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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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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옥타비오 빠스 _ 시적계시 댓글:  조회:1375  추천:0  2018-07-25
옥타비오 파스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미지가 이 책의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책들이란 꼭 필요한 책들을 의미하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들이다."란 대목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 책을 통해 제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기에 혹시 다른 분들께도 그러한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옮긴이들이 먼저 읽으라고 권해주신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2부를 올려드립니다.  시에 앞서 삶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을 때의 당혹과 두려움, 고뇌와도 같은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는 원초적인 정서 체험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인용들이 넘칩니다. 「랭보는 말하기를, 시의 혁신성은 "사상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감춰진 오의奧義를 보편적 영혼들이 감지할 수 있도록 잡아내는 능력에 있다"라고 한다.」 334 옮긴이의 글 『활과 리라』는 파스가 가장 애착을 느꼈던 책이다. 젊은 시절 고민하던 '존재의 이유'를 이 책을 통해 풀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담고 있는 내용이 진지하다. 이 책은 1부 시란 무엇인가? 2부 시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3부 시와 사회의 관계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명증한 사색을 담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는 그 중에서 2부를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동양 사상을 인용하면서 시적 경험에 대해 써 내려간 그의 글이 우리에게 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옮긴 우리들에게도 매우 소중한 책이다. 오늘의 우리를 키워준 책. 평생 옆에 두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시란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아가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는 현대가 어떤 시대인지…… 『활과 리라』는 파스를 격동의 대륙 중남미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하고, 그 결과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다. 단순한 시론서詩論書가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꿰뚫는 안목을 열어주는 고전 같은 책이다. 또한 20세기에 스페인어로 씌어진 대표적인 산문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책의 문체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글은 정교하고 치밀하면서도, 매우 시적이어서 존재의 내밀하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흐름에 취해 현기증이 일 때가 많다. 백척간두에 선 듯한 아찔한 현기증. 때때로 책갈피 뒤에 숨어 있던 존재의 이면이 홀연히 드러나고, 그때 시간과 공간은 역류逆流하기도 한다.  활과 리라  제1판 서문  글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더 적절한 정의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책들, 내가 말하는 위대한 책들이란 꼭 필요한 책들을 의미하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들이다.  이 책에 씌어진 나의 대답이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부응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이 일반적인 동의를 얻을 것인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 글에서 표현된 내 대답의 깊이와 유효성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필연성에 충실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시를 쓴다는 것이 진정 가치가 있는 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삶을 소재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는 시적 창조를 통해 글로 씌어지지 않고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까? 시를 통한 보편적인 영적 교감은 가능할까?  1942년에 호세 베르가민이 십자가의 성 요한의 탄생 사백 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 나를 초대했다. 이 강연회는 내게 청소년 시절부터 줄곧 생각해오던 질문에 대해서 좀더 생각을 다듬어서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그 글은 잡지『탕자El Hijo Prodigo』5호에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Poesia de soledade y poesia de comunion」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책은 그때의 글이 성숙되고 발전된 것이며 어떤 점에서는 바로잡은 것이다. 이 책을 내면서 특별히 고마움을 표해야 할 이름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진 빚이 엄청난 것이어서 책 속에서 어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감사함을 표시하려고 애썼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알폰소 레예스*에게는 감사를 표하고 싶다.  *Alfonsd Reyes(1889~1959). 멕시코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멕시코에서 가장 풍요로운 결과를 낳았던 지식인 운동 가운데 하나인 '1910년 세대'에 속했다. 희랍의 고전과 유럽, 스페인 그리고 중남미의 문학, 사회학, 지리학, 문화, 철학 등 전 분야에 걸친 박학함으로 중남미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가 보여준 우정과 모범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그가 썼던 책들 『문학적 경험La experiencia literaria』, 『경계 설정El deslinde』그리고 다른 작품들 속에 산발적으로 실려 있는 많은 귀중한 에세이들이 내게 모호했던 것을 명료하게 밝혀주었고 불투명했던 것을 투명하게 해주었으며 복잡하게 얽힌 것을 쉽고 가지런히 바로잡아주었다. 한마디로 나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멕시코, 1955년 8월 옥타비오 파스 2부 시적 계시La revelacion poetica 피안彼岸  인간은 그가 시간적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인 리듬에 자신을 담으며, 리듬은 스스로를 이미지로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의)입술이 가늘게 열리며 시를 낭송하자마자, 그 이미지는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창조적 반복인 리듬의 작용으로,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의미들의 다발인 이미지는 참여로 통하는 문을 연다.  시 낭송은 축제요 교감交感1)이다. 이러한 교감을 통해 분배되면서 재창조되는 성체는 바로 이미지이다.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하게 되는데, 그 참여란 다름 아닌 원초적 순간의 재창조이다. 이렇게 해서, 시에 대한 분석은 자연스럽게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된다.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과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이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케 만든다.  하지만, 원시적 의식 구조에서부터 유행, 정치적 광신, 심지어 범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신성한 형태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정신분석학이나 역사주의라는 말만큼이나 남용된 '신성한'이란 개념이 지니는 의미의 다양함은 우리를 최악의 혼란 상태로 몰고갈 수 있다. 때문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고, 시란 단지 스스로에 의해서,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영접 교섭 혹은 가톨릭의 의식인 성찬식을 뜻하는 단어인 comunion을 교감이라고 번역한 것은, 옥타비오 파스의 진의를 살려 되도록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서 파스 자신이 언급하듯, 현대시의 과업은 종교와 공유하고 있는 원초적 신성함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를 낭송하며 공감하는 것은 미사에서 예수의 몸인 성체聖體를 신도들이 나누어먹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현대인이 발견한 사유와 느낌의 방식들은 우리가 흔히 인간 존재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성이나 윤리 혹은 현대적 관습이 감추거나 폄하하는 모든 것은, 그 옛날 소위 원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실재實在 앞에서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태도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애써 무시해도 자기 무의식의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 인류학은, 인간이 비정상적인 상태나 신경 쇠약에 빠지지 않고도 꿈과 상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술적, 종교적 제도와 신화에 대한 연구가 유행하는 것은, 원시 예술이나 무의식의 심리학 혹은 신비주의 전통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런 관심들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재不在에 대한 증거들이며, 그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들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와 종교는 같은 연원에서 솟아나온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인데, 이러한 종교와의 교전交戰은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류학자들이 호주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사회 제도를 연구하거나 혹은 고대 부족의 민속과 신화를 분석할 때, 마치 원대인의 눈에는 이성의 도전으로 보이는 특이한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현상을 굳이 설명해보려는 의욕으로, 몇몇 인류학자들은 인과론을 잘못 적용한 때문이 아닌가 하고 해석했다.  프레이저Frazer는, 마법이란 '인간이 현실에 대해 취하는 가장 오래된 행동 양식'이며, 그로부터 과학과 종교 그리고 시가 파생되어 나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사 과학이었던 마법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았다.  다른 한편, 레비-브롤Levy-Brujl은 마법을 참여에 근거한, 전前논리적인 개념으로 해석했다. "원시인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물들을 논리적, 인과적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것들을 인과의 사실로도 보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 무관한 것들로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들을,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상호 관련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인간이 무엇을 만지면, 물론 그 옆에 있는 사물도 변하고 또한 인간 자신도 변화된다고 믿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관점을 원시 사회 제도 연구에 적용시켜 보려했지만,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융은 집단 무의식과 보편적 신화 원형론에 근거하여, 고대인의 행동 양식에 대한 심리적 설명을 시도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도 인간이 자연에 던진 첫번째 거역(NO)인 근친상간에 대해 연구했다.  뒤메질Dumezil은 아리안족 신화를 연구하여 그들의 봄 축제(혹은 그의 책에서 시적으로 명명한 "불멸의 향연")에서 인도유럽어족들의 신화와 시의 원형을 발견했다. 카시러는 신화, 마법, 예슬 그리고 종교를 인간의 상징적 표현으로 간주했다. 말리노 보스키는 또한…… 하지만 계속해서 열거하자면 끝이 없고, 이 글은 새로운 관점이나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수시로 변하는 그 넓은 세계를 다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현상과 그에 대한 가설에 대해 논할 때, 제일 먼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은 소위 '원시 사회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라칸돈 부족은 지금도 실제로 고대의 생활 조건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했던 가장 복잡하고 풍요로웠던 마야문명의 직계후손들이다. 라칸돈족의 사회 제도는 문화의 발생기에 속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잔재에 해당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前논리적도 아니고, 그들의 마법 의식儀式 또한 전前종교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라칸돈 사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일 뿐, 더 진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문화가 어떻게 탄생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사라지느냐 하는 것을 보여준다.  토인비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에스키모 사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문명이 그대로 화석화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그것이 쇠락하는 것이든, 화석화된 것이든 간에)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53-156 이제는 극복되어진 오래 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시적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은 직선적 역사관이 낳은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런 개념은 '진보'라는 개념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원시적 사고방식과 진보라는 개념은 양적 시간 개념의 산물이다.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레비-브롤은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서 "원시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심지어 우리 현대인들 사이에서도, 의사 전달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논리적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확실히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깊은 차원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증의 발생과 신화의 발생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정신 분열증은 마법적 사고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어린이들의 현실 세계는 우리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은 현상에 대한 이성적 설명과 환상적 설명 중에서 거의 틀림없이 후자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또한 현대인들 속에 지속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마법적 믿음에 대해 지적했다. 여기서 더 이상 예증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논리적 합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참여 행위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비단 시인, 광인狂人, 원시인, 어린이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꿈을 꾸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직업적, 사회적, 정치적 행사에 참여할 때, 우리 대부분은 카시러가 말한 마법적 믿음의 연원을 구성하는 광범위한 '생명계society of life'에 참여하고, 그 일부분을 구성한다. 여기에는 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 그리고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원시적 사고방식'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이성에 의해 은폐되어 있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거나 간에, 이 모든 현상들에게 '원시적'이라는 형용사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고대인이나 어린이들만의 것 혹은 정신 이상 증세가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에게도 공통된 내재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153-157 어떤 사람들은, 의식儀式이나 제의의 주체가 원시인이나 정신병자처럼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사회제도라고 본다. 여러 사회 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제의, 신화, 축제, 전설 등 '물질화'되었다고 적절히 표현된 그런 것들은 저기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대상화되고 사물화되어 있다. 위베르와 모스는, 신앙을 가진 자가 신성함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감격은 개인적인 특수한 범주의 경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사랑, 미움, 외경, 두려움, 배고픔, 목마름 등 인간의 본질은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오직 사회 제도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견이 현실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일 신성함의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 제도가 진정 폐쇄되고 유일한 무엇을 구축한다면, 축제나 의식에 참여한 사람은 그곳에 참석하기 몇 시간 전 숲 속에서 사냥하거나 차를 운전하던 그때의 자기와는 무언가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할 수 없다.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주는, 인간만의 존재 방식은 '변화'에 있다.  오르테가 이 가셋식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실체가 결여된, 비실체적인 존재이다. 확실히, 종교적 경험의 가장 특정적인 사실은 갑작스런 도약, 본성의 돌발적인 변화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은 신격화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과는 다르다. 또한 춘화春花를 볼 때의 감정과 티벳의 사원에 새겨진 남녀 교접상을 볼 때의 감정과 역시 서로 다르다. 158 사회 제도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며, 또한 '원시적 사고 방식'이나 신경증이 신성한 것도 아니다. 양쪽 다 그것만으로는 신성한 것이 되기에 불충분하다. 그것들은 성스러운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따라서 이 양극단에서 벗어나 우리는 신성함을,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으로 포용하여야 할 것이다.  신성함의 세계는 인간을 배제한 사회 제도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요, 제도와 절연된 인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적인 것의 경험을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는 것도 역시 불충분하다. 그 경험은 우리를 전체의 일부로 표함하며, 그 세계에 대한 묘사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묘사가 될 것이다.2) 2) 이 글이 씌어지고 난 후 10년 뒤, 『야생의 사고』(1962)가 출판되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중요한 저서에서 '원시적 사고 방식'이 현대인의 사고 방식 못지 않게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몇몇 사회학자들은 그들의 논의를, 성聖의 세계와 속俗의 세계로 이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터부는 그 두 세계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세계에 금지된 일들이 다른 세계에선 가능하다. 순결이라든지 혹은 불경不敬이라는 개념은 이 구분으로 인해 생겨난다. 단지, 위에서, 우리 자신을 배제한 단순한 사실은 표피적인 자료만 양산할 뿐이다. 또한 모든 사회는 여러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각각의 영역에는 다른 영역에는 적용되지 않는 독특한 규칙과 금기 체제가 지배하고 있다.  상속세법의 운영 체계는 형법에 적용되지 않으며(비록 그 옛날에는 적용되었겠지만), 사회 관습에 따라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만일 공무원 사회에서 행해진다면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국가 사이의 외교 규범은 가정 내에선 적용되기 어렵고, 반면 가족끼리의 규범은 국제 통상 세계엔 적용되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영역 내에서 인간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규범에 따라 처리된다. 따라서 성(聖)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서 성스러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선, 그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만일 신성함이 별개의 세계라면, 우리가 그곳에 어떻게 들어가볼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가 부른 '도약'이나, 스페인어식으로 말하자면 '치명적 도약salto motal'을 통해서일 것이다. 7세기의 중국 선사(禪師) 혜능(慧能)은 불교의 핵심적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인도 산스크리트 용어인데, 중국어로 옮기자면 큰ㅡ지혜ㅡ피안ㅡ도달의 뜻이다…… 마하란 무엇인가? 크다는 뜻이다…… 반야란 무엇인가? 지혜라는 뜻이다…… 바라밀다는 무엇인가? 피안에 이르다(到彼岸)의 뜻이다. 차안(此岸)이라고 불리는 대상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바다의 파도처럼 부침(浮沈)하는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버리면,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무쌍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바라밀다ㅡ'피안에 이름'이다.  많은 바라밀다 계열 경전들의 끝부분에는 여행 혹은 도약의 개념이 감동적으로 표현된다. "오, 가버린 이여, 피안으로 완전히 가버린 이여(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비록 영세, 영성체, 각종 성사 혹은 통과 의례들이 모두 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도약'의 경험을 체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타자(他者)'로 만드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의례들은 흔히 우리가 막 탄생했거나 혹은 중생(重生)했다고 하며,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새 이름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원초적으로 경험했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태아로서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 이런 인간 탄생의 신비적 체험을 재현하는 것이 각종 제의들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행위는 다름 아닌, 새 생명이 태아로서는 죽고 이 세상에는 살아서 탄생하는 그 일을 반복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바람의 비유는 모든 문화권의 종교 경전 속에서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인간은 마치 나무처럼 뿌리뽑혀서 저 너머 피안으로, 자신과의 만남으로 떠밀려간다. 