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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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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환시인- “여기저기 나뒹구는 불발 접속어 야생화”-송시월 시집 『B자 낙인』
2022년 09월 25일 17시 05분  조회:632  추천:0  작성자: 강려
“여기저기 나뒹구는 불발 접속어 야생화”
ㅡ 송시월 시집 『B자 낙인』
 
안 수 환
  
 
 
1
인생은 얼마만큼 해석되는가. 인생이 해석될 때 인생은 마땅한 듯이 보인다. 인생이 해석되지 않을 때 그때도 인생은 또 마땅한 듯이 보인다. 인생을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인생을 모르는 때문일까. 혹은 인생이 너무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일까. 인생의 의미는, 그러니까 그 인생 의미의 범주는, “비 오는 날 우산을 쓰면 비를 맞지 않는다”의 경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의 세계는 인생의 경계와 또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시의 의미는 시의 행간 · 자간에 음각陰刻된 인생의 체모體貌라는 점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문맥의 신비로운 속성으로 본다면, 시는 의미 [즉, 해석]에 입술을 대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시의 문맥 속에 숨은 신의 이름을 호명할 때, 이때 음각으로 새겨진 신의 작인作因에 대한 제재制裁 [즉, 삼원三元이 되는 상象 · 질량質量 · 속성屬性]에 대하여 시인 [혹은, 독자]은 어떤 해석을 붙여야 할까. 시인은 시를 쓴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시를 쓰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시인에게 시를 쓰도록 시키는 힘은 삶을 해석하는 논리의 힘이 아닌, 시에 붙어 있는 정념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논리에 충실한 송시월은, 그는 지금 “여기저기 나뒹구는 불발 접속어 야생화 「아차산」”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철학으로든 과학으로든 정신분석학으로든 송시월의 시를 해석할 수 없다는 점 그것이 이 글의 기본입장이다. 송시월은, 지금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바 이대로의 모습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의 착상을 붙들고 시를 쓴다. 그의 착상이란 내 생각으로는 사고기능의 임시적 추론과 감각의 표상물로 대체된 연상활동 그리고 소재인식에 따른 유추 Analogy와 기억력으로 점철된 판각본이다. 시인은 어디 있을까. 세계는 별안간 자기 현시성의 높은 종탑을 세운 뒤 이 종탑으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안에 시인의 몸을 덜컥 가두어 놓는다. 그는 현실의 서술적 전경全景 위에 꼿꼿이 서있다고는 하지만, 벌써 시인의 마음을 주관하는 연상과 뇌의 복합 영역 앞에서는 특정한 기억의 잔재들을 치우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과 맞닥뜨린 듯이 보인다. 그는 방금 꿈에서 깨어난 듯 이렇게 기이한 담론을 풀어 놓는다.
 
달빛 우주복을 입고 달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요
 
태아로 웅크려 달달달 주문을 외우자
무중력으로 떠 올라요
 
달의 사생아인 나, 사식으로 들어온 별빛을 먹어요
환하게 열리는 500만개의 내 모공
태양동기궤도로 진입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는데 살짝 스치는 트리톤 표면에
크레바스가 생겨요 저 얼음동굴로 들어가 보고 싶은데
모래알 같은 말똥구리별들 반짝반짝 눈을 흘겨요
수많은 갤럭시들 X자로 꼬리를 흔들어요

[...]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달항아리 앞
알에서 갓 깨어난 나와 퇴화된 내가 합성되어요
나의 이동 경로와 자유의 성분을 정리한, 달이 쓴 서사
네게 전송되지 않네요
 
