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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한국SF작가협회 편 관제탑을 폭파하라 서광운 작
2023년 08월 23일 13시 58분  조회:212  추천:0  작성자: 강려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한국SF작가협회 편
 
관제탑을 폭파하라
서광운 작
 
 
<차례>
 
이상한 징조··················· 4
예보국장의 행방················· 7
파카 B9호의 비밀················ 22
소련에 잠입하라!················ 26
확대 연석 회의················· 33
비둘기 6호 발사················ 37
국민신보 기자················· 44
하바로프스크 천문대·············· 48
탈출 모의··················· 52
젊은 간호원·················· 59
청진 비행장·················· 70
예보국장의 수난················ 73
허력 에너지·················· 77
유린 가고파 양의 정체············· 81
17호 태풍 아이러호··············· 85
노라른스키 교수의 논문············· 96
허력 에너지의 완성·············· 102
가고파 양의 실종··············· 109
일본에 잠입하라················ 112
전쟁의 먹구름················· 134
출동 명령··················· 143
 
■ SF 단편
 
기적의 세레나데 호·············· 151
이 별····················· 165
서 박사의 실험················ 171
수수께끼의 모랫벌··············· 176
 
작품 해설··················· 183
 
이상한 징조
 
오늘날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2천 18년의 초봄. 그러니까 해토머리라 할지라도 아직은 늦추위가 땅을 어녹이치고 있는 어느 날 밤.
국립 기상청의 대기실에서 아까부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는 사내가 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텔레타이프와 텔레타이프 사이의 통로를 잔걸음으로 왔다갔다하며 가끔 야릇한 표정으로 척척 찍혀 나오는 전문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걸……'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팩시밀리(Facsimile)가 찍어내는 천기도를 손에 들고 유심히 들여다본다.
아까부터 통신 위성 카파(Kappa) B9호가 보내 온 기상통보가 엉뚱한 숫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보통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이날 밤은 동경 128도, 북위 38.7도의 상공을 지나칠 때마다, 온갖 관측 데이터(Data)를 2배에서 3배 사이로 껑충 늘려 송신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다만 카파 B9호가 방금 보내 온 데이터의 위치가 금강산 근처의 상공이며, 그 숫자대로라면 초봄인데도 기온은 한더위 못지 않게 덥고, 기압이나 습도가 마치 대만의 그거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예보 과장은 마땅히 의아한 생각을 품었다.
그는 당직 일지에 그러한 사실을 적어 놓고 새벽녘에 딴 직원과 교대하여 잠이 들었다.
이튿날도 진종일 아무 탈없이 통신 위성은 모든 자료를 정상적으로 보내 왔다. 90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돌기 때문에 하루에도 궤도를 19회나 돌며 기상 데이터를 보내 주고 있다.
그런데 이상야릇하게도 밤이 되면 카파 B9호는 꼭 금강산 상공에서 변조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다음 날 밤에도 그 다음 날에도 확인되었다
 
보고는 기상청장 박상문 앞으로 올라갔다.
"수신 안테나가 그 때마다 고장을 일으키는 게지요. 한 번 손질해 봐요. 그럴 리가 있겠소."
박상문 박사는 불거진 이마를 한 손으로 문지르면서 가벼이 물리쳤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아요. 카파 위성은 일본측이 쏘아 올린 것이니까 그 쪽에 연락이나 해 주어야죠."
예보국장 성하룡이 안경을 바로 고치며 신중한 낯빛을 짓고 대꾸했다.
"그럼 좋도록 해요. 통고해 주는 거야 친절한 일이니까. 그 쪽에서도 이미 수신하고 있을 텐데……"
기상청장은 혹 한국측 기계 고장으로 잘못 수신한 사실을 공연히 선전함으로써 스스로 웃음거리를 만들지나 않EMB000005e064c5을까 하고 염려하는 투였다.
예보국장은 당장 보고서를 꾸며 일본 기상청 앞으로 타전했다.
 
「본 기상청장은 서기 2018년 3월 1일 밤 8시 30분 경부터 귀국의 기상 위성 카파 B9호가 보내는 자료에 변조를 발견했습니다. 위치는 동경 128도, 북위38.7도의 금강산 상공을 통과할 적마다 관측 데이터가 3배로 늘어남이 별지처럼 확인되었습니다. 그 원인을 방금 조사 중이나 귀국에서도 참고로 알아두기 바랍니다. 」
 
이런 줄거리의 통고를 받은 일본 기상청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 시각에 똑 같은 데이터를 받고 지금 검토 분석 중에 있으나, 아직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답신이 들어왔다.
일본 기상청만이 아니었다. 중국 대륙에서도, 소련의 하바로스크 기상대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어찌 된 일인가 하는 문의가 얼마 후에 당도했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있나. 우리가 쏘아 올린 기상 위성은 늘 서울 상공을 통과하고 있는데도 아무 탈이 없는데, 하필이면 일본의 카파 위성만이 금강산 상공에서 공연히 변조하다니."
대책 회의의 자리에서 기상청장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도깨비장난인지 알 수가 있어야죠. 수원의 송수신소를 샅샅이 뒤져봐도 아무 이상도 없는데. 일본 사람들한테 자기네 주파수로 고치라고 연락하죠."
예보과장 이기호는 그 팔팔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입바른 말을 늘 뱉는 사람이다.
 
예보국장의 행방
 
이 무렵 한국의 과학 기술부 아래 서울에는 기상청이, 신골덕리에는 원자력 연구소가, 제주도의 서귀포에는 우주 개발청이, 강원도의 설악산에는 천문대가 있었다.
뒤늦게 발을 내딛은 한국의 과학 기술계였지만 정부의 개발 계획보다는 과학자가 스스로 국제 수준을 넘어서려고 애쓴 보람이 있어, 이제는 어느 나라보다도 규모있는 종합 발전시킬 수 있게 됐다.
그러한 국력은 1700km의 동해안, 2200km의 남해안, 4700km의 서해안을 합친 총 8600km 남짓한 해안선과 해양 자원의 개발로 화학 공업을 이룩함으로써 뒷받침되었다.
이제는 국산 인공 위성도 올리게 되어 이웃 나라에 꿀릴 필요가 없게 되니 예보과장 이기호가 큰 소리를 할 만하다.
"장소가 금강산인 만큼 좀더 신중히 금강산 근처를 살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나도 전에 그 곳의 식물 자력선 연구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혹 거기서 모종의 새발견을 해냈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 곳을 조사해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아요."
예보국장 성하룡의 주장이다.
그는 기상청으로 전임 발령을 받기까지 근 10년을 꼭 생물 자력선 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하면서, 기상이 생물의 생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연구한 농업 기상 전문가이다.
"좋은 의견이오. 정 국장이 아무래도 적임자가 아니겠소. 금강산의 기상 관측소를 중심으로 알아 봐 주시오."
청장 박상문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외국의 문의에 속시원한 답신을 보내려면 한국에서 가능한 모든 조사를 종합해야만 한다.
성하룡 국장은 이튿날 저녁 차를 타고 총총히 금강산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2주일이 흘렀다. 그런데도 성 국장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출장의 관례에 따르자면 도착한 즉시로 무사히 닿았다는 보고를 본청에 내야만 한다.
성 국장은 그런 보고를 하지 않았어도 본청에서는 급한대로 식물 자력선 연구소에도 들러야 하니 겨를이 없었을 것으로 눌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2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조회해 본즉, 예보국장은 1주일 전에 관측소를 떠나 서울로 돌아갔다는 연락이다.
"웬일일까? 본청에도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기상청장은 근심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될 일이다. 청장 박상문 박사는 이 기호 예보과장을 몰래 불러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알아보도록 당부했다.
"경찰보다는 정보부에 부탁하는 편이 낫겠지. 정보부에는 과학 담당의 전문가도 수두룩하니까 경찰보다는 신중할 거야."
"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예보과장의 얼굴이 적이 굳어진다. 일본의 기상 위성이 공연히 말썽을 부리더니, 이제 예보국장마저 온데간데 없게 되었으니 무슨 꿍꿍이 속이란 말인가?
예보과장은 입을 꾹 다물고 이를 악물고 청장실에서 나오자 단김에 차를 몰고 정보부를 찾아서 그간의 경위를 일러 주었다.
"그렇다면 실종 사건이란 말이지. 음, 1주일 전에 그곳을 떠났는데도 깜깜 소식이니. 우선 전국에 수배 해놓고 볼 일이야."
담당관은 사뭇 흥분하여 앉은 자리에서 전화기를 들고 예보국장 성하룡을 비밀리에 수배하도록 신청했다.
예보과장이 새삼스레 일러 줄 필요조차 없이 성하룡의 인상이라든지 경력이나 풍채는 이미 정보부의 인물 카드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10분만에 수배를 마치게 마련이다.
거처불명이 된 성하룡의 얼굴은 두툼하고 탐스러워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푼더분한 귀공자 스타일이다. 거기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는데, 안경을 벗으면 금방 바투보기눈이 나타나 앞을 조려보려고 눈살을 찌푸리게 마련이다. 몸집은 큰 편이 아니나 좋아 보이는 풍채이다. 까닭에 메부수수한 시골사람들 틈에 끼면 단박에 특징이 드러나는 도시형 인텔리다.
예보과장은 정보부에서 나오자 혼자 생각으로 예보국장의 행방을 더듬어 보았다.
설마 교통 사고로 부상을 입지는 않았겠지. 만일 그러한 경우라면, 본인이 아니면 병원측에서 재빨리 본청에 연락이 올 게 아닌가.
교통 사고가 아니라면 여자 관계는 어떨까? 모처럼 금강산을 찾아갔고 더욱이 10년 동안을 근무한 식물 자력선 연구소에도 들렀으니, 혹 전에 사귀던 여자를 만나서 단꿈을 꾸고 있지나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일단 연락을 않을 사람은 아니다.
국제적으로 회답을 보내야 할 책임자가 그토록 넋을 잃고 사랑에 빠질 리가 없다. 예보과장은 평소에 여자 관계가 깨끗한 국장의 인품으로 미루어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단정했다.
사고나 여자 관계가 아니라면 과연 자살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는 자살할 아무런 이유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처럼 오직 나라를 사랑하고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몸을 조심하는 이도 드물다.
집에는 2남 1녀의 처자가 버젓이 행복을 누리고 있으며 가정에도 충실한 그이다. 예보과장의 머리 속에서 한없이 맴도는 생각들은 정 국장의 자취를 잡을 만한 아무 실마리도 던져 주지 않았다.
도시 걸릴 것이 없는 알쏭달쏭한 실종이 아니고 뭐랴.
예보과장은 정보부에서 걱정하던 일을 대충 청장에게 보고한 끝에,
"역시 제가 금강산으로 직행해서 현장을 알아봐야겠습니다. 내일이라도 국장님이 허허 웃으며 나타나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남에게 부탁만 하고 먼 산만 바라볼 수 없지 않겠어요?"
하며 현장 조사를 자청했다.
"옳은 얘기야. 나도 줄곧 걱정이 되어 밥맛이 다 없어질 판이네. 저 쪽(정보부) 얘기를 우선 들어본 다음에 우리가 나서야 되지 않을까?"
"그럼 하루나 이틀 더 기다려 보기로 하겠습니다만 만일 뚜렷한 꼬투리가 없을 적엔 독자적인 수색을 해 나가겠어요."
두 사람은 방침을 세우고 각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무했다.
다음날 아침 정보부에서 남몰래 보내 온 보고는, 예보국장 비슷한 인물을 구철원 역에서 본 사람이 있고, 또 그 이튿날 원산 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구철원 역이라니 서울로 돌아오기 위한 길목이 아닌가. 그런데 또 어째서 북쪽으로 원산까지 올라갔다는 말이야.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알 수 없어."
기상청장은 두 손으로 이마를 괴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가지는 않았을까요? 원산 쪽으로 갈 일이 도대체 없지 않습니까. 분명히 납치된 것 같은 직감이 드는데요. 청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보과장은 박상문 박사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들여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납치? 도대체 기상학자를 납치할 건더기가 있어야 말이지. 세계 공통의 서비스 기관원을 누가 굳이 납치한단 말인가. 혹 자기 나름대로 더 조사할 일이 있어 성진(城津) 기상대까지 가 보려는 생각이 아닐까? 금방 알아봐 주게."
말을 마친 박상문 박사는 머리를 싸매고 울상이 되다시피한 얼굴을 손으로 힘껏 쓸었다.
예보과장이 장거리 전화로 알아본즉 성하룡은 원산에도 성진에도 들르지 않았다는 전갈이다.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걷잡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소식을 확인한 바로 그날 밤, 10시 5분 전에 예보과장실에 전화가 따르릉 울려왔다.
"네, 예보과장실입니다."
이 기호가 수화기를 들고 대답하자, 뜻밖에도 예보과장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야. 성하룡이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오. 그런데 알아볼 일이 있어 당분간 기상청을 쉬어야겠네. 청장이나 가족들에게 걱정하지 말도록 전해 주게."
예보과장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물었다.
"거기가 어딥니까?"
"중강……"
"여보세요. 거기가 어딥니까?"
"……"
"여보세요. 교환! 빨리 이어 줘요."
예보과장 이기호가 아무리 외쳐 봐도 상대방의 전화는 딱 끓긴 채 아무 대답이 없다.
아무리 고함을 질러 봐도 소용이 없었다.
예보과장은 흥분을 참지 못한 채로 이 일을 기상청장에게 곧장 보고했다.
"중강이라니 그런 데가 어디에 있나?"
청장도 납득이 가지 않는 눈치이다.
"중강이라는 지명은 아무리 찾아 봐도 없어요. 혹 중강진(中江鎭)이 아닐까 하고 시외전화를 급히 부탁해 놓았는데, 국장님의 떠듬떠듬한 목소리로 보아 곁에서 누가 감시하고 있는 듯 해요. 더우기 어디냐고 물었을 때 중강 무엇이라고 대려고 할 적에 입을 가로막힌 듯 뚝 끊어지고 말았어요. 먼저 중강진을 불러내서 물어 보겠습니다."
이기호의 씩씩거리는 숨소리는 가빴다. 가까운 곳이라면 당장이라도 달음질해서 알아내려는 기세이다.
이기호는 안절부절 못하고 여러번 교환대를 독촉하여 가까스로 20분 만에 중강진 기상대를 불러냈다.
"여보시오, 중강진이지요? 여기 서울이오."
"네, 그렇습니다."
"30분 전에 예보국장이 거기서 전화를 걸어온 것 같은데 지금도 계시면 바꿔 줘요."
"안 계십니다. 통 들르지 않았는데요.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 예보과장이시군요. 예보국장이 이곳에 오셨단 말씀입니까?"
금방 또랑또랑한 말소리가 울려왔다. 그런데도 이기호는 힘없이 대답했다.
"알았어요. 수고하시오.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시오."
전화통을 놓으며 고개를 떨군 이 기호는 '중강'이라는 장소의 수수께끼를 한참 좇아 봤다.
'아무래도 금강산부터 현장 조사를 하여 어쩐 일인지 실마리를 잡아내야지 웬 일인지 분간을 못하겠다.'
스스로 수사관이나 된 것처럼 예보과장은 벽에 붙은 토끼 모양의 한반도 지도를 쏘아보았다.
그날로 기상청장의 허가를 얻어 예보과장 이기호는 아침차를 타고 금강산으로 떠났다.
"모든 일을 신중히 해야 하네. 몸을 아껴야 되오."
떠나기 직전에 청장이 타이른 말소리가 예보과장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기차는 전기화된지 오래다. 한강 상류를 따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다.
2등차 칸에 자리잡은 예보과장 이기호는 아까부터 멀거니 창 밖을 내다보며 수심에 찬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따름이다.
창 밖의 골짜기에는 진달래 꽃이 울긋불긋하고 강가의 척 늘어진 실버들의 파릇파릇한 초록색이 눈알을 쏜살같이 스쳐가곤 한다.
그는 포개어 올린 다리 위에 턱을 고이고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좇았다.
'예보국장은 무엇 때문에 중강진까지 올라갔을까? 그는 혹 무슨 논문이라도 쓰려고 혼자 애태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기호의 가슴은 이내 답답해졌다. 수수께끼를 풀을만한 꼬투리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예보과장은 혼자 조바심이 나서 속이 절로 버글거리고 있는데도 차간의 딴 손님들이 아랑곳 할 리가 없다.
그들은 구철원 역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전철로 갈아 탄 뒤부터는 제법 관광 기분을 풍기기 시작했다.
등산복을 말끔히 차린 그들 남녀노소가 들떠서 지껄이는 말소리가 자꾸 헛들리기만 한다.
기차는 금화를 거쳐 두 번이나 길다란 철교를 지나 단발령을 허위넘을 무렵부터 쌕쌕거리기 시작한다.
온갖 신록이 물을 머금은 채, 싱싱한 빛을 현란하게 햇빛에 얼비쳐 주는 가파른 비탈길을 기차는 허덕허덕 기어 올라간다.
차 안의 스피커가 안내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금강산은 높이가 1638 미터요, 봄에는 금강산이라고 일컫고,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모두 창문을 열어젖치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며 기암절벽(奇巖絶壁)을 손짓하며 야단법석이다.
예보과장 이기호는 마음 속으로 저들처럼 관광할 수 있는 처지라면 이처럼 눈부신 구경이 또 어디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물 자력선 연구소로 가서 예보국장의 발자취를 캐내야만 하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는 그다.
기차가 종착역에 다다르자, 이기호는 왁자지껄한 사람들과는 달리 총총히 연구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비탈진 자동차 길을 터벅터벅 걸으면서 이기호는 생각을 더듬었다.
'예보과장은 먼저 관측소에 들른 뒤, 자력선 연구소를 찾아간 모양인데 관측소는 이곳에서도 까마득하게 멀다. 먼저 자력선 연구소에 들러 보기로 하자.'
높은 낭떠러지에서 깊은 골짜기를 보고 산새들이 짹짹 지저귀며 나닐고 있다.
그 새 소리들이 새삼 야릇하게 울려온다.
이기호는 해가 산봉우리에 걸릴 무렵에야 연구소에 도착했다.
"어이구, 이 멀고 호젓한 길을 얼마나 고생했소. 어서 들어오시오."
미리 연락을 취해 놓은 까닭에 연구 소장 김철수가 반가이 맞아들였다.
"그저 휴가로 놀러 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기호는 껄껄 웃어댔다.
"그러게 말이에요."
두 사람은 소장실로 들어가 소파에 마주 앉았다.
EMB000005e064c6"마치 절간 같군요. 조용하기 짝이 없고……"
이기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김철수 박사는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어떻게 된 노릇이오?"
이기호는 한번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성하룡 예보국장이 거처(去處) 불명이 됐어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소장님을 만나 볼겸 일부러 찾아 왔어요."
이렇게 말을 끄집어낸 이기호는 그 동안의 경위를 대충 설명했다.
"그래요……"
김 박사는 한숨을 내쉬면서 두 손을 깍지끼고 고개를 숙이며 무슨 생각을 좇는 듯 손길로 책창방아를 찧는다.
"그래서, 박상문 기상청장은 예보국장이 전에 이 연구소 직원으로 있은 적이 있으니까, 이번 실종과 무슨 관계가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더욱이 일본의 카파 B9호 위성이 금강산 상공에서만 송신 싸이클이 변조를 일으킨단 말이에요."
이기호는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김철수 박사는 고개를 들고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참 신기한 일도 다 있군. 성하룡군이 여기 있을 적에 바로 식물 자력선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의 연구 테마로 말하자면 광물질 속에 있는 식물질을 동조(同調)시켜 보겠다는 것이었소."
김 박사는 아주 조용한 소리로 이기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옛날에 식물이 지구 위에서 판친 시대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 후 식물은 까들어들어 땅 속에 파묻히고 말았지만, 성하룡군은 그러한 식물들이 지열로 말미암아 2차적으로 화학 반응을 일으켜 희암석(稀巖石)이 된 것으로 믿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의 견해는 늘 광물과 식물 사이에 실오리 만한 공통성이 있으리라는 거요. 까닭에 식물의 엑기스를 뽑아 광물질에 작용시켜 보려는 연구를 계속해 왔었지요. 그는 레이저 광선과 같은 열 반응을 식물 자력선의 전자 반응으로 일으켜 보려고 애썼지요."
김 박사는 예보과장이 과연 납득하느냐 하는 눈으로 흘끔 그를 쳐다보더니 담담한 어조로 얘기를 이어 갔다.
"이를테면 한약을 마시지 않습니까. 한약은 식물의 엑기스라고 이를 수 있는데, 그 엑기스는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서 장기(藏器)와 장기 사이를 흐르는 소화액이나 호르몬의 길을 씻어 주는 구실을 하거든요. 성하룡군은 늘 농담조로 전자와 전자가 흐르는 마디와 같은 진공관 사이에 식물 자력선을 작용시킬 수 있으리라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장담하듯 식물 자력선이 거기에 동조나 변조를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허선(虛線) 에너지가 될 거라고 자랑했는데…… 그러한 연구는 아직도 그의 후배가 계속하고는 있지요. 그런데, 그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다니 웬 일일까?"
김철수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따름이다.
잠시 후 소녀가 차를 들여왔다.
차는 향긋한 작설차(雀舌茶)였다.
작설차는 옛부터 갓나온 나무의 어린 싹을 따서 만든 향기로운 차다.
"그런데, 예보국장은 연구소에서 며칠이나 묵고 내려 갔습니까?"
이기호는 권하는 대로 차를 마시면서 물었다.
"아마 이틀 쉬다가 떠났었지. 관측소가 험한데다가 마침 뒤늦게 눈보라가 휘몰아친 바람에 고생만 하고 돌아갔는데 무슨 영문일까?"
"혹, 거동에 이상한 점을 느끼시지나 않았는지요?"
"이상한 점?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다만 식물 자력선이 성공한 게 아닌가 하고 혼자서 기뻐하더군. 그 관계는 나중에 연구원에게 자세히 물어보면 알 거요. 아무래도 걱정인데……“
벌써 바깥 세상은 어둠침침하다.
멀리서 부엉부엉 하고 우는 부엉이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치고 있다.
소장과 함께 저녁을 들은 이기호는 초저녁에 딴 채에 있는 자력선 연구실로 찾아가서 연구원을 만났다.
그들은 예보국장이 실종된 사실을 처음으로 전해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수야 있겠어요. 무슨 딴 일이 별안간 생겨 미처 보고를 못한 게지요."
그들은 입을 모아 사건을 부정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실종은 엄연한 실종이다.
"다만 성 국장은 식물 자력선이 완성되면 모든 전자기능에 간섭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하더군요."
연구원들은 예보국장에겐 여자 관계란 티끌만큼도 없다고 되려 껄껄 웃으면서 증언해 주었다.
이튿날 아침 나절, 이기호는 관측소로 향하려던 참에 서울의 기상청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를 들자 기상청장의 귀익은 목소리가 걸걸하게 들려왔다.
"과장이오? 빨리 본부로 돌아오시오. 전화론 말을 못하겠는데 엉뚱한 데서 예보국장의 자취를 확인했소."
"찾아냈단 말씀이지요. 천만다행입니다."
"글쎄……"
전화는 끊어졌다.
무슨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나 무슨 실마리가 잡힌 것만은 뚜렷하다.
"소재를 알아냈으니 다행이구려."
옆에서 김철수 박사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누그러진 얼굴을 지어 보였다.
이기호는 당장에 서둘렀다. 관측소로 전화 연락만 하고 채비를 갖추었다.
금강산 역에서 서울로 떠나는 차는 상오 11시 정각이다.
벌써 시간이 빠듯하다.
연구 소장과 작별하고 난 이기호는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왔다.
정거장까지 사람을 안동하겠다는 친절을 굳이 뿌리치고 홋홋이 내려오는 참이다.
역까지의 거리는 5마장에 지나지 않는다. 길섶에는 보라색 제비꽃이 가냘프게 이슬방울을 맺히고 고개를 들면 돌비알마다 참나리 꽃이 소담하게 얼굴을 내보이고 기웃거리고 있다.
이기호는 혹독한 겨울이 가고 따사로운 봄에 생명을 되살려 주는 자연의 섭리를 그지없이 고맙게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어 보았다.
거푸적, 거푸적…… 문득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뒤따른다.
웬 사람일까 하며 뒤돌아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기호가 다시 걷기 시작하면 뒤에서 이번에는 사붓사붓하는 소리가 뒤따른다.
분명히 사람의 발자국 소리다. 그런데도 둘러보면 그림자도 안 보인다.
으슥한 산길. 혹?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기호의 머리끝은 쭈뼛이 서고 소름이 확 끼쳤다.
이기호는 나이답지 않게 냉큼 달음질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듯한 소리가 마구 울린다.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줄달음치며 멀리 정거장이 바라보이는 길목에 이르렀을 적엔 그의 겨드랑이는 식은 땀으로 흠뻑 적셔져 있었다.
헐레벌떡 정거장에 뛰어들어 그는 무사히 서울행 기차를 탔다.
 
파카 B9호의 비밀
 
그가 식물 자력선 연구소에서 돌아올 무렵 정보부의 과학과원 김민수는 멀리 웅기(雄基)에 와 있었다.
성하룡 예보국장의 발자취를 더듬다가 보니 웅기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웅기는 나진(羅津)의 조금 북쪽, 두만강 하구에서 멀지 않는 북단에 자리잡고 있는 도회지이다.
중강진(中江鎭)에서 어떻게 코스를 밟은 것인지 어쨌든, 예보국장은 길주(吉州), 청진(淸津), 나진을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키가 땅딸막한 과학과원 김민수는 바로 식물 자력선 연구소장 김 철수의 동생이다.
예보국장의 발자취를 더듬어서 서울에서 웅기까지 민수가 와 있다는 것을 형 김철수 박사가 알 리가 없다.
'이건 분명히 소련의 공작원이 저지른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은 왜 예보국장 같은 인물을 납치해 갔느냐 말이다.'
민수는 혼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리송한 생각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박상문 기상청장은 정보부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우선 이기호를 금강산에서 불러들인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예보과장은 자력선 연구소에서 들은 얘기를 낱낱히 구두로 보고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 것은 제가 돌아오려고 연구소를 나와 정거장으로 걸어올 때, 분명히 미행을 당한 것 같아요. 저는 학생 시절 때부터 산악반이었기 때문에 엔간히 후미진 산길일지라도 겁나는 일이 없는데 어찌나 무서운지 솔직히 말해서 36계를 놓았다니까요?"
이기호는 덧붙이며 쑥스러운 웃음을 띄었다.
기상청장도 그 소리에는 한바탕 껄껄 웃고 나더니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일렀다.
"요즘 일본에서 또다시 금강산 상공에 무슨 변이 생긴 것 같다고 재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 왔는데. 식물 자력선의 탓이라고 겉잡아 일러 주면 우리를 돌았다고 하겠지. 식물 자력선의 작용인지 아닌지, 아직은 과학적으로 확실치 않으니 속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도 없고, 사정이 아주 딱해졌는데."
실은 일본뿐이 아니라 멀리 독일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문의해 오고 있는 판이었다.
박상문 청장은 혹 카파 B9호가 금강산 위에 이르렀을 순간에만 고장이 나도록 기계의 순환에 차질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설령 그렇다면 지구의 궤도를 돌 때마다 딴 위도상에도 통과하기 때문에 그러한 주기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야 할 법하다.
그런데 금강산 상공에서만 그런 변조가 생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일본측에 요청해서 그 통신 위성을 회수하거나 고장난 데를 고치도륵 권해 보죠."
이튿날, 아침 회의에서 관측과장이 제안했다.
"그까짓 것 저네들이 못하겠다면 제주도의 우주 개발청에 부탁해서 우리가 올라가서 고쳐 주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썽이나 꺼야 할 게 아닙니까."
젊은 간부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모두 그렇게 흥분할 게 아니라 이번 사건은 둘이면서도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이나 마찬가지이니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의논을 보아 결정하기로 합시다. 감정대로 일을 처리할 순 없지 않아요."
박 청장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간부들도 이해 못할 리 없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새로운 조치가 취해지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청장이 과학기술부에 요청하여 관계청장과 정보부 과학과와의 연석 회의를 열게 됐다.
그 결과, 두 가지 문제를 따로따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 한 가지는 정보부로서는 과학과원 김민수를 웅기에서 그대로 소련으로 밀파하기로 하고, 다른 한 가지는 일본 측에 카파 B9호의 고장이 금강산과 관련이 없으니 스스로 회수하든지 고장을 고치도록 촉구하기로 한 것이다.
과학기술부의 결정으로 일본측에 공문이 발송되었다.
 
