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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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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창작시론』 - 1. 샤를 보들레르, 예술의 현대성―추(醜)의 미학 발제: 김민지   1) 보들레르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상징주의의 문을 연 현대시인. -상징주의, 현대 도시시의 시초. 현대적 예술의 징후를 가장 먼저 포착한 예술가. -『악의 꽃』에는 생의 모순이 잘 드러나 있고, 시적 주체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징후를 관찰하고 꿈꾸고 좌절하는 ‘현대성의 감내자’이다. 현대성의 필연적 산물인 불안, 무출구성, 유토피아 앞에서의 좌절 등 자신의 내면에 투영된 생의 모든 국면들에게로 진입하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상징: 인간은 물질세계의 상징을 통과해야만 정신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상형문자이며, 시인은 암호 해독자 또는 번역자가 된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세계(상징적 외관)와 관념세계(정신적 실재)를 하나의 기호로 결합시키는 자이다. -상상력, 예술가의 첫 번째 자질. 모든 창조를 분해하여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어떤 규칙에 따라 다시 수집하고 배열한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의 시에 등장하는 파리는 ‘실재하는 도시’가 아닌, ‘의도적으로 구성한 상상적 도시’이다. 현실 모사가 아닌 현실 변형.   2) 추의 미학   -그로테스크(grotesque)의 시학. -단순한 ‘더러움의 미’가 아닌, ‘기괴함과 더러움의 공존하는 불협화의 미’. -보들레르는 ‘미’에도 악마가 뒤섞여 있다고 보았다. ‘악마성’과 ‘숭고함’, 선과 악, 하늘과 지옥, 순간과 영원. -『악의 꽃』 역시 ‘악’과 ‘꽃’의 대비처럼, 현대성의 불협화음을 담아낸 텍스트.   3) 현대성(Modernity)   -도시가 보여주는 새로운 시대의 징후. ‘더러운 수도’와 ‘창녀’, ‘쾌락’ 등과 같은 ‘도시의 매력’ -보들레르가 평론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처음 사용 -『1846년의 살롱』에서 보들레르는 현대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관건이 되는 바는 유행으로부터 당대적인 것 안에 포함할 수 있는 시적인 것을 추출해내고, 변해가는 것에서 영원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현대성은 예술의 절반을 구성하는 일시적이며 스쳐가는 우연적인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 화가에게도 각자의 현대성이 있었다.” “그들이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게 보이는 것은 의복과 머리 모양, 동작과 시선 그리고 미소마저도(각 시대는 나름의 자세와 시선과 미소를 갖고 있다) 생명력이라는 온전한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시적이며 흘러가는 요소의 변화가 매우 빈번하다고 해서, 독자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도외시할 순 없다.” -한편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두고, “현대성이란 식기 세트 혹은 광학 기구에 붙어 있는 상표와 같다”며 “자기 작품에 상표를 찍는 것이 보들레르의 분명한 의도였다”고 언급한다. 이 상표는 영속성을 가지면서도 신속히 낡은 것이 되는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예술의 이중성과 ‘미(美)’의 개념과 연결.. -‘미’는 모든 발생 가능한 현상들처럼, 영원하며 순간적이고, 절대적이며 독특한 이중성을 지닌다. -보들레르는 ‘미’를 범속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낯설게 하기’의 전략으로 ‘기괴한 것’, ‘경악스러운 것’의 ‘미’로써 도발한다. 이러한 시도로 그는 당시의 고답파와 사실주의, 자연주의가 추구하는 ‘미’는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 조화롭고 평화로운 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미의식을 보여주었다. (찰나의 아름다움 + 절대의 미 → 덧없음의 쾌락, 우울의 미학)  
46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 테드 휴즈 댓글:  조회:6  추천:0  2018-10-19
★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 테드 휴즈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배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현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너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45    [공유] 후기구조주의 시각으로 詩 바라보기 댓글:  조회:94  추천:0  2018-10-02
퍼온 자료임 후기구조주의 시각으로 詩 바라보기 - 문학이론 입문의 후기 구조주의       언어는 소쉬르의 생각처럼 닫힌 체계를 구성한다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모든 기호들은 다른 기호들과 구별되기 위해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공부하기로 한다. 소쉬르의 랑그는 한계 지어진 의미구조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 언어의 어느 곳에 경계선을 정할 것인가? 소쉬르의 논점을 보면 기호는 분리, 즉 분절[分節]의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니피앙 과 스스로 구별하기 때문이다. 시니피앙은 계속해서 시니피에로 변형되며 그 역(逆)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주의가 기호를 지시대상(referent)으로부터 분리되었다면 후기구조주의로 알려진 이런류의 사고방식은 더 나아가 시니피앙을 시니피에로 분리한다. 기존 구조주의는 '의미가 기호안에 직접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의미는 쉽게 고정될 수 없으며 하나의 기호 안에서만 완전하게 현존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현존과 부제가 함께 끊임없이 명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목걸이의 구슬을 세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명멸과정을 추적하는 것에 가깝다는 말이다. 이것은 언어가 시간에 따라 문장은 유보되며 지체되거나 변해가는 과정이다. 하나의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에 넘겨주고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전달된다. 읽어 내려간 텍스트는 앞서 올 텍스트에 영향을 주고 지난 텍스트는 앞서올 텍스트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개방적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완전히 순수하거나 완전히 독립적인 기호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소설이나 시에서 독자에게 말하려는 전달의미가 완전하게 드러날 수 없다는 말이다. 작자의 의미는 항상 분산 분리되며 처음의 의도와 다르게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의 허구가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 에 대해, 왜곡과 굴절이 없을 수 없다고 한다. 하물며, 내가 쓴 글에도 나의 의식과 생각이 동일하지 않을 수가 있는데 나 외에 다른 독자나 일반이 나의 글을 읽을 때 정확한 의미전달은 그리 중요치 않다. 그냥 어렴풋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글쓰기는 2차적인 소통양식이며 삭막하고 기계적인 육성기록으로 나의 의식으로부터 한 단계 떨어진 이유로 플라톤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러 서양철학의 전통은 생명력이 없고 소외된 표현방식이라고 비방하기 까지 했다. 그들이 육성에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육성 또한 글쓰기의 한 형식일 수밖에 없다. 언어의 실제 과정 속에서 언어의 왕복운동, 좌우운동, 현전과 부제, 사이의 운동을 놓치고 있다. 후기구조주의가 "텍스트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은 거미줄 같은 복잡성에 기인한다. 사람도 각기 자체의 정체성이 확립되려면 그에 비견되는 대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처럼 언어도 절대적으로 경계를 구분하고 확립하려하는 고전적 해체주의가 등장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특유의 사유방식임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허용 하는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자아와 비 자아, 참과 거짓 , 이성과 광기, 주변과 중심 표면과 심층사이에 확실하게 엄격한 경계를 좋아했다. 이렇듯 해체비평의 전술은 텍스트가 자신의 지배적인 논리체계를 어떻게 혼란시키게 되었는가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해체주의는 텍스트가 곤경에 처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자기모순을 일으키는 '징후적인' 특징들에 혹은 아포리아(aporia) 즉, 의미의 막다른 골목에 집착하므로 써 이를 잘 보여준다.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에로 발전 모습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 K.마르크스, M.하이데거, S.프로이트 등의 견해에 대립하여 프랑스에서 새로이 형성된 사상적 조류이다. 그러나 실존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명확한 형태를 갖춘 사상적 경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류학자, 사회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M.푸코, 리시안 세바크, L.알튀세르, 정신분석학자 J.라캉 등이 구조주의를 주창한 주요 멤버이다. 그중에서 1960년대 발표한 "이야기의 구조적 분석 입문"이란 중요한 시론은 야콥슨과 레비스트로스의 방식을 따르며 이야기 구조를 별개의 단위, 기능, 지표(인물의 심리 분위기, 등등...을 지시하는 것)들로 나뉜다. 이야기는 시간에 다라 전개되지만 비평가들은 비시간적인 설명틀속으로 흡수시킨다. 바르트에 있어서 '건강한 기호는 자신의 자의성에 기를 기울이는 것' 즉, 자신을 자연적인 것으로 속이려하지 않고 의미를 전달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자신의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위치같은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바스트의 '이중적' 기호--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물질적 존재를 몸짓으로 나타내는 기호--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체코 구조주의자들의 '낯설게 된'언어의 그리고 명료한 언어적 존재를 과시하는 야콥슨의 연결자이다. 낯설게 하기는 쉬클로프스키와 야콥슨의 좀 더 명확하게 이어졌다. "비평선집'에서 바르트는 "가능한 한 완전하게 자신의 언어로써 텍스트를 감싸는 것" 이 비평이라고 말했다. 또한 에서 비평담론은 "작품의 1차언어 위를 떠도는 2차언어'라고 했다. 후기구조주의적인 용어로 문학 언어 자체를 규정한다. 문학 언어는 '밑창 없는" 언어이며 "텅 빈 의미"에 지탱하는 '순수한 애매모호함'같은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이 글이나 텍스트성을 논할 때 바르트 자신이 말했듯이 후기구조주의로의 이전은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시나 소설의 명확한 의미를 갖춘 닫힌 실제물(entity)로 보고 그 의미를 판독하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라고 했다. 이렇듯 텍스트는 구조라기보다는 '끝없는 구조화 과정'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미래파 구조주의자들이 단어를 낯설게 하고 새롭게 하는것, 소외된 언어에게 그것이 빼앗긴 풍성함을 부여하는 것에 몰두했던 것은 러시아정치적인 문제와 직결되어있다. 그 시대엔 괄호 안에 넣고 지시대상을 유보하고 내향적으로 빠져들어 갔다. 하지만 그것은 쓸모없는 존재라고 사회적 죄의식에 의해 고통 받거나 그늘져있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정기때 윤동주가 그 대표적인 한 흐름이다 생각할 수 있겠다. 그의 시에 나오는 참회록이나 자화상에서 이미, 후기 구조주의의 한 일면이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윤동주시인은 그렇다고 볼 수 없지만,)침묵의 순수함을 향해 글쓰기의 영도를 추구했지만, 또 다른 문학 양식일 뿐이었다. 폴드망의 비평은 본질 자체를 정의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언어는 비유와 문체에 의해 움직이는 철저히 은유적이다 라고 했다. 어떤 언어라도 정말로(literally)글자 그대로의 것을 믿는 것은 큰 실수라고 했다. 철학이나 법 또한 시처럼 은유에 의해 움직이고 똑같이 허구이라고 했다. 은유는 본디, 근거 없는 것이고 일련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은 이런 한 애매모호함의 가장 극명한 영역인데 그 안에서 독자는 글자 그대로 의 의미와 문체적 의미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독자는 텍스트에 의해 끝없이 심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예일 학파의 비평가들이 말하는 텍스트의 애매함은 문학비평에서의 아이러니하고 거북스런 일이 되며 의미의 환상성, 진리의 불가능함, 모든 담화의 기만적 관계등을 낱낱이 밝혀주는 텍스트의 내적 공간으로의 불안한 모험이 된다- 라고 했다. 뉴크리티시즘에서는 문학은 모든 지시행위의 몰락이며 의사소통의 공동묘지이다그리곤, 결정 불가능한 가물거리는 거미줄로 보았다. 후기 구조주의에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쾌락주의 또는 무책임한 무정부주의 등, 후기 구조주의에서 빈번하였으나, 다원성 구별 성적분리 등 급진적 페미니즘형태들도 있었다. 하지만 21세기를 지나가면서 언어와 텍스트에 대하여 가학적이며, 획기적인 새로운 흐름이 일어날 것이라 여겨진다. 첨단 산업화의 발전으로 통신의 발달과 심화되는 개개인의 단절, 그리고 환경의 피폐함이 텍스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자목 궁금하다. 그것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기도 하다.    
44    [공유] 문학비평의 방법 댓글:  조회:76  추천:0  2018-10-02
퍼온 자료임    문학비평의 방법  (from 이상섭 저, 『문학연구의 방법』)   * 역사주의 비평의 방법  한 작품을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하는 데에서 문학 연구의 역사적 방법은 시작된다. 모든 작품은 확실히 반복될 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른바 역사적 일회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에 의해서 사람에 관하여 사람을 위하여 의지적으로 조성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를 논하면서 비극과 희극의 기원을 전통적 관습에다 둔 것은 문학의 역사적 접근을 최초로 시도한 예가 될 것이다. 문학의 기원, 특히 한 장르의 발생, 변천에 대한 관심은 역사주의 비평가의 최대 관심사에 속한다. 근대적 역사주의 비평은 19세기에 확정되었다. 쌩뜨 뵈브와 이뿔릿 테느는 역사적 방법의 이론적 체계와 실제응용을 눈부시게 보여준 선구자들이다. * 형식주의 비평의 방법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문학 비평은 결국 전체와 부분의 특수한 조직적 관계를 문학에서 찾는 다는 것이다.  이 전체는 그것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과 필연적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독자적인 것으로 보아야 비로소 으미있는 전체가 된다. 전체라는 개념은 그 구성 부분들의 존재를 인정하는데서 성립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인 형식주의자들은 부분들의 독특한 조직으로서의 단일한 전체적 형상을 문학연구의 가장 중심적 대상으로 보고, 그 형상의 근원, 생성과정, 호용 등은 제이차적 내지 비문학적 주제가 된다고 믿는다. 전체를 구성한 부분들을 세밀히 알고자함에서 형식주의 비평가는 자연히 분석적이 된다. 작품이라는 전체는 대단히 복잡한 조직체임을 믿는 가닭에 분석은 매우 다기하며 무궁무진할 수 있다. 분석과 더불어 유사한 부분들의 비교와 대조 역시 무한한 문제를 낳는다. 형식주의가 분석적임은 타고난 운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코울리지의 넓은 의미의 형식주의 문학관은 현대에 이르러 리쳐즈, 엘리어트, 파운드 등의 이론과 실제비평에서 계승되었고, 그 후 주로 미국에서 뉴크리티시즘의 급진적 형식주의를 낳았다.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개념은 텍스트를 여러 가지 기교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형식주의 비평의 선언이다. 미국에서 활발하게 일었던 신비평의 뿌리는 러시아 형식주의이고, 엘리어트(T.S. Eliot)와 브룩스(Cleanth Brooks) 등이 주도적 인물이었으며, 전세계의 문학비평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는 비평가들은 작품 속의 구성, 언어, 상징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형식주의 비평은 서정시를 분석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서사적 쟝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사회.윤리주의 비평의 방법    문학은 개인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는 정의 못지 않게 문학은 사회의 표현이라는 정의 역시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이 정의는 드 보날드의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이쁠릿 테느 이래 널리 보급되어온 생각이다. 테느는 역사주의 비평가였으나, 사회.윤리적 비평의 형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사실은 역사주의 비평과 사회.윤리적 비평 사이의 거리가 가까움을 잘 시사한다.  문학을 독립된 완성품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점, 문학을 시대상이라는 콘텟스트 속에 놓고 보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보는 점에서 역사주의와 사회.윤리주의의 관점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윤리적 비평은 역사주의 비평에서 그렇게도 중요시하고 있는 소위 문학의 근원적 요소들, 즉 작품의 제작 연대, 작가의 전기, 언어의 변천, 전달의 방식 등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안가진다. 그밖에 문학의 장르, 관습, 전통에 대해서도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 현실 생활과의 관계야말로 사회.윤리비평의 주관심사이다. 제일차적으로는 문학과 사회, 정치, 경제 등과의 관계에 유의하지만, 윤리, 문화와의 관계를 또한 빼놓지 않고 유의한다.  문학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킬만한 중요한 사상적인 힘을 갖고 있어야 좋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동안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논리가 적용된 것이다. 사회 비평은 이념적이며 상호적이다. 사회비평의 주도적인 비평가는 루카치(George Lukac)이다.   * 심리주의비평    우리가 문학을 논의할 때 자주 사용하는 문학정신, 문학적 감동, 시상, 영감, 정서, 성격, 동기 등의 용ㅇ어는 모두 사람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다는 점에 있어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들을 다시 세분할 때, 문학정신 시상, 영감 등은 문학을 창작할 때의 상태이고, 정서, 감동 등은 그것을 받아들일 때의 상태이며, 성격, 동기 등은 문학작품 내부의 요소라 할 수 있다. 문학의 연구에서 작가의 창작, 독자의 수용, 작품으ㅢ 내용을 인간 심성의 면에서 고찰하는 일은 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제가 되어왔다. 심리학을 문학연구에 응용하는 일은 비평의 여러 부요 유파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역사주의 비평에서는 특히 작가 연구에 크게 이용하고 있고, 작품을 작가의 전기를 구성키위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특히 정신분석학에서 빌어오고 있다.   * 신화비평의 방법  현대 형식주의 비평의 방법에 못지 않게 야심만만한 것은 소위 신화비평의 방법이다. 문학연구의 여러 방법을 다 포함하면서도 문학을 단일한 근원으로 환원시키는 일을 해내겠다고 나선 것이 신화비평인 것이다. 신화비평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한 인류학파의 괄목할 만한 연구성과에서 자극받아 일어났다. 대표적 인물은 의 저자로 유명한 제임스 프레이저였다. 프레이저는 세계 각처의 신화, 설화, 전설들을 집대성하여 신화가 단지 허망된 이야기라는 통념을 뒤엎고, 신화를 구성하는 힘이 동서고금의 인간의 공통된 기능이라는 생각과 초개인적 사회와 우주와의 의미있는 대화를 위한 형식적 행위, 즉 제식이 말의 형태를 취한 것이 곧 신화라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발견은 세계의 주요 신화들이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아넘길 수 없을 만큼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프레이저 일파의 인류학 이외에, 프로이드의 심리학, 특히 에서보여준 민속신앙의 기원에 관한 그의 연구도 현대 신화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역시 융의 분석심리학, 특히 그의 archetypal unconscious의 이론은 여타 신화학자들의 이론을 크게 보완하고 뒷받침하였다. 한편 독일의 철학자인 에른스트 카씨러(Cassirer)는 사람의 언어생활의 상징성에 최대 절대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사람의 신화 창조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즉 외부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 언어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신화를 창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노스롭 프라이는 신화비평이 진정한 비평일 뿐아니라, 문학비평을 하나의 지식의 체계, 즉 인문과학으로 승격시켜 놓았다고 주장한다.   * 구조주의 비평의 방법 (from Selden, Raman. Contemporary Literary Theory)  문학에 대한 구조주의적 접근은 일반 독자들의 평소의 신념을 흔들어 놓았다. 통념상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작 생활의 산물이며 작가의 근본적인 자아의 표현이다. 또한 텍스트는 독자가 그 속에 들어가서 작가의 사상 및 감정과 정신적 또는 인간적으로 교감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은 작가는 "죽었으며" 문학적 언술에는 진실이라는 기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롤랑 바르트는 구조주의적 입장을 천명하면서 작가들이란 이미 씌어진 문장들을 뒤섞어 재결합하거나 재배치시키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구조주의는 근본적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적 배경에서 출발한다. 소쉬르는 '랑그 langue'와 '파롤 parole'  즉 실제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언어체계와 개인의 발화를 구별한다. 랑그는 언어의 사회적 양상으로 우리가 화자로서 이끌어내는 공유 체계이며 파롤은 실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체계를 개인적으로 구체화시키는 현상이다. 언어학 연구의 주된 목적은 개인의 발화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특정한 표현 행위의 근간을 이루는 체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어떤 특정한 시나 신화나 경제행위를 분석할 때 어떤 규칙 체계가 사용되고 있는가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쉬르는 언어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구별을 통해 의미를 획득하는 것으로 본다. 즉, 신호등의 빨강색은 '초록색이 아님'이고 '정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모든 기호는 이렇듯 기의(정지)와 기표(빨강)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철두철미하게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구조주의는 인간이 이룩해놓은 다양한 체계를 최소단위의 분석을 통해 설명해 내고자 한다.  바르트는 인간의 제반행위 이면에는 상이한 요소가 서로 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존의 체계가 있다는 전제를 사실상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습에 적용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제관습을 언어의 모델 위에서 작동하는 기호 체계로 해석한다.  구조주의는 예민한 문학의 영역 속에 활력과 객관성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문학비평가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파롤을 랑그에 종속시킴으로써 구조주의자들은 실제 텍스트들의 특수성을 무시한채 마치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금속 줄밥의 패턴인 양 다룬다. 그들은 실제 연구의 대상-체계-을 따로 분리해 내기 위해 실제 작품과 작가를 괄호로 묶어 버리기 때문에 텍스트는 물론 작가도 없어지는 것이다.  구조주의 주창자들은 일정한 관계 세트가 특정 행위의 기저에 존재하고 있으며 자연의 모양이 지하의 지층구조에 의해 형성되듯 개인의 행동도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체의 과정은 구조주의의 바로 한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이 소위 후기 구조주의의 중심이론인 것이다.   [출처] [공유] 문학비평의 방법 |작성자 옥토끼    
43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이은봉 댓글:  조회:135  추천:0  2018-09-06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이은봉 정리           1. 머리말      유럽의 문예사조에서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술사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미문학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오히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아방가르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있고,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행해지고 있는 듯하다.      아방가르드가 발전하는 데는 특히 라틴 문화권 사람들의 감수성이 옥토의 역할을 했다. 영미문학에서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구별하려는 의도도 별로 환영받고 있지 못할 정도이다. 심지어는 아방가르드를 모더니즘의 하위개념으로 두고자 하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이다. 어쨌거나 아방가르드는 상대적으로 라틴계 문학에서 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레나토 포기올리의 지적대로라면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보다 훨씬 더 유희적이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는 우상 파괴적인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주로 아방가르드가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이 유럽과 스페인 중남미에서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논의하려고 한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주로 프랑스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는 아방가르드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에서는 아방가르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위라는 뜻. 혁신적인 예술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써 특히 남보다 앞서 미지의 세계를 타개해 가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던 20세기 초의 예술 운동, 즉 이탈리아의 미래파, 러시아의 구성주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등을 지칭해서 쓰인다. 예술 혁신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이 명칭이 쓰이지 않으나, 예술 영역에 따라서 전위미술, 전위음악 등으로 쓰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어떠한 몇몇 동일한 특성으로 쉽사리 정의내릴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서로 동질성을 찾기가 어려운 수많은 표현 방식과 문학 형태가 아방가르드의 이름 아래 모여 그것을 대표하며 그것의 의미를 분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自意나 他意에 의해 아방가르드에 포함되는 예술 사조는 40여개를 넘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아방가르드적 특성이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지극히 보편적인 문학현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까지 있다. 아방가르드의 보편적인 특성인 ‘실험적인 예술의 전통과 관습’, ‘인습을 뛰어넘는 예술정신’은 문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학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며, 시대에 앞서고자 하는 창조적인 반항과 몸부림 등의 경우 문학작품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를 이러한 특징으로만 파악하면 그러한 오해는 일면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가 추구해온 가치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 및 삶의 이해방식을 문학 일반이 지니고 있는 현상의 과도한 표현이라고만 말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방가르드가 어느 특정한 예술 사조나 전통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 이상의 여러 예술 현상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래파, 표현주의는 아방가르드 중에서도 가장 드러난 예술운동으로 손꼽히고 있다. 물론 입체파나 표현주의, 소용돌이파나 구성주의도 아방가르드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은 그 전 시대의 모더니즘과의 관계가 다른 예술운동만큼 급진적인 단절을 이루고 있지는 않고 예술적 성과도 별로 크지 않아 아방가르드의 중심 현상으로 파악하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다.      아방가르드는 단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서구에서 일어났던 문학적 현상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방가르드는 사회적이면서도 심리적인 특성까지도 포함하는 주요한 사상의 흐름이었는데, 이는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작가들이 정치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1차 대전이 비참하게 終戰한 후에는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난 수많은 정치사상이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대중들의 마음을 잡았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 분출하기 시작한 이 무렵 이들 정치사상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의식을 거칠게 사로잡으며 역사에 온갖 사건을 연출한 바 있다. 아방가르드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다소 무궤도한 정신차원에서 출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회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아방가르드의 경우 처음부터 문학운동이나 예술운동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는 아니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군대의 용어로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특공대의 선봉, 곧 전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뜻을 갖는 아방가르드가 정치사상이나 사회혁명과 관련된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이처럼 정치개혁나 사회개혁과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보편화되게 되었는데, 좀더 분명하게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미학용어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은 마르크스나 니체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대강 1845년 무렵에 와서이다.      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드높게 비상함으로써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을 표현한다. 예술은 개척자이며 폭로자이다. 그런데 예술이 선구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혹은 예술가가 그야말로 아방가르드에 속해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뜻을 갖는 아방가르드가 맨 처음 문학의 용어로 사용된 것은 빅토르 위고에 의해서다. 그러면서 샤를르 보들레르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 용어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70년도에 들어서면서 전위적인 작가들과 예술인들의 혁명적인 정신경향을 총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조금씩 의미가 확대되면서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내포를 갖게 되고, 차츰 자신의 몸체를 형성해 온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들 기본적인 개념을 끌어안은 채 다양한 분야에서 당시의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들을 함유하고 규정하는 가운데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형성해온 것이 아방가르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방가르드는 사상 및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갈등이 미만해 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과거의 인습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욕구가 예술과 만나면서 나타난 일련의 반항아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과거의 인습 및 전통과 단절하고 새로우면서도 진정한 예술을 찾기 위해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삶과 예술의 영역에서 자유와 해방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문예운동이 다름 아닌 아방가르드인 것이다.      3. 아방가르드의 성격      1) 아방가르드는 개척정신과 선구자적인 자세를 지향한다.      아방가르드는 언제나 앞장서 문화적 전선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치 군대의 특공대처럼, 전위병처럼 말이다. 아방가르드의 실험은 단순한 이론의 제시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예술과는 전혀 다른 방법과 표현으로 새로운 정신을 발굴하려고 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다. 이러한 면에 대한 군중들의 호기심과 비난이 아방가르드의 열정과 생명력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용기와 진취적인 기상으로 적군에 대항하는 특공대처럼 자신의 운명과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하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선전포고는 끊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결국 저 자신에게까지도 공격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성격상 다른 아방가르드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방가르드의 생명력은 불완전한 데에서 솟아 나와 미지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새로운 형태와 내용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여기서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필연적인 모순과 시간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2) 아방가르드는 공격적 성향을 지니고 자신을 펼쳐 나간다.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Russel은 사회적 반목으로 보고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사회적 반목이란 아방가르드 작가가 현대문화의 지배적인 심미적, 윤리적, 정신적 가치로부터 자의식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그러한 가치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아방가르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를 공격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려고 했다. 미래파의 선언문에는 용기, 공격, 투쟁의 美 등이 언급되어 있고, 표현주의의 선언문에는 행동, 폭풍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공격성은 텍스트를 통해서는 물론 작가의 행동이나 언어, 즉 욕설이나 빈정거림 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3) 아방가르드는 전통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어떤 것과도 타협을 거부한다.      본래 아방가르드의 출발은 지금까지의 예술적 전통을 거부하는데 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과거의 추억이 간직되기를 원치 않았다. 인상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 현상의 하나로 태어난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르네상스 이후 어떤 예술도 자연을 충실히 반영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견해에 대해 반발하지 못했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입장에 대한 반발은 모더니즘 혹은 그 이후의 예술에서나,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에 와서야 가능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원칙하에 400년 이상이나 계속되어온 예술의 흐름, 자연에 대한 모방이라는 예술의 흐름을 인상주의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했다. 그 이후 예술은 더 이상 자신의 특징을 자연의 재현에서 찾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그때까지는 예술적 흐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과거 예술과의 단절을 촉진시켜왔던 셈이다. 결국 전통과 인습을 매장시키면서 동시에 예술적 근원을 추구해온 것이 아방가르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방가르드는 현대적 의식의 일차적인 모습인 무소속감과 반순응주의를 거부한다. 낭만적 개인주의의 특징인 무소속, 고립, 계급 탈락, 방랑 등과도 과감히 단절을 강화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그렇다. 아방가르드는 그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단절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이는 기존의 모든 문학적 전통들과 사고방식을 조소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영원한 단절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인 것이다.      하지만 단절을 통한 자기 고립이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아니다. 예술의 원형을 복구하려 했기 때문에 아방가르드의 단절은 흔히 진보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절을 통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던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단절의 논리가 실질적으로 가져온 것은 허무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허무의 정신은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도덕적 파괴를 감행하도록 했고, 결국은 분노로 삶을 바라보도록 하는 태도를 형성하도록 했다. 아방가르드가 삶을 하나의 문젯거리로 이해 한 것도 실제로는 여기서 기인한다. 아방가르드의 끊임없는 반항이 급기야는 도덕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들 미학은 결국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허무주의로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데, 이는 아방가르드의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아방가르드는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 참여는 실패로 끝나지만 도덕적 반항을 바탕으로 하는 허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지속된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쟁의 의미가 상실되기 시작하면서 아방가르드가 추구해온 부정의 행위는 더욱 과격하게 바뀌어 가는데, 그에 비례해 파괴의 양상도 더욱 심해진다. 결국 부정의 행위와, 그에 따른 파괴의 양상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허무주의는 아방가르드의 이러한 과정에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모든 계급 및 가치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여 잿더미만을 남겨놓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완전한 파괴, 그것은 완전한 절망의 소산이다. 다다이즘에 따르면 善, 惡, 美의 기준은 상대적 가치이거나 단순한 언어적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 느끼는 허무주의는 이내 절대적인 예술의 구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절대적 예술, 곧 역사와 사회로부터 완전히 해방한 예술, 바로 그러한 예술의 자유를 그리려고 한 것인데,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유토피아를 추구한 예술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와 관련해 아방가르드가 원하고 있는 자유는 이미 상당 부분 실현되어 있는 것 아니냐며 되물은 바도 있다. 결국 예술의 자유라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데 있다면 아방가르드는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부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방가르드가 추구하는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이렇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 자체를 다시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을 생명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가 이미 열린 문을 부수고 있다는 비판은 아방가르드가 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기막힌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오히려 긍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대부분 詩와 관련해 시를 위해 존재한다.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에는 지속적으로 진실되게 詩를 재생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본질적으로 시의 순수와 서정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데, 이는 현대에 들어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순수와 서정에 대한 향수는 과거의 시가 지니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순수와 서정, 곧 상상력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는 사실 아방가르드에게 당연한 것이 된 지 오래이다.      아방가르드는 근본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방가르드는 원형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깊이 있게 그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원상(原象)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역사의 인습과 관습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의 모델을 찾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예술의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세계에서 심미적 절정을 이루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현실에 대해서는 허무주의적인 경향을 보여 주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비관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소간은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방가르드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에는 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의미를 향한 강렬한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5) 아방가르드는 미래 지향성을 갖는다.      아방가르드가 미래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주지하다시피 미래라는 말은 아방가르드의 선언문이나 작가들의 말에 매우 자주 등장한다.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아방가르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미래성 때문에 때로 폭동을 정당성하게 여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현재성, 곧 미래성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아직도 온갖 모욕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방가르드의 핵심 예술경향의 하나가 미래파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성공은 먼 훗날에나 알 수 있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방가르드의 작가는 아예 자신의 성공 여부조차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아방가르드 작가는 영원히 산다고 하더라도 저 자신의 아방가르드가 만드는 성공을 볼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방가르드의 내적 논리에 의해 작가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는 창조적 반항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더라도 말이다.      4. 유럽의 아방가르드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의 지성인들은 과거의 시대가 멀어져 갈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지적 유산과 전통이 전쟁으로 파멸버렸다는 것을통감한다. 이른바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감지했다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다양한 작업에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던 것이 당대의 지성인들이다. 때마침 불거져 나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키면서 당시의 예술사상 일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적인 모럴은 물론 기독교도적 가치도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운 지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      문학에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과거의 소재와 형식을 버리고 현대에 알맞는 새로운 미적 가치를 이룩하려고 하는 모더니즘의 도전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더니즘은 19세기 보들레르에서 출발하는데, 아폴리네르에 이르러 형식과 내용면에서 적극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고 실험의 대상이 된다. 또한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글에서 “진실은 숭고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내재해 있으며, 驚異야말로 모든 예술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해 그 이후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후에는 프랑스 미래파의 거장인 그 자신도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깊이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에 모든 예술계가 적극적으로 부응하는데, 1909년에는 마침내 이탈리아의 마리네티가 파리의 지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래파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미래파 운동은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기계문명의 도래를 예고했는데, 이는 후에 새로운 시어 개척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미래파는 인류의 미래와, 예술에 나타날 새로운 관념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 중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과거의 우상을 파괴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박물관과 도서관을 부수자는 말조차 서슴지 않았으며, 갇혀 있던 예술을 일상적인 삶의 위치로 끌어내기 위해 안간 힘을 다했다. 미래파 시인들의 첫 시집의 이름이 『언어에게 자유를』이란 점도 그들의 이런 노력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미래파 시인 중에서는 러시아 혁명에 앞장섰던 마야코프스키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야 말로 이 시기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와 함께 세계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다다는 1916년 츄리히의 카바레 에 모인 젊은이들에 의해 출발되었다. 그런 뒤 초현실주의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1922년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이 해체를 선언하는 6년 동안 유럽 전역에 걸쳐 크게 풍미했던 예술운동이었다. 다다의 의미는 매우 우연적이다. 다다라는 용어가 받아들여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다의 작가들은 다다의 무의미성이 정신의 소멸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기존 질서의 붕괴라는 내적 의미를 갖는다고 믿었다.      다다는 무엇보다도 전쟁과 전쟁을 합리화하는 이념과 논리에 대해 반발했다. 국가를 위한다는 논리로, 신을 위한다는 논리로 이루어진 전쟁의 비극과 파괴를 경험한 그들은 언어 및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전통적인 문학과 예술은 물질세계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나타낼 뿐이라고 느꼈다. 그들이 도덕성을 거부하고 절대적인 회의를 부르짖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18년에 이루어진 다다이즘의 선언에서는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다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우연과 직관에 의해서만 올바른 현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이성과 필연은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다다이스트들이다. 따라서 관습과 습속, 속박은 언제나 그들의 저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다다이즘의 주도자인 차라의 말이다.      나는 모든 체제에 대해 반기를 든다. 가장 받아들일 만한 체제는 원칙적으로 말해 아무 체계도 갖지 않는 것이다.      다다가 기존 예술의 역할을 혐오한 것은 그것이 제도화되어 있다고 믿었고 형식화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제도와 형식이 인간의 생생한 경험을 끊임없이 왜곡시킨다고 믿었다. 따라서 다다이즘 운동은 표현의 직접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다다이즘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낭만주의적인 정신을 함유할 수밖에 없다. 낡아빠진 기존의 표현방식에 대해 완전한 파괴를 추구하는 것이 다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쟝 뽈랑은 언어로부터 이처럼 범속하고 인습적인 형식 및 상투구를 완전히 제거하고, 언어가 지니고 있는 함정을 피해 순수하고 신선하고 시원적인 영감에 호소하고 있는 이들 다다이스트, 즉 언어파괴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까지 부르기까지 했다. 따라서 이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에서의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다는 그 표현에서 언어의 연상 작용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이나 언어의 구문도 거부한다. 미래파의 영향을 받아 부사나 형용사를 되도록 쓰지 않으며, 구두점을 찍지 않고, 단어의 의미보다는 소리나 억양, 리듬 등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아폴리네르는 상형시 즉, 글자를 어떤 의미를 띤 형태로 배열하는 그림처럼 된 시(구체시)를 고안하기도 했으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시를 읽는 동시시(영대시)를 주창하기도 했다.      다다가 인정하는 가치는 개인의 자발성에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진 것으로 인해 예술도 진정한 창조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발성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해 각양각색의 예술적 실험을 했지만 따로 자신들 내부에서 이론적인 통일성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면이나 기교의 면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고유한 원칙도 없었다. 이러한 측면으로 하여 다다는 예술론과 창작활동 사이에서 모순점을 안고 있었으며, 떠들썩한 활동에 비해 창작의 면에서는 별다른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다다는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 중에서도 20세기의 예술의 진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갖게 해주었다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다다이즘이 미래파에서 비롯되었다면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다다이즘을 주도했던 브르통이 초현실주의를 창시했다는 사실에도 잘 나타난다. 다다이즘의 자기부정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초현실주의인 셈이다. 초현실주의는 문명의 속박 속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이성의 횡포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을 석방시키고자 한 예술운동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 예술운동이 초현실주의인 셈이다.      초현실주의는 1924년 11월, 앙드레 브르통이 을 발표하면서 개막되었다. 이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의식적인 경험과 무의식 속의 경험을 일치시켜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 합리적인 세계와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르통을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러한 예술관은 무엇보다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꿈과 환상에 대한 강조는 낭만주의나 상징주의의 색채가 깊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낭만주의나 상징주의는 예술의 목적의식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현실주의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무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것의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자동기술이다. 자동기술은 무의식 중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순식간에 그대로 받아쓰는 것을 가리킨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을 재빨리 받아쓰는 것이 자동기술인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자동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동기술은 말이다. ‘욕망’이 되는 말이다.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욕망에 몸을 맡기는 말이다.”      자동기술은 작가가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작가의 미학적 기준이 발동하게 된다는 점과, 의식을 잠재우게 되는 과정으로 미루어 볼 때 자동기술에는 인위적인 면이 강하다.      자동기술법은 최면술과의 혼동으로 인한 오해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절대적인 자동기술은 거의 존재하기 어렵다. 무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려 그것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또한 객관적이고 외적 형식을 갖추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과연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ㄷ면 진정한 표현은 침묵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예술에서 침묵과 같은 지적인 자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초현실주의에서의 자동기술은 이처럼 모순적이다.      다다이즘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도 구체적인 창작으로 이어지는 데는 실패했다고 해야 옳다. 따라서 다다이즘과 더불어 초현실주의는 운동의 산물인 작품이 직접적인 예술적 성과와 가치를 획득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징주의 운동 말기에 이르면서 문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점과, 삶으로부터 단절되면서 문학이 갖게 되는 不毛性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도 일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스페인의 아방가르드      스페인의 아방가르드는 루벤 다리오(Ruben Dario)에 의해 모더니시모(modernismo)가 수입되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풍미한다. 그러한 과정에 스페인에서는 다시 새로운 문학 운동에 대한 열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방가르드의 물결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 전 유럽을 강타하고 있었는데, 이 물결이 스페인라고 그냥 지나갈 리는 없었다.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이 있고 나서 스페인에도 아방가르드가 소개되었고, 그 이후 스페인식 아방가르드 운동인 울트라이스모가 모더니즘 운동의 뒤를 이어 중요한 문예사조로 등장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울트라이스모는 모더니즘의 호화스러운 수사법과 이야기 스타일, 감상주의, 음악성 등을 과감히 버리고 미래주의의 테마와 같은 현대문명의 산물들을 소재로 하여 비유와 이미지에 의거하는 시적 표현 방식을 추구한다.      초기에 아방가르드의 물결을 수용하고 작품을 발표한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구이레르모 데 토레)(Guillermo de Torre), 고메즈 데 라 세르나(Gomez de la Serna)와 게라르도 디에고(Gerardo Diego)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근대 문명 속에서 테마를 추구하고, 은유적 곡예(acrobacia metaforica)를 위해 감정적, 일화적 요소를 배재한다.      이들 중에서 특히 고메스 데 라 세르나(Gomez de la Serna)는 초기 서반아 아방가르드의 개척자적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는 간단한 형태의 유모적인 은유가 눈에 띄는 ‘그레게리아’라는 형태의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라면 “사물이 스스로 외치는 소리”이다. 그의 시작법은 사물이 가끔씩 보여주는 숨겨진 의미나 이미지를 발견하는 데 있다. 이러한 그의 ‘그레게리아’는 심각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단순함과 현실의 파괴를 기반으로 한 장난스러운 문학이었다.      울트라이즘이 시들고 나서 Vicente Huidobro(빈센트 후이도브로)의 창조주의(Creacionismo)를 표방한 Gerardo Diego(게라르도 디에고)는 뒷날 과거 공고라의 시풍은 물론 초현실주의의 시풍까지 받아들여 자신의 시를 현대적으로 승화시켰다. 디에고의 창조주의에 따르면 시는 자연이나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언어의 창조이다. 그의 기발한 이미지는 아방가르드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는 27세대의 복고주의의 시어 개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그의 창조주의는 지금까지 시에서는 절대적인 법칙처럼 여겨져 오던 자연이나 인간의 모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방은 가장 인간적인 본능이며 쾌락이다. 당시까지 모든 예술은 이 모방에서 자신의 시작점을 찾고 있었다. 창조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을 탈피하려고 했다. 이제 디에고(Diego)부터는 말이 시를 쓰는 시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창조주의의 원조인 칠레의 비센떼 우이도브로의 시학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디에고(Diego)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창조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또 다른 표현방법일 뿐이다. 창조의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낸다거나 혹은 고백한다는 의미이다.      디에고는 창조주의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에도 능숙하기 때문에 전통시와 아방가르드를 적절히 조화해 극도의 상징적 미를 창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방가르드와 그 자신의 경험을 합쳐 독특한 詩世界를 구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름으로 독립된 채 스페인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초현실주의의 경우 독자적으로 스페인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아방가르드라는 분위기 전체에 묻혀 들어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는 그 자체로서는 스페인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도 없다.      아방가르드(특히 초현실주의)의 시작법은 로르카(Lorca)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로부터 반발을 샀으며, 그 반발로서 순수시(Poesia pura)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동양의 하이꾸에 대한 모방을 포함한 아방가르드의 표현기법은 스페인의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져 시어의 혁명을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 이는 나아가 극단적인 비논리, 비이성의 시학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기까지 했다.   5.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논할 때 첫 번째 주인공으로 거론해야 할 시인은 빈센트 후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이다. 그는 창조주의(Creacionismo)의 선구자이며, 그의 창조주의는 전 스페인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인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창조이며, 따라서 시인은 반드시 모방론적인 시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시인이여, 어찌하여 장미를 노래하는가. 시 속에 장미를 꽃 피우라.      이보다 더 빈센트 후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 시론을 나타내는 말은 찾아 보기는 어렵다. 창조주의 시론에 따르면 시인은 자연을 흉내 내지 않고 작은 신이 되어 시 속에서 창조하는 자유를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시는 자연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자연과는 상관이 없는 언어로 이루어져야 창조주의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적 감흥의 재료가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언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객관적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도 결국 주관적인 재창조의 결과이어야 한다. 모든 것은 창조되어진 것이거니와, 시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창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창조주의 시학이다. 따라서 그의 창조주의 시학은 다다와 같은 완전한 파괴주의 문학경향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학의 재건에 더 치중한 것이 그의 창조주의 시학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노 브룰은 아방가르드의 가장 극단적인 개혁의 하나인 글자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글자시는 의미체계의 최소단위인 단어를 파괴해 시인의 독자적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그 고유의 언어로 이루어진 시를 말한다. 한 나라의 국어는 시인의 영감을 표현하는데 언제나 최후의 장벽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글자시다. 이것이 마리아노 브룰에게 수용되어 당시 아방가르드의 한 줄기를 이어갔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이후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강하게 띈다. 네루다의『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 절망의 노래』는 중남미 초현실주의의 최고봉을 이룬 시집이다. 그의 시 쓰기는 먼저 생각나는 대로 쓴 다음에 후에 수정해나가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유럽 초현실주의의 기법인 자동기술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의식적으로 시작에 참여하는 방식을 취하므로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무의식에는 불연속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네루다(Neruda) 이후 중남미의 초현실주의는 옥따비오 빠스에게로 넘어가는데, 옥따비오 빠스는 네루다와는 달리 프랑스 초현실주의에 직접 영향을 받아 시에 새로운 현실을 담아낸다.   6. 맺는말      아방가르드가 전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준 영향은 그렇게 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어권 내에도 아방가르드가 수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에 수입된 아방가르드는 각기 독특한 형태로 각색되면서 시인과 문화권에 따라 크게 변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완전한 의미에서의 아방가르드 작가는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정신은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실제로는 스페인어권 작가들이 자신의 시적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 것에 불과한 듯싶기도 하다. 일단 그 문을 통과한 다음 스페인이나 중남미 작가들은 기존의 유럽의 반항아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일반, 그리고 유럽의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그것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성격과 표현방법을 중심으로 자세히 설명을 한 바 있다. 하지만 스페인과 중남미의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는 별로 자세히 기술을 하지 못했다. 전체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각각의 詩人에 대한 기술이, 특히 스페인과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시인에 대한 기술이 충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도 여기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표현방법과 표현기법이 가장 첨단적으로 실험되었던 것이 아방가르드 시대이다.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시의 표현방법과 표현기법에 대한 공부를 통해 여러분 자신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이 오늘 여기서 아방가르드에 대해 탐구하는 가장 주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현암사, 1992), pp.131- 180. 민용태, 『서중남미 명시 사냥』, 《현대시학》 5-10월호 (1993). 민용태, 『서중남미 문학론- 제 3의 문학의 현장에서』(전예원, 1989), pp.291-325. 박 철, 『스페인 文學史』(삼영서관, 1989), pp.239-306. 신현숙, 『초현실주의』(동아출판사, 1992), pp.15-18, pp.61-66, pp.75-107. 아놀드. 하우저, 『백낙청ㆍ염무웅 共譯, ‘文學과 藝術의 社會史’ - 現代篇』(創作과批評社, 1992), pp.227-240. 아드리안 마리노, 「아방가르드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외국문학》 제1호(1984., 장선영, 『西班牙 라틴아메리카 文學史’』(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87), pp.165-170. [출처]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이은봉|작성자 옥토끼