원석을 굴리면 달을 훔친 내 코에 B자 낙인이 선명해요
둥둥둥 북을 울려 달내림을 받으려던 내가 달을 부셔버려요
ㅡ 「B자 낙인」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난 달항아리. ‘나’는 달항아리의 원석이었으니, 어느새 ‘달항아리’의 순결을 잃어버린 나는 [나는 나의 퇴화였던 것] 얼굴에 B자 낙인이 박힌 절도범 신세가 되었다는 것. 이 점이 이 시의 작인이랄 수 있다. 그러나 시에 나타난 이야기의 합성이 논리적이든 아니든, 시인 감각의 입력이 변덕스럽든 아니든 문맥의 활성을 불러일으키는 주의력과 판단력은 외부의 주도면밀한 자극에 의해 너무도 생생히 채집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시상詩想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세계인식의 메커니즘 [혹은, 신경조절 능력]은 그만큼 강렬하며 뚜렷한 것이었다. 객관은 주관의 투사透寫인가. 그가 쳐다보는 사물들 혹은 생생한 시각피질들까지도 이제는 시인 자신의 내면적인 심리현상의 지배를 받는 듯이 보였다. 나는 송시월의 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시인은 시를 쓸 때 시적 대상에 기울이는 의식적인 부분에 대하여 자신의 기억을 어느 정도 제한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경우 시는 우리가 꿈을 꿀 때처럼 감각 운동의 생생한 환상을, 시를 쓰고 난 다음 그것들을 모조리 씻어버리는 무책임에 매몰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나는 누구와 만나고 있으며, 나와 그 누구와의 간격은 도대체 얼마나 먼 거리에 놓여 있는가. 사실상 꿈을 꾸고 난 다음 깨어났을 때 경험하게 되는 의식의 휴면 상태는 현실의 어떤 슬픔보다도 더 뼈아픈 비극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시인의 지각활동에 붙은 연상이 어떤 경우로든 [예컨대, 흥분 혹은 충일감] 자신의 정신세계를 고양시킬만한 신념을 상실할 때, 대개의 시인들은 가뭇없는 자기체면의 관습으로 쉽게 미끄러진다. 그런 점에서 송시월 시의 소재인식에 나타난 일련의 조치들은 지금까지 경험한바 삶의 형식으로서의 패러다임이 아닌, 그 패러다임에 드리운 인식의 변화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묻는 술어들로 채워져 있다. 바꾸어 말한다면, 송시월은 애당초 인생에 관한한 인생의 서술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의미를 무화시키는 송시월 시에 대하여 나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네 인간이 의미를 쫒는 동안에는, 대개의 경우 나 자신의 욕망을 증폭시켜가면서 그 욕망의 방향 또한 명백하지도 않다는 점을 너무도 쉽게 간과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낱말은 요컨대 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도 흡사한 음색을 띠기도 한다. 삶의 의미에 대한 분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달은 듯이 그는 이렇게 쓴다;
 
