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11월 2020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     

방문자

홈 > 들뢰즈

전체 [ 54 ]

54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 댓글:  조회:280  추천:0  2019-12-16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            프랑스 철학자. 소르본대학을 나와 리옹대학 강사를 거쳐서 1970년 파리 제 8 대학 교수가 되었다. 구조주의(構造主義) 등 60년대 서구 근대이성의 재검토라는 사조 속에서,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경으로 서구의 2대 지적(知的) 전통인 경험론·관념론이라는 사고(思考)의 기초형태를 비판적으로 해명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철학을 주저 《차이와 반복(1968)》에서 전개했다. 더 나아가서 F. 과타리와 공동으로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의 개념 구성을 통합적으로 원용(援用)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파악하는 시도를 《반(反)오이디푸스(1972)》 《밀·플라톤(1980)》 등에서 전개하여 현대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       DELEUZE Gilles, pp.301-331, La Philosophie au XXe siecle(v.8), Hachette, 1973 [1967(?)] 들뢰즈의 이 논문은 샤뜰레에 의해 1973년에 편집된 『20세기철학』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이 논문에서 참고문헌 중에 최근 책이 1966년으로 되어있으며, 글의 내용상으로 1967년의 글일 것으로 우리는 추정한다.]   [후기 구조주의가 아니라 구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논문을 읽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후기 구조주의라는 것은 시간 즉 반복 존재론을 다루는 것을 말하며, 구조주의라는 것은 공간 즉 차이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 차이 존재론은 사실상 인식론의 관점의 형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구조의 공리과 형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차이존재론은 자신이 배제되어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트교의 부시와 이슬람교의 라덴은 둘 다 '신'과 '정의'를 말한다. 그 이름(대상)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의미(구조)에는 실체가 있는가? 중성인가?]   수학과 논리가 지니는 구조는 선 가정에서 온 것이며, 여기서 개념의 분절은 사유의 본질로 여기며, 기본적으로 약속에 의해서 이다. 반면에 생명과 심리의 구조는 체험 즉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자연적인 분절을 인정하며 표면과 내면의 구별(차이)에서 구체적 현상을 파악한다. 전자에서 이미 주어진 자료가 있다는 약속에는 공간의 전제를, 후자에서 체험된 과정을 자료로 삼으면서 공감(합의)에 의한 시간적 생성을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공공연히 '구조'라는 개념(signifié)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 문제의 접근 방식을 갖고 있다. 양자의 설명 또는 표현의 매카니즘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조'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서로는 다른 길을 간다는 점에서 우리가 '구조'라는 개념을 문제삼을 수 있다.   이런 전망에서 들뢰즈의 논문 「구조주의를 무엇으로 재인식하는가?」를 우리는 읽고자 한다.   프랑스철학에서 실존주의를 말하다가 어느 시기부터는 구조주의를 말하기 시작한다. 들뢰즈는 먼저 누가 구조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언어학자로서 자콥슨(Jakobson), 사회학자로서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정신분석학자로서 라깡(Lacan), 인식론을 새롭게한 철학자로서 푸꼬(Foucault), 맑스주의의 문제를 재해석한 맑시스트 철학자로서 알뛰세르(Althusser), 문학 비평가로서 바르트(Barthes), 뗄 겔 잡지에 관계하는 그룹의 저술가들이 있다. 이들 중 몇몇은 '구조주의'라는 개념보다 구조(structure, structural)를, 다른 이들은 체계(systeme)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더 좋아한다.   다른 한편 구조주의의 기원은 소쉬르(Saussure)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학파, 프라하 학파에 기원이 있다고 한다. 이런 기원과 더불어 구조라는 어휘는 다양하게 쓰인다. 언어에서 의미를 파악해야 할 비의적(ésotérique)언어가 있다하더라도, 언어에는 구조가 있으며, 표출하는 무의식은 (언어로) 말한다는 정도에서 무의식에 구조가 있으며, 신체가 징후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와 같은 표현이라는 점에서 신체에 구조 있으며, 사물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침묵으로 표시(signes)를 내보낸다는 점에서 사물에도 구조가 있다. 여기서 구조는 기계의 골격이나 신체의 뼈와 근육의 구조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구조주의에서 구조는 표현하는 그 무엇의 내용(성질) 또는 능력(권능)을 포함하면서, 일정한 기간에 또는 사물의 특성에 따라 그 무엇이 (외연적이 아니라 내재적)동일성 유지하면서, 표출하고 실현하려는 경향성을 말한다. 사실 사물의 타성적 표출도 항상적 표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지속하는 한에서 한 사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구조는 한 개체(단일자)를 설명하는 열려진 단위이다. 이 단위의 총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이 이전까지는 일방적이었는데 비하여, 이제 규정할 있는 방식자체를 문제 삼아보니까 위계질서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방식의 규정가능성이 등장한다. 이런 기준들을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방식이 없다는 것은 방식들이 여러 차원에서 서로 다른 위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정하는 것 자체가 기준의 수렴과정과 다른 발산과정의 모습이다. 이러한 위상적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이런 차이가 왜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눈에 띄게 등장했을까?   1. 첫 번째 기준: 상징(le symbole)   철학은 한편 진리로서 실재적인 것과 있는 그대로의 실재적인 것의 대립에 의해밝히는 경우, 다른 한편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결합하는 보충으로 여기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구조주의의 첫 번째 기준은 제 3의 질서로서 상징의 질서를 세운다. 이 상징을 실재와 상상 사이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뗄赉 그룹의 소설가, 푸꼬, 알튀세도 심층적 영역을 발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 라깡(Lacan)이 중요하다. 라깡은 제3의 아버지, 상징적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라깡에서 구조의 근본요소로서 상징은 발생(genèse)의 원리에 속한다. 라깡이 해석한 "늑대 인간"의 경우에서, 거세의 주제가 잘린 손가락이란 환각적 형태로 실재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거세의 주제가 상징화되지(배제. forclusion) 못했기 때문이다.   실재, 상상, 상징을 나열해 보면, 실재는 존재론적으로 하나(un)인데, [인식론적으로] 이중화된다.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하나는 놀이하는 광대의 아버지로, 다른 하나는 노동하는 이상적인 아버지로 된다. 그리고 나서 보면, 상징은 세 가지이다. 그래서 구조에는 3원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자체는 제 3의 것이다. 이 첫 번째의 기준에서 보면, 상징적 질서의 지위는 실재적 질서나 상상적 질서에 환원할 수 없다. 그런데 구조라는 것은 지성의 본질(진리로서 실재)도 감성의 형식(있는 그대로 실재)도 상상의 모습(인격으로 상정한)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형상(forme)도 상상의 모습(figure)도 본질(essence)도 아니다. 알뛰세르가 말하듯이 구조는 "이론(théorie)"에 동일한 것으로 지위를 부여해야 하고, 상징은 독창적이고 사변적인 이론 대상의 생산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구조주의는 때로는 공격적이고 때로는 해석적이다. 공격적이란 상징의 궁극범주에 대한 오해를 고발한 것이고, 해석적이란 이 상징이란 범주로부터 언어행위, 작품, 관념, 실천 등이 마주치는 근원적인 점(point original)을 재발견한다는 것이다.   [구조는 우선 상징으로 표상(재현)화 될 필요가 있다. - 구조는 대상도 표지도 아니고, 구조에는 하나님(아버지)과 같은 어떤 것이 상징으로 있다. 그것은 욕망의 거울에 있는 허상이지만, "백설공주"에서 여왕의 거울처럼 여왕의 부름에 등장하는 백설공주의 재현과 닮았다. 부르면 더 상위의 자격으로 또다시 나타나는...것처럼.]   2. 두 번째 기준 : 위치 즉 지위(local ou de position)   구조의 요소들(상상, 실재, 상징)이 지시화(désignation)도 의미화(signification)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레비스트로스에서는 이 요소들은 의미(sens)이다. 여기서 의미(sens)란 지위(position)이다. 그래서 구조란 공간이지만 비너비적 공간이며, 선존재 하는 공간이며, 순서적 의미를 지닌 인접에 의한 순수 공간(spatium)이다. 구조적 공간에서 위치란 실재 존재와 사물이 관여하고 역할을 하는 것에 우선(première)한다는 의미이며, 이런 의미에서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양적이 아니라 위상적이고 관여적이다.   알뛰세르의 경우는 경제구조에 대하여 말한다. 위치란 생산(연관)관계에 의해 규정된 위상적이고 구조적 공간에서 위치이다. 푸꼬의 경우에, 위치를 인접성의 질서에 따라 역할 하는 지위의 성격부여(qualification) 즉 지위부여라고 생각해야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구조주의는 새로운 선험철학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306). 이 점에서, 선험적 위상학이 경험적 심리학을 기초 지우고 규정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될까?   이 위상적 지위로부터 여러 귀결이 나올 수 있다. 첫번째로, 상징적 요소가 지시화도 의미화도 아니라면, 진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기표가 아닌 요소들의 결합에서 의미가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는 결과물이고 결과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부조리의 철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부조리 철학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모자란다. 그와 반대로 구조주의는 항상 의미가 과도하게 너무 많다. (그래서 알뛰세르는 과도한(포화된?) 규정(surdétermination)의 개념이 나온다.) 무의미는 불합리가 아니라 의미의 반대이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주의는 까뮈(Camus)에 힘입지 않고 루이스 케롤(Carroll)에 힘입고 있다.   두 번째로 놀이와 연극의 관점에서 구조주의가 어떤 취향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카드놀이의 중요성을 환기 시켰고, 라깡은 브릿지와 장기놀에서 놀이자의 말 운행놀이보다 더 깊은(심오한) 순수공간(spatium)이 있다고 한다. 알뛰세르가 지위의 순수극장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간단히 말해서 구조주의는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한번에 여러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라 선언한다. [주사위에 관하여, 『니체와 철학(1962)』,Ch. I, s. 11, pp. 29-31.]   세 번째로 구조주의는 새로운 유물론, 새로운 무신론, 새로운 휴머니즘과 분리될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을 신의 지위에 놓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미래에 올 어떤 것이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푸꼬에서 인간의 상상적 특성이 알뛰세르에서 인간주의(인문주의)의 이데올로기 특성이 나타난다. [여기서 지성의 자기반성에 의한 미신적 폐쇄적 종교성이 등장하는 매커니즘, 즉 베르그송의 우화적 기능이 나타난다. 상상적 특성들과 이데올로기적 특성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화적 기능인 셈이다.]   [상징으로 재현되는 구조는 (상상이든 실재이든) 놀이 할 수 자리를 마련한다. - 그래야 자리에는 요소(내용, 성질)들이 부여될 수 있으며, 그 구조는 (평면적 차이 상으로) 놀이할 수 있는 놀이터이다. - 프로이트의 꿈의 장면에서 꿈의 대상인 한 사물에 다양한 성질이 이전(déplacement)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고 베르그송에서는 신체(질료)라는 내부에서는 다양한 성질(과거 기억)들이 놀이(jouer)할 수 있고, 그것을 영혼(사유)라는 내부에서는 상상(imaginer)한다. (MM, 251)].   3. 세 번째 기준: 미분자와 단독자(le différentiel et le singuiler) (참조: 『차이와 반복』, CH. IV, s 2. p. 221- )   상징적 요소, 즉 지위의 단위(통일성)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사실 구조의 내용성, 그중에서 외연적 구분을 다루면서 잠재성의 내용의 차이(공간적)를 구분한다. 이 구분 이후에 내재적 힘(권능, puissance)의 세분화(différenciation)로서 차이(시간적, 반복에서 오는 차이)를 다룰 수 있다. 그래서 공간적 차이로서 미분화의 예는 언어학에서 기표의 차이를 다루면서 순수 형식적(논리적이 아니다) 차이를 다룬다. 그 구성에 대한 논의로서 언어학에서 출발한다. 언어학에서 음소(phoneme) b/p는 두 단어를 구별(차이)하는 최소단위이다. 이런 관계를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요소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 3+2(산술적) 2/3 (기하적) 경우이다. 두 번째, x2 +y2 -r2= 0 경우이다. 항들에서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경우에서 [타원의 두 초점 사이 크기에서] 정해진 가치를 가진다. 셋째로 ydy +xdx =0, dy/dx = -x/y 경우가 있다. 각 항은 자체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다. 그러나 관계에서 상호적으로 규정된다. 이런 상징적(symbolique, 기호적)관계는 미분적이다. 이런 구조주의 기원에는 수학자 집단 부르바키(Bourbaki)에서처럼 공리주의적(axiomatique) 측면이 있다. 들뢰즈는 부르바키 경우는 다른 측면의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공리라는 것은 상상적이며, 기호적(상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바이에르스트라스(Weierstrass)와 럿셀(Russell)의 정태적이고 서수적인 해석을 부여한 미분계산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사물에서 미분화에 의해서 생긴 가루들, 즉 미분들은 [무의식에서 정태적으로 구분된 심리적 개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단독자들이다. 수학적으로 예를 들면, 단독자들은 삼각형의 각 꼭지점들이다. 그래서 상징적 요소(수학적인 기호)들의 상호 규정(détermination réciproque)이 단독적 점들의 완전 규정(détermination complète)으로 이어진다. 이런 전망에서 단독자란 구조가 있는 모든 영역에 속한다.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한번에 여러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주사위들 위에 나타난 점(단독성)들에 연관이 있다. 모든 구조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고 할 때, 하나는 미분적 연관 체계이며 다른 하나는 단독성들의 체계이다. 이 단독성은 구조 속에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수학적 은유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다.   중요한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친족관계에 요소적 구조를 파악하는 경우에서이다. 그는 음소(phonème)와 같은 지위를 지닌 단위들로서 친족소(parentème)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친족관계에서 네 개의 연관, 즉 형제/자매, 남편/아내, 아버지/아들, 외삼촌/생질의 연관은 단순한 구조를 형성한다. 이런 형성처럼 (외디푸스) 신화 속에서도 신화소(mythème)들이 상호 규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구조의 규정(détermination)은 구조가 작동하는 것을 표현하는 태도의 이론에서 완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단독성들은 기호적(상징적)요소들과 요소들의 연관에 상응할 뿐 이들과 닮은 점은 없다. 이 단독자들 중에 어떤 것은 변수가 되고 어떤 것은 함수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것은 구조 내에서 명칭의 영역이 되고 다른 것은 태도의 영역이 된다. [한 단독자의 두 성격(속성) 한편으로는 대상으로서 몸짓으로(corporel), 다른 한편으로는 소리 등의 비형체적(incorporel) 표현으로 드러난다. 몸짓에 이름을 붙여주고 표현을 태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미분화에서는 이 둘 모두가 동태적인 것이 아니라 정태적이라는 의미에서 잠세태가 아니라 잠복기(잠재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라깡의 제자인 르끌레르(Serge Leclaire)는 무위식의 상징적 요소가 어떻게 신체의 리비도 운동에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자 알뛰세르와 그 협력자들에서도 보인다.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각 생산양식은 관계들의 가치에 상응하는 단독자들에 의하여 특징 지워진다. 진실한 주체가 구조 자체, 즉 미분자와 단독자, 미분관계와 단독적 점들, 상호규정과 완전규정 등이다. 생산관계에서 "진실한 주체는 참여자나 행정인... 