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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위상진시인의 시모음 및 시평 댓글:  조회:533  추천:0  2022-10-14
위상진시인의 시모음 및 시평   -11월의 비/위상진-     지금, 어딘가를 쓰고 있을 H에게   너는 여섯 번째 나의 구두창을 갈고 있다   음이 소거된 티브이 뉴스가 거짓 수사가 많아지는 저녁을 꿰맬 때 구두는 너보다 먼저 늙어갔다   벽화처럼 정지된 얼굴로 부르는 노래는 믿을게 못 되었죠 말言이 안 되는 말들을 수집하는 나는, 특히 잘 있죠 '거기 윗동네 공기는 어떤가요?’   시간의 창살 뒤에 어디에도 없는 너의 말은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거울 같아 구둣방 거울은, 안주머니에서 시를 꺼내든 채 사라지는 너를 뱉어 낸다   나는 주크박스를 빼앗긴 음악처럼 창백해지고 공중에서 노란 비가 묻어있는 신문지가 떨어진다   거미는 담벼락에 못처럼 박혀버리고 안짱다리를 한 유령이 걷어찬 우유는 하수구로 콸콸 흘러들어간다   너의 젖은 말言 하나가 나를 지켜본다   잠시 자리 비우신 -문덕수 선생님께                                       위상진     프로이드의 중절모가 걸려 있고 흰 셔츠 접으신 채 돋보기로 책을 보시던 지성의 푸른 핏줄 펜 혹엔 늘 잉크가 묻어있었지요 시문학 4월호 ‘편집인 겸 주간 문덕수’ 직함이 지워져 있더군요 찬란한 꽃 망사 위에* 철커덩 셔터 내려오는 소리 나침반 같은 말씀 어디서 들어야 합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김시철 선생의 인사 말씀 흰 꽃잎은 뿌연 안경 너머 애도의 눈雪으로 날리고 죽음은 지상에 남겨진 자에게 구형求刑된 가장 긴 형기刑期임을 알고 계시지요   조셉 룰랭의 우편배달부 복장으로 갈아입으셨는지요 금장 단추 하나씩 채우고 모자는 살짝 삐딱하게 은빛 머리칼 반짝이는 거울을 보고 계시는지요   대학 1학년 ‘교양 국어’ 시간 짙은 눈썹을 응시하던 저는, 시 공간 저 너머 ‘시문학‘에 편입생이 되었지요 시인의 복무를 짚어보는 지금   그런데 선생님 보낸 이 받는 이 없는 편지 말고 누에처럼 쓰신 손글씨 싸인해 주신 첫 장에 발딱발딱 살아 숨 쉬는 손글씨 받고 싶습니다, 문덕수체 손편지를요   사무실 책더미 속에 꽃을 물고 있을 만년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는* 꽃보다 환하게 웃으시던 어제 뵈온 듯 아무 일 없는 듯 잠시, 아주 잠깐 자리 비우신 의자 있다. 있다       *선에 관한 소묘.1. 차용 *인연설에서 차용 *추모 시 ’영원한 우체부‘ 와 ‘잠시 자리 비우신’ 2편을 1편으로 재구성했다      *************      벽은 속삭인다       천국의 해시계는 사라지고 화면은 눈을 닫았다 백야의 객석은 음이 내려앉은 피아노 같았지 그토록 쉬운 말을 왜 할 줄 몰랐을까   새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귀 유예된 약속을 건져 올릴 때 속삭이는 벽과 열리지 않는 문에 관해 얘기했던가 말이 쪼개지는 저 너머 늘 기다리는 사람 더 기다리는 사람 생각보다 빨리 오고 시간보다 늦게 갔지 시차를 가로지른 밤은 불면으로 잃어버린 밤이다   환영과 환각 사이 너는 뒤돌아보지 않고 익숙한 장소에 도착한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붉은 물이 든 해변 글씨 자국이 난 꽃잎을 한 장씩 떼어 날렸지 익숙했던 패턴은 지워지고   무심한 듯 나타났다 없어지는 조각난 환영 눈물의 성분처럼 중얼거렸지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고    무대 위 페이지터너는 오늘을 넘기고 퇴장했다   쉼표 박물관         위상진     중국 현대문학관 테이블, 올챙이 무늬로 마구 찍혀 있는 쉼표들 멈출 수 없는 쉼표들은, 쉼표를 낳는 중일까?   쉼표는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음 문장을 끌어당기고 있어 오늘 아침 느닷없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떠올랐어 나는 좀 더 볼온해져야 할까 봐   구름은 나뭇잎을 갉아먹고, 나무 속으로 그림자를 밀어 넣는 중이야 그리다 만 액자 밖에는 아스라한 건물이 비탈에 서 있어 손으로 밀면 뒤로 넘어갈 듯해   소파 위에 놓인 사무엘 베케트 그의 눈 속엔 보라색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고요히 다문 입술, 고독이 밴 듯한 이마 낡은 셔츠의 보푸라기처럼 묻어 있는 말들   베케트의 문장은 쉬지 않는 쉼표로 가득해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깨어나지 못하는 쉼표들   북극에서 날아온 우울이 맺혀 있는 걸까? 신갈나무 한 그루, 빗속에서 한 호흡 쉬고 나뭇가지 끝에 달려 있는 연둣빛 물방울들 비 내리는 봄의 숲은, 쉼표 박물관 같아     - 2009.6월호       * 문학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문자로 표현한 예술이다. 그래서 문학 속의 쉼표는 "끊임없이 다음 문장을 끌어달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화자가 중국 현대문학관에서 문장과 쉼표를 보고 불온해지고 싶은 것은 쉼 없이 문학 작품을 쓰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나무 속으로 그림자를 밀어 넣는" 구름, "그리다 만 액자"는 그러한 화자의 내면을 암시한다. 그리고 「고도를 기다리며」란 부조리 문학을 남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독한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근원적 결핍과 욕망을 안고 사는 인간은 늘 구름 같은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불온하고 부조리한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물방을 쉼표가 달려 있는 "봄의 숲은, 쉼표 박물관"이다.    - 2010.오늘의 좋은시/ 푸른사상   중얼거리는 꽃 외 1편/위상진   면도칼이 녹아내리는 문장 뒤에 서 본 적이 있나? 언젠부턴가, 그방은 파지가 쌓이기 시작했어 알 껍질을 깨고 프린터에서 빠져 나오는 꽃이 중얼거린다   너의 이마에 찍힌 번호 도마뱀의 잘린 꼬리 같았지   나는 몽유병에 걸린 듯 단어를 찾아다녔지 사라진 천재들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 당길때 처음 듣는 낱말의 침전물이 부유한다   뼈대가 부서진 소조 같은 문장 발가벗은 사람들은 연필로 그려진 도시를 지나며 아무 말도 흘리지 않았어   우린 범종에 낀 불협화음처럼 같은 책을 들고 다른 페이지를 뒤적였지 의심의 맨 끝에 도착하지는 못했어 충혈된 시계위로 폭설처럼 쏟아져 내리는 파지   누가 녹아내리는 면도칼의 문장을 알아챌 수 있을까? 1초도 자기 자신을 낭비하지 않는 시간처럼 바스락거리는 이파리 소리   도무지 닫히지 않는 귀 하나, 여기 있다      불속의 비둘기   검은 봉지속, 귤이 해가 지는 쪽으로 쏟아질 때 그 불은 경찰서 뒷마당에서 시작되었죠   새들이 날개를 접는 시간 버섯구름에 싸인 비둘기 집   머리 위의 불꽃이 타다만 비둘기가 각목처럼 툭 떨어지며 비명도 없이 날아갔죠   호루라기 소리 어른거리는 불꽃 속에서 당신의 마지막 눈동자를 떠올렸죠   나는 당신과의 거리를 사랑한 것이라고 잔느* 처럼 사라진 눈동자가 꾸는 꿈이라고 밤기차 유리창에 악착같이 달라붙은 사랑 어디까지 따라 왔을까요?   이제 당신의 눈동자에 불사조를 그려 넣고 싶어 불에 타다 만 비둘기는 니그로 조각 같아요   * 화가 모딜리아니의 아내.모딜리아니가 죽자 임신한 몸으로 투신했다    -시집 그믐달 마돈나에서   아주 심한 자물쇠   ​    위상진 ​ ​ 내 이름은 스파이, 내 이름은 바람 여러 개 이름으로 온몸에 자물쇠를 채워두었지   나를 통과한 검은 역광들,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 무엇인 갑옷 속 눈물이었지. 얼룩말처럼 달리고 달리던 청동색 먼지를 뒤집어쓴 원판들              380달러에 경매되었다지. 15만 통의 필름 그 얼룩말의 발굽에 붙어있는 겹눈들, 부재중인 내가 현존하는 전시회, 예지몽도 없이 빛의 제국으로 입국한 건가?   아주 심한 자물쇠를 채워둔 단단한 성채(城砦)였는데, 흔들리며 덜컹거리며 수 만 번 열었다 닫았지. 반도 네온의 노란 슬픔을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묶여있는 개의 눈빛, 죽은 줄 모르고 귀부인 목에 감겨있는 여우의 말간 눈   오려낸 시간에 방아쇠를 당겨버린   다친 인형을 뒤지던 내가 피사체가 된 건가. 휘발한 자국을 가만 내버려 두기를   파. 벽. 돌.처럼 떠 있는 구름 불타는 이마 위에 쏟아진다. 수상한 스파이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   벤치에 앉아있다. 까마득히 날아가는 새떼 허공은 다시 아물고. 혼자 듣던 아침의 새소리는 이제 그만   수요일에 도착한다던 장미는 몇 번의 수요일이 지나가고   카메라에 칼처럼 꽂혀있다. 섬광처럼 보이는 나만 나에게 호명하는, 비비안 마이어라고 해       *비비안 마이어(1926~2009): 뉴욕 출생. 유모라는 직업을 가졌던 여자. 존 멀루프가 15만 통의 사진을 경매소에서 사들여 전시회를 열었다. 생전에 한 점도 공개한 적이 없는 비비안은 전시회를 통해 천재 사진작가로 호평받았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월호 발표 조명등 밖으로     위상진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출입구 천장에 붙어 있는 죽은 시계 나는 그에게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거지처럼 드라이아이스는 낮게 깔리며 내 발끝으로 들어온다 누군가 흘리고 간 이력서 같은 진주목걸이 바닥을 굴러다닌다   나는 어두운 대기실에 앉아 커튼 사이로 무대를 엿 본다   언 생수통이 깨지듯 얼굴 위로 빛이 쏟아진다 꽃가루를 수정하는 벌새들의 날개 짓 같은 빛 나는 커튼의 한쪽 끝으로 몸을 말고 싶다 유랑서커스단이 천막을 걷어내듯   교회 담벼락 옆엔 흐르다 만 전선줄이 깨진 조명등 밖으로 나와 있다 어디서 급하게 창문 닫는 소리   내 발밑에 내리는 질산 같은 눈 길 끝에는 보이지 않는 커튼이 내려져 있다 눈은 흰색을 지우고 어둠을 부식 시킨다 그것은 말랑한 벽이었다 한 발만 내디디면 무대 밖이다       8분     갑자기 화면이 뚝 끊어졌다 나는 소리만 들리는 영화관에 앉아 비어있는 화면을 마주 한다 눈을 뜨고 있는 눈 먼 자의 시간   이미 읽어버린 영화전단지를 접었다펼쳤다 했지 어둔 화면은 소리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줬다   잃어버린 내 망사장갑 한 짝을 내밀며 눈을 맞추지 않던 눈 나를 위해 연주하던 기타 위의 긴 손톱 소리만 들리는 70년대식 사랑은 여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화면 저 너머 내가 들여다보기를 거부한 훔친 물감 같은 내안의 소리 지하 기도소의 돌이끼같이 번식되는 시간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영사기는 계속 돌아간다   양철 지붕 위의 빗소리로 가득한 극장 박쥐처럼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파지를 태운 재 같은 어둠의 주름을 밀치고 불이 들어왔다   복원되지 못한 화면은 필름 세척자의 이름과 함께 흘러내렸다 잃어버린 8분을 집행유예로 남겨둔 채       가방 속의 탁상시계     저녁은 고해신부의 귀처럼 비밀을 향해 자라기 시작했다   너는 작은 보폭으로 한 걸음 나와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울다 들어갔다 나는 오늘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비극과 희극이 뒤섞인 연극을 보고 나는 맛없는 국수를 먹는다 국수집 창으로 시침처럼 달라붙는 빗물 나는 검은 유리창에서 이름을 지운다   어떻게 나를 전환할 수 있을까? 수십 개의 소리를 가지고 팩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목록 중에 내가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무엇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한 듯 건너뛰고 싶은 생일날 너무 늦게 도착한 축하 메시지   만화경의 색종이 무늬가 사라진 후에도 새로운 무늬를 기다리던 시간은 탁상시계처럼 가방 속으로 기어들어갔지   나의 가방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내 몸의 태엽을 풀어놓고 나는 권태로운 생일을 관리한다   지하철 입구 젖은 양동이에 담겨 나이 수대로 계산되는 꽃송이처럼 나는 국수를 세며 먹는다   혼자 듣는 뻐꾸기 소리는 저녁과 함께 사라졌다 등을 보이지 않는 소리의 끝을 따라 나는 거울 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끊기지 않는 탯줄 위상진    발등 뼈가 아프다. 네 생일이 오나 보다. 산후조리할 때 바람 쐬지 말랬는데 그만 찬물을 발등에 부어버렸다. 너는 이 세상에 이 견딜만한 아픔으로 발등에 왔다. 시(詩)도 아이가 내게 오듯 그렇게 왔다. 끊기지 않는 탯줄 해마다 길어진다.     바다로 내리는 잠 위상진   그는 밤마다 부적을 따라 나선다 스틸녹스 두 알을 입에 물고 가수면의 바다로 잠겨든다 더 이상 지느러미를 흔들 수 없을 때까지 잉크처럼 풀어지며 해저로 가라앉는다   암청색 바닷물이 이마 위로 흘러가고 형광빛을 내는 몸은 물고기 알을 낳는다 내리지 않는 잠은 심해어 울음소리를 낸다   그때 앞집 여자가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소리 열쇠 구멍으로 머리를 밀어넣는지 덜그럭거린다 어딘가로 핸드폰을 눌러대는 소리   밤의 소리들이 달팽이관에서 비틀거린다 어디서 잠의 노래가 들려오나 남아있는 비상약 한 알을 삼키고 잠은 더 깊은 어둠으로 흘러드는데   앞집 여자는 밤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 *스틸녹스 : 수면제     길 혹은 고양이 위상진   1. 종로 3가 지하도 낯선 음악이 울리고 있다 안데스를 넘어 온 차고 맑은 선율, 까무잡잡한 얼굴에 치렁하게 묶은 머리, 키 작은 악사들이 물안개처럼 피워내는 미소, 지하로 날아든 십일월의 철새 같은 엘 콘드르 파사   쓸쓸하고 달콤한 팬플룻 소리, 하늘로 울리던 의식 같은 음악은 오후 세 시의 지하 사막을 건너간다 안데스 계곡을 감아 돌던 바람은 갈 데 없는 노인들을 덮어주고 철새는 날아가고   2. 북경 천지극장, 사내아이가 반 쯤 늘어진 줄 위를 간다 아이가 밟고 가는 줄이 흔들리며 절벽으로 떨어진다 몸을 돌려 그네를 탄다 숨죽여 증발하고 싶었던 울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줄 위에 얹혔네 적막한 그림자가 뛰어내리며 밀려난다   3. 눈 내린 길 위에 발자국이 젖어들고 있다 고양이 한 마리, 납작한 배에 그림자를 달고 검은 비닐봉지를 따라간다 고양이 발에 찍힌 길이 파랗게 돋아난다   -------------------- *엘 콘도르 파사 : 페루의 민속음악 ‘철새는 날아가고’로 우리나라에 아려졌고, 사이먼 가펑컬이 불러 유명해진 곡. *산뽀냐 : 팬플룻 같이 대나무관을 나란히 묶어 앞과 뒤의 단이 지그재그 모양을 한 안데스 전통악기.         수족관 위상진   불꺼진 수족관의 물고기는 거기가 바다인 줄 알까 저녁 어스름 사이에서 별이 가물거릴 때 비늘이 해진 입을 벙긋거리며 빛을 따라 옮겨 다니네   시간은 글씨가 사라진 양피지 같아 어둠은 지워진 문장을 다시 쓰게 하네 물고기의 흐린 눈은 물소리를 찾아가고 나는 더듬거리며 문을 그리네   창가에 걸린 마그리트 그림 속의 여신은 하얀 대리석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기억을 쏟아낸다 바다는 수평선을 끌어내려 구름을 가둬놓고   그 안에 흐르던 물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밤의 유리창은 꺼진 티브이처럼 캄캄해 검은 거울 속에 나는 담겨 있네 밤이 기억을 찍어 전송하는 동안 블라인드를 내리네     물렁물렁한 방 위상진   해가 들지 않는 방이 있다 해질녘 잠깐 문 앞까지 빛이 왔다 가기도 한다 방문 앞에는 보이지 않는 금줄이 쳐져 있는 듯 쉽게 다가갈 수도 없다   태아처럼 손가락을 빨며 너는 방에 담겨 있다 그때 스탠드 불은 펼쳐진 책을 더듬어 보기도 했을까    63빌딩 전시실, 이집트에서 온 람세스 2세는 삼천이백육십 년 째 자고 있다 북쪽으로 문을 낸 피라미드처럼 검고 깊은 방, 다시 깨어나기 위해 외우는 사자의 서, 관 속에서도 왕은 파피루스에 인장을 찍고 있겠지 람세스의 심장은 방부제로 가벼워져 있고 신이 되고 싶었던 시간은 물렁물렁해져 있다 왕은 그 시간에 울기도 했으리라 람세스의 가슴에 붙어있던 쇠똥구리는 날개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중일까?   저물녘, 조금 늙어버린 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머리맡에 구겨져 있고 너의 몸에서는 비늘이 떨어져 내렸다 멈춰버린 시계를 더듬으며 너는 혼자 중얼거렸다   창 밖에는 황사가 내리는지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초저녁 먼지 냄새는 굴목으로 번지고 길은 두루마리처럼 말리며 그림자를 삼켰다   너는 블라인드를 내린다 방은 다시 피라미드처럼 그윽해진다     방향감각이 없으니 위상진   참 딱한 일인 게, 나는 방향감각이 없다. 길 떠날 일 생기면 일단 걱정이다. 아드은 출발해서, 도착 때까지 전화로 길 안내를 해. 거기다 남편까지, 나 같은 사람 어디 인신매매단에라도 끌려가면 길 몰라 도망치는 일도 쉽진 않을 거란다. 아들은 이미 서너 살 때부터 눈치 챈 일이다. “엄마 이리 가는 것 맞아?” 다짐에 다짐, 어쩌다 남의 차라도 타면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요?” 등줄기 땀이 나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살아가는 일도 그랬다. 어리둥절, 허둥대고만 있다. 늘 나는…   두 개의 시선 위상진 르네 마그리트, 그는 그림에 문을 달아 주고 나가고 싶었을까 그의 언어가 그림으로 들어갔네 유리창을 열고 나간 바다가 새의 날개를 달고 있어요 그곳으로 날아든 새는 시간을 놓아 버렸네 창 안의 바다는 우울하게 저물어가고 숨겨진 그림은 보이지 않는 섬이 되는 걸까 밤의 공중전화 부스를 열었어요 그곳에 갇혀있는 어둠은 또 하나의 그늘이 되기도 하나요 부스에 담겨있던 말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네요 누군가 누르다 간 번호판 움푹한 곳에 지문이 파랗게 돋아나고 있어요 자정에 멈춘 시계에선 여전히 시간이 새어나오고 머뭇거리던 안개가 부스를 섬처럼 둘러싸요 - 2007. 겨울호 물렁물렁한 방 위상진  해가 들지 않는 방이 있다 해질녘 잠깐 문 앞까지 빛이 왔다 가기도한다 방문 앞에는 보이지 않는 금줄이 쳐져 있는 듯 쉽게 다가갈 수 없다   태아처럼 손가락을 빨며 너는 방에 담겨 있다 그때 스탠드 불은 펼쳐진 책을 더듬어 보기도 했을까?   63빌딩 전시실, 이집트에서 온 람세스 2세는 삼천이백육십 년째 자고 있다 북쪽으로 문을 낸 피라미드처럼 검고 깊은 방, 다시 깨어나기 위해 외우는 사자의 서, 관 속에서도 왕은 파피루스에 인장을 찍고 있겠지 람세스의 심장은 방부제로 가벼워져 있고 신이 되고 싶었던 시간은 물렁물렁해져 있다 왕은 그 시간에 울기 도 했으리라 람세스의 가슴에 붙어 있던 쇠똥구리는 날개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중일까?   저물녘, 조금 늙어버린 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머리맡에 구겨져 있고 너의 몸에서는 비늘이 떨어져 내렸다 멈춰버린 시계를 더듬으며 너는 혼자 중얼거렸다   창 밖에는 황사가 내리는지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초저녁 먼지 냄새는 골목으로 번지고 길은 두루마리처럼 말리며 그림자를 삼켰다   너는 블라인드를 내린다 방은 다시 피라미드처럼 그윽해진다     게재지: 2008년 11월 시문학 발표 이름: 위상진 등단:1993년 시문학       출처: 계간 시향 원문보기 글쓴이: 글나무   무성의 입술   위상진   석고상은 붉은 입술로 일렁거리는 말을 한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무 말이나 좀’   잠에서 깨어나자 그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진다 회색 피가 흘러나오는 제라늄 화분 그는 입술을 더듬어 본다 ‘좋은 말을 해본지가 오래 되었어’   낮에도 밤은 여러 번 찾아왔고 휘어지는 길을 따라 아침은 사라졌다 간호사들은 오늘 죽은 사람의 생일 케잌을 우물거린다 ‘나는 내 맘에 들고 싶어’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올라가는 간판 창밖의 검은 태양은 바닷물 색을 울컥 울컥 쏟아내고 간판이 있던 자리 공중에 걸린 둥지 하나 어린 새의 솜털이 묻어 있다   구름그림자를 덮어쓴 간판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는다 ‘내가 벗어둔 집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   그는 유리창 위에 입술을 벙긋거린다 한 단어 한 단어 말의 입김이 번진다       필자가「무성의 입술」을 논평하는 이유는, 필자가 주장한 시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시론은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한 행에서 단어와 단어의 낯설게하기, 어절과 어절의 낯설게하기, 제목의 낯설게하기’를 완벽하게 실현하여, 자기 이름의 상표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필자의 시론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시를 쓸 때 ‘제목, 단어, 표현, 비유’에서 닮은 표현을 피하기 위한 고민을 필자도 한다. 누군가의 시에서 읽은 것을 ‘무의식적 표절’을 할까 두려워 새로운 ‘표현’을 버리기도 한다. 위상진 시인은 그럴 때 ‘인터넷 검색’을 하여 검증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위상진 시인의 시 특징은 사동보다는 피동적 표현기법이 주조를 이룬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는 그 경향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6개의 연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며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제목의 낯설게하기, 행 안에서의 단어의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그믐달 마돈나』에 실린 다른 작품들처럼, ‘한 연 내에 여러 개의 파생된 보조관념’이 등장한다. 부채살처럼 여러 개의 보조관념이 마디마디 퍼져 있다. 은 1980년대부터 양준호가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을 도용한 ‘단어 흩뿌리기’ 표현기법을 구사하여 ‘행과 행’,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를 이미 보여주었다. 그러나 위상진은 ‘객관화’와 ‘재해석’ 특징을 추가하였다. 또한 표현주의를 추구하지만, 감각적 미의식과 진정성이 엿보인다. 아래의 대사는 거짓이 아닌 참이다. 작가의 목소리든, 화자의 생각이든, 3인칭 타자의 무의식을 차용하였든, 진정성이 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무 말이나 좀’(1연) ‘좋은 말을 해본지가 오래 되었어’(2연) ‘나는 내 맘에 들고 싶어’(3연) ‘내가 벗어둔 집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5연)   자동기술기법으로 연과 연을 단절하고, 흐름을 끊어주지만, 객관화에 집중하였다. 또한 ‘제목’과 ‘마지막 끝연’의 ‘끝행’에서는 반드시 객관화를 실현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지나치게 집중한 ‘낯설게하기’가 산만하거나 복잡하거나, 통일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의적, 다의적 ‘표현주의’ 기법은 새로운 ‘심미적 미의식’을 만들고 있음에 주목한다.   -묻어버린 시계/위상진-     박스를 열자 유화 물감은 복수심처럼 굳어 있었다 파레트 위에서 나이프 끝에서 그 방에 들어찬 익사체 같은 액자들 그림 속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대답들 사이 반복되는 푸른 망점들 사이 새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유병에 걸린 듯 사원을 지나가는 메아리가 기억 속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그린 푸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림을 그리던 손의 리듬은 어떻게 다르게 방향을 잡았을까? 태엽을 풀어 흙속에 묻어버린 시계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빈 잉크통을 들고/위상진-     잉크 충전 가게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프린터 수리 센터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고양이는 내 방문을 열심히 긁다가 문 앞에 오줌을 싸버렸다 닫힌 문들에 대한 기억은 본능에 각인 된 두려움일까? 엊그제 화가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신문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검은 네모 칸에 담아두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미래에 경매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가격이 매겨질 것이다 또 변덕 같은 비밀이 만들어지리라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사람들 망상의 끝에서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셔터가 내려진 문을 향해 물감풍선을 집어던지고 싶다 물감은 주목 받지 못한 표현주의자의 얼룩처럼 흘러내릴 것이다 문을 닫은 그들은 문을 빠져나간 걸까? 바깥에 의해 갇혀버린 걸까?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고 빈 잉크통만 어둠과 상관없이 남아 있다   -초승달/위상진-     고양이가 엄지발가락을 깨물어 너를 깨운다 끈적한 침을 발가락에 묻히고 지독한 근시로 너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불 위에 떨어져 있는 검자주색 핏물이 든 발톱 고양이는 발톱 안에 혈관이 있어 무라노 섬에서 그가 보낸 초승달 모양 목걸이가 도착했다 밤하늘을 오려낸 오색 금빛 별들 우린 너무 멀리 가까이 있어 그믐달을 지난 초승달처럼 목걸이는 너에게 예약되어 있었던 걸까?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든다 고양이는 코를 킁킁거리며 발톱 모양의 목걸이를 건드려본다 무라노 섬에 유배된 유리공의 손길은 너의 목에서 흔들리고 별 모양의 고양이 오줌에서 달의 발톱이 돋아나는 소리 창가에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 있다   -초현실주의/위상진-     아무래도 코가 비뚤게 됐나봐 이 돌파리 의사! 다시 수술을 해 달라 해야지 거울 속의 여자는 분필 같은 코뼈를 바로 잡고 있다 한 밤중 쇼윈도의 마네킹은 어긋나버린 몸통으로 거울을 왜곡하고 있다 누군가를 닮고 싶은 이들은 눈 코 입을 바꿔버렸다 창백한 얼굴은 어긋나지 않으려고 어긋나고 있다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죽은 햄스터에 넣을 밧데리를 사러 갔다 CC TV 속 아이들은 성급하게 어른들을 모방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사랑하고 헤어진 연인은 욕설을 퍼붓는다 참 멋진 놈이었는데, 나쁜 놈!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인 채 사람들의 얼굴은 해면처럼 녹아내렸다 어른들은 자기 안의 아이조차 달랠 줄 몰랐다 무성한 비밀이 꿈같이 흘러 다닐 때 우산살처럼 부러진 말들은 화면 속에서 오래도록 펴지지 않았다   -무릎 위의 고양이처럼/위상진-     거기는 흐리고 게으른 비가 내리는 나라 해가 나면 너는 공원으로 간다 고 말했지 너의 낮은 나의 밤이야 네가 두고 간 고양이가 나의 발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기는 네가 없는 영하의 나라 손가락 끝이 잘린 장갑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8시간의 시차를 가로질러 두 개의 엇갈리는 태양은 안부를 묻는다 길들여진 말의 그림자가 수화기에서 잘게 쪼개질 때 털을 핥다가 반쯤 혀를 내민 고양이는 내 무릎 위에서 멀고 먼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양이의 귀는 한 쪽으로 쏠려있고 말해지지 않은 약속은 유예된 새벽을 건져 올렸다 더 기다리는 사람과 늘 기다리는 사람의 거리는 누가 잴 수 있을까? 청색을 모아들인 플루토의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바다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예언자의 칼처럼   누군가가 두드린다 위상진   바람은 여러 개로 늘어났다 무의도 바닷가의 돌탑 기원은 땅 속으로 묻히지 못하고 나는 돌의 심장 위에 작은 돌을 얹었다   어제 벽시계가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 폭발물처럼 산산조각 나는 유리컵 놀란 고양이는 총알처럼 튀어 올랐다   시계가 숨을 쉬지 않았다 내 손이 닿으면 바늘이 가고 손을 놓으면 꼼짝하지 않았다   고양이를 안았을 때 심장은 고장 난 시계 침처럼 쿵쾅거렸다 고양이의 심장이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수리점에 맡긴 벽시계는 부속을 전부 갈아야 했다 나는 시간 밖으로 추방당한 국외자   나의 시간은 움직이지 않고 시계가 없는 벽 위에 덩그러니 박혀있는 대못   푸르스름한 불안은 시계가 차지했던 벽으로 번져갔다   작은 돌은 그날 나의 별자리에 닿지 못했다 위상진   경북 대구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미술교육과 졸업 및 경희대학교 대학원 수료  1993년 11월 월간 ≪시문학≫지에  시 , , , 등이 당선되어 등단.  광명문학 신인상 수상  前. 미술교사로 재직, 구름동인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광명시지부 사무국장, 시문학회 간사  現. 한국문인협회 광명시 지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시문학사  2001 고체의 회화 손미   Ⅰ 사람은 액체다. 70%의 물로 구성되어있다는 과학적인 근거도 그렇거니와 작은 새 소리에 기분이 좋아지고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보면 몸속의 물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기분 좋은 칭찬 한마디에 날아갈 듯 가벼워지기도 하고 사나운 말 한마디에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감정은 물을 틀에 붓는 것처럼 변한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불안과 공포까지 틀에 따라 우리는 다른 감정을 안고 산다. 이렇게 요동치는 액체가 되어 날마다 다른 결정을 보이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특히 시인은 더욱 다양한 감정의 지배 아래 그 어떤 불순물이 첨가되지 않은 가장 맑은 액체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 물컹한 액체가 부르는 고체의 노래 다섯 편이 있다. 위상진 시인의 「묻어버린 시계」외 4편을 보면 화자의 “복수심처럼 굳은” 테두리를 목격할 수 있다. 화자는 자꾸만 부서지는 손톱으로 굳게 닫혀 있던 뚜껑을 열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딱딱한 마음이 들어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순간, 시인은 고체의 회화 展을 열고 독자를 초대한다.   박스를 열자 유화 물감은 복수심처럼 굳어 있었다 파레트 위에서 나이프 끝에서 그 방에 들어찬 익사체 같은 액자들 그림 속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대답들 사이 반복되는 푸른 망점들 사이 새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유병에 걸린 듯 사원을 지나가는 메아리가 기억 속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그린 푸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림을 그리던 손의 리듬은 어떻게 다르게 방향을 잡았을까? 태엽을 풀어 흙속에 묻어버린 시계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 위상진 「묻어버린 시계」 전문   그림 속에서 발견한 “굳어버린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한다. 감정을 잃은 미라의 상태. 살과 피를 잃은 대상은 어쩌면 죽은 것일지 모르지만 시인은 대상을 장례(葬禮)하지 않고 몸을 뒤져 심장을 찾는다. 그러나 굳은 대상을 끌어안고 속삭이는 것은 “세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딱딱할 뿐이다. 결국 깨지는 건 벽이 아니라 새의 살점이겠지만 대상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 붉고 뜨겁게 열릴 테지만 화자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한때 생생하고 말캉하게 살아있었던 그것. 박제된 동물처럼 형체는 그대로지만 딱딱하고 차갑게 굳은 대상을 화자는 바라보고 기다린다. 그럼에도 화자는 대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시간의 잘못이라 정의한다. 물감이 굳는 것도 마음이 굳는 것도 시간 탓이다. 화자는 태엽을 풀어 시계를 묻어보지만 이런 눈가림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마음을 만류할 수 없다.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땅 밑에 두고 화자는 다시 뚜껑을 열고 굳은 물감을 발견하고 그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굳은 마음이 용해되길 기다리며.   Ⅱ 엊그제 화가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신문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검은 네모 칸에 담아두었다 …중략…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사람들 망상의 끝에서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 「빈 잉크통을 들고」 부분 화가 두 사람이 실종됐거나 죽었지만 신문에서조차 그들은 “검은 네모 칸에” 갇혀 있다. 죽은 사람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상황에서도 화자는 입구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죽어서도 네모 안에 갇혀야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고체 되기를 거부한다. 어떻게 지켜온 마음인데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다” 화자는 그런 세상을 향해 “물감풍선을 집어던지”며 왜 벌써 포기하느냐. 왜 머무르지 않느냐며 소리치고 싶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화자는 빈 잉크통 같은 빈 우물 속으로 두레를 집어넣는 것이다. 공허와 어둠만 길어 올리겠지만 아직 화자는 굳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운동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우린 너무 멀리 가까이 있어 그믐달을 지난 초승달처럼 목걸이는 너에게 예약되어 있었던 걸까?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든다 …중략… 별 모양의 고양이 오줌에서 달의 발톱이 돋아나는 소리 창가에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있다 - 「초승달」부분 그는 언제나 부재중이거나 부동이 없다. 벽, 굳은 물감, 굳은 식빵처럼 요동도 없이 딱딱하기만 하다. 그의 마음은 잘라내도 아프지 않은 손톱이거나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들어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고체이다. 어쩌면 화자는 너무 가까이에 있어 무뎌지고 무거워진 대상을 굳은 대상으로 선정해 놓고 관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도망갈 자세로 “창가에서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있”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으리라. 한 밤 중 쇼윈도의 마네킹은 어긋나버린 몸통으로 거울을 왜곡하고 있다 …중략…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죽은 햄스터에 넣을 밧데리를 사러 갔다 CC TV 속 아이들은 성급하게 어른들을 모방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인 채 사람들의 얼굴은 해면처럼 녹아내렸다 어른들은 자기 안의 아이조차 달랠 줄을 몰랐다 무성한 비밀이 꿈 같이 흘러 다닐 때 우산살처럼 부러진 말들은 화면 속에서 오래도록 퍼지지 않았다 - 「초현실주의」부분 「초현실주의」에서 화자는 다른 시선을 부여한다. 화자가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딱딱한 대상은 어쩌면 “딱딱한 식빵”이 아닌 “마네킹” 같은 자기 자신일 지도 모른다. 화자의 속에서 굳어버린 아이 같은 내 자신, 그래서 모두가 문을 닫고 폐업을 하고 굳어버리는 이 상황에서도 나는 굳지 않고 끝없이 온기를 유지하려 애쓴 것이다. 가짜와 진짜가 뒤섞인 채 의식은 굳어가고 생각도 굳어가고 진실이 어느 것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 화자는 왜곡되지 않은 진짜를 바라보고자 눈을 부릅뜬다. 인터넷 속 공간과 CCTV의 공간, 한번 걸리진 이곳에서 가짜들은 더욱 강하게 방류된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가식들 속에, 나의 가짜 말들도 떠다니고 있다. 이쯤에서 화자에겐 뾰족하고 독한 마음이 필요해 보인다. 이 고체들을, 이 가식들을 부숴버릴 단단한 이빨 말이다.   Ⅲ 거기는 흐리고 게으른 비가 내리는 나라 해가 나면 너는 공원으로 간다 고 말했지 너의 낮은 나의 밤이야 네가 두고 간 고양이가 나의 발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기는 네가 없는 영하의 나라 손가락 끝이 잘린 장갑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8시간의 사치를 가로질러 두 개의 엇갈리는 태양은 안부를 묻는다 길들여진 말의 그림자가 수화기에서 잘게 쪼개질 때 털을 핥다가 반쯤 혀를 내민 고양이는 내 무릎 위에서 멀고 먼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양이의 귀는 한쪽으로 쏠려있고 말해지지 않은 약속은 유예된 새벽을 건져 올렸다 더 기다리는 사람과 늘 기다리는 사람의 거리는 누가 잴 수 있을가? 청색을 모아들인 플루토의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바다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예언자의 칼처럼 - 「무릎 위의 고양이처럼」 전문   그래, 이제 단칼이 필요하다. 화자의 결단이 필요할 때다. 이 고체들을 부숴버릴 것인가. 형틀에 부어도 모양을 바꾸지 않는 이 고집들이 그녀 안에서 어느덧 단단해지고 있다. 껍질을 딱딱하게 하는 것은 방어한다는 것이다. “예언자의 칼”로 화자는 이 방어자들을 깨부술지 더 단단한 모양으로 깎을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다음 모양이 궁금하다. 화자는 이 고체들과 다른 이야기를 만들며 계속해서 흥미로운 노래를 불러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계속해서 고체의 회화를 그려나갈 것이고 회화는 굳고 녹으며 독자를 대면할 것이다. 그녀의 전시회엔 테레핀 냄새가 진동하고 한쪽 벽에선 그 고집스런 회화를 뚫고 나가려는 머리 터진 새들도 보이겠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녀에겐 굳어버린 유리에 진심을 부으며 고체의 회화가 뚝뚝, 떨어지길 기다릴 고집이 있으니 말이다. 손미 2009년 『문학사상』시 부문 등단  
135    김현승 시모음 댓글:  조회:626  추천:0  2022-10-10
김현승 시모음   김현승 시인 소개   눈물  아버지의 마음 사월 내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 가을 가을의 기도 새해 인사  이별(離別)에게 파도  희망  시의 맛  창 절대 고독  지각(知覺) -행복의 얼굴- 슬픔 플라타너스 겨울 까마귀   ~~~~~~~~~~~~~   김현승 시인 소개   913 광주 출생 1934 숭실전문 재학중 교지에 투고했던 시 를 양주동의 천거로 동아일보에 발표 1951 광주 조선문리대 졸업 1975 별세 시집으로 , , 등   ~~~~~~~~~~~~~   눈물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바깥은 요란해도 아버지는 어린것들에게는 울타리가 된다. 양심을 지키라고 낮은 음성으로 가르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눈물이 절반이다. 시집 / 아버지 울아버지   ~~~~~~~~~~   사월                        플라타너스의 순들도 아직 어린 염소의 뿔처럼 돋아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시는 그들 첨탑 안에 든 예언의 종을 울려 지금 파종의 시간을 아뢰어준다 깊은 상처에 잠겼던 골짜기들도 이제 그 낡고 허연 붕대를 풀어버린 지 오래이다 시간은 다시 황금의 빛을 얻고 의혹의 안개는 한동안 우리들의 불안한 거리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검은 연돌(煙突)들은 떼어다 망각의 창고 속에 넣어버리고 유순한 남풍을 불러다 밤새도록 어린 수선들의 쳐든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개구리의 숨통도  지금쯤은 어느 땅 밑에서 불룩거릴게다 추억도 절반, 희망도 절반이어서 사월은 언제나 어설프지만 먼 북녘에까지 해동의 기적이 울리이면 또 다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달은 어딘가 미신(迷信)의 달   ~~~~~~~~~~~~~~~   내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 내 마음은 마른 나무가지 주여 나의 머리 위으로 산까마귀 울음을 호올로 날려 주소서. 내 마음은 마른 나무가지 주여 저 부리 고운 새새끼들과 창공에 성실하던 그의 어미 그의 잎사귀들도 나의 발부리에 떨여져 바람부는 날은 가랑잎이 되게 하소서. 내마음은 마른 나무가지 주여 나의 육체는 이미 저물었나이다! 사라지는 먼뎃 종소리를 듣게 하소서 마지막 남은 빛을 공중에 흩으시고 어둠 속에 나의 귀를 눈뜨게 하소서. 내 마음은 마른 나무가지 주여 빛은 죽고 밤이 되었나이다! 당신께서 내게 남기신 이 모진 두팔의 형상을 벌려 바람 속에 그러나 바람 속에 나의 각곡한 포옹을 두루 찾게 하소서.   ~~~~~~~~~~~~~~   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새해 인사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 굴러라. 건너뛰듯 건너뛰듯 오늘과 또 내일의 사이를 뛰어라. 새 옷 입고 아니, 헌 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 굴러라 발 굴러라 춤 추어라 춤 추어라.   ~~~~~~~~~~~~~~~~~   이별(離別)에게 지우심으로 지우심으로 그 얼굴 아로새겨 놓으실 줄이야 흩으심으로 꽃잎처럼 우리 흩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실 줄이야 비우심으로 비우심으로 비인 도가니 나의 마음을 울리실 줄이야 사라져 오오, 永遠을 세우실 줄이야 어둠 속에 어둠 속에 寶石들의 光彩를 길이 담아 두시는 밤과 같은 당신은, 오오, 누구이오니까!   ~~~~~~~~~~~~   파도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이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   희망  나의 희망, 어두운 땅 속에 묻히면 황금이 되어 불 같은 손을 기다리고, 너의 희망, 깜깜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 나의 희망, 아득한 바다에 뜨면 수평선의 기적이 되어 먼 나라를 저어 가고, 너의 희망, 나에게 가까이 오면 나의 사랑으로 맞아 뜨거운 입술이 된다. 빵 없는 땅에서도 배고프지 않은, 물 없는 바다에서도 목마르지 않은 우리의 희망! 온 세상에 불이 꺼져 캄캄할 때에도, 내가 찾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 끝으로 희망에서 불을 붙여 온다.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때에도 우리의 무덤마저 빼앗을 때에도 우릴 빼앗을 수 없는 우리의 희망! 우리에게 한 번 주어 버린 것을 오오, 우리의 신(神)도 뉘우치고 있을 너와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   시의 맛  멋진 날들을 놓아두고 시를 쓴다. 고궁(古宮)엔 벗꽃, 그늘엔 괴인 술, 멋진 날들을 그대로 두고 시를 쓴다. 내가 시를 쓸 때 이 땅은 나의 작은 섬, 별들은 오히려 큰 나라. 멋진 약속을 깨뜨리고 시를 쓴다. 종아리가 곧은 나의 사람을 태평로 2가 프라스틱 지붕 아래서 온종일 기다리게 두고, 나는 호올로 시를쓴다. 아무도 모를 마음의 빈 들 허물어진 돌가에 앉아, 썪은 모과 껍질에다 코라도 부비며 내가 시를 쓸 때, 나는 세계의 집 잃은 아이 나는 이 세상의 참된 어버이. 내가 시를 쓸 땐 멋진 너희들의 사랑엔 강원도풍(江原道風)의 어둔 눈이 나리고, 내 영혼의 벗들인 말들은 까아만 비로도 방석에 누운 아프리카산(産) 최근의 보석처럼 눈을 뜬다. 빛나는 눈을 뜬다.   ~~~~~~~~~~~~~~~   창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 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   절대 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詩)는.   ~~~~~~~~~~~~~~~   지각(知覺) -행복의 얼굴- 김현승(金顯承)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여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   슬픔 슬픔은 나를 어리게 한다. 슬픔은 죄를 모른다 사랑하는 시간보다도 오히려 슬픔은 내가 나를 안는다 아무도 개입할 수 없다 슬픔은 나를 목욕시켜 준다 나를 다시 한번 깨끗하게 한다 슬픈 눈에는 그 영혼을 비추인다 먼 나라의 말소리도 들리듯이...... 슬픔 안에 있으면 나는 바르다 믿음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르지만 슬픔이 오고 나면 풀밭과 같이 부푸는 어딘가 나의 영혼......   ~~~~~~~~~~~~~~~~~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窓)이 열린 길이다.   ~~~~~~~~~~~~~~~   겨울 까마귀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 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와질 수도 있는, 言語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高貴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祖上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十二月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責任에 뿌리 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물고 있는 소리로, 까아윽-- 깍 ~~~~~~~~~~~~~~
134    기형도 시 모음 댓글:  조회:1349  추천:0  2022-10-10
기형도 시 모음   빈집 소리의 뼈 밤눈 노인들 물 속의 사막 숲으로 된 성벽 봄날은 간다 꽃 病 나무공 가는 비 온다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388 종점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아이야 어디서 너는 기억할 만한 지나침 오후 4시의 희망 질투는 나의 힘 잎 속의 검은 잎 엄마걱정 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통로)를 비집고 들어갔다 바람의 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대학시절 새벽이 오는 方法 겨울, 우리들의 都市 정거장에서의 충고 가을에 허수아비-누가 빈들을 지키는가 껍질 쥐불놀이 여행자 나리 나리 개나리 기억할 만한 지나침 비가2 -붉은 달 종이달 폭풍의 언덕 雨中의 나이 12개의 책장안에 머물러있는 시인의 영혼 그날 진눈깨비 바람은 그대 쪽으로 추억에 대한 경멸 포도밭 묘지 겨울 눈(雪) 나무 숲 안개 바다에 버리고 오다 오래된 書籍 어느 푸른 저녁 거리에서 약속 1-3 : 희망에 지칠때까지 봄날은 간다 그집앞 정거장에서의 충고 작가의 말 詩作메모 (1988.11), 희망 참회록 中에서 기형도 추모시 기형도님 연혁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中에서-김현 기억할 만한 질주, 혹은 용기- 장정일 기형도,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 성석제 기형도 전집/'머물고 떠남' 못내 아쉬워… - 한겨레신문 (1999/03/02) 佛전문지 '포에지' 여름호 한국시만으로 특집 제작 - 중앙일보 (1999/08/24)   ~~~~~~~~~~~~~~~~~~~~~~~~~~~~~~~~~~~~~~~~~~~~~~~~~~~~~~~~~~~~~~~~~~~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소리의 뼈/기형도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고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ㅡ시집(문학과지성사) ~~~~~~~~~~~~~~~~~~~~~~~~~~~~~~~~~~~~~~~~~~~~~~~~~~~~~~~~~~~~~~~~~~~ 밤눈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 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 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 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 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 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 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 물 속의 사막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숫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 숲으로 된 성벽 저녁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숲으로 된 성벽 ~~~~~~~~~~~~~~~~~~~~~~~~~~~~~~~~~~~~~~~~~~~~~~~~ 봄날은 간다 /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는 몇 장 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 꽃 내 靈魂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앓는 그대 庭園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 病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나무공   가까이 가보니 소년은 작은 나무공을 들고 서 있다. 두 명의 취한 노동자들, 큰 소리로 노래부르며 비틀비틀 이봐,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죽어 있는 것뿐, 이젠 자네 소원대로 되었네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주위의 공기가 약간 흔들린다. 훨씬 독한 술이 있었더라면 좀더 슬펐을 텐데, 오오, 그에 관한 한 한치의 변화도 용서 못 해 소년이 내게 묻는다. 公園은 어두운 대기 속으로 조금씩 몸을 숨긴다. 그 사내는 무엇을 슬퍼하는 것일까요, 오래 앓던 가족 때문일까요 나의 이 작은 나무공 밖은 너무 어두워, 둥근 것은 참 단순하죠 나는 입을 열 수 없다. 말이 되는 순간, 어떠한 대답도 또 다른 질문이 된다. 네가 내 눈빛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차라리 저녁에 너를 만난 것을 감사하자. 어느 교회의 검고 은은한 종소리 행인들 호주머니 속의 명랑한 동전 소리 모든 젖은 정신을 꾸짖는 건조한 저녁에 대해 감사하자, 소년이여 저 초라한 街燈들을 바라보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대낮까지도 고정시키려 덤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이지. 나의 꿈은 위대한 律士, 모든 판례에 따라 이 세상을 재고 싶어요, 나는 매일같이 일기를 쓰죠 내가 아저씨만한 나이라면 이미 나는 법칙의 可祭 움직이면 안 돼, 나는 딱딱한 과자를 좋아해 이건 나무 소년은 공을 튕겨본다. 나무공은 가볍게 튀어오른다, 엄청나게 커지는 눈, 이건 뜻밖이야 그러나 소년이 놀라는 순간 나무공은 얘야, 벌써 얌전한 고양이처럼 한번 놀란 것에 더 이상 놀라면 안 돼 그건 이미 나무공이 아니니까 그 취한 사내들이 어디로 갔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던 소년도 재빨리 사라진다. 아저씨는 쓸모 없는 구름 같아요, 공원은 이미 완전한 어둠 한 개 둥근 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서로 다른, 수백 개 율동의 가능성으로 들려오는 이곳. 견고하게 솟아오르는, 소년이 버린 저 나무공. ~~~~~~~~~~~~~~~~~~~~~~~~~~~~~~~~~~~~~~~~~~~~~~~~~~~~~~~~~~~~~~~~~~~~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부르기 싫은 노래를 억지로 부르듯 黑人 가수의 노래가 천천히 탁자에는 시든 꽃 푸른 꽃 위에는 램프 어두웠다 벽면에 긴 팽이모자를 쓴 붉고 푸른 가면들이 춤추며 액자 때문은 아니었다 예감이라도 했던들 누군가 나를 귀찮게 했던들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나는 大學生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가끔씩 어떤 홀연한 계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全靑春이 한꺼번에 허물어져버린 것 같은 슬픔을 맛볼 때가 있듯이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쓰러졌다. ~~~~~~~~~~~~~~~~~~~~~~~~~~~~~~~~~~~~~~~~~~~~~~~~~~~~~~~~~~~~~~~~~~~~ 388종점   구겨진 불빛을 펴며 막차는 떠났다. 寂寞으로 무성해진 가슴 한켠 空地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는 몇 점 불씨 가만히 그 스위치를 끄고 있는 한 사내의 쓸쓸한 손놀림 ~~~~~~~~~~~~~~~~~~~~~~~~~~~~~~~~~~~~~~~~~~~~~~~~~~~~~~~~~~~~~~~~~~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있는가. 곧 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가라,어느덧 황혼이다 살아있음도 살아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 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 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 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 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 다. 기타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 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 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 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 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아이야 어디서 너는   아이야, 어디서 너는 온몸 가득 비[雨]를 적시고 왔느냐. 네 알몸 위로 수천의 江물이 흐른다. 찬 가슴팍 위로 저 世上을 向한 江이 흐른다.   갈밭을 헤치고 왔니. 네 머리카락에 걸린 하얀 갈꽃이 누운 채로 젖어 있다. 그 갈꽃 무너지는 西山을 아비는 네 몸만큼의 짠 빗물을 뿌리며 넘어갔더란다. 아이야 아비의 그 구름을 먹고 왔느냐.   호롱을 켜려무나. 뿌옇게 몰려오는 소나기를 가득 담고 어둠 속을 흐르는, 네 눈을 켜려무나. 하늘에 실노을이 西行하고 어른거리는 불빛은 꽃을 쫓는다.   닦아도닦아도 흐르는 꽃술[花酒] 같은 네 江물. 갈꽃은 붉게붉게 익어가는데, 아이야 네 눈 가득 아비가 젖어 있구나. ~~~~~~~~~~~~~~~~~~~~~~~~~~~~~~~~~~~~~~~~~~~~~~~~~~~~~~~~~~~~~~~~~~~~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오후 4시의 희망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간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 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 번 꽃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입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끔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 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詩集, 잎 속의 검은 잎 ~~~~~~~~~~~~~~~~~~~~~~~~~~~~~~~~~~~~~~~~~~~~~~~~~~~~~~~~~~~~~~~~~~~~ 엄마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통로)를 비집고 들어갔다 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통로)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겨울이다. 자네가 바라던 대로 하늘에는 온통 먹물처럼 꿈꾼 흔적뿐이다. 눈(雪)의 실밥이 흩어지는 空中(공중) 한가운데서 타다 만 휴지처럼 한 무더기 죽은 새(鳥)들이 떨어져 내리고 마을 한가운데에선 간혹씩 몇 발 처연한 총성이 울리었다 아무도 豫言(예언)하려 하지 않는 時間(시간)은 밤새 世上(세상)의 낮은 울타리를 타넘어 추운 벌판을 홀로 뒹굴다가 몽환의 빗질로 우리의 차가운 이마를 쓰다듬고 저 혼자 우리의 記憶(기억) 속에서 달아났다. 알 수 있을까, 자네 꿈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굳게 빗장을 건 얼음판 위에서 조용한 깃발이 되어 둥둥 떠올라 타오르다 사라지는 몇 장 불의 냉각을 오, 또 하나의 긴 거리, 가스등 희미한 내 기억의 迷路(미로)를 날아다니는 외투 하나만큼의 허전함. 겨울 오후 3시, 그 휘청휘청한 권태의 비탈 텅 빈 서랍 속에 빛나는 압핀 한 개 춥죠? 음. ……춥군. 그런데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리하여 水平(수평)으로 쓰러지는 한 컵의 물. 한 컵 빛의 悲鳴(비명). 잠자는 물. 그 빛나는 죽음. 얼음의 꿈. 토막토막 끊어지는 秒針(초침). 우리는 世上과 타협하지 않는 최후의 무리였다. 모든 꿈이 소멸된 지상에 홀로 남아 두꺼운 외투와 커피 한 잔으로 겨울을 정복하는 꿈을 꾼다. 춥죠? 음. ……춥군. 그런데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거리를 한 개 끈으로 뛰어다닐 때의 해질 무렵 건물마다 새파랗게 빛나는 면도 자국. 이것이 희망인가 절망일 건가 불빛 속에서 낮게 낮게 솟아오르는 중얼거림 깨지 못하는 꿈은 꿈이 아니다. 미리 깨어 있는 꿈은 悲劇(비극)이다. 鋪道(포도) 위에 고딕으로 반사되는 발자국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희미한 음향을 듣는가 자네 아직도 꿈꾸며 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 ~~~~~~~~~~~~~~~~~~~~~~~~~~~~~~~~~~~~~~~~~~~~~~~~~~~~~~~~~~~~~~~~~~~ 바람의 집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 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대학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 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였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의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 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 새벽이 오는 方法 밤에 깨어 있음. 방 안에 물이 얼어 있음. 손[手]은 零下 1度. 문[門]을 열어도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 갈대들이 쓰러지는 江邊 에 서서 뼛속까지 흔들리며 강기슭을 바라본다. 물이 쩍쩍 울고 있다. 가 로등에 매달려 다리[橋]가 울고 있다. 쓰러진 나무들이 어지러이 땅 위에 서 흔들린다. 썩은 나무 등걸처럼 나는 쓰러진다. 바람이 살갗에 줄을 파 고 지났다. 쿡쿡 가슴이 허물어지며 온몸에 푸른 노을이 떴다. 살이 갈라 지더니 形體도 없이 부서진다. 얼음가루 四方에 떴다. 호이 호이 갈대들 이 소리친다. 다들 그래 모두모두--- 大地와 아득한 距離에서 눈[雪]이 떨어진다. 내 눈물도 한 點 눈이 되었음을 나는 믿는다. 江 속으로 곤두 박질하며 하얗게 엎드린다. 어이 어이 갈대들이 소리쳤다. 우린 알고 있 었어, 우린 알았어--- 끝없이 눈이 내렸다. 어둠이 눈발 사이에 숨기 시작한다. 到處에서 얼음 가루 날리기 시작한다. 서로 비비며 서걱이며 잠자는 새벽을 천천히 깨우 기 시작한다. ~~~~~~~~~~~~~~~~~~~~~~~~~~~~~~~~~~~~~~~~~~~~~~~~~~~~~~~~~~~~~~~~~~~~ 겨울, 우리들의 都市   겨울, 우리들의 都市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풀리지 않으리란 것을, 설사 풀어도 이제는 쓸모 없다는 것을 무섭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외투 깊숙이 의문 부호 몇 개를 구겨넣고 바람의 철망을 찢으며 걸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이 世上에서 애초부터 우리가 빼앗을 것은 無形의 바람뿐이었다. 불빛 가득 찬 황량한 都市에서 우리의 삶이 한결같이 주린 얼굴로 서로 만나는 世上 오, 서러운 모습으로 감히 누가 확연히 일어설 수 있는가. 나는 밤 깊어 얼어붙는 都市앞에 서서 버릴 것 없이 부끄러웠다. 잠을 뿌리치며 일어선 빌딩의 환한 角에 꺾이며 몇 타래 눈발이 쏟아져 길을 막던 밤, 누구도 삶 가운데 理解의 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숨어 있는 것 하나 없는 어둠 발뿌리에 몸부림치며 빛을 뿌려넣은 수천의 헤드라이트! 그 날[刃]에 찍히며 나 또한 한 점 어둠이 되어 익숙한 자세로 쓰러질 뿐이다. 그래, 그렇게 쓰러지는 法을 배우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온몸에 시퍼런 절망의 채찍을 퍼붓던 겨울 속에 서 나는. ~~~~~~~~~~~~~~~~~~~~~~~~~~~~~~~~~~~~~~~~~~~~~~~~~~~~~~~~~~~~~~~~~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은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가을에 1 잎 진 빈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울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 허수아비-누가 빈 들을 지키는가   밤새 바람이 어지럽힌 벌판, 발톱까지 흰, 지난 여름의 새가 죽어있다. 새벽을 거슬러 한 사내가 걸어온다. 얼음 같은 살결을 거두는 손. 사내의 어깨에 은빛 서리가 쌓인다. 빈 들에 차가운 촛불이 켜진다. ~~~~~~~~~~~~~~~~~~~~~~~~~~~~~~~~~~~~~~~~~~~~~~~~~~~~~~~~~~~~~~~~~~ 쥐불놀이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 껍질   空中을 솟구친 길은 그늘을 끼고 돌아왔고 아무것 알지 못하는 그는 한줌 가슴을 버리고 떠났다. 車窓 안쪽에 비쳐오는 낯선 거리엔 大理石보다 차가운 내 幻影이 떠오른다. 아무것 알려 하지 않는 그는 미련 없이 머리를 깎았다. 그는 나보다 앞선 歲月을 살았고 나와 同甲이었다. 감싸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단단히 굳어버린 鋪道엔 바람이 일고 이 밤은 여느 때마냥 춥다 ~~~~~~~~~~~~~~~~~~~~~~~~~~~~~~~~~~~~~~~~~~~~~~~~~~~~~~~~~~~~~~~~~~~ 여행자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찬,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나리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컹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비가2 -붉은 달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요, X자고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떨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대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살은 남루한 옷으로 자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는 거리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삼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떠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세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이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 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구부러진 어느 젊은 날이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 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을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면서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의 의심하며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 종이달 1 과거는 끝났다. 송곳으로 서류를 뚫으며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는 김(金)을 본다. 자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수백 개 명함들을 읽으며 일일이 얼굴들을 기억할 순 없지. 또한 우리는 미혼이니까, 오늘도 분명한 일은 없었으니까 아직은 쓸모 있겠지. 몇 장 얄팍한 믿음으로 남아 있는 하루치의 욕망을 철(綴)하면서. 2 그들이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한 두시간 차이났을 뿐. 내가 아는 것을 그들이 믿지 않을 뿐. 나에게도 중대한 사건은 아니었어. 큐대에 흰 가루를 바르면서 김은 정확하게 시간의 각을 재어본다. 각자의 소유만큼씩 가늠해보는 가치의 면적.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지. 잠시 잇고 있었을 뿐. 좀 복잡한 타산이니까. 똑바로 말한 적이 자네는 한 번도 없어.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와이셔츠 단추 한 개를 풀면서 날 선 칼라가 힘없이 늘어질 때까지 어쨌든 우리는 살아온 것이니. 오늘의 뉴스는 이미 상식으로 챙겨듣고.   3 믿어주게. 나도 몇 개의 동작을 배웠지. 변화 중에서도 튕겨져나가지 않으려고 고무풀처럼 욕망을 단순화하고 그렇게 하나의 과정이 되어갔었네. 그는 층계 밑에 서서 가스라이터 불빛 끝에 손목을 매달고 무엇인가 찾는 김을 본다. 무엇을 잃어버렸나. 잃어버린 것은 찾지 않네. 그럴만큼 시간은 여유가 없어. 잃어버려야 할 것들을 점검중이지. 그럴만큼의 시간만 있으니까. 아무리 조그만 나프탈렌처럼 조직의 서랍 속에 숨어 있어도 언제나 나는 자네를 믿어왔네. 믿어주게. 로터리를 회전하면서 그것도 길의 중간에서 날씨야 어떻든 상관없으니까.   4 사람들은 조금씩 빨라진다. 속도가 두려움을 만날 때까지. 그러나 의사의 기술처럼 간단히 필라멘트는 가열되고 기계적으로 느슨히 되살아나는 습관에 취할 때까지 적어도 복잡한 반성 따위는 알콜 탓이거니 아마 시간이 승부의 문제였던 때는 지났겠지. 신중한 수술이 아니어도 흰색 가운을 입듯이 누구나 평범한 초침(秒針)으로 손을 닦는 나이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여주게. 휴식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주 사무적인 착상이군. 여기와 지금이 별개이듯이 내가 집착한 것은 단순한 것이었어. 그래서 더욱 붙어 있어야 함을 알아두게. 일이 끝나면 굳게 뚜껑을 닫는 만년필처럼.   5 소리나는 것만이 아름다울테지. 소리만이 새로운 것이니까 쉽게 죽으니까. 소리만이 변화를 신고 다니니까. 그러나 무엇을 예약할 것인가. 방이 모두 차 있거나 모두 비어 있는데. 무관심만이 우리를 쉬게 한다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는 없어진다. 과거는 끝났다. 즐거움도 버릇같은 것. 넥타이를 고쳐매면서 거울 속의 키를 확인하고 안심하듯이 우리는 미혼이니까. 속성으로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휘파람불며 각자의 가치는 포켓 속에서 짤랑거리며 똑바로 말한 적이 자네는 한 번도 없어. 제발 그만두게. 자네를 위해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다 토해냈네. 또한 무엇이든 분명한 일이 없었고 아직도 오늘은 조금 남아있으니까. 그럼. 굿바이... ~~~~~~~~~~~~~~~~~~~~~~~~~~~~~~~~~~~~~~~~~~~~~~~~~~~~~~~~~~~~~~~~~~~ 폭풍의 언덕   이튿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유리같은 밤을 지났다. 그날 우리들의 언덕에는 몇 백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누이는 긴 팽이모자를 쓰고 언덕을 넘어갔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 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이다. 하루종일 나는 문지방 위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있는 유지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하는 폭풍의 하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런닝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 개 주사바늘. 그리고 나서 저녁 무렵 땅거미 한 겹의 무게를 데리고 누이는 뽀쁠린 치마 가득 삘기의 푸른 즙액을 물들인 채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것이다.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암흑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집. 이 불끈거리는 예감은 무엇일까. 나는 헝겊같은 배를 접으며 이 악물고 언덕에 섰다. 그리하여 풀더미의 칼집 속에 하체를 담그고 자정 가까이 걸어갔을 때 나는 성냥개비같은 내 오른팔 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무서운 섬광을 보았다. 바람이여, 언덕 가득 이 수천 장 손수건을 찢어날리는 광포한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어디에서 네가 불어오는지 알 것 같으다. 오, 그리하여 수염투성이의 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오는 언덕에서 보았던 나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를.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 雨中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1 미스 한, 여태껏 여기에 혼자 앉아 있었어? 대단한 폭우라구. 알고 있어요. 여기서도 선명한 빗소리가 들려요. 다행이군. 비 오는 밤은 눅눅해요. 늘 샤워를 하곤 하죠. 샤워. 물이 떨어져 요. 우산을 접으세요. 나프타린처럼 조그맣게 접히는 정열? 커 피 드세요. 고맙군. 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질해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시한 소리예요. 기형도 씨 무얼했죠? 집을 지 으려 했어. 누구의 집? 글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허물었어 요? 아예 짓지를 않았지. 예? 아니, 뭐. 그저…… 치사한 감정 이나 무상 정도로, 껌 씹을 때처럼. 2 등사 잉크 가득 찬 밤이다. 나는 근래 들어 예전에 안 꾸던 악 몽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의 간유리. 안개. 이렇게 빗소리 속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내 흘러온 짧은 거리 여기저기서 출렁거리는 습습한 생의 경사들이 피난민들처럼 아우성치며 떠내려가는 것 이 보인다. 간혹씩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건조한 물 고기 알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런 식으로 또 나의 일년은 마취약처럼 은밀히 지나가리라. 술래를 피해 숨죽여 지나가듯. 보인다. 내 남은 일생 곳곳에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을 숱한 폭우들과 나무 들의 짧은 부르짖음이여. 3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게 신 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4 시험지가 다 젖었을 것이다. 위험 수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충분한 숙면. 물보다 더욱 가볍게 떠오르기. 하얗게 씻겨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삽날의 꿈. 당신의 꿈은? 5 지난 봄엔 애인이 하나 있었지. 떠났어요? 없어졌을 뿐이야. 빛 의 명멸. 멀미 일으키며 침입해오던 여름 노을의 기억뿐이야. 사랑해보라구? 사랑해봐. 비가 안 오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 어? 비 때문은 아녜요. 그렇군. 그런데 뭐 먹을 것이 없을까? 6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미스 한. 혼자 앉아서 이젠 무 엇을 할래? 집을 짓죠. 누구의 집? 그건 비밀.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품었던 우리들 꿈 의 방정식을 각자의 공식대로 풀어가는 것일 터이니. 빗소리. 속의 빗소리. 밖은 여전히 폭우겠죠? 언제나 폭우. 아. 그러면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논리…… 300원의 논리. 여름엔 여름 옷을 입고 겨울엔 겨울 옷을 입고? ~~~~~~~~~~~~~~~~~~~~~~~~~~~~~~~~~~~~~~~~~~~~~~~~~~~~~~~~~~~~~~~~~~~ 12개의 책장안에 머물러있는 시인의 영혼 나의책 나의서가 - 故 기형도 시인   천국을 도서관으로 상상했다는 어느 시인처럼 그는 지금 하늘에서 행복할까. 아니면 지상에 자신이 세워놓은 ‘도서관’을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을 지도. 처녀시집이자 유고시집이 되어버린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을 남기고 만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기형도(1960~1989)시인. 그가 떠난지 벌써 1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서가는 오롯이 남아 있었다. 네 살 위 누이인 기애도(45)씨의 안산 성포동 27평 아파트, 거실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조카들의 방마다 ‘침입’해 있는 12개의 책장으로. 누이 기씨는 “책장 하나, 빛 바랜 책 한 권까지도 모두 동생의 품과 애정이 깃들어 있는 것들”이라면서 “동생을 더 오래 살게 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정음사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삼성판 세계사상전집과 한국문학전집, 홍성사의 홍성신서, 현암사의 현암신서, 창비와 문학사상의 영인본들이 책장에 꽂힌 채 시인의 지적 궤적을 ‘입증’하고 있었다. 연세대 문학회 시절, 둘도 없는 동기였던 소설가 성석제에게 “꼭 읽어보라”며 적어줬다던 책들이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꼬장꼬장한 책주인과 유쾌한 책도둑 사이로 문단에서 이름났다. 작가가 시인의 집에서 놀다가 대문을 나설 때마다 주머니까지 샅샅이 열어보이며 ‘검문검색’을 받았을 정도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석제가 “갈 때마다 솜씨껏 도둑질 하였다”고 자신의 산문집에서 ‘자랑’했던 시인의 시집들이 주방 쪽 책장에 하나 가득이다. 혜원출판사에서 김현, 오생근, 김화영, 김주연 등이 번역했던 괴테, 예이츠, 발레리, 엘뤼아르, 휘트먼의 시들, 번호 순서대로 모아놓은 ‘청하시선’, ‘문지시인선’, ‘민음의 시’들이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 위를 눈으로 더듬다 장석주의 ‘햇빛사냥’(고려원)을 끄집어 냈다. 1981년 4월에 발행된 1200원짜리 시집. 질 나쁜 갱지에 박혀 있는 시어들. 그리고 그 밑에 가는 연필로 그어놓은 줄과 깨알같이 적혀 있는 메모. 어느 단어에는 동그라미를 쳤다가, 어느 단어에는 가위표를 치고, 어느 명사 아랫줄에는 ‘밝고 힘찬’이란 형용사를 수줍게 적어 놓은. 생전의 그를 떠올리는 순간 엽서 한 장이 책갈피에서 굴러 떨어졌다. 출판사 회수용으로 만들었던, 부치지 못한 독자엽서다. 또박또박 쓴 글씨로 직업: 학생, 좋아하는 시인: 장석주, 이름: 기형도 등이 적혀 있다. 옆에 서 있던 누이는 “느닷없이 만나는 이런 기쁨 때문에 내가 이 책들을 끼고 사는 것”이라며 반가워 한다. H.스튜어트 휴즈의 ‘의식과 사회’(홍익신서) 등 몇 권 무작위로 골라낸 책들에는 연두색, 푸른색 등 색연필로 그어놓은 줄과 메모가 듬성듬성 보이고, 심지어는 습자지를 별도로 붙여 요약정리까지 했다. 자신의 보물을 뒤늦게 찾아보는 사람들의 기를 죽이려는 의도였을까? 사실 산자들이 죽은 자의 최후를 비극적으로 포장하는 건,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고한 평론가 김현은 시인에게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하지만 시인은, 최소한 자신의 서가 안에서만은, 무척이나 유쾌했던 것 같다. 소설가 강석경씨는 어느 글에서 시인을 추모하면서 “천사는 지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서가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 그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 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김(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서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된다. 모든 의심을 짐을 꾸리면서 김은 거둔다.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 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그곳에서 계집아이같은 가늘은 울음소리가 터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빗방울은 은퇴한 노인의 백발위로 들이친다 ~~~~~~~~~~~~~~~~~~~~~~~~~~~~~~~~~~~~~~~~~~~~~~~~~~~~~~~~~~~~~~~~~~~~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나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볼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 추억에 대한 경멸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가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 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 포도밭 묘지 1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 림자가 거대한 조명 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 는 풍경 속에서 내 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 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 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 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 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 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 렸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 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하는 수 없이 내 지친 발을 타일러 몇 개의 움직임을 만들다보면 버릇처럼 이상한 무질서도 만나곤 했지만 친구여, 그때 이미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정든 포도밭에서 어느 하루 한 알 새파란 소스라 침으로 떨어져 촛농처럼 누운 밤이면 어둠도, 숨죽 인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 다. 그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 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 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 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 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 도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어 느 날 기척 없이 새끼줄을 들치고 들어선 한 사내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주인이라 부를 때마다 아, 나는 황망히 고개 돌려 캄캄한 눈을 감 았네. 여름이 가기도 전에 모든 이파리 땅으로 돌아 간 포도밭, 참담했던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 금 쓴다 친구여.   포도밭 묘지 2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 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 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 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 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空中들. 기억하느냐, 그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 의 임종. 從者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 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 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 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神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 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 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 락을 슬픔에 걸 듯이 믿음은 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 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 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 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 다. 듣느냐, 이 세상 끝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 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 앙쥐를 물어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 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 하느니 從者여,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 냐. ~~~~~~~~~~~~~~~~~~~~~~~~~~~~~~~~~~~~~~~~~~~~~~~~~~~~~~~~~~~~~~~~~~~~ 겨울 눈(雪) 나무 숲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沈默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假面)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향(向)하여 불을 지피었다. 창(窓)너머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청결(淸潔)한 죽음을 확인(確認)할 때까지 나는 부재(不在)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거리(距離)를 두고 그래, 심장(心臟)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완벽(完璧)한 자연(自然)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후(後)에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죽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니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 바다에 버리고 오다.   1. 도망치듯 바다로 달렸다 그 바다, 구석진 바위에 앉아 울고 싶어서 술을 마셨다 그냥은 울기가 민망해서 술기운을 빌려 운다 울 수 있을 만큼만 술을 마신다. 그러면 바다는 내 엄살이 징그럽다고 덤벼들었다 노을이 질 무렵, 파도가 한 웅큼의 피를 쏟아내었다 바다는 새벽을 잉태하기 위하여 날마다 하혈한다 일상의 저음부를 두드리던 가벼운 고통도 내 존재를 넘어뜨릴 듯 버거운 것이었고 한 옥타브만 올라가도 금새 삐그덕거리는 우리의 화음은 합의되지 못한 쓸쓸함, 그래 가끔은 타협할 필요도 없이 해결 되기도 했지만 나와 함께 아파 할 아무도 없다면 어떠랴 징징대는 감정을 달래느라 늘 신경은 하이소프라노로 울고 끝내는 당도하지 못할 너라는 낯선 항구, 파도가 쓸고 가버린 것은 빈 소주병만이 아니었을까 시작도 없는 끝, 시작만 있는 끝 늘 함부로 끝나버리기 일쑤인 기약없는 시작이었음을   2. 바다가 잠든 나를 두드렸다 이미 어두워진, 수초내음만이 살아있는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눈을 문질러도 보이지 않아서 볼 수가 없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하기로 한다 바이올린의 비명이 나를 대신하는 oblivion, 바다가 슬픔을 풀어놓는 동안 잃어버린 기억 한자락 끼어든다 망각은 내가 너를 견디는 방식 살아가는 것이 무릎 관절염 같은 시린 악몽일지라도 오늘, 단 한편의 아픈 꿈을 허락하기로 한다 오늘만 취하기로 한다 수평선 너머로 밀려가는 아득한 기억상실을 위하여   3 바다는 출산을 위하여 끙 한번 신음한다 망망대해에 부유하는 사연들과 같이 아파했던 까닭으로 바다는 새벽을 낳을 무렵, 푸르고도 투명하게 멍들어 있다 ~~~~~~~~~~~~~~~~~~~~~~~~~~~~~~~~~~~~~~~~~~~~~~~~~~~~~~~~~~~~~~~~~~~ 오래된 書籍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 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입속의 검은 잎》에서 ~~~~~~~~~~~~~~~~~~~~~~~~~~~~~~~~~~~~~~~~~~~~~~~~~~~~~~~~~~~~~~~~~~~ 어느 푸른 저녁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는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 거리에서   우리가 오늘 거둔 수확은 무엇일까 그대여 하고 물으면 갑자기 地上엔 어둠, 거리를 疾走하는 바람기둥. 그대여, 우리는 지금 出口를 알 수 없는 巨大한 圖畵紙 위에 서 있다. 제각기 하루의 스위치를 내리고 웅성이며 사람들이 돌아가는 시간이면 都市의 끝에서 끝까지 아픈 다리를 데리고 걸으면서 우리는 누구도 時間을 묻지 않았다. 문득 우리의 軌跡으로 그어진 꺾은선 그래프에 허리를 찔리우고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기에 어둠이 달려왔다 어둠이여 그러나 숨길 그 무엇이 있어 너를 부르겠는가 빌딩 너머 몇 점 노을로도 갑자기 수척해지는 거리를 보며 우리는 말없이 서 있을 뿐이다. 全身으로 서 있을 뿐이다 어둠이여   왜 우리는 세상에 이 크나큰 빈 箱子 속에 툭 툭 採集되어야 했을까 팽팽하게 얼어붙는 한 장 바람의 形狀이 되어 우우 어디로 가서 기댈까 우리가 활활 消滅할 수 있는 未知의 불은 어디? 우리는 都市의 끝, 그 바람만 줄달음치는 驛舍를 배회하였다. 그러나 旅客運賃表로 할당되는 가난한 우리의 생. 갈 곳은 황량한 都市뿐이었다. 그래도 어딘가 낯선 도시 한켠에 주저앉아 휘파람 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아 있을까. 그 믿음을 무엇이라 부를까.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늘 時間이 停止해 있는 도시. 푯말 없이 오늘도 캄캄하게 버티고 선 아아, 잎 뚝뚝 떨어지는 우리들의 도시. 急流처럼 참혹하게 살고 싶었다, 우리 現在는 언제나 삶의 끝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絶壁에서 뒤 돌아보는 우리의 조용한 행적은?   어둠이 靜寂의 보자기를 펄럭여 세상을 덮고 온통 바람만 이삭처럼 툭툭 굴러다니는 都市에 페이지를 넘기면 막 가을이구나. 그대여, 秋收하기에 너무도 우리의 生은 이르다. 그러나 우리가 寂寞으로 廢墟가 된 뜨락에 부끄럽게 설 때 오, 그래도 당당하게 드러나는 몇 움큼 퇴비로 변한 우리들의 사랑 가자, 얼굴은 감춘 그대여 個人으로 살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世上 함께 가자, 어디에든 노을은 피고 바람 속에서 새벽은 오는 것 이제는 일생을 걸어야 할 때, 지친 하루를 파묻고 일어서면 캄캄한 어느 골목에선가 휘파람처럼 暴風처럼 아아, 화강암 같은 時間의 호각 소리가 우릴 부르고 있네 ~~~~~~~~~~~~~~~~~~~~~~~~~~~~~~~~~~~~~~~~~~~~~~~~~~~~~~~~~~~~~~~~~~~~ 약속   아이는 살았을 때 한 가지 꿈이 있었다. 아무도 그 꿈을 몰랐다.   죽을 때 그는 뜬 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별이 졌다고...... ~~~~~~~~~~~~~~~~~~~~~~~~~~~~~~~~~~~~~~~~~~~~~~~~~~~~~~~~~~~~~~~~~~ 1-3 : 희망에 지칠때까지 사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 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차라리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 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나는 어떤 시에선가 불행하다고 적었다.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아있단 말인가. 누군가 내 정신을 들여다보면 경악할 것이다. 사막이나 황무지, 그 가운데 띄엄띄엄 놓여있는 물구덩이, 그렇다. 그 물구덩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아직 죽음쪽으로 가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있는 이유를 그 물구덩 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쨋든 희망을 위하여 나는 대구행 첫 차표를 끊은 것이다..... -기형도 산문집(짧은 여행의 기록)/도서출판 살림 .. ~~~~~~~~~~~~~~~~~~~~~~~~~~~~~~~~~~~~~~~~~~~~~~~~~~~~~~~~~~~~~~~~~~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時着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는 몇 장 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 그집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을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을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을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에서 가장 좋아하는 詩. ~~~~~~~~~~~~~~~~~~~~~~~~~~~~~~~~~~~~~~~~~~~~~~~~~~~~~~~~~~~~~~~~~~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詩作메모 (1988.11),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 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詩作메모 (1988.11), ~~~~~~~~~~~~~~~~~~~~~~~~~~~~~~~~~~~~~~~~~~~~~~~~~~~~~~~~~~~~~~~~~~ 가끔씩 어떤 `순간들`을 만난다. 그 `순간들`은 아주 낯선 것들이고 그 `낯섦`은 아주 익숙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어떤 흐름의 불연속 선들이 접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방향으로 튕겨나갈지 모르 는, 불안과 가능성의 세계가 그때 뛰어들어온다. 그 `순간들`은 위험하 고 동시에 위대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감각들의 심판을 받으며 위대하 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에 씌어진 부분과 씌어지지 않은 부분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두번째 부분이다. [.....]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 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의 시작 메모,[문학사상],1985년12월호 ~~~~~~~~~~~~~~~~~~~~~~~~~~~~~~~~~~~~~~~~~~~~~~~~~~~~~~~~~~~~~~~~~~~ 희 망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 참회록 中에서 1982. 8. 27 제대병. 나는 비로소 제대하여 민간인(民間人)으로 복귀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은 내 일생 몇 번 되지 않는 독특한 감동으로 기억되리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추억들. 또 한 보병 제 51사단 포병연대 예민과원들(예민과장 최용달 휘하 부사수 김기홍, 고영호 이병 등)에 대한 나의 심려 역시. 그러나 참아내리라. 시련이다. 그것은 너희들 일생을 좌우하는 것들, 중의 하나, 즉 프론티어리즘(Frontierism)으로 작용할 것이다. 해제증을 받아들고 위병소를 내려오다 부대 진입로 앞에 앉아 허리를 꺾고 약간 눈물을 흘렸다. 이제 안녕히. 나의 성숙에 또 하나 자양분으로 쌓여 있을 군대생활이여. 떠남이란 것이 허무하면서 또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리라는 것은 속박에서 탈출이 빚어내는 암울한 자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마치 새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새와 같다. 어느날 주인집 꼬마 소녀가 장난삼아(오! 운명이란 것이란) 새장 문을 열고 나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날아야지. 오, 아뿔사. 이미 나는 날으는 법을 잃어버린 새였다.' 혹은 '어쩌면 미국 남부 켄터키주쯤의 농장에서 노예로 있는 검둥이. 드디어 계약이 끝나고 사슬을 풀고 목책을 지나 광활한 평원을 바라볼 때 문득 뒤돌아 본 철문 닫히는 소리와 그 은은하고 쓸쓸한 석양 그 막막한 자유!'- 부대를 나와 '태양'다방에 들렀다. 계급장과 부대 마크는 위병소에서 떼어버리고, [제대병]이란 시 한 편 완성. 오후에 양석이 이병과 함께 제대기념 환송회를 '샘물' 술집에서 가졌다. 기쁜 일은 장장19명이 나와 주었다. (훗날의 기쁨을 확인하기 위해 기록: 나. 양석이, 윤여백, 고영호, 김기홍, 백종화, 엄윤명, 남건현 하사, 박재옥 병장, 최종진 일병, 인사과 이희정, 박병철, 방동수, 원호승, 정작과 서호석, 김민호, 562BN 백승오, 강동기, 김신철). 