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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자작시 해설 2 <물고기그림>/심상운 댓글:  조회:1124  추천:0  2019-12-19
자작시 해설 2 물고기 그림 / 심상운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하이퍼 시의 심리적 장면 변화의 기법을 보여주는 시 겨울저녁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있는 물고기와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가는 그와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가는 나는 이 시의 캐릭터다. 그들은 문맥 상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없이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나 ‘내’가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내’가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의 새를 넣었을 때, 그가 설경 속을 나오는 장면은 물고기와 그와 내가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분명한 것은 그 관계가 현실적인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관계는 나의 심리적 현상이 만들어내는 관계 즉 마음의 관계(마음속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마음을 직관하면서 심리의 내면에 떠오르는 영상 이미지를 포착하여 한 편의 시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변화의 기법’은 인간의 내면의식을 포착하여 표현하는데도 하이퍼 시의 기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는 가상세계를 표현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를 보면서 나름대로 추리하고 상상하는데 만족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 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문덕수 「내면세계의 미학」)라는 말에 동감한다.그리고 그 말은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프랑스의 철학자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김융희 「바슐라르의 이미지의 시학」)는 말과 이음동의(異音同義)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시의 중심 포인트는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는 행위와 그 행위에 의해서 설경으로 떠나간 그가 나오는 장면이다. 이것은 하이퍼 시의 장면 변화의 기법을 시에다가 끌어들인 것으로 그 기법이 시인의 내면적 심리현상을 표현하는데도 효과적인 기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논리적인 인과의 법칙에서 잠시 벗어나 시인이 보여주는 장면(이미지)을 보고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추리해보고 느껴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64    강소이 시집 해설 댓글:  조회:1124  추천:0  2019-12-14
강소이 시집 해설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가상공간이 융합된 이미지의 세계                                                     심 상 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21세기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은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무인자동차, 5g 스마트폰 등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현실과의 새로운 마주침이다. 여기서 마주침이라는 것은 사유를 유발시키는 특별한 경험을 의미한다. 강소이 시인의 세 번 째 시집 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구현될 4차 산업혁명의 놀라운 현실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편들이 일반적인 서정성에서 탈피하여 펼치는 가상공간의 이미지가 현실과의 관계에서 치열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을 읽는 독자들은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에서 "현실 문제를 반영하고 비판하며 문제의식을 제기함이 시인의 사명이기도 하다"는 은사님의 가르침이 내 뇌리에 늘 명징하게 박혀 있어서 물질문명 시대에 생명존중과 초월의식, 죽음, 전쟁에 유린된 생명, 현실 세상의 세태와 비판을 형상화했다. 또한 해녀, 광부, 임란 때 도공들의 애환,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현장을 탐색하는 여행자가 되어 과거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현실의 문제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존중을 내세우며 적극 대응을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는 그런 자신의 시작행위를 ”여행지에서는 풍경과 사유와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오버랩(over lap)되기 때문에 여행지를 하이퍼시로 쓰는 건 재미있는 정신적 기쁨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주제의식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은유, 직유, 이미지, 관념의 사물화, 아이러니(Irony), 패러독스(Paradox), 공감각적 심상, 객관적 상관물,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 낯설게 하기 등의 표현 기교들“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강소이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기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가 여행지에서의 견문과 사유를 하이퍼시로 엮어내는 데서 정신적인 기쁨을 느낀 다는 것은 관념적인 의미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몰입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게 한다. 이 시집의 시편들의 주류가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소이 시인의 개성이 창출한 현대적인 감수성과 21세기의 시인정신이 형상화한 신선한 시의 공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해설의 관점을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가상공간이 융합된 이미지의 세계’라는 데 두고 시편들의 면면을 나름대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현대문명에 대응하는 생명의식의 시편들 십여년 전 중앙일보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인터뷰기사를 보고 스크랩을 하였다. SBS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가 한 말이다.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현대시에도 해당됨은 물론이다. 이 시집의 첫 시「6차선 도로」는 그런 면에서 독자들에게 충격과 함께 높은 정신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시로 읽힌다. 러쉬아워(rush hour)의 6차선 도로에서 차바퀴에 깔려서 검붉은 내장을 토하고 쥐포처럼 뭉개져버린 고양이를 보는 시인의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카메라 기자 같이 그 끔찍한 현장의 장면을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며 보도(reporting)하고 있다. 그리고 차바퀴에 깔려 죽은 고양이를 ‘ 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대시에서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실주의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있다. 휴머니즘(humanism)을 내세우는 현대인들은 인간이외의 생명체에 대해서 차별의식을 가지고 생명체의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시인은 이 시에서 사실적인 현장의 감각과 함께 오히려 죽은 고양이를 ‘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으로 표출하여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깨우침의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출근길이면 산탄散彈처럼/쏟아져 나오는 6차선 도로/검은 등 흰 배 고양이가/도로에 검붉은 내장을 토했다/단말마斷末魔 /아직 놓지 못한 발끝 파르르 떨린다//퇴근길 달리는 6차선 도로/진회색 비둘기 몸통 으깨져/쥐포처럼 빨간 피로 뭉개져있다//먹이를 찾아 도로에 나섰을까/떠나간 짝을 찾아 잠시/6차선 도로에 날아 앉았을까//문명의 톱날 바퀴 밑에/깔린/거대한 한 마리 하늘님//-「6차선 도로」전문 「高苑을 가르는 경적소리」에서도 문명을 상징하는 화물트럭의 바퀴에 깔린 생명체(검붉은 창자)를 시인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고 있다. 티베트 고원은 현대인들이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정신적(종교, 철학) 시원(始原)의 고향이다. 그러나 문명의 바퀴는 그 시원의 공간마저 침범해 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현장을 시인은 살아있는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검붉은 창자 도로 위에 터져있다/아직 놓지 못한 숨결/파르르 떠는 발/질주하는 헤드라이트 바닥/찢긴 너의 너덜거리는 살/시뻘건 프린트 자국/밟고 간 바퀴도 미안해하지 않았다/울리지 않은 요란한 경적소리//20톤 화물트럭에 깔린 햇살 한 조각에서/파드득 /두레박 길어 날아올랐다//( 티베트 고원 꼭대기 찰진 바람을 가르는 경적소리 ...... ) //-「高苑을 가르는 경적소리」전문 「별 무리 지는 강물」에서는 젊은 여인들의 낙태에 대해 시인이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자궁 속에서 태아(胎兒)로 생을 마감하는 인간 생명체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문제의식은 생명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경시하는 현대인들의 문명(의술)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신의 자리가 여자의 자궁에서 메스로 도려졌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여 독자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십자 틀에 묶인 창백한 여자의 손과 발. 신의 자리가 여자의 자궁에서 메스로 도려졌다. 잉태를 꿈꾼 적 없는 밤의 동굴을 지나 자목련 벽에 콩나물 대가리가 위란강을 건너 딸깍 앉았던 곳. 그 문은 철문보다 단단해서 한 달에 한번만 문을 연다는데, 손발 묶인 그녀의 문으로 쏟아져 내렸던 스륵스륵 기계소리 덩이 피. 그런 날이면 하늘의 신들은 눈을 감았다. 뒷골목 허름한 이층집에서 그렇게 별들은 하나씩 떨어졌다. 감나무 가려진 감잎 쓰린 맛을 탓하지 마라. 태씨 아주머니는 감잎으로 별을 하나씩 감싸서 마을버스에 태워 보냈다. 별 무리 지는 강물 위로//--「별 무리 지는 강물」전문 *위란강 : 수정막과 난표면과의 사이 이 외에도 동백꽃의 모가지가 떨어져 내리는 안타까움을 하이퍼시의 구성으로 드러낸「찰라-여수에서」, 해안에서 자살한 시신들이 새벽마다 떠온다는 인천 무의도 명사길의 시신들에게 “무에 그리 서러워 무의도까지 버린 발로 떠왔느냐고 이제는 편히 가라”고. 위무의 마음을 전하는「무의도, 감은 눈에게」등이 생명존중의 시편들로 인상에 남는다. 나.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의 시편들   21세기에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태어난 하이퍼시는 서로 다른 이미지의 단편을 결합하여 하나의 큰 이미지를 구성하는 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을 바탕으로 기승전결로 연결되는 기존시(旣存詩)의 아날로그(analog)적인 구성의 시와 대조되는 이미지의 망(網)을 형성하는 디지털(digital)적인 새로운 시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시형식을 해체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과 결합을 기본으로 하는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하이퍼시는 기존시들의 설득적 구조에서 벗어나서 ‘이미지의 보여주기(showing)’를 통해서 독자와 소통하고자 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시론은 현대철학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와 질 들뤼즈(Gilles, Deleuze)의 리좀(Rhizome)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현대적인 시론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하이퍼시는 21세기 최첨단의 사유와 철학이 만들어낸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새를 낳는 사람들」에서도 시의 구성에서 서술형식의 기존 시와는 다른 이미지들의 결합이 빚어내는 입체적인 시의 공간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환상과 현실이 교직(交織)된 심리적 현실의 보여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그녀는 천상에서/물고기 비늘 반짝이는 시간을/한 국자 떠서/끝나버린 영화 스크린을 클릭하고 싶었을지도 몰라”로 시작되는 #1은 심리적인 내면의 환상의 세계로, “기억의 방에 26 년 숨겨둔 여인을 태우고/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50대 사내”가 등장하는 #2는 현실의 의식세계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1의 “경주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찰랑이는 금관/자궁 안에 태胎모양, 옥빛 관옥/유리 기억들”은 “가시 구슬을 두고 간 그녀/한 톨의 마음”이 안고 있는 이승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사물 이미지로 표출한 시적 몽타주로 이해된다. 그리고 “버림받았던 기억의 뼈들이/들꽃으로 하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는 구절에서 50대의 사내와 천상의 그녀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심리적 갈등의 앙금이 이 시의 내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감지된다. 그것은 시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이 서사구조의 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이렇게 이해할 때, 이 시와 기존의 서술형식의 시가 얼마나 다른 차원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사물인터넷의 4차 산업혁명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된다.   #1/그녀는 천상에서/물고기 비늘 반짝이는 시간을/한 국자 떠서/끝나버린 영화 스크린을 클릭하고 싶었을지도 몰라/가시 구슬을 두고 간 그녀/한 톨의 마음//경주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찰랑이는 금관/자궁 안에 태胎모양, 옥빛 관옥 /유리 기억들//영사기는 더 이상 돌지 않았다//#2/기억의 방에 26 년 숨겨둔 여인을 태우고/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50대 사내/돌아온 꽃잎이/“아앙 아아앙......”/십 수 년 전 무지갯빛 사진 스크린을/애교 띤 콧소리로 더듬어도/버림받았던 기억의 뼈들이/들꽃으로 하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푸른 달무리에 깨물렸던 한 톨 구슬/새를 낳는 사람들//--「새를 낳는 사람들」전문 「스마트폰의 하루」에서도 (F.I), (F.O) 등 영화의 기법을 넣어서 스마트 폰에서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면들이 이미지들의 연상과 결합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새로운 감각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정신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스마트 폰의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강아지소리, 새소리, 임진왜란 때의 조총소리, 금당벽화를 그려내던 담징의 손끝에 앉았던 나비 등으로 이어지는 불연속적인 단편(斷片)의 이미지들은 모사(模寫)된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그 가상이 실재같이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원본 없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로 둔갑한다는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이론과 연결된다. 그는『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실재의 왜곡→이미지 자체로의 독립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시에서 시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된다. 독자들은 시인이 우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현대문명의 현상을 나름대로 즐기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F.I)//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까만 네모 화면에서/졸라대는 애인처럼/ㄷㄹㄷㄹㄷㄹ 강아지 소리/ㅋㅌㅋㅌㅋㅌ 날개 없는 새소리/임진왜란 때 거북선에 날아오던/ㅁㅁㅁㅋㅋㅋ/ㅋㅌㅋㅌㅋㅌ/내 귓바퀴에 쏘아대는 조총소리/ㅅㅅㅅㅅㅅ허공에 날개 짓을 한다//(O.L)//금당벽화를 그려내던 담징의 마지막 손 끝에/앉았던 나비의 날개마저 포르르 떨린다/책장 넘기는 소리에 너 울리는 줄 몰랐으니/하얀 꽃잎 하나 떨어진다//고구려 벽화에서 살며시 날아 나온 나비 한 마리/내 손바닥 까만 네모 상자 안으로/화살처럼 들어와 박힌다//(F.O)//송골송골 담징의 이마에 맺혔던 까만 밤/화룡정점의 순간에도/눈을 껌벅이는 불면의 아우성//--「스마트폰의 하루」전문 「이즈하라항의 달빛」은 기행시로서 하이퍼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덕혜옹주, 최익현 등 대마도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이 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런 역사의식과 함께 쓰시마 사내와 연관되는 성적인 이미지가 들어 있다. 