소련에 잠입하라!
 
그리고 한편으로는 웅기에 머무르고 있던 김민수에게 지령이 내려졌다.
"귀하는 예보국장이 확실히 소련에 납치되었는지? 납치되었다면 소련의 무슨 기관원에게 납치되었는지 그 물적 증거를 입수하기 위하여 소련 영토 내로 잠복하여 살피도록 하라. 본부에서 짐작되는 바는 예보국장 성하룡이 하바로프스크 지방에 연금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 하면 시베리아의 기상 정보 센터는 하바로프스크이기 때문이다. "
김민수는 여관에서 이러한 암호 전보를 받아 읽고 온몸의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방 안의 창을 열어 젖히고 두만강 쪽을 바라보니 음력 초사흗날의 눈썹달이 나직한 언덕 위에 걸려 있다.
정보부 과학과원 김민수는 채비를 차리고 여관에서 나오자 곧장 공동 묘지를 찾았다.
터벅터벅 걸어서 시가지를 빠져나온 그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길을 지나가 공동 묘지에 이르렀다.
사방은 호젓하며 어리친 개 한 마리도 없다. 가끔 산새가 멀리서 지저귈 뿐, 산바람이 물결치듯 쏴쏴 지나간다.
민수는 주위를 조심스레 두루 살핀 후 뭇 묘지의 가장자리에 있는 한 무덤으로 다가섰다.
큼직한 무덤 앞엔 케케묵은 비석이 우뚝 서 있다.
「[金海金氏 常人之墓」 (김해 김씨 상인지묘)라고 새겨 있을 뿐, 딴 비석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무덤 앞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네모난 넓은 돌이 놓여 있으며 다만 화강암(花崗巖)으로 쌓아 올린 축대가 무덤의 주인공의 화려했던 과거를 말해 주는 듯하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무덤을 한 바퀴 돌고난 뒤, 축대의 왼편으로부터 두번째 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EMB000005e064c7'과연 열릴까?'
김민수는 눈앞에서 아롱아롱하는 돌비늘(雲母)과 질돌(石英)의 검싯 투명한 무의를 한 눈으로 쏘아보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의심을 내쫓았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한 손으로 돌결을 만져 보았다. 돌은 차가웠다.
민수는 네모진 돌의 왼편 모서리를 먼저 손톱으로 긁어냈다.
'과연 전에 교육을 받은 그대로구나.'
혼자 감탄하면서 양복의 웃옷 안주머니에서 둥그런 메달을 꺼냈다.
태극기와 이화 무늬가 새겨 있는 정보부의 메달 뒤쪽에는 짜름한 수나사의 꼭지가 달려 있다.
민수는 그 꼭지를 긁어낸 화강암의 구멍에 맞추고 나사돌리개처럼 틀어 보았다.
영락없이 맞아들었다!
조심스레 끝까지 돌리고 난 민수는 다시 대각선을 따라서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서 구멍을 찾아 똑같이 메달의 꼭지를 틀어막으며 돌렸다.
그리고서 이번에는 바로 위 모서리에, 다음에는 대각선을 따라 왼쪽 아래 모서리를 더듬어 꼭지를 돌렸다.
그러자 축대의 돌문이 소리없이 열리지 않는가?
김민수는 눈물이 핑 돌 듯한 감흥을 느끼면서 발을 돌문 안으로 내딛고 밖을 살펴 본 뒤, 살짝 문을 밀었다.
돌문은 마치 친구인 양 순순히 닫혔다.
이제 홀가분해진 과학과원 미스터 김은 스위치를 더듬어 굴 속에 전등을 켰다.
환히 밝은 굴 속은 휑댕그렁 했으나 낯익은 얼개였다.
민수는 이미 설악산 남쪽 기슭에서 이와 같은 굴 속 생활로 한 여름을 보낸 적이 있다.
민수는 허리를 펴고 먼저 책상 서랍의 지도를 꺼내서 펼쳤다.
소련의 접경 지대의 작전도가 역력하다.
돌을 힘껏 던지면 닿을만한 폭에 지나지 않는 두만강(豆滿江)의 좁고 깊은 골짜기가 표시되어 있는 곳 - 이 편에는 아오지 역에서 갈라진 철도를 따라 동북쪽의 끝에 경흥(慶興) 역이 외따롭다.
'이 곳을 거쳐 한말(韓末)에 처음으로 북감자가 러시아로부터 들어온 곳이구나.'
민수는 문득 떠오르는 감상을 지우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쭉 훑어보았다.
거기에는 신라 시대의 북경(北京) 대동강(大洞江)이 태봉(泰封)에서 청천강(淸川江)으로 내밀고, 고려 때는 압록강으로 내키고, 이조(李朝) 초 무렵엔 두만강으로, 말엽에는 간도(間島)에서 연해주(沿海洲) 일대로, 그리고 일제 시대 때는 만주와 화북으로 뻗어 나간 발자취가 말없이 적혀 있다.
'백성의 세력은 늘 북으로 향하고 식량과 무역은 남쪽의 바다 건너에서 구해야 하는 팔자가 아닐까?'
민수는 생각하면서 경흥에서 두만강 철교를 건너 노보키에프스크에 이르러, 다시 블라디보스톡에서 만주의 동쪽 끝을 마주보는 하바로프스크까지의 길목을 눈에 익혔다.
그리고선 민수는 다른 서랍을 열어 소련 지폐를 한 뭉치 꺼내서 바지의 주머니에 쑤셔 넣고 무전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붉은 불이 조그마하게 켜지며 마치 옛 친구처럼 찡하고 대답한다.
무전기는 5kW짜리이다.
민수는 모르스 신호를 따 찌-찌-따 연거푸 보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발신기지 델타엔 이상이 없습니다."
델타란 웅기(雄基)의 비밀 기지의 부호이다.
정보부는 한반도의 온갖 요소, - 독도에 이르기까지 지하의 비밀 기지를 이미 만들어 놓고 비상시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민수는 금고 속에서 마취총을 꺼내 들고 잠깐 망설였다.
'역시 안 가지고 가는 게 낫겠지. 무기란 그것이 비록 호신용이라 할지라도 적은 그것을 공격용으로 오인하기 마련이다. 공연히 일을 덧낼 필요는 없다.'
그는 총을 도로 금고 속에 집어넣고 스위치를 돌려 페리스코프(Periscope)의 스크린을 살폈다.
화면에 나타난 바깥 정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김민수는 태연히 돌문을 열고 나자 화강암을 말짱히 봉한 다음, 총총히 그 곳을 떠났다.
웅기 역은 그다지 붐비고 있지 않았다. 기차는 해안선을 따라서 여러 번 선 뒤, 한 시간만에 아오지역에 도착했다.
민수는 여기서 블라디보스톡 행 국제 열차로 갈아탔다.
아오지와 블라디보스톡 사이는 모노 레일이다. 차간의 유리창이 타원형인 것이 벌써 이국 정서를 풍겨 준다.
뿡! 하는 기차 소리와 함께 소리없이 정거장을 떠난 열차는 시속 1백 km로 쏜살같이 줄달음쳤다.
국경역 경흥에는 단 10분만에 도착, 거기서 세관의 조사가 시작됐다.
김민수는 시치름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자칫하면 헛기침이 나오려고 한다.
민수의 자리 앞에 이르른 소련 관원과 한국 세관원이 묻는다.
"무슨 일로 소련으로 가지요?"
"국민 일보 특파원입니다. 시베리아 일대의 과학 발전상을 취재하러 가는 길입니다."
민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서슴없이 대답했다.
"소지품에는 법에 어긋나는 물건이 없겠지요?"
"없습니다. "
신문 기자의 신분증을 들여다보고 난 세관원들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셈이다.
검사가 끝나고 이윽고 기차는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두만강의 급류가 힘차게 솟은 아름드리 정글 사이를 물보라를 튀기면서 세차게 흘러가고 있다.
무섭게 내려오는 물발을 억세게 받아 넘기는 바위는 수만 년을 두고 물에 깎여 둥글둥글 뭉우리를 이루고 있다.
국제 열차는 한 다름에 노보키에프스크에 이르러 해안선을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달린다.
멀리 잔물결이 얼비치는 햇빛이 눈부시다.
민수는 결코 마음을 놓지 않으면서도 수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펼쳐 있는 동해의 검푸른 바다를 넋없이 바라보았다.
북쪽 소련을 끼고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는 동해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앞자리에 앉은 소련 부인이 태연히 담배를 피우고 있다.
'저 여자는 무슨 일로 한국에 다녀가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직업 의식이란 어느 때고 무섭게 고개를 쳐드는 모양이다.
기차는 한참 만에 블라디보스톡 역에 다다랐다.
블라디보스톡 역은 유럽과 동양을 연결하는 종착역인 까닭에 과연 굉장한 차림이었다.
정거장은 해변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항구에 떠 있는 3만 톤급 화물선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여기는 소련의 극동잠수함대의 기지이기도 하다.
민수는 여러 갈래로 된 플랫홈을 지하로 가로 질러 역의 구내 식당으로 찾아갔다.
하바로프스크로 떠나는 기차는 앞으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민수는 문 어귀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했다.
'여기에 당분간 머물면서 수소문을 해볼까? 또는 바로 하바로프스크로 직행할까?'
민수는 또다시 망설였다.
그러나 담배연기를 뱃속까지 깊이 빨아들여 훅 내뿜고 났을 적엔 이미 결정이 굳었다.
민수는 역시 하바로프스크로 직행하기로 한 것이다.
시간에 맞추어 그는 3번 플랫홈으로 찾아갔다.
차에 오르니 소련인 외에도 일본인, 중국인들이 많았다.
이윽고 발차한 뒤, 김민수는 혼자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성하룡 예보국장을 하필이면 소련놈들이 납치해 갔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확대 연석 회의
 
한편, 서울의 기상청에는 일본 기상청으로부터 회답이 들어왔다.
"카파 B9호의 기능이 정상적인 만큼, 회수하기는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장차 새 기상 위성을 내보낼 적에 작업원을 올려 보내서 고장의 원인을 조사할 작정이오니 양해해 주십시오."
이러한 내용의 공문을 읽고 난 박상문 기상청장은 빙그레 웃었다.
'역시 경비가 아까워서 제대로 일을 못하는 모양이군. 자기네가 쏘아 올린 것을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는 성질을 누가 모를까 봐. 그러나 남의 나라의 위성을 우리가 함부로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야. 위성의 소유권이 우주법에 엄연히 규정되어 있는 만큼 어쩔 수도 없지.'
그러면서도 기상청장은 석연치 않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EMB000005e064c8이 일은 역시 과학부 장관과 의논해서 우주개발청과 식물자력 연구소 측과 확대 회의를 열어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했다.박상문 청장은 예보과장 이기호를 불렀다.
"이 공문이 일본 기상청에서 보내온 회답이야."
공문을 받아 쥐고 읽어내리는 예보과장의 얼굴이 샐룩거린다.
"흥, 내버려 두겠다는 회답이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조사해 보지요. 일본인들은 아직도 식물 자력선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모양이지요. 식자연(植磁硏)의 김철수 박사와 의논해 보는 것이 어때요? "
예보과장은 기승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글쎄, 내 생각도 여러 사람과 연석 회의를 갖고 결정하고 싶은데……"
"그야 물론이지요. 식자연 관계로 성하룡 국장이 납치되어 가는 판국에 우리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당장에 연락을 취해서 건의해 봅시다."
"그럼 그렇게 하지."
기상청장은 예보과장의 주장을 들어 이튿날 아침 과학부장관을 찾아가서 경위를 보고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3일 내로 연석회의를 갖고 의논해 보시오."
과학부 장관은 시원스럽게 이른다.
그리하여 과학부 장관의 명의로 회의가 소집되어 3일 후 송월동(松月洞)의 기상청 회의실에서 연석 회의가 열렸다.
"이제는 모든 사정을 알았습니다. 예보 국장이 실종된 일도 그 원인을 따지자면 우리 식자연(植磁硏)과 관계가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까닭에 식물자력선이 정작 그러한 작용을 기상 위성에 일으켰는지 아닌지를 알아 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김철수 박사가 현지답사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주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남의 인공 위성을 함부로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로선 작업원을 올려 보내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말썽이 생기면 귀찮으니까요."
권중희 우주개발청장은 신중론을 폈다.
"아니, 권 박사는 반대하시는 겁니까?"
김철수 소장이 소리를 높이며 따졌다.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되도록이면 우주공법에 위반된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그건 처지가 다르지요. 일본으로 말하자면 자기네 기상자료 수집에 하등의 지장이 없기 때문에 고장을 고치나 마나 하겠지만, 우리로선 확인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남의 집 자동차가 자기집 앞에서 클랙션 고장을 일으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을 때, 그 자동차의 주인이 당장에 없다고 해서 클랙션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당장에 귓청이 찢어지도록 시끄러운데도. 아무리 우주공법이 완벽하다고 해도 법률가에게 의논하면 떳떳이 손댈 수 있는 귀절을 찾아 낼 겁니다. "
김철수 박사는 자뭇 흥분하고 있다.
우주개발청장 권중희 박사로 말하자면 전에 식자연의 소장을 지낸 적이 있는 권일송 박사의 맏아들이며 김철수 박사보다는 훨씬 후배이다.
권중희 박사가 김 소장의 서슬에 당해 낼 도리가 없다.
"정 그러시다면 우주공법학자에게 문의해서 작업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아직도 외국에선 전례가 없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 보자는 것 뿐이지요. 그래 우리가 김 박사 팀의 연구 계획이나 자료 수집을 방해하겠습니까?"
권 청장은 쓴웃음을 띄우면서 변명을 했다.
"사실이지 기상청의 입장으로선 외국에서 문의해 온 것에 대답할 길이 없어 난처하기 짝이 없습니다. 식물 자력선의 효과가 그만큼 위대하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속전속결(速戰速決)주의로 외국에 알릴 필요조차 없이 슬그머니 해치우는 게 낫지 않겠어요?”
박상문 청장은 본디 거추장스럽게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미이다.
 
비둘기 6호 발사
 
"그렇다면 뒷 일을 나중에 수습하기로 하고 작업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우주개발청장이 두 손을 드는 시늉을 하며 토론에 매듭을 지었다.
일본이 쏘아 올린 카파 B9호의 고장 원인을 한국의 우주개발청에서 조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그 날로 제주도의 동쪽 성산포에 자리잡고 있는 우주선 발사 기지에 지시가 내렸다.
성산포의 우주 작업원들은 때아닌 출장을 환성을 올리며 반겼다.
지휘관인 문봉기 대령은 세 명을 올려 보낼 작정이다.
"대장님, 다섯 명은 올라 가야지요. 모처럼의 출장 명령인데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습니까?"
젊은 대원들이 마치 소풍이나 가듯이 자원했다.
"군들은 놀러 가는 줄 아나. 로켓을 한 번 쏘아 올리는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 줄 아나? 멀쩡한 초등학교 30개를 신설할 비용이 든단 말이야."
지휘관의 예정대로 작업원은 3명으로 결정되고 차례에 따라 공정히 뽑혔다.
그리하여 5일 후, 발사 준비가 모두 완료되었다.
작업원이 타고 갈 위성은 3단계 로켓 비둘기 호이다.
15층 건물의 높이만한 로켓 발사대의 저편 관제탑(管制塔)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전화 연락이 부산하다.
오전 10시를 20분 앞두고,
"A OK !(모든 조건이 다 좋다)"
하는 보고가 기관마다에서 들어오기 시작한다.
드디어 내려세기가 시작되어
"다섯, 넷, 셋, 둘, 공-"
하는 마이크 소리와 더불어 로켓은 시뻘건 불을 내뿜으며 덩그렇게 발사대를 빠져나간다.
불길은 더욱 세차게 백열화(白熱化)하며 비둘기 6호는 한 달음에 쑥쑥 우주 공간을 향하여 기운차게 내뻗쳤다.
눈길에서 사라진 비둘기 6호로부터 보내오는 자동 전파와 삑삑소리는 아주 순조롭다.
비둘기 6호는 단숨에 11km 대기권(大氣圈)을 돌파하고 진주 구름이 군데군데 깔려 있는 오존층을 솟구쳐 80km의 성층권을 뚫고 800km의 전리권을 넘어 비로소 외권(外圈)에 이르렀다.
잠깐 사이에 고개를 틀어박은 채 외기권에 다달은 세 사람은 한결같이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이구 이젠 살았구나. 매 번 올라올 적마다 정신이 아득해진단 말이야."
항공장 오동환은 어깨와 허리를 죄고 있던 벨트를 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공군 소령이다.
공과대학의 전자공학과를 나온 해군 대위 천기흥도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뱃속까지 숨을 들이 마셨다.
또 한 사람은 정비장교인 공군 대위 김순걸이다.
"우주 공간에 올라올 적마다 느끼는 일인데, 사람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갓날 적에도 비슷한 스릴이 있을는지도 몰라. 언제나 성공하면 기적인 것만 같애."
그는 군입을 다시면서 한 마디 했다.
비둘기 6호는 이미 궤도에 따라 수평 비행을 하고 있었다.
항공장은 성산포 기지의 문봉기 대령과 무선 전화로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램 제트를 분출시켜 궤도를 수정하라!"
우주 기지에서 지령이 내렸다.
오동환 소령은 대번에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위성의 오른쪽에서 시뻘건 불길이 세차게 내뻗치면서 위성은 왼쪽으로 대각선을 따라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날은다.
"너무 고요해서 미칠 지경인데……!"
천기흥 대위가 실뚱머룩한 말투로 지껄인다.
사실이지 우주공간은 너무나 조용했다.
지상에서라면 램 제트의 소리는 요란스럽게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외기권에는 공기가 없는 탓으로 음파(音波)가 생기질 않아 소리가 번지질 못한다.
서로 레시버를 통해서 들어오는 말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는 죽음의 고요나 다름이 없다.
비둘기 6호는 보라빛 지구를 내려다 보면서 다섯 바퀴 돈 다음, 천천히 카파 B9호에 접근해 갔다.
지상의 관제탑에서 일일이 위치를 일러 주고 궤도를 수정해 주는 바람에 일본의 기상 위성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비둘기를 카파에 도킹시켜야겠는데, 김 대위가 먼저 나가서 작업을 하고 천 대위는 다음 차례로 나가도록 하게. 카파와 함께 돌면서 조사하기로 하지."
항공장은 늠름한 목소리로 일렀다.
우주복의 플라스틱 마스크 너머로 들여다 보이는 오 소령의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다.
김 대위가 먼저 기밀실(機密室)로 내려갔다.
오 소령은 기밀실의 기압을 내린다. 기압계의 바늘이 거의 0에 가까워질 무렵, 그는 다른 단추를 눌러서 우주선의 출입문을 열었다.
조종실의 스크린에 비친 김 대위의 얼굴이 싯누렇다.
자못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김 대인는 찬찬하게 몸을 밖으로 내밀고 출입문을 닫았다. 그리고선 헤엄치다시피 허공을 끌어 당기면서 생명의 줄을 늦추며 카파 B9호의 옆구리로 접근해 간다.
"햇빛이 너무 눈부시는데요. 도킹할 만한 자리가 있어야지."
김 대위가 짜증을 낸다.
"잘 찾아봐요. 위성의 꼬리를 더듬어 보면 로켓과 분리할 때의 결합부가 있지 않겠어."
"참 그렇지요."
김 대위의 도킹 작업은 10분만에 끝났다.
이번에는 천 대위가 나갈 차례이다. 오 소령은 다시 기밀실의 기압을 올렸다.
이것은 마치 바다 깊숙히 해저 탐험을 할 때의 절차와 비슷하다.
바다 속에서는 수압을 고루 조정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외기권에서도 기압을 고루 조정해야만 한다.
오 소령은 기압이 조종실과 똑같이 되는 것을 보자 천 대위에게 눈짓을 했다.
'기밀실로 내려가도 된다.'
는 뜻이다.
천 대위가 내려가자 항공장은 전과 똑같은 절차를 밟아 기압을 내리고 출입문을 열어 주었다.
천 대위도 우주 공간을 밧줄을 따라 아장아장 헤엄쳐 갔다.
그들은 가벼운 자석(磁石)신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카파 B9호에 올라갈 수가 있다.
두 작업원은 일본 위성에 달라붙다시피 계기실로 통하는 출입문의 나사 장치를 돌려서 풀었다.
나사 돌리개로 위성을 두들겨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우주 공간의 특징이다.
두 대위는 플래쉬로 계기실 안을 비추어 보았다. 여느 위성과 마찬가지로 계기판의 바늘이 퍼렇게 움직이며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 이대로 금강산 상공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도둑놈도 아닌데 마음이 조마조마 하군."
천 대위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별 생각을 다 하네. 과학자가 과학 연구를 하는데 뭐가 잘못인가. 어서 코드나 접선시켜요."
두 작업원이 접선시킨 코드를 통해서 비둘기호의 조종실에 갖가지 데이터가 자동적으로 기록되게 마련이다.
그들은 계기판의 규칙적인 바늘만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는 참이다.
"작업원에게 이른다. 3분 후에는 금강산 상공을 통과할 예정이다. 실수가 없도록"
오 소령의 지시가 울려왔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며 눈망울을 졸였다. 과연 3분 간이 지나자 계기판이란 계기판은 사시나무 떨듯이 바늘이 흔들리기 시작하지 않는가!
기계실은 마치 유령을 만난 것처럼 간섭파(干涉波)를 내기 시작한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사인 커브를 나타내던 계기판이 느닷없이 코사인 커브를 그리기 시작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두 작업원은 더욱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천 대위의 가슴은 공연히 두근거리기만 했다.
"작업원에게 이른다. 다시 금강산 위를 지나치려면 99분이나 걸린다. 도킹한 상태를 그대로 둔 채, 일단 비둘기 호로 돌아와서 대기하라."
오 소령의 지시를 어겨서는 안된다.
그들은 계기실의 출입문을 닫고 개구리처럼 빠져나와 비둘기 호로 돌아왔다.
기밀실은 두 사람이 한꺼번에 사용하기에는 좁다. 한사람씩 출입하도록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례로 조종실에 수용되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할 뻔 했어. 자네들이 인공 위성에 나가 있는 동안 비둘기 호의 계기판도 제멋대로 바늘이 춤추지 않는가! 식물 자력선이란 게 대단한 모양인데."
뜻밖에도 오 소령마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야. 다시 한 번만 확인하고 어서 내려가세."
이러구러 시간은 흐른다.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대서양이며 아프리카 대륙이 흰빛을 눈부시게 얼비친다.
눈길을 서쪽으로 돌리면 반굽이로 뚜렷한 지평선 너머에서 오로라 못지 않는 흰빛이 엷은 노란색으로 환히 물들고 있다.
세 사람은 시계의 바늘이 움직이는 대로 다시 작업을 이었다. 이번에는 천 대위가 먼저 나가고 김 대위가 뒤를 따라 카파 B9호로 옮겼다.
금강산 위에 이르자 금방 일어난 간섭 현상이 또 다시 일어났다. 진동은 약 30초 동안 계속되었다.
이젠 모든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들은 인공 위성의 고장을 고칠 필요가 없었다. 본디 고장이 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 대위와 천 대위는 코드를 뽑고 출입문을 흔적없이 마무린 다음 도킹을 거두고 비둘기 호로 돌아왔다.
감쪽같이 카파 B9호의 내부를 들여다 본 셈이다.
"이젠 어서 내려가자."
오 소령은 두 사람에게 말하고 나서 우주 기지에 연락을 취했다. 내려오라는 대답이 이내 들려왔다.
"하강(下降) 준비, 역추진 로켓 발사!"
비둘기 6호는 관제탑의 지시대로 서서히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국민신보 기자
 
한편, 하바로프스크 정거장에 내린 정보부 과학과원 김민수는 역전 광장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어디로 가실까요?"
늙수그레한 운전사가 무뚝뚝하게 묻는다.
"코스모푸카야 신문사로!"
김민수는 거침없이 응답하고 나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길거리의 가로수는 아마도 플라타너스인 듯 굵고 넓적한 잎사귀를 첩첩이 우거질대로 매달고 있다.
하바로프스크에는 10층이 넘는 고층 건물이 드물다. 5층 가량이 평균이라고 할까, 벽돌집이어서 얼핏 보기에 산뜻하지가 않다.
'저 건물들을 전에 포로로 잡혀 온 일본의 관동군 장병들이 지어 놓았나?"
민수는 2차 대전이 끝나자 소련이 만주에 있던 일본군을 끌어다가 강제 노동을 시켜 집을 지은 일을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차는 이윽고 코스모푸카야 신문사의 현관에서 멎었다.
미터에 적힌 대로 요금을 치른 민수는 수위실에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그 신문사의 파브로프 과학부장이다.
"아, 그래요. 여기까지 찾아 오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소. 곧 내려가겠습니다."
뜻밖에도 친절한 대답이었다.
한참 후에 땅딸막한 파브로프가 층층대를 내려온다.
민수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파브로프도 반갑게 악수를 한다. 민수는 그리고선 명함을 꺼내서 주었다.
"한국의 국민신보 과학부 기자이시라니 반갑습니다. 우선 식당으로 가서 얘기를 들어 봅시다."
파브로프는 앞장 서서 걷는다.
민수는 뒤따르면서 소련의 신문 기자도 소탈한 면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은 지하실에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더듬더듬 의사 소통을 시작했다.
"시베리아의 농업 사업을 자세히 알려고 왔습니다. 취재의 편의를 좀 제공해 주십쇼."
민수는 간곡한 말투로 부탁했다.
"제공하구 말구요. 우선 호텔을 정해야 될 텐데, 프레스 클럽에 방이 있을 테니 거기서 머무르는 게 가장 편할 거요."
파브로프는 차를 시키고 일어서더니 성급히도 전화를 들어 프레스 클럽을 불러대고 방을 부탁한다.
"방이 예약되었으니 그리로 가서 쉬십쇼. 나는 일을 마치고 나서 그리로 가겠습니다."
그는 우물쭈물하는 성깔이 아닌 모양이었다.
커피도 후루룩 마시고 나더니 금방 민수를 재촉하다시피 일어선다. 사무적인 편이 고마울 뿐이었다.
민수는 안내해 주는 대로 프레스 클럽의 3층 303호실에 들었다.
파브로프가 나간 뒤, 김민수는 수화기를 번쩍 들고 한국의 정보부 과학부 전화 번호를 댔다.
국제 전화는 30분이 넘어 때르릉 걸려 왔다.
"과학부장이십니까? 나 김민수요. 무사히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여 코스모푸카야 신문의 파브로프 과학부장의 안내로 프레스 클럽 3층 303호실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일보에서 농업 기술 취재를 하러 왔다니까 아주 반기더군요."
민수의 전화 보고를 들은 강 윤식 과장은 제법 신문사 과학부장답게 일러 준다.
"취재를 똑똑히 하게. 농업 기술도 중요하지만 기상 관계도 곁들어서 잊지 말도록…… 그럼 몸조심하게."
국제 전화는 도청되기 쉽다. 민수와 과학부장은 겉으로는 태연히 취재 연락을 주고 받았으나, 호흡에서 느끼는 체온은 사뭇 다르다.
이날 저녁 파브로프가 찾아 와서 두 사람은 취재 스케줄을 함께 짰다.
파브로프는 시베리아에서 제일가는 과수원을 보이고 싶은 눈치였다.
과수원, 농과대학 그리고 농장과 조림(造林) 지대를 그는 천거했다.
민수는 마다할 까닭이 없다. 차례로 예정표를 짜면서 그는 이왕이면 농업기상관측소도 구경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 참, 그것을 잊었었군. 농업기상관측소도 보고 시베리아 제일의 하바로프스크 기상대도 꼭 둘러 보십시오."
파브로프라는 사나이는 어디까지나 호인이었다. 초면에도 서먹서먹한 점이 전혀 없으며 자기는 독일의 대학원에서 지질학을 연구한 적이 있는 만큼 외국인과의 접촉이 많았다고 자랑한다.
두 젊은이는 과학 특히, 농업과학이 장차는 공장 규모로 일관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 합의하며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고 헤어졌다.
 
