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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3)-강인규 댓글:  조회:106  추천:0  2019-02-03
출처 존재와 사유 | 동동 원문 http://blog.naver.com/mdpsjk/20021771588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 (3)                  2003. 1. 9.   -      소쉬르의 기호이론과 그것이 미친 영향                                강인규   리뷰   1.      소쉬르와 구조주의   구조주의에서 “구조(structure)”는 관계와 차이의 체계이며, 통시적(diachronic)이기보다는 공시적(synchronic) 특성을 지닌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의 개별적 사용 즉, “파롤(parole)”보다 언어의 일반적 구조인 “랑그(langue)”에 초점을 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으로부터 유래한다.   2.      구조와 주체   구조주의 철학에서 ‘구조’는 주체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주체의 구조에 종속된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중세의 신이라는 ‘구조’에 종속되지 않은 인간존재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구조주의는 이처럼 자율적이고 능동적 주체의 개념을 거부한다. 데카르트가 존재의 조건으로 내세운 ‘생각’이란 개인 고유의 판단이 아니라 언어라는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사회구조 없이는 말도, 생각도 불가능하다면, ‘나’란 언어가 내면에 심어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주체가 사회구조로 환원되는 상황에서는 개인도, 자율성도, 저항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다분히 결정론이나 숙명론적 성격을 갖는다.   3.      자의성, 부정성, 관계, 차이   소쉬르의 기호학은 자의성(arbitrariness), 부정성(negativity), 관계(relationship), 그리고 차이(difference)의 네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자의성’이란 기표와 기의 사이에 닮은 점이 없다는 것이고 (바르트는 이 ‘자의성’이 기표와 기의 사이가 아니라 기표와 지시대상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부정성이란 의미가 ‘~이 아님’이라는 기호의 부정적 관계 속에서 떠오른다는 의미이다.   4.      이항대립(binary opposites), 신화소(mytheme), 기능(function)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구조적 환원(structural reduction)의 틀로써 “이항대립”과 “신화소(mytheme)”의 개념을 사용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두 가지의 상반된 개념범주에 근거하여 세상을 이해한다고 보았다. 밤과 낮, 하늘과 땅, 안과 밖,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화소”는 이야기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서사구조를 말한다.      5.      특이범주(anomalous category)   이항 대립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특이범주(anomalous category)”는 흔히 금기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화된다. 예를 들어 육상동물과 물고기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뱀은 혐오의 대상이 되는, 반면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겸비한 천사는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신성시된다.   6.      레비-스트로스의 신화(myth):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   ‘너는 늑대고, 나는 곰이다’라는 토템신화는 결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화적 동일시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개인의 지위를 다른 사물이나 개인에 연관시켜 진술하는 것 뿐이다. 예컨대 내가 곰의 후손이고 네가 독수리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과 와 사이의 관계를 생물의 종들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은유로 치환하는 과정을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라고 한다.   7.      롤랑 바르트의 외연, 내포, 신화                                                 “외연(denotation)”은 기호의 1차적 의미작용, 즉 문화의 차이와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산출하는 과정을 말한다. 반면에 “내포(connotation)”는 기호가 사용자가 속한 문화적 차이와 개인적 정서에 따라 다른 의미를 산출하는 2차적 의미작용의 과정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가 인간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중립적으로 설명하는 기술적(descriptive) 개념인 반면, 바르트의 ‘신화’는 처방적(prescriptive) 개념이다. 바르트의 신화개념은 자연화되고 상식화된 지배적 담론체계를 지칭한다. 텍스트의 의미가 외연에서 내포와 신화로 바뀌어가는 과정은 텍스트에 내재된 의미가 사회적으로 삼투되는 과정이다.       1.      데리다의 구조주의 비판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의하면 기표는 기의의 거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표는 직접적으로 기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 관점은 기표와 기의가 종이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으로 보았던 소쉬르의 견해와 큰 차이가 있다. 기표를 통해 궁극적인 기의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의는 기표들 밑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가기 때문이다. 기호의 의미가 ‘~이 아님’의 부정적 관계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라면, 의미란 기호 속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의미는 기표의 사슬 주변에 불규칙하게 흩어져있을 뿐이다. 따라서 의미는 고정시킬 수도 없고 하나의 특정 기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미는 마치 별의 깜박임처럼 현존(presence)과 부재(absence)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는 그 자체로는 부재하지만 그 구조를 가능케 하는 발화를 통해 현존한다.                 의미가 기호 속에 있지 않다면 지식의 ‘목적’과 ‘수단’ 역시 일치할 수 없게 된다. 지식의 목적은 특정한 ‘의미’에 있으며, 이를 위해 ‘기호’라는 수단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내가 어떤 문장을 읽는다면 그것의 의미는 언제나 지연된 것이고 유예된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기표는 지연 과정에서 다른 기표들도 대체된다. 게다가 각각의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위해 선택된 것임을 생각하면, 그 기호에는 배제된 기호들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또한 의미는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레비-스트로스 등의 구조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안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말하거나 쓰는 데 있어 내가 의도한 바를 남에게 완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독립적인 기표의 영역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어떤 기표도 특정 기의를 언급하지 않으며, 우리는 결코 이러한 기표의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제약받지 않는 현존은 없다. 우리는 불안정한 언어를 통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절름발이 현존을 볼 뿐이다. 언어가 불완전하다면 언어에 의해 매개된 우리의 현존 역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데리다는 현존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위계화된 대립(hierarchized opposition)을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데리다가 구조주의에 가했던 비판과 맞닿아 있다. 그의 비판은 구조주의가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체계를 가정하고 있으며 (소쉬르의 ‘랑그’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소’ 등), 전통적인 이항대립적 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소쉬르의 ‘기표-기의,’ 레비-스트로스의 ‘자연-문화’)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대립에서 ‘우월한 것’은 현존과 로고스에 속하게 되고 ‘열등한 것’은 종속적인 지위를 강요 받는다. 그 결과 지성과 감성, 그리고 정신과 육체의 대립이 서양철학사를 지배해 왔다. 기표와 기의의 대립 역시 이러한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식이 불완전한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면, 우리가 아는 바의 ‘진리’ 역시 불완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데리다는 니체의 저작들이 갖는 주된 특성을 “형이상학에 대한 전면적 불신’과 ‘진리’ 및 ‘의미’의 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요약하고 있다. 니체의 입장에서 우리의 해석을 뛰어넘는 단일하고 물리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관점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우리가 언어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언어 속에서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언어와 개념의 덫에 걸려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 주장 역시 언어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 ‘덫’을 표현하려 애쓴들 그 개념은 역시 동일한 덫의 일부가 되어 우리를 구속할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관념은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발생한다. 은유(metaphor)는 서로 닮지 않은 것 사이에 동일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은유, 환유, 의인법으로 구성된 기동부대이다. 결국 진리란 우리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이처럼 은유 등을 만들어내는 힘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불렀다. 진리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의지이다. 우리는 소유하고 정복하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2.     언어의 본질로서의 은유와 환유   3.1. 은유   언어가 기호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낳는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은유가 단순한 수사학적 도구가 아니라 언어 자체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언어는 본질적으로 은유적이다. 우리가 말하기와 쓰기, 그리고 심지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은유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결코 뿌리뽑을 수 없는 것이다.                 은유(metaphor)는 다른 속성을 지닌 두 차원 중 하나를 어느 한 편의 차원으로 치환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그 여자는 한 송이 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 여자’라는 의미를 ‘꽃’이라는 표현수단으로 치환한 은유다. 은유에는 이 같은 ‘문학적 은유’ 외에 ‘일상적 은유’도 있다. 일상적 은유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은밀함을 특성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 은유는 그 자체가 은유로서 인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 은유는 문학적 은유보다 더 교묘하게 사회의 ‘상식’이 되어 아무런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해당 문화권 내에 쉽게 수용된다.                 문학적 은유와는 달리 일상적 은유는 자신의 수사학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보다 쉽게 ‘진리’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고위층’이라고 지칭한다. 그들은 평균적인 사람보다 키가 크거나 높은 건물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적 지위를 스스로 자연화 하는 것이다. 결국 은유란 일련의 기호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대체되는 것이다. 결국 철학, 법, 그리고 정치이론 역시 시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은유를 통해 작동하는 허구적인 것이다.                 언어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구성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은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언어의 수사학적 장치가 어떻게 우리의 경험과 판단을 형성함으로써 특정한 행위를 유도하고 또 배제하는가.’ 은유는 단순히 언어의 표현적 기능만을 담당하는 수사학적 장치가 아니다. 이는 언어의 본질이기도 하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은유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시간에 따라 전화 통화료를 지불하고 시간에 따라 급료를 받고 이자를 계산한다. 