여기서 또 다른 특이함이 드러난다. 즉,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만일 거대한 바람에 한번 떠밀리면,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의례에 정성껏 참여하더라도, 외부의 힘이 개입되지 않으면 '도약의 경험'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시 창작의 순간과 똑같이,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자유와 숙명은 인간 속에서 만난다. 스페인 희곡은 이 갈등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161 티르소 데 몰리나는 그의 작품 『믿음이 없는 죄인』에서, 구원을 찾아 10년 간 동굴에서 고행을 실천하는 수도자 파울로를 등장시킨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죽어 신 앞에 출두하여 자신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심판 내용을 알게 된다. 잠에서 깬 그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악마가 천사로 변장하여 그의 앞에 나타나, 신이 그에게 나폴리로 떠나라는 명령을 했다고 알린다. 그곳에 가서 엔리코란 사람을 만나면, 그를 통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를 만나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운명을 당신도 똑같이 겪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엔리코는 효자이며 믿음이 두터운 사람이란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었다. 엔리코라는 모델을 보자 파울로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쳤다. 잠시 후, 뚜렷한 이유 없이, 그를 따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파울로가 본 모습은 단지 그의 외면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악한이 겉모습과는 달리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망설임 없이 신의 품에 자신을 맡길 거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엔리코는 속죄하고 즉시 스스로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바친다. 그는 치명적 도약을 하고, 구원받는다. 고집이 센 파울로는 아주 다른 종류의 치명적 도약, 즉 지옥으로 떨어져버린다.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내부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의심이 그의 내부를 공허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파울로의 죄는 무엇인가? 신학자인 작가 티르소에 의하면, 불신과 의심이 죄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만이 그의 죄였다. 그는 결코 신에게 자신을 내주지 않았다. 신성에 대한 그의 불신은 자신에 대한 과신으로, 즉 악마로 변한 것이다. 파울로는 귀담아들을 줄 모르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침묵으로 말하는 자는 신뿐이며, 악마는 언제나 달콤한 유혹의 말을 건넨다. 자신을 신에게 온전히 맡긴 엔리코는 죄의 무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었으나, 자기 자신을 믿은 파울로는 파멸했다. 자유는 하나의 신비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신의 은총이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162 『믿음이 없는 죄인』이 내포하는 신학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주인공들이 겪는 본성의 급격한 변화와 순간적인 전이가 주목할 만하다. 엔리코는 금수(禽獸)였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서 참회 속에 죽는다. 파울로 역시 갑자기 수도사에서 방탕한 자로 탈바꿈한다.  미라 데 메스쿠아4)의 『악마의 노예』에서도 심리적 변화가 급격하고도 전면적으로 일어난다. 희곡의 앞부분에서 돈독한 신앙을 가진 선교사 돈 힐은, 우연히 어느 청년과 마주치는데, 그는 애인 리사르다의 발코니로 올라가려는 중이었다. 성직자는 그 젊은이를 설득하여 물러가게 한다.  혼자 남게 된 성직자는 자신의 선업에 대한 교만에 들떠, 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번개 같은 독백을 통해 돈 힐은 치명적 도약을 한다. 기쁨에서 교만으로, 그리고 교만에서 호색(好色)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젊은이가 오르던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어둠과 욕망에 신분을 감추고, 애인을 기다리던 아가씨와 동참한다.  다음날 아침 리사르다 아가씨는 그 남자가 성직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녀 역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의 순간에서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넘어가는데, 그 긍정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젊은이의 사랑이 그녀를 외면해서, 악을 껴안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기증이 둘을 삼켜버렸다. 그날 이후 그들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두 사람은 그 무엇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훔치고, 죽이고 마침내 리사르다의 부모까지 죽였다.  4) Mira de Mescua(1574~1644). 로페 데 베가 학파의 스페인 극작가로 종교극을 많이 썼다. 163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파울로와 엔리코의 경우처럼, 심리적인 설명이 필요없었다. 그 어두운 열정을 설명한 마땅한 이유는 없다. 자유롭게 동시에 무엇엔가 떠밀려 그들은 한 순간에 그들을 유혹하는 심연으로 전락한 것이다. 비록 그들의 행위는 스스로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적 결정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어떤 다른, 엉뚱한 힘에 이끌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무엇엔가 홀려,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타인'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가능하다. 그들 역시 엔리코와 파울로처럼 도약을 했다. 그것은 우리를 떠미는 힘이 우리 자신의 것인지 초자연적인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를 이 세계에서 벗어나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행위이다. '차안此岸의 세계'는 상대적인 대립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설명과 까닭과 이유의 왕국이다. 큰 바람이 일어나 인과(因果)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이 첫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이 폐기된다. 인간은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티르소와 미라 데 메스쿠아의 주인공들은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게, 수직으로 솟거나 혹은 가라앉는다. 동시에 세계의 모습도 변한다.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도약은, 텅 빔이나 충만한 존재로 향한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164 우리가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도 유사한 이중적 감정이 생긴다. 우리가 신이나 신의 형상과 마주쳤을 때, 동시에 끌림과 두려움, 사랑과 공포, 매혹과 혐오를 느낀다.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찾아 헤매던 것으로부터 도망한다. 또한 순교자들이 말하듯이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성 후안 크리솔로고san Juan Crisologo의 말 "정신이 고양될수록, 더욱 뜨거워진다Plus drdebat, quam urebat"을 제사(題詞)로 따온 소네트에서 케베도는 순교자의 열락(悅樂)을 이렇게 묘사했다.  로렌초는 석쇠 위에서 불타며 즐긴다.  황색 불길이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순교자의 항구적인 가치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폭군은 로렌초를 통해 불타며 고통 겪는다. 숯불은 황홀하게 번져 나가고 석탄 속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순교자의 갈비짝은 요리가 되어 사형 집행인에게 바쳐진다.  적에게 자신을 먹이로 내준 그리스도의 지고한 노력을 닮은 성사(聖事)의 불타는 재현. 하늘이 인간을 영원케 하는 것을 보라. 패배가 영광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타락한 군주는 타들어가고 있다. 165 로렌초는 불타면서 자신의 순교를 블긴다. 폭군은 괴로워하며 적 속에서 스스로를 태운다. 이런 영광스런 순교와 비속한 고문 사이의 간극을 밝히기 위해선, 사드 백작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 세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희생양은 하나의 대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방탕자의 고독은 깨어지지 않는다. 가해자의 쾌락은 순수하고, 외로운 것이다. 그것은 쾌락이라기보다, 차가운 분노에 가깝다. 사드가 묘사하는 인물들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기에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의 세계는 의사불통의 세계다. 각자는 자신의 지옥에 외롭게 갇혀 있다.  케베도는 그의 소네트에서 교감comunion의 이중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석쇠는 고문과 요리의 도구이며, 로렌초는 요리와 태양으로 이중적으로 변한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이중성은 반복된다. 폭군의 승리는 패배가 되고, 로렌초의 패배는 승리가 된다. 어디서 고통이 끝나고, 어디서 쾌락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뒤섞일 뿐 아니라, 로렌초는 교감의 힘에 의해 폭군의 가해자가 되며 폭군은 그의 희생양이 된다.  신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기반이며 한계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어놓는다. 성(聖)의 체험은 여기가 저기라고 믿게 한다. 몸은 편재한다. 공간은 더 이상 연장(延長)이 아니라 질(質)이다. 어제는 오늘이다. 과거는 돌아오고, 미래는 이미 일어났다. 시간과 사물들의 그 특이한 존재 방식을 들여다보면, 밀고 당기고, 고양시키고 추락시키며, 움직이고 멎게 하는 어느 중심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신성한 시간은, 육체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며,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며, 선을 악으로 바꾸는 그 리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리듬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우주는 자장(磁場)으로 변한다. 어떤 리듬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감정과 사고를, 판단과 행위를 각각 씨줄과 날줄로 삼아 하나의 천을 짠다. 166 어제와 오늘, 여기와 저기, 구토와 감미(甘味)로 엮인 천을 짜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오늘이다. 모두가 현존한다. 모두가 존재하고, 모두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다른 곳, 다른 때에 있다. 자기 밖에서, 자기 충만 속에서, 요행으로 믿었던 것이 바뀌어, 모든 것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어떤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 낯설음은, 가장 일상적이며 명백한 표현으로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대상들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로렌초는 태양으로 변하지만, 동시에 타버린 잔혹한 고깃덩어리로 변한다. 모든 것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다. 종교적 제의들은 이 이중성을 강조한다.  나는 어느 날 오후, 힌두교 성지인 무트라Mutra의 줌마 강가에서 거행되는 작은 의식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그 의식은 매우 간단했다. 석양녁에 한 사제가 조그마한 사원 모양의 나무 더미에다 성화를 붙이고, 강가의 거북이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신자들이 종을 치고 노래하며 향을 사르는 동안, 그 사제는 송가를 읊조렸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크리슈나를 모시는 큰 사당이 있었는데, 그날 그 의식에는 크리슈나를 믿는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사제가 불을 당겼을 때(우리 앞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거대한 밤의 장막 앞에 그 불빛은 얼마나 연약한 것이었던가!) 신자들은 노래하고, 고함치며,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어지러운 동작과 고함소리는 나에게 역겨움과 고통을 주었다. 167 그 무절제한 열광은 너무나 엄숙하면서도 너무나 소박한 것이었다. 불쌍한 고함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몇몇 벌거숭이 애들은 깔깔거리며 뛰놀고 있었고, 어떤 이는 무심히 낚시를 하거나 또 다른 이는 헤엄치고 있었다. 어느 촌부는 꼼짝 않고 서서 흐린 물에다 오줌을 누고 있었다.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갔다. 모든 것이 일상 속에서 그대로 지나가고 있었고, 유일하게 신이 난 것은 목을 길게 빼고 먹이를 쫓는 거북이뿐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침묵 속으로 다시 잠겨들었다. 거지들은 시장으로 돌아가고, 순례자는 여관으로, 그리고 거북이들은 강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크리슈나에 대한 경배의 전부인가? 모든 제의는 하나의 공연representacion이다. 제의에 참여한 사람은 마치 연극 공연 중의 배우와 같다. 그는 동시에 극중 인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의 장소 역시 재현된다. 저 산은 용왕은 궁전이며, 무심히 흐르는 강은 신성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 산과 강은 그렇다고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각각은 모두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가 아니다. 그 크리슈나의 경배자들도 재연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어느 종교극의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가지는 이중적 성격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평상시대로 무심히 흘러가고, 우리 삶이 너무나도 통속적이라 실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모든 것은 성유(聖油)에 젖어 있다.  믿음의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이 세계는 실재이면서 실재가 아니다. 때때로 그 이중성은 유머스럽게 표현되기도 한다. 어느 스님이 운문(雲門)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선사는 "똥막대기"라 대답했다. 선(禪)수련자는 엉뚱하고 자칫 무의미한 대화로 보일 수 있는 그런 간화(看話) 수련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하고 갑작스런 깨달음[頓悟]에 이른다. 168 반야바라밀다 계통의 어느 경전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교리를 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교리를 설하는 것이다." 어느 제자가 물었다. "줄이 없는 거문고를 쳐서 소리를 내실 수 있습니까?" 스승은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들었느냐?" "아뇨, 못 들었습니다." 이 말에 스승이 응답했다. "이번에는 좀더 세게 쳐달라고 청해보지 그러냐?" 낯설음이란,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느끼는 어리둥절함은 소위 '명백함의 땅'이 우리 눈앞에서 두 쪽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래, 나는 에이다가 아니야. 그 앤 머리가 곱슬곱슬한데, 내 머린 생머리거든. 난 확실히 메이블도 될 수 없지…… 어쨌든 그 애는 그 애고, 나는 나야. 맙소사, 이 모든 게 얼마나 희한한지!" 앨리스의 의심은 신비주의자나 시인의 의심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처럼 앨리스도 스스로 놀라움을 느낀다.  하지만 대체 무엇 앞에서 놀라워하는가? 바로 자기 자신 앞에서,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은 평범한 현존(現存)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Otro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169 루돌프 오토는, 타자의 출현은-그리고 타자성의 느낌까지도―일종의 가공스러운tremendum 신비,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의 형태로 다가온다고 했다.6) 이 독일 사상가는 가공스러움의 내용을 분석하여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한다. 첫째는 성스러운 공포이다. 그것은 '특별한 공포'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성스러운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섬뜩함이다.  두번째 요소는 현존 혹은 출현(出現)의 위엄이다. 이다. 즉 '무시무시한 위엄'이다. 마지막으로, 그 위엄 있는 힘에 '빛나는 에너지'의 개념이 합쳐진다. 이렇게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이 세번째 요소로 등장한다. 한편 세 요소 중 나중의 두 개는 종교적 신성의 속성이며, 가공스러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부차적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둘을 배제하고 논의를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로 집중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신비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순간, 우리는 미지의 것 앞에서 느끼는 것이 늘상 공포와 두려움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쁨과 매혹 등 그 반대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이다. 그 독일 철학자가 '신비mystetium'라는 용어를 그 체험의 '핵심적 개념'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도 그것을 인식하는 것 같다.  신비―'절대적인 접근 불가능'―는 바로 '타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이다.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 한 무엇이다. 그의 출현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첫번째 감정은 망연자실이다. 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막막함은, 공포나 두려움 혹은 기쁨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두려움으로 느껴진다.  6)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70 무서움 안에는, 뒷걸음 쳐지는 공포와 현존과 합치되고자 하는 매혹이 포함되어 있다. 무서움은 우리를 마비시킨다. 그것은 현현한 것이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 현현에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무섭다. 그것은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내면이 드러나는 얼굴이며, 존재의 안과 밖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잔혹미와 불규칙미에 대한 길이 남을 작품을 썼다. 그 미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세례를 받은, 타자의 육화encarnacion이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혹은 아찔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매혹에 빠지기 전에, 먼저 마비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자.  몸이 굳어진다는 테마는 신화나 전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공포는 우리의 숨을 멎게 하고, 피를 얼어붙게 하며, 몸을 돌처럼 굳게 만든다. 기묘한 현현 앞에서 마비되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숨이 멎는 것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즉 생명의 흐름인 호흡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공포는 존재에 물음표를 붙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공중에 띄운다. 우리는 무(無)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무다. 우주는 심연으로 변하고, 우리 앞에는 움직이지 않는 현현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입을 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냥 거기 있기만 한다. 현전하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 장면은 크리슈나 신의 현현(顯現)이다. 크리슈나는 영웅 아르주나의 전차를 모는 마부로 변신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와 대화한다. 영웅은 망설인다. 그는 겁이 나서가 아니라, 애정 때문에 망설인다. 171  적장들이 이복형제, 스승, 사촌들이기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리는 같이 피를 나눈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했다. 아르주나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상당수를 죽이는 것은 '카스트 제도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세계의 기저와 전 우주도 파괴될 것이다.  아르주나의 논리에 대해 크리슈나는 먼저 세속적인 논지로 맞섰다. 즉, 전사(戰士)에겐 전투가 그에게 주어진 '법dhama'이라는 것이다.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자기 운명에 대한 배신이며, 자신이 전사라는 사실에 대한 배반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살인은 죄라고 믿는 아르주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살인은 끝없는 업業[karma]을 낳는 속죄할 수 없는 죄라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이 논리 못지 않게 강력한 논리를 세운다.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그의 판두족(族)을 패배와 죽음으로 몰고갈 것이기 때문에, 결국 아군의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르주나가 처한 입장은 안티고네의 입장과 유사하지만, 그 긴박함은 아르주나의 경우가 훨씬 더하다. 안티고네는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에서 고민한다. 국사범을 매장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만, 오빠를 땅에 묻어주지 않는 것은 인의(仁義)에 어긋난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권유하는 것은, 법이나 인의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어느것도 아르주나의 갈등을 풀지 못한다. 마침내 모든 논리가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크리슈나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신이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정한 현현이 일어나면, 존재의 감춰진 모든 형태가 시각적으로 확연하고도 생생히 드러난다. 신의 출현 앞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아르주나는 자기가 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172 수많은 입과 눈, 오 억센 팔을 가진 자여, 수많은 팔과 넓적다리와 발, 수많은 배와 수많은 끔찍한 송곳니를 지닌 당신의 위대한 형상을 보면서 세계는 전율하나이다. 그리고 저도 또한. 갖가지 색깔로 하늘을 찌를 듯 타오르며 딱 벌어진 입과 작열하고 있는 거대한 눈을 지닌 당신을 보고서 저의 내적 자아는 전율하며 안정과 평안을 얻지 못하나이다. 오 비쉬누시여!7) 비쉬누는 '우주의 집'이며, 그가 출현할 땐 삶과 죽음의 모습 등 모든 형태가 뒤범벅되어 나타나기에 무서워보이는 것이다. 