이 아니라, 오히려 지위와 기능의 분배와 정함(définition)이다. [주체가 프로레타리아의 인간이란 측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지위와 그 실행방식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제 생산양식에서 노동자의 지위와 실행방식을 단독성으로 파악하여 보라.. ]   [언어학적으로 음소의 문제제기가 중요하다. 단어에 내재해 있는 음소가 개별적이지만, 위치가 있고, 그와 다른 음소와 차이를 나타내면서 순서적 상호 연관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미분에서, 특히 포물 곡선에서, 기울기인 접선은 순서적이고 정태적 연관에서 그 힘의 방향과 크기가 다르다는 것과 닮았다(라이프니츠와 럿셀). 이 세 번째 기준까지는, 정태적 의미에서 무의식을 내면에 가지고 있으나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의식의 태도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네 번째 기준은 의식의 내재적 힘으로서 무의식 내에서 기준을 발견한다.]   4. 네 번째 기준: 차별자(le différenciant, 분사형에 주의 할 것), 차별화(la différenciation): 참조: 『차이와 반복』결론 s3 p. 358. .   구조들은 요소들, 연관, 점(단독자)들 덕분에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이다. 모든 구조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이고 소우주적 구조(micro-structure)이다. 쟈곱슨(Jakobson)이 음소의 질적 지위를 문제 삼으면서, 구조의 양태 또는 이론의 대상이 잠세성(virtualité)이라 한다. 여기서 잠재적이라는 것은 자신에 고유한 실재성(réalité)과 자신에 고유한 이상성(idéalité)을 지닌다. 그래서 구조에 대해 사람들은 현실적이지 않는 실재(réelle)이며, 추상적이지 않는 이상(idéale)이라 말하리라.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를 자주 일종의 저장소 또는 이상적 장부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모든 구조가 다수의 잠재적 공존(coexistence)이라 한다. 그리고 알뛰세르는 마르크스의 독창성이란 사회체계 요소의 공존과 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방식에서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구조 속에 무엇이 공존하는가? 그것은 모든 요소들, 관계와 관계의 가치들, 관련된 영역에서 단독자들이다. 이런 공존은 혼융도 비결정도 함축하지 않으며, 미분적 요소들의 관계이다. 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현실화(actualiser)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화 여기 지금 현실화된다는 것은 그런 관계, 관계의 그런 가치, 그런 단독성들이고, 다른 시각에 다른 곳에서는 다른 것들이 현실화된다. [이 현실화란 인간의 인격이 이런(이슬람) 문화에서 이렇게(이맘), 저런(힌두교) 문화에서 저렇게(브라만) 실현화(réalisation)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체적 언어(langue)도 없고, 전체적 사회도 없으며, 우리가 덧보탠다면, 전체적으로 진과 선을 지닌 어떤 신적 존재도 없다는 것이 된다. 잠재성으로서 구조는 [공존이란 의미에서 보면] 미분화되어(différentiée)있다 하더라도, [공존의 속성들이 아직 발생적 과정을 걷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아직 세분화되어(indifférenciée)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조라는 것은 음소관계 t/c를 구성하는 différent/cation이라는 명칭으로 지적될 수 있는 이중적 측면을 분리할 수 없다.   모든 세분화 즉 현실화는 두 개의 길, 종과 그 부분들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류와 종이란 생물적(양적 개체) 분류와 다르다. 종과 부분들이란, 한 덩어리와 그 덩어리의 일부가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 덩어리의 현실화와 그 부분의 현실화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종과 부분들의 현실화의 과정에는 항상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잠재적 공존의 요소들은 다양한 리듬에 따라서 효과를 [시간 속에서] 발휘한다. 시간은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구조에서 현실화로 이행하는 것이지, 한 현실적 형식에서 다른 현실적 형태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질료(원질)의 자기 변형과정이며, 그리고 질료의 변형 과정에서 어떤 형태가 나타나났다고 해서 그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의 자기변형에서 일어나는(여기에 반복의 의미가 들어 있다) 것이다, 결국 질료의 자기 변형의 과정에서 보여진 단면들은 효과이며 결과물이며 사건인 셈이다. 이 사건에서 원형질료를 순수 사건이라 부를 수 있다면, 순수사건은 기억의 혼재인 셈이다.] 이런 이행을 통하여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구조가 종들과 그 부분들을 생산한다(produire)고 들뢰즈는 말한다. 구조는 이들을 세분화된 종과 부분들처럼 생산한다. 그래서 생성(la genèse, 발생)은 시간처럼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구조로부터 구조의 현실화로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내적 다양한 시간성과 정태적 순서로서 생성(발생)라는 두 개념은 구조의 놀이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생산을 스피노자에 비추어서 자연(질료)이 속성(종들)을 효과화하며 그 속성을 현실화하는 사물들(부분들)을 양태라 볼 수 있다. 이 양태가 질료적 차원과 달리 비형체적 차원에서 언어행위 즉 표현(문장)을 다룰 수 있다. 이 표현은 사유의 양태와 같다. 우리가 보기에 여기서, 들뢰즈는 질료의 차원에서 보아 이 비형체적 사유의 양태가 형체적 사물의 양태와 동시에 생겨나는 두 가지 길을 묘사하려한 것이 아니다. 설령이 두 가지 길이 같은 시간에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기표와 기의가 서로 필연적 연관이 없는 것처럼, 서로로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두 양태는 구조와 뗄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며, 두 양태사이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스피노자에 여러 속성들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듯이 (생명 현상의) 발생적 차원에서 보면 두 개는 생산되고 있는 중이며, 또한 권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들뢰즈는 이 세분화의 역할을 강조해야 한다고 한다. 구조는 자체적으로 보면 미분화(différentielle)이나, 그 효과(결과)적인 측면에서 보면 세분화의 작용(différenciatrice)이다.   레비스트로스와 푸이이용(Jean Pouillon)의 문제제기에 이어 뒤메질(G.Dumézil)은 종교들과 한 종교의 신들에서 류적차이와 종적차이를 구별한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가 부처로 화한 것이 종이라면, 지혜를 밝혀주는 관음보살, 병을 고치는 약사여래, 성불로 이끄는 미륵 보살 등등은 부처의 부분들의 효과화 이다.] 이런 구별로부터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경계가 있다. 상상적인 것은 [부분적인] 각 항들에 총합적 매카니즘의 총체적 효과를 집결시키는 것이라면, 상징적인 구조는 항들의 미분화와 그 결과의 세부화를 확인 시켜준다. 라깡의 융에 대한 비판이나 "신비평"의 바슐라르에 대한 비판은 상상에 대해서이다. 뒤메질을 논평한 오르티그(Edmond Ortigue)는 "사람들이 질료적 상상에 접근할 때 미분적 기능이 감소하며 사람들은 동등성에로 향하고, 사람들이 사회의 형상적 요소들에 접근할 때 미분적 기능이 증가하며, 사람들은 구별된 형평성으로 향한다."고 한다.   이제 들뢰즈는 탐험을 깊이로 향한다. 구조들은 무의식적이다. 구조들의 생산물 또는 결과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결과(효과)로부터 구조들을 읽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재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라깡의 제자 밀러(J.A. Miller)는 환유적 원인성(causalité métonimique)의 개념을, 알뛰세르(Althusser)는 구조적 원인성(causalité structurale)의 개념을 형성한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구조의 무의식이 미분적 무의식이라고 한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이해가 잘 안 된다. 무의식이 구조이라는 측면에서 미분적이지만, 무의식이 생성의 권능으로 실현화의 과정에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세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밀러와 알뛰세르의 구조 읽기는 미분적 구조 읽기에 끝나는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작은 지각들을 미분적 무의식으로 제시했고, 반면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하여 힘들의 갈등 또는 욕망의 대립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서 무의식의 기원의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는 욕망의 수준, 연합적 이미지의 수준, 대립 관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무의식을 욕망도 표상도 아니고, 항상 비어있다(toujour vide)고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질료와 같아서 무미 무취 즉 비가치 개념이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스피노자의 자연, 베르그송의 본성과 같다. 베르그송의 세 가지 본성은 구조(이마쥬)가 의미를 표출하는 장면인 셈이다.]   무의식은 항상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인간에 관한 문제제기는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제기한 방식을 따라가면 풀 수 있는 해결이 항상 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과 정신병환자의 치료처럼]. 알뛰세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제기된 문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우나, 라깡에 이어 르끌레르가 갈등의 전형에 의해서라기보다 문제 양식[문제제기방식]에 의하여 신경증과 정신병을 구분할 수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제제기나 의문을 표시하는 것은 주관적이거나 임시적이 아니라, 객관적 카테고리이며 충만하고 전체적인 객체성(objectité)이라는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구조적 무의식이 미분적인 동시에, 문제제기적이고,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열(sériel)이 있다.   [구조는 규정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다. 구조는 결과물로서 그 근원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인-결과라고 말할 정도로 인과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결과의 효과나 의미는 원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서 성립한다. 얼마나 많은 결과들이 현실의 장에서 원인(동기)에 관계없이 이루어지고 소멸하는가! 또한 의미 있다고 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가! 의미의 부여에서 계열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의미 부여자가 누구인가 라고 물음을 제기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가 보이지 않는 주체로서 대자아일 것이며, 자의식의 발동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   5. 다섯 번째 기준 : 계열(sériel)   지금까지 설명된 구조는 아직 작용(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가 (위의 네 가지와) 다른 절반의 기준을 회복한다면 구조는 움직이며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미분화된 상징적 요소들이 계열로서(en série)조직화 된다. 하나의 우선적(première) 계열과 파생된 다른 부차적 계열은 서로 자치적이지만, [비형체적인 것과 형체적인 것으로서] 음소들(les phonèmes)과 형태소들(les morphèmes), 경제적 계열과 다른 사회적 계열 [경제적 상품 생산과 문화적 작품 생산], 또는 푸꼬가 말하는 [말과 경제활동과 인간] 언어적, 경제적, 생물학적, 삼원적 계열처럼 필연적으로 연관을 맺는다. 문제는 이 우선 계열이 기초를 형성하는지, 우선 계열이 기표이면, 다른 계열은 기의인지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구조가 계열로 되어 있고 게다가 다양한 계열(multi-sérielle)이라고 만 말하자.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상상과 상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즉 한편으로 미분적 연관의 요소로서 동물 종의 계열과,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으로 파악된 사회적 지위의 계열 사이에 대치는 차이의 두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은 개별적이지도 집단적이지도 않고, 상호주관적(intersujectif)이다. 무의식은 계열로 전개되고, 기표와 기의로서 뿐만이 아니라 두 계열은 고려된 영역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화된다고 한다. 그가 포우(Edgar Poe)의 『훔친편지』에 대한 유명한 논평을 하면서, 구조가 어떻게 두 개의 계열, 왕-여왕-장관 계열과 경찰-장관-뒤팡 계열을 연출하는지 보여주고, 프로이트의 『쥐 인간』에서 아버지-자식의 이중 계열을 기초로 하여, 각각(아버지와 자식)은 빚-친구, 가난한 여인-부유한 여인이라는 4개의 항들에게 역할을 한다.   구조가 계열로 조직화된 경우에 진실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조의 결정은 상징적 요소들의 선택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우선(일차적) 계열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차적(이차적) 계열의 구성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음악과 가깝게 느껴진다. 그 예로서 솔러스(Philippe Sollers)의 소설『드라마(Drame)』와 페이(Jean-Pierre Faye)의 『유비들(Analogues)』의 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두 계열로 하여금 서로가 단순히 반영되지 못하게 하고 바로 그때도 그 항들 하나 하나에 정체성을 부여하지 못하게 하는가? [우선 계열들이 상징적으로 연관 있기 때문이고, 그 연관이 실현화와 관련이 없으며, 단지 의식 내에서 구조적으로 현실화하는 양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적 양상은 실재성도 아니고 상상성도 아닌 제 3의 것이다. 이 제 3의 것에는 다양하게 이전이 가능하다. 이 이전도 상징적 이전인데 두 부류로 은유적과 환유적으로 구분 할 수 있다. 꿈의 분석에서는 이 상징적 이전으로부터 상상성과 실재성을 구분하여, 환자의 병의 초발전조(초기 정신적 상흔)를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상징적 이전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나 그 환자에게는 고유하다. 왜냐하면 환자의 과거경험은 분명히 있었으나, 지금 의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의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그 전조는 환자의 자아에 자리가 없으나, 무의식에서는 그 자리는 (정해진 크기도 위치 없이) 있으며(유크리트의 점처럼 크기 없이 위치도 없이, 산술에서 0처럼), 그 자리에 무엇인가를, 은유로든지 환유로든지, 채우려 들어온다. 왜 이런 방식을 취하느냐는 검열의 논의이다. 그런데 이 위치를 우리는 위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무의식은 위상처럼 존속한다.] 자, 라깡의 『훔친편지』의 분석에 따르면 일차적 계열에서 장관은 이차적 계열에서 여왕의 위치에 있듯이, 『쥐 인간』에서 가난한 여인이 친구의 위치에 있듯이, 레비스트로스에서 높은 인격(personne d'en haut)으로서 쌍둥이(토템) 계열이 낮은 인격(personne d'en bas)으로서 새(토템)의 계열에 이른다. 이런 두 계열의 상대적인 이전(déplacement)은 전혀 부차적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적 즉 싱징적이며, 본질적으로 구조의 공간 속에서 위치에 속해 있다. 구조주의가 [프로이트로부터 라깡이 주목한] 이 은유와 환유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둘(은유와 환유)은 상상의 모습으로부터 나온 것이 전혀 아니며, 구조적 인자들(facteurs)로부터이다. 그 두 인자들은 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한 계열에서 동일 계열의 내부로 이전의 자유의 두 정도를 표현한다. 상상적이지 않는 [말하자면 상징적인] 이 둘은 이 둘에 의해 활성화된 계열들로 하여금 항들을 뒤섞게도 이중이 되게도 못하게 한다. 상대적 이전이란 구조 속에서 위치의 일부를 차지한다면, 그 상대적 이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상징으로서 위상은 아무 것도 무의식으로서 그 안에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창고이다. 그 창고는 빈 창고로서 무(무능)가 아니라, 담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빈(의미) 창고라는 것이다. 즉 대상을 담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담는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고는 상징이 만든 것으로 이데아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라깡의 분석을 따라가면, 최고 관념(신)의 이데아처럼 등질적 성질로서 빈 것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질료로서, 가득 찬 그러나 아직 의미가 발현되지 않은, 그 무엇과는 반대의 방향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다섯 번째 기준인 계열에서 들뢰즈는 라깡을 충실히 따르면서 생물학적(질료적) 또는 심리학적(시간적) 관심으로서 시간성에 대하여 다루는 측면을 도외시 한 것 같다. 아니면, 이런 구조 해명으로 나아가 보라. 그러면 빈 것으로 밖에 안되지 않느냐라고 반어적으로 서술하고 난 뒤, 그 빈 것 자체가 무엇인가로 실재로는 충만 되어 있고.. 그리고 상징(징후)을 드러낼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6. 여섯 번째 기준 : 빈 상자(la case vide)   구조는 완전히 역설적(paradoxe)인 대상 또는 요소를 감싸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훔친편지』에서 편지와 『쥐 인간』에서 빚의 경우에서 대상은 특출하게 상징적이다.   