그래서 그 두 개의 이미지가 하이퍼적인 구조 속에서 시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것이 기행시로서 시의 맛을 풍기고 독자와 소통하는 시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즈하라항에 보슬비 내린다/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밤이면/성큼성큼 박수소리처럼/노를 저어오던 쓰시마 사내들//이즈하라항에 검은 가오리날개 매 한 마리/날아간다/바다를 유리창 가득 담은/회전초밥집에서 뜨거운 대마도 한잔을 붓는다//덕혜옹주도 낙선재로 돌아가고/최익현도 잠든 밤/검은 파도 소리에/목이 아프도록 시린/ 대마도 하루 빌린 내방엔 밤새/불을 끄지 못했다//수밀도 무성한 숲에/창호지를 찢고 쳐들어오는 쓰시마 팔뚝 달빛/찔레꽃 하얀 내 가랑이도 아팠다// ---「이즈하라항의 달빛」전문 * 이즈하라항: 일본 대마도 남단에 있는 항구 이름 「하얀 지평 너머」는 세 가지의 형태로 응집되어 있는 죽음의 정서가 서사적 모듈(module)을 형성하면서 울림을 준다. 중동건설 현장에서 죽은 아들의 배냇저고리를 가슴에 품고 우는 늙은 어머니, 중동의 어느 도시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울부짖는 히잡 여인들의 실성한 모습, 어느 장례식장의 시계소리에서 시신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시선이 그것이다. 끝 부분의 “하얀 나비들이 포르르 폴 포르르 상화고택을 나선 6월 달구벌 팔공산 한낮.”이라는 이미지가 엉뚱한 듯하지만 '하얀 나비‘와 죽음을 연결하면 현실과 초월이라는 두 세계의 결합이 보인다. 1.옥양목 보자기에 싸인 배냇저고리, 하얀 기억을 꺼낸다/낡은 옷장 서랍에서 아기작거리듯 배냇저고리,/귀밑머리 하얀 그녀는 보자기 풀어 흰빛 먼지를 쓰다듬는다/중동으로 떠난 아들, 그녀는 흰옷 갈아입고 열린 서랍 배냇저고리 품고 울다 웃는다//2.6 ‧ 25 동란, 폭탄에 으깨진 건물더미, 철근덩이, 찢진 유리 파편들/길바닥에서 언덕배기 카키색 천막 아래/피 절은 천에 덮여 씌운 시신들./하얀 천 들춰보며 울부짖는 여자들 울음소리/“ 아이고, 이것이, 아이고, 우리 복덩이, 복뎅이는 여기에 없어야재 ”/실성한 어미들의 꺼억꺼억 오열, 시신이 널브러진 언덕빼기가/목화구름처럼 아침 화면을 가득 덮었다//3.장례식장 시계소리가 달랑거리는 동안 시신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검버섯마저 하얗게 눈부신 순간을 나는 본다/알코올 솜으로 삭신을 닦아내는 손놀림이 바쁘다 /살아생전 소원까지 닦아내며 염殮하는걸까//하얀 나비들이 포르르 폴 포르르 상화고택을 나선 6월 달구벌 팔공산 한낮.// ------「하얀 지평 너머」전문 * 상화고택 : 대구시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 시인(1901~1943)의 옛집. 이 외에도 도쿄여행기-황거, 하비야공원, 도쿄역 등의 이미지를 하이퍼(hyper) 적의 구성으로 조합한「도쿄일기」, 신라여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던 전죽소리, 비닐이 묻힌 땅에서도 죽음을 뚫고 나오는 파릇파릇한 생명의 소리, 월정사 길에서 듣는 산 속의 물소리 등 소리가 만들어 내는 의미를 세 가지의 감각적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는 「만파식적-소리가 만드는 세상」, 세월호의 비극적 상황을 하이퍼적 상상으로 엮은「바다에 촛불을 켜주세요」등 다수의 시편들이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로 기존의 시와는 다른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다,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룬 시편들 노자(老子)는『도덕경(道德經)』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도가 도라는 관념에 잡혀있으면 있으면 순수한 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시에도 해당된다. 시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생명의식의 시편들과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들과 함께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편들이 주목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에서 서정성은 기계속의 윤활유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에 서사(敍事) 속의 서정성(抒情性)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에는 조선왕조 시대에 영화로웠던 운현궁의 퇴락한 가을 정경이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져 있다. 시의 제목 ‘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라는 비유와 “운현궁 마당에/찰깍대는 외국인들의 셔터소리”의 서사가 시대적인 풍자성을 엿보게 하지만 “집주인은 햇빛 잘 드는 방에서/한 낮잠 잘 주무시고 계신걸까”라는 현실 초월의 서정적 여유로움이 이 시의 탄력성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것이 서사 속 서정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겨진 갈햇살이 운현궁 툇마루를 쪼고 있다//가슴이 이랑처럼 패인 여자의 가슴팍에/쏟아지는 햇살은 갯벌 달랑게 걸음이다//해바라기가 졸다간 햇살바라기,/퇴락한 왕조의 으깨진 갈색 노을빛에/꾸벅이는 행랑채//운현궁 마당에/찰칵대는 외국인들의 셔터소리/막아도막아도 넘쳐나는 논두렁처럼//집주인은 햇빛 잘 드는 방에서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계신걸까//주인 없는 툇마루에 걸린 놀/돌담을 넘어 오는 갈잎//-「돌담을 넘어 오는 달랑게」전문 「사북역」에서도 서사와 서정의 조화로움이 시의 맛과 멋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폐광을 보고 싶어 했지만 사북역에 내려 역사(驛舍)에 핀 들꽃만 가슴에 담는다. 그리고 “검은 가루 이야기에 묻은/노을 이야기”를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그 노을은 사자의 혀보다 붉은 노을이다. 그래서 그 들꽃과 붉은 노을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이글거리던 광부들의 분노와 희망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것이 이 시에서 서사와 서정이 만들어 내는 시적 울림의 공간이 되고 있다. 사북역에 내려 막차가 올 때까지/기찻길 서너 시간, 역사驛舍에 들꽃들만 가슴에 담는다/폐광이라도 보고 싶다고 편지해 놓고//사자 혀보다 붉은 노을 기차에 가득 싣고/청량리역에 붉게 내려본 적 있는가//낮은 땅, /석탄가루 소주와 돼지고기로 씻어낸 검은 가루 이야기에 묻은/노을 이야기//-「사북역」전문 「유카리나무」에는 시인이 호주 시드니 파크의 유카리나무를 보고 느낀 시적 감성이 “Y字, Y에서 Y ....../Y에서 또 포크처럼 Y ....../Y자가 끝말잇기를 하며 뻗어있다”라는 개성적인 언어에 담겨 있다. 일종의 언어유희 같지만 “파란 하늘에 회백색 Y자마다 바람 스치자/술 취한 화가는 온통 연초록 물감을 쏟았다”고 술 취한 화가를 등장시켜 서정적 풍광을 연출하고 있으며, 나무의 푸른 정액과 여자를 연결하여 성적인 감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호주 시드니 올림픽 파크/분홍 플라스틱 포크 하나/잔디에 비스듬히 꽂혀있다/백 미터, 키 재기하는 유카리나무들/회백색 수피樹皮는 무우의 맨살처럼/Y字, Y에서 Y ....../Y에서 또 포크처럼 Y ....../Y자가 끝말잇기를 하며 뻗어있다//파란 하늘에 회백색 Y자마다 바람 스치자/술 취한 화가는 온통 연초록 물감을 쏟았다//연두 빛 유카리나뭇잎 단추들 닥지닥지/나무 위에선 오물오물/검은 귀 흰 몸 코알라가 유카리나무의 푸른/정액을 씹고 있다/지나가던 여자가 분홍 포크로 나뭇잎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그녀의 입안에 푸른 물 고였다/칼로 잘라낸 돼지고지 한 조각/유카리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빛 밝은 한나절//-「유카리나무」전문 이외에도 이승과 저승이 한 매듭이라는 것을 드러낸 「통영점묘-매물도」, 감자탕 골목풍경을 사유의 언어와 결합한 「감자」, 화가 이중섭에 대한 연민과 사유가 담긴 「그의 草家」등 다수의 시편들이 주목되었다. 3. 나가는 글 이제까지 강소이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새를 낳는 사람들』에 실려 있는 66편의 시편들의 전체를 조감(鳥瞰)하면서 관심이 가는 시편들을 선택해서 가. 현대문명에 대응하는 생명의식의 시편들, 나. 현실과 상상이 융합된 하이퍼시의 시편들, 다.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룬 시편들이라는 세 가지의 관점에서 감상의 시선으로 해설을 했다. 66편의 시편들 중에서 집중 조명된 시편들은 10편에 불과해서 더 좋은 시편들이 외면당한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의 마음이 든다. 그러나 선택된 시편들이 이 시집의 중심에 서 있는 시편들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21세기의 중심은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무인자동차, 5g 스마트폰’ 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명의 구조가 지배하는 시대환경이다. 그래서 그런 시대의 환경에 대응하여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탄생된 ‘하이퍼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몰입을 보여주고 있는 강소이 시인의 시편들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중심의 문명(culture)이 만들어낸 가치판단 속에서 소외된 생명체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과 문제의식을 비롯하여 인간정신의 원적지 훼손에 대한 지적(指摘)이 담긴 시편들이 먼저 선정된 것은 그 시편들에는 시의 형식적인 면보다 더 중요한 ‘시의 영원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정과 서사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시적 감성의 탄력성과 함께 시의 맛과 멋을 내포하고 있는 일련의 시편들이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감각과 기법도 중요하지만 시의 근원은 서정성과 서사성의 조화로움에 있기 때문이다. 강소이 시인의 시편에서는 현대시의 이런 중심점이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이 시집의 시편들이 시적 균형(均衡)을 아름답게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강소이 시인의 시에 대한 애정과 정진이 얼마나 치열하였나를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21세기에 등단한 시인으로서 현대시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강소이 시인의 사유와 감각이 빚어낼 시편들의 새로운 변모와 발전이 기대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시집의 해설을 줄인다.
63    최성철 시집 해설 댓글:  조회:1164  추천:0  2019-12-14
최성철 시집 해설 도시인의 고독한 내면의식을 담은 모더니즘의 언어                                                                 심 상 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최성철 시인은 1975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한 중견시인이다. 그는 20대의 대학생 시절에 등단하여 1976년 3월에 발간된『시문학』출신들의 첫 사화집『환한 대낮』에도 참여한 바 있다. 그는 등단 후 개인사 때문에 적극적인 활동을 유보해 왔지만 2002년에 시집 『간이역에 머무는 아픔』을 발간하고, 본격적인 시작활동의 결과물로『도시의 북쪽』을 상재하고 있다. 이 시집의 서문「찬란한 자줏빛」은 그의 시세계로 들어가는 안내문의 역할을 한다. 이 짧은 산문은 그가 왜 도시를 자기 시의 중심에 두고 있는지. 그가 지향하는 이상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한다. 그리고 시집의 제목 『도시의 북쪽』이 상징하는 그의 정신의 고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는 이 글에서 ‘도시의 시’를 쓰게 된 이유를 “도시와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면서 “아무 말 없이 각자 자기 표정을 가지고 총총히 제 갈 길로 사라지는 작은 도시인들의 모습도 좋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도시인을 “행복한 난쟁이”라고 한다. 이런 그의 낭만적인 감성의 시선은 그의 시가 도시를 시의 대상으로 하면서도 도시인들의 환경문제나 생존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도시인 또는 자신의 고독한 존재의 모습을 그리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시는 외부적인 현실보다 개인적인 내면의 세계에 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가 독자들에게 어떤 관념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낭만적 감성의 빛깔로 채색된 자신의 내면세계를 서술만이 아닌 모더니즘의 언어 이미지(가상현실, 사물 이미지의 집합)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이런 그의 시에 대해서 시를 도구로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은 그들의 편향된 시론으로, 시를 종교적인 입장에서 인식하고자하는 이들은 그 나름의 시각으로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유혹에 끌려가지 않고 시를 순수한 감성의 언어표출이라는 입장에서 자기 시의 영역을 30여년 지켜온 그의 순수한 시관(詩觀)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순수시관은 시를 어떤 관념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예술적인 존재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시집 『도시의 북쪽』에 담긴 87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도시를 자기 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그가 정신적으로 단단한 성벽처럼 의지하고 있는 ‘고독’의 근원을 찾아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는 한적한 시골보다 각종 소음과 사람들로 분비는 도시에서 더 절실하게 고독한 존재의 모습과 대면하게 되고, 그 내면의 실체를 고향처럼 인식하면서 물을 만난 물고기같이 그 속으로 침잠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도시인의 고독한 내면의식을 담은 모더니즘의 언어’라고 붙여 본 것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내면의식의 표출과 이미지의 환상적 결합 이 시집의 구성은 4부 (Ⅰ. 오십 너머 마신 술 Ⅱ. 가을을 지나 겨울 속으로 Ⅲ. 담장에 그린 그림 Ⅳ. 내 마음의 놀이터)로 분류되어 있다. 그 분류의 방법은 시의 형식이 아닌 내용에 의한 분류다. 먼저 「사람들은 금요일마다 술을 마신다」를 읽어 보자. 무너지는 서류더미 속에서 오후 내내/인생의 로드맵을 만들고, 또 파쇄기에 넣는다/어느덧 석양은 안개처럼 번지고/전동차는 여전히 소음 속으로 떠나고/어둠은 언제나 뒤척이다가 나타난다/멀리서 사람들이 돌아온다/어둠을 헤치며 흔들흔들 온다/불빛 희미한 사거리/휘청거리는 신호등이 길을 가로막는다/시계는 매번 정각을 맞추려고 숨을 죽이고/일단의 사람들이 폭탄처럼 몰려서서는/무의미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펄럭이는 자동차 불빛 앞에 /몇몇 남은 사람들은/손에 쥔 가방을 구겨버리며 술을 꺼내 마신다/쓱쓱 지우고 싶은 하루/그 금요일마다 사람들은 제 가슴을 열고/몰래 숨겨 놓은 술을 꺼내 마신다//-「사람들은 금요일마다 술을 마신다」전문 이 시 속에는 도시 직장인들의 삶의 현장이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연결되어 있다. 서술보다는 묘사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독자들의 시선을 당긴다. 그 중심 이미지는 “어둠은 언제나 뒤척이다가 나타난다” “휘청거리는 신호등이 길을 가로막는다/시계는 매번 정각을 맞추려고 숨을 죽이고” 등 명사+동사 또는 동사+명사 형태의 동적 이미지다. 다방면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이 동적 이미지들은 집합적 결합을 통해서 퇴근 시간의 도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의 화자도 그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이지만 그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서 객관적인 위치에서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금요일마다 제 가슴을 열고 몰래 숨겨 놓은 술을 꺼내 마시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밀실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탄생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밀실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태아를 보호하는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원초적인 생명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안과 초조, 정신적 스트레스에 지친 도시인들은 술을 마시고, 그 공간 속으로 잠수하려고 하는 것이다.「새벽의 빛」은 그 속에서 새롭게 탄생하고자 하는 시인(화자)의 무의식 속 자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새벽마다 나를 깨우는 이 누구인가/창문을 두드리는 이 누구인가/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안개꽃처럼 번져오면/땅에서 시작된 어둠은 /다시 땅으로 사라지고/하늘이 열리고 빛이 내려온다//적막하여 외롭게 서 있는 지평선/드리워진 휘장을 서서히 걷으며/바람도 움직이지 않고/구름도 그 흐름을 멈춘 이 새벽에/저기서 다가오는 이 누구인가/눈부신 손을 내미는 이 누구인가//-「새벽의 빛」전문 “새벽마다 나를 깨우는 이 누구인가” 는 이 시의 화두다. 