하바로프스크 천문대
 
민수는 잠자리에 들어 고상고상 작전을 꾸몄다.
'아무래도 기상대를 중심으로 수소문해야겠다. 과수원이니 농과대학은 사실상 흥미없는 일이다. 기상대의 젊은 실무자를 붙잡고 물어보아야겠다.'
침대 속에서 소리치다가 또 눈을 뜨며 노루잠으로 하루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이튿날부터 파브로프의 안내로 각 기관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한다.
그러나 민수의 마음은 마지막 날에 가기로 된 기상대의 취재에만 정신이 쏠려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1주일 후, 민수는 파브로프와 함께 하바로프스크 기상대를 찾아 갔다.
"한국의 신문기자 김민수올시다. 잘 부탁합니다."
민수가 천연스럽게 인사하자 기상대장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퍼뜩 스쳐갔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기상대장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지만 민수의 마음에 비친 야릇한 심중은 지울 도리가 없다.
송수신 시설, 관측기재 등을 일일이 구경하면서 민수는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며 예보국장 성하룡의 모습을 찾았다.
하바로프스크 기상대는 과연 훌륭한 시설이었다.
고저(高低) 기압의 위치, 시도(示度), 진행 방향, 속도, 등압선과 불연속선의 위치 등을 전자계산기로 계산해서 수치(數値) 예보를 하고 있었다.
태풍이나 허리케인의 진행 방향을 수치 예보해 온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천기도를 수치 예보로 바꿔 보려는 꿈을 여러 나라의 기상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겨우 실용화된 것이다.
민수는 국제방송과에 들렀을 때, 젊은 실무자를 붙들고 물었다.
"대한민국으로 나가는 기상 방송은 어디서 합니까?"
계원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 송신기를 가리키면서,
"이 기계올시다."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고서는 송신 테이프의 키를 계속 두들기고만 있다.
'말을 붙일 틈도 주지 않는구나. 이 일을 어떻게 한담?'
민수는 몸이 달았다.
그리고선 다시 목소리를 추스르며,
"여기에는 어느 나라 연구원이 주재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일본, 중국, 미국, 그리고 한국의 교환연구원이 와 있지요."
그 젊은 계원은 귀찮다는 말투로 내뱉었다.
"아, 그렇습니까."
민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 속에서는 번쩍 불이 튀었다.
'한국에서 연구원이 와 있을 턱이 있나, 그 사람이야말로 예보국장임에 틀림없으리라.'
민수는 기상대장에게 이 일을 추궁해 볼 작정으로 건성으로 돌아보았다.
층층대를 돌아서 긴 낭하를 지나칠 때, 민수는 무심코 반쯤 문이 열린 방안을 훔쳐 보았다.
아아! 거기에는 눈익은 예보국장 성하룡이 책상 머리에서 책을 들여다 보고 있지 않는가!
김민수는 순간 멈칫 걸음이 떼이지 않았다.
청년 김민수는 순간 망설였다.
'예보국장을 본 이상, 당장에 알은 체 할 것인가, 또는 일단 지나친 뒤에 연락을 취할 것인가?'
그의 머리 속에선 번개처럼 판단이 맴돌았다.
민수는 언뜻 기상대장의 눈치를 훔쳐 보았다. 기상대장은 몹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아니다. 기회를 놓쳐버릴 염려가 있다. 여기서 단번에 결판을 지어야 돼.'
민수는 마음먹자 문을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성하룡 예보국장님! 안녕하셨어요, 저는 한국에서 온 국민일보 특파원입니다. 소식이 없어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어요."
민수가 우리말로 인사하자 그는 깜짝 놀란 낯빛으로 변했다. 소스라치게 놀랜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예보국장은 이내 목소리를 추스리며 태연히 말했다.
"그러세요. 반갑기 짝이 없소.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찾아 왔습니까?"
"대강 짐작이 갔어요. 선생님은 식물 자력선 연구의 권위이시라니까 짐작할만 하죠."
김민수는 짧게 잘라서 말한 뒤, 금방 코스모푸카야 신문의 과학부장 파브로프를 성하룡에게 소개했다.
"그렇습니까. 그런 훌륭한 분이 여기에 와 계시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좀 있다가 점심이나 같이 하면서 식물 자력선 얘기를 들어 봅시다. 한 바퀴 돌고 오겠어요."
파브로프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 하지요. 기다리겠습니다."
예보국장과 파브로프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민수는 마음 속으로 쾌재(快哉)를 불렀다.
어떻게 해서 예보국장을 끌어 낼 구실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던 참에 마침 안성맞춤이다.
하바로프스크 기상대장은 속으로는 어쨋든 헤살을 놓을 수도 또한 그런 생각을 내색할 겨를조차 없었다.
김민수는 방에서 나와 앞장서며 안내해 주는 기상대장의 설명을 건성으로 듣고만 있었다.
얼마 후에, 기상대장에게 깎듯이 작별 인사를 한 김민수는 파브로프가 운진하는 자동차 속에 성하룡 예보국장과 함께 타고 있었다.
차는 오른편으로 멀리 부두(埠頭)를 바라보면서 경쾌하게 달린다. 6월의 시원한 바람이 반쯤 열린 창문으로부터 마구 들이친다.
 
탈출 모의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요. 어떻게 여기까지 끌려 왔습니까. 청장님이 여간 걱정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이것도 모두 우리 나라의 과학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수고라고 생각하면 뭐 대단한 건 없지요. 그래 미스터 김은 이곳에 온지 오래 됩니까?"
"2주일밖엔 되지 않아요. 국장님을 만나 뵈려고 딴엔 무척 애를 썼습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자동차는 어느덧 아담한 이층 건물 앞에 다다랐다.
"자, 여러분 내립시다. 이 식당은 하바로프스크에서도 유명한 달팽이 요리집입니다. 예보국장을 위해 특별 대접하는 겁니다."
파브로프는 해맑게 웃으며 먼저 내려선다.
두 한국인이 그의 뒤를 따라 식당에 들어서니, 과연 진미(珍味) 요리집 못지 않게 홀의 장식이 고전적이다.
벽에는 페르샤 융단에 수놓은 고궁의 그림이 걸려 있고 검은 털이 생생한 곰의 박제(剝製)도 진열되어 있다.
파브로프는 두리번거리는 그들을 안내하여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하고 있는 손님들이 제법 점잖아 보인다.
이 식당은 외국인용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웨이트레스가 시중을 들어준다고 파브로프가 일러 주었다.
일행은 달팽이 요리를 주문했다.
"아까 식물 자력선을 연구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예보국장님은 그 가능성을 믿고 계십니까?"
EMB000005e064c9파브로프가 먼저 얘기를 끄집어 냈다.
"믿구말구요. 당신네들 서양사람들은 광물성에만 너무 치중했지 식물의 신비한 기능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애요. 식물에 왜 자력선이 없겠어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참, 알쏭달쏭한 말씀입니다. 식물이 어떻게 전기 작용을 일으킨다는 말입니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처음 듣는 이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실제로 연구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이곳까지 온 까닭도 따지고 보면 툰드라와 같은 한대 식물의 자력선을 연구해 볼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자 김민수는 속으로,
'이 양반이 무슨 흰소리를 하나. 그래 납치되어 온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국경을 넘어 왔단 말인가?'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연구의 성과를 어느 정도인지 묻고 있는 게 아니죠. 제가 묻고 있는 초점은 식물이 무슨 힘으로 전기력를 발생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파브로프가 적이 초조하게 묻자 성하룡은 빙그레 웃으면서 천연스럽게 말한다.
"우리는 대기권의 온도차와 기압차(氣壓차)로 말미암아 허리케인이나 태풍과 같은 무서운 힘이 생기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수소 폭탄의 수 배나 되는 위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는 식물을 포함해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기력에 공명하는 식물 자체의 전기력을 왜 인정 못해요. 거기에는 수분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오. 그 양을 수적으로 표시하자면 다소 복잡해지지만 식물 자력선의 근원은 역시 대기층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성하룡이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 문제의 달팽이 요리가 나왔다.
"퍽 흥미있는 테마라고 생각됩니다. 음식이 식기 전에 먼저 듭시다."
파브로프는 약간 슬기로운 말투로 권하면서 먼저 꼬챙이를 들었다.
철사로 된 꼬챙이를 소라딱지만한 달팽이집의 어귀에 쑤셔넣고 끌어내지 않는가!
두 한국인은 말없이 그의 솜씨만 지켜 보고 있다.
파브로프는 사리사리 끌어 낸 달팽이 한 마리를 쏘스에 찍어서 탐스럽게 입으로 가져간다.
두 사람도 그대로 흉내를 내며 달평이를 내어 씹어 봤다. 살짝 데힌 그 놈이 징그러운 생각보다는 훨씬 구수하다. 마치 소라를 씹을 때처럼 졸깃한 입맛이 있다.
"달팽이 요리도 그렇게 볼 게 아닌데요."
하고 김민수는 솔직히 감탄를 털어 놓았다.
"이건 일부러 먹기 위해서 깨끗이 양식한 달팽이니까 별식으로선 치는 음식이죠."
파브로프는 설명하면서도 연방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다.
김민수는 식사를 들면서 슬며시 손님들의 움직임을 살펴 보았다. 손님들은 거의가 나이깨나 먹은 층이었다. 늙은 부부가 마주 앉아서 평화롭게 포크를 움직이고 있는 옆자리에 앉은 한 청년의 눈초리가 아무래도 수상하게 느껴졌다. 움펑눈이 김민수의 눈과 자주 마주친다. 외국인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에 앞서 민수는 직업 의식 때문에 본능적으로 혹 감시를 받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혹 감시를 받고 있다면 벌써 수배가 되었을까?'
민수는 시베리아에서 만들어 냈다는 사과를 먹으면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이 자리에서 성하룡 예보국장을 그대로 빼돌려 도망갈 순 없을까? 그 어떠한 묘안은 없을까? '
민수는 슬그머니 일어서서 화장실로 갔다.
노크를 해 본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대변소의 문을 꼭 잠그고 한참 동안 생각 끝에 주머니에서 가루약을 꺼냈다
화장실은 예상한 대로 수세(水洗)식이었다. 거기에는 흘러내리는 오물을 모으는 탱크가 분명히 땅 속에 묻혀 있으리라!
민수는 긴장한 얼굴로 상당한 양의 가루약을 물에 풀어서 내려 보냈다.
흰색 가루약은 세차게 내려오는 물에 씻겨서 구멍을 타고 내려가 버렸다.
민수는 그제야 대변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세면대에서 손을 깨끗이 씻고 맞은 편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고 싱긋이 웃어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민수는 다시 밖으로 나와서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태연스럽게 돌아와서 시치미를 떼고 제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아직도 식물 자력선 얘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곁눈질로 험상궂은 움펑눈이를 살펴보니 그는 먼산을 바라보듯 벽의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민수는 한없이 헤아려 봤다.
'과연 오물 탱크가 파묻혀 있을까? 만일 보통 설계대로 있기만 하다면 그 속의 메탄가스가 무섭게 폭발할 거야. 사람들이 놀라 자빠지겠지.'
이러한 생각을 하며 그는 속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파브로프의 얼굴만 지켜보고 있었다.
정보부 과학과원 김민수가 화장실에서 뿌린 흰 가루약은 냄새도 나지 않는 산화제(酸化劑)이다.
그 약은 국립화학연구소의 특별연구반이 정보부의 위촉을 받아 비밀리에 만들어낸 메탄가스의 폭발 촉진제이다.
민수는 속으로 1초, 2초, 3초하며 헤아리면서 오직 그 효과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다.
예보국장 성하룡이 신이 나서 손짓을 하며 우주선과 식물의 자력선의 유사점을 설명하고 있을 때, 별안간 꽝! 하는 폭음이 터졌다.
꽝! 꿍꽝! 와그르르……
폭발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고 식당 안은 수라장으로 변했다.
"사람 살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연기 속을 헤매는 부인과 아이들!
변소가 폭발하는 바람에 불이 붙어 연기가 삽시간에 휘돌았다.
민수는 재빨리 예보과장의 손목을 붙잡고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입구를 향하여 탈출하려고 허덕였지만 불길과 연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플라스틱 제품으로 말짱 장식해 놓았기 때문에 거기에 불이 붙어 무서운 독(毒)가스를 내뿜는다.
민수는 그럴수록 정신을 가다듬으며 예보국장의 손목을 더욱 굳세게 붙잡고 입구를 향하며 달음박질했다.
두 사람, 아니 모든 사람들이 한 손으로 연기를 가리면서 뛰어간다.
민수가 가까스로 문 밖으로 나왔을 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코 속이 싸하게 매큼하다. 독한 기운이 무섭게 코청을 찌르는 것을 느끼자, 김민수는 의식을 잃고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젊은 간호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김민수는 머리가 쑤시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되찾았다.
도무지 생각이 옹송망송하여 어떻게 된 일인지 걷잡을 수가 없다.
머리를 만져보니 붕대로 동여매고 있었다.
분명히 식당에서 탈출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가스 냄새에 중독이 되어 쓰러진 뒤, 어떻게 되었을까?
"정신이 났습니까? 참 다행이에요. 미스터 김은 다행이어요."
김민수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온 젊은 여자 간호원이 기쁘다는 듯 중얼거린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민수는 물었다.
"대단치는 않아요. 화재 현장에서 가스 중독이 된 거에요. 이젠 안심하셔도 돼요."
여자 간호원은 상냥스럽게 일러 주면서 민수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본다.
"예보국장님과 파브로프는 어떻게 됐죠?"
"아, 모두 무사합니다. 가벼운 중독으로 한 때 실신했을 따름이에요. 저 편 침대에 누워 있지 않습니까?"
간호원이 가리키는 곳에 성하룡이 역시 머리를 동여맨 채로 누워 있었다.
그의 의식은 아직도 흐리멍텅한 모양이다. 눈을 감은 채 아무 대꾸도 없다.
"파브로프는?"
"벌써 깨어나서 출근했어요."
여자 간호원이 웃어 보인다. 영락없이 밤볼진 얼굴에 보조개가 더욱 정답다.
그녀의 나이는 23, 24세 쯤일까. 어딘지 모르게 동양인다운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
병원에서 이틀이 지났다. 성하룡 예보국장도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다.
"혼날 뻔 했어. 객지에서 개죽음할 뻔 했지, 핫하하하."
예보국장은 쓴웃음을 일부러 웃어 보인다.
간호원의 이름은 유린 가고파라고 했다. 그녀는 김민수가 한국 사람인 줄 알고 더욱 친절히 대해 주었다. 밤이면 침대 옆에 앉아서 이런 얘기도 했다.
"저의 할아버지는 한국 사람이래요. 아무튼 일제 시대에 만주의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쫓기고 쫓겨서 시베리아로 도망왔대요. 처음엔 치타 정부와 독립군의 사이가 좋았는데, 1921년 6월에 소련 정부가 일본과 협정을 맺어 독립군을 무장 해제 시켰다지 않아요. 조선 독립군은 그 때 흑룡강(黑龍江) 자유 시에서 반항했는데, 이 때 저의 할아버지 김한성은 포로가 되어 나중엔 소련에 귀화하고 말았대요. 어머니는 소련인이였어요."
김민수는 귀가 솔깃했다.
해방 전의 독립 투사의 손녀를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는 무릎을 칠 만큼 마음 속으로 기뻐했다.
"이것도 모두 선현(先賢)이 맺어 준 인연인가 봅니다. 나는 신문 기자이지만 저 분은 한국의 훌륭한 과학자이지요.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김민수는 젊은 간호원에게 호소했다.
아무리 세상이 너그럽다고 해도 소련의 소방대원들이 화재와 폭발의 원인을 조사않을 리 없다.
산화제를 써서 화장실의 지하 탱크를 폭발한 사실이 드러나는 날이면 민수의 정체도 밝혀져 재미없는 일이 생긴다.
민수는 하느님의 덕분으로 만나게 된 이 한국계 간호원의 가냘픈 팔에 매달려야 겠다는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 올랐다.
머리의 붕대를 풀던 날, 김민수는 넌즈시 그녀를 꼬여 뒤뜰을 산책했다.
"미스 유린, 성이 가고파라니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을까. 나는 신문 기자이니까 상관이 없지만, 그 예보국장에게는 말 못할 사정이 있소. 제발 우리를 도와주시오. 우리를 비행장까지 안내해 주시오. 안내만 해 주면 고맙겠소."
나란히 거닐면서 김민수는 애타는 소리로 애원했다.
젊은 여인은 민수의 두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더니 별안간 이슬같은 눈물이 눈시울에 맺힌다.
'이 한국 사람들은 죄인이 아닐 텐데, 분명히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할아버지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그녀의 가슴을 메우는 감상이 어느 듯 동정의 눈물을 자아낸 것이었다.
김민수는 그녀의 두 손을 쥐고
"꼭 부탁해요."
하며, 힘을 주었다.
그녀는 말 대신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 보였다.
"내일이면 늦으리라는 속담이 있는데, 미스 유린! 오늘밤에 부탁해요. 네?"
"오늘 밤에요?"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랜다.
"결코 폐를 끼치지는 않을 테니까."
미혼(未婚)의 젊은 두 남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통할 수 없는 감정이고 심정일 게다.
김민수는 강다짐을 하다시피 밤 9시에 병원을 탈출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예보국장님, 오늘 밤에 병원을 떠납시다. 뒤가 시끄러을 것 같으니 비행장으로 갑시다. 저는 정보부 과학과원이오."
성하룡은 이 말을 듣자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납치되고 다시 납치되다시피 탈출해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이구나……'
"가야지."
성하룡은 눈을 뜨며 절로 다짐한다.
EMB000005e064ca그날 밤, 세 사람은 조심스레 빠져나와 뒤뜰에 대기시켜 놓은 자동차에 올랐다. 매끈한 시동(Smooth start)으로 자동차는 굴러 간다.
미스 유린이 운전했다. 그녀가 지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큰 길로 나오자, 그들은 전속력으로 비행장을 향하여 줄달음쳤다. 차는 밝은 시가를 지나쳐 교외로 달린다.
숨을 죽이며 비행장에 이르렀을 적엔 하늘에 별이 총총하고 초생달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유린 가고파 양의 검은 머리카락은 가지런하다고 할까 차라리 함초롬하다.
그녀가 기를 쓰고 몰아대는 자동차는 비행장의 가장자리를 휘뜰휘뜰 돌아서 어떤 경비행기 옆에서 급정거했다.
유린 양은 엔진을 끄고나서 손짓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 그대로 세 사람의 그림자는 잽싸게 움직여 벌써 비행기의 트랩을 차례로 밟고 있었다.
저마다 가슴은 두근거릴 뿐 도무지 말이 없다. 숨을 죽이고 신경만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먼저 조종석에 들어선 유린 양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말을 끄집어 냈다.
"자, 이 비행기로 탈출하면 돼요. 미스터 김은 비행기 조종을 할 수 있나요?"
"허허……"
김민수는 대답 대신에 웃어 보였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고 제도가 다르다고 할망정 한국에서는 이미 비행기 조종의 유행 시대는 한 물 간 뒤였기 때문이다.
해방 전에는 자전거 타기가 유행하고 60년대부터는 자동차 부리기가 유행하더니 21세기에 들어설 무렵부터 비행기 조종이 대중 스포츠로 등장하고 요즘은 도리어 원시적인 요트 열이 한창이다
"그렇지만 미스터 김은 이 나라의 항공부호를 알지 못할 테니까 이 일을 어떻게 한담."
유린 가고파 양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못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염려마세요. 부호나 약호만 적어 주면 요령껏 빠져나갈 테니 어서 내리세요."
김민수는 주머니에서 종이와 볼펜을 꺼내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야, 아무리 조종술이 우수하다고 해도 부호를 모르면 관제탑의 의심을 받아요."
유린양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김민수의 소매를 끌고 출입문 쪽으로 갔다.
가만한 말로 속삭인다.
"당신은 내가 대한 민국으로 가면 신분을 보장해 줄 수 있어요? 나를 안동하지 않고서는 여기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성심껏 도와 드리려는 거예요. 할아버지의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유린양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깜박이지도 않은 채 뚫어지게 김민수의 눈동자를 쳐다본다.
김민수는 순간 당황했다. 자기를 버리고 한국인을 도와 주겠다는 이 어여쁜 간호원의 정체는 무엇일까? 본 마음은 또한 어떤 것일까? 혹, 엉뚱하게 그녀는 소련 공작원이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스쳐간다.
"고맙소. 고마워요. 그렇게까지 우리를 위해 주신다니 은혜는 기어이 갚으리다."
김민수는 유린 양의 두 손목을 꼭 쥐고 그녀의 성의를 받아 들였다.
손목에서는 따스한 기운이 달아 오르고 있었다.
'한 시가 바쁘다. 우선 한국땅까지 국경을 넘어 놓고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김민수는 서슴없이 조종석으로 되돌아 와서 비행기에 전원(電源)을 넣었다.
엔진을 걸려는 참이다.
그런데 출입문과 트랩을 걷어 올리고 돌아온 유린 가고파 양이 싱긋이 웃으며 김민수의 어깨를 밀치는 것이 아닌가!
조종석에서 비켜 달라는 눈치다.
"이 나라의 국경까지는 내가 비행기를 몰을 게요. 미스터 김은 하늘에선 벙어리일 텐테. 홋호호."
티없이 해맑은 웃음소리엔 만만한 자신이 어려 있었다.
김민수와 바꿔 앉은 유린 가고파 양은 익숙한 솜씨로 차례차례 스위치를 넣고 발동을 걸어간다.
그리고선 레시버를 머리에 끼고 관제탑을 부른다.
"관제탑. 여기는 민간 항공기 R3호. 블라디보스톡을 떠날 예정. 오버."
"R3호기. 17번 활주로를 쓰시오. 오버."
관제탑에서는 금방 지시가 내렸다.
세 사람이 탄 비행기는 제자리에서 서서히 빠져나와 활주로를 누비며 17번 활주로를 찾아 갔다.
엔진 소리는 경쾌하게 밤 하늘에 울리고 가솔린의 양을 가리키는 계기의 바늘도 안심할 만 했다.
누구의 비행기인지 훔치는 게 오히려 쑥스러울 분위기이다.
유린 양은 이윽고 17번 활주로 앞에서 다시 마이크 연락을 했다.
"R3호기 출발 준비 완료. 오버."
"R3호기 출발해도 좋다. 고도(高度)는 2,500 피트.
풍향은 서남풍. 풍력은 3. 안전 비행을 바란다. "
부르릉거리는 프로펠러 소리는 한결 요란하게 급회전하기 시작하고 R3호기는 가볍게 꽁무니를 들추었다.
양력(揚力)을 얻어가며 질주하는 비행기의 날파람에 두 줄로 가지런히 늘어선 붉은 신호등이 뒤쪽을 보고 줄달음친다.
이윽고 서부렁섭적 땅을 뜬 R3호기는 기수를 비스듬히 쳐들고 밤 하늘을 향하여 한 달음에 쏜살같이 솟아 을랐다.
정해진 2,500 피트의 고도를 잡은 유린 양은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거요. 서쪽으로 20분만 날면 만주땅으로 빠질 텐데……
궁금했던 모양인가 예보국장 성하룡이 묻는다.
"국장님. 그런 눈치도 없으세요. 중국으로 빠지면 항공관제가 더 귀찮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남쪽으로 날아가다가 방향을 살짝 서쪽으로 바꾸면 이내 한국 땅으로 넘어 가요."
젊은 간호원이 시원스럽게 말하는 투에 질렸는지 예보국장은 덤덤히 앉아 있을 뿐이다.
비록 무사히 이륙은 했으나 시간은 벌써 10시를 5분이나 넘어 있다. 환자들이 자취를 감춘 일이 이젠 드러났으리라.
발칵 뒤집힌 병원의 소란을 상상만 해도 김민수의 마음은 조마조마한 한편 제법 통쾌하기도 했다.
세 사람은 저마다의 생각에 잠긴 채 별 말이 없었다.
1시간 남짓 비행하다가 유린 양이 레시버를 풀어 김민수에게 건네 주었다. 방스레 웃으면서.
민수가 모처럼 붙잡은 조종간의 촉감은 차가웠다.
차라리 자릿한 만족감 같은 것이 온 몸에 전해 왔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꺾어야겠어."
민수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항로를 바꿨다.
그는 달빛에 아스라이 반짝이는 싱카이호(湖)의 넓은 호수를 발치 밑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김민수는 거기서부터 만주와 소련의 국경을 조금 서쪽으로 쏠리면서 남하해 갔다.
그의 머리 속에는 나진(羅津)과 청진(淸津)의 두 비행장이 교대로 오버랩 되었다.
어느 비행장에 내리거나 상관은 없겠지만 신문사에서 냄새를 맡으면 귀찮은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만 같아서이다.
그는 도리어 넓고 번잡한 청진 비행장을 고르고 허리를 구부리며 연료 계기를 들여다 보았다.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는 청진까지 빠듯하다.
"예보국장님, 청진으로 가겠습니다."
민수는 뒤를 돌아보며 일러 주었다.
예보국장은 두 눈을 감은 채로
"아무렴."
하고 한 마디 할 따름이다.
다행히 뒤를 쫓아 오는 비행기는 없었다. R3호기는 고도를 3,500 피트까지 높이 뜨며 드디어 두만강을 넘어섰다.
한반도로 들어서자 민수의 긴장했던 어깨가 저절로 풀렸다.
"유린 양, 정말로 고맙소. 이젠 우리들의 조국으로 들어섰으니 안심하시오. 이제 청진 항공국과 콘택트 하겠어."
민수가 건네는 말을 듣고 유린 양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아랑곳없다는 시늉을 한다.
자칫 잘못하면 추격하는 전투기의 총알을 맞을는지도 모르는 모험이었건만 간이 큰 이 젊은 간호원은 마치 이웃 도시에라도 날아가는 양 시종 태연하다.
 