이처럼 우리는 시간을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다룰 뿐 아니라, 동일한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돈’이 아닌 문화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상식은 자의적인 문화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은유는 사람들의 인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함으로써 경험을 ‘은유적으로’ 재조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연에 대한 동양의 전형적 은유는 ‘조화를 이루고 살 존재의 원천’인 반면, 서양의 은유는 ‘인간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 대상’이다. 이러한 은유의 차이는 세계관과 문명의 차이로 나타났다. 앞에서 말한 ‘시간은 돈’이라는 은유를 전달의미와 표현수단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시간은   소중하다.  (전달의미)                                                                      [통합체] 돈이다.                                     금이다.      (표현수단) 진주다.        목숨이다.                                     …………..                                     [계열체]   위의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은유는 계열체적으로 작용한다. 은유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으로서, 연상의 원리에 의해 수직적인 차원에서 유사성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연사의 원리는 현실 혹은 의미의 한 차원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의 가치를 다른 차원의 속성의 가치로 치환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러한 치환과정은 한 계열체 내의 기호단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은유의 이러한 치환과정이 반드시 유사성에 의해서 매개되는 것은 아니다.   3.2. 환유   은유가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두 차원 중 어느 한 쪽을 다른 쪽으로 치환하는 과정이라면, 환유는 동일한 차원 내에서 의미를 연상시키는 방법이다. 환유를 간단히 ‘어떤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지칭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야콥슨은 은유를 시에 지배적인 양식으로, 그리고 환유를 소설에 보편화된 양식으로 간주하였다. 현실은 ‘재현’은 불가피하게 환유를 수반하며, 전체를 지칭하기 위해서 ‘현실’의 일부분이 선택될 수 밖에 없다. 환유는 선택된 일부분에 의해 선택되지 않은 나머지 부분까지 구성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선택하는가’는 환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시위현장은 대부분 시위대에 의해 진압경찰이 맞고 있거나 수세에 몰려있는 장면이다. 이는 전체의 일부분 – 혹은 극히 예외적인 부분 – 에 지나지 않지만, 방송사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됨으로써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시위를 비난하도록 한다. 시청자들은 환유를 통해 선택된 부분을 통해 이 시위에 대한 나머지 부분을 상상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환유는 지표적(indexical)으로 작용한다. 환유의 지표적 작용은 매개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진이 강력한 전달수단이 되는 것은 이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에 담긴 것은 피사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여기에 자의적인 선택의 과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환유는 ‘먹구름과 비,’ ‘불과 연기’ 등의 자연적 지표와는 다른 차원을 갖지만, 자연적인 지표로 인지되어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실로 인식된다. 즉 환유는 자신의 지표적 본질을 숨김으로써 사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예컨대 먹구름이 비 자체가 아니며, 발자국이 발 자체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인식할 수 있지만, 시위현장의 사진이 시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깨닫기 어렵다. 사진의 지표성은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갖는다. 기호학 분석의 주목적은 이런 은폐의 매커니즘을 폭로하는 것이다. 은유가 계열체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환유는 통합체적으로 작용한다. 환유는 제시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수용자 스스로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3.      권력관계로서의 언어   언어는 사회적이다. 각 사회계층마다 쓰는 말이 다르며, 같은 말이라도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나타낼 수도 있다. 특정한 진술을 위해 사용하는 말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최근의 담론연구는 계층이 낳는 담론 이외에 ‘중립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던 지식의 담론으로도 그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작업현장에서 쓰는 언어와 이사회에서 쓰는 언어만이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자신의 몸을 설명하는 말과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 역시 위계화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 환자가 의사에게 서툰 일상용어로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의사는 여유롭게 그 용어를 ‘전문용어’로 교정해 준다. 그리고 환자가 전혀 알 수 없는 언어로 환자의 증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는 외국어로 된 의학용어를 처방전에 휘갈겨 쓴 후, 간호사에게 건네주라고 말한다. 환자는 자신의 ‘무지’에 부끄러워하며 그 수수께끼 같은 처방전에 의한 치료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결국 의사와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는 사회적 권력관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언어는 결코 합리적 의사소통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언어자본의 불평등’이고, 두번째는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이다. ‘언어자본’이란 각 개인의 언어사용 능력을 의미한다. 언어사용 능력의 핵심이 되는 어휘 수와 문장 구성 능력 등은 교육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들 사이에 평등한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와 경영대학원을 마친 사용자가 ‘노사협상’에 앉아 대화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사용자는 현 시점이 ‘구제금융 시국’임을 시종 강조하면서 도표와 그래프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적자보고서를 노동자에게 건넨다. 사용자가 정확한 수치를 인용하며 진행하는 ‘경제원론’과 ‘노동윤리’의 강의 속에서 노동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언어는 힘을 잃기 마련이다. 설사 그가 어설픈 형식논리를 들이댄다고 해서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두 번째로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은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화자들의 관계를 위계화하는 사회적 요인을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화로 인해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들어야 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언급한 노사협상의 예를 다시 한 번 들어보자.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 ‘협상’이 갖는 성격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 여차하면 사용자는 그를 승진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아예 해고할 수도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회사 때려치우고 은행 이자나 받아먹고 살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실력 행사를 한다고 해도 크게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 그들의 뒤에는 든든한 공권력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요구란 기껏해야 사용자의 인내심의 한계에서 허용되는 경우가 많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모든 언어교환에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화에 임하는 모든 화자들은 화자의 불평등한 분배구조 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이처럼 불평등한 관계를 토대로 작용하지만, 이에 대한 저항과 갈등이 표출되지는 않는다. 이는 화자에 대한 상대방의 승인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화자가 대화의 장 내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 자본에 대한 인정을 뜻한다. 앞서 ‘노사협상’은 애초부터 등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노동자가 아무리 자신의 입장이 불리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대단히 불평등한 매체이니 만큼 다른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합시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용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합리적인 언어’는 이미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경영자의 언어를 빌어 자신의 요구를 전달해야 하는 것이 노동자의 운명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사용자와 언어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그가 가진 자본과 지위를 묵인하는 것이 된다.   4.      언어: 분절의 체계   모든 담론은 특정한 대상을 가지고 있고, 다른 개념을 희생시키면서 어떤 개념을 앞으로 내세운다. 상이한 담론은 상이한 개념과 범주를 만들어낸다. 거머리로 피를 뽑으며 의료와 이발을 동시에 하던 옛 유럽 이발소의 언어는 현대의 병원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명백히 다를 것이다.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젖은 양피지 조각’이라는 말은 18세기에 널리 사용되던 엄연한 의학용어였다. 그러나 의학이 근대의 합리성과 결합되면서 그 용어는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담론에 포함되는 영역과 배제되는 영역은 명백히 다르다. 의학이 합리성의 담론과 결합되면서 현대의 의사들은 더 이상 뇌 주위에서 ‘젖은 양피지 조각’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황간막’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담론은 어떤 시대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또 전에는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푸코는 언어의 분절화 현상이 인식된 대상을 일정한 방법으로 구조화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대상을 특정 방식으로 나누는 ‘분절의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분절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는 담론 속에서 대상이 정의되고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이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할하는 분절의 체계이며, 그 위에서 대상을 정의하고 설명하게 하는 규칙의 체계다. 결국 언어의 기능은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단’하는 것이다. ‘분절(articulation)’이란 언어가 대상을 일정한 단위로 나누어 분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같은 시계소리가 한국사람에게는 “똑딱 똑딱”으로 들리지만, 영미인들에게는 ‘틱 택(ticktack)”으로 들린다. 소리 그 자체는 비분절음이지만 이 소리가 특정한 방향으로 분절되고 나면 우리는 그 소리를 언어가 지시하는 대로 듣게 된다. 에스키모인들은 눈을 십여 가지 이상으로 분류하는데, 이것 역시 언어의 분절화가 가져온 결과로 볼 수 있다. 언어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개개의 항목이 지니고 있는 특유한 성질이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와 각 항목의 차이(difference)이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차이가 유의미한 것으로 등록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차이가 무시되고 있으며,  명백히 서로 다른 것일지라도 한 문화권에서 ‘다른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 차이는 ‘같은 것’으로 묶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한국사람들은 영어의 ‘doll’의 첫 자음 /d/와 한국어 ‘달’의 초성 /ㄷ/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어권 문화에서 이것은 ‘유성음(voiced)’과 ‘무성음(voiceless)’이라는 큰 차이로 인지된다. 또한 영어를 배우지 않은, 즉 ‘영어권의 구조’ 속으로 편입되지 않은 한국인들은 /r/과 /l/, /f/와 /p/, 그리고 /v/와 /b/를 같은 소리로 인지할 것이다. 