새벽마다 눈부신 손을 내미는 그 존재는 시인의 무의식 속의 모성(어머니)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자아의 존재다.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한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년 ~ 1981년)은 무의식 속의 자아는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끌고 통제하는 타자(他者)라고 한다. 따라서 그 타자는 본래적 자아의 은유나 환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 온 뒤」에는 그 본래적 자아가 하얗게 발가벗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산을 접고 양지로 나오는 사람들/모두 눅눅했던 제 그림자를 벗고/환하게 피어나는 햇살을 만나러 간다/하늘은 이제 파랗게/나뭇잎에 걸린 물방울을 타고/지상으로 내려온다//그래서 세상은 하늘에서 온 도시/잔잔한 연못 속으로 지하철이 달리고/새소리, 바람소리 직조한 옷을 입으면/사람들은 차가운 분수에 못이 박힌 발을 씻고/마음속에 퇴적한 어둠을 털어낸다/다 보인다, 비 온 뒤에는/건널목을 지나가는 사람들/하얗게 발가벗은 모습이/무지개 틈새로 환히 다 보인다//-「비 온 뒤」전문 비 온 뒤 먼지가 다 빗물에 씻긴 세상은 “하늘에서 온 도시/잔잔한 연못 속으로 지하철이 달리”는 동화 속의 나라를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건널목을 지나가는 사람들/하얗게 발가벗은 모습이/무지개 틈새로 환히 다 보인다”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를 열어준다. 이런 시각의 열림이 이 시에서는 관념에서 벗어난 선명한 사물인식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2009년 겨울 독감」에는 시인의 내면의식의 환상적 이미지(가상현실)가 서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미지 속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영화의 화면처럼 나타난다. 등산용 지팡이로 땅을 딛으며/어머니가 나타나셨다/어깨에 비스듬히 손가방을 둘러메고/어머니가 나타나셨다/오른쪽 눈 실명, 왼쪽 눈 백내장/주변을 자꾸 둘러보며, 한 손을 저으며/행길을 건너오셨다/오늘따라 시청 앞 횡단보도가 매우 넓었다/나도 얼른 길을 건너 우리는 한복판에서 만났다/괜찮다, 괜찮아/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고/그래 감기는 좀 어떠냐/또 그렇게 말씀하셨다/괜찮어, 이제/나는 어머니 앞에서 기침을 할 수 없었다/어머니를 한쪽 품에 안고 길을 건너오면서/어깨뼈가 닭뼈처럼 손가락에 잡혀/너무나 면구스러웠다/찬 바람이 콧속에 스며들었으나/기침을 할 수 없었다/통장과 카드를 전해드리고/나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어머니는 또 평상시처럼 한 손을 저었다//-「2009년 겨울 독감」1연 겨울 날 시청 앞 횡단보도에서 만난 어머니. 오른쪽 눈 실명, 왼쪽 눈 백내장이지만 “괜찮다, 괜찮아” 하시는 어머니. “통장과 카드를 전해드리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평상시처럼 손을 젓는 어머니의 모습 속에는 시인의 절실한 그리움이 투영되어 있다. 어머니는 시인의 정신적 안식처로 인식된다. 나. 도시인의 고독한 서정과 낭만적 피안의식(彼岸意識)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의 시편의 중심은 도시인의 고독한 서정이다. 연작시 「지하철․1」은 그의 그런 모습을 새벽에 출근하는 회사원의 모습으로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새벽의 징검다리를 건너/발목이 시리게 푸른 공기를 마시며/나는 출근길을 나선다/밤새 잠을 설친 새들은 새까만 머리를 서로 비비다가/졸린 눈으로 제 부리를 제 가슴에 파묻고/길게 늘어진 전깃줄을 바람이 두어 번 흔들고 간다/붉은 보도를 가로막고 선 지하철역 입구/하얀 불빛에 가지런한 계단을 내려서면/알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에 밀려온다/아직은 다 깨어나지 못한 공간을 침묵만이 가득 메우고/희미한 전등불빛이 그 침묵더미를 조심스럽게 썰어간다/아무도 없다, 주변에는/항상 그렇게 살아왔다/바람 부는 날이나 비 오는 날이나/언제나 혼자였던 사람들/혼자라는 것에 이제 익숙해져서/외로울수록 편안해지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빛나는 어둠이 수북이 쌓인 철로를 보며/나는 잠시 가방을 내려놓는다/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철로를 우우 구르며/바람과 같이 전동차가 나타날 것이다-「지하철․1」전문 심경토로가 들어있지만 사실적인 이미지가 더 가슴에 닿는다. 새벽에 출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밤잠을 설친 새들의 모습과 병치시킨 앞부분의 정경은 도시인들의 삶이 얼마나 각박하고 피곤한 것인가를 사물의 이미지로 전한다. 그리고 끝부분 “빛나는 어둠이 수북이 쌓인 철로를 보며/나는 잠시 가방을 내려놓는다/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철로를 우우 구르며/바람과 같이 전동차가 나타날 것이다”에서는 도시인들의 삶은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순응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화자의 ‘빛나는 어둠’이라는 역설이 도시인의 고독한 삶을 표현하는 언어로서 신선한 감각과 함께 내면적 슬픔을 남긴다. 그러나 고독감이 내면적 슬픔이라고 하여도 시인은 고독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고독의 각질 속에 들어가서 자신만의 낭만적 우주감각을 느끼고자 한다.「항아리 斷想」은 그의 그런 내면세계를 순수한 모더니즘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밤은 깊고 깊은 항아리/가도 가도 끝이 없는 우주가 /그 안에 천천히 내려온다/오늘 밤 별들은 /항아리 가득 부어진 물에 풀어져/한 그림 속 조용한 빛을 이룬다/그 안에선 모두가 정지해 있다/바람이 분다 해도/흔들리는 것은 오로지 바람일 뿐/무슨 상관이 있을 수 없다,/ 서로 간에/편안한 항아리 속/단단히 여문 침묵만이 제 그림자를 안고 서 있다//부동의 항아리 속/별빛들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한다/별빛들이 일어설 때마다/그 빈자리를 어둠이 메워간다/나뭇잎들이 떨어져 은은히 쌓이듯이/어둠은 제 몸을 쌓아 빛의 자리를 천천히 메우며/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견고한 안식을 다져나간다/빛의 흔적은 모두 지워지기 시작한다/물어보라, 무슨 미련들이 아직 남아 있는 건지/다 가지고 가거나, 다 놓고 가거나//이제부터는 이 단단한 공간에/모든 것은 오로지 태초의 제 모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내 숨소리가 천천히 내 눈을 덮는다//-「항아리 斷想」전문 이 시에서 밤, 항아리, 별, 빛, 바람 등의 언어들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벗어나서 시인의 고독한 세계를 치장하는 기표(signifier 記票)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공간은 실제의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시인의 상상이 꾸며낸 가상공간이 된다. 그는 그 항아리의 단단한 공간 속에서 그에게 정신적인 “견고한 안식”의 자리를 다지게 하는 고독의 실체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태초의 제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아를 발견한다. 따라서 이 ‘항아리의 공간’은 선사(禪師)들이 본래적인 자아를 탐색하는 선(禪)의 공간과 통한다. 이 가상공간의 본질적인 풍경은「도시의 북쪽」에서 낭만적인 동영상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단풍은 아름다웠다/차를 한참 달려서 이제는/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 찬 숲길/하얀 빛 한 줄기 나무 틈을 밀며/힘겹게 들어오고 있었다/피치 파인이라고 부르는 리기다소나무들은/떼를 지어 하늘을 막고 서서/바람이 불 때마다 탬버린 소리를 냈다/그중에는 키다리 더글러스소나무도 있는 것 같았다/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나를 에워싼 나뭇잎들은 모두 황금빛 왕관을 쓰고/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햇살들은 바람을 타고 내려와/뽀얀 분홍빛에서 찬란한 자줏빛으로/다시 뽀얀 분홍빛으로 변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길을 달리며 나는 그런 색깔로 물들어 갔다//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수십 년 전에 헤어진 동네 꼬마친구가/길옆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나는 황급히 차를 세웠으나//그 아이는 온 데 간 데 없었다/아아, 이름이 뭐였더라,/그곳에는 한 무더기 코스모스만이 흐드러지고 있었다//-「도시의 북쪽」1,2,3연 승용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이 시의 세부를 형성하는 사건들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적 체험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이 시에서는 시인의 상상, 감성, 정서, 무의식 등에 의해 재구성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가상현실(假想現實) 속의 사건이 된다. 가상현실 속에는 물리적 가능성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판타지(fantasy)의 영상도 들어갈 수 있다. 시인은 차를 타고 도시의 북쪽으로 달려간다. 도시의 북쪽에는 아름다운 단풍이 있고, 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 찬 숲길엔 하얀 빛 한 줄기 나무 틈을 밀며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탬버린 소리가 난다. 그는 그런 세계의 풍경을 “나뭇잎들은 모두 황금빛 왕관을 쓰고/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라고, 또 길을 달리면 “수십 년 전에 헤어진 동네 꼬마친구가/길옆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라고 동화적인 낭만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인용된 시만으로도 ‘도시의 북쪽’이 시인(화자)의 정신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시의 화자가 왜 도시의 북쪽으로 여행을 떠나는지를 알게 한다. 그곳은 시인이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또는 우주의 어둠으로부터 떠나온, 그래서 시인의 무의식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피안(彼岸)을 상징하는 이상향의 도시라고 유추되기 때문이다. 이 시의 끝부분, 돌아오는 차 안 그의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찬란한 자줏빛 외투를 입은 어둠 하나” 는 시인이 갈구하는 이상향의 분위기와 빛깔을 암시하고 있다.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돌아갈 곳을 찾지 못했다//차의 머리를 돌렸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칠흑 같은 침묵을 헤치고 돌아오는 차 안 내 옆 좌석에는/찬란한 자줏빛 외투를 입은 어둠 하나가 /나를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나는 그의 외투에 파묻혀/그 찬란한 자줏빛으로 물들고 싶었다//-「도시의 북쪽」끝부분 다. 시람 사는 풍경의 시편들과 사물성의 감각 이제까지 이 시집의 시편들 중에서 낭만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본래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내용의 시편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다음은 시인의 시선이 외부로 돌려진 시편들이 그려내는 풍경을 본다. 그 외부의 시선 속에는 나와 남(타자)의 두 모습이 들어 있다. 그 둘은 시간과 공간의 틀(frame) 속에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서로 일정한 거리에서 각자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독자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다. 그것이 시인의 고독감이 그려내는 도시의 풍경이다. 먼저 연작시 「사람 사는 풍경․1」을 읽어보자. 수서로 가는 전동차가 막 떠났다/먼지 섞인 바람이 가슴 가득 밀려오고/나는 낡은 나무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는다/잠시 갈라졌던 공간이 다시 이어지면/건너편 플랫폼에 서 있던 한 여자가/우연히 나를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고/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서로 모르는 사람일 뿐/태연스러운 서성임만이/그 여자와 나를 말없이 오갈 뿐/다시 적막감이 이곳을 휘감고 나면/침묵만 한가득 내려쌓이고/잠시 후 전동차가 이 침묵을 깨며 달려와/우리의 공간을 갈라놓으면/우리는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어느 역, 어느 시간에 다시 만나도/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일 뿐/저 건너편 낯선 공간에 서 있는/희미한 그림자들일 뿐-「사람 사는 풍경․1」전문 수서로 가는 전동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나’는 영원히 모르는 사람으로 끝나고 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매개도 없다. 시인은 그 여자와 나의 소통에 대한 어떤 상상도 시 속에 넣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후 전동차가 이 침묵을 깨며 달려와/우리의 공간을 갈라놓으면/우리는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어느 역, 어느 시간에 다시 만나도/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태도는 인연(因緣)을 시의 근원으로 삼는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시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시라고 판단하게 한다. 그것은 이 시가 이성적인 모더니즘의 과학적 태도에 가깝기 때문이다.「사람 사는 풍경․3」에서도 그런 시인의 자세는 변하지 않는다. 농협 양재동 마트에는/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늦은 밤에도 상품 진열대 사이로/손수레를 밀고 당기며/어린 새댁은 이미 잠을 설쳤고/어쩌다 낯익은 얼굴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밤새도록 밀양에서 올라온 단감은/진열대 위에서 졸고/어제 따온 사과는/종이상자 속에서 익어간다/계산대 앞에 줄 이은 사람들이/각자의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리고/지불을 마친 사람들은/하나 둘씩 빠져 나가는데/내 앞 손수레 안에는/한 아이가 잠들어 있다//-「사람 사는 풍경․3」전문 시인의 눈은 농협 양재동 마트의 풍경을 카메라의 렌즈처럼 객관적으로 촬영하고 있다. 그래서 진열대의 단감, 종이 상자 속의 사과, 계산대에 줄지은 사람들, 손수레 안에 잠든 아이들은 각자의 표정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냉정한 시선은 그의 시편들이 대상에 대해 어떤 간섭(판단, 주장)도 배제된 영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념에 시달려온 독자들에게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 감각은 독자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는 사물성의 감각이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은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사람 사는 풍경․5」는 위에 인용한 시편들에 비해서 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밝은 풍경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시인(화자)은 철저하게 관찰자 또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풍경을 촬영하여 보여주고 있다. 큰 수족관 앞에서/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선 계집아이 둘이/수족관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한참 보다가 갑자기 한 아이가/허리를 잡고 깔깔깔 웃었다/웃음소리에 놀란 듯 지나가던 여자가/수족관 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가던 길을 다시 가고 있다/나는 걸음을 멈추고 수족관으로 다가갔다/계집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수족관 안에는 커다란 열대어들만 오가고 있다//-「사람 사는 풍경․5」전문 3. 나가는 글 이제까지 최성철 시인의 시집 『도시의 북쪽』에 담겨 있는 87편의 시편들을 읽어보고 나름대로 해설을 하였다. 이 해설은 이 시집의 전체 시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인용된 시편들은 해설자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 의해서 선택된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해설자의 편협한 시선에 의한 해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중심의 줄기는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성철 시인만의 독특한 색채의 내면세계, 고독한 자아의 눈으로 대상을 응시하는 냉정한 자세, 자신의 관념을 순수한 사물 이미지로 표출하고 뒤에 침묵의 여백을 남기는 기법 등을 접하게 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런 그의 세계는 새로운 창조적인 세계와는 대칭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독자들과 호흡을 함께하고 그들의 사유를 자유롭게 하는 시의 공간을 열어준다. 필자는 그의 시가 앞으로 더 단단히 자기의 세계를 구축해서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김현승(金顯承) 시인의 ‘절대의 고독’에 비견될 수 있는 ‘도시인의 고독’의 세계를 확고하게 형성할 것을 기대하면서 글을 줄인다.