나는 좀 과음(소주 1병)했고 다소 감상적이었다. 그들에게 마지막 유언(?) 시간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軍)에서의 인내심이란 개성이나 자존심의 붕괴과정을 내면적으로 다스리는 힘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싸워 이겨야 할 그 긴 타율적 시간과의 지리한 싸움에서 극복의지'라고...... 허망하였다. 그리고 나 또한 그 허망한 비참성이 단순히 내 젊음의 한 토막을 호계동 부대에 끊어주고 나온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알고 있다. 단지 나는 이러한 비참성이 '잠재적 기쁨의 자유'가 스스로 '슬픔이란 감동의 굴레'를 쓰고 미화하는 사치품이 아니기를 논리적으로 되묻는 자세만을 생각하였다. 떠남이 허망할진대 만남 또한 허망하다는 단세포적 논리는 지극히 염세주의적인 황폐한 것이라고 되묻는 자세만을 생각하였다. 건강하고 생산적인 마주침. 먼 훗날 다시 내부에서 희미한 윤곽으로만 정리될 제대 유감(有感)을 감상적이지만 솔직하게 기록해 본다. *이 글은 1981년부터 1982년까지 쓴 일기에서 추린 것이다. ~~~~~~~~~~~~~~~~~~~~~~~~~~~~~~~~~~~~~~~~~~~~~~~~~~~~~~~~~~~~~~~~~~ 기형도는 죽었다. 기형도는 시인이다.기형도가 묻혔다.기형도를 땅속 깊이 묻었다. 곧 많은 열매가 맺히리라. 기형도는 땅에 떨어졌고 묻혔고,썩었다. 그첫열매의 얼굴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기형도는 자지가 있었다. 기형도의 자지는 내 자지다. 자지가썩었다. 어머니말고 기형도 자지를 본 여자가 보고싶다. 그런 여자가 있다며 그 여자가 달고 있는 자지 반대도 썩을 것이다. 기형도가 벌떡 일어나 걸어다닌다. 문학이 어떻고 시가 뭐고 하고 싶다고 하다가 한 많은 이 세상을 부르고 있다. 기형도가 이닌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묻힌다. 터질 듯한 유방과 엉덩이가 찢어질 듯 발기한 자지가 묻힌다. 더럽고 또 더럽고 세 번 더러운 서울이 내 고향 경기도 안성의 한 구릉에 묻힌다. 품페이처럼 베수비오스 화산처럼. 기형도가 멋있다. 기형도를 제외한 그 모든 놈들은 다 나쁜 놈이다.기형도가 제일 착하다. 조금은 착한 나는 또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고 나는 싼다. 이자지 반대 같은 세상에 기형도가 찍 싸진다. 기형도가 내 자지 속에서 나와 자지 반대의 그 어떤부드러운 곳으로 쏙 들어간다,기형도가 잘 죽었다 * 기형도가 이시대에 살아있다면 시인 기형도는 어떤 시를 쓸까 생각합니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하면서 무언가 사람을 쏙 빠지게하고 어두운 내면 그리고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꼿꼿하게 자신의 목소리로 항변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 제가 올린 위 시는 처음 읽을땐 참으로 당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기형도를 사랑하는 여러분은 김영승이 말하는 남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아시겠지요 ... ~~~~~~~~~~~~~~~~~~~~~~~~~~~~~~~~~~~~~~~~~~~~~~~~~~~~~~~~~~~~~~~~~ 연혁 1960.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중 막내로 출생. 1965. 부친이 서해안 간척사업에 실패, 유랑하다가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 '85년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인 "안개"는 이 마을이 배경이 된다. 1967. 시흥국민학교에 입학. 1969.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눕다. 가계가 힘들어짐. 1975. 당시 고등하교 2학년이던 셋째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 이 사건이 깊은 상흔을 남기다. 1979. 신림중학교을 거쳐 중앙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연세대학교 정법대 정법계열 입학,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수업 시작. 1980. 대학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당선없는 가작으로 입선('영하의 바람'). 1981. 방위병으로 입대, 복무중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 동인지에 '사강리'등 발표, 시작에 몰두. 1982. 6월 전역후 다수의 작품을 쓰며,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당선('식목제'). 1984. 10월 중앙일보사에 입사. 198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안개')되어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 2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신문사 수습을 거쳐 정치부에 배속. 1986.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김.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 주목을 받음. 1988.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김. 여행등을 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 1989. 가을에 시집출간을 위해 준비하다 3월 7일 새벽,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독신.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을 가지고 있었음.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발간됨. -------------------------------------------------------------------- 1989년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90년 3월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살림출판사) 1994년 2월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출판사) 1999년 3월 전집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 ~~~~~~~~~~~~~~~~~~~~~~~~~~~~~~~~~~~~~~~~~~~~~~~~~~~~~~~~~~~~~~~~~~~~ 부조리한 시대의 절망 - 기형도의 시세계 李 明 元 하나. 한 권의 시집을 바라본다. 시집의 장정은 때가 타고 닳아 있어, 그 위에 그려진 시인의 컷 그림이 조야해 보인다. 그 시선(그림)은 어딘가(내부?)를 향해 있고, 턱 밑을 가볍게 스쳐 한 무더기 선을 이룬다. 그 선의 흐름을 따라, 주의깊게 시선을 아래로 응시하다 보면, 기형도라는 이름이 드러난다. 그 밑에 알아볼 수 없는 글씨와 89라고 쓰여 있는, 아마도 컷 그림을 그린 사람의 싸인인듯한 글씨가 보인다. 나는 시집의 표지를 향상 그렇듯 들추고, 표지 왼쪽에 뭐라고 쓰여진 글들을 바라본다.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이후 독창적이면서 강한 개성의 시들을 발표했으나 89년 3월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나는 언제나 여기서 멈칫한다. 그는 서른을 채 못 채우고 삶을 마감했다(혹은 완성했다). 그가 시단에서 활동한, 시간적으로는 4년이 조금 넘고, 양적으로는 시집 한 권 분량에 불과한 삶 속에 "독창적이면서도 강한 개성"이란 말을 함부로 붙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 한 이유는 그의 시세계가 한 병든 낭만주의자(죽음을 다루는 자는 모두 낭만주의자이다!)의 무책임한 빈정거림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온통 젊음을 통과했을 시대의 다른 목소리들은, 그처럼 자기 파괴적이지 않았다. 절망은 희망의 큰 힘이었고, 슬픔도 힘이 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황지우와 최승자의 몸부림은 그 끝에 희망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는 시절에, 플라톤을 읽는 젊은이의 두려움이란, 한갓 나르시시즘에 불과한 것이엇다. 시 쓰는 후배가 기관원이었음이 밝혀지고, 감옥과 군대로 친구들이 흩어지는 목련철에 한가로이 책 읽으며, 대학을 떠나기가 두럽다고 말하는 그를 당시에 누가 마음 열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흘렀고, 그의 시집 해설자인 김현이 죽어, 겹으로 쌓인 죽음의 텍스트가 다시 나에게, 내가 그에게 삼투해 들어갔을 때, 나는 그를 보았고, 그를 통해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그가 뿌려 놓은 언어의 씨방에서 잎이 나고, 열매를 맺었을 때, 나는 그 열매의 속살을 파먹으며, 나의 의식을 곧추 세웠던 것이다. 그 때, 홀연 시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고통들이 찬연히 날선 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 글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건 그 때였다. 그의 시와 맞부딪치며, 교호하며, 나는 무언가 해명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젊은 나이에 죽은 한 시인에 대한 호사가의 값싼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시에 대한 탐구란, 시인(시적 화자)을 이해하고, 나를 발견하며, 시대를 감싸안음을 의미한다. 그 성채에 들어가, 그와 한 몸을 이룰 때, 그의 시세계는 보편적 공감의 체험으로 승화될 것이다. 또한, 한 시인의 방황은, 혼돈스런 시대의 의미있는 발걸음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둘-1. 기형도의 시세계는 도저한 허무주의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허무로 읽혀져야 한다. 이는 그가 절망의 한 방식인 시를 통하여, 현실 속에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헤매며, 끊임없는 모색을 해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그의 시세계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며,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통하여,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그의 시가 화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한 자아가, 환상으로의 진입을 통하여 불화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그마저도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좌절하는 모습을 극명히 드러낸 데 그의 시세계의 본질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부조리한 방법으로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한 치열한 영혼의 방황을 굳이 글로써 표현하고픈 욕망을 느낀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곧, 환상과 현실의 극한에 위치하여 그것을 해체해버린 한 시인의 언어영상이란 삶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그 삶의 장애인 억압을 해소시킴으로써 온전한 자기해방에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기해방의 한 해결방식이 죽음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비록 시인이,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죽은 구름」 라고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시작메모」 라는 비장한 자기확신에 젖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재의 그의 죽음에 덧입혀져 한갓된 낭만적 시인의 신화로 남기를 나는 거절한다. 고통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도처에 깔려 있고, 자신의 몸을 누이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일은 삶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지, 죽음을 통하여 삶을 확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존재의 한계에 직면해서 존재를 구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한계에 직면해서 언어를 해방시킨다. 이러한 자리에 우리는 프랑소아 비용, 보들레르를 놓아보면,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다. 하여 시인의 죽음을 시의 이해를 위한 손쉬운 입구로 생각하는 것은, 낭만주의의 제사에 한 시인을 제물로 바치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올바른 시의 이해에는 걸림돌로 작용할 요인이 많다. 지금까지 기형도 시에 대한 분석은, 그의 유년기의 가난, 아버지의 죽음, 청년기의 이별 등의 방향에서 상실감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져 왔다. 거기에 그의 시적 이미지의 건조성의 문제, 낙원상실 모티브의 분석 등의 작업이 이어졌다. 이러한 작업들은 기형도의 시세계를 정신분석으로 환원하거나, 기형도 시의 특수성을 내용-형식의 종합화로 총괄하지 않는 일면적인 해명에 그쳤다고 생각된다. 거기에 시인의 죽음이란 감정적 프리미엄이 붙어 객관적 거리를 흔들어버린 경우도 발견되곤 한다. 이 글을 통하여 그러한 문제점을 보충하고, 그의 시세계가 당대적 현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도 중요성을 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면, 이 글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다. 둘-2. 저녁 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 물론 작은 그 당나귀들 역시 -「숲으로 된 성벽」전문 희망을 노래하는 기형도의 몇 안되는 시 중 하나인 이 시는 역설적이게도, 도저한 허무의 원형적 공간을 드러낸다. 그 공간을 되돌아봄 없이 들어가는 자는 환상을 보게 된다. 그 환상이란, 희망의 다른 표현이다. 숲으로 된 아름다운 성채로 들어가는 당나귀와 농부들은 되돌아 봄 없이 그저 유유히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조용한 공기"나 "구름"인듯한 모습으로 신들의 상점에서 나오는 불빛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불빛을 바라보며, 들어가는 그들이 "골동품 상인"에게 신비롭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골동품 상인이란 이미 인생을 알 만큼 알아버린 사람으로, 그는 더 이상 조용한 공기도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도 아닌 "죽은 구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몫이란 숲의 나무를 자르고, 쓰러진 나무를 볼 뿐, 도리없이 그 공터를 떠나야 함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성채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끊임없이 삶을 뒤돌아보고 고통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성채의 안의 세계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성채에 들어가기 위한 현재의 행위 과정 자체에 있다. 그는 그 길을 찾으려 방황하고 길을 걷는다. 이때, 우리가 성채가 상징하는 세계를 하나의 유토피아로 보고 나무를 잘라내고 들어가려 애쓰는(그러나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를 현실로 갈라놓고 현실에서 유토피아로의 열망이 이 시인의 시적 동인이라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구절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희망을 위한 예비적 절망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희망을 위해 절망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신비로운 그 성 안에 농부와 당나귀가 평화롭게 살고 있으므로 자신도 그곳에 언젠가는 편입될 것이라는 꿈을 꾸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신비로운 성엔 결코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 그 신비로운 성마저도 허위에 불과한 것이라는 절망의 이중성이 그를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신비한 성의 이미지가 유리담장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는 「전문가」는 이러한 시인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이사를 온다. 그는 그의 집 담장을 모두 빛나는 유리로 세운다.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골목에서 놀다가 유리창을 박살내곤 하는데, 그는,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 아이들이 이상스러워함은 당연한 일이다. 몇몇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말을 한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이 아이가 ?겨나게 했을까. 그것은 "이미 늙은 (「정거장에서의 충고」)" 영혼을 아이가 가졌기 때문일까? 혹은 너무나 일찍 "존재의 비밀을 알아버(「나의 플래시 속으로 들어온 개」)"린 때문일까? 유리창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그 모든 질문들이 의미없음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견고한 송판으로 담장을 쌓기 원하던 아이는 현실-유리가 깨지는-이 두려워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을 누르며, 혹은 쾌활하게 유리담장 속의 즐거움을 즐기던 아이들은 이제 더욱 어두운 현실에 직면한다. 그들이 꿈꾸는 세계-한없는 놀이의 즐거움, 욕망의 경쾌한 발산, 정신적 연대감-는 결국 충실한 부하로 영락하기 전의 일시적 만족에 불과했다. 오히려, 삶은 그들의 꿈조차도 억압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인류는 환상의 낯설음에 당황해 왔다. 그 낯설음이란, 환상이 절망적 현실의 출구로 작용했을 때, 처음 보는 빛의 눈부심이다. 그 강렬한 빛에 한 외로운 자아는 눈이 멀기도 하고(현실도피), 서서히 시력을 회복하여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하며(삶의 반성), 그 빛을 상상력의 거울로 어둠 속으로 반사시키기도(현실 전복적 부정)한다. 대부분의 좋은 시인들은 두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환상이란 그것이 도피적 동굴로 화하지 않는 이상 현실의 억압에 대항할 수 있는 위대한 거부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라깡의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개념을 상징계와 상상계의 이분화로 설명한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이분화는 그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예외적 존재(시인)를 완벽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이 중요성을 띠는 것은 환상이 결코 도피의 공간만이 아닌 저항의 공간이란 사실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환상이란 현실원리에 고통받던 시인으로 하여금 쾌락원리 속에서 뛰놀게 함으로써 역동적 상상력을 가능케 한다. 이 역동적 상상력이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가능하게 했고, 엉터리 화가에 대하여 브레히트가 경악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기형도의 시세계는 현실원리와 쾌락원리의 경계가 소멸되어 있다. 그러나, 그 소멸된 경계는 정현종의 시에서와 같이 자아가 사물로 틈입하여 몸섞는 화해의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白夜」)"에서처럼,그 흩어짐과 소멸의 공간은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고통의 몸부림으로 드러난다. 그는 어디에고 속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이 때, 그는 절망한다. 이러한 절망을 이해해야만 그의 병적 허무주의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 느낌으로, 그의 데뷔작 「안개」를 다시 읽어보면, 그를 절망케 한 환상의 공간이 "가장 햇빛이 안드"는 누추한 공간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몇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 . . . . . . )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시인은 안개를 그 읍의 명물이라 말한다. 누구나 얼마간은 안개의 주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개는 아침 저녁으로(하루도 빠짐없이?) 끼는 것이기에 삶 자체의 리듬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기형도 특유의 아이러니의 세계는 겁탈당한 여직공과 방죽 위에서 얼어죽은 취객 하나를 등장시킴으로써, 안개의 세계가 결코 행복하고 화창한 기억의 꽃밭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오히려 그 세계는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하는 세계이다. 그 공간이 이른바 "안개의 聖域"이다. 안개는 현실의 추악한 면모를 은폐시킨다. 그러나 그 은폐된 공간 속에서 우리들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긍정한다. 그 긍정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어 가고 현실이 눈 앞에 드러나게 될 때, 산산히 깨져버린다. 긍정이 사라질 때, 삶은 너무나 추악한 것이다. 환상은 깨졌고, 현실도 그를 억압한다. 기형도의 시에 나타나는 한 중요한 양상은 다른 시인들처럼 그 깨진 현실을 조립하려 하거나, 아예 조립을 포기하고 다른 세계를 만들어 거기에 안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공간의 경계에서 떨림을 경험한다는 데 있다("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비가-2」)". 그러한 경계에서의 떨림은 모든 고정된 것을 부정한다. 모든 사물에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을 규칙화시키는 것이 일상성의 세계요, 이 세계의 질서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한 질서의 세계를 통해야만, 무한히 증폭되는 개인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고 타자(他者)의 삶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질서는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기도 하고, 지배이데올로기에 봉사하기도 한다. 알뛰세르는 이를 가리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라 불렀고 마르쿠제는 현실원리라 불렀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시인은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 더 나아가 현실원리에 저항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저항은 모든 고정화 되고 규칙화 된 질서를 뒤집고 의심하는 시인의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뒤집음, 의심의 순간에 시인은 하나의 시적 질서를 구축한다. 이러한 시적 질서를 과잉억압이 해소된 세계라 명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현실원리의 세계에 비해 더욱 세련된 자유의 세계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의 세계도 변화를 겪지 않을 때, 하나의 억압이 된다. 기형도의 시는 이러한 끝없는 변화의 공간이다. 변화에 대한 그의 집착이 그 특유의 아이러니의 수법으로 서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시 「나무공」은 기형도의 이러한 시적 인식을 독특하게 드러낸다. 그 내용을 무리하게 줄거리로 치환하면 이렇다. ⅰ)내가 소년에게 다가가니 소년은 나무공을 들고 서 있다. 술 취한 두 명의 노동자들은 죽지 않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지나간다; ⅱ)소년이 나에게 그들이 왜 슬퍼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둥근 것은 참으로 단순한 것이라고 소년이 말한다; ⅲ)나는 대답할 수 없는 데, 왜냐하면, 어떠한 질문도 대답을 하면 또다른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고정시키려 덤빈다; ⅳ)아이는 자신의 꿈은 모든 판례에 따라 세상을 재는 것이라고 말한다("아저씨 만한 나이라면 이미 나는 법칙의 사제"); ⅴ)그런데 소년이 나무공을 튀기자 나무공이 가볍게 튀어오른다. 소년은 나를 쓸모없는 구름이라 말하며 재빨리 사라진다; ⅵ)나는 소년이 사라진 완전한 어둠 속에서 수 백의 율동의 가능성을 본다("견고하게 솟아오르는, 소년이 버린 저/ 나무공"); 이 시는 시적 화자가 소년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으로 진행된다. 기형도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은 이러한 객관화된 자아에 대해서는 한 평론가가 "살해욕망(잠재적 자아)과 삶의 욕망(현실적 자아)과의 대립적 현실을 엄정한 객관적 시선으로 전복시켜놓고 있는 것이"라는 옳은 지적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위의 지적에 더하여 강조되어야 할 것은 잠재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대개의 시들은 현실적 자아가 잠재적 자아를 통해 이상적 자아를 향해 가는 것인 데 비해, 기형도의 시에서는 이상적 자아가 안타까운 눈으로 현실적 자아를 바라보고 있다. 그 바라봄의 행위 속에는 말로 할 수 없는 회한과 고통, 절망의 몸짓이 첨가된다. 위의 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일단 위의 시에 등장하는 소년과 관찰자(시적 화자)인 '나'를 살펴보자. 화자에 의해 관찰되고 있는 소년을 현실적 자아에 '나'를 이상적 자아에 그리고 나무공을 잠재적 자아-시인은 대상물도 하나의 자아로 승격시키고 있다!-에 연결시켜 보자. 현실적 자아인 소년의 나무공이란 법칙의 사제가 되고 싶은 소년의 꿈을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에게 나무공은 그저 나무공일 뿐이며 둥근 것은 단순하기만 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모든 판례에 따라 세상을 재는 것이다. 그러나, 술취한 노동자들이 죽지 않는 것은 죽음 뿐이라고 말하며 지나가고, 나무공은 가볍게 튀어오르고, '나'는 나무공을 바라보며 율동의 가능성을 점칠 때, 소년의 꿈은 여지없이 망가진다. 그리하여 소년은 '나'를 쓸모없는 구름 같다고 말하면서 나무공을 버리고 사라진다. 그러나, 쓸모없는 구름같다고 생각되는 구름만이 숲으로 된 성벽을 넘어 신비로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앞에서 확인했다. 고정되지 않는 변화의 가능성 속에서만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우리는 앞에서 확인했다. 고정되지 않는 변화의 가능성 속에서만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우리는 이야기해왔다. 그러니까, 소년이 법칙의 사제가 되고 이 세계를 하나의 판례로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나무공도 튀어오를 수 있다는 사실, 죽지 않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사실, 말이 되는 순간 어떠한 대답도 또다른 질문이 된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소년은 꿈을 상실한다. 더군다나 그는 잠재적 자아를 버려둔 채로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 사라짐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자아는 사라진 자아를 그리워한다. 안타까움으로 절망한다. 둘-3. 기형도 시에서는 이와 같이 현실과 환상의 공간 어디서도 희망은 드러나지 않는다. 회고적으로 유년시절을 바라보는 시에서도, 유년시절은 아득한 추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삼촌의 죽음, 가난의 고통 등으로 드러난다.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암흑 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집. 이 불끈거리는 예감은 무엇이었을까.(「폭풍의 언덕」)"에서의 예감이란 도저한 절망의 예감에 다름 아니다. 그 절망의 예감은 바슐라르가 존재의 우물이라 칭한 유년의 세계에서도 여지없이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기억되므로, 그가 현실 속에서의 고통과 절망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분히 비관적이다. 이 비관적인 공간, 허무의 공간을 시인은 이중으로 포장하여 독자에게 내놓는다. 그 한 방법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동화적이거나 몽환적인 상태로 유지시키고 그 사이에 절망을 숨기는 것이다. 여러 편의 유년 시편과 「안개」, 「전문가」, 「숲으로 된 성벽」, 「나무공」 등의 시는 이러한 방법에 의해 쓰여진 시이다. 이 시들의 공통적인 특색이라면, 시적 화자가 담담히 현상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그 보여줌은 상황의 고통스러움에 비해 지나치게 낙관적이기에 시를 읽는 독자는 아이러니를 체험하게 된다. 그 아이러니의 공간을 지나면, 시인은 자못 당당히 자신과 세계에 대한 부정의 몸짓을 취한다. 그것은 아마도 유년의 고통의 공간이 치유되지 못한 데서 나온 극단적 현실부정의 행위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부정의 행위 또한 화자를 통한 관찰에 의해 절망하는 한 대상을 상정하고 있다. 「장미빛 인생」, 「기억할 만한 지나침」,「鳥致院」, 「오후 4시의 희망」,「늙은 사람」등은 그러한 영역에 들어간다. 이 두 번째 영역 속에서 시인은 고통스런 현실을 목도하고 그 대상에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예를 들어 「기억할 만한 지나침」을 보면, 대상과 주체 사이의 일체화된 슬픔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전문 - 이 시에서 우리는 대상의 슬픔이 이제 화자 자신의 슬픔이 되었음을 발견한다. 그러하기에 그는 울고 있는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는 울고 있는 사내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돌연 울고 있는 사내가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며, 그 울음을 그칠 수 없는 절망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건드렸을 것이다. 그 사내가 안에서 울고 있을 때, 시에는 드러나 있지 않으나, 그 또한 밖에서 눈물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시인의 절망이 그 내부로 향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로도 향해 있었기 때문에, 현실을 향해 있을 뿐만 아니라 환상으로도 향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세계인식은 그야말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가수는 입을 다무네」)"만,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되는 것이다 - 「입 속의 검은 잎」 에서는 유예된 대답을 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야 하며,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바람은 그대 쪽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그의 세계는 부조리하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게 된다. 저 베케트나 이오네스꼬의 희곡에 나타나는 부조리성-세계에 내던져진 존재,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 어떤 초월자의 기다림,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는 구원의 약속-이 고스란히 기형도의 시세계에 침투한다. 그의 시엔 그러므로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시에 수직적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방황하는 한 자아의 모습. 출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구를 찾고 구원을 기대한다. 번번히 좌절되는 희망과 솟아오르는 절망에도 삶은 아름다운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삶은 역시 살만한 것이라고 믿기에. 하지만, 기형도의 시적 화자는 이를 부정한다. 그는 현실을 극한까지 몰고간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눈물 흘리는 일이었을까? ⅰ) 사방에서 인적 끊어진 꽃밭, 새끼줄 따라 뛰어가며 썩은 꽃잎들끼리 모여 울고 있을까. - 「 도시의 눈」 ⅱ)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 「 엄마 걱정」 ⅲ)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이 울고 있어 - 「 밤 눈」 ⅳ)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 「 진눈깨비」 ⅴ)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 「 여행자」 ( 윗점 - 인용자 ) 건조한 이미지의 분출과 더불어 그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 눈물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ⅰ)과 ⅲ)에서처럼 꽃잎이나 눈까지도 눈물 흘리고 있으리라는 감정이입과, ⅱ)에서처럼 빈방에 갇힌 상태에서 자폐성을 띠기도 하고, 방을 나와 거리를 나서면, ⅳ)와 ⅴ)에서와 같이 갑작스런 눈물과 드디어는 동물처럼 울부짖음으로 발전한다. 그의 시 도처에서 나타나는 빗방울, 구름, 바람의 이미지는 수직적 상승이 불가능한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출구를 찾으려는 시인의 열망이 안타깝게 드러난 것이다. 시인의 눈물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 거기서 쓸모없는 구름이나 검은 구름을 이루어 다시 빗방울 되어 내리는데, 이 빗방울을 바라보며, 시인은 그를 절망케 한 유년시절을 회고하거나 잃어버린 사랑을 추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물의 유전이 초월적이거나, 수직적일 수 없는 이유는 문제가 미해결인 채로 상황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인이 만물유전을 노래하고 있는 「포도밭 묘지」에서의 생명의 유통이 어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묘지(죽음) 위에서이다 :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 듯이 믿음은 不在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포도밭 묘지. 2」)." 죽음의 틀 안에서 모든 것이 소통하고 회전하고 있는 세계의 한 가운데에 그는 "비밀"을 숨기어 놓았다. 그 비밀스런 공간은 같은 시에서 "그 놀라운 보편적 진실"로 표현되어 있다. 아포리즘적인 문체로 이루어진 그 놀라운 보편적 진실은 시를 읽어보면 다음의 두 가지이다 : ⅰ)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짖?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친다 ; ⅱ)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한다 ;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비극적 삶의 방식을 체험한다. 그 비극성이란 슬픔이 짖?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태양빛을 포함한 모든 자연사가 생명의 잉태에 관계하는 데에 연유한다 (엄숙성 속의 치열함!).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명의 탄생이란 고귀하고 엄숙한 일이다. 그러한 엄숙성은 한 종(種)의 계속적인 생존을 위하여 에너지를 소모한 한 개체로부터 새로운 개체기 숨통을 트는 작업이다. 생명의 탄생은 마치 죽음이 인간에게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하듯이, 우리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게한다. 그 두려움의 공간, 떨림의 가쁜 숨을 시인은 경박한 변증의 쾌락 속에서 경험하길 원치 않는다. 진정으로 시인이 바라는 꿈의 세계는, 단순한 안락의 공간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의 모든 순간을 온 정신으로 견디는 팽팽한 긴장의 세계다. 그 견딤의 과정이 비극적인 것은 그 끝에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은 시인 자신이 원했던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라고 외치게 한다. 이 탄식의 목소리는 무엇 때문인가? 나는 앞에서 기형도 시의 화자가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떨림을 경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떨림은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 하나의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평범한 시인들의 의식과는 달리, 기형도의 이상세계 혹은 환상세계는 현실의 음험함과 고통스러움이 고스란히 동거하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기에 시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할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 방황과 절망의 기록이 그의 시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지배적인 정신이다. 이 지배적 정신세계에서 그렇다면 시인은 그의 절망과 유년의 고통에서 유래한 공격성을 어떻게 해소시켰을까? 나는 그 공격성이 자신의 내부로 향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기형도가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뚜렷한 공격의 대상이 존재하였다면 그토록 처절한 방황의 거리를 헤매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대상을 끝끝내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여, 그의 세계는 일종의 부조리의 세계로 변해갔던 것이다. 부조리한 세계에서는 부조리한 삶이 정상적인 것이다. 서구의 부조리극에서는 흔히 자아가 이분된다. 즉 갈등하는 두 자아가 한몸을 이룬다. 기형도의 시에서도 역시 우리가 앞에서 현실적 자아와 잠재적 자아라고 이름붙인 분열된 자아가 등장한다. 이 분열된 자아들은 서로 갈등을 겪고, 그 갈 등의 와중에서 잠재적 자아가 현실적 자아를 살해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나타난다. 기형도 시에 자주 나타나는 공격성, 예를 들어 「늙은 사람」에서 공원 등나무 벤취에 웅크리고 있는 늙은이를 시적 화자가 경멸하는 것이나, 「여행자」에서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 던진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내부를 향한 공격성의 서로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의 시집에 유난히 자기의 삶을 비관하고, 어린 나이에 이미 늙었음을 한탄하고,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죽음을 맞아들이는 태도가 팽배해 있는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그는 쉴 새 없이 죽음과 고통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죽음과 고통을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다분히 메저키즘적인 그의 발언 속에서 죽음의 의식을 치뤄간 것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그의 발언 속에서 죽음의 자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그것이 잠재의식으로 그를 "끝까지 괴롭혔을 것이(「죽은 구름」)"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웅덩이에 빠져, 자신의 꼬리를 물고 영원회귀하는 뱀(Uroboros)이 되고자 하다가, 추락해버렸다. 셋-1. 그렇다면, 그의 영락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허무의 끝간 데까지 떨어져, 심연의 고통을 맛보고 다시 떠올랐다면, 그의 시세계는 새로운 트임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는 결국, "가장 낮은 음계로 가라앉아 다시는 악보 위로 떠오르지 않았(「삼촌의 죽음」)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가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낭만적 열정을 지닌 보기드문 허무주의자이기도 하지만 결코 기적을 믿지 않는 시인이다. 시인의 시는 그러하기에 유토피아를 궁리하지도 않고, 지나간 시간의 궤적을 애써 품안에 끌어안으며 회고적 시선으로 잠기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삶이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었고 현재의 삶 역시 이에서 더 나아간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일반적인 시인이라면, 안락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형도는 안락과 평화의 공간에 스며들기보다는 자신이 위치해 있는 현실을 탐사하고 헤매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탐사와 헤맴의 과정이 철저하게 내부지향적이라는 사실이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왔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대학 시절」전문 "나는 외토리"라는 의식이 기형도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 외토리 의식이 그로 하여금 내면을 지향하게 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관망하고 저주하게 한다. 그러나, 그가 현실주의자일 수 있는 것은, 동시대의 동료시인들이 현실에 직접 맞서거나 뛰어들어가 이를테면 위의 시에서처럼 나뭇잎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면, 그는 거기서 물러나 현실을 조망하고 가늠했다는 데에 있다. 물론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는 민족해방문학이 당위였다는 조동일의 논법을 빌려, 80년대는 민중문학이, 현실참여 문학이 당위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한 논리의 연장에서 기형도의 시를 도피적 애상주의로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가 시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은 시가 가지고 있는 넓고도 깊은 상징의 숲을 바라보지 못하고 개개의 나무에 너무 쉽게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시의 상징은 현실의 고통을 가로지른다. 상징은 시가 씌어지기 힘든 시대에 자주 등장한다. 개인의 절망이 극에 달하거나 집단의 고통이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순간에는 시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쓰는 행위란 문학의 모든 행위가 그러하듯 반성적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형도 시의 상징은 좁게는 실존적 개인의 내면풍경으로부터 넓게는 한 시대의 보편적 고통의 체험까지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를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소리의 뼈] 전문 이 시는 기형도 시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내포와 외연을 지니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 외연적 의미를 추적해보면 이 시는 김교수가 소리에도 뼈가 있다고 말한 학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고 그 결과 사람들은 모든 소리들을 더 잘 듣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시를 넓은 의미에서 파악하고자 할 경우 우리는 이 시 속에서 정치적/실존적 알레고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끝까지 침묵하고 말하지 않는 김교수의 모습에서 비극적 자유의지를, 학장의 강력한 경고와 묵살된 의견에서 억압적 정치권력을, 그러나 끝끝내 더 잘 듣게 되는 소리를 통해서는 초월에의 의지까지도 함께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형도 시의 높은 상징성은 쉽게 간과되어 왔다. 더불어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형태파괴적 요소가 현실에 대한 저항의 "방법론적 비유"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형식주의가 우리에게 경고한 의도적 오류와 감정적 오류를 우리 비평이 고스란히 행하고 있었음에 다름 아니다. 셋-2. 지금까지 우리는 기형도의 시세계가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에서 쓰여진 글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한 확인은 그가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현실에 쉽게 자수하거나 유토피아에로의 열망을 불태우지 않고 방법적인 글쓰기를 계속해왔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의 그러한 방법적 글쓰기가 올바른 자리매김을 받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과 그의 시세계를 직접화시켜 낭만주의적으로 승인하는 오류가 범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가 현실 속에서 지탱해 간 시세계가 단순한 허무주의의 세계가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허무란 점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나는 그의 시 세계가 단순히 유년시절의 고통을 드러낸다는식의 정신분석을 지양하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그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 나갔는가를 밝히려 했다. 결론적으로 기형도의 시세계는 부조리한 공간 속에서 극한적 경계를 경험한 자아의 치열한 생의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생의 과정은 어떠한 환상이나 몽상도 접근하지 아니하는 치열한 현실주의의 세계이다. 그 현실주의의 세계는 시인으로 하여금 현실이 결코 아름답거나 동경으로 가득찬 세계가 아님을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그 현실주의의 세계가 그의 절망을 가중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이제 그는 어디고 정착하여 몸을 쉬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그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는 언제고 남아 변하지 않는 그의 존재를 구현하고 있다. 나는 문득 그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승에서 그는 과연 행복할 것인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중에서 ~~~~~~~~~~~~~~~~~~~~~~~~~~~~~~~~~~~~~~~~~~~~~~~~~~~~~~~~~~~~~~~~~~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中에서-김현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p.107) 어느 날 저녁, 지친 눈으로 들여다본 석간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거짓말처럼, 아니 환각처럼, 읽은 짧은 기사는, [제망매가]의 슬픈 어조와는 다른 냉랭한 어조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럴 수가 있나, 아니, 이건 거짓이거나 환각이라는 게 내 첫 반응이었다. 나는 그 시인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공적이었지만, 나는 공적으로 만나는 사람좋은 그의 내부에 공격적인 허무감, 허무적 공격성이 숨겨져 있음을 그의 시를 통해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죽었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 못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없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는 부재이지만, 머릿속에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현존이다. 말장난 같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한 힘일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서워서, 그것이 겁나서, 사람들은 그를 영구히 기억해줄 방도를 찾는다. 제일 쉬운 방도는, 기를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줄 사람을 만들어놓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기형도에게는 아이들이 없다. 그는 혼자 죽었다.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때, 그가 완전히 사라짐 속에 잠기는 것을 막이야 한다. 어쩌면, 그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완전히 사라지면, 모든 역사적 소추에서 자유스러울 것이고, 그는 우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모든 글들을, 카프카가 바란 것처럼, 다 태워 없애야 한다. 그의 글뿐만 아니라, 그 글들이 실린 모든 지면을 없애야 한다. 그것을 바랄 수는 있으나, 이룰수는 없는 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를 살리는 것이 났다. 그의 시들을 접근하기 쉬운곳에 모아놓고, 그래서 그것을 읽고 그를 기억하게 한다면, 그의 육체는 사라졌어도, 그는 죽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시가 충격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빨리 되살아나,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의 시들을 모아, 그의 시들의 방향으로 불을 지핀다. 향이 타는 냄새가 난다. 죽은 자를 진혼하는 향내 속에서 그의 육체가 나타난다. 나는 샤만이다…… 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는, 갖고 있으려 하는 한 사람의 문학비평가다. ...........................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89년 3월 7일 새별 3시 30분경, 종로 2가 한 극장 안에서 죽었다. 그의 가장 좋은 선배중의 하나였던 김훈은 “나는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극장 - 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과연 그가 선택한 것일까. 차라리 운명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 인용자) 죽음의 장소는 나를 늘 진저리 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랬동안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한 뒤에 드의 넋을 가라앉히기 위해, 원효가 사복의 어머니를 위해 부른 게송의 어조로, 침통하게 당부하고 있다. :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석어서 공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뜨고 흰 달이 뜨더냐.” 김훈의 어조를 가슴에 담고,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어보면, 그는 젊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김훈처럼 모질지가 못해, 두리뭉수리하게, 오마르카이얌의 [루바이아트]의 시 하나를 빌어, 그의 넋을 달래려 한다. 우리 모두 오고가는 이 세상은 시작도 끝도 본시 없는 법! 묻는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으리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김병옥 역) ~~~~~~~~~~~~~~~~~~~~~~~~~~~~~~~~~~~~~~~~~~~~~~~~~~~~~~~~~~~~~~~~~~ 기억할 만한 질주, 혹은 용기- 장정일 1 생에 대한 소박하고 명징한 낙관을 지니고 있었던 지중해의 철학자 쟝 그르니에는 자신의 낙관이 "죽은 자에 대한 살아 있는자의 지배,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인적인 것,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지배" ({인간에 관하여}, 청하, 1990, 175쪽) 라는 지중해 정신에 의해 제공된다고 고백하면서, 놀랍게도 그의 나이 53세 때 "내 생애의 많은 페이지가 거의 백지인 것이다"(181쪽)라고 썼다. 반면 오늘 우리가 기억해보고자 하는 기형도는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사,1989,25쪽. 이하 쪽수만 표시)와 같은 삶에 대한 무수한 부정적 전언들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대개의 시인들은 절망과 비극 을 노래할 때라도, 자신의 절망과 비극을 희석시키거나 중단시킬 희망의 영상을 함께 제시하기 마련이다. 흔히 우리가 전망이라 고 말하는 것들을. 그런데 기형도는 낙관이나 희망과 같은 향일성 가치에 대해 너무나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그의 유고시집을 읽으며 우리는 몇 번씩이나 본문 읽기를 중단하고 시집의 표지 앞날개에 적힌 그의 약력을 되읽게 된다. 대체 얼마만한 연령을 살았기에 그는 이렇듯 상처입은 시집을 남길 수 있었을까. "도둑질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18쪽)라 거나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25쪽),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38쪽) 등등 시구들 은 그가 언제 태어났고, 몇 살 때부터 (공식적인) 시쓰기를 시작했으며, 유고시집이 모두 씌여진 때는 또 언제인지 퍽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41쪽)거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 어"(49쪽),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50쪽)다는 구절을 대하곤 시집의 앞날개로 다시 돌아가 스물 다섯에 등단, 스물 아홉에 더 이상 씌어지기를 거부한 그토록 짧은 약력을 읽는다. 그런 이상한 독서를 한 독자는 그가 쓴 '검은 페이지 '에 진저리치면서 가슴속 한편으로 이런 의문을 키우게 된다. 스물아홉해의 생애는 어쩌면, 도둑질말고는 다 해보았다고 쓰기에 는 너무 과장된 연륜이 아닌가? 자연이 우리에게 명한 자기 보존이라는 대전제에 대하여 너무나 극렬하게 기형도의 시가 저항하기 때문에 독자의 그런 의심은 수긍될 만한 것이다. 하여, 자라나는 의혹을 지우기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 편의 독일 가곡 으로부터 도움받기를 원한다.   바람 부는 밤 말을 타고 달리는 아버지와 아들 그는 그 아들 품속에 안고 춥지 않도록 감싸줬네. 아가 무엇 그리 무서우냐? 오 아버지 마왕을 봐요?금관 쓰고 망토 휘둘며? 아아 그건 안개란다. 괴테의 시에다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마왕]은 이렇게 시작되며, 어린 아들이 볼 수 있는 마왕을 아버지가 보지 못하는 아이러 니는 시종 이 노래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마왕은 아이의 귀에 속삭인다. 귀여운 아가 함께 가련! 좋은 장난감 널 기다리고 수많은 꽃들 널 반기리. 아름다운 옷들 쌓여 있네. 마왕의 속삭임을 듣고 어린 아들은 한번 더 아버지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오 나의 아버지 들어보세요. 저 마왕이 내게 속삭인 말" 그러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필사적인 구조 요청을, 어리광으로 받아들인다. "조용히 진정해라 아가. 저 소린 바람 소리란다." 마왕은 유혹을 계속한다. '좋은 장난감'과 '아름다운 옷'보다 더 노골적인 유혹물로. 자 나와 함께 떠나가자. 너와 함께 놀아주기 위하여 나의 귀여운 딸이 기다리네. 너를 위해 춤추며 노래하리 너를 위해 춤추며 노래하리. 이제 어린 아들은 잔뜩 겁에 질렸다. "오 나의 아버지 저것 보세요. 저 마왕의 땀이 보여요?" 나이 많은 아버지는 마왕의 존재를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무감각한 사람이다. 그는 이성복이 어느시에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고 썼을 때, 그 '아무도'의 사람이다. 늙은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세계에 대하여 느끼는 예민한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아가 아가 저기 저것은 늙은 수양버들이 틀림없다." 끝내 아이는 저 혼자만의 공포 속에서 죽는다. 세계와의 불화를 간직한 채. 울부짖는 아기 가슴에 안고 성급히 집에 와보니 품속에 안긴 아가 죽었네. 무서운 세계와 때묻지 않은 순결을 가진 아이의 대립. 어린아이는 마왕의 존재를 볼 수 있고 그의 유혹을 들을 수 있다. 기형 도는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에 이렇게 쓴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깍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마왕]의 어린 아들과 같이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에서의 어린 아들 역시 외부 세계에 대한 불안과 다가올 성년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으며, 초자연적 힘의 실체를 깨닫고 있다. 괴테의 [마왕]에서 외부 세계나 성년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좋은 장난감','아름다운 옷','귀여운 딸'과 같은 세속적 추구물로 상징되고 초자연적 힘의 실체는 바로 '죽은'이었듯이 기형 도의 시속에서도 그런 두 갈래의 두려움이 병치된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던 그의 등단작 [안개] 속의 한 구절은 관리사회의 냉혹함과 도시생활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전문가],[조치원], [오후 4시의 희망] 같은 시를 만들면서 기형도가 어렸을 적에 느꼈던 외부, 성년 세계에 대한 공포를 구체화하고, 그의 시에 가득한 삶에 대한 부정적 영상 은 죽음이라는 무지막지한 힘의 실체를 일찍 깨닫고 있었던 예민한 어린아이의 불안을 수식하고 있다.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과 [마왕]은 어린아이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바람'이라는 자연 현상을 매개로 개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어린 아들의 대화 상대자가 한편은 '아버지'고 다른 한편은 '어머니'라는 데서 사소한 차이를 갖는다. 그러나 그 사소한 차이는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에서 인용된 위의 시구에 이어 나오는 다음의 시구에서 알게 될 것처 럼 엄청난 차이를 숨겨 가지고 있다. 기형도의 어머니는 괴테의 아버지와 같이 어린 아들의 불안과 공포에 대하여 무감각하지만 않으며, 아들의 공포와 불안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감각(?)보다 오히려 더 비극적(!)인 충고를 아들에게 한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식의 실패를 예견한다. 반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자기 자식의 성공을 강요한다. 우리는 그런 차이에 모성의 원리와 부성의 원리라는 이름을 달아줄 수 있다.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세상에 실패하면 언제든 너의 유년(/'이 겨울')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마왕]의 아버지는 말을 탄 채 아들을 품에 안 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 그 아버지는 세속에의 질주에 멀미를 느낀 아이의 불안과 공포에 무감각한 것이 아니라, 알고도 모른 체한다. 저건 '안개','바람 소리','수양버들'일 뿐이라고 시침떼며! 우리는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가 없는 '과거-현재'와의 단속적인 왕복운동만을 보는데, 기형도에게 '미래'가 없는 까닭은 또 '과거-현재'와의 단속적인 왕복운동만 있게 된 까닭은 그의 시에 부성의 원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앞으로 전 진할 동력을 잃었다. 사실 {입 속의 검은 잎}에는 "아버지 또 어디로 도망치셨는지. [...] 아버지, 불쌍한 내 장난감 "(94쪽)과 같은 식으로 밖에는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다. 되돌아가야 할 "유년의 윗목"(127쪽)을 깨끗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풍병"(80쪽)이 들어야 했고 [폭풍의 언덕]에서 "칼자국"같은 바람을 맞고 영영 "돌아오지 않"아야 했다. 결국 아버지란 부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의 희생자이면서 '칼'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이다. 유년기 동안 양친과 가족에게 의존했던 아이는 자라나면서 최초의 통합으로부터 독립, 분리되어 사회와 재통합을 시도하게 된다. 그런데 재통합 과정중에 원만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최초의 통합으로 퇴각하려 한다. 이때 재통합에 실패한 아이를 사회로 내보내는 것은 부성이고, 그것을 끌어당기는 자성은 모성에서 발원한다. 그러므로 외디푸스 콤플렉스란 프로이트가 말 하는 것과 같이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심리적, 성적 고착이 아니라 사회적 재통합에 실패한 성년이 최초의 통합을 잊지 못하고 양친, 가족으로 되돌아가려는 사회적, 감정적 고착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드라마를 기형도와 함께 활동한 8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많이 보아왔고, 그 주제에 바쳐진 평론도 있음을 기억한다. 어쨌거나 위의 문단에서 본 것과 같은 부성원리의 부재와 "그래, 고향에 가고 싶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지만/ 사과나무는 나를 사로잡았어"(920쪽)에서 간파할 수 있는 유년으로의 회귀, 모성 원리에로의 귀속이라는 특징을 기형도를 비롯한 그 또래의 젊은 시인들은 공유했다. 하지만 뒤에 설명되겠지만, 그 공유점은 너무 미미하고 기형도는 오히려 기억할 만한 괴상한 질주를 통해 한 무리의 젊은 80 년대의 시인과 상반된다. ................................. 4 특기할 만한 개성을 가졌던 시인이 요절해버렸기에, 평자들은 그가 살아 있으면서 계속 시를 썼다면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되었 을까 점쳐보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란 시를 읽고 나서 기형도의 모든 시에 이중성이라고 불 러도 좋고 자아분열이라고 불러도 좋은 강력한 양가감정이 있다는 것을 느낀 필자에게도 갑자기 점쟁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 나오는 두 자아만을 신대 삼아 판단해보자면, 창밖의 자아가 방속으로 들어가 방 가운데서 울고 있는 자아를 껴안고 함께 운다면 김소월과 같은 초혼시가 나왔으리란 생각이 들고, 울고 있던 방안의 자아가 밖으로 뛰쳐나와 창속을 들여다보던 바깥의 자아와 합세하여 텅 빈 방을 함께 쳐다보게 될 때 기형도는 [입 속 의 검은 잎]의 세계보다 더 냉혹한 모더니스트가 되었으리란 예감이 든다. 그러나 복채를 놓아줄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 기형도,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 성석제 기형도에 관한 추억을 나열하기 위해 쓴다. 태어날 때는 누구나 벌거숭이다. 자명한 이 말도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하물며 수십 년을 물과 바람이 떠미는 대로 동가숙 서가식한 사람이라면 지나친 자국마다 무엇이 고여도 고이지 않겠는가. 기형도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누군가의 친구였고 동지였고 원수 였으며 악당, 천사, 귀엽거나 끔찍한 그 무엇이었을 수 있다. 그 동안 나는 그에 관한 것이라면,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추억의 곳간에서 되도록이면 예쁜것을 모으려 했다. 이것을 살아남은 자의 권리라고, 상정(常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는 내가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을 잡담이라고 부를 것인데 자신이 이런 잡담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런 자신의 경향을 '추억에 대한 경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사정이지 내 생각은 다른 것이다. 그의 경멸은 살아 있으면서 어쩔 수 없이 채워넣을 수밖에 없는 위장과 같은 추억에 대한 자기 판단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추억이라고 말할 때는 좋거나 나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가슴이 시린, 발가락이 근지러운, 머리칼이 쭈뼛하는, 흐뭇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한, 아예 추억하기도 싫은 추억 따위처럼 분류할 수 있는 그런것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이름 붙인 추억이라는 동네, 그 동네에 존재하는 제행무상에 대한 경멸이다. 나도 어떤 추억을 경멸하긴 한다. 모든 추억에 대해서 사랑한다, 경멸한다고 단언하지 않을 따름이다. 내겐 아직 더 삭여야 할 오욕과 추억이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형도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빛나고 푸른, 아니 이 말은 틀렸다, 오만과 독선의 이빨로 서로를 물어뜯을 수 있는 대학시절을 함께 보냈다. 쉽게 말해 목욕탕에 함께 갈 수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 내가 제정신으로 여기 늘어놓을 수 있는 추억담은 아주 적다. 하얀 키보드와 바다색 모니터 화면을 앞에 두고 손을 꺾으며 내가 떠올리는 것은 기형도의 수동타자기다. 우리는 대학 시절, 학교 신문에서 공모하는 무슨 문학상을 받아 타자기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은 공통된 경험이 있다. 기형도는 나보다 먼저 상금을 타서 수동타자기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고 배부른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도 상금 받으면 먼저 책하고 타자기부터 사. 눈 딱 감고." 글쎄, 나는 상을 받기도 전, 상금은 내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술값으로 미리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에 내가 받은 상금은 그가 그 전해에 받은 것의 반이었다. 가작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충고를 잊지는 않았다. 청계천에서 그가 산 반값으로 같은 세계문학전집을 샀고 그가 산 수동타자기의 값으로 중고 전동타자기를 샀고, 어쨌든 그 타자기와 문학전집의 덕으로 나는 다음해 그보다 조금 상금이 많은 무슨 상을 받아 술값으로 마음놓고 다 써버렸다. 그때는 상금이 내 것이나 다름없다는 흰소리 따위는 하지 않고 조용히. 그와 나 둘 중에 누가 장사를 잘 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이 내가 썼으면 싶은 추억담이다. 당연히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데다 시시콜콜하다. 이에 따라 나는 기형도와 가까웠고 아직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에 관한 추억을 나누어달라고 부탁했다. 누나, 기애도 씨는 유년 시절과 집안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게으른 나를 위해 글로 옮기느라 몸살이 나고 말았다. 민망할 따름이다. 고등 학교 동창인 이상현 정대호 에게 감사한다.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신문사 후배였던 박해연이 정리해 주었다. 그 역시 글을 쓰는 동안 몸살을 앓았다고 엄살을 떨며 겁을 주었다. 대학 시절 이후의 벗들, 동료들에게도 감사한다. 사실 기형도를 추억할 수 있는 사람, 그런 권리가 충분한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가 참여했던 동인(同人)들, 선후배,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를 읽은 독자들에게도 권리가 있다. 그를 만났던 모든이에게 추억담을 들어야 하고 기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에는 참 아름다운 이름이 많다고 했다. 물빛의 수색(水色),강의 서쪽, 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인 서강(西江) 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것은 그였다. 사람의 이름이 지명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떤 이름에는 살아 있어도 그럼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에, 세월은 가고 이름은 남았다. 추억은 경멸할 만한 것이다. 그것에 먹히는 한은. 가볍게 내리는 비처럼 머리를 두드려 깨우는 추억은 아름답다. 우리가 함께 살아있는 동안. ~~~~~~~~~~~~~~~~~~~~~~~~~~~~~~~~~~~~~~~~~~~~~~~~~~~~~~~~~~~~~~~~~~~ 기형도 전집/'머물고 떠남' 못내 아쉬워… - 한겨레신문 (1999/03/02) 요절한 예술가들 중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는 `요절'이 부여하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불멸의 명성을 얻는다. 기형도(1960~89)가 그런 경우이다. 89년 3월7일 새벽 서울 종로통의 한 심야극장에서 그의 심장이 멈추었을 때, 그는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정리해 두고 있었다. 85년 신춘문예 당선작 `안개' 이후 발표한 것들에 미발표 시 15편을 더한 시집 이 나온 것이 그해 5월 말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이 쉽지 않은 시집은 스테디셀러의 상위를 고수하며 모두 20만 권이 팔려나갔다. 지금도 한 달 평균 1천~2천부씩 주문이 들어온다는 것이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쪽의 설명이다. `기형도 바람'은 단지 서점 판매대에 한정된 것은 아니어서, 특유의 암울한 세계관과 비의적인 언어의 직조는 90년대 젊은 시인들의 약호와도 같게 됐다. 기형도 사후 불과 1년여 만에 그 뒤를 따르게 되는 평론가 김현은 시집 해설에서 기형도 시의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을 지적한 다음, “나는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봐 겁난다”고 말한 바 있다. 기형도도 김현도 결국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뒤의 전개는 김현의 우려가 적절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기형도와 마찬가지로 이른 죽음을 맞으면서 유고 시집 를 남긴 진이정 같은 시인도 있었다. 물론, 90년대 젊은 시인들이 소멸과 죽음의 정조에 깊이 빠져든 것이 순전히 기형도의 영향 때문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열정과 모색의 80년대를 떠나 보낸 뒤 급격하게 찾아온 허무와 절망이 그들로 하여금 기형도에게서 좇고 싶은 모범을 발견하게 했을 터이다. 여기에다가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든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와 같은 잠언성 구절들이 지니는 감정적 호소력이 후배 시인들과 독자들 모두에게 가깝게 다가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형도의 파장은 그의 육체의 소멸 뒤에 오히려 두드러져, 1주기에는 유고 산문집 이, 5주기에는 추모문집 가 각각 그의 빈 자리를 메워 주었다. 그의 10주기에 즈음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은 과 이 두 권의 문집을 모두 담고, 새로 찾아낸 기형도의 미발표 시 20편, 단편소설 '겨울의 끝'을 덧붙였다. 주로 대학시절의 습작에서 고른 미발표 시들은 기본적으로 의 연장, 아니 예시로 볼 수 있다. 부자간의 불화와 뒤틀린 가계사를 그린 `아버지의 사진', 어쩐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라는 유명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희망'), “처음부터 우리는/손바닥에 손금을 새기듯/각기 노인의 초상 하나를 키우며/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다.”(`교환수')의 젊음 속 늙음의 강조, 물에 버려진 붕어의 아가미와 빨간 장갑으로 변하는 손목과 같은 초현실주의적 이미지 등이 그러하다. 기형도가 남긴 원고 뭉치를 뒤지는 것으로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다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뒤에 남겨진 자들을 위해 쓴 것만 같은 시를 다시 읽어 볼 일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빈 집' 전문) 최재봉 기자 ~~~~~~~~~~~~~~~~~~~~~~~~~~~~~~~~~~~~~~~~~~~~~~~~~~~~~~~~~~~~~~~~~~~ 佛전문지 '포에지' 여름호 한국시만으로 특집 제작 - 중앙일보 (1999/08/24) 한국문학 특집호로 꾸며진 프랑스 권위의 시전문지 '포에지 (Po&sie.책임편집위원 미셀 드기) 여름호 (통권 88호) 를 통해 소개된 한국문학이 프랑스 문학인에게서 주목할 만한 반응을 얻고 있다. 미셀 드기와 함께 프랑스 문학계의 저명한 시인으로 꼽히는 필립 자코테는 최근 '산정묘지' 의 시인 조정권씨에게 "당신 시를 읽고 내가 받은 감명을 전달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며 편지를 보내왔다. 현지 출판사를 통해 팩스로 전달된 이 편지는 "당신의 '산정묘지' 연작에 내가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 지, 지금처럼 나의 내부가 위기 가운데 있을 때 이런 우연한 만남으로 내가 얻은 힘은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다" 면서 "우리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내가 지난 포에지 80호에서 당신 시를 읽은 것 말고는 당신은 내게 아주 낯선 사람인데, '포에지' 가 내게 이런 느닷없는 기쁨을 준다" 고 썼다. 편지에서 보듯, 조정권 시인의 시가 '포에지' 에 실리기는 이번이 두번째. 지난 97년 창간20주년 기념 포에지 80호에 한국인 유학생 김희균씨의 번역으로 옥타비오 파스 등 세계적 시인들의 시와 함께 처음 실렸다. 조씨의 시에 대한 프랑스 시인들의 좋은 반응은 이후 미셀 드기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초청으로 내한해 한국문학을 직접 접한 것과 함께 이번 한국문학 특집호 기획의 주요 계기가 됐다. 이번 특집호 포에지에 소개된 한국시인은 이상.김춘수.고은. 황동규. 정현종. 이승훈. 조정권. 이성복. 최승호. 송찬호. 남진우. 기형도 등 12명. 포에지가 77년 창간 이후 외국시만으로 특집을 꾸미기는 이번이 처음. 또한 국내재단의 출판비 지원이 전혀 없이 이뤄진 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조정권씨는 "정신의 힘에서 우러나는 한국시의 광활한 힘을 제대로 옮긴 번역 덕분" 이라고 공을 돌리면서도 "간간히 번역된 필립 자코테의 시를 읽고 좋아했던 터라 더욱 기쁘다" 고 말했다. 포에지측은 출간 직후 오를레앙에서 현지인들만으로 시 낭송회를 가진 데 이어 편집위원들이 내한, 오는 10월 8일 프랑스대사관.대산문화재단주최로 수록시인들이 직접 참가하는 낭송회를 갖고 내년 가을에는 기형도전집도 번역출간할 예정이다. 이후남 기자  
133    에이츠시 모음 댓글:  조회:611  추천:0  2022-10-10
에이츠시 모음   이니스프리 호수 섬 흰새들 죽음 오랜 침묵 후에 버드나무 정원에서 그대 늙었을때 방황하는 인거스의 노래 술노래 하늘의 융단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레다와 백조 쿠울호의 백조 둘째 트로이는 없다 유리 구슬 학생들 사이에서 내 딸을 위한 기도 1916년 부활절 육신과 영혼의 대화 비잔티움 벌벤산 아래 긴다리 소금쟁이 ~~~~~~~~~~~~~~~~~~~~~~~~~~~~~~~~~~~~~~~~~~~~~~~~~~~~~~~~~~ 이니스프리 호수 섬 나는 일어나 지금 갈거야, 이니스프리로 갈거야, 조그마한 오두막을 거기에 지을거야, 진흙과 나뭇가지로. 콩을 아홉 이랑 심고, 꿀벌도 한 통 칠거야, 그리고 벌소리 잉잉대는 숲에서 홀로 살거야. 나는 거기서 평화로울 거야, 왜냐면 평화는 천천히, 아침의 장막을 뚫고 귀뚜리 우는 곳으로 천천히 오니까. 거기는 한 밤은 항상 빛나고, 정오는 자주빛을 불타고, 저녁은 홍방울새 소리 가득하니까. 나는 일어나 지금 갈거야, 왜냐면 항상 밤낮으로 호수물이 나지막이 찰싹이는 소리가 들리니까. 나는 차도 위나 회색 보도 위에 서 있는 동안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소리가 들린다. ~~~~~~~~~~~~~~~~~~~~~~~~~~~~~~~~~~~~~~~~~~~~~~~~~~~~~~~~ 흰새들 애인이여, 나는 바다 물거품 위를 나는 흰 새가 되고 싶구려! 사라져 없어지는 유성의 불길엔 싫증이 나고, 하늘까에 나직이 걸린 황혼의 푸른 별의 불길은, 애인이여, 꺼질 줄 모르는 슬픔을 우리의 마음에 일깨워 주었소. 이슬 맺힌 장미와 백합, 저 꿈과 같은 것들에게선 피로가 오오. 아 애인이여, 그것들, 사라지는 유성의 불길은 생각지 맙시다. 그리고 이슬질 무렵 나직이 걸려 머뭇거리는 푸른 별의 불길도, 왜냐하면, 나는 떠도는 물거품 위의 흰 새가 되었으면 하니, 그대와 나는! 나는 수많은 섬들, 그리고 많은 요정의 나라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오. 그곳에선 분명 시간이 우리를 잊을 것이고, 슬픔도 더 이상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며, 곧 장미와 백합, 그리고 불길의 초조함에서 벗어날 것이오. 애인이여, 우리 다만 저 바다의 물거품 위를 떠도는 흰 새나 된다면 오죽 좋겠소. ~~~~~~~~~~~~~~~~~~~~~~~~~~~~~~~~~~~~~~~~~~~~~~~~~~~~~~ 죽음 두려움도 바램도 죽어가는 동물에 임종하지 않지만, 인간은 모든 걸 두려워하고 바라며 최후를 기다린다. 그는 여러 차례 죽었고 여러 차례 다시 일어났다. 큰 인간은 긍지를 가지고 살의(殺意) 품은 자들을 대하고 호흡 정치 따위엔 조소(嘲笑)를 던진다. 그는 죽음을 뼈 속까지 알고 있다 - 인간이 죽음을 창조한 것을. ~~~~~~~~~~~~~~~~~~~~~~~~~~~~~~~~~~~~~~~~~~~~~~~~~~~ 오랜 침묵 후에 오랜 침묵 후에 하는 말 - 다른 연인들 모두 멀어지거나 죽었고 무심한 등불은 갓 아래 숨고 커튼도 무심한 밤을 가렸으니 우리 예술과 노래의 드높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함이 마땅하리. 육체의 노쇠는 지혜, 젊었을 땐 우리 서로 사랑했으나 무지했어라. ~~~~~~~~~~~~~~~~~~~~~~~~~~~~~~~~~~~~~~~~~~~~~~~~~~~~~~~~~~~ 버드나무 정원에서 버드나무 정원에서 그녀와 나 만났었네. 눈처럼 흰 작은 발로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며 그녀는 내게 일러주었지. 나뭇가지에 잎이 자라듯 사랑을 수월히 여기라고. 그러나 난 젊고 어리석어 그녀의 말 들으려 하지 않았네. 강가 들판에서 그녀와 나 서 있었네. 기대인 내 어깨 위에 눈처럼 흰 손을 얹으며 그녀는 내게 일러주었지. 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수월히 여기라고. 그러나 젊고 어리석었던 나에겐 지금 눈물만 가득하네. ~~~~~~~~~~~~~~~~~~~~~~~~~~~~~~~~~~~~~~~~~~~~~~~~~~~~~~~~~ 그대 늙었을 때 그대 늙어 백발이 되어 졸음이 자꾸 오고 벽로 가에서 고개를 끄떡끄떡할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그대 눈이 옛날 지녔던 부드러운 눈동자와 그 깊은 그림자를 꿈꾸어라 ;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의 즐거운 우아의 순간을 사랑했으며, 또 그대의 미를 참사랑 혹은 거짓사랑으로 사랑했던가를,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그대의 편력하는 영혼을 사랑했고, 그대의 변해가는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었음을; 그리고 달아오르는 쇠살대 곁에 몸을 구부리고서, 좀 슬프게 중얼대어라, 어떻게 사랑이 산 위로 하늘 높이 도망치듯 달아나 그의 얼굴을 무수한 별들 사이에 감추었는가를. ~~~~~~~~~~~~~~~~~~~~~~~~~~~~~~~~~~~~~~~~~~~~~~~~~~~~~~~~~~~~ 방황하는 인거스의 노래 내 머리 속에 불이 붙어 개암나무 숲으로 갔었지. 개암나무 한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딸기 하나를 낚싯줄에 매달았지. 흰 나방들이 날고 (아마 이 구절인 듯) 나방 같은 별들이 깜빡일 때 나는 시냇물에 딸기를 담그고 작은 은빛 송어 한 마리를 낚았지. 나는 그것을 마루 위에 놓아 두고 불을 피우러 갔었지. 그런데 마루 위에서 무엇인가가 바스락거리더니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지. 그것은 머리에 사과꽃을 단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가 되어 내 이름을 부르며 달아나 빛나는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나 비록 골짜기와 언덕을 방황하며 이제 늙어 버렸지만 그녀가 간 곳을 찾아 내어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고 손을 잡고서 얼룩진 긴 풀밭 속을 걸어 보리라. 그리고 시간이 다할 때까지 따보리라. 저 달의 은빛 사과를 저 해의 금빛 사과를... ~~~~~~~~~~~~~~~~~~~~~~~~~~~~~~~~~~~~~~~~~~~~~~~~~~~~~ 술노래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내 그대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 ~~~~~~~~~~~~~~~~~~~~~~~~~~~~~~~~~~~~~~~~~~~~~~~~~~~~ 하늘의 융단 만일 나에게 하늘의 융단이 있다면 금빛과 은빛으로 짠, 낮과 밤과 어스름의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천으로 짠.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 허나 가난한 나는 꿈밖에 없어 그대 발 밑에 꿈을 깔았습니다.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잎이 많아도 뿌리는 하나입니다. 내 청춘의 거짓 많던 시절에는 태양 아래서 잎과 꽃을 흔들었건만 이제는 나도 진실 속에 시들어 갑니다. ~~~~~~~~~~~~~~~~~~~~~~~~~~~~~~~~~~~~~~~~~~~~~~~~~~~~~~~~ 레다와 백조 별안간의 강한 휘몰아침. 커다란 날개들이 아직 비틀거리는 소녀 위에서 퍼덕이고, 그녀의 허벅지는 검은 물갈퀴로 애무되고, 목은 그의 부리에 잡혀 있을 때, 그는 그녀의 무력한 가슴을 자기 가슴에 껴안는다. 어떻게 놀라고 모호한 그 손가락들이 밀어내겠는가 그녀의 느슨해지는 허벅지에서 깃털달린 영광을? 어떻게 그 하얀 물풀 속에 눕혀진 육체가 느끼지 않을 수 있으리 낯선 심장의 고동을? 허리의 떨림이 거기에 낳는다 파괴된 담, 불타는 지붕 그리고 탑과 아가멤논의 죽음을. 그렇게 잡혀서, 하늘의 그 야만적인 피에 지배되었을 때, 그녀는 그의 힘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받았는가 그 무관심한 부리가 그녀를 놓아주기 전에? ~~~~~~~~~~~~~~~~~~~~~~~~~~~~~~~~~~~~~~~~~~~~~~~~~~~~~~~~~ 쿠울호의 백조 나무들은 가을의 아름다움에 싸여 있고, 숲 속의 오솔길은 메말랐다, 시월의 황혼 아래 호수물은 잔잔한 하늘을 비춘다, 솔 사이로 넘치는 물 위에는 쉰아홉 마리의 백조가 있다. 열아홉 째 가을이 나에게 왔다 내가 처음 세기 시작한 이래. 나는 내가 잘 끝내기도 전에, 모두 갑자기 올라가 부서진 커다란 고리 모양으로 선회하며 요란한 날개소리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빛나는 생물들을 보아왔고, 이제 내 마음을 쓰리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황혼녘에, 이 호숫가에서 처음, 내 머리 위로 그들의 날개짓 소리 들으며 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던 이후로. 여전히 지치지 않고, 연인끼리, 그들은 사귈만한 찬물에서 노닥거리거나 하늘로 올라간다. 그들의 마음은 늙지 않았다. 정열과 정복심이, 그들이 어딜 가든, 여전히 그들에겐 있다. 지금 그들은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다, 시비롭고, 아름답게. 어떤 물풀 속에 그들은 세울까, 어떤 호숫가나 연못가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까 내가 어느날 잠깨어 그들이 날아가버린 것을 발견할 때? ~~~~~~~~~~~~~~~~~~~~~~~~~~~~~~~~~~~~~~~~~~~~~~~~~~~~~~~~ 둘째 트로이는 없다 왜 내가 그녀를 책망해야 하나 그녀가 내 생애를 고통으로 채운 것을, 또는 그녀가 최근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가르친 것을, 또는 작은 거리들을 큰 거리로 내던진 것을, 만일 그들이 욕망에 상응하는 용기를 가졌다면? 무엇이 그녀를 평화롭게 할 수 있었을까, 고상함이 불처럼 단순케 한 마음과, 이런 시대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종류인, 팽팽히 당겨진 활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를, 만일 그녀가 높고 외롭고 매우 엄격했다면? 아니, 무엇을 그녀가 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오늘날의 그녀였다면? 또 하나의 트로이가 있었단 말인가 그녀가 불태워 버릴 ? ~~~~~~~~~~~~~~~~~~~~~~~~~~~~~~~~~~~~~~~~~~~~~~~~~~~~~~~~~ 유리 구슬 나는 들었다 병적으로 흥분한 여인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들은 팔레트와 바이올린 활과, 항상 명랑한 시인들에 넌더리가 난다고, 왜냐면 모든 이들은 알거나 알아야 하기에 만일 근본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비행기와 비행선이 나와서, 빌리 왕처럼 폭탄을 떨어뜨려 도시가 납작하게 두드려 맞을 것이기에. 모두가 자신의 비극을 연출한다, 저기 햄릿이 활보하고, 리어가 있고, 저건 오필리아, 저건 코델리아, 그러나 그들은, 만일 마지막 장면이 되어, 커다란 무대 장막이 내려지려 하더라도, 극 중의 그들의 뚜렷한 역할이 가치가 있다면, 울느라고 대사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고 있다 햄릿과 리어가 명랑하고, 명랑함이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모든이들이 목표했고, 발견했고 그리고 잃었다. 무대 소등. 머리 속으로 빛내며 들어오는 천국, 최대한도로 진행된 비극. 비록 햄릿이 천천히 거닐고 리어가 분노해도, 수십만 개의 무대 위에서 모든 무대 장막이 동시에 내려진다 해도, 그것은 한 인치도, 한 온스도 자랄 수 없다. 그들은 왔다, 그들 자신의 발로 걸어서, 배를 타고, 낙타를 타고, 말을 타고, 당나귀를 타고, 노새를 타고, 옛 문명들이 칼로 죽임을 당할 때. 그 후 그들과 그들의 지혜는 파괴되었다. 대리석을 청동처럼 다루었던, 바다 바람이 그 구석을 쓸어갈 때 올라가는 듯이 보이는 휘장을 만들었던, 칼리마커스의 수공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가냘픈 종려나무 줄기 같은 모양의 그의 긴 등갓은 단 하루만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세우는 자들은 명랑하다. 두 중국인이, 그들 뒤엔 또 한 사람이, 유리 구슬에 새겨져 있다, 그들 위로는 장수의 상징인, 다리 긴 새가 날아간다. 세번째 사람은, 분명히 하인인데, 악기를 가지고 간다. 돌의 모든 얼룩이, 우연히 생긴 틈이나 움푹한 곳이, 물줄기나 사태처럼 보인다, 아니면 아직도 눈내리는 높은 비탈처럼 보인다, 비록 분명히 오얏이나 벗나무인 가지가 그 중국인들이 올라가고 있는 곳의 중간 쯤에 있는 작은 집을 기분좋게 하지만, 그리고 나는 즐거이 상상한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있는 것을, 거기에, 산과 하늘 위에, 그들이 바라보는 모든 비극적인 경치 위에. 한 사람이 구슬픈 곡조를 요청하자, 능숙한 손가락들이 연주하기 시작한다. 많은 주름 속의 그들의 눈, 그들의 눈, 그들의 오랜, 빛나는 눈은, 즐겁다. ~~~~~~~~~~~~~~~~~~~~~~~~~~~~~~~~~~~~~~~~~~~~~~~~~~~~~~~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질문하며 긴 교실을 걸어간다. 흰 두건을 쓴 친절한 노 수녀가 대답한다. 아이들은 배웁니다 셈하기와 노래하기, 독본과 역사를 공부하기, 재단하기와 재봉하기를, 모든 면에서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잘하기를--아이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놀라서 응시한다 육십세의 미소짓는 공직자를. II 나는 꿈꾼다 꺼져가는 불 위에 웅크린 레다의 육체를, 그녀가 말한 어떤 어린 시절을 비극으로 변하게 한 거친 책망이나, 사소한 사건의 이야기를-- 들었지, 그러자 우리의 두 본성은 섞이는 듯했다 젊은이 특유의 공감 때문에 한 구체로, 아니, 플라톤의 비유를 바꾸어 말하자면, 한 껍질 속의 노른자와 흰자로. III 그리고 슬픔이나 분노의 그 발작을 생각하며 나는 거기 있는 이 아이 저 아이를 바라보고 궁금해한다 그녀도 그 나이에 저랬을까 하고-- 왜냐면 백조의 딸들이라도 모든 물새들의 유산을 조금은 공유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리고 뺨이나 머리에 저 색깔을 지녔었을까 하고, 그러자 내 마음은 미칠 듯했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실물과 같은 아이로. IV 그녀의 현재의 영상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 십오세기의 손가락들이 그것을 만들었나 마치 바람을 마시고 고기 대신 한 접시의 그림자를 먹은 듯 뺨이 훌쭉하게? 그리고 나는 결코 레다의 종류는 아니지만 한 때 예쁜 깃털을 가졌었다--그것이면 충분하다, 미소짓는 모든 이에게 미소짓고, 보여주는 게 나으리라 편안한 종류의 늙은 허수아비가 있음을. V 어떤 젊은 어머니가, 생식의 꿀이 드러내어, 회상이나 그 약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잠자고, 고함치고 고망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형체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자신의 아들을, 만일 그녀가 그 머리 위에 육십이나 그 이상의 겨울을 얹은 그 형체를 보기만 한다면, 그의 출산의 고통이나 그를 세상에 내보낼 때의 불확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할까? VI 플라톤은 자연이 사물들의 희미한 모형 위에 떠도는 거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견실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질을 했다 왕 중 왕의 궁둥이 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금-허벅지의 피타고라스는 바이올린 활대나 줄을 손가락으로 연주했다 별이 노래하고 무심한 시신들이 들은 것을. 새를 쫒아버리는 낡은 막대기 위의 낡은 옷들일 뿐이다. VII 수녀들가 어머니들은 상들을 숭배한다, 촛불들이 밝히는 것들은 어머니의 환상을 활기차게 하는 것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대리석이나 청동의 평온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들도 가슴을 찢는다--오 정열, 경건, 아니면 애정이 알고 천상의 모든 영광을 상징하는 존재들이여-- 오 인간의 일을 조롱하는 스스로 태어난 자여. VIII 노동은 육체가 영혼을 즐겁게 하려고 상처입지 않는 곳에서 꽃피거나 춤춘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의 절망에서 생기지 않고, 흐린 눈의 지혜는 한밤의 기름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 밤나무여, 크게-뿌리박은 꽃피우는 자여, 그대는 잎인가, 꽃인가, 아니면 줄기인가? 오 음악에 맞춰 흔들린 육체여, 오 반짝이는 시선이여, 어떻게 우리는 무용수와 춤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 내 딸을 위한 기도 폭풍우가 한 번 더 불고 있으나 이 요람 덮개와 이불 아래 반 쯤 덮혀 내 아이는 잠잔다. 그레고리의 숲과 헐벗은 동산 하나 외에는 장애물이 없다 거기에 대서양에서 생긴 바람이 머물 수 있다. 건초더미와 지붕을 납작하게 만드는 바람이, 한 시간 동안 나는 걸으며 기도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큰 어둠 때문에. 나느 한 시간을 걸으며 기도했다 이 어린 아이를 위해 그리고 바다바람이 탑 위에서, 다리의 아치 아래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물이 불은 냇물 위의 느름나무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흥분된 환상 속에서 미래의 세월이 도래했다고 상상했고, 바다의 살인적인 순진에서 나온 격노한 북소리에 맞추어 춤추었다. 