42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민용태 댓글:  조회:141  추천:0  2018-09-06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                                     민 용 태(스페인 왕립한림원 위원,고려대 명예교수)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가 태어났다면 우리는 초현실주의 시에 드리워진 말라르메나 렝보, 르뜨레아몽의 영향을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자동 필기법(Automatism)”이 말라르메를 비롯한 상징주의 시인들의 갈고 닦아진 시어를 증오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들은 분명히 빈상징주의자들이다. 초현실주의의 신은 절대 자유였다. 앙드레 브르똥은 말한다: “자유라는 어휘만이 아직도 나를 격동시키는 전부이다. 이 어휘만이 안류의 낡은 영광주의를 무한히 유지하는 데 적합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어휘만이 나의 유일하고 절당한 갈증에 답변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그 숱한 불명예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정신의 자유’가 또한 우리에게 상속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정신의 자유를 지독하게 악용해서는 안 될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상상력을 노예 상태로 환원시킨다는 것은, 소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조잡하게 불리는 명칭과 관계될 때 조차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최고의 정당성을 죄다 도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직 상상력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고, 상상력이 그 가공할 금기 사항을 조금씩 취소시킬 수 있으며, 그리고 기만당할 두려움 없이 내 자신을 방임할 수 있는 곳 역시 이 상상력 속이다(더 이상 기만당할 수도 없겠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의 잘대적 정신의 자유에 대한 집념은 마침내 문학까지도 거부하게 만든다. 제1 선언에 이어, “1925년 1월 7일의 선언”은 더욱 단호하다. “첫째, 우리는 문학과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에 따리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이용할 수는 있다. 둘째, 초현실주의는 새롭고 편리한 표현 수단도 아니며 시의 형이상학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수단이다.(이하 생략)” 즉 초현실주의는 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된 상상의 자유를 최대로 확장시켜,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 꿈의 세계까지를 해방시키려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쉬르레알리즘은 문학 뿐만 아니라 회화, 기타 모든 시각 예술을 비롯 모든 인간 해방 운동에 혁명의 기치를 든다. 그들의 해방운동적 성향은 마침내 엘뤼아르, 아라공,브르똥 등이 연 이어 공산당에 가입하는 정치적 색체까지 띠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실천이라는 변증법적 진실에 직접 참여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자유 해방 정신의 확장 과정에서 비롯된 하나의 사건으로 보아야 하리라. 초현실주의 이런 혁명적 성향은 일체의 전통과의 단절을 부르짖었던 “전위문학(1916-1923)”고도 일맥 상통한다. 쉬르레알리즘이 트리스탄 자라의 “다아이즘”에서 나왔다는 이론도 그래서 타당성이 있는 것. 아방 가르드 예술은 많은 경우 재래의 모습 예술 형식과 사상을 일체 거부하는, 매우 낙천적인 파괴주의였다. 이들은 일체의 형식의 파괴를 앞세웠던만큼 장난끼와 유모어로 가득찬 예술운동으로 일관했으며, 결국 별다른 시학도 작품도 남기지 못했다. 전위예술의 해방 정신을 “자동필기법”이라는 시학으로 대치한 것이 초현실주의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는 그러나 전위예술만큼 낙천적이지는 못 했다.억압된 본능의 해방을 위해 쓰여지던 “자동필기법”은 구겨지고 문드러진 잠재의식의 혼란스러운 표출이었던만큼 때로는 지극히 어둡고 염세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든 초현실주의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창작의 산실로 초대하면서, 혼란과 우연을 그의 텍스트 속에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1919년 브르똥과 수뽀가 함 께 펴낸 “자기장(Les Champs magnétiques”에서 그들은 최초로 자동 필기법을 실험하는데, “꿈과 불면의 중간 상태에서 시적인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한 번 백지 위에 우연히 떨어진 말은 그대로 필연이 된다. 그것은 마치 “유리창에 부딪힌 말”처럼 더러는 투명하고 더러는 흩어져 사라진다. 이들 불가사의한 낱말들, 쇠붙이들이 서로 끌고 당기며 이룩하는 연상의 자장(磁場)이 바로 시라는 것.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의식의 눈에는, 우선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프로이트 같은 의사나 상상력이 자유로운 독자의 눈에는 또 의미가 보여지고, 때로는 황홀한 꿈의 체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말라르메나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법을 거부한 것은 힘들여 연상을 다듬고 짜 맞추는 그 인위적 과정이 위선이라는 것. 그것은 시작 과정에서 시인 자신들조차 자유롭지 못한 억압이니 행위라는 데 있다. 이미 말했듯, 초현실주의는 좋은 시 좋은 문학 만들기보다는 일종의 해탈을 위한 정신 수양에 있었만큼, 그 작업 행위 자체까지 정신 해방 연습이어야 했다. 그들에게 시적 영감이란 천재적 재능이 있는 자에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나 내면에 지니고 있는 것들이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것을 가장 자유롭게 끌어낼 수 있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어떤 시인의 천재성이나 개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을 표출하는 건강한 집단시(集團詩)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 구체적인 예가 “맛있는 시체 놀이(Exquisite 이다. 여러 가지인데, 첫번째 사람이 명사 하나를 쓰고 그 종이를 접는다. 다음 사람이 형용사, 또 다음 사람이 형용사...이런 식으로 앞 사람의 말을 모르고 써 나가면 하나의 부조리하고 신선한 시구나 정의(?)가 태어난다는 것. 또 다른 방법은 한 시인이 시 한 연을 쓰고 덮고, 다음 시인이 그 끝줄이나 맨 앞줄을 보고 다시 한 연을 쓰고....이런 식으로 여럿이 한 시를 만들어가는 놀이. 말하자면 하나의 시인이 작위적으로 뜻이나 연상이 통하는 이미지들을 엮어가는 것보다는, 놀이에 참여한 각 시인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우연히 떠오르는 말들을 적어감으로서, 이들 무작위한 시어들이 만들어가는 의미의 무늬들을 감상하는 재미를 즐기자는 것. 이런 놀이는 마치 우리의 선인들이 포석정에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연작 시 놀이를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까. 여기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더러 신선한 태어나는 기적을 맛보았다는 점. 그래서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맛있는 시체가 새로운 와인을 마시리!” 하고 놀이를 즐겼다 한다. 물론 쉬르레알리즘의 이런 자동필기법은 실제로 상투적 시어와 참신하지 못한 시상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들이 의식적으로 시 만들기에 쏟는 억압적 노력과 상황에서 해방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와 작스 로보, 이태리의 상기네띠, 그리고 찰스 톰린슨은 일본의 렝가(連歌)를 모방하여, 1971년 빠리 어느 호텔에서, 또 다시 “맛있는 시체 놀이”와 같은 연작시를 시도한다. 각각 스페인어, 이딸이아어, 불어, 영어로 씌여진 시는 우리 동양시가 기대한 만큼 기(氣)의 통일성이나 현묘성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시창작의 개인적 작위성을 누그려Em렸다는 점에서는 기억할만한 사건이었다. 이제 우리는 초현실주의 전개 역사나 인간정신 해방 운동의 성패(成敗)에 대해서보다는 쉬르레알리즘 시학의 수사학적 측면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 예술 운동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현대시에 엄청난 시어의 개혁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서반아의 시인이며 평론가인 카를로스 보우쇼뇨는 그의 “슈퍼리얼리즘과 상징화”라는 책에서 초현실주의가 시표현의 새로운 상징의 문을 열었음을 상세히 파헤치고 있다. 형식주의 문학론이나 구조주의 시학은 시대적으로 아방가르드 문학의 봉기와 초현실주의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형식주의 발아 시기가 볼쉐비키 혁명 전후 1916년경이고, 그 때가 또한 구조주의의 원조 페르디난드 소쉬의 “일반 언어학 강론”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창작문학이나 언어 이론, 문학 이론의 일치점은 현상학적 철학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언어가 인간됨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이다. 형식주의가 문학은 사상이나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그 문학성이 달려 있다고 보는 시각이나, 초현실주의가 인간의 해방은 그가 쓰는 언어의 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은 언어의 중요성의 인식에서 일치한다. 이미 언급한 쟝 꼬앙의 “시어 구조”론이나 보우소뇨의 “슈퍼리얼리즘과 상징화” 등의 이론은 형식주의와 함께 구조주의적 시어 분석이 뛰어나다. 구조주의 시학의 공헌은 문학어, 시어가 일반 산문어와는 다른 “반산문” 혹은 “일탈(desviación)” 현상이며, 그 저항 이유는 뜻하지 아니한 연상을 통한 숨겨진 일치점을 발견하는 작업이라는 데 있다. 말을 바꾸면, 마야코프스키를 비롯한 미래주의 시에 관심을 둔 형식주의의 발견처럼, 문학어는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일상어에 대하여 일부러 “낯설게 하기(singularization)” 언어인 것이 밝혀진다. 구조주의는 그 “낯설게 하기”가 다의미(polisemia) 산출의 방편이었던 것을 지적한다.즉 정서적, 영상적, 관념적 다의미를 지향하는 문학어는 일상어의 관습성, 논리성을 파괴하는 것을 항상 전제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카를로스 보우쇼뇨의 이론에 따르면 초현실주의 시는 시어의 사용에 있어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상징주의의 시에 비해 엄청난 시어 성격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전래의 시어나 상징주의 시가 구문이나 언어의 관습성에 있어서 “까만 하늘”같은 표현처럼 맞지 않은 소리를 하거나,“자동차의 코”같은 표현처럼 상당하지 않는 부분에 “코”를 갖다 붙이는 이상한 표현을 일삼았다면, 초현실주의 시어는 “관계없음(inconexión)”, “구문 상으로는 일치하나 내용상 관계 없음”, “제멋대로의 표현(autonomía)”이 성행한다고 말한다. 초현실주의 시의 이런 반언어적 시어 구조는 그러나 연상 의미에 있어서 “선험적 일치점(ecuaciones preconscientes)”을 야기시키거나,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상상을 자극한다는 것. 초현실주의로부터 시어는 일상어의 이해와는 달리, 우연하게 떨어진 시어라할지라도 그 당위성을 가지며, 독자는 그 당위성의 바탕 위에서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상상의 필연성을 요구한다는 것. 이것은 마치 잘 번지는 창호지 위에 떨어진 붓 자국처럼, 그 점이 무슨 점, 무슨 강, 무슨 호랑이의 모습으로 번져갈 줄은 모르지만, 일단 떨어진 붓 자국의 무늬는 절대이며, 그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자유라는 것. 보우쇼뇨는 몇 번이고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시인 비센떼 알레익산드레의 다음 두 구절을 예로 든다. 1. “나의 목 휘감지 말아요, 밤이 온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2. “너의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거야, 폭풍이 퍼렇게 멍이 드는 동안” 1의 경우는 그래도 연상이 가능하다. 목을 휘감으면 눈이 가려질게고, 그러면 나는 밤미아라고 생각할지 모르니까. 논리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가린다고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여기서의 알레익산드레의 독특한 사랑관, 사랑은 파괴요 죽음이라는 엄청난 역설이 도사리고 있는 것. 2의 경우는 정말 부조리 그것이다. 이 시인의 시를 이해하려면, 우주의 현상이 시인의 내적 갈등에 지배된다는 새로운 기상 원칙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폭풍”은 원칙 없이 “너의 심장”의 어떤 고뇌스러운 현장이 되어야 한다. 심장이 어떻게 “입으로 튀어”나올 수 있느냐는 다음 문제이다. 이쯤 되면 시어사용은 그야말로 자유자제다. 나는 문득 이 태백의 “...나 술 취했으니 잘라네./ 생각나면 내일 거문고 들고 다시 오게나”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초현실주의 시법은 표면상 이처럼 무책임하면서 자유롭다. 예술혼이 도학(道學)의 경지처럼 극도의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통하는 언어이다. 역사상 초현실주의는 “사랑과 시와 자유가 동시에 추구되는” 현실적 혁명을 시도했다. 그것은 역사상 실패한 운동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초현실주의는 동양 철학의 바탕 위에서 여물어졌다고 본다. 그것은 옥따비오 빠스의 일본 시나 당시에 대한 심취, 그리고 특히 탄트리즘과 노장사상, 역경에의 탐익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장자의 “소요유”의 경지에서처럼 의식이 우주적으로 자유로워질 때 초현실주의는 또다른 차원의 커다란 자유를 느낀다.       현대 문예 사조에 있어서 동서양의 교류     동양의 20 세기 문예 사조는 서양의 영향 하에서 생겨난다. 일본의 근대 문학이 그렇고 중국의 “백화문학”이 그렇다. 또한 우리의 “신체시(新體詩)”도 서구의 낭만주의 상징주의의 영향 하에서 싹튼다. 실제로 동양의 오늘 문학은 서양 문학의 형식과 내용을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재수용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문학이라는 것이 형식적으로 각각의 언어적 속성에 크게 지배 받는 것인만큼, 동양이 서양 문학 형식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국의 언어나 전통에 의하여 재각색된 형태들이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동양 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나 소설, 연극의 원형들은 동양 전통의 계승 측면보다는 서양의 그것의 모방성이 두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오늘 시를 쓴다면 누구나 자유시 형식을 취하고, 소설을 쓴다면 사실주의적 기법을 생각하는 것도 모두 서양에서 온 사고들이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본에는 하이꾸(俳句)가 쓰여 지고 우리 문학에도 시조가 살아있다. 또한 문학 내용의 측면으로 살펴보아도 노장(老莊)이나 불교적 관조가 두드러진 것이 동양 문학들이다. 더구나 동양인적 섬세한 감수성과 심미주의에서 잉태된 많은 시나 소설들이 반드시 서양 문학 영향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문학의 대상이나 소재도 모두 각 나라의 정서나 문화 환경에서 잉태된 독창성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학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사고 자체가 다분히 서양에서 온 것들이다. 우리가 “동서 문예 사조”를 이야기하면서 서양 문예 사조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은 비로 이 때문이다. 즉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에 대한 통념이나 작법들이 대부분 서양 전통에 말미암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문학에 대한 사고가 그 본거지에서 어떤 당위성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를 정확히 살피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우리 동양에 이와 비슷한 전통의 뿌리가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었던가를 살피는 일이 필요했던 것. 이제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현대 문학 사조를 대별하고 나서, 우리는 우리의 현대 문학이 바로 이것들을 모방하며 자라왔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양 문학을 모르고 오늘 동양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양 현대시의 일반적 형식인 자유시는 서양의 “상징주의”의 산물이며, 그 또한 시적 언어의 다양한 의미 산출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형시에서처럼 시행을 음성적 법칙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자를 때와 자유시에서처럼 자유롭게 자르고 붙일 때의 차이는 크다. 자유시에서의 시행 바꾸기는 왜 꼭 거기에서 시행을 옮기는가에 대한 이유와 의미가 또 필요하다. 한국시가 서양의 자유시 형식을 본따고 자라오면서 잊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양의 상징주의가 만든 자유 시 형식의 그 엄청난 혁명성이다. 그 때까지 서양시는 시(versus)라고 하면 곧 정형시를 일컬었다. “versus”의 어원 자체가 “되돌아온다”는 리듬의 뜻에서 발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상징주의는 시어나 시행의 모호성과 다의미 산출을 욕심냈다. 서양 시에서 종래의 시행(정형시행)은 소리 단위의 제약을 받은 의미 단위였다. 예를 들어 11 음절이면 무조건 10음절에 리듬의 축(axis rítmico)을 둔 각운(脚韻,rima,)을 필요로 했다. 10 음절부터 11,12 음절 안에 시행(verso,verse)은 끝난다. 그러다 보니, 소리의 제약에 따라 이따금 문장이 한 시행에서 완결되지 못하고 다른 시행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런 “넘어가기”를 수사법적 용어로 “뛰어넘기(encabalgamiento)”라고 하며, 이런 경우 시행을 뛰어넘은 한 문장으로서의 의미와 주어진 시행 그대로의 단독 의미라는 두 의미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뛰어넘기” 수사법은 정형시에서는 흔히 음절 맞추기적 필요성에서 생긴 결과로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음절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시에 와서는 시행 바꾸기가 그 때 그때마다 “왜?”라는 의미 요구 앞에 서게 된다. 자유시는 시행이 산문의 문장(oración,sentence)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장은 시행과 달리 하나의 소리 단위, 하나의 의미 단위이다. 자유시가 산문의 문장의 법칙을 시행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면서, 말하자면 시인의 마음대로 시행을 바꿀 수 있게 만들면서, 이제는 “왜 여기에서 시행을 바꾸는가?”라는 질문에 시시각각 대답해야 하는 의미 요구를 받게 되었던 것. 따라서 많은 의미 산출을 욕심내던 상징주의가 자유시를 도입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시행 바꾸기 형식조차도 정형시의 의미 외적인 외재율보다는 또다른 의미 산출의 강력한 도구로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한 문장은 한 소리 단위면서 동시에 한 의미 단위이다. 이제 시는 이런 산문의 문장적 성격을 시구 나누기에 도입함으로서, 자유시의 한 시구는 이제 반드시 하나의 의미 단위의 성격을 강하게 요구 받게 된 것. 자유시 형식이 우리 시에서도 혁명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시나 시조가 모두 정형시였으니까. 그러나 우리 신체시는 중국의 백화문학처럼 우선 문학의 문어체, 한문시, 한문체에 대한 구어체로 쓰기에 더욱 열중했다. 김안서나 소월의 경우에서 보듯, 그들은 구어체로 신시를 쓰면서 그 율격의 문제를 민요에서 따오면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차차 자유시체로 우리 시가 정착해간다. 말하자면, 시 리듬 자체의 벽혁의 혁명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새로운 시형식, 말하듯이 놀해하듯이 자유롭게 쓰기라는 이상한 “신체시”가 생긴 것. 여기에서 우리 시는 민요조로 쓰느냐, 아무렇게 자유시로 쓰느냐에 대한 고민의 순간조차 없었다. 말하자면, 왜 꼭 이 시를 자유시로 써야 하느냐 하는 고민조차도 우리 시인들에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는 상징주의의 다양한 의미 산출의 장치인 시형식의 묘(妙)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음(音) 상징의 묘(妙) 또한 우리 시에는 그다지 오묘한 것들이 드믈다. 그 이유인 즉, 우리는 서구 상징주의의 다의미 창출의 고뇌와 형이상학적 깊이보다는, 이와 너무 다르게 우리 시의 시표현이 흔히 안이한 감정주의적 서정성에 머문 이유가 여기 있다. 사실상 서양의 상징주의는 동양의 예술이나 시를 많이 모방하려 애썼다. 내가 “서양 문학 속의 동양”에서 자세히 연구하고 있듯이, 호꾸사이 그림의 여백(餘白)의 아름다움이나 동양시의 여운(餘韻), 하이꾸의 의미성 등은 서구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학자에 따라서는 자유시가 동양시 형식의 모방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그것은 라프까디오 헌이나 로띠 같은 동양을 서구에 소개한 작가들이 쓴 동양시의 자유로운 번역이나 서정적 글들이 새로운 시표현의 가능성을 여는데 기여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유 약우의 “중국의 문학 이론”은 동서가 비슷한 문학 이론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늘 이야기한다. 그는 중국의 심미주의 이론을 열거하고,“...서구에도 비슷한 것이 많다”는 식으로 개관한다. 그는 특히 에즈라 파운드의 “시각시(Phaopoea)”, “음악시(Melopoeia)”, “언어시(Logopoeia)”가 유협(劉勰)의 세 가지 무늬들 “형문(形文)”, “성문(聲文)”, “정문(情文)”과 비슷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서구 학자들이 추상적으로 미(美)를 논의하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오스카 와일드의 심미주의처럼 부도덕성까지 아름다움으로 간주한 경우는 중국 문학에 없었다고 못 박는다. 나는 동양시의 서정성이 다분히 서양의 후기 낭만주의적 감성하고 일치한다고 본다. 감정의 내적 성찰이나 암시성이 동양시에는 거의 일반화되어 있는 성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동양시가 더욱 탁월한 것은 상징주의 시가 개척한 동감각(synaesthesia)의 시적 활용이다. 이미 에즈라 파운드가 중국시의 이미지즘을 격찬했듯이, 실제로 동양시, 특히 당시(唐詩))에는 뛰어난 이미지의 활용이 보인다. 정 상홍은 “중국의 시론과 화론 1--산수시와 산수화”라는 글에서 왕유의 시에 대한 소식(蘇軾)의 평을 인용한다. “왕유의 시를 맛보면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즉 저 유명한 “시중유화(詩中有畵)”의 전통은 왕유뿐만 아니라 모든 동양시에 뿌리가 된다. 같은 글이 인용한 왕유의 “산중(山中)”이란 시를 보자.   “형계엔 흰 돌이 드러나 있고 날씨 차거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산길엔 애당초 비도 오지 않았건만 파란 산기운이 옷을 적신다.”   위 시에는 엄청난 공감각이 높은 시취를 자아낸다. 먼저 “날씨 차가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는 붉은 색,즉 따뜻한 색과 차가운 날씨가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촉각적 “차가움”과 시각적 “붉은 단풍”이 공감각(촉각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멋진 공감각 활용은 “파란 산기운이 옷을 적신다(空翠濕人衣)”이라는 절구다. 파란 색깔이 어찌 옷을 적시랴. 이를 강조하기 위해 “산길엔 애당초 비도 오지 않았건만”이라는 시구까지 달고 있다. 이런 표현이야 말로 공감각을 사용한 훌륭한 인상주의 그림이 아닌가. 우리는 상징주의와 인상주의가 상당히 혼동된 개념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말을 바꾸면, 동양시의 이런 인상주의 전통은 서구 상징주의가 그토록 탐내던 자연 속의 사물 사이의 교감을 이루어내는 장치였다. 프랑스 상징주의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영향 받은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바로 동양 예술의 이런 영상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심취했던 것. 나는 동양시의 영상미가 서구의 상징주의처럼 심오한 형이상학적 시취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안다. 그것은 동양시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배, 거기에 직감(直感)을 존중하는 진솔성이 서양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동양시는 시도(詩道)를 추구하는 반면에, 서양시는 끝까지 상징적 의미 추구의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동양 시인의 자연의 오묘성에 심취하여 삶의 향기를 이루어내려는 풍류정신이 앞서는 반면에, 서양은 신과 우주의 궁극적 원리를 밝혀내고자 하는 열념이 시작에 있어서까지 앞서고 있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있어 모호성이란 결국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으리라는 기대감의 확대이지, 천인(天人)합일이나 자연 속의 무아(無我)지경, 혹은 깨달음을 향한 열망은 아니었다. 동양 시인이 끝까지 시어나 말에 크게 무게를 주기보다는, 오하려 마음의 기(氣)나 풍경과의 합일에 마음을 쏟았다면, 서양 시인들은 마지막까지 말의 탐구, 시어의 표현 가능성의 확대에 더욱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 뜻에서 시인의 잠재의식의 해방까지 꿈꾸었던 초현실주의 또한 자연 중심, 풍경중심적 시학아라기보다는 인간중심의 해탈운동이었다. 자기를 버리고 자연과 하나 되는 불교나 노장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반(反)이성적 이성운동이었을 뿐이다. 동양이 서양에 배울 것이 있다면 시어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보다 투철한 개척 정신이다. 서양은 17 세기 바로크 문학에서부터 “인공적인 것이 아름답다(공고라)”는 것을 발견하고 문학하기에 있어서 말과 수사학을 최대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어쩌면 해체주의의 주장처럼 어차피 진리나 자연을 원 모습, 원가(原價) 그대로 표현할 언어는 없다는 확신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말을 바꾸면,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처럼 자연을 모방한다는 가능성을 벌써부터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말의 놀이 속에서 빛과 아름다움의 무늬를 산출하는 재미를 맛보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서양은 동양에서 언행일치(言行一致),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적 이상에 대한 믿음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행동과 삶을 그대로 구현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거기에 중용(中庸)에서 주장하는 성(誠)이 촉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라.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자연에 대한 성실한 사랑으로 언어를 빚을 때, 시인의 성실성에 흠이 없을 때, 인간은 성인스러운 절묘한 언어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이것이 최소한도 동양 시인의 믿음이다. [출처]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민용태 |작성자 옥토끼
41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 현중문 댓글:  조회:103  추천:0  2018-09-03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현중문  중남미 현대시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시 작품을 중심으로 번역·소개하려고 한다.  이른바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는 고려하지 않았다.  중남미 현대시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통의 부정과  혁신의 연속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시인들이 "영향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한결 풍성한 시 작품으로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가려는 지난한 시도라고  평가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먼저 중남미 현대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모데르니스모(Modernismo)의 시는  몇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고루해진 전통적이고 정형적인  시 형식을 탈피하려는 중남미 최초의 시운동으로,  세기말적 감수성과 중남미 크리오요(criollo)의 비전을  담아내려고 했다.  ☞ 루벤 다리오:「백조」  백조  다리오 / 현중문 옮김  중남미 모데르니스모 시인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의 시학을 잘 표현한 작품  시 제목에서 '고니' 대신에 '백조'라는 말을 선택한 까닭은  희고 청순한 하얀색의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고육책  원제는 El cisne. 출전은 『불경한 산문시』(Prosas profanas y otros poemas, 1896)  원문과 상세한 주석은 한글문서에 있습니다.  그때는 인류에게 신성한 시절이니  백조는 죽기전에 단한번 노래했다.  바그너 백조노래 멀리서 들려올땐  여명이 한창이고 재탄생 순간이니.  인간세 바다에서 춤추는 폭풍우 위  백조의 노래소리 끊임없이 들린다.  게르만 늙은신 토르의 망치소리와  아르간튀르의 칼 찬미가 잠재우며.  신성한 새 백조여! 백옥미녀 헬레네  레다의 청란(靑卵)에서 우아하게 태어난  절세미모의 공주, 불후불멸의 공주.  네 하얀 날개 아래 새로운 시는 빛과  조화의 영광으로 순수한 헬레네를,  영원한 이상의 헬레네를 생각한다.  Corregio(1490-1534)  Leda with the Swan(1531-32)  Oil on canvas, 152 x 191 cm  Staatliche Museen, Berlin  이어 전위 운동(Avant-garde)의 시작과 더불어  기존의 시 형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시학이  1910년대 칠레의 시인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가  주창한 창조주의이다.  우이도브로에 따르면, 시적 대상이란 언어 내부에만,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언어로서만 존재한다.  ☞ 우이도브로:「시학」  시학  우이도브로 / 박병규 옮김  비센테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는  칠레 출신의 아방가르드 시인.  1916년부터 프랑스에서 르베르디(Reverdy)와 함께  활동하면서 창조주의 시학을 주창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시집 『높은 매』(Altazor, 1931)  시가 열쇠가 되기를  수많은 문을 열 수 있기를.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무언가가 날아가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라,  그리하여 듣는 이의 영혼이 감흥에 떨도록.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언어를 조심하라.  생명 없는 형용사를 죽여라.  우리들은 신경 조직이다.  근육은 옛 유물이니  박물관에나 진열하라.  그렇다고 힘이 빠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활력은  머리 속에 있다.  시인들이여! 왜 장미를 노래하는가.  시 속에서 장미가 피게 하라.  우리들이 보기에 만물은  오로지 태양 아래 살고 있다.  시인은 작은 하느님이다.  『물거울』(1916) 중에서  이러한 일련의 아방가르드적 시 개혁 운동 정점에  위치한 시인을 들라면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초기 네루다(Pablo Neruda)를 꼽겠다.  이 때의 네루다 시는 시인의 가슴에서 편린처럼 튀어나와  이내 명멸하는 덧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이다.  ☞ 네루다: 시학 (Arte poética)  ☞ 네루다: 시  시학  네루다 / 조민현 옮김  어둠과 공간 사이에서, 성장(盛裝)과 처녀 사이에서  유별난 심장과 불길한 꿈을 안고,  때 이르게 창백한 안색, 시들어버린 이마  하루하루 삶을 여윈 분노로 상복을 입고,  아, 꿈결처럼 마시는 보이지 않는 물방울과  전율하며 받아들이는 모든 소리 앞에서  나는 언제나 갈증 없는 목마름과 차가운 열병을 앓는다.  마치 도둑이나 유령이 나타나듯이,  불현듯 돋아나는 청각(聽覺), 종잡을 수 없는 고뇌.  그리고 두껍고 단단하게 펼쳐진 겉껍질,  망신당한 웨이터 같고, 약간 목쉰 종소리 같고  낡은 거울 같고, 외딴집의 냄새 같은  그곳에 밤이 되면 만취한 손님들이 들어온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 냄새, 꽃도 없는데,  ― 이렇게 얘기하면 훨씬 덜 우울하겠지 ―  그러나, 사실, 내 가슴을 후려치는 바람과  침실에 굴러 떨어진 밑도 끝도 없는 밤들과  희생으로 불타는 하루의 소음은  우울하게, 내 안에 있는 예언의 목소리를 요구하는데,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을 듣지 못한 사물들의 주먹질과  휴전 없는 동요와 혼미한 이름 하나 있으니.  『지상의 거처 I』(1933)에서  시 (詩)  네루다 / 김현균 옮김  그러니까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 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찔려  벌집이 된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 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1964) 중에서  후기 네루다는 이러한 단련의 과정을 거쳐  누구나 읽어도 수긍할 수 있는 일반적인 비유와 이지미와  시상을 노래하는데, 보르헤스 또한 이와 유사한 도정을 걸어갔다.  보르헤스는 전위운동(극단주의, Ultraísmo)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작 활동을 시작했으나  만년에는 "유치하다"고 초기 시작품을 부정적으로 평했으며,  일부 작품은 재출판을 극구 반대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시학」은 만년의 작품인데,  우리는 시와 산문을 포함하여 보르헤스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요 모티브를 접할 수 있다.  ☞ 보르헤스:「시학」  시학  보르헤스 / 현중문 옮김  보르헤스 후기 시에서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이 시에서도 물, 세월, 강물, 거울 같은 평범한 이미지를  중첩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리((琉璃))라는  미학적 응결물을 창출해내고 있다. 원제는 Arte poética  물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강을 보고  시간이란 또 다른 강임을 기억하라.  우리들은 강처럼 사라지고  우리 얼굴은 물처럼 흘러감을 알라.  깨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꿈,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꿈이며  우리 육신이 두려워하는 죽음이란  밤마다 찾아오는 죽음, 꿈이라 생각하라.  나날의 일상에서 인간이 살아온  유구한 세월의 상징을 보고,  세월의 전횡을 음악과  속삭임과 상징으로 바꾸어라.  죽음에서 찾아낸 꿈, 석양에서 찾아낸  서글픈 황금, 이것이 시일지니,  가난하고도 불멸하는 시일지니,  여명과 석양처럼 번갈아드는 시일지니.  오후가 되면 종종 거울 깊은 곳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얼굴 하나 있으니  예술은 그 같은 거울이 되어  우리 얼굴을 보여주어야 한다.  불가사의한 일에 신물이 난 율리시즈는  눈물이 났단다, 먼발치로 보이는 이타카  푸르고 소박한 고향, 예술은 그런 이타카  영원히 푸르지만 불가사의는 없는 이타카.  예술은 또한 흐르면서도 제자리에 머무르는  끊임없는 강물이며, 그 끊임없는 강물처럼  자신이면서 다른 사람으로 유전하는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유리(琉璃)이다.  『제작자』(1960)중에서  20세기에 시를 쓰는 작업,  특히 네루다의 매끄러운 시와 시낭송 열풍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침묵으로 변한 이후에 시를 창작하는 작업은  성냥개비 하나로 대낮처럼 밝은 네온사인의 거리를 밝히보려는  안타깝고도 안쓰러운 일임을 모두들 자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인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기보다는  "시란 무엇인가", 나아가서는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천착한다.  다시 말해서, 시 창작을 다룬 시, 메타시의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메타시의 첫 운을 뗀 시인은, 내가 보기에,  멕시코 시인 파스(Octavio Paz)이다.  파스의 시세계는 매우 복잡하여 한마디로 축약하기 곤란하나,  이제는 시인의 의도를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고  의미의 주변이나 어슬렁거리는  시어(詩語)를 붙잡고 대판 씨름을 벌인 것은 분명하다.  ☞ 파스:「시인」 (업로드 예정)  이어 우리는 파라(Nicanor Parra)의 반시(反詩)를 만난다.  파라는 모데르니모에서 보여준 시어의 조탁을 거부하고  일상어를 도입하며, 네루다가 보여준 부드러운 리듬과 서정성에  반기를 들어 일상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시를 시답게 만든다고 여겨온 대부분의 자질들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흙먼지 이는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 파라:「선언문」  선언문  파라 / 박병규 옮김  반시(反詩) 선언문으로  니카노르 파라(Nicanor Parra, 1914-)가 거부하는  시의 전통과 옹호하는 글쓰기를 잘 드러낸 작품  원제는 Manifiesto(Manifiesto, 1963)  신사 숙녀 여러분,  이것이 저희들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시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보기에  시란 사치품이었습니다만  우리들에게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정중하게 말씀드려  우리는 선조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시인은 연금술사가 아니라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성벽을 쌓는 미장공이고  문과 창문을 만드는 일꾼입니다.  우리들은  일상 언어로 이야기를 나눌 뿐  언어의 연금술을 믿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시인이 저기서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무는 올곧게 자란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들은 창조주 같은 시인  싸구려 시인  백면서생 같은 시인을 고발합니다.  공손하게 말씀 드려  이분들은 모두  피고소인으로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허공에 성채를 지으려고 한 죄  시간과 공간을 허비한 죄입니다.  달에 바치는 소네트를 만들면서  파리의 최신 유행을 따라  단어들을 우연하게 결합한 죄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상(思想)은 입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들은  짙은 선글라스의 시  영풍 농월의 시  챙 넓은 모자의 시를 배격합니다.  그 대신  안경을 벗은 눈의 시  진솔한 가슴의 시  모자를 벗은 사람의 시를 옹호합니다.  우리들은 요정이나 신화를 믿지 않습니다.  시란 이런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삭으로 치창한 여자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이제 정치적인 차원입니다.  우리 앞 세대는  -정말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굴절하고 산란했습니다.  몇 분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였는지 알 수가 없으나  우리들은 그렇게 추정합니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민중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존경받는 부르주아 시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몇 분들만이 민중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이 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과 행동으로  지배적인 시를 비판하고  현재의 시를 비판하고  플로레타리아의 시를 비판했습니다.  우리들이 인정하는 공산주의자들,  그러나 시는 볼품이 없었고  초현실주의 아류였으며  삼류 퇴폐주의였으며  물 건너 온 낡은 도식이었습니다.  형용사의 시  후각과 미각의 시  자의적인 시  책을 베낀 시  그리고  언어 혁명에 기초한 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기초한 시  관념 혁명에 기초한 시였습니다.  극소수의 엘리트를 위해  "절대적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악순환의 시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호를 그으며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이런 시를 썼을까.  쁘띠 부르주아를 놀라게 하려고?  한심하게도 시간만 낭비했으니!  쁘띠 부르주아는 먹거리가 아니면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로 놀라게 하려고 들다니!  지금 사정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황혼의 시  밤의 시를 썼다면  우리들은  새벽의 시를 옹호합니다.  이것이 우리들 메시지입니다.  시의 광채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시는 누구나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료 여러분, 이것 뿐입니다.  젊잖게 얘기하면  우리들은  작은 하느님의 시  신성한 소의 시  분노한 투우의 시를 비판합니다.  구름의 시에 반대하는  우리들은  지상의 시를 주장합니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들은 지상에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카페의 시에 반대하여  자연의 시를 주장하며,  살롱의 시에 반대하여  광장의 시  저항의 시를 주장합니다.  시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선언문』(1963) 중에서  더 이상 내려딛을 곳이 없는 일상의 평면에서  시는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테면, 파체코(José Emilio Pacheco)의 작품에서 보듯이,  상호텍스트성으로서의 시 개념이 등장하고,  독자의 위상은 공동 창작자로 격상된다.  ☞ 파체코:「익명의 옹호」  ☞ 파체코:「동조운에 관한 고찰」  익명의 옹호 (인터뷰를 거절하기 위해 조지 무어에게 보내는 편지)  파체코 / 김현균 옮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é Emilio Pacheco, 1939-)는  멕시코 출신의 시인이자 작가  원제는 Una defensa del anonimato  친애하는 조지 씨, 나는 우리가 왜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써 놓은 것을 후에 출판하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메시지가 담긴 병들과 쓰레기로  가득 찬 바다에 병 한 개를 던지는 것입니다.  조류를 타고 누구에게로, 어디로 흘러갈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십중팔구 깊은 바다의 풍랑에 휩쓸려,  바다 밑바닥, 죽음의 모래에 처박힐 테지요.  하지만  조난자의 찡그린 얼굴이 영 부질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일요일  콜로라도의 에스테스 파크에서 당신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으니까요.  당신은 병 속에 들어있던 것들을 읽었으며  (바다를 통해 우리의 두 언어가 만났습니다.)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내가 단 한번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또 나의 꿈은 읽히는 것이지 "유명세"를 타는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텍스트일 뿐 텍스트의 저자는 중요치 않고,  내가 문학 곡마단을 혐오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 후에 장문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걸 보내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썼겠습니까.)  나는 회신을 보낼 수도 그렇다고 침묵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시행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이건 시가 아니죠.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시의 특권을 꿈꾸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오늘날 산문으로 말하는 모든 것들  (이야기, 서간문, 드라마, 역사, 농사교본)의  도구로 운문을 사용할 뿐입니다.  당신의 전보에 답하지 않기 위해 말하겠습니다.  나의 시 안에 있는 것 말고는 덧붙일 게 전혀  없습니다.  나는 시를 논평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역사 속에서의 자리"  (혹 나의 자리가 있다해도)에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머지 않아 우리들 모두에게 조난이  닥칠 테니까요.)  나는 시를 쓰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나는 시의 절반만을  씁니다.  시는 백지 위에 그려진 검은 부호가 아닙니다.  나는 타인의 경험과 교유하는 만남의  광장을 시라고 부릅니다. 독자들이  내가 스케치한 시를 완성할(혹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들을 읽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읽습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내 거울에 비쳐보인다는 건  기적과 같습니다.  여기에 가치가 있다면 ―뻬소아가 말했습니다―  그건 시의 몫이지 시의 저자의 몫이 아닙니다.  어쩌다 위대한 시인이라 해도  숱한 좌절과 허섭쓰레기 틈에서  너덧 편의 빼어난 시를 남길 뿐입니다.  그의 개인적인 견해들은  정말이지 별로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 세상은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시인들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 가는데,  시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줄어드니 말입니다.  시인은 이미 종족의 목소리이기를 그만두었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인은 또 하나의 연예인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의 술주정, 간음, 병력(病歷),  그리고 곡마단의 다른 광대들이나 곡예사, 혹은  코끼리 조련사와의 야합과 분쟁은  이미 시를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폭넓은 관객으로 확보했습니다.  나는 시란 이와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시는 두 사람, 거의 영영 알지 못할  두 사람 사이의 밀약(密約) 속에  오직 침묵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형식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반세기 전에 환 라몬 히메네스가  한 잡지를 발간하려고 했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그는 잡지에 《익명》이라는 제목을 붙인 다음  서명이 아니라 텍스트를 발표하고,  시인이 아니라 시로 잡지를 꾸미려 했습니다.  나는 스페인의 대가처럼  시가 익명이기를 바랍니다. 시는 집단적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나의 시와 나의 번역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아마 당신도 내 생각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내 시를 읽었지만 나를 알지 못합니다.  영영 만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친구입니다.  내 시가 당신 맘에 드셨다면  내 것이든 / 타인의 것이든 /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든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읽은 시는 진정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시를 읽을 때 그것을 창작하는 저자입니다.  『바다의 일』(Los trabajos del mar, 1983) 중에서  동조운(同調韻)에 대한 고찰  파체코 / 김현균 옮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e Emilo Pacheco)는  멕시코 태생의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문학평론가.  이 시의 원제는 Disertación sobre la consonancia  (동조운(同調韻)이란,  정형시의 율격 가운데 하나로  운(韻)을 구성하는 모음뿐만 아니라  이에 뒤따르는 자음까지도 동일한 형태를 일컫는다.)  때때로 스페인어의 소리 울림 때문에 여전히  시가 운율을 지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운율에서 나와 운율을 지니며 운율을 생성한다고 해도,  최근 반세기 동안 씌어진 가장 좋은 시들은  과거의 학자들이나 규범가들이 얘기하던  〈시〉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시의 한계를 확장할 새로운 정의가  상정되어야 한다(만일 아직도 한계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가령 고전주의자들이 불굴의 도전으로도 발굴해내지  못했던 어떤 단어.  ―지당하게도― 한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이건 이미 시가 아니다" 라고 내뱉는  사람들의 놀라움과 노여움을 피할 수 있는  (암시가 용인되는) 하나의 명칭, 그 어떤 용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내게 묻지마』(1969) 중에서  이와 더불어 창작에 대한 자의식 또한 고개를 들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시가 바로  엔리케 린(Enrique Lihn)의 메타시(metapoesía)이다.  ☞ 린:「시를 올바르게 쓰려면」(업로드 예정)  이 글처럼 각 시인의 시학에 해당하는 작품을 통해서  중남미 현대시사를 조망하려는  -그것도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이라는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시도는 필연적으로 몇몇 대가를 누락시키는 희생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보유로서  서인도 제도와 브라질의 독특한 흑인 혼혈 문화,  즉 물라토(mulato) 문화를 노래한 쿠바 태생의 시인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의  ☞ 작품 「성벽」을 소개한다.  성벽(城壁)  기옌 / 현중문 옮김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은 쿠바 시인  원제는 La muralla  - 크리스티나 루스 아고스티에게-  성벽을 세우려니  일손을 빌려주게,  흑인은 검은 손을  백인은 하얀 손을.  아,  저기 지평선 위에  성벽이 드러날거야,  해변에서 산까지  산에서 해변까지.  - 쿵쿵  - 누구야?  - 장미와 카네이션...  - 성문을 열어라  - 쿵쿵  - 누구야?  - 대령의 칼...  - 성문을 닫아라  - 쿵쿵  - 누구야?  - 비둘기와 월계수...  - 성문을 열어라  - 쿵쿵  - 누구야?  - 전갈과 지네...  - 성문을 닫아라  우리편 가슴을 향해  성문을 열어라.  독약과 비수에게는  성문을 닫아라.  도금양과 박하에게는  성문을 열어라.  뱀의 이빨에게는  성문을 닫아라.  꽃에 앉은 나이팅게일에게는  성문을 열어라.  모두들 합세하여  성벽을 세워보세,  흑인은 검은 손으로  백인은 하얀 손으로.  저기 지평선 위에  성벽이 드러날거야,  해변에서 산까지  산에서 해변까지.  『비상하는 민중의 비둘기』(1958) 중에서 [출처]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현중문|작성자 옥토끼  
40    [스크랩] 나의 두 여자, 은유와 환유 / 이빈섬 댓글:  조회:349  추천:0  2018-06-23
나의 두 여자, 은유와 환유 / 이빈섬  우린 늘 언어와 문자에 골몰하면서도 그걸 쉽게 경멸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말 잘하는 놈을 보면 밸이 틀린다. 뭔가 번지르르한 말결 속에 교묘히 허수를 숨기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시나 수필을 쓰면서도 은유와 환유가 풍겨내는 지분냄새같은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기름끼 다 빼고 정말 언어의 견결한 골조만 남은 시, 수필을 쓰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할까? 문학에서 은유와 환유가 들어올린 공간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일이? 물론 그건 번답과 화려가 본질을 가리고 진의를 에두른 적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이어트의 희원임을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그건 은유와 환유가 좀더 평상어에 가까운 방식으로 슬림해지는 것이지, 그것들에 대한 무차별의 삼제가 될 수는 없다.  문학의 심연은 어쨌든 문자가 들어올린 그 여지의 활기와 비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교환을 위한 통상의 문자들만을 줄세워 문학을 할 수는 없다. 그건 문학의 순정성의 증표가 아니라, 문학을 압살하고 경멸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평상어의 눈으로 시와 산문을 재단하려는 모든 기도를 나는 반대한다. 복잡한 문장, 섬세한 뉘앙스에 대한 가차없는 경멸. 여기엔 정말 심각한 무지와 오해가 있지 않나 싶다. 우선 우리나라 국어교육과 언어사회학의 죄악이다. 논리를 즐길 줄 아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논리가 돼야 수사학이 된다. 무슨 뜻인지 파악하는 눈과 귀가 없는데 어떻게 그게 즐거울 수가 있으랴? 또 많은 달변가들과 문자쟁이들이 사람을 현혹시키고 본질을 어지럽히는데 그 재능을 써오기도 하였다. 그러니 지레짐작 말 잘하는 놈은 의심부터 하고 볼 일인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중요하지, 그것을 표현하는 재능은 별 거 아니다. 기본적인 말만 할 줄 알면 되는 게 아닌가. 이런 통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면서 그것과 대립되는 능력인 화술과 언어재능과 시적감각들이 세상살이에 별로 소용없는 물건으로 치부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과연 그게 옳은 생각인가. 누군가에게서 몇 마디 날카로운 지적을 받으면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기 전에 얼굴부터 벌개져서 입이 꽉 닫히는 일. 아주 치열한 논리적 공방을 바라보면 그 풍경에서 시정잡배의 멱살잡이 만을 떠올리며 그걸 뜯어말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일. 몇번씩 뒤틀어 표현한 복잡하고 섬세한 문장들에 대해서 아예 손사래부터 치며 왜 해골을 복잡하게 하느냐고 화내는 일. 이런 언어습관이 유통되는 사회에서 시가 존재하기란, 혹은 문학이 당위를 인정받는 일이란 얼마나 간고한 일인가. 문학이란, 혹은 시란, 평상어로부터의 고의적인 일탈이다. 좋게 말해서 일탈이지 솔직히 말하면 멀쩡한 언어판을 뒤흔들어 개판으로 만들어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화폐와 같이 정직한 교환가치를 인정받는 평상어는, 인간의 언어욕망 모두를 채워주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허전한 뭔가를 채우기 위해 인간은 시, 혹은 문학을 기웃거린다. 평상어들이 득세하여 문학적 언어들을 핍박하고 경멸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 사회의 인문적 지형도다. 인문학의 위기, 인문주의의 위기라는 표현 또한 실용이라는 담론에 경도되어 오래된 인류의 낙원을 스스로 폐기처분하고 있는 이 시대의 경박에 대한 경고다. 은유란 뜻밖에도 발이 넓다. 어쩌면 문학 전부가 은유란 그릇 안으로 들어와 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다. 은유에 대한 성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찾아올라가야 할 만큼 묵은 내력을 지닌다. 인류는 일찌감치 언어의 별세계를 찾아냈다. 저 그리스 아저씨의 을 잠시 훔쳐보자. "은유란 유에서 종으로, 또는 종에서 유로, 또는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의 관계에 의해서,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하는 것이다." 유니 종이니 하는 말 때문에 지레 따분해질 필요는 없다. 일본사람과 게다신발을 생각하면 된다. 이때 게다는 종이며 일본사람은 유이다. 일본사람을 그냥 게다짝이라고 멸칭하기도 하고, 그것을 신은 모양새를 데려와 쪽발이라고 욕질하기도 한다. 이것도 고전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은유이다.(실은 환유이지만.) 앵두같은 입술이라 할 때 앵두와 입술은 붉음이란 특징을 매개로 한 유추의 관계다.(이건 은유 중에서도 직유라고 불린다.)그러니 은유가 가능한 경우를 아저씨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귀담아 두면 좋을 것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한다는 표현이다.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켜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 행위. 이같은 은유론은 많은 학자들의 성찰을 거쳐서 체계적으로 다듬어져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지금까지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적시하고 있다. 은유는 너무 평범하고 진부해서도 안되며 지나치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되어서도 안된다. 은유가 평범하고 진부한 표현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언어의 은유적 사용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즉 개똥이는 개똥이가 아니라 말똥이라고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즐거움, 즉 우회해서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수사적 즐거움-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또 수수께끼가 되는 걸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자칫 은유를 통한 언어의 우회적 움직임이 그 출발점을 잊어버리고 길을 잃게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아저씨가 은유를 너무 멀리서 이끌어내서는 안된다고 여러번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은유의 유추적 즐거움이 언어의 수사적 기능, 말하자면 담론을 통해 타인을 설득시키는 것에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서 살피자면 은유는 낱말과 낱말 사이의 거리이다. 유사성의 거리라고 할까. 너무 가까우면 재미없고 너무 멀면 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 알맞은 거리의 긴장과 탄력이, 좋은 은유를 만들어낸다. 쓰다보니 문자 사이의 건조함이 목구멍을 칼칼하게 한다. 은유에 관한 날렵한 성찰들을 살핌으로써 물기를 뿌려보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은 나를 사로잡았다. "은유는 아마도 인간의 가장 다산적인 잠재력일 것이다. 그것의 효력은 마술에 접해있고,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의 피조물의 몸 속에다 깜박 잊어버리고 놓아둔 창조의 도구처럼 보인다." 요컨대 은유는 인간이 지닌 조물주의 능력, 즉 창조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수술가위를 몸 속에 놔둔 채 꿰매는 멍청한 외과의사로 신을 조롱한 죄가 가볍지 않아 보이지만 은유에 대한 예찬을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리쾨르의 얘기도 들을 만하다. "은유는 낱말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서 발생한다. 즉 술부에서 발생한다. 의미혁신은 주부와 술부가 이어지면서 낱말이 사전적 의미를 어느 정도 이탈하면서 발생한다. 은유는 어떤 말을 통해서 다른 말을 하려고 하는 말이다. 한번 꼬여서 간접으로 무엇을 겨냥한다. 여기서 언어혁신이 일어난다. 언어에 들어있는 뜻이 아니라 언어가 새로 만들어내는 뜻이다. 말이 새로운 뜻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은유는 이라 할 만하다."  라캉도 거든다. 그는 프로이드를 데려오면서 인간의 무의식의 지형은 은유와 환유의 기법이 차용되어 있다고 말한다. 꿈 속에 등장하는 많은 것들은 비슷하거나 근접한 무엇들의 변용이 아니던가.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텍스트에서 첫 출발하는 주체는, 에고의 가장자리에서 기호계의 검은 물결이 흘러넘치는 절벽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채 그것에 교란받는 주체이다,라고. 데리다는 은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성중심주의를 희석시키는,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가는 한없는 이방의 여행이다." 제 생각이 없으면 이렇게 글에 귀신들이 들끓는다. 남의 생각에 의지하여 앵무새같은 개념들을 늘어놓는 일이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매만지는 일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리라. 그런 비난들이 더 커지기 전에 내 얘기들을 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은유의 서양말인 메타포 (metaphor)는 그 말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타페레인이란 그리스어를 만나게 된다. 메타는 "위로" 혹은 "너머로"라는 뜻이고 페레인은 "옮기다" 혹은 "나르다"의 뜻이다. 은유란 말이 처음 쓰일 때의 생각은 "한 말에서 다른 말로 그 뜻을 실어 옮기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느 영화에서 어떤 소년이 말한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엔 맞지 않지만 조금씩 발을 맞춰가듯 맞춰가는 게 인생이 아니냐고, 소년은 짐짓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버지는 되묻는다. 그래? 그럼 인생은 장갑과도 같은 것이군. 그것도 맞춰야 하잖아? 아냐 인생은 모자와도 같은 것이야. 아니 내복과 같은 게 아닐까? 아버지의 조크는 소년의 은유가 지닌 약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은유가 생동감을 얻기 위해서는 두 사물의 유사성이 참신하고도 설득력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소년은 그의 은유를 충분하게 잘 설명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 참신한 비유가 아닌가? 이런 비유를 만났을 때, 우린 인생과 구두가 지닌 유사점에 대해서 고민하고 성찰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은유의 힘은, 구두라는 매개개념을 데려와, 인생이란 의미를 좀더 풍요롭게 파악해가는데 있다.  개미같은 허리라고 하면 우린 아예 개미를 떠올리지 않고도 가는 허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 은유가 오랜, 잦은 사용으로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우초밥같이 생긴 여자라고 말한다면 우린 한참 고민하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쉽게 답이 안나온다. 이 수수께끼가 의미의 미로에서 너무 오래 헤매면 그건 일단 성공적인 비유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새우초밥 여자가 들어있는 문장의 맥락에서 그가 가슴에 겨자빛 반점을 지닌, 불그죽죽한 새우무늬의 숄을 걸치기 좋아하는 여자라면 그건 설득력있는 은유일 수 있다. 이렇게 문맥 속에서 살아움직이는 두 개념 간의 피돌기가 자아내는 효과, 이것이 은유의 힘이 아닐까 싶다. 새우초밥같은 여자라고 말했을 때, 그 여자는 새우초밥에서 건너오긴 했지만 새우초밥을 넘어서있는 뉘앙스이다.  내가 아까 불러온 귀신들의 말로부터 받았던 인상들을 종합하자면, 은유란 것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이라는 놀라움이다. 수사학은 출발과 끝이 은유에 싸인 하나의 거대한 봉지사탕인지 모른다. 문학이란 은유 욕망들의 다채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통상적인 언어에서 빠져나온, 바람난 언어들의 춤이다. 시는 평상적 언어에서 새나가는 뉘앙스들을 수배하러 나선 또다른 언어들의 그물망이다. 언어를 올라탄 언어, 문자와 문자의 교미, 낯익어서 이미 긴장이 풀려버린 언어들의 나사를 풀어 낯선 다른 언어를 끼워넣음으로써 새롭게 하는 작업들. 은유란 일렬로 선 낱말들을 교란시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본능적인 유희가 아닐까 싶다. 신은 인간에게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선물했을 테지만, 인간은 그것을 즐기는데에 쓰기 시작했다. 이 유희의 한 지류가 문학이며 레토릭이며 또, 은유행위다. 두루뭉수리하게 통상 언어의 일탈 모두를 은유라고 부르던 아리스토텔레스식 분류법이 은유와 환유라는 보다 섬세한 일별법으로 진화하게 된 것은 언어학자 야콥슨의 공로다. 야콥슨에 이르면서 은유와 환유는 치열한 대립쌍으로 거듭나게 된다.물론 그 전에도 은유와 환유는 구별지어지는 개념이었다. 라틴수사학의 한 경전인 1세기경의 이란 책에서는 환유를 " 그 자신의 이름에 의해 지칭되지 않은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을 근접한 요소로부터 빌어오는 문채(文彩)"로 설명하고 있다. 환유를 뜻하는 미토니미(metonymy)는 그리스어 미토니미아를 어원으로 가지는 말이다. 그 뜻은 이름을 바꾼다는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환유를 아예 전의(轉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콥슨은 은유가 유사성에 기댄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은유가 초현실주의나 낭만주의 상징주의와 손을 잡는다면 환유는 고전주의나 리얼리즘과 관계를 맺는다고도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요즘 황지우를 읽고 있다, 고 말할 때, 나는 황지우의 시를 읽고 있다는 뜻이다. 라는 인물의 한 부분인 그의 시작품을 가리키는데에 황지우 모두를 데려와버린다. 반대도 가능하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을 외팔이라고 부른다. 돌아온 외팔이란 영화도 있지 않았던가. 외팔이란 팔이 없다는 특징 만으로 어떤 사람을 특칭한다. 환유와 제유라는 분류로 더 섬세하게 구분도 하지만 이 모두를 환유라 하자. 환유는 언어를 사용하는 효용성과 크게 관련지어져 있다. 군대시절 고참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을 때, 신병인 나는 서울에 산다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서울이 모두 네 집이냐며 기합을 주는 것이었다. 이런 썰렁한 유머는 군대에서 하나의 관습을 이루는 것들인데, 여기에도 환유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숨어있다. 우린 서울에 산다고 말하지, 서울시 중구 순화동 7번지 우리집에 산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대표지명으로 구체적인 지명을 환유하는 것이다.  한 글벗은 한때 환유법을 능란하게 활용하는 문장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어떤 모임의 후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독특한 호칭으로 불러 문장의 윤기를 낸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낭군이 된 글빛하늘이라면 그중의 한 낱말인 으로 표현하고, 산돌이 아이디를 가진 사람은 으로 표현하고는, 산이 빛의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는 식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악수 장면이 새로운 기의를 발하면서 놀라운 참신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은유는 비슷한 성질을 이용한 낱말의 연결인 반면, 환유는 어떤 사물과 인접한 무엇을 데려와 그 사물을 대치하는 기법이다. 김동인의 붉은 산은 황량하지만 버릴 수 없는 이 나라에 대한 감동적인 대치물이다. 블루칼라는 노동자들이 입는 옷으로 그 노동자 집단 전체를 의미한다. 어떤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과 근접한 무엇으로 표현하여 어떤 쾌감을 얻는 언어행위이다.  은유는 유추과정을 통해 유사성을 찾아내지만, 환유는 특정한 맥락에서 생겨나는 연상을 기초로 잇는다. 비약적 마술적인 것으로 지적되는 은유와는 달리, 환유는 오랜 시간을 두고 생겨난 연관관계나 관습에 따른 연상에 기댄다. 지극한 효녀를 심청이라 부르는 것, 말을 듣지 않고 반대로만 하는 사람을 맹꽁이라 부르는 것, 제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강요받는 경우를 억지춘향이라 부르는 것 등은 바로 이런 예라 할 만하다. 은유는 시적인 표현에서 많이 등장하고 환유는 산문적인 문장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은유의 초현실주의적 생리와 환유의 리얼리스틱한 생리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은유가 가부장 담론의 특성이라면 환유는 페미니스트 담론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성은 아이를 자기 몸 안에 아홉달 동안 담고 있고 낳은 후에도 곁에 두고 기르기에 모자관계는 환유적이며 부자관계는 은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라캉의 말이다.  은유는 남자의 문자현상을 특징짓는 기법이라면 환유는 여성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적인 글쓰기는 만져지는 무엇을 비롯한 근접한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환유적 욕망이 승한 특징을 보이기 쉽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너무 도식적인 분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일면 공감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은유란 무엇인가를 보다 생생하고 풍성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방식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된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는 다른 말을 데려와 함께 서있지만 환유는 다른 말을 데려온 뒤 자신은 숨어버린다. 그 숨어있음의 쾌감이 환유의 특징이며, 은유는 두개의 말이 나란히 서서 비교됨으로써 합성되고 증폭되는 쾌감이 특징이다.  환유는 또한 보다 현대적인 서술방식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은유는 지난 시대의 낭만주의와 결부된 낡았지만 아직도 튼튼하게 살아남은 기법이다. 최근의 비평가들은 당대 시인들과 작가들의 환유성을 찾아내고 그것의 얼개를 파악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황지우의 많은 참신함은 그의 환유에 힘입고 있다.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는 진술에서 뚱뚱한 가죽부대는 내 몸의 구조와 형질을 경멸적인 사물적 특징으로 치환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수은등 아래 벚꽃)이라 했을 때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는 건 "죄"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지만 거기 느닷없이 "죄"라는 추상어를 데려옴으로써 삶의 심각한 본질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시 벚꽃의 만개와 겹치면서 아름다움과 죄악을 현란하게 교직한다. 그의 환유는 이 시의 중심시축이다. 은유와 환유는 시나 문학의 주민등록증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시나 문학을 몹쓸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딱지이기도 하다. 마구 뒤섞어놓은 은유들의 실끄트머리를 찾아내어 상상력으로 끊어진 다른 지점과 조심스럽게 이어야 하는, 비유 해독의 고단함은 난해라는 두건을 뒤집어쓴 작품들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 원흉이기도 했다. 뿐만인가. 꼭 집어 그냥 말하면 좋을 얘기를 굳이 에둘러 말해버리는 저 환유의 내숭과 음흉함은 문자속 전부를 내숭과 음흉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은 문학의 즐거움은 바로 그 묻힌 의미들을 발굴하는 쾌감이며, 낯선 의미들이 충돌하여 피흘리는데서 돋아나는 생기이며, 매복한 개념들이 낮은 포복으로 언어의 습지를 기어가는 장면을 영화처럼 감상하는 재미이기도 하다. 은유와 환유는 글쓰기라는 욕망의 가장 핵심이기도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들이 행간 속에서 즐길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쾌감의 지평이다.  문학은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두 여자, 내 딸들에게 붙여주어도 좋았을 이름, 은유와 환유라는 두 여자와 사귀러가는 은밀한 아지트가 아닐까 싶다./빈섬. (Binsom Lee/ 시인, 작가, 스토리텔러)    
39    [공유] "낯설게 하기" 기법의 낯설게 하기 / 함영준 댓글:  조회:273  추천:0  2018-06-21