워프(Benjamin Whorf)와 사피어(Edward Sapir) 등의 구조주의 언어학자는 언어라는 구조가 경험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험 그 자체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피어는 더 나아가 객관적이고 불변인 ‘현실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사피어와 워프는 언어의 구조와 문제를 사회행동의 다른 분야로 넓혀감으로써 문화의 형상이 그 문화에서 사용되는 언어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한 사회의 언어와 문화는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는 라캉의 주장은 언어가 사회나 문화구조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구조까지 결정한다는 언어결정론적 입장을 드러낸다.    푸코의 말을 빌면 담론은 ‘말과 사물을 이어주는 사슬’인 동시에 ‘사물과 언어를 재단하는 방법’이다. 19세기 이후 ‘젖은 양피지’라는 표현이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자취를 감춘 것은 이러한 ‘말과 사물을 잇는 사슬’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합리성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현대의 의학적 담론이 요구하는 시대감각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배제된 것이다. 담론은 이렇게 시대감각에 맞는 것은 포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하는 분절의 규칙이다. 어떠한 대상도 담론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눈에 드러나고, 말해지고, 또 설명될 수 있다. 푸코는 자신의 저서인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적 표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가 사물을 포착하는 순간부터 그 대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언어의 음흉한 계략, 즉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 속으로 끌어들여 대상의 모습을 변질시키려 하는 언어적 횡포다.”   5.      구조주의 언어학의 한계와 담론이론   “담론(discourse)”의 개념은 연구 목적 및 분야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문장보다 상위의 범주에 속하는 언어적 발화’로 정의된다. 간단히 말해 담론은 문장보다 큰 단위의 말 집합이다. 담론은 보통 언어적인 것을 지칭하지만 넓게는 비언어적인 것까지도 포함한다. 담론분석은 한 개인의 구체적인 발화보다는 두 사람 이상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 그리고 주어진 맥락 속에서 이 담론들을 지배하는 언어적 규칙 및 관습이다.                 전통적으로 – 심지어 현재까지도 여전히 지배적인 관점으로서 – 의미가 ‘저 밖의 세계’에 내재해 있다거나 개인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의미가 객관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기호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효과일 뿐이다. 여기서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관계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자의적 관계이며, 의미작용은 외부세계와 개인의 특성이 아닌 언어의 자의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외부세계와 개인의 의식은 언어 및 의미작용의 원인이 아니라 도리어 결과일 뿐이며, 언어와 의미작용을 떠나서는 ‘나’도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곧 우리 자신이며, 우리들이 세계에서 말하는 내용이 곧 세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갖는 문제는 이 관점이 지나치게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견해는 세계와 언어가 우리가 가 원하는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결국 ‘언어’라는 추상적 개념은 의미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특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것을 적절히 설명해 내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담론’의 개념이 허술하고 애매한 ‘언어’의 개념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언어(language)’와는 달리 ‘담론(discourse)’은 명사인 동시에 동사이다. 따라서 ‘언어’가 ‘사물’로만 이해되는 반면, 담론은 하나의 ‘행위’로도 이해될 수 있다. 담론은 상호작용의 과정인 동시에 사고와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결국 담론은 의미를 만들고 이를 다시 재생산하는 사회적 과정이다.                 의미는 추상적인 언어체계인 ‘랑그’에 의해서만 생산되고 우리는 세계를 언어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언어일반이 역사발전 및 사회적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요컨대 ‘랑그’는 추상적일 수 있으나 의미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담론은 사회적, 역사적, 제도적 구성체의 산물이며, 의미는 제도화된 담론들에 의해서 생산된다. 이에 따르면 언어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의미를 생산할 수 있으나,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우세한 사회관계의 구조가 그 의미를 한정하고 고정시키며, 이 구조는 다양한 담론들을 통해 재현된다. 따라서 언어를 배우는 것은 추상적인 기술의 습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앵무새처럼 ‘언어만’ 배울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은 다양한 주체성 – 계급, 성, 국가, 민족, 나이, 가족 등 – ‘재현’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지배 담론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들은 이러한 담론적 주체들 속에 ‘서식’하며 각자의 주관성을 확립하고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주체들은 서로 협력하거나 충돌하며 공존한다. 담론 이론에 따르면 주관성 그 자체가 담론의 서식처다.                 사회적으로 생산된 의미들이 만나 충돌하는 담론 속에는 텔레비전 뉴스와 같은 ‘매체담론’부터 의학, 문학 그리고 과학과 같은 ‘제도화된 담론’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들 중에 몇몇은 높은 지위와 합법 및 당위의 권위를 누리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공식적 담론’의 지위에 오른다. 반면에 어떤 담론은 옹색한 인정이라도 받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인다. 결국 담론은 권력관계다. 이것의 좋은 예로 (합법적이고 자연스러운) 가부장제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리고 주변화된) 페미니즘을 들 수 있다.  기호학적 텍스트 분석을 통해 이러한 투쟁의 방향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다. 즉 어떻게 특정한 텍스트가 다양한 담론의 요소들을 취하고 그것들을 접합(articulation)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담론의 순환, 확립, 억제의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의 분석을 통해 담론의 자취를 좇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론은 결코 텍스트의 동의어가 아니다. 의미는 결코 텍스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담론은 특정한 의미의 집합들을 생산하고 순환시키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개발된 재현의 언어, 혹은 체계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들은 자연화 과정을 거쳐 한 사회의 ‘상식’이 됨으로써 그 담론이 기원한 사회의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담론이 권력관계로 이해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담론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돕거나 이와 대항하여 싸우는 사회적 행위이기에 ‘담론적 실천(discursive practic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6.        종합: 기호학 분석의 예[1]    7. 1. 광고, 기호, 의미   시각기호는 언어기호와는 달리 의미가 대단히 모호하다.  시각기호의 이러한 모호성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위의 광고에서 시각기호를 설명해주는 언어기호가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벨트와 약병의 관계는 고정되지 않고 무수히 많은 의미의 연속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이 약이 벨트의 버클을 닦는 광택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약이 가죽을 튼튼하게 만드는 가죽 강화제나 접착제라고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벨트와 약”이 흔히 연관되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이 광고가 다이어트를 위한 약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한한 기호의 의미작용(semiosis)은 광고주가 가장 염려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광고에 그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데도 정작 소비자는 철물점이나 옷가게에서 “호르반”을 찾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쩌겠는가?  그 때문에 광고주는 광고의 의미를 특정한 범위 내로 한정시키고자 하는데, 여기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언어기호다.  “호르반”이 “연마제”나 “다이어트약”이 아닌 “강장제”임을 말해주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언어기호이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처럼 광범위하고 모호한 시각기호의 의미가 언어기호의 매개를 통해 고정되는 과정을 ‘정박(anchorage)’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배가 닻을 내려 바다 위에 선체를 고정시키듯 언어기호는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 위에서 시각기호를 특정한 영역 내에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7. 2. 광고 기획자의 의도, 독자의 해석   광고의 목적은 상품의 이상적 속성이나 이미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면 거짓이든 간에)를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득의 과정은 소비자들이 이미 익숙한 지배적 의미체계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식'은 광고 기획자들과 소비자들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평범한 소비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광고'란 결코 광고주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위의 광고가 ‘정보부족으로 인한 혼란’을 통해 소비자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부족은 단지 일차적 해석의 과정, 즉 “외연 (denotation)”의 수준에서만 작동한다.  소비자들은 한 눈에 알 수 없는 광고에 호기심을 갖지만, 눈길을 끈 이후에도 광고가 계속해서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은 곧 싫증을 느끼고는 외면해 버릴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뒤척이는 소비자들은 화랑에 걸린 추상화를 바라보듯 인내심을 가지고 광고메시지를 해석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광고메시지는 다분히 대중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대중성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반복해서 경험한 익숙한 의미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벨트와 약의 모호한 관계가 “똑바로 서는 남자”라는 언어기호를 통해 고정됨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약병과 벨트의 의미가 어떻게 “선다”라는 행위 및 “남자”라는 성별과 연관되는가?  그것은 사진 속의 벨트가 남성용이라는 상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선다”는 기호는 일차적으로는 벨트와 약병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그 약이 접착제가 아닌 이상) 그 기호는 벨트가 아닌 남성성과 결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벨트라는 시각기호는 벨트 자체가 아니라 그 벨트를 착용하는 남자를 대표하는 기호이며, 이러한 연관관계는 한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의미체계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인 남성이라면 그 누구도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원색 벨트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선다”는 언어기호 역시 상식적인 기호작용을 통해서 그 의미를 전달한다.  “서다”라는 기호는 특정 대상이 수직으로 놓여있는 상태와 쓰러진 상태에서 다시 일어나는 행위 모두를 의미한다.  여기서 “서다”는 사진 속의 벨트와 약병이 서 있는 상태를 서술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이 갖는 상식을 재현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후자의 의미에서 “선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발기한 남성의 성기'라는 성적 의미이고, 두 번째는 가장의 '재기(再起)' 혹은 '성공'이라는 사회적 의미이다.  