청진 비행장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시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김민수는 생각했다.
"SRCK ! SRCK ! 여기는 R3호라는 소련 국적의 민간 비행기요. 청진 비행장까지의 항로 지시를 요망함. 오버."
민수가 부르고 있는 SRCK는 청진 항공국의 호출 부호이다.
"여기는 SRCK. 항로를 서미남(西微南) 15도로 고치시오. 오버."
아주 사무적인 쌀쌀한 말투의 회답이 레시버의 음향판을 울린다.
항공국 직원이 R3호기의 사정을 알 리가 만무하다.
그래도 한국말에 어려 있는 믿음의 마음은 외로울수록 한결 간절하게 들려오는 법.
김민수가 내다보는 밤중의 강산은 드문드문 켜진 민가의 등불과 멀리 내려다보이는 붉은 항공 표지등 밖에는 온갖 생명이 숨을 죽인 채 깔려 있을 뿐이다.
조종석와 계기판에서는 항로의 방향을 잡아 주는 신호가 '삑삑'하며 규칙적으로 파랑불을 켜 주고 있다.
30분이 지나고 다시 30분이 지날 무렵 밤 하늘에 훤하게 비치는 불빛의 바다가 멀리 바라보였다.
청진 비행장 상공에 다다른 것이다. 활주로의 표지등이며 써치라이트의 눈부신 흰빛은 어느 비행장과 다름이 없었건만 유린 양은 그래도 호기심에서인지 자리에서 일어서서 눈시울을 조리며 굽어보면서 말했다.
"꽤 큰 비행장인 듯 해요. 미스터 김."
"한국에서 여덟 번째 가는 비행장이죠.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송 기지이기도 합니다. "
김민수는 보라는 듯이 집게손가락으로 불빛이 훤한 쪽의 항만을 가리켰다.
그리고선 R3호기는 착륙 준비를 서둘렀다.
"청진 관제탑, 여기는 R3호기. 착륙 준비 완료. 오버."
"R3호기, 12번 활주로를 쓰시오. 자동 착륙 장치를 사용하도록. 오버."
그들은 관제탑의 지시대로 적외선(赤外線)으로 인도되는 자동 착륙으로 들어갔다.
기체는 이윽고 거뜬히 내려 앉았다. 민수는 비행기를 공항의 출입구에 가까운 구석으로 몰고 가서 발동을 껐다.
그리고선 한 번 크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 예보국장을 돌아보았다.
"다 온 거요! 비행기가 편리하긴 하군."
성하룡은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의 벨트를 고르고 바지의 먼지를 털었다.
세 사람은 차례로 비행기를 내려 공항 사무소 쪽으로 걸어 갔다.
기다리고 있던 공항 직원은 아닌 밤중에 도착한 소련 여자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잠깐 연락할 곳이 있으니 사무실로 들어갑시다."
민수는 먼저 말을 건네며 젊은 직원을 안동하고 공항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고 휘황한 전등빛만이 눈부시다.
시계는 새벽 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정보부 과학과원이오. 청진 비행장에 내린 것은 곡절이 있으니 그리 알으시오."
민수는 타이르고 나서 전화통을 들고 정보부의 청진부를 불렀다.
"나는 김민수인데 누구시오? 오, 장기환군인가. 숙직인 모양이군. 여긴 비행장인데 빨리 공항 사무실까지 와 주게. 손님이 두 분이 있어. 오케이."
수화기를 천천히 놓으면서 민수는 창 너머에 서 있는 유린 가고파 양을 새삼스럽게 관찰해 보았다.
하바로프스크의 병원에서 무척 크게 느껴졌던 그녀의 몸매가 실상은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다. 알맞게 내민 유방이며 날씬한 허리에 놀랍게도 그녀는 단화(短靴)를 신고 있었다.
공항 직원은 어리둥절한 채 민수와 외국 여인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기웃거릴 따름이었다.
한참만에 장기환이 차를 몰고 기운차게 사무실로 뛰어 들어오자 민수의 손목을 쥐고 굳게 악수를 한다.
"사유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시장할 테니 우선 식사를 해야죠. 시내의 올나이트 식당으로 갑시다. 서울행 여객기는 새벽 4시에 있습니다. 어서 식당으로 갑시다."
장기환이 설치는 바람에 세 사람은 그의 차에 올라 쏜살같이 시내를 향해 넓은 국도를 마구 달린다.
예보국장 성하룡이 이날 아침 서울로 돌아온 소식은 기상청이나 가족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예보국장의 수난
 
하루 종일 푹 쉰 예보국장은 떼꾼했던 표정이 가시고 좀 상기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보부 과학과장 강윤식은 걱정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생각할수록 꿈같은 얘기입니다. 아 금강산에서 볼 일을 마치고 식물 자력선 연구소를 나오지 않았어요. 정거장까지 전송하겠다는 김철수 박사를 굳이 보내고 혼자서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네 산모퉁이로 접어들자 난데 없이 코 큰 사람 두 명이 불쑥 들이닥치면서 내 팔을 붙들지 않겠어요. 가슴이 덜렁 내려 않더군요. 웬 사람들이냐고 고함을 꽥 질렀더니 예보국장이 아니냐고 영어로 묻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바보짓을 했어요. 아니라고 잡아 떼면 그만인 것을 고지식하게도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대기시켜 놓았던 자동차로 끌고 가요. 처음엔 웬 미국인이 이렇게도 난폭할까 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예보국장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넋없이 말을 이었다.
과학과장실에는 단 둘이 마주 앉아 있을 뿐이다. 과학과장은 가끔 펜으로 메모하고 있었다.
"놈들은 한참 달리다가 주머니에서 박카스 병만한 것을 세 개 꺼내더니 한 놈이 뚜껑을 열고 꿀꺽 마시더군요. 시원할 테니 나에게도 마시라는 거예요. 괜찮다고 사양해도 굳이 마시라는 바람에 마지 못해 한 모금 마셨더니 그만 정신이 핑 돌고 말았어요. 까무라친 거지요. 그 후, 어떻게 됐는지 통 기억이 없어 어렴풋하게 제정신이 돌아왔을 적엔 어떤 호텔의 침대 위에 누워 있더군요. 장소가 어딘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종잡을 수 없는 판인데 머리는 띵해요. 한 놈이 나타나더니 제법 공손하게 일러 주더군. 국장님, 여기는 중강진(中江鎭)인데 본청에 소재를 연락하시라구. 전화통을 안겨주는 바람에 연락을 할 수는 있었으나 옆에서 노려보는 서슬에 더 이상 자상한 얘기는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중강진 기상대에는 들르지 않았군요."
과학과장이 미심쩍게 묻는다.
"그럼요. 기상대에 들르면 우리 직원들이 가만히 있었을라구. 놈들이 적어 준 쪽지대로 읽었을 따름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온몸의 기운이나 정신이 아련하여 반항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조직적인 생각이 꾸며지지 않아요."
"아마도 그 약기운인가 보죠."
"그럴지도 몰라요. 나는 상대방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무척 겁이 났어요. 그런데 하루는 유고미크라고 자칭하는 놈이 소련으로 가자고 꾀는 거예요.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이처럼 못살게 구느냐고 따졌더니, 놈은 아주 겸연쩍은 표정으로 상부의 지시라고만 잡아 떼요. 상부는 아마도 당신에게 식물 자력선에 관한 연구를 도와드릴 생각이 있는 것 같다고만 일러 주더군요. 혼자서 생각했어요. 타산을 해보았지요. 그렇지 않아도 장차 툰드라 식물의 자력선 연구를 기어이 해볼 작정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는 생각, 한편으로는 기상청의 일을 팽개칠 수는 없다는 생각. 두 가지 생각을 저울질해 보았으나, 당장에 탈출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주사위를 던져 본 거죠. 기왕에 젖은 몸 차라리 소련으로 들어가서 식물 자력선 연구를 계속해 보자는 배짱이 생겨요. 욕심이지요. 그래도 겁이 나서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신신 부탁했죠. 그랬더니, 한 놈은 줄곧 윗도리의 주머니 속에서 권총을 겨누면서 감시하지 않아요. 바보처럼 줄줄 끌려 갔을 따름이오."
예보국장은 대충 경위를 설명했다.
"딱한 상황엔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성 국장은 식물 자력선을 좀더 연구해 보려는 개인적인 욕심이 앞서지는 않았을까요?"
강 과장은 예보국장의 표정을 지긋이 훑어 보며 묻는다.
"하기야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지 않아요. 나는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이바지하려는 욕심에서……"
과학과장은 예보국장의 말을 가로 막으며 느닷없이 책상을 탁 치고 일어서며 호통을 쳤다.
"뭐요? 과학엔 국경이 없다구요! 무슨 뜻이죠. 어림도 없는 생각!"
서슬에 성하룡은 질겁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본 들 잘못된 일은 없는데……
"그럼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씀이오."
예보국장도 굽히지 않고 한 마디 했다. 두 사람의 논쟁이 대짜배기로 벌어졌을 때, 공교롭게도 찌르릉하고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는 과학부장으로부터 걸려 왔다.
"예보국장이 무사히 돌아 왔으니 천만 다행이오. 그만한 과학자를 앙성하려면 40년이나 걸리니 강(姜) 과장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마시오. 내 부탁이오."
"네, 염려 마시오. 형식적인 사무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강윤직은 수화기를 놓고 예보국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국장님, 과학에 국경이 있나 없나 하는 문제는 언젠가 심포지움에서 토론하기로 합시다.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십쇼."
"먼저 기상청에 연락하는 게 순서가 아니겠어요. 전화 좀 씁시다."
성하룡은 박상문 기상청장을 불렀다.
"이게 웬 일이오.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도무지 꿈 같기만 하오. 어서 기상청으로 오시오……"
기상청장이 반색하며 말하는 소리가 쨍쨍 울린다.
성하룡은 정보부에서 태워준 차를 타고 기상청으로 직행했다.
예보국장의 모습을 본 기상청은 발칵 뒤집혔다.
현관의 수위실로부터 청장실까지 마치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나는 듯한 흥분이 삽시간에 휩쓸었다.
"정말로 놀랬어. 도대체 도깨비 장난 같아서 앞뒤를 종잡을 수가 있나. 어서 차를 드셔."
박상문 청장은 넘쳐 흐르는 기쁨을 참지 못해 손수 전화통을 들고 예보과장 이기호를 불렀다.
"하바로프스크까지 납치된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말라던데요. 소문이 돌면 정보부의 입장이 난처해진대요".
예보국장은 먼저 기상청장에게 못을 박아 놓고 그 동안의 경위를 짧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기상청의 관계 직원들은 우선 예보국장의 건강한 얼굴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허력 에너지
 
그날로 부터 근 한 달 후, 성하룡의 모습은 다시 금강산의 식물자력연구소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는 과학부 장관에 간청해서 식물 자력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기상청에서는 예보국장을 놓치기 싫어 붙잡았으나 성하룡의 결심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정 그렇다면 조건을 붙입시다. 자력선이 완성된 다음엔 다시 기상청으로 돌아오기로 합시다."
박상문 청장과 예보국장 사이에서 이러한 언약이 맺어졌다. 정보부는 정보부대로 예보국장이 일단 자리를 떠나는 것을 환영했다. 왜냐 하면 법규상 성하룡이 그 자리에 눌러 앉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성하룡이 식물 자력선 연구소로 돌아오자 김철수 박사는 발벗고 환영했다.
"구관이 명관이라, 역시 성 형이 일을 완성시켜야죠."
김 소장은 마냥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한 동안 들뜨다시피 했다.
성하룡은 납치 사건의 진동이 가라앉을 무렵부터 식물 자력선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했다.
소련의 과학자들이 눈독을 들일 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연구인 것을 그 동안 소홀히 한 것을 뉘우치기도 했다.
금강산으로 돌아온 그는 그 때부터 밤과 낮을 가리지 않았다. 늘 두더지처럼 연구실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력선 연구의 초기 시대엔 자력선이 식물 성장에 미치는 영향만에 관심을 기울였었다.
이를테면 식물 자체 내의 자력선이 전자력(電磁力)의 자장에서 세포의 배수체(倍數體)를 마치 진공관에서처럼 증폭(增幅)시키는 현상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었다.
그 연구가 열매를 맺자 그는 다시 세 단계로 식물 자력선 자체를 증폭하여 이를 에너지로서 유도하는 문제에 손을 댄 것이었다.
이 유도(誘導) 문제는 수식상으로는 가능했었다. 성하룡이 이론적인 가능성을 입증한 뒤, 기상청의 요청으로 예보국장에 전임하였기 때문에 연구실에 남은 후배들이 뒤를 이어서 오늘날까지 실험을 계속해 온 것이다.
식물 자력선의 유도 에너지 실험은 그 동안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르 카파 B9호 위성에 송신 변조를 일으킬 만큼 방사력(放射力)이 강한 것으로 발전한 것만은 사실이다.
성하룡은 연구소로 돌아온 뒤부터 그러한 유도 에너지를 레이저 광선에 실어서 먼 데까지 발사하는 실험에 손을 대는 한편, 이론적으로는 식물 자력선이 일종의 허력(虛力) 에너지로 전자(電子)의 흐름과 공명(共鳴)할 때, 그 전자를 소멸시켜버리는 반세계(反世界)론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허력 에너지의 착상은 아주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 은하계의 별 속에도 허력 에너지만으로 된 별이 있으리라는 것이 나의 가설(假說)이오. 정 형, 나는 생각컨대, 우리가 그러한 별의 근처로 가면 모든 물질이 그 자리에서 삭아 버릴 것입니다. 녹거나 타거나 한다는 것은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허력 에너지를 쬐면 모양도 없이 삭아 버린단 말씀이에요."
연구소장 김철수 박사는 간간히 연구실에 들러서 자기의 의견을 내놓고 상대방과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다.
이 날도 성하룡의 연구실에 들러 허력 에너지설을 꺼내어 성하룡의 구미를 돋굴 작정인가 보다.
"김 박사처럼 이론으로만 따질 수 있는 학자는 부럽습니다. 우리는 생리적으로 실험을 해보지 않으면. 좀이 쑤시니까 탈이죠. 허력 에너지의 가능성을 저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식물 자력선으로부터 완전무결하게 유도하고야 말겠어요."
"그 때는 우리들이 인류의 과학사에 아인슈타인 이상으로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는 거지. 참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성 형, 그렇게 시험관만 들여다 볼 게 아니라 일도 쉬엄쉬엄 합시다."
김 박사는 실험학자들에게 공통된 버릇을 늘 입버릇처럼 황소같다고 조롱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한 가지 일만 붙잡으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코대답만 하기 때문에.
성하룡은 이 날도 금강산의 녹음이 무르녹은 골짜기를 돌아다니면서 색다른 약초를 한 아름 캐어 가지고 돌아와서는 일일이 온상에 옮겨 심었다.
실힘실에는 혹 옛 진시왕(秦始王)이 와서 보면 탐이 나서 목에서 고무래질할 정도로 진기한 약초들이 전기 코일에 감겨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수백만, 수천만 년 동안 말없이 그들만의 생존 투쟁을 계속해 온 식물들의 숨은 에너지가 장차 우주 공간을 통해서 발사되리라는 것만 생각해도 성하룡은 한없는 행복감에서 헤어나지 못할 황홀한 순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유린 가고파 양의 정체
 
두 사람이 잡담을 주고 받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사환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른다.
"소장님, 서울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뭐, 손님? 어떤 분인데."
"두 사람이에요. 한 분은 외국 여자이고요. 성 선생님도 계시느냐고 물어 왔어요."
"외국 여자?"
가만히 서있던 성하룡이 대뜸 묻는다.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소장실까지 가 보니 거기에는 다름 아닌 김민수와 유린 가고파 양이 와 있지 않는가.
"놀랬는데. 그거 무슨 소식이라도 던져 주고 찾아 와야지 미리 준비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무고하셨어요."
두 사람은 먼저 굳은 악수를 했다. 성하룡은 가고파 양의 두 손목을 붙씁고 반색을 하며 소파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너 웬 일이냐? 외국 여자까지 데리고."
김 박사는 민수를 보고 나무라듯이 말한다.
"소개를 하겠어요. 이 분은 유린 가고파라는 한국계 소련 여잡니다. 지난 번 하바로프스크에 갔을 적에 크게 신세를 진 생명의 은인이죠."
민수는 그리고선 가고파 양에게
"내 형님이니까 인사를 하시지."
하고 권한다.
쑥스럽지 않을 만큼 인사 소개는 이내 끝났다.
"그래, 가고파 양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요?"
성하룡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성하룡은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연구소장이 김민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성 형, 아직도 모르셨나. 이 놈은 내 동생이오."
"그러시던가요. 미처 몰랐는데…… 세상이 손바닥보다 더 좁아졌어. 핫하하하."
성하룡이 껄껄 웃어대는 바람에 가고파 양도 눈이 휘둥그래져서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릴 따름이다.
네 사람이 이렇게 만날 줄이야 아무도 몰랐으리라.
"휴가를 얻어 금강산 구경을 왔지요. 사나흘 묵고 갈래요."
"넌 팔자도 좋구나. 외국 여자하고 신선 놀음을 다 할줄 아니. 어서 차를 들거라."
"저요, 저는 미스터 김 덕분에 정보부의 동북아시아과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매일 소련과 만주 지방의 서류 정리를 하고 있는데 일이 퍽 재미나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처럼 살기 좋고 외국인에 대한 인심이 좋길래 할아버지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가 봐요. 금강산도 아주 아름답고 하늘도 가없이 맑고……"
가고파 양이 종달새처럼 지껄이는 말소리 가운데는 그녀의 행복감이 어려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부터 실컷 구경을 하지."
김 박사가 일러 준다.
민수와 가고파 양은 다음 날부터 금강산 관광객에 끼어 폭포며 절이며 이름모를 골짜기며 발길이 가는 대로 구경하며 돌아 다녔다.
가고파 양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지 못하고 그날 그날의 생활에 쫓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가엾은가 하며 한탄하고 있었다.
저 멀리 유럽의 관광객들도 비로봉의 안개구름을 들이마시며 극락에 온 듯 하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의 산 구경을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식물 자력선 연구소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연구소를 구경해야죠. 색다른 약초가 많다던데요."
민수가 성하룡을 보고 웃어 보인다.
"그야 얼마든지 있지. 따라와요."
성하룡이 앞장서서 연구실 뒷뜰에 있는 온실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가고파 양은 깨알만한 꽃송이가 피어오른 약초의 넓은 잎사귀를 어루만져 보며 삽삽한 푸른빛이 마음에 든다고 아양을 떤다.
온실을 두루 구경하고 그들은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 동안 김민수의 눈망울에는 깊숙이 반짝거리는 광채가 늘 따르고 있었다.
가고파 양이 무심코 던지는 눈길을 쫓는 민수의 시선은 쉴 새 없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는 사소한 변화까지 훔쳐 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인즉, 민수는 가고파 양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금강산 구경을 꾀한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소련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라면 식물 자력선 연구소를 구경하는 동안 그 무엇인가 이상한 행동을 취하리라고 그는 판단했다.
민수는 가고파 양이 그러한 정체를 드러내지나 않을까 하고 속으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어머나, 이 나무뿌리는 마치 사람의 모양과 비슷하네요. 이름이 무엇인가요."
그녀는 산삼(山蔘)이 담겨있는 유리병 앞에서 놀란 듯 소리 질렀다.
"인삼이라구 하지요. 우주 비행사들이 훈련받을 때 먹는 중요한 보약의 한 가지입니다. 한국의 특산물이죠."
성하룡은 기꺼이 설명해 준다.
민수는 그 동안에도 차거운 눈초리로 가고파 양의 얼굴에서 그 무엇인가 읽어 내려고 훔쳐보고 있었다.
옥에도 티가 있듯이 만일 가고파 양이 조금이라도 야릇한 관심을 나타내는 경우, 김민수는 그녀에 대한 인식을 180도로 바꿔야 했기 때문에 그는 마치 범인을 쫓는 심정으로 그녀를 감시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훑어 보아도 민수의 지레걱정은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가고파 양의 태도나 표정에서 그는 당장엔 아무런 속임수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연구소의 직원들과 함께 어울려서 저녁 식사를하고 여럿이 피라밋에 관한 얘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17호 태풍 아이러호
 
피라밋의 각도는 한결같이 45도이며 이것은 구름장을 깨고 내뻗치는 태양 광선의 각도와 평행하도록 짜여 있다
누군가가 설명했다. 이집트인들의 태양 숭배가 다분히 기하학을 발전시켰다는 얘기이다.
그러한 얘기가 오가는 판에 라디오에서 갑자기 임시 뉴스가 흘러 나왔다.
"기상청이 발표한 기상 특보입니다. 중심시도(中心示度) 940mb의 제 17 호 태풍 아이러 호는 이날 오후 8시 20분 현재, 제주도 남쪽의 북위 31도 5분, 동경 125도 30분의 해상까지 진출하여 방금 북북동으로 북상 중에 있습니다. 제 17호 태풍의 중심 속도는 매시 40km이고 모레쯤은 남부 지방에 상륙할 우려가 있으므로 미리 단속해 주기 바랍니다."
방 안은 금방 어둑해졌다.
"야단났군. 아이러호는 1957년의 추석날에 부산을 휩쓸은 사라호보다 10.5mb나 더 강한 놈인데. 야단났어."
이윽고 성하룡 부장만이 홀로 긴 한숨을 내쉰다.
기상 특보의 탓인지 창 밖의 나무잎들이 한결 요란스럽게 너불거리는 것 같았다.
한편, 아이러호와 맞닥뜨리게 된 기상청은 태풍을 폭파시키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로 긴급 회의를 열었다.
"폭파시켜서 진로를 변경시켜야만이 정통으로 엄습을 당하지 않을 게요. 이대로 놔 두면 인천근방에 상륙하지나 않을까."
예보과장 이기호는 작업복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우긴다.
"그러나 만일 태풍의 진로가 꺾이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반드시 꺾인다는 확률(確率)이 60% 이상이 아닐 때는 도리어 헛수고가 아닐까요."
젊은 과원 아니 통보원이 넌지시 반박한다.
모레면 폭풍우를 몰고 들이닥치게 마련이다. 그런 날이면 올 가을의 농사는 쑥밭이 되고 말 것이다.
의론은 티격태격 그칠 줄을 모른다. 손으로 이마를 파묻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기상청장 박상문은 한참 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선언한다.
"폭파시키자! 아무리 따져봐도 폭파시키는 도리밖에 없다. 원자탄 값과 피해액을 견주어 봐도 역시 폭파시키는 게 낫다."
이마를 맞대고 있던 간부들은 그제야 정신이 난 듯 천기도 앞으로 모여들었다.
"폭파 시간을 몇 시로 하겠습니까?"
"오늘 밤 그러니까 자정(子正)이 넘어서 새벽 3시 정각에 동중국 해상에서 깨트려 보자."
기상청장은 그리고서 전화통을 들고 제주도의 우주 개발청에 직통 전화를 걸었다.
기상청의 결정이 상세히 연락되었다.
"잘 알겠습니다. 이내 출동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명령은 척척 실천으로 옮겨져 우주개발청의 평화용 원파탄을 실은 폭격기가 성산포 기지에서 한 시간 후에 떠올랐다.
광풍을 헤치며 성층권까지 치솟은 폭격기의 적외선 장치로 태풍 아이러호의 중심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컴컴한 밤중에 레이다에 잡힌 태풍은 사나운 용처럼 소용돌이 치며 서서히 북상하고 있다.
조종사 김순걸 공군대위는 침착하게 태풍을 쫓으며 3시 정각을 기다린다. 기상청으로서는 처음으로 원자탄에 의한 태풍 폭파를 시도한 것이다.
2시 50분! 김 대위는 투하 장치의 스위치를 넣었다.
투하 장치는 자동적으로 움직이며 카운트 다운의 절차를 일일이 계기판에 전해 준다.
5분 전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다. 4분, 3분, 2분, 그리고 30초, 15초, 10초, 5초, ……, 0초! 번쩍 섬광이 터진다.
"꽝! 쿠르릉"
울리는 폭음 소리와 함께 뭉게뭉게 말려 올라오는 버섯 구름!
김순걸 대위가 멀찍이 지켜보는 레이더의 영상은 갈기갈기 흔들리고 있었다.
김순걸 공군대위는 동시에 관측반장이기도 했다. 과연 원자탄은 태풍 아이러호에 명중하여 엄청나게 많은 수증기를 뽑아 올리고 말았다.
태풍은 그 쉴 새 없는 진행 방향에서 마치 자동차의 타이어가 빵구난 듯 멈칫 하더니 여전히 실세(失勢)를 되찾아 소용돌이칠 따름이다.
자동차의 타이어는 한 번 구멍이 뚫리면 바람이 꺼지지마는 태풍은 마치 칸막이가 되어 있는 잠수함처럼 원자탄이 터진 부분만 잠깐 흔들리다가는 또 다시 균형을 잡고 끄덕없이 북상하고 있다.
김 순걸 대위는 비행기의 계기가 잡은 관측 데이터를 가지고 제주도 기지에 우선 돌아왔다.
숨가쁘게 본부실에 뛰어 들어서니 거기에는 기상청장 박상문, 관측과장 김민수, 우주개발청장 권중희 박사 등 대여섯 사람이 회의상을 둘러싸고 무엇인지 의논하고 있었다.
김순걸 대위는 예정 지점에서 성공적으로 원자탄을 폭발시킨 것과 그 후의 데이터를 수집했다고 짤막하게 보고한 다음 그 방을 물러갔다.
EMB000005e064cb"역시 불로써 물을 견제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모양이다. 한강에 돌 던지기지 원자탄 한 개쯤으로 태풍의 방향이 바꿔질 것 같지 않았어."
권중희 박사가 먼저 관측 자료를 들여다 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그러나 기상청으로서 반증을 낼 한 자료도 입수해 놔야 하니까 실험해 본 거요."
박상문 청장이 저으기 난처한 얼굴을 지으며 변명했다.
사실이지, 태풍의 비구름 중에는 중심으로부터 지름이 2000km나 되는 범위에서 3백억 톤의 물을 싣고 날아가는 초특급도 있다.
이러한 태풍의 위력이란 수폭 2천 개와 비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감히 원폭 한 개를 떨어뜨려 실험해 보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상청장이 예보과장 이기호를 안동하고 온 일에는 까닭이 있다.
원폭에 의한 수증기의 증발량이 대체로 알려진다면 다음 단계로서 드라이 아이스 공세를 취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상청은 전에 그러한 실험으로 사소한 저기압의 목을 마르게 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태풍의 영양제(營養劑)는 바로 수증기이다.
태풍은 바다 위에서 수증기를 휘말아 가면서 더욱 강해지며 비교적 수증기가 없는 육상에 올라오면 영양제의 보급이 끊기어 세력이 약화된다.
"권 박사, 너무 기상청을 얕보지 마십쇼. 실은 잇달아 드라이 아이스 작전을 취할까 합니다. 태풍의 수증기를 바다 위에서 깡그리 떨어뜨려 버려야지, 육지까지 쳐들어 오는 날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비행기 10대만 빌려 주십쇼."
박상문 청장은 기를 쓰며 부탁했다.
"좋습니다. 그러나 청장, 나중에 웃음거리가 돼서야 되겠소. 드라이 아이스를 어떻게 준비할 작정입니까?"
"그 일은 염려 마시오. 이쪽에서 이미 마련해 놓았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예보과장을 직접 관측반장으로 올려 보내겠소."
"나는 반대할 생각이 없소. 좋을 대로 하시오."
권 박사가 선선하게 청을 들어 준 바람에 기상청 기술진은 곧장 진두지휘에 나설 수 있었다.
"여러분, 제주와 서귀포, 한림의 드라이 아이스 공장을 모두 불러 주시오."
박상문 청장은 지체없이 지시했다.
전화는 금방 나왔다.
"여보세요. 여긴 성산포의 우주개발본부요. 아침에 부탁해 둔 드라이 아이스 가루를 급히 보내 주시오. 도착하는 대로 비행기에 싣고 뜰 테니까……"
박상문은 차례차례로 전화 연락을 마쳤다.
그들은 전에 요드화 은가루와 요드화 연의 연기를 뿜어서 태풍의 진로를 바꿔 보려는 실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었다.
까닭에 이번에는 차디찬 드라이 아이스 가루를 태풍의 수증기에 안겨 줌으로써 이를 얼음알로 만들어 비를 유도하자는 것이다.
30분도 채 못되어 드라이 아이스 상자는 속속 우주 기지에 도착했다.
창 밖으로 내다보니 작업원들이 분주하게 플라스틱 상자를 나르고 있다.
벌써 동쪽 하늘은 훤하게 밝아오고 있다. 얼마 후에는 태풍이 휘몰아칠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불어오는 바람기는 선득하기만 하다.
멀리 검푸른 수평선 위에 산뜻한 진붉은 햇살이 대여섯 줄기 힘차게 내뻗히더니 이내 하늘은 불그스럼하게 물들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햇살은 스러지고 뭉글뭉글한 햇덩어리는 눈부시게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태풍이 몰아오기 전의 고요함인 지금 바다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기지에서는 터보 제트기의 발동 신호가 내렸다. 점화된 엔진은 하늘이 무너질 듯 소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드라이 아이스의 투하 시간을 6시 30분 정각으로 하시오. 그리고 예보과장, 당신이 탄 비행기는 끝까지 관측해야 돼."
기상청장이 늠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비행복으로 말끔히 갈아 입은 이기호는 제 1 호기가 기다리고 있는 활주로로 뛰어가서 기상(機上)에 몸을 실었다.
6시 30분 정각. 10대의 비행기가 태풍의 눈을 중심으로 뿌리는 드라이 아이스의 뿌연 가루는 검은 빛 버섯구름과 대조적이었다.
마침, 잿더미 위에 칠 모래를 담쫙 뿌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비행편대는 열십자 갈지자로 그리고 멀리 태풍의 허리를 따라 원형으로 샅샅이 드라이 아이스를 쏟았다.
약을 뿌린지 근 한 시간 만에 태풍 아이러 호는 사나운 등뼈에 침을 맞은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예보과장이 편승하고 있는 1번기는 급강하해서 눈앞에 벌어진 기상 이변(氣象異變)의 이상야릇한 모습을 사진찍기 시작한다.
태풍의 눈 언저리로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리 쏟고 있지 않는가! 분명히 드라이 아이스 가루는 저기압의 물방을 속에서 얼음알로 응결되어 그 무거운 하중을 하강(下降)시킴으로써 마침내는 빗방울로 변한 것이다.
마치, 청이의 수염이 한없이 꺾이어 나가는 것처럼 검푸른 작달비가 길길이 빗발치고 있다.
이기호는 이 숨막히는 광경을 뚫어지게 지켜보며
"대성공이다 ! 우리는 승리했다."
고,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정말로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통쾌한 일을 목격했어. 굉장한데 굉장해."
천기흥 해군대위가 연방 눈을 깜박거리며 레이다를 들여다 보고 있다.
태풍 아이러호는 그로부터 약 20km 북상하는 동안 속도가 점점 떨어졌다.
태풍의 중심선의 수증기가 도려빠진 관계로 가장자리의 수증기가 몰려들어 진행방향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기호는 재빨리 이 사실을 기상청장에게 무전으로 알리고 태풍의 앞머리로 진출했다.
태풍의 이변은 그뿐이 아니었다. 북위 32도 40분, 동경 125도 50분의 자리에서 별안간 아이라호가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부지깽이로 한 대 얻어맞은 삽살개가 꽁무니를 말고 움츠리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아이러호는 거기서부터 한참 비틀거리며 방향를 남서쪽으로 약 60km나 옮겨 갔다.
그 동안 아이러호가 바다에 뿌린 비는 수 10억 톤은 됐으리라.
태풍은 그러더니 한 시간 30분 뒤부터 새로이 방향을 가다듬어 일본의 규슈(九州) 지방을 향해 진행하기 시작했다.
한국 기상청의 과학진은 역사상 처음으로 드라이 아이스에 의한 태풍의 진로 변경에 성공한 것이다.
이기호의 다섯번째 무전 연락을 받고 박상문 기상청장은 만면에 흐뭇한 웃음을 띄며 더 없는 행복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얄궂은 일이 생겨났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자니 부모에게 효성이 되지 않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자니 나라에 충성이 되지 않는 이율배반(二律背反)과 같은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두 달 후의 일이다.
일본 기상청은 태풍 아이러호의 진로 변경에 관해서 한국 기상청에 강경한 항의를 보내왔다.
그 때, 한국은 9백 40mb의 태풍을 꺾어버릴 수 있었으나 그 바람에 일본의 규슈 지방은 9백 80mb로 약화된 아이러호의 엄습을 받아 과수원 농장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항의문을 통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독선적인 사태가 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국제 회의를 열어서 공동 이익에 관한 협정을 맺어야 옳을 것으로 압니다. 만일, 중국이 일방적으로 그와 비슷한 진로 변경을 했을 때, 한국이 입을는지도 모르는 피해를 상상해 보면 일본의 고충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태풍의 진로가 늘 포물선 모양으로 북위 32도 근처에서 늘 좌회전하는 현상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에 북위 31도선의 공동관리를 차제(此際)에 제안하는 바이다."
라고 통고해 왔다.
"귀찮은 문제가 생겼구나. 31도선의 공동 관리라."
공문을 받은 기상청장은 손으로 이마를 툭툭 두들기면서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 문제는 확률(確率)에 속하지 않겠어요? 태풍의 진로를 변경한다 해도 반드시 일본 쪽으로만 진행한다는 것은 아니니까."
옆에 서 있던 예보과장 이기호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지 그래. 확률 문제야. 자네는 전문가니까 그러한 확률을 다시 전자 계산기로 뽑아내 주게."
박상문은 구원을 받은 듯 이맛살을 풀고 좋아했다.
그들은 과학부 장관에 이 일을 보고하고 이에 대한 회답을 수치 계산이 끝난 뒤에 보내기로 정했다.
 