 綠 | 청하  http://blog.naver.com/cyan666/120036136959   "낯설게 하기" 기법의 낯설게 하기   단국대학교 교수 함영준   (1)   줄에 묶여 매 네 걸음마다 한번씩 다리를 절며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 쌀뜨이꼬 프-쉐드린의 아주 유명한 이 경구에 대한 답은 다름 아닌 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시의 정형화된 구조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쉬끌롭스끼의 지적처럼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고정된 관습과 습관화된 시의 리듬에 중독 된 사람을 제외하고 예술을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는 자명한 것이라 하겠다. 실제로 우리의 예술에 대한 관점은 보다 자주 고정되고 자동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균형 속에 파격을 줌으로서 예술의 존재가치를 보다 새롭게 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20 세기초 문학성에 대한 관심으로 새로운 학파를 탄생시키는 쉬끌롭스끼(후기 형식주의의 대표자:프라하 학파)의 선언적 논문"기법으로서 예술"의 가장 중심적인 개념중의 하나인 "낯설게 하기"는 형식주의 미학의 기본 도구로서 사용되어 왔다. 특히 형식주의 연구의 집대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독일의 러시아 문학자 한씬 뢰베는 형식주의가 "낯설게 하기 원칙에서 발전"한 것으로서 이 학파의 총체적인 성격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용어는 패러독스한 운명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기법의 최초 의미론인 '자동화'된 사물에 대한 '탈 자동화'로의 시각 교정이 오늘날 문학이론에서 거의 여과 없이 "낯설게 하기"라는 자동화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적 그리고 발전적 고찰보다는 존재하는 기법상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의 목적은 형식주의적 방법론에 묻혀버린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을 다시 한번 낯설게 하여 탈 자동화 시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쉬끌롭스끼가 고안해 놓은 이 용어의 특징을 살펴 볼 것이다. 그 동안 형식주의를 언급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되었던 그의 주장을 다시 한번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예술이라는 것은 삶의 느낌을 주고, 사물을 느끼기 위해 다시 말해 돌을 돌답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술의 목적이란 '사물에 대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예술의 기법은 사물을 (낯설게 하는)기법이며 형식을 어렵게 하는 기법인 것이다. 당연히 이 기법은 지각을 어렵고도 오랫동안 확장시키게 되는데 왜냐하면 예술에서는 지각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이는 오래 지속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는 방법이고 이미 만들어 진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서 볼 때 쉬끌롭스끼의 논점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예술의 존재 이유에 관한 것이고(대상을 대상답게 느끼기 위함) 둘째는 예술의 목적에 대한 것(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 보는 것으로의 전달)이며 셋째는 이러한 기반에서 예술의 기법은 무엇인가(낯설게 하기와 형식을 어렵게 하기)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보던 대상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탈 자동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낯설음"이라는 것이 쉬끌롭스끼의 고유한 이론이 아니며 새로운 것 또한 아니었다. 이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오던 방식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쉬끌롭스끼 자신도 이것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적 언어란 낯설고 놀라게 하는 특징을 지녀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기법들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바로크, 낭만주의자 노발리스, 그리고 철학에서는 칸트와 헤겔의 그리고 마르크스 철학에서도 그 맹아적 형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의 역사적 고찰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쉬끌롭스끼와 뽀쩨브냐와의 관계 또한 관심이 없다. 우리의 관심은 이 기법의 보다 본질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의 지평 확대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낯설게 하기" 기법이 문학 용어로서의 창조라는 큰 역할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술에서 자동화되는 대상을 어떻게 이탈시켜 낯설게 할 것인가라는 방법상의 문제와 그리고 이러한 기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또한 덧 부쳐서 낯설게 하기 기법의 지평확대 가능성은 없는 가도 논의의 핵심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쉬끌롭스끼의 주장에서는 이러한 여러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진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돌을 돌답게 하기 위해" 형식주의자들의 문학관에 부합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예술은 예술로서 존재양식이며 여타의 사회적, 역사적 관심은 배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 하라는 주문 즉 "낯선 시각" 또는 "처음 본 것처럼" 볼 것을 요구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문학을 보는 것인가 ? 아니면 알아차리는 것인가 ? 그리고 방법상의 문제와 더불어 이 기법의 목적이 "지각을 어렵게 하여 오래 지속시키도록"하는 미학적인 측면의 사용이 "낯설게 하기"의 유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의 문제도 정작 쉬끌롭스끼 자신은 무관심한 체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기법의 사용은 단순히 화석화된 문학 연구의 용어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지가 잇는 곳에는 어디에나 낯설게 하기가 존재"한다는 쉬끌롭스끼의 주장은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모든 대상을 원하는 대로 처리하고도 정작 사용할 수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상황으로 이끌 수도 있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 먼저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한 여러 연구가들의 견해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쉬끌롭스끼에게 가장 기본적인 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또 다른 형식주의자인 또마쉡스끼에게 "개인적인 특수한 경우"로 또한 쥐르문스끼에게 이 "낯설게 하기" 기법은 예술 발전의 가장 큰 동인이 되는 요소가 아니라 부차적인 특징일 뿐이다. 그는 "낯설게 하기, 어렵게 하기라는 기법이 미적 체험이 이루어지기 전의 것이며 평범치 않은 미적 대상을 상상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체험을 하고 나면 이 감각은 사라져 단순성과 평범함을 느끼는 것으로 바뀐다"고 주장하고 있다. 메드베제프(바흐찐)도 역시 쥐르문스끼의 견해에 공감을 표하면서 이 기법이 "심리적인 주관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소이에서 비롯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메드베제프는 쉬끌롭스끼가 "감지되는 것을 문학의 목표"로 삼은 것에 대해 비판하며 이러한 감지되는 것이란 실체가 없는" 소박한 심리주의의 모습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보이곳스끼 또한 "예술에서 지각되는 과정이 목적"이라는 쉬끌롭스끼에게 반대한다. 이것이 형식주의자들의 심리학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내용과는 관계없이 사물의 지각 자체를 아름다운 것이라는 "초보적 쾌락주의"공식으로 퇴행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도 쉬끌롭스끼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스위프트의 비인간성, 혐오성과 사르트르의 부르주아 사회의 비판의 힘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모든 것이 쉬끌롭스끼에게는 모두 새롭게 하기 위한 구실로서 우선 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제임슨은 낯설게 하기가 지각과정 자체인지 아니면 그 지각의 양식 제시 쪽인지 애매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예술의 본질이 낯설게 하기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쉬끌롭스끼의 글은 낯설게 되는 것이 내용인지 형식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많은 연구가들이 "낯설게 하기"기법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였음에도 대부분은 쉬끌롭스끼의 기법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뭔가 보충적인 선에서 비평하고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기법에 대한 비평들의 대부분은 "낯설게 하기"라는 본질적 문제 보다는 이것의 출현 배경이나 혹은 다른 형식주의 이론들과의 연계성 속에서 혹은 다른 논의 구조 층위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쉬끌롭스끼의 이 기법의 중요성은 형식주의 이론과 실제 뿐 아니라 향후 문학이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더러 문학연구에서 아직도 이 기법은 유용하며 또한 흥미로운 것으로 남아있다. 이제 앞에서 제시한 우리 논문의 중심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쉬끌롭스끼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2)   쉬끌롭스끼가 지적하였듯이 무엇보다 먼저 "낯설게 하기"는 어떠한 대상에 대한 관습적인 시각에서 이탈하여 새롭게 보는 것이다. 주지하다 시피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에서 종종 어떤 사물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그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지 않고 단지 그 특성을 나열하는 문체적 특성을 보여준다. 언젠가 '밝고 흰 줄기와 가지를 지닌 키가 크고 구부정한 나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이는 물론 자작나무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마치 이 나무의 이름을 모르고 그 특이함에 놀란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 기법의 사용에서 사용되는 것은 그 대상의 새로운 시각(혹은 마치 처음 본 듯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쉬끌롭스끼는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면 이 기법의 생성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   낯설게 하기 위한 조건은 그 대상의 이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름을(또는 명칭) 모른다는 전제는 흥미로운 기호적 성격을 획득한다. 철학자 로세프에 따르면 "어떤 대상의 이름이란 총체적인 유기체로서" 그 이름을 통해 다른 삶을 살아가던 것을 이름을 수렴시키고 환원시켜서 그것 자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란 결국 대상의 이름(명칭)을 모르는 체하면서 그 이름을 구성하고 있는 내부 인자들의 특징을 해체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이야기한 "자작나무"(명칭)를 모른다는 전제는 이 나무의 구성 인자의 특징인 "밝고 흰 줄기와 가지를 지닌 키가 크고 구부정한 나무"라는 표현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름의 기표가 숨겨진 채 기의를 통한 표현 기법이 낯설게 하기의 기본 원리인 것이다. 다음으로 쉬끌롭스끼에 따르면 이 기법은 '에로틱한 예술'에서 자주 보이며, 수수께끼와 민속에서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통찰력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수수께끼의 구조적 고찰을 통한 낯설게 하기의 생성원리를 추적할 수가 있다. 기호학적인 측면에서 수수께끼는 "기호(수수께끼의 텍스트)의 본뜻(해답)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 텍스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수께끼는 "현실의 예술적 변환 원칙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고 아주 단순한 예를 통해 그러한 변환을 조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수께끼로 제시된 대상은 무언가 부족하고(또는) 변형이나 은유를 통해 왜곡된 묘사로 나타나게 된다. 쉬끌롭스끼 자신 또한 이것이 지니는 기호적 속성이 낯설게 하기 기법과 많은 부분 상관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미지와 수수께끼"라는 논문에서 쉬끌롭스끼는 수수께끼와 그 해결 과정에 주목하면서 "수수께끼의 해결은 제시된 대상의 특징들의 치환을 통해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수수께끼에 관한 것을 고찰해 보면 분명히 "하나의 시작되는 상황에서 변환되는 상황으로" 전달해 간다. 만일 우리가 맞추어야할 문제를 X라고 가정하면 X를 암시하는 몇몇의 대항을 지정해 주게 된다 . 이때 지정된 대상들은 맞추어야할 X의 특징, 상황, 부분 등의 조건이어야 한다. 그러나 X를 맞추기 위해서 X에 대한 기능을 제시 해 주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가위(X)를 수수께끼의 문제라고 가정 할 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두 개의 날카로운 끝(2A)을 가지고 두 개의 고리(2B)에 못이(C)박혀 있는 것이다.(이것을 공식화 하면 X=nA+nB+nC...로 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제시된 그 과정은 어떤 경우라도 낯설어 지는 대상의 기능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위의 기능인'자르다'는 표현이 나타나면 그 대상은 너무 쉽게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낯설게 하기"기법의 원리가 도출 될 수 있다. 이는 어떠한 방법으로 낯설게 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답이 된다 (쉬끌롭스끼는 그 방법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낯설게 하기 기법의 원칙은 낯설어지는 대상의 기능이 감춰진다.   즉 그 사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를 감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순수한 의미의 낯설게 하기 기법인 것이다. 이는 단지 쉬끌롭스끼가 말하는 새로운 시각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 과정의 애매성을 제거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리를 쉬끌롭스끼가 주로 인용한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통해 보도록 하자. 쉬끌롭스끼가 인용한 톨스토이의 글에 대입시켜 보면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톨스토이는 "법을 어긴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쳐서 마루에 넘어뜨리고 눕히고 엉덩이를 회초리로 때리는 것"으로써 대상을 낯설게 한다. 그 낯설어진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태형이다. 태형의 본래 기능인 벌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짐짓 무심한 척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형식을 바꿔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의 오페라나 의 결혼에 대한 낯설게 하기는 기능이 제거됨으로 마치 처음 보는 듯한 시각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낯설게 하기 기법은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많은 비평가들은 이 기법의 유용성(문학 연구 방법론적 측면에서)을 인정하면서도 쉬끌롭스끼의 독단적인 규정에 반기를 들고 있음을 보았다. 그 반기의 가장 보편적인 것은 이 기법이 도덕적, 심리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한 문학적, 미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예에서 보여지는 쉬끌롭스끼의 관심이 이념적 의미가 아니라 "상투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도전"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에서 미학적 기법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종교적 의미들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단지 낯설어 지는 대상의 기능이 제거된다는 것만으로 톨스토이의 이 기법을 설명하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쉬끌롭스끼가 인용한 톨스토이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다른데 있다. 그것이 낯설게 하기의 목적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폭로적(비평적)기능을 할 수 있다.   쉬끌롭스끼는 톨스토이의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해 논하는 중에 태형에 대한 낯선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형식을 바꿔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쉬끌롭스끼는 이 이외에도 에서 전투장면과 살롱과 극장. 에서 도시나 재판 광경. 에서 결혼 장면. 그리고 에서 조차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미학적인 측면에서만 보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쉬끌롭스끼에겐 이러한 기법의 사용이 "돌을 돌답게" 만들어 주기 위한 예술적 기법이며 "낯설게 하기가 단지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사물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적용되어지는 기법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형식주의적 문학 이론이 "문학성"을 찾기 위한 내재적 분석 방법이 경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잇다. 특히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쉬끌롭스끼는 이 기법이 드러내 주는 "지각 과정 차체가 목적"이 며 이것이 톨스토이 특유의 시회 비평 수단의 폭로적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다. 낯설게 하기 기법을 단순히 예술적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가? 단지 낯설게 되는 대상을 더욱 예술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인가? 우리가 보기엔 아닌 것 같다. 에서 언급한 태형의 낯설게 하기는 이러한 신체적 징벌을 더욱 징벌답게 묘사하기 위해서 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태형의 불합리한 점을 폭로하기 위함인 것이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태형은 인간에게 단지 육체적인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세의 고통을"주는 것으로 비평하고 있는 것이다. 쉬끌롭스끼가 에서 살롱 및 극장의 낯설게 하기에 인용하고 있는 것도 실상은 단순히 오페라에 대한 예술적 미학적 목적이 아니라 이는 오히려 "시골적이고 자연적인 나타샤가 오페라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교계의 필수적인 이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도덕적인 목적"에 있다. 실제로 곧 나타샤는 완전히 자연스럽게 오페라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점점 오랫동안 체험해 보지 못했던 도취 상태로 빠져 들고""이제 이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게 되어 만족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타샤는 "자신이 지금 있는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어""시골 생활이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이성적이고 무엇이 비이성적인지 모를 이 불가사의한 광기의 세계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빠져버린 것을 느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에서 결혼의 낯설게 하기 기법이나 에서 재판관경 묘사와 같은, 이러한 모든 기법의 내용상 기능은(쉬끌롭스끼가 무시한 기능은) 비평적이며 폭로적인 파토스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톨스토이가 사용하고 있는 이 기법의 사용이 "돌을 돌답게"만들어 주기 위한 예술적 기법이며 "낯설게 하기가 단지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사물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적용되어지는 기법은 아니다" 라는 쉬끌롭스끼의 견해는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의 대가로서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표층의 삭제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부정적인 사회 현상의 폭로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은 비록 그의 모든 기법상의 특징은 아닐지라도 절대적인 의미론을 획득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흥미롭게도 스위프트의 에서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제도에 대한 풍자적인 해명을 위해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 사람은 같은 형식주의자중 한 사람인 또마쉡스끼였다. 쉬끌롭스끼 자신도 1970년대에 들어와 "톨스토이의 낯설게 하기 기능이 양심"이라는 입장으로 후퇴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물론 낯설게 하기 기능이 폭로적(비평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쉬끌롭스끼의 지적처럼 많은 이 기능의 많은 부분이 미학적, 예술적 원칙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로서 체홉의 를 들 수 있다 . 이 작품에서 눈물은 '비오는 날 창문에 어리는 반짝이는 방울들"로 보여 지고 코끼리는 "코 대신 꼬리가 달리고 입 언저리에 살점이 다 뜯긴 두개의 긴뼈를 지닌 뚱뚱하고 거대한 상판때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에 등장하는 레빈 아이의 탄생 장면에서 사용되는 낯설게 하기는 비판적인 기능은 없다. "리자베따 빼뜨로브나(산파-필자)는 이 꿈틀거리는 새빨간 것을 침대에 놓고는 한 손으로 아이를 들어 올리며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풀었다 간 무언가로 덮으면서 다시 감았다" 당연히 여기서는 폭로적인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선 철저히 쉬끌롭스끼 적인 것으로 보여 진다. 이 기법의 사용에서 우리가 구분해야할 것은 어떠한 때에 비평적 기능을 수행하며 언제 미학적 기능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또 하나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우리가 예를 든 것을 조건적으로 보았을 때 낯설어지는 대상이 문화와 연관되었을 때와 자연적 현상과 관련되었을 때를 구분해야 한다.   낯설어 지는 것이 자연적 대상일 경우에는 쉬끌롭스끼적(미학적)타당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문화적 대상은 그렇지 않다.   태형과 재판, 극장(오페라), 전투 등과 같이 문학적인 현상이 낯설어질 때 비평적이고 폭로적 의미론을 획득하고 눈물, 코끼리, 자작나무, 어린아이와 같이 자연적인 대상의 낯설게 하기는 미학적인 모습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예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원칙이 들어맞지만 문화적인 현상의 낯설게 하기가 모두 비평적(폭로적)이란 우리의 제안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푸쉬킨의 에 등장하는 "결투"에 대한 생각 속의 낯설게 하기 기법은 뭔가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결투에서 부상당한 그리뇨프에게 하인 싸벨리치는 말한다 ; "모두가 그 빌어먹을 무슈놈의 잘못입니다. 그놈이 쇠꼬챙이로 찌르는 법과 발 구르는 법을 가르쳤으니까요" 물론 여기서 칼쓰는 법에 대한 늙은 하인 사벨리치의 말은 결투라는 사회적 불합리에 대한 비판적 모습을 띠는 것으로 불수는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유머의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유머의 느낌은 마치 수수께끼나 에로틱한 예술에서와 같이 미학적인 의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낯설게 하기 대상의 자연적 현상과 문화적 현상을 분리해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쉬끌롭스끼가 바라본 단 한가지의 목적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앞에서 본 여러 원리들을 중심으로 실제적인 낯설게 하기의 사용의 예를 기호적 측면에서 분석하기 위해 쉬끌롭스끼가 자신의 논문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를 모델로 볼 것이다. 제일 먼저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관점의 문제이다. 이 작품은 말의 관점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는 당연히 인간이 정해놓은 "이름"(명칭)을 새롭게 불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부여해 준다. 이 경우 시점은 말에게 주어지고 말에 의해 낯설어진 효과는 더욱 강한 가극을 준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동물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당연히 낯설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 낯설게 하기는 처음엔 주로 폭로라기보다 종종 묘사적 타입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보이다가 대개의 경우 작품의 전개 속에서 작가적 시점과 관점이 작용하면서 내용상의 폭로적 의미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이러한 시점의 불일치는 일반적으로 아이러니한 작품의 예에서 자주 등장한다. 쉬끌롭스끼는 에서 주도적인 낯설게 하기 기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사적 소유에 대한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본 언어로 하자면 문화적 대상으로서 '사적 소유'의 문제와 자연적 대상으로서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이 작품의 소유에 대한 고전적인 인용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먼저 에서 가장 명확한 낯설게 하기는 말의 눈을 통한 '소유'의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도 내용상 기능은 사적 소유에 대한 비평과 폭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소유의 "낯설게 하기"를 기표와 기의라는 기호학적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 것, 자기 말이라는 단어가 무얼 뜻하는지는 그 당시엔 정말 몰랐지,...이것이 어떤 관계를 뜻하는지 당시 난 전혀 알 수가 없었어...그 당시로서는 인간의 소유물로서 나를 자기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야. 살아 숨쉬는 말인 나를 향해 붙여진 나의 말이라는 단어가 내겐 마치 나의 땅, 나의 공기, 나의 물이라는 단어들처럼 이상하고 어색했던 거지..."   홀스또메르의 눈에 비추어진 '소유'는 (1)먼저 단어적 수준에서 드러난다. '내 것, 나의 것""자기 것"이라는 단어는 실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은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말에게 이는 단지 소리로서만 존재 할 뿐 어떤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다. 또한 "나의 땅","나의 공기" 그리고 "나의 물"은 부조리한 단어 결합이며 역시 무의미하고 그 단어의 기능은 없다. 따라서 말의 입장에서 이러한 모든 단어들은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닌 조건적 언어이다. 다시 말해 "무엇 때문에 그럴는지 모르는" 단어들은 그 기능이 제거된(감춰진)기표상의 낯설게 하기인 셈이다.   "...그 단어의 의미는 이런 거야. 인간들의 삶은 일이 아니라 지껄여 대는 말에 의해 좌우된다는 거지... 나의 것, 나의 물건, 나의 소유라는 것이지... 무었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던 그렇게 되어 있어. 난 한동안 이런 것이 인간들에게 어떤 직접적인 이익이 되는 것인지 이해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어. 하지만 이건 잘못된 거야 예를 들어 나를 자기 말이라고 부르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나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어. 오히려 날 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어. 내게 먹이를 준 것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지"   기의적 측면에서 '소유'는 (2)인간에게 어떠한 '이익을 의미한다." 나를 자기 말이라고 부르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나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어" 여기서 소유라는 기능의 목적은 아마도 그 말을 타고 다님으로서 다시 말해 말을 이용함으로서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날 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고 보면 소유의 기능은 제거되고 부정된다. 또한 "내게 먹이를 준 것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소유자(주인)의 기능은 당연히 말에게 먹이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주인은 이 기능을 거부한다. 비록 말 지기를 고용하여 봉급을 줌으로서 이 기능을 간접적으로 수행은 하지만 이 기능은 여기서 부정적으로 폭로된다.   "네게 선을 베푼 사람들도 나를 자기 말이라고 부르던 그 사람들이 아니라 마부나 수의사난 아니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어. 내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해 본 결과 나의 것이라는 개념은 우리 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낮고 저급한 본능인 소위 감정이나 사적 권리라고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지. 인간들은 이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거기에 살지 않고 단지 집의 건물 자체와 그 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상인들은 , 하고 말하지만 자신의 가게에 있는 고급 양복지로 만든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인간들은 땅을 다신의 것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땅에 가본적도, 그 땅위를 걸어 다녀본 적도 없단 말이야.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인간들도 전혀 그들을 만나 본적도 없으니 말이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는 단지 손해를 입히는 일 뿐이지. 혹은 여자들을 보고 나의 여자니 마누라니 하고 부르는 데도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살기도 해. 결국 인간들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 것을 나의 것이라고 말하기 위한 거야 바로 이점이 인간과 우리말을 구별하는 본질적인 차이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낯설게 하기는 그 기능의 바꿔치기에 의해 강조된다.   홀스또메르의 관점에서 '소유'는 (3)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주인의 필수적인 기능은 아니다. 주인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잇다. 여기서 낯설게 하기의 기능은 슬쩍 다른 것으로 변화된다. 홀스또메르는 "선을 베푼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와 직접 관계없는 사람"임을 말한다. 이것은 말에 대한 본질적인 기능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기능은 바꿔치기 된다. 소유라는 대상의 낯설게 하기는 여기서 '이익'이라는 소유의 기능이 제거되는 게 아니라 '선'이라는 다른 기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 자연스럽게 소유는 선이라는 가치 기능으로 넘어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비평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잇을 것이다. 우리는 에서 '소유'가 "인간의 저급한 본능인 감정이나 사적 권리"라는 기능 대신에 경제적인 기능으로 바꿔치기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자기 집에 살지 않고"."자가 땅에 가보지도 않음으로", 집이라는 살아가는 공간과 자신이 경작해야하는 땅은 돈과 소유라는 경제적 이익으로서 바꿔치기 된다. 그리고 상인이 "자기 집의 천으로 옷을 해 입지 않는'것도 마찬가지로 옷감의 본래 기능인 옷을 해 입는 것에서 판매라는 소유의 이익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사람들을 자기 사람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들을 본적이 없는 것은 기능의 제거이며 뒤이어 "다른 사람들에게 맺고 있는 관계는 단지 악을 행하는 것"은 바꿔치기 기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바꿔치기 기능을 통해 낯설게 하기의 폭로적 기능이 강화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에서 소유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보았다. 다음으로 자연적 대상인 죽음이 어떻게 낯설게 되는지 보자. 소유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낯설게 하기 기법의 중요한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세상을 방황하며 먹고 마셔댄 세르뿌홉스꼬이의 죽은 육신이 한참 후 땅에 묻혔다...새 관을 다른 납으로 된 곳에 집어넣고 모스끄바로 운구하여 거기서 옛사람들의 뼈를 파헤치고 새 제복과 깨끗한 구두로 감춰진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썩어 가는 육신을 흙으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여기서 육신이 먹고 마시고 돌아다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육신이 먹고 마시고 돌아다닐 수 있는가? 물론 불가능하다. 육신의 기능은 인간을 정신과 영혼과 더불어 지탱해 주는 것이다. 육신의 기능은 낯설어지면서 그 기능이 제거된다. 죽음에 대한 미학적 진행효과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낯설게 하기는 그로테스크로 발전해 간다. 물론 죽음의 모습이 주는 대비는 말의 관점이 아닌 작가의 관점이다. 여기서 단지 죽음의 대비 속에 드러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비판적 기능)낯설게 하기 기법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낯설어지는 대상의 기능이 감춰지고 제거되는 것은 순수한 의미의 낯설게 하기 기법 즉, 쉬끌롭스끼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시각'을 위한 기법인 것이며 톨스토이에게서 주도적으로 보여 지는 기능의 바꿔치기는 어쩌면 비평적 성격을 위한 이 기법의 확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쉬끌롭스끼는 대단히 중요한(그러나 유일한 문학 기법은 아닌)것을 착안해 냈고 낯설게 하기의 필수적 조건이 '새롭게 보기"를 끌어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 생각을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다양한 기능들을 자주 수반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쉬끌롭스끼는 낯설게 하기 기법을 예술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기능으로서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여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낯설게 하기가 그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기법의 사용이 과연 어디에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대한 것이다. 쉬끌롭스끼는 "이미지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낯설게 하기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 예로서 에로틱 예술에서 이 기법의 사용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의 사용 용례를 밝힐 뿐 왜 그 기능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비록 그가 완곡어법에 대해 말하긴 했어도 아마도 에로틱 예술에서 낯설게 하기의 사용은 "타부(금기)"에 대한 것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쉬끌롭스끼는 동일한 행위에 대한 낯설게 하기라는 .심리적 병치법'(유사성 속의 불일치)에서의 낯설게 하기와 방언사용에 의한(난해하고 애매한)낯설게 하기를 지적하고 있다. 이 밖에도 낯설게 하기의 기능과 목적은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브이곳스끼가 제기한 것처럼 감정의 전활을 일으키는 카타르시스, 사회 비평적이고 폭로적인 기능의 풍자, 무섭게 만드는 기능(스릴러), 흥미를 유발시키는 기능(추리소설), 마술적 상황(혹은 질병을 낫게 하는 주술), 성례적, 신비적 기능(주로 이어성에 의해)(성스러움은 불가사의한 비밀일 수 있다)등 보다 다양한 기능성들을 언급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광고의 기능도 낯설게 하기에 사용된다. 특히 짧은 시간에 주어진 관심을 최대한 증폭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지각을 오랫동안 확장시키기"위해서도 광고는 기존의 자동화된 시선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광고에 많이 사용되는 유행이란 무엇인가를 보자. 헤겔이 지적한 것처럼 "유행의 의미란 의복이 지속적으로 새로워지고 그것이 또 감춰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성들이란 의상에 의해 새로워지기 위해 옷을 새롭게 입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동화되어 여자는 사라지고 여성의(실체)는 구현되지 못 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이러한 생각은 쉬끌롭스끼에세서 발견된다, " 자동화가 사물과 의상, 가구, 아내, 전쟁의 공포를 먹어치워 버릴 것"이라고 하였다. 광고에서 보여지는 유행의 새로움은 낯설게 하기의 가장 잘 어울리는 영역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기법의 모든 기능과 적용을 살펴 볼 수는 없다. 단지 우리의 관심은 쉬끌롭스끼의 이론이 지니는 논쟁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인 "낯설게 하기" 기법의 적용으로 다른 지평확대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감지되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에만(쉬끌롭스끼에게선 주로 문학)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구조의 통일 속에서 확대되고 구체화 된다. 쉬끌롭스끼의 주장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하라는 주문을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방법상의 문제와 더불어 이 기법의 목적이 "지각을 어렵게 하여 오래 지속시키도록"하는 것이 문학이외의 예술 장르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선 그의 말대로라면 문학은 알아차리는 것으로가 아니라 보는 것으로 전달된다. 물론 쉬끌롭스끼 자신이 시각을 통한 지각의 확장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문자 그대로 본다면 "시각"을 통한 전달이라는 것이 문학보다는 오히려 공연 예술 분야에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쉬끌롭스끼가 문학에서 보고자 했던 "시각"이 사실 연극(공연예슬)에서 1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연극예술이 이루어지는 극장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리스어인 "볼거리"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 연극은 관객들이 모두 그 내용을 알고 있던 것이었다. 따라서 관객의 관심은 공연되는 연극의 인물에 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내용)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이미 알려진 그 이야기를 어떻게 새롭게 꾸미느냐(형식)에 집중되어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춘향전"의 내용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공연을 가는 것은 어떠한 "새로운 시각"으로 이 작품이 꾸며졌는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연극의 본질적인 의미론인 볼거리를 새롭게 시도한 사람이 20세기 독일의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브레히트이다. 흥미롭게도 연극에서의 낯설게 하기가 1930년대 브레히트에게서 "소외"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면서 스파니슬랍스끼 연극론과 더불어 20세기 가장 중요한 연극적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실제로 문학적인 측면에서 쉬끌롭스끼의 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연극적인 측면에서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에 대칭된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소외 개념과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 사이의 상관관계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1959 년 존 윌릿은 에서 이 용어가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였는데 그는 "브레히트가 1935년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체류한 이래 그의 작품에 소외라는 표어와 이론이 등장함은 시사적이라는 것이다. 로널드 그레이 ㅣ역시 브레히트의 이 용어가 러시아의 "낯설게 하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브레히트의 러시아여행은 이미 1932년에도 한 번 있었고 그가 형식주의자들과 교유했다는 증거도 없었으며 실제로 브레히트가 1930년대 러시아를 방문하여 이 형식주의자들의 저작을 알았다 하더라도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는 순수하게 문학적인 개념이지 사회적인 요인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연극관에 대해서는 다음의 주제로 남겨 놓더라도 그의 연극적 낯설게 하기가 오늘날 대단히 중요한 연극 미학의 한 틀을 만들고 있음은 우리의 주제에 대단히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영향과 수용관계가 논란이 있다 할지라도 쉬끌롭스끼 기법의 연극적 지평확장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열린 가능성으로   우리가 보고자 한 "낯설게 하기"에 대한 것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쉬끌롭스끼의 기법이 지니고 있는 한계와 그 발전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낯설게 하기의 문학적 기법에 대한 관심이 문화사적인 의미를 획들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 기법은 단순히 논란의 대상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박제된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확장되고 변환되고 적용될 수 있는 기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낯설게 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그 대상의 이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의 원칙은 낯설어지는 대상의 기능이 감춰진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폭로적(비평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낯설어지는 것이 자연적 대상일 경우에는 쉬끌롭스끼적(미학적) 타당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문화적 대상은 그렇지 않다. 낯설게 하기는 그 기능의 바꿔치기에 의해 강조된다.   우리가 제시한 이 기법의 보충 설명들은 단지 조건적일 뿐이다. 이것은 아마 낯설게 하기의 새로운 면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본래 낯설게 하기가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대상을 새롭게 보는 것처럼 우리의 이러한 시도 역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물론 개별 작가들의 더 많은 예문들을 통해 보게 되면 아마도 우리가 본 논문에서 본 것보다도 다양한 다른 방법들과 목적들이 더 많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도한 우리가 잠시 보았던 문학 이외의 다른 공간에서 이 기법의 적용은 어쩌면 오늘날 필수적인 연구주제가 될지도 모른다. 모든것이 자동화 되어지는 세상 속에 끊이없이 요구하는 아이디어는 결국 대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쉬끌롭스끼의 주장에서 찾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식주의 미학 원칙의 주도적 의미를 주었던 쉬끌롭스끼의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는 조건적인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결론에서 우리가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본 논문은 애초 쉬끌롭스끼의 "낯설게 하기'기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구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우리가 도달한 것은 그의 진술 속에서 한두 걸음 앞으로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쉬끌롭스끼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 단지 그의 입장에서 중요치 않았거나 무관심한 부분에 대한 보충으로 끝이 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동화된 인상을 인생이라고 말하듯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학의 한 기법으로서 낯설게 하기를 탈자동화 시켜보려는 시도는 그것으로 의미를 부여했다는 자족을 하게 한다. 그리고 대부분 이론의 존재가 갑작스런 도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딘 진화에 의해서 발전함을 생각할 때 앞으로 더 많은 비판과 보충, 그리고 진정한 안티테제(만일 필요하다면)를 향한 정지작업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출처] [공유​] "낯설게 하기" 기법의 낯설게 하기/함영준 |작성자 옥토끼    
38    [공유] 김영남 시인 인터넷 창작강의 자료 모음[스크랩] 댓글:  조회:276  추천:0  2018-06-21
[공유] 김영남 시인 인터넷 창작강의 자료 모음     창작강의 및 감상평(1)     ☞ 시를 쉽게 쓰는 요령은 상상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초보자들이 시를 쓸 때 제일먼저 봉착하는 것이 어떻게 시를 써야하며, 또한 어떻게 쓰는 게 시적 표현이 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필자도 초보자 시절 이러한 문제에 부딪혀 이를 극복하는 데에 거의 10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거죠.   필자가 이와 같이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이유는 시란 ' 자기가 경험했고, 보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게 시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를 힘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재미있게 쓰는 데에는 이게 바로 함정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된 거죠. 경험과 느낌은 모든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상상은 천차만별이죠.   하여, 시를 힘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잘 쓰려면 상상으로 써야 합니다. 상상으로 써야 발전이 빠르고 좋은 시를 계속 양산할 수 있습니다. 즉 시란 자기가 쓰고자 하는 소재를 두 눈 딱 감고 상상해서 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는. 보고, 느낀 걸 쓰는 게 시다라는 고정관념에 빠지니깐 시를 한 줄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 겁니다. 즉 보고 느낀 것이 다 떨어지면 그때부터 허둥대기 시작하는 거죠. 기껏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게 자기 주변 친구, 부모,  어린 시절 이야기 등을 둘러대는 정도. 그리곤 스스로 훌륭한 시를 썼다고 자기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가 되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만 99%가 그렇고 그런 이야기, 누구나 다 보고 느끼는 형편없는 넋두리, 서사, 풍경 나열이 되기가 일쑤죠.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시를 써왔다면 이 순간부터 기존 쓰는 방식을 잠시 접어두고 필자가 안내한 대로 석 달만 같이 공부해 보도록 합시다. 글이 달라지는 걸 본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상상하는 것부터 배우도록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우선 상상할 소재, 즉 상상할 대상을 구체적인 것 하나를 고르세요. 자신이 있는 곳이 지금 사무실이라고 하면 주변에 있는 꽃병, 벽, 창, 하늘, 노을 등이 있을 겁니다. 이중 어느 하나를 골라 봅시다.   필자가 먼저 어떻게 상상하는지 그 방법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로 한번 해볼까요? 기존 방식대로 이란 소재로 시를 한번 시를 써 보라고 하면 대다수가 노을을 쳐다보며 < 피 빛 노을이 아름답구나/ 나는 저 노을 아래로 걸어간다/ 친구와 함께...> 대다수가 아마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하지 않았겠나 여깁니다. 그러나 이건 느낌을 적은 것이고 상상한 게 아닙니다.   상상을 이렇게 해보는 겁니다. 만약 자신이 현재 애로틱한 감정상태에 있다면 을 바라보며, 또는 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눈부신 상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한 여자가 옷을 벗고 있다/ 그녀가 옷을 벗으니까 눈부셔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도 저렇게 발가벗고 그 곁으로 가고 싶다/ 아니다, 그녀를 데리고 여관으로 가고 싶다/ 가서 같이 포도주 한 잔을 건넨 다음 껴안고 뒹굴고 싶다........> 이렇게 노을을 발가벗고 있어서 눈부신 여자로 여기고 계속 상상해 가는 겁니다. 이땐 순서를 생각하지 말고 앞 상상의 핵심어를 가지고 다음 상상을 유치하든 품위 있든 따지지 말고 계속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나중에 논리적으로 순서를 다시 잡아 정리, 수정해 가면서 다듬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제목을 로 붙여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근사한 한 편의 시가 탄생할 것 같잖아요?   이번에는 을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고 한다면 빨간 노을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상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아이들이 모닥불을 피고 있다/ 그 모닥불은 연기가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저 불에 나는/ 고구마를 구어 먹고 싶다/ 제일 잘 익은 것을 꺼내/ 이웃 동네 창수에게 건네주고 싶다/....난 저 모닥불에 오줌을 갈겨 피식 소리가 나게 끄고 싶다....> 이렇게 을 로 여기고 모닥불과 관련된 온갖 경험, 추억, 익살스런 행동, 우수꽝스런 생각, 이야기들을 계속 꺼내가면서 상상을 하는 겁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을 로 치환했으면 을 멀리 떠나서 상상을 하면 안됩니다. 모닥불과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상상을 펼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초점이 흐려지고, 내용이 난해해 지게 됩니다   다른 소재들로 상상하는 것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 다듬는 법, 순서를 잡는 법, 제목을 붙이는 법....등등은 그때그때 하나씩 계속 예를 들기로 하고 오늘은 상상하는 요령만 익혀두기로 합시다. 시를 쉽게 쓰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며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    방승일 님의 라는 시를 먼저 감상해 봅시다. 필자가 위에서 말한 내용을 새기면서 이 시를 읽으면 방승일 님의 시가 왜 시가 될 수 없는지를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말을 무수히 하였는데도 하나도 우리의 눈길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건 상상을 하지 않고 느낌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느낌이라도 참신한 느낌을 쓰면 한 두 줄 시로 성립할 수 있지만 그것마저도 찾아볼 수 없군요. 본인이 섭섭해 할까봐 구체적으로 한번 지적해 볼까요?   첫줄에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서른 즈음에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는데...이게 내용적으로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서른 나이에 아직도 사람이 되지 못하고 서른 나이에서야 사람이 되겠다는 게 남에게 얼마나 공감을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선언해 놓고서 두 번째 줄에서 왜 갑자기 이야기가 나무로 변했습니까? 두 번째 줄의 내용이 성립하려면 첫줄의 표현이 라고 표현했어야 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남에게 공감을 주거나 눈길을 잡으려면 의미 있는 말, 남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을 개발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서른 즈음에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말을 거꾸로 '서른 즈음에 황소가 되고 싶다' 라고 말해 보세요. 이게 독자의 눈을 훨씬 더 끌지 않을까요. 우선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왜 이 작자가 사람도 아닌, 황소가 되려할까 궁금해하지 않겠어요?   하여, 방승일 님은 첫줄을 , 또는 라고 선언해 놓고 나무의 좋은 점, 이로운 점(그늘,목재,땔감,기둥... 등등)과 황소의 어진 점, 부지런한 점, 묵묵한 성격..등등을 위에서 설명한 상상의 요령에 따라 시를 다시 써 보기 바랍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처음에는 시적 표현을 한 줄 얻어도 큰 소득이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본기를 착실히 다져놓으면 시 쓰는 건 금방입니다. 제시한 과제로 시를 다시 써서 올리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윤주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윤주 님은 방승일 님보다 더 쉽게 상상으로 빠질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뵙니다. 그러나 느낌과 생각을 중구난방 해서 내용이 가슴에 와 닿는 게 없습니다. 라는 소재를 어떤 것 하나로 비유해 놓고 그 하나의 속성, 내용, 사상 등을 집중해서 파고들기 바랍니다. 그래야 글에 초점이 생기고 내용이 깊이를 갖고 설득력도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끝내기가 아쉬우니깐 윤주 님의 시 첫줄 하나만 봅시다. 첫줄에서 비가 라고 했습니다. 추측컨데 가랑비가 부드럽게 내리는 걸 표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근데 표현이 어설퍼요. 의 이미지는 통상 달콤한 이미지입니다. 근데 부드러움을 표현하는데 둘러댔어요. 그래서 이 비유가 어설프고 미숙한 겁니다.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고있는 건 통상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천이 아닙니까. 더 나아가 비단 천? 그렇다면 부드럽게 내리는 비를 표현하려면 이렇게 하면 되죠. < 지금 내리는 비에는 비단 천이 들어 있다 >라고 말이죠. 그리고 나서 비단 천으로 묘사했으니깐 그 비단 천하나로 위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집중해서 상상을 펼쳐보는 겁니다.   그리고 비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소낙비, 우박비, 여우비, 보슬비, 봄비, 가을비 등등.. 그래서 표현하고자 하는 비도 이중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서 시로 쓰려고 해야지 모든 비를 아울러서 시로 표현하려고 하면 1급 시인도 쓰기 힘듭니다. 따라서 윤주 님도 봄비나 보슬비 하나를 골라 위에 제시한 표현을 첫줄로 놓고 시를 다시 쓰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두 달, 아니 반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고민해서 쓰기 바랍니다. 깊고 넓게 고민하는 자만이 크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땐 뭐든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참고가 될만한 시를 첨부하오니 , , 이란 낱말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상상력을 발휘하였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김영남)   ************************************************************************          밑에 관하여       나는 위보다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큰 나무, 밑이 큰 그릇, 밑이 큰 여자....  그 탄탄한 밑동을 사랑한다.   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밑동도 다 넓은 것은 아니지만 참나무처럼 튼튼한 사람, 그 사람 밑을 내려가보면 넓은 뿌리가 바닥을 악착같이 끌어안고 있다.   밑을 잘 다지고 가꾸는 사람들.... 우리도 밑을 논밭처럼 잘 일궈야 똑바로 설 수 있다. 가로수처럼 확실한 밑을 믿고 대로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거리에서 명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밑이 구린 것들, 밑이 썩은 것들은 내일로 얼굴을 내밀 수 없고 옆 사람에게도 가지를 칠 수 없다.   나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넓은 말, 밑이 넓은 행동, 밑이 넓은 일...  그 근본을 사랑한다. 근본이 없어도 근본을 이루려는 아랫도리를 사랑한다.     ***********************************************************************      아름다운 모퉁이에 관하여       모퉁이가 아름다운 건물을 보면 사람도 모름지기 모퉁이가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입체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향기로운 내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퉁이가 둥근 말, 모퉁이가 귀여운 사랑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모난 부분을 둥그렇게 구부린 흔적이 바라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옆구리를 한번 돌아가보면서 모퉁이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될 건물의 중요한 한 분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부까지 품위 있게 해주는 의식의 요긴한 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퉁이를 가꾸는 사람들... 경제학적으로 검토하면 비효율적 투자이겠지만 모두가 모퉁이를 가꾸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또 어디를 돌아가보고 살아야 하나? 향기로운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입체물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                               벽       가려보고 드러내봐도 내 앞뒤 골목은 온통 벽이로구나. 한 발로 뻥 찼을 땐 여지없이 되튕기며 발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벽.   야, 벽에도 이단 옆차기가 있고, 돌려차기가 있구나. 속이 훤히 드러난 유리벽이 있고, 보초를 세워야 하는 철조망 벽이 있구나. 그러면 벽에도 나이가 있고 학벌이 있고 지위가 있다는 것인데, 맘에 안 든 벽을 마구 감옥에 잡아넣는다면 누가 경쟁을 하나? 벽 없이도 세상을 이룰 수 있나? 우리들 마지막 버팀목이 벽이라면 벽 없이도 희망은 존재할까? 벽을 쌓으려면 스폰지를 넣거나 변경이 용이하도록 조립형으로 설계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견고하게 구축하더라도 잦은 발길질과 교묘한 철거 전략에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벽은 융통성 있게 존재해야 하리라.    지금 나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한 사나이가 망치를 들고 힘차게 걸어가고 있다.   ***********************************************************************       창작강의 및 감상평(2)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하기에 좋은 소재들을 골라 상상하도록 합시다.   초보자 시절에 일단 상상하는 요령을 알게 되면 어떤 소재를 고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상상력이 일정 수준에 달한 사람은 어떤 소재를 갖다놓더라도 즉각 상상력을 기발하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막막하기 이를 데 없죠. 그래서 초기에는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담긴 소재, 언어들을 고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고르는 게 상상하기 쉽습니다. 구체적이지 않고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소재들은 수준급의 상상력 소유자가 아니면 상상의 단서를 잡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 미움, 과거, 미래, 종이... 등 이런 소재들로 시를 쓴다고 해봅시다. 그냥 숨이 콱 막힐 겁니다. 그러나 공간이 있는 것들 문, 벽, 창, 천장, 집....등 이걸로 상상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한결 쉬울 겁니다. 이건 상상이란 기본적으로 이미지, 즉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고 그 그림은 공간이 있는 것이 평면적인 것보다 훨씬 그리기 쉽고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을 가지고 상상한다면 현실의 문(사립문,철문,미닫이문,파란문,빨간문...), 추억의 문, 사랑의 문, 지식의 문...등 상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가령 그 추억의 문 하나로만 상상을 해보더라도 그 추억의 문에 문고리를 달아보고, 자물통도 달아보고, 발로 한 번 뻥 차보고, 파란 페인트, 아니 빨간 페인트도 칠해보고 온갖 상상을 다 해볼 수 있잖아요?   또 이란 소재로 한번 해 볼까요? 처럼 의미적 공간 말고, 이번에는 실제적 공간으로 , 즉 어느 초가집을 한번 그려본다고 해 봅시다. 두 눈 딱 감고 어릴 적에 보았던 초가집 하나를 머리 속에 담고 < 그 집에 들어가려면 싸립문을 밀어야 하고/ 문 왼쪽에는 나팔꽃 화단/오른 쪽에는 토끼장이 딸린 닭장/ 거기에는 줄을 잡고 변을 보는 화장실이 있다/.....뒤란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마당에는 삽살개 한 마리/ ....신발을 벗고 방문을 열면/ 펜티 차림의 한 어린이가/ 만화책을 보고 있다>  이렇게 묘사해 놓고 제목을 으로 붙인다고 해 보세요. 정말 김영남의 어린 시절 집을 그린 훌륭한 시가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유의할 점은 초가집을 그리는데 자기가 실제적으로 본 초가집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안 되요. 상상이 당장 막혀요. 상상은 기본적으로 허구이고 가공입니다. 즉 그 초가집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기억 속에서 모두 불러와 한번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겁니다. 즉 상상 속에서 초가집을 새롭게 창조하는 거죠. 이게 바로 참신한 그림이요, 참신한 이미지요, 참신한 시가 되는 겁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골라 상상을 해 시를 써보도록 하고, 상상은 체험, 허구, 가공까지 드나들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시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 가공까지 동원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는 걸 유념하고 게시판에 올라온 공기욱 님의 를 감상해보도록 합시다.   *******************************************************************   공기욱 님의 란 시는 발상, 즉 상상의 단서는 참 좋습니다. 비가 오는 것을 편지가 오는 걸로 상상하는 것은 훌륭한 시로 탄생할 여지가 매우 높습니다. 일단 상상이 참신하니깐요. 그러나 현재로써는 시로 여물지 못했어요. 단지 시로 건질 수 있는 표현은 네 번째 연 이것 뿐입니다. 나머지는 비오는 걸 편지 오는 걸로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구절들이에요. 한 시에서 초점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면 그런 표현들은 버려야지요.   하여, 공기욱 님은 나머지 연은 다 버리고 네쩨연을 첫연으로 내걸고 거기서부터 다시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소한 표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상상을 어떻게 펼치는가가 앞으로의 장래를 보장하니깐 의 요령을 참고하시어 다시 써보기 바랍니다. 당분간 상상을 참신하게 하는 데에 중점 지도를 할 것입니다.   공기욱 님에게 위 시에서 상상을 펼치는데 참고가 될만한 이야기를 하자면 첫 연에서 비가 오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가 오는 걸로 생각했으니깐 둘째 연에서부터는 나한테 오는 편지로 끌어와야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쉬워질 겁니다. 그리고 나선 슬픈 편지, 기쁜 편지, 빨간 편지 파란 편지, 애인 편지, 친구 편지, 문안편지, 위로편지 등등....쓸 내용이 많아질 겁니다. 상상하는 데 참고해 보세요.(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3)   초보자 시절에는 시 창작 방법을 아무리 들어도 시작하려면 정작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좀 더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를 추천할까 합니다.   첫째로 왕 초보 시절에는 기성 시인의 작품중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작품을 갖다놓고 그 작품 구조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먼저 해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즉 그 시를 한번 모방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 했습니다. 사실 어느 시인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좋게 말해서 영향이지, 액면 그대로 표현하면 그 사람을 모방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가능한 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미술학도 지망생에게 제일먼저 시키는 것이 석고데생, 즉 모사연습이고 외국어를 습득하는데 어떤 이론, 문법공부보다도 말을 실제로 따라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음미해보면 금세 이해가 갈 겁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이렇게 급속도로 선진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다는 것도 외국, 특히 인접 일본의 앞선 기술, 문화, 제도 등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나라의 색깔과 독자성이 문제이지만...   하여, 왕초보 시절에는 구조적으로(기,승,전,결) 잘 짜여진 작품이나, 독특한 표현이 많이 들어있는 작품을 갖다놓고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내용과 감각을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전개방법과 표현기술을 따라서 해보라는 뜻입니다. 이걸 능수능란하게 하다보면 나중에 자기도 모르게 표현을 뒤틀어보고 싶고 독특하게 펼치고 싶어져 자기 색깔이 선명하게 나오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감각은 있는데 될만한 시의 소재를 못 찾아 시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은 잡지를 많이 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특히 여성지, 패선 잡지, 디자인 잡지, 건축잡지, 미술잡지 등 사진과 그림이 많이 담긴 잡지를. 시란 기본적으로 심상, 이미지 즉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 그림이 많은 잡지를 넘기다보면 언뜻 시로 표현하고 싶은 소재가 스치게 됩니다. 잡지를 깊게 읽지 말고 눈요기식으로 넘기고 광고 카피도 눈여겨 보기 바랍니다. 문득 힌트를 얻게 됩니다. 광고쟁이들도 시를 많이 읽고 쓴다는 걸 참고해 가면서 말입니다. 이때 얻은 힌트를 가지고 감상평(1),(2)를 참고해서 상상을 펼쳐보기 바랍니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제목에 신경을 쓰지 말고 문득 얻은 힌트, 그 소재를 가지고 상상을 해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상상을 자꾸 새롭게 하고 고치다가 보면 처음 의도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의 시가 탄생하거든요. 그래서 제목을 맨 나중에 붙이는 겁니다.   이상을 참고해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이미지 즉 글로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걸 잘하다 보면 나중에 의미있는 말, 표현, 자기철학 등도 요령있게 양념치듯 넣는 기술을 알게 됩니다. 여하튼 처음에는 거창한 자기의 말, 주장을 하려하지 말고 힘을 완전히 뺀 상태에서 감각과 상상으로 접근해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들을 한번 감상해 보겠습니다.   이소빈 님의 시 은 거의 시의 근처에 와 있습니다. 즉 시적 사고가 이제 시작의 단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 시로 성립하기에는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몇 군데 눈에 띄는 구절이 있지만 이란 이미지가 전혀 그려지지 않았어요. 단지 유리의 속성(이건 좋은 표현)과 유리를 끼우는 사람만 있지 유리의 관이란 이미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선 유리의 관이란 소재가 낮설고 독자의 상상을 자극할만한 매력적인 물건도 아니거든요. 차라리 유리 벽, 유리 등, 유리 인형 등이 더 상상력을 펼치기 쉽고 독자들의 상상도 매력적으로 자극할 물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여 이 시를 유리의 속성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시를 다시 쓰면 좋은 시가 탄생할 것 같습니다 이소빈 님은 기본적으로 소재를 어떻게 상상하는 지를 알고 있는 것 같거든요. 우선 첫줄을 라고 두 번째 줄의 내용을 변용해 놓고 이소빈 님이 발견해 낸 유리의 속성들, 즉 광채, 맑은 영혼 등을 가지고 다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상을 전개하는데 참고가 될 지 모르겠지만 올 연초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를 한번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유리의 속성들을 발견하는 데에는 이기철의 문학과 지성사간 시집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공기욱 님은 아직도 제가 설명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면 발전이 더디니까 당분간 제가 과제를 내 준대로 시를 써서 올리시기 바랍니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따라간다는 자세를 갖기 바랍니다.   다음에 시를 올릴 때 공기욱 님의 애인 방을 시로 그려서 올리시기 바랍니다. 애인이 없다면 임의로 하나 만들어서라도, 그거마저 없다면 친구의 방이라도 시로 멋지게 그려서 올리기 바랍니다. 필자가 공기욱 님의 시만 읽고서도 애인의 방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기 바랍니다.   이섭 님의 시도 시로 건질 수 있는 표현은 맨 마지막 두 줄 뿐입니다. 나머지 표현은 설명과 느낌을 적은 것이고 상상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필자의 감상평(1),(2)를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하여 이섭 님도 공기욱 님처럼 애인의 방을 한번 멋지게 시로 그려서 올려보기 바랍니다. 이섭님은 위 시를 가지고 이렇게 시작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하고 나서 애인의 방을 꾸며서라도 멋들어지게 그려내 보기 바랍니다.   참고 시를 하나 소개 합니다. ********************************************************************                       방     그 방은 창을 통해 안이 훤히 드러난다. 연둣빛 레이스 커튼을 드리웠고 널린 브래지어가 한결같이 희망표이다. 고개를 들면 갤럭시 손목시계, 악어가죽 핸드백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바닥은 아담하고 천장은 유난히 높고 알록달록한 박달나무 숲속 같은 분위기가 달려오는 방. 저렇게 꾸미는 데는 몇 년이 걸렸을까. 그 방에 닿으려면 창동역에서 도봉산 쪽으로 날아가는 화살표를 두 번 따라가야 하고 909국 다이얼을 돌려야 한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만큼 그 방 밖도 늘 매혹적이고 불안하다. 항상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 꺼져 있으면 그 방 밖은 가을이고 수상하다. 그리고 낙엽이 뒹굴고 바람이 불면 그 방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은 흔들릴 때가 아름답다. 흔들릴 때마다 굳게 잠긴 자물통이 침묵의 장식처럼 중심을 잡아주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돌아다보면 그 방은 다시 불이 켜진다.   참으로 이상한 방. 한번 쓱 들어가 맘껏 뒹굴어보고 싶은 방. 브래지어가 창인 그녀.      *******************************************************************            창작강의 및 감상평(4)     ☞ 시의 길이는 20행 정도를 목표로 하는 게 좋습니다.   초보자 시절에 시의 퇴고와 관련하여 자주 고민하는 것이 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시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 입니다. 여기에는 내용에 따라 전개하는 형식에 따라 각각 다르겠지만 행갈이를 정상적으로 한다고 할 때 시의 길이는 대체적으로 20행 정도를 목표로 하고, 시의 연은 의미가 달라지는 부분에서 연을 구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통상적으로 20행이 넘어 시가 길어지면 우선 시각적으로도 질리게 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시를 읽고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됩니다. 시가 길어질 땐 길어지는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그 시가 아주 재미있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길어도 독자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하는 특별한 기교와 내용이 있든지 해야 합니다. 이젠 독자들도 영악해서 별로 의미 없고 특별한 내용도 없으면서 작자만의 생각으로 길게 쓴 시는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시가 문학의 어느 분야보다도 언어의 함축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걸 생각하면 금세 이해가 가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요즘 시 잡지에 발표되는 시들을 보면 필자가 말하는 내용과 너무나 다르다는 걸 느낄 겁니다. 좋은 시란 적당한 길이에 음악성과 함축성을 겸비하고 이미지가 선명한 시가 좋은 시입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은 끝없이 해놓고 나중에 작품을 다듬어 퇴고할 때 이 정도의 길이로 지향하는 게 바람직할 겁니다.   연을 나눌 때에는 대체적으로 의미가 달라질 때 나누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상의 내용이 건너 뛸 때. 변칙도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여하튼 기본에 충실하는 게 발전이 빠릅니다. 그리고 1, 2, 3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내용이 거의 연작시 수준이거나, 연을 구분하기에는 보폭이 너무 클 때 통상 사용하는 것으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게 바람직합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공기욱 님의 시를 감상하겠습니다.   를 쓴 공기욱은 제게 한 번 지적을 받고 시가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는 걸 이 게시판 독자들은 금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시란 바로 이렇게 쓰는 겁니다. 시 쓰는 방법을 제대로 알면 시 쓰는 게 이렇게 쉽습니다. 벌써 한 편의 시를 쉽게 건진 공기욱 님! 축하합니다.   좀 수정할 부분을 지적하겠습니다. 우선 연을 에서 연을 나누고 쉼표를 없애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 속에 란 단어를 모두 빼기 바랍니다. 비오는 걸 편지 오는 걸로 상상하는 것은 이미 마음 속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니깐 란 단어가 들어가면 안되겠지요?   두 번째 구절의 에서 을 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첫째 연 마지막 를 로 바꾸기 바랍니다. 마지막 연의 를 로 바꾸어 문장 속으로 집어넣기 바라고, 에서 누구의 편지인지 불분명하죠? 그래서 앞에 란 말과 편지 다음에 란 말도 집어넣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겠죠? 그리고 맨 앞에 집어넣어 시 서두의 의미를 리플레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서두의 구절을 한번 리플레이 해 주면 상상의 초점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독자가 시의 처음을 다시 되새기면서 감상을 마치게 됩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마지막 연이 이렇게 되겠죠?   그리고 제목을 로 바꾸기 바랍니다. 이 시의 내용에 가을비가 가장 잘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의 지적을 반영해 시를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되겠습니다. ********************************************************************                             가을비     이렇게 편지가 오는 날은 방안에 불을 켜둔다 이렇게 편지가 오는 날은 문도 열어둔다 먼데서 오는 그 편지 나의 집을 수월히 찾아오도록   밤새 멎지 않는 무수한 발자국자국소리에 잠 못 이룬 나는 길눈 밤눈 다 어둔 내어머니, 혹 딴 번지를 헤매시나 한참을 문 밖에서 서성이다가 귓속으로 한 발짝 두 발짝 파고드는, 어머니의 동여맨 사랑을 풀다보니 풀다보니 그 사랑 금새 문지방을 넘어 바닥 깊숙이 흘러가서 금새 빛 바랜 편지함마저 흥건하게 잠긴다 어머니, 나를 매만지는 손길에 잠이 든다.   이렇게 편지가 오는 날은 어머니 생전에 드리지 못한 안부, 내 편지 한 통도 하늘로 급히 부쳐야 하리.   ************************************************************************            창작강의 및 감상평(5)       ☞ 시를 쉽게 잘 쓰려면 2중 구조에 대해 먼저 눈을 뜹시다.   