이처럼 상이한 두 가지 의미는 “선다”라는 동일한 언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남성의 벨트가 남성성으로, 그리고 벨트가 서 있는 상태가 사회적 성공과 성적 능력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과정은 이처럼 상식적인 의미체계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상식”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하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광고메시지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러한 의미체계의 허구성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호학의 목표는 이런 의미의 허구성과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데 있다.                7. 3. 은유: “서는” 남성   상식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리의 위치를 자임한다.  그리고 이런 상식은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의 수사학적 도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앞의 광고에서 “똑바로 서는 남자”라는 기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다른 차원을 갖는다.  첫 번째는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두 다리로) 서 있는 남성이다.  그러나 이 의미는 “호르반”이 관절염 치료제가 아닌 이상 “강장제”라는 상품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다른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선,” 다시 말해 성적 능력이 왕성한 남성이라는 함의다.  이 두 번째 의미는 공적인 담론 차원에서 쉽게 다루어지지 못하는 비공식적 언어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의미 뒤로 모습을 숨김으로써 사회적 반감을 피해간다.  세 번째는 “서다”의 의미가 은유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이라는 함의다.                  그 밖에도 앞의 광고에는 많은 은유의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먼저 길게 누워서 앞부분을 수직으로 세우고 있는 남성용 혁대는 뱀의 은유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뱀은 남자 성기의 상징이자 은유이다.  이는 물리적 유사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특히 한국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외적 유사성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뱀은 오랜 시간 동안 성교를 할 수 있는 정력의 화신인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뱀은 가장 선호되는 정력제이기도 하다.  이 혁대는 뱀의 은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남성의 성기로 이어진다.  따라서 앞부분을 수직으로 세우고 있는 이 혁대는 극도로 발기된 남성 성기의 은유가 된다. 위의 은유는 비교 대상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은유는 두 개 이상의 비교 대상을 필요로 하지만, 긴 물체 뱀 성기로 이어지는 은유는 우리의 문화권에 이미 코드화 (codification)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약품과 이 문화적 약호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  이 광고의 목적은 이처럼 무의미한 두 대상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광고는 발기된 성기 밑에 약병을 나란히 놓아둠으로써 두 관계를 연관시키는 은유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보통의 드링크제와는 판이하게 긴 모양으로 설계된 용기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남성의 혁대 밑에 배치시킨 긴 약품 병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이 약을 복용하면 이렇게 된다.”  광고 기획자는 수용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혁대의 위쪽에 “똑바로 서는 남자!”라는 메시지를 추가하는 배려를 보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똑바로 서는 남자”란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것은 발기한 남자의 성기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남자라는 함의이다.  여기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서다”라는 기호는 은유의 주축이 되고 있다.  즉  ”남자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서”며, “사회가 바로 서”야 “국가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삼단 논법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이 메시지는 “건강한 국가를 위해선 남자가 바로서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남자가 바로 선다”는 메시지는 위에서 말한 바처럼 성적 성공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그 뒤에 반복되는 “가정이 바로 선다”와 “사회가 바로 선다”는 말에는 성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단순한 동어반복처럼 사용되는 “서다”라는 말은 결코 동일 개념의 반복이 아니다.  이는 남성의 물리적인 성적 능력을 가정, 사회, 그리고 국가로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은유의 은폐전략이다.  남성의 성적 능력이나 출세가 가정의 성공이나 사회의 발전으로 귀결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이한 개념들을 연결해주는 것은 자연적 인과관계나 논리적 연관성이 아니라 바로 문법적 착각일 뿐이다.              7. 4. 환유: 허리띠와 가장   이제까지 동일하지 않은 두 개념을 동일시하는 은유의 작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처럼 개인적인 성적 능력이 사회적 함의로 확대되는 현상은 환유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환유를 간단히 '어떤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지칭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광고의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남성용 혁대와 긴 약품 용기뿐이다.  그러나 이 두 시각기호는 수용자로 하여금 그 이상의 의미를 생성해 내도록 한다.  먼저 검은 색 띠와 금과 은으로 도금된 버클장식은 이것이 고급 남성용 정장과 함께 착용하는 장신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금과 은은 부에 대한 환유이며, 검은 색은 권위의 환유이다.  이를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사진 속의 혁대는 고급 신사복의 환유가 된다.  이러한 정장을 입는 사람은 이른바 화이트칼라, 즉 사무직 직장인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환유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혁대 하나가 직장인의 의미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똑바로 서 있는 혁대가 의미하는 바는 성공한 직장인 남성이다.  여기서 남성은 가장으로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대표하는 사회적 역할의 주체이다.                   직장인 남성과 또 다른 환유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성기이다.  혁대는 사무직 직장인의 환유이자 남성 성기의 은유이다.  그런데 남성의 성기는 또 다시 환유를 통해 성인 남성의 의미를 드러낸다.  남성의 성기는 남성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기는 환유적으로 성인 남성 전체를 의미하게 된다.  서 있는 혁대, 즉 발기된 성기는 왕성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성의 환유이다.  여기서 남성은 성적 관계의 주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결코 성적 능력이 만족스런 부부관계의 동의어일 수는 없다.  부부관계가 물리적인 성교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부부관계가 가정을 세우는 하나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그것의 동의어는 아니다.  이 광고에서는 성적 남성과 사회경제적 남성을 연결하는 환유의 커다란 두 갈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기호학은 특정 맥락 속에서 특정한 계열체(paradigm)가 선택되는 이유에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 선택 가능한 일련의 기호 속에서 왜 하필 그것을 택했느냐는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그것이 아닌 다른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의 광고에 사용된 혁대는 여성용 혁대가 아니고, 어린이나 근로자가 사용하는 혁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이 혁대의 주인은 가정과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남성, 그리고 성인으로서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 혁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기호로 연결된다.                  한국의 문화권에서 혁대는 경제적 의미와 연결된다.  예컨대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은 경제적 긴축을 의미한다.  또한 사모관대(紗帽冠帶)란 말에서 허리띠는 벼슬, 즉 사회적 성공을 의미한다.  이처럼 혁대는 한국에서는 단순한 장신구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광고에 나타난 혁대는 검은 색 띠에 금과 은으로 도금된 버클이 달려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금과 은은 부를, 검은 색은 권위를 의미하는 기호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의미요소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혁대를 가정과 사회의 경제적 주체로 드러낸다.  여기서 혁대가 곧게 서 있는 모습은 가장의 사회적 성공을 의미하는 기호이다.            광고에 나타난 혁대 그 자체는 가장을 의미하지만, 길게 뻗어 있는 전체적 형상은 남자의 성기를 의미하는 기표로서, 결국 남자의 성적 능력을 뜻하는 기호가 된다.  혁대가 서 있는 모습은 발기된 성기를 나타내며, 이는 결국 왕성한 성적 능력 가진 남성을 의미한다.                                              광고에 나타난 언어기호에서 고개 숙인 남자라는 말은 바로 선 남자와 흔들리지 않는 남자에 대립되는 사람으로서 발기되지 않는 성기와 낙심한 가장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똑바로 서는 남자는 왕성한 성적 능력을 가진 남성인 동시에 당당한 가장이다.  이 광고 메시지에 따르면, 남자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면 사회가 바로 서며, 사회가 바로 서면 국가가 건강해 진다.  결국 가정의 침실로부터 국가 번영의 과업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참여할 여지는 없다.  남자와 여자 간의 성관계는 남성이 바로 서는 성능력 만 갖추면 해결되는 것이며, 가정과 사회의 발전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획득된다.  이는 발기와 번영이라는 상이한 개념을 서다라는 개념으로 동일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은유의 작용이다.  여기서 여자가 성관계나 사회경제적 활동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여자는 “서”지 않기 때문이다.   [1] 기호학연대, 기호학으로 세상읽기, 서울: 소명사, 2002. [출처]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3)-강인규|작성자 옥토끼  
2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2)-강인규 댓글:  조회:101  추천:0  2019-02-03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 (2)                 2003. 1. 2. - 소쉬르와 구조주의                                 강인규                                                                                         리뷰   1.              소쉬르와 퍼스 기호학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기호(sign)와 지시대상(referent/   object)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소쉬르에게 있어 기호는 지시대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체계인 반면, 퍼스는 지시대상과 맺고 있는 긴밀성(동기화: motivation)에 다라 기호를 지표(index), 도상(icon), 상징(symbol)으로 구분하였다.     발자국                                          脚印 Footprint Abdruck                                                                                                                                 위의 사진들을 퍼스의 세 가지 기호 개념을 통해 분석 해 보자. 위의 광고가 설득효과를 발휘하는 지점은 지표, 도상, 상징 가운데 어디인가?  의 세 번째 사진은 앞의 말보로 담배의 패러디 광고다. 이 광고는 기호의 어떤 측면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가? 지표, 도상, 상징의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해 보라.         아래의 보도 사진을 위와 동일한 방식으로 분석해 보라. 보도사진이 글로 작성된 기사보다 강력한 효과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래의 사진이 의 발자국 사진과 갖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표”의 관점에서 설명하라.                               위의 두 사진은 같은 대상을 지시하고 있지만, 분명히 서로 다른 기호이다. 만일 대중일간지의 대학생 시위용으로 두 번째 사진이 채택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경우 사진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텔레비전 뉴스의 경우, 뉴스진행자들의 카메라 샷(shot)은 머리부터 가슴까지를 잡는 미드샷(mid-shot)이 주로 사용된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이 경우 프레임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무엇인가? 