선택받은 헬렌은 삶이 단조롭고 무료함을 발견했고 후에 한 멍청이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물보라에서 태어난 그 위대한 여왕은, 아버지가 없었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안짱다리 대장장이를 남편으로 골랐다. 멋진 여인이 그들의 고기와 함께 미치게 하는 샐러드를 먹는 것은 확실하다 그로 인하여 풍요의 뿔은 망쳐진다. 예절에 있어서는 그녀가 주로 배웠으면 한다, 마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름답지 만은 않은 사람들이 수고해 얻는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 바보짓을 한 많은 사람들을 매력이 현명하게 했다, 헤매고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생각한 많은 불쌍한 사람들은 즐거운 친절에서 자신의 눈길을 돌릴 수 없다. 그녀의 모든 생각이 홀방울새처럼 되도록 그녀가 꽃피는 숨은 나무가 되기를, 그 소리의 관대함을 나누어 주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은 하지 않기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면 추격을 시작하지 않기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면 싸움을 시작하지 않기를. 오 그녀가 한 사랑스런 영속적인 장소에 뿌리박은 어떤 푸른 월계수처럼 살기를. 내 마음은, 내가 사랑했던 마음들 때문에, 내가 인정했던 종류의 아름다움 때문에, 조금밖에 번창하지 않고, 최근엔 메말라버렸다, 그러나 증오로 목 메이는 것이 모든 악운 중에서 최고라는 것을 안다. 마음에 증오가 없다면 바람의 습격과 공격이 홍방울새를 잎사귀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지적인 증오가 가장 나쁘다, 그러니 그녀로 하여금 의견은 저주받은 것이라고 생각케하라. 풍요의 뿔의 입에서 태어난 가장 사랑스런 여인이, 그녀의 완고한 정신 때문에 그 뿔과 조용한 본성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모든 선을 분노한 바람이 가득한 풀무와 맞바꾸는 것을 나는 보지 않았던가? 모든 증오가 여기에서 쫒겨나고, 영혼이 근본적인 순결을 회복하고 드디어 그것은 스스로 기쁘게 하고, 스스로 달래고, 스스로 위협한다는 것과, 그 자체의 감미로운 뜻이 하늘의 뜻이라는 알게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녀는, 비록 모든 얼굴들이 지푸리고 모든 바람부는 지역이 고함치거나 모든 풀무가 터져도, 여전히 행복하리라. 그녀의 신랑이 그녀에게 집을 가져오기를 그곳에선 모든 것이 익숙해져 있고, 의식적인 그런 집을, 왜냐면 거만과 증오는 대로에서 사고파는 물건들이니. 어떻게 단지 관습과 의식에서만 순진과 아름다움이 태어나는가? 의식은 풍요의 뿔의 이름이고, 관습은 널리 퍼지는 월계수의 이름이다. ~~~~~~~~~~~~~~~~~~~~~~~~~~~~~~~~~~~~~~~~~~~~~~~~~~~~~~~~~~~~~ 1916년 부활절 나는 잿빛 십팔세기의 집들 가운데서 계산대나 책상으로부터 활기찬 얼굴로 다가오는 그들을 낮이 끝날 때 만났다 나는 지나갔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예의바른 별 뜻없는 말을 하거나 잠시 머물러 별 뜻없는 말을 하거나 하곤,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과 내가 광대옷을 입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클럽의 난로에 둘러 앉아 있는 친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농담이나 조롱을 끝마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고,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고. 그 여인의 낮들은 보내졌다 무지한 선의 가운데, 그녀의 밤들은 토론 가운데 보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질 때까지. 그녀가 젊고 아름다울 때, 말타고 사냥개를 쫓을 때, 어떤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보다 감미로왔는가? 이 남자는 학교를 경영했고 우리의 날개달린 말을 탔다, 이 사람은 그의 조력자이자 친구로 한창 본령을 발휘하고 있었다, 결국 명성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그의 본성은 지극히 민감해 보였고, 그의 생각은 지극히 대담하고 감미로워 보였으므로. 이 사람은 내 생각에 술주정뱅이고, 허영심 강한 촌놈이었다. 그는 매우 심한 나쁜 짓을 했다 내 마음에 가까운 누군가에게, 그러나 나는 그를 노래 속에 넣어준다, 그도, 또한, 이 우연한 희극에서 자기 역할을 그만두었다, 그도, 또한, 자기 차례가 되어 변했다, 완전히 변형되었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 가지 목적만 가진 사람들은 매혹되어 돌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강물을 괴롭히기 위하여. 길에서 오는 말, 말탄 자, 구름에서 휘모는 구름으로 날아가는 새들, 순간순간 그들은 변한다, 냇물에 비친 구름 그림자는 순간순간 변한다, 말발굽이 물가에서 미끄러지고, 말은 그 속에서 텀벙거린다, 다리가 긴 붉은 뇌조들이 잠수하고, 암컷들은 수컷들을 부른다, 순간순간 그들은 살아가고. 그 돌은 이 모든 것 가운데 있다. 너무 오랜 희생은 마음을 돌로 만들 수 있다. 오 언제면 충분할까? 그건 하늘의 몫이다, 우리 몫은 마음대로 뛰놀던 사지에 마침내 잠이 닥쳐왔을 때,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부르듯이, 이름들이나 중얼거리는 것, 그것이 황혼이 아니고 무엇이오? 아니, 아니, 밤이 아니라 죽음이오. 그건 결국 필요없는 죽음이었나? 왜냐면 행해지고 말해진 모든 것에 대해 영국은 신의를 지킬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그들의 꿈을 안다, 충분하다 그들이 꿈꾸었고 죽었다는 것만 알면, 긜고 과도한 사랑이 그들이 죽을 때가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으면 어떻소? 나는 그것을 시로 쓴다-- 맥도너와 맥브라이드 그리고 코놀리와 퍼스는 지금과 장래에 녹색 옷이 입어지는 곳 어디서나,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 육신과 영혼의 대화 영혼: 나는 굽이도는 옛 계단으로 부른다, 너의 마음을 모두 가파른 오르막에, 부서지고 무너지는 성벽에, 호흡없는 별빛 비친 공기에, 숨은 극을 표시하는 별에 집중하라고. 헤매는 모든 생각을 모든 생각이 다해버린 그 지역에 고정하라고. 누가 어둠과 영혼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육신: 내 무릎 위의 그 신성한 칼은 사토의 옛 칼로 여전히 예전과 같다, 여전히 날리 예리하고, 여전히 거울같고 긴 세월에 의해 얼룩지지 않았다. 그 꽃무니, 비단의 옛 장식은, 어떤 궁정여인의 옷에서 찢어내어져 그 나무칼집을 묶어 싸고 있는데, 해어졌으나 여전히 보호할 수 있고, 빛바랬으나 장식할 수 있다. 영혼: 왜 인간의 상상은 전성기를 한창 지나서 사랑과 전쟁을 상징하는 것들을 기억해야 하는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밤을 생각하라, 다만 상상이 대지를 경멸하고 지성이 그것이 이것 저것으로 또 다른 것으로 헤맴을 경멸하기만 한다면, 죽음과 탄생의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그 밤을. 육신: 몬타시기, 그의 가족의 셋째가, 그것을 만들었다 오백년 적에, 그 주변에는 어떤 자수인지 나는 모르는--진홍빛의-- 꽃들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밤을 상징하는 탑에 대한 낮의 상징으로 놓는다, 그리고 군인의 권리에 의한 것처럼 그 죄를 한 번 더 범할 특권을 요구한다. 영혼: 그 지역의 그러한 충만함은 넘쳐흘러 정신의 웅덩이에 떨어져 사람은 귀멀고 말못하고 눈이 먼다, 왜냐면 지성은 더 이상 구별하지 못하기에 존재와 당위를, 주체와 대상을-- 다시 말하여, 하늘로 올라가기에, 단지 죽은 자들만이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걸 생각할 때 내 혀는 돌이 된다. II 육신: 산 사람은 눈멀어 자신의 배설물을 마신다. 도랑이 불결하면 어때? 내가 그 모든 것을 한 번 더 살면 어때? 자라는 노고를, 소년시절의 치욕을, 어른으로 바뀌는 소년시절의 슬픔을, 자신의 어색함을 직면하게 된 끝나지 않은 사람과 그의 고통을 참아내면 어때? 적들에게 둘러싸인 끝난 사람을 참아내면 어때?-- 도대체 어떻게 그가 마침내 저 형상이 자신의 형상이라고 생각하도록 악의에 찬 눈들의 거울이 자신의 눈들 위에 던져준 저 더럽고 일그러진 형상을 피할 수 있는가? 명예가 그를 겨울의 강풍 속에서 발견할 때 도망이 무슨 소용있는가? 나는 이 모든 것을 다시 하는데 만족한다 그리고,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때리는 눈먼 사람의 시궁창의 개구리 알 속으로, 가장 비옥한 시궁창 속으로, 만일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혈족이 아닌 오만한 여인에게 구애하면 그가 행하거나 겪어야만 하는 그 어리석음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삶이라 해도, 나는 또 다시 사는데 만족한다. 나는 행동이나 생각에 있어서의 모든 사건을 그 원천까지 추구하는 데, 운명을 헤아리는 데, 내 자신에게 그 운명을 허용하는 데 만족한다, 내가 이렇게 후회를 내버려서 매우 큰 감미로움이 가슴 속으로 흘러들 때 우리는 웃고 노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에 의해 축복받았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축복받았다. ~~~~~~~~~~~~~~~~~~~~~~~~~~~~~~~~~~~~~~~~~~~~~~~~~~~~~~~~~~~~~~~~ 비잔티움 낮의 정화되지 않은 상들이 물러난다. 황제의 술취한 병사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밤의 메아리도, 밤-보행자의 노래도 대 성당의 큰 종이 울린 후에는 물러난다. 별빛이나 달빛 비친 둥근 지붕은 경멸한다 인간인 모든 것을, 다만 복잡하기만 한 모든 것을, 인간 혈관의 격노와 오욕을. 내 앞에 상이 떠다닌다, 인간인지 허깨비인지, 인간이라기 보다는 허깨비이고, 허깨비라기 보다는 상인. 왜냐면 미이라의 옷에 감긴 하계의 실꾸리가 구불구불한 길을 풀어 놓을 지도 모르니, 습기도 없고 호흡도 없는 입을 호흡없는 입들이 소환할지도 모르니, 나는 환영한다 그 초인을, 나는 그것을 삶-속의-죽음과 죽음-속의-삶이라 부른다. 기적이, 새나 황금 세공품이, 새나 수공품이라기 보다는 기적이, 별빛 비친 황금 가지에 얹혀서, 하계의 수탉처럼 울 수 있거나, 달빛에 격분하여 큰 소리로 경멸할 수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금속을 찬양하여 보통의 새나 꽃잎을 그리고 오욕과 피의 모든 복잡한 것들을. 한밤에 황제의 포도 위에는 날아다닌다 나무도 공급하지 않고, 부싯돌도 부치지 않고, 폭풍우도 방해하지 않는 불꽃들이, 불꽃에서 나온 불꽃들이, 거기로 피에서 나온 영혼들이 오고 격노의 모든 복잡한 것들이 떠난다, 춤 속으로 황홀한 고뇌 속으로 소매도 그을릴 수 없는 불꽃의 고통 속으로 죽어간다. 돌고래의 오욕과 피에 걸터앉아 영혼이 줄지어 온다. 용광로들이 홍수를 부순다, 황제의 황금 용광로들이! 무도장 바닥의 대리석들이 복잡한 것의 격렬한 격분을 부순다, 여전히 새로운 상들을 낳는 그 상들을, 그 돌고래에 찢긴, 그 큰 종의 괴롭힘을 받은 바다를. ~~~~~~~~~~~~~~~~~~~~~~~~~~~~~~~~~~~~~~~~~~~~~~~~~~~~~~~~~~~~~~ 벌벤산 아래 아틀라스의 마녀가 알고 있었고, 말했고, 닭들을 울게 했던 마레오틱 호수 주변에서 성자들이 말한 것을 걸고 맹세하라. 안색과 모습이 초인임을 증명하는 그 말탄 자들, 그 여인들을 걸고 맹세하라, 그 창백하고 얼굴 긴 동료 불멸의 그 태도를 그들의 완전한 정열이 성취했음을. 이제 그들은 겨울 새벽을 타고 간다 벌벤 산이 경치를 보여주는 곳에서. 여기 그들이 뜻하는 바의 요점이 있다. II 여러 번 사람은 살고 죽는다 종족의 그것과 영혼의 그것인, 그의 두 영원 사이에서, 옛 아일랜드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사람이 자기 침대에서 죽든 아니면 장총이 그를 죽게 하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짧은 이별은 사람이 두려워해야 하는 최악이다. 비록 무덤-파는 자들의 노고는 오래고, 그들의 삽이 날카롭고, 그들의 근육이 강하더라도, 그들은 다만 그들이 매장한 사람을 인간의 마음 속으로 다시 되밀어 넣을 뿐이다. III "우리 시대에 전쟁을 보내주소서, 오 주여!"라는 미첼의 기도를 들은 당신은 모든 말들이 말해지고, 한 사람이 미쳐서 싸울 때, 무언가가 오랫동안 멀었던 눈에서 떨어지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의 편파적인 마음을 응시하고, 잠시 편안히 서서, 큰 소리로 웃는다, 그의 마음은 평온하다. 가장 현명한 사람조차도 긴장한다 어떤 종류의 격렬함으로 그가 운명을 완수하거나 자신의 일을 알거나, 짝을 고를 수 있기 전에는. IV 시인과 조각가는, 일을 한다, 시류를 따르는 화가로 하여금 그의 위대한 선조들이 한 것을 피하도록 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영혼을 신에게로 가져가고, 그로 하여금 요람을 옳게 채우도록 한다. 도량법이 우리 이론을 일으켰다, 힘찬 이집트인이 생각한 형체들을, 보다 점잖은 피디어스가 만든 형체들을, 미켈란제로는 시스틴 성당 지붕에 증거를 남겼다, 거기선 단지 반쯤 잠깬 아담이 지구에 거니는 마담을 혼란케할 수 있다 그녀의 내장이 열받을 때까지, 은밀히 작용하는 마음 앞에 놓인 목적이 있다는 증거이다. 인류의 세속적 완성이다. 십오세기는 신이나 성자의 배경으로 영혼이 편안히 쉬고 있는 정원을 그림으로 그렸다, 거기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꽃과 풀과 구름없는 하늘이, 잠꾸러기들이 깨었으나 여전히 꿈꿀 때, 그리고 단지 침대와 침대틀만 거기 남아 있고, 그것이 사라졌으나 천국이 열렸다고 여전히 선언할 때, 존재하거나 보이는 형체들을 닮았다. 가이어들은 계속 회전한다, 보다 위대한 그 꿈이 사라졌을 때 칼버트와 윌슨, 블레이크와 클로드는, 신의 국민들을 위한 휴식을 준비했다, 팔머의 말로, 그러나 그 후 우리 생각에 혼돈이 일어났다. V 아일랜드 시인들이여, 당신네의 일을 배우시오, 잔 만들어진 것은 무엇이든 노래하시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형체에서 나온 모든 것 지금 자라고 있는 종류의 것을 경멸하시오, 그들의 기억않는 가슴과 머리는 미천한 침대에서 미천하게 난 산물이오. 농부를 노래하시오, 그리고 그 다음엔 어렵게 말타는 시골 신사를, 수도승들의 성스러움을, 그리고 그 후엔 흑맥주 술꾼들의 요란한 웃음을 노래하시오, 일곱 영웅적인 세기 동안에 땅 속에 매장된 명랑한 귀족과 귀부인들을 노래하시오, 당신의 마음을 지난날에 던지시오 우리가 다가오는 시대에도 여전히 불굴의 아일랜드 인이 되도록. VI 헐벗은 벌벤 산 정상 아래 드럼클리프 묘지에 예이츠가 누워 있다. 조상 한 분은 그곳의 목사였다 오래 전에, 교회가 가까이에 서 있다, 길 옆에 한 오래된 십자가. 대리석도, 전통적인 구절도 없다, 가까운 곳에서 채석된 석회암에 그의 명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삶에, 죽음에. 말탄 자여, 지나가거라! ~~~~~~~~~~~~~~~~~~~~~~~~~~~~~~~~~~~~~~~~~~~~~~~~~~~~~~~~~ 긴다리 소금쟁이 문명이 멸하지 않도록 큰 전투에 패하지 않도록 개를 조용하게 하고 나귀를 먼 기둥에 매어라. 우리 장군 시저는 지도가 펼쳐진 텐트 속에 있다.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의 마음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의 마음 정적 속에 움직인다.   드높은 탑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그 얼굴을 기억하도록 이 외로운 곳에서 움직여야 한다면 아주 상냥하게 움직여라. 사분의 일 여자에 사분의 삼 아이인 그네 아무도 자길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네의 발은 거리에서 익힌 땜장이의 걸음을 흉내낸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네 마음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사춘기 소녀들이 마음속에 최초의 아담을 발견할 수 있도록 법황청 성당의 문을 닫고 아이들을 들여보내지 마라. 성당 안에서 미켈란젤로는 비게 위에다 몸을 기댄다. 새앙쥐 움직이는 소리 정도로 그의 손은 이리저리 움직인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의 마음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
132    박진환 현대시모음 댓글:  조회:527  추천:0  2022-10-10
박진환 현대시모음   개화/라일락   박진환   햇볕도 피해 골목안으로 숨어버리고 나비도 피해 골목밖으로  날아가 버리는 자정향   몸내도 살래도 그렇다고 사향내느 더욱아닌 맡다가 코피터질 요분질 단내   필시 분만 처바르다 간 어느 화냥년의 넑이거나   꽃으로 환생한 넋이 처바른 천하디 천한 박가분내 -----------------------   개화/백목련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희고 고운손   한나절  얇은  홑겹 햇살에도 열이올라 천사들이 펼쳐든 부채살   행여 속진의때묻은  손길 닿을 세라 높이 쳐든 가지에 잠시 앉혔다가 부채살로 날려보낸 백학   순도 100%로의 순수만이 꽃이되는 꽃잎마다 날개가 되어 순백의 학으로 귀천하는 백목련 --------------------------------- 개화/상유수   가물 가물 아지랑이 꼬아타고 봄햇살 흘러내리면   아편보다 노곤한 춘곤증의 한나절 선 하품   하품에 취한 바람 가누지 못한 몸가지에 기대면   개진개진 망울진 미처 뜯어내지 못한 노란 눈꼽의 산유수 --------------------------------- 개화/살구꽃   남루로 둘러친 가난한 울타릿가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핀 살찐 살구꽃의 풍요   마주하고선 계집애의 가슴으로 앓는 한나절의 시장기   채워도 채워도 눈요기로는 못면하는허기 무슨 꽃이 있어 채울수있을까   -------------------------------   꽃   무위만이 칠할수있는 빛갈 지울수있는 미소 얼굴 할수있는 표정 말할수있는 언어 -------------------- 꽃 4   빨간 꽃잎에 피가묻었다 원죄만이 흘릴수있는 흘려 칠할수 있는피   노란 꽃잎엔 종소리가 묻어있다 소리하지 않아도 감겨오는 황금메아리의   하얀 꽃잎엔 묻은 걱도 섞인것도 아무것도 드어있지않았을 때만 드러낼수 있는 순도100%의 순수가 들어 있다   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칠한 무성시 -------------------------------- 장미 1   하나님의 따님인 로즈는 벙어리다   말하지 않고도 말하고 말하고도 말하지않음과 같이하는 하나님의 언어   그언어를 익힌 탓일까 하나님 따님 때문일까   입술이 수십개이면 서도 벙어리인 로즈는 여왕 아닌 붉은 입술의 공주다   그앞에 서면 상것인 나도 따라 벙어리가 된다 ------------------------------ 장미 2   한방울위 피도 석이지 않은 피로는 칠할수없는 물들일수도 없는 무위만이 채색할수있는 꽃잎   햇살의 수혈 주사에도 바람의 마사지에도 끝내 피의숞환을 거부하는 차가운 순백   무슨사랑이 있어 입술을 포개면 피가 돌까 피가돌아 빨갛게 물들일수있을까   인위으가지저쪽에서만 꽃잎하는 백장미 ----------------------------   장미/적장미   카인의 피이거나 칼에 찔리  여인의 피거나 피로 물들인게  분명한 붉은 장미   드라큘라의 입술이거나 사랑의 굶주림으로 피를 빨고 토한게 분명한 입술   사랑만이 흘릴수있는 피 사랑만이 태울수있는 불 불괖치로 입술포갠 적  장미  
131    김지하 시모음 댓글:  조회:530  추천:0  2022-10-10
김지하 시모음   황톳길 새 타는 목마름으로 사랑 꽃그늘 벼랑 솔잎 겨울 바다 겨울 거울 3 短詩 하나 短詩 둘 短詩 넷 중심의 괴로움 푸른 옷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낯선 희망 첫 문화 말씀 노을 무렵 되먹임 별 가을 산책은 행동 갈꽃 마른번개의 날에 빗소리 비 녹두꽃 白鶴峰.1 끝 이제 나에게 오세요 엽서 형님 애 린 이슬털기 우리 앞에 있는 분명한 희망 회귀 바람에게 가벼움 一山詩帖(일산시첩) 3 쳐라 사람 사이의 틈 겨울에 나이 저 먼 우주의 서 편 나 한때 無 저녁 산책 벽 눈물 죽음 목련 무화과 김지하 시인 소개 ~~~~~~~~~~~~~~~~~~~~~~~~~~~~~~~~~~~~~~~~ 황톳길 / 김지하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으로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송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브르랴 대삽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면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 새 저 청청한 하늘 저 흰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 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뚱어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 가는 넋 속의 저 짧은 여위어 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떠나가는 새 청청한 하늘 끝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덧없는 가없는 저 눈부신 구름 아아 묶인 이 가슴 ~~~~~~~~~~~~~~~~~~~~~~~~~~~~~~~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 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는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사랑 / 김지하 내가 이렇게 기대 있는 것은 누굴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기대 있는 것은 한밤중 열두 시가 지난 시간 당신도 자고 아이들도 잠든 시간 담 건너 고양이 울음도 죽은 시간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괴로운 시간 깨어 있다는 것 죽기보다 더 버리고 싶은 일 알겠어요 이 시간 내가 기대고 있는 까닭 내가 기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누구라도 좋지요 돌멩이라도 좋고 쓰레기라도 좋고 잿더미라도 좋지요 사랑하겠다는 것. ~~~~~~~~~~~~~~~~~~~~~~~~~~~~~ 꽃그늘 / 김지하 아 이제야 그늘 속에 꽃 핀다 꽃과 그늘 사이 언젯적부터인가 그 긴장은 이제야 짧은 행간에 웬 무늬 무늬 드러나 흰 무늬들 속의 속 흐드러 진다 내 삶의 꽃 여기 청도 각북골에 와 엎드린 한 새벽에 흘러 흘러 넘치며 아롱거리는 샘물 속 꽃 그늘. 창작과비평 / 2006,가을 ~~~~~~~~~~~~~~~~~~~~~~~~~~~~~~~~~ 벼랑 / 김지하 북풍은 가슴을 꿰뚫고 이마 위에 눈 쌓인 시루봉이 차다 삶은 명치 끝에 노을만큼 타다 사위어가는데 온몸 저려오는 소리 있어 살아라 살아라 울부짖는다 한치 틈도 없는 벼랑에 서서 살자 살자고 누군가 부르짖는다 거리에 나서도 아는 사람 없는 빈 오후에. 시집 ; 별밭을 우러르며 ~~~~~~~~~~~~~~~~~~~~~~~~~~~~~~ 솔잎 엄동에도 솔잎은 얼지 않고 나무들은 뿌리만으로 겨울을 견딘다 모두 오염되고 파괴되었어도 생명은 얼지 않고 뿌리에서 오는 힘으로 넉넉히 새봄을 준비한다.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겨울 내 마음 여위어 겨울 나무 같아라 잿빛 구름 함께 까마귀도 와 앉거라 바람 소리 가깝고 번개 치리 번개 속에 숨었던 옛일 하나 비춰나리 땅속 스치는 희미한 노랫소리 그림자 하나 흔들림 거기 무서운 기별 봄 오리라.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바다 / 김지하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참으로 이제 가겠다 손짓해 부르는 저 큰 물결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망망한 바다 바다로 없는 것 아득한 바다로 가지 않고는 끝없는 무궁의 바다로 가는 꿈 없이는 없는 것 검은 산 하얀 방 저 울음소리 그칠 길 아예 여긴 없는 것 나 이제 바다로 창공만큼한 창공보다 더 큰 우주만큼한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만큼한 끝간 데 없는 것 꿈꿈 없이는 작은 벌레의 아주 작은 깨침도 있을 수 없듯 가겠다 나 이제 가겠다 숱한 저 옛 벗들이 빛 밝은 날 눈부신 물 속의 이어도 일곱 빛 영롱한 낙토의 꿈에 미쳐 가차없이 파멸해 갔듯 여지없이 파멸해 갔듯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백방포에서 가겠다 무릉계에서 가겠다 아오지 끝에서부터라도 가겠다 새빨간 동백꽃 한 잎 아직 봉오리일 때 입에 물고만 가겠다 조각배 한 척 없이도 반드시 반드시 이젠 한사코 당신과 함께 가겠다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 바다가 소리 질러 나를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의 이슬 이슬 가득 찬 한 아침에 그 아침에 문득 일어서 우리 그 날 함께 가겠다 살아서 가겠다 아아 삶이 들끓는 바다, 바다 너머 저 가없이 넓고 깊은, 떠나온 생명의 고향 저 까마득한 화엄의 바다 가지 않겠다 가지 않겠다 혼자서라면 함께가 아니라면 헤어져서라면 나는 결코 가지 않겠다 바다보다 더 큰 하늘이라도 하늘보다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라도 화엄의 바다라도 극락이라도. ~~~~~~~~~~~~~~~~~~~~~~~~~~ 겨울 거울 3 / 김지하 대흥사 동백은 날 위해 피었는가 대흥사 동백 위해 내 가슴속 피멍 여기 피었는가 모든 것 다 잃었는데 사슬 소리는 여전히 거느리고 피안교 건너는 내게 동백이 오네 붉은 붉은 꽃 사슬 두른 동백숲이 내게 오네 아 맵디매운 동백꽃 떨기들 피안교 너머 내게로 밀려오네. 모로 누운 돌부처 / 나남 ~~~~~~~~~~~~~~~~~~~~~~~~~~~~~~~~~~~~~~ 短詩 하나 끊으려면 잇는 법 아주 잊히기 위해 이리 우뚝 선다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이 사람이라 오늘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한다. 短詩 둘 내 가슴에 달이 들어 내 가난한 가슴에 보름달이 들어 고층 아파트 사이사이를 산책 가는 내 가슴에 가을달이 들어. 短詩 넷 진종일 바람 불고 바람 속에 꽃 피고 꽃 속에 내 그리움 피어 세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데 내 어쩌다 먼 산 바라 여기에 굳어 돌이 되었나. 花 開 / 실천문학사 ~~~~~~~~~~~~~~~~~~~~~~~~~~~~ 틈 아파트 사이사이 빈 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 사람은 틈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서정시 100선 / 꽃과그늘 ~~~~~~~~~~~~~~~~~~~~~~~~~~~~~~~~~~~~~~~ 중심의 괴로움 봄에 가만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시집:중심의 괴로움 / 솔 시인선 / 1994.8 ~~~~~~~~~~~~~~~~~~~~~~~~~~~~~~~~~~ 푸른 옷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 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 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든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워지지만 않는다면. ~~~~~~~~~~~~~~~~~~~~~~~~~~~~~~~~~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아직은 따스한 토담에 기대 모두 토해버리고 울다 일어나 무너진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무것도 없는 댓잎 하나 쓰적일 바람도 없는 이렇게 비어 있고 이렇게 메말라 있고 미칠 것만 같은 미칠 것만 같은 서로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 불켠 방의 초라한 술자리 초라한 벗들 날이 새면 너는 진부령 넘어 강릉으로 오징어잡이, 나는 또 몸을 피해 광산으로 가야 할 마지막 저 술자리 서로 싸우지 않고는 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낯선 마을의 캄캄한 이 시대의 한밤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아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 낯선 희망 내리는 비를 타고 한없이 내려라 증발의 날을 기다림도 없이 내려라 내림 속에 떠오르는 첫 무지개 태양도 없이 떠오르는 비 오는 날의 낯선 낯선 희망. 花開 / 실천문학사 ~~~~~~~~~~~~~~~~~~~~~~~~~~~~~~~~~ 첫 문화 말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아파트 사이 공터에 나가 입에 손을 모은다 속삭인다 '꽃이 피었다아---' '꽃이 피었다아---' 한겨울에 석 달 만에 '난초 피었다아---' 소리는 하얀 입김이 되어 푸른 하늘에 뜬다 사방으로 흩어진다 '피었다아---!' 첫 문화다. 花 開 / 실천문학사 ~~~~~~~~~~~~~~~~~~~~~~~~~~~~~~ 말씀 하늘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틈 산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 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시선집 ; 마지막 살의 그리움 / 미래사 ~~~~~~~~~~~~~~~~~~~~~~~~~~~~~~~~~~~~~~~~~~~~~ 노을 무렵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행길 저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하는 내 속에 담배 피우며 신문 읽고 있는 내 속에 노을 무렵에 되똥거리는 빛나는 재잘거리는 닭,참새,붉은 구름,사철나무 스쳐 지나는 바람,머언 거리의 노랫소리 노랫소리 속에 나와 함께 공받기 하는 아이들 속에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우리 집에 문득 불켜질 때 나는 다시 혼자다 오늘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자. ~~~~~~~~~~~~~~~~~~~~~~~~~~~~~~~~~~~~~~~~ 되먹임 내 목숨은 아득타 별로부터 오셨으니 내 목숨은 가까이 흙으로부터 풀 나무 벌레와 새들 물고기들 내 이웃들로부터 오셨으니 죽고 싶어도 죽기 어려운 것 우주가 날 이끌고 있어 튕기고 이끌고 또 튕기고 살고 또 살아 갚아야 하리니 이 은혜를 갚아야 쪼그려 앉아 흙 위에 돌팍으로 쓴다 가슴팍에 깊이깊이 새기며 쓴다 '되먹임!' 花開 / 실천문학사 141 ~~~~~~~~~~~~~~~~~~~~~~~~~~~~~~~ 별 내일 새벽 나의 죽음 뒤에 아마도 별이 뜰 것이다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 뜰 것이다 우주의 비밀이다 살아서는 내 몸 속에 빛나던, 아름답던, 나를 이제껏 살게 했던 그 별이 처음으로 우주에 뜰 것이다 숨어 있던 별, 아마도 내일 새벽 나의 죽음 위에 비밀을 열 것이다 다시 산다면 나는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로 항상 떠 내내 비췰 것이다. ~~~~~~~~~~~~~~~~~~~~~~~~~~~~ 가을 낙엽철 햇빛 속에서 머리를 긁어 올린다 흰 비듬이 우수수 쏟아진다 가슴에 꽂힌 모진 눈빛들 칼끝 같은 말들 다 쏟아진다 푸른 하늘 제주 어디쯤 검은 돌 틈 흰 갈꽃에 가 있는 내 마음 그물 새 가을.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산책은 행동 겨울 나무를 사랑한다면 봄은 기적 같으리 고독한 사람이 물 밑을 보리 이리저리 흩날리는 가랑잎에 훨훨훨 노을 불이 붙는다 산책은 행동.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갈꽃 싸늘한 듯 살가운 가을풀 냄새 이리 돌아오는 옛 마을 코끝에 또 가슴속에 갈꽃 하나 흔들려 나 지금 거리에서 버티고 모멸에도 미소짓고 술 취한 밤 파김치 발길이 집 찾아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은 갈꽃 하나 내 아내 마음의 틈 이 가을 숨쉬는 일 모두 다 아아 귀향!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마른번개의 날에 사람 없는 곳 골라 앉아 사람을 기다린다 예전엔 그렇지도 않더니 요즘엔 세월 흐르는 소리 들린다 흰 영산강으로 달을 베먹고 비녀산 위에서 별을 훔치던 때는 언제 사람 물결에 실려 자유를 외치던 때는 그 언제 천지가 내 집이나 머리 둘 곳마저 이제 없는 이 가슴 가슴속에 바람 한 오리 휘돌아 기인 하늘 저쪽에 마른번개가 한 번 또 한 번. ~~~~~~~~~~~~~~~~~~~~~~~~~~~~~ 빗소리 눈감고 빗소리 듣네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돌아 다시 하늘로 비 솟는 소리 듣네 귀 열리어 삼라만상 숨쉬는 소리 듣네 추위를 끌고 오는 초겨울의 저 비 산성비에 시드는 먼 숲속 나무들 저 한숨 소리 내 마음속 파초잎에 귀 열리어 모든 생명들 신음 소리 듣네 신음 소리들 모여 하늘로 비 솟는 소리 굿치는 소리 영산 소리 듣네 사람아 사람아 외쳐 부르는 소리 듣네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 비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춤추며 하소하나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온갖 것 소리지른다 흙도 사금파리도 상추잎도 소리지른다 닫힌 몸 속에서 누군가 소리지른다 외침의 침묵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6 ~~~~~~~~~~~~~~~~~~~~~~~~~~~~~~~~~~~~~~~ 녹두꽃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육시(戮屍) 지난날, 중죄(重罪)로 죽은 사람의 목을 벰, 또는 그 형벌. ~~~~~~~~~~~~~~~~~~~~~~~~~~~~ 白鶴峰.1 멀리서 보는 白鶴峰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와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 아 이제야 알겠구나 흰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제14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계간 ; 시와시학 2002 여름호 ~~~~~~~~~~~~~~~~~~~~~~~~~~~~~~~~ 끝 기다림밖엔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끝없는 끝들이여 말없는 가없는 모습도 없는 수렁 깊이 두 발을 묻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외쳐 부르는 이 기나긴 소리의 끝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죽기 전엔 디뎌보마 죽기 전엔 꿈없는 네 하얀 살결에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 바람도 소리도 빛도 없는 세월이여 기다림밖엔 남김 없는 죽음이 죽음에서 일어서는 외침의 칼날을 기다림밖엔 끝없는 끝들이여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죽기 전엔 기어이 결별의 글 한 줄은 써두고 가마 ~~~~~~~~~~~~~~~~~~~~~~~~~~~~~~~~~~~~ 이제 나에게 오세요 이제 나에게 오세요 문 열어놨습니다 한 스무 평쯤 될까요 한 서른 평쯤 될까요 라이타 여기 있고 술잔 저기 있습니다 저기 있고 여기 있는 그이 이 세상에 사는,아직도 살아 있는 전화로 가끔은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그래요 전화하시면 돼요 아니 하지 마세요 하지 않는 동안 생각하세요 그 긴 시간 고통받았던 그 긴 시간 그리고 내 시간. 시선집 / 마지막 살의 그리움 / 미래사 ~~~~~~~~~~~~~~~~~~~~~~~~~~~~~~~~~~~~~~~ 말씀 하늘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틈 산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 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시선집 / 마지막 살의 그리움 / 미래사 ~~~~~~~~~~~~~~~~~~~~~~~~~~~~~~~~~~~~~~~~~ 엽서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시선집 ; 마지막 살의 그리움 / 미래사 ~~~~~~~~~~~~~~~~~~~~~~~~~~~~~~~~~~~~~~ 형님 희고 고운 실빗살 청포닢에 보실거릴 땐 오시구려 마누라 몰래 한바탕 비받이 양푼갓에 한바탕 벌려놓고 도도리장단 좋아 헛맹세랑 우라질 것 보릿대춤이나 춥시다요 시름 지친 잔주름살 환히 펴고요 형님 있는 놈만 논답디까 사람은 매한가지 도동동당동 우라질 것 놉시다요 지지리도 못생긴 가난뱅이 끼리끼리. 시집 : 황토.솔. ~~~~~~~~~~~~~~~~~~~~~~~~~~~~~~ 애 린 외롭다. 이말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가는 빗살 빗살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다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남 날들 스쳐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건넬이 이세상엔 이미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줄수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짐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소리 한자락 이리 외롭다. ~~~~~~~~~~~~~~~~~~~~~~~~ 이슬털기 ~~술은 시가 되어 훨훨 나는데 여기 미인의 넋, 꽃이 있다 오늘은 마침 이 둘이 쌍쌍하니 귀인과 함께 하늘에 오름과 같도다~~ (이규보)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흰 바람은 불어라 푸른 배추포기들 춤추고 붉은 능금들 딸랑거리고 하늘 올라라 떠올라라 두견꽃 죽어간 날 누가 태어났나 바람이 불어 눈뜰 수 없이 티끌은 일어 어둡던 그날 술집 술상 밑에서 꽃받침에서 누가 태어났나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흰 치마는 흩날려라 검은 삼단머리 드날려 분홍 옷고름 휘날려 올라라 푸른 하늘 저 높이 높이 죽어도 죽지 않는 혼 중의 혼 뜨거운 한여름에 태어난 혼 버선코에 낮달을 걸고 눈뜰 수 없이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빛나는 해 이마에 이고 떠올라라 하늘 올라 두견꽃 죽어간 날 누가 태어났나 바람이 불어 눈뜰 수 없이 티끌은 일어 어둡던 그날 술집 술상 밑에서 꽃받침에서 누가 태어났나 가라 가라 눈부시게 흰 극락 가라 요령 소리 따라 일수도 빚도 잊고 전세도 적금도 잊고 늙은 어머니 어린 동생 모두 다 잊고 설움 한 무더기 원한 한 삼태기 술도 노래도 주먹질 칼부림도 잊고 모두 뒤에 버리고 어화 넘자 어허야 달구 소리 따라가라 죽어도 죽지 않는 혼 중의 혼 뜨거운 한여름에 태어난 혼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흰 바람은 불어와 푸른 배추포기들 춤추고 붉은 능금들 딸랑거리고 떠올라라 애린의 혼 푸른 하늘 높이 올라 두견꽃 죽어간 날 누가 태어났나 눈부시게 흰 눈부시게 흰 극락 가라 술 취해 우는 내 비나리 따라 어서 가라 어서 가라 ~~~~~~~~~~~~~~~~~~~~~~~~ 우리 앞에 있는 분명한 희망 술병 속에 갇혀 있던 때를 기억해라 술병 밖에서 술병 속을 추억하던 때를 기억해라 술병 속에 있을 때는 술병 밖을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술병 밖에서는 술병 속에 들어 있던 행복한 때를 추억한다 한마디로 말하자 마찬가지 얘기다 술병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술병 재벌의 매체 조작에 의해서만 술병은 이 지상에 있을 뿐이다 술병의 존재를 거절해라 우리는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마시고 있을 뿐이다 절망에도 술병이 있는가 만약 절망에 병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절망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아주 커다랗게 아주 환하게 아주 분명하게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시전집 / 도서출판 솔 ~~~~~~~~~~~~~~~~~~~~~~~~~~~~~~~~~~~~~ 회귀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로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하나 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둥걸 속 애틋했던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은 가데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 가데.. ~~~~~~~~~~~~~~~~~~~~~~~~~~~~~~~~~ 바람에게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 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 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바랄 것은 몹시도 시장한 중에 눈 밝혀 찾아 먹는 밥 한 그릇 배부르면 배 두드려 대중없이 부르는 밥노래 한 가락뿐 춘란 뽑혀 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 못생긴 여뀌닢여뀌 잎으로 잔뜩 비틀어져 내 다시 났으니 바람아 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 새 햇살로 흔들려라. ~~~~~~~~~~~~~~~~~~~~~~ 가벼움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물을 이고 물의 진양조의 무게 아래 숨지는 나비 같은 가벼움 나비 같은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물살을 이고 퍼부어 내리는 비의 쌔하얀 파성을 이고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이마 위에 총창이 그어댄 주름살의 나비 같은 익살을 이고 불꽃이 타는 그 이마 위에 물살이 흐르고 옆으로 옆으로 흐르는 물살만이 자유롭고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퍼부어 내리는 비의 쌔하얀 공포를 이고 숨져간 그날의 너의 나비 같은 가벼움. 김지하 서정시100선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 一山詩帖(일산시첩) 3 외로울 땐 풀잎 하나도 정답다 하늘 가득 스모그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대지 아 참새 지저귀고 아직도 꽃이 피고 하늘엔 흰 구름도 흐른다 아파트에 쭈그려 앉아 허공 한쪽 볼 수 있으니 내 삶 아직은 괜찮다 고마워 눈물난다. ~~~~~~~~~~~~~~~~~~~~~~~~~~~~ 쳐라 노을이여 나를 쳐라 내 마음을 쳐라 불타는 노을이여 새벽에나 겨우겨우 길 찾아나서는 둔한 내 마음을 잠든 내 삶을 쳐라 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 산란한 내 마음 더욱 더 산란하게 쳐라 산란하여 아으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게 쳐라 일어서 아무 때 아무 곳이든 뚜벅뚜벅 진흙길 나서게 쳐라 쳐라 쳐라 힘차게 쳐라 사그라드는 애잔한 끝만 남은 덧없는 노을이여 노을이여 쳐라 쳐라. ~~~~~~~~~~~~~~~~~~~~~~~~~~~ 사람 사이의 틈 아파트 사이사이 빈틈으로 꽃샘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사람은 틈 새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시집 ; 중심의 괴로움 ~~~~~~~~~~~~~~~~~~~~~~~~~~~~~~ 겨울에 마음 산란하여 문을 여니 흰눈 가득한데 푸른 대가 겨울 견디네 사나운 짐승도 상처 받으면 굴속에 내내 웅크리는 법 아아 아직 한참 멀었다 마음만 열고 문은 닫아라 ~~~~~~~~~~~~~~~~~~~~ 나이 바람은 풍덩풍덩 불고 햇볕은 사뭇 초봄인데 매지리 못가에 앉으니 괴로움도 기쁨도 자취 없고 파문 자취만 물 위에 남는다 이울어진 함석집 한 귀퉁이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나는 항상 구경꾼 나는 항상 여행자 내 속에서도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 저 먼 우주의 저 먼 우주의 어느 곳엔가 나의 병을 앓고 있는 별이 있다 하룻밤 거친 꿈을 두고 온 오대산 서대 어딘가 이름 모를 꽃잎이 나의 병을 앓고 있다 시정에 숨어 숨 고르고 있을 기이한 나의 친구 밤마다 병든 나를 꿈꾸고 옛날에 옷깃 스친 어느 떠돌이가 내 안에서 굿을 친다 여인 하나 내 이름 쓴 등롱에 불 밝히고 있다 나는 혼자인 것이냐 홀로 앓는 것이냐 창틈으로 웬 바람이 기어들어 내 살갗을 간지른다. ~~~~~~~~~~~~~~~~~~~~~~~~~~~~~ 서 편 내 마음에 불길 꺼지고 밤낮 흰 달 뜬다 차가운 자리 노을마저 스러져 무서운 꿈마다 꽃 피어난다 지난날 회한도 이제는 즐거움 아파트 사이 봉숭아 한 잎에도 하늘 든다 님아 이젠 오소서 와 검은 삶에 붉은 살 돋우시라 나 지금 서편으로 가는데. 시집 ; 꽃과그늘 / 실천문학사. ~~~~~~~~~~~~~~~~~~~~~~~~~~~~~~ 나 한때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해 스치는 세포마다 말들 태어나 온 우주가 노래 노래부르고 잎새는 새들 속에 또 물방울 속에 가없는 시간의 무늬 그리며 나 태어난다고 끊임없이 노래부르고 노래부른다 지금도 신실하고 웅숭스런 무궁한 나의 삶 내 귓속에 내 핏줄 속에 울리는 우주의 시간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잊었는가 잎새가 나를 먹이고 물방울이 나를 키우고 새들이 나를 기르는 것 잊었는가 나 오늘도 잎새 속에서 뚫어져라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는 것. 김지하서정시 100선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 無 공허하므로 움직인다 시장해서 나 너를 사랑했노라 땅 위의 풀과 벌레 거리의 이웃들 해와 달 별과 구름 모두 다 모두 다 죽어가는 이 한낮 내 속에 텅 빈 속에 바람처럼 움트는 왠 첫사랑 우주 사랑 그 새붉음을 본다 공허하므로 공허함으로 움직인다. ~~~~~~~~~~~~~~~~~~~~~~~ 저녁 산책 숙인 머리에 종소리 떨어지고 새들이 와 우짖는다 숙인 머리에 바람이 와 소스라치고 가슴 펴라 가슴 펴라 악쓰고 숙인 머리에 별 뜬다 오늘밤은 무슨 꿈을 꾸랴 먼 하늘엔 새빨간 노을 쏟아지고. 시집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 벽 벽 그것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벽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벽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네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님이 화안이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김지하 서정시 100선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1999. ~~~~~~~~~~~~~~~~~~~~~~~~~~~~~~~~~~~~~ 눈물 가만 있으면 몸에 물이 솟는다 흰 물은 눈이 되어 하늘에 걸린다 울며 걷던 철둑길도 비치고 어둑한 감옥 붉은 탄식 나 죽은 뒤에 남을 자식들 고된 인생도 비친다 슬픈 것은 먹고 또 먹고 죽이고 또 죽여 지구를 깡그리 부수고 있는 지금 여기 나 시커먼 몰골 눈에 자욱히 눈물 되어 비치는 것. ~~~~~~~~~~~~~~~~~~~~~~~~~~~~~ 죽음 빛 밝은 삼월 아침 상여 소리 지나는데 황매꽃 지고 꽃상여 지나는데 산란하던 마음 이리 차분해 황토 한줌 황산 어디쯤 산이면 어디쯤 눈부실 황토 한줌 종이꽃 하나 내 목숨. ~~~~~~~~~~~~~~~~~~~~~~~ 목련 눈을 뜨면 시커먼 나무등걸 죽음 함께 눈감으면 눈부신 목련 내 몸 어딘가에서 아련히 새살 돋아오는 아픔 눈부신 눈부신 저 목련. 김지하 서정시 100선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 무화과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다스려 주며 이것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무화과 나무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개굴창을 날쌔게 가로지른다. ~~~~~~~~~~~~~~~~~~~~~~~~~~~~~~~ 김지하 시인 소개 김지하 (김영일) 출생 : 1941년 2월 4일 출신지 : 전라남도 목포 직업 : 시인,대학교수 학력 : 서울대학교 데뷔 : 1969년 시인 '황톳길' 등단 경력 : 2006년 제주대학교 명예박사 2006년 명지대학교 교양학부 석좌교수 수상 : 2006년 제10회 만해대상 2005년 제10회 시와 시학상 작품상      
130    하이네 시 모음 댓글:  조회:1221  추천:0  2022-10-10
하이네 시 모음   로렐라이 소녀 백합 꽃잎 속에 별은 아득한 하늘에 나무 아래 앉아서 그대가 보낸 편지 흐르는 내 눈물은 서시 아름다운 봄이 찾아와 잔잔한 여름철의 노래의 날개를 타고 연꽃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꿈의 신이 나를 온갖 꽃들이 밤은 잔잔하고 아아,나는 눈물이 싫어졌다 둘이는 서로 속을 다이아몬드랑 진주랑 너는 꽃에라도 대고 싶다 산위에 올라 뺨에 뺨을 비비며 그대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나는 꽃속을 거니네 내 눈을 이토록 너의 그 말 한마디에 ~~~~~~~~~~~~~~~~~~~~~~~~~~~~~~~~~~~~~~~~~~~ 로렐라이 왜 그런지 그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자꾸만 슬퍼지고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내 마음에 메아리친다. 싸느란 바람 불고 해거름 드리운 라인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지는 해의 저녁놀을 받고서 반짝이며 우뚝 솟은 저 산자락. 그 산 위에 이상스럽게도 아름다운 아가씨가 가만히 앉아 빛나는 황금빛으로 황금빛 머리카락을 빗고 있다. 황금빛으로 머리를 손질하며 부르고 있는 노래의 한 가락 이상스러운 그 멜로디여 마음속에 스며드는 그 노래의 힘. 배를 젓는 사공의 마음속에는 자꾸만 슬픈 생각이 들기만 하여 뒤돌아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강속의 바위가 보이지 않는다. 무참스럽게도 강 물결은 마침내 배를 삼키고 사공을 삼키고 말았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로렐라이의 노래로 말미암은 이상스러운 일이여 ~~~~~~~~~~~~~~~~~~~~~~~~~~~~~~~~~~~~~~~~~~~~~~~~~~~~~~~~~ 소녀 장미를 백합을 비둘기를 태양을 일찌기 이 모든 것을 나는 마음 깊이 사랑했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귀엽고 맑고 순정스러운 한 소녀일 뿐, 사랑이 샘솟는 그 소녀만이 장미며, 백합이며, 비둘기며, 태양입니다. ~~~~~~~~~~~~~~~~~~~~~~~~~~~~~~~~~~~~~~~~~~~~~~~~~~~~~~~~ 백합 꽃잎 속에 백합 꽃잎 속에 이 마음 깊이 묻고 싶어라. 백합은 향기롭게 내 임의 노래를 부르리라. 노래는 파르르 떨며 언젠가 즐겁던 그 한때에 나에게 입맞춰 주던 그 입술의 키스처럼 생생하리라. ~~~~~~~~~~~~~~~~~~~~~~~~~~~~~~~~~~~~~~~~~~~~~~~~~~~~~ 별들은 아득한 하늘에 별들은 아득한 하늘에 몇 해를 두고 몸 하나 까닥않고 그리워 하는 저쪽 별에게 눈 웃음 보내고 있다. 별들이 말하는 얘긴 아름답고 너무나도 푸짐해 지금 세상 어떤 학자도 그 뜻은 알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나만은 그것을 배워 언제나 잊지 않고 익히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대 얼굴에 그것을 풀 수 있는 방식이 있다. ~~~~~~~~~~~~~~~~~~~~~~~~~~~~~~~~~~~~~~~~~~~~~~~~~~~~~~~~~ 나무아래 앉아서 하얀 나무 아래 앉아서 너는 새된 먼 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 하늘에서 말없는 구름이 안개에 싸이는 것을 보고 있다. 지상의 숲과 들이 시들고 앙상해진 것을 바라보고 있다. 너의 주위에도, 네 속에도 겨울이 와서 너의 마음은 얼어 붙었다. 갑자기 새하얀 눈송이 같은 것이 네 머리 위에 떨어져 내린다. 너는 짜증스레 생각한다. 나무가 눈보라를 뿌리는 것이라고 ~~~~~~~~~~~~~~~~~~~~~~~~~~~~~~~~~~~~~~~~~~~~~~~~~~~~~~~ 그대가 보낸 편지 그대가 보내 주신 편지에 나는 전혀 마음 슬퍼하지 않겠소. 그대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했지만, 그러나 그 편지는 너무나 길었습니다. 열두 장이 넘도록 오밀조밀하게 쓰신! 이 정성스러운 글씨를! 만약 그대가 이별을 원한다면 이토록 상세하게 쓰실 수는 없는 것을. ~~~~~~~~~~~~~~~~~~~~~~~~~~~~~~~~~~~~~~~~~~~~~~~~ 흐르는 내 눈물은 흐르는 내 눈물은 꽃이 되어 피어나고 내가 쉬는 한숨은 노래되어 울린다. 그대 나를 사랑하면 온갖 꽃들을 보내 드리리 그대의 집 창가에서 노래하게 하리라... ~~~~~~~~~~~~~~~~~~~~~~~~~~~~~~~~~~~~~~~~~~~~~~~ 서시 옛날에 한 기사가 있었다. 우울하여 말이 없으며, 두 볼에는 살이 빠지고 핏기가 없었다. 언제나 흐릿한 꿈을 꾸고 있는 듯, 비틀대며 바깥을 흔들흔들 나돌고 있었다. 멍청하고, 굼뜨고, 돌에 채어 비트적거리며 걸어갈 때면, 주위에서 꽃과 소녀들이 낄낄 웃었다. 집에서는 항상 깜깜한 구석에 움추리고 있었다. 그곳이면 인간세사를 피할 수가 있었다. 이윽고 무엇인가 동경하며 두 팔을 내밀었지만,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밤중에 기이한 노래가 울리기 시작하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넘실대는 바다 물결의 포말같은 옷을 입은 사모하는 여인이 들어선다. 선명하게 타오르는 장미의 아름다움, 금은으로 치장된 그녀의 면사포, 남실대는 금발에 날씬한 몸매, 두 눈에 넘치는 달콤한 미소--- 두 사람은 다가가서 끌어안는다. 기사는 사랑으로 힘껏 안는다. 멍청하던 사람이 생기를 되찾고, 창백한 얼굴에 피가 돌며, 흐릿한 꿈에서 깨어난다. 수줍음은 점덤 사라져간다. 그러나 익살맞게 그를 놀려서, 그녀는 반짝이는 하얀 면사포를 살며시 그의 머리에 덮에 씌운다. 그러자 기사는 마법에 걸려, 어느덧 바다밑 수정궁에 와 있다. 휘황한 반짝임에 눈이 부셔 어찌할 바 모르는 기사를 바다의 요정이 상냥히 안아준다. 지금, 기사는 신랑, 요정은 신부. 수많은 쳐녀들이 찌터를 연주한다. 구슬같이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 춤추는 옷깃에서 드러나는 발. 기사는 넋을 잃고 사랑스런 요정을 끌어안는다.-- 그때. 불이 갑자기 꺼지고, 기사는 다시 외롭게 집에 앉아있다. 침침한 시인의 방에. ~~~~~~~~~~~~~~~~~~~~~~~~~~~~~~~~~~~~~~~~~~~~~~~~~~~~~ 아름다운 봄이 찾아와 아름다운 봄이 찾아와 온갖 꽃망울들이 피어날 때에 내 가슴속에도 사랑이 움텄네. 아름다운 봄이 찾아와 온갖 새들이 지저귈 때에 그리운 그대에게 불타는 사랑을 고백했지. ~~~~~~~~~~~~~~~~~~~~~~~~~~~~~~~~~~~~~~~~~~~~~~~~~~~~~~~ 잔잔한 여름철의 잔잔한 여름철의 저녁 어스름, 숲에, 푸른 들에 내려 깔린다. 파아란 하늘에 황금빛 달이 향기롭게 흔흔히 내리비친다. 귀뚜라미 찌륵찌륵 우는 시냇가, 물 속에 흐늘흐늘 그림자 하나. 나그네는 물소리에 귀 기울인다, 고요 속에 들려오는 숨쉬는 소리. 인적 없는 시냇가에 살며시 홀로 아름다운 요정이 멱을 감는다. 백설같은 두 팔과 가는 목덜미, 달빛 속에 은은히 떠오른다. ~~~~~~~~~~~~~~~~~~~~~~~~~~~~~~~~~~~~~~~~~~~~~~~~~~~~~~~~~~~~~ 노래의 날개를 타고 노래의 날개를 타고, 나의 사랑이여, 내 너와 함께 가련다. 갠지스 강의 들판 저편으로, 거기에 나는 가장 아름다운 곳을 알고 있다. 고요히 흐르는 달빛 아래 빠알간 꽃이 가득 핀 정원이 있고, 연꽃들은 그곳에서 사랑스런 자매를 기다린다. 제비꽃들은 소리죽여 웃으며 애무하고 하늘의 별들을 우러러보며, 장미꽃들은 몰래 귓속말로 향기로운 동화를 주고받는다. 온순하고 영리한 영양(羚羊)들은 깡충깡충 뛰어와 숨어서 기다리고, 머얼리서 성스러운 강의 물결이 파도치는 소리 들려온다. 그곳 야자나무 아래 우리 함께 내려앉아, 사랑과 안식을 마시며 행복한 꿈을 꾸고 싶다. ~~~~~~~~~~~~~~~~~~~~~~~~~~~~~~~~~~~~~~~~~~~~~~~~~~~~~~~~~~ 연꽃 연꽃은 찬란한 햇님이 두려워, 머리 숙이고 꿈꾸며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달님은 그녀의 연인, 달빛이 비쳐 그녀를 깨우면, 연꽃은 수줍게 얼굴을 들고 상냥하게 님을 위해 베일을 벗는다. 연꽃은 피어 작열하듯 빛나며 말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향내음 풍기며 사랑의 눈물 흘리고 사랑의 슬픔때문에 하르르 떤다. ~~~~~~~~~~~~~~~~~~~~~~~~~~~~~~~~~~~~~~~~~~~~~~~~~~~~~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참으로 귀엽고 예쁘고 깨끗하여라. 너를 보고 있으면 서러움이 나의 가슴 속까지 스며든다. 언제나 하느님이 밝고 곱고 귀엽게 너를 지켜주시길 네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나는 빌고만 싶다. ~~~~~~~~~~~~~~~~~~~~~~~~~~~~~~~~~~~~~~~~~~~~~~~~~~~~~~~~~ 꿈의 신이 나를 꿈의 신이 나를 커다란 성으로 데리고 왔다. 후덥지근한 방향과 반짝이는 등화와 그리고 잡다한 인파가 미궁처럼 착잡한 방마다 범람하고 있었다. 창백해진 사람들이 손을 비비고 불안에 흐느끼며 나갈 문을 찾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젊은 쳐녀들과 기사들이 눈에 띈다. 나도 인파에 싸여 움직여갔다. 그러나 갑자기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어느덧 군중이 사라져 버린 것을 보고 나는 놀라며 혼자 걸어갔다. 그리고 기묘하게 구부러진 수많은 작은 방을 급히 지났다. 다리는 납처럼 무겁고, 마음은 불안과 슬픔에 찼다. 나갈 문을 못찾아 거의 절망하고 있을 때 가까스로 마지막 문에 이르렀다. 나가려고 하자 --- 거기에, 그 문 앞에 애인이 서 있었다. 입술에는 고통이, 이마에는 근심이 어려 있었다. 돌아오라고 나에게 손을 흔든다. 조심하라 주의를 시키는지, 화를 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두 눈에는 감미로운 빛이 반짝이고 있다. 그것이 번갯불처럼 내 마음과 이마를 꿰뚫는다. 그녀가 근엄하고 기괴하게, 그러나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온갖 꽃들이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5월에 수줍게 피어난 마음속의 이 사랑. 온갖 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5월에 님을 잡고 하소연한 그리 웁던 이 사랑. ~~~~~~~~~~~~~~~~~~~~~~~~~~~~~~~~~~~~~~~~~~~~~~~ 밤은 잔잔하고 밤은 잔잔하고 거리는 고요하다. 바로 이 집에 내 애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 전에 이 고장을 떠났지만 집은 그대로 옛 자리에 있다. 집 앞에 옛날처럼 사람이 서 있다. 손을 비비며, 몸을 뒤틀며 우러러 보고 있다. 그 사람의 얼굴이 보였을 때, 나는 섬뜩하였다. 달빛에 틀림없는 바로 내 얼굴. 오, 바로 나를 닮은 창백한 사나이여, 사랑으로 괴롭던 나를 왜 닮는가, 허구 많은 밤들을 이 자리에서 괴로움에 지새던 옛날의 나를. ~~~~~~~~~~~~~~~~~~~~~~~~~~~~~~~~~~~~~~~~~~~~~~~~~~~~ 아아,나는 눈물이 싫어졌다 아아, 나는 눈물이 싫어졌네. 달콤한 근심에 쌓인 사랑의 눈물. 그처럼 그립던 마음이 그리움 그대로 끝나지 않을까 두렵구나. 아아 사랑의 달콤한 근심과 그 아프고 슬픈 기쁨이 또다시 내 가슴을 괴롭히려고 미처 아물지도 않은 가슴속에 밀려드누나. ~~~~~~~~~~~~~~~~~~~~~~~~~~~~~~~~~~~~~~~~~~~~~~~~~~~~ 둘이는 서로 속을 둘이는 서로 속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데 없이 사이가 좋았다. 우리 둘이는 곧잘 를 했지만 할퀴고 때리고 싸우지는 않았다. 둘이는 어울려 소리치고, 시시거리고 아주 다정히 입맞추곤 하였다. 그런데 필경에는 어린아이 마음에 숲과 골짜기에서 을 하였다. 그러나 너무도 깊이 숨어버려서 다시는 서로를 찾아내지 못했다. ~~~~~~~~~~~~~~~~~~~~~~~~~~~~~~~~~~~~~~~~~~~~~~~~~~~~~~~~~~~~ 다이아몬드랑 진주랑 다이아몬드랑 귀한 진주랑 그밖에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지고, 거기에다 어여쁜 눈을 하고서 -- 그런데도 너는 또 무엇을 바라는가. 그지없이 어여쁜 너의 눈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쉴 사이 없이 노래를 차례 차례 나는 지었다 ___ 그런데도 너는 또 무엇을 바라는가. 그지없이 어여쁜 너의 눈으로 나를 몹시도 괴롭히면서 이렇게도 절망 속에 몰아넣고서__ 그런데도 너는 또 무엇을 바라는가. ~~~~~~~~~~~~~~~~~~~~~~~~~~~~~~~~~~~~~~~~~~~~~~~~~~~~~~~~~~ 너는 꽃에라도 대고 싶다 너는 꽃에라도 대고 싶다 정말 귀엽고 예쁘고 티없는...... 나는 너를 볼 때마다 슬픈 심경을 견디기가 어렵다...... 나는 문득 두 손을 내밀어 네 머리 위에 얹고 언제까지나 귀엽고 예쁘고 티없이 있게 하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싶어진다. ~~~~~~~~~~~~~~~~~~~~~~~~~~~~~~~~~~~~~~~~~~~~~~~~~~~~~ 산위에 올라 산 위에 올라 보니 웬지 자꾸 슬퍼지누나. 만일 내가 산새라면 어느만치 한숨을 내쉴 것이메냐? 만일 내가 제비라면 그대 있는 곳에 날아갈 것을. 그런 후 그대 집 창가에 조그만 둥지를 만들어 볼 것을. 만일 내가 원앙새라면 그대 있는 곳에 날아갈 것을. 그런 후 푸른 저 보리수에서 밤마다 들리어 줄 노래 부름을. 만일 내가 비둘기라면 이내 그대 가슴에 날아갈 것을. 비둘기 좋아하는 그대일지니 어리석은 번뇌쯤 잊으시리라. ~~~~~~~~~~~~~~~~~~~~~~~~~~~~~~~~~~~~~~~~~~~~~~~~~~~~~~~~~~~~~~~~~ 뺨에 뺨을 비비며 뺨에 뺨을 비비며 울어 봅시다. 가슴과 가슴을 맞대며 불태웁시다. 눈물이 불길에 떨어질 때엔 서로 꼭 껴안고서 죽어 버립시다. ~~~~~~~~~~~~~~~~~~~~~~~~~~~~~~~~~~~~~~~~~~~~~~~~~~~~~~~~~~ 그대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그대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근심도 괴로움도 이내 사라지네 그대와 더불어 입맞출 때면 내 마음 금방 생기가 도네 그대가 내 품에 안길 때면 천국의 즐거움 용솟음치고 그대를 사랑한다 호소할 때면 눈물은 하없없이 솟아나네 ~~~~~~~~~~~~~~~~~~~~~~~~~~~~~~~~~~~~~~~~~~~~~~~~~~~~~~~~~~~~~ 나는 꽃속을 거니네 나는 꽃 속을 거닐고 있네 마음도 꽃도 활짝 열리어 마치 꿈인 양 거닐고 있네 한걸음 한걸음 휘청거리며. 아아, 내 사랑아, 날 놓지 말지니 안 그러면 사랑에 취한 나머지 그대 발 아래 쓰러질 듯하네 사람들이 보고 있는 이 정원에서 ~~~~~~~~~~~~~~~~~~~~~~~~~~~~~~~~~~~~~~~~~~~~~~~~~~~~~~~~~ 내 눈을 이토록 내 눈을 이토록 흐려만 놓고 적적한 눈물은 어찌해야 하는가? 적적한 이 눈물은 옛날부터 내 눈 속에 고여 있던 것. 투명하게 빛나는 눈물도 많았지만, 모두 다 흘러가 버렸고 내 온갖 슬픔과 기쁨과 함께 밤과 바람 속으로 사라져 갔다. 살포시 웃음 지며 내 가슴 속에 기쁨과 슬픔을 담뿍 안기어준 영롱하고 귀여운 작은 별도 안개가 사라지듯 사라져갔다. 덧 없는 입김의 허무함처럼 내 사랑마저 사라져가고 옛부터 고여 있는 이 적적한 눈물이여, 너도 이제는 사라지기를 ~~~~~~~~~~~~~~~~~~~~~~~~~~~~~~~~~~~~~~~~~~~~~~~~~~~~~~~~~~~~~~~ 너의 그 말 한마디에 너의 해맑은 눈을 들여다보면 나의 온갖 고뇌가 사라져 버린다 너의 고운 입술에 입 맞추면 나의 정신이 말끔히 되살아난다.. 따스한 너의 가슴에 몸을 기대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 "당신을 사랑해요" 너의 그 말 한마디에 한없이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출처: 시인 소향{素香}강은혜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데미  
129    괴테 시모음 댓글:  조회:560  추천:0  2022-10-10
괴테 시모음 신비의 합창 첫사랑 그대 곁에서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동경(憧憬) 이별 슬픔의 환희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껴요 사랑의 독본 들 장 미 나그네의 밤노래 5월의 노래 거룩한 갈망 미뇽(Mignon) 가뉘메트 마왕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툴레의 임금님 프로메테우스 ~~~~~~~~~~~~~~~~~~~~ 신비의 합창 지나간 모든 것은 한갓 비유일 뿐, 이루기 어려운 것 여기 이루어졌으니. 글로 쓰기 어려운 것이 여기 이루어졌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라가게 한다. Chorus Mystics - Johann Wolfgang von Goethe Each thing of mortal birth Is but a type What was of feeble worth Here becomes ripe. What was a mystery Here meets the eye; The ever-womanly Draws us on high. ~~~~~~~~~~~~~~~~~~~~ 첫 사 랑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 것이냐, 저 첫사랑의 날을.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때를 돌려 줄 것이냐, 저 사랑스러운 때를.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기르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한탄과 더불어 잃어 버린 행복을 슬퍼한다.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 것이냐! 그 즐거운 때를. Verlust - Johann Wolfgang von Goethe Ach wer bringt die schonen Tage, Jene Tage der ersten Liebe, Ach wer bringt nur eine Stunde Jener holden Zeit zuruck: Einsam nahr ich meine Wunde, Und mit stets erneuter Klage Traur ich ums verlorne Gluck. Ach wer bringt die schonen Tage, Jene holde Zeit zuruck! ~~~~~~~~~~~~~~~~~~~~ 그대 곁에서 나 그대가 생각납니다. 태양의 미미한 빛살이 바다 위에서 일렁거리면 나 그대가 생각납니다. 달의 어렴풋한 빛이 우물 속 그림자로 출렁거리면 나 그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먼 길에 먼지에 일게 되면 나 그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슥해진 좁은 길 위에서 나그네가 떨고 있으면 나 그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요란한 소리로 높은 파도가 밀려 올때면 나 그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모든 것이 숨죽인 공원을 거닐 때면 나 그대 곁에 있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대는 늘 내 곁에 있습니다. 태양이 가라앉고 잠시 후 별이 빛날 것입니다. 아아, 그대가 저 하늘의 별일 수만 있다면. ~~~~~~~~~~~~~~~~~~~~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희미한 햇빛 바다에서 비쳐올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달빛 휘영청 샘물에 번질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저 멀리 길에서 뽀얀 먼지 일 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어두운 밤 오솔길에 나그네 몸 떨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물결 높아 파도 소리 아득할 때 나 그대 소리 듣노라. 고요한 숲 속 침묵의 경계를 거닐며 나 귀를 기울이노라. 나 그대 곁에 있노라, 멀리 떨어졌어도 그대 내 가까이 있으니 해 저물면 별아, 나를 위해 곧 반짝여라 오오 그대 여기 있다면. ~~~~~~~~~~~~~~~~~~~~ 동경(憧憬) 내 마음을 이렇게도 끄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을 밖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방에서, 집에서 나를 마구 끌어 내는 것은 무엇인가. 저기 바위를 감돌며 구름이 흐르고 있다! 그곳으로 올라갔으면, 그곳으로 갔으면! 까마귀가 떼를 지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나도 그 속에 섞여 무리를 따라간다. 그리고 산과 성벽을 돌며 날개를 펄럭인다. 저 아래 그 사람이 있다. 나는 그쪽을 살펴본다. 저기 그 사람이 거닐어 온다. 나는 노래하는 새. 무성한 숲으로 급히 날아간다. 그 사람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여 혼자 미소 지으며 생각한다. 저렇게 귀엽게 노래하고 있다. 나를 향해서 노래하고 있다고, 지는 해가 산봉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건만, 아름다운 그 사람은 생각에 잠겨서 저녁놀을 보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목장을 따라 개울 가를 거닐어 간다. 길은 꼬불꼬불하고 점점 어두어진다. 갑자기 나는 반짝이는 별이 되어 나타난다. 저렇게 가깝고도 멀리 반짝이는 것은 무엇일까.」 네가 놀라서 그 빛을 바라보면, 나는 너의 발 아래 엎드린다. 그 때의 나의 행복이여! ~~~~~~~~~~~~~~~~~~~~ 이 별 입으로는 차마 말 할 수 없는 이별을 내 눈으로 말하게 하여 주십시오 견딜 수 없는 쓰라림이 넘치오 그래도 여느 때는 사나이였던 나였건만 상냥스러운 사랑의 표적조차 이제는 슬픔의 씨앗이 되었고 차갑기만 한 그대의 입술이여 쥐여 주는 그대의 힘 없는 손이여 여느 때라면 살며시 훔친 입맞춤에조차 나는 그 얼마나 황홀해질 수 있었던가 이른 봄 들판에서 꺾어 가지고 온 그 사랑스런 제비꽃을 닮았었으나 이제부터는 그대 위해 꽃다발을 엮거나 장미꽃을 셀 수조차 없이 되었으니 아아 지금은 정녕 봄이라는데 프란치스카여 내게만은 쓸쓸하기 그지없는 가을이라오 ~~~~~~~~~~~~~~~~~~~~ 슬픔의 환희 마르지 말아라, 마르지 말아라 영원한 사랑의 눈물이여! 아아, 눈물 마른 눈에 비치는 이 세상이란 얼마나 황량하며, 그 얼마나 죽은 것으로 보이랴! 마르지 말아라, 마르지 말아라 불행한 사랑의 눈물이여! ~~~~~~~~~~~~~~~~~~~~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단 한번 그대 얼굴 보기만 해도, 단 한번 그대 눈동자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은 온갖 괴로움 벗어날 뿐, 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하느님이 알 뿐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OB ICH DICH LIEBE Ob ich dich liebe, weiss ich nicht. Seh" ich nur einmal dein Gesicht, Seh" dir ins Auge nur einmal, Frei wird mein Herz von aller Qual. Gott weiss, wie mir so wohl geschicht! Ob ich dich liebe, weiss ich nicht. ~~~~~~~~~~~~~~~~~~~~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홀로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등지고 머언 하늘을 바라봅니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 주던 사람은 지금 먼 곳에 있습니다. 눈은 어지럽고 가슴은 찢어집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껴요 산과 강, 도시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요? 그러나 우리가 비록 헤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끼며 영혼이 가까이 있는 그 누군가가 있음을 알고 있다면 이 세상은 사람이 살고 있는 정원이 될 것입니다. ~~~~~~~~~~~~~~~~~~~~ 사랑의 독본 책 중에 가장 오묘한 책, 사랑의 책을 나는 차분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기쁨을 말하는 페이지는 적었고 한권을 읽는 동안 괴로움만 계속되었습니다. 이별은 특별히 한 장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재회에 대해서는 아주 짧은 단문으로 말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고뇌는 전편에 걸쳐 매우 긴 설명이 붙어 있었고 끊임없이 이어져 갔습니다. 오오 시인이여, 마침내 그대는 정답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풀 수 없었던 그 문제는 결국 다시 만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 들 장 미 한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 그리도 싱그럽고 아름다워서 가까이 보려고 재빨리 달려 가, 기쁨에 취하여 바라보았네.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소년은 말했네. '너를 꺾을 테야 들장미야!' 장미는 말했네. '너를 찌를테야 끝내 잊지 못하도록. 꺾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짖궂은 아이는 꺾고 말았네 들에 핀 장미 장미는 힘을 다해 찔렀지만 비명도 장미를 돕지 못하니, 장미는 그저 꺾일 수 밖에.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 나그네의 밤노래 모든 산봉우리위에 안식이 있고 나뭇가지에도 바람소리 하나 없으니 새들도 숲속에 잠잔다. 잠시만 기다려라 그대 또한 쉬리니. The Wanderer"s Night-Son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THOU who comest from on high, Who all woes and sorrows stillest, Who, for twofold misery, Hearts with twofold balsam fillest, Would this constant strife would cease! What are pain and rapture now? Blissful Peace, To my bosom hasten thou! ~~~~~~~~~~~~~~~~~~~~ 5월의 노래 밀밭과 옥수수밭 사이로, 가시나무 울타리 사이로, 수풀 사이로, 나의 사랑은 어딜 가시나요? 말해줘요! 사랑하는 소녀 집에서 찾지 못해 그러면 밖에 나간 게 틀림없네 아름답고 사랑스런 꽃이 피는 오월에 사랑하는 소녀 마음 들 떠 있네 자유와 기쁨으로. 시냇가 바위 옆에서 그 소녀는 첫 키스를 하였네 풀밭 위에서 내게, 뭔가 보인다! 그 소녀일까? May Son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BETWEEN wheatfield and corn, Between hedgerow and thorn, Between pasture and tree, Where"s my sweetheart Tell it me! Sweetheart caught I Not at home; She"s then, thought I. Gone to roam. Fair and loving Blooms sweet May; Sweetheart"s roving, Free and gay. By the rock near the wave, Where her first kiss she gave, On the greensward, to me,-- Something I see! Is it she? ~~~~~~~~~~~~~~~~~~~~ 거룩한 갈망 현자에게가 아니면 말하지 마라 세속 사람은 당장 조롱하고 말리니 나는 진정 사는가 싶이 살아 있는 것을 불꽃 속에 죽기를 갈망하는 것을 찬미한다 그대를 낳고 그대가 낳았던 사랑을 나눈 밤들의 서늘한 물결 속에서 그대 말없이 타는 촛불을 보노라면 신비한 느낌 그대를 덮쳐 오리 그대 더 이상 어둠의 강박에 매이지 않고 더 높은 사랑의 욕망이 그대를 끌어올린다 먼길이 그대에겐 힘들지 않다 그대 마술처럼 날개 달고 와서 마침내 미친 듯 빛에 홀리어 나비처럼 불꽃 속에 사라진다 죽어서 성장함을 알지 못하는 한 그대 어두운 지상의 고달픈 길손에 지나지 않으리 The Holy Longing Tell a wise person, or else keep silent, because the mass man will mock it right away. I praise what is truly alive, what longs to be burned to death. In the calm water of the love-nights, where you were begotten, where you have begotten, a strange feeling comes over you, when you see the silent candle burning. Now you are no longer caught in the obsession with darkness, and a desire for higher love-making sweeps you upward. Distance does not make you falter. Now, arriving in magic, flying, and finally, insane for the light, you are the butterfly and you are gone. And so long as you haven't experienced this: to die and so to grow, you are only a troubled guest on the dark earth. (Johann Wolfgang von Goethe)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Robert Bly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로버트 블라이 번역 ~~~~~~~~~~~~~~~~~~~~ 미뇽(Mignon) 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선 금빛 오렌지 빛나고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 오고 감람나무는 고요히, 월계수는 드높이 서 있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 기둥들이 지붕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 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立像)들이 날 바라보면서, "가엾은 아이야, 무슨 몹쓸 일을 당했느냐?"고 물어 주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보호자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산, 그 구름다리를? 노새가 안개 속에서 제 갈 길을 찾고 있고 동굴 속에는 해묵은 용들 살고 있으며 무너져 내리는 바위 위로는 다시 폭포수 내려 쏟아지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우리의 갈 길 뻗쳐 있어요. 오 아버지, 우리 그리로 가요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 가뉘메트 아침놀 가운데인 양 나를 에워싸 작열한다. 그대, 봄이여, 사랑하는 것이여! 수천의 사랑의 기쁨 더불어 그대의 영원한 열기 거룩한 마음 내 가슴으로 밀쳐든다. 끝없이 아름다운 것이여! 하야 내 그대를 끌어 안고자, 이 품안으로! 아, 애태우며 그대 가슴에 내 누우면, 그대의 꽃, 그대의 풀포기 내 가슴에 밀려든다. 사랑스런 아침 바람 내 가슴 속 불타는 갈증을 식혀주면, 바람결에 나이팅게일 사랑스럽게 안개낀 골짜기에서 나를 향해 우짖는다. 곧 가리라! 가리라! 그러나 어디로? 아, 어디로? 위를 향해, 위를 향해서이다. 구름은 아래로 떠오며, 구름은 그리운 사랑으로 내려 온다. 나에게로, 나에게로 오라! 너희들의 품에 안겨 위를 향해서 에워 싸고 에워 싸이어! 위를 향해 그대의 가슴에 안겨 자비로운 아버지여! GANYMED Wie im Morgenrot Du rings mich angluehst, Frueling, Geliebter! Mit tausendfacher Liebeswonne Sich an mein Herz draegt Deiner ewigen Waerme Helig Gefuehl, Unendliche Schoene! Dass ich dich fassen moecht' In diesen Arm! Ach, an deinem Busen Lieg' ich, schmachte, Und deine Blumen, dein Gras Draegen sich an mein Herz. Du kuehlst den brenneden Durst meines Busens, Lieblicher Morgenwind, Ruft drein die Nachtigall Liebend nach mir aus dem Nebeltal. Ich komme! Ich komme! Wohin? Ach, wohin? Hinauf, hiauf strebt's, Es schweden die Wolken Abwaerts, die Wolken Neigen sich der sehnenden Liebe, Mir, mir! In eurem Schosse Aufwaerts, Umfangend umfangen! Aufwaerts An deinem Busen, Alliebender Vater! * 가뉘메트 ; 아폴로의 독수리를 따라 하늘로 올라간 미소년 ~~~~~~~~~~~~~~~~~~~~ 마왕 이 늦은 밤 어둠 속, 바람 속에 말타고 가는 이 누군가? 그건 사랑하는 아이를 데리고 가는 아버지다. 아들을 팔로 꼭 껴안고,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다. "뭣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무서워 하느냐?" "보세요, 아버지, 바로 옆에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왕관을 쓰고 옷자락을 끄는 마왕이 안 보이세요?" "아이야, 그건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란다." "오, 귀여운 아이야, 너는 나와 함께 가자! 거기서 아주 예쁜 장남감을 많이 갖고 나와 함께 놀자. 거기에는 예쁜 꽃이 많이 피어있고 우리 엄마한테는 황금 옷이 많단다." "아버지, 아버지,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지금 제 귀에 말하고 있어요." "조용히 해라 내 아가야, 너의 상상이란다. 그건 슬픈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란다." "귀여운 아이야, 자,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나의 딸들이 널 예쁘게 돌봐주게 하겠다. 나의 달들은 밤마다 즐거운 잔치를 열고 춤추고 노래하고 너를 얼러서 잠들게 해줄거다." "아버지, 아버지, 저기에 보이지 않으세요? 마왕의 딸들이 내 곁에 와 있어요." "보이지, 아주 잘 보인단다. 오래된 회색 빛 버드나무가 그렇게 보이는 거다." "귀여운 아이야 나는 네가 좋단다. 네 귀여운 모습이 좋단다. 네가 싫다고 한다면 억지로 끌고 가겠다." "아버지, 아버지, 마왕이 나를 꼭꼭 묶어요! 마왕이 나를 잡아가요!" 이제 아버지는 무서움에 질려 황급하게 말을 몬다. 신음하고 있는 불쌍한 아이를 안고서. 가까스로 집마당에 도착했으나 팔 안의 아이는 움직이지 않고 죽어 있다. The Erl-Kin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WHO rides there so late through the night dark and drear? The father it is, with his infant so dear; He holdeth the boy tightly clasp"d in his arm, He holdeth him safely, he keepeth him warm. "My son, wherefore seek"st thou thy face thus to hide?" "Look, father, the Erl-King is close by our side! Dost see not the Erl-King, with crown and with train?" "My son, "tis the mist rising over the plain." "Oh, come, thou dear infant! oh come thou with me! Full many a game I will play there with thee; On my strand, lovely flowers their blossoms unfold, My mother shall grace thee with garments of gold." "My father, my father, and dost thou not hear The words that the Erl-King now breathes in mine ear?" "Be calm, dearest child, "tis thy fancy deceives; "Tis the sad wind that sighs through the withering leaves." "Wilt go, then, dear infant, wilt go with me there? My daughters shall tend thee with sisterly care My daughters by night their glad festival keep, They"ll dance thee, and rock thee, and sing thee to sleep." "My father, my father, and dost thou not see, How the Erl-King his daughters has brought here for me?" "My darling, my darling, I see it aright, "Tis the aged grey willows deceiving thy sight." "I love thee, I"m charm"d by thy beauty, dear boy! And if thou"rt unwilling, then force I"ll employ." "My father, my father, he seizes me fast, Full sorely the Erl-King has hurt me at last." The father now gallops, with terror half wild, He grasps in his arms the poor shuddering child; He reaches his courtyard with toil and with dread,-- The child in his arms finds he motionless, dead. ~~~~~~~~~~~~~~~~~~~~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슬픈 밤을 한 번이라도 침상에서 울며 지새운 적이 없는 자, 그는 당신을 알지 못하오니, 하늘의 권능이시여. 당신을 통하여 삶의 길을 우리는 얻었고 불쌍한 죽을 자들 타락케 하시어 고통 속에 버리셨으되, 그럼에도 저희는 죄값을 치르게 됩니다. WHO Never Ate With Tears His Bread - Johann Wolfgang von Goethe WHO never ate with tears his bread, Who never through night"s heavy hours Sat weeping on his lonely bed,-- He knows you not, ye heavenly powers! Through you the paths of life we gain, Ye let poor mortals go astray, And then abandon them to pain,-- E"en here the penalty we pay, ~~~~~~~~~~~~~~~~~~~~ 툴레의 임금님 옛날 예적 툴레에 한 임금님이 사셨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정성을 바쳐 사랑하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며 황금 술잔 하나를 남기고 가셨지.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서 잔치 때마다 그 잔을 쓰시고 그걸로 술을 드실 때마다 계속 눈물을 흘렸지.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 지자 다스리던 고을들과 온갖 것들을 세자에게 물려주셨지만 금 잔만은 그러지 않았지. 임금님은 왕궁 잔치를 열었는데 바닷가 높은 성 안에 선조들 대물려 온 넓은 연회장에 기사와 귀족들 모두 불렀지. 늙으신 임금님은 거기에 서신 다음 그 잔으로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드시더니 그 성스러운 잔을 들어 바닷물로 힘껏 던지셨지. 임금님은 잔이 떨어지는 것과, 물이 들어가고 바다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신 다음 눈을 영원히 감으시고 다시는 마시지 않으셨네. The King Of Thule This ballad is also introduced in Faust - Johann Wolfgang von Goethe IN Thule lived a monarch, Still faithful to the grave, To whom his dying mistress A golden goblet gave. Beyond all price he deem'd it, He quaff'd it at each feast; And, when he drain'd that goblet, His tears to flow ne'er ceas'd. And when he felt death near him, His cities o'er he told, And to his heir left all things, But not that cup of gold. A regal banquet held he In his ancestral ball, In yonder sea-wash'd castle, 'Mongst his great nobles all. There stood the aged reveller, And drank his last life's-glow,-- Then hurl'd the holy goblet Into the flood below. He saw it falling, filling, And sinking 'neath the main, His eyes then closed for ever, He never drank again. We wouldn"t enjoy the sunshine If we never had the rain. We wouldn"t appreciate good health If we never experienced pain. ~~~~~~~~~~~~~~~~~~~~ 프로메테우스 제우스여, 그대의 하늘을 구름의 연기로 덮어라! 그리고 엉겅퀴의 목을 치는 어린이처럼 참나무나 산정들과 힘을 겨뤄라! 그러나 나의 대지는 손대지 말고 내버려둬야 한다 그대가 짓지 않은, 나의 작은 집과, 불길 때문에 그대가 나를 질투하는 나의 화덕도 나는 태양 아래에서 신들인 그대들보다 가엾은 자들을 알지 못한다. 그대들은 제물과 기도의 숨결로 간신히 먹고산다. 대단한 분들이여 그리고 만일 어린이들과 걸인들이 희망에 부푼 바보들이 아니었던들 그대들은 굶주렸을 것을. 나 역시 어린애여서, 들고 날 곳을 몰랐을 때, 나는 당황한 시선을 태양을 향해 돌렸다. 마치 저 하늘에, 나의 탄식을 들어 줄 귀가 있고, 압박받는 자를 불쌍히 여겨 줄 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는 듯이. 그러나 누가 거인족의 오만에 대해서 나를 도왔으며, 누가 죽음과 노예상태에서 나를 구했던가? 거룩하게 불타는 나의 마음이 이 모든 것을 성취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젊고 선량한 마음은, 기만당하여, 구원에 감사하며 천상에서 잠든 자를 열애하지 않았던가? 그대를 존경하라고? 왜? 그대가 이전에 한 번이라도 짐을 진 자들의 고통을 덜어 준 적이 있는가? 그대는 이전에 한 번이라도 겁먹은 자들의 눈물을 달래 준 적이 있는가? 전능의 시간과 나의 주이며, 그대의 주인인 영원한 운명이 나를 사나이로 단련하지 않았던가? 꽃봉오리의 꿈이 모두 성숙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삶을 증오하고, 황야로 도주할 것이라고 그대는 착각하는가? 나는 여기에 앉아, 나의 모습에 따라, 인간들을 형성한다. 괴로워하고, 울며, 즐기고, 기뻐하는, 나와 같이 그대를 존경하지 않는 나를 닮은 족속을. Prometheus - Johann Wolfgang von Goethe Bedecke deinen Himmel, Zeus, Mit Wolkendunst Und ube, dem Knaben gleich, Der Disteln kopft, An Eichen dich und Bergeshohn; Mußt mir meine Erde Doch lassen stehn Und meine Hutte, die du nicht gebaut, Und meinen Herd, Um dessen Glut Du mich beneidest. Ich kenne nichts Armeres Unter der Sonn als euch, Gotter! Ihr nahret kummerlich Von Opfersteuern Und Gebetshauch Eure Majestat Und darbtet, waren Nicht Kinder und Bettler Hoffnungsvolle Toren. Da ich ein Kind war, Nicht wußte, wo aus noch ein, Kehrt ich mein verirrtes Auge Zur Sonne, als wenn druber war Ein Ohr, zu horen meine Klage, Ein Herz wie meins, Sich des Bedrangten zu erbarmen. Wer half mir Wider der Titanen Ubermut? Wer rettete vom Tode mich, Von Sklaverei? Hast du nicht alles selbst vollendet, Heilig gluhend Herz? Und gluhtest jung und gut, Betrogen, Rettungsdank Dem Schlafenden da droben? Ich dich ehren? Wofur? Hast du die Schmerzen gelindert Je des Beladenen? Hast du die Tranen gestillet Je des Geangsteten? Hat nicht mich zum Manne geschmiedet Die allmachtige Zeit Und das ewige Schicksal, Meine Herrn und deine? Wahntest du etwa, Ich sollte das Leben hassen, In Wusten fliehen, Weil nicht alle Blutentraume reiften? Hier sitz ich, forme Menschen Nach meinem Bilde, Ein Geschlecht, das mir gleich sei, Zu leiden, zu weinen, Zu genießen und zu freuen sich, Und dein nich zu achten, Wie ich! ~~~~~~~~~~~~~~~~~~~~ - 괴테 (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 독일의 시인·작가. 고전파의 대표자이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출생. 부친에게서 엄한 기풍을, 모친에게서 명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적 성격을 이어 받았고, 부유한 상류가정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 뒷날의 천재적 대성(大成)을 이룰 바탕을 마련하였다. 괴테는 독일의 시인,비평가,언론인,화가, 무대연출가,정치가,교육가,과학자. 세계문학사의 거인중 한사람으로 널리 인정되는 독일 문호이며, 유럽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거장다운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가 쓴 방대한 저술과 다양성은 놀랄 만한 것으로, 과학에 관한 저서만도 14권에 이른다. 서정적인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문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허구문학에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의 기초자료로 사용된 동화로부터 시적으로 정제된 단편 및 중편소설(novella)들. 의 "개방된" 상징형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음을 보여준다. 희곡에서도 산문체의 역사극.정치극.심리극으로부터 무운시(blank verse) 형식을 취한 근대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82년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인 경지의 예지를 터득하기도 했으나,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모든 존재를 내어 맡기곤 했다. 내적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할 규율을 엄수하면서도 삶, 사랑, 사색의 신비가 투명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마술적 서정시들을 창조하는 힘을 잃지 않았다. ....... 마침내 그에게는 원하는 대로 창조력을 샘솟게 하는 자신조차도 신비스럽게 여긴 재능이 생겨나 60년 가까이 노력해온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죽기 불과 몇 달전에 완성한 전편은 괴테의 반어적인 체념이 덧붙여져 후세 비평가들에게 전해졌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2행연구(couplet)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우리를 끌어 올린다"는 인간존재의 양극성에 대한 괴테 자신의 감성을 요약한 말이다. 여성은 그에게 있어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괴테에게는 상호 배타적인 삶의 양극을 오가는 자연스러운 능력과 변화 및 생성에 대한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상반된 경향들을 자연스럽게 조화시미는 가운데 타고난 재능을 실현해가는 성숙의 과정이었다.
