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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0도의 수수께끼 ♣ E. S. 가드너 지음
2023년 08월 23일 14시 30분  조회:420  추천:0  작성자: 강려
절대 0도의 수수께끼
♣ E. S. 가드너 지음
 
액체 침략자
♣ R. M. 파뤼 지음
 
<차 례>
 
절대 0도의 수수께끼
 
괴이한 유괴 사건················ 6
대답은 '아니오'················ 10
총경 허풍 떨다················· 15
투명 인간이란 말인가·············· 19
그랜트 가의 창고················ 23
범인은 이미 사라지고·············· 26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32
얼어 버린 잉크················· 36
미치광이 과학자················ 39
울려 퍼지는 총 소리·············· 42
절대 0도···················· 51
은행장도 사라지다··············· 56
루비도 사라졌다················ 60
또 다시 옷만이················· 65
밀퍼스 가 6372번지··············· 70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72
악마의 최후·················· 77
 
액체 침략자
 
검은 호수··················· 84
화상 입히는 물················· 87
3명의 청년 과학자··············· 90
여과성 바이러스················ 94
인간 쪽이 더 하등 동물이다·········· 100
말하는 액체·················· 102
두려운 액체 생물··············· 107
소금에 취한 액체 생물············· 111
대성공···················· 117
나를 다시 호수로··············· 120
금을 만들자·················· 125
교환조건··················· 130
슈미트도, 액체 생물도············· 136
배반자의 최후················· 141
포위되었다·················· 147
군대 출동··················· 149
상대하기 벅찬 적··············· 151
최후의 수단·················· 154
데이의 결의·················· 158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163
 
절대 0도의 수수께끼
 
♣ E. S. 가드너 지음
EMB00000c5848b6
등장 인물
 
● 덴저 필더 : 유괴된 억만 장자. 몸값을 지불해 주도록 경찰에 편지를 보냈지만….
● 핸더 총경 : 로스앤젤레스 경찰 본부의 수사 부장. 협박장을 받고는 24시간 이내에 범인을 체포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 샘즈 : 덴저 필더의 비서. 덴저 필더의 행방을 혈안이 되어 찾고 있다.
● 앨버트 크롬 : 천재 과학자. 그러나 자기의 발명을 정부에 팔려다가 실패하고 지금은 약간 정신이 돈 상태다.
● 알리 기자 : 루비 기자와 경쟁 관계에 있는 '스타'신문의 유능한 기자. 이번 사건에서도 루비 기자와 서로 특종 기사를 얻기 위하여 경쟁을 벌인다.
● 시드 로드니 : 유명한 핑커튼 탐정소의 뛰어난 탐정. 은행으로부터 사건 수사를 의뢰 받는다. 언제나 침착하며 머리가 명석하다.
● 솔로몬 : 덴저 필더가 거래하는 은행의 은행장. 지독하게 꼼꼼하며 유괴범이 요구하는 몸값을 지불하지 않는다.
● 루비 기자 : '크랠리온' 신문의 여기자이며 로드니의 친구. 맡은 일에 매우 충실하며 어디라도 용감하게 달려간다.
 
괴이한 유괴 사건
 
로스앤젤레스 경찰 본부 핸더 총경의 방에는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나이들이 모여들었다. 신문 기자들이다. 그 기자들의 시선이 지금 한 사나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억만 장자인 덴저 필더 씨의 비서 샘즈를…….
자고 있는 것을 흔들어 깨워 황급히 달려나온 듯했다. 셔츠의 칼라는 때에 찌들어 있고 넥타이는 비뚤어져 있으며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 한 통의 편지를 받아든 참이었다. 읽기 시작하는 그의 눈은 긴장한 탓인지 더욱 가늘어졌다.
"아니, 이건."
하고 그가 말했다.
"어떻소? 그 편지의 글씨가 덴저 필더 씨의 필체가 확실합니까?"
핸더 총경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샘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분명히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쓴 것입니다."
"뭐라고 써 있습니까? 핸더 총경, 내용을 밝혀 주실 수 없습니까?"
한 신문 기자가 핸더 총경에게 부탁하듯이 말했다.
핸더 총경은 아무 말 없이 샘즈의 손에서 그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핸더 총경님께.
저는 덴저 필더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에게 유괴되어 어딘지 모르는 곳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저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신다면 지금 즉시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중단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몸값으로 50만 달러를 빨리 그들에게 지불해 주십시오. 저의 은행 예금은 현재 20만 달러밖에 없습니다만, 제가 거래하는 은행의 솔로몬 은행장에게 부탁하면 부족한 돈을 곧 빌려 줄 것입니다. 총경님께서 솔로몬 은행장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해 주십시오.
몸값을 지불하는 방법은 50만 달러를 007가방에 넣어 제 비서인 밥 샘즈에게 시켜 차이나타운에 있는 마우라는 중화 요리집 뒷문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게 하고 샘즈는 자동차를 타고 왔다가 다시 자동차로 되돌아가도록 하십시오.
단, 샘즈는 반드시 혼자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찰이 따라오거나 지폐의 일련 번호를 적어놓거나 하면 나는 곧 살해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지켜 주십시오. 믿겠습니다. 나를 잡아 두고 있는 사람은 굉장한 천재 과학자이며 두뇌가 명석한 무시무시한 사나이입니다. 저는 무서워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쪼록 급히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덴저 필더.
 
"이런 편지요."
핸더 총경은 매듭짓듯이 말했다.
"나에게 직접 배달된 것이오."
"그렇지만 아주 이상한 협박 사건이군요. 보통 협박 사건이라고 하면 범인은 경찰에 알리면 죽이겠다고 하는 것이 상식인데 오히려 경찰 본부의 핸더 총경에게 편지를 보내다니……."
스타 신문의 알리 기자가 말했다.
"즉, 범인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요?"
여기자인 루비가 덧붙여 말했다.
"아니면 미치광이겠지. 이런 일은 범죄자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보내 줄 테지."
핸더 총경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가지 모두이거나. 매우 자신만만한 사람 아니면 미치광이일 거요."
이렇게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한 사나이였다. 바로 시드 로드니.
유명한 핑커튼 탐정소의 명탐정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은행이 특별 수사 요원으로 선정한 인물이다.
샘즈가 로드니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로드니 씨, 당신은 은행이 어떻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덴저 필더 씨를 구해 내기 위해서 모자라는 30만 달러를 빌려 줄까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번에는 로드니에게 쏠렸다.
EMB00000c5848b7로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덴저 필더 씨의 필적이 틀림없음을 이미 샘즈 당신이 확인했고 또 핸더 총경도 덴저 필더 씨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은행에 돈을 지불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나의 견해를 전할 생각입니다."
모두가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 때, 쿵쿵 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대답은 '아니오'
 
핸더 총경이 방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은행장 아서 솔로몬 씨였다. 무표정하게 차가운 눈초리로 방안의 사람들을 빙 둘러보았다.
여느 사람과는 달리 옷차림도 깔끔했으며 수염도 깨끗이 면도한 침착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나오라는 연락 받고 왔소, 핸더 총경."
말투도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다.
"꽤 늦으셨군요, 솔로몬 씨. 저는 수염도 깍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집에서 달려나왔습니다만."
샘즈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갈림길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굳이 흉한 몰골을 하고 나와야 할 까닭은 없지 않소?"
은행장은 싸늘하게 한 마디 내뱉고는 핸더 총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총경, 용건이 뭔가요?"
핸더 총경은 편지를 건네 주었다.
은행장은 의자에 걸터앉아 주머니 속에서 안경을 꺼내더니 먼저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았다. 그리고는 불빛에 안경을 비추어 깨끗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그럴 듯하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은행이 몸값을 지불할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솔로몬 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안은 쥐죽은듯이 조용했으며 모든 사람의 시선이 솔로몬을 응시하고 있었다.
로드니가 입을 열었다.
"핑커튼 탐정소로서도 덴저 필더 씨의 목숨을 위험으로부터 구해 내기 위해서는 일단 돈을 지불해 줄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은행장은 힐끗 로드니를 쳐다보았다.
"이 사건에 대해 뭔가 알아 냈소?"
"아직 없습니다."
"음."
은행장은 뭔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EMB00000c5848b8"솔로몬 씨! '스타' 신문으로서는 빨리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아니 아마도 이것은 전 시민이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알리 기자가 다그치며 말했다.
은행장은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그렇다면 대답하겠소.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그 순간 방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서인 샘즈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그에게 덤벼들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런 감정을 그는 용케도 꾹 참고 있는 것이다.
"덴저 필더 씨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까짓 30만 달러 정도는 바로 갚을 수 있소! 그 정도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건 인정합니다."
은행장은 여전히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그의 글씨임이 분명해요."
"그것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어째서 돈을 내 주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비서인 샘즈는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말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은행은 50만 달러를 지불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금은 20만 달러입니다. 그러니 20만 달러까지라면 언제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20만 달러만 갖고는 반액도 되지 않으니까 이렇게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유괴범은 우리를 깔보고 더욱 더 날뛰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범죄자들도 이런 범죄를 흉내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불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고 그 결론을 이미 여러분께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일단 덴저 필더 씨의 생명이 안전하게만 된다면 경찰은 전력을 기울여 범인을 체포할 것입니다."
핸더 총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은행장은 경멸하듯이 피식 웃어 버렸다.
"지금까지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실패만 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은행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일어섰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샘즈 비서가 은행장 앞을 가로막았다.
"솔로몬 씨, 잠깐! 이건 한 인간의 목숨이 걸린 문제요!"
"은행의 안전도 걸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샘즈 씨!"
은행장은 이렇게 말하고 샘즈를 밀어젖히더니 부랴부랴 방에서 나가 버렸다.
 
총경 허풍 떨다
 
문이 꽝 닫혔다.
모두가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헨더 총경은 땅이 꺼져라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쁜 놈! 돈에 눈이 먼 지독한 수전노!"
샘즈 비서가 외쳐댔다.
"그 놈은 지금까지 덴저 필더의 덕을 본 주제에 이제 와서 배신을 하고 이렇게 냉정하게 거절하다니!"
샘즈가 모자를 움켜쥐었다.
"여기 있다간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나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핸더 총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샘즈는 나갔다.
"가엾어요. 너무 흥분해 있어요."
하고 '크랠리온' 신문의 루비 기자가 말했다.
"무리도 아니지. 지금 자기 회사 사장이 살해될 지경에 처해 있으니 말이오."
또 다른 기자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핸더 총경을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총경님!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고 싶군요. 신문에 기사를 써야겠습니다."
"좋소. 그럼, 이렇게 쓰시오. '경찰은 지금 매우 유력한 새 단서를 잡았다. 24시간 이내에 반드시 범인은 체포될 것이다.' 하고 말이오."
핸더 총경이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단서라는 게 뭡니까?"
"그것은 아직 발표할 수 없소!"
핸더 총경이 벌컥 화를 내자 신문기자들은 황급히 방을 나가 버렸다.
이제 방안에는 핸더 총경과 로드니 탐정만 남았다.
"총경……. 아무래도 당신은 허풍을 떤 것 같군요. 새 단서란 건 거짓이었죠?"
로드니가 조용하게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총경은 로드니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자기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말일세…….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경찰의 명예가 완전히 땅에 떨어질 텐데 어쩌겠나?"
"하지만 그랬다가 만약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명예고 뭐고 체면이 땅에 떨어질 것 아니겠소?"
"그러니 대체 어쩌면 좋겠나? 자네에게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면 좀 들려 주지 않겠나?"
"음, 뭐 없는 건 아니지만……."
로드니가 담배를 피우면서 무심코 말하자 총경은 정신이 번쩍 드는지 벌떡 일어섰다.
"정말인가?"
"음, 믿지도 않을 테지만."
바로 그 때 방문이 빠끔히 열리더니 두 사람의 남녀가 뛰어 들어왔다.
"그게 뭡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은 루비 기자와 알리 기자였다.
"당신들은 뭐요? 아직 신문사로 돌아가지 않았소?"
"로드니 씨가 뭔가 열쇠를 쥐고 있을 것 같아 문 옆에서 엿듣고 있었죠. 어서 그걸 말씀해 주십시오!"
"끈질긴 사람들이군."
로드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할 수 없군. 그러면 당신들 두 사람만 특별 케이스요. 그 대신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절대로 발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오. 어떻겠소, 총경. 괜찮겠죠?"
"어쩔 수 없지."
핸더 총경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니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꺼 버렸다.
"지금까지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할 말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소. 내가 생각할 때 이 사건은 겉보기보다는 훨씬 심각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오."
"음."
하고 총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내 육감이지만 이 사건의 범인은 보통 유괴 사건의 범인보다는 몇 배나 머리가 뛰어난 것 같소. 경찰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다는 점이 바로 그 증거요. 그래서 나는 덴저 필더를 유괴할 만한 동기를 가진 사람의 기록을 닥치는 대로 모조리 조사해 보았소."
"하지만 그 정도는 경찰에서도 조사해 보았소."
핸더 총경이 중간에 끼여들어 말참견을 했다.
"맞아요. 하지만 경찰은 전에 덴저 필더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실패한 일당을 면밀하게 조사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음……. 그건 그랬지. 하지만 이해 관계가 없는 일이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거기에 흥미를 느꼈던 겁니다. 즉, 돈을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앙심을 품고 있는 놈이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런 짓을 할 만한 녀석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게 누군가?"
"앨버트 크롬이라고 하는 남자죠. 그런 이름 들어본 적 없습니까?"
핸더 총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루비 기자가 말했다.
"저……, 그 사람 얼마 전에 새로운 발명을 했느니 어쨌느니 하며 문제를 불러일으킨 그 과학자 아닌가요?"
"맞았소. 바로 그 사람 말이오."
하고 로드니가 말했다. 알리 기자도 무릎을 탁 쳤다.
"아아, 그 남자라면 기억하고 있어요! 정부에 속임수 발명을 팔려다가 거절당하자 정부를 제소하겠다던 그 허풍선이 말이죠?"
"그 사내가 어쨌다는 거야?"
"아니, 증거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그 사내를 만났을 때 뭔가 좀 이상한……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사내는 곧잘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당치도 않은 짓을 하곤 했거든요."
"그 따위 느낌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싱거운 사람 같으니……."
핸더 총경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바로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밖에서 문을 열었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더니 방금 나갔던 샘즈가 새파랗게 질려서 들어오는 것이었다.
뭔가 사건이 터지기라도 한 듯이!
 
투명 인간이란 말인가
 
"어찌 된 일이오?"
샘즈는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소?"
"예……. 있었습니다."
"기운 내서 말을 해 보시오."
샘즈는 입술이 타는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나는 집에 돌아갈 생각으로 차를 몰고 클레몬트 가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 가 방향으로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갑자기 검은 대형 트럭 한 대가 나타나 내 차에 바짝 달라붙어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추월하려나 보다 생각하고 앞서 보내려고 속도를 줄였는데 그 녀석도 덩달아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거EMB00000c5848b9대한 트럭으로 차츰 내 차를 인도 쪽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나!"
여기자 루비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문득 유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브레이크를 막 밟았더니 그 차는 느닷없이 내 차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내 차를 향해 무언가를 내던지더니 그대로 쏜살같이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어요."
"허어……."
핸더 총경이 마치 더 잘 들으려고 하는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처음에는 폭탄이 아닌가 했는데, 터지지 않길래 겁이 났지만 가만가만 살펴보니……, 새까만 종이 뭉치였습니다. 이것입니다. 읽어 보십시오."
샘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 장의 타이프 용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샘즈.
네 녀석은 멍청한 바보다! 은행장이 안 된다고 한 것은 네 놈이 너무 무례하게 대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너희들이 하고 있는 짓은 덴저 필더를 위해서는 좋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라. 너희들이 취한 행동을 그에게 알려 줬더니 '아무도 내 일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지 앉는군.' 하며 버럭 화를 냈다. 이제 앞으로 은행장과 협상할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12시간 이내에 돈을 가지고 와라. 만약 이번에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덴저 필더의 목숨을 없애 버릴 테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를 죽이고 나면 다음은 샘즈, 네 녀석을 잡아들일 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행장 솔로몬도 말이다.
솔로몬을 잡아들이면 그 때는 몸값이 1백만 달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돈을 내 놓는 것이 몸에 이로울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라.
이것이 최후 통첩이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여기서 있었던 일이 그렇게 빨리 새어나갔을까?"
핸더 총경이 제일 먼저 말했다.
"이 방에 도청 장치라도 설치해 둔 것이 아닐까요?"
알리 기자가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마시오. 여기는 경찰 본부란 말이오. 아무리 영리한 범인이라 해도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소."
"투명 인간이라면 할 수 있겠죠."
로드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치 않은 소리요. 과학 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들이 한 이야기를 알고 있겠소? 범인이 천리안이라도 갖고 있단 말인가요?"
 