이중구조란 글자 그대로 두 가지 그림을 거느리는 구조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 현재의 나와 과거촵미래촵 또는 추억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그림 속의 나....등 이런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의 시를 가장 선명하게 제일먼저 제시한 시인이 바로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 시인은 주로 거울을 매개체로 해서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를 잘 조응했었습니다. 사실 이중구조 이치만 잘 이해하고 소화한 사람이면 이런 유형의 시가 쓰기도 쉽고 참 재미있다라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남들은 난해하고 쓰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로직은 의외로 쉽지 않나 생각합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와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온갖 장난과 행동을 다 해보는 겁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로 예를 들면  < 내가 눈빛을 시퍼렇게 뽑으니까/ 거울 속의 녀석도 눈빛을 시퍼렇게 뽑는다./ 내가 쫓아가니까 그 녀석은 도망간다. 화장실로 숨는다/ 내가 다시 돌아서니깐 녀석은 다시 기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와 행동을 이 둘에만 초점을 맞추어 전개해 나가면 시적 공간이 나와 거울 속의 나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아주 선명하게 되고 이야기도 풀어나가기가 한결 쉽게 됩니다. 제 시집 '정동진역'에 실려있는 라는 시도 참고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상의 시작도 이런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고의 자유로움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데에부터 시작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마인드를 갖고 이상, 김기림, 김수영, 오규원 등 이런 시인들의 시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가 참 재미있다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위에서 예를 든 이중구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재의 이중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즉 어떤 오브제를 갖다놓고 그 소재와 나와의 관계 둘로 보고 시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때 시를 끌어내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첫째는 내가 아예 그 소재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꾸로 그 소재가 나로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셋째로는 그 소재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서 떨어져 앉아 대화를 나누며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그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나는 엉덩이에 찌그러진 상호를 붙였지만/ 발로 차면 크게 소리를 지른다/ 밟으면 시커먼 침을 뱉을 수도 있고/ 잘 돌봐주면 난 그대 책상을 꾸미는 꽃병이 될 수도....>이런 식으로 내가 깡통이 되어 깡통의 속성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본문 내용에 절대 '깡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깡통'이란 말이 들어가면 깡통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내가 깡통이라는 환상이 갑자기 확 깨져버립니다. 이것만 잘 소화해도 현상문예 예선을 거뜬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가 감각적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거꾸로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이 깡통은 목소리가 크고/ 속에 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루종일 거리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그리하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깡통/ 가끔 앞집 아저씨의 발에 채여/ 아프다고 소리치는 깡통.....> 이렇게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또 반대로 '나의' 라는 말이나 '나'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단어를 보는 순간 환상이 확 깨져버립니다.   세 번째 방법은 지면상 설명이 좀 길어질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첫 번째 방법에 충실한 시 한편을 소개하고 게시판 시 감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방법만 잘 활용해도 눈에 확 나는 좋은 시를 금세 쓸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수박                           윤문자   나는  성질이   둥글둥글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허리가  없는  나는  그래도 줄무늬  비단  옷만  골라  입는다 마음속은  언제나  뜨겁고 붉은  속살은  달콤하지만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배꼽을  보여주지  않는다 목말라  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겉모양하고는  다르게 관능적이다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을  만나면 오장육부를  다  빼  주고도   살  속에  뼛속에  묻어  두었던 보석까지  내  놓는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들을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소빈 님의 시는 몇 군데만 고치면 상상력이 풍부한 아주 좋은 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번 지적을 받고 금세 상상력을 이렇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님이 똑똑한 건지, 필자의 강의가 훌륭한지 모르겠습니만 여하튼 필자의 의도를 쉽게 알고 따라오는 것이 대견스럽습니다. 이소빈 님은 제가 위에서 설명한 소재의 이중구조를 잘 읽어보면 이 시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 지를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즉 이 시는 소재의 이중구조 첫번째 경우이지만 "유리와 나"의 이중구조가 아니라 "유리와 그"와의 이중구조로 파악해야 이 시의 내용에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하여 본문 속에 나오는 라는 말을 전부 로 바꾸어 보세요. 훌륭한 시가 되죠? 하여 필자가 바꾸어 고치면 다음과 같은 훌륭한 시가 탄생하겠습니다. 그 이유를 이 게시판에서 설명하려면 또 길어지니, 듣고 싶으면 일요일날 밤 10시 초고작을 프린트해 놓고  817-6119로 전화하시기 바랍니다. *****************************************       유리   날카로운 모서리를 반짝이는 그는 살아 있다 빛나는 피부는 분명 날카로움이 응집된 광채이다 갈대처럼 휘어질 줄 모르는 성질을 가진 그는 어디를 두드려도 물방울 떨어지듯 맑은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주고 긁혀 다쳐도 아파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 속을 꿰뚫어 보는 섬뜩하게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 몸을 날려 날카롭게 변신할 수 있는 그는 틀에 갇혀 살아 간다 오랜시간 단단하게 버티고 있어야 하는 고행도 견딘다 한낮 몸통을 흔들어 대는 바람의 유혹에도 쉽게 제 몸을 부수어 자유를 갈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돌팔매질에는 단번에 날카로움을 드러낼 그는 반짝이는 모서리를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     ********************************************   공기욱 님도 시를 잘 썼군요. 그러나 ,를 빼세요.  를 로 바꾸어 보세요. 그 이유는 이소빈 님처럼 전화를 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를 반영하면 다음과 같은 시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공기욱 님은 시의 방향을 이제 제대로 잡은 것 같으니 더 고심해서 시를 써 당분간 시를 올리지 말고 다른 독자들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도록 비축해 두시기 바랍니다.   ********************************************            봄비   누군가 호미질 하는 소리에 눈이 떠져요 톡톡톡 소리 나는, 이른 아침 밭으로 나가요 누군가 호미질 하고 있어요 밭이랑마다 깊이로 넓이로 골고루 씨앗을 뿌리고 있어요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흙으로 덮어주며 다독거리며  누군가 이렇게 부지런한 손놀림을 하고 있어요   내 이마 위에 맺힌 새말간 땀방울을 좀 보세요 밭고랑 씨앗들도 파도처럼 나에게로 퍼져와요 나도 누군가에게로 씨앗들을 퍼트리고 싶어요   *******************************************   chr486님은 올린 글의 내용으로 보아 시를 잘 쓸 수 있는 감각과 사고의 소유자로 여겨집니다. 제대로 배우면 폭발적으로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 우선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씩 익히시길 바랍니다. 기성 시인들의 시중 구조가 잘 짜여있고 감각적인 시를 많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필자의 감상평1,2,3,4도 반드시 여러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6)     ☞ 제목을 효과적으로 잘 붙이는 데에도 요령이 있습니다.   시의 제목을 제대로 붙일 줄 알려면 그 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편의 시가 성립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또 독자들이 이 시를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제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이 문제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 그동안 시 창작에 응용한 사람이 의외로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었습니다. 하여 이 문제에 관한 한 필자가 문단에서 맨 처음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같은 제목을 붙이더라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제목이 되고, 보다 생산적인 제목이 될 수 있을까? 필자가 그 방법을 개발해서 그동안 작품에 실제로 구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 세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써 놓고 제목을 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방법입니다. 더욱이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논문, 일반 문서에까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제일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는 이걸 제대로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역기능으로 작용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은 시들이 제목을 로 해놓고 화장실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쓰거나, 해놓고 서울역에 관하여 온갖 수사와 기교를 동원해 시를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화장실과 서울역에 대한 정보를 이미 많이 갖고 있어서(어쩌면 필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름) 그 시를 쓴 사람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저 그렇고 그런 내용의 화장실과 서울역에 관한 시는 읽으려 하지 않고 쉽게 외면하지 않나 싶습니다. 작자는 정말 열심히 최고로 좋은 시를 썼다고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작자 혼자 만의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다음의 요건에 해당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그 화장실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모습의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롭게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어야 그 시를 읽어줄 이유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시로 성공한 작품들을 한번 예로 몇 들어볼까요? 김춘수의 , 김수영의 . 곽재구의 등을 한번 봅시다. 내가 불러줄 때 내게로 와 핀 꽃을 본적이 있습니까?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평역이란 시를 보기 전에 사평역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사평역을 목포역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때도 이 시의 감동이 사평역만큼 올까요?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위와 같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때 효과적인 제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방법은 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센텐스, 키 센텐스를 제목으로 올리되 전체 내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서 붙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으로 필자의 시집 정동진역을 읽어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필자가 이 방법을 개발하게 된 배경은 평소 광고 카피와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유심히 살피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즉 기사와 광고 카피의 헤드라인이란 시로 여기면 제목에 해당하는데 이걸 잘 뽑느냐 잘 못 뽑느냐에 따라 그 기사 또는 광고의 첫 인상 뿐만 아니라 여운까지 전혀 다르다는 데에 착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헤드라인이 그 카피,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다라는 것도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시에 한번 적용해봤더니 제대로 맞아떨어지더군요. 이때 붙이는 제목의 형식은 서술형이 되기 쉽고, 내용은 시 전체를 장악할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시 내용중 가장 근간이 되는 내용의 속성을 가진 전혀 엉뚱한 것으로 제목을 붙이는 방법입니다. 위의 내용으로 설명을 하자면 화장실 내용으로 시를 쭉 써놓고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과 제목을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김영남은 화장실이다" 라는 시를 쓴 거가 되는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글을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서 그럴싸하게 묘사 해놓고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만약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쭉 묘사해 놓고 제목을 로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이 글이 아름다운 여자를 설명하고 묘사한 글이지 어떻게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목을 이라고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메타포가 형성되어 시로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시가 되고 안 되고 까지 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시를 하나 소개하고 지면상 한계로 인해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소개하는 시는 98년(?) 현대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이고 아주 하찮은 여울을 하나 묘사해 놓고 제목을 엉뚱하게 붙여 성공한 시입니다. 만약 이 시 제목을 < XXX 여울>.로 붙였을 경우 시가 될 수 있는지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사춘기                                                          강순   여울에는   밀어,꼬치동자개,버들매치,버들치,배가사리,감돌고기,가는돌고기,점몰개,참마자,송사리,갈문망둑,눈동자개,연준모치,버들개,모래주사,새미,누치,흰수마자,납자루,열목어,꺽저기,수수미구리지,금강모치,돌상어,왜매치,꺽지,쌀미구리,점줄종개,돌마자,둑중개,왕종개,버들가지,꾸구리,모샘치,어름치,돌고기,부안종개,자가시리 등이 살았다.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박현 님의 라는 시를 읽으면 이제까지 강의한 내용중 어디에 걸려 시로 성공할 수 없는지를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름대로 제목에도 멋을 부렸는데 위에서 제가 설명한 내용을 참고하면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를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죠? 그리고 돌탑도 독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소재 아닙니까? 독자들이 이 시를 읽고 뭔가 얻었다 뭔가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라는 느낌을 주려면 돌탑에 관하여 가공으로 만들어서라도 새로운 이야기, 정보를 제공해야죠. 그러지 않으면 시간도 돈이기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읽어봤는데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 판단되면 독자는 다시 그 사람 시를 읽지 않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현재 님의 시중에서 필자에게 어필할만한 구절과 감각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군요.   박현 님은 필자의 창작강의1,2,3,4,5를 읽어보고, 또 게시판에 올라온 독자들 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유심히 살핀 다음, 다른 소재로 시를 한번 써서 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생각하고 차근차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바라자면 그 동안 써왔던 방식을 잠시 접어두고 제가 창작강의(1)에서부터 설명한 방식으로 시를 한번 새롭게 써 보시기 바랍니다. 뭔가 달라지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일 모든 게 다 그렇지만 유연한 사고를 갖는 자가 빨리 성공할 수 있습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7)     ☞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 상세 강좌   이전 창작강의 및 감상평(6)과 관련하여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중 세 번째인 "엉뚱하게 붙이는 방법"에 관하여 여러 군데에서 전화가 와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 보충합니다.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은 전통적인 방법보다 그 수준과 기교가 한결 세련을 요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걸 잘 못 붙이면 시가 난해해져 무엇을 썼는지 독자가 잘 모르게 됩니다. 가끔 시 전문잡지에도 본문과 관련지어 전혀 이해가 안가는 이상한 제목의 시를 종종 볼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이에 해당할 겁니다. 그러나 제목을 제대로 찾아 붙이면 매우 뛰어난 시로 금세 둔갑하게 됩니다.   그 원리는 이렇습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기본적으로 메타포, 즉 은유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참신한 은유관계가 형성될 때 그 시는 그만큼 참신한 시로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 이때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A는 B이다"라는 은유관계가 있는 문장을 가져와 A를 제목으로 올리고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 시를 만드는 방법이고, 두번째는 B에 해당하는 것을 먼저 써놓은 다음, 나중에 A에 해당하는 제목을 발견해 시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중 첫 번째는 상당한 수준을 요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가 쉽게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지난 강좌 때 이 방법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번 예로 든 시를 다시 읽고 난 다음에 설명하겠습니다. ************************************************************************                              사춘기                                                        강순   여울에는   밀어,꼬치동자개,버들매치,버들치,배가사리,감돌고기,가는돌고기,점몰개,참마자,송사리,갈문망둑,눈동자개,연준모치,버들개,모래주사,새미,누치,흰수마자,납자루,열목어,꺽저기,수수미구리지,금강모치,돌상어,왜매치,꺽지,쌀미구리,점줄종개,돌마자,둑중개,왕종개,버들가지,꾸구리,모샘치,어름치,돌고기,부안종개,자가시리 등이 살았다.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   ************************************************************************   위시는 제목과 본문이 은유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 라는 훌륭한 메타포가 들어있는 시인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방법을 설명한다면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라는 메타포가 눈에 번쩍 띄는 문장을 발견하고 이걸 갖다놓고 제목을 로 올리고 본문에 해당하는 에 관한 내용만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즉 사춘기를 특징 지을 수 있는 물살 빠른 여울만 구체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죠. 하여 이 방법은 상상력으로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야 하니까 테크닉과 능력이 일정 수준에 달하지 않으면 여간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눈에 번쩍 띄는 물살 빠른 여울을 묘사해 놓은 다음, 그 내용에 메타포가 잘 조응되는 제목을 찾아 올리는 방법입니다. 위시의 작자는 아마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인상깊은 여울을 먼저 상상으로 묘사한 다음에 그에 잘 조응하는 제목인 '사춘기'를 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위 시는 제목을 굳이 '사춘기'로 하지 않더라도 물살 빠른 여울에 조응하는 제목이면 다 성립합니다. 즉 제목을 '나의 대학시절' '80년대' '고교시절' '어린 시절' '신혼기' 등 과도기적 상황의 제목이면 다 잘 어울려 시로 훌륭하게 성립합니다.   하여,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방법 중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두 번째 방법이 첫 번째 방법보다 좋은 시를 더 쉽게 많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퇴고 과정 중에 버리기 아까운 대목을 다로 떼어내어 보강한 다음 이 방법을 한번 활용해 보세요. 의외로 좋은 시를 아주 쉽게 건질 수 있을 겁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하겠습니다.   배용진 님의 를 감상해 봅시다. 배용진 님은 소나기 오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포착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다만 그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만약 이게 시가 될 수 있다면 사진이 제일 훌륭한 시가 되는 거죠. 이는 무얼 뜻하느냐 하면 대상을 포착하되 자기가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들어가려면 이 강좌 맨 처음부터 줄기차게 강조한 상상으로 대상을 포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소나기가 오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고 상상을 한 것이 아니죠. 즉 상상은 소나기 오는 모습이 내게 무얼 떠오르게 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상상을 하는 지는 이 창작강의 처음에서 님이 배용진 님처럼 시를 썼다가 제게 지적을 받고 비오는 모습을 편지오는 모습으로, 또 씨뿌리는 모습으로 상상을 한 것을 보면 금세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하여, 공기욱 님의 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한번 참고해 배용진 님도 상상으로 다시 써 보세요.   기성 시인중 소나기 오는 모습을 인상깊은 상상으로 포착한 예를 들면 조정권 시인은 소나기 오는 모습을 '대못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포착했고, 또 이대흠 시인은 하늘과 땅이 섹스하는 모습, 즉 '땅이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는 모습으로 포착하지 않았습니까?   배용진 님이 올린 시를 가지고 상상한 시로 필자가 고치자면 를 로만 바꾸면 금세 시가 되요. 즉 소나기가 오는 모습을 내 추억 속의 여자들이 오는 모습으로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다 같이 필자가 고친 시로 한번 확인해 봅시다 시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     소나기     여자들이 온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여섯......   모두를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   박미라 님의 를 감상해 봅시다. 이 시는 시를 많이 써 본 사람의 시이거나, 아니면 기성 시인의 시로 여겨지는군요. 그러나 이 창작교실에 올렸다는 것은 제게 무언가 얻을 정보가 있다고 여겨 올렸다고 믿기 때문에 제가 의도한 목표에 빗나간 시는 그 시 작자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감하게 지적할 것임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목표는 제가 설정한 것이고, 또 제가 지적한 내용에 수긍할 수 없으면 제 지적에 따르지 않고 자기식대로 계속 시를 쓰면 되니깐요.   우선 필자가  박미라 님의 시를 읽고 난 느낌은 이렇습니다. 시가 너무나 뻔한 내용으로 필요없이 길다. 다 읽고 나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눈길을 끄는 표현과 감감도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선 독자에게 이런 느낌을 주었다면 그 시는 실패했다고 봐야지요. 필자를 포함하여 이 지상 모든 작가들은 독자들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지 못했다면 독자의 소중한 시간을 빼았은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작가와 독자들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거죠.   시학의 시작인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빠지지 않고 시문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 상상력과 텐스, 즉 긴장입니다. 상상력은 시의 내용을 좌우하고, 텐스는 시의 표현력, 구성력, 형상력 등 시의 외형을 좌우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가 이 강좌 맨 처음부터 상상력, 상상력 했던 게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여 이 시는 바로 이 두 가지 것중 상상력에서부터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독도를 어떻게 상상력으로 접근할 것인가를 먼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잘 되지 않을 때는 우선 상상을 펼치기 쉬운 소재부터 갖다놓고 시를 쓰는 한번 습관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필자의 창작강의도 (1)에서부터 쭉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 소재를 상상으로 접근을 하지 않으니까 자꾸 자기 주장과 진부한 자기 넋두리가 들어가게 됩니다. 자기 넋두리, 즉 자기 서사가 들어가 효과를 보려면 특별한 이야기이거나 조금 들어가든지, 아니면 아주 뛰어난 테크닉으로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시가 형편없이 늘어지거나 진부한 넋두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서사적인 내용으로 성공한 시, 백석 시를 한번 잘 관찰해 보세요. 시의 뒤에 괭장한 기교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서사가 들어가도 시가 진부하지 않고 긴장도 훌륭하게 살아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여 서사가 많이 들어가는 시를 쓸려면 시의 테크닉을 충분히 읽힌 다음 쓰고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력 위주의 시를 쓰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더라도 상상력으로 시를 쓴 사람은 젊은 사람 뺨치게 잘 쓰는 걸 필자는 주변에서 자주 봅니다.   ************************************************************************   이소빈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님은 금천장날의 한 풍경을 그냥 그리는데에 끝났군요. 많은 말을 했는데도 내용적으로는 큰 진척이 없이 시를 쓰다 만 기분이에요. 여기에서 더 깊이 상상력으로 들어가야지요. 정경 묘사는 1연 수준으로 충분합니다. 2연부터는 더 깊게 들어가 상상력을 발휘해야지요. 일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 봉숭아를 다시 한번 잘 읽어보세요. 풍경에 어떻게 상상력을 덧붙이는 가를....   하여 이소빈님은 2연에서 할머니들 얼굴에서 나팔꽃을 발견했으니깐 그 나팔꽃 이야기로 전개해야하지 않나요? 1연과 2연을 합쳐서 더 간결하게 추려 금천장날 할머니들 정경 묘사를 하고 2연부터 할머니들 얼굴에서 발견한 나팔꽃 이야기로 더 상상력을 펼치기 바랍니다. 망해도 좋으니 맘놓고 상상을 해 보세요. 이소빈님은 이제 사고가 자유롭게 활발하게 터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그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때는 정말 망해도 좋다는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갖기 바랍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8)       필자의 강의를 중간부터 듣는 사람은 필자의 강의 (1)부터 반드시 읽어볼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래야 빠른 시간에 효과적으로 시창작법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시적 표현 얻는 방식 두 가지   초보자 시절은 시 쓰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설사 알겠다 여겨지더라도 쓰려고 하면 또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되든지 않되든지간에 상관하지 말고 바로 무조건 끄적거려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여, 바로 끄적거려도 남보다 몇 곱절 빠르게 시적 표현을 얻는 방법 두 가지만 공개할까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이 두 가지만이라도 잘 활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른 표현을 새롭고 독특하게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을까? 이걸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이걸 또 설명하려면 한 학기 내내 설명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필자의 개발한 용어로 그 방법을 설명할까 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입니다. 시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 방향이 주로 한쪽으로 쏠려있습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행동하고 또 사물을 보고 느끼고 감탄하고 슬퍼하는 방식이 대동소이하고, 우리의 인식구조도 주로 그 쪽으로 익숙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쪽에서 새로운 표현을 구하려면 지금까지의 방식보다 몇 곱절 노력과 탐구로 새로운 표현을 발견하지 못하면 결코 효과적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때는 거꾸로 접근해 보는 겁니다. 남들의 시선이 다 한쪽으로 쏠려있을 때 자기는 거꾸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들이 전에 자주 보지 못했던 사고와 행동이니깐 우선 시선을 끌게 되고 새롭게 느껴지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고스톱도 여지껏 쳐왔던 방식으로 쳐 잘 안 풀릴 땐 거꾸로 치면 의외로 잘 풀리는 이치와 같은 전략이지요.   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시인이 로 표현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지만 이걸 거꾸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 또는 이렇게 되는 거죠. 를 거꾸로 표현하면 . 는 , 는 가 되는 거죠. 어떻습니까? 똑같은 내용이지만 어떤 게 우리에게 더 참신하게 다가옵니까? 후자이지요. 전자가 설명이라면, 후자는 묘사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묘사란 그 동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인식체계로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구사할 때 유의할 점은 시 전편에 걸쳐서 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요. 전편에 걸쳐서 구사하면 이것 또한 한쪽 체계의 인식구조로 전락하고 굳어지기  때문에 군데군데 양념치듯 구사해야 되요. 특히 첫연 첫구절에 이걸 효과적으로 구사하면 독자들을 아주 매료시킬 수 있습니다. 현 문단에서 이걸 잘 구사하는 시인이 바로 오규원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을 쓴 김수영 시인도 이 기법을 즐겨 구사했구요.   두 번째 방법은 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깊이 탐구해 작품에 실제 많이 응용했고 현재도 아주 즐겨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즉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또는 풍경 내에 있는 주변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이걸 잘 활용하면 시가 그림처럼 아주 선명하게 되고 초점도 또렸하게 됨을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풍물, 풍경시를 쓸 때 이 방법은 아주 효과적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가령 어떤 사람이 형광등, 침대, 커튼, 그림 등이 있는 방에 갇혀 한 여자를 그리워하며 책상에 골똘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방 속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 이미지와 초점이 선명하게 되고 할 이야기도 금세 많아지게 됩니다. 대부분이 이걸 잘 모르고 방밖을 벗어나 거창한 소재와 이야기를 자꾸 끌어오려 하다보니깐 시가 초점이 흐려지고 난해해 지게 되는 거죠. 이것만 잘 해도 시가 아주 유창해 집니다.   실제로 이 기법 하나만으로도 신춘문예 당선한 필자의 시 한 편을 그 예로 살펴보고 이번 강좌를 마치겠습니다. *****************************************   정동진驛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   필자는 정동진역 풍경을 그리는데 모두 정동진역 근처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재들은 실제로 정동진역에 다 있던 것들입니다. 억새꽃, 벤치, 모래사장, 라면집, 소주집, 소나무 등등... 그래서 열차가 들어오는 역이니까 겨울이 오는 것도 으로 생각했고, 역도 으로 표현했고, 라면집도 삼양라면을 끓이는 라면집이 아니라 이고, 소주집도 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필자가 실제로 라면집을 묘사해야 하겠는데 구불구불한 주변 소재를 찾으니까 산 능선, 도로, 해안선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중에서 가장 주변 소재에 어울리는 게 바로 해안선이었어요. 그래서 이걸 차용한 겁니다. 또한 마주보고 술잔을 나누는 소주집도 묘사해야겠는데 쓸만한 주변 소재들을 밖을 내다보며 살펴봤더니 배, 수평선, 갈매기, 파도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 소재들이 다 어울리지만 이중에서 파도가 가장 운치 있는 소재로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주변 소재로 둘러댔더니 읽는 사람마다 다 반하더군요. 만약 이걸 라고 표현했다고 해 봅시다. 얼마나 평범하고 싱겁겠어요?   위시는 시의 템포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삽입한 마지막 구절을 제외하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동진역을 벗어나지 않고 철저하게 정동진역 주변 소재로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도 신춘문예에까지 당선되고 성공한 시로 여기잖아요?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영이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이영이 님의 시를 읽으니 양파를 가지고 나름대로 상상을 펼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물겹게 느껴지는군요. 아주 장래가 기대되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몸부림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시 창작법을 습득하게 됩니다. 아주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이렇게 되는 상상이든 안 되는 상상이든 천방지축 날뛰며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되고 이런 몸부림치는 과정이 치열할수록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여지도 많게 됩니다.   이영이 님은 쌩상의 음악을 틀어놓고 양파를 벗기며 단순히 느낀 소감을 적었군요. 그래서 이 시는 내용이 쌩상의 음악이 흐르고 있고, 양파 껍질을 벗기다 보니 매워 눈물나는 모습 두 가지 밖에 없군요. 그리고 마지막 구절은 앞의 내용과 조응하지 못하는 동떨어진 시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시는 내용적으로 아직 여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초보자가 이렇게 몸부림치는 모습은 크게 인정해 줄만 하고 아주 좋은 징조로 여겨집니다.   우선 이영이 님은 이 시를 그대로 놔 두고 이렇게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소재를 양파에 한정하고 이렇게 첫줄을 써 놓고 쌩상의 음악을 양파의 속성과 우리에게 이용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빗대어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때도 물론 상상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맨 마지막에 가서 로 서두의 구절에 의미를 첨해 한번 더 리플레이 하면서 시를 마무리 지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그때 필자가 앞에서 설명한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요령'을 참고해 제목을 한번 붙여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필자의 창작강의 및 감상평 (5)에 예로 든 윤문자의 을 로 바꾼 다음 수박의 속성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부 양파로 바꾸어 시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금세 훌륭한 시로 탄생함을 절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이렇게 앞서간 사람들의 시 창작 방법을 모방하면서 자신의 시 창작법을 습득하게 되는 겁니다. 절대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써서 다음에 다시 한번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효과적인 시창작법을 이 게시판 독자들이 함께 공유해야 하니깐요. ************************************************************************   눈아수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눈아수 님도 나름대로 몸부림 쳤습니다만 문제가 많군요. 우선 시 내용의 시점이 첫 연에서는 아침이었다가 두 번째 연부터 갑자기 저녁으로 변했어요. 작품에서 이러면 안 되지요. 시점이 갑자기 바뀌고 장소가 바뀌면 독자들이 못 따라와요. 그려면 시가 갑자기 산만해지고 난해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작자 혼자 내킨대로 쓴 형국이 되는 겁니다. 시간이 바뀌고 장소가 갑자기 바뀌면 독자들이 충분히 따라올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해요. 이것까지 고려하면서 시를 쓴다니... 시 쓰기가 갑자기 어려워지죠? 그래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한 장소와 한 시점으로 통일해 시를 써야 하는 겁니다. 독자들이 따라올 정도로 배려를 해 시를 쓸려면 테크닉이 충분히 붙은 다음에라야 가능해요.   하여, 눈아수 님의 시는 시점이 첫 연과 맞지 않고 내용도 참신한 내용이 아닌 진부한 서사이오니 더 참신한 내용으로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에 구애받지 말고 필자의 창작강의 (1)부터 꼼꼼히 읽은 다음 상상하기 쉬운 소재를 하나를 갖다놓고 시를 한번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이때는 시 한편을 얻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는지를 체득하는 게 눈아수 님에게 더 중요합니다. 더불어 연을 전개할 땐 앞 연의 핵심어, 또는 핵심 의미를 가지고 뒷 연을 전개해야 시의 논리성과 전달력을 갖게 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이 시 첫연을 로 고쳐 쓴 다음 '열리는 꿈' 이야기로 두 번째 연부터 상상을 한번 펼쳐 시를 완성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 창작이란 체험과 경험을 직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소재를 통해 체험과 경험, 가공 이야기를 새롭게 꾸며내고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창작인 것입니다 (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9)       ☞ 시어 선택 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필자는 요즘 문단에서 가끔 문학의 위기니, 시의 위기니 하고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 답답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시의 위기가 어디에서 왔고, 그 해결방안은 어디에 있는 지 떠드는 내용을 보면..... 더욱이 그 원인을 독자층에 돌리고 그 해결방안도 독자층에서 찾을 땐. 그러나 필자는 그 원인과 해결방안에 대한 생각은 이와 정 반대입니다. 그 원인은 시를 생산해 제공하는 시인에게서 왔고, 그 해결방안도 시인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를 포함해 이 땅의 모든 시인들은 대중들, 특히 문학 수요자의 환경변화를 하루 빨리 깊게 인식해야 합니다. 예전에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는 문학이 중심 매체이었고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대체할만한 마땅한 대체매체도 없어 늘 대중들의 수요에 공급이 모자랐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는 공급만 하면 수요는 절로 보장되어 있는 상황이었죠. 즉 시라는 제품의 효용성, 편리성, 유익성 등을 크게 고려하지 않더라도 시라는 제품에 언제나 충분한 수요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나라가 산업화로 치달으면서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할만한 대체매체가 많이 출현하게 되었고, 또한 대중들의 욕구도 다양해졌습니다. 이젠 특별한 흥미가 없고 독자들을 유인할만한 내용이 아니면 독자들이 절로 찾아오리라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겁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방식대로는 이젠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다수 시인들이 이런 환경변화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기존 사고에 갇혀 시의 위기를 수요자인 독자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건 번지수를 잘 못 짚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급자인 시인 스스로가 빨리 변해 독자의 환경변화에 적응해야지요. 지금 정치도, 경제도, 행정도, 교육도, TV도, 영화도, 체육도.. 모든 것이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 즉 독자 위주로 바뀐 지 오래인데 오직 시만큼은 권위주의 귀족주의 전통주의에 너무 깊게 빠져 독자를 고려하면 마치 3류 시인인양 취급하고 전문가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시를 해설서를 곁에 놓고 감상하라는 식의 합리화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는 달라진 독자들의 욕구환경을 고려해 시도 하나의 상품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감상하기 쉽고, 재미있고, 음악성 있고, 유익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을만한 시를 만들어 제공해야죠. 그렇다고 품질이 형편없는 싸구려 제품을 만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싸구려 제품과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과는 그 기준이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 동안 이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고 제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시 쓰는 방식은 수요자 위주로 하루빨리 변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요즘 발표되는 시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특별한 내용도, 흥미도 없으면서 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한 장도 아닌 두 장 세 장으로 늘어놓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일반 독자들이 읽어 주리라는 걸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이제는 시를 생각하는 방식, 시를 만드는 방식이 종전과 하루 빨리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시의 위기라는 말이 사라지죠.   하여, 초보자들이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 기본적으로 유의할 점 두 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첫째로 초보자 시절에는 老티 나는 시어를 쓰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 등 혼자 술취해 영탄하는 듯한 용어는 절대 쓰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 용어들을 보면 독자들이 바쁘고 바쁜 세상에 혼자 술취해 영탄하고 돌아다니는 소리로 여겨 그런 시는 그냥 넘겨버리게 됩니다. 즉 독자들은 이런 용어를 보면 할 일없고 배부른 소리로 생각해 기분 나빠하기 쉽다는 거죠. 그리고 , 식의 명령투도 지양하시기 바랍니다.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불행한 이야기, 슬픈 이야기, 즐겁게 하는 이야기, 유익한 이야기 등에 관심이 있고 또 이걸 읽으면서 스스로를 위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잘난 체하는 이야기, 친구 가족 등 주변 자랑 이야기, 명령투의 이야기 등을 들을 땐 아주 기분 나빠하게 됩니다. 실제로 필자는 아주 젊은 시인들 중에도 이런 노티 나는 용어와 명령투의 시를 자주 쓰는 걸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창작강의를 듣는 사람은 이런 노티 나는 용어대신 가능한 한 확신에 차 있고 박력 있고 싱싱한 용어를 구사하기 바라고, 명령투 대신 청유형을 구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고어(古語), 사어(死語), 상투어 등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시도 그 시대의 문화를 즐기는 하나의 매체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용언어와 무관하지 않죠. 그런데 이 첨단 시대에 살면서 아직도 화랑, 신라의 달밤, 정읍사의 노래, 달구지, 신작로, 물레방아, 수틀, 바느질, 낮달, 이승, 저승 등등  그 옛날 시절의 풍경과 풍물, 남들이 지겨울 정도로 써먹는 낡은 시어를 들먹이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에 특별한 관심이 있거나 사연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대다수 독자들은 이런 용어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싫어하게 됩니다. 시속에 나타나는 시간, 장소, 풍물들의 거리도 독자들에게는 현실의 거리만큼 멀고도 가깝게 느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막연하게 먼 시간 속으로 끌고 가는 건 귀찮아해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늘에 UFO가 날아다니는 세상인데 아직도 낮달 운운하는 걸 보면 독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더군다나 남이 자주 쓰는 시어를 보면 '이 사람 노력도 하지 않고 맨 날 남이 쓴 시어나 갖다 쓰는 참 게으른 시인이구나!' 하고 독자들이 판단하지 않겠어요?   하여, 이 게시판 독자들 중 이런 것에 그 동안 관심이 있었다면 잠시 이를 접어두고 현재의 우리 생활 속에서 매력적인 소재를 찾아 시를 쓰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기본적으로 가능한 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울고 웃고 놀기를 좋아한다는 걸 명심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사투리를 쓰더라도 옛것보다는 현재의 것을 쓰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공급자 위주가 아닌 수요자, 즉 독자를 고려한 전략적 시 쓰기 방법의 한 예입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를 쓴 서담 님은 언어를 다루는 것을 보니 기성 시인이 아닌가 싶군요. 제 추측이 맞는다면 이렇게 찾아주신 데에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크게 잘난 것도 없지만 제가 이 교실을 담당하기 때문에 만났고, 그 인연으로 필자의 창작 경험을 듣게 된다고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서담 님이 풍자시, 위트시, 드라마틱 시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남들보다 한 발 앞서가는 생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시를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가 되면 시의 테크닉은 정점에 달한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 이유는 이런 시는 기본적으로 소설적인 기법인 극적구조, 즉 기승전결 구조를 요하고 이걸 효과적으로 구축하려면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면서 독자들을 꽉 휘어잡고 몰고 다니는 능력과 반전상황을 상상력으로 창조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소설도 역동적인 반전상황을 창조하기 힘든데 더군다나 시에서 독자들을 몰고 다니며 효과적으로 반전상황을 창조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쉽습니까?   서담 님의 를 읽고 나니 서담 님이 어떤 풍자시를 쓰고자 하는지 그 의도는 충분히 알겠는데 서담 님이 의도한만큼 풍자가 되지 않았어요. 우선 라는 소재 자체부터 충분하게 풍자성 있는 소재가 아닙니다. 풍자시로 성공하려면 먼저 소재 자체가 충분하게 풍자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낯설어요. 그렇게 되면 가 어떤 것이다라는 의미를 서두에서 창조한 다음 시를 전개해야 하니깐 그만큼 풍자성이 풍부한 소재보다 전략적으로 긴장이 뒤떨어지게 되는 거죠. 만약 같은 프로이지만 로 소재를 선택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이건 웃기는 프로다라고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의미를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잖아요. 왜 이게 중요하냐면 처음부터 독자의 의식을 한쪽으로 확실하게 굳혀놓아야 독자를 쉽게 끌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배경과 무대를 가능한 한 한군데로 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두 군데를 하더라도 반전부에서 반드시 이를 모아야 해요. 그 이상을 벗어나면 긴장과 집중도가 떨어지게 되어 반전도 용이지 않을뿐더러 반전을 시도하더라도 김이 다 빠진 상태가 되는 거죠. 예컨데 술좌석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정말 웃기는 이야기라고 말하는데 자꾸 여기저기를 이야기하다보니 초점이 흐려지고 내용이 산만해져 웃음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경우와 똑같은 이치이죠. 하여 서담 님의 시에는 고시촌, 골프장, 시창작반으로 세군데로 장소가 흩어져 있어서 독자들이 갈수록 긴장하기보다는 장소를 따라다니기에 바빠요. 그래서 이미 김이 다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셋째로는 반전부에서는 기본적인 형식이 이제까지의 내용을 뒤집는 겁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내용이 이었으면 반전부에서는 가 되는 거죠. 그리고 접속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그러나, 그런데, 하여 등등이 되는 거죠. 그리고 나서 결론부분에 가서는 서두의 의미를 한번 더 리플레이 한다는 생각을 갖고 전개와 반전으로 벌어진 의미를 모아주고 자기 생각이나 새로운 의미를 첨가하면서 끝내는 겁니다. 그런데 서담 님의 시는 반전부의 형식과 내용이 크게 역동적이지 못하고 결론부분도 없이 끝냈어요. 그래서 풍자도 흥미도 의도했던 것만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근간으로 해서 필자가 서담 님의 시를 바로 고쳐 쓴다면 이런 형식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       닭장프로                        서 담   골프연습장에는 닭장프로가 있다네. 아직까지 날지 못하는 자에게 유용한 프로.   그 프로에 의하면 실내에선 되지 않는 게 없다네. 늙다리 할아버지도 옆집 아줌마도 힘을 빼고 부드러운 자세로 기본기에 충실하면 신문 인터뷰 난에 크게 날 수 있다네. 서로 연인도 될 수 있다네. 그러나, 야외 연습장으로 나가면 이 모든 게 아무짝 쓸모 없네. 모든 것이 내 의지를 거역하기 일쑤이고   샷도, 공도, 여자도 제 멋대로이네. 내 팔도 내 것이 아니네.   골프연습장에는 닭장 프로가 있네. 난 그 닭장프로를 인터넷 시 창작 반에서 또 보네. ********************************   어떻습니까, 서담 님? 정말 근사한 풍자시 한 편이 탄생한 것 같지 않습니까? 하여, 서담 님은 이쪽에 관심이 있고 더 참신한 풍자시, 위트시, 드라마틱 시 소재를 얻으려면 우화집이나, 그림 동화집, 유우머집, 여성지 광고 카피 등을 많이 뒤적거려 보세요. 그러면 기발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조정호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조정호님은 제가 잠 못 자고 힘들여 쓴 창작강의를 읽어보지 않고 시를 올렸군요. 더군다나 한 사람이 일주일에 한편 올린다는 운영방침도 어기고..... 하여, 처음에 올린 한편에 대해서만 감상평을 쓰겠습니다. 제 강좌의 내용에 더 많이 접근해 있는 시가 또한 처음에 올린 시이기도 해서요. 이런 글은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지 창작강의(7) 배용진님이 올린 시 가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 지를 실제로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그 앞전 강의에서도 여러번 강의했구요.   일전에 강의 때 제목을 이라 붙이고 형광등에 관하여 시를 쓰면 시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요. 이게 시가 되려면 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새로운 형광등을 창조해야 시가 되는 겁니다. 즉 걸어다니는 형광등, 말하는 형광등, 화장을 하는 형광등... 이런 식의 형광등을 창조해야죠. 그렇잖으면 가장 쉬운 방법으로 형광등을 천장에 붙어서 우는 친구로, 또는 여자 친구로 여기고 상상을 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면 금세 시가 되잖아요? 제목과 내용을 연관지어보면 '형광등'은 '내 친구이다', 또는 '형광등'은 '내 여자 친구이다' 라는 메타포가 형성되어 시가 된다는 겁니다.   하여, 이 시를 본문에 나오는 형광등이란 낱말과 의미를 전부 내 친구로 바꾸면 금세 시가 됩니다. 현재로는 시가 될 수 없어요. 이 내용을 필자가 반영해 약간 수정하면 이런 시가 되겠습니다. *******************************     형광등     낡은 천장 한 가운데 붙어 우는 나의 친구   그는 오래 전에 하늘로 올라가   스스로 울지 못하고 내 손이 가야만, 내 손이 가야만 비로소 우는 처량한 족속.....   그 처량한 울음아래 내가, 내가 묵묵히 앉아 있다.   ******************************   어떻습니까 조정호님. 이렇게 쓰는 게 바로 시에요. 위 시를 나의 친구가 아닌, 나의 추억, 나의 옛날, 나의 할아버지 등등 어떤 걸로 치환해도 다 시로 성립함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해가 되나요?   ************************************************************************   김은철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이런 시를 만나면 필자는 우선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우선 필자가 줄기차게 강조한 시를 상상력으로 써라 하는 관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지적해 주기가 한결 쉽습니다. 이런 분은 조금만 더 공부하면 금세 수준 급으로 올라갈 여지가 많아요. 일단 시 소재를 대하는 기본방식은 필자가 바라는 방향을 제대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보완하고 수정해야할 부분이 많군요. 그 부분을 지적해 보겠습니다. 우선 제목 붙이는 것이 서투릅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정공법으로 접근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가능한 한 심플하고 구미가 당기게 붙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부제가 붙고 복잡하면 우선 독자들이 이 시에 호감을 갖게 하는 데에 처음부터 실패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독자들이 시를 대하는데 복잡하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면 음식을 즐기는데 그 음식 첫 인상이 복잡하고 지저분해 먹기 싫어지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하여 이점 고려하시고 필자의 "창작강의"중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요령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실제로 '어느 황혼'을 보고 이 시를 썼다 하더라도 내용과 멋지게 부합하지 않으면 과감하게 다른 제목으로 바꿀 줄 아는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시 내용상으로는 시 첫줄에서는 동녘 해돋이였다가 두 번째 연에서 갑자기 서녘 황혼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시의 초점이 흐려지고 산만해지고 난해해 집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하나의 소재를 잡아 한 시점, 한 장소에 고정시켜놓고 집중해서 파고들어야 처리하기 쉽고 또한 시가 선명해 집니다. 하여 이 시는 서녘 황혼이 주 내용이니깐 서녘으로 모든 시점을 통일해야 시가 선명해지지 않나 싶습니다. 자꾸 여기저기 들먹거리면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이 주위가 혼란스러워집니다.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아도 독자의 편의와 감상을 고려해 지나친 부분은 스스로 참아야지요. 이게 기교고 숙련이에요. 하여 첫 번째 연부터 동녘에 해당하는 내용을 모두 서녘으로 바꾸면 두 번째 연이 첫 번째 연과 중첩이 되어 필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시에 라는 말이 너무 많아요. 한 시에 동일한 단어가 두 번 이상 나오면 지루하고 따분해요.   그리고 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나를 미워해서 떠난 사람으로 전달됩니다. 이는 로 고쳐야 작자의 의도와 부합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도 구체적이지 못하고 막연해요. 이는 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하여 제목도 좀 더 멋들어지게  쯤으로 다르게 붙여 놓고 그 황혼을 보며 내 곁을 떠나간 사람을 상상한 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시로 탄생하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가 지적한 사항을 곰곰이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    제부도 황혼     서녘을 보니 빨갛게 충혈된 너의 눈이 슬프다.   항상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나를 그리도 따사롭게 감싸던 네가   무엇이 그리워서 눈물에 젖어 사느냐.   서럽게 떠난 너의 빈 자리엔 싸늘한 밤이 남았지만   나를 보러와 줄 것을 기다리며 숨을 놓지 않는다.   가슴 차가운 어둠을 뚫고 여전히 슬프게 충혈된 너의 눈이 다시 또 나를 보러 와주리라 기대하므로......   ***********************************************************************   박용석 님의 라는 시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박용석 님은 짧은 시를 썼지만 상상력이 폭발적이군요. 검은 구름의 이미지에서 살이 오른 누에를 발견한 것이. 초보자 시절에는 이런 싯구를 하나 발견한 것도 대단한 수확입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상상해야 시가 금방 늘어요. 여하튼 좋습니다.   다만 미숙하고 어설픈 표현을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시선이 하늘에 있다가 갑자기 로 옮겼습니다. 이러면 시가 난해해 진다고 했지요. 비유를 하더라도 그 주변 소재로 해야지 이렇게 하늘에서 갑자기 보이지도 않는 발가락 사이로 시선을 옮기면 누가 수긍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라고 했는데.... 비명? 소리를 지르는 누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건 아니죠. 이런 게 미숙한 표현이에요. 정도로 해야지요. 그리고 '끝에 숨었다'라고 했는데 그 이 어딘지 너무 막연하지 않나요? 시의 내용으로 보아 정도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했는데 창시? 즉 창자들이 개떼처럼 달리는 걸 본 적 있습니까? 창자들이 어떻게 개떼처럼 달릴 수 있나요? 말도 되지 않지요. 이게 시적 표현이다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시의 논리도 상식 수준 범위 내에 있습니다. 단지 그 상식을 어떻게 새로운 방향에서 보아 냈느냐가 문제인 거죠. 하여 이 부분은 전체 내용으로 보아 정도로 표현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의 지적한 내용을 반영해 시를 조금 수정하면 다음과 같은 시가 탄생하겠습니다. 지적한 내용과 수정한 부분을 잘 음미해보고, 또한 필자의 창작강의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박용석 님은 상당히 감각적인 시를 잘 쓰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   신호등이 붉게 깜박이고 있다     문득 바라 본 하늘에 붉게 깜박이는 신호등을 안고 먹장 구름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검지 손가락으로 거길 문질렀다. 살이 오른 누에들이 꿈틀댔다. 난 화들짝 놀라 건물 뒤에 숨었다. 거리엔 차들이 달리고 내 속엔 아름다운 추억들이 달리고.....   *********************************   어떼요 박용석님? 이렇게 수정하니깐 근사한 시가 되잖아요? 여하튼 필자의 강의를 듣고 열심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10)       ☞ 효과적인 표현력, 문장력 기르는 법   시를 쓰던지 소설을 쓰던지 간에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언어로 표출할 수 있는 표현력과 자기 글이든 남의 글이든 간에 이걸 응용할 줄 아는 문장력을 기르는 게 급선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도 정확히 표현할 줄 모르는데 글을 응용할 줄 알리 만무하고, 또한 천재가 아닌 이상 글을 응용할 줄 모르는데 좋은 글, 좋은 시 쓸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최고의 문장가 영국의 서머셋 모옴은 그의 책 에서 훌륭한 글의 조건으로 첫째 명쾌한 글, 둘째 정확한 글, 셋째 간결한 글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는 또한 문장이 애매모호하고 난해한 것은 그 글을 쓴 작자가 자기가 무엇을 쓰려는지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거나, 설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쓰려고 한 내용을 정확히 알고 제대로 소화한 상태에서 글을 쓰면 절대 그런 글이 나올 수 없다고 갈파했습니다.   하여, 이 상을 참고해 명쾌한 글, 정확한 글, 간결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고 남보다 빠른 표현력과 문장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우선 소설을 읽든, 시를 읽든지 간에 반드시 곁에 대학 노트를 펼쳐놓고 읽기 바랍니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멋진 표현, 아름다운 표현, 특이한 표현, 기발한 표현 등이 나오면 바로 대학노트 왠쪽에 쭉 베껴 놓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잠이 오지 않을 때나 틈이 날 때 이걸 꺼내놓고 다시 한번 쭉 읽으면서 훌륭한 표현은 대학노트 오른쪽 면에다가 자기 생각으로 한번 바꾸어 표현해 보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원문이 "열려라 참깨, 아라비아 마법의 주문을 빌어서라도 그들을 한꺼번에 열어 젖히고 싶었다" 이런 글을 베껴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바로 그 줄 오른쪽 노트에다 "열려라 커튼, 아메리카 마법의 주문을 빌어서라도 난 그녀의 치마를 한번 열어젖히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작자의 원문을 그 구조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겁니다. 또 더 참신하게 다르게 끼워볼 수 있으면 가능한 데까지 계속 하고요. 이 예문은 필자가 김신의 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베껴놓은 원문을 실제로 바꾸어 표현한 예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학노트 한 열 권 정도만 연습하면 우리 나라 1급 글쟁이들도 결코 부럽지 않아 질 겁니다.   왜 이게 효과적인가 하면 통상적인 방식으로 책을 읽으면 멋진 표현이 나오더라도 그 순간 아, 멋진 표현이구나 하고 눈으로만 읽게 되고 또한 읽고 난 지 얼마후면 그 표현들도 금세 까맣게 잊어버리기 쉽상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방식을 취하게 되면 첫째로 원문을 베끼는 과정에서 그 표현을 몸으로 느끼게 되고, 둘째로 다시 꺼내 읽을 때 또 한번 그 표현을 음미하게 되고, 셋째로 그 표현을 나의 식으로 바꾸어 표현해 보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표현이 내 피 속에 스며들게 됩니다. 더불어 한가지 더 유익한 게 있다면 보통은 한번 책을 읽고 나면 얼마 후 그 책 내용을 거의 까맣게 잊어먹게 되는 데 이런 식을 거치면 다시 한번 그 책 핵심내용을 훑은 게 되어 그 책 전체내용이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는 부수 효과도 얻게 됩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비디오를 보든, 영화를 보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멋진 표현을 만나면 언제라도 항상 채집해 그걸 자기 식으로 바꾸어 표현해 보는 게 표현력과 문장력을 기르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장이론 책 백 번 읽는 것보다 이걸 한번 연습해 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는 게 필자의 경험입니다. 참신하고 기발한 시의 감각훈련도 이런 식으로 하면 금세이고요.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송희야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그동안 필자의 창작강의에서 한번도 빠지지 않고 강조한 게 시 소재를 접근할 땐 상상으로 접근하라 이었습니다. 그렇잖으면 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풍물과 풍경을 새롭고 놀랍게 창조하던지.... 이 두 가지로 접근하지 않으면 십중팔구가 자기 서사 넋두리로 전락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염두해 두고 다시 이 시를 읽으면 어떻습니까, 송희야님? 상상을 펼친 것도 아니고, 그냥 누구든지 흔하게 볼 수 있는 정신병원 풍경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지요? 서사도 특별한 것이 아닌 너무나 평범한 내용이지요? 그러면 안 돼요. 그래서 필자가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시를 상상으로 써라' 라고 줄기차게 강조한 것입니다.   소재를 통해서 상상으로 접근하면 그만큼 자기 서사, 넋두리가 사라지게 되고, 실제로 서사,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소재를 거쳐서 진술하게 되면 묘사로 변하게 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라는 표현은 직술입니다. 이걸 '단풍잎'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말하게 되면 가 되겠죠? 어떻습니까 너무나 멋진 시적 표현이 아닌가요? 이와 같이 똑같은 글이지만 소재를 통해서 말하게 되면 금세 시적 표현인 묘사로 둔갑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여, 송희야 님은 필자의 창작강의 1,2,3를 읽어보고 나서 상상하기 좋은 다른 소재를 갖다놓고 시를 다시 한번 써 올리시기 바랍니다. 필자의 강의 목적은 한편의 시를 건진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쓰는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해서 혼자서도 시를 잘 쓰도록 하는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남들은 5년 아니 10년이 걸렸다는 걸 참고해 차근차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현재 송희야 님의 시중에 시적 표현을 고르자면 이 한 구절밖에 없습니다. 왜 이 한 구절만 시적 표현인지 곰곰히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서담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서담님의 발상은 참 놀랍습니다. 필자도 부러울 정도의 발상력을 갖고 있군요.파란 유리병을 바라보면서 라고 상상한 이 시 첫 구절은 김기림의 라는 시를 연상시킬 정도로 훌륭해요. 그런데 그 좋은 발상력을 바로 다음 구절부터 전혀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어요. 더불어 첫 번째 연은 바다에 띄우는 배를 이야기 했다가 두 번째 연에서부터는 먹는 배 이야기를 해서 그 수준이 아주 저급으로 전락했어요.   이런 것보다 말장난이라고 해요. 말장난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장난을 해야지 이런 식의 시를 접하면 독자들이 기본적으로 아주 기분 나빠해 합니다. 독자들은 작자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게 되요. 신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독자를 여기기 때문에 이렇게 진지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그냥 말 바꾸기 식으로 대한다고 생각하게 되요. 생각해 보세요, 단지 김영남이란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그 사람들 모두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한다고 여기며 말한다면 이를 누가 수긍하겠어요? 안그런가요, 서담님? 김영남이란 사람 한명이 빨간 옷을 입거나, 파란 옷을 입거나, 팬티 차림이거나 아니면 알몸이거나,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이거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한다면 또 몰라도.....   하여, 서담님은 이 첫 구절 하나만 살려놓고 여기서부터 시를 다시 쓰기 바랍니다. 이렇게 훌륭한 상상을 해놓고 왜 그 다음을 못 이어요? 바다에 띄운 배에 사랑도 실어보고, 미움도, 추억도, 보석 반지도, 아니면 돛도 한번 달아보고, 배 수리도 한번 해보고....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서담님은 기본적으로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전에 들어가면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게시판에서는 게시판 특성상 한계도 있고 하니, 더 큰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문학아카데미 창작실기과정에 등록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의 말에 수긍한다면 창작실기과정에 등록을 해서 승부를 한번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문의는 월간 으로 해서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   김은철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김은철님은 전번주에 칭찬을 한번 해 주었더니 금세 왕창 망한 시를 써서 올리는군요. 그래서 훌륭한 선생은 초보자 시절에 절대 칭찬을 잘 안 하나 봅니다. 지난번 시와 지금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 다시 한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시란 기본적으로 언어로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미지, 즉 심상이라고 했지요. 지난번 시 이란 시를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한 사람이 제부도 황혼을 쳐다보면서 떠나간 여자를 상상한 시로 머리속에 그림이 선명히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위 시는 읽고나서 그림이 그려집니까? 어떻습니까 .   제목처럼 이란 현상을 시로 표현하려 했다면 소재를 통해서 이야기 해야죠. 그리고 앞전 창작강의에서 제목도 이런 식으로 붙이지 않는다고 여러번 강조했지요? 제법 멋을 부리려고 했는데 멋도 제대로 알고 부려야지.....