아침 비비비 새소리를 손으로 받아본다
 
비가 미끄러진다
 
나팔꽃 줄기에 새소리가 방울방울 매달린다
 
S라인으로 다리 꼬고 하늘로 치솟고 있는 나팔꽃
 
진보라색 꽃우산 펴들다 초록하이힐이 벗겨진다
 
지렁이를 신은 빗줄기
 
자목련건반 스타카토로 두드리다 나동그라진다
 
아침 비비非非 새소리
 
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간다
ㅡ 「아침 비비비」 전문
 
시인은 삶의 의미를 기억하지 않고, [가령, 꿈의 절차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흘러가듯] 머릿속에 남겨진 행위 목록의 여러 장식들 그 소재성의 측면만을 바라본다. 시인은 말한다; 누가 이곳에 ‘나둥그라져’ 있는가. 비나 새소리의 ‘비비비’라는 중의重義는 말장난 이상의 포리포니 polyphony [즉, 대위법對位法]로 울린다. 시인은 지금 이곳에서 새소리의 비비 [즉, 긍정]와 非非 [즉, 부정]의 울음소리를 통합해내면서, ‘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간’ 아침을 본다. 어디든 보잘것없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에 유입된 대긍정의 서랍 속에는 대상들 하나하나에 깃든 내밀함의 어떤 정신적 가치도 굳이 힘주어 천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영혼을 가진 자로서 그러니까 그는 태연을 가장할 것도 없이 방안에 놓인 가구들의 기하학적인 도면에 대해서도 몇 마디 비현실적인 놀라움 몇 점을 던져 놓으면 되는 것이었다. 시인은 보물 상자의 뚜껑을 열지 않는다. 송시월은 이미 시를 쓰기 전부터 저쪽 사물들의 내밀성의 차원이 제 혼자 저절로 개현開顯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3
그렇다면 송시월 시의 문맥을 덮고 있는 사물과 그 사물을 읽어내려는 상감세공象嵌細工 [즉, 쇠붙이 · 사기 · 나무 · 상아 따위의 속살을 파내고 그 자리에 딴 재료를 틀어박는 상안象眼 기법]으로서의 문법에 대한 한 두 마디 암시를 더 열어보기로 하자. 그는, 자기 시의 행간 속에 자리 잡은 녹두꽃 한 점에서도 그것이 우주적인 유기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다 (「점묘화」). 그는, 손바닥으로 바다를 뜬다 (「게놈지도」). 그는, 물구나무서서 / 가을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 시뻘건 튤립단풍에다 암모나이트를 구워 먹고 / 울컥울컥 청자빛 하늘을 토한다 (「자하연」). 그는, 820광년을 한걸음에 뛰어 / 북두칠성 큰곰자리 등으로 올라가 위아래 / 사면을 둘러본다 (「10분 간」).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의식의 자율성 [즉, 꿈속에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이물異物들의 집합]에 기댄 채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 감정은 다음 찰나 시적 상징으로서의 부표浮漂들과 만나면서 시간과 공간의 틈새를 단번에 단축시킨다. 시인은 또 이렇게 쓴다;
 
막고굴 같은 걸개시 계단
석실마다 발화되지 못한 단세포의 나뭇잎언어들
발밑에서 꼬리 꿈틀
‘나’ 라는 자음 ‘ㄴ’을 미끄러뜨린다
삼신할매바위 천개의 주름강에서 떨어지는 모음들
내 발등으로 미끄러진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보이지 않는데 앞서가는 등산복 차림의
혜초와 폴 펠리오가 데리다를 데리고 내 우산 속으로 미끄러진다
 
미끄러지고 미끄러져 영국사 앞마당에 천년의 언어
노오랗게 피워내는 은행나무
내가 “허공의 하트”라고 외치자 노랑나비 무량대수로 날리며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란 플래카드를 펼쳐든다
천태산, 월아천, 천궁자리, 왕오천축국전, 천마도, 천지연,
천 개의 강줄기를 건너 지금 막 해가 뜬다
 
칙칙한 껍질을 벗어버린 나,
여여산방으로 영국사 공민왕의 무릎 위로 동서남북 천축국으로
자율자율 미끄러진다
어린 동자승구름이 자전거바퀴에다 하늘을 감으며 조용히 내게로 온다
허공이 울퉁불퉁 패이며 아, 아, 아, 소리를 낳는다
 