그랜트 가의 창고
 
다섯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정적을 깨고 마침내 알리 기자가 말했다.
"여기 이렇게 죽치고 있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제 곧 새벽닭이 울 시간입니다. 배라도 채우러 갑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 일은 나중에 생각합시다."
"그것이 좋겠소."
로드니가 찬성했다.
"그전에 총경, 일단 솔로몬씨에게 전화라도 걸어서 몸조심하라고 일러두는 것이 좋지 않겠소? 또한 경호원을 붙여 두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고 아까 말했던 크롬이란 자에 대해서도 좀 더 조사해 두도록 하십시오."
핸더 총경은 로드니가 말한 대로 순순히 응했다. 그의 충고는 언제나 유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섯 사람은 야간 영업을 하고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수사계의 그린 경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합니다, 총경님. 솔로몬씨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그것 참 이상하군. 여기서 솔로몬씨의 자택까지는 불과 4~5분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핸더 총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크롬에 대해서는 뭔가 알아 냈소?"
이번에는 로드니가 물었다.
"예, 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 냈습니다. 그는 그랜트 가의 633번지에 있는 한 창고에 실험실을 만들기 위해 그 창고를 빌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험은 화재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하여 허가를 내 주지 않자 구청에 찾아와 담당자와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는 기록이 컴퓨터 조회 결과 나타났습니다."
"뭐라구? 아니, 그까짓 일이 뭐 그리 재미있단 말인가? 그 따위는 알아 내 보았자 이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
핸더 총경이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그 때, 갑자기 로드니가 말했다.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요, 총경. 그 녀석이 실험실을 만들 생각이었다면 필시 그 창고에 방을 꾸몄을 것이오. 만일, 그가 범인이라면 덴저 필더 씨를 가둬 두기에 가장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겠어요?"
"아!"
핸더 총경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더군다나 크롬은 과학자이고 덴저 필더 씨의 편지에도 범인은 과학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크롬은 덴저 필더 씨에게 앙심을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총경, 이건 틀림없소."
"좋다, 아무튼 가 보자!"
핸더 총경은 벌떡 일어났다.
신문 기자들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샘즈 비서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고 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핸더 총경과 로드니는 여러 명의 경찰과 함께 2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그랜트 가 633번지의 창고로 들이닥쳤다.
바로 그 때 아침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해맑은 아침해가 높은 빌딩 숲 사이로 내리비치기 시작했다.
핸더 총경이 4층 짜리 건물을 가리켰다.
"여기다. 원칙적으로는 수속을 밟아 수색 영장을 갖고 와야 하지만 잠깐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니까 상관없다."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곰팡이 냄새가 확 코를 찔렀다. 텅 빈 널찍한 건물 안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군. 아무리 허가를 내 주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 넓은 건물을 빌려 놓고 그대로 썩이다니."
총경은 이렇게 투덜투덜 혼자 지껄이면서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모두 깜짝 놀라서 엘리베이터 안을 바라보았다.
"저게 뭐야?"
한쪽 구석에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커피 잔과 먹다 만 샌드위치가 쟁반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핸더 총경이 그 샌드위치에 손을 대 보았다. 커피 잔에도 코를 대고 벌름벌름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음, 이건 그다지 오래 된 것이 아니군. 아마도 어제쯤 먹EMB00000c5848ba다가 남긴 것일 거야. 그렇다면,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여기에 있었군!"
핸더 총경은 갑자기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재빠르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함께 온 그린 경감을 뒤돌아보았다.
"어이, 자네는 아무나 한 사람 데리고 가서 계단을 지켜. 그리고 자네와 자네는 비상 계단과 뒷문을 지키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한 층 한 층 수색한다. 만일, 누군가 나타나면 체포하라, 만약 반항하거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사살해도 좋다! 모두 알았나?"
경찰들은 바짝 긴장되었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범인은 이미 사라지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층에 다다르자 탁 하고 멈췄다.
총경을 앞세우고 모두 민첩하게 뛰어 내렸다. 복도에는 2개의 문이 있었다.
2개의 방이 모두 잠겨 있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 안에는 휴지 조각 따위만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을 뿐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아냐. 위로 올라가 보자!"
모두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3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고나서야 비로소 로드니의 느낌이 옳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방 안에는 기다란 실험용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는 시험관과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리로 만든 기구들이 복잡하게 널려 있었다. 화학 약품 병과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도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군!"
총경은 방 안을 둘러보다가 눈을 멈추었다. 그의 눈은 옆방과 연결된 샛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권총을 빼어 들었다. 그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낮은 자세를 취하고는 손잡이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낭패야! 문이 잠겨 있어서 꼼짝달싹하지 않아!"
바로 그 때였다.
그 문을 통해 실오라기같이 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치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소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살려 주시오! 나는 덴저 필더요!"
"역시!"
핸더 총경은 문을 열려고 어깨춤으로 쾅쾅 문을 부딪쳐 보았다.
그러나 두껍기만 한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총경은 큰소리로 그 쪽을 향해 외쳤다.
"어이, 덴저 필더요? 경찰이오. 당신을 구하려고 왔소!"
"고맙소! 빨리 여기서 꺼내 줘요."
덴저 필더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확실히 들EMB00000c5848bb렸다.
"열쇠는 없나?"
"없소. 잘 보시오 총경. 그 문에는 열쇠 구멍이 없지 않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로드니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한 문이다. 쓸데없이 크기만 한 손잡이가 달려 있을 뿐 열쇠를 꽂을 구멍이 없는 것이다.
"빨리! 빨리!"
하고 문 저 쪽에서는 덴저 필더가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어찌된 까닭인지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절박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때려 부숴라! 한꺼번에 몸으로 부딪쳐!"
핸더 총경이 명령했다.
전부 한 몸이 되어 쾅쾅 어깨로 문을 부딪쳐 보았으나 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깨만 아프고, 픽픽 튕겨 나가 넘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 저 쪽에서 덴저 필더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쿠, 그 놈이 온다. 안 돼! 여보게, 그만두라니까. 아아! 저 쪽으로 가! 그만둬, 그만두라니까, 악! 으윽! 사, 살려 줘!"
그것은 너무나도 소름 끼치는 오싹한 목소리였다.
"어이, 덴저 필더! 괜찮소? 기운을 내요, 이제 곧 구해 줄 테니."
경찰관 하나가 어디서 찾아냈는지 공사장에서 쓰는 기다란 쇠 지렛대를 갖고 왔다.
"좋았어, 그것을 문틈에 끼워 넣어라!"
그러나 문이 딱 들러붙어 틈이 없어서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겨우 지렛대가 들어갔다.
"하나, 둘, 셋!"
세 사람이 덤벼들어 힘껏 힘을 모아 잡아당기자 튼튼한 문이었지만 마침내 삐꺽삐꺽 거리며 흔들렸다.
핸더 총경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한 채,
"자, 한 번만 더 해 보자!"
다시 한 번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결국에는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자!"
모두 권총을 겨누고 방으로 우르르 밀어닥쳤다.
아니……. 모두가 멍청히 멈춰 버렸다.
방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 방은 문도 창도 없다. 천장에 창문이 하나 있긴 했지만 그것은 너무 높기 때문에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었다.
방안에는 탁자와 의자, 그리고 침대가 있고 탁자에는 먹다 만 밥그릇이 놓여 있다. 틀림없이 사람이 있었던 증거다.
그런데 덴저 필더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여우에 홀린 듯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한 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저게, 저게 뭐야?"
모두 뒤돌아보았다.
방금 부숴 버린 문 바로 옆 마루 위에 양복이 한 벌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좀 이상했다. 사람이 입고 있는 채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옷을 입은 사람은 증발해 버리고 옷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핸더 총경이 허리를 굽혀 양복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그것은 5분 전에 멈춰 있었다. 5분 전이라면 경찰들이 이 문 앞에 와 있을 때다. 양복 안쪽에는 실크 와이셔츠가 단추가 하나 풀리지 않은 채 소매 또한 양복저고리의 소매를 따라 그 속에 가지런히 넣어진 채로 있고 목에는 넥타이도 아주 단정하게 매어져 있었다.
바지 자락 밑에는 구두가 놓여 있고 그 구두 속에는 양말이 들어 있었다.
아무도 숨소리 하나 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모두가 몸통 없는 양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알리 기자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마치 회오리바람이 몸통만을 쏙 빨아내 삼켜 버린 것 같잖아!"
"그러나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을 리가 없어! 틀림없이 함정이야. 함정일 거야."
핸더 총경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핸더 총경, 한 번 생각해 보셔요. 구두를 신고 있다가 구두끈을 묶은 채로 벗어 보십시오. 그건 불가능합니다."
루비 기자가 구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하나도 없질 않소. 저 꼭대기에 매달린 통풍용 둥근 격자 창문 사이로 연기처럼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확실히 그 따위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핸더 총경이 말을 이었다.
"자, 거기서부터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소? 여기에 있던 사람은 덴저 필더였어. 그건 확실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그의 양복이야. 이 양복점의 상표가 바로 그 증거지. 게다가 이것은 그가 항상 갖고 다니는 금딱지 만년필이고 시계에는 그의 이름의 머리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명함 꽂이도 있으니 말야."
핸더 총경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덴저 필더는 여기에 갇혀 있었던 것이 분명해. 그리고 그를 가둔 것은 틀림없이 그 크롬이라는 발명가야."
"그러면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는 덴저 필더가 사라졌다EMB00000c5848bc는 그 사실입니까?"
하고 알리 기자가 끼어들었다.
"그럼 설명하겠소. 이 양복은 우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여기에 놓아 둔 것이오. 자, 양복 안쪽을 만져 보시오. 차갑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한 경찰이 만져 보았다.
"맞습니다 ! 얼음 덩어리처럼 찹니다!"
"사람이 이것을 입고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온기가 남아 있어야 당연한 것이오."
핸더 총경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 문 안쪽에서 비명을 질렀던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카세트 녹음기요. 틀림없이 이 방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을 것이오. 크롬은 과학자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낼 수 있소."
"글쎄요, 총경."
하고 이번에는 로드니가 말했다.
"아까 안에서 들렸던 소리는 비명 소리뿐만이 아니었소. 안쪽에서도 문을 쾅쾅 두드렸소. 카세트 녹음기였다면 문을 걷어 찰 리는 없지 않소?"
"그건……."
총경은 말문이 막혔다. 로드니는 문을 가리켰다.
"보시오. 문 아래쪽에 구두로 걷어 찬 자국이 있지 않소?"
모두가 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군! 구두에도 문에 칠해져 있는 것과 같은 페인트와 나무 부스러기가 붙어 있어."
알리 기자가 구두를 집어 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방에는 덴저 필더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사람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군."
"좋아, 그럼 이 방의 벽을 철저히 살펴서 비밀의 통로가 있는가 없는가 조사해 봐!"
총경은 경찰들에게 명령했다.
"그 벽을 부숴라!"
 
얼어 버린 잉크
 
경찰들은 재빨리 각목과 지렛대로 닥치는 대로 모조리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어느 새 온 방 안의 벽들이 너덜너덜 걸레 조각처럼 뜯겨져 버렸다.
"허어, 이 벽은 이상한데."
로드니가 벽으로 다가가 보더니 말했다. 정말로 이상한 벽이었다. 맨 바깥쪽에는 나무 판자가 붙어 있었지만 그 안쪽에는 두꺼운 석면이 붙어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석면 뒤에는 철판이 있고 또 그 뒤에는 1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벽이 막혀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했을까?"
루비 기자가 말했다.
"응, 방음 장치를 할 때는 대개 이런 방법이 동원되긴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좀 지나치군."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벽이란 벽은 모조리 벗겨져 버렸지만 끝내 비밀의 통로는 발견되지 않았다.
"보라구! 역시, 내가 말한 대로야. 여기서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핸더 총경이 크게 외쳤다. 그리고 로드니가 아까부터 덴저 필더의 만년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이, 로드니! 뭘 가지고 애들처럼 그렇게 장난을 치고 있나?"
"장난이 아니오. 이 만년필이 써지나 안 써지나 시험해 보고 있는 중이오."
"그게 장난이지 뭔가?"
"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로드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만년필을 열어 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잉크가 들어 있는 고무 튜브를 싹둑 잘라 버렸다.
"어이 이봐, 뭐 하는 짓이야!"
핸더 총경이 보다 못해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로드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잘라 낸 튜브를 손바닥 위에 거꾸로 세우자 그 속에서 작은 대롱 같은 것이 나왔다. 보고 있던 사람이, '저건?'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잉크가 나온 것이 아니라 괴상한 것이…….
"뭡니까, 그게?"
누군가가 물었다.
"잉크요."
"고체 잉크인가요?"
"아니오. 얼어 버린 것이오."
"그런 이상한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루비 기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 방은 이렇게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더운데 말예요. 잉크가 얼어 버릴 까닭이 없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어 있으니까 이상한 거죠. 어쩌면……."
"어쩌면, 뭡니까?"
"여기에 덴저 필더가 실종된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오."
"어이 어이! 여보게들!"
핸더 총경이 옆에서 소리쳤다.
"그 따위 쓸 데 없는 소리만 하고 있으면 자네들을 여기에 내버려두고 갈 테야. 우리들은 지금부터 크롬의 집을 완전 포위하고 체포하러 갈 참인데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갑니다, 가요!"
알리와 루비 두 사람은 허둥지둥 총경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로드니는 여전히 그 언 잉크 대롱을 물끄러미 바라EMB00000c5848bd보고 있었다.
 
미치광이 과학자
 
이윽고 핸더 총경 일행이 발명가 앨버트 크롬의 아파트에 당도했다. 총경의 연락을 받은 무장 경찰들이 이미 아파트 주위를 이중 삼중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이제 크롬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핸더 총경이 노크를 했다. 자세히 보았더니 이 문도 역시 아까 그 실험실의 문과 똑같은 두껍고 열쇠 구멍이 없는 그런 문이었다.
 
"누구요?"
억지로 목소리를 죽인 듯한 낮은 소리가 들렸다.
총경은 미리 준비한 각본대로 거짓 대답을 했다.
"육군 본부에서 온 하더 대위입니다. 당신의 발명을 기필코 사들이라는 상부의 지시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문 안쪽에서 껄껄대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것 참 고마운 얘기군. 곧 열어 드리지."
핸더 총경은 뒤에서 명령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부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문이 열리면 일제히 들이닥치라는 뜻이다.
그러나 크롬은 그런 수작에 넘어갈 멍청이가 아니었다.
갑자기 문에 붙은 좁다랗고 기다란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곳을 통해 매서운 눈초리를 한 남자가 밖을 내다보았다. 언저리가 짓물러 터진 왠지 기분 나쁜 그런 눈이!
"경찰, 이런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남자는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창문으로 뭔가 새하얀 연기를 내뿜는 물건을 내던졌다. 총경은 창문을 향해 권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창문이 콱 닫혀 버린 지 오래다. 총알은 탕탕 튕겨 버렸다.
그 순간 핸더 총경이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그 하얀 연기를 들이마신 순간 숨이 막히고 눈이 따끔따끔 아파 온 것이었다. 가스다. 최루탄 가스다!
"조심해, 모두! 가스니까!"
그는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뒤에 있던 부하들도 우르르 후퇴했다.
그러나 최루탄 가스는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어느 새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최루탄 가스 때문에 큰 난리가 났다.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콜록콜록 기침을 하느라고 온통 수라장이 되었다.
알리 기자도, 루비 기자도 눈을 가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단지 로드니 탐정만은 처음부터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피할 수가 있었다.
잠시 물러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과학자 크롬의 첫 번째 작전은 멋들어지게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소방차가 왱왱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왔다.
커다란 대형 선풍기를 꺼내더니 독가스를 바람이 부는 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가스 마스크가 경찰들에게 지급되었다.
지렛대와 긴 각목을 든 1개 중대의 경찰들이 다시 문으로 접근했고 그 옆에는 카빈총으로 무장한 2~3명의 경찰들이 따랐다. 만약 크롬이 또 다시 독가스를 던지려고 하면 한 방 먹여 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크롬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문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저마다 손에 권총을 치켜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없잖아!"
누군가가 소리쳤다.
넓은 실험실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약품 병이 깨지고 여러 가지 장치와 기구가 여기저기 마룻바닥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크롬의 모습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도 문도 하나 없는데 또 다시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울려 퍼지는 총 소리
 
"또 없다구! 그 따위 당치 않은 일이 있나! 이번에는 내가 이 두 눈으로 크롬을 똑똑히 보았단 말이야!"
핸더 총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몹시 화가 나서 고함을 쳐댔다.
"반드시 이 방 어딘가에 도망칠 만한 곳이 있을 것이다. 생쥐 구멍 하나 빠뜨리지 말고 모두 분담해서 찾아라. 알았나!"
경찰들은 벽이며 마룻바닥이며 할 것 없이 각목으로 쿡쿡 찌르기도 하고 지렛대로 때려부수기도 하며 비밀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어머, 저런 곳에 모르모트(실험용 흰 쥐)가 있다니."
루비 기자가 손으로 가리켰다. 현관문 바로 옆에 새장이 있고 그 안에는 3마리의 모르모트가 찍찍 울어대며 야단을 떨고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로드니 탐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실험용이겠죠?"
"그렇긴 하지만, 무슨 실험일 것 같소?"
그 때 실험실 한쪽 구석에 있던 전화가 따르릉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경찰이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갖다대더니 곧,
"총경님, 전화입니다."
하고 말했다.
"내 전화? 어디서 왔을까?"
핸더 총경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속에서 쉰 목소리가 괴상하게 들려왔다
"고생이 많군. 당신들이 거기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나는 밖으로 나와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지. 이 다방 참 멋진 곳이군."
"앗! 당신은 크롬!"
"그렇소. 이제 일러 주지. 그 방 북쪽 구석에 비밀 지하도가 있네. 나는 그 곳을 통해 빠져 나왔지."
그리고 전화가 딱 끊겨져 버렸다.
핸더 총경은 수화기를 마룻바닥 위에 내동댕이쳤다.
"저 쪽 구석이다! 저기 지하도가 있어. 그 놈은 그 곳으로 살짝 도망쳐 버린 거야!"
경찰들이 달려들어 쇠지레대로 때려 부쉈다. 그러자 벽이 빠끔히 열리고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따라와!"
핸더 총경이 앞장서서 어두컴컴한 비밀 통로로 내려갔다. 뒤따라서 경찰들이 뛰어들었다. 로드니와 알리 기자도 그 뒤를 따랐다.
비밀 통로는 바로 넓은 지하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거기는 커다란 차고였다. 네댓 대의 차가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죽 늘어서 있고 출구에는 커다란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나쁜 놈! 크롬 이 자식, 이런 곳에 이렇게 거대한 차고를 갖고 있다니!"
핸더 총경은 놀라서 혀를 찼다.
"어딘가에 출입문을 열 수 있는 단추가 있을 거다. 찾아봐라!"
"있습니다. 여깁니다!"
한 경찰이, 한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단추를 눌렀다. 하지만 셔터는 꼼짝도 않았다.
"거 참 이상하네. 고장났나?"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로드니가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상하오! 이건 함정이오, 총경. 놈은 아직 이 집 어딘가에 있소. 우리들을 이 차고에 몰아 넣고 몽땅 죽여 버리려고 하는 것이오."
경찰들은 오싹 소름이 끼쳐 꼼짝 않고 있었다.
"돌아가자!"
핸더 총경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바람 하나 들어올 틈새도 없을 정도로 꼭 닫혀 있던 셔터 문이 소리 없이 약간 열리더니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불길과 함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따다다닷! 따다다닷!
기관총이다!
"윽!"
한 명의 경찰이 몸을 뒤로 젖히며 풀썩 쓰러져 버렸다.
"윽!"
핸더 총경도 비틀거리며 오른손으로 감쌌다. 총탄에 맞은 것이다. 그러나 총경은 팔을 감싸면서 명령했다.
"모두 바닥에 엎드려. 반격해라!"
계속 쏘아대는 총성이 지하실 천장에 울려 퍼져 흡사 지옥을 방불케 하는 대소동이었다.
"안 되겠다. 기관총을 당해 낼 수가 없으니 지원병을 불러라!"
한 경찰이 벌떡 일어나더니 통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그 뒤를 향해 기관총의 총탄이 비 오듯이 퍼부어 댔다.
"아악!"
경찰은 통로 바로 앞에서 튀어 오르더니 풀썩 나뒹굴었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로드니 탐정이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비 오듯이 퍼붓는 기관총 세례 속을 쏜살같이 돌진하며 통로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2분 후에 그는 수류탄 상자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뒤집혀 있는 자동차 뒤쪽으로 뛰어가더니 수류탄을 한 개 집어 들었다. 안전핀을 빼더니 맹렬하게 불길을 내뿜는 비밀 출입문을 향해 내던졌다.
로드니는 전에 프로 야구에서 투수로 활약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수류탄은 정확히 통로 속으로 떨어졌다.
꽈, 꽝!
통로 입구에서 오렌지 색 불길이 솟아올랐다.
"아-악!"
고통스러워하는 비명 소리가 총성 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해치워라!"
"좋았어, 그렇다면 나도……."
EMB00000c5848be다른 경찰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크롬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고 했다. 아까부터 기관총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던 것이다.
"앗, 그렇게 하면 안 돼! 될 수 있으면 크롬을 생포해야 한단 말이오."
로드니가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꽈-과-꽝! 꽝! 꽝!
출입구는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느새 다 타 버렸다. 연기가 점점 사라지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관총 소리가 울려대던 출입문은 엉망진창 말이 아니었다.
기관총은 더 이상 불을 뿜지 않았다.
"이젠 괜찮겠지."
경찰들은 권총을 거머쥐고 앞으로 나갔다.
출입문 바로 안쪽에 시체 하나가 무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미치광이 과학자 앨버트 크롬의 처참한 최후였다.
 
