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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전집 2. 단편소설
2022년 08월 31일 20시 52분  조회:726  추천:0  작성자: 강려

지도의 암실

 

- 그는 왜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을 버리지 않고서 버리지 못하느냐 어디까지라도 괴로움이었음에 변동은 없었구나 그는 그의 행렬의 마지막의 한 사람의 위치가 끝난 다음에 지긋지긋이 생각하여 보는 것을 할 줄 모르는 그는 그가 아닌 그이지 그는 생각한다.

 

지주회시(蜘蛛會豕)

 

- 참 신통한 일은ㅡ어쩌다가 저렇게 사(生)는지ㅡ사는 것이 신통한 일이라면 또 생각하여 보면 자는 것은 더 신통한 일이다. 어떻게 저렇게 자나? 저렇게도 많이 자나? 모든 일이 희(稀)한한 일이었다.

- (문학)(시) 영구히 인생을 망설거리기 위하여 길 아닌 길을 내디뎠다 그러나 또 튀려는 마음ㅡ비뚤어진 젊음 (정치)

- ...그대는 그래 고소할 터인가 즉 말하자면 이 사람을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는가. ... 지금 내가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까는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되나요. 거기 섰는 오 그리고 내 안해의 주인 나를 위하여 가르쳐주소, 어떻게 하였으면 좋으리까 눈물이 어느 사이에 뺨을 흐르고 있었다. 술이 점점 더 취하여 들어온다.

 

동해(童骸)

 

*TEXT

- "불장난을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과는 성질이 아주 다릅니다. 그것은 컨디션 여하에 좌우되지는 않겠지요. 그러니...일러 드리지요. 저는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자각된 연애니까요.

 안 하는 경우에 못 하는 것을 관망하고 있노라면 좋은 어휘가 생각납니다. 구토. 저는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육체적 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자연발생적 자태가 저에게는 어째 유취만년(乳臭萬年)의 넝마 쪼각 같습니다. 기뻐해 주세요. 저를 이런 원근법에 좇아서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안 하는 것은 못 하는 것보다 교양, 지식 이런 척도로 따져서 높다. 그러나 안 한다는 것은 내가 빚어내는 기후(氣候) 여하(如何)에 빙자해서 언제든지 아무 겸손이라든가 주저없이 불장난을 할 수 있다는 조건부 계약을 차도(車道) 복판에 안전지대 설치하듯이 강요하고 있는 징조에 틀림은 없다.

 

*전질(顚跌)

 

- 나는 조심도 할 줄 모르는 야인(野人)이니까 반쯤 죽어야 껍적대지 않는다. ...

 "우리 의사는 죽으려 드는 사람을 부득부득 살려 가면서도 살기 어려운 세상을 부득부득 살아가니 거 익살맞지 않소?"

 말하자면 굽 달린 자동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고들 있다.

 

종생기

 

- 어머니 아버지의 충고에 의하면 나는 추호의 틀림도 없는 만 25세와 11개월의 '홍안(紅顔) 미소년(美少年)'이라는 것이다. 그렇건만 나는 확실히 노옹(老翁)이다. 그날 하루하루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랗다.' 하는 엄청난 평생(平生)이다.

 나는 날마다 운명(殞命)하였다. ...

 그러나 고독한 만년(晩年) 가운데 한 구의 에피그람을 얻지 못하고 그대로 처참히 나는 물고(物故)하고 만다.

 일생의 하루ㅡ.

 하루의 일생은 대체 (위선) 이렇게 해서 끝나고 끝나고 하는 것이었다. ...

 나는 내 감상(感傷)의 꿀방구리 속에 청산(靑山) 가던 나비처럼 마취(痲醉) 혼사(昏死)하기 자칫 쉬운 것이다. 조심조심 나는 내 맵시를 고쳐야 할 것을 안다.

- 나는 아침 반찬으로 콩나물을 3전어치는 안 팔겠다는 것을 교묘히 무사히 3전어치만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미끈한 쾌감을 맛본다. 내 딴은 다행히 노랑돈 한 푼도 참 용하게 낭비하지는 않은 듯싶었다.

