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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상징사전
조향사는 향수를 쓰지 않는다
장석주 (시인) |
‘생명’에 집중된, 미학적 치열함의 알레고리들
박 성 현
시의 공간은 시인 자신의 내밀한 장소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의식들이 끊임없이 관통하는 공개된 장(場)이다. 마치 광장이 수많은 개인들의 발자국을 보존하면서도, 일정한 경향을 가진‘움직임’을 유도하는 것처럼, 시의 공간은 시인과 대상과의 내적 거리를 만들어내면서, 다양한 시의 내용과 방법, 그리고 형식을 생성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애초에 ‘시’란 정신의 작업,혹은 무형의 춤과 같기 때문이다. 발레리가 말한 것처럼, 시는 “확정되지 않은 작업 속에서 필요와 목표, 수단 또 장애물까지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따라서 시인은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시작(詩作)을 통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사물 속으로 침잠(沈潛)하며, 그들과의 교감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한다.
블랑쇼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 한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것에 따라 현재의 우리가 된다”(<문학의 공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닌, ‘사회-속의-나’가 타자를 지각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으로서 시를 생산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세계관으로서 리얼리즘의 핵심이다.
사실의 정교한 배치 혹은 해석의 변증(辨證)
1925년, 영화 <전함 포템킨>은 몽타주라는 상당히 세련되고 낯선 미학을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몽타주는 두 개의 극단적인 쇼트를 대비함으로써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미학으로, 대상들의 변증(辨證)을 통해 의미가 생성된다. 때문에 몽타주에서는 대상의 배치도 중요하지만, 그 배치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의 의미들이 더 중요하다. 몽타주에서 촉발되는 ‘현실-이미지’는 세계의 재현이라는 단순한 ‘미메시스’(mimesis)가 아닌, 제3의 의미 혹은 해석이다. 주체는 사실들을 각각의 맥락 속에서 정교하게 병치하고, 충돌시킴으로써, 관객들의 감각을 재구성하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감각을 이끌어낸다. ‘사실들의 총체’(비트겐슈타인)는 이 몽타주를 통해 ‘해석들의 총체’로 탈바꿈한다.
강신애 시인의 신작시 「유령어업」은 이러한 몽타주를 기반으로 시인이 경험했던 사실들을 적절하게 편집, 배치함으로써, 미학적으로 놀라운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예컨대, ‘우산 손잡이 / 깃털’, ‘라이터 / 아가미’라는 생명의 ‘있음’과 ‘없음’의 대립적 이미지를 병치한다든지, ‘로프 모니터 야구장갑 노란 오리 파란 염산통 쪽지가 든 표류병’, ‘무지개 샌들’ 등의 물신화된 죽음을 무질서하게 나열함으로써 시의 정서적 충격을 확장한다. 시인은 자신이 포착한 ‘도시의 부유물’들을 병치와 나열의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죽음에 침윤되어버린 실존의 ‘몰(沒)-실존성’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알바트로스 어미가 새끼에게
병뚜껑을 먹이고 있다
인형 머리가
물고기를 해변에 토해놓는다
우산 손잡이와 무관한
깃털이
라이터와 무관한
아가미가 발치에 흩어져 날린다
나는 숨이 차고
좌표를 잃는다
소보록하게
폐활량을 가득 채운 내장의 출처는
저 바람과 해류에게 물어야한다
로프 모니터 야구장갑 노란 오리 파란 염산통 쪽지가 든 표류병
추락한 비행기 무지개 샌들……
보도블럭과 하수구를 흘러 태평양의 무풍지대에 이른
도시의 부유물들이
잘게 쪼개져
플라스틱 플랑크톤 대륙을 빙빙 돌리고 있다
내가 해를 바로 보지 못하고
그 거대한 환류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은
바닷새와 무관하다
내 방이 볼리스로 산을 이루었다
몸부림칠수록
그물이 숨통을 조여온다
- 「유령어업」 전문
북태평양 아열대 환류를 따라 작은 대륙만한 쓰레기 섬이 있다. 오로지 죽음만 존재하는 이 불모의 대륙은 인간이 처한 끔찍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대륙은 미국의 텍사스 넒이 정도이고, 쓰레기양도 300만t이나 된다. 산소가 없기 때문에 물고기나 새우 등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폐그물, 폐통발 등 유실되거나 버려진 어구들로, 바다 속에 존재하며 물고기를 마구잡이로 포획한다. 뿐만 아니다. 바다거북, 바닷새, 물범이나 고래 등도 한번 걸리면 예외 없이 죽는다. 이것이 바로 ‘고기 무덤’ 혹은 ‘바다의 지뢰’로 불리는 ‘유령어업’(ghost fishing)의 실체다.