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정공법을 구사하시고, 매력적인 소재 하나를 골라놓고 한 시점 한 장소에 고정시킨 다음 상상을 깊이 있게 추구하는 시를 써서 올리시기 바랍니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필자는 개성적이고 효과적인 시 창작법 습득을 이 창작교실 운영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김은철 님이 유의해야 할 점은 자기가 쓴 시에 대해 절대 남에게 설명하려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자기 시를 읽는 사람마다 다 쫓아다니며 모두 설명을 해야 김은철님의 시를 제대로 감상한 격이 되요. 또한 자기 시 변명을 듣고 감상평을 이야기 한다면 필자의 존재 이유도 전혀 없구요. 하여 김은철님은 늘 '나는 이런 내용으로 시를 썼는데 왜 상대방에는 이처럼 다르게 전달되었을까'를 항상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갖기 바랍니다.   ************************************************************************   김송 님의 을 감상해보도록 합시다.   김송님은 그저 밋밋한 시 한편을 건졌습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이것만으로도 괭장한 수확입니다. 일단 자기가 설정한 소재를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 그리는데 비교적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두 눈 딱 감고 자기가 설정한 대상을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이 제가 지향하는 시 창작 방법입니다. 다만 얼마만큼 개성적인가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김송님의 시중에서 어설픈 표현들을 지적하자면 셋째연 는 다소 과장되고 막연한 표현으로 생각되고 또한 바로 앞줄에 '사방연속 무늬' 라는 말이 나와 '비연속 무늬' 라는 단어가 크게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걸 정도로 표현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넷째 연에서 라고 표현했는데....이런 표현도 미숙해요. 이 시 전체 분위기가 음침하고 우울한 분위기이잖습니까. 그러면 여기에 구사하는 단어들도 이 분위기와 색깔, 의미, 어조, 뉘앙스가 서로 보조를 맞추어야 해요. 그러면 표현은 바꾸어야 하지요. 어떻게 부러진 다리를 껴안고 해죽 웃을 수 있나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미친 사람이나 다름 없죠. 하여 이 부분은 로 바꾸어야 시 전체 분위기와 맞고 표현도 더 적절하지 않나 싶어요.   이렇게 고치고 나면 을 그린 담담한 시는 되겠는데 뭔가 좀 부족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는 이 너무나 특색없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땐  시의 제목을 한번 다듬어보거나, 아니면 시의 맨 마지막을 보강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시가 한 차원 높게 상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 란 제목에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해 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말이죠. 라고. 어떻습니까, 김송님? 그녀의 방이었지만 남편도 오래전에 떠나버려서 이젠 그녀도 떠나버린 방으로 내용이 한결 더 선명해지고 깊어졌지요? 그렇잖으면 라는 제목을 맨 마지막으로 내려놓고 원래 제목인 을 제목으로 삼아도 마찬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필자가 수정한 시를 감상하면서 필자의 말이 맞나 안 맞나를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   그녀의 방에는 그녀가 없다                              김 송                     문고리를 잡고 창호지문을 미는 순간 쾌쾌한 내가 코를 찌른다.   들뜬 베니어 장판은 세월만큼 켜켜이 땟국에 절여 있다.   사방연속 무늬 벽면을 따라 파리가 새겨놓은 사연들.....   방구석 그녀가 쓴 경대는 부러진 다리를 껴안고 슬퍼한다.   짧디 짧은 파마 머리 그녀는 천장 아래 사진틀 속에서 까까머리 장남을 안고 웃는다.   그 옆에 35년 전에 죽은 그녀의 남편은 근엄하게 장남을 바라보고 있다.   흙벽을 갉다말고 새앙쥐 한 마리가 사진 속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 간다.   ************************************        그녀의 방                           김 송                     문고리를 잡고 창호지문을 미는 순간 쾌쾌한 내가 코를 찌른다.   들뜬 베니어 장판은 세월만큼 켜켜이 땟국에 절여 있다.   사방연속 무늬 벽면을 따라 파리가 새겨놓은 사연들.....   방구석 그녀가 쓴 경대는 부러진 다리를 껴안고 슬퍼한다.   짧디 짧은 파마 머리 그녀는 천장 아래 사진틀 속에서 까까머리 장남을 안고 웃는다.   그 옆에 35년 전에 죽은 그녀의 남편은 근엄하게 장남을 바라보고 있다.   흙벽을 갉다말고 새앙쥐 한 마리가 사진 속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 간다.   그녀의 방에는 그녀가 없다.   ************************************************************************   이영이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이영이 님은 소재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제가 바라는 방식의 입구에까지 왔습니다. 일단 시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접근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접근하는 방식에는 성공했는데 상상을 풀어가는 방식이 아직 서투르군요. 일전에 필자가 이영이님 한테 참고시로 소개한 윤문자의 이란 시를 유심히 살펴보세요. 맨 처음에 을 로 비겨놓고 나의 모든 양태, 즉 나의 행동, 취미, 성질, 얼굴, 가슴, 다리 등 나의 모든 모습중에서 오직 이란 특성 하나를 골라 이것 하나로 상상을 전개하고 끝마쳤잖습니까? 하여 처음에는 가능한 한 한가지 특징이나 특징을 골라 집중으로 상상을 펼치는게 내용을 전개하기가 쉽고 시도 선명해지고 깊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시는 맨 처음에 어떤 특징을 잡아 선언하느냐가 중요하게 됩니다. 이걸 잘 못 택하면 상상을 펼치기가 아주 어려워 결국 시 쓰는 것도 중도에서 포기하게 됩니다.   이영이 님의 양파 시 맨 처음을 보면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우선 처음부터 표현과 풀어가는 방식이 어설퍼요. 이라고 했는데 무채색이란 말은 있어도 무백색이란 말이 있나요? 백색이란 단어 자체가 이미 색깔이 없는 색이 아닙니까? 그러면 의 는 의미없는 말이죠. 그리고 양파를 나로 비겨놓았으면 윤문자 시 수박의 첫줄처럼 나의 모습중 어떤 것 하나를 골라서 시의 첫줄을 시작해야죠. 아마  이영이 님이 의도했던 바는 양파의 겉은 붉지만 속은 하얀 걸 끌어내려 했던 것 같군요. 그러면 처음에 나의 양태중 하나를 골라 이렇게 선언하고 시작해야지요. 라고 말이죠. 그리고 나선 두 번째 연부터 하나에 한정해서 상상을 계속 펼쳐야지요.   이영이님이 쓴 시를 참고해 필자가 위와같은 방식으로 시를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상상을 풀어가는 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양파                     이영이   나의 겉 얼굴은 붉지만 내 속 얼굴은 항상 백색이다. 내가 외출을 해 손님을 만날 땐 늘 이 겉 얼굴을 가지고 만나지만 나의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으려면 속 얼굴이 필요하다. 몇 겹을 벗겨도 한결같은 백색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 핏기 없는 속 얼굴이지만 함부로 대하는 자에게는 결코 가만히 놔두지 않는 못 된 성깔도 가졌다 내 백색 얼굴을 건드리면 여지없이 그대 코를 비틀어서 눈물까지 흘리게 한다.   나의 겉 얼굴이 붉고 속 얼굴은 백색이지만 난 이 두 얼굴을 가지고 끝까지 인생을 뜨겁게 살 수 없다는 게 나의 가장 큰 불만이다.   ************************************** 어떼요, 이영이님? 상상을 이런 식으로 풀어가는 겁니다. 윤문자의 이란 시와 이영이 님의 시를 고친 시와 유사점, 다른 점, 풀어가는 방식 등을 잘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영이님에게 한번 더 권고할 것은, 대상을 표현할 때 [나]를 중심으로 잡으라는 겁니다. 지금은 [남]이 [나]를 보는 식이지요. 그러지 말고, [내]가 화자가 되어 [남]을 묘사하는 겁니다. ************************************************************************   황미숙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황미숙 님은 일전 서담 님처럼 위트 시, 드라마틱 시, 풍자시를 겨냥하고 시를 썼군요. 이런 종류의 시를 쓰는 방법과 이론은 이 앞전 창작강의 서담 님 감상평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다만 이 시를 읽고난 느낌을 쓰자면, 화자가 보고자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이 시가 끝날 때까지 뭔지를 모르겠군요. 그러다보니 이 작자가 무얼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긴 이야기를 썼나 하고 고개가 갸웃거려 집니다. 이러면 안 되지요. 우선 화자가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이다라고 독자들이 알 수 있게 큼 처음부터 확실하게 굳혀야 해요. 그래서 반전부에 이르렀을 땐 독자들이 이것 외에는 딴 생각이 전혀 들지 않도록 한 다음, 그 내용을 역동적으로 뒤집는 겁니다. 그래야 읽는 사람이 충격을 받지요.   하여, 황미숙 님은 이 시를 그대로 묵혀 두세요.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 꺼내 필자가 지적한 내용을 염두해 두고 읽어보세요. 그러면 미흡한 부분이 보이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시를 처음 쓸 땐 오래도록 묵히면서 시를 계속해서 다듬는 습관을 가지세요. 이게 일정 괘도에 이르면 퇴고과정이 아주 짧아짐을 절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현재 님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상당히 있어 뵈니 계속 그 방향에 관심을 한번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군요. 문학판도 하나의 세계이어서 문학판에서 나름대로 개성을 확보하려면 자기 특화(特化)를 생각하면서 시를 쓰는 자세가 절대 필요하다고 필자는 여깁니다. 그렇고 그런 시를 쓰면 또 그렇고 그런 시인밖에 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도 생각하구요. 하여 서양 소피스트 철학과 노자, 장자 책을 꼭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런 책을 읽다가보면 딱딱한 사고가 자신도 모르게 유연해짐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겁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11)     ☞ 시인이 되고자 하는 데에도 전략수립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들은 일을 효과적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그 일에 대한 사례를 충분히 연구, 검토하여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많은 시간과 정열을 낭비한 다음에야 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충분히 대비한 사람들보다 그만큼 뒤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경영학에서도 성공적으로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사례연구는 전략수립의 핵심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언어를 경영해 성공적인 시인이 되려는 데에도 이 내용은 매우 적합한 이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의 사례를 분석해 이를 활용하면 활용하지 않은 사람보다 그만큼 빨리 앞서 나갈 수 있지 않나 여깁니다. 그러면 어떤 사례를 분석할까요?   필자가 등단 전에 조사하기로는 한 해 동안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 이름 있는 잡지까지 포함해 등단한 시인들을 헤아려보니 대충 50여명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 2, 3년 후까지 계속 살아남은 시인은 불과 몇 명이 되지 않았고 대다수가 겨우 등단 작품 정도 남겨두고 기억 속으로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개성적인 작품으로 처음에 주목받았던 시인들도 시집 한 권 정도 내고 나면 또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었구요. 인정받고 있는 시인들도 등단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무얼 의미할까요?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등단 시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 않는 상태에 있었거나,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을 충분히 갖고있지 않는 상태에서 등단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늦게라도 그 원인을 분석해 차근차근 대비한 사람은 다시 도약할 수 있었지만 상당수가 끼리끼리 모여 서로의 시를 위로하면서 현재에 안주하거나, 아니면 아예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습니다.    이상 예를 살펴보면 이 창작교실 독자들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지 않고 능률적으로 詩業을 달성할 수 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거라 여깁니다. 등단 전에 충분한 기량을 닦아놓고 또한 시집 한 권 정도의 시를 갖고 투고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야 프로 세계에 훌륭하게 데뷔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면 등단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충분한 역량과 개성적인 시도 많이 확보할 수 있을까요? 필자가 생각으로는 유료 창작지도실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시를 혼자 집에서 생각나면 쓰면 되지 뭐가 또 공부냐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집에서 혼자 쓰게 되면 남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자기 개성이 뭔지도 파악하기 어렵고, 또한 자기 도취에 휩싸임과 동시에 게을러지기 쉽상입니다. 그리고 유료이어야 돈의 아까움을 알게 되어 억지로라도 시를 계속 쓰게 됩니다. 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시의 테크닉과 감각훈련은 주기적으로 계속 반복해야 몸에 스며들고 자기 개성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더욱이 미술, 음악분야를 전공하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얼마나 미미한 수준입니까?   그러면, 등단을 위해서는 어떤 창작지도실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이론보다는 실기를 바탕으로 하고, 다양한 시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 가장 훌륭한 창작지도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별한 연고도 없는데 시인들을 많이 배출할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는 외진 음식점인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북적거리고, 어느 교회에는 신도들이 아주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와 바글거리는 이치를 따져보면 금세 이해가 가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놀러 다니기 좋아하고 어울리기를 즐기는 창작지도실도 있다는 걸 유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 이 창작교실 독자들이 남보다 성공적으로 시업을 달성하려면 앞선 시인들의 사례를 거울삼아 미리 전략을 수립해서 하루빨리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지 않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또한 시인이 되는 지름길이지 아닌가 생각합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먼저 유은선 님의 를 감상해 봅시다. 유은선 님은 겨울나무를 추운 겨울을 견디며 새로운 꿈을 준비하는 나, 또는 우리로 상상을 했군요. 우선 라는 필자의 방침에 일단 부합했습니다. 그 상상의 폭이 아직 미흡하지만 이 정도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큰 진척입니다. 이렇게 조그만 상상도 자꾸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날 상상의 폭과 깊이가 늘어나는 걸 체험하게 될 겁니다.   이 시에서 미숙한 부분을 지적하겠습니다. 둘째 연의 이라고 했는데 이건 어떤 바람을 표현했는지 난해하고 추상적이고 미숙하군요. 추측컨대 몹시 춥고 매서운 바람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싶은데...그렇다면 정도로 하든지, 아니면 이 시 전체에 구사한 어휘를 보아 그냥 정도로 하는 게 어떤가 싶습니다.   그리고 셋째 연 첫줄에서도 도 이란 표현이 설득력이 없고 왜 쓰러져 가는 지가 막연해요. 이것도 전체 내용으로 보아 정도로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마지막 연의 도 이미 앞에서 언급한 이미지를 다시 끌어온 것 같아 상상의 폭을 확장하는데 장애 요소로 작용해 갑자기 답답해집니다. 그래서 이 두 줄을 빼고 이 연의 맨 마지막 줄에 < 우리의 봄을 장만하고 있는 거야> 정도로 보강한 다음 마무리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시가 되겠습니다. 유은선 님은 고친 부분을 잘 한번 살펴보고 내용도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음미해 보기  바랍니다.    겨울 나무                   유은선    죽은 게 아냐 견디고 있는 거야   맵고 찬 바람 남은 잔가지 툭툭 부러뜨리고 가는 밤   함께 어깨동무한 이 거리에서 우는 게 아냐 숨죽여 노래하고 있는 거야   누우면 안 돼 잠들면 안 돼 서로를 흔들어 깨우며   다시 꿈 꿀 수 있도록 우리의 봄을 장만하고 있는 거야.   **************************************************************************   스핑크스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스핑크스 님은 어떤 소재를 구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시 소재를 이렇게 막연하고 추상적인 소재를 택하면 1급 시인도 그 단서를 풀어나가기가 어렵다고 그랬지요? 그리고 이란 뜻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한 사전을 찾아보면 정확하고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은가요? 그러면 이 시의 내용이 우리들이 갖고있는 상식과 사전에 들어있는 내용보다 더 새롭고 재미나는 정보, 표현이 있는가요? 스핑크스 님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이란 익히 알려진 제목으로 시가 성립하려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던지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야지요. 그래야 독자들이 이 시를 읽어줄 가치가 발생한다는 거죠. 현재로선 시적 표현도 새로운 의미창조도 전혀 없어 아쉽군요. 같은 동면이지만 기왕이면 이란 구체적인 소재를 갖다놓고 너구리가 동면하는 모습을 실제 있는 모습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말고 아주 우수꽝스럽게 상상으로 한번 그려보세요. 시를 풀어가기가 한결 쉬어질 겁니다. 현재 스핑크스님이 참고해야될 내용이 필자의 창작강의(1-10)에 이미 다 들어있으니 이를 참고해 시를 다시 한번 써 보기 바랍니다.   **************************************************************************   유은선 님의 도 바로 앞 스핑크스 님의 과 감상과 지적내용이 정확히 똑 같습니다. 유은선 님은 를 쓸 때는 그러지 않았는 데 이 시를 쓸 땐 왜 이렇게 다른가요?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소재를 찾아서 시를 쓰기 바랍니다.   *************************************************************************   이영이 님의 를 보도록 합시다. 이영이 님은 가을의 전경과 심상을 예전보다 상당히 깊게 천착했군요. 1연은 나름대로 잘 뽑았습니다. 다만 제목에 이란 단어가 들어가니깐 1연에 나오는 이란 단어를 모두 빼세요. 이 단어가 들어가면 시가 답답해져요. 독자들은 제목에서 이미 가을이라는 계절감각을 인지하고 이 시를 읽어가는데 또 다시 이 단어를 보니깐 갑갑해지는 거죠. 그리고 과 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구체적인 단어를 바꾸세요. 예를 들면 과 같이.... 그리고 두 번째 연은 이에 맞추어 상상을 더 전개하세요. 현재 내용은 버리고요. 제목은 맨 나중에 다시 고친다 생각하고 이에 상관하지 말고 상상을 맘껏 펼치세요.   *************************************************************************   를 쓴 나리 님은 시를 많이 만져보았군요. 그러나 이 시를 읽고나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군요. 감흥이 없다는 건 시에 문제가 있다는 거죠. 시가 싱겁다는 건 양념, 즉 감각적인 표현이 없거나, 시의 건덕지, 즉 의미있는 내용이 없다는 거죠. 이 시의 내용을 한번 잘 살펴보세요.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부친 한 장면의 내용 밖에 어디 있나요? 이 시 전체 내용은 한 줄의 시 내용 밖에 되지 않아요. 작자가 그냥 길게 늘어놓았을 뿐이지. 시가 어느 분야보다 함축성과 경제성을 요구하는 글이다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하여, 나리 님은 하찮은 행동과 단어 하나에서 의미를 뽑아내고 건덕지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먼저 익히라고 권장하고 싶군요. 하나의 단어에서 의미를 뽑아내는 방법은 한용운 시집을 읽으면 도움이 될 거고, 하찮은 행동에서 이야기 거리를 뽑아내는 방법은 을 쓴 김수영과 오규원 시집을 읽으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   최유경 님은 많은 시를 올렸는데 시로 보아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군요. 최유경 님이 현재 읽고있는 시가 추측컨대 이정하, 원태연 류의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누구나 다 겪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를 쓰려면 이 단계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이걸 시 읽기 젓떼기 단계라고 합니다. 이 시절에는 이런 류의 시가 최고의 시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게 결코 시의 정신을 성숙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에 얼음과자를 떠올리면 쮸쭈바가 제일 맛있고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제과점에 가보니깐 친구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있는 거 있죠. 그래서 한번 얻어먹어 봤더니 참 맛있더라구요. 하여, 얼음과자도 이렇게 맛있고 고급 스러운 것이 있구나 하고 느끼는 거와 마찬가지인 거죠. 쮸쭈바도 품질을 고급화 시키면 또 몰라도 색깔만 자꾸 빨갛고 노랗게 바꾸어 어린 아이들에게 파는 게 어디 건강에 좋다고 생각할 수 있나요? 이걸 또 시적 표현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란 말을 이런 류로 표현하면 , < 난 널 정말 미치도록 사랑해> 하는 경우이고, 이를 시적으로 표현하면 , 하는 거와 마찬가지이죠. 어느 것이 낭만이 있고 운치가 있나요, 최유경님? 하여, 최유경 님은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수준 있는 시를 골라 읽은 것이 우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   송덕희 님의 라는 시를 감상해 봅시다. 송덕희 님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상상, 묘사, 설명을 넘나들면서 나름대로 몸부림을 쳤군요. 좋습니다. 이렇게 시가 되든 안되든 몸부림치면서 발전해 가는 겁니다. 한 풍경을 가지고 나름대로 상황을 꾸며보고 창조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니 계속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를 곁에 놓고 필자의 지적을 곰곰히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꺼내놓고 다시 써 보던지요.   1.에서 지금 화자가 눈으로 보고 있는데 시의 내용은 입으로 맛보는 내용으로 표현하여 어색하고요, 2.도 무슨 내용을 표현하려는지 짐작이 가나 표현이 너무 과장되어 있고또한 추상적인 표현이고요, 3.도  밑줄친 부분이 추상적이고 표현도 미숙합니다. 특히 실핏줄이 파닥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실핏줄이 팔딱인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고, 4. 에서 누가 차렷 열중쉬엇하고 쇠몽둥이를 내리치는지 모호하고 또한 왜 그렇게 하는지도. 그리고 금속음이 그를 가위 누른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 이 시를 다시 쓴다면 라고 첫줄을 놓고 이야기로 시를 전개해 보기 바랍니다. 첫줄에 이렇게 표현해 놓으면 송덕희 님이 이 앞에서 그렇게 열심히 묘사해 놓았던 내용이 이미 이 안에 다 함축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는 이 한 줄로도 시의 주인공이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걸 파악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자꾸 덧붙이고 싶은 건 님의 혼자 생각이에요.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체득해 가는 겁니다.  어떼요, 송덕희 님? 첫줄을 이렇게 표현하면 위에서 지적받았던 내용이 모두 사족에 불과했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죠?(김영남)   창작강의 및 감상평(12)   ☞ 작품 퇴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누가 필자에게 시창작 과정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두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필자는 아마 상상력과 퇴고력을 들지 않나 싶습니다. 그 이유는 시의 내용을 상상력이 좌우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퇴고력이 좌우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상상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퇴고를 잘 하면 그 시는 크게 흠이 드러나지 않고, 또한 퇴고가 좀 어설프더라도 상상력이 특출하면 이 시 또한 큰 문제점이 노출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요소에 문제가 있을 땐 정말 작품이 형편없이 추락하게 되죠. 하여, 가장 바람직한 것은 상상력과 퇴고력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하면 작품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퇴고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 또한 필자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 강좌를 대신할까 합니다.   상상을 할 때 마음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뜨겁고 깊게 해야 하지만, 퇴고를 할 때 마음의 자세는 이와 정반대 자세인 냉정하고 넓게 해야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을 쓸 때와 작품을 고칠 때에는 정 반대의 심성이 필요한 이유는 작품을 바로 써서  완성시키면 흥분된 감정상태에 있기 때문에 시도 흥분되어서 좋은 시 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보자 시절에는 시를 써서 곧바로 완성시키고 누구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게 초보자 시절에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힘들여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더디고 아집에 사로잡히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퇴고기간은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필자의 경험을 말하자면 퇴고는 오래할수록 좋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는 아무리 짧은 시라도 곧바로 써 바로 완성한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현재도 시 한 편을 구상해서 남에게 보여줄 정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보름 이상의 퇴고기간을 갖습니다. 그러니깐 필자의 경우 상상은 한 두시간에 깊고 뜨겁게 해서 서랍에 두었다가 2-3일이 지난 다음에 다시 꺼내 이 시에 새로운 상상을 조금씩 덧붙이고 삭제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작품을 완성시켜 나갑니다. 그래야 내용이 흥분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고, 시에 침착성과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퇴고와 관련해 시를 효과적으로 다듬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필자는 퇴고를 위해 정신이 가장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아주 자주 가졌습니다. 정신이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자주 가진 이유는 아무리 맑은 정신상태라 하더라도 그 분위기에 또 오랫동안 잠기게 되면 이 또한 마음이 흥분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여 필자는 아침에 맨 처음 가는 화장실을 시 퇴고 장소로 아주 잘 이용하였습니다. 2-3일전에 쓴 시 초고를 갖고 네모난 밀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읽으면 정말 시의 어수룩한 부분, 미흡한 부분, 참신하지 못한 부분 등이 눈에 잘 띄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이 상태에서 지적된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고치고 그랬습니다. 하여 게시판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자신의 정신이 가장 맑고 평온한 상태가 어느 순간인지를 확인해 퇴고를 할 때 이를 자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울러 이건 등단 후에 크게 신경을 써야할 내용으로 여기지만 필자가 작품 퇴고 마지막 단계로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한가지를 더 소개할까 합니다. 필자는 퇴고 마지막 단계로 작품의 보편성 확보를 위해 문학적으로 평균치 수준에 있는 주변 사람들, 특히 사무실 사람들에게 작품을 꼭 한번 읽혀보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읽힌 다음 바로 즉시 "읽은 시가 무슨 내용인지 알겠느냐?" "읽고 나서 머리 속에 무슨 그림이 그려지느냐?" 이 두 가지를 꼭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작품은 과감하게 고치고 버리곤 그랬습니다. 이때 내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하지말고 작품을 읽혀 첫 소감을 묻는데 그치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때 자기 작품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엄격성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초보자에게는 너무나 요원한 사항이고 다만 마지막 퇴고와 관련해 이와 같은 정신, 즉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이의 지적을 빨리 받아들일 줄 알며, 아끼는 작품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마음 자세의 확보가 중요해서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 자기 동료들의 작품평과 훈수를 귀담아들으면 망하는 길로 가는데 첩경이라는 걸 명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을 보여줄 땐 가능한 한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시를 쓴 경력이 충분한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시를 잘 쓸 줄 모른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시를 볼 줄 아는 안목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 게시판 독자들은 많은 퇴고는 곧 시 창작력의 향상이다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라고, 이 게시판에 시를 올릴 때에도 정말 최선을 다한 작품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많은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느리게 됩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하겠습니다.   최민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지금 최민 님은 무슨 내용의 시를 썼나요? 우선 읽는 사람에게 무슨 내용의 시를 썼는지 전달이 되지 않았다면 그 시는 문제가 있는거죠. 필자에게 전혀 전달이 되지 않고 본문 중에 눈에 띄는 표현도 없어서 아쉽군요. 우선 최민 님은 감각적이고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시를 찾아 읽어보길 추천하고 싶군요. 그런 시를 찾아 읽다가 보면 어느 날 자기도 그런 멋진 표현을 해보고싶고 자신도 그런 상상을 한번 멋지게 펼쳐보고 싶어질 겁니다. 그때까지 시를 읽는데 더 치중하라고 권장하고 싶군요. 이때는 신춘문예 등 현상문예 당선작과 심사평도 꼭 찾아 읽어보면서 심사위원들이 어떤 표현들을 주목하고 있는지도 익혀두길 바랍니다.   *************************************************************************   송덕희 님의 을 감상해보도록 합시다. 송덕희 님도 시를 접근하는 방법을 아직까지 잘 체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동안 필자가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 강좌 때마다 강조한 내용이 "매력적이고 구체적인 소재를 찾아 그걸 상상으로 접근하라" 이었습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시의 성패가 거의 여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면 남보다 뛰어난 시 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여 송덕희 님도 남보다 매력적인 눈을 가져야 매력적인 상상, 매력적인 시를 쉽게 뽑아낼 수 있지 않는가요? 그리고 그 소재는 가능한 한 장소를 크게 벗어나지 말고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상상으로 천착하라고 그랬지요?   송덕희 님이 올린 시를 한번 살펴볼까요? 이 송덕희 님은 나름대로 매력적인 소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막연합니까. 우선 시간적으로 초저녁인지, 한 밤중인지,새벽인지도 막연하고 장소도 도시 농촌지역인지, 해변가 농촌인지, 깡촌 시골인지 우선 막연하지 않나요? 왜 이게 중요하냐고 하면 막연한 소재는 우선 구체적인 소재보다 기본적으로 언급해야할 게 많아 수준급이 아니면 상상을 깊이 있게 추구하지 못한다는 거죠. 따라서 초보자는 대부분 설명으로 일관하기 쉽고 또 설명하다 이야기 거리가 떨어지면 그냥 그렇고 그런 시시한 가족이야기, 친구 이야기 둘러대다 끝내기 쉽다고 그랬죠?   하여, 송덕희 님의 시 소재를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잡는다고 해보세요. 예를들면 , , 등등...이런 식으로 소재를 잡는다고 하면 훨씬 더 구체적이고 매력적이 되지 않는가요? 일단 그렇게 소재를 잡으면 그에 어울리게 이야기 거리를 현실, 추억, 경험 등을 넘나들며 거짓으로라도 상상으로 만들어내라고 그랬지요? 가공으로라도 만들어내니깐 창작인 겁니다. 시를 보고 느낀 걸 정직하게 기술하는 게 시다 라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니깐 발전이 더딘 겁니다.   하여, 송덕희 님은 이 시를 더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소재 하나를 걸어놓고 지난주처럼 몸부림 쳐보세요. 필자는 한 두편의 시를 건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남보다 개성적이고 효과적인 시를 잘 쓸 수 있을 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시에도 캄캄한 밤인데 들녘이 다 보는 것처럼 내용을 썼습니다. 이런 것들도 설득력이 없는 겁니다.   **************************************************************************   99퍼센트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못처럼 만에 필자가 바라는 유형이 한명이 나타났군요. 그래요 반갑군요. 초보자 시절에 이렇게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온갖 행동과 상상을 다 해보는 겁니다. 예측컨대 이런 태도를 계속 견지하면서 습작과정을 탄탄히 거치면 조만간에 우리 문단을 꼭 한번 흔들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현재 님은 소재를 대하고 궁글리는 방식은 제대로 길을 잡았습니다. 다만 세련되고 효과적인 표현, 효율적인 구성 등에는 문제가 있으나 당분간은 조금 더 상상력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시집을 소개하자면 함기석의 , 류수안의 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현재의 시는 버리지 말고 그대로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효율적인 구성법을 터득한 다음에 그때 다시 다듬으세요. 그리고 님은 더 이상 게시판에 시를 올리지 말고  바로 창작실기과정에 등록해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창작훈련과정을 거치는 것이 어떤가 하고 추천합니다.   *************************************************************************   나리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나리 님은 지난주보다 한결 나아졌습니다만 아직도 미숙해요. 앞에서 송덕희 님에게 했던 이야기가 정확히 적용됩니다. 송덕희 님의 감상평을 참고해 다시 써 보기 바랍니다. 시의 처음을 라고 쓰고 나답지 못한 이야기로 상상력을 한번 다시 발휘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가는 위의 99퍼센트 님의 를 한번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김영남) 필자가 두 달간 쉬고 다시 이 원고를 쓰려하니깐 머리 속에서 글이 잘 나오려하지 않군요. 그래서 매사에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면 계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나 봅니다. 여하튼 필자는 한 달여 이 창작교실을 찾는 독자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생각이오니 운영방침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창작강의 및 감상평(13)   지난 주에는 퇴고요령의 외형적인 측면을 강의하였고, 이번 주에는 퇴고의 구체적인 방법을 강의하려 했는데 필자의 사정으로 원고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널리 양해를 구하고 이번주에는 감상평만 올립니다.   ***************************************************************************   먼저 스핑크스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시를 쓰는 목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생각을 시적 언어로 표현해 다른 사람들과 그 생각을 공유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깐 시란 기본적으로 자기 표현과 의사소통이라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표현을 시적 언어로 해야 하니깐 그 기술습득이 필요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깐 의미있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느낌과 생각을 자기 혼자만 즐기는데 있다면 굳이 쓰기 어려운 시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죠. 즉 혼자만이 알아보는 언어로 맘껏 즐길 수 있는 일기형태가 최고이지요.   하여, 작자의 생각을 남과 함께 공유한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써야할 시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너무나 명약관화합니다. 남들에게 의미있는 내용, 미쳐 몰랐던 내용, 재미있는 이야기, 남들이 신기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 등등 여하튼 그저그렇고 그런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뭔가 의미있는 이야기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별한 의미가 없더라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창조해야죠. 그러니까 시창작인 거죠. 우리가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눌 때에도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면 정말 짜증이 나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핑크스님?   시의 이치도 이와 똑같습니다. 필자가 그동안 줄기차게 강조해온 내용이 '매력적인 소재를 찾아 상상으로 접근하라'이었습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소재에서 의미있는 내용을 발견하고 만들어내기 버거우니깐 누구나 알 수 있는 평법한 느낌과 풍경, 자가 주변 아야기를 늘어놓기 십상이다라고 그랬죠? 그래서 상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상상은 어떤 소재가 내게 무엇을 생각하도록 했느냐를 말하는 것으로 느낌은 대동소이 하지만 상상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라고 그랬죠? 따라서 상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내용은 남에게 들려줄 사유가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게는 평범한 내용의 상상일지라도 남에게는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스핑크스 님의 시를 읽으면 어떻습니까? 이 시에 특별한 풍경, 의미있는 이야기, 의미있는 행동, 남들이 주목할 만한 표현들이 있나요? 하여 스핑크스님은 필자의 창작강의를 다시 한번(특히 처음부분을) 정독하면서 상상하는 요령을 먼저 익히고 시를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초보자 시절에 이런 여행시, 이야기 시를 쓰기 시작하면 시가 형편없이 늘어지게 되어 좋은 시를 건지기가 힘듭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상상력, 감각훈련을 아주 탄탄하게 익힌 다음 나중에 이런 시를 써야 긴장감 있고 매력적인 시를 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님은 소재 하나를 놓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그 소재의 속성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요령, 즉 상상의 요령을 먼저 터득하기 바랍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기본기를 확실하게 다진다는 자세를 갖기 바랍니다. 거듭 밝히지만 필자는 한 편의 시를 건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개성적인 시를 혼자서도 효과적으로 잘 쓸 수 있을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   나리 님의 을 봅시다. 나리 님은 어렴풋이 감을 잡은 것 같습니다만 님은 수업의 어떤 것이 이런 내용의 시를 쓰게 했나요? 필자에게 쉽게 느낌이 다가오지 않군요. 그리고 소재(제목 포함)를 이렇게 추상적인 것으로 잡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하여 이 시는 제목을 바꾸면 금세 한 편의 시로 성립합니다. 즉 이라고 붙이면 미술시간에 떠오른 한 아이를 상상한 시로 내용이 맞아떨어집니다. 아니면 , , 등 꽃 이름을 제목으로 올려도 한 편의 시로 성립합니다. 즉 꽃을 바라보며 그 꽃 속에 한 아이가 들어있는 것으로 상상한 시로 성립합니다. 나리 님은 현재의 제목으로는 시가 될 수 없지만 이렇게 제목을 바꾸면 왜 시가 되는 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송덕희 님의 을 봅시다. 송덕희 님에게도 스핑크스 님에게 했던 이야기가 똑 같이 적용됩니다. 그리고 일전에 어느 시 한 편은 그런 흔적이 보이더니 이건 또 다르네요? 제 강의를 듣고 도움을 받으려면 기존에 써놓았던 시를 올리지 말고 창피해도 좋다는 자세로 제가 지도하는 방식으로 새로 써 올리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와 관련해 이야기 하자면 이렇게 소재를 설명하고 해석해 내려하면 안돼요. 시 쓰기가 얼마나 뻑뻑하고 어려워집니까? 이걸 제가 침이 마르도록 말하는 요령으로 상상을 한번 펼쳐볼까요?   우선 나팔꽃씨를 보고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고 하면 이렇게 상상을 펼쳐가는 겁니다. ( 나팔꽃씨에는 내 어린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교복이 까맣고, 모자가 까맣고 그리고 얼굴이 시커멓다/ 시커먼 얼굴을 뒤져보면/ 철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순희가 분홍치마를 입고 나온다......) 이런 식으로 첫 상상을 다음 상상으로 계속 이어나가는 겁니다. 이때 조심할 것은 어린 시절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줄곧 상상을 하는 겁니다. 이걸 나중에 내용적, 논리적 등등 순서를 고려해 자르고 다듬어 시를 만드는 겁니다.   또한 송덕희 님처럼 꽃씨에서 꿈틀거리는 무엇을 느꼈다면 ( 나팔꽃씨를 건드리니 살아있다/ 그 속에서 여린 숨소리가 들린다/ 귀를 갖다대니 꼼지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 빨간 입술로 환하게 웃는 웃음 소리도 들린다/ 웃음소리를 따라가 보면 / 골목이 나오고 싸리울과 장독대를 만난다/ 순희의 집이다/ 와, 깡패같은 오빠가 있는 순희집.....) 이런 식으로....   또한 나팔꽃 속성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상상을 펼친다면 ( 나는 무엇이나 붙드는 성질을 가졌다/ 나는 담벼락을 좋아하고/ 빗자루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대나무 울타리이다/ 나에게는 올라타는 재주가 있고/ 장기는 허공을 달리기이다.....) 이런 식으로 상상을 펼치면 얼마나 쉬어지는가요? 송덕희 님 어떼요?   **************************************************************************   유은선 님의 을 봅시다. 제가 자주 이야기 했지만 이라 제목을 붙이고 노량진 성당을 내용으로 쓰면 시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요? 이렇게 제목을 붙이고 시로 성립하려면 노량진 성당에 특별한 내용이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새로운 성당을 창조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현재로선 시가 되지 않아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면 시가 될까요.   이건 제목만 바꾸면 시가 되요. 내용은 노량진 성당이지만 제목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붙이면 되요. 예를 들면 , , 등등... 그러면 시가 되지요. 즉 백합꽃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이 오는 것 같이 착각이 드는 노량진 성당으로 상상한 내용이깐요. 즉 이라는 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새로운 성당을 창조한 것이니깐 시가 된다는 뜻입니다. 다만 첫 연과 마지막연은 제목에 부합하도록 약간 조정을 해야합니다.   *************************************************************************   이성희 님의 를 봅시다. 이성희 님은 필자가 바라는 방향으로 시를 썼군요. 즉 길은 제대로 잡았다는 뜻입니다. 계속 이성희 님은 소재 하나를 잡고 이런 식으로 상상을 더 깊이 다양하게 하길 바라고, 그 소재 속성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요령도 익히시길 바랍니다. 사고를 더 유연하고 자유롭게 숙련시키길 바랍니다.   다만 이 시는 정물화를 쓴 초고작이라 생각하고 필자의 지적을 참고해 계속 보완하고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우선 내용을 더 재미있고, 의미있는 내용을 많이 집어넣길 바라고, 둘째로는 어설프고 미숙한 표현들을 더 다듬어서 다시 올려보길 바랍니다.   미숙하고 어설픈 부분을 지적하자면 첫연의 부분과 셋째연의 는 내용이 중첩이고, 시가 나아갈수록 새롭고 긴장이 되어야 하는데 앞에서 묘사한 내용이 다시 나와 긴장이 떨어집니다. 앞 부분의 묘사는 너무 튀고 당돌하니 빠져야 할 것 같습니다.   셋째연의 을 보자면 자기감정 과잉 노출이고, 의미의 중첩이고, 미숙한 표현들입니다. 처자기 잠자는 모습을 자기가 성격을 규명해 설명하는 것은 지금 자신이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건 논리 모순이고, 라는 단어도 단어와 의미 중첩이고 또한 잠자는 사람의 모습을 말하는데 적합한 단어가 아닙니다. 하여 이 부분은 전체적인 시 분위기와 내용으로 보아 정도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고,   그 다음줄에서  표현도 이미 앞에서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정물들은 내 잠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정물들이 깨어난다는게 이상하고요, 도 국민학교인지 중학교인지가 불분명해서 정도로 함이 좋을 듯하고요, 마지막연 첫줄에서 < 내가 잠에서 깨어날 즈음에...>은 내가 앞에서 이미 잠에서 깨어났는데 또 깨어난다고 해서 도대체 내가 잠에서 몇번을 깨어나는지 헛갈릴 정도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도 로 고치시길 바랍니다. 이상의 지적을 참고해 이 시를 더 재미나게 내용을 보완해 다듬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성희 님은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해서 어느정도 감을 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니 본격적인 시쓰기에 몰두해 좋은 작품을 건져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이성희 님의 시는 위와같이 웹 창작교실에서 지도받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있고 비생산적이 아닐까하는 우려가 됩니다. 아무튼 필자의 의견을 참고해보기 바랍니다.   **************************************************************************   전정가위 님의 를 봅시다. 전정가위 님에게 감상평을 해줄 말을 앞에서 다 한 것 같군요.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소재를 어떻게 접근해 효과적으로 시를 뽑아낼 것인가는 기 실시 창작강의 및 감상평(5)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중구조 문제, 예로 든 시 등을 잘 한번 읽어보시고 다시 써 보기 바랍니다. 이런 시는 요령만 알면 정말로 감각적으로 눈에 확 띄는 아주 좋은 시를 금세 건질 수 있습니다. 현재 님은 언어를 부리는 걸로 보아 시를 많이 써 본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기법만 제대로 터득하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14)     이번 주에 퇴고의 구체적인 요령을 강의하려 하였으나 이건 초보자들에게는 너무 버겁지 않나 여겨지고 또 너무 소상히 이야기하면 상상을 자유롭게 펼치는데 역기능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어 뒤로 미룹니다. 대신에 초보자들에게 더 시급한 사안으로 여겨지는 내용을 강의할까 합니다. 그동안 이 게시판에 올라온 독자들의 시를 쭉 살펴보니 자질은 충분히 보이는데 감각에 쉽게 눈을 뜨지 못한 경우가 상당히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여 자기 개성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골라 읽는 법을 알려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필자는 이번 강의로 담당 월 강의를 마치고 두 달 후에 다시 나오겠습니다. ***************************************************************************   ☞ 어떤 책을 골라서 어떻게 읽어야 자기 개성개발에 효과적일까요?   학창시절에 우리가 문장기술 지침으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내용이 '많이 읽어라, 많이 사색해라, 많이 써 봐라' 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책을 읽을까요? 하면 무조건 '고전을 많이 읽어라' 이었습니다. 그러면 고전은 어떤 것이 있나요? 하면 단테의 신곡, 일리아드, 오딧세이, 황무지.....하고 거의 전국 학교 교실에서 동일하게 복창을 해왔던 게 우리나라 독서교육의 실상이 아니었던가 필자는 생각합니다.   필자는 이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소수 엘리트 학자들의 지적 과시욕 또는 지적 귀족주의 입장에서 피력한 도서목록이 고전 목록으로 전국 학교에 동일하게 유포되고 강요하다보니 개성개발과 상상력 개발에 역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장과정과 생활여건과 식습관이 다른 전국의 무수한 사람들에게 일부 특수층에서 즐겨먹던 햄버거를 우리 국민들 최고의 음식이다라고 강요하는 식의 독서교육이 얼마나 유효하겠어요? 필자는 불행하게도 위에서 든 목록의 책을 수번 읽어보려 노렸했는데도 재미가 없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 아직까지 완독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필자는 어떤 책을 읽었을까요?   필자가 소중하게 읽었던 책은 중학교 시절에는 만화책, 고등학교 시절에는 김우종, 유안진 에세이, 정목일 수필집, 대학시절에는 신석정 시집, 이문열, 세익스피어, 섬머셋 모옴, 쇼펜하우어, 노장사상, 실존주의 철학 등이었습니다. 이중에서 고전 목록에 든 작품은 세익스피어 하나 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린이 만화영화, 애니메이션 영화를 아주 즐겨 봅니다. 이건 무얼 의미할까요? 고전은 누구에게나 다 고전이 될 수 없고, 명작도 누구에게나 다 명작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고전이고 명작일까요?   필자의 견해로는 그 사람의 감각과 취향에 가장 잘 맞는 책이 그 사람의 고전이고,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아무리 고전이고 명작이라고 떠들어도 자기의 감각과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건 결코 자신에게 크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감각과 취향도 책을 읽어 가는 동안에 자꾸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책 선택 방향도 세련되어 가면서 자기 상상력과 개성개발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자기 감각과 취향에 맞는 책을 어떤 방법으로 쉽게 고를 수 있나요?   필자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걸 대신할까 합니다. 우선 필자는 소설책 등 산문책을 고를 때에는 그 책을 다 읽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꼭 처음 두서너 페이지를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두 서너 페이지에서 내 눈길을 잡지 못하고 특별한 표현과 내용도 없으면 그 책을 절대 고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일 처음부터 내게 싱겁게 다가오는데 그 책이 끝까지 날 감동시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방법은 외국 소설을 고를 때 아주 효과적입니다. 즉 외국 책은 그 책 번역자가 그 책의 모든 면을 절반이상 좌우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여 아무리 유명한 책도 번역자의 자질이 없으면 그 책의 문학적 수준이 형편없이 추락하기 때문에 우리는 책 몇 장을 읽고서 이를 빨리 간파해 소중한 시간을 절약해야 하는 거죠.   둘째로는 시집을 고를 때는 꼭 표제작과 첫 페이지 시를 맨 먼저 읽어보았습니다. 표제작과 첫 페이지 시, 두 번째 페이지 시를 읽어보면 그 시집 전체를 다 읽어보지 않아도 그 수준과 취향을 대충 파악할 수 있지 않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시인들이 시집을 낼 때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표제작과 첫 페이지에 실릴 시를 제일 신경 쓰기 때문에 필자가 평소 잘 알고 있는 시인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 시집을 고를 때 표제작과 첫 페이지 시를 읽어보아 내 감각과 취향,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시집은 절대 고르지 않았습니다. 나의 개성개발을 위해 읽어 내야할 시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그런 시집을 골라 친절을 베풀어 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러면 이런 책, 이런 시집을 골랐다고 할 때 어떻게 읽는 자가 자기 개성개발에 효과적일까요? 소설을 읽던지 시집을 읽던지 간에 책을 읽을 땐 초보자 시절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첫 번째 유형은 그 책의 내용에 관심이 많아 그 책의 흥미위주로 책을 읽는 경우이고요, 두 번째는 그 책의 문장표현 들, 즉 '어쩌면 저렇게 아름답고 기막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미적 표현들에 매료되어 읽어 가는 경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유형 중 후자의 유형으로 읽는 사람이 자기 개성개발에 쉽게 눈뜨고 글쟁이로 빨리 성장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미적 표현에 매료되면 더 자극적이고 더 기발한 표현들에 자꾸 관심이 가 그런 책들을 즐겨 찾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방향으로 마약처럼 깊숙이 빠져들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자기 개성개발에 효과적인 독서법은 자기의 감각과 취향에 맞는 책을 골라 미적 표현에 늘 더 관심을 두고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합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유은선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유은선 님이 곁에 있다면 뽀뽀라도 해주고 싶군요. 몇 번 지적을 받고 초보자 수준에서 이렇게 필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따라오는 님이 정말 귀엽습니다. 이럴 때 가르치는 사람도 정말 보람을 느끼지요. 유은선 님 예전에 비해 월등하게 잘 썼고, 벌써 감각과 상상력의 깊이까지 겸비했군요.   유은선 님은 첫사랑의 속성을 구체적인 소재, 사과 하나에 빗대어 아주 잘 뽑아냈어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렇게 빗대어 쓴 시는 비유에 그치면 예쁜 시 정도에 그치지요. 하여, 시의 마지막에 이 시와 관련하여 자기 생각을 한 줄 정도 언급하고 시를 마쳐야  시가 한 단계 상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줄을 이렇게 고쳐 보강하는 것이 좋을 듯싶군요. 쯤으로요. 그리고 제목이 너무 판에 박은 듯 하고 촌스러워서 쯤으로 약간 멋을 부리는 겁니다. 이상을 반영해 다같이 이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정말 한 달만에 이렇게 새로운 시를 쓴 유은선 님! 축하해요. *****************************************************   첫사랑에 관하여                     유은선   사르륵사르륵 사과 깎는 소리 어릴 적 들었던 옛날 이야기 술술 풀려 나오는 소리 벗겨지는 껍질 속에서 나는 듣네. 하얗고 탄력 있는 속살의 비밀 둥글둥글 웃음으로 앳된 마음 감추고 섬유질마다 고인 수분 눈물처럼 쏟아 놓는데 한 움큼 베어 문 사과 한 입 노랗게 꿀이 박혔네. 난 오래 전 숨겨둔 이야기 하나 음미하며 이 가을을 또 아름답게 나겠네.   *************************************************************************   윤주 님의 를 감상해 봅시다. 윤주 님은 열심히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제 방향을 잡고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필자가 늘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소재 하나를 골라 상상으로 접근하라, 이었는데 윤주 님은 '하늘 아래 나무....'를 골랐습니다. 하늘 아래 나무들이 얼마나 많고, 하늘아래 나무들이 존재하는 모습들도  또 얼마나 다양하나요? 이렇게 소재를 광범위한 걸로 잡으니까 시 쓰기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하여, 윤주 님은 구체적인 소재 하나를 골라 그 소재를 해석하고 설명하려하지 말고 그 소재의 속성으로 상상, 즉 생각하고 행동해 보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감상한 유은선 님의 경우를 잘 한번 살펴보세요. 첫사랑이란 이렇게 추상적인 내용을 사과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하나 골라 어떻게 상상을 펼쳤는지를.....윤주 님은 제가 두 달 후에 다시 나타날 테니 그때까지 필자가 내준 소재로 시를 한번 써서 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윤주 님은 현재 시 소재를 어떻게 접근하는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만 제대로 알면 시 쓰기가  정말 쉬워짐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겁니다. 윤주 님은 현재 윤주 님이 사는 방과 애인의 얼굴을 시로 그려서 각 한편씩 올리시기 바랍니다. 요점은 필자가 윤주 님의 시만 읽고도 그 모습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시기 바랍니다. 없으면 가공으로 만들어서라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   S.Y님의 을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님의 시를 읽고 나니 시를 쓰는 근본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고 싶어지는군요. 필자는 시란 기본적으로 감성의 공유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공유라고 생각한다면 독자가 있게 마련이고, 글을 쓴 사람의 품격도 생각해야겠지요. 만약 혼자만의 유희라고 한다면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시도 그 시절 문화를 즐기는 하나의 매체이어서 그 매체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인격과 소양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점을 고려하면 님의 시는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비속어, 쌍소리가 허용되는 것은 풍자시를 쓸 때이고 그것도 그 시절과 환경이 그 시와 충분한 알레고리가 성립할 때입니다. 그것도 시문학사에 기념비적으로 한 두 편이면 족합니다. 현재 우리 문단에 한 두 사람이 이런 비속어, 쌍소리, 저질 언어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며 시를 쓰는 사람이 있는데 이 경우는 다른 사람들 모두는 우리 일상 용어로 대화를 나누며 울고 웃으며 살고 있는데 유독 그 사람만 쌍소리를 해대며 돌아다니는 사람과 똑같은 이치이지요.   하여, S.Y 님은 더욱이 초보자가 아닙니까? 어떤 것이 시의 정도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심재문 님의 시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님은 아마 이 창작교실에  처음 방문하지 않나 싶군요. 현재 님에게 해줄 말이 "기 실시 창작강의 (1-10)" 아주 소상히 설명되어 있으니 이걸 프린트해서 처음부터 꼭 읽어본 다음 시를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똑 같은 이란 내용으로 시를 썼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유은선 님의 이란 시와 님의 시가 어떻게 다른 지를 곰곰이 한번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그 차이가 필자의 창작강의에 이미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시 어투와 관련하여서는 창작강의 및 감상평(9)에 그 문제점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걸 참고해 시를 새롭게 써 제 담당 월에 올리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한 편의 시를 건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개성적인 시를 혼자서도 잘 쓸 수 있을까를 이 강좌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김영남).   *************************************************************************** [출처] [본문스크랩] 김영남 시인 인터넷 창작강의 자료 모음|작성자 청하  
시어와 일상어 : 세계를 창조하는 시적 요소   정연수                                                사내는 숨 하나를 들이마신다 뱃가죽이 부풀고 심장이 쉼 없이 세웠다 허무는 산들이 심전도에는 그려지고 있다 푸르륵 푸르륵 늙은 노새가 되어 그 산을 오르는 심장과 오랫동안 살을 끌고 이동해왔던 뼈 속에는 바람이 들어와 누웠다 -김유자,「코마」부분   내가 달콤하게 받아먹던, 소화되지 못한 당신이 고약한 냄새를 풍겨요 -오명선,「거짓말을 수확하다」부분   평생 시 읽는 행복으로 살겠다고 작정한 것은 신선하게 살아 펄떡이는 감각적 언어와 감동적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독자처럼 시와 시집을 못 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시적 언어가 던지는 맛에 매료되면서 부터이다. 시적 어휘는 요리의 맛을 내게 하는 조미료다. 표현을 생생하게 만드는 수사, 섬세한 감각의 촉수들,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시는 맛, 멋, 재미, 그리고 감동까지 전한다.   우리는 한 줄의 시구에서, 심지어는 산문에서, 때로는 일상적 삶에서 조차 ‘시적’인 것을 발견한다. ‘시적’이라는 표현은 ‘미적 가치’에 대한 ‘시적 표현’일 테다. 나도향은 「그믐달」이란 수필에서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라고 표현했다. 산문이지만 ‘시적’이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일상어와 일상적 이야기로 시화된 작품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시적인 표현은 여전히 우리를 압도한다. 어휘만을 놓고 볼 때 시어와 일상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개별 단어가 인접 단어와 만나서 시구를 이루는 순간 시어와 일상어의 구분은 선명해진다. 예컨대 다음의 두 문장에서 ‘노래’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를 생각해보자.   ①나는 여기서 노래를 부른다. ②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①에서 의미하는 노래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인 일상어이다. 이에 비해 이육사의「광야」에 등장하는 ②의 문장에서 노래란 앞부분의 ‘가난’과 뒷부분의 ‘씨’와 결합하면서 사전적 의미를 벗어난다. 가난에 대한 극복의지이거나, 힘든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일 것이다. 혹은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선언적 의지이거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초인정신, 또는 미래에는 현실의 암울한 상황을 넘어설 예언이기도 하다.   일상어가 보편적 정서를 지니고 있다면, 시어는 다의성과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일상어가 소통을 위한 정보 전달에 중심을 둔다면, 시어는 감정과 상상의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일상어와 시어의 경계는 휴전선 철조망만큼 뚜렷하다. 이 글에서는 계간『시향』 2010년 겨울호를 주목했다. 『시향』에서는 다른 문예지에 발표된 시를 재수록 한 ‘현대시 펼쳐보기 50선’과 신작의 ‘젊은 시 펼쳐보기 10선’이란 코너를 마련했는데, 작품마다 ‘시적’ 요소가 풍부해서이다.   햇살이 종일 하늘에 산탄 구멍을 내더니 저녁이 왔구요 행성의 비늘에 테가 하나 늘었습니다 이 시간 고슴도치 같은 표정으로 걸어 나와 털게의 춤으로 알을 낳습니다 눈꺼풀을 닮은 바람이 물고기를 타고 자맥질을 합니다 -전형철,「거북이알의 시간」부분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다 혹은 눈 내린 산을 내려와 늙은 술집에 앉아 있으면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른다 -우대식,「목소리」부분   은유가 풍부한 시들은 독자의 사유 세계뿐만 아니라 몸의 움직임까지 바쁘게 만든다. ‘고슴도치 같은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읽던 시를 멈추고 상상의 날개를 편다. 또 ‘눈꺼풀을 닮은 바람’은 어떤 바람일까? 겨울 내내 꽁꽁 닫쳐 있던 아파트 베란다를 활짝 열어놓고 그 바람을 느껴보기도 한다.   “늙은 술집”은 어떤 술집일까? 늙은이들이 모인 술집일까? 낡은 술집, 아니면 유서가 깊은 술집일까? 혹은 술 속에 더불어 살아가며 지혜로워진 노인들의 삶을 받아주는 공간일까? ‘늙은’과 ‘술집’의 이질적 요소가 충돌하면서 의미는 미끄러지고, ‘늙은’의 시니피앙이 불러낸 ‘낡은’의 어휘 사이에서 의미는 또 다시 미끄러진다. 그 미끄러짐의 행간 사이에서 사유의 누룩은 점점 부풀어간다.   아저씨야, 깡통이 울었어. 맥주 거품 보리깜부기 피리 불며, 포경의 휴전선 녹슨 철조망 가시로 울었어. 대나무 숲이 내 얼굴 바닥 가득하니 기어 나와 울었어. -신세훈,「울더군, 울더군」부분   고인돌 속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바람의 애벌레들이 꿈꾸고 있다 초승달 같은 낫을 들고 애벌레의 꿈을 들여다본다 -김영석,「바람의 애벌레」부분   가발을 뒤집어쓴 장미처럼 담배를 피우며 웃는 목각인형 인드라 1백만분의 1로 축소된 등에선 핏줄 등고선들이 포도넝쿨로 자라고 대패가 뱉는다 -함기석,「인드라 주행코스」부분   ‘휴전선 녹슨 철조망 가시로 운다’는 것은 어떻게 우는 것일까? ‘고인돌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바람의 애벌레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또 ‘가발을 뒤집어쓴 장미’는 꽃일까, 가발일까? “욕지거리 같은 가발”(노춘기,「15분」)을 읽고는 가발과 장미 그리고 욕지거리가 함께 뒤엉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알 수 없는 시의 세계란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의 난해함과는 달리 신비로운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때로 안 풀리면 어떠랴, 도무지 시가 뭘 말하는지 모르면 어떠랴. 깊은 생각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먼 우주로 솟구치는 그 비상의 쾌감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한데 말이다. 또 “젖소 젖꼭지처럼 늘어난 주유기가/빵빵거리는 차들에게 젖을 물린다”(지영,「현수막」)는 대목에서는 깔깔거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상상력의 끝을 보려는 호기심은 계속 이어진다.   떡깔나뭇잎 거울에서 햇살에 활활 타는 단하소불(丹霞燒佛) 홀딱 벗고 홀딱 벗고 홀딱새가 쑤군거리자 거울이 홀랑 뒤집어엎는다 -송시월,「초록거울」부분   거울 속 하늘은 부드러운 금속으로 빛났다 검고 큰 뿔, 자이언트 장수하늘소 한 마리 첼로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이수정,「시계악기벌레심장」부분   발라진 생선가시 같은 소리의 흔적이 쇄골을 드러내고 사라질 때 나의 삶은 더 이상 추적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진 소리는 득음을 마친 묵음이다 -이수종,「사라진 소리」부분   “홀딱 벗고 홀딱새가 쑤군”이 전달하는 언어유희라든가 이어지는 상상력의 전개가 즐겁다. ‘첼로에서 빠져 나오는 자이언트 장수하늘소’는 독자의 눈에 음악 소리까지 넣어준다. 귀가 아닌 눈으로 듣는 소리는 그 자체로 명상 그림이다. “발라진 생선가시 같은 소리의 흔적이 쇄골을 드러내고 사라질 때”라는 순간을 포착한 경지는 득도의 일갈이다. 소리가 사라지고 난 침묵의 상태는 득도한 성자가 입적한 직후, 그 달관의 세계를 이끈다.   백반 쟁반 두 판 거머쥐고 발발발, 배달 가는 동현 엄마는 장수하늘소다 팔뚝은 뿔, 다리는 갈쿠리다 토란국생선찜누릉지, 파문 한 점 일지 않는 수평선이라니 저 수평이 장수하늘소를 호수 뒷골목까지 끌고 왔다   스크린 골프장, 카센터 밥그릇 쓸어 모아 뿅뿅뿅, 달려가는 상주댁은 소금쟁이다 축지법으로 단박에 물 건너간다 그 속도가 아니면 익사라도 할듯하다 부랴부랴 소금쟁이 좇아가면 호수는 청둥오리숲이다 꾸룩꾸룩, 꾹꾸 -이강산,「호수 가정식백반」부분   식당 배달 아주머니가 장수하늘소, 소금쟁이로 이름을 얻는 순간. 고단한 노동이 경쾌해진다. 우울하고 꼬질꼬질한 서민적 삶이 상큼하게 승화한다. 그래, 질질 짜면서 세상을 살지 말자. 세상을 덧없거나 구질구질한 눈으로도 보지 말자. 고달플수록, 마음의 상처가 깊을수록 정갈한 호흡이 필요하다. 하여, 서러워도 시적인 세상에선 살맛이 나는 게다.   “아침 햇살에 부풀은 바하의 미뉴엣이 이파리마다 내려앉는다. 오르간으로 야채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양원홍,「음악 농사」)   “설핏한 잠의 틈새로/모래가 켜놓은 시간의 톱밥”(이정원,「모래시간 속에 갇히다」)   “물비늘 출렁이는 노을 속으로”(최재영,「백년」)   “바람이 불면 푸른 잎의 환상통에 시달리는//내 몸 깊숙이/마른 숲”(이용임,「측백나무」)   “전등불 아래서 풀무치가 제 울음을 꺼내 손질하고 있다./둥근 종소리가 앉았다 간 식탁 위에/달그림자가 앉는다.”(한석호,「박제된 노래」)   이처럼 도발적 상상력은 작품 곳곳에 발목지뢰처럼 숨어 있다가 읽는 재미를 빵빵 터트렸다. 어디 그뿐이랴, “너와 나의 침대 사이에서 자란 매화”(박강우,「34번가의 랙」)도 그렇고, “손가락 끝에서 꽃이 피어났다”(이재훈,「잡초론」)는 시구도 그렇다. 소파에서 잠자는 경험을 시화한 “나를 분해해 아삭 아삭 씹어 먹고 살이 발린 뼈를 추슬러”(이화영,「소파」)라는 기괴한 기운을 만난 뒤부턴, 달콤한 소파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또 “윤달 같은 골방”(조연희,「사각 뒤주의 추억」)에서는 윤달과 골방의 이질적 요소를 두고 한참 긴장을 했다. 윤달에 행해지던 전통적 관습과 골방의 추억, 그리고 윤달에 특별히 골방이 더 분주해지고 물건이 이리저리 옮겨지던 까마득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테이트나 리차즈는 시에 쓰인 언어와 말이 지시하는 대상물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tension)에 주목한 바 있다.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하기’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에 대한 감각을 알려져 있는 태도가 아니라 지각되는 대로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기법은 사물을 ‘낯설게’하고 형식을 어렵게 하며, 지각을 힘들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한다. 왜냐하면 지각의 과정은 그 자체가 미학적 목적이고, 따라서 되도록 연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한 대상의 예술성을 경험하는 방법이며, 그 대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   시적 언어와 대상 사물의 연결 고리가 멀어지면서 낯설어지고, 독자는 시를 읽는 긴장의 즐거움을 얻는다. 긴장하면서 팽팽하게 당겼던 활시위가 시인의 의도에 근접하는 순간 과녁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간다. 무릎을 치며 소리 내는 아하!, 가슴을 저미는 울림, 감동의 전율, 잊었던 기억이 몰아치는 폭풍, 끝없는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사유들을 맛보는 순간이다. 그 감동을 전한 시인의 다음 작품을 설레며 기다리게 하는 영접의 순간이다.   몇 년 전에는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를 모아 특집으로 실은 문예지도 있었다. ‘최고의 시구’라는 말은 ‘시적’이라는 맥락에 닿아있는 셈이다. 시적 요소야말로 시의 멋과 맛을 만들 뿐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을 한층 고무시키고 의식을 발전시킨다. 모든 생명체를 살아있게 하는 요소는 들숨과 날숨이듯, 시를 살아있게 하는 요소는 ‘시적’인 힘이다. 이 힘은 무생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모든 만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사유의 힘에서 나온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존재의 대상으로 만드는 창조의 힘에서 나온다. 하여, 우리는 그 사유와 창조를 지닌 시작품 앞에 경의를 보낸다.   단언컨대, 시인은 세계의 창조자이다. 작품을 쓰기 위한 언어의 세계 안에서 시인은 절대 권좌를 누린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나탈리 골드버그의 진술이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시적인 요소에서 신적인 에너지의 요소를 보았으니, 시인들이여 거듭 세상을 창조하라.        