62    허순행 시집해설 댓글:  조회:987  추천:0  2019-12-14
허순행 시집해설   내면세계가 펼쳐놓은 감각적 기표의 별무리                                                                        심상운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말   허순행 시인의 첫 시집『꽃잎만 붉다』에 담긴 60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시속에서 무수히 탄생하고 움직이는 무의식(無意識) 속 환상(幻想)의 이미지들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미지들은 이미지로서 감지될 뿐 어떤 의미를 붙여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허순행 시인의 시편들 중 하이퍼시(hyperpoetry)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시편들을 비롯해서 다수의 시편들의 이미지가 기의(signified)보다는 현실적 사실에서 이탈하여 행위하고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의식의 세계 속의 기표(signifiant)로 인식되었고, 그 기표의 이미지 덩이들이 시의 속살을 뜨겁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궁극을‘언어의 예술’이라고 할 때 그의 시가 차지할 자리는 더 확실해진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시를 열고 감상하는 시론(詩論)의 근거와 키(key)를 문덕수 시인의 시론「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과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1915년~1980년)의『S/Z』(1970)에서 찾아보았다. 문덕수 시인은「내면세계의 미학」에서 “외면 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의 차이를 의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식의 구조’ 와 ‘무의식의 구조’로 구분될 것이다. 외면세계의 대상에 의존했던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말하자면 의식의 구조의 산물이었지, 무의식의 구조의 산물은 아니었다. 물론 내면세계의 시라 할지라도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통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광활한 영역이 의식의 기초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아나키즘(anarchism)적 성격을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 내면세계에 관한 시론은 무의식의 영역을 1960년대 한국현대시(韓國現代詩)의 새로운 영역으로 도입(導入)하고자 한 매우 혁신적(革新的)이고 개방된 시론으로 인식되고 평가되고 있다. 1960년대의 구조주의(構造主義)에서 탈피한 롤랑 바르트는『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text,글, 책)에 대해“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들의 구조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에서‘기표들의 별무리’라는 말은 현대시는 기의(의미)에 구속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무의미시(無意味詩) 또는 기호시(記號詩)의 탄생을 선언(宣言)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의 선언 속에는 시에서 ‘진리나 실재’에 대해 기존 관념을 위압적으로 강요하는 전통언어에 대한 반발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消費者)에서 생산자(生産者)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있다. 그래서 위의 두 전위적(前衛的) 시론은 허순행의 시편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바탕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함께 허순행의 시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감지하게 하는 것은 그의 감성이 뜨겁게 흐르는 서사(敍事)와 감각적 표현이다. 그가 즐겨 활용하는 활유(活喩 personification)와 무의식 속에서 분출하는 성적(性的) 이미지의 환유(換喩)는 그의 시를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물성의 에너지가 되어 독자들에게 시적 긴장감, 감각적 충격,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활력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집 해설의 표제를‘내면세계가 펼쳐놓은 감각적 기표의 별무리’라고 명명(命名)한 근거도 거기에 있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의 시   허순행 시에서는 환상적이고 서사적인 이미지, 성적감각(性的感覺)의 이미지와 그것의 바탕이 되는 생명의식(生命意識)이 사물처럼 만져진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외부적인 가치관(價値觀)이나 교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관념이 아닌 실제의 감각과 무의식의 흐름에 시의 원적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서 순수한 이미지는「귀뚜라미가 울고」라는 시로 알려진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년 - 1886년)의 회화적인 선명한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시에서 신선함과 놀라움을 주는 것은 시어의 감각적 결합이다. 그의 시에서 무생물을 동물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활유는 표현의 생동감, 정서의 상승, 시적 긴장감에 큰 효과를 내고 있다.   이 시집의 첫 시「보름달」에서는 그의 생동하는 감각적 표현을 통한‘무의식 속의 나의 발견’을 감지하게 된다. 1연의“밤이/제 살에 묻은 달빛 뜯어내고/언덕 아래 숨었어요”에서는 밤의 활유가 일으키는 신선한 동물적 상상을 느끼게 된다. 2연의 말과 거울과 애(아이)의 이미지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 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학자)의 상상계⟶상징계의 구조로 해석의 실마리를 잡아보게 된다. “말이 입술에 닿자 그 애는 거울 뒤를 살피기 시작했어요/제 얼굴과 나누던 입맞춤도 사라졌어요”는 거울(상상)의 세계에서 언어(상징)의 세계로 이동하는 아이의 성장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3연의 “그러나 죽어서 거울 앞으로 왔어요/뼈마디 앙상한 거울이 그 여자를 들여다봐요”는 어릴 적 상상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표현으로 유추되고, 4연의 “벌거벗고 누워도/아랫도리가 춥지 않은 밤이예요”라는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행복한 의식을 감지하게 된다. 이 시에서 아이는 화자(시인)의 내면(무의식) 속의 아이로 인식된다.   밤이/제 살에 묻은 달빛 뜯어내고/언덕 아래 숨었어요//말이 입술에 닿자 그 애는 거울 뒤를 살피기 시작했어요/제 얼굴과 나누던 입맞춤도 사라졌어요/온갖 물상을 꺼내 손가락에 옮기고 제왕처럼 호령하던 졸병들 내다버렸어요/퍼즐 속에서 꺼낸 말이 그 애를 끌고 다녀요/조각 하나하나를 끼워 맞춰 입술 단정히 하고 높은 시렁 위에 올려놓은 말들이 그 애를 거느리기 시작했어요/종자처럼 말의 시중을 들었어요/어여쁜 그 애는//그러나 죽어서 거울 앞으로 왔어요/뼈마디 앙상한 거울이 그 여자를 들여다봐요/평생을 끌고 다녔던 그림자 받아들고 강물이 강물을 건너가요/보름달이 따라와서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를 쏟아요//벌거벗고 누워도 /아랫도리가 춥지 않은 밤이예요//-「보름달」전문   「꽃샘바람」은 이른 봄날 쌀쌀한 꽃샘바람을 여자로 비유해서 신선하고 놀라운 상상으로 독자들을 자극하면서 생명감이 출렁이는 소설적(小說的) 서사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언덕으로 올라간 여자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주정꾼을 만나자 사내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중략)여자의 얼굴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밤새도록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판을 적셨다”의 역동, 환상, 성적 이미지는 읽을수록 맛을 낸다. 호흡이 길고 사건이 중첩되는 장편 서사시의 가능성을 예지(豫知)하게 한다.   여자가 왔다// 머리는 갈기처럼 풀어졌고 메마른 얼굴에 버짐이 허옇게 피어있다 마을로 들어선 여자는 아이들이 노는 양지쪽에 끼어 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아이들이 까르르까르르 웃었고 이제 막 얼굴을 내민 꽃다지가 마른 숨을 토해냈다// 해가 설핏하게 기울자 여자는 갑자기 아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 흔들었다 놀라서 울어대는 아이의 목도리를 잡아채 멀리 던지고는 개울물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앙상한 맨발에 핏물이 돌았고 깔깔깔 웃어대는 귓볼이 붉었다 개울물에 비친 그 여자의 속살도 붉었다// (중략)다음 날, 산수유나무에서 그 여자의 혼백이 노랗게 피어났다//-「꽃샘바람」처음과 끝부분   「열사흘 달」도 생명의식을 바탕으로 한 무의식 속의 성적 이미지 속에 여자애들과 사내애들을 등장시켜 짧은 서사구조로 갈무리하면서 시적 감각을 뿜어내고 있다. “여자애들이 먼저 속옷을 벗는다 달빛은 그 애들의 맨몸을 뚫고 들어가 달덩이 하나 만들고 은색 실타래를 풀어 허기진 가슴을 채운다”.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에서 해방되어서 시인이 만들어 놓은 열사흘 달밤의 서사적 환상의 공간 속에 들어가서 놀고 느끼면 된다. 예술의 끝이 천진한 놀이라고 할 때 이 시의 자리는 확실해진다.   은사시나무 잎새들이 허연 정액을 쏟아낸다// 이런 밤,/ 여자애들이 먼저 속옷을 벗는다 달빛은 그 애들의 맨몸을 뚫고 들어가 달덩이 하나 만들고 은색 실타래를 풀어 허기진 가슴을 채운다 하얗게 날선 어둠이 젖어들기 시작하면 골목에선 웃자란 신음이 번지고 쓰레기더미 속에선 버려진 울음이 아기로 태어나기도 한다 사내애들은 휘파람을 불고 여자애들은 깔깔거리고 어둠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달빛이 더 높게 제 몸을 걸러내고 있다/ 소금밭보다도 더 낮게 몸을 웅크린 밤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이 귀를 털어내고 음모처럼 드리워진 어둠이 어둠을 껴안은 채 어둠 속으로 든다// 중천을 지나 서쪽 보리암 마당을 지나던 달이 땅바닥에 누운 제 몸에 입술을 대 본다 얕게 오르내리는 숨소리가 둥글다//-「열사흘 달」전문   「꽃잎만 붉다」에서는 4월의 이미지를 종아리에서 기어나 온 뱀 한 마리, 돌단풍의 붉은 혓바닥, 남자애의 허벅지를 적시는 붉은 물 등 시인의 내면적 생명의식이 무의식의 욕망으로 드러내는 기표의 무리들과 만나게 된다. 그 기표의 무리들은 외부세계의 어떤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시인 자신의 내부의식이며, 의미로 환원되기 어려운 감성의 환유(metonymy) 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의식은 인간의 숨은 욕망의 노출(露出)이라는 면에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길이 하루 종일 나를 끌고 다니다가 나무의자에 내려놓았을 때, 종아리에서 뱀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돌단풍이 붉은 혓바닥을 내밀어 목덜미를 애무하고 벚꽃은 흔들리며 흔들리며 땅 위에 눕고 己巳年에 태어난 나의 욕망은 제 다리에서 생겨난 돌단풍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등 뒤에 바짝 붙어 몸을 비벼대는 남자애의 아랫도리 사이로 붉은 물이 쏟아져서 허벅지를 적셔도 좋을 일// 낮잠을 깬 4월,/ 나무 그늘 아래로 천천히 멀어지는/ 낙타 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한데/ 도랑물 따라 떠내려가는/ 꽃잎만 붉다//-「꽃잎만 붉다」전문   이외에도 「그네」「장마」「사랑은」「빈집」에서 보여주는 선명한 사물성의 감각적 이미지의 시들은 허순행 시인을 서사적이며 역동적인 이미지즘(imagism)의 시인으로 평가하게 하는 근거가 될 것 같다.   나. 하이퍼(hyper) 구조의 시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인과적(因果的)인 시의 구조가 배제되고 이미지의 비순차(非順次)와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는 하이퍼 구조의 시편들은 독자들의 생각을 상상의 네트워크(network)로 퍼져나가게 함으로써 새로운 연결구조의 맛에 젖어들게 한다. 그러나 저자(著者)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이미지만으로 끝나는 하이퍼 시의 구조에서 당황하기도 한다. 허순행의 시에서 다선구조는 내면세계의 연상공간(聯想空間)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그의 무의식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세계이기도 하다.   「동백꽃」에서는 1연의 붉은 노을, 2연의 사내를 더듬는 형수, 3연의 동굴이 바다를 건너가는 이미지, 4연의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기억, 5연의 바람을 등에 지고 혼자 걸어가는 사막의 이미지, 5연의 흔적을 지우는 어둠, 6연의 여자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등의 단절적(斷絶的)인 이미지가 다선구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하이펴 시에서는 연을 단위라고도 한다) 이 다선구조는 시를 의미에서 벗어나서 감각과 감성으로 읽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동굴, 사막, 어둠 등이 의미하는 것은 독자의 유추와 상상과 시적 분위기에 맡기게 된다. 2연의“형수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더듬어요/빗줄기가 쏟아지는데/치마 속에서 빨갛게 눈뜨는 비린내”의 성적인 감흥(感興)은 빨갛게 피는 동백꽃에 대한 감각적 상상의 이미지를 통해 뿜어내는 시인의 내면의식의 발현(發現)으로 인식된다.   