특출하게(éminemment)란 의미는 그 대상이 다른 계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즉 그 해당하는 계열에서만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두 계열에 동시에 내재하는 이것을 대상=x 즉 수수께끼의 대상, 대운동자(grand Mobile)이라 부르자. 라깡은 편지와 빚의 특별한 역할을 발견한 것을 인위적이며, 일반적 방법이며, 모든 구조에서 기준(critère)이라 하고 마치 노래에서 후렴처럼 순환한다고 한다. 그의 제자 그린(André Green)은 『오델로』에서 손수건이,『햄릿』에서 왕위이, 이런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런 분석에서 상징적 대상(왕위)은 상상적 동일화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는 상상적 동일화의 대상이 아니라 상징적 대상으로 본 라깡의 장점이다(제1기준에서)] 다시 한번,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첫 번째 차이가 있다. [여기서 실재(기표)와 상상(기의)과도 다른 상징은 구체적 대상(자의식, 무의식)이 아니라, 자의식이 만든 허구의 대상(빈 상자)이다. 왜 들뢰즈는 여기서 언어학적 도식에서 배제된 '구체적 실물'에 대한 언급 없이 허구의 대상을 언급하는 것에 머물까? 이 논문은 후기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탐험이 시간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아직 설명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 논문은 라깡과 푸꼬의 영향권 내에서 푸꼬의 『말과 사물(1966)』이후에 그의 저술『차이와 반복(1968)』이전에 썼을 것이다.] 상상의 [실재에 대한] 전투적 성격에 반대하는 제3자(상징적인 것)는 본질적으로 상징체계 속에서 개입한다.   라깡의 분석에 따라, 수수께끼의 대상은 자체적으로 이전한다. 그 대상의 성질은 그것을 찾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 자기 장소가 없다는 것, 자기와 닮은 것이 없다는 것,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화폐라는 상징은 물건이 있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 토지난 창고의 상품처럼 자기 자리가 있지 않다는 것, 자기와 닮은 것이 없다는 것, 금본위라고 하지만 주식처럼 본래적 정체성이 없다는 것, 이 분석을 잘 들여다보면 라깡 만큼이나 들뢰즈가 자본주의 물신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물신, 이름을 부르는 신의 모습, 자기 배타적인 모습의 신과 지정학적 위상이 없다는 신의 모습, 모두를 지니고 있다.] 라깡은 『쓴 글들(Ecrits)』속에서(p.25) "감추어져 있는 것은 자기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EC 4장)베르그송의 무의 분석에서 부정판단과 관련하여] 마치 도서관에 흩어져 있는 책을 찾으러 갈 때, 그 책의 목록카드가 표현하는 것처럼..." 목록카드는 그 책이 그 서가에 있지 않으면, 빈 종이 인 셈이다. 이 카드가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그래서 모든 구조는 원본인 제3자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하고, 그런데 제3자는 자기의 기원이 없다는 것이다. 수수께끼의 대상, 즉 대상x는 차이 자체의 세분화능력(le différenciant)이다.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형상적 신을 잘 표현한 것인가? 기원이 없으면서도 존재하고, 그리고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상징이다. 이것을 소박한 실재론에서 보면, 바람소리일 뿐인데, 이 표지(상징)가 실물을 대체하는 능력이 있으니... 어휴, 여기에 매여 얼마나 많은 인민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놀이에는 빈 상자가 필요하다. 빈 상자 없이는 아무 것도 전진하지도 작동하지도 못한다. [데모크리토스를 연상해야 하는가? ] 대상=x가 매번 위치 이전하는 것이 그 자리이라고 하며, 라깡은 브릿지 게임에서 버려진 패의 자리(la place du mort)를 상기시킨다. 푸꼬는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에서 벨라스케즈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왕의 위치(la place du roi)를 상기시킨다. 구조주의 있는 곳에는 Zéro(0) 등급이 있다. 솔러스와 페이 경우에는 문학에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맹점(la tache aveugle)을 상기하게 하며, 여기서 문학소들(littérèmes)로서 계열을 조직화하여, 문학을 허용한다. 밀러(Miller)는 프레게(Frege)에서 제로(Zéro)의 지위를 빌려왔다. 레비스트로스는 [토속 원주민 문화에서 권능있는 정령과 같은 실재인] "마나"(mana)를 "유동하는 기표"의 존재, 상징적 제로(0) 가치의 존재라고 인식한다(『의미논리』제8단원(p. 64)에서). 쟈콥슨의 경우에 음소 제로(le phonème zéro)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주의 비평의 대상은 언어행위 중에서 작품 속에 미리 존재하는 잠재성(virtualités)을 규정하는 것이다. 작품이란 자체는 자기의 고유한 잠재성을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이다. 캐롤(Lewis Carroll)과 조이스(Joyce)는 "단어들이 든 가방 (단어가방)"(mots-valises)란 개념을 창안한다. 『핀간의 각성(Finnegan's Wake)』속에서 한 글자가 우주이고, 세계의 모든 계열들을 재통합한다. 캐롤에서는 단어가방은 적어도 두 가지(말하고-먹고) 기초계열을 내포하고 있다. 신조어인 스나크(Snark, 『의미 논리』p. 60와 여러 곳에서)는 무의미(non-sens)이나 두 계열을 활성화시킨다. 이 단어는 문제 제기적(problématique) 대상, 즉 대상x를 지시하는 한, 단어x 이다. 이 대상x는 두 계열 사이의 홈을 파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을 채워 넣기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마나"에 관해서 제시하고, 마나를 "거시기"(truc)나 "아무개"(machin)라 본다. 거시기라는 무의미는 의미화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의 과도함(l'excès)이다. 이런 의미를 푸꼬가 분석한 루셀(Reymond Roussel)의 음소적 차이에 의한 테크닉에서, 말라르메(Mallarmé)의 계열들 사이의 연관적 체계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이중 측면을 지닌 빈 상자의 효과성을 주목한 것이다.   대상=x라는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것은 이 논문의 제목처럼 「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인식해야 할까」이며, 정체성을 표시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지위의 문제에로 이끈다. 라깡은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대상=x가 상징적 남근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이것은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는 것, 자기와 연관해서 항상 이전되어 있으면서, 어머니의 편에서 그것(상징적 남근)을 발견할 장소가 없다. 결국 상징적 남근은 편지, 빚, 손수건, 왕위, 스나크, 마나 등인데 비해, 아버지와 어머니 [왕, 장관, 여왕] 등은 상징적 요소들이다.   남근(팔루스)이 마지막 응답이 되지 못한다. 이 자리는 성적구조의 빈 상자에 특징을 부여하는 의문과 질문의 자리이다. 이 팔루스는 교환에 관계없는 "어떤 것"으로 있은 것이다. 이것이 "노동일반"으로서 가치이다. 가치와 팔루스, 경제적 물신과 성적 물신 중에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이 문제는 의미 없다고 한다. 하여튼 대상x가 정체성을 지니려는 것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고, 위치를 지니려는 것은 모든 위치에 연관해서 스스로 이전되기 때문이다. 대상x가 구조의 각 질서에서 빈 장소 또는 구멍 뚫린 장소이다. [정체성과 위치를 지니려는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진다는 의미에서 신성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구조의 질서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빈 장소에서 소통한다. [각 학문은 하나의 같은 계 내에서 공통적 원리를 갖지 못한다. 각각의 학문은 각기 자기 계 내에서 정합성과 무모순성을 확보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민속학적 사회구조를 위하여 특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언어학에서 구조들은 상징적 요소 즉 궁극적 기표로 간주될 수 없었다. 또한 푸꼬는 "매순간에 개인적 경험의 고유한 구조는 사회체계 속에서 몇몇 가능 한 선택들(과 배제된 가능성들)을 발견한다. 반대로 사회적 구조들은 그 구조들의 선택점들 각각에서 몇몇 가능 한 개인들(과 가능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발견한다."(『말과 사물』, p. 392)고 말한다.   [구조를 무엇으로 재인식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대상x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상x는 자기 질서 속에 다른 구조적 질서들을 종속시킨다. 다른 질서라는 것은 현실화 영역으로서 개입한다. 2) 대상x는 다른 질서들 속에 있는 그 다른 질서에 대상 자체가 종속된다. (대상x는 자신의 고유한 현실화에만 개입한다.) 3) 모든 대상들x와 구조의 모든 질서들은 서로 서로 소통한다. 각 질서는 우선적인 종의 차원으로 규정된다. 4) 이런 조건들로부터, 그런 역사적 계기 또는 그런 경우에서, 구조의 질서에 상응하는 그런 차원은 스스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질서의 현실화에 복종한다(여기서 라깡의 "배제"(forclusion)의 개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들뢰즈는 구조에 대한 재인식의 방식을 6가지로 해명하면서 공간적 의미 존재로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 반복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역동적 측면에로 탐험은 찾을 수 없다. 무의식의 대상으로서 상징이 지니는 것은 빈 것이라고 한 점에서 최고 형상에 대한 비판적 해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데아를 빈자리이라고 하면, 종래에 이데아의 등질적 충만성과는 다른 차원이 된다는 점에서 상징적 존재로서 이데아는 플라톤의 실재적 존재로서 이데아와는 구별된다. 이 구별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데아의 실재적 존재의미를 살리자는 것이다. 이데아라는 것이 내재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이 성립하는가? 이 말의 성립이 존재, 즉 시간의 역동성, 자기의 본래적 정체성이 없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현실화된 것은 무엇인가? - 조각으로 흩어진 개체들, 단독자들(singuliers)이다. ]   7. 마지막(일곱번째) 기준: 실행에 놓여 있는 주체(Du sujet à la pratique)   이런 의미에서 장소(위치)는 구조가 현실화되는 정도에서 실재적인 존재자들에 의하여 채워진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 장소(위치)는 상징적 요소들로 채워진다. 존재자들에 채워지기 앞서 후자들이 채워진다는 점에서 후자가 우선적이다. 이것을 빈상자의 파라독스라고 부른다. 이 빈 것은 비 존재가 아니다. 푸꼬는 "이 빈 것은 모자람을 구멍파는 것도 아니고, 채워야 할 빈칸을 기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이 사유할 가능성이 있는 공간의 펼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말과 사물』p. 353) 고 한다.   이 빈 장소에는 장소의 이전이 뒤따르는 특출하게 상징적인 심급(l'instance)이 있다. 주체(le sujet)가 정확히 빈 장소를 뒤따르는 심급이다. 또한 이 주체는 본질적으로 상호주관적(intersubjetif)이다. 신의 죽음을 알리고, 인간조차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어떻게라는 방법만 남는다. 니체가 절대 신이 여러 방식으로 죽는다고, 그리고 신들은, 하나의 신이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웃으면서 죽는다고 제시하려 했을지 모른다. 구조주의는 주체를 제거하는 사상이 아니라, 주체를 바수어서 체계적으로 분배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에서 주체는 항상 노마드(유랑하는) 주체이며, 비인격적인 개별화로 되어 있고, 전 개별적(pré-individuelle, 개체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갖기 전의 개체)인 단일자로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푸꼬는 "산개"에 대해 말하며, 레비스트로스는 주관적 심급을 대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 조건들에서 진리체계가 "동시적으로 다수의 주체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구조의 두 가지 큰 우발사건(accident)은 유동하는 빈 상자가 진실한 결핍이거나 또는 빈상자가 채워져 정착적 결과로 사라지거나 이다. 언어학적으로 표현하면, 기표가 사라지거나, 기의가 사라지거나 이다. 신학-인간학 용어로 말하면, 신이 사막을 증가시키거나 [황폐화를 증가시키거나], 인간이 그것을 채우거나 이다. 인간과 신은 땅, 즉 구조의 두 질병이다. 알뛰세르와 그 협력자들은, 대상=x를 가치로 보는 빈 상자의 구조가 한편으로는 어떻게 자본주의 구조를 특징 지우는 상품, 화폐, 물신, 자본 등으로 표시되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모순이 구조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제시한다. 모순은 상상적이 아니라 구조적이다. 모순은 구조에 고유한 내적 시간 속에서 결과에게 구조의 자격을 부여한다. 모순은 구조 속에서 빈 위치로부터 그리고 자기 생성으로부터 파생된다. 일반적 규칙으로 보면,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이 양자의 관계는 시초에서 우선적 결과들을 가지는 구조적 작동에 의해 항상 부차적으로 생겨난다. 조금 전에 우발사건들이라 불렀던 것이 구조에 도달하는 것은 밖으로부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반대로 내재적 "경향성"이다. 구조의 빈 상자 또는 주체에 상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념적 사건(l'événenemnt idéel)들이 중요한데, 이 사건들을 들뢰즈는 우발적인 것(accident)이라 부른다.   복잡한 문제들의 집합이 구조주의에서 제기되고 있고, 푸꼬의 구조적 "변환"(mutation)이나 알뛰세르의 "이전 형식"(formes de transition)이란 것도 구조주의에 관한 문제이다. 이들은 빈 장소에서 해결될 문제이다. 또한 구조주의적 영웅도 있다. 이 영웅은 신도 인간도 인격도 보편도 아니며, 정체성도 없다. 이 영웅은 과도와 결함으로 타격 입은 구조의 분열(l'éclatement)을 확신한다. 그리고 영웅은 자신의 이상적 사건(l'événement déal)을 우리가 이미 정의했던 이상적 사건들에 대립시킨다. 이 영웅이 새로운 구조에 속한다는 것은 이 영웅의 창조적이고 저항적인 힘에 의존하고 위치 이전을 뒤따르고 간직하는 민활성에 의존한다.   "주체에서 실천으로"라는 마지막 기준은 가장 모호하며, 미래의 기준이다. 앞선 여섯 가지를 통하여 다양한 영역들을 탐험할 수 있다. 구조의 수준차이에 따라, 실재와 상상, 실재적 존재들과 이데올로기들, 의미와 모순 등은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결과"들이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어떤 생산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구조주의에서는 새로운 어떤 것을 "찬성하는", 그리고 그것을 생산할 줄 아는, 책들이 중요하다.   [이 주체에 대한 연구에서 전자 현미경이나 고도의 분석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독자의 진솔한 그대로 말씀 즉 진솔한 기록의 책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기에, 결국 들뢰즈는 라깡이 분석한 진솔한 '작은 자아'를 설명한 것이다. 이 자아가 아직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의 경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아이다. 자아가 자기 정체성을 찾는 길은 미래와 연관 있다. 미래의 문제는 기억을 포함하는 자기의 반복과 더불어 풀어가야 할 것이다. 하여튼 이 논문은 그 당시(1967,?) 구조주의의 현주소에 대한 분석인 셈이다.]                                                     ***   "차이와 반복(1969)" 영문판 서문에 관한 견해     들뢰즈 pp. xv-xvii   우리는 이 서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를 먼저 말하자.   우리는 들뢰즈(Deleuze)가 베르그송의 철학적 문제제기방식과 프로이트의 심리적 문제제기 방식과 동일한 방향에서 철학사적 개관을 하고 있다고 본다 . 물론 대 철학자는 철학사적 흐름에 대한 견해에서 거의 동등한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에서도 천상과 제작자와 생성의 3차원의 구분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사유의 사유가 있고,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의 합일로서 실현태가 있으며, 질료인으로서 잠세태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상, 현상에 대한 실재, 실재를 총괄하는 원리를 구분하는 개체성에 관한 논의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단지 우리가 이미 죽은 것에서 생명의 현상을 보는 19세기에 와서야 살아 있는 생명체의 내재성이 이미 수 억년의 역사와 기억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죽은 시체는 끝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과거의 축적이며, 살아있는 생명체도 살아온 과정의 축적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서장에 나오는 파라독스 3 가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분신(쌍둥이) 파라독스 (P. des doubles) [일자(원리)-다자 관계 - 고대철학]   대칭 파라독스 (P. des objets symetriques) [일자(주체)-타자 관계 - 근세철학]   무덤 파라독스 (P. des des sepultures) [일자(자아)-내재성 관계 - 현대철학]   이런 견해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의 제3장 "명제논리의 세 파라독스"에서 설명하는 지시화, 표출화, 의미화의 세 파라독스와 같은 맥락이다. 지시체, 표출체, 의미체의 세 경우를 설명하는데, 이 설명에서 각 대상은 이미 구체적 개별 물체와 연관이 없다. 말하자면 소쉬르가 말하듯이 기표와 기의가 현실적(위부의) 물체와 연관 없다고 하듯이 명제 의미는 구체적 사건의 진상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연관 있는 문맥 즉 지정학적 위상과 관계를 말한다. 