무서움은, 근접할 수 없는 전체 앞에 섰다는 놀라움에서 발생한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이 현현 앞에서, 선과 악은 더 이상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들의 몸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아니, 다른 측정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크리슈나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는 나의 도구이다." 아르주나는 신의 손에 쥐어진 연장에 자나지 않는 것이다. 도끼는 자기를 부리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 모른다. 인간의 도덕 기준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행위―신적인 행위가 드러난 것이다. 아즈텍 문명의 조각상에서도 신성은 꽉 채워지고 충만한 모습으로 조각된다. 하지만 무서움은 단순히 형상과 상징이 많이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 순간 한 모습 속에 존재의 두 면이 한꺼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무서운 광경은 존재의 내부를 보여준다. 코아틀리쿠에Coatlicue[神像]는 이삭과 해골 그리고 꽃과 발톱으로 꾸며져 있다.  7) 이 부분의 번역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길희승 옮김, 현음사, 175쪽)에서 인용함. 173 그의 존재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생의 내장이 눈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생의 내장은 바로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이다. 소화 기관은 동시에 파괴 기관이기도 하다. 크리슈나의 입으로 창조의 강이 흐른다. 그의 입으로 우주는 자신의 폐허를 향해 줄달음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말과 동격이다. 실제로, 무서움은 총체적 출현의 형태로 나타날 뿐 아니라 부재(不在)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촛불이 꺼지고, 형상이 붕괴되며, 우주가 피를 흘린다. 모든 것이 공을 향해 뛰어든다. 벌어진 입, 구멍, 보들레르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실감했다.  파스칼에게는 거동을 함께하는 심연이 있었다.  ―아! 모두 심연이다―행동, 바람, 꿈, 말도 역시! 쭈뼛 솟아오른 머리털 위로 '공포'의 바람이 수없이 스치는 것을 느낀다.  저 높은 곳에나, 낮은 곳, 어디에나, 깊은 수렁, 모래톱,  침묵, 그리고 무서웁고도 매료되는 공간……  내 밤의 바닥에 신은 그 날렵한 손가락으로 갖가지 형태의 악몽을 끊임없이 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큰 구멍을 두려워하듯, 어디론지 모르게 나를 몰아가는 막연한 공포로 가득 찬 잠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창마다 보이고 비치는 건 오직 무한뿐 늘 혼미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은 허무도 시샘하는 감각의 무덤,  ―아! 절대로 수(數)와 존재를 벗어나지 못할 나여!8) 8) 인용된 시는 「심연Le gouffre」이다. 여기선 김기봉 교수의 번역을 인용한다. 현존한다. 『보들레르의 명시』, 세계출판사, 1944, 118쪽 174 놀라움, 망연자실, 기쁨 등 '타자'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마음의 첫번째 방향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란 사실이다. '타자'는 우리의 머리칼을 쭈뼛쭈뼛 서게 만든다. 심연, 뱀, 환희,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괴물. 그리고 이 물러섬에 의해 반대의 동작이 이어진다.  우리는 현현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단애의 저 깊은 바닥을 향하여 몸을 숙인다. 거부와 매혹, 그리고 현기증. 몸을 던져, '자아'를 벗고 '타자'와 하나가 된다. 비우는 것, 무(無)가 되는 것, 전체가 되는 것, 존재하는 것, 죽음의 중력, 자아의 망각, 포기 그리고 동시에 그 이상한 현현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나의 털을 곤두세우는 것이 나를 잡아끈다. 그 '타자'는 나다. 만일 '타자성'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가, 그 뿌리에서는, 이상하고 낯선 그것과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느낌에 이어져 있지 않다면, 두려움과 동시에 그것에 매혹을 느낀다는 감정은 설명될 길이 없을 것이다.  부동 속에서 전락하고, 전락하면서 상승한다. 나타남은 사라짐이고, 두려움은 저항할 수 없는 깊은 끌림이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에서 정점에 달한다. 반대되는 두 운동은 합쳐진다. 뒷걸음질 속에는 이미 앞으로의 도약이 깃들여 있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175 우리는 때때로 특별한 이유 없이, 혹은 흔히 쓰는 표현대로 '그냥',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볼 때가 있다. 그땐, 마치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세계는 우리에게 자신의 주름살과 심연을 보여준다. 무심한 흐름 속에 일상이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나름대로 일종의 현신(顯身)이나 출현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똑같은 거리와 정원을 지난다. 우리는 매일 오후 도시적 삶에 찌든 저 벽돌담과 눈이 마주친다. 갑자기, 아무 때나, 거리는 별세계가 되고, 정원은 막 창조되고, 피곤에 찌든 벽은 기호로 뒤덮인다. 언제 그것을 본 적이 있던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무나, 정말 압도적으로, 생생하다. 선명해진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게 진짜인지, 과거의 것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한다. 처음 본 것 같은 이것은 과거에도 분명히 여기 있었다. 우리가 이제야 처음 들어가본 그 세계에는 거리와 정원과 담벽이 들어가 있었다.  낯설음에 이어 그리움이 뒤따른다. 사물들이, 태초에서 오면서도 이제 방금 태어난 것 같은 빛에 세례받고, 모든 것이 변함없는 그곳을 우리는 기억해내고 돌아가고 싶어진다. 우리들도 그곳에서 왔다. 한 줄기 바람이 우리의 이마를 때린다. 우리는 마법에 걸려, 시간이 멈춘 오후 한가운데서 허공 중에 떠 있다. 우리는 저 너머에서 왔다는 것을 느낀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전생(前生)―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176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진실로 자신과 함께 홀로 있는 사람, 자신의 고독 속에 칩거하는 사람은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우리는 자꾸 그들을 붙잡으려 하고, 그들은 자꾸 도망간다.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항상 저기 웅크리고 있다. 매일 밤, 몇 시간 동안, 우리와 살며시 합친다. 매일 아침 우리는 헤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부재이며, 빈틈인가? 그들은 하나의 이미지인가? 하지만 그들을 배가시키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을 잊기 위해, 일상으로 도망치거나, 업무에 몰두하거나, 혹은 쾌락에 정신을 잃는 것은 소용없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偏在)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인 타자를 찾아, 넋을 잃고 고뇌하며 헤매인다. 하지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없인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 치명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앞에서, 그것이 진짜 현현이라면,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그 몸과 눈과 목소리는 우리를 위협하면서도 매혹시킨다. 우리는 이전에 결코 그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은 우리의 먼 옛날과 혼동하게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낯설면서도, 너무도 친밀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몸을 만나는 것은 미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굳건한 대지를 밟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더 먼 남[他人]도, 더 가까운 자신도 없다.  사랑은 우리를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 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이제 타인이란 없다. 가장 완벽하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순간에, 가장 완벽하게 자기 존재를 회복할 수 있다. 이때 모든 것이 현존하며, 우리는 존재의 어둡고 숨겨진 이면을 본다. 다시 한번 존재는 자신의 내부를 드러낸다. 177 사랑과 신성의 경험 사이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같은 연원에서 흘러나온 현상들이다. 단지 각 존재의 상이한 층위에서 도약을 시도하여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손쉬운 예를 들어보면,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신자의 본성을 바꾸는 작용을 한다. 성스러운 음식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본성이나 원초적 조건을 '회복하는 것'이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지고한 육체적 먹거리다"라고. 성적 식인canivalismo erotico에 의하여 인간은 변화되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모든 종교의 행위와 모든 신화, 그리고 유토피아 사상에서까지 등장하는 회귀의 개념은 사랑의 인력(引力)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인은 우리를 고양하여 우리 밖으로 나오게 하고, 동시에 원래의 우리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떨어지는 것은 존재로 돌아가는 것,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생에 대한 허기는 죽음에 대한 허기이다. 에너지의 약동, 분출, 존재의 팽창은 곧 게으름, 우주적 무기력, 무한으로의 전락이다. '타자' 앞에서의 낯설음은 자신으로의 회귀이다. 존재와의 궁극적 일치와 동일화의 경험이다.  사랑과 종교와 시가 공통된 연원(淵源)에서 나왔다는 것을 제일 먼저 지적한 사람은 시인들이었다. 근대 사상은 이 발견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차압하였다. 근대 염세주의는 시와 종교를 섹슈얼리티의 한 형태로 전락시켰다. 종교는 정신 착란이며, 시는 승화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다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와 시를 다시 다른 분야의 용어를 빌려 설명하는 경제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연구들을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으리라. 여러 번 지적된 바와 같이, 이 모든 가설들은 19세기의 전형적인 연구 방식인 개체 분석법의 제국주의적 폐해를 여실히 폭로하고 있다.  사랑과 시에서와 같이 초자연적인 경험에서 인간은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 단절의 느낌에 이어, 낯설게 보였으나 이제는 우리 자신의 존재와 분리 불가능한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따라 온다. 이 모든 경험들이, 섹슈얼리티나 경제적, 사회적 기구 혹은 그 어떤 다른 조직보다도 오래된 무엇을 공통적인 핵심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근대 사상가들과는 달리―우리는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신성은 섹슈얼리티와 그것을 구체화시킨 사회 제도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에로티시즘이지만, 성적 충동을 초월하는 무엇이며 또한 사회 현상이지만, 그와는 다른 무엇이기도 하다. 신성은 우리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근원이 원초적인 것이며 우리 자신의 존재와 뒤섞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그 세 가지 경험은 인간 존재의 뿌리가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그 경험들에는 이전의 상태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우리가 떨어져 나왔으며, 매순간 떨어져 나오고 있는 그 근원적인 통일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원초적인 존재 조건을 이룬다.  존재의 심연 저 깊은 곳에서 대체 무엇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낯설음과 친숙함, 상승과 하강, 외경과 경배, 거부와 매혹 등 그것이 표현되는 상반적인 운동과 그 화해를 엿보고, 우리는 그 운동들이 통일성으로 용해되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 조건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일까? 진정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미래의 나를 앞당긴다. 태초의 삶에 대한 향수는 미래의 삶에 대한 예감이다. 하지만 그 과거와 미래의 삶은 지금 여기이며, 번개 같은 순간 속에 녹아든다. 그 향수와 예감은 시, 신화, 사회학적 유토피아 혹은 영웅의 과업 등 모든 위대한 인간 업적의 본질을 이룬다.  어쩌면 인간의 진정한 이름, 인간 존재의 표식은 '욕망'인지 모른다. 하이데거가 말한 시간성이나, 마차도가 말한 '존재의 본질적인 타자성'은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지향하는 그것이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만일 인간이란, '그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존재는 욕망의 존재이며, 존재의 욕망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만남, 시의 이미지, 그리고 신의 현현에는 갈증과 충족감이 뒤섞인다. 우리는 불가분한 결합 속에서 과일이며 동시에 입인 것이다. 근대인들은,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시간적인 존재는 긴장을 이완시키기를 원하고, 갈증을 해소시키기를 원하며, 스스로에 대해 명상하기를 원한다. 시간적인 존재는 자기 충족을 위하여 샘처럼 솟아난다. 인간은 스스로를 상상한다. 그리고 상상하면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시가 드러내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가? 180 시적 계시   우리는 종교와 시를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고자 노력하며 또한 스스로의 고유한 모습을 실현하는 가능성을 성취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종교와 시는, 마차도가 '존재의 본질적인 타자성'이라고 부른, 그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이다.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속적이고 진부한 삶으로 덮여 있는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해낸다. 그때 우리 자신인 그 '타자'가 나타난다.  시와 종교는 계시이다. 하지만 시 언어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선다. 이미지는 이성적 증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이다. 반면 종교적 언어는, 정의 그대로,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이 상이성은 종교와 시 사이의 유사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같은 샘에서 탄생하고 또 같은 변증법에 지배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둘이, 어쩌면 그렇게 상호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한편에선 리듬과 이미지로, 또 다른 편에선 신의 현현(顯現)과 제식으로―구체화되어 갈라서게 되는 것일까? 시란 일종의 종교의 혹이거나 또는 신성의 어둡고 희미한 예시인가? 종교란 교리로 굳어진 시인가? 앞글에서의 기술은 이런 물음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  1)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82   루돌프 오토는, 신성(神聖)이란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 요소로 구성되는 선험적a prior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성적인 요소는 "어떠한 감각적인 지각에도 근거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필연적이고, 실체론적인 관념, 그리고 필연적이고 객관적 가치인 선(善)의 관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관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경험의 영역을 버리도록 강요하며, 모든 지각으로부터 독립되어 순수 이성에 속하며 정신 그 자체의 원천적인 성향을 구성하는 것으로 우리를 데려간다."1)  고백하건대, 내 생각 속에 완벽이나 필연 혹은 선(善) 같은 그런 관념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이성의 원천적인 성향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와 유사한 관념들이 의식을 구성하는 갈망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관념들을 한 가지 윤리적 판단으로 구체화할 때마다, 그에 못지 않게 엄격하고 절대적으로 그와 관계된 다른 윤리적 판단들을 부정하게 된다. 개개의 윤리적 판단은 다른 윤리적 판단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선, 그 윤리적 판단 자체가 의지하는 선험적 관념이라는 것마저도 부정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한편 만일 실제로 그런 관념들이 지각 이전의, 혹은 지각의 해석 이전의 영역을 구성한다면, 신성(神聖)의 범주가 정말 근원적인 요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신성은 초자연적인 경험에도 있지 않고, 수많은 종교적 개념에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합리적 선험성으로 여겨지는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신성(神性)의 개념에서만 성립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추정을 부정하는 것 같다. 아즈텍인들의 종교는, 패배하고 죄를 짓는 신(神)인 켓살코아틀을 숭배한다. 그리스나 다른 종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신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동시에 선과 필연의 관념들은 전지전능이라는 보완적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 아즈텍인들의 종교는, 희생 제의에 대해 우리와 다른 해석을 한다.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신들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신들이 세계를 움직이지만, 그 신들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피다.  이런 예를 더 제시할 필요는 없다. 오토 스스로 자신의 말의 한계를 이미 설정했다. "이성적인 표현은 신성(神性)의 본질을 고갈시키지 못한다…… 신성은 통합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합리적 술어는 어떤 면에서는 발판이 되지만, 신성이 이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속성을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신성(神聖)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두려운 무엇으로 이끌리는 경험이다. 그것은 내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며, 존재의 내장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신화에서, 악마적인 것은 대지의 중심에서 움터 나온다. 그것은 숨겨진 것의 발현이다. 동시에, 모든 드러남은 시간이나 공간의 단절을 수반한다. 그 상처나 틈새로 우리는 존재의 '이면'을 엿보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창조란 무의 심연에서 창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현기증이 우리를 엄습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체계화하려 하고, 원초적인 공포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으려 할 때,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일종의 범주화를 시도하게 된다. 183  이런 작업에서 이원론과 더 나아가 소위 모든 이성적 분류의 원천이 연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경험의 몇몇 요소들은 시바 신의 파괴, 여호와의 진노, 켓살코아틀의 만취, 테스카틀리포카의 북면北面 등, 신의 어두운 혹은 난폭한 모습을 구성하는 속성으로 변한다. 다른 요소들은 신의 밝은 면을 표현하여 빛나는 얼굴이나 구원자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원론이 심화되어, 두 얼굴 혹은 두 모습을 지닌 신이라는 개념에서 빛의 왕자와 어둠의 왕자라는 독립된 신성神性으로 전이된다.  결국, 정화 혹은 순화를 통하여, 그 경험의 잔혹한 요소들은 신의 모습에서 유리되고 종교 윤리가 생성될 토양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계율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 되든 간에, 그 계율이 신성神聖의 최종적 근거가 되지 못하고, 또한 순수한 윤리적 직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층을 들추는 원초적 경험의 합리화 내지 정화의 산물일 뿐이다.    오토는 다음과 같이 비이성적 요소의 우선성과 원초성을 확립했다. "신령함의 관념들과 그와 연관된 감정들은 이성적 관념들처럼 완전히 순수한 관념과 감정들이다. 그것들엔 칸트가 '순수' 개념과 감정에 내재한다고 지적한 요소들이 완벽하게 적용된다." 즉, 관념과 감정이 비록 경험 속에 주어지며, 경험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지만, 경험에 우선한다는 말이다.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과 함께 오토는 "더 고양되거나 혹은 더 깊은 곳을 구성하는" 제3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제3의 영역이 바로 신성神性이나 성스러움 혹은 신성神聖이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은 이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신성神聖은 인간 속에 내재한 신격화 성향의 발현이다. 우리는, 선험적 관념의 유현遊絃한 내용이 성장함에 따라 자기 자신과 대상물을 의식하려는 일종의 '종교적 본능'의 출현을 목적하게 된다. 184 그 근원적인 성향이 표상하는 내용은 그것이 기초하는 선험성처럼 비이성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이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이성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다." 신령한 대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너무나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미지나 역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불교의 니르바나(열반)나 기독교 신비주의의 무는 부정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개념으로, '타자성을 밝히는 진정한 상형문자'이다. "역설의 가장 강렬한 표현인" 이율 배반은 당연히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에 공통된 신비주의 교리의 기본 요소를 형성한다.    오토의 정의는 노발리스의 금언을 상기시킨다. "마음이 외부의 현실적이며 개별적인 모든 대상에 놓여나서 스스로를 느낄 때, 이상적인 본연의 마음자리가 찾아온다. 바로 그때 종교가 탄생한다." 神聖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은총이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를 열어제치는 것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에서는, 종교적 근본인 초월의 개념이 심각한 균열을 겪게 된다. 인간은 "신의 손끝에 매달린" 존재가 아니라, 신이야말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대상은 항상 내부에 있고, 모든 신비적 경험이 시작하는 텅 빔의 다른 얼굴, 즉 긍정적인 면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인간의 내부에서 신이 드러난다는 생각과,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현현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 내부에 잠재된 신격화 성향 때문에 우리가 신을 보게 된다는 생각은, 동시에 신성을 오히려 인간 주체성에 종속시키면서 그 존립 기반을 흔드는 것이 되지 않을까? 185   다른 한편, 종교적이거나 신격화 성향을 다른 성향들, 그 중에서도 시적 성향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노발리스의 말을 변형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도 조금도 어색하거나 문제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외부의 현실적이며 개별적인 모든 대상에 놓여나서 스스로를 느낄 때, 이상적인 본연의 마음자리가 찾아온다. 