주목할 부분은 시인이 인간을 위협하는 환경파괴의 실상보다는, 인간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하는 고귀한 생명과 그것이 결국 인간의 실존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말한다, “내 방이 볼리스로 산을 이루었다 // 몸부림칠수록 / 그물이 숨통을 조여온다”고. 바다는 생명체가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하는 복잡한 생태계로, 균형이 무너지면 지구의 생명력도 위험하다. 시인 자신의 환유라 할 수 있는 ‘방’도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시인은 자연과 인간은 하나의 혈관으로 이어져 있으며, 그 연결고리가 끊어질 때 인간은 존재의 집을 잃어버린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세계관은 ‘자연’이라는 타자를 주체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적이고 대립적 관계는 ‘타자-안의-주체’라는 새로운 의미망으로 압축된다. 시인이 ‘알바트로스’에게서 느끼는 고통이 개인의 연민이나 동정을 넘어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인은 고통의 사회적 감각화를 정치(鼎峙)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알바트로스 어미가 새끼에게 ‘병뚜껑’을 먹이는 상황이나 “인형 머리가 / 물고기를 해변에 토해놓는” 상황은 “나는 숨이 차고 / 좌표를 잃는다”, “몸부림칠수록 / 그물이 숨통을 조여온다”라는 구절 속에서 통각(痛覺)으로 직결되며, 바로 이 좌표에서 시인이 만들고자 하는 ‘고통의 사회적 감각화’는 시작된다. 시인의 상상력은 자연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다가선다. 자연과 인간의 일치를 강조함으로써, 자연의 지배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서구과학문명’의 불합리를 바로잡고자 하는 생명근본의 유연한 상상력 말이다.
죽음, 인간의 보편적 가능성
강신애 시인이 집중한 ‘죽음과 생명’의 대비는 인간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치열하게 확대된다. 시인은 「조 블랙」이라는 다소 유머러스하면서도 삶의 문제를 직설하는 시를 통해 개인의 문제가 바로 인간 군상의 문제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릴케는 죽음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속성―곧, ‘낯선 죽음’과 ‘고유한 죽음’―이 존재한다고 언급한다. 전자는 우연한 사건에서, 후자는 삶의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주목할 부분은 릴케가 ‘고유한 죽음’의 관점에서만 자신의 삶을 조망할 수 있다고 한 점이다. ‘고유한 죽음’이란 ‘유기적으로 성숙하는 과일의 핵’과 같은 것으로, 과일 속의 씨앗이 과일을 무르익게 하듯이 인간 속의 죽음도 인간의 삶을 성숙케 한다. 「조 블랙」의 기저도 릴케의 그것과 동일하다.
이층 긴 복도를 지나 왼쪽 5번 방
거기서 조 블랙을 만났다
생전 처음 사랑 때문에 맺힌 눈물의 질감을
손끝으로 가만히 비벼보는
조 블랙의 눈물은 피넛 버터 맛일까?