이는 진리와 허위라는 가치가 문맥에만 연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위상이 일어난 사실의 내용이라기보다 피상적으로 드러난 현상의 연결방식을 담론자가 의미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도 실재와 사실의 총체는 있었다. 문맥의 연결은 시각 즉 세계관의 반영일 뿐이다. 우리는 시각이 개념화되었다는 들뢰즈의 입장을 수긍한다. 그러면 총체와 내용은 개념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가? 어떻게 말하든, 말을 하는 것 자체는 표현이고 또한 시각이다. 이 시각들이 난무하는 세계가 바로 노마드의 세계이다.   들뢰즈는 노마드(nomade)의 세계를 통하여 무엇을 알리고 또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할까? 노마드의 세계는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이다.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monad)는 자신 속에 모든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 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노마드의 개체는 끊임없이 확장하는 과정 중에 있기에,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시각을 보충하고 확충하면서 부풀어 간다. 말하자면 돌아다니는 것, 그 자체가 시각의 자기 확장인 것이다. 모나드가 자기 한계 내에서 시각에 만족하고 있다면, 노마드에서는 시각의 한계가 자기를 비하시키고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고 본다. 천박하지 않는 노마드적 자아는 자연의 본성을 (극복하고자)넘어서 - 왜냐하면 그 본성이 자신의 한계임을 자각하기 때문에 - 자아의 새로운 형성 즉 자기 형성에로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이는 자신의 형성을 넘어서 개체들 공동의 형성체를 성립시키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들뢰즈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제대로 보았을 것이다. 삶의 방식 자체가 무덤으로부터 이탈도 아니고, 죽음으로부터 구원도 아니다. 무덤을 뒤에 유성처럼 달고 살아가며, 죽음의 신체를 데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 무덤 즉 신체는 인간이 갖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의미체 이다. 왜냐하면, '삶의 양식'이란 문법에서, 또는 ?의미논리?라는 위상적 도식에서 죽음(무덤) 과 신체(추억)는 의미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 삶과 직접적 연관 중에 있음(연속성-기억)을 간직하고 표출하고 의미화 한다. 말하자면 이런 죽음과 신체를 반대 즉 대상(문자 그대로 앞에다 놓는)으로 여기고, 적으로 또는 무화 시키려는 의식자체가 병든 의식이다. 왜냐하면, 상대 없는 자신이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환상에 빠진 것이다. 이것이 미신이다. 상대가 있는 긴장을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 다른 한편 상대 없이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세계, 천상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그리스트교인은 믿는다. 마치 기하적 점이 위치와 크기 없이도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천국의 세계가 있단다.   "천국의 세계이다"는 이 명제자체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세계이다"만큼 더도 덜도 아닌 만큼 의미 있다. 자족적 존재가 있는 세계에서 .... 등으로 설명한 후에 ?천국의 세계이다?는 이미 현실적 세계와의 문맥이 없는 백색의 세계에서 의미 있다. 여기서 의미라는 것은 이와 같다. 스스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살아가려는 생명체가 남(타 생명)의 살을 먹지 않고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도사들의 삶에서도. .... 등으로 설명한 후에 "지상의 세계이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그 세계도 의미 있다. 채소를 먹고산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말할 때, 다른 의미란 전자의 두 세계와 후자의 세계의 차이로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대비는 문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의미이다. 의미는 기본적으로 문장들 간의 관련 맺는 정도에서 의미가 표출된다. 누구(무엇)와 연관 맺었는가? 수 억겁의 인연 연기를 말할까? 그러고도 무엇으로 어디에서 진리와 가치를 말할까?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대하여 한 시각.(Russ, 1993) .***   뤼스(Jacquline Russ) p. 237. Atlas de la philosophie, Kunzmann et 2, Paris, LGF, 1993, (Munich, DTV 1991)   독일에서 출판한 이 철학의 위상적 지도(Atlas de la philosophie)를 프랑스판을 만들면서 프랑스철학자 몇 명을 첨가했다. 그 중에 뤼스는 들뢰즈에 관해 반쪽을 할애한다. 여기서 그녀는 차이와 반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이 "차이와 반복(1968)"은 아직 설명되지 않는 사물의 시각이 출현함을 알립니다. 들뢰즈는 사유된 실재를 익명의 영역 즉 주체 또는 인격적 개별성이 박탈된 영역으로서 표현한다. 그래서 주체의 정체성(동일성)은 부서져야 한다. 인격적 나(je)와의 모든 관련를 넘어서 자아의 동일성도 없고 주체도 없는 무한정한 우주가 나타난다. 결국 존재에는 인격이 없다.   들뢰즈는 안티-외디푸스(1972)와 더불어 인격 없는 욕망의 영역을 재발견하다. 이 욕망이 삶(la vie)을 감싸고 있고 또한 생활(la vie)도 생산한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생의 창조이자 권능의 의지이다. 이 욕망은 결함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권능이다. *-   [우리는 여기에 몇마디 보태자. 뤼스의 견해는 정신 분석적 담론에 상당히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인격 또는 자아의 부서짐은 소자아(moi)의 행태이다. 제도와 관습에서 미신과 환상에 빠진 주체를 넘어서, 소자아라는 현상(겉모습)을 표출하는 권능인 실재 즉 대자아(Moi)를 발견한다. 이 빙산의 물밑에 있는 의식과 같은 대자아는 욕망이다, 대자아는 어느 누구가 아니라 그 무엇이다. 존재는 인격도 사물도 아닌 그 무엇이다. 이는 삶의 여러 양태를 생산하는 기본적 동력이다. 말하자면 만물을 있게 하는 근원이다. 들뢰즈의 사상의 전개로 보아, 차이와 반복에서 욕망이라 불릴 수 있는 권능의 존재론적 근거를 찾고서, 안티-외디푸스에서 존재적 능력이 실현하는 방식과 실현한 사태들에 주목한 것이다. 이 생산된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긍정 죽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라고 본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영역판 서문의 개략***   철학사를 쓰는 것과 철학을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한편으로는 위대한 사상가의 도구와 광활한 영역을 연구한다. 다른 한편 나의 도구를 잘 가다듬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의 이름은 그의 작업의 결과물 다른 말로 하면 발견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서,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흄, 스피노자, 니체, 프루스트를 열심히 연구한 후에 그가 '철학한다'는 노력으로 차이와 반복을 썼단다. 이 책에는 가타리와 함께 했던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왜 차이와 반복과 같은 특별한 문제에 대해 집착했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는 새로운 문제도 아니고 많이 다루어진 문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는 차이를 동일률에, 동일자에, 유사성에, 대립자에, 유비추리에 종속시키며, 또한 이 차이를 개념의 정체성에 도입했으며, 차이를 개념자체에 두고, 차이의 개념이 아니라 개념적 차이에 도달했다.   우리는 차이를 여러 방식으로 종속시킬 것이다. 먼저 차이를 생각하기 위해서(즉 개념 또는 주어의 관점에서, 예를 들면 종적 차이는 류적 형식에서 동일적 개념을 미리 가정하는 것이다.)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킨다. 그 다음 차이를 (지각의 관점에서) 유사성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고, (술어의 관점에서) 대립에, (판단의 관점에서) 유비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차이를 그 자체로서 생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은 차이의 유기적(organique) 표상을 제공하고, 라이프니츠와 헤겔과 더불어 영(혼)적(orgique *1) 표상을 제공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차이자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반복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방식으로 반복도 동일성으로, 유사성으로, 동등 또는 대립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경우에 반복은 개념 없는 차이로서 취급한다. 그래서 두 가지(차이와 반복)는 둘 다 정확히 동일한 개념으로 표현되더라도 차이가 있을 때는 서로 반복한다. 반복이 변화를 일으킨 모든 것은 반복을 감추고 동시에 은폐하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복의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양한 변종은 반복을 감추기 위하여 반복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종이 바로 반복의 조건, 반복의 구성적 요소, 특히 반복의 내부 이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런(반복이란) 개념을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변장하고 이전하는 것은 반복의 일부이며 차이의 일부 즉 공통적 이동과 흩어짐이다. 극한에서 차이와 반복의 하나의 힘이 있기보다, 다자 속에서 작용하고 다수성을 결정하는 하나의 힘이 있지 않을까?   모든 철학은 예술과 과학과 연관을 맺는다 하더라도 이들에 대해 말하는 자기 방식을 갖춘다. 그러나 이제는 어렵다. 철학은 초소한의 우월성조차 요구할 수 없어진 이래로 철학의 개념을 만들고 설명하면서, 이 개념을 가지고 과학적 기능이나 예술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적 개념을 과학적 기능과 예술적 구조와 혼동해서 안되며, 과학의 이런 저런 영역에서 또는 예술의 스타일에서 이들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에서 과학적 내용과 예술적 내용은 매우 기초적이며, 이 내용이 과학 또는 예술을 진보하게 하기보다 얻어진 기능과 구조로부터 철학적 개념을 형성함으로서 철학이 진보한다. 철학은 과학 또는 예술에 대해 독립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개념의 각각의 수준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이 두 개념 사이에 안정적 관계는 없는 지를 물으면서, 철학적 개념을 미분화(diffrentiatio)의 수학적 함수와 차이화(differenciatio)의 생물학적 기능으로 구성하고자 노력한다. 예술 과학 철학은 동적(mobile)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며, 각각은 자체의 방식으로 서로서로 대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차이와 반복의 힘은 사유의 전통적 이마쥬를 문제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런 이마쥬에 의해서 우리는 주어진 방법에 따라서 생각하며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할 때, 목표를 결정하는 사유의 다소 은밀한 선가정적 이마쥬가 있다는 것을 들뢰즈는 말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유란 훌륭한 본성을 소유하며 사상가는 (당연히 진리를 '원하는') 선한 의지를 소유한다고 가정한다. 인지과정을 모델로, 다른 말로 하면 상식으로 또는 가정된 동일한 대상에 관한 모든 능력의 사용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오류 단지 오류일 뿐인 것을 무찔러야 할 적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진리는 해결에 관여한 것, 다른 말로 하면 대답에 사용할 수 있는 명제인 것으로 가정한다. 이것은 고전적 사유의 이마쥬이다. 비판이 이런 이마쥬의 중심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 사유에 대해 이런 문제 - 명제적 양상을 넘어서 지적하는 문제 - 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는 (이 사유에 대해) 모든 인지를 벗어나는 뜻밖의 만남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또는 (이 사유에 대해) 그 사유와는 아주 다른 진실한 적과 대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또는 사유를 사유의 자연적 무감각과 악명 높은 나쁜 의지로부터 멀어져가게 하며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비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들뢰즈에게] 이제, 사유의 새로운 이마쥬, 오히려, 새로운 이마쥬를 가두는 저[고전적] 이마쥬들로부터 사유의 해방이 있다. 이것은 들뢰즈가 프루스트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여기 차이와 반복에서 이런 탐구는 자치적이며, 이것은 이들 두 개념을 발견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가장 필수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것은 제3장이다. 이 제3장은 사유의 식물적 모델을 환기시킬 가타리와 더불어 행한 탐구에 이어갈 책의 입문으로 쓰인다. 사유의 식물적 모델(vegetal model)은 나무에 대립되는 뿌리이며 잔가지로 나뉜 사유 대신에 뿌리-사유(rhizome-thought)가 될 것이다.   *1) 뒤마는 'orgique가 그리스어 οργη에서 나왔다고 하고 격정(bouillonnement)으로 설명한다.   고전 그리스어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orge: I. agitation interieure qui gonfle l'ame, - disposition naturelle de l'ame   II. sentiments violents ou passionnes, - ressentiment, colere - vengence, d'ou puniton, hatiment     참조 2)   경험론과 주관성 1953 [흄에 관한 연구]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968   니체와 철학 1962, 니체 1965   푸르스트와 기호 1964 - 증보 1970.   [왜 이서문에서 베르그송에 관한 연구를 제외했는지 모르겠다. 베르그송주의 1966]     안티외디푸스 1972(avec Felix Gattari)   카프카 - 미세 문학을 위하여 1975 (avec Felix Gattari)   뿌리 1976 (avec Felix Gattari)   천개의 고원 1980 (avec Felix Gattari)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1 (avec Felix Gattari)    참조 3)   ***들뢰즈의 안티외디푸스에 대한 한 견해 (Oriol, 1979)***   오리올(Timmt Oriol), p. 193, Histoire de la philosohie, Nathan 1979   들뢰즈는 안티외디푸스(1968)에서 자식-부모관계에 근거한 전통적 정신분석만 강조하는 것을 비판한다. "어린이는 아빠-엄마놀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마법사 놀이, 카우보이놀이, 술래잡기놀이(도둑과 순경) 기차놀이, 작은 자동차놀이도 한다. 기차는 아빠가 결코 아니며, 기차역은 어머니가 아니다." 확실히 어린이의 '욕망하는 기계(기관 *4)(Les machines desirantes)' (충동들과 기관이 지향하는 다수의 대상들의 이상야릇한 통합인 기관차)는 부모관계를 위한 한 지위, 즉 단지 한 지위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지위를 허용한다.   (리샤르 견해) 또한 오리올은 리샤르(Michel Richard)가 다음과 같이 썼다고 소개한다. ?만일 사람들이 안티-외디푸스에서 아빠-엄마-얘기라는 삼각관계의 밀접하고 폐쇄된 영역에서 작은 욕망들과 큰 욕망(le Desir)을 가두고 있는 부르주아 정신분석의 비판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들뢰즈가 이 작은 욕망(ce desir)을 생명의 활기와 복잡성에 닮은 보편적 흐름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욕망과 무의식적 힘들 때문에 그는 인간을 "욕망하는 기관"이라고 표현한다. 이 개념은 욕망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임과 동시에, 특히 욕망의 혁명적 능력 지칭하고자 한다. 욕망은 개인적 무의식에서 보다, 큰 조직체와 억압장치에 대해 욕망이 대항하여... 항의하는 모든 형식들에서 더 [그럴듯한] 기준이 된다..."   (72년 들뢰즈 자신의 견해) 또한 오리올은 클레망(Catherine, Backes-Clement)이 대담한 들뢰즈와 가타리와의 대담(LArc, n. 49, 1972)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공격하는 것,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천에서 정신분석학 자체이다. 가족적이거나 분석적이거나 간에 외디푸스는 근본적으로 욕망하는 기관을 억압하는 장치이지, 무의식 자체의 형성체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외디푸스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이를 너무나 허락하는 우리들의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디푸스를 공격한다. 우리는 외디푸스를 성관계보다 소위 더 낫다는 이상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더럽고 작고 가정적인 비밀'로 환원되지 못하는 성관계의 이름으로 외디푸스를 공격한다. 그리고 우리는 외디푸스의 상상적 변이들과 구조적 불변이체 사이에서 어떤 차이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두 끝에는 욕망하는 기관들의 똑같은 막다른 골목과 똑같은 붕괴가 있기 때문이다. ... 정신분석학은 모든 것을 신경증으로 만든다. 이런 신경증화 작업은 또한 정신병적인 사람을 외디푸스로 만들려는 작업에 저항하는 사람으로서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4) 여기서 기관은 기계적 기관이 아니라, 생명적 나아가 영(혼)적 기관이란 뜻으로 우리는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혼은 외화된 정신과 같은 형상이 아니라, 형성 과정 중인 질료적 성질의 것이다.  