128    헤르만 햇세 시 모음 댓글:  조회:913  추천:0  2022-10-10
헤르만 햇세 시 모음   미인 사랑 편지 순례자 스승의 모습 숙녀 로자 둘다 같다 가을날 안개속에서 구름 행복 슬픔 봄날 젊음의 꽃밭 내 젊음의 초상 멀어져가는 젊음 내일은 방황 운명 무상 비난 어둠과 나와 그는 어둠 속을 걸었다 꿈 누이에게 나의 어머님께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 냉정한 사람들 눈속의 나그네 한장의 그림 흰 구름 고난기에 사는 친구들에게 때때로 너없이 마을의 저녁 무렵 노을속의 백장미 나의 아픔이 너에게 위안이 된다면 어린 시절부터 가여운 무리 격언 열병을 앓는 사람 마른잎 여름의 하루 혼자 책 기도 2월의 호수 골짜기 고독으로의 길 가끔 라벤나 마을 묘지 그러나 나의 마음은 꺽인 가지 깊은 밤거리에서 그 시절 나는 여인을 사랑한다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북쪽에서 그러나 구원자 늦가을의 산책 젊음의 고개를 넘으며 나는 하늘의 별 세상이여 안녕 늙어간다는 것 어디엔가 생의 계단 들을 넘어서 시인 소개 ~~~~~~~~~~~~~~~~~~~~~~~~~~~~~~~~~~~~~~~~~~~~~~~~~~~~~~~~~~~~~~~ 미인 장난감을 얻은 어린아이가 그것을 바라보고 품고 하다가 망가뜨리고, 내일이면 벌써 준 사람은 생각치 않는 것처럼, 내가 준 마음을, 너는 작은 손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그것이 괴로워하는 것은 보지 못한다. ~~~~~~~~~~~~~~~~~~~~~~~~~~~~~~~~~~~~~~~~~~~~~~~~~~~~~~~~~~~~~~~~ 사랑 입맞춤으로 나를 축복해주는 너의 입술을 즐거운 나의 입이 다시 만나고 싶어한다. 부드러운 너의 손을 어루만지며 나의 손이 마주잡고 싶다. 내 눈의 갈증을 네 눈에서 적시우고 내 머리를 네 머리에 깊이 파묻고 언제나 눈떠 있는 청춘의 육체로 네 몸의 움직임에 충실히 따라 언제나 새로운 사랑의 불꽃으로, 천 번이라도 너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해주고 싶다. 우리들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감사히 모든 괴로움을 넘어서서 행복하게 살 때까지. 낮과 밤에, 오늘과 내일에 담담하게 다정한 누이로 인사할 때까지. 모든 행위를 넘어서, 빛에 싸인 사람으로 평화 속을 조용히 거닐 때까지. ~~~~~~~~~~~~~~~~~~~~~~~~~~~~~~~~~~~~~~~~~~~~~~~~~~~~~ 편지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 온다. 보리수가 깊은 신음소리를 내고 달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내 방을 엿본다. 나를 버린 그리운 사람에게 긴 편지를 썼다. 달빛이 종이 위로 흐른다. 글위를 흐르는 고요한 달빛에 나는 슬픔에 젖어 잠도, 달도, 밤 기도도 모두 잊는다. ~~~~~~~~~~~~~~~~~~~~~~~~~~~~~~~~~~~~~~~~~~~~~~~~~~~~~~~~~~~~~~~ 순례자 나는 항상 방랑의 길에 있었다. 순례자였다.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쁨도 슬픔도 흘러갔다. 나는 방랑의 의미도, 목적도 알지 못한다. 몇 천 번을 쓰러지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다. 아,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성스럽고 멀리 높은 하늘에 걸려 있었던 사랑의 별이었다. 그러나 그 별을 안 지금은 목적을 알지 못하던 동안에는 마음 편히 걸어 갔고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이미 늦었다. 별은 돌아서 버리고 아침에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화려한 세상과 작별을 해야 한다. 나는 목표를 잃어버렸으나 그래도 가야 할 나그네의 길이 있었다. ~~~~~~~~~~~~~~~~~~~~~~~~~~~~~~~~~~~~~~~~~~~~~~~~~~~~~~~~~~~~~ 스승의 모습 나의 선생님은 벌써 여러 날 누워서 말씀이 없으시다. 고통과 싸우는지,사상과 싸우는지,모를 때가 많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선생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앉아서 노래하면,선생님은 눈을 감고 황홀하게 귀를 기울인다. 선생님은 최고의 지성인일까. 가날픈 음향에 기쁨을 느끼는 소년일까. 그러나 중용의 법칙에 언제나 따르고 있다. 때때로 선생님은 연필을 가지고 뭔가를 쓰시려는 듯이 굳어버린 손을 움직인다. 그리고는 선생님의 눈길은 형용할 수 없는 사랑으로써 문쪽으로 향한다. 사자가 타고 오는 천사의 날개소리가 들리고 천국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시는 것같다. 그렇지 않으면 먼 고향의 언덕 위에는 지난날 같이 아침의 미풍으로 나부끼는 야자수를 기억하시는 것같다. 나는 자주 불안해진다. 선생님 대신으로 내가 병이 들고,백발이 되고,쇠약하고,나이를 먹고 아침 해가 벽에 그리는 하나의 엷은 나무잎 그림자가 된 것같이. 그러나 대가인 선생님은 현실과 존재와 본질을 충분히 깨닫고 잉태한 것처럼 보이신다. 내가 사라질 동안에 선생님은 세계로 퍼지고 찬란한 빛 속에서 신처럼 하늘을 배운다. 헤르만 헤세 시집 / 너는 나에게로 와서 별이 되었다 / 문지사 ~~~~~~~~~~~~~~~~~~~~~~~~~~~~~~~~~~~~~~~~~~~~~~~~~~~~~ 숙녀 로자 이마에 빛이 감도는 갈색의 고운 눈매와 비단결 같은 머리를 한 당신을 나는 잘 알지만 그러나 당신은 나를 모르는 이 아픔. 티없이 맑은 얼굴의 당신을, 은은한 이국의 고운 노래를 부르는 상냥한 당신을 나는 사랑하지만 그러나 당신은 나를 모르는 이 서러움. ~~~~~~~~~~~~~~~~~~~~~~~~~~~~~~~~~~~~~~~~~~~~~~~~~~~~~~~~~~~~~~~~ 둘다 같다 젊은 날에는 하루같이 쾌락을 쫓아 다녔다. 그 후에는 우수에 싸여 괴로움과 쓰라림에 잠겨 있었다. 지금 나에게는 기쁨과 쓰라림이 형제처럼 스며 있다. 기쁜 듯 슬픔 듯 둘은 하나로 되어 있다. 신이 나를 지옥으로 탱양의 하늘로 인도한다면 나에게는 둘 다 같은 곳이다. 신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 한. ~~~~~~~~~~~~~~~~~~~~~~~~~~~~~~~~~~~~~~~~~~~~~~~~~~~~~ 가을날 숲이 금빛으로 타고 있다. 상냥한 그이와, 여러 번 나란히 걷던 이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간다. 이런 화창한 날에 오랜 동안 품고 있던 행복과 고로움이, 향기 속으로 먼 풍경으로 녹아 들어간다. 풀을 태우는 연기 속에서 농부의 아이들이 껑충거린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노래를 시작한다. ~~~~~~~~~~~~~~~~~~~~~~~~~~~~~~~~~~~~~~~~~~~~~~~~~~~~~ 안개속에서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정말 이상하다. 덩쿨과 돌을 모두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활기에 찰 때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에 휩싸이니 그 누구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것들로부터 인간을 홀로 격리시키는 어둠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일 수가 없다.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정말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혼자인 것이다. ~~~~~~~~~~~~~~~~~~~~~~~~~~~~~~~~~~~~~~~~~~~~~~~~~~~~~~~~~~~~~~ 구름 말없는 뱃사람같이 구름이 머리 위로 떠 가며 부드러운 고운 베일로 야릇하게 마음을 울린다. 푸른 대기에서 솟아나온 빛나는 색깔의 아름다운 세상 그것이 신비로운 매력으로 때때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땅 위에 있는 모두를 구원하는 가볍고 맑은, 투명한 거품 너희들은 더럽혀진 지상의 아름다운 향수어린 꿈인가? ~~~~~~~~~~~~~~~~~~~~~~~~~~~~~~~~~~~~~~~~~~~~~~~~~~~~~~ 행복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너는 행복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너의 것일지라도. 잃어 버린 것을 아쉬워하고 목표를 가지거나, 또는 초조해하는 이상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너는 모른다. 모든 소망을 단념하고 목표와 욕망도 잊어 버리고 행복을 입밖에 내지 않을 때 사건의 물결은 네 마음에 닿지 않고 너의 영혼은 비로소 쉰다. ~~~~~~~~~~~~~~~~~~~~~~~~~~~~~~~~~~~~~~~~~~~~~~~~~~~~~~~~~~~~~ 슬픔 어제 그토록 불타오르던 것이 오늘 죽음의 제물이된다. 슬픔의 나무에서 꽃 잎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내가 가는 길에 쉴새없이 떨어져 쌓이는 것을 본다. 발자국 소리도 더 이상 울려퍼지지 않고, 긴 침묵이 가까워 온다. 하늘엔 별이 없고 가슴엔 사랑도 움트지 않는다. 회색 빛 먼 곳은 적막하고 세상은 늙고 공허하다. 이 사악한 세상에 어느 누가 그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슬픔의 나무에서 꽃 잎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 봄날 숲 속엔 바람소리, 작은 새소리, 높푸른 아늑한 푸른 하늘엔 고요히 멋있게 떠 가는 구름의 배...... 나는 금발의 여인을 어린 시절을 꿈꾼다. 푸르게 넓은 하늘은 내 동경의 요람이다. 그 속에 나는 고요한 마음으로 따사롭게, 복되게 나직이 노래 부르며 생각에 잠긴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가 잠 자듯이. ~~~~~~~~~~~~~~~~~~~~~~~~~~~~~~~~~~~~~~~~~~~~~~~~~~~~~~~~~~~~~~~~~~ 젊음의 꽃밭 나의 젊음은 온통 꽃밭의 나라였습니다. 풀밭에는 은빛의 샘물이 솟아오르고 고목들의 엣이야기같은 푸른 그늘이 거칠은 내 젊음날 꿈의 열정을 식혀 주었습니다. 심한 갈증에 허덕이며 불볕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제 내젊음의 나라는 닫혀 있고 나의 방황은 어리석다는 듯이 울 너머의 장미가 고개를 쳐들고 있습니다. 지난날 나의 서늘한 꽃밭의 속삭임이 노래하며 점점 멀어져 가는데 그 때보다 더 곱게 울리는 수많은 것 들이 마음 깊은 곳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내 젊음의 초상 지금은 벌써 전설이 된 먼 과거로부터 내 청춘의 초상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지난날 태양의 밝음으로부터 무엇이 반짝이고 무엇이 타고 있는가를 ! 그때 내 앞에 비추어진 길은 나에게 많은 번민의 밤과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다. 그 길을 나는 이제 다시는 걷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성실하게 걸었고 추억은 보배로운 것이었다. 잘못도 실대도 많앗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 멀어져가는 젊음 피곤한 여름이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호수에 비친 그의 마지막 모습을들여다본다. 일상에 지친 나는 먼지에 싸여 가로수 그늘을 방황하고 있다. 포플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면 내 뒤로 황혼이 금빛으로 타오르고 앞에는 밤의 불안이 죽음과 함께 온다. 먼지에 싸인 채 지친 걸음을 옮겨 놓는다. 그러나 젊음은 머뭇거리듯 뒤로 밀려나며 고운 모습을 감춘 채 나와 함께 앞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 내일은 반짝이는 별로 가득차 있는 밤. 느릅나무는 자작나무와 소곤거리고 멀리, 또 가까이마다 느껴지는 여름의 아름다움. 나의 마음은 아득히 먼 곳으로 향수와 하프의 선율을 찾아헤매고 있네. 그러면서 몸을 떨며 저 높은 밤하늘에 미래의 노래가 꽃다발이 되어 걸려있는 것을 바라볼 뿐. 나의 마음은 터질듯 부풀어오르고... 가슴은 뜨겁게 타고 있네. 그러나 내일은 서럽게 시장과 더러운 거리를 뛰어다녀야 하리라. 얼마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하여... ~~~~~~~~~~~~~~~~~~~~~~~~~~~~~~~~~~~~~~~~~~~~~~~~~~~~~~~~~~~~~~ 방황 서러워 마라. 머지 않아 밤이 오리니. 그러면 창백한 산야 위에 살며시 웃음짓는 차가운 달을 보게 되리라. 그리고 손을 잡고 쉬게 되리라. 서러워 마라. 머지 않아 잠이 들 때가 오리니. 우리들의 십자가는 둘, 밝은 한길 위에 나란히 서고 그리고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가리라. ~~~~~~~~~~~~~~~~~~~~~~~~~~~~~~~~~~~~~~~~~~~~~~~~~~~~~~~~~~ 운명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우리들은 화를 내고 분별없이 헤어졌다. 수줍음 때문에 서로를 회피하고. 뉘우치고 기다리던 동안에 세월이 흘렀다. 이제 우리들의 청춘의 정원으로 통하는 길이 하나도 없다. ~~~~~~~~~~~~~~~~~~~~~~~~~~~~~~~~~~~~~~~~~~~~~~~~~~~~~~~~~~~ 무상 생명의 나무에서 잎이 하나하나 떨어진다. 오오, 눈부신 화려한 세상이여 어쩌면 너는 이토록 만족하게 하는가. 흐뭇하게, 이토록 괴롭게 어쩌면 너는 취하도록 만드는가. 오늘 아직 불타고 있는 것도 머지 않아 사라져 갈 것이다. 나의 갈색 무덤 위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어갈 것이다. 어린아이 위로 어머니가 몸을 구부리신다. 그 눈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그 눈은 나의 별이다.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변모된다. 모든 것은 죽는다. 즐겁게 죽는다. 다만, 우리를 낳은 영원한 어머니만은 여기에 남아서 그 부지런한 손가락으로 덧없는 허공에 우리들의 이름을 쓴다. ~~~~~~~~~~~~~~~~~~~~~~~~~~~~~~~~~~~~~~~~~~~~~~~~~~~~~~~~~ 비난 밤이 내리깔고 향연이 끝나고 정원의 햇불이 붉그스레 꺼져간다 너는 경쾌히 머리를 숙이고 나에게 밤인사를 한다 오늘 저녁에 너는 많이도 웃었다 오늘 저녁에 너는 많이도 지껄였다.그러나 혼자서 정한 나의 약속은 모른체 지켜주지 않았다 ~~~~~~~~~~~~~~~~~~~~~~~~~~~~~~~~~~~~~~~~~~~~~~~~~~~~~~~~~~~~~~ 어둠과 나와 나는 촛불을 꺼버렸다. 열린 창문으로 밤이 밀려와 살며시 나를 안고, 나를 벗으로 형제로 삼는다. 우리들은 같은 향수에 젖어 있다. 불안한 꿈을 밖으로 내쫓고 소곤소곤 아버지 집에서 살던 지난 날을 이야기한다. ~~~~~~~~~~~~~~~~~~~~~~~~~~~~~~~~~~~~~~~~~~~~~~~~~~~~ 그는 어둠 속을 걸었다 검은 수목들의 그림자가 꿈을 식히는 어둠 속을 그는 즐겨 걸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빛에서 빛으로 타오르는 욕망에 갇혀 괴로움을 다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은빛으로 맑은 별이 가득 찬 하늘이 있음을, 그는 몰랐다. ~~~~~~~~~~~~~~~~~~~~~~~~~~~~~~~~~~~~~~~~~~~~~~~~~~~~ 꿈 언제나 같은 꿈이다. 빨간 꽃이 피어 있는 마로니에 여름 꽃이 만발한 뜰 그앞에 외로이 서 있는 옛집 저 고요한 뜰에서 어머니가 어린 나를 잠재워 주셨다. 아마도, 이제는 오랜 옛날에 집도 뜰도 나무도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 위로 초원의 길이 지나고 쟁기가 가래가 지나 갈 것이다. 고향의 뜰과 집과 나무를 이제는 꿈에서만 남을 것이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떠올리는 무수한 낯모르는 얼굴들.... 서서희 하나, 둘 불빛이 흐려간다. 그 여린 빛이 회색이 되고 ~~~~~~~~~~~~~~~~~~~~~~~~~~~~~~~~~~~~~~~~~~~~~~~~~~~~~~~~~~~~ 누이에게 어찌할 바를 몰라 슬픔에 젖어 이곳에 서 있다. 고향을 멀리 떠나 나는 헤매이며 왔다. 내가 알고 있던 꽃이여 푸른 높은 산이여 인간이여, 들판이여 이제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다만, 너의 입에서만 옛날의 소리를 듣고 다정한 동화의 말처럼 옛날의 소식을 듣는다. 멀지 않아 착한 원정인 죽음이 부모가 기다리는 저녁 노을 속으로 그의 정원으로 나를 데리고 갈 것이다. ~~~~~~~~~~~~~~~~~~~~~~~~~~~~~~~~~~~~~~~~~~~~~~~~~~~~~~~~~~~~~~~~ 나의 어머님께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멀리 객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를 이해해 준 분은 어느 때나 당신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에게 드리려는 나의 최초의 선물을 수줍은 어린아이 손에 쥔, 지금 당신은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나의 슬픔을 잊는 듯합니다. 말할 수 없이 너그러운 당신이, 천가닥의 실로 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 아름다운 나비를 많이 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을, 나비는 모두 날아갔다. 어쩔 수 없이 인간세계로 돌아왔다. 나에게서 나비잡는 법을 앗아간 세계로. 어찌 이 지상에서 추위에 떠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가? 옛날에는 따스하고 아름답게 찬란했는데. 다만 먼지가 되기 위하여, 많은 충격으로 나의 절실한 목숨이 그의 명을 재촉하지 않았던가! 나는 나를 왕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를 하나의 마술의 정원으로. 그러나 끝내는 다른 노인들과 함께 지껄이며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대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 냉정한 사람들 당신들의 눈길은 참으로 냉정합니다. 모든 것을 굳혀 버리려는 듯합니다. 그 속에는 아주 작은 꿈조각조차 없고 차가운 현실만이 들어 있습니다. 대체 당신들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의 빛도 비추이지 않나요? 당신들의 어린시절이 없었다는 사실에도 당신들은 울지 않아도 되나요? ~~~~~~~~~~~~~~~~~~~~~~~~~~~~~~~~~~~~~~~~~~~~~~~~~~~~~~~~~~~~~~~~~~ 눈속의 나그네 한밤에 골짜기에서 시 한 수를 읊는다. 벌거숭이 추운 달이 하늘을 헤메고 있는 때에 눈과 달빛이 쌓인 길을 그림자와 함께 나는 걸어간다. 봄의 파릇한 풀길을 걸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많은 여름해를 보았다. 걸음은 피로에 지치고 머리칼은 하얘져서 아무도 예전의 나를 몰라본다. 야윈 나의 그림자가 피로하여 머물러 선다. 그러나 기어코 이 길을 다 가고 말리라. 화려한 세계로 나를 끌고다니던 꿈이 나에게서 떨어져나간다. 이제야 나는 안다. 꿈이 나를 속인 것을. 골짜기에서 한밤에 시 한 수를 읊는다. 오, 저 높은 곳에서 달이 냉정하게 웃는다. 차가운 눈이 이마와 가슴을 끌어안아 준다. 생각했던 것보다 죽음은 상냥하다. ~~~~~~~~~~~~~~~~~~~~~~~~~~~~~~~~~~~~~~~~~~~~~~~~~~~~~~~~~~~~~~~ 한장의 그림 가을의 찬 바람이 시든 갈대밭을 스잔히 불어간다. 갈대잎은 밤 사이에 회색이 되었다. 까마귀는 버드나무를 떠나 육지로 날아간다. 호수에서는 한 노인이 외로이 서서 쉬고 있다. 머리에 바람과 밤과 다가오는 눈을 느끼고 그늘진 호수에서 밝은 하늘을 바라본다. 거기 구름과 호수 사이에 한 줄기 물가의 육지가 햇빛 속에서 따뜻하게 빛나고 있다. 꿈과 시처럼 행복에 찬 금빛 호수가. 노인은 빛나는 이 풍경을 똑똑히 눈 속에 간직하고 고향을, 지난 행복한 세월을 생각한다. 그리고 황금빛 태양이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자 머리를 돌려 버드나무에서 떠나 천천히 육지로 걸어간다. ~~~~~~~~~~~~~~~~~~~~~~~~~~~~~~~~~~~~~~~~~~~~~~~~~~~~~~~~~~ 흰 구름 오, 보라. 잊어버린 아름다운 노래의 나직한 선율처럼 구름은 다시 멀리 푸른 하늘 너머로 떠간다. 기나긴 여정에서 방황과 기쁨과 슬픔을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 해, 바다, 바람같은 하얗고 정처없는 것들을 나는 사랑하노니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누이이며 천사이기에 ~~~~~~~~~~~~~~~~~~~~~~~~~~~~~~~~~~~~~~~~~~~~~~~~~~~~~~~~~~ 고난기에 사는 친구들에게 사랑하는 벗들이여, 암담한 시기이지만 나의 말을 들어 주어라 인생이 기쁘든 슬프든, 나는 인생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햇빛과 폭풍우는 같은 하늘의 다른 표정에 불과한 것 운명은, 즐겁든 괴롭든 훌륭한 나의 식량으로 쓰여져야 한다. 구비진 오솔길을 영혼은 걷는다. 그의 말을 읽는 것을 배우라! 오늘 괴로움인 것을, 그는 내일이면 은총이라고 찬양한다. 어설픈 것만이 죽어간다. 다른 것들에게는 신성(神性)을 가르쳐야지. 낮은 곳에서나 높은 곳에서나 영혼이 깃든 마음을 기르는 그 최후의 단계에 다다르면, 비로소 우리들은 자신에게 휴식을 줄 수 있으리. 거기서 우리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을 것이리라. ~~~~~~~~~~~~~~~~~~~~~~~~~~~~~~~~~~~~~~~~~~~~~~~~~~~~~~~~~~~~~~~ 때때로 때때로 모든 것이 믿을 수 없고 서럽게만 보입니다. 우리들이 나약하게 지쳐 고심하고 있을 때에는 충격은 모두 비애가 되려 하고 모든 기쁨의 날개는 찢겨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움에 차서 먼 곳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거기서 혹시 새로운 기쁨이 오려나 하고. 그러나 기쁨이나 운명은, 언제나 우리들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겸허한 정원사인 우리들은 자신의 본질 속으로 귀기울여야 합니다. 거기서 꽃다운 얼굴로 새로운 기쁨이 새로운 힘이 자라날때까지. ~~~~~~~~~~~~~~~~~~~~~~~~~~~~~~~~~~~~~~~~~~~~~~~~~~~~~~~~~ 너없이 밤에, 묘비처럼 허망하게 베게가 나를 쳐다본다. 혼자 있는 것이 너의 머리카락에 싸여 있는 것이 이리도 괴로울 줄이야! 고적한 집에 혼자 누워 있다. 불을 꺼 버린다. 그리고 너의 손을 쥐려고 살며시 손을 내민다. 뜨거운 입술로 네게 마구 키스를 퍼붓는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다. 서늘한 밤이 적막하게 둘러싸고 창에 별빛이 반짝이고 있다. 오, 너의 금발은 어디에 있는가, 달콤한 너의 입술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는 모든 기쁨에서 슬픔을 마시고 모든 술에서 독을 마신다. 혼자 있는 것이 너 없이 혼자 있는 것이 이리도 괴로울 줄이야! ~~~~~~~~~~~~~~~~~~~~~~~~~~~~~~~~~~~~~~~~~~~~~~~~~~~~~~~~~~~~~ 마을의 저녁 무렵 양떼를 몰고 목동이 조용한 오솔길을 가고 있다. 집들은 잠이 오는 듯 벌써 깜박이고 있다. 나는 이 마을에서, 지금 단 하나의 이방인 슬픔으로 하여 나의 마음은 그리움의 잔을 남김없이 비운다. 길을 따라 어디로 가든 벽난로에는 따뜻한 불이 타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고향과 조국을 느껴보지 못했다. ~~~~~~~~~~~~~~~~~~~~~~~~~~~~~~~~~~~~~~~~~~~~~~~~~~~~~~~~~~~~~~~~ 노을속의 백장미 슬픈 듯 너는 얼굴을 잎새에 묻는다. 때로는 죽음에 몸을 맡기고 유령과 같은 빛을 숨쉬며 창백한 꿈을 꽃피운다. 그러나 너의 맑은 향기는 아직도 밤이 지나도록 방에서 최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한 가닥 은은한 선율처럼 마음을 적신다. 너의 어린 영환은 불안하게 이름 없는 것에 손을 편다. 그리고 내 누이인 장미여, 너의 영혼은 미소를 머금고 내 가슴에 안겨 임종의 숨을 거둔다. ~~~~~~~~~~~~~~~~~~~~~~~~~~~~~~~~~~~~~~~~~~~~~~~~~~~~~~~~~~~~~ 나의 아픔이 너에게 위안이 된다면 영혼이여, 너 불안에 떠는 새여 너는 언제나 끊임없이 물어야만 한다. 이 많은 격정의 나날이 지나간 뒤에 언제 평화가 오는가, 휴식이 올 것인가 하고 오, 나는 알고 있다. 우리들이 땅 속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면, 곧 새로운 그리움으로 하여 너에게 다가오는 나날은 괴로움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네가 구원 받자, 곧 새로운 번민과 고뇌에 애태우며 성급히 무한한 공간을 불사를 것이다... 너는 사슴이고, 나는 작은 노루 너는 새, 나는 나무 너는 태양, 나는 눈 너는 대낮, 나는 꿈 밤이 되면 잠든 나의 입에서 금빛의 한 마리 새가 너를 향해 날아간다. 그 소리는 맑고, 날개짓은 아름답다. 새는 너에게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사랑의 노래를. 나의 노래를... ~~~~~~~~~~~~~~~~~~~~~~~~~~~~~~~~~~~~~~~~~~~~~~~~~~~~~~~~~~~~ 어린 시절부터 지난날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행복을 약속한 하나의 음향이 나에게로 다가 온다. 만일 이것이 없으면 살기가 너무나 괴로울 것이다. 이 마력의 음향이 울리지 않는다면 나는 빛없이 서서 주위에 불안과 암흑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슬픔과 죄에 다치지 않는 소리가 행복에 찬 달콤한 음향이 울린다. 슬픔과 죄악에도 파멸되지 않는 그 음향이. 너 자랑스런 목소리여 내 집의 불빛이여 다시는 꺼지지 말고 그 푸른 눈을 감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부드러운 빛을 모두 잃고 크고 작은 별들이 차례로 떨어져 나만 홀로 남게 될 것이다. ~~~~~~~~~~~~~~~~~~~~~~~~~~~~~~~~~~~~~~~~~~~~~~~~~~~~~~~~~~~~~~ 가여운 무리 떨어지는 나뭇잎과 거센 바람이 걸어가는 나를 향하여 흩어져 오네. 그러나 나는 모른다, 가여운 아가야, 오늘 우리들이 어디서 묵을지.... 언젠가는 너도 이 바람 속을 지쳐 근심에 싸여 뛰어다니리. 그러나 나는 모른다. 가여운 아가야. 그때도 내가 아직 살아 있을지. ~~~~~~~~~~~~~~~~~~~~~~~~~~~~~~~~~~~~~~~~~~~~~~~~~~~~~~~~~~~ 격언 그리하여 너는 모든 사물의 형제와 누이가 되어야 한다. 사물이 완전히 너에게 녹아들어, 네가 너의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별 하나 잎사귀 하나가 떨어져도- 너도 그것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 그러면 너도 모든 것과 함께 어떠한 순간에도 되살아나리. ~~~~~~~~~~~~~~~~~~~~~~~~~~~~~~~~~~~~~~~~~~~~~~~~~~~~~~~~~~~~~ 열병을 앓는 사람 나의 생애는 죄로 가득 차 있다. 많은 죄가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용서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않고 나의 무덤 위에 돌을 던질 것이다. 그러나 별들이 나를 데리러 오고 달이 나에게 웃어준다. 나는 달의 조그마한 배를 타고, 초롱한 밤하늘을 은은히 떠간다. 조용히 별의 궤도를 따라, 빛이 나를 희롱하고 어지럽히고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둥실둥실 떠서 어머니가 다시 나를 끌어안을 때까지. ~~~~~~~~~~~~~~~~~~~~~~~~~~~~~~~~~~~~~~~~~~~~~~~~~~~~~~~~~~~~ 마른잎 꽃은 모두 열매가 되려 하고 아침은 모두 저녁이 되려 한다. 이 지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변천과 재빠른 세월만 있을뿐. 아름다운 여름도 언젠가는 가을이 되고 조락을 느끼려 한다. 잎이여, 움직이지 말고 끈기 있게 참아라. 바람이 너를 유혹하려고 할 때는 너의 희롱을 거역하지 말라. 가만히 하는대로 두라. 너를꺾는 바람이 하는대로 집으로 날리어 가라. ~~~~~~~~~~~~~~~~~~~~~~~~~~~~~~~~~~~~~~~~~~~~~~~~~~~~~~~~~~~~~~~ 여름의 하루 수목들은 세판 뇌우가 남긴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젖은 이파리 속에 서늘하게 달빛이 비친다. 골짜기에선 보이지 않는 냇물의 끊임없는 소리가 아련히 울려 오고 있다. 지금 어느 농가에서 개가 짖는다. 아, 여름밤과 희미한 별들이여 너희들의 파란 하루의 일과를 따라, 나의 마음이 어쩌면 이렇게 방황의 속삭임과 먼 곳으로 이끌리는가. ~~~~~~~~~~~~~~~~~~~~~~~~~~~~~~~~~~~~~~~~~~~~~~~~~~~~~~~~~~~~~~ 혼자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다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지혜나 능력은 없다. ~~~~~~~~~~~~~~~~~~~~~~~~~~~~~~~~~~~~~~~~~~~~~~~~~~~~~~~~~~~ 책 이 세상의 온갖 책도 네게 행복을 주지는 못하나니, 그래도 책은 은밀히 너로 네 자신 속에 돌아가게 한다. 네 자신 속에 네가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것 태양도 별도 달도 있나니, 네가 찾던 빛은 네 자신 속에 깃들어 있다. 네가 오랜 동안 만 권의 책에서 구한 슬기는 지금 어느 쪽에서나 빛나고 있나니 그것은 네 것이기 때문이다. ~~~~~~~~~~~~~~~~~~~~~~~~~~~~~~~~~~~~~~~~~~~~~~~~~~~~~~~~~~~ 기도 신이여 나를 절망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미혹의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모욕을 겪도록 하여 주시옵고 내가 스스로 지탱해 나감을 돕지 마시고 내가 발전하는 것도 돕지 마소서 그러나 나의 모든 자아가 분쇄되거든 그 때에는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아 주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으려고 하나 나는 오직 당신의 품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2월의 호수 골짜기 오 2월의 얄팍한 태양이 비치는 대기여! 흐릿한 해변은 갈색과노랑으로 살금살금 기어가고, 호수와 창공은 유리처럼 싸늘하고 청명하게 굳어지며 벌거숭이 나무들은 장례 행렬을 지어 흘러간다. 아, 요즈음 난 수염이 회색으로 센 것을 알았다! 예전에 그다지도 밝게 불타던 것이 늙고 피로해지니, 오 화가여, 그대의 여정도 종말로 기울어지고 공동묘지 공기와 겨울 땅을 통해 지나가게 된다. 그러나 어깨 위에 햇빛은 벌써 나직이 불타오르며, 상냥스게 다가올 여름을 노래하나니 그대 타락한 아들이여, 여름으로 작열하며 활기를 찾아 다시 한번 힘차게 걸어나가라! ~~~~~~~~~~~~~~~~~~~~~~~~~~~~~~~~~~~~~~~~~~~~~~~~~~~~~~~~~~~~~ 고독으로의 길 세상이 그대로부터 떨어져 가고, 그대가 예전에 사랑했던 기쁨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환희의 잿더미엔 암흑만 스며든다. 보다 강한 손의 밀침을 받아 그대는 자신속으로 달갑지 않게 침잠하여, 부르르 몸을 떨며 사멸한 세계 속에 서게 된다. 그대 뒤에선 울부짖으며 잃어버린 고향의 여음이 불어오고 유년 시절의 목소리와 짜릿한 사랑의 음향이 울려온다. 고독으로의 길은 괴로웁나니 그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어려우리라. 꿈의 원천조차도 말라 버렸다. 그러나 믿어라! 그대 여정의 종말에는 고향이 있으리니, 죽음과 재생, 무덤과 영원한 어머니가 있으리라. ~~~~~~~~~~~~~~~~~~~~~~~~~~~~~~~~~~~~~~~~~~~~~~~~~~~~~ 가끔 가끔 한 마리의 새가 우짓거나 한 가닥의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쳐지나갈때, 또는 먼 농가에서 개가 짖을때 나는 오랫동안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새와,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닮아, 나의 형제였던 잊혀진 쳔년의 먼 옛날로 나의 영혼을 되돌려 놓는다 나의 영혼은 한그루의 나무 한마리의 짐승, 한필의 구름조각이 되어 변하여 낯설게 돌아와 나에게 물을때 나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은지? ~~~~~~~~~~~~~~~~~~~~~~~~~~~~~~~~~~~~~~~~~~~~~~~~~~~~~~~~~~~~~ 라벤나 1 라벤나에 가 본 적이 있었지. 조그맣고 텅 빈 도시. 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많은 교회와 폐허가 있는 곳. 이제와서 돌아보니 거리거리가 아주 음침하고 습기에 차 있었다 천년 세월은 말이 없고 여기저기에 이끼와 풀이 자라 있었지 마치 옛날 노래같이 아무도 웃지않고 듣고 나면 누구나 밤늦게까지 곰곰히 생각하는 그러한 노래처럼 2 라벤나의 여인들은 깊은 눈매와 아리따운 몸매를 지니고 있었지 그리고 이 옛도시와 축제일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 라벤나의 여인들은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울었지 깊고 나직하게,그녀들의 웃음은 밝은 선율의 서러운 가사를 연상시키고 라벤나의 여인들은 어린아이처럼 기도했지,정성껏 만족스럽게 사랑의 말을 소곤거리지만 거짓말인 줄 자신들은 모르고 라벤나의 여인들은 드물게 깊은 마음을 다하여 키스했지 그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외에는 인생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 마을 묘지 너희들은 아주 가까이에서 함께 너희들의 뜰에 누웠다.말없는 무리여 너희들의 삶의 불길에서는 이제 아무것도 타오르지 않으니, 소리도 그여운도 너희들에겐 더이상 지난날의 슬픔이나 기쁨을 의미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머리위로 높이 라일락이 피어 따스한 향기로,여름밤에 너희들의 위에서 휘황하게 타더라도 너희들은 아랑곳없고 힘으로,열정으로,풀려날 수 없는 충동으로 너희들 속에서 살고 있던 것들이 지금 풀려나와 자유롭게 유희처럼,장식처럼 꽃향기 속을 떠가고 있을뿐 ~~~~~~~~~~~~~~~~~~~~~~~~~~~~~~~~~~~~~~~~~~~~~~~~~~~~~~~~~~~~~~~~ 그러나 나의 마음은 어색한 것을 참으로 많이 썻다 나쁜 짓을 참으로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기쁠때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기를 나의 마음은 은근히 바라노니........ 그들이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은 내가 내 마음 속에 청춘의 모습을 지녔기에, 그들 자신의 먼 나날과 가까운 죄들을 기억하기에 ~~~~~~~~~~~~~~~~~~~~~~~~~~~~~~~~~~~~~~~~~~~~~~~~~~~~~~~~~~~~~ 꺽인 가지 꺽어져 부스러진 나뭇가지, 이미 여러 해 동안 그대로 매달린채, 매말라 바람에 불려 삐걱거린다. 입도 없이 껍질도 없이, 벌거숭이로 빛이 바란채 너무도 긴 생명과 너무 긴 죽음에 지쳐 버렸다. 딱딱하고 끈질기게 울리는 그 노랫소리, 반항스레 들린다.마음속 깊이 두려움에 울려온다. 아직 또 한여름을 아직 또 한 겨울 동안을. ~~~~~~~~~~~~~~~~~~~~~~~~~~~~~~~~~~~~~~~~~~~~~~~~~~~~~~~~~~~~~~~~~ 깊은 밤거리에서 어둠을 헤치고 도로위에 가로등 불이 반짝이고 있다 이 늦은 시간에도 잠들지 않은 것은 가난과 악덕뿐이다 잠자지 않은 너희들에게 인사를 한다 가난과 악덕속에 누워있는 너희들에게 웃고 있는 어린 너희들에게 모두 나의 형제인 너희들에게 ~~~~~~~~~~~~~~~~~~~~~~~~~~~~~~~~~~~~~~~~~~~~~~~~~~~~~~~~~~~~~~~~~~ 그 시절 아직은 이유가 있었고, 나는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그전처럼 모든 것이 맑고 한 점의 티도 없었을 것을 때는 왔다.도리없이 짧고 불안한 그때가 그리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속절없이 청춘의 빛을 모두 거두어가 버렸다 ~~~~~~~~~~~~~~~~~~~~~~~~~~~~~~~~~~~~~~~~~~~~~~~~~~~~~~~~~~~~~~~~~ 꽃핀 가지 쉬임없이 바람결에 꽃핀 가지가 흔들린다 쉬임없이 아이들처럼 나의 마음이 흔들린다 갠날과 흐린 날 사이를 굳은 지향과 단념 사이를 꽃잎이 모두 날려가고 열매속에 가지가 늘어질 때까지 어린아이다움에 지쳐 버리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서 인생의 들떴던 유희도 즐거웠고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때까지 ~~~~~~~~~~~~~~~~~~~~~~~~~~~~~~~~~~~~~~~~~~~~~~~~~~~~~~~~~~~~~~ 나는 여인을 사랑한다 천년이나 전에 시인들이 사랑하고 노래한 그런 여인들을 사랑한다 황폐한 성벽이 옛날의 왕족을 서러워하는 그러한 도시를 사랑한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다 사라질때 되살아나는 그러한 도시를 사랑한다 태어나지 않고 세월의 품속에서 쉬고 있는 날씬하고 고운 여인들을 사랑한다 별같은 그들의 아름다움이 언젠가는 내 꿈의 아름다움과 같아질 것을 ~~~~~~~~~~~~~~~~~~~~~~~~~~~~~~~~~~~~~~~~~~~~~~~~~~~~~~~~~~~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나는 밤에, 그토록 설레며 그대에게 가서 속삭였습니다. 그대가 나를 언제나 못 잊도록 내가 그대의 마음을 따 왔습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그대의 마음은 나와 함께 있으니 오로지 내 것입니다. 설레고 타오르는 내 사랑에서 그 어느 천사도 그대를 구하지 못합니다. ~~~~~~~~~~~~~~~~~~~~~~~~~~~~~~~~~~~~~~~~~~~~~~~~~~~~~~~~~~~~~~~~ 북쪽에서 꿈에 본 것을 이야기하랴? 잔잔한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언덕가에 어스레한 수목의 숲과 노란 바위와 하얀 별장 골짜기에는 도시가 하나 하얀 대리석 교회들이 있는 도시는 나를 향하여 반짝이고 거기는 플로렌스라는 곳 좁은 골목에 둘러싸인 한 고풍의 정원에서는 내가 두고온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니 ~~~~~~~~~~~~~~~~~~~~~~~~~~~~~~~~~~~~~~~~~~~~~~~~~~~~~~~~~~~~~~~ 그러나 그러나 청춘의 그때그때마다 나의 모든 것들을 다 향유하였다 어린가슴이 상처와 쓰라림,슬픔만을 지녔다고 이제와서 나는 탄식해야 하는가 그러나 청춘이 되돌아와 아, 지난날의 사랑스런 얼굴을 하고 있다면, 새로이 다르게 끝맺는다면 비로소 나는 만족할 것인가..... ~~~~~~~~~~~~~~~~~~~~~~~~~~~~~~~~~~~~~~~~~~~~~~~~~~~~~~~~~~~~~~~~ 구원자 항상 그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열려진 귀를 향해,닫혀진 귀를 향해 말을 한다. 그는 우리의 형제이나,늘 새롭게 잊혀져 가는 존재 항상 그는 외로이 홀로 서서, 모든 형제들의 고난과 갈망을 짊어진다 그는 늘 새로이 십자가에 못박힌다 신은 늘 자신을 알리고 성스러운 것이 죄의 골짜기 속으로, 영원한 정신이 육체속으로 흘러들어가길 원한다. 항상 이와 같은 날에도 구원자는 우리를 축복하고 우리들의 불안과 눈물,수많은 의심과 불평들을 고요한 시선으로 만나주신다 우리가 감히 그에게 응수할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의 눈만이 그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늦가을의 산책 가을비가 회색 숲에 흩뿌리고, 아침바람에 골짜기는 추워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툭툭 떨어져 입을 벌리고 촉촉히 젖어 갈색을 띄고 웃는다. 내 인생에도 가을이 찾아와 바람은 찢어져 나간 나뭇잎을 딩굴게 하고 가지마다 흔들어 댄다 - 열매는 어디에 있나? 나는 사랑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괴로움이었다. 나는 믿음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미움이었다. 바람은 나의 앙상한 가지를 쥐어 뜯는다. 나는 바람을 비웃고 폭풍을 견디어 본다. 나에게 있어서 열매란 무엇인가?목표란 무엇이란 말인가! 피어나려 했었고,그것이 나의 목표다.그런데 나는 시들어 가고, 시드는 것이 목표이며,그 외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에 간직하는 목표는 순간적인 것이다. 신은 내 안에 살고,내 안에서 죽고 내 가슴속에서 괴로워한다.이 것이 내 목표로 충분하다. 제대로 가는 길이든 헤매는 길이든,만발한 꽃이든 열매이든 모든 것은 하나이고,모든 것은 이름에 불과하다. 아침바람에 골짜기가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져, 힘있게 환하게 웃는다.나도 함께 웃는다. ~~~~~~~~~~~~~~~~~~~~~~~~~~~~~~~~~~~~~~~~~~~~~~~~~~~~~~~~~~~~~~~~~~ 젊음의 고개를 넘으며 전나무 아래서 쉬고 있노라면 지난날이 생각난다. 익은 숲의 냄새가 최초로 소년의 슬픔을 잉태했던 그날이. 바로 이곳이었다.내가 이끼위에 누워 수줍은 소년의 열정이 가냘픈 금발 소녀의 모습을 꿈꾸었다. 환한 속에 처음 핀 장미를 꺽어 넣고. 세월은 흐르고 꿈은 늙어지고 멀어져서 다른 꿈이 왔다. 그것도 작별한지 이미 오랜 일이다. 최초의 꿈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나는 늘 괴로워했다. 그래,누구였을까.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만, 그녀가 상냥하고 가냘픈 금발이라는 것 뿐이다. ~~~~~~~~~~~~~~~~~~~~~~~~~~~~~~~~~~~~~~~~~~~~~~~~~~~~~~~~~~~~~~~ 나는 하늘의 별 나는 저 높은 하늘에 자리한 하나의 별 세상을 내려다보며 세상을 비웃으며 스스로의 불길에 타오르며 흩어지는 하나의별 나는 노여히 굽이치는 바다 묵은 죄위에 새로운 죄를 쌓아 희생의 무거움에 괴로워하는 바다 나는 너희들의 나라에서 쫓겨난 사람 공교롭게 자라나와 그것에 배반당한 나는 국토가 없는 외로운 밤 나는 침묵에 쌓인 정열 집에서 아궁이가 없고 전장에서 칼이 없는 나는 견딜수없는 스스로의 힘에 병이 든 사람 ~~~~~~~~~~~~~~~~~~~~~~~~~~~~~~~~~~~~~~~~~~~~~~~~~~~~~~~~~~~~~~~ 세상이여 안녕 세상은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옛날엔 그다지도 사랑했었는데, 죽는다는 것도 이젠 별로 놀라운 일이 되지 못한다. 세상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다지도 화려하고 거친 세상을, 태고적 마력이 아직까지도 그의 형상 주변에 나부끼고 있다. 세상의 거대한 유희로부터 감사한 마음으로 우린 떠나가리라. 세상은 우리에게 쾌락과 고통을 주었고,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주었다. 세상이여, 안녕, 그리고 젊고도 매그럽게 다시 치장하여라. 우린 너의 행복과 너의 비애로 지쳐 있노라. ~~~~~~~~~~~~~~~~~~~~~~~~~~~~~~~~~~~~~~~~~~~~~~~~~~~~~~~~~~~~~~~~~~~ 늙어간다는 것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모든 겉치레들. 나도 덩달아 좋아했던 것들. 곱슬머리, 넥타이, 투구와 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 그러나 나 이제야 분명히 알겠다. 나 늙은 소년이 된 지금에야, 그런 것들을 소유하지 않는 것. 그런 노력이 얼마나 현명한 건지 나 이제야 분명히 알겠다. 리본과 곱슬머리, 그리고 모든 매력이 금방 사라지듯이, 그밖에 내가 얻은 것들, 지혜, 미덕, 따뜻한 양말, 아, 이 모든 것도 곧 사라지리라. 그러면 지상은 추워지겠지. 늙은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난로와 부르고뉴산 적포도주,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편안하게 맞는 것. 그러나 오늘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 어디엔가 햇볕에 타며 생명의 사막 위를 내 방황했노라, 그리고 스스로의 무거운 짐에 깔려 신음했노라. 하지만 어디엔가 거의 잊혀진 곳, 서늘한 그늘이 드리운 꽃피는 뜰이 있음을 내 알고 있노라. 그러나 어디엔가 꿈처럼 먼 곳에 몸 풀고 쉴 곳이 기다리고 있음을 내 알고 있으니, 영혼이 다시금 고향을 찾는 그 어디엔가에 엷은 잠과 밤과 그리고 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 생의 계단 만발한 꽃은 시들고 청춘은 늙음에 굴복하듯이 인생의 각 계단도 지혜도 덕도 모두 그때마다 꽃이 필뿐 영속은 허용되지 않는다.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때마다 마음은 용감하게 그러나 슬퍼하지 말고 새로운 단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 무릇 생의 단계의 시초에는 우리를 지켜주고 살아가게 하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이어지는 생의 공간을 명랑하게 지나가야 하나니 어느 곳에도 고향같이 집찹해서는 안되며,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단계씩 높이고 넓히려 한다. 우리가 어떤 생활권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 편히 살게 되면 무기력해지기 쉽나니, 새로운 출발과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우리를 마비시키는 습관에서 벗어나리라. 아마 임종의 시간마저도 우리를 새 공간으로 젊게 보낼지 모르나니 우리를 부르는 삶의 소리는 멈춤이 없으리... 자,마음이여 이별을 고하고 건강하거라. ~~~~~~~~~~~~~~~~~~~~~~~~~~~~~~~~~~~~~~~~~~~~~~~~~~~~~~~~~~~~~~~ 들을 넘어서 하늘 위로 구름이 흐르고 들을 지나서 바람이 간다. 들을 지나 가는 외로운 나그네는 내 어머니의 길 잃은 아들. 거리 위로 낙엽은 구르고 나무 가지 위에서는 새가 지저귄다. 저 산너머 어디인가 나의 먼 고향이 있으리라. ~~~~~~~~~~~~~~~~~~~~~~~~~~~~~~~~~~~~~~~~~~~~~~~~~~~~~~~~~~~~~~~~~ 헤르만 헤세 (Herman Hesse) 출생 : 1877년 7월 2일 사망 : 1962년 8월 9일 출신지 : 독일 직업 : 소설가 학력 : 괴팅겐라틴어학교 마울브론신학교 데뷔 : 1899년 시집 '낭만적인 노래' 경력 : 베른의 독일포로 위문사업국 근무 헤겐하우어 서점의 견습점원 수상 : 1943년, 1946년 노벨문학상 괴테상 대표작 :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피터 카멘진트 특이사항 : 1922년 스위스 국적 취득   출처: 시인 소향{素香}강은혜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데미  
127    황지우 시 모음 댓글:  조회:1893  추천:0  2022-10-10
황지우 시 모음 나는 너다 - 126 나는 너다 503. 메아리를 위한 覺書 우울한 편지 비오는 날, 초년(幼年)의 느티나무 상실 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動詞 이 세상의 고요 거룩한 저녁 나무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수은등 아래 벚꽃 화광동진(和光同塵) 눈 맞는 대밭에서 길 유혹 나의 누드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THE ROPE OF HOPE 붉은 우체통 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 타르코프스키 監督의 고향 점점 진흙에 가까워지는 존재 가을마을과 비닐 봉지 속의 금붕어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인사 세상의 고요 비 그친 새벽 산에서 에프킬라를 뿌리며 눈보라 목마와 딸 아직은 바깥이 있다 게 눈 속의 연꽃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뿐 안부 1 안부 2 출가하는 새 비닐새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일 포스티노 발작 雪景 等雨量線 1 늙어가는 아내에게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뼈아픈 후회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재앙스런 사랑 겨울산 너를 기다리는 동안 겨울산 재앙스런 사랑 뼈아픈 후회 華嚴光州 비 그친 새벽 산에서 이 문으로 들녘에서 영산(靈 山) 너무 오랜 기다림 옛집 뜰 앞의 잣나무 서풍 앞에서 황지우 시인 소개 ~~~~~~~~~~~~~~~~~~~~~~~~~~~~~~~~~~~~~~~~~~~~~~~~~~~~~~~~~~ 나는 너다 - 126 나는 사막을 건너 왔다, 누란이여. 아, 모래 바람이 가리고 간 그 옛날의 강이여. 얼굴을 가린 여인들이 강가에서 울부짖는구나. 독수리 밥이 되기 위해 끌려 가는 지아비, 지새끼들. 무엇을 지켰고, 이제 무엇이 남았는지. 흙으로 빚은 성곽, 다시 흙이 되어 내 손바닥에 서까래 한 줌. 잃어버린 나라, 누란을 지나 나는 사막을 건너간다. 나는 이미 보아버렸으므로 낙타야, 어서 가자. 바람이, 비단 같다, 길을 모두 지워놨구나. 시집, 풀빛출판사 ~~~~~~~~~~~~~~~~~~~~~~~~~~~~~~~~~~~~~~~~~~~~~~~~~~~~~~~~~ 나는 너다 503.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地平線(지평선)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 날아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경)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너니까. 우리는 自己야. 우리 마음의 地圖(지도)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 메아리를 위한 覺書 불 속에 피어오르는 푸르른 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술 처마신 몸과 넋의 제일 가까운 울타리 밑으로 가장 머언 물 소리 들릴락말락 (우리는 어느 溪谷[계곡]에 묻힐까 들릴까) 줄넘기하는 쌍무지개 둘레에 한세상 걸려 있네 詩集,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 우울한 편지 한때 나는 저 드높은 화엄(華嚴) 창천(蒼天)에 오른 적 있었지 숫개미 날개만한 재치 문답으로! 어림 턱도 없어라 망막을 속이는 빛이 있음을 모르고 흰 빛 따라가다 철퍼덕 나가떨어진 이 궁창;진흙-거울이어라 진흙-마음밭에 부리 처박고 머리털 터는 오리꼴이라니 더욱 더러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신간은 편하다만 이렇게 미친 척 마음 가지고 놀다 병 깊어지면 이 어두운 심통(心筒), 다시 빠져 나갈 수 있을지 아슬아슬하다 ~~~~~~~~~~~~~~~~~~~~~~~~~~~~~~~~~~~~~~~~~ 비오는 날, 초년(幼年)의 느티나무 느티나무 아래서 느티나무와 함께 더 큰 줄기로 비맞는 幼年 부잣집 아이들은 식모가 벌써 데려가고 일 나간 우리 엄니는 오지 않았다 齒가 떨리는 운동장 끝 어린 느티나무 몸 속에선 이상한 低音이 우우 우는데 날 저물어 오고 느티나무 아래서 느티나우와 함께 더 큰 빗줄기, 보이지 않는 우리 집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기어 가는 것 같고 문고리에 매달린 동생들 이름 부르며 두 손에 고무신 꼭 들고 까마득한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갔었다 그 운동장으로부터 20년 후 이제 다른 生涯에 도달하여 아내 얻고 두 아이들과 노모와 生活水準 中下, 月收 40여 萬 원, 종교 無, 취미 바둑, 政治意識 中左, 학력 大퇴 의 어물쩡한 30대 어색한 나이로 출판사 근처에나 얼쩡거리며 사람들 만나고 최근 김영삼씨 동향이 어떻고, 미국 간 김대중씨가 어떻고, 雜談과, 짜장면과, 연거푸 하루 석 잔의 커피와, 결국 이렇게 이렇게 물들어 가는 구나 하는 절망감과, 현장 들어간 후배의 경멸어린 눈빛 그런 작은 표정에도 쉽게 자존심 상해하는 어물쩡한 30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색한 나이로 남의 사무실을 빠져나오다가 거리에서 느닷없이 기습해 오는 여름비---- 소년은 비 맞으면서 비닐 수산을 팔고 비닐 우산 아래서 비닐 우산과 함께 더 큰 줄기로 비맞는 成年 그 비닐 우산 속으로 20년 전 어린 느티나무가 들어와 후두둑 후두둑 몸 떨며 이상한 低音으로 울고 나는 여전히 저문 운동장 가에 혼자 남아 있고 ~~~~~~~~~~~~~~~~~~~~~~~~~~~~~~~~~~~~~~~~~~~~~~~~~~~~~~~~ 상실 귀밑머리 허옇도록 放心한 노교수도 시집간다고 찾아온 여제자에게 상실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가버린 낙타여 이 모래 바다 가는 길손이란! 어쩌면 이 鹿苑은 굴절되어 바람에 떠밀려 온 신기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래밭과 풀밭이 갈리는 境界에 이르러 나는 기를 쓰고 草錄으로 들어가려 하고 낙타는 두발로 브레이크를 밟고 완강히 버티고 결국,어느 華嚴 나무 그늘에서 나는 고삐를 놓아버렸지 기슭에 게으르게 뒹구는 사슴들, 계곡에 내려가지 않고도 물의 찬 혓소리 듣는 법을 알고 목마름이 없으므로 '목마름'이 없는 뜨락 멋모르고 처음 돌아오는 자에게도 돌아왔다고 푸른 큰 나무 우뢰 소리 金剛 옷을 입혀 주는구나 내가 놓아버린 고삐에 있었던 낙타여 내 칼과 한 장의 지도와 經 몇 권 든 쥐배낭 안 그래도 무거운 肉峰에 메고 어느 모랫바람 속에서 방울 소리 딸랑거리고 있느냐 새 길손 만나 왔던 길을 初行처럼 가고 있지 않은지 내 귀밑머리 희어지도록 너를 잊지 못하고 내가 슬퍼하는 것은 그대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지만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대를 끝끝내 끌고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 차라리 그대를 내 칼로 베어버리고 그 칼을 저 鹿溪에 씻어줄 걸 씻어줄 걸 ~~~~~~~~~~~~~~~~~~~~~~~~~~~~~~~~~~~~~~~~~~~~~~~~~~~~~~~ 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生)이 마구 가렵다 어언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하늘은 컴퓨터 화면처럼 푸르고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왜정 시대의 로마네스크식 관공서 건물 그림자를 가로수가 있는 보도에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내가 어떻게 마흔인가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11월의 나무는 아직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처럼, 추하다 그래도 나무는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 ~~~~~~~~~~~~~~~~~~~~~~~~~~~~~~~~~~~~~~~~~~~~~~~~~~~~~~~~~~ 動詞 한다. 시작한다. 움직이기 시작한다. 온다. 온다. 온 다. 온다. 소리난다. 울린다. 엎드린다. 연락한다. 포위 한다. 좁힌다. 맞힌다. 맞는다. 맞힌다. 흘린다. 흐른 다. 뚫린다. 넘어진다. 부러진다. 날아간다. 거꾸러진 다. 패인다. 이그러진다. 떨려나간다. 뻗는다. 벌린다. 나가떨어진다. 떤다. 찢어진다. 갈라진다. 뽀개진다. 잘 린다. 튄다. 튀어나가 붙는다. 금간다. 벌어진다. 깨진 다. 부서진다. 무너진다. 붙든다. 깔린다. 긴다. 기어나 간다. 붙들린다. 손 올린다. 묶인다. 간다. 끌려간다. 아, 이제 다가는구나. 어느 황토 구덕에 잠들까. 눈감 는다. 눈뜬다. 살아 있다. 있다. 있다. 있다. 살아 있 다. 산다. 詩集,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이 세상의 고요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바깥으로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릴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듣지 않는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이 땅만 보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버스에서 힐껏 보았을 때 빽밀러에 國道 포플라 가로수의 먼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목탄화 같은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도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거릴 때 흰 여구차가 따뜻한 봄 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무한하다 ~~~~~~~~~~~~~~~~~~~~~~~~~~~~~~~~~~~~~~~~~~~~~~~~~~~~~~~~~~~~~ 거룩한 저녁 나무 -김용택 시백(詩伯)에게 치마로 생밤을 받는 신부처럼, 아니, 급식소로 가는 사람들처럼, 맨 처음인 듯, 아니 맨 마지막인 듯 그렇게 저녁을 받는 나무가 저만치 있습니다 兄이 저 혼자 저무는 섬진강 쪽으로 천천히 그림자를 늘리는 나무 앞에 서 있을 때 옛 안기부 건물 앞 어느 왕릉의 나무에게 전, 슬리퍼를 끌며 갑니다 ; 그 저녁 나무, 눈 지긋하게 감고 뭔갈 꾸욱 참고 있는 자의 표정을 하고 있대요, 형, 그거 알아요 아, 저게 는 형용사구나 누군가 떠준 밥을 식반에 들고 있는 사람처럼, 혹은 신부처럼 生을 부끄러워할 때 거룩한 저녁 나무는 이 세상에 저 혼자 있다는 거 땜에 갑자기 울고 싶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서 있습니다 형이나 저나, 이제 우리, 시간을 느끼는 나이에 든 거죠 이젠 남을 위해 살 나이다,고 자꾸 되뇌기만 하고 이렇듯 하루가 저만큼 나를 우회해서 지나가버리는군요 어두워지는 하늘에 헌혈하는 사람처럼 팔을 내민 저녁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저는 지금 이 시간 교실 밖 강물소리 듣는 형의 멍멍한 귀를 잠시 빌려가겠습니다 그 강에 제 슬리퍼 한 짝, 멀리 던지고 싶소 ~~~~~~~~~~~~~~~~~~~~~~~~~~~~~~~~~~~~~~~~~~~~~~~~~~~~~~~~~~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황지우(1952~)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에서 ~~~~~~~~~~~~~~~~~~~~~~~~~~~~~~~~~~~~~~~~~~~~~~~~~~~~~~~~~~~~~~ 수은등 아래 벚꽃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그때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 화광동진(和光同塵) 이태리에서 돌아온 날, 이제 보는 것을 멀리 하자! 눈알에서 모기들이 날아다닌다. 비비니까는 폼페이 비극시인(悲劇詩人)의 집에 축 늘어져 있던 검은 개가 거실에 들어와 냄새를 맡더니마는, 베란다 쪽으로 나가버린다. TV도 재미없고 토요일에 대여섯 개씩 빌려오던 비디오도 재미없다.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건 자꾸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뜯긴 지붕으로 새어들어오는 빛띠에 떠 있는 먼지. 나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 겨울호, 1997 ~~~~~~~~~~~~~~~~~~~~~~~~~~~~~~~~~~~~~~~~~~~~~~~~~~~~~~~ 눈 맞는 대밭에서 단식 7일째 도량 뒤편 눈 맞는 대밭에 어이없이 한동안 서 있다 창자 같은 갱도를 뚫고 난 지금 박장을 막 관통한 것이다 눈 맞는 대밭은 딴 세상이 이 세상 같다 눈덩이를 이기지 못한 댓가지 우에 다시 눈이 사각사각 쌓이고 있다 여기가 이 세상의 끝일까 몸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 죽음에 아무런 판돈을 걸어놓지 않은 이런 순간에 어서 그것이 왔으면 좋겠다 미안하지만, 후련한 죽음이 ~~~~~~~~~~~~~~~~~~~~~~~~~~~~~~~~~~~~~~~~~~~~~~~~~~~~~~~~~~~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령은 초소다 한려수도,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유혹 여름 동안 창기 紫薇꽃이 붉게 코팅한 통유리; 잘못 들어온 말벌 한 마리가 유리 스크린을 요란하게 맴돈다 환영에 銀날개를 때리며 어? 여기가 바깥인데 왜 안 나가지냐? 無明盡亦無無明盡 바깥을 보는 것까지는 할 수가 있지, 허나, 바깥으로 한번 나가보시지 아아, 울고 싶어라; 투명한 것 가지고는 안돼 그해 겨울, 그 통유리창에 눈보라 몰려올 때 나, 깨당 벗고 달려나가 흰 벌떼 속에 사라지고 싶었다 ~~~~~~~~~~~~~~~~~~~~~~~~~~~~~~~~~~~~~~~~~~~~~~~~~~~~~~~~~~ 나의 누드 공중 목욕탕에 앉아서 제 손으로 제 몸을 구석 구석 훑어 나가는 것은 한두 주일 동안의 때를 밀어내는 일만이 아니다, 一生이여. 이 부피만큼 살아왔구나. 질그릇처럼 아슬아슬하다. 대저 나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내가 있었던가. 나의 容積이 탕 밖으로 밀어내는 물? 거짓이 나를 만들어 놨을 뿐, 두뇌의 격한 질투심. 열등감. 뭐 드러내기 좋아하는 허영으로 적재된 서른 몇 해. 헐떡거리며 나는 하프라인을 넘어왔다. 살아 있다면 내 나이쯤 되는. 가령 전태일 같은 이는 聖者다.그의 짧은 삶이 치고 간 번개에 들킨 나의 삶. 추악과 수치. 치욕이다. 그의 우뢰소리가 이 나이 되어 뒤늦게 나에게 당도했구나. 벼락맞은 靑春의 날들이여. 나는 피뢰침 아래에 있었다. 나.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요행이었을 것이다. 내 속에 들어 있는. 묵묵부답인 소작농이여. 그는 그가 떠나지 못한 新月里 北平의 防風林 아래 윤씨 땅을 새마을 모자 채양으로 재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웃 도암재를 넘어 그는 장독 굽는 陶工이 되려 했으리. 그는 小木이었을까. 말없고 성깔 괴팍한 미쟁이였을까. 아 그는 대처에 나와 그의 바람기로 인해 노가다가 되었으리라. 극장 간판쟁이였거나 공직공장 경비원이었거나 철도 노동자였거나 추운 삶의 시퍼런 정맥을 따라 淸溪川 평화시장까지 흘러갔으리라. 그는 땔나뭇꾼. 껌팔이. 신문팔이. 고물장사였었다. 역 뒤. 極貧의 검은 강가에서 사흘 밤과 나흘 낮을 빈 창자로 서 있었고. 내장에 콸콸 넘치는 쓴 하수도. 뜨거운 내 눈알은 붉은 회충알들이 청천에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어지러웠다. 현기증 사이로 본 부. 모. 형. 제. 전가족이 각각이 고아였다. 자원입대한 형이 떠난 후 조개석탄을 주우러 침목을 세며 南光州까지 걸어갔었다. 産物을 가득 실은 여수발 화물열차가 지나가고 最低 生計 以下에 내려와 있는 차단기. 赤信號앞에 서 있던 불우한 날들이여. 風塵 세상 살아오면서 나는 내 삶에, 그러나 그 모든 날들을 不在로 만들어 버렸다. 고백은 지겹다. 모든 자화상이 흉칙하듯. 나는 내가 살던 露天을 복개했다. 캄캄한 여러 지류가 나를 지나갔다. 지나갔었다. 그리고 지나간다. 지금 나는 알몸이다. 내 손이 나를 만진다. 이것이 나다. 때를 벗기면 벗길수록 生涯는 투명하다. 낫자국. 칼자국. 자전거에서 떨어져 무릎팍에 남긴 상처가 내 몸과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돌아다보니 몇 바가지 물로 나와 같이 목전의 자기 일생을 씻어내는 알몸들. 알몸들이여. 나의 현장부재중인 '나'들이여. 그러나 등 좀 밀어 달라고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있다. 이태리 타월을 들고 나는 한 노인의 등 뒤로 다가갔다. 닿지 않는 나의 등으로. ~~~~~~~~~~~~~~~~~~~~~~~~~~~~~~~~~~~~~~~~~~~~~~~~~~~~~~~~~~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무궁)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 THE ROPE OF HOPE 極樂(극락) 싣고 정박중인 배 無爲寺(무위사) 極樂殿(극락전) 처마에 이크, 물고기 한 마리 낚였다 배가 출렁거렸고 쨍그랑 쨍그랑, 구리물고기, 배때기를 팽팽하게 부풀린 虛風(허풍) THE ROPE OF HOPE라고나 할까 닻줄에 의해 끌어올려지는 수렁 속의 전갈女子 우리마누라는 내가 글을 쓰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으면 지가 시름시름 앓는다 無爲도 아프다는 거다 '희망의 끈'에 걸린 주둥일 괜히 잡아채면서 구리물고기, 여기가 極樂이오 여그가 긍낙이여 요동친다 ~~~~~~~~~~~~~~~~~~~~~~~~~~~~~~~~~~~~~~~~~~~~~~~~~~~~~~~~~~~~ 붉은 우체통 버즘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 ~~~~~~~~~~~~~~~~~~~~~~~~~~~~~~~~~~~~~~~~~~~~~~~~~~~~~~~~~~~ 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쫙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漁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 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이 아니다 ~~~~~~~~~~~~~~~~~~~~~~~~~~~~~~~~~~~~~~~~~~~~~~~~~~~~~~~~~~~~~~ 타르코프스키 監督의 고향 고향이 망명지가 된 사람은 폐인이다. 출항했던 곳에서 녹슬고 있는 폐선처럼 옛집은 제자리에서 나이와 함께 커져가는 흉터; 아직도 딱지가 떨어지는 그 집 뒤편에 1950년대 후미끼리 목재소 나무 켜는 소리 들리고, 혹은 눈 내리는 날,차단기가 내려오는 건널목 타종 소리 들린다. 김 나는 국밥집 옆을 지금도 기차가 지나가고. 나중에는 지겨워져서 빨리 죽어주길 바랐던 아버지가 파자마 바람으로 누워 계신 그 옛집, 기침을 콜록콜록, 참으면서 기울어져 있다. 병들어 집으로 돌아온 자도 폐인이지만 배를 움켜쥐고 쾡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신 아버지, 삶이 이토록 쓰구나, 너무 일찍 알게 한 1950년대; 새벽 汽笛에 말똥말똥한 눈으로 깨어 공복감을 키우던 그 축축한 옛집에서 영원한 출발을 음모했던 것; 그게 내 삶이 되었다. 그리움이 완성되어 집이 되면 다시 집을 떠나는 것; 그게 내 삶이었다. 그러나 꼭 망명객이 아니어도 결국 폐인들 앞에 노스탤지어보다 먼저 와 있는 고향. 가을날의 송진 냄새나던 목재소 자리엔 대형 슈퍼마켓; 고향에서 밥을 구하는 자는 폐인이다 ~~~~~~~~~~~~~~~~~~~~~~~~~~~~~~~~~~~~~~~~~~~~~~~~~~~~~~~~~~~~~~~~~~~ 점점 진흙에 가까워지는 존재 원목 옷걸이에 축 처진 내 가다마이, 일요일 오후의 공기 속에 그것은 있다 나를 담았던 거죽,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깨닫는 나의 한계; 내가 채운 나의 용량, 그것은 있었다 누군가 감아놓은 태엽의 시간을 풀면서 하루종일 TV 앞에서 오른팔이 아프면 왼팔로 머리를 받치고 길게 모로 누워 있는 일요일; 이 내용물은 서서히 금이 가면서 점점 진흙에 가까워지고 있다 KAL기 잔해에서 실신한 여자를 헬기가 끌어올릴 때 바람이 걷어올리는 붉은 팬티; 죽음은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른다 강 수심으로 내려가는 돌처럼 어디까지 내려가나 보자, 아예 작정을 하고 맨 밑바닥까지 내려온 덩어리; 하품하면서 발가락으로 마감 뉴스를 끌 때도 옷걸이에 축 처진 내 옷, 어떤 억센 힘에 목덜밀 붙잡힌 자세로 그것은 월요일이 된 공기 속에 있다 이것이 삶이라면, 삶은 욕설이리라 TV 위엔, 바람을 묶어놓은 딸아이 꽃다발; 바르르 떠는 셀로판紙가 알려주는 공기 ~~~~~~~~~~~~~~~~~~~~~~~~~~~~~~~~~~~~~~~~~~~~~~~~~~~~~~~~~~~ 가을마을과 비닐 봉지 속의 금붕어 가을 마을 저녁해 받고 있는 방죽둑 부신 억새밭, 윗집 흰둥이 두 마리 장난치며 들어간다 중풍 든 柳氏의 대숲에 저녁 참새 시끄럽고 마당의 殘光, 세상 마지막인 듯 환하다 울 밖으로 홍시들이 내려와 있어도 그걸 따갈 어린 손목뎅이들이 없는 마을, 가을걷이 끝난 古西 들에서 바라보니 사람이라면 핏기 없는 얼굴 같구나 경운기 빈 수레로 털털털, 돌아오는데 무슨 시름으로 하여 나는 동구 밖을 서성이는지 방죽 물 우으로 뒷짐진 내 그림자 나, 아직도 세상에 바라는 게 있나 비닐 봉지 속의 금붕어 아침마다 머리맡에는 15층이 있다 이부자리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이건 삶이 아냐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어, 속으로 울부짖는 나는 비닐 봉지 속의 금붕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한겨레신문'이 놓여 있다 주가 470선도 무너져 러시아를 순방하고 돌아오는 대통령을 환영할 때처럼 전표들이 빌딩에서 쏟아져내리는 명동 증권가; 이 生에는 밑바닥이 없는 듯하다 내심, 돈 좀 빌릴 수 있을까 하고 소설가 Y에게 찾아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걸 느끼고 있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약간 불었기 때문에 내 살갗에 와 닿는 비닐막 같은 거; 나는 내 生이 담겨서 들려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던 거다 그거다 베란다에서 1미터만 걸어가면 아침마다 머리맡에는 15층이 있다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시집, 미래사 ~~~~~~~~~~~~~~~~~~~~~~~~~~~~~~~~~~~~~~~~~~~~~~~~~~~~~~~~~~~~ 인사 개가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색종이 뿌리듯 가을 금남로 은행잎들이 마구 쏟아지는 걸 넋 놓고 잠시 바라보았더니 뒤에서 빵빵거린다 뒤돌아 보며 은행나무를 가르키자 영업용 택시 기사도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웃는다 차라리 모르는 얼굴에는 인간의 光背가 있다 집에 도착해서도 프라이드 차창에 붙어 있는 금빛 스티커:오늘은 하느님이 색종이 뿌려 주시는 황금나무 밑을 지나온 거다 ~~~~~~~~~~~~~~~~~~~~~~~~~~~~~~~~~~~~~~~~~~~~~~~~~~~~~~~~~~~~~ 세상의 고요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밖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렸을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없는 방,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官으로 드리운 늦가을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백미러에 國道 포플러 가로수의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야산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돌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거릴 때 흰 영구차가 따뜻한 봄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希望의 한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는 초토(焦土)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 이제 울음 소리도 없습니다. 파리 여러분!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 눈보라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 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 목마와 딸 우리 집으로 오는 길은 시장이 있고 그 길로 한 백 미터쯤 위로 올라오면 호남 정육점이 있는데요, 거기서 오른쪽 생선 가게 있는 샛길로 올라오면 신 림탕이라고 공중 목욕탕이 있고요, 그 뒤 공터에 소 금집과 기와 공장이 있지요. 소금집은 루핑으로 지 붕을 얹은 판잣집인데요, 거기서 다시 연립 주택이 있는 골목길로 쭉 타고 올라오면 여덟번째 반슬라브 가옥이 바로 우리집이지요. 이 집에서 나는 번역도 하고 르포도 쓰고 가끔 詩도 쓰면서 살지요. 마누라 가 신경질 부리면 다섯 살 난 딸을 데리고 소금집 공터에 나와 놀지요. 공터의 큰 포플러나무 그늘에 앉아 노인들은 화투를 치고. 어떤 날은, 리어카에 목마 여섯 대를 달고 아이들 에게 백 원씩 받고는 한 이십 분이고 삼십 분씩 태 워주는 할아버지가 그 그늘 아래로 오지요. 나는 환 호하는 딸을 하얀 백말에 앉혀주고 그 하얀 백말의 귀를 잡고 흔들어주지요. 아, 나의 아름다운 딸은 내 눈앞에서, 네 발을 묶은 용수철을 단방에 팍 끊 고 튀어가는 듯하지요. 말갈기를 흩날리며 나의 아 름다운 딸은 기와 공장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 속 으로, 아, 노령 연해주 땅으로, 멀고 안 보이는 나 라로 들어가버린 듯하지요. ~~~~~~~~~~~~~~~~~~~~~~~~~~~~~~~~~~~~~~~~~~~~~~~~~~~~~~~~~~~~ 아직은 바깥이 있다 논에 물 넣는 모내기 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빛이 斜繕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내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직은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시집.문학과지성사.1998. ~~~~~~~~~~~~~~~~~~~~~~~~~~~~~~~~~~~~~~~~~~~~~~~~~~~~~~~~~~~~~ 게 눈 속의 연꽃 1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트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트려 이름을 빼내 가라 2 게 눈 속에 연꽃은 없었다 보광(普光)의 거품인 양 눈꼽 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피워 올렸다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그러나, 볼 수 있었다 3 투구를 쓴 게는 바다로 가네 포크레인 같은 발로 걸어온 뻘밭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죽고 낳고 죽고 낳고 바다 한가운데에는 바다가 없네 사다리를 타는 게, 게좌(座)에 앉네 1994년 제8회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문학사상사. ~~~~~~~~~~~~~~~~~~~~~~~~~~~~~~~~~~~~~~~~~~~~~~~~~~~~~~~~~~~~~~~~~~~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뿐 내가 먼저 待接받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러나 하루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위해 나를 對岸으로 데려가려 하는 환장하는 내 바바리 돛폭. 만약 내가 없다면 이 강을 나는 건널 수 있으리. 나를 없애는 방법,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뿐! 사랑하니까 네 앞에서 나는 없다. 작두날 위에 나를 무중력으로 세우는 그 힘 ~~~~~~~~~~~~~~~~~~~~~~~~~~~~~~~~~~~~~~~~~~~~~~~~~~~~~~~~~~~~~~~ 안부 1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 안부 2 안녕하신지요. 또 한 해 갑니다 일몰의 동작대교 난간에 서서 금빛 강을 널널하게 바라봅니다 서쪽으로 가는 도도한 물은 좀더 이곳에 머물렀다 가고 싶은 듯 한 자락 터키 카펫 같은 스스로 발광하는 수면을 남겨두고 가대요 그 빛, 찡그린 그대 실눈에도 對照해 보았으면, 했습니다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지난번 엽서, 이제야 받았습니다 숨쉬는 것마저 힘든 그 空中國家에 제 생애도 얼마간 걸쳐놓으면 다시 살고 싶은 마음 나겠지요마는 연말연시 피하여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하냥 멍하니, 있고 싶어요 머리 갸우뚱하고 물밑을 내려다보는 게으른 새처럼 의아하게 제 삶을 흘러가게 하게요 ~~~~~~~~~~~~~~~~~~~~~~~~~~~~~~~~~~~~~~~~~~~~~~~~~~~~~~~~~~~~~~~~~~~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라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風速을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본다 ~~~~~~~~~~~~~~~~~~~~~~~~~~~~~~~~~~~~~~~~~~~~~~~~~~~~~~~~~~~~~~~~ 비닐새 흐리고 바람 부는 날 언덕을 오르는 나에게 난데없이 대드는 흰 새를 나는 쌱 피했다 피하고 보니, 나는 알았다, 누가 버린 農心 새우깡 봉지였다 칠십세 이하 인간에게 버림받은 비닐새, 비닐새여 내 마음을 巡察하는 흰 새여 흐리고 바람 마음대로 부는 날의 언덕은 이 세상 참 가깝구나 ~~~~~~~~~~~~~~~~~~~~~~~~~~~~~~~~~~~~~~~~~~~~~~~~~~~~~~~~~~~~~~~~~~~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쭬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 雪景 날 새고 눈 그쳐 있다 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 장의 수의(壽衣)에 덮여 있다. 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 일러주는 눈발 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우에 짐부린다. 『게 눈 속의 연 꽃』, 문학과 지성사, 1990 ~~~~~~~~~~~~~~~~~~~~~~~~~~~~~~~~~~~~~~~~~~~~~~~~~~~~~~~~~~~~~~ 等雨量線 1 1 나는 폭포의 삶을 살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쏟아지는 힘을 비켜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 ;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을 나, 나가요, 여자가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아냐, 이 방엔 너의 숨소리가 있어야 해 남자가 한참 뒤에 중얼거린다 2 이력서를 집어넣고 돌아오는 길 위에 잠시 서서 나는, 세상이 나를 안 받아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트 실평수처럼 늘 초과해 있는 내 삶의 덩어리를 정육점 저울 같은 걸로 잴 수는 없을까 나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아이들이 마구 자라 수위가 바로 코밑에까지 올라와 있는 생활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커피 숍에 앉아, 기다리게 하는 사람에 지쳐 있을 때 바깥을 보니, 여기가 너무 비좁다 3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 물 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저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생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 겨울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욱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華嚴光州 하늘과 땅을 溶接하는 보라色 빛 하늘의 뿌리 잠시 보여준 뒤 환희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帝釋天, 저 멀리 구름장 밑으로 우뢰 소리, 도라무깡처럼 우르르르르 굴러오네 이윽고 비가 빛이 되고 願을 세우니, 거짓말이나니 희망은 作用하는 거짓말이므로 전남대학교 정문 문짝 없는 문, 해탈했네 아구탕처럼 입 쩍 벌리고 털난 鐵齒 드러낸 아수라 아귀, 울퉁불퉁 종기 난 쇠방망이 들고 無門 앞에 서 있고, 어? 없는 것들이 있네, 좋은 것으로 나아가는 문 앞에는 어째서 꼭 나쁜 것들이 있을까? 푸르스름한 고춧가루 안개라 용과 봉황 모양으로 버즘나무숲 위로 자욱하게 기어오르고 눈물을 담은 능금 열매들이 후두두두둑 다시 그 자리에 떨어지네 어메, 저 잡것들, 헛것들이 힘쓰네이 헛것들아, 헛것들아, 문 한번 지나간다고 해탈할까마는 이 문은 지나가는 것이제 빠져나가는 구멍이 아니랑게 선남선녀들, 아름다운 舌音과 母音으로 일렀으나 아귀들, 헛것들인지라 그리고 대저 헛것들일수록 불안감이 증가시키는 더 큰 힘을 쓰는지라 종기퉁성이 쇠방망이 휘두르며 더 날뒤네 이에 선남선녀들, 해탈문 아래 도솔천 계곡에 내려가 지천으로 불꽃핀 불꽃들 꺾어 이 헛것들, 물러가라 이 헛것들 뒤의 더 큰 헛것들, 물러가라 이 헛것들 뒤이 더 큰 헛것들 뒤의 더 더 큰 헛것들, 물러가라, 물러가라, 외치며 던지니 그 꽃들만 성층권 밖으로 뚫고 나가 보이지 않네 상점 주인들이 수도 호스로 길을 씻고 그날 밤, 꽃들이 사라진 그 자리에 獅子座, 환히 點燈하고 나타나네 돌덩어리에다가 얼마나 뜨거운 마음을 넣으면 별이 되었을꼬 공용 터미널 나는 이렇게 들었네 이 종점은 다시 모든 곳 十方世界로 출발한다고 떠나고 돌아오고 업 싣고 갔던 소 달구지, 적재량 초과되어 입에 진득한 비누 거품 물고 때로는 낮은 클라리넷 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만겁 인연의 낡은 驛舍로 돌아오고 떠나고 돌아오고 돌아오고 떠나고 좀체 브레이크가 없는 수레바퀴 아래 풀을 먹는 벌레 풀을 먹은 벌레를 먹는 딴 벌레 풀을 먹은 벌레를 먹는 딴 벌레를 먹는 물고기 그 물고기를 먹는 새 그 물고기를 먹은 새를 먹는 짐승 그 물고기를 먹은 새를 먹은 짐승들을 먹는 사람들 아, 수레바퀴여 결과를 다시 밟아 잡아먹는 원인이여 그해 佛紀 이천오백스무네 번째 부처님 오신 날 어찌하여 진리는 말도 안 되는 역설로 복수하였는지요 약국 앞 길에 괴어둔 자전거 뒷바퀴를 한 아이가 돌리고 있네 시계 톱니 음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아름다운 바퀴살 짐을 내린 그 자전거 타고 그 아이, 벌써 몇 세상 갔네 광주 공원 나는 여러 군데서 여러 번 이렇게 들었네 화엄도 말짱 구라고 부처도 베어버리자고 옳도다, 화엄도 구라엿고 부처도 이미 베어져 있었네 잔뜩 바람먹은 떡갈나무숲 위로 펄럭이던 天幕 갑자기 暗電되던 날 사람 대가리가 뽀개진 수박 덩이처럼 뒹굴고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부처도 없어졌네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부처도 터져나온 내장은 저렇게 순대로 몸뚱어리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다만 대가리만 남아 푸욱 삶아져 저렇게 눈감고 소쿠리에 臥禪하고 있는 거이네 광주때 두개골 파손된 사진 광주때 두개골 파손된 사진 나무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떡갈나무숲 공원 광장 건너편 순대국집 앞 아저씨는 프로판가스 화염 분사기로 돼지머리를 지지고 아주머니는 합성고무 다라이에 든 출렁출렁한 내장들 피를 씻어낸다 그 핏물 광주천으로 흘러내리고 그 검은 궁창, 멀리 하남 땅 흰 극락강으로 가고 있다 어는 날 극락강 사구에서 목 없는 돌부처들, 洪水에 씻겨 올라왔지 國會 光州特委 위원들이 혹시나 하고 다녀가고 그렇지만 부처는 이렇게 없어진 채로, 늘, 있네 부활도 하지 않고 죽지도 않고 광천도 我聞如是 광주보다 먼저 있는 이름,빛의 샘 그래서 무등 경기장 왼쪽 외야석 상공 새털구름 깃털에 노을이 살짝 비낀, 부끄럼타는 듯한 아름다운 서광을 프로야구 중계 화면이 전국에 보여주기도 하네 광주로 빛을 다 보내고 어둑어둑해지면 일신방직공장 정문 앞 여공들 삼교대하고 윤상원의 누이, 형광등 아래에서 끊긴 실을 찾고 있네 오빠, 아직 이 실 끝에 있능가 세상은 죄다 사람이 지은 거라고 쬐그만 들불로 비춰주었던 오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형광등 아래 아직도 이 세상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세상을 다감고도 남을 실타래 어디에 걸려 있구만이 노동자 보살이 이렇게 해서 끄집어낸 형광등 아래의 빛실이 충장로 밤거리를 걷는 사람의 옷 솔기에서 풀리고 있네 끝없이 북으로 뻗친 비단江 광천동을 돌아 금남로에 이른 영업둉 택시, 양쪽에 물날개 달고 억수 속을 질주하네 물은 맑아 물 저 및 거뭇거뭇한 아스팔트가 보이고 옛날에는 이 강 밑으로 길이엇는가보죠, 묻고 싶엇네 불과 몇 달 전 일 같은데 벌써 유적이 되어 밑바닥으로 내려가 있는 길, 수면에 기총소사하듯 소나기 두드러기 무수히 돋는 먹물강이구나 나는 그렇게 들었네 검은 무쇠소가 이 강에 들어갔다 나오면 흰 羽緞 같은 소가 된다는데 보면 깊어도 서면 발바닥에도 못 미치는 이 비단 두께의 강에 어떻게 들어가랴 그 당시 자기도 큰 코끼리 등에 타고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고 말하는 기사님 그래서인가, 나이에 비해 머리카락 어느새 허옇네 그 당시 가로수였던 은행나무들 물 위로 올라와 호우주의보가 몰고 온 비바람에도 휘지 않고 맞서 함성을 지르네 도청 앞 Y건물에 내려서 보니 왔던 길, 끝없이 북으로 뻗친 비단강, 뿌우옇게 보이지 않는 靑天江 하늘 아래로 흘러드는 듯하네 도청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온다던 사람 아직 보이지 않고 기다리다 못해 사자좌에서 일어난 사자 몸을 털며 크게 포효하니 고막이 찢어지게 하늘이 번개표 모양으로 찢어지고 이윽고, 꽃이 되었다가 별이되었던 돌, 우박 덜어지는구나 이 비에 사람이 어떻게 오랴만 때로 진실은 약속을 깸으로써 오기도 하지 우리가 간절하게 기다리는 건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에 가장 온전하게, 와있듯이 이 비 그치면 이 비 그치면 저 도청 앞 분수대에 유리 줄기 나무 높이 올라오르리라 그 투명 가지가지마다 지금가지 참았던 눈물 힘껏 빨아올려 유리나무 상공에 물방울 뿌린듯 수많은 魔尼 보배 꽃, 빛 되리라 그때에 온 사찰과 교회와 성당과 무당에서 다 함께 종 울리고 집집마다 들고 나온 연등에서도 빛의 긴 범종 소리 따라 울리리라 상점도 은행도 창고도 모두 열어두고 기쁜 마음 널리 내는 강 같은 사람들 發光體처럼 절로 비나는 얼굴들 하고 젊은이는 무든 태우고 늙은이는 서로 업고 어린이는 꽃 갓끈 빛난 신 신겨 앞세우고 금남로로, 금남로로, 노도청으로, 도청으로 十方으로 큰 우레 소리 두루 내는 강처럼 흘러들고 흘러나오고 그때여, 須彌山에서 날아와 궅어 있던 무등산이 비로서 두 날개 쫘악 펴고 羽化昇天하니, 정수리에 박혀 잇던 레이다 기지 산산조각나는구나 땅에서는 환호성, 하늘에서는 비밀한 불꽃 빛 천둥음악 마침내 망월로 가는 길목 山水에는 기쁜 눈으로 세상 보는 보리수 꽃들 푸르른 억만 송이, 작은 귓속말 속삭이고 오시는 때 맞춰 황금 깃털 수탉이 숲 위로 구름 憧奇 일으키며 힘차게 우는 鷄林 그때에 도둑, 깡패, 마약범, 가정파괴범, 국가보안법 관련자, 장기수 공산주의자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교도소 문을 나오고 그날 밤, 연꽃 달 환히 띠우고 여어러 세상 흘러온 굽이굽이 千江이 산기슭에 닿아 있는 月山, 처음으로 물 속 연꽃 다 보았던 개 한 마리 늑대 울음 울며 산으로 돌아가고 ~~~~~~~~~~~~~~~~~~~~~~~~~~~~~~~~~~~~~~~~~~~~~~~~~~~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槍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希望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이 문으로 이 문으로 들어가면 넓고 이 문을 나오면 좁다 이 문에는 종교성이 있다 풀잎 하나가 풀잎의 전체를 보여 준다 제자리 걸음으로 수십 킬로 먼 곳까지 다녀온다 끼니 때마다 내 밥의 1/3을 비둘기에게 던져 주고 갇혀 있음으로 내 몸이 무장무장 투명해진다 새들이 내 흉곽으로 기어들어와 날개 짓는 소리가 소란하다 내려가고 싶다 유리 같은 땅 ~~~~~~~~~~~~~~~~~~~~~~~~~~~~~~~~~~~~~~ 들녘에서 바람 속에 사람들이...... 아이구 이 냄새, 사람들이 살았네 가까이 가보면 마을 앞 흙벽에 붙은 작은 붉은 우체통 마을과 마을 사이 들녘을 바라보면 온갖 목숨이 아깝고 안타깝도록 아름답고 야 이년아, 그런다고 소식 한장 없냐 ~~~~~~~~~~~~~~~~~~~~~~~~~~~~~~~~~~~~~~~~~~ 영산(靈 山) 마을 가까이 오면 산은 의인화된다 마을 사람들은 앞산을 의상대라 부르고 있었다 의상대는 겸재식 부벽준의 도끼로 도끼로 깎여 있다 천여 년 전 의상은 저 앞산에서 천공을 받아먹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로써 그의 라이방 원효에게 재고 싶어졌다. 여수 돌산 영구암에서 놀고 있던 원효가 어느 날 저녁 의상에게 들렀다. 이튿날 한식경이 되 어도 의상은 원효에게 공양을 갖다줄 생각을 아니하는 거디었다. "의상 이놈아, 형님한테 밥 안주냐?" "형은 왜 이리 촐삭거려? 좀 기다려봐. 곧 소식이 올 거야." 그러나 그놈의 소식은 오질 않았다. 배고프다고 투덜거리며 원효는 그 길로 내려가버렸다. 원효가 간 뒤 의상은 천공을 받았다. 그는 또 한번 뼈아픈 질투심의 도끼에 찍혔다. 의상은 그 산을 버렸다. 산을 오르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몸무게에 의해 실존주의자가 되 었다가 산꼭대기에 이르면 유물론자가 된다. 서울을 빠져나올 때, 아내에게 "아무도 책임지려 하질 않아. 이건 내가 내린 유배야"라고 말했던 것도 우스꽝스럽고 부끄럽더군. 불행은 마력을 갖는다. 천년 전 의상이 버린 산을 오늘 내가 오른다. ~~~~~~~~~~~~~~~~~~~~~~~~~~~~~~~~~~~~~~~~~~~~~~~~ 너무 오랜 기다림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개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이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 옛 집 산수동(山水洞) 옛집엘 가보았더니 철로도 없어지고 옛 그 집에 약국이 들 어서 있었다. 거기에 웬 원숭이가 있어 철창 사이로 손을 넣어 한참 을 같이 놀았다. 갓난아이같이 볼그레한 원숭이 손바닥에도 손금이 제 운명을 그려놓았다는 게 신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으로 돌아와, 그날 밤부터 온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겨드랑이며 배때기며 낯짝이며 득득 긁어대고 있자니, 도반이 다가와, 웬 잔나 비가 들어앉았냐며 문을 밖에서 잠가버린다. 내 귀를 뚫고 1940년대 산 기차가 침을 퇴퇴, 뱉으며 지나갔다. ~~~~~~~~~~~~~~~~~~~~~~~~~~~~~~~~~~~~~~~~~~~~~ 뜰 앞의 잣나무 텔레비전 가게 앞을 지나가다 얼핏, 그 집 안집으로 난 문이 거울인 줄 알고 얼른 내 얼굴을 비췄더니 거울이 아니라 문이었어 보려고 했으니까 보였지 않겠어, 쯔쯧 쯔쯔쯔쯧 쓰러져 있는 노동자들을 발로 지근지근 밟고 터진 머리를 또 때리러 가는 쇠파이프들이 16인치, 20인치 화면에 줌 인, 중인 거울인 줄 알았더니 문이었어 그리 가면 들어가버리는 문 뜰에는 한 그루 잣나무 잡으면 평면인 나무 그렇지만 활처럼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자라나는 잣나뭇가지 ~~~~~~~~~~~~~~~~~~~~~~~~~~~~~~~~ 서풍(西風) 앞에서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문학과지성사 ) ~~~~~~~~~~~~~~~~~~~~~~~~~~~~~~~~~~~~~~~~~~~~~~~~~~~~~~~~~~~~~~~ 황지우 시인 소개 시인. 본명 : 황재우 활동분야 : 시인 출생지 : 전남 해남 주요수상 : 김수영문학상(1983) 등 주요저서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 《뼈아픈 후회》(1993) 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 강제 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 연우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 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 ~~~~~~~~~~~~~~~~~~~~~~~~~~~~~~~~~~~~~~~~~~~~~~~~~~~~~~~~~~~~~~~~ 詩:황지우 * 음울했던 80년대, 거침없는 시어와 새롭고 낯선 형식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 지식인과 소시민의 허위의식과 맞서 싸웠던 시인 황지우. 그는 80년대 한국시에 있어 하나의 상징이었다. 황지우가 새 시집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를 냈다. ‘게 눈 속의 연꽃’(1990)을 낸 지 꼭 8년만이다. 격랑의 시대를 헤쳐온 한 시인이, 이념이 무너져버린 90년대의 진공상태에서 걷잡을 수 없는 정신적 공황을 겪었던 한 시인이, 지금 세기말의 끝자락을 어떻게 건너가고 있는지. 이 시집엔 그러한 고뇌와 사유의 흔적이 짙게 깔려 있다. ‘슬프다//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뼈아픈 후회’중) 이 시집은 우선 그 제목부터가 낭만적이다. 삶의 허무가 짙게 풍겨나기도 하고 어쩌면 속세에 연연해하지 않는 초월의 모습 같기도 하다. 욕심이나 집착을 버리니 과거의 ‘내’가 속절없어 보인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생이 끔찍해졌다/…/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중) 그러나 그의 시는 상실과 허무에 매몰되지 않는다. 상실이나 결핍은 출발이고 힘이기 때문이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어쩌다 한순간/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저 화엄탕에 발가벗고 들어가/생을 바꿔가지고 나오고 싶다’에서처럼 화엄(華嚴)이나 선(禪)의 불교적 색채도 어른거린다. 이념 투쟁보다 더 깊은 곳으로 그의 시는 가고 있다. 그는 87년 시집 ‘나는 너다’의 후기에서 다스 카피탈(Das Kapital·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뜻함)과 화엄 사이, 그 좌와 우의 깊은 간극에 대해 고뇌했고 그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시에 대해 고뇌했었다. 당시 그는 물론 다스 카피탈에 가까웠고 지금은 화엄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시는 하나에 편향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양자의 포괄을 추구한다. 황지우는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도인(道人)의 길로 가면 시가 필요하지 않고 그렇다고 시가 투쟁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는 둘 사이의 경계선,그 떨림이 아닐까.” 떨림이 없으면 시의 감동도 없다. 그가 종종 ‘아, 옛날에 내 노래를 들어주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가?/다시 탄압이나 받았으면’하고 말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떨리고 그의 시는 더욱 긴장한다. 미세한 떨림은 어쩌면 그의 촉수가 더 예민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다른 새로움을 찾아나서는 출발이기도 하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 유마주의적 세계관의 변주-改作을 통해 본 황지우의 시세계 1. 詩적 전략과 개작 한 시인이 자신이 이미 발표했던 작품을 개작(改作)하여 세상에 다시 내놓았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내적 동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 내적 동인을 찾아내면 시인의 시작과정과 개작속에 드러나는 마음의 지도까지도 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황지우의 일곱번째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1998,문학과지성사·이하 ‘어느 날…’로 약칭) 는 그런 점에서 여러가지로 주목되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각종 잡지에 발표했던 작품들이 작게는 한 두 행, 많게는 거의 전면적으로 개작되어 실려 있다. 그 중에는 시집에 수록되지 못한 작품들도 여럿 있다. 특히 ‘조각시집’이라 불리는 이전 시집‘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학고재·이하 ‘저물면서…’로 약칭)에 실렸던 작품들도 여러 곳에 걸쳐 수정되어 실려있는데, 그 수정의 과정은 황지우의 시작과정과 90년대 이후 변모해가는 마음의 지도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그만큼 그가 보여주는 개작의 과정은 집요하고도, 전면적이다. 80년대를 노도와 같이 통과해온 시인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있어 90년대는 표면적으로 일종의 휴지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황지우는 1990년 ‘게 눈속의 연꽃’을 펴낸 이후 시 대신 조각에 몰두해 전시회를 가졌고, 그 기록을 ‘저물면서…’에 남겼다. 그가 시집을 펴낸 것은 ‘게 눈속의 연꽃’ 이후 8년만의 일이다. 그가 그 사이 시집 형태로 시를 발표한 것은 시화집 성격인 ‘저물면서…’에 실린 12편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3년 뒤 ‘어느 날…’을 펴내면서 여기에 실린 12편의 작품중 3편은 버리고, 나머지 9편만 살려놓는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여러 곳에 손을 댄, 전면적이라 할 수 있는 개작을 통해 세상에 다시 내놓았다. 그가 얼마나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짧은 시의 개작에서 쉽게 드러난다. 1)물기 남은 바닷가에 긴 다리로 서 있는 물새 그림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서 멍하니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욱 빛나는 저녁 바다를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전문, ‘저물면서…’, 19952)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는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전문, ‘어느 날…’, 1998 3년의 시차를 두고 개작 발표된 위의 작품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울림을 준다. 1)의 작품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 무게가 주어져 상실감을 강조하는데 반해 2)의 작품은 졸리는 옆눈에 무게가 주어져 권태와 더불어 존재와의 그 어떤 거리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멍하니’라는 표현이 ‘맹하게’라고 바뀐 것도 이같은 변화 때문이다. 특히 1)은 ‘물새 그림자’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자아, 혹은 자기 내면에의 침잠이 도드라지는데 반해, 이를 삭제한 2)는 ‘긴 외다리’의 이미지가 부각되어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이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황지우는 짧은 시의 개작에서도 섬세한 변화를 주어 울림 자체를 바꾸고 있다. 그 변화는 군살을 빼고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는 형식의 수정에서부터, 의미를 덧대거나 변모시키는 내용수정, 그리고 위의 작품처럼 자신의 시를 패러디하는 차원으로까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개작 과정의 추적을 통해 황지우의 시작과정과 90년대를 통과해가는 마음의 지도를 밝혀 낼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한 시인에게 있어 개작이 지닌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작게는 퇴고의 부족을 자인하는 결과일 수도 있고, 크게는 한편의 시 속에 담은 세계관의 변모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퇴고의 부족을 자인하는 결과라 할 지라도 시인의 시작과정을 은연중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물며 세계관의 변모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문제제기적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황지우의 경우처럼 여러 편의 작품에 동시적으로 개작을 진행했다면 그것은 주목받을 만한 현상이다. 황지우의 개작이 주목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시를 대하는 그의 시관(詩觀)에서도 연유한다. 그는 80년대를 ‘나는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라는 명제를 앞세우고 온몸으로 통과해 나갔다. 이 명제속에 담긴 전언은 시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시인에 의해 얼마든지 발견되어질 수 있는 ‘움직이는 실체’ 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시적인 것을 들추어 내는 발견이자 발상이다. 황지우는 이를 두고 “시를 언어에서 출발하지 말고, ‘시적인 것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해보라” (‘버라이어티 쇼, 1984’시작메모, ‘겨울 -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고 표현했다. 그는 이와 함께 ‘전략’이란 용어도 공공연히 사용했다. 즉 황지우에게 있어 시쓰기는 시적인 것을 발견해내 시로 만드는 ‘전략’인 것이다. 해체적 시쓰기는 이러한 시관의 핵심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발견과 전략을 시쓰기의 기둥으로 삼고 있는 황지우에게 있어 개작은 발견된 대상의 수정 내지 전략의 수정을 뜻한다. 그것은 곧 개작과정이 시인이 90년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통과해왔는가를 보여주는 시적 궤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문안에서 우는 검은 소 발견과 전략이라는 황지우식 시쓰기의 두 기둥으로 ‘어느날…’이전의 시세계를 일별해보면 크게 두가지 세계를 발견해낼 수 있다. 부정적 현실 인식과 바깥의 세계를 향한 낭만적 열망이 충돌하는 초기의 시세계가 그 충돌의 원인이 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시적’이라는 전략속에 쓰여졌다면, 87년 대선 패배와 공산주의 몰락이후 우울한 자기 성찰과 불교적 사유를 결합시키고자 한 그의 시세계는 선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전략속에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이 시적이라는 전략이 필연코 풍자를 동반한다면, 선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전략은 깨달음이라는 화두를 전제로 한다. 그가 ‘게 눈 속의 연꽃’에서 수시로 깨달음을 내세우는 것은 이러한 전략적 장치의 하나라 볼 수 있다. “넘기면 없어질 것 같은 한 장/ 아, 저것을 넘기면 과연 空일까/송곳으로 내 눈알을 찔러버리고 싶다.”(‘광양길’ 부분)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세계는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변모하게 된다. 다음 작품은 그 변모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1)아, 눈 먼 것은 聖스러운 병이다, 지렁이 하나가 진흙을 기어 갔구나 해를 지탱시켜 주는 원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어찌 하랴,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 있을 때다 雨後, 붉은 봉숭아 꽃잎 진 곳 눈 먼 삶이 한가닥 선을 마쳐 놓았구나 -‘바깥에의 반가사유’ 전문, ‘저물면서…’, 19952)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전문, ‘어느 날…’, 1998 먼저 발표된 1)에서 시를 끌고 가는 중심 이미지는 ‘지렁이 하나’이다. 이 지렁이에 대한 이미지가 ‘눈 먼 삶이 한가닥 선을 마쳐 놓았구나’라는 마지막 행을 이끌어 내 시 전체의 무게가 ‘한가닥 선을 마쳐놓은 눈 먼 삶’에 기울게 된다. 이는 나중 발표된 시에는 없는 ‘雨後, 붉은 봉숭아 꽃잎 진 곳’이라는 행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의해 더욱 고조된다. 그러나 나중 발표된 2)에서 시를 끌고 가는 중심 이미지는 ‘검은 장수하늘소’이다. 이 검은 장수하늘소에 대한 이미지가 문 안에서 우는 ‘검은 소’를 이끌어 내 시 전체의 무게는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을 꿈꾸며 우는 ‘검은 소’에 실리게 된다. ‘한가닥 선을 마쳐놓은 눈 먼 삶’에 대한 경도에서, ‘알지만 나갈 수 없는, 무궁의 바깥을 꿈꾸며 우는 검은 소’에로의 변화속에는, 시인이 삶을 단순하게 수락하는 대신, 안과 바깥이라는 대립속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바라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 의지에 대한 표명이 깨달음이란 화두를 표현하는 어조까지 바꾸어 ‘어찌 하랴,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 있을 때다’라는 영탄조의 구절을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라는 완곡조의 구절로 변형되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여기에다 앞선 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를 등장시켜 시를 보다 입체화시키고, 나아가 인간화시키고 있다. 눈이 없는 ‘지렁이 하나’가 열어주는 공간은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단순화 되고, 관념적인 공간인데 반해,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보는 넙치가 열어주는 공간은 입체적이고, 인간화된 공간이다. 시제목이 ‘바깥에의 반가사유’에서, 보다 지향점이 명확한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로 바뀐 것도 이러한 변모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시의 개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시인이 ‘무궁의 바깥’에 대한 사유를 통해, ‘안’의 세계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 ‘눈 먼 삶이 마쳐 놓은 한가닥 선’의 절대성보다는, 문 안에서 우는 검은 소의 구체적 울음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성보다 안과 바깥에 대한 사유를 통해 시간적 공간적 확장, 혹은 열림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변모된 태도는 다음의 개작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1) 그리고 사람들이 땅만 보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버스에서 힐낏 보았을 때 (중략)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무한하다 -‘이 세상의 고요’, ‘저물면서…’, 19952)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중략)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세상의 고요’, ‘어느 날…’, 1998 ‘이 세상이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한 때들을 포착해 일상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생의 이면을 들추어내는 위 작품도 황지우의 개작이 어떤 심리적 과정을 거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황지우는 1)에서 재판받으러 가는 호송버스안에서 본 것이 땅만 보면서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고 했다가, 개작한 시에서는 투명하고 추운 하늘이었다고 했다. 1)은 지금 나는 절박하게 끌려가는데 유리창 너머의 사람들은 무심하게, 혹은 의식적인 외면을 통해 바삐 지나간다는 느낌을 주어 나와 세계의 단절, 불화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는데 반해 2)는 이 단절과 불화 대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이라는 존재론적인 외로움, 소외등을 부각시키고 있다. ‘힐낏 ’이라는 조소조의 표현이 보다 단정한 ‘힐끔’이라는 표현으로 바뀐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마지막 연의 개작도 의미심장하다. 1)이 고요하고 나른하다는 단순한 표현으로 그치고 있는데 반해 2)는 그 세계가 무궁과 닿아있기 때문에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적으로 열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시적화자가 말하는 무궁이란 바깥의 세계와 대립되는 안의 세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무궁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바깥에 대한 사유도 없다는 점에서 무궁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존재론적인 인식이다. 시인이 ‘저물면서…’에는 없던 ‘무궁’이란 표현을 개작을 통해 덧붙였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황지우에게 있어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시세계를 지배했던 ‘선적인 것이 시적’이라는 태도는 개작에서도 드러났듯 변모되었다. 그 변모는 이 세계가 무궁과 닿아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고, 그 무궁의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열망속에서 부풀어 오른 것이다. 그 인식과 열망은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관념적인 절대성에의 추구를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존재 탐구로 변모시켰다. 그 변모는 영탄, 조소조의 어조보다 완곡하고 단정한 어조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3. 문안에서의 초월 80년대 후반의 방황을 담고 있는 ‘게 눈 속의 연꽃’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어휘가 길, 집, 산 등이었다면 90년대를 통과하는 궤적을 담고 있는 ‘어느 날…’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어휘는 삶(生),막(膜), 거울 등이다. 특히 길과 삶(生)은 양 시집에서 각각 70회 이상씩 등장하는데 이는 거의 수록된 작품수와 비슷한 분량이다. 길, 집, 산등이 떠도는 자의 방황과 회한을 드러내는데 적절한 이미지라면 삶(生), 막(膜), 거울등은 무엇엔가 갇힌 자의 응시와 탐구를 드러내는데 합당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이들 이미지를 받쳐주는 공간적 모티프가 각각 겨울과 대낮으로 대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방황과 회한으로 떠도는 자의 공간이 눈 내리는 겨울이라면, 무엇엔가 갇힌 자의 응시와 탐구는 햇빛 환한 낮에도 별(‘낮에 나온 별자리’)을 보는 환(幻)과 착란의 공간에 머문다. ‘이는 작품들의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게 눈 속의 연꽃’에 실린 작품들이 ‘길’,‘집’,‘겨울숲’,‘눈보라’,‘雪景’, ‘겨울산’등의 제목을, ‘어느날…’에 실린 작품들이 ‘낮에 나온 별자리’,‘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우울한 거울’(연작), ‘태양 연못속에 칼을 던지다’등의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갇힌 자는 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가거나, 초월을 꿈꾸며 갇혀 있다는 마음을 벗어나려고 애쓴다. 이때 초월은 완전한 탈출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갇혀 있다는 마음은 탈출시켜준다. ‘게 눈속의 연꽃’에서 “날 새고 눈 그쳐 있다/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 장의 수의에 덮여있다”(‘雪景’)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내 희망의 한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비 그친 새벽 산에서’) 고 절망과 상실감을 노래하던 시인이 초월을 꿈꾸며 어떻게 회생해가고 있는가는 두 번의 개작을 거친 다음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1)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고향…… 무한한 지평선에 게으르게, 가로 눕고 싶다; 印度, 인디아 ! 無能이 죄가 되지 않고 삶을 한번쯤 되돌릴 수 있는 그곳 -‘노스탤지어’ 전문, ‘문학과사회’ 1993년 봄호2)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고향… 짐승과 성자가 한 水準에 앉아 있는 지평선에 남루한 이 헌옷,벗어두고 싶다 벗으면 생애도 함께 따라 올라오는 나의 인도, 누구의 것도 아닌 인디아 ! 무한이 무능이고 무능이 무죄한, 삶을 몇 번이고 되물릴 수 있는, 그곳 -‘노스탤지어’ 전문, ‘저물면서…’, 19953)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고향………무한한 지평선에 게으르게, 가로눕고 싶다; 인도, 인디아! 무능이 죄가 되지 않고 삶을 한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 온갖 야한 체위로 성애를 조각한 사원; 초월을 기쁨으로 이끄는 계단 올라가면 영원한 바깥을 열어주는 문 이 있는 그곳 -‘노스탤지어’전문, ‘어느 날…’ , 1998 2, 3년의 시간차를 두고 각각 수정 발표된 이들 시편들은 시 한 편을 완성해가는 황지우의 공력과 고향찾기로 상징되는 초월에의 경사, 그리고 황지우가 90년대를 지나면서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가장 먼저 발표된 1)은 시적화자가 삶을 한번쯤 되돌릴 수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인도를 상정해놓고 그곳으로 가고 싶어함을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표현은 시적화자가 아직도 길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길은 ‘게 눈속의 연꽃’의 세계처럼 방황과 회한의 길이 아니라 고향에 비유되는 인도라는 구체적 목표지점을 갖고 있는 길이다. 길은 길이되 지향점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구별된다. 2년뒤에 발표된 2)는 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근원이 무엇 때문인지를 시적화자 스스로가 자문해보는 작품이다. 그 고향은 짐승과 성자가 한 수준에 앉아 있고, 남루한 헌옷을 벗으면 생애도 함께 따라 올라오는 곳이다. 시적화자는 그곳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인도’임을 강조한다. 1)에 없던 ‘나의’ ‘누구의 것도 아닌’이란 표현은 두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그 인도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 인도가 아니라 내가 나의 상상속에 그린 인도임을 강조한 것으로, 인도를 그냥 문맥 그대로의 인도로 보지 못하는 타자 혹은 독자에 대한 짜증이 묻어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인도 자체가 아무에게나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인도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1)과 2)의 중요한 차이는 마지막 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적화자는 1)에서 인도를 ‘삶을 한번쯤 되돌릴 수 있는 그곳’이라고 했다가 2)에서는 ‘삶을 몇 번이고 되물릴 수 있는, 그곳’이라고 표현했다. 되돌린다는 것은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함의한 과거지향적 표현인데 반해 몇 번이고 되물린다는 것은 매번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신생(新生)의 의미를 품고 있다. 3)에 와서 시인은 2)의 설명투 표현을 버리고 돌연 1)로 다시 돌아간다. 제목까지 1)로 되돌아간 시인은 대신 인도를 꿈꾸는 다른 이유를 덧댄다. 그 덧댐은 두가지 층위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하나는 온갖 야한 체위로 성애를 조각한 사원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보다 인간적(세속적)이고, 보다 역동적 깨달음을 주는 곳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바깥을 열어주는 문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2)에 나온 ‘몇 번이고’라는 표현 대신 ‘한 번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러번 되물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한번쯤 되물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은 보다 지순한 깨달음 혹은 보다 순정한 신생에의 열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1) 2) 3)은 각각 발표된 시기에 따라 다른 울림을 준다. 1)이 단순한 동경 차원에서 인도를 상정했다면 2)에서는 그 동경의 근원을 시인이 자문함으로써 동경의 대상에 관념의 외피를 입혔다. 그러나 3)에서는 처음에 동경했던 그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2)에 입혔던 관념의 옷을 벗기고 대신 인간적 체취와 순정한 신생에의 의미를 덧댔다. 그 과정에서 ‘노스탤지어’는 과거지향적에서 미래지향적인 노스탤지어로 변했으며, 관념적 공간에서 보다 생생한 공간으로 옮겨갔다. 미래지향적 노스탤지어는 달리 말하면 문 안에서의 초월이자, 자기회생의 길이라 할 수 있다. 4.돈오점수(頓悟漸修)적 시쓰기의 의미 ‘선적인 것이 시적’이라는 전략속에 쓰여진 ‘게 눈 속의 연꽃’에서 황지우가 펼쳐보인 세계는 불교용어를 빌리면 돈오돈수(頓悟頓修)적 시쓰기의 세계이다. 깨침과 닦음이 둘 다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완성된다는 의미의 돈오돈수를 시쓰기에 차용하면 직관적 시쓰기를 중시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개작을 통해 이루어진 ‘어느날…’의 시세계는 직관적 깨달음에 도달한 세계라도 오랜 세월을 두고 되새김질을 해서 의미를 덧대야 한다는 돈오점수적 글쓰기의 태도라 할 수 있다. ‘불교의 돈점논쟁’에서도 알수 있듯이 돈오돈수식 글쓰기는 직관의 힘을 과신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기 쉽고, 돈오점수식 글쓰기는 알음알이(知解)에 치우쳐 직관의 절대성을 흐리게 하기 쉽다. 황지우가 어떻게 돈오돈수식 글쓰기에서 돈오점수식 글쓰기로 옮겨갔는가는 다음 시들의 변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천변 수양버들 아래 간지럼을 멕이는 이 아리아리한 봄밤 아, 뭐라고 말해야지 肉欲的인 봄밤 수은등 아래 사직공원 사쿠라곶잎 다 지고 이 스펀지 같은 봄밤 사람들은 세상에 와서 한낱 착각 같은 아름다움을 보고 갈 뿐인가 -‘봄 밤’부분 , ‘게 눈속의 연꽃’, 1990 2)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사춘기 때 수음(手淫) 직후의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罪意識)처럼 벚꽃이 추하게, 다 졌다 나는 나의 생(生)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벚꽃’ 전문, ‘실천문학’ 1992년 봄호 3) 사직공원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이제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수은등 아래 벚꽃’전문, ‘어느 날…’, 1998 벚꽃 지는 봄날의 정경을 노래한 위의 시들은 똑같은 소재를 가지고 변화되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1)에서 시인은 ‘이 아리아리한 봄밤’을 ‘아 뭐라고 말해야지’라고 고민하다가 ‘肉欲적인 봄밤’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들은 세상에 와서 한낱 착각 같은 아름다움을 보고 갈 뿐인가’라는 깨달음을 노래한다. 시인은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사태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이름 붙이기에 성공하고, 동시에 이 사태가 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이 과정이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직관의 힘을 믿는 시쓰기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현재 진행형에서 과거회상형으로 바뀐 2)는 젊은 시절로 상징되는 벚꽃 피던 시절의 도취와 광기를 돌아보고 그 벚꽃이 지고 난 뒤 다가온 절망감,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다.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 때 이미 다 알았다’라는 표현은 ‘삶이 착각같은 아름다움만 보고 갈 뿐’이라는 1)의 깨달음에 대한 확인이다. 시인이 만약 2)의 세계에서 사유를 멈추고 말았다면 이 시는 단순한 회고와 확인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에 머물지 않고 개작을 통해 3)의 세계로 나아간다. 3)에서 중요한 것은 벚꽃이 아니라 벚꽃을 비추는 ‘수은등’이라는 존재이다. 시인은 똑같은 정경에서 1)과 2)에서는 없었던 수은등을 ‘발견’ 해낸다. 어떤 죄악이나 광기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수은등이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을 비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오직 축하해주고 싶도록 지순한 ‘늦은 사랑’을 통해 이를 깨닫는다. 늦은 사랑을 통해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고,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에서 수은등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수은등을 발견해냄으로써 시인은 죄악과 광기로 얼룩졌던 지난 시절에 대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껴안음의 세계에 닿을 수 있었다. 1)에서 3)으로의 변모는 되새김질을 거듭한 돈오점수식 시쓰기의 태도에서 가능한 세계이다. 개작을 통해 도달한 ‘어느 날…’의 시세계는 이 돈오점수식 시쓰기의 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5.유마주의적 세계관의 변주 황지우의 시세계를 끌고온 지배적인 정서는 환멸과 초월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부터 선을 보인 이 환멸과 초월은 이후에 나온 시집들에서 그때 그때 시인이 처한 상황과 세계인식의 변화에 따라 변주된다. “나는 너다’와 ‘게 눈 속의 연꽃’이 환멸의 정서가 두드러진 시집이라면,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는 초월이 두드러진 시집이라 할 수 있다. 병든 자의 투병일기 같은 이같은 환멸과 초월의 변주를 이끌고 가는 황지우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유마주의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유마는 무엇 때문에 병이 생겼느냐는 질문에 “모든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병을 앓고 있다. 만약 일체중생의 병이 사라지면 내 병도 사라질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황지우는 이 유마주의적 세계관을 통해 병에 대한 자각과 병들게 하는 것들에 대한 환멸,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초월의 이중주를 연주할 수 있었다. 황지우의 유마주의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일찍이 김현도 지적(‘고난의 시학’, ‘말들의 풍경’)한 바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황지우 자신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세계관으로 개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황지우는 ‘어느 날…’의 후기에서 “나는 환자로서 병을 앓으면서 병을 가지고 깨달음을 실행했던 유마힐 생각이 많이 났다”고 고백했다. 이 후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시인이 유마힐에 대하여 ‘병을 가지고 깨달음을 실행’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러므로, 길 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藥과 마음을 얻었으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山經’,“게 눈 속의 연꽃’) 고 노래했던 이전의 낭만적 유마주의와는 구별된다. 앞서 인용한 작품들의 개작에서도 드러났듯이 황지우의 집요하고도 전면적인 개작속에는 이러한 변화된 유마주의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문안에서 우는 검은 소에 대한 자각과 문안에서 꿈꾸는 초월은 이의 시적 표출이다. 유마주의적 세계관은 자신이 병들었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문 안에서 우는 검은 소에 대한 자각은 자기 병듦에 대한 인식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눈 먼 삶이 마쳐 놓은 한가닥 선’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알지만 나갈 수 없는, 무궁의 바깥’에 대한 처절한 인식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聖스러운 병’이되 차원을 달리 하는 병이다. 초월에 대한 사유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무능이 죄가 되지 않는 곳’이라는 이유로 초월의 지향점이 된다면 그것은 무능한 자의 넋두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초월의 지향점에 대해 스스로 되묻고 인간적 호흡을 불어넣음으로써 그 곳이 보다 인간적이고 역동적인 공간이 되도록 했다. 초월이 기쁨으로, 과거지향적인 노스탤지어가 미래지향적인 노스탤지어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변화된 유마주의적 세계관은 길, 집, 산 (‘게 눈 속의 연꽃’)등이, 삶(생), 막, 거울 (‘어느 날…’)등으로 대체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길, 집, 산 등의 소재들은 병든 자의 방황과 회한을 드러내기에 합당한 반면 삶(생), 막, 거울 ‘어느날…’등으로 대체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길, 집, 산 등의 소재등은 병든 자의 구체적 모습을 직시하기에 적합한 소재들이다. 황지우의 시에서 전자의 소재들이 주로 낭만적 유마주의를 보여주었다면 후자의 소재들은 병의 근원을 입체적으로 조명, 이전의 낭만적 유마주의가 지닌 과장과 엄살기를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황지우는 이러한 변모를 돈오점수식 글쓰기라 명명할 수 있는 개작을 통해 일구어 냈다. 돈오돈수와 대비되는 돈오점수식 글쓰기의 세계는 의미의 덧댐, 즉 발견을 거듭하는 정신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세계이다. 발견이란 곧 한발짝 더 나아간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벚꽃이 아니라 벚꽃을 비추는 수은등을 발견해냄으로써 벚꽃시절에 대한 진정한 껴안음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황지우에게 있어 90년대는 이 껴안음에 도달하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개작은 변화된 유마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거듭된 발견을 성취하고, 마침내 진정한 껴안음의 세계에 다다르려는 시적여정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다.