조 블랙은
샘 블랙이나 윌리엄 블랙, 찰스 블랙이 될 수 없지만
블랙은 항상 블랙이어서
조 블랙의 꽃다발은 안개 속에 묻힌다
밀폐된 방
소파는 더럽고
환기통은 고장 났지만
나를 위해 거듭 몸을 바꾸어 태어나는
나를 위해 청보라빛 눈동자 속을 열어 보이는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 움직이는 조는
죽음을 복제하는 자, 남의 육체를 뒤집어쓰고
영겁의 옷을 벗기는 자
나올 때
내 몸은 붕 뜨는 느낌이었다
조 블랙이 나의 블랙을 데리고 푸르른 정지 화면 속으로 사라진 것
나는 블랙이 그렇게 큰 부피를 차지하는지 몰랐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나는
블랙, 블랙, 외쳤다
조 블랙이 위례성 방향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조 블랙」 전문
여기서 ‘조 블랙’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블랙’으로 명명될 때, 그는 이미 죽음과 밀접한 존재 혹은 죽음 그 자체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시인도 ‘조 블랙’을 “죽음을 복제하는 자”이며, “남의 육체를 뒤집어쓰고 / 영겁의 옷을 벗기는 자”로 묘사하면서, 그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샘 블랙이나 윌리엄 블랙, 찰스 블랙이 될 수 없”어서 ‘조 블랙’일 수밖에 없다는 다소 아이러니한 시구를 통해 시인은 죽음이 오로지 개인의 문제라는 실존적 세계관에 접근한다.
죽음은 경험적 사실로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현존재의 내적 필연성으로서의 ‘가능성’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한 존재’인 것이다(하이데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함축한다. 죽음의 ‘삶에 대한 불가능성’의 영역을 ‘생생한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타자의 죽음’이라는 경험적 차원의 죽음을 주체의 고유한 죽음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시인에게 ‘조 블랙’은 “나를 위해 거듭 몸을 바꾸어 태어나는 / 나를 위해 청보라빛 눈동자 속을 열어 보이는 /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며, 시인의 내적 필연성에서 기인하는 ‘죽음’의 고유성이다.
시인은 “이층 긴 복도를 지나 왼쪽 5번 방”에서 ‘조 블랙’을 만난다. 그 방은 “밀폐된 방 /소파는 더럽고 / 환기통은 고장”난 곳으로, 모든 것이 낡고 병들어 있는, 마치 죽음의 내부와 같은 장소이다. ‘조 블랙’은 ‘블랙’이라는 이름 때문에, “샘 블랙이나 윌리엄 블랙, 찰스 블랙”의 유비적 관계를 형성하지만, 정작 ‘조 블랙’은 단 한 명의 존재다. 이는 샘 블랙이나 윌리엄 블랙, 찰스 블랙에게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다른 존재를 통해 매개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자신만이 죽음과 조우할 수 있다. “조 블랙이 나의 블랙을 데리고 푸르른 정지 화면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시인은 ‘왼쪽 5번 방’에서 자신의 고유한 죽음인 ‘조 블랙’을 대면했던 것이다.
이처럼 현존재가 죽음을 자신의 삶의 종말로써 인식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의 의미를 적극적인 것으로 보는 인식론적 전환이다. 현존재가 자신의 삶의 유한성을 깨달을 때 그는 삶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존재로 바뀐다. 결과적으로 죽음이란 단지 삶의 종말이 아닌, 존재를 기획하고, 스스로를 책임지게 하는 적극적인 투사다.
‘나비’라는 시작(詩作)의 방법적 형이상학
강신애 시인이 집중한 생명, 즉 죽음의 문제는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일정한 경향성을 보인다. 화염에 둘러싸인 ‘미림산’─“화귀(火鬼)는 숲을 먹고 숯을 토했다”─에서 “녹색의 요람에서 쫓겨난 밑동들 잿더미 돌멩이들”을 감내하는 ‘사내’는 시인의 또 다른 내면임에 틀림없다.「광시(光視)」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시인은 죽음이라는 ‘가뭄의 내부’로 뛰어든다.