위의 보도사진 및 옆의 사진과 비교해서 분석해 보라.                             2.              소쉬르는 기호(sign)를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결합체로 보았다. “기표”가 기호의 물리성에 가까운 “청각이미지(sound-image)”라면, 기의는 이 청각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불러 일으키는 정신적 “개념(concept)”이다. 기표가 표현의 차원이라면, 기의는 내용의 차원이다.     3.              소쉬르의 기호 개념은 “자의성(arbitrariness)”과 “부정성(negativity)”으로 대표된다. 자의성은 기표와 기의가 아무런 외적 유사성이나 자연적 인과관계 없이 관습(convention)적으로 결부된 관계라는 의미다. 부정성이란 기호가 지시대상을 지시함으로써가 아니라, 기호가 다른 기호들과 연관됨으로써 의미가 산출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기호는 “~이 아님”의 끊임없는 부정의 연속관계에서 그 의미를 드러낸다.                                    기호          기표          기의              [지시대상]       (소쉬르의 기호모형)                기호      해석체          지시대상       (퍼스의 기호모형)     4.              계열체(paradigm)는 특정 맥락에서 선택될 수 있는 기호의 목록이며, 통합체(syntagm)는 각 계열별로 선택된 기호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이루어진 메시지를 뜻한다.     최근 불거진 반미(反美)로 인해 한미동맹 관계에 예전에 보지 못한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전환점에 선 한미관계: 韓-美 현주소,” , 2002. 12. 31.)     최근     불거진  반미로 인해  한미동맹 관계에 예전에 보지 못한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계열체)  과거에   드러난  극미         한미혈맹        흔히 보아왔던     정상       오래전   대두된  항미         한미종속        드물게 보아왔던   바람직한                 ……      ……    …           ………          …………………    …… (통합체)              다음은 우리가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기사다. 아래의 기사를 소쉬르의 “계열체” 개념을 이용해서 분석해 보자. 언어를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반영론”과 “구성론”—에서 아래의 기사는 어떻게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가? 현실은 “아날로그적”이지만, 언어는 “디지털적” 이라는 주장을 아래의 기사 분석을 통해 증명해 보라.         “12일부터 지하철 파업 예고” 2002. 10. 3.   “부산지하철과 시내버스 노조가 파업을 예고, 교통대란이 우려되고 있다. 특히 지하철의 경우 부산아시아게임 기간 중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히고 있어 큰 혼란이 예상된다. 부산지하철 노조는 ‘사측인 부산교통공단과의 5차례에 걸친 교섭이 결렬됨에 따라 2~4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 중’이라고 3일 밝혔다. 노조측은 찬반투표가 끝나는 4일 파업결의 대회를 갖고 오는 12일 파업에 돌입할 계획이다. 노조는 임금 18.6% 인상과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고 있지만, 사측은 임금 6% 인상, 해고자 복직 수용 불가방침을 밝히고 있어 타협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부산시내버스 노조도 시내버스 요금 인상시기 지연 등을 이유로 부산아시아게임 폐막 이후 파업에 돌입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朴柱榮기자 park21@chosun.com)       1.      소쉬르와 구조주의   구조주의에서 “구조(structure)”는 관계의 체계이며, 통시적(diachronic)이기보다는 공시적(synchronic) 특성을 지닌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유래한다. 소쉬르는 의미를 기호간의 관계의 체계(“가치”; value) 파악했을 뿐 아니라, 당시 지배적이었던 (언어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연구하는) 통시적 접근 대신 공시언어학을 채택하였다. 그의 강의 명칭이자 자신의 유고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라는 이름 자체가 소쉬르의 공시 언어학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 특히 언어의 일반적 구조인 “파롤(parole)”에 초점을 맞춘 소쉬르의 기호학은 이후 구조주의 분석과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1. 이항대립(binary opposites)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소쉬르의 언어학을 문화분석에 접목시켰다. 그가 친족체계와 신화분석 등에 사용한 방법론은 구조주의적 접근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는 ‘구조’의 구체적인 분석 틀로써 “이항대립”과 “신화소(mytheme)”의 개념을 사용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두 가지의 상반된 개념범주화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밤과 낮, 하늘과 땅, 안과 밖의 범주화로써 구분하며 대상을 신과 사람, 영웅과 악당 등으로 구분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저서 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대상을 이항대립적으로 파악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모든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구조는 대상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날 것”과 “익힌 것”으로 구분하고, 익힌 것을 다시 “물이나 기름에 삶거나 튀기는 것,” “불에 직접 구운 것,” 그리고 “부패시킨 것”으로 구분함으로써 문화를 분류한다. 그에 따르면 음식은 결혼과 더불어 문화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한 집안에서 자신의 여자를 내어주고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소위 “여자의 교환”이 인류의 모든 문화를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요소이듯, 세계의 대상을 ‘먹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모든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근본구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실상 인간의 위장이 모든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화권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특정 문화권에서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범주화되는 것은 사람이 소화시킬 수 없다거나 먹은 후 물리적 위험이 따르는 등의 생물학적인 이유보다는 문화적인 금기(taboo)와 연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컨대 호주사람들에게 개고기는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캥거루와 악어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결국 “먹을 수 있음/없음”의 구분은 자연적 기원이 아닌 문화적 기원을 갖는 것이고, 우리는 이런 이항대립적 범주 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비교함으로써 한 사회의 문화적 특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항대립은 신화소와 더불어 문화의 일반적 양식을 드러내는 구조적 환원(structural reduction)의 한 방식이다.   안 : 밖                            인간 : 신                            여자 : 남자                            문명 : 자연                            어둠 : 빛 밤 : 낮                              땅 : 하늘                            약자 : 강자                            악당 : 영웅                                     이항 대립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대상은 “특이범주(anomalous category)”가 되어 한 사회에서 금기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화되는 극단적인 의미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예를 들어 쥐는 완전한 야생동물도 아니고 개처럼 완전히 길들여지지도 않은 안/밖의 경계에 속하는 동물로서 금기시된다. 뱀 역시 육상동물과 물고기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특이범주에 속하기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겸비한 예수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신성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의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이항대립에 의한 반복적 패턴, 즉 “구조적 반복(structured repetition)”을 찾아서 도식화하라.   외딴 숲 속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보호 하에서 훌륭하게 자랐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잦아졌다. 햇살이 화창한 어느 날 오후 아들은 산책을 나왔다가 호기심에 아버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깊은 숲 속에 들어갔다.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다니던 아들은 사냥꾼이 파 놓은 깊은 굴 속에 빠져버렸다. 그는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굴 속을 맴돌 뿐이었다. 한 편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염려한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온 숲을 헤매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빠진 굴에 도착해 안을 들여다 보았으나 굴의 그림자가 너무 깊어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울부짖었으나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 때 해가 높이 떠서 굴의 바닥을 비추었고, 이로써 아들은 아버지의 손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이전의 행복한 생활로 돌아갔다.     1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다.  ↑ 1” 어둠이 햇빛을 차단하다.        ↑   2 아들이 산책을 하다.             ↔ 2” 아버지가 찾아 나서다.          ↔   3 해가 굴의 깊은 곳을 비추다.     ↓ 3” 아버지가 아들을 구조하다.      ↓     2.      신화(Myth):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   우리에게 ‘남자다운 남자,’ ‘주부다운 주부,’ ‘학생다운 학생’과 같이 ‘진리’와 ‘자연’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든 사회현상들은 모두 특정 시점에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됨으로써만 존재하는 신화다. 현재에는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고대의 신화들도 그 당시에는 엄연한 ‘현실’로서 문화성원들의 역할과 관계를 설정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것이다. 현대의 신화 역시 미래에는 고대의 신화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인지될 것이다.                   비코(Giambattista Vico)에 따르면,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시적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이를 통해 외부 환경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을 실체화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신화가 유치하고 허무맹랑하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진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매개수단을 통해 세계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모든 신화는 고대 민족들이 현실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일반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신화란 그러한 경험을 납득 가능한 인식의 틀, 즉 특정 문화의 ‘구조’ 속에 맞추어 넣으려는 시도이다. 신화는 인간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지만,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인간은 도리어 신화에 의해 반영된 세계를 ‘자연적인 것’ 이나 ‘주어진 것,’ 또는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진리는 만들어진 것(verum factum)일 뿐이다. 인간이 세계를 지각할 때에는 그것이 자신의 경험이 그려내는 틀임을 인지할 수 없으며, 사물은 그 틀 안에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만 ‘의미 있는 것,’ 즉 진리로서 인식된다. 사회나 제도를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지만,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그것들이 인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처럼 인간에 의해 창조된 신화는 다시 인간의 세계를 구조화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역시 인간들이 ‘시적 지혜’에 따라 신화를구성하고, 이로써 환경에 대응한다고 봄으로써 비코의 신화론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에서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대신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실을 알지 못 한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근대과학은 우리에게 병과 병균 사이의 인과관계를 알 수 있게 하려고 하는 데 반해, 원시공동체의 샤만(shaman)은 병을 환자가 진심으로 믿고 있는 신화와 괴물의 세계에 결부시킨다. 