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태준. 1947년 경남 마산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성급히 이해의 포우즈를 취하지
않음은 물론 정교하면서 침착한 언어로 도시민으로 편입된 지방 출신계층의
서민적 정서에 초점을 맞춘 시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시인으로 평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몸 바뀐 사람들"이 있다.
흔들릴 때마다 한 잔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독하게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죽은 참새를 굽고 있다 한놈은 너고 한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얼키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사모곡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
강경화. 1951년 충남 공주 출생. 연세대와 동대학원 영문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오늘의 어두움, 불안, 쓸쓸함, 슬픔의 모습으로 승화시킨
시 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여류시인. '성좌' 동인이며 시집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를 갖고 있다.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
서리내린 저 밭의 배추잎 끝에서
이제 나는 가을 하늘을 볼 테다.
추위가 몰려 오면 흙벽에
제 눈만한 창문을 내고
울며 울리는 사람들.
날 부르는 뜨거운 눈물이 안 보일지라도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삽날이 밀려와
내 집 밑둥을 자르고
밤마다 흙더미 사이로 별이 보이면
내 사랑은 흐르는 한 줄기 강물
가을 빛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잘 있거라. 누런 들판아, 탱자나무야
속삭이는 낙엽소리와 연기 내음도 두고
캄캄한 땅 속에서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풍경
이상하다. 어제 지나온 황혼이 다시 지평선에 걸려 어두움을 이루는
것은.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 죽어가는 사내들, 꽃과 새들이 오늘의 숲과
거리를 지나친다.
이상하다. 우리 손아귀에 잡힌 것은 모두 우리만큼 작아진다. 우리들의
두려움만큼, 인색한만큼.
비명을 지르며 오늘 숲에서 어제의 새들이 날아간다. 황혼과 어둠
속으로.
강은교. 1946년 서울 출생. 연세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사상계"
신인문학상 당선(1968)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 "허무집" "풀잎"
"소리집"이 있으며 산문집 "추억제" "그물 사이로"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등이 있다. 그는 인간의 죽음과 유전이 만들어내는 허무적 삶의
인식을 탁월한 시적 감수성과 전통 무과의 주술적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시인이다. 현재 부산 동아대학에 재직.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와
살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않는 피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수 없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창민. 1947년 경남 밀양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성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현실은 늘 어둡고 죽음과 가까운 것을 배경으로 깔면서도,
상승과 발산의 의지로 충만된 상상력은 그것을 새로운 현실로 재구성하는
탄력성을 보여 준다. 시집으로 "비가 내리는 마을"이 있다.
비가 내리는 마을
회화선생 윌리암은
비가 올 때마다 '피'가 온다고 한다.
그에게 내리는 피는 비지만
우리에게 오는 비는 피였다.
온 몸이 온 마을이 피에 젖는다.
시인에게
그대가 잠들어 쓰는 시
떨리는 신경을 몰래 늘이어
어제는 어떤 꿈을 서럽게 짰는가
가난한 만큼 확실한 꿈을 꾸라, 그대여
꾸어도 빼앗기지 않고
빼앗겨도 더욱 넉넉해지는
그것이 무엇인가 말하라
가위에 눌려
그대가 소리쳐 부르던 이름은
눈 뜨면 늘
노란 나비처럼 사라지고 말았지.
다시 잠들려 애쓰는 그대여
뜰에 나가 겨울 비를 맞으며,
통금에 잠긴 어둔 골목을 보고 섰으면
누가 보고 싶은지 말하라.
그대가 잠깨어 쓰는 시
무서워무서워 고쳐 썼다가
다시 적고 만 그 노래
그것을 불러라, 바보야
강현국. 1948년 경북 상주 출생. 경북사대 국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대문학"(1976)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가 있고 현재 '자유시' 동인이며 대구
교육대학 국어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의 작품세걔는 보다 명료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영혼의 울림을 주는 한편 삶을 반성하게 하는 정서적 울림을
일으킨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일막이장
구석을 빠져나온 하나의 구석이
또 하나의 구석과 어느날 만나서
악수를 한다. 온 몸을 흔들며
펼치는 풀밭의 푸른 힘으로
일년초 꽃들은 피어난다.
산그림자 잠시 바다로 눕고
시들기 위하여 피어난 개똥쑥꽃,
떡쇠 속눈썹이 빛난다.
(전화벨소리 빌어먹을 정전)
벽 속 철근들이 힘주는 소리 들린다.
들린다. 개똥쑥은 시들고
떡쇠 사라지는 발자욱 소리
하늘로 번진다.
서산 노을이 몸을 태우며
좌중의 미간을 밝히는 동안
산짐승 소리 점점 커다랗게
큰 산 그림자를 일으켜 세운다.
(초인종 소리 빌어먹을, 빌어먹을 다시 정전)
우리는 헤어지고
구석은 구석끼리 몸을 떨지만
창경원 늑대의
이빨없는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 비에 젖어 번져가는
좌중의 박수 소리
궂은 날은 옆구리를 결리게 하므로
떡쇠 속눈썹이 다시 빛난다.
고정희. 1948년 전남 해남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현대시학"에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하는 그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투시와 비판을 힘찬 언어로 승화시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누가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 기행" "초혼제" "이 시대의
아벨"이 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에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리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리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이름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김명인. 1946년 경북 울진 출생. 고려대 문과대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중앙일보' 신춘문예 (출항제)가 당선(1973)된 이후 왕성한 시작
활동을 했으며 '반시' 동인으로 참여해왔다. 그의 작품세계는 약소 민족의
설움이 기본 모티브가 되고 있다. 비애와 비극의 정서가 고도의 감수성으로
용해되어, 현실극복 의지와 열망으로 표출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동두천"이 있다.
베트남.1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짚히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펼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3부인
남편은 출정 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이션 박스
속에서도 가랭이 벌여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꺾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잊어야 할 것들 정작 잊히지 않는 땅 끝으로 끌려가며
나는 예사로운 일에조차 앞날 흐려 어두운데
뻑뻑한 눈 비비고 또 볼수록, 로이
적실 것 더 없는 세상 너는 부질없이도 비 되어 내리는지
우리가 함께 맨살인데 몸 섞지 않고서야 그 무슨
우연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로이 만난대서 널 껴안을 수 있겠느냐
동두천.1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릴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 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김승희. 1952년 전남 광주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그의 시세계는 오직 빛으로만 향해
내닫고 있는 참신한 언어와 밝은 톤으로 죽음의 빛을 형상화시킨
엑스레이 빛꽈 대조를 이루면서 백열의 광도를 보여주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태양미사"와 "왼손을 위한 협주곡"이 있다.
흰 여름의 포장마차
나에게는 집이 없어.
반짝이는 먼지와 햇빛 속의 창대가,
훨, 훨, 타오르는 포플린 모자.
작은 잎사귀 속의 그늘이
나의 집이야.
조약돌이 타오르는 흰 들판.
그 들판 속의 자주색 입술.
나에게는 방도 없고
테라스 가득한 만족도 없네.
식탁가의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의 목마는 오직 강으로 가고
나는 촛불이 탈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지었지.
내 마차의 푸른 속력 속에서
그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으로
서투른 음악을 켜며.
하루의 들판을 무섭게 달리는 나의 마차는
시간보다도 더욱 빠르고 강하여
나는 밤이 오기 전에
생각의 천막들을 다 걷어버렸네.