가지마다 붉은 노을 매달았어요//형수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더듬어요/빗줄기가 쏟아지는데/치마 속에서 빨갛게 눈뜨는 비린내//숨어있던 동굴이 어둠을 밀어내고/씻지도 않은 몸으로 바다를 건너가요//젖은 머리칼에서/허기진 기억들 흘러내려요//사막이 바람을 등에 지고 혼자 걸어가요/그림자도 없이 어둠은 흔적을 지워요//여자 몸에서/젖은 핏방울 뚝뚝 떨어져요//-「동백꽃」전문   「소나기」에서도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가 선명하다. 1연의 문을 두드리는 밤비 소리, 2연의 말안장에 앉아 채찍을 흔드는 사내, 3연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유월의 장미꽃, 4연의 사내의 꿈과 고시원의 1인용 침대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통해서 시 속에 극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그 효과는 인과적 연결에서는 드러낼 수 없는 시의 감각과 의미를 함축한다. 이 시에서 사막횡단의 꿈을 가진 사내와 유월의 장미꽃, 말안장에 앉아 세차게 채찍을 흔드는 사내와 그의 뒷그림자에 매달려 하루를 사는 여자, 밤마다 낙타를 끌고 사막으로 가는 사내와 1인용 침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미의 유추(類推)는 독자의 몫이 되어 독자가 의미의 생산자(生産者)가 되는 것이다. 주제의 다양성은 다선구조의 시가 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밤이 놀라 깬다/쏴하고 쏟아지는 비/시원한 바람 한 줄기 흐르고 베란다 문 열려 있어/순식간에 방안 젖어든다//말안장에 앉아 세차게 채찍을 흔드는 사내/빗줄기를 뚫고 서쪽으로 사라진 다음/여자들은 그의 뒷그림자에 매달려 하루를 산다/산을 넘어가는 저녁이 여자들 눈 속 들여다보다가/마음 적막해져서 어둠 속으로 드는데//유월이 장미꽃을 피워 울타리를 넘어 간다/햇살은 나무 그늘 아래 숨었다가 스커트가 짧은 허벅지에 붙어/스마트폰을 따라가고/엉덩이에서 튀어나온 말이 옷을 벗은 채 그 뒤를 따라 간다/그 애들의 시한은 200일/여름이 가기도 전에 기념잔치를 끝낸 사진이 울지도 않고 돌아서 간다//사막횡단이 꿈인 사내는/밤마다 낙타를 끌고 사막으로 간다/책상 위로 수북이 쌓이는 모래바람/1인용 침대가 고시원에 누워서 너덜너덜 늙어간다//-「소나기」전문   「석류」에도 하이퍼(hyper)시의 다선구조의 기법이 보인다. 1연의 한강다리에서 벌어지는 사내의 아랫도리 퍼포먼스(performance), 2연의 세헤라자데의 혀에서 돋아나는 붉은 꼬리, 3연의 간통 혐의의 여자 자하라의 검붉은 피, 4연의 한 낮의 태양의 흔적이 남은 석류의 붉은 속살 등의 이미지가 불연속적(不連續的)인 관계로 이어지면서 시인의 무의식(無意識)의 흐름을 엿보게 한다. 석류의 붉은 빛에서 연상되는 다채로운 성적(性的)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통일된 의미보다는 각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개별적인 가상현실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의미가 흥미를 끈다. 그리고 이미지들의 집합에서 발생하는 시의 총체적 효과에 관심을 갖게 한다.   보름달은 황갈색으로 변했고 *세헤라자데의 말이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때때로 혀에선 붉은 꼬리가 돋아나기도 한다 바람소리를 엿들은 왕들은 눈먼 소문을 찌르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별빛이 일곱 번이나 죽고도 살아난 바람을 나무에 매단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낮달이 환하게 눈을 뜨고 천 년 밖으로 도망갔던 발자국들이 검은 눈물을 훔쳐 달아나는데/밤새도록 모래바람이 불던 여자의 입술에서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들린다//*자하라가 건넨 테이프에서 늑대들이 기어나왔다 충혈된 음모가 말 속에서 똬리를 틀었다 컴컴하고 빠르게 자라난 혀끝에서 거짓말은 돌덩어리처럼 단단해지고 단단해진 거짓말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사내들은 사방에 눈알을 매달아놓고 돌아갔다 눈처럼 하얀 여자가 저녁노을을 끌어다가 제 주검을 덮었지만//-「석류」2,3연 *세헤라자데 :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실처럼 이야기를 풀어가는 여자, 아내에게 배신당한 왕에게 천일 동안 이야기를 들려준다.*자하라 : 간통 혐의를 씌워 아내를 돌로 쳐 죽이는 남자들을 고발한 영화 (더 스토닝)에 나오는 여자주인공   「살모사 또는 말(言)에 대한」에서도 하이퍼 시의 구조가 인식된다. 1연의 그 애의 거미줄에 걸린 말, 2연의 살모사를 묻던 10살 아이가 말의 포식자가 된 것, 3연의 사전 속의 살모사 4연의 바람 든 무를 버리려다가 보름달을 버렸다는 엉뚱한 생각 등이 각각 하이퍼 시의단위(unit)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인과적 논리의 시와 비교할 때, 이 시는 입체적인 시의 공간을 형성한 극적인 영상의 시로 읽히게 된다. 그 공간 속에는 엄마, 아이, 살모사, 보름달, 거미줄 등의 생동하는 이미지가 있다. 이 시에서 말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이미지 속에 암시(暗示)되어 있다.   내 말이 그 애의 거미줄에 걸렸다 끈끈하다/넘어가는 저녁노을이 목덜미에서 뜨겁다// “살모사를 알아? 엄마 ”/10살이 되던 조그만 입으로 종알거린 말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던 이후로 그 애는 포식자가 되었다 길고 차가운 포박 팽팽하다 밧줄은 두껍고 내 몸은 터질 듯하다 부풀어 오르는 말// 사전 속에는 굵은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 살모사 (살무사) : 몸빛은 엷은 회색이고 몸통의 측면에 암회색 얼룩무늬가 있으며 몸길이는 70㎝쯤 까치 살무사, 남도살무사, 독사, 殺母蛇 깔깔거리며 웃는 그 애의 입 속에서 속살이 꽉 찬 독사 한 마리가 기어 나온다 시린 바람이 내 몸을 휘감는다// 바람 든 무를 버리려다가 문득 중천에 걸린 보름달을 버렸다//-「살모사 또는 말(言)에 대한」전문   이 밖에도「우두커니 앉아 있는 날들은 」에서 보여주는 시간을 매개로 하여 나열하는 이미지의 다선구조, 아들과 아빠의 갈등과 화해를 희곡적(戱曲的)인 대화로 구성한 「내 몸을 떠난 별이 천년을 건너와서 네 발등에 닿는 다면」, 연의 순서를 바꾸어도 시가 구성되고 긴장감을 주는 「보이스피칭」등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으로 생각된다.   다. 서사적 구조와 가족의 이미지   허순행의 시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서사적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가족의 이미지다. 그의 시에서 강렬한 시적 생명력을 제공하고 있는 딸의 이미지, 갈등을 조성하면서도 끈끈한 연민의 끈으로 서로를 묶고 있는 아빠(남편)와 아들과 엄마의 이미지는 우주공간속의 암흑의 물질(dark matter)같이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기억 속에서 전쟁은」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의 기억이 서사의 구조 속에 생생한 이미지로 담겨있다. 그 기억은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의 이미지로 남아 60이 넘은 나이에도 꿈속에서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진땀을 흘리게 한다. 이 시속에는 얼굴이 까만 병사를 흠모하는 사촌언니,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머리칼을 자른 딸애가 등장하여 입체적(立體的)인 서사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아이들이 차올린 허공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가요 날개를 반짝이며 전투기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이불 속으로 숨어야 했어요 -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 이불 속은 가마솥처럼 뜨거웠어요 땀으로 범벅이 된 어둠 속에서 소리에 어두운 귀가 소리를 먼저 들어요//개들이 어슬렁거려요 주둥이에 핏물을 묻힌 채 시궁창을 뒤지기도 해요 사촌언니는 다락으로 숨어들어 얼굴이 까만 병사들을 흠모했어요 벼슬이 붉은 수탉이 뒤뚱거리며 허공을 쪼았어요 연두색 저고리에 엄마가 남기고 간 눈물 자국을 아이는 오래 오래 만져보았어요//-「기억 속에서 전쟁은」2,3연   「서쪽에서 달이 뜬 까닭은」에는 제삿날 죽은 남편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1연의 죽어서도 질투심이 남아서 탕국을 아내의 발등에 쏟아버리고 가는 남편과 그 남편을 연민하는 아내의 마음, 2연의 시인의 무의식 속에 등장하는 피부가 검은 사내애와 붉은 뱃속에서 우는 아이의 이미지, 3연의 울고 있니? 하고 묻는 죽은 남편과 검은 달덩이의 이미지, 4연의 비명을 지르는 아내와 떠오르는 달의 이미지가 무의식의 단절적 구조 속에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죽어서 학생이 된 그는/죽어서도 질투할 힘이 남아 있어/김이 오르는 탕국을 아내의 발등에 쏟아버리고/갔다는데/마음까지 멈춘 그가 흰 달덩이 하나를/서쪽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까//그 애의 책상은 15쪽에 머물러 있다 글자들은 목소리를 숨겼고 피부가 검은 사내애들은 암막 커튼을 쳤다 운동장을 저벅저벅 걸었던 그 애들도 커튼 안으로 들면 옷을 벗었다 숫자는 넘어가지 않았다 수억 년 전에 사라진 꼬리뼈가 날을 세우고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들이 코 밑에서 가랑이를 벌리고/붉은 뱃속에서 아이가 숨죽여 울고//울고 있니?/학생이 된 그가 누군가에게 묻고 사라지는 밤/창문이 열리고 검은 달덩이 하나가 문 밖으로 던져졌을 때/모든 집들이 등뼈가 휘도록 제 몸을 껴안았다/신음이 빠르게 연골을 빠져나가 그의 등짝을 때렸다//아내가 놀라 비명을 질렀고/아이는 면사포처럼 하얀 제 몸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그리고 달이 떠올랐다//-「서쪽에서 달이 뜬 까닭은」전문   허순행의 시에서 딸의 이미지는 왕성한 생명력과 연결된다.「딸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서 시인은 그 생명력을 “아주 간혹은 붉은 혓바닥을 가진 뱀이 그 애의 말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거미가 식탁 위를 빠르게 기어 다녔다 장미가 내 얼굴에 실뿌리를 내리고 해를 끌고 다니던 어둠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컹컹 짖었다”라는 감각적 사물 이미지로 만들어서 독자들이 실제같이 느끼고 감지하게 한다.   딸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 지구가 공전하는 소리도 들렸다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는 소리에 흡수되고 그런 밤에는 그 애의 푸른 이마에서 용암이 솟구쳤다 새빨간 핏물이 흘러넘쳐 바위덩어리를 태웠다 돌들이 숯덩이처럼 투명해졌다/ 아주 간혹은 붉은 혓바닥을 가진 뱀이 그 애의 말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거미가 식탁 위를 빠르게 기어 다녔다 장미가 내 얼굴에 실뿌리를 내리고 해를 끌고 다니던 어둠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컹컹 짖었다//-「딸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2연   이와 함께 사망 1주기에 딸과 아내 곁으로 온 남편 혼령의 독백을 환청으로 듣고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보면서 그림자로 보이는 혼령에게 말을 하는 아내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그려진「1週忌, 사진」이 가족애(家族愛)를 담은 서사적 구성의 시로 감동을 주고 있다.   아내와 함께 달빛이 하얗게 누워 있네 맞은 편 방에서 딸애도 얕게 코를 골고 있네 어둠은 물에 젖은 무명옷처럼 축축하네 비에 젖어 돌아오면 딸애는 늘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네 밤새도록 그 애의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주며 아내는 어둠 속을 헤매고 다녔네/ 얼굴 가만히 만져보네 그녀가 몸을 뒤척이네 당신은 긴장하고 그녀가 잠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가네 개울물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검은 물속을 걸어나와 어둠으로 앉아 있네 어둠 속에서 그녀 어둠 더 깊어지고 당신은 그림자도 없이 방안을 서성거리네/-「1週忌, 사진」1연 앞부분   3. 나가는 말   허순행 시인의 첫 시집『꽃잎만 붉다』의 시편들을 읽고 나서 필자는 외부의 가치관이나 공리적 교훈성에 전혀 물들지 않은 그의 무의식 속에서 빛의 굴절에 작용하는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현실과 환상의 교직(交織)에 작용을 하는 이미지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해야 할지 막연했다. 그래서 무의식의 자유로운 연상 작용의 시적활용을 말한 문덕수 시인의「내면세계의 미학」과‘이상적 텍스트의 언어들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는 기표들의 별무리’라는 롤랑바르트의 탈구조주의 이론에 대입하여 문제를 풀어보았다. 이런 접근이 허순행의 시를 이해하는 바른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매우 유용한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함께 허순행의 시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감지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장기(長技)라고 평가할 수 있는 서사적 구성과 이미지의 감각적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서사능력(敍事能力)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와 어울려서 장편의 판타지 시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의 단선구조의 시와 하이퍼의 다선구조의 시가 섞여있다. 그 시편들의 내부에는 그의 시에서 강렬한 시적 생명력을 제공하고 있는 무의식 속의 가족애가 들어있다. 그의 의식은 외부세계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내부세계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성으로 인해 21세기에 빛을 받는 동양의 노장철학(老莊哲學)과 연결되는 끈이 되기도 한다. 인용된 시편들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시편들이다. 더 좋은 시편들이 선택되지 못하였음을 부기하면서, 허순행 시인의 시적 성취를 기대한다.  