바로 그때 시가 탄생한다."  오토 자신도, "숭고함sublime의 개념은 신령함의 개념과 밀접히 연결된다."고 인정하고, 시적 감정과 음악적 감정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길, 단지 숭고한 감정의 출현은 신성한 감정의 출현보다 나중에 일어난다고 했다. 이렇게 神聖의 특이점은 그 우선성에 있다.    신성의 우선성은 역사적 순서의 문제가 아니다. 이 땅에 인간이 처음 출현한 그 순간, 그들이 무엇을 먼저 느끼고 생각했는가 하는 것은 지금도 알 수 없고,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오토가 주장하는 우선성은 다른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성스러움은 근원적인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성의 모든 경험에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한'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숭고함 속에는 언제나 측량할 길 없는 미지의 것이 출현할 때의 신적인 공포가 자아내는 두려움, 불편함, 마비, 숨막힘 등이 있다.  사랑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신성의 경험 속에는 에로틱한 힘이 강력히 개입되기도 하고, 사랑의 경험 속에 신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모든 사랑은 자아의 기저를 뒤흔드는 지진이며 계시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는 신에 몸을 맡긴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 창작의 순간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종교적 순간과 사랑의 순간뿐 아니라 시적 순간에도 현존과 부재, 빔과 충만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한 모든 순간에는 이성적인 요소와 비이성적인 요소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을 서로 구분하는 것은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을 해석하고 분류할 때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신성함이 다른 모든 경험보다 우선하면서 근원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선험적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추정하게 된다. 우리가 그 선험적 영역을 고집하려고 할 때마다, 신성의 경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경험 속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놀라는 존재이다. 인간이 놀랄 때, 시를 쓰고 사랑하고, 신을 찬양한다. 사랑에는 놀라움과 시와 신성과 대상에 대한 숭배가 들어 있다. 시 역시 놀라움에서 싹트고, 시인은 신비주의자처럼 신성화하고, 누구에게 반한 사람처럼 사랑한다. 이런 경험들 중 그 어느 것도 독자적으로 고립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경험에는 서로의 우선성을 따질 수 없는 동일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런 경험들을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이다. 시인의 언어와 신비주의자들의 언어를 구별하는 특별한 색조는 그 말이 지향하는 대상에 달렸다. 신비주의자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은 특별한 정신의 빛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개개 경험의 진정한 독자성은 그것이 지향하는 대상에 좌우된다. 하지만 이때도 역시 어려움이 끼여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적 대상이란 것도 결국은 "우리 내부에 잠재된 신격화의 본능을 자극하고 일깨울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외적 대상들을 신성화의 목록 속에 기록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저 희미한 내적 본능이다. 하지만 본능이란 것도 앞에서 본 바대로 순수하지 않다. 결론짓자면, 신성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지시체 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이란 것도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모든 길이 끊어졌다. 선험적이라는 관념이나 범주를 포기하고 신성神聖이 인간에게서 탄생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수밖에 없다. 188   신성한 공포는 근본적인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은 일종의 자아의 왜소화를 가져온다. 인간은 자신을 거대함 속에서 길 잃은 미약한 존재로 느끼고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작다는 감정은 비참함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바로 '먼지와 재'에 다름 아니다.  슐라이어마허Schleiemacher는 이 상태를 '의존의 감정'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특징적인 차이가 이 '의존'을 다른 의존들과 구분짓는다. 상위의 존재와 상황에 대한 의존은 상대적이며, 그러한 요인이 사라지자마자 의존도 사라진다. 신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이고 지속적이어서 우리들의 탄생과 함께 태어나 죽음 뒤에 이르기까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의존은 "스스로에 의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정신의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무엇이다. 신성은 이렇게 추론에 의해 획득되어진다. 스스로에 대한 감정과 무엇에 의지하고픈 마음에서 신성의 관념이 태어난다.  오토는 낭만주의 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생각을 차용했지만, 그의 이성주의는 배격했다. 사실 슐라이어마허에겐 신성이나 신령함이 진정으로 모든 관념들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지의 무엇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결과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항상 현존하며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그 무엇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오토는 이 근원적 감정을 '피조물의 상태'라 부른다. 이제 중력의 중심이 바뀐다. 진정으로 특징적인 것은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말은, 우리들의 근원적인 감정이 우리들의 유한성과 왜소함의 어두운 의식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얼굴과 대면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이렇게 근원적 감정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요소이다.  슐라이어마허와는 반대로, 오토에게 피조물의 상태는 창조주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결과이다. 우리는 전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작은 부분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낀다. 우리가 창조주를 희미하게나마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의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많은 종교가나 신비주의자들의 글은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한다. 즉, 부정의 상태가 긍정의 상태보다 우선하고, 피조물의 상태가 긍정의 상태보다 우선하고, 피조물의 상태가 창조자의 등장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아기는 자기가 누구의 아들이라고 느끼지 않고 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스스로 뿌리뽑혀서 어느 낯선 세계에 던져졌다는 느낌뿐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고아의 감정은 모성과 부성에 대한 인식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오토는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한 논리를 단지 역으로 또 한 번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토는 의지의 감정에서 신의 개념을 추출했으며, 슐라이어마허는 신성함을 피조물의 근원적 상태로 여겼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해석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오토는 핵심을 포착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결정적인 상태인 '태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189 그리고 막 탄생한 그 상태는 우리의 생애 내내 지속된다. 매순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다. 낯선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오토가 말한 피조물의 상태란,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하면, 바로 하이데거가 부른 "그곳에 처해졌다는 섬뜩한 느낌"이다. 그리고 왈렁스Waelhens는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에서 "근원적 상태의 느낌은 우리들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을 정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고 말했다.2)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순간 태어난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그곳에 처해졌다'는,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하고 비보호의 상태로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사건은, 전지전능한 의지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고 언젠가는 그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로 변한다.    하이데거의 분석에 의하면, 고뇌와 두려움은 우리들의 근원적 조건에 이르는 문을 열고 닫는 서로 대립되고 대칭적인 두 개의 통로이다. 스스로의 공동空洞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하는 신성함의 경험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존재 조건인 우연성과 유한성을 붙잡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빛나는 계시는 잠시 후 인간 조건의 외부적인 요소인 창조주와 신성神性 등에 의거하여 인간 존재 조건을 해석하려는 시도에 의하여 가려지게 된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은 고뇌 속에서 발견되는 무를 잘 가려낸다. 하지만 곧 죄인의 왜소함을 신 앞에 고백하면서 이 계시의 의미를 왜곡하고 만다.  우리의 비참함은 죄의 사함과 구원에 힘입어 소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원히 구원되었다는 느낌으로 회복된 전망은 우리 존재의 가치를 재건하고 잠깐 동안 무를 극복하게 해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일어났던 것처럼, 고뇌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한 번 가면을 쓰게 된다."3) 2) 왈렁스 Alphonse de Waelhens,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tin Heidegger』, Lovania, 1948. 9(원주)  3) 왈렁스 Waelhens, 앞의 책. (원주) 190 우리는 여기에 미겔 데 우나무노와 특히 케베도라는(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그의 시 「참회자의 눈물」과 「기독교인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또 다른 이름을 첨가할 수 있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계시의 의미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이제 결론내릴 수 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며 그것을 알고 느낀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는 모든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유한성이라는 형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 대안은, 조금만 움직여도 벗겨질 가면에 불과하다. 이 점은 원죄와 속죄라는 개념을 검토해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우리의 근원적인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신성은 자신의 성스러운 형태에 존재의 충만함을 담는다. 성스러운 것은 '장엄한 것'인데, 이것은 선과 도덕의 개념을 초월한다. "장엄한 것은 경외심을 유발하여" 숭배와 복종을 요구한다. "모든 도덕적 체계와 무관하게, 종교는 의식에 부여되는 내적인 의무이다…… "4)  원죄, 보상, 속죄 같은 개념들은 장엄한 것이 피조물에게 느끼게 하는 이 복종의 감정에서 싹터 나온다. 원죄 개념에서 구체적인 잘못이나 어떤 다른 도덕적 영향을 찾는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느끼기 전에 고아 의식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죄는 우리들의 잘못과 죄악보다 선행한다. 그것은 도덕보다 앞서는 것이다.  4) 1)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91 "도덕적 영역 내에선 구원이나 보상 혹은 속죄 개념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토는 이어 말하길, "그것들은 신비주의 영역에서는 진실되고 필요한 것이지만, 윤리의 영역에서는 거짓이다." 속죄와 긴급한 구원의 필요성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근원적인 '결핍'에서 싹터 나온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전체인 존재에 비해 작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불충분함이다. 원죄란 부족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은 신을 달래고, 신성神性을 받아들여야 한다.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것, 충만한 존재에 이른다. 이것이 성사聖事, 특히 영성체領聖體 의식의 의미이다. 이는 또한 희생의 궁극 목표이기도 하다. 즉, 신을 달래는 것이며 이것은 헌신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타인들의 희생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자신의 원초적인 부족함으로 인해, "신성神聖에 접근할 자격이 없다." 희생을 통하여 신이 우리에게 존재의 가능성을 되돌려주는 구원과 우리를 정화하는 희생인 속죄는 이 근원적인 자격 미달의 감정에서 태어난다.  종교는 이렇게, '죄의식'과 '죽을 운명'이 같은 차원의 용어라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들은 죽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죄는 속죄를 요구하고, 죽음은 영원을 요구한다. 죄와 속죄, 죽음과 영원한 삶은, 특히 기독교에서, 상호 완성되는 하나의 짝을 형성한다. 하지만 동양의 종교들은, 우나무노를 그토록 잠 못 이루게 했으며 병적 성격으로까지 몰고간 문제인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192    엄격한 의미에서, '결핍'과 '부족한 존재'가 원죄와 동의어가 된다고 추론할 만한 근거는 없다. "빚을 진 것 때문에 죄의 가능성이 높아졌다고도 낮아졌다고도 증명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 교리와 차이점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 세계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따라서 부족한 인간 존재를 원죄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완벽한 존재인 신 앞에서, 천사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결점이 많다. '결점'은 바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 즉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연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로서 주어진다. 존재로 상승하거나 무로 추락할 수 있는 힘에는 자유가 포함된다. 한편으로 우연은 자유를 생산하고, 다른 한편 자유는 우연 혹은 원초적 결함을 치료하고 순화시키는 가능성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추락되거나 구원받을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자체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가능성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굳이 가톨릭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생각이며, 스페인 희곡에서 크게 발전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원죄는 '부족한 존재'와 동의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결핍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타락한 세계에서 살며, 이 세계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바로크 시대 멕시코의 수녀 시인 후아나 수녀가 유명한 편지에서 "부정적 호의"라고 표현했을 때도 포함해서, 은총이란 구원에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은총에 굴복한다.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는 진짜 부족하고, 작으며, 불충분하다. 이 사실은 은총이 자유를 대체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확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은총과 함께 우리가 은총의 힘을 능가하는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유 의지가 은총에 의하여 그 힘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6) 가톨릭 사상은 개신교 사상보다 더 풍부하고, 자유로우며,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와 원죄 사이에 형성된 이 인과론적인 연결 고리를 완전히 해체시키지는 못한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기 전에 어떻게 자유가 악을 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존재보다는 무를 선택한 이 자유는 대체 어떤 자유란 말인가?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했다. 이렇게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에서 근원적 결핍을 속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 속에 현존한다. 우리는 죽으면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매순간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부터 죽음을 빼앗으면서, 종교는 우리에게 삶도 빼앗는다. 영원한 삶의 이름으로, 종교는 이 삶의 죽음을 확인한다.  5) 하이데거Ma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El ser y el tiempo』, traduccion de Jose Gaos, 2a ed.  6) 질송Etienne Gilson, 『중세 철학의 정신L、esprit de la philosophie meddievale』, Paris, 1944 (원주) 194   우리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드러냄(啓示)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엔 언어적인 형태를 띄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조차도, 현시하는 주체의 창조, 즉 인간의 창조는 수반된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은,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이다. 어쨌든,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된다. 시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중에 낱말들로 옮겨지는 경험이 아니라, 낱말들 자체가 핵을 이루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이름 불려지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실존을 결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분석하는 것은 그 경험의 표현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앞장에선 시적 계시의 의미를 규명했고 분석했다. 이젠,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시는 어떻게 씌어지는가? 207   우리들의 물음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이다. 시인들의 말을 믿는다면,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이 있다고 한다. 이 도움은 우리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과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를 취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는 대체 누구이며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그를 악마, 뮤즈, 영靈(espiritu), 정령精靈(jenio)으로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으로 부른다. 어떤 이들은 시는 외부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어떤 이들은 시인 자신에게서 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예외는 번번이 일어나서, 단순히 예외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작에 관한 이런 상반된 개념들을 이상적으로 반영하는 두 타입의 시인을 가정해보자.    책상 위에 엎드려, 골똘하지만 텅 빈 듯한 시선으로, 영감을-믿지-않는-시인은 미리 그려놓은 계획에 따라 시의 첫 연을 이미 썼다.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았다. 각각의 각운과 이미지를, 자명한 원리에 따른 엄격한 필연성 그리고 기하학적 놀이 같은 즐거움과 가벼움을 준수하며 썼다.  하지만, 11음절의 마지막 행을 끝내기 위한 한 단어가 필요했다. 시인은 생각나지 않는 각운을 찾아 사전을 뒤적인다. 하지만, 찾지 못한다. 담배를 피워 물고, 일어섰다 앉았다, 다시 일어선다. 무無, 공허와 불모. 그러다 갑자기 각운이 생각난다.  시를,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쩌면 초기의 계획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예상 못했던 다른 것―항상 다른 무엇―이다. 이 이상한 도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인이 착상을 자극해서 그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게 했다고는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에서는 무에서만 나온다. 그 단어는 어디에 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 발생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208    반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속삭임의 무진장한 흐름'에 내맡긴 채, 외부 세계로 향한 눈을 지긋이 감고 시인은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 간다. 처음엔 문장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지만, 점차 펜을 쥔 손의 리듬은 사고의 흐름과 일치한다. 이제 사고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고, 둘은 같은 리듬을 탄다.  시인은 그의 행위에 대한 의식마저도 잊어버렸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혹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돌연히 길을 가로막는 단어 하나, 혹은 단어의 이면인 침묵이 나타나 흐름을 중단시킬 때까지 모든 것은 순탄하다. 시인은 줄기차게 장애물을 피하려고, 그것을 돌아 어떻게 해서든지 비껴 나아가려고 시도한다. 다 소용없다. 길들은 항상 동일한 벽 앞에 이른다. 샘은 흐르기를 멈춘다.  시인은 방금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뒤얽혀 있는 듯한 그 글이 비밀스런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한다.