그리고 또한 나의 몇 형제들은
동화의 무덤 곁에 집을 지었으나
오. 나는 그들을 경멸했지.
그럼으로써 낯선 풍경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는 꿈이 없어.
해가 다 죽어버린 밤 속의 밤이
별이 다 죽어버린 밤 속의 정오가
그리고 여름이 다 죽어버린
국화 속의 가을이
나의 꿈이야.
콜탈이 눈물처럼 젖어 있는 가을들판.
그 들판 속의 포장마차의 황혼.
햇님의 사냥꾼
다이아나 언니.
마차를 매요.
바람이 좋으니 사냥나가자.
요정 1. 요정 2. 요정 3. 요정 4
그리고 어린 모짤트도 불러
사슴과 거미와 토끼와 나비를
표범과 매와 태양과 절망을
언니는 쫓고 나는 잡고.
언니는 활쏘고 나는 겨누고.
영혼의 마차에는
네 개의 바퀴가 반짝이고 있다.
숲의 정. 벌의 정. 꿈의 정. 활의 정
우리는 정비하여
해 가까이 나가는데
지금 누런 들판에서는
엑스레이빛, 엑스레이빛으로
마른 개들이 죽고 있다.
죽고 있다.
나는 알지.
긴 어둠의 창작을 내가 할 때
흰 물결. 검은 물결. 파랑 물결 사이에서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황야를.
메마른 의식의 침엽수 이파리와
필생의 그 든든한 어둠소리를
나는 알고 나는 견디리
나는 활쏘고 나는 밝히리.
돌아오는 마차엔
햇님의 머리칼.
눈부시게 타오르는 요정들의 옷자락.
어둠은 이제 말을 몰고 돌아가고
밝아지는 뼛속과 태양 취한 일센티.
다이아나 언니.
햇님을 매요.
반짝이는 사냥노래 나의 노래를.
김옥영. 1952년 경남 마산 출생. 마산교대를 졸업했으며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데뷔했다. 시집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를 갖고 있는 그는
감상적 서러움 혹은 그와 완전히 다른 인간성을 완전히 배제한, 언어인식의
시가 갖는 건조성읗 뛰어 넘은 시세계를 갖고 있는 시인이다. 현재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
죽은 날벌레를 위하여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
뜨겁다고 그들은 속삭인다.
전등 갓 안쪽에 까맣게 타 죽은 날벌레들.
들끓는 한낮의 태로부터 태어난
날개들은 죽었다. '밤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
제 그리움에 쫓겨
작은 불빛의 덫에 머리를 처박고
어둠에서 달아나왔던 그들의 배는
멋대로 다시 어둠에 밀려 다닐 뿐.
겨드랑에 아직 묻어 있는 햇볕의 분가루는,
흔들리며 구름 속으로 빨려오르는 무더운 수증기의 내음은,
잃은 것이 많아서 꿈 많은 사람들의 꿈 속에 들어가
자꾸 날개가 투명해진다.
어둠이 무서웠던 그들.
불을 켜서, 밤마다 우리는 외면했다. 보이지 않는 무서움을.
어둠이 모든 길들을 이장하고
알 수 없는 그의 복면만을 보여 줄 때
소름 돋쳐 뛰어간 우리.
에비! 에비!
겨자씨만한 불씨에 겨자씨만한 두 눈을 가리고
에비! 헛짚은 우리.
두 눈이 먼 날벌레들은
뜨겁다고 속삭인다. 이제,
꺼 버려. 작은 불빛들을 불어 버려.
돌아서, 어둠의 허허벌판을 바라보고
바라보며 말하라.
불을 끄면 별이 보인다고.
불 끈 자리에 에워싸는 어둠에도 낯이 익으면
어둠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가볍게, 가볍게
떠 오르는 별빛.
불을 끄면 밝은 별이 보인다.
어둠에 조금씩 날개를 비비며 날아오르는 것들이.
비로소 더 날아오르는 것을 배우는 것들이.
밤의 유영에 익숙해지고 마는 어떤 힘찬 팔들이.
말.1
--내가 '사랑'이라고 말할 때
네가 '사랑'이라고 혹은 '슬픔'이라고 말할 때
상아의 이빨이 가지런한 네 말
네 말이 씹는 과질 속으로
몇 마리 건어가 텀벙 뛰어들기도 하지만,
네가 '사랑'이라고 혹은 '슬픔'이라고 말할 때
지상에 일어서는 것은
빈 집 하나다.
단단한 골격을 두른 말의 어깨 너머
말이 부려 놓은 공간,
우기의 긴 골목으로
깊이 발이 빠지면
목소리들은 안개에 머리를 부딪고
스스로 체중을 벗어
들의 공복에 살을 섞는다.
들의 그림자 들의 뿌리께 물을 주며
오 허깨비들이
이 들을 키운다.
허깨비를 본 자는
허깨비의 나라로 밖에 갈 수 없어
네가 '사랑' 혹은 '슬픔'이라고 말할 때
가시엉겅퀴들은 흔들리지만
살아 있는 은빛 독사는 보이지 않고
흰 공터만 눈을 뜬다.
유리창마다 자옥히 성에 끼는 겨울날
(때로 성에를 꿰비치는 날카로운 햇빛의 파견)
벌목된 주검 몇 구 뛰어넘어
두어 점 깨끗한 웃음이
울렸다 사라지는 쪽으로
왜 고개가 돌려지지 않을까?
서쪽 하늘에 서성이며 떠나는 공기의 맨발이
오래도록 가슴을 밟고 밟을 뿐.
네가 '사랑'이라는 혹은 '슬픔'이라는
빈 집을 세울 때.
김원길. 1942년 출생.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데뷔(1971)하여 절제와
염결들을 갖춘 서정시를 쓰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개안"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등이 있다. 현재 안동대학 강사로 출강 중.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미닫이에 푸른 달빛
날 놀라게 해
일어나 빈 방에
좌불처럼 앉다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버레소리 잦아지는
시오리 밤길
달 아래 그대 문 앞
다다름이여.
그대 뜨락 꽃내음만
훔쳐 맡다가
달 흐르는 여울길
돌아오나니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김은자. 1948년 경남 충무 출생.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1975)하여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재직하고 있다.
초설
하릴없이 숫눈발 속에 다시 서노니 초경의 비린내 풋풋한 순수함이여.
너의 심부에 언제나 깊고 어둔 발자취를 남겼으되, 이 눈길 위에 다시
새로운 발자국. 오오 편편으로 흩어지는 하늘의 전신이 흰 북소리 둥둥
울릴 때 과거가 어찌 남김없이 용서받고 기억들이 어찌 위무 받느뇨.
모든 만남은 언제나 영원한 첫번째 만남이듯 흰 눈썹 부비며 낯선 미명의
거리를 가노라. 미진한 기억 속에 흰 북소리 낮게 질주하고 빈 나무등걸은
바람에 부풀면서 시간 밖으로 무수한 기억의 휴지부를 날려보내도다.
해마다 한차례 심령 속에 하늘이 갈갈이 찢어지나니 묵은 기억의
모서리를 이지러뜨리며, 미지의 경험 속에 나를 미끄러뜨린다. 새로운
시간의 숫눈길 속에 그날의 풋풋한 순수로 유입하리라.