결국 구조화의 양식만 다를 뿐, 고대의 샤만치료와 현대의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샤만의 신화체계가 ‘객관적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환자는 스스로 신화를 믿고 있으며, 또한 그 신화를 진리로 인식하는 사회에 속해 있다. 수호신이나 악신, 초자연적인 괴물이나 주술적 동물 등은 모두 원주민의 인식을 구성하는 신화체계의 일부이다. 그러나 병으로 인한 고통 등은 환자가 믿는 세계의 일부에 속하지 않는 ‘현실적인 요소’가 됨으로써 환자를 괴롭힌다. 샤만은 이 환자의 고통을 그가 믿는 세계 속에 재통합하는 임무를 맡는다. 샤만의 도움으로 환자가 그 고통을 이해하게 되면—다시 말해 자신의 문화적 구조, 즉 신화 속으로 편입시키게 되면—그의 병은 낫게 된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샤만은 환자에게 언어를 준다. 이로써 환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표현할 수도 없었던 자신의 심적 상태를 자신의 문화구조와 일치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토템신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곰이다’라는 신화는 결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화적 동일시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개인의 지위를 다른 사물이나 개인에 연관시켜 진술하는 것 뿐이다. 예컨대 ㄱ부족이 곰의 후손이고 ㄴ부족이 독수리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ㄱ과 ㄴ사이의 관계를 생물의 종들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문화적 관계를 구체적인 은유로 치환하는 과정을 레비-스트로스는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라고 불렀다. 이러한 인간 정신의 기본 형식은 현대적인 과학기술 정신의 경우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즉 고대의 신화는 현대사회의 신화—여기에는 첨단과학도 포함된다—와 기능상 동일하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신화적 사고에서 나타나는 논리는 근대과학의 논리만큼 엄밀”하며, “인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잘 생각해 오고 있다.”[1]   3.      외연, 내포, 신화                                               소쉬르의 언어학은 기호 일반이 어떻게 의미를 산출하는가를 말해주지만, 동일한 기호가 다른 문화권의 다른 사용자들에 의해서 다른 의미와 정서적 느낌을 유발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인 바르트(Roland Barthes)는 “외연”과 “내포”의 개념을 빌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외연(denotation)”은 기호의 1차적 의미작용, 즉 문화의 차이와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산출하는 과정을 말한다. 반면에 “내포(connotation)”는 기호가 사용자가 속한 문화적 차이와 개인적 정서에 따라 다른 의미를 산출하는 2차적 의미작용의 과정이다.                                                 외연(denotation)                                                                                             내포(connotation)/ 신화(myth)                                              아래의 사진은 바르트가 분석에 사용했던 텍스트이다. 각기 “외연,” “내포,” 그리고 “신화”의 관점에서 아래의 사진을 분석해 보라.                             4.      기호학 분석의 사례: 텔레비전 드라마[2]   4.1. 텍스트:   여주인공: 내부소행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마 이전부터 같은 금고번호를 사용했을 거예요.  주인공: 그래도 만전을 기해야지.  이것 좀 봐 줄래? (넥타이를 고쳐달라는 제스처를 한다.)  여주인공: 음, 그러죠. (그가 그녀를 안는다.) 이 부드러운 손. 아, 좋아요. 조나단.  주인공: 나중을 위해 손 근육을 좀 풀어두려고.  여주인공: 혹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닐까요?  주인공: 문 열쇠는 코드 번호가 있어서 아무 기계로나 복사할 수 없게 되어있어.  여주인공: 그럼 창문으로는?  주인공: 그건 선창(porthole)이라고 하는 거야. 여주인공: 맞아요. 선창. 보기 좋으라고 만들어 놓은 건 알지만, 그걸 볼 때마다 세탁기가 생각나요. 주인공: 방금 전에 살펴봤어. 이제 할 일은 다 한 셈이야. 그곳 창문, 그러니까 선창까지 높이가 십 미터가 넘는데다가, 그 사이로 빠져나가려면 웬만큼 마른 체격으로는 안 돼. 여주인공: (자신의 보석을 보여주며) 어때요? 이 정도 꿀이면 벌들이 달려들겠죠? 주인공: 누가 알아?  꽃에 정신이 팔려서 꿀을 못 알아볼지? 여주인공: 내가 들어본 중 가장 달콤한 말이네요. 우리 갈까요?  (문 쪽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한다.)   악당: 샴버린의 케익 위에 듬뿍 묻어있는 설탕 봤지?  그 팔찌는 맨눈으로 봐도 오만 불은 족히 나가게 생겼던데? 여자악당: 패트릭. 당신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포기해요. 같은 배에서는 두 번 일 안 하기로 했잖아요.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거 잘 알면서. 악당: 하지만 여보, 내가 염려하는 건 당신이야. 혼자 슬쩍할 생각은 아니지? 이번에 한 탕 확실하게 하면 다신 이 짓 안 해도 돼. 여자악당: 지난 번에도 똑같은 말 했어요.  악당: 확실하게 몇 건 하고 손 씻자. 노후연금은 넉넉히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4.2. 분석   “현실”은 이미 부호(코드; code)화되어 있다. 우리는 해당 문화 속에 존재하는 코드를 통해서만 현실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 설사 ‘저 밖에’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현실은 언제나 부호화된 상태로 존재하며 결코 “날 것”이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부호화”란 이미 부호화된 현실의 일부를 선택하여 (1) 기술적으로 전송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고 (2) 수용자들이 ‘적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텍스트로 만드는 과정이다. 텔레비전의 부호화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차 단계: “현실” (텔레비전 카메라에 담길 사건은 이미 외모, 의상, 화장, 환경, 행동, 대화, 몸짓, 표정, 소리 등의 사회적 코드에 의해 부호화되어 있다.)    2차 단계: 재현 (앞의 사회적 코드는 카메라, 조명, 편집, 음악, 음향 등의 기술적 코드에 의해 다시 부호화된다. 관습적 재현 코드는 내러티브, 갈등, 인물, 연기, 대사, 무대, 캐스팅 등의 재현에 영향을 미친다.)   3차 단계: 이데올로기 (재현된 현실은 개인주의, 가부장제, 인종, 계급, 자본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적 코드에 의해서 일관되고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형태로 조직화된다.)   의 예에서 주인공과 여주인공간의 대화는 ‘사실적’이고 ‘자연스럽게’ 들리는데, 이는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적 코드가 작용한 결과다.  이 이데올로기 하에서 (무지한) 여성은 늘 남성에게 질문을 하고, (모든 걸 아는) 남성은 여성에게 정답을 제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대화가 된다.  기호학의 목적은 이렇게 자연화되고 상식화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1)        카메라워크   카메라 거리는 시청자로 하여금 악당에 대해서는 반감을, 그리고 주인공에 대해서는 쉽게 동일시할 수 있도록 한다.  텔레비전에서 주로 사용되는 샷은 미드샷과 클로즈업으로, 등장인물들에게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악당은 흔히 익스트림 클로즈업 (ECU)의 대상이 된다. (위의 의 예에서 주인공에게는 여덟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악당에게는 스물 한 번이나 사용되었다. 웨스트모어랜드가 CBS를 상대로 명예훼손소송을 제기한 것 역시 카메라 샷의 재현적 특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이런 특성은 두 가지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1)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편안한’ 대인 거리 – 이 거리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사람은 연인이거나 악당이다. 2) 피사체를 분명히 보여주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수용자로 하여금 “지배적 시청위치(dominant specularity)”를 제공함으로써 피사체에 대한 우월감과 권력의 쾌락을 선사한다.   (2)        조명   주인공의 방에는 부드러운 오렌지빛 조명이 사용된 반면, 악당의 방에는 강렬한 백색 조명이 사용되었다.   (3)        편집   악당보다 주인공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주인공:72초/ 악당:49초) 그리고 악당보다 주인공에게 더 많은 샷이 사용되었다. (10/7)   (4)        음악   악당이 출현하는 순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장조 음악에서 (불안한 느낌의 )단조로 바뀌었다.   (5)        캐스팅   외모는 사회적 코드의 지배를 받는 “현실”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캐스팅은 이런 코드를 이용한 것 뿐이다.  수용자는 배우가 연기했던 인물의 이미지 이외에 잡지나 신문 기사 등 다른 차원의 담론과의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극중의 등장인물을 이해한다.  외모는 이데올로기적이다. 거브너의 연구에 따르면, 극중 인물이 백인/중산층/남성인 경우 생존 확률이 높으며, 이와 멀어질수록 생존확률은 낮아진다. 의 경우, “비미국적인(non-American) 남자악당과는 달리 “미국적(백인/금발/미인/젊음)”이기에 살아남았고 도덕적(탐욕 비난/사유재산의 존중이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수호)이기에 결국 “우리편”이 되었다.   (6)        무대와 의상   주인공의 방이 악당의 방보다 크다.  주인공의 방은 커튼과 꽃 등을 통해 “인간적”으로 꾸며진 반면, 악당의 방은 직선적이고 날카롭다.  악당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이는 그를 하인이나 종업원의 위치에 놓는 것이다.  여자악당의 옷은 여자주인공의 옷보다 경박하고 값싸게 보인다. 이처럼 계급, 선과 악, 도덕, 매력 등의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적 코드는 물리적인 사회적 코드로 압축된다.      (7)        화장   여자악당의 기본적인 매력은 그녀가 선하게 바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보다 매력적이어서는 안 되므로 립스틱을 가늘고 경박하게 칠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8)        행동   주인공과 악당이 취하는 행동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선실에서 여자는 모두 화장을 하고 남자는 무언가를 계획한다.  이것은 남자와 여성의 역할(남자: 지도자/ 여자:남성의 시선의 대상)을 자연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행동의 공통점은 물질적 부가 행위의 동기가 된다는 점이다.  또 다른 차이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 협력하고 물리적으로 가까운 데 반해 악당은 서로 반목하고 물리적으로 거리를 둔다.  이는 남녀는 친밀해야 한다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재현한다.   (9)        대화   악당은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서로 다투지만 주인공은 유머를 알고, 풍부한 은유를 사용하며 서로 협력한다.   (10)     이데올로기적 코드   텍스트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수용자는 익숙하고 편안한 이데올로기적 쾌락을 얻는다. 수용자는 텍스트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주체(subject-in-ideology)”로 호명된다.   1) 농담:  “창문-선창-세탁기”의 농담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코드다.  여성은 기술적인 담론(“선창”)에 취약하기에 이 담론은 가정적인 담론(세탁기)과 접합되어야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농담은 금기의 불안을 드러낸다. 결국 “창문-선창-세탁기” 농담은 남성성의 영역에 침입한 여성성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이를 다시 지배적인 체제 속으로 돌려놓기 위한 장치이다.  여자 주인공의 미모와 순종적 성격 역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2) 보석: 주인공과 악당은 모두 보석에 관심을 갖지만, 악당의 보석은 현금의 가치로 환산되는 데 반해, 주인공의 보석은 간직하기 위한 것, 다시 말해 계급, 부, 그리고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기호이다.  여자주인공은 일부러 필요 이상의 보석으로 경박하게 치장하는데, 이는 하위 계층의 악당을 유혹하기 위한 것으로서 계급간의 취향을 자연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취향 taste”이라는 은유 자체가 문화적으로 습득되는 것을 자연적인 감각의 차원으로 자연화한다.) 보석은 또한 성적인 코드를 갖는다.  보석은 여성과 교환되는 화폐로서, 그것을 착용하는 것은 그 보석을 준 남성의 소유물임을 표시하는 동시에 그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1] Terence Hawkes, Structuralism and Semiotic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7, pp. 11-18, 32-48. [2] John Fiske, Television Culture, London: Routledge, 1987. [출처]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2)-강인규|작성자 옥토끼  