36    은유, 그 아슬아슬한 거리 / 이문재 댓글:  조회:284  추천:0  2018-06-06
  은유, 그 아슬아슬한 거리 이문재  | 2003-02-01   지중해가 맑은 이유가 그 청년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년 전,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 나왔을 때, 주인공 마리오에 대한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말라터진 바게뜨 빵을 연상시켰던 마리오는 너무 섬약하고 또 너무 순수했다. 그가 지중해의 청정함을 지키는 정수기처럼 보였다. 마리오가, 잠시 섬에 체류하게 된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전속 우체부’가 되면서 시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네루다를 영웅화했다면, 네루다가 떠난 이후,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보낸 별이 반짝이는 소리까지 담은 ‘녹음 편지’는 전통적인 시(활자)의 시대를 마감하는 징후로 보였다. 시위 현장에서 마리오가 스러져가는 장면은, 네루다 혹은 시의 시대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몇몇 장면만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네루다가 거두절미하고 ‘메타포’라고 답하는 대목이다. 메타포, 은유. 그렇다. 은유가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은유를 빼 놓고서는 시를 쓸 수도, 읽어내기도 쉽지가 않다. 은유는 시와 시쓰기, 시읽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동력(전달 장치)이다. 직유를 거쳐 은유를 웬만큼 구사/해독할 수 있다면, 그는 괜찮은 시인/독자이다. 직유는 주종 관계이다.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라고 쓸 때(결코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바람은 그가 달리는 상태를 구체화하는 보조 역할에 머문다. 하지만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라는 표현에서는 약간 달라진다. ‘그’와 ‘바람’ 사이도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비’와 ‘쇠못’ 사이처럼 스파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비와 쇠못 사이는 매우 먼 거리다. 일상적 차원에서 비와 쇠못은 거의 무관한 관계이다.  ‘비둘기는 평화다’와 같은 상징은 아예 주종 관계에서 종이 사라진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쓰이는 순간, 비둘기 고유의 정체성은 지워져 버린다. 상징은 상징에 동원되는 수단을 지워 버리는, 매우 폭력적인 비유법이다.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울 때, 비둘기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징이 종교와 신화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징은 권력의 도구이다. 직유에서 주종 관계가 희박해질 때, 나는 그것이 바로 은유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직유가 술어(동사)를 거부할 때, 예컨대 ‘비가 쇠못처럼 달렸다’가 아니고, ‘비는 쇠못이다’로 변화할 때, 직유는 은유로 한 차원 승격한다. 그래서 나는 비유법을 자주 은유법이라고 이해한다.  ‘그대는 꽃이다’라고 쓸 때, 그대는 꽃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대가 꽃을, 또는 꽃이 그대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다. 은유의 차원에서 그대와 꽃은 그대도 아니고, 꽃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은유의 위력이다. 내가 지지하는 은유는 다원주의에 바탕한 은유이다. 즉 하나의 절대적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모든 존재와 의미가 각자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은유이다. 직유가 수직의 상상력이라면, 은유는 수평의 상상력이다. 직유(혹은 상징)가 과거의 세계관이라면, 은유는 미래의 세계관이다. 공존, 상생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직유도 그렇지만 은유의 생명력은 비유되는 두 이미지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앞에서 예로 든 문장을 다시 불러와 보자.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 혹은 ‘그는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그’의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는 것은 바람이 갖고 있는 모호성 때문이다. 여기서 바람은 주어를 도와 주지도 못하고 동사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참신하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직유는 구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상투성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 혹은 ‘비는 쇠못이었다’라는 표현이 위의 경우보다 조금 산뜻한 까닭은 쇠못이 갖고 있는 구체성 덕분이다. 은유를 ‘A는 B이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A와 B의 사이가 너무 가까울 때 상투성으로 전락하고, A와 B 사이가 너무 멀면 난해함으로 빠진다.  네루다와 마리오 사이의 대화를 흉내낸다면, 시란 저 A와 B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이다. 그리고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 A와 B를 결합시키는 비결은 (전에도 말했지만) 평소의 관찰력과 상상력에서 나온다. A와 B를 난데없이 연결시켜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직관력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관찰과 상상의 누적이 없다면 은유의 직관은 불가능하다. 사족 같은데, 한 마디만 덧붙여야겠다(은유를 말하고 있으니까).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에 바늘을 찔러야, 풍선은 강렬하게 터진다.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 그것이 관찰과 상상의 상태이다. 그것이 깨어 있는 정신이다. 그렇게 깨어 있다면, 바늘(직관)은 얼마든지 있다. 불지 않은 풍선은 풍선이 아니다. 탄생 이전이거나 죽음 이후다.   글쓴이 소개 이문재 - 시인. 『시사저널』편집위원. 1928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등이 있다.      
35    김욱동 <은유와 환유> 댓글:  조회:465  추천:0  2018-06-01
김욱동 민음사, 2004.    예전에 김혜순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이젠 은유의 시대는 갔고, 환유의 시대다, 라고 말씀하셨다. (달리 기억하고 있을런지 몰라도) 친구들을 붙잡고 환유가 뭐냐고 물어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때때로 문학비평 용어사전이나 이론서에서 환유를 만나기는 했으나, 읽어도 어렴풋했다.  이 책을 사서 읽은 것은 그 미심쩍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김욱동이란 저자를 이래저래 만나게 된다.대학시절 논문을 쓰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 관련서를 읽다가 이 분을 만났다. 참 바지런한 분같다. 외국의 이론을 무작정 수입하는 오퍼상이 문제라고 하지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겠다.  여하튼, 훌훌 잘 읽힌 책이다. 일단 이분이 선생님이라 그런지 되도록 예를 많이 들어주고,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은유와 환유의 정체를 목격하지는 못 했어도 하반신 정도는 본 것 같다.  지금 내 머릿속에 대강 그려진 상에 의하면 은유는 A는 B라 하는 것이고 환유는 A는 A' A''A'''A''''라는 것이다. 뭐야! 해도 일단 이 정도다.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은유와 환유를 세계관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은유를 쓰는 사람의 세계관, 환유를 쓰는 사람의 관점은 다르다. 수사법을 가지고 세계관까지 짐작해본다는 점에서 여타의 수사학 책과는 다르다 할 수 있다.     이 책의 차례는 다음과 같다.  1. 비유란 무엇인가?  2. 은유란 무엇인가?  3 환유란 무엇인가?  4 은유의 정치학, 환유의 정치학.    참으로 차분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1장, 비유란 무엇인가? 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웅변의 여신에게 제사를 지냈단다. 그들에게는 말 잘 하는 능력이 무척 중요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사학'이 발달했다. 수사학이란 본디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기술로서 생각을 좀더 뚜렷하고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런 능력은 타고 난 것이기도 하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얻어진다.   키케로는 수사 담론이 제대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1)창안2)배열3) 양식4)기억5)전달의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창안이란 논거와 증명을 찾아내는 것, 배열이란 찾아낸 논거나 증명을 짜맞추는 것, 양식이란 짜맞춘 자료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낱말과 언어 패턴, 리듬 따위를 고르는 것이다. 키케로는 수사학의 양식을 1)웅장한 양식 2) 중간 양식 3) 소박한 양식으로 나누고, 이 세 양식 모두에 두루 적용되는 기준을 1)정합성(언어를 용법과 관습에 맞게 올바로 사용하는 것)  2) 명확성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말하는 법)3) 적절성(말하는 상황이나 맥락에 어긋나지 않게 언어를 구사하는 법) 4) 장식성. 이 중 장식성인 수사적 장치로 꼽혔다. 장식성은 처음에는 웅변 양식의 한 특징이었으나 차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수사학인가? 철학인가?    논리학과 수사학의 싸움은 팽팽했다. 미국의 수사이론가 리처드 랜햄의 이론을 보자면, 인간은 크게 ,의 두 갈래로 나뉜다. 진지한 인간은 중심적 자아와 확고한 동일성을 가진 반면, 수사적 인간은 배우같고, 그의 행동은 연극적인 데가 적잖다. "진지한 인간의 편에서 보면 모든 수사적 언어는 의심스럽고, 수사적 관점에서 보면 투명한 언어는 이 세계에 대하여 부정적하며 거짓말을 한다."    이 두 전통은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엎치락뒤치락 우열을 다퉈왔다.    수사에 맨처음 의혹의 눈길을 보낸 것은 소크라테스다. 그는 수사를 "무식한 사람의 눈에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득하는 방법"이라 했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 파에드로스 역시 수사학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도 수사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수사학에 대하여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 비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유기적 통일성을 중시한 플라톤은 에서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이루어져 있다."했다. 언어가 생물체라면 언어의 논리성 못지 않게 수사성도 중요하다. 이런 태도는 수사적 언어와 논리적 언어, 시어와 일상어를 굳이 구별하지 않으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진리란 문어체의 시어보다 오히려 구어체로 된 일상 대화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의 유기적 언어관은 훗날 낭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수사학에 대해 양면적 태도를 취했다. 그는 수사학 자체에 잘못이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잘못 쓰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 잘만 사용하면, 수사는 진리를 왜곡시키거나 숨기기는 커녕, 오히려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는데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그는 은유 구사력을 천재의 징표라 주장한다. "훌륭한 은유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에서 직관적으로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구심을 버리지는 못하였는데 은유란 고기맛을 나게 하는 양념이며 지나치게 쓰면 곤란하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유란 어디까지나 모방이론의 관점에서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더 효과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방법 중에 비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내세웠는데, 그들에게 진리는 개별적인 데다가 일시적인 것이어서 보편성과 영원성을 지니지 않았다. 한 마디로 어느 누구에게나 진리는 남을 확신시키거나 남한테 설득당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의 키케로, 호라티우스, 퀼틸리아누스도 수사학에 관심을 보였다. 키케로는 인간이 동물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수사학 덕이라 했고, 사상과 언어, 과 은 영혼과 육체처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호라티우스는 문학의 당의정 이론을 주장하며 문학이란 쾌락적 기능, 실용적 기능, 미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동시에 가졌다 했다. 키케로는 수사학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심장처럼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했다. 그는 수사학을 옷에 견주는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만든 것처럼 언어의 부족함과 결핍 때문에 수사학이 필요하가 주장했다.  언어를 에 처음으로 견준 사람은 퀸틸리아누스다. 몸에 안 맞는 옷이 볼품 없듯이 사상에 어울리지 않는 언어도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논리학과 수사학의 싸움은 중세에 들어 소상상태를 맞는다. 이 무렵 수사학은 문법학과 논리학과 더불어 의 한 과목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과 합리성이 대접받는 근대에 들어 수사학은 움추려든다. 수사학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17세기 합리주의 철학자, 경험주의 철학자에게 뚜렷이 나타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들이 진지한 주제와 건전한 논의보다는 오히려 미사여구에 현혹된다 개탄했고, 로크는 수사학을 기만이나 사기 행위로 간주했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 역시 사물을 담아내는 그릇인 언어보다는 그 그릇 안에 담겨 있는 사물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철학적 입장에서 수사학을 반대했다면 청교도들은 종교적 이유로 그것을 업신여겼다. 밀턴을 비롯한 청교들에 의하면 교회의 색유리창이 빛을 차단하는 것처럼, 현란한 수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린다고 주장했다.     수사학은 19세기 낭만주의자에게 큰 조명을 받았다. 독일 관념론자들과 장-자크 루소의 세례를 받은 영국 낭만주의자들은 수사학의 가치를 인정했다. 가령 루소와 마찬가지로 셸리는 언어란 본질적으로 은유적인 것이라 주장하고, 시인이 맡아야 할 임무는 바로 새로운 은유를 창조하여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라 했다. 수사학이란 궁극적으로 이성과 감성을 하나로 결합하여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었다.  이 무렵 수사학에 무게를 실어준 사람은 니체다. 그에게 진리란 기껏해야 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란 그것이 라고 잘라 말한다. 니체는 절대적인 것을 믿는 모든 행동이야말로 병적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수사학과 논리학의 다툼은 20세기까지 지속된다. 크로체는 수사학이 내용과 형식, 주제와 표현을 엄격히 나누려고 한다는 점을 들어 이라 지적했고, 비엔나 실증주의자들도 비유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하버마스는 수사성에 물들지 않는 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수사학은 20세기 중엽 개화기를 맞았는데, 이에 대해 I.A 리처즈의 공헌이 크다. 에서 그는 "한 낱말이 실제 사용과 추상적으로 적절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종래의 주장을 그는 미신이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언어의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 비유는 언어에 입히는 옷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언어와 사상은 영혼과 육체의 관계라는 것이다. 또한 애매성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애매성이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본질적 속성이요 의사소통의 필수적인 방법이다. 특히 문학과 종교처럼 언어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객관성과 논리성에 회의하는 포스트구조주의자도 이런 흐름과 연관 있다. 2차 대전 이후 새롭게 선보인 비평이론들이 흔히 이라 낙인 찍히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자크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주의자들은 수사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그와 오스틴이 언어의 수사성을 두고 벌인 논쟁은 유명하다. 스피치 행위이론을 처음 세운 오스틴은 언어행위를 술정적 행위와 수행적 행위로 나누고, 모든 언어 행위는 결국 수행적이라 결론지었다. (술정적 행위: 사실이나 정황에 대해 언급하는 것, 수행적: 질문, 약속, 경고, 명령을 하는 것 달리 말해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달성하려는 것 (김욱동 에서) 그러면서도 오스틴은 문학어가 일상어에 대하여 '파생적'이고 '기생적'이라고 말한다.  이에 맞서 데리다는 문학어는 물론이고 일상어조차도 수사성에 짙게 물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며 수사성을 피해 아무리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나 상식 속에 숨으려한들 부질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나 상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부분적이고 당파적이며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이상 수사성과 연관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문학 텍스트를 해체하는 작업이란 궁극적으로 텍스트 안에 숨겨져 있는 수사성을 드러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폴 드 만 역시 수사학에 깊이 오염되어 있다는 점이 문학과 철학의 공통점이라 했다.   수사학은 철학 뿐만 아니라 경제학에서도 중요한 몫을 한다. 도널드 맥클로스키는 에서 경제학의 방법론이 언뜻 객관적인 것 같지만 따져보면 "형이상학과 도덕과 개인적 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법학도 마찬가지다. 로버트 고든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신념 구조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것"이라 말했다. 과학 이론 역시 마찬가지. 토머스 쿤은 에서 과학을 움직이는 동력은 참과 거짓을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확신이나 설득이라 말한다. 만약 과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릴 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도 수사학이 발전했다. 중국에서는 문학을 도를 싣는 그릇으로 보려는 '문이재도'가 크게 힘을 떨쳤지만, 못지 않게 문학의 형식적 측면에도 무게를 실었다. 에서는 시육의 또는 육시로 일컫는 시적 장치가 기술되어 있다. 시육의란 부, 비, 흥, 풍, 아, 송 등 여섯 가지 방법을 말한다. 이 가운데 부와 비와 흥은 오늘날의 수사법에 속하고, 나머지 풍과 아와 송은 장르 이론에 속한다. 이렇게 세가지씩 두 쪽으로 나우어지는 것을 두고, 삼경삼위설이라 한다.  삼경에서 부가 한 짝이 되고, 비와 흥이 다른 한 짝이 된다. 와 , 의 풀이에 따르면 부는 다른 것에 빗대지 않고 사물을 직접 진술하는 직서법이나 포진법이다. 비와 흥은 간접적으로 다른 사물에 빗대어 말하는 방법이다. 비는 오늘날의 상징법에, 흥은 오늘날의 연상법에 가깝다.  우리나에서도 문학의 형식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이 있다. 김종직과 성현이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이론가다. 김종직은 그런데 문장보다 경술을 강조하는 김종직의 글에는 비유가 무성하다.  성현은 에서 김종직의 주장에 반박한다. 김종직은 뿌리(경술)이 튼튼하지 않고서는 가지와 잎사귀(수사나 비유)가 제대로 자랄 수 없다고 했으나 성현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하게 자랄 때 비로서 뿌리가 제대로 뻗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수사학과 비유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비유를 뜻하는 말인 영어 트로우프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어 '트로페(구부러짐, 뒤틀림)'와 만난다. 똑바로 말하지 않고 에둘러 완곡하게 말하는 방법을 뜻한다. 트로우프와 함께 쓰이는 '피겨'라는 영어도 형상이나 모습을 뜻하는 라틴어 에서 나왔다. 이 말에서 비유가 흔히 가지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비유는 통상 둘로 나눈다. , 가 그것이다. 전자는 축어적 의미와 다른 어떤 의미를 얻기 위하여 낱말이나 구를 구사(은유, 직유, 환유, 반어. 제유, 역설, 상징, 우화, 과장, 의인)하는 반면, 후자에서는 낱말의 의미보다는 낱말의 통사론적 순서나 패턴에 의지(병치, 도치, 대조, 점층)한다.    비유는 생성하고 발전하는 단계에 따라 죽은 비유, 죽어가고 있는 비유, 살아 있는 비유, 다시 되살아난 비유로 나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일상어는 죽은 비유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비유를 비롯한 시어를 일상 표준어에 대한 일탈이나 전경화로 본다. 가령 체코 언어학자 앤 무카조프스키는  -비유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맡기도 한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보태는 식으로 어휘를 생성한다. -비유는 웃음과 해학을 자아낸다.   -부정적인 면은 고루하고 인습적인 생각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내자','안사람' 여성을 집안에서만 가두려는 속셈.   마루 하 -비유는 진실을 드러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감추거나 숨기는 기능을 맡기도 한다.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무엇인가를 빼놓아야 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다. (작가가 의도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작품 속에 남겨놓은 빈공간이나 침묵에 눈길을 돌리려는 정신분석이론이 힘을 얻고 있다.) 빌 클린턴 성추문 사건 "부적절한 관계" "친근한 성접촉"/ "잠자리는 같이 하였지만 속살은 섞지 않았다."   비유와 세계관    인식론적 관점에서 비유를 처음 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인간이 비유를 통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게 된다고 했다. 폴 리쾨르는 철학적 관점에서 비유를 인식 작용과 연관시키고, 존 설은 스피치 행위이론의 관점에서 그것을 발전시킨다. 폴 드 만은
34    [공유] 21세기 영미 실험시 산책 / 작성자 HUE 댓글:  조회:314  추천:0  2018-05-29
글은 영미 현대시의 새로운 조류로 등장하는 실험시에 대한 특징 및 경향을 기술한 것이며, 시전문 계간지  2001년 겨울호에 게재된 기사다. 간단하나마 현대 영미시단의 실험시적 특징과 경향을 연작 시리즈로 게재하는 일회분이다.       (21세기 영미 실험시 산책)         영미 실험시 배경과 경향         1. 글을 들어가며     어는 고드름은 시간과 함께 남모르게 더욱 굵어지며 자란다. 녹는 고드름은 뜨거움과 함께 더욱 가늘어지며 사라진다. 동굴의 석순(石筍)은 세월과 함께 어둠 속에서 말없이 자란다. 석순을 형성하는 동굴 속 물 흐름은 보이지 않아도, 시야에 드러나지 않은 어둠 속에서 나름대로의 멋진 아방궁을 퇴적시킨다. 어느 날 먼지 빛으로 공개되는 동굴 궁전은 너무 신비로워 그리스 강장제에 도취된 눈동자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실험시는 결빙되는 고드름처럼 속으로 얼고, 초봄에 전통시가 녹아 내리기를 기다린다. 실험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둠의 궁전에서 석순으로 자라며, 우연한 조명으로 세상의 눈길 받기를 기다린다. 실험시는 고드름처럼 머리 위에서 찌르며 자라고, 석순의 뿌리처럼 어둠에서 단단히 생장한다. 하나의 물방울로 시작된 결집(結集)이 더욱 성장하며 화려한 새로운 시 세계를 이룬다. 더 이상 숨으며 팽창될 시공간이 부족할 때, 실험시의 고드름이나 석순은 깨어지고 세상에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실험시는 새로운 시 쓰기다. 밑으로만 늘어지는 고드름의 흔적이 싫어서 옆으로 위로 성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결정체다. 새로운 형상과 무늬로 퍼지기를 욕망하는 새로 형성되는 석순의 속살 아픔이다. 한 시대의 퇴적된 정신 층을 쓸어버리려는 바람(慾, 風)의 모임이다. 그 작은 모임은 홀로 서는 외로운 학 다리가 두려워 새로운 실험성을 공유하는 집단의 나눔이 되려한다. 나눔의 장(場)이 모여서 새로운 물줄기를 모아내고, 노란 사막에 한밤의 비내림으로 새로운 빗자욱을 남긴다.   20C를 갓 넘긴 새 천년 시대에도 실험시가 생장하는 시 동굴에 지난밤부터 내린 새로운 빗자욱이 엿보인다. 겉으로 바로 드러나지 않고,아직 수로를 형성하여 도도히 흐르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물줄기의 자욱이 드러난다. 20C를 투영하는 지하수가 모래 속의 거울이 되어 분명한 잔상(殘像)으로 반영하는 한 세기의 흔적이 있다. 20세기말의 정신적 흐느낌과 새로운 시 쓰기의 물줄기가 실험시의 수맥을 찾는 대나무 가지에 살풋이 느껴진다.   흔히들 20 세기말의 새로운 시대의 감성과 몸짓을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용어로 대변한다. 어두운 세기말적인 정감과 새로운 기대에 대한 상반된 감성을 표현 투영하는 모든 급진적 정신 활동을 실험적(Experimental)이라고 한다. 이러한 새로움의 모색과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를 쫓는 새로운 형태/내용의 시를 실험시라고 정의한다. 실험시는 영어로 “experimental poetry, " "avant garde poetry," "innovative poetry" 등으로 불리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새로움을 향한 강렬한 정신적 발돋음, 실험성이 된다. 시 쓰기의 새로운 방향성 추구, 새로운 표현과 의미의 모색이 실험시의 목적이며 생명이다.   모든 시(어)에는 사라지는 지점이 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는 과거가 스러지고 새로움이 들어서는 교체의 시기가 있다. 너무 익숙한 편안함이 싫어서 새로운 낯설음을 찾아 나서는 정신적 여정이 있다. 낯설음에 매료되는 탐험성이 실험을 추구하게 한다. 실험시는 이렇게 상실되는 시어의 의미, 놓친 조각을 새롭게 되살리는 작업이다. 기존에 포착된 지점을 재구성하기보다는 상실된 부분을 더욱 탐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움의 탐구가 모든 실험시의 맥박이며 핏줄이다. 실험시는 전통을 버리려 하면서도, 고아로서 떨어지지 않는 지혜가 있다. 멀리 떠나려는 설레임을 항상 새로 각색하는 용기와 의지를 드러낸다.   특히 미국 실험시는 유럽의 시 경향과 비평이론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렬하게 새로워 지려한다. 유럽의 모태를 벗어나 신세계의 자유와 자본주의의 팽배를 더욱 즐기며 새로운 실험시를 시도한다. 현대의 모든 문화의 집산지로서 최고의 실험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미국 실험 시인들은 학제간 상호 교류를 통한 문화적 융합접을 더욱 천착한다. 시와 영적 감각성이 높은 서구 화단의 영향도 수용한다. 특히 유럽의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화풍을 통한 시적 감수성을 더욱 새롭게 개발한다. 특히 큐비스트(cubist)나 다다이스트(dadaist) 화가들의 그림에서 많은 실험적 영감을 얻고 있다. 또한 언어학적 비평이론과 해체이론, 프랑스 철학 비평이론 등의 영향으로 미국 대학 내의 비평문학이 새롭게 발전되면서, 시에서도 새로운 성향이 발전하게 된다.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따른 마르크스(Marx) 이론이나 사회주의 및 자본주의 이론 등도 실험시의 노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준다.   미국의 정치적 패권주의와 문화적 제국주의가 더욱 왕성해지면서, 실험성 높은 시적 경향이 자연스레 강화된다. 평안과 풍요의 정신성 속에서 정신세계와 지적 만족을 위한 새로운 시 경향을 추구하는 것은 가히 본능적이라 하겠다. 현대 문화의 다양성만큼 시 경향도 다양하게 추구하게 된다. 시의 실험성은 자연, 풍토, 문화적 환경, 인간적 기질 등의 제반 요소에 따라서 급변하고 요구되는 것이므로, 문화제국으로서 군림하는 미국의 실험시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성을 표출하고 있다. 전 지구적인 위기와 변화의 물결을 대변하는 정신성을 프론티어(frontier) 정신으로 맞서나간다. 그들의 전방위(前方位)를 겨냥하는 총구는 대열을 이루어 정확히 발사되고 있다.   이러한 영미 시단에 나타나는 실험시 경향을 4회에 걸쳐 탐방해본다. 우선 미국 실험시의 성장 배경과 일반 특성을 먼저 접근해본다.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각 시인과 실험시 집단별로 구체적 시를 감상하면서 변화와 실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영미 시단의 실험시 추세와 내용을 이해함으로서 토착적 국내시에 새로운 시적 감성과 실험시 추구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앙망한다.               2. 실험시의 형성 과정         i) 새로운 유행   최근 10-20년 사이에 미국에서는 지성인 사회(특히 대학 사회)나 대중사회에서 시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각 대학의 문예창작과나 시 창작 워크샵, 일반 시 낭송회에서 새로운 시 발표가 성시(盛市)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시 형식, 내용, 틀을 벗어난 자유를 향유한다. 신선한 표현 매체와 실험시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어찌 보면 쓸데없는 짓거리처럼 느껴지는 시내용이 진지하게 논의되며, 새로운 매체를 통한 새로운 창작법이 진지하게 모색된다. 모더니스트 시인(W. C. Williams, Gertrude Stein 등)을 비롯해서 비트 세대 시인(Allen Ginsberg, Lawrence Ferlinghetti 등), 뉴욕 시인(Ashbery 등), 고백시인(Sylvia Plath, Robert Lowell, Anne Sexton등), 구체주의자(E. E. Cummings 등), 이미지스트(Robert Bly, James Wright 등), 더 나아가서 이러한 2차세계대전 전후 세대들의 시를 전통시라고 반발하는 새로운 실험주의자들의 낯선 이름이 광고문구처럼 논의된다. 90년대의 실험시 연구자들은 현 시대의 사회 정치 현상과 문화성에 대해 더욱 심각한 탐구를 시도한다. 이들이 연구하는 실험시적 내용은 너무나 다양하여서 쉽게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이러한 실험시 연구 자체가 신조류의 문학형태로 나타나는 듯하다.   이처럼 미국사회, 특히 대학사회에서는 각종 실험시가 출현 연구되고 있다. 이 현상은 새로운 시의 문예부흥 시대의 다가옴을 예고하는 듯하다. 시문학사에는 항상 이중적 대립성이 편재한다. 전통적 소네트, 서사시, 하이꾸 등의 전통시를 새롭게 도입하려는 성향과 다른 한 편으로는 전통을 거부하는 듯한 실험시가 강하게 대비된다. 전통시의 새로운 모색이든, 이탈된 실험시의 추구이든지 간에, 모든 실험시 경향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정치성과 다양한 포스트모던 성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복잡한 개성과 색다른 삶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일례로 시 낭송과 토론이 왕성한 대학 구내의 커피샵에서는 시각적 효과를 높이는 영상시, 시인지 음악인지 구분이 어려운 소리시, 연극인지 시인지 경계가 모호한 행위시 등이 망설임 없이 발표된다.   이러한 현대의 실험시 경향은 과거의 시 역사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새로움이란 과거의 궤적(軌跡) 위에서 새롭게 비트는 표현 작업이다.이러한 새로움의 변화를 간단히 더듬어 본다.   우선 실험시는 1950-60 연대의 비트 세대의 시 현상에서부터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비트세대(Beat Generation) 시인들은 탈정치적, 반지성적, 낭만적 염세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 경향을 시도하였다. 그 후 베트남 전쟁 여파로 퇴폐적이고 반동적인 사회현상이 새로운 히피 문화로 반영되었다. 그 후 히피 문화성이 쇠퇴하면서 시도 전체적으로 쇠퇴기를 맞이한다. 특히 전통시, 운율과 각운을 맞춘 정형시나 자유시 등이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듯했다. 대학의 시 교육에서도 시보다는 다른 장르 문학이 선호되는 듯했다. 무용이나 대중 예술, 행위예술에 비교해서, 언어 예술인 시가 급진적인 사회변화에 만족스럽지 못한 표현수단이나 예술행위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는 단순히 상아탑 속의 학자들의 얘기이며, 아직 정신적 세례를 받지 못한 대중들과는 요원한 고상한 취미일 뿐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시란 마치 깊은 내적 고민을 토로하는 정신적 표현물, 지적 산물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80년대부터 탈냉전 사태를 통해 미국적 패권주의가 더욱 강화되면서, 새로운 사회 정치적 요구, 지적 변화에 부응하여 새로운 시 쓰기 경향이 나타난다. 각 대학의 문창과에서 대학교수보다는 현장 시인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기존의 전통적 시 쓰기에 대한 담론보다는 실험성이 강한 시 쓰기가 시도되었다. 시는 더 이상 상아탑 속의 죽은 대상이 아니라, 현대 사회 속에서 동참하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식되었다.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간결하고 강렬한 시가 새로 조명 받게 된다. 전통 시적 표준을 거부하고 새로이 변화하는 시대성에 발맞추려는 시도가 진행된다. 잘 포장된 상품 같은 획일적인 현대 사회성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감성과 사유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매체로서 시를 선호하게 된다. 시는 산문과 달리 자유로운 감성과 미래성을 보장하는 듯한 표현력을 갖는다. 새로운 감성, 흥미로운 생각을 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가 지성인과 대중의 환영을 받게 된다. 모든 형태의 시가 수용 가능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전통시의 찬반(贊反), 사유시의 강조, 무의미 시 선호, 정치적 성향 시, 일반 대중적 세속시, 등의 다양한 취미와 내용이 시로 표출되었다.   이처럼 시는 복잡한 현대 생활에서 새로운 일탈(逸脫) 방법으로 점점 선호되었다. 단순한 오락으로 자리매김 하기보다는 지적 쾌감이나 여유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시를 선택하였다. 대중은 산문과 달리 간단하고 짧은 공간에서 자유로운 사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시적 특질에 매료되었다. 시가 여가거리로 격상되었다. 문화 생활의 충족조건으로 시가 필요되었다. 특히 젊은 층에게는 전통적 진부한 시 표현이나 정치적 슬로건, 광고 문구 등에 식상하고, 일상적 언어 표현이 너무 진부하고 재미가 없어서,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서 시적 감성과 통찰력, 재치, 폐부에 와닿는 표현 등을 모색하게 된다. 그 새로운 모색의 결과가 언어 장난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삼행시나 광고문구를 넘어서는 시적 표현으로 발전하게 된다. 시는 조금만 변화를 주어도 의미나 감성 전달이 확 달라지는 표현수단이므로, 새로움 선호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시가 자연히 새로운 감성 표현수단으로 선호되었다.   이 결과로 1990년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세기말적인 현상에 맞는 새로운 표현력을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보다 영적(靈的)이고 감성 표현적이며 현실 반동적이고, 폭팔적 표현수단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세기말적 현상은 어느 시대에서나 발견되나, 21C의 새로운 천년(millenium)을 앞둔 시대에서는 그 느낌이 더욱 강화되었다. 일례로 선(善)을 발견하는 수단으로서 시를 찾기보다는 인간적 악(惡)의 내면성을 보기 위해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선호하기도 한다. 시는 다른 어떤 문학적 표현수단보다도 즉각적이며 표현 강도가 높다. 현 시대의 사회적 악, 세기말 사상을 표출하는 시적 감성은 자연스레 등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구원과 깨달음의 방편으로 새로운 유형의 시는 새롭게 다가온다.   이러한 새로움의 추구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실험적 표현 양식이 나타난다. 우선적으로 서구 정신사를 대변하는 전통적 사상시(Dante, Louise, Keats, Milton, Christina, Urure등)를 새롭게 읽는 노력이 나타난다. 전통 속의 실험적 시를 통한 명상 작업을 시도하고, 새로운 미학으로 현세상을 읽기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시도한다. 이러한 전통의 새로 읽기는 다양한 비평 조류에서 정전(正典)을 다시 읽기 현상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비평의 일상화에 의해서 일반 시민들도 시인이 세상을 보듯이 일상적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와 깊은 생의 통찰력을 발견하게 된다. 종래에는 기존 시인들만이 향유하던 자연과 사물에 대한 생의 음미법을 일반 대중들도 같이 공유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시의 저변 확대가 더욱 강화되고, 시의 대중화에 따른 새로운 변화가 더욱 가속화된다. 실험시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자연히 형성된다.         ii)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전통         실험시의 전통은 멀리 정원 끝의 조망으로 보면 모더니즘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가까운 조망으로는 비트세대의 시인에서부터 연관을 짓는다. 이 시인 집단은 1955-60년대 사이에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던 서정시 시인들로서, 탈정치적, 반지성적, 낭만적 염세주의 시 성향을 보여주는 시인들이다. “짓밟힌,” “얻어터진,” “축복에 겨운(beatific)”처럼 모순적인 극단의 반대 의미를 가진 비트(Beat) 의미에서 이들의 사회적 태도와 시적 성향을 암시 받는다. 이들은 스타일이나 주제, 형식적 표현의 통일성 요소보다는 새로운 표현법을 추구한다. 이러한 시인으로는 휘트만(Whitman)적인 강렬한 자유를 구가하는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b),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자동 암시적으로 시를 쓰는 잭 케루악(Jack Kerouac), 신중하면서도 다다이스트(Dadaist)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시의 대장장이 로렌스 펠링게티(Lawrence Ferlinghetti), 등이 있다.   이들은 모더니스트와 유럽 시 경향을 총망라하여서 사실주의, 마르크스주의 성향, 감성 및 초감각적 엑스타시(황홀경), 언어의 실험 성향 등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로 이들의 시는 재즈처럼 자유분방하고 영감적이며, 황홀 상태에서 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들은 종교적 감정과 감수성을 보이는 신비주의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신비주의 성향이 미국적 풍토와 문화성과 어울려서 새로운 시적 감성을 잉태하게 한다. 이러한 비트 시인들의 일반 성향은 미국이 더욱 강대해지면서 새로운 실험시의 표본으로 자리잡게된다.   일례로, 실험시의 전통은 언어의 청각성(aurality)에서 추적할 수 있다. 미국시단에서는 1930년대와 1950년대에 두 차례 좌파 성향이 나타나는데, 전자를 구 좌파시인이라 하고 후자를 신좌파 시인이라고 한다. 이 때 “new left"라는 칭호는 당시의 정치 성향이외에도 새로운 시적 특질을 암시해준다. 이 새로운 시 경향은 바로 시의 음악성, 청각성이다. 비트 세대에서는 노래나 주문(chant) 같은 반전시(反戰詩)를 행위예술 하듯이 낭송하였다. 대표적으로 Ginsberg는 노래부르는 가수처럼 시를 표현하였다. Ginsberg 시 "Kaddish"는 미친 공산주의자 Naomi 어미를 위한 유대교의 망가(death-epic)다. 비트 세대 시인인 Kerouac 시는 jazz 처럼 들린다.         (삽화 시)   Kaddish의 마지막 5절은 공동묘지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처럼 울려나온다.         주여 주여 하늘의 울림소리 남루한 나뭇잎 사이로 바람 기억의 함성 까악까악 일생 나의   탄생 꿈 까악 까악 뉴욕 버스 깨어진 구두 거대한 고등학교 까악 까악 모든 주님의 환상들   주여 주여 주여 까악 까악 까악 주여 주여 주여 까악 까악 까악 주여         여기서부터 과거와 달리 시가 대중가요처럼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하게 된다. 구어체 사용을 통해 대중에게 읽히고 노래처럼 부르는 시를 쓰게 된다. Wilbur 의 “두꺼비" 같은 시 성향이 쉽게 대중에게 접근되어 간다. 최근의 이러한 구어체 시 운동은 MTV 출연으로 유명한 Maggie Estep을 통해서 시가 대중시, 상업시로 근접하는 계기를 맞게된다. 또 Edwin Torres는 구어체 시 운동에서 보다 심각하게 시를 표출하고 있다. 최근 시인의 구어체 시어법은 비트 세태의 전통을 계승하고, 모더니즘, 더 거슬러 올라가서 Whitman의 시 전통을 계승하면서, 시를 대중주의(popularism)로 발전시키고 있다.   시의 대중성은 자연히 정치적 참여성으로 발전한다. 1차 세계대전후 세대인 1930년대 좌파 시인들(Edwin Rolfe, Ruth Lechlitner 등)이나 2차 세계대전후 비트 세대는 모두 동일하게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된다. 국회의원이 단순히 소방전 같다는 시 표현에서 세태의 풍자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정치적 급진주의(political radicalism)성향은 시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이러한 정치성은 실험시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현대인은 오락산업화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현대 실험시는 정치적 요소를 많이 표출한다.   물론 비트 세대 시는 전 세대(모더니스트)와 30여년의 세월의 차이에 의해서 30년대의 시 성향과는 사뭇 다른 시 형태를 보여준다. 비트 세대는 심각하고 전통적 가치를 표현하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캐쥬얼한 시를 선택한다. 벽난로에 앞에 앉아서 편안히 졸고 있는 강아지처럼 자기 사유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일상적 사물(슈퍼마켓, 거리, 경찰, 거리의 물웅덩이 등)을 노래한다. 당시의 메카시 선풍에 휩쓸리지 않고, 좌익사상에 실망한 상태로 자기 나름대로 미국 가치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본연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시인으로서 자유로운 형식과 언어, 정신을 구가하였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시 대상에 조율하듯이 명상해나간다.자기 스스로 새로운 도구가 되어서 새로운 표현매체를 창조한다. 스스로 자기 인식의 관찰자가 되는 동시에 해설자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시적 리듬은 생체리듬과 닮아 있다. 이러한 자연스런 호흡이 바로 자연스런 시쓰기를 의도한다. 가장 자연스런 마음이나 표현은 곧 자연스런 파괴가 가능한 새로운 시 쓰기를 강요한다.   이러한 감성의 자연 발생적인 성격(spontaneity)이 새로운 시 사조로 자리잡게 된다. 실험시는 땀 흘리며 애쓰는 작업을 거부한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듯이 편안한 표현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발레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도의 기술을 자연스레 땀 흘리지 않고 연기하듯이, 아무리 어려운 시적 상황이나 사상도 자연스레 토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추는 춤은 예술이라 하지 않고 중노동이라 한다. 의도적이고 애간장을 태우는 시 쓰기는 예술이라기 보다는 고생이 된다. 실험시는 지적 노동이나 의도적 고생이 아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새로운 성향이 되어야 한다.   자연스러움은 수많은 훈련과 반복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자연스런 실험시 쓰기는 원숙한 기존의 시 쓰기를 전제한다. 기존의 시 쓰기의 틀을 완성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실험시가 탄생 가능하다. 자연스러움은 완전한 통제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인의 새로운 시적 감성은 다양한 경험과 대체 감성 표현이 가능할 때 자연스럽다. 실험시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기존의 완성미를 대변한다. 자연스러운 발레 동작이 완전한 균형과 고난도의 기술을 마스터 할 때 가능하듯이, 시의 자연스러움 즉 새로운 시 쓰기도 기존의 시를 완성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시에서의 자연스러움은 시 쓰기의 기본 3 과정인 착상, 시작(詩作), 대중 전달에서 나타난다. 독특한 시상(詩想), 비의도적이고 검열하지 않는 듯한 시 쓰기, 자연스런 전달력 등에서 자연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실험시는 이렇게 자연스런 시 쓰기에 의해 자연스레 태어난다. 시를 새롭게 쓰려는 의도와 생각, 표현법, 전달 과정에서 새롭고도 자연스런 실험시가 탄생한다.   이런 자연스런 시쓰기는 의도적으로 반복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시 쓰기가 곧 퍼포먼스처럼 일회성으로 순간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기 쉽다. 영감처럼 일어나고 스러지는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즉각성(immediacy)이나 즉흥성(improvisation)은 이미 고도의 절제와 완성,훈련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아무리 순간적으로 변화를 주더라도, 그 근본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실험시는 이러한 수준의 완결도를 기본으로 하여 형성된다. 실험시의 자연스러움은 고도의 건축적 완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비트 세대 시인의 전통은 90년대에도 유효하게 작용한다. 자연스런 언어의 흐름대로 시를 표현하고, 감성과 황홀경을 신비하게 표현하고, 현시대적 감수성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고, 표현 도구로서 소리와 행위를 동원하고, 현실 염세적인 비판적 시성을 보여주는 실험시는 이미 비트세대에서 뿌리가 자라고 있다. 이들의 뿌리 위에서 사유시, 소리시, 행위시, 전자시, 무의미시, 매체시 등의 다양한 실험적 시가 탄생된다.         3. 실험시란 무엇인가?     i) 실험시의 일반 특성   실험시는 시대 변화를 반영하는 시다. 현시대에 맞는 시적 의사소통 방법의 결과로 나타나는 시가 실험시다. 현대 인간의 의식 속에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되는 것이 안 되는 것이고, 안 되는 것이 되는 것으로 헛갈릴 때가 많다. 이러한 의식 현상이 시에서는 모순과 조화의 수사법으로 나타난다. 동질성과 비동질성의 병치법(juxtapositions of association and dissociation)이 된다. 최근까지도 현대인간은 꿩 잡는 자가 대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삶이 보다 풍요해질수록 결과보다는 삶의 질,살아가는 과정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시에서도 시대성이 그대로 반영된다. 포스트모던 실험 시인들은 시 쓰기 과정을 중시하지, 시어가 의미하는 직접적인 내용을 그리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즉 형식과 내용보다는 시를 쓰는 그 과정 자체를 더욱 중시한다. 시를 쓰는 그 자체로 만족한다. 그들의 목적은 시와 시어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기존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 추구에서 쾌감을 맛본다. 이렇게 시는 시대성을 벗어날 수 없는 정신활동이다.   이러한 시대성과 실험성의 상관관계에서 시는 현실을 주도하려는 욕망을 가진 시인들에 의해 창조되어진다. 따라서 실험시는 새로움의 변화 추구에서 일단 전위성을 갖게 된다. 전위성은 독특함(uniqueness), 미완성, 이탈, 비타협성, 초월성 등을 의미한다. 실험시의 전위성은 우선적으로 완성되지 않는 새로운 시도로 인식된다. 목표를 향한 과정성의 중시, 변화 자체를 향유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실험시는 기존시의 틀을 의도적으로 벗어나려 한다. 새로운 의미를 증명하기보다는 무의미성이라도 일단 행하고(쓰고) 보는 진취력이 있다. 실험시는 새로운 시도의 성공 여부를 개의치 않는다. 실험적으로 움직이며 새로운 시적 생명력을 탐구하는 데에 스스로 만족한다. 실험시는 항상 굴러가는 돌이기를 원하지, 일정한 구멍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기존시와 실험시는 안주와 거부의 차이일 뿐이다. 실험시가 안주하면 다시 기존시가 되며, 기존시가 안정을 거부할 때 실험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감성적, 형식적, 언어적, 의식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대 실험시는 시 의미가 너무 깊어서 무질서하게 느껴질 수 있다. 시 주제가 너무 일상적이라서 약간 평범한 기분을 줄 수 있다. 그렇잖으면 일상적 시제나 내용을 벗어나서 너무 특이한 시를 쓰려고 한다. 현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한계치를 시로 표현하려고 한다. 개성을 강조하는 최고 끝자락을 표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해를 거부하는 듯한 난해성 속에서도, 시 자체로는 그렇게 재미없고 지루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시가 낯설고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만, 톡톡 튀는 지적 자극을 준다. 현대 실험시는 지루한 표현을 용납하지 않으며, 신선한 자극(지적 및 감성적 자극)을 중시한다.   이러한 일반 특성 이외에 주요 특성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미국 예일대 교수인 Elizabeth Alexander는 "훌륭한 시는 적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의미는 적확한 언어 구사, 특정 시 상황에 맞는 정확한 시적 감성의 표현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연히 감성의 분출보다는 냉철한 지적인 시적 표현을 중시한다. 감성적으로 엄격하고 정확하게 구사되는 시 표현을 말한다. 실험시는 전통적 서정시의 감성 표현을 거부하고 기계적, 금속적, 객관적 감수성을 중시한다. 낭만주의적인 풀어짐보다는 어찌 보면 고전주의적인 차가운 이성, 절제된 감성, 단아한 형식, 풀어지면서도 가볍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내면이 무거운 듯한 표현을 선호한다. 실험시는 언어 구사의 적확성을 가장 강조한다.   실험시에는 언어시적인 요소가 많다. 문장간의 연결성이 별로 없는 듯한 파편적인 문장(“new sentence," Ron Silliman이 그의 산문시”Albany"에서 사용한 용어)을 많이 사용한다. 시행 길이는 기능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한다. 파편적 언어의 의미는 전체 맥락에서 구성력을 갖는다. 개별적 문장이나 어휘는 즉각적인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실험시의 언어적 요소는 접속사 없이 단어/구/절을 자유롭게 연결하는 구문(parataxis)을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시어의 위치를 변경하고, 의도적으로 시어를 생략하고, 언어장난하듯이 사념을 표현하고, 고정된 그림을 거역하듯이 이미지를 그려나가고, 의도적으로 소리 유희하듯이 시어를 선택하고, 화자 및 주어를 감추면서 전통적 표현법을 회피한다.   실험시는 시적 표현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가 많다. 이것이 실험시의 미결정성, 과정성이다. 구체적으로 지시되지 않고 항상 열려있다. 무한한 지시성은 구체적 상징이나 지시어로 존재하지 않고 은유나 환유로 무한히 열려있다.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지시의 무한성은 시 의미와 비유의 무한성으로 연결된다. 실험시는 한정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실험시는 불명확성 속에서 사실주의를 표방한다. 이러한 사실주의적인 불명확성 속에서 실험시의 변화로운 시공간이 형성된다. 부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시 의미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되도록 수수께끼처럼 그대로 남겨두고 시가 진행된다. 실험시는 신비적 요소와 일상적 요소를 동시에 담는다. 난해한 신비성이 불명확한 은유와 비유를 제공하고, 일상적 편안함이 읽기 쉽고 재미있는 재치를 제공한다. 실험시에는 시를 위한 시처럼 시작법(詩作法)을 위한 메타포이트리(metapoetry) 요소가 있다. 시 쓰는 방법론이 곧 인생의 방법론처럼 인식되는 시가 많다. 