김정환. 195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창작과 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한 그는 시대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결의와 열린
감성으로 우리 시대의 언어에 일대 변혁을 몰고온 젊은 시인이다. 시집으로
"황색 예수전" "지울 수 없는 노래"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마포 강변 동네에서
해마다 장마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나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같이 빨려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 기어들 듯 말 듯
모기 같은 속삭임으로 땅에게 마지막 이별에게
가지 마셔요 저는 당신의 애기를 가졌어요 당신처럼 설움뿐이지만
당신처럼 활활 타오르는, 당신처럼 언제나 떠나가고 싶어하지만
당신처럼 제 뇌리에서 지워드릴 수 없는
질긴 생명의 씨앗이 제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모두 단신 거예요 이 흠뻑 젖은 제 육신의 꿈과 숙명
그리고 당신의 모질지 못했던 과거 이제 돌이킬 수는 없어요
억새는 자란다 그 여름 홍수 지난 온 몸이 뜨거운 검은 땡볕 의연히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아지 못할 고통이 주는 삶의 참뜻을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이젠 헤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다시는 헤어질 수 없음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만나서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다시는 떠나갈 수 없음이
다시 한뻔 떠나가고 있는 줄...?
가난하고 피난 내려온 사람들의 판자집만 들어선
히필이면 이 마포, 강변동네에서.
유채꽃밭
내가 그대의 허망함을 눈치채기도 전에
그대가 나의 미망의 눈앞에 펼쳐논 온통 샛노란 불볕, 벌판
그대는 내 앞에서 그대의 몸가짐을 흐트리며 출렁이면서
그대의 마음도 눈이 부시게 흔들리고 싶을 때
그러나 그대가 일용의 양식으로 머금고 배앝아 낸
입술에 배인
고운 피, 거친 숨결이
나는 보일 것도 같애 반란으로도 모자란, 학살로도 모자란
그대는 아직도 동요하지 않는 한라산 슬하에서
이제껏 조바심내며 출렁거리며 바람에 몸 식혀 왔나니
아아 그대가 내 앞에 마련해논 광대한 벌판은 벌써 미쳐버린 색깔로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마침내 강심장으로 돌아온 사랑 앞에서
김종. 1948년 전남 나주 출생. 조선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그는 삶의 좌절과 회의를 승화시켜낸 역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시세계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부교수로 재직중.
역사
사람들은 초롱초롱한 눈을 뜨고
언제나 변함없는 것은 역사라고 한다.
어두운 상처 밑에 신음하는 사람도
모두 모두 역사라고 한다.
그것이 뭐길래 그리 믿어쌌느냐
무슨 부모 자식간이나 되는냐 아니면
제삿상 받아먹는 선영이기라도 하느냐 묻지는 않았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일편단심 믿고 또 믿는 것,
그것은 틀림없는 역사라고 한다.
못 볼 것을 보여 쥬고 주먹을 쥐면서도
역사가 말하리란다. 저녁 끓일 것이 없는 시인나라도
큰 배를 앞세우고 근엄하게 말씀하시는 분네도
역사가 반드시 반드시 말해준다고 한다.
어느 누구이건 절로 터진 입이면 늘 은혜롭고 향긋한 역사
분하고, 뒤가 구리고, 몸을 또아리 틀어 사리는 사람 모두
떳떳하게 당당하게 역사는 늘 위대하고 거룩하단다.
사람들은 잠을 자면서도, 이빨을 갈고 잠꼬대하면서도
역사를 베고, 깔고, 숨쉬고, 보듬고 산다.
친구도 부모형제도 보이지 않아 무섬증이 든 허허벌판에서
역사를 앞세우고 그 뒤에 숨어서 식은 땀을 흘린다.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오뉴월 물꼬속에도
역사는 숨쉬고 살아서 하늘을 날아다닌다 한다.
하다못해 돌멩이나 껴안고 물에 빠진 어느 촌놈도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가 되려고
충향이 남편 이도령이라도 뙤려고 설레이고 쌩방귀를 뀐다
이 시시한 시를 쓰는 나도 역사를 들먹거리며 휘파람을 분다.
그러나 역사는 얼굴 깊이 흘러가는 주름살이다.
몸부림도 잊어버리고 화석 속에 누워 지내는 공룡이다.
모랫바람 속에서 사라지는 사하라 사막의 신기루다.
우리들의 비어있는 뼈마디 아련히 차오른
흐린 얼굴 갖가지 모양새다.
저기 저 사는 일이 신물난 사람들의 꽁무니에
산사태의 요란한 소리로 무너져내리는 흙탕물이다.
불꺼진 토담집 모퉁이에서 우리의 어깨를 덮는 채알귀신이다.
역사는 토란잎 위에 굴러내리는 아침 이슬이 아니다.
쌩방귀는 어떨지 모르나 큰 바위 얼굴은 아니다.
어제 진 달 다시 돋아 삼천리 강산을 비추는 시간에
서로 껴안고 딩굴던, 사랑하는 청춘들의 밀어가 아니다.
역사는 역사일 뿐 어느 누구의 노래도 포부도 아니다.
떠도는 혼들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시간에
태연히 코를 고는 하나님의 참으로 민망한 사투리다.
눈만 크게 떠도 무한히 작아지는 몇몇 사람의 마스코트다.
들여다보면 무심히 알아지는 허망하디 허망한 돼지쓸개다.
김종철. 1947년 부산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1970)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작품을 통해 삭막하고
무망한 현대의 기적 정신적 상황, 현대인이 갖고 있는 비극적인 꿈과 처참한
현실을 파헤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신춘시' 동인이며 한국시인협회
회원이다.
서울의 유서
서을은 간을 앓고 있다
도착증의 언어들은
곳곳에서 서울의 구강을 물들이고
완성되지 못한 소시민의
벌판들이 시름시름 앓아 누웠다
눈물과 비탄의 금속성들은
더욱 두꺼워 가고
병든 시간의 잎들 위에
가난한 집들이 서로 허물어지고
오오 집집의 믿음의 우물물은
바짝바짝 메마르고
우리는 단순한 갈증꽈
몇개의 죽음의 열쇠를 지니고 다녔다
날마다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양심의 밑둥을 찍어 넘기고
헐벗은 꿈의 알맹이와
약간의 물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밤마다 죽음의 깊은 지하수를
매일매일 조금씩 길어 올렸다
절망의 삽과 곡괭이에 묻힌
우리들의 시대정신에서 흐르는 피
몇장의 지폐에 시달린 소시민의 운명들은
탄식의 밤을 너무나 많이 싣고 갔다
오오 벌거숭이 거리에
병들은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새벽 두시에 달아난 개인의 밤과
십년간 돌아오지 않은 오딧세우스의 바다가
고서점의 활자 속에 비끌어매이고
스스로 주리고 목마른 자유를
우리들의 일생의 도둑들은 다투어 훔쳐 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죽음의 눈들은
집집의 늑골 위에서 숨죽이며 기다리고
콘크리트 뼈대의 거칠거칠한 통증들은
퇴폐한 시가의 전신을 들썩이고
오염의 찌꺼기에 뒤덮인
오딧세우스의 청동의 바다는
몸살로 쩔쩔 끓어 올랐다
그때마다 쓰라린 고통의 서까래는
제풀에 풀석풀석 내려앉고
우리가 앓는 성병 중의 하나가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어디서나 단순한 목마름과
죽음의 열쇠들은 쩔렁거리고
세균으로 폐를 앓는 서울은
매일 불편한 언어의 관절염으로 절뚝이며
우리를 소시민의 가슴에 들어 와 몸을 떨었다.