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음조와 리듬과 체온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다. 혹은 여전히 살아 있는 부분들은 아직도 빛을 내며,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시의 통일성은 물리적이거나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조, 체온, 리듬 그리고 이미지들이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시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은, 모든 작품은, 원재료를 소기의 계획에 종속시키고 변형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글을 쓰는 데에 이성적 의식이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텍스트엔 반복되는 단어들, 일정한 경향에 의해 계속 다른 것들을 생산해내는 이미지들, 잡을 수 없는 단어를 찾아 팔을 길게 뻗친 듯이 보이는 문장들이 있다. 시는 흐르고, 달린다. 이 흐름이 바로 시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210 그런데, 흐름이란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또한 무엇을 향해 간다는 것도 의미한다. 단어들을 존재하게 하고, 또한 앞으로 향하게 하는 긴장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단어들은 자신의 행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행진을 멈추게 할 단어를 찾는다. 시는 이 마지막 단어에 의해, 그리고 그 단어 앞에서야 환하게 밝아진다.  시편은 숨어 있는, 어쩌면 말해질 수 없는 그 단어를 향한 겨냥이다. 결국, 시의 통일성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그 방향과 의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갈 지之자 모양의 시편의 흐름에 마지막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색적인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신비한 외부의 도움, 즉 예기치 못한 타인의 목소리의 출현과 만나게 된다. 낭만주의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속삭임을 딱 들어맞는 말로 바꾸고, 희미한 예감을 현실화하는―앞의 경우와 같이 설명할 수 없는―어떤 의지의 출현과 마주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좀 부정확하지만 임시 방편으로 '타자의 의지 침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라고 불리는 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쩌면 그것은 의지보다 훨씬 오래되고, 오히려 의지가 기대고 있는 그 무엇이다.  사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지란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정한 규범에 우리의 행위를 종속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말하는 의지란 사색, 계산, 혹은 예상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지적 작용보다 우선하며,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의지의 진정한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우리 것인가? 210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경계는 희미해진다. 우리의 언표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너'나 '그'가 아닌,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다른 대명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이 모호성에 영감의 신비가 자리한다.  신비인가, 난제인가? 둘 다이다. 영감이 고대인들에게 하나의 신비였다면, 우리들에겐 세계라는 개념과 우리의 심리적 개념 자체에 모순되는 난제이다. 이렇게 영감의 신비를 심리적인 문제로 왜곡하는 것은, 시적 창조가 무엇에 기초하는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처음부터 외부 세계의 실존을 의문시했던 인도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서구 사상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의 존재를 안심하고 믿어버려 우리 눈이 본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타자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개입하는 시적 행위는 언제나 어둡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어, 세계라는 개념을 위협하는 문제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대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계 속에 포함되고, 세계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는 현상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의 객관성, 사실성 그리고 역동성의 증거로까지 인정되었다.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자로 보았다. 시인의 몽환夢幻과 열정은 악마적 강신降神의 표지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온Ion』에서 말하길, "시인은 열정의 포로가 되어 자신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창조를 말할 수 없는 가볍고, 신성하며, 날개 달린 존재이다…… 시인의 말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신의 입이 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고 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으로 보았다. 211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자연이란 혼으로 가득한 것, 하나의 유기체 그리고 살아 있는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모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해설에서 가르시아 바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은 다소간 신비적 물활론物活論에 의해 영靈이 깃들인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였다.  따라서 시적 '발생'은 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다.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그리스의 물활론은 후에 기독교적인 초월로 변한다. 이러한 연계성으로 인해 외부 세계는 존속한다. 혼령의 터전이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건 간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외부 세계는 우리 앞에 필요한 지평으로서 존재한다.  천사, 돌, 동물, 악마, 식물 그리고 '타자'까지도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가지며, 때때로 우리를 포로로 잡아 우리 입을 통해 말한다. 외부 세계가 의심받지 않고 개념과 원형을 산출해내는 사회에서, 그것이 영감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타자' 즉 신이거나 귀신과 정령이 깃들인 자연이다. 영감은 신성한 힘의 현현이기 때문에 계시이다. 영감이 인간의 자리에서 대신 말을 한다. 신성하거나 세속적이거나 간에, 서사시이거나 서정시이거나 간에, 시는 외부에서 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이다.  시적 창조는 신들이 인간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하지만 그 신비는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212   데카르트로부터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근대적 주관주의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단지 의식에 근거해서만 인정하였다. 초월적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유아론이었다. 의식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계를 세울 수 없었다. 그 사이 자연은 우리에게 대상과 관계의 얽힘으로 변하고 말았다.  신은 우리의 생생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대상, 본체, 인과의 개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의 영역에서와 같이, 관념론이 외부 현실을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 외부 현실은 하나의 대상, 하나의 '경험의 장'으로 변화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속성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연은 살아 있고 혼이 깃들인 생명체, 즉 은밀하고 의도를 갖는 하나의 힘이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오래된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감의 개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자의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도전해온다. 이렇게 영감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사이에는 하나의 벽이 세워진다.  영감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의 존재는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지적 믿음을 부정한다. 따라서 19세기 내내, 신성한 그 옛 힘을 외부 현실에게 되돌려주고자 하는 골칫거리 운동들을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증가되어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영감이 우리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 16세기부터는 영감을 하나의 수사학이나 문학적 비유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하는 주체는 시인의 의식뿐이었다. 당시의 대표적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고, 부르는 대로 받아 적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자의식에 충만한 깨어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213 시적 창조를 진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답을 구하기가 불가능해진 사실은, 슬그머니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으로 변화되었다. 한동안 영감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탈선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의 진정한 이름은 게으른, 부주의, 즉흥주의, 편의주의였다.  몽환과 영감은 광기와 질병의 동의어로 변했다. 시적 행위는 노동과 훈련이 되고, 글쓰기는 '흐름에 거슬러 싸우기'가 되었다. 이런 사고 방식 속에서, 여러 가지 부르조아지 도덕 개념들이 미학의 영역에 과도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이 장사꾼 미학의 도덕적 뿌리를 고발한 것이다. 사실 영감은 상과 벌이라는 개념을 숨기고 있는 편의성과 난해함, 게으름과 노동, 부주의와 테크닉 등의 천한 개념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맑스가 지적한 대로, 부르조아지 사회가 오래된 인간 관계를 대체한 '엄격한 계약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한 작품의 가치는 그것에 투자한 작가의 노동의 양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시적 창조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영감은 심연에서 싹튼다. 시인의 언표는 침묵과 불모, 가뭄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충만함과 일치에 도달하기 전의 결핍이고 목마름이다. 그 뒤, 결핍은 더욱더 커지는데, 왜냐하면 시는 시인의 손에서 벗어나 더 이상 시인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시의 앞뒤 좌우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 '우리', 그 '나' 역시 사라지고 침몰한다. 시인은 몸을 숙이고 스스로 백지 위로 굴러 떨어진다. 이렇게 시적 창조에는 이득과 손실, 노력과 대가와 같은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시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득이다. 모든 것이 손실이다.  하지만 부르조아지 도덕의 압력은 시인들에게 그 오래된 정령들의 '목소리' 앞에 귀를 막게끔 강요한다. 보들레르조차도 은근히 노동을 찬양했다. 불모의 황무지와 게으름의 천국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썼던 그 조차도! 하지만 비평가들과 작가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영감의 샘은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도전이며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214   현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는 추상적인 신들을 양산했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유대인들을 꾸짖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정반대의 질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탈육체화에 정신이 없다. 현대의 우상들은 육체도 없고, 형태도 없다. 그것들은 관념, 개념, 권력 등이다.  신들과 악마들이 살았던 고대 자연과 그 뒤 기독교적 유일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인종, 계급, (집단적 혹은 개인적) 무의식, 민족성, 유산 등 얼굴 없는 존재들이 차지했다. 이런 개념들에 의지하면 영감조차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그저 영매靈媒로서 성性, 日記,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개념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즉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두에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사실을 붙잡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이 자명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그 결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비로운 '예술 능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감쪽같이 문제를 감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근본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현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16 시인의 언어와 노이로제 환자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구분해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는 예술가들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들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꿈이나 몽상같이 방향성을 결여한 생각 속에도 이미지와 언어의 흐름은 의미가 있다.  "목적이 없는 표상들의 흐름에 우리를 맡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멈출 때, 그 즉시 다른 알 수 없는 개념―부적절하지만 흔히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표상들의 행진들을 결정짓게 된다.  목적의 개념 없이는 하나의 사상을 형성할 수 없다…… "1) 여기서 프로이트는 핵심을 찌르고 있는데, 목적이라는 개념은 무의식의 흐름에서조차도 필요 불가결하다는 점이다. 단지 그는 인간을 의식, 무의식 등 여러 층으로 나누고, 두 개의 상이한 목적을 인식할 뿐이다.  하나는 우리들의 의지가 참여하는 이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무관한 '무의식' 혹은 순수하게 본능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무시된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리비도나 본능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설명을 빠뜨렸다. 그 본능적인 목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의식적'인 목적이란 사실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욕구, 자연적인 작용이므로 대상과 의미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 게 아니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비록 한없이 어둡지만, 도달하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앎을 내포한다. 목적의 개념은 의식의 개념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과 그 모든 분과 학문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제를 바르게 제기하는 데도 실패했다.  1) 프로이트S. Freud, 『꿈의 해석La interpretacion de lod suends』 (원주) 216   시인의 개념을 역사의 '대변자'나 '표현자'라고 보는 데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역사의 힘'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로 전환되며,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하는가? 모든 역사적 삶이 가지는 상호 연관성에 대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人이며, 간間이다. 가장 신비주의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시인의 목소리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정신 분석학에서와 같이, '역사'나 '경제의 흐름', 즉 '역사적 목표'가, 리비도의 '목적'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말로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역사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이며,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다. 시는 사회의 메아리가 아니라, 다른 인간 행위들처럼 사회를 만들고 또한 사회의 산물이다.  결국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이나 주체 혹은 단순한 외부 현실은 성性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니며, 또한 역사도 아니다. 세계는 우리 밖에 있지 않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안에 있지도 않다.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17   지식인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감은 하나의 문젯거리 혹은 미신 또는 현대 과학의 설명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 어깨를 움칠하고는 머리 속에서 그 문제를 지워버릴 수 있다. 반대로 시인들은 그것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혀서 투쟁해야 한다.  현대시의 역사는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이다. 이 갈등을 제일 처음 겪었던 이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명철하고 충실하게 그것에 대처하였으며, 그 모순에 고통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초극하려 애쓴 유일한 사람들―초현실주의 이전까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자식이면서 다른 한편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자식이기도 한 그들은 나폴레옹 제국의 칼날과 신성 동맹의 반동 사이에서, 구태여 표현하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은 채 살았다. 그들의 내부는 대립물의 싸움터였다.    이런 시인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고집스럽게 유지되어온 영감은, 낭만주의가 전투적으로 포교하는 주관주의 관념론과 화해할 수 없었다. 결별이 야기한 폭력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담하고 무모한 시도를 유발했다.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라고 노발리스가 선언한 것은, 아마도 현대인을 분열시키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영감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려는 필요성을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제기한 것이 아닐까?  다만 모순의 법칙을 제거하는 것―예를 들어, '통일성에로의 회귀'를 통하여―은, 글을 쓰게 하는 힘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인이라는 이중적 요소로 구성된 영감을 파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노발리스는 단일성은 이루어지자마자 곧 깨져버린다고 확신했다.  상호간의 끝없는 생성 과정 속에서 모순은 동일성으로부터 탄생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기 자신과 합의하고 헤어졌다 다시 합치는 대화이며, 다의성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이며, 그 여러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이기도 하다. 218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창조는 어디에 의지하는가? 노발리스는 말하기를, 시인은 "작作하지 않고 술述한다"고 했다. 섬광과도 같은 이 말은 시 쓰기의 현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술'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시인으로 하여금 '작'하도록 도와주는가?  노발리스는 이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때로 그 '작'하는 주체는 성령, 민중, 이념, 혹은 소위 대문자로 씌어지는 그 무엇들이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주체로서의 시인이라는 관점에 대해선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시적인 존재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는 시적 창조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선천적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성스러움을 지각하게 하는 신격화 성향과 유사한 것이다.  시적 창조 능력은 선험적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의 신자에게 신성을 심기 위해서는 그의 내부에 있는 '의존의 감정'에 호소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 사상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떤 낭만주의 시인도 종교로부터 시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았다.  많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이 개종한 것은 종교를 시적으로 해석하고, 시를 종교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시는 야생 상태의 종교 같은 것이고, 종교는 실천시이거나 행위시라고 노발리스는 거듭 확언했다. 따라서 시적인 것의 범주는 신성神聖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19 시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둘 다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의 해석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작용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이름부르기로 이루어진다. 말(言)이야말로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한다. 시 쓰기는 말로써 창조하는 것, 즉 시를 창작한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이다. 시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선험적 영역이나 선천적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시가 부르고자 했던 것, 즉 이름 불려지기 전에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의 형태로만 보여졌던 바로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는 것이다. 독자와 시인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시를 창조할 때, 독자와 시인은 스스로를 창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 언어가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시적 상태라는 것도 따로 있지 않다. 