61    김순호 시집 해설 댓글:  조회:1019  추천:0  2019-12-14
김순호 시집 해설   내면의식의 오랜 뜨거움이 피워낸 진솔한 독백의 언어                                                                     심상운(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김순호 시인의 첫 시집『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 』에 실려 있는 66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 시편들의 진솔한 독백獨白의 힘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들어갔다. 극적장면劇的場面을 보여주는 서사敍事와 상상想像,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적 이미지, 끝 연의 의미의 함축, 등은 개성적이고 세련된 미적 감각을 느끼게 했다. 또 일정한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펼쳐내는 독백의 언어 속에 들어있는 여성적인 사랑과 열정의 정서는 자기응시와 생명의식과 현실인식의 밑바탕이 되어 단편적 이미지들을 뜨거운 감동과 깨달음의 언어로 다가오게 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성적 감각의 언어는 잘 숙성된 술과 같이 독자들에게 시적 감흥을 안겨주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그의 시의 감각과 사유가 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공간을 안고 있어서 독백의 언어가 객관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시편들은 경험을 밑거름으로 한 시적 에너지의 발산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는 이 시집의 시편들의 이미지가 시인의 무의식無意識 속에서 오랜 세월 잠재되었다가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 자연스럽게 언어로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김순호의 시를 읽으면서 ‘시는 경험과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한 R.M.릴케의 산문집『말테의 수기手記』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칠십 년, 혹은 팔십 년을 두고 벌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씌어질 것이다. ” R.M.릴케의 이 말은 너무 과장되어 반박을 당할 여지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시의 창작’은 시인의 일생에 걸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창작의 교훈으로 영원히 남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근거로 해서 필자는 해설의 제목을 ‘내면의식의 오랜 뜨거움이 피워낸 진솔한 독백의 언어’라고 붙이고, ‘사랑과 열정의 언어’ ‘생명의식과 자연’ ‘자기응시의 이미지’ ‘현실인식 속의 시간 이미지’를 소제목으로 해서 시의 내용과 함께 김순호의 시를 매끄럽게 하고 피부에 닿게 하는 언어의 절제와 감각, 시적 구성에 대해서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사랑과 열정의 언어   20세기의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여 현대시를 19세기 낭만주의의 ‘감정의 유로流露’(워즈워드)에서 탈출하게 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현대시에서 대상에 대한 낭만적浪漫的 인식까지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 전광판에/그 남자의 집이 있는 동(洞) 이름이 써 있으면/난 하염없이 그 글씨들을 쳐다본다./그 남자는 지금 무엇을 할까/내가 사는 동(洞) 이름을 보면 그 남자도 나를 생각할까/반가움인지 쓸쓸함인지 모를 뒤엉킴 들이/혈관을 타고 발끝까지 퍼져간다.//그 남자의 집/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남자의 집은/꿀벌들이 꿀을 나르며/수없이 드나드는 벌집 같기도 하고/빨간 모자를 쓴 성냥개비들이 꼿꼿이 서있는/성냥곽을 포개 놓은 것 같기도 한 아파트/멀리서 바라보다 뜨거운 눈에 어른거려/하나, 둘, 층수만 세어보다 돌아서는 집/언제나 풍경으로만 서있는 그 남자의 집//그 남자/달밤엔 달빛이 창을 뚫고 들어와/마음을 송두리째 훔쳐간다고/비 오는 날엔 옥상에 올라/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전화선에 태우고/내게로 내게로 달려오는/그 남자/창밖엔 지천으로 봄이 왔다간다고/울울창창 까맣게 여름이 퍼져간다고/애틋한 가을이 그만 가고 있다고/무릎 끓은 겨울이 긴긴 밤 울고 있다고/소리로 소리로 소리로/풍경을 그려주는 그 남자//그 남자가 사는 집/막막한 열정에 우는 내 영혼이 연기처럼 스며들어가 서성이는 집/내 영혼이 사는 집 //-「그 남자의 집」전문   이 시집의 첫 시「그 남자의 집」은 시인의 낭만적인 꿈이 일상적인 형이하形而下의 언어를 넘어서서 ‘내 영혼이 사는 집’에 도달하는 형이상적形而上的 상승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반복의 언어 속에서 솟아나는 정서의 뜨거운 열기를 감지하게 한다. 그리고 사실적 이미지에 섬세한 언어로 녹아든 여성女性의 풋풋한 감성이 농익은 시의 맛을 한껏 맛보게 한다. “그 남자의 집/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남자의 집은/꿀벌들이 꿀을 나르며/수없이 드나드는 벌집” 같기도 하다는 상상의 언어는 독자들에게 사랑의 감미로운 감각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것은 관념이전의 사물적인 언어의 이미지가 주는 사랑의 원초적 감각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감미로운 맛을 더 느끼게 되고 사랑의 진실에 동감하게 된다. 이런 순수한 정서의 전달이 주는 감동은 김순호 시인의 가식假飾이 없는 의식이 허공 같이 자유로운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꽃을 품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가/매화꽃 두런거리는 광양 매화마을로 떠났다//'꽃바람 없는 건 남자도 아니지'//그 남잔 스마트폰으로/꽃불 번지는  매화마을을 /소방사가 물을 뿌리듯 구석구석/찍고 또 찍어 보내왔다//지금/매화꽃 고것들은/송곳 같은 꽃술은 감추고/언뜻언뜻 별 같은 심장을 흔들어대며/눈 시리게 활짝 웃고 있겠지//'앙큼한  고것들'//그러다 어느 순간/치명적인 향기를 내뿜어/봄마다 그 남자/꽃병이 들어 허둥지둥 달려오게 만들 거야//-  「매화꽃 고것들은」전문   「매화꽃 고것들은」에서도 감각적인 사랑의 언어가 생동한다. 남자와 매화꽃이 육감적인 사랑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이 시는 시인의 언어감각이 얼마나 예민하고 세련되어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꽃바람’ ‘꽃불‘ ’꽃술’ ‘꽃병이 들어’ 등의 언어가 단순한 암시에 머물지 않고 시 속에서 걸림이 없는 낭만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 언어들은 독자들에게 맛깔스럽고 풍요로운 시의 맛을 맘껏 즐기게 하는 시적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혹한을 견뎌낸 송곳 같은 순결/꺾고 싶은  도발적인 자태/너를 보고 떨리지 않을 바람이 어디 있으리//다가가면/사르르 벗어버릴 것 같은/투명한 옷자락/실핏줄 비치는 살내음의 유혹/네 앞에서 미치지 않을 가슴 어디 있으리//도도히 온몸을 불사르며/스러지는 교태의 몸짓/그 장엄한 뒷모습/서럽지 않을 영혼이 어디 있으리//아 바람을  타고 싶다/너와 나/태풍에 실려/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순정한  바람//-「꽃1」전문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주방에선/분수처럼 불기둥이 솟는다/푸른 바다 푸른 산 푸른 들이/후라이팬 속에서 오그라들고 있다//그 죽음을 난 먹는다//이제 알겠다/최후의 그날/내손을 잡아줄 이는/사랑했던 사람도/미워했던 사람도 아닌/용암처럼  성난 저 불덩이라는 걸//-「불덩이」전문    「꽃1」도 “다가가면/사르르 벗어버릴 것 같은/투명한 옷자락/실핏줄 비치는 살내음의 유혹” 등 성적 감각의 이미지가 꽃을 육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성적감각의 언어와 상상은 김순호 시인의 독특한 개성으로 파악된다. 이런 개성이 애정이나 탐애貪愛에 머물지 않고 더 활달한 어법- 어떤 것에도 구속 받지 않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깊고 넓은 자연의 생명력을 담을 때, 전통적인 감성이나 관념의 좁은 울타리를 과감히 부숴버리는 ‘생명의 시’를 탄생시킬 것 같다.「불덩이」는 그런 면에서 주목된다. 탐애에서 생명력으로 넘어가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하는 시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 단서가 이 시의 끝 연 “최후의 그날/내손을 잡아줄 이는/사랑했던 사람도/미워했던 사람도 아닌/용암처럼 성난 저 불덩이라는 걸 ”에서 발견된다. 이외에도 「애인 하나 있으면 좋겠다」,「열병」등이 뜨거운 인상을 남긴다.   나. 생명의식과 자연   그리스 신화에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이룬 마이더스 왕이 금덩어리가 된 사랑하는 딸을 안고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탐욕을 경계하는 교훈으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신화는 돈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를 각성시키는 경종이 되기도 한다. 현대철학에서 인간중심주의humanism의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공생인간共生人間이라는 호머심비우스Homo symbious가 거론되고 있는 것도 21세기 인류생존의 활로가 인간이 쌓아놓은 자본資本에 있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현대시에서 ’생명의식과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시가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20세기 말 독일의 시단에서 태풍을 일으킨 ’생태시生態詩 운동‘이 증명하고 있다. 생태+시로 형성된 생태시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평등한 존중과 보존을 기반으로 한 지구의 생태환경의 보존이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담은 시운동으로 세계의 시단에 큰 반향과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은 생태시의 언어가 인간양심의 소리이며 인간의 생존을 위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싱가폴에선 킹크랩을 먹어야한다고/부둣가 노천식당에 사람들이 구불구불  쇠사슬같이  늘어서있다/자릴잡고 앉아 /빨갛게 삶아져 사람들의 입으로 쓸려 내려가는/킹크랩들의 최후를 본다 //사람들이/가위로 자르고 꼬챙이로 살점을  파내는 형을 집행하고 있을때 /그들의 벌거벗은 살육장에선/긴 다리로 허공을 할키며  질러대는  비명이 천장에 몰려 웅웅운다//부딪혀 꺾이는 소리/수증기 뿜는 소리/포연인 듯 넘실대는 비린 안개가 꽉찬다//싱가폴에선 킹크랩을 먹어야 한다고/먹이사슬의 맨 꼭대기 인간들이 줄지어 몰려온다/그들의 목숨도 줄줄이 끌려온다//싱가폴 부두가 붉디붉다//-「킹크랩」전문   * 킹크랩* 대게와 같은 갑각류* 킹크랩은 대게에 비해 몸통도 더 크고 껍질에 가시가 있으며 색도 대게보다 붉다.   「킹크랩」은 그런 관점에서 주목되는 시이다. 시인은 관념이 아닌 현실 속에서 킹크랩을 먹는 인간들의 행위를 사물적 언어로 생생하게 현장감을 느끼게 표현하여 먹이사슬의 맨 위에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잔혹한지를 생태적인 입장에서 관찰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가위로 자르고 꼬챙이로 살점을 파내는 형을 집행하고 있을 때/그들의 벌거벗은 살육장에선/긴 다리로 허공을 할키며 질러대는 비명이 천장에 몰려 웅웅운다”라고. 