄새 질펀한 사투리
  우리의 몸은
  허드슨 강을 질러
  막을 길 없이 밀려가고 있었다

 

  정명자. 1958년 전남 목포 출생. 노동현장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형상화시키고 있는 그의 시는 저항의 순간마다 겪고 치뤄야하는 의식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할 구 없는 고통스런 인간 선언의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동지여 가슴 맞대고"가 있다.

       잊지 못할
    1978년 2월 21일


  떼때로 지난 일들이 지금 진행되는 일처럼
  생생하게 역력히 되살아난다
  1978년 2월 21일 대의원 선거날
  선거 한번 민주적으로 해보자 기대에 부풀었던 날 새벽
  낯익은 동료들
  술냄새를 풍기던 보전반 박씨의
  촛점 없이 하얗게 변색된 얼굴을 뒤따라
  대의원 선거장은 똥물로 아수라장
  "똥 먹고 싶지 않으면 싹 나가!"
  부라리며 고함지르며 덤비던 광란의 눈동자
  "아저씨 진정해요 이럴 때가 아니에요!"
  뜨거운 눈물 애절한 호소
  "비켜! 니년들이 뭐 잘났다고...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고 까부는 년들에게는 똥물이 약이야"
  폭력 남발
  악성범죄의 현장
  작업은 거부되고 범죄자들은
  자율을 부르짖던 모두를 몰아내기 위한 시도 단행
  지부장의 자격을 박탈하고
  동일방직 민주노조는 사고지부로 낙인찍고
  민주노동조합을 때려잡는
  조직행동대라 칭하는 200여 명의 깡패를 현장으로 난입시키고
  아 -- 자율은 똥물 진창 속에 묻혔고
  노동조합법은 권모술수의 앞잡이로 둔갑
  견딜 수 없는 치욕의 날들
  살아 숨만 쉬는 허깨비 아닌 우리 모두
  우리의 정당성을 밝히기로 하고 단식으로 항의농성
  똥물 먹고 살 수 없다
  우리가 빨갱인가
  자율적인 노동조합 보장하라
  대의원 선거 치르게 하라
  백날 같은 하루 백날 같은 한 시간
  정신 잃고 들것에 실려나가고
  가족들의 아우성은 더욱 커지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동맹단식이 이어지기를 13일
  사태는 급속도로 위급해지고
  현장으로 복귀만 하면 모든 문제는 백지화시킨다
  정부의 고급관리와 종교계 인사들께서 합의
  대의원 선거도 무사히 치르게 한다
  아 -- 가슴 터지는 승전가
  얼싸안고 얼싸안고 웃고 울고 나딩굴고
  솜먼지 자욱한 일터로 가자
  선진조국 잉태하는 기계 앞으로 가자
  그런데 맑은 하늘에 개벼락?
  무단결근으로 사칙 위반한 죄
  소요를 유발시켜 회사의 위신을 추락시킨 죄
  생상량을 50P 감소시키고 불량품의 급증으로 막대한 손해를
  유발시킨 죄로 124명 해고
  또 범죄 유발 악성범죄 재유발
  "우린 어떻게 살아요?"
  "입 닥쳐"
  입술은 곤봉에 짓이겨지고
  "같이 살아 봅시다"
  허우적거리는 손과 발은 쇠사슬에 조이고
  범죄자들은 버젓이 어깨에 힘주어 행세하기를
  선량한 노동자들은 전과자
  피보다 진한 우리 모두의 눈물
  피보다 진한 우리 모두의 한
  아-- 식모살이 버스 안내양 봉제공장 시다
  들통나면 가차없이 해고 해고...
  차라리 웃음 팔고 몸을 파는 창녀짓을 해서라도
  목구녕에 풀칠해야 살지
  질서 정연한 공단거리
  찢어진 무심한 모집공고 앞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한숨
  그러나
  이대로는 죽을 수 없어
  죽는다면 이 세상을 떠도는 원귀라도 되어
  진실을 위반한 범죄자들 가슴과 머리를 도려내고
  전과자 된 양심과
  핏빛보다 진한 눈물로 목욕시켜
  사랑 앞에 무릎 꿇고 과오를 번성시키는
  이런 각오로 살아야 한다
  때때로 이런 생각만 하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아-- 살아야 한다
  진실과 정의의 기치를 들고 끝까지 살아야 한다

 

  정상현. 1961년 경남 함안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1985년
"문예중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시의 뿌리는 생활 그 자체'라는
시관을 갖고 있는 그는 더 크고 내밀한 생활의 나이테를 보여줄 수 있는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시인. 현재 서울 중앙중학교 교사로 근무중이다.

       운동장을 바러보며


  추억에 젖은 사람처럼 봄볕에 몸을 말리며
  결국 못 쓰고 말 편지를 펼쳐놓고 운동장을 바라본다
  빨간 베레모 학생들의 기합소리를 끌어 올리며
  비둘기떼는 도서관 지붕위로 날아 오른다
  봄볕을 마중하러 나오는 피아노 소리와
  늘 뒤로 물러앉아 푸르기만 한 하늘과
  모두와 모두가 실성한 것처럼 어우러진다
  아직 포플러 앙상한 운동장 구석에는
  초록빛 아이들이 농구공을 쏘아올리고
  멀리 남산탑에서 운동장을 내려보는 시선들이 보일 것 같다
  돌아서면 작은 가슴 하나 되지 못하는
  나날들의 주장을 새삼 동여매면서
  오수에 잔긴 한 여자의 무릎에
  눕고 싶은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 아득해지는 이맘때쯤
  그리운 마음들에게
  그동안 죄송했읍니다 라고 고개 숙이면서


       동두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중등 2급 정교사가 되어
  신탄리행 기차에 올랐다 김명인을 읽으며
  도착한 동두천은 꽃샘 추위에 막막히 잠겨 있고
  교문 앞을 행진하는 흑인 병사의 탱크 행렬에
  핫도그를 먹는 꼬마들이 거수 경례하고 있었다
  정 선생, 여기는 어려운 도시니까 열심히 해 보도록!
  첫수업부터 나는 너희들의 기를 잡겠다며 설치고
  한문 숙제 때문에 발바닥을 맞은 너희들
  마침내 교실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나는 체벌 이유를 합리화, 끝까지 정당화했다
  이유없는 선생의 위신과 분필가루 같은 사랑을 앞세워
  부기와 타자 급수로 여상 3학년을 점수 매기고
  5분 늦은 지각생을 벌 주면서
  그러나 나는 무엇에 대해 선생이 될 수 있을까
  퇴근길 동두천 별빛이 부끄러워
  생연동 숲 속을 고개 숙여 걸을 때
  흐느끼는 눈망울이 가슴에 별처럼 찍혀 왔고
  숲 끝난 논둑에서 봄벌레 자지러지는 소리 들으며
  작고 연약한 것에 나는 왜 이렇게 강하고 난폭해지는지
  가듭 자문했지만 대답하지 못한 채
  교단 위의 인격과 카아네이션이 오래 오래 미안했다

 

  정인섭. 1955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시집
"나를 깨우는 우리들 사랑"으로 문단에 데뷔, 주목을 받았다. "남민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한말 이후 우리 민족에게 다가온 참담한 비극들에
대해 뜨거운 분노와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시화하고 있으며 선비적 음성과
남성적 한으로 충만된 시세계를 갖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현재
전주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 땅에 모여 3


  겨울이 오고 논이 비었다
  이 한 해 흙을 파다가
  다친 손이며 뒷목 살기낀 나락씨들 단단히
  논바닥에 묻혀 가고
  검불 줍던 눈들 어디론지 가서는
  검불 가리며 침침한 불을 밝히고^256^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오래 잠 깨어
  새떼를 부르거나 우물을 파며
  온 나라 들을 모으는 일뿐
  얼며 흐르며 두껍게 근심 쌓는 일뿐
  지금 쑤시는 허리와 그슬린 얼굴들 모아
  서로 덮는 일뿐
  담양 곡성 장성 화순
  새들은 하늘에 멈추어 울고
  물은 남북으로 다시 갈라져
  오늘은 탈곡기 밑에서 마른 손가락이 나오고^256^
  논바닥에 넘치며 길들을 끊으며
  겨울비가 내린다, 모두
  조선 들에 모여 흘러내린다


