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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현대시의 난해성의 의의와 역할/김신영 댓글:  조회:155  추천:0  2021-01-04
현대시의 난해성의 의의와 역할/김신영 현대시의 난해성은 늘 왈가왈부하는 논의의 대상이다. 시에 대한 논의가 변방으로 밀려나도 난해성에 대해서만큼은 문단을 달구는 요소가 된다. 그만큼 난해성에 더해지는 문화예술의 창조적 역량과 심화를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라는 시대가 갖는 특성 중에는난해성으로 표출되는 언어와 또한 표현의 다양성으로 논의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대는 시대적인 특성으로 인한 독자적인 언어의 다양성으로 산문시나 소설같은 시의 양산을 부추키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각양각색을 가진 다양한 독자성과 자기목적성으로 인해 앞으로도 시는 더욱 난해성을 추구해 갈 것으로 여겨진다. 유럽의 시들은 난해성을 논할 때 주로 상징주의 시인들을 떠올린다. 엘리어트의 대화시나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의 시에서 발견하는 의미는 사물의 외적 요소에 대한 것들이라기보다 내적인 요소에 대한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은 각계각층에 영향을 미치는 데 특히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재창조되어 그 의미의 심오함을 표출하고 있다. 이에 상징성으로 대표되는 애매성(曖昧性, ambiguity)을 앰프슨은 7가지로 정의하면서 시에서 애매성이 갖는 의미를 역설한 바 있다. 이것은 시의 애매성이 그 미묘한 차이로 인하여 의미의 확장과 풍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복잡성을 제공하여 본래 가진 의미를 확장시켜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애매성이나 상징이 시를 난해하게 하는 요소이다. 그로 인하여 시는 복잡성을 띠면서 의미를 확장하며 그때 내포된 의미로 인해 난해해진다. 이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 아니라 시에서 어떤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이다. 그러므로 난해한 시는 자기목적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난해한 시의 탄생은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말 할 수가 없다. 우연히 난해한 시를 쓴다는 것은 상징이나 모호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쓰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난해한 시는 시인의 뚜렷한 자기목적성을 동반하면서 탄생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시에서 난해성으로 논의되는 시인들은 대략 이상과 김수영, 김춘수, 김구용, 이승훈, 오규원 그리고 최근에 논의가 활발했던 황병승 등이 있다. 이들의 시도 산문성과 문법의 무시 또는 파괴, 그리고 상징적인 언어의 사용으로 그 난해성에 대해 논란을 일으킨 바가 있다. 이 시인들의 시는 우리 문단에 일단락 나름의 공헌을 하였다. 새로운 시를 갈구하는 사회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패턴을 제공한 것이다. 독단적인 언어 독법과 새로운 인식의 틀을 구성하면서 파란을 불러일으킨 시가 이상의 「오감도」가 아닌가? 그것은 의미전달과 더불어 존재에 대한 인식의 차원으로 확대되면서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김수영 시인도 자신의 시를 난해시로 규정하면서 그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했다. 김수영의 「꽃잎.1」 이나 황병승의 시 「여장남자 시코구」등은 해석에 있어 여러차례 문단에서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특히 이상의 작품은 시의 진위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으며, 김수영은 난해시가 갖는 특성으로 상징성을 들어 논의한 바 있다. 또한 최근 황병승의 작품은 소위 ‘미래파’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평단은 미래파 시에 대한 논의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난해시는 무엇보다도 시의 해석에 대한 난삽함을 드러내면서 더불어 의미의 재생이나 새로운 의미의 탄생이 화두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보니 난해시는 일면 기교중심의 시로 흐른 면도 없지 않아 이 또한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시는 시의 발달사에 비추어볼 때, 이상 시인을 선두로 꾸준히 다시 나타나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난해시는 더욱 늘어난 양상을 보인다. 시인들을 위한 말잔치라고 비판하는 독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시인들은 난해시를 즐기며 또한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미술계에서 피카소의 그림은 추상화의 의미와 더불어 난해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미술계는 이미 난해한 미술이 오래전부터 나타나 일반독자와 거리두기를 시도한지가 오래 되었으며 미술은 추상미술이나 입체파로 진화일로에 있다. 그러나 문학계는 책읽기의 난독성을 제기하면서 독자층의 중요성이 확대되어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시는 새로운 독자층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 독자들은 일반적인 독자가 아닌 시를 이해하는 어느 정도 수준의 이해력을 가진 독자층이다. 그들은 시가 난해해 지는 것을 반긴다. 시가 갖는 신선함과 의외성은 문학의 창조적 역량을 충족시켜주는 까닭이다. 즉, 일반적인 서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세계를 난해시는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난해시가 갖는 문학적 특성이며 의의라고 할 수가 있겠다. 앞서도 논의하였듯이 문학예술의 창조적 역량과 심화는 심오한 정신적인 세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현대시에서 서정성으로 나타날 때 단순화될 소지가 있으나 난해시는 이를 더욱 정교하게 복잡미묘한 세계를 표현한다. 정신병리적인 현상이나 신경증적인 강박증들이 시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 거울. 무능이라도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들창을 가리키었다. 그 들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네게 가리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엄폐하고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권총을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다.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조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이상의 시제15호에서 하늘의 뜨거운 꼭지점이 불을 뿜는 정오/도마뱀은 쓴다/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에서 낯선 문법이 등장하면 사회는 열광한다.   프랑스의 누벨바그(전통적 영화에 대항해 1957년 태동한 영화운동)도 즉흥연출과 장면의 비약적 전개로 장 뤼크 고다르에게 대단한 영예를 안긴 바 있다. (‘네 멋대로 해라’의 감독으로 누벨바그를 등장시키며 뉴웨이브의 기수로 불렸다. ) 개인의 실존문제를 주로 다루는 이 누벨바그처럼 난해시의 등장은 낯선 문법과 새로운 시의 양식으로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다시 말해 난해시는 낡은 것을 밀치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은 주로 개인의 자아를 탐구하면서 새롭고 낯선 규범들을 창조하였다면, 황병승의 시에 등장하는 소수의 대변자인 캐릭터는사회의 탐구를 추구하는 측면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상의 시에는 자아의 분열적 증상이 나타나지만 황병승의 시에는 사회적인 병리현상과 더불어 신경증적인 반응들이 詩化된다. 어지럽고 복잡한 언어들 속에서 표상화되는 시어들을 살피다 보면 이 넓은 세상에 어지러이 불고 있는 갖가지 바람의 의미를 이해할 듯도 하다. 이것이 난해시의 의미이며 역할이라고 아니겠는가? 이제 난해시에 대한 나름의 논의는 일단락된 것이 아닌가 개인적인 생각을 한다. 난해시도 하나의 조류이며 새로운 현상으로 이미 시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신영 (시인, 문학평론가), 충북 중원 출생 94년 《동서문학》시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저서『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시집, 문학과지성사, 1996) 『불혹의 묵시록』(시집, 천년의 시작, 2007) 『현대시, 그 오래된 미래』(평론집, 한국학술정보, 2007) 중앙대 국문과 문학박사, 홍익대 등에서 강의 문학서재 : http://ksypoem.kll.co.kr   아시아문예 2008년 가을호  
108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 박상천 댓글:  조회:173  추천:0  2020-11-11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박상천     시를 일컬어 흔히 언어예술이라고 한다. 언어예술이라는 말은 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언어는 시의 질료(material)이면서 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에 관한 이론을 공부하건 시 창작의 방법을 공부하건 그 출발은 언어일 수밖에 없다. 언어에 대한 공부는 시 공부의 출발이자 기초이며 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 공부를 언어 공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은 먼저 언어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일상의 언어와 시의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일이 시 공부의 출발이다.   1. 언어는 사물을 존재하게 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언어란 가장 쉽게 말해 어떤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 ‘하늘’ ‘책상’ ‘물고기’ 등 물질적인 것들을 일컫는 언어만이 아니라 ‘슬픔’ ‘기쁨’ ‘사랑’ 등 추상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들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감정들에 붙여진 이름이다.사물들은 이러한 이름(언어)에 의해 구별되고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언어에 의해 사물들이 구별되고 존재한다’는 말을 더 쉽게 설명해보자. 여기 우리가 ‘볼펜’이라고 부르는 사물과 ‘연필’이라고 부르는 사물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 사물들을 각각 ‘볼펜’ ‘연필’이라고 구분하여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필기도구’라는 이름만을 붙였다고 한다면 ‘필기도구’는 존재하지만 ‘볼펜’과 ‘연필’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장롱’ ‘식탁’ ‘의자’라는 각각의 이름이 없이 ‘가구’라는 이름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가구’는 있지만 ‘장롱’ ‘식탁’ ‘의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이름이 붙지 않은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므로 ‘필기도구’라는 이름이 ‘필기도구’를 존재하게 하고 ‘볼펜’이라는 이름이 ‘볼펜’을 존재하게 하며 ‘연필’이라는 이름이 연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이데거는 언어를 일컬어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언어는 이처럼 사물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일부 어떤 사물이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하늘’이 된다.   2.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이지만 사회적 약속이다   언어는 가장 쉽게 말해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사물과 사물의 이름인 언어의 결합 관계에는 필연성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과 ‘나무’라는 언어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만약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과 ‘나무’라고 부르는 언어 사이에 꼭 그렇게 결합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다면 세계 각국의 언어가 서로 다를 수가 없고 시대를 따라 언어가 변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을 15세기에는 ‘나모’라고 하였고 영어에서는 ‘tree’라고 부른다. 사물과 언어의 결합이 필연적이라면 동일한 사물을 이렇게 다르게 부를 수는 없고 또 다르게 불러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사물의 결합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은 여기서 명백해진다.그러나 사물과 언어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해서 말하는 사람이 임의로 그 이름을 바꿀 수는 없다. ‘나무’를 ‘나무’라 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늘’이라고 한다면 의사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사물과 언어 결합의 자의성은 사회적으로 용인을 받아야 하고 용인을 받은 이름으로 사물을 부름으로써 우리의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일상의 언어는 사회적 약속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3. 시의 언어는 사회적 약속을 깨뜨린다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분명 자의적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약속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면 의사 소통이 불가능해지거나 어려워진다. 그런데 시는 이러한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고 그 약속을 깨뜨리려고 한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이 시는 우리가 잘 아는 유치환의 「깃발」이다. 그러나 우리가 제목도 없이 이 시를 처음 대했다고 했을 때, 이 시가 무엇을 대상으로 쓴 글인지 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사전을 찾아보면 ‘기(旗)’는 “헝겊이나 종이 같은 데에 무슨 글자, 그림, 부호, 빛깔 같은 것을 잘 보이도록 그리거나 써서 막대 같은 것에 달아 특정한 뜻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쓰는 물건의 총칭”이라고 되어 있고 ‘깃발’은 ‘헝겊이나 종이로 된 기의 근본 부분’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들을 보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유치환은 누구에게나 뜻이 통하는 이런 정상적인 언어를 버리고 깃발을 일컬어 ‘소리없는 아우성’이니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니 ‘백로처럼 날개를 편 애수’니 하는 말로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까?한 마디로 말해서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를 ‘비틀고 왜곡’하는 것이다. 일상 언어가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의사 소통’ ‘정보 전달’이라 할 수 있는데 의사 소통을 위하여서는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잘 지켜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한 일상어의 사용법을 ‘정상적 언어 사용법’이라고 한다면, 시의 언어는 그러한 정상적 언어 사용법을 어기고, 부수고, 비틀어 비정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시는 일상 언어의 정상적 용법을 사용하지 않고 사회적 약속을 깨뜨리며 비정상적 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과 둘째, 그러므로 시는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효율적이거나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4. 시의 언어는 왜 사회적 약속을 깨뜨리는가?   언어가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언어와 사물을 동일시하기 쉽다. 그러나 언어가 곧 사물은 아니다. 언어는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예를 들어 여기 ‘연필’ 두 자루가 있다고 하자. 이 두 자루의 연필은 각각 별개의 사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가지 별개의 사물을 모두 ‘연필’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러한 언어 사용법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두 자루의 연필 중에 하나를 A라 하고 또다른 하나를 B라고 하자.그러면 우리의 언어 사용법으로 볼 때, A〓연필, B〓연필이고 이 명제에 따라 ‘A〓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A와 B는 서로 다른 사물이므로 ‘A〓B’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다. 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가? 그 까닭은 ‘A〓연필’, ‘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사물과 언어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또한 사물 개개의 이름이 아니라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자의적으로 붙여진 이름(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연필’이라는 언어는 연필 하나하나에 붙여진 개별적인 이름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필의 공통적 속성(흑연 심을 가느다란 나무때기 속에 넣어 만든 필기도구)에 붙여진 이름인 셈이다.개별적인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공통적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언어의 성격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근본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불완전한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A가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B도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말한 ‘슬픔’은 동일한 것일까? 이 두 사람의 ‘슬픔’이 동일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슬픔’이라는 말은, 모든 이들이 가진 그 다양한 ‘슬픔’의 공통적 속성(뜻밖의 일에 낙심하여 눈물이 나거나 한숨이 나오며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느낌)을 뽑아내어 ‘슬픔’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슬프다’ 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이 지닌 개별적인 ‘슬픔’의 진실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시는 일상의 언어가 지닌 이러한 추상성과 불완전성을, 언어를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슬픔.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슬픔의 진정한 모습을 표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한 노력이 시를 탄생하게 하였다. 그래서 시는 비유, 묘사, 상징, 이미지 등 다양한 시적 장치들을 동원하여 사물의 공통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 개별적 사물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시에서는 일상 언어의 정상적인 사용법이 아닌 언어의 비정상적 사용법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는 셈이다. 5. 시의 언어는 의사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의사 소통’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사회적 약속을 지켜 언어를 정상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언어의 정상적 사용법을 무시하고 깨뜨리고 왜곡한다. 따라서 시는 언어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언어와는 달리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그다지 효율적인 것이 아니다.다시 말해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 시를 쓰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정상적 용법으로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는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의사 소통을 위한 효율적인 방법이 결코 아니다.그렇다면 시는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시도 언어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의사 소통의 목적을 위해 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의사 소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때 시는 일상의 언어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생각해보자. 의사 소통이란 발신자(말하는 이)가 어떤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말 듣는 이)에게 ‘내용’을 보내고 수신자는 매체를 통해 받은 ‘내용’을 해독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과정이 제대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발신자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내야 하고 수신자는 발신자가 매체를 통해 보낸 내용을 발신자가 의도한 내용대로 해독하여야만 한다. 만약에 발신자가 보낸 내용이 수신자가 해독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거나 또는 발신자가 보낸 내용을 수신자가 임의로 해석하게 되면 의사 소통은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시에 적용한다면 시인은 발신자, 시의 언어는 매체, 독자는 수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에 따라 시인은 독자가 해독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에 따라 시를 해석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어떤 세계를 창조하였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인이 창조해 놓은 세계를 해독할 뿐이다. 즉, 시인은 독자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를 알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시는 시인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6. 시의 언어는 체험하게 하는 언어이다   일상의 언어와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시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그대로 시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기능 면에서 두 언어는 차이를 보여준다.언어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정보 전달의 기능이고 둘째는 행위 요구의 기능이며 셋째는 체험의 기능이다.첫째 정보 전달의 기능은 일상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핵심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정보 전달을 위하여서는 언어는 가장 간명해져야 하며 사전적 정의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간명하면서도 효과적인 정보 전달의 방법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한다고 하자. 사전에는 ‘사랑’을 ‘①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또는 그러한 일 ②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이렇게 사전적인 정의를 통해 그 개념을 전달하면 읽는 이나 듣는 이에게 가장 간명하면서도 분명한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 전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이러한 설명의 방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설명의 한계로 먼저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를 설명하는 데에는 따르는 어려움을 들 수 있다.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언어는 개개의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사물의 공통되는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근본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추상이란 ‘낱낱의 구체적인 사물에서 공통되는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관념적으로 뽑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개개인의 감정 상태를 적확하게 표현해 보여주지 못한다.예를 들어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설명해보도록 하자. ‘나는 요즈음 A를 사랑하게 되어 마음이 기쁘고 즐겁다.’라고 설명을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모두 전달할 수는 없다. 열 명의 사람이 있으면 열 명의 사람은 모두 사랑하는 마음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열 명이 지닌 각각의 사랑을 ‘구체적, 개체적’이라고 한다면 그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사랑’이 지닌 공통의 속성 즉,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이라는 관념을 뽑아낸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추상적 언어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언어는 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있는 대로 모두 다 표현해 낼 수는 없다.둘째는 말하는 이가 말 듣는 이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거나 유도’하기 위한 기능이 있다. 그러나 그 행위를 실행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어디까지나 듣는 이의 ‘의지’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하여, 설득하여 행동하게 하기 위하여 씌어지는 글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글들을 읽은 이들이 그 글에 설득당하거나 감동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간혹 그 글에 감동하여 그 글이 요구하는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언어 행위는 읽는 이의 ‘의지’라는 장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사랑하자.” 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 것인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개인 모두는 개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위 요구나 유도 지향의 언어는 그 목적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시의 언어는 정보 전달이나 행위 유도를 위해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의 언어는 어떤 기능을 하는 언어인가?먼저 다음에 있는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당신 곁에 머물면화상(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동상(凍傷)에 걸린다. 아나벨리 내 사랑. 아아, 불 ―이세룡의 「아나벨리」 이 시는 ‘사랑’을 ‘불’의 속성에 비유하여 시화하고 있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독자들에게 ‘당신 곁에 머물면 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 凍傷에 걸린다.’는 사실(정보)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사람 곁에 머물면 火傷을 입으니까 가지 말라거나 또는 사랑은 이렇게 좋은 것이니까 사랑을 하라.’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이 시인이 ‘사랑’의 속성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또는 ‘사랑’을 요구하기 위해서 시를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시는 산문의 언어, 일상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의 아이러니를 단 6행으로 표현해내고, 세계 어느 나라 사전에도 없는 ‘사랑’의 속성을 새롭게 말하고 있다.이처럼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기존의 ‘사랑’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사랑’이라는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사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내는 ‘발견자’이며 그러한 발견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사물을 새롭게 존재하게 하는 ‘명명자’이기도 하다.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또는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정보 전달의 언어가 지닌 관념성이나 추상성을 극복하려는 시의 언어는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시인은 시를 통해 일정한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시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그러므로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가 지닌 추상의 세계를 극복하고 구체화한다. 이해의 대상은 될지언정 체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추상의 세계를 구체적인 체험의 세계로 만들어 준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이해하고 있었던) ‘사랑’은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사랑을 만족시켜주는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대상을 추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게 한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보듯 한 시인에 의해 ‘사랑’은 새롭게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는 시인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그렇다면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과 만나게 되고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데 이를 ‘지각’이라고 하며 이러한 지각을 통해 대상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대상을 지각하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는 어떤 느낌(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고 이성적 사유를 하기도 한다.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체험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동일한 체험들이 반복되면서 체험의 대상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상 만나고 있는 사물에 대하여 점차 무감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습관적이고 무감각해진 삶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자동화된 삶’이라고 말한다. 자동화된 삶 속에는 감동이 있을 수 없다. 어떠한 느낌도 주지 못하는 체험, 그 체험은 이미 체험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만 것이다.이렇듯 일상의 반복되는 체험은 우리의 삶을 무감각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시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려 줄 수 있어야 하고 대상과 삶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새로운 체험이야말로 시를 시답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 할 수 있다.‘사랑’이란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여름에는 나무가 푸르고 가을에는 낙엽이 진다는 사실을 알리거나 내가 실연을 해서 슬프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다. 시는 무디어져버린 우리의 감각을 되살려주고 느낌이 사라져버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시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그리고 세계의 사물을 새롭게 지각하고 체험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시의 언어가 새로운 세계를 존재하게 한다. 우리는 시의 언어가 새롭게 존재하게 해준 세계를 만남으로써 현실에서는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시는 기존의 삶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출처 : 나는..영혼을 적시며 서있다  |  글쓴이 : 푸른하늘저편 원글보기 [출처]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작성자 최진연    
107    시와 예술, 그리고 신화 -유승우 댓글:  조회:169  추천:0  2020-11-11
시와 예술, 그리고 신화                             유 승 우   1. 시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이며,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시에 대한 정의의 문제이며, 시에 대한 본질적 문제이다. 그런데 시의 개념과 시에 대한 정의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시, 곧 문학의 관점과 정의는, 시는 세계를 모방한 것이라는 관점(모방설-아리스토 텔레스),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초점으로 하는 관점(실용설-호라시우스), 작품을 예술가인 시인 자신의 표현으로 보는 관점(표현설-워즈 워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작품 그 자체에 초점을 두는 관점(객관설-신 비평) 등에서1) 보는 바와 같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변화할 수 없는 시에 대한 개념이나 정의가 있다. 시라는 말의 어원에 의한 개념이나 정의는 동서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다. 이것이 바로 시에 대한 본질적 문제이다.   나는, 이 글에서 어원에 의한 시의 정의를 고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시의 내용적 정의와 형식적 정의를 시도함으로써 시 창작의 이론과 실제의 문제를 밝혀보고자 한다. 시의 내용적 정의는 ‘시는 무엇을 쓰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며, 시의 형식적 정의는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이제까지는 시의 정의와 같은 것은 이론의 측면이고, 시 창작 곧 시를 쓰는 것은 기능의 문제라고 하여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에 대한 이론은 시 창작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시의 이론은 오히려 시 창작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의 이론은 대학에서 연구하는 것이고, 시인은 시를 쓰는 기술자이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기술자가 아니며, 또한 시를 떠난 이론의 연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의 이론이 시인의 생리가 되고, 시를 쓰는 것이 바로 시인의 삶 자체가 될 때, 시가 사람의 삶 속에서 생기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 곧 존재 자체가 바로 시이며, 시를 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살아가는 것이 될 때,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의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2. 시는 언어(言語) 예술이다     시는 언어(言語) 예술이다. 그러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藝術)의 ‘藝’자를 자전에서 ‘種也’라 풀이하고, ‘種’의 뜻은 ‘씨앗’과 ‘심다’라고 했다.2) ‘씨앗’ 곧 종자란 무엇인가. 생명의 씨눈이 잠들어 있는 집이다. 이 씨앗을 심어서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생명의 잠을 깨우고 자라게 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기술이 곧 예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에는 반드시 그 열매인 ‘작품’이 있어야 한다. 이 열매인 시작품에서, 언어는 시적 생명의 씨눈이 잠들어 있는 종자이다. 그러면 언어(言語)에서 씨눈에 해당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말씀(言)이다.   이 말씀(言)은 마음을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며, 글(文)은 마음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말씀(言)이 글(文)보다 먼저이다. 이 말씀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말(語)이 되기도 하고, 시(詩)가 되기도 한다. 말씀(言)이 관청(寺)에3) 바쳐지면 시(詩=言+寺=poetry)가 되고, 나(吾)를 위해 쓰여지면 말(語=言+吾=language)이 된다. 관청에서 가장 높은 곳엔 천자 곧 하늘의 아들이 있다. 그러므로 제정 일치 시대에는 관청이 곧 신전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관청에 바쳐진다는 것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원래의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言)과 시(詩)는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언어(言語)처럼 언시(言詩)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말씀은 곧 신이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4) 처음에는 말씀(言)이 곧 신이며 마음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신과 함께 있는 ‘言=神’의 모습 그대로였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이 곧 신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신(神)의 자리에 내(吾)가 끼어 들면서, 말씀은 그 본래의 생기인 신성(神性)을 잃고,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의 도구인 말(語)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상어이며, 본래의 생기가 죽은 말인 것이다. 생기가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는 기운이 잠들었다는 것이지, 생명이 끊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언어(言語)가 된 것이다. 언어는 말씀(言)과 말(語)이 함께 사는 존재의 집이다. 그래서 언어는 시의 종자이다. 이를테면 번데기나 식물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이 번데기나 씨앗과 같은 언어에다 따뜻함 곧 사랑을 불어넣고, 다시 말해 신(神)을 불어넣으면 시가 태어난다. 예술이란 원래 생기와 신을 불어넣어 생명의 잠을 깨우는 기술이다.   시의 종자인 말(言語)에서 생명의 씨눈은 말씀(言)이다. 이 씨눈을 싹틔우려면 이 씨눈을 잠들게 한 나(吾)를 죽여야 한다. 언어라는 집에서 나(吾)를 내쫓고 그 자리에 신의 아들(天子)을 들이면 시(詩)가 된다는 것이다. 관청은 곧 신의 아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관청은 곧 신전인 것이다. 로마에서도 주(主)라는 영어단어를 소문자로 ‘lord’라고 쓰면 노예가 자기 주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대문자로 쓰면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말씀을 신에게 바치면 시가 되고, 나를 위해 쓰면 말(言語)이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신과의 대화는 시가 되며, 사람과의 대화는 언어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곧 신이며 마음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신과 교감하면 시가 되고, 사람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언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에서도 시는 신탁(神託)이라고 해서, 신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으며,5) 공자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해서 그냥 뜻을 받아 진술할 뿐 자기가 짓지 않는다고 했고,6) 구약성경에서도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뿐 자신의 생각을 보탤 수 없었다. 그래서 서정시를 ‘신과의 대화’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천자를 섬기면 시인(詩人)이 되지만, 몸으로 천자를 섬기면 또 다른 시인(侍人)이 된다. 몸으로 천자를 섬기려면 궁중 안에 있어야 함으로 내시(內侍)가 된다. 천자도 남자이고 내시도 남자이지만, 내시는 자신의 남성을 거세해야 한다. 이것은 주(主)를 모시기 위해서는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시가 천자를 속이고 권세를 잡으면 나라가 망한다. 