노라른스키 교수의 논문
 
한편,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정보부로 돌아온 유린 가고파 양은 얌전하게 동북과에서 근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바로프스크의 병원에서는 엄두도 못낼 만큼 소련의 온갖 사정을 샅샅이 알게 되었다.
"저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어요. 여태까지 살아오던 자기 나라에 관한 일은 그렇게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야요. 겨우 전화 번호나 영화 제목을 기억하는데 바빴으니 못난 사람이지요."
하루는 갑자기 가고파 양이 민수에게 말했다.
"무슨 수수께끼를 안기는 거죠. 우물 안의 개구리라니, 이해할 수가 없는데……."
옆 자리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던 민수는 일손을 멈추고 얼굴을 돌렸다.
"수수께끼? 그런 건 아니예요. 내가 할아버지의 나라에 돌아와서 도리어 소련에 관한 공부를 더 많이 했단 말이에요. 경제도 산업도 기술도 문화도 더 알게 됐어요."
"그야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벌써 노스탈지어가 생겼단 말이죠.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지."
인수는 가고파 양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머리채를 길게 늘어뜨리고 전기인두질은 결코 하지 않았었다.
보통 여자들이 유별나게 길게 달은 속눈썹이나 마스카라도 칠하지 않은 채 자연스러운 얼굴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EMB000005e064cc그것은 일종의 혼혈아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일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녀의 둥그런 얼굴을 세로지르는 오똑한 콧날이며 움푹 패인 두 눈은 새삼스러운 조형(造形)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 돌아가고 싶다면 도와줄 테니 바른대로 말해 봐요"
민수는 약간 장난스러운 말투로 떠 보았다.
"미스터 김, 그런 게 아니예요. 당신은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애. 그런 말은 후일로 미루고 이 문헌을 좀 읽어 봐요."
가고파 양은 끄덕도 하지 않은 채 민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뭘 가지고 그래."
민수는 일어서서 그녀의 책상머리에 놓인 종이철을 고부장히 들여다 보았다.
종이철은 전자과학에 관한 모스크바의 과학 아카데미 회의의 보고서였다.
"이쪽 제목을 봐요. 「허력(虛力) 에너지가 전자 회로에 미치는 연구 보고」라는 제목 말이에요. 어디서 들은 제목 같죠? 저, 성하룡씨의 연구 말이에요."
김민수는 속으로 깜짝 놀랬다. 이런 일도 있나 싶었다. 눈을 다시 한 번 비비고 깨알같은 글씨로 된 제목을 들여다 보았다.
분명히 「허력 에너지가 전자 회로에 미치는 연구 보고」이다.
발표자 이름은 바이칼 대학 물리학 교수 노라른스키 박사라고 적혀 있다.
"음,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민수는 몸을 일으켜 팔장을 끼고 콧숨을내려 쉬었다.
"무엇인가 잘못된 거야. 소련 과학자가 이런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성하룡 씨의 연구와 무슨 관련이 있을 거야. 가고파 양, 보고서 봤어요?"
가고파 양이 쳐다 본즉 민수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묻는 민수의 태도가 한낱 우습기만 했다.
"읽어 봤어요. 그러나 제가 물리학을 알 수 있겠어요? 더군다나 세계에서도 일류가는 이러한 어려운 논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겠어요. 생각 좀 다시 해 보셔요."
"핫하하하."
민수는 별안간 목청이 찢어지도록 큰 소리로 웃어 제쳤다.
"그건 그렇지. 자기도 알쏭달쏭한 내용을 하물며 문외한인 가고파 양이 알 리가 있나. 바보같은 질문을 했어."
그는 생각할수록 웃음보만 터졌다.
"내가 잘못했어."
민수는 이내 웃음기를 가다듬고 그 논문을 손에 들었다.
아무래도 보고서를 성하룡에게로 보내야만 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고파 양은 시종 침착하게 앉아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의 생각 같아서는요. 이래요. 예보국장이 납치되지 않았어요. 그 때, 괴한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주사를 맞고 텔레파시(精神感應力) 해석(解釋)을 당한 것 같아요. 저는 병원에 있었으니까 신경과에서 텔레파시 해석을 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어요. 텔레파시에 걸리면 머리 속에 생각하고 있는 기억의 곡절이 자동적으로 전기 회로에 의해 기록되거든요. 성하룡씨의 식물 자력선 연구에 관한 대뇌의 기억이 텔레파시로 말미암아 그 사람들에게 누설되지나 않았을까? 저는 공연히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과학에는 우연의 일치라는 게 있다.
신라(新羅) 시대의 기술자들이 화주(火珠)를 만들어 불상(佛像)에 렌즈의 원리를 응용했을 적에 희랍의 기술자들은 이들 렌즈의 원리를 전쟁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 발전에 과연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
김민수의 머리는 결코 가고파 양보다 재치있게 돌지는 못하는가 보다.
그녀의 해석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생각도 들었다.
"알았어. 어쨌든 이 문헌을 식물연구소에 보내기로 하지. 성하룡씨도 나자빠질 거야. 노라른스키? 노라른스키라 어디서 듣던 이름같은데 ……."
김민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쥐고 옹송망송한 생각을 더듬어 보았으나 노라른스키에 얽힌 실마리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문제 거리를 안은 김민수는 밤에 잠자리에 들어도 쉬 잠이 오지 않았다.
노라른스키라는 인물을 생각해 내려고 그는 예보국장 성하룡의 실종 경위를 더듬어 보았다.
당시 성하룡을 납치해 간 두 사람의 괴한 중의 한 사람 이름이 노라른스키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성은 똑같되 이름이 다른 점은 웬 일일까? 소련 사람의 성에도 똑같은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민수는 허력 에너지가 전자 회로(電子回路)에 미치는 연구 보고서를 오려서 식물 자력선 연구소의 성하룡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는 일부러 중앙 우체국을 찾아가서 제 4 종의 등기 우편으로 보냈다. 봉투의 한 모서리의 귀를 잘라서 내용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밝혔다. 아주 소중한 물건이었음에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꾸미는 편이 도리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꼭 일 주일이 지나자 성하룡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귀중한 자료를 잘 받아 읽었습니다. 노라른스키라는 대학 교수는 국제적으로 이름난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재작년에 지구의 자장(磁場)과 자전 속도의 변화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학자입니다. 이번에 학회에 보고한 연구논문은 이론면에서 허력 에너지를 취급한 것입니다. 내용인 즉 마치 조각(彫刻)의 방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조각의 조(彫)는 중심이나 심지가 없는 것을 밖으로부터 모양을 갖추어서 '+'방향으로 핵심을 구하는 작업이요, 각(刻)은 정 반대로 핵심이 있는 것을 새겨 냄으로써 '-'의 방향에서 모양을 갖추게 하는 작업입니다. 이 때, 조와 각이 눈에 안 보이는 공간에서 서로 엇갈리는 공통점을 생각해 보십쇼. 이것을 우리는 조화점(調和點)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노라른스키 교수는 바로 전자 회로의 '+'방향과 허력 에너지외 '-'방향을 회전시켜 엇갈리는 조화의 소멸(消滅)을 강조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전자를 좀먹는 허력 에너지가 새로운 우주 에너지로서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민수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럴 듯한 감동에 사로잡혔다. 허력 에너지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성하룡의 편지 내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심하시오. 우리는 이론면에서보다 실험면에서 더 일찌기 허력 에너지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틈이 나면 금강산에 와서 구경해 보면 우리의 허력 에너지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행간마다에서 풍기는 기백은 그의 연구가 결코 노라른스키에 뒤벌어졌다거나 자신이 없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보부 과학과원 김민수는 그럼 그렇겠지 하는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허력 에너지의 완성
 
사실이지, 성하룡은 그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골똘한 보람이 있어 요즘 허력 에너지의 초보적인 발사장치를 완성했던 참이다.
"당신이 아니고선 이 연구에 매듭을 지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장한 일을 한 겁니다. 한국의 과학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이제 세계에 자랑할수 있게 된 거요."
식물 자력선 연구소장 김철수 박사는 시사(試射) 실험이 끝날 때까지 성하룡을 격려했다.
EMB000005e064cd시사 실험은 금강산의 호젓한 골짜기를 골라서 연구소의 관계자들만 참석한 가운데 베풀어졌다.
발사 장치는 마치 둥근 탄창(彈倉)에 탄알을 가득 쟁인 기관포와 비슷했고 또한 레이저 광선의 발사 장치와도 비슷했다.
다만 다른 점은 발사기의 꼬리에 기다란 코드가 달려 있어 허력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자장(磁場)을 전화(電化)시키는 장치이다.
허력 에너지는 분명히 레이저 광선과 같은 특수 광선에 싣고 발사되었다. 전자파는 전리층에서 반사되지만, 성하룡의 특수 에너지는 그대로 전리층을 뚫고 우주의 가없는 곳까지 돌진할 수 있는 것이 특색이다.
첫번째 실험에서 성하룡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거뒀다.
기록계에 나타난 계수는 발사 장치의 모든 기능이 정상적임을 나타냈다.
"됐어! 이젠 우리 연구소가 세계에 둘도 없는 소멸(消滅)장치를 발명한 셈이야. 권일송(權一松) 박사가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성하룡은 젊은 과학원 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감상어린 목소리였다. 자고로 위대한 천재는 큰 발명이나 발견을 이룩하고 나면 웬일인지 저절로 고독감에 빠지게 마련이다.
첫날의 실험 대상은 화성이다. 레이저 광선에 실은 허력 에너지는 서로 펄스가 다르기 때문에 반사해 오는 양상도 또한 다르다.
화성에 다다른 허력 에너지는 일부가 소멸되고 얼마 후부터 레이저 광선만이 되돌아 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전자의 충돌이 있었을 게다. 허력 에너지가 소화된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젊은 연구원들은 더위도 잊고 구슬땀을 손등으로 씻어 내면서 발사 장치를 조정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대성공이오. 오늘의 실험 결과를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도록. 그렇지 않아도 외국의 과학간 첩들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혹시 냄새를 맡으면 또 귀찮을 일이 생길 테니까……."
김철수 박사는 소원들에게 함구령(緘口令)을 내렸다.
두 번째 실험은 그 날부터 달포가 지난 초가을에 진행됐다. 벌써 따사로운 햇볕이 살갗에 부드럽게 엉펴 가끔 진땀을 맺게 하는 계절이다.
성하룡은 며칠 동안 잠을 한 숨도 이루지 못하고 기계 장치의 정밀도를 조정해 왔다.
"전원(電源)을 넣어요."
성하룡이 한 손을 번쩍 들고 신호를 했다.
전원이 넣어지자 발사 장치 람다호는 쉽하는 소리와 함께 발동끓기 시작했다.
실험 대상은 일본의 카파 B9 호와 한국의 기상 위성 소나기 호였다. 이 두 인공 위성은 궤도를 돌면서 금강산 상공을 여전히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우주 기지와 수원의 송수신소로부터 시시각각으로 텔레타이프 연락이 들어오고 있다. 그 때마다 두 위성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이다.
"하오 3시 25분, 북위 40도 1분, 동경 128도 3분의 신의주(신의주)로부터 적도면에 대하여 80도 간도르 소나기 6호가 금강산을 420km 높이로 통과한다.
텔레타이프의 톡탁거리는 건반(鍵盤)이 거센 숨소리를 내며 글자를 찍어 낸다.
"발사 준비!"
성하룡이 외친다.
"준비 완료!"
이비 대답이 들어왔다.
"발사!"
성하룡은 두 눈으로 뚫어지게 서북쪽 하늘을 노리면서 몸을 구부리고 기관포를 쏘다시피 발사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거기에는 로케트 실험 때와 같은 소란함이 없었다. 폭발도 폭음소리도 있을 리가 없다. 실험의 장면은 극히 조용하지만 픽픽 되돌아 오는 신호 소리에 계기판의 바늘이 바르르 떨리면서 쉴새없이 흔들리고 있다.
몇 초가 지났을까. 텔레타이프에서 찍혀 나온 전문이 김철수 박사의 손으로 옳겨졌다.
"소나기 6호가 그 동안 보내오던 송신이 별안간 중단됐음. 기기 고장인 듯."
수원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전문은 짤막했으나 김철수 박사는 속으로 웃음을 죽이며 심각한 낯빛을 지었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이처럼 정확하게 전자(電子)를 좀먹는 기계가 있을 줄 몰랐다. 이제 살인 광선과 마찬가지로 전파 파괴 장치가 나타날 게 아니냐. 놀라운 일이 아니고 뭐냐.'
저만큼에서 성하룡은 도깨비에 홀린 사람처럼 넋을 잃고 발사 장치의 손잡이를 힘껏 쥐고 있었다.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양이 더욱 안타깝게 보인다.
10분이 흘러갔다. 그들에게는 1년의 세월보다도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성 국장, 이것을 읽어 보시오."
김철수 박사는 전문을 성하룡에게로 돌렸다. 성하룡은 아무 말 없이 멀거니 전문을 들여다 볼 따름이었다.
쓰다 달다하는 말이 없을 정도로 그는 자기의 과학적 승리를 믿고 있던 참이다.
또 한 장의 다른 전보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제주도에서였다.
"소나기 6호는 동해 해상에서 자제(自制) 능력을 상실했음. 지금 리모트 콘트롤로 작업을 복구시키는 중이나 완전한 기능 회복에는 시간이 걸릴 것임."
이 전문을 손에 들은 성하룡은 담배를 꺼내 물고 한없이 푸른 물이 든 듯한 맑은 하늘을 눈을 조리며 볼 따름이었다.
4시 50분에 시험 발사한 허력 에너지가 일본의 기상 위성 카파 B9호에 무슨 충격을 주었는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
허력 에너지는 일련의 실험 계획에 따라 그후 태풍에도 적용해 보았다.
태풍이 일면 저기압의 물방을이 모두 이온화되어 전기력을 지니게 된다. 성하룡 국장은 태풍의 기운을 꺾기 위해서 허력 에너지를 발사하여 이온을 죽이는 실험을 해 보았다.
이 실험은 한국대학교 문리대의 기상학과 실험실에서 작은 규모로 진행됐다. 보통 실험은 담배 연기와 같은 발연(發煙) 장치로 진행되지만, 이번 실험에는 특수 물감으로 물들인 수증기를 불어 넣어 전화(電化)시켜서 진행했다.
수증기가 몰아 붙이는 방향에 허력 에너지의 커텐, 그러니까 장막을 쳐서 이온화된 수증기의 우악스러운 기운을 꺾자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도 성하룡은 뜻대로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허력 에너지의 장막을 어떻게 해서 수십km에 걸친 넓은 범위에 펼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장차의 연구 과제로 남게 되었다.
허력 에너지가 더 많은 응용 분야를 발견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알려지게 됐다.
성하룡은 소련의 툰드라를 연구해서라도 하루 바삐 일을 완성시켜 보려던 지난 날의 생각이 어리석은 짓이었구나 하는 뉘우침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툰드라가 아니더라도 금강산의 약초 연구만으로도 거뜬히 허력 에너지를 완성시키지 않았는가!
성하룡은 모처럼 서울에 들러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지금 물리학에 새로운 이론을 도입한 세계적인 주인공인지를 가족들은 미처 모른 채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반길 따름이었다.
 
가고파 양의 실종
 
허력 에너지에 관한 연구 보고서는 한 벌이 정보부의 과학부 금고 속 깊숙이 보관되었다.
김민수가 그 금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유린 가고파 양은 그러한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 허력 에너지가 실제로 어떠한 성능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가고파 양의 거동을 미행하는 검은 그림자가 요즘 늘 뒤따랐다. 가고파 양은 까마득이 그런 사실을 눈치조차 못 채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보부에 출근할 뿐이었다.
호기심에 찬사람들의 눈에 가고파 양의 존재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첫째, 그녀는 처녀의 신분으로서 한남동 외인 주택에 홀로 살고 있지 않는가.
둘째로는 소련 여성으로서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정보부에 근무하고 있는 점.
셋째로는 최근 일본과 소련의 외교 관계가 긴장되어 한국이 두 나라의 스파이 소굴로 변하고 있는 사실도 곁들어 그녀의 존재를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이러한 전후 관계를 김민수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고파 양의 싹싹한 인품을 믿고 함께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민수는 그러면서도 늘 가고파 양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혹 노스탈지어에 걸리지 않았나, 혹 고독을 견디어내지 못하지나 않나 하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가고파 양의 표정이 어두워 보이면 저도 모르게 민수의 마음도 꺼림칙해지고 그녀의 낯빛이 밝으면 괜히 마음이 놓이는 요즈음이었다.
어느 맑게 개인 일요일에 그는 모처럼 바다 구경을 하기로 정하고 가고파 양을 꾀었다.
"참말이죠. 함께 가요.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가고파 양은 민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써 옷 걱정부터 시작했다. 유린 가고파 양은 이튿날 15층 건물의 서울역 3층에 자리잡은 구내 식당에 약속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짙은 하늘색의 맑은 빛깔의 블라우스에 밤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의 새하얀 프릴이 깃 언저리에서 그녀를 한결 돋보이게 했다.
"자동차로 가겠어요? 기차로 갈까?"
민수는 운동 모자를 젖혀 올리면서 물었다.
"도대체 어딜 가길래 행선지도 말하지 않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말을 안했던가. 인천으로 가서 모터 보트를 타고 덕적도(德積島)까지 해상 드라이브를 할려구요.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물결도 잔잔할 거요."
"좋아요. 해상 드라이브란 멋이 있어 보여."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내려갔다.
30톤짜리 모터 보트는 그런대로 최신식 설비를 갖춘 것이었다. 최대 시속이 40마일이나 나오는 쾌속정의 일종이다.
거기에는 운전사가 있어 두 사람은 굳이 운전할 필요가 없었다.
브르릉거리는 발동기 소리와 함께 부두를 떠난 모터 보트는 팔미도를 지나자 전속으로 섬 사이를 누비며 한달음에 덕적도에 도착했다.
두 젊은 남녀는 흔히 세상의 선남선녀가 하는 것처럼 모든 시름을 잊고 오직 자연 속에 몸을 맡긴 채 웃고 지껄이고 태양과 바닷바람에 온 몸을 쬐이며 하루를 즐겼다.
그날 밤, 아무 사고없이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왔다.
"바래다 드릴께."
"괜찮아요. 먼 데도 아닌데, 애인 행세를 해 볼 작정인가요?"
가고파 양이 장난스러운 눈초리로 반문하는 바람에 민수의 입은 천금처럼 무거워지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민수는 전날 밤의 일이 한없이 뉘우쳐졌다.
'끝내 바래다 줄 걸 잘못했어.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킨 셈이 아닌가.'
유린 가고파 양이 그날 밤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실종된 것이었다.
'도대체 대 서울의 한복판에서 어느 놈이 정보부원을 납치해 간단 말이야. 못난 놈 같으니……. '
민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올랐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그지 없었다. 목격자의 증언을 종합해 본 즉 가고파양 비슷한 짙은 하늘색의 블라우스를 입은 서양 여자를 가운데 자리에 앉힌 자동차가 한강의 고속 도로를 질주한 사실이 드러났다.
어떤 놈들일까? 경찰 보고는 그 검은 세단차의 운전사며 사내들이 서양인이 아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분명히 납치해 간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어느 나라 공작대원들일까?
 