     오늘 저녁 우리나라의
        절망 우물들이


  서로 눈뜨고 있네
  오늘 저녁 우리나라의 절망 우물들이
  밤바람을 견디며 새 절망 부르고 있네
  어디에 곤한 고향땅 두고 와 있네
  저 들에 하룻길
  흙을 파다 돌아가네
  이 사람아, 지금은 마른 풀에
  내 적신 우물 가득하네
  길어 올려 네게 마시우는 이 단 물
  우리 드러난 몸의 뼈 부끄러워 단단하고
  물 없이 가는 내일 해 아래
  이 쓰디쓴 발바닥에 두리니
  포근하다 썩어가는 풀무덤가여
  뉘어 보아라
  오래 내리지 않는 하늘에 내비치는 우물들
  여기서 닿는 저 산 어둠
  부르며 져 나르면 날이 새는가,
  동트기 전에 절망 우물들
  함께 우리 땅 밑으로 손잡고 있네
  이 사람아, 부르고 있네

 

  정일근. 1958년 경남 양산 출생. 경남대 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4년 "실천문학"지와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그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과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뛰어난 서정성으로 노래함으로써 진실한 감동을 주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산의 시학" 동인이며 현재 진해 남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제1신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뫃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남발을 끌고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히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우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우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이루어 시경강의보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선제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시월의 기도문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천고마비보다 시고시인비이게 하소서
  서정성으로 둔갑하는 누이의 가을 사랑 속에서도
  번번이 결별의 비수는 빛나고
  안경을 벗은 안맹의 여린 내 시선으로도
  반도를 움켜쥐는 바람의 손길이며
  한반도의 툭툭 불거진 슬픔의 힘살들이 환히 보입니다
  하여 시월 속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이제는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소서
  시월에는 유신이게 하지 마소서
  가을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즐거이 일하고 놀이합니다
  하누님 당신은 늘 그대로 하늘에서 쉬시고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월의 공산 같은 달밤이 오면
  아이들, 낙엽, 대통령, 바보, 눈물, 풀꽃 모두 모여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
  높은 더욱 낭낭히 높은 목소리로 시를 읽게 하소서

 

  정재희. 1944년 서울 출생. 경기대 졸업. 1983년 "월간문학"지로
데뷔하였으며 "미래시"의 동인이다. 본향에의 추구, 향수, 그리움을
주지적으로 드러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유년시절


  지울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들고
  아직도 나는 서 있다
  시절을 잃어버린 텅 빈 앨범 속에 버려두었던 나를
  때 묻은 날들이 가끔은 고개들어 새삼 부르고
  사라진 그때의 사람들만 빼앗긴 계절을 돌아 온다

  아는 자만이 아는 그늘진 모퉁이를
  수없이 돌며 안으로 삼킨 우리들의 아픔을
  헹구던 시간만 가고
  아무래도 남은 것은 남는
  지울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들고
  아직도 나는 살아간다

  까마득히 멀어져간 날을 말없이 돌아와
  때 없는 비바람을 다스려 앉으면
  꿈결처럼 그날들은 가고
  또 헤쳐가야 할 이 시대의
  아득한 강 줄기를 타고
  소리 없이 지나는 이야기가 있다


       봉원사 가는 길


  강이 바라다보이는
  양지 바른 언덕
  그곳에 영원의 집을 짓고
  오늘도 무심한 날을 기다림으로
  버티어 선,
  비문 한 줄
  흔적의 흙 한줌 세우지 못한
  그대의 영혼

  새들이 번나들고
  계절이 때마다 오가지만
  발길 멈춘 외로움에
  활활 사르지 못한 짧은 생애
  아픔마저도 가져가 버린
  망각의 먼 추억이 불을 켜면
  아슴한 기억으로 달려와
  못 견디게 하는 그대의 모습

  안아 일으키는 불꽃
  꺼질줄 모르는 어제들이
  흔들리며 떠가는 아쉬운 손짓으로 여기
  헐벗은 남루를 가슴 여미게 할 뿐

  봉원사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
  지척에 이 발길 그리 더디고
  못내 잊혀진 그림자 밟고 오르는
  매정한 세월만 쏜살같이 멀어 간다

 

  조남야. 1947년 충북 청주 출생. 1983년 "월간문학"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현재 청주 신흥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으며 "뒷목"의
동인이기도 한 그의 시는 문명비판적이거나 현실비판적인 내용을 평이한
시어로 표현, 독자적 시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그믐밤


  무서리 지는
  그믐밤

  오동 울리는
  바람 소리에
  하얀 무명에 싸인
  달 그림자

  울섶을 지나
  빈 마을 돌면
  수수꽃같은 만초
  달 가리고

  문풍지 스산한
  소리마다
  홀로 사위는 수절곡 한 곡
  달빛 속으로 간다


       보리 밟기


  나는 보리 밟기가 아주 좋아서
  외숙네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내처 보리 밟기만 하였어요
  투명한 햇살을 등에 지고
  잔설의 흔적이 쬐금씩 남아 있는
  가파른 산등의 몇십평쯤은
  아주 재미난 일이었지요
  첫돌 지난 놈의 잠지처럼
  봉곳이 솟아오른 푸른 청보리
  초장이 웃자라면 안된다고
  엽수를 잘 가려야 한다고 해
  짧은 섣달 한 나절을
  사방 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삐쭘이 쳐들은 초움들을
  싹수부터 암팡지게 밟았지요
  외숙은 여러 번 말했어요
  보리는 그렇게 밟으면 밟을수록
  보숭보숭한 속살이 오르고
  동토를 헤집고 솟아오르는
  강한 힘력이 길러진다고
  그러니 폭설이 언땅을 내리치고
  만상이 길게 동면을 해도
  보리만은 쑥쑥 솟아올라
  이 땅의 산천을 누비고 누비며
  그 푸르른 힘력을 자랑하지요
  나는 그것이 참 신기하여
  외숙네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내처 보리 밟기만 하였어요

  조석구. 1941년 경기도 화성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상실을 회복하려는 그의 시들은 소시민의 비애와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땅이여 바다여 하늘이여"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가 있으며 현재 평택 한광고등학교 교사로 있다.

       리어카와 생선


  어느 날 시장에서
  문득 들려오는
  유년의 고향 소리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닻을 내리고 모여 사는 곳

  리어카에 얼굴 붉힌 사과들이
  시펄시펄 멍들은 알몸을 비벼대며
  외침질을 하고 있다
  튼튼한 어둠

  눈을 부릅뜬 생선들이
  좌판에 일렬 횡대로 서서
  최근의 바다 소식을 모른 채
  열병식에 참가하고 있다
  헹가래로 일고 있는 파도

  빛은 이단의 뜨락에서
  썩은 냄새를 풍기며
  따갑게 흩어진다

  군중은 허위였다
  오호, 화려한 모순


       시인과 농부


  비인칭 주어로
  살고 있는 그리움
  불규칙 동사로 저무는 하루

  그대 슬픔이 누워 있는 언덕에
  잡초로 꺾인 서러운 꿈이
  들꽃으로 서 있다

  향기도 없이 쓸쓸하게
  바람에 기대어

  들빛을 꺾어
  들바람을 꺾어주던 그대의 손엔
  물꼬를 보고 오는
  저문 삽이 들려 있구나

  아, 나는 들꽃을 안고 울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울었다

  누군가 가지고 놀다버린
  이 시대의 상황이 노을에 젖고
  가난이 강물로 흐르는
  황토흙 길 끝 그대 집에
  해바라기 노오랗게 피고
  은빛 램프 켜지는 날
  나는 다시 한번 울고 싶다

 

  조석현.1953년 경북 출생. "시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절제되고 간결한 시어를 선택, 낭만적인 경향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현재 근로복지공사 산업재활원에 근무하고 있다.