53    제14강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댓글:  조회:736  추천:0  2019-03-17
▶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에 정치적 과제를 부과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새로운 민중’과 ‘새로운 대지’의 구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의 ‘절대적 탈영토화’와 자본의 ‘상대적 탈영토화’가 구분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주체와 대상’은 사유의 빈곤한 근사치일 뿐이다. 사유는 영토(territory)와 대지(earth)의 관계를 포함해야 한다. 이 관계에서 일차적인 것은 대지 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탈영토화의 운동들이다.(영토는 대지 위에서 일정한 형태를 취한다) 탈영토화를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지가 영토의 운동들과 맺는 관계가 역사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에 있다. 대지가 특정한 역사적 규정들에 제약되지 않는 ‘순수 내재면’으로 이행할 때, 그리고 ‘무한한 디아그람적 운동들’을 포함하는 존재와 자연에 대한 사유의 내재성에 들어갈 수 있을 때 탈영토화는 ‘절대적’이 된다.  1) 내재면 위에서의 탈영토화는 (형식들, 기능들, 감응들의) 재영토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새로운 대지의 창조’에 입각해 재영토화를 정립한다.  2) 절대적 탈영토화는 “상대적 탈영토화와의 여전히 규정되어야 할 관계들에 관련해서 파악되고 작동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절대적’이란 사회와 역사의 초월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극복을 이끄는 개념이다.(베르그송의 지속과 비교)   ▶ 근현대 철학과 자본의 관계는 단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근현대의 철학들은 사회적-역사적 규정을 하나의 무한점(無限點)에까지 밀어붙여 다른 어떤 차원으로 넘어가곤 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철학은 그 고유의 교환가치를 띤 ‘정신의 부드러운 상업행위’도 아니고 ‘서구의 민주주의적 대화’에 고유한 순수한(disinterested) 사교성도 아니다. 그것은 영토들 및 인구들(개체군들)의 운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져 왔다. 즉 소통, 교환, 합의, 의견에 복종하지 않는 것, 통념과 명제에 속하지 않는 ‘para-doxa’의 추구가 철학이며, 때문에 새로운 대지와 새로운 민중을 지향하는 철학은 늘 탈시대적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유토피아적이다. 즉 철학은 자기 시대에 대한 비판을 극점(極點)으로까지 밀어붙이는 정치적 행위이다.  문제는 단지 자아도취적일 뿐인 비판이나 강도론적 방법의 무능함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철학이 (절대적 탈영토화의 구축을 통해) 정치적이 될 수 있는가이다. 들뢰즈의 사건론에는 이런 물음이 깃들어 있다. 사건을 위해 산다는 것(“사건의 자식이 되라”)이 중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 현재에 관련되는 대목은 부끄러움이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시대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 그것과 부끄러운 제휴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다음 물음을 야기시킨다: 내재면은 생명/삶을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에 예속시키는가?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철학은 현재에의 저항(resistance to the present)이며, 따라서 철학은 끝없이 스스로를 초월해야 한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이어받고 있다. 따라서 사유는 (개념의) 철학과 ‘현재의 환경=매트릭스(present milieu)’의 교차로에서 성립하며, 이것이 곧 정치철학 또는 정치적 철학이다. 철학의 사건은 역사의 선형적이고 진보주의적인 개념과는 관련이 없다. 철학은 오로지 그 (비물체적인, 잠재적인, 배아적인=싹트는, …) 사건의 개념을 가지고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the lived)’에 관계할 뿐이다. 사건을 사유함에 있어 철학은 현실의 삶의 모든 것을 탐사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변적 생기론이다. 장래의 사건은 현실의 사태를 엔트로피적 힘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생성/되기’와 ‘역사’가 구분된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철학관이 함축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철학을 개념의 ‘자기조직적(autopoietic)’ 창조로 보는 것은 그것에 거짓된 독립성을 주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적 결정을 거부함으로써 들뢰즈는 사유의 사건과 철학의 과제들을 비결정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현대 사상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곤경들에서 벗어나 내재면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 위에서 출몰하는 문제들은 사건과 역사적 현실성 및 경험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 점에서 철학적 생성/되기는 역사적 규정성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건과 사태는 존재의 전혀 다른 질서임을 강조한다. 혁명은 역사의 계기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서, 개념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즉 역사의 연대기에 저장될 계기가 아니라 생성/되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성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와의 투쟁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것이 된다. 그래서 사건은 역사에 구속되지는 않지만 역사를 디디고서 발생하게 된다. 아도르노는 베르그송주의는 생명의 미분화적 물결 속에서 변증법적 소금이 씻겨 내려가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즉 베르그송주의는 비합리적인 직접성의 컬트를 통해서 내재성의 자유와 역사적 현실의 사실성 사이의 이산(離散)=선언(選言)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새로운 베르그송주의는 아도르노의 이런 거친 비판을 논박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개념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생성/되기의 리듬과 함께 하는 개념들의 창조이다. ▶ 에릭 알리에즈는 들뢰즈의 베르그송이 함축하는 철학사적 의미를 칸트로부터 후설에 이르는 흐름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존재론적 일원론과 유물론을 제시한 점에서 찾는다. 베르그송주의는 존재를 ‘순수 긍정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내재성에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방향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을 제공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강조하듯이, 실존의 양태와 삶의 가능성은 어떤 초월적 원리나 가치에도 독립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유일한 규준은 실존의 성격, 삶의 강화(intensification)이다.   
52    제13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Ⅱ 댓글:  조회:730  추천:0  2019-03-17
▶ 그러나 『테스』를 반드시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테스가 리좀이, 탈주선이 되는 특이점들이 존재한다. 테스는 짙은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 그 때에는 자연도 그녀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내부는 선별된 외부이고 외부는 투영된 내부인 시점이 도래한다. 거기에서 테스는 모든 것들과 격리되어 야생 동물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서 ‘희망찬 삶의 맥놀이’가 뛰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그 어떤 기억도 없는 외딴 곳을 꿈꾼다. 그렇다면 테스가 알렉 더버빌을 죽이는 장면은 운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테스의 한계를 뜻하는가, 아니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여인으로 탄생하는 되기를 뜻하는가? 후자로 읽는 것은 하디를 배치들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인물들을 그린 작가로 보는 것이고, 그것은 곧 ‘되기의 블록’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 들뢰즈/가타리에게 글쓰기란 되기이다. 그것은 재현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선/삶의 선의 창조이다. 탈기표적, 탈주체적 창조, 얼굴 없는 창조. “모든 사람들처럼 되기.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그 누구도 아닌 사람, 어떤 사람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되기이다. 회색 위에 회색을 덧칠하면서 스스로를 그리기.” ▶ 베르그송의 전통에 따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souvenir’와 ‘memory’를 구분한다. “우리는 어릴 적 기억을 가지고서 쓰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아이-되기인 아이와의 블록을 통해서 쓴다.” 사건에 실존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을 시원이나 기억으로 흡수시키는 대신 그것을 특이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곧 사유와 감응의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런 글쓰기는 정치적 함축을 띤다. 즉 그것은 소수 문학이며 ‘도래할 민중의 씨앗들’을 뿌리는 작업이다. 소수 문학은 한 몰적 집단은 민족학도 아니고 사적 관심사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분자적 개체군들에 주목한다.  
51    제12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I 댓글:  조회:649  추천:0  2019-03-17
▶ 『천의 고원』에서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은 탈기관체 개념으로 변환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윤리학적 함축이 깃든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알(卵)로서, 이것은 강도=0의 순수 잠재성이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자아가 자신의 되기를 실험하는 환경이다. 그러나 탈기관체가 층화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탈기관체는 층화와 함께 있다. 탈기관체에의 추구는 기원에로의 되돌아감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조건의 자발적 변이일 뿐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적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화와 주체화를 변이시켜 가는 것 또한 탈기관체를 통해서이다. 탈기관체는 탈아적(脫我的) 알(卵)이다. 그것은 타자성(alterity)의 장소이다. 그것은 창조적 첩화의 장소이다. 탈기관체는 ‘intense germen’(강도적 유아幼芽)이다. 그러나 이는 기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성/되기의 잠재성을 가리킨다. 기계적 이질생성과 리좀적 배치들에는 이런 생성/되기들이 항상 함축되어 있다. ▶ 일직선적인 계보학적 기억들로부터 창조적 되기로의 이런 이행을 예시하기 위해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 家의 테스』를 생각해 보자. 테스는 유전자 결정론을 깔고 있는 비관주의적 소설이다. 여주인공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식질’의 또 하나의 예이며, 하디는 철저한 다윈주의에 입각해 테스나 주드 같은 부적응자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도태되는가를 그린다. 주인공들은 “잔혹한 자연법칙이 그들에게 떨어뜨린 감정(emotion)의 무게에 눌려” 신음한다. 모이라와 하마르치아는 본능과 유전형질(inheritance)로 바뀐다. 테스는 여섯 명의 데비필드 아이들을 보면서 맬서스를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연의 도안의 결과들일 뿐이다. 노도처럼 닥쳐오는 산업사회라는 객관적 환경, (에인젤 클레어를 실망하게 했던) 도덕적-문화적 환경 또한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힘이다.    ▶ 로렌스는 하디와 다른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분석한다. 로렌스에게 생명이란 잉여이며 넘침이다. 약동이 없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 약동이 있다는 것이다. 로렌스에게 생명은 탄력적인(elastic) 것이고 불연속적인(discontinuous) 것이다.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들이 언제나 같은 결론으로 치닫는다고 본다. 자연과 사회에 의한 개인의 압살. 로렌스는 이 점에서 근대의 비극에는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에게도 볼 수 있는 위반(transgression)의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그렇다) 하디의 소설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법(칙)을 인식하고 사랑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에서 사랑은 늘 법(칙)과 그것이 가져오는 죽음이라는 결과에 의해 으깨어진다고 본다. 기억이 있을 뿐 생성/되기는 없다. DNA를 물신화(物神化)하는 도킨스의 생각도 바이스만-하디의 연장선상에 있다.  