일본에 잠입하라
 
민수의 머리 속을 스치는 질문은 한이 없었다.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옳지,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아니고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추적해 보자.'
민수는 난데없이 벌어진 가고파 양의 실종 사건을 기어이 해결하기로 작정했다.
3일 후, 민수의 모습은 모지(門司)로 가는 연락선의 갑판 위에서 볼 수 있었다. 민수가 깊은 생각에 잠겨 먼 산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갑판 한구석의 짐짝의 그늘에 몸을 감춘 청년이 매서운 눈초리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해탄의 검푸른 파도는 여전히 거칠었다. 김민수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바다는 젊다고 느끼면서 한없이 넓은 수평선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가고파 양의 정체는 무엇일까? 공작원은 아닌 듯 하지만 역시 노스탈지어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민수는 알쏭달쏭한 생각을 쫓으며 선실로 내려갔다.
층층대를 한 발자국씩 힘있게 딛으며 내려가는 민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괴한도 갑판 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연락선 위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는 무사히 모지(門司)항에 도착했다.
"뿌 부욱!"
우렁찬 고동소리를 넓은 항구에 울리면서 연락선이 부두에 닿자 성급하게 갑판 위에 올라와서 기다리던 선객들이 저마다의 짐을 들고 내리기 시작한다.
EMB000005e064ce민수도 웅성거리는 군중들에 끼어 가방을 들고 트랩을 내려갔다. 마중나온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는 곧장 택시를 몰고 정거장으로 향했다. 자동차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모지의 시가지는 일본의 서쪽 현관답게 높은 굴뚝들이 즐비하게 치솟아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모지 역에 이른 민수는 3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연락선의 도착시간과 도쿄(東京)로 떠나는 특급 열차의 출발 시간은 30분의 여유를 두고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민수를 쫓는 수상한 청년도 역시 정거장에 도착하여 멀찌감치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민수가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청년과 두 번이나 눈길이 맞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른척 하면서 한참 있다가 청년의 거동을 살펴보펴고 고개를 돌려 본즉 또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음, 무슨 일이 생겼구나. 놈이 나를 미행하거나 감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서울에서부터 쫓아 왔을 텐데, 일본의 공작원일까? 서울에 벌써 일본의 정보기관이 그물을 펴고 있단 말인가!'
민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시청앞 광장의 복작거리는 인파를 생각해 보았다.
겉으로 평화스러운 통행인들이 지하도를 오르내리고 있지만, 거미줄 모양으로 끈이 달린 특수 기관원의 눈초리가 새삼 긴장을 자아내고 있지 않는가.
더우기 요즘 일본과 소련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하다.
민수는 무딘 부저 소리에 상상의 날개를 접고 개찰구로 걸음을 옮겼다.
특급 열차는 아침 10시 정각에 모지역을 떠났다. 민수가 자리잡은 곳은 이동차간의 입구에 가까운 데였다.
앞뒤를 둘러 본즉 수상쩍은 청년도 저만큼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민수가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을 깨달았음인지 그 청년은 될 수 있는 대의 시선을 민수 쪽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열차가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은 산간을 한 달음에 달리고 해안선을 누비면서 도쿄에 도착한 것은 하오 4시 40분이었다.
도쿄는 민수에게 낯익은 도시이다. 전에 1년 동안 수리 통계 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민수는 도쿄역에 도착하자 조심스럽게 수상쩍은 청년의 뒤로 돌았다. 이번에는 그 청년의 뒤를 밟아 볼 작정이다. 청년은 선선한 표정으로 가방을 들더니 쏜살같이 플랫폼의 인파 속으로 몸을 감추어 버렸다. 짝눈의 청년이라는 인상이 민수의 머리 속에 못박혔다.
민수는 공중전화실을 찾아들어 주일 대표부의 임관식(林官植) 공보관을 불러냈다.
"나야, 민수다. 전화 연락받았지. 좀 귀찮은 일이 생겨서 일부러 연락선을 타고 기차로 도착했다. 어느 호텔로 가면 되겠나?"
"프린스 호텔이 좋지 않을까? 그쪽으로 예약을 해버렸는데……. 이쪽 일을 마치고 찾아 갈 테니 먼저 가 있게."
용건만을 짤막하게 말하고는 민수는 수화기를 놓고 넓은 광장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높직 높직한 건물들이 하오의 햇빛을 받고 서로 그림자를 꺾고 있었다.
프린스 호텔의 3동 312호실에 들은 김민수는 이내 전화기를 들어 대륙(大陸) 상사의 문일환 과장을 불렀다.
"그동안 별 일 없었나? 국민일보 일로 취재하러 왔는데 상의할 일이 있으니 프린스 호텔로 와 주게. 312호실이야."
"오케이, 당장에 갈께."
문일환의 걸걸한 목소리가 전화통에서 쌩쌩 울린다. 믿음직했다.
그는 정보부원이다. 3년 전부터 도쿄에 근무를 하고 있는 별동 대원인 것이다.
김민수는 담배를 피워 물고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산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넓은 벌판에 가없이 건물과 집만이 같려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는 그런대로 한 가지 거대찬 생명체를 이루고 숨가쁘게 호흡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도시의 인구란 최대 공약수(最大共約數)의 생명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반목하므로써 최대 공약수가 깨질 때, 도시는 허허벌판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스나 로마의 문명도 그래서 망했고 이조(李朝)의 질서도 그래서 무너지고 말았다.
30분 가량 되었을까,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문일환이 들어왔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때물이 가신 말쑥한 차림이었다.
"오래간만이야."
그는 민수의 손목을 붙잡고 두어 번 흔들면서 정다운 눈길로 얼굴을 들여다 본다.
"앉아라. 갑자기 귀찮은 일이 생겼어. 전에 소련에서 데려온 여자가 있었지. 그 여자가 서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에게 유괴당했단 말이야. 국내에서 꾀어 낼 놈이 있을 리 없구,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일본 놈들의 수작인 것만 같애. 급히 알아 봐 주게."
문일환은 버릇처럼 뒤통수를 한 번 긁고 나더니
"왜놈들의 수작이라. 어떤 선에서 그랬을까? 당장에 알아 봐야지."
대뜸 전화통을 들고 교환수에게 번호를 일러 주었다.
문 일환이 불러낸 상대는 교포 3세인 다찌가와 이사무(立川勇)였다. 다찌가와는 일본 자위대(自衛隊) 정보 기관의 소식통이다. 문 일환은 사건의 경위를 대충 설명하고나서 유린 가고파 양이 일본 어느 곳에 감금되고 있는지 알아 봐 달라고 부탁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임관식도 호텔로 찾아 왔다. 김민수가 임관식을 통해서 얻은 정보인즉 마침 도쿄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 학술 회의에 소련의 노라른스키 교수가 참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필코 무슨 관련이 있을 거야, 허력 에너지를 개발하려고 그가 몹시 서두르고 있지 않는가. 가고파 양이 허력 에너지의 비밀이라도 아는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이지."
민수는 혼자 쓴웃음을 뱉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수작을 비웃었다.
한편, 삼각지에서 졸지에 납치당한 가고파 양은 영문을 몰라 어쩔 줄을 몰랐다.
"무슨 사람들이 이래요. 어서 놔 주셔요."
가고파 양은 등뼈를 꼿꼿이 세우며 대들었으나 놈들은 막무가내였다.
"잠자코 있으면 된다. 우리는 다만 당신을 일본까지 호송하는 책임이 있을 뿐이니까. 통사정해도 소용이 없어. 거기 가면 책임자가 있으니 그 분에게 말하는 것이 제일이야."
그들은 일본인이면서도 소련 말이 유창했다. 극히 사무적으로 가고파 양을 다스렸다.
그녀는 세 놈에게 붙잡힌 채 꼼짝달싹 못하고 자동차로 수원까지 내려간 다음, 비행기편으로 곧 부산으로 옮겨져 다시 일본 땅으로 끌려갔다.
가고파 양은 정말로 영문을 몰랐다. 일본인들에게 끌려갈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놈들은 처음엔 제법 사나운 눈초리로 대하더니 비행기가 부산을 떠나자 별안간 태도를 바꿔 은근하기 짝이 없는 대우를 했다. 낯이 간지러울 정도로 마치 여왕을 모시는 것처럼 대했다.
EMB000005e064cf비행기는 하네다(羽田) 국제 공항을 피하고 다찌가와(立川) 비행장에 착륙했는데, 가고파 양은 거기가 어딘지 알 리가 없다. 아름다운 포로가 된 채로 그녀는 자동차에 실려 빌딩이 서 있는 거리를 빠져나와 호젓한 공원을 지나서 외딴 집에 이르렀다.
그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살림집은 아닌 듯, 뎅그렁한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그 동안 아무 사고도 없어 도리어 감사를 드립니다. 이젠 마음을 푹 놓고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키가 훤칠하게 큰 놈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일러 준다. 가고파 양은 어리둥절할 뿐, 악몽(惡夢)과도 같은 하루 사이의 변화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그들을 외면할 뿐이었다. 근 한 시간이 지나자 노크도 없이 불쑥 방안으로 들어온 서양인이 있었다.
"유린 가고파 양, 안녕하셔요. 얼마나 고생했소. 하바로프스크에서 한국인들에게 납치당했다지요. 이젠 안심하시오. 머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는 소련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듯 그쪽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까지 납치해 오는 것이오."
그녀는 생각할수록 치밀어 오르는 분함을 참지 못해 퉁명스럽게 따졌다.
"나는 소련 대사관 2등 서기관 블라비노프라는 사람이오. 당신이 허력 에너지의 비밀을 어느 정도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노라른스키 교수의 청이 있어 서울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것이오."
"뭐라구요? 허력 에너지? 난 몰라요? 날 서울로 돌려 보내 주세요.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데 당신네가 간섭할 건 없지 않아요."
"허허, 너무 단순한 생각이오. 가고파 양이 한국인에게 납치됐다면 우리로선 구해 낼 의무가 있는 것이오. 설사 납치되지 않았더라면 수속없이 출국한 당신을 본국으로 송환할 권리가 있는 것이오. 그대가 서울을 가고 싶어하는 까닭은 무엇이오?"
"듣기 싫어요.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인이었소.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면 그만이 아니겠어요. 그 노라른스키 교수를 만나게 해 주셔요. 속시원하게 일러줄 테니까."
"어쨋든 반가운 일이요. 오늘 밤에 이 곳으로 모셔올 테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
블라비노프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가고파 양을 가볍게 다스릴 뿐이었다.
"그럼 그 동안에 그대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어떵게 납치당했는지 경위를 듣겠습니다. 숨김없이 말해야 됩니다."
블라비노프는 따지려고 들었다.
가고파 양은 모든 일을 숨김없이 일려 주었다. 한국인들을 도망가게끔 한 일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 지금까지 한국의 정보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자못 딱딱한 소리로 그는 물었다.
그녀는 동북아과에 소련에 관한 자료를 정리해온 사실을 솔직히 대주었다. 노라른스키 교수의 학술 논문도 보았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해가 저물자 노라른스키 교수라는 뚱뚱보가 나타났다.
블라비노프와 입빠르게 한두 마디를 건네다가 가고파 양에게 인사를 청했다.
"당신이 허력 에너지에 관해서 혹 아는 게 있지 않나 싶어 만나 보고자 한 것이오. 나라를 위해서라도 나를 좀 도와 주시오."
가고파 양은 뭇 사람들이 자기를 무슨 거물인 것처럼 공손히 대하는 태도에 싫증을 느꼈다.
"아는 게 없어요. 교수께서도 아시다시피 나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교수님의 논문을 보기는 했으나 내용은 깜깜합니다. 서울에서 소문에 들은 얘기로선 한국의 학자가 허력 에너지 장치를 완성시켰다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완성시켰대요?"
노라른스키의 얼굴에는 갑자기 심각한 그림자가 졌다. 그는 팔장을 끼고 한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동양인들의 특운한 공간 의식에는 따라갈 수는 없는가 보다. 식물성에 전자력을 부여하는 그 대목만 알아 내면 결코 뒤떨어지지 않겠는데…….'
노라른스키는 머리 속에서 복잡한 수식을 더듬어 보았다. 풀리지 않는 수식이었다. 가고파 양은 그러한 교수의 옆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김민수는 프린스 호텔에 묵으면서 문일환의 보고를 받았다.
교포 3세 다찌가와가 일본 자위대 정보 기관에서 입수한 소식은 소련 여인을 태운 비행기가 다찌가와 비행장에 내렸다는 것이다. 비행장에서 어디로 갔을까?
김민수는 도쿄의 소련 대사관 주변을 더듬어 보았다.
거기서도 새로운 여직원이나 낯설은 젊은 여성이 기숙하고 있는 사실은 없는 것으로 확인이 됐다.
"옳지, 노라른스키 교수를 찾아 보아야겠다. 문 과장도 노라른스키의 주변을 알아봐 주게."
그들 젊은 한국 정보부원은 1천만 명이 넘는 도쿄의 인구 속에서 한 사람의 여성을 찾아 내야만 했다.
김민수는 문화 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학술회의장으로 찾아 갔다. 그는 해외에 나오면 의례 국민일보 과학부 기자였다. 접수처에서 신원을 밝힌 즉시 민수는 보도반석이라고 표시된 자리에 안내되었다. 일본인 기자뿐 아니라 서양인 기자들도 대여섯 자리를 잡고 회의를 방청하고 있었다.
민수는 3일째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회의는 일정(日程)에 따라 하오 4시에 파했다.
그는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는 학자들 가운데서 노라른스키 교수를 찾아내는 데 한참 걸렸다. 노라른스키는 뚱뚱한 몸집에 돋보기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차라리 인터뷰하면서 떠보는 게 어떨까?"
문 일환이 성급하게 굴었다.
"저 자가 무슨 상관이 있어. 요는 가고파 양의 소재만 알아 내면 그만 아니야. 미행하는 게 상수지."
두 사람은 노라른스키의 뒤를 밟았다.
그는 택시를 잡아 탄다. 그들도 놓칠세라 택시를 잡아타고 뒤를 쫓는다.
"앞의 푸른색 택시를 꼭 따라 가요."
일본인 운전사는 고개를 꾸벅하더니 알았다는 듯 핸들을 크게 돌리며 앞차를 따라간다. 차가 고속 도로로 빠져 나온 뒤부터 두 대의 택시는 마치 편대 비행하는 제트기 모양으로 꼬리를 물고 쏜살같이 질주한다. 노라른스키의 차는 교외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는 공원을 가로질러서 언덕배기에 있는 2층집으로 향하고 있다.
뒷차는 속력을 내리고선 멀찍이 따라 갈 따름이다. 노라른스키의 차가 그 집의 대문 앞에서 멎었다. 대문은 단단한 철문이었다.
노라른스키가 차에서 내려서 부저를 누른다. 한참 후에 안뜰에서 사내가 나타나더니 철문을 열어 준다.
"앗, 저놈이! 짝눈의 청년이다."
김민수는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여기서 내리자."
민수는 택시를 돌려 보내고 문일환과 함께 나무 그늘에 잽싸게 몸을 감추었다. 두 청년은 노라른스키가 현관으로 들어가 버리자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벌써 어두컴컴해진 밤기운을 타고 어디선가 귀뚜라미의 귀뚤귀뚤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짝눈이가 노라른스키 박사를 맞아들인 현관문은 굳게 닫힌 채 둥근 외등만 동그마니 밝다.
"기다려 봐야겠지. 무턱대고 집 안으로 들어가다간 일을 망칠 우려가 있겠다."
민수는 문일환을 보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문일환은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 말이 없었다. 시간은 아랑곳없이 흐를 뿐. 담너머 2층 집을 우두커니 지켜보며 기다린다는 것은 확실히 고역이다.
그러나 만사는 막연한 기다림 속에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이 켠으로 흘러오는 동안에 접질러서 비틀거리듯 으례 새로운 사건이 생겨난다.
두 사람은 풀서리 뒤에 몸을 감춘 채 몇 번이나 하품을 해가며 말없이 기다렸다.
"이럴 게 아니라 저기 있는 느릅나무 위에 올라가서 안쪽을 살펴봐야겠어요."
문일환이 문득 말을 던졌다.
"조심해서 살펴봐요.이 편이 공격을 해야 되니 더욱 조심해야."
"염려마세요. 잠깐 올라가 보지요."
문일환은 서풋서풋 저쪽으로 걸음을 옮겨 느릅나무 밑에 이르렀다. 그는 고개를 추키고 나무를 둘러보더니 서부렁섭적 뛰어올라 나무 가지를 붙잡고 날래게 기어 올라간다.
두 길, 세 길까지 올라선 문 일환은 안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망원경을 꺼내들고 하염없이 2층집을 들여다 본다.
망원경은 적외선 장치가 되어 있어 어둠 속에서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응접실의 창 너머로 노라른스키 박사의 얼굴이 마주 보이고 사진에서 익힌 가고파 양의 옆 얼굴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민수의 짐작이 들어 맞았구나.'
가고파 양은 무엇인가 항변하고 있는 모양이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문일환은 원숭인 못지 않는 재빠른 솜씨로 느릅나무를 술술 내려와서 훌쩍 뛰어 내렸다.
"여보게, 가고파 양이 응접실에서 손짓을 해가며 무엇인지 항변하고 있던데……."
"음, 제대로 들어맞았군. 무슨 수를 쓴다?"
민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길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은다.
두 청년은 잽싸게 풀섶 뒤로 몸을 사리고 지켜 보았다.
젊은 아베크가 정답게 손길을 잡고 속삭이며 가로등 밑을 지나간다.
민수는 어둠 속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뜰 안으로 넘어 들어가 볼까요?"
"개가 있을는지도 모르잖아. 좀더 생각해 보자."
민수는 늦장을 부리면서도 속으로 집히는 것이 있었다.
저처럼 노라른스키가 가고파 양을 붙들고 말을 시키는 까닭은 분명히 노라른스키가 식물 자력선에 탐이 나서 무엇이든 캐묻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고파 양이 성하룡의 연구 전체를 알 리가 없다. 그렇다면 노라른스키는 가고파 양을 설득시켜 장차 식물 자력선에 관한 전보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할 게 아닌가.
민수는 머리 속에서 더욱 생각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아마도 놈들은 가고파 양을 이쪽에서 뺏어가도록 만들 것이다. 뺏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서는 놈들의 계획에 빗나간다. 짝눈이가 부산에서부터 미행해 온 것으로 보아 놈들은 이쪽의 움직임을 미리 계산에 넣고 있는 것이다.
김민수는 여기까지 추리(推理)를 하고 나서 빙그레 웃었다. 놈들의 수작이 빤히 들여다 보이기 때문이다.
"좀 더 기다려 보자.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거야."
민수의 말꼬리를 문일환은 물고듣지 않았다. 티격태격할 장소가 아닌 까닭에.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검은색 세단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양관(洋館)의 정문 앞에 서지 않는가.
운전사가 짧게 클래션을 울리고선 기다린다.
양관의 창을 밝히던 전등이 2층 쪽에서부터 차례차례로 꺼지며 응접실만이 환하게 남더니 현관문을 열고 블라비노프 2등 서기관이 빠져 나왔다.
노라른스키가 잇달아 배를 문지르며 나타나고 짝눈이도 뒤를 따른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철문을 열고 차례대로 세단차에 올랐다.
민수와 문일환은 숨을 죽이고 그들의 동작을 지켜 볼 따름이었다.
세단은 느린 시동(Slow Start)으로 굴러가기 시작한지 한참만에 속도를 올리며 사라져 버렸다.
민수는 말없이 문일환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문일환은 어깨를 으쓱 추켜보였다.
"들어가 볼까?"
"먼저 현관 기둥에 돌을 던져보지요."
문일환은 길 섶에서 돌맹이를 주워 힘껏 던졌다.
철커덩! 소리가 나자마자 어디 숨어 있었는지 컹컹거리며 개가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다시 숨을 죽이고 뜰 안의 인기척을 살폈다. 개가 우짖는데도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없다.
민수는 바지 주머니에서 마취총을 꺼내들고 문일환에게 눈짓을 했다. 들어가 보자는 것이다.
EMB000005e064d0철문을 열고 발을 내려딛자, 어둠속에서 세퍼트 세 마리가 내달아 덤벼든다.
민수는 단숨에 총을 꼬나 쏘았다. 세 마리의 세퍼트는 마취총알을 맞는 족족 끽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차례차례 쓰러지고 만다.
두 정보부원은 현관까지 줄달음쳐서 문일환은 응접실 창밖으로 돌고 김민수는 발길로 현관문을 열어제쳤다.
역시 인기척이 없다. 민수는 총을 겨누면서 조심스레 한 걸음씩 복도로 들어섰다. 문일환이 뒤를 따른다.
민수는 응접실 문을 우악스럽게 박차고 빗겨 섰다.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잽싸게 눈으로 더듬어 본즉 가고파 양이 손발을 묶인 채 손수건으로 재갈을 먹히고 소파 위에서 뒹굴고 있지 않은가!
민수는 쏜살같이 달려가서
"미스 가고파! 이게 웬 일이오?"
하며, 나지막이 외쳤다.
문일환은 문 어귀에 서서 빈틈없이 사리며 둘레를 경계하고 있다.
민수는 익은 솜씨로 그녀의 입막음부터 풀어 주었다.
"민수씨! 오, 이젠 살았는가 봐요."
가고파 양의 두 눈에는 이내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다.
 
"바래다 주겠대도 고집부리더니 고생만 하지 않았어."
"설마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요."
가고파 양은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자기 집에서 눈을 흘기며 민수에게 대들었다.
민수가 추리했던 그대로 노라른스키는 가고파 양을 이용해서 식물 자력선의 비밀을 캐내려는 계획이었다.
가고파 양은 결코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조국의 독립을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던 그녀의 할아버지의 피가 너무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와는 인연이 너무 깊어진 것 같애. 차라리 결혼을 하면 어떨까?"
정보부의 과학과장 강 윤식은 하루는 민수와 잡담 끝에 이렇게 권했다.
"과장님도 그러한 생각이었나요. 글쎄 생각은 여러 번 해봤지만 외국 여성이어서……."
"외국 여성이라니. 당당한 백의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그게 문제가 되나. 사내답게 프로포즈를 해보지 않고."
“글쎄올시다. 두고 봐야지요."
민수는 말꼬리를 흘려버렸다. 직업상 계교에만 살아 오던 민수였고 보기에 따라서는 일류 배우 못지 않은 곡절을 겪어 왔다. 언제까지 인생을 중간에 걸뜬 채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임을 민수도 알고는 있다.
그러나 친구로서의 우애(友愛)와 결혼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늘 앞선다.
어느 날 저녁, 민수는 가고파 양과 나란히 남산의 길을 걸으면서 그러한 문제를 끄집어 냈다.
"제 생각 같아서는 벗사랑과 결혼을 따로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애요. 원시적인 뜻에서 결혼해서 가족을 기르며 보호하는 정신은 찬성할 수 있겠으나, 시방같이 하루 하루가 문명과 기계화의 시대로 질주하는 세상에서는 부부가 원시적으로 얽매이면 낙오하기 마련일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벗으로 살아나가는 편이 차라리 속도 시대에 걸맞는 방법일 게요. 저는 결혼을 동양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고파 양이 떨어지게 속을 내비쳤다.
민수는 그녀에 비하면 아직도 세습적(世襲的)인 고루한 냄새가 몸에서 풍기는 편이다.
"벗사랑? 평생을 한결같이 벗으로 끝낼 수 있다면야 오죽이나 좋겠소. 그런데 사람은 나이를 먹게 되고 또한 다음 세대를 통솔할 책임이 있으니 집 안에서 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받는 자가 구별되어야 할 게요."
"명령이라구요? 사내들은 명령의 뜻을 아직도 잘 모르는가 봐요. 민수 씨가 말하는 명령이란 호통을 친다는 뜻이겠죠. 할아버지도 가끔 그랬으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명령이란 합의를 본 결의 사항에 지나지 않잖아요. 명령을 받는 사람이 납득을 해야지 그 명령도 실천할 수 있을 게 아니예요. 사내들이 간혹 자기는 빼놓고 두 다리를 쭉 뻗어버린 채 명령만 하는 것은 보기에 민망해요. 미래는 다리를 뻗고 살려는 사람을 게으름뱅이로 규정하고 말 거예요."
가고파 양은 발부리로 길 위의 잔돌을 쿡쿡 차면서 거침없이 말했다.
박물관의 넓은 뜰에 들어서면서 민수는 걸음을 멈추고 가고파 양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고파 양은 오히려 선선한 눈초리로 민수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 본다.
"사랑한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못하겠구. 우리들 결혼해 볼까?"
민수는 남의 일처럼 조금 뜬 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어요. 생각해 보겠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결혼이 적격한지 않은지 전자 계산기에 물어봐야지요. 뚜렷한 답이 나올 거예요."
"전자 계산기? 별로 신통하지 못한 아이디어가 아닐까?"
그러나 이튿날 가고파 양이 결혼 상담소에서 얻은 전자 계산기의 답은 두 사람의 결혼이 80% 적합하다는 결론이었다.
'나머지 20%는 무엇일까?'
민수는 문득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 만큼 노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준 게지요. 도시 100% 적합하다는 답은 있을 수 없다던데요."
가고파 양은 민수의 두 손목을 꼭 쥐며 일러 주었다.
민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가고파 양의 허리를 껴안고 어색하게 얼굴을 그녀의 목 언저리에 파묻었다.
조국을 위해서 그다지도 용감하게 여러 차례 사선을 넘어온 사내였지만 첫사랑에는 애들보다 약했다.
가고파 양과 김민수가 화촉을 밝힌 것은 그 날로부터 석 달 뒤의 일. 식물 자력선 연구소장이자 친형인 김철수 박사와 성하룡이 함께 와서 축복해 준 것은 물론이다.
 