사라진 모르모트
 
싸움은 끝났다.
부상자가 급히 병원으로 실려갔다.
중상을 입은 핸더 총경 대신에 그린 경감이 경찰 기동대를 지휘하며 크롬의 실험실 안을 구석구석까지 조사했다.
덴저 필더가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드니는 실험실 구석에 이상한 상자 모양의 기계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상자와 그 옆에 있는 변압기가 서로 코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기계 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이게 뭘까?"
"폭탄일지도 몰라. 조심해. 폭발물 처리반이 올 때까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그렇지만, 전선을 끊어 놓는 게 좋지 않습니까?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
한 경찰이 말했다.
그린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전선을 끊어 버릴 참이었다.
바로 그 때 로드니는 우연히 모르모트가 들어 있던 새장을 보고 있었다.
경찰이 전선을 끊어 버리자 갑자기 그 기계에 치직하며 불이 붙었다.
"앗! 위험해!"
누군가가 소리쳤다. 모두 그 기계 곁에서 도망쳤다. 그러나 기계는 폭발하지 않았고 윙윙 소리만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로드니는 문득 새장 속에 있는 모르모트들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히스테리를 일으킨 듯이 새장 속을 맴돌고 있던 모르모트들이 갑자기 딱 멈춰 섰다.
그러는가 했더니 순식간에 작아지기 시작했다.
로드니는 잘못 보지나 않았나 하고 자기 눈을 의심했다. 눈을 비벼 보았다. 그러나 틀림없다. 모르모트는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이, 여보게들 이것 좀 봐!"
로드니가 외치는 소리에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알리 기자와 루비 기자도 어느 틈에 달려와 새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모르모트가……."
하고 말하던 로드니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모르모트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모르모트가 도망쳤잖아. 아까 서로 총질할 때 파편이라도 날아와 새장의 창살을 망가뜨려 도망 쳤겠지 뭐."
알리 기자가 말했다.
"그게 아냐! 모르모트는 마치 얼음덩어리가 녹듯이 작아지더니 마침내는 사라져 버렸단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경찰들이 웃었다.
"미치광이 과학자의 실험실에 있더니 핑커튼 탐정소의 명탐정까지도 이상해져 버린다면 곤란하지."
그린 경감이 빈정댔다.
"아무튼, 우리들은 그 따위 잠꼬대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어. 덴저 필더의 행방을 찾아 내는 것이 급선무이니 말일세. 자,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일해!"
경찰들은 다시 흩어졌다. 로드니 혼자만이 새장 앞에 남았다.
그는 살짝 새장의 창살에 손을 대 보았다. 지독하게 차가웠다. 그리고, 마치 냉동실에서 막 꺼낸 차디찬 얼음 덩어리에 손을 대면 척 달라붙듯이 손이 창살에 달라붙어 버렸다.
"에잇!"
억지로 손을 떼려고 하다가 손가락 끝의 살갗이 약간 벗겨져 피가 맺혔다.
그리고 난 다음 로드니는 새장 속에 들어 있는 물통에 관심을 가졌다.
물통 속에 들어 있는 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더군다나 새장의 창살에는 어디 한 군데고 모르모트가 도망칠 만한 구멍이 없었다.
그런데도 모르모트들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떻게 된 노릇일까?
그 때 멋진 생각이 로드니의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 바로 그거다!
 
절대 0도
 
"로드니 탐정님! 왜 그렇게 멍하니 서 계십니까!"
뒤에서 상냥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루비 기자가 서 있었다.
"아아, 루비 기자로군. 당신은 절대 0도란 것을 알고 있소?"
"절대 0도라구요!"
루비 기자는 물끄러미 로드니를 마주 쳐다보았다.
언제나 침착하며 머리도 좋고 남자다운 로드니인데…… 루비 기자는 갑자기 걱정이 되어 로드니 탐정의 안색을 살폈다.
"로드니 탐정님, 당신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소. 나는 미친 게 아니오. 단지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요. 당신도 학교에서 배웠을 거요!"
"그 정도는 배웠죠. 마이너스 273도 아니에요? 하지만 그게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기라도 한가요?"
"있지!"
로드니는 갑자기 힘 주어 말했다.
"이야기해 줄 테니 잘 생각해 봐요. 덴저 필더는 분명히 출구가 없는 방 안에 있었소. 그런데 방문을 열었을 땐 그림자 하나 없었소. 그렇지요?"
"예, 그래요. 그리고 양복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어요."
"그 옷은 얼음덩이처럼 차가웠었소. 만년필 속에든 잉크마저 얼어붙을 정도로 말이오. 시계도 태엽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멈췄던 거요."
로드니는 눈을 반짝이며 눈앞에 텅 빈 채로 매달려 있는 새장을 가리켰다.
EMB00000c5848bf"그리고 이 속에 있던 모르모트는 실제로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소. 잘 봐요, 저 물통 속을. 얼음이 얼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내가 이 새장을 만졌을 때 얼마나 차가운지 손가락이 들러붙어서 상처가 나 버렸을 정도였소. 자, 보라구요."로드니는 피맺힌 손가락을 루비 기자에게 보였다.
"즉, 이 새장 속도, 덴저 필더 씨가 있었던 그 방 안도 모두 절대 0도가 되어 버렸었다는 겁니까?"
"맞았소!"
"하지만 덴저 필더 씨나 모르모트가 없어진 것과 그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이에요!"
"잘 들어봐요."
로드니는 마치 학교 선생이 학생에게 가르치듯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루비 기자는 모든 물질은 분자라고 하는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요?"
"예, 알고 있어요."
"그리고 열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자가 운동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을 테지요!"
"예."
"즉, 온도가 높다는 것은 분자의 운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운동이 활발하면 활발할수록 부피가 커지게 되지요. 반대로 분자의 운동이 느려지면, 즉 온도가 내려가면 물질은 작아지게 됩니다. 절대 0도라고 하는 것은 분자가 전혀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분자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사라져 버리고……, 즉 지금 본 것처럼 말이오!"
루비 기자는 로드니가 하는 이야기가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이상해요. 여기 존재하고 있던 물질이 사라져 버리다니……."
"이해를 못 하는군요! 우리들이 물질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은 원자와 전자 그리고 분자의 운동이란 말이오. 그 운동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물질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오. 이것은 이미 사실로 인정된 이론인 거요."
"그렇다면 결국 크롬은……."
"크롬은 그 운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거요! 덴저 필더도 모르모트도 그 방법으로 없애 버린 거지요. 그래서 잉크나 물이 얼어 있었던 거요!"
루비 기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잠시 후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로드니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로드니 탐정님. 나는 그런 괴상한 이야기를 신문에 실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이상한 기사를 쓴다면 신문은 팔리지도 않을 것이고 나는 편집국장에게 야단만 맞을 거예요. 아마 신문사에서 쫓겨날지도……."
로드니는 울화통이 터져 고래고래 한바탕 난리를 치르더니 도중에 그만둬 버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로드니 탐정님, 너무 지치셨나 봐요. 댁에 돌아가셔서 좀 쉬셔요, 네!"
로드니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루비 기자는 '더 야단 맞기 전에 가 버리는 게 좋겠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슬슬 꽁지가 빠지라고 도망쳐 버렸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로드니는 맥없이 꾸물꾸물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실험실을 나왔다.
 
은행장도 사라지다
 
로드니는 핸더 총경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다.
총경은 침대 위에 누워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어깨부터 팔까지 새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러나 그까짓 정도의 상처 때문에 주저앉을 총경이 아니었다. 침대 옆에 전화통을 갖다 놓고 계속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부하를 야단치기도 했다.
로드니가 들어서자 눈으로만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 몸통은 없고 양복만 달랑 발견된 그 방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시켰지만 비밀 통로는 결국 찾아내지 못했어. 정말 이상한 사건이야."
그 때 또 전화가 울렸다. 핸더 총경이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
총경이 호통을 쳤다.
"좋아. 먼지 하나 건드리지 말고 사진으로 찍어 둬라. 감식과에 있는 사람을 빨리 보내고 지문을 채취해. 시계를 잘 조사해 보고 몇 시에 멈춰 있는가 즉각 보고해라!"
총경은 후- 하며 한숨을 쉬더니 로드니를 뒤돌아보았다. 그 눈에는 뭔가 무서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놀란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솔로몬의 옷이 발견됐어."
"옷이!"
로드니는 양미간이 찌그러졌다.
"그렇다네."
총경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만 말이야. 솔로몬의 옷이 자기 승용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다고 하는군. 마치 여태껏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녹아 버리고 옷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하며 구두도 브레이크 위에 놓여 있다고 하는군."
"즉, 덴저 필더 씨와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것 하나 다른 것 없이 그대로란 말이군요!"
"그렇지."
그 때 또 전화가 울렸다.
핸더 총경은 전화를 받더니 다시 말했다.
"좋아, 알았어."
그리고 로드니를 뒤돌아보았다.
"시계는 10시 13분에 멈춰 있다고 하는군. 너무나 차가워서 시계가 얼어붙어 멈춘 것 같다는 거야."
로드니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한결같이 똑같군요. 총경, 내 생각을 듣고 싶지 않으신가요."
핸더 총경은 피식 웃었다.
"절대 0도가 어쩌고 분자가 어쩌고 그런 이야기라면 벌써 루비 기자에게 들었네."
"당신도 믿지 않는 건가요!"
"다른 때 같았으면 물론 믿겠지만, 이번만은 자네의 의견을 전혀 믿고 싶은 생각이 없네. 아무리 대 발명가라고는 하지만 한 인간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이 두 눈으로 모르모트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단 말입니다."
"그런 거라면 나도 마술사가 하는 것을 보았지. 그와 비슷한 것을 말이야. 분명히 거기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기도 하고 또한 사람을 톱으로 두동강 내기도 하는 것을. 하지만 모두 속임수를 쓰는 것이야."
로드니는 어깨를 움츠리며 형사 콜롬보의 흉내를 냈다. 그것은 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알았소, 총경. 그런데 그 솔로몬의 옷은 어디서 발견됐다고 합니까?"
"71번 가와 보일 가가 만나는 로터리라는군."
"아직 그대로 두었겠죠!"
"그대로일 걸세. 이번에야말로 철저히 조사하기 위해 감식과 사람이 갈 때까지는 절대로 그 주위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명령해 두었으니까. 자네가 그 곳으로 간다면 그린 경감에게 내가 전화를 해 주지."
"고맙습니다, 부탁합니다 "
로드니는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나와 곧바로 자동차를 그 쪽으로 몰았다.
현장 근처에는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찰이 줄을 쳐 놓았다. 하지만 로드니는 쉽게 통과할 수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모두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 경감이 현장에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참 묘합니다. 솔로몬씨가 집에 돌아오자 마자 어딘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씨는 전화를 받았고 통화를 마치자마자 부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밖으로 나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 전화는 어디서?"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태도는?"
"왠지 매우 흥분되어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현관문이 부서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 이상은 아직 경찰도 모르고 있었다.
로드니는 그린 경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곧 솔로몬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루비도 사라졌다
 
솔로몬 씨의 저택은 은행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마치 성과 같이 으리으리했다. 그렇지만 저택 안은 신문 기자, 카메라 맨, 형사들로 북적거렸다.
로드니는 솔로몬씨의 부인을 만나보았다. 그러나 그녀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의식이 흐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망한 나머지 되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어엇, 이상하네!'
신문 기자들 가운데 당연히 있어야 할 루비 기자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비록 여자이긴 하지만 그토록 취재에 열을 올리는 루비 기자가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로드니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어쩌면 루비 기자마저도…….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나 않은 것일까?
기자들을 붙들고,
"루비 기자 못 봤나?"
하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못 봤다는 말뿐이었다. 루비를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때 한 경찰이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로드니 씨, 전화 받으셔요."
로드니는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로드니 탐정님!"
"야, 이거! 루비 기자!"
로드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루비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평상시는 훨씬 침착했는데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뭔가에 쫓기는 듯 다급해 하는 것 같았으며 매우 빠르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로드니 씨. 제 말 잘 들으셔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제가 솔로몬 씨 집에 가지 못한 것도 그 쪽을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인 거예요."
"대체, 뭘 조사하고 있었다는 거요!"
로드니는 안달이 나서 물었다.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어요. 로드니 씨, 당신이 말한 것처럼 만약 절대 0도로 인간을 녹여 버리려면……. 머리카락에 뭔가 가루를 뿌립니까?"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것이었다.
"이봐요, 루비 기자,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오!"
"아니에요! 빨리 가르쳐 주셔요. 목숨이 걸린 중대한 문제 예요."
"그렇긴 하지만 나도 역시 알지 못해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생각하는 거죠?"
"왜냐 하면 말이에요, 제가 보았어요. 솔로몬 씨의 머리에 그런 가루가 묻어 있었던 것을. 그리고 잠시 후에 솔로몬 씨가 몸부림치며 머리를 쥐어뜯었어요."
"하지만 그것과 사건이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이지요?"
EMB00000c5848c0"그런데 실은 제 머리카락에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가루가 묻어 있지 뭐예요. 머리를 깨끗이 감긴 했지만 아까부터 점점 몸이 차가와 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뭐, 뭐라구!"
로드니는 펄쩍 뛰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죠?"
"제 아파트예요. 아아…… 역시 당신 생각이 맞았어요. 절대 0도예요. 아아, 로드니 씨, 이제 말이 잘 안 나와요. 추워요. 너무 추워요. 너무……."
루비 기자의 목소리는 거기서 뚝 끊어졌다.
"이봐요, 루비 기자! 루비 기자! 어떻게 된 거야!"
로드니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전화에서는,
톡, 톡.
하는 가느다란 소리뿐이었다.
그것은 코드에 대롱대롱 매달린 수화기가 흔들려 벽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로드니는 수화기를 내팽개치고는 마치 불도저처럼 사람들을 밀쳐 버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새 그 넓은 저택을 뛰쳐나와 차에 올라타고는 핸들을 잡았다. 액셀레이터를 밟자 차는 로켓처럼 굉음을 내며 질주했다.
커브 길에서 전봇대에 부딪칠 뻔했으나 용케도 빠져나갔다. 그리고 똑바른 길을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해!"
차는 4~5분만에 루비 기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로드니는 아파트로 뛰어들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가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복도로 뛰어 내렸다.
루비 기자의 방 앞에 오자마자 두 주먹으로 문을 마구 두드려 댔다.
"이봐요, 루비 기자! 루비 기자! 나야, 로드니야. 괜찮아?"
대답이 없었다.
로드니는 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서 돌려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거실을 지나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전화가 놓여 있었다.
"아니?"
전화의 수화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다음 순간 로드니는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그 전화 바로 밑에 한 벌의 여자 옷이 헝클어져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에 본 적이 있는 루비 기자의 옷이었다!
 
또 다시 옷만이
 
이게 웬일인가?
루비 기자마저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로드니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루비 기자의 옷을 조사해 보았다. 틀림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담뱃불을 붙였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덴저 필더를 절대 0도를 만드는 장치로 사라지게 한 것은 틀림없이 그 미치광이 크롬이다. 하지만 크롬은 죽어 버렸는데, 오늘 아침에는 솔로몬 씨 그리고 루비 기자마저도 똑같은 꼴로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악마와 같은 범인이 아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것이 과연 누굴까?
로드니의 머리는 컴퓨터처럼 회전이 빨랐다.
아까 루비 기자는 솔로몬 씨의 머리에 뭔가 가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고 했다. 루비 기자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다. 덧붙여서 그녀는 이런 말도 했던 것이다. 틀림없이 아까 내가 말했던 절대 0도로 인간을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루비 기자의 머리에도 그 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점점 차가워져 갔다. 그리고 로드니에게 전화하고 있는 동안에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도대체 루비 기자와 말을 나눈 상대는 누군가?
"아! 그렇지!"
로드니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무엇인가가 그의 머리를 스쳤던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오른쪽으로 돌아서더니 루비 기자의 방을 뛰쳐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마저 없다는 듯 계단을 달려 순식간에 일층까지 내려왔다. 단 세 걸음에 밖으로 뛰어나와 차에 오르는가 싶더니 벌써 차는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앗, 위험해! 이봐, 빨간 불이란 말야!"
교통 순경이 로드니의 차를 보더니 놀라서 소리를 질러댔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는데도 불구하고 로드니는 전 속력으로 맹렬하게 차를 몰아 질주했기 때문이었다.
반대편 쪽에서 오던 차들이 질겁을 하고 핸들을 꺾어 피했다.
로드니의 차는 마치 회오리바람을 방불케 하듯 쌩 하고 교통 순경 앞을 지나치더니 그 다음 로터리에서도 또 그 다음 로터리에서도 신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더 날쌔게 달려갔다.
마침내 진범을 알았던 것이다.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절친한 친구였던 루비 기자의 원수를 때려잡는 거야!
로드니의 얼굴은 마치 도깨비 얼굴같이 붉게 상기되었다.
마침내 차가 주택가에 들어섰다. 그라고 어떤 커다란 저택 앞에 끼익 하고 급정거를 했다.
그 곳은 덴저 필더 씨의 저택이었다.
로드니가 초인종을 마구 눌러대자 가정부가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샘즈 비서 있소?"
"계시긴 합니다만 무슨 일로!"
EMB00000c5848c1"만나고 나서 이야기하죠."
로드니는 가정부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가정부가 정색을 하며 로드니 앞을 가로막았다.
"이러시면 안 돼요, 손님. 제가 먼저 손님이 오신 사실을 샘즈 씨에게 전한 다음 그분의 승낙이 있어야만……."
로드니는 가정부 따위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이층에 있는 샘즈의 방으로 올라갔다.
"기, 기다리세요!"
"시끄럽소!"
로드니는 가정부를 확 밀쳐 버렸다.
가정부는 안간힘을 다해 로드니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으며 결국 마음을 바꿔 먹은 것 같았다. 휙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안쪽으로 가 버리는 것이었다.
로드니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샘즈 방 앞에 이르자 온 집 안이 쩡쩡 울릴 정도의 고함을 질렀다.
"나와라, 샘즈!"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로드니는 문을 열었다. 없는 것 같았다.
침실을 나와 욕실을 지나서 그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책상 앞에 있는 긴 의자 위에 한 벌의 양복만이 길게 엎드려 누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은 샘즈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역시 거기 누워 있던 사람의 몸통만이 사라진 것 같은 상태였다.
샘즈까지도…….
로드니는 맥이 탁 풀렸다.
그는 아까 샘즈가 범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곳으로 달려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샘즈마저 이 꼴이 되었으니 그의 생각은 빗나가고 만 것이었다.
설마 범인이 자기 자신을 사라지게 할 리는 없다. 진범은 따로 있는 것이다.
그 놈이 루비를 없애고 나서 샘즈를 덮친 것이다. 그리고 샘즈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밀퍼스 가 6372번지
 
로드니는 샘즈의 양복을 조사하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양복 안쪽 주머니에 메모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드 로드니, 루비 오만, 밥 샘즈. 이 세 사람은 기어코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릴 것이다. 우리를 방해하는 놈들은 모두 이렇게 될 것이다. 덴저 필더도, 솔로몬도 물론 우리가 죽였다.
 