그리고 “싱가폴 부두가 붉디붉다”라는 구절로 킹크랩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감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종로 5가에/반라半裸의 여자그림 광고판이 빙글빙글 돌아간다/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드는  쇼 윈도우/네온사인 불빛이 여자들을 난자 한다 //맞은편  바다횟집/물고기들이 납작하게 엎드린 체/오고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쳐다본다/그러다 뜰 체가 다가오면/피할곳 없는 수족관 벽에 온몸을 부딪치고 부딪치다/거품은 가라앉히고  진한 비린 향을 고요로 남긴다//-「종로5가에 」전문   「종로5가에 」에서도 시인의 눈은 화려한 쇼윈도우에만 머물지 않고, 뜰 체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부딪치던 물고기들의 모습이 사라진 바다횟집의 작은 수족관을 스케치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날 서울 종로 5가의 단순한 소묘素描이지만 화려한 쇼윈도우의 대칭적 구성이 바다횟집의 수족관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그 장면은 인간과 물고기의 현실을 단편적 이미지로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생명체의 공존의 문제를 화두話頭로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주에 혁명이 일어났다//하늘은 흰 천을 풀어/순식간에 세상을 덮어버리고/땅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엎드려 항복 한다/백기를 흔들며 빠져나간 바람이/그들의 편이 되어 미친 회오리를 일으킨다//하늘은 드르륵 드르륵/거대한 빙산을  갈아 뿌리며  아래로 내려오고/눈을 찌르고 입을 막고 목을 조이며 휘날리는 눈보라/그것은 세상을 뒤엎는 혁명//나는 종종걸음으로 다지듯이 눈을 밟아나간다/뽀득 뽀득 소리 지르며 납작하게 죽어가는 눈의 무리들/땅은 높아지고 덩달아 나도 높게 들어 올려 진다 /밟아도 밟아도 끈질기게 낙하하는 살아있는 눈덩이들//백주에 혁명이 일어났다//-「폭설」전문   「폭설」은 폭설暴雪을 통해 세상을 개혁하는 혁명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자연이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하늘은 흰 천을 풀어/순식간에 세상을 덮어버리고/땅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엎드려 항복한다” “밟아도 밟아도 끈질기게 낙하하는 살아있는 눈덩이들”이란 구절들을 생동하는 의미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문명이 인간의 위대성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무심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자연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을 평등한 눈으로 성찰하게 한다.     집을 나오니/이게 웬일인가/몽실몽실 솜사탕을 문 벚꽃들이/안개처럼 새절역 거리를 삼키고 있다//내가/사관생도들이/칼을 높이 들어 도열해 만든 터널 속을/수줍은 신부가 되어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내가/목숨을 걸고 불속을 뛰어들어 걷고 있는 것인가/아니면  내가죽어/꽃상여를 타고 떠나는 것인가//아니다/그것은 햇살을 찢어발기는 태평소 소리/열두 발 상모를 돌려대는 서러운 남사당패의 한마당 같은/꽃들의 살풀이춤/꽃들의 이별이다//-「벚꽃 날리던 날」전문   「벚꽃 날리던 날」은 봄의 벚꽃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생명의 환희’를 포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사관생도들이 도열한 터널 속을 걸어 들어가는 신부, 목숨을 걸고 뛰어든 불꽃 속, 꽃상여 등의 이미지가 시인의 화려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끝 연에서는 시인의 마음과 꽃의 마음이 한 덩이가 되어 춤을 추고 있다. “열두 발 상모를 돌려대는 서러운 남사당패의 한마당 같은/꽃들의 살풀이춤”의 장면은 시의 현실은 비현실의 꿈같은 것이지만 그 꿈이 진정한 의미의 현실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시의 현실은 가장 본질적인 생명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다. 자기응시의 이미지    자기응시는 자기도취나 자기탐애,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과 크게 다르다. 자기응시는 주관에서 탈피한 객관적 시각에 의한 자기존재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불교佛敎의 선禪은 자기응시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실존적實存的 자기의 존재를 깨닫는 수행법이다. 20세기 한국불교를 대표한 성철成徹스님은 법문집『자기를 바로 봅시다』에서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항상 자기는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라고 자기존재의 원형原形을 깨닫게 하였다. 김순호 시인의 자기응시는 이런 철학적 사유와는 사뭇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무구無垢한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거리에서/쇼 윈도우를 스치며 언뜻 본 내 모습/아직은 괜찮다 싶다//백화점 화장실 거울은 젊은 여자들이 다 차지하고 붙어있다/그 젊음에 주눅이 들어/나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도둑처럼 쓰윽  훔쳐보며 나온다//그러다 아무도 없을 땐/나도 그녀들처럼 거울로 기어 들어갈 듯 붙어 서서 훑어보는데/씨앗 주머니를 매단듯 늘어진 눈이 그렁그렁 웃으며 답한다/다음 이마를 슬적 들춰서/생선가시처럼 뻗대고  서있는 하얀 머리카락을/검은머리 속으로 꼭꼭 숨바꼭질 시키고/콤팩트를 쇼 윈도우 꺼내 거뭇하게 얼룩진 잡티를 공격한다/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배춧잎을 기어간 벌레의 안간힘처럼 퍼져가는 주름들//샤워를 하고/온 몸을 거울에 비춰본다/촉촉한 물기 때문일까/오. 괜찮다 /나는 한발 뒤로 물러나/도도하게 턱을 위로 치켜들고 서있다//-「쇼 윈도우와 거울」전문   「쇼윈도우와 거울」은 중년여성이 자기의 육체적 젊음을 젊은이들과 비교하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장면을 솔직담백하게 가벼운 터치로 그리고 있다. 언제나 젊고 싶은 욕망으로 거울 속의 자기를 바라보는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면서 여성에게는 강한 자극을 주는 욕망이다. 이 시는 자신의 존재성을 ‘이성적 의식’(데카르트)이 아닌 ‘무의식의 욕망’(프로이트, 라캉)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더 시적 미감을 풍긴다.   뜨겁게 포옹한다/그리고 화들짝 놀라서 깬다/웬 에로틱한 개꿈!//두 남녀를/바라다보고 있는 게 나인지/안겨있는 여자가 나인지 분간키 어렵다/이왕이면 안겨있는 여자이고 싶은데/바라다본 것도 같으니/꿈에서도 나는 아니다//아침 겸 점심을 먹고/잠시 누웠다 잠이 들었는데/사춘기 소녀처럼 야릇한 춘몽이라니/평생 딱 맞추는 꿈 한번 꿔보지 못했는데/심지어는  태몽조차도//송골송골/얼굴에 맺혀있는 땀을 닦으며/방금  꿈에 보았던/실루엣 같은 영상을 떠 올린다//-「개꿈」전문   「개꿈」에서도 무의식 속의 자기와 만나는 시인의 욕망이 적나라赤裸裸하다. 이런 성적인 욕망의 표출은 이성 쪽에서는 감추고 숨기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의 이성은 위선의 가면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꿈속에서도 안겨있는 여자이고 싶다는 시인의 개방적이고 솔직한 욕망의 표출은 외설적 표현으로 문제가 되었지만 '사랑의 원초적인 의미의 회복‘ 이라는 평가를 받은 D. H. 로렌스의『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이 외에도 젊은 연인들이 길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포착하여 “축복받은 그들이 보란 듯이 키스하고 있다”면서 나도 저렇게 키스를 하고 싶다는 솔직한 욕망을 드러낸 「그들이 우리였으면」이 싱싱한 야생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라. 현실인식 속의 시간 이미지   시는 비현실의 꿈을 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언어예술이지만 현실 속에서 사는 시인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떠나온 공간은 돌아갈 수 있지만 떠나온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의 조건이다. 이것을 공간의 가역성과 시간의 불가역성이라고 한다. 김순호 시인은 불가역적인 시간을 시속에 담아내고 있다.       북촌 정독도서관엔/낡은 시간의 부스러기들이 굴러다닌다/공지사항과 문학 강연 광고는/옛날 영화 포스터 같이 나를 붙들고/어둑한 복도의  CCTV 카메라는 죄도 없이 무서운데/와본 적도 없는 오래된 복도를 걸으며/아득한 유년의 풍경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50 년 전 시립병원에서 죽어간 한 소녀가 웃으며 걸어온다/그림자처럼  복도를 느리게 걸어 다니던 아이/ 어느날 해맑게 웃으며 외출하듯 떠나간 아이/그때도 이렇게 햇살이 너울너울  유리창을 기웃거렸지// 그 애의 침대가 비워지고 /병실가득 뿌려지던 크레졸 냄새가 순간 퍼져온다/와락 달려와 안기는 날카로운 냉기/잊었던 시간들이 때 묻은 벽을 뚫고 있다//무심히 내다본 조각난 유리창 밖/까까머리 소년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먼지를 일으키며 몰려다닌다/떠나는 것은 다 붙들고 싶다 /흙먼지 날리는 쎈 바람도 찢어진 낙엽도// -「 떠나는 것은 다 붙들고 싶다 」전문          「떠나는 것은 다 붙들고 싶다」는 제목 그대로 시간 속에서 떠나는 것들을 붙잡고 싶어 하는 연민의 정이 물수건같이 촉촉한 느낌을 준다. 시인은 정독도서관 내부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에 50년 전에 죽은 한 아이의 영상을 넣어서 현재와 과거를 하나로 결합하는 입체적인 이미지를 연출하여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런 시의 구성을 하이퍼적 구성이라고도 한다. 이런 시간의 영상적 기법은 「저 여인 은 누구인가」에서도 시적 공간의 입체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터널속을 달리는 지하철/거울처럼 까만 차창에  박혀있는 한 여인이/손잡이를 잡고  바라본다/저 여인은 누군가/낯설다//눈을 깜박인다/물처럼 맑은 한 계집아이가 천진하게 웃는다/또 눈을 깜박인다/짙푸른 청춘이 터질듯 풋풋하게 웃는다/다시 눈을 깜박인다/이번엔 절정의 중년이 우아하게 웃는다//흔들리는 지하철/까만 차창 속에 박혀있는/한 늙은 여인이 쳐다본다/손잡이를 바꿔 잡자/차창 속 늙은 여인도 바꿔잡는다/까맣게 말라버린 마른 꽃처럼/만지면 바스라질것 같은 모습/저 여인은 누군인가/낯설다//-「저 여인은 누구인가 」전문     터널 속을 달리는 지하철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순간순간 변하는 여인의 모습이 영화의 장면변화 같다. 그것은 한 여인의 일생을 단편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디지털적인 영상감각의 기법으로 비현실을 현실화하여 시적현실을 창조한다. 현실의 냉혹성을 보여주는「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는 서사적 구성을 현재⟶ 과거⟶현재로 해서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그리고 시나리오의 기법으로 서사를 영화의 장면같이 보여주고 있다.   (전략)//'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어려서 엄마에게 배워 간직한 유품같은 노래하나/구전동요인지 이후론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그러나 지금도 완벽하게 부를수있는 노래/오늘도 웅얼거리는 그녀의 목젖이 떨리며/살갗을 파고드는 냉기처럼 그날이 밀려온다//(중략)//외딴 초가의 문간방/갑자기 들이닥친 사내/방문은 국방색 담요로 급히 가려지고/깡마른 몸에 푸르스름한 빛의 남루한 옷차림/신발도 벗지 못한 채 산적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지아비와/깔끔하게 핀으로 고정된 신여성풍 까미 머리의 지어미가 마주보고 앉아있다/아이는 밥그릇 위로 빙 돌려 올려놓은/물에 씻은 김치를 밥에 얹어 먹으며 힐끔 거린다//(중략)//-「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부분      이 시에는 1950년 한국전쟁(6.25)로 인해 부모와 헤어진 시인의 아픈 기억이 하얀 서리꽃같이 피어있다. 필자는 이 시를 거듭 읽으면서 그 아픔의 사연을 냉정하게 객관화시켜 영화의 화면처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밝은 이미지로 끝맺음한 시인의 마음을 꽃동산의 빛으로 느꼈다.   3. 나가는 글   필자는 김순호 시인의 첫 시집『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 』의 66편의 시편들을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읽고 이해하고 해설의 제목을 ‘내면의식의 오랜 뜨거움이 피워낸 진솔한 독백의 언어’라고 붙이고, ‘사랑과 열정의 언어’ ‘생명의식과 자연’ ‘자기응시의 이미지’ ‘현실인식 속의 시간 이미지’를 소제목으로 시를 분류하여 해설했다. 앞의 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김순호 시인의 진솔한 독백의 언어는 독자들의 가슴에 공감의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극적장면劇的場面을 보여주는 서사敍事와 상상想像,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적 이미지 등은 오랜 수련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했다. 특히 그의 시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성적 감각의 언어는 잘 숙성된 술과 같고 시적 감흥과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항아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김순호의 시가 또 어떤 놀라움을 줄지는 예측할 수 없어도 그의 무의식無意識 속에 오래 잠재되었다가 나오는 매력적인 시의 이미지들이 더 완숙한 경지에 이르리라 여겨진다.  