재봉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 가지의 난동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
눈 나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의 가봉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천사에게 주문받은 아이들의 전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이는 신의 겨울,
그 길로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화잉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알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뢰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눈이 와서 나무들마저 의식의 옷을 입고
축복받는 날.
아이들이 지껄이는 미래의 낱말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섬조의 방에 누워
내 동상의 귀는 영원한 꿈의 재봉,
이 겨울날 조요로운 아내의 재봉일을 엿듣고 있다.
김준태. 1949년 전남 해남 출생. 조선대학교 사대 독어과 졸업. "시인"지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야생적인 기백의 순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목소리와
형식으로 우리들의 기슴속에 참신하게 와 닿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시집으로
"참깨를 털면서"가 있다.
참깨를 털면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핳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천지현황을 뒤집어 쓴
그대들에게
봄이 오면
먼 산의 바람
먼 산의 구름
먼 산의 꽃
모두 우리 님이어라
모두 우리 가슴이어라
봄이 오면
먼 벌판의 불빛
먼 벌판의 뼈부딪침
먼 벌판의 푸르른 뒤엉킴
모두 우리 아픔이어라
모두 우리 노래이어라
봄이 오면
먼 바다의 물결
먼 하늘의 새들
먼 강 기슭의 풀잎
모두 우리 사랑이어라
모두 우리 그리움
모두 우리 몸부림이어라.
김창범. 1947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졸업. "창작과 비평"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추구를 애증의 자취로 노래하는
민중시인이다. 시집으로 "봄의 소리"가 있다.
봄의 소리
누가 재가 되었다고 했는가
부러져 말라버린 나뭇가지가 되었다고 했는가
모래틈에서 터진 민들레 꽃잎 속에서
명주실같이 감기는 물소리가 되어
아 누구에게나
숨 넘어갈 듯이 달려오는 것
꽃들이 흐드러지게 웃어 댄다고 모르겠느냐
바람들이 수선을 떨며 쏘다닌다고
누가 잊어버리겠느냐
생각해서야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고함쳐야 들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모두 모두 떠나고 만 봄날
길고 긴 낮잠 속에서도
자꾸만 흔들리며 밀리며 일어나는
저 수많은 소리
김혜순.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건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입선(1978).
"문학과 지성"지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 외 4편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했다. 현재 서울 시립대 강사로 재직 중이며 시집으로는
"또 다른 별에서"가 있다. 그의 시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 풍요한 서정을
부풀어 넣어 사물과 감정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 일으키는 독창적인 수법을
갖고 있다.
납작 납짝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렵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수근수근.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마라톤
밤 기차의 이빨 사이로
시리게 기어나갔다
하, 하, 하, 하 웃으며 달리는
밤 기차의 입술 가장자리에
나무들이 박혔다.
따라오던 바람이
밤 기차의 머리채를
송두리째 강바닥에 던졌다.
밤 기차의 이빨 사이로 시리게
시리게 기어 나갔다.
안개가 목 위로 차올라 왔다.
연기의 알리바이
자 연기를 내놓으시지
음험한 구름기둥을
엇갈린 약속의 그림자를
냄새나는 굴뚝의 알리바이를
감춰둔 손길의 행방을
모두 대 보시지
창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틀어놔도 아무 소용없어
동분서주 해봤자야
저기 날리는 검댕이 좀 봐
깔고 앉아도 난 다 알아
두 무릎 사이로 푸른 연기가
풍선처럼 튀어나오잖아
게다가 손바닥마저 시커멓잖아
어서 고백해 보시지
아가리를 찢어 놓기 전에
아가리 속에서 냄새의 긴 끈을 꺼내
조사해 보기 전에
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모두 불었어 정말이야 너만
남았어
그래도 나는 연기를 피워 본다
집안 가득히 피워 본다
음험한 구름기둥 불기둥을
사라지며 부서지는 지난날의
날개 그림자를 가슴에 품어 보려
연기를 피워 본다 헛되이
손짓하며 몰래몰래 온 집을
허우적 거리며 뛰어올라 본다
한 웅큼의 연기를
끌어 안으려 애써 본다.
노창선. 1954년 출생. 청주대학교 영문과와 경희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뒷목' 동인으로 활동중이며 같은
세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과 아픔을 같이 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시집으로 "섬"이 있다.
섬
우리는 섬이 되어 기다린다 어둠 속에서
오고 가는 이 없는 끝없이 열린 바다
문득 물결 끝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그러나 넋의 둘레만을 돌다가 스러지는
불빛, 불빛, 불빛, 불빛
외로움이 진해지면
우리들은 저마다의 가슴 깊이 내려가
지난날의 따스한 입맞춤과 눈물과
어느덧 어깨까지 덮쳐오던 폭풍과
어지러움 그리고 다가온 이별을 기억한다
천만 겁의 일월이 흐르고
거센 물결의 뒤채임과 밤이 또 지나면
우리들은 어떤 얼굴로 만날까
내가 이룬 섬의 그 어느 언저리애서
비둘기 한 마리 밤바다로 떠나가지만
그대 어느 곳에 또한 섬을 이루고 있는지
어린 새의 그 날개짓으로
이 내 가슴속 까만 가뭄을
그대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
등 둘
우리가 우리 삶을 버린다 한들
내 어머니 뼛 속에 숨은 눈물까지야
우리가 우리 목숨을 버린다 한뜰
분노로 회한으로 다져진 이 땅이
우리네 이름없는 죽음까지야
누구는 사랑할 때 창자까지 나눈다지만
모질게 부대끼며 익은 우리네 사랑
미치도록 환하게 살아 목숨을 버리는 일
뼛속물까지 나눠 마시며
맑게 비치는 시냇물처럼
우리들의 썩은 살을 도려 내는 일
그리한 상처로 돌아 서서도
먼지처럼 흩어진 죽음까지 찾아서
녹두꽃을 피우다가 그 넋을 달래다가
우리도 이름없이 스러지는 일
모질게 부대끼며 익은 우리네 사랑
미치도록 환하게 살아 목숨 아주 버리는 일
우리가 우리 삶을 버린다 한들
뼛속으로 숨어온 입김까지야
마광수. 1951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1977)한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대한
푸념꽈 배설로서 순수한 자유와 해방에의 동경을 창출하고자 하는 의지적
성향을 잘 그려내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 "광마집" 이 있으며 현재 연세대학
국문과 조교수로 있다.
우리는 포플라
포플라는 오늘도 몸부림쳐 날아오르고 싶어 한다.
놓쳐버린 그 무엇도 없이
대지의 감미로움만으로는 아직 미흡하여
다만 솟구쳐 날아오르는 새가 부러워
끝간 데 없이 뻗어나간 하늘이 부러워
바람이 부러워
포플라는 자유의 의미도 모르는 채
언제껏 손을 쳐들고
흔들고만 있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땅 속에 묻어버린 꿈, 역사에 지친 생활의 빛에
체념, 권태로 하여 잃어버린
네 생명의 자존심 섞인 의지에!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손에 잡히지 않지만
아픔도 잊고 세월도 잊고 사랑도 잊고
포플라는 오늘도 안타깝게 손을 휘저어 본다.
명백히 놓쳐버린
그 무엇이라도 있다는 듯이
망나니의 노래
떨어져 내리는 것은 너만이 아니다.