형체 없는 악마의 도전장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차례다.
로드니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는 샘즈의 양복 주머니를 하나하나 조사하기 시작했다.
시계, 담배 케이스, 라이터, 만년필, 열쇠, 지갑. 지금까지와 좀 색다른 것은 이것들이 차갑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지갑을 열어보았다. 지폐 외에 여러 가지 서류 같은 것이 나왔다.
로드니는 그 중 한 장을 눈여겨 보았다. 그것은 운송 회사의 영수증이었다. 읽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워싱턴 블루바드 753번지에 사는 앨버트 크롬이 밀퍼스가 6372번지에 사는 사무엘 글로브라고 하는 사람에게 기계 한 대를 보내 주었다고 쓰여 있었다.
로드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크롬이 보낸 기계의 영수증을 어째서 샘즈가 갖고 있는 것일까?
사무엘 글로브라는 사람은 또 누군가? 그 다음에 로드니는 담배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담배가 들어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좀 이상한 냄새가 나는 담배였다. 그는 한 개피를 집어 부러뜨려 보았다. 담배 가루가 마룻바닥에 쏟아졌다.
바로 이거다! 담배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이것이 루비가 말한 그 가루인 것이다.
그 담배 케이스를 주머니에 넣은 로드니는 일어섰다. 그리고 문으로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아까 그 가정부가 큰 권총을 움켜쥐고 서 있었다.
"물러섯! 두 손을 머리에 올려! 허튼 수작 부리면 머리통에 바람 구멍을 내 버릴 거야."
가정부는 기분 나쁜 눈초리로 로드니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로드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 젖혔다.
"아, 하하핫! 이봐, 농담은 이제 그만 집어치우시지."
"입 닥쳐! 손 들라는 말, 안 들려!"
로드니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거기에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쿠션이 하나 그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위에 주저앉았다.
"자아, 어서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 줘."
"안 돼! 셋 셀 동안 손을 들지 않으면 진짜 쏘겠다!"
"하지만 나는 권총도 아무것도 없지 않소. 그런데 뭐 그렇게까지……."
"하나, 둘."
"이봐,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셋."
로드니는 일어나 손을 드는 척하다 갑자기 쿠션을 집어 들고는 그녀를 향해 내던졌다.
탕! 푹!
총알이 로드니의 귀를 스쳤다. 그리고 두 번째 총알은 쿠션에 날아가 박혔다. 세 번째 총을 쏘기 전에 로드니가 달려들었다. 가정부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로드니는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아랫배에 한 방 먹였다.
가정부는 깩하는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로드니는 권총을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가정부를 그대로 둔 채 집에서 뛰쳐나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밀퍼스 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곳에 있는 사무엘 글로브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드니는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밀퍼스가 6372번지에 도착했다.
그 곳은 조용하고 낡은 주택가였다. 그는 돌층계를 단숨에 달려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다. 비었나?
그 때 후닥닥 달려가는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집 안에서 들렸다.
다음에는 쿵쿵쿵 하며 큰 발자국 소리가 그 뒤를 쫓아가는 듯했다.
그러더니 "까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로드니는 재빨리 좌우를 살펴보았다.
문 옆에 창문이 있었다!
달려가 쓱 열어봤더니 하늘이 도왔는지 다행히도 스르륵 열렸다.
그는 창문을 기어올라가 방 안으로 뛰어 내렸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더니 이층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그는 계단을 올라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였다. 뭔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주 조금만 머리에 뿌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가씨. 아프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아. 먼젓번에는 이 가루를 씻어내 버렸지만 이번에는 그렇게는 안 될걸."
여자가 뭐라고 대꾸했다.
"응 그래 맞아. 이 발명을 한 사람은 크롬이지. 나는 크롬에게 이 발명품을 완성하게 했지. 물론 덴저 필더를 유괴한 것도 모두 내가 방법을 일러 준 거라구."
남자는 거기서 후후 하고 기분 나쁜 소리로 웃었다.
"크롬이 죽기 전에 나는 물질을 절대 0도가 되게 하는 가루를 만드는 기계 한 대를 훔쳐내 여기에 갖다 놓았던 거야. 솔로몬을 죽인 것이 나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
로드니는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방 쪽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지금쯤 로드니 씨가 이리로 오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저 목소리는……. 루비 기자가 아닌가!
그러자 남자가 다시 웃었다.
EMB00000c5848c2"그럴 리가 있나. 나는 당신과 로드니 그리고 나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협박장을 내 양복 주머니에 넣어 두고 왔거든. 그리고 마치 나도 사라져 버린 것처럼 해 놓고 왔단 말씀이야. 로드니는 내가 이미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이제 당신만 죽여 버리면 나는 자유야. 이제부터는 부자들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릴 테야. 그래도 나는 의심받지 않겠지. 나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인간이니까 말야."
샘즈다!
역시 샘즈가 범인이었던 것이다!
샘즈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 자, 고통은 없을 거야. 춥다는 생각이 들자 마자 죽을 꺼야. 그리고 몸의 세포가 녹기 시작하고 사라져 버릴 테니까. 이 가루를 당신 머리카락에 뿌리면……."
로드니는 쓰윽 문을 열었다.
샘즈가 뒤돌아보았다. 로드니는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아, 샘즈 아닌가! 아니, 이게 웬일인가!"
샘즈는 섬뜩하면서도 겉으로는 어느새 태연한 모습을 하고 머릿속으로는 잔꾀를 꾸미고 있었다. 활짝 웃음을 짓고는,
"그럴 만한 깊은 사정이 있어서요, 로드니 씨. 그게 말이죠……."
하고 말을 하더니 갑자기 로드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로드니도 방심하고 있지는 않았다. 슬쩍 몸을 피하면서 샘즈에게 강펀치를 한 방 먹였다.
"윽!"
어느 틈에 주머니 속에서 꺼냈던 권총이 탁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샘즈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어느 새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로드니를 한 방 걷어찼다.
그리고 로드니가 깜빡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옆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로드니 씨!"
그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는 순간, 루비 기자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로드니는 뒤돌아보았다.
"루비! 당신 무사했군요!"
"로드니 씨, 머리 좀 이렇게 해 보세요! 가루 묻지 않았어요? 근질근질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가렵지도 않구요."
로드니가 물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로드니는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던 권총을 집어들고 문으로 다가섰다.
"항복해라, 샘즈! 이젠 도망칠 수 없다!"
대답 대신에 문 안쪽에서 굉장한 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황해서 홱 물러서자 기관총 총알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곧 경찰이 올 거예요. 그 때까지 기다려요."
루비가 말했다. 두 사람은 두텁고 긴 의자를 쓰러뜨려 바리케이드를 치고는 그 뒤로 숨었다.
 
악마의 최후
 
"고마와요, 로드니 탐정님. 당신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요."
로드니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역시, 루비 기자답군요. 그러면 당신 방에 있던 그 옷은 뭐지요?"
"이제, 말씀드리죠."
루비 기자가 말했다.
"로드니 씨가 생각하고 계셨던 그대로였어요. 크롬은 생물을 녹여 버리는 방법을 발견한 거예요. 어떤 특수한 전류를 통하게 하면 사람 몸의 분자는 절대 0도가 되며 그 전류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리는 거죠. 하지만 녹여 버리려면 화학 약품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돼요. 크롬은 그 가루를 발명한 것입니다."
"가루……. 아아, 당신이 조금 전에도 걱정했던 그 가루 말인가요?"
"맞아요. 그 가루를 머리에 뿌리면 그것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 신경에 영향을 끼쳐 전류가 잘 흐르도록 하는 것이죠. 샘즈는 그 가루를 담배 속에 넣어 항상 갖고 다녔죠. 그리고 재를 터는 척하면서 없애 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머리에 묻히는 것이죠."
"그랬었군!"
로드니는 그 담배 케이스를 떠올리며 말했다
"제가 당신이 해 준 이야기를 샘즈에게 했거든요. 그랬더니 샘즈가 담뱃재를 터는 척하면서 내 머리에 묻혔던 거예요. 그 순간 퍼뜩 솔로몬 씨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도 머리에 재 같은 것이 떨어진 다음 잠시 후에 사라져 버렸거든요."
"음! 샘즈는 당신이 완전히 알아차리기 전에 죽이려고 생각했던 거요. 그래서 당신은 샘즈가 진범이란 것을 알게 되었군요!"
루비 기자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처음에는 왠지 머리가 자꾸 가려웠어요. 그래서 깜짝 놀라 머리를 감고 또 감고 해서 깨끗이 씻어 냈어요. 그리고 계략을 꾸몄죠. 옷만 남겨 두면 샘즈는 나를 없애 버리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그래서 먼저 옷을 그런 식으로 놓아두고 나서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죠."
"과연."
"그런데 깨끗이 씻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약간 묻어 있었던 모양이에요.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에 몸이 차가워지더니 결국은 의식을 잃고 말았어요. 이젠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샘즈의 차 안에 있지 뭐에요. 샘즈는 성공했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 아파트에 왔던 것이죠."
"아, 그랬군요 ! 이제 모든 걸 알겠소. 그래서 그 다음 샘즈는 자기도 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런 잔꾀를 부린 것이군요."
로드니는 굳게 닫힌 방문을 계속 지켜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왜 여태 샘즈가 진범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참 이상하죠? 제일 처음, 우리들이 덴저 필더 협박장 때문에 모였을 때 누군가가 우리가 한 이야기를 도청하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했던 일이 있었지요. 그것도 역시 생각 해 보면 샘즈가 가장 수상했다는 사실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거요. 왜냐 하면 그 때 모였던 다섯 사람 중에서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샘즈 뿐이었기 때문이죠."
"그 말도 그럴 듯하네요……."
루비 기자가 혀를 낼름 내밀면서 말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들은 범인과 미주알고주알 의논하면서 그 범인을 잡으려 했으니 우습군요."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 범인이 이번에야말로 잡히겠지."
로드니가 말했다.
그 순간 샘즈가 있는 방에서 윙 하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는 뭐지요?"
"앗! 어쩌면……"
루비 기자가 벌떡 일어났다.
"위험해요. 나오면 당해요!"
"하지만……. 틀림없이 샘즈는……."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으며 실랑이를 벌일 때 복도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무장을 한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샘즈는 저 문 안에 있소. 하지만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소."
"좋아, 총을 쏴서 부숴라!"
지휘자가 명령했다.
경찰들은 총구를 문에 겨냥하더니 일제히 발사했다.
따, 따, 따, 따, 땅!
천지를 울리는 총성과 함께 빛이 번쩍거리더니 문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쿵하고 안쪽으로 넘어졌다.
틀림없이 반격해 오리라고 여겼으나 그대로 조용할 뿐이었다.
"방심하지 말아.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경찰들은 총을 겨누고 살금살금 방으로 다가갔다.
방 한가운데에는 언젠가 크롬의 실험실 안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기계가 놓여 있었다. 기계는 경찰들이 문을 부수기 위해 쏘아댄 총알에 맞아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없잖아!"
경찰이 외쳤다.
"아녜요, 있어요. 이거요."
루비 기자가 그 기계 바로 옆에 있는 긴 의자 위를 가리 켰다.
거기에는 한 벌의 주인 없는 옷이 길게 가로누워 있었다. 그리고 옷 주위에는 새하얀 가루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렇군…….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사라져 버렸군."
로드니가 맥없이 말했다.
미치광이 과학자를 이용해 천인공노할 완전 범죄를 저지르려고 했던 악마 같은 샘즈도 이렇게 해서 스스로 미세한 분자가 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액체 침략자
 
♣ R. M. 파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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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인물
 
● 액체 생물 : 검은 호수에서 발생한 여과성 바이러스. 소나 고양이를 잇달아 녹여 버릴 정도로 생명력이 왕성하다. 또한 고도의 지능을 지니고 있다.
● 데이 :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소 소장으로, 냉정한 화학자. 액체 생물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점차 액체 생물에 대한 일종의 우정을 느끼게 된다.
● 한스 슈미트 :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소의 세균학자. 멋진 발견을 하여 큰 부자가 되려고 액체 생물 연구에 몰두한다.
● 이반 지노프 : 항상 인류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려고 하는, 메트칼프 연구소의 생물학자. 데이와 슈미트와 더불어 액체 생물의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 메트랄프 사장 : 데이 일행에게 자유롭게 연구를 하도록 밀어 주는 후원자. 최초로 호수의 이변을 알아차려 데이를 비롯한 세 사람에게 조사를 의뢰한다.
● 피어슨 소장 : 메트칼프 사장과 잘 아는 사이로, 주둔 사령관. 병사들을 지휘하여 닥쳐오는 액체 생물을 전멸시키라고 명령하지만…….
검은 호수
 
"저것이 바로 그 호수다."
메트칼프 사장이 소나무 숲의 건너편에 보이는 작은 호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따뜻한 6월인데도 불구하고 손가락은 딱딱하게 굳어져 가늘게 떨리고 있는 듯했다.
"저것이?"
일행 중 키가 크며 어깨가 딱 벌어진 청년이 말했다.
그리고 그 호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둘레는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병풍같이 깎은 암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호수 가장자리에는 풀 한 포기도 없다. 거무칙칙한 수면에는 맑게 개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하얀 구름이 선명히 비쳐지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 나쁜 호수다. 하지만 특별히 색다른 점은 없어 보였다. 넓이를 보아서는 호수라기보다 자그마한 연못이라든가 웅덩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이 호수가 어떻다는 말입니까, 사장님? 어쩐지 괴물이라도 살고 있는 듯한 호수이기는 하지만 설마 20세기에 공룡이라도 나오려고요? 아무래도 우리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소 팀이 나설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요?"
청년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러나 사장은 머리를 저었다.
"자네는 아직 아무런 점도 발견하지 못했나, 데이군? 저 호수의 수면을 잘 보게나! 수초가 전혀 눈에 띄지 않지? 대개의 호수에는 반드시 있는 갈대조차 없지 않나? 물고기도 없네. 아니, 수생 곤충조차 없을 걸세."
데이라고 불린 청년이 대꾸했다.
"그런 점들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사장님. 이 호수는 염분이 매우 많이 함유된 호수겠지요. 그러므로 담수어나 보통의 수생 곤충과 갈대 등은 살아갈 수 없지요. 아, 사해라고 있지요? 그 곳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런 산 속에 어떻게 짠 물 호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산 속이기는 하지만 이곳은 바다와 가까운 곳이었을 겁니다. 잘 조사해 보지 않아서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아마 이곳은 몇만 년 전까지는 바다 속이었겠지요. 그것이 솟아올라 움푹 패인 곳에 바닷물이 흘러 들어와 이런 짠 물 호수가 생겨난 것이겠지요."
데이는 침착한 어조로 답변했다. 그는 항상 냉정한 성격의 과학자로,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 소장직을 맡고 있다.
그러나,메트칼프 사장은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것 같지는 않네. 나는 아무래도 이 호수가……."
데이는 사장의 염려를 일축해 버리려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흠칫했다.
어쩐지 이 호수는 이상해 보였다.
바람도 없는데 수면이 희미하게 물결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것은 거무칙칙한 물 속에서 어떤 거대한 생물이 몸을 감추고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공룡이 이 호수의 바닥에 있을지도 모른다.'
데이는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생각을 부인했다.
'내가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니…….'
메트칼프 사장은 그러한 데이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끄덕였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증거를 보고부터 의혹이 생기기 시작한 걸세."
"무시무시한 증거라니요?"
데이는 사장의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쪽으로 와 보게나."
라고 말하고 소나무 숲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소나무 숲 건너편에는 푸른 풀이 난 목초지가 호수 가장자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메트칼프 사장은 앞장서서 그 목초지를 가로질러 물가 쪽으로 걸어갔다.
호숫가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커다란 검은 바위 같은 물체가 가로 놓여져 있었다.
그 곳으로부터 지독한 냄새가 풍겨와 코를 찔렀다.
'무엇일까?'
데이가 생각에 잠겼을 때, 사장이 검은 바위를 가리켰다.
"잘 보게나!"
"아니!"
데이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이럴 수가 검은 바위로 보인 것은 몸의 절반이 참혹하게 물어 뜯겨져 있는 커다란 검은 소의 시체였던 것이다!
 
