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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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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애송시 5
2015년 06월 16일 21시 46분  조회:5638  추천:0  작성자: 죽림
장석주.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청순한 의식과 탄력있는
상상력으로 타락한 세계 속에서의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삶과 찢긴 자아를
비극적으로 드러내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햇빛사냥" "완전주의자의 꿈" "그리운
나라" 외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등에 부침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뛰어 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나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숨은 꽃

  1
  너... 숨은
  꽃이 아름답다

  겨울 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또아리를 틀고
  짓누르는 땅거죽 헤집고 돋는 초록의 들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태연히 떠나갈 수는 없다

  핏방울 떨어지듯 앙징맞게 맺힌 꽃망울이여
  숨어서 앙칼지게 쏘아보는 꽃이여

  2
  징그러워라, 상처 아문 뒤 철죽보다 더 짙은 붉음으로
  타는 이 삶이 괴로움은 죄보다 더 가시같다

  세상에 태어나 이 괴롬보다 더 큰 괴롬은 없었다
  널 향한 미친 피의 참을 길 없는 줄달음질에
  난 서릿발 풀린 흙덩이마냥 부서지고 싶었다
  그러나, 보라... 삶은 징그럽고도 다정한 것,
  가량비 흐릿한 저 들녘에 하염없는 꽃상여 행렬을...

  우린 더욱 살아봐야 하리,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것
  살아서 타는 괴롬으로 더욱 생생히 빛나야 하리

 

  장영수. 1947년 강원도 원주 출생. 서울대 사범대 불문과 졸업. "문학과 지성"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한 그는 삶에 상처를 받는 인간의 고뇌를
드러내면서 그것을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확산하는 시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장훈고 교사로 재직중이며 시집 "메이비" "시간은 이미 더 높은
곳에서"가 있다.

     메이비

  (천막교실, 가마니 위에 비는
  내리고)

  우리는 고무신으로 찝차를
  만들었다. 미군 찝차가
  달려왔다 네가
  내리고.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고, 그리하여 너는
  메이비가 되었다.
  미제 껌을 씹는 메이비. 종아리 맞는
  메이비.

  흑판에 밀감을 냅다 던지는
  메이비. 으깨진 조각을 주으려고
  아이들은 밀려 닥치고.
  그 뒤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섰는
  미군 같은 메이비.

  남자보다 뚝심 센 여자애보다
  뚝심 센 메이비. 여자애를 발길로
  걷어 차는 메이비.

  지금은 비가 내리고.
  어느 틈엔지 미군들을 따라
  떠나 버린 메이비.

  바다 건너 가 소식도 모를
  제 이름도 모를 메이비.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메이비. 다시는 너를
  메이비라고 브르지 않을 메이비.


     그 여자

  그 여자. 중년의 갈잎처럼
  타버린 살결에. 흐트러진 축축한
  머리칼.

  소년원에 잡혀간 아들과.
  아는 집 아이를 보아주는
  딸과. 거쳐도 없이, 세 식구가
  헤매이는 서울의 새벽은 안개와
  연기에 휘감기었다.

  그 여자. 겨울이면 식모를
  살고. 더운 한철은 채소를
  팔고. 노점단속에 걸리면
  닷새를 살고.

  어느날. 소년원을 도망친 아들은
  찾아와, 돈 오백원을 졸랐다.

  어머니가 가진 돈 천이백원은 내일
  채소를 살 돈이었건만. 아들은
  그날 밤, 그 돈을 훔쳐
  달아났다.

  그 여자. 나는 그날 이후. 길을
  걷다가. 뻐스를 탔다가. 또는
  저 남쪽 어느 부두에 이르렀다가.
  수없는 그 여자를 보았다. 세상은
  첩첩, 안개와 연기에 덮여.

  아무도 깨뜨리지 못한다, 안개와
  연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세상은, 불현뜻 돌아선다.

 

  정호승. 1950년 경북 대구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한국일보, 대한일보'
신춘문예와 "현대시학"으로 데뷔한 그는 민중적 감각의 부드러운 일깨움의 시들을
발표했다. '반시' 동인이며 시집 "슲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가 있고, 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기도 했다.

     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쎄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 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 사람이 되었네


     슬픔은 누구인가

  슬픔을 만나러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우리들 생의 슬픔이 당연하다는
  이 분단된 가을을 버리기 위하여
  우리들은 서로 가까이
  개벼룩풀에 몸을 비비며
  흐느끼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황토물을 바라보며 무릎을 세우고
  총탄 뚫린 가슴 사이로 엿보인 풀잎을 헤치고
  낙엽과 송충이가 함께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 형제여
  무릎으로 걸어가는 우리들의 생
  슬픔에 몸을 섞으러 가자.
  무덤의 흔적이 있었던 자리에 숨어 엎드려
  슬픔의 속치마를 찢어내리고
  동란에 나뒹굴던 뼈다귀의 이름
  우리들의 이름을 지우러 가자.
  가을비 오는 날
  쓰러지는 군중들을 바라보면
  슬픔 속에는 분노가
  분노 속에는 용기가 보이지 않으나
  이 분단된 가을의 불행을 위하여
  가자 가자
  개벼룩풀에 온몸을 비비며
  슬픔이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가지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조정권. 1949년 서울 출생. "현대시학"에 추천을 받아 시작활동을 시작한 그는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1972)와 "시편"을 출간했다. 1985년
'녹원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시세계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로, 퇴화되기
이전의 서정적 자아만이 볼 수 있는 사물과의 원초적 관계를 드러내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문예진흥원에 재직중이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혼자이오나 혼자가 아니옵니다.
  혼자이오나 여전히 혼자가 아니옵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이 마음 오랫동안 혼자 향하고 있었아오나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이 마음 오랫동안 혼자 물굽이 일었아오나 응결하지 아니하였읍니다.
  어느 고적한 밤의 어깨에 기대어 그 침묵의 물굽이를 향하고 있었아오나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내 스스로 이룬 근심이니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내 스스로 향한 불길이니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정결하게, 그리고 공손하게,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에 이르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이루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응결하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혼자로서 그득하지 못했읍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차 넘치옵니다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넘치고 있아옵니다.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비어서 넘치옵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오늘은 그분이 지긋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읍니다.
  오늘은 그분이 힘겨운 짐을 내려놓고 앉아 계시는 모습을 뵈었읍니다.
  오늘은 그분이 하늘에 기대어서
  육신도 짐도 다 벗어놓은 채 가슴만으로 앉아 계시는 모습을 뵈었읍니다.


     77년 가을

  이삿짐을 꾸리다가 장롱 뒷벽 먼지 구덩이에서 찾아낸
  결혼 사진첩을 아내는 애지중지 책더미와 함께 싸기 시작한다.
  육개월에 한 번씩 소동을 벌일 때마다 들쑤셔지는 세간살이 속에서도
  책과 사진첩은 의례 따라 가야 되는 것이라고 아내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는 일체 상관할 바 없이
  안심하고 허리에 매달려 따라오는 어린 것들과 같이

  그러나 나는 반대다.
  우리가 미련을 가지고 끌고 다니던 것
  한사코 소중하게 모셔 놓았던 것들 가운데도
  버려야 할 것은 너무 많고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또다시 긴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애지중지 정돈하려 하는 책과 기념사진첩
  그 속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는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고
  정이 되어 있는 과거가 우리들의 생활에서 장식이 되는
  그런 이로움은 이제부터는 막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한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살아보면 살아 볼수록 더 좁디 좁은 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 사람에게는
이삿짐이란 가벼워야 하고 간편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승자. 1952년 충남 연끼 출생. 고려대 독문꽈에서 수학. "문학과 지성"을
통해 데뷔한 그는 철저한 긍정에 도달하기 위해 세계 전체에 대한 부정을 수행하는
시세계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 시집으로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가 있다.

     삼십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돋힌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맆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서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 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 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
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놀아났읍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최승호. 1954년 춘천 출생. 춘천교육대학 졸업. "현대시학"으로 데뷔했으며
'제6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그는 사실적 관찰, 단순하지 않은 사려, 허덥지
않은 언어의 세계로 시풍을 다져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대설주의보"가
있다.

     대설주의보

  눈 덮인 채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 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하종오.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한사대를 졸업했으며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맑은 감성과 순결한 언어로 이 땅에 서린 한과 소망을 노래한
시인으로 '반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가
있다.

     풍매화

  떠돈들 어떠리 떨어진들 어떠리
  언제든지 떨어지면 움 돋겠지
  진달래가 골백송이 흐득흐득 울어도
  풍매화는 바람 따라 날아다닌다.
  골짝에 죽어 있는 메아리를 살려내고
  벌목꾼이 버리고 간 도끼소리 찾아내고
  땅꾼이 잃어버린 휘파람도 찾아내어
  그 덧없는 소리들 데불고 무얼 하는지
  풍매화는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혼자서 싹틀 힘도 없으면서
  어디든지 뿌리내리면 숲이 이뤄지겠지
  풍매화는 득의양양 산맥을 날아다니지만
  대포알 묻힌 땅 버릴 수 없고
  녹슨 철조망 무사히 바라볼 수만 없어
  머뭇거리니 마침내 바람도 잠잠해진다.
  이제는 묻혀야지, 몸 바쳐야 할 자리는 여기.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홍영철. 1955년 대구 출생. 계명대 국문과 졸업. '대구매일' 신춘문예와
"문학사상"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자연과 시인의 유기적인 교감 속에서
발견되는 자아의 신선한 시세계를 갖꼬 있는 그는 시집 "작아지는 너에게"가
있다.

     바다 일부

  1
  내 사랑은 우리집 책상 속에 잠들어 있어요. 고운 노래를 들으면 그것은 하늘
위로 날아갔다 돌아오곤 해요. 꿈꾸는 바다가 보여요. 깨울 수 없는 그
바닷가에는 고기떼들만 하얗게 죽어 있어요.

  2
  새들의 지붕 위로 푸른빛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발가락을
간지르던 새앙쥐도 떠나가고 나는 심심히 오래된 그림책을 펼쳐요. 잠든 때에도
오렌지빛 바다는 얘기해요. 흩날리는 거리에서 돌아오면 피곤한 손을 닦아
주기도 해요.

  3
  나는 모른다고 했어요. 책상 위 제라늄이 왜 자꾸 시드는지를. 내 낡은 머리칼
위에는 왜 늘 겨을 바람이 펄럭이는지를. 이따금 열린 창틈으로 새틀구름이
지나가고 지금 내 귀에는 어둠 소리만 가득해요. 떨어져 쌓이는 쓸쓸한 바닷가도
보여드릴께요.


     작아지는 너에게

  말이 달려오다.
  연갈색 갈기 뒤에는
  알몸인 너의 그대가 숨어 있다.
  바람이 분다.
  어디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냇물은 어디로도 흐르지 않는다.
  뒷산이 가라앉는다.
  너는 흰꽃을 꺾는다.
  못에 찔린 발가락이 너는 몹시 아프구나.
  가라, 절룩거리며.
  달려오는 너의 그대와
  너의 그대의 말에게로 가서
  그 꽃묶음을 건네주려므나.
  너의 그대와 너의 그대의 말은
  꽃향기에 취해
  더욱 거센 숨소리로 달려가리니.
  쥐들이 너의 다친 발가락을 물어뜯는구나.
  너는 모르느냐.
  동해에는 폭풍 경보가 내려졌다.
  고기떼들이 다 땅 위로 올라와
  너와 네 이웃의 집뜰을 범하고
  거친 비린내를 세우고 있다.
  너는 또 부서진 기타를 치는구나.
  그러나 그런 시시한 노래 소리로는
  돌멩이들의 달콤한 새벽잠만 깨워 놓을 뿐
  한 마리 개똥벌레의 날음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드디어 흰 꽃묶음을 건네주었구나.
  잘했따.
  너의 발가락은 이제 다 나았다.
  너의 그대의 등허리는 너무나 눈부시다.
  잊어버리자.
  일전의 일들은 슬로우 비데오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잠시만 울어야겠따.
  너의 그대와
  너의 그대의 말은
  가라앉은 산으로 가서
  함께 가라 앉았다.
  아침이 올 것이다.
  나뭇가지 너머가 훤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왜 자꾸 작아지느냐.
  왜 자꾸만 작아지느냐.

 

  홍희표. 1946년 대전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1967)한 그는 시집 "마음은 구겨지고" "한방울의 물에도"
"살풀이"가 있다. 언어와의 싸움에서 풍자적인 것을 살려 전통적 시형식에
팽팽한 긴장을 부여하고 그 긴장으로 인해 그의 시세계를 형성해 나가는 시인이다.

     섬에 누워

  섬이 날 가두고
  회오리 바람으로 날 가두고

  원산도 앞에는 삽시도
  삽시도 앞에는 녹도.

  파도가 날 가두고
  피몽둥잇 바람으로 날 가두고

  프랑크톤 위에는 조각달
  조각달 위에는 왕보리나무.

  젖은 예수님 걸어오고
  다리꺾인 게 걸어오고

  오, 열 두 입이 목메인 섬
  오, 하늘로 흘려보낸 섬.


     한국인의 애송시 III
           제1권


  편집고문: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발행인:장석주
  발행처:청하
  주소: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80-1
  초판발행일:1985년 7월 25일
  입력일:1992년 4월 22일
  입력 및 교정자:임종욱

 

  서문

  강말주
  5월이 오면
  설정

  강방영
  집으로 가는 길
  해바라기

  강성일
  꽃망울 통신
  일요일에 죽은 붕어

  강신용
  못질
  그리움

  강안희
  저녁 노우트 5
  빨래

  강정화
  바느질
  맷돌의 염원

  강형철
  해망동 일기 1
  광명리에서

  고경희
  개화
  귀향

  고광헌
  신중산층 교실에서 1
  낙골 산동네 101번 종점

  고운기
  동대문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고형렬
  쓰레기장불
  대청봉수박밭