내가 서 있는 이곳
언어의 발원지인가? 도착지인가?
ㅡ 「천태산」 전문
 
낭만주의자의 꿈길처럼, 시인의 기억력 현상에 스며있는 낱말의 돌변성과 자발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요체 하나는 “미끄러지고 미끄러져 영국사 앞마당에 천년의 언어 / 노오랗게 피워내는 은행나무 / 내가 ‘허공의 하트’라고 외치자 노랑나비 무량대수로 날리며”에 집중적으로 못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주목해보자. 이 부분 사물의 운동 그 동정무단動靜無端을 한 번 깊이 들여다보자. 시인의 자유 연상 속에서는 무극無極 [즉, 지허至虛 (주돈이周敦頤) ]까지도 제자리에 가만있지 않고 움직인다. 동양사상에서는 자연이란 말도 그것은 명사가 아닌 동사였던 것 (『주역周易』). 이기理氣를 쳐다보는 입지에 대한 몇 사람의 생각을 인용하자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은 그 움직임의 비분리성을 가리키며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말했다. 칸트 (Kant 1724~1804)는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부분 [즉, 자유 혹은 이理]과 시간이라는 감성의 형식을 통해 움직이는 감각의 전체 [즉, 역사 혹은 기氣] 그것을 시공간의 연접으로 통합하면서 영혼의 불사不死를 주장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칸트는 이 땅위의 인지공간은 다름 아닌 양 · 질 · 관계 · 양상으로 나누어지며 이것들은 각각 전체와 개체와 구체로 쪼개지면서 결국 12개의 범주 Categories를 그려낸다고 추론했던 것이다. 사물 그 자체 Ding an sich는 시간과 공간의 통합이었던 것 [칸트의 감성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는 이 모양의 추론을 다음과 같은 합성어로 축약했다; ‘허이실虛而實’. 달리 말하자면, 무는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무’였던 것이다. 송시월의 말을 들어보자. 무량대수로 날아다니는 노랑나비의 비상飛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천년의 언어로 말하건대) “허공이 울퉁불퉁 패이며 아, 아, 아, 소리를 낳는다” 고. 물物의 구체성 [즉, 사물의 기화氣化]만이 그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 그러니까 송시월은 “사물 밖에는 어떤 길도 없다” (물외무도物外無道)는 그 길의 자유연상만을 쫒고 있었던 것이다.
 
4
그렇다면 이제 사물이 움직이는 방향에 대하여 송시월은 어떤 생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자. 하이퍼시의 전형이랄 수 있는 그의 시 「“의”자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하게 되었다. 나와 사물의 간격. 역사와 현실의 간격.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사고형식의 이분화된 대칭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든지 선과 악은 별개의 것으로 여기기 십상이지만] 어거스틴 (St. Augustinus 345~430)의 역사철학 『고백록』이 그랬듯이, 시인의 생각 밑바닥에는 자신도 모르게 ‘선-악’의 일원적 갈등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그랬다. 시인의 추론은 어떤 전제에 대해서 언제든지 그것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시인의 시는 다음과 같이 풀리고 있다;
 
의자를 잃어버린 내 척추의 4번 뼈
의자야 어디 있니 온 종일 삐꺽 삐그덕 중얼거린다
 
국어 대사전 2991 페이지가 들썩거리며 줄줄이 따라 나오는 행렬
의자 의사 의부 의인 의병 의상 의심 의자왕 의문사 의무병 의문부호 의료사
고......

의자들은 귀가 밝고 행동이 민첩하다
 
000병원 외과 과장실
의료사고, 의사, 의심, 셋이서 만나는 삼각 꼭짓점
‘의문사’란 회색 모자를 썼다
 
백제왕궁
의분이 의병에게 의무병을 시켜 의자를 권한다 의병은 의인에게 의자를 권한다
의병인 계백이 빈 의자에 앉자 의심이 많은 의자왕이 계백을 밀어내고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다리에 쥐가 난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다
 