화상 입히는 물
 
"이, 이것은……."
데이는 썩어가기 시작한 소의 시체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코를 움켜쥐면서 말했다.
"우리 목장의 소지. 그렇지 않아도 한 마리가 없어져서 조사해 보았더니 글쎄 이 모양이……."
"사장님!"
데이가 말을 가로막았다.
"이 소의 시체는 아무래도 이상한데요. 뒷부분 절반이 물어 뜯겨진 것이……. 마치 뱀에게 먹히다 만 개구리처럼 절반이 녹아 없어졌으며 앞부분으로 갈수록 점차 가늘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네!"
메트칼프 사장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 호수 속에 무언가 거대한 뱀 같은 괴물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EMB00000c5848c4"하지만 설마 소를 한 입에 삼킬 정도의 뱀이 있을라구요? 몇 만 년 전의 괴물이라도 그것은 불가능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네. 그러나 조사해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보트를 가져다가 서너 명의 어부에게 이 호수 밑바닥을 깡그리 훑어보라고 했지."
"그래서요?"
"그런데 생물이라고는 흔적조차 없다는 걸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뱀장어나 게 등이 있었다는데, 그런 것들이 한 마리도 없다지 뭔가?"
"흠……."
"그것뿐이 아닐세."
메트칼프 사장은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어부들이 늘어뜨린 그물이 얼마 안 있어 너덜너덜 끊어져 버렸다네. 게다가 어부들이 튀어오른 물로 인해서 지독한 화상을 입었지 뭔가!"
"물로 화상을 입었어요?"
데이가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호숫가로 다가섰다.
그러자 메트칼프 사장이 당황해 하며 뒤에서 소리쳤다.
"정신 차려, 데이 군 ! 물보라가 몸에 닿으면 화상을 입는단 말일세. 그 물은 마치 염산과 같아서 몸에 닿기만 해도 타 버린단 말이야."
데이는 이내 멈춰 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활짝 펼친 다음 수면을 향해 던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손수건은 마치 얼음이 열탕 속에서 녹아 없어지듯이 순식간에 녹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흠……."
데이는 재차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의 깊게 호숫가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준비해 온 유리병에 가만히 물을 담았다.
"잘 알았습니다, 사장님. 어쨌든 이 샘플을 갖고 돌아가서 면밀하게 검사해 본 후에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3명의 청년 과학자
 
데이는 메트칼프 생물 과학 연구소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실험실로 들어갔다.
뒤죽박죽 어지러운 실험실이었다.
한가운데에는 갖가지 화학 실험 도구를 늘어놓은 좁고 긴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다.
오른쪽 벽가에는 수신기가 한 대, 테이블이 한 대 있었으며, 그 위에는 해부용 고양이가 한 마리 놓여져 있었다. 고양이 앞에는 한 사람의 흰 가운을 걸친 피부색이 검은 청년이 지금 막 고양이에게서 끄집어 낸 내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참이었다.
그 반대쪽의 왼쪽 벽 가에는 단단한 몸집의 청년이 흰 가운을 걸치고 역시 시험관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비커에 물을 넣기도 하며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데이가 들어서자 돌아보더니 데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유리병을 의아한 듯이 쳐다보았다.
"그게 도대체 뭔가, 데이?"
"이건 보통 물 같은데?"
고양이 해부를 하고 있던 청년이 유리병을 손으로 잡으려고 했다.
"기다리게 지노프, 그것을 만지기 전에 우선 내 이야기 좀 듣게나."
데이는 오늘 메트칼프 사장과 함께 겪은 이상한 체험을 두 사람에게 들려 주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몸의 절반이나 녹아 버린 소 이야기와 데이의 손수건이 녹은 이야기를 듣자 점차 진지한 표정을 띠며 말했다.
"흠……. 그것 참 이상한 이야기군."
하고 지노프가 말했다.
"자네 이야기가 진짜라면 이 짠물은 지독히 강한 산성을 띠고 있다는 말인데, 조금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는다든지, 소를 녹여 버린다든지 하는 강한 약품은 산 이외에는 생각해 볼 수도 없지. 그렇지 않나, 슈미트?"
"하지만 그러한 산성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그 호수로 들어갔단 말인가?"
"그것을 이제부터 우리 셋이서 연구해야 한다구."
하고 데이가 말했다.
"이 물이 지니고 있는, 사물을 태운다든지, 녹인다든지 하는 작용은 화학 분야이므로 화학자인 내가 연구하기로 하지. 그리고 생물과 물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물학자인 이반 지노프가, 또한 물 속의 생물학적 문제는 세균 학자인 한스 슈미트가 조사하기로 하지."
"좋았어, 합시다."
라고 지노프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요즈음, 신통한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짜증이 나던 참인데, 이 물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인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이끌어내도록 해야지."
"암, 그래야지.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고 있는 메트칼프 사장에게도 기쁨을 안겨 주어야 하지 않겠나?"
데이도 얼굴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균 학자인 한스 슈미트는 건장한 몸집을 흔들며,
"흠!"
하며 코를 벌름거렸다.
"자네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꼭 아이들 같구먼. 데이는 항상 메트칼프 사장에게 은혜를 갚을 것만 생각하고 있고, 지노프는 오로지 인류를 위한 것만 생각하고 있지 뭔가? 하지만 나는 달라. 언젠가 멋진 발명을 해서 큰 부자가 되는 것이 내 꿈이지. 이번 이 연구는 어쩐지 내 꿈을 이루게 해 줄 듯한 기분이 드는군."
"자, 그것도 좋겠지. 그렇게 될지 어떨지는 앞으로의 연구 여하에 따라서 결정될 걸세. 그럼 속히 착수하도록 하지."
데이는 말을 마치자 이내 횐 가운을 머리로부터 뒤집어쓰고 자신의 실험 테이블 앞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유리병 마개를 열고 그 물을 극히 소량 시험관 속에 따르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물이 튀어서 손가락에 닿았다.
"앗! 손가락을 데었어."
데이는 손가락을 누르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 바를 만한 약을 찾았다.
슈미트가 무언가 작은 병을 갖고 달려와서 그 속에 담긴 액체를 데이의 손에 발라 주었다.
"아, 고마워. 제법 효과가 있는데 그래?"
라고 데이가 말하며 한숨 돌렸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사용한 거지?"
"석탄산을 엷게 한 것이야."
"뭐라구!"
데이는 깜짝 놀랐다.
"산을 중화시키는 데 산을 사용했단 말인가? 뭔가 잘못 되었는걸!"
"응. 그렇지만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긴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을 중화시키는 데는 알칼리성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석탄산을 가져왔지?"
"세균학자란 갑자기 어떤 급한 일이 벌어졌을 때는 본능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석탄산을 거머쥐는 버릇이 있다네. 그런데 산으로 중화된 것을 보니 데이, 아무래도 이 물은 알칼리성인 것 같은데?"
"리트머스 시험지로 반응을 조사해 보면 알겠지."
라고 지노프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렇지. 어째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처음부터 산이라고 단정지었기 때문이지."
데이는 이내 빨간 리트머스 시험지를 갖고 와서 물 속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리트머스 시험지는 즉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흠……. 확실히 알칼리성인 것 같아. 그래서 석탄산으로 중화시킬 수 있었지 뭔가."
그러자 슈미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깐.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조금 이른 것 같군.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그 물의 샘플을 주게나. 조사해 보고 싶은 점이 있네."
 
여과성 바이러스
 
그리고 4~5일 동안 세 사람은 한눈도 팔지 않고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나 결국 데이가 먼저 실험에서 손을 들고 말았다.
"아니, 이건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단지 바닷물이야. 나는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알아 낼 수가 없네."
그러자 슈미트가 파란 눈을 물끄러미 데이에게 향하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네. 아무리 분석해 봐도 바닷물 분자밖에는 나오지 않는걸."
"화학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세균학적으로 볼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걸."
슈미트는 무언가 비밀이라도 움켜쥐고 있는 듯 단호히 말했다. 데이와 지노프는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래? 어떤 점이 다른가?"
"요컨대, 이 물에는 일종의 여과성 바이러스가 들어가 있단 말일세."
"여과성 바이러스라니?"
데이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화학자이므로 생물에 관한 일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란 물론 세균의 일종이지. 보통의 바이러스는 여과기를 사용하여 거르면 아주 조그만 것이라도 대개는 걸리고 말지. 그런데, 이 여과성 바이러스는 아무리 미세한 여과기에도 채취되지 않으므로 정말이지 아주 작은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네. 그래서 여과성 바이러스라는 이름이 붙여 진 것이지."
"음, 그런가?"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그렇지 않다는 점이 밝혀졌네. 즉, 여과성 바이러스란 보통의 세균과 같이 작은 생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액체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세균인 것이라는 점이 밝혀졌어."
"살아 있는 물이라고?"
라고 생물학자인 지노프가 말했다.
"물이 생물이라니, 처음 들어 보는걸?"
"그렇다면 생물이란 무엇일까?"
라고 슈미트가 거꾸로 되물었다.
"먹을 것을 섭취하고 성장하며 번식해 가는 것이 생물이겠지?"
"그건 그렇겠지."
"그렇다면 여과성 바이러스 역시 말할 나위 없이 생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몸 형태는 물이기는 하지만 먹기도 하고 성장도 하며 번식해 가기 때문이지."
"음……. 그러면 자네는 결국 그 호수에 여과성 바이러스인지 뭔지 하는 놈이 살고 있다는 말이지?"
라고 데이가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니 지노프가 해부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실험실에 갖다 둔 고양이 한 마리가 바구니에서 빠져 나와 호수 물을 담은 시험관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저, 저런!"
지노프가 소리지르고 미처 달려갈 틈도 없이 고양이는 엎어진 물을 날름날름 핥기 시작했다.
그러자…….
"캬옥! 캬옥!"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르고 고양이는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그러더니 온 몸을 비비꼬며 발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끔찍한 독이군. 가엾게도."
데이가 고양이를 집어 들어 옆에 있는 싱크대 속으로 집어 던졌다.
고양이는 꿈틀꿈틀 몇 번인가 버둥대더니 이윽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죽었군……."
지노프가 고양이 몸뚱이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데이가,
"어 ! 저것 좀 보게."
라고 소리쳤다.
지노프와 슈미트가 일제히 쳐다보니, 고양이의 배 부분에 어느 사이엔가 커다란 구멍이 뻥 하니 뚫리고 그 곳에서 투명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빨리, 싱크대 마개를!"
데이가 외쳤다. 슈미트가 재빨리 달려가서 마개를 틀어막았다.EMB00000c5848c5
세 사람은 싱크대 앞에 서서, 물끄러미 고양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마치 얼음이 녹듯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배, 가슴, 발, 머리……. 그리고 흰 빛을 띤 액체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에 싱크대는 부쩍 늘어난 횐 빛의 액체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액체의 표면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실룩실룩 움직이며 파도같이 넘실대고 있었다.
"액체 생물이다!"
데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호수의 물도 꼭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었어. 그 호수 전체가 이 액체 생물이 되어 버린 거야! 그 소도, 이 물에 먹혀 버린 것이지!"
"그러나 소의 경우는 머리와 상반신이 남아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것은 그 곳이 모래땅이었기 때문이지. 소의 배 쪽에서 배어 나온 액체 생물은 이내 지면 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린 것이네. 그래서 상반신이 남았던 것이지. 만일 모래땅이 아니고 딱딱한 바위땅이었다면, 상반신마저 액체 생물로 변해 버렸을 테지."
슈미트가 끼어들었다.
"무서운 생물이군……."
"만일 이 생물이, 호수에서 넘쳐 나게 되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녹여 버릴 것이 아닌가!"
"그렇지. 대단히 위험한 생물이야. 이 녀석을 죽일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세!"
슈미트도 안색을 바꾸어 말했다.
바로 그 때, 지금까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지노프가 손을 내저었다.
"잠깐, 그전에, 내가 한 가지 실험해 볼 것이 있네."
"무슨 실험인가?"
"이 액체 생물에게 과연 지능이 있는가 없는가를 조사해 보는 실험이네."
 
인간 쪽이 더 하등 동물이다
 
"뭐라고?"
데이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지노프는 상체를 쑥 내밀며 말했다.
"내가, 동물의 뇌를 내가 발명한 장치에 연결하여 뇌파를 파악해 내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들도 잘 알고 있겠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이 액체 생물에게 응용해 볼 생각이야. 이 생물은 이토록 생명력이 왕성한 생물이니 틀림없이 지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지능이 있다면 반드시 무언가 들려올 것이네. 자, 그럼 즉시 시험해 볼까?"
지노프는 재빨리 커다란 유리 용기를 가지고 와서 국자로 조심스럽게 액체 생물을 담아 넣었다. 액체 생물은 여전히 부글부글 움직이고 있었다.
지노프는 유리 용기를 자신의 실험 테이블까지 가져가 수신기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신기의 스위치를 올리고, 길고 가느다란 검은 고무 막대기를 손에 쥐었다. 막대기 끝에는 금속 침이 연결되어 있으며, 한쪽은 수신기에 이어져 있다. 이것이 전극인 것이다.
지노프는 가만히 그 금속 침 쪽을 액체 생물 속에 찔러 넣고 스피커의 다이얼을 조절했다.
그러나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지노프는 가만히 불러보았다.
하지만 스피커는 여전히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하하하!"
갑자기 슈미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처럼의 실험이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군. 도대체 이런 여과성 바이러스가 지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는 생각 아닌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스피커에서,
"여보세요!"
라고 지노프의 음성과 꼭 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노프는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2개의 전극을 액체 속에 빠뜨릴 뻔했다.
"하하하!"
이어서 스피커에서는 슈미트의 음성과 꼭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처럼의 실험이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군. 도대체 이런 여과성 바이러스가 지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는 생각 아닌가?"
세 사람은, 잠시 말문이 막힌 채 눈을 크게 뜨고 서로 쳐다보았다.
"이것 참 놀랄 만한 일이군!"
데이가 잠시 후 소리쳤다.
"이 녀석은 우리가 한 말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군!"
"그러니 역시 이 녀석은 어떤 종류의 낮은 지능을 갖고 있다는 말이군!"
지노프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스피커에서는 다시금 똑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보게. 낮은 지능을 갖고 있는 쪽은 바로 자네들 인간 쪽이네!"
 
말하는 액체
 
세 사람은 거듭 입을 딱 벌리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이러스는 이번에는 흉내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뭔가를 물어보게."
데이가 흥분해서 말했다.
지노프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질문을 생각했다.
"자네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을 모두 알아듣는가?"
세 사람은 스피커 쪽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질문 방법이 서투른 모양이야. 좋아, 내가 한 번 물어보지!"
슈미트가 지노프를 밀어 내며 앞으로 나섰다.
"자네는 사실은 고양이 뇌일 것이므로 고양이 뇌를 이용하여 떠들고 있는 것이지?"
그러나 스피커에서는 역시 반응이 없었다.
다음에는 데이가 물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액체 생물은 아까의 말을 마지막으로 무엇을 물어보아도 일언반구 대꾸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지?"
지노프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뇌까렸다.
"아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능을 모두 써 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 도대체 그것으로 지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 역시 어리석었던 것 같네. 과학자 세 사람이 모여 고양이가 녹은 물을 상대로 이러쿵저러쿵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키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라구!"
EMB00000c5848c6슈미트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고. 이 녀석은 아까 우리가 한 이야기를 듣고 그에 걸맞은 대답을 했단 말이야. 즉, 조금 더 지식을 넣어 준다면 대답을 끌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데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틀림없이 그렇다구. 데이, 이 녀석에게 어떤 책이든 읽어 주자구.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효과가 있을 걸세."
지노프가 즉시 찬성했다. 그리고 재빨리 연구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생물학 책을 가지고 왔다.
"바보 같은 짓을 하는군. 나는 그만두겠네. 그런 시시한 짓을 하고 있느니 차라리 집에 가서 낮잠을 자는 편이 낫겠네."
슈미트가 머리를 옆으로 흔들며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 후, 몇 시간에 걸쳐 지노프와 데이가 교대로 스피커를 향해 책을 계속 읽어 주었다.
가끔씩 질문을 해 보았으나 여전히 액체 생물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밤이 깊자 두 사람은 결국 낭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의 일이다.
지노프가 재차 액체 생물을 향해 물었다.
"어떤가? 어제 읽어 준 책은 재미있었나? 오늘도 무언가 읽어 줄까? 대답해 보게나."
지노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액체 생물은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술렁술렁 움직이면서,
"그렇게 해 주게. 어젯밤의 생물학 책은 대단히 재미있었네. 이번에는 여과성 바이러스에 관한 책을 읽어 주었으면 하네."
라고 똑똑히 대답하지 않는가!
지노프는 깜짝 놀랐다.
"어이! 모두 지금 한 말을 들었지? 이 거품 도깨비가 말을 했다네."
말이 떨어지자마자, 액체 생물의 단호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를 거품 도깨비라고 부르지 말아! 여과성 바이러스라든가, 액체 생물이라든가, 정확한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미, 미안하네."
지노프는 자신도 모르게 사과했다.
마치 학교 선생님에게 잘못을 들켰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어이, 우리 세 사람 모두 정신이 돌아 버린 것이 아닐까?"
슈미트가 아직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겁내면서 말했다.
그러자 액체 생물이 다시 또렷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네. 자네들은 중대한 발견을 한 것이지. 여과성 바이러스가 액체 생물이라는 점을 발견한 과학자보다도 훨씬 중대한 발견이지. 자네들은 새로운, 더욱이 자네들보다도 훨씬 뛰어난 지능을 가진 생물을 발견한 것이란 말이야. 자, 알았으면 여과성 바이러스에 관한 책을 가져와서 어제처럼 또 읽어 주게!"
 
두려운 액체 생물
 
세 사람은 온순하게 액체 생물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하루 종일 교대로 무색 투명의 유리병을 향해 책을 낭독해 주었다. 한 권을 다 읽자 액체 생물은 이어서 관심 있는 책을 명령했다. 그리고 조금도 쉬지 않고 넘실넘실 흔들거리면서 세 사람의 낭독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 5시가 되자, 세 사람 모두 녹초가 되어 버렸다.
"잠시 쉬었다 하세."
지노프가 손을 뻗어 전극 막대기를 뽑으려고 하자 스피커에서 몹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짓이야! 전류를 끊으면 안 돼. 아직 낭독이 끝나지 않았잖아!"
"그렇지만 우리들은 좀 쉬어야겠네."
지노프가 겁먹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쉰다구? 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래서 데이가 연구소 도서실에서 커다란 백과 사전을 가지고 와서 '피로'라든가 '수면' 등의 낱말을 읽어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한 것이라네."
"과연 그렇군. 인간이란 존재는 성가신 것이군. 우리에게는 피로 따위라든가 싫증이란 것이 없지. 오늘은 도리 없군. 그만두기로 하세. 그 대신 내일 아침이 되면 오늘처럼 낭독을 계속해 주게나."
겨우 허락을 받은 세 사람은 전극을 뽑아 낸 뒤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도중에 세 사람은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자 세 사람은 다시 모여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액체 생물이 명령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주었다.
그러나 액체 생물의 지식욕은 점차 심해질 뿐이었다. 세 사람 모두 그날 저녁에는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버렸으며 어리석은 짓에 점차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실험을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이 따위 물에게 혹사당하고 있다니 바보 같은 짓도 유분수지!"
슈미트가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액체 생물은 즉시 그 말에 대해서 따지고 들었다.
"뭐라고? 하등 동물인 주제에, 건방진 말을 하지 말게나. 자네들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 같은 고등 생물을 위해 일하게끔 되어 있었단 말일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슈미트는 화가 치밀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물이 담긴 병을 집어 들려고 했다. 데이와 지노프가 당황하여 앞을 가로막았다.
"참게나, 슈미트."
지노프가 말리며 액체 생물 쪽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대단히 뛰어난 지능의 소유자란 점은 잘 알고 있네, 액체 생물 군. 그러나 우리 또한 이 지구상에서의 생물 중의 왕자지. 즉, 고등 생물이란 말이지. 그리고 고등 생물이란, 호기심을 갖고 있는 법이네. 우리는 자네가 어떤 생물인가를 알고 싶어. 그런데도 자네는 책만 읽어달라고 하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시끄러워, 그런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아."
"그렇게 제멋대로 지껄인다면, 전극을 뽑아 버려 더 이상 지껄일 수 없게 만들어 버리겠네. 아무리 지능이 발달해 있더라도, 그 곳에 들어 있는 한 자네는 별 도리가 없을 걸세."
액체 생물은 잠시 듣고 있더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투덜거렸다.
"흠……. 아무래도, 내가 좀 신경질적이 된 듯하네. 잠깐 기다려 주게나. 그 원인을 생각해 볼테니."
액체 생물은 잠시 묵묵히 있었다. 그리고 5분 정도쯤 지나자 전보다 훨씬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원인을 알았네. 내게 염분이 부족해진 거야. 그래서 괜스레 신경질적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소금을 조금만 넣어 주지 않겠나?"
슈미트가 약품 선반에서 식염을 가지고 와서 조금 집어넣고 유리 막대기로 휘저었다. 액체 생물은 마치 인간이 하듯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제 기분이 좋아졌어. 자, 다시 낭독을 시작해 주게."
"잠깐 기다리게."
데이가 끼어들었다.
"이제 슬슬, 우리 질문에 대답해 주어도 될 것 같군. 도대체 자네 정체는 무엇인가?"
액체 생물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자네들이 액체 생물이라고 말한 그대로일세. 하지만 나는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지능이 높은 뛰어난 생물이지."
"그렇다면 그 호수 전체가 자네처럼 지능이 높은 액체 생물이란 말인가?"
"물론이지. 그러나 나는 이곳에 와서 제법 공부를 했으므로, 호수에 있는 나와는 상당히 차이가 나지. 그러나 다시 호수에 돌아가게 해 준다면 호수의 전체가 나와 똑같은 지식을 가지게 된단 말씀이야."
"잠깐,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네.
이번에는 지노프가 끼어들었다.
"지금 '나'와 '호수의 나'라고 했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액체 생물은 킥킥대며 웃었다.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원래 하나의 나인 셈이지. 그러나 나눈다면 몇 개의 나로 나뉘어진다네. 지금은 호수의 나와, 병 속의 나이지만, 호수에 가서 합쳐지면 다시 하나의 나로 바뀐다는 말이야. 이 병 속의 나도 만일 2개의 병에 나누어 적당한 음식과 물과 소금을 준다면 2개의 나가 된다네. 즉, 우리는 끝없이 번식해 갈 수 있단 말이지."
세 사람은 모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렇단 말이다."
라고 액체 생물은 세 사람의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하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언젠가는 우리가 이 지구를 점령할 때가 올 것이다. 능률이 낮은 당신들 인류를 대신하여 우리 액체 생물이 지구상의 주인공이 될 날이 말이야. 만일, 우리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을 익힌다면……."
 