미간으로 햇빛이 골을 판다
미간으로 낙엽이 굴러든다
나비를 잡으면 회절하는 나비 떼
숲을 거느린 머리카락
오디 입술
수액이 증발하는 너의 배후로
유리체가 녹아 유리 조각을 빚다니
유리체가 녹아 사스레나무 껍질을 날리다니
가뭄을 견딘 망막이 당겨진다
거기, 찌릿찌릿한
네가 서 있고
흑점이 모아져 눈물 난다
번지는 작약, 은색 홀씨
플래시 터뜨리는 이 세계의 빛 부스러기들
이 어지럼증, 칠흑 세계의 잔상들
찡그리며 찡그리며 웃는
이 눈부심
- 「광시(光視)」 전문
전통적으로 시는 언어의 내부로부터 번져오는 아이러니에 충실하다. 사실과 사실 이면의 어긋남, 혹은 관계와 관계 사이의 모호한 균열은 시적 긴장(tension)을 효과적으로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형식주의자들이나 브레이트의 (포괄적 의미의) ‘낯설게 하기’는 벤야민이 말했던 ‘정지의 변증법’과 직결된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식은 변형, 일그러짐 즉 어긋남이나 모호한 균열에서 그 정신적 틀은 깨지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나비는, 미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 변모한다. 즉, 미추가 아니라 선악이며, 관조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시인은 ‘나비’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만개한 ‘지배되지 않는 야생성’을 본다. “나비를 잡으면 회절하는 나비 떼”와 같은, 그 환상의 편린들은 시인의 무의식이고, 집요하게 의식에 저항하는 실체이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유리체가 녹아 유리 조각을 빚”고, “유리체가 녹아 사스레나무 껍질을 날린다”는 부분이다.앞의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시인은 하나의 연 속에 ‘유리조각 / 사스레나무’와 같은 생명의 없음과 있음을 대비하고 있다.
나비에 삶을 투영하고 있으나 의인화하지 않으며, 나비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 시선은 시인의 내부로 향한다. 이것은 ‘사실’과 사실 ‘이면의 것’ 혹은 관계의 ‘모호한 균열’을 보여주는 것으로, “미간으로 햇빛이 골을 판다 / 미간으로 낙엽이 굴러든다”와 같은 문장에 집약된다.다시 말해, ‘미간’이라는 인식의 층위와 ‘햇빛’, ‘낙엽’과 같은 무의식의 층위가 마치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ía)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확실히 세계는 각각의 몫으로 흩어져 있으며 잘게 쪼개져 부드러운 ‘리좀’을 형성하고 있다. 시인이 말한 “거기, 찌릿찌릿한 / 네가 서 있고 / 흑점이 모아져 눈물 난다”는 부분이나, “번지는 작약, 은색 홀씨 / 플래시 터뜨리는 이 세계의 빛 부스러기들”과 같은 부분이 묘파하는 것처럼, 그것이 위 시의 마지막 연, “이 어지럼증, 칠흑 세계의 잔상들 / 찡그리며 찡그리며 웃는 / 이 눈부심”이라는 존재의 만화방창(萬化方暢)으로 확장될 수 있는 힘이다.
문장의 메커니즘 혹은 탈 형이상학
문장은 주체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다. 우리는 문장으로 사유하고 문장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유와 소통이 명징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과녁 너머로 사라지며, 또 어떤 것은 과녁의 가장자리에 꽂힌다. 물론 과녁의 정중앙에 꽂힌 문장이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통과 사유의 최대치를 말하는 것이다. 문장은 시인이 사물을 받아들이고 사물과 소통하는 메커니즘에 해당한다.명백히, 문장이란 시인에게는 고유한 세계관이며 사유의 틀이자 사물 그 자체다.