천자가 하늘의 뜻을 어기고 하늘 자리에 앉으면 우상이 되고, 이 우상이 바로 용(龍)이다. 용은 신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하늘에 올라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은 귀머거리다. 용(龍)의 귀(耳)는 귀머거리(聾)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신의 음성, 곧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신은 무엇인가.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어떤 무엇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하는 것이 신의 소리다. 여기서 참고로 관청 시(寺) 자가 어떻게 절 사 자가 되었는지를 알아보면, 후한(後漢)의 명제가 백마에 불경을 싣고 인도에서 돌아온 마등과 축법란 두 스님을 귀빈 접대 관청인 홍려시에 머물게 했다가 낙양성 교외에 그들을 위한 거처를 짓고 백마시라고 했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가 되었다고 한다.7)              사람에게 처음 주어진 것은 마음(心)이며, 이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 말씀(言)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시(詩)가 되든지 아니면 언어(言語)가 되든지 하는 것은 순전히 그 마음에 달렸다. 그래서 휠더린은 “그러므로 모든 재보(財寶)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재보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증시하기 위해---”8)라고 했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주어졌고, 그 마음의 씀인(用) 언어가 주어졌다. 이 언어가 나를 위해 봉사하면 죽음을 지향하게 되고, 신에게 바쳐지면 시가 된다고 하겠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재보인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증시(證示)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없음(無)’이며, ‘0’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없음’이 되고, ‘0’가 된 것이다.   싸르트르는 자의식 곧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모든 존재(물체와 생물)를 ‘즉자(卽自․en-soi)’라 하고,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대자(對自․pour-soi)’라고 부른다. 사람은 의식 곧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없음(無․neant)’이라고 한다는 것이다.9) 이 ‘없음’에서는 ‘있음’이 되고자 하는 지향성이 있기 마련이며, 이 지향성이 곧 욕구가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게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이 주어졌다. 물론 사람에게도 본능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위에 사람에겐 마음이 더 주어졌기 때문에 본능의 욕구 위에 마음의 욕구가 더 있게 된 것이다. 이 마음의 욕구를 우리말로 옮기면 ‘그리다’가 될 것이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은 이 욕구를 소유(to have)에의 욕구와 존재(to be)에의 욕구로 나누고 있다.10) 소유에의 욕구는 ‘욕심(慾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에의 욕구는 ‘꿈’이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밥이나 옷을 주지 않는 즉 소유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 시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꿈과 사랑, 즉 존재에의 욕구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존재 일반의 단순한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존재 일반도 사람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가리켜 ‘존재의 목자’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런데 그 목자도 말이 없이는 그가 할 일을 다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말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의식되어 졌다’고 할 수 없으며, 의식되어지지 않은 것은 어둠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캄캄한 어둠 속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실존을 비롯하여 존재 일반에 대해서도 캄캄한 무지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의식 곧 마음이 있기 때문에 물체나 생물처럼 어둠 속에 버려진 채로 묻혀 있을 수는 없다. 빛을 캐내어 나의 실존도 비추어 밝혀야 하고, 모든 존재 일반에 대해서도 그 모습을 밝혀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의무를 진 사람을 가리켜 ‘존재의 목자’라고 하며, 이러한 사람에게만 ‘위험한 재보(財寶)인 말’이 주어졌던 것이다.11)   사람은 말(言語)로써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를 증시(證示)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소유의 욕구’로 쓸 때엔 오히려 더욱 더 어둠 속에 묻히게 된다. 그래서 말을 위험한 재보라고 하는 것이다.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 쓰는 수단이나 기호가 아니라 어둠에서 빛을 피워 내는 존재 그 자체가 될 때 재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을 ‘본질적 언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언어는 ‘비본질적 언어’이며, 시는 ‘본질적 언어’가 되는 것이다. ‘비본질적 언어’인 ‘외연적 의미(denotative meaning)’의 말이 시인의 가슴속에서 그 일상성이 죽고, ‘본질적 언어’인 ‘내포적 의미(connotative meaning)’의 말로 다시 태어날 때 그것이 바로 시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언어에서 내(吾)가 죽어야 시로 환생하는 것이다. 언어에서 말씀(言)은 곧 언어 속에 잠들어 있는 씨눈이다. 이 씨눈이 시인의 가슴에서 싹이 터서 시의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가슴은 정서(emotion)의 도가니이기 때문에 꿈과 사랑이 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꿈과 사랑이 끓고 있는 것은 ‘의식의 지향성’ 때문이며, ‘존재에의 향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이며, 이 욕구가 동사로 표현될 때 ‘그리다’가 되는 것이다.   이 ‘그리다’라는 말은 사람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이 길을 통하지 않고는 사람은 언제나 ‘없음(無)’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0’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질이 ‘없음’이기 때문에 ‘그리다’가 아니면 ‘0’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그리다’라는 말의 한자어는 상상(想像)이다. 상상의 뜻은 어떤 모습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아가 부모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도 ‘그리다’이고, 애인이 없는 사람이 애인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도 ‘그리다’이다. 그러니까 ‘그리다’라는 동사는 ‘없음’의 상태를 느꼈을 때 활동을 시작한다. 사람은 원래 ‘없음’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무언가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바로 ‘그리다’이다. 이 마음의 움직임이 손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습을 만들었을 때 ‘그림’이 되고,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있으면 ‘그리움’이 된다.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金春洙 〈능금Ⅲ〉 전문     이 작품은 시로 된 시론이면서 또한 존재의 원리를 시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본질로서 김춘수는 ‘그리움’을 제시한다. 모든 시작품은 이 ‘그리움’의 성육(成肉 : incarn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그리움을 가지고 존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상상력(imagination)이란 에너지가 정서의 도가니에 열을 가해 꿈과 사랑을 끓일 때 반짝이는 빛이 ‘그리움’인 것이다. ‘그리움’은 존재를 지키는 등대이며, 시인은 그 등대지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꿈과 사랑이 끓고 있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일상의 언어, 즉 때묻은 말은 허물을 벗게 되는 것이다. 허물을 벗으면서 존재는 개명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인의 가슴속에서 ‘그리움’은 존재의 목소리인 ‘빛깔과 향기’를 가진 새로운 말의 수육(受肉 : incarnate)되어 시로 탄생하는 것이다. 시는 바로 그리움의 성육인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金春洙 〈꽃〉 전문     꽃은 시인이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다. 시인의 그리움에 성육된 말을 통하여 살아 있는 눈짓이 되는 것이다. ‘나’도 어는 누구의 그리움에 성육이 되기 전까지는 보통명사인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길 기다린다. 그리하여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마음으로 해서 그리움이라는 의식의 병을 앓고 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생각 있음의 존재이며 그리움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가슴속에서 꿈과 사랑이 뜨겁게 끓고 있는 정서의 도가니가 있기 때문에 시에서 떠날 수도 없고 시를 버릴 수도 없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라기보다 ‘정서의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은 ‘정서의 동물’이기 때문에 시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를 떠난다는 것은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서의 동물’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시의 나라의 백성일 수밖에 없다. 정(情)이란 무엇인가. 정(情)은 마음(忄)이 푸르게(靑) 살아 있는 것이다. 육체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동물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살아야 사람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은 영혼의 다른 표현이며, 영혼은 사람 속에 자리한 신(神)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살면 영혼이 살고, 영혼이 살면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영혼이 신과 교감하는 것을 영감(靈感)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영혼과 육체를 갈라서 말하는 이원론은 아니다. 육체나 영혼이나 살아 있는 것은 느낌(感)이 있어야 한다. 육체의 느낌은 육감(肉感)이며, 영혼의 느낌은 영감(靈感)이다. 마음이 살아 있는 것으로 표현하면 정감(情感)이지만, 영혼이 살아 있는 것으로 표현하면 영감이다. 그러니까 정감이나 영감은 ‘그리다’라는 동사가 활동하는 단서가 된다. ‘그리다’가 활동을 시작하면 나(吾)는 죽게 되고, 내가 있던 자리에 신(神)이 자리해서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때부터 시의 나라가 건설된다. 육체가 죽는 것은 죽을 사(死) 자로 표현하고, 영혼이 죽는 것은 망할 망(亡) 자로 표현한다. 육체가 사는 것은 살 생(生) 자로 표현하지만 영혼이 사는 것은 흥할 흥(興) 자로 표현한다. 그런데 영혼이 살 수 있는 길은 시의 나라에만 있다.12) 시의 나라는 신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제정 일치 시대에는 관청이 곧 신전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이곳에서만은 신과의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신과의 교감이 시(詩)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에서 영혼이 살고, 영혼이 살면 영혼의 감각이 살게 되어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시는 곧 신과 만나는 길이며, 신과 통하는 길인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관청에는 신이 없다. 인간만이 살아서 서로 다투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관청은 그 사회의 중심이다. 이 관청을 중심으로 사회는 활성화된다. 여기서 활성화의 활(活)은 육체의 삶인 생(生)과 영혼의 삶인 흥(興)이 합작해서 만들어 가는 삶이다. 그러니까 활(活)은 곧 ‘몸’의 삶이다. 인간의 사회에는 특히 관청에는 영혼의 삶인 시와 나의 삶인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시는 없고 언어만 있다는 말이다. 육체는 죽으면 썩는다. 영혼도 죽으면 썩는다. 그것을 부패라고 한다. 오늘의 관청이나 사회가 부패한 것은 시가 없고 언어만 있기 때문이다. 시가 살아야 관청이 살고 사회가 산다는 말이다.      3. 시는 신화이다     ‘시는 神話이다’라는 말은 시의 내용적 정의이다. 시의 내용, 즉 시는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러니까 시의 내용은 ‘神話’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神話의 의미를 밝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면 신화는 무엇인가. 신화는 글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 혹은 ‘신과의 대화’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들의 황혼’도 훨씬 지난 신들의 밤의 시대, 신들을 위해 떠오를 해가 없는 세기(世紀).”13)라는 인간들의 세기에 신들의 얘기를 하자는 것이다. 이 인간들의 세기에 대해 토마스 만은, “합리주의란 현대인이 행하는 자기 억제의 속물적 표현이다.”라고 했다.14) 그리고 이어서 토마스 만은, 자신의 신화에 쏠리는 관심을 ‘흔들리는 배의 균형 잡기’에다 비유했다. 신화적 세계가 대표하는 초 합리와 과학이 대표하는 합리 사이에 형평을 유지하려는 것을 인간들이 지닌 충동 내지 본능이 빚은 결과로 보는 것이 토마스 만의 ‘균형의 이론’이라는 것이다.15) 그렇다. 현대는 아무리 봐도 신(神)들을 위해 떠오를 해가 없는 시대다. 균형이 맞지 않는 시대다. 땅의 시대이며, 육체의 시대이며, 물질의 시대이다. 육체는 죽었다가 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고 잠든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깨울 수 있다. 현대는 신이 죽은 시대가 아니라 잠든 시대다. 신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 언어 속에 말씀(言)으로 잠들어 있다. 이 말씀을, 이 시의 씨앗을 싹틔우면 신이 깨어나 신화의 세계가 열린다. 그러면 신화(神話)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화 연구가들에 의하면 다음의 세 가지로 풀이된다.     ① 신들의 이야기  ② 신과의 대화  ③ 신의 말씀     위의 세 가지 신화의 의미 중에서 시의 내용이 되는 것은 ②번의 ‘신과의 대화’이다. 오늘날에는 시라고 하면 서정시만을 가리키는 말이 되므로 ‘신과의 대화’는 곧 서정시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①번의 ‘신들의 이야기’는 신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펼치는 이야기로서 그리스․로마 신화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도 시의 내용이긴 하지만 서사시와 극시의 내용인 것이다. 오늘날의 소설과 희곡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들의 이야기’는 결국 ‘사람들의 마음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도 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③번의 ‘신의 말씀’은 종교적 차원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시는 다시 말해서 서정시는 ‘신과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신과의 대화’가 시의 내용이라면, 시인은 신을 만나서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시인과 종교인은 같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인은 신의 말씀을 듣고, 신의 뜻에 순종하고, 신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시인(詩人)이 아니라 시인(侍人)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시인(詩人)은 신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말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니까 시인의 표현은 신에게 보내는 회답이다. 그래서 시를 ‘신과의 대화’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신과의 대화’를 가리켜 시적 영감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시를 신탁(神託)이라고도 했다. 신이 사람을 매개로 해서 그의 뜻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신과 대화하는 사람인 것이다.     詩神의 詩觀은 詩를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詩로써 神(Muses)과 인간은 通話를 한다고 보았다. 그 通話의 通路가 바로 靈感(inspiration)이었다. 詩神에게 靈感은 시인을 부르는 것이었고 詩人에게 靈感은 부름에 응함이었다. 詩神의 부름과 詩人의 응함을 가능하게 했던 靈感은 神의 목소리를 듣는 귀였고 읊는 입이었던 셈이다.16)      이것은 그리스 시대의 ‘詩神의 詩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해, 오늘날 예술(Art)로 번역되는 그리스의 용어인 Techne를 ‘황홀함의 양식(a mode of ecstasis)’ 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는 양태(a pattern of looking beyond whatever is already given at any time)’로 보기도 한다.17) 이것은 신화의 신비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적인 견해이다. 신이 사람 속에 들어오면 영혼이 되고, 이 영혼의 작용이 마음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언어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언어(言語)에서 내(吾)가 죽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죽어야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다시 말해서 신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입신의 경지를 의미한다. 입신의 경지가 바로 황홀함이며, 한자로는 흥(興)이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신의 소리를 듣는 데까지는 시인이나 종교인이나 같다. 그런데 종교인은 신의 말씀에 대한 회답을 몸으로 하고, 시인은 언어로 한다. 신의 말씀에 대한 회답으로서의 언어, 이것이 곧 언어 예술이다. 신의 말씀은 지식이 아니다. 느낌으로 전해 오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에 대한 회답도 살아 있는 언어라야 한다. 살아 있는 언어를 만드는 것이 곧 언어 예술이다. 예술이란 생명(藝)을 살리는 기술(術)이란 뜻이라고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시인이란 뜻의 영어인 ‘poet’은 만드는 사람(maker)이란 뜻이다. 살아 있는 언어를 만드는 사람 곧 창조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고 시를 우리말로는 노래라고 하는데, 노래는 ‘놀+애’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놀이도 원래 ‘놀+이’의 구조라고 한다. 그런데 ‘놀’이라는 말이 ‘神’의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노래는 ‘神樂’의 의미이며, 놀이는 ‘神遊’의 의미라고 한다.18) 서정시는 원래 시가(詩歌)이다. 그러니까 시와 노래는 사람의 영혼이나 마음, 곧 사람 속에 있는 신(神)이 살아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워즈워드는 강한 느낌(powerful feeling)의 자발적 유로(spontaneous overflow)라고 했으며, 한자로는 흥(興)이라고 하고, 그리스의 ‘techne’에서 말하는 ‘황홀함’이라 하는 것이다. 마음은 영혼의 나타남이며, 영혼은 곧 사람 속에 있는 신이다. 이 마음이 신과 만나서 교감(交感)할 때 이를 영감이라 하며, 영감에 의해 시가 탄생하고, 거기서 마음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상태를 ‘神난다’라고 한다.   사는 것의 반대는 죽는 것이다. 땅에서 온 물질인 육체가 물질의 모체인 자연과의 교통이 이루어져야 살 수 있듯이, 영인 마음도 영의 모체인 神과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과의 교감, 마음과 마음과의 교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어떤 사람이 시를 낳게 되며 어떤 사람이 시인이 될 수 있는가. 흔히 시를 가리켜 체험이라고 한다. 그런데, 체험을 정의해서, ‘남은 못 보는 것을 나만이 보고, 남은 못 듣는 것을 나만이 듣는 것’이라 하고, 또는 ‘경험+사랑=체험’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체험을 하려면 누구보다도 가슴이 뜨거워야 한다. 뜨거운 사랑이 없이는 경험에 그치고 말며, 체험은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이 많아야 한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은 ‘그리움’이며, ‘사랑’인 것이다. 문학적 용어로는 ‘상상(想像)’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상이란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어떤 모습(像)을 생각한다(想)’이다. 그러니까 상상을 우리말로는 ‘그리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다’의 작용은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 작동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성을 하늘로부터 명부 받았다고 한다.19) 그런데 남성은 남성만을, 여성은 여성만을 하늘로부터 명부 받았기 때문에 남성에겐 여성이 없고, 여성에겐 남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다’의 원리이며, 시 창작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상상력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다시 말해서 가슴이 뜨거울 때, 사람은 신을 만나서 교감하게 되고, 남은 못 보는 것을 보게 되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신과의 대화’라고 하는 것이다. 신의 음성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며, 가슴으로 듣는 것이다. 시인은 뜨거운 가슴으로 모든 사물 속에 숨어 있는 신의 이미지를 보고, 그 음성을 듣는 시적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체험만으로는 시인이 될 수 없다. 이 체험을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어서 회답을 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특권이며 또한 시인에게 주어진 십자가이기도 하다. 시를 낳지 못하는 시인은 그 영혼이 죽은 망(亡)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신을 위해 떠오를 해가 없는 시대라고 한다. 불균형의 시대라고 한다.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 빛과 그늘, 아버지와 어머니, 이것이 균형을 이루어 잘 어울릴 때,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이 말은 불균형이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땅에 산다. 그래서 하늘을 그려야 하고, 영혼의 삶을 그려야 하고, 빛과 아버지를 그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과의 교감, 곧 영감에 의한 시를 써야 한다. 영감은 신의 소리를 듣기 위한 귀의 열림이다. 이 귀가 열려야 신탁이 이루어진다. 한국 민속에서는 이것을 ‘공수’라고 한다. 신에 접한 무당이 신의 말을 듣고 이를 옮기는 것이 ‘공수’이다. 시베리아의 샤먼은 그의 입무식(入巫式) 동안의 탈혼 상태에서 즉흥적인 시작(詩作)을 한다고 한다. 입신하여 있는 경지가 바로 창작하고 시작(詩作)하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20) 그러니까 시를 쓰고 있는 동안에는 신과 교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시인이나 무당은 신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제 멋대로 조작하거나 거역할 수 없었다. 종교성이 특히 강한 기독교의 예언자들은 더욱 그랬다.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절대이면서 진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할 일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시나 써야지 하는 생각에서 시인이 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란 이름은 사명 그 자체이며, 입무(入巫)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지도자가 따로 있고, 시인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누구나 입무를 해야한다. 모두가 신화를 창조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옛날에는 황제만 신의 아들이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황제만 주(主)였지만 지금은 모두가 주(民主)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정신이다. 시를 쓰는 기술자로서의 시인이 아니라 시정신의 소유자로서의 시인이 되어야 한다.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진리의 소리에 귀를 열 수 있어야 한다.   개체 생명도 늙으면 다시 어린애로 돌아간다고 한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한다. 신과의 대화를 할 수 있으려면 신과 같아야 한다. 등신(等神)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 생명인 사회도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시시대는 신화 시대다. 네 것도 없고, 내 것도 없는 때다. 내가 없는 말씀(言)만의 시대다. 시정신이란, 언어(言語)의 말(語)에서 내(吾)가 죽고 그 자리에 절대적인 공간(寺)인 신전을 세워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마음가짐이다. T. 만의 말대로 불균형의 황무지에서 에덴을 꿈꾸는 마음과 노력이다. 황무지는 영적 죽음의 풍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황무지에서 시의 나라에 대한 동경이나 에덴에 대한 향수가 곧 시정신이라는 것이다. 시정신은 곧 신과의 교감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자세는 종교를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원시 종합예술 시대에는 종교와 예술이 한 자리에 있었으나, 예술이 분화되어 따로 나왔을 때에는 종교의 자리를 이성(reason)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현대 사회는 결국 종교의 멸종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21) 그러면 인간 존재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다시 말해서 황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이에 대해 조셉 캠블은, “신학처럼 권위의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경험에 충실한 능력 있는 통찰, 감성, 사고, 비젼에서” 나오는 창작 신화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했다.22) 창작 신화란 시작품을 일컫는 말이다.           이제 해답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창작 신화 곧 시작품을 통해 시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리움’ 곧 사랑이란 에너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문학의 3요소 중 첫째와 둘째인 정서와 상상력의 의미가 확실해진다. 정서는 살아 있는 마음의 덩어리로서 무언가가 되기 위해 머리를 내밀고 있는 상태이며, 상상력은 무언가의 모습을 그려 줄 수 있는 힘이다. 이 두 가지는 다 마음이 행할 수 있는 기능이다. 마음은 영혼에서 오고, 영혼은 신에게서 왔다. 살아 있는 마음을 통해 영감이 살아나고, 영감을 통해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통해 영혼으로, 영혼을 통해 신(神)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그 과정은 어떠한가. 그 과정이란 신의 나라, 곧 신화의 마을인 시의 나라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마음이 하는 일은 ‘생각하다’인데, 이 ‘생각하다’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그 첫째가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思考)’이며, 둘째가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상상(想像)’이다. 흔히 사고는 머리로 하고, 상상은 가슴으로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주된 기능은 ‘상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슴이 곧 마음이며 심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력은 분석하는 힘이고,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상상력은 종합하는 힘이라고 한다. 상상력을 통해 마음에서 영혼으로, 다시 영혼에서 신화의 나라에 이르는 과정을 재구하여, 처음 신화의 나라에서 쫓겨나 황무지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창작 신화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캠블은 상상력으로 종합하여, “생성되는 것은 사물(死物)이 아니라 생명이다. 될 것이나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또 되었던 것이나 전혀 되지 않을 것이 아니라, 안과 밖에, 지금 여기에, 깊음 속에,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23)라고 한 것이다.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고력에 의해 과학이 발달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실험적 진실만이 진리이며, 인간 체험이라는 공통 분모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적 혹은 시적 진리는 허구나 착각이라고 무시되어버렸다. 과학은 이렇게 하여 종교나 시의 정신적 공화국의 위대한 독재자가 되었다.   인간이라는 의식이 성숙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그 언어 자체가 시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시인이다. 원시언어는 다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주고받은 말이나 그들이 하나님과 대화한 것도 그 자체가 다 시라는 것이다. 원시언어는 리듬과 은유를 동시에 사용하는 신비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며, 세려된 언어보다는 집단심성(community mind)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24) 따라서 원시언어는 주술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술적 기능이란 신과의 교감을 의미한다. 영혼이 살아야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신과의 교감은 곧 집단심성의 표현이라면, 영혼의 죽음을 한자로 망할 망(亡)자로 쓰는 것이 타당하다. 망한다는 것은 집단 곧 공동체 생명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명의 첫 단계는 가정이고, 아직까지는 그 끝 단계가 국가이다. N. 프라이는, “신화는 심오한 공공의식의 표현이다. 이 때 공공의식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문제되는 것처럼 지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느낌과 행위와 삶의 전체의 일체감이다.”라고 했다.25)    이 가정과 국가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그것에 소속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집단심성의 표현인 원시언어란 나의 뜻인 내 마음이 생기기 이전의 언어다. 이 원시언어의 세계가 곧 신화의 세계이며 시의 나라인 것이다. 나(自我)라는 자의식이 눈뜨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신화의 세계에는 공동체의식의 발로에서 일체감이 양식화되었으며, 이렇게 양식화된 일체감은 제의(祭儀)나 기도, 춤, 그리고 노래 등의 리듬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이 신화세계에서는 종교적 의식이 자유롭게 발달할 수 있어서 신비감이 모든 인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이러한 신비감은 신과 악마들이라는 다신교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의 위대한 유일신으로 집중되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26) 그런데 신화 시대에는 이 신비가 주로 외형적인 리듬으로 나타났는데, 현대에는 외형적인 운율의 정형시가 없어지고 내재율의 자유시가 되었다. 그렇다면 내재율이란 무엇인가.    나는 내재율을 글자 그대로 풀고 싶다. 그렇다면 내재율이란 ‘안에 있는 가락’이다. 이 ‘안’이 바로 마음이다. 가락 곧 리듬은 ‘살아 있음’을 뜻한다. 살아 있는 마음에서만 마음의 가락인 내재율이 울리게 되어 있다. 이것이 곧 영혼의 가락이며, 이 영혼의 리듬이 바로 신과의 교감이며, 한자로는 영혼의 삶을 뜻하는 흥(興)이 되는 것이다. 이 흥은 곧 신(神)이 살아나는 것이며, 신이 살아나는 것 곧 신이 날 때 노래와 춤이 나오는 것이다. 내재율은 오히려 시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시 곧 현대시는 외형률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내재율 곧 마음의 가락으로 쓴다. 다시 말해서 신과의 교감으로 쓰는 것이다. 신과의 교감이란, ‘남은 못 보는 것을 보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듣는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없는 ‘우리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칼 마르크스는 이 ‘우리의 상태’를 ‘원시공산사회’라고 했다. 네 것도 없고, 내 것도 없는 사회 곧 에덴동산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분명히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였기 때문에 물질의 생산을 공유한다는 공산(共産)에다 초점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이 노예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공산주의 사회가 와야한다고 했다. 논리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곧 물질의 생산과 소유의 구조로만 본 것이다. 개체생명도 노인이 되면 다시 어린애가 되는 것과 같이 ‘원시공산사회’에서 시작하여 ‘현대공산사회’로 끝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27) 그들은 자본주의 다음에, “그러나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공산주의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되지만 보다 높은 차원에서 돌아가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원시적인 생산력에 원시공산주의 자리에 극단적으로 발전된 생산력에 근거하며, 자체 내에 거대한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공산주의가 오게 된다.”라고 했다.28) 그러나 역사는 물질의 생산과 소유에 관한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서 영혼, 영혼에서 다시 신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사회는 물질의 공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공유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한 사회가 형성되는 것은 그 시대의 마음들의 모음인 시대정신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원시공산사회’가 아니라 신과의 대화가 가능한  그 시대의 마음들이 형성한 ‘신화시대’인 것이며, ‘현대공산사회’가 아니라 현대인의 마음들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민주시대’가 되어야 한다. 역사의 흐름이 마지막으로 다다라야 할 곳은 ‘민주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아래로 흐르는 물이 가장 낮은 자리에 이르러 머문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하늘과 닿아 있다. 하늘과 만난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마음과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다. 낮아지는 마음과 영혼의 안에는 하늘이 들어오게 마련이다. 겉으로 보면 하늘과 바다는 맞닿아 있는 것 같지만 하늘은 바다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의 빛깔이 하늘보다 더 푸른 것이다. 더 푸르다는 것은 더욱 생명력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민(民)은 가장 낮은 사람이다. 이 가장 낮은 사람이 임금이며 주인인(主) 시대가 ‘민주시대’이다. 이것은 순전히 마음의 문제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영혼이나 정신을 배제한 유물론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출발에서부터 영혼이 죽은 것이므로 망(亡)할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사실 공산주의는 망했으며, 망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성 어거스티누스의 이라는 대 순환론의 영향이라고 한다. 헤겔과 토인비도 마찬가지며, 유태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이슬람까지 순환론적 역사관이다. 동양에서는 힌두교, 불교, 그리고 스리 오르빈도와 라다크리쉬난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환론적 역사관이다. 이들의 순환론적 역사관이 모두 신에서 출발해서 신으로 귀착하는 순환론이다. 오직 마르크스만이 공산에서 출발하여 공산으로 귀착하는 것이다. 오르빈도의 경우, 사람을 무한자로 보고, 이 무한자의 퇴화는 가장 저급한 수준의 존재인 물질로의 하행이며, 물질은 비 의식적인 차원이므로 여기서부터 진화가 시작되어 의식적인 차원에 도달한 다음 정신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진화 과정의 최종 목표인 영지(靈知)적인 차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29) 어쨌든 인간의 문제는 마음에서 영혼으로, 거기서 다시 신으로 이어져야 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환론적 역사관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숨어 있다. 역사는 절대로 순환하지 않는다. 순환론의 뿌리는 인도에 있다. 역사는 시간과 영혼이 만드는 것이다. 시간과 역사는 원이 아니며, 만다라가 아니다. 하루는 아침에서 출발해서 다시 아침으로 돌아오지만 오늘 아침이 어제의 아침은 아니다.        역사는 시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는 물의 흐름에 비유한다. 에덴동산 곧 신화시대에서 나(吾라)는 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나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 씨족이다. 시간은 흐를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은 자연이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모인 작은 냇물과 같은 것이 ‘씨족시대’라는 흐름이다. 이 시대가 열리면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예제도가 탄생한다. 한 씨족이 다른 씨족을 정복한 다음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연의 물은 저절로 합류하지만 인간 공동체의 흐름은 싸우면서 큰 집단이 된다. 작은 냇물이 여럿이 만나면 큰 냇물이 되듯이 몇 개의 씨족이 서로 싸워서 합병해 부족을 이룬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봉건제도다. 큰 냇물이 모여서 강이 되듯이 강한 부족이 약한 부족을 합병하여 민족국가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 과학의 발달과 함께 산업이 발달하면서 자본이라고 하는 돈의 힘이 부각되고, 권력이 돈의 힘인 자본과 합작하면서 만들어진 게 자본주의사회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마음은 물질로 향하게 되고 영감은 돈을 버는 경제감각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물신시대가 오고, 영적 황무지가 된 것이 현대다. 오늘날은 공산주의자만 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유물론자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만 좌익이 아니라 모두가 좌익이 되었다.   한 어둠이 또 다른 어둠에게 캄캄한 제 속뜻을 전한다. 다른 어둠이 빨리 알아듣고 둘은 서로 캄캄하게 껴안는다. 덩달아 모여드는 어둠들이 온 누리를 뒤덮는다. 어둠들이 한데 뭉쳐서 캄캄한 대권을 거머쥔다. 눈을 떠도 캄캄하고 눈을 감아도 캄캄하다. 빛을 모두 잡아먹고 캄캄하게 살이 오른 거대한 야행성 동물의 뱃속이다. 나도 그 뱃속에서 캄캄하게 소화된 지 오래다. 어둠공화국의 충실한 백성이 된지 오래다.                    -유승우, 전문.     현대의 영적 황무지를 상징한 작품이다. 모든 사람이 시정신을 떠나서 산문정신으로 무장되었다. 현대야말로 시가 탄생해야 할 때다. 그래야 영혼이 살아서 흥(興)이 나고, 신(神)이 나서, 남은 못 보는 것을 보고, 남은 못 듣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흥이 나고 신이 나는 것은 바다의 물결이다. 물이 흘러서 바다에 이르듯이 역사는 흘러서 민주로 가야한다. 바다는 민주를 상징한다. 