긴 한낮 태양을 비집던 태양,
제 미처 바다에 못가 미처버린 폭포,
모든 게 운명처럼 떨어져 내리나니
아, 어찌 모든 것들은 떨어져 가야만 하는 것이냐
시간의 힘은 이리 무섭기만 한 것이냐
어쩔 수 없이 울긋불긋 휘황한 치장을 하고
내 한껏 신명나게 칼을 휘둘러대면
칼끝은 본능처럼 선그어 떨어져 내린다.
--늠름하던 네 모가지는 어찌 그리도 힘없이 떨어져 버리는 거냐
내 마음 난파당한 어느 쇠배마냥
스스로 무거움겨워 가라앉아 버렸나니
나를 휘감는 건 죽음같은 고독일 뿐.
네 목을 찾지 말라, 날 욕하지 말라.
억겁 이전 인연으로 우리는 만났거니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단 한번뿐
짧은 생, 우리 업보를 누가 막으랴.
그래도 우리는 소매끝 인연보다
피엉겨 다붙은 찬구되어 만났으니
천년, 만년 뒤 저 세상에서
우리, 다시 한번 합하게 될지 그 뉘 알리?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데뷔(1969)한 그는 시대와 현실에 대한 애착을 언어가
주는 최대의 미적 감각과 가락을 이용하여 노래하는 시인. '제21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꽃숨" "새떼"가 있고 산문집으로는
"사랑의 그물을 던지리라"가 있다.
편지
--고향에서 혼자 죽음을 바라보는 일흔 여덟 어머니에게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세요.
그 하나
그것은 생이 아니라
약속이예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 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리는
조금 나중 그곳에 갑니다.
약속도 없이 태어난 우리
약속 하나 지키며 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외롭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 울지 마셔요.
어머니는 좋은 낙엽이었읍니다.
민용태. 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 졸업.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에서
수학. 시집으로 "시비시"가 있는 그의 시세계는 경직된 우리 시의 틀을
깨버림으로써 죽은 언어에 생기를 불어 넣어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고려장
구름은 팔 수 없다.
삼천 예순 날을 비가 내려도
구멍 뚫린 우리 지붕에
구멍 둟린 내 가슴에
내가 빠져 죽어도
우리는 종이 아니다.
우리는 종이다. 눈감고 귀먹은
종이어도 좋은 종이다.
하얀 종이다.
두들겨 맞을대로 두들겨 맞은 쇠붙이 하얗게 목쉰
얕은 한숨으로만 남은 종
그것은 차라리 천 년을 닳은 무릎
억 년을 다듬이질 당한 무명베
맞고 용서하고 맞고 용서하고
칼을 맞고 칼 끝을 어루만지는
비루하리만큼 따스한 가슴팍
증오만큼 늘 따스한 가슴팍
나는 할머니를 묻어야 했다.
할머니를 묻고 어머니를 묻고 계집을 묻고
가슴 속에 가슴을 묻고 핏 속에 피를 묻고 흙 속에 흙을 묻고
박남철. 1953년 경북 영일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과 지성"으로 문단에 데뷔한 후 활발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공저)와 "지상의 인간"이 있다. 그는
기존의 질서, 도덕률, 시 형식 등을 파괴하면서 섬뜩한 비극성을 시에
도입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연날리기
한번 날아 보구 싶어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오온 동네방네 쏘다녔던 그 어릴 때처럼
훌훌훌 코 흘리면서 한번 날려 보구 싶어라
이 고요한 언덕배기 위에 두 다리 벌리고 서서
높이 날려 올리고 싶어라
언젠가 바람은 불어 오리라
흔들리지도 않는 높은 산봉우리를 그저 바라보며
소리도 없이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돌아다보면 오 광활한 세계
평평하고 푸른 세계의 잔잔한 침묵
언젠가는 숨막히는 함묵은 깨어지고
순하고 순하지도 않은 바람은 저도 모르게
갑자기 느닷없이 일어나리라
저 낮은 곳의 푸르른 벌판으로 빽빽한
수천 수백만의 착한 벼포기들이
한꺼번에 술렁술렁 흔들리면서
바람은 이 호젓한 언덕 위로
멍멍멍 잡초들만 무성한 이 언덕배기로
슬픈 사랑처럼 달려오리라
아직 미처 고개 수그리지 못한
수천 수백만의 착한 벼포기들이
어느날 갑자기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면
익은 열매 터지듯이 툭툭툭 깨어나면서
웅성웅성 흔들리면서 바람은 일어나리라
언젠가 바람 불어 오면 한번 날려 보구 싶어라
이 부끄러운 언덕배기 위에서 날려 보구 싶어라
너무 기뻐서 마구 웃으면서 울면서
먼지 쌓인 얼레를 풀어 주고 싶어라
달달달 풀어 주고 혹은 서서히
조금 잡아다녔다 다시 풀어 주고
자유롭게 더 자유롭게 풀어 주고
그러다 실이라도 그만 툭 끊어지면
가물가물 허물어지며 멀어지는 연을 따라
아아아 고함지르며 달려가고 싶어라
돌아다 보면 저 광활한 세계
함께 숨쉬고 함께 자라면서
동화 속의 난장이들처럼 함께 잠자는
평평하고 푸른 세계의 말 없는 약속
언젠가 바람 불어 오면 그 바람을 마시면서
끝도 없이 바람 잔잔한 이 뜨거운 계절을
지루하고 지루한 닫혀 있는 시간들을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추억하고 싶어라
너무 기뻐서 마구 울면서 웃으면서
정직한 역사처럼 텅 빈 허공 위로
날려 올리고 싶어라 방패연
날려 올리고 싶어라 가오리연
질긴 생명의 가느다란 실을 풀어
한번 날려 보고 싶어라 한번
날아 보고 싶어라
첫사랑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박정남. 1951년 경북 서산 출생. 경북대 사대 국어과 졸업.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자유시' 동인으로 활똥하고 있는 그는 생명 탄생의 눈부신 감동과
생명체 사이의 건강한 교감을 시속에 담으려 노력하는 여류시인이다. 시집으로
"숯검정이 여자"가 있으며 현재 대구 효성 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빛이 드는 언덕에는
새 풀들이
빛이 드는 언덕에는 새 풀들이 돋고 있었다.
노랑 나비는 은빛 못을 박고
셀로판 종이 상자 안에 와서
가지런히 날개를 펴서
끝없이 날았다.
가을은 더 깊고 무거운 서릿발의 낮은 보리밭에 엎드려서 봄으로 갔고
가장 푸른 하늘은 먹구름 끝에서 왔다.
수녀원의 저녁 미사에서 울고 있는
검은 옷 입은 핏빛 노을도
진흙밭으로 가서
이마가 맑은 연꽃으로 피었다.
박정만. 1946년 전북 정읍 출생.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서울신문'
신춘문예와 '문공부 문예창작공모'에 각각 당선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한국의
전통적 운율과 정서를 성실하게 추구하여 돋보이려는 개성파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잠자는 돌" 외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잠자는 돌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기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이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며
마을마다 떠디니는 슬픈 귀동냥.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데
반벙어리 가슴으로 바다를 보면
밤눈도 눈에 들어 꽃처럼 지고
하늘 위의 하늘의 초록별도 이슥하여라.
내 손을 잡아다오,
눈부신 그대 살결도 정다운 목소리도
해와 함께 저물어서
머나먼 놀빛 숯이 되는 곳.