       천목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쩌면 천둥
  갈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번개

  도자기에
  내 눈물을 찍어 바르고
  먼 산울림

  기왓골마다에
  마른 비늘이
  살아있는 붕어가
  바람불면
  때로는 천둥
  때로는 번개

  곰 나루
  얼음 밑에서도


       6병동


  꽃잎없이 피는 꽃
  꽃 속에서 울어요
  어릴적
  어둠 속에서 별을 본 듯이

  과거는 꿈 같은 기억 속에
  꿈은 과거였던가
  내 눈빛 녹슬어 가고
  눈물처럼 무너지는 침묵

  종이 울리면
  이 아픔 건너
  흩어질까나
  수면제 한 알만큼
  바람 속으로

 

  조원규. 1963년 서울 출생. 서강대 독문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 독문과에
재학중이다. 198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시적감응과
발화의 주체 및 수용자의 단위를 개인으로 하여 초보적 시작법을 엄수하는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밤의 노래 1


  오늘 지는 해가
  저토록
  빛나는 것을
  어느 누가 기억하랴
  질병의 흙에 뒤엉키며
  터뜨려지며
  결코 인간의 역사를 장식치 않는
  늦장미와 여윈 바람을
  훗날

  어느 또 한 눈 먼 인간이 있어
  살려는 자와
  살고 싶지 않은 자의
  하루와
  역사 이래의 서럽고도
  서러운 인간들의 욕정을
  막막한 오후

  백열의 뇌세포 속에
  못박아
  새기기를 원할 것인지
  나는 생각치 않으련다
  무한히 살고 싶다
  손끝까지 빛에 감싸이면
  엎드린 도회의 어깨 너머로
  다함없는 저 시간의
  약속들 속에서


       밤의 노래 2


  밤은 존재하고
  나도 존재한다
  황량한 진리를
  누구든 기억해다오
  인간이 변하고
  거듭 변치 않을 수 없음이란
  서럽고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나는 기억하련다
  왜 죽고 싶었던가를
  푸른 하늘 쏟아지던
  어느 새벽 어느
  도회의 일몰들을
  파헤쳐진
  모래와 같이
  살기 시작했음을

  밤이 존재한다 하여
  나까지 존재하는 것은
  도회의 쇠못과
  망치를 노래하기 위함
  온갖 쓸모없는 것들을
  한 세계의 경계로
  내팽개쳐진
  쇠와 피의 아버지들을
  저토록
  차가운 세상에 누워
  내 과거를 지키는 눈초리들을

 

  조윤호. 1947년 경남 하동 출생. 1983년 "문예중앙"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순진무구한 동화적 세계에 시적 동기를 두고 있으며, 냉소적인
시선과 함께 감정 조절에 탁월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석유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풀잎의 영혼


  풀잎의 영혼은
  풀잎의 머리 위에
  돋아난다

  풀잎의 영혼은
  풀잎의 머리 위에
  그러나 그리 높지 않게
  돋아난다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면
  풀잎의 영혼도
  흔들리고

  풀잎이 비를 맞으면
  풀잎의 영혼도
  비를 맞는다

  풀잎이 푸르를 때
  풀잎의 영혼은
  더욱 푸르지만

  풀잎이 시들어 질 때
  풀잎의 영혼이
  먼저 시들고

  풀잎이 뽑히면
  풀잎의 영혼도
  뽑혀진다

  다시 돋아날 풀잎을 위해


       빈자여행


  월수 이십만원 못되는 사람끼리
  우주여행을 떠나자

  철새는 남북으로 날고
  잘 사는 사람들은 동서로 날고

  날지 못한 사람끼리
  우주여행을 떠나자

  카운트다운은 필요 없다
  유산균음료병 같은 우주선에
  시내버스처럼 가득 타고
  우주여행을 떠나자

  둥둥 하늘로 치솟아
  빙글빙글 돌면서
  웃자웃자
  하루종일 웃고웃다
  저녁 때 슬그머니 내려오자

  내려올 때 조심하자
  이북땅에도 내리지 말고
  미국땅에도 내리지 말고
  변두리변두리 정류장에
  잊지말고 내리자

 

  차정미. 1958년 전남 보성 출생. "시인"3집(1985)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시작활동을 펴고 있는 그는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현재 방송통신대학 학보사에 근무하고 있다.

       여의도 83


  겨울은 봄 속에서 싹을 틔워
  겨울은 여름 속에서 가을 속에서 성숙되리
  봄은 겨울 속에서 반죽되는 봄
  하여
  겨울 그 겨울 속에서 봄은
  한덩어리의 풀빵으로 부푸리
  베이킹 파우다여!
  봄이 오거든 내친 걸음으로
  재빨리 봄이 오거든
  너의 공로를 어찌할거나
  북에서 동으로 불던 바람
  서에서 남으로 불던 바람
  6, 25에 영락없이 죽은 줄만 알았던
  뒷날의 무수한 비극처럼
  까무라쳐 죽은 줄만 알았던
  말숙이, 상돌이, 갑식이, 언년이
  가슴팍에 박힌 점하나로
  너를 찾았구나  영락없이 찾았구나
  붐빠빠
  꽹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풍악소리 높이 울려
  30년 불던 미풍
  오늘 돌풍으로 몰아치니
  바람이여
  너의 공로를 어쩔거나
  어쩔거나


       피아노를 치면서


  나의 윤택한 일상을 위해서
  일곱개의 옥타아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적마다
  생각하지
  피로 얼룩진 항거의 깃발
  나부끼던
  기미년 삼월 일일 점심무렵
  터지던 만세의 함성들을
  국사교과서 위인전에서나마
  간간이
  그때의 현장
  그때의 울분
  혹은 그때의 감격
  전율로 느껴 알 수 있지만
  부끄러워라
  나의 윤택한 일상을 위해
  일곱개의 옥타아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적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다시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종횡무진
  쉰두개 피아노건반
  몽땅 두들겨대도
  기미년 삼월 일일 점심무렵
  피맺힌 그날의 절규
  그날의 함성소리를
  그릴 수가 없구나
  그릴 수가 없구나

 

  채희문. 1938년 서울 출생.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주로
인간의 고독과 죽음, 그리고 이 시대의 불안한 상황의식에서 비롯된 자아의
깊은 고뇌와 한을 현장감 있는 말이나 구도적인 소박한 언어로 표현하며
독자와의 교감에 유의, 공감의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미래시"의 동인이며
현재 한국일보사 편집국에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꽃과 시" "세계 명작
영화 100년", 역서 "문 밖에서" "쉬쉬푸쉬" 등이 있다.

       가을레슨


  가을이 가기 전에 한번쯤은
  떠나 볼줄도 알아야지

  좀 돌아서 갈줄도 알아야지
  좀 천천히 갈줄도 알아야지

  점점 높아지는 하늘
  점점 얕아지는 땅
  그 사이에서 점점 흔들리며 작아지는
  나
  새삼 느껴 볼줄도 알아야지

  떨어지는 잎, 다시 볼줄도 알아야지
  싸늘한 바람에 손만 흔들고 서있는
  나무들도, 다시 볼줄 알아야지

  좀 멀리 볼줄도 알아야지
  좀 가까이 볼줄도 알아야지
  깊은 것도
  얕은 것도
  함께 볼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가을비
  아침 이슬같은 빗물로 만나
  한번쯤 썰렁한 가슴
  젖어 볼줄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한번쯤은...,


       자기 빨래하기


  하루 종일 남의 겉살만 닿으며 살다
  누구에게도 깊이 닿지 못하고
  나에게도 깊이 이르지 못하고
  늦은 저녁에 돌아와
  나의 하루를 빨래한다

  빈 시간의 한가운데 고인
  맑은 고요의 물
  내 모두를, 잔가지에서 밑뿌리까지
  하나 하나 지우듯 담그고
  확인하듯 만지며
  버리듯 비비며
  자꾸만 나를 물에 헹군다
  나의 안을 뒤집어 짠다

  하루의 구정물 줄어들 때까지
  내 얼굴 맑은 물에 보일 때까지

  그렇게 다시금 건져진 나의 안팎
  잠의 줄에 걸고
  꿈의 바람결에 널어
  한밤내내 나를 말린다

  그러나 끝내 마르는 것은
  겉자락뿐인가

  또다시 다음날 밤이면
  어느새 나의 가슴은 
  여전히 그날의 줄에 걸린 채
  밤 이슥토록 젖어 울고...

 

  최건. 1940년 전남 순천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기자로
몸을 담았었던 그는 1983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시단에 데뷔했다.
서로 다른 음색과 음계를 감동과 질서의 음악으로 조율하려는 시세계로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심양사에 근무하면서 "백지"의 동인과 "시정신"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 까치


  소식 나르며 살아 왔었지
  기쁨을 울음으로 살아 왔었지
  수백의 하루가 들고 나는 하구 느티나무나
  수천의 생애를 기적으로 돋구는
  철로변 키 큰 미류나무 높이
  분교의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아침 저녁 인가로 나들이하며
  인정의 담장 안을 기웃거리는
  혈연의 족속

  새벽별 서둘러 제 몸 사르고
  아침햇살 제일 먼저 너의 집 들어서자
  눈 비비며 부스스 일어나
  밤새 두근대던 소식
  지붕 위에 내리어 목청 베푸니,
  살이 옹ㅅ길을 나서는 꼭두새벽
  가랑잎 대신
  발 끝에 채이는 동전 한 닢 우울과
  청소차가 쓸고 갈
  간밤의 어수선한 휴지조각 딩구는
  네모창 빌딩의 숲 찾아가
  죽음을 곡예하며 세상사 거느릴지언정,
  적막한 빈 산은 매어달린 조롱
  그곳에서는
  다정한 햇살조차 추워라
  밤마다 꿈길도 머뭇거리겠네