1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1)-강인규 댓글:  조회:108  추천:0  2019-02-03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                                            강인규         1. 기호학과 구조주의  1.1. 인간: 의미의 생산/소비자  1.2. 언어의 함정: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1.3. 기호학: 의미를 둘러싼 투쟁   2. 소쉬르의 기호학: 자기완결적 구조로서의 공시언어  2.1. 기호, 기표, 기의  2.2. 의미작용  2.3. 가치  2.4. 계열체와 통합체   3. 구조와 구조주의 3.1. ‘구조’와 ‘주체’ 3.2. ‘랑그’와 ‘파롤’/ 구조와 현상   4. 퍼스의 기호학: 반영의 체계 4.1. 기호, 해석소, 지시대상 4.2. 도상, 지표, 상징         1. 기호학과 구조주의   1-1. 인간: 의미의 생산/소비자   기호학은 간단히 “기호의 과학(science of signs)”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호학은 모든 사회 현상을 기호(sign)로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내는 작업이다.  인간의 활동 가운데 ‘무의미한’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의미를 추구한다.  심지어 떨어지는 낙엽 하나, 작은 별 하나에 조차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커뮤니케이션학의 기본 명제는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만일 상대방의 말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대답할 때, 이는 상대방의 발언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의미’의 거부는 곧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와도 같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아래의 표현들은 ‘의미’가 우리의 삶에서 갖는 중요성을 드러내 준다.   “그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무의미한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그처럼 이해심 많은 사람은 처음 봤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꽃을 주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이는 단순히 ‘특정 식물의 일부 조직에 대한 소유권을 이전하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행위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주 전화를 걸어올 때, 우리는 이것을 상대방이 나에 대해 (나의 전화번호나 나의 전화기가 아니라) 보이는 관심의 징표로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의미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기호학자인 셈이다.  여기에서 꽃을 주는 행위나 전화를 거는 행위는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호”다.  기호학의 기원을 고대 희랍시대로부터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 현대의 기호학은 구조주의 언어학(Structuralist Linguistics)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2. 언어의 함정: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주의(Structuralism)를 간단히 정의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일단 ‘데카르트적 주체(subject)를 허문 탈근대 철학’의 관점에서 설명해보기로 하자.  이 관점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발견했던 ‘선험적, 이성적인 주체(subject)’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 ‘진리’는 오직 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들은 신의 힘을 빌지 않고도 스스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이러한 자신감의 터를 닦고자 했다.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먼저 요구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진리를 세울 토대, 즉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명제를 찾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는 진술이다. 당시 이 명제는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한다고 하자.  그 판단은 옳은 것일 수도 있고 그른 것일 수도 있으나, 그 판단을 하는 나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명제는 곧 그 허구성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합리론은 언어와 대상의 일대일 대칭을 기초로 한다. 이에 따르면 언어에 앞서 선행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붙여진 이름으로서의 언어가 있다.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고 사물에 내재된 의미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투명한 재현의 매체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래의 예를 보면, 언어는 대상과 일대일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싸리눈” (한국어)                “snow” (영어) “함박눈”    “mutton” (영어)                “mouton” (불어) “sheep”      한국어에서는 눈을 “싸리눈”과 “함박눈” 등으로 대상을 구분해서 지칭하는 반면, 영어에는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눈”이라는 하나의 기호로 일반화한다. 눈또한 영어에서 목장에서 뛰노는 양과 정육점에 걸린 양고기가 각기 “쉽(sheep)”과 “머튼(mutton)”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불어에서는 “무통(mouton)”이라는 하나의 기호가 두 개의 다른 대상을 동시에 지칭한다. 여기서 언어가 대상과 일대일 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언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권에 따라 대상을 상이한 방식으로 나누고 구분한다. 언어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재단하는 폭력적인 매체이다. 이로써 언어는 대상에 대한 특정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조건이 된다. 대상이 언어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대상에 선행한다.  우리의 인식은 언어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언어의 매개 없이 ‘직접’ 현실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눈을 예로 들어 보자.  한국에는 몇 가지 눈이 내릴까?  함박눈, 싸리눈, 진눈깨비....  우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직접’ ‘현실’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네 가지 이상의 눈을 보기가 힘들 것이다.  반면에 에스키모인들을 한국에 데려다 놓는 순간 한국에는 십여 가지 이상의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에스키모인들에게는 한국의 눈이 열 다섯 가지 이상의 완전히 다른 종류로 구분되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키모인들이 사는 지역에는 다른 눈, 즉 다른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눈’을 지칭하는 더 세분화된 언어를 가지고 있는 탓이다. 사람들은 언어가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 주는 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하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언어의 세계 –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Symbolic) – 에 들어가기 전, 아기들은 자신과 어머니를 분리되지 않은 한 덩어리라고 여긴다.  다시 말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너’와 ‘나’의 구분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언어와 대상은 일대일 대칭이 아닐 뿐 아니라, 상이한 언어는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 된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함으로써 특정 대상을 보이게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게 하기도 한다.  한국어를 학습하지 않은 영어권의 사람들이 한국어의 모음 ‘ㅡ’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이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현실세계’에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존재할까?  “미소”와 “웃음”의 경계는 어디인가? “뚱뚱함”과 “날씬함”은 어떠한가?  “모퉁이”이 끝나고 “벽”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처럼 '현실'은 경계선이 없는 한 덩어리의 연속체 속에 존재한다.  언어는 그것들을 낱낱이 쪼개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실’은 연속적인 ‘아날로그’인 반면, 언어는 파편화된 ‘디지털’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아무리 잘게 자른다고 해서 단절적인 파편이 연속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 아니다.  그 빛의 스펙트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무한히 많은 색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언어는 대상의 이러한 연속성과 가변성을 담아낼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안정적인 형태로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언어의 효과다.             우리는 이렇게 ‘현실’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것을 보거나 경험하는 행위는 특정 대상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된다.  결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세계에서 '무의미한'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잔잔한 호수에 비친 나무 그림자 조차 '낭만'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우리의 경험은 늘 언어라는 의미의 체에 의해서 걸러지기 문에 각적이거나 직접적인 현실의 지각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언어 속에 태어난다. 그리고 우리에 앞서 존재하는 언어를 통해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언어는 ‘나 자신’ 즉 ‘주체’와는 무관하게 학습된 ‘남의 말,’ 즉 타자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에게 말하고 생각하도록 지시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 곧 ‘나’란 언어가 우리의 인식에 투영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 생각이 보장해 주는 것은 ‘나’의 ‘존재’ 아니라 ‘남’의 ‘언어’일 뿐이다.  내가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나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데카르트의 명제는 라캉의 명제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1-3. 기호학: 의미를 둘러싼 투쟁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주체란 사회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제반 문화적 현상은 우리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이고, 따라서 분석을 요하는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우리나라”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일컫는 말일까?  한국 자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 줌의 재벌 총수?  아니면 직장에서 쫓겨나 길거리를 전전하는 노숙자?  아니면 새벽부터 다시 새벽까지 입시준비에 시달리는 입시생? 혹은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의 절반 밖에 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  결국 “우리나라”라는 말, 즉 기호는 이 땅에서 남을 혹사시켜 돈을 긁어 모은 사람이건, 그 축재과정의 희생재물이 된 사람들이건 간에 모두 “조국”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 묶어 두려는 지배계층의 음흉한 계략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호학은 이러한 권력의 흉계를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현대 기호학은 크게 두 가지 원류를 갖는다.  하나는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주창한 “세미올로지(Semiology)”고 두번째는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 Peirce)로부터 시작된 “세미오틱스(Semiotics)”다.  기호학에는 유럽과 미국의 두 가지 전통이 있는 셈이다.  아래에서 이 두 가지 기호학의 특성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2. 소쉬르의 기호학: 자기완결적 구조로서의 공시언어   2-1. 기호(Sign), 기표(Signifier), 기의(Signified)    소쉬르의 기호학은 앞서 말한 ‘구조주의 언어학’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쉬르는 ‘기호(Sign)’를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결합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꽃”이라는 소리나 글자를 들을 때 머리 속에 향기로운 꽃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는데, 이 때 소리나 글자는 “기표”가 되고, 이것의 자극으로 우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관념은 “기의”가 된다.  