애오라지 내가 죽고
그대 옥비녀 끝머리에 잠이 물들어
밤이면 눈시울에 꿈이 선해도
빛나는 대리석 기둥 위에
한 눈물로 그대의 인을 파더라도,
무덤에서 하늘까지 등불을 다는
눈 감고 천년을 깨어 있는 봉황의 나라.
말이 죽고 한 침묵이 살아
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
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
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선 모양으로.
아편꽃
저만큼 나를 놓고 달아나는 첫사랑이여.
내 피의 아득한 급류의 산맥 위에
오늘은 초롱의 꽃그림자 자지러지고
속마음 타넘고 일렁이는 능구렁이,
짙은 아내의 푸른 불로 타오르도다.
이 내 몸도 징그러운 꿈이 되어
또한 푸른 불 한가지로 타오르도다.
박주관. 1953년 전남 왼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수료.
고교졸업과 동시에 "풀과 별"지로 데뷔했지만 한동안 침묵했다가 다시
"세계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제개했다. '5월 시' 동인인 그의 시세계는
우리 시대를 이루어온, 죽어간 이들과 살아있는 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엮어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벗은 사람을 위하여
태어날 때부터 벗었고
죽어서도 안경을 벗었으므로
나무는 언제든 잎사귀가 없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에서 돌아와
창신동 언덕받이에서 미군들
초상 그리며 끼니 때우던
키 크고 목이 흰 사내는
아내의 발을 씻겨 주며
거짓말 하지 않았고
큰 소리 한번 쳐보지 못했지만
오늘도 살아서 우리들 앞으로
예수처럼 나타나는 환쟁이
박수근 당신 앞에
벗은 나무들이 헐벗은 채로
지금도 동네 어귀마다 걸어가고 있구려
갖기 위하여 남를 해치지 않아도
행복은 올 수 있고
사랑을 찾지 않아도
가슴 속에 이미 있는 것
바라보리라 바라만 보리라
당신의 안경 너머로
떠가는 흰구름 바라보며
벗고 서서 떠나간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돌아오는 발소리에
아낙과 더불어 한 밤을 지새우리라.
내가 살던 광주.5
--물길을 건너지 않아도
어젯밤 꿈 속에서
물길을 건너가는
학 한 마리를 보았지요
산허리를 휘어 감은
살아있는 눈을 보았지요
호젓하게 춘설차를 끓이는 당신을 만났지요
호미를 농민들이
무등산으로 몰려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생에 단 한번 화갑 때 붓을 쉬었다는
당신의 의연함을
이즈음 사람들은 잊고 있지요
정신을 배우던 그 옛날도 가고
이제는 살아가는 맛도 잃어버린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사
언제든 밤이면 내려와
시도 읽어주고 차도 끓여 주세요
의제여
이제는 물길을 건너지 않아도
만날 수 있겠지요.
서원동. 1950년 경남 창녕 출생. 대구대 교육학과 수학. "문학과 지성"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서정적인 감수성 속에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가하면서 생존적 탐구를 계속하여 비극적 진지성을 보여준 그는
"우리들의 왕"이라는 시집을 갖고 있다.
달맞이꽃
1
이 어둠 속에는 귀신도 보이지 않고 방금 눈뜬 달맞이꽃만 웃고 있어요
낄낄낄 웃고 있어요 달빛 아래 빛나는 꽃의 이빨 자국만 빈 허공에 가득해요
밤새들도 깊이 깊이 숨어 버렸나 봐요 손을 벌리면 손바닥 깊숙이 꽃잎의 살이
닿아요 뼈도 없는가 봐요 피 흘리는 꽃잎 속에 내가 보여요 내 얼굴도 힐힐힐
웃고 있어요 맨살이예요 맨가슴이 춤추고 있어요 자세히 보면 하늘 한 끝이
깨어져 있어요 뿌리로는 미친 노래 부르고 있어요
2
나는 밤이 두려워요 떨리기만 해요 눈을 감아도 눈속 가득히 바늘같은
공포가 몰려오곤 해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나무 줄기보다 질긴 어둠을 보세요
내 허리를 붙잡고 뒹구는 저 달빛을 보세요 깔깔거리며 세상 헤매는
그림자들을 보세요
송기원.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중앙대학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시와 소설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화려한 데뷔를
한 그는 이 시대의 진실을 진지하게 파헤치는 시인으로 소설에 있어서도
탁월한 민중적 정서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이다. 시집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창작집 "월행" "다시 월문리에서"가 있다.
회복기의 노래
1
무엇일까.
나의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의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섭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나의 육체에서 꺼낸 것들은.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은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은 무엇일까.
바람을 따라 한 없이 퓰려나며 버려진 땅, 시든 풀잎, 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날려가는 것들은.
저것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든 풀잎들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고, 죽어있던 소리들이 이슬처럼 깨쳐나 나팔꽃 같은 귓바퀴를 찾아서
비상하고...
2
누님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 저것들이 만나는 사물마다 제각기
내부를 열어 생명의 싱싱한 초산냄새를 풍기고 겨드랑이 사이에 젖을 흘려서,
저는 더 이상 쓰러질 필요가 없읍니다. 굶주려도 배고프지 않고, 병균들에게
빼앗긴 조직도 아프지 않습니다. 저의 캄캄한 내역마저 젖물에 녹고
초산냄새에 스며서, 누님, 저는 참으로 긴 시간 끝에 때묻은 시선을 맑게 씻고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봅니다.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노래합니다.
격렬한 고통의 다음에는 선명한 빛깔들이 일어서서 나부끼듯이 오랜 주검
위에서 더 없는 생명과 빛은 넘쳐오르지.
깊이 묻혀 깨끗한 이들의 희생을 캐어내고,
바람의 부드러운 촉루 하나에도
돌아온 사자들의 반짝이는 고전을 보았어.
저것 봐. 열린 페이지마다 춤추는 구절들을.
익사의 내 눈이 별로 박히어 빛을 퉁기는 것을.
모든 허물어진 관련 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질서를.
내가 품었던 암흑의 사상은 반딧불 하나로 불 밝히고
때묻은 환자들은 밤이슬에 씻어냈어.
수시로 자라는 번뇌는 은반의 달빛으로 뒤덮고
눈부신 구름의 옷으로 나는 떠오르지.
포도알들이 그들 가장 깊은 어둠마저 빨아들여
붉은 과즙으로 융화하는 밤이면, 그들의 암거래 속에서
나도 한알의 포도가 되어 세계를 융화하고.
3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무서운 저 광채 때문에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한 마리 야광충이 되어 깨어 있어야 하지. 저 광채 때문에 내 모든
부끄러움의 한 오라기까지 낱낱이 드러나 보이고, 어디에도 감출 수 없던
뜨거운 목소리들은 이밤에 버려진 갈대밭에서 저리도 뚜렷한 명분으로
나부끼지.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덩이 뜨거운 피마저 이밤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 병든 나를 휩쓸지, 캄캄한 삶을 밝히며 가득히 차오르지.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안경원. 1951년 인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그는 근원에 대한 관조 인식의 깊이에서 나오는 시
본래의 서정성을 잃지 않고 삶의 의식을 튼튼히 세우고 뻗어나가는 작품경향을
가지고 있다. 시집으로 "분지"가 있으며, 현재 강릉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통화
또한 속절없이 풀꽃이 진다.