전쟁의 먹구름
 
이 무렵, 일본과 소련은 사할린(樺太)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외교적으로 한창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판이다.
일본은 노일전쟁(1904~5)으로 제정 러시아로부터 사할린의 남쪽 반을 빼앗아 유전과 탄광을 개발해 오다가 2차대전으로 당하자 다시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은 거기에 심어놓은 권익을 되찾으려고 끈덕지게 소련에게 압력을 가해 왔다.
소련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일본의 전자 공업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 자칫하면 꿀리기 쉬운 입장이었다.
사할린을 중립화시켜 아이누 인들에게 넘겨 주자는 일본의 주장을 소련측이 헛들을 수 없는 것이, 사할린은 본디 아이누 족의 땅인 것을 소련인들이 원주민을 몰아내고 점령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여론은 일본의 그러한 주장을 뒤에서 제 3 국이 조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측은 소수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조상의 땅을 돌려 주는 수 밖에 없다고 우겨댄다.
그러나 서로 주장을 내세울 뿐이지 감정적으로 충돌할 환경은 못됐다.
소련은 강력한 핵무기를 지니고 있을 뿐더러 어느 때고 우주에서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반면에 일본은 대륙간 탄도탄으로 소련을 전멸시킬 수 있는 세균 무기를 비밀리에 개발해 놓고 있다.
만일, 지역적인 충돌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유엔은 이를 제재할 능력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까닭에 강대국은 서로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는 협정 하나로서 스스로의 발을 묶어 놓고 있을 뿐, 세계 평화에 대한 제재의 보장을 바랄 수 없는 입장이다.
이러한 국제적인 긴장 속에서 공교로이 성하룡의 허력 에너지를 개발하고 있는 사실은 소련이나 일본으로서도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온갖 자동 계기나 전자 공업의 산물이 허력 에너지 발사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은 이미 실험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는 터이다.
"발사 장치를 만들어 놓으니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졌으면 하는 생각마저 든다니까.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는 모양이야."
성하룡은 가끔 조수들과 이런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게 아니지요. 허력 에너지를 막아 내는 발사 장치를 누군가는 반드시 개발할 게요. 그럴 때, 이것을 다시 방비하는 장치를 개발해야 겠지요."
조수 중에는 이렇게 앞일을 내다보는 젊은 과학인도 있다.
금강산의 외딴 골짜기에서 연구 생활만 계속하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극을 창조해 내는 정신은 과학한국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랑할 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김철수 박사에게 호출이 내렸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나같은 늙다리도 필요한 모양이지."
김 박사는 비시시 웃어보이며 서울로 떠났다.
일주일 후에 김 박사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연구소로 돌아오자 성하룡 부장을 불렀다.
"극비에 속하는 정보야. 일본과 소련이 멀지 않아 무력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두 나라가 싸우면 우리 나라에도 반드시 피해가 있을 건 뻔하지. 그래서,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무력 충돌을 사전에 방지할 문제를 검토 중이라네."
김 박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얘기를 이어갔다.
"허력 에너지 장치를 얼마나 발동시킬 수 있나 묻지 않는가. 비상시에는 허력 장치로서 분쟁에 개입하겠다는 계획인 것 같애. 당장에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을 알아봐 주게."
"그렇지 않아도 그러한 기회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싸움이 터지면 발벗고 나서 보겠어요."
성하룡은 가슴을 펴고 두손으로 문지르면서 장담했다.
순식간에 번쩍이는 눈빛은 마치 개구리를 노리는 뱀의 그것처럼 독기가 어려 있었다.
이런 대화가 오간 3일 후에 난데 없이 라디오 방송은 중대 발표를 보도했다.
"오늘 새벽 3시에 동해안을 초계 중인 일본 구축함과 소련 순양함이 정면 충돌하여 일본 구축함이 침몰했습니다. 일본 해군의 승무원들은 잽싸게 구명 보트로 옳겨 타고 소련의 구조 작업을 거절했답니다. 일본의 함대는 급거 현장에 출동 중이며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덤덤이 듣고 있던 성하룡은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구나 생각하면서 가슴에 용솟음피는 뜨거운 것을 느꼈다.
일본의 극동함대 총사령관 오까사끼(岡崎) 제독은 기함 이즈모(出雲) 호의 작전실에 앉아 초조한 기색으로 팔목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계의 바늘은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함 1척, 항공모함 1척, 순양함 3척, 구축함 4척 그리고 잠수함 8척으로 편성된 함대는 현해탄의 검푸른 밤의 파도를 세차게 헤치면서 전진하고 있다. 사세호(佐世保) 군항을 황급히 떠나 온 이들은 고조(高潮)된 긴장 속에서 사고현장으로 직행하고 있는 참이다. 보고된 현장은 울릉도의 동북쪽 북위 39도 4분, 동경 131도 5분, 수심 1천 5백 m의 해역이다.
일본 해군장병들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한바탕 싸워 볼 작정이었다. 굳은 표정에서 그들의 전의(戰意)를 넉넉히 엿볼 수가 있었다.
북상할수록 안개가 짙었다. 울릉도 근처의 바다는 한국에서도 가장 안개가 많은 곳이다.
"참모장, 전투 준비는?"
오까사끼 제독은 짤막하게 물었다.
"완료된지 5분이 지났습니다. 유사시에 블라디보스톡을 넉 아웃시킬 중거리 유도탄을 가동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참모장은 군함마다에서 보고되어 붉은 불이 켜진 전기 작전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좋아. 정치참모는 해군본부의 움직임을 문의해 주게."
총사령관은 이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한쪽 다리를 절면서 브리지로 올라 갔다.
함대가 충돌 현장에 다다른 것은 사고가 일어난지 꼭 세 시간 후였다. 바다는 어슴프레 밝아 왔지만 뿌연 안개는 수평선을 가리고 있었다.
먼저 헬리콥터가 붕붕거리며 항공모함으로 부상자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구조원들의 손으로 침몰한 구축함의 나리세 함장이 수용되어 기함으로 이송되어 왔다.
"죄송합니다. 본인의 부주의로 귀중한 구축함을 가라앉히고 말았으니 함대사령관을 뵐 낯이 없습니다."
나리세 대령은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총사령관 앞에서 일단 사과를 했다.
"성패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요. 충돌 현황을 듣고 싶소."
오까사끼 총사령관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대했다.
나리세 해군 대령이 설명한 사고 현황은 이러하다.
일본 구축함은 예정 항로에 따라 동해를 초계 중, 전날 저녁부터 짙은 안개를 만나게 됐다. 레이더는 곧잘 가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위 39도 4분, 동경 131도 5분의 해역에 이르자, 별안간 시계(視界) 1 마일 해상에 불쑥 검은 빛 순양함이 나타나지 않는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레이더망이 왜 이것을 미리 포착하지 못했을까?
얼떨결에 구축함은 귀청이 찢어지도록 날카로운 기적(汽笛)을 연발하면서 신호를 했다.
군함의 속도를 급히 낮추고 대피태세(待避態勢)를 갖추었다. 상대방의 국적을 확인했을 적에는 순양함은 이미 코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위기일발(危機一髮)! 그러나 소련 순양함도 뜻밖의 일을 당한 듯 속력을 낮추며 충돌을 피하려고 함수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에서의 1마일이란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였다. 여태까지 질주해 오던 관성(慣性)을 달랠 길 없이 소련군함은 내쳤다 일본 구축함의 교리를 들이받고 말았다.
우르릉 쿵 쾅!
삽시간에 일어난 불상사였다. 함미 쪽에서 두동강이가 난 군함은 기울기 시작했다. 다행이 불이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아 열댓 명의 부상자를 내었을 뿐, 전원이 구명정으로 옮길 수 있었다.
충돌은 전혀 우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두 나라의 국민들은 신문 보도만 읽고 분개했다. 사고는 서로의 자료를 국제해난(海難)재판소에 제출하여 거기서 판가름해야만 된다. 그럼에도 신문은 저마다 추측 기사와 해설을 실어 자기네 쪽이 정당한 것처럼 떠들었다.
소련의 순양함은 함수에 약간 금이 갔을 뿐 평소와 마찬가지로 항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듣기에 뻔뻔스러운 것 같았다.
순양함은 순양함대로 항해의 안전을 보장할 길이 없어 한국 정부의 양해를 얻어 가까운 원산항으로 기항했다.
군함이나 상선이 해상에서 위급할 때, 국제법상 가까운 항구에 기항하는 일을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국의 근해에서 일어난 충돌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국 정부도 공연한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별 도리가 없게 됐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일본 해군은 극동함대를 계속 블라디보스톡 앞바다까지 초계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또 무슨 꼬투리만 잡는 날에는 영영 전화의 불꽃이 튀길 판이었다.
소련 해군은 그들대로 잠수함과 항공모함을 원산 앞바다로 보내어 수리 중에 있는 순양함을 보호할 양 닻을 내리지 않은 채로 근해를 유예(遊曳) 중이다.
일본의 극동함대가 먼저 대거 출동한 사실은 블라디보스톡의 소련 함대를 자극한 것이다.
"만일 일본 해군이 발포하면 서슴없이 응전하라. 이 해역에서의 분쟁이 당장에 전면 전쟁으로 발전할 확률은 적다."
소련 함대사령관 역시 에누리 없는 명령을 내린지 오래다.
국제 긴장은 으례 썰물과 밀물이 번갈아 들듯이 오르내리지는 않는다. 한 번 달아오르면 여간해서 식지 않는 법.
일본 외무성은 모스크바에서 주소대사로 하여금 이 건을 정식으로 정부에 항의케 하고 소련 측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소련은 며칠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비로소 각서를 일본측에 수교했다.
“……역시, 국제해난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응당한 보상을 요구하거나 물거나 해야겠다. 지금 형편으로는 우발 사건을 유감으로 여길 뿐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여론은 발칵 뒤집혔다.
"도의적인 책임마저 지지 않으려는 소련 정부의 처사는 괘씸하다. 일본의 극동함대는 뭘 우물쭈물하고 있느냐. 본보기로 소련 군함을 격침(擊沈)시켜라."
왁자하게 들먹거리는 여론을 정부도 당장에 가라 앉히질 못했다.
미국 정부가 워싱톤에서 두 나라 대사를 통해서 조정안을 내놓고 일을 마무리려고 애썼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소련은 미국 정부가 나서서 입을 내밀 처지가 못된다고 한 마디로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그들의 태평양 함대까지 만들어 바다로 진출해 오는 일은 일본이나 미국으로서는 못 마땅한 일이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의 이동(以東)에서 군사 기지를 철수한 뒤, 소련은 슬그머니 인도양에 해군 기지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들은 이제 태평양 특히 서태평양에서 활개를 치려는 판이다.
국제해난재판소의 송사(頌辭)는 지지부진 날짜만 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급한 일본 해군이다. 고의(故意)인지 우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제 2의 충돌 사건이 동해에서 또 생겼다.
이번에는 소련측 구축함이 폭발하면서 침몰했다. 사상자도 30명을 헤아렸다.
"망할 놈들! 일분러 우리 군함을 들이받다니 말이 되느냐 말이다. 일본 군함을 발견하는 대로 발포해도 무방하다."
악에 바친 발포 명령이 내리고 말았다.
동해는 졸지에 전쟁터로 바뀌고 말았다. 서로 상대방을 발견하려고 그림자를 찾아서 정찰기가 하늘 높이 비행구름을 그으면서 날으고 있다.
 
출동 명령
 
"동해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하면 우리의 어족보호상 불가피 개입해야만 한다. 정보망을 넓혀서 쌍방의 동태를 주시하도록."
김이찬 참모총장은 정보부에 또 한번 지시를 내렸다.
유린 가고파 양이 한껏 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그녀는 소련 방송과 비밀 지령을 해독하는 작업에 정식으로 참가했다.
소련 함대의 작전 지령이 쏟아져 나왔다. 현해탄을 뚫고 일부 함대는 태평양으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확대는 불가피한 거야. 이거 야단났는데."
직접 담당은 아니었으나 김민수도 몸이 달았다.
입수된 지령에 의하면 일본 해군은 세 갈래로 제 1 전대는 직접 블라디보스톡을 치고, 제 2 전대는 현해탄에 포진하고, 제 3 전대가 유격 함대로 주력을 이루리라는 것이다.
전운(戰雲)은 날이 갈수록 짙어지기만 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다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고 대책을 토의했다.
"쌍방의 접전으로 한국 어선이나 영토에 직접으로 피해가 생길 때, 그래도 우리는 중립을 지켜야 되는가 또는 무력 개입을 해야 옳은가?"
해군과 공군 측에서 먼저 이러한 질문을 내놓았다.
"보복을 해야 할 것으로 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군이 대마도를 점령하는 방책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육군 측에서도 강경론이 펼쳐졌다.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로선 만전의 태세를 갖추어 놓아야 할 것이다. 오늘 오후 5시를 기해서 전군이 응전 태세로 들어갈 수 있토록 조처하도록!"
김이찬 참모총장은 회의에 일단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선 따로 식물 자력선연구소의 김철수 박사와 성하룡 실장을 불러 놓고 정세를 설명해 주었다.
"지금 일본은 일본대로, 소련은 소련대로 제각기 한국의 중립을 요청해 왔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고려할 순 있으나 군사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가 직접 피해를 입었을 때. 가만히 앉아 있다면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무력하다고 비난할 것은 뻔하다. 그래서, 국군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전에 장치해 놓은 허력 에너지 장치를 동원할 생각이다.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염려 마십쇼. 허력 에너지는 본래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서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김철수 박사는 서슴없이 답변했다.
"성 실장의 견해는?"
참모총장은 잊지 않고 물었다.
"과학자로써 한 마디 말씀드리자면 피를 흘리는 충돌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본디 평화를 위해서 발전시켜온 것이지 결코 전쟁의 도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충돌이 생겨서 피해를 입을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나가서 허력 에너지 장치로 쌍방의 전쟁을 억제해 버려야 할 줄로 압니다."
"대단히 좋은 의견이오. 그러나 나라의 체면으로선 함부로 개입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어쩔든 에너지 발사를 총동원해 놓으시오. 당신의 솜씨를 보여 줄 날이 온 것 같소."
이러한 얘기가 오고 간 이틀만에 참모본부에 짤막한 전보가 날라왔다.
「일본의 제 3 전대와 남하 중의 소련 함대가 독도(獨島) 동쪽 30마일 해상에서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
는 소식이다.
"이젠 걷잡을 수 없는 일이 터지고 말았군!"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성하룡은 뜨거운 것이 가슴을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온 몸이 화끈화끈 달아 올라왔다.
3분도 채 못되어 참모본부로부터 호출 명령이 내렸다.
급히 출동할 준비를 갖추고 출두하라는 것이다.
성하룡은 1초가 늦을세라 옷을 갈아 입고 차를 남산 기슭에 있는 참모본부로 몰았다.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는 시민의 표정은 라디오 점포의 문전에 모여 모두 걱정스러운 빛으로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당장에 포항(浦港)으로 직행하시오. 거기서 대기 중인 순양함 북두칠성호를 타고 출동하시오. 작전 명령은 함장이 알고 있을 테니 잘 부탁하오."
김이찬은 성하룡의 손목을 붙잡고 힘주며 말했다. 그의 두 눈에는 말과는 반대로 차가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이기호 군은 어디로 배치했습니까?"
성하룡은 물었다.
"방금 김포 공항을 떠났을 거요. 그 쪽은 비행기에서 당신은 해상에서 한껏 일해 주시오."
성하룡의 가슴 깊이 감격의 샘은 포항에 도착할 때까지 마냥 넘쳐 흐르고만 있었다.
북두칠성호는 모든 엔진을 걸고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양함이 외항을 향해서 출발한 것은 오후 1시 5분 하늘은 맑게 개였으나 북서풍을 받은 물결은 흰 거품을 들쓰고 넘실거리고 있었다.
성하룡은 북두칠성호에 미리 장치해 둔 허력 에너지 발사장치를 점검(點檢)해 보았다.
둥근 벌집 모양의 커다란 발사기는 전기 회로를 순순이 받아 들인 채, 온 몸에 열을 올리면서 수 많은 계기판에서 바늘을 흔들이며 약동하고 있다.
"성 실장! 허력 에너지 발사에 관한 모든 지령을 본함에서 내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공군 쪽도 본함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점 참고삼아 알아두시오."
갓 마흔이 지났을까 말까 해 보이는 함장이 다가와서 일러 주었다.
"고맙습니다. 이쪽의 발사 준비는 다 돼 있습니다."
성하룡은 일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면서 대답했다.
벌써 은은한 포성이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단파 방송은 쌍방이 교전 중이라고 보도하고 있을 뿐 피해는 당장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발사 준비!"
임종구 함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레시버에서 쨍 울린다.
성하룡은 보조원들의 얼굴을 둘러 보았다. 서로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개만 끄떡여 보인다.
"동동북 각도는 33도. 발사!"
성하룡은 짜릿한 전율을 온 몸에 느끼면서 단추를 기운차게 눌렀다.
그리고선 계기판으로 눈을 돌렸다. 다시 눈길을 벌집 안테나로 옮긴즉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는 그 무엇이 거기에서 내뻗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지령은 공군에게도 내려졌다. 허력 에너지 편대가 2만 mEMB000005e064d1상공을 날으고 있는 중이다.
허력 에너지의 집중 발사를 가한지 3분, 4분, 5분만에 요란스러웠던 포성이 별안간 잠잠해졌다.
"이게 웬 일이야. 전자 장치가 움직이지 않는다!"
"빨리 전원(電源)을 체크해 봐!"
"전원에는 이상이 없소."
일본 해군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소리가 전파 수집기의 확징기를 통해 들어온다.
"기관장 어떻게 된 일이오? 군함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것 같소!"
소련 해군 쪽에서도 야단법석이다.
모든 전자 회로가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전함도 항공 모함도 움직이질 못한다.
두 나라 해군 장병들은 천지이변이나 다름이 없는 기적의 수수께끼를 풀어 낼 재주가 없었다.
"한국은 극동의 이 해역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드디어 허력 에너지를 발사했습니다. 허력 에너지는 모든 전자의 움직임을 좀먹어 버리는 전혀 새로운 에너지입니다. 소련 해군 장병 여러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이 위대한 비밀무기의 위력 앞에서는 모든 군사적 모험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총을 버리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를 찾으시오."
유린 가고파 양의 유창한 소련말 방송이 들려 왔다.
성하룡은 마음이 저절로 흐뭇해졌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몸부림치며 평화를 원했던 것처럼 한국은 이제 스스로의 평화를 실력으로 지킬 수 있는 허력 에너지를 개발하고 말았다.
"대 성공이오. 우리의 승리요."
잠잠해진 바다 위에서 함장은 성하룡을 힘껏 부둥켜 안았다.
성하룡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뜨거워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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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단편선
 
※ 기적의 세레나데 호
※ 이별
※ 서박사의 실험
※ 모래벌의 비밀
 
 
기적의 세레나데 호
 
영등포에서 지하철(地下鐵)을 내린 영웅은 마중나온 아저씨와 함께 광장을 건너 갔다.
우주관광연맹사에서 나왔다는 F씨가 벌써 차에 발동을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해라. 이분이 너를 케이프 케네디 우주 정거장까지 데리고 가서 안내하기로 된 F선생이다. 그럼 너무 수선떨지 말고 잘 다녀와!"
영웅이가 내민 손을 잡는둥 마는둥 F씨는 왼쪽 손에 들었던 시가를 입에 옮겨 물면서 차를 곧장 김포 비행장을 향하는 탄환도로(彈丸道路)로 몰았다.
"학생이 이번 퀴즈 문제에 일등한 사람입니까?"
F씨는 3차 대전 직전에 미국으로 이주해 갔다는 한국인 3세였다. 옛날 우리 나라처럼 자그마한 나라에도 여러 가지 사투리가 있던 시절. 아마 이 분은 경상도 지방에서 이주해 간 이민의 자손이 아닐까 생각됐다. 영웅이는 요즘 '김유신 장군의 소년 시절'이라는 연극에 나가느라 경상도 방언의 발음 지도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말소리가 어쩌면 그렇게 경상도 사투리하고 꼭 같아요?"
"내 말이 경상도말캉 같다꼬?“
"예!"
"우리 옛날 조상들 고향은 강원도라카든데……"
비대한 체구의 F씨가 서툰 우리 말로 먼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이 우스워서 영웅이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울창한 숲을 양쪽 기슭으로 거느린 한강이 오른쪽 발 아래 사라지고 「천천히 시속 100마일」이라고 쓴 표지판이 있는 커브를 끼고 큰 독수리 날개처럼 접힌 지점에 도달했다. 왼쪽으로 7월 하오의 눈부신 햇빛을 받고 잠자리같은 헬리콥터 편대가 떠 오른다. 벌써 런던, 파리,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김포 국제 공항에 도착한 극동항공공사의 제트기가 개미같이 자그마한 손님들을 동체에서 풀어 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걸 타고 가는 거예요?"
"아니지. 아마 저 속에 퀴즈 문제에 이등으로 당첨된 파리에서 오는 아가씨가 끼어 있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F씨는 이어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관광공사에서 이번에 주최한 퀴즈 문제의 응모자 총수는 8억. 그 중 정답이 3억. 이 3억을 대상으로 실시한 추첨에서 백 서른 두 명이 뽑혔는데, 그 중 세 명은 5세 미만의 애 이름으로 응모해서 실격, 백 스물 아홉 명이 우주 여행의 특권을 얻었다. 그 가운데서 다시 등수를 매겨서 다섯 명만 전적인 관광공사 부담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것,
"학생 이번 문제는 너무 쉬웠지?"
F씨는 얼굴에 미소를 띄며 이렇게 물었다.
"달이 생긴 원인에 대한 학설 3가지를 든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요. 첫째 지구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 태평양 근처에서 말입니다. 둘째는 외계에서 태양계를 떠돌다 들어와서 지구의 인력에 사로잡혔다는 것, 셋째는 지구가 형성될 때 그 가까이에서 달도 형성이 되었지만, 달이 작기 때문에 지구의 주위를 돈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그 학설을 맨 먼저 제창한 사람을 들으라는 것은 학교에서도 안배웠거든요. 그게 아까 그 아저씨한테 물어보고 쓴 거예요. 그 아저씨는 지금 원자력원에서 일하시거든요."
달나라 관광 사업은 예상했던 것처럼 성적이 좋지는 못하다는 풍문이었다.
달나라에는 공기가 없기 때문에 지구에서 천체를 관망할 때처럼 별들이 물빛을 머금고 반짝거리지는 않는다.
거기서 지구를 바라다 본다는 것은 지구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실감있게 느낄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이라는 말을 3차 대전 후 어느 철학자가 말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지구에서 볼 때 달이 주는 것보다 훨씬 밝은 빛을 지구는 달에 비쳐주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서 전체를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태평양같이 큰 바다를 바라다 보고 있노라면 누구의 가슴에도 시상(詩想)이 떠오를 것 같았다.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 하얀 쪽배에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이런 동요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달보다 여섯 배나 큰 지구를 바라다 본다는 것은 바라다 보는 그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신비한 체험이었다.
처음에는 지구에서 볼 수 얹는 달의 이면을 구경하고 중력이 지구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 몸 움직임이 가볍고 자유스러운 달에 비싼 돈을 들이면서까지 가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옛날의 얘기.
우선 달은 너무 고요했다. 대낮에도 별이 보이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우주복 속에 싸인 제 숨소리 뿐이었다. 두 시간이면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이 우주 생활의 매력은 아는 사람만이 알았다. 이를테면 플로렌스라는 여자 같은 이름을 가진, 영웅이를 안내하는 아저씨같은 분이랄까.
"달에서는 안내원의 얘기를 절대로 어겨서는 안되지."
제트기가 이륙할 때 채웠던 벨트를 끌르면서 플로렌스씨는 로이 양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이 양은 프랑스에서 행운의 추첨에 이긴 영웅군의 동행이었다.
영어 실력은 영웅이와 어슷비슷.
"안내원의 말을 안듣는 사람도 있나요?"
로이 양이 묻자
"우주선 안내원은 전부 여자거든. 여자 손님들이 특히 말을 안 듣지 뭐니."
"어마 그래요?"
"일전에는 안내원들이 달에 파견 나가 근무하고 있는 우주 개발국 기지에 손님들을 안내했거든."
"그래서요?"
"그렇지 않아도 관광객들이 찾아오면 쓸데 없는 질문을 해서 골치를 앓는 판인데, 어느 부인이 묻는 말에 공사부 엔지니어 한 사람이 대답을 안했대. 그랬더니 고만 그 부인은 그 자리에서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거였지. 막무가내야."
"어디 그럴 수가 있어요."
로이양은 영웅군을 쳐다보며 싱긋 웃는다.
"달나라에서는 지구와 달라서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 공휴일이거든, 그 사람은 휴일날 아침인데 금방 근무 교대를 하고서 한잠 자려던 참이었지."
"우주복을 오래 입고 다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한다면서요?"
영웅이가 물었더니
"누가 그러든. 시시한 소설 얘기지. 나두 우주복을 십여 년 입고 지낸 사람이지만, 어디 내가 너희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니?"
"……?"
"넌 아까 내 한국말 사투리가 경상도라고 했지만 우주복을 입고 정말 바깥 세상과는 무전기 하나로 밖에는 연락할 수 없는 속에서 나는 열심히 한국말 공부를 했어. 알고 보니까 한국에는 크게 나누어 다섯 가지 사투리가 있다고 하지 않겠니. 그 다섯 가지를 이제는 다 마스터하게 된 것도 실은 우주복을 입고 보초 근무를 서 온 덕택이었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그들은 어느덧 마이애미 남단 케이프 케네디 우주 공항 상공을 날고 있었다.
"아저씨가 이번 여행을 계획하셨다지요. 이번에는 어느 코스로 가나요?"
"이번은 제일 스릴이 있는 코스지."
"스릴이라니요?"
로이 양의 눈이 커진다.
"달의 뒷모습은 이제 안 알려진 데가 없고, 첫 개척자들이 우주선을 분해해서 만들었다는 도시도 가보면 듣던 것과는 좀 다르거든."
"거기에 아직도 사람이 사나요?"
"아니. 지금은 우주천문대에서 관리하는 검시소가 하나 있을 뿐이야."
"그럼 우리들은 어디로 가는데요?"
"저 목마른 바다라는 말 들어보았지?"
"아! 폭이 60km쯤 되는 그 먼지로 된 바다 말인가요?"
로이 양이 물었다.
"응 거기도 이제는 배를 띄우고 있거든."
"배를요?"
"그렇지, 글쎄 썰매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하기야, 그 바다가 그렇다면 육지는 아니고, 공기는 없지만 빈 공간도 아니니 뭐 배라고 해도 무방하겠지, 우리가 이번에 타게 될 우주선도 이름은 독립 호라는 배니까 이상할 것도 없지."
 
케네디 우주 정거장에서 영웅 군과 로이 양은 세계 도처에서 온 일행과 합세하였다. 그들은 지구에서 마지막 먹는 저녁은 모두 자기 나라 고유의 음식으로 하는 것 같았다. 전골 백반을 먹는 영웅이 곁에 앉은 인도 할아버지는 맵게 생긴 카레라이스를 맨손으로 먹고 있었다.
우주선 독립 호는 타는 기분이 배와 같았다. 승객 가운데는 무중력 상태에서 배멀미를 하지 않으려고 주사를 맞는 사람도 있었다. 예정대로 저녁 10시, 독립 호는 달을 향하여 발사대를 출발했다. 로이 양은 영웅 군의 팔을 꼭 잡으면서 이제부터는 '미스터가 나의 나이트'라고 했다.
총총한 별들이 선창에서 멀어지더니 햇빛이 닿고 있는 태평양 서쪽 일대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윽고 지구는 완전한 하나의 원으로 신비를 가득히 감춘 우주를 배경으로 구름의 베일을 두른 공처럼 멀어져 갔다.
 
눈을 떠 보니 벌써 달에 닿아 있었다.
"여러분 긴 여행에 얼마나 지루하셨습니까. 여기는 여러분이 기대하시던 루나 제일 정거장입니다. 목마른 바다로 향하는 관광선은 5번 플랫홈에 대기 중이니 우주 하복을 잊지 말고 관광선을 타시려는 손님들은 열을 지어 나오시기 바랍니다."
로이 양을 앞세운 영웅 군은 퀴즈 일등 당첨의 금뱃지를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키 큰 흑인 중년 신사와 나란히 독립 호보다 유리벽면이 휠씬 크고 시원하게 생긴 관광선 안에 들어섰다.
세레나데 호라는 관광선에는 선장과 스튜어디스 두 사람이 정원 서른 명의 손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모든 손님이 자리를 잡은 다음 우주선을 개조해서 만든 관광선의 스튜어디스 월킨즈 양은
"세레나데 호에 오르신 여러분을 달의 여신 다이아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 여행은 네 시간 정도 걸릴 것이며……"
고운 목소리로 또렷또렷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게 관광 코스와 설명이 시작되는 동안, 세레나데 호는 지구빛이 달빛처럽 환한 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단. 독립 호의 속력은 세레나데 호의 수백 배를 능가하는 것이었으나, 손님들은 여유 있게 적외선 망원경으로 처음 보는 달나라 광경을 즐길 수 있었다. 세레나데 호가 달리는 달 표면에 깔렸던 흙가루가 더 보드러운 융단처럼 일 센티미터 남짓 깊어지면서 관광선은 드디어 목적지의 하나인 목마른 바다에 나섰다. 말만 들어보던 옛 화산구였다. 은빛으로 한없이 깔린 이 우주진으로 형성된 바다는 죽은 듯 조용했다.
"어때 사하라 사막 같지?"
스튜어디스의 설명이 끝난 다음 영웅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로이 양에게 말을 건넸다.
"사하라 사막보다 이 먼지는 더 부드럽대. 아니 그런데 저게 뭐지?"
시속 30노트로 달리던 세레나데 호는 갑자기 선체를 기울이면서 돌연 앞을 막고 나서는 벽을 피하여 속력을 늦췄다.
벨트를 풀고 있던 한 사람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소리를 쳤다.
이런 사태는 우주 비행으로 잔뼈가 굵은 나탈리 조종사에게도 적지 않은 놀라움을 가져다 주었다. 앞에서 솟아 오른 것은 벽이 아니라 사구(砂丘)였다. 달의 내부 깊숙이 도사리고 있던 마지막 열기가 일으킨 발작같은 지진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세레나데 호는 점점 가라앉지 않는가!
 