사과상자는 사과하지 않는다
굴비상자는 비굴해하지 않는다
 
‘義’자가 없는 의자들이 줄행랑을 친다
ㅡ 「“의”자에 대하여」 전문



말은 말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말은 말의 자발성을 낳을 뿐이다. 시는 시인에게 자신의 몸 [즉, 기의와 기표]을 내맡기지 않고, 시는 자신의 말의 전치사와 후치사에게 다만 자신의 말을 넘겨준다. 보자. “의”자는 “義”자로 바뀌고 의자로 바뀌고 의인으로 바뀌고 [......] 마침내 ‘굴비상자는 비굴해하지 않는다’의 착종錯綜으로 몸을 뒤집는다. 착종일지라도 그의 낱말은 그의 시의 추론 형식을 이끌고 가는 긍정적 가치의 차축車軸이었던 것. 긍정은 긍정을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 긍정과 부정의 불일치는 이율배반을 낳는다는 점에서 시인은 정성스럽게도 그와 같은 필연을 사뿐히 뛰어넘는다. 물 자체를 알 수 없다는 칸트의 말처럼, 시인도 이곳에서는 인식의 기본적 범주를 잠깐 벗어나 펀 pun [즉, 익살] 놀이를 즐기면서 헤겔 (Hegel 1770~1831)의 ‘정 These’과 ‘반 Antithese’의 경계로 들락거린다. 한 그물망으로 보면, 현 순간은 과거와 미래의 집합일진대 이와 더불어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까지 이쪽으로 한 번 더 끌어 잡아당기면 보편적인 양상 하나와 그는 눈을 맞춘다. 그것은 우리가 평상시에 지각하지 못하는 의식의 씨앗과도 같은 모호한 예감 (즉, 무의식)인 것. 주관적인 언어 형식의 휴지부를 제외한다면, 예감 (즉, 무의식)은 의식의 명료성보다도 훨씬 명료하다는 점에서 시인은 대체로 세계이해의 혼동을 예방하는 방법론으로 이미지를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시인은 사물을 지각하는 데 따른 무의식의 솔직함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기에 시인의 심원한 영혼은 이성의 형이상적 연상 징후들과 손을 잡지 않고 도리어 사물 가장자리에 붙어있는 비효율적인 예견과 입을 맞추면서 성숙한다. 송시월 시의 ‘의’자 유희에 동원된 낱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우주의 전체 혹은 사물의 개체에 닿아 있는 지고지순한 표정에 대해서 그리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응당 물어야 하겠지만] 그의 시에서는 하늘이 좌초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는 시인은 자기완성의 꿈마저도 가차없이 해체해버린다. 절망스러운 바가 없지 않을 테지만,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의자를 잃어버린 내 척추의 4번 뼈 / 의자야 어디 있니 온 종일 삐꺽 삐그덕 중얼거린다 [...] ‘義’자가 없는 의자들이 줄행랑을 친다”. 아프다.
 
5
형상은 어떻게 있는가. 이 형상 앞에 송시월 시의 문법은 언뜻 보면 출렁거리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단정한 어투로 일관한다. 성인 [혹은, 시인]은 천하의 뒤섞인 모습을 보며 그 형용을 의태擬態하여 사물의 마땅함을 본뜨고, 그 본뜬 모습을 일컬어 형상이라고 불렀다 (성인유이견천하지색 이의저기형용 상기물의 시고위지상 聖人有以見天下之賾 而擬諸其形容 象其物宜 是故謂之象, 『주역周易』,「계사상전 繫辭上傳」 제8장). 송시월 시의 밑변에 깔려있는 무의식을 좀 더 들여다보자면, 그가 바라보는 사물 형상의 즉각성은 시인의 시적 경험의 불확정적인 정념이라 할 수 있는 미분화된 충동과 거침없이 만나며, 그리고 그 정념은 또 다른 이미지들과 섞이면서 매우 투명한 명상을 만들어낸다.
 
한라봉을 쪼갠다
수평으로 쫙 갈라지는 한라산 봉우리
햇살이 밟고 선 백록담의 출렁이는 무늬들
내 입에다 달디단 과립을 뿌린다
하늘바다 하얀 물고기 떼
파닥파닥 내 얼굴에다 은비늘을 뿌린다
 
눈 덮인 한라산 봉우리,
먹이 찾는 노루 고라니들 산등성이로 미끄러진다
하얀 털모자아이가 뿌려 논 무늬들
쓸어도쓸어도 쌓이는 노숙의 눈
건너편 용천사 여승, 법문의염화칼슘 뿌리는 소리
“오늘은 空치는 날 내일도 空치면 공처럼 뒹굴지
나미아비타불나미아비타불”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유리창을 내다보며
서걱 씹는 한라봉 신경의 단면
새콤달콤 씁쓸하다
ㅡ 「눈 오는 날 한라봉을 먹다」 전문
 