50    제11강 동물-되기 댓글:  조회:679  추천:0  2019-03-17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층화와 공재면/탈기관체가 밀고 당기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생명체는 층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인간의 비인간적 되기들’이 존재함을 역설한다. 모든 되기는 분자적이다. 이는 곧 생명체를 본질=종을 넘어 개체군으로 보는 것이고, 나아가 개체군으로 통계처리를 할 수 없는 ‘분자’의 차원에서 봄을 뜻한다. 의식적인 동물-되기는 인간에게서만 성립하지만, 자연세계에서도 동물-되기는 성립한다. 말벌의 양란-되기와 양란의 말벌-되기가 그 좋은 예이다.     양란 (tropical orchid)     ▶ 행동학적 접근에서 신체는 기관들과 기능들, 종과 유로 규정되기보다는 ‘감응(感應)’(스피노자의 ‘affectus’)하는 신체는 해부학이나 분류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에 감응하고 스스로의 특이성들과 강도들의 장, 즉 ‘氣’를 변화시켜 자신의 존재 여건을 자발적으로 바꾸어가는 존재이다. 감응하는 신체의 감각은 식별 불가능 또는 규정 불가능의 지대(地帶)를 통과한다. 한 개별화된 배치의 부분을 형성하는 동물의 능동적/수동적 감응들에 대한 윅스퀼의 논의는 스피노자와 연결될 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진드기의 예에서 중요한 것은 생리학적 특성들이 아니라 관계, 정도, 그리고 속도의 리듬이다. ▶ 동물-되기는 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려는 융적인 시도가 아니라 차라리 층화가 더욱더 무너지고 공재면이 두드러질 미래를 염두에 둔 논의이다. 동물-되기는 인간적 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가두어 이해하는 정신분석학과 대립한다. 동물-되기는 표상/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감응의 문제이다. 꼬마 한스와 말의 관계는 주관적 몽상의 관계가 아니다. 동물-되기의 감응은 실재적인(real) 것이다. 분자-되기는 종과 유라는 몰적 질서를 일탈한다. ▶ 표상/재현은 인간적 형식과 질서를 절대시하는 문화주의와 도덕주의를 은폐하고 있다. 동물-되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표상의 함정에 빠지는 것, 즉 신체를 기관들과 기능들의 질서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첩화에 있어 동물의 왕국은 강도와 근접성(진동들과 운동들)의 지대들에 의해 정의되는 탈기관체로 화한다. 여기에서 꼬마와 동물은 ‘주체들’이 아니라 복잡한 배치들에서의 ‘사건들’로 화한다. 배치들은 환경과 얽혀 있다. 시공간적 관계들은 사물의 술어들이 아니라 배치들 또는 복수성들의 차원들이다. 동물들은 공생적 복합체들에 들어가 활동한다.(포식 동물의 시공간)   ▶ 둔스 스코투스는 ‘이것’ 즉 개체화하는 차이 개념을 제시했다.(라이프니츠의 ‘완전 개념’과 비교) ‘이것’은 기존의 분류 방식을 깨는 무수한 ‘entities’들이다. 그것은 분자들/입자들 사이의 운동과 정리라는 경도적 관계들과 감응을 주고받는 위도적 능력들에 관련된다. 그것은 전통적인 실체도 주체도 아닌 어떤 개체이다. 주체들은 이 속도의 경도들과 감응의 위도들의 카르토그라피 내의 개체군들로서 존재한다. 자연은 집단적 배치들로 존재하며 이는 ‘탈주체적 개체화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속도들과 역능들/감응들을 통해 진화한다.  중요한 것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몰적 구성체는 분자적 무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되기는 언제나 몰적 외연을 포함한다. 정신분석학은 되기들을 하나의 콤플렉스에, 몰적 규정의 콤플렉스(오이디푸스, 거세)로 환원시킨다. 프로이트가 늑대 인간의 여러 늑대들을 하나 즉 아버지로 환원시킨 것이 그 예이다.  ▶ 분열분석 또는 리좀학의 목적은 인종, 혈족, 종, 유 등과 같은 몰적 구분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 덩어리진 현상들의 선험적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맥락에서 이것은 미시물리적 차원과 생물학적 차원이 별개가 아님을 말한다. 이 차원에서는 열역학조차도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배치는 통계학이 무너지는 탈주선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의 생성은 분열생성(schizogenesis)이며, 횡단적 소통, 포함적 선언들(inclusive disjunctions), 다성적(多聲的) 연언들(polyvocal conjunctions)을 통한 생성이다.  ▶ 몰적 구성체들은 분자적 힘들의 통합이자 총체화이다. 분자적 무질서의 부분적 대상들이 결핍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욕망은 결핍으로 파악된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은 분자적 복수성의 적극적 산포가 아니라 (신경증이나 거세 유형들에서 볼 수 있는) 거시적 규정성들의 주체들만을 다룬다. 욕망을 결핍으로 봄으로써 사람들은 욕망을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특정한 목적, 목표, 의도에 연관시킨다. 이로써 욕망은 생산의 실제 과정에서 유리되어 표상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49    제10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Ⅱ 댓글:  조회:686  추천:0  2019-03-17
▶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로렌츠나 틴버겐 같은 (동물)행동학자들은 본능이 학습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해 왔다. 예컨대 ‘반사(reflex)’ 같은 개념은 중추신경 같은 신체의 특정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자극-반응의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로렌츠는 본능적 행동은 해부학적 구조만큼이나 항상적이고 고정적이라고 말한다. 보다 복잡한 상황에서는 ‘본능적 복잡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로렌츠나 틴버겐은 이 메커니즘에 근거해서 종, 유, 나아가 문(phylum)까지도 분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최근의 행동학은 행동의 패턴을 행위의 강도 조절, 시간 조절, 속도 조절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Thorpe, Merleau-Ponty) 더 중요한 것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를 벗어나 동물과 환경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는 점이다. 선천성과 후천성을 둘러싼 게으른 논쟁에서 벗어나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항목이 환경적으로 안정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동물들의 적응(adaptation) 자체가 학습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도 강조되고 있다.(McFarland) 가변성과 유연성이 중요하다. 관계는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자기가 자기를 완벽하게 안다 가정해도 타자가 어떻게 나올지는 시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최근의 행동학은 이런 존재론적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 모든 영토는 다른 종들의 영토들을 포괄하거나 가로질러 간다. 로렌츠가 말한 것처럼 공격성이 영토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영토성이 공격성을 낳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을 따라, 이런 구도에서의 자연을 음악적으로 파악한다. 즉 자연에 대한 선율적인, 다성음악적인, 대위법적인 파악이다. 새들의 노래, 거미의 집짓기, 연체동물(예컨대 소라)의 껍질, 진드기 등이 그 예이다. 연체동물의 죽음은 소라게의 거주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목적론적 자연 개념에서 선율적 자연 개념으로의 이행을 함축한다. 여기에서 자연의 기예(技藝)와 인간의 기예는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는다. 연체동물의 껍질과 게 사이에는 대위법적 관계가 성립하며, 여기에서 성립하는 되기에는 기능적인 요소들(성, 생식, 출산, 양육 등)만이 아니라 ‘sensibilia’도 포함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의 이 창조적 양태를 ‘art=기예’라 부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의 분석을 더 밀고 나아가, 동물-되기는 적응의 대상들(traits)의 선별만이 아니라 물리-화학적 강도들과 근접성의 영역들(zones of proximity)의 작용까지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것들이 퓔룸적 혈통들을 가로지르며, 따라서 생명은 음악적인 ‘생성/되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본능과 학습을 둘러싼 논의가 아니라 ‘공재성(consistance)’에 주목하는 것이다. 공재성에 주목했을 때 리좀적 배치를 탐구할 수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행동을 중심들과 활동(activation) 사이의 선형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들로 모형화할 수 없다고 본다. 생물학적-행동적 기계학(machinique)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선천적인 것은 탈코드화되고 획득된 것은 영토화된다. 행동에서 배치로. 어떤 국소적 작용도 다른 것들과 얽혀 있고(coordinated) 중심적 주체가 없이 거대한 결과가 현실화된다/동시화된다. 여왕개미는 없다. 이는 곧 창발성(emergence)의 논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뇌들, 신체들, 분자들, 세계들(이들 모두는 서로의 영토들과 겹치면서 존재한다)을 포괄하는 ‘산포된 지능(distributed intelligence)’을 통해 행동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카우프만이 강조했던 자기촉매작용은 하나의 유기체 내에서가 아니라 배치들 전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탄생도 특정한 메커니즘의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산포의 결과일 뿐이다. 지연된 발생(예컨대 幼生生殖), 기관들의 특별한 탈영토화(예컨대 손과 발), 그리고 특히 환경의 상관적인 탈영토화(숲에서 초원으로). ‘잃어버린 고리’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배치의 변환인 것이다.
48    제9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I 댓글:  조회:684  추천:0  2019-03-17
▶ 지능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이해를 추구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폰 윅스퀼이 거론된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이 모두 윅스퀼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윅스퀼 (1864~1944) 독일의 동물학자, 비교심리학자 인간이 아닌 동물을 중심으로 동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동물과 그 동물이 속해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기능환(機能環)'으로 표현하고, 각 동물은 다시 넓은 자연 속에서 그 종(種 )의 독특한 환경 세계를 주체적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환경세계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환경 세계론은 새로운 생물행동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생물행동학자인 로렌츠나 틴버겐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클라크 같은 사람도 마음을 ‘a leaky organ’으로 규정하면서 행동주체(agent)의 표상주의적 개념화들을 벗어난 심신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입장들에 따르면 지능은 상이한 물질적 공재(共在)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지능은 행동의 다각도의 측면들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하며, 행동은 개체들을 관통하는 복잡한 물질적 체계들(배치들) 및 계통적 혈통들과 유기체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리좀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적 진화는 되기의 블록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제 ‘행동학(ethology)’은 행동주체의 ‘behaviour’에 대한 관한 담론에서 배치들의 운동에 대한 담론이 된다.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47    제8강 자기조직화와 기계적 이질생성 댓글:  조회:720  추천:0  2019-03-17
※ 지금까지 배운 내용 복습 ▶ ‘기계적 이질생성(machinic heterogenesis)’이라는 가타리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기조직화 이론은 현대 사상의 중요한 한 요소이고 들뢰즈/가타리에 의해서도 수용되지만(이 이론은 ‘센트럴 도그마’로 대변되는 환원주의와 결정론을 논박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동시에 들뢰즈/가타리의 시각에서 볼 때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 이는 진화의 ‘기계적’ 성격과 관련된다. ▶ ‘횡단적 소통’은 진화에서의 계통수들(genealogical trees)을 뒤섞는다. 물론 이 뒤섞임의 개념은 계통수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뒤섞임까지 포함한 전체적 지형도를 볼 필요가 있다. 계통적 계열들은 그보다 근본적인 기계적 퓔룸을 전제한다. 기계적 퓔룸은 여러 계통들을 낳지만 동시에 물질적 힘들의 횡단적 움직임들을 통해 새로운 생성들을 낳는다. 계통수들은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진행되며, 친자관계/分岐(filiations)에 입각해 진행된다. 그러나 새로운 생성들은 새로운 결연들(alliances)을 통해 진행된다. 생성의 선은 특정한 매듭들을 가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로지 ‘중간(middle)’만이 있다. 이 중간을 통해서 생명은 ‘운동의 절대 속도’를 향유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사이(entre=in-between)’ 개념은 중요하다. 모든 것은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이는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생성의 장이다. 카오스를 통해서 개체들의 코스모스가 생성한다. 이러한 생성이 도태압을 무너뜨린다. 물론 도태압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도태압은 그것에 대응하는/응답하는 유기체들의 활동을 고려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곧 행동학적 배치들(ethological assemblages)을 함축하고 있다. ▶ 기계적 배치들에의 주목은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자기조직화와의 비교를 통해 계방계들로서의 생명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기 때문이다. 자기조직화 개념은 생명체란 자기차이성(自己差異性)을 보여주는 존재임을 잘 설명해 준다. 이는 곧 생명체가 계방계임을 말해 준다. 자기조직적 유기체 즉 ‘기계’(= 신체)의 기능은 그것의 특수한 유전적 구조 또는 조성(composition)으로 환원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의 구성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들이다. 자기조직적 존재들은 스스로의 조직화와 경계들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들은 “조직화를 통해 닫힌” 존재들이다. 따라서 자기조직적 존재들의 진화는 차이들의 와류에서 계속 메타동일성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로 이해된다.(이케다 기요히코) 그런 동일성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해체(disintegration)가 발생한다. 따라서 자기조직화 이론은 자기동일성을 지키려는 개체들의 속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진화 전체의 창조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 사실의 문제를 넘어 삶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련된다. ▶ 기계적 진화는 이질생성들을 종합하며 또 ‘공재(共在=consistency)’의 형성을 포함한다. 기계적 배치들은 포텐셜 장들과 잠재적 요소들을 통해서 場을 만들어나가며, 종과 유의 구조를 넘어 기술적-존재론적 문턱들을 가로지른다. 자기조직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장 위에서이다. 이것은 기계적 자기조직화를 기계적 이질생성으로 봄을 뜻하며, 자기조직화라는 모델에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한 비평형 개념을 도입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타자성(alterity)은 보다 넓은 경지에서는 창조적 진화를 위한 조건으로서 이해된다. 이는 배치들의 행동학과 관련된다.  
46    제7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Ⅱ 댓글:  조회:715  추천:0  2019-03-17
▶ 들뢰즈 사유의 구도는 결국 고대의 본질철학과 근대의 주체철학에 대립한다. 또 철학을 언어철학이나 사회철학, … 등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들과도 대조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사유하지만 그러나 경험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 자연과학과의 연관성, 예술과의 연관성, 종합적-횡단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 ▶ 창조적 첩화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를 일체의 목적론적 함축을 배제하고서 사유하고자 한다. 발생의 정도, 복잡성에 입각한 위계를 비롯해 일체의 일방향적 사고는 배제된다. 횡단적 소통에 의한 ‘괴물들’의 탄생, 분자적 층위에서의 탈영토화, 퓔룸이라는 물질적 바탕에서의 새로운 존재들의 생성이 사유된다.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가능케 한다. 리좀의 개념. 베르그송에 여전히 함축되어 있는 진화의 방향성조차 거부된다. 창조적 첩화는 ‘동물-되기’와도 관련된다. 동물-되기는 인간의 의식적 되기의 맥락과 생명철학적 맥락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 동물-되기는 횡단적 소통을 통한 창조적 첩화를 뜻하며, 횡단적 소통은 또한 ‘되기의 블록’, ‘생성의 블록’과 관련된다.  첩화는 퇴행이 아니다. 예컨대 프로이트에게서 나타나는 퇴행은 창조적 첩화와는 대극적인 사유이다.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분화(differenciation)가 아니라 블록들의 생성이다.  다윈주의자들이 볼 때, 또 결정론적 태도를 가진 과학자들이 볼 때 리좀적 생성을 무조건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조금 완화된 결정론자들의 경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법칙의 복잡성이나 유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에 비해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훨씬 급진적이며, 실증적 연구들의 통해 이런 대립이 해결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 들뢰즈/가타리의 가설을 받쳐 주는 요소들 중 하나는 진화에서의 전염성, 유행성 변화이다. 이는 리좀적 방식의 진화를 뒷받침해 주는 좋은 예이며, 도킨스 같은 유전자 결정론자조차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루스=바이러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질적인 존재들(인간, 동물, 박테리아, 비루스, 분자, 미세기관들, …) 사이에서의 전염과 유행은 분명 진화를 복잡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도킨스는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전자 결정론과 다위니즘을 견지한다. 캠피스는 이 점을 비판하면서 도킨스의 ‘extended phenotype’을 보다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들뢰즈/가타리의 생각은 매걸리스가 『세포 진화에서의 공생』에서 전개한 논의와 매우 가깝다. 진화에서 도태의 역할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신다윈주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진화에서의 진정 새로운 변화는 상이한 퓔룸들을 가로지르면서 나타나는 합병, 연합을 통해서이다. 합병과 연합을 통해서 유전자 자체에서의 큰 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유전자에 입각한 일방향적 인과나 유전자를 항구적인 동일성으로 보려는 생각들은 거부된다. 더 나아가 개체군의 사유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개체들 이하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중층결정.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개방계적 연구방식(open systems approach)’을 선취하고 있다 하겠다.  