  곽문환
  촛불
  소리

  곽재구
  사평역에서
  20년 후의 가을

  구중회
  물방울 튀기는 노래
  장마기

  권오욱
  은비
  겨울 안개

  권태현
  공백기
  미술시간

  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안개

  김경미
  비망록
  임진강이 말하기를

  김경옥
  비만 1
  햇빛 부신 날은

  김기문
  발견
  토함산 그늘

  김기홍
  일터에서
  겨울인사

  김대구
  말씀
  잠적

  김동원
  너의 겨울 뒤에서
  연두색 하느님

  김동호
  죽은 바둑이
  복숭아

  김명이
  탈춤
  간이역

  김백겸
  구리
  비를 소재로 한 서정별곡

  김사인
  한강을 보며
  고향의 누님

  김상길
  그릇
  그 목소리

  김상윤
  입소 28 고지
  월남에 계신 오빠에게

  김상환
  영혼의 닻
  산비둘기

  김선굉
  아리랑 1

  김세완
  눈물에 대하여
  허수아비

  김소원
  그림자
  조춘

  김송배
  바람
  흩꽃잎 뒤풀이 2, 닻

  김순일
  서산 사투리 1
  서산 사투리 16

  김영안
  한수이북
  민중선언

  김용락
  송실이 누님
  4.19날 육사시비 앞에서

  김용옥
  산문에서
  흐린 저녁

  김용주
  노래
  작업대 앞에서

  김용택
  섬진강 3
  섬진강 18

  김유선
  가족
  봄바람

  김윤현
  만적
  봉양동

  김재진
  아침을 위하여
  그대

  김정숙
  이 강산 돌이 되어
  이 강산 유월은

  김정원
  6월의 기억
  차 한잔

  김종목
  찻집에서
  1961년의 강설

  김종섭
  환상조
  달맞이꽃

  김종희
  까치가 오지 않는 집
  매장

  김진경
  E.T
  풀잎

  김창규
  비무장지대
  동지를 위하여

  김필곤
  편지
  섬진강 강물을 먹고

  김해화
  우리들은
  어디만치왔냐

  나종영
  화해에 대하여 5
  양화진에서

  나해철
  무등에 올라
  강강수월래

  남진우
  그 새벽나라로
  잠자는 바다

  노진선
  다시 굴리고 싶은 주사위
  한 발로

  도종환
  고두미 마을에서
  울타리꽃

  류후기
  소지
  유두

  명기환
  목포항 1
  가을 여행

  문형렬
  꿈에 보는 폭설
  눈물사위

  박귀래
  등대
  시냇가

  박기동
  산죽 그늘 아래
  콘체르토

  박기영
  물의 역사
  숲에 대한 응시 1

  박남준
  들판에 서서
  마을

  박남철
  오랑캐꽃을 위하여
  엽서 1

  박노해
  노동의 새벽
  손무덤

  박덕규
  기러기 남매
  빈 살을 채우기 위하여

  박만기
  황토 1
  황토 11

  박몽구
  우체국에서
  빈잔

  박상봉
  자정의 꿈
  다시 그리운 사랑

  박상우
  안경흔들기
  해맞이

  박상일
  빈차
  그 새 한마리

  박상천
  열대어의 유전인자
  단 한번만이라도

  박선욱
  그때 이후로
  오월 초하루 신새벽에

  박양진
  어느 여름날 아침에
  일절유심조

  박영근
  철거민 1

  박일
  나무에게
  겨울이 오면, 시여

  박일규
  감나무
  목련을 보며

  박정숙
  추억에서
  동화의 나라

  박진관
  우리가 기다린 님은
  우리가 죽음으로

  박진숙
  죄
  다른 새들과 같이

  박찬
  상리 마을에 내리는 안개는
  이 땅에 무슨 일이

  박태일
  그리운 주막 1
  선동 저수지

  박현서
  제막식
  서림사 2

  박혜숙
  가을 저녁에
  5월에

  배경란
  나는 잠들고 싶어요
  내가 우는 까닭을 묻지 말아요

  배인환
  길잡이
  나의 방

  배찬희
  민들레
  고향

  배창환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 남아
  오리걸음

  백남천
  산낙지를 씹으며
  고층빌딩 유리닦이

  백미혜
  공구르기
  정적 2

  백준찬
  감각
  겨울잠

  백창수
  어떤 처용
  헌화가유감

  백추자
  돌아오는 길
  현명한 새

  백학기
  봉천
  눈

  서경온
  실내악
  숯불

  서소로
  언덕을 넘어
  땅

  서은숙
  폭죽
  분수

  서홍관
  금주선언
  넋건지기

  석병호
  낯잠속 얼굴 11
  편지

  성낙희
  겨울 나무
  불을 켜며

  소재호
  장미
  석고상

  손동연
  우리 선생 백결
  선에 대하여

  송무
  옛날의 금잔디
  배를 바라보며

  송재학
  섬 1, 편지
  얼음시

  송희철
  가을 노래
  발을 씻으며

  안도현
  고추밭
  빈논

  안초근
  사막
  가을

  안혜경
  무너지기 위하여
  전화를 끊은 후

  양애경
  베스트 셀러
  물

  양준호
  칸딘스키
  파이프

  엄승화
  탈옥자
  후레지어

  오재동
  운암리 시편
  베짜기

  오정환
  채광기
  모래벌판

  오태환
  공옥진 1
  최익현

  오환영
  처용무 79
  처용무 80

  우미자
  내소사 연가
  겨울 강가에서

  원용문
  중추절
  청자송

  원재길
  한자락의생
  사진찍기

  원태희
  겨울이 간다
  비의 꿈

  유혜목
  안개
  이주

  유화운
  겨울바다
  겨울 아침 강가에서

  윤성근
  황진이 서설
  평일의 관심

  윤승천
  유언
  목마

  윤여홍
  돌멩이를 위한 시
  꽃

  윤인영
  생물선언
  고 과거에게

  윤재철
  피뢰침
  대자보

  윤지용
  노래
  봄잠

  윤형근
  사냥
  해와 달 이야기

  음예원
  뜻밖의 추억
  해마

  이난수
  문
  고향에

  이능표
  풍장
  스물여섯번째의 산책

  이륭
  잠행 1
  해방춤

  이문재
  우리 살던 옛집 지붕
  낙타의 꿈

  이병천
  선사의 잠
  물의 계율 1

  이복웅
  걸어가는 아파트
  바다의 시간

  이상백
  누가 끝을 보았나
  목마름으로

  이상호
  바다로 나가볼까

  이선관
  애국자
  자화상

  이세일
  비
  구름

  이수정
  물구나무서기
  역사 앞에서

  이숙희
  고향 1
  새

  이승철
  정든 임
  오월비

  이승하
  내림굿
  백수광부의 차에게

  이신강
  손
  기차역에서

  이영유
  자유에 대하여
  사슬 6

  이우영
  그해 겨울
  편지

  이은경
  나무가지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속도제한 구역

  이은미
  보길도의 5월
  슬픔

  이은봉
  사루비아
  남새갈기

  이정숙
  편도선
  문상

  이창기
  문득 고요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파문이듯

  이충이
  당신의 자리
  무심사로

  이해영
  기억 속의 바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이현암
  산
  곱사춤

  이혜선
  후예들
  한가윗날

  이효윤
  거울 앞에서
  함곡관 밖으로 가는 길에서

  이희목
  보리밭
  4월

  이희자
  천천리의 새벽비
  미륵사 오층석탑

  이희찬
  리브울만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한 비망록
  사랑을 위한 독후감

  임문혁
  물의 비밀
  딱 둘만 남게 된다면

  임석래
  겨울
  4월

  임승빈
  세 개의 유년
  입술들

  장경린
  허리운동
  인물화

  장정일
  강정간다
  지하인간

  장종권
  바람불
  안테나

  전광옥
  신정동 1
  관법 4

  전연옥
  곤충채집
  제비붓꽃

  전원책
  동해단장

  정대호
  레미에게
  미국으로 입양가는 아이들에게

  정동주
  이삭줍기
  전설

  정두리
  테레사 씨 꽃가게
  우리들의 이름자

  정명자
  잊지 못할 1978년 2월 21일

  정상현
  운동장을 바라보며
  동두천에서

  정인섭
  이 땅에 모여 3
  오늘 저녁 우리나라의 절망 우물들이

  정일근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 편지
  시월의 기도문

  정재희
  유년 시절
  봉원사 가는 길

  조남야
  그믐밤
  보리밟기

  조석구
  리어카와 생선
  시인과 농부

  조석현
  천목
  6병동

  조원규
  밤의 노래 1
  밤의 노래 2

  조윤호
  풀잎의 영혼
  빈자여행

  차정미
  여의도 83
  피아노를 치면서

  채희문
  가을 레슨
  자기 빨래하기

  최건
  마을까치
  청량리 역에서

  최동현
  어전리 3
  어전리 4

  최명자
  쑥
  천생연분

  최문수
  식
  출항기

  최병준
  바람으로 멱 감으며
  연

  최영
  개구리
  희화

  최영철
  나무
  지금도 지금도

  최준
  가을장래
  섬 7

  최창렬
  톱니바퀴
  벽시계

  최휘웅
  어느날
  환상도시 9

  하남길
  현상붙은 시
  꽃

  하일
  주민등록
  동행

  하재봉
  숲의 전설

  한기찬
  아가야 2
  칠월

  한상원
  소망
  오늘 2

  허영선
  인동일기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홍석하
  청동 항아리
  첫눈

  홍일선
  오산장 시오릿길
  동탄행 버스

  황영순
  봄 편지
  길

  황인숙
  추락은 가벼워
  새를 위하여

       서문


  "한국인의 애송시" 3권을 펴내면서

  사실 한편의 시가, 창조적인 자아 표출의 계기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거나, 제도적 강제에 의해 고립. 분산된 좁은 경험세계의 참호 속에 갇힌
삶을 강요당하는 위기의 벼랑에 선 인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다. 그것은 굶주린 자에게 한 조각의 빵이 될 수도 없고, 부당한 폭력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힘없는 자에게 자기방어를 위한 한 자루의 칼이 될
수도 없다. 그렇게 시는 무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동아시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캄캄한 역사 속에 삶의 자리를 마련한
숱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시를 위하여 자신의 한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온 몸으로 한편의 시가 되어 그 캄캄한 역사를 헤쳐나가는 불꽃이 되는
대열에 서고 있다. 이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거대한 활화산의 분출과 같은
젊은 시인들의 끝없는 '시의 폭발'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경이감은, 우리
시대의 상처에 대한 아픔, 그 고통과, 예민한 슬픔과 기쁨, 그리고 허무와
절망을, 단순한 추상성을 넘어서서 생동감 넘치는 현실적, 구체적 형상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줄 때의 놀라움에 다름아니다. 1980년대는 시의 시대이다.
한 시인이 표현했듯이, 그들의 시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삶과 상처의
참모습과 진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느낀다
  상처의 고통을
  우리를 찌른 창의 고통을...

  젊은 시인들의 '상처의 고통'은 바로 우리들의 그것이다. 시인들은
'종족의 더듬이'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세계의 억압과
모순의 싸움 끝에 얻은 '상처의 고통'을 그 내면 속에 가두어 사유화
시키지 않고, 의미 있는 형태로 표출시켜 공적 지평 속에서 그것의
진정성을 물을 때, 우리는 놀라고, 감동하고, 반성하고, 절망 속에서도
새롭게 희망을 갖는다. 왜냐하면 시는 예언이니까. 우리는 시가 그 안에
감추고 있는 '예언적 기능'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선집은 "한국인의 애송시" 1, 2권에 쏟아진 당초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 열띤 반응과 찬사에 힘입어 기획된 것이다. 이 시선집에 작품을
낸 시인들은 1980년 이후 각 지면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의 절차를 밟은
거의 모든 시인들을 망라하고 있다. 각 일간지의 신춘문예, "현대문학"
"한국문학" "문학사상" "월간문학" 등의 문예지와, "심상" "시문학"
"현대시학" 등의 시전문지, 그리고 개인 시집과 각 동인지, 무크지 등을
통해 등단하여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200여 명의 시인들이다.
우리는 이 시인들을 선정하는데 특별한 기준을 만들지는 않았다. 시인들
각자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감수성은, 시에 표현된 이념과 세계관의
다양화와, 시적 방법론 및 그 질적인 성취의 다양화로 드러나 있다. 물론
그 다양성을 쉽게 무방향성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출발한 대다수의 시인들의 시세계를 편자들의 일방적인 안목과 척도에
의해서 재단함으로서 자칫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젊은 시인들의
무한대의 잠재적 가능성마저 잘라버릴 수도 있다는 우리의 염려와 신중함이
그런 비난에 대한 변호가 될 수 있으리라. 작품을 보내주고, 책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을 인내심 깊게 기다려준 시인들께 우리의 고마움을
보낸다. 그리고 이 시선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혹시 누락된 시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분들께 사과를
드리며, 앞으로 새로운 기획에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애송시" 1, 2권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새로 출간되는 80년대 시인들의 작품들을
수록한 이번 책에도 변함없는 애정을 가져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1986년 여름에
  "한국인의 애송시" 편집고문
  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강말주. 1928년 황해도 출생. 1982년 "시문학"지를 통해 등단했으며
국학대학 전문부 국문과를 졸업했다. 우리말의 고유함에 내포된 섬세하고
다감한 정서에 현대적인 의미를 부야하는 작업과 함께 한국적인 서정이
전달될 수 있는 시어의 선택에 유의하여 시를 쓰고 있다. 월간
"새교육"지의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5월이 오면


  고운 가슴 쥐어짜
  뿌려 놓은 정성으로
  5월은 오는 것.

  산에도 들에도
  아씨의 마음.

  시냇물에 머리 씻어
  곱게 빗은 실버들도

  훈풍에 솟는 정
  전하고파

  릴리리야 피리소리
  흘러간단다.


       설정


  1
  눈이 내려
  내 가슴에도 내려
  소복이 쌓이는 고향 생각

  밟고 가면 지워질까
  마냥 걸어도

  그래도 좇아오는
  길고 긴 행렬.

  눈길은 철길처럼
  산모퉁이 돌아서 갔다.

  2
  가도 아니 가도
  고향길은 먼 천리길

  천리길 시린 한이
  발길에 맺혀
  나, 눈사람이 되어 주저앉겠네.

  할 말이 많아 눈이 오는가
  오도가도 못하는
  눈사람도 고향은 있어.

 

  강방영. 1956년 제주도 출생. 1982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순간적인 것을 포착,
강렬한 서정으로 응축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 대학원
영어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


  1
  바람과 놀고 있는
  시골 아이들
  머리카락 살랑일 때마다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

  진분홍 분꽃을 따
  꽃술 당겨 씨방으로
  귀걸이하고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는 길.

  공기마저 살쩌 있구나!
  가슴 가득
  맛있어라
  맛있어라

  전나무 사이 길
  아직도 풍성한
  남은 여름의 노래

  눈을 뜨고
  걸어 가다가
  눈을 감고
  걸어 가다가.

  2
  밤의 숲에
  안겨
  어둠은 잠이 들고

  깜박깜박
  하늘에서
  시간을 재는
  푸른 별들

  아가들의 꿈길 지켜
  두어번 낮게 짖는
  검둥개

  불빛 새는 마당에는
  감꽃 홀로
  깨어 귀 기울이고

  심해처럼
  갈앉는 밤

  먼 사막에서 일어나
  파리하게 불어 오는
  바람 소리

  마을 한 귀퉁이
  소리 없이 부서져
  잠든 이들의 이마에
  눈썹에 내리는
  밤의 가루
  검은 재와 같이
  조용히
  내려 앉는다.

  3
  바람을 재우며
  내리는 가랑비

  수북이 동백꽃 떨어져
  노랗게 꿀물 씻기는
  마당
  다시 담장은 푸르게
  이끼를 입는다.

  지나는 자리마다
  안개는 고사리 새순
  세우고

  산으로
  꿈 속에서도
  산으로
  달리는 아이들

  아이들과 함께
  물결치는 산
  아이들이 웃는 소리
  산이 웃는 소리

  골짜기를 오르며
  빛나는 꼭대기를
  휘어 감으며
  돌굽이에 나무 등걸에
  울리는 메아리

  쉬임 없이 당기는
  시간의 홠시위에서
  솟구치는 빛의
  화살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아이들은 춤춘다
  아이들은 노래한다.


       해바라기


  바다 건너서
  언니가 부쳐 온
  해바라기 씨

  봄내 싹나고
  대 올라
  마디마디
  피어나는 꽃

  한치 꽃대 자라면
  한송이 더 달린다고
  마당에서 아버지는
  금빛 꽃송이를
  세신다

  구름이 뜨고
  바람이 불고
  흰 빨래가 날리는
  해바라기의 하늘

  황금의 시간 이울어
  달빛 빠져 나가는 밤
  잎 시들고
  대 마르면

  산이 멀리 가고
  가을이 멀리 가고
  해바라기도
  하늘을 이고
  멀리 가지만

  언니의 하늘
  아버지의 하늘에서
  해바라기는 꽃 핀다

  시간의 바퀴 자국 속에
  금빛으로 해바라기는
  피어난다.

 

  강성일. 1946년 경북 출생. "중원문학"의 동인이기도 한 그는 1985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하였다. 분명하고 획실한 경험에 의해
자연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의 참모습을 주지적인 순수시로 형상화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청주 운호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꽃망울 통신


  지난 밤 그대로부터
  까만 꿈을 새긴 어둠 한 장
  전통을 받고
  이내 흰 종이로 답신하였오.

  그 흰 종이 위에
  내 맘의 화신인
  흰 나비 한 마리
  그림 한 장 부탁했는데
  아직까지도 무소식이오.

  봄비에
  당신의 꿈을 씻으며
  더욱 긴급한 통신
  하얀 회신의 나비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오.

  오늘 아침도
  꽃술같은 기대로
  내 마음 쫑긋
  그대 문전에 나가 있오.


       일요일에 죽은 붕어


  천 근 늘어진
  일요일 오후 한낮,
  투명한 의식의 그늘 아래
  붕어 한 마리.

  하늘의 낮달처럼
  정신을 식히고 있다.

  바람개비 섞바뀌는
  오늘은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긴 날,

  극과 극
  머리와 발 끝인
  이승과 저승까지
  오수 한 잔에 취한 날,

  날개 접힌
  일상의 푯대 끝 신호등에
  사명처럼 빌붙는
  빨강불의 숨소리,

  세단 같은
  정신의 질주 속에
  눈을 뜬 평생이여.

  그대
  숱한 돌멩이로
  내 가슴을 겨냥한들
  이 목숨
  새 떨어지지 않는
  새.

 

  강신용. 1954년 춤남 연기 출생. 1981년 "현대시학"지를 통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간략한 표현과 여백의 미를 추구하는 순수 서정시를 쓰고
있다. "백수문학" 동인이며 시집으로 '가을 성'을 갖고 있다. 현재
도서출판 "창학사"에 근무하고 있다.

       못질


  못질을 한다.
  험물어져 가는 나의
  가슴,

  바르고 곧은 것들만을 골라서
  못질을 하지만
  상처로 되돌아오는 나의
  일상,

  못질을 한다.
  출근길, 퇴근길 혹은
  모진 세상 언저리
  내 모진 것들을 모아서
  못질을 하지만
  매일같이 빗나가는 나의
  하루.


       그리움


  길을 거닐다 보면
  혼자인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누군까 꼭
  올 것만 같은
  길을 거닐다 보면
  잊었던 친구가 생각나고
  어디선가 꼭
  불러줄 것 같은
  그대
  목소리
  길을 거닐다 보면
  혼자인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강안희.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심상"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생활 주변의 일들을 일상적 사물을
빌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녁 노우트.5
       -- 대화법


  때 가 되 면시집은가야지어머니는외 제다리미와외 제후라이팬외
제믹서기손가락을꼽으며슬금슬금나를살피신다어머니어디호두딸집없을까요?
고무장갑없이그많은호두껍질이나까 고 싶 어 요쯧쯧이추위에무슨놈의호두가
맺힐까무 엇 보 다다리미는외제가좋아글쎄 요글쎄요라니써 보 면 다차암어
머니는쓸데없는소리마라뒷집선이서울시댁에서외제안해왔다고애 낳 은지금도
오 금을건다더라삼성금성대우것들도쓸만 해 요그런대로수명도길 구요그 런
대로어머니의숨소리가길 길어졌다.

     7.어느 듯

  주인여자가 머리 볶으러 간 사이 신나게 빨래해 널고
  방으로 온 나는 고향집 생각을 더듬는다
  베란다에선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 옷가지들이
  스스로 수분을 뱉으리라 어느듯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며 증발할 수 있으까
  꿈 꾸겠지만
  무거운 나의 마음을 뱉을 수 없어 어느듯
  어둠은 문 틈에 조롱박같이 매달린 채 어느듯
  방울방울 떨어질 듯 말 듯.