시인이 표현하고 있는 “한라봉을 쪼갠다”와 “수평으로 쫙 갈라지는 한라산 봉우리”와의 내포內包 · 외연外延은 한 마디로 말해 명사가 양화量化되는 모양을 보여주면서, 그리고는 이 양화가 관계로 연결됨으로써 [즉, 추상화되면서] 일정한 개념을 만든 다음 또 다른 문장과 연접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용천사 여승과 여승의 ‘법문의염화칼슘 뿌리는 소리’가 하나로 겹칠 뿐 아니라, “오늘은 空치는 날 내일도 空치면 공처럼 뒹굴지” (즉, 전건前件)와 “나미아비타불나미아비타불” (즉, 후건後件)이 연접해 쌓여 이 둘은 양화되고, 이 양화는 또 다른 연결사인 함축으로 몸을 바꾼다. 이와 같은, 시인의 추론 혹은 추리규칙 rules of inference 들은 송시월 시에 흐르는 명제의 타당성을 정확하게 지켜나간다. 명제의 타당성은, 그러니까 그것은 이곳에서 “여기저기 나뒹구는 불발 접속어 야생화”의 문의文意와도 같이, 의미상의 내포와 외연이 하나의 명제로 결합되는 함축 논법으로 변환된다. 달리 말해서, 이 결합의 함축 속에는 다른 명제를 교체해도 그 결과의 타당성에는 변함이 없음을 드러낸다. 독자들이 예기치 못한 순간 시인의 문맥은 꿈속에서 흔들리는 환영들의 집합처럼 무한의 빛을 복원시키고자 시인의 노래 속에 황홀하게 등장한다. 송시월 문학의 터무니없는 유추 방법이 저와 같이 자연스럽게 읽히는 까닭은, 시의 문맥을 채워 주는 연결사가 연접 [즉, 시적 표현 중 두 개념의 공통성을 취함]이든 이접 [즉, 표현 A와 B에서 A나 혹은 B를 택함]이든 시인의 연상 안에서는 언제든지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바 수많은 명제들을 추리규칙에 부합하도록 유추해내는 데에 있다. 그것은 시인의 유추 논법이 집합의 일정한 관계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음을 뜻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는 송시월은 역설 Paradox을 취한다 [가령, “길을 구르던 천년 묵은 염주알에 싹이 튼다 「접신」” ]. 시의 구조상 명사를 한 겹 한 겹 층화層化하게 되면, 관계가 쌓이고 쌓여 명제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명제들은 또다시 부정 · 연접 · 이접 · 함축과 같은 수리논리의 기본구조로 변형되면서 시인의 시적 표현의 다원적 타당성으로 시 형식의 몸을 불리게 된다 [부정 (즉, 외연); “교회에선 부활절 성탄절 소란스러운데, 부처도 예수도 보이지 않고 일급수 물소리도 들리지 않고 「정리에 대한 변」” / 함축 (즉, 내포); “내 눈높이의 정점에서 채송화가 핀다 「채송화」”]. 율곡은 일찍이 이기理氣의 묘합을 수식으로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일이이一而二, 비이非二, 이이일二而一, 비일非一”. 말하자면, 이기의 상수학적 개념은 시인의 낱말조합에 있어서도 [내 억측이 아닌 이상] 얼마든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이이 (즉, 하나지만 둘, 혹은 둘 이상인 것); “밤잠 「공매」” “아침점심저녁 「막장」” / 이이일 (즉, 둘이지만 하나인 것); “찌르레기별 「비염」” “동자승구름 「천태산」” “하늘바다 「눈 오는 날 한라봉을 먹다」”. 시의 문맥이 합리적인 영역을 벗어날 경우, 유추의 힘이 견고하다고는 하지만 흔히들 시인은 때때로 자기 당착에 빠지기 십상이다. 유추 논법이란, A를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근거 앞에서 다른 B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수리논리로 볼 때 이 논법의 인식활동에는 명사와 동사와의 관련성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특별히 시적 표현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동사로서 언표되는 주장에는 마땅히 인지 영역을 넓힐 뿐 아니라 그 안에서 객관적 관계를 찾아내는 눈을 떠야할 것이다 [가령, “나는 꽃을 좋아한다”는 표현 (즉, 주장)에 무슨 감동이 따라붙겠는가.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말은 자기만의 감정을 기준으로 삼은 이분법적인 판단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집합이면 충분하다. 짐작컨대 가령 인식형태를 대수화한 베이컨 (F. Bacon1561~1626)의 논리과정 [즉, 네 가지 셈법 + · - · ÷ · ×]을 잠깐만 들여다보아도 좋다. 송시월은 꿈의 정령을 다시 이렇게 불러낸다;
 