바다는 평등하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제 멋에 겨워 흥이 나고 신이 나는 것이 물결이다. 바다는 편을 가르지 않는다. 압록강에서 흘러온 물이나 섬진강에서 흘러온 물이, 낙동강에서 흘러온 물이나 두만강에서 흘러온 물이, 서로의 근원을 따져 지역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모두가 민주(民主) 곧 임금이며 주인이기 때문이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그 가슴속에 키우던 민물고기들은 다 두고 간다. 바다의 가슴속 어디에서도 강물의 추억이나 기억을 찾아볼 수 없다. 송사리 새끼 한 마리도 그 품속에 숨겨두지 않는다. 이토록 깨끗한 몸 바꿈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지만, 나는 송사리나 미꾸라지처럼, 아니면 산골의 가재처럼 민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유승우, 전문.     물이 강물일 때까지는 흘러야 한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늪이 되어 썩는다. 그러나 바다는 흐르지 않아도 썩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나(吾=私)는 죽고, 우리(公共)만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신화가 탄생하는 것이며, 신화가 탄생한다는 것은 영혼이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혼이 살면 영감이 발달하여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린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듣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이미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현대시를 쓰는 것은 외형률로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정신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4. 시는 이미지이다     ‘시는 이미지이다’라는 말은 시의 형식적인 정의다. 신(神)의 체험을 어떻게 형상화하여 보여주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신의 체험은 지식이나 사상이 아니다. 지식이나 사상이라면 설명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나 예술은 이해가 아니라 느낌이며 체험이다. 종교의 교리를 이해함으로써 종교적 체험을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음악이나 미술이나 시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감동이며 교감이다. 시인은 시를 음악처럼 느끼게 하기 위하여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고, 미술처럼 느끼게 하기 위하여 시각적 이미지를 만든다. 시인은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들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의 창고 속에 저장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이라고 한다. 시인은 이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체험들을 살려서 이미지로 만든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지각이 결합하는 것이 바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poet'이란 말이 만드는 사람(maker)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런 뜻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신과의 대화’라든지 ‘신의 말씀’이란 것은 추상적 관념이다. 자기만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타인에게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만든다. 신과의 대화란 정신적 혹은 영적 교감이다. 쉽게 말해서 마음의 느낌이다. 마음의 느낌은 그 느낌의 당사자인 시인에겐 생동하는 감각이다. 이 생동하는 감각을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는 없다. 보여줘야 하고, 들려줘야 한다. 그래서 이미지를 만든다. 이해시키는 언어는 과학적 언어이며, 보여주고, 들려주어서 느끼게 하는 언어는 시적 언어이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시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C. D. 루이스는 이미지를 말로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보여주는 언어, 곧 ‘언어로 구성된 회화’라고 할 수 있다.30)   과학적 언어는 이해하는 언어이며, 논리적 언어이다. 과학적 언어의 가장 훌륭한 표본은 수식이다. 모든 과학의 법칙은 수식으로 요약되고, 이해된다.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통해 ah/2라는 수식으로 요약된다. 이 명쾌한 요약을 사람들은 이해한다. 그러나 이해된 지식은 추상적 관념이다. 사실 숫자보다 추상적인 것은 없다. 숫자는 이미지가 없다. 1이나 2가 어떻게 생겼는가. 1이나 2는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 산수 책에서는 3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과 세 개나 병아리 세 마리를 보여준다. 추상적 관념을 이해하게 되면 과학이나 철학을 지식으로 갖게 된다. 그러면 시를 느낄 수가 없다. 어린이의 마음을 지녀야 시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시심은 동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인과 어린이는 모든 것을 이미지로 감각한다.   나는 앞에서 상상(想像)을 우리말로 ‘그리다’라고 했다. 이 ‘그리다’를 다른 말로는 ‘묘사’라고 한다. 묘사라는 말은 수사학에서 쓰는 용어이다. 수사학에서는 글을 쓰는 형식을 ‘설명, 논증. 묘사, 서사’로 나눈다. 이 중에서 ‘묘사’는 시를 쓰는 형식이다. 그러니까 시를 쓰는 것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며, 느낌을 말로 그리는 것이다. 윤재근은 상상에 대해, “마음속에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코가 있으며 온 몸의 觸角이 있음을 想像은 확인한다. 想像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마음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한다. 이처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 妙하므로 옛부터 想像을 강조하여 神思라고 하였다.”31)에서 보듯이, 劉勰의 ‘文心雕龍’에 나오는 ‘神思’를 상상으로 풀이한다.32) 상상은 마음의 기능이며, 마음은 영혼의 다른 이름이고, 영혼은 神과 교감할 수 있는 신적 요소다. 그러므로 마음이 하는 일은 무엇이나 신을 빼놓고는 논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상상(想像)’을 특히 ‘神思’라고 한 것은 마음이 그리는(想) 모습(像)이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상상이란 말 대신에 신사(神思)를 쓴 것이다. 노래를 ‘神樂’이라 했고, 놀이도 ‘神遊’라고 한 것을 보면 동양적 신(神)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E. 파운드는 이미지를 ‘지적 정서적 무의식의 일시적 발현(presents an intellectual and emotional complex in an instant of time)'이라고 했다.33) 나는 여기서 ’complex'를 ‘무의식’이라고 번역했다. 원래 콤플렉스는 종합이나 합성물이란 뜻이다.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을 모든 경험이 녹아든 기억의 창고라고 한다. 그리고 빙산의 물 속에 잠긴 부분을 무의식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물 밖에 나와 있는 부분은 의식이다. 이 빙산이 바다 위에서 떠도는 것은 밖에 나와 있는 부분이 바람에 밀려서가 아니라 물 속에 잠긴 부분이 물결에 밀려서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동이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상상은 마음의 행동인 ‘그리다’인데, 이 상상이 그려낸 이미지가 바로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시적(in an instant of time)인 발현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무의식이 왜 일시에 튀어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무의식이 일시에 발현되려면 의식이 사라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이 바로 나(吾)라는 자아이다. 그렇다면 의식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신과의 교감을 위해서 내(吾)가 죽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면 어떤 때 의식이 사라질 수 있을까. 일상적으로는 충격을 받았을 때 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나 여기서의 충격은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이다. 정신적인 충격은 사랑하는 심장을 가진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의식이 곧 생각이나 마음이라면 여기서는 내 생각이나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나 내 마음이 죽어야 사물 자체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심장을 가진 사람은 내 생각이나 내 마음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대상만 있고 나는 사라지게 된다. 이런 상태가 바로 시인의 영혼이 신(神)과 교감하는 상태인 것이다.   신과 교감하는 상태에서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 때의 말은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신과의 교감은 느낌일 뿐 의미와는 상관이 없다. 순수 예술은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이미지를 만들뿐이다.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다. 소리를 살리는 것이 음악이다. 소리는 느낌일 뿐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높은 소리로 아버지를 발음하나 낮은 소리로 발음하나 그 의미는 다르지 않고 느낌만 다르다. 미술도 순수 예술이다. 미술의 재료인 색채도 의미와는 상관이 없다. 빨강이나 파랑은 느낌이 다를 뿐 어떤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음악이나 미술은 번역이나 통역이 필요 없다. 시는 언어 예술이다. 그런데 언어는 소리와 의미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이 두 요소 중 사람과 대화할 때는 의미가 중요하지만 신과의 대화에서는 느낌이 중요하다. 말의 요소 중 소리로는 듣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정형시의  율격이다. 그러나 현대시는 자유시다. 귀로 듣는 율격이 아니라 눈으로 보아서 소리도 느끼게 하고 의미도 느끼게 하는 것이 이미지이다. 여기서 눈으로 본다는 것은 듣는 시가 아니라 읽는 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를 ‘말로 그린 그림’이라고 정의한 의미이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 ‘외인촌’에서)   꽃처럼 붉은 울음에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에서)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정한모 ‘가을에’에서)   음악이 혈액처럼 흐르는 이 밤(김종한 ‘살구꽃’에서)   “요한복음 삼장 십육절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고 있다.“ (유승우 ‘섣달에 내리는 눈’에서)     위에 인용한 것들이 감각적 이미지들이다. 감각적 이미지의 이상적인 방법은 여러 종류의 이미지들이 결합해서 정서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이것을 공감각적 이미지라고 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만드는 원동력은 상상력이다. 위대한 시인은 위대한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위대한 상상력은 참으로 살아 있는 듯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상상력의 소유자는 또한 위대한 사랑의 소유자이다. 남은 못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이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듣는 사람이다. ‘푸른 종소리’에서처럼 종소리의 빛깔도 보며, ‘붉은 울음’에서처럼 울음의 빛깔도 보는 것이다. ‘음악이 혈액처럼 흐르는’ 것도 볼 수 있으며, ‘요한복음 3장 16절이’ 눈처럼 내리고 있는 것도 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시인인 것이다.   감각적 이미지는 마음으로 그려보는 그림이다. 사실은 없는 것을 그렇게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종소리와 울음에 무슨 색깔이 있으며, 음악이나 요한 복음이 어떻게 피처럼 흐르며 눈처럼 내릴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정신적인 관념을 육체의 오관을 통해 느끼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감각적 인식이라고 하며, 정신적 이미지라고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을 체험이라고 한다.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것은 경험이며, 없는 것을 시인만이 보는 것을 체험이라고 한다. 시인은 어떻게 남은 못 보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볼 수가 있을까. 그것은 시인의 살아 있는 마음이 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마음은 곧 영감(靈感)이며, 영감은 신과 교감하기 때문이다.     5. 마무리-시는 몸이다     사람을 가리켜 작은 우주라고 한다. 우주란 무엇인가. 무한 공간인 우(宇)와 무한 시간인 주(宙)가 만나서 우주가 된 것이다. 그런데 끝이 없는 무한(無限)에는 결코 사이(間)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 공간’이나 ‘무한 시간’이란 말을 쓴다. 여기서 쓰는 공간이란 말은 땅(地球)이 있음으로 해서 성립된 낱말임을 알 수 있다. 지구가 없다면 그냥 빈 하늘일 것이다. 그래서 빌 공(空) 자는 하늘 공자도 된다. 지구가 있음으로 해서, 이 쪽 하늘과 저 쪽 하늘 사이에 땅이 있다는 공간 개념이 성립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땅이 있음으로 해서 하늘도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땅이 기준이다. 땅으로 해서 공간개념이 있게 된 것이다. 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땅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이다. 이 땅의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만들었다. 땅과 같이 눈에 보이는 물질로 된 부분이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람의 모형일 뿐 사람이 아니다. 여기에 생명이 들어가야 하고, 마음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들은 형체가 없으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종합해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우주는 공간과 시간의 모음인 몸이고, 작은 우주인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모은 몸이다. 그러니까 우주는 몸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는 몸이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1) 문덕수, ꡔ시론ꡕ(서울, 1993, 시문학사), p.36.2) 김언종, ꡔ한자의 뿌리ꡕ(서울, 문학동네, 2001), p.636.3) ‘寺’자는 원래 관청이란 뜻과 ‘시’의 음을 가진 글자이다. 제정 일치 시대에는 관청이 곧 신전이다. 그러므로 관청에 바쳐진다는 것은 곧 신에게 바쳐진다는 뜻이다.4)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씀 참조.5) 윤재근,ꡔ詩論ꡕ(서울, 둥지, 1990), p.259.6) 論語, 述而篇, ‘述而不作 信而好古’7) 김언종, 앞의 책, pp.400-401.8) 하이데거, 소광희 옮김, 「시와 철학」(서울, 박영사,1978). p.43.9) 박이문, 「현상학과 분석철학」(서울, 이조각. 1982). p.114.10) 에리히 프롬, 김진홍 옮김, 「소유냐 삶이냐」(서울, 홍성사, 1978). p.30.11) 박이문, 앞의 책, pp96-98.12) 論語, 泰伯篇,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13) 김열규 외, 「우리 民俗文學의 이해」(서울, 1984, 개문사). p.11.14) 위의 책, 같은 곳.15) 위의 책, p.12.16) 윤재근, 「詩論」(서울, 둥지, 1990), p.259.17) 위의 책, p.258.18) 서정범, 「어원별곡」(서울, 1991, 범조사) p.158.19) 中庸, 제1장, 天命之謂性.20) 김열규, 앞의 책, p.21.21) 지라르, 김진식 옮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서울, 2004, 문학과 지성). p.7.22) 캠블, 정영목 옮김, 「창작 신화」(서우, 2002, 까치), p.15.23) 캠블, 위의 책, p.16.24) 김병욱 외 편역, 「문학과 신화」(서울, 1981, 대람). p.138.25) 김병욱 외 편역, 「문학과 신화」(서울, 1981, 대람). p.137.26) 위의 책, p.137.27) E. 케언즈, 이성기 옮김, 「역사철학」(서울, 대원사, 1990). p.267.28) 위의 책, p.290.29) 위의 책, pp.244-317.30) 문덕수, 「詩論」(서울, 1993, 시문학사). p. 215.31) 윤재근, 「詩論」. p.721.32) 崔信浩 譯註 「文心雕龍」(서울, 1975 재판, 현암사)에서는 券六, ‘信思二六’을 ‘想像力의 陶冶’라고 했다.33) Handy and Westbrook, Twentieth century criticism, LIGHT & LIFE, p.18. [출처] 시와 예술, 그리고 신화|작성자 최진연
106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 댓글:  조회:829  추천:0  2019-12-21
출처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 by 김용식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 ​ 문학은그 자체로 진공의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자 - 작품 - 독자'의 구도 속에서 '현실 세계'에 역동적으로구체화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문학의 참된 의미는 작자, 독자,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서어디에다 중점을 두고 문학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관점이 나온다. 현실세계   ∥ 작가 〓 작품 〓 독자   표현론적 관점(생산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작가의 체험, 사상, 감정의 반영물이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조 능력의 소산이다. ⑵ 특징 ♠ 작품이 작자와 맺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관점 ♠ 문학 작품은 작가의 표현욕구가 드러난 대상이기에 작가의모든 것을 작품에 연관시켜 해석하려 함. ♠'작가론(作家論)'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님. ⑶ 방법 ♠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창작 의도에 대한 연구 ♠ 작가에 대한 전기적(傳記的) 연구 ― 성장환경, 가계, 학력, 교우관계, 취미, 사상, 병력 등의 조사. ♠ 작가의 심리 상태에 대한 연구 ⑷ 장 · 단점 ♠ 장점 : 작가의 개인적인 능력과 천재성을 중시함. ♠ 단점 : 의도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작가가 표현하고자의도한 것과 그것이 실제로 표현된 결과인 작품이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 반영론적 관점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현실 세계의 반영이다. ⑵ 특징 ♠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작품과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임. ♠ 실제로 인간의 삶은 현실 세계에서 영위되고 있으므로, 작품은 인간의 현실적 삶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할 수 있다. ♠ 작품에 나타난 현실과 실제의 현실이 맺고 있는 관련성에촛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방법임. ⑶ 방법 ♠ 작품이 대상으로 삼은 현실 세계에 대해 연구한다. ♠ 작품에 반영된 세계와 대상 세계를 비교 검토한다. ♠ 작품이 대상 세계의 진실한 모습과 전형적 모습을 반영했는지검토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문학이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출발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며, 문학 작품에대한 이해가 삶의 현실, 시대 및 역사에 대한 이해로 확대될수 있게 한다. ♠ 단점 : 이 방법이 지나치면 작품을 작품으로서가 아니라실제 사실들의 조립체 또는 역사적 자료로 보게되는 단점이 있음. 효용론적 관점(수용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은 독자에게 미적 쾌감, 교훈, 감동 등의효과를 주기 위해 창작한 것이다. ⑵ 특징 ♠ 작품과 독자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 ♠ 능동적 참여자로서의 독자의 역할을 강조함.(독자가 작품을수용함으로써 의미가 구현된다는 점, 즉작품 해석이 수용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점 등을 제시함) ♠ 작품의 가치를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어느 정도 주었느냐에따라 평가하려는 관점이다. ⑶ 방법 ♠ 독자의 감동이 무엇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품의 어떤면에서 촉발되는가를 검토한다. ♠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과 정신 등 객관적이고 타당한 기준이도입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독자가 능동적인 주체가 되며, 일반 독자들이 쉽게실천할 수 있는 관점이다. ♠ 단점 : 독자의 주관적 느낌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하는오류에 빠질 염려가 있음. 절대주의적 관점(구조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고도의 형상적 언어로 조직된자율적인 체계이다. ⑵ 특징 ♠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작품밖에 없으며, 작품속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함. ♠ 작품을 그 자체로 독립된 자족적 세계로 인식하기 때문에, 작품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생각함. ♠ 작품을 작가나 시대, 환경으로부터 독립시켜 이해한다. ♠ 언어 표현의 방식과 작품의 내적인 짜임새를 중시함. ⑶ 방법 ♠ 작품의 언어적 구조를 중시한다. ♠ 문학의 언어가 지니는 특징 및 언어의 이미지, 비유, 상징등에 주목한다. ♠ 작품을 유기적 존재로 본다. 특히, 시에 있어서 시어와시어 사이, 행과 행, 연과 전체 작품의 상관 관계, 운율과 의미와의 관계 등을 분석적으로 이해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언어에 민감한 시의 분석에 뛰어난 성과를 보임. ♠ 단점 : 작품에 대한 해석의 폭을 좁힐 수 있으며, 문학이궁극적으로는 역사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고려하지 않는다. 종합주의적 관점 ⑴ 기본 입장 : 작품의 총체적이고도 통일적인 의미를 추구하기위해서는 표현론적, 반영론적, 효용론적, 절대주의적관점을 통합하여 연구해야 한다. ⑵ 특징 ♠ 작품을 어떤 하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그 작품의 부분적의미만을 볼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함. ♠ 작품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총체적으로이해하려면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하다는것이다. ⑶ 방법 ♠ 네 가지 관점을 통합한다. ♠ 네 가지 관점을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유기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한다. ​ 출처 : http://www.woorimal.net/ [출처] [공유] 문학작품의 해석 방법|작성자 옥토끼  
105    1950년대 시인의 <시와 시인의 말>1/정한모(鄭漢模) 댓글:  조회:555  추천:0  2019-12-14
1950년대 시인의  1/정한모(鄭漢模)       멸입(滅入)                                        한 개의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맑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별리(別離)       지금은 차라리 아름다울 수 있는 그것은   현악기(絃樂器) 혹은 목관악기(木管樂器)의 고음(高音) 그 가늘한 도레모로로 내 가슴에 금을 그으면서 사라져 간 몇 개의 이별(離別)들   녹아드는 빙과(氷菓)의 맛처럼 슬픔은 그런대로 자릿한 미각(味覺)이기도 하였으나   흔들리는 바다의 그 푸른 바탕에 떠서 하늘하늘 하얀 꽃이파리는 지고 우리들의 이별(離別)은 끝났다.   끝이 난다는 것은 홀가분한 휴식(休息) 아니면 고요한 기도(祈禱)와도 같은 것   뜨거웠던 입술 속에서 떠오르는 달무리 그렇게 번지어가는 추억(追憶)   창의 불빛 휘파람소리 숨소리 이슬 젖은 소롯길   빗소리 바람소리 하얀 눈길   가슴 조이는 통고(痛苦)마저도 불붙는 생명일 수 있었던   그것은 떨어뜨린 눈물로 지워진 흐릿한 글씨 또는 남은 향기   이제는 거리(距離)에서 아물아물 바람에 스치우는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별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난해難解와 전달傳達                                                                                            정한모(鄭漢模)                                                                        는 말을 듣는다. 지당한 말들이다. 사실 현대시는 난해하다. 말라르메의 상징시 이래 T. S. 엘리어트 의 철저한 주지적 경향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도 이미 허다한 논란을 거듭하여 왔다. 이와 같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오면서도 시인을 있게 하고 더욱 더 시가 절실하게 요구되면서 현대시가 발전해 왔다는 것은 현대시의 난해성이란 어쩔 수 없는 필연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난해성은 긍정(肯定)되어야 할 것이다. 극도로 압축된 문학형식 속에서 현대 지성의 다양성과 그 논리를 처리하려고 하면 작품은 당연히 난해해질 수 밖에 없다. 현대시가 노래하는 시로부터 읽고 생각하는 시로 그 매력의 중심을 이행해 온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으나, 현대시는 그 대부분이 읽는 시이지 애송(愛誦)할 수 있는 시가 아니다. 노래하는 시에서는 반복이 생명이며 언어의 형식이나 음률적(音律的) 요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반복되기 쉬운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시인 현대시는 그 기억의 성질이 전연 다른 것이다. 노래하는 시의 경우엔 그 기억이 언어의 음에 더 많이 의존하지만 읽는 시는 이미지 혹은 의미로서 마음에 남는 성질의 것이다. 이리하여 노래하는 시로서의 전달성은 잃었지마는 그 대신 읽는 시로서의 전달성을 갖게 되었다. 즉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지각하는 기능을 현대시는 갖추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시의 기능과 효용은 그 폭을 넓혔고 또 그 전달성에 있어서도 단순했던 과거의 시보다 복잡해졌으므로 자연 난해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시는 언어에 의한 표현활동의 최고의 형식이다. 시인들은 이것을 믿고 있으므로 여러 각도에서 끊임없이 언어에 대한 시도를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경험이 새로우면 따라서 언어표현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을 달리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욕은 생활을 새롭게 하고자하는 지향(指向)과 근본적으로 결부되고 있다. 시인들이 그 표현에서 특이한 형식, 리듬, 신기(新奇)한 이미지, 또는 의미가 풍부한 메타포(metaphor)에 의하여 혹은 리듬을 뒤바꾸거나 이미지나 의미를 고의로 축소 내지 확대하거나 탈락, 단절시키거나 하여 그것 때문에 대단히 난해한 표현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시인의 기술의 미숙이나 경험의 부족에서 생긴 혼란 때문에 난해해진 것까지 포함시킨다는 말은 아니지만 현대시의 난해성은 이런 필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의 난해성은 시에서 의미를 제거(除去)하는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시에서 의미를 제거하는 데에도 본질적으로 뜻이 다른 두 계열이 있었다. 저 몽롱한 음악적 정서에 젖고자한 상징시(象徵詩)나 그 뒤 순수시 같은 것은 오직 심미적(審美的)인 목적을 위하여 의미를 버렸고, 같은 심미적 목적을 위함이면서도 몽롱한 음악의 경지를 지양(止揚)하여 명쾌한 시각적 심상을 찾는 초현실주의의 이후 모든 포멀리즘(formaism)은 회화적(繪畵的)인 세계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시에서는 음악을 듣거나 시화(詩畵)를 감상(鑑賞)하듯 다만 순수히 감각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 감각하는 것이 바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시는 이런 심미적 목적만이 아니라 보다 더 시인의 개체적 현실의식과 내적체험을 새로운 언어의 구성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주체적 리얼리즘(realism)을 기초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시가 난해한 경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보편성을 가진 가치의식이 아니고 다만 현대적 자아 속에서도 사적(私的)이며 개인적인 현실의식과 내적세계를 표현하고자 할 때 그 속에는 남에게 이해될 수 없는 많은 것이 불가피하게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시인들이 전달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알기 쉬운 시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또한 아무리 난해한 시라 할지라도 완전히 불가해(不可解)한 시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시는 그 구성에서부터 긴장과 갈등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잘못 꾸며진 경우엔 그것은 산란한 단편(斷片)들의 어지러운 모습이거나 참으로 무엇인지 전연 짐작할 길 없는 그야말로 난해한 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짤 째어진 시라면 미묘한 색채(色彩)의 새로운 조화(調和), 또는 불협화음의 아름다운 화음(和音)의 매력을 지니게 된다. 좋은 시는 반드시 아름답게 이해될 것이며 충분히 전달될 것이다. 난해성과 전달이 현대시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처럼 T. S. 엘리어트는 “진정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발레리는 “시는 천 명의 독자에게 한 번만 읽혀지는 것과 한 명의 독자에게 천 번 읽히는 작품이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난해한 시라고 할지라도 단 한 명의 독자에게 천 번이 아니라 열 번만이라도 읽히는 작품이라면 훌륭히 전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발레리의 이 말은 시의 고고성(孤高性)을 더 강조한 듯하나 T. S. 엘리어트의 이 말은 현대시의 난해성의 본질을 정확하게 구명(究明)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현대시의 난해성을 시인(是認)한다. 더욱이 감상능력이 그 감상의 대상 내용인 시적미(詩的美)의 조직의 변화를 미처 따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난해성은 더욱 완고(頑固)할 것이다. ‘시의 빈곤(貧困)’이란 말이 어느 시대에도 잘 씌어진 말 같지만 오늘날 역시 ‘시의 빈곤’이란 말은 자주 논의되고 있다. 현대라는 시대와 현대의 인간성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면 현대만큼 절실하게 시가 필요한 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현대의 버스’를 미처 타지 못한 지참(遲參)한 인간이 자기의 낡은 시의 개념과 그에 따르는 낡은 시의 방법과 기술로 쓰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과거의 세계를 현대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시의 빈곤’을 재래(齎來)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희극(喜劇)은 시의 빈곤의 원인이 자기의 낡아빠진 머리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잊고 있다는 점에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매력을 불변의 규준(規準)으로 삼고 모든 사리(事理)를 단정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청각이나 시각 같은 감관(感官)의 세계에서도 또한 논리를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시대의 진화와 변화를 쉽사리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시의 경우에도 낡은 감상능력을 한도로 하여 언제까지나 이것에 의거하여 오늘 날의 현대시를 비판하려고 한다. 이러한 독자에겐 현대시는 다만 차단된 벽일 수밖에 없으며 더욱 불가해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다시 현대시의 난해성을 시인하며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대시의 난해성이 불가피한 경향이란 사실에 현혹되어 난해한 시만이 가장 새로운 시인 듯 착각하고 일부러 불가해한 시를 써가지고 자랑으로 삼고 있는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시를 쓰는 사람이 오늘날 없지 않아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는 말이 시인에게 조금도 자랑이 될 수 없다. 현대시에서 난해한 시는 있을 수 있으나 전달되지 않는 불가해한 시는 있을 수 없다. 빈약한 육체와도 같은 보잘 것 없는 사고(思考)를 감추기 위하여 불투명한 의미를 가진 의상(衣裳)으로 애매하게 감싸가지고 난해성이란 추세를 이용하여 현대시 속에 한 몫 끼어보려는 사이비(似而非) 현대시는 적발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난해성이 현대시의 운명에 가까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난해성에 편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시인의 시의 기술이 이러한 난해성을 얼마나 가능한 한도에서 막아내는데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날 시인들의 노력은 이 현대의 다양성(多樣性)과 착잡(錯雜)한 논리를 어떻게 정돈하고 질서를 세워 나가느냐 어떻게 논리적 이미지를 조형(造形)하여 현대시로서의 발랄한 생명을 지니게 하느냐 하는 방향에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난해성을 일종의 스타일처럼 착각한다든지 심한 경우 난해성을 도리어 과시하는 넌센스는 현대시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통찰과 그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정화(淨化)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韓國戰後問題詩集』(1961년 신구문화사) *한자는 한글로 표기하고, 중요한 한자는 괄호에 넣어 표기하였으며 영어단어는 괄호속에 영문자를 넣었음.
104    낭만적 영혼과 꿈 / 알베르 베겡 저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댓글:  조회:873  추천:0  2019-06-30
낭만적 영혼과 꿈 알베르 베겡 저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독일낭만주의와 프랑스 시에관한 시론       서문       꿈의 개화 현상   밤의 꿈들, 표면에 너무 근접해서 조그만 충격에도 표면으로 드러날 것같은, 낮에도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더욱 신비로운 꿈들, 거기에는 여러가지 기호들을 통해 자신의 영속성과 풍성함을 나타내는 또하나의 현실이 있다.     내가 소홀히 한 것, 망각속으로 사라져버린 것들이 어느날, 뜻하지 않게, 땅속에 묻힌 씨앗이 꽃이나 나무로 자라듯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자양으로 성장하여 변용된 모습으로 거기서 다시 솟아오른다.     그것은 나 자신보다 훨씬 더 먼곳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져오는 무의식적인 기억 속에, 또는 개체로서의 내 존재의 영역과는 다른 어떤 영역에서 오는 것만 같다.         상상력의 세계   상상을 통해 표출되는 이미지들은 바로 나의 내부에 있는 꿈을 자극하고 표면에 떠오르게 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에 투사하는 능력을 갖고있다. 또는 사물들이 나의 외부에 존재하기를 멈추고   마술적인 그들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름받고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위해 생동한다고도 말 할 수있다.     사상이나 예술작품은 실제로 우리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에 관계한다. 외관상의 개체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우리 자신에게로 향해진 그부분에 이르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근심밖에 남지 않는다.     징조와 신호들에 우리자신을 열고, 그럼으로써 한순간 완전히 생소하게 응시된 인간조건이, 그것이 가지는 위험과 전반적인 불안, 아름다움과 실망스런 한계들과 함께 불러일으키는 혼미함을 깨닫는 것이 바로 그 근심이다.           꿈 신화의 황금시대의 유적인 우리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성인이 된 인간은 사물들, 종이 조각들, 예전에 친숙했던 풍경들과 같은 마술적 잔해의 힘을 빌어, 자신 속 어딘엔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위해 끓어오를 순간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을 일깨우려한다.     우리의 자애심 자체가 우리에게 깊이 감추려드는 가장 독특한 우리 존재에 대한 인식은, 거울이나 사진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죽어버린 우리의 초상에서 우리의 얼굴 혹은 어깨에 대한 미지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러한 조화 혹은 특수한 법칙을 포착하려면, 시간에 대한 관조를 통해 시간에서 벗어나거나, 귀를 귀울여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의 운명인 이 멜로디를 식별해 내는 방법밖에는 없다.     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인류가 행하는 , 각 개인의 멜로디가 귀결되는 인류 자신의 멜로디에 대한 탐구이기때문이다.     꿈이란 말은 한편에서는 미학적이거나 특이한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는 밤의 꿈을 지칭하고, 또한편에서는 관념의 세계보다는 감성으로 채워진 , 안락처를 찾아 나선 정신을 이끄는 변함없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뜻한다.     또 달리는 시인과 신화적 상상력이 한결같이 그들의 부를 길어오는, 먼 과거에서 대대로 이어져오는 무의식적 기억이라는 보물창고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때로는 유령들이 살고있는 위험한 장소이기도하고, 또 때로는 천국을 향해 열려있는 휘황찬란한 현관이기도 하다. 신 자신이 꿈을 통해 우리에게 엄숙한 경고를 전하기도 하고, 대지에 밖혀있는 우리의 뿌리가 꿈에 의해 자연의 풍요로운 품으로 뛰어 들기도 한다.     예술의 리듬에 영감을 불어넣는 몽환적 삶의 리듬은 별들의 영원한 운행과도, 원죄를 짓기 전에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었던 원초적인 박동과도 일치한다.     낭만주의자들은 무의식적 이미지들 속에서, 그것이 비록 병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을 미지의 영역으로 이끄는 길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병적 이미지를 정화시켜 지상의 삶에 유용한 것으로 만들려는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시공 속에서 우리를 우리 너머로 연장시켜 현재의 우리존재를 무한한 운명의 선 위에 찍힌 한점으로 만드는 모든것의 비밀을 거기에서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제1장 낮에서 밤으로   낭만주의자들은 꿈이나 또다른 주관적인 상태들을 통해 자신 속에 침잠함으로써 우리의 의식보다 '더 우리자신인' 우리의 부분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유일한 앎은 내적 심연으로의 침잠을 통한 앎, 개별적인 우리의 리듬과 전 우주적 리듬의 일치를 통한 앎,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닌 어떤 실재에 대한 유추적인 앎이다.     1. 켜진 촛불 우리의 무의식적 기억과 향수는 우리가 육체화되어 생리적으로 개인이 되는 탄생의 신비에 앞서는 어떤 존재의 무엇인가가 우리 속에 계속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2. 지상의 미로 이중적 충동- 광활한 공간에 대한 갈망과 칩거생활에 대한 욕망, 감옥처럼 느껴지는 한계 밖으로의 도피와 그 울타리 안으로 되돌아 오게 만드는 현기증- 모리츠는 일찌감치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그 충동은 그의 내적 삶의 원초적이고 심원한 리듬, 그존재의 풍부함과 비극성을 형성한다.     팽창에서 자기 내부로의 귀환, 신비주의적 내적일치에서 행동의지의 고갈로 이행되는 동일한 리듬이 각운을 이룬다.     내적 숙명의 자각   모리츠는 인간이 다른 능력을 가지게 될 미래에 대한 '마술적'이고 낭만적 생각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개인의 저주로 여기는 신비적 염세주의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 신비학자들 그리고 이어 낭만적 사상가들은 원초적 통일성이 죄로 인해 깨어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연에서 발효되어 요동치는 모든 생명과 모든 사랑을 자신 속으로 들여마신다고 믿을 정도로 그 생각을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자신을 동시에 꽃이자 초목이자 새이자 노래이고 신선함이자 유연함이며 쾌락이자 평온으로 느낄수만 있다면! 수축에 '활짝 피어남'이 대응한다. 최상의 순간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모리츠에게도 무한속에서 자아가 완전히 망실되는 순간이 아니라, 팽창과 한정이 실재감 속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 존재의 팽창과 수축의 감정은 한순간 안으로 집약되며, 거기서 유래되는 혼합한 느낌에서 바로 그와같은 순간에 우리를 사로잡는 이상한 종류의 우울이 탄생된다.     