시의 특성은 끊임없는 창조이며, 창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내동댕이치고 자신에게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데리고 간다는 점이다. 220   초조도, 사랑의 열정도, 기쁨도, 열광도 그 자체로는 시적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시적 요소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체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쓰러뜨린다. 이때 우리에겐 죽어 있는 언어를 포함한 침묵이나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 무엇, 이름 없는 것을 이름짓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부르기 위해 우리가 창조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는 창조자의 희생을 통해 생겨난다. 일단 시가 씌어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 ―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의 경험은 단지 그 방향만 바뀌어 반복된다. 이미지는 독자에게 스스로를 열어, 자신의 불투명한 심연을 열어 보인다.  독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심연으로 떨어질 때, 혹은 상승하거나, 이미지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시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나 할 때 그때까지 모르거나 무시하던 '진짜 나'가 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시인처럼 독자도, 스스로를 투사하고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름붙일 수 없는 것과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로 변한다. 시인과 독자 양자의 경우, 시는 자기 밖에 있는 시 작품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 안의 우리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고, 또한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노발리스의 금언을 이렇게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작하지 않고 술한다. 그리고 작자는 창조자로서의 인간이다. 시적인 것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시작詩作은 우리 내부에서, 마치 '누군가'가 우리 내부에 저장해놓았거나 혹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나는 '물건'처럼 시를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다.  시인의 의식은 숨겨진 보물처럼 시가 묻혀 있는 동굴이 아니다. 미래의 시 앞에서 시인은 어눌해져서 발가벗고 서 있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221   갈등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어왔다. 갈등은 반복되면서 깊어지고, 동시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모순은 더 첨예해졌고, 찢겨짐의 의식이 커갈수록, 그것에 정면으로 대항할 명증성과 그리고 해결해낼 용기는 작아졌다.  영감의 희생양이나 증거자 혹은 공조자인 19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그 누구도 노발리스처럼 투철한 의지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들 모두는 해결책 없는 모순 속에서 논쟁했을 뿐이다. 영감을 버리는 것은 시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정당화해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인간관 및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점 때문에, 종종 이 시인들은 세계를 거부하고 비난했다. 물론 도덕적 관점에서 보들레르의 공격과 말라르메의 멸시 그리고 포우의 비판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즉, 그들이 살게 된 그 세계는 구역질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들의 시대는, 현대의 비할 바 없는 끔찍함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무도 그가 속한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그 부정과 비난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는 방법, 즉 소극적으로 견뎌내는 방법일 뿐이다. 보들레르나 콜리지 혹은 말라르메의 글 이상으로 시적 작용의 신비와 그것이 낳는 황무지와 천국에 대해 통찰적이고 명징하게 묘사한 것은 없다. 동시에, 영감의 개념과 현대적 세계관을 조화시켜보려는 그들의 설명과 가설처럼 선명한 것도 없다.  그들의 혼란스럽고 모순에 가득 찬 명증성과 맹목성을 살펴보기 위해선, 현대 시학의 중요한 텍스트(예를 들어, 포우의 『글쓰기 철학』 등) 중 그 어디라도 한번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 그 이전 글들과의 대조는 너무나 선명하다.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22   스스로의 확신으로 가득 찼던 단테는, 꿈에서 사랑의 신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어 시를 받아 적게 했고,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철저하게 확신시키는 상황 속에서 계시가 언제라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쉽고도 단순하게 얘기했다.  "말들을 마치자 그는 사라져버렸고, 잠이 몰려왔다. 그 뒤, 그 환상을 돌이켜보았을 때, 아침 9시에 그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 집을 나서기도 전에 그 서정시를 끝냄으로써, 주(사랑의 신)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2)  단테에게 9라는 숫자는 네르발에게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와 유사하다.3) 단테에게 숫자 9의 반복은 베아트리체가 가지는 구원의 의미와 그들 사랑의 특별한 성격을 순수한 빛으로 조명하기 위한, 비록 신비롭고도 성스럽지만, 다분히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네르발에게 7이란 숫자는 모호하며, 때로는 불길하고 또 때로는 좋아서, 그 진정한 의미는 명확히 밝힐 수 없다. 단테는 계시를 받아들여, 그것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비경秘境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시적 창조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사색하고 몰두해야 할 필요성은, 그것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바로 그 행위 속에 근대성이 기초한다. 그리고 시인들의 불쾌함은, 근대인의 의식과 세계관 속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근대의 기초 관념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상한 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는 무능에 기인한다.  부서지지 않는 유일한 바위이며 세계의 기둥인 자아라는 의식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의식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이상한 요소가 나타난 것이다. 영감의 문제를 정확히 제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뒤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시사詩史에서 그것은 초현실주의로 불린다. 224   초현실주의는, 우리에게 주체와 현실이라는 형태로 불리는 객체 사이의 투쟁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로 등장했다. 고대인들에게 세계와 의식은 모두 충만하게 존재했고, 그들의 관계 또한 뚜렷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존재가 살벌한 투쟁의 형태로 다가온다. 한편으로 세계는 증발하여 의식의 이미지로 변하고, 다른 한편 의식은 세계의 반영이 된다.  초현실주의의 시인들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다툼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그들의 과업은 근대 세계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 되었다. 낭만주의의 계승자인 초현실주의는, 노발리스가 '최상의 논리학'이라고 했던 그 과업을 완수하려고 했다. 즉, 우리를 찢는 '오래 묵은 이율배반'을 파괴하고자 했던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주체의 이름으로, 생으로 가득 찼던 어제의 세계에 대한 환각 껍질이 되어버린 현실을 부정했다. 초현실주의 역시 객체에 대해 공격했다. 그러나 객체를 녹였던 그 산酸은 주체마저 녹여버렸다. 자아고 없고 창조자도 없으며, 단지 시적 힘만이 근거 없고 설명할 길 없는 이미지만을 선호하고 양산하는 종이 위를 휩쓸고 다닐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적 행위는 문자 그대로 비자발적이 되어, 항상 주체의 부정으로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명은 그 시의 힘을 불러 고압 전류로 바꿔서 이미지들을 방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주체와 객체는 영감을 위해 용해되어버렸다.  '초현실주의의 대상물'은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침대이고, 바다이며, 동굴이고, 쥐구멍이며, 거울이고, 칼리 신의 입이다. 주체 역시 사라진다. 시인은 두 개의 단어 혹은 두 실재 사이의 만남의 장소인 시로 변한다. 이렇게 초현실주의자는 양가적 가치 사이의 모순과 유아론을 부수고자 했다. 단호한 의지로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도 없고, 의식도 없다. 세계의 의식도 없고, 의식에 비친 세계도 없다. 상상력이라는 천장으로의 비행 외에는 환풍구도 없어졌다. 영감은 이미지로 나타나거나 실현된다. 영감을 통해, 우리는 상상한다. 상상할 때, 우리는 주체와 객체를 해체하고, 우리 자신도 해체하며, 모순도 함께 제거한다. 225   영감 때문에 괴로워하던 이전의 시인들과는 달리,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무기로 삼고 칼처럼 휘둘렀다. 그렇게 하여 영감을 이념화하고, 또 이론화했다. 초현실주의는 단순한 시운동을 넘어 하나의 시학, 혹은 더욱 더 결정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표출된 계시인 영감은 주관주의의 미궁을 깨뜨린다. 그것은 의식이 잠들자마자 갑자기 우리를 엄습하는 무엇이다. 그것은 경계警戒의 모든 문들이 닫힐 때만이 비로소 열리는 다른 문을 통하여 분출하는 그 무엇이다. 내면적 계시로서의 영감은 의식의 단일성과 동질성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을 뒤흔든다.  자아란 없고, 우리들 개개인의 내부에는 여러 개의 목소리들이 싸운다. 영감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사고는 우리들의 세계관의 파괴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이 단순한 환영fantasma임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바로 영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상정한다.  초현실주의적 세계관은, 영감의 파괴적이며 재창조적인 활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초현실주의는 신이나 이성이 차지하고 있던 중심을 영감이 대신 차지하는 사회, 그런 시적 세계를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독창성은 영감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했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까지 확대했다는 데 있다.  이런 변화 덕분에, 영감은 단순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나 공허한 미신 혹은 비정상적인 상태로 치부되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근본 개념과 상충되지 않는 하나의 관념이 되었다. 이것은 영감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영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다른 관념들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26   초현실주의 이전의 모든 위대한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인들은 영감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몰두했지만―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시인들과 다른 점이었다―그 누구도 영감을 현대인의 세계관과 인간관과 합당하게 소화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전시대의 찌꺼기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영감은 과거로 돌아가 중세인, 그리스인, 야만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낭만주의자들이 고딕주의, 근대시의 일반적인 의고주의擬古主義, 그리고 도시 한복판에서 망명자로 사는 시인의 초상 등이 영감을 순화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초현실주의는 신, 자연, 역사, 인종 등의 외부 요인에 의지하지 않고도 영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인정함으로써, 시인의 저항과 추방을 멈추게 만들었다.  영감은 인간 속에 있고, 자신의 존재 자체와 혼동되며, 인간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무엇이 되었다. 이것이 「1차 초현실주의 선언」의 출발점이다. 또한 바로 이 점이, 아직도 간과되고 있지만, 브르통과 그의 동료들이 가지는 독창성이다.    자동 기술법, 자기 최면, 의도적 꿈꾸기, 집단 창작 등의 운동을 벌였던 '초기 모색기'에서, 시인들은 영감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한편으론 영감으로 인해 고통받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가장 용감한 시인들은 장애물을 부수고, 영감을 추적하여 거의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갔다.  초현실주의의 운동은 우리들의 개념이 보이는 결핍을 지적―특히, 인간의 모든 작품 속에서 어떤 '의지'의 개입을 읽어내는 것―하고, 위대한 발견들 속에는 이상하게도 종종 '방심', '우연', '부주의' 등이 끼여든다는 것을 밝혀냈다. 227 브르통은 명증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현상에 매혹되어, 인간과 '타자'가 만나는 장소이며 '타자성'의 선택된 장으로서 '객관적 우연'이라 불리는 신비한 메카니즘을 규명하려고 했다. 우리가 무엇을 찾거나 혹은 찾는 것을 멈출 때, 여인, 이미지, 수학이나 생물학 법칙 등의 그 모든 신대륙이 대양의 한가운데에서 불쑥 솟아나는 것이다. 이런 만남들은 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모든 것이 교차하는 자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게 전부다.  우리는, 세심한 주의와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다른 목소리'가 솟아나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 어디서 오며, 그렇게 갑작스럽게 왔다가 왜 또 그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것일까? 초현실주의의 고된 실험에도 불구하고, 브르통은 고백하기를, "여전히 우리는 목소리의 근원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보자.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예기치 않은 그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미 과거에 보았던 것을 다시 본다는 느낌이 든다. 돌아가서, 다시 듣고, 기억해내는 것 같다. 타자성의 느닷없는 출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느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들어본 일이 있으며 또한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의 근원에 대해 잘 알 수 없다는 브르통의 고백이 나름대로 타당함에 주목해야 한다. 브르통은 영감을 단지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내심 저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초현실주의자들의 영감에 대한 관념을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28   낭만주의 이후로 시인의 자아는 시적 세계가 움츠러든 것과 정확히 반비례하여 커져갔다. 공장주나 농부가 자신의 공장이나 땅에서 생산된 생산물의 주인인 것처럼―양쪽 다 그 소유가 타당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시인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기 시의 주인인 것으로 생각했다.  전시대 시인들의 개인주의와 이성주의에 대응하여,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모든 창작의 무의식적, 비의도적, 그리고 집단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영감과 자동기술법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가장 시적인 것은 시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의 시 속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적 요소라는 것이다.  시는 방향성이 없는 사유다.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부수기 위하여, 브르통은 프로이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는 무의식의 계시이고, 따라서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노발리스가 살펴본 바와 같이, 브르통이 깨달은 그 문제는 거짓된 것이다.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것도 의도적인 행위가 된다. 수동성이 가능하려면 능동성이 전제된다는 의미에서, 그 수동성은 능동성을 내포한다. 전前-숙고라는 말은, 그것이 성립되려면 전前-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별의미가 없는 말이다.  기계적이고 생각 없이 '유용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되는 것에 대해 하이데거가 행한 비판은―이것에 관련하여, 근원적으로 인간을 점거하고 있는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된 채로 인간의 모든 작업의 전제가 된다―그대로 초현실주의 영감 이론에 적용된다.  무의식의 계시들은 그 계시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다. 자아ego의 검열이 검열될 대상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자유롭고도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그 계시들은 밖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욕망이나 충동을 억제할 때, 우리는 가면을 쓰고 변장하고 나타나는 의지를 통해서만 그렇게 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관여되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하여 그 의지를 '무의식'의 탓으로 돌리는 그 '무의식'이 자유롭게 되는 순간, 이번에는 역으로 그 작용이 반복된다. 이번에는 수동성이라는 가면에 숨은 채 의지가 다시 개입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서 모두 의식이 개입한다.  229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그것을 무의식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밖으로 끄집어내거나 간에, 하나의 결정이 따른다. 이 결정은 분석 능력, 의지 혹은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결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존재의 총체성 자체이다.  전-숙고는 창작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것이다. 전-숙고 없이 영감이나 '타자성'의 계시란 없다.  하지만 전-숙고란 의지보다 선행하여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몰두와 욕망보다 앞선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보여준 바와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갈증이고 끊임없는 전前-존재인 인간의 존재 자체에 모든 소망과 욕망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부분'이거나 '구성 요소'로서의 의식이나 무의식에서도 아니고, 충동이나 수동성 혹은 깨어 있음에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모두가 모여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브르통은 심리학적인 설명이 항상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프로이트의 생각에 매우 동조했을 때조차 영감은 정신분석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했다.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그로 하여금 신비주의적인 가정을 모험해보도록 이끌었다.  한편 신비학은 그것이 신비학이 되기를 그만둘 때, 즉 그것이 계시가 되어 감추던 것이 드러날 때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만일 영감이 하나의 신비라면, 신비학적인 설명은 그것을 두 배로 더 신비하게 만들 뿐이다. 신비학은, 영감과 마찬가지로, 존재를 '타자성'의 계시로 만든다. 따라서 그것은 유사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영감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면, 그것이 신비학자들이 말하는 계시와 비슷한 것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230 왜냐하면, 우리는 영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브르통이 신비학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설명의 가능성에 집착한 사실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그 집착은 심리학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자성'의 현상이 지속된다는 데 그가 점점 더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브르통에게 유효한 것은 영감의 개념이 아니라, 영감으로부터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현상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감추거나 단순한 심리적 메카니즘으로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타자성'의 숙제를 풀지 못했다고 해도, 초현실주의 이론은 요약적이고 끝내 표면적일 수밖에 없는 심리학적인 단언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영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우리에게 친숙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채택한 심리적 설명이 불충분하여 결국 문제의 핵심이 '타자성'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전-숙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타자성'에 어쩌면 답이 있을지 모른다.    노발리스나 브르통 같은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가 경험한 어려움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즉 어떤 본성은 가진 주체로 파악한 데 있다. 말하자면, 시적 창조란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말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혹은 그 반대의 가정에 의하면, 어떤 특수한 순간에 시인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말들이 돋아난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마음 깊은 곳'이란 없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도 아니며, 그의 마음속에 별과 뱀과 보석과 맹수들이 웅크리고 있는 부동의 경직된 존재는 더 더욱 아니다. 자신 너머의 저곳으로 발사되어 날아가는, 끊임없이 대기를 가르며, 항상 앞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인 인간은 쉼 없이 전진하고 추락한다. 그 순간 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이다.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어쩌면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지 모른다. 231   여기 한 시인이 종이 앞에 앉아 있다. 그가 사전 계획을 가지고 있건 없건, 그가 앞으로 쓸 것에 대해 길게 사색을 했건 안 했건, 번갈아가며 그를 유혹하고 거부하는 순결한 백지처럼 그의 의식이 비어 있건 아니건 상관없다. 