  애옥한 사람들 오늘도
  고향 길에 오르질 못했다
  깊은 숲 침묵의 골짜기는 죽음보다 싫어
  온종일 하구 밖 사위에서 빙빙 돌다가,
  해거름 전
  남의 소식 부지런히 전해 주고
  제 집 소식 남이 가져 오는
  우체부와 고샅길 동행하며
  남기고 돌아갈 저녁 소식 더듬으니,
  흥겨운 방아찧듯 주둥이와 꼬리 흔들어
  뽑는 목청이야 슬픔 많은 세상에서
  모진 기다림이 변해 된 가락
  기쁨의 가락

  기쁨을 울음으로 살아 왔었지
  소식 나르며 살아 왔었지
  두고두고 세월을 함께 하는
  동거의 무리, 마을의 새는
  밤 새워 흐들히 달빛으로 갈고 닦은
  소식 노래 부르며
  오늘도 잊지 않고 부지런히
  오지 않는 내일을 물어 나르네


       청량리 역에서


  쾌청쾌청일요일청량리역아침
  하늘의신호등도파란불내걸었다
  광장에는물고일어나는유행처럼
  배낭배낭의물결술렁거리고
  햇살쪼아대는비둘기의몇발치뒤에서는
  여행자한사람
  담배꽁초하나줍고있었다
  아침을일으켜세우듯빨아들이려
  꽁초하나줍고있었다

  가시오어서가시오
  낡은빌딩음습한그늘빠져나가
  신개발지편입지구푸석푸석먼지이는
  마을도떠나고프로야구프로축구도떠나
  산그림자밟고밟으면서
  멧새울음싱그러운청솔바람마시어
  오장육부만말고
  변비처럼꽉막힌오살놈의양심훤칠하게
  번영된시대의고속도로처럼
  통로도뚫고
  익숙해진만성류머티즘쯤고칠수있게스리
  아파트뼈대같이직각처럼딩구는우리들미움
  어둠속음모의칼날까지
  데불고가시오슬은녹닦으면서
  홀홀가시오

  해기웃어스름청량리역광장
  풀어헤쳐놓고담아온것풀어젖힐것도없이
  시들어가는유행처럼훌쭉해진
  배낭배낭들이꾸역꾸역기어나와
  지하철입구쪽으로빨려들어가고있었다
  비둘기이미둥지로들고여행자의모습간데없이
  역사안에는제몸체보다더큰
  반도의슬픔같은것저혼자
  오지않는막차를기다리고있었다
  밤깊도록웅크리고앉아
  기다려도기다려도막차는오질않았다

 

  최동현. 1954년 전북 순창 출생. 전북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한
산촌 풍경의 묘사를 통해 근대화의 그늘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작품은
적절한 감정이입으로 감동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남민시"의 동인으로
전주 동암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어전리 3


  냉해가 들고, 아이들이
  무리지어 가출을 했다

  학부형이 소환되고
  닷새만에 죄인이 되어
  붙들려 온 아이들을 벌 주면서
  종아리를 치면서
  다문 이를 악물었다

  끝끝내 학교를 다닐 수 없다며
  한 아이가 퇴학을 하였다

  회초리를, 그 질긴 아픔을 
  휘두르며
  겨울이 가고

  학기가 바뀌면서 더러는 잊혀도 갔지만
  수첩을 펴면 명렬표 끝에
  아프게 남아 있는 이름, 성^256^ 순^256^ 애^256^
  아직도 너는 우리 반이다


       어전리 4
       -- 미자에게


  생활기록부를 정리하다가
  색인표 위 지워진
  네 이름을 보았다

  너는 열 다섯
  늘 찌끄래기 옷만 입어서
  언니가 밉다고 했다

  그 미운 언니를 따라 울먹이며
  공장으로 가더니
  한 달 뒤에는 퇴학이 되었고

  나는 그 날
  어느 교과서에도 없는 네 이야기를
  생각하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책상이 치워지고
  이름이 지워지고
  그러나 그 누가 네가 남긴 기억마저를
  지울 수 있으랴

  밤마다 너는 내 불면으로 와서
  생각의 마디마디를
  아프게 했다

  길은 보이지 않지만, 모두들
  어디로든 가야만 하리라
  그렇게 떠나서 너는 지금
  어느 눈길을 가고 있느냐

  어전리, 어두운 하늘 아래
  열병처럼 너를 잊지 못하는
  찬 눈이 내려
  함부로 쌓이고 있다

 

  최명자. 1957년 강원도 화천 출생. 가난한 자신의 삶과 이웃의 아픔을
잔잔한 음성으로 표현, 시화하고 있는 그는 1985년 안내원 생활을 하면서
엮은 책 "우리들 소원"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현재 가정주부로서 고향인
화천에 거주하고 있다.

       쑥


  쑥밭, 쑥밭이 되어 버리던 날에
  고향을 떠나
  슬픈 여행을 시작했다
  무작정 길을 떠났다

  쑥쑥 자라야 할 봄날에
  한약방으로 쑥탕으로
  온몸을 태우고 바스라지면서
  태어남을 원망했다
  난 왜 장미가 아니라 쑥이며
  왜 목련이 아니라
  흔코 천한 쑥이 되어
  귀함보다 천함을
  보살핌보다 뜯김을
  더 많이 받아야 되는거냐며
  서럽게 물었다

  붉은 꽃잎 하나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 죽어가면서
  한스럽게 울었다

  쑥밭에서 쑥이 조상인 내가
  살아감에 순응하지 못하고
  서러워할 때
  넌 내게 대답했다

  보리고개에 가난한 역사가
  널 먹었고
  단오날 새벽에 촌색시
  널 찾아오리니
  희망과 사랑 속에
  항상 푸르러라!


       천생연분


  아버진 엄마보고
  예펜네란다
  우리 예펜네, 저 예펜네
  저 주책없는 예펜네
  절대로 마누라가 아니다

  울 엄마 아버지보고
  웬수란다
  저 웬수 술주정뱅이
  저놈의 웬수
  단 한번도 당신이 아니다

  웬수와 예펜네가 단칸방에서
  새끼를 다섯이나 낳고
  한평생을 같이 살았다

  난 이제야 깨닫는다
  웬수와 예펜네는
  전생에 인연으로 맺어진
  천생연분이란 것을!

 

  최문수. 1957년 전북 정읍 출생.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등단하였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은 짜임새 있는
구성과 신선한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갈밭"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식


  이제 나는
  허리를 더 구부리며 살아야 한다고,
  하루를 발갛게 물들인
  서쪽의 황혼이 두 눈알을 찌를 땐
  더 더욱 팔근육에 힘을 당겨야 할 꺼라고
  셋이레 지난 내 씨알 연호가 운다
  소젖먹고 자라는 녀석의 눈동자에서
  이슬젖은 풀잎들의 발성을 들으며
  나는 비로소 아늑해야 할 땅이 되었음을 안다
  군용담요 위, 비취타올을 들판 삼아
  한 웅큼씩 싸고 누워있는 녀석의
  싱싱한 풀밭을 볼 때마다
  나는
  시가 한 그릇 일용할 양식이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출항기


    1
  새벽을 퍼올리는 밤안개를 헤치며
  노를 저었다, 서서히
  불안의 바다 한 쪽을 열어
  빙하기를 딛고 선 나의 입지를 저었다

  눈물의 풍어가를 부르며
  잠의 흰 등뼈를 타고
  수없이 별똥이 빠지던 동경의 나라에
  아, 불시착을 위하여

  전생애만큼이나 힘닿는 노를 저어
  멀리 수평선에 보이던 유빙을 만났다
  저으면 저을수록 겨울 속으로 한없이 자맥질하며
  눈발을 녹이던 건강한 물떼들
  빙산의 일각, 시계의 끄트머리는
  빙산의 하얀 비늘을 벗기고
  매운 눈물에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어둠을 통째로 씹고 있던
  섬을 보았다

    2
  접혀 돌아누운 기억과 꿈 쪽,
  진실로 모든 것은 멈추어
  태고로부터 찾아드는 굳은 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유년으로 지칠 줄 모르게 흘러드는
  성좌들의 장엄한 행렬을 맞으며
  20세기의 서러운 작은 돛 하나 마지막 불길 지피어
  한 줄의 시를 담고 침몰한 목선의 이야기와
  바다에 잠긴 일몰의 전설이
  바람으로 불어왔을 때,
  손끝에 느껴오던 팽팽한 시위
  나는 힘차게 닻을 던졌다  한 해의 맨 끝에 서서
  내일을 위하여 중량 없이 낙하하던 별빛 속으로

  그때 서서히 안개를 걷으며
  어둠은 타올라 은백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산을
  보았다, 마치 내 유년의 영산처럼
  육중하게 떠오르던 바다의 뿌리
  원시의 눈발 위를 달리던 예지의 날개를 꺾고
  수 세기 전 빙하 속으로 곤두박질치던
  시조 한마리
  섬의 흰 등뼈를 쪼고 태초의 폭설 위를 훨훨 날자
  잿빛 바다로 우수수 떨어지는 수천의 꽃다발 
  아, 키가 모자라 깨금발로 보았다
  내 어린 한 살은 점점 붉어져 아침 바다로 황홀히 빛나는 것을...