- 넘어가는 내 지지한 종생, 이렇게도 실수가 허(許)해서야 물화적(物貨的) 전 생애를 탕진해 가면서 사수(死守)하여 온 산호편(珊瑚篇)의 본의가 대체 어디 있느냐? 내내(乃乃) 울화가 복받쳐 혼도(昏倒)할 것 같다. ...

 나는 내가 그윽히 음모(陰謨)한 바 천고불역(千古不易)의 탕아(蕩兒), 이상(李箱)의 자지레한 문학의 빈민굴을 교란시키고자 하던 가지가지 진기(珍奇)한 연장이 어느 겨를에 뻬물르기 시작한 것을 여기서 깨단해야 되나 보다. 사회는 어떠쿵, 도덕이 어떠쿵, 내면적 성찰, 추구, 적발(摘發), 징벌(懲罰)은 어떠쿵, 자의식과잉이 어떠쿵, 제 깜냥에 번지레한 칠(漆)을 해 내어걸은 치사스러운 간판(看板)들이 미상불(未嘗不) 우스꽝스럽기가 그지없다.

- 미문에 견줄 만큼 위태위태한 것이 절승(絶勝)에 혹사한 풍경(風景)이다. ...

 왜 나는 미끈하게 솟아 있는 근대건축의 위용을 보면서 먼저 철근철골, 시멘트와 세사(細砂), 이것부터 선뜩하니 감응(感應)하느냐는 말이다. 씻어버릴 수 없는 숙명의 호곡(號哭), 몽골리언 플렉[蒙古痣], 오뚝이처럼 쓰러져도 일어나고 쓰러져도 일어나고 하니 쓰러지나 섰으나 마찬가지 의지할 얄판한 벽 한 조각 없는 고독, 고고(枯稿), 독개(獨介), 초초(楚楚).

- 이것은 물론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재앙이다.

 나는 이를 간다.

 나는 걸핏하면 까무러친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철천(撤天)의 원한에서 슬그머니 좀 비껴서고 싶다. 내 마음의 따뜻한 평화 따위가 다 그리워졌다.

 즉 나는 시체다. 시체는 생존하여 계신 만물의 영장을 향하여 질투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

 누루(累累)한 이 내 혼수(昏睡) 덕으로 부디 이 내 시체에서도 생전의 슬픈 기억이 창궁(蒼穹) 높이 훨훨 날아가나 버렸으면ㅡ.

 나는 지금 이런 불쌍한 생각도 한다. 그럼ㅡ.

 ㅡ만 26세와 3개월을 맞이하는 이상(李箱) 선생님이여! 허수아비여!

 자네는 노옹일세.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일세. 아니, 아니.

 자네는 자네의 먼 조상일세. 이상(以上)

 

환시기

 

- 태석(太昔)에 좌우(左右)를 난변(難辨)하는 천치(天痴) 있더니

 그 불길한 자손이 백대(百代)를 겪으매

 이에 가지가지 천형병자(天刑病者)를 낳았더라.

- 그야말루 송 군은 지금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오ㅡ. 송 군이 가진 양심, 그와 배치되는 현실의 박해로 말미암은 갈등, 자살하고 싶은 고민을 누가 알아주나ㅡ. ...

 그러나 한 사람의 생명은 병원을 가진 의사에게 있어서 마작의 패 한 조각, 한 컵의 맥주보다도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 자꾸 삐뚤어졌다구 그랬더니 요샌 곧 화를 내데ㅡ.

 아까 바른쪽으루 비켜서란 소리는 괜헌 소리구 비켜서기 전에 자네 시각을 정정ㅡ그 때문에 다른 물건이 죄다 바른쪽으루 비뚤어져 보이드래두 사랑하는 안해 얼굴이 똑바루만 보인다면 시각의 적능은 그만 아닌가ㅡ그러면 자연 그 블라디보스톡 동경 사이 남북 만 리 거리두 배제처럼 바싹 맞다가서구 말 테니.

 

실화(失花)

 

-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 꿈ㅡ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자는 것이 아니다. 누운 것도 아니다.

- 적빈(赤貧)이 여세(如洗)ㅡ콕토가 그랬느니라ㅡ재주 없는 예술가야 부질없이 네 빈곤을 내세우지 말라고. 아ㅡ내게 빈곤을 팔아먹는 재주 외에 무슨 기능이 남아 있누.