산비탈을 급히 내려가다
샘을 핥던
고라니 새끼의 동그란 눈과 딱 마주쳤다
놈은 펄쩍,
뛰어오르더니 물가에 나동그라졌다
고요한 숲이 쿵! 흔들렸다
애처로운 연노랑 배를 버르적거리다
칡덩굴과 엉겅퀴 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새끼는 어디에 가서 울고 있을까
산 중턱에서 꺾인 낙엽송을 밟고 선 짙은 갈색 몸집이
어미인지도 모른다
젖내 나는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가
인간의 눈빛과 맞닥뜨린 사태를 낱낱이 고할지도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린 찰나의 공포를
긁힌 털가죽 깊이 심어 넣었겠지
그 씨앗 같은 눈은 더욱 검어지고
내 눈은 더욱 더듬거리겠지
- 「각인」 전문
이 시는 문장과 문장론에 대한 시인 자신의 고백이며, 시인을 넘어서서 문장 전체에 대한 일반론이다. 시인이 말하는 문장은, 모호함이 아니라 선명함이고, 안개 능선과 같은 애매함이 아니라 투명한 호수 같은 적확함이다. 하나의 사물 속에서 세계를 관통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그것에서 나온다. 의미의 확장은 정확한 의미의 집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문장을 만들 때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다. 정확한 단어를 뽑아내야 하고, 그 단어가 흘러가서 관통해야 할 맥락을 찾아내며, 맥락이 흩어짐이 없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문장은, 시인이 노래하는 것처럼“샘을 핥던 / 고라니 새끼의 동그란 눈과 딱 마주”치는 순간에 생성된다.
그런데 그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놈은 펄쩍, / 뛰어오르더니 물가에 나동그라”지기도 한다. “고요한 숲이 쿵! 흔들”릴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문장과 감각의 접경이 완전히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애처로운 연노랑 배를 버르적거리다 / 칡덩굴과 엉겅퀴 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진다. 무슨 이유일까. “산 중턱에서 꺾인 낙엽송을 밟고 선 짙은 갈색 몸집이 /어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미’라는 시어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시인과 고라니가 정신적 교감의 실체로, 시가 단순히 시인의 자존감이 아니라 타자와의 내면화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매개체다. 문장이 사물에 닿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하나의 문장이 확연한 의미를 가지고 다른 문장으로 이어져 완곡한 성채─‘씨앗 같은 눈’─를 쌓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문장과 문장 이전의 심연은 스틱스 강(styx)처럼 이전 형체의 사라짐 혹은 본질의 ‘탈-형이상학’과 동일하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문장 이전 혹은 비문(非文), 즉 문장으로 만들었으나 문장으로 충족되지 못한 글자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다. 이 태도는 “젖내 나는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가 / 인간의 눈빛과 맞닥뜨린 사태를 낱낱이 고할지도 /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린 찰나의 공포를 / 긁힌 털가죽 깊이 심어 넣었겠지”라는 구절에서 ‘찰나’와 ‘공포’라는 두 단어에 집중된다. 이 두 단어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그만큼 사물의 메커니즘과 그 이면을 읽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메커니즘의 총체성에 자신의 감각을 집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고라니가 “물가에 나동그라졌”을 때, 중력은 고라니를 잡아당겼던 필연이었다. 이때 고라니는 중력을 거스르고자 했던, 다시 말해 중력의 내부이자 외부인 것이다. 따라서 고라니는 부처를 버리면서까지 해탈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운명 혹은 문장을 버리고 그 문장의 최대치에서 문장의 속내를 뒤집는 그 ‘미학적 치열함’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 <시산맥> 2013년 가을호
유령어업 외 4편
강신애
알바트로스 어미가 새끼에게 병뚜껑을 먹이고 있다
인형 머리가 물고기를 해변에 토해놓는다
우산 손잡이와 무관한 깃털이 라이터와 무관한 아가미가 발치에 흩어져 날린다
나는 숨이 차고 좌표를 잃는다
소보록하게 폐활량을 가득 채운 내장의 출처는 저 바람과 해류에게 물어야한다
로프 모니터 야구장갑 노란 오리 파란 염산통 쪽지가 든 표류병 추락한 비행기 무지개 샌들……
보도블럭과 하수구를 흘러 태평양의 무풍지대에 이른 도시의 부유물들이 잘게 쪼개져 플라스틱 플랑크톤 대륙을 빙빙 돌리고 있다
내가 해를 바로 보지 못하고 그 거대한 환류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은 바닷새와 무관하다
내 방이 볼리스*로 산을 이루었다
몸부림칠수록 그물이 숨통을 조여온다
*볼리스(bolus) : 소화 안 된 음식을 토해내는 것
-《시산맥》2013, 가을호
조 블랙
이층 긴 복도를 지나 왼쪽 5번 방 거기서 조 블랙을 만났다 생전 처음 사랑 때문에 맺힌 눈물의 질감을 손끝으로 가만히 비벼보는 조 블랙의 눈물은 피넛 버터 맛일까?