     8.벌판

  어느 날 갑자기 나는 허허
  벌판에 서 있었다 가뭇가뭇한 벌판의 끝
  을 향해 나는 달리고 있었다 가도가도 드러나지 않는
  왠일일까 벌판의 끝에 소스라치게
  뻗은 벽
  그 벽의 밑바닥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었다
  뛰어내리면서 보니 하늘이 낮게낮게 벌판에 엎드린다
  엎드려 별을 뿌린다 도리깨에 흩어지는
  참깨같은 저 별이 어느 날
  벌판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빨래


  빨래를 합니다 섬유 낖숙이
  잡히지 않는 곳에 침투한
  일상의 때를
  두 손으로 휘어 흔들어 헹굽니다
  비누 방울은 웃으며 웃으며 사라지고
  손가락 마디에 부딪혀 질컥이는
  하루의 웃음이 혹은 아픔들이
  물통에서 푸득거립니다
  빨래를 합니다 나일론처럼 빳빳한
  아버지의 옷가지
  까마득히 손 끝에 드러눕는
  옷가지를 건져 올리면
  가슴 부푼 비눗방울처럼 부풀대는 나의 하루
  빨래를 합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온 세월이 느닷없이
  발등을 밟고는 쏜살같이 달아나고 아
  물통 가득히 비어 있는 하늘의 중심
  물통 속의 거친 숨소리가
  비어 있는 중심마저 흔들어 놓읍니다.

 

  강정화. 1947년 경북 영일 출생. 부산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84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의 작품세계는 고전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서정성을 통해 뜨거운 인간애를 추구하고 있다. '배토'와 '한국여성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바느질


  한땀 두땀
  옮긴 손끝에
  때때옷 되어 빛나던
  어린날의 깃발.

  한올 두올 엮으신
  매듭진 옷고름이
  풀지 못한 인연인 것을

  어느 뉘가
  풀어 헤쳐 이 자리를 채우리까

  명주올 매만지신
  고운 손
  세월이 걸려
  굵은 삼베옷 되어
  갈라져 가니

  실꾸리처럼 길게
  살자 하신
  언약 날아가고
  서러움만 올올이 배이네.


       맷돌의 염원


  쉼 없는 노역의 권태 속에
  천년을 휘감고 돈다
  보석같은 꿈들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체증처럼 갑갑한 가슴앓이는
  연륜의 껍질을 벗기는 지문이다.

  입다문 불상처럼 앉아서
  혹은 기적의 비상을 꿈꾸면서
  끌고온 긴 생애
  세월에 갈리어 부서지는
  희망과 절망, 사랑과 증오가
  지워지지 않는 멍울로 남는다.

  돌다가 닳아버릴 돌
  끝없는 소멸의 아픔을 염주로 엮으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도 삼키고
  삶의 굴레를 도리어 거역하지 않는
  끝내 뜨거운 맷돌이기를...

 

  강형철.  1955년 전북 옥구 출생. 가난한 이웃들의 외롭고 어두운 삶,
분노와 아픔을 긴장된 시어로 구사하고 있는 그는 주로 '민중시'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현재 숭전대학교 강사로 있다.

       해망동 일기.1


  떠밀려 오는 것이 뻘뿐이면 어떠랴
  금강 구비구비 절망 외엔 할 것이 없는
  우리들의 이웃이 툇마루에 걸터 앉아
  보리밥 깨물어 바라보던 눈빛이
  흙과 버무러져 갯물과 버무러져
  칙칙한 뻘물인 것을

  게를 잡으러 나갔다가
  밀물 때도 잊고
  꽃발게 울음소리 뒤쫓다 잠이 들어
  둥둥 떠가는 양동이
  위태론 손짓만 남기고
  뻘구덩이 빠져죽은 친구가
  아직 잠들지 못하고

  나왕나무 등허리에 기어오르다
  미끄러져 다시 죽는
  늦은 해변
  깃발 없이 돌아오는
  새우젖배 그물코의 매듭
  마디마디 햇빛 때려 눈부신 것을

  떠밀려 오는 것이
  파란 강물이 아님으로 오히려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아직 살아남아 너왕나무 엮음의
  밧줄에 출렁이며 살아있는 것을


       광명리에서


  명도소송을 집행한 집에서
  우리는 고스톱을 쳤다
  전세돈, 그 돈은 내 목숨이라며
  한 푼도 안 주느냐고 개인은 죽어도 좋으냐고
  핏발 서린 원망을 던지던 아줌마는
  곡괭이로 방 구들을 찍고 나갔지만
  똥통을 망가뜨리고 나갔지만
  우리는 전기난로를 설치하고
  유입물건 관리한다며 주질러 앉아
  메주와 흑싸리와 팔공산 십끗짜리를
  서로 따먹기 위해 눈을 붉힌다
  집달리는 매일 하는 일이라며
  눈 하나 끔뻑 않고 솥단지를 던지며
  대문에다 못질을 하고
  지방법원장 명의의 판결문을
  흔들고 있었지만
  돈을 뺏기고도 죄지은 사람처럼
  쫓겨간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떤 집에서 명도집행을 하는데
  똥바가지를 앵겨
  잽싸게 붙이고 나왔다며
  이 집은 양호한 편이라고 집달리는 웃고 있었지만
  함부로 던져진 솥단지는
  다시 어느 곳 부엌에 걸려
  식구들 밥그릇을 채울까
  방 구들 쪼개진 돌멩이는
  이제 어떻게 이어져
  끊어진 허리를 녹일 것인까
  우리는 묻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도망칠 수도 합세할 수도 없다
  캄캄한 여기는 광명 7동
  자본주의의 밤
  천민들의 밤

 

  고경희. 195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80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는 현재 '삼악시'와 '산까치'의 동인으로 활동중이며 객관적
묘사를 통한 선명한 이미지의 시적 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개화


  내,
  숨은 사랑을 놓아주면
  흰, 배꽃이겠네.

  봄, 한철
  각피에 쌓였다. 매디마다 트는
  흰,
  배꽃이겠네.


       귀향


  산 구비 돌면
  오리나무 숲
  하루 저무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잎보다 많은 산새가 울었다

  시가지가 보이는
  언덕에
  남빛 달개비꽃
  보조개처럼 숨어 있고
  서울가서
  쌍가풀 수술 받았다던
  매자 언니네
  울 밑을 지나는
  오솔길에는
  감꽃이 융단같이 깔려 있었다.

  내 창에
  불 꺼지는 것을 지켜 보았다던
  소년이
  은날개 반짝이는
  (비닐 하우스) 앞에서
  구리빛 중년으로 맞아 주던 날.
  먼 -- 거리를 돌아와
  뜨락에 선
  내 낯선 여인의 허울,

  이끼 낀
  뒷켠 바가지 우물에
  댓잎 하나 흔들리지 않고
  떠, 있었다.

 

  고광헌. 1954년 전북 정읍 출생. 경희대 체육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8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시인"지에 시 '흔들리는 창 밖의
연가'와 '신중산층 교실에서' 등으로 문단에 나온 그가 다루고 있는 시적
주제는 분단이 가져오는 삶의 아픔과 고통에 있으며, 특히 '신중산층
교실에서'와 '안개 마을의 자장가' 연작은 우리의 교육과 스포츠 현실을
형상화시킨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5월 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신중산층 교실에서"가 있다.

       신중산층 교실에서.1
       -- 단 몇 개의 귀


  아카시아 향기가 결코 토종꿀을 낙태하지 못하는 길들여진 못난 황무지의
일벌들을 유혹하던 오월 나는 나의 무조건반사는 숨겨 놓고 그녀들에게
묻는다

  왜 아카시아 향내에 피냄새가 섞여 있을까?

  그녀들은 한결같이 꽃대궁 깊숙이 더듬이를 박으며 나의 질문을
정신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한결같이 나는 그때서야 나의 비글함을
고백하며 그녀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대, 아동기의 놀이, 팝송과
텔리비전 그리고 학교 수업시간의 설득력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들이 한결같이 이 나라의 가장 큰 희망과 절망, 가장
큰 사랑과 증오, 가장 작은 민주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서양사의 구린 곱똥
한 토막씩을 책받침 가운데 끼워 갖고 다니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보강시간에 내 말들의 어처구니 없음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나의 말들은 마른 수수깡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면서 사방의 콘크리트 벽에
혈관이 터져 그녀들의 실내화 밑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나는 잠시
그녀들 앞에 서 있어야 되는 당위성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시간은 가끔 바늘 끝 위를 밟으며 단 몇 개의 귀속에
재빨리 낱말들을 챙겨 넣고 있었따 이러한 시간의 재빠른 동작을 맹종의
태극기 맞은 편 벽에 화석이 되어 붙어 있는 한복 입은 십육 세 소녀가
동지처럼 훔쳐보고 있었다

  한편 실내화 밑창을 물들이던 내 말들은 번화가 쇼윈도우의 명도 높은
채색혁명이 되어 그녀들의 책받침 속 우상인 시스터 보이의 얼굴에
밑화장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책받침을 빼앗아 둥그렇게 휘어
보인다

  오! 놀랠만한 금속성 휴머니즘

  나는 책받침의 유연성을 통해서 그놈이 제 조국에서 노래부를 때 수 명이
깔려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는 토픽 뉴우스와 신식민지 처녀들이 먹물
속으로 익사하는 것을 감동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너 그동안 너희 학생들에게 얼마나
거짓말 시켰냐?" 나는 당당하게 원색이 된 내 말들의 설 땅과, 설 땅의
확보와 교과서와 책받침 그리고 팝송이 만들어 내는 함수관계를 변명처럼
풀어보였다 그것은 만세 부르다 죽은 처녀가 훔쳐 본 몇 개의 귀의 부활

  그후 나는 그 몇 개의 귀와 오월 날벼락에 떨어진 아카시아 꽃잎을 주워
모아 질긴 항아리에 막소주를 풀어 밀주를 담았다 그 밀주는 지금
발효중이다

       낙골 산동네 101번
             종점


  더러는 일당을 손에 쥐고
  더러는 하루종일 일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빈 손 가득
  솟구치는 노여움 퍼쥐고 돌아오는 밤

  더 이상 뿌리 내릴 곳 없어
  막막한 그리움
  낮게 엉겨붙은 산비탈 무허가 모퉁이
  무성하게 널려 자란 잡초밭 위에
  어쩌다 궂은 비라도 쏟아지는 밤이면

  눈물겨운 사람들
  튕겨오르는 흙탕물에
  아랫도리를 적시며 비포장도로 양 옆
  값싼 우산의 행렬로
  값비싼 마음들을 기다리는
  끈끈한 사랑의 도열을 보았는가

  팍팍한 가슴
  시퍼렇게 타오르는 칸델라 불빛 밑에
  가난처럼 설익은 과일 몇 알,
  단칸방 여섯 식구의 누런 웃음을 담아
  못난 마누라
  마른 버짐 가득한 꿈 꾸는 눈동자를 찾는
  못난 시대 풋풋한 희망을 보았는까

  젖어가는 세상
  늦은 저녁 빗줄기 사이로
  저 아래 평지의 불빛 몸살나게 반짝이고,
  그렇다
  바라는 건 다만
  하루하루의 일자리나 더 이상 쫓겨갈 수 없는
  마지막 보금자리가 아니라
  그대의 질긴 노동의 불빛이
  몸살나 뒤척이는 땅
  정직하게 갈아 뉘는 것이다

 

  고운기. 1961년 전남 벌교 출생. 한양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재학중
"동아일보" 신춘문예(1983)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남도 특유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그의 시는 역사와 현실이 주는 진실을 포착, 형상화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시힘" 동인. 학부졸업기념으로 낸 시집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이 있으며 현재 연세대학원 국문학과에 재학하고 있다.

       동대문


  이 문이 열리면 조선의 동쪽이 열리고
  이 문이 닫히면
  조선의 동쪽 사람들은 이문동이나
  신설동에 와 머물러야 했따
  조선의 동쪽은
  동대문의 문짝만큼만 했을까
  소나 나귀도
  사람이나 화물도
  동대문 하나면 족했다, 조선의 동쪽은
  이 문이 열리면 열리고
  상감께 올리는 공물도
  서울 시민 먹일 옥수수며 감자도
  족히 들어왔다
  어둠을 맞고 이 문이 닫히면
  소도 나귀도 잠들고
  들어올 사람도 짐도 문밖에서 잠들었다
  잠든 마을은 평화로왔지만 이제
  종로는 힘차게 달려오다 여기서 멎고
  건널목도 지하로 숨어
  사람들은 속삭이며 지하도 어디로 사라지는데
  이 문은 닫혀 있다
  버스도 사람도 문을 두고 돌아
  돌아서 어디로 가고 있다
  닫힌 것은 동대문만이 아니며
  돌아가는 것은 자동차 뿐만이 아닌 것 같이.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 도성 밖 대장장이의 노래


  진달래 꽃 피면 돌아오겠네
  벚꽃 만발하면 만나보겠네
  그리운 이름들 어디 가도
  불러서 모이면 쑥 캐러 가자
  봄비라도 내리면 알맞게 맞고서
  사랑하던 사람 등에 업고도 가리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그대 떠날 때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
  서울로 가던 밤 피흘리며
  기도해 준 일
  가슴마다 허전함으로 슬픔 그득하여
  개나리꽃 터쳤어도 눈물만 뿌릴 뿐

  그대의 아비도 나만큼이나 천한 사람
  일생을 목수질하며 살아왔을 땐
  아들이 장차 자라 로마의 군인이나 제사장이나
  세리가 되어 돈을 벌고
  좋은 집에 살며 세상 일은 잊으라고
  그렇게 바란 것은 아니었을 테지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나귀 새끼 한나리에 몸을 싣고
  그대는 가서 서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그리운 고향 봄이 피어 오른 산천 뒤로 두고
  진달래꽃 같은 붉은 피 흘린다니

  나는 아직 도성 밖 대장간에 앉아
  불에 담근 쇠를 꺼내 망치질 하면서도
  이 못이 장차 그대의 손을 뚫고 발을 뚫고
  이 만드는 창으로 그대의 가슴을 찌르게 될지
  알 수 없다네
  알 수 없다네.


  고형렬. 1954년 전남 해남 출생. 1982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시적 대상에 대해 자유로운 존재론적 접근과 맑고 튼튼한 남성적
서정으로 가난한 삶의 근저를 따뜻하게 노래하는 시인이란 평을 듣고 있다.
특히 설화조의 변설은 시의 영역을 넓히는 것으로 주목받으며 '갈뫼'와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대청봉 수박밭"이 있다.

       쓰레기장불


  쓰레기장에 빨간 불을 놓았다.
  이것은 옛날 몽둥발이의 모닥불이 아니고
  집채로 들고 갈 태풍이 아니다.
  타는 그 옛새끼오리, 헌신짝, 짚검불... 개터럭이
  아니라, 거진 50년 가까운 세월에
  맥주 캔, 나일론, 시집, 말, 지갑, 지루하다. 병, 소, 지루하다
  무슨 여름 낮이 15시간이나 되나
  구름장이 떨어져 이 쓰레기장불.
  뭐가 타서 다시 기름이 된다는 무슨 불사조같은 헛소리다. 손찌검을
하거라
  타는 건지 죽는 건지 알 길이 없는
  이 쓰레기장불. 어떤 것들의 혼귀가 묻혔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활화산이나
  50년 갖다 버린 구역질 나는 악취
  밀크, 초컬릿, 화장품, 프라스틱, 병균,
  흙도 쇠도 가죽도 유리도 똥도 시체도 음식물 찌꺼기도.
  갑자기 어깨를 물지게를 벗듯 벗고 싶다.
  여기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쓰레기장, 한 번 불꽃을 보지 못했던 쓰레기장 연기를 바라본다
  샛강 여닐곱 둑을 건너는 그곳에
  오리무중 속에 보인다
  석유 한 초롱 갖다 붓고 올까, 창자 속에 들어가 불이 되는 소주
  쓸어가자. 쓰레기장 그리로 그리로
  없을 때까지. 대비와 잔털 잘린 몽당 비와 갈퀴와, 아니면 불도우저로
쓸어
  태워서 묻자. 청산하고 싶어, 나도
  사랑, 노래, 비, 언어, 양말, 시멘트, 피, 눈물, 칼, 술, 책, 집...
집, 집
  내 몸 속의 쓰레기장 불
  쓰레기장 불


       대청봉 수박밭


  청봉이 어디인지. 눈이 펑펑 소청봉에 내리던 이 이름밤
  나와 함께 가야 돼. 상상을 알고 있지
  저 큰 산이 대청봉이지.
  큼직큼직한 꿈 같은 수박
  알지. 와선대 비선대 귀면암 뒷 길로
  다시 양폭으로, 음산한 천불동
  삭정이 뼈처럼 죽어 있던 골짜기 지나서
  그렇게 가면 되는 거야. 너는 길을 알고 있어
  아무도 찾지 못해서 지난 주엔 모두 바다로 떠났다고 하더군
  애인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나 나나  행복했을 것이다.

  너는 놀라지 않겠지. 누가 저 산꼭대기에
  수박을 가꾸겠어
  그러나 선들거리는 청봉 수박밭에 가면 얼마나 큰 만족 같은 것으로
겁 속에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와서
  사는 거야. 별 거겠니 겨울 최고봉의 추의를 느끼면서
  걸어. 서릿발 친, 대청봉 수박밭을 걸어.
  그 붉은 속살을 마실 수 있겠지.