그 때, 지구 쪽에 면한 클라비우스 위성 제일 도시의 천문대에서는 지진계의 바늘이 놀란 듯 흠칠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자동으로 기록되어 통제실 기술국장의 데스크 위에 붉은 불빛으로 깜박거렸다.
"이게 무슨 일일까?"
우주 생활에서 필요한 수면 시간은 두 시간이라고 하지만 지금 로렌스 국장은 막 점심 후의 낮잠을 즐기려던 참이었다. 그는 곧 지진계가 있는 곳으로 뛰어 내려갔다. 붉은 바늘은 마지막 진동에서 몸을 가누려고 파르르 떨었다.
옆에 있는 전자 지도판을 열어 본 그는 진원이 어딘가를 알아챘다.
"비상! 비상 신호를 내려라. 지금 목마른 바다 근처를 항해 중인 관광선은 없는가?"
로렌스 국장은 마이크에다 이렇게 고함쳤다.
나탈리 조종사는 우선 승객들을 진정시키고 선체의 내부 압력을 증가시켰다. 먼지 깊숙히 가라앉을수록 밖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위험했던 것이다.
"지금 세레나데 호는 예기치 않은 지진을 만나 바다 속에 가라앉았습니다만, 10m 이상 가라앉을 염려는 없습니다."
그 때, 키 큰 흑인 신사가 조종사 앞에 나타났다.
"제가 한센 탐험 대장입니다. 앞으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가 유명한 한센 대장이라는 말을 듣고 절망과 공포에 싸였던 분위기는 조금 안정되었다. 화성 중거리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년 전에 은퇴한 유명한 우주 비행사가 바로 이 사람이었던가. 영웅이는 부러운 눈빛으로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식량과 물은 충분하오?"
한센 씨가 묻자, 스튜어디스 월킨즈 양은
"칠일 동안 먹을 비상식량이 있고 물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선체가 상하지 말아야 할텐데요."
"그보다 산소가 떨어질까 봐 더욱 걱정이군."
그리고 한센 씨와 조종사는 조종석으로 갔다. 네 시간 후 세레나데 호가 당면한 문제는 식량과 산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선내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먼지 속에 밀폐된 선실 속에서는 서른 명의 체내에서 발산하는 열도 대단했다. 네 시간에 7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모두 우주 하복으로 갈아 입어야 했다. 남자들은 웃옷을 벗었고, 여자들은 수영복 차림이 되었다.
"수색대를 또 보내보았나?"
세레나데 호가 실종한 다음 '목마른 바다' 일대에 썰매를 풀어 놓았으나 기술국장은 아직 세레나데 호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지금 막 3호 썰매에서 무선 연락이 왔습니다. 목마른 바다 한쪽에 먼지가 샘솟는 곳이 있다는 보고입니다."
"뭐 먼지가 샘솟는다고?"
기술국장은 구조작업의 선두에 나설 준비를 했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 다시는 입지 않으려고 했던 우주복을 또 한 번 입는 수 밖에 없었다.
현장에 도착한 로렌스 기술국장은 그것이 곧 대류 현상(對流現象)인 것을 알았다. 그 속에 파묻힌 물체가 지금 타고 있지 않으면 열에 달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물체가 세레나데 호일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선체 내는 흡사 한증탕 같았다. 선실 밖을 사그락거리고 스쳐가는 먼지들이 달아오른 배기구 근처의 열에서 일어난 대류 현상인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다음이었다. 그래서 사뭇 오르고 있던 실내 기온이 주춤한 이유도 이해가 갔다. 조종사는 생각했다. 이렇게 축 늘어진 선객들을 어떻게 구조해 낼 것인가 - 저만치 한국에서 왔다는 퀴즈왕이 불란서 소녀의 손을 꼭 잡고 잠들어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선체 위를 깎아들어오는 쇠소리와 함께 천정 한구석에 구멍이 뚫리고 시꺼먼 쇠통 하나가 나타났다.
"살아 있으면 대답을 하시오. 여기는 구조모함."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조종사는 쇠통 밑에 달린 마개를 열었다. 순간, 선내에 있던 모든 물체가 일제히 손을 드는 것 같았다.
"빨리 기통 마개를 잠궈. 선내 기압과 조절이 안 되면 위험해!"
세레나데 호는 자꾸 더 밑으로 가라 앉았다. 로렌스 국장이 산소통을 넣었을 때는 깊이 20 m의 진흙처럼 굳은 바다 속 바닥 위에 떠 있었다. 잠수함을 내려보내기 전에 세레나데 호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승객들을 전부 깨워서 힘 있는 대로 발을 구르도록 지시할 것."
로렌스가 세레나데 호의 실종 위치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구의 각 통신사에서는 구조 현장의 텔레비전 중계를 의뢰해 왔기 때문에 목마른 바다에는 온갖 형태의 선박들이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옛날에 쏘아 올린 로켓의 선체를 뜯어서 개조한 것들이었다.
"구조할 가망이 있습니까?"
"22세기 과학에 불가능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로렌스 국장은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두 가지 사실이 걱정되었디. 그것은 구조 사다리를 내려뜨릴 잠수함을 세레나데 호의 천장에 밀착시킨 다음에도 배가 밑으로 가라앉는 경우요, 세레나데 호의 발전기에서 일어날 화재의 염려였다.
완전히 내화 재료로 만든 선내에 화재의 위험이 있을까? 문제는 파이버 글래스였다. 잠수함을 세레나데 호에 밀착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도선이 끊겨나간 자동발전기는 전도체(電導體) 구실을 하는 우주진(宇宙塵)에 마치 점화기(點火器) 같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것이 파이버 글래스에 당기고 앞으로 옮겨서 산소통에 불이 일 때까지 한센 대장의 계산에 따르면 8분밖에 남지 않았다.
뚜껑처럼 천정이 도려져 나가면서 사다리줄이 내려왔을 때, 48시간 동안 목마른 바다 속에 갇혔던 서른 명의 사람들은 환성을 울릴 겨를도 없었다. 여자를 앞세우는 성급한 구출 작업을 해야 했다. 인력이 약한 곳이기 때문에 모두들 나는 듯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벌써 선실 속에는 파이버 글래스가 타는 짙은 흑회색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하고 그 위로 종이컵 몇 개가 타 있는 것이 보였다. 조종사가 마지막으로 사다리줄을 잡아 쥘 때까지 꼭 6분이 걸렸다. 저 연기가 천정을 덮기 전에 세레나데 호는 50 피트 깊이의 먼지 속에서 자폭을 하고 말겠지.
"기적이야!"
로렌스 국장은 나탈리 조종사의 땀에 흠뻑 젖은 팔을 잡아 올리면서 소리쳤다. 그 때다. 구조모함 근처의 먼지가 일제히 춤을 췄다. 드디어 세레나데 호는 폭파한 것이다.
"역시 기적은 있군!"
인공 위성의 중계를 거쳐 구조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던 영웅 군의 아버지 말이었다.
 
<끝>
이 별
 
"모두들 안녕!"
벤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로봇의 에너지 탱크에서 손을 뗐다.
이 행성(行星)에서 최후의 지구행(地球行) 로켓이 발사된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벤 노인은 수백 개의 로봇과 생활을 같이 해왔다.
벤은 자기가 설계해서 개량을 가해온 로봇들에게 둘러싸여 오늘날까지 행복된 나날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즐거운 생활에 이윽고 피리어드를 찍을 날이 온 것이다.
약 2개월 전에 심장의 발작을 일으켰다. 이 때, 벤 노인은 자기의 죽음이 눈앞에 찾아온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2개월 동안 벤 노인은 오직 즐겁기만 했던 로봇들과의 생활을, 그리고 30 수 년 전 이 근처의 행성에 많은 지구인이 살았던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지냈다.
벤 노인이 여기에 온 것은 우라늄이 아직 에너지원(源)으로 중요시되어 있던 시대였다. 그 후, 이 우라늄을 상회하는 에너지량을 가진 새로운 플루토늄의 시대가 다가왔기 때문에 이 근처에 있는 행성은 버려진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30 수 년 전, 이 행성에 파견되어 온 사람들은 지구로 끌어 올려졌다. 이 행성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벤 노인은 최후의 지구행 로켓를 타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벤 노인은 젊고 우수한 로봇 공학의 기술자로 이 행성에 파견되었던 것이었다. 이 행성의 광산 채굴 작업에 사람 아닌 고도로 발달한 로봇이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벤은 행성의 로봇 관리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구인이 이 행성에서 할 일이 없어짐으로써 로봇도 여기에 쓸모없이 버려지게 된 것이다.
"내 모든 지혜를 짜내어 개량해서 이제는 인간에 가까운 감정을 갖기 시작한 로봇을 버리려 하는가요?"
벤은 정부의 관리에게 열심히 항의를 했으나 정부 관리는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쪽의 의견을 들어 보세요. 2척의 로켓이 이 행성과 지구를 왕복해야 합니다. 그 경비는 로봇을 수백 개 구입하는 값의 8배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로봇을 그 곳에 버리는 것이 경제적으로 크게 유리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만든 로봇은 그 정도의 비용을 가지고는 만들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십 년 간을 있으면서 그 동안에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유명한 로봇 공학의 권위자인 아시모프 박사라도 그 가치를 인정해 줄 것입니다."
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만들어 개량한 로봇을 지구로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런데 과학적 지식이 없는 관리의 눈으로 보아 지금 지구상에서 심부름꾼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로봇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당신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 집착하는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로봇들을 여기에 남겨둔다 해도 당신이 지구에 돌아가면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기술은 지구에 돌아간다 해서 퇴보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건 모르는 말입니다. 나의 로봇은 몇 번이나 거듭 말한 바와 같이 십 몇 년 동안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결과 지금과 같이 우수한 성능(性能)을 가미(加味)할 수 있게 까지 된 것입니다. 실물이 없으면 개량해 온 프로세스(過程)를 반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1개만 가지고 돌아가는 허가를 얻도록 당국에 신청해 드리지요."
이 답변에 벤은 난처하게 되었다. 관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모든 로봇을 운반해 갈 필요는 없다. 그런데 벤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모든 로봇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의 감상(感傷)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벤에게 있어서는 절실한 감정인 것이었다. 사실 사람의 정(情)이란 야릇한 것으로서 아무리 많은 자식을 가졌어도 그 하나 하나에 끌리는 정은 마찬가지여서 어느 하나도 떼어놓기 싫은 것이다. 벤의 기분은 흡사 그와 같은 것이었다.
타협이 끝나자마자 지구의 정기편(定期便) 우주선이 이 행성을 출발하는 날이 닥쳐왔다.
로봇의 에너지 보급탱크는 이제 활동을 멈추어 버릴 운명에 부딪친 것이다. 이 로봇들은 아직도 1세기는 더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기능을 가졌지만 에너지 탱크를 움직일 인간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로봇은 두 번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이윽고, 로켓은 지구를 향해 발진(發進)했다. 그런데 벤은 아무도 없는 행성에 홀로 남은 것이었다.
그래서 로봇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행성은 지구와 거의 비슷한 자연 조건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저장 식량이 떨어져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벤이 입김을 준 로봇은 그 후 벤이 상상치도 못했던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벤의 로봇은 인간과 꼭 같은 감정을 가진, 아니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미개한 행성은 로봇 자신의 의지로 개척되어 바야흐로 여기는 지구상에 있는 도시와 맞먹을 정도의 건물이 건설되었다.
그 결과, 이 행성에는 인간인 벤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로봇의 힘의 원천은 벤이 관리하고 있는 에너지 보급 탱크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벤은 이들 로봇의 왕인 것이다.
또한 로봇들도 벤을 창조주(創造主)로 모시고 왕을 대하는 태도로 그를 경애하는 것이 었다.
그런데 벤을 모시고 즐거웠던 날들도 이윽고 그 막을 닫을 날이 찾아온 것이다.
임종의 자리에 누운 벤 노인의 주위에는 로봇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히."
벤은 최후의 고별을 하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른손은 에너지 보급 탱크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스위치에 가 있었다. 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루의 휴식도 없이 자기가 만든 로봇을 돌보았던 것이다.
이윽고, 에너지원은 끊어졌다. 그 순간 벤 노인은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로봇들의 활동은 정지하지 않았다. 많은 로봇들이 슬픈 표정으로 벤의 침대 가까이 가는가 싶더니 벤의 시체를 안아 일으켰다.
얼마 후, 이 행성의 고요한 초원에 로봇들의 장열(葬列)이 보였다. 창조주를 정중하게 장사지냈다.
사실인즉 자기가 로봇의 에너지원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벤 노인에 대해서 로봇들은 그들 스스로 에너지원을 얻을 수 있었던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 로봇들의 벤에 대한 경애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끝>
서 박사의 실험
 
"드디어 완성이다."
서 박사는 만족한 기분이었다. 박사의 눈앞에는 작은 상자 모양의 기계가 알루미늄 빛을 내고 있다. 그 기계로 말하면 서 박사가 수십 년의 세월을 걸려 완성한 '사고뇌파 수신 장치(思考腦波受信裝置)'였다. 이것은 문자(文字)로 인간의 사고를 캐치할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발명품인 것이다.
사고 뇌파는 일종의 전파로서 그 파장을 알고 동조(同調)할 수 있는 장치만 만들어진다면 그것으로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이론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실제로 이 연구에 정면으로 착수한 사람은 서 박사가 처음인 것이다.
서 박사는 자기가 만들어전 장치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이 장치는 박사의 과거 수십 년 간의 노고의 결정이다.
그 동안 서 박사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리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러나 연구가 완성된 지금 그의 노고는 모두가 하나의 즐거운 회상이 될 뿐이었다.
서 박사는 장치를 앞에 놓고 여러가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 장치가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면 사회에 일대 변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잡아 한 나라나 세계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박사는 복잡한 생각들을 머리에서 쫓아 버리려는 듯 냉정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하여간 이론적으로는 성공되었지만 아직 실험이라는 수속이 남아 있다. 실험의 결과 어딘가에 결함이 발견되는 경우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빨리 실험을 해 보는 것이 급선무다.
정말 십 여년 동안을 연구실에 도사리고 앉아 외출이라고는 한 발자국도 해보지 않고, 오직 이 연구에 전력을 기울인 그였다. 박사는 그 동안에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전연 모른다. 현실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하루에 한 번 찾아오는 식료품점 점원에게서 음식을 받는 것뿐이다.
'만일 장치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박사는 연구의 성과에 자신이 있지만 만일의 경우 실험에 실패한다면 하는 불안을 느꼈다.
그런데 이 때 부~하고 부저가 울렸다. 하루에 한 번 오는 식료품점의 점원이 온 것이다. 10여 년 동안에 이곳에 오는 점원도 여러 명 바뀌었다. 지금 이 점원은 30번째나 되리라.
그런데 이 부저 소리가 서 박사에게 결단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서 박사는 장치에 안테나를 연결하고 작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박사는 그 점원을 실험 대상으로 하려는 것이다. 피실험자(被實驗者)는 '인간'이면 누구라도 좋은 것이다.
점원은 홍안의 소년이었다. 식료품이 든 부대를 고르고 오렌지 주스 통조림을 꺼냈다. 통조림을 들고 있는 소년 앞으로 간 서 박사는
"아무도 없으니 한 잔 하고 가게."
"저는 먹지 않아요."
소년은 정중히 예를 차리며 마시려 하지 않았다. 이 때, 서 박사는 장치에 스윗치를 넣고 질문했다.
"오렌지 주스를 싫어하는군."
"아니오, 가끔 마십니다."
박사는 이어폰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온몸의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어떤 반응이 있을까 하고.
그런데 서 박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서 서 박사는 또 하나의 주스를 들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 때, 테이블 커버에 물이 번져갔다. 소년은 재빨리 일어나 옆에 있는 걸레로 훔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치워 놓고 서 박사 앞에 앉았다.
이어폰의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틀렸구나……'
서 박사는 점차 불안해졌다. 주스를 찔끔찔끔 테이블 위에 붓는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었다. 소년의 마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처럼 기다려도 이어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 소년이 무의식적으로라도 무엇을 생각하면 그 사고파(思考波)를 기계가 캐치하고 언어 변환 장치(言語變換裝置)가 말로 만들어 이어폰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잘 먹겠습니다."
소년은 허리를 굽히며 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서 박사는 그 순간 장치의 점검을 시작했다. 조작 과정에 어떤 미스가 있었던 게 아닐까? 재빨리 장치를 분해하고 부품을 하나하나 설계도를 보며 맞추었다. 박사의 손 끝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서 박사가 점검을 마친 것은 해가 저물녁이었다. 그런데 조작 과정에 어떤 잘못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서 박사는 실내의 전등을 켰다. 그렇다면 과거 십여 년간의 연구를 재검토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는 복잡한 계산, 다른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의 낙서로 생각될 도식(圖式)이 빽빽이 적힌 레포트를 꺼냈다.
어딘가에 잘못이 있는 것이다. 그는 열심히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계산에 잘못이 있다면, 지금부터 수정해 나가야 할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면 서 박사는 과거 10여 년의 세월을 히송한 셈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졌다.
"옳지 여기까지는 잘 되었다. 그러면 근본적인 잘못은 없다는 것이군."
서 박사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는 급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이내 잠 속에 빠져 들어갔다. 머리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나 몸은 느슨하게 풀려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책상에 기대고 잠이 들었다. 담배는 박사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채로.
직사 광선이 얼굴에 닿아 눈이 부셔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여섯 시간 후였다.
박사는 까무러치리만큼 놀랐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기록이 온통 잿더미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박사는 푸석푸석한 잿더미를 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순간 창으로 불어 들어온 바람이 이 재를 날려버렸다. 서 박사는 다시 종이에다가 그 복잡한 이론을 전개할 기력를 잃어 버렸다.
부저가 울렸는데 이에 답할 사람이 없었다.
식료품을 받을 서 박사는 어지럽게 놓여진 기계들 사이에 싸늘하게 누워 있었다. 어제부터 서 박사의 집에 다니게 된 식료품점의 「로봇 점원」은 문 앞에 식료품을 내려 놓고 가버렸다.
최근 10여 년 간에 로봇 공학은 엄청나게 발전하여 드디어 실용화된 사회가 찾아왔던 것이었다.
<끝>
수수께끼의 모랫벌
 
사라진 아버지
 
바다는 코발트 블루로 빛나고 있었다.
1960년 7월 25일-.
고등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로렌 랜달(16세)은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양친과 함께 셋이서 플로리다로 피서차 떠났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플로리다 반도 끝에 있는 플로리다 시티 해안.
이것이 그 알 수 없는 괴사건의 발단이 되리라고는 로렌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로렌과 같이 수영하기는 참 오래간만이구나. 어디 한 번 경주 해볼까. 아빠도 아직은 젊으니까 너한테 지진 않을 거다."
"좋아요, 아빠, 렛츠 고!"
아름다운 금발을 바람에 날리며 로렌은 흰 인어(人魚)처럼 바다로 뛰어 들었다.
비치 파라솔 밑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빙그레 웃는 어머니. 로렌의 아버지 제임스 랜달은 조그만 철강회사의 사장이었다. 가정은 늘 명랑하고 화목했다.
로렌과 아버지 랜달은 서로 앞섰다 뒤졌다 하며 혜엄쳐 나갔다.
그러나 바닷가로 돌아올 적에는 로렌과 랜달의 거리는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겼다! 엄마, 내가 이겼지?"
이윽고 로렌은 바다에서 올라왔다. 아버지 랜달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해안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0분 후였다.
"아, 피로해. 로렌한테 완전히 졌는데……."
랜달은 물에 젖은 일굴로 빙그레 웃었다. 로렌과 어머니 린다는 비치 패러솔 안에서 랜달을 보고 웃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강렬한 한낮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로렌과 어머니 린다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모랫벌에 비치는 강렬한 태양 광선이 플래쉬를 터뜨린 것처럼 번쩍 빛났기 때문이다.
"어마……."
자그마하게 외치는 로렌. 그 로렌에게로 한 5미터쯤 다가온 랜달. 랜달의 표정이 한 순간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고 굳어져 버린 것이다.
"우, 우, 우……"
무엇엔가 짓눌리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는 랜달.
그 순간, 로렌과 어머니 린다는 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아버지 랜달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이……!
"앗, 아빠!"
"여보, 여봇!"
모녀는 동시에 소리쳤다.
그러자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중에서 괴로운 듯한 랜달의 음성이 들려 왔다.
"로……렌……린……다. ……살려……다……오."
"아빠, 아빠, 어디 계셔요, 아빠!"
그러나 구원을 바라는 랜달의 음성은 차츰 작아져 갔다.
 
, 로렌이 사라진다
 
"뭐, 뭐라구? 눈 앞에서 인간이 사라지다니!"
달려온 주(州) 경찰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경찰관은 그곳에 이 사건의 기괴함을 나타내는 증거를 발견한 것이다.
"아, 이것은……."
모랫벌을 가리키는 경찰관. 그 곳에는 사라진 아버지 랜달의 발자국이 물가에서부터 분명히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발자국은 랜달이 사라진 지점에서 끝나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저녁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모랫벌에 서 있는 로렌과 어머니 린다.
그러는데, 그 때 갑자기 공중에서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리……린다……. 로……로렌……."
그것은 분명히 아버지 랜달의 소리였다.
그러나 랜달의 지상에의 통신은 그것이 최후였다. 사라진 랜달의 음성은 경찰관도 확실히 들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났다.
1961년 7월 25일-.
랜달을 잃어버린 로렌과 어머니 린다는 다시 그 악몽(惡夢)같은 회상이 남아 있는 플로리다 시티 해안을 찾았다.
이튿날에는 10여 명의 FBI(미국 연방 수사국)가 출동하여 수색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FBI는 괴사건의 수수께끼의 실마리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렬한 햇살 밑에 전개된 흰 모랫벌에는 빨강․파랑․노랑의 아름다운 비치 파라솔의 꽃이 현란하게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해수욕을 하러 나온 사람들의 환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해와 다른 점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로렌과 린다의 마음은 납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엄마, 아빠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로렌, 그만 돌아가자. 잘못 왔나보다. 어떻게든 아빠의 수수깨끼를 풀려고 왔지만, 엄마는 이 모랫벌을 보니까 괴로워 죽겠다."
'안 돼요, 엄마! 난 아무래도 이 모랫벌에 아빠가 사라진 수수께끼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아요.
로렌은 모랫벌을 달려 갔다.
"엄마, 요 부근이었어요. 그날 아빠는 바다에서 이렇게 걸어왔어요. 그리고 이 근처까지 걸어 왔을 때……."
로렌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린다는 흠칠 놀랐다. 태양이다! 그 때와 똑같은 태양 광선이 이 순간 갑자기 플래쉬를 터뜨린 것처럼 번쩍 빛난 것이다.
그리고 린다는 분명히 보았다. 로렌의 상반신이 스르르 사라져 간 것을!
"로렌!"
린다는 총알처럼 사라져 가는 로렌에게 뛰어가 매달렸다.
 
아버지가 있었다
 
"로렌, 정신 차려라, 로렌!"
모랫벌에 쓰러진 로렌을 어머니 린다는 흔들었다. 이윽고 로렌이 문득 눈을 떴다.
"앗, 엄마, 엄마, 나……."
"로렌,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 넌 지금 사라져 갈 뻔 했었어. 내 눈앞에서 아빠처럼 사라져 갈 뻔 했었단 말야!"
"네? 아빠처럼…… 아, 참 그래요. 나 정말 아빠 봤어요. 아빠가, 아빠가 있었어요."
"로렌!"
"태양이 갑자기 번쩍 빛났었죠."
"그래, 로렌, 그 때 네가 사라질 뻔 했었지."
"난 어쩐지 현기증이 났었어요. 그러더니 여태까지 눈 앞에 있던 바다며 모랫벌이 문득 사라지고, 내 눈 높이이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꽃밭이 펼쳐져 있었어요. 바로 거기에 아빠가 '로렌, 용케 왔구나'하고 손을 내밀었어요. 난 그 때 아빠 손을 잡으려고 했었죠."
"로렌, 넌 꿈을 꾸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녜요. 꿈이 아녜요. 그 때 난 오른손으로 꽃밭에 있는 꽃을 쥐고 있었어요. 앗!"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그렇게 외쳤다. 한편 로렌의 오른손. 그 손바닥에 한 송이의 꽃잎이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묘한 색채의 꽃잎이었다.
내리쪼이는 태양에 그 꽃잎은 황금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보라빛으로, 그리고 곤색으로 변했다. 이 보고를 듣고, 주립대학에 있는 식물학의 권위 포오트 보오선 박사가 그 꽃잎을 자세히 조사했다.
그러나 보오선 박사의 지식으로도 그 꽃잎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이 꽃은 지구상에는 없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이 꽃잎의 조직과 섬유의 상태를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끝내 결론은 얻을 수 없었다."
신문과 주간지(週刊誌), 텔레비전, 라디오는 로렌이 당한 이 괴사건의 전모를 자세히 발표했다. 그리고 어느 과학자는 이런 추리를 신문에 게재했다.
『랜달이나 로렌은 모두 사라지기 조금 전에 태양이 강렬하게 빛났다고 한다. 이것이 그 사건과 어떠한 형태로든 관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로렌이 보았다는 꽃밭의 세계야말로 제 4 차원의 세계가 아닐까. 이러한 인간 실종(失踪)의 예는 이 밖에도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모두 제 4 차원의 세계에 가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랜달이 사라진 플로리다 시티의 해안에 그 4차원의 세계로 가는 입구가 있는지도 모른다.』
<끝>
 
 
 
작품 해설
관제탑을 폭파하라
 
서 광 운
 
한반도의 기상(氣象)은 대강 두 가지 영향을 받고 있다. 여름이면 압도적으로 태평양 기권의 영향을, 겨울이면 반드시 시베리아 기권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 나라와 소련과 일본은 기상 상으로 어쩔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이 순간에도 계속 기상 통보를 교환하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인공 위성 시대여서 기상 위성은 수시로 지구 위의 궤도를 돌면서 태풍 발생을 비롯한 기상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지구 위의 수신소에 연락해 준다. 그러한 연락이 전파를 이용하고 있으므로 전파(電波)를 가령 광물성이라고 생각할 때 식물성의 에너지 발사로 이를 제동(制動)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상정(想定)에서 '관제탑을 폭파하라'는 작품이 쓰여졌다.
이러한 상상의 에너지를 허력(虛力) 에너지라고 우선 불러 두었다. 그리고 허력 에너지원을 약초에서 구해 보려고 시도했다. 우리는 산삼(山蔘)와 위력을 잘 알고 있으며 사람이 허할 때, 보약을 달여 먹으면 기운이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허(虛)한 것을 실(實)하게 만들어 주는 기운은 곰곰 생각할수록 신비스럽지 않는가. 미국이나 소련의 우주 비행사들도 우주 여행에 앞서 보약을 먹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한 허력 에너지를 발사하여 이를 우주 공간에서 사람이 몸받을 수도 있고 또한 전자 장치가 몸받아 동조(同調)할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그래서 시대를 한반도 통일 이후로 설정하고 약초가 많은 금강산에 식물 자력선 연구소를 세웠다. 까닭인즉 우리의 과학은 날이 갈수록 계면(界面)이 없어져 물리학적인 것이 화학적인 것에 영향을 받게 되고 또한 거꾸로의 방향도 가능한 현실로 바뀌어 가고 있으므로 생약학(生藥學)과 전자 물리학의 사이가 언제 갑자기 인연을 맺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라 하겠다. 식물 자력선 연구에 초점을 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관상대의 기구나 인원이 안타까울 정도로 국제 선진수준에 비하여 빈약하기에 기상청 예보국장 성하룡을 등장시켜 봤다. 만일 작품에서처럼 우리의 허력 에너지인 식물 자력선이 인공 위성의 회로를 제동할 수 있다면 이 비밀을 탐내지 않는 전문가는 없으리라.
소련의 시베리아 기상 센터는 하바로프스크에 있으므로 이 곳을 무대로 택하게 된다. 하바로프스크는 정치적으로도 8․15 해방 전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수많은 한인(韓人)들이 독립 운동 근거지로 삼아온 일이 있었던 만큼 무대로서는 안성마춤이라 하겠다. 거기서 소련의 노라른스키 교수가 허력 에너지에 관심을 갖고 그 곳의 비밀 경찰에 부탁하여 성하룡 예보국장을 납치하게 된 일은 장차 과학경쟁이 과열되는 경우 인간 두뇌를 납치해 갈 우려도 없지 않으리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정보부의 구실도 국익(國益)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폭을 넓혀야 되는 방향은 변하지 않으리라. 1904, 5년 한반도의 권익을 둘러싸고 소련과 일본이 충돌, 전쟁을 빚어 낸 사실은 잊을 수 없다. 장차 동해(東海)에서 소련과 일본의 해군 세력이 또 한 번, 충돌할 가능성을 내다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무슨 수를 써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기상상의 관계는 지정학적으로 분쟁을 일으키기 쉬움으로 허력 에너지 개발에 기대를 걸어본 것이다. 이 작품은 1968년에 쓰인 것으로 장차의 소련과 일본 관계를 예상한 것이라 하겠다.
 
관제탑을 폭파하라
서광운 작
 
아이디어회관 과학문고
224p, 19cm (SF 세계 명작 <한국편> 56)
 
인 쇄     1984년 8월 20일
발 행     1984년 8월 30일
역 자     박홍근
조 판     태광 문화사
제 판     명림 정판사
옵셋 인쇄 장원 정판사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영지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제 2-213호
     전화 (266) 1975, (266)1970
 
<판권 본사 소유> 값 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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