그의 정신적 진화의 본질적인 문제는 두 세계,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실제 세계와 그가 안식처로 삼으려 했던 꿈의 '이상적인' 세계의 분열이었다. 거친 현실에 의해 손상을 입은 자아가 활짝 피어날 수잇는 자의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낭만적 영혼의 첫 움직임이다.     이러한 믿음을 획득한 영혼이 삶으로 되돌아와 새로운 빛으로 그 삶을 변모시키고, 무덤너머에 있는 고등한 삶의 '여기와 지금'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움직임 말이다. 꿈은 그에게 사람들이 은신처로 삼으려하는 하나의 다른 세계이다. 그것은 가시적 현실에 아직 마술적인 색깔들을 퍼뜨리지는 않는다.     그는 꿈이 의식적인 삶에 의해 망각된 기억의 수문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 기억들을 거대한 전체속의 혼돈이었던 이전의 삶과 연관시키고, 기억의 고리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갈 능력을 가진 사람은 개별적인 존재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어렴풋이 예감한다.   제2장 꿈, 자연 그리고 복귀     한개인이나 한 세기의 우주는 우리 정신의 이미지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그것의 통일성은 자신의 통일성을 믿는 자에게만 존재한다.   '영혼'이라는 낱말에 그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전체적인 가치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중심의 개념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통일성은 무한대로 분열한다.     합리주의자들의 오만은 가장 명백하지만 가장 깊이가 없는 우리의 능력에 집착하는데 있고, 신비주의자들과 시인들의 오만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면, 자신이 자신을 한없이 초월하는 어떤 신비한 실재와 유사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이 오만은 결국 최고의 겸손이다. 그것은 인간조건의 불안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끊임없이 우리자신의 신비에 놀라움을 나타내며, 피조물은 알 수없는 운명에 따른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그운명이 자신의 존재에 관해 우리에게 보내는 모든 신호들을 포착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18세기 리히텐베르크와 모리츠, 하만과 헤르더, 젊은 괴테와 장 파울, 게다가 장 자크와 디드로까지, 그리고 경건주의자들과 신비론자들... 그들의 사고와 정서에 있어서도 그들 자신의 전 존재를 몰입시키는 일에만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앞선 경험적 시대와 뒤이어 오는 과학적 시대에 반하여 그들은 어떤 감정적 충격에 의해 강화되는 직관만을 믿는다. ......거대한 반항과 신비적 겸허함이 언제나처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낭만주의가 모든 위험과 난파를 무릎쓰고, 또한 모든 운을 걸고 그 모험을 감행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보편적 통일성, 세계의 영혼, 절대적 수와 같은 대신화들을 부활시키고 보물창고와 수호신인 밤- 우리가 지고한 실재와 성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성소인 무의식- 모든 광경이 변모하고, 모든 이미지가 상징과 신비적 언어가 되는 꿈과 같은 대신화들을 창조해낼 것이다.   3. 르네상스의 재발견   자신에 대한 앎만이, 이 지옥으로의 탐방만이 우리에게 신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 하만   19세기초 자연철학자: 사변가,실험가,신비론자,최면술사, 연금술사   비이성주의의 태동- 독일 르레상스의 신플라톤 학파: 낭만적 물리학자: 케플러/파라겔수스/쿠자/아글파/브루노/ 등에게서 우주는 영혼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     본질적인 하나의 정체성이 전체의 발현에 불과한 모든 개별자들을 연결시킨다. 보편적 친화의 관계가 삶의 모든 발현들을 지배하고, 르네상스의 모든 사상가들이 왜 마술을 믿었는지 설명해준다. 그의 울림들이 단계적으로 만물전체로 퍼져나간다. 그래서 마술적 작용은 머나먼 곳에 있는 사물이나 존재들에게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도달한다.     자연과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유사는 각각의 운명이 별들과 성좌들의 흐름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사고할 수 있고 의식이 있는 피조물이라는 긍지, 우주가 스스로를 비추어 보고 자신을 알게되는 거울이라는 긍지 덕분에 인간은 만물의 중심에서도 특별한 자리를 점한다. 또한 거꾸로 인간은 자신의 중심에서 만물의 전체를 되찾는다. 안다는 것, 그것은 내부를 탐방하는 일이다.     신비의 길은 내부로 향한다. 영원이 그의 세계들 과거와 미래와 함께 있는 곳은 우리의 내부이지 그외의 어느 곳도 아니다.     자연을 창조한 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 바로 거기에 인간적 운명의 모든 비밀이 있다.창조주와 인간의 주요한 유사점은 둘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갑자기 만물이 완전히 새롭게, 그들의 완전한 의미를 갖춘채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들은 특별한 순간에만 우리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바로 이순간들을 포착한다.     내부의 인간은 하나이다. 그의 모든 열정은 보이지 않는 관계들에 의해 연결되어 있고 한결같이 단 하나의 불꽃에 의해 생기를 얻는다.     헤르더의 생기론적 개념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내적 감각의 직관, 혹은 모든 존재와 그가 속한 유기체 전체 사이의 교감 뿐만 아니라, 자연은 살아있기때문에 그것을 포착하기위해서는 이성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이다.     생물학적 생성의 법칙   모든 존재들의 진화와 정련의 대신비이고 증오와 사랑, 매혹 변모의 심연이다. 신은 자연과 역사라는 평행적인 두진화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영원히 생성중인 하니의 힘으로 이해된다. 그 두 움직임 속에서, 끊임없는 투쟁은 앞선 형태들 보다는 항상 더 우월한 형태들의 탄생과 변모를 야기 시킨다.     전체 사이의 교감   만물이 가지고 있는 유사성에 따른 리듬적 의미 - 인간의 본성과 신의 본성 사이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과 자연의 진화 사이에도 존재한다.     우주와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예술작품의 법칙은 바로 영원을 포착하되 그러나 순간 속에서 포착하고, 무한을 인식하되 그러나 대상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괴테는 사물을 통해 그들이 상징하는 것을 생각하기를 거부했고, 인간의 행위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행위는 최상의 비전으로 사물들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포착된 각 순간 속에서, 파악된 각 사물안에서 그가 도달하는 것은 영원이라고, 영구불변하는 본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 생기에 찬 하나의 실재인 영원 자체라고 확신 하고 있다.     경험주의자들에 대한 신비주의자 낭만주의자들의 반발: 자연의 상징적 가치 그리고 감각적인 세계를 초월하는 실재하는 세계의 우의성. 그것은 즉각적인 우주의 기계적인 힘이 아니라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실재들에 대해 발휘되는 권능이다.     자연에 대해 진실인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해서도 진실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에는 단순한 유사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유기체의 구조와 우주의 구조 사이에 무한히 많은 유사성이 설정된다.     4. 우주적 통일     고로 자연은 다양한 요소들로 분해될 수 있는 하나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생기에 찬 하나의 유기체이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동물적 삶과의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외적 현상들의 다양성에서 하나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찾고자 하는 욕구에 따랐던 모든 이에게 공통된 본질적 직관이다. 자연을 시간 속에서 바라볼때, 그것은 모든 개별적인 존재가 태어나고 죽으며, 총체에의 복종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무한한 순환으로 보인다.     공간 속에서의 자연은 모든 현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현상들 각각은 전체적인 삶을 반영하고 재생산 할 뿐이다.     오직 전체(절대)만이 살아 있다. 각 개인은 전체에 얼마나 가까이에 있느냐에 비례해서만, 다시 말해 엑스터시가 그를 그자신의 개체성에서 분리 시키는 한에 있어서만 살아있다: 바아더     그러므로 생명만이 유일한 실재이고 영원한 움직임은 신적인 것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유동은 방향이 있으며 맹목적인 힘과는 구별된다.     "각자의 종에서 완벽한 모든 것은 자신의 종을 넘어 다른 무엇,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 괴테     생성 과정은 일정한 방향을 따라 진행되고, 개별적인 생명들의 진보는 생명 전체가 최초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게 해준다.     신비주의자들의 출발점   원초적으로 주어진 것은 신적인 통일성이고, 자신들은 그로부터 추방당했다고 느끼며, 신비한 결합을 통해 그것으로 되돌아 가고자 열망한다, 또한 낭만적 사상가들은 우주의 생성과정 자체를 상실된 통일성으로 돌아가는 도정으로 설명하려함.     분리된 존재는 악이다. 모든 개별적 존재는 전체의 불완전한 반영일 뿐이며, 자연이 그 전체성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생명의 절대적 관념을 표현하고자하는 미완성의 시도일 뿐이다.     모든 것 속에는 개별화와 분리의 근원과 상실되었지만 미래에 되찾을 통일성의 씨앗이 함께 비밀스럽게 살고 있다. 하지만 오직 통일성 만이 실재하기 때문에 복귀를 향한 삶은 불가피한 것이다.     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쌍들의 성향들 사이에서 하나의 방대한 유사체계가 세워진다. 낮과 밤의 리듬에 여러가지 층위의 성의 대립, 중력과 빛, 힘, 물질등의 원리들이 상응한다. 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힘이 모든 존재를 서로 서로 그리고 전체와 연결시키며 전 우주적 생명을 관통한다. 자기에 대한 발견들에 영향을 받아 이힘은 친화력이라 명명한다.     우주-동물이라는 신플라톤 학파적인 인식과 더불어, 개별적인 영혼들을 통해 발현되거나,한 양상을 드러내는 , 모든 사물의 정신적 근원이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보편적 영혼의 개념이 다시 태어난다. 이 영혼은 정신적 실재와 우주가 발현하는 근원이다. 관념들의 초월적 차원과 자연의 차원사이에는 더이상 심연은 없고 공통된 관계만 있을 뿐이다.자연은 인간 정신 속에서 의식적인 것이되는 , 그리고 창조의 측면에서 볼때는 분리될 수없는 통일성인 이 영혼의 어떤 무의식적인 행위와 동일시된다.     신이 모든 것안에 있다면, 그는 동시에 결코 우주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원리, 그의 중심, 그의 영혼으로서 우주안에 현존해 있는 진정하고 유일한 존재라고 그들은 말한다.     인간은 '모든 순간에 살아있고 그 내부에 있는 그 무엇도 결코 우주에서 고립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하나의 내부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 속에서 자연의 전체성을 반영하고 거기서 신을 발견한다. 분리된 각각 의 존재를 유기체 전체의 상징으로 만드는 유추에 우리의 정신을 우주의 완전한 상징으로 삼는 유추가 응답한다.     자연의 신비는 인간의 형태속에 전체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인간은 지구의 멀고 먼 과거의 심연 속에서 만들졌다. 인간은 지구의 전 운명 그리고 무한한 우주의 운명을 자기자신의 운명처럼 그내부에 지니고 있다- 우주의 전역사가 우리 각자 속에 잠들어 있다. (슈터펜스)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 내려가, 사랑과 언어, 시 그리고 무의식의 모든 이미지 속에서 그에게 아직 그의 기원들을 기억나게 할 수있는 다양한 모든 잔해들을 찾아야 한다.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 신과의 유사점에 대한 감명을 모호하게라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자연 속에서 재발견 해야만 한다. 잠들어 있는 이 씨앗들을 취해 경작해야만 한다.     신비한 현존을 드러내주는 꿈의 씨앗들   5. 삶, 그 밤의 양상들     인간 -소우주는 내적 감각 혹은 보편적 감각이라 명명된 단 하나의 인식방법을 갖춘 완벽한 유기체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신비신학의 교리에 따르면, 이 감각은 유추를 통해 우주를 알고 있다. 인간이 조화로운 자연과 유사하기때문에 그자신이 그대로 반영되는 현실에 도달하기위해서는 자기자신의 관조 속에 침잠하기만 하면 되었다.     현상태에 이르기까지 이감각은 지위지고 조각나기는 햇지만 우리 내부에 살아 남아 있다. 진정한 앎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감각까지 내려가야한다. 그감각은 자연을 지배하는 역동적인 힘 -자기작용 같은 것-과 유사한데, 최면, 몽유, 시적 고양의 모든 상태들, 다시말해 엑스터시라 불릴 수 있는 자연의 리듬 자체에 자신을 유기하는 상태들 속에서 나타난다.     엑스터시 ekstase 우리를 평상적인 상태 밖으로 데리고 가서 일시적으로 다른 존재로 복원시켜 놓는다.     랭보: 시인은 본질적으로 견자다. 시는 예언이며 과거, 미래, 전체성에 대한 엑스터시 상태의 비전이다.     프시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생명원리, 영혼을 나타냄. 심리학적으로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모든 정신현상의 총체를 가리킴.     영혼: 우리 마음 속의 현존, 우리를 한없이 초월하는 무엇인가의 신성하고 강력한 현존이다. - 마음 속에 현존하는 신     깨어있음과 잠의 교대는 우리가 우주적 생명에 속해있고 리듬의 유사가 보편적 관계라는 가장 뚜렷한 표현이다.     온갖종류의 '대지의 영향'에 의해 물리적 우주에 뿌리를 박고있는 우리는 모두 포로들이다. 하지만 이 포로들에게 는 그들을 묶고있는 사슬자체가 미래의 자유와 조화의 약속이다.     잠은 대지의 산물이며 깨어있음은 태양의 산물이다.     영혼은 잠에 빠져 있을때, 자연이라는 전체적인 유기체와, 그리고 동시에 바로 자신의 육체적인 생명과 보다 밀접한 공생관계를 이룬다. 인간은 주기적으로 두뇌가 지배하는 활동에서 벗어나 대지의 영향을 받던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고로 꿈은 생리학적 성장의 모든 무의식적 과정이 모호하게나마 예감되는 희미한 의식상태로, 전 우주에 생기를 불러넣는 생명의 유기적 존재로서의 행위와 가장 즉각적으로 접촉하게 되는 순간으로 인식된다.     꿈   꿈을 통해 우주적 실재에 참여 꿈은 아직 인간이 자연의 말씀이었던 황금시대에 인간이 처해있던 최초의 상태였고, 신화적 시간에 대한 이 무의식적 생각은 자연의 완전한 계시다. 꿈을 통해 우리는 신호들에 귀 기울이고, 우리 존재의 밤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유적들을 재발견해야만 한다.   6. 꿈의 형이상학     마음과 관능은 둘다 존재의 중심을 지칭하는데, '진정한 실재 속에서'사느냐 아니면 무의 변경에 있는 감각적인 현상의 세계즉 maya에 사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신을 지각하고 자신의 관능 속에서 우주를 지각한다.     트록슬러: 인간의 물질적인 본성은 우주 안에 스스로를 드러낸 신의 발현인 반면에, 그의 정신적 본성은 신에게로 회귀하려는 성향     최초의 통일성이 우주와 인간이라는 자연의 창조 속으로 전개되었다면, 자연의 모든 진화는 최초의 상태에 다시 도달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회귀성향의 최고의 표현은 본질적인 갈망들로 목말라하는 인간의 영혼이다.     깨어있음은 삶의 밝은 면이고 잠은 어두운 면이다. 하나는 신 속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 속의 삶이다. 이 교대의 삶은 죽음에 의해 해방되고 불멸에 이르러우주의 삶 속에서 새로이 자리잡을 때까지 계속된다.     꿈, 그것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실재의 중심 자체이다. 원초적이고 영원한 인간 내부의 심원이며 '생명의 행위 그자체'이다.     정신이 물질 속으로 내려오면, 상상력은 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성에 동반되는, 그리고 앎이라고 불리우는 그 꿈을 꾼다. 하지만 거꾸로 물질이 정신을 향해 상승하면, 앎은 자신의 '심연' 혹은 그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엑스터시라는 이름을 가진 상상력의 두번째 꿈이다.   그러므로 밤의 꿈은 영원한 꿈과 '유사한 것' 이상이다. 즉 그것은 영원한 꿈의 잔존물이고 우리 마음속, 우리내부 깊은 곳의, 최초의 통일성의 실제적 현존이다. 그것은 '깊이를 알수없고 탄생전과 죽음 후에나 그의 완전한 실재성을 가지게 되는 원초적 상태에 대한 암시'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부터 이심연들은 우리 모든 삶의 근원이 된다.   7. 꿈의 상징 체계     1814년 슈베르트 : 발간 바아더 를 통해 신비주의적 사상에 입문     사랑의 법칙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연적인 모든 과정을 지배한다. 금속은 공기와 결합하려는 욕망에 의해 녹슨다. 빛은 생명이 없는 존재들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형태이고 소리는 동성의 사물들 사이의 우정이다.     우주적 순간들에서 사물들은 자기를 통해 보다 발달된 종류의 존재 속으로 통합시켜주는 활발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성질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생명은 어디에서나 하나이고 동일하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의 삶은 자연의 대주기, 즉 연 일 시를 주재하는 동일한 리듬에 따라 조직된다.     '생명은 서로 대립하거나 조화를 이루는 보편적인 거대한 힘들과의 일치에 다름아니다.' 식물들에 있어서 '죽음의 순간이기도 한 개화의 순간은 동물적 존재에 대한 예감이다.' 이처럼 단계에서 단계로 모든 자연적 생성은 존재의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인간을 지향한다.     시적 리듬은 그자체로서 마법적 주문의 역할을 하고, 일깨어진 어떤 조화, 우리와 우리가 속하는 우주 사이에서 복원된 보다 심원한 어떤 교감을 나타내는 행복감을 발생시킨다. 노래는 낮의 기능들을 '잠들게 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삶의 내적인 탄생을 촉진 시킨다.     운명은 어떤 신성에 의해 계산된 길을 따라 우리의 삶을 이끄는 숙명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 생애를 구성하는 모든 순간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이다.     현 세계는 반대되는 두 힘에 의해 지배된다. 하나는 개별화를 지향하고, 다른 하나는 자석처럼 작용하여 모든 사물들 사이의 유대와 모든 사물과 신 사이의 유대를 창조한다. 인간의 영혼은 사랑을 통해 화해하게 되는 이 두경향의 포로이다.   8 무의식의 신화       프리드리히의 위대한 풍경화; '그는 풍경의 비극을 발견했다' -다비르당제르.   자신의 내적비극 , '황혼은 그의 기본요소였다' -카루스     인간의 본성을 찢어놓는 화해할수없는 이중성들에서 오는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자신의 신앙심과 예술관이 동시에 표현되는 통일성의 획득을 통해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자연을 앞두고 있는 인간의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   화가가 우주적 유기체의 생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앎.   이 두야망을 밀접하게 일치시켜야 했고 만물 속에 있는 신의 존재를 짐작하게 해주기위해 그토록 생생한 인상을 우리의 인상을 결합시켜야 한다.     이상적인 풍경은 만물의 배면에 있는 무한을 우리에게드러내는 영혼의 주관적 상태들과 유한한 세계를 향해 있고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객관적 비전을 동시에 일깨워준다.   카루스의     전 자연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 부터, "영원한 법칙들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우주를 전체적으로 창조하는 영원한 생성, 모든 삶의 근원"에 의해 생기를 얻는다.   "이생명의 원동력이 우주의 변화 뿐만 아니라 아주 미세한 유기적 성장 속에서도 표출된다."   전체와 부분 사이에는 카루스가 리듬의 일치라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 유사의 관계가 존재한다. 천체들의 삶을 특징짓는 주기들의 광대한 리듬이 '신적인' 항구성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내적 삶의 극도로 작은 입자들의 존재 속에도 반영된다."     유기체의 각 부분은 그의 내적 구조에 있어서 전체적 유기체와 흡사하다. 모든 부분들은 서로 동일하고, "생체의 각부분의 성장은 아주 단순한 하나의 동일한 원초적 형태의 극히 다양한 증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 형태는 바로 완벽한 원형, "전체라는 관념을 표현하고, 그결과로 일종의 자율을 누리는 " 세포이다.     하지만 생명의 무한한 흐름은 방향이 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무궁한 상승, 극에 도달하는 완벽은 끊임없이 태어나는 형태들에 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물리학과 우주발생론의 중심에 가치의 개념 재도입.   식물에서 동물 ,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새로운 형태를 창조함에 따라, 이 존재들과 이에 생기를 불어 넣는 신과의 관계는 밀접.   " 자신의 종에서 완벽한 모든 것은 그 종을 초월하여 다른 ,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괴테의 생물학적인 원칙, 카루스의 사상에도 낯설지 않은 개별적 진보를 통한 분화와 향상의 원칙인 것만은 아니다.   신적인 것은 모든 것 속에 존재하지만, 신은 동시에 세계의 중심이고 영혼, 혹은 생명과 그부분들의 원동력이다.   무의식     의식적인 정신적 삶에 대한 앎의 열쇠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속에 있다.     관념, 영혼은 모든 피조물에 형태와 생명을 부여하는 제1원인이다. 하지만 개인의 전 형성과정은 그 개인 자신의 의식에서 벗어난다. 유기적 진전과정, 성장, 생리적 형성은 무의식이라는 생기에 찬 거대한 실재속에 속한다.     "무의식은 우리가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주관적 표현이다."     그로므로 무의식은 그의 심원한 본질 속에서는 비개인적인 실재, 영원하고 끊임없는 생성, '신의 창조적 활동' 같은 것이다.     유기체적 통일   의식 속에서 기억과 예견이라고 부르게 될 시간들의 상관관계의 깊은 이유.     무의식은 의식의 본질적인 형태들에 대한 예시를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   식물의 씨앗과 동물의 태아는 미래에 있을 성장들을 모조리 그안에 내포하고 있다.   카루스는 이러한 유기적 무의식의 예견에 프로메테우스의 원리라는 이름 부여.     다른 한편으로 유전은 과거가 현재의 진화 속에서 살아남아 활동하고 효율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 증명 이것이 기억의 무의식적인 형태 , 에피메테우스적 원리이다.     그러므로 삶을 이루는 모든 순간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이러한 유기적 기억은 그 내용물이 개인적 삶의 틀을 넘어서 존재의 근원들 자체에 이르는 일종의 무의지적 기억이다.         개인적인 삶은 '인류'라는 유기체의, 더나아가서 우주적 유기체의 한 부분이다.   인류의 영혼 그리고 세계 영혼의 모든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각각의 개별적 영혼을 거쳐 지나가야만 하고 무의식적으로 그것의 형상을 만들어야한다.     따라서 절대적 무의식은 우리 모든 삶에 있어서 극히 중요. 그것은 우리 모두의 본능적 삶과 내부에 있는 , 개별적 진화와 개인적 독창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 우리 종 전체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지휘한다.( 카알 융 과 일치)     본능의 형태로 각자의 삶 속에 잔존해 있는 무의식적 과정의 에피메테우스적 원리는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한 경험을 영속화 시킨다. 유리환 정화들 속에서 투여된 개인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피조물 자격으로 우리가 우주와 관게를 맺는 모든 순간에 있어서,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이 보물에서 방어수단과 삶의 창조적 근거를 빌어온다.     시적 창조와 사고의 일례, 직관- 가장 심원한 창조력은 개인의 의식적인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조상 대대로 경험을 통해 축적해온 것을 간직하고있는 무의식의 집단적 저장소안에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그 과정의 절대적 필연, 어떠한 학습도 필요로 하지 않은 즉각성, 우주적 생명 그리고 과거와 미래와의 법촉으로 특징지어진다.     감정은 무의식적 삶에 섞어들고 그 모든 특성을 함께하는 '의식적 영혼의 어떤 특수한 색조'이다.       감정을 통해, 영혼은 모든 영혼들의 공통된 통일성과 관계하고 있는 심원한 영역에 가 닿는다.   감정중 최고의 형태인 사랑은 "분리된 존재로 부터의 최초의 해방이고 전체로 되돌아가는 첫걸음이다."   꿈의 귀환적 상상력     꿈을 통한 이미지의 순환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귀환은 서로 다른 두가지 양상   혈액의 순환과 유사한 첫번째 순환은 어떤 특수한 이미지나 감정을 망각속에 잠기게 하고, 이 이미지와 감정은 의식적인 삶 속에 새로이 작용하기 위해 변화하고 풍성해져 망각에서 다시 솟아오른다. 그사이 그것들은 발아되기 이전의 식물의 씨앗의 삶과 비교되는 잠재적 삶을 산다.     하지만 이런 분리된 이미지들과의 순환과는 별도로 보다 본질적인 또다른 리듬이 의식전체를 주기적으로 무의식의 밤 속에 잠기게 한다.   이 리듬은 "관념이라는 영원한 존재의 대 주기들, 우리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르는 주기들을 재현"할 뿐이다. 꿈으로의 귀환은 식물적 삶 혹은 "아직 이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유아의 무의식적 삶"과 유사한 하나의 의식없는 잠이었던 태초의 상태로의 귀환이다.     "영혼이 의식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이중의 삶을 끊임없이 영위하고" 이 양극사이를 영원히 오갈수있도록 잠은 그에 앞선 깨어있음을 통합한다.   그래서 카루스에 따르면 "표면적인 비존재 속의 존재의 연속성"이야말로 심리적 삶의 가장 큰 신비들 중 하나이다.     잠은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과 의식의 부분적인 퇴거에 의해 유발된다. 이처럼 식물적인 삶 속에 침잠함으로써 '영혼의 자연적인 부분들'은 새로운 활력을 취하고, 동시에 '자연 전체와의 보다 활발한 관계'가 무의식 속에 생겨난다.     일단 나라는 경계들이 무너지면, 존재는 모든 생명의 근원인 위대한 무의식과 보다 즉각적인 방법으로 소통하게되고, 한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달된 기억들의 불분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험은 의식의 세계에 우주에 대한 모호하고 심원한 인식을 가져다 준다.     그에게 있어 의식적 영역은 여전히 자율성을 지닌 이물질처럼 잠속에서 잔존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내밀한 결합이 이루어지고 그 결합에서 꿈이 생겨난다.     유기체의 어떤 내적 불균형들은 실제로 어떤 특별한 감정들을 발생시키고, 이감정은 다시 어떤 내적 이미지, 어떤 시적 상징을 일깨워 그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자연 속에서 발현된 신적인 관념인 영혼은 스스로는 시간과 공간을 알지 못한다.   영혼이 자연에서 퇴거함에 따라, 발현된 세계에 대한 의식이 흐려짐에 따라 영혼은 "생각들의 연속, 즉 식간과 그것들의 병렬, 즉 공간이 사라지고, 그자리에 이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존재의 통일성이 들어서는 것"을 보게된다.     전체 유기체의 의식적 부분이 인격 개성 그리고 자유가 생겨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유기체의 무의식적 부분은 그 유기체를 일반적 생명과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 요컨데 그를 보편화 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무의식이기때문에 우주의 모든 움직임에 의해 관통되고 그것에 참여한다. 더 나아가서 가가운 것과 먼것, 그리고 공간에 속하는 모든 것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시간에 석하는 모든 것도 그안에서 서로 만나고 섞인다.     "영혼의 건강한 성숙에 적합한 우리의 습관적 한계"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실제로 모든 현순간에 존재하고, 멀리 떨어져 공간들이 서로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 보편적인 생명의 얼마되지 않는 부분이외에는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다.   하지만 '정상적'인 우리 상태의 어떤 변모에 힘입어 우리는 보편적인 생명의 다른 양상들 , "우리로 하여금 멀고 먼 곳들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와도 접촉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양상들"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예외적으로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무의식 속에 깊이 침잠해 있기때문에 영혼이 바로 무의식에 고유한 특성인, 만물을 연결하는 그물망 속에, 공간적인 모든 것과 시간적인 모든 것의 상호침투에 속에 더 깊이 침잠하게 되는 " 예외적인 상태들 속에 신비롭거나 불가사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ㅜ여기서 유기적 참여와 의식적 참여를 구분해야한다.   예감과 통찰력       예감   우주적 감각의 조건인 우리의 무의식적인 삶은 자신의 자율성을 유기함으로써 보편적 생명의 순환 속으로 삼켜진다.   그리고 그때그것은 인체의 변모와 동일하게 보편적 생명의 변모들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이처럼 인류 혹은 자연의 생명의 순환 속에 침잠하여, 일반인은 전혀 느낄 수 없는 ,   멀리 발생한 혹은 미래에 발생할 어떤 사건들이나 다른 작용들에 영향을 받아 이상한 불안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게된다.   이러한 예외적인 사실의 설명할 수 없는 지각은 그들의 정신상태를 완전히 변모해 놓는다.   바로 이것이 흔히들 예감이라 칭하는 것이다.     통찰력   다른 한편으로 우주와 인류의 모든 생명과 가지는 이 관계가 인간의 의식적인 영혼 속에 드러나 새로운 종류의 민감한 지각의 형태를 취한다. 그때 그빛이 항상 우리 각자를 관통하고 있지만, 우리가 평상시에는 지각하지 못하는 보편적 생명의 양상들이 의식에 도달하는 것은 더이상 모호한 감정들로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한정된 생각들로나타나는데 이것을 통찰력이라 부른다.     무의식을 통해 옛시대의 인류, 우리시대의 인류 그리고 우리 종의 미래적 운명들도 매순간 우리를 변모시킨다.   그리고 꿈의 이미지들 속에서 모호하게나마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이 변모들이다.     카알 융은 이러한 낭만적 철학자 카루스의 직관을 이어간다.   '무의식 본래의 언어'인 이미지들에 말할때, 카루스는 슈베르트의 직계상속인이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천재성이 최초의 직관 속에 있었다면, 카루스의 힘은 이러한 각각의 통찰력을 정신적이고 자연적인 삶에대한 전체적 비전에 연결시켜주는 일관된 구성에 있다.   명상   신의 의식에 그의 전능함을 되돌려주는 이 명상은 "사랑의 힘과 깊이로 심연을 메우고 극복하기위해" 열심인 우리의 노력이 도달할 수있는 최고의 진보이다.하지만 일단 이 정상에 도달하게되면 정신은 인간적인 삶 그자체로 되돌아 올수있다. 정신은 자신의 엑스터시로 인해 아름답게 변모된 인간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고귀한 종교적, 시적 영감들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이 변모이다.     이 각성된 영혼은 눈먼 유기적 생명의 심연 뿐만 아니라 신의 생명의 무한 속에서 '제2의 눈'을 담고 있을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우리안에 불멸하는 것은 관념, 영혼, 우리의 생성의 법칙이지 생성 중에 획득된 모든 특성들이 아니다. 개인적인 삶에서 진보는 연속되는 모든 경험들, 감정들,사상들,관념이 신에게로 회귀하는 데에 소용이 되게하는데 있다. 유기적인 무의식은 생성의 모든 단계를 결합시키고, 그것들과 일치되며, 영원히 변함으로서 그 경계가 이동하는 과거와 미래로 나뉠 수밖에 없는 반면, 정신은 현재를 포착하기에, 다시말해 그본질에 있어 영구불변하는 관념 그자체를 응시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그것의 발현을 통해서만 관념을 알 수 있다.     < 우리 영혼의 관념은 지고의 존재의 이중적 빛의 방사를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존재속에 함축하고 있다. 이 발현 중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창조하는 신적인 원동력으로 우리 외양의 끊임없는 변모를 결정한다. 다른 하나는 지속되는 하나의 내적 현재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정신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반쪽이고, 다른 반쪽의 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신과 맺고있는 이중적 관계가 설명된다. 만물에 속하는 우주적 존재들로서 우리는 무의식에 의해 신의 실재속에 뛰어든다   9. 순수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낭만주의 사상가들의 첫번째 공리는 오직 전체만이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여받았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분리된 존재는 악이다. 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잃어버린 통일성에 이르는 길을 되찾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의 매개체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 그 설명이 의식 속에서 찾아질 개인적 영역으로 귀착하지 않고   - 우리의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근원이 있는 초-개인적인 실재이고,   우리가 보편적 유기체와 접촉을 가지는 지점이다.     꿈과 다양한 열광들, 언어에서 인칭의 변화와 같은 사고들과 시적인 번득임들, 광기의 창조들과 유아기의 상상력들, 이모두가 태초에 자연의 생명과 함께한 협화음의 소중한 유물인 동시에, 결국에는 우리를 태초의 조화의 품으로 되돌려줄 근원들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은 사상가들에 앞서 제각기 독특하지만 모두 밤의 가장자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따라 무의식의 모습들을 포착하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무의식의 양상들을 일깨우는 도구인 그들의 예술을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과 동일시했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그들은 영웅적인 정열을 가지고 그일에 달려 들었다.     정신속에 내재해 있는 집단적 무의식(신화) , 즉 우주적 통일성과 개인적 이미지 (직관) 즉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징적 발현이 낭만주의의 근원적 미학이다.   이는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인바 무의식과 의식의 조화로 나타난다.   이는 자연과 영혼의 합일에 이른다.   10 성운과 혜성     낭만주의의 핵심적소재(근원) -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 - 꿈의 미학   1) 집단적 무의식 (신화)   2) 개인적 이미지(직관)     우리의 상상력은 세계를 형성시킨 거대한 창조력의 알 수 없는 하나의 응답이다.   그의 활동이 우리에게 아주 생생한 행복감을 부여해 주는 것은 '정신이 창조한 이미지들이 바로 정신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휠더린   그가 전력을 다해 지향하는 소유는 낭만주의가 획득하고자 할 그 마술적 권능이 아니다.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관조적이고 미학적인 소유이다.   세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만물이 갑자기 완벽하고 은혜로운 조화의 관계속에서 드러나 보일정도로 순수한 관조와 아름다운 비전을 되 찾는데 있다.      