  어느 쑥돌 널린 들판에 앉듯, 대청봉
  바다 옆에서 모자를 벗으면 가죽구두를 너도 벗어 놓고 시원해서
  원시 말아야. 그 싱싱한 생명 말이야
  상상력을 건든다.
  하늘에서 들리는 파도소리로
  삼경까진 오겠지 기다리지 못하면 시인과 동고할 수 없겠고
  그게 백두산과 닮았다고 하면 그만큼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맨발로 눈이 새하얗게 덮인, 아니지, 달빛에 비친 흰 이슬을
밟으며
  나는 청봉으로 떠난다.
  독재로 너의 손목을 잡고
  나는 굴복시켜야 돼 너는 사랑할 줄 아니.
  한 가마 옥수수를 찌는 여인의 밤
  그 밤만 가지고, 너와 나 우리 모두 노래할 수 있는가
  가구를 두고 청봉 수박 마시러 나와 간다, 세상은 다 내 책임이었냐는
듯이 가기로 했다.

  이 (대청봉 수박밭) 속에 생각이 있다고 털어놓건
  비유인지 노래인지, 그것이 표명인지
  거짓같지 않은 뜬소문 때문에
  나는 언제고 올테니까.
  대청봉에서 너와 가슴을 내놓고
  여행을 왔노라며, 기막힌 수박인데 하고 뭐라고 할까.

  설악산 대청봉 수박밭!
  생각이 떠오르지 않다니
  그것이 공산 아니면 얼음처럼 녹고 있는 별빛에 섞여서 바람이 불고,
수박 같은 달이다. 아니다
  수박만한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면
  상상이다 아니다
  할 수 있을까.

 

  곽문환. 1935년 전북 익산 출생. 1985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순수 서정의 세계와 함께 소시민적 의식,
자의식에 대한 의지를 내면화시켜 시화하고 있다. 1983년도에 시집
"통곡하는 밤바다"를 간행하였다.

       촛불


  새도록
  마주 앉아 사루는
  정념의 끄트머리.

  가슴 가득 날리는
  불티의 색깔을
  나와 그는
  여태껏 알지 못한다.

  어둠 속에
  눈 감으면
  창백한 얼굴로
  지켜보는 이 있어
  수줍게 외면하면
  멀리 달아나는 그림자

  그리운이여.
  네 하이얀 숨결 번지는
  까마득한 옛노래를
  이 밤은
  굳이 듣고만 싶다.


       소리


  강물처럼
  파문이 여울지는
  숨결
  가슴 풀어 잠재우고

  불에 그을린
  몸짓으로
  먼 지평을 달리는
  이단자...

  어디엔들
  머물 곳 없으랴만
  쫓고
  쫓기우는
  시류의 둘레만
  맴돌다
  끝내 되돌아오는
  애절한 여운.

  단 한번
  항변의 그 서슬찬
  목소리로
  가슴마다 녹슬은
  실어증을 지워줘야겠다.

 

  곽재구.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졸업.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하였따.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름없이 살아가는 이웃들의 사랑과 슬픔을 응축시킨 시를 쓰고
있다. 시집에 "사평역에서"와 "전장포 아리랑"이 있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20년 후의 가을


  내 어릴 적 산골 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고 울으셨다
  가을 산꽃이 피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선생님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출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눈을 뜨고 모른다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 후비는 날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려 보는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내 손으로 그린 내 땅 안에 허름하게 시든
  단풍잎 하나 떨구는 것을 거부하면서
  끝내는 잊혀진 옛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나
  동강 난 눈물방울들이 산과 바다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뒤덮었다.

 

  구중회. 1946년 전북 완주 출생. 1980년 "심상"지로 문단에 데뷔. 시를
통해 자기 자신과 당대 사회의 자리를 찾고 확인하고자 하는 그는 현재
공주 사범대에 근무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은하수 건너가며 스치는
여름밤"을 갖고 있다.

       물방울 튀기는 노래


  물방울 튀기는
  물가에 섰다.

  벼랑이 보였다가
  바닥이 드러났다가
  수런거리는 물.

  지금 물은
  매우 위험한 어린애다.

  권투를 하듯이
  물방울 튀기는 물가에
  사람들이 지나갔다.


       장마기


  수증기와 편승하는
  물방울들은
  구름만 되면
  이미 소나기로 쏟아진다.
  자갈밭에 자라는 들풀
  황톳물로 뿌리 채 뽑아
  싣고 떠나간다.
  물방울들은 바다에 가도
  왜 바다가 못 되는가.
  또 수증기로 피어오른다.

 

  권오욱. 1941년 충북 음성 출생. 명지대 국문학과와 서울대 보건대학원
졸업. 1985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는 현재 '동강시'와
'시소리'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겨울 안개"가 있다.

       은비


  작은 섬 하나 보이지 않고
  떠도는 갈매기도 여기는 없는

  바다와 하늘의
  동그란 울안

  시원하여 슬퍼지는
  짐승의 눈 속처럼

  순하게 밀리는
  물살 위로

  별빛보다 고운
  은비가 온다

  빛의 소낙비가
  온다

  깨어지는 빛방울의
  아득한 순도

  부시어 파닥이다
  뒤채는 심장에

  반짝이며 꽂혀오는
  빛바늘

  아픔조차 눈부시어
  내뽑는 목에

  배암처럼 감기는
  빛오라기


       겨울 안개


  얼어붙은 겨울강에
  움직이는 적막을 보아라

  떠오르는 태양빛을 차단한
  미명의 늪지

  얼음장 밑으로
  살아서 흘러가는 물소리 들리고

  상실한 살과 뼈의 기억으로
  강폭을 더듬어 일렁이는

  얼어붙을 한 방울 피도 없이
  얇은 바람에 날리어 흩어지는

  쓸어안고 엎디어 부벼보아도
  얼어붙은 겨울강을 녹이지 못하는

  영롱한 순간의 반짝임도
  이제는 싫은

  잔존의 자욱한
  입자들

  얼어붙은 겨울강에
  움직이는 적막을 보아라

 

  권태현. 1958년 대구 출생. 1983년 동인시집 "국시"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85년 동인시집 "잠시 나가본 지상"을 펴낸 그는
어려운 구조로 짜여진 현실로부터 이탈, 자연인을 꿈꾸는 내적 갈등을
형상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월간 "여학생"에 근무하고
있다.

       공백기


  아내가 죽었다. 아내가 죽던 날
  나는 처음으로 햇빛을 보았다.
  금빛 지느러미를 흔들며 나를 흔드는
  아내의 유물을 깊이 껴안았다.

  아내가 죽었다. 아내를 묻고 돌아올 때
  산은 부쩍 키가 자라 있었고
  새 한 마리가 강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물살이 두 팔 벌리는 강의 하단에 이르러서야
  나는 알았다. 산이 제 빛깔을 떼어내
  강물에 띄워보내고 혼자 황폐해지는 것을.
  아내가 늘 강가에서 살고 싶어하던 이유를.

  그러나 아내는 죽어서 산이 되었다.
  아무도 찾아와 잡아주지 않는 손을
  온몸으로 흔드는 작은 풀잎이 되었다.
  내가 바다로 합류하는 강의 하구를 딛고
  등을 돌리자 비로소 산은 산의 소매로
  내 발길에 매달려 쿨쩍쿨쩍 울기 시작했다.

  아내가 죽었으므로 나는
  더이상 집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집을 허문 빈 터로 돌아와
  젖은 몸을 벗어도 벗어도
  더욱 안쪽으로 젖어드는 바람을 만났다.

  아내가 죽었다. 아내의 등을 밀어낸
  눈초리들만 시퍼렇게 살아 있는 길을
  나는 아내와 함께인 듯이 걸었다.
  열려 있는 문들 모두 지나고
  돌아볼 것이 너무 많은 숲가에 이르러
  내 몸의 나뭇잎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미술시간


  새가 날지 않았으므로 하늘은
  비어 있었다. 비어서
  스스로의 깊이로 푸르렀다.
  새의 깃털 같은 구름이 잠시
  떠다니고 그 사이로 새의
  부리 같은 햇살이 새어나왔다.

  처음 백지 위에 맨손을 펼쳤을 때
  조심스럽지 않은 땅이
  없었다. 모서리 한 곳도
  다치지 않으려고 화판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실핏줄 모두 벌려

  산만한 높이의 산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아 허전하게 엎드리고
  구부린 등이 알맞게 곡선을 그었다.
  드믄드문 제 키를 자랑하는 나무 몇 그루
  뿌리내리는 동안 산의 허리가
  튼튼해지고 일어서는 풀빛 울음에
  풍경 전체가 흔들렸다. 계곡을 적시며
  흐르는 물줄기는 약속대로
  하류로 흘러 산의 연장선을 그었다.

  부러진 크레용을 던지자
  놀라 흩어지는 산짐승들
  좇으며 산 깊숙이
  들어서면 비로소 한 마리씩
  바위, 혹은 동굴 안쪽으로 숨어들고

  헐벗은 꿈을 숨기려면 무슨 색깔이
  제일 안전할까. 온 산을 뒤져야
  오두막 한 채 보이지 않는데
  아무리 색칠해도 채워지지 않는
  빈 무덤 위로 노을이 지고 그 너머
  돌아올 수 없는 거리에서 새울음
  몇 마디 산등성이를 넘어왔다.

 

  기형도.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문단에 데뷔했다. 재학 당시 '윤동주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그는 가시적 혹은 비가시적 사상의 법칙성을
추구하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현재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어느 푸른 저녁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글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없이 고개를 갸우뚱해 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를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상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따.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동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는,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성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김경미. 1959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83년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서정성을 잃지 않으면서 여하한 삶의, 문학의 기성 근거나 규범 강령
혹은 구호보다 넓으면서도 최소한의 진실도 외면하지 않는, 인간의
살아가는 본바탕이 진하게 담긴 시를 쓰는 젊은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현재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다.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ㅎ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날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런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읍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읍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임진강이 말하기를


  보름달빛이나 덮으며 초승달빛이나 고르며
  바늘귀에 스산한 풍문만 꿰차니 하 좋더냐
  내라면 한달음에 산맥 넘고 평야 질러 갈 길
  두발 짐승 두손 짐승으로 태어났거든
  무거운 그리자 벗어 땅 속에 묻고
  머리끝 하늘 닿기 전 쿵쿵 땅 꺼지기 전만큼만
  가랭이 돋우어 뛰어라
  오가는 철새들 깃털이라도 빌려 입어라
  친형제들끼리 눈흘김 미친 행각 그리 즐겁더냐
  말로 말할 수 없거든 울부짖음으로 말하며 오라
  이복 유복 서자 사고무친 아닌 누가 있어
  끄잡거든 잡힌 옷 벗고 가로서거든 메다꽂아 오너라
  발톱 검은 때 누가 흉보랴
  시궁창 진흙에 신발 들러붙거든 던져버려라
  오물이란 똥오물 끼얹겨도 그대로 오라
  숨결만 묻힌 바람이 전할 수 없어
  바람 탄 풀씨 몇 점이 피울 수 없어
  견우별 직녀별 오작교별로 이을 수 없어
  뼈를 가져와 살을 묻혀와
  따뜻한 혈맥 심긴 흙발로 몸소 와
  어린 실개천들 갈 길 몰라 목타하거든
  오종종 앞길 물길도 파주며 데불고
  집짐승들아 여기도 생솔 타는 구들방 있으니
  들짐승들아 이녘에도 손발 넓은 논밭 있으니
  가슴짐승들아 이 언덕들도 헤어짐을 시시철철 해후로 바꾸며 살았노니
  친형제 살아낸 또 하루 덧없음을 생각해보라

  이 깊은 폐토를
  어이 나 혼자 건너라고

 

  김경옥. 1956년 경북 경주 출생. 경북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0년
"월간문학"지로 등단하여 '미래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시의
서정성 회복에 역점을 두고 작품 활동에 임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밀.1


  붉은 빛깔 잊지 않고 피우기 위해 동백이 내 비밀 깊숙이 뿌리를 감아
왔던 그 겨울. 그대에게 떠나 보낼 수 없는 말들은 내 따뜻한 핏줄 속에
몇 송이씩 벙글어 나는 홀로 동백으로 피고 지고 그러면서 외로왔다.
한밤에 눈뜨면 바다는 우리들 운명을 만지다가 돌아서고 낮동안 반짝였던
우리 사이 마음의 길은 어둠에 헐려, 절망과 위안을 밤바람 속에서 짚곤
했다.
  아아, 우리가 밀물처럼 설레이며 처음으로 서로의 기슭에 닿을 수
있기를, 그런 후에 만조가 된 바다처럼 서로 가득 찰 수 있기를. 위태롭게
꿈꾸는 내 비밀은 동백의 뿌리를 물들이고 줄기를 타고 올라 어느 날
그대는 뜰에서 부끄럽게 서성거리는 내 고백 알게 되리라.


       햇빛부신 날은

  나는 한 식물이 화분에서 자란다는 것이 슬펐다.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은 햇빛과 꿈과 자유까지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므로 화분에
핀 적동백 한 그루의 그 보호받은 빛깔은 나를 슬프게 했다.

  낙동강 어귀의 나무들이 때때로 거센 폭풍우와 홍수에 떠밀리면서도 그
어두운 대지 아래로 조금씩 불 밝히며 들어가 낙동강의 작은 물줄기를
찾아내는 기쁨을 4월의 저 봄비는 안다 그 기쁨을 흔드는 실바람은 안다.

  언제부턴가 스스로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나를 놓아 주고 싶었다.
흘러가며 어딘가서 대지를 사랑하므로 고독한 뿌리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우리 모두의 화분 속에 갇힌 사물도 그대도 떠나 보내주고 싶었다.
오늘처럼 햇빛부신 날은 세계가 화분 밖에서 스스로 꿈꾸었으면 좋으리라.

 

  김기문. 1945년 경북 경주 출생. "심상" "시와 의식"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전통적인 흐름에 서구적 경향의 시를 접목시켜 현대인의 아픔을
절실하게 노래하고 있다. 현재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다.

       발견


  석굴암 교무 일법 스님과 토굴을 나와 나란히 걸을 때, 신유년
소슬바람에 그해 무성ㅎ던 나뭇잎 바람 따라 굴러오네.
  떨어지기 위하여 맺혀 있음이어 우리들 발길에 밟히기까지 수백 생의
인연의 덧없는 바스라짐, 대저 산을 넘고 시간의 장막 저편 나 또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낙엽이로다.
  석굴암 교무 일법 스님과 이 나라 온 승려가 다 각기 한 조각 크고 작은
이파리임을, 각자의 업에 맞는 비탈을 택해 반짝이며 떨고 있는 일순의
매달림.

  마음이 머물다 간 빈 가지마다 만유는 인연이요 바람이요 굴러옴이요
또한 매달림이요 기다림임을.


       토함산 그늘
       -- 오줌싸개


  경주시 진현동 중리마을은
  산그림자 내려와
  아침이 늦다.

  소금은 무슨 소금
  주걱으로 뺨만 맞고
  울며 오는 길

  타박타박 키를 쓰고
  바라보는 토담 밑에
  감자꽃 나팔꽃 까닭없이 서럽더니

  손가리고 웃고 있는
  뒷집 새댁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리움인 걸

 

  김기홍. 1957년 전남 승주 출생. 생활에서 얻어진 체험적인 아픔과
그것을 버티게 하는 힘을 진솔하게 표현, 감동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실천문학"의 "노동시선집" "민중시선집" "지평"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일터에서


  우리는 귀 막히고 말 막힌 사람
  두 손 열 손가락으로
  뜨거운 그리움을 말하는 사람
  철근때 묻은 옷을 걸치고
  하늘을 바라보며 파랗게
  가슴을 적시는 사람

  섣달 눈보라 마음마다 몰아친다
  잠실종합운동장 3층 난간
  피티 * 를 꽂아 올리며 하늘로 간다 (* 피티:철제 조립식 아시바)
  무엇이 우리들을 열망하게 하는지?
  하늘로 올라갈수록 바람은 거세다
  얼마나 올라가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들의 말도 노동의 근사치도
  내려다보는 땅엔
  개미같은 사람들이 각목을 메고
  합판을 메고
  저곳에 우리들의 사랑도 함께 있다
  하늘에 발을 딛고 땅을 우러러 볼 수는 없을까...

  내일 우리 죽어서도 귀 막힌 사람
  살아 있는 오늘은 더욱 말 막힌 사람
  이 높은 곳에 푸른 별을 매달며
  몇은 저 낮은 땅
  기다림도 모르는 아내를 사랑하고
  철부지 자식을 사랑한다
  목숨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어제 다친 조장이 피우는 모닥불에
  손을 던지고 발을 던져도 뜨겁지 않다
  우리들은 더욱더 뜨거운 불길이다


       겨울인사


  만나지 말세.
  만나지 말세.
  부러진 손 절뚝이는 다리로는
  다시는 우리 만나지 말세.

  작업복을 챙겨 메고 오는 밤
  강 상류의 불빛은 모두 꺼지고
  눈발에 기억을 풀며
  흘러서 우리는 어디로 가랴

  미칠 수만 있다면
  생명 부지하고 미칠 수만 있다면
  미쳐서 날뛴 짐승 모조리 때려잡고
  역류하는 하수구에 누워
  무너져 간 세월을 풀피리에 흘려놓고
  과일 껍질 북데기도 비단보에 싸갈걸
  어허이 어허이 어야디야 넘자 어이하나

  추워. 겨울은 우리에게 너무 추워
  질척이는 발자욱이 얼어붙고
  헤진 옷 땀방울로
  넘어사제. 닭뼉다귀 끓여주는 한바 심사
  삼국지 묘수들을 십장 소장 넘어 뛸 때
  바람이 불어도 날릴 낙엽 없고
  구르는 몸뚱이 새파란 미나리 몸뚱이

  -- 맑은 물 콩나물보다는
  흙탕물 연꽃이 될래요--

  가소. 가소. 잘도 가소.
  정씨 유씨 오지 마소.
  9천 원 만 원 일당에
  가슴 맑은 마누라 청상과부 만들지마소.
  꽝꽝 언 공사판 길
  깡깡 마른 몸뚱이 
  철근 공구리 인장통에
  발 담그면 발 깨지고 손 담그면 손 깨지고
  코 대면 코 깨지네.