- 꿈ㅡ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10월 23일부터 10월 24일까지 나는 자지 않았다. 꿈은 없다.

 (천사는ㅡ어디를 가도 천사는 없다. 천사들은 다 결혼해 버렸기 때문이다.)

- 나왔으니, 자ㅡ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해야 되누,

 해가 서산에 지기 전에 나는 이삼 일 내로는 반드시 썩기 시작해야 할 한 개 '사체'가 되어야만 하겠는데, 도리는?

 도리는 막연하다. 나는 십 년 긴ㅡ세월을 두고 세수할 때마다 자살을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나는 결심하는 방법도 결행하는 방법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다.

 나는 온갖 유행약(流行藥)을 암송하여 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인도교(人道橋), 변전소(變電所), 화신상회(和信商會), 옥상(屋上), 경원선(京元線) 이런 것들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렇다고ㅡ정말 이 온갖 명사의 나열은 가소롭다ㅡ아직 웃을 수는 없다.

 웃을 수는 없다. 해가 저물었다. 급하다. 나는 어딘지도 모를 교외에 있다. 나는 어쨌든 시내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시내ㅡ사람들은 여전히 그 알아볼 수 없는 낯짝들을 쳐들고 와글와글 야단이다. 가등(街燈)이 안개 속에서 축축해한다.

- 아스팔트는 젖었다. 스즈란도 좌우에 매달린 그 영란(鈴蘭) 꽃 모양 가등도 젖었다. 클라리넷 소리도ㅡ눈물에ㅡ젖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는 안개가 자옥ㅡ히 끼었다. ...

 법정대학(法政大學) Y군, 인생보다는 연극이 더 재미있다는 이다. 왜? 인생은 귀찮고 연극은 실없으니까.

-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ㅡ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ㅡ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

 "신념을 빼앗긴 것은 건강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마치 쉬운 경우더군요."

 "이상(李箱) 형! 형은 오늘이야 그것을 빼앗기셨습니까? 인제ㅡ겨우ㅡ오늘이야ㅡ겨우ㅡ인제."

- '슬퍼? 응ㅡ슬플밖에ㅡ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로다. 슬퍼야지ㅡ만일 슬프지 않다면ㅡ나는 억지로라도 슬퍼해야지ㅡ슬픈 포즈라도 해 보여야지ㅡ왜 안죽느냐고? 헤헹! 내게는 남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버릇밖에 없다. 나는 안 죽지. 이따가 죽을 것만 같이 그렇게 중속(衆俗)을 속여 주기만 하는 거야. 아ㅡ그러나 인제는 다 틀렸다. 봐라. 내 팔. 피골(皮骨)이 상접(相接). 아야 아야. 웃어야 할 터인데 근육이 없다. 울려야 근육이 없다. 나는 형해(形骸)다. 나ㅡ라는 정체(正體)는 누가 잉크 짓는 약으로 지워 버렸다. 나는 오직 내ㅡ흔적일 따름이다.'

 

단발(斷髮)

 

- 공연히 그는 서먹서먹하게 굴었다. 이렇게 함으로 자기의 불행에 고귀한 탈을 씌워 놓고 늘 인생에 한눈을 팔자는 것이었다.

- 사실 그는 무슨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악인일 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애호하는 가면을 도적을 맞는 위에 그 가면을 뒤집어 이용당하면서 놀림감이 되고 말 것밖에 없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소녀에게 자그마한 욕구가 없는 바는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이것은 한 무적 '에고이스트'가 할 수 있는 최대 욕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코 고독 가운데서 제법 하수(下手)할 수 있는 진짜 염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체취처럼 그의 몸뚱이에 붙어 다니는 염세주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게으른 성격이요 게다가 남의 염세주의는 어느 때나 우습게 알려 드는 참 고약한 아리아욕(我利我慾)의 염세주의였다.

 죽음은 식전의 담배 한 모금보다도 쉽다. 그렇건만 죽음은 결코 그의 창호(窓戶)를 두드릴 리가 없으리라고 미리 넘겨짚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다만 하나 이 예외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

 A double suicide

 그것은 그러나 결코 애정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다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말고 서로서로 '스프링보드'노릇만 하는 것으로 충분히 이용할 것을 희망한다. 그들은 또 유서를 쓰겠지. 그것은 아마 힘써 화려한 애정과 염세의 문자로 가득 차도록 하는 것인가 보다.