    3
  돌아오는 길에
  나는 원양을 안고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마리 싱싱한 정어리로
  파닥거리며
  이제사 아침을 몰고 오는 겨울 새떼들의
  나직한 비상을 보았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은빛으로 반짝이는 수평선
  나는 뱃머리에
  날짐승의 흰 날개를 달아 주었다
  만선의 깃발에 미끄러지듯이
  풍어의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마침내는 흰 눈을 따라
  여명의 폭설로 쉴 새 없이 흩어 내리는 날개를, 날개를

 

  최병준. 1939년 충남 천원 출생. 단국대대학원 국문과 졸업.
"월간문학"지로 데뷔한 그의 작품은 생활 자체를 가슴으로 표현, 진솔한
감동을 준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강남사회복지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바람으로 멱감으며


  눅눅한 이부자리에서
  이상과 뭉기적이다가

  산에
  오르면
  마음은 바다
  깊숙이 침잠되고

  억새, 솔내음을 만지며
  알몸이 되면

  헐렁헐렁해지는
  긴장에

  신명이 은밀하게
  고여 온다

  화장품 냄새에
  불순하게 배설했던,
  주택복권을 겸연쩍게 샀던,

  모두의 기억들을
  휴지통에 넣고

  덕지덕지한 누더기를
  벗고
  구멍마다
  가득한 고름을

  바람으로
  날리면

  끈끈한 일상과는
  유쾌한
  이별이다

  수렁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

  모두 잊어먹고, 잃어먹고
  아무것도 안 느끼고, 안 바라고

  절대절명의
  허심, 무화

  아!
  이 성스러운 작업

  알몸인 채
  바람으로 빗질하면서

  무명에서
  벗어나는 희열

  없는 자유가
  있는 모두보다
  훨씬
  개운하다는 것을...

  어디서
  이렇게
  징이 울린다


       연


  바람맞이에서
  영원한
  바램으로,

  정월 보름
  서걱대는
  벌판에서

  연을 날린다
  액막이 연

  하늘 추스르는
  처용아비
  팔다리 휘감아
  너훌너훌

  서울 밝은 달 아래
  이슥히 노닐다가
  핑그르
  돌아가는 얼레야,

  안에 들어 자릴 보니
  가랭이가 넷이고나
  새촘하게 긴장하는
  실의 감촉

  둘은 내 것이었는데
  둘은 뉘 것이냐
  아아라히 먼
  아리 아리 아리랑 아리랑아

  본디 내 것이었지만
  빼앗긴 걸 어쩌리
  절씨구
  닐리리야 니나노 얼씨구

  비상하는 연,
  점으로 이어지는
  처용아비, 처용아비

  텅빈 벌판에서
  순리대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쥐불 이는 논두렁에서

  표표롭게
  연을 날린다

  위대한
  해체

  최영. 1946년 전북 순창 출생. "시문학"과 제5회 "한국시학" 신인상을
수상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현실에의 비판의식을 내포한 선명한
사물이미지와 체험을 바탕으로 한 풍자와 풍속 모더너티를 지향하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청록두' 동인이며 현재 군상시청에 근무하고 있다.

       개구리


  경장동
  주택가는
  개구리들의 터밭을
  나누어 가졌다

  무논에서만
  살아야 할 그들이
  도자에 깔려 죽고
  농토마저 모두 빼앗겼다

  살아 있는
  목숨들은 흩어져
  건폐율의 그늘에 숨어
  정원수 이파리 이슬로 연명한다

  정원수에 묻어나는
  달빛의 그늘에 숨어 살다가

  이슬비가 오는 밤이면
  살아 있는 목숨들을 알아 낸다
  울면서 확인을 한다

  소낙비가 뿌리는 밤이면
  독립만세를 외친다
  죽은 목숨들도 함께 울어댄다


       희화


  김씨는
  토지구획이 고시된 후로
  지주가 되었다
  이제는 김사장이란 말을
  땡감처럼 씹지도 아니하고
  발밑에 새어나는
  논배미 물고 소리도 잊은 채
  경장동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감고
  머리카락 속의 농약 냄새를
  열심히 드라이한다
  가뭄처럼 타들어간 얼굴에
  이슬비처럼 로숀을 뿌리고
  무논에서 피를 뽑듯이
  무성한 수염을 면도질한다
  농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맛사지까지 하고
  이발소를 빠져 나와
  주막을 밟고선 관광호텔
  그 스카이 라운지에 앉아
  열심히 아주 열심히
  목구멍에 양주맛을 길들이고 있다

 

  최영철. 경남 창녕 출생. 1984년 무크지 "지평"에 '낮은 곳을 향하여'
외 다수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보는 사람과 보이는
것의 긴장 위에 세워져 있는 특이함과 해체와 복원, 무질서와 질서의
긴장을 시적 주제로 한 개성있는 작품을 쓰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나무


  삭둑 잘라 불을 지르고
  삭둑 잘라 다리를 놓고
  삭둑 잘라 간판을 세우고
  삭둑 잘라 이빨을 후빌 때
  나무는 가만히 서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 나무 이외의 뜬구름도
  뜬구름만큼의 행복도 믿지 않는다 믿을 것이라곤
  그래도 나무 뿐이다 싫으나 좋으나 제자리걸음의
  뜬구름뿐이다 뜬구름처럼 가냘픈
  행복뿐이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나무따위는 그냥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흘러가거나 지겨울 뿐인 행복 따위는
  믿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무엇인가 믿기 위해서는
  나무라도 몇 그루 서있었으면 좋겠다 푸른 하늘에
  뜬구름 둥실 떠있는 내일일지라도

  그러나 나무들은 가만히 서 있지 않다
  이제 나무들도 하품
  일렬종대가 아니면 이열횡대로
  이제 나무들도 바가지
  근육통이 아니면 과민성대장으로
  아니면 모두가 알다시피 만성빈혈이든가
  이쯤에서 해산을 명령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기강이 문제
  설마 제까짓 것들이
  돌을 던지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성큼성큼 걸어와 내 목을 찍어누르지는 않겠지
  더 이상 큰코 다치기 전에
  그러나 나무들도 온몸이 가렵다


       지금도 지금도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잠들어 있거나
  명상에 젖어 온 밤을 지새울지라도
  미묘한 음반처럼
  레미콘은 돌고 있다
  등돌린 그대들의 화합을 위하여
  모래와 자갈은 아프게
  물과 시멘트는 성질을 죽이고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까마득히 잊고 있을 때에도
  길을 걷거나 걷지 않을 때에도
  따뜻한 화합을 위하여
  그대들 먼 발치에 우뚝 멈추어선
  콘크리트는 위험하지
  순하게 섞여 물에 물탄 듯
  물에 물탄 듯 부서지지 않는
  시멘트는 모래가 되고
  모래는 자갈이 되어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오랜 미아로 서성대는
  그대들의 어깨너머
  다시 만남을 위하여
  알게 모르게
  절망하지 않을 때에도

 

  최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82년 "월간문학"지의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여름 환상' '겨울 일기도' 등의 작품에서 세련된 언어구사와
대상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적 이미지의 발상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장시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진 꽃에
대한 기억'을 쓰고 있다.