  삼월이면 물 오르겄제
  사월이면 꽃 피겄제
  작업복 담살이복 거센 물에 휙 던지고
  십만 원 공장에 가더라도
  내년엔 만나지 말세.

 

  김대구. 1947년 경북 의성 출생. 한양대 신문학과 졸업. "시문학"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의 행적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재조명하고 있는 그는 현재 월간 "크리스찬 라이프"사의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성서 요한복음 1장 1절)


       잠적


  이 세상에 (말씀)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허약한 몸을 가누며 저 황량한 바다에 주저앉아서
  철썩 철썩 가슴을 치고 있나요

  산촌 어느 가난한 농부의 뜨락에서
  졸고 있는 가을 햇살인가요

  아니면 도시의 음침한 지하밀실에 갇혀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마시고 있나요

  우울증에 걸린 도시
  움츠린 자세로 빌딩의 그늘을 할일 없이
  배회하는 겨울 바람인가요

  폭우가 쏟아진 오후
  오색영롱한 무지개를 비추시던 하늘
  우렁찬 뇌성과 폭풍우로 말할 수 없는
  울분을 토하시며 이 여름을 수장하시고
  우리들의 (말씀)은 비참한 이 도시 속에서 잠적

  김동원. 1937년 충남 예산 출생. 공주사범대 화학과를 졸업. 1980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인간의 삶꽈 그 방식을 파헤치고 죽음에
대한 확인을 통하여 모든 유한한 것들의 생명에 대한 외경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시집으로 "유적지" "바람의 끝에서"가 있으며 현재 충북대
화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너의 겨울 뒤에서


  너의 빨간 목도리 뒤에 서 있는
  가늘고 하얀 겨울,
  겨울 따라 찾아가면
  하얀 눈꽃은 지고,
  붉은 입술에 모여 있는
  너의 옥같은 소리를 만난다.

  너의 분홍빛 가슴에 감추어진
  눈물같은 사랑,
  사랑 따라 찾아가면
  하얀 강물은 눕고,
  자주빛 사탕처럼 무너지는
  너의 하얀 이빨을 만난다.

  하얀 지체를 뿌리면서,
  눈을 감은 채
  금빛으로 물드는 언덕이여.
  하늘과 땅을 건너
  맨발로 달려오는 슬픈 봄이여.
  너, 이조의 여인처럼 울고 있는
  수직의 분화구여.

  나는 지금,
  하얀 눈꽃이 되어
  너의 따뜻한 겨울 속으로
  죽음처럼 떨어져 간다.


       연두색 하느님


  나의 연두색 하느님,
  탄생의 조건을 땅에 내려놓지 마시고
  죽음의 조건을 하늘에 올려놓지 마십시오.

  제한없는 조건을 던져
  낯선 거리를 방황하게 하지 마시고,
  이 세상 눈물이
  칠월의 홍수같이 넘치는 것을
  손으로 감추지 마십시오.

  천근의 돌을
  당신의 언덕으로 나르게 하지 마시고,
  만길도 넘는 바닷물을 기르게 하지 마십시오
  또한 무릎을 꿇고는
  세상을 살게 하지 마십시오

  맨발로
  꽃피는 언덕을 밟게 하여 주시고,
  속살을 다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조건없는 물의 순결을
  나애개 주십시오.

  사랑의 조건
  혹은 죄의 조건을 만들지 마시고,
  꽃 혹은 열매의 조건을
  만들지 마십시오.
  조건으로 다스리는 천한 땅,
  황제의 얼굴을 하지 마십시오.

  당신과 너무 친하지 못하도록
  나를 멀리 떨어져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햐여
  당신과 너무 친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이 세상 모든 죄악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늘의 조건 혹은 땅의 조건을
  만들지 마십시오.

  타인을 죄인처럼 갈라놓는
  눈먼 개인이 되지 마십시오.
  어느 개인의 하늘이 되지 마십시오.
  나의 연두색 하느님.

 

  김동호.본명 김익배. 1934년 충북 괴산 출생. 성균관 대학교 영문과
졸업. 1978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바다" "꽃" "피뢰침
숲속에서" 등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죽은 바둑이


  그것은 네가 아니다.

  눈깜짝할 사이
  번개를 타고 간
  너는
  정말 네가 아니다.

  교통
  지옥
  막바지 낭떠러지를

  독기를 곤두세운
  쇠바퀴가
  너의 급소를 후려치고
  달아났을 때

  죽어서도 백리를 달려온 사랑이여.
  피 한 방울 겉으로 내뱉지 않고
  속으로 속으로만 토하며 간
  순결이여.
  벼락치는 문명을
  조용히 조용히 땅 속에 묻고 간
  혼령이여

  아버지
  개도 심장마비가 있나요?
  막내가 울면서 물었을 때
  나는 울면서 대답했다.
  암 있고말고.
  나무도 있는데
  돌도 있는데.

  왜 나는 지금
  죽음 앞에 맑게 서 계시는
  은사 C선생을 생각하는 것일까?
  왜 나는 지금
  십 년 전에 간 고우
  K형의 그 마지막 조용한 눈빛을
  생각하는 것일까?
  교통이 두절된 밤거리를 활보하는
  도적고양이가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고 죽은
  개를 무한히 힐난하는 오후.

  먼 하늘가
  어데로부턴가
  별빛이 날아와
  바닷속의 말간 눈빛과
  너의 빛나는 마지막 침묵을 엮어
  프리즘을 만든다.
  쏟아지는 프리즘 사이로
  사라지는 그림자들
  시간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바둑아
  죽어서도 백리를 달려온
  바둑아

  나는 오늘 너에게서
  영원히 사는 법을 배운다.


       복숭아


  복숭아야 복숭아야
  가슴이 고와서
  얼굴이 빨간 소녀야
  비밀이 고와서
  입술이 빨간 소녀야.
  네 꼭 담은 꼭지
  젖뺨 하늘에
  내 가슴이 이렇게도 뛰는 것은
  내 작은 가슴에 박힌 
  너의 화살 때문이 아니다.

  문둥이도 너를 보고
  백옥이 되었다는

  백치도 너를 보고
  하늘이 되었다는

  옛날 옛날
  아주 옛날
  이 세상 최초의 이야기 때문이다.

 

  김명이.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시를
눈앞에 전개되는 언어의 현실이기 이전 그 궤적들을 언어라는 집게로 끄집어
내는 과정으로 인식, 시작에 임하고 있다.

       탈춤


  1
  나의
  어머니로부터
  정월 열나흗날의 생일을 물려받던 날
  나는 풍만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여러개의
  탈을 준비했다

  시간의 입자들이
  젖은 목관악기의 가지런한 신음 속으로
  침몰하는 동안 나는 하나이기를 거부하는
  서너개의 몸짓을 만난다

  내가 지닌 여러개의 탈과
  내가 만난 서너개의 몸짓을
  더한다뺀다곱한다나눈다
  내 방 모서리에서 성큼성큼 자라나는 순열

  넘치는 하나와
  모자라는 하나를 정리하기 위해 나는
  가끔씩 간이역 주변이나 점등 안 된 가로등 아래서
  우울한 손가락들을 펼쳐든다

  2
  아직도 나의 침실에서 서성대는 숫짜들


       간이역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십세기 메카니즘의 멀미를 함께 앓으며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잔의 인스턴트 커피에도 취하여 비틀거리며
  이 화려한 질주의 시대에 폐허를 꽃으로 달고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메시아의 부활을 꿈꾸며
  포기하며, 게으른 시간의 양떼를 몰아 우리는
  회부의 땅 가나안으로 어쩌면 가고 있는 것일까

  가파른 사유의 안데스, 갠지즈를 모두 지나
  피 묻은 한점 사리의 날반, 그 날개 돋치는
  피안까지 우리는 어쩌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마다의 바이블을 옆구리에 낀 채
  생사의 현기증을 아프도록 베어 물며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김백겸. 1953년 충남 대전 출생.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데뷔한 그는 '시힘'과 '신인문학' 등에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물의 정신을 드러내 보이는 이미즘을 추구하는 한편 일상적인
삶의 문제까지 폭넓게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현재
'한국에너지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구리


  어느 산 어느 바위 틈에서 깨지 못할 꿈 깨다가
  곡괭이에 뼈혀 나왔는지
  용광로에 뼈와 살 녹여내고 마음만 남아
  휘저으면 티끌 하나 걸리지 않는 마음만 남아
  낙랑 공주 얼굴 비친 동경이 되었다가

  자명고 찢은 사랑도 무덤에 잠든 오늘은
  문고리가 되어 바람에 심장을 내맡겼구나
  햇빛에 달그락달그락거리는 고요 속
  검은 녹 사이사이로 빛나는 시간은
  명희, 고사리같은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는 조카의 눈망울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살아나는구나

  그것은 장인이 두드려 만든 기다림이었을까
  담금질에서 꺼내면 가난도 금이 되고
  한평생 칼날 한번 세우고자 벼르던
  상민의 집념이었을까
  임금을 베어 자신이 임금이 되는 대신
  형장 망나니 칼 끝에 목을 얹은 홍경래의 슬픔이었을까

  바람부는 오늘은 전신주 위에서 울고 있구나
  플라스틱 피복관 속에 갇혀 불과 물이 만든 힘 도시에 보내고
  역사에 다이알 돌려 수신인 찾는
  내 호출부호도 실어 보내면서
  수은등에 스윗치 누르면 파랗게 질린 얼굴 어둠 속에 켜는
  마음만 남아 울고 있구나


       비를 소재로 한 서정별곡


  1
  바위를 베고 누워
  나무 뿌리와 금광석에 닿는 꿈꾸는
  물줄기의 잠이다.
  목마른 풀잎 끝 적시는 시간의 어둠이다.
  창살에 자욱한 안개로 피어오르는
  비는
  애기씨꽃나무 잎새를 두드리는 울음이다.

  2
  허리에 닿는 신열 몇개를 제련하여 얻어낸다.
  산너머 바다에 몰려 있는 구름떼
  흐르려 하는 힘의 방향을
  숲속 어둠의 눈썹 떨리게 하며
  멥새 날갯소리 죽여 접게 하는 이상한 느낌을
  지상에서 하늘까지 안테나를 세우면
  걸린다. 벼랑 끝에 선 저기압의 음모
  선을 건드리는 빗방울
  손톱 끝까지 파고 들어 신경을 태운다.

  3
  사랑, 흐르지 않아도 어제나 흐르는 물줄기.
  열쇠를 가지고 숲의 문 열면
  심장에 흘러드는 비가 보이고
  물오른 애기씨꽃나무
  불씨로 살아오르는 숨껼이 보인다
  꿈, 비가 내리지 않아도 언제나
  바닥까지 생을 적시게 하는 빗줄기.

 

  김사인.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1981년 '시와
경제'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그는 힘 없고 버려진
것들의 애환이나 분노를 사실적으로 표현, 시적 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실천문학사'에 근무하고 있다.

       한강을 보며


  가거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 때
  그러나 눈 있는 이들 숨죽이며 지켜보는 이 때
  떠나거라 묵묵히
  움직이지 않는 듯
  뜨겁게 땅에 몸을 붙이고 굳굳하게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한번 가면
  죽은 넋 바람에 실려 빗물로는 몰라도
  샛푸른 한으로 번뜩이는 신새벽 이슬로는 몰라도
  서릿발로는 몰라도 통곡처럼 퍼붓는 우박, 눈발로는 몰라도
  떠나가면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흐르거라 이 밤이 새기 전에
  버림받은 모든 것들
  모멸과 안타까움 속쓰림을 부둥켜 안고
  가거라 속 시원히
  밤 깊어 고요할 때 이 때
  저 어둠의 복판으로


       고향의 누님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 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뿐
  주인 잃은 빈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덩이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찬 바람에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넌출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 들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오고 있나요

 

  김상길. 1955년 서울 출생. 강남사회복지대 기독교 문학과 졸업.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순수 의식과 현실의식을 종교적인
언어로 탐색하여 존재확인으로 이어지는 시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창조시작' 동인이며 "우리 아버지 집"(5인 동시집) "뜨거운 언어를 너의
가슴에" "변화받은 사람들"(수필집 공저)이 있다. 현재 "현대목회"의
주간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릇


  비울 줄 모르고
  채우기에만 허둥거렸읍니다.
  남보다 앞서서 
  수북이 쌓아 놓았읍니다.
  그 부패하여 냄새나는 떡 덩어리를
  은택의 향기로 알고
  이웃을 불러들여 자랑했읍니다.

  채울 줄 모르고
  비우기에만 바둥거렸읍니다.
  그 귀한 보배들을
  실속 없는 선물,
  그릇을 상하게 하는 티끌로 알고
  사람들이 잠든 사이
  소리내지 않고 비웠읍니다.

  별이 만발한 이 새벽
  당신의 음성에 잠을 치우고
  비로소 눈을 떠
  비워서 얻는 것과
  채워서 버리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 목소리에 날마다
  새순으로 돋아나고 싶습니다.

  겨우 잠 재운 슬픔이 깨어나
  손 때묻은 품목들이 흐려질 때
  그 목소리를 들으며
  창을 열고 싶습니다.

  붙잡은 사람들이 총총히 떠나고
  허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올 때
  그 목소리를 들으며
  들길을 걷고 싶습니다.

  계절을 쓰러뜨리는 저 바람에 쫓기고 쫓겨
  어두운 골목에서 주저앉을 때
  그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일어나고 싶습니다.
  봄 들녘처럼.

  날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이 정겨운 계단을 오르고 싶습니다.

  그 목소리 없이
  이 시린 마음을 뎁힐 수 없읍니다.
  그 목소리 없이
  이 어두운 밤을 걸어갈 수 없읍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늘 깨어있다가
  끝내 내 호흡이 가장 평화로와질 때
  영원의 눈을 뜨고 싶습니다.

 

  김상윤. 1959년 경북 영일 출생.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인간성의 상실과 마모에 따른 소외감, 절망과 불안을 다양한 이미지의 시적
결합을 통해 드러낸다. '국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상업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입소 28고지
       --사이공, 사이공 5


  야자수의 어깨에 걸려 있는 밤의 음울한 흐느낌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은
사타구니의 습진과 투이호아 우체국에서 어머님께 송금한 10불의 무사를
근심했다. 식스틴(M16)의 젖은 총구에서 초조와 긴장은 최루가스처럼 피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기다려도 새벽은 좀처럼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수통에 가득 담아 온 고량주 썩은 냄새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소대장과
이하사의 희뿌연 이마에서 불안은 훈장보다 분명하고 당당하였다. 우리들은
엎드려서 빌어먹을 생각했다. 단 한 번 맛본 사이공 여자의 가짜
산호목걸이와 고국에서 온 편지와 봉투에 쓰인 충남 보령군 웅천면 관당리...
눈시울이 시큰하게 저려 오는 머언 하늘과 목선 바라크와... 전갈좌의 발톱이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흉한 꿈과... 소스라쳐 깨어나면 정글화는 천근인 양
무거웠다. 저만큼 베트남공화국의 민가에서 불빛은 새어 부드럽게 대지를 적시고,
어쩌면 지겨운 --서야-- 내일도 우리들의 몫일 수 있는 매복을 위하여 나는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슬며시 흔들었다.


       월남에 계신 오빠에게
       --사이공, 사이공.7


  사월이 가고... 뿌옇게 흙먼지 뒤집어 쓴 대자리행 버스가 툴툴거리며 잠시 멈추어
섰다가 떠난 빈 자리, 웅천면 합동버스정류장 뒤켠의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며...
문득 고개들어 바라보는 거울 속에서 새까만 머리칼을 실밥처럼 풀어 내리며 늙은
미용사는 시종 분주하였고... 미용사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가득한 먼지와 하릴없이
삐거덕거리는 못자국, 파리똥 쌓여 있는 판넬을 보며... 무심코 흘려 듣는 라디오
방송은 용감한 따이한 군대와 잔악한 베트콩, 고 강재구 소령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시사해설하는 김교수의 열띤 주장에도 야자는 익고... 아오자이를
입은 소녀들이 페이브먼트를 걸어 가는 배경으로, 배경에서 꽃처럼 피어 있는
시크로(삼륜 인력거)... 어깨에 묻은,미련같은 머리칼을 떨며 미장원을  나설 때,
유리문 선반에 놓인 1967.3.2.월남에서 호가 어머님께 목조군함의 갑판에 새긴 육군
상병의 씩씩한 이름을 대하며... 미장원의 유리문을 밀 때 한층 따듯하게 울려 퍼지는
목선의 기적소리... 뿌옇게 먼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며 오빠, 오빠
생각하며... 이기고 돌아와요, 건강한 모습으로... 1967.5.9.