오접된 수화기 저쪽 끝에선
밤비 쏟아지는 소리
여윈 들판 가득 헛되라고 헛되라고
우는가, 그대는 우는가
그대의 깊은 꿈마다 떠다니는
빈 섬들과 그리로 떠나간 사랑을 위하여
그러나 아직도 멀다
눈물 속에 섞여 내리는 붉은 녹물과
빗 속에 날름거리는 저 불빛들의 혀를 보면
안다. 알겠지. 저만큼 흘러가버린
지난날의 날내나는 고통이
밤비 속으로 투신하던 날
그때도 그대는 마지막처럼 울었으니
지평선 가까이 짓다만 집뜰은
벽이 뚫린 채 또 한번 마지막 꿈을 꾸고 있다.
오, 곤고한 그대는 그리로 가거라.
아닙니다. 잘못 거셨어요.
그대는 눈물 속으로 스며들었어요.
헛되다고 헛되다고
시든 오동잎 몇 개가
끊긴 수화기 속으로 뚝뚝 떨어진다.
오승강.1953년 경북 영양 출생. 안동교육대학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시문학"으로 데뷔한 그는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붕행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해 진솔하게 노래하는 시인. 시집으로 "새로 돋는
풀잎들을 보며" 외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새로 돋는 풀잎들을 보며
누이는 영해로 시집가고 재행길
일가붙이 모여
신랑을 다루며 웃고 들썩일 때
서른 한 살 처녀인 고모는
외딴 방에서 그 소리 귓전으로 들으며
쓸쓸히 피 쏟아가며 죽어
우리 식구들 경황없어
이리뛰고 저리뛰며 그 죽음을 숨길 때도
오늘처럼 세상은 봄이 와서
주검 아래서도 풀잎 돋는 소리
새들 두런거리는 소리 들렸었고
내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며
침묵속으로 또 빠져들 때
세상엔 더 많은 꽃들이 피어
내 더 쉽게 슬퍼지던 것을
또한 무엇엔가 홀린듯
경황도 없이.
윤석산. 1947년 서울 출생. 고교 3학년 재학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 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한국
현대시의 큰 줄기의 하나인 모더니즘 계열의 시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감성과
지성의 유연한 조합을 통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는 시인으로
시집으로 "바다속의 램프"가 있다.
편지
오뉴월 꽃그늘이 드리우는 마당으로 우체부는 산골 조카의 편지를 놓고
갔구나, 바람 한 점 흘리지 않고 꽃씨를 떨구듯.
편지는 활짝 종이 등을 밝히며 서로들 파란 가슴을 맞대고 정겨운 사연을
속삭이고 있구나.
찬연한 속삭임은 온 마당 가득한데, 꽃씨를 티우듯 흰깁을 뜯으면 샘재봉
골짜기에 산딸기 익어가듯 조카는 예쁜 이야길 익혀 놨을까.
모두 흰 봉투에 숨결을 모두우며 꽃내음 흐르는 오뉴월 마당으로
'석 산 이 아 저 씨 께'
아, 좈카가 막 기어다니는 글씨 속에서 예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구나.
원색의 잠
마른 풀잎이 몰려온다
잠 속으로,
죽은 말 하나가
뛰어든다.
세멘 마당에 엎질러진
물끼, 혹은
어둠 속에 하양게
박혀버린 자갈돌.
하얗게 죽어버린
사내들이
마른 육체를 불사른다.
몰켜오는 풀잎 마다엔
꺼지지 않는 램프,
심지를 밟으며
달려나가는 수천 두의 말굽,
동해남부선
어디
적재의 화차가
하나 어둠 속,
오래오래 이마를 부딪는다.
윤재걸. 1946년 전남 해남 출생.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했고, "월간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세계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확대하여,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들을 야무지게 비판하고 해부하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시집으로 "후여 후여 목청 갈아"가 있다.
후여 후여 목청갈아...
후여 후여 이삭 쪼는 새떼들을 날린다.
새떼 쫓는 후여 후여 목청 속에서
물 말아 넘긴 보리알 반쪽이 일어선다.
푸른 하늘이 내 편을 들어 새떼들을 쓸어간다.
무심히 고개 숙인 이삭이여,
허구헌 날 그런 몸짓으로 죽을 순 없어.
삼베 적삼 입은 허수의 어미 아비
이젠 당신네들도 후여 후여 목청 갈아
사지 흔들며 푸른 하늘하고 손잡을 것이며.
전라도의 무등과 함께
앙금이 밑바닥으로 갈앉듯
불씨는 늘 아랫녘으로 도사린다.
눈 부릅뜨고 곧추 서 있는 무등처럼
예사로 일어서는 물건 하나 있어
언제나 쇠 잠긴 조선의 사타구니--.
이 땅의 인총처럼 사철로 무성한
우리네 음모의 강기슭엔
땀내 나는 빤스와 더불어
어두운 만큼 힘을 지켜가는,
아끼는 만큼 자랑스러운
두알의 불알과 함께
꼿꼿한 이 땅의 남근이 숨어 있지 않느냐.
잠겨서 혼자 일어서고
일어서서 홀로 평정하는
몽정의 밤마다
함께 일어서는 물건 하나 있어
전라도의 부릅뜬 눈빛을 본다.
빤스에 묻어나는 내 나라의 하혈을 보면서
우리들은 아작껏 중요한 것을 써먹지 못하고 있다.
앙금이 밑바닥으로 갈앉듯
불씨는 늘 아랫녘으로 도사리고
이 땅의 은총만큼이나 우리네의 음모는 사철로 무성타--.
윤후명. 1946년 강릉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경향신문' 신춘문예(1967)에
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1979)에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언어의
미학과 겨레 정신의 뿌리를 조화시켜 억압 속에서 살아온 역사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명궁"이 있으며 '녹원문학상'(1983)과
'소설문학작품상'(1984)을 수상했다.
곰취의 사랑
눈 속에서도 싹을 내는 곰취
앉은 부채라고도 부른다
겨울잠에서 갓 깬 곰이
어질어질 허기져 뜯어먹고
첫 기운 차린다는
내 고향 태백산맥 응달의 고취 여린 잎
동상걸려 얼음 박인 뿌리에
솜이불처럼 덮이는 눈
그래서 곰취는 싹을 낸다
먹거리 없는 그때 뜯어먹으라고
어서 뜯어먹으라고 힘내라고
파릇파릇 겨울 싹을 낸다
눈오는 겨울밤 나도 한 포기 곰취이고 싶다
누군가에게 죄 뜯어먹혀 힘을 내줄 풀
명궁
잡목 숲은 무덤처럼
어둠의 둘레를 무지개로 감고
별빛을 모아 물결의 장단에 따라
바람이 하늘거렸다,
날새의 제일 유심히 반짝이는
두 눈깔을 꿰뚫음에
공명하며 하룻밤을 흔들린 이의
사무치는 뜬 눈의 웃음
드넓고 광포해라,
새가 온 들을 채어 쥐고
한 기운으로 푸드드득 오를 때
활짝 당겨 개이는 먼오금
숲과 들을 벗어나 휘달려
그는 죽음의 사랑에 접근한다
이동순. 1950년 경북 금릉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섬세한 감각, 언어의 운율적 조직을 통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지향하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개밥풀"이 있다.