126    김지향 시 모음 2 댓글:  조회:478  추천:0  2022-10-10
김지향 시 모음  2 아침 뜰 아침상 술렁임 잔디밭의 아이들 아이들과 장미 푸른 땅을 걷는다 인형의 방 빨 래 사는 재미 머리를 감는다 아침 햇빛 호숫가에서 바람아 바람이 돌아온다 눈사람 그 물 빗속의 바람 흙바람 추억 한 잔 겨울나무 안개 속에서 눈 뜨는 잎사귀 햇빛 속에서 단풍나무 아래서 움직임 일점무구一點無垢 비 는 승 화 추 수 안강安康 물이 되는 꿈 외롭지 않게 내일에게 주는 안부 계석리癸石里에게 가을잎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발이 달린 사랑 사랑 만들기 (3) 사랑 만들기 (4) 사랑 만들기 (5) 사랑 만들기 (6) 사랑 만들기 (18) 사랑 만들기 (19) 사랑 만들기 (49) 사랑 만들기 (50) 사랑 연주 演奏 풀물의 그녀 연가풍戀歌風으로 봄 편지 봄비 속에서 초록빛 아이들 ~~~~~~~~~~~~~~~~~~~~~~~~~~~~~~~~~~~~~~~ 1부 아침뜰 ~~~~~~~~~~~~~~~~~~~~~~~~~~~~~~~~~~~~~~~~ 아침 뜰 뜰이 일어앉는다 바람이 눈 뜨는 탱자나무 가지가 가볍게 홰를 친다 어제 가을이 퇴원한 아침 뜰에는 다시 먼지들이 부시시 걸어나오고 떨어져 누운 마지막 나뭇잎이 서리를 털고 있다 바람을 깔고 앉아 두 아이는 황금빛 동화를 풀어논 황금빛 그림책에 황금햇살 몇 개를 마저 잡아 넣고 있다 우유컵을 들고 망설이는 내 등 뒤로 교과서 같은 아버지의 옆얼굴이 드러난다 아침 신문이 펄럭이는 뜰 밖에는 다시 쓰러질 거짓말들이 꼬리를 치고 어제 저녁 퇴원한 가을의 잔해들을 방금 첫차로 내린 겨울 손이 쓸고 있다 ~~~~~~~~~~~~~~~~~~~~~~~~~~~~~~~~~~~~ 아침상 된장 찌개 사이 사이 신선한 바람의 김을 뿜는 쑥국 사이 초롱한 말들이 뛰어 다니는 동화 속 아이들의 숨소리 그래 이거다 어디서나 덜미잡는 시간의 손아귀와 생활의 올가미에 갇힌 마음을 이 아침 꿰뚫는 한 줄기 빛보라 바깥 세상의 오뇌를 바깥 생활의 인종을 놓치게 하는 참 맛의 한 때를 김을 뿜는 쑥국 사이 사이 아침 상에 얹어놓은 아이들의 숨소리 그래, 이거다 참! ~~~~~~~~~~~~~~~~~~~~~~~~~~~~~ 술렁임 뜰 밖에 잠 깬 한 그루 실버들 군살을 깨물고 새 손이 새 눈을 열어 소금에 절여진 세상 바다를 살펴보고 있다 기척을 기다리는 외딴 폐강에서도 그 겨울 횡포에 풀 죽은 팔을 맥 짚어보면서 송어새끼들이 바깥나들이를 서두르는 중이다 하늘엔 한 줄 눈붉은 실구름이 앞산 이마를 가르고 들새 몇 쌍이 새 씨를 물고 물 뿌린 햇빛 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무단가출한 복술강아지 등에 실려 두 돌 지난 개구장이 소금끼 먹어 술렁이는 세상 소식을 듣고 있다 톱질소리가 일어서는 아침뜰 밖엔 조용한 침잠은 없다 ~~~~~~~~~~~~~~~~~~~~~~~~~~~~~~~~~~~~~~~~ 잔디밭의 아이들 풀 기둥을 열고 보는 눈이 큰 잔디밭에 구슬로 뛰어가는 맨발의 아이들이 초록실을 뱉아놓은 풀바람을 몰아타고 파릇파릇 파도가 되어 빈 땅을 채운다 구름의 문을 열고 한 줄기 비가 된 내가 깡마른 육교 위를 지나갈 때 그 때 빗속을 뛰어드는 저 아이들을 곁눈질하며 어른들은 화려한 거짓말을 받쳐 쓰고 비를 피해 달아났지 달아나다 다시 어둠을 앞세우고 수천 마리 메뚜기떼를 몰아오는 캄캄한 거짓말이 되었지 어른들의 캄캄한 거짓말 속에서 수천 번 헝클어지던 내가 오늘은 저 파도가 일어나는 초록눈의 잔디밭에 파릇파릇 맨발의 아이들이 되고 있다 ~~~~~~~~~~~~~~~~~~~~~~~~~~~~~~~~~~~ 아이들과 장미 아이들이 나를 잡고 이따금 장미밭을 간다 장미는 불을 켠 얼굴을 일으키고 멈추어 선 내 눈 속을 아이들은 소리를 날리며 꽃의 미끄름대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소리는 내 살의 바람을 빨아내며 불바다를 가로질러 내 귀를 때리고 그리고 이미 귀의 절반이 떨어진 풍경을 깨고 달아나 하늘이 되어버린다 하늘에서 물음표가 되어 다시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머리 위의 물음표 장미는 몸의 불을 풀어 아이들 눈을 뚫고 들어가 아이들 키만한 선생님이 된다 나는 장미밭의 불꽃 속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불꽃 속에서 타는 하늘이 되어버린다 ~~~~~~~~~~~~~~~~~~~~~~~~~~~~~~~~~~~~~~ 푸른 땅을 걷는다 푸른 물이 든 푸른 땅을 걷는다 나의 실눈으로 들어오는 숲들의 잎과 잎이 안개도 구름도 걷힌 얼굴로 밝게 웃는다 안개도 구름도 없는 얼굴 아래로 우리집 아이들이 솔방울처럼 굴러간다 고궁의 5월은 땅도 아이들도 7할이 들빛이다 세상의 시끄러움이 들여다 보지 못하고 매연도 먼지도 따라와 갇히지 못하는 아이들의 눈 속에 커다란 바다를 물고 애기 바람이 달려온다 바람이 조그맣게 담겨있는 바다 속엔 내 유년의 얼굴이 돋아나 자꾸자꾸 아이들 얼굴에 가 겹쳐 눕는다 아이들 입 속에서 새소리가 뛰어나와 내 해묵은 머리 속 체증을 씻어 내린다 아, 하고 오랜만에 질러보는 함성 어느새 나도 푸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 인형의 방 작은 꽃들이 놀고 있는 작은 방 탁자 위에는 두 세치 키의 유리곽들이 뱅글뱅글 제 그늘 밑으로 돌고 있었다 키다리 난장이 인형 남매가 살아있는 머리채로 유리곽에 엉겨붙은 어둠을 쓸어내고 있었다 그 살아있는 머리칼 속에서 생귤내가 나는 생빛 몇 줌을 집어낸 나는 눈 코 입 귀가 한판에 뚫려 열린 내 정신의 문으로 참 삶의 맛을 불어넣고 있었다 방의 꺼풀을 벗기고 팔팔 뛰는 금붕어들이 물의 오색 무늬를 건져들고 와서 어둠 밖으로 튕겨져 나온 내 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 너머 공터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의 팔팔한 재잘거림 저 살아있는 바람소리 속에서 피가 뛰는 생명을 뽑아든 나는 뭇 신경의 문을 열고 참 사는 맛을 잡아넣고 있었다 작은 꽃들이 내다보는 작은 방 한 구석에 크레용을 들고 쪼그리고 있는 얼굴 맑은 나비들이 머뭇거리던 어둠이 물러간 헌 벽을 연초록으로 깁고 있었다 작은 꽃들이 새 시대를 이고 나와 숨어버린 헌 시대의 방석에 앉아있는 내 풍금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방 청소를 끝낸 인형 남매가 열어놓은 낯익은 구멍으로 유년의 문을 열고 참 삶의 맛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 빨 래 방바닥에 눌어 붙어 집안의 열기를 삭히고 있는 저 장님의 홍역은 담 너머 주인을 찾아 달래어 보낸다 벽장 속 장롱 벽에 발려서 집안의 웃음을 훔쳐가는 귀머거리 백일해는 산 너머 온 샛바람의 푸른 칼로 한 귀 한 귀 뜯어내 보낸다 아이들 겉옷 속에 들어와 집안의 생기를 뭉개고 있는 벙어리 감기는 저 햇빛의 눈살로 찔러 물살 빠른 강물에 풀어 보낸다 이 집나간 삼대 맹아가 또 다시 돌아올까 겁이 난 나는 밤낮이 다른 물가에 앉아 한눈도 팔지않고 빨래를 한다 ~~~~~~~~~~~~~~~~~~~~~~~~~~~~~~~~~~~~~ 사는 재미 내가 사는 단층집 안마당 한 귀퉁이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반들반들 해꼬리와 어울려 앉아 있었다 그 장독 속에 손을 넣어 공통성을 뽑아내는 나는 간장.고추장.열무김치.파김치 쪽으로 후각을 열고 여자임을 느끼는 참맛을 맛보고 있었다 세상 번뇌를 젖히고 하얀 속살 일부를 드러낸 접시들이 잇달아 손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 끓고 있는 남비 속의 도.레.미 아이들의 장난감 피아노 음계와 마주치는 쪽으로 청각을 열고 여자임을 느끼는 참맛을 맛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사는 단층집 대청 위에 앉아 오색 물감을 짓이기고 있는 작고 큰 키의 꽃분들이 짝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 그 속에 눈을 넣어 나는 집의 평화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히 빛 속에 나와 인사하는 벽걸이의 순수와 만나는 쪽으로 시각을 열고 여자임을 느끼는 참맛을 맛보고 있었다 ~~~~~~~~~~~~~~~~~~~~~~~~~~~~~~~~~~~~~~ 머리를 감는다 모가 닳은 마당 가운데 땅 뿌리를 모아 잡고 있는 풀의자 그 위에 지난 겨울 죽은 향나무 그늘과 새로 이사 온 유자나무 그늘이 의좋게 앉아 하늘의 깊이를 재고 있다 작년과 재작년에 두 번이나 다녀간 들비둘기 두 마리도 종종걸음으로 찾아들어 새로 난 새풀을 쪼으고 있다 촛불을 켜 든 일곱빛 햇살과 일곱빛 무지개가 내려와 마당 빈 칸을 채우고 있다 이 충만한 마당의 생기가 일제히 푸른 하늘 깊은 데로 투신하는 날 아이들은 새옷을 입혀 짙푸른 풀잎상에 마주 앉히고 나는 풀내나는 얼음물로 머리를 감는다 ~~~~~~~~~~~~~~~~~~~~~~~~~~~~~~~~~~~~~~~~~~~~ 아침 햇빛 비늘을 털고 살아나는 말들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와 앉는다 창 밖의 허리 굽은 느티나무 팔뚝에 목이 트인 서리까마귀 빨간 목청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간밤에 싸움을 걸던 검은 오뇌의 줄기, 쇠방울로 등솔기를 때리며 재빨리 머리 속에 뿌리 내린 그 어둔 줄기를 뽑아내 버리고 나는 손가락을 펴들고 금가루를 뿌리는 햇빛의 머리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리에는 선잠 깨어 연지 찍은 가랑잎을 초롱 초롱 유치원 아이들 소리가 뒤덮고 있다 무거운 시대를 메고 세상 깊이를 재고 있는 그대들의 처진 어깨 위로 황금빛 꽃비가 된 가을이 뚝, 떨어져 아침 햇빛 속에 나부끼고 있다 ~~~~~~~~~~~~~~~~~~~~~~~~~~~~~~~~~~~~~~ 호숫가에서 집 앞의 호수에 담긴 가을의 옆얼굴을 들여다 본다 흠집 하나 없는 거울알이다 거울 속엔 털이 다 벗어진 숭어 몇이서 흩어져 있는 풍금소리를 모으고 있다 여름을 떠메고 돌아서는 시간의 손이 붉은 물감을 뿌려 놓고 간 뒤로 한쪽 뺨이 붉은 사과알이 내려와 데굴데굴 덜 찬 속살을 내비치고 한쪽 가슴이 붉은 나뭇잎은 가슴의 붉은 물을 씻어 놓고 있다 붉은 물감으로 생기를 얻은 집앞의 거울알은 나의 마음 속까지 뚫고 들어가 때가 좀 끼인 마음 구석 구석을 비추어 어디서 혼자 우는 비를 피한 죄를 드러내고 늘 해가 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다 풀린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서 굵다란 회초리로 내 시든 종아리를 때리고 있다 나는 다시 물이 오른 종아리로 가슴을 떨면서 해묵은 헌 죄를 다 털어내고 털어내고 마침내 그 호수 속 생기로 돌아간다 ~~~~~~~~~~~~~~~~~~~~~~~~~~~~~~~~~~~~~~~~~~~~~~~ 바람아 저무는 세종로 바닥에서 꽃들은 가루로 뭉게져버린다 사람의 가슴에 일어선 비둘기도 죽어 먼지가 되어버린다 구름 밖으로 달아나는 풍선 꼬리를 따라 천 개의 눈이 달리는 아이들의 다리 사이로 어지럽게 내왕하는 매연, 소음, 의사당의 아우성, 높이뛰기 경주에 열을 낸 물가고 그 저울대의 발치에서 이제 실티만한 움직임을 보이는 바람아 그대 희고 날카로운 손바닥으로 우리 꽃을 가루내고 우리 정신을 축내는 저 삼불공해三不公害 그 악의 혹을 처내어 보라 그대 전신의 능력으로 뿌리까지 내려가서 일일이 간추려 쓸어내고 한 번만 다시 살아날 참 사랑의 참 꽃을 피게 해 보라 바람아 ~~~~~~~~~~~~~~~~~~~~~~~~~~~~~~~~~~~~~~~~~~~~~~~~~ 바람이 돌아온다 달빛이 허연 뼈를 뽑아들고 길 모퉁이에 비켜 서 있다 흰옷 입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밤을 썰어내는 톱질 소리를 내며 구멍 뚫린 공간을 빠져나간다 시간을 쏠아먹는 좀벌레가 발소리를 이고 땅 밖을 기어간다 귀가 게우는 개구리 소리를 둑 모가지에 걸어두고 품팔이 갔던 바람이 돌아온다 조용하다 달이 툭, 땅 가득 떨어질 뿐 흰옷 입은 나무들의 눈이 깨져 사방에 흰 빛을 뿌릴 뿐 바람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눈사람 다리 긴 바람이 눈을 뜨고 뛰어간다 바람의 손이 머리를 빗기는 안마당이 귓불을 비비며 일어앉는다 땅 밑으로 쫓겨난 나무 뿌리도 뛰어가는 바람의 행방을 잡고 있다 쨍그렁, 깨지는 창밖의 샐로판지 위로 강아지 두엇이 꼬리를 떨면서 튕겨간다 바람만 나와 설치는 빈 뜰에 중절모를 눌러쓰고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는 눈썹 흰 사람이 내려와 술렁술렁 아이들을 불러내고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마술 가위를 들고 나와 그 흰 사람의 흰 머리칼을 베어 내 머리를 덮고 있는 먹구름을 지우고 그 흰 사람의 흰 손가락을 뽑아 내 이마에 순결의 무지개로 오려 붙이고 술렁이는 뜰 안에서 깊이 잠든 내 의식을 두드리며 마술 가위의 아이들은 오만 개의 눈 뜬 오만 개의 바람소리를 만들고 있다 ~~~~~~~~~~~~~~~~~~~~~~~~~~~~~~~~~~~~~~~~~~~~~~ 그 물 내 손톱 속에서 빛나는 수만 개의 그물이 나와 수만 개의 금빛 손가락을 펴고 얼굴이 터져 떨어지는 해를 받친다 만리 밖을 달려나가 땅 끝을 다 휘젓고 발병이 나서 고개를 떨구며 돌아와 쏟아지는 바람 바람의 조각 수염이 내 그물에 와서 걸린다 흐름이 끝난 시간을 붙들어매고 사방에 펴 걸었던 치마폭을 걷어 끝난 난간에 뛰어내리는 하늘을 땅의 끝난 데에 나와 기다리던 그물이 받는다 모든 깨진 얼굴은 그물로 꿰매고 끝난 모든 것은 서로 붙잡아 그물로 잇는다 세상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술렁임을 누르고 천천히 가라앉아 간다 ~~~~~~~~~~~~~~~~~~~~~~~~~~~~~~~~~~~~~~~~~~~~~~~~~~ 빗속의 바람 그 여자의 가슴의 빈터에서 비가 내리고 그 여자의 속눈썹이 잰걸음질 친다 비가 일으켜 세운 그 여자의 머리칼이 어둠 속으로 넘어지고 어둠 속을 걷는 침묵의 발소리 곁으로 그 여자의 사랑이 사라지는 뒷모습이 깔린다 사랑의 뒷모습에 묻어있는 하늘을 비우는 비소리 비가 익는 냄새 비의 냄새를 보내주는 짧은 바람의 발이 섞여 있다 빈 가슴을 비로 채우는 바람은 살이 쪄 가고 바람살을 안고 돌아오는 그 여자 굵은 총알이 꽂히는 검은 강을 본다 비의 총알에 심장이 뚫리는 자기 혼을 본다 그 여자는 몸도 마음도 비로 메워져 있다 ~~~~~~~~~~~~~~~~~~~~~~~~~~~~~~~ 흙바람 눈을 찌르는 바람 속을 눈을 뜨고 간다 좁다란 시골길엔 바람뿐이다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의 손에 흙이 묻었다 흙이 묻은 어깨로 청솔가지 연기에 묻히는 일은 신명나는 일이다 거짓과 다툼과 비밀과 눈물 그런 것이 없는 곳엔 어둠도 없다 어둠이 없는 흙바람을 서말이나 퍼 마시고 아삼한 초갓집을 더듬으며 나는 정신을 잃는다 방앗고에 넣고 찧던 그 바람, 맨발의 아이들이 신고 다니던 그 바람을 지금 내가 밟고 서서 정신을 잃는다 거짓과 비밀로 몸이 무거워진 이에겐 밟히지 않는 그 바람 밟혀서 사는 사람만의 발이 되는 그 바람 도시의 큰 기침소리에 풀이 죽은 사람만이 반가운 그 바람 그 바람 속으로 내 정신은 풀어져 들어간다 나는 없어져 버린다 ~~~~~~~~~~~~~~~~~~~~~~~~~~~~~~~~~~~~~~~~~~ 추억 한 잔 꿈통에 대못을 박고 다시는 열지 않기로 했다 나의 이 굳은 결의 앞에 기억의 스크린이 책장처럼 넘어간다 스크린 한 토막 뚝, 잘라내어 가슴의 가마솥에 넣고 천천히 끓인다 허름한 삶 한 자락이 조청 처럼 졸아들어 추억 한 잔으로 남았다 한 잔 속에 가라앉아 타고 있는 비릿한 추억의 눈을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꿈통에 박힌 대못이 크게 확대되어 왔다 성급한 나의 결의를 저항이나 하듯이 ~~~~~~~~~~~~~~~~~~~~~~~~~~~~~~~~~~~~~~~~~ 겨울나무 나무가 언덕을 데리고 내 귀에 와서 두근두근 귀를 두드린다 언덕에 내가 나와 심어지고 달빛 한 꼬챙이가 내 발부리에 꽂힌다 내 발이 새파랗다 나무는 겨울 나무는 천 개의 손으로도 내 발의 푸르름을 닦지 못하고 만 개의 눈으로도 내 푸름의 깊이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나무는 겨울 나무는 밤마다 나의 깊이를 재려 나의 귀에 와서 그 짧고 마른 손으로 두근두근 내 귀의 높은 층계를 깨뜨리려 한다 ~~~~~~~~~~~~~~~~~~~~~~~~~~~~~~~~~~~~~~~~~~~~~ 안개 속에서 그녀는 밤마다 귀 떨어진 달빛 속을 달리고 있었어 잘려 나간 들 끝에 한 발이 매달려 있었어 넘어지는 산의 뼈에 가슴 한 쪽이 깔리고 있었어 살을 깎는 바다 물너울에 한 발목이 잡히고 있었어 풀잎을 뒤집는 한 무더기 소낙비를 두 눈에 주워담고 있었어 하늘을 흔드는 밤 우레를 두 손바닥으로 잡고 있었어 소름을 일으켜 세우는 까마귀 울음에 등골이 붙들리고 있었어 나무들을 눕히는 회오리에 머리칼이 휘말리고 있었어 살을 태우는 장작불 속을 그녀는 밤마다 온몸으로 달리고 있었어 그러나 그녀는 죽지 않고 죽음을 품은 안개를 건너갔어 드디어 그녀는 이겨버렸어 ~~~~~~~~~~~~~~~~~~~~~~~~~~~~~~~~~~~~~~~~~ 눈 뜨는 잎사귀 모서리가 살아난 장독대 옆구리 황금날개 바람이 앉아 있다 날개는 이내 열리고 바람은 날고 있다 귀를 세워 설치던 진눈깨비는 귀가 잘려 고개를 떨구고 하늘을 깁고 있던 먹구름도 팔짱을 끼고 제집으로 돌아서고 채소빛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비어있는 마당 열 두 군데를 새로 와서 채우는 열두빛 햇살 지구 밖의 봄 돋는 소식도 몰고와 초록빛 비늘을 뿌린다 황금실을 뿜어낸다 동면 속에 접어든 오동나무는 꿈을 털고 일어서고 장독대 질항아리도 이마를 쳐들고 깨어난다 엎드렸던 내 의식은 눈썹을 내밀어 저 창 밖의 파도치는 초록물감 속을 눈 뜨는 잎사귀 되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 햇빛 속에서 햇빛이 내려 앉는다 내가 버린 하늘에 마른 안개가 넘어지고 구름도 몽그라져 일어나지 못하고 그러나 바람은 숨어서 올라가고 (땅 위엔 햇빛이 차고 햇빛을 키우는 심장이 차고 심장을 깨우는 사랑도 차고) 땅의 이 싱글한 충만함 속을 누군가 내려와서 내 손등을 덮는다 그림자도 한 점의 목소리도 눈도 코도 손톱에 패일 살도 다 털어버린 내 눈 속 깊이 일어서는 한 사랑을 내가 떨림 속에서 붙들게 하고 그리고 내 머리 끝에서 터져 햇빛이 되어버리는 그대 그대는 열 두번 죽어도 내 땅의 햇빛이다 ~~~~~~~~~~~~~~~~~~~~~~~~~~~~~~~~~~ 단풍나무 아래서 머리칼 끝마다 호롱불을 켠 단풍나무 사이로 나는 얼굴을 붉히며 걸어간다 불에 데인 부리를 털며 산새 두 세 마리 녹슨 손풍금 건반 위로 내려간다 도.레.미.파.솔 손풍금이 떨구는 통통한 유리구슬을 주워 먹는다 내가 붉힌 얼굴 사이 사이로 속살이 다 찬 호수가 움직임을 그치고 있다 숨도 안 쉬는 호수 속에 내 얼굴이 하나 커다랗게 떠 있다 아직도 한 구석이 빈 어둔 동굴 어디서 뛰어든 당돌한 사슴 한 마리는 재가 되고 있는 단풍잎을 비켜 서서 유난히 높은 코를 반짝이며 내 얼굴에 와 포개진다 ~~~~~~~~~~~~~~~~~~~~~~~~~~~~~~~~~~~ 움직임 가을 마당에 떨어져 퍼지는 아침 바람 한 움큼이 하늘 복판에 팽개쳐져 죽은 세상의 피를 건져낸다 건져내어 뛰어가다 주저앉은 시간의 추에 얹는다 시계 바늘이 살아난다 돌이 되다만 생물의 눈썹이 다시 풀려나와 드러낸 뾰족뼈를 몸 속으로 접어넣고 태연하게 도망 가고 도망 오는 움직임을 만든다 다시 세상은 움직인다 마당 옆구리에 코스모스가 일어나고 살아난 들판엔 들국화도 깨어난다 ~~~~~~~~~~~~~~~~~~~~~~~~~~~~~~~~~~~~~~~~ 일점무구一點無垢 내 안에서 바람이 부숴지고 있다 열 겹의 부끄러움이 열 겹의 옷을 챙겨 쫓겨나가고 있다 방금 나의 안으로 들어오던 먼지도 입구에서 발이 굳어 시들고 며칠째 살 구석을 뒤적이던 습한 한 목소리도 문 쪽으로 가고 있다 나를 붙들고 있던 이 몇개의 움직임을 비우면 나는 아직 조금 남은 동정童貞으로 저 햇빛 속에 나와 있는 일점무구, 일점무구 속에 어울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그 오욕五慾을 털고 훌쩍 일어난다 아, 가볍다 ~~~~~~~~~~~~~~~~~~~~~~~~~~~~~~~~~ 비 는 비는 하나씩 불안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인습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속력을 벗어 던졌어 비는. 그날 떨어지던 모체 이후 마음을 비비는 순간 보다 생활을 엮는 시간으로 꿈을 꿰는 감동 보다 시계를 보는 형안으로 헤엄치는 머리 속 둔주 보다 만지는 손가락의 감각으로 놓여나는 신경의 분자. 잠이 들었어 비는 하나씩 풀리는 잠이 들었어 비는 하나씩 끝내는 잠이 들었어 여기 비의 평강. ~~~~~~~~~~~~~~~~~~~~~~~~~~~~~~~ 승화 / 김지향 당신이 벗기는 면사포 창문 밖에선 처녀가 들고있는 물주전자 뿌려지는 물방울 아래 싱싱한 꽃송이의 머금은 총명을 두 눈이 따고 있는 아침 한 때. 요람을 타고 나의 아침은 창 밖의 왕국 당신의 청결한 꽃 속을 가면서 승화할 수 있었지 화창한 꽃밭의 건강한 세계. 창가에서 당신이 던져버린 오물의 고양이를 담고 저만치 가고 있는 노파의 노폐물 바구니 투신하던 나의 신경쇠약을 생각했지 그리고 이야기 했지 생각하지 않을 광채를 가리던 지난 번의 비. ~~~~~~~~~~~~~~~~~~~~~~~~~~~~~~~ 추 수 그 열병을 끝내는 허약이 오기 전의 생기로 머리 위를 감도는 돌풍이 말아가기 전의 긴장으로 떨어져 잊혀지는 열등생이 되기 전의 충만으로 열대성 기후를 떠나는 외로운 운행이 시작되기 전의 성숙으로. 마침내 도강하는 사랑의 손이 잡은 열매 ~~~~~~~~~~~~~~~~~~~~~~~~~~~~~~~~~~ 안강安康 소리를 풀어놓은 저 들녘 정을 빻아 뿌리는 눈보라를 잠 재우고 하늘 끝 치닫는 광란의 떼바람을 잠 재우고 적요로운 산기슭 몸을 뜯는 낙엽의 애소곡哀訴曲을 잠 재우고 깊푸른 강심의 풀어헤친 머리채를 잠 재우고 달빛을 안은 외틀어진 갈잎을 잠 재우고 가을밤 적막을 울고 가는 외기러기를 잠 재우고 머리만 돌아온 귀환병의 무덤을 잠그고 유령들로 포식한 도시의 골동품상을 잠그고 목숨을 으깨는 뭇 공장의 연통구를 잠그고 협심증을 돋키우는 저 기계 소리를 잠그고 붕붕대는 마음들을 흔드는 요정의 분무기를 잠그고 높고 깊은 고비의 등반을 끝낸 지금은 커다란 사랑으로 찰랑한 가슴 ~~~~~~~~~~~~~~~~~~~~~~~~~~~ 물이 되는 꿈 눈을 뜨면 가슴은 없어지고 갈기갈기 찢겨져 없어지고 찢어대는 세상을 향해 펑펑 가슴이 피를 게우지만 사정없이 세상의 바람칼이 찍어내려 없어지는 건 가슴 뿐이고 세상에서 가슴으로 건너뛰는 도도한 바람의 회초리가 지나가기만 하면 가슴은 숯빛이 되지만 우리는 회초리의 끝에 붙은 숯빛이라도 좀 벗겨졌으면 하지만 벗겨졌으면 하는 희망도 함께 숯빛이 되었다 숯덩이에 파묻힌 가슴 가슴도 숯덩이를 나눠 먹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늘 속으로 떠오르는 꿈을 꾸었다 하늘 속에 떠오른 가슴이 세상 숯덩이를 닦아낼 비가 되어 세상을 빛낼 은빛의 물이 되어 좍--좍 내린다면 세상의 귀가 하얗게 씻겨 스치는 만상의 눈썹이 빛나겠지만 꿈은 꿈일 뿐 깨고 나면 가슴은 펑펑 피를 게우며 날마다 찢어져 없어지고 ~~~~~~~~~~~~~~~~~~~~~~~~~~~~~~~~~~ 외롭지 않게 강설의 추적을 끝내고 탄우 속 야영을 끝내고 선고 받은 혹한기를 끝내고 소음을 버리고 패기를 버리고 회한을 버리고 버리고 잔촉이 마저 붙기 전에 초록이 마저 떨리기 전에 감성이 마저 쓸리기 전에 순정의 여인으로 사랑에 첫 눈 뜬 싱그러움으로 헌신하는 아름다움으로 외롭지 않게 외롭지 않게 황혼까진 아직 몇 발자국 ~~~~~~~~~~~~~~~~~~~~~~~~~~~~~~~~~~` 내일에게 주는 안부 어디 사는지 아직도 남아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내일이란 이름에게 나는 안부를 보낸다 해마다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는 내일에게 내일이면 늦어 오늘 나는 일년치의 안부를 한꺼번에 날려보낸다 이번엔 머리꼭지라도 좀 드러내 보라고 내일 뒤 어디에 숨어있을 내일에게까지 두 손으로 안부를 불어 보내면서 안부가 가서 닿는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망원렌즈 먼지를 닦아내고 뒤꿈치의 돌베개를 곧추 돋우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내일에게 뜨거운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나의 노력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에다 들끝에다 바람귀에다 입을 대고 내일의 이름을 불러댄다 목청껏 목청껏 불러댄다 그러나 내일은 어딘가에 들앉아 내 목소리를 묘사하며 웃고만 있겠지 내가 잠잘 때 그도 잠을 내가 죄로 배 부를 때 그도 죄를 내가 거짓말로 속삭일 때 그도 거짓말을 흉내 내겠지 그런 내일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진실임이 알려질 때까지 내가 내일의 사랑을 무식하게 신앙하는 환자임이 밝혀질 때까지 나는 주소불명의 내일에게 오늘 일년치의 안녕 안녕을 한 무더기 띄워 보낸다 그래, 그렇고 말고 내일이여, 안녕! ~~~~~~~~~~~~~~~~~~~~~~~~~~~~~~~~~~~~ 계석리癸石里에게 세상 돌다 헛디딘 다리 하나 들고 네에게 가고 싶다 거기 사람이 찾아내지 않은 주인없는 별이 소나기처럼 무너져내려 사락사락 밟히는 빛살 홀로 사는 그 곳 사람에게 찢겨 마음 고픈 사람아 그대도 가면 빛을 밟을 수 있어! 있어, 있어, 희망을 싸들고 가 보라 세상을 쓰러뜨린 바람이 살찐 회오리로 뭉칠 때 회오리 사이로 번쩍, 칼날처럼 치솟는 빛 돌담에 기대어 눈 감고 있으면 둘 셋씩 팔장 끼고 달려오는 빛들과 환하게 벗어진 이마의 땅, 이마 위로 높게 열린 하늘 속 파란 사파이어 건널목 건너가면 시간도 뒹굴어 뒷통수만 보이는 견고한 절망 생산자도 덩달아 절망을 단산하는 그 곳, 밤도 새벽도 없는 빛투성이 낮천지가 희망, 희망, 희망, 귓속말로 입을 오물거리며 나온다 그리움이나 기다림이 없이도 생애가 빛나는 그 곳 내딛는 발가락 마다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빛에 씻기는 그 곳 세상에게 살 베어 마음 아픈 사람아 잠자지 않아도 눈이 아프지 않은 그 곳 새파란 나뭇가지에 앉아 보라 저절로 푸른 물 오른 온몸에서 술렁술렁 파도소리 일어나리라 오염된 지느러미 씻기는 소리, 소리, 쉬지 않으리 (세상 돌다 헛디딘 다리 하나 들고 빛 뿐인 그 곳으로 가고 싶다) ~~~~~~~~~~~~~~~~~~~~~~~~~~~~~~~~~~ 2부 꿈 혹은 풀밭 ~~~~~~~~~~~~~~~~~~~~~~~~~~~~~~~~~~` 가을잎 가을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을잎은 온 몸으로 뒹굴기 내기를 한다 온 몸으로 나의 눈 속에 풍덩 빠져 박하분 냄새로 살아난다 박하분 냄새가 내 몸 속까지 흘러들어 나의 영혼 전체가 박하 내로 떠오른다 밤 기슭의 헛간 어둔 헛간의 어둔 가슴 그 좁은 고랑을 가만 가만 비켜서 조금씩 뜨거워져 터지고 있는 가을 옆으로 옆으로 흘러간다 가을은 뜨거운 가슴 뿐 손이 없으므로 가을잎을 붙들지 못한다 ~~~~~~~~~~~~~~~~~~~~~~~~~~~~~~~~~~~~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그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만 빛나는 이름 사람의 무리가 그대 살을 할키고 꼬집고 짓누르고 팔매질을 해도 사람의 손만 낡아질 뿐 그대 이름자 하나 낡지 않음 하고 우리들은 감탄한다 그대가 지나간 자리엔 반드시 자국이 남고 그대가 멈추었던 자리엔 반드시 바람이 불어 기쁘다가 슬프게 패이고 슬프다가 아픔이 여울지는 이름 그 이름이 가슴에서 살 땐 솜사탕으로 녹아내리지만 가슴을 떠날 땐 예리한 칼날이 된다 그렇지, 그대는 자유주의자 아니 자존주의자이므로 틀 속에 묶이면 자존심이 상하는 자 틀 밖에 놓아두면 보다 더 묶임을 원하는 자, 그대를 집어들면 혀가 마르거나 기가 질려 마음이 타버리거나 한다고 우리는 때때로 탄복한다 그렇지, 사랑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 실은 사랑이 슬픔 속에 자라지만 기쁨 속에 자란다고 진술한다 실은 사랑이 아픔 속에 끝나지만 새 기쁨을 싹 틔운다고 자술한다 사랑의 끝남은 미움이지만 실은 끝남이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사랑은 사랑은 끝없이 자백한다 ~~~~~~~~~~~~~~~~~~~~~~~~~~~~~~~~~~~~~~ 발이 달린 사랑 사랑은 가슴에서 산다 가슴에서 사는 사랑이 베어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알맹이 없음 하고 나는 손을 쳐든다 혼자서 이렇게 나의 실험대에 올라온 사랑을 현미경으로 뚫어보았다 사랑, 그 자유분방주의자는 거침없이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떨어져 서로 반목하며 제 갈 길로 갈 궁리에 빠져 있었다 서로 다른 머리 발 손이 한 덩치로 얽혔을 뿐 틈틈이 발은 손, 손은 발을 베어낸다 그렇지 그 날도 한 쪽 발이 베어져 나갔었지 베어낸 자리엔 재빨리 구멍이 들어앉았지 구멍은 자기의 부피를 키우려고 나머지 사랑 지체도 내쫓으려 했었지 아암, 그렇고 말고 사랑발이 잘려나간 빈 칸을 나는 구멍이 차지하지 말게 하려고 떨며 떨며 한 쪽이 기우뚱한 가슴으로 사랑발을 붙잡아오려고 찾아 나섰지 세상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사건 사이 어둠 사이 시기 질투 분쟁 사이 어디에 내 사랑의 발은 걷고 있나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해주며 사랑발이 제 맘대로 잘려나간 무례를 용서해주며... 아, 일곱 번째 용서함 바로 그때였다 나의 사랑발은 세상 구석 어느 개골창에 빠져 어둠, 그것이 되어 있었다 발톱 한 귀퉁이에도 제 모습이 남아 있지 않게 나는 이 사실을 사랑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이 엄청난 오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랑발을 집어들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소리질렀다 돌아다본 사람들은 그게 이전부터 어둠이라고 우겨댔다 내 가슴에서 베어져 나간 사랑의 발임을 믿지 않는 동안 실은 그게 나도 모르게 어둠이 되어버린 나의 발임을 사람들이 어둠을 보지 않고 나를 보며 웃는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아내고 소스라쳤다 얇은 바람 이빨에도 삭둑삭둑 잘려지는 보드라운 잎사귀 사랑이여 집을 나가면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는 그러므로 되돌아올 줄도 모르는 눈썰미 없는 사랑이여 하고 나는 골목 어귀에서 지는 해를 붙잡고 찾아낸 사랑의 발을 그 어둠을 씻는다 ~~~~~~~~~~~~~~~~~~~~~~~~~~~~~~~~~~~~~~~ 사랑 만들기 (3) 나무가 날마다 칼을 갑니다 칼은 끝이 날카로와야 칼이지만 나무가 가는 칼은 끝이 뭉툭합니다 뭉툭한 칼을 만들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배로 숨을 쉬었습니다 배에 모인 숨은 가장 견고한 연장을 만들므로 가장 견고한 연장은 뭉툭한 칼끝이므로 뭉툭한 칼끝은 바람을 베므로 뭉툭한 칼에 베인 두 쪽난 바람은 또 다시 하나가 되므로 다시 또 하나가 되는 건 사랑이므로 그대여 사랑 만들기에 참여한 그대 날카로운 칼끝을 감추고 뭉툭한 날을 빚어보아라 비로소 사랑의 참맛을 알리라 사랑이 사랑이 가슴에서 은방울을 굴리리라 나머지는 후렴으로 되풀이하면 될 일 ~~~~~~~~~~~~~~~~~~~~~~~~~~~~~~~~~~~~~~ 사랑 만들기 (4) 타버린 잿더미도 버리지 않음 잿더미에서 타는 불은 마지막 움직임의 뒷꼭지가 드러나 보임 타버린 잿더미의 불은 가장 절절한 울음을 건너서 다음 삶의 예고편을 보여줌 나는 잿더미를 버리지 않음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삶의 찌꺼기를 거르는 불꽃을 보는가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집약된 생애의 이력서를 보는가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서로 찾는 목소리의 떨림을 듣는가 내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가장 순결한 피를 구르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가 그대 잿더미의 아우성은 가슴 전체를 연다 허기 속을 헤매며 자기의 허기도 못보는 눈 그대 날로 날카로워만 가는 눈 잿더미의 진실을 빠뜨리고 시간의 끝짬만 보는 눈 뜨고 있어도 잠든 눈이여 내다버린 잿더미 밑에 숨어있는 사랑을 찾아봐라 그대 눈 그대 손이 우리와 영원히 아름답게 포개짐을 알리라 ~~~~~~~~~~~~~~~~~~~~~~~~~~ 사랑 만들기 (5) 마침표를 찍고 돌아설 때에야 흔들리는 마음 마음의 지시로 입을 잠근 열쇠를 강물에 던져넣은 뒤에야 떠오르는 말 말의 지시로 기억의 문을 닫아 건 뒤에야 '나 여기 있어!' 손을 쳐들고 생략된 부호처럼 나서는 눈 참 부신 빛살로 떠오르는 눈 마음의 밑바닥에서 강물의 밑바닥에서 기억의 밑바닥에서 흙 위에 담장 위에 거리에 빌딩 꼭지에 허공 속에 시간 속에 돋아있다 원망처럼 내 혼이 닿는 곳마다 잘못 찍은 마침표를 허무는 몸짓으로 빗물로 떠서 출렁이는 눈 그림으로 박혀서 초롱이는 눈 불길로 치솟아 타오르는 눈 눈을 덮어버릴 강철 보자기가 없는 나는 불혹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만날 수 밖에 너 불치의 병 사랑아 ~~~~~~~~~~~~~~~~~~~~~~~~~~~~~~~~~~~~~~~ 사랑 만들기 (6) 잃어버린 푸른 빛 한 오라기 건져 내려고 이미 빛을 삼켜버린 가슴을 두들기며 찾아도 찾아도 모자라는 땅의 넓이만큼 넓은 가슴 어디서 솟구쳐 올 약속도 없는 사랑 하나 기다려 24시간 전체를 기다림이 되어 흔들리는 첨단적 세상 모퉁이에 나뒹구는 뜨거운 햇빛을 지워버린 차거운 눈이 되어 사랑을 그 신선한 빛을 찾아서 두근거리며 나는 오늘도 가슴을 밀고 나올 감동의 그 트럼펫을 지켜본다 ~~~~~~~~~~~~~~~~~~~~~~~~~~~~~~~~~~~~~~~~~~~~ 사랑 만들기 (18) 아직은 꽃빛의 목소리로 부른다 사랑 부르고 불러도 바래지 않은 이름 사랑 부르고 부르면 피가 되는 이름 사랑 어느 해 흰 벌판 한 모퉁이 혼자 푸른 포플러 가지 끝 높이 높이 걸어놓고 아직도 찾아오지 않은 이름 시간이 벌판 모서리를 베어 먹은 오늘에야 잊어버린 발자국을 짚으며 찾으러 가는 목소리 포플러는 오늘 외롭지 않아 사랑 몸 전체를 두부모 자르듯 잘라 팔았어 주소도 받지 않고 팔아 버렸어 아, 피 흘리는 내 목소리여 속임수 쓰는 저 포플러 성큼성큼 가지에서 내려와 마주 오는 건 메아리 맨발로 쪼르르 내 목에 감기는 메아리! 아직은 꽃빛 목소리로 다시 시작할 밖에 ~~~~~~~~~~~~~~~~~~~~~~~~~~~~~~~~~~~~~~ 사랑 만들기 (19) 날은 저물고 구름도 안개도 어둠에 잠길 때 우리집 등넝쿨엔 얼굴도 안 보이는 가을이 걸린다 낮보다 긴 밤이 지는 새벽 너는 벌써 발소리도 없이 내 창문을 밀지만 새벽은 참 짧아 다시 또 날은 새고 날은 저물고 기계보다 빨리 달려가는 이 시대 너와 어울려 이력서를 써 내려갈 시간은 없어 밤에만 살을 벗어 놓고 영혼 홀로 빠져나가 밤새 헤맸지 사랑아 너는 그때 어디 있었니 사랑도 어둠에 갇혀 안 보이는 이 시대 저문 날 눈이 혼자 세상 문을 열고 나와 무한공간 네 뒤를 따라가 참말 참말 사랑을 청소할 바로 그때를 기다려 너는 나와 숨바꼭질을 하니 날은 저물고 구름도 안개도 어둠에 잠길 때 우리집 창문엔 어둠에 젖어 안 보이는 사랑 그림자만 걸리고 ~~~~~~~~~~~~~~~~~~~~~~~~~~~~~~~~~~~~~~~~~~~~ 사랑 만들기 (49) 방은 메말라 있었다 핏대를 올리는 시간의 하복부에서 눈에 화살을 꽂은 우리는 컴퓨터에 그날의 일기를 맡기고 세상 삶이 얹힌 책상을 맞대고 앉아 서로 다른 생각에 금을 그으며 가갸거겨 떠들어대던 입씨름도 이제 지쳐 하나씩 떠나고 가슴을 빳빳이 다림질하던 성급한 분노만 남아 방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 사랑 만들기 (50) 나가 보면 바람 속에 꽃잎의 울음이 깔린다 울음은 발자국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 남은 잎사귀의 구멍 뚫린 가슴들이 바람이 된 울음을 쓸어 담는다 피지 못한 그대들은 우리 머리 위 세상에서 피니 우리가 고개를 들면 피어있는 그대 몸을 볼 수 있니 낫을 댈수록 칡넝쿨처럼 강해지던 그대 쪽빛 의지 없는 듯 살아서 견디던 그 의지의 순수는 어디에 벗어두고 이제 바람이 되어 울음이 되어 떠나가니 사랑아 나가 보면 바람 속에 더욱 크게 울리는 그대 울음소리뿐 세상은 죽었다 ~~~~~~~~~~~~~~~~~~~~~~~~~~~~~~~~~~~~~~ 사랑 연주 演奏 잠 속에서도 나는 피아노가 키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다 내 머리 절반을 뜯고 방울방울 떨어져 굴러간 그대를 머리 아닌 손이 잡으려다 놓쳐버린 채 십 년이 지나고 또 십 년이 지나갔다 어제 문득 강변로의 잠을 깨우다가 내 한쪽 눈이 잃어버린 그대를 잡았다 그는 내 머리 아닌 가슴으로 방울방울 살아나 피아노 건반을 타고 내려와 내 몸 전체를 연주했다 ~~~~~~~~~~~~~~~~~~~~~~~~~~~~~~~~ 풀물의 그녀 바다 밑 수렁 뚜껑을 열고 길고 긴 해꼬리가 내려갑니다 풀물 투성이가 된 그녀는 풀물을 섞으면서 세상 쪽으로 나아갑니다 세상과 입씨름도 끝내고 침방울을 닦으면서 아직은 새파란 눈에 빛도 물소리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 공중을 짖밟은 우레소리를 타고 나와 세상의 심장에 방아쇠를 겨누는 저녁 가마귀떼를 보아도 깜빡 잃어버린 정신을 못 찾는 그 사람을 만나러 그 사람의 눈에 풀물을 먹이러 슬픔이 조금 빗겨선 밤엔 풀물의 그녀 홀로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 연가풍戀歌風으로 한 목소리가 달려오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돌아보았다 조금 늦게 목소리는 토막 토막 달아나고 있었다 다시 목소리는 한 몸으로 돌아와 한 음계 높이 올라갔다 나는 다시 돌아보았다 조금 더 늦게 노란 안개가 내 무릎을 적시고 있었다 안개 속을 헤엄치며 보일 듯 말 듯 더 높은 음계로 올라가며 나를 부르는 그를 나는 붙잡으려 피를 쏟았다 그는 이미 공중에 떠올라 금빛 연가풍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 연가는 왜 잡히지 않나 2분의 1 내 목숨이 지날 동안 언제나 노란 안개 속에서 허우적이고 있었던 나에게 ~~~~~~~~~~~~~~~~~~~~~~~~~~~~~~~~~~~~~~ 봄 편지 들 끝에서 조그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내 눈이 주워 먹었다 내 눈엔 뾰족뾰족 샛노란 개나리가 돋아났다 개나리는 시간마다 2*4*6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작년에 져버린 들밖의 봄이 세상 속에 가득 깔렸다 나비는 봄의 배달부였다 ~~~~~~~~~~~~~~~~~~~~~~~~~~~~~~~~ 봄비 속에서 돌담 위에서 나무등걸에서 방울방울 푸른 물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물방울엔 갈고리가 있어 풀들의 머리를 움켜잡는다 길게 목이 뽑혀져 나온 풀꽃들이 부끄러워 바위틈에 얼굴을 파묻는다 풀꽃들의 얼굴은 숨을수록 더욱 불거져 나오고 벌써 이마가 반짝이는 쑥잎이 나무 등걸에 쑥물을 들이고 있다 회양나무 쭈그렸던 허리도 벌떡 일어나 머리를 씻고 종아리를 씻고 부리가 새파란 새끼 제비를 태우고 있다 빗물 쫑, 쫑, 떨어진 자리마다 깨끗한 얼굴, 깨끗한 세상 꽃분홍 꽃밭에선 꽃분홍 꽃망울들 불꽃놀이 하고 불티 송이송이 산과 들에 멀리멀리 뛰어간다 아, 불꽃 뛰어가는 송이 속에 나는 또 왜 섞여 있나 화끈 화끈 가슴이 달아 나이도 줄줄 흘려 버리면서 새로 피는 꽃이 처음 있는 꽃이 되려고 뛰어가니 어쩌나 ~~~~~~~~~~~~~~~~~~~~~~~~~~~~~~~~~~~~~~~~ 초록빛 아이들 제쳐진 오월 하늘은 아이들 얼굴로 꽉 차 있다 새파란 마술지팡이 바람이 내 발 앞에 와서 눈이 큰 풀밭을 부려 놓는다 풀밭 속에 솜구름 같은 함성이 동 동 떠 다닌다 함성을 앞지르는 아이들의 맨발도 풀물이 올라 초록빛이 된다 초록빛 아이들 속에 들어간 나는 아이들 키만한 물음표에 빠진다 아이들의 샛별 같은 물음표를 내 귀에 주워 담으면서 나는 문득 경이의 눈을 뜬다 아이들의 입에서 줄지어 나오는 종달새의 지저귐 하늘까지 퉁기는 그 의문부에 깔려 나는 아찔, 말을 잃는다 보랏빛 내 정신의 나이를 키질해 보이면서 부끄러움을 타는 나 아, 나는 어디쯤에 와 있을까 새삼 얼굴을 씻고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면서 무겁게 껴 입은 나이를 한 겹 한 겹 벗어던진다 아이들은 선생님이므로 ~~~~~~~~~~~~~~~~~~~~~~~~~~~~~~~~ 김지향 시인 소개 경남 양산에서 성장함. 홍익대 및 단국대 대학원을 거쳐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시집 병실(1956) 발간 후, 시 '별'을 세계일보에 발표(1957), 활동을 시작함.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시인협회 자문위원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원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현 한국 여성 문인회 회장 '막간 풍경' '빛과 어둠 사이' '사랑 만들기'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세상을 쏘다' '위험한 꿈놀이' '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 '한줄기 빛처럼' '리모콘과 풍경' 등 23권의 시집과 '김지향 시선집' 'A HUT IN GROVE'(대역시집), 에세이집, 시론집 등 다수. 시문학상(제1회 76) 대한민국문학상(86) 박인환문학상(제1회.2000) 한국크리스챤문학상(2000) 윤동주문학상(2002) 등 다수.