 

  김상환. 1957년 경북 영주 출생. 1981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내성적 자아로서 느끼게 되는 존재 탐구와
궁핍한 땅위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을 담담하면서도
조용하게 노래하고 있다. 현재 영광여중에 재직하고 있으며 '미래시'
'전통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혼의 닻


  달 뜨지 않은 밤에 나는
  심천 미류나무 숲속에
  슬픈 짐승처럼 쭈그리고 앉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타는 음성을 듣는다.

  원무를 그리며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간증의 불꽃은
  삼경을 지나
  더욱 간절한 몸부림으로 떤다.

  나는 살을 쥐어뜯어며
  본향을 생각하다,
  꿈에만 출항하는 영혼의 뱃고동 소리에
  시선이 멎다

  어차피 모래알처럼 부서질
  너와 나는
  일어나 숲속을 헤매이다, 새벽녘
  깊이도 모를 바다의 숲속에 
  닻을 내린다.


       산비둘기


  이야기처럼 첫눈이 내리는
  산마을의 겨울 창가로
  전나무 숲이 요요(괴괴하고 쓸쓸함)하고
  우리는 어쩌다
  카키색 마루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닫힌 방 안에서 
  떠나 있음에 대해 골몰하며
  조금씩
  야
  위
  어
  갔
  다.

 

  김선굉. 1954년 경북 영양 출생. 대구대학교, 영대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82년 "심상"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일요문예' 및
'네 사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구미 금오공고에 재직하고 있다.

       아리랑 1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다.
  우리의 가슴엔 무시로 장고 소리가
  설장고 소리가 둥두둥 울려오고 있는 게 아니냐.
  참 많은 고개를 넘어 또 아득한 세상
  하늘은 너무 푸르러 슬펐고
  때로는 낮은 땅으로 내려와 저만치
  강물이 구비구비
  흘러가고 있었다.
  끝이 없겠구나 이렇게 자꾸 흐르다 보면
  무궁하겠구나. 그렇겠꾸나.
  흰 옷에 붉게 배이던 소리없는 아픔을 어루만지며
  바람은 넘실 끝이 없고
  끝이 없겠구나. 그렇겠구나.
  참 많은 그리움과 참 많은 안타까움과 참 많은 설레임과 참 많은 아픔과
흰 몸과 붉은 마음이
  아! 작은 가슴에 너무 많이
  흐르고 있다.
  걸어가자. 고개 마루나 강가에서
  이 뜨거운 흙에 앉아 잠시 쉬기도 하며.
  몸보다 먼저 마음이
  어느날은 어쩌면 마음보다 먼저 몸이
  푸르게 흐를 수도 있으리라.
  온통 우리 몸이 귀가 되어 귀 기울이면 들려오리라.
  이건 참 너무 큰 그리움이다.
  우리의 가슴엔 무시로 장고 소리가
  설장고 소리가 둥두둥
  울려오고 있는 게 아니냐.

 

  김세완. 1953년 전북 남원 출생.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 등단한
그는 '남원문학'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삶의 시를 위해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폭넓게 수용, 시화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국정교과서' 편집부에 근무하고 있다.

       눈물에 대하여


  모든 눈물은
  빛나는 나라에서 올 것
  그리고 돌아보지 말 것
  스스로 거두지 말 것이며
  다만 눈물로 빛나기만 할 것.

  눈물은 눈물끼리
  껍데기는 껍데기끼리 모여
  하나가 될 때
  눈물은 어두워지지 않고
  살아서 빛나는 튼튼한
  이름 하나를 남길지니
  껍데기뿐인 눈물은
  껍데기의 나라로 돌아가고
  모든 돌아보는 것들은 다시 오지 말고
  스스로 거두는 것들만 어둠의 땅에 오래 남아
  씨앗을 뿌릴 것.

  그리하여 부르면 대답하는
  눈물 하나로 우뚝 솟을 것.


       허수아비


  모든 빛들이 잠쩍해 버리고
  죽은 풀들마저 쓰러져 마른 몸을 뒤척일 때
  너는 절망의 끝에서 홀로 돌아왔다.
  달빛 속에 우울하게 깨어 있는 길 위엔
  울며 몰려가는 가랑잎뿐
  까닭없이 바람은 불고
  온종일 고단한 허리를 풀고
  귀가를 서두르는 저문 벌판에서
  너를 기다린다.
  돌아오지 않는 새들의 안부와
  죽은 꽃들을 버리지 못하는 꽃대궁의 슲픈 임종
  또는 이 땅의 마지막 길손이 되기 위하여.

  무엇인가
  햇빛을 꿈꾸며
  간간이 모였다 흩어지는 바람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가는 별빛을 갈아 꽂으며
  빛나고 있는 저것은.
  깊은 밤에도 쉬지 않는
  적막한 길 위에
  살아 남기 위한 잡초들만
  서로의 목숨을 굳게 껴안고
  어둠에 묻혀 갈 대
  불꽃처럼 확실히 빛나고 있는
  저것은 무엇인가.

  이제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 떠오르리라
  우리가 만나지 못한
  새벽을 그리워하며 너는 언제까지나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인가
  침묵의 뿌리를 뽑아 들고
  마침내 너의 영혼은
  눈물 빛깔의 꽃으로 승천한다.
  남루에 드러나는 굽은 등으로
  이 하늘의 높이
  이 땅의 끝까지 견디고 있는
  울음 소리만 홀로 세워 둔 채.

 

  김소원. 1942년 전남 출생. 전남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월간문학"지를
통해서 데뷔했으며 '미래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사적인 흐름의
한을 간결한 시행으로 정감있게 표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림자


  목마른 가슴에
  봄비로 내려
  아픔으로 건져낸
  한 방울 눈물같은
  그대는

  가득 차 오는 가슴
  바다의 울음소리가 되어
  끝없이 안아도 안을 수 없는
  해일의 무인
  그대는

  맞바람 창을 열고
  눈에서 눈으로 건너는
  깊게 취한 가슴으로 
  그대는
  살아서 오는 나의
  그림자.


       조춘


  타래진 햇살
  하오를 엮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붓끝을 모으면

  향 스민 자국마다
  숨결이 돌아
  초서 머문자리
  조으듯 일어서는

  난향 바람에
  놀라는
  세상.

 

  김송배. 1943년 경남 합천 출생. 1984년 "심상"지로 문단 데뷔. 토착적인
자연꽈 풍경을 서정성으로 환치하여 인간성 회복과 삶의 재정립을 담은 글들을
발표하고 있다. '심상시인회' 상임위원이며 시집으로 "서울 허수아비의
수화"가 있다.

       바람


  멀리서 쓰러진따.
  누군가 마른 풀씨만 씹다가
  썩지 않은 마음 한쪽 남겨놓고
  한 생의 막을 내리는가.

  하늘이 엷게 흔들린다.
  흔들리는 저 언저리
  시린 시야 밖으로
  돌아가 눕는 저녁 새떼
  바람만
  빗살고운 무늬로 어른거린다.

  오늘밤
  귀에 젖은 물소리는
  밤의 중심으로 흐르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거기에 나는
  그리움처럼 남아 있다.


       홑꽃잎 뒤풀이 2. 닻


  기다림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은
  서러움
  그래도 기다려야 한다.

  올 수 없는 발걸음 소리
  갯펄에 꽂힌 채
  밤새도록
  피를 토하는
  아픈 꽃망울

  피어나기 위한 기다림은
  아름다운 사랑의
  약속이다.

 

  김순일.1939년 충남 서산 출생. 대전사범학교 졸업. 1980년 "현대시학"지를
문단에 데뷔한 그는 반 도시, 반 문명적으로 고향과 자연 상실에 대한 아픔과
인간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인이다. '백지'
동인이며 시집 "서산 사투리"가 있다. 현재 서산여중에 재직하고 있다.

       서산 사투리 1


  내 얼굴에는 늘 바보스럽게 헤에 웃는 웃음이 붙어다녀서 사람되기는 다
틀렸다고 한다 피사리를 가서도 피대신 벼를 뽑아 놓고도 헤에 웃는다고
주인한테 퇴박맞고 이른 새벽부터 논두렁에 나와 웃는 그 웃음소리만 들어도
하루종일 재수없다고 사람들은 투덜댄다. 막거리 냄새만 맡고도 절로 나오는
그 바보스런 웃음 때믄에 술맛이 없다고 잘 끼워주지도 않고 초상집 시신
앞에서까지 웃는다고 뺨을 맞으면서도 헤에 웃는다.
  병원엘 가 보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절에도
갔었지만 헤에 웃는 나를 내려다 보시던 부처님이 한바탕 웃어대더니 지성들릴
게 따로 있지 어서 가라고 한다.
  '무슨 웃음이 그렇지 부처님도 꼭 바보스럽구먼'
  나는 시무룩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오면서 별 희한한 일이라도
엿본 듯이 헤에 웃는다.


       서산 사투리 16


  눈이 내리는 밤
  시골은
  눈빛만으로도 훤했다

  등잔불 및에서
  콧구멍이 까매지도록
  '흙'을 읽었고
  어쩌다
  촛불을 켰을 때
  너무 환해서 황송했다

  요즈음은
  그믐밤도
  대낯처럼 밝은 세상
  30W 불빛에서는
  아예 일손을 놓는다

  세상은 점점
  밝아지는 것일까
  어두워지는 것일까

 

  김영안. 1958년 경기도 양주 출생. 1985년 "나는 작은 영토에"를 출간한 바
있는 그의 시는 냉철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비판의시식과 농민에
대한 진한 애정을 담고 있다.

       한수이북


  강북의 하늘엔 쌕쌕이 두 마리
  곡예를 부리고
  파주 문산 동두천 포천
  자꾸만 죽음 같은 전선이 남하한다.

  그린벨트 +
  이전촉진지역 +
  작전지역이면 
  하늘 밑 지표에
  감히 발댈 곳이 없다.
  태아가 머리 밀고 나올 곳이 없다.

  녹음 속에 있던 갈비집은 하나 둘
  문을 닫고
  꿩 토끼 은여우 농장뜰도
  강남으로 쫓겨가고

  발칸과 헬기장이
  형제봉 일곱 봉우리를
  여대생 유방처럼 도려 내고

  북이 막히고
  남이 터진
  명당을 잡아
  우물 파고 마당 들여 살라치면 금방
  탄약고가 들어와 진을 치고

  봄이 와도 철물점이 뇌졸증처럼 잠을 잔다.
  버려진 땅
  남쪽의 자본주의와
  북쪽의 공산주의를 베고
  시꺼먼 침묵으로 죽어 누운 땅
  나로 하여금 뜨거운 조국애로
  동네를 지키며 살게 하라
  활화산 같은 자유의 이념으로
  민주주의의 농토를 갈며
  북진하게 하라 조국의 땅
  휴전선 155마일까지
  도처에 애국 청년들이 살아숨쉬게 하라
  그리하여 해주 사리원 신의주까지
  훌륭한 민주주의를 갈고
  북진 운산 용원 금광을
  우리 손으로 캐 나르게 하여라.


       민중선언


  시대는 확실히 좋아졌다.
  농민 열 명 노동자 다섯 명만 모이면
  비싼 대학물 먹고 나와 할일없는 놈들
  어느 놈이든 한 놈 끼어들어
  이름을 만든다
  명예를 만든다
  기구를 만든다
  전봉준을
  전태일을
  진리라는 책갈피 속에 모신다.
  4월 5일 팔아먹은 놈들
  노동자가 투신자살을 하면
  재야는 투쟁거리가 생겨 좋고
  농민이 폭삭 망하면
  야당은 발언감이 생겨 좋으리라

  어림없는 놈들
  우리가 논밭에 엎으러져
  이 뜨거운 여름을 지고 있을 때
  위원은 그의 마누라와 2명인
  '강경민주투사선두주자연합회'
  '극렬민중운동가범세계적협의회'를 만들어 놓고
  너희는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고 다니며
  삶보다 먼저 투쟁을 교육시켰다
  눈물이 많고 맘이 보드란 사람들
  그대들의 더 온당한 투쟁은
  이들의 이름 없는 시간 속에  들어와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라고 불렀던 해직교수는
  우상이 가고 난 봄날 아침 학교로 돌아가고
  땅을 빼앗겨도
  국졸인 이유로 나는 야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손목을 잃어도 우리는
  국졸인 이유로 기계를 떠나지 못하는데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끝까지 우리의 투쟁은 멈출 수 없는데
  노조와 농민회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시회과학을 공부하고 온 학생의 애국심만을 믿고
  우리는 계속 유인물만 받아 보고 있을가

  아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노동자의 각성
  농민의 역량이 필요하다고
  그대들은 애써 말하려 하지 말라
  전봉준을 전태일을 뺏어
  책갈피 속에 가두지 말고
  저임금
  저곡가에
  목숨이 모져 살아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해 두지도 마라

  기독교회관 금요기도회에서
  자유실천문학회 맨 뒷자석에서
  외로이 울다
  외로이 울다 도망쳐 온
  우리 불쌍한
  쌩 알몸들
  이젠 우리가 모여 할 때다
  농약 먹고 목 매고 분신자살로 죽지 말고
  우리들의 어둑한 거리에 혼으로도 살지 말고
  이젠 우상놈 다리 후려칠
  낫 놓고 기역자 한자 한자 쓰는
  기 터지는 시로 살아날 때다
  수천년 알몸으로 뜨겁고 차운 것 배운
  양심의 소리로 살아
  분노로
  선언으로 살아
  너희들의 오래도록 긴
  책갈피 속
  십자가 속
  부처님 마빡 속
  가을비 우산 속 룸싸롱의 계집 속
  남산 위의 둥근 달 단상 위의 대머리
  그 철판보다 두꺼운 철판바닥을
  용서할 것인가
  어림없다 땀 흘리지 않는 놈 공자 맹자 따위는
  함석헌도 강원용도 김대중도
  노동으로만 먹고 살고
  죽음으로만 말해 온 우리에게
  한낱 티끌이다

  어이 할 것인가
  어이 할 것인가
  전태일이 노동자 약혼 반지 속에 있고
  전봉준이 농민의 제상 위에 있을 터인즉
  교회는 하나님을 석방하고
  학문은 진리의 포승줄을 풀어
  그것들이 일하는 사람 등 아무데나 가 붙게 하고
  그것들이 일하다 죽은 혼 아무데나 가 절하게 하고
  목사 중놈 신부 다
  군인과 학생과 교수 다
  그런 신 앞에 횡으로 서 절하게 하고
  우리가 노동하다 지쳐 여름이 지겨울 때면
  우리도 사무실로 가 동지의 전화도 받고
  자전적 에세이도 쓰고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라고
  거침없는 논문도 써 돈도 받고
  우상은 없으되 민중은 무섭고
  율법이 없으되 세상은 고른
  참말로 믿어도 되고
  참말로 하나이 되는
  삼청교육대 애들이 들고 뛰던 통나무처럼
  우리 이 미치게 뜨거운 역사를 이고 져야겠지 않은가
  벗이여 동지여 친구여
  우리들의 크나큰 사랑이여


  김용락. 1959년 경북 의성 출생. 계명대 영문과 졸업. 1984년 창비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는 분단으로 인해
훼손되고 단절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함으로써 시적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분단시대'의 동인이며 계명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송실이 누님


  시오리 갑티재 넘어
  달밤의 박꽃 같이 환한 얼굴
  비단결같이 고운 마음씨 속에는
  항상 물고기 몇 마리쯤은 넉넉히 기를 여유를 갖고 사는
  송실이 누님
  태어나던 기축년 그 이듬해 여름 전란통에
  젖배 곯고 돌림병 돌아 벌써 죽었을 목숨
  아직도 그때 흔적으로 코 밑에 두어 개 마마자국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가끔씩 부끄럽지 않느냐고 내가 묻기라도 하면
  콩타작하다가 넘어져서 생꼈다고
  슬쩍 웃어 넘기는 재치도 보이곤 하던 누님이
  시집가던 날
  나는 집모퉁이 흙담벽에 얼굴을 묻고 참 많아도 울었었지
  마을을 몇 개 지나고 큰 강을 건너
  실배기 마을 송가 성을 가진 더벅머리와 혼인을 치르니
  드디어 송씨 가문의 지체 있는 맏며느리요
  그 호칭도 송실이로 바뀌었는데
  더벅머리 총각 마음씨 순박하기가 또한
  시월 첫서리에 무른 감홍시 같으니
  두 사람은 필시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라
  낢마다 밤마다
  서로 얼르고 위하여 아들딸 낳고
  한 살림 일궈 너른 들판의 쑥대같이 사는데
  어느 날부터 마을에 이상한 풍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드디어는 물 막고 댐을 만들어
  온 마을이 물 속에 잠긴다고 하니
  정든 집 땀흘려 가꾼 논밭 전지 두고
  고향땅을 떠나야 하는
  하루 아침에 수몰민 신세 된 송실이 누님
  어린 남매 손목 짭고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타향이 다 타향인지라
  그래도 친정집 가까운 갑티재 넘어
  갈대 마을에 터를 잡으니
  제 값 제대로 받은 보상금은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난생 만져보기 힘든 큰 몫돈이라
  괜히 마음 설레어
  마을 주막에 출입을 시작하던 송서방이
  어깨 너머로 배운 솜씨로 노름판에 끼어들어
  하룻밤 새 전재산을 몽땅 털리고
  풀죽은 모습으로 돌아와 며칠을 앓아 누워도
  묵묵부답 상한 속마음을 나타내지 않고
  다시 논밭 일궈야겠다며
  집안 식구들 뒷바라지에만 열중하던
  속 넓고 이해심 많던 누님
  나는 그 송실이 누님을 볼 적마다
  어쩐지 한국판 '여자의 일생'을 보는 것 같아
  코끝이 찡하기도 하지만
  오늘도 갑티재 위로 흰 구름이 떠가고
  갈대꽃이 바람에 춤추는 것이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 줄 아는
  송실이 누님의 지혜를 보는 것만 같다


       4.19날 육사시비 앞에서


  4.19날 아침
  내리는 빗속을 걸어서 육사시비 앞에 당도했다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고
  '지금 눈내리고'라고 음각된 비면이 비에 젖어
  더욱 깊게 보인다
  오늘이 바로 4.19 사반세기라는데
  길가의 풀들은 비에 젖어 청청하게 솟아오르고
  뒹구는 돌조차도 힘이 올라 소리치는 듯하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어깨를 맞대고 무심히 거리를 오간다
  비를 맞으며
  나는 잠시 고개를 숙여본다
  그때. 당신이 북경의 차디찬 감방 속에서
  젊은 한시절을 보낼 때
  그날, 또다른 당신들이 서울 한복판 거리에서
  젊은 한시절을 송두리째 날려 보낼 때도
  아무 울분없이 강은 저렇게 잔잔히 흘러갔고
  역사도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그냥 스쳐갈까
  이 소도시에서
  그날의 참뜻을 새기며 고개를 숙인 아침
  강건너 보리밭이 푸른 깃발을 흔들며 다가오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무어라고 기르칠 것인가
  어느 선배 시인의 말처럼
  편하게 살라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정직하게 살라하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 위에서
  여전히 나는 아이들에게 편하게 살라고만 가르칠 것인가
  어느덧 속옷마저 후줄근히 비에 젖는
  4.19날 아침 육사시비 앞에서 말을 잊은 채
  나는,

 

  김용옥. 1954년 서울 출생.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2년
"심상"지를 통해 데뷔한 그는 고독, 허무, 어둠을 수용하는 시인으로
서정 양식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며 이미지의 참신한 연결을 통하여 시의
아름다움을 지속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다. 현재 성산여중에
재직하고 있으며 "풀무치 울음에 오는 비"를 출간한 바 있다.