조 블랙은 샘 블랙이나 윌리엄 블랙, 찰스 블랙이 될 수 없지만 블랙은 항상 블랙이어서 조 블랙의 꽃다발은 안개 속에 묻힌다
밀폐된 방 소파는 더럽고 환기통은 고장 났지만
나를 위해 거듭 몸을 바꾸어 태어나는 나를 위해 청보라빛 눈동자 속을 열어 보이는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 움직이는 조는 죽음을 복제하는 자, 남의 육체를 뒤집어쓰고 영겁의 옷을 벗기는 자
나올 때 내 몸은 붕 뜨는 느낌이었다 조 블랙이 나의 블랙을 데리고 푸르른 정지 화면 속으로 사라진 것 나는 블랙이 그렇게 큰 부피를 차지하는지 몰랐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나는 블랙, 블랙, 외쳤다
조 블랙이 위례성 방향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산맥》2013, 가을호
가을 애인
너를 사랑하는 일은 태양에 귀걸이를 다는 일 너를 이해하는 일은 샤론나무의 질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
박동이 필요하다 석류를 위해 더 많은 D, 더 많은 누수를 위해
씀바귀 코스모스에게
한 생을 얇게 떠있구나
짧아진 햇살 당겨 허리에 금빛 문신을 해 줄게 시곗바늘 따윈 부러뜨릴게
누런 흙에 대한 모호한 애착, 모호한 기분으로 모호한 읊조림으로 천천히 흔들리다 가렴 가을이니까
씀바귀를 꺾다가 끈적한 것을 발견한다
세계가 흰 피로 이루어져 있다니!
-《시와시》2012, 겨울호
말들이 뛰노는 바닷가에
말들이 뛰노는 바다에서 말들을 쫓는 젊은이를 사랑했네
바다는 흰 말들을 풀어놓고 철썩철썩 때리며 후미진 바위 깊숙이 말들을 몰아갔네
고삐를 빙빙 돌리며 나는 듯 달리는 젊은이를 사랑했네 고삐를 씌우고 말의 등에 올라탄 벌거벗은 소년을 사랑했네
햇빛 휘감아 하나 되어 달렸네 말들은 열 갈래 만 갈래 갈라지며 바다의 푸른 맥을 보여주었네
물속에 잠겼다 튀어 오르는 싱싱한 청어 두 마리
헉헉 노을 뱉으며 끝없이 달리는 말
젊은이는 고삐를 조여 말의 목을 비틀었네 말은 울고 날뛰고 다리를 꺾었네
말을 묻고 하얀 모래로 덮었네 바다와 흰 말들뿐인 해변에서
울부짖던 핏빛 아가리처럼 석양이 두 손을 붉게 물들였네
히힝거리며 말들이 달려와 말의 묘지를 핥고 갔네 히힝거리며 말들이 달려와 말의 묘지를 핥고 갔네
황금 물비늘 한 점이 혈관 속으로 새처럼 깃드는 시간
말의 무덤을 파냈을 때 말은 없고 모래 위 하얀 거품만 남아 있었네
말들이 뛰노는 바다를 바라보다 젊은이는 흩날리는 갈기를 향해 꿈꾸듯 걸어갔네
-《현대시학》2012, 12월호
가장 조용한 죽음
몽골에서 양 잡는 것을 보면 사람 둘, 짐승 하나가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
한 사람은 뒤에서 양을 꼭 껴안고 한 사람은 앞발을 잡고 명치를 찔러 애인의 가슴을 움켜쥐듯 심장동맥을 움켜쥐고 가장 고통 없이 즉사시킨다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살리는 것이다
속삭이는 주인의 품에 폭 안겨 양은 한 마디 비명도 없이 커다란 눈만 껌벅이고 있다
하늘의 솜다리 꽃이 하강한 양
말의 발굽에 밟혀 진동하는 꽃향기처럼 제 몸 냄새를 들판에 퍼뜨리지만 에튀겐*에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용히 별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환생을 지켜보는 것 같다
*몽골 대지의 신
-《창작21》2012, 여름호