       가을장례


  죽은 새를 땅에 묻고 돌아온다
  새의 온기가 남아 있는 나의 손은 따스하다
  마을 사람들은 읽던 역사를 덮고
  덕장에서 마른 물고기를 마저 거두어 들이고
  불 켜지 않은 주막에서 술을 마신다
  가을이라고
  한철 젊었던 바다와 고대의 여름을 넘나들던
  그들은 내게 죽은 새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에게 새의 죽음을 상세히 말해 주었지만
  새의 무덤에 함께 넣은 풀씨 얘기는 감춘다
  가을 태양이 바다의 품으로 안겨들고
  수평선을 건너온 목선들로
  해안은 소란하다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떼지어 몰려 나오고
  나는 돌아온다 문 잠긴 저녁 마을을 향하여
  다친 햇살의 끝이 조심스럽게 기어가고 있다
  이제는 정말 부활하지 않을 것인가
  가을과 새의 죽음은
  아이들의 말소리나 분명치 않은 손짓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없음이란 때로 가을산의 나뭇잎을
  슬픔으로 물들인다 새가 사라진 지상에서
  홀로 아픈 누이는 내게
  마지막 눈물을 꺼내어 건네 준다
  마을이 황혼에 젖어들기 전의 일이다
  저물 무렵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지만 임종한
  새처럼 나는 문득 피리가 불고 싶어진다
  아직도 하늘 어느 마을에선가
  채 떠나지 못한 새의 울음소리가
  저녁 황혼에 젖어 있을꺼라 생각하면서


       섬 7


  그 섬에 시계탑을 세우면서 사람들이
  시계를 쳐다보고 바다에 나가는 시간을
  앉아서 기다리고 무료한 기다림을 달래기 위하여
  잠을 껴안는다 소나무 그늘을 찾아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잠든다 이제는 해시계가 필요 없으므로 사람들은
  태양과 결별한다 날이면 날마다
  굿당만 소란하고 섬의 이마에 얹힌 태양 녹슬고
  바다에 이르는 언덕길만 길어지고 깊어져서
  섬의 전신을 덮고 있는 그늘 살찌고
  섬은 무거워진다 바다로 서서히 침몰해 간다
  꿈속의 시계소리 속으로 사람들은 용해되고
  거슬러 올라가는 태양의 길목에서 들숨 날숨
  섬은 익사한다 시계탑과 더불어
  태양이 마저 녹슬기 전에

 

  최창렬. 1938년 충남 대전 출생. 중앙대 교육대학원 국어과 졸업.
1983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시란 진실이며 자아발견을 위한
고통이라는 기본명제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톱니바퀴


  지하철 공사장에는
  힘 좋은 기계들과
  힘 좋은 사람들이 붙어
  살고 있다

  365일
  밤낮도 없이 계절을 잊은 채
  저들은
  헛돌지 않는 톱니바퀴다

  억척스런 기계는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감으로써 무서운 힘이
솟아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이 도시의 막힌 숨통을 뚫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지금 그 옆과 위를 굴러가고 있다
  거리에는
  온통 톱니바퀴들이다

  그런데 나는
  몇 시간을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 이렇게

  강물은 늘 땅과 입맞춤을 하고
  물고기들에게 사랑을 주고
  말없이 흘러가는데

  나는 나의 톱니바퀴에서 빠져나와
  녹슨 톱니바퀴
  헛돌고 있는 톱니바퀴
  몇 십 년을 녹을 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벽시계


  우리집 개들이
  몰아 온
  햇살 가득한 아침

  주섬주섬 햇살을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뽀삐의 재롱
  늘 그렇듯
  꼬리를 치며 몸을 뒤틀며 뛰어 오르며 마당 한 바퀴 도는 인사

  개밥그릇 옆
  두 마리의 쥐가 죽어 있었다

  밤새
  우리집 개들은
  두 마리의 쥐를 놓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쥐 두 마리를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이들이 부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청소부가 들어 오더니 쓰레기통을 들고 나갔고 연탄재도 들려
나갔다

  방으로 들어 오다가 무심히
  벽시계를 보았다

 

  최휘웅. 1944년 충남 예산 출생. 동아대 국문과 졸업. 1982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무한한 이미지의 자동기술적 변환을
통해 내면에 존재하는 꿈을 현시하며 새로운 언어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시와 의식'의 동인이면서 현재 부산 대동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어느날


  새들이 날아와 빗장에 잠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느닷없이
무지개가 되어 날아갔다. 산과 들은 온통 바람이었다. 음악이었다.
넝마조각 위에 앉은 나는 나비였다. 백사장이 길게 누워 웃고 있었다. 아,
거기에는 황홀한 것들이 모여서 공깃돌을 던지고 있었다. 수평 저 끝
돌섬을 만지고 있었다. 솔밭에서도 여름은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만나는
것들마다 하늘의 안부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손끝에 닿는 별들이 호주머니
가득히 쌓였다.


       환상도시 9


  관객들은 커튼 밖으로 밀려났다
  바깥에서는 바다가
  깨진 올갠 곁으로 밀려오고
  아이는 두 팔을 든다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흉내를 낸다
  저 멀리 눈송이 속으로
  사라지는 흉내를 낸다
  그때 쾌종시계가
  은행잎으로 날은다
  사라지는 스포트 라이트 뒤곁에서
  무희의 발톱만 뒹굴고 있다

 

  하길남. 1934년 일본 나가노에서 출생. "현대문학"지와 "현대시학"지를
통해 시단에 데뷔하고 '신문예'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시는 존재적
양상에의 서정적 궤적, 순수 미의식화 결정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작품집으로 "닮고 싶은 유산"과 "우정은 노을처럼"(공저)이
있으며 현재 경남대에 재직하고 있다.

       현상 붙은 시


  시를 한 편 쓰리라는 생각에서 시작 노트를 머리 맡에 펴놓고, 서재 한
가운데 벌렁 드러누웠더니
       임의 정거장
  이란 낱말이 퍼뜩 머릿 속에 떠올랐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느님의 선거
       귀 먼 안사돈
       유언의 발기
       나르던 인어상
  따위의 말들이 속속 귓전을 때리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이 언어들을 가지고 끝내 한 편의 시를 쓰지는 못했읍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시를 써보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위에
예시한 글귀들을 토대로 해서시를 한번 지어보십시오  필요하다면 제가
현상금을 걸 수도 있읍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이 시 한 편을 꼭 당대에
끝내야 하겠다고 무리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애기들 돌잔치 때 산 인형들이 다시 임신한 몸이 되어
입덧이 날 때까지라도 기다려 줄 것입니다  또 그들이 자라서 하느님을
우리 손으로 다시 뽑겠다고 칭얼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줄 것입니다
  귀 먼 안사돈이나, 유언의 발기 같은 것도 말이 통한다면, 나르던
인어상까지 영원히 기억해 두실 것입니다
       임의 정거장에서


       꽃


  꽃은 피어 오르다가
  잠시 생각해 본다
  누구를 만날 것이냐고
  깜짝깜짝 놀라면서
  잠시 생각해 본다
  낯선 사람을 보고 울던 아기처럼
  낯선 사람을 보고 짖던 짐승처럼
  꽃은 피어 오르다가
  잠시 두리번거려 본다
  이 세상 머리 위를
  흐르던 바람같이
  강보의 인연은 영 없는 것이냐고
  안절부절하면서
  꽃은 피어 오르다가
  잠시 생각해 본다

 

  하일. 1944년 경남 창녕 출생. 한신대에서 수학하였으며 1984년 "세계의
문학"지에 '가두어 놓기' 외 1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의
시는 개인적 사정을 넘어선 복합적인 경험의 세계가 갖는 의미를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며 특히 개인적 체험의 절실함은 간절한 호소력을 갖게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시집으로 "주민등록"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간행하였다.

       주민등록


  우리 가족은 주민등록도 못했읍니다  공식적으로 부산시 진구 초읍동
133번지에 거주한 것이 아니고, 월세방 한 칸 얻어서 서로 하늘같이 믿으며
살았읍니다  누가 죽어도 공식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면 죽었다가 한 번만
더 비공식적으로 부활했으면 좋겠읍니다  그냥 비공식적으로 살다가 그냥
비공식적으로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무죄한 자입니까  뿌리만
남았다가 봄이면 다시 피는 들꽃같이 얼마나 얼마나 무죄한 자들입니까


       동행


  신문 방송에서 믿을 건 광고뿐이다, 아니다, 하고 때로는 다투었지
때로는 다투며 새벽까지 소주를 나누어 마시다가 교회의 잠긴 문밖에서
유행가를 불렀지  요즈음 잘 팔리는 게 예수냐? 아니면 그리스도냐? 서로
묻기도 했었지  그는 한 번도 손바닥을 펴서 내게 보이지 않았고, 헤어질
때 그냥 웃기만 했었지  목이 쉬어 그냥 웃기만 했었지

 

  하재봉. 1957년 전북 정읍 출생.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한국문학"지에 시가 당선되면서 활발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밤나무 숲들과 그 속의 까마귀 그리고 잠못드는 영혼을 노출시키면서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시운동'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숲의 전설


  하눌님의 아내를 닮은 나는 새벽이슬과 함께
  이 숲에 왔다 언제나 나뭇잎은 부드러웠고
  맛있는 열매가 번갈아가며 열렸으므로
  그는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도끼를 놓고
  땀을 씻고 있었다 내 투명한 옷은 아름다웠다