       산문에서


  길이 끝나는 곳에
  돌아앉아 면벽한 겨울의
  흰 이마가 보인다.

  차갑게 말문을 닫은 바람이
  석간수 아래 얼어붙고
  눈 맑은 산새는 아침마다
  빛의 울음을
  눈 속에 물고 온다.

  동안거에 들어간
  선방 앞 댓돌에
  햇빛 한자락
  혼지 비추다 돌아가고,
  흰 고무신이
  달빛 고인 뜨락에 내린다.

  아랫마을의 등불이
  뿌옇게 번져보이는 이 산속,
  제 안으로 빛을 내리는
  촛불의 흔들림에
  어디선가
  얼음이 깨어진다.


       흐린 저녁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나서면
  뾰족한 첨탑 끝에 와
  얼어붙은 흐린 바람.

  아픔마저도 잊고 지낸 날.
  경부가도 지나
  잡목림 너머
  희미하게 슬리는 낮달,

  나직한 언덕으로도
  늘 초조히
  기다리던 것들은
  오지 않는다.

  나무 사이의 간격이
  선명히 떠오르는
  어스름 사이로
  선회하는 겨울 철새의
  낮은 울음에 맞서
  등이 굽은
  우리 뒷모습이
  지워지고 있었다.

  기다림보다
  먼저
  윤곽을 지우며 오는
  어둠에 
  우리의 관계가
  묻히고 있었다.

 

  김용주. 1962년 경기도 양주 출생. 뿌리 내리지 못한 이들이 갖고 있는
억눌린 힘에 관심을 가지고 보다 깊이 천착하고자 노력하는 시인으로 198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했으며 현재 국민대 대학원 국문학과에 재학하고
있다.

       노래


  여름이네요.
  땀에 밴 목소리로
  매미가 울고
  부드럽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사람은 땅에 끼어 있고
  산은 바위에 눌려 있고

  내 앞에서는
  둥근 하늘이 떠올라 샛노랗게 익어 터지네요.

  무슨 일이죠?


       작업대 앞에서


  낮일을 하고, 7시
  구멍가게로 몰리는
  캄캄한 눈발
  우리는 서로 볼을 비비며 지하실로 들어간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다른 이들은 지금 무슨 일을 끝내고 있을까'

  엉켜붙은 실뭉치 사이로
  때에 절고 닳아진 원판
  가득히 널려 있는 작업대 앞에서
  너는 졸고, 몸판만 남은 꿈에 시달리고
  나는 봄 옷감에 싸여 재봉틀 바퀴마다 굴러 다닌다.

  옷들은 짐차에 실려
  신평화 새벽장으로 나간다.
  눈이 아린 불빛 속에서
  조각조각 우리를 박으면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누구의 옷이 되는가.

  밖에는 얼음이 맺히고 숨겨질 얘기들이 숨겨 들고
  우리는 조용히 걸어온 길 앞에 선다. 발바닥를 핥으며 발바닥 깊숙히
얼굴을 묻는다. 모든 것이 육체의 일부로 남는다. 허리, 머리, 눈 그 위에
손 댈 수 없이 구겨져 있는 정신.

 

  김용택.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순창농고 졸업. 1982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1'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농촌 시인으로 탁월한 감성과 예리한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농민시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85년 첫시집
"섬진강"을 펴냈다.

       섬진강 3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오는 저녁길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 익어 정들었으니
  이 땅에 정들었으리.
  더 키워 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섬진강 18
       --나루


  섬진강 나루에 바람이 부누나
  꽃이 피누나
  나를 스쳐간 바람은
  저 건너 풀꽃들을
  천번만반 흔들고
  이 건너 물결은 땅을 조금씩 허물어
  풀뿌리를 하얗게 씻는구나
  고향 산천 떠나보내던 손짓들
  배 가던 저 푸른 물 물 깊이 아물거리고
  정든 땅 바라보며
  눈물 뿌려 마주 흔들던 설운 손짓들
  두고
  꽃길을 가던 사람들
  지금 거기 바람이 부누나
  꽃이 피누나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던 뱃길
  뱃전에 부서지며 갈라지던 물살을 보며
  강 건너 시집 간 누님도 객지로 가고
  공장 간 누이들은 소식도 없다가
  남편 없는 아기엄마 되어
  밤배로 몰래 찾아드는
  타향 같은 고향 나루
  그래도 천지간에 고향이라고
  이따금 꽃상여로 오는 사람들
  빈 배가 떠 있구나
  기쁜 일 슬픈 일 제일 먼저
  숨가쁜 물결로 출렁이던
  섬진강 나루에
  지금도 물결은 출렁이며
  설운 가슴 쓸어
  그리움은 깊어지는데
  누가 돌아와서 이 배를 저을까
  오늘도 저기 저 물은 흘러, 흘러서 가는데
  기다림에 지친 물결이 자누나
  풀꽃이 지누나.

 

  김유선. 1950년 경기도 용인 출생. 1983년 "현대문학"지로 등단한 그는
현재 숙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경기대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자잘한 일상사까지 폭넓게 수용, 시의 영역을 넓히는 일에도
주목하고 있는 그는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발표, 훈훈한
정서를 일깨우고 있다.

       가족


  싸우지 말아라
  남편은 우리에게 타이르고 나가지만
  나가서 그는 싸우고 있다

  한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그가 현관문을 들어설 때
  우리들은 안다

  그가 옷을 털면
  열두 번도 더 넘어졌을 바람이
  뚝뚝 눈물처럼 떨어진다

  싸우지 말아라
  아침이면 남편은 안스럽게
  우리를 떠나지만
  그는 모른다
  아이들의 가볍고 보드라운 입김이
  따라가는 것을

  그가 싸울 때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떨고 있는 것을


       봄바람


  철없는 니 춤바람 신바람이
  외진 산등성이 무덤잔디
  새순을 키워도
  가슴구렁 그 언저리만
  건드리고 건드릴 뿐
  목마른 나뭇가지 축이지 못하고
  시든 풀머리에
  꽃비녀 얹어주지 못하누나.
  바람아, 실성한 듯
  밖으로만 내도는 바람아

 

  김윤현. 1955년 경북 의성 출생. 경북대 사대 국어과 졸업. 1984년
'분단시대'의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역사 위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참다운 인간상을 시화하고 있다. 현재 영진 고교에 재직하고 있다.

       만적


  너무 오랫동안 가라 앉았어
  너무 깊이 잠들었어
  어둡고 칙칙한 성왕성대 동구 밖에서
  이젠 사람 가운데 살고 싶어
  때가 되면 다리를 펴고 살 수 있어
  배우고 익히면 정승도 우리 것이야
  원님 배부르면 우리도 등 따신 시절 다 지났어
  우리도 눈을 떠야 돼
  개는 개만이 알아 주는 거야
  가는 막대기도 함께 모이면 꺾이지 않아
  초전에서는 반란군이 전멸되었다는 풍문도 들려오고
  북산에서는 관군이 몰려온다는 소문도 떠돌지만
  가랑비도 많이 오면 보는 터지는 거야
  콩밭머리 혹은 허리 굽은 논배미에서도
  잡초끼리 꼭 껴안으면 들불은 죽지 않는거야
  생각해 봐 모여 가슴 맞대 봐
  우리들 흔뜰림은 빛이 되지 못했어
  우리들 흔들림은 구원이 아니었어
  세상은 구름 오늘은 안개
  우리의 소매자락 혹은 숨결을 되찾기 위해
  모여! 내일이면 늦어


       봉양동


  수업이 끝나자
  책보자기 등에 울러메고
  뛰었다 좁은 등하교길 십오리
  산굽이 돌아 쉬지 않고 뛰었다
  이끼 끼고 말없는 앞산 돌성은
  6.25때 아군적군 없이
  우리눈 우리가 찔렀던
  싸움의 흔적을 보여줄 뿐
  주위에 흩어진 탄피
  주우려 배고파도 뛰었다.

  썩은 풀속 말없는 뼉다귀
  푸른 하늘 쳐다보는 해골
  사이로 녹슨 탄피 주워
  장난감 딱총을 만들 때
  불발탄 탄창 모아 엿바꿔 먹을 때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징용 갔던 삼촌도 멀리서 바라나 볼 뿐
  이 땅에 살아 있는 자들 아무도
  남아 뒹구는 뼉다귀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적개심만 가르치고 요구할 뿐
  통일에 대한 희망과 의지는
  우리 손에 쥐어진 탄피처럼
  녹슬어 있었다.

 

  김재진. 1955년 경북 대구 출생. 계명대 음악대학 졸업. 197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1978년 "시와 의식"지에 당선되면서
데뷔한 그는 현재 '오늘의 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며 KBS대구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다.

       아침을 위하여


  잠들지 말아야지 이 추운 밤
  눈사람도 지친 듯 눈꽃에 싸여 조는 밤
  같이 걷던 친구마저
  동태가 뙤어 얼어붙은 밤
  입김을 호호 불며 걸어가야지
  잠들지 말아야지 두 눈 동그랗게 밝혀
  어둠이 깊어도 멀잖은 아침
  햇살 이야기 나누며 걸어가야지
  머리 위엔 눈꽃이 쌓여
  관처럼 인고의 십자가처럼
  어깨 위엔 눈꽃이 쌓여
  별처럼 이 밤의 순교자처럼
  잠들지 말아야지 숨막히고 안타까운 밤
  모르는 곳에서 누눈가 촛불 밝혀
  빛나며 기다리는 밤
  숨죽여 들으면 얼음 밑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 들려 오는데
  잠들지 말아야지 추운 밤 모두모두
  노래하며 걸어야지
  손 잡고 걸어야지 이 하얀 밤
  눈사람도 지친 듯 눈꽃에 싸여 조는 밤
  잠들지 말아야지
  세상의 은빛 지붕들 모두
  눈 무게에 내려앉은 밤


       그대


  나는 그대를 위해 많은 것을 바치려 한다
  우리 젊음의 전부를 함께 보냈던 그대
  아무것도 없던 영하의 밤을 견디며
  서로의 체온을 나누던 그대
  그러나 한때 내가 잊어야 했던 그대
  나는 이제 다시 돌아와
  그대를 위해 멀고 긴 길을 가려고 한다
  별이 없던 밤에도 그대여
  강 건너 불빛 더욱 빛나고
  모질게 우리를 다그치던 밤바람도 그치고
  돌을 던지던 사람들도 잠드는데
  모든 것이 일체 멈추어 버린 순간 앞에
  거울 앞에 서 있는 듯 숨죽인 그 순간 앞에
  팽팽해진 수면을 적시며
  시린 손등을 적시며
  하나씩 내려와 부풀어 가던
  액체도 고체도 슬픔은 더욱 아닌
  마치 우리의 체온과 같이 녹아내리는
  절대의 소망 앞에서 우리는
  숨죽여 노래라도 불러야 하지 않으리
  돌을 던지던 사람들도 잠들고
  이제는 다시 돌아와
  거친 물결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으리
  그대여 나는 그대를 위하여
  숨가쁘고 눈물 많은 기다림을 위하여
  다시 뛰는 이 심장을 열어 보이리
  불러도 메아리 없던 노래를
  목이 잠기도록 소리소리 불러야 하리

 

  김정숙. 1960년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국문학과 졸업. 1983년
"문예중앙"지를 통해 데뷔한 그는 지고의 삶꽈 최저의 생존 보장을 포괄하는
인간다움을 시로서 갈구하고 있다. 한동안 잡지사에 근무하였으나 현재
작품에만 전념하고 있으며 소설작업도 함께 하고 있다.

       이 강산 돌이 되어


  나도 이전엔 한 그루 나무나 날아가는 새였는지 몰라
  치술령 고개마루 기다림 한에 얼어 서 있꺼나
  동굴 속 부처의 형상으로 가부좌튼 내 동료들도
  먼먼 예전엔 사람이었나 몰라
  관가마루 높은 기둥 받치던 내 동료 불타 죽고
  앉은뱅이 누구는 대궐 잔치판에서 녹두를 갈고
  또다른 누구는 성곽 벽에서 총알받이 되고
  손바닥만한 텃밭 지키다 군화발에 짓밟히기도 해도

  그 부릅뜬 눈으로
  두고 보는 게야 만수산 드렁칡이 서로 엉겨 즐거이
  개미떼 벌떼 떼서리로 긁어 모으며 즐거이
  이 강산 살찔 때
  저들이 다시 살아 무엇이 되는지
  처음 태어났던 사과나무 아래 징그런 몸뚱이의 뱀으로
  거꾸로 매달린 넓은 손의 박쥐로
  물 위를 딛고 선 긴 다리의 소금쟁이로 그런 것들로
  허공에 다시 삶을 펄럭일지
 
  두고 보면서 한 천 년 누워
  할 말 뜨거운 마음 땅 가까이 가라앉히면
  내 이마에서 푸른 달빛 푸른 노래 솟아날까 몰라
  푸른 들판 홀로 지키는 푸른 솔이 될까 몰라
  죄 많은 인간의 자식을 다시 태어나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뼈 묻힌 바로 그 자리에서
  저들이 또 싸우지 않으면 무얼 하는지
  다시 한 천 년쯤 두고 보려고


       이 강산 유월은


  고추나무에 받침대를 세운다 비가 와야지 큰아버지
  사촌형 없는 큰어머닌 오늘도 일손이 달린다
  묘비 없는 뒷산 구덩이를 아카시아 뿌리 휘감아 들 때
  못박아야지 살아남은 죄
  손바닥에 아카시아 가시라도 박아야지
  고추나무에 받침대를 세우며
  혼자 남아 너무 오래 살았어 큰어머니 한숨소리
  자잘한 고추꽃 위로 낮게 깔리며 고추나무 흔들 때

  삼십년이 지나도 못 감은 눈 몇 개
  밭기슭에 누워 우리를 본다
  참꽃 지고도 아직 칡꽃 피지 않은 이 강산 유월은
  보리고개 넘어 내리막길
  보리밥과 풋고추에 뒤가 급한 내리막길
  비탈에 기대어 잠든 조카들의 식곤증 속

  마을마다 대순이 자란다 조카들의 잠을
  쿡쿡 쑤시는 오래된 해골의 뼈마디
  이마를 타고 내리는 그들의 희석된 피
  저 대나무를 못 자라게 하자 자라면 꺾일 뿐
  꺾이면 온몸 피묻힐 뿐 네 피 내 피 없이
  더위에 흐르는 네 땀 내 땀 없이 유월 가뭄에

  쓰러지지 마라고 고추나무에 받침대를 세우면
  이 강산 천지 벗어놓은 뱀 허물이 흐느적거린다
  삼십년이 지나도 못감은 눈들 불을 켜고
  대나무처럼 곧게 자라지는 마라 속삭이는 마읆마다
  아직도 대순이 자라는 이 강산 유월은

 

  김정원. 1932년 경북 포항 출생. 연세대 및 동교육대학원을 졸업.
1985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그는 현재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성대에 출강하고 있다.

       6월의 기억


  염천의 비탈에
  날마다 곤두선 목숨

  빈 냄비엔
  단호박 씨앗 너댓
  허기진 천리길도
  해질녘이면 닿을 듯

  길은 돌아 강물을 쫓고
  새벽꿈에 젖은
  두려움의 성 하나를
  우린 기대며 걸었다.