강신애 1996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불타는 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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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 속에 깃든 파파피네,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당신 안에 깃든 파파피네를 위해 이번 시집에서 강신애 시인은 ‘파파피네’라는 특별한 존재에 주목한다. ‘파파피네’는 태평양에 있는 미국령 섬 ‘아메리칸 사모아’에서 제3의 성(性)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으로, 이들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성의 삶을 선택하여 여성성을 내속(內屬)해가며 청소와 빨래, 육아와 노약자 보호 같은 전통적 가사에 종사한다. 시인에 따르면 ‘파파피네’는 “신을 쏙 빼닮”았고 “신성한 힘과 아름다움이 무한 수렴”(「파파피네」)되는 위대한 심미성의 존재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율법의 신이 아니라 포용/수렴의 신의 자식들로 거듭난 삶을 사는 존재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현실적·세속적 성별 전이는 차라리 탈현실적·탈세속적 지평으로 초극되는 사태의 일종이라 말할 수 있다.
“여자이면서 남자인 인간”으로 남녀 성차(性差)의 외부에 존재하는 ‘파파피네.’ 이때 ‘외부’는 이들이 비정상과 일탈의 무리로 차별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무서운 기호다. 그러나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트랜스젠더가 개인의 성적 취향과 욕망에 대한 미약한 존중 속에서나마 자율적인 소수자의 지위를 열심히 개척하고 있다면 ‘파파피네’는 공동체의 원리와 전통의 일부로 일찌감치 제도화되어 집단의 안정과 지속에 긍정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파파피네”와 스스로를 두려움 없이 연관시킬 수 있다면, 우리 역시“두 개의 내면”을 가지고 있는 “파파피네”의 잠재적 가능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정상이나 “소점(消點)” 같은 이성의 간지(奸智)가 아니라 “굴절, 혹은 왜곡이 창조해낸” 다성적이며 불확실한 존재, 곧 “파파피네”의 명랑한 이웃으로 호명될 것이다.
당신 안의 비밀한 영혼이 떠오를 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파파피네”의 자기 긍정과 상호소통의 아름다움에 도달할 것인가? “내 닫힌 귀는 없는 목소리를 듣고/내 닫힌 눈은 떠도는 나비 무늬를 의심하지 않”는 삶의 지평에 올라서는 일, 아니 그 문턱 앞에라도 간신히 다가서는 일. 아마도 그곳을 향한 실존적 모험의 문패에는 “가장 깊이 자신을 버린 자의 아름다움으로”(「소리 없는 바이올린」)라는 말이 적혀 있을 것이다. 이런 존재 최후의 고통스런 방기(放棄), 아니 무한 자유로의 명랑한 투기(投企)는 어떻게 가능한가.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는 그것이 무섭고 불확실한 ‘자기 던짐’을 향해 “캄캄한 수압을 문지르고 파도의 속살을 뜯으며 소리 없이 연주하고 또 연주”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비밀의 틈으로 떠오르는 영혼”을 엿보고 만나는 일이다. 그 특별한 만남을 통해 우리는 세속적인 단성(單性)화와 이분법을 넘어 다성(多性/多聲)의 존재로 해방된다.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를 읽으며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타자’로서 억눌러온 자신 안의 ‘당신’을 꺼내는 작업에 동참하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과 타자에 대한 사랑의 확산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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