125    김지향 시 모음 60편 댓글:  조회:462  추천:0  2022-10-10
김지향 시 모음 60편 ☆★☆★☆★☆★☆★☆☆★☆★☆★☆★☆★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김지향 강물이 눈썹까지 차오른 몸의 창문이 사방으로 밀리며 한 잎 한 잎 열렸다 물에 잠긴 몸의 부속품들이 송어새끼 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풀나풀 기어나온다 엊그제 잠입한 매연 찌꺼기도 살살 녹아 나온다 마구잡이로 먹어치운 공해물질이 소화도 안된 채 밀려나와 풀썩풀썩 강바닥으로 주저앉는다 사람의 눈이 해독할 거리쯤에선 손을 흔들며 나가는 물거품 눈썹까지 차오른 욕망을 말끔히 씻어내면 하얗게 피어서 떠오르는 빈 몸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꽃잎이다 나는. ☆★☆★☆★☆★☆★☆☆★☆★☆★☆★☆★ 가을 그리고 은빛의 잎 김지향 공터 옆구리 어린이 놀이터 옆구리 익은 땡감들이 수은등처럼 켜져 있다 가을 내 초록 잎 지는 소리 아래로 고개 내민 말라깽이 단풍나무가 그림엽서를 만들고 있다 모두 떠난 언덕 밑 경사로에는 줄지어 미끄러지던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 멈춘 커브길이 까뭇까뭇 딱지를 덮고 누워있다 추적추적 짚신소리 끌고 따라오던 장맛비도 멈추어 섰다 물 젖은 바람이 볼가 낸 언덕 너머 서쪽 하늘이 무거운 낮잠을 벗는다 널따란 발코니 창가에서 나는 서쪽 하늘에 펼쳐지는 우주의 단막극을 구경한다 우주에서 풀잎이 한 켤레씩 톡. 톡. 떨어질 때마다 내 머리엔 한 땀씩 은빛 잎이 심어진다 은빛 잎은 머리에서 초롱꽃이 되어 앉았다 누웠다 깊은 머리 속 호수로 내려간다 내가 타고 갈 은빛의 우주선 한 채 아직 마감공사 덜된 채 깊은 호수 버티칼을 열고 내다본다. ☆★☆★☆★☆★☆★☆☆★☆★☆★☆★☆★ 가을 눈물에 젖는 김지향 튕겨나간 하늘이 군데군데 얼룩이 졌다 파삭한 가을 얼굴이 골목골목 포개 앉아 있다 나뭇잎이 떨어뜨린 눈물에 가을이 젖는다 하늘에 잎을 달아주며 하늘과 도킹하던 나무들 이젠 드러낸 알몸이 부끄러운지 어깻죽지를 움츠리고 있다 사람들은 아직 살이 덜 찬 열매를 따서 길가 좌판 위에 널어놓고 있다 짐수레마다 얼굴 붉히고 있는 열매들이 빤질빤질 눈물에 씻긴다 다 내어주고 몸 비운 가을이 뜨거웠던 시간들을 접어놓으며 영혼의 집으로 떠날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중이다 나뭇잎을 신고 떠난 ‘시간’은 가서 돌아오지 않지만 눈물에 씻겨 살아난 가을은 내일 다시 살아서 돌아온다. ☆★☆★☆★☆★☆★☆☆★☆★☆★☆★☆★ 가을 잎 김지향 가을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을잎은 온 몸으로 뒹굴기 내기를 한다 온 몸으로 나의 눈 속에 풍덩 빠져 박하분 냄새로 살아난다 박하분 냄새가 내 몸 속까지 흘러들어 나의 영혼 전체가 박하 내로 떠오른다 밤의 기슭의 헛간 어둔 헛간의 어둔 가슴 그 좁은 고랑을 가만 가만 비켜서 조금씩 뜨거워져 터지고 있는 가을 옆으로 옆으로 흘러간다 가을은 뜨거운 가슴뿐 손이 없으므로 가을잎을 붙들지 못한다. ☆★☆★☆★☆★☆★☆☆★☆★☆★☆★☆★ 가을 화약 냄새 김지향 시간은 부르지 않아도 달려온다 달려와서 낡은 잡기장 한 페이지 부욱, 찢어낸다 흘린 부스러기들은 열린 서랍 속에 밀어 넣는다 여름 시체를 담은 서랍들이 화장터에 쌓인다 푸르렀던 시절을 가슴에 넣은 가을은 시체들을 화장한다 세상 납골당엔 빨간 불꽃들이 앉아 있다 화약 냄새를 안고 시간은 또 어디로 가고 있다. ☆★☆★☆★☆★☆★☆☆★☆★☆★☆★☆★ 가을바람.2 김지향 바람이 풍선을 타고 하늘을 건너간다 풍선은 달의 품에 안겨 느긋하게 날아간다 풍선이 달의 닮은꼴이냐고 바람에게 물어본다 그때 달은 구름 속에 숨어버린다 바람이 풍선을 놓친 줄 모르고 달을 끌고 까불까불 산을 넘어간다 이윽고 달이 산 속에 몸을 숨기며 바람을 내버린다 하늘에서 쫓겨난 바람이 사과송이를 풍선인줄 알고 사과의 뺨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논다 사과송이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다 가을바람은 눈이 멀어 분별력이 없다 자꾸자꾸 몸이 싸늘하게 식어갈 뿐 ☆★☆★☆★☆★☆★☆☆★☆★☆★☆★☆★ 개울가 그 집 김지향 신발을 벗어들고 걸으면 발바닥이 간지러운 자갈밭 호롱불 가물거리는 외딴집 까지는 몇 마장이 더 남아 있었다 한쪽 발을 들고 걸어도 양쪽발이 아픈 개울가 공사장 한쪽 끝에 가물가물 꺼져가는 호롱불의 그 집은 아직도 있었다 지붕 서까래 밑에서 잘새알을 꺼내어 친구 시중드는 일이 재미 있었던 그 아이는 오늘 부뚜막에 턱을 괴어 꿈으로 가고 새들은 서까래 밑으로 들락거리며 지붕 꼭대기에 북더기집을 만들었다 호롱불이 혼자 붙다가 만 방안 고요 위엔 무서움이 한꺼풀 더 덮여 함께 자고 있었다 밤내 울다 성대를 다친 부엉이의 안개처럼 퍼지는 울음 사이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 집 잠을 깨우는 성.누가 성당의 새벽 미사 올리는 소리만 먼저 간 주인의 혼을 부르며 개울가를 맴돌고 있을뿐 성대 잃은 부엉이 소리 혼자 버려두고 꿈속으로 먼저 간 그 남자(아이)는 어디를 가고 있는지? 개울 속엔 옛 주인의 옷자락 젖는 소리 추적추적 흘러간다 아직도 발가락이 시린 개울가 그 집. ☆★☆★☆★☆★☆★☆☆★☆★☆★☆★☆★ 거울 속 풍경 김지향 흙이 하늘로 날아간 뒤 하늘에서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뻗은 뒤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낸 뒤 꽃잎이 땅으로 몸을 헐어낸 뒤 꽃잎이 땅으로 날아온 뒤 골목길에 떨어진 하늘 새 한 마리 하늘 새를 타고 그가 하늘로 떠난 뒤 집속 방속 벽 속 거울 속에 그가 살아있다 거울 속엔 발도 없이 걸어 들어간 어제의 사건들이 모두 살아있다 병정놀이가 땅뺏기놀이가 사냥놀이가 거울 속에 살아있다 살아있는 거울을 따먹고 하늘궁전으로 간 나는 하늘풍경을 마저 따먹는다 아, 거울 속은 내가 따먹은 내 눈 속이네 ☆★☆★☆★☆★☆★☆☆★☆★☆★☆★☆★ 걸으면서 잠자는 버릇 김지향 나는 걸으면서 잠을 잔다 걸어도 오는 잠은 내쫓지 못한다 눈으론 실탄을 어깨에 멘 총잡이를 보면서 권총의 자동방아쇠가 미사일이 되어 햇빛이 끝나는 우주 기슭을 뚫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불길이 노을처럼 곱게 타오르는 현장을 입을 딱 벌리고 감상한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걸었다 등 뒤에서 호르라기 소리가 등솔기를 때렸다 축 쳐진 금줄을 번쩍이는 검은 옷의 늙은 사나이의 어깨가 내 옆구리를 떠밀었다 사나이의 터진 목소리가 공기를 찢어댐을 촉감으로 만지면서 나는 또 다시 아까 그 권총 사나이를 따라갔다 그는 불길 속에서 불쑥 튀어오른 한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 여자는 머리칼이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말탄 병정들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쯧.쯧.쯧! 강한 느낌표를 발하며 급히 말머리를 막았다 그때였다 찌~익!하고 금속성 폭발음이 귓속에 깊게 깔렸다 또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내 뒤통수를 찢었다 순경 나으리가 달려왔다 나는 그 때부터 걸으면서 잠 자는 버릇을 내버렸다 아름다운 의식의 뒤죽박죽 장난도 끝내버렸다 ☆★☆★☆★☆★☆★☆☆★☆★☆★☆★☆★ 겨울밤이 눈에 묻히다 김지향 나는 밤내 눈에 젖는 겨울 한 컷 일기장에 그려 넣는다 이제 연거푸 토해낸다 포식한 하늘이 벨트를 풀고 너무 오랜 시간 받아먹은 사람의 아우성, 넋두리, 비명을 비비고 버무려 하얗게 바랜 속 깊은 응어리를 게워낸다 멍울멍울 맺힌 빛바랜 녹말 알갱이를 버티칼 밖으로 부어낸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오래오래 쏘아올린 토혈이 이제 되쏟아져 내려도 스스로의 가슴에서 쌓인 가슴앓이가 뜯겨져나간 세포 조각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입을 열고 창가에 앉아 의미 없는 함박웃음을 밤내 눈 속에 묻는다 하늘에 가르마를 탄다 디지털로 가는 바람 갈기 한 줄 손에 든 면도칼로 웅크린 떠돌이별 수염을 깎으려지만 미리 모두 깎여 하얗게 빛 꺼진 별은 뜬 눈 채 잠이 들었다 뼈만 남은 플라타너스가 하늘의 속앓이를 아는지 팔을 치켜든 채 하늘 심장에 바싹 귀를 대고 숨 죽여 얼어 있다 하늘과 땅, 땅과 땅 경계를 넘나들며 조금씩 살을 헐어내고 있는 공기의 폐장도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하늘 위의 하늘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퀘이사만이 끝나 가는 길고 긴 아날로그의 지상 삶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팽개치고 돌아설 시간의 속셈도 알고 있다 퀘이사가 알고 있는 시간이 한밤 우주를 붙들고 이제 잠을 씌우는지 이 간이역의 하얀 낙하산 속은 무거운 침묵만 깔려 있다 나는 밤내 일기장에서 나체로 있는 침묵 한 컷 집어먹는다. ☆★☆★☆★☆★☆★☆☆★☆★☆★☆★☆★ 계절이 초록 옷을 입을 때 김지향 초록 옷 입은 계절이 초록바람을 먹고 펄럭펄럭 옷깃을 펄럭일 때 우리는 참 싱그러운 초록이 된다 숲들이 옷깃을 펄럭일 때마다 사람은 온통 초록 물감 통에 빠져 초록 숲이 된다 초록 숲이 된 우리의 가슴에 휘파람새가 숨어들어 몸 전체를 연주한다 휘파람새가 우리 몸을 연주할 동안은 사람의 눈흘김도 게걸음도 거치른 거치른 말솜씨도 일시에 화해로운 노래가 된다 초록 노래로 흐른다 ☆★☆★☆★☆★☆★☆☆★☆★☆★☆★☆★ 고층 아파트 김지향 담쟁이도 미끄러지고만 고층 아파트 터질 듯 볼록볼록한 품을 안고 기다란 키로 버티고 서서 아침이면 술술 풀리는 연줄처럼 구겨 넣은 내장 다 풀어내고 밤이면 빠짐없이 되감아 넣는 아파트 그 품속엔 어떤 생이 출렁이고 있는지 밖에선 깜박이는 창유리만 보일뿐 때때로 요란한 소리로 몸을 띄운 비행기가 머리 위를 짓뭉개지만 (내다보는 사람의 귓바퀴만 찢기고 말지만) 아파트 눈썹 하나 긁지 못한 비행기 하늘 저 쪽으로 튕겨 올라가면서 아파트의 불 눈에 넌지시 읽힌다 팽팽한 하늘이 여전히 황금엽서를 펼쳐놓고 화살 없는 활시위로 빛을 쏘아대고 있지만 하늘빛의 쇼올을 두르고 날마다 우주 속에 머리를 넣어 세계 별들의 집회에서 보내오는 초음속의 송신음을 듣고 있는 아파트가 깊은 잠에 빠질 땐 요술지팡이의 어린왕자가 머리를 톡톡 치며 깨운다 어린왕자의 요술지팡이를 어서 빨리 읽어 보라고 ☆★☆★☆★☆★☆★☆☆★☆★☆★☆★☆★ 공간 밖 공간 김지향 휙 휙 시간이 달아난다 어디로 가는 거지 궁금한 나는 시간의 손을 끌어 잡는다 잽싸게 뿌리치고 달아나는 비밀 같은 시간 나는 온 힘을 모아 시간의 꽁지를 끌어당긴다 시간은 공간 밖 공간의 레일 위로 훌쩍 몸을 빼 돌린다 나도 잽싸게 마우스를 잡고 공간 밖 공간의 나라로 함께 동댕이쳐 진다 이미 이사 온 사람들로 배불뚝이 된 공간 밖 세상 초만원의 공간마다 금이 찍 찌익 나 있다 누가 만들어 공간 밖 공간의 개찰구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는지 한꺼번에 밧줄 같은 길들이 살아나 얽히고 한꺼번에 박음질이 잘 된 방들이 환하게 불을 켜 어린 복제인간들의 눈을 밝혀주고 한꺼번에 닮은꼴의 아이들이 지상엔 없는 속력을 만들어 까불까불 콩새 꼬리 같은 서버를 타고 둥둥 떠다니고 한꺼번에 구문이 안 맞는 낯선 말들을 만들어 사방천지 아무데나 낭자하게 팡 팡 쏟아놓는다 남은 지상 사람들아, 공간 밖 공간을 쳐다봐라 새로 돋은 새 풀처럼 톡 톡 머리들이 튀어나와 있지! 겉옷을 벗어둔 지상은 이미 눈동자 빠진 허공일 뿐 내일이면 없어질 구멍 뚫린 항아리일 뿐 그래도 남은 사람들은 수명 다한 낡은 잡기장 같은 지상을 사랑한다 죽도록 사랑하며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린다 또 다시 생기발랄한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 공간 밖 공간에도 봄이 살아난다 김지향 어제는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를 마구잡이로 들락거린 세상소리를 마셨다 오늘은 모두가 한꺼번에 세상소리로 뒤엉켜 고속 메일이 되어 온 세상에 흩어진다 삶을 짜서 널어놓은 빨랫줄 밑에서 뚝 뚝 떨어지는 삶의 옹아리를 받아먹은 씨앗들을 마우스에 담아 나는 수평선 저 쪽 가물거리는 안개나라에 보낸다 안개는 없어지고 파란 풀밭이 태어난다 풀밭 속에서 살살 풀리는 햇살을 등에 업고 새파란 바람을 받아먹는 병아리 떼, 놋쇠 자물통 아이디를 훔쳐 열고 쫓아 나온 성급한 노란 병아리 몇 개비 꽃 대궁에 끼워져 서로 팔짱을 걸고 노란 꽃으로 피어난다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 줄다리기하는 고속 안테나 위에서 누가 먼저 정보를 빼앗나 싸움판을 벌이는 마우스의 숨 가쁜 속력을 타고 금빛 날개를 파닥거리는 본적도 없는 낯선 메일들이 내게도 와락 달려든다 가장 먼저 받은 이름 없는 메일을 연다 날개를 편 봄이 내려 선 공간 밖 공간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 뜰 잔디밭에 쫑 쫑 쫑 뛰어가는 방금 마악 배꼽 떨어진 봄을 한 입 가득 따 넣은 메일, 나는 숨차게 따라가며 봄 꼭지를 톡 따고 빠뜨린 꼭지도 톡 딴다. 세상은 온통 샛노란 물감 통에 빠져 진저리를 친다. ☆★☆★☆★☆★☆★☆☆★☆★☆★☆★☆★ 공중창고에서 김지향 공중창고에 갇히면 나가지 못함 활주로가 녹이슬어? 아니 시체로 귀환할까 봐? 삼십년 전에도 그랬었지 공중을 도려내 보이는 분화구마다 지상의 배기가스가 터져나오고 군데군데 열려있는 공기통은 뚱뚱 부어 손톱자국도 남지 않았지 우리는 소리쳤지 밟을 때 마다 딱딱 발이 맞힌다고 공중에 갇혀서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복막염 앓는 공기를 살려내라고 전능자에게 비명을 쏘아올렸지 우주공간을 빙빙 돌며 전능자가 있을 끝과 끝을 두 주먹으로 땅,땅, 두들겼지 그로부터 대심판날인줄 알고 사는 우리 오늘도 심판날인줄 아는 우리 복막염 공기는 때때로 배에서 산성비를 뽑아내고 비닐 주머니도 없는 우리는 거짓말장이, 사기꾼! 하고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치지만 공기가 살아난다고 전능자가 손을 내밀리라고 믿었던 우리는 오늘도 우리 자신의 희망에게 배반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시체로 귀환하지 않고 활주로가 떨어져나간 공중창고에서 아직도 시체가 되지 않고 있음 ☆★☆★☆★☆★☆★☆☆★☆★☆★☆★☆★ 굴렁쇠와 아이 김지향 안녕! 바람도 한 옆으로 밀쳐 세워놓고 쨍쨍한 햇빛 속을 날마다 보는 아이 하나 손을 파랗게 흔들며 간다 처음엔 숨죽인 운동장 머리에 삐뚤삐뚤 서투른 팽이치기처럼 바퀴가 푸득거렸다 아이의 새파란 손가락에 걸린 새파란 시간이 밀쳐놓은 바람을 흔들어 운동장 전체를 띄웠다 와~와~와~ 운동장으로 뛰어든 사람의, 빌딩의, 공장의, 창문의, 손뼉소리가 귀먹은 시간의 귀속까지 요동쳤다 중간엔 팔딱이는 운동장 심장부를 뛰는 아이보다 큰 덩치의 굴렁쇠에 성미 급한 젊은 시간이 고무줄처럼 튕겨 올라붙었다 올라붙은 시간이 심술을 부렸다 검은 보자기를 공중에 펼쳐 햇빛을 걷어냈다 공중은 문득 뚜껑열린 물병이 되었다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이 소나기로 몸 바꾸는 순간 굴렁쇠에 무너지는 보드불럭 담장이 걸리고 굴렁쇠에 쓰러지는 공장 굴뚝이 걸리고 굴렁쇠에 달려가는 사물의 아우성이 걸리고 굴렁쇠에 흙탕물을 몰아오는 바람 갈퀴가 걸리고… 나중엔 손을 흔드는 아이의 손등이 주름 깊은 어둠덩이를 밀고 노을 감긴 운동장 하복부를 마악 돌아 얽힌 실타래를 온몸으로 풀어내듯 은빛의 시간을 나부끼며 느긋하게 간다 내가나를 밀고 나간다 운동장 밖으로 안녕! ☆★☆★☆★☆★☆★☆☆★☆★☆★☆★☆★ 궤도 이탈중 김지향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마디 문을 열어놓고 바람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렀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삶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 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구겨 넣으며 터널같은 세상 한 비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가는 중이다 ☆★☆★☆★☆★☆★☆☆★☆★☆★☆★☆★ 그 해 여름 숲 속에서 김지향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아직 바람은 나무를 베고 잔다 동쪽 하늘에 붉은 망사 천을 깔던 해가 숲을 깨운다 숲은 밤새 바람에게 내준 무릎을 슬그머니 빼낸다 베개 빠진 바람머리 나뭇가지에 머리채 들려나온다 잠 깬 산새 몇 마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네를 뛰는 사이 숲들이 바람뭉치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북채가 된 가지로 산새의 노래를 바람 배에 쏟아 부으며 탬버린이 된 바람 배를 치느라 부산떤다 입 다물 줄 모르는 가지가 종일 바람바퀴를 굴린다 숲 속은 온종일 탬버린 소리로 탱탱 살이 찐다 세상을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아래서 위로 숲을 안고 돌며 바람바퀴를 굴리는 숲의 재주를 배우느라 여름 한 철을 숲에서 산다 ☆★☆★☆★☆★☆★☆☆★☆★☆★☆★☆★ 그대 향기 김지향 상수리 나뭇잎에 우레소리를 몰고 와 바람이 앉는다 상수리나무는 깊은 잠을 버리고 엷은 안개를 게우며 일어난다 그림자도 같이 어둠도 같이 바람 속으로 숨는 상수리 밭은 소용돌이치는 소리의 강이 된다 세력 있는 강의 소용돌이 틈에서 더욱 싱그럽게 더욱 뜨겁게 그대 향기 그대 노래 오늘은 분수로 솟아올라라 솟아올라 어둠을 지워버려라 ☆★☆★☆★☆★☆★☆☆★☆★☆★☆★☆★ 그리다만 가을 한 장 김지향 까슬까슬 빛이 바스러지는 가을엔 바람도 빌딩 꼭지에 꽁지를 내려놓고 쉰다 몸이 싸늘한 바람을 기다리는 나무마다 지름길로 온 따끈거리는 햇볕의 불 주사에 따끔따끔 이마가 빨갛게 익는다 고루 박힌 이빨을 죄다 내놓고 노랗게 웃는 옥수수 머리칼도 붉게 볶여 곱슬거린다 도토리 키 재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꿈치를 쳐들고 있는 고추밭, 진다홍 손가락을 대롱거리는 탱탱한 고추송이에 탁, 탁, 날개를 치며 고추잠자리 떼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건너편 사과밭 사과나무엔 공들여 키운 아기의 발그레한 뺨을 쓰다듬는 거치른 손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이제 곧 가을 공간을 청소할 싸늘한 바람이 몸을 일으켜 그리다만 삽화 한 장 걷어내 화덕으로, 곳간으로 보낼 키를 들고 총총히 달려올 차례만 남았다 ☆★☆★☆★☆★☆★☆☆★☆★☆★☆★☆★ 그림자의 뒷모습 김지향 그 때 알 수 없는 한 그림자와 마주 서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나는 그에게 자꾸 끌려가고 있었다 그림자는 밤에만 다녔다 그림자가 자고 있을 때 아침이 오지만 그림자는 자지 않으므로 아침은 창 밖에 서 있었다 밤은 가고 또 와도 그림자는 죽지 않았다 무성하게 머리털까지 자라나 내 키를 덮었다 나는 그림자의 갈퀴에 쓸려 내려갔다 앗질앗질 땅 아래로 떨어져 내려 마침내 밑바닥에 닿았다 그때였다 어디서 날카로운 한 줄의 빛이 새들어와 그림자를 쏘았다 머리털 갈퀴도 수염도 쏘았다 아, 나는 죽음을 이끌고 나가는 그림자의 뒷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이겨 버렸다 비로소 나의 창안엔 아침이 왔다 ☆★☆★☆★☆★☆★☆☆★☆★☆★☆★☆★ 기차가 온다 김지향 그해 겨울 나는 정동진 새벽 바닷가 모래 위에 서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시간과 시간 사이 서너 꼭지의 남자와 여자가 안개를 신고 희미하게 서성거렸다 동쪽 산꼭대기에 박힌 한 여자의 눈이 비명을 질렀다 ‘모래시계가 얼어붙었다’ 여자의 어깨 위로 한 뼘쯤 더 긴 남자의 고개가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동쪽 산마루 밑에서 볼그레한 저고리만 벗어 올릴 뿐 해는 아직 머리칼 한 올 보여주지 않았다 성미 급한 남자가 둑 위에 얼어붙은 돌멩이를 차 던지다 그 자리에서 깨금발로 뛰었다 엄숙하고 신비한 우주의 송신음을 기다리듯 나는 오그라든 목으로 우주의 옆구리에 얼어붙었다 바로 그때 둑 위의 남자가 와~와~와~ 소리 질렀다 멀리 발치께의 수평선이 빨갛게 끓어올랐다 점점 몸 부피를 넓혀갔다 문득 바다 배꼽에서 새빨간 모닥불이 물너울에 스르륵 말리고 있었다 나도 겁결에 돌멩이를 던졌다 모닥불은 얼룩도 지지 않고 활짝 웃고 있는 장미다발로 커다랗게 피어올랐다 바로 내 이마 위로 뜨끔거리는 빛이 흐르고 온몸이 얼음에서 풀려났다 얼음이 빠져나간 여자들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모두 주저앉았다 해는 점점 작아지면서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 달고 부지런히 공간 밖으로 가고 있었다 나도 해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아침공기를 부수고 햇살을 쪼개며 희뿌연 공간 한가운데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잠자는 둑 목에 찢어지는 기침소리를 질러 넣으며 정신 나간 사람들 정신의 복판을 가로질러 기차가 와락 달려들고 있었다 ☆★☆★☆★☆★☆★☆☆★☆★☆★☆★☆★ 기차를 타고 김지향 내가 탄 급행열차는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열차에서 눈이 사물 1.2.3을 먹는다 햇빛은 덩그렇게 나를 켜고 따라온다 가로수가 눈 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열차는 가만히 서서 가로수를 파먹는다 개망초꽃이 밟히지 않으려고 뒷절음질쳐 궁둥이로 들어와 이마로 나간다 열차는 서서 창문으로 스르륵 뭉개버린다 무리 소나무가 누렇게 뜬 어깨쭉지를 디밀어본다 열차는 서서 발통으로 깔아뭉갠다 밭이랑이 줄을 그으며 달려들었다 짓뭉개진다 논바닥이 찰랑찰랑 물장구를 치며 들어왔다 열차 눈에 물먹이고 지워진다 지우개를 달고 서있는 열차를 타고 내 눈은 사물 1.2.3을 먹고도 눈물 한 방울 내놓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에 벗어두고 눈만 기차를 타고 다 뭉개진 금수강산을 보러가다니! ☆★☆★☆★☆★☆★☆☆★☆★☆★☆★☆★ 길이 길을 버리다 김지향 현관을 나선다 길이 길의 몸속에 내 발을 꽂아준다 “빨리 내 몸을 밟고 건너가 봐, 시간이 없어‘ 길이 선심을 쓰듯 내 발을 밀어 던진다 나는 길에 튕겨진다 발이 큰 나는 길에 담겨지지 않는다 되튕겨져 나와 나는 길을 구경한다 시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길머리가 없어진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한다 반복에 반복을 해도 길 머리는 살아 나오지 않는다 ‘이런 , 길이 길을 버리다니!’ 나도 길을 버린다 길이 나를 버리기 전에 길이 만들어놓은 난삽한 길을 먼저 버린 나는 튕겨져 나와 길 밖에서 길 밖을 꿰뚫어 본다 갈래 갈래로 땅이 쪼개지고 있다 땅은 쪼개지는 대로 길이 된다 길 밖의 길로 내가 가고 있다 오만개의 내가 오만개의 길로 가고 있다 잔뜩 몸을 부풀린 짐차는 짐차의 길로 정면돌파 하고 잔뜩 몸을 움cm린 승용차는 승용차의 길로 정면돌진 하고 나는 내가 만든 나의 길로 정면통과 한다 만일 내가 나의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오욕칠정의 나의 분신들은 지금 어디로 빙글빙글 우회할지 아찔, 현기증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 길이 된 꽃잎 김지향 꽃샘바람이 얼굴을 가리고 도둑처럼 쳐들어온다 꽃은 제 몸을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꽁꽁 묶었지만 찢어진 비망록처럼 부욱, 찢겨진다 나무는 제 몸에서 걸어나간 꽃을 보며 뚝,뚝 눈물을 떨군다 무거운 고요가 눈물 위에 떨어진다 옷깃 속에 목을 접어넣은 사람들은 나무의 눈물로 돋아난 새 풀을 못 본 채 마구 짓밟고 간다 신명이 난 바람이 입에 면도칼을 달고 뾰족뾰족 밖으로 내민 꽃의 희망을 줄을 긋듯 주루룩 삭발시킨다 봄들어 속력을 내는 시간을 따라 나무는 꽃잎을 연거푸 토해내고 바람은 연거푸 면도칼로 꽃머리를 부러뜨린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후레지아 부러져 길이 된 꽃의 희망을 한 아름 품어 안고 나는 한바탕 시샘하는 꽃샘바람과 열전을 벌인다 ☆★☆★☆★☆★☆★☆☆★☆★☆★☆★☆★ 깊은 밤 김지향 별이 꽃밭에 떨어졌다 나는 꽃밭을 한 삽 떠서 마당 가운데 던져 넣었다 마당 전체를 빛이 들고 있다 나는 빛을 손바닥에 퍼 담았다 새나가지 않도록 주먹을 꼭 쥐고 어둠을 넘어와 내 책상 꽃병에 꽂았다 빛은 꽂히지 않았다 꽃밭에도 빛은 한 개도 뜨지 않았다 시간은 시간을 잡아먹으며 어둠 속으로 힘껏 떠나간다 사람도 떠나가고 아파트도 떠나가고 길도 가로수도 모두 어둠 속으로 떠나간다 꿈을 담는 그릇은 꿈들을 털어내고 낡아가는 헌것 채 한 개비씩 어둠에게 끌려간다 시간은 죽어가는 헌것들을 어둠에게 넘기느라 죽을 시간도 없다고 투덜댄다 투덜대며 죽어간다 (새로 피어날 내일의 스펙터클 꿈을 새로 만들며) 방문을 닫은 깊은 밤이 내 가슴속 우주에도 가득 깔렸다 ☆★☆★☆★☆★☆★☆☆★☆★☆★☆★☆★ 꽃잎의 귀 김지향 꽃밭이 있는 고층 아파트 발코니로 이사 온 매 발톱 꽃나무 몇 날은 기가 빠진 듯 졸다 오늘 문득 높은 공기를 맛본 듯 고개를 쳐들고 팔팔 일어나고 있다 쫑긋쫑긋 귀를 세우고 사람 쪽으로 목을 내밀어 흐드러진 세상 소리를 연거푸 퍼먹는다 너무 많은 세상 소리를 뼈째로 허겁지겁 집어삼킨다 말이 내뱉는 가시를 소금물로 알고 들이킨 꽃의 귓불엔 오늘 아침 유리조각들이 매 발톱처럼 뾰족뾰족 매달려 있네 ☆★☆★☆★☆★☆★☆☆★☆★☆★☆★☆★ 꿈 혹은 풀밭 김지향 해꼬리를 잡고 삼백 몇 날을 걸어도 보이지 않네 어딘가에 펼쳐져 있을 꿈에만 나타난 풀밭 빛살이 반질거리는 풀밭 장다리꽃이 안개밭으로 뜬 머리위 풍경처럼 걸려서 가늘가늘 숨 죽이고 날개만 떨던 바람이 내 목으로 알싸한 꽃물을 내려보내던 풀밭 숯 많은 풀잎의 귀밑머리 자르며 하늘하늘 살 비비며 마구 짓이기며 바람이 능멸을 해도 아픈 표정 하나 없이 포근한 가슴 열어주던 풀밭 꿈 깨고 나면 보이지 않네 육체를 벗은 꿈에만 가벼운 발이 담장위로 치뻗은 풀의 머리를 으깨고 가는 꿈에만 어머니처럼 껴안아 주던 풀밭, 나는 먼 훗날에도 피어날 삶의 꽃씨 한 톨 심어놓고 발병나게 찾아갔지만 어느 날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잠깨고 나니 갈 수 없네 꿈마저 잃어버린 나는 오늘 대문을 박차고 나가서 지상의 길을 종일토록 헤맨다 휘청휘청 내 키가 꼬부라져 접히도록 달려가는 시간의 뒤통수도 보이지 않도록 삼백몇날을 헤매고 다녀도 꿈에 본 풀밭은 나오지 않네 때때로 잡동사니 화물차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발에 먼지만 진흙처럼 쌓여가는 금지구역이 많은 널따란 철조망 속 내 발이 닿는 곳마다 철조망이 옭아매는 그런 땅만 있네 아, 지상의 삶은 철조망과 진흙 바로 그것이네 길 모퉁이 저 혼자 웃다 울다 하는 외톨이 꽃 한송이의 외로움도 나만 같은 이 삶 속에선 풀밭은 안 보이고 진흙밭에 깊이 박혀 빠지지 않는 내 발자국의 아픔만이 지나간 시간의 증인이 되네 ☆★☆★☆★☆★☆★☆☆★☆★☆★☆★☆★ 나뭇가지에 매맞는 바람 김지향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고 어젯밤까지 바람을 따라가던 나는 말했다 바람은 곁에서 힘없이 부러져 있지만 나뭇가지가 바람을 멀리 내쫓고 있지만 나뭇가지엔 불끈불끈 불뚝힘이 출렁이고 있지만 바람이 나뭇가지를 낚아채어 홀랑,몸 벗겨 부끄럽게 한다고 어젯밤까지 나는 분명히 말했다 봄이 되면 바람이 달려와서 나뭇가지에 꽃으로 매달린다고 바람꽃이 봄을 피운다고 바람이 아무리 속삭여 주어도 나와도 같이 믿어주지 않는 나뭇가지가 오늘 보니 바람을 마구 때려 패대기치고 있네 패대기 한번에 봄꽃 한 주먹씩 피어나고 있네 바람은 오늘 종일 나뭇가지에 매맞고 있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 나는 오늘부터 믿기로 했다.) ☆★☆★☆★☆★☆★☆☆★☆★☆★☆★☆★ 나뭇잎이 시를 쓴다 김지향 고장 난 시간이 가을 속에 멈춰 섰다 세상의 휴게소는 만원을 이루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나는 갓길로 내쫓겼다 길은 바퀴 없이도 잘 굴러 간다 내 앞에 스르륵 미끄러져 온 길이 가득 담은 나뭇잎의 붓끝으로 빨간 시를 쓴다 한 자국도 옮기지 못하는 창백한 내 발등에 마음 아린 나뭇잎이 쯧. 쯧. 쯧. 혀를 차며 나뭇잎 사이사이 초롱꽃처럼 달랑거리는 수은등을 끌어와 불빛 같은 시를 붓는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온 우주에 시를 쓴다 하늘에다 땅에다 사람의 몸에다 빨간 시를 쓴다) 블랙홀에서 불어온 먼지바람에도 돌담 위에도 터널 속에도 주렁주렁 시가 익어간다 사람들은 숨차게 뛰어온 삶의 굴레를 벗어 가을의 가지에 걸어놓고 가을 내 시를 읽다가 스스로 시가 되어버린다 (높이 올라간 인간들의 투정을 미리 알아챈 눈치 빠른 하늘도 마침내 가슴을 열고 비명 같은 삿대질의 시위로 찢기고 찢겨 뚝,뚝 핏방울의 시를 떨어뜨리며) 시간은 멀지 않아 바퀴를 돌린다고 송신해 온다 ☆★☆★☆★☆★☆★☆☆★☆★☆★☆★☆★ 나의 디지털 하늘 김지향 디지털 버턴을 쥐고 나는 손이 붙어 있는지 더듬어 본다 너무 가벼워 날아간 줄만 알고 나는 나에게 육체가 있느냐고 물어 본다 육체가 가벼울 때 나무의 날개 사이로 보인다 하늘이 살이 붓지도 않고 양 옆으로 열림이 환히 보인다 그때 하늘이 먹은 새들이 꽃씨를 물고 팔랑팔랑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나뭇잎이 열매를 매달고 동글동글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바람이 물결무늬 주름진 치마폭을 펄럭이며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햇살이 치마끈을 풀어 땅에 수정기둥을 세우며 나온다 날아 나온 몸 바뀐 존재들은 가벼운 육체로 땅의 안 바뀐 존재들과 하나의 허리띠에 묶여 하나가 된다 나의 디지털 하늘은 이제 배가 푹 꺼져 땅에 내려와 누웠다 우주가 일직선으로 길게 깔려버리는. ☆★☆★☆★☆★☆★☆☆★☆★☆★☆★☆★ 낮 달을 보며 김지향 길을 가다 문득 하늘만 쳐다본 날 가물가물 점 같은 새가 까맣게 떠서 말간 낮달을 끌고 가더니 하얀 몸의 낮달이 진종일 불에 타는 고통으로 이지러지며 혈관이 터지더니 밤이면 진홍빛의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몸이 타는 고통의 낮달을 보며 그때서야 나는 후닥딱, 너에게 준 아픔을 깨달았다 나도 혈관이 터져 진흙이 될 때까지 지켜볼 하나님의 불눈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오늘 내 피곤을 털어낼 원두막 그 뽕나무 집을 찾아 길을 가다 문득 하늘 기슭으로 끌려간 반쪽뿐인 낮달을 보며 뜨끔거리는 바늘 꽂는 아픔 예삿일이 아니다 (영혼은 육체가 없이도 아픔을 알데 하나님의 분신임도 뚜렷이 알데) 길도 중간부위를 넘어선 때에야 빼마른 낮달이 태양의 덤불을 빠져나지 못하듯 나의 우주도 하나님의 손바닥임이 유리알처럼 보이데 ☆★☆★☆★☆★☆★☆☆★☆★☆★☆★☆★ 내부 수리 중 김지향 오늘도 나는 리모컨으로 세상을 연다 가장 먼저 기지개를 켜는 먼지 사이로 키를 일으킨 빌딩들이 마음 놓고 꺼낸 내장을 말리고 있다 내장 속에 숨어 있던 정적들이 한 소쿠리씩 쏟아진다 정적 밑에 가만히 엎드렸다 툭, 툭, 불거지는 것들이 투명유리 속처럼 보인다 부서진 욕정 부스러기, 배배꼬인 야망 찌꺼기 햇빛의 주사바늘 밑에서 와글와글 끓고 있다 나는 얼른 리모컨으로 빌딩을 꺼버린다 그림자까지 모두 삭제하고 재빨리 장면이 바뀐다 좁다란 블록담 옆으로 측백나무가 길을 끌고 파랗게 간다 돌아보지 않고 가는 길 옆으로 자잘한 곷 나무들을 안고 손을 흔드는 해바라기 긴 허리도 리모컨 눈의 조리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다시 또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빌딩 지붕 위로 길이 떠서 올라간다 피가 하얗게 씻긴 길을 끌고 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아득히 좁아진 길 끝 거기는 어느 세상일까 아, 쪽문이 보인다 사람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멈추어 있구나 지금 마악 도착한 진공포장지에 싼 한 사람의 손발에선 아직도 야생마 같은 피가 포장지 밖으로 지고 있구나 나는 다시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장면이 바뀌지 않는다 리모컨도 들어가 보지 않은 길 끝 세상, “내부 수리 중”이란 쪽지가 커다랗게 나부끼고 있을 뿐 사람들은 길 끝에서 하얗게 기다리고 있다 ☆★☆★☆★☆★☆★☆☆★☆★☆★☆★☆★ 내일에게 주는 안부 김지향 어디 사는지 아직도 남아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내일이란 이름에게 나는 안부를 보낸다 해마다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는 내일에게 내일이면 늦어 오늘 나는 일년치의 안부를 한꺼번에 날려보낸다 이번엔 머리꼭지라도 좀 드러내 보라고 내일 뒤 어디에 숨어있을 내일에게까지 두 손으로 안부를 불어 보내면서 안부가 가서 닿는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망원렌즈 먼지를 닦아내고 뒤꿈치의 돌베개를 곧추 돋우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내일에게 뜨거운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나의 노력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에다 들끝에다 바람귀에다 입을 대고 내일의 이름을 불러댄다 목청껏 목청껏 불러댄다 그러나 내일은 어딘가에 들앉아 내 목소리를 묘사하며 웃고만 있겠지 내가 잠잘 때 그도 잠을 내가 죄로 배 부를 때 그도 죄를 내가 거짓말로 속삭일 때 그도 거짓말을 흉내 내겠지 그런 내일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진실임이 알려질 때까지 내가 내일의 사랑을 무식하게 신앙하는 환자임이 밝혀질 때까지 나는 주소불명의 내일에게 오늘 일년치의 안녕 안녕을 한 무더기 띄워 보낸다 그래, 그렇고 말고 내일이여, 안녕! ☆★☆★☆★☆★☆★☆☆★☆★☆★☆★☆★ 눈 김지향 작은 제 몸 속에 몇 갑절의 큰 몸을 넣고 있다니! 작은 몸속에 앉아있는 우주의 볼에 돋은 사마귀 같은 내가 그려 넣은 종이비행기 지금 마악 산 너머 하늘 길을 넘고 있음을 말문 막힌 나는 보고만 있다 큰 몸이 보지 못하는 작은 몸 그게 바로 내 눈동자라니! ☆★☆★☆★☆★☆★☆☆★☆★☆★☆★☆★ 눈 속의 여자 김지향 표정도 없이 하늘이 웃는다 좌 악 열린 하늘 입에서 소금 알갱이가 내린다 한 여자가 하늘 웃음 속으로 삭제된다 삭제되었다 나온 그 여자가 눈을 깜박일 때 마다 눈썹에서 해묵은 때가 지워진다 소금 가루가 덮어버린 그 여자의 머리가 낮게 내려온 하늘 살이 된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손잡은 하얀 우주를 그 여자의 실티 같은 머리칼이 금을 긋는다 하얀 소금 알갱이에 묻힌 여자의 하얗게 씻긴 가슴 속 우주엔 하늘 살을 보내준 이의 눈동자도 담긴다 그 여자는 몸도 마음도 백지의 우주로 재생된다 ☆★☆★☆★☆★☆★☆☆★☆★☆★☆★☆★ 눈뜨는 잎사귀 김지향 모서리가 살아난 장독대 옆구리 황금날개 바람이 앉아있다 날개는 이내 열리고 바람은 날고 있다 귀를 세워 설치던 진눈깨비는 귀가 잘려 고개를 떨구고 하늘을 깁고 있던 먹구름도 팔짱을 끼고 제집으로 돌아서고 채소 빛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비어있는 마당 열 두 군데를 새로 와서 채우는 열 두 빛 햇살 지구 밖의 봄 돋는 소리도 몰고 와 초록빛 비늘을 뿌린다 황금 실을 뿜어낸다 동면 속에 접어든 오동나무는 꿈을 털고 일어서고 장독대 질항아리도 이마를 쳐들고 깨어난다 엎드렸던 내 의식은 눈썹을 내밀어 저 창 밖의 파도치는 초록물감 속을 눈뜨는 잎사귀가 되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 눈물처럼 떨어지는 김지향 하늘엔 시린 눈이 사라졌다 팔팔 살아서 끓는 정기 쏟아 붓던 그 눈, 이젠 어디로 가고 없다 하늘은 돌에 맞아 상처투성이 가슴 뿐 멍청히 떠서 휘모는 폭우에도 귀우뚱거린다 하늘 가슴에 대고 마구잡이로 쏘아 올린 사람들의 돌팔매 녹도 슬지 않고 이제껏 쩌렁쩌렁 박혀 있으니 이제껏 분수처럼 치솟는 돌팔매 피투성이 가슴으로 맞고 있으니 어쩌나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에게 침묵의 깊은 물음 던지는 듯 돌팔매 박힐 때마다 빗물처럼 주루룩, 떨어지는 눈물을 사람들은 그게 사랑인줄 하늘의 가없는 사랑인줄 모른다 ☆★☆★☆★☆★☆★☆☆★☆★☆★☆★☆★ 눈사람 김지향 다리 긴 바람이 눈을 뜨고 뛰어간다 바람의 손이 머리를 빗기는 안마당이 귓불을 비비며 일어앉는다 땅 밑으로 쫓겨난 나무 뿌리도 뛰어가는 바람의 행방을 잡고 있다 쨍그렁, 깨지는 창밖의 샐로판지 위로 강아지 두엇이 꼬리를 떨면서 튕겨간다 바람만 나와 설치는 빈 뜰에 중절모를 눌러 쓰고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는 눈썹 흰 사람이 내려와 술렁술렁 아이들을 불러내고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마술 가위를 들고 나와 그 흰 사람의 흰 머리칼을 베어 내 머리를 덮고 있는 먹구름을 지우고 그 흰 사람의 흰 손가락을 뽑아 내 이마에 순결의 무지개로 오려 붙이고 술렁이는 뜰 안에서 깊이 잠든 내 의식을 두드리며 마술 가위의 아이들은 오만 개의 눈 뜬 오만 개의 바람소리를 만들고 있다 ☆★☆★☆★☆★☆★☆☆★☆★☆★☆★☆★ 다리뿐인 햇빛 김지향 나는 발코니 쪽문에서 총알을 날렸다 갈퀴를 세우고 뛰어가던 강이 퐁, 퐁, 퐁, 장파열을 일으켰다 가닥가닥 실타래처럼 잘려나가는 물의 살결들 둑 너머 둑으로 물의 실타래는 마음 놓고 퍼져나갔다 둑을 마구 넘어갔다 바둑돌들이 빠진 둑 이마가 뜯겨나갔다 (둑 밖으로 쫓겨나온 물고기들이 눈을 뜨고 잔다 주사바늘을 손톱처럼 세운 햇빛이 물고기에게 불주사를 놨다 까맣게 타버린 물고기들에게 햇빛은 연속사격을 가했다) 나는 햇빛의 뷸꽃 사격이 나를 겨냥한 줄도 모르고 또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퍼엉! 햇빛을 관통했다 1초 동안 내 눈에 튀어든 빛 가루가 까맣게 눈을 태웠다 까만 눈을 끌고 간 블랙홀, 1초의 어지러움 너머 빛 부신 은빛나라가 반짝였다 1초 동안 강물을 뚫고 햇빛을 뚫어야 보이는 하얀 나라! 햇빛은 수평도 수직도 아닌 땅도 나라도 없는 빼 마르고 기다란 다리만 촘촘하다 다리에 구멍을 내도 금방 아물어버리는 그 물렁살이 은빛의 하얀 나라를 감추고 있다니! ☆★☆★☆★☆★☆★☆☆★☆★☆★☆★☆★ 다시 또 절망에게 김지향 오늘도 길은 낯선 곳으로 뚫고 간다 시간은 날마다 내 발에 노끈을 묶어 낯선 길로 끌고 가지만 (낯선 시간에 희망을 걸고)나는 따라 가지만 그 곳도 똑 같은 세상이구나 절망아,그 곳에도 황사바람 몰아부치고 산성비 쏟아지는 진펄이구나 우회선도 없는 일차선로 중앙부에 접어든 내 발은 위험과 손 잡고 점점 거세게 몰아부치는 황사바람에 키가 다 구겨져서 점점 거칠게 퍼부어대는 산성비에 살갗이 닳아 떨어져서 쓰러졌다 일어남을 반복하며 오늘도 길에게 코가 꿰인 내 발이 따라가며 이제 그만 불시착이라도 하고 싶다 시간의 노끈이 내 발을 놓아주기를, 삶과 죽음이 폭파되어 한 세계로 어우러지기를 꿈 꾸며 누군가에게 들키면 지상에선 영영 소각되어 버릴 위태로운 꿈을 몰래 꾸며 세상을 깨뜨렸다 일으키는 의식운동을 되풀이한다 절망아, 내가 너무 두려움없이 낯선 길을, 낯선 시간을 사랑했나 봐 깨끗한 그 곳인줄 알았던 내 믿음이 배반 당한 삶(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절망아,네게 길들여진 삶 나는 그 삶의 주인일까 삶이 나의 주인일까 아직도 석연치 않은 물음을 안고 오늘도 나와 삶은 낯선 시간 속으로 가고 있다. ☆★☆★☆★☆★☆★☆☆★☆★☆★☆★☆★ 다시 열린 봄날에 김지향 활짝 열린 봄 속으로 들어선다 겨우내 외롭던 꽃밭이 식구들로 가득하다 빵긋거리는 노랑 빨강 하양 뺨들을 다독이며 *창준의 손을 잡은 나는 꽃으로 피던 시절을 생각하며 걷는다 아이의 손에는 빨간 꽃이 내 손에는 하얀 꽃이 복사된다 지난 겨울 떨군 꽃의 눈물이 다시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어린 세대와 낡은 세대가 서로 다른 생각 속에 꽃들을 복사한다 시간은 그 시간이 아닌데 꽃들은 왜 그 꽃이지? 하고 아이가 물어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이의 말은 왜? 왜? 로부터 시작하고 길어지는 나의 대답엔 귀를 닫아버린다 대답에 궁색한 나는 아이가 스스로 알아갈 길만 안내해준다 아이는 얼마 안가 혼자서 봄 속을 달려갈 것이다 ☆★☆★☆★☆★☆★☆☆★☆★☆★☆★☆★ 따먹은 잡동사니 김지향 오늘도 안 가본 길을 걷는다 (낯설게 달려오는 세상 따먹고 싶은 나는 방에 갇히지 못한다) 나는 날마다 휴대폰으로 세상을 따 먹는다 온갖 잡동사니를 물어오는 휴대폰 머리꼭지의 머리카락 그에겐 하늘 내장도 저장되어 있다 길을 가다 문득 하늘을 따먹고 싶어 산꼭대기 상상봉으로 발을 끌어 올렸다 가만히 누워서 하늘의 혈관을 찾고 있을 그 때 그 하늘을 내가 백발백중의 투창질로 구멍을 냈다 휴대폰이 하늘 풍선 한 자락을 움켜쥐고 풍선 배꼽을 탕 ,탕, 탕, 우그러뜨렸다 한쪽 귀퉁이가 먼저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휴대폰 머리칼이 먹어치운 하늘이 휴대폰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너무 많은 하늘의 영양소들이 엉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공기를 패대기치고 있다 별은 별끼리의 도킹으로 부화가 되는지 휴대폰 입으로 별싸라기가 새나와 온몸에 아이섀도우를 칠해 놓고 삐리리~~ 삐리리~~ 부딪는 마찰음으로 내 청각신경을 괴롭힌다 한 요리사가 허드레 잡동사니 날것들을 냄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며 볶아대는 소리 냄비를 굴릴 때마다 휴대폰 온몸이 난잡하게 뒤틀린다 뒤틀리는 휴대폰 아, 알고 보니 내 속이네 내 속을 뒤집어 놓고 있네 나는 사람일까 물체일까 무엇이든 꿀꺽 삼키기만 하면 소화가 되어버리니! 따먹은 하늘의 잡동사니 내일은 또 무엇이 되어 태어날지? ☆★☆★☆★☆★☆★☆☆★☆★☆★☆★☆★ 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 김지향 열손가락을 부채살처럼 펴고 컴퓨터 키보드를 한꺼번에 눌렀다 잠시 엷은 주름 사이 그림자뿐인 유리집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녀는 들어갈까 말까 망설임도 없이 습관적으로 머리꼭지를 드밀어넣었다 유리집에 잠입한 그녀는 간첩처럼 귀를 세우고 몰래 벽에 걸려 엿본다 정물 하나 없는 움직임들이 무리무리 지나간다 나뭇잎 널브러진 키 낮은 산들이 지나가고 이마 훤한 지붕들이 지나가고 강아지떼가 고양이떼가 돼지떼가 지나가고 먼지가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해묵은 미해결 건수가 지나가고 지나가는 건수들은 모두 줄을 서듯 입에 앞의 꼬리를 물고 물고 물고 초고속으로 지나간다 형상을 가진 사물들은 모두 발도 없이 유리집 사이버 속으로 들어간다 인터넷 A가 인터넷 B와 인터넷 B가 인터넷 C와 불똥을 퉁기며 번개처럼 접속된다 온 우주가 인터넷 속에서 한 개 점이 되어 그녀 두뇌 속으로 도랑물처럼 기어들어간다 나는 삐걱거리는 두뇌로 가끔은 형이상 속으로 증발되고 싶다. ☆★☆★☆★☆★☆★☆☆★☆★☆★☆★☆★ 로봇과 가을 김지향 여름이 시들시들 시들 때 나는 내가 키우는 로봇을 풀어놓았다 파닥파닥 팔을 부딪치며 보듬고 있던 모닥불을 옆의 옆 앞의 앞 나무 겨드랑이에 쏟아 부었다 부글부글 끓는 나무 가슴팍에서 불길이 척추 위로 치뻗었다 로봇에게 지고 만 여름이 꼬리를 스르륵 감추었다 나무 겨드랑이엔 불똥 같은 뾰루지가 입을 뽀르통, 내밀었다 찻길 너머 산속, 키 낮은 풀밭에서도 로봇이 화약통을 엎질렀다 온 산이 빨갛게 성이 났다 찔레꽃 덤불도 엉겅퀴도 단풍나무도 낯익은 얼굴들이 새빨갛게 불이 났다 당분간 시간은 가을에게 발목 잡혀 산속 깊이 주저앉았지만 불길 속을 혼자 달려가는 불덩이 로봇, 멈출 줄 모르는 나의 로봇,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온몸에 화약통을 달아준 나는 나의 서투른 고집 같은 시행착오를 후회하지만. ☆★☆★☆★☆★☆★☆☆★☆★☆★☆★☆★ 리모컨과 풍경 김지향 휴일 심심한 저녁 때 나는 창가에서 잠자는 리모콘을 깨운다 리모컨의 뇌세포는 나보다 훨씬 개수가 많은지 나보다 먼저 내 생각을 알고 있다 리모컨이 창 밖의 창을 열어제낀다 깊숙이 집어넣은 내 눈에 들어온 사람들 가라앉은 몸속에 다 저문 삶을 꼬깃꼬깃 접어 넣고 앉아 있다 사람을 지나 창밖으로 몸을 누인 강변북로로 간다 멀리 다림질이 잘된 빌딩 머리에 홍시 같은 햇덩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몸이 뭉개지고 있다 빌딩 목으로 넘어가는 다리 짧은 시간이 원추형으로 으깨진 핏덩이 몸을 끌어간다 꼴깍, 나의 리모컨 조리개가 전기 고압선에 얽혀 뇌세포 한 둘쯤 죽어버렸는지 강변 한쪽 풍경이 지워졌다 한쪽 구석은 접혀졌다 접혀진 풍경 옆구리 버티고 선 다리 사이 또 한개 다리가 강을 건너뛰고 있다 눈에 안약을 넣은 수은등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강변북로의 삶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접혀진 풍경을 펴본다 뒤로 밀쳐진 사람들이 나온다 어둠이 되고 있는 사람의 의미 있는 아픔들이 내다본다 방금 빌딩 목울대로 넘어간 햇덩이의 각혈처럼 (바깥 풍경만 보는 이들은 아무도 접혀진 삶의 아픔을 모르지만) 눈치 빠른 나의 리모컨은 아직 자지도 않지만 남은 다른 쪽의 풍경을 다음 휴일로 넘겨버린다 깊은 밑바닥이 드러날 땐 얼른 조리개를 꺼버리는 리모컨, 나보다 지능지수가 얼마나 높은지? ☆★☆★☆★☆★☆★☆☆★☆★☆★☆★☆★ 망원렌즈와 시라세니아 잎 김지향 길과 강 사이가 붙어 있다 붙어 있는 틈새를 뒤로 빼내며 키를 쑤욱 뽑아 올린 하얀 머리의 아파트 발코니가 주춤 뒷짐 지고 서 있다 아파트 머리를 뒤로 밀며 강으로 눈을 내민 망원렌즈는 강물을 복사뼈에 걸치고 바삐 가는 시간을 붙잡느라 부산떤다 낮에는 하늘에 이마 내걸고 오지랖에 하늘 말을 받아 담는 밤에는 강변에 귀를 던져 허드레 폐지 같은 사람의 말들을 귀로 주워 먹는 아직 나이 어린 S아파트 몇 덩이 정적 같은 그의 내부가 궁금한 나의 망원렌즈는 아름다운 정적 내부로 몸 전체를 밀어 넣었다 종일 팔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던 시라세니아 잎사귀 그가 렌즈의 몸 전체를 움켜쥐었다 앗찔, 혼신의 눈을 모으고 뚫어보는 렌즈 사면이 꽉 막혔다 궁금증의 내부, 아래 위 사방에서 사기그릇 깨지는 소리 소리와 소리가 뛰어가며 부딪는 운동장이 되었다 몇 포기 남지 않은 머리칼이 소름처럼 윗마을로 치켜서고 심장박동소리가 심지 닳은 호롱불로 가물거리지만 아직 맑은 영혼으로 암호 같은 출구를 찾으며 나의 망원렌즈는 강변 S아파트 내부의 정적을 깨뜨리는 그 시라세니아 잎 속에서 아직은 살아 있다. ☆★☆★☆★☆★☆★☆☆★☆★☆★☆★☆★ 몸살 앓는 하늘 김지향 간밤 내 깔깔, 봉오리 웃는 소리만 났다 아침에 하늘이 한 뼘도 남지 않았다 봄 내 하늘은 가득 찬 꽃잎으로 몸살을 앓는다 해는 어디에 있는지 진종일 빨간 명주실만 내려보낸다 ☆★☆★☆★☆★☆★☆☆★☆★☆★☆★☆★ 바람과 바다 김지향 어젯밤 새도록 바람의 회초리에 매 맞은 바다 아침에 보니 눈꺼풀이 잔뜩 부어올랐다 바람은 바다에게 품고있는 잡동사니를 내놓으라며 아침에도 소리 높여 호통을 친다 바다는 무엇이든 잘도 삼켜버린다 배속에 넣고 있는 우럭 미역 명태 조개 물지렁이 고래 수달 바다쥐빠귀 불가사리 그들의 어린 것 까지 바다가 삼킨 잡동사니들은 헤일수도 없다 잡동사니도 바다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보물이 되어버린다 바람은 때때로 바다에게 보물을 토해내라며 크게 소리치며 바다 몸통을 돌려가며 패대기친다 살이 뜯긴 바다 가슴이 오늘 보니 움집처럼 패였다 바다 뼈가 다 들어나도 품고 있는 보물들은 나올 기미가 서푼어치도 안 보인다 (잡동사니들은 바다 깊은 가슴 안에서 찰삭찰삭 물장구를 치며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다) 문득 바람 배를 가르며 전조등을 켠 유람선 한 채 발을 멈추고 바다 가슴이 보내주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다 바람도 함께 서서 잠잠히 듣다가 신명이 났는지 어깨춤을 추며 크게크게 박수를 보낸다 바람은 바다 보물에 쏟은 끈질긴 욕심을 툭, 끊고 유람선을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 없다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바다는 지금 오케스트라 연주로 한창 뜨겁게 끓고 있다 ☆★☆★☆★☆★☆★☆☆★☆★☆★☆★☆★ 바람을 타고 김지향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 마다 지퍼를 열어 놓고 바람의 멱살을 휘어잡고 바람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 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 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 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생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집어넣으며 터널 같은 세상 한 바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 간다. ☆★☆★☆★☆★☆★☆☆★☆★☆★☆★☆★ 바람의 반란 김지향 바람이 일어선다 나뭇잎이 나부끼는 가지에서 뚝 끊어져 서쪽 하늘 뺨에 걸려 이빨을 갈고 햇살은 동쪽 산 이마에서 발을 옮기지 못한다 바람이 일어선다 해가 빛을 잃고 구름 뒤에서 물구나무로 벌을 서고 아까부터 바람이 하늘 밖에 세워둔 비가 슬슬 바람의 눈치를 보며 뛰쳐나와 수직으로 빗금을 그으며 땅에 부딪힌다 몸이 으깨진다 바람이 일어선다 땅이 키우는 풀머리가 부러지고 풀머리 밑으로 처박혀 죽은 비로 땅이 지워져 버린다 조금씩 비의 시체에 파먹혀 지워지는 땅을 보는 바람 아직 심장이 멎지 않은 땅에 크게 숨을 불어넣는다 (땅이 없이는 바람의 스펙타클도 허사임을 깨우치고 땅 전체에 엎질러 놓은 반란을 한 장 한 장 걷어내기 로 했음) 바람이 일어선다 풀잎과 땅을 움켜쥔 주먹을 풀고 땅의 가슴에 박힌 대못의 상처를 치료 하기로 바람이 마음을 바꿔 먹는다. ☆★☆★☆★☆★☆★☆☆★☆★☆★☆★☆★ 바람이 돌아온다 김지향 달빛이 허연 뼈를 뽑아들고 길 모퉁이에 비켜 서 있다 흰옷 입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밤을 썰어내는 톱질 소리를 내며 구멍 뚫린 공간을 빠져 나간다 시간을 쏠아먹는 좀 벌레가 발소리를 이고 땅 밖을 기어간다 귀가 게우는 개구리 소리를 둑 모가지에 걸어두고 품팔이 갔던 바람이 돌아온다 조용하다 달이 툭, 땅 가득 떨어질 뿐 흰옷 입은 나무들의 눈이 깨져 사방에 흰빛을 뿌릴 뿐 바람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발끝으로 간다 김지향 사람은 가고 없는 강변 의자에는 눈송이가 몇 앉아 옛날이야기 속으로 가고 있다 눈송이 몇이서 걸어가는 시간의 자국마다 소복소복 모여앉아 여럿이 되고 무리가 되어 입 열린 호주머니에서 옛날이야기를 풀풀 꺼내놓고 앉아있다 한참 후엔 의자 혼자 남겨두고 서로 손을 잡은 눈송이가 무리무리 사람의 머리를 올라타고 부지런히 가고 있다 눈이 오는 날은 잠자는 세상이 깰까 봐 시간도 까치발로 뛰어 간다 눈을 머리에 얹은 두 세 사람은 팔짱을 끼고 지나간 날의 가슴에서 자고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무겁게 껴입은 이 시대 사건들 위에 겹쳐놓고 구시렁거리며 발끝으로 가다가 무릎으로 가고 있다 (사건의 중간 부위에 빠지면 무릎까지 파묻힌 몸을 빼낼 줄도 모르고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가는 사람들, 그것이 무덤인줄은 빠진 뒤에야 깨닫는다.) ☆★☆★☆★☆★☆★☆☆★☆★☆★☆★☆★ 발이 달린 사랑 김지향 사랑은 가슴에서 산다 가슴에서 사는 사랑이 베어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알맹이가 없음 하고 나는 손을 쳐든다 혼자서 이렇게, 나의 실험대에 올라온 사랑을 현미경으로 뚫어보았다 사랑, 그 자유분방주의자는 거침없이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떨어져 서로 반목하며 제 갈 길로 갈 궁리에 빠져있었다 서로 다른 머리 발 손이 한 덩치로 얽혔을 뿐 틈틈이 발은 손, 손은 발을 배어낸다 그렇지, 그날도 한 쪽 발이 베어져 나갔었지 베어낸 자리엔 재빨리 구멍이 들어앉았지 구멍은 자기의 부피를 키우려고 나머지 사랑지체도 내쫓으려 했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사랑발이 잘려나간 빈 칸을 나는 구멍이 차지하지 말게 하려고 떨며떨며 한 쪽이 기우뚱한 가슴으로 사랑 발을 붙잡아오려고 찾아 나섰지 세상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사건 사이 어둠 사이 시기 질투 분쟁 사이 어디에 내 사랑의 발은 걷고 있나 일곱 번씩 일흔 번도 용서해주며 사랑발이 제 맘대로 잘려나간 무례를 용서해 주며 아, 일곱 번 째 용서함 바로 그 때였다 나의 사랑 발은 세상 구석 어느 개골창에 빠져 어둠 그것이 되어 있었다 발톱 한 귀퉁이에도 제 모습이 남아있지 않게, 나는 이 사실을 사랑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이 엄청난 오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랑 발을 집어 들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소리 질렀다 돌아다 본 사람들은 그게 이전부터 어둠이라고 우겨댔다 내 가슴에서 배어져나간 사랑의 발임을 믿지 않는 동안 실은 그게 나도 모르게 어둠이 되어버린 나의 발임을 사람들이 어둠을 보지 않고 나를 보며 웃는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아채고 소스라쳤다 얇은 바람 이빨에도 삭둑삭둑 잘려지는 보드라운 잎사귀 사랑아, 집을 나가면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는 그러므로 되돌아 올 줄도 모르는 눈썰미 없는 사랑아~ 하고 나는 골목어귀에서 지는 해를 붙잡고 찾아낸 사랑의 발을 그 어둠을 씼는다 ☆★☆★☆★☆★☆★☆☆★☆★☆★☆★☆★ 방안의 삶 김지향 잘 익은 봄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깨끗이 세탁된 볕이 만리로 뻗은 오늘 사람은 모두 볕이 차단된 방에서 컴퓨터 몸을 만지며 쏟아져 나오는 깨알 글자의 바둑알 부딪는 소리에 빠져들어 있다 컴퓨터 바둑알 소리로 팽팽한 방에서 헤엄치는 사람의 눈과 손은 바깥 세상의 산과 들이 게우는 생선 비늘 같은 생기와 햇볕을 모두 만진다 그리고 지워버린다 바깥 기억들이 점점 지워지는 컴퓨터가 사람 몸 속에 들앉은 방안의 삶 지난 세대에겐 낯익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잘 맞춰 입어야 할 컴퓨터 삶의 한가운데 와 있으니 이젠 컴퓨터 생리에 길들여져야 할밖에 시간과 손잡은 컴퓨터의 속력이 불편하다고 컴퓨터 생리가 너무 빡빡해 시간 밖 세계로 궤도 이탈하고 싶다고 그녀는 투덜대지만 자꾸 뒤로 밀리는 그녀 두뇌가 궤도 이탈을 연기해 낼지? 궤도 이탈을 위해 눈을 접고 활짝 날개를 펴 볼지? 창 밖 잘 익은 봄 거리가 그녀를 맞으려고 깨끗이 세탁된 볕을 깔아놓고 있지만. ☆★☆★☆★☆★☆★☆☆★☆★☆★☆★☆★ 백지 공간 김지향 어제까지 거뭇하게 그을린 길이 새하얀 살에 금을 내고 간다 창밖엔 꽁꽁 얼어붙은 허드레 세상이 속살을 내놓고 앉아있다 빳빳한 허공을 붙들고 척추를 연거푸 눕히는 눈발을 베며 한 줄로 줄서기 하는 갈가마귀 떼 허공에 대롱대롱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다 쉬지 않고 오는 눈발에 매 맞는 가로수 하얀 바지가랑이 사이 자꾸 뒤로 미끄럼 타는 차량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는 구세기 세상 누더기 소리들을 깔아뭉개는 중이다 별똥별도 숨어버린 밤 백지로 채워진 공간에 남은 한물간 세상도 죽어 있다 내일 새 세기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햇빛은 날을 펴 놓지 않아도 된다. ☆★☆★☆★☆★☆★☆☆★☆★☆★☆★☆★ 벽 허물기 김지향 바람도 빗겨간 가슴 넓은 산줄기를 안고 안개가 명주실 치마폭을 말아 올리는 중이다 햇살이 아득히 먼 발아래서 자꾸 바스라진다 새파란 가슴을 드러낸 산줄기들 바람에 쓸린 기러기 한 두름 안아드리고 있다 방금 마악 허공 위의 하늘을 찢으며 치솟은 우주선 한 채, 우주선을 타고도 세상을 내다보는 사람들 손엔 손가락만한 디카 폰 하나씩 들려있다 디카폰은 잽싸게 구름 살을 헤집고 옆으로 지나가는 세상 풍경에 드르륵 밑줄을 그으며 풍경눈알에다 새겨 넣은 의미를 몽땅 베껴 낸다 우주선이 우주정거장에 발을 내릴 땐 우주에서 발사하는 발통 없이도 시간을 잘 굴리는 비행접시 몇 채 세상 창공으로 떠난다 바람소리만 걸려있는 지상정거장에는 수많은 어린왕자들이 버들가지처럼 가느다란 키를 휘청이며 별을 찾고 있다. (세상에서 하늘 위의 하늘로 오가는 사람들 일찌감치 육체에서 육체 위의 육체로도 들락거리고 있었네) ☆★☆★☆★☆★☆★☆☆★☆★☆★☆★☆★ 별은 내 눈에서 뜬다 김지향 내가 만지는 사물마다 머리 조아리며 굴리는 쟁·쟁한 은방울의 합창 별은 내 눈에서 뜬다는 발신음 한 소절을 또렷하게 열린 내 귀가 또박또박 주워먹는다 지난날 하늘의 셀로판지에 반점으로 돋던 별 그가 이제 보니 내 가슴에 새파란 피멍으로 푸욱, 박혀 알을 낳는지 삽시간에 나의 우주가 청보석 복사기가 되었네 (내가 눈을 뜨지 않으면 가슴의 블랙홀 벽에 낳은 알을 주욱― 널어놓는지?) 오늘은 내가 별에게 신발을 신겨준다 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에게서 새로 그린 삽화 한 장 튕겨나가듯 단숨에 블랙홀 요새를 철거해버리고 고속 디지털 안테나를 타고 뛰쳐 나가네 (하늘도 하늘의 하늘도 아닌 내가 눈을 얹는 거기에 작은 우주같은 내 별은 수도 없이 내 눈에서 뜨지만) 별아, 이제는 해산의 아픔도 없는 별아,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자주 몸 바꾸는 별아, 내가 목청껏 불러도 빙글빙글 바뀌는 성대로 나를 어지럽게만 하는 별아, 이제는 그만 내 눈에서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 ☆★☆★☆★☆★☆★☆☆★☆★☆★☆★☆★ 봄 명주실 웃음 김지향 오늘 문득 실바람이 세상을 열어젖힌다 실바람 손에 든 초록 칩을 나뭇가지 겨드랑이마다 꼭꼭 묻는다 나무 겨드랑이엔 초록 손톱이 돋아나고 손톱 밑에선 뽀르통 내민 새 입술을 열어 진달래 개나리 초롱꽃 뻐꾹채 노루귀 제비꽃 줄줄이 명주실 웃음을 좌악 널어놓는다 실바람 요술지팡이에 올라탄 나비 몇 마리 몇 됫박씩 꽃가루를 흩뿌리며 세상의 몸에 봄을 입힌다 깔 깔 깔 세상은 종일 명주실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세상 웃음을 따라 날아온 제비도 명주실 웃음을 날개에 태워 우주 밖으로 날아가느라 부산떤다 나는 종일 봄 웃음을 퍼먹으며 한 발 더 진화한 세상 속에 서 있다 ☆★☆★☆★☆★☆★☆☆★☆★☆★☆★☆★
124    다시 읽는 세계의 명시 댓글:  조회:922  추천:0  2022-09-12
 출처 - 편견 혹은 농담처럼 다시 읽는 세계의 명시(1)   이별 / 괴테   입으로 차마 이별의 인사를 못해 눈물어린 눈짓으로 떠난다 복받쳐 오르는 이별의 서러움 그래도 사내라고 뽐냈건만   그대 사랑의 선물마저 이제는 나의 서러움일 뿐 차갑기만 한 그대 입맞춤 이제 내미는 힘없는 그대의 손   살며시 훔친 그대의 입술 아 지난날은 얼마나 황홀했던가 들에 핀 제비꽃을 따면서   우리들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하지만 이제는 그대를 위해 꽃다발도 장미꽃도 꺾을 수 없어 봄은 있건만 내게는 가을인 듯 쓸쓸하기만 하다   괴테 /독일/ 1749~1842 / 시인. 소설가.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한 고백과 참회의 작품을 많이 썼음.        작품으로 등이 있음     낙엽 / 구르몽   시몬, 가자 나뭇잎 져 버린 숲으로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부드럽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나겹은 나지막이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길에 밟히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새의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 가까이 오라, 날은 이미 저물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눈 / 구르몽   시몬, 눈은 네 목처럼 희다. 시몬, 눈은 네 무릎처럼 희다.   시몬, 네 손은 눈처럼 차다. 시몬, 네 마음은 눈처럼 차다.   눈을 녹이려면 뜨거운 키스, 네 마음을 녹이는 데는 이별의 키스.   눈은 슬프다. 소나무 가지 위에서 네 이마는 슬프다, 밤색 머리칼 아래서   시몬, 네 동생 눈은 정원 잠들었다. 시몬, 너는 나의 눈, 그리고 내 사랑     구르몽 /프랑스/ 1858~1915 / 시인. 문예평론가. 소설가.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아름다운 사상은 아름다운 글에 있다고 주장            저서에 등이 있음   다시 읽는 세계의 명시(2)   키스 / 그릴파르처   손 위에 하는 것은 존경의 키스 이마 위에 하는 것은 우정의 키스 뺨 위에 하는 것은 감사의 키스 입술 위에 하는 것은 사랑의 키스 감은 눈 위에라면 기쁨의 키스 손바닥 위에라면  간구의 키스 팔과 목에 하는 것은 욕망의 키스 그 밖에 하는 것은 모두 미친 짓!     그릴파르처 / 오스트리아 / 1791~1872  시인이자 극작가. 그리스의 전설이나 사실을 제재로 비극이나 사극을 많이 썼음.  작품에는 등이 있음.     가을의 유서 / 네루다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 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헤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혼이 빠져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루 밤새 하얗게 들어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은 바닷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 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네루다 /체코 / 1884~1891 / 프라하 출신으로, 가난과 싸우며 프라다대학교를 졸업하고 신문 기자로 활약. 1859년대 말부터 문학활동에 전념. 사실주의적 국민문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 됨. 처녀 시집 을 비롯하여 < 발라드와 로맨스> 등을 써서 낭만주의적 시점에서 민족해방을 호소했음.   다시 읽는 세계의 명시(3)   미아 나의 사랑 / 다리오   미아 그대 이름 아름답다 미아 태양 빛 미아 장미와 불꽃   그대 영혼 위에 향기를 보내니 그댄 날 사랑해 오오 미아 오오 미아   여성인 그대와 남성인 나를 녹여 그대는 두 개의 동상을 만든다   외로운 그대 외로운 나 목숨이 있는 한 미아 나의 사랑   다리오(Dario Ruben / 니키라과 / 1897~1916) 생애 대부분을 외국에서 살면서 날카로운 감각과 우아산 선율 그리고 치밀한 문체로 인기를 얻었으며,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근대시 성립에 공헌했다. 대표작으로
123    황지우 시모음 댓글:  조회:510  추천:0  2022-09-11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거대한 거울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몹쓸 동경(憧憬)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喉頭音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 쳤지만, 이미 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집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石橋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시에게                                                   한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신 벗고 들어가는 그 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魚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생을'쇼부'칠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두고 온 것들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국                         요즘엔 신문을 봐도 무슨 천문학자나 고고학자의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南제주 대정 바닷가에서 5만년 전 舊石器人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맣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게으르게 밥알 씹다가 뒤집어본 스크랩 뒷면,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 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 강제 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 연우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 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122    루이스 글릭Louise Gluck 시모음 댓글:  조회:677  추천:0  2022-09-11
루이스 글릭Louise Gluck은 미국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1943년 뉴욕에서 태어나 롱아일랜드에서 자랐다. 사라 로렌스 칼리지와 콜럼비아 대학을 다녔다. 1968년 '퍼스트본'으로 등단했다. 퓰리처상, 전국 도서 비평가 협회 상, 볼링 겐상 등 미국에서 많은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확고한 시적 표현으로 개인의 존재를 보편적으로 나타냈다"라는 스웨덴 한림원의 찬사를 받으며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70대 후반을 넘긴 그녀는 이제 미국에서 활동하는 걸출한 서정시인으로 손꼽힌다. 그녀는 Firstborn(맏이), The House on Marshland(마실랜드의 집), The Garden(정원)(1976), Descending Figure(내려오는 사람) (1980), The Triumph of Achilles(아킬레스의 승리) (1985), Ararat(아라라트 산) (1990), 퓰리처 상을 수상한 The Wild Iris(야생 아이리스) (1992) 등의 시집을 냈다. 류시화 시인의 시선집에 「애도」 「눈풀꽃」 등의 시가 소개되었고,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된 시집은 없다.     학동들       아이들이 작은 가방을 들고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매일 아침 엄마들은   서로 다른 언어들의 단어같이 제각각 빨갛거나 금빛인   때늦은 사과들을 따 모으는 일을 한다.   그리고 다른 기슭에는   큰 책상의 뒤에서 이 헌납을   받는 이들이 앉아 있다.   그들 모두가 얼마나 질서정연한지   ㅡ아이들이 푸른색이나 노란색 오버코트를   걸어놓은 못들.   그리고 선생님들은 조용히 그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고   엄마들은 한 방향으로 과수원을 소탕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적은 탄약을 매단 과일나무들의   회색빛 가지들을 끌어당기며. (1975년)       익사한 아이들     여러분 보시라, 그들은 사리분별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빠져 죽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   첫째 얼음이 그들을 빨아들이고   그리고는, 그들의 울 스카프들이   물에 빠진 그들 뒤를   겨우내, 마침내 그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떠다녔지.   그리고 연못은 그것들을 여러 검은 팔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죽음이 그들에게는 제각각 다가왔음에 틀림없어,   처음 태어날 때처럼.   마치 그들이 항상 눈멀고   무게감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나머지는 꿈처럼 펼쳐졌다, 램프와   테이블과 그들의 시신을 덮은   깨끗하고 하얀 천들이.   그럼에도 그들은 연못 위로 미끄러지던 미끼처럼   그들이 사용하던 이름들을 듣고 있다.   너희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니   돌아와, 돌아와, 푸르고 영원한   물속에서 잃어버린 집으로.  (1980)      하강하는 숫자     1. 방랑자들     석양에 나는 거리를 나섰다.   태양은 쇠빛 하늘에 낮게 걸리고   차가운 깃털에 둘러싸였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이 공空에 대해 쓸 수만 있다면 ……   커브 길을 따라, 한 무리의 아이들이   마른 낙엽 속에서 놀고 있다.   오래전, 이 시간에, 내 어머니도 어린 여동생을 안고   잔디밭 가에 서 계셨다.   모두 가버리고, 나는 어두워진 거리에서   죽음이 너무나 외롭게 만들어 버린   다른 자매와 놀고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우리는 발을 내린 현관이   황금빛 자력의 빛으로 가득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왜 그녀는 불려가지 않았을까?   나는 내 이름이 종종 나를 지나 미끄러져 나오도록 두었다,   그것이 보호되길 바라긴 했지만.     2. 아픈 아이     -레이크스뮈세밈*     한 작은 아이가   아프다, 깨어났다.   때는 겨울, 한밤중을 지난   안트워프**에서, 나무 상자 위에서   별이 빛난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포근하다.   엄마는 자지 않는다,   그녀는 찬란한 박물관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봄이 되면 아이는 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딸아이를 혼자 두는 것 ……   기억도 없이,   외로이 두는 것은 잘못, 잘못이다.   다른 이들이 얼굴에서 검은 페인트를 긁어내며   공포에 질려 깨어날 때.      3. 내 자매를 위하여     저 멀리서 내 자매가 작은 침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죽은 자매들도 그와 비슷했지만,   항상 마지막은 침묵이었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오래 땅속에 누워 있어도   그들은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나뭇잎들이 떨어트릴 정도의   너무나 작은 나무 바아를 누르면서 불안하게 남아있을 것이니.   그런데, 만일 그녀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굶주림의 외침이 시작되리.   나는 그녀에게 가봐야 해,   아마 내가 부드럽게 노래한다면   그녀의 피부는 하얗게 바뀌고   그녀의 머리는 검은 깃털로 덮이게 될 터이니  …… (198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립 박물관,「아픈 아이」는 밤중에 아픈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 유화다.   **벨기에의 도시.       가짜 오렌지*      그것이 달이 아니라고 내가 늘 말했지.   마당을 밝히는 것은   이 꽃송이들이야.   나는 그것들이 싫어.   내가 섹스를, 내 입을 틀어막는   남자들의 입, 남자들의   (순간)마비되는 몸뚱아리……   그리고 늘 터져나오는 비명   저열하고 굴욕적인   합체의 전제를 …… 싫어하듯이   그것들이 싫어.   오늘밤 내 마음속에서   나는 듣는다, 오르고 오르다 마침내   옛 자아로, 지친 반항심으로   찢어져 들어가는 하나의 소리로 합해진   질문과 따라오는 대답을. 우리가 속았다는 걸.   너는 아니?   그리고 가짜 오렌지의 향이   창을 통해 흘러들어오지.     내가 어찌 쉴 수 있겠어?   세상에는 아직   그 냄새가 남아있는데   내가 어찌 만족할 수 있겄어? (1985년)     *오렌지를 닮은 과실로 만든 시럽.       환상     나는 지금 중요한 것을 말하려 해,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을. 그건 시작일 뿐이야.   매일, 장례식이 있는 집에서는, 새 과부와 새 고아가   생겨나지, 그들은 손을 모으고   이 새로운 삶을 해결하려고 애쓰며 앉아 있지.   그리고 그들은 공동묘지로 가 있지, 그들 중 몇은   난생처음일 거야. 그들은 사람들의 울음소리에,   때로는 울지 않음에 겁먹지. 어떤 이는 몸을 숙이면서,   다음에 어떻게 할지 그들에게 말해주지, 그것은   몇 마디 말을 해주거나, 때때로 열린 무덤에   흙을 끼얹는 것으로 전달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 후에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거기는 갑자기 방문객들로 가득해진다.   미망인은 카우치에 당당하게 앉아있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줄을 서고,   때로는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고 때로는 포옹하기도 한다.   그녀는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고,   와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치례를 찾는다.   마음속으로, 그녀는 그들이 가버리기를 원한다.   그녀는 다시 묘지로 환자실로 병원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소망,   옛날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 그것도 아주 조금,   그녀의 결혼 때쯤으로 돌아가기를, 첫 키스 때까지는 아니더라도 (1990년)       야생 붓꽃     내 고통의 끝에   출구가 있었다.   바깥에서 내 말 들어줘, 네가 죽음이라고 부르던 것   나는 기억해.   머리 위에, 소음들, 흔들리는 소나무의 가지들.   그리곤 없어. 허약한 태양은   메마른 지표 위에서 깜박일 뿐.   검은 당에 묻히어   의식체로   살아남는 것은 끔찍스러워.   그리고 그렇게 끝났어. 즉 당신이 두려워하던 것,   혼령이 되어   말을 할 수 없는 것, 갑자기 끝나는 것, 뻣뻣한 흙이   약간 구부려(열어)주는 것. 그리고 내가 알아챈 것은   나지막한 관목 덤불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새들이 되었다는 것.   제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   나는 말한다, 다시 말해줄 수 있다고.   무엇이든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들은   목소리를 찾아 돌아오는 법이라고.   내 삶의 중심에서 거대한 분수가   솟구친다, 하늘빛 바닷물 위로   감청색 그림자를 드리우며. (1992년)       흰 백합들       한 남자와 여자가 그들 사이에   한 묘상의 별들처럼   정원을 가꿀 때, 여기서   여름 저녁 내내 머물었고   그러다보면 저녁이 그들의 두려움 때문에   추워지곤 했다. 모두   끝날 수 있었다, 파산도 가능했다. 모두 모두   잃어버릴 수 있었다, 향기로운 공기를 뚫고   좁은 기등들이   쓸모없이 솟구치고, 그 뒤로,   휘젓는 양귀비의 바다 ……   쉿, 사랑받았어. 얼마나 많은 여름을   돌아가기 위해 살았는지는 중요치 않아,   이 한 여름 우리는 영원에 들어갔어.   나는 당신의 두 손이   빛을 내뿜도록 나를 매장하는 것을 느꼈어. (1992년)       페넬로페의 노래     작은 혼이여, 영원히 나체인 작은 영혼이요,   내가 명한 대로 해 줘, 선반 같은   가문비나무의 가지 위로 기어 올라가,   그 꼭대기서 보초나 감시병처럼 주의 깊게   기다려봐. 그는 금방 귀가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인내심을 갖는 것이   너의 의무야. 너는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완벽하진 않았어, 너의 힘들어하는 몸으로   시에서 토론할 수 없는 것들을 해왔어.   그러니 저 트인 물, 반짝이는 바다 위로   헐떡이며 너의 검은 노래   부자연스러운 노래 마리아 칼라스처럼   정열적으로 불러봐. 그가   너를 원치 않을 거라고? 그의 가장 악마적인 식욕에   답할 수가 없어? 곧   그가 얼마 동안 돌아다녔던 온갖 곳에서 돌아올 거야,   머나먼 시간에서 햇빛에 그을린 모습으로,   그릴로 구운 치킨을 먹고 싶어 하며, 아 너는 그를 환영해야 해,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나뭇가지를 흔들어야지,   그러나 조심, 조심해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떨어지는 수많은 바늘 같은 잎들에 상하지 않도록. (1996년)     고요한 저녁       내 손을 잡아. 그러면 우리는   생명을 위협하는 숲속에 홀로 있게 되지, 거의 즉시   우리는 집에 있지, 노아*는   자라서 떠나갔어, 클레마티스가 수십 년이 지나서   갑자기 하얀 꽃을 피우네.   이 세상의 어느 것보다   나는 이런 저녁들을 사랑해, 우리가 함께 있고   하늘에 아직 빛이 남아있는 이 시간의 고요한 여름 저녁을.   그렇게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의 손을 잡았다,   그를 말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러한 평화를   그의 기억에 각인시키기 위해서,   이런 점에서, 당신이 지금 휘저으며 움직이는 고요는   당신을 뒤쫓는 나의 목소리.  (1996년)     *시인의 아들     신생(Vita Nova)*     당신은 나를 구했어, 당신은 나를 기억해야 해.   한 해 중 봄, 젊은이들은 유람선을 타러 티켓을 끊으면서   웃음을 터뜨리지, 왜냐하면 공기가 사과 꽃으로 가득하거든.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똑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나는 그와 같은 소리를 내 어릴 적에서 기억해냈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세상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내는 웃음   저(젊은이들의) 웃음소리와 같은 것들.   루가노호수**. 사과나무 아래 탁자들.   색 깃발들을 들어 올렸다 내리는 선원들.   그리고 호수 가에서 한 젊은이가 모자를 벗어 물속으로 던진다,   아마 그의 애인이 (프로포즈를) 받아들인 듯.   결정적인   소리와 몸짓들.   더 큰 테마 앞에 놓인 외길 같은   후에는 쓰이지도 않고 묻혀있는,   멀리 떨어진 섬들. 작은 케익 접시를   내미는 내 어머니   ……내가 기억하는 한, 변치 않은   세부들, 생생하고 온전하고 빛에 드러난 적 없는   순간, 그리하여 나는 깨어났다, 고무되어   삶에 굶주린 내 나이에, 완전히 확신에 차서.……   테이블 곁에, 새 풀더미들, 연초록이   검게 현존하는 땅에 조각조각 파고든다.   확실히 봄이 내게 돌아왔다, 이번에는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죽음의 사자로, 그러나   그래도 봄이다, 여전히 부드러운 의미를 갖는다. (1999년)     *단테의 최초의대작, 베아트리체에 대한 이상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이태리와 스위스의 경계지역에 있는 호수       세상의 사랑       현시대의 관례들이   그들을 함께 모았다.   한때 무상으로 베풀었지만   자유를 억제하기 위한,   공식적인 제스처로   심장이 꼭 필요했던 (아주 긴) 시간이었다,   즉시 감동을 주지만   어쩔 수 없게 운명 지어진 신성화.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러하듯,   다행히 우리는   이러한 요구사항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내 삶이 부서졌을 때   내가 내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듯이.   그리하여 우리가 그토록 오래 간직했던 것은   살아있는   다소의 자원봉사였다.   이로부터 오랜 후에나   다른 쪽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다 ……   심지어 선명성울 거부하며,   자기기만의 순간까지 가더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우리 스스로를 지키려 한다. 내가 언급한   신성화에서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이 기만의 속에서   진정한 행복은 생겨난다.   그리하여 나는 이러한 실수들을   정확히 되풀이하리라고 믿는 것이다.   또한 내게는    그러한 행복이 몽상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의 실체가 있다.   어떤 쪽으로든 끝이 날 것이니까. (1999년)       *위의 시는 계간『시인시대』「영미시 이야기 5」에서 발췌한 것으로 신원철 시인이 번역한 것입니다
121    이상 전집 1. 시 댓글:  조회:587  추천:0  2022-08-31
이상 전집,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뿔, 2009     정식 Ⅲ 웃을수있는시간을가진표본두개골에근육이없다   정식 Ⅳ 너는누구냐그러나문밖에와서문을두다리며문을열라고외치니나를찾는일심이아니고또내가너를도무지모른다고한들나는차마그대로내어버려둘수는없어서문을열어주려하나문은안으로만고리가걸린것이아니라밖으로너는모르게잠겨있으니안에서만열어주면무엇을하느냐너는누구기에구태여닫힌문앞에탄생하였느냐     내 마음에 크기는 한개 궐련 기러기만하다고 그렇게보고, 처심은 숫제 성냥을 그어 궐련을 붙여서는 숫제 내게 자살을 권유하는도다. 내 마음은 과연 바지작 바지작 타들어가고 타는대로 작아가고, 한개 궐련 불이 손가락에 옮겨 붙으렬적에 과연 나는 내 마음의 공동에 마지막 재가 떨어지는 부드러운 음향을 들었더니라.   처심은 재떨이를 버리듯이 대문 밖으로 나를 쫓고, 완전한 공허를 시험하듯이 한마디 노크를 내 옷깃에남기고 그리고 조인이 끝난듯이 빗장을 미끄러뜨리는 소리 여러번 굽은 골목이 담장이 좌우 못 보는 내 아픈 마음에 부딪혀 달은 밝은데 그 때부터 가까운 길을 일부러 멀리 걷는 버릇을 배웠 드니라.   *-삼차각설계도   숫자의방위학 **4 4 4 4 숫자의역학 시간성(통속사고에의한역사성) 속도와좌표와속도 ***4+4 4+4 4+4 4+4 etc    사람은정력학의현상하지아니하는것과똑같이있는것의영원한가설이다, 사람은사람의객관을버리라.  주관의체계의수렴과수렴에의한*오목렌즈.   4 제4세 4 1931년9월12일생. 4 양자핵으로서의양자와양자와의연상과선택.    원자구조로서의모든운산의연구.  방위와구조식과질량으로서의숫자와성상성질에의한해답과해답의분류.  숫자를대수적인것으로하는것에서숫자를숫자적인것으로하는것에서숫자를숫자인것으로하는것에서숫자를숫자인것으로하는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질환의구명과시적인정서의기각처)    (숫자의모든성상 숫자의모든성질 이런것들에의한숫자의어미의활용에의숫자의소멸)    수식은광선과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는사람과에의하여운산될것.    사람은별ㅡ천체ㅡ별때문에희생을아끼는것은무의미하다, 별과별과의인력권과인력권과의상쇄에의한가속도함수의 변화의조사를우선작성할것.   *'삼차각'은 수학 용어로서는 부정확한 말이다. 수학에서 말하는 '각(角)'이라는 것은 3차원 이상의 공간에서도 언제나 2차원 평면에서의 '각'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삼차각'이란 수학적 개념이라고 하기 어렵다. 다만 세 모서리가 만나는 각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본디 위의 시에서 숫자의방위학 다음의 4는 차례대로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뒤집어져 있으며, 속도와좌표와속도 다음의 4+4 역시 그 방향이 제각각 뒤집어진 채로 쓰여졌다. 이는 숫자 '4'와 같은 방위 표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시하면 방향이 서로 달라진다는 것을 기호로 표시한 것이다. 또한 4+4의 수식은 물리학의 기본을 이루는 물체의 운동량을 힘(속도)와 방향으로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목렌즈' 를 시에서는 기호로 표시하였다.   -삼차각설계도    공기구조의속도ㅡ음파에의한ㅡ속도처럼330미터를모방한다(광선에비할때참너무도열등하구나)    빛을즐기거라,빛을슬퍼하거라,빛을웃어라,빛을울어라.    빛이사람이라면사람은거울이다.    빛을가지라.    ㅡ    시각의이름을가지는것은계획의효시이다. 시각의이름을발표하라.    □ 나의 이름    △나의아내의이름(이미오래된과거에있어서나의 AMOUREUSE는이와같이도총명하니라)    시각의이름의통로는설치하라, 그리고그것에다최대의속도를부여하라.     ㅡ    하늘은시각의이름에대하여서만존재를명백히한다(대표인나는대표적인일례를들것)    창공, 추천, 창천, 청천, 장천, 일천, 창궁(대단히갑갑한지방색이아닐는지)하늘은시각의이름을발표하였다.    시각의이름은사람과같이영원히살아야하는숫자적인어떤일점이다, 시각의이름은운동하지아니하면서운동의코오스를가질뿐이다.    ㅡ      시각의이름은빛을가지는빛을아니가진다, 사람은시각의이름으로하여빛보다도빠르게달아날필요는없다.    시각의이름들을건망하라.    시각의이름을절약하라.    사람은빛보다빠르게달아나는속도를조절하고때때로과거를미래에있어서도태하라.   *-건축무한육면각체 **    Ⅰ    허위고발이라는죄목이나에게사형을언도했다. 자태를감춘증기속에서몸을가누고나는아스팔트가마를비예하였다.  ㅡ직에관한전고한구절ㅡ  ***기부양양 기자직지(其父攘羊 其子直之)   나는안다는것을알아가고있었던까닭에알수없었던나에대한집행이한창일때나는다시금새로운것을알아야만했다.   나는새하얗게드러난골편을주워모으기시작했다.   '거죽과살은나중에라도붙을것이다'   말라떨어진고혈에대해나는단념하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Ⅱ 어느경찰탐정의비밀신문실에서    혐의자로검거된남자가지도의인쇄된분뇨를배설하고다시금그걸삼킨것에대해경찰탐정은아는바가하나도있지않다. 발각될리없는급수성소화작용 사람들은이것이야말로술이라고말할것이다.  '너는광부에다름이없다'  참고로부언하면남자의근육의단면은흑요석처럼빛나고있었다고한다.     Ⅲ 호외    자석수축하기시작하다  원인극히불분명하나대외경제파탄으로인한탈옥사건에관련되는바가크다고보임. 사계의요인들이머리를맞대고비밀리에연구조사중.  개방된시험관의열쇠는내손바닥에전등형의운하를굴착하고있다.  곧이어여과된고혈같은강물이왕양하게흘러들어왔다.     Ⅳ    낙엽이창호를삼투하여내정장의자개단추를엄호한다.  **** 지형명세작업이아직도완료되지않은이궁벽한땅에불가사의한우체교통이벌써시행되었다. 나는불안을절망했다.  일력의반역적으로나는방향을잃었다. 내눈동자는냉각된액체를잘게잘라내며낙엽의분망을열심히방조하는수밖에없었다.  (나의원후류에의진화)   *'육면각체'라는 용어는 수학에서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정육면체나 정사면체는 '삼면각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섯 개의 면이 만나는 입체라는 무리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오일러의 다면체 공식(v-e+f=2)'에 의하면 육면각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무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경우, '무한육면각체'를 여섯개의 면이 한 점에서 만나고 반대쪽으로 무한이 벌어진 입체라고 볼 경우 그 존재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 (김명환, , , 권영민 편, 180~181쪽 참조.) 여기서 '육면각체'를 '육면체'로 볼 수 있다면, 수많은 육면체가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진 현대건축의 기하학적 모형을 상징하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제목으로 내세워지고 있는 '출판법'은 글자 그대로 인쇄 출판의 방법을 의미하는 이른바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지만, 출판과 인쇄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의미하는 각종 규범들, 특히 식민지 시대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강행하였던 언론 출판에 관한 검열제도(censorship)의 문제를 우회적(迂廻的)으로 비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자로(子路)' 편에 등장하는 구절을 패러디한 부분이다. 논어 원문에서, '其父攘羊 而子證之(기부양양 이자증지)'를 '其父攘羊 其子直之(기부양양 기자직지)'라고 고쳐 써놓았다. 이렇게 고침으로써,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그 아들이 그것을 증언하였다.'는 뜻에서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그 아들이 그것을 바로잡았다.'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타이포그래피에서는 공자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간적 도리와 정서 같은 것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조판 과정에서 식자공(植字工)이 잘못 조판된 것을 원고에 따라 교정하여 바로잡는 과정은 엄격성과 정확성을 기본으로 한다.   ****박스 속의 '암살(暗殺)'이라는 글자는 종이에 글자가 인쇄된 모양을 기호로 표시한 것임.   -건축무한육면각체 *   균열이생긴장가이녕의땅에한대의곤봉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수목이자라남.  이상 꽂는것과자라나는것과의원만한융합을가르침. 사막에성한한대의산호나무곁에서돼지같은사람이생매장당하는일을당하는일은없고쓸쓸하게생매장하는것에의하여자살한다. 만월은비행기보다신선하게공기속을추진하는것의신선이란산호나무의음울함을더이상으로증대하는것의이전의일이다.   **윤부전지(輪不輾地) 전개된지구의를앞에두고서의설문일제. 곤봉은사람에게지면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르치는데사람은해득하는것은불가능인가.  ***지구를굴착하라.    동시에  생리작용이가져오는상식을포기하라.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 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는 사람 은 열심으로질주하는 일들을 정지한다.  사막보다도정밀한절망은사람을불러세우는무표정한표정의 무지한한대의산호나무의사람의발경의배방인전방에상대하는자발적인공구때문이지만사람의절망은정밀한것을유지하는성격이다.  지구를굴착하라    동시에  사람의숙명적발광은곤봉을내어미는것이어라*     *사실차8씨는자발적으로발광하였다. 그리하여어느덧차8씨의온실에는온화식물이꽃을피우고있었다. 눈물에젖은감광지가태양에마주쳐서는히스므레하게빛을내었다.   *이 작품은 제목에 드러나 있는 '且8氏'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함께 이상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난해시의 하나로 지목되어 왔다. 특히 이 작품을 성적 이미지로 확대하여 해석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상 자신이 그와 가장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한 사람인 화가 구본웅(具本雄)을 모델로 하여 그의 미술 활동을 친구의 입장에서 재미있게 그려낸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且8氏'는 구본웅의 성씨인 '구(具)씨'를 의미한다.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된 '8'을 한자로 고치면 '팔(八)'자가 된다. 그러므로 '구(具)'자를 '차(且)'와 '팔(八)'로 파자(破字)하여 놓은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차(且)'자와 '8'자를 글자 그대로 아래위로 붙여 놓을 경우에는 그 모양이 구본웅의 외양을 형상적으로 암시한다. 이것은 구본웅이 늘 쓰고 다녔던 높은 중산모의 모양인 '且'와 꼽추의 기형적인 모양을 본뜬 '8'을 합쳐 놓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구본웅을 지시하는 말은 또 있다. '곤봉(棍棒)'과 '산호(珊瑚)나무'가 그것이다. '곤봉'은 그 형태로 인하여 남성 상징으로 풀이된 경우가 많지만, 가슴과 등이 함께 불룩 나온 구본웅의 외양을 보고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말은 '구본웅'이라는 이름을 2음절로 줄여서 부른 것이므로, '말놀이'의 귀재였던 이상의 언어적 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산호나무'라는 말도 역시 구본웅의 마른 체구와 기형적인 곱사등이의 형상을 산호나무의 모양에 빗대어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은 의 '천하편'에서 인유(引喩)한 것이다. 원문은 "윤부전지(輪不蹍地)"이며, 그 의미는 '바퀴의 둘레서 땅에 닿는 곳은 한 점에 지나지 않으며 둘레가 아니다. 그러므로 바퀴는 땅을 딛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이 작품에서는 '윤부전지(輪不蹍地)'의 '전(蹍)'을 '전(輾)'으로 바꾸어 쓰고 있는데, 그 의미도 '수레바퀴는 땅에 구르지 않는다.'로 변하게 된다. 이 구절을 통해 인유하고자 하는 것은 구본웅의 걸음제라고 할 수 있다. 커다란 중산모를 쓰고 걸어가는 구본웅의 모습을 그의 성씨인 '구(具)'를 다시 파자하여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且)'와 '8'이라는 글자의 결합은 '且'의 아래쪽에 '8'을 세운 형태가 된다. 여기서 '且'자의 아래에 '8'자를 뉘어놓으면 수래 아래 두 바퀴가 붙어서 땅 위로 굴러가는 모양이 되지만, '8'자가 '且'밑에 서 있는 모양으로 되면 바퀴가 굴러가는 모습을 이루지 못한다. 참으로 재미있게 '문자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구절의 패러디는 바로 뒤에 오는 "棍棒은사람에게地面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르치는데사람은解得하는것은不可能인가."로 이어진다. 구본웅이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모자(且) 아래 '8'자가 서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지구의 굴착'은 구본웅이 조각을 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임.   *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최후.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이 작품은 근대과학의 등장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 문명이 오히려 인간의 정신을 억압할 수 있다는 점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상 문학의 중심적 주제와 맞닿아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은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에 관련된 일화를 패러디하고 있다. 뉴턴의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근대적 계몽사상의 근거를 만들어낸다 출처: https://hichy.tistory.com/entry/이상-전집-1-시?category=478796 [히키의 상상 공간:티스토리]
120    이상 전집 2. 단편소설 댓글:  조회:523  추천:0  2022-08-31
지도의 암실   - 그는 왜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을 버리지 않고서 버리지 못하느냐 어디까지라도 괴로움이었음에 변동은 없었구나 그는 그의 행렬의 마지막의 한 사람의 위치가 끝난 다음에 지긋지긋이 생각하여 보는 것을 할 줄 모르는 그는 그가 아닌 그이지 그는 생각한다.   지주회시(蜘蛛會豕)   - 참 신통한 일은ㅡ어쩌다가 저렇게 사(生)는지ㅡ사는 것이 신통한 일이라면 또 생각하여 보면 자는 것은 더 신통한 일이다. 어떻게 저렇게 자나? 저렇게도 많이 자나? 모든 일이 희(稀)한한 일이었다. - (문학)(시) 영구히 인생을 망설거리기 위하여 길 아닌 길을 내디뎠다 그러나 또 튀려는 마음ㅡ비뚤어진 젊음 (정치) - ...그대는 그래 고소할 터인가 즉 말하자면 이 사람을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는가. ... 지금 내가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까는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되나요. 거기 섰는 오 그리고 내 안해의 주인 나를 위하여 가르쳐주소, 어떻게 하였으면 좋으리까 눈물이 어느 사이에 뺨을 흐르고 있었다. 술이 점점 더 취하여 들어온다.   동해(童骸)   *TEXT - "불장난을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과는 성질이 아주 다릅니다. 그것은 컨디션 여하에 좌우되지는 않겠지요. 그러니...일러 드리지요. 저는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자각된 연애니까요.  안 하는 경우에 못 하는 것을 관망하고 있노라면 좋은 어휘가 생각납니다. 구토. 저는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육체적 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자연발생적 자태가 저에게는 어째 유취만년(乳臭萬年)의 넝마 쪼각 같습니다. 기뻐해 주세요. 저를 이런 원근법에 좇아서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안 하는 것은 못 하는 것보다 교양, 지식 이런 척도로 따져서 높다. 그러나 안 한다는 것은 내가 빚어내는 기후(氣候) 여하(如何)에 빙자해서 언제든지 아무 겸손이라든가 주저없이 불장난을 할 수 있다는 조건부 계약을 차도(車道) 복판에 안전지대 설치하듯이 강요하고 있는 징조에 틀림은 없다.   *전질(顚跌)   - 나는 조심도 할 줄 모르는 야인(野人)이니까 반쯤 죽어야 껍적대지 않는다. ...  "우리 의사는 죽으려 드는 사람을 부득부득 살려 가면서도 살기 어려운 세상을 부득부득 살아가니 거 익살맞지 않소?"  말하자면 굽 달린 자동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고들 있다.   종생기   - 어머니 아버지의 충고에 의하면 나는 추호의 틀림도 없는 만 25세와 11개월의 '홍안(紅顔) 미소년(美少年)'이라는 것이다. 그렇건만 나는 확실히 노옹(老翁)이다. 그날 하루하루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랗다.' 하는 엄청난 평생(平生)이다.  나는 날마다 운명(殞命)하였다. ...  그러나 고독한 만년(晩年) 가운데 한 구의 에피그람을 얻지 못하고 그대로 처참히 나는 물고(物故)하고 만다.  일생의 하루ㅡ.  하루의 일생은 대체 (위선) 이렇게 해서 끝나고 끝나고 하는 것이었다. ...  나는 내 감상(感傷)의 꿀방구리 속에 청산(靑山) 가던 나비처럼 마취(痲醉) 혼사(昏死)하기 자칫 쉬운 것이다. 조심조심 나는 내 맵시를 고쳐야 할 것을 안다. - 나는 아침 반찬으로 콩나물을 3전어치는 안 팔겠다는 것을 교묘히 무사히 3전어치만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미끈한 쾌감을 맛본다. 내 딴은 다행히 노랑돈 한 푼도 참 용하게 낭비하지는 않은 듯싶었다. - 넘어가는 내 지지한 종생, 이렇게도 실수가 허(許)해서야 물화적(物貨的) 전 생애를 탕진해 가면서 사수(死守)하여 온 산호편(珊瑚篇)의 본의가 대체 어디 있느냐? 내내(乃乃) 울화가 복받쳐 혼도(昏倒)할 것 같다. ...  나는 내가 그윽히 음모(陰謨)한 바 천고불역(千古不易)의 탕아(蕩兒), 이상(李箱)의 자지레한 문학의 빈민굴을 교란시키고자 하던 가지가지 진기(珍奇)한 연장이 어느 겨를에 뻬물르기 시작한 것을 여기서 깨단해야 되나 보다. 사회는 어떠쿵, 도덕이 어떠쿵, 내면적 성찰, 추구, 적발(摘發), 징벌(懲罰)은 어떠쿵, 자의식과잉이 어떠쿵, 제 깜냥에 번지레한 칠(漆)을 해 내어걸은 치사스러운 간판(看板)들이 미상불(未嘗不) 우스꽝스럽기가 그지없다. - 미문에 견줄 만큼 위태위태한 것이 절승(絶勝)에 혹사한 풍경(風景)이다. ...  왜 나는 미끈하게 솟아 있는 근대건축의 위용을 보면서 먼저 철근철골, 시멘트와 세사(細砂), 이것부터 선뜩하니 감응(感應)하느냐는 말이다. 씻어버릴 수 없는 숙명의 호곡(號哭), 몽골리언 플렉[蒙古痣], 오뚝이처럼 쓰러져도 일어나고 쓰러져도 일어나고 하니 쓰러지나 섰으나 마찬가지 의지할 얄판한 벽 한 조각 없는 고독, 고고(枯稿), 독개(獨介), 초초(楚楚). - 이것은 물론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재앙이다.  나는 이를 간다.  나는 걸핏하면 까무러친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철천(撤天)의 원한에서 슬그머니 좀 비껴서고 싶다. 내 마음의 따뜻한 평화 따위가 다 그리워졌다.  즉 나는 시체다. 시체는 생존하여 계신 만물의 영장을 향하여 질투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  누루(累累)한 이 내 혼수(昏睡) 덕으로 부디 이 내 시체에서도 생전의 슬픈 기억이 창궁(蒼穹) 높이 훨훨 날아가나 버렸으면ㅡ.  나는 지금 이런 불쌍한 생각도 한다. 그럼ㅡ.  ㅡ만 26세와 3개월을 맞이하는 이상(李箱) 선생님이여! 허수아비여!  자네는 노옹일세.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일세. 아니, 아니.  자네는 자네의 먼 조상일세. 이상(以上)   환시기   - 태석(太昔)에 좌우(左右)를 난변(難辨)하는 천치(天痴) 있더니  그 불길한 자손이 백대(百代)를 겪으매  이에 가지가지 천형병자(天刑病者)를 낳았더라. - 그야말루 송 군은 지금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오ㅡ. 송 군이 가진 양심, 그와 배치되는 현실의 박해로 말미암은 갈등, 자살하고 싶은 고민을 누가 알아주나ㅡ. ...  그러나 한 사람의 생명은 병원을 가진 의사에게 있어서 마작의 패 한 조각, 한 컵의 맥주보다도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 자꾸 삐뚤어졌다구 그랬더니 요샌 곧 화를 내데ㅡ.  아까 바른쪽으루 비켜서란 소리는 괜헌 소리구 비켜서기 전에 자네 시각을 정정ㅡ그 때문에 다른 물건이 죄다 바른쪽으루 비뚤어져 보이드래두 사랑하는 안해 얼굴이 똑바루만 보인다면 시각의 적능은 그만 아닌가ㅡ그러면 자연 그 블라디보스톡 동경 사이 남북 만 리 거리두 배제처럼 바싹 맞다가서구 말 테니.   실화(失花)   -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 꿈ㅡ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자는 것이 아니다. 누운 것도 아니다. - 적빈(赤貧)이 여세(如洗)ㅡ콕토가 그랬느니라ㅡ재주 없는 예술가야 부질없이 네 빈곤을 내세우지 말라고. 아ㅡ내게 빈곤을 팔아먹는 재주 외에 무슨 기능이 남아 있누. - 꿈ㅡ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10월 23일부터 10월 24일까지 나는 자지 않았다. 꿈은 없다.  (천사는ㅡ어디를 가도 천사는 없다. 천사들은 다 결혼해 버렸기 때문이다.) - 나왔으니, 자ㅡ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해야 되누,  해가 서산에 지기 전에 나는 이삼 일 내로는 반드시 썩기 시작해야 할 한 개 '사체'가 되어야만 하겠는데, 도리는?  도리는 막연하다. 나는 십 년 긴ㅡ세월을 두고 세수할 때마다 자살을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나는 결심하는 방법도 결행하는 방법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다.  나는 온갖 유행약(流行藥)을 암송하여 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인도교(人道橋), 변전소(變電所), 화신상회(和信商會), 옥상(屋上), 경원선(京元線) 이런 것들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렇다고ㅡ정말 이 온갖 명사의 나열은 가소롭다ㅡ아직 웃을 수는 없다.  웃을 수는 없다. 해가 저물었다. 급하다. 나는 어딘지도 모를 교외에 있다. 나는 어쨌든 시내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시내ㅡ사람들은 여전히 그 알아볼 수 없는 낯짝들을 쳐들고 와글와글 야단이다. 가등(街燈)이 안개 속에서 축축해한다. - 아스팔트는 젖었다. 스즈란도 좌우에 매달린 그 영란(鈴蘭) 꽃 모양 가등도 젖었다. 클라리넷 소리도ㅡ눈물에ㅡ젖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는 안개가 자옥ㅡ히 끼었다. ...  법정대학(法政大學) Y군, 인생보다는 연극이 더 재미있다는 이다. 왜? 인생은 귀찮고 연극은 실없으니까. -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ㅡ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ㅡ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  "신념을 빼앗긴 것은 건강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마치 쉬운 경우더군요."  "이상(李箱) 형! 형은 오늘이야 그것을 빼앗기셨습니까? 인제ㅡ겨우ㅡ오늘이야ㅡ겨우ㅡ인제." - '슬퍼? 응ㅡ슬플밖에ㅡ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로다. 슬퍼야지ㅡ만일 슬프지 않다면ㅡ나는 억지로라도 슬퍼해야지ㅡ슬픈 포즈라도 해 보여야지ㅡ왜 안죽느냐고? 헤헹! 내게는 남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버릇밖에 없다. 나는 안 죽지. 이따가 죽을 것만 같이 그렇게 중속(衆俗)을 속여 주기만 하는 거야. 아ㅡ그러나 인제는 다 틀렸다. 봐라. 내 팔. 피골(皮骨)이 상접(相接). 아야 아야. 웃어야 할 터인데 근육이 없다. 울려야 근육이 없다. 나는 형해(形骸)다. 나ㅡ라는 정체(正體)는 누가 잉크 짓는 약으로 지워 버렸다. 나는 오직 내ㅡ흔적일 따름이다.'   단발(斷髮)   - 공연히 그는 서먹서먹하게 굴었다. 이렇게 함으로 자기의 불행에 고귀한 탈을 씌워 놓고 늘 인생에 한눈을 팔자는 것이었다. - 사실 그는 무슨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악인일 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애호하는 가면을 도적을 맞는 위에 그 가면을 뒤집어 이용당하면서 놀림감이 되고 말 것밖에 없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소녀에게 자그마한 욕구가 없는 바는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이것은 한 무적 '에고이스트'가 할 수 있는 최대 욕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코 고독 가운데서 제법 하수(下手)할 수 있는 진짜 염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체취처럼 그의 몸뚱이에 붙어 다니는 염세주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게으른 성격이요 게다가 남의 염세주의는 어느 때나 우습게 알려 드는 참 고약한 아리아욕(我利我慾)의 염세주의였다.  죽음은 식전의 담배 한 모금보다도 쉽다. 그렇건만 죽음은 결코 그의 창호(窓戶)를 두드릴 리가 없으리라고 미리 넘겨짚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다만 하나 이 예외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  A double suicide  그것은 그러나 결코 애정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다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말고 서로서로 '스프링보드'노릇만 하는 것으로 충분히 이용할 것을 희망한다. 그들은 또 유서를 쓰겠지. 그것은 아마 힘써 화려한 애정과 염세의 문자로 가득 차도록 하는 것인가 보다.  이렇게 세상을 속이고 일부러 자기를 속임으로 하여 본연의 자기를, 얼른 보기에 고귀하게 꾸미자는 것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애정이라는 것에 서먹서먹하게 굴며 생활하여 오고 또 오는 그에게 고런 마침 기회가 올까 싶지도 않다. - "...불행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더없는 매력입니다. 그렇게 내어버리구 싶은 생명이거든 제게 좀 빌려주시지요."  연애보다도 한 구(句) 위티시즘을 더 좋아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이때만은 풍경에 자칫하면 패배할 것 같기만 해서 갈팡질팡 그 자리를 피해 보았다. ... 소녀는 비로소 '세월'이라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방심(放心)을 어느결에 통과해 버린 '세월'이 소녀로서는 차라리 자신에게 고소하였다.  고독ㅡ그런 어느 날 밤 소녀는 고독 가운데서 그만 별안간 혼자 울었다. 깜짝 놀라 얼른 울음을 끊쳤으나 이것을 소녀는 자기의 어휘로 설명할 수 없었다. - "가령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물을 상 찌푸리지 않고 먹어보는 거 그래서 거기두 있는 '맛'인 '맛'을 찾아내구야 마는 거, 이게 말하자면 '패러독스'지. 요컨대 우리들은 숙명적으로 사상, 즉 중심이 있는 사상 생활을 할 수가 없도록 돼먹었거든. 지성(知性)ㅡ흥 지성의 힘으로 세상을 조롱할 수야 얼마든지 있지, 있지만 그게 그 사람의 생활을 '리드'할 수 있는 근본에 있을 힘이 되지 않는 걸 어떡허나? 그러니까 선(仙)이나 내나 큰소리는 말아야 해. 일체 맹세하지 말자ㅡ허는 게 즉 우리가 해야 할 맹세지." - 운명에 억지로 거역하려 들어서는 못쓴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나는 오랫동안 '세월'이라는 관념을 망각해 왔소. 이번엔 참 한참 만에 느끼는 '세월'이 퍽 슬펐소. 모든 일이 '세월'의 마음으로부터의 접대에 늘 우리들은 다 조신하게 제 부서에 나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하오. 흥분하지 말아요. - 저는 결코 오빠를 야속하게 여긴다거나 하지 않아요. 애정을 계산하는 버릇은 언제든지 미움받을 버릇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세월'이오? ... '세월'! 좋군요ㅡ교수ㅡ, 제가 제 맘대로 교수를 사랑해도 좋지요? 안 되나요? 괜찮지요? 괜찮겠지요 뭐? - 단발(斷髮)했습니다. 이렇게도 흥분하지 않는 제 자신이 그냥 미워서 그랬습니다.  단발? 그는 또 한번 가슴이 뜨끔했다. 이 편지는 필시 소녀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에게 의논 없이 소녀는 머리를 잘렸으니, 이것은 새로워진 소녀의 새로운 힘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라고 간파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물났다. 왜?  머리를 자를 때의 소녀의 마음이 필시 제 마음 가운데 제 손으로 제 애인을 하나 만들어놓고 그 애인으로 하여금 저에게 머리를 자르도록 명령하게 한, 말하자면 소녀의 끝없는 고독이 소녀에게 1인 2역을 시킨게 틀림없었다.  소녀의 고독!  혹은 이 시합은 승부 없이 언제까지라도 계속하려나ㅡ이렇게도 생각이 들었고ㅡ그것보다도 싹뚝 자르고 난 소녀의 얼굴ㅡ몸 전체에서 오는 인상은 어떠할까 하는 것이 차라리 더 그에게는 흥미 깊은 우선 유혹이었다.   김유정(金裕貞)   - 암만해도 성을 안 낼 뿐만 아니라 누구를 대할 때든지 늘 좋은 낯으로 해야 쓰느니 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이 김기림(金起林)이라.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敵)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업신여기고 그만두는, 그러기 때문에 근시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朴泰遠)이다.  업신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진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 "여! 어디 뎀벼봐라."쯤 할 줄 아는, 하되, 그저 그럴 줄 안다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는 파(派)에, 고만 이유로 코밑에 수염을 저축(貯蓄)한 정지용(鄭芝溶)이 있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敵)의 벌마구니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稀有)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金裕貞)이다.    누구든지 속지 마라. 이 시인 가운데 쌍벽(雙璧)과 소설가 중 쌍벽(雙璧)은 약속(約束)하고 분만(分娩)된 듯이 교만하다. 이들이 무슨 경우에 어떤 얼굴을 했댔자 기실은 그 교만에서 산출된 표정의 데포르마시옹 외의 아무것도 아니니까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이분들을 설복할 아무런 학설도 이 천하에는 없다. 이렇게들 고집이 세다.  나는 자고로 이렇게 교만하고 고집 센 예술가를 좋아한다. 큰 예술가는 그저 누구보다도 교만해야 한다는 일이 내 지론이다.   봉별기   - 금홍이는 겨우 스물한 살인데 서른한 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았다. 서른한 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은 금홍이가 내 눈에는 열일곱 살 먹은 소녀로만 보이고 금홍이 눈에 마흔 살 먹은 사람으로 보인 나는 기실 스물세 살이요 게다가 주책이 좀 없어서 똑 여남은 살 먹은 아이 같다. 우리 내외는 이렇게 세상에도 없이 현란하고 아기자기하였다.  부질없는 세월이ㅡ.  일 년이 지나고 팔월, 여름으로는 늦고 가을로는 이른 그 북새통에ㅡ.  금홍이에게는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왔다. -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그만해두 두 달지간이나 되지 않니? 헤어지자, 응?"  "그럼 난 어떻게 되우. 응?"  "마땅헌 데 있거든 가거라, 응."  "당신두 그럼 장가가나? 응?"  헤어지는 한(限)에도 위로해 보낼지어다. 나는 이런 양식(良識) 아래 금홍이와 이별했더니라. - 어디로 갈까.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동경(東京)으로 가겠다고 호언했다. 그뿐 아니라 어느 친구에게는 전기기술(電氣技術)에 관한 전문 공부를 하러 간다는 둥, 학교 선생님을 만나서는 고급 단식인쇄술(單式印刷術)을 연구하겠다는 둥, 친한 친구에게는 내 5개 국어에 능통할 작정일세 어쩌구 심하면 법률을 배우겠소까지 허담(虛談)을 탕탕하는 것이다. 웬만한 친구는 보통들 속나 보다. 그러나 이 헛선전(宣傳)을 안믿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하여간 이것은 영영 빈털털이가 되어 버린 이상(李箱)의 마지막 공포(空砲)에 지나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겠다. -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 생에서의 영이별(永離別)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 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云云)."   주석 중 - 活同是死胡同 死胡同是活胡同.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다. 최초의 해석은 이어령 교수가 '사는 것이 어째서 이와 같으며, 죽음이 어째서 같은가. 죽음이 어째서 이와 같으며 삶이 어째서 같은가.' (이어령 편, , 181~2쪽)라고 했다. 김윤식 교수는 '사는 것이 어찌하여 이와 같으며, 죽음이 어째서 같은가. 죽음이 어째서 이와 같으며, 사는 것이 같은가.'(김윤식 편, , 177쪽)라고 이어령 교수와 비슷하게 풀이하였다. 최근 김주현 교수는 이 대목을 백화문으로 보고, '뚫린 골목은 막다른 골목이요, 막다른 골목은 뚫린 골목이다.' (김주현 편, , 154쪽)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기한 바 있다. 이 구절이 한문식 독법과 백화문식 독법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점을 밝힌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상(李箱) 자신도 바로 이 같은 성질을 활용하고자 의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구절의 기호적 중의성(重義性)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에 맞춰본다면, '살아 있는 것이 곧 죽은 것이며, 죽은 것이 곧 살아 있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상 전집 2. 단편소설,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 뿔, 2009 출처: https://hichy.tistory.com/entry/이상-전집-2-단편소설?category=478796 [히키의 상상 공간:티스토리]