소금에 취한 액체 생물
 
"어쨌든 정신 차려야겠네. 저 액체 생물에게 당하지 않도록 말일세."
데이가 말했다.
"그래. 저 놈이 무턱대고 불어난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 걸세."
그런데 그 염려가 머지 않아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의 일이다.
여느 때와 같이 슈미트가 여과성 바이러스가 담긴 병에 소금을 넣어 주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멍해 있던 슈미트는 그만 소금 병을 손에서 놓쳐 절반이나 담겨져 있는 소금 병이 액체 생물 속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앗!"
슈미트는 당황하여 병을 집어내려고 손을 뻗쳤다.
"위험해! 손이 녹는단 말이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노프가 외쳤으므로 슈미트는 순간적으로 손을 거두어 들였다.
유리병 속의 액체는 이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끓는 물처럼 수면으로부터 거품이 튀어 올랐다.
"어떻게 된 일이지?"
슈미트가 안색을 바꾸며 소리쳤다.
"스위치를 넣어 보자!"
데이가 재빨리 전극을 용기 속으로 집어넣고 수신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마자 갈라진 목소리가 다급하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좀 더 소금을 주게! 조금만 더! 고양이 시체를 조금 더 주게! 나는 성장하고 싶단 말이야. 좀 더 분열하고 번식하여 이 지구상에 넘쳐흐르고 싶단 말이야."
세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거품은 한층 발작하고 있었다.
"넘쳐흐른다! 강으로, 바다로! 지구는, 4분의 3이 물이지. 바다로 들어간다면 지구는 이제 우리 것이 된다! 이 지구상의 생물을 모두 먹어 치우면 지구는 우리 것이다."
뒤이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우와와와……. 이이이이……. 오오오오오……."
하는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당장이라도 지구를 점령하고자 덤벼드는 액체 침입자의 싸움의 외침 같았다.
지노프가 수신기의 스위치를 껐다.
"이 녀석은, 소금에 취했군. 굉장히 난폭해졌어."
"응, 난처해졌군."
데이가 팔짱을 끼고 여전히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액체 생물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이 녀석이, 정신이 들려면 며칠 걸릴 것 같군."
"질산을 넣어서, 소금의 화합물을 만들면 어떨까?"
라고 슈미트가 말했다.
"안 돼, 질산 나트륨에는 살균성이 있기 때문에 이 액체가 죽어 버릴지도 몰라."
"그렇지! 무언가를 혼합해서 엷게 하면 어떨까?"
라고 데이가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물이다. 물로 20~30배 정도 묽게 해 보지!"
EMB00000c5848c7세 사람은 급히 끓고 있는 액체를 커다란 물통에 쏟아 넣고 끓음이 멈출 때까지 물을 쏟아 넣었다.
이윽고 진정되었다. 대신에 액체 생물은 커다란 물통 가득히 불어나 버렸다.
"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한다?"
하고 지노프가 말했다.
"이렇게 불어나 버리다간 큰일나겠는걸."
"그래, 위험하고 말고. 그럼 불어난 만큼 싱크대에다 쏟아 버리면 어떨까? 하지만 원래 지능은 그대로 남아 있겠지. 아까 액체 생물이 일부나 전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지 않나?"
"그 말은 맞지만 싱크대에 버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
"어째서?"
"싱크대에 이렇게 많은 액체 생물을 버리면 강으로 흘러 들어가 그대로 바다로 들어가게 되지. 바닷물에는 소금기가 있으니까 액체 생물은 맹렬한 속도로 번식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 속의 생물을 전멸시키고 바다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된다고. 아까, 소금에 취한 액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렇게 된다면 정말 큰 일이지!"
데이가 말했다.
"그렇군. 하마터면 멍청한 짓을 할 뻔했군."
슈미트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좋을까?"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데이가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내가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을 때, 석탄산을 발라서 중화시키지 않았나? 그러니 원래 있었던 만큼의 액체만 퍼내고, 이 통 속에다 석탄산을 넣는다면 중화되어 죽어 버릴 것이네."
"그것 좋겠군. 자, 빨리 해 보세."
세 사람은 이내 전과 똑같은 분량만큼을 원래의 유리 용기에 집어넣고 물통 속에다 석탄산을 퍼 넣었다. 액체는 즉시 탁하게 변하여 잠잠하게 되었다.
"잘 되었군."
세 사람은 유리 용기 쪽으로 돌아가, 전극을 찔러 넣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먹을 것을! 먹을 것 좀 줘!"
"아직 살아 있군!"
데이가 기뻐서 소리쳤다.
"지금은 취해 있지 않군 그래."
지노프가 중얼거리며 해부대 위에 남아 있던 고양이 시체의 일부분을 용기 속에 집어넣었다. 시체는 즉시, 슈……, 슈……, 소리를 내며 녹아들기 시작하더니 2~3분이 지나자 완전히 녹아 없어져 버렸다.
이것으로 겨우 액체 생물은 기운을 차린 듯했다. 목소리도 전보다 훨씬 커졌다.
"아, 고맙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건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단 말씀이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 주지 않겠나?"
데이가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통 속의 액체 생물을 죽여 버린 것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 이외의 부분은 어떻게 되었나?"
"아, 그것은 저……, 싱크대 속에 버렸지."
데이가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일순간 용기 속의 액체는 무서운 기세로 거품을 일으키며 거친 소리로 말했다.
"아아! 그런 짓을 하다니! 그런 짓을 하면 그 부분은 죽어 버린단 말이야! 보통의 물로 지나치게 묽어지면, 우리는 죽어 버린다고!"
세 사람은 의미심장하게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생각지도 않게, 액체 생물을 죽이는 방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성공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 액체 생물은 다시 원래대로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전처럼 갖가지 책을 읽어달라고 지시했다.
세 사람의 과학자는 액체 생물의 요구를 들어 주었으나 그동안 곤란한 일이 벌어졌다.
메트칼프 사장이 짠 물 호수의 수수께끼는 어떻게 되었는지 연구 결과를 빨리 보고하라고 성가시게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것 참 난처하군."
데이가 말했다.
"사실대로 그 짠 물 호수의 물은 굉장한 지능을 가진 생물이라고 이야기를 해야만 하나……. 그러나 사장이 믿지 않겠지."
"믿지 않으면 증거를 보여 주면 되지 않나?"
라고 슈미트가 말했다. 데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은 무리야. 증거를 보여 주면 사장은 틀림없이 그런 위험한 생물은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죽여 없애라고 말할 걸세. 나는 모처럼의 귀중한 연구 재료를 그런 식으로 없애 버릴 수는 없다네."
"그것도 그럴 법하네."
라고 지노프가 말했다.
"설령 죽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메트칼프 사장은 즉시 세상에 그것을 발표할 거야. 그렇게 되면 온 나라 사람들이 진귀한 액체 생물의 견본을 얻고자 그 호수로 몰려들 걸세. 그리고, 필시 어떤 사소한 실수에서 액체 생물은 난폭하게 날뛰게 될 것이란 말이야."
그러자 슈미트가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그렇지! 이런 때야말로 액체 생물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어보면 어떨까? 그 녀석은 항상 자기가 인간보다도 훨씬 머리가 좋다고 말하지 않았나? 아마 그 녀석이 무언가 멋진 지혜를 가르쳐 줄지도 모르지."
과연 좋은 제안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액체 생물에게 곤란한 일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액체 생물은 잠시 묵묵히 있더니 이내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면 내게 좋은 생각이 있지. 내가 자네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빌려 줄 테니 자네들 연구소가 의뢰 받은 문제를 내게 들려주게나. 내 우수한 두뇌라면 어떠한 문제라도 즉시 해결할 수 있을 걸세. 그렇게 되면 자네들 연구소는 점차 번창하여 사장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 걸세."
"진짜로 그렇게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면 알 것 아닌가?"
그래서 세 사람은 마침 당면해 있는 발명에 관한 사항을 액체 생물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발명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어려워서 거의 체념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액체 생물은 그 발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더니 단 한 시간 정도만에 대수롭지 않게 해결해 버렸다. 세 사람이 몇 개월에 걸쳐서도 풀 수 없었던 문제가 액체 생물에게는 간단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 참 굉장하군!"
세 사람은 액체 생물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발명에 관한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메트칼프 과학 연구소의 명성은 즉시 굉장한 기세로 치솟았다.
일의 주문이 점차 늘어났다.
그 주문을 액체 생물은 간단하게 해결했고 그로 인해서 성공의 사례금이 점차 불어나게 되었다.
연구소 일은 갑자기 늘어나 바쁘게 돌아갔다. 연구소를 증축한다든지 조수나 사무원을 몇 사람 새로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성공에 가장 깜짝 놀라서 기뻐한 것은 물론 메트칼프 사장이었다. 그리고 짠 물 호수의 수수께끼 쪽은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모두가 액체 생물이 말한 대로 된 것이다.
 
나를 다시 호수로
 
세 사람도 역시 바쁘게 지냈다
산처럼 쌓인 주문을 차례차례 액체 생물과 상담하여 해결해야만 했다.
액체 생물은 엄중한 방음 장치가 된 깊숙한 방에 두었고, 그 방에는 데이와 슈미트, 그리고 지노프의 세 사람 이외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액체 생물의 비밀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옆방은 낭독실이었다. 액체 생물에게 갖가지 문제를 해결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책을 읽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새로 고용한 사람에게 책을 읽게 하여 그 소리를 마이크로폰과 스피커에 연결시켜 방음실 속에 있는 액체 생물에게 들려 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몇 주 동안은 마치 화살과 같이 지나갔다. 연구는 아무런 장애 없이 잘 풀려갔으며, 사례금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런 만큼, 세 사람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자 액체 생물이 점차 불쾌한 듯이 보여 졌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서 액체의 염분이나 영양분을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액체 생물의 불쾌함은 점차 도를 더해 갈 뿐이었다.
결국에는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적이 몇 차례나 계속됐다.
세 사람은 방음실에 모여 그에 대한 일을 의논했다.
"결국, 액체 생물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군."
슈미트의 제안에 모두가 찬성했다. 그래서 스위치를 넣고 지노프가 대표로 물어보았다.
"액체 생물 군.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무언가 불만이 있으면 말해 보게나. 무엇이라도 원하는 대로 해 주겠네. 자네가 우리에게 협력해 주지 않으면 우리 입장이 퍽 난처해진다네."
그러자 액체 생물은 여전히 불쾌한 어조로 대꾸했다.
"불만투성이일세! 도대체, 이런 일만 하고 있다니,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게 무슨……?"
"자네들 세 사람은 내 두뇌 덕택에 점차 유명하게 되어 돈까지 벌게 되었지만 내게는 돈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네. 그런데 나는 매일같이 수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얻는 것은 고작해야 그날 그날의 양식인 죽은 물고기나 고기 덩어리뿐이지. 나는 이제 이런 생활에 싫증이 났단 말일세."
"그러나 우리가 돈을 버는 데 있어서 전혀 비용이 안 드는 것은 아니네. 설비를 늘리기도 하고, 책을 다량 구입해서 자네에게 갖가지 지식을 알려 주는 것도 돈이 필요한 것 아닌가?"
데이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러나 액체 생물은 불만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단지, 사물을 생각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싫증이 났단 말이야. 자네들 역시 그렇겠지. 나도 책에서 익힌 지식을 무언가 중요한 일에 사용하고 싶다구!"
"그래서 매일 갖가지 연구를 들려 주지 않는가?"
지노프가 말하자 액체 생물은 경멸한다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흥, 그런 어리석은 문제를 생각하는 것 따위를 갖고 나는 내 지식을 유용하게 사용한다고는 생각지 않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 보게나!"
성질 급한 슈미트가 소리쳤다.
"나를 다시 호수에 데려다 주게. 나는 남은 부분의 나에게 지금까지의 내가 공부한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단 말이야. 자네들은 다시 별개의 나를 이곳에 데리고 와서 가르치면 될 것 아닌가?"
"그럴 수는 없어."
데이가 강경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겠네. 자네가 이곳에 있는 한, 자네는 우리들의 선생이네. 인류에게 새로운 지혜를 전수해 주는 은인이지. 그러나 만일 자네를 다시 호수로 돌려보내 그 호수 전체가 자네와 똑같이 갖가지 지식을 익히게 된다면, 무서운 인류의 적이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것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승낙할 수 없다네."
"뭐라고! 이 은혜도 모르는 인간 같으니. 하등 동물인 주제에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그렇게 말한다면 이제 두 번 다시 지혜 따위는 빌려 주지 않을 테니까 그리 알라고!"
액체 생물은 화를 벌컥 내며 입을 다물었다.
이리하여 2~3일 동안 액체 생물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난처하게 되었다. 어쨌든 액체 생물이 협력해 주지 않으면 일은 밀리기 마련이고, 그렇다고 해서 액체 생물의 요구를 들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묵묵히 액체 생물의 하는 태도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하루, 이틀이 지났다.
다투고부터 5일째 되던 날, 세 사람은 함께 방음실로 향했다.
"오늘쯤은 기분이 풀려 있을지도 모르지."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방음실 문을 열고 책상 위의 용기를 본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액체 생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가슴이 철렁하여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 어찌 된 셈이지?"
"아니! 어떻게 빠져나갔지?"
"도망칠 수가 없지 않은가!"
세 사람은 제각기 엉겁결에 한 마디씩 내뱉었다.
"그렇다면 도둑이 들어와서 훔쳐간 것이겠지. 아아, 이제 액체 생물이 없어졌으니 이 메트칼프 연구소도 끝장이야. 모처럼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었는데, 이제 다 수포로 돌아갔군. 역시, 녀석이 한 말을 들어 줄 걸 그랬나봐……."
이렇게 말한 것은 슈미트였다. 지노프가 슈미트의 얼굴을 흘겨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슈미트! 이런 때에 돈 벌 궁리를 하고 있다니! 도대체 그 생물이 이 곳을 빠져나가 이 세상에서 번식해 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게나. 인류가 놈들에게 깡그리 먹혀 버릴지도 모른단 말일세!"
데이는 묵묵히 팔짱을 끼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속은 액체 생물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데이는 오랫동안 액체 생물과 함께 일해 오면서 마치 친구에 대한 우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액체 생물은 포로 신세인 자신이 싫어져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먹어 사라져 버렸는지도 몰라. 아, 우리가 너무 심한 짓을 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책상 밑바닥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어딘가에 액체 생물이 흘러 넘친 자국이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방구석에, 해파리 같은 모습의 반원 물체가 꿈틀대며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앗!"
데이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금을 만들자
 
"저, 저것 좀 보게!"
데이의 외침에 슈미트와 지노프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앗! 액체 생물이다!"
그러자 그 반원 모양의 액체 생물이 마치 세 사람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듯이 주르륵 주르륵 세 사람을 향하여 다가왔다. 그리고 갑자기 그 일부분이 스르륵 일어서는 듯싶더니 기다란 팔과 같은 모습이 되어 세 사람 쪽으로 스르륵 뻗었다.
"으앗!"
세 사람은 엉겁결에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액체 생물이 있는 곳에서 세 사람이 있는 곳까지EMB00000c5848c8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팔은 도중에서 맥없이 구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반원 모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액체 생물이 변화한 것이다! 스스로 몸의 성질을 바꾸어 움직인다든지 손을 뻗칠 수 있다든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일 먼저 제 정신을 찾은 사람은 데이였다. 그는 테이블 위의 빈 유리 용기를 쥐자, 흐느적대며 움직이고 있는 액체 생물의 옆으로 달려가 병의 입 쪽을 벌렸다.
그러자 액체 생물은 마치 보금자리 속으로 들어가는 문어처럼 미끄러지듯이 스스로 용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데이는 유리 용기를 가슴에 안고 재빨리 테이블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급히 전극을 꽂고, 수신기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대단히 흥분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인간들이여! 나는 이제 막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정신력으로 내 몸을 바꾸어, 어디에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정신력이라고?"
"그렇다. 역시 내 뛰어난 두뇌가 해 낸 것이다. 이것으로 지금까지 두뇌는 인간의 몇 십 배나 뛰어나면서,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는 하등 동물과 같은 신세에서 해방되었단 말이다!"
액체 생물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세 사람은 할 말을 잊은 채 서 있었다.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 머리가 뛰어나며, 무서운 액체 생물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면 순식간에 인류나 모든 생물을 먹어 치울 것이다.
세 사람은 힐끗 눈을 마주쳤다.
'이 방에서 절대로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세 사람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지노프가 한발 한발 석탄산이 있는 선반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자 액체 생물이 기묘한 말을 끄집어냈다.
"인간들이여, 나는 매우 기쁘네. 그래서 지금까지 자네들을 괴롭힌 것 같아서 자네들을 위해 무언가 해 주고 싶네."
액체 생물의 예외적인 발언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엇을 해 준다는 말인가?"
"음, 우리는 이 2개월 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어. 그러나 그것으로는 서로 공부할 시간이 없어진다네. 그래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도 돈 그 자체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네."
"돈을 만든다고?"
슈미트가 한 걸음 몸을 내밀며 물었다.
"어, 어떻게 만든단 말이지?"
"기다리게."
데이가 슈미트를 말리면서 말했다.
"위조 지폐를 만든다니, 당치도 않네."
"위조 지폐를 만든다는 말이 아닐세.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황금을 만들자는 것이네. 아무 곳이나 널려 있는 하잘것없는 금속을 황금으로 바꾼다는 말이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지?"
슈미트가 다시 몸을 내밀며 물었다.
"아직은 할 수 없네. 그러나 그런 것쯤은 문제가 아니지. 지금까지 낭독해 준 책에서 보면, 모든 금속은 원소로 되어 있으며, 그 원소를 바꾼다면 구리를 금으로 바꾸는 일도, 철을 금으로 바꾸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세."
"그 원소를 바꾼다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텐데."
"그렇지 않아. 라듐이라든가 우라늄이라고 하는 방사능을 지닌 금속은, 저절로 방사능을 내뿜어 납으로 변해 가지 않는가? 그 원리를 응용한다면, 분명히 해 낼 수 있을 걸세."
"그것 참 멋지군! 구리나 철을 금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인류의 꿈이었네. 우리가 그것을 해 낸다면 그야말로 굉장한 일이라네.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슈미트가 굉장히 흥분하여 말했다.
"나는 역시 안 될 거라고 생각하네. 멋대로 금을 만들어 낸다면 이 세상에 혼란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으니까."
데이가 고개를 저었다.
지노프도 끼어들었다.
"맞아. 우리는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되는 과학만을 연구해야 해. 보통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것은 연구로서는 좋지만 진짜로 금을 만들어 낸다면 인류를 위해서 안 된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희들은!"
슈미트는 맹렬히 덤벼들었다.
"데이, 자네는 항상 세상이 이러쿵저러쿵 된다느니, 시끄럽게 떠들어대지. 그리고 지노프, 자네는 일 년 내내 인류를 위한다느니 하면서 이루지도 못할 이상만을 내세우고 있고 말이야. 그러나 나는 달라. 나는 부자가 될 이런 멋진 기회를 놓칠 바보가 아니란 말이야!"
슈미트는 말을 마치자 액체 생물 쪽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반대일지 모르지만 나는 대찬성일세. 나는 자네 편이란 말이야. 자, 어떻게 하면 금을 만들 비법을 고안해 낼 수 있겠나? 무엇이라도 좋으니 명령만 내려 주게!"
액체 생물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러면 시작하도록 하지. 우선 원자, 물리학 관계 책을 남김 없이 갖고 와서 낭독자에게 읽히도록 하고 다음은 광물학의 책을 가져다가 낮이나 밤이나 계속해서 읽어달란 말이야!"
 