실험시는 대개 작가의 개성이 간섭하듯이 드러나는 작가적 지배력을 거부한다. 시를 독자에게 열어놓는다. 시인은 독자가 읽고 싶은 대로 시를 던져놓는다. 시인은 상호 모순되는 듯한 언어, 소리, 언어 구조(색채)를 상호 교차하듯이 정교하게 써놓는다.   이러한 실험시의 특성을 보여주는 시인을 가볍게 언급해본다.   미국의 저명한 실험시 작가인 Fanny Howe는 의미의 아이러니를 더욱 밀고 나아가서 미국시의 기교의 경계선을 허물정도로 새로운 시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시의 질료인 언어 자체에 대해 회의한다. 언어성에 회의하면서도 그는 새로운 시적 의미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현대 사회의 인간성, 정치성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심각하거나 우울한 색감보다는 민감한 유머를 즐겨 사용한다. 대체적으로 그의 시는 소리를 중시하고, 전체적인 시 의미나 시적 무드를 선호한다. 그의 시는 실험적 탐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연작시(sequence)를 많이 쓴다.   Carol Snow 같은 시인은 “어휘 문장”(Vocabulary Sentences)이라는 연작시에서 언어시적 요소를 많이 추구한다. 가벼운 듯하나 내면적으로 울림소리가 커다란 시를 즐겨 쓴다. 언어시적 예를 들어보면, “Are" 제목의 시에서 ”누구는 구제 받고/ 누구는 빠진다,“ "During"에서는 ”그 동안 그가 내 손을 잡고 있는 것,“ "만족”에서는 ”25년간의 결혼 후에야, 그녀의 호기심이 만족되었다.“ 이처럼 그는 간결한 경귀 같은 실험시를 많이 쓰고 있다.   실험시 시인의 공통적 특징은 언어에 대한 새로운 탐구성이다. 그들에게는 언어가 곧 사물이며, 사상이 된다. 이러한 언어가 곧 사상이라는 견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회자되어 있다. 미국 모더니스트 시에서는 이러한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테니스 코트 맹세”(The Tennis Court Oath, 1962) 작가인 비트 세대 시인 Ginsberg는 “언어가 사상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시어는 의미 구분과 단락 설정이 어려운 상태를 보여준다. 머잇 속의 생각처럼 언어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의 “수많은 의존심”이라는 시는“나는 의존한다 의존하고 있다 나를 보라 깊은 어둔 밤 속으로 의존하는 그 의존에서부터 나는 아침에 의존하며 나타난다 노래하는 나는 의존한다 노래는 의존하는 나에게 의존한다.” 이것은 내면의 마음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고 경쾌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자아의식이 흐르는 대로 마음이 팽창하는 느낌을 제공한다. 이러한 시 의식은 세잔느(Cezanne)의 화법(畵法)과 별 다름이 없다. 동양의 호흡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더니스트들의 숨쉬고 확장하는 과정이 새로운 형식주의자(New Formalists)들을 자연히 탄생시킨다.   이러한 실험시의 기본은 이미 비트 세대 시인에서부터 발견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면 실험시의 산실 역할을 한 비트 시인들의 시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로렌스 펠링게티(Lawrence Ferlinghetti)의 시 “개(Dog)"를 살펴본다. 그의 시 의식은 생각(비교, 의식)과 경험이 일치되는 듯한 시 경험을 제공해준다. 그는 직접 개의 실존을 경험하듯이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감성을 표현한다. 그는 인간의 지성으로 고도의 인간 마음과 강아지의 정신세계를 혼연일체 시키고 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생각이 추상적 세계(abstraction)가 되고,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시적 의구심과 마음이 근본적인 사상과 존재의 문제를 의문하고 있다.   그 시의 일부분을 번역해본다.         강아지가 거리에서 자유롭게 뛰어간다   그는 강아지 삶을 살아간다   스스로 생각할   스스로 사유할   모든 것을 만지고 냄새맡고 실험하며   모든 걸 조사한다   위증죄의 은혜도 없이   진정한 사실주의   진정으로 말할 이야기가 있는   진정으로 같이 말할 꼬리가 있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컹컹 짖는   민주적인 강아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기상(氣像)에 종사하는   존재론에 대해   무언가 말할 게 있는   실재에 대해   무언가 말할 게 있는   그걸 어떻게 보는지   그걸 어떻게 듣는지   머리를 갸우뚱 옆으로 틀고서   거리 한 모퉁이에서   마치 승자의 레코드판   겉 사진   마악 찍으려는 듯이   주인의 목소리   들으면서   바라보면서   살아있는 의문부호처럼   거대한 축음기   속으로   혼란스런 존재의   경이로운 텅 빈 뿔을 가진   항상 모든 것에   승리의 해답을   마악 토해내려는 듯이   보이는               ii) 실험시의 기본 원리 및 개념         실험시를 이해하기 위해 기본 원리나 개념을 먼저 정리해본다.   우선 실험시는 시의 오리지널리티를 부정한다. 시 쓰기는 결국 서로 표절하고 상호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독립된 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는 본래부터 타인이나 전통에서 새롭게 각색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새로운 시 쓰기는 전통이나 타인에서 새로 빌려오는 것뿐이다. 모든 시는 상호 영향성을 준다. 이러한 언어의 근본성, 시어의 차용성이 실험시의 근본 출발점이다. 타인의 시를 새로 각색하고 패러디하고, 변형하여 표현하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새로움이나 실험시란 근본적으로 표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실험시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한 베르나데트 메이어(Bernadette Mayer)의 실험시 쓰기 연습법을 살펴본다. 실험시 쓰기 연습에서 실험시의 속성을 암시 받는다.   첫째, 쓰여지지 않은 것을 써야 한다. 실험시는 지수나 디지털로 될 수 있다.   둘째, 가장 어울리지 않는 주제, 마음상태, 내용을 시로 써야한다.   셋째, 빈 종이에 쓰지 말고, 이미 적혀있는 종이에다가 시를 써본다. 기존의 활자와 어울려서 새로운 시를 탄생시킬 수 있다.   넷째, 졸작의 시를 찾아서, 잘 연구한 뒤에 그에 어울리는 졸작을 써보도록 한다. 졸작을 쓰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발견할 수 있다.   다섯째, 거울 속의 자아상을 바라보면서 “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시를 써본다. 자아가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자아를 부정하는 시를 쓸 때에 새로운 시 쓰기가 가능하다.   여섯째, 산문을 시로 개작(改作)하는 작업을 해본다. 일례로 산문의 첫 단어와 끝 단어만을 발췌하여 시 형식으로 다시 써보면, 색다른 시를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애국가를 가지고 개작해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민국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것을 이렇게 새로운 시 형태로 개작할 수 있다.   동해물 닳도록   하느님 만세   무궁화 강산   대한민국 보전하세   일곱째, 언어를 의도적으로 체계적으로 변형시켜본다. 일례로 각 품사별로만 시를 써본다. 동사면 동사, 명사면 명사로만 시를 써본다.   여덟째, 동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여러 개의 시를 써본다.   이렇듯, 실험시는 문창과의 워크샵 시 쓰기 연습 시간에 시도되는 실험성처럼 느껴진다. 대개는 시의 고유한 표현력을 유지하면서도, 시적 형식이나 표현 방법을 새롭게 변화하는 방법론을 실험성이라고 한다. 언어의 변화성을 일차적으로 실험시의 가치로 본다. 현대 실험시의 특징은 시어의 기본 단위를 문장(sentence)보다는 시행(line)이라고 한다. 완전한 문장을 통한 의미 전달보다는 불완전하지만 새로운 탈격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감수성을 모색한다. 이러한 형식과 의미 단위의 변화는 W. C. 윌리암스의 모더니즘 성향에서부터 비롯되어서Robert Creeley가 적극 주장하는 시형식의 파괴성에서부터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성향이 현대 아방가르드 시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 표현 단위의 변화는 자연히 구두점(punctuation) 사라짐, 완전한 문장 부정, 단어 및 단어의 연결, 등과 같은 실험적 변화성으로 나타난다. 완전히 통일된 (어느 면에서는 고정된) 의미 전달보다는 항상 열려진 의미 해석, 보다 풍부한 의미의 개방을 위하여 시행의 변화를 추구한다.   또 실험시는 시각(視覺)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거울 앞에 서서 자아상을 바라보는 일차적 평면성보다는 거울 뒤에 나타나는 자아상을 보려한다. 자아를 입체적으로 떨어트려 놓고 보려한다. 시인이 스스로 시에 드러나면서 실체를 보이려 하지 않고, 시인 스스로가 다른 시각으로 꺽어진 곳에 숨어있는 자신을 훔쳐보는 듯한 시야를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변화성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의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실험시는 시의 초점, 의식의 주체, 시각의 각도가 어디에서부터 쏘아지는지 분명하지 않다. 잉크제트에서 분출되는 간헐천의 용솟음처럼 예기치 못한 의식의 구멍에서 시가 튀어나온다. 이러한 시각의 사각지대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할 때, 실험시는 마냥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러한 언어적 변화성과 시각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실험시는 이미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예술이론에서 근원이 발견된다. 그는 조각가, 화가, 시인으로서 새로운 시론을 강조한다. 시인의 창조행위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한다. 시인은 단순한 중간자(mediumistic being)로서 예술적 계수(係數)로만 작용할 뿐이라고 한다. 이 말은 시인이 표현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표현이 우연히 발생되는 것이 시라고 한다. 이러한 포스모던한 예술이론에서 현대 실험시의 경향이 예측된다. 시인은 체스플레이어, 창문 닦는 사람,치즈 나르는 사람, 숨쉬는 사람에 불과하기에, 우연히 발견되는 언어에 우연히 미쳐서 환호하는 예술가일 뿐이다. 실험시는 우연히 발견되는 치즈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언어적 우연성, 예술적 행위성, 영화 같은 극성(劇性), 그림 같은 회화성에서 실험시는 항상 새롭게 변화를 추구한다.   이 외에도 실험시는 항상 전통시의 토대 위에서 새롭게 발전한다. 모더니스트 중에서 실험적 성향을 보인 거르투르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실험적 언어 시, 윌리암스(W. C. Williams)의 이미지 시(Kora in Hell, 1918), 애쉬베리(Ashbery)의 “테니스 코트의 맹세”(1962) 등을 기초로 해서 발전한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시에서 언어의 리듬과 변화를 통해 소리시(sound poetry)가 탄생된다. 이외에도 실험시의 보편 성향인 사유시(Meditation poetry), 행위시(Action poetry), 언어시(Language poetry), 전자시(Electric poetry)등으로 변모한다.   현대 미국 실험시의 대표 시인으로는 론 실리만(Ron Silliman), 찰스 번스타인(Charles Bernstein), 앨런 대이비스(Alan Davies), 린 헤지니안(Lyn Hejinian), 수전 하우(Susan Howe), 부루스 앤드류(Bruce Andrew), 훼니호우(Fanny Howe), 마크 레빈(Mark Levine), 캐롤 스노우(Carol Snow) 등이 있다.         4. 실험시의 구체적 공통성         실험시의 본능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 발전을 모색한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기본 공통적 성향을 안고있다. 그 기본 특성을 몇 가지만 추려본다.     1) 사실주의 성향         현대 실험시는 다양한 형태 속에서도, 대개는 사실주의 성향을 보여준다. 낭만주의의 감성이나 눈물, 서정보다는 현실의 실재적 사실(facts)을 구성적으로 표현한다. 사실적이면서도 실험적인 포스트모던한 시를 병행하고 있다. 사실적 측면과 실험적 측면은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듯한데도, 현실 사회의 현실성을 실험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현대 실험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시 표현 기법은 “사실 그대로"인데, 이 말은 사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레 표현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낯선 실험적 기교라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대로 표현한다. 5개 단어의 미완성 문장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 그냥 자연스레 흘러나오듯이 시를 쓴다. 인간의 보편 감성(죽음, 사랑, 등)에 대해서도 감성적으로 토로하듯이, 추상적 지식을 장식하듯이 표현하지 않고, 모든 감성을 억제하고 사실 그대로 싸늘하게 객관적으로 표현한다. 실험시는 기계적 차가움, 지성적 냉혹함, 노년의 달관성 비슷한 감성의 형태를 보인다. 이것이 실험시의 특징인 객관적 태도, 탈자아적 성향, 원거리 시야 등을 암시한다.   이러한 현대판 사실주의 성향은 자극적이거나, 인상주의적 감흥이나, 수사학적 화려함을 배제한다. 즉 비현실적인 것(irreality)을 배제한다. 시인이 직접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으며, 시인의 표현능력 범위 내에서 가능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언어적 기교를 이용하여 새롭게 시를 쓰면서도 현실적 문제를 사실 그대로 표현한다. 추상적, 형이상학적, 관념론적인 표현을 싫어한다. 시는 살아있는 현실을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인의 개인적 경험과 상상력을 직접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는 면에서 전통적 사실주의와 별다르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실험시의 사실주의 성향은 기존 사실주의와는 시 형태나 표현성에서 다른 점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실험시적 사실주의는 사실성을 다섯 개 시어(詩語) 정도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기존 사실주의처럼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어휘를 동원하지 않고, 일정한 어휘 내에서 사실주의 성향을 표현한다. 즉 각 시행이나 일부 문장이 사실주의 성향을 보여주지, 전체 문장이나 시 전체적으로 사실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실험시는 현재성, 현실적 긴박감, 강한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실주의 성향을 도입할 뿐이지, 전체적으로 사실주의를 목표로 해서 시를 쓰지는 않는다. 다만 도구로서 이용할 뿐이지 목표로 차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실험적 사실주의는 기존 사실주의와 성질상으로 차이가 난다. 여기서 성질적, 기질적 차이점은 언어의 변화성, 의도적인 언어의 비틀어쓰기 성향을 말한다. 실험시는 시 자료(내용)의 사실적 표현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언어를 의도적으로 색다르게 표현하려 한다. 전치사로만 시를 쓰던가, 시 구문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내용의 사실적 표현과는 달리 언어적, 구문적 실험 행위가 돋보인다. 실험적 사실주의는 외부 사물을 사실적 묘사보다는 인식과정의 사실적 표현을 말한다. 즉 주제가 되는 사물에 대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예술적 표현수단으로서의 사실주의가 된다.               II. 언어적 요소   사실주의 성향과 동시에 실험시는 언어의 새로운 특성을 추구하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실험성은 모더니스트 시에서부터 뿌리가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언어적 형식 면에서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거투르드 스타인(Gertrude Stein), 윌리암스(William Carlos Williams), 루이스 주코프스키(Louis Zukofsky), 존 애쉬베리(John Ashbery)의 맥락을 유지해나간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이 강한 시를 언어시라고 부른다.         a) 언어시   대개 멋진 시적 형식과 내용을 갖춘 시보다는 언어적 변형을 시도하는 실험시를 언어시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시는 시적 문맥(context)을 탈피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느 면에서 언어라는 한계성에 내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이러한 언어의 변형은 시사(詩史)에서 끊임없이 추구해온 노력이다. 모든 시는 언어구조물이다. 언어 구조적 건설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감성을 표출하려는 노력은 항상 존재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언어시는 대개 정치에 대한 표현을 많이 한다. 정치가 갖는 인간 지배력을 생각하면, 언어시가 풍자적으로 해체하는 대상이 자연히 정치가 된다. 언어시는 결국 언어로서 현시대의 상황적 의미와 내용을 표출하는 정신작업이 된다. 다만 그 표현 양식이 새로운 언어로 언어학적 변형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감성을 드러내는 형태를 취할 뿐이다.   이렇게 세상사에 목소리를 내는 시는 결국 “목소리 시(voice poem)로 발전한다. 이 유형의 시는 독자와 시인의 쌍방간의 의사전달을 중시하는 시다. 자아 주체적인 시인이 또 다른 자아로서의 독자에게 독특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개념이 강한 시다. 즉 양자 간의 도전적인 의사통신을 목적으로 중간 색의 언어와 투명하면서도 자연스런 언어를 이용하여서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시를 말한다. 이 때 시인은 자신의 경험이나 감성을 자신의 메시지로 전달하려고 한다.   언어시를 추구하는 시인들은 주로 1940-1950 연대에 태어난 시인들이다. 이들은 주로 Toothpick, Lisbon & the Orcas Islands (1973); Alcheringa (1975); Open Letter (1977); Hills (1980); Ironwood (1982); Paris Review (1982); The L=A=N=G=U=A=G=E Book (1984); Change (1985); Writing/Talks (1985); boundary 2 (1986); In the American Tree (1986); "Language" Poetries (1987) 같은 시 전문지에서 시를 발표하였다. 언어시 계통의 시인들은 아직 다양하게 분산된 상태로 각자 시작 발표를 하고 있지만, 현대시 잡지, 비평서 등에서 언급되는 시인은 80 여명 정도가 된다. 최근에는 This, Tottel's, Roof Hills, Miam, Qu, L=A=N=G=U=A=G=E, The Difficulties, A Hundred Posters, Sulfur, Temblor, Sink, and Tramen 같은 시지에서 언어시가 자주 발표된다. 그 중에서 대표적 시인들을 일부 기술해본다. Bruce Andrews, Rae Armantrout, Steve Benson, Charles Bernstein, David Bromige, Clark Coolidge, Alan Davies, Ray DiPalma, Robert Grenier, Carla Harryman, Lyn Hejinian, Susan Howe, Steve McCaffery, Michael Palmer, Bob Perelman, Kit Robinson, Peter Seaton, James Sherry, Ron Silliman, Diane Ward, Barrett Watten, Hannah Weiner 등이 중요시되는 시인들이다. 이들은 후에 언급될 실험시에도 중복되어 활동한다.   이들은 1970년대 이후로 소규모의 언론 및 대담 활동을 통해서 전통적 학문적 비평과는 약간 다른 사회적 홍보 활동, 시 표현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문화활동의 과정으로서 시를 전도하는 입장에서 보다 왕성하게 네트워크를 형성하듯이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실험시 작가들의 통합된 활동은 1933년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활동하던 실험시인 모임인 흑산파(Black Mountain school) 시인들(Charles Olson, Robert Duncan, Denise Levertov, Jonathan Williams, Robert Creeley) 이래로 가장 정교한 시학파를 형성하는 듯하다. 이러한 활동이 현대 실험시를 급속히 새로운 유형의 시로 정착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스타인(G. Stein)의 영향으로 세상은 정의하기보다는 규정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냥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에서 명사와 같은 고정된 운명론, 결정론대로 시를 쓰지 않고, 인생의 연(緣)의 한 과정으로 시를 쓰려고 한다. 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과정론으로 애쉬베리의 시 "나무들(Some Trees)"을 즐겨 인용한다. 이 시를 평하면서, 시인 부루스 앤드류(Bruce Andrew)는 언어와 의미를 포기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내면에 숨어있는 인위적이고 필요한 선택을 자의식적으로 인식해내는 시 쓰기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전통 언어를 해체하기 위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성향에서 윌리암스의 시성을 답습하고 있다. 언어시를 통해 시는 구체적인 이데올로기의 투쟁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언어시 시인들은 어느 실험 시인보다도 언어에 대한 실험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실험시 특성을 가장 먼저 시도한 시인 그룹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들의 언어적 시 표현의 특성, 불명확성, 난해성, 혁신성 등은 기타 실험시 작가 군에게 공통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영향성이 언어시를 대표적 정치 표현시로 규정하는 듯하다. 어느 시대이든지 시대성에 반대하는 정치 성향의 시가 존재하는데, 현대에는 언어시가 그러한 정치비판성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 언어시는 여권운동, 동성애 운동 시처럼 정치 지향적 시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언어시의 사회성을 너무 일방적으로 정치성향 시로 규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일례로 번스타인의 시 "쟁기보습판을 들여올려라"를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시로 규정할 수 있을까?         간단히 긁기 위해, 생략하라,   노(시간)를 치워라.   흉악한 침수가 모든 최상의   배를 공격한다. 손, 심장은   미끄러지지 않는다, 견고하게   (애처롭게) 떠나간다.         이러한 언어시는 자본주의 정시성에 대한 비평보다는 시인과 독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고 이해하면 보다 쉽다. 언어시라고 할 때, 대개는 언어에 대한 특별한 태도를 의미한다. 스티브 맥캐퍼리(Steve McCaffery)는 1976년에 “주제의 죽음”이라는 에세이에서 언어시는 특별한 스타일이나 관행이 아니고 언어에 대한 관심을 중시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언어적 관심은 언어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시 쓰기를 총칭한다. 이러한 언어적 관심에서 언어시인들은 시인마다 서로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몇 가지 정리해본다.   첫째, 언어적 무의미를 통한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새로운 언어적 의미 조건을 개발하는 실험성이 있다.   둘째, 언어적 의미는 세상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속내용이라고 인식한다.   셋째, 소쉬르(Saussure)의 언어학 이론을 도입하여 언어 특성을 시에 적용해본다.   넷째, 시어의 고정된 의미에 묶이지 않고, 항상 언어의 상관관계를 새로 적용하려 한다.   다섯째, 언어의 물질적 측면(소리, 리듬, 구문 등)을 강조한다. 인식과정에서 형식적 유관성, 의식의 투명한 장소에서 퍼져나오는 의미와 인식력을 표출하려 한다.         그러면 1회분을 마감하면서 언어시를 몇 개 읽어본다. 실험시의 특성처럼 마감되지 않은 새로운 글쓰기의 여운을 다음 호로 넘겨버리면서 새로운 기대와 쾌감을 남겨놓는다.         서론(序論)에서 멀지 않는         엄격한 아름다움 --   개혁 그리고 말살   양자(兩者)를 위한 공간   동시에 하진 않지만   낡음 밑에 지어 논 새로움(Kenning 詩誌, 3권, 1호 발췌)           사례 모음집         1 1 1   2 2 2   3 2 1         분류학의 발명과   제시 -- 좌에서 우로   읽기, 그 순서를 강요하며   남는 것으로 부터               얘기하는 것으로는 시를 얻지 못한다         로저, 네 차례야. 세상은 바보가 아냐!   너가 네 눈을 얻자 광대함은   끈적이는 담요의 벽돌 밑으로 사라진다,   바보들만이 회계과를 감히 쳐들어가지   못한다. 생명보험 계리사의 기와 무늬   (권고하는 비애감)처럼 동작을 취하고,   풍선 같이 부푸는 전구처럼. ... (찰스 번스타인) [출처] (21세기 영미 실험시 산책) |작성자 HUE
33    [공유]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강희안 댓글:  조회:275  추천:0  2018-05-27
 김용식 문학서재 | 김용식  http://blog.naver.com/blackhole68/220975822989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강희안   1. 은유의 개념   은유를 지칭하는 메타포(metaphor)는 일반적으로 희랍어 ‘metapherein’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을 살펴볼 때, 은유란 ‘meta’의 ‘초월해서’(over․beyond)란 뜻과, ‘pherein’의 ‘옮김’(carrying)의 합성어로서 ‘의미론적 전환’을 뜻한다. 표현의 측면에서 직유가 외적 유사성에 바탕을 둔 직접적 비교라면, 은유는 내적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 비교라는 점에서 차별된다. 은유는 합리적이고 산문적인 비교를 벗어나 질적인 도약을 통해 두 가지 대상을 동일시하거나 차별화하는 기법이다. 나아가 그 두 가지 특성의 교집합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관계망을 구축한다. 따라서 다수의 비평가들은 은유가 논리를 넘어서는, 혹은 우회하는 사고체계라고 정의한다. 야콥슨(R. Jakobson)은 회화를 예로 들어 아주 명쾌한 주장을 펼친다. 그에 따르면, 시각 예술에서 사실감의 표현은 자연스럽고 용이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3차원의 실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이기에 인위적 방법을 채택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림의 박진감은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관습적 언어’를 익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관습적 방식이 반복되면, 마침내 ‘추상화’가 되고, 한자어와 같은 ‘표의문자’로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핍진성(verisimilitude)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일그러뜨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결국 은유에서 대상의 왜곡은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지각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논지로 요약된다. 야콥슨이 내린 시적 자질에 대한 정의는 러시아 비평가 쉬클로프스키(Shklovsky)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의 주장은 시가 ‘자동화’를 깨뜨려 버리면서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강화해 준다는 논리다. 이 두 학자의 변별점이 있다면, 쉬클로프스키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논의한 반면에, 야콥슨은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관계를 궁구한다. 즉 현실에 대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보고 있다. 문학사는 언제나 ‘사실’ 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전시대의 문체에 반발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예사조를 사실의 왜곡이니 진실의 파괴라고 부정하며 무시하고 폄하하기 일쑤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런데도 전시대의 문학이 부정되는 것은 과거 낯설었던 것들이 자동화․습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 어떤 문체 또는 어떤 비유가 더 사실적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형식주의자들이 이질적인 수법을 동원하는 것은 참신한 방법으로 사실을 표현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어느 한쪽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낯선 것과 친숙한 것 가운데 어느 쪽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비교조사의 유무에 따른 ‘직유’와 ‘은유’의 구별은 오늘날 크게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극복 방법을 내세운 이는 필립 휠라이트(P. Wheelwright)이다. 그는 자신의 역저인 『은유와 실재』에서 비유가 이미 알려진 것과 체험한 것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제시하는 방편으로 서술의 형식을 지향한다고 단언한다. 즉 A를 이용하여 B를 제시하는 형식은 결국 ‘A는 B다’라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단순한 서술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논리적 제약에 집착하다 보면 시가 지닌 비논리적 특성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논리적 관계에 치중하는 비유를 치환(置換, epiphor)이라고 하고, 비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비논리적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을 병치(竝置, diaphor)라 하여 구별한다. 은유는 본의(tenor)와 매재(vehicle)의 관계가 외면적으로는 결합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유사성 내지 이화성의 형식으로 드러나며 시의 가장 주된 요소를 차지하는 시적 화법 중의 하나이다.   1) 1:1 치환의 방식   은유가 단순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나 말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장식이거나 새로운 말의 창조라는 수사학적 논리로는 미흡하다. 차라리 은유의 현대적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어의 상호작용이나 긴장 관계에서 그 가능성의 단서가 발견된다. 동일성이니 유추적이니 하는 사고나 상상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은유의 기능이란 결코 시어법의 전유물이 아니라 산문을 포함한 일반적 어법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은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로 치환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하나의 본의에 두 개 이상의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관념이나 대상(본의)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댈 대상(매재)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명백히 가시화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하여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의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태상으로 보면, 치환이란 용어에서도 드러나듯 ‘A는 B이다’라는 구문이 성립한다. 치환의 방식으로 구성되는 은유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본의, 내 마음)을 이미 잘 알려진 정황이나 사물(매재, 호수)로 대체하여 의미론적 전이를 일으키는 은유의 대표적인 전범이다. 야콥슨의 논리에 의하면 ‘옮겨 놓기’란 등가성의 원리에 입각한 계열의 축으로 구성된다. 또한 직유에서와 같이 비교조사가 직접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부분적인 표현에서도 꿰맨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 표현의 문리가 트이면 트일수록 널리 활용하는 표현 기교에 속한다.   (1) 유사은유   앞 장에서도 언급했지만 은유는 본의와 매재를 결합하는 구조적 특질을 지닌다. 그런데 습작생들의 시에서는 본의 따로 매재 따로 노는 경우와 종종 부딪칠 때가 있다. 본의와 매재의 결합이라는 용어에서 ‘결합’이란 의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결합이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지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어적 관점에서는 어떤 사물에 적합한 이름이 다른 사물로 전이된 형식이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와 어떤 유사성도 없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비상사성 속에서 상사성을 인식하는 정신 행위이며, 또 ‘내 마음’이 ‘호수’로 변환되면서 의미론적 전이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은유는 문학 비평가는 물론 전문적인 철학자들에게도 관심의 초점을 모아온 수사적 기법 중의 하나이다. 두 가지 대상을 하나로 버무려 새로운 영역을 유추적으로 재현해 내는 독특한 세계 인식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은유는 직설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돌려 말하기’인데,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효율적으로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장점이 있다. ‘유사은유’(類似隱喩)란 본의(T)와 매재(V)가 1:1 유사성을 축으로 결합하면서 공분모를 드러내는 양식으로서 기존의 ‘치환은유’를 좀더 세분화하기 위해 새롭게 명명한 용어이다.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구토(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 유종인, 「팝콘」 전문     상기 인용시에서 유사성의 축은 “팝콘―꽃/내 마음 진창―속/창문 깨고 투신―밖/내 속을 까뒤집은 것―꽃, 구토” 등으로 추출해볼 수 있다. 화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T, 본의)이다. 이것은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마음의 상태이지만, “팝콘”(V, 매재)의 특성을 통해 명쾌하게 구상화된다. 화자는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화자는 자신이 현재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는, 그러한 고통으로 인해 새로운 내적 도약을 예비한다. 화자는 “창문 깨고 투신하”듯이 현재 화자는 힘든 상황을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다”고 말한다. 이 같은 표현을 통해 하얀 속살을 내밀며 팝콘으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화자가 말한 ‘꽃’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이 시에서 ‘꽃’은 표면적으로 ‘팝콘’을 나타낸다. 팝콘은 옥수수 씨앗이 뜨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변혁을 이룩해낸 무의식의 표지이다. 나아가 ‘팝콘’은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진 화자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이러한 ‘꽃’을 “견딜 수 없는 구토”라고 표현한다. 즉 밖이/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안은/밖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화자도 내적인 고통의 분화구가 터져 제 속을 밖으로 꺼내 몸을 뒤집어 쓴 형국이다. 뜨거워 견딜 수 없는 마음은 밖으로 나오고 단단한 몸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고통의 몸부림과 뒤틀림이 꽃이란 몸의 형상으로 동일화되어 새롭게 탄생하는 도약의 순간이다.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털이 있다. 궁창이 열리고 땅이 혼돈을 멈추었을 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 가장 나중에 완성시킨 건, 아무래도 털이다. 당신이 떠나고 세상에서 가장 싼값으로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낡은 침대나 주전자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털. 윤기가 잘잘 흐르는 털. 궁창이 열리고 혼돈이 멈춘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완성시킨 건 아무래도 풀이다. 땅의 털인 풀. 욕망이 없다면 땅이 풀을 풀이 땅을 간지럽히지 않았겠지. 아, 시원해 물 먹고 주전자 옆에 야구르트 먹고 아, 개운해. 날이 저물고 바람이 불면 빼빼마른 창녀들이 잠자리처럼 날아다니겠지. 궁창이 열리고 땅의 혼돈이 시작되겠지. ― 원구식, 「털」 전문   앞서의 시와는 다르게 이 시는 ‘털’(본의)이 ‘풀’(매재)이라는 전이적 은유 구조로 변용되어 있는 수작이다. 털과 풀은 외형상의 조건은 유사하지만, 내용상의 의미는 이질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질성을 축으로 하는 확실한 두 대상의 결합은 ‘욕망=생명’이라는 모호한 주제를 구체화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털은 화자에 의하면 “궁창이 열리고/땅이 혼돈을 멈추었을 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가장 나중에 완성”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털은 “쾌락으로 가는 길목”이나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꼼지락거리”는 욕망의 이름과 다를 바 없다. 이에 반해 ‘풀’은 “궁창이 열리고/혼돈이 멈춘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완성”시킨 존재로 긍정화된다. 만약 “욕망이 없다면/땅이 풀을/풀이 땅을 간지럽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전자 옆”에 있는 ‘털’과 ‘야구르트’는 “개운해”로 동일화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결합된다. 창녀로 야기된 털(음모, 욕망)과 천지 창조(사랑, 탄생)라는 쾌락과 생명이라는 이중성을 동시에 환기하는 특성으로 재조합된다. 동양적 사유와 맞물려 있는 성(聖)과 속(俗)의 세계를 일여적 관점으로 정관한다는 것은 시인의 확장된 의식이 있었을 때만이 가능한 사유 방식이다. 이와 같이 ‘유사은유’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본의가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진 매재로 전이하거나, 구체적인 대상이 다른 이질적인 대상과 결합하기도 한다. 전자에 속하는 유종인의 시가 불확실한 관념을 새롭게 재생하는 효과를 거둔다면, 후자에 속하는 원구식의 시는 두 대상의 차이를 동일화하여 아이러니한 삶의 국면을 보여준다. 본의와 매재의 결합은 동일성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며, 의미의 변용 내지 확대를 가져온다. 이 동일성은 단순한 외형상의 근사한 특질이라기보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측면이 중시된다. 이처럼 치환의 방식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유사성의 축이 시적 인식과 의미망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2) 이접은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은유를 ‘천재의 상징’으로 보았다. 전혀 다른 사물들 사이에서 공통점이나 비슷한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화감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분명 천재들에게만 주어진 신의 특별한 선물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상이한 사물들이 각도에 따라 유사하게 보인다면, 아마 그 유사성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인지되는 공분모의 발견과 다르지 않다. 아인슈타인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들, 예를 들면 ‘노 젓기’와 역에서 바라보는 ‘지나가는 기차’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다양한 영감을 병렬하여 물리학의 수많은 추상적 이론을 완성했다. 또한 그 어려운 이론을 일상적인 은유를 통해 대중에게 쉽고 친근하게 설명한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은유는 비유할 의도를 숨기면서, 표면에 직접 그 형상만을 꺼내 보여주는 특질을 지닌다. 시인은 독자가 상상적 유추를 동원하여 그 본질적인 상사성(想事性)을 해석할 수 있는 함축적인 구조를 마련한다. 이러한 은유는 시인의 언어에 관한 인식과 대상에 대한 태도 및 표현에 대한 정신의 긴박감 등이 문제가 된다. 은유가 만일 안이하게 사용되면 이미지가 아니라 혼란만 야기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시를 은유의 결정체라고 했을 때, 시작 기술에서 본의(T)와 매재(V)가 1:1 동일성을 축으로 하여 결합하는 동시에 다시 상반된 이미지나 의미로 분리되는 특별한 방식이 바로 ‘이접은유’(異接隱喩)이다. 이 기법은 자연스럽게 ‘낯설게 하기’의 효과도 거두면서 입체적인 구조를 형성한다는 장점이 있어 현대 시인들이 즐겨 구사하는 양식 중의 하나이다.   염소를 매어놓은 줄을 보다가 땅의 이면에 음메에 소리로 박혀 있는 재봉선을 따라가면 염소 매어놓은 자리처럼 허름한 시절 작업복 교련복 누비며 연습하던 가사실습이 꾸리 속에서 들들들 나오고 있네 비에 젖어 뜯어지던 옷처럼, 산과 들 그 허문 곳을 풀과 꽃들이 색실로 곱게 꿰매는 봄날, 상처 하나 없는 예쁜 염소 한 마리 말뚝에 매여 있었네, 검은 색 재봉틀 아래 깡총거리며 뛰놀던 새끼 염소가, 한 조각 천 해진 곳을 들어 미싱 속으로 봄을 박음질하네 구멍난 속주머니 꺼내 보이던 언덕길 너머 보리 이랑을 따라 흔드는 아지랑이 너머 예쁜 허리 잡고 돌리던 봄날이었네 쑥내음처럼 머뭇머뭇 언니들은 거친 들판을 바라보던 어미를 두고 브라더미싱을 돌리고 있었네, 밤이 늦도록 염소 한 마리 공장 뒤에 숨어 울고 있었네 부르르 떨리는 염소 소리로, 가슴도 시치며 희망의 땅에, 가느다란 햇살로 박아 놓은 옷이 이제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기염소 뛰어노는 여기저기 소매깃에 숨어 있다 돋아나는 봄날 언니의 속눈썹 같은 실밥을 나는 뜯고 있었네 ― 구봉완, 「재봉질하는 봄」 전문   상기 인용시는 70년대의 검은색 몸통의 “브라더미싱”(본의)을 “염소”(매재)로 변용하여 은유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염소”가 봄날 상처하나 없이 깡총거리는 “예쁜 염소”(화자)와 응달진 공장의 뒤편에서 “부르르 떨리는 염소”(언니)로 양분되면서 화자의 유년시절을 재생해 내고 있다. 인용시의 은유 체계를 세분화해 보면, 유사성의 축은 ① ‘검은 염소―브라더 미싱’/ ② ‘염소의 음메에 소리―재봉질 소리’/ ③ ‘염소의 발자국―재봉선’/ ④ ‘황폐한 거친 들판―공장 뒤’ 등이다. 이에 반해 이화성의 축은 ① ‘해지고 허문 곳―희망의 땅’/ ② ‘상처 하나 없이 깡총거리는 새끼 염소―공장 뒤에서 부르르 떨리는 염소’/ ③ ‘비에 젖어 뜯어지던 산과 들―색실로 곱게 꿰매는 봄날’/ ④ ‘구멍난 속주머니―햇살로 박은 옷’ 등이다. 이 시의 시적 구획은 생계를 책임진 언니의 희생(공장의 미싱)과 그 혜택을 받아 가사실습(학교의 미싱)에 임한 화자의 상반된 삶의 양면이 한 꾸리로써 병치되어 있다. 언니의 ‘고통스런 현실’과 화자의 ‘내면적 상처’가 염소의 울음이라는 ‘재봉질 소리’에 의해 극복된다. 이와 같은 은유는 봄날의 생명력 있는 이미지와 공장의 신산한 현실이 접면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화자는 우리 근대사의 음영을 상호 화사하고 화해로운 재봉질로 갈무리한다. 시 속의 언니에게는 암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화자가 “한 조각 천”으로 “해진 곳을 들어 미싱 속으로 봄을 박음질하”고 있는 정황이다. 삶의 간극과 환부를 아름답게 봉합하는 이 은유적 상상력은 낯선 의미 충돌을 유발하는 동시에 “햇살로 박아 놓은 옷”을 상상 공간에서 마름질하며 아름답게 완성된다.   ÷의 달이 호수에게 왜 나를 비추느냐를 묻자 그는 나를 비춘 적이 없다고 되물었다. 구름이 서행하다 몸의 스크럼을 푼 곳은 문자 이전일까, 이후일까? 그녀는 나와 괜히 결혼했다고 트집을 일삼으며 웃었다. 통통 튀던 %들조차 널 중심으로 나를 취했으나, 한쪽으로 기울었다. 삐딱한 관점에서 너는 위장 이혼을 종용했다. 그들이 거주한 몸은 빗장뼈를 뽑았기 때문에 헐거웠다. 시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솔직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忄에 고착된 그들은 양쪽 도어록을 잡고 울었다. 서로 힘껏 잡아당겨서 열리지 않았다. 예수의 발 뒤꿈치도 뒤집어 볼 수 없었다. 파경을 각오한 호수의 달빛이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댔다. 기도로써 뽑아든 평등의 벽을 보았다 ― 강희안 「÷%忄」 전문   인용시는 자아와 대상, 기표와 기의가 긴밀하게 동일화되어 의미를 명징하게 만드는 서정의 순기능이 거세되어 있다. 결코 동화될 수 없는 자아와 대상과의 파열을 겪는 서정의 역기능에 시선이 고정된다. 시인은, 은유를 통해 기호 표현의 양면성에 관심을 모으면서 기존의 세계가 고착화한 관념의 폭력성에 집중한다. 인용한 시의 화자는 무엇보다도 세계와 불화를 겪는 시적 정황을 초점화하고 있다. 제목은 ‘÷’(이성)라는 수식이 각도의 형태를 달리하면서 ‘%’(기대지평)로 미끄러지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평등이 벽이 되는 ‘忄’(감성)의 형태를 지향한다. ‘수식’이라는 가장 확실한 이성적 세계에서부터 ‘확률’이라는 모호한 가능성의 세계를 거쳐 ‘마음’이라는 가장 불확실한 심리적 세계까지를 함축한다. 인용시에서는 수식을 대표하는 ‘÷’(T)가 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호수의 표면에 비친 달’(V)의 형상으로, 확률을 대표하는 ‘%’(T)가 널뛰기의 ‘널’(V)의 형상(혹은 삐딱한 관점)으로, 마음을 대표하는 ‘忄’(T)은 문과 문고리가 되어 서로 “양쪽 도어록을 잡”고 있는 형상(V)으로 은유화된다. 이와는 역으로 이화성의 축에서 볼 때, “÷의 달”(주체)은 호수(객체)에게 “왜 나를 비추느냐를 묻자 그는 나를 비춘 적이 없다”고 진술하는가 하면, “%들”까지도 “널(타자) 중심으로 나(자아)를 취했으나,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불화에 봉착한다. 나아가 시인은 “忄에 고착된 그들”(소통)은 “서로 힘껏 잡아당”긴 결과 자아와 기호의 관계가 “평등의 벽”(절연)이 된 심각한 국면을 포착한다. 결국 인용시의 골격은 “결혼했다고 트집” 잡혀 “위장 이혼을 종용”당하고, 결국 “파경”을 염두에 둔 형태로 분리되는 형국이다. 이상과 같은 ‘이접은유’는 동화와 이화의 두 축이 서로 넘나들며 의미를 생성하는 구조이다. 구봉완의 시가 상반된 삶의 음영이 화해로운 재봉질로 갈무리되는 동일성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강희안의 시는 기호 표현의 양면성을 통해 자아와 대상의 불화감에 주목한다. 유사성과 이화성의 기능적인 측면을 볼 때, 동화의 축은 시적 인식을 새로운 관계망으로 응집하여 시적 골격을 만들어 낸다. 이에 비해 이화의 축은 아이러니한 삶의 보편적 진실이라는 결구를 이끌어 내는 힘을 발휘한다는 특징이 있다. 즉, ‘유사은유’가 단순하지만 감각적이고 명료한 직접적인 이미지라고 한다면, ‘이접은유’는 시의 주제와 관련되어 유기적이고 긴밀한 다중적이고도 입체적인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이 다르다. [출처] [공유​]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강희안|작성자 옥토끼
    채수영의 시세계    ―계절의 환타지를 노래한 아르페지오 기법의 시        이선 ​     채수영은 4,000여 편의 방대한 시를 쓴 다작의 시인이다. 2018년 봄에 34편째 시집을 받았다. 한국에서 시집해설을 가장 많이 했다는 평판을 듣는 것도 채수영이 글쓰기를 사랑하며 작가로서 치열하게 저작활동을 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필자는 작년에 채수영의 「장자론으로 본 채수영의 시 세계」 평론을 쓴 후, 이번에 두 번째 시평을 쓰게 되었다. 젊은날부터 여든이 가깝도록 수십 년 동안 쓴 방대한 시를 몇 편으로 한정하여 논평함이 유감이다. 필자는 채수영의 시의 특징을 몇 개의 음으로 나누어 화음을 넣는 반주기법으로 분석하였다.그리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의 환타지를 노래한 아르페지오 기법의 시」로 분류하였다. 비발디의 사계처럼 각각 다른 계절의 조화로운 화음을 펼쳐서 노래하는 채수영 시의 구조를 아르페지오 기법으로 정의한 것이다.   음악은 단일구조보다 복합구조를 가지고 화음을 넣을 때 관객의 청각을 아름답게 자극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단일구조보다 복합구조를 가지고 복합 이미지로 구조화했을 때 감각적 미의식이 증폭된다. 아래에 예시된 시를 통하여 그 기법을 논의하여 보자. 아래 시는 채수영의 2017~2018년에 발간된 신간 시집 6권 중에서 13편의 시를 조명하였음을 밝혀둔다.       1. 봄의 환타지, 아르페지오 기법      채수영 시의 매력은 하나의 음색을 내지 않고 다변적이며 다각적인 화음을 낸다. 구조상 2중구조, 3중구조, 다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어와 비유는 직선구조가 아닌, 곡선구조와 겹쳐그리기 기법의 복합구성을 하고 있다. 아래 시를 읽고 상세히 논의해 보자.     꽃잎에 빗물이 닿으면 뭐가 되는가   그렇게 벚꽃이 지는 길을 걸었다   젖어 흐르는 봄날의 나그네가 되어   무게가 가라앉는 나무들   윤나는 푸른 표정 앞에   옮겨 딛는 발길   하늘을 가린들 그게   슬픔으로 보이던가   예약을 손짓하면서 다가오는   희망은 그렇게 언덕에 있었다   ― 「초록으로 오는 세상을 위하여」 전문     위의 시는 제목부터 봄의 이미지를 노래하고 있다. 1-10행의 간결한 시어들이 한 편의 시에서 러너처럼 연속성을 갖고 수식된다. 행마다 일상적 결어를 거부하고, 다음 행과 배열을 어긋나게 잇는다. 시의 낯설게하기를 실현하여 감각적 미의식을 새로이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다.   위의 시의 1행 ‘꽃잎에 빗물이 닿으면 뭐가 되는가’는 의문형이다. 그런데 2행의 ‘그렇게 벚꽃이 지는 길을 걸었다’는 1행의 물음에 대한 대답 행이 아니다. 되받는 문장은 전혀 순치적이지 않다. 역행의 문장으로 낯설게하기를 실현한 심미적 미의식을 준다. 필자는 이 문장들의 구성과 연결을 ‘아르페지오’ 기법으로 명명하였는데 여러 이질적인 음들이 내는 화음으로 분류한 것이다.   위의 시에서는 다른 시인들이 낱말과 낱말의 언어충돌을 시도하는 것과 달리, 문장과 문장의 이미지 충돌을 시도하여 ‘놀람 교향곡’처럼 음악적 화음을 펼치며 정서를 환기시킨다.   21세기 시와 음악, 미술은 통합적 예술의 형태로 합성되고 있다. 채수영의 시는 미술의 색채요소와 음악요소를 통합하고 있다. 뒤에서 음악적 요소는 또 상세히 언급하기로 하자. 채수영의 시는 화음을 넣어 여러 악상들이 모여 세련된 연주를 한다.   3행-8행을 살펴보자. 행마다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행과 엇박자로 연결된다. 3행 ‘젖어 흐르는 봄날의 나그네가 되어’는 4행 ‘무게가 가라앉는 나무들’과 연결된다. 그런데 4행은 명사형의 결어 부분이 아니다. 다시 5행의 ‘윤나는 푸른 표정 앞에’와 문장이 연결된다. 이와 같이 ‘옮겨 딛는 발길(6행)/ 하늘을 가린들 (7행)/ 슬픔으로 보이던가(8행)’까지 연속성을 가진 문장들이 의문형으로 끝난다. 채수영의 시는 짧은 시행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상투어가 없다. 어긋나게 연결된 행들이 아름답다. 필자는 이러한 채수영의 시 창작기법을 곡선구조와 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분류한다. 여러 방향의 화음을 넣은 음악처럼 감각적이다.   8행과 9행을 살펴보자. ‘예약을 손짓하면서 다가오는(8행)/ 희망은 그렇게 언덕에 있었다(9행)’의 두 행도 낯설게하기를 하여 어긋난 문장은 비대칭이다. 채수영은 언어를 노련하고 완숙하게 절대 미학을 살려 표현하고 있다. 끝날 것 같은데 끝나지 않고, 용트림하여 비비꼬며 다시 살려내어 연결시킨다. 그리고 다음 행과 묘하게 어긋난 문장으로 만나게 한다. 이러한 기법을 필자는 겹쳐그리기 기법이라고 명명한다. 채수영 시의 문장과 낱말들의 비틀림과 낯설게하기는 노래와 연주의 화음처럼 2중구조, 3중구조, 다중구조로 결합되어 화음을 넣고 있다. 짧은 문장들의 행진 속에서 아르페지오 기법의 도드라진 매력을 지닌다. 아래 시를 읽고 다시 논의를 계속해 보자.     너무 무겁다. 푸른 잎을 토해내는   중량. 임부姙婦의 먼 예약처럼 희망을   꽃으로 단장하고 길은 다시 수채화일 때   신은 실수인지 연신   푸른 물을 엎지르느라 정신이 없고   땅을 비집는 아우성이 혁명을   부르짖는 소란 속에서도   사람들의 놀란 표정에도 여백을   채우는 산천은 손놀림이 분주한데   바람은 다시 소식을   전하려 이름을 呼名하는   바쁜 일 사월을 점령하는 오직   푸른 이데올로기일 뿐이네     ― 「4월이면」 전문     위의 시는 봄과 꽃의 이미지를 로 점층적 구조로 표현하고 있다. 확산적 사고의 파고가 높다. 혼합된 이미지들의 합창은 화음이 증폭되어 툭툭, 치받고 올라간다. 임산부와 4•19 혁명의 이미지에서 발상의 전환의 극점을 본다.   1-4행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너무 무겁다. 푸른 잎을 토해내는/ 중량. 임부姙婦의 먼 예약처럼 희망을/ 꽃으로 단장하고 길은 다시 수채화일 때’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임산부가 아이를 낳는 것처럼, 녹색의 배설을 폭발적 이미지로 그렸다. 꽃이 피고, 잎이 난다는 단순한 자연현상을 희망예약으로 표현한 점이 압권이다. 나무는 꽃과 열매를 약속하니 틀림없는 희망예약이다.   ‘신은 실수인지 연신/ 푸른 물을 엎지르느라 정신이 없고’(4-5행) 부분을 살펴보자. 앞다투어 피어나는 잎들의 전쟁, 꽃들의 전쟁을 왁자지껄 보여주는 이미지다. 빠른 템포의 행진곡 같다. 녹음예찬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기 발랄한 이미지가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화음의 극치를 이룬다. 아르페지오 음악기법 시창작의 극점을 본다. 6  -13행의 중심어를 살펴보자.