흔히 기표를 “기호의 물리적 형태”로 정의하지만, 이는 소쉬르가 본래 제안한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소쉬르는 기표 역시 정신적인 심상(image)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는 사물과 이름의 결합이 아니라, 개념과 소리-심상(sound-image)의 결합이다.여기서 소리-심상이란 물질적인 소리, 즉 순전히 물리적이 사물이 아니라, 그 소리가 우리의 정신 속에 남기는 자국이요 인상일 뿐이다.”[1]   2-2. 의미작용(Signification)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의 가장 큰 특성은 기표와 기의 간의 “자의성(arbitrainess)”이다.  즉 “꽃”이라는 소리나 글자는 그것이 지시하는 관념과 아무런 유사성이나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결합될 자연적 동기나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적 관습(convention)에 의해 종이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 할 것ㅊ은 ‘기표’와 ‘기의’의 구분이 개념적 이해를 위한 인위적인 도식일 뿐, 그 자체로 구분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것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2-3. 가치(Value)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호가 ‘현실’의 외부대상을 지칭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낳을 뿐, 결코 언어 밖의 물리적 현실을 지시하지 않는다.  의미란 ‘~이 아님’이라는 부정의 연속선상에서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이것은 사전을 찾는 행위와 유사하다. 사전은 한 낱말의 뜻을 다른 낱말들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그 풀이에 사용된 낱말을 찾기 위해서는 또 사전을 뒤져야 하고, 거기에 나와 있는 낱말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사전을 넘겨야 한다. 결국 사전 찾기는 끝나지 않는다. 의미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질문과도 같다. “이게 뭐야?”라는 질문에 답하기 무섭게 그 대답에 사용된 말은 또 다른 질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꽃”이라는 기표는 ‘저 밖의’ 물리적 대상과 연관될 필요도, 연관될 수도 없으며, 단지 “잎,” “줄기,” “열매” 등의 다른 기표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산출한다.  다시 말해 “꽃”은 “잎”이 아니고, “줄기”가 아니며, “열매”도 아니고…라는 식으로 기호의 다발 속에서 차이를 통해 의미를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다.  “갑”이라는 기호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을”이나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택된 기호의 의미는 선택되지 않은 다른 기호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소쉬르는 기호의 이러한 특성을 “가치(Value)”라고 부르고 있다.  “의미작용”이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인 반면, “가치”는 기호들 간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2-4. 계열체(Paradigm)와 통합체(Syntagm)                         나는  영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통합체)          너는  순희    따로 발레           그는  지희    달리 미전            :      :         :       :             :      :         :       :             (계열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기호가 지닌 의미는 그것이 아닌 다른 기호에 의해서 결정된다.  “나는 영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는 말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함께 간 사람이 “순희”나 “지희”가 아니기 때문이며, 함께 본 것이 “발레”나 “미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의 완전한 의미체계, 즉 ‘통합체(Syntagm)’를 구성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항목을 ‘계열체(Paradigm)’라고 한다.  소쉬르의 기호학을 문화현상에 적용했던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를 를 옷 입기(garment system)와 메뉴선택(food system)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계열체는] 우리가 동일한 신체 부위에 동시에 입거나 쓸 수 없는 의류로서, 이것에 변화를 줄 때 옷입기의 의미가 달라진다.  모자-두건-머리띠를 예로 들 수 있다.통합체는 종류가 다른 의류들을 함께 구색을 갖추어 입는 것이다.  치마-블라우스-자켓의 배열이 통합체의 예이다.”[2]   3. 구조(Structure)와 구조주의   3.1. ‘구조’와 ‘주체’   사회이론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사회’라는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관점과 ‘개인’이라는 미시적이고 개별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사회’를 강조할 때, 개인은 그에 부속된 무기력한 존재로 이해되며, 여기서 개인의 ‘선택’이나 ‘자발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회라는 총체적 관계 속에서 결정될 뿐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사는 ‘나’의 욕망이란 개인의 고유한 본성이나 자율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통해 소비자로서의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내’가 좋아하는게 아니라, ‘사회’가 나에게 좋아하도록 (혹은 좋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고 결정하는 포괄적인 사회적 관계를 “구조(structure)”라고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조주의 철학에서도 ‘구조’는 주체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주체는 구조에 종속된 하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중세의 ‘신’이라는 구조에 종속되지 않은 인간 존재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구조주의 이후 이 관점은 완전히 폐기되고 만다.  데카르트가 존재의 조건으로 내세운 ‘생각’이란 개인 고유의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사회구조 없이는 말도, 생각도 불가능하다면, ‘나’란 언어가 개인 내면에 심어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나’라는 의식 혹은 주체가 언어라는 사회구조로 환원되는 상황에서는 개인도, 자율성도, 저항도 존재할 수 없고, 이런 면에서 구조주의는 다분히 결정론이나 숙명론의 성격을 갖는다.             ‘구조’가 ‘주체’의 대립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 이외에 다른 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별적 현상의 대립개념으로서의 ‘구조’가 그것이다.  이 경우 ‘구조’는 ‘근원’의 동의어가 된다.  즉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현상의 밑바닥에 깔린 근원적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벨기에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는 인류문화의 ‘구조’를 “여자를 교환하는 결혼형식(exchange of women)”으로 파악한다. 다른 집에 여자를 내주고 자기 집에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결혼 양식이 모든 문화의 구조 혹은 공통분모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3.2.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구조와 현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조주의의 기원을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소쉬르로부터 찾는다. 그가 언어를 파악한 관점이 구조주의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구분했는데, 여기서 ‘랑그’란 일종의 언어규칙이고, “파롤”은 그 규칙이 사용된 실제의 언어행위를 가리킨다.  예컨대 지금 이 강의에 사용되고 있는 모든 말은 구체적인 발화로서의 ‘파롤’이지만, 이 언어행위는 한국어라는 일종의 규칙체계인 ‘랑그’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샘(랑그)에서 물(파롤)을 퍼올리는 행위인 셈이다.  여기서 랑그는 언어의 ‘구조’인 반면, 파롤은 그 구조의 지배를 받는 ‘행위’ 혹은 ‘현상’ 된다.             요약하자면, 구조란 사회를 거시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으로서, 이에 따르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태도와 행위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될 뿐, 어떤 능동성이나 자율성도 갖지 못한다.  개인은 사회의 생산자가 아니라 생산품일 뿐이다.  일단 완성된 사회구조는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가 되어 스스로 움직이고 성장해 가기 시작한다.  사회구조는 분명히 개인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일단 사회체계가 형성되고 나면 도리어 사회성원들을 규제하고 지배하는 주체로 군림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소쉬르의 전통에 입각한 기호학에서 기호는 외부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의미의 그물망 속에서 기호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만을 언급할 뿐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언어는 저 밖의 현실(reality)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독립적 구조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미는 ‘저 밖의 현실’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 자의적인 – 독립적 구조인 언어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언어는 나름의 독자적인 ‘총체성(wholeness),’ ‘가변성(transformation),’ 그리고 ‘자율성(self-regulation)’[3]을 지닌 채 스스로를 복제해 가는 유기적이고 자기 완결적 구조다.     4. 퍼스의 기호학: 반영의 체계   4.1. 기호(Representamen), 해석소(Interpretant), 지시대상(Object)    퍼스의 기호학은 구조주의 언어학보다는 해석학의 전통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퍼스는 기호는 현실세계를 지시하는 체계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기호현상을 외부 대상과 분리했던 소쉬르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관점이다.  소쉬르가 기호를 “기표-기의”라는 (현실과 무관한 언어구조 속의) 두 개념으로 설명한 반면, 퍼스는 현실 속의 지시대상을 상정하고 있다.   “기호(Sign 혹은 Representamen)는 어떤 사람에게 특정 대상을 표상해주는 것이다. 기호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발전된 다른 기호를 사람의 마음 속에 떠오르게 한다.  이처럼 첫번째 기호에 의해서 생성된 또 다른 기호를 해석소(Interpretant)라고 부른다.  그 기호는 대상(Object)을 지시한다.”[4]   4.2.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     퍼스는 기호가 외부대상에 대해 보이는 ‘유사성’을 근거로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도상’ 즉 아이콘은 현실세계를 모방하고 있는 기호인 반면, ‘상징’은 알파벳처럼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의적인 약속이다. ‘도상’의 예로는 초상화나 성대모사 등을 들 수 있다.  ‘지표’는 실존적(혹은 물리적)으로 대상과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는 기호다.  (특정 대상의 존재를 알려주는) 발자국이나 (병이 났음을 드러내 주는) 반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대상과의 유사성과 연관성을 토대로 각 기호의 특성을 도식화 하면 아래와 같다.          +   동기화(motivation) –           지표     도상    상징      – 자의성(arbitrariness) +    여기서 ‘동기화(motivation)’가 기호와 대상 간의 자연적 상관관계를 의미하는 반면 ‘자의성(arbitrariness)’은 기호가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서 인위적 관습에 의존하는 정도(conventionality)를 말한다.  ‘지표’는 대상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동기화는 높고 자의성은 낮은 기호인 반면, ‘상징’은 대상과 무관한 기호 이므로 동기화는 낮고 자의성은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퍼스의 기호학은 현실과의 연관 정도에 따라 기호의 충실도(modality)를 구분한다.  이에 따르면 ‘지표’와 ‘도상’은 비교적 충실도가 높고 ‘상징’은 충실도가 낮은 기호가 된다.       [1] Saussure, F ([1915]1966)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New York: McGraw-Hill, p. 66. [2] Barthes, R ([1964]1967) Elements of Semiology, New York: Hill and Wang, p    63.   [3] Piaget, J ([1968]1971) Structuralism,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pp.   3-16.   [4] Peirce, C ([1897]1956) “Logic as Semiotic: The Theory of Signs,” Buchler, J (ed.) The Philosophy of Peirce,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p. 99.   [출처]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1)-강인규|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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