119    이상 전집 4. 수필 외,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 뿔, 2009 댓글:  조회:570  추천:0  2022-08-31
4이상 전집 4. 수필 외,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 뿔, 2009   1부   문학과 정치   : 문학자는 그 생활하는 성격상 생활이 다른 어떤 종류의 부문의 생활양식에 비교하여도 정신적인 고뇌가 훨씬 더 많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이래서 그들은 생활의 물질적인 고뇌에 다른 어떤 부문의 누구보다도 강인한 인내력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만약 한 문학자가 생활 혹은 그것에 유사한 보통 원인으로 하야 그 자신의 일명(一命)을 스스로 끊었다면 이 비극성이야말로 절대(絶大)하다.  문학자가 문학해 놓은 문학이 상품화하고 상품화하는 그런 조직(組織)이 문학자의 생활의 직접의 보장(保障)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대라는 정세가 이러면서도 문학자ㅡ가장 유능한ㅡ의 양심을 건드리지 않아도 꺼림칙한 일은 조금도 없는 그런 적절한 시대는 불행히도 아직 아닌가 보다.  이런 데서 문학자와 그의 생활 사이에 수습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기고 모순으로 하여 위와 같은 끔찍끔찍한 비극도 일어난다.  보면 사회, 아니 문학 한다는 이들까지가 이 비극에 대하기를 '냉담' 한마디에 다한다는 것은 한심하고 참괴(慚愧) 참아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생활난 때문에 일가(一家) 구몰(俱沒)의 보도를 조석으로 듣고 상을 찌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세월에 하나 정신 패배자의 죽음쯤이야 사회적 현상으로 내려다볼 때에 혹은 너무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르나 그 패배의 모양이 정신적인 점, 우리 문학하는 사람들과 친근자인 경우에 좀 더 절실한 무엇이 우리 흉리(胸裏)에 절박하는 것을 아니 느끼고 족히 베길까. X X X 문학자가 제 문학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제 생활을 기피하였다는 당대의 비극이 있다.  흔히 있는 또 있어야 할 유서(遺書) 한 장 없으니 더 슬프다.  고 매운 눈초리를 나는 눈에 선-하니 잠시 잊을 수도 없었다. ...  문학도 결국은 투기사업(投機事業)일 것이다. 되든지 안 되든지 둘 중의 하나, 이 냄세나는 '악취미 자극'을 나는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고 어디까지든지 버틸 결심이다.   실낙원(失樂圓) - 월상(月傷)   : 나는 엄동(嚴冬)과 같은 천문(天文)과 싸워야 한다. 빙하와 설산 가운데 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나는 달에 대한 일은 모두 잊어버려야만 한다ㅡ. 새로운 달을 발견하기 위하여ㅡ   병상(病床) 이후   : 그동안 수개월! 그는 극도의 절망 속에 살아왔다.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죽어왔다'는 것이 더 적확하겠다.)  ...  '참을 가지고 나를 대하여 주는 이 순한 인간에게 대하여 어째 나는 거짓을 가지고만 밖에는 대할 수 없는 것은 이 무슨 슬퍼할 만한 일이냐.' ...  '그렇다. 나는 확실히 거짓에 살아왔다ㅡ. 그때에 나에게는 체험을 반려(伴侶)한 무서운 동요(動搖)가 왔다ㅡ.   편지   기림(起林) 형 ... 빌어먹을 거ㅡ세상이 귀찮구려! 불행이 아니면 하로도 살 수 없는 '그런 인간'에게 행복이 오면 큰일나오. 아마 즉사할 것이오. 협심증(狹心症)으로ㅡ. '一切誓ふな(일체 맹서치 마라.)', '一切を信じないと誓へ'(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맹서하라.) 의 두 마디 말이 발휘하는 다채(多彩)한 파라독스를 농락하면서 혼자 미고소(微苦笑)를 하여보오. 형은 어디 한번 크게 되어보시오. 인생이 또한 즐거우리다. 사실 전(前)에 FUA '장미신방(薔薇新房)' 이란 영화를 보았소. 충분히 좋습디다. 'ききやかなる幸福' (소소한 행복)이 진정의 황금(黃金)이란 タイトル(주제)는 ア-ノルド  フアンダ(아르놀트 판크의) 영화에서 보았고 'ききやかなる幸福' (소소한 행복)이 인생을 썩혀 버린다는 タイトル(주제)는 장미(薔薇)의 침상(寢床)에서 보았소. 아ㅡ '哲學の限りなき無駄よ' (철학의 끝없는 헛됨이었소.) 그랬오.  '一切の法則を嗤へ?' 'それも誓ふな.' (일체의 법칙을 비웃어라? 그것도 맹서하지 마라.) ... 退屈で、退屈ならない(따분하고 따분해서 견디기 어려운) 그따위 일생도 또한 사(死)보다는 그래도 좀 자미가 있지 않겠소?  연애라도 할까? 싱거워서? 심심해서? 스스로워서? ...  여보 편지나 하구려! 내 고독과 울적(鬱寂)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소? 자ㅡ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꾿빠-이   ...구인회는 인간 최대의 태만(怠慢)에서 부침(浮沈)중이오. ...   ...해변에도 우울 밖에는 없소. 어디를 가나 이 영혼은 즐거워할 줄을 모르니 딱하구려! 전원(田園)도 우리들의 병원(病院)이 아니라고 형은 그랬지만 바다가 또한 우리들의 약국(藥局)이 아닙디다.  독서(讀書)하오? 나는 독서도 안 되오. ...  고황(膏肓)에 든, 이 문학병(文學病)을ㅡ 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陶醉)의......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표연(飄然)할 수 있는 제법 근량(斤量)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  세상 사람들이 다ㅡ제각기의 흥분, 도취에서 사는 판이니까 타인의 용훼(容喙)는 불허하나 봅디다. 즉 연애, 여행, 시, 횡재, 명성ㅡ이렇게 제 것만이 세상에 제일인 줄들 아나 봅디다. 자ㅡ기림 형은 나하고나 악수합시다. 하, 하.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사구니에 끼워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  그들은 이상(李箱)도 역시 20세기의 スポーツマン(스포츠맨)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을(아니 환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20세기를 근근히 ポーズ(포즈)를 써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구려! 아! 이 마음의 아픈 갈등이어.  생(生)ㅡ 그 가운데만 오직 무한한 기쁨이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이미 ヌキサツナラヌ程(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전락하고 만 자신을 굽어살피면서  생에 대한 용기, 호기심 이런 것이 날로 희박하여 가는 것을 자각하오.  이것은 참 제도(濟度)할 수 없는 비극이오! ... 환멸이라기에는 너무나 참담한 일장(一場)의 ナンセンス(넌센스)입니다. ...  오직 가령 자전(字典)을 만들어냈다거나 일생을 철(鐵) 연구에 바쳤다거나 하는 사람들만이 エライヒト(위인)인가 싶소.  가끔 진짜 예술가들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이 생활 거세(去勢) 씨들은 당장에 ドロ礻ズミ(시궁창의 생쥐)가 되어서 한 2,3년 만에 노사(老死)하는 모양입디다.   한화(閑話) 휴제(休題)ㅡ 차차 마음이 즉 생각하는 것이 변해 가오. 역시 내가 고집하고 있던 것은 회피(回避)였나 보오. 흉리(胸裏)에 거래(去來)하는 잡다한 문제 때문에 극도의 불면증으로 고생 중이오. 2,3일씩 이불을 쓰고 문외(門外) 불출(不出)하는 수도 있소. 자꾸 자신을 잃으면서도 양심 양심 이렇게 부르짖어도 보오. 비참한 일이오.  한화 휴제ㅡ 삼월에는 부디 만납시다. 나는 지금 쩔쩔매는 중이오. 생활보다도 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모르겠소. 논의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만나서 결국 아무 이야기도 못하고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만나기라도 합시다. ... 이러다가는 정말 자살할 것 같소. ... 여기 와보니 조선 청년들이란 참 한심합디다. 이거 참 썩은 새끼조차도 주위에는 없구려!  진보적인 청년도 몇 있기는 있소. 그러나 그들 역 늘 그저 무엇인지 부절히 겁을 내고 지내는 모양이 불민(不憫)하기 짝이 없습디다. ... 조금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하오. (중략) 망언(妄言) 망언. 엽서라도 주기 바라오.   ... 저에게 주신 형의 충고의 가지가지가 저의 골수에 맺혀 고마웠습니다. 돌아와서 인간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의 옳은 도리를 가지고 선처하라 하신 말씀은 참 등에서 땀이 날 만치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저는 지금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습니다. 계집은 가두(街頭)에다 방매(放賣)하고 부모로 하여금 기갈(飢渴)케 하고 있으니 어찌 족히 사람이라 일컬으리까. 그러나 저는 지식의 걸인은 아닙니다. ... 살아야겠어서, 다시 살아야겠어서 저는 여기를 왔습니다. 당분ㄱ단은 모든 죄와 악을 의식적으로 묵살하는 도리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친구, 가정, 소주, 그리고 치사스러운 의리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전연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분간 어떤 고난과라도 싸우면서 생각하는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편의 작품을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말라 비틀어져서 아사(餓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지금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도저히 '커피' 한 잔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고독과 싸우면서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있습니다. ...  가끔 글을 주시기 바랍니다. 고독합니다. 이곳에는 친구 삼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3부. 단상 또는 창작 노트   무제 (원문에 제목이 없음)      손가락 같은 여인이 입술로 지문(指紋)을 찍으며 간다. 불쌍한 수인(囚人)은 영원(永遠)의 낙인(烙印)을 받고 건강을 해쳐 간다. * 같은 사람이 같은 문으로 속속 들어간다. 이집에는 뒷문이 있기 때문이다. * 대리석(大理石)의 여인이 포오즈를 바꾸기 위해서는 적어도 살을 깎아내지 않으면 아니된다. * 한 마리의 뱀은 한 마리의 뱀의 꼬리와 같다. 또는 한 사람의 나는 한 사람의 나의 부친(父親)과 같다. * 피는 뼈에는 스며들지 않으니까 뼈는 언제까지나 희고 체온이 없다. * 안구(眼球)에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안구뿐이다. * 고향(故鄕)의 산(山)은 털과 같다. 문지르면 언제나 빨갛게 된다. (, 1960, 11, 164쪽, 김수영 역.)   얼마 안 되는 변해(辨解) (혹은 일년이라는 제목) ㅡ몇 구우(舊友)에게 보내는ㅡ    한 개의 임금(林檎)의 껍질을 벗기자 한 개의 배로 되었기 때문에 그 배의 껍질을 벗기자 한 개의 석류(石榴)로 되었기 때문에 그 석류의 껍질을 벗기자 한 개의 네이블로 되었기 때문에 그 네이블의 껍질을 벗기자 이번에는 한 개의 무화과로 되었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포학(暴虐)한 질서가 그로 하여금 그의 손에 있던 나이프를 내동댕이쳐 버리게 하였다.  내동댕이쳐진 소도(小刀)는 다시 소도를 낳고 그 소도가 또 소도를 낳고 그 소도가 또 소도를 낳고 그 소도가 또 소도를 분만(分娩)하고 그 소도가 또......   무제 (원문에 제목이 없음)   '오전 4시와 제 1초(秒). 지상의 나변(那邊)에도 나는 있지 않았다.' ... '나는 유모차에 태워진 채로 추락하였다. 기억의 심연 속으로'    무제 (원문에 제목이 없음)   생사의 초월ㅡ존재한다는 것은 생사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인가.   무제   만사는 나에게 더욱 냉담한 사념(思念)이 되어간다.  신(神)을 엄습하는 가을의 사색(思索), 그럴 때마다 느끼는 생존의 적막과 울고(鬱苦)에 견뎌낼 수 없다. 나의 전방에 선명한 문자처럼 전개하는 자살에의 유혹.  그러나ㅡ  나의 냉각(冷却)한 피는 이 경(磬)쇠처럼 꽃다운 맥박 속에서 포옹처럼 따뜻해지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석반(夕飯)   별이 나왔다. 일찍이 아무도 촌사람에게, 하늘에서 별이 나온다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은 별이란 걸 모른다. 그것은 별이 송두리째 하느님에 틀림없다. 더구나 일등성(一等星) 이등성(二等星) 하고 구별하는 사람의 번쇄(煩鎖)야말로, 가히 짐작할 수 있도다. 불행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 무슨 일이건 다 불쾌하다는 걸 계속해서 생각는 것은 불쾌하다. 그러자 이번은 이웃 방 사람들의 식사하는 소리가 들리어온다. 꼭 개가 죽(粥) 먹을 때의 그 소리다. 인간이 식사하는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들을 때, 개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함은 일대(一大)의 쾌사(快事)라 하겠다. ...  이렇게 오고 가는 방향이 서로 어긋나는 생리 상태와 심리 상태는 도대체 어쩌자는 셈일까. 심리 상태가 뭣이든 사사건건마다 생리 상태에 대하여 몹시 노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라면 그 반대일 것이다. 오로지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수습할 수 없는 상태며 난국이다. 나는 건강한지 불건강한지, 판단조차 할 수 없다. 건강하다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건강한 사람의 그 누구와도 (조금도) 닮지 않았다. 불건강하다면 이건 얼마나 처치 곤란하리만큼 뻔뻔스러운 그렇게 약해 빠진 몰골인가. ... 암담할 뿐이다. 그러나 개도 개지, 글쎄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열심히 몇 번씩이나 냄세를 맡는 것은 얼마나 우열한 일이뇨.개는 개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행복하다. ㅡ역시 이런 걸 생각하는 자체부터가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냄세 맡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도 가버렸다. 나는 이제 무엇을 관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  그러나 구름이 있다. ... 구름의 존재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가 된다고? 나는 아직 한 번도 구름이 비가 된다는 것을 믿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저건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완전히 부운(浮雲)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아침의 이 세상의 어느 나라의 지도와도 닮지 않은 백운(白雲)을 망연히 바라보며 인생의 무한한 무료함에 하품을 하였다.   무제   (2) 꽃이 매춘부의 거리를 이루고 있다. ... ......죽음을 각오하느냐, 이 삶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느니라...... 이런 값 떨어지는 말까지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개의 눈은 마르는 법이 없다, 턱은 나날이 길어져 가기만 했다.   (3) 가엾은 개는 저 미웁기 짝 없는 문패(門牌) 이면(裏面) 밖에 보지 못한다. 개는 언제나 그 문패 이면만을 바라보고는 분만(憤懣)과 염세를 느끼는 모양이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모양이다.   회한(悔恨)의 장(章)   가장 무력(無力)한 사내가 되기 위해 나는 얼금뱅이였다 세상에 한 여성조차 나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나의 나태(懶怠)는 안심(安心)하다 (이 대목에서 '안심(安心)'이라는 말은 '근심 걱정 없이 마음을 편안히 가짐.'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안심(安心)의 경지' 즉, '불법을 굳게 믿어 어떤 충동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지에 이른 상태.'를 인유(引喩)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나의 나태는 어떤 충동에도 고칠 수 없고 변화가 없음.' 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원문 주-)   양팔을 자르고 나의 직무를 회피한다 더는 나에게 일을 하라는 자는 없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支配)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歷史)는 지겨운 짐이다 세상에 대한 사표 쓰기란 더욱 무거운 짐이다 나는 나의 글자들을 가둬버렸다 도서관에서 온 소환장을 이제 난 읽지 못한다   나는 이젠 세상에 맞지 않는 입성이다 봉분(封墳)보다도 나의 의무는 많지 않다 (여기서 '봉분'은 '죽은 자'에 해당함.) 나에게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은 깡그리 없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는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아무것에게도 또한 보이진 않을 게다 비로소 나는 완전히 비겁해지기에 성공한 셈이다   단장(斷章)   죽음은 알몸뚱이 엽서나처럼 나에게 배달된다 나는 그 제한된 답신밖엔 쓰지 못한다. ... 헌 레코드 같은 기억 슬픔조차 또렷하지 않다.   첫번째 방랑   - 출발   나의 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여행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나로선 괴로운 일이다. 나는 기차 칸에서도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 나는 왜 이렇게 피로해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어제는 엊그제 같기도 하고, 또한 내일 같기조차 하다. 나에겐 나의 기억을 정리할 만한 끈기가 없어졌다. 나는 이젠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거대한 바위 같은 불안이 공기와 호흡의 중압이 되어 마구 짓눌렀다. ...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 자신을 암살하고 온 나처럼, 내가 나답게 행동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 책을 덮었다. 활자는 상(箱)에게서 흘러 떨어졌다. 나는 엄격한 자세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이제 혼자뿐이니까.   -차창(車窓) ... 나는 나의 기억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정신에선 이상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  적토 언덕 기슭에서 한 마리의 뱀처럼 말라 죽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름다운ㅡ꺾으면 피가 묻는 고대(古代)스러운 꽃을 피울 것이다.  이제 모든 사정이 나를 두렵게 하고 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는 그것이, 승천하려는 상념 그것이, 그리고 사람들의 치매증(癡呆症) 그것 마저가.  그러한 온갖 위협을 나는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의 침범으로 정신의 입구를 공허하게 해서는 안 된다. ...   아주 딴 방향으로부터 저 하현달이 다시금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다른 것으로 보아 그것은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약간 따스함조차 띠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사치(奢侈)로 해서 참을 수 없이 빛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나에게 표정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기꺼이 표정을 선택할 것이다.  이런 떄, 내가 해야 할 표정은 어떤 것이 제일 좋을까? 어떤 것이 제일 달의 자랑에 알맞은 것이 될까?  나는 잠시 망설인다.   -산촌(山村) ... 그들은 도대체 나한테서 무엇을 탐지하려는 것일까? 내 악(惡)의 충동에 대해 똑똑히 알고 싶은 것이리라ㅡ. 나는 위구(危懼)를 느껴 마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누구를 보고도 싱글벙글했다. 무턱대고 싱글벙글 함으로써 나의 그러한 위구감(危懼感)을 얼버무리는 수밖엔 없었다. ...  하지만 이제 나는 귀뚜리를 향해 어찌 싱글벙글할 수 있겠는가? 너의 혜안은 나의 위에 별처럼 빛난다. ...  귀뚜리여, 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너는 능히 나의 이 모자란 글을 읽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정녕 선지자 같은 정돈된 그 이지적인 모습을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되니 말이다. 그러나 어떠냐, 나는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얄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요사한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너만은 알 것이다. 보다 속 깊이 싹트고 있는 나의 악에 대한 충동을, 그리고 염치도 없는 나의 욕망을, 그리고 대해 같은 나의 절망까지도. 그리고 너만이 나를 용서할 것이다. 나를 순순히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러나 귀뚜리는 다시 흰 벽으로 옮아앉았다. 그것이 내가 필설로서 호소할 수가 전혀 없는 수많은 깊은 악과 고통마저 알고 있다는 꼭 그런 얼굴인 것이다. 나는 나의 무능함이 폭로되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던 것이다. 나는 더욱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다.   불행한 계승(繼承)   한여름 대낮 거리에 나를 배반하여 사람 하나 없다. 패배에 이른 패배의 이행(履行), 그 고통은 절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ㅡ. 자살마저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래 그렇기에ㅡ 나는 곧 다시 즐거운 산 즐거운 바다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ㅡ달뜬 친절한 말씨와 눈길ㅡ그리고 나는 슬퍼하기보다는 우선 괴로워하기부터 실천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한여름 대낮 거리 사람들 모두 날 배반하여 허허(虛虛)롭고야. ...   2 ... 피해자를 낼 만한 농담은 금해야 할 것이다. 그의 뇌리에 첫째로 떠오르는 금제(禁制)의 소리는 몽롱하나마 그것은 피해자에의 경계(警戒)인 것 같았다. 그렇다, 상의 앞에 피해자는 육안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상을 위협하는 포즈를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괴롭다.  차라리 이렇게 하자. 저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가 나중에 무엇이라고 나무라든지 아랑곳할 것이 뭐냐.  옳지, 하고 그는 후회보다도 더욱 냉정한 푼돈을 집어 던지고 오뎅집 콘크리트 바닥을 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가을바람처럼 비틀거리면서ㅡ노(路)ㅡ  차압(差押)이다. 특히 네놈이 이번엔 지명당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 기세로 상의 속도(速度)에는 시뻘거니 발홍(發紅)한 노여움이 충만해 있었다.   3 불길한 예감에는 그는 무섭도록 민감했다. 불길한 사건 앞에선 반드시 무슨 일에나 불길한 조짐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항상 전전긍긍하여 겁을 먹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 이젠 더 내 평생엔 사랑을 한다든가 하는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단다. 설령 어느 경우 이쪽에서 연연한 연정을 느낀다손 치더라도, 결국은 바닷가 조가비의 짝사랑이 되고 말 것이라고 굳게 체념하고 있었단다. 불긋불긋 녹슨 들판만 아득한 천(千) 리(里)란다.  사귀면 손해 본다. 허나 되레 반갑다. 두세 친구 이외에 내 자살을 만류해 줄 이유의 근원이 있을 턱이 없다.  자넨 혹은, 하필이면 네가 그러느냐 그럴지도 모른다. 허나 난 정당방위 그것마저 준비하고 있었단다ㅡ. 아니지, 어느 경우이건 놀림받기는 싫단 말이야. 그래서 그 손쉬운, 즉 조그마한 희생을 택했던 게야. 이러한 점에서 내가 하수인이라는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점에서만 말하자면 난 굳이 그 책임을 회피하라곤 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니, 자넨 아주 무관심한 것 같군. 하나의 조소 거리를 얻을 것 같을지도 모르지. 허나,    이런 날에도 어쩌다 떠오르는 추억의 조각 한강(漢江)물 반짝이는 여름 햇살 보누나   4 ... 피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 피해서 안전한 것을 어째서 피하지 아니하였느냐 말이다. 한 줄기의 백금선을 백일(白日)에 드러냈던 때의 후회ㅡ. 아니다ㅡ. 그래 그것은 나중이야, 아니면 정녕 먼저냐? 예감이라니 정말이냐.  허나 분명 얻은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송두리째 잃은 것만은 사실이다. 속일 순 없다. 이건 또 치명적인 결석(缺席)이었다.  무엇일까. 누이인 줄 알고 있던 두 가지의 성격을 두 가지의 방법으로 생각했던 그것일까. 아니면, 한꺼번에 십 년 후로 후퇴해 버린 자신의 위치일까. 아니면, 십 년이란 먼 곳에 미소짓는 해변의 소운ㅡ그 친구일까.  아니면,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일까.   5 ... 자아, 가자구. 그러지 말고 가자구. 고집부리지 말고. 멋꼬라지 없게, 새삼스레, 자아, 자아. 그렇지, 상은 결국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ㅡ전연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 그래,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대체 그는 어떻게 하고 있으면 좋단 말인가. 결국 가만히 있는 것.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거든.  가만히 있기는커녕, 정녕 가만히 있진 못하겠다. 이건 또 불가사의한 처지인 것 같았다. 왜 가만히 있지 못한단 말인가?  소운은 집에 가겠노라 했던 것이다. 집에 가서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슬픈 심정을 주체스러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괴로워해 하겠노라고ㅡ.  괴로워해?  그 괴로움이야말로 사람들이 원해도 쉬이 얻을 수 없는, 말하자면 괴로움 같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닌, 어떤 그 무엇이지 않을까.  조용한 시간만큼 적어도 두 사람에게 있어서 싫은 것은 없을 터이다. 설상 상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외톨이로 남게 되어ㅡ상은 소운의 팔을 잡아끎변서, 절일 만큼의 서러움을 몸에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이 자리를 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아니다, 소운으로 하여금 이 '눈물의 장(場)'에서 달아나게 해선 안 된단 말이다.  억지로, 오기(傲氣)로도ㅡ. (혹은 있고 싶지 않단 말이다. 혼자 있는 건 무서워.)  혼자서? 혼자서 있는 것일까 그것이? 그리고 그런 내용을 가지고서의 혼자서 있는 것. 그것이 허용될 수 있는 일일까.  숫자는 3이다. 2와 1이라는 짝 맞춤밖에는 전혀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무엇을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이냐? 얌전하게 단념해야지ㅡ.  그러고 싶어. 사실은 그래도 좋다곤 생각해. 허나 그저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다 그런 소리일 따름이야. 이걸 달래주는 법은 없을까. ... 절망의 새끼줄을 붙잡고ㅡ이 무슨 멋꼬라지 없는 하룻밤이었던가. 이미 분리된 것을 끌어당긴다는 것은 적어도 비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밤이 밝아온다. 절망은 절망인 채, 밤이 사라져 없어지듯 놓아주지 아니하면 아니 될 성질의 것이다. 날뛰는 망념(妄念) 위에, 광기 어린 야유(揶揄) 위에, 그야말로 희디흰 새벽빛 베일이 덮쳐 오는 것이었다.   6 ... 모든 것은 현관 신발장 께에 구두와 함꼐 벗어던져져 있다. 이제 이 지폐 냄새 물씬거리는 실내엔 고독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 ㅡ그래 웃지 않기는 커녕 입을 열지 않는다구. 그런 아주 색다른, 어쩌면 내일 당장 자살해 버리지나 않을까 싶은 염세형(厭世型)인데,  그러면서도 개성이 강해서 남의 말은 쉬이 들어먹지 않거든.   황(獚)의 기(記)ㅡ작품 제 2번 ㅡ황은 나의 목장을 사수하는 개의 이름입니다. (1931년 11월 3일 명명) ... 기(記) 2 ... 지식과 함께 나의 병(病)집은 깊어질 뿐이었다 ...시간의 습관이 식사처럼 나에게 안약을 무난히 넣게 했다 병집이 지식과 중화(中和)했다ㅡ세상에 교묘하기 짝이 없는 치료법ㅡ그 후 지식은 급기야 좌우를 겸비하게끔 되었다   기(記) 3 복화술이란 결국 언어의 저장 창고의 경영일 것이다 한 마리의 축생은 인간 이외의 모든 뇌수일 것이다   기(記) 4 ... 언제나 나는 나의 조상ㅡ육친을 위조하고픈 못된 충동에 끌렸다 치욕의 계보(系譜)를 짊어진 채 내가 해부대의 이슬로 사라질 날은 그 어느 날에 올 것인가? ... 그래 나는 나의 신분에 걸맞게시리 나의 표정을 절약하고 겸손하고 하는 것이었다 ... 나의 사상의 레터 나의 사상의 흔적 너는 알 수 있을까? 나는 죽는 것일까 나는 이냥 죽어가는 것일까 나의 사상은 네가 내 머리 위에 있지 아니하듯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모자 나의 사상을 엄호해 주려무나 나의 데스마스크엔 모자는 필요 없게 된단 말이다! ... 별들은 흩날리고 하늘은 나의 쓰러져 객사(客死)할 광장 보이지 않는 별들의 조소 ... 한 줄기 길이 산을 뚫고 있다 나는 불 꺼진 탄환처럼 그 길을 탄다 ... 화살처럼 빠른 것을 이 길에 태우고 나도 나의 불행을 말해 버릴까 한다 한 줄 기 길에 못이 서너 개ㅡ 땅을 파면 나긋나긋한 풀의 준비(準備)ㅡ 봄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작품 제3번   2 ... 신(神)은 사람에게 자살을 암시하고 있다...... ... 나의 눈은 둘 있는데 별은 하나밖에 없다 폐허(廢墟)에 선 눈ㅁ불ㅡ눈물마저 하오(下午)의 것인가 불행한 나무들과 함께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폐허는 봄 봄은 나의 고독을 쫓아버린다 나는 어디로 갈까? 나의 희망은 과거분사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폐허에서 나는 나의 고독을 주워 모았다 봄은 나의 추억을 무지(無地)로 만든다 나머지를 눈물이 씻어버린다 낮 지난 별은 이제 곧 사라진다 낮 지난 별은 사라져야만 한다 나는 이제 발을 떼어놓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이다 바람은 봄을 뒤흔든다 그럴 때마다 겨울이 겨울에 포개진다 바람 사이사이로 녹색 바람이 새어 나온다 그것은 바람 아닌 향기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묻어버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나는 흙을 판다    흙 속에는 봄의 식자(植字)가 있다   지상에서 봄이 만재(滿載)될 때 내가 묻은 것은 광맥(鑛脈)이 되는 것이다 이미 바람이 아니 불게 될 때 나는 나의 행복만을 파내게 된다   월원등일랑(月原橙一郞) (츠키하라 도이치로[原橙一郞]. 1930년대 활동했던 일본 시인.)   나의 마음이 죽었다고 느끼자 나의 육체는 움직일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달이 둥그래지는 내 잔등을 흡사 묘분(墓墳)을 비추듯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참살당한 현장의 광경이었다.   공포의 기록(서장)   ... 아, 피곤하다. 그에게 아방궁을 준다 해도 더는 움직일 수 없다. 그는 그렇도록 피곤한 것이다. ... ㅡ자아, 나르자! 저 악취에 싸여 있는 육친의 한 뭉치를 그는 낡은 짐수레에 싣고 날라와야 한다. 노동이다. 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한다든지 하는 일 따위는 엄두도 못낼 지경이었다. 성격 파산ㅡ무엇 때문에? 그의 교양은 그의 겉모양새와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남루. 수염도 텁수룩하다. 거리. 땀. ... 공복ㅡ절망적인 공허가 그를 조소하는 듯했다. 초조하다. 그다음에는 무엇이 왔는가. 적빈. 쓸 만한 넝마는 남의 손에 의해 모두 팔려 나갔다. 그리하여 보다 더 남루한 넝마들이 병균처럼 남아 있다. ...    밤이 되자 그는 유령처럼 흥분한 채 거리를 누볐다. 이제 그에게는 의지할 곳이 없다. 오로지 한 가닥 공복을 메꾸기 위해 행동할 뿐이었다.  성격의 파편, 그는 그런 것은 돌아볼 생각도 않는다. 공허에서 공허로 그는 역마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술이 시작되었다. 술은 그의 앞에서 향수처럼 빛났다.  왼팔이 오른팔을 오른팔이 왼팔을 자꾸만 가혹하게 구타한다. 날개가 부러져서 흔적이 시퍼렇다.  소량의 구조 깃발은 이미 효력이 없다.   공포의 성채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 즉 애완용 가축처럼 귀여움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다.    무서운 실지(實地)ㅡ특기해야 할 사항이 없는 흐린 날씨와 같은 일기(日記)ㅡ긴 일기다.    버려도 상관없다. 주저할 것 없다. 주저할 필요는 없다.    ...  그것도 정말일까. 모두를 미워하는 것과 개과천선하는 일이 양립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개과한다는 것은 바로 교활해 간다는 것의 다른 뜻이다. 그래서 그는 순수하게 미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때는 민족마저 의심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번쩍임도 여유도 없는 빈상스런 전통일까 하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가족을 미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는 또 민족을 얼마나 미워했는가. 그것은 어찌 보면 '대중'의 근사치였나 보다.  사람들을 미워하고ㅡ반대로 민족을 그리워하라, 동경하라고 말하고자 한다.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덩어리의 그늘 속에 불행을 되씹으며 웅크리고 있는 그는 민족에게서 신비한 개화를 기대하며  그는 '레프라'와 같은 화려한 밀탁승의 불화(佛畵)를 꿈꾸고 있다. (lepra. 나병(癩病). 문둥병.) (밀타승[密陀僧]. 일산화연[一酸化鉛]의 별칭. 색상의 농도에 따라서 금[金] 밀타, 은[銀] 밀타 등의 명칭이 있음.)  새털처럼 따뜻하고 또한 사향처럼 향기 짙다. 그리고 또 배양균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 ... 성은 재채기가 날 만큼 불길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창들의 세월은 길고 짧고 깊고 얕고 가지각색이다.  시계 같은 것도 엉터리다.  성은 움직이고 있다. 못쓰게 된 전자처럼. 아무도 그 몸뚱이에 달라붙은 땟자국을 지울 수는 없다.  스스로 부패에 몸을 맡긴다.  그는 한난계처럼 이러한 부패의 세월이 집행되는 요소요소를 그러한 문을 통해 들락거리는 것이다.  들락거리면서 변모해 가는 것이다.  나와서 토사(吐瀉) 들어가서 토사. 나날이 그는 아주 작은 활자를 잘못 찍어놓은 것처럼 걸음새가 비틀거렸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것이 간단하게 끝나 버릴 아리송한 새벽이 올 때까지만이다.   야색(夜色)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별을 본 적은 없다. 어쩐지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달 없는 밤하늘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귀기마저 서린 채 마치 커다란 음향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느낌이다. ...  과연 이 한 몸은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티끌만 한 가치도 없다. 그런데도 이 야망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 불안은 뭔가. 이 악에의 충동은 또 뭔가. 신은 이 순간에 있어서 건강체인 나의 앞에선 단연 무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신을 이길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신에 대해 저주의 마음 같은 것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신을 이기겠다는 의욕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나의 이 불안감은 끝없는 환희 속에서 신의 의지, 신의 제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곻 나의 이 바윗덩이 같은 우울의 근거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전혀 불명이다. 그 원천이 내 자신의 내부에 있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나 자신에 의해 고통을 받는 것일까? 그건 우스운 이야기다.    인간 세상이 온통 제멋대로인 것처럼 자꾸만 생각된다. 그것은 사실 신이 관여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한 몸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고 간섭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지녔다. 자살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수단, 시기. 유서에 대한 것 등 세세히 냉정하게 생각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다가 자살하지 않고 있는 것도 역시 자유다. 모든 곤란과 치욕을 견더내며 아랫배에 힘을 주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자살자들은 모두 자살하는 것의 자유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며 더 큰 고난과 치욕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는 것도 또한 자유라는 데 대한 인식을 얻은 사람들이다.  ...  이상하게도 그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하지 않는다. 그들이 마음 속으로 자살을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토인처럼 검게 탄 얼굴 모습을 일별하면 그들은 결코 단 한 번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데 나는 뭔가. 자살하는 일 자살하지 않는 일 등을 번갈아 가며 생각하는 데 몰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정신 상태를 어지럽게 해서 그 때문에 몹시 비관하거나 실망하는 등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불행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나의 일생은 끝나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산다는 것이 이 얼마나 불쾌와 고통의 연속인가 하는 것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야색은 권태로운 경치를 한층 더 권태롭고 혼연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방대한 공포의 광경마저 내장한 채 버티고 있다. 이러한 우매한 자연에 대해서 나는 언제까지나 털끝만 한 친밀감도 발견할 수 없다.   단상(斷想)   (1)   나의 생활은 나의 생활에서 1을 뺀 것이다. 나는 회중전등을 켠다. 나의 생활은 1을 뺀 나의 생활에서 다시 하나 1을 뺀다. 나는 회중전등을 끈다. 감산이 회복된다ㅡ그러나 나는 그것 때문에 또 다른 하나의 생활을 잃어버린다. 나는 회중전등을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다. 나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빈둥빈둥ㅡ나의 사상마저 빈둥거리게 하기 위해 회중전등이 포켓 속에서 켜졌다. 나는 서둘러야 한다. 무엇을? 나는 죽을 것인가? 그게 아니면 나는 비명의 횡사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내게는 나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생활의 국부를 나는 나의 회중전등으로 비추어본다. 1이 빼어져 나가는 것을 목전에 똑똑히 보면서ㅡ나는 나에게도 생활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2) 병자가 약을 먹고 있다. 병자는 약을 먹지 않아도 죽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은 약을 먹어도 건강하기 때문이다.   (3)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ㅡ이 편지 읽는 대로 곧 답장을 보내 주세요ㅡ 단지 이 한마디만을 써서ㅡ 그러자 답장이 왔다. ㅡNo, 이것을 Yes로 생각하세요ㅡ No 이것을 번역하면 '아니다' Yes 이것을 번역하면 '맞다' '아니다'를 '맞다'로 한다면 아무리 '맞다', '맞다'라고 해본들 이 '맞다'는 '아니다'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니다'나 '맞다'나 매한가지다. 어느 쪽이든 '아니다'인 것이다. 결국 No는 Yes가 있어서 비로소 No가 되며 Yes는 No가 되는 것이다. ...   (9) 여자의 손은 하얗다. 그리고 파란 줄이 잔뜩 있다. 여자는 그 파란 줄 하나를 선택한다. 앞으로 간다 갈라진다. 여자는 그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앞으로 간다. 또 갈라진다. 여자는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앞으로 간다. 역시 갈라진다. ㅡ지팡이로 해봐야지ㅡ 물론 지팡이라도 쓰러뜨려 보지 않는 이상 어떤 지식으로 어떤 감정으로 어떤 의지로 길을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No와 Yes 두 통의 편지를 써서 지팡이를 쓰러뜨려 봉함에 넣는다. 그리고 또 지팡이를 쓰러뜨려 주소를 쓴다. 그리고 또 지팡이를 쓰러뜨려ㅡ ㅡ당신은 Yes라고 말했군요. 고맙습니다ㅡ ㅡ그치만 그게 정말 Yes인지 아닌지는 이걸 쓰러뜨려 봐야 알지요ㅡ 아ㅡ아무리 쓰러뜨려 본들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을까?   (10) 누군가가 밥을 먹고 있다. 몹시 더러운 꼴이다. 그렇다. 분명히 밥을 먹는다는 것은 더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라고 하는 작자가 바로 내 자신이라면 이걸 어쩐다?   (11) 나는 매일 아침 양치질을 한다. 나는 또 손톱을 깎아 마당 가운데 버린다. 나는 폐의 파편을 토한다. 나는 또 몸뚱이의 도처가 욱신거린다. 나는 서서 오줌을 갈기면 눈이 녹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또 내가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소리를 질러본다. 내일이 오늘이 될 수 없는 이상 불안하다. 내일이야말로 정말 미쳐버릴거다 ㅡ나는 항상 생각하며 마음을 들볶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한쪽 장갑을 잃어버렸을까? 나는 나머지 장갑도 마치 잃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내 마음대로 그것을 없앨 수가 있을까? 나는 욕을 먹는다. 한쪽 장갑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내일은 내게 편지가 오려나 내일은 좀 풍성해지려나 내일 아침 몇시쯤 나의 최초의 소변을 볼 것인가. 출처: https://hichy.tistory.com/entry/이상-전집-4-수필-외?category=478796 [히키의 상상 공간:티스토리]
118    말테의 수기 -릴케 댓글:  조회:586  추천:0  2022-08-31
말테의 수기 (1) ··· 릴케 9월 11일 툴리에 거리.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온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밖에 나갔다왔다. 많은 병원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기에 그 후의 일은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임신한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은 따사로운 높은 담을 따라 힘들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담이 아직 거기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그녀는 여러 번 담을 만져보고는 했다. 물론 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도를 찾아보았다. 산부인과 병원. 그래. 그녀는 곧 해산을 하겠지-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좀더 가니 생 자크 거리가 나오고, 둥근 지붕의 커다란 건물이 나왔다. 지도에는 발 드 그라스 육군병원이라 나와 있었다. 사실 이런 것을 알 필요는 없었지만 안다고 나쁠 것도 없다. 골목길 사방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요오드포름, 감자 튀김 기름 그리고 불안의 냄새를 분간할 수 있었다. 여름이면 모든 도시에서 냄새가 난다. 그 다음 나는 백내장이 낀 듯한 야릇한 색의 집을 보았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그 집 현관문 위에는 아직는 제법 뚜렷하게 ‘간이 숙박소’라 씌어 있었다. 문 옆에 요금이 붙어 있었다. 읽어보았다. 별로 비싸지 않았다. 그리고 또 무엇을 보았던가? 세워놓은 유모차 안에 있는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는 통통했고 피부는 푸르스름했으며, 이마에는 오롯하게 종기가 나 있었다. 종기는 거의 다 나아서 이제 아프지 않아 보였다. 아이는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는 입을 벌린 채 요오드포름과 감자튀김, 그리고 불안의 냄새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나는 보았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 버릇을 나는 도저히 고칠 수가 없다. 전차가 미친 듯 경적을 울리며 내 방을 가로질러 달려간다. 자동차는 내 위를 지나간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 유리창이 깨져서 떨어진다. 큰 유리조각들은 걸껄거리고 작은 조각들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는 갑자기 집 안의 다른 쪽에서 둔중하고 무언가에 갇힌 듯한 소음이 들린다.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온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문 저쪽에 서 있다가, 한참을 서 있다가 지나가버린다. 다시금 거리의 소리. 처녀애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다. “제발 입 다물어. 이제 충분해.” 전차가 잔뜩 흥분해서 달려와 그 소리를 덮치고, 모든 것을 덮치고 지나간다.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이고 서로를 앞질러간다.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개가 있다니. 게다가 새벽녘에는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는 내게 한없는 위안을 가져다준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불현듯 잠이 든다. 이것은 소리들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소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정적이다. 큰불이 났을 때 가끔 극도로 긴장되는 한 순간이 있다. 솟구치던 물줄기들이 사그라들고, 소방관들은 더 이상 사다리를 기어오르지 않고, 아무도 움직잊 않는 그런 순간 말이다. 소리없이 검은 추녀 끝이 위에서 앞으로 밀려나오고, 높은 담이, 뒤쪽에서 불길이 넘실대는 담이 소리없이 무너진다. 모두가 멈춰 서서 어깨를 움츠리고, 눈에다 온 신경을 모아서 끔찍한 일격을 기다린다. 이곳의 적막은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모든 것이 내 안 깊숙이 들어와서, 여느 때 같으면 끝이었던 곳에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내면을 지금 나는 가지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른다. 오늘 나는 편지를 썼다. 그러면서 내가 여기에 이제 겨우 삼 주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다른 곳에서 삼 주라면, 가령 시골에서의 삼 주라면 하루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몇 년 지난 것 같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변하고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말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변한다면 나는 당연히 예전의 나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무엇이라면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니 낯선 사람들에게, 이제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이미 말했던가?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그렇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직 서투르지만 주어진 시간을 잘 이용하려고 한다. 가령 지금까지는 얼마나 많은 얼굴이 있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사람들의 수도 엄청나지만 얼굴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모두들 여러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하나의 얼굴만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얼굴은 닳아버리고, 지저분해지고, 주름살이 잡히고, 여행 내내 끼고 다녔던 장갑처럼 헐거워진다. 이런 사람들은 검소하고 순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굴을 바꾸지도 않고, 한 번 깨끗하게 닦지도 않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누가 그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반증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들도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나머지 얼굴을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다. 그들은 나머지 얼굴은 그냥 보관해둔다. 그들의 아이들이 쓰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개가 나머지 얼굴을 쓰고 다니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어떻든 얼굴은 얼굴이다. 다른 사람들은 끔찍하게도 빠르게 차례차례로 얼굴을 바꿔 금방 낡아버리게 만든다. 처음에는 영원히 바꿔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마흔 살도 안 되어 마지막 얼굴만 남는다. 물론 비극적인 일이다. 그들은 얼굴을 조심해서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얼굴도 여드레가 못 되어 구멍이 숭숭 나고, 여기저기가 종이처럼 얇아져서 급기야는 점점 밑바닥이, 그러니까 얼굴도 무엇도 아닌 것이 드러난다. 결국 그들은 그런 상태로 돌아다닌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여인은 몸을 숙인 채 두 손에 얼굴을 온통 파묻고 있었다. 노트르담 드 샹 거리의 모퉁이에서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불쌍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 그들에게 무슨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으니까.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침 심심해하던 거리의 공허가 내 발자국소리를 낚아채가서는 마치 나막신이라도 신은 듯 제멋대로 여기저기서 딸까닥 소리를 냈다. 그 여인은 깜짝 놀라서 몸을 을이켰는데, 너무 급하게 일으키는 바람에 그만 얼굴이 두 손에 남아버렸다. 나는 손 안에 놓여 있는, 움픅 들어간 얼굴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그 여인의 손에서 떨어져나온 맨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손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말할 수 없이 힘이 들었다. 얼굴을 안쪽에서 바라보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없는, 상처 난 맨 머리를 보는 것은 더욱 무서웠다.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무서움을 느끼면 그에 맞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 여기서 병이 들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디외 병원으로 데려가기라도 한다면 나는 거기서 틀림없이 죽고말 것이다. 그 병원은 안락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일각을 다투며 넓은 광장을 지나 병원으로 달려가는 그 많은 마차들에 치일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노트르담 성당의 정면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다. 작은 합승마차들이 계속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누군가 죽어가고 있는 이가 이 병원으로 곧장 달려오기로 마음먹었다면 사강 공작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마차를 세워야 할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막무가내기 마련이라 마르티르 거리의 고물상 주인 러그랑의 마누라가 센 강의 시테 섬에 있는 이 병원으로 실려올 경우 파리 시 전체의 교통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 고약한 소형 마차의 창에는 몹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반투명 유리가 끼워져 있어서, 그 안에서 아주 화려한 단말마의 고통이 벌어지고 있다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을 상상하는 데는 수위의 상상력 정도면 충분하다. 상상력이 좀더 풍부해서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펼친다면 곧 그러한 추측은 한도 없이 뻗어나갈 것이다. 나는 지붕 없는 합승마차가 도착하는 것도 보았는데, 포장을 젖힌 이 마차는 규정된 요금으로 운행한다. 임종의 시간을 맞기 위해서는 2프랑이면 된다. 이 훌륭한 병원은 매우 오래 되었다. 이미 클로비스 왕 시절에도 이곳의 몇몇 침대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지금은 559개의 병상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 공장에서처럼 대량 생산 방식이다. 이렇게 엄청난 대량생산이기에 각각의 죽음은 훌륭하게 치러지지 않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대량으로 죽어나가니 그렇게 되었다. 오늘날 훌륭하게 공들인 죽음을 위해 무언가 하려는 사람이 아직도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심지어는 세심하게 죽음을 치를 능력이 있는 부자들조차 무관심하고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만의 고유한 죽음을 가지려는 소망은 점점 희귀해진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런 죽음은 고유한 삶이나 마찬가지로 드물어질 것이다. 맙소사, 이게 전부라니. 사람들은 세상에 와서 기성품처럼 이미 만들어져 있는 삶을 찾아서 그냥 걸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죽으려 하거나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내몰릴 경우에도 문제가 없다. “자, 너무 애쓰지 마세요. 이것이 당신의 죽음입니다, 선생.” 이제 사람들은 자신에게 막 닥쳐온 죽음을 맞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앓고 있는 병에 딸려 있는 죽음을 맞이한다(사람들이 모든 질병을 알게 된 이래로 여러 가지의 죽음은 인간이 아니라 질병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병자는 아무 할 일이 없다). 의사와 간호사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기꺼이 죽어가는 요양소에서 사람들은 그 시설에 걸맞는 죽음을 맞는다. 그런 죽음을 사람들은 좋다고 여긴다. 그러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당연히 훌륭한 계층에 어울리는 점잖은 죽음을 선택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면 죽음과 함께 상류계층의 장례 절차가 시작되고 그들의 매우 멋진 관습들이 뒤따라 이어진다. 가난한 이들은 그 집 앞에 서서 실컷 구경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격식이 없는 가난한 이들의 죽음은 보잘것없다. 그들은 자신에게 대충 들어맞는 죽음이면 기뻐한다. 죽음이 아주 커서 헐렁해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늘 조금씩 자라기 때문이다. 다만 죽음이 가슴을 여미지 못할 정도로 꽉 끼거나 숨막힐 정도로 옥죈다면 문제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는 사람이 없는 고향을 생각할 때면 예전에는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사람들은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듯 자신 안에 죽음을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또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작은 죽음을, 어른들은 커다란 죽음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었다. 여자들은 뱃속에, 남자들은 가슴속에 죽음을 지니고 있었. 누구나 바로 그런 죽음을 갖고 있었고, 그 사실은 사람들에게 독특한 위엄과 조용한 자부심을 가져다주었다. 나의 할아버지, 늙은 시종관 브리게도 하나의 죽음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죽음이었던가. 두 달이나 계속되고, 외딴 농가까지도 들리는 그런 요란한 죽음이었다. 유서 깊은 이 널따란 저택도 그 죽음에게는 너무 작았다. 옆에다가 곁채를 하나 더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시종관의 몸이 점점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주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아직 하루가 다 가지도 않았는데, 이제 누워보지 않은 방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면 무섭게 화를 냈다. 결국 하인과 하녀, 그리고 할아버지가 항상 곁에 두셨던 개들이 하나의 무리가 되어 계단을 올라가, 집사가 앞장선 가운데 당신의 어머니께서 임종하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23년 전에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때의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제 모두가 무리를 지어 여느 때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던 그 방으로 밀려들어갔다. 커튼이 젖혀지자 여름날 오후의 강렬한 햇살이 깜 놀라고 겁먹은 모든 사물들을 샅샅이 비추고, 천이 젖혀진 거울에 부딪혀서 서투르게 몸을 돌렸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기심에 가득 찬 하녀들은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했고, 젊은 하인들은 모든 것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이든 시종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운 좋게도 마침내 들어와보게 된 이 폐쇄된 방에 대해 들었던 모든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들이 모든 사물이 냄새를 풍기는 이 방에 들어오게 되어 몹시 흥분한 것 같았다. 호리호리하고 커다란 러시아산 그레이하운드들은 안락의자 뒤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마치 춤이라도 추는 듯한 걸음걸이로 몸을 흔들며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는 紋章에 새겨진 개처럼 일어서서 가느다란 앞발을 백금으로 된 문틀에 걸치고는, 뾰족한 얼굴로 바짝 긴장하여 이맛살을 찌푸리며 마당의 오른편 왼편을 둘러보았다. 누런 장갑 빛깔의 자그마한 닥스훈트는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가의 널찍한 비단 소파에 앉아 있었다. 털이 불그스름하고 뭔가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의 포인터는 금빛 책상다리의 모서리에 등을 비벼대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림이 그려진 책상 위에 있던 세브르산 접시가 달가닥거렸다. 물론 이것은 맥놓고 잠 속에 푹 빠져 있던 사물들에게는 끔찍한 시간이엇다. 누군가가 성급한 손길로 거칠게 펼친 책갈피에서 장미꽃잎이 떨어져 짓밟혔다. 자그맣고 부서지기 쉬운 물건들은 누군가가 낚아채어 바로 망가뜨리고는 얼른 제자리에 놓았다. 여러 가지 망가진 물건들을 커튼 아래 숨겨놓거나, 벽난로의 금빛 격자망 뒤로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이따금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양탄자 위로 살며시, 혹은 마룻바닥 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런데 언제나 소중하게 다뤄지는 데 익숙해 있던 이 물건들은 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어디에 떨어지든 쪼개지고, 날카롭게 부서지거나 소리없이 깨져버렸다. 누군가가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불안하게 지켜온 이 방의 몰락을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그 대답은 단 하나, 죽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울스가르 마을의 시종관 크리스토프 데트레프 보리게의 죽음이었다. 크리스토프 데트레프는 시종관의 감청색 제복 밖으로 미어져 나올 정도로 부풀어오른 채 방바닥 가운데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커다랗고 낯설기만 한, 아무도 더는 알아볼 수 없게 된 얼굴의 눈은 감겨져 있었다. 그는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를 침대 위에 눕히려 했다. 하지만 병이 자라기 시작했던 초기부터 침대를 싫어했던 그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게다가 그 방에 있던 침대는 너무 작았기에 그를 양탄자 위에 눕히는 것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래층으로는 내려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종관 데트레프는 누워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개들은 하나씩 하나씩 문틈으로 빠져나가서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털이 빳빳한 개 한 마리만이 주인 곁에 남았다. 넓적하고 털이 텁수룩한 앞발 하나를 그의 커다란 잿빛 손 위에 얹어놓고 있었다. 대부분의 하인들도 이제는 방보다는 한결 환한 바깥의 흰 복도에 나가 있었다. 방에 남아 있는 이들도 때때로 방 가운데 놓여 있는 커다랗고 시커먼 덩어리를 몰래 힐끔거리며 그것이 썩어버린 물체 위에 덮여 있는 커다란 옷에 지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었다.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더 이상 시종관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 이미 7주 전부터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된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크리스토프 데트레프가 아니고 크리스토프 데트레프의 죽음이었다. 크리스토프 데트레프의 죽음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울스가르에 살면서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무엇인가를 요구했다.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고, 푸른 방으로 데려가라 요구했고, 자그마한 응접실로 그리고 넓은 홀로 가자고 요구했다. 개들을 요구했고, 사람들에게 웃어라, 이야기하라, 유희하라, 조용히 하라고 요구했고 때로는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요구하기도 했다. 친구가 보고 싶다고, 여인들과 이미 죽은 이들이 보고 싶다고 했으며, 자신도 죽고 싶다고 했다. 요구하고 요구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밤이 와서 지쳐버려 파김치가 된 하인들이 먹 잠들려 할 때면 크리스토프 데트레프의 죽음은 조금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한숨을 쉬고 울부짖었다. 그 바람에 처음에는 함께 짖어대던 개들도 결국 입을 다물고 감히 다시 몸을 눕힐 생각을 못 하고 길고 가느다란 다리로 서서는 무서움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덴마크의 광활한 은빛 여름밤을 뚫고 그 죽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면 마을 사람들은 천둥번개라도 칠 때처럼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그 소리가 그칠 때까지 등잔 주위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해산 날짜가 가까워진 여인들은 가장 구석진 방에 두꺼운 칸막이를 한 잠자리로 옮겨졌다. 그렇지만 거기까지 그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자신들의 몸 속에 있기라도 한 듯 여인들은 그 소리를 들었다. 여인들은 일으켜달라고 간청하여, 희고 품이 넓은 옷을 입은 채로 나와서는 흐릿한 얼굴을 하고 다른 사람들 곁에 앉았다. 이 시기에 송아지를 낳아야 할 암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닫아버렸다. 새끼가 영 나오려 하지 않자 사람들은 암소에서 죽은 새끼를 강제로 꺼냈는데 내장까지도 함께 끌려나왔다. 다가올 밤에 대한 두려움에 그리고 밤에 자꾸만 깜짝 놀라 깨어 있는 바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기 때문에 모두들 낮에도 일을 제대로 못 했고 건초를 들여놓는 일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일요일에 흰색의 평화로운 교회에 갈 때마다 사람들은 이제 울스가르에서 주인이 사라져 주기를 기도했다. 이 주인이 너무 금찍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가 가슴에 품고 기도한 것을 목사는 설교단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목사 역시 밤에 잠을 잘 수 없었고 이러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종도 똑같이 외쳤다. 그 종은 밤새도록 시끄럽게 울려대는 경쟁자에 맞서 쇳소리를 힘차게 울렸지만 아무리 해도 대적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그 이야기를 했다.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저택에 들어가서 쇠스랑으로 나리를 찔러 죽이는 꿈을 꾼 이도 있었다. 모두들 매우 흥분했고, 인내의 한계를 느꼈고, 초조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젊은이의 꿈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그 젊은이가 실제로 그런 일을 감행할 만한지 가늠해보는 것이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시종관을 사랑했고 걱정해주던 그 지방의 사람들은 모두들 이제 그 젊은이처럼 느끼고, 그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울스가르에 살고 있는 크리스토프 데트레프의 죽음은 물러가려 하지 않았다. 죽음은 10주 예정으로 와서 10주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죽음은 이전의 크리스토프 데트레프보다 더욱 강력하게 군림했다. 죽음은 마치 후세 사람들이 나중까지 폭군이라 부르는 군주와 같았다. 그것은 수종증에 걸린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시종관이 일생 동안 품고 다니며 스스로 키워왔던 고약한 군주 같은 죽음이었다. 시종관 자신이 평온한 시절에 다 써버릴 수 없어 남아 있던 모든 자만과 의지, 지배력이 이제 그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죽음은 울스가르에 눌러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것과는 다른 죽음을 가지라고 그에게 요구한다면 시종관 브리게는 그 사람을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았을까. 그는 자신만의 힘든 죽음을 맞은 것이었다. 내가 직접 알고 있었거나 전해들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해 보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자신만의 고유한 죽음을 가지고 있다. 남자들은 갑옷 깊숙이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 죽음은 마치 포로와 같았다. 아주 늙어서 자그맣게 오그라든 여자들은 무대처럼 엄청나게 큰 침대에 누워 모든 가족과 하인과 개가 지켜보는 앞에서 분별 있고 주인다운 죽음을 맞았다. 아이들까지도, 아주 어린아이들까지도 마음을 가다듬어 아이들의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라온 자신과 앞으로 자라게 될 자신을 합해놓은 죽음을 맞았다. 아이를 가진 여인이 가만히 서 있을 때면 얼마나 우수에 찬 아름다움이 느껴지는지. 무의식적으로 가느다란 손을 올려놓고 있는 그녀의 커다란 몸 속에는 두 개의 열매가, 아이와 죽음이 들어 있다. 단아한 얼굴에 감도는 진지하고 거의 풍요롭기까지 한 미소는 그들이 자신 안에서 두 개의 열매가 자라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두려움에 맞서서 무엇인가를 했다. 밤새 앉아서 글을 썼다. 이제 나는 울스가르의 들판을 건너 먼 길을 걸은 뒤처럼 피곤하다. 지금은 모든 것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으며, 그 오래된 저택에 이제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 아마 지금도 하얀 다락방에서는 하녀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무겁고 축축한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아는 사람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달랑 가방 하나와 책이 든 상자 하나만 들고, 아무런 호기심도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집도, 물려받은 물건도, 개도 없는 이런 삶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적어도 추억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가 있을까? 어린 시절이 추억 속에 있지만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모든 추억에 다시 다다르기 위해서는 아마도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이 그래서 나는 좋다. 오늘 아침은 아름답고 가을 분위기가 났다. 나는 툴리에 공원을 거닐었다. 동쪽을 향해 서 있는 모든 것들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햇빛을 받고 있는 것들이 밝은 회색 커튼 같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아직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은 정원의 동상들은 밝아오는 희미한 빛 속에서 햇살을 쬐고 있었다. 기다란 화단의 꽃들이 잠에서 깨어나 깜짝 놀란 목소리로 ‘아아 붉은색’이라고 말햇다. 그때 저쪽 샹젤리제 쪽에서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다가왔다. 그는 목발을 겨드랑이에 끼지 않고 가볍게 앞으로 내밀고 있었고, 이따금 마치 전령관의 지팡이라도 되는 듯 힘을 주어 소리나게 땅을 짚었다. 그 남자는 기쁨을 억누릴 수가 없는 듯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태양과 나무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린아이처럼 조심스러웠지만 이상하리만치 가벼웠고 이전의 걸음걸이에 대한 추억에 가득 젖어 있었다. 이렇듯 자그마한 달이 못 하는 게 없다니. 달밤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투명하고 가벼우며, 밝은 공기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뚜렷하게 보인다. 바로 옆에 있는 것도 먼 빛을 띠고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넓이와 관계 있는 것들, 즉 강과 다리와 길게 뻗은 길과 확 트인 광장은 그 거리감이 뒤로 사라져서 마치 비단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보인다. 그럴 때면 퐁네프 다리 위의 밝은 녹색 마차와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어떤 붉은 물체와 진주빛 빌딩의 방화벽에 붙은 포스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로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단순해져서 마치 마네의 초상화 속의 얼굴처럼 몇 개의 정확하고 밝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센 강변의 헌책방에서 책이 들어 있는 상자들을 열어 놓는다. 새 책의 선명한 노란색이나 헌 책의 바랜 노란색, 전집 물의 붉은 빛이 도는 갈색, 대형 화첩의 초록색. 이 모두가 잘 어울리고 각자 의미를 지니며, 서로를 보완해 주어서 무엇 하나 빠진 것 없는 완전함을 만들어낸다. 창문 아래로 다음과 같은 풍경이 보인다. 여인이 작은 손수레를 밀고 간다. 손수레 위 앞쪽에 손으로 돌리는 오르간이 세로로 놓여 있다. 그 뒤에는 아기 바구니가 비스듬히 놓여 있고, 그 속에는 모자를 쓴 아주 작은 아이가 기쁜 듯이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앉으려고 하지 않는다. 가끔 여인은 오르간 손잡이를 돌린다. 그러면 그 작은 아이는 곧바로 바구니에서 일어나 발을 구르고, 초록색 나들이옷을 입은 작은 소녀는 춤을 추면서 창문을 향해 탬버린을 흔든다.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지금 나는 무엇인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물여덟인데 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해서 카르파초에 관한 논문을 썼지만 형편없고, 이라는 희곡을 썼지만, 잘못된 내용을 모호한 수법으로 증명해 보이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시를 썼다. 아아, 젊어서 쓴 시는 별로 대단치가 못하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가능하다면 오래 살아서 삶의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마지막에 열 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시란 사람들이 말하듯 감정이 아니라 (감정은 이미 젊어서부터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은가)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와 사람들 그리고 사물을 보아야 하며 동물들을 알아야 한다.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자그마한 꽃들이 아침이면 만들어내는 몸짓을 알아야 한다. 낯선 지방의 길들과 예상치 못한 만남 그리고 오래 전부터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던 이별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아직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어린 시절과,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 했으나 아이가 그것을 알지 못하여 부모가 마음 상한 일과 (다른 아이한테는 분명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아주 이상하게 시작되어 몇 번이나 매우 깊고 무겁게 변화해간 어린 날의 병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고요하고 외진 방에서의 나날들과 바닷가에서 맞은 아침, 그리고 바다 그 자체, 이곳 저곳의 바다들, 하늘 높이 올라가 별과 함께 날아가버린 여행 중의 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하나하나가 각각 달랐던 사랑의 밤들에 대한 기억과 산고(産苦)의 외침 그리고 산후에 다시 몸을 닫고 가벼워져서 하얗게 잠든 산모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어보아야 한다. 창문이 열려 있어 이따금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는 방에서 죽은 사람 곁에 앉아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아지면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다란 인내심을 가지고 추억이 다시 솟아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추억 자체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추억이 우리 몸 속에서 피가 되고 눈짓이 되고 몸짓이 되어 이름을 잃어버리고, 우리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될 때에야 비로소 아주 드물게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시의 첫 단어가 솟아올라 걸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시들은 이와는 다르게 생겨났다. 그러니 시라고 할 수가 없다. 희곡을 쓸 때에도 나는 얼마나 실수를 했는지. 서로를 힘들게 하는 두 사람의 운명을 이야기하기 위해 제삼자를 등장시켰으니 나는 모방자이고 바보가 아니었던가? 너무 쉽사리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모든 삶과 모든 문학에 등장하는 이 제삼자는, 실제로는 존재한 적이 없는 이 제삼자라는 율령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그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이 제삼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알리지 않기 위해 자연이 꾸민 술책 중의 하나다. 진행되고 있는 드라마를 가리고 있는 칸막이와 같다. 실제 갈등은 소리없는 고요 속에서 벌어지는데 그 입구에서 나는 소음이 바로 제삼자다. 문제가 되는 두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지금까지는 모두에게 너무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제삼자는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루기가 쉬웠다. 그래서 모두들 제삼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작가들의 희곡에서는 바로 첫머리부터 벌써 제삼자를 등장시키고 싶어하는 초조함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제삼자를 참고 기다릴 수가 없다. 그런데 제삼자가 등장하자마나 모든 것은 순조로워진다. 그가 조금 늦게 나오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지루한가. 제삼자 없이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못하고, 모든 것이 정지되고, 정체되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정체 상태와 마냥 멈춰 있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가정해 보자. 사람들은 대번에 극장이 예술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마치 위험한 구멍이라도 되는양 극장을 막아버릴 테고, 좀벌레 나방들만 특별석의 테두리에서 날아올라 텅 빈 공간에서 나부낄 것이다. 극작가들은 더 이상 고급 주택가에서 살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공공 첩보기관들은 극작가를 위해 그 제삼자를, 줄거리 그 자체이며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제삼자를 아주 멀리 떨어진 세계 구석구석까지 찾아나설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이는 ‘제삼자’가 아니라 바로 그 부부다. 두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데도 아직 그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된 게 거의 없다. 그들은 괴로워하고, 행동하고, 서로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스운 일이다. 나는 여기 이 작은 방에 앉아 있다. 스물여덟이 되었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나. 브리게가 앉아 있다. 나는 여기 앉아 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제 생각하기 시작하여, 잔뜩 흐린 파리의 어느 날 오후에 5층 방에서 이러한 생각을 펼친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어떤 진실한 것, 중요한 것도 보지 못하고, 인식도 못하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가능할까? 관찰하고, 숙고하고, 기록할 몇천 년의 시간을 갖고 있엇는데도 사람들은 그 수천 년의 시간을 버터 바른 빵과 사과 하나 베어먹는 학교의 점심시간처럼 헛되이 흘려버렸다는 사실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수많은 발명과 진보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종교 그리고 세상의 지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만 삶의 표면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 의미 있을 수도 있는 이 삶의 표면을 형편없는 천으로 덧씌워놓고, 여름 휴가철의 응접실 가구처럼 보이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럴 수 있다. 세계의 모든 역사가 온통 잘못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죽어가고 있는 낯선 사람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데, 죽어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모여든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역사는 항상 군중에 대해서만 말해왔기 때문에 과거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럴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을 되찾아야 한다고 믿는 일이 가능할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가 이전의 모든 조상들에게서 생겨나온 존재이며, 그것을 알게 되면 그와는 다르게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설득시키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 그럴 수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결코 존재한 일이 없는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모든 현실은 무의미하며, 그들의 삶은 마치 빈 방의 시계처럼 어떤 것과도 연관을 갖지 않고 다만 헛되이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현실에 살고 있는 처녀들에 대해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게 가능할까? 사람들이 ‘여인들’ ‘아이들’ ‘소년들’이라고 말하지만 이 단어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복수형이 아니라 다만 수많은 단수형만이 있었음을 (아무리 교양 있더라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럴 수 있다. ‘신’이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그 말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두 명의 초등학생을 보라. 한 아이가 칼을 하나 사고, 옆자리의 아이도 같은 날 똑같은 것을 샀다고 하자. 그리고 일 주일 뒤에 두 아이가 그 칼을 서로에게 내보일 경우, 두 칼에는 비슷한 점이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두 칼은 각기 다른 손 안에서 그렇듯 다르게 변한 것이다 (그걸 보고 한 아이의 어머니는 “너희들은 무엇이든 금방 망가뜨려버리지”라고 말할 테지만 말이다). 아아, 그렇다. 신(神)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다만 마음속에 품고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일이 가능할까? 말테의 수기 (2) ··· 릴케 그 당시 나는 열두 살, 많아야 열세 살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우르네클로스터로 데려 가셨다. 아버지가 무슨 일로 외할아버지는 방문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두 분은 오랫동안 만난 적이 없었고, 아버지는 브라에 백작이 만년에 이르러 은거한 그 오래된 저택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 그 기이한 저택을 나는 그 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집을 떠올려보면 건물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내 기억 속에 그 집은 온통 분해되어 있다. 여기에 방 하나, 저기에 또 하나, 그리고 두 방을 연결시켜주지 않고 따로 떨어져 단편으로 남아 있는 복도가 있다. 내 머리 속에는 모두가 이런 식으로 흩어져 있다. 여러 개의 방들, 큰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뻗어 있는 계단, 그리고 어두컴컴한 속을 사람들이 혈관 속의 피처럼 지나야 했던 나선형의 좁은 계단이 있는가 하면, 탑 속의 방, 높게 매달려 있는 발코니, 조그만 문을 밀고 나가면 나오던 예상치 못했던 자그마한 발코니가 있다. 이 모든 것이 내 머리 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아마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치 이 집의 모습이 헤아릴 수 없이 높은 곳에서부터 내 안으로 떨어져 내려와 내 속에 있는 밑바닥에 부딪혀 부서진 것과 같다. 내 마음 속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매일 저녁 일곱 시면 저녁식사를 위해 모이곤 했던 그 커다란 방뿐이다. 나는 이 방을 낮에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창문이 있었는지, 어느 쪽으로 나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족들이 그 방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묵직한 촛대 위에 촛불이 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과 함께 밖에서 보았던 모든 것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이 높다란, 지금 기억으로는 둥그런 아치형의 방은 그 어떤 방보다도 강렬했다. 그 방의 어두컴컴한 높은 천장과 한 번도 온전하게 빛이 비친 적이 없는 구석은 사람들에게서 모든 영상을 빨아들이고는 그것을 대신할 다른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아무런 의지도, 생각도, 의욕도, 저항할 생각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빈 공간 같았다. 이처럼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상황이 처음에는 내게 배멀미와 같은 메스꺼움을 불러일으켰던 게 생각난다. 나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무릎에 내 발이 닿도록 다리를 쭉 뻗음으로써 이 기분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거의 냉담할 정도였던 당시 관계에 비추어보면 그러한 행동은 자연스럽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이 이상한 행동을 이해해 주었거나 어떻든 아주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 접촉을 통해서 나는 길고 긴 식사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렇듯 안간힘을 다해서 견뎌낸 몇 주가 지나가 아이들 특유의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적응력에 힘입어 나는 이 모임의 몹시도 스산한 분위기에 아주 익숙해졌고, 두 시간 동안 식탁에 앉아 있는 것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식탁에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오히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이 모임을 가족이라 불렀고 다른 사람들도 이 표현을 썼는데 이 표현은 별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네 사람은 서로 먼 친척이기는 했지만 결코 한 집안에 속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당숙은 노인이었는데 단단하고 검게 탄 얼굴에는 몇 개의 반점이 있었다. 내가 들은 바로는 화약이 폭발해서 난 상처라 했다. 투덜거리며 불만스러워했던 그 당숙은 소령으로 퇴역했는데, 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방에서 연금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인들에 따르면, 그는 1년에 한두 차례 시체를 보내오는 어떤 감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는 그 방에 밤낮으로 틀어박혀서는 시체들을 해부하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시체가 썩지 않도록 처리를 한다는 것이었다. 당숙의 맞은편은 노처녀인 마틸데 브라에의 바리였다. 그녀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인물로 내 어머니의 먼 사촌 뻘이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의 한 심령술사와 매우 활발하게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 놀데 남작이라는 이 심령술사에게 그녀는 완전히 빠져 있어서 사전에 그의 허락이나 더 나아가 축복을 받지 않고는 아무리 사소한 일도 하려 들지 않았다. 당시 그녀는 매우 뚱뚱했는데 부드럽고 느물느물한 덩어리가 밝고 헐렁한 옷 속에 아무럿게나 흘려 넣어져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동작은 피곤해 보였고 부정확했으며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괴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나의 다감하고 날씬한 어머니를 기억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를 오래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재대로 기억해낼 수 없었던 어머니의 섬세하고 조용한 특징들을 그녀의 얼굴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마틸데 브라에를 매일 보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아마도 처음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제대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수백 가지 개별적인 인상들이 모여서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그 모습은 그 후 언제나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브라에의 얼굴에는 정말로 어머니의 얼굴과 모습을 특징지어주는 모든 세부적인 요소들이 깃들여 있었다. 다만 두 얼굴 사이로 낯선 얼굴이 끼어들기라도 한 듯, 두 얼굴이 서로 밀려나고 일그러지는 바람에 더 이상 관련을 갖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이 부인 옆에는 사촌누이의 아들이 앉아 있었는데, 내 또래였지만 나보다 작고 허약했다. 주름 잡힌 옷깃 위로 가늘고 창백한 목이 솟아올랐다가 긴 턱 아래에서 사라졌다. 그 아이의 얇은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으며 콧등이 가볍게 떨리곤 했다. 아름다운 짙은 갈색의 두 눈 중에서 단지 한쪽 눈만이 움직였다. 그 눈은 이따금 구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그 눈을 팔아버렸기에 이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식탁의 끝에는 아주 큼지막한 외할아버지의 팔걸이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일만을 맡아 하는 하인이 외할아버지가 앉을 때 의자를 밀어 넣어주곤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그 의자의 아주 작은 공간만을 차지하고 앉았다. 귀가 어둡고 무뚝뚝한 이 늙은 주인을 각하나 시종관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장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물론 외할아버지는 그런 직함을 지닌 일이 있었지만 아주 오래 전의 일이어서 이러한 명칭이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어떤 순간에는 말할 수 없이 예리하다가도 다시금 몽롱해지는 외할아버지 같은 인물에게는 어떠한 특정한 명칭을 붙일 수 없다는 생각이 내게는 들었다. 