  나는 안다 아직 내가 그를 충분히 길들이지 않았음을
  공기만 먹고 살았는데 햇빛만 입고 살았는데
  내가 나뭇잎을 보고 말을 건넸을 때
  수런거리던 뿌리들의 마음처럼 그가
  바위 뒤에 숨어 내 옷을 눈여겨 보고 있음을
  나는 모두 투명하게 안다

  두 아이를 잠재운 이 저녁 새삼스레
  오막살이의 낮은 자리에 누워, 한때 내
  나비처럼 살던 곳을 바라본다 모르는 사람이
  오늘은 무척이나 많이 죽어 어지럽게
  푸른 별이 켜지고 덩달아 달도 크게 웃는데
  말못하는 나무 부둥키고 나는 울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내가 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맨살에 찬물을 끼얹을 때
  왜 마른 번개가 숲을 태우고 천둥이
  말 달리며 구름 위를 지나갔는가를
  내가 그의 몸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투명한 살이 다른 그 무엇으로 변해버렸음을

  나는 모른다 늙은 열매만 툭 툭
  발등 위로 떨어져 내 몸은 자꾸 무거워지고
  별들은 별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내 귀는
  나무껍질처럼 두꺼워져 알아 들을 수 없다
  숯장수인 내 애인은 속도 모르고 밤새도록
  불타는 아궁이 속으로 나무뭉치를 집어 넣었다

  날이 새면 그는 허리춤에 도끼를 꽂고
  더 높은 나무 찾아 나간다 성이 다른 짐승들
  고함 질러 다른 숲으로 몰아내고 사정없이
  밑둥을 찍어간다 그의 여자인 나는
  태양보다 뜨겁게 숯가마에 불을 지펴야 하지만, 별아
  네가 다시 내 뜰의 공기들이 될 수만 있다면

  구름아 새야, 내가 다시 너의 잔등에 엎드려
  서 있고 누워 있는 산이랑 들판이랑 굽어볼 수만 있다면
  좀 먹고 색 바랜 궤짝 속의 날개옷
  나는 날 수가 없구나 잠자는 아이들 품에 안고
  옛날의 우물 곁에 다시 서 본다 나무짐을 진 그가
  돌아오기 전에 아직도 두레박은 있을 것이다

 

  한기찬. 1955년 서울 출생. 연대 국문과 졸업. 1980년 "현대문학"지의
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전에는 비밀장부 같은 것을 만들어 시를 썼으나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에 시를 쓰지만 때로는 종이에
옮기기 전 잊어버릴 때도 있다고 말하는 그는 시집 "나무오르기"를 갖고
있다. 현재 '현암사'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가야 2


  아가야 저건 느릅나무란다
  나뭇가지 하나씩 모두 젖는,
  너처럼 맨살로
  공기뚫고 자라는

  색연필로 그릴 수 있겠니
  아름답지 않아도 좋으니
  꾸밈 없이
  뿌리 웅성대고
  줄기 건장한 저것을

  벌써 잎사귀는 모두
  네 손가락 감지하고
  빛나는구나
  나는 느릅나무라고
  명확히 뽐내고 있구나

  넌 부정보단
  긍정을 좋아하지
  또렷또렷하게 꿈꾸기를 바라지

  아가야, 우리가 닿으면
  느릅은 비로소
  말하기 시작한단다
  뿌리끝 흠뻑 젖을 때까지
  잎사귀빛으로 살아난단다


       칠월


  아침은 밤보다 더 심심하다
  이슬 한 웅큼 머리에 끼얹고
  빛이 되는 나무, 나무
  달려드는 바람을 힘껏 뿌리치다
  몸속 깊이 잠든 절벽을 깨우면
  비로소 잎사귀는 모두 뿌리처럼 깊다

  어린 힘은
  어린 독수리, 자라려고
  몸을 찢는다
  피와 살이 한데 섞인
  육혼 하나, 태아마냥
  조용히 쉬고 있다

  낮엔 알몸의 바닥까지 뒤집어서
  흰 고무신 끌고
  빛의 발톱 아래 선다
  하늘은 어느 날개보다도 사나워
  맹금 한 마리 땅에 내리지 못하고
  벼랑에 산다

  눈감은 그 안에 잠겨 있을
  사나운 눈
  실뿌리마다 매달려 있을 벼랑
  먹이를 억누르는 힘으로
  먹이를 물면
  뒤틀리고 만다

  몸을 움직여도 더는 자라지 않는다
  그림자는 바위 속에서 부서지고
  핏방울은 풀뿌리에서 멈춘다
  이제 한줌의 평지도 가파르다
  불에 닿은 천의 입술 스스로 다물려
  다시 열리지 않는다

  그 정신없음이 바람처럼 자유롭다
  그 앉아있음이 햇살처럼 반듯하다
  그 기울어짐이 빛줄기처럼 힘차다
  빛에 싸인 바윗덩이는
  산산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뿌리에 머리를 기대고 어두워지다
  바람 한 줄기 마시고
  저녁에 시든다
  물보다 가벼운 꽃이
  가슴에 떠서
  평안히 흐른다

  아아, 오늘 아
  이마를 때리는
  피 한 방울
  누가 쥐었다 놓은 것인지
  아프고
  아직 따스하다

 

  한상원. 1946년 전남 광주 출생. 서라벌 예대와 조선대 법대 졸업. 1985년
"정경문화"와 "신앙세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전개한 그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을 따스하게 감싸 줄 수 있는 시를 쓰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삼성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돈아더매치" "세일즈맨의
일기"와 수상집 "낙서수첩" 등이 있다.

       소망


  무성한 잡초밭 하늘을 서성거리다가
  실이 끊겨 정처없이 흘러가다가
  어드메 고목 가지에 걸려
  파르르 꼬리를 떨고 있는
  지연이 되었다가,
  짙게 깔린 어둠 속 묘지
  소름끼치게 무서운
  맹수들의 울음을 들으며
  묘석에 쪼그리고 앉아
  저편 하늘을 응시하는
  학이 되었다가,

  이제 먹구름 비바람 천둥이 지나가면
  한아름 목련을 안고 다가올
  나의 봄,
  그 땐 고고한 몸짓으로
  휘파람을 불며
  눈이 부시게 찬란한 하늘에
  훨훨 비상하리라


       오늘 2


  겨울비 맞으며 오늘을 간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내 고독한 영혼의 안식처

  구름다리에 오르면
  잡힐 듯한데
  공허뿐인가
  어덴가 비추는 나의 얼굴
  아, 주름살만 늘었구나

  어차피 가야 하는
  내 고독한 영혼의 안식처
  오늘은 '그레고르 잠자' *
  '디오게네스' **  의 몸짓으로
  한 많은 산을 넘어
  설움 많은 고개를 넘어
  눈물의 골짜기에서
  시의 날개를 펴볼까
  날개여, 태양이여
  저 푸른 창공을 한번만이라도
  날아보자고
  겨울비 맞으며 오늘을 간다

  *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이름
  ** 디오게네스:그리이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계통을 이은
'안티스테스'의 제자

 

  허영선. 1957년 제주 출생. 제주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1980년도
"심상"지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을 출간하기도 한
그의 시세계는 풀리지 않는 현상에 대한 물음과 확인 작업을 하는 한편,
화해보다는 부조화 속에서 호흡하는 시들을 발표하고 있다. 현재 제주신문
문화부에 근무하고 있다.

       인동일기

  강이 얼었다, 종이 비행기
  맨발인 채
  강을 건넌다

  눈만 멎으면
  바람 소리 풀 스치는 소리
  섞이지 않는다
  한사코 잠기지 않는다

  발목끼리 발목 묶고
  건너는 어둠은
  깨어지는 법 없다

  묶어 둘 수 있을까
  소리들과
  빈 강물과
  날으는 종이비행기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내가 아직 들풀이었을 때
  벌판은 쏟아져 강으로 흐르고,
  흘러서 나의 자유는
  탓할 것 없었네

  철든 바람과도 입 맞추고
  목화처럼 번져,
  하늘이 강물로 풀려서,
  흘러서 돌아오는 강가에 서서
  나의 자유는
  오랑캐 꽃

  미나리아제비
  민들레 씨앗으로 날아오르던
  내 살점의 꽃들
  예감하는
  소금기로도 남아 있었다

 

  홍석화.1937년 강원도 횡성 출생. 청주사범학교 졸업. 1981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후로 서정성이 강한 한국 서정시의
재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인. '제천문학' 동인이며 현재 백운국교
애련분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청동항아리


  해와 달과
  별이 잠들어 있읍니다

  숱한 슬픔으로 지켜온 오늘
  구름 잠긴 목으로
  기러기가 울고 있읍니다

  악랑과 임둔도 아침 나절
  새싹이 보고 싶어 물을 주었읍니다

  천년 새싹을 기다리며
  동해 바닷빛으로
  성천강이 흐르고 있읍니다


       첫눈


  낙엽지는 소리
  네 관에
  은장을 막는다

  멀고도
  가까운 길

  지금
  저승에서
  구름 한장
  돌아오고 있다

  들리는 얘기론
  올해
  첫눈이
  일찍 온다지

  가슴을
  떠나 버린
  옥양목 두루마기
  풀 비린내

 

  홍일선. 1950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80년 "창작과 비평"지에 작품을
게재하면서 문학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시와 경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투철한 역사의식과 함께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시를 리듬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시집 "농토의 역사"를 출간할 예정이다.