  길의 피바다
  불씨의 고동
  뙤약볕의 매미 울음마저
  거듭 앓으며

  열 여덟 같은 또래의 유령들이
  주검으로 널브러진
  6월의 남행길
  너는 종내 말이 없었다

  만에 하나
  내 살아 남는다면
  살아 다시 돌아온다면
  버린 내 집 뒤켠
  한갓진 터 골라 앉아
  목 놓아 너를 울마.


       차 한잔


  물빛이 도는 창가
  짐을 풀어 놓은 큰 섬 하나를
  잔으로 내려놓는다

  하루 나그네의
  흔들리는 땅 위에
  한 순간 고요를 저어 본다

  철이 들 무렵
  어머니의 용서를 구하던
  그날의 다사로움을 담고

  아껴
  한 모금씩 들며
  깊은 겨울산의 명상을 부른다

  떨리던 하루해가
  빈 잔 속에서
  바람개비로 돈다.

 

  김종목. 1938년 경북 의성 출생.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지의 추천으로 시단에 데뷔한 그는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한이나 애수를 곱게 다듬어 아름다운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현재
부산진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겨울바다"와 "아기의 하루"가
있다.

       찻집에서


  방금 배달된 코피잔에서
  따뜻이 뎁혀진 겨울을 보며
  나는 외투깃으로 스치는 비발디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약속한 시간을
  뚝뚝 부러뜨리는 성냥개비마다,
  잠시 그리움이 찌직찌직 타오르다
  하얀 재로 꺼진다.

  차는 식어가고
  음악은 누군가의 목청에서 피를 적시며
  끝없이 끝없이 흐르는데,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는
  삶의 비애를 달래며
  석꼬처럼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

  때로는 기다림에 지쳐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시인이나 작가처럼
  하루의 허무를 만지작거리다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것이
  더러는 이러한 아픔과의 부딪힘 속에서
  무쇠처럼 단련되고
  또 단단한 뼈대를 갖춘다는 것을,
  스스로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나는 또 언제까지나 기다려야만 하는지.

  낙엽같은 창문에서
  누군가가 붉게붉게 흐느끼고
  하얗게 삭아 있는 코피잔 위로
  약속의 껍질을 소리없이 만지작거리면서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지.
  얼마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는지.


       1961년의 강설


  1
  어둡고 질긴 밤이
  연탄 난로 위에서 지글거릴 즈음,
  우리는 술잔을 앞에 놓고
  한 시대의 비밀을 꺼집어내고 있었다.
  녹쓴 손가락 끝에 집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나누어 들고
  확실하게 다가오는 절망이라든가
  혁명적인 우리의 피도 이야기하고
  서로의 눈 속에 숨은 비밀도
  손바닥을 뒤집듯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미리 준비된 약간의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그저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우리의 가난을
  탁탁 소리내어 떨어내기도 하면서
  한 시대의 울음을 어루만지듯
  뻘꺽뻘꺽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2
  약한 바람 앞에서도
  자주 삐꺽거리는 싸구려 대포집에서
  가장 고귀한 우리의 대화는
  때로는 위험한 어둠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애국자가 어떻고 독재자가 어떻고
  그저 주먹을 쾅쾅 내리치던
  그해 겨울 밤,
  우리는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 자유를 보았다.
  연탄 난로 곁에서 피에 젖은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의 귀를 피하고
  저 순하디 순한 눈발의 귀를 피하면서
  우리의 대화는 날카롭게 움직였다.

  3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우리는 몸에 흐르는 애국심을 정돈하였다.
  지껄이고 또 지껄여도
  술집을 나오면 변함없이 눈이 내리고
  한 겨울 내내 눈이 내리고,
  우리의 가슴은 늘 비어 있었다.
  순결한 눈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신음하는 우리의 한 세대를
  내면 깊숙이 잠재우고 있었다.
  우리가 찾는 부끄러운 단어들이
  눈의 나라에 천천히 묻혀가고 있음을 보면서
  귀가길에 날리는 내 슬픈 영혼은
  그해 겨울 내내 잠들지 못했다.

 

  김종섭. 1946년 경북 경주 출생. 1983년에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고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본질적으로 서정이나 민족적 정서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의 언어들은 정서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정서적인 몽롱함을
거부하는 이성적 논리구조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미래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산내고교에 재직하고 있다.
시집으로 "환상조"가 있다.

       환상조


  비가 천년의 석탑을 적시고
  오늘은 또 삼복의 지열을 적시고
  꺼져가던 환상의 조각들을 씻으며
  이미 빈 공원의 의자에서
  십년은 젊어진 내 얼굴의 때를
  벗기고 있었다
  점점 밝아지는 아랫도리마저 젖어 선
  내 곁엔 어느새 잊혀졌던 과거의 장미가
  환히 웃으며 섰다.
  어쩌면
  울고 선 아사녀의 전설을 읽고 있다
  저쯤에서 비는 비껴 선 꽃잎을 찢으며
  그 잔인한 웃음을 던지다 사라지고
  문득 번개가 우뢰소리 더불어
  천년의 종을 울리고 있다
  탑신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놀란 장미꽃 이파리들이
  내 발등을 덮고 있다
  열기에 젖었던 아랫도리는 말라들고
  다시 지열은 들떠서 비를 걷어가고
  백랍같던 시벌의 하늘이
  한때의 꿈처럼 구름을 태워가고 있다
  내 곁엔 이국소녀가 석탑을 향해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쏘아대고
  놀란 한 마리 금오조가
  염천의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잠자는 내 먼 눈을 쪼으며


       달맞이꽃


  풀잎이 찬 바람에 누워
  별들을 세고 있는 강둑에서
  꽃처럼 기운 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에 한 점 온기도 없이
  이슬에 젖은 꽃잎을 떨굴 때
  언덕은 조용히 일어나
  마른 대궁이를 꼿꼿이 세우고
  감기저린 바람을 막아내고 있엇다

  비틀대던 욕망은
  강둑에 떨어져 잘려나면서
  손을 저었다, 너를 향하여

  그림자 지운 적막한 언덕에선
  시든 닮맞이꽃 그날을 웃고 섰는데
  어쩌란가, 정말 어쩌란가
  꺼지지 않는 불씨 하나
  끝나지 않은 사랑의 연습을

  강물이 열리고
  잠든 평원에 강물이 열리고
  우수 같은 첫눈이 녹아지면서
  또 내리고 있는데
  달맞이꽃, 그날 우리는
  다시 역류의 언덕에서 바라보겠네
  잃어버린 세월 마디를 풀며
  조용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김종희. 충북 청주 출생.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83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작품은 수직적인 시간과 수평적인
공간이 교차되는 순간을 포착, 한계성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까치가 오지 않는 집


  요즈음은
  우리집에도 까치가 오지 않는다
  뜰엔 까치가 와 앉을 나무가
  아직은 있는데도.
  햇살을 부풀리어
  까치의 청결한 목이나
  하이얀 앞가슴을
  적셔줄 맑은 이슬
  한 방울도 못맺는 아침.
  반가운 손님도 기쁜 소식도 없는 우리집
  밤 낮으로 대문은 안으로 잠겨 있고
  새벽마다 눈만 뜨면
  시퍼런 칼 자국이 난 신문이
  잿빛 뜰에 널브러져 있을 뿐
  신문을 들어올리는 나의 손 끝에선
  언재나
  까맣게 탄 하늘이 보인다.
  까치는 없고.


       매장


  숨을 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를 꽁꽁 묶어서 땅 속에 깊이 묻었다.
  발로 꾹꾹 밟아가며 단단히 묻었다.
  삽으로 때려가며 봉분도 만들었다.

  우리는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했다.
  '부디 안녕히 계셔요'
  나는 작별인사까지 했다.

  아버지를 등지고 산을 내려올 때는
  수많은 무덤들을 만났다.
  허물어진 낡은 무덤, 새 무덤
  큰 무덤, 작은 무덤, 초라한 무덤.

  나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고 또 보면서
  아버지의 무덤을 확인했다.

  무섭다, 우리는 무슨 짓을 했는가
  --아버지를 메어다 산에 묻어버린 자식들--
  나는 몸을 떨며 차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보다 먼저 거기에 와 계셨다.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아버지와 함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안고--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김진경. 1953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시 '보리피리'
'부엉이 울음' 등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80년 역사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민족과 역사적 현실이 형상화된 시들을 주로 발표하고 있다.
시집으로 "갈문리의 아이들" "광화문을 지나며"가 있으며 '5월 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T


  어릴 때 나는 검은 타이야표 통고무신을 신은 채
  까맣게 그을린 배가 툭 튀어 나와 있었고,
  동네 논에 불시착한 헬리콥터에서
  쑤알라거리면서 내리는 미군은
  사랑이니 평화니 말하기에는 우주인처럼 생소해서
  내 친꾸의 아버지는 망가진 벼값을 받을 수 없었다.

  군에서 휴가나왔을 때에 빌리 그레함이 왔고
  여의도엔 300만 인가가 모였고, 어머니도 그 중에 하나였고
  비가 오려고 했으므로 우산을 들고 어머니를 찾으러 갔고
  300만은 기도하고 있었다.
  사할린, 만주 등등에 있는 동포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때 가까이 서울에 있는 동포 중에는
  밀린 임금을 받으려 단식하다 떨어져 죽기도 했으므로
  나는 사람들이 갑자기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 데 놀랐고
  빌리 그레함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헬리콥터에 올라 여의도를 한 바퀴 돌았고,
  사람들은 무슨 신음 소리를 냈으므로
  나는 그가 대단한 우주인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빌리 그레함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어릴 때의 나처럼 배를 툭 내밀고
  눈에서, 심장에서, 손끝에서 번갈아 불빛을 반짝이며
  광화문에서, 종로에서, 영등포에서
  사랑과 평화의 대군단을 이루었다.
  더욱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라.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평화를 우주인에게
  그때 서울에서는 모처럼의 봄이 지나갔고
  사람들은 고개를 움츠리며 코트 깃을 세웠고
  가까이 있는 것들은 무관심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


       풀잎


  풀잎 속엔 찰랑찰랑 강물소리 들린다.
  얼음 밑을 시리게 흘러가는 강물
  이상하다. 쨍쨍한 햇볕 속에서도
  풀잎 속엔 흰 눈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

  엄니야, 네가 돌아오는 벌판의 어둠이 보인다.
  돌아보면 세상은 언제나 흰 눈으로 등 뒤에 멈추어 있고
  빨갛게 젖은 귀가 비인 바람소릴 듣고 있을 뿐
  세상 어디에 언 손을 녹일 한 뼘 지붕이라도 있었느냐.

  엄니야, 풀잎 속엔 찰랑찰랑 강물소리 들린다.
  힘없는 글줄에 매달려
  농약 공장 하루 일
  물집 잡힌 네 손보다 못한 것을 시라고 부끄러워질 때
  흰 눈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

  이상하다. 쨍쨍한 햇볕 속에서도
  시린 강물소리 들리고
  매운 바람에 쏠리는 따가운 불티
  시리고 뜨거운 한 점 사랑.
  무수히 쨍쨍한 햇볕 속을 흔들려 온다.

 

  김창규. 1954년 충북 보은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창작과 비평"사의
16인 신작시집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분단시대'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분단이 낳은 상황을 절실하게 시화하고 있다. 현재 교회
담임 전도사로 있다.

       비무장 지대


  전쟁의 포화가 멈춘
  저격능선 무명고지에
  바위 모서리 진달래꽃
  피어 있다.

  밤골마을 허물어진 담장
  여기저기 뒹구는 깨어진 가마솥
  조니워커병이 함께
  순이가 닦던 꽃무늬 접시와 어울려
  폐허의 마을을 지키고 있다.

  수색정찰조가 지나가면 그뿐
  노려봐야 할 아무것도 없는 우리땅
  휴전선을 넘어서
  이데올로기란 휴전선을 넘어서
  자유로운 그날

  죽일놈 하면서도
  서로가 죽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
  미군도 쏘련군도 중공군도 물러가고
  이 땅에 평화가
  참된 세상에 우리가 주인으로 남는
  비무장 지대


       동지를 위하여


  너와 나의 가슴 속에
  반만년을 이어온 뜨거운 사랑
  가난한 판자촌 꼭대기에
  깃발처럼 펄럭이는
  우리들의 그것

  바람부는 날
  험산 준령 넘어 온 손님을 맞아
  죽을 때까지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것을 위해 살아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개 죽더라도
  가슴과 가슴으로 문 열고
  소문이라도 좋은 소문 들리는 날
  목청껏 외쳐 부를 노래
  아! 만주

 

  김필곤. 1946년 경남 하동 출생. 1983년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한편, 종교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해 가고
있다. '시뿌림'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도서출판 '뿌리'에 근무중이다.

       편지


  편지를 쓰겠읍니다
  내 고향 산수유꽃
  향그러운 편지를 쓰겠읍니다

  민들레한테도
  종달새에게도
  강가에서 만난 밝은 바람과
  그리고 그날의 흰 구름에게도
  아득한 편지를 쓰겠읍니다

  저승의 어머님께
  속죄의 편지를 쓰겟읍니다

  신문배달 소년과
  청소부 아저씨와
  지하철 공사장의 박형에게도
  심청이 누이와 '쏘냐'에게도
  억새풀 편지를 쓰겠읍니다

  그리고
  고요가 소소히 익는 밤이면
  내가 나에게도
  포도주빛 편지를 쓰겠읍니다
  가시나무 편지를 쓰겠읍니다


       섬진강 강물 먹고


  일어서거라
  겨우살이 댓닢처럼 일어서거라
  병자년 산사태에 죽은 넋이랑
  피아골 전투의 전우들 넋이랑
  겉보리 까스라기처럼 일어서거라

  경상도 보리문동이 바람아
  전라도 호랑이 바람아
  지리산 화전민의 화난 바람아
  섬진강 강물 먹고
  반야봉 고사리 날것으로 먹고
  억새풀 울음으로 일어서거라

  도시것들
  노고단 언추리꽃 다 파가기 전에
  눈 속에 피어나는
  화개 칡꽃 향기로 일어서거라

  바람아
  바람아
  섬진강 강물 먹고 일어서거라.

 

  김해화. 1957년 전남 승주 출생. 1984년 "실천문학"사가 펴낸 "시여
무기여"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두엄자리' 회원이며
현재 공사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시작활동을 펴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우리들은
       --인부수첩 1


  우리는 별을 지우고
  우리는 별을 그릴 수 있다.
  하늘을 그리고 땅을 그리고
  우리는 모두를 지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들을 지우고
  그렇다 우리들의 비겁 우리들의 가난을 지우고
  우리는 우리들을 그릴 수 있다.
  우리들의 길들지 않은 노동으로
  건강한 혁명도 그릴 수 있다.
  어둠이여
  어둠보다 깊은 체념이여
  우리가 휘두르는 망치 아래 휘어지고 끊기는 철근
  그것들과 함께 묶여
  뼛속까지 스며서야 비로소 멈추는 아픔을
  원색의 욕설과 독한 술로 지우듯
  우리는 어둠을
  어둠보다 깊은 체념을 지울 수 있다.

  우리는 노래를 지우고
  우리는 노래를 그릴 수 있다.
  우리는 눈물을 지우고
  우리는 눈물을 그릴 수 있다.

  우리는 모두를 지우고
  우리는 모두를 그릴 수도 있다.


       어디만치왔냐


  1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내가 눈을 감고 너의
  참꽃내나는 어깨 위에 그냥 손을 얹고만 있으면
  그 봄날
     어디만치왔냐 감나무 밑에 왔다
     어디만치왔냐 당산 밑에 왔다
  순이야 감나무가 있고 당산나무
  푸른 방솔나무가 있고
  나물바구니 깔망태 아이들 우우 몰려가며
     어디만치왔냐 개굴창 건너 간다
     어디만치왔냐 논두렁길 간다
  그러면 꽃 지는 소리 꽃 피는 소리
  복사꽃 살구꽃 앵두꽃 우우우 피는 소리 우우우
  지는 소리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다 왔다
  눈을 뜨면 니가 있고 참꽃무데기 있고
  아아 내가 눈을 감고 꿈 꾸듯이
  니를 믿고만 있으면
  그 봄날

  2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갔냐 어디만치갔냐
  찬 바람만 휭휭 가슴을 때리고
  대답도 없이 어둠은 깊어만 가고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아아 어디어디있냐 어디어디있냐
  순이야 니는 어둔 길 저 쪽 어디서
  살을 팔고 웃음을 판다는데
  낯익은 길은 모두 파헤쳐져 버린 세상
  꿈 꾸듯이 믿을 사람 하나 없이
  나는 어둠 앞에 몸을 팔고 젊음을 파는데
     어디만치왔냐 새마을에 다 왔다
     어디만치왔냐 선진조국 다 왔다
  캄캄한 어둠 속에 신음소리 한숨소리
  울음소리, 소름끼치게 비명소리
     어디만치왔냐 정의사회 다 왔다
     어디만치왔냐 통일조국 다 왔다
  풀냄새 꽃냄새 풀풀나는 어깨도 없이
  믿고 붙잡을 어깨도 없이 어둠 속에서
  언제부터 그냥그냥 들려오는 달디 단 목소리
  가다보면 길을 막는 날카로운 가시철망
  소리도 없이 다가와 손목을 묶고
  발을 거는 세상
     어디만치왔냐 자유 평등 다 왔다
     어디만치왔냐 복지사회 다 왔다
  가도가도 끝도 없이 캄캄한 세상
  달디 단 목소리는 멀리서만 웅웅대고
  가파른 길 가시밭길 넘어지며 피 흘리며
  아아 목이 마른데, 목이...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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