외할아버지는 때때로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더군다나 농담 석인 악센트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 곁으로 오라고 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외할아버지라 부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모든 가족이 외할아버지에게 존경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태도를 보였지만, 꼬마 에릭만은 이 늙은 집주인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의 움직이는 눈이 가끔 외할아버지에게 재빨리 동의를 구하는 눈짓을 보내면, 이 눈짓을 곧바로 외할아버지의 응답을 받곤 했다. 때로는 기나긴 오후 시간에 두 사람이 으슥한 화랑의 끝에 나타나 서로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하지만 분명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면서 어두운 옛 초상화 옆을 지나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뜰이나 집 밖의 너도밤무 숲 또는 들판에서 지냈다. 다행히도 우르네클로스터에는 개들이 있어서 나를 따라다녔다. 여기저기 소작인들의 집이나 목장에서 우유나 빵, 과일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나중의 몇 주 동안은 저녁 모임에 대한 생각으로 불안해하지도 않고, 아무런 걱정도 없이 나의 자유를 누렸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는 기쁨 때문에 나는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개들하고는 이따금 짤막하게 이야기를 했다. 개들하고는 아주 잘 통했다. 하기야 과묵함은 우리 집안의 특성이기도 했다. 나는 과묵함을 아버지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저녁식사 내내 한 마디 말이 없어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우리들이 도착한 후 며칠 동안 마틸데 브라에는 말을 아주 많이 했다. 아버지에게 외국의 도시에 살고 있는 친지들에 대해 물어보았고, 아주 오래 전의 인상을 회상하기도 했으며, 죽은 친구들이나 어떤 젊은 남자를 생각해내고는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했다. 그 남자는 자기를 사랑했지만 자신은 그의 간절하고 절망적인 애정에 응할 수가 없었노라고 암시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정중하게 귀를 기울였고, 가끔 긍정의 표시로 머리를 끄떡였으며 꼭 필요한 대답만을 하였다. 위쪽에 앉아 있는 외할아버지는 아랫입술을 꽉 다물고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마치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듯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외할아버지도 이따금 말을 했지만 특별히 누군가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가 매우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홀의 어디서나 잘 들렸다. 그 목소리는 시계바늘의 규칙적이고 무관심한 진행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목소리를 둘러싼 적막은 일종의 공허한 반향을 지니고 있는 듯 보였고 어느 음절이나 똑같이 울렸다. 브라에 백작은 나의 아버지의 죽은 처, 그러니까 나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는 지빌레 백작 영양이라 불렀고 무슨 말을 하든 어머니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럴 때면, 지금도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처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처녀가 금방이라도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올 것만 같았다. 나는 또한 외할아버지가 같은 어조로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안나 소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느 날 나는 외할아버지가 특별히 좋아했던 것처럼 보이는 이 소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그녀는 콘라드 레벤트로우 재상의 딸로 나중에 프리드리히 4세의 배우자가 되었고 로스킬데에 묻힌 지 150년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에게는 시간의 흐름이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죽음은 작은 돌발 사건으로 외할아버지는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한 번 자신의 기억에 받아들인 사람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어서 그들의 죽음 정도는 약간의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고 이 늙은 주인이 죽은 후에 사람들은 그가 미래 역시 제멋대로 현재의 일처럼 여겼다고 서로들 이야기했다. 언젠가 외할아버지가 어떤 젊은 여인에게 그녀의 아들들에 대해서, 특히 그 중의 한 아들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당시 첫 아이를 임신한 지 겨우 3개월인 상태였기 때문에 계속 이야기를 하는 노인 옆에서 놀라움과 두려움에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한 채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사건은 내가 웃음을 터뜨린 일이 발단이 되었다. 나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는 억제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에 마틸데 브라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한 늙은 시종은 그녀의 자리에 멈춰 서서는 음식 그릇을 내밀었다. 그는 한동안 이런 자세로 기다리다가 만족한 듯, 그리고 모든 것이 제대로라는 듯 점잖게 다음 자리로 옮겨갔다. 나는 이 장면을 줄곧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는 우습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막 음식을 한 입 입에 물었을 때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와 사레가 들렸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내게도 이런 상황이 불쾌하게 여겨졌고 모든 수단을 다해서 점잖게 있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계속 웃음이 터져나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의 행동을 감싸주려는 듯 넓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틸데가 아픈가보지요?”라고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는데, 나는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는 바람에 주의해 듣지는 않았지만 아마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니, 단지 크리스티네를 만나고 싶지 않을 따름이야.”그래서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던, 갈색으로 그을린 소령이 일어나서는 백작에게 잘 알아들을 수 없게 중얼거리며 양해를 구하고 인사를 한 뒤 방을 떠난 것이 외할아버지의 말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집주인의 등 뒤에 있는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몸을 돌려서는 갑자기 에릭과 내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지시하는 듯한 손짓과 고갯짓을 한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그것을 보고 나는 아주 놀랐다. 놀란 나머지 나를 괴롭히던 웃음이 뚝 그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 소령에게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 에릭도 그를 무시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식사는 언제나처럼 천천히 진행되었고 막 후식이 나올 때쯤이었다. 그때 나는 방의 뒤편, 반쯤만 빛이 비치는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움직임에 눈이 끌려 숨을 죽이고 그것을 응시했다. 그곳의 늘 잠겨 있는 문이, 중간층으로 통한다고 사람들이 말해준 적이 있는 그 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리고 내가 호기심과 놀라움이 섞인 아주 기묘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밝은 옷을 입은 날씬한 여이니 문이 열린 어두운 공간에 나타나서는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어떤 몸짓을 했는지 아니면 소리를 질렀는지 잘 모르겠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서 나는 그 이상한 여인의 모습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쳐다보니 아버지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주먹 쥔 손을 내려뜨리고는 그 여인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 여인은 이런 광경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우리에게로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그녀가 백작의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자 외할아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아버지의 팔을 붙들고 식탁으로 잡아당겼다. 그 동안 낯선 여인은 천천히 그리고 아주 무관심하게 한 반짝씩 걸음을 옮겨, 이제 방해물이 사라진 공간과 어디선가 유리잔이 떨리는 소리만이 들릴 따름인, 형언할 수 없는 적막을 지나서 방의 맞은편 벽에 달린 문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이 낯선 여인의 뒤에서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문을 닫고 있는 사람이 에릭임을 알아보았다. 식탁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붙박인 듯 앉아 있었기에 혼자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 다음에야 아버지 생각이 나서 바라보니 외할아버지가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고 있다. 아버지의 얼굴은 이제 화가 나서 벌게졌으나 외할아버지는 마치 맹수의 흰 발톱과 같은 손가락으로 아버지의 팔을 움켜쥐고 예의 가면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외할아버지가 무슨 말인가를 한 음절 한 음절씩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말은 아주 깊숙이 내 귀에 박혔다. 2년 전인가 나는 그 말을 갑자기 내 기억의 저 밑바닥에서 찾아내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그 의미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종관, 자네는 너무 흥분을 잘 하고 예의가 없네.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하도록 왜 내버려두지 않나?” 그러자 아버지가 말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기에 있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낯선 사람이 아니네. 크리스티네 브라에야.” 그때 다시금 저 이상야릇한 엷은 적막이 솟아올라 다시금 유리잔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몸을 휙 잡아빼서는 달리듯 홀에서 나가버렸다. 나는 아버지가 밤새도록 자신의 방에서 서성이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나도 역시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는 선잠이 들었고 새벽녘에 갑자기 깨어났다. 그리고는 내 침대에 앉아 있는 하얀 물체를 보고는 심장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나는 겨우 힘을 내어 이불 속으로 머리를 숨기고는 무섭고 난감해져서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울고 있는 내 눈 위쪽이 서늘하고 밝아졌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눈물 고인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서 내게 말을 걸고 있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달콤하게 얼굴에 다가왔다. 나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마틸데의 목소리였다. 나는 곧 안정을 되찾았지만 완전히 울음을 그친 후에도 게속 그대로 위안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이러한 친절이 너무 다정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것을 즐겼고 그럴 자경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머니”, 마침내 나는 그녀의 흐트러진 얼굴에서 어머니의 특징을 재구성해내려 애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그 부인이 누구였어요?” “아”, 마틸데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는데 그 한숨이 내게는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어느 불쌍한 여자란다. 얘야, 어느 불쌍한 여자야.” 그날 아침 나는 몇 사람의 하인이 방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떠나는구나라고 나는 생각했고 이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도 아마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무엇이 아버지를 움직여서 그날 저녁 후에도 여전히 우르네클로스터에 머물도록 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는 떠나지 않고 그 후로도 8주인가 9주를 그 집에 머물면서 그 집이 주는 기이한 억누름을 참아내었다. 우리는 세 번 더 크리스티네 브라에를 보았다. 당시 나는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가 아주 오래 전에 두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것과 그때 태어난 사내 아이가 자라서 두렵고 끔찍한 운명을 맞이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죽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열적이면서 매사에 논리적인 것과 분명함을 추구하는 아버지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 사건을 견뎌내려 생각했던 것일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아버지가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고, 역시 왜 그랬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굴격 자신을 억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크리스티네 브라에를 마지막으로 본 때였다. 이번에는 마틸데도 식탁에 자리해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우리가 도착한 뒤의 며칠 동안처럼 그녀는 쉬지 않고 아무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하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 안에 자리잡은 무언가 육체적인 불안 때문인지 끊임없이 머리며 매무새를 매만졌다. 이것은 그녀가 예기치 않게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서는 뛰쳐나가버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은 나도 모르게 그 문을 향했다. 정말로 거기에 크리스티네 브라에가 나타났다. 옆 자리의 소령은 짧고 격하게 몸서리를 쳤는데 그것은 내 몸까지 전달되어왔다. 그러나 그는 몸을 일으킬 힘은 더 이상 없는 듯했다. 그는 늙고 반점이 난 갈색 얼굴을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돌렸는데, 입은 벌어져 있었고 혀는 썩은 이빨 뒤에서 뒤틀려 있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사라졌는가 싶더니 어느새 식탁 위에 희끗한 머리가 놓여 있었다. 팔은 토막이라도 난 듯 아래로 늘어져 있었고, 어디선가 시들고 반점투성이의 손 하나가 삐져나와 떨고 있었다. 크리스티네 브라에는 단지 늙은 개의 신음 같은 소리가 울릴 따름인 말할 수 없는 적막 속을 병자처럼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걸어서 지나갔다. 그때 수선화가 가득 꽂혀 있는 커다란 백조 모양의 은꽃병 옆으로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가면 같은 얼굴이 암울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향해 자신의 포도주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크리스티네 브라에가 막 아버지의 의자 뒤를 지나가고 있을 때 아버지가 술잔을 잡고 아주 무거운 것이라도 되는 듯 식탁에서 한 뼘쯤 들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에 우리는 바로 출발했다. 그렇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무언가 해야 한다. 이러한 불안한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금까지 지나쳐버린 일을 되잡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설령 그가 그 일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다른 사람이라고는 없다. 그래서 이 젊고 보잘것없는 외국인인 브리게가 5층 꼭대기에 앉아서 밤낮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말테의 수기 (3) ··· 릴케 국립 도서관에서 나는 앉아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 도서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책에 몰두해 있다. 이따금씩 책장을 넘기느라 움직이는 것이 마치 잠자면서 꿈과 꿈 사이에 뒤척이는 사람들 같다. 아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사람들은 왜 언제나 이렇지 못할까? 어떤 사람한테 다가가 가만히 건드려 보라. 그 사람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일어나다가 옆에 앉은 사람을 조금 건드려서 사과를 한다면 그는 당신의 목소리가 울린 쪽으로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 그의 얼굴은 비록 당신을 향하고 있지만 당신을 보고 있지는 않고 그의 머리카락은 잠자고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 같은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는 여기 앉아서 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운명인가. 도서관에서 지금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대충 삼백 명 정도가 된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 시인을 갖고 있을 수는 없다(그들이 무엇을 읽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삼백 명의 시인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초라한 이인 내가, 외국인인 내가 어떤 운명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보라. 나는 시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 비록 가난하고, 매일 입고 다니는 옷은 한두 군데 해지기 시작하고, 내 신발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내 옷의 칼라는 깨끗하다. 속옷도 그렇다. 지금 이대로 큰 번화가의 아무 제과점에라도 들어가 이 손을 거리낌없이 과자접시에 내밀어 하나를 집어들 수도 있다. 그래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욕하거나 내쫓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 손은 좋은 가문 출신인데다가 매일 네다섯 번씩 씻고 있기 때문이다. 손톱 밑에는 때도 끼지 않았고 글을 쓰는 손가락에 잉크가 묻어 있지도 않다. 특히 손목이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거기까지 닦지는 않는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들은 깨끗한 내 손에서 무언가 추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가게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러나 예를 들어 생 미셸 거리나 라신 거리에는 그런 것에 속지 않고 내 손목을 비웃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고는 그것을 알아버린다. 사실은 내가 자신들과 같은 무리인데 약간의 희극을 연출하고 있을 따름임을 아는 것이다. 지금은 카니발 기간이어서 그들은 나의 즐거움을 망치려 하지 않는다. 다만 히죽 웃으며 눈을 꿈벅이는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밖의 사람들은 나를 신사처럼 대해준다. 게다가 그들은 누군가 옆에 있기라도 하면 하인처럼 굽실거린다. 내가 마치 모피옷을 입고 뒤에는 전용 마차가 따라오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대해준다. 가끔 나는 그들에게 동전 두 닢을 주곤 하는데 그럴 때면 그들이 거절하면 어쩔까 하는 걱정으로 손이 떨린다. 그러나 그들은 동전을 받아준다. 그들이 다시금 히죽 웃거나 눈을 꿈벅이지만 않아준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텐데. 그들은 누구일까?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무엇을 보고 그들은 나를 알아보았을까? 내 수염이 약간은 손질이 안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내 수염이 아주 조금은, 내게 언제나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그들의 병들고 노쇠하고 바랜 수염을 상기시켜주기는 한다. 그렇지만 수염을 그냥 내버려둘 권리도 내게는 없단 말인가? 일에 바쁜 많은 이들은 수염 손질을 등한시 하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아무도 바로 그들이 내던져진 자들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거지일 뿐 아니라 내던져진 자들임이 분명하다. 아니, 원래는 거지가 아니다. 그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운명이 뱉어버린 인간의 찌꺼기이며 껍질이다. 그들은 운명의 침에 흥건히 젖어 벽과 가로등과 광고탑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아니면 어둡고 지저분한 흔적을 남기며 골목길을 천천히 흘러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노파는, 단추 몇 개와 바늘이 굴러다니는 침실 탁자의 서랍을 들고 어느 움막에서 기어나온 듯한 이 노파는 대체 내게 무엇을 원했던 걸까? 왜 그녀는 계속 내 곁에 붙어 따라오면서 나를 관찰한 것일까? 짓무른 눈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려 애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눈은 불그스레한 눈꺼풀에 병자가 뱉어놓은 녹색의 가래가 엉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어떻게 해서 그때 그 머리가 허연 작은 여인은 십오 분 동안이나 진열장 앞의 내 곁에 서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녀는 꼭 쥔 지저분한 두 손에서 아주 천천히 삐져나오던 그 기다란 낡은 연필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진열된 물건을 보면서 짐짓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행동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그녀를 보았고, 알아차렸으면,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필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어떤 신호라는 것을,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사람끼리의 신호이자 내던져진 자들만이 알고 있는 신호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어디론가 가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가 암시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정말 무슨 사전 약속이 있으며, 이 신호는 미리 정해진 것이고 이 장면도 사실은 내가 기대했던 것이라는 느낌을 계속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비슷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날이란 하루도 없다. 저녁 무렵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한낮의 거리에서도 갑자기 작은 남자가 늙은 여인이 나타나서는 고개를 끄떡이고 내게 무엇인가를 내보이고는 모든 임무를 다했다는 듯 다시 사라져버리곤 한다. 언젠가는 그들이 내 방으로 찾아올 작정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분명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관리인에게 저지당하지 않도록 일을 꾸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도서관에서는 나는 당신들로부터 안전하다. 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오려면 특별한 입장권이 있어야 한다. 이 입장권을 가졌다는 점에서 나는 당신들보다 우월하다.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조금은 두려워하며 거리를 지나온다. 그리고는 마침내 여기 유리문 앞에 이르러서는 마치 집에라도 온 듯 그 문을 열고는 다음 문으로 가서 내 입장권을 제시한다(당신들이 내게 물건을 내미는 것처럼 말이다. 단지 차이점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고 내가 하는 행동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책들에 둘러싸여 있게 된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당신들한테서 떨어져 나와 나는 여기 앉아 안심하고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 당신들은 시인이 무엇인지 알기는 하는가? 베를렌을 아는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무 기억도 없다고? 그럴 것이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과 그 시인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들이 아무런 구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읽고 있는 시인은 다른 사람이다. 파리에 살고 있지 않은 아주 다른 사람이다. 산 속의 조용한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시는 마치 투명한 공기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 같다. 그는 자신의 창문과 깊은 생각에 잠겨 사랑스럽고 쓸쓸한 먼 풍경을 투영하고 있는 책장의 유리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행복한 시인이다. 그는 바로 내가 정말로 되고 싶었던 그런 시인이다. 소녀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소녀들에 대해 그렇듯 많이 알고 싶다. 그는 몇백 년 전에 살았던 소녀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녀들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그는 그녀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말한다. 그는 옛날식으로 둥글게 멋을 부린 늘씬한 활자로 가늘게 씌어진 나직한 그녀들의 이름과, 자기보다 나이가 든 친구들의 결혼 후의 이름, 그 속에 벌써 조금은 운명과 약간의 실망과 죽음이 함께 울리는 그런 이름들을 부른다. 아마도 그 시인의 마호가니 책상 서랍에는 빛바랜 그녀들의 편지며 일기책에서 떨어져 나온 낱장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생일이며 여름날의 파티, 생일날의 일이 적혀 있을 것이다. 또는 그의 침실 뒤쪽에 놓여 있는 불룩한 옷장 서랍 안에는 그 소녀들의 봄옷이 간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부활절에 처음으로 입어본 얼룩무늬 망사로 만든 새하얀 옷은 원래는 여름철의 것이나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으리라. 아아, 물려받은 집의 조용한 방에 앉아서 아주 고요하고 안정된 물건들에 둘러싸여 바깥의 화창한 연녹색 정원에서 갓 자라난 박새들이 처음으로 내는 울음소리와 멀리서 울리는 마을 시계소리를 듣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운명인가. 그렇게 앉아서 오후의 따뜻한 한 줄기 태양을 바라보고 과거의 소녀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 세상 어딘가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숨겨진 시골집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도 그런 시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 하나면, 지붕 밑의 밝은 방이면 내게는 충분하다. 그곳에서 오래된 내 물건들과 가족사진과 책과 함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안락의자 하나와 꽃과 개, 그리고 돌길을 걸을 때 필요한 지팡이를 하나 갖고 싶다. 그 밖에는 더 필요한 게 없다. 다만 누런 상아빛 가죽으로 장정을 하고 꽃무늬를 새긴 공책 한 권이면 족하다. 거기에 나는 글을 쓸 것이다. 나는 많은 생각과 많은 이들에 대한 추억을 지니고 있기에 거기에 그 모든 것을 써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다르게 되어버렸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의 옛 가구들은 맡겨둔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고 나 자신은 세상이 몸뚱이 하나 가릴 집도 없다. 비가 내 눈 속으로 들이친다. 나는 때때로 센 강변의 작은 상점들 옆을 지나간다. 골동품 가게나 작은 고서점, 동판화 가게의 진열장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가 그 가게로 들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겉보기에 장사하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앉아 있는 게 보인다. 그들은 그렇게 앉아서 아무 근심 없이 무엇인가를 읽고 있다. 내일은 걱정하지도 않으며 성공하려고 초조해하지도 않는다. 그들 앞에는 기분 좋게 발을 뻗고 앉아 있는 개나 적막을 더욱 커다랗게 만드는 고양이가 한 마리쯤 있다. 고양이는 마치 책표지의 이름을 지우기라도 하는 듯 늘어선 책들을 따라 미끄러져간다. 아아, 이것으로 충분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때때로 이처럼 물건으로 가득 찬 진열장이 있는 가게나 하나 사서 개와 함께 한 이십 년쯤 앉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나면 좀 낫다. 다시 한 번 해 본다. “아무 일도 아니야.” 이러면 좀 도움이 될까? 난로에서 다시 연기가 나서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 것쯤은 사실 불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 몹시 피곤하고 감기 기운이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루 종일 골목을 싸돌아다닌 것은 순전히 내 책임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앉아 있었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몸을 녹이러 들어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벨벳을 씌운 긴 의자에 앉아서 난방 장치의 격자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다. 그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그들의 발은 마치 벗어놓은 장화 같았다. 그들은 매우 겸손한 사람들로 주렁주렁 훈장을 단 검은 제복을 입은 관리인이 눈감아주기라도 하면 아주 고마워한다. 그러나 내가 들어서면 그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눈을 찌푸리고 살짝 고개를 끄떡인다. 내가 그림 앞을 이리저리 옮겨갈 때도 그들은 계속 나를 눈으로 뒤쫓는다. 탁하고 무른 눈으로 나를 지켜본다. 그러니 루브르 박물관에 가지 않기를 잘했다. 나는 계속 돌아다녔다. 얼마나 많은 시가지와 동네, 묘지, 다리, 골목을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어디에선가 나는 채소 수레를 밀고 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꽃양배추우, 꽃양배추우”라고 외쳤는데, “우” 발음을 할 때 아주 독특하게 탁한 소리를 냈다. 그 남자 옆에는 몹시 뚱뚱하고 추한 여인이 걸어가면서 이따금씩 그를 쿡쿡 찔렀다. 여자가 찌를 때마다 그 남자는 외치는 것이었다. 때로는 혼자 알아서 외치기도 했는데 그래봐야 소용이 없었다. 물건을 사줄 만한 집 앞에 다다랐기 때문에 곧바로 다시 외쳐야 했다. 그 남자가 장님이라고 내가 말했던가? 아니라고? 그는 장님이었다. 그는 장님이었고 그리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만 말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남자가 밀고 가는 수레를 빼먹고 말하는 것이 되고, 꽃양배추라고 외치는 말을 내가 못 알아들은 듯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일일까? 설사 그게 중요하다 해도 그 일 전체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가 문제되는 게 아닐까? 나는 늙은 남자를 보았는데 그는 장님이었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것을 나는 보았다. 내가 본 것은 그것이다. 그런 집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을까? 아니,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할 것이다. 이버네는 아무것도 빼지 않고, 더 보태지도 않은 사실 그대로다. 내가 어디서 보탤 것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것을 다들 알고 있다. 집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는 더 이상 그 자리에는 없는 집이라고 해야 한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부서진 집 말이다. 아직 거기 남아 있는 것은 이 부서진 집 옆에 서 있던 다른 집, 이웃의 높은 건물들뿐이었다. 한쪽 측면을 모두 부숴버렸기 때문에 그 집들은 무너질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무너진 집의 바닥과 겉으로 드러난 이웃 건물의 외벽 사이에 타르를 칠한 긴 돛대 간은 기둥들을 비스듬히 걸쳐놓은 게 보였다. 내가 벽을 말하고 있다고 앞에서 이미 말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아직 남아 있는 이웃집의 맨 앞쪽 벽이 아니라(그렇게들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서진 집의 마지막 벽이다. 그 벽의 안쪽이 들여다보였다. 여러 층마다 아직 벽지가 붙어 있는 방 안의 벽이 들여다보였고 여기저기 천장과 방바닥의 이음새가 보였다. 이 방의 벽 옆으로 전체 외벽을 따라 지저분하고 희끗희끗한 공간이 남아 있었는데, 그 사이로 화장실의 녹슨 하수관이 벌레가 기어가거나 창자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모양으로 말할 수 없이 역겹게 뻗어 있었다. 전등에 연결된 가스가 지나갔던 자리로 찬장 가장자리에 뿌옇게 먼지 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흔적은 여기저기 예기치 못한 곳에서 휘어져서는 색칠한 벽 사이, 시커멓게 무참히 뚫린 구멍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벽 그 자체였다. 이 방들 속에서의 끈질긴 삶은 밟혀 없어지지 않았다. 삶은 아직 거기 남아 있었다. 삶은 아직도 박혀 있는 못에 매달려 있었고, 손바닥 넓이만큼 남은 방바닥에 붙어 있었고, 아직도 조금은 내부 모습이 남아 있는 방 모서리 틈새에 숨어 들어가 있었다. 이 삶은 또한 서서히 매년 변해간 색깔 속에도 들어 있었다. 푸른색이 우중충한 녹색으로, 녹색이 회색으로, 누런색이 낡고 퇴색한 흰색으로 변색되며 썩어가는 색깔 속에도 있었다. 그러나 삶은 또한 거울이나 그림, 장롱 뒤의 빛이 덜 바랜 부분에도 남아 있었다. 삶은 거기에다 그 물건들의 윤곽을 새기고 덧붙여놓고 이 숨겨진 곳에서 거미와 먼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제 그 부분이 밖으로 드러났다. 긁혀서 생긴 줄무늬에도, 벽지 아래 부분, 습기가 차서 부풀어오른 곳에도 삶은 있었다. 삶은 찢어진 조각에 붙어 나부끼고 있었고, 오래 전에 생긴 더러운 얼룩들에서도 배어나왔다. 무너진 칸막이 벽의 파편으로 둘러싸여 있는 푸르고, 녹색이며 누르스름한 색이었던 이 벽들에서는 삶의 공기가, 어떤 바람도 흩트려놓을 수 없었던 질기고 무거우며 곰팡내 나는 공기가 뿜어 나왔다. 그 속에는 한낮과 질병들, 내뱉은 입김과 여러 해 동안 쌓인 연기, 겨드랑이 밑에서 나와 옷을 축축이 적시는 땀, 입냄새, 썩어가는 발에서 나는 고린내가 들어 있었다. 또한 아주 강한 오줌 지린내와 그을음이 타는 냄새, 감자요리에서 나오는 뿌연 김, 변해가는 식용유의 미끈둥한 악취가 스며 있었다. 거기에는 내팽개쳐둔 젖먹이에게서 나는 달콤하고 긴 여운이 남는 냄새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불안의 냄새, 사춘기 사내애들의 침대에서 나는 끈적한 냄새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여기에 섞여들었다. 저 아래 골목 바닥에서 증발해 올라오는 냄새와 깨끗하지 못한 도시의 상공에서 빗물에 녹아 내려오는 냄새들이 섞였다. 언제나 같은 골목에 머물러 있도록 길들여진 약한 바람이 또한 많은 것을 날라왔고 그 밖에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냄새들도 있었다. 마지막 것만 남겨놓고 다른 모든 벽들은 남김없이 부서졌다고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 마지막 벽에 대해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앞에 오래 서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맹세컨대 그 벽을 알아보자마자 나는 뛰기 시작했다. 그 벽을 알아본 것은 참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이 바로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안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 모든 일을 겪고 나는 지쳐버렸다. 기진맥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남자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것은 내게는 너무 가혹했다. 그 남자는 내가 계란 프라이를 먹으러 들어간 자그만 간이식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다. 그런데 여전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계란 프라이가 나오기도 전에 나는 거리로 뛰쳐나왔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빽빽한 물결이 내게로 밀려왔다. 카니발 저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시간이 넉넉해서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서로들 부대끼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가설 무대에서 비치는 빛을 받아 환했고, 벌어진 상처에서 고름이 흘러나오듯 웃음소리가 입에서 솟아나왔다. 내가 점점 초조해져서 앞으로 뚫고 나가려 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웃음을 터뜨렸고 더 빽빽하게 밀려들었다. 어쩌다가 한 여인의 숄이 내 옷에 걸렸다. 나는 그것을 질질 끌고 다닌 모양이었는지 사람들이 나를 붙들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웃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내 눈에다 콩페티를 한 주먹 던졌다. 마치 채찍으로 한 대 맞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거리 모퉁이는 온통 밀려드는 사람들로 꽉 막혀버렸다. 전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마치 선 채로 성교를 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미친 사람처럼 찻길가의 사람들 사이로 달려갔는데 사실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내가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조금도 변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눈을 들어보니 여전히 한쪽에는 똑같은 집들이, 다른 쪽에는 가설 무대가 보였다. 아마도 모든 것이 꼼짝 않고 서 있는데 단지 나와 사람들 머리 속에서 현기증을 느껴서 모든 것이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걸 곰곰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었고, 내 피 속에 무언가 너무 커다란 것이 들어 있어서 혈관을 잡아늘이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마비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동시에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공기가 바닥이 나서 이제는 내 폐가 뿜어낸 공기를 다시 들이미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견뎌낸 것이다. 이제 나는 내 방의 등불 앞에 앉아 있다. 조금 춥다. 하지만 난로를 다시 피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난로에서 연기가 나서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앉아서, 생각한다. 내가 가난하지만 않다면 전에 살던 사람들의 손때가 잔뜩 묻어 있고, 이처럼 낡아빠진 가구가 있는 방이 아닌 다른 방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처음에는 머리를 이 안락의자에 기대기가 참말이지 아주 힘들었다. 의자의 녹색 커버에는 누구의 머리든 다 들어맞을 것 같은, 기름에 전 잿빛의 움푹 파인 홈이 나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의자에 기댈 때면 머리 밑에 손수건을 놓는 조심성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제 너무 지쳤다. 그냥 앉아보니 그런대로 괜찮고 약간 들어간 부분이 마치 자로 잰 듯 내 뒷머리에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내가 가난하지 않다면 무엇보다도 좋은 난로를 사고 싶다. 그리고 산간 지방에서 가져온 순수하고 화력이 좋은 장작을 쓸 것이다. 이 한심한 조개탄 같은 것은 절대 쓰지 않을 것이다. 조개탄이 뿜어대는 연기는 숨 막히고 머리를 아주 어지럽게 만든다. 다음으로는 거친 소리를 내지 않으며 난로를 치우고, 내가 필요한 만큼 불을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십오 분 동안이나 난로 앞에 꾸부리고 앉아서 들쑤석거리고 있다 보면, 가까이 있는 불기에 이마의 피부가 당겨지고 열기가 눈으로 들어와서 하루 종일 써야 할 힘을 온통 소진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면 바로 지쳐버린다. 너무 혼잡할 때면 나는 가끔 마차를 불러 타고 그 옆을 지나갈 것이다. 나는 매일 뒤발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리라······ 더 이상 간이식당으로 기어들어가지는 않으리라······ 그런데 그 남자가 뒤발에 가본 적이 있을까? 아니겠지. 그런 곳에서 그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들여보내지는 않으니까. 죽어가는 사람이라고? 나는 지금 내 방에 앉아 있다. 그러니 조용히 내가 겪은 일을 잘 생각해볼 수가 있다. 아무것도 불분명하게 놔두지 않는 게 좋다. 간이식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처음에는 내가 자주 앉던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자그만 조리대 쪽에 인사를 하고 주문을 한 다음 옆자리에 앉았다. 그때 나는 그 남자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그의 존재를 느꼈다. 바로 그가 꼼짝달싹하지 않고 있음을 나는 느낀 것이다. 그 의미를 나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우리들 사이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나는 그가 놀라움 때문에 굳어버렸음을 알았다. 몸 안에서 일어난 무엇인가에 깜짝 놀라 그의 온몸이 마비된 것을 알았다. 아마도 혈관이 터졌거나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독이 이제 막 심장에 이르렀거나, 세계를 변화시키는 태양과 같은 커다란 종기가 그의 뇌 속에서 부풀어오른 것 같았다. 그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이 힘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내 상상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벌떡 일어나 뛰쳐나오고야 말았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그는 두꺼운 검정색 외투를 입고 긴장한 잿빛 얼굴을 모직 목도리 깊숙이 파묻고 앉아 있었다. 그의 입은 마치 커다란 힘에 눌린 듯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이 아직도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지는 말하기 어려웠다. 눈에는 김이 서린 회색 안경이 걸쳐 있고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콧방울은 잔뜩 부풀어 있었고 푹 꺼진 관자놀이 위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무더우 l 속에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귀는 길고 누르스름했으며 뒤에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렇다, 그 남자는 이제 자신이 지금 모든 것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뿐만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 순간만 지나면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 식탁, 이 찻잔 그리고 그가 꽉 붙들고 있는 이 의자, 모든 일상의 것들과그렇게도 가까운 것들이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낯설게 되고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듯 그 남자는 거기 앉아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저항을 하고 있다. 나를 괴롭히는 이들이 나를 놓아준다고 해도, 나를 괴롭히는 이들이 나를 놓아준다고 해도, 나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으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저항하고 있다.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그렇지만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떼어놓기 시작하는 무엇인가가 내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이미 아무도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얼마나 섬뜩했던가. 그러면 내게는 고독한 얼굴이 떠올랐다. 베개에서 얼굴을 들어올려 무언가 친숙한 것을, 어디선가 한 번이라도 본 듯한 것을 찾아보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고독한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내 공포가 이렇게 크지만 않다면 모든 것을 다르게 보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자신을 위로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 이 변화가 말할 수 없이 두렵다. 멋지게 보이는 이 세상에 나는 아직 전혀 익숙해지지도 못했지 않은가. 그러니 다른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마음에 드는 의미들 사이에 나는 기꺼이 머물고 싶다. 만일 무언가 정히 변해야만 한다면 적어도 개들 사이에서라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친숙한 세계와 지금과 같은 물건이 있는 개들 사이에서라도 말이다. 아직 한동안은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손이 나에게서 멀어져서 내가 무언가를 쓰려고 하면 생각지도 않은 다른 말을 쓰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해석의 시대가 도래하여 말과 말 사이의 연결이 없어지고, 모든 의미는 구름처럼 흩어지고 물처럼 흘러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위대한 것 앞에 서 있는 사람과 같은 심정을 느낀다. 전에도 종종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이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게 기억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쓰는 게 아니다. 내가 씌어질 것이다. 나는 변화해가는 인상이다. 아아, 아직 조금 모자란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인정할 수 있을 텐데. 단지 한 발짝만 옮기면 나의 이 깊은 비참함이 지극한 기쁨이 될 텐데. 그러나 그 발걸음을 내딛을 수가 없다. 나는 무너졌고 더 이상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나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 어디선가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어오리라 믿어왔다. 여기 내 앞에 내 손으로 쓴 기도의 말이, 내가 매일 밤마다 드린 기도의 말이 놓여 있다. 그것을 나는 여러 책에서 찾아내어 옮겨놓았다. 늘 내 옆에 두고, 내가 직접 쓴 내 말인 것처럼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나는 이 문구들을 다시 한 번 옮겨 적어야겠다. 여기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옮겨 적으련다. 그렇게 하면 읽을 때보다 더 오래 음미할 수 있고, 다너 하나하나가 더 오래 지속되며, 사라지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리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에게 불만스럽고 내 자신에게도 불만스럽지만 나는 밤의 정적과 고독 속에서 나를 되찾고 조금이나마 기운을 얻으려 한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의 영혼이여, 내가 노래했던 이들의 영혼이여, 나를 도와주고 내게 힘을 주오. 세상의 온갖 거짓과 나쁜 악취로부터 나를 지켜주오. 그리고 나의 주, 나의 신이여! 내가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이 아니며, 내가 경멸하는 자들보다 더 보잘것없는 인간이 아님을 내 자신에게 증명해줄 아름다운 시 몇 줄을 쓸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멸시받는 자의 자식으로 나라에서 가장 천한 자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었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 그들은 나의 앞에 저승길을 터놓았다. ······ 그들이 나를 망치기란 너무도 쉬워서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 ······ 이제 나의 넋은 모두 쏟아졌고 괴로운 나날이 나를 사로잡았다. 밤이면 도려내듯이 내 뼈를 쑤셔대는데 나를 쫓는 자는 쉬지를 않는다. 내 질병의 힘은 커서, 옷은 더러워지고 속옷의 깃처럼 몸에 꼭 달라붙는다······ 내 창자는 끓어올라 쉴 줄 모르고 환난의 날은 나를 엄습했나니······ 내 비파는 탄식의 소리가 되었고, 내 피리는 통곡의 소리로 변했구나.”   출처 영혼이 머무는 곳
117    릴게 시모음 댓글:  조회:694  추천:0  2022-08-31
Rainer Maria Rilke 작별 소녀의 기도 엄숙한 시간 석상의 노래 봄을 그대에게 고독 자신이 직접 쓴 릴케의 묘비명 사랑은 어떻게 당신 말씀의 파수꾼으로 고독한 사람 고아의 노래 살로메에게 바치는 시 존재의 이유 흰장미 사랑의 노래 장미의 내부 삶의 평범한 가치 가을의 종말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가을날(Herbsttag) 순례의 서 가을 그리움이란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피에타 서시(序詩)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받는다는 것 고독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만년의 밤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1부/ 3편) 과수원 두이노의 비가-제 4 비가 (1-18) *두이노의 비가 ~~~~~~~~~~~~~~~~~~~~ 작별 우리 이제 서로 작별을 나누자, 두 개의 별처럼, 저 엄청난 밤의 크기로 따로 떨어진, 그거야 하나의 가까움이려니, 아득함을 가늠하여 가장 먼 것에서 스스로를 알아보는. ~~~~~~~~~~~~~~~~~~~ 소녀의 기도 그 언젠가 그대가 나를 보았을 때엔 나는 너무도 어렸습니다. 그래서 보리수의 옆가지처럼 그저 잠잠히 그대에게 꽃피어 들어갔지요. 너무도 어리어 나에겐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나에게 말하기까지 나는 그리움에 살았었지요. 온갖 이름을 붙이기에는 내가 너무나 큰 것이라고. 이에 나는 느낍니다. 내가 전설과 오월과 그리고 바다와 하나인 것을, 그리고 포도주 향기처럼 그대의 영혼 속에선 내가 풍성한 것을... ~~~~~~~~~~~~~~~~~~~ 엄숙한 시간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우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슬퍼 울고 있다. 지금 이 밤 어디에선가 웃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밤에 웃는 사람은 나를 비웃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가고 있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가고 있는 사람은 나를 향해 걷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죽어가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보고 있다. ~~~~~~~~~~~~~~~~~~~~ 석상의 노래 소중한 목숨을 버릴만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누구일까. 나를 위하여 누군가 한 사람 바다에 익사한다면 나는 돌에서 해방되어 생명체로, 생명체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도 나는 끓어오르는 피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돌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생명을 꿈꾼다. 생명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나를 잠깨울수 있는 만큼 용기를 가진자는 아무도 없는가. 그러나 언젠가 내가, 가장 귀중한 것을 내게 주는 생명을 갖게 된다면------ ~~~~~~~~~~~~~~~~~~~~ 봄을 그대에게 갖가지의 기적을 일으키는 봄을 그대에게 보이리라. 봄은 숲에서 사는 것, 도시에는 오지 않네. 쌀쌀한 도시에서 손을 잡고서 나란히 둘이서 걷는 사람만 언젠가 한번은 봄을 볼 수 있으리. ~~~~~~~~~~~~~~~~~~~~ 고독 고독은 비처럼 바다로부터 저녁을 향해 올라 온다. 멀리 외딴 벌판으로부터 고독은 언제나 외로운 하늘로 올라가서는 처음 그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모든 골목길마다 아침을 향해 뒤척일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신들은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를 떠나 갈 때, 그리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하는 그 뒤엉킨 시간에 비 되어 내리는 고독은 냇물과 더불어 흘러 간다. ~~~~~~~~~~~~~~~~~~~~ 자신이 직접 쓴 릴케의 묘비명 장미여, 아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Rose, oh reiner Widersprl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 사랑은 어떻게 그리고 사랑은 어떻게 그대를 찾아왔던가? 빛나는 태양처럼 찾아 왔던가, 아니면 우수수 지는 꽃잎처럼 찾아 왔던가? 아니면 하나의 기도처럼 찾아 왔던가? --- 말해다오 반짝이며 행복이 하늘에서 풀려 나와 날개를 접고 마냥 흔들리며 꽃처럼 피어나는 내 영혼에 커다랗게 걸려 있었더니라 ~~~~~~~~~~~~~~~~~~~~ 당신 말씀의 파수꾼으로 나를 당신 말씀의 파수꾼으로 삼아 주소서. 돌에 귀기울일 줄 아는 자가 되게 해 주소서. 나에게, 바다의 고독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주소서. 양 기슭의 맞부딪치는 소음 속에서 멀리 밤의 음향 속으로 나를 당신의 텅빈 나라로 보내 주소서. 그곳을 지나 끝없는 바람이 불어 큰 수도원의 승복처럼 아직 살아 보지도 못한 삶의 주위에 서 있는 그곳에 어떤 유혹에 의해서도 다시는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거기서 나는 순례자 쪽에 서렵니다. 눈 먼 늙은이의 뒤를 따라 모르는 사람뿐인 길을 가렵니다. ~~~~~~~~~~~~~~~~~~~~ 고독한 사람 낯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나는 영원히 귀향길에 있습니다. 그들 식단을 보면 충족된 날들로 가득하지만 내게는 아득한 곳의 모습만 있습니다. 내 얼굴 속에 세상이 스며듭니다. 달처럼 어쩌면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 그러나 세상은 어떤 감정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세상의 온갖 언어에는 삶이 끼어 있습니다. 멀리서 내가 가져온 것들은 희귀하게 보이면서, 제몸에 매달려 있죠: 그들의 넓은 고향에서 그들은 짐승이지만, 여기서 그들은 부끄러움을 타며 숨을 죽입니다. ~~~~~~~~~~~~~~~~~~~~ 고아의 노래 나는 아무도 아닙니다. 앞으로도 아무도 되지는 않으렵니다. 지금은 존재하기에도 너무 초라한 몸 그러나 훗날에도 마찬가지일 게요. 어머님들 아버님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말 키워 주신 보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잘려지는 몸입니다. 아무한테도 쓸모없는 신세입니다. 지금은 너무 이르고 내일이면 너무 늦습니다. 내가 걸친 옷은 이 옷 한 벌뿐 헤어지며 빛이 바랩니다. 영원을 간직하는 옷입니다. 어쩌면 신 앞에서도 지킬 수 있는 영원 입니다. 나한테 남은 것이라고는 이 한 줌 머리카락뿐입니다.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지만) 한때는 사랑하는 이의 것이었어요. 이제는 사랑이라고는 모르는 그 사람 이어요. ~~~~~~~~~~~~~~~~~~~~ 살로메에게 바치는 시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나는 당신을 가슴으로 잡을 것입니다. 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럼 나의 뇌가 심장으로 고동칠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뇌에 불을 지르면 그 때는 당신을 핏속에 실어 나르렵니다. ~~~~~~~~~~~~~~~~~~~~ 존재의 이유 아! 우리는 세월을 헤아려 여기저기에 단락을 만들고, 중지하고, 또 시작하고 그리고 두 사이에서 어물 거리고 있소. 그러나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어쩌면 모두가 친한 관계에 있고, 태어나고, 자라고 자기 자신으로 교육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결국 그저 존재하면 되는 겁니다. 다만, 단순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말이요. 마치도 대지가 사계절의 돌아감에 동의 하면서 밝아졌다, 어두워 졌다 하며 공간 속에 푹 파묻혀서 하늘의 별들이 편안하게 위치하는 그 숱한 인력의 그물 속에 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이...... ~~~~~~~~~~~~~~~~~~~~ 흰 장미 너는 죽음에 몸을 맡긴 채 잎새 위에 서럽게 얼굴을 뉘인다. 유령 같은 빛을 숨쉬며 희푸른 꿈을 띠고있다. 하지만 노래마냥 마지막 가냘픈 빛을 띠며 아직도 하룻밤을 달콤한 네 향기 방안에 스민다. 네 어린 영혼은 불안스럽게 이름없는 것을 더듬거리다 내 가슴에서 웃으며 죽는다. 내 누이인 흰 장미여. ~~~~~~~~~~~~~~~~~~~~ 사랑의 노래 당신의 영혼이 내 영혼에 닿지 않은 바에야 어찌 내 영혼을 간직하겠습니까? 어찌 내가 당신 아닌 다른 것 에게로 내 영혼을 쳐 올려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어떤 것 옆, 당신의 깊은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낯선 곳에 내 영혼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은 확실히 마치 두 줄의 鉉에서 한 音을 짜내는 활 모양의 바이올린처럼 우리를 한데 묶어 놓습니다. 어떤 악기에 우리는 얽혀져 있는 것인가요?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건가요? 오, 달콤한 노래입니다. ~~~~~~~~~~~~~~~~~~~~ 장미의 내부 어디에 이런 내부를 감싸는 외부가 있을까. 어떤 상처에 이 보드라운 아마포 (亞麻布)를 올려놓는 것일까. 이 근심 모르는 활짝 핀 장미꽃의 내부 호수에는 어느 곳의 하늘이 비쳐 있을까. 보라, 장미는 이제라도 누군가의 떨리는 손이 자기를 무너뜨리리라는 것을 모르는 양 꽃이파리와 꽃이파리를 서로 맞대고 있다. 장미는 이제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다. 많은 꽃들은 너무나 충일하여 내부에서 넘쳐나와 끝없는 여름의 나날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점점 풍요해지는 그 나날들이 문을 닫고, 마침내 여름 전체가 하나의 방, 꿈속의 방이 될 때까지. ~~~~~~~~~~~~~~~~~~~~~ 삶의 평범한 가치 이따금 나는 륨 드 세인 같은 거리의 조그만 가게의 윈도우 앞을 어정거리는 일이 있다. 그것은 고물상이나 조그만 헌 책방의 동판화를 파는 가게로 어느 윈도우에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많이 들어차 있다. 나는 손님이 한 사람도 들어가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아마 장사를 하려고 가게를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역시 거기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앉아서 무엇을 읽고 있다. 정말 한가한 모습이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려고 억척을 피우는 모습이란 눈곱만치도 없다. 발치에는 살이 찐 개가 배를 깔고 누워 있다. 개가 아니면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꽂혀 있는 책에 몸을 비비며 표지의 등 글자를 지우듯이 걸어 다닌다. 그것은 주위의 조용함을 더욱 깊게 하는 것 같다. 아아, 이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느 가게 하나를, 구닥다리 물건이 차 있는 윈도우를 고스란히 사들여 개 한 마리와 함께 그 안에서 20년쯤 앉아 있을 수 있다면 하고. ~~~~~~~~~~~~~~~~~~~~ 가을의 종말 언제부터인가 눈앞에 만물의 변화가 보인다. 무엇인가 우뚝 서서 몸짓을 하며 죽이고 또 아픔을 준다. 시시로 또 아픔을 달리하는 모든 정원들. 샛노란 잎새들이 차차 짙으게 조락에로 물든다. 내가 걸어온 아득한 길 이제 빈 뜨락에서 가로수길을 바라보면 먼 바다에까지 이어닫는 음울하고 무거운 차디찬 하늘 ~~~~~~~~~~~~~~~~~~~~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데 익숙해야 하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 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기를 연마하는 일과가 되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 ~~~~~~~~~~~~~~~~~~~~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럽게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Herbsttag Herr: 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ß.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 Befiehl den letzten Früchten voll zu sein; gie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 drä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üß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ätter treiben. ~~~~~~~~~~~~~~~~~~~~ 순례의 서 내 눈빛을 지우십시오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십시오.나는 당신을 들을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팔이 꺾여도 나는 당신을 내 심장으로 붙잡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멈춘다면 나의 뇌수가 맥박 칠 것입니다 나의 뇌수를 불태운다면 나는 당신을 피속에 싣고 갈 것입니다 - 릴케가 연상의 여인 루 안드레아 살로메에게 첫사랑을 고백한시 ~~~~~~~~~~~~~~~~~~~~ 가을... 앞이 떨어집니다. 멀리서인 듯 떨어집니다. 하늘의 저 먼 정원이 시든 것처럼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집니다. 밤이면 저 무거운 대지가 모든 별들에서 고독으로 떨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떨어집니다. 이 손도 떨어집니다. 다른 것을 보십시오.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지요. 하지만 이 떨어짐을 부드러운 손으로 끝없이 맞아주는 누군가가 계십니다. Autumn The leaves are falling, falling as if from far up, as if orchards were dying high in space. Each leaf falls as if it were motioning "no." And tonight the heavy earth is falling away from all other stars in the loneliness. We"re all falling. This hand here is falling. And look at the other one. It"s in them all. And yet there is Someone, whose hands infinitely calm, holding up all this falling. Translated by Robert Bly 조두환 번역 ~~~~~~~~~~~~~~~~~~~~ 그리움이란 그리움이란 이런 것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의 삶 그러나 시간 속에 고향은 없는 것 소망이란 이런 것 매일의 순간들이 영원과 나누는 진실한 대화 그리고 산다는 것은 이런 것 모든 시간 중에서도 가장 고독한 순간이 어제 하루를 뚫고 솟아오를 때까지 다른 시간들과는 또다른 미소를 띠고 영원 속에서 침묵하고 마는 것 ~~~~~~~~~~~~~~~~~~~~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마음 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 피에타 이렇게, 예수여, 저는 당신의 발을 다시 봅니다, 제가 가슴 떨며 벗기고 씻겨드렸던, 그 때는 한 젊은이의 발이었지요. 내 드리운 머리카락 속에 당황하여 서 있던 모습 마치 가시덤불 속에 하얀 야수 같았지요. 이렇게 저는 당신의 사랑 받은 적 없는 팔다리를 봅니다 처음으로 이 사랑의 밤에. 우리는 아직 함께 누워 본 적도 없는데, 이제는 경이로와 지켜볼 뿐이로군요. 그런데, 보아요, 당신의 손이 찢겨 있군요-: 사랑하는 이여, 저 때문에, 제가 찔러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당신의 심장은 열려 있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군요: 어찌 저만 들어갈 수는 없었던가요. 이제 당신은 지쳤고, 당신의 지친 입술은 제 슬픈 입술에 아무런 욕구도 없군요-. 오 예수여, 예수여, 우리의 시간은 언제였나요? 어쩌면 기이하게도 우리 둘 다 몰락하는지. Pieta So seh ich, Jesus, deine Fusse wieder, die darmals eines J nglings Fusse waren, da ich sie bang entkleidete und wusch; wie standen sie verwirrt in meinen Haaren und wie ein wei es Wild im Dornenbusch. So seh ich deine nie geliebten Glieder zum erstenmal in dieser Liebesnacht. Wir legten uns noch nie zusammen nieder, und nun wird nur bewundert und gewacht. Doch, siehe, deine Haende sind zerrissen-: Geliebter, nicht von mir, von meinen Bissen. Dein Herz steht offen und man kann hinein: das haette duerfen nur mein Eingang sein. Nun bist du muede, und dein mueder Mund hat keine Lust zu meinem wehen Munde-. O Jesus, Jesus, wann war unsre Stunde? Wie gehn wir beide wunderlich zugrund. ~~~~~~~~~~~~~~~~~~~~ 서시(序詩)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면 네 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보라; 먼 곳을 배경으로 너의 집은 마지막 집인 듯 고즈넉하다: 네가 누구라도. 지칠대로 지쳐, 닳고닳은 문지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너는 한 그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하늘에다 세운다: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 너는 세계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 세계는 크고, 침묵 속에서도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 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 . . . Entrance Rainer Maria Rilke (Translated by Edward Snow) Whoever you are: in the evening step out of your room, where you know everything; yours is the last house before the far-off: whoever you are. With your eyes, which in their weariness barely free themselves from the worn-out threshold, you lift very slowly one black tree and place it against the sky: slender, alone. And you have made the world. And it is huge and like a word which grows ripe in silence. And as your will seizes on its meaning, tenderly your eyes let go. . . . (김재혁 / 고려대학교 교수 / 옮김) ~~~~~~~~~~~~~~~~~~~~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받는다는 것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오직 타버린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나긴 밤을 새운 아름다운 불빛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스러지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지속이다 Das Geliebtsein heißt aufbrennen. Lieben ist: Leuchten mit unerschöpflichem Öle. Geliebtwerden ist vergehen, Lieben ist dauern. ~~~~~~~~~~~~~~~~~~~~ 고독 고독은 비와도 같은 것 저녁을 찾아 바다에서 오른다. 멀고 먼 외진 들녘에서 오른다. 늘상 고적하기만 한 하늘로 옮겨갔다가 하늘에서 비로소 도시에 내린다. 아침을 향해 골목골목이 몸을 일으키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육신들이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 떠나갈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같은 잠자리에서 함께 잠들어야 할 때, 낮과 밤이 뒤엉킨 시각, 비가 되어 내리면 고독은 강물과 함께 흘러간다..... Einsamkeit DIE Einsamkeit ist wie ein Regen. Sie steigt vom Meer den Abenden entgegen; von Ebenen, die fern sind und entlegen, geht sie zum Himmel, der sie immer hat. Und erst vom Himmel fallt sie auf die Stadt. Regnet hernieder in den Zwitterstunden, wenn sich nach Morgen wenden alle Gassen und wenn die Leiber, welche nichts gefunden, enttauscht und traurig von einander lassen; und wenn die Menschen, die einander hassen, in einem Bett zusammen schlafen mussen: dann geht die Einsamkeit mit den Flussen.... ~~~~~~~~~~~~~~~~~~~~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합니다. 박해받으면 갇혀 있는 감옥에서 풀려나려는 듯이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나는 느낍니다.여기에는 모든 삶이 살고 있다고. 그러나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연주되지 아니한 선율이 하아프 속에 깃들여 있듯이 저녁 어스름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겠습니까. 물 위에 불어 오는 바람이겠습니까, 신호를 주고받는 나뭇자기겠습니까, 향기를 풍기는 꽃송이겠습니까, 늙어 가는 긴 가로수 길이겠습니까, 오고가는 따뜻한 동물들이겠습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새들이겠습니까.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신(神)이여, 당신입니까-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 만년의 밤 밤이여, 오 그대 나의 얼굴에서 깊이 속으로 녹아든 얼굴이여. 그대여, 내 경탄하는 관조의 가장 위대한 과중(過重)함이여. 밤이여, 나의 응시 속에 전율하며, 그러나 스스로 그토록 확고한 ; 고갈되지 않는 피조물, 대지의 잔해(殘骸) 위에 영원한; 저네들의 가장자리의 도피로부터 중간영역의 소리 없는 모험 속으로 불길을 던지는 어린 별들로 가득한; 그대 다만 존재함 자체만으로도, 우월한 존재여, 나는 얼마나 왜소한 모습인가 ― ; 허나 어두운 대지와 한 몸 되어 내 감히 그대 안에 존재하려 하노라. Aus dem Umkreis : N chte Nacht. Oh du in Tiefe gel stes Gesicht an meinem Gesicht. Du, meines staunenden Anschauns gr tes bergewicht. Nacht, in meinem Blicke erschauernd, aber in sich so fest; unersch pfliche Sch pfung, dauernd ber dem Erdenrest; voll von jungen Gestirnen, die Feuer aus der Flucht ihres Saums schleudern ins lautlose Abenteuer des Zwischenraums: wie, durch dein blo es Dasein, erschein ich, bertrefferin, klein ― ; doch, mit der dunkelen Erde einig, wag ich es, in dir zu sein. (SWII 178f.) ~~~~~~~~~~~~~~~~~~~~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1부/ 3편) A god can do so. But tell me how a man 신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말 해다오. is supposed to follow, through the slender lyre? 어떻게 인간이 가냘픈 수금을 통해 신을 따라갈 수 있는지를? His mind is riven. No temple of Apollo 그의 마음은 찢겨졌다. stands at the dual crossing of heart-roads. 이중의 마음의 십자로엔. 아폴론의 사원이 서 있지 않구나. Song, as you have taught it, is not desire, 노래는, 당신이 가르쳐 준 것처럼. 욕망이 아니다. not a winning by a still final achievement:묵묵한 마지막 성취에 의한 승리도 아니다: song is being. A simple thing for a god. 노래란 존재이고. 신에겐 단순한 것. But when are we in being? And when does he 그러나 우리는 언제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는 언제 turn the earth and stars towards us? 대지와 별을 돌려서 우리에게 향하게 해 줄 것인가? Young man, this is not your having loved, even if 젊은이여, 이것은 네가 사랑을 간직하는것만으로 될 수 없다.비록 your voice forced open your mouth, then – learn 그때, 네 목소리가 네 입을 열도록 만든다 할지라도. to forget that you sang out. It fades away. 네가 불렀던 노래를 잊어버리도록 배워라. 그건 사라질것이다. To sing, in truth, is a different breath. 노래한다는건. 사실은, 또 다른 호흡이며 A breath of nothing. A gust within the god. A wind. 아무것도 호흡하지 않는 것이며. 신 안의 돌풍이고. 바람이기 때문이다. ~~~~~~~~~~~~~~~~~~~~ 과수원 1 내가 만일 빌려온 언어로 그대에게 편지를 쓸 용기를 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과수원이라는 이 소박한 명사를 사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그 명사 하나에 사로잡혀 오래 전부터 고통스러워했다. 이 명사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서 흔들리는 너무나 막연한 하나의 의미나, 또는 그보다 못한 방어하는 울타리라는 의미 중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가엾은 시인이여. 과수원 : 오, 너를 단순하게 이름 부를 수 있는 리라의 특권이여 ; 꿀벌들을 매혹하는 비할 데 없는 말, 숨쉬고 기다리는 말... 고대의 봄을 숨기고 있는 명료한 명사, 가득 차 있으면서도 투명한 말, 그 대칭적인 음절 안에서 모든 것을 배가시킴으로써 풍요로워지는 말. VERGER Rainer Maria Rilke 1 PEUT-ÊTRE que si j"ai osé t"écrire, langue prêtée, c"était pour employer ce nom rustique dont l"unique empire me tourmentait depuis toujours : Verger. Pauvre poète qui doit élire pour dire tout ce que ce nom comprend, un à peu près trop vague qui chavrre, ou pire : la cloture qui défend. Verger : o privilège d"une lyre de pouvoir te nommer simplement ; nom sans pareil qui les abeilles attire, nom qui respire et attend ... Nom clair qui cache le printemps antique, tout aussi plein que transparent, et qui dans ses syllabes symtriéques redouble tout et devient abondant. - 릴케전집 3. 「완성시(1906 ~ 1926). 프랑스어로 쓴 시」(책세상 , 2001, 옮긴이 김정란)에서 (원문: "Rilke Werke", Zweite Auflage, Insel Verlag, 1982) ~~~~~~~~~~~~~~~~~~~~ 두이노의 비가-제 4 비가 (1-18) 오 생명의 나무여, 겨울은 언제이뇨? 우리는 한 마음이 아니다. 철새들처럼 그렇게 때를 알지도 못해 뒤쳐지고 늦어서야 우리는 느닷없이 억지 바람을 일으켜 무심한 못 위로 떨어질 뿐이다. 피고 지는 것을 우리는 동시에 의식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가고 있는 사자들은 무기력을 모르련만. 그러나 우리가 서로 아주 하나라고 생각하는 곳에서도 이미 상대편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적대감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 여인들도 언제나 서로 안에 하나가 되어 가장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거기 아득한 넓이와 사냥과 고향이 약속되어 있건만. 한 순간의 그림을 위한 여기에도 애써 대조의 바탕이 마련된다. 우리가 그것을 보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아주 분명하게 우리를 아니까. 우리는 감정의 윤곽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밖에서 그것을 형성해 주는 것일뿐. Die vierte Elegie 1-18 O Baeume Lebens, o wann winterlich? Wir sind nicht einig. Sind nicht wie die Zug- voegel verstaendigt. Ueberholt und spaet, so draegen wir uns ploetzlich Winden auf und fallen ein auf teilnahmslosen Teich. Bluehn und verdorrn ist uns zugleich bewusst. Und irgendwo gehn Loewen noch und wissen, solang sie herrlich sind, von keiner Ohnmacht. Uns aber, wo wir Eines meinen, ganz, ist schon des andern Aufwand fuehlbar, Feindschaft ist uns das Naechste. Treten Liebende nicht immerfort an Raender, eins im andern, die sich versprachen Weite, Jagd und Heimat. Da wird fuer eines Augenblickes Zeichnung ein Grund von Gegenteil bereitet, muehsam, dass wir sie saehen; denn man ist sehr deutlich mit uns. Wir kennen den Kontur des Fuehlens nicht: nur, was ihn formt von aussen ~~~~~~~~~~~~~~~~~~~~ 두이노의 비가 내가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 주리오? 설령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해도, 나보다 사뭇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는 무서움의 시작에 다름아니니까.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어두운 흐느낌의 유혹소리를 꿀컥 삼키는데, 아, 대체 우리는 그 누구를 부릴 수 있을까? 천사들도 아니요 인간들도 아니다. 영리한 짐승들은 해석된 세계 속에 사는 우리가 마음 편치 않음을 벌써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산등성이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어 날마다 볼 수 있을런지. 우리에게 남은 건 어제의 거리와, 우리가 좋아하는 습관에의 뒤틀린 맹종, 그것들은 남아 떠나지 않았다. 오 그리고 밤, 밤, 우주로 가득찬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파먹어가면, 누구에겐들 밤만 남지 않으랴, 그토록 그리워하던 밤, 모든 이의 가슴 앞에 힘겹게 드리운, 약간 환멸을 느끼는 밤. 밤은 사랑하는 이들한테는 더 쉬울까? 아, 그들은 그저 몸을 합쳐 그들의 운명을 가리우고 있구나. 너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가? 우리가 숨쉬는 공간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네 공허를 던져라. 그러면 새들은 더욱 당찬 날갯짓으로 넓어진 대기를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봄들은 너를 필요로 할지 모르지. 수많은 별들은 네가 저희들을 느끼기를 바랐다. 과거 속에서 파도 하나 일어나고, 혹은 열려진 창문 옆을 지나갈 때 너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겠지. 그 모든 건 사명이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완수했는가? 모든 것이 네게 애인을 점지해줄 듯한 기대감에 너는 언제나 마음이 어지럽지 않았는가? (네가 그녀를 어디에 숨겨도, 크고 낯선 생각들은 네 가슴속을 들락거리며 밤이면 어김없이 네 안에 머무르는데.) 그리웁거들랑, 사랑을 하는 자들을 노래하라, 하지만 그들의 유명한 감정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리라. 네가 시기할 지경인 그 사람들, 너는 그들이 사랑의 만족을 맛본 이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움을 알았으리라. 결코 다함이 없는 칭송을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라, 생각하라, 영웅이란 영속하는 법, 몰락까지도 그에겐 존재하기 위한 구실이었음을, 그의 궁극적 탄생이었음을. 그러나 지친 자연은 사랑에 빠진 자들을, 두 번 다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듯이, 제 몸 속으로 거두어들인다. 너는 가스파라 스탐파를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사랑하는 남자의 버림을 받은 한 처녀가 사랑에 빠진 스탐파의 드높은 모범에서 자기도 그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을? 언젠가 이처럼 가장 오래 된 고통들이 우리에게 열매로 맺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면서 연인에게서 벗어나, 벗어남을 떨며 견딜 때가 아닌가? 발사의 순간에 힘을 모아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 머무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목소리, 목소리들, 들어라, 내 가슴아, 지난날 성자들만이 들었던 소리를, 엄청난 외침 소리가 그들을 땅에서 들어올렸지만, 그들, 불가사의한 자들은 무릎꿇은 자세 흐트리지 않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바로 그렇게 그들은 귀 기울이고 있었다. 신의 목소리야 더 견디기 어려우리. 바람결에 스치는 소리를 들어라, 정적 속에서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전언을. 이제 그 젊은 주검들이 너를 향해 소곤댄다. 네가 어디로 발을 옮기든, 교회든 로마든 나폴리든 그들의 운명은 조용히 네게 말을 건네지 않았던가? 아니면 얼마 전의 산타 마리아 포르모자의 碑文처럼 비문 하나가 네게 엄숙히 그것을 명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내게 무엇을 바라는가? 내 그들의 영혼의 순수한 움직임에 가끔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옳지 못한 인상일랑 조용히 버려야 하리라. 이 지상에 더 이상 살지 않음은 참으로 이상하다, 겨우 익힌 관습을 다시는 행할 수 없음과, 장미들과 그밖의 무언가 나름대로 약속하는 사물들에게 인간의 장래의 의미를 선사할 수 없음과, 한없이 걱정스런 두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가 이제 더 이상 아님이, 그리고 자기 이름마저도 마치 망가진 장난감처럼 버리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서로 연결되어 있던 모든 것이 그처럼 허공에 흩어져 날리는 것을 보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죽어 있다는 것은 점차 조금이나마 영원을 맛보기 위한 힘겨움과 만회로 가득 차 있는 것 ――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은 모든 것을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하는 실수를 범한다. 천사들은 살아 있는 자들 사이를 가는지, 죽은 자들 사이를 가는지 때때로 모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영원한 흐름은 두 영역 사이로 모든 세대를 끌어가니, 두 영역의 모두를 압도한다. 끝내 그들, 일찍 떠난 자들은 우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니, 우리는 어느 덧 자라나 어머니의 젖가슴을 떠나듯, 조용히 대지의 품을 떠난다. 그러나 그토록 큰 비밀을 필요로 하는 우리는, 슬픔에서 그토록 자주 복된 진보를 울궈내는 우리는 ―― 그들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젠가 리노스를 잃은 비탄 속에서 튀어나온 첫 음악이 메마른 단단함 사이를 꿰뚫었다는 전설은 헛된 것인가, 거의 신에 가까운 한 젊은이가 갑작스레 영원히 떠나버려 깜짝 놀란 공간 속에서 비로소 공허함이 우리를 매혹시키고 위로하며 돕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 Duineser Elegien - The First Elegy - Rainer Maria Rilke Who, if I cried out, would hear me among the angels" hierarchies? and even if one of them suddenly pressed me against his heart, I would perish in the embrace of his stronger existence. For beauty is nothing but the beginning of terror which we are barely able to endure and are awed because it serenely disdains to annihilate us. Each single angel is terrifying. And so I force myself, swallow and hold back the surging call of my dark sobbing. Oh, to whom can we turn for help? Not angels, not humans; and even the knowing animals are aware that we feel little secure and at home in our interpreted world. There remains perhaps some tree on a hillside daily for us to see; yesterday"s street remains for us stayed, moved in with us and showed no signs of leaving. Oh, and the night, the night, when the wind full of cosmic space invades our frightened faces. Whom would it not remain for -that longed-after, gently disenchanting night, painfully there for the solitary heart to achieve? Is it easier for lovers? Don"t you know yet ? Fling out of your arms the emptiness into the spaces we breath -perhaps the birds will feel the expanded air in their more ferven flight. Yes, the springtime were in need of you. Often a star waited for you to espy it and sense its light. A wave rolled toward you out of the distant past, or as you walked below an open window, a violin gave itself to your hearing. All this was trust. But could you manage it? Were you not always distraught by expectation, as if all this were announcing the arrival of a beloved? (Where would you find a place to hide her, with all your great strange thoughts coming and going and often staying for the night.) When longing overcomes you, sing of women in love; for their famous passion is far from immortal enough. Those whom you almost envy, the abandoned and desolate ones, whom you found so much more loving than those gratified. Begin ever new again the praise you cannot attain; remember: the hero lives on and survives; even his downfall was for him only a pretext for achieving his final birth. But nature, exhausted, takes lovers back into itself, as if such creative forces could never be achieved a second time. Have you thought of Gaspara Stampa sufficiently: that any girl abandoned by her lover may feel from that far intenser example of loving: "Ah, might I become like her!" Should not their oldest sufferings finally become more fruitful for us? Is it not time that lovingly we freed ourselves from the beloved and, quivering, endured: as the arrow endures the bow-string"s tension, and in this tense release becomes more than itself. For staying is nowhere. Voices, voices. Listen my heart, as only saints have listened: until the gigantic call lifted them clear off the ground. Yet they went on, impossibly, kneeling, completely unawares: so intense was their listening. Not that you could endure the voice of God -far from it! But listen to the voice of the wind and the ceaseless message that forms itself out of silence. They sweep toward you now from those who died young. Whenever they entered a church in Rome or Naples, did not their fate quietly speak to you as recently as the tablet did in Santa Maria Formosa? What do they want of me? to quietly remove the appearance of suffered injustice that, at times, hinders a little their spirits from freely proceeding onward. Of course, it is strange to inhabit the earth no longer, to no longer use skills on had barely time to acquire; not to observe roses and other things that promised so much in terms of a human future, no longer to be what one was in infinitely anxious hands; to even discard one"s own name as easily as a child abandons a broken toy. Strange, not to desire to continue wishing one"s wishes. Strange to notice all that was related, fluttering so loosely in space. And being dead is hard work and full of retrieving before one can gradually feel a trace of eternity. -Yes, but the liviing make the mistake of drawing too sharp a distinction. Angels (they say) are often unable to distinguish between moving among the living or the dead. The eternal torrent whirls all ages along with it, through both realms forever, and their voices are lost in its thunderous roar. In the end the early departed have no longer need of us. One is gently weaned from things of this world as a child outgrows the need of its mother"s breast. But we who have need of those great mysteries, we for whom grief is so often the source of spiritual growth, could we exist without them? Is the legend vain that tells of music"s beginning in the midst of the mourning for Linos? the daring first sounds of song piercing the barren numbness, and how in that stunned space an almost godlike youth suddenly left forever, and the emptiness felt for the first time those harmonious vibrations which now enrapture and comfort and help us. ~~~~~~~~~~~~~~~~~~~~ - 릴케(Rainer Maria Rilke) 평가 : 열정적인 몸부림과 영감, 충일한 언어로 20세기를 감당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의 거장 약력 : 1875년 체코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영토) 출생 1890년 메리시 바이스키르헨의 육군사관학교 입학 1891년 사관학교 퇴학 1894년 처녀시집 를 발레리의 도움으로 출간 1895년 프라하 대학 입학 1901년 여류 조각각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 1902년 출판 1910년 출판 1923년 출판 1926년 장미가시에 찔려 급성 백혈병의 증세로 사망 작가 이야기 열정적인 몸부림과 영감, 충일한 언어로 20세기를 감당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의 거장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실존의 불안과 예감의 고뇌 속에서 자신의 영감이 폭풍을 일으키고 그것을 언어로 춤추었던 불세출의 서정시인이요 작가였다. 그는 매우 열정적인 몸부림과 영감 그리고 충일한 언어로 20세기를 감당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의 거장이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 출신의 독일 시인이었던 그는 일찍부터 고향 상실의 비애와 감상에 젖어야 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가 퇴학한 것도 그의 우수를 더해 주는 요소였다. 군사교육에 대한 지독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그로 인해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을 평생 극복할 수 없었노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뮌헨대학을 졸업하던 22살 무렵 만난 루 살로메와 더불어 러시아 여행을 하면서부터 그의 삶은 사랑과 고독, 방황과 편력, 여행과 발견, 그리고 그에 따른 문학적 탐색의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릴케의 문학은 정신적 순례를 통해 영혼의 초월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특성을 지닌다. 신을 찾고 신에게로 다가서고자 하는 순수 영혼의 열정적인 동경을 형상화한 을 비롯하여 사물의 존재를 관조적으로 성찰한 , 무한한 우주 공간에 던져진 인간의 실존과 고뇌를 그린 , 존재와 세계의 아름다움과 조화 세계를 노래한 등의 시편들로 현대시인으로서의 불멸의 지위를 확보했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인 는 을 집필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체류했던 기간에 쓰여진 대표적인 소설이다. 말테라는 청년 주인공의 내면 영혼의 심층을 깊 있게 보여준다. 를 완성하던 날, "마침내 축복받은, 축복받은 듯한 날이 왔습니다"라며 열광적인 편지를 쓰기도 했던 그는 장미 가시에 찔려 그 상처가 깊어져 숨을 거둔다. 51세의 나이로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라고 스스로 쓴 묘비명 아래 누웠다. 누구의 꿈도 아닌 깊은 잠을 포근히 감싸주는 장미꽃에 덮혀, 그렇게 20세기의 순수 열정과 운명을 마감했다. (우찬제/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 출처 : 시인 소향{素香}강은혜 플래닛입니다 | 글쓴이 : 데미 | 원글보기 출처: https://hichy.tistory.com/48 [히키의 상상 공간: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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