개밥풀
아닌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서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램을 푸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라
볏집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 날 큰 비는 우리를 뿔뿔히 흩어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집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연탄갈기
무엇이 다른가 불타고 지는 모습은
쪼그리고 앉아서 연탄 갈아 넣으며
우리들 살과 피의 왕래 없음이여
이 밤을 헤매이는 개짖음만 못하리
바람결에 살의 분노 소란한 땅에
한 줄기 이름 없는 풀잎이 산다
아무나 와서 보라, 저절로 자란 초목
그대 목침에 깔려 신음하는 신문지
가까운 들판에는 푸른 개똥이 마르고
지하의 풀뿌리에 서릿발 친다
내 살을 차고 노는 자여
아픈 머리 찬 물에 담그는 자여
이성복.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문학과 지성"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뜽단한 그는 개인적 삶을 통해서 얻은 고통스런 진단을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여 우리의 아픔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려는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깨는가" 외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정든 유곽에서
1
누이가 듣는 음악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음악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 돋아나는데, 그 남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의 잠, 한반도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
당한 여자의 반복되는 임종, 병을 돌보던
청춘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의 신체를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일본인가, 일식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니신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승천하면
나는 죽음으로 월경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신음,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 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전쟁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사명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조국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후세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구미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한족의 별
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 치는 노인과 편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세룡. 1947년 서울 출생. 1974년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는 개인적인 처지와 형편을 노래하면서도 심한 절망이나 좌절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낙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여유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빵"이 있으며, 현재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빵
이것이 희망으로 보일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집을 담보로 잡히고서라도
끝까지 간직하려고 애쓰겠지요
또 이것이 불만으로 보일 때
똑똑한 사람들은
밤을 새우더라도
끝까지 씹으려고 덤비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밀가루 빵으로 보일 때
사람들은
제조한 날로부터 사흘이 경과되면
대체로 상하기가 쉽다는 걸 알게 됩니다
희망에 대해서도
불만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이시영.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서라벌예대 문창과 및 고대 대학원 국문과
수학. '중앙일보' 신춘문예 및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시에 강렬한
민중적 메세지를 담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드물게 뛰어난 정서와를 조합시켜
감동어린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다. 시집 "만월"을 춝간, 현재 창작과
비평사 주간으로 있다.
너
불러다오
밤이 깊다
벌레들이 밤이슬에 뒤척이며
하나의 별을 애타게 부르듯이
새들이 마지막 남은 가지에 앉아
위태로이 나무를 부르듯이
그렇게 나를 불러다오
부르는 곳을 찾아
모르는 너를 찾아
밤 벌판에 떨면서
날 밝기 전에
나는 무엇이 되어 서고 싶구나
나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걷고 싶구나
처음으로 가는 길을
끝없는 길을
만월
누룩 같은 만월이 토담벽을 파고들면
붉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칡뿌리를 한 발대
가득 지고 왔다
송기를 벗기는 손톱은 즐겁고
즐거워라 이마에 닿는 할아버지 허리에선
송진이 흐르고
바람처럼 푸르게 내 살 속을 흐른다
저녁 풀무에서 달아오른 별들,
노란 벌이 윙윙거리면
마을 밖 사죽골에 삿갓을 쓰고
숨어사는 어매가
몰매 맞아 죽은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삼베치마로 얼굴을 싼 누나가
송기밥을 이고
봉당으로 내려서면
사립문 밖 새끼줄 밖에서는
끝내 잠들지 못한
맨대가리의 장정들이 컹컹 짖었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쭈그리고 앉은
산길에는 썩은 덕석이 내다버린 아이들과 선지피가 자욱했다
어둠 속에 숨 죽인 갈대덤불을 헤치고
늙은 달이 하나 떠올랐다
이윤택. 1952년 부산 출생. 서울연극학교 중퇴. '제1회 방송통신대 문학상'
시부문 당선. "현대시학"으로 데뷔하여 '열린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는 서민적 삶의 양상에 대한 구체적 탐색을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시민"이
있고 현재 부산일보 기자로 있다.
늑대
빈들 마구 달렸어
갯바닥 풀섶 꾀꼬리알 훔치고
낮게 나는 새 모조리 잡아 먹었어
표범과 만나 돌밭 당당히 뒹굴었고
없는가
숲이 썩고 있어
부러진 상수리 옆구리 불 새고 있어
보이지 않아
도사리고 앉은 나무들 웅웅 매맞는 소리
어디 있는가
생솔가지 불타는 불
황홀하게 쓰러지는 휘파람소리
밤에 핀 포도알 알알이 삼키며
눈부신 아랫도리 벗어 던졌어
이하석. 1948년 경북 고령 출생. 경북대 사회학과를 수학했으며 "현대시학"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한 그는 현대문명의 반인간성에 대한 인식을 광물질의
상상력으로 드러내는 한편, 소외되고 사물화된 인간의 모습을 냉혹하게 그려내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시' 동인이며 시집으로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등이 있다.
철모와 수통
철모와 수통은 우연히 만나, 조수 속 기우뚱 거리며
쓸려내려간다, 굴 껍질 딱딱한 바위 기슭에
때로 휴전처럼 쉬며, 탄혼의 질린 표정을
굴 껍질 밑에 서로 숨기면서. 망가뜨려진 몸으로 갖는
그들의 휴식과 비탄은 공허하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수고의 값도 없이.
오직 쓸려갈 뿐, 차가운 동해의 깊이 속에
내던져진 채, 끊임없이 밑바닥으로만 내려가면서.
몇 마리 광어 새끼들 눈 비비며 철모 속에
숨어든다. 밤, 인광의 흰 소금물 속에서
문득 철모의 한 끝이 떨어져 나간다, 붉은 녹의 껍질로만
사라져간 어둠 속만이 아프다. 광어 새끼들의
잠 속으로 몇 개의 불덩이가 지나갔다.
불덩이 쪽으로 열린 광어 새끼들의 꿈을 향해
수통은 막연히 속이 출렁거림을 느낀다.
죽음과 함께 병사의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 버렸던
물. 광어 새끼들의 잠깬 눈을 숨기는
바위 기슭, 수통의 헤진 구멍 틈으로
몇 방울 물이 고즈너기 흘러내렸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갈증도 남김 없이
오직 쓸려갈 뿐인 거대한 소금의 밑바닥에서.
핀 2
그들은 반짝거린다 눈만 날카롭게 뜬 채,
흰눈 속 노을 묻은 어깨 묻힌 채, 엷은 푸른 하늘 속에
두 손 든 나무 밑에서. 봄도 오기 전
백치의 땅 밑에 누워 질퍽한 잠을 자는
모든 것들의 정수리를 찌르며, 그들은 때로 풀처럼
싱싱하게 땅에서 솟으며, 노을 묻은 몸이
사악한 반짝임만으로 일어선다.
세상 모든 그들 반짝이며 노는 곳마다
우울하게 뒤로 일어서는 구름의 노을빛.
이해인. 경기도 이천 출생. 필리핀 세인트 루이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고 현재
수녀로서 수도생활과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서강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시집 "민들레의 영토"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가 있는 그는 투명한 종소리처럼 소박하고 순수한 시들을 쓰고 있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고 있는 수녀 시인이다.
민들레의 영토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로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처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처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가을노래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도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석류꽃
지울 수 없는
사랑의 화인
가슴에 찍혀
오늘도
달아오른
붉은 석류꽃
황홀하여라
끌 수 없는
사랑--
초록의 잎새마다
불을 붙이며
꽃으로 타오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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