현상 저 너머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4)       김철교(시인, 평론가)         7. 읽기       문덕수는 시가 ‘소리의 시’와 ‘의미의 시’를 거쳐 이제 ‘이미지의 시’의 단계에 도달하여 ‘이미지의 지적 주권’ 시대에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시인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문덕수, 『현실과 초월』, 시문학사, 2014, 13-22쪽).       문학비평용어사전에 의하면, 시의 이미지는 표현상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고, 시적 상황을 암시하여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엘리엇(T.S Eliot)의 ‘객관적 상관물’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녁노을을 통해 독자는 죽음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영섭에 의하면, ‘이미지는 철학에서는 실체의 환영, 심리학에서는 심리적 체험을 단순히 재생하는 심리적 작용, 시에서는 마음속에 언어로 그린 그림으로 운율과 더불어 시를 구성하는 원리로서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화하는 역할을 한다’(이영섭, 「이미지의 유형과 실제」, 『시창작 이론과 실제』,(오세영 외 편) 시와시학사, 1998, 252-276쪽).       미술용어 사전에서는 ‘자연주의 미술에서는 대상을 직접 갖다 놓을 수 없으므로 그 이미지를 그렸던 것인데, 반자연주의적인 현대미술에서는 마음속에 잠재하는 환각이나 형상을 그리게 되고 여러 가지 사물을 변형시키고 조립함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표현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월간미술편, 『세계미술용어사전』, 369쪽).       어떤 정의를 인용하든 이미지는 實在(the real) 자체가 아니라 그림자다.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인간이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다. 마그리트는 캔버스에 파이프를 그리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써넣었다. 그림의 제목을 이라고 붙여 놓은 것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미지)이지 진짜 파이프가 아니란 뜻도 담겨 있다. 이 그림을 통해서는 파이프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어떤 나무로 되어 있고, 얼마나 낡았는지, 그리고 실물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 지 등 어떤 특성도 파악할 수 없다.     언어학적 측면에서도 ‘파이프’라는 단어는 파이프의 참된 성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파이프’라고 부르자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약속한 것뿐이다. 우리나라에는 더 멋있는 단어인 ‘곰방대’가 있다.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와 이미지(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한 원본은 인간인 이상 누구도 볼 수 없다) 사이의 정확한 의미 전달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시각에 의존하여, ‘이것은 천국이다’, ‘이것은 죽음이다’라고 파이프가 그려진 그림 아래에 써놓는다고 해서 거짓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여, 애연가의 경우 파이프 담배를 피움으로써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담배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폐암의 원인이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현존 너머의 원본의 세상을 보고자 하는 예술가에게는, 특히 시인에게는 언어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자신의 이미지로 무한히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물론 언어의 한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시인도 적지 않다.           *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 ,   1929, 캔버스에 유채, 60×81Cm,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캘리포니아.         바짝 마른 장미꽃 다발에서 앵앵거리는 꿀벌의 날갯짓 들리나요? 닳아빠진 촛불에서 넓디넓은 꿈을 읽을 수 있나요? 장맛비에 휩쓸려온 뼛조각에서 화장품 냄새를 맡을 수 있나요?       지금 우리 자리는 죽은 자들 이미지의 묘지가 아닌가요? 우리 삶은 또 다른 복제물 복제물, 복제물이 아닌가요? 원본의 기억은 살아있나요? 원본은 있기는 있나요?       우리는 어디에 둥지를 마련할 수 있나요? 내가 눈을 감은 후에도 저 바다는 저 산은 감히 저기 저 자리에 버티고 있을 건가요? 아니 내가 있는 이곳은 도대체 어딘가요?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시인은 촛불이 다 닳아빠져 흔들리고 있는 서재에서 마른 장미꽃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전 산보하다 길가에서 마른 뼛조각을 발견했던 것을 문득 떠올린다. 지금-여기 내가 있는 것은, 오래 전에 앞서 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관습이라는 이미지와 언어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진정한 모습’, ‘사물의 실재(the real)’와는 먼 시뮬라크르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죄를 짓기 이전의 하나님 형상(Imago Dei)을 닮은 아담과 이브가 살던 낙원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와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에 젖어 있는 것이다. 시인의 먼 미래, 사후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 존재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질문형을 반복하며 대위법적 기교를 활용함으로써, 그 질문의 절실함을 담아내고 있다.       김유중은 “시인은 여기서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가 ‘죽은 자들’이 누워있는 ‘이미지의 묘지’는 아닌지,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또 다른 복제물’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 원본은 벌써 우리의 기억 속에서 추방되고 지워져버렸으며, 따라서 이 시대에는 더 이상의 어떠한 창조적인 활동도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삶의 원형으로서의 원본, 예술가의 절대적인 이상으로서의 원본은 벌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버린 것인지 모른다. 그것을 되찾기에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실물로서의 원본이 사라진 시대, 그리하여 그것이 남긴 이미지만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시대가 바로 지금 현재, 우리 시대인 것이다”라고 평설에서 언급하고 있다(김유중, 김철교의 시집 『무제2018』평설, 2018, 시와시학, 141쪽).       8. 읽기       예술작품은 좋은 시뮬라크르다. ‘좋은 시뮬라크르’라 함은, 현상 저 너머에 대한 꿈을 머금고 있는 시뮬라크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엄밀한 의미의 시뮬라크르는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플라톤의 에이콘의 개념에 가까울 수도 있다. 시뮬라크르(simulacre)의 개념은, 가상, 모조품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simulacrum)에서 유래한 말로,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즉 원본을 알 수 없는 복제물을 뜻하는 개념이다.       넓은 의미의 이미지, 보통명사로서의 이미지는 복사물(플라톤의 eidolon의 개념)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에이돌론(eidolon)을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로 나눌 수 있으며, 에이콘은 원본이 반영된 복사물이라는 이미지다. 판타스마는 복사물의 복사물로 원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만 시뮬라크르다. 플라톤은 이 시뮬라르크를 악마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에이콘은 실재를 닮은 것이지만 시뮬라크르는 에이콘을 복사한 것으로 원본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원본(이데아 + 실재)을 반영하지 않은 복사물은 저급한 것이다. 여기서 ‘이데아’는 지성의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 즉 머리로서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실재’는 감각의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 즉 오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들뢰즈는 원본이 반영되지 않은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 이데아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탈중심의 세상, 이데아를 재현하지 않는, 이데아를 바라보지 않는 재현파괴의 세상, 카오스적 다양성을 가진 개인중심의 세상, 다분히 ‘디오니소스적’이어서 유희적인 유목성을 가진 개인 중심의 세상, 무질서를 내포한 질서를 중시했다. 시뮬라크르 세계는 원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플라톤의 시각에서는 버려야할 악마적인 것이지만 들뢰즈에 의하면 시뮬라크르가 탈중심화된 체계의 중심을 여는 새로운 사유매체이자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박치완,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한국외국대학교 지식출판원, 2016, 60~79쪽).       그러나 시뮬라크르에도 원본의 그림자가 남아있지 않을까? 복사의 복사를 반복하다보면 차이가 누적되게 되고 결국 원본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지는 몰라도 원본의 그림자는 남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뮬라크르인 것이지, 원본의 그림자조차도 없다면 그것은 ‘새로운 창조’와 다름 아니다. 시인이 한편의 시를 써서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읽힐 때, 그 시가 원본이냐? 시뮬라크르냐? 시인은 그것이 ‘원본’이라고, ‘실재’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독창적이어서), 그러나 그 시가 이 사회에 존재하고 수용된다는 것은, 환경과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복사한)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의미한다(김철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21-26쪽).         시인은 신에 가깝다고? 에라이, 시뮬라크르 너는 어떤 모습으로 복제된 거지? 어느 것도 원본은 없고 그저 차이만 반복된다면서?       y = ax + b, 변수들의 변치 않는 정의는 무엇일까? y = 나 x = 너 아니 하나님 a와 b는? 그림 속 텍스트도 텍스트를 그린 그림에 불과하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은 양 두툼한 책을 서슴없이 써내지만 행간에는 그저 황무지만이 널따랗고 위안을 주는 작은 풀꽃 하나 찾을 수 없다       인식 저 너며 이성 저 너머 감성 저 너머 거기엔 아무 것도 없는데 용량이 부족한 두뇌로 열심히 삶의 프로그램을 짜서 돌려본들 루핑이 걸려 평생 그칠 줄 모르고 쳇바퀴를 돌릴 뿐이다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가 인류의 원본(Imago Dei)이라면 지금의 시인 역시 시뮬라크르인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원본의 그림자가 남아있기에,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 이어진 복제과정을 반복되어 온 ‘지금의 나’이지만, 창조주의 존재를 잊지 않고 복락원의 꿈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y = ax + b가 간단한 삶의 방정식이라고 한다면, 나(y)는 하나님(x) 혹은 이웃(x)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a와 b는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위치 혹은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x가 하나님일 때 a가 0인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겠고, -인 사람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이 삶의 공식이 참인가? 여기서는 단순하게 1차방정식으로 표시했지만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기에 무한대의 다차원방정식일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그림 속 텍스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의 의미도,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글씨그림’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이 세상은 들뢰즈의 시각에 의지하면, 온갖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마치 원본을 찾은 양, 실재(實在)를 찾은 양, 사람들은 많은 책을 써내지만 그 글 중에서 진실의 양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신 직후 죄짓기 이전의 모습을, 온갖 이성과 감성을 동원해 찾으려 해도 여전히 죄악과 욕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에 루핑(looping)이 걸리면, 프로그램 속에서 동일한 명령이나 처리과정을 반복하여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주어진 뇌세포의 10%도 가동 못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언제 우리는 원본, 실재, 이마고데이를 찾아내어, 저절로 의인으로 살아질 날이 온단 말인가?       9. 읽기       예술의 본령은 현상 저 너머의 탐구라 하겠다. “다른 상징주의 작가들이 그러하듯 랭보에게도, 현실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외관을 지닌 모든 사물들은 단지 본질을 나타내고 투영하는 일부분일 뿐이지, 결코 본질 그 자체이거나 또는 본질을 충분히 투영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 파괴와 해체를 통해 현실적인 외관을 제거하고, 그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전혀 다른 ‘실체’를 ‘재건축’, ‘재창조’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랭보에 의하면 진정한 시인이란 ‘투시자’가 되어, 의식과 이성으로 느끼기보다는 현상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궁극적 본질을 ‘무의식’과 ‘상상력’에 의해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곽민석 역, 『랭보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148-154쪽).     * 미로(Joan Miro, 1893~1983), ,   1978, 캔버스에 유채, 92x73Cm, 마르요카 호안 미로 재단. 스페인.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 그 안에는 원죄로 인해 잊어버렸던 우리의 원본이 있을까?       천진난만한 언어로 꿈을 길어 올리는 환쟁이 천국의 지도를 완성하러 별나라에서 온 그가 날마다 주문으로 외우는 그림과 음악으로 외우는       함께 가자 함께 가자 함께 가자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 2018) 전문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왜 자기 작품에 구체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고, 특히 미술가들은, 즐겨 「무제」라는 제목을 쓸까. 작곡가들도 대부분 작품의 제목대신 일련번호를 즐겨 쓴다. 베토벤 도 작곡 당시「운명」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아니다. 베토벤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가 붙인 이름이다. 특정 제목이 붙지 않은 예술작품은 수용자에게 무한자유를 허용한다. 호안 미로의 「무제 1978」라는 그림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그림을 보고 이라는 시를 쓴 시인은 미지의 별에서 온 우주선을 떠올렸다.     이성은 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감성은 자주 우리를 욕심에 휘둘리게 한다. 도대체 우리 인간은 모두 천사일 수 없는가?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기 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는가? 내 멋대로 살아도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우리가 선하게 살도록 자동프로그램화 될 수 없는가? 모든 인간이 선하게 남을 배려하도록 프로그램된 칩을 머릿속에 심을 수 없을까?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주기도문’에서 외우듯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이 시에 대한 이덕주의 평설을 인용해보자. 시인은 이 그림을 보면서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을 연상해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쩌면, “원죄로 인해 잊어버렸던/ 우리의 원본이 있을까?”라며 삶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탐색하려 한다. 화자는 호안 미로에게, 타고난 “천진난만한 언어로/ 꿈을 길어 올리는 환쟁이”라고 신뢰를 보낸다. 예술가에게는 “천국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있기에 긍정적으로 교감하는 것이다. “별나라에서 온 그”이기 때문에 자신이 희원하는 근원적 해답을 반드시 줄 것이라고 “날마다 주문으로 외우”며 기대치를 높여보는 것이다. 반복적인 “함께 가자”라는 구호는 후안 미로가 상상해내는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에 동승하려는 화자의 기원이 내포되어 있는 주문이기도 하다(이덕주, 「화가의 영혼과 교류하는 심미안」, 한국시문학아카데미 발표원고, ).       예술세계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본다. 호안 미로가 초대하는, 천국에서 온 우주선이 초대하는, 예술세계에서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원본(Imago Dei)을 만날 수 있을 것도 같다.(*)  
음악의 옷을 입은 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3)       김철교(시인, 평론가)         4. 읽기           * 클레 (Paul Klee, 1879~1940) ,   1929, 캔버스에 유채, 83.7×67.5Cm, 루드비히 미술관, 쾰른, 독일.       은 과 함께 클레가 음악의 대위법(對位法)을 활용하여 그린 그림이다(김광우,『칸딘스키와 클레』, 미술문화, 2015, 321~323쪽). 크고 작은 사각형 모양의 돌들이 반복되어 쌓이면서 길을 만들고 있다.   ‘예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클레는 스위스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화가가 되었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클레는 색을 소리처럼 사용하였다. 칸딘스키와 클레 모두 음악을 자신들의 추상화에 적용했지만, 사실상 이를 먼저 주장한 사람을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었다. 고갱은 “생활이나 자연에서 가져온 주제를 가지고 선과 색을 배열하여 일종의 교향곡과 화음을 만든다”고 하였다.       대위법(對位法, counterpoint)은 음악에서 두개 이상의 선율(멜로디)을 동시에 결합하는 다성음악(多聲音樂)이다. 규칙적인 시차를 두고 같은 음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연주되기 때문에 연결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여러 성부(聲部)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며, 각 성부가 선율적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음악에서는 일반적으로 음의 수직적 결합(화성, 화음)과 수평적 결합(선율, 멜로디)을 통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있는데, 대위법은 수평적 결합에 해당한다. 캐논과 푸가는 대위법의 일종이다. 캐논은 하나의 성부에서 주제가 노래되면, 시간의 차이를 두어 다른 성부가 그 주제를 그대로 ‘모방’하여 뒤따른다. '돌림 노래'는 캐논형식의 전형이다. 푸가는 하나의 성부에서 주제가 제시되면, 이어서 제2의 성부가 이것을 모방하는데 이것을 ‘응답주제’라 한다. 그 동안에 제1의 성부는 응답주제에 대위(對位)하는‘대주제(對主題)’를 부르면서 진행한다. 주제, 응답주제, 대주제의 관계가 모든 성부를 중심으로 반복되는 것이 푸가형식이다.       문학에서의 대위법은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으로,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어구를 연결하여 대비의 느낌을 강하게 강조하는 동시에 그 대립 자체가 하나의 통일성을 갖게 한다. 김종삼의 시에서 이러한 음악기법들이 잘 활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조용훈, 「김종삼 시에 나타난 음악적 기법 연구」, 『국제어문』, 2013, 321-346쪽), 푸가 형식을 활용하여 시의 의미를 한층 풍성하게 한 사례를 첼란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박미리, 「음악과 문학의 상호 매체성 – 한 예로서 푸가 형식과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 『독일어 문학』제56집, 2012, 121-146쪽).       클레의 그림 에서 그림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곧게 뻗고 안정적인 길이다. 그 옆의 수많은 샛길들은 좁고 불안정하고 아무렇게나 생겨난 오솔길이다. 우리의 삶은 고속도로처럼 평탄한 한 평생을 보내든, 불안정하고 흔들리며 어렵게 살든 결국은 하나의 지평선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게 될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결국은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났을 때, 후회 없는 삶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클레가 그린 을 보면서, 대위법을 염두에 두고 을 썼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주어진 길이 어떤 길이더라도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다.         푸른 바다로 향하는 길 모두에게 넓고 모두에게 좁은 모든 길 가지각색으로 가지각색의 길을 닦고 있다       바다 건너 아주 먼 바다 건너 내가 온 별자리를 향해 층층마다 다른 색깔로 비틀거리기도 하며 뜀박질도 하며 때로는 목적지를 환히 보기도 하고 때로는 목적지를 잊기도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길       점. 선. 면. 색을 통해 가야할 길 가는 길을 알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치는 화가의 붓질 속에 아득하게나마 찾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을 붙들자 붉고 푸른 오렌지 빛깔들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더라도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첫째 연과 둘째 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푸른 바다를 향하는 길을 가는 길손이며 각각의 길은 다르다. 푸른 바다란 각각이 지향하는 낙원, 본향, 고향인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며, 연어도 알을 낳고 죽기 위해 고향으로 회귀한다. 물론 그 고향, 즉 삶의 목적, 가고자하는 종착지는 모든 사람에게 다르다. 또한 가는 방법(삶의 노정)도 다르다. 어느 것이 정답이고 옳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연에서는 가는 길을 멈출 수 없는 숙명을 말하고 있다. “내가 온 별자리를 향해/ 층층마다 다른 색깔로/ 비틀거리기도 하며/ 뜀박질도 하며/ 때로는 목적지를/ 환히 보기도 하고/ 때로는 목적지를/ 잊기도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길”인 것이다.       셋째 연은 예술가의 길을 노래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가야 좋은지 고민 없이 그저 간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가야할 길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른 길들은 어떤 길들일까? 길 너머에는 어떤 길이 있을까? 끊임없이 질문하며 가는 사람이 예술가다. “점. 선. 면. 색을 통해/ 가야할 길/ 가는 길을 알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치는/ 화가의 붓질 속에/ 아득하게나마 찾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을 붙들자/ 붉고 푸른 오렌지 빛깔들/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더라도” 꼭 그림 속에서 만이 아니다. 모든 예술, 더 넓혀 모든 학문 속에서 삶의 목표를 향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그저 아무 할 일 없이 세월을 소비하는 것을 시인을 참지 못한다.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인생은 얼마나 불쌍한가? 목적, 꿈, 소망(죽음을 앞에 두었더라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라도 가져야 한다)이 없는 삶은 동물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물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동물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시는 음악적 기법 중에 대위법을 잘 활용하였다. 대위법을 통해 리듬을 살리고 있고 내용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또한 색채 이미지 ‘붉고 푸른 오렌지 빛깔’은 도, 미, 솔을 색채로 나타낸 것이다.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871-1915)은 음과 색채와의 상응관계를 연구한 바 있다.       삶의 조화로운 것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비록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아무 것도 볼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나의 모습을 찾아 예술 속에 한 평생을 던지겠다는 것이다. 이 시의 형식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리듬과 색이 합쳐진, 즉 ‘보는 리듬’도 클레의 이론에 따라 도입한 것이다.         5. 읽기                         피카소의 15m의 조각 작품 는 시카고 시청 앞에 세워져 있다. 이 조각상을 보고 쓴 시 에서, 시인은 거대한 조각 앞에 서 있다가, 자신이 조각 작품이 되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앞을 지나가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이,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을 관조하면서, 대위법적 구성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나름의 해답으로 자족한다. 반야심경에서 세상 모든 삶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없다’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저 있는 자리에서 자족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작품화 하였다. 없는 해답을 찾아 애쓰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구원이요 행복의 지름길이 아닐까 자문자답하면서.         거대한 몸짓이 우리를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안쓰러운 듯 행복한 듯 무심한 듯       거리를 초점 없이 거닐고 있는 노인들 손잡고 휘파람 부는 정다운 애인들, 애인들, 천방지축 재잘대는 아이들, 아이들, 아이들       존재마다 무슨 제목을 붙일 수 있나요? 사람마다 딱 맞는 옷이 있나요?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데 있나요?       도서관에 꽉 찬 책들이 해답을 줄 수 있나요? 책장마다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그림자를 알 수 있나요? 책 속에 뭔가 있긴 있나요?       그냥 저 거리에 부는 매연 섞인 바람 속이지만 웃고 싶은 웃음이나 실컷 웃지요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6. 읽기                 미로,         호안 미로의 그림(, 1974, 216x174Cm, 캔버스에 아크릴과 목탄, 마요르카 호안 미로 재단)은 사람의 얼굴을 단순화 시킨 모습이다. 위쪽에는 머리를 표현하는 듯한 검은 색이 있고, 그 아래 검은 눈, 그리고 그 아래는 회색 얼굴빛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의 크기는 제법 커도 아주 간결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시로 쓴 에서는 빛의 3원색이 등장하고, 그러한 밝고 맑은 색깔에서, 다장조의 화음까지 읽어낼 수 있다. 사방에서 우리는 지켜보는 하나님의 눈을 염두에 두면서 그림을 응시하고 얻은 이미지를 시로 옮긴 것이다. 검은 색과 회색으로 그려진 그림 앞에 서면, 수용자의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을 법하지만, 시인은 이 그림에서 항상 우리를 따뜻한 눈으로 보살피는 창조주의 마음을 읽고, 삶을 평화롭게 관조하는 행복한 얼굴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도 대위법을 염두에 두었으며, 색깔의 이미지도 도입하여 미술과 음악 기법을 동시에 활용하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하늘에도 눈 뒤에도 눈 앞에도 눈 바다에도 눈       마음 깊은 곳에도 눈 너머 저 너머에도 눈 온 세상에 눈 눈 눈       정염이 맴도는 빨간 눈 세상 빛으로 가득한 파란 눈 교회 종소리 가득한 초록 눈   도 · 미 · 솔 저 너머 투명한 눈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 그분의 눈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우리 주위에는 많은 눈들이 있다. 하늘도 바다도 미지의 세계도 시인을 응시하고 있다. 주위 온갖 세상 사람들의 눈도 시인을 향하고 있다. 내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 대상과 내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우리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인식의 눈은 그 분의 눈 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은 확인한다. 이해할 수도,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삶의 속박 속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그 분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다.(*)
춤과 색과 음의 불협화속에 있는 은근한 질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2)   김철교(시인, 평론가)     3. 읽기       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1911년 쇤베르크(A. Schoenberg, 1874〜1951)의 음악회에 다녀온 후 그 느낌을 그린 것으로, 청각적 체험을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하여 회화와 음악의 공감각을 표현한 것이다.       검은 색 부분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상징한다.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에 있는 청중을 나타낸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좌우 흰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란색은 쇤베르크의 음악이 홀을 가득채운 것을 그린 것이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색들은 각종 악기들의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김광우, 『칸딘스키와 클레 – 추상미술의 선구자들』, 미술문화, 2015, 19~20쪽).       보다 관련 작품을 정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딘스키, 쇤베르크, 스크리아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의 아버지,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의 창시자, 스크리아빈은 음을 색으로 표현한 선구자라는 점이다.       당시 칸딘스키가 다녀온 음악회에서는 쇤베르크의 ‘현악 4중주’와 ‘3개의 피아노 소품’이 무대에 올랐다고 하며, 이는 무조음악(無調音樂)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회였다. 무조음악이란 악곡의 중심이 되는 장조(長調), 단조(短調) 등의 조성(調性)이 없는 음악을 말한다. 으뜸음도 없어서 모든 음은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 쇤베르크는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7개의 온음과 5개의 반음을 포함한 12개의 음을 모두 사용하여 곡을 구성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12음 기법을 창안하였다. 장조나 단조의 조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무조음악(無調音樂)은 쇤베르크 이후 일반화되었다.       당시로서는 불협화음이 음악에 도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것이 불협화음인지 화음인지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당시로는 혁신적인 기법이었다. 불협화음을 음악에 편입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부조화와 삭막함을 예술에 담아내어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아도르노가 현실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는 예술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현실을 왜곡하게 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현실의 고통을 표현해서 사람들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며, 그런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고 아도르노가 주장한 바 있다.       러시아의 신비주의 작곡가 스크리아빈(A.Scriabin, 1871~1915)은 자신의 음악에 시각적 효과를 더하기 위하여 작품이 연주되는 동안 개개의 음에 해당하는 빛을 투사하는 것을 시도한 바 있는데, C(도)=빨간색, D(레)=노란색, Db(레b)=자주색, E(미)=파란색, Eb(미b)=구리색, F#(파#)=군청색, G(솔)=오렌지색, A(라)=초록색, Ab(라b)=제비꽃색, B(시)=암적색, Bb(시)=철색이었다.(전상직, 『음악의 원리』, 음악춘추, 2014, 36쪽)       색의 삼원색은 상호조합에 따라 다양한 색을 만들어 내고, 모두 합쳐지면 검은 색을 나타낸다. 음(音)들의 어울림에 따라 다양한 색깔로 표시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서 역으로 어떤 음악을 떠올릴 수 있을까? 또 어떤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각 개인의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의 역동에 따라 똑같은 그림과 음악에서도 행복 혹은 불행, 질서 또는 무질서, 고요함 혹은 잡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 시상(詩想)을 얻었는지 살펴보자.                   *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 , 1911,   캔버스에 오일과 템페라, 77.5x100Cm, 렌바흐하우스(Lenbachhaus), 뮨헨.               색깔 속에서 화음이 들리고 (조화롭지 않아도 된다) 무질서한 선(線)에서도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캔버스에 콘서트 장이 서고 누군가 시를 낭송하면 된다 (시인이 아니어도 된다)       땀범벅 마당에서는 그렇게 음악과 미술이 문학이 뒤엉켜 무질서 속에서 은근히 질서가 서고 지성도 감성도 찾지 못한 화성(和聲)이 완성된다       도는 빨간색 옷을 입고 미는 파란색 모자를 쓰고 솔은 오렌지색, 그래 오렌지를 입에 물고 흥겨운 춤을 추자 가야 할 길을 몰라도 그저 가는 길로 가자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이승하에 의하면, “이 시야말로 ‘음악과 미술이 문학이 뒤엉켜/ 무질서 속에서/ 은근히 질서’를 세우는 융ㆍ복합적인 시가 아닌가 한다. (······) 시의 제3연은 랭보의 시 「모음」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 「춤추는 음악」은 음악과 미술과 문학의 융ㆍ복합을 꾀한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승하, 「그림을 본 관람객, 어떻게 시를 쓰는가」,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202~203쪽)       시인은 칸딘스키의 그림 를 보면서, 음을 색으로 표현했던 스크리아빈(A.Scriabin, 1871-1915)을 생각한다. 스크리아빈은 음 높이와 색채의 상호관계를 연구하고 각 음계마다 색깔로 나타냈다. 빨간색, 푸른색, 오렌지색(노란색)은 도·미·솔을 은유한 것이다. 또한 시인은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를 떠 올린다.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콘서트에서 들었다는 무조음악과 연관시켜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제1연은 를 듣고 쓴 시이다. 처음에는 부조화(不調和)의 조화(調和)라할까 좀 생경한 맛이 있지만 자주 듣다보면 묘한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음들의 어울림, 조화로울 것 같지 않는 색들의 조화, 시인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대신하려는 시낭송가, 음악과 미술과 시가 어울리는 한마당이다. 화음이란 본래 조화롭다는 것을 말하지만, 조화로워야 할 화음이 조화롭지 않아도 조화로워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을 뭉뚱그린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그런 것이다. 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이성적인 것이 현실이다. 서양에서 경영경제의 모든 이론들은 합리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기본적인 전제아래 경제이론과 정책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영경제 현장에서 모든 결정이 이성적인 정확한 계산에 의해서 투자와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17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일러(Richard H. Thaler; 1945〜)는 심리학과 경제학을 연결시킨 ‘행동경제학’을 세상에 내놓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으로만 행동한다고 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경제사회를 설명하고 있다.       비이성적인 결정들이 난무하는, 그러면서도 그럴듯하게 어울려 경제 경영사회가 비교적 순항하고 있다. 무질서 속의 질서, 그것이 인간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학문에서 이제는 의사결정 주체들이 더 이상 이성적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인간세계에서 비이성적인 의사결정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미가 전혀 없는 로봇이 경영하는 세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음악의 세계에서도 장·단조에 따라 화음을 잘 맞추어 오선지에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림도 현실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화폭에 오선지에 반영하고 있다. 표현주의 예술, 초현실주의 예술이 우리 삶의 참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쇤베르크가 표현주의 음악으로 분류되는 에서 사용한 알베르 지로(Albert Giraud; 1860~1929)의 시는 의미의 그림자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초현실주의 시(詩)다. 쇤베르크의 는 악기들과 소프라노의 음성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소리로 더 초현실적이다. 전통적인 조성(調性)과 화성(和聲), 형식과 구성 등을 부정하여 당시까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음악이다. 표현주의 음악은 20세기 초의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세계대전의 어두운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혁신적인 운동이다.   제2연에서“무질서 속에서/ 은근히 질서가 서고// 지성도 감성도 찾지 못한 화성이 완성된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바로 인간 삶의 진면목이다. 인위적인 법칙과 질서, 지성만으로, 감성만으로 만들어진 예술, 정교한 이론에 의한 이루어진 화성, 그런 것들이 아니라, 모든 것이 뒤엉켜있으나 은근히 질서가 있는 삶, 그것이 이성적이지만은 않은 인간의 세계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단토((Arthur Danto; 1924〜2013)가 『예술의 종말이후』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예술은 잘 정돈된 르네상스식의 예술이 종말을 고하고, 1964년 워홀의 가 미술전시장에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기존 예술이라는 것이 예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즉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던 예술이, 이제는 인간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그대로, 즉 이성에 의해 간추려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예술의 시대, 음(音)과 색(色)과 시(詩)가 구분 없이 어우러지는 세계, 그것이 진정한 예술의 세계이며 진정한 삶의 세계인 것이다.       제3연을 보자.“도는 빨간 색 옷을 입고/ 미는 파란색 모자를 쓰고/ 솔은 오렌지색, 그래 오렌지를 입에 물고/ 흥겨운 춤”을 추는 마당. 전통예술의 정돈된 오페라의 무대, 원근법과 잘 복사된 현실을 나타내는 캔버스가 아니라, 나이트클럽에서 추는‘막춤’의 예술이, 예술의 진정한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삶은“가야 할 길을 몰라도/ 그저 가는 길로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무슨 법칙과 이성적인 흐름에 편승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하루 아니 한 순간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이 우리네 삶인 것이다.       시인이 경영대학원에서 지도했던 러시아 학생 중에‘나자’라는 학생이 있었다. 아주 춤을 잘 추었는데, 러시아에서 고등학교 때 정규과목으로 춤을 배운다고 했다. ‘나자’는 시인에게 춤을 가르쳐 주겠다하여 자주 유성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갔다. 시인은 짧은 시간에 스텝을 배울 수도 없어 그저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는 소위‘막춤’을 추게 되었다. 동행한‘나자’친구들도 마찬가지다. 한참 흥겨운데 무슨 격식이 필요하겠는가. 시인은 학생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막춤을 추면서 깔깔대며 즐거운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춤의 기본을 배운 학생들은 내가 보기엔 멋대로 추는 것 같아도, ‘은근한 질서’를 갖추었을 것이었지만, 나는 그런 기본기를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마구잡이로 흥에 겨워 추는‘막춤’이었다. 격식에 맞는 춤, 원칙에 맞는 춤, 그런 춤은 재미가 없다. 공연장에서 점잔을 빼면서 감상하는 발레도 나름대로 좋겠지만, 그것은 관객인 ‘나’의 세계가 아니라 특수 계급 즉 전문 배우들, 발레리나들의 세계인 것이다. 관객은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타자인 것이다. 막춤은 그저 흥겨운 대로 몸을 흔들어대는 무질서한, 그렇지만 보는 사람이나 추는 사람이나 함께 어울려 흥겨울 수 있다. 나이트클럽에서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막춤같은 음악, 그것이 정신과 맞닿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시를 쓴 것이다.       제3연에서, 도, 미, 솔은 다장조 으뜸화음이다. 으뜸화음은 으뜸음을 기준으로 3도 위의 음과 5도 위의 음을 함께 표현한 화음을 말한다. 장조에서는 ‘도 · 미 · 솔’의 화음이, 단조에서는 ‘라 · 도 · 미’의 화음이 으뜸화음이다. 일반적으로 장조(major)는 밝고 깨끗한 느낌을, 단조(minor)는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도·미·솔이 무질서하게 어울려도, 멋들어진‘자연스러운’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 물론 그 무질서는 낙서와 달리, ‘은근한 질서’를 가진 무질서인 것이다. 예술혼이 무질서를 무질서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은근한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무질서가 무질서로 머물 때 그것은 낙서요 소음이다. 예술가에 의해 은근한 질서를 갖추어져 있을 때 비로소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낙서 같은 한 줄의 글, 혹은 시장 잡배들의 상소리 같은 글들이 버젓이 시라는 옷을 입고 무대에 등장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원색이 서로 엉켜 모든 색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화음과 비화음이 어울려서 또 다른 조화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성과 비이성, 현실과 초현실, 의식과 무의식, 그것들의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넘나들며 ‘조화로움’을 생산하는 것이 예술의 세계다.       절경을 잘 묘사해놓은 그림보다, 어린아이들이 투박하게 그린 그림에서 진실된 감동을 얻고, 유명한 서예가의 정돈된 서체로 써진 글씨보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글씨들에서 우리는 더 푸근함을 느낀다. 정돈된 그림과 글씨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감상해야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그림과 글씨를 보면, 우리의 이성을 무장해제 시켜 안온한 느낌을 주어, 현대 사회의 톱니바퀴에서 짓이겨진 우리 영혼을 치유해 준다. ‘예술의 전당’에서 가끔 전시되는 어린아이들의 작품 앞에서 머무를 때가 더 평화를 느끼는 이유라 하겠다.(*)