빨갛게 익어 터진 체리를 먹은 예니
흉노 돌궐 위그르 셀주크투르크 오스만 이스탄불 이런 이름을 낳고
이스탄불은 오르한 파묵을 낳고
매운 파묻힘을 먹은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 “순수박물관” 등을 낳고,
순수박물관 심장은 여전히 빨강 피를 낳고 있고
 
사이프러스에 기대어 흔들리는 예니에게
너는 나와 한 몸이니까 우리 사이프러스가 되면 어때
체리가 말하고
 
고흐는 별이 요동치는 푸른 밤을 온몸으로 삼키는
검은 사이프러스를 하늘에다 심고 있고
ㅡ 「예니 체리」 부분
 
이 시 명제 구성의 연접 · 이접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만 말하기로 하자. 시에 등장하는 예니 체리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친위부대]와 오르한 파묵 [그는 터키의 정체성을 탐구한 작품을 써서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음]과 지중해 동부에 있는 사이프러스 섬과 고흐의 그림인 측백나무과의 사이프러스나무 등등의 강압적인 언표 따위 [그것들은 현재 시인의 의식과는 무관한 우주의 보편적 실재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는 그리 중요한 표상들이 아니다. 시인은 제자리에 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자기 자신을 몇 억 년 전으로 퇴화된 몸으로 의식한다 (「콜람」). 그런가 하면 저쪽 아득한 공간 [돌멩이들이 데굴데굴 구르는] 천수만 들판으로는 [있으나마나한] 하늘이 편안하게 내려앉기도 한다 (「다이빙 하시는 하느님」). 시인의 별은, 유독 우물 속에서 태어나기까지 한다 (「제의」). 여러모로 보아 나는 나로부터 일탈한 몸이며, 무엇보다도 하늘은 하늘로부터 일탈한 몸이다 [하늘은 하늘의 몸을 버리고 있었단 말인가]. 따라서 해는 동쪽에서 떠오르지 않고, “해는 서쪽에서 뜬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 썰물이 펼쳐놓은 모항의 아침 백사장, 개미만한 흰 벌레들이 별자리와 지구를 그리고 있다 (「10분 간」). [그래도, “여기저기 나뒹구는 불발 접속어 야생화”는 핀다, 또, “아차, 미끄러진다” (“미끄러진다”는 말은 시인의 애장품이다. 송시월은 시를 쓰지 않고, 시가 미끄러지고 있음을 보고 있었던 것) ]. 중요한 것은 지금 시인의 내부 시정詩情 속으로 파고들어온 한 묶음의 무의식이며, 그 무의적인 기억을 통해 송시월은 매순간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사물과 만나면서 그것들을 이제는 인지적 · 신경과학적 접근으로 높이 신성화시키는 비밀스러운 몽상 [즉, 시간을 읽는 수리철학]과 손을 마주잡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비밀스러운 몽상이란 시인 내부의 삶을 아늑하게 감싸는 몽롱함이며, 그 몽롱함은 다른 것이 아닌 저쪽 초월적인 빛을 그대로 쏙 빼닮은 인각印刻이었던 것. 시인은 그것 말고는 더 이상 달리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 듯이 보였다. 이에, 시인의 저와 같은 행복한 정서에 대하여 나는 달리 무슨 말로 더 덧칠해 훼방할 수 있으랴.

<시문학 2015년 6월호 >
[출처] 안수환시인- “여기저기 나뒹구는 불발 접속어 야생화”-송시월 시집 『B자 낙인』|작성자 나무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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