31    [공유] 은유와 환유에 대한 정리 / 글쓴이 / 씨네필 댓글:  조회:423  추천:0  2018-05-08
[공유] 은유와 환유에 대한 정리 / 글쓴이 / 씨네필    초보 cinephile 의 블로그 | 씨네필  http://blog.naver.com/caline/60033056869           * 학기 초라서 그런지 갑작 스럽게 이 포스팅이 자주 스크랩 되는 군요(보통 이맘때 소쉬르를 배우죠...웃음), 네이버는 클릭 한 두번으로 손쉽게 포스팅을 퍼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 아마 대다수는 가벼운 맘으로 퍼갔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별다른 노력없이 포스팅 할 수 있는 퍼온 글이나 음악파일 같은 포스트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고민과 공부를 통해 자생적으로 써낸 포스트를 많은 분들이 퍼가시니 고마움과 함께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최근에 다시금 소쉬르와 야콥슨 라캉등을 공부하면서 포스팅 속에 있는 몇몇 오류들(파롤과 기표를 동일시 하는거나 야콥슨 환유이론을 수평이 아닌 수직의 축으로  설명하는등)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 엉뚱한 이야기를 한건 아니지만(엉뚱한 부분이 있다면 야콥슨의 환유 개념 정도일까요? 라캉이나 레비스트로스는 완벽(?)함!) 그래도 분명 오류가 있는건 사실이고 이 포스팅이 갑작스럽게 자주 포스팅을 당하기에, 일단 오류가 있다는 점을 공개해야 할듯 해서 황급히 수정을 눌러 경고문구(?)를 작성했습니다.    이번 학기 '정신분석과 문화'의 기말 페이퍼로 소쉬르, 야콥슨, 라캉의 언어학 이론의 위상차에 대한 글을 작성할 예정이며 그 과정에서 은유, 환유 역시도 다시한번 꼼꼼히 다루어 이곳에 포스팅 할 생각이니 은유, 환유이나 소쉬르, 야콥슨, 라캉등의 학자의 언어학 이론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신 분들은 이 글을 무턱대고 퍼가기 보다는 6월 중순까지 좀 기다려 주시길....(웃음) 2007.04.20        지난 화요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발제를 하면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과는 달리,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순전히 상징적 차원에서 의미가 배제된 순수차이인 시니피앙의 은유에 의해서 설명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도중, 은유 그리고 그것과 종종 같이 언급되는 환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물론 이 은유, 환유 개념은 굳이 라캉이 아니더라도 구조주의, 아니 하다못해 문학에 약간의 관심만 있어도-라캉과는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해도- 종종 접하는 개념이라 굳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는 기본개념(?)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질문을 받고 보니 은유와 환유를 썩 훌륭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비록 아무도 인정은 안하지만(웃음) 자칭 별명 김쉬르(?)에 매번 구조주의 빠돌이를 자청하던 주제에 그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은유, 환유조차도 설명하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매번 그러한 개념들을 ‘당연히 알고 있는 것’ 정도로 대충 넘어가버렸다는 사실에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러한 부끄러움에 고착되기 보다는 다시금 발전하는 계기로 삼자는 취지에서(이 무슨 포지티브 씽킹에나 나올법한 문장인가....) 소쉬르를 출발점으로 은유, 환유 개념을 미약하게나마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아시다시피 소쉬르는 다른 대다수의 학자들과 달리 후세에 남긴 저서나 텍스트는 빈약하기 그지없고, 특히나 그를 오늘날의 구조주의의 아버지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그의 사후에 그의 제네바 대학에서 그가 담당했던 일반언어학 강의를 수강했던 제자들이 강의 노트를 모아 발간한 ‘일반 언어학 강의’라는 서적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론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소쉬르를 깊게 파고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니 구조주의와 관련해서 소쉬르가 제창한 개념 중 중요한 4가지를 꼽자면(이거 원 라캉이 말한 정신 분석학의 4대 근본개념이 생각나는 건 왜지? -_-;) 우선 첫째 공시태와 통시태중 공시태에 우위를 두었다는 점(이것이 훗날 역사와 단절하고 역사를 도표화 해버린 구조주의의 전통과 이어진다.) 둘째 언어를 하나의 기호체계라 생각했고 하나의 기호가 시니피앙(기표)와 시니피에(기의)로 이루어져있듯 언어도 파롤(말로 발화된 단어)과 랑그(단어가 지칭하는 의미)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것(물론 한번 관계를 맺게 되면 동전의 양면처럼 고착된다.), 셋째는 그런 ‘자의적’인 기호가 의미작용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기호의 내재한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 시점을 조금 바꾸자면 거대한 언어체계 내에서 차지하는 특정한 ‘위치’에 의해서 ‘소극적’으로 정의된다는 것 마지막 넷째가 바로 은유, 환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소쉬르는 그 ‘차이’를 단순히 불규칙하고 난삽합 그물망속의 위치로 바라보기 보단  이후 계열체와 통합체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아주 유명한 문장의 예를 들자면   “고양이가 매트에 앉아있다.”   란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 문장에 있어서 ‘고양이’란 단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메커니즘은 크게 두 가지 첫째로 고양이를 대체할 수 있는 같은 계열의 여러 가지 단어 (ex>강아지, 소, 말, 닭, 경우에 따라선 죽은 고양이, 꼬리 잘린 고양이 등등)와의 ‘차이’와 둘째로 하나의 문장 내부에서 고양이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요소(가, 매트, 에, 앉아있다.)들과의 ‘차이’ 때문으로 소쉬르는 전자를 계열체 후자를 통합체로 정의했다. (그리고 전자를 수직의 축, 후자를 수평의 축으로 바라보았다.)    로만 야콥슨은 소쉬르의 계열체 통합체 개념을 자기조 은유, 환유의 개념을 정식화 하였는데(물론 그 전에도 은유, 환유의 개념은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은유의 경우는 어떤 한 사물이나 상황을 지칭함에 있어 그것과 실질적인 연관관계는 없지만 어떤 유사한 이미지를 공유한 어떤 단어로서 그것을 대체하고(ex> 내 마음은 호수요-> 호수라는 단어가 가진 특정한 이미지를 통하여 마음을 수식해야 할 잔잔함, 고요함 등의 단어를 대신하고 있다. 동시에 그 단어는 결정적이지 않다.) 동시에 그를 통해 좀 더 다양한 의미작용의 틈을 열어주는 것을 의미하고, 반면 환유는 특정한 사물의 부분이나 특징으로 전체를 설명하거나(ex> 한 잔 하자-> 진짜로 잔이라고 하는 물체를 먹자는 의미가 아니라, ‘한 잔’이라는 술을 따르는 용기로 술을 마시는 행위 전체를 설명), 반대로 전체로 부분을 설명하는 것(ex> 청와대는 오늘 xx 했습니다. -> 청와대라는 건물이 직접 말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청와대라는 기구에 속해있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부서의 발언을 청와대라는 상위의 개념을 끌어들여 설명)으로 정의된다. 일단 이렇게 설명해놓고 나니 딱히 그것이 계열체, 통합체와 무슨 상관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 유심히 살펴보면 결국 은유든 환유든 특정한 단어가 다른 계열체적 단어로 ‘교환’(다만 둘은 심급이 다르다 전자(은유)가 부분적인 이미지를 매개로 한 ‘동등한 교환' 이라면, 후자(환유)는 부분과 전체의 ‘불평등한 교환’이다. 갑자기 생각난 좋은 예로 500원짜리 동전으로 같은 가격의 음료수나 공책을 사는 것이 은유라면, 500원 짜리를 같은 ‘화폐’라는 이유만으로 천원, 만원, 오십원으로 교환하는 것이 환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되었다는 점에서 계열체, 통합체와 은유, 환유는 분리 될 수 없는 관계이고 나아가서 야콥슨은 이러한 메커니즘에 입각하여 ‘언어의 시적’기능을 ‘이러한 언어의 수직의 축에 수평의 축을 투영하는 것’(이 반대였나....?.....정확하게 기억이...OTL)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야콥슨에 의하여 소쉬르에 발을 들여놓게 된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러한 계열체의 메커니즘에 입각하여 오이디푸스 신화를 분석했는데 그저 연속적인 네러티브의 연속이라고만 받아들여졌던 오이디푸스 신화를 (1). ‘친족 관계의 과대평가’ (2). ‘친족관계의 과소평가’ (3). ‘괴물을 죽임(초인적인 신체)’ (4). ‘신체적 장애’라는 네 개의 축을 중심으로 그 아래로 각각의 네러티브에서 분절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인 신화소들을 계열체적으로 배치하고(ex>예를 들어 (1)의 하부로는 ‘카드모스가 제우스에게 겁탈당한 동생 에우로파를 찾는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랑 결혼한다.’ ‘안티고네가 판결을 어기고 자신의 오빠인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한다.’가 배열되고 (셋은 모두 추상화 시키면 ‘혈연관계의 과대평가’에 수렴한다.) (2)의 하부로는 ‘용에 이빨을 심어서 탄생한 청년들이 서로를 죽인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 랍타코스를 죽인다.’ ‘에테오케네스가 형제인 폴리네이케스를 살해한다.’등이 배치된다.) (1)과 (2), 그리고 (3)과 (4) 각각 계열체적으로 이항대립 구도를 이룬다는 방식으로 오이디푸스 신화의 구조를 분석했다. 물론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은 결코 이런 특정한 하나의 신화를 지엽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도데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없지만(사실 난 신화학을 작년 말에 읽었다. 그것도 4권중에 1권만 번역되어있음....ㅠㅠ 덕분에 그전까지 신화학이 그저 이런 식으로 분석만하면 끝나는 줄 알았다. 아 쪽팔려.....OTL) 어찌됐건 계열체와 통합체란 모델은 이런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통해 단순히 ‘언어’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화의 네러티브로까지 확장되어 적용되었고, 나아가서 차후의 구조주의 문학비평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물론 완전히 심급이 다른 이론이 더 많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푸코, 레비-스트로스, 바르트와 함께) 흔히 프랑스 구조주의 4인방으로 알려져 있고 “여러분이 정신분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시다면 소쉬르를 읽으십시오, 단언컨대 정신분석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현대 언어학의 설립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알아야 합니다.”라는 충성어린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라캉에게 있어 은유와 환유는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프로이트의 꿈 이론에 대한 짧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꿈의 해석’이나 그러한 꿈 이론을 조금 더 간단하고 쉽게 설명하고 있는 ‘정신 분석 강의’에서 프로이트는 ‘꿈의 작업(Traumarbeit)’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 대표적인 메커니즘으로 ‘압축(Verdichtung)’과 ‘전치(Verschiebung)’(어디선가는 응축과 전위(이동)라고도 변역하고 있더라...) 두 가지 방식을 이야기했다. 기본적으로 프로이트는 꿈을 깨어있는 동안 경험한 것들의 표상이 전의식에 남아있고 그것이 잠을 자는 동안 수면을 방해하는 무의식적 표상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압축이란 특정한 하나의 표상이 여러 표상들의 연쇄의 교착점에 존재하는 것으로 꿈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이미지로 겹쳐 보인다던가, 꿈의 해석의 유명한 예로서 프로이트가 꿈에서 보았던 식물학 논문이 그와 유사한 다양한 이미지들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를 의미하고, 반대로 전치는 어떤 특정한 표상에 대한 악센트, 흥미, 강도(强度)등이 그 표상에서 분리되어 다른 표상에 달라붙는 것으로서, 꿈에 있어서 그다지 개연성을 찾을 수 없는 장면의 전환이나(실제로는 그러한 부분적인 개연성이 존재), 역시나 프로이트의 예를 따라 식물학 논문에 달라붙어있는 과거의 표상들의 잔재들이 바로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야콥슨의 경우 압축, 전치를 환유에 동일시와 상징을 은유에 비유했지만, 라캉은 압축을 은유에 전치를 환유에 비유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어떤 의미에선 ‘자의적인’ 언어학 이론을 발전시킨다. 아시다 싶이 라캉은 기표/기의 모델에서 소쉬르가 주로 기의에 우선권을 두었던 것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기표의 우위를 두었고(그의 이론에서는 기표는 기위 위에 위치하며 기표는 대문자로, 기의는 소문자로 표기된다.) 나아가서 둘 사이의 자유로운 소통관계를 방해하는 가로선을 그려 넣음으로서 철저하게 의미작용이 배제된 순수 차이로서의 시니피앙을 중심으로 한 언어이론을 구축했다.    그가 주장하는 은유, 환유의 개념 역시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데, 라캉이 말하는 은유란 기본적으로 ‘하나의 시니피앙이 다른 하나의 시니피앙을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의 2차 텍스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예로서 프로이트가 제자인 융과 함께 처음 미국으로 강연을 하러 갔을 때 배에서 내리면서 했다고 하는 ‘우리가 페스트를 가져온 줄 저들은 모르겠지?’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페스트’란 단어가 바로 라캉이 말하는 은유의 좋은 예인데 그것을 라캉이 좋아하는 공식으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페스트(S1)                                                                             ------------     페스트(S1)                      정신분석(S2)                    정신분석(S2) ---------------   =>     -----------------     =>     ------------ 페스트의 의미(s1)            정신분석의 의미(s2)                  의미(s2)      즉 페스트라는 단어가 가지는 이미지에 의해 페스트가 정신분석이라는 단어와 일종의 대체이자 포개짐의 방식으로 결합하고 그를 통해서 보다 많은 이미지를 생산하게 되는 이 라캉이 의미하는 은유의 본질로서, 환유와는 달리 의미를 생산 할 수 있는 은유를 라캉은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라캉 왈“오로지 의미화라는 것은 은유적 차원에서만 나타난다.”)    반면 환유는 하나의 시니피앙이 인접성을 가지고 하나의 시니피앙으로 연관관계를 가지고 이어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부분에서 전체나 원인에서 전체 혹은 그 역 방향으로의 시니피앙들의 이동을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환유는 은유와는 달리 명확한 관련성 속에서 행해지는 기표들의 연결성으로서 은유와는 달리 의미가 발생하지 않으며, 라캉은 이 모델을 들어 최초의 결여(S1)를 다른 기표로 끊임없이 매우려 하는 인간의 욕망을 설명했다.(“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이다.”)    라캉이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역시 이러한 은유의 모델로서 쉽게 설명 될 수 있는데 아이-남근-어머니의 3자 관계 속에서 어머니의 욕망(남근)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아이는(전자는 기표, 후자는 기의가 될 것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인식하는 어머니와의 관계 외에 좀 더 거대한 금지의 법, 즉 ‘아버지-의-이름(라캉 왈“아버지는 은유다.”)’이 존재하고 어머니의 욕망이 그것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이 경우 ‘아버지-의-이름’은 기표 후자는 기의이다.) 결국 그러한 상황에서 아이는 아버지-의-이름을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공통  부분을 매개로 받아들이고(그 과정에서 양측의 기의, 기표에 위치한 ‘어머니의 욕망’은 분수처럼 약분되어 사라진다.) 무의식을 가진, 시니피앙에 의해 관통된 주체로 탄생된다는 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의 주요 골자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대략적이나마 소쉬르를 출발점으로 라캉에 이르기까지 은유, 환유 개념을 나름대로 차분히 정리해서 설명해 보았다. 비록 라캉의 경우 웹 페이지 상에서는 그림을 그리기가 참 난감하다는 점 때문에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훨씬 더 쉽게 설명 할 수 있는 것을 괜히 더 어렵게 설명한 것 같지만(웃음) 아침에 학교 와서 노트북을 켜는 순간 갑자기 신내림(글빨)이 내려온 덕분에 4시간도 채 안되는 시간 만에 며칠 전 발제 때의 찜찜했던 기분을 충분히 해소 할 수 있을만한 글을 쓰게 된 것에는 100% 만족한다. 부디 우리 스터디 멤버들은 물론, 이글을 보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이글을 통하여 은유, 환유의 개념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이도록 하겠다.(웃음)
“나무”의 사유와 “풀”의 사유로서의 시들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 김행숙「포옹」( 계간 『서시』 2008년 겨울호)   - 김  산 「월식」( 계간 『문학마당』2008년 겨울호)   - 서영처「숲새」( 계간 『시로 여는 세상』2008년 겨울호)   - 심보선「잎사-귀로 듣다」(계간 『문학·선』2008년 겨울호)   - 이영옥「 물방울의 역사」(계간 『시작』2008년 겨울호)   - 김연아「모래시계가 있는 방」(웹진 『시인광장』2008년 겨울호)   - 이성목「한지에 수묵」(계간 『시로 여는 세상』2008년 겨울호)   - 이재훈「대황하」(계간 『딩하돌하」2008년 겨울호)   - 이정란「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태그」(계간 『시로 여는 세상』2008년 겨울호)   - 김성규「수열」(계간 『시와 사상』2008년 겨울호)   - 박정대「슬라브식 연애」(격월간 『유심』2009년 1~2월호)   -----------------------------------------------------------------    작가로서 사유배경을 서양에 두느냐 동양에 두느냐의 입장은 기호와 공부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사상사를 과거에 주마간산으로 일독을 한 바는 있으나 나는 동양사상을 더 선호한다. 서양의 최신사유라는 것도 알고 보면 불경이나 노장에 이미 들어가 있는 개념인데 지금시대의 용어로 말만 바꾸어 심오한 척 하는 서양이론들이 싫어서 가급적 안 쳐다보기로 작정하고 있다. 주위 문인들이 인용하는 작가중 라깡은 좀 읽어보았으나 들뢰즈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나희덕 시인이 대전의 백북스 클럽에 초대되어 강연을 하면서 요즘 읽은 책으로 질.들뢰즈와 클레르 파르네의 『디알로그』를 언급했다. 나 시인이 입문서로 괜찮다고 해서 “그래, 이 책을 읽어보고 괜찮으면 『천개의 고원』과 『차이/반복』도 읽어보자” 작정하고 주문해서 읽어보니 이 작가는 사유에 반골기질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뢰즈는 헤겔 데카르트 마르크스 프로이드 같은 정치질서의 지배사유를 싫어하고 스피노자 흄 베르그송 니체의 사유를 지지한다. 들뢰즈는 삶/생명을 숭배와 생성을 위한 ‘유목민 사고’와 ‘풀의 사고’를 케이스로 들었는데 기존의 지배담론에 대한 ‘중간,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 간주곡’을 의미하는 리좀(Rhizome)의 개념을 도입한 점은  그런대로 흥미로웠다.    어떤 이론도 현실을 떠난 모델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관점에서는 들뢰즈도 약점이 있다. 정착민이 아닌 유목민의 삶을 이상향으로 하고 있으나 내 생각에 인류의 삶은 법과 자본의 질서아래 중세의 농노를 연상케하는 정착민으로서의 삶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땅이 없으면 존재기반이 무너지는 농노처럼 현대인은 자본이라는 토지의 부양이 없으면 삶의 유지가 불가능하다.    이상을 위해 현실세계의 벽을 넘어야 하는 작가들의 사유와 삶에는 ‘유목민’의 삶이 매력이겠으나 현실인에게는 다소 낯선 개념일수도 있다. 들뢰즈는 ‘지배질서’로서의 ‘나무’사유를 비판한다. 나에게는 차이를 위한 비판으로 들리며. 들뢰즈의 ‘풀’사유 못지않게 나에게는 ‘나무’의 아름다움이 어필한다. 인간의 지배사유 모델에 ‘나무’모델이 들어온 이유는 나무가 현실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한 다윈의 이론이 맞다면 인간의 유전자에는 ‘나무’존재가 혈연과 피의 관계처럼 각인되어 있다. ‘풀’은 곤충이나 초식동물의 무의식에 더 어울린다. ‘나무’와 ‘풀’ 둘 다  세계를 해석모델이자만 내 해석으로는 ‘나무’가 인간에게 더 심미적인 모델을 제공한다. ‘풀’이 중요했으면 ‘에덴 신화’에서는 ‘생명나무’대신 ‘생명 풀’이 사머니즘에서는 ‘세계나무’대신 ‘세계 풀’이 등장했어야 맞다. 장황하게 인용했으나 계간비평을 위해 내가 고른 시들이 들뢰즈의 ‘풀’의 사유에 다가있는지 ‘나무’사유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다  1. 김행숙과 김산    포옹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김행숙(〈서시〉, 2008년 겨울호)    월식   촉촉하게 달뜬 그녀의 몸에 나를 대자 스르르 미끄러졌습니다. 나의 첨단이 그녀의 둥근 틈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말입니다. 그녀가 열었는지 내가 밀고 들어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사르르 눈앞이 캄캄해진 것을 보면 붙어먹는다는 거,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최초의 일이 다 그렇습니다. 그 다음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만, -김산(〈문학마당〉, 2008년 겨울호)     김행숙의 「포옹」과 김산의 「월식」은 연인들의 사랑을 주제로 썼다. 김행숙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合一이지만 ‘사이’를 내포한 불화의 감정을 말했고 김산은 合一이지만 제목「월식」처럼 곧 떨어질 미래시간의 슬픔까지 암시했다. 에로스/인간은 생명의 번식을 위해 연인/배우자와의 합일을 추구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온 모델처럼 신/합일의 완전존재가 될 수 없는 인간/분리의 불완전존재로서 살아간다. 에로스는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에 대한 갈망이며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 대대손손 작가들이 좋아하는 문학의 반복주제이다. 들뢰즈는 생성으로서의 ‘에로스’와 ‘증식’으로서의 욕망이 삶의 기본모습이며 “결핍‘으로서의 욕망과 ‘타나토스’의 개념을 비판한다. 김행숙의 「포옹」은 ‘욕망’으로서의 에로스와 ‘결핍’으로서의 에로스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내 판단으로는 ‘나무’와 ‘풀’의 사유가 동시에 혼합되었고  김산의「월식」은 ‘증식’으로서의 에로스에 더 비중을 두고 썼다.  들뢰즈의 ‘풀의 사유’에 해당하겠으나 「월식」을 합일의 쾌락으로만 보는 독자와 「월식」이후의 시간까지 유추하는 독자의 시선(내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적극적 재창조로서의 내 감상은 ‘풀’의 사유 뒤에 ‘나무’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해석한다(들뢰즈는 ‘해석’대신 느껴야 한다고 주장할 터지이만).  2. 서영처와 심보선    숲새    Ⅰ    새는 나무가 꾸는 꿈  새를 품은 나무는 지저귄다  수만 개 부리로 지저귄다    새는 나무의 영혼  나무는 새들이 잠드는 푸른 봉분  나무는 훨훨 날아오른다    흰 새들이 나무 위에 피어있다  새는 나무가 낳은 아이들  소란하게 떠들며 몰려다닌다    Ⅱ    새벽 숲에 들어서자 나무들  몸 깊숙이 부리를 묻고 외다리로 줄지어 서 있다  나무들은 진작 조류로 분류되어야 했다  다리 묶인 새  땅에 매인 새    태양이 내부를 비추자  나무는 푸드덕거리며 깨어난다  쫑긋거리는 귀, 지저귀는 부리, 반짝거리는 눈  숲이 들썩거린다  소란한 고요와 섬광 같은 순간,   새들은 날아오른다  수천 마리이며 한 마리인 새,    -서 영 처 (시로여는세상, 2008년 겨울호>    잎사-귀로 듣다    매혹의 순간을 고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노라   사랑은 모든 계획에 치밀하였노라  화해와 호감이 가득한 꿈속에서  너는 내게 물었다  나무들은 잎사-귀가 너무 많아요  바람소리를 어떻게 견딜까요  너의 어리석음도  구름의 한계 안에서는 당당하여라  사랑은 삻을 과장하니 좋아라  너는 고풍스런 잠언이 배인 표정으로  잠이 들었고 어리석고  어리석었던 나는  불가피한 내일의 파국을 떠올렸고  내가 울기 전에   네가 먼저 운다는데  이별과 재회 중에 하나를 걸었노라  잠에서 깬 너는 말했다 꿈속에서  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고  나는 당신의 노래를 백 개의   잎사-귀로 들었지요  먼저 운 것은 결단코  나였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나리라   - 심 보 선 (문학선, 2008년 겨울호)   들뢰즈는 ‘나무의 사유’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꼭대기를 이루는 구조라고 갈파했다. 가지는 중심(근원, 신)에서 펴져나간 사물/인간의 제도와 문화의 은유로 보았다. 그는 ‘위계적 시스템 혹은 명령의 전송’으로서의 제도권의 사유를 비판한다. 기존의 문화란 ‘과거와 미래, 온전한 역사, 진화, 발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작가란 “풀의 사유“로서 뿌리가 아닌 ‘리좀’(위에서 언급)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란 사유의 숲에 종(種)과 속(屬)이 아닌 군(群)을 만들어서 ‘점이 아닌 선’으로서 사물들 가운데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가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그래야 하는가?. 문자이후 만년, 고등종교의 출현이후 약 오천년동안 이어져온 신화와 종교의 사유체계는 현대에서 무용지물인가?  경전(Canon)은 찢어버리고 박물관과 미술관과 고전작품들은 역사의 유물로 묻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서영처의 「숲새」와 심보선의 「잎사-귀로 듣다」를 읽어본다.     「숲새」는 나무와 새의 고전적인 관계를 설정했다. 나무/몸과 새/영혼의 구조로 나무=새 인 존재의 기쁨을 노래했다. ”태양이 내부를 비추자/나무는 푸드득 거리며 깨어난다“는 표현으로 생태환경과의 조화와 우주내 생명의 발화를 얘기한다. 이 세계는 全一의 관계이며 ‘一卽多 多卽一’의 세계인데 “새들은 날아오른다/수천마리이며 한 마리인 새”의 결어가 이를 상징한다.   「잎사-귀로 듣다」는 나무/주체와 바람/타자의 관계 상황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세계를 ‘꿈’으로 보고 있으며 사랑에 빠진 주체/인간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꿈속에서/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고/나는 당신의 노래를 백개의/잎사-귀로 들었지요”라는 언술로 사랑이란 존재에의 귀 기울임이며 관심임을 말한다. 이별 상황을 대조했으나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며 이별/사랑이란 “화해와 호감이 가득한 꿈속”의 사건이다. 결국 세계내 존재의 기쁨을 말한 詩 로 해석할 수 있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이 시들의 대상은 나무를 노래했으니  ‘原點과 씨앗 혹은 중심’사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까? 시의 구조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은 ‘나무-되기’ 에 시인의 감각이 집중되어 있다. “나무”와 “새” 사이, “나”와 “너”사이, “꿈”과 현실 사이로는 시인의 기쁨이 ‘증식’되어 ‘도주선’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시들의 사유는 ‘풀’인가 ‘나무’인가? 시에서는 사유방법이 아니라 작가의 表現의 아름다움이 더 문제가 아닐까?  3. 이영옥과 김연아    물방울의 역사    연잎에 떨군 물방울이 맑은 구슬로 또르륵 굴러가는 것은   연잎에 스며들지 않도록 제 몸 고요하게 껴안았기 때문이다  오직 꽃 피울 생각에 골똘한 수련을 건들지 않고  그저 가볍게 스치기만 하려고 자신을 정갈하게 말아 쥔 까닭이다.   그러나 물방울의 투명한 잔등 속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포자들이 출렁거렸는지  수 만 갈래의 흩어지려는 물길을 달래며 눈물의 방을 궁굴려 왔는지  깨끗하다는 말 속에 숨은 외로움은 왜 그리 끔찍했는지    물 위에 닿는 순간 물방울은 잠시 흔들렸던 세상을 먼저 버리기 위해  옴 힘을 다해 부셔진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가장 아픈 방법으로   -이영옥(시작, 2008년 겨울호)    모래시계가 있는 방    그가 오래 비워둔 방에 들어섰을 때   거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맡의 모래시계는 천상의 시간을 비우고   지상에 무덤 하나 만들어 놓았다    그는 부러진 늑골로 누워 있었다   문병 온 사람들은 늘어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에게서 그는 죽어가는 자신의 시선을 보았던가?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는 시선은   남은 불빛을 하나씩 꺼나갔다    모래시계에 갇힌 지평선은    검은 구멍으로 흘러내렸다   시간은 그의 입에 모래를 부어넣었다   모래 흐르는 소리 이명처럼 울리고   눈썹 위로 지평선이 올라가겠지    그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태양과 바다를 오가는 구름처럼,   언제나 다시 태어나는 자에게   죽음은 잠을 완성시킬 뿐이다    죽은 가지 끝에 눈을 틔우는 봄처럼   그는 이 지상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몹시 더운 방 너머, 눈 덮인 저 길 너머로   시간은 오래 흐르고 흐르리라    모래시계가 만든 무덤, 누가 뒤집어 놓을 것인가?   천상의 시간을 지상에 펼쳐놓는 사막에서의 밤처럼,   모래시계는 비어있는 시간에 다시 젖줄을 댈 것인가?      -김연아 (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겨울호)    이영옥의 「물방울의 역사」는 화자/물방울/존재의 일생을 말하고 있다. “물방울”과 “연잎”과의 ‘이항대립’에서 화자/물방울은 타자/“꽃 피울 생각에 골똘한 수련”을 가볍게 스치기만 하고 물/죽음/실재계로 돌아간다. ‘물방울은 물에서 나와 물로 돌아간다’는 존재의 순환구도를 말한다. 삶/존재의 유한기쁨을 드러낸 화자/물방울과 타자/수련과의 에로스적 긴장이 처리된 은유는 너무 청교도적이다. 시인의 인생관이 반영되었겠지만 “깨끗하다는 말 속에 숨은 외로움은 왜 그리 끔직했는지”같은 표현이 아름다우면서도 독자의 마음을 끔직하게 몰아간다. “물방울”과 “수련”사이에 들뢰즈식의 ‘도주선’이 발생하였을까? 새로운 ‘생성’으로 나아갔을까? 내 생각엔 ‘생성’이 아닌 ‘귀환’과 ‘퇴행’이 발생했다. 그러나 물/죽음/실재계로 돌아가는 큰 상징 때문에 시의 구조는 큰 스토리를 말하고 있다. 작은 ‘생성’보다는 큰 ‘이야기’가 더 아름답다.      김연아의「모래시계가 있는 방」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장소는 “모래 시계”가 있는 병실이다. 모래시계가 병실에 왜 비치되어 있는지 현실이유는 묻지 말고 작품의 상징성을 높이기 위해서 작가가 배치한 구도라 이해하자. 김연아는 “모래시계”의 시간이 인간시간의 은유임을 내세운다. 작가의 생각에 “시간”이란 “천상의 시간”에서 “지상의 무덤”을 향해 흐르는 강물/“구름”이다. 모래시계는 가운데 “검은 구멍”을 통해 저 세상의 시간과 지상의 시간을 교환/순환 하는 구조의 은유이다. 4차원시공간의 물리학적관점에서는 시간이란 실제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인간의 존재인식이 시간이 흐르는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 존재조건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절대운동이므로 동양에서는 運命으로 파악한다. “모래시계”에 갇힌 인간의 시간/존재태는 나고 병들고 죽는다. “모래시계”는 한 인간이 시간이 끝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환을 말했으나 화자는 “모래시계가 만든 무덤, 누가 뒤집어 놓을 것인가?”는 언술로 윤회의 암시와 인간의 불안을 동시에 드러낸다.  「물방울의 역사」와 「모래시계가 있는 방」도 나무 사유/구조에 뿌리를 둔 인간의 원형적인 세계인식를 드러낸 시로 보여진다. 「세계목」으로서의 나무시간은 천상과 지상의 시간을 매개하며 “모래시계”와 “수련”은 잠재태인 「세계목」의 다른 은유이다.     4. 이성목과 이재훈    한지에 수묵    봄비 슴슴한 날이다. 젖은 땅에 산그늘 번져들더라. 어느 여백에 들까 궁리도 끝나지 않은 사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렸으니 어쩌겠는가.    묽은 밤이 오는 것이더라. 어둑한 마당에 흰 꽃잎 날고, 빛들이 고요히  눈물에 닿아 번져가더라. 너무 멀리 번져가서 마음 희미해졌으니 어쩌겠는가.     날이 가니 색이 멀어지던가. 생살 붉은 저녁의 별리도, 아침이면 붓끝에 묻어나지 않는다. 색을 버리고도 못 버린 몸이, 몸에 겹쳐 파묵이 되고 다른 몸으로 번져 발묵이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백발이 성성한 날 기다려지더라. 한없이 늙고 늙은 끝, 당신의 여백으로 스며드는  나를 맞이하고 싶더라. 있고 없는 것이, 들고 나는 것이 모두 세상의 한 폭인 것을 어쩌겠는가.  -이 성 목 (〈시로 여는 세상〉, 2008년 겨울호 )     대황하 10     취하리라. 저 물에 취하리라. 자동차를 타고 계단을 오르고 집에 들어누으리라. 노을의 냇내를 풍기며 그대에게 안기리라. 늙은 사람과 만나 술 한 잔에 취하리라. 지혜의 말에 취하리라. 새로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리라. 푸른 초원을 달리리라. 소리를 지르리라. 그러나 그리워하리라. 그러나  웃으리라. 그대의 아들을 안고 웃으리라. 그대의 주검을 안고 웃으리라. 떡을 먹고 살리라. 살기 위해 길 끝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곳의 법을 버리리라. 새들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리라. 기도하고  울리라. 그물처럼 집 위에 눌러 앉은 햇살에 몸을 누이리라. 눈을 감으면 폭우가 내리리라. 빗물이 얼굴에 상채기를 내리라. 취하리라. 피가 흘러내리는 저 물에 취하리라. - 이 재 훈 (〈딩하돌하〉, 2008년 겨울호)   들뢰즈는 사물은 ‘「시작, 기원이 아닌」 중간’에서만 살아 움직인다고 말한다. 철학이나 종교의 도그마가 추구하는 ‘제 1원리는 언제나 가면’이라고 비판하며 ‘사물들은 오직 제 2, 제3, 제4의 원리 수준’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유의 중심점을 지금 현재에 놓아야 한다는 강조로 들린다. 내 생각에 가면이지만 ‘제 1원리’의 절대성을 부정하고서는 ‘제 2, 제3, 제4의 원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과거의 철학자들과 종교창시자들이 ‘제 1원리’에 수 천년동안 매달린 이유는 지금 현재의 사물들의 ‘시원과 근거’가 없이는 세계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거문화의 세례와 지금 현재의 직관에 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어떤 작가들은 창작품을 세계의 재현으로 보며 작품의 창조란 世界態의 창조라 믿는 사람도 있다. 이성목의 『한지에 수묵』도 이런 창조의식이 드러난 작품이다. “한지”는 세계의 축약이고 붓으로 그리는 그림은 화자의 인생에 대한 은유이다. “눈물 한 방울”은 창조자/작가가 세상에 간섭한 행위이다.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점’으로서의 “눈물 한방울” 때문에 “묽은 밤이 오는 것이더라. 어둑한 마당에 흰 꽃잎 날고, 빛들이 고요히 눈물에 닿아 번져가”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창조자/작가는 세계내 존재이며 “있고 없는 것이, 들고 나는 것이 모두 세상의 한 폭”이라는 한계상황에 갇힌 자이다. ‘점’/화자와 ‘화폭’/세계의 긴장관계를 드러냈는데 역시 들뢰즈의 ‘나무 사고’에 해당한다.     이재훈의 『대황하』는 표현으로만 보면 들뢰즈의 ‘유목민’사고에 해당한다. ‘유목민’ 사고란 ‘영토’에 뿌리내리지 않으며 구조로서의 ‘나무’사이를 질러나가 증식하는 ‘풀’의 ‘도주선’을 의미한다. 상황에 영향을 주고 상황에 의해 생성되는 ‘이중포획’으로서의 삶 자체를 중요시한다. 지금여기의 희로애락이 삶이며 ‘시작과 끝’이 있는 구조/문화는 삶의 억압기제로 본다. 자유주의자의 생명사상처럼 들리기도 한다. 『대황하』는 삶의 자유란 흐르는 강이면서 항상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강물의 속도에 따라 화자의 감정도 상승/발산한다. “살기 위해 길 끝의 집으로 돌아가”고 “그곳의 법을 버리”고 “새들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리라”고 화자는 노래한다. 들뢰즈식의 ‘강-되기’가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형식상으로는 들뢰즈의 논리가 반영된 시다.  ‘풀’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 ‘풀’이란 초원을 강물처럼 흘러 미지의 세계로 가는 존재이므로.  5. 이정란과 김성규    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태그     애인아     두꺼운 전화번호부 두 권의 갈피갈피를 서로 맞물려 놓고 대형트럭이 양쪽에서 아무리 당겨도떨어지지 않는 걸 보았다. 쉽게 찢어질 낱장들의 허약함을 알지만,   애인아, 그 정도 자력은 있어야 사랑하지, 사랑이지   無名草     부두에서 잠 배를 놓치고 A4 종이못에서 낚시하고 있는데 퐁당 소리가 난다. 살펴보니 머리카락몇 가닥이 빠졌다. 저울에 올렸더니 바늘이 어느 결에 360도 돌고 나서 시치미 딱 떼고 O 가운데에 숨어 있다.    무명초가 이리도 무거워지는 새벽이란, 시간의 새 벽에 부딪쳐 느닷없이 안기는 오늘이라니.     수도적     꽉 잠겨 있던 수도꼭지를 힘주어 돌리자 사방으로 물이 튄다. 너무 오래  많은  걸 머금고 있었다. 글을 쓰다 수동적을 수도적이라고 잘못 쳤다.    스스로 분출할 수 없으니 수도가 수동적인 건 명백한 일. 녹물은 핏물과 다르지 않지.     믿음     유리 파편이 박힌 것처럼 발뒤꿈치가 아팠다. 며칠 견디다 작정하고 돋보기를 들이댔다. 머리카락이 박혀 있었다. 1밀리미터쯤 될까.    불신 한 가닥이 믿음의 몸체를 찔러 파열시키는 순간처럼 놀랍다.     조각     아기 손바닥만 한 조각을 들고 고고학자가 흥분해서 소리친다. 새로운 빗살무늬토기를 발견했습니다! 아무렴, 산산조각으로 깨졌어도 토기는 토기, 나는 나.    물방울은 강이 아니지.   -이정란 (「시로여는 세상」, 2008겨울호)   수열   1.나무-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 사람은 태어날 때 나무를 밟고 지상으로 내려오며 죽은 후 에는 다시 나무를 밟고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죽은 혼을 부를 때 무당들은 나무 를 흔들어 영혼을 깨우기도 하며 나무에 직접 올라가 영혼을 온몸에 가득 채우고 내려오기 도 한다.   2.하늘-무한한 침묵으로 열려있는 공간 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3.잠-죽음으로의 여행.   4.돼지-할머니가 죽기 전에 먹고 싶었던 과일.   5.옷-언젠가는 더렵혀질 물건, 사람들은 그것을 자주 빨거나 새로 만들려고 애쓴다. 그것을  어떻게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6.홍수-평소에 조용하던 아이가 화나면 얼굴이 빨개지고 성이나 한꺼번에 울음이 터지는 장 면.   7.배-화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언젠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면 배를 타고 도망가거나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런 지혜를 누군가 수천 년 전에 일러주었고 나는 어릴 때 얼음으로 만든 배를 타고 자주 도망가는 연습을 했던 적이 있다.   8.고구마-달아나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말, 돌아오지 말았으면 싶은 말, 돌아왔으면 하는 말. 할머니가 날마다 잊어버렸으면 하던 노래.   9.창문-앉아있을 때의 날개는 검지만 날아오르는 순간  날개의  색깔이 파랗게  바뀌는 새의 이름. 자주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니지만 누군가가 보고 있을 때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는다. 나는 가끔 집에서 창문이 날개를 펼칠 때까지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당연히 그 새의 검은 날개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내 눈앞에서 그 새가 푸른 깃털을 보여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10.공-굴러다니기 위해 태어난 동물. 나무를 타고 내려왔는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음. 그러나 이 동물도 굴러다니다가 결국 하늘로 뛰어 올라간다.   1+2+3……9+10 할머니는 나무를 밟고 내려와 나무를 밟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무한한 침묵의 공간인 하늘 로 잠을 자러 간 것이다. 죽기 전에 돼지고기 한 근이라도 먹었으면 좋았을 걸, 더러운 옷을 입고 이 세상을 뒹굴다가 가신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동생은 자주 울었고 집 앞의 강이 화를 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배가 없었고 타고 날아갈 새 한 마리 없었다. 결국 어린 나는 공이나 차며 흙 묻은 옷을 입고 운동장을 뒹굴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나는 공을 차며 놀고 내가 뛰어다니고 있는 운동장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알아가고 있다. 나 또한 할머니처럼 그렇게 세상을 뒹굴다가 나무를 밟고 그 뒤를 따라갈지 모르겠다. -김성규(「시와 사상」, 2008년 겨울호)     새로운 형식의 시는 일단 이해하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 눈에 익지 않으니 새로운 독법을 개발해야 한다. 은유가 재미있어서 두 시를 골라보았다.  작은 제목이나 번호를 붙인 글들이 전체화폭에서 어떤 구도와 풍경을 그리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표현주의 화가 샤갈의 그림처럼 그림안의 부분 이미지들은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이정란은 『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태그』라는 제목에서 작은 제목의 글은 본문의 꼬리말이며 태그(tag)가 생략한 본문을 읽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생략한 본문이 무엇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야 한다.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진 작은 글들은 빛나는 구절을 보여주고 있으나 작가가 생략한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들뢰즈의 글쓰기 전략인 ‘배치’로서 이 작품을 이해하자. 들뢰즈는 ‘배치’란 ‘동질적이 않은 집합의 요소들이 협동하게끔 만드는 것...공동-작동, 공감, 공생’이라고 정의했다. 임의의 문장이나 發話를 배치한다고 공감 공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질적인 이미지나 스토리를 배치하되 각 요소는 ‘몸체들의 노력이나 침투, 사랑 혹은 증오’로 공감을 이루어야 한다.    이정란은 일상적인 사물을 일상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잡아내고 독자로 하여금 지평선 너머 풍경(본문)을 보도록 요구한다. 사물에 작동하는 공감의 침투력은 시인의 암시력과 독자의 상상력에 비례한다. ‘배치’로 낯선 풍경을 만들고 사물과 사물사이로 ‘도주선’을 만드는 들뢰즈의 글쓰기 전략에 형식적으로는 부합한다.     김성규는 1에서 10까지의 수열에 작은 스토리를 부여하고 마지막 연에서 수열의 조합인 전체스토리를 종합하고 있다. 각자의 이야기는 부분이 모여 종합을 이루는 형식이므로 ‘나무’사고에 해당한다. “할머니”의 일생을 소재로 하고 ‘사머니즘’의 ‘세계목“이 첫 연에서 등장한다. 시간이란 ’나무‘상징처럼 하늘에서 지상으로 드리워진 시간이며 인간은 하늘과 지상의 시간을 윤회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할머니“의 시간이 스민 ”돼지“ “옷” “고구마”와 화자의 시간이 스민 “홍수” “배” “창문” “공”은 서로 얽히고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서 화자의 유년과 할머니의 시간이 스민 추억을  이미지로 그려냈다(샤갈의 〈나와 마을〉풍경을 보는 것 같다). 감정을 숨긴 채 드라이이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그려내는 기법들은 테라야마 슈우시의 시들에서 선보인 바 있다. 요새 젊은 시인들이 이 수법에 암시받은 작품들을 쓰는 것을 가끔 본다.       6. 박정대와 조연호  슬라브식 연애                            흑맥주를 마시는 캄캄한 밤, 강원도 내륙 산간 지방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바람이 컴컴한 하늘을 끌고 내려와 민박집 처마 끝에 당도했을 때 나는 나타샤의 살결처럼 하얗게 피어날 폭설의 밤을 생각한다,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나는 연애지상주의자, 지상에서 밤새도록 펼쳐질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폭설은 사흘 밤낮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의 아리따운 그녀는 세상이 더러워 세상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온 고독한 여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흑흑, 흑맥주를 마시는 밤은 아주 캄캄하고 추워 지금 내 마음의 내륙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폭설에 의해 고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추워 서로의 체온이 간절해져야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체온만으로도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라 했으니, 그녀와 나는 끝끝내 꿈속에서 깨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함께 흑맥주를 마시며 캄캄하게 계속 따스해져야하는 것이다, 천일 밤낮을 폭설이 내리든 말든 그녀와 나는 계속 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와 내가 스스로 태양을 피워 올릴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진정한 사랑의 방식을 터득할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슬라브식 연애를 완성시킬 때까지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박정대(「유심」, 2009년도 1.2월호)       점성(占星)의 성속사(聖俗史)     물결이 오고 있는 곳은 이야기의 끝 약 200페이지 남짓한 지점이었다. 편지는 날아올라 그것을 본 내게 별이 더 이상 비약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우주가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하는 질문에 천문학자는 ‘그것은 그것의 내부에서 온다’고 대답했다.     그가 말한 것은 죽은 것을 포란하는 어떤 성조(成鳥)에 관한 것이었다. 수많은 높임말이 쏟아져 나오는 책이 동물의 배태(胚胎) 같았기에 나는 그 책의 산도(産道)를 찾아 새가 날고 있다고 여겼다. 허무한 도서관이 발바닥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 자침(磁針)의 방향은 허공의 생에게로 향한다.     방충망 틈으로 잔잔한 환역(寰?)이 와도, 잔잔함의 부피는 방충망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흉상의 하체를 닮았고 허탈하게 내 귓전으로 다가올 두 다리를 쥐고 있었으니까. 시간 역시 발바닥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 선천의 혹은 후천의 애인들에게 사람들은 감격했고, 토론했고, 비탄에 빠졌다.     죽은 동물의 머리 뼈 안에 꿀을 만드는 벌의 이야기다. 서쪽의 별자리는 소변을 모아두는 작은 두개골 같았다. 옥상이 구름을 열광하더라도 잘 찢어지는 종이공예품 같은 성감대는 탓하지는 말자, 사람은 안정과 확신에서 신비를 얻기도 하는 거니까. 밤은 신발처럼 뒤엉킨 우리들의 절종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할머니 저 괴로운 별이 자기 발을 닦아달라고 울부짖고 있어요. 역연(逆緣)의 별에게 오래 물었던 구중청량제를 뱉는다.     또 다른 이야기 에서, 옆집 아저씨가 깨진 망원경에게 “서쪽 하늘에서 만나자”라고 말한 건 너무 슬펐다. 오케아노스의 일곱 자매는 반신(半神)들을 배고, 매일 밤 오줌 누기가 힘들었다. 내 베개는 종종 엄마의 발목 자국을 주먹만큼 자란 여동생처럼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더러 인간을 사랑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별도 있었다. 임신중독, 그것은 밤하늘을 무심한 것으로 상상한 자의 증상이기도 했다.   -조연호(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박정대와 조연호의 시는 로맨티즘의 현대해석을 보여준다. ‘낭만주의’는 외부현실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 진실이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슐레겔 형제가 《아테나움》지를, 영국의 워즈워드와 콜리지가 《서정민요집》을 발간하여 시작된 이 운동은 상상력에 의한 우주와의 영적 합일감을 중요시한다. 비 현실의 공간을 중요시한 이 상상운동은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운동까지 이어진다. 낭만주의 자아에 무의식의 영역을 도입하여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과 환상의 세계를 노래하는데 박정대와 조연호의 시는 이 계보의 시 정신에 닿아있다. 다만 표현수법에 있어서 박정대는 낭만주의에 조연호는 초현실주의 무의식적 표현에 더 기운 것으로 해석된다.   박정대는 폭설에 갇힌 강원도 민박집의 딸과의 연애를 상상한다. 그 연애는 현실공간이 아니고  “태양의 반대편으로” “밤새 걸어가” “우리가 태양이 되는” 공간이다. 태양은 내면의  빛나는 시간을 상징하고 완전시간은 남과 여(음과 양)의 합일에 의해 도달한다는 ‘유토피아’를 드러낸다. “인생은 한 바탕의 꿈”이라는 생각도 장자의 초월주의에 닿아있다. 박정대의 시정신은 문맥보다도 노래에 가까운 리듬과 운율에 있다. 많은 현대시들이 이미지 홍수의 시들을 쏟아내고 운율이 주는 무의식의 기쁨을 간과한다. 어떤 시들이 생명력이 길지는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조연호의 시는 이미지의 비약이 심하다. 그나마 이 시는 독자들이 신화와 과학의 배경지식이 있다면 상상력을 따라갈 수 있는 시이다. “‘우주가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하는 질문에 천문학자는 ‘그것은 그것의 내부에서 온다’고 대답했다.”는 언술은 잠언의 형태로도 들린다.   이 시 역시 들뢰즈의 ‘배치’와 쉬르리알리즘의 표현이 혼합되어 ‘진정한 본체란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다’라는 들뢰즈의 사유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저마다의 이미지와 스토리를 가진 이질적인 사건들이 있고 작가의 의도적인 배치에 의해서 『점성占星의 성속사聖俗史 』를 조연호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聖과 俗의 긴장이 있는 이야기들이 대립하고 이 사이로 기존의 관념을 무너뜨리는 들뢰즈의 ‘도주선’이 질주하는지는 역시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7.들뢰즈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생각     시인들이 사물에 가 닿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글은 들뢰즈로 시작했으니까 다시 들뢰즈로 돌아간다. 들뢰즈는 글쓰기에서는 사물사이 ‘도주선’의 절대속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운동이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층위사이에서 ‘잠재력’의 차이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현상을 풀어주거나 방출하는 것’은 강도의 차이라 설명한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물리학에서 차용한 개념이었다. 모든 사물은 +전하와 -전하를 띄고 있고 두 개의 극성사이에 힘의 자장이 성립하며 운동이 발생한다. 동양이 陰陽관도 같은 개념인데 현상과 운동은 음양의 대위와 상보작용의 결과이다. 운동이란 주체의 운동이 아니라 세계구조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태양계가 은하계를 도는 행성의 운동주체는 행성이 아니다. 공간의 중력장이 휘어져있기 때문에 행성들은 중력장의 구조사이를 돌아다닌다는 관점이 최신물리학의 해석이다. 들뢰즈는 ‘구조’를 배척하고 운동하는 사유정신의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 상상력을 발휘하면 세계내 존재는 스스로의 운동이 아니다. 주체는 시공간의 환경구조에 의해(음양의 전위차이에 의해) 길을 간다. 동양에서는 運命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모든 사물의 본성에 내재해 있다. 세계 내 부분존재(주체)는 자신의 의지대로 운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주체의 관점이고 타자의 관점에서는 무위자연의 영구순환운동의 일부이다. 이야기가 비약했지만 들뢰즈의 절대속도는 동양의 運命에 해당하는 절대속도를 말한 것 같지는 않다(동양식 사고의 깊이까지 섭렵한 것 같지는 않다는 의문이 든다). 그는 운동이란 ‘시작, 결말’의 목적지향적 해석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생성/되기’로 파악한다. 시공간의 표면에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생성/소멸 운동은 보고 있으나(감각의 입장에서) 생성소멸이 일어나는 구조의 문제(사유체계)는 지나간다. 구조주의적 언어관도 비판한다. 구조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과거와 미래 역사도 없으며 심지어 현재도 없다’고 말한다. 지나가는 생성/운동 만이 있을 뿐. 언어는 감각적으로는 소리와 기호의 생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조측면으로 보면 인간이 사막에 세운 가장 오래된 책 피라미드와 형식이 비슷하다(B.C 만년전이라는 가설이 있으며 단어/벽돌은 책과 문명의 가장 쉬운 기초은유이다). 피라미드가 最古의 책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견고한 구조/설계 때문인가? 아직도 무언가를 향해 생성중이기 때문인가? 들뢰즈는 어떻게 대답할까?  작가/인간이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 견고한 구조물서의 문화/문명/사유체계를 시간 속에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은 삶의 생성/소멸-부재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욕망이다. 여기 언급한 시들과 들뢰즈의 『디알로그』는 아마도 천년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만년 전의 책을 보면서 나는 아직까지 살아남은 고대인간의 정신을 감탄한다. 나는 내 시가 피라미드 같기를 기원한다. 순간에 사라지는 생성/소멸의 꽃과 같은 일회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   ■ 김백겸 시인 -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  -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  현재 ‘시힘’,‘화요문학’  동인 -  한국작가회의 대전.충남회장, 한국시인협회회원 -  웹진 『시인광장』主幹 -  한국원자력연구원 감사실장 [출처] “나무”의 사유와 “풀”의 사유로서의 시들/김백겸|작성자 옥토끼  
29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댓글:  조회:665  추천:0  2018-04-02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1)  / 라이너 마리아 릴케   파리에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보내주신 편지는 수일 전에야 받았습니다. 편지에 담겨진 관대하고 친절하신 신뢰감에 우선 감사 드립니다. 그 이상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어떤 피평적인 견해라도 중요하게 여겨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비평으로는 도저히 예술 작품에 근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하든 비평에는 다소간에 우스꽝스런 오해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물은 우리들이 믿고 싶은 이상으로 이해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모든 사건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언어를 넘어선 영역 속에서 일어나며 무엇보다도 예술작품은 이러쿵 저러쿵 비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우리들의 보잘 것 없는 생명과는 달라서 영속되는 것이며 신비에 찬 존재입니다.  이런 서두 말을 드리면서 저는 한 가지만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당신의 시들은 개성(個性)에 도달하려는 은밀하게 숨겨진 씨앗은 보이나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일 마지막의 라는 시에서 그 점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는 무언가 독자적인 것이 언어와 운율로 나타나려고는 합니다. 라는 아름다운 시 속에도 그 위대했고 고독했던 분과는 친근감이 자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취할 게 없으며 독자적인 게 없습니다. 마지막 시나 레오빨디에게 붙이는 헌시(獻詩)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동봉해 주신 편지는 당신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무언가 막연한 것을 설명해 주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가 좋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제게 말입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물으셨을  것입니다 잡지사에 보내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와 비교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편집자가 당신의 작품을 되돌리면 불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충고를 드려도 좋으시다고 하셨으므로 감히 말씀드리는데 제발 그런 일은 그만 두도록 하십시오. 당신은 자기의 밖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러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충고를 해 주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沈潛)하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께 쓰라고 명령하는 그 근거를 캐어 보십시오. 그리고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당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뿌리를 뻗어 나오고 있는지를 알아 보시고, 만일에 쓰는 일을 그만 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기라도 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런 의문을 우선 조용한 밤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쓰지 않으면 안될까? 그리고는 마음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만일에 그 대답이 그렇다고 하거나 쓰지 않고는 죽을 수 밖에 없다 라고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해 명확하고 확고한 대답을 내릴 수 있거든 당신은 당신의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세우십시오. 당신의 생활은 비록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좋거나 쓸데없는 순간일도 그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연(自然)에 근접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게 될 것을 모방하지 말고 표현하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사랑의 시는 쓰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선 흔히 있는 일상적인 형태는 피하도록 하십시오.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힘든 것입니다. 비록 얼마되지는 않지만 훌륭하고 빛나는  전통으로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숱하게 많은 판에 독자적인 것을 나타내자면 보다 힘차고 완숙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즐겨 택하는 보편적인 주제는 피하고 당신 자신의 일상(日常)이 주는 주제(主題)를 택하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그리고 열망을, 무엇이든 아름다움에 대한 당신 자신의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나 믿음을 묘사하십시오. 그것들을 내심에서 훌려 오도록 은근하고 겸손하게 묘사하도록 하십시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사물들, 당신의 꿈의 영상(映像), 추억의 대상들을 인용하십시오. 당신의 일상이 비록 빈약하게 보일지라도 그걸 탓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탓하십이오. 그리고 훌륭한 시인이 못되어 그 일상의 풍요(豊饒)를 불러낼 수 없음을 스스로 책하십시오. 창조하는 자에게는 빈곤도 없으며 그냥 지나쳐도 좋을 빈약한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당신이 감옥에 갇혀서 외계의 소음조차 당신의 의식에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당신에게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값비싸고 풍성풍성한 추억의 보고(寶庫)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주위를 돌리십시오. 아득하게 지나간 과거의 가라 앉아버린 감동을 다시 캐어내 보려고 애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굳어지고 고독은 넓어져서 어둑어둑한 방(房)이 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는 시끄러운 소음은 멀리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으로의 전환(轉換)에서, 자기 세계 속으로 침잠에서부터 시가 나오게 되면 당신은 그 시가 좋으냐고 누구에게 물 볼 염도 하지 않게 될 겁니다. 또한 잡지사에 보낸 그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갖게하려고 애도 쓰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자기 작품 속에서 자랑스럽고도 자연스런 재화(財貨) 즉 자기 생명의 한 편린(片鱗), 그 생명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적필연성(內的必然性)에서 이루어진 예술작품은 훌륭한 것입니다. 시의 원천에 따라서만 이시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판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이것 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파고 들어서 당신의 생명이 근원한 그 깊이를 음미하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 원천에서부터 반드시 창작을 해야할까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해답이 어떻든 그걸 받아들이십시오. 모르긴 해도 당신은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사실에 밝혀질 겁니다. 그러거든 그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하시고 외부로부터 오게 될 보상(報償)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말고 그 무겁고 힘든 짐을 지고 가십시오.  창조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이어야만 하며 자신 속에서나 그 자신과 어울려 하나가 될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속, 당신의 고독 속으로 파고들고도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그만두어야만 될지도 모릅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시인의 될 수 없다는 것은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제가 말씀 드리는  바는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자기로의 복귀(復歸)는 전혀 무위(無爲)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활이 어떻게 되든  거기서부터 독자적인 길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훌륭하고 풍요로우며 양양한 대로가 되기를,  저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이상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더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론 할 말은 다 한듯 싶습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당신께 충고할 것이 있다면 조용하고 진지하게 당신의 발전을 통해서 성장해 가도록 하십시오. 가장 은밀한 시간에 당신의 내심의 느낌을 통해서만이 해답을 내릴 수 있는 의문에 대해서 밖을 향하거나 외부로부터 그 해답을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처럼 당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편지 속에서 호라체크 교수님의 존함을 읽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아직도 고매하신 그 학자님에 대해 경외의 마음과 해를 두고도 변함없는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충정을 제발 그분께 사뢰어 주십시오. 그분께서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시고 계신 점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믿고 보내 주신 당신의 시들을 다시 회송합니다. 거듭 당신이 저를 믿어 주신 관대함과 솔직한 마음씨에 대해 감사 드리면서 낯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제가 아는 바대로 믿어 주신 점에 대해 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충정과 변함없는 관심을 갖고---                       1903년 3월 17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탈리아의 피사 근교 비아렛지요에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우선 저를 용서해 주셔야겠습니다. 2월 24일자의 댁의 편지에 오늘에야 비로서 감사를 드려야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계속 몸이 불편했습니다. 별다른 병은 아니었으나 인플렌자에 걸린 것처럼 나른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해봐야 별다른 차도가 없기에 결국 이곳 남쪽 바닷가로 떠나왔습니다. 전에더 이곳에서 한번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도 아직 완쾌되지가 않아서 글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몇 줄 되지 않는 편지지만 많은 것으로 혜량하여 주십시오.  우선 당신이 주시는 편지마다 언제나 저를 기쁘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아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회답에 대해서만은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기대에 어긋나게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근본적으로 따져 본다면 우리들은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사물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충고를 하거나 도움을 주자면 많은 일이 벌어져야만 합니다. 많은 일이 이룩되어 비록 단 한 번의 운좋은 결말을 맺기 위해서도 사물과의 완전한 상호관계가 이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한 가지는 아이러니입니다. 아이러니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특히 창조력이 빈약한 순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순수하게 사용하면 아이러니도 또한 순수합니다. 그걸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과 너무나 친숙해지는 것 같거나 아이러니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게 두렵거든 보다 위대하고 진지한 대상들로 눈을 돌리십시오. 그런 대상들에 비하면 아이러니야말로 보잘 것 없이 무력하게 될 것입니다. 사물의 밑바닥을 추구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아이러니가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의 언저리를 즉시 살펴 보십시오. 보다 진지한 사물의 영향을 받게 되면 아이러니가 우연한 것일 경우에 당신으로부터 떨어지게 될 것이며,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당신의 것이라면 진지한 도구(道具)로 강화(强化)되어 당신의 예술을 이루는데 쓰이는 한 가지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두 번째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저의 장서 중에서 무엇보다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은 불과 몇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중에 두 가지는 어디를 가든 언제나 지니고다니는 게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저의 좌우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들은 성서(聖書)와 덴마크의 위대한 시인 덴 페터 야콥센(1847~1885)의 저작들입니다. 당신께서도 그의 작품들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책들은 구하기는 쉬울 겁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일부가 게크람판 세계문고로 훌륭하게 번역이 되어 출판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콥센의 이 수록된 책과 그의 장편 를 구해서 첫째 권의 첫 소설 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하십시오. 한 세계가 당신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과 부(富), 세계가 지닌 불가해한 것이 찾아들 것입니다. 잠시 동안 그 책들 속에서 살아가시며 당신이 읽을 가치가 있어 보이는 그곳에서 배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 책들을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사랑이 어떻게 되든 이런 사랑은 수천배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 저는 그 점을 확신합니다. 그 사랑은 당신의 생성(生成)의 피륙을 뚫으며 당신의 경험, 환멸, 환희의 모든 올 속에서 가장 중요한 가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창조의 본질에 대해 그 깊이나 영원에 대해 제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면 제가 알고 있는 두 분의 이름을 들어야겠습니다. 한 분은 위대한 시인 야콥센이며, 또 한 분은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예술가 중에서 비견할 수도 없는 조각가 오거스트 로댕입니다.  -당신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빌면서.                         1903년 4월 5일 마리아 라이너 릴케   이탈리아의 피사 근교 비아렛지요에서(2)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부활절에 보내주신 편지로 해서 저는 여러 가지로 즐거웠습니다. 그 편지를 통해서 당신의 여러 가지 훌륭한 점을 듣게 되었으며 당신이 야콥센의 위대하고 훌륭한 예술에 대해 말씀하신 태도로 미루어 보아서 제가 당신의 삶과 그 삶이 가지는 많은 문제들을 충만한 곳으로 이끌어 갔을 때, 제가 과히 잘못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 그 호화롭고 찬란하며 깊이를 가진 책의 세계가 당신께 전개될 것입니다. 그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인생의 은밀한 향기로부터 삶의 묵직한 열매의 풍요하고도 위대한 맛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그 속에 어울려저 있는 듯합니다. 거기에는 이해되지 않았거나 파악되지 않은 것, 경험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늘거리는 추억의 여운 속에서 인식되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체험이라도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아무리 적은 사건이라도 운명처럼 전개되었습니다. 그 운명도 신비에 차고 크나큰 피륙 같아서, 그 속에서 한 올 한 올이 섬세한 손에 의해서 짜여졌으며 한 올 곁에다른 실오라기가 포개지고 수 백의 다른 실올에 의해 다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이 책을 처음으로 읽는다는 크나큰 행운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낯설은 꿈 속에서처럼 그 책이 주는 무한한 경이 속을 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께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뒷날에 가서도 당신은 여전히 변함없이 놀라운 마음으로 이 책들을 탐독하게 될 것이며 삶에 대한 신념에 있어서는 보다 심화될 것이며 인생에 있어서는 보다 복되고 위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마리구릅뻬의 운명과 동경을 그린 그 놀랄만한 책을 읽어야 하며 야콥센의 서간문과 인기단편들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비록 번역은 시원치 않지만 무한한 격조 속에서 울려퍼지는 그의 시도 읽으셔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 저는 전부가 수록된 야콥센의 멋진 전집을 사도록 권합니다. 이 전집은 3권으로 되어 있는데 번역도 훌륭하며 라이프치히의 오히겐 디트리히 서점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권당 5마르크 내지 6마르크면 살 것입니다.   라는 시(이 작품은 섬세한 점과 형식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작품입니다)에 대한 당신의 견해가 오히려 서문을 쓴 사람에 비해서 나무랄 데 없이 옳습니다. 여기서 한 말씀 드려도 좋다면, 될 수 있는데로 미학적이고 비평적인 글은 읽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편파적인 견해로서 굳어졌으나 생명력이 없는 고화상태(固化狀態)에서 무의미하게 되었거나, 노회(老獪)한 언어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이란 오늘은 이 견해가 이기는가 하면 내일은 다시 뒤집혀지기가 일수입니다. 예술작품이야 말로 끝없는 고독에서 나오는 것이며 비평으로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그것을 파악할 수도 지닐 수도 있으며 그것에 대해 불편부당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되든 당신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이 옳은 것으로 알고 거기에 따르십시오. 그리고 모든 시비나 비평이나 해설서들은 무시하도록 하십시오. 설사 당신이 틀렸다 하더라도 당신은 당신의 내적인 삶이 지닌 자연스런 성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다른 인식으로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으로 하여금 독자걱이고도 은밀하며 아무 것에도 구해받지 않고 스스로 발전을 하도록 두어 두십시오. 그런 발전은 모든 진보와 마찬가지로 깊이 내심에서 나와야 하며 강요되거나 채찍질이 되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만삭이 될 때까지 잉태되었다가 배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상과 감정의 싹으로 하여금 자기 속에서, 어둠 속에서, 무의식 속이나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불가사의 속에서 완성되도록 하시고, 겸허한 마음과 끈기로서 명료함이 새로이 분만될 시기를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그게 바로 예술적으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술을 이해하거나 직접 창작을 하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시간을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횟수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10년이란 세월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바로 계산하지도 연수를 세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수목처럼 무성하도록 하십시오. 나무는 수액을 억지로 내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봄의 폭풍 속에서 의연하게 서 있습니다. 혹시나 그 폭풍 끝에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쩔까 하고 불안감을 갖는 일도 없습니다. 여름은 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원이 그들의 눈에 앞에 있듯, 근심 걱정없이 조용하고 침착하게 거기에 서 있는 참을성 있는 자들에게만 여름은 찾아옵니다. 저는 그걸 매일 익히고 있으며 그것도 괴로움을 찾아가며 배우고 있고, 또 그 괴로움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끈기만이 전부입니다.  리하르트 데멜(1863~1920 독일의 시인)의 책들에 대해서 말씀 드리자면,(덧붙이자면 그에 대해서는 저도 거의 모릅니다) 그의 책 속에서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발견했는가 싶으면 금세 다른 페이지를 펴기가 두렵습니다. 모든 게 다시 엉망으로 만들어져서 훌륭한 것을 보잘 것 없이 뒤바꿔 놓지나 않았나 하고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28    [권오삼] <좋은 시를 쓰려면> 댓글:  조회:412  추천:0  2018-04-02
[권오삼]  1. 쓴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문맥의 흐름을 다듬는다. 2. 일상어보다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사용한다. 3. 독자의 몫을 배려한다. 4. 이미지 중복을 피한다. 5. 수식어는 극약이다. 수식어 대신 비유법으로 정리함이 필요. 6. 감춤과 드러냄이 절묘하게 짜여져야 한다.  -사랑의 내용은 드러내 적지만 사랑이란 말은 감춘다. 7. 글의 말미를 확정, 단정하는 식으로 끝내지 마라. 의문으로 끝내는 것이 효과가 있다. 8. 호흡을 너무 길게 잡지 않도록 소리 내어 읽어보고 단락이 너무 길어 무슨 소리인지 모를 때는 2 - 3행 어딘가에서 끊어줘야 한다. 9. 비유를 앞세우지 마라. 내용이 중요하다. 먼저 현실을 묘사하고 다음으로 비유법을 사용해서 부연한다. 10. 주격 문제  ~은 : 따로따로인 느낌  ~이 : 곁에서 함께 하는 연관성 있는 표현 11. 말은 아끼되 조사 사용은 정확하게 한다. 12. 시작, 전환, 상승, 결구로 시를 전개한다. 13. 단락의 종결 어미를 모두 명사형으로 하면 변화의 맛이 없다. 14. 시 쓰기에서 ‘정형(틀)’에 너무 치우치면 깊이가 없고 변화가 없어 단조롭게 느껴진다. 15. 되도록 작가 자신, 즉 ‘나’는 감추어야한다. 16. 추상적으로 쓰지 말고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할 것. 17. 상황 그대로를 표현해야 한다. 누구를 만나면 만난 그 상황을 묘사해야지 추상적으로 나타내지 말 것. 18. 순간의 느낌을 포착해서 쓰기. 19. 친숙해 보이던 것이 낯설게 보일 때 시가 된다. 20. 시를 아름답게 쓰려하지 말 것. 21. 추상은 구상, 구체화해서 이미지화해야 한다. 22. 시를 쓸 때 의미를 찾지 말라. 시란 존재하는 것이다. 23. 시는 사물에 대한 말걸기이다. 24. 막연한 시어는 금물.  -표정을 얼굴, 눈빛으로 구체화시키기 25. 대화를 나타낼 때는 누구와 누구의 대화인지 알 수 있게 표현. 26. 좋은 시어 메모해 두기. 27. 시 속에 인물을 등장시키려면 구체적인 묘사가 요구됨. 28. 제목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단순하게 명사형으로 하는 것 피하기. 29. 직접 체험에 의한 시 쓰기.  -가상으로 쓴 것은 내용 또한 허구, 추상에 가까울 수 있다. 30. 강조, 감추기 등을 위해서 순리에 맞지 않는 내용을 적을 때는 반드시 이유, 상황이 이해될 수 있도록 풀어서 써야 한다. 31. 메시지 전달보다 이미지화하기. 32. 묘사에 치중하기. 이미지가 좋으면 독자가 따라온다. 33. 사물의 형태보다는 행동 묘사. 34. 섣불리, 아는 지식은 시에 인용하지 말기.  -사전 찾기, 직접 보기 35. 상상으로만 쓴 시는 공감을 주지 못한다. 36. 시는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37. 시에선 밑그림이 선명해야 한다. 38. 시점을 현재로 하는 게 효과적. 39. 내가 왜 이 시를 쓰려는지, 무엇을 쓰려는지, 어떻게 쓸 것인지 목적이 분명할 때 창작하면 시의 주제가 선명해진다. 40. 내 시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기. 문제점을 알게 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41. 백석 -이야기시. 풍경 묘사 속에 이야기가 있다.  정지용 -묘사시  유치환 -관념적인 묘사시  묘사의 효과는 시인이 대상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묘사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도 중요하지만 시적 진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중요하다. 42. 시가 너무 속이 다 보이면 매력이 없다. 43. 시는 의미 전달에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이미지 전달, 마음과 정의 전달도 있다. 44. 첫 문장이 흡족해야한다. 45. 감각적으로 쓰기.  -감각적 형상화가 서툰 시는 생생하지 않다.  감각은 몸과 마음의 경계이다.  시인은 감각으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으로 시와 교감한다. 가각의 극단이 시이다. 즉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다. 감각의 제왕은 시각이다. 시 쓰기는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 보기(觀)이다.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동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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