45    제6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I 댓글:  조회:642  추천:0  2019-03-17
▶ 공재면으로서의 자연 조프루아 쌩-틸레르의 ‘추상동물’은 퀴비에가 그어놓은 경계선들을 무너뜨린다. 기관과 기능, 구조와 발생 유형들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속도와 강도에 기반하는 자연의 보편적인 면(面)을 발견했다. 조직화의 도안(조직면)은 무한히 유연한 추상기계로 화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거기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내재면이고, 또 모든 것에 대해 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의성의 면(일의면)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자연이며, 장횡거의 태허(太虛)이다. 이 개념을 통해 개체화된 현실성의 세계로부터 전개체적-비인칭적 잠재성의 세계로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명계에서의 비정상적 결연, 창조적 첩화, 횡단적 소통들이 사유될 수 있다. * 태허(太虛): 중국 사상의 기본적 개념의 하나로 우주의 본체 또는 기(氣)의 본체. 장자에게 있어 도는 일체의 것, 전체 공간(空間)에 확산되고 명칭도 표현도 초월한 실재(實在)이므로 이를 ‘태허’라 불렀다. ‘태허’가 기의 본체를 가리킨다고 한 사람은 송(宋)의 장횡거(張橫渠)로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에서 ‘태허즉기(太虛卽氣)’라 하고 기는 태허에서 생기고 모여서 만물을 생성하며 기가 흩어지면 함께 만물은 소멸하나 기는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즉, 기가 흩어진 모습이 태허라고 설명하였다. ▲ 공존면: 현실화된 존재들의 공존 / 공재면: 잠재적 차원에서 모든 것들이 공존. ▲ 일자성과 일의성의 차이 ▲ 장자의 제동(齊同)의 의미 ▲ 공재면 자체의 생성 (베르그송적 차이를 사유하기) ▲ 차이와 동일성  
44    제5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Ⅱ 댓글:  조회:675  추천:0  2019-03-17
▶ 베르그송-들뢰즈에 의해 ‘복수성’이라는 말은 실사(實辭)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는 실체들을 셈으로써 성립하는 서술어로서 ‘많음’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실사인 ‘다양체’가 되었다. 다양체가 포함하는 차이들은 ‘크기들(magnitudes)’이 아니라 ‘거리들(distances)’이다. 크기들은 등질적 공간에서 성립하고, 거리들은 연속적 변이가 발생하는 다질적 공간에서 성립한다. 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소산적 수’이고 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능산적 수’이다. 능산적 수는 곧 잠재적 수이다.  다양체는 강도들을 통해 측정된다. 강도는 크기들이 아니다. 20도와 20도를 합친다고 40도의 날씨가 되지는 않는다. 시속 60킬로로 10킬로를 두 번 달리는 것과 시속 120킬로로 10킬로를 달리는 것은 같지 않다. 단순한 양이 성립하는 것은 등질적 공간에서이다. 세계를 강도로 볼 때 수학적 환원주의는 거부된다. ‘intensity’는 ‘intension’과 통한다.(우리말 ‘강도’와 ‘내포’가 잘 결합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intension’을 ‘내포도’ 또는 ‘內含度’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다양체는 선들과 차원을 가진다. 다양체는 계열들로 형성된다. 다양체가 함축하는 질적 복수성은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은 (재)영토화와 탈영토화 때문이다. 다양체는 늘 생성한다. 접속, 영토화/탈영토화, 탈주선, ‘코드의 잉여가치’, 리좀, 창조적 첩화 등이 모두 이와 연관해서 이해된다.    생명체/주체 또한 다양체이다. 들뢰즈에게서 ‘균열된 나  ’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진화’는 다양체의 생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다양체들의 생성은 곧 복합적인 형태의 소통을 함축한다. 이것은 매걸리스의 ‘공생적 발생(symbiogenesis)’ 개념과 통한다. 이는 리좀적 진화로서 기존의 분류학적-계보학적 틀을 깨는 횡단적 배치들(transversal assemblages)을 통해 진화를 이해한다. DNA는 작은 레플리콘들(복제 단위들) ― 플라스미드들(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유전인자), 비루스들, 트랜스포손들(레플리콘들 사이에서 전이되는 유전자군) 등 ― 의 형태로 쉽게 돌아다닌다. 리좀 형태의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계열들의 속도와 방향이다. 때문에 리좀학은 ‘반계보학’이며 라마르크적인 방향성은 거부된다.  베르그송과 다윈은 공히 개체군들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복수성의 사상가들이다. 특히 신다윈주의는 발생을 속도, 비율, 계수들, 미분적 관계 등으로 파악한다. 발생은 미리 접혀 있는 것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발생의 정도는 증가하는 완전도, 또는 분화, 부분들의 복잡성의 증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태압, 촉매작용, 전파 속도, 성장비, 진화, 돌연변이 등과 같은 미분적 관계들과 계수들에 의해 측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개체군을 몰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분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대수의 법칙에 근간하는 통계학,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고전적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리좀적 차원에 주목하는 것은 곧 분자적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개체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유의 수준을 개념적 유기성의 차원에서 구체적 지각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곧 가장 구체적인 차이의 운동들에 주목하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함축한다.    
43    제4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I 댓글:  조회:700  추천:0  2019-03-17
▶ 베르그송은 두 종류의 복수성(multiplicite)을 구분: ①수적, 공간적, 현실적 복수성과 ②질적, 시간적, 잠재적 복수성. → 이 구분은 과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 물질과 생명을 구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질적 복수성을 ‘다양체’로 부를 수 있다. 전통 사유가 일자와 다자의 조각그림-오려-맞추기의 사유(樹木型 사유)를 펼쳤다면, 베르그송-들뢰즈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성하는 다양체이다. ▶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차이 1) 들뢰즈에게는 베르그송적인 급진적인 연속주의는 함축되지 않는다. 2) 들뢰즈에게는 물체와 생명체의 날카로운 구분보다는 이들이 함께 형성하는 배치가 문제가 된다. 3) ‘진화’의 뉘앙스가 훨씬 복잡하게 된다. (리좀, ‘산종(散種)’, ‘창조적 첩화’.) 4) 베르그송: 氣가 물질성과 생명성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 들뢰즈: 氣가 리좀 상태로 탈주하는 방향과 층화되고 석화되는 방향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42    제3강 탈기관체와 유기체 댓글:  조회:727  추천:0  2019-03-17
▲ 들뢰즈/가타리는 분자 수준과 단백질 수준을 내용과 표현으로 파악.  ▲ 내용으로부터 표현이 연역되는 것이 아니다. → 일방향적 설명(환원주의),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 ▲ ‘번역’이 아니라 코드의 잉여가치.  ▲ 다윈주의는 대수(大數) 개념에 입각한 통계적 덩어리들을 다루는 몰적 사유.  ▲ ‘비정상적인’ 동물-되기들.  ▲ 탈영토화 개념이 코드의 잉여가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 (탈주선의 일차성도 상기.) 이로써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동일성의 사유)에서 벗어난다. ▲ ‘진화’라는 개념의 뉘앙스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것.  ▲ 단지 이행, 다리 놓기, 턴넬 뚫기가 있음. creative involution! 퇴행도 점진도 아닌 되기가 있을 뿐.   ▶ 들뢰즈와 가타리는 층화(stratification)의 세 양태로서 유기체화, 기표화, 주체화를 든다. 유기체화로부터의 탈주는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유기체는 하나의 통일성을 보존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지적했듯이 그 부분들은 그것들이 유기체를 위해 존재하는 한에서 극소의 자율성만을 가진다. 지구라는 탈기관체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을 나른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또한 층화가 발생한다. 층들의 체계는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강도들과 특이성들을 ‘포획’한다. 유기체적 층화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로 구성된 ‘체(corps)’를 ‘유기체’로 만드는 과정이다. 유기층에서 유기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유기체와 탈기관체 사이에서의 ‘윤리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유래한 탈기관체 개념을 자신들의 체계로 흡수해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탈기관체는 내재적 장이다. 그것은 강도들을 산출하고 분배하는 ‘욕망’(의 장)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달리 말해 유기체들이 탈기관체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와 함께 있으며 늘 일정한 과정 속에 있다. 탈기관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탈기관체는 한 유기체의 구성에 포함되어 있는 접힘들, 침전들, 엉김들의 발생의 터가 되는 ‘초저속의(얼음 같은) 실재’를 구성한다. 그에 비해 유기체는 이 체 위에 존재하는, 그것에 형식들, 기능들, 위계적 조직화들, 초월성들을 주는/부과하는 층(stratum)을 구성한다. 그러나 유기체와 탈기관체가 불연속적 타자로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1) 탈기관체는 층들 속에서 작동하기도 하고 또 탈층화된 공재면 위에서 작동하기도 한다. 즉 하나의 층으로 간주되는 유기체에 (기관들의 견고한 조직화에 대립하는) 탈기관체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유기체의 층에 속하는 그것[유기체]의 탈기관체가 존재하기도 한다. 즉 유기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기체를 힘들, 강도들, 지속들의 보다 넓은 장 속에 위치시켜 보자는 것이다. 이 장 안에서 탈유기적 생명과 층화된 생명의 끝없는 상추(相推)가 계속된다. 베르그송 및 기학과 비교. 2) 탈기관체들의 ‘되기’는 ‘이것-임’/특이성을 통한 개체화, 그리고 영도(零度)에서 시작하는 강도들의 산출을 포함한다. 이는 구분되는 계통들을 가로지르는 횡단성(橫斷性)을 낳는다. 결국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는 유기체 개념은 위계화되고 초월화된 조직화로 이해된 유기체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분자적 층위 또는 리좀적 층위를 선험적 장으로 제시함으로써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얽히는 카오스모스의 자연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탈기관체 개념은 자연철학만이 아니라 윤리학적 함축을 띠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신체=‘기계’에는 무한한 잠재성이 내재해 있다. 신체의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것, 다른 신체들과의 좋은 만남을 이루는 것, 새로운 변양과 감응을 시도하는 것, 의미 있는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 …이 중요하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와 기학을 함께 사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친 탈층화는 오히려 불행한 결과들을 낳기도 한다. 강도 높은 신체가 되는 것, 유기체로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41    제2강 복잡성과 유기체 댓글:  조회:690  추천:0  2019-03-17
▶ 들뢰즈/가타리의 주요 개념은 ‘creative involution’이다. 이 개념은 들뢰즈/가타리를 다윈뿐만 아니라 베르그송과도 구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를 이끈다.(『스피노자와 실천철학』에서 「스피노자와 우리」 참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 배치의 한 요소로서의 인간이다. 이제 인간의 ‘진화’가 논의된다면 자연 및 생명체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보다 기계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가 더 중요하다. ‘환경’의 의미 자체가 바뀌었다. ‘기계적 퓔룸(machinic phylum)’의 개념이 중요하다. 퓔룸은 연속적 변이(정도의 사유, 베르그송주의)의 바탕/주체로서 특이성을 실어 나른다. 퓔룸의 차원에서는 인간과 自然이 통합된다. 퓔룸은 디아그람과 쌍을 이루어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추상기계가 구체적인 형상을 띠게 되면 배치가 된다.(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메카닉들은 인간-주체의 발명품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배치로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메카닉에 흡수된 비관적 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메카닉, 그리고 동식물들 등이 함께 형성하는 기계적 배치가 문제될 뿐이다. 아울러 언표적 배치가 함께 고려되면서 문화의 차원이 함께 다루어진다.   ‘공재면’, ‘내재면’은 카오스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구조-섬들 아래에 또는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장, 구조-섬들이 거기에서 개별화되어 나오고 또 그리로 돌아가는 기(氣)가 공재면, 내재면이다. 태허(太虛)에 해당한다. 氣, 太虛는 또한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실체=자연=신이기도 하다. 같은 논리가 보다 구체적인 여러 층차들에서 적용될 때 ‘탈기관체’ 개념이 성립한다.   ▶ 들뢰즈/가타리는 다윈, 바이스만,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한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유기체보다 그 아래에서 지속되고 있는 ‘생식질’(바이스만)에 중점을 두고서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몽동으로 대변되는) 개체화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것은 구조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탈주체주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각의 한 급진화인 유전자 결정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유전이나 진화는 생물학에서보다는 더 복잡하고 넓은 함의를 띠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현재 주류 이론인 신다윈주의, 유전학, 분자생물학을 흡수하지만 그 테두리에 갇히지는 않는다.   바이스만의 생물학과 더불어 복잡성 이론 및 자기조직화 이론 또한 중요하다. 여기에서 복잡성 이론은 물리학적 맥락보다는 생물학적 맥락을 가리킨다. ‘complexity’는 글자 구성 그대로 “함께-접혀-있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의 이론이다. 자연도태의 주인공은 환경이고 생명체는 도태/생존의 순서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생명체와 환경은 연속적이며, 생명체는 개방계(open system)을 구성한다. 생명체는 단지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응답하는(repliquer) 것이다.(베르그송)  굿윈의 말처럼 생명체는 단순한 내적(유전자 수준에서의) 변이의 결과가 아니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며, 또 캠피스의 말처럼 적응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그 자체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과정과 산물들은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도 이런 구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렐라에 따르면 생명체와 환경은 ‘상호 종화’와 ‘공결정(codetermination)’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보다 발달한 생명체일수록 이런 연계성의 복잡성도 커진다. 이 생각은 ‘탈영토화’ 개념으로 이어진다.   철저한 다윈주의자인 모노에게도 이런 생각은 나타나 있다. ‘도태압(淘汰壓=selective pressures)’은 유사한 생태권들(ecological niches) 내에서 살아가는 상이한 유기체들 사이에서의 종적(種的) 상호작용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기체는 이 과정에서 ‘선별적인’ 역할을 하며, 유기체가 더 발달될수록 자율성은 점점 더 커진다.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기계’와 ‘메카닉’을 구분하며, 모든 기계들을 내재면에 놓고서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부는 단지 선별된 외부이며, 외부는 단지 투영된 내부일 뿐이다.” 이는 윅스켈과 메를로-퐁티를 거쳐 들뢰즈/가타리로 이어지는 생각이다(메를로-퐁티와 들뢰즈/가타리의 차이도 음미). 그리고 생명체의 자율성은 배치와 탈영토화에 관련해 이해되며 자기조직화도 이런 개념틀 속에서 이해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칸트로부터 오늘날의 자기조직화 이론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통일성, 안정성, 동일성의 개념은 비판된다(그러나 이케다가 강조하는 동일성의 역할도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유전자 결정론과 대립한다. 최근의 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더 이상 물질적 구조의 부대현상(epiphenomenon)으로 보지 않으려는 입장을 다듬어 왔다. 유기체의 생명은 비선형적인 피드백 공정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자기조직계들(autopoietic systems)의 창발성(創發性)으로 이해된다. 유기체들은 자기조직 및 자기조절(self-regulation) 능력을 가진다. 생명은 DNA가 아니다. 분자들의 활동, 유전자들의 활동, 형태발생적 맥락 등은 단순한 연역관계를 맺지 않는다. 로버트 로젠은 바이스만의 생각을 전복시킨다. 체세포와 유기체가 중요한 것이다. 생명이란 형태발생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복잡계들의 창발적 현상이다. 진화 없이 생명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생명 없이 진화를 생각할 수는 없다. 생명체들은 단지 진화 과정의 매듭들인 것이 아니다. 생명체의 활동이 진화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40    제1강 들뢰즈/가타리 사유 개관 댓글:  조회:787  추천:0  2019-03-17
▶ 이 강의는 『천의 고원』 중 「변신」 장을 생명철학적으로 심화시켜 이해하려는 강의이다. 피어슨의 저작(Pearson, Germinal Life, Routledge, 1999)을 따라 강의할 것이다. 마누엘 데란다의 저작(Manuel DeLanda, Intensive Science & Virtual Philosophy, Continuum, 2002)이 들뢰즈 사유의 자연과학적 이해/확장에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브라이언 마수미의 저작들(Brian Massimi, A User's Guide to Capitalism & Schizophrenia, MIT Press, 1992; Parables for the Virtual, Duke Uni. Press, 2002) 또한 뛰어나다. 군지-페기오 유키오의 『生成する生命』도 들뢰즈를 기초적인 원천으로 삼고 있다. ▶ 변신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베르그송,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다.  개별화된 존재들, 개체들은 카오스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과도 같다. 그러나 카오스는 단순한 암흑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개체들이 거기에서 나와 거기에로 돌아가는 근원적 氣, 太虛와도 같은 것이다. 이를 ‘공재면(plan de consistance)’이라 부른다. 따라서 개체화되어 있는 차원을 근거로 하는 사유들은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는 피상적이다. “배경(ground)을 일깨우고 형태[피겨]를 와해시키는 것보다 더 큰 죄(sin)는 없다.”(『차이와 반복』) 그러나 피상적 차원이 소홀히 되는 것은 아니다. ‘superficial’의 차원, 즉 표면의 차원은 깊이의 차원과 대등하게 중요하다. 『차이와 반복』이 잠재성과 강도 개념을 중심으로 한 깊이의 철학이라면, 『의미의 논리』는 사건과 계열화 개념을 중심으로 한 표면의 철학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베르그송적 구도를 띤다. 형상들은 물질-생명의 운동에서 파생하는, 그것도 우발적으로 파생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시간이 우주의 근본 주재자가 된다. 전개체적-비인칭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서 ‘존재론’(전통적 의미)을 생각할 때 ‘이것(haecceitas)’에 관한 둔스 스코투스의 생각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기존의 존재론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존재들(entities)을 우리 시야에 펼쳐 주는 존재론. 이 존재론은 또한 ‘이것들’의 잠재적 장으로서의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를 설정하게 만든다. (공재면은 궁극적 탈기관체이다)    개체화된 존재들 ― ‘기계들’(이 말에는 스토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부터 현대적 맥락까지 다양한 맥락이 스며들어 있다) ― 사이에서는 한편으로 영토화/탈영토화의 과정이 발생하고, 그와 더불어 감응(affectus)에서의 변화도 발생한다. 이로부터 갖가지 윤리적-정치적 문제들이 발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창조적 행동학(ethology)을 구상한다.  