교환 조건
 
이리하여 액체 생물은 금을 만드는 비법 연구를 시작했다.
매일매일, 낭독하는 사람은 산처럼 쌓인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주었다. 액체 생물은 그 내용들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사흘째가 되어 슈미트가 아직 안 되겠느냐고 묻자,
"아직 알 수 없는 점이 있어. 전기에 관한 책을 20권 정도 가져다가 다시 읽어 주게."
라고 말했다.
닷새 째에는 다시 30권에 달하는 갖가지 책들을 요구해 왔다.
세 사람은 이제는 다른 연구에 관한 일은 내팽개치고, 매일같이 액체 생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일을 하려고 해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업었다.
슈미트는 특히 초조해 있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방음실에 들어가서는 액체 생물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슈미트는 그 일로 인하여 잠도 못 이루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였으므로 이내 여위게 되어 마치 병자같이 되어 버렸다.
열흘째의 일이었다.
그 날 아침, 세 사람이 방음실에 들어가 수신기 스위치를 넣자, 이내 스피커에서 쾌활한 액체 생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나는 드디어 문제를 해결했소!"
"해, 해 냈다고?"
슈미트가 스피커 쪽으로 몸을 바싹 당기며 물었다.
"이론은 완성되었지. 실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어서 빠뜨린 것이 있었네."
"그렇다면?"
"금을 만들려면 극히 간단한 장치가 필요해.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화학 약품과 전기 기구를 메모해서 이 곳에 갖다 주게나."
세 사람은 떨리는 손으로 액체 생물이 부르는 물품의 이름을 메모하여 앞을 다투어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각자가 맡은 물품을 갖고 방음실로 향했다. 문을 열려고 할 때 슈미트가 말했다.
"그런데 데이, 이런 것으로 정말 금을 만들 수 있을까? 액체 생물 녀석,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 우리에게 엉터리로 말한 것이 아닐까?"
"그럴 리가 없어."
데이는 강경히 잘라 말했다.
"지금까지 액체 생물은 우리에게 엉터리로 가르쳐 준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점차 저 액체 생물 녀석이 좋아진단 말씀이야. 저 녀석이 바깥으로 나가면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에 결코 인간처럼 거짓말을 한다든지, 속인다든지 하지는 않는단 말일세. 그러므로 틀림없이 이번에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녀석은 혼자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기쁨에 겨워 진짜로 금을 제조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라는 기분이 드네."
슈미트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역시 지혜는 인간 쪽이 한 수 위지. 나는 녀석에게서 금 제조법을 익힌 뒤, 이내 그 용기 속에다 석탄산을 집어넣어 죽여 버릴 작정이네. 어때, 좋은 생각이지? 그렇게 하면 이제 위험도 사라질 것이고, 게다가 금 제조법이 다른 사람에게 유출될 염려도 없어지지 않겠나?"
"자, 자네! 무슨 소릴 하는가!"
데이는 발끈 화를 내며 슈미트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액체 생물을 속이자고 말하는 건가? 나는 그런 비겁한 짓은 할 수 없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데이?"
슈미트가 다시 비웃으며 응수했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구. 단지 세균이란 말이야. 속이고 뭐고가 없지 않아?"
"아니, 그렇지 않아. 설령 상대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약속을 어긴다든지 속인다든지 하는 짓은 용서할 수 없어. 나는 절대로 그런 짓을 허락할 수 없다구!"
세 사람은 언쟁을 벌이면서 방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가지고 온 화학 약품과 코일, 전기 기구 등을 액체 생물의 용기 곁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전부 준비되었네."
라고 데이가 말했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지?"
그러자 액체 생물은 전연 의외의 제안을 해 오는 것이었다.
"다음은 금 제조법을 가르쳐 주는 대신에, 나에 대한 사례를 정할 차례야."
"뭐, 뭐라고?"
세 사람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EMB00000c5848c9"사례를 원하는가?"
"당연하지 않나? 나는 자네들을 세계 제일의 부자로 만들어 주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거야. 그 대신에 내가 조그만 사례를 바란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는가?"
"도대체 어떤 사례를 바라는가?"
지노프가 액체 생물에게 따지고 들었다.
"극히 간단한 일이지. 금 제조법의 대가로 나를 원래의 호수로 데려다 주면 되는 걸세."
액체 생물이 차분히 대꾸했다. 세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갑자기 슈미트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정도쯤이라면 기꺼이 책임지지."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슈미트!"
지노프가 큰소리로 가로막았다.
"그 일만큼은 절대로 안 되네! 이 액체 생물이 호수로 되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자네가 잘 알고 있지 않나! 액체 생물은 이제 스스로 걸어다닐 수도 있단 말이야. 호수 안의 물이 모두 기어 나와서 우리를 습격할 거란 말이야!"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암, 가능하고 말고."
"자네, 정말 내 일을 방해할 셈인가, 지노프!"
슈미트와 지노프는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언쟁을 벌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증오와 노여움으로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슈미트도, 액체 생물도
 
"두 사람 모두 이제 그만 두게나!"
데이의 딱 벌어진 몸집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두 사람은 마지못해 물러섰으나 아직까지도 씨근거리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 진정들 하게. 우리 모두가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그런 것 같구먼.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세."
"이런 녀석과는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 인류의 운명보다도, 돈벌이를 앞세우는 이런 비열한 녀석은 이제 볼도 보기 싫다고!"
지노프가 입술을 떨면서 소리쳤다.
슈미트가 이내 응수를 하려다 말고 무슨 생각에선지 몸을 돌려 휙 하니 방음실에서 나가 버렸다.
나머지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으나 할 수 없이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복도에 나서자 슈미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이 좋겠군. 액체 생물이 듣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슈미트는 이렇게 말하더니 빙긋이 웃었다.
"지노프의 완고함에는 내가 두 손 들었네. 그렇다고 나라고 해서 인류의 운명과 돈벌이를 바꿀 수야 있겠나? 무엇보다도 전 세계가 액체 생물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린다면 금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렇다면 어째서 자네는 그런 말을 했나?"
지노프가 따지고 들었다.
"이해 못 하겠나? 나는 녀석에게서 금 제조법만 배우면, 즉시 녀석 속에다 석탄산을 뿌려 넣어 죽여 버릴 작정이란 말이야. 금 제조법의 비결이 목적이쟎나? 그래서 거짓말을 한 거라고."
"자네는 그렇게 항상 거짓말만 늘어놓는군!"
지노프가 분통을 터뜨렸다.
"알아듣게 이야기하면 수긍할 줄 알아야지! 더 이상 건방진 소릴 지껄이면 목을 분질러 버리겠어!"
"어럽쇼! 할 수 있으면 해 보게!"
지노프가 주먹을 움켜쥐고 대들었다.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하려는 듯이 씩씩댔다.
데이가 다시 두 사람을 메어 놓았다.
"이제 그만하게나! 오늘 더 이상 논쟁을 벌이다가는 싸움이 벌어질 것 같으니 오늘밤은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서 의논해 보기로 하세."
데이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두 사람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데이는 어젯밤 늦게까지 일을 했던 탓에 늦게 눈을 떴다. 이미 한낮이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이것 참, 늦잠을 잤군."
데이는 세수도 하는둥 마는둥하고 급히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여느 때와 같이 화학자와 물리학자, 생물학자와 수학자들이 자기의 책상에서 이미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낭독하는 사람도, 평소처럼 마이크를 향해 무미 건조한 목소리로 어려운 전문 서적을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데이는 방음실 앞에 서서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앗!"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액체 생물을 넣어 둔 용기가 없어졌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금 제조를 하기 위한 도구나 약품류도 그리고 액체 생물과 이야기하기 위한 수신기까지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액체 생물만 없어졌다면 다시 그 정신력을 이용해 걸어서 빠져나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용기째 없어진 것이나 도구와 수신기까지 없어진 것으로 짐작해 보건대 의심할 나위 없이 인간의 소행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누가?
물론 슈미트 아니면 지노프다.
이 방음실 열쇠는 그들 세 사람밖에는 갖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이 빼내 갈 리는 만무하다.
슈미트일까? 그렇지 않으면 지노프일까?
데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열려 있는 문으로 지노프가 불쑥 들어왔다. 그리고 얼이 빠져 있는 데이를 보고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데이?"
"지노프? 그렇다면 역시 슈미트. 여보게, 저길 보게나! 누군가가 액체 생물을 훔쳐 갔어."
"슈미트 녀석 짓이군!"
지노프는 방안을 둘러보면서 외쳤다.
"그렇다면 그 녀석! 역시 금 제조법 때문에 액체 생물을 빼돌렸구나!"
"하지만 어디로 갖고 갔을까?"
"그 짠 물 호수로 갔을 거야. 틀림없이 액체 생물이 금 제조법의 비법과 교환 조건으로 내걸었을 테지."
"큰일났군!"
데이는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짠 물 호수에 그 액체 생물을 놓아 주면, 녀석은 호수의 동료들에게 걷는 방법을 가르쳐 줄 걸세. 그렇게 된다면 세계는 파멸일세!"
"빨리 가 보세, 데이!"
지노프가 데이의 손을 낚아채며 외쳤다.
EMB00000c5848ca"지금이라도 빨리만 가면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자, 빨리 가 보세!""잠깐만 기다려!"
데이는 연구실의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45구경 자동 권총을 끄집어내어 포켓에 쑤셔 넣었다.
"만의 하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네. 자, 가지."
두 사람은 연구소 밖으로 뛰쳐나와 속력이 빠른 지노프의 2인승 차에 올라탔다.
차는 이내 엔진 소리를 내며 짠 물 호수 쪽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배반자의 최후
 
차는 조금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그러나 짠 물 호수 근처에 도착한 것은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차로 가면 눈치 챌 테니 여기서부터는 걷기로 하지."
두 사람은 차를 도로 모퉁이에 세워 놓고 어둠 속을 걸어갔다.
그러자 호숫가 쪽에서 회중전등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 속으로 호수 바로 곁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둘레에는 유리 기구와 수신기 같은 것이 놓여져 있었다.
"저기 있다! 간신히 늦지 않은 것 같군."
지노프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슈미트 녀석은 액체 생물을 속이려고 했지만 액체 생물도 역시 슈미트를 믿지 않은 것이 틀림없어."
데이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슈미트는 금 제조법을 배우기까지는 액체 생물을 호수에 데려다 주지 않겠다고 말했을 것이고, 액체 생물은 호수에 가기 전까지는 제조법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말했겠지."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도 가능한 한 빨리 슈미트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슈미트는 지금 액체 생물에게 가르침을 받아가면서 금을 제조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 거지?"
"이렇게 하면 되나?"
열심히 질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갑자기 환희의 외침으로 바뀌었다.
"오, 금이다! 진짜 금이 되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슈미트는 손에 번쩍번쩍 빛나는 조그만 것을 받쳐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금을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저것 좀 보게나!"
갑자기 지노프가 데이의 팔뚝을 움켜쥐면서 공포에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슈미트가 금을 바라보면서 한쪽 손을 포켓 속에 찔러 넣고 무언가 조그만 약병을 끄집어내는 것이 보였다.
"아, 저것은 석탄산이다! 놈은 액체 생물을 죽일 작정이EMB00000c5848cb다."
"안 돼! 뛰어가자!"
지노프와 데이는 급히 내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슈미트는 병마개를 열자 재빨리 그것을 액체 생물의 용기 속으로 부으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액체 생물이 들어 있는 유리 용기 속으로부터 회중전등 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는 문어발과 같은 것이 휙 하니 튀어나오는 듯싶더니, 막 약품을 쏟으려고 하는 슈미트의 손목을 눈 깜짝할 새에 휘감아 버린 것이다.
"아, 앗!"
슈미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약품 병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 이 손 좀 풀어 줘!"
슈미트는 비명을 지르며 손목에 휘감긴 문어발 같은 것을 떼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 갑자기 슈미트의 커다란 몸집이 획 하고 한 바퀴 도는 것 같더니 땅 위로 곤두박질치는 것이었다.
"으악!"
"죽은 것 같아! 빨리 가 보세!"
데이가 외쳤다. 두 사람은 더욱 빨리 뛰어갔다.
회중전등이 꺼져 버렸다. 첨벙 소리가 났다. 호수 속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호수 주위는 어둠 속에 빠져 버렸다.
그 어둠 속으로부터 슈미트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액체 생물, 용, 용서해 주게, 그것은 농담이었어. 아니, 진담이라네. 제발 부탁이니 나 좀 풀어 주게! 이제 그런 비겁한 짓은 다신 하지 않을 테니 용서해 주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슈미트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으, 윽! 죽는 것은 싫어. 나 좀 구해 주게, 아앗, 누군가 나 좀 구해 주게!"
이어서 첨벙! 하는 세찬 물소리가 났다. 그리고 부글부글하는 거품이 끓는 소리와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소리가 잇달아서 들려왔다.
듣기에도 끔찍스러운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어둠 속으로부터 울려 퍼졌다.
슈미트의 최후의 목소리였다!
데이와 지노프가 권총을 한쪽 손에 쥐고 그 곳으로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뒤였다. 주위는 다시 조용히 가라앉았으며 수면에는 이미 슈미트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가지고 온 회중전등을 켜서 주위를 비추었다.
"슈미트!"
하고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지면에는 전선과 코일, 그리고 금을 제조하기 위한 도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금 전에 만든 금 덩어리도 있었다. 슈미트와 액체 생물이 다투었을 때 뒤죽박죽이 되어 유리 기구가 뒤엎어져 있었다. 그러나 액체 생물의 모습은 어느 곳에도 있지 않았다.
"슈미트를 죽여 버리고 호수로 도망쳐 버린 것 같군."
지노프가 공포에 질려 말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나겠네, 데이. 액체 생물은 이제 동료 액체 생물들에게 걷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 틀림없어.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지겠네!"
"슈미트 녀석이 나빠. 액체 생물은 약속을 지켜 금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음에도 녀석은 액체 생물을 죽이려고 했으니."
"누가 아나? 액체 생물이야말로 슈미트를 속여서 이곳까지 데려왔는지 말이야. 제조법을 가르쳐 준다고 말하여 이 곳 호수까지 데려와 죽일 작정이었는지."
"글쎄, 어쩐지 나는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지만……."
데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그 액체 생물만큼은 인간 편이 되어 줄 것이 라는……."
진짜로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슨 잠꼬대 같은 말을 하고 있나, 데이!"
지노프가 초조해 하며 말했다.
"녀석은 슈미트 몸을 잔혹하게 녹여 없애지 않았나? 더욱이 그 액체 생물 역시 이 호수 전체의 액체 생물과 마찬가지야. 액체 생물은 하나라고 언젠가 녀석이 말하지 않았나?"
"하긴 그렇지만……."
"자,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세. 그리고 메트칼프 사장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뒤 무엇이든 액체 생물들의 습격에 대비할 방법을 강구해 보세."
"그렇게 하세."
 
포위되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자동차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데이가 운전했다.
메트칼프 사장의 저택에 가려면, 이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달려야만 한다.
달리기 시작해서 얼마 안 돼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홀연히 호수 일대에 커다란 물결이 일더니 도로에까지 물보라가 휘몰아쳤다.
물보라는 유리창에 닿자 기분 나쁜 벌레처럼 꿈틀꿈틀 돌아다녔다.
데이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위험해. 일단 마을로 돌아가서 사장에게는 전화로 사정을 털어놓도록 하세."
이렇게 말하고 핸들을 꺾는데, 그 때 뒤를 돌아본 지노프가 목구멍이 조이는 듯한 공포의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질했다.
"아, 안 돼. 데이! 저것을 보게!"
"이런!"
호수의 물이 도로 쪽으로 미끄러지듯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바람에 밀린 물결이 호숫가에 밀어닥치자 그대로 뒤로 물러나지 않고 조금씩 호숫가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물결은 호숫가에서 부서지자 순식간에 거대한 물의 덩어리가 되어 그것이 서로서로 부딪쳐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부풀어올라 직경 50센티미터 정도의 무시무시한 해파리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몸의 밑 부분에서 문어발 같은 것이 쓱 하고 튀어나와 도로 쪽으로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놈이 가르쳐 주었구나! 호수 안의 액체 생물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그것뿐만이 아니야. 녀석은 두 달 사이에 인류가 5천 년에 걸쳐 이룩해 놓은 문명을 터득했단 말일세. 그 지식이 지금 호수 전체에 퍼졌단 말이야. 이 놈들은 정말 무서운 적이군."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해파리 군대와 같은 액체 생물의 무리는 서서히 전진해 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차 위로 기어올라 운전대 유리창으로 올라왔다.
"제기랄!"
지노프가 와이퍼 스위치를 틀었다.
액체 생물은 불시의 공격을 받고 창으로부터 떨어졌다.
"달아나자!"
데이는 액셀레이터를 밟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이미 앞쪽 도로에도 액체 생물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끝장이야! 포위 당했어"
"젠장! 이렇게 된 바에는 강행 돌파다. 가자!"
데이가 외쳤다. 차는 맹렬한 속도로 전방의 액체 생물 무리 속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앞에도, 뒤에도, 거대한 해파리 괴물과 같은 액체 생물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차바퀴가 녀석들에게 부딪쳐 헛돌았다.
지노프가 문을 열고 둘레의 땅 위를 향해 자동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액체 생물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정신력으로 지탱하고 있는 움직이는 원동력이 부서져 액체 생물은 갑자기 물의 형태로 바뀌어 다시 흘러 내렸다.
"지금이다!"
차는 전속력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2분 후에는 액체 생물 무리의 한가운데를 벗어나 산 맞은편의 메트칼프 사장의 저택을 목표로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었다.
 