글을 쓰는 행위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마치 허공으로 던져지는 것 같은 이탈을 요구한다.  이제 시인은 혼자 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를 신경쓰게 만들었던 모든 일상 세계가 사라진다. 만일 시인이, 단지 의례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글쓰기를 원한다면, 그의 행위는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괄호 속에 집어넣는다. 그때 두 가지 가능성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증발하고 희미해져서 중력을 잃고 떠다니다가 결국 녹아 없어지거나, 혹은 모두가 스스로를 닫아걸어 의미의 빛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물질인 무의미체가 되고 만다. 세계는 스스로를 연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 거대한 하품이다. 책상, 벽, 컵, 기억나는 얼굴 등 세계는 스스로를 닫아걸고 균열없는 담으로 변한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은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된다. 다시 세계를 창조하여, 저 위협적인 외부의 텅 빔을 하나하나 이름붙여야 한다.  책상, 나무, 입술, 별, 그리고 무까지도. 하지만 낱말 역시 증발하여, 도망가고 만다. 말 이전의 침묵이 우리를 감싼다. 혹은 침묵의 또 다른 얼굴인 무분별하고 말로 옮길 수 없는 중얼거림,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분노the sound and fury", 수다, 아무 의미 없는 소음 등이. 232 세계가 사라질 때, 시인에겐 말 역시 사라진다. 어쩌면 이 순간 그는 뒷걸음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말을 기억하려 하고, 학습했던 모든 것, 즉 조금 전만 해도 그에게 외부로의 길을 열어주고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같던 그 아름다운 말들을 내부에서 끄집어내려 애쓴다.  그러나 뒤에, 혹은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팽팽하고 긴장되게, 앞을 향해 던져진 시인은 문자 그대로 그를 벗어나 있다. 시인처럼, 말들도 저 너머, 언제나 저 너머에서,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질 듯이. 자신 밖으로 던져진 그는 결코 말과, 세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말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주어진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치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그것들을 창조하고 발명해내야 한다. 어떻게 말들을 창조하는가? 무에서는 무만 나온다. 만일 시인이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해도, '언어를 발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언어란, 당연히, 대화이다.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고, 언제나 최소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두 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매일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앞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상 안도 밖도 없다. 우리가 존재한 순간부터, 우리는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우리 존재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자신이다. 그것들이 바로 우리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낯선,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성'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이다. 233 시인이 스스로를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로 느끼고, 언어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고 해체될 때, 그 자신도 떠나고 사라진다. 그 다음 순간 침묵이나 알아듣지 못할 혼돈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고 더듬더듬 언어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 그 자신이 새로 창조되고 치명적 도약을 통해 재탄생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의 말과 목소리만 이상한 게 아니다. 그 자신, 그의 존재 전부가 끊임없이 낯선 것, 항상 타자로 변하는 무엇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된다.    시는 우리의 존재 조건을 투명하게 한다. 왜냐하면 말은 여전히 세상의 것이면서, 즉 말이기를 그치지 않은 채, 시의 정수 속에서 시인만의 독점적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어는 역사적인 것일 뿐 아니라, 개인적이고 순간적이기도―창조의 순간의 표식―한 것이다. 시가 순간적이고 개인적인 표식이기 때문에, 모든 시는 같은 것을 말한다.  모든 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 즉 인간과 인간의 언어와 세계를 쉬지 않고 파괴하고 창조하며,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끊임없는 '타자성'을 계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역사적이며 공동의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에, 각각의 시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무엇을 말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호메로스나 라신과 똑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시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세계를 말하고, 저마다 자신의 세계를 재창조한다. 234   영감은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지도 않고, 과거의 진흙으로부터 갑자기 솟아난 존재처럼 뒤에 있지도 않으며, 굳이 말하자면 앞에 있으면서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 무엇, 혹은 차라리 누구이다. 그 누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사실 영감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이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이렇게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 자유는 좀더 충만해지기 위해서 우리 자신 저 너머에 있는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행위이다.  자유와 초월은 시간성의 표현이며, 움직임이다. 영감과 '다른 목소리'와 '타자성'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현시켜서 흐르게 하는 시간성이다. 영감, '타자성', 자유 그리고 시간성은 초월이다. 하지만 그 초월과 존재의 움직임은 어디로 향한 것인가? 우리 자신을 향해서이다.  보들레르가 "우리의 가장 고귀하고 철학적인 능력은 상상력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을 확인한 것이다. 상상력을 통하여, 즉 우리들의 본질적인 시간성에 내재하면서 바로 그 시간성을 육화하려는 끈질긴 욕망을 이미지로 바꾸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 너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되기를 멈춘다. 두번째 단계에서 자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더욱더 전체적인 자신이 된다. 신화와 시적 이미지가 말하는 진실은, 대개 매우 신비롭게 나타나는데, 이탈에서 귀환으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에 들어 있다. 235   인간은 세상을 자화磁化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삼라만상은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의미를 머금게 되고,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겨냥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를 겨냥해야 하나?  그는 그것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타인이 되기 원하며, 그의 존재는 그를 항상 자신 너머로 가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인간은 매순간 헛발을 짚고 발자국마다 비틀거리며, 존재이기를 상상하지만 매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타자와 조우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이 남자였고 여자였으며, 바위였고 "바닷속에서는 벙어리 물고기였다고 했다. 그만 그런 게 아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이런 말을 듣는다. 어떤 사람이 흥분하면, '몰라보게 달라 보이고', '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말을. 우리 이름 속에는 누군가가 숨어 있고, 그 역시 우리 자신이라는 것 외에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완성한다. 타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낙원에서의 추방과 이 땅으로의 전락 이전의, 나와 '타인' 사이의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재정복한다.    인간의 특성은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뿐 아니라, 타자가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말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  그때, 도약의 절정에서, 인간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허공에 걸려 작렬하는 순간, 그는 순간적인 충만과 충만한 존재로의 생성 속에서 동시에 이것과 저것,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 삶과 죽음이 된다.  인간은 이제 되고 싶었던 모든 것이 된다. 그는 돌, 여자, 새, 다른 사람, 다른 존재가 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시이며, 대립물들의 결합인 이미지가 된다. 결국 그는 인간으로 육화한 인간의 이미지가 된다.    시적 목소리, '다른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이다. 인간의 존재는 이제 그가 되고 싶어했던 타자를 포함한다. 마차도가 말하길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에로틱한 의미로서 하나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우리들의 존재 속에 갈증과 '타자성'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에로티시즘이다. 영감이란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다른 몸, 다른 존재―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자신에게서 꺼내는 이상한 목소리이다. 존재는 다름 아닌 존재의 욕망이기 때문에, 욕망의 목소리는 존재 자신의 목소리이다.  나 밖의 저 멀리, 푸르고 빛나는 숲 속의 떨고 있는 가지 끝에서 미지의 누군가가 노래한다. 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낯선 이는 친밀감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더듬어 '시의 목소리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난 이미 그곳에 있어보았다. 고향의 바위는 아직도 내 발자국을 머금고 있다. 바다는 친숙하다. 저 별은 언젠가 내 오른손에서 불타고 있었다. 난 네 눈을, 네 머리칼의 감촉을, 네 뺨의 체온을, 네 침묵으로 인도하는 길목을 알고 있다. 너의 생각은 투명하다. 네 생각 속에서 네 모습과 겹쳐지는 내 모습을 보고, 이윽고 그 모습들이 천 번 만 번 겹쳐지다가 백열白熱에 이르는 것을 본다.  너로 인해 나는 이미지이고, 너로 인해 나는 타자이며, 너로 인해 나는 나다. 모든 사람은, 타자이며 나 자신인 사람이다. 나는 너다. 또한 그이며, 우리이고, 너희이며, 이것이고, 저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명사들은, 언어의 원천이며 시의 끝이고 한계이며 모든 언어를 양육하는 비밀스럽고 언명 불가능한 다른 대명사의 변조變調이며 굴절어屈節語이다.  모든 언어는, 나이며 타자들이고, 나의 목소리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고, 모든 사람이면서 각 개인인 그 원초적 대명사의 은유들이다. 영감은 존재로의 투신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존재를 기억해내서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로 돌아가는 것.' 237   ​
1    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 [스크랩] 댓글:  조회:1225  추천:0  2018-07-22
글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거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그 글은 아무에게도 쓰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은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시인의 숙명   말은?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나를 말들 속에 사라지게 하라,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뉘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휴식   새 몇 마리가 찾아온다. 그리고 검은 생각 하나. 나무들이 수런댄다. 기차소리, 자동차 소리. 이 순간은 가는 걸까? 오는걸까?   태양의 침묵은 웃음과 신음소리를 지나 돌들 사이 돌의 절규를 떠뜨릴 때까지 깊이 창을 꽂는다.   태양 심장, 맥박 뛰는 돌, 과일로 익어가는 피가 도는 돌; 상처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 나의 삶이 삶의 참모습으로 흐를 때.   행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세바스또 대로를 가고 있었지, 이 일 저 일 생각하며, 빨간 불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어. 위를 쳐다 보았지:                     위에는 잿빛 지붕 위에는, 검으잡잡한 새들 사이에 끼어 은빛으로 반짝이며 생선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어.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고 길을 건너면서 그는 문득 뭘 생각하고 있었지 하고 혼자 물었지    너의 눈동자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 말하는 고요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 속의 환한 빈 터에 찾아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곳.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 맛있는 거짓, 이승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씌어진 말   첫마디 써놓은 말(결코 생각한 일이 없는 다른 말-이 말 즉 말도 않고 딴 소리를 하는 즉 말은 않지만 말을 하고 있는) 첫마디 써놓은 말(하나, 둘, 셋- 위에는 태양, 너의 얼굴 우물 한가운데 멍청한 태양처럼 박혀 있는 네 얼굴) 첫마다 써놓은 말(넷, 다섯- 조약돌이 끝내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며 네 얼굴을 본다, 떨어지며 추락의 수직선을 헤아린다) 첫마디 써놓은 말 (다른 말이 없다. 밑에는, 떨어지고 있는 말이 아니라 얼굴과 태양의 시간을 떠받고 있는 지옥 위에 간신히 떠받고 있는 말 추락 전, 사고 전의 말) 첫마디 써놓은 말(둘, 셋, 넷- 부서진 네 얼굴을 보라, 흩어지는 태양을 보라, 부서진 물속에 돌을 보라, 똑같은 얼굴, 똑같은 태양을 보라, 똑같은 물 위에 새겨진 첫마디 써놓은 말(을 계속한다, 생각이 있는 말밖에는 말이 없다)   말한 말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위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고드름 글로 쓴 기둥 하나씩 하나씩 글자 글자마다,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인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정확한 말의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의 자궁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말하지 않는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일지도 몰라   외침 한 마디 사위어간 통감 속- 다른 천체에서는 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은 한다. 마음은 마음 아프고 미친 마음 때면에 묘지는 묘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이야기를 하려면 말 안 하는 것을 배우라   우정   기라리라던 시간 책상 위에 끝없이 떨어지는 램프의 머리칼 밤은 창문만 키워놓고 아무도 없다 이름없는 실체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육체를 보며   마침내 어둠이 열리고 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너의 머리칼, 짙은 가을, 태양빛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너의 입과 그 식인종 치아의 하얀 군대는 불길 속에 잡혀 있다. 갓익은 노란 빵 색깔의 너의 살결과 불에 태운 설탕 빛 너의 눈, 거기에서 시간은 흐름을 멈춘다. 오직 나의 입술만 아는 언덕이여, 가슴을 거슬러 너의 목까지 오르는 달의 행로, 목덜미의 굳어진 분수 폭포, 너의 배의 높은 고원, 너의 옆구리의 끝없는 해변   너의 눈동자는 응시하는 호랑이의 눈이다가 일 분이 지나면 물기 젖은 강아지 눈이 된다.   너의 머리칼에는 항상 벌이 있다   너의 잔등은 조용하게 나의 눈 밑을 흘러간다 불길 밑에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의 잔등처럼.   잠든 물결이 밤 낮 진실로 된 너의 허리를 두들긴다 달 빛 아래 모래벌 같은 크막한 너의 바닷가에서   바람은 내 입으로 불려나오고, 그 긴 신음소리는 이 육체와 육체의 밤을 잿빛 날개로 감싼다, 사막의 고적을 덮고 가는 독수리 그림자처럼. 너의 발가락의 발톱들은 한여름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너의 다리 사이에는 물이 잠든 우물이 있다. 밤 바다가 고요해지고 물거품의 검은 말이 머무는 항만, 보물을 감춘 산 자락의 동굴, 성스러운 빵을 빗는 화덕의, 반쯤 열린 사나운 입술의 미소, 빛과 그림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결혼 (거기 육은 스스로의 부활과 영원한 삶의 날을 기다린다.)   피의 조국, 유일하게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아는 고향, 내가 믿는 유일한 조국, 영원으로 행해 열려진 유일한 문 하나.   새벽   차갑고 날쌘 손길이 하나씩 하나씩 어둠의 껍질을 벗긴다. 눈을 뜬다          아직 난 살아 있다          한가운데 아직 생생한 상처의 한가운데   되풀이   심장과 그 성난 고동소리 피 속의 검은 말 눈먼 망아지 고삐 풀린 망아지 밤의 축제 행진 공포의 수레바퀴 벽을 향한 절규와 빨간 불 걸어온 길은           걷지 않은 길 날을 곧두세운 사념과 육박전 날마다 심문을 해도 대답없는 아픔 이름도 부피도 없는 아픔 핀 하나가 뚫고 나간 동공 고생 많았던 날의 동공 때묻은 시간 침 뱉는 사랑 미친 웃음과 지독한 거짓말 고독과 세상 걸어온 길은          걷지 않은 길 피와 괭이와 휘파람 소리의 광장 상처 위에 햇빛 죽은 물 위에 털보 하늘 분노와 온몸이 뒤틀리는 쓴 입맛 녹슬어가는 사고 병든 글씨 괴로운 새벽 잎에 자갈을 물고선 하루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밤 갉아먹는 밤의 뼈 항상 새로운 항상 되풀이되는 공포 걸어온 길은          걷지 않는 길 물 한 컵 약 한 알 양철판 같은 혓바닥 한 밤 꿈 속에 개미굴 피 속의 검은 폭포 밤 속의 돌의 폭포 허무의 총 무게 커다란 도시에 차의 모터소리 나의 귀 주위에 멀리 가까이 멀리 눈이 나타나고 벽이 몸짓을 하고 절름발이 지하철이 나타나고 부서진 다리와 물에 빠져죽은 사람 걸어온 길은 걷지 않는 길 뱅글뱅글 도는 사념 가족 분위기 내가 뭘 했는가 넌 뭘 했는가 우리는 무얼했는가> 죄없는 죄의 미궁 이의를 제기하는 거울과 상처를 내는 침묵 불모의 날과 불모의 밤 불모의 고통 잡동사니 고독한 사람이 없는 세계 이젠 아무도 없는 대기실 그 길이 그 길이고 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버리고 없다.   소녀   아직 사라지지 않는 하오의 빛과 쌓여 있는 밤 사이 한 소녀의 시선이 있다   노트와 글씨 쓰는 것을 그만둔다. 그녀의 모든 존재는 앞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뿐. 벽에는 빛이 사라진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종말인가? 시초인가? 그녀는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고 말하리라. 영원한 투명한 것.   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결코 모르리라.     마지막 여명   지평선에 누운 채 너의 머리칼은 숲으로 사라진다 너의 발이 내 발을 만진다. 자고 있으면 너는 밤보다 더욱 크고 그러나 너의 꿈은 이 방에 찬다. 그렇게도 작으면서 그렇게도 큰 우리! 밖에는 택시 하나가 지나간다 도깨비들을 한 짐 가득 싣고 흘러가는 강물             항상 돌아오고 있는 강물.   내일은 진정 다른 날이 올까?             움직이는 것   네가 호박빛 암말이라면        나는 피의 길 네가 첫눈이라면        나는 첫새벽의 화롯불에 불 붙이는 사람 네가 밤의 첨탑이라면        나는 너의 이마에 박힌 불붙은 못 네가 새아침의 밀물이라면       나는 거기 첫새의 외마디 울음 네가 오렌지 바구니라면       나는 태양의 칼 네가 돌의 제단이라면      나는 성배를 하는 손 네가 가로누운 땅이라면      나는 푸른 갈대 네가 뛰어오르는 바람이라면        나는 땅 속에 묻힌 불더미 네가 물의 입이라면       나는 이끼의 입 네가 구름의 숲이라면       나는 구름을 가르는 도끼 네가 속세의 도시라면       나는 성스러운 비 네가 노란 산이라면       나는 리켄으로 된 빨간 품 네가 떠오르는 태양이라면       나는 피의 길   말   말, 정확한 소리 그러나 틀린 말; 어둡고 빛나는 상처난 샘물 :거울; 거울이면서 광휘인 것 ; 광휘이면서 칼인 것,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칼, 이젠 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드라운 손; 열매 나를 자극하는 불길; 고요한 잔인의 눈동자 현기증의 절정에 머문; 눈에 보이지 않는 차거운 빛이 나의 심연을 파헤친다, 나를 허무로 채운다, 공허한 말로.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 그 바쁜 움직임에 나의 발길을 맡긴다.   이제 나를 벗어난 말, 허나 나의 말, 내 죽은뒤 남은 뼈다귀처럼 이름도 없는, 가냘픈 내 육신의 흔적; 나의 어두운 눈물의 소금 맛, 얼어붙은 금광석. 말, 하나의 말, 버림받아 웃고 있는, 순수한, 자유로운, 구름처럼, 물처럼, 대기처럼, 빛처럼, 온 땅을 헤매는 눈처럼 나처럼, 나를 잊은 나처럼.   말, 하나의 말,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항상 말없는 항상 말하는 성체용 빵이면서 잿더미인 것.     날   시간의 물결 속에 떨어진, 아 놀라운, 어느 하늘에서 떨어진 외로운 나그넨가, 이 고요한 사람아. 너는 길이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익어간다. 어느 크막한 순간에 투명해진다: 공중에 뜬 화살 하나, 표적을 잃은 마침내 화살의 기억을 잃은 공간 하나. 시간과 허공으로 이루어진 날들이여, 너는 나를 비우고, 내 이름을 지우고, 나의 실체를 없애고 대신, 너로 나를 채운다, 빛이며 허무뿐인 너로   그리고 나는 뜬다, 마침내 나를 잃고, 순연한 존재만으로.   수사학   1 새가 노래한다, 노래한다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울대뿐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이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일 뿐.   3 투명한 수정의 맑음은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신비   대기가 반짝인다, 반짝인다 정오가 빛난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투명함 속에 빠져 길을 잃고 나는 빛에서 현란한 빛 속으로 간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그리고 해는 빛 속에 벌거숭이가 되어 빛살마다 묻는다 하지만 해도 해를 보지 못한다.   말들   뒤집어 엎어라, 꽁지를 잡아라(악을 쓰라고 그래, 똥갈보 년들), 집어 패라, 채찍에 묻혀 입에다 설탕을 먹여라, 풍선처럼 불어대, 그리고 터뜨려, 피고 골수고 빨아 마셔라, 말려라, 공알을 까버려라 짖이겨라, 멋진 수탉처럼, 울대를 비틀어라, 요리사처럼, 털을 벗기고 창자를 꺼내고, 투우처럼 숫소처럼, 짓이겨 놓아라, 새 말을 만들어라, 시인아 말은 제가 한 말을 혼자 다 들어 마시게 하라.    시   너는 말없이, 은밀하게 온다. 와서는 분노와 행복을 일깨우고 이 무서운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만지는 대로 불을 붙이고 사물마다 어두운 목마름을 심는다.   세상은 물러나고, 불 속에 집어넣은 쇠붙이처럼 허물어져 녹는다. 허물어진 나의 형체 사이에서 나는 홀로, 벌거숭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 일어선다. 내가 선 곳은 침묵의 크막한 바위 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를 향한 외로운 투사다.   불타는 진실이여, 너는 나를 어디로 밀어붙이는가? 