       오산장 시오릿 길


  어스름 풀무골 잡초 흔들어 훠어이 훠어이
  부질없는 하곡 수매가도 흔들어 훠어이
  새벽 꼴 한 짐 한숨 한 짐 베허놓고
  반나절 행보 나선 장길 시오릿길
  이젠 품앗이도 옛말이 된 마을
  타동 일꾼을 사 보리를 털었지만
  수확이 좋으면 무엇하랴
  훠어이 훠어이 먼지만 뿌옇게 피어나 자갈길
  저희끼리 드문드문 허기끼리 맞닿아 서 있는
  미류나무도 훠어이 빈 달구지도 훠어이
  등짐 진 보리자루마저 각박한 세월
  우리네 무심함을 원망하는 것이냐
  하루 너댓번 다니는 읍내행 버스
  장날은 차장과 짐삯 싸움 진저리 넌저리
  아예 걸어가는 삼일장 오산장 시오릿길
  가엾긴 왼종일 이리 부대껴 저리 부대껴
  꾸벅꾸벅 졸며 살아가는 저희들이나
  농사지어 헐값에 내다 파는 우리네나
  서럽기는 마찬가지인데 훠어이 훠어이
  그렇구나 지난 봄 언 땅 갈아엎듯
  모진 세월 속아 산 세월 갈아 엎어
  우리들도 허리피고 살 날 언제일까
  보리 서 말 등짐 메고 밀린 농약값 걱정
  산자락 윗논 터진 물꼬 걱정
  쉬엄쉬엄 걸어가면 다다를 읍내
  똥값이여 보리가 똥값이여 급하지 않걸랑
  다음 장날 내라던 구장 말이 선한데
  그래도 장터엔 속고 살아가는 농민들로
  지금쯤 한창 법석일텐데 훠어이 훠어이
  사료값도 안나와 에미 소 한 마리
  장터에서 제 손으로 죽인 죄밖에 없는데
  경찰들에게 개처럼 끌려갔다는
  어느 농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오지만
  오늘은 초사흗날 아버님 제삿날
  쇠고기라도 한 근 사갖고 가야지
  마른 하늘에 소나기가 쏟아지려나
  대낮 천둥 번개가 훠어이 훠어이
  선진 조국 입간판 벼락맞아 훠어이 훠어이
  세상 다 속여도 흙은 못 속인다던
  아버님 생전 말씀도 훠어이 훠어이
  오늘 따라 말벗도 없이 홀로 가는
  답답한 장길 오산장 시오릿길


       동탄행 버스


  동탄까지 들어가는
  막차도 끊긴 지 오래
  달빛이 지친 몸뚱이를
  허옇게 감아
  길가 아무데나
  나를 팽개치지
  동탄에 들어가면
  일손이 없어 난리라던데
  하루 세 끼 밥 먹여주고
  품값도 일시불에다
  모내기 일당으로는 괜찮다던데
  공사판의 일거리도
  이제는 다아 끝나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황톳물 무논의 못단이
  꿈길처럼 아련하구나
  동탄엔 논밭이 기름지다던데
  왜 농사질 사람이 없을까
  거기도 우리 고향처럼
  정든 땅 버리고
  밤길 떠난 사람 많은가
  오늘 동탄 가긴 글렀으니
  막소주나 한 잔 하고
  오산역에서 밤을 새야지
  쑥고개 백화점 지을 때
  잡부로 몇 달 썩을 때
  양키들 부랄 털럭거리는
  이 거리가 더러웠지만
  살찐 양키들이 부럽구나
  아아 저 달빛이
  우리집 안마당을 비추겠지
  우리집엔 누가 살까
  그냥 빈 집
  명아주만 우리를 기다리며
  무성히 피었을까
  그때 그 몸서리나는 오월
  형님은 어디서 죽었는지
  돌아오지 않고
  칼빈 소총 반납하고
  이듬해 오월
  우리는 고향 떠났지
  내 고향 함평에도
  지금쯤 물꼬대느라
  정신들이 없을텐데
  내일 새벽 첫차로
  동탄에 들어가야지
  농촌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난데
  품값이 일시불이 아니라도
  동탄에 가야지
  함평의 오월을 생각하면
  벌써 몸이 달아오지만
  이 달 오월 한 달은
  동탄에 들어가서
  한없이 모나 심어야지

 

  황영순. 1949년 전북 김제 출생. 원광대 가정학과 졸업. 1984년
"월간문학"지를 통해 데뷔하여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그의
시세계는 어둠과 절망에 물들지 않고 맑고 지순한 목소리로 새롭게
우주를 열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봄 편지


  나는 꽃씨입니다
  아름다운 호미질을 기다려 온
  흙 속의 꽃씨입니다

  추운 들녁에서
  얼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모진 결심으로 혈서를 쓰면서
  긴 눈물로 왔읍니다

  슬픈 내 피 늦게야 이곳
  이곳으로 와서
  저녁마다 금빛 도리깨로
  곤한 잠 깨우고
  어두움을 털어내고 있읍니다

  오늘은
  하나의 우주가 열리고
  누군가 어둠 속에서
  커다란 기침으로 올 것 같은
  향그러운 새날입니다

  꿈길로 바람소리 파도소리 밀려 오는
  풍란처럼
  풍란처럼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나는 꽃씨입니다


       길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
  홀로 가고 있으면,

  두 마음
  품지 않고
  흠없이 가고 있으면,

  높고 맑게
  사는 법
  향기로 흩날릴까

  사랑이
  헛되지 않음 믿고서
  한없이 가고 있으면,

  사계절이 왔다 그대로 가듯
  서늘한 눈빛 하나
  소리없이 가고 있으면,

  푸른바람 칭칭 감고 봄이 오듯
  끝내 잴 수 없는 아름다움
  아픔의 뿌리는 깊고 깊어라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4년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세련된 언어
구사와 참신한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추락은 가벼워
         그렇도다! 살아서 천국에 갈 수 없는 법이로다.
         --비용


  그건 난다는 것
  날으는 길은 허공
  (허와 공으로 길이 나다니!)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시여
  땅 속 깊이 저는 꺼지나이다
  위로 난 길은 너무 멀어
  저는 지름길을 찾았나이다
  그건 난다는 것
  (허공 거울에 비친 공허)
  어쩌면 아버지
  받침대를 잃고 담쟁이 덩굴이
  밑으로 자지러드는 건
  뿌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시여,
  나의 어머니 뿌리
  땅 전체가 뿌리이며 중력은 그녀의 애정입니다
  그건 난다는 것
  당신의 경멸과 그녀의 중력으로
  아뜩한 허공으로 난 길

  공기와 나는 서로에게서 빠져나와
  담백해지려고 서두른다
  날면서 나는 죄, 혹은 의식을 토해내고
  끊임없이 나를 용서하고
  세계의 운율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숨과 교체하고

  날아오를 때 나는
  내가 무거웠나이다
  안녕, 아버지
  빛처럼 가벼이 나는
  터지나이다


       새를 위하여


  우리는 서로 얼마나 닮았는가, 새여
  그대 날개에 돋는 소름으로
  땅거미를 지나칠 때
  나무들은 둥지를 기울여 보인다
  일기장 갈피에서
  잘 마른 시간이 너울너울 떨어져
  부리 끝을 스친다

  나무를 지워버리렴
  그 둥지가 여기가 아니고
  항상 저 너머인 나무
  항상 한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날으는 순간만 (여기)일 새여

  내 굴 입구의 금빛 나무가 쓰러지며
  내뻗은 검지 손가락에
  지평선이 걸려 터졌을 때
  내가 방향을 버리고 고개를 쳐들었듯
  그대 나무를 지워버리렴

  글쎄 그대가 왜 날개에 소름이 돋아
  땅거미에 걸려 바둥거릴 것인가?
  나무를 지워버리렴
  그러면 그대는
  어디서나 자유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둥지를 위해서는 날을 것 없이
  온 벽이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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