39    제12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Ⅲ 댓글:  조회:607  추천:0  2019-03-12
    양란 (tropical orchid) 탈영토화의 운동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상대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양란(洋蘭)은 하나의 이미지, 말벌의 트레이싱을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이 이미지에 스스로를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그 자체 양란의 생식 기구의 한 부품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며, 꽃가루를 실어 나름으로써 양란을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말벌과 양란은 둘이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물론 양란이 기표적 방식으로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해냄으로써 말벌을 흉내 낸다고(미메시스, 의태적 모방, 속임수 등)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층들의 층위에서만 참이다. 즉 흉내는 두 층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성립하며, 양란에서의 식물적 조직화가 말벌에서의 동물적 조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좀에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 흉내/모방 이상의 그 어떤 것, 즉 코드의 포획, 코드의 잉여가치, 원자가의 증가, 진정한 되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양란-되기, 이 되기들 각각은 한 항의 탈영토화와 다른 한 항의 재영토화를 함축하며, 두 되기는 탈영토화를 계속 더 멀리 밀고나가는 강도들의 순환을 따라 서로를 이끌어내고 또 서로 교대한다. 흉내내기나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다. 두 이질적 계열들이 공통의 리좀으로 구성된 탈주선에서 파열되고 있는 것이다. 레미 쇼뱅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화의 도식들이 수목형 모델 및 혈통 모델 같은 낡은 형식들을 버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하나의 비루스는 생식세포들에 접속해 스스로를 하나의 복합종의 세포유전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전혀 다른 어떤 종의 세포들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그럴 때면 이전 숙주에서 유래한 ‘유전정보들’을 옮기기도 한다. 진화의 도식들은 보다 덜 분화된 것에서 보다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즉 수목형의 혈통 모델들을 따라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리좀을 따라 이질적인 것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이미 분화된 하나의 선에서 다른 하나의 선으로 건너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의 원리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의 논리이다.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 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은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 굴은 동물 리좀이다. 쥐 굴에서는 이동 통로로서의 도주선과 저장이나 서식을 위한 지층들이 때때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38    제11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Ⅱ 댓글:  조회:597  추천:0  2019-03-12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개념들, 개체들, 집단들, 사회구성체들 ―을 펼치는 것이리라.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또는 그 중 하나를 가로지르는, 그래서 기표(작용)적인 단절들에 대항. 하나의 리좀은 임의의 어떤 곳에서 끊어지고 꺾어질 수 있으며, 그것의 이런저런 선들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선들에 따라 수선하기도 한다. 이는 개미들에서조차 확인된다. 개미들은 동물-리좀을 형성한다. 그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기도 하며, 또한 끝없이 복구되기도 한다. 모든 리좀들은 자체의 절편선들을 내포하며, 이 선들을 따라 층화, 영토화, 조직화, 기표화, 귀속, … 등을 겪는다. 그러나 리좀들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며, 이 선들을 따라 끝없이 탈주한다. 절편선들이 하나의 탈주선에서 파열할 때마다 리좀에는 도약이 발생하지만, 탈주선은 리좀의 부분을 이룬다. 이 선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초적인 형식으로조차도, 이원론 또는 이항 분할에 근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탈주선을 긋지만, 늘 그 위에서 다시금 전체를 재층화하는 조직화들을, 하나의 기표에 권력을 재부여하는 구조들을, 하나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들을 되찾을 위험에 처하곤 한다. 집단들과 개인들은 오로지 응결되기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들을 내포한다. 그렇다, 개밀속도 리좀이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다시 시작되어야 할 어떤 선별의 산물일 뿐이다.  
37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I 댓글:  조회:642  추천:0  2019-03-12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I    리좀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의 원리를 제시한다.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촘스키가 구사하는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하나의 점 S에서 출발해 이분법에 따라 진행한다. 리좀에서는 그와 반대로 각각의 특질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학적 특질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언어학적 특질은 전형적인 수목형의 사유를 보여준다. ‘homme’는 생명체/무생명체에서 생명체, 척추동물/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 …로 이어지는 스무고개 놀이를 통해서 그 언어학적 특질을 부여받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특질(trait)은 촘스키적 특질(하나의 사물이 ‘유기적 재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아니고 일상적 의미에서의 ‘성질들’도 아니다. 성질들이 관찰에 관련되는 형용사적 특징들이라면, 특질들은 감응과 강도에 관련되는 동사적 특징들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즉 존재(esse)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할 수 있는가” 즉 능력(posse)의 문제이다. 짐을 끄는 말과 소 사이의 거리는 짐말과 경주용 말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독문학자와 하이데거 사이의 거리는 하이데거와 콰인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물이 분류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관조 속에 드러내는 성질들도, 내면적 감정들도 아니다. 행동/행위와 과정에서, 강도로, 감응으로 드러내는 특질들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리좀에서는 각종의 기호학적 고리들이, 상이한 기호체제들만이 아니라 상이한 지위의 사태들까지도 작동시킴으로써, 매우 다양한 코드화에 접속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쉬르에서 연원하는, 기표 중심의 ‘기호론’보다 퍼스에서 연원하는 ‘기호학’을 선호한다.)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들은 사실상 기계적 배치들 내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때문에 기호체제들과 그 대상들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의 경우, 그것이 명료한 것에만 논의를 국한시키고 랑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자 할 때조차도, 여전히 배치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적 권력의 유형들을 함축하는 어떤 담론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촘스키가 말하는 문법성,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인 S는 통사론적 표식 기구이기 이전에 이미 권력의 표식 기구이다 ―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 통합체와 동사 통합체(첫 번째 二分, …)로 나누어라. 우리는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차라리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고, 하나의 랑그를 의미론적이고 화용론적인 내용들에,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들에,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에 연결시키는 추상기계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비난한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하나의 기호학적 고리는 다양한 언어학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지각적, 모방적, 신체언어적, 인식적 행위들을 얽는 덩이줄기와도 같다. 따라서 자체로서의 랑그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방언들, 사투리들, 속어들, 특수언어들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화자-청자의 이상(理想) 같은 것은 없으며, 등질적인 언어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인라이히의 공식화에 따르면, 랑그는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어(母語)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지배적인 한 랑그에 의해 권력의 장악이 있을 뿐이다. 랑그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의 주위에서 안정된다. 그것은 구근(球根)을 이룬다. 그것은 줄기들과 지하수들을 통해서, 계곡물들을 따라, 또는 철로들을 따라 진화하며, 기름자국들처럼 번져간다. 우리는 언제라도 내적인 구조적 분해를 통해 랑그를 변화시킬 수 있으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뿌리들에 대한 탐구와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늘 계통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적인 방법이 아니다. 반면 리좀적인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로 그리고 다른 등록부들(registres)로 탈중심화함으로써만 분석할 수 있다. 하나의 랑그는 무능력해질 때에만 자체의 차원에 폐쇄되는 것이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개념들, 개체들, 집단들, 사회구성체들 ―을 펼치는 것이리라.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36    제9강 책의 두 가지 유형 댓글:  조회:551  추천:0  2019-03-12
※ 『천개의 고원』 텍스트 읽기 - 서론: 리좀 부분 (p.14~20)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 단위들, 수렴의 CsO 단위들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또는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의미를 만들며 주체의 산물인(이런 것들이 책의 지층들이다), 아름다운 내부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 즉 가 둘이 되는 것이다. 책의 법칙은 어떻게 자연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세계와 책, 자연과 예술 사이의 나눔을 주재하니 말이다. 하나가 둘이 된다. 이 공식을 만날 때마다, 설사 그것이 모택동에 의해 전략적으로 언표된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파악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반성되고 최고로 늙고 더없이 피로한 사유 앞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 자체는 축처럼 곧게 뻗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기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원 모양으로 수없이 갈라져 나간다. 정신은 자연보다 늦게 온다. 심지어 자연적 실재로서의 책조차도 축을 따라 곧게 뻗어 있고, 주위에는 잎사귀들이 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실재로서의 책은, 그것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둘이 되는 하나 그리고 넷이 되는 둘… 이라는 법칙을 끊임없이 펼쳐간다. 이항 논리는 뿌리-나무의 정신적 실재이다. 언어학 같은 “선진적인” 학문조차도 이 뿌리-나무를 기본적인 이미지로 갖고 있는데, 이 이미지는 언어학을 고전적인 사유에 병합시킨다(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적으로 진행되는 촘스키의 통합체적 나무가 그러하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이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측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를 크게 호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원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이분법의 이항 논리를 대체한 것일 뿐이다. 주축뿌리가 이분법적 뿌리보다 다양체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축뿌리가 대상 안에서 작동한다면 이분법적 뿌리는 주체 안에서 작동한다. 이항 논리와 일대일 대응 관계는 여전히 정신분석(슈레버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망상의 나무), 언어학, 구조주의, 나아가 정보이론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다.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재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그 가 더 포괄적인 비밀스런 통일성 또는 더 광범위한 총체성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보상하는 건 아닌지.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꺾꽂이처럼).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포개 쓰기가 함축하는 이 보완적 차원 속에서 통일성은 정신적 노동을 계속해 나간다.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계열들을 증식시키거나 다양체를 커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방법들은 어떤 방향에서는, 예컨대 선형적(線型的)인 방향에서는 완전히 타당하다. 한편 총체화의 통일성은 다른 차원에서, 원환이나 순환의 차원에서 훨씬 더 확고하게 확증된다.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시키고 만다. 여기서 통일성을 유산시키는 자들은 정말이지 천사를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천사가 지닐 만한 우월한 통일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언어들은 정당하게도 “다양한 뿌리를 두고 있다”고들 하는데, 적절한 말이다. 조이스의 언어가 단어들, 나아가 언어 자체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그것이 문장이나 텍스트, 또는 지식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바꿔 말하면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이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하다.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제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호 체제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되며 기름 자국처럼 번져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계통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35    제8강 혼효면, 혼화면, 기계 댓글:  조회:585  추천:0  2019-03-12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혼효면/혼화면(plan de consistance)이란 무엇인가? ‘조직화의 도안’ 즉 조직화의 면은 근대 생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은 일정한 도안/면에 입각해 이해되었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 구조, 기능은 수미일관한 정합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가의 일관된 도안/면(‘플랜’)에 입각해 기하학적 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형상을 질료에 구현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델에 입각해 작업했다. 구부러진 길들은 ‘당나귀의 길들’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데카르트적 마천루들’은 거대한 조직화의 도안/면을 보여준다. 조직화면은 기계들 위에, 그것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고착화된 코드이다. 기계들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이 초월적 코드에 입각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다. 그러나 혼효면/혼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면일 뿐(plat)”이다. 평평하든 복잡하게 굴곡져 있든 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은 없다. 모든 것은 면 자체-내에서, 즉 면의 내재성에 입각해 성립한다. 기계들을 미리 조감(鳥瞰)하고 있는 청사진은 없다. 관계들에 입각해, ‘사이들’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윤리이다. 혼효면/혼화면은 곧 내재면이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그 자체 하나의 작은 기계라면, 그것 ― 그 또한 측정 가능한 이 문학 기계 ― 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등과, 그리고 이것들을 낳는 추상기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인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제기되는 유일한 물음은 문학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해 나갈 수 있는가, 또 (잘 작동하기 위해서) 나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기계,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기계, … (누군가가 문학에 의해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문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란 ‘물질’=氣가 物로 화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에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사실상 기계적 배치이다. 그리고 이 배치는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청소기는 전기 코드를 통해 거대한 전력 기계들과 접속해 작동한다. 책은 책상, 연필, 스탠드, … 등과 접속해 공부-기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잔과 접속해 받침대-기계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인공적인 기계들만이 아니라 식물들, 동물들, 인간들을 모두 포함하는 커다란 외연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접속을 이루면서 연속적으로 변이(變移)해 가는 기계, 가장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기계는 아마 사람의 몸일 것이다. 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면서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이보다 훨씬 큰 기계들도 존재한다. 무수히 다양한 기계들의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울-기계, 더 나아가 한국-기계도 있다. 이런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들’을 형성한다. 이질적인 기계들로 이루어지는 배치,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층화의 방향과 탈기관체의 방향을 오가는 기계 즉 기계적 배치가 세계를 구성한다. * 따라서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날카로운 불연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물질은 ‘연속적 변이’를 겪는 무한히 유연하고 잠재적인 氣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퓔룸(phylum)’이라 부른다. 기계적 퓔룸은 특이성들과 강도들(또는 표현의 특질들)을 나른다. 이 퓔룸이 (추상기계에 의해) 어떤 역동적 구조 즉 디아그람을 통해 구체화될 때 기계적 배치가 형성된다. 추상기계는 특정한 시공간에 구체화된 기계적 배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비물체적인(그러나 구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적 기계이다.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밥을 차릴 때 우리는 상과 그릇들을 놓는다. 좀더 추상적으로 생각하자. 식사-기계는 경우에 따라 다른 기계들(갖가지 상들, 그릇들, 수저들, 요리들, …)과 다른 코드들(“한 상 가득히 차려내는” 전통 상, ‘코스’로 먹는 서구식 상, …)을 작동시키지만 늘 식사-추상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기계들과 다른 코드들을 작동시키지만, 서대문 형무소, 정신병원, (러시아 아가씨들을 가두는) 방, … 등은 모두 감금-추상기계를 사용한다. 여러 형태의 공들(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과 심판들, 관중들, 다르게 생긴 경기장들, 다른 코드들(‘룰들’), … 가동시킴에도 모든 경기들은 어떤 반복되는 추상기계 즉 경기-추상기계를 가동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추상기계, 배치, 다양체가 맥락에 따라 차이를 드러냄에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냐 철학이냐, …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문학기계, … 등 다양한 추상기계들을 어떻게 접속시키고 어떤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실재와 그 허위적인 반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  이전 1 2 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칼럼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潮歌网) • 연변두만강국제정보항(延边图们江地区国际信息港) •아리랑주간(阿里郎周刊)
地址:吉林省延吉市光明街89号A座9001室 电子邮件: postmaster@zoglo.net 电话号码: 0433) 251-7898 251-8178
吉林省互联网出版备案登记证 [吉新出网备字61号] | 增值电信业务经营许可证 [吉B-2-4-20080054] [吉ICP备20003111号]
Copyright C 2005-2016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