나는 너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그 철없는 질문도 뭐하러 이 소득없는 전쟁을 벌인 것이냐? 인간은 너를 포용할만한 존재가 못 된다. 너의 목마름은 또 다른 목마름으로 배가 찰 뿐, 너의 불길은 모든 입술을 태울 뿐 너의 정신은 아무 형태로든 살기를 거부한다. 모든 형태를 불타오르게만 할 뿐, 너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 존재의 이름모를 중심에서 병대처럼, 밀물처럼 올라온다. 너는 점점 커지고 너의 목마름은 나를 질식시킨다 너는 폭군처럼 너의 열광의 칼 끝에 항복하지 않는 모든 무리를 추방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 혼자 나를 점령한다. 이름도 없는 너, 분노의 실체여, 지하의 목마름, 그 광기여,   너의 유령들이 내 가슴을 친다, 내 감촉을 일깨우고 내 이마를 얼리고 내 눈을 띄운다.   세상을 감지하며 너를 만진다 너, 만질 수 없는 실체여, 내 영혼과 내 육체의 조화여. 나는 내가 싸우는 싸움을 바라보며 땅의 결혼식을 본다.   상반된 이미지들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같은 이미지들에 다른, 더 깊은 이미지들이 앞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불타는 더듬거림, 더욱 숨겨진, 더욱 짙은 물길이 앞의 물길을 흩트린다. 이 젖은 어둠의 싸움 속에 삶도 죽음도 고요도 움직임도 모두 하나다.   계속하라, 승리자여, 내가 존재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입, 나의 혀도 오직 너의 존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너의 은밀한 음절들, 만질 수 없는 횡포한 말은 내 영혼의 실체다.   너는 오직 하나의 꿈. 하지만 세상은 네 속에서 꿈꾼다. 그리고 말 없는 세상은 너의 말로 입을 연다. 너의 가슴을 만지면서 나는 삶의 지평의 기류를 더듬고 어두운 피는 사랑에 취한 잔인한 입과 세상을 묶는다. 너의 입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파괴하는 것을 다시 살 욕망으로 항상 똑같은 비정한 세상과 결탁한다.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머물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어느 것 위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기에.   외로운 사람아, 나를 데려가 다오, 꿈 속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나의 어머니가 되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일깨워주고 내 너의 꿈을 꿈꾸게 하라, 내 눈을 올리브유로 적시어 내 너를 찾음으로 하여 나를 찾게 해다오.   손으로 느끼는 삶   나의 손은 너의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 나의 손은 너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을 창조한다.   태양의 돌   -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 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도리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서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 일이 없다. 우리 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짝수와 홀수   무게가 없는 한 마디 말 새 날에 인사를 보내는 돛 달고 날아가는 말 한 마디         아! ----------------   잠 못자서 네 눈자위에 생긴 커다란 쌍꺼풀 네 얼굴은 아직 밤.   ----------------------------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엮은 목걸이가 너의 목구멍에 달려 있다.    -----------------------------------   신문이 떨어지는 동안 너는 새들에게 휩싸인다 -------------   나의 품 속에  y 너의 다리 속에 우리가 있다. 물 속에 물처럼 비밀을 간직한 물처럼   ---------------------   내 손에 너의 두 가슴 다시 계곡을 내려오는 물 ----------------------   한 발코니에서 (부채가) 다른 발코니로 (펼펴진다) 태양이 뛰어나간다 (그리고 닫힌다)   상호보조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 중간에서   발사   생각보다 앞서 말 하나가 튀어나온다 소리보다 앞서 말이 말처럼 뛴다 바람보다 앞서 유황빛 송아지처럼 밤보다 앞서 두개골 속 거리로 사라진다 곳곳에 맹수의 발자취 나무의 얼굴엔 진홍빛 문신 첨탑의 이마에는 얼음 문신 교회의 음부에는 전기 문신 너의 목에도 맹수의 발톱 너의 배에도 맹수의 발 오랑캐빛 상흔 하얗게 될 때까지 돌아가는 해바라기꽃 비명이 터질 때까지, 이제 그만! 할 때까지 해바라기 꽃이 돌아간다 껍질이 벗겨진 비명처럼 너의 피부를 타고 줄줄이 새겨진 이름없는 도장 곳곳마다 눈을 멀게 하는 절규 생각을 덮고 마는 검은 물줄기 나의 이마에서 두들기는 성난 종소리 나의 가슴에 번지는 피의 종소리 탑 맨 꼭대기에서 웃는 영상 하나 말들을 터뜨리는 말 하나 모든 다리를 불지르는 하나의 영상 포옹의 순간 사라져버린 여인 어린 아이들을 죽이는 거지 할멈 멍충이 거짓말장이 근친상간을 일삼는 쫓기는 암노루 점장이 거지할멈 삶의 한 가운데서 나를 일깨우는 나를 일깨우는 소녀 하나   너의 이름   너의 이름은 내게서 태어난다, 나의 그림자에서 나의 피부로 오르며 동이 튼다, 조으르는 듯한 빛의 예명.   사나운 비둘기 너의 이름은 나의 어깨 위에서 마냥 부끄럽다   독백   허무와 꿈 사이, 부서진 기둥들의 밑에서, 나의 불면의 시간을 가로질러가는 너의 이름의 음절들,   붉으레한 너의 긴 머리칼, 한여름의 번갯불이 달콤한 횡포의 불빛으로 떨리고 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꿈의 어두운 물살, 허무로부터 너를 벼루어내는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거기 눈 먼 바다가 밀려와 미친듯 후려치고 있다.   눈 앞에 다가온 봄   투명한 보석의 잘 닦여진 광채, 기억을 잃은 석상의 훤칠한 이마: 겨울 하늘, 더욱 깊고 더욱 텅빈 어느 하늘에 되비친 공간.   바다는 거이 숨을 멈춘다, 거이 빛을 감춘다. 빛은 나무들 사이에서 눈을 감는다. 잠든 병사들.그들을 깨우는 것은 짙푸른 깃발을 들고 온 바람.   봄은 바다에서 태어난다, 언덕을 휘덮는다, 육체도 없는 물결은 노란 유칼토스 나무 숲에 가서 부딪기도 하고, 이내 메아리가 되어 평원으로 쏟아진다.   대낮이 눈을 뜨고 철 이른 봄 속으로 헤집고 들어간다. 내 손에 닿은 것은 모두가 날개를 단다. 세상이 온통 날으는 새뿐이다.   새   투명한 고요 속에 한낮이 머물고 있었다; 투명한 공간은 투명한 고요이기도 했다. 하늘의 단단한 빛이 풀잎의 자람을 고요히 잠재우고 있었다. 땅의 벌레들도, 돌들 사이에선 빛이 같아서, 그냥 돌멩이들이었다. 시간은 1분 속에서도 배가 불렀다. 고요한 침묵 속에 한낮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 때 새 한 마리가 울었다, 가느다란 화살 하나. 상처난 은빛 가슴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잎사귀들이 움직였다. 풀잎들이 잠을 깼다......... 그 때 나는 죽음이 누가 쏜지 모르는 하나의 화살인 줄 알았다, 눈을 뜨자마자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침묵   음악의 맨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듯이 하나의 음계가 솟아올라 떨리는 동안 커지다가 이내 가늘어진다 다른 음악이 오르면 그 음계는 입을 다물고 침묵의 맨 밑바닥에서 또다른 침묵이 솟아오른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탑이거나 칼 같은 것이 오르다, 커져가다, 머문다. 오르는 동안 또 떨어지는 것은 추억과 희망과, 우리의 크고 작은 거짓말들. 소리치려해도 목구멍 끝에서 외침은 사라지고 우리는 수많은 침묵이 입다무는 그곳으로 또 다른 침묵이 되어 튀어나간다   새로운 얼굴   밤은 네 얼굴 위에 수많은 밤을 지운다. 메마른 너의 동공 위에 기름을 붓고 너의 이마 위에 생각을 불태운다. 생각 저편에는 추억만 남는다.   수많은 어둠들이 너를 없애고 또 다른 얼굴을 떠올린다 내 옆에 잠든 네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여기 잠든 건 네가 아니라 지나간 어떤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 그 여인은 단지 네가 잠드는 이유가 다시 돌아와 또 다시 나를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었지.   연인들   풀밭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밀감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파도와 파도가 거품을 나누듯이.   해변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레몬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구름과 구름이 거품을 나누듯이.   땅 밑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말이 없다, 입맞춤이 없다 침묵과 침묵을 나눈다.   두 개의 몸뚱아리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파도 같다. 밤은 크낙한 바다.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두 개의 돌멩이 같다. 밤은 그땐 사막.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뿌리같다, 밤에 꽁꽁 얽어맨.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칼 같다. 밤은 번개.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두 개의 별똥별 빈 하늘에 떨어지고 있다.   잠깐 본 세상   바다의 밤 속에 물고기, 아니면 번개, 숲의 밤 속에 새, 아니면 번개.   육체의 밤 속에 뼈는 번개. 오 세상이여, 모든 것은 밤이다 삶은 번개.   흩어진 돌멩이들   1 꽃 외침, 부리, 이빨, 으르렁거리는 소리들, 살기등등한 허무와 그 혼잡도 이 소박한 꽃 앞에선 자취를 감춘다.   2 여인 밤마다 우물로 내려가곤 아침이면 다시 얼굴을 내민다, 품에는 새로운 뱀을 안고,   3 자서전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랬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랬던 것들은 이미 죽은 것들이다.   4 밤중에 듣는 종소리 그림자의 물결, 눈먼 파도가 불 타는 이마 위에 밀려온다; 내 사념을 적셔다오, 그리고 아주 불을 꺼버려!   5 문 앞에서 사람들, 말들, 사람들, 잠시 멈칫했지: 문은 위에 있다, 홀로 떠 있는 달 하나.   6 보이는 것   눈을 감자 내가 보였다; 공감, 공간 내가 있고 내가 없는 이곳.   7 풍경 저토록 바쁜 벌레들, 태양빛 말들, 구름빛 당나귀들, 구름은 무게를 잃은 커다란 바위, 산은 내려앉은 하늘, 나무들이 무리져 내려와 골짜기 물을 마신다. 모두들 있다. 행복하게, 저기, 스스로의 분수만큼 행복하게, 우리 앞에, 그런데 우리는 없다 분노와 증오와 사랑에, 마침내 죽음에 송두리채 먹혀버린 우리는 없다.   8 무식장이 하늘을 쳐다보았지. 하늘은 비문이 닳아진 커다란 바위돌, 별들도 한 마디 내게 읽어주질 못했어.   불면의 기록노트   1   시계가 갉아먹는다. 내 심장을, 독수리가 아니다. 쥐다.   2   한 순간의 정점에서 나는 홀로 부르짖었다. 하나 그 순간은 떨어지고 있었다 또다른 순간 속에, 시간도 없는 심연 속에.   3 나는 문득 어느 벽 앞에 당도했다. 벽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4 향수  똑같은 푸르름 속에 똑같은 샛별이 반짝이지만 우리는 몰라본다. ......하지만 수탉마다 제 헛간을 노래하는 것을.   그 많은 날들의 하나   태양의 홍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보인다 무게 없는 육체들 두께 없는 땅 우리는 올라가고 있는가 내려가고 있는가?   너의 육체는 금강석 하나 너는 어디 있는가? 너는 너의 육체 속에 묻혔다   이 시간은 조용한 번개. 발톱도 없다 결국 우린 모두 형제들 오늘 우리는 안녕하세요 할 수도 있고 심지어 멕시코인까지 행복해도 좋다 물론 다른 이방인까지도   자동차들은 풀잎이 그립다 집 꼭대기들이 걸어다닌다.                 시간은 멈췄다 두 서너 눈동자가 나를 못잊게 한다 석회빛 남녘의 반짝이는 해변같이 분노빛 바위 사이의 바다같이 분노한 유월, 그 벌떼의 이불같이   태양은 바다의 사자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아                  나를 보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우상이여                    우리를 보라 하늘은 돌며 바뀌어도 항상 똑같다 너는 어디에 있는가? 태양과 사람들을 마주하고 나는 홀로 있다 너는 육체였다 너는 빛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날 나는 너를 다른 태양에서 발견했다   하오가 내려온다          산들이 자라난다 오늘은 아무도 신문을 읽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발을 반쯤 벌리고 앉아 아가씨들이 커피를 마시며 지껄인다 내 책상을 연다           파란 날개로 가득하다 노란 엘레뜨르 꽃으로 가득하다 타자기가 혼자 간다 쉴 새 없이 똑같은 불타는 음절을 써간다 밤은 마천루 뒤에 숨어 있다. 식인종의 포옹의 시간이다 긴 손톱의 밤 기억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분노! 떠나기 전 태양은 모든 보이는 것을 불태운다   시간 자체   바람이 아니다 물이 아니다, 몽유병자 같은 물의 발걸음이 아니다 돌이 된 집들과 나무들 사이를 스쳐가는 붉으스레한 밤을 따라 흐르는 바다가 아니다, 층계를 밟고 올라가는 모든 것은 고요하다                     자연계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건 도시다, 스스로의 그림자에 휩싸여 스스로를 찾고 있는, 항상 찾고 있는 스스로의 광대한 어둠 속에 묻혀 한번도 찾지 못한 스스로를 찾고 있는                   한번도 스스로를 헤쳐나오지도 못한 도시. 나는 눈을 감는다,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불이 켜졌다가 켜졌다가 켜졌다가  이내 꺼져간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더 이상 아는 게 있는가? 벤치에서 노인 한 사람이 혼자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혼자서 말을 할 때 우리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걸까? 과거는 잊었다              미래는 만져보지도 못할 것이다. 누군지 모른다 밤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일 뿐                          자기 말소리를 혼자 듣고 있다 담장 근처에선 남녀 한 쌍이 포옹을 하고 있다 여자가 웃는다, 뭔가 물어본다 그 물음은 떠올라 높은 곳에서 펼쳐진다 이때 하늘은 주름살 하나 없다 한 나무에서 이파리 세 개가 떨어진다 누군가 골목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다. 맞은편 집 창문 하나에 불이 켜진다 살아 있다는 감각ㅇ느 참 이상하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간다는 것 살아 있다는 비밀을 소리쳐 입증이라도 하듯이   소깔로에는 사람 하나 없는 새벽이 오간다 다만 미치광이 같은 우리의 열정과                                 전철들 따꾸바 따꾸바야 소치밀꼬 산 앙헬 꼬요야깐   밤보다 넓은 광장에 이들 정거장만이 불을 켜고            어딘가 우리를 데려갈 차비를 하고 시간은 있는 대로 넓게 잡고                이 세상의 마지막 끝까지 데려갈 차비를 하고 검은 선들 전차의 우뚝 솟은 가공선 접촉 촉수들만이                      돌 같은 하늘을 찌른다 불똥 튀기는 상투 끝, 불의 혓바닥 밤을 뚫는 화염                 새 새가 날아간다. 물푸레 나무의 칩칩한 그림자 사이로 산 뻬드로에서 미스꼬악까지 두 줄로 늘어선 가로수 사이로 비비거리며 나르는 새 푸르뎅뎅한 하늘                젖은 침묵의 두께가 불타는 우리 머리 위를 누르고 있다 우리는 뒤늦게 다가오는 전차를 타고 무너져 내린 탑이 우글대는 빈민촌을 지나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걷고 있다는 것이다 돌 자잘, 밭길, 바로 그 길을 웅덩이를 넘고 진흙탕길을 누비며 유월에서 구월까지의 긴 포도를 현관을 지나고 높은 담장, 잠든 꽃밭을 지난다 지금 여기 눈 떠 있는 것은 오직                             하양 파랑 하양 꽃향기      손에 잡히지 않는 꽃가지들 어둠 속에       살아 있는 듯한 가로등 하나 죽은 담장에 기대어 서 있다     개 한 마리가 짖는다 밤을 향한 물음표            아무도 없다 바람이 나무숲에 스며들었을 뿐 구름 구름 일어나고 무너지는 구름 구름 무너진 사원 새로운 왕조들 하늘에 떠 있는 암초와 재난들                     위에 뜬 바다는 고원의 구름, 다른 바다는 어디?   눈을 가르치는        구름은 침묵의 건축가 그리고 문득 다짜고짜 금방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얀 눈조각같은 어디서 나타난지도 모르는 가느른 투명함 너는 말했다       내 그말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야 겠어 음절의 성곽을 말이야       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하얀 눈송이 같은        꽃도 없고 향기도 없는 피도 없고 물기도 없는 석고 어디선가 잘려나온 하얀색 그것          목구멍 오직 목구멍만 남은 밑도 끝도 없는 노래  나는 오늘 살아 있다, 별다른 향수도 없이 밤은 흐르고       도시도 흐르고 흐르는 종이 위에 낱 글을 쓴다 흘러가는 말을 타고 나도 흐른다 세상이 나와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죽을 것도 아니다                          나는 생명의 맥박의 강 속의 하나의 맥박 이십 년 전에 바스꼰셀로스가 내게 그러더구먼 그리고 오르떼가 이 가셑은                    로다노 위에 있는 바에서 하더구먼.   나는 사실 시간이나 죽이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시간이 나를 통해 살도록, 되살아나도록 하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 오후는 다리 위에서 강물 속으로 태양이 들어간느 것을 보았다 모든 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석상들도 불타고 집들도 문짝들도 불타올랐다 정원에는 여성스러운 포도송이들이 열렸다 물빛 햇살의 토막들 태양빛 물그릇들의 신선함 포플러 나무 숲은 무성한 빛살의 축제 하늘 아래, 불붙은 세계 속에 물은 수평선처럼 꼼짝않고 서있었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고정된 눈동자 그 크막한 아름다움의 무게는 열려진 동공마다 반짝였다 시간의 줄기 끝에                머물고 있는 현실 아름다움은 무게가 없다               시간과 아름다움은 고요한 반영일 뿐 모두가 한가지다                 빛도 물도   아름다움을 받들고 있는 눈길 눈길 속에 황홀한 시간 무게를 잃은 세계               사람이 무게가 있다면 아름다움의 무게 이외 더 있는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남는 것뿐이다.                       충분한 게 아니다 무지는 아름다움처럼 어렵다 언젠가 내 조금 더 모르게 되는 날 나는 눈을 뜨리라 어쩌면 시간은 무겁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거운 건 시간의 영상이다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현제가 돌아온다 이 삶에는 또다른 삶이 없다 저 무화과 나무도 오늘 밤 다시 오리라 오늘 밤 또 다른 밤들도 돌아오리라   글을 쓰면서 나는 강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 강이 아니라          저 강이 바로 이 강이다 순간과 영상이 맞부딪는 곳 앵무새 하나 잿빛 돌 위에 있다 삼월 어느 청명한 날                   까망은 맑음의 한 가운데 있다 올 것 같은 황홀의 순간이 아니다                                  지금 느끼는 현실 더없는 현재           더 없이 가득하고 충일한 것 기억이 아니다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원하지 않았던 것 똑같은 시간이 아니다          다른 시간 항상 다른 시간이면서 같은 시간이 들어와서 우리를 우리로부터 몰아낸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눈이 보지 못한다 시간 속에 또 다른 시간이 있다 시간도 무게도 그림자도 없는                             고요한 시간 과거나 미래도 없는                        살아 있기만 하는 벤치에 앉은 노인처럼 하나가 된 똑같은 영원한 시간 우리는 결코 볼 수는 없다               투명할 뿐        마이투나   나의 눈이 너를 벗긴다 벌거숭이로        그리고 이내 너를 덮는다 뜨거운 빗줄기 눈길 세례   소리가 갇힌 새장이                열린다   찬연한 아침         새하얗게 너의 허벅지보다 새하얗게         한밤중에 너의 웃음 아니, 차라리 너의 짙푸른 잎사귀 너의 달빛 속옷이           침대에서 펄럭일 때 곱게 쏟아지는 달빛           노래하는 소용돌이가 흰 실 꾸러미를 감는다            산골짜기에 심은 풍차의 날개              너의 밤 속       나의 대낮이 폭발한다       너의 탄성이 파편이 되어 튄다               밤이 너의 몸을 풀어 흩뜨린다  썰물 너의 흩어진 몸뚱아리들이 되모아진다  다시 너의 몸이 탄생한다   수직의 시간         가뭄이 거울 달린 바퀴를 돌린다 칼들이 피어난 정원               협잡의 축제 그 번뜩이는 눈길 사이로                너는 상처 하나 없이   들어선다         내 손의 강물로   신열보다 빠르게 너는 어둠 속에서 헤엄친다                     너의 그림자가 더욱 밝아온다 애무 속에서         너의 몸뚱아리는 더욱 검다 예측할 수 없는 강 저편으로                          네가 뛰어넘는다 어떻게 언제 그게 그런 거야   자료 2 태양의 돌                             옥타비오 파스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순간 하나만이 이 밤을 되찾고, 꿈 하나에 대항하며 모아 놓은 이미지들을 꿈꾸며, 꿈에 대항하며 모질게 조각된, 이 밤의 허무, 글자글자마다 일어선 맥박을 뽑아 버린 순간만이, 한편 바깥에선 시간이 풀려져 내 영혼의 문들을 부순다 잔혹한 시간표를 지닌 세계, 다만 순간 하나 한편 도시들, 이름들, 맛들, 살아 있는 것이, 내 눈먼 이마에서 허물어진다, 한편 밤의 괴로움 내사고는 고개를 수그리고 내 해골, 이제 내 피는 좀더 천천히 걸어간다 이제 내 치아는 느슨해지고 내 눈은 흐려지고 하루들과 연도들 그 텅빈 공포들이 쌓여간다, 한편 시간은 그의 부채를 접는다 이제 그 이미지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순간이 가라앉아 떠돈다 죽음에 둘러싸여, 밤과 그 음산한 하품에 위협 받고, 질기고 가면 쓴 죽음의 아우성에 위협 받고 있다 순간이 가라앉아 흡수된다, 주먹만한 크기로 닫힌다, 자신의 내부를 향해 익어가는 과실 하나처럼 자신에 입맞추며 흩어진다 이제 내부를 향해 무르익는다, 뿌리를 내린다, 나의 내부에서 성장한다, 모두가 나를 차지 한다 몽롱할 정도로 무성한 잎새들이 나를 몰아낸다, 나의 사고들은 다만 그 새들이다, 그의 수은이 내 혈관들, 정신의 나무, 시간의 맛난 열매들을 순환한다, 오! 살아가기 위한 삶과 이미 살고 있는 삶, 하나의 큰 파도로 바뀌어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물러나는 시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라져가는 다른 순간에서 말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초석과 돌멩이의 오후 눈에 보이지 않는 칼들로 무장한 오후를 마주보며 해독할 수 없는 붉은 문자 하나가 나의 피부에 글을 쓰고 그 상처들은 하나의 불꽃옷처럼 나를 덮는다, 나는 자신을 소멸함이 없이 불탄다, 나는 물을 찾는다, 이제 네 눈망울에는 물이 없다, 돌이 있다, 이제 네 가슴, 네복부, 네허리는 돌로 되어 있다, 네 입에선 먼지맛이 난다, 네 입에선 썩어 버린 시간맛이 난다, 네 육체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이다, 반복되는 거울들의 회랑 목마른 자의 눈동자,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랑, 이제 너는 무작정 내 손을 잡아끌고 저 끝이 가물가물한 통로로 원의 중심부를 향해 데려가서 버티고 서 있다 횃불 속에서 얼어붙은 하나의 광휘처럼, 껍질을 벗기는, 매혹적인 빛처럼 사악한 자를 위한 교수대처럼, 채찍처럼 탄력 있고 달과 짝을 이룬 하나의 무기처럼 화사하게, 이제 날을 세운 네 단어들이 내 가슴을 파내고 나를 황폐하게 하고 텅비게 한다, 하나씩 하나씩 너는 내게서 기억들을 뽑아낸다, 나는 내 이름을 잊었다, 내친구들은 돼지들 사이에서 꿀꿀대거나 벼랑에 걸친 태양에 잡아먹혀 썩어간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길다란 상처 하나뿐, 이미 아무도 거닐지 않는 동굴 하나, 창문들 없는 현재, 사고가 돌아와, 되풀이되고, 반사된다 이제 그 동일한 투명 속에서 사라진다, 눈 하나에 의해 옮겨진 의식 밞음으로 넘쳐 흐를 때까지 돌아봄을 서로 마주보는 의식: 나는 네 지독한 비늘을 보았다. 멜루시나, 동틀녘에 녹색으로 빛나는, 너는 시이트 사이에 동그라미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이제 너는 깨어나 한 마리 새처럼 부르짖었다 이제 끝없이, 부숴진 창백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아무것도 네게는 남지 않았다 네 외침만이, 이제 세기들의 말에 나는 발견한다 기침을 해대며 흐릿한 시선으로, 오래 묵은 사진들을 뒤섞으며: 아무도 없다, 너는 아무도 아니다, 잿더미 하나와 빗자루 하나, 이빠진 나이프 하나와 깃털하나, 몇몇 뼈다귀들이 매달린 가죽 하나, 이미 말라 버린 꽃송이 하나, 시꺼먼 구멍 하나 이제 구멍 바닥에는 천년 전에 질식해 버린 한 여자아이의 두 눈이 있다, 한 우물에 묻혀 있는 시선들, 태초부터 우리를 보는 시선들, 늙은 어머니의 어린 시선 덩치 큰 아들에게서 보는 한 젊은 아버지, 고만한 여자아이의 어머니 시선 몸집 큰 아버지에게서 보는 한 어린 아들, 삶의 바닥으로부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이제 죽음의 함정들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 눈 속에 떨어짐이 진정한 삶에로의 회귀인가?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 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 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 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일이 없다. 우리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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