그림으로 쓴 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1)       김철교(시인, 평론가)     1. 열린 예술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 이후』(이성훈·김광우 역, 미술문화, 2012, 13쪽)에서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미술의 개념은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쓴 르네상스 때에 비로소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미술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며, 바자리 이후 1964년까지의 서양미술사를 하나의 르네상스 패러다임에 비유했는데, 이 전형이 1964년 워홀의 가 등장하면서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1965년부터를 ‘서양미술사 이후’의 시기로 인식하면서, 예술가는 이제 모든 형식과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예술가의 유일한 역할은 ‘예술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화장실의 낙서도 시집(詩集)으로 들어오면 시가 될 수 있고, 거리에 버려진 찌그러진 깡통도 전시장에 전시되면 예술이 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예술의 본질과 교신하는 예술 철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예술은 열려 있어야 한다. 작품을 통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질문과 해답을 읽을 수 있다. 생산자인 예술가의 의도와 소비자인 수용자(관객/독자)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예술이다. 수용자 사이에도 일치할 수가 없다. 무의식의 역동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양한 질문과 다양한 해답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술의 존재가 더 우리 삶에 귀중한지도 모른다.   삶의 본질과 행복에 대한 물음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 해답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모든 물음과 모든 해답이 다 옳다고도 할 수 있고 그르다고도 할 수 있다. 오직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김철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7쪽)   최근 예술은 미술이라는 장르를 앞세워, 활발한 융·복합을 통해 각자의 품을 넓히면서 영역을 계속 확장하여 왔다. 파리의 퐁피두 현대미술관, 니스의 근현대미술관은 물론, 우리나라 현대미술 전시장에 가면 회화, 조각, 사진, 음악, 영상, 스토리텔링 등을 비롯하여, 오만가지 혐오스런 오브제까지 어울려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필자는, 문학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 장르를 넘겨다보며, 미술과 음악을 문자로 은유해 내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시문학의 좌표를 그려보고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을 2018년 12월에 출간한 바 있다.       이에 앞서, 관련된 실험시들을 2018년 8월에 시집 『무제2018』에 묶었다. 본고에서는 이 시집의 제5부 「이미지의 반란」에 수록된 열여섯 편을 해설하면서, 각종 미술 및 음악 이론과 기법을 어떻게 시 창작에 활용할 수 있는 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들 시는 마치 추상화 그림 앞에 서있을 때처럼 나름대로 이미지를 떠 올릴 수 있도록 의도된 시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면 쉽게 다가 설 수 없다. 마치 이우환(1936~)의 점·선·면 관련 작품들 앞에서 현상 저 너머의 세계를 유추한다든지, 호완 미로(1893~1983)의 동화 같은 추상화를 보면서 즐거운 상상에 빠진다든지,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추상화 앞에서 가부좌하고 명상에 빠진다든지, 하는 것처럼, 독자들이 어떤 분명한 메시지나 의도를 캐려 하지 말고 오직 무한의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오직 리듬만을 추구했다면, 『무제2018』 제5부 「이미지의 반란」에 실린 시들은 음악과 미술이 한판 거나하게 어우러졌으면 하는 바램을 담았다.       앞으로 이어질 몇 편의 글에서는, 단지 비평가의 견지에서 시인(생산자)의 이미지를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수용(소비자)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예술 비평가의 역할은 흔히 예술가의 이미지를 번역 혹은 해설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번역의 우열, 번역의 정오(正誤)는 없다. 단지 비평가의 눈으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는 비평가에게 동의할 필요도 없다. 다만,‘저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정도면 되는 것이다. 원본도 번역본도 ‘실재’는 아니다. 원본도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 시인이 쓴 시(원본)도 결국 현상 혹은 인식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시인의 손짓(열망)일 뿐이니까. 시인의 작품도, 그에 대한 평설도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좋은 시뮬라크르들이다. 일반적으로 시뮬라크르는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복사물을 지칭하지만, 필자는 시뮬라크르에 원본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고 본다(김철교,『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21-24쪽)       2. 읽기       는 호안 미로가 그린 라는 그림을 보고 쓴 시다. 호안 미로는 나름대로 떠오르는 詩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렸다. 시인은 이 그림을 보고 문자로 시를 그렸다. 우리는 추상화나 절대음악 절대음악과 표제음악: 절대음악은 음악 외의 문학, 철학, 회화 등 다른 예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순수한 음의 논리적 조합에 의해서 예술성을 추구하는 음악이며, 표제음악은 곡의 내용을 설명 및 암시하는 표제(標題)로써 구체적 또는 추상적인 대상을 묘사하려는 음악. 을 들을 때에 나름대로 이미지를 떠올리며 감상을 한다. 비록 문자로 된 메시지가 없어도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수용을 하는 것이다. 추상예술은 예술가에게나 수용자(관객/독자)에게 무한한 자유를 준다. 호안 미로는 물론이요, 시인도, 호안 미로의 그림을 본 관람객도, 시인의 시를 읽는 독자도, 모두 머리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각기 다를 것이다.       ----------------------------------------------------         * 미로(Joan Miro, 1893~1983), , 1966, 캔버스에 유채와 목탄, 259.5x173.5Cm, 마요르카 호안 미로 재단, 스페인. --------------------------------------------------         호동그랗게 검은 눈 검은 눈 소녀 잠 기지개 아주 큰 기지개       물구나무 하늘 바다 손자국 손금 영혼길 길 큰길 작은길       크레센도 쿵쾅쿵쾅쿵 돛 닻 갈매기 부두 어시장 선혈 해변 장미 말벌 쾅 데크레센도 라르고       묘지 흰나비 흰국화 비너스의 하얀 젓가슴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 김철교 (『무제2018』, 시와시학, 2018.) 전문     --------------------------------   호안 미로는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하여, 1907년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12년 이후 갈리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1925년에 초현실주의 제1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의 초현실주의는 아주 밝은 시정과 단순화되고 순수화된 형태와 색채의 조화에 의한 율동적인 구성에 의하여, 조형성(造形性)의 긴밀감을 준다. 별 ·여자 ·새 등을 거의 상형문자와 같이 환상화(幻想化)하여, 그것들을 조화시킨 화면은 건강하고 명쾌한 유머마저 풍긴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호안 미로의 그림 를 보고 있노라면, 시인에게는 해변가에서 검은 눈이 커다란 소녀가 큰 기지개를 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이내 물구나무를 선다. 하늘과 바다가 뒤집혀 보인다. 땅 바닥에는 손자국이 선명하다. 손금에는 사람의 굴곡진 한 평생 가는 길이 나타나 있다. 젊은 시절에는 겁 없이 세상에 도전을 하게 된다. 세상을 거꾸로 보고 싶은 것이다. 음악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소녀는 물구나무를 선 채, 부두와 배와 갈매기를 뒤로 하고 어시장으로 들어간다. 시장에는 싱싱한 고기들이 팔딱팔딱 선혈을 흘리고 있다. 어시장만큼 생과 사가 분주한 곳이 어데 있으랴.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거친 도전에서 때때로 피도 흘리게 된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 가까이 해변에 장미 꽃밭이 보이고, 아름다운 말벌이 꽃에 앉았다 날았다 하며 점점 커지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쾅’하면서 크게 한번 울리고 음악이 점차 잦아들자 소녀는 물구나무서기에서 벌떡 일어난다. 저 멀리 해변가의 묘지로 눈을 돌리자 하얀 국화에 흰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소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 사이로 하얀 젖가슴을 드러내고 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음악과 함께 점점 사라진다.   한 소녀가 이 세상으로 건너와 격렬하게 살다가 퇴장해야 하는, 인간 삶의 한 노정이 파노라마처럼 상상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특히 명사만을 사용함으로써 속도감을 높이려는 장치를 하였다.       는 데페이즈망 기법과 표현주의 기법을 사용하되, 특히 색채 이미지와 음악 기호를 차용하였다. 호안 미로의 라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색깔과 음향의 이미지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때 마음속에 격하게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쓴 시가 이다. 전혀 엉뚱한 이미지들이지만 합쳐지면 통일적인 이미지가 형성되도록 유념하였다.       데페이즈망기법이란 사물을 상식적인 관계를 벗어나 엉뚱한 관계에 두는 것을 말한다. 초현실주의자의 선구자인 시인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eamont, 1846-70)의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2010). 표현주의 기법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에 있음을 나타낸다. 구성(구도)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 혹은 왜곡된다.       여기에서 소녀, 배, 어시장, 선혈, 해변, 말벌, 장미, 국화, 젖가슴 등은 엉뚱한 이미지들의 집합이지만 소녀의 격정적인 삶이라는 통일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강약, 고저 등 음악에 사용되는 용어들을 활용함으로써 음악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미술적 이미지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한편의 영상을 마음속에 떠올리게 인도한다.(*)  
   ■ 2011년『詩文學』9월호 신인우수상       안개-넬라판타지아 (외 2편)                  김이교     욕조에 물이 넘실거리는 동안 뿌연 안개 피어오르고 번쩍이던 빌딩의 유리창이 서서히 지워지고 유리창 속에서 움직이던 얼굴들이 지워지고 그들이 쏟아낸 소리가 지워진다 욕조에 물이 넘실거리는 동안   큰꽃으아리 연보라 꽃잎과 꽃잎 사이 깊은 골짜기에 안개가 모여들고 춘천 시가지에 떼 지어 돌아다니는 안개는 중도와 공지천 오래전에 먹은 소양호 동강 갠지스강 다뉴브강의 푸른 입김을 게워낸다 욕조에 물이 넘실거리는 동안   큰꽃으아리 가쁜 숨을 몰아쉬고 허벅지를 핥아내리는 뜨거운 입김 으아리 으아리 축축한 신음이 흐르고   거리에 등불이 내걸리기 시작한다.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는 수도 없이 떠오르는 ···· 흐린 불빛들   안개 속 깜박이는 UFO의 불빛에 사격을 하는 병사들   트윗~ 트윗~ 트위터들이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뛰며 놀고 있다       이명     아침부터 굴착기가 땅을 파고 있다 좌르르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 내려앉은 지반으로 하숫물이 쏟아진다 왼쪽 귀가 소리들을 끌고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냉장고로 세탁기로 전류 흐르는 소리 빨래 삶는 소리   그 여자는 가끔씩 실로폰 소리를 듣는다 도미쏠 쏠시레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소리가 방안 가득 커피 향을 풀어 놓자 왼쪽 귀가 슬그머니 숲을 끌고 온다 숲에는 바람이 불고 딱따구리가 나무를 찍어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나뭇잎 소리를 파도 소리로 착각하는 날에는 끼룩끼룩 갈매기 울고 파도 소리 멀리 타이티 섬까지 떠내려간다 꽃과 나비로 장식한 춤추는 해변의 여인이 고갱의 손을 맞잡는다 고갱의 어깨엔 버석거리는 해바라기와 고흐의 귀가 말벌처럼 달라붙어 있다   119를 불러 말벌집을 뜯어낸 뒤에 까맣게 태웠던 기억이 굴뚝처럼 솟아오른다 굴뚝을 타고 붕붕붕 말벌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왼쪽 귀가 다시 119를 부른다 삐뽀삐뽀 사이렌이 울리고 사이렌 소리를 피해 까무룩 잠이 들면 밤새 샤워기에 물이 흐르고 김이 오르는 물기둥 아래서 몸을 씻는 여인, 여인의 실루엣   넉 장의 꽃잎을 활짝 펼쳐놓은 병실 꽃잎 한 장이 떨어진 고흐의 귀를 들고 젖은 머리를 빗는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각 또는 아침햇살     때때로 아침햇살과 서먹한 사이가 된다 바동대며 뒤따라가는데 저희들끼리 수군대면서 먼저 가버린다   발이 빠지는 모래밭에서는 자글자글 웃음을 쏟으며 가고 옷자락 걸리는 덤불숲에서는 덤불들 속살을 간질이며 간다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거리에서 서성거리면 간혹 처진 아이들을 데리러오는 또 다른 햇살이 있다   대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까딱까딱 조는 날에는 햇살이 나뭇가지를 세워들고 단잠을 깨우러 온다   어느새 모퉁이가 닳아버린 내 하루 햇살이 몸을 안아 일으켜 마디마디 소독을 한다 금가룹니다 은가룹니다   거울처럼 난반사되어 걸음걸음 눈이 부시다       --------------------------------------------   결빙 (외 2편)                  심우기     맑았던 물이 얼어 물속을 보지 못하게 될 때 사람의 눈물도 단단한 결정으로 굳어버릴 때   나는 나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서로의 마음은 보지 못하고 단단해진 뼈만 쓰다듬는다 쿨렁거리는 피와 살이 눈물을 만든다 집 나간 사람 집 지키는 사람 혼자 노는 아이   서로의 길 가고 있을 때 결국 혼자라고 말끝 하나에도 자갈을 물리는   실금의 그것은 무엇?   달그락거리는 자물쇠 출근길 전동차 칸칸마다 굳게 채워진 지퍼들로 그득하다     종소리     그느드 르므브 스으 하고 어느 산사의 종소리 ㅡ로만 퍼져 나가면 멀리 각과 변으로 서 있던 산들이 느슨한 180도 한 선분으로 눕는 밤 그 선 위의 모든 것을 까만 물감으로 북북 칠하며 산 하나를 넘고 또 산 하나를 넘는 지치키 티피히이 하고 어느 도심 속 종소리 l로만 쨍그랑거리면 벽을 넘고 집 하나를 타고 넘어 이제는 커다란 빌딩도 훌쩍 넘어 널찍한 광장까지 이르러서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깡충깡충 건너가는 몸이 걸친 옷 조각 실 오르라기 한 올 한 올 풀어져 소리를 타고 ‘ㅡ'와 ’l'로 부서져 뼈와 피로 도로를 넘고 길을 건너 이명으로 울리는 종소리 조그만 가슴 속 우로 좌로 위로 아래로 사방팔방 그지느치드키 으 이 뎅 뎅 응하고 쨍그랑 댕그랑거리며 텅 빈 속을 알 수 없는 낮은 소리로 어느새 꽉 채우고 여운으로 터져나오는------ l l l       괄호     꽃술 속의 괄호 나무와 나무 사이의 괄호 계곡과 산을 잇는 괄호 건너갈 수 없는 강폭을 메우는 괄호 코와 가슴 사이의 괄호 하늘의 푸른 선 하나를 끌어 와 벌린 대지와 하늘 사이의 환한 괄호 괄호 안엔 돼지가 산다 도시 비둘기가 구구대며 둥지를 튼다 나비가 날개에서 꽃가루를 괄호 안에 털어내고 배 밑창이 간지러운 꿀벌들이 괄호와 괄호 사이를 날고 딱딱한 돌덩이 암흑이 미세물질 잔뜩 묻힌 괄호 괄호 안에서 내가 방긋 웃고 괄호 속에서 꽃들이 튀어나온다   --------------------------------- ---------------   색깔 있는 날 (외 2편)                  고현석     하얀 섬광이 번쩍이더니 밤하늘이 유리같이 갈라지고 깨진 몸에서 먹물이 쏟아진다.   먼지 쌓인 전구가 안무 낀 태양이 되어 부연 빛을 발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무지개를 잘라 입은 사람들이 해변을 뒹굴고 쪽빛 파도가 넘실대며 금방이라도 방안으로 밀려오려한다.   어항 속 빨간 금붕어가 허우적거릴 때 붉은 색이 물에 번진다.   그가 불을 끄고 들꽃 같은 누비이불을 뒤집어쓴다.   검은 시간이 되었다. 혼자만의 세상이다.       가로등이 된 남자     늦은 밤 버스 정류장에 낡은 코드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남자가 무겁게 서 있다.   불황이 겨울바람보다 싸늘하게 사람들을 스치며 어둠만큼 짙게 도시에 번져간다.   그의 질환처럼 구겨진 휴지가 발밑을 어지럽게 맴돌고 이지러진 그믐달이 비스듬히 엿보고 있다. 한 남자가 희미한 가로등 되어 서 있다.   이미 떠난지도 모르는 막차를 잃어버린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다.       돌지 않는 물레     항아리가 되려고 배가 불룩하고 커다란 술독 닮은 남자와 사기그릇처럼 희고 호리병 같은 여자가 얼싸안고 빙글빙글 춤을 춘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마치 돌아가는 물레 위 잘 빚어진 도자기가 되어 간다.   내가 돌지 않는 물레에 고립이 되어 일그러진 도자기 되어 비스듬히 서 있다.   막걸리사발을 연거푸 들이켠다. 멈추었던 물레가 서서히 돌아가고 내가 허공을 안는다.   ---------------------------------------------------------------   ■ 2011년 9월신인상 심사기        신인들의 경향이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단서가 되는 것이 텍스트 속의 시각변화視角變化다. 주지적 경향의 시나 일반 서정시의 시각이 대부분 주체의 내부에서 바깥을 보는 것이었는데, 신인들의 텍스트는 그 반대로 바깥에서 주체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경향은 텍스트 속에서 주체의 의식과 관념(영탄, 해석, 판단, 설득 등)을 최소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그것은 불완전하지만 무의식無意識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시각과 연결된다. 따라서 주체 중심의 논리적인 관념의 텍스트들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변화를 보여준다. 주체(시인)의 무의식이 텍스트의 표면을 형성하는 경향이 주류主流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응모작품 중에서 신인 우수작품상에 선정된 김이교 심우기 고현석의 시편들은 그런 점에서 신선한 개성을 풍긴다.     김이교의「안개-넬라 판타지아」는 여러 개의 불연속적인 장면들이 동일한 시간의 상황 속에서 발생하고 움직이는 판타지(fantasy)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판타지는 주체의 관념을 무화無化 시키면서 자유로운 가상현실의 문을 열어준다. 그 속에는 현실적인 어떤 욕망이 잠재한 것 같지만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이미지뿐이라는데 주목된다.「이명」에서도 ‘굴착기 소리’ ‘실로폰 소리’ ‘파도 소리’ ‘사이렌 소리’ 등에서 파생되는 상상과 소리가 다양한 현상現象의 세계를 감각하게 한다. 그것은 현상의 배후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하이퍼(hyper)의 감각적 영역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현실이 배제된 감각적 향락에 빠지는 위험성도 감지하게 된다. 이에 비해 「지각 또는 아침햇살」은 시인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어릴 적 햇살의 기억이 투명한 물방울처럼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밝고 가볍고 감각적인 동심의 이미지가 시선을 끈다. 그러나 무엇인가 빠져 있는 듯한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 이 부족함이 자신의 내면을 겸손한 자세로 더 진지하게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긍정적인 에너지로 환원되리라고 생각된다. 더 분발하고 낮은 자세로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바란다.     심우기의 시편들은 개성적인 기법이 흥미를 끈다. 그것은 그의 시작 태도가 도전적이고 실험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결빙」은 고독한 내면의식의 코드를 몇 개의 이미지로 나열하면서, 끝내 자신의 내면을 열어보지 못하는 도시인들의 심리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달그럭거리는 자물쇠/출근길 전동차 칸칸마다/굳게 채워진 지퍼들로 그득하다’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 이미지 속에는 시인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도 투영되어 있어서 진정성을 진하게 한다.「종소리」는 기표(시니피앙)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어떤 관념의 세계에서 해방된 소리만의 감각적 이미지가 매우 참신하고 개성적이다. 지성의 반대편에 위치한 이런 감각현상感覺現象은 현대시의 기호성과 연결된다는데 의미가 있다.「괄호」는 독자들을 기의(시니피에)의 세계 속으로 유인한다. 숨은 의미 찾기가 이 시의 키포인트인 것 같다. 괄호가 의미하는 것을 독자들이 나름대로 추적해서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괄호에는 독자참여의 공간이 들어있다. 그래서 독자와 소통하는 현대시의 형태를 생각하게 한다. 앞으로 이런 덕목들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짝이는 재치의 세계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단순한 언어놀이’에 머물지 않으려면 자기 시의 방법론을 확립하는 시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깊이 있는 성찰과 확고한 의지를 요망하게 된다. 개성의 성취를 기대하면서 겸손히 공부하는 자세를 당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고현석의「색깔 있는 날」에는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영상감각이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외부(객관적)의 시각으로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쉽게 경험하는 문명현상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그 속에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들의 존재 모습을 넣어서 한 컷의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부각된다. 그와 함께 텔레비전 속의 ‘쪽빛 파도가 넘실대며 금방이라도/방안으로 밀려오려 한다.’는 생동하는 사물성의 감각이 개성적인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가로등이 된 남자」에서는 현대도시인 중에서 불황 속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남자의 모습이 희미한 가로등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이미지화 되어 있다. 어떤 관념에도 쏠리지 않은 중립적 태도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존재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서 사물시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런 기법은「돌지 않는 물레」에서 ‘멈추었던 물레가 서서히 돌아가고 /내가 허공을 안는다.’라는 주체와 객체의 융합을 통한 정서의 율동을 보여준다. 그 율동 속에는 무의식 속 주체의 욕망이 들어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접근이 단편적이고 소극적인 것 같다. 이런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극복할 때 규모가 크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끝까지 경합하다 선외選外로 밀려난 김귀란, 김경옥, 현자의 도전적인 분발을 기대한다. 김귀란의「투명인간」의 발상의 신선함과 명료한 언어, 김경옥의「다시 청사포」의 서정성과 세련된 언어 감각, 현자의「어느 봄날의 기억」의 고향풍속 사생 등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서 재도전의 모습을 꼭 보고 싶다. 이번 수상자들이 ‘재도전의 결실’을 얻었다는 점에서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   (심사위원: 문덕수· 신규호· 심상운)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 글쓴이 : 박정원 | 원글보기
한 수인이 그의 감방의 벽에 풍경을 하나 그려 놓았다. 그 그림에서는 조그만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간수들이 그를 찾으러 오면, 그는 그들에게 내가 내 그림에 있는 저 조그만 기차 안에 들어가 뭘 좀 검사하고 나올 수 있도록 잠시 동안 기다려 달라고 상냥하게 요구한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아주 조그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 조그만 기차에 올랐다. 그러자 기차는 굴러가기 시작했고, 그 조그만 터널의 깜깜한 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동안 터널의 그 동그란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약간의 솜 같은 연기가 보였다. 그러다가 그 연기는 흩어졌고, 그리고 연기와 더불어 그림마저, 그림과 더불어 나 자신까지 흩어져 버렸다……. 얼마나 여러 번 그 시인-화가는 그의 감방 속에서 그 감방의 벽을 터널로 뚫어 관통해 나가지 않았으라! 얼마나 여러 번 그는 그의 꿈을 그리며 벽의 갈라진 틈으로 빠져나가지 않았으라! 감옥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좋은 것이다. 필요하다면 불합리성이, 그 자체만으로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 공간의 시학 274
97    말라르메 댓글:  조회:1004  추천:0  2019-03-13
그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을 일종의 시각적 휴지로 이용하여 말과 이미지의 리듬감 있는 운동감을 창출했다. 마치 음악에서 음표들이 리듬감 있는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또한 그는 시란 모름지기 뭔가를 환기하고 충동질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주 인용되는 구절 '사물을 그리지 말고 그것이 빚어내는 효과를 그려라.'에는 그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주제-대상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전의 중심적 지위를 잃었다. 브라크가 대상 주변의 공간을 대상과 동등한 실질을 가진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이 회화에서 지니던 권위를 무너뜨렸듯이, 말라르메는 대상을 시에서 떼어내고 대상의 그림자와 효과들을 재료로 하여 언어 구성물을 말들어냄으로써 대상이 문학에서 보유해온 권위를 감쇄시켰다. 1895년, 한 강의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새로운 시에서는 정확한 묘사가 필수적인 게 아니고 그보다 환기와 암시, 시사를 사용한다. '갑작스런 도약과 당당한 주저'야말로 대상을 암시함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심상과 연상을 가지고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한다. 는 형이상학적 전제에 안주해온 낡은 미학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은 제프리 스콧이 낡은 건축 미학에 대해 퍼부은 공격에 상응하는 문학적 사건이다. 제프리 스콧은 낡은 건축 미학이 '우리의 감각기관과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공간의 창출이라는 건축 본연의 임무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공격하였다.) 말라르메는 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시인들이 그동안 빠뜨려온 지점이라고 주장했다.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스티븐 컨, 425-426
96    앙드레 브로통 - 댓글:  조회:980  추천:0  2019-03-13
앙드레 브로통 - 초현실주의 제 1선언   내 사유라는 의식의 리듬이 우위에 놓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잠들고 싶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는 잠이 들기 직전에 어떤 이상스럽기 짝이 없는 문장 하나가 내 귓가로 들려옴을 느꼈다. 단어 하나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또렷하면서도, 온갖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져 멍멍해진 소음으로 들려온 이 문장은, 그 당시 내가 연루되어 있던 갖가지 사건과는 무관하게 내게 들려온 것으로, 내게는 워낙 완강하게 보여, 감히 말을 하지면, 그 문장은 유리창에 와 부딪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금새 그 뜻을 파악했으므로, 그 목소리의 특성이 나는 놀라고 말았다. 불행히도 나는 지금까지 그 문장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대충 이런 것이었다. 창문으로 두 동강이 난 남자가 하나 있다. 하지만 그때 그 문장에 전혀 애매한 점이 없어 보였던 것은, 이 문장과 함께 몸의 축선과 수직으로 놓여져 있는 창문에 의해 몸의 중간 부분이 두 동간이 난 남자 하나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 앞에 희미하게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화가였다면 이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나은 표현이 될 것이다.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 - 꿈, 바슐라르의 말을 빌리자면 몽상, 몽상 속에 떠오른 장면(시각이 우세)을 일상적 언어 의미의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기법. 하지만 색과 선을 사용하는 화가이든,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이든 상징계 안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두 가지 현실의 상호관계가 멀면서도 적절할수록, 이미지는 더욱더 강렬한 것이 될 것이고, 보다 더 강력한 감동력과 시적인 현실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결합을 이미지라고 보았다. 비유적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상호유사성에 의존하지 말아얗 한다고 했다. - 이를 종합하면, 그에게 시란 멀리 있는 두 사물 간의 밝혀지지 않는 유사성(관련성)를 찾아내는 것이리라.   그는 시인을 기묘한 유사성을 찾아내는 감시병이라고 했다.   언어에 의해 분별되는 사물이나 관념들이 사실은 한 덩어리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표현 가능한 것과 표현 불가능한 것, 숭고함과 저속함 등 상호 대립의 인식을 멈추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며 그때서야 비로소 주관과 객관, 꿈과 현실의 이원성이 제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브르통은 상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대립된 요소로 보지 않았고,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이성적 세계와 결합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현실주의가 지향하는 '절대적 실재'이다.   '시의 이해', 민음사 / 현대시 창작시론, 시인동네 참고
95    평론: 에즈라 파운드 -시문학과 미술의 만남- 댓글:  조회:1076  추천:0  2019-03-13
월간 한비문학 세계명시감상 6 에즈라 파운드 -시문학과 미술의 만남- 두메솔 이재관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27세에 소용돌이라는 미술 유파를 태동시켰고 유럽의 화가, 조각가,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다. 거칠고 난해한 그의 시를 해석하기 위해 사람들은 흔히 모더니즘의 조류를 대입하거나 그의 개인적 특징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보다 잘 해석하기 위해 미술사를 넘겨볼 필요가 있다. 에즈라 파운드 자신의 평론 또는 그에 관한 전문적 논문들이 매우 다양하고 많지만 미술사와 연관된 부분에 초점을 두어보는 이 글은 나름대로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1. 미술과 문학의 만남 아카데미즘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만국박람회나 살롱의 출품작을 심사했던 일종의 국립단체인 아카데미 데 보자르 Academie des Beaux-arts의 전통을 말한다. 이 단체의 회원 화가들은 부자들의 취향에 영합했으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추한 것을 찾아 나설 이유가 없다. 시대와 무관하게 오직 한 가지 회화가 있을 뿐이다."라고 자신들을 변명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주로 역사, 신화, 종교, 귀족, 신화의 영웅을 모델로 삼았으나, 개혁적인 화가들은 평민, 상인, 하녀 등 보통사람을 그림의 모델로 등장시켰다. 현대성 및 사실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다. 시대와 함께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로 들어서는 문턱은 높았다. 충동, 본능 등 정신분석학적 개념들과의 갈등이 불거져 미술의 전통적 법칙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화가들은 기호와 시어詩語를 빌려 본능적 인간을 표현하려 하거나 추상미술 쪽으로 진출했다. 폴 세잔은 회화를 언어나 수학 같은 것, 새 시각을 위한 실험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윤곽선, 명암, 원근법을 무시했으며 뒤이어 나비Nabis파, 야수파, 다리파 등 '색채에 의한 혁명'의 유파들이 거의 동시에 등장한다.   나비파의 피에르 보나르는 형상의 소실점을 과감히 제거하고 빛은 차가운 색으로, 그늘은 따듯한 색으로, 채색방법을 대담하게 전도시켰으며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다리파(또는 표현주의)는 “인간은 초인과 짐승 사이의 다리”라는 니체의 말에 근거하여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 양극화, 경제적 고통, 사회주의 등 혼란기의 독일에서 부르주아적 가치를 혐오하는 화가들이 공동화실을 설치하고 대중에게 다가선 것인데 다리파는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을 무시하고 격렬한 색을 사용하지만, 현실 참여적이고 심리적 과장을 한다는 점에서 야수파와 달랐다. 모딜리아니, 샤갈 등 파리에 모여든 화가들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면서 파리파를 형성했고 지중해 연안에서는 우체국 직원, 농사꾼, 인쇄공, 가정부, 세관원 등 평범하지만 재능 있는 화가들이 소박파의 기치를 걸었다. 소박파는 구상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대담한 색채혁명을 시도했으며 소박하지만 꼼꼼하고 세밀했다.   개혁파를 대별하면 ‘색채에 의한 혁명’과 ‘형태에 의한 혁명’,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를 통칭하여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부른다. 아방가르드는 군대 용어였으나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계급투쟁의 선봉을 가리켰고 기존 예술을 뒤엎는 혁명적 예술운동을 또한 아방가르드라 한다. 그 계보는 입체파, 소용돌이파, 미래파,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으로 이어졌다.   소용돌이파Vorticists는 미술의 유파지만 산업사회 및 문학적 배경이 강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주의, 프로이드 심리학, 과학혁명, 전쟁 등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다. 1910년대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는 연간 수십만 대라는 경이적인 대량생산 기록을 수립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신기계문명은 기대와 불안을 함께 안겨주었다. 소용돌이파의 잡지 창간호(1914-15)에 게재된 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소용돌이vortex는 최대의 에너지, 최대효율을 내는 지점이다. 최대효율이란 기계공학의 최대효율과 같은 뜻이다. 인간은 방향성을 갖는 지각perception의 운동체인데, 인간은 환경의 장난감일 수도 있고 환경에 대항하는 유체 역학적 통제권자가 될 수도 있다. 소용돌이파는 각자의 물감을 신뢰한다. 개념과 정서는 스스로 구현되는 것이지만 활기찬 양심과 주된 방식에 따른다. 미술은 100편의 시요, 음악은 100편의 그림, 가장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가능한 문장이다. 경험을 소용돌이에 퍼붓는다. 모든 과거, 전환점, 경쟁, 달리던 추억, 평온을 원하는 본능, 에너지가 담기지 않은 미래, 모두를. 인간 소용돌이 속에 벌어지는 미래의 설계. 과거를 미래에 쏟아 붓고 소용돌이에서 잉태시킨다. 바로 지금"   에즈라 파운드는 이 창간호에서 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로 인사말을 대신하고 있다. "타임지의 점잖음을 비웃어주자, 하하/입마개 쓴 평론가들 너무 많다/벌레들이 몸에 우글거릴 때 깨달을까/..."   소용돌이 운동은 3년간(1912~1915) 전개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으나 전후 "X 그룹"이란 명칭으로 계승되었다. 초기 가담자는 화가이며 소설가인 윈덤 루이스, 화가 윌리엄 로버츠, 에드워드 웨즈워드, 프레데릭 이첼스, 조각가 고디에-브르체스 등이다. 로버츠는 소용돌이파 10인의 에펠탑 회동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루이스 Wyndham Lewis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소용돌이 운동은 흔히 영국의 예술혁신운동, 영국의 아방가르드 또는 영국판 큐비즘이라고도 한다.   의식세계는 불완전하다. 환경, 감정, 사회적 요소가 끊임없이 감각과 판단을 왜곡시킨다. 작가가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독자(또는 관람자)들이 동일한 의미를 느끼도록 하려는 노력 자체가 종종 헛수고로 끝난다. 따라서 화가와 시인들은 추상과 무의식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현실과 의미적 일대일 대응에 지쳐버린 작가들로서는 비로소 진정한 휴식과 자유의 가능성을 전망하게 되었다. 추상의 세계에서는 의미를 규정하는 부담이 줄어들고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아내는 신선함이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는 청색(힘) 또는 노란색(감미로움)의 말을 좋아했고 자신들을 청기사라고 호칭하였다. 피터 몬드리안 등은 수학기호와 기하학적 도형을 통해 추상의 세계를 구축했다. 1910~1920년에 나타난 다다이즘, 메르츠, 초현실주의는 모두 문학에 기원을 둔 것들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운동에 많은 시인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본능, 리비도, 충동에 종속된 상상의 세계였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말, 글 또는 다른 모든 방식을 통해 사고의 실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순수한 정신적 자동성"이라고 초현실주의를 정의한다. 조르지오 키리코는 모든 사물의 외양을 "무의식의 거울"이라고 보았다. 의식세계 일변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현실감각을 파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다다이즘 예술가들은 복고주의를 규탄하고 틀에 박힌 언어를 흥분된 의성어로 변형시켰다. 갖가지 조각과 고물을 더덕더덕 붙이는 꼴라주, 아상블라주, 레디메이드가 시도되고, 그라타주(긁어내기), 환각제, 약물 등이 사용되었으며 비참한 사회의 고발에 몰두하였다.   2. 에즈라 파운드의 시 감상 앞에서 고찰한 미술사, 그리고 화가와 시인들의 정신적 교류와 혼신의 몸부림을 생각하면서 에즈라 파운드의 시를 읽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소용돌이 운동기에 쓴 시들은 그의 시집 (1917)에 실려 있다. 초기의 비판적인 시를 중심으로 가급적 짧은 작품 5편을 번역하여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서는 미국의 대표적 시인인 휘트먼에 대해 빈정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빈정거림이 아니다. 휘트먼으로 대표되는 시문학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지 고민하는 마음과 각오가 서려 있다. 은 문학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전체에 대해 도전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다. 즉, 이 시에서의 비판 대상은 자기 노래(시)라고 볼 수 있다. 는 1920년에 출간된 시집에서 뽑은 장시의 일부분이다.     계약  -A Pact   당신과 계약 한 건 합시다, 월트 휘트먼 씨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혐오했답니다. 당신은 고집쟁이 부친 슬하의 다 큰 아이 같았는데 나는 친구를 사귈 만큼 나이를 먹었어요. 나무를 자른 건 당신이었고 이제 나는 목각을 제작해야 하니 우린 한 뿌리 한 수액을 공유하는 셈입니다. 둘이 거래를 해봅시다. -----------     연극처럼  -Histrion   아직 아무도 이런 걸 감히 쓴 적이 없었지 아직 내가 알기로는, 우리 곁을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어찌 그리 위대한 척 했는지 우리 모두 홀딱 빠졌지 반성시켜야 할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그러니 나 역시 한 구석에선 단테였고 또 다른 구석에선 발라드의 왕이자 도둑인 프랑소아 빌론이었지 이런 거룩한 자들에 대해 내 이름 때문에 모독적 언행은 못했다네 하지만 순간에 지나가 불길은 꺼졌지   우리 한 복판에서 반투명구체, 용해시킨 황금인 "나"를 자라게 하면서 요상한 프로젝트를 집어넣어 스스로 그리스도 또는 존 또는 위대한 피렌체 가문인 척 했지 그 후 즉시 떠밀려 당대에 해야 할 일을 그만 두었네 정해진 형식이 투명하지 못한 것이었거든 뭐 그렇고 그래서 '영혼의 대가'들이 영원한 거지 -----------     추가적인 주의사항  -Further Instructions   내 노래야 정신 좀 차려 우리의 더 근본적인 열정을 표현해보자 안정된 직장에서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자를 부러워할 건 없다 내 노래야 너는 게을러서 끝이 안 좋을까봐 그게 두렵다 너는 길거리에 나가 모퉁이와 버스정류장을 서성대고 있다. 아무 일도 안 하려는 것인가   우리 태생이 고귀한 신분이란 것조차 노래에 담질 않는구나 그러면 끝은 안 좋을 거야   나는 어떠냐구? 반쯤 깨져 못 쓰게 됐어 너를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고 네게 입이 닳게 말했지 건방진 작은 놈! 뻔뻔스럽기는! 옷이나 걸쳐라!   그러나 너, 많은 중 제일 새로운 노래, 너는 아직 젊다 나쁜 짓을 많이 할 새가 없었지 나는 네게 용이 수놓아진 중국제 초록 코트를 입게 했지 산타마리아노벨라의 아기 그리스도 상에서 따온 진홍 실크바지를 입혔지 우리가 맛이 갔다거나 천한 신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안 되니까 -----------     새벽의 노래 (알바) -Alba   새벽녘 내 곁에 누워 있는 그녀는 계곡의 백합 젖은 잎처럼 차고 창백했다. -----------     휴 셀윈 마버리 I-2  -Hugh Selwyn Mauberly, Part I-2   시대는 다른 이미지를 요구했다 가속적으로 찌푸려지는 얼굴 같은 것 현대적 무대에 필요하다고들 하는 것 하여튼 희랍식 기품과는 다른 어떤 것 아니, 내면의 애매한 몽상은 분명 아니고 고전 미사여구들 보다는 나은 허위! 시대적 요구란 시간 손실 없이 회반죽 본을 뜨는 일 산문 영화, 아니, 확실히 그건 설화석고 또는 운문의 조각 작품 -----------   3. 아름다운 고발 현대 예술의 주류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다. 사실주의는 폭로 고발하는 것이고 표현주의는 자기 주관을 뿜어내는 과시(또는 자기고발)이다. 그런데 사실주의적 고발이든 표현주의적 자기과시든 자칫 지저분한 것이 되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궁극적 가치관이 요구된다. 작가들은 처절하게 고발하거나 자기고발을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실험에 도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고결한 미에 다가서고자 몸부림친다. 자연, 동식물, 거짓과 폭력의 현장에서 고결한 미를 찾고 작품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말이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무표정하고 허약한 자신, 오염된 자신을 먼저 꾸짖는다.   화가는 빈 공간을 의미 있게 채우기 위해 추상, 무의식, 초현실성까지 동원한다. 캔버스는 의미들이 와서 형성되거나 부서지는 장소가 된다. 거리 공간은 의미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화가는 점, 선, 색, 도형, 빛들을 의미 있는 조형미로 바꾼다.   시인은 일상 언어를 쪼개고 갈고 붙여서 의미 있는 시어로 바꾼다. 그것은 기술적 실험일 수도 있다. 많은 시인들이 언어의 유희에 빠진다. 반대로 현장고발이나 주관의 표현에만 급급한 경향도 있다. 화가들이 필사적으로 공간과 싸우는 것처럼 시인들은 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처절하게 시어를 만져야 한다.   고발하거나 고발당하는 치열함, 실험에 대한 열정, 고결한 미의 추구는 미술과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었다. 시는 예술과 문학의 꽃이고 그런 만큼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단지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이라면, 19세기 미술사의 아카데미즘과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혐오스러운 단어를 써야 진보적이라 할 것인가? 에즈라 파운드의 거친 표현의 시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의 4행 시 을 음미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보석계단의 불평 The Jewel Stairs' Grievance   보석 박힌 계단이 이슬에 많이 젖었다, 너무 늦어 나의 외올베 양말이 젖었지 뭐요 그래서 난 크리스털 커튼을 내리고 청명한 가을을 통해 달을 바라봤지요 -----------   원작자가 이백(李白, Rihaku)임을 밝히면서 파운드는 자기가 개작한 시와 그 해설을 발표했다. 고대 라틴 시, 중국 시 등을 왕성한 열정으로 번역한 파운드는 간간히 이와 같은 개작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개작은 파운드의 경우 그의 실험정신의 일단이었다. 사실 시의 번역은 직역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시에 대한 파운드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보석이 박힌 계단이라면 아마 왕궁일 것이다. 그 곳에 불평이 있다는 것인데 외올베(가제, 紗) 스타킹은 귀부인이 신는 것이니 불평하는 사람은 귀부인일 것이다. 귀부인은 청소가 늦은 것을 탓하니 너무 일찍 현장에 온 것이다. 날씨는 쾌청하니 날씨 탓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귀부인은 아무도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는 멋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라는 이유로 이백의 이 시가 좋다고 말한다. 평생 비판적인 시를 썼던 그가. 그 많은 독설과 빈정거림, 비아냥대는 시를 썼던 사람이 한 해설이니 또 한 방 맞은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본다. 만일 그가 누구를 지목해서 괴롭히려고 그런 시를 쓴 것이 아니었다면, 진정한 사랑이 복받쳐 터져 나온 비판이나 고발이었다면 말이 되지 않을까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94    폴 발레리 - 노고 댓글:  조회:1096  추천:0  2019-03-12