 이렇게 세상을 속이고 일부러 자기를 속임으로 하여 본연의 자기를, 얼른 보기에 고귀하게 꾸미자는 것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애정이라는 것에 서먹서먹하게 굴며 생활하여 오고 또 오는 그에게 고런 마침 기회가 올까 싶지도 않다.

- "...불행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더없는 매력입니다. 그렇게 내어버리구 싶은 생명이거든 제게 좀 빌려주시지요."

 연애보다도 한 구(句) 위티시즘을 더 좋아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이때만은 풍경에 자칫하면 패배할 것 같기만 해서 갈팡질팡 그 자리를 피해 보았다.

... 소녀는 비로소 '세월'이라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방심(放心)을 어느결에 통과해 버린 '세월'이 소녀로서는 차라리 자신에게 고소하였다.

 고독ㅡ그런 어느 날 밤 소녀는 고독 가운데서 그만 별안간 혼자 울었다. 깜짝 놀라 얼른 울음을 끊쳤으나 이것을 소녀는 자기의 어휘로 설명할 수 없었다.

- "가령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물을 상 찌푸리지 않고 먹어보는 거 그래서 거기두 있는 '맛'인 '맛'을 찾아내구야 마는 거, 이게 말하자면 '패러독스'지. 요컨대 우리들은 숙명적으로 사상, 즉 중심이 있는 사상 생활을 할 수가 없도록 돼먹었거든. 지성(知性)ㅡ흥 지성의 힘으로 세상을 조롱할 수야 얼마든지 있지, 있지만 그게 그 사람의 생활을 '리드'할 수 있는 근본에 있을 힘이 되지 않는 걸 어떡허나? 그러니까 선(仙)이나 내나 큰소리는 말아야 해. 일체 맹세하지 말자ㅡ허는 게 즉 우리가 해야 할 맹세지."

- 운명에 억지로 거역하려 들어서는 못쓴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나는 오랫동안 '세월'이라는 관념을 망각해 왔소. 이번엔 참 한참 만에 느끼는 '세월'이 퍽 슬펐소. 모든 일이 '세월'의 마음으로부터의 접대에 늘 우리들은 다 조신하게 제 부서에 나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하오. 흥분하지 말아요.

- 저는 결코 오빠를 야속하게 여긴다거나 하지 않아요. 애정을 계산하는 버릇은 언제든지 미움받을 버릇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세월'이오? ... '세월'! 좋군요ㅡ교수ㅡ, 제가 제 맘대로 교수를 사랑해도 좋지요? 안 되나요? 괜찮지요? 괜찮겠지요 뭐?

- 단발(斷髮)했습니다. 이렇게도 흥분하지 않는 제 자신이 그냥 미워서 그랬습니다.

 단발? 그는 또 한번 가슴이 뜨끔했다. 이 편지는 필시 소녀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에게 의논 없이 소녀는 머리를 잘렸으니, 이것은 새로워진 소녀의 새로운 힘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라고 간파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물났다. 왜?

 머리를 자를 때의 소녀의 마음이 필시 제 마음 가운데 제 손으로 제 애인을 하나 만들어놓고 그 애인으로 하여금 저에게 머리를 자르도록 명령하게 한, 말하자면 소녀의 끝없는 고독이 소녀에게 1인 2역을 시킨게 틀림없었다.

 소녀의 고독!

 혹은 이 시합은 승부 없이 언제까지라도 계속하려나ㅡ이렇게도 생각이 들었고ㅡ그것보다도 싹뚝 자르고 난 소녀의 얼굴ㅡ몸 전체에서 오는 인상은 어떠할까 하는 것이 차라리 더 그에게는 흥미 깊은 우선 유혹이었다.

 

김유정(金裕貞)

 

- 암만해도 성을 안 낼 뿐만 아니라 누구를 대할 때든지 늘 좋은 낯으로 해야 쓰느니 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이 김기림(金起林)이라.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敵)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업신여기고 그만두는, 그러기 때문에 근시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朴泰遠)이다.