군대 출동
 
메트칼프 사장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그것이 호수의 수수께끼 정체에 관한 것임을 알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것참 큰일이군!"
"두말할 나위도 없지요."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할 심산일까?"
"모르지요. 어쨌든 녀석들의 지능은 우리 인간보다 몇십 배나 높단 말예요. 게다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요. 총을 쏘아도 폭파시켜도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더욱이 그 녀석들은 지금도 점점 불어나고 있어요!"
"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메트칼프 사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노프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아시는 분 중에 누군가 고위층에 있는 분이 안 계십니까? 이 이야기를 하더라도 곧이들을 사람 말입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조사에만 몇 주일씩 걸리게 하는 사람말고 즉시 행동에 옳길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여하튼 1분이라도 지체 없이 대책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하고 옆에서 데이가 거들었다.
"있네. 그런 사람이라면 주둔 사령관인 피어슨 소장이 적격이지. 그라면 내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 줄 거야."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즉시 전화를 걸어 보시죠."
"알았네."
메트칼프 사장은 즉시 수화기를 들어 군사령부를 불렀다. 피어슨 소장이 나오자 사건 경위를 간단하게 설명한 후 수화기를 지노프에게 넘겨줬다.
지노프는 재빨리 이야기했다.
"이 지방에 있는 주둔 부대를 즉시 전원 집결시켜 그 짠 물 호수로 보내 주기 바랍니다. 그런데 나무 소독에 쓰이는 분무기를 전원에게 지참시켜야만 합니다."
"잘 알았네. 두 시간 이내에 최초의 부대가 그곳에 도착할 걸세."
피어슨 소장은 군인답게 즉시 답변해 주었다. 지노프는 이어서 보스턴과 뉴욕에 있는 굴지의 약품 회사에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창고에 있는 석탄산을 전부 이곳으로 갖다 주기 바랍니다. 대사건입니다. 서둘지 않으면 인류가 멸망하고 맙니다."
 
상대하기 벅찬 적
 
그 날, 밤이 깊었을 무렵 주둔 부대를 태운 트럭이 잇달아 도착하기 시작했다.
지노프와 데이는 병사들을 지휘하여 석탄산을 분무기에 채워 넣도록 하여 즉시 호수로 출동시켰다. 병사들은 물가에서 꿈틀대고 있는 액체 생물에게 분무기를 일제히 퍼부었다. 액체 생물들은 이내 흰 빛을 띤 물이 되어 땅 위로 흘렀다.
한편 공병 부대는 호수 위에 철제 보트를 띄워 가지고 있던 석탄산을 무차별로 호수 속에 털어 넣었다.
뉴욕에서는 석탄산을 가득 실은 헬리콥터가 잇달아 날아와 호수 위를 날면서 석탄산을 마구 뿌려댔다.
짠 물 호수는 이내 굉장한 기세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별 수 없이 액체 생물도 전멸한 듯이 보였다.
"됐다. 이젠 안심이다."
지노프와 데이는 피어슨 소장과 메트칼프 사장과 함께 호수 근처에 마련된 사령부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하기에는 아직 너무 일렀다.
당황하여 그 곳으로 달려온 장교 한 사람이 창백한 얼굴로 피어슨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큰일났습니다, 사령관님! 액체 생물은 아직 전멸되지 않았습니다! 호수에서 흐르고 있는 작은 강 주위 일대로 액체 생물이 넘쳐흘러 그 근방에 있던 마을 사람이 10명 정도 죽었습니다!"
"저런! 지금 즉시 부대의 일부를 그 곳으로 파견하게!"
분무기에 새롭게 석탄산을 집어넣은 부대가 황급히 강 쪽을 향해 떠났을 때, 다시 전령이 사령부로 뛰어 들어왔다.
"보고합니다! 액체 생물의 일부분이 물줄기를 타고 하류에 있는 목장으로 내려가 소 몇십 마리인가를 녹여 없앴을 뿐더러 여전히 전진 중입니다!"
사령관이 분통을 터뜨렸다.
"당했군! 우리가 호수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에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곳 저곳으로 도망쳐 버렸단 말일세!"
지노프도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후로도 보고는 잇달아 날아왔다.
액체 생물은 교묘하게 인간의 눈을 속여 물줄기를 타고 물과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도망친 것이다.
사령부 벽에 걸린 지도에는 액체 생물이 발견된 장소가 차례차례 표시되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데이는 깜짝 놀랐다.
"앗, 이것을 보셔요! 그들은 바다 쪽으로 가고 있어요! 바다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들은 몇천 배로 불어날 수 있습니다!"
"큰일이군! 그렇게 되면 끝장일세. 한 방울이라도 바다로 들어간다면 승산은 없어져 버리네!"
"이렇게 되면 미국 전역의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비상선을 긋고 그들을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도록 해야만 하겠어요."
"그러나 이곳은 커다란 강이 있지 않는가? 강으로 들어선다면 군대의 힘이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는가."
피어슨 소장이 절망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는 갑자기 액체 생물의 말을 생각해 냈다.
"아니, 강은 괜찮습니다. 액체 생물은 보통의 물에 엷어지면 죽어 버린답니다. 그러므로 강으로는 절대로 접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안심이네. 즉시 명령을 내려 액체 생물을 저지할 비상선을 치도록 하지!"
피어슨 소장이 힘있게 대꾸했다.
바다와 강 사이에는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비상선이 쳐졌다. 물이나 풀이 있는 곳에는, 한 군데도 남김 없이 석탄산을 뿌려 절대로 액체 생물이 기어들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액체 생물 쪽이 인간보다도 지능이 높았다. 거의 대부분의 액체 생물은 비상선에 걸려 죽음을 당했으나 극히 소수의 액체 생물은 인간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을 통하여 비상선을 돌파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조금이라도 먹을 것과 물이 있다면 액체 생물은 순식간에 천 배나 만 배로 불어나는 것이다.
비상선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바다로 한 걸음씩 다가가는 꼴이었다.
"이제 틀렸군."
사람들은 절망했다. 온 세계가 액체 생물, 수수께끼의 액체 침입자의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인 것이다.
 
최후의 수단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데이는 호수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미 그 곳에는 대부분의 액체 생물은 남아 있지 않은 듯했으나 데이는 어쩐지 그 곳에 실험실의 유리 용기 속에 들어 있던 그 액체 생물이 숨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내게 책임이 있다. 우리가 액체 생물에게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 돌연 데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그렇다!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황급히 사령부로 돌아가 소형 수신기를 한대 빌려서 호숫가로 향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가만히 2개의 전극을 물 속에 넣고 스위치를 넣었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써 액체 생물과 이야기를 해 보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아주 가냘픈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아, 자네는 데이가 아닌가?"
"그렇다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데이는 재빨리 물었다. 액체 생물은 마치 인간의 한숨과 똑같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네. 내 일부분이 자네들에게 지독한 피해를 입히고 있지."
"자네 말대로 우리 인간의 운명은 실로 급박한 처지에 도달해 있네. 액체 생물 군, 아직 자네에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내 부탁 좀 들어 주게. 우리 인류를 멸망시키지 말아달란 말이네. 지구의 문명은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피땀 흘려 이룩해 놓은 것이네. 그것을 멸망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데이는 필사적으로 하소연했다. 그러자 액체 생물은 다시 가냘프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알았네, 데이 군.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액체 생물은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이미 난폭하게 날뛰는 내 일부분들을 만류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네. 나는 석탄산으로 인해 완전히 기운이 빠져 버렸단 말일세."
데이가 즉시 되물었다.
"어째서 자신의 일부분을 자신의 의사대로 할 수 없단 말인가?"
"그것은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야. 즉, 나는 호수의 나와 분리되어 자네들 인간의 지혜를 배워, 자네들 인간과 교제했단 말이네. 그로 인해 호수의 나와 연구소에 있던 나 사이에는 완전히 틈이 벌어졌던 것이지. 이번에도 나는 호수의 나에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지. 그러나 호수의 나는 내 말을 듣지 않고 튀어나간 것이네."
"그, 그렇다면 자네의 힘으로도 이미 어쩔 수 없단 말인가?"
데이의 가슴 속에 절망감이 밀어닥쳤다. 액체 생물은 헐떡이면서 드문드문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방법은 있지. 데이 군. 자네는 인간이 아닌 나를 위하여 여러 가지 친절을 베풀어주었네. 내 생명은 이제 얼마 안 남았다네. 그러므로 자네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내 일부분이 바다에 도착하기 전에 없애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네."
"제발 부탁이네!"
데이는 다급하게 외쳤다.
"좋아. 간단한 일이지. 자네는 연구소에서 슈미트가 나에게 소금을 너무 많이 뿌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바로 그것이 방법일세."
"그렇다면……."
"바다를 향해 가고 있는 내 일부의 가장 선두에 소금을 뿌리면 되네. 그렇게 하면 내 일부는 취하여 의식을 잃어버린다네. 그밖에 흩어져 있는 동료들도 그 소금에 끌려 모두 그 곳으로 모일 것이란 말이네."
"고, 고맙네!"
데이는 소리쳤다.
"정말 고맙네. 그 대신 나도 약속하겠네. 자네의 일부를 모두 처치하더라도 자네만큼은 결코 죽이지 않기로 말일세. 그리고 먹을 것과 책의 낭독을 거르지 않도록 하겠네."
"아아, 고맙네."
데이는 액체 생물의 목소리를 뒤에 남긴 채 사령부로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피어슨 소장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려 줬다.
"알았네. 즉시 조치를 취하도록 하지!"
피어슨 소장은 매우 기러하며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다.
 
데이의 결의
 
10분 후에는 소금을 실은 트럭이 열을 지어 최전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데이의 지시대로 소금 둑을 쌓았다.
효과는 1백 퍼센트였다. 액체 생물들은 이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리고 소금에 잔뜩 취해 있을 때 석탄산을 퍼부어 순식간에 전멸시켜 버렸다. 인류의 위기는 마침내 구제되었다.
그 보고를 접한 사령부는 온통 기쁨에 술렁였다.
데이는 기뻐서 환호하는 사령부를 살짝 빠져 나와 호수로 갔다. 작전이 뜻대로 끝났다는 것을 액체 생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호숫가에 도착한 데이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지노프가 병사들을 지휘하여 지금 막 석탄산을 호수 속으로 부어 넣으려고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기다려, 지노프!"
데이는 큰소리로 외쳤다.
"무슨 짓이야! 나는 그 작전을 액체 생물이 가르쳐 주었을 때 그만은 살려 주기로 약속했단 말일세. 이에 대해서는 EMB00000c5848cc아까 그만큼 다짐해 두지 않았었나!"
"듣기는 들었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약속이야."
라고 지노프가 대꾸했다.
"상대는 위험한 액체 생물일세. 언제 다시 난폭하게 굴지 알 수 없단 말야. 지금 죽여 버리는 것이 세계의 안전을 위하는 길일세."
"아니, 안 되네. 약속은 약속인 법이야. 나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가 한 약속은 지키겠네!"
데이는 병사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지노프가 병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병사들은 느닷없이 데이에게 총을 겨누었다.
"무, 무슨 짓인가!"
"순순히 말을 듣게나. 나는 자네를 죽이고 싶지 않네. 그러나 액체 생물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금 모두 전멸시켜야만 한다네."
지노프가 강경히 말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에게 석탄산을 집어넣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돌연 데이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호숫가를 향해 달려갔다.
"무, 무슨 짓인가 데이. 호수에 빠지면 죽어!"
지노프가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려 소리치자 데이는 몸을 빙글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나는 호수에 몸을 던져 죽을 작정이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액체 생물에게 내 목숨을 주어 버리겠네!"
"바보 같은 짓을!"
지노프가 달려나갔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데이의 몸이 호수 속으로 풍덩 하고 빠진 뒤였다.
"아앗!"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연기를 내면서 녹아가는 데이의 참혹한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데이의 몸은 한참이 지나도 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데이도 깜짝 놀랐다. 손도 발도 어느 곳도 고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호수의 물 속 깊은 곳으로부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 군. 자네는 좋은 친구일세."
액체 생물의 목소리였다.
"자네는 죽지 않아. 왜냐 하면 나는 이미 죽음 앞에 와 있기 때문일세. 바이러스란 이미 왕성하게 번식한 후에는 돌연 살아가는 힘을 잃게 되어 죽어 버리는 것이네. 나도 역시 마찬가지지. 석탄산은 필요 없네."
"오오……."
데이는 물 속에서 신음했다.
"그러나 나는 자네의 우정을 죽어서도 잊지 않겠네. 고맙네. 고마워. 고마……."
돌연 액체 생물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호수 속의 데이도, 호숫가에 서 있던 지노프도, 지금은 아무런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호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호수 위에는 두세 마리의 곤충이 퍼덕거리며 헤엄치기 시작했다.
<끝>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절대 0도의 수수께끼
 
이 소설은 텔레비전 연속 드라마로 방영된 '페리 메이슨'이란 변호사가 차례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으로 유명한 미스터리 시리즈를 집필한 얼 스탠리 가드너의 작품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흔치 않은 에스에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이 소설을 읽은 독자 가운데는 어째서 이것이 미스터리(추리 소설)가 아니라 에스에프(SF, 과학 소설)로 취급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스터리에서는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데 있어서 현대 과학에서 알려진 사실을 초월한, 즉 현대 과학으로 풀 수 없는 것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나올 곳도 없고 들어갈 곳도 없는 밀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이 때 새로운 발명이라든가 초능력, 또는 타임 트래블(시간을 초월해서 여행하는 것) 따위의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사용하게 되면 독자는 추리하는 즐거움이 없어지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러한 틀을 과감하게 벗어나서 작가가 자유로이 공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는 것이 에스에프이며, 넓은 의미의 모험 소설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2가지 소설 (미스터리와 SF)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물인 점에서는 똑같지만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가드너는 에스에프라고 확실히 명명할 수 있는 작품을 쓰지 않았던 작가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가 젊었을 때 쓴 작품으로, 미스터리와 에스에프의 구별을 무시하고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소위 추리 소설을 성공시킨 흔치 않은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훌륭한 에스에프 작품이 많이 나와서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에스에프가 하나의 문학 장르를 확립하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가드너는 1백 권 이상의 미스터리를 썼으며, 팔린 책만도 1억 수천만 권에 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미국에서의 그의 인기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가드너가 작품을 쓰는 속도가 매우 빨랐으므로, 대부분의 작품은 구술로 이루어졌을 거라고들 합니다. 어쨌든 그는 미국 유행 작가의 전형적인 시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드너는 본래의 자기 직업인 변호사 사업에도 충실했던 사람으로, 개인 재산을 다 털어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을 돕는 '최후의 법정'이라는 위원회를 만들어 활약했던 일로도 유명합니다. 가드너는 1970년에 사망했습니다만, 사망하던 그 해까지 계속 발표한 '페리 메이슨'의 후속 작품을 이제는 더 이상 접할 수 없게 되어 수많은 애독자들은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액체 침략자
 
지금까지 지구에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초미생물이 인류의 우주로 향한 진출과 더불어 지구상에 침입하여 저항력이 없는 우리에게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는 이야기는 에스에프의 일반적인 주제였습니다.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지금도 때때로 재방영되고 있는 마이클 클라이튼의 '안드로메다 병원체' 등은 최근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 만연한다고 알려지면, 혹시 다른 우주에서의 병원체가 우주 공간을 날아와 귀환한 우주선이나 인공 위성에 달라붙어서 지구에 침입한 결과가 아닐까 하고 연상되어질 정도로 그 영화는 흥미진진했으며 박력이 있었습니다.
사실, 생명체라고는 살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던 굉장한 고온과 저온이 동시에 존재하는 진공의 우주 공간 속에 미생물이 살아 있다는 것은 최근의 과학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인에 의한 달 착륙 계획에서도 나사(NASA ,미항공우주국)는 아폴로 우주 비행사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엄중한 격리 검역을 실시했던 것입니다. 우주 초미생물의 공포는 에스에프만의 것이 아닌, 현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극히 과학적인 자료에서 묘사된 에스에프와는 별도로 이 소설과 같이 우주의 어딘가에는 수백, 수천만의 집단이 되어 인간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지능을 가진 미생물이 있어, 지구를 정복한다고 하는 에스에프도 지금까지 많이 묘사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미생물인 이티(ET)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우주로부터 되돌아 온 조종사에 달라붙어 지구로 침입한다고 하는 인류의 우주 진출에 따르는 침입이라는 점에서 '안드로메다 병원체'와 아주 흡사합니다.
다만, 이들 미생물이 지구의 생물에 발붙인다든지 그것을 습격하여 성장하며 괴물화되어간다는 점에서 앞의 내용과 다른 의미이며, 에스에프를 일종의 탐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쪽이 훨씬 재미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종류 주제의 에스에프는 많이 쓰여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책을 쓴 랄프 밀런 파뤼라는 작가에 대하여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합니다만, 1930년대 미국에 에스에프가 퍼지기 시작했을 무렵의 유행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소설은 40년 이상이나 전의 것입니다만, 주제도 좋으며, 그 이야기의 재미 또한 만점이어서 현재까지도 읽힐 수 있는 에스에프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정성호
미스터리 SF 문고 10
절대 0도의 수수께끼
 
초판인쇄 ● 1987년 8월 5일
초판발행 ● 1987년 8월 15일
지 은 이 ● E. S. 가드너
옮 긴 이 ● 정 성 호
펴 낸 이 ● 김 성 근
펴 낸 곳 ● 성정출판사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407-24
전화 832-9151~2, 833-0547
등록일자 ● 1980년 3월 12일
등록번호 ● 제 11-95호
값 ● 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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