폴 발레리 - 노고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세트에서 태어나 몽펠리에 대학을 졸업했다. 홀로 습작을 하던 중 1890년 몽펠리에 대학 개교 기념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피에르 루이스를 통해 지드를 알게 되고 말라르메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뒤에 파리로 이주하여 「테스트 선생과의 저녁」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방법론 입문」 등의 글을 통해 깊이 있는 사고와 필력을 과시했으나, 절필하고 무려 20여 년간 문학 활동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뒤에 프랑스 시에서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장시 「젊은 파르카 여신」을 발표하고, 대표작 「해변의 묘지」와 「나르시스 단장」 등을 담은 시집 『매혹』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밖에도 유럽 정신의 회복을 주장한 일련의 문명 비평과 철학적 성찰, 시학의 새로운 개념 정립을 시도한 시론, 문학비평 등도 발표했는데, 이런 글들은 『바리에테』 『요즘의 세상을 바라봄』 등에 실렸다. 또한 플라톤의 대화 형식을 부활시킨 『외팔리노스 또는 건축가』 『나무에 대한 대화』 『고정관념』 등도 발표했다. 발레리의 전체적인 사상은 말년의 미완성작 『나의 파우스트』와 평생에 걸친 성찰의 결실인 작업 공책 모음 『카이에』 등에 담겨 있다. 1945년 세상을 떠난 발레리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세트 해변의 묘지에 묻혔고, 드골 정부는 국장으로 그를 예우했다.           해변의 묘지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은 반짝이고 은 지식이로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간소한 사원, 정적의 더미, 눈에 보이는 저장고, 솟구쳐오르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하많은 잠을 네 속에 간직한 ,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 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과일이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마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至日)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항상 미래에 오는 공허함 영혼 속에 울리는 가혹하고 음울하며 반향도 드높은 저수조를!   그대는 아는가, 녹음의 가짜 포로여, 이 여윈 철책을 먹어드는 만(灣)이여, 내 감겨진 눈 위에 반짝이는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나태한 종말로 나를 끌어넣으며 무슨 이마가 이 백골의 땅에 육체를 끌어당기는가를? 여기서 하나의 번득임이 나의 부재자들을 생각한다.   닫히고, 신성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찬, 빛에 바쳐진 대지의 단편, 불꽃들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 이토록 많은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케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삶은 부재에 취해있어 가이없고, 고초는 감미로우며, 정신은 맑도다.     감춰진 사자(死者)들은 바야흐로 이 대지 속에 있고, 대지는 사자들을 덥혀주며 그들의 신비를 말리운다. 저 하늘 높은 곳의 정오, 적연부동의 정오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에 합치한다……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어디있는가 사자들의 그 친밀한 언어들은, 고유한 기술은, 특이한 혼은? 눈물이 솟아나던 곳에서 애벌레가 기어간다.       간지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쁜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또한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바라는가 육체의 눈에 파도와 황금이 만들어내는, 이 거짓의 색체도 없을 덧없는 꿈을? 그대 노래하려나 그대 한줄기 연기로 화할 때에도? 가려므나! 일체는 사라진다! 내 존재는 구멍나고, 성스런 초조도 역시 사라진다!     깡마르고 금빛 도금한 검푸른 불멸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만드는, 끔찍하게 월계관 쓴 위안부여, 아름다운 거짓말 겸 경건한 책략이여! 뉘라서 모르리, 어느 누가 부인하지 않으리, 이 텅빈 두개골과 이 영원한 홍소(哄笑)를!   땅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민 없는 머리들이여, 가래삽으로 퍼올린 하많은 흙의 무게 아래 흙이 되어 우리네 발걸음을 혼동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지 않도다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도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킬레스여!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파도 속에 달려가 싱그럽게 용솟음치세!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大海)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석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폴 발레리-노고 시는 영감에 온다. 영감은 우발적 진동, 전기적 에너지이다. 영감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시인이 되지 않는 이유는 시인은 제작에서 노고가 있기 때문이다. 영감은 시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꿈의 우주, 꿈의 상태, 발생과 유사하다. 폴 발레리는 영감을 꿈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꿈은 곧 상실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노고에 의한 제작이다. 영감은 독자에 의해 발견되며 작품에 부여하는 것이다. 독자가 작품을 읽고 경탄하게 되는데, 이때 경탄은 기존의 이성이 끼치는 것이다. 발레리는 영감이 독자에 의해 작품에 의미 지어지는 것이지, 시인의 방법론은 아니라고 한다. 영감에 의해 시를 쓰기보다 노고에 의해 써야한다고 한다. 폴 발레리는 법대출신이다. 법대 출신들은 지성의 메카니즘적 사고를 한다. 시와 소설(산문)의 차이는 라캉이 샤플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라르브가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무용이다 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보행은 목적이 있고, 무용은 보행과 같이 신체기관을 움직이는 동시에 신경들도 사용한다. 그러므로 시는 산문과 동일한 요소, 동일한 메카니즘에 적용된 운동이나 규칙, 관습의 차이로 구별된다. 시는 산문시라도 리듬이 있다면 시다. 산문시를 읽을 때, 리듬을 찾지만 소설은 리듬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문시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상대를 이해시키고 즉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고 서술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산문에서 형식은 보존되지도 않고 이해작용이 끝난 후까지도 존속되지 않는다. 사라진다. 그러나 시는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폴 발레리는 시와 산문의 구분을 시의 추동운동에 빗대어 표현한다. 대칭적인 두 점 사이를 왕복하는 추처럼 시란 외형(소리, 음성, 리듬)과 내형(의미, 관념, 추상, 사고) 즉 형식과 의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형태와 내용사이, 소리와 의미 사이, 한편의 시와 시적 상태 사이에 왕복운동이 나타난다. 산문은 독자를 환각에 빠져 자신의 이미지에 몰두하게 하지만 시는 가짜 현실을 강요하지 않으며 존재전체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어떤 시인도 관념을 쫓으려했다. 제작에 있어서도 철학자의 사유와 관념에서의 철학적 사유는 다르다. 철학과 시속의 철학은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나 루크네티우스는 철학을 시에 담으려고 시도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호평적이지 않다. 그런 면에서 시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발레리는 고전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어려운 이유는 의미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리듬, 소리, 음성, 목소리가 어렵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폴 발레리는 상징주의 계열 시인이다. 상징주의 시는 원관념이 빠진 보조관념의 시다. 보조관념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상징주의 시는 10명 정도. 나머지는 초현실주의, 다다, 미래파. 그 이후에 현대 시인들은 본질을 제거하고 의미를 담지 않는다. 초현실, 미래파는 의미를 포기한 예라 할 수 있다.)말라르메 계보를 이어간다. 말의 건축성을 가지고 의미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건축성을 가지고 세계의 원리를 보여주려 한다. 보통 시를 짓는 것은 영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인간적 성취의 느낌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시들은 노고로 얻어진 시들이다. 여기에서 영감은 시인을 위한 영감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영감이다. 그래서 시인은 독자가 시를 읽고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노고의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93    스티븐슨 상상력 댓글:  조회:1114  추천:0  2019-03-12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년~1955년)는 미국의 시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으로, 하버드, 뉴욕 양 대학을 졸업, 변호사가 되고, 그 후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의 재해보험회사에 입사, 부사장까지 되었다. 비즈니스와 시를 양립시킨 특별난 시인이다. 그는 자기 비평에 엄했으며, 44세 때 처음 간행한 시집 (1923)에 의해서 그의 천재성을 비평가에게 인정받았다. 그 밖에 (1935), (1937) 등을 출판, 영국에서 간행된 (1954)도 있으며, 다시 75세 탄생을 기념하여 (1954)이 출판된 후 곧 죽었는데,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언어를 단지 의미 전달의 도구로 삼지 않고 언어 그 자체의 모양이나 음조(音調)를 효과적으로 써서 이 세계의 음영(陰影)을 나타내는 그의 시는 세련의 극에 달한 고도(高度)의 것으로 1950년에 볼링겐상(賞), 1955년에 퓰리처상을 획득했다.       The Snow Man   우리는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만 서리를 볼 수 있고 눈으로 딱딱하게 껍질이 입혀진 소나무의 가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오랫동안 추위를 경험하고 나서야 얼음으로 덥수룩하게 털이 돋은 노간주 나무를 볼 수 있고 정월의 햇빛을 받고 멀리서 반짝이는   꺼칠한 가문비 나무를 그래야만 바람이 내는 소리에서 어떤 곤궁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몇 개의 가랑잎이 내는 소리는 대지가 내는 소리, 대지는 허허로운 곳에서 불어오는 꼭같은 바람으로 가득차 있다.   왜냐하면 눈 속에서 경청하고 있는 청자(聽者)는 자신도 없음이면서 거기에 있지 않는 없음과 있는 없음을 듣기 때문이다.     The Course of a Particular   오늘 잎새들이 운다. 바람에 나부끼는 가지에 매달려서 그러나 겨울의 텅 빔은 덜 허허롭다. 아직도 겨울은 차디찬 그늘과 모양을 갖춘 눈으로 가득하다.   잎새들이 잉잉 운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끊이지 않는 울음이다. 어느 누군가가 들으라는 울음이다. . . . 잎새들이 운다. 그것은 신의 뜻을 알리는 울음이 아니다. 그것은 숨을 거둔 영웅들에게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아니며 인간의 울음소리도 아니다. 이는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는 잎새들의 울부짖음이다.   드디어 한 사람의 듣는 귀는 찾았으나... 울부짖음은 아무하고도 상관이 없다.           스티븐슨 -상상력   자본주의에 적응을 잘 한 시인이다. 보험회사 부사장까지 맡았다. 그 만큼 정신세계는 파운드나 엘리어트와 다르다. 시가 난해하고 어렵다. 스티븐슨은 현실을 배제한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상상력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상상력이 현실로 표현된다. 현실은 상상력이 표현된 것이다. 질서는 혼란에서 정리인데, 스티븐슨은 상상력에서 인식되는 것이 질서는 곧 인식이다. 아이가 태양을 그릴 때, 태양의 모양은 다양하다. 본 것이 질서가 된다. 상상력에서 잠정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상력은 형이상학적이다. 실재에 이르는 실마리이다. 실마리는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티븐슨의 상상력은 카시러, 논리실증주의, 낭만주의 요소, 프로이드와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다. 카시러는 낭만주의에서 시적 상상력은 본원적 형이상학적이다.고 한다. 오직 낭만주의 시가 예술이고 철학이며 우주라 한다. 낭만주의 사상에서 시적 상상력은 실재에 이르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그래서 참다운 시는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우주 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논리실증주의는 실제로 있는 것만 믿는다. 형이상학을 믿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없고, 시인이 떠드는 이상한 소리이다.고 한다. (신을 형이상학적 용어라 한다면 신이 실재에 속한다면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신이 없는데,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미학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낭만주의 요소에서 상상력(낭만주의)은 마음의 자유롭고(실재) 감정적이고(감상) 추상이다(감정 푸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억압이고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프로이드가 상상력은 없다고 한다. 무의식은 상상력을 억압한다고 한다. 바슐라르는 프로이드 이론을 꽃을 두엄으로 만든다고 표현한다. 상상의 의도적 허구들이 과학의 선구자가 된 예가 많다. 상상력은 형이상학이다. 삶에서 상상력은 사회적 제도, 관습, 신분제, 장례, 결혼, 의식, 죽음 보고 들은 것 모두를 의미한다. 그 모든 것이 삶에서의 상상력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인간이 유토피아에 접근하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사람의 이성이나 과학 또는 철학이 사회를 지배해도 다수의 대중은 그들의 삶에서 상상력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세상은 상상력이 지배한다. 세상이 곧 상상력이다.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예술에서의 상상력이다. 현실속의 비현실, 비정상속에 정상, 혼란 속의 질서이다. 현실속의 비현실이라는 것은 잠정적인 질서가 부여된 현실 속에 또는 비현실 들어오는 게 예술이다. 그것은 영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영상 즉, 이미지는 관념이 복사된 것이다. 영상은 현실속의 비현실을 흔든다. 잠정적 질서를 부여하는 현실을 흔든다. 이것이 상상력이다. 비정상 속에 정상은 랭보나 카프카가 비정상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정상이다. 이것은 상상력이 이룬 결과이다. 이성이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정상, 질서를 먼저 본다. 이성은 상상력의 방법화 작업을 맡은 것에 불과하다. 이성은 규범, 정상이다. 그래서 상상력은 이성을 앞선다. 이성은 상상력에 의해 정의된다. 그 예로, 의상은 사회 형식으로서의 상상적 삶의 사례이다. 비범상한 것을 범상화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 예이다. 또는 정원에 꽃을 들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고 한다. 이때 정원, 꽃은 질서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정원희의 꽃은 정원희라는 공공의 질서에 꽃이라는 개인의 질서가 드러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마음의 힘으로서의 상상력의 차이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실제에 이르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참고할 만한 자료(싸이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hm29&logNo=110043942953&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http://builder.hufs.ac.kr/user/ibas/k2board/F374B91EA10B4F3DBD431B05BA030C52_002.pdf  
92    T.S 엘리어트 댓글:  조회:1162  추천:0  2019-03-12
T.S.엘리어트(Thomas Stearns Eliot)          시인·극작가·문학비평가  생몰 1888년 9월 26일 ~ 1965년 1월 4일  출생지 미국 / 영국으로 귀화 학력 하버드 대학교 철학, 불문학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 대표적인 시 (황무지)는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의  세계와 작가 자신의 황폐한 사생활을 형상화해 표현하였다.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웨어 엘리엇(1843–1919)은 성공한 사업가로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벽돌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의 어머니 샬럿 챔프 스턴즈(Charlotte Champe Stearns, 1843–1929)는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엘리어트는 살아남은 형제자매 여섯 명 중 막내였으며,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 모두 44세였다. 그의 네 명의 누나는 11세에서 19세까지였으며, 친구와 가족들에게는 외할아버지 토마스 스턴즈의 이름을 따서 톰으로 불렸다. 1898년에서 1905년까지 《스미스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다. 그는 14세 때 이미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오마르 하이얌의 작품을 번역한 루바이야트의 영향이 컸다. 그의 최초의 시는 15세 때 수업시간에 연습으로 쓴 것이며, 이것은 후에 하버드 대학교의 학생 잡지인 《The Harvard Advocate》에 실렸다. 학교 졸업 후에 그는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밀턴 아카데미》로 입학을 한다. 그곳에서 그는 이후 황무지(The Waste Land)를 출판하게 될 〈스콧필드 세이어〉(Scofield Thayer)를 만난다. 1906년에서 1909년까지 그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하여 철학을 공부했고, 이곳에서 3년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비평가인 〈프랭크 커모드〉는 재학 중 〈아써 시몬스〉(Arthur Symons)의 《시에서 상징주의 운동》(The Symbolist Movement in Poetry , 1899)을 발견한 1908년이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섰다. 이 책은 그에게 쥘르 라포르그(Jules Laforgue), 아르튀르 랭보, 폴 발레리를 그에게 소개를 했으며, 엘리어트는 발레리가 없었다면 트리스탄 꼬르비에(Tristan Corbière)를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졸업 후 유럽과 미국을 왕복하며 연구 활동을 한다. 그 다음 파리 대학, 마르부르크 대학, 옥스포드 대학을 간다. 1917년 시집 , 1922년 라는 시를 발표하여 젊은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초기의 시는 영국 형이상학 시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 문명의 퇴폐성을 그리고 있다. 1927년 영국에 귀화한 후에 유니테리언에서 성공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스스로 문학은 고전주의, 정치는 왕당파, 종교는 앵글로 가톨릭(성공회의 가톨릭 전통을 중시하는 신학조류→고교회파)노선의 성공회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황무지(荒蕪地)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주) 로마신화에서 무녀 Sivil은 앞날을 점치는 힘을 지닌 여자다. 특히 로마의 식민 도시였던 이탈리아의 쿠마의 무녀는 유명했다. 그녀는 아폴로 신에게서 손안에 든 먼지 만큼 (황무지 30행 참조) 많은 햇수의 장수를 허용받았으나 그만큼 젊음도 달라는 청을 잊고 안했기 때문에 늙어 메말라들어 조롱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죽음보다도 못한 죽은 상태의 황무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나은 예술가 (il maglor fabbro)"는 단테가 신곡 26장에서  12세기 이탈리아 시인  Arnaut Daniel을 찬양한 문구이다. 엘리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혼란한 상태에 있던 의 초고를 에즈라 파운드가 절반의 길이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황무지(荒蕪地) / T.S.엘리어트    한 번은 쿠마에서 나도  한 무녀가 조롱 속에 달여있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여, 넌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물으니, 무녀는 "난 죽고 싶다"라고 대답했지요.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1. 죽은 이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대지에서 라일락꽃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뒤덮고, 매마른 뿌리로  희미한 생명을 길러주었다네.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하며, 슈타른베르게르시 호수를 넘어  소나기를 몰아왔지. 우리는 주랑에 머물다가  햇볕나자 호프가르텐으로 가서는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  나는 러시아여인이 아니고 리투아니아 출신 순수한 독일인이죠.  우리 어릴 적 내가 사촌인 공작 집에 머물렀을 때,  그는 날 썰매 태워주었지,  나는 놀랐지. 그는 말했지, 마리  마리 날 꼭 잡아. 그리고 우리는 내려갔지.  산에서는 자유를 느낄 수 있지요.  밤에는 대부분 책을 읽고 겨울이면 남쪽으로 가지요.  이렇게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대체 어떤 가지가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간의 아들이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추측하지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부서진 우상더미 뿐 그 곳에는 햇살 부서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가 위안도 주지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나지 않다.  다만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밑 그늘로 들어오라),  그러면 내 아침에 네 등 뒤로  다가오는 네 그림자와  저녁에 너를 맞으려 나온  그림자와 다른 무엇을 보여주리니.   내 네게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주리니.                바람은 선선히      고향으로 부는데      아이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가려 주나?  "일 년 전 그대가 처음으로 내게 히야신스를 주셨기에,  사람들은 날 히아신스 소녀라 부르죠."  하지만 우리 밤늦게 히아신스 정원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대 팔 한아름 히야신스를 안고 머리는 젖은 채,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으며  다만 빛의 핵심,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유명한 천리한 마담 소소스트리스는   심한 감기에 걸렸어도   그저 사악한 카드 한 벌만 가지고도  전 유럽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자로 소문이 났다,여기, 그녀가 말했다,  그대 카드가 있소, 익사한 페니키아 수부군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답니다, 보세요!)  벨라도나도 있군요, 암석의 귀부인이자  시시때때 변하는 여인이죠.  여기 삼지창을 지닌 사내와 바퀴,  외눈박이 상인도 있고, 이 카드,  텅 빈 이 카드는 상인이 등에 짊어진 것인데,  내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군요. 교수형 당한 남자를  못찾겠어요. 익사를 조심하세요.  빙빙 원을 돌며 걷는 사람들 무리가 그려진 카드가 보여요.  고마워요. 혹시 에퀴튼 부인을 보시거든  천궁도는 내가 직접 가져간다 전해주세요.  요즘은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은 시절이거든요.  비현실의 도시,   겨울 새벽 갈색의 안개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런던 브리지 위로 흘러간다,  죽음이 이리도 많은 사람을 파멸시켰는지 몰랐다.  이따금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기 발에 눈을 고정한 채  언덕 위로 흘러 킹 윌리엄가로 내려가더니  성 메이 울노스 교회가 죽은 소리로  아홉시의 마지막 타종을 하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아는 이를 만나 "스테쓴"하며 그를 불러 세웠다!  "자네 밀리에 해전 때 나와 함께 있었지!   "작년에 자네가 자네 정원에 묻은 시체는   "싹이 트기 시작했나? 올해는 꽃이 피겠는가?  "아니라면 갑작스런 서리가 그 토대를 어지럽혔는가?  "오, 인간의 친구인 개를 멀리하게,   "그렇지 않으면 그 놈의 발톱이 그 시체를 다시 파헤칠거야!  "자네! 위선의 설교자여! 나의 동포, 나의 형제여!"      참고) 마지막 부분은 보드레르의 서시 "독자에게"의  마지막 행을 엘리어트가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보들레르처럼 엘리어트도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어 적극적으로 시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는 시행이다.     2. 체스 게임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눈부신 왕좌처럼  대리석 위에 빛나고, 거울이  열매 달린 포도넝쿨이 새겨진 지주로 받쳐져 있고  그 넝쿨로부터  황금빛 큐피트가 힐끔 내다보았다  (다른 하나는 날개 뒤에 눈을 감추고)  거울은 일곱가지 촛대의 불꽃을 두겹으로 비추며  테이블 위에 빛을 반사했다   그녀의 보석들의 광채와 어울려.  비단 상자 속에서 화려하게 흘러넘치는  상아와 색유리로 된 호리병은  마개가 열린 채 그녀의 기묘한 온갖 향수를 담고 있고,  연고, 분, 혹은 액체향유가 어지러이 혼란시키며  감각을 향내 속에 마비시켰다. 창으로 신선히 불어오는  대기에 흔들리며 향기는 날아올라  늘어진 촛불의 연기의 살찌우며  그 연기를 우물반자 속으로 던져 넣어  소란으로 장식된 천장 무늬를 아른거리게 했다.   銅箔 뿌린  커다란 바다 나무는  색대리석 테두리를 한 채 초록 오렌지빛으로 불타오르고  그 슬픈 빛 속을 돌고래 조각상이 해엄치고 있었다.   고풍스런 벽난로 위에는   마치 삼림의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처럼  야만스런 왕에게 거칠게 능욕당한 나이팅게일의 변신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나이팅게일은  맑은 목소리로 황야를 가득 채우며  여전히 울고 있었다, 여전히 세상을 뒤쫓으며,  더러운 귀에 "짹짹"소리로 들렀다.  그 박에도 시간의 공초들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응시하는 형상들이  몸을 밖으로 내밀고 닫힌 방을 조용하게 했다.   계단에서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화로 불 아래서 빗질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뻗쳐올라  작열하여 말(speaking)이 되었다가 다시 끔찍하게도 침묵했다.   "오늘밤 내 신경이 이상해요. 예, 정말 이상해요, 함께 있어줘요."  "내게 말해요. 왜 그리 말을 하지 않는지. 말해 봐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요? 대체 무슨 생각을?"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생각해봐요."  체스 게임"나는 우리가 쥐의 골목에 있다고 생각해,  죽은 이들이 자신의 유골을 잃어버린."  "저 소리는 뭐지요?"       문 밑을 지나는 바람.    "지금 저 소리는 뭐지요?" 저 바람은 뭘 하는 건가요?"              아무 것도 하지않아 아무것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못 봐요?" "기억도 못해요?"  "아무것도?"    나는 기억해  저것들은 그의 눈이 변한 진주들이라는 것을.    "당신은 살았나요? 죽었나요? 당신 머리 속엔 아무것도 안 들었나요?"    하지만,  오 오 오 오 셰익스피어의 파편 같은 재즈 말고는 그것 참 우아하고 지적이야  "이젠 뭘 하죠? 이젠 뭘 해야하죠?"  "이렇게 이 상태로 달려 나가 거리를 뛰어나갈까요?  "머리를 늘어뜨린 채. 내일은 뭘 하죠?   "도대체 앞으로 뭘 하면 좋을까요?"    열 시에 더운 물.  비가 오면, 네 시에 세단 차  그리고 우리는 체스게임을 하리.  졸리는 눈을 억누르며 문의 노크를 기다리며.  릴의 남편이 제대했을 때, 나는 말했지  말들을 더듬지 않고 직접 릴에게 말했지,  서둘러 때가 되었어  알버트가 돌아오니 좀 깔끔하게 치장을 해 봐.  알버트가 이 해 넣으라고 당신에게 준 돈으로  뭘했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야. 알버트가 물을 때, 나 거기 있었지.  릴, 이 다 빼고 좋은 틀리를 해 넣어.  알버트가 말했어, 정말이지 난 널 볼 수가 없어.  그래 나도 그렇다고 했지. 가엾은 알버트를 생각해 봐.  4년이나 군에 있었다고. 재미보고 싶어 할거야.   당신이 즐겁게 안 해주면 다른 여자들이 그럴거야, 내가 말했지.   오, 그런 여자가 있을까, 릴이 말했지. 있을걸, 내가 말했지.  그럼 그 여인한테 인사나 해야겠군, 릴이 말하고는 나를 쏘아보았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그게 싫다면 결과는 당신이 견뎌야지, 나는 말했다.  당신이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여자들이 골라 잡을거야.  하지만 알버트가 도망간다면, 누가 말 안 해줘서 그런 것은 아닐거야.  그렇게 늙어 보이는 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나는 말했지.  (그녀는 겨우 서른 하나.)  어쩔 수 없지. 릴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  건 아이를 떼려고 먹은 피임약 때문이라고, 그녀가 말했지.  (이미 애가 다섯, 막내 조지를 낳을 땐 거의 죽을 뻔 했지)  약제사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그 뒤로 전과 같지 않았지.  당신 정말 바보로군, 내가 말했지  알버트가 당신을 원하면 어쩔 수 없잖아, 나는 말했지.  아이들을 원치 않으면 결혼은 뭣 땜에 한거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알버트가 돌아온 일요일, 그들은 따끈한 베이컨을 마련하고  -맛있고 뜨거운 요리를 먹자고 만찬에 날 초대했지  서둘러 때가 되었어  서둘러 때가 되었어  안녕 빌, 루, 메이, 안녕.  타 타 안녕, 안녕.  안녕히 부인들, 안녕히 사랑스런 부인들, 안녕히, 안녕히.      3.  불의 설교   강의 천막이 찢어졌다.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지며 가라앉는다.  바람은 소리 없이 갈색 땅을 가로지른다. 님프들이 떠나갔다  아름다운 템스야,고이 흐르라,내 노래 끝날 때가지   강물 위엔 빈 병도, 샌드위치 쌌던 종이도  명주 손수건도, 마분지 상자도, 담배 꽁초도  그 밖의 여름밤의 증거품도 없다. 님프들은 떠나갔다.  그리고 그네들의 친구들도, 빈둥거리던 중역 자제들도,  떠나갔다. 주소도 남기지 않고.  레먼  호숫가에 앉아 나는 울었노라.(바빌론을 생각하며 울었노라.성경구절)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 내 노래 끝날 때가지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내 크게도 길게도 말하지 않으리.  그러나 등 뒤에 일진 냉풍 속에서 나는 듣는다.  뼈들이 덜컹대는 소리와 입ㄹ이 찢어지도록 낄낄거리는 소리를.  어느 겨울 저녁 가스 공장 뒤를 돌아  음산한 운하에서 낚시질을 하며  형인 왕의 난파와 그에 앞서 죽은   부왕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쥐 한 마리가 흙투성이 배를 끌면서  강둑 풀밭을 슬며시 기어갔다.  흰 시체들이 발가벗고 습기 찬 땅 속에  뼈들은 조그맣고 낮고 메마른 다락에 버려져서  해마다 쥐의 발에만 채어 덜거덕 거렸다.   허나 나는 등 뒤에서 대론 듣는다.  클랙슨 소리와 엔진 소리를,그 소리는  스위니를 샘물 속에서 있는 포터 부인에게 데려가리라.  오 달빛이 포터 부인과  그네들의 달 위로 쏟아진다.  그들은 소다수에 발을 씻는다.  그리고 오 둥근 천정 속에서 합창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여!  투윗투윗투윗  ? ? ? ? ? ?  참 난폭하게 욕보았다  테루.  허망한 도시  겨울 낮의 갈색 안개 속에서  스미르나 상인 유게니데스 씨는  수염도 깍지 않고 호주머니엔 보험료 운임 포함 가격의  건포도 일람 증명서를 가득 넣고  속된 불어로  나에게 캐논 스트리트 호텔에서 점심을 하고   주 말을 메트로폴 호텔에서 보내자고 했다.  보랏빛 시간,눈과 등이  책상에서 일어나고 인간의 내연기관이  태시처럼 털털대며 기다릴  때,  비록 눈이 멀고 남녀 양성 사이에서 털털대며  시든 여자 젖을 지닌 늙은 남자인 나 티레지어스는 볼수 있노아  보랏빛 시간, 귀로를 재촉하고  뱃사람을 바다로부터 집으로 데려오는 시간  茶 시간에 돌아온 타이피스트가 조반 설거지를 하고   스토브를 켜고 깡통 음식을 늘어 놓는 것을 .  창밖으로 마지막 햇살을 받으며 마르고 있는  그네의 속옷이 위태롭게 늘려있다.  (밤에 그네의 침대가 되는)긴 의자 위엔  양말짝들,슬리퍼, 하의,코르셋이 쌓여있다.  쭈그러진 젖이 달린 노인인 나 티레지어스는  이 장면을 보고 나머지를 예언했다.  나 또한 놀러올 손님을 기다렸다.  여드름투성이의 청년이 도착한다.  소 주택 중개사무소 사원,당돌한 눈초리,  하류 출신이지만 블랫포드 백만장자가 쓰는  비단모자처럼 뻔뻔스러운 젊은 사내.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지루하고 피곤해하니  호기라고 짐작하고   그는 그네들을 애무하려든다.  원치 않지만 내버려둔다.  얼굴을 붉히며 결심한 그는 단숨에 달려든다.  더듬는 손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다.   잘 난체하는 그는 반응을 필요로 하지않아  그네들의 무관심을 환영으로 여긴다.  ( 나 티레지어스는 바로 이 긴 의자 혹은침대위에서  행해진 몬든 것을 이미 겪었노라.  나는 테베 시의 성벽 밑에 앉기도 했고  가장 비천한  죽은 자들 사이를 걷기도 했다.)  그는 생색내는 마지막 키스를 해주고  더듬으며 층계를 내려간다,불거진 층계를...  그네는 동아서서 잠시 거울을 본다.  애인이 떠난 것조차 거의의식하지 않는다.  머리 속엔 어렴풋한 생각이 지나간다.  “흥, 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 좋아.”  사랑스런 여자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혼자서 방을 거닐 대는  무심한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고  축음기에 판 하나를 건다.  “ 이 음악이 물결을 타고 내 곁으로 기어와.”  스트랜드 街를 지나 퀸 빅토리아 街로 따라  오 도시여, 나는 때론 듣는다.  로우 템스 가의 술집 곁에서  즐거운 만돌린의 흐느끼는 소리와  낮엔 생선다루는 노동자들이 어슬렁거리며  거기서 떠들어대며 지껄이는 소리를.  마구누스 마아터 성당의 벽이  이오니아 풍의 흰빛 금빛 형언할 수 없는 화려함을 지니고 있다  강은 땀흘린다  기름과 타르르  거룻배는 썰물을 타고  흘러간다.  붉은 돛들이 활짝  육중한 돛대위에서  바람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거룻배는 떠있는  통나무들을 헤치고  개 섬을 지나  그리니지 하구로 내려간다.  웨이얼랄라 레이어   웨이얼랄라 레이어  엘리자베스 여왕과 레스터 백작  역풍에 젓는 노  고물은  붉은 빛 금빛 물들인  조개 껍질  힘차게 치는 물결은  양편 기슭을 잔 무늬로 꾸미고  남서풍은  하류로 가지고 갔다.  진주 같은 종소리를,  하얀 탑들을,        웨이얼랄라 레이어        월랄라 레이얼랄라  “전차와 먼지 뒤집어쓴 나무들  하이베리가 저를 낳고 리치몬드와 큐가  저를 망쳤다, 리치몬드에서 저는 좁은 카누 바닥에 누워  두 무릎을 치켜 올렸다.”  "저의 발은 무어게이트에, 마음은  발 밑에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는 울었다. 그는 을 약속했으나  저는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무엇을 원망해야 할까?"  '마아게이트 모래밭.  저는 하찮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 다녔다,  더러운 두 손의 찢겨진 손톱.  제 집안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  아무 기대도 없는’       랄라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건지시나이다.  탄다.      4.  익사(溺死)    페니카아 사람 플레버스는 죽은 지 2주일  갈매기 울음소리도 깊은 바다 물결도  이익도 손실도 잊었다.  바다 밑의 조류가  소근대며 그의 뼈를 추렸다. 솟구쳤다 가라앉을 때  그는 노년과 청년의 고비들을 다시 겪었다.  소용돌이로 들어가면서.       이교도이건       유태인이건  오 그대 키를 잡고 바람 부는 쪽을 내다보는 자여  플레버스를 생각하라, 한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      5.  천둥이 한 말   땀 젖은 얼굴들을 붉게 비춘 횃불이 있은 이래  동산에 서리처럼 하얀 침묵이 있은 이래  돌 많은 곳의 고뇌가 있은 이래  아우성 소리와 울음 소리  감옥과 궁궐  먼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있던 우리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으며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 사이로 오르고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 큼에서는 멈출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山 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 속엔 정적마저 없다  비를 품지 않은 메마른 불모의 천둥이 있을 뿐  산 속엔 고독마저 없다  금간 흙벽집들 문에서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비웃으며 우르렁댈 뿐  만일 물이 있었고  바위가 없었다면  만일 바위가 있었고  물도 있었다면  물  샘물  바위 사이에 물웅덩이  다만 물소리라도 있었다면  매미 소리도 아니고  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로록 또로록  허지만 물이 없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  세어 보면 당신과 나 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요?  공중 높이 들리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어머니의 비탄 같은 흐느낌 소리  평평한 지평선에 마냥 둘러싸인  갈라진 땅 위를 비틀거리며 끝없는 벌판 위로 떼지어 오는  저 두건 쓴 무리는 누구인가  저 산 너머 보랏빛 하늘 속에  깨어지고 다시 세워졌다가 또 터지는 저 도시는 무엇인가  무너지는 탑들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비엔나 런던  현실감이 없는  한 여인이 자기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팽팽히 당겨  그 현 위에 가냘픈 곡조를 타고,  어린애 얼굴들을 한 박쥐들이 보랏빛 황혼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개치며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시커먼 벽을 기어 내려갔다  공중엔 탑들이 거꾸로 서 있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종을 울린다, 시간을 알렸던 종소리  그리고 빈 물통과 마른 우물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들.  