 업신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진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 "여! 어디 뎀벼봐라."쯤 할 줄 아는, 하되, 그저 그럴 줄 안다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는 파(派)에, 고만 이유로 코밑에 수염을 저축(貯蓄)한 정지용(鄭芝溶)이 있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敵)의 벌마구니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稀有)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金裕貞)이다.

 

 누구든지 속지 마라. 이 시인 가운데 쌍벽(雙璧)과 소설가 중 쌍벽(雙璧)은 약속(約束)하고 분만(分娩)된 듯이 교만하다. 이들이 무슨 경우에 어떤 얼굴을 했댔자 기실은 그 교만에서 산출된 표정의 데포르마시옹 외의 아무것도 아니니까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이분들을 설복할 아무런 학설도 이 천하에는 없다. 이렇게들 고집이 세다.

 나는 자고로 이렇게 교만하고 고집 센 예술가를 좋아한다. 큰 예술가는 그저 누구보다도 교만해야 한다는 일이 내 지론이다.

 

봉별기

 

- 금홍이는 겨우 스물한 살인데 서른한 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았다. 서른한 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은 금홍이가 내 눈에는 열일곱 살 먹은 소녀로만 보이고 금홍이 눈에 마흔 살 먹은 사람으로 보인 나는 기실 스물세 살이요 게다가 주책이 좀 없어서 똑 여남은 살 먹은 아이 같다. 우리 내외는 이렇게 세상에도 없이 현란하고 아기자기하였다.

 부질없는 세월이ㅡ.

 일 년이 지나고 팔월, 여름으로는 늦고 가을로는 이른 그 북새통에ㅡ.

 금홍이에게는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왔다.

-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그만해두 두 달지간이나 되지 않니? 헤어지자, 응?"

 "그럼 난 어떻게 되우. 응?"

 "마땅헌 데 있거든 가거라, 응."

 "당신두 그럼 장가가나? 응?"

 헤어지는 한(限)에도 위로해 보낼지어다. 나는 이런 양식(良識) 아래 금홍이와 이별했더니라.

- 어디로 갈까.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동경(東京)으로 가겠다고 호언했다. 그뿐 아니라 어느 친구에게는 전기기술(電氣技術)에 관한 전문 공부를 하러 간다는 둥, 학교 선생님을 만나서는 고급 단식인쇄술(單式印刷術)을 연구하겠다는 둥, 친한 친구에게는 내 5개 국어에 능통할 작정일세 어쩌구 심하면 법률을 배우겠소까지 허담(虛談)을 탕탕하는 것이다. 웬만한 친구는 보통들 속나 보다. 그러나 이 헛선전(宣傳)을 안믿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하여간 이것은 영영 빈털털이가 되어 버린 이상(李箱)의 마지막 공포(空砲)에 지나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겠다.

-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 생에서의 영이별(永離別)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 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云云)."

 

<지도의 암실> 주석 중

- 活同是死胡同 死胡同是活胡同.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다. 최초의 해석은 이어령 교수가 '사는 것이 어째서 이와 같으며, 죽음이 어째서 같은가. 죽음이 어째서 이와 같으며 삶이 어째서 같은가.' (이어령 편, <전작집 1>, 181~2쪽)라고 했다. 김윤식 교수는 '사는 것이 어찌하여 이와 같으며, 죽음이 어째서 같은가. 죽음이 어째서 이와 같으며, 사는 것이 같은가.'(김윤식 편, <전집 2>, 177쪽)라고 이어령 교수와 비슷하게 풀이하였다. 최근 김주현 교수는 이 대목을 백화문으로 보고, '뚫린 골목은 막다른 골목이요, 막다른 골목은 뚫린 골목이다.' (김주현 편, <전집 2>, 154쪽)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기한 바 있다. 이 구절이 한문식 독법과 백화문식 독법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점을 밝힌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상(李箱) 자신도 바로 이 같은 성질을 활용하고자 의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구절의 기호적 중의성(重義性)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에 맞춰본다면, '살아 있는 것이 곧 죽은 것이며, 죽은 것이 곧 살아 있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상 전집 2. 단편소설,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 뿔, 2009

출처: https://hichy.tistory.com/entry/이상-전집-2-단편소설?category=478796 [히키의 상상 공간: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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