산속의 이 황폐한 골짜기  희미한 달빛 속에서 풀들이 노래하고 있다  무너진 무덤들 너머 성당 주위에서,  단지 빈 성당이 있을 뿐, 단지 바람의 집이 있을 뿐.  성당엔 창이 없고 문은 삐걱거린다  마른 뼈들이 사람을 해칠 수는 없지.  단지 지붕마루에 수탉 한 마리가 올라  꼬꾜 꼬꾜 꼬꾜  번쩍하는 번개 속에서. 그러자 비를 몰아오는  일진의 습풍  캔지스 강은 바닥이 나고 맥없는 잎들은  비를 기다렸다. 먹구름은  멀리 히말라야 산봉 너머 모였다.  밀림은 말없이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천둥이 말했다  다  다타: 우리는 무엇을 주었던가?  친구여, 내 가슴을 흔드는 피  한 시대의 사려분별로도 취소할 수 없는  한 순간에의 굴복, 그 엄청난 대담,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해 왔다.  그것은 죽은 자의 약전에서도  자비스런 거미가 덮은 죽은 자의 추억에서도  혹은 텅 빈 방에서  바싹 마른 변호사가 개봉하는 유언장  속에도 찾을 수 없다  다  다야드밤: 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 번 돌아가는 소리  각자 자기 감방에서 우리는 그 열쇠를 생각한다.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옥을 확인한다.  다만 해질녘에는 영묘한 속삭임이 들려와  잠시 몰락한 코리올레이누스를 생각나게 한다.  다  담야타: 보트는 경쾌히 응했다.   돛과 노에 익숙한 사람의 손에.  바다는 평온했다. 그대의 마음도 경쾌히 응했으리라  부름을 받았을 때, 통제하는 손에  순종하여 침로를 바꾸며.  나는 기슭에 앉아 낚시질했다. 등위엔 메마른 들판.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바로잡아 볼까?  런던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하는 불길 속에 몸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될 것인가-오 제비여 제비여  황폐한 탑 속에 든 아퀴텐 왕자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 왔다.  분부대로 합죠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다다. 다야드밤. 담야타.  샨티 샨티 샨티.        히스테리    그녀가 웃으면,나는 그녀의 웃음속에 휘말려  그것의 일부분이 된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의 이는 分隊敎練의 재능을 가진  우연의 星群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갑작스런 가쁜 숨결 속에  끌려들었고,게서 빠져나려 하면 그때마다 들이마셔져,    마침내는 캄캄한 그녀의 목구멍 속에서 떠돌아 다니다  보이지 않는 근육의 파문에 상처입었다.    늙수그레한 웨이터가,녹이 슨 초록빛의 철제 식탁위에,손을 떨며,  핑크빛의 흰 격자무늬를 수놓은 식탁보를 급히 펴면서 말했다.    '만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싶으시다면,만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싶으시다면, '하고.`    그녀 가슴의 진동을 멈출 수만 있다면,나는 오후의 단편을 얼마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세심하고 교묘하게 나의 주의를  이 목적에 집중했다        하마   등이 멋없이 넙쩍한 하마 녀석 진흙 가운데 배를 깔고 자빠져 있다. 보기엔 아주 건장한 놈 같지만 겨우 살과 핏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살과 피는 힘없고 약하여, 신경의 충격에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끄떡 않음은 바다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먹이나 줍고 있는 하마의 연약한 발은 잘못 딛는 수가 있지만, 진정한 교회는 가만히 있어도 배당이 굴러 들어오게 마련이다.   하마군은 망고나무의 망고 열매에 결코 닿지 않지만, 석류나 복숭아는 바다 건너서 교회의 먹이가 된다.   발정기의 하마군의 목소리는 목 쉬고 이상한 변성을 내지만 우리가 매주 듣는 교회의 목소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있음을 기뻐하는 소리.   하마군의 하루는 낮에는 자고 밤엔 먹이를 찾는 일. 하느님의 일은 알고도 모를 일― 교회는 잠자며 동시에 먹는다.   나는 하마군이 날아서 습한 대초원에서 하늘에 오르고, 합창하는 천사들이 그를 에워싸고, 드높은 호산나로 하느님의 찬가를 부름을 보았다.   어린 양의 피로 씻기고 천사의 팔에 안겨 성자의 대열에 참여한 그는 황금의 거문고를 연주하리라.   그는 눈처럼 하얗게 씻겨 모든 순교한 처녀들의 키스를 받으려니 허나 참된 교회는 하계에 머물며 낡고 썩은 안개에 싸여 있으리라.       버언트 노오튼 I. - '4중주곡'에서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모든 시간이 끊임없이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보상할 수 없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은 하나의 추상으로서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가능성으로서 남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은 일은  한 점을 향하여, 그 점은 항상 현존한다.    발자국 소리는 기억 속에서 반향하여 우리가 걷지 않은 통로로 내려가  우리가 한 번도 열지 않은 문을 향하여  장미원薔薇園속으로 사라진다. 내 말들도  이같이 그대의 마음속에 반향反響한다.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 꽃잎에 앉은 먼지를 뒤흔드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 밖에도 메아리들이 장미원에 산다. 우리 따라가 볼까?    빨리, 그걸 찾아요, 찾아요, 모퉁이를 돌아서.  새가 말한다. 첫째문을 빠져,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우리 따라가 볼까   믿을 순 없지만 지빡새를?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아 있구나. 위엄스럽게, 눈에도 안 보이게, 죽은 잎 위에 가을 볕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대기 속에 가벼이 움직인다.    그러나 새는 노래한다, 관목 숲속에 잠긴  들리지 않는 음악에 호응하여. 보이지 않는 시선이 오고간다. 장미는 우리가 보는 꽃들의 모습이었다.    그건 영접받고 영접하는 우리의 빈객이다.  우리들이 다가서자 그들도 하나의 정형의 패턴으로  텅 빈 소로小路를 따라 변두리 황양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물마른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못은 마르고, 콘크리트는 마르고, 변두리는 갈색 햇빛이 비치자 연못은 뮬로 가득차,  연꽃이 가벼이 가벼이 솟아오르며, 수면은 광심光心에 부딪쳐 번쩍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의 등 뒤에서 염못에 비치고 있었다. 그러자 한 가닥 구름이 지나니 연못은 텅 빈다.  가라, 새가 말했다. 나뭇잎 밑에 아이들이 가득 소란하게 웃음을 지니고 숨어 있다.   가라, 가라, 가라, 새가 말한다. 인간이란  너무 벅찬 현실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니.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 끝은 언제나 현존한다.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만일 나의 대답이 저 세상에 돌아갈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내 생각한다면 이 불길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나 내가 들은 바가 참이라면 이 심연에서 살아 돌아간 이 일찍이 없으니, 내 그대에게  대답한들 수치스러운 염려 없도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갑시다, 거의 인적이 끊어진 거리와 거리를 통하여 값싼 일박 여관에서 편안치 못한 밤이면 밤마다 중얼거리는 말소리 새어 나오는 골목으로 해서   굴껍질과 톱밤이 흩어진 음식점들 사이로 빠져서 우리 갑시다. 음흉한 의도로 싫증나게 질질 끄는 논의처럼 연달은 그 거리들은    그대를 압도적인 문제로 끌어 넣으리다. 아아, '무엇이냐'고 묻지는 말고 우리 가서 방문합시다.   방안에선 여인네들이 왔다 갔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며    유리창에 등을 비벼대는 노란 안개, 저녁의 구석구석까지 혀를 핥고서   수채에 괸 웅덩이 위에서 머뭇거리다가, 굴뚝에서 떨어지는 그을음을 등에 받으며,   테라스곁을 살짝 빠져 껑충 한 번 뛰고선, 아늑한 10월달밤인 줄 알았던지, 집 둘레를 한바퀴 핑 돌고선 잠이 들어 버렸다.   유리창에 등을 비벼대며 거리를 미끄러져 가는 노란 안개에도 확실히 시간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만날 얼굴들을 대하기 위하여 한 얼굴을 꾸미는 데에도 시간은 있으리라, 시간은 있으리라.   살해와 창조에도 시간은 있으리라.    백번이나 망설이고  백번이나 몽상하고 백번이나 수정할 시간은 있으리라. 토스트를 먹고 차를 마시기 전에.   방안에서 여인네들이 왔다갔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며   정말 생각해 볼 시간은 있으리라. '한번 해 볼까?' '해 볼까?'하고 망설일 만한 시간은   한복판은 대머리가 벗겨진 내 머리를 끄덕이며  발을 돌려 계단을 내려갈 만한 시간은 (여인들은 말하리라, 저이 머리는 어쩌면 저렇게 벗겨진담.)   내 모닝코트, 턱까지 빳빳이 치받치는 내 칼라 화려하고 점잖지만 수수한 핀 하나로 그 것을 나타내는 넥타이 여인들은 말하리라. '참 저이 팔다리는 가늘기도 하지?'   한 번 해  볼까? 천지를  뒤흔들어 볼까?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일순간에 의하여 역전하는 결단과 수정의 시간을.   나는 이미 그 것들을 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저녁과 아침과 오후를 알고 있다.   나는 내 일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해 왔다. 저쪽 어느 방에서 음악에 섞여   갑자기 낮아지며 사라지는 목소리들도 나는 안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감히 해 볼 것인가?   그리고 나는 이미 그 눈들을 알고 있다. 그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 공식적인 문구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노려보는 눈들을   그리고 내가 공식화되어 핀 위에 펼쳐질 때 내가 핀 꽂혀 벽위에서 꿈틀댈 때   어떻게 나의 생활 나의 태도의 한토막 한토막을 비로소 모조리 뱉어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그 팔들을 알고 잇다. 그것은 모두 알고 있다. 팔지 낀 허옇게 드러나 팔들을  (그러나 램프 불에 보며, 엷은 갈색 솜털로 덮인)   내가 이처럼 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는 것은 옷에서 풍기는 향기 때문인가?   테이블에 놓인 팔, 쇼올을 휘감은 팔 그러면 한번 해 볼까? 그러나 어떻게 말을 꺼낼 것인가?   이렇게나 말해볼까, 나는 저녁때 좁은 거리를 지나왔습니다. 샤쓰만 입은 외로운 사나이들이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뿜어대는 파이프의 연기를 나는 보았습니다라고   나는 차라리 고요한 바다 밑바닥을 어기적거리는  한 쌍의 엉성한 게 다리나 되었을 것을.   그런데 오후도 저녁도 저렇게 편안히 잠들었구나. 긴 손가락들도 쓰다듬어져서! 잠이 들었거나, 피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앓은 체 하는 것이다.   그대와 내 곁 여기 마루 위에 펼쳐서 차도 끝내고 케이크도 아이스크림도 먹고 났는데, 이제 내게 무슨 힘이 있어 이 순간을 한 고비로 몰아 가겠는가?   그러나 나는 울기도 하고, 단식도 하고, 울며 기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머리(조금 벗겨지긴 했지만)가 쟁반 위에 놓여 들어오는 것을 보긴 했지만,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여기에 별로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나는 나의 위대한 순간이 가물거리는 것을 보았고,   영원한 '하인'이 내 코트를 잡고 킬킬 거리는 것을 보았다. 결국 나는 두려웠었다.   도대체 그 것이 보람이 있었겠는가? 잔을 거듭하고, 마말레이드를 먹고, 차를 들고 나서,   화병을 옆에 놓고 내 그대와 주고 받는 이야기에서 그 것이 보람있었겠는가?   미소로써 문제를 물어 뜯어 버리고 우주를 뭉쳐서 공을 만들어   어떤 어마어마한 문제로 그 것을 굴려 간다한들 또는 '나는 주검으로부터 살아나온 나자로다.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알리기 위하여 돌아왔다, 모든 것을 말하리라'고 말한들.   만약 어느 여인이 머리맡에 베개를 놓고서 '나 조금도 그런 뜻에서 말한 것 아네요, 조금도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한들,   아니다! 나는 햄릿 왕자가 아니다, 될 처지도 아니다. 나는 시종관 행차나 흥성하게 하고 한 두 장면 얼굴이나 비치고   왕자에게 진언이나 하는, 틀림없이 만만한 영장, 굽실굽실 심부름이나 즐겨 하고,   빈틈 없고, 조심정 많고, 소심하고 큰 소리치지만, 좀 머리가 뜨고   때로는 정말 바보같기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때로는 틀림없이   나는 늙어 간다... 늙어 간다. 바짓가랑이 끝이나 접어 입을까   머리를 뒤에서 갈라 볼까? 복숭아를 한번 먹어볼까? 흰 플란넬 바지를 입고 해변을 걸어 볼까?   나는 인어들이 서로 노래를 주고 받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인어들이 날 들으라고 노래 부르는 것은 아니겠지.   그 것이 물결타고 바다 안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흴락 검을락 물결이 바람에 불릴 때   뒤로 젖혀지는 파도의 흰 물머리를 빗질하며 우리는 적색 갈색의 해초를 두른 바다 처녀들에 섞여   바다의 방안에서 지금까지 머뭇거리다 그만 인간의 목소리에 잠이 깨어 물에 빠진다.       바람 부는 밤의 광시곡    열두 시.  달의 종합 속에 들어있는 쭉 뻗은 거리를 따라  속삭이는 날의 주문은 기억의 심층과  그 모든 뚜렷한 관계와  그 구분과 정밀성을 용해하고,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은 저마다 숙명적인 북처럼 울리고,  어둠의 공간을 통하여 한밤은 기억을 뒤흔든다, 광인이 죽은 제라늄을 흔들듯이.   한 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고, 가로등은 중얼대고, 가로등은 말했다. "저 여자를 보라 방긋 웃는 듯이 열려 있는 문간의  불빛 아래서 그대를 향해 망설이고 있는 저 여자를,   그녀의 옷자락이 찢겨져  모래로 더렵혀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꼬리가  구부러진 핀처럼 비틀린 것도 볼 수 있다.   추억은 많은 뒤틀린 것들을 높이 밀어올려 마르게 하고, 해변의 비틀린 가지는  매끈히 벌레에 먹히고 반들반들 닳아 마치 세계가 희고 빳빳한 그 뼈대의 비밀을  내던져 버린 것 같다.   공장 마당의 부서진 용수철, 힘이 빠져 막막하게 구부러지고 꺾일 지경이 된 그 형체에 달라붙은 녹.   두시 반, 가로등이 말했다.   "보라 도랑에 납작 업디어 혀를 쑥 내밀고 한 조각의 썩을 버터를 탐식하는 저 고양이를"   그렇게 어린 아이의 손이 자동적으로 쑥 나와 부두를 따라 달리는 장난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 아이의 눈 뒤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거리에서,불켜진 덧문 사이로  들여다보려고 하는 눈들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날 오후 웅덩이 속에서 게 한 마리가, 등에 조개삿갓이 붙은 늙은 게 한 마리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막대기 끝을 움켜잡았다.   세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며, 가로등은 어둠속에서 중얼댔다. 가로등은 흥얼거렸다--   "저 달을 보라, 달은 아무런 원한도 품질 않는다, 그녀는 약한 눈을 깜박이며  구석구석에 미소를 보낸다. 그녀는 풀의 머리털을 쓰다듬는다.   달은 기억을 잃었다. 색이 바랜 천연두로 그녀의 얼굴은 금이 가고 그녀의 손은 먼지와 오 드 꼴로뉴의 냄새를 풍기는 종이 장미를 비튼다.   그녀는 다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오랜 밤의 온갖 냄새와 더불어 있도다"   추억이 밀려온다 햇빛 받지 못하는 마른 제라늄과  갈라진 틈바구니의 흙과    거리의 밤 냄새와  덧문 닫힌 방의 여자의 냄새와 복도와 담배와  술집과 캐테일 냄새 등의 추억이.     가로등은 말했다. 지금은 네 시, 여기 문 위엔 번호가 있다. 추억이라고!   열쇠를 가진 것은 그대, 작은 등불이 계단에 원을 펼쳤으니, 올라오라. 침대는 비었고,칫솔은 벽에 걸려 있다 신일랑 문간에 놓고,잠자라,그리고 내일의 삶에 대비하라    나이프의 마지막 비틀림       T.S 엘리어트-전통   1888-1965 하버드→프랑스→하버드→독일→영국: 1927년 미국의 전통이 짧아서 영국으로 귀화한다. (여기에서 나는 엘리어트가 자신의 모국이 짧은 역사의 국가라는 이유로 전통이 있는 영국으로 귀화한다는 것은 지식적 탐욕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1917년에 나온 시를 읽어보면 영국성향의 시적 면모가 드러난다. 1920년 평론가로 활동한다. 1922년 황무지를 쓴다. (박식다학한 시, 문명비판사의 시) 엘리어트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고수는 인정한다. 그 예로 파운드가 엘리어트의 시를 고쳐주는데, 그것을 그대로 싣는다. 그것은 작가로서 치명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실을 정도면 자기위의 사람을 무조건 따른다는 성향을 알 수 있다.   전통과 개인의 재능 엘리어트가 말하는 전통은 움직이는 전통, 조류이다. 정체하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의 통시적 흐름에서 조류를 제대로 알고,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시대의 정신을 흡수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어트는 경험과 창조적 정신은 분리시켜야 한다고 한다. 경험에서의 격한 감정표현을 외면하고 창조에 접할 때, 더 강렬한 뜻이 창조된다. 그래서 개성을 외면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시창작 방법론이 이성적이고 좋은 창작품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계승의 유일한 형태가 우리 앞 세대의 방식을, 그 성공적인 면들에 맹목적이거나 소심하게 달라붙어 뒤따르는 것이라면 그런 전통은 저지되어야 한다. 전통은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를 띤다. 그것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매우 공들여 얻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작가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갖춘다. 첫째, 역사의식이다. 단, 시간성과 영원성을 동시에 느끼는 역사의식이다. 자신의 시대의식 뿐만 아니라 유럽의 全문학과 그 속에 들은 자신의 나라의 전문학이 동시에 존재하여 하나의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과 더불어 글을 쓰게끔 한다. (그래서 황무지라는 작품이 나온 것 같다) 어떤 시인이나 예술가도 자신의 전적인 의미를 혼자 가질 수 없다. 즉 홀로 평가될 수 없다. 죽인 시인이나 예술가들과의 대조와 대비를 통해 이뤄진다. 이를 엘리어트는 역사적 비평의 원칙으로서 뿐만 아니라 심미적 비평의 원칙이라 한다. 그래서 전통이 중요하다. 오래된 것과 새것의 화합은 새로운 작품이 출현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기존의 질서가 아주 조금이라도 변경되어 전체를 향해 균형을 가지고 재조정되면서 유지된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 이끌어지듯 과거가 현재에 의해 변경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새로운 것은 전통의 변형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은 전통, 조류를 매우 잘 의식해야 한다. 그 조류는 가장 특출한 명성을 지닌 시인들을 통해서만 전적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절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더불어 예술의 소재는 항상 똑같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개인의 정신보다 유럽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유럽의 정신은 변하는 정신이다. 시인은 엄청난 양의 박식을 요구한다. 많은 학식은 시적 감수성을 죽인다거나 왜곡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이 자신의 필수적인 감수성과 필수적인 나태성을 침범하지 않을 한도로 알아야만 한다. 반면, 지식을 단지 시험이라든가, 응접실이라든가. 아니면 보다 더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우쭐대는 데 유용한 형태로 묶어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몰개성이 전통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를 산소와 이산화유황에 백금을 넣었을 때 일어나는 반응으로 비유한다. 여기에서 백금은 촉매이다. 개성 있는 작가는 특별하거나 매우 다양한 감정들이 자유로이 새로운 결합을 이룰 수 있는 보다 더 세밀하게 완숙된 매개체이다. 그래서 촉매, 백금은 시인의 정신이다. 여기에서 시인의 정서와 감정이라는 요소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새로운 정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정서를 이용하여 그것을 시 속에 다듬어 넣고 전연 실제의 정서 속에 들어있지 않던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시를 쓰는 데 있어 의식적이고 의도적이어야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시란 정서의 풀어놓음이 아니라, 정서로부터 탈피이고.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탈피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탁월성을 알아보고 감상할 수 있는 자들은 보다 소수이다.   시의 사회적 기능   엘리어트는 시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며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언어뿐만 아니라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고 고 말한다. 그러나 각국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는 실정에서 이것은 슬픈 일이다. 시의 사회적 기능1. 문화를 고립, 단절하지 않는다. 통합도 안 된다. 시의 사회적 기능2. 시가 사라지면 안된다. 시가 사라지면 감정이 사라진다. 시의 사회적 기능: 종교적 기능 (찬송에서의 시), 교훈적 기능(농경시, 이때 산문으로 쓰이면서 풍자가 드러난다.) , 역사적 기능(사회, 도덕, 정치를 드러낸다. 이때 지나치게 드러내서도 또는 아니어서도 안되다) 좋은 시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모든 사람이 갖기는 힘들지만 노력해야 한다. 그림이나 음악을 한 나라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즐길 수 있듯 말이다. 언어를 문학적으로 사용하려는 충동은 시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시에 그 나라의 민족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시가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말로 그 나라의 시를 이해하는 데는 큰 즐거움을 얻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국어를 보존하고 그것을 확대 향상시키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그것을 좀 더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그 느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시인이 매우 급속히 많은 독자를 가지게 도니다면 그것은 좀 의아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 있지 않고 대중들이 벌써 잘 알고 있는 것. 따라서 그들이 벌써 전세대의 시인들에게서 받은 것을 다만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올바른 소수의 독자를 가져야 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 빛을 발하지 않는다. 자신이 처해 있던 시대에 있어서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들을 잘 연구해야 한다. 건전한 사회에서는 각 부분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 계속적인 영향과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사회적 기능이 그러해야 한다. 시인은 자기 주위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그대로의 언어를 소재로 취해야 한다. 시는 어느 정도 언어의 미를 보존하고 나아가서 부활시켜야 한다. 그래서 시는 다만 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고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외국어 하나를 수고해서 배우고 어느 정도 모국어와 같이 외국어로서 느낄 수 있는 개인들이 없이는 민족과 민족사이 정신적인 교통은 불가능하다(여기에서 번역가의 힘, 또는 작가가 번역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연수가 부럽다) 결국 다양성이라는 것은 여러 문화의 통일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91    에즈라 파운드 댓글:  조회:1028  추천:0  2019-03-12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 - 1972)        에즈라 파운드는 모더니즘의 주도자로서 이미지즘을 주도하여 현대시의 방향을 설정했고 음악가들과도 접촉을 하면서 시예술이 회화적, 음악적 특성의 확충을 도모했다.그는 T.S.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로버트 프로스트, W.C.윌리엄즈 그리고 다른 여러 작가들이 인정 받도록 격려, 충고, 또는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파운드는 문학사에 거인적 존재로 남을 만하다.        그의 시적 명성이 걸려있는 필생의 작품 이 뒤늦게 1970년에야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낸 탓도 있지만, 그 내용이 악명 높을 정도로 까다롭고 난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흔히 논리나 수사를 거부하여 일상적인 구문이 무시되고, 전통을 중시하여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의 한자, 그 외의 여러 언어로부터의 인용이 빈번하고, 시의 예술성을 제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회화적, 음악적 특성이 강하다. 그의 초기 시 몇 편을 소개한다.    *     나무      나는 숲속에 조용히 서서 나무가 되어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의 진실을 알게 되었네:    더프네1)와 월계수의 인사  그리고 숲 속에서 느릅나무 상수리 나무로 변한  저 신을 대접하던 늙은 부부,2)  신들을 친절히 초청하여, 안으로,  마음 속 가정의 노변爐邊 에 모시고야  그들은 그 경이로운 일을 이루었는지 모르네.  그럼에도 나는 숲 속에 나무가 되어  많은 새로운 것들을 이해하게 되었네,  전에는 나의 머리에 지독한 어리석음이었던 것들을.    1)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 신에 쫓기어 월계수가 되었다는 요정.  2)변장한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잘 대접하였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나무로 변신한 가난한 늙은 부부 바우키스와그 남편 필레몬.      - 이 작품은 W.B.예이츠의 "그는 자신의 지난 날의 위대함을 생각하네"를 본받은 것이다. 정신적 경험을 통한 변신의 주제가 다루어져 있다.       *  다락방       오라, 우리보다 유복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자,  오라, 내 친구여, 그리고 부자는 하인은 있어도                    친구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지만 우리는 친구는 있어도 하인은 없다.  오라, 우리 기혼자들과 미혼자들을 불쌍히 여기자.    새벽은 작은 발걸음으로                    도금한 파블로바같이 다가온다.  나에게 욕정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 속의 생명력엔  이 맑은 서늘한 시간,  함께 깨어나는 시간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 다락방 작업장에서의 호색적 에피소드는 부르주와의 인습에 대한 중상과 함께 문학적 보헤미안들의 상투적 수단이다. 황금빛 새벽이 도금한 신을 신은 러시아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에 비유되어 있다. 그녀는 1910년 영국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  기질       아홉 번의 간통, 12번의 밀통密通, 64번의 사통私通  그리고 강간에 가까운 어떤 짓이  밤마다 우리의 허약한 친구  플로리얼리스트의 영혼에 찾아드네.  그럼에도 그 사람은 말이 없고 처신이 신중하여  기운이 없고 정욕이 없는 것으로 통하네.  반면에 성교에 대해서만 지껄이고 글을 쓰는                배스티디더스는  쌍둥이의 아버지가 되었네,  그는 얼마간의 대가를 치르고 그 위업을 이루었네.  그는 네 차례나 오쟁이 저야했네.        - 이 시에 등장한 성에 대해 대조적인 두 인물들은 미확인이나 허구적인 인물이나 다름없다.       *  지하철 역에서       군중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 얼굴들:  비에 젖은 검은 가지 위에 꽃잎들.       - 파운드는 한때 파리의 콩꼬르드 지하철 역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느낀 데서 얻은 경험을 소재로 처음에 31행의 시를 썼으나 일본의 단가인 하이꾸 형식을 빌어 이와같이 두 줄로 압축해 놓았다.            *  찻 집      그 찻집의 소녀는  예전만큼은 예쁘지 않네.     8월이 그녀를 쇠진케 했지.  예전만큼 층계를 열심히 오르지도 않네.     그래,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우리에게 과자를 날라줄 때  풍겨 주던 청춘의 빛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겠네.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  인 사       오 철저히 점잔빼고  철저히 거북한 세대여,     나는 어부들이 햇빛 속에 소풍가는 걸 보았고,  그들이 지저분한 가족들과 함께 있는 걸 보았고    이 다 드러낸 그들의 웃음을 보았고  본때없는 웃음소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너보다 행복하고  그들은 나보다 행복했다;     고기는 호수에서 헤엄치는데  옷조차 갖지 않았다.         *  소 녀      나무가 내 손으로 들어오니  수액(樹液)이 내 팔로 올라왔네.     나무가 내 가슴 속에서  아래를 향해 자라니,    가지들이 나에게서 뻗어 나오네.  두 팔처럼.    너는 나무,  너는 이끼,    바람이 그 위를 스쳐가는  오랑캐꽃들. 너는,  너는 어린이 - 그렇게도 키가 큰 -    세상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것들이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에즈라 파운드- 본격 예술가   1885년-1922. 뛰어난 언어학자. 그리스어: 희랍어 로만스: 라틴어(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게르만어: 영어. 네덜란다.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슬라브어: 러시아, 폴란드 인도, 이란어. 칸토스cantos-1~100편의 연작시   각 국의 언어가 혼합되어 번역하기 힘들다. 파운드는 번역하지 마라, 그대로 각국, 언어와 문화를 혼합한 것이다. 예술은 과학이다. 라는 도발적 질문을 한다. 에즈라 파운드가 말하는 정확성이란? 과학적 수치의 정확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진리를 보여주려는 시도에서 정확성이다. 예술 자체가 진리임을 인정하라. 인간은 같지 않고 다르다.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이 정확성이다.   정확한 심상을 파악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소수의 비평가이다. 시와 소설(산문)은 구분가능한가? 산문은 말하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시는 없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시적으로 쓴 글은 시인가? 소설이라 하면 내러티브라는 틀의 강화 또는 소멸을 말한다. 여기에서 내러티브가 붕괴되었다고 해서 소설이 시가 되지 않는다.   「본격예술가」 논문에서 파운드의 고전적인 면, 고지식한 면이 느껴진다. 파운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없다. 그것을 예술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잘 하자고 주장한다.   예술이 가장 이상이고, 나라는 동양의 중국 요순시대이다. 이를 병합하여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기간 동안 칸토스를 쓴다. 58년에 이탈리아에 간다. 45년에 파시즘 붕괴되고 미국에서 추방된다. 미국에서 사형대신 25일 동안 동물원에 갇혀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된다. 이 때, 파운드는 미국은 정신병동이다 라는 말을 하고 미국을 떠난다.   예술가는 지식인이어야 한다. 박식하고 다재다능해야 한다. 고 말한다. 파운드가 기고만장해 보이나 사실 예술가로서 맞는 말이다. 나라나 외국의 작품이나 발표작에 대해 작가라면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구별 할 수 있는가? 예술이 왜 필요한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여러 서문보다 훨씬 가치가 뛰어나다. 그럼에도 를 통해 예술이 무엇인가를 변론한다.   예술은 인간, 비물질적인 인간, 인간의 본성에 관해 이야기해준다. 예술은 통해 인간이 어떤 점에서 닮았고 어떤 점에서 동물과 다른가를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은 어떤 종류의 동물인가를 결정하는 데 가장 훌륭한 자료를 제공한다.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다. 허위보고를 하는 예술이다. 설사 허위를 보고하더라고 끝까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나 의사들에게 나쁜 예술은 비도덕적 예술이다. 그들에게 좋은 예술은 도덕적인 예술이다. 그래서 비도덕적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   파운드는 좋은 예술을 자기도 참된 증언을 하는 예술이 가장 정확한 예술이라고 한다.   의학에 진단의 의술과 치료의 의술이 있듯이 예술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시라고 하는 진단의 예술과 치료의 예술이 있다. 진단의 예술은 추의 예찬이고, 치료의 예술은 미의 예찬이다. 미의 예찬은 위생학이다. 태양, 공기, 바다, 비이다. 추의 예찬은 프랑스 시인 비용, 평판 나쁜 것을 시의 소재로 삼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코르비에르, 데카당 운동에 가담한 영국의 삽화가 비어즐리이다. 플로베르는 진단의 예술이다. 풍자나 비판은 수술, 삽입, 절단이다.   본격 예술가는 과학적이다. 개론적인 심리학자들이나 사회이론가들의 경험적과는 다르다. 본격 예술가는 자신의 욕망, 증오, 무관심의 심상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자신의 심상도 그렇게 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다. 본격 예술가의 기록이 정확할수록 예술작품은 지속적이고 논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론가들은 보편성을 이끌며 사람들에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예술은 그 누구에게도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행동하게 이끌지 않는다. 예술은 있는 그대로 (향유하는 것)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의 시금석은 정확성이다. 이 정확성은 다양하고 복잡한 종류의 것이라 전문가만이 어떤 예술작품들이 어떤 종류의 정확성을 지니는지 결정할 수 있다. 걸작을 알아내는 것은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와 시   위대한 시인은 그들의 시간이 울림과 동시에 태어났고 많은 사람들의 노작의 결과를 집적하고 배열하고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사람이다. 이 혼합을 위한 능력이 위대한 시인의 재능의 일부이며 어느 점에서는 겸허, 무사심無私心이다. 단테가 차용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 못지않게 그가 차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억된다. 동시에 단테는 자신의 것을 내놓았다. 그래서 단테가 대시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에너지, 아주 맑은 모래를 뚫고 분출하여 재빨리 그것을 움직이게 할 때의 물과 같은 힘, 예술가가 좋아하는 어떤 심상을 만들어야 한다.   시와 산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는 고도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단,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다. 상대적이다. 좋은 글은 에너지가 없다. 너무 무겁지 않고 통제하기 쉬우며 일상어로 되어 있다. 완전한 명료성과 간결성을 가지고 최소한의 말을 사용한다. 또한 다양한 종료의 명료성이 있다. 요구의 명료성도 있다.   산문과 시는 언어의 확장에 불과하다. 더욱이 산문은 시라는 언어의 확장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의사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관념과 그것의 변형, 관념과 수많은 그것의 효과들, 분위기, 모순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 그럼으로써 뛰어난 소설을 얻게 된다. 음악을 가진 말들로, 음악을 가진 묘사, 운율이 있는 말, 어떤 정확한 묘사를 간직한 리듬이 있는 발로 발전한다. 산문의 말들과 그 의미는 그 정서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고, 또는 반대되는 관념의 단편들이 지적이고 정적인 복합물의 정서와 부수적인 정서들은 조화이루고, 유기체를 형성해야 한다.   산문은 정서가 필요하지 않다. 시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괴물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데 능숙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생각하고 어휘를 배열하고 해명하는 능력은 에너지를 발산, 지각하는 음악적인 능력들과 함께 움직이고 뛰어야 한다. 결국 시인을 만드는 것은 정서적 활력의 지속성이고, 이것과 결합될 때의 독특한 종류의 통제이다.
90    김춘수 무의미시 댓글:  조회:1110  추천:0  2019-03-12
1920~1940년대~28세 1922년 11월 25일 출생  11월 25일 경남 통영읍 서정 61번지(현 경남 통영시 동호동 61)에서 아버지 김영팔(金永八), 어머니 허명하(許命夏)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29년 (8세) 진학  통영 근처 안정의 간이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가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전학.    1935년 (14세) 통영공립보통학교 졸업  5년제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4학년 때 경기공립중학교로 교명이 바뀜)에 입학.    1939년 (18세) 자퇴 후 일본으로 감  11월, 졸업을 앞두고 경기공립중학교 자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1940년 (19세) 4월, 동경의 니혼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    1942년 (21세) 12월, 니혼대학 퇴학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 사상혐의로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 간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됨).    1944년 (23세) 부인 명숙경(明淑瓊) 씨와 결혼.    1945년 (24세) 통영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전혁림 등과 통영문화협회 결성.    1946년 (25세) 9월, [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에 시 ‘애가哀歌’를 발표.  통영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8년까지 근무.  조향, 김수돈과 함께 동인 사화집 [노만파(魯漫派)] 발간. 3집 발간 후 폐간됨.    1948~1949년 (27세~28세) 8월, 첫 시집 [구름과 장미](행문사)를 자비로 간행.  1949년 마산중학교로 전근, 1951년까지 근무.   김춘수 보충자료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922&path=|462|570|&leafId=841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가을 저녁의 詩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갈대 섰는 風景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너와 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네가 가던 그 날은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 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물망초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부재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 없이 져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靑石(청석)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 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김춘수-무의미시   김춘수는 관념에 대한 시를 쓴다. 플라토닉, 이데아를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관념어를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관념 도피증이 생긴다. 그래서 관념시에서 무의미 시로 간다. 무의미의 시는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서술적 이미지 즉 이미지를 서술한다. 이것은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이다. 또는 비유적 이미지 즉, 은유이다. 여기에서 서술적 이미지는 대상이 있을 때 관념을 배제한다. 대상이 없을 때 김춘수는 대상이 있지만 있으면 안 된다고 한다. 대상을 놓치고 언어와 이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한다. 김춘수에게 초이미지나 탈이미지는 별 차이 없다. 김춘수는 무의식이 없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쓰되 무의미하게 쓰는 것이다. 언어와 언어의 배합과 충돌에서 그려지는 이미지, 그림자를 쓴다. 그러나 대상을 없애고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쓰나 이미지가 있는 시가 된다. 그래서 그 의미를 지우는 시를 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이미지를 또 다른 이미지로 지우고, 또 다른 이미지는 제 3의 이미지로 지운다. 그것이 반복된다. 대상이 없어졌다고 해도 의식이 자꾸 감시한다. 무의식적으로 시를 써도 대상과 이미지를 끊임없이 의식이 감지하여 의식이 비대해진다. 이때 허무해진다. 그러나 일반적 허무와 달리 끊임없이 나아가는 허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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