60    김이원의 시집 해설 댓글:  조회:1048  추천:0  2019-12-14
김이원의 시집 해설   내면의식 속 ‘나’의 진실을 탐구하는 뜨거운 감각의 언어                                                                                                                            심 상 운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글   김이원의 시집『말에 대하여』의 시편들은 위선의 가면을 벗어버린 자신의 내면의식을 벌거숭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그 감각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다. 벌거숭이 의식의 언어 속에는 성적욕망과 몽상과 좌절, 그리고 희망이 돌출하면서 시와 진실 또는 실상(實相)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시편을 통해 인생의 진실은 무엇인가? 시는 인생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붙어 있는 화두는 ‘내 존재의 탐구’다. 그의 시에서 ‘나’는 ‘육체의 나와 정신의 나’, ‘욕망의 나’와 욕망 속에서 탈출하여 ‘욕망 속의 나를 바라보는 나’로 구분된다. 욕망 속의 나는 무의식(無意識)의 나이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는 의식(意識)의 나라고 할 때, 그 ‘분열된 나에 대한 탐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의 시편들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Lacan, Jacques 1901~1981)의 무의식(unconsciousness) 이론에 대입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관점에서 김이원의 시편들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시편에서 언어의 무의식적 구조가 중시된다. 그리고 기표(signifiant)보다 그 기표의 내면에 잠겨있는 의미를 더 중시하게 된다. 표면의 언어는 무의식이 은유와 환유로 변형된 언어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그는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 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성애적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김이원의 시에서 시의 표면으로 솟구치고 노골적인 이미지를 드러내어 시적 긴장감과 자극적 감각을 유발하는 성애적 표현도 인생의 진실에 도달하려는 그의 무의식의 환유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의 시편에서 발랄하고 자유롭게 분출하는 낭만주의적 언어 표현의 내면에도 성적 에너지’가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그의 시편들의 언어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저돌적이고 야생적(野生的) 생명력을 분출하는 언어가 된다. 이는 어떤 유파(類派)에도 소속되지 않는 그의 선천적 언어감각의 분출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편을 형성하는 무의식의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그의 언어감각은 전통적 서정시들의 통념화(通念化)된 언어구조를 쳐부수는 에너지를 발휘한다. 그리고 논리적 이미지, 압축과 생략의 모더니즘적 기법은 그의 시편들의 메시지가 암시적으로 함축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래서 필자는 해설의 제목을 라고 붙였다.   2. 시편 들어다보기   가. 길 잃은 욕망의 여행기   「어느 해 이 세상의 겨울이었네」에서는 삶의 겨울을 느끼고 죽음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는 시인(시적자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주먹만한 눈덩이가 도시 전체를 덮고 있을 때/나는 자신의 안녕을 한없이 괴로워했었네”라고 독백한다. 그리고 “이미 마음의 눈(目)을 다쳐/보이지 않아/몸의 눈(目)마저 캄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의 시적자아는 자신의 눈 먼 육체와 정신을 “길 잃은 욕망”이라고 한다.   1 어느 해, 이 세상의 겨울 이였네/그때 나는 이미 스스로 계획한 인생을 다 살아 버렸고/그 나머지 인생을 살고 있었네//주먹만한 눈덩이가 도시 전체를 덮고 있을 때/나는 자신의 안녕을 한없이 괴로워 했었네//나의 안녕은 수치스러운 것/죽어간 인생들에게 어떠한 안부도 건네지 못했으므로// 2 마음은 우연, 말도 우연 /마음의 눈도 우연, 몸의 눈도 우연/그 겨울 눈꽃 천지의 세상도 우연//우연이 우연을 만날 때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욕망,//하지만 나/이미 마음의 눈(目)을 다쳐/보이지 않아/몸의 눈(目)마져 캄캄해//(길 잃은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니죠/불길한 미래의 추억들은 어떠한 인생도/차용하질 못하거든요 )// --「어느 해 이 세상의 겨울이었네」1-2 연   「오오, 내 인생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에서 시적자아는 “가면과 가발을 눌러쓰고 척추 뼈를 짓누르며/ 전대미문의 쾌락을 요구하는 사내들!”과의 정사장면을 그려내면서 육체적 욕구의 허망함을 토로한다. 이는 길 잃은 욕망의 처절한 몸부림의 환유로 인식된다.   오늘도 면책 특권을 누리는 자칭 천재들의 원반던지기 시합/한창 어지러운데//나는 믿었지/내 정신의, 꽃의, 향기를 /놀라운 가속도의 그 휘발성을//가면과 가발을 눌러쓰고 척추 뼈를 짓누르며/전대미문의 쾌락을 요구하는 사내들!/(흥! 바람은 바람의 상승무드를 타고 바람과 함께 잘도 사라지더라)//나는 흥정했지/하룻밤의 숏 타임 정사를!//어지럽고 습기 찬 계곡사이를/꿀벌의 날개로 붕붕 날으며//밤하늘 히닥닥 요란한 신선놀음에 썩어 가는 건/내 나날의 힘없는 도끼자루들!//오오 내 인생이 단 한번이라도 행복해 질 수만 있다면//---「오오, 내 인생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전문   이런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은 「시를 써야 한다」에서 정신적 또는 예술적 욕망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시를 써야 한다면서도 시를 쓰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 시켜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시를 써야한다/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고상틱한 시?”라고. 그래서 그에게 시란 “무당벌레, 집게벌레, 그것들의 화려한 등껍질”로 비유될 뿐이다. 이는 ‘기의(signifié)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는 자크 라캉의 언어관과 상통한다. 그것은 진실에 닿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시를 써야 한다/살아남기 위해서//라이프 이스 숏, 아트 이스 롱/책들은 친절하다/책들은 X 세대다/X 세대의, X 세대에 의한, X 세대를 위한,//책들은 가르쳐 준다/시대정신에 늦고/문학사조에 어두운 /무식한 예술가에게 나름의 세계관을 가르쳐 준다/그것은 시의 합법적 처세술이다, 테크닉이다//난 바퀴벌레가 아니다/그러니 바퀴벌레 따위와 놀지 않는다/굳어버린 빵 속에서 숨쉬는/바퀴벌레의 속사정쯤으로/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시를 써야한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고상틱한 시?//너는 알겠지/내가 밤새워 공부한 세계관/그 세계관이 그려낸 무당벌레, 집게벌레, 그것들의 화려한 등껍질 그래 너는 알겠지/.................알겠지!/..................알아?//손과 손이 인도하는 피아노 건반과/음표사이엔, 그러나 그러나 /그딴 세계관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는 것쯤을?--「시를 써야 한다」전문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 속의 욕망은 모체이탈(母體離脫)의 원초적인 결핍에 대한 충족욕망이다. 이 욕망은 ‘떠나온 곳(잃어버린 곳)을 향한 강렬한 그리움’이라는 점에서 인간 삶의 정신적 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적 혼(魂)으로 승화된다. 그러나 그 욕망은 허상(虛像)에 집착하는 번뇌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명령 불복종의 죄 값을 치르는 날이 오리라」에서 “불량 지도를 들고서/천국의 여행을 꿈꾸었던 나”라는 구절은 허상에 대한 집착을 상징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행을 꿈꾸는 천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크 라캉이 말한 유아시절의 나르시즘(상상계) 속에 있을까? 아니면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에 있을까? 또 아니면 인간의 언어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실재계에 있을까? 불교 경전『금강경』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형상으로 여래를 찾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이원의 시편들은『화엄경』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구도기(求道記) 같이 ‘육체와 정신’을 편력하는 체험적 사유(思惟)를 통해서 천국에 대한 갈망과 허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의 일부 시편들은 인생의 어둠 속을 헤매는 ‘길 잃은 욕망’의 여행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명령 불복종의 죄 값을 치르는 날이 오리라/태양을 마주보고 랄랄라 서 있는 자들//당신의 여행은 즐거웠냐고/성급하게 물어 오지만/잘못 그려진 불량 지도를 들고서/천국의 여행을 꿈꾸었던 나여/그럼요/천국은 여자 혼자서 여행하기엔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랍니다/그러니 내 붉은 입술이 흘리는 어떤 말도 당신은 믿지 마세요/그러니/길 떠나온 길 위에서 떠나갈 길 따윌 묻는 어리석음을 다시 한번 범하지 마세요//-「명령 불복종의 죄 값을 치르는 날이 오리라」1부   이런 자신의 존재 탐구 여정은「그날 밤 나는 벌레처럼 웅얼거리며 파닥거렸다」에서는 절정에 이른 정신적 생존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 시의 나(시적자아)는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현대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죽음에 처한 처절한 운명의 한 여자로 등장하여 거대한 조직 속에서 소외된 존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었어//죽음이 제 스스로의 의미로 가득 차/제 목을 조를 때//나는 알지/세계는 다음날,/조간신문에 난 기사화된 죽음을 즐긴다는 사실을”의 구절이 비인간적이고 몰개성적인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존재의 단면을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부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외된 존재상황을 파닥거리는 벌레에 비유한 야성적인 언어 감각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한다.   그날 밤 나는 벌레처럼 웅얼거리며 파닥거렸다/파닥거린 죄?/세상은 너무 어두웠고 너무 너무 어두워/닫혀진 창문사이로 나는 소리 질렀지/질러지지 않는 끓는 쇳소리 넘쳐 흘렀어/캑캑 꺽꺽//여보세요!/여보시죠!/여어기 좀 봐 주시죠!/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었어//죽음이 제 스스로의 의미로 가득 차/제 목을 조를 때//나는 알지/세계는 다음날,/조간신문에 난 기사화된 죽음을 즐긴다는 사실을//아무렴 알지 난/4월과 5월 사이/불법의 공포와 금지된 발광사이에/한 여자 숨 막혀 길바닥에 누운 날/대다수의 시민들은 시청율 60% 이상/TV 심야 영화를 즐겼다는 사실을//아무도 다른 그 누구에게 관심 없었어/모두들 스스로의 율법 속에서/생의 찬가를 높이 높이 불렀어//--「그날 밤 나는 벌레처럼 웅얼거리며 파닥거렸다」전문   「나의 단말마적 발작과 세기말적 발광사이에」도 제목부터 충격적이다. 그리고 “번개속 생각들은 천둥에게 괜한 날벼락을 때렸다/아픈 줄도 모르고 피뢰침위에 제 몸뚱이를 눕혔다” 등의 언어들이 보여주는 가상현실 속의 나의 모습도 전율적이다. 이런 전율과 자극의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퍼포먼스(performance)는 생의 허무와 미궁에 대한 존재론적 도전으로 인식된다. 그것은 “찾지 못했다/앞서가는 저기 저 검은 구름위의 검은 옷 입은 한 사내/뛰어가 잡지 못했다”라는 구절의 이미지에서 유추된다.   나의 단말마적 발작과 세기말적 발광사이에/입버릇처럼 중얼거린 허무에 대해/그 정교한 치 떨림에 대해/기술한/그 어떤 말도 찾지 못했다//미궁은 불꽃 속을 날으고/번개속 생각들은 천둥에게 괜한 날벼락을 때렸다/아픈 줄도 모르고 피뢰침위에 제 몸뚱이를 눕혔다//찾지 못했다/앞서가는 저기 저 검은 구름위의 검은 옷 입은 한 사내/뛰어가 잡지 못했다//무한창공의 무한불꽃이 번쩍이는/창세기의 무한질주 굉음 사이로//그렇게 부질 없었다 //-「나의 단말마적 발작과 세기말적 발광사이에」전문   나. 형이상적 인식-바다의 발견   이런 처절한 정신적 존재상황의 과정을 거친 시인의 갈망은「바다에 갔다」에서 ‘말이 없는 바다’라는 공간을 획득한다. 그는 바다에서 무심(無心)의 의미에 접근하고 “어떤 위안들은/소리 내어 발음되어지지 않은/무형태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시에서 바다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변함없는 옛 바다이다. 그 바다는 무심하게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모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진실은 말의 허상 속에 있지 않고 아무 형태가 없는 침묵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묵은 위안이 되고 말의 허상을 벗겨내는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은 ‘존재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다에 갔다/내가 아는 몇 개의 바다가 있었지만../오직 그 바다만이 나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나는 그 바다로 갔다//내가 좀 피곤해 있었기 때문일까//바다는 말이 없었다/모래 한 알의 흐트러짐 조차도 여전한 예전 그 바다/그 모습 그대로였기에/나는 그 무심함에 좀 슬퍼졌다//그 무심함 속에서/어떤 쓸쓸함 들은 전혀 공유되지 못함을/그리고 오로지 자신만의 것으로 남는다는 것을/나는 조금 이해해야 했다//그리고 생각해 보았다/어떤 무심함이란/가장 최선의 사랑방식일지도 모른다고//어떤 위안들은/소리 내어 발음되어지지 않은/무형태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라고//-「바다에 갔다」 전문   이런 ‘바다’의 이미지가 그의 시에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 제목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유의 옷을 입고 있는 시,「한때, 나는 세상이 이미지들의 단백질 합성체 같은 것 인줄 알았다」는 독백의 언어로 시적자아의 사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사유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같이 세상을 보는 눈의 변화이다. 물질적 형상에서 벗어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선불교(禪佛敎)의 수도승 같은 시인의 모습이 감지된다. 그것은 이 시의 “태양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 몸을 비틀기 전에/나는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사생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라는 구절에서 드러난다. 시인이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치열한 구도(求道)의 시간을 통해 얻은 것이 바다의 이미지이다. 그는 “바다로 배를 띄워야한다/내 헛되고 헛된 희망이 다시 자해의 심한 욕구를 느끼기 전에”라고 한다. 이 바다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합쳐진 본질적인 세계로 유추된다. 그것을 깨달은 시적자아는 오도송(悟道頌) 같이 확신에 찬 말을 한다. 그리고 외친다. “안개, 자욱한, 어디선가/오오 누군가의 낮은 휘파람 휘파람 소리/오오”라고.「바다에 갔다」에서는 바다가 위안의 장소라는 의미였지만 이 시에서는 바다의 이미지가 “성분미정의 합성체”라는 통합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래서 바다는 이 시에서 헛된 희망을 주는 허상의 공간에서 벗어난 해방공간의 이미지로 부각된다.   한때, 나는 세상이 이미지들의 단백질 합성체 같은 것인 줄 알았다/길고 검은 역사를 지닌 자궁의 생성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오해였다, 그건, 내, 특유의//태양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 몸을 비틀기 전에/나는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사생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어깨 너머로 도끼를 번쩍 휘둘렀다/핏물 고인 채 부릅 뜬 눈동자의 물고기들/사방으로 흩어지며 죽음을 노래하였다//바다로 배를 띄워야한다/내 헛되고 헛된 희망이 다시 자해의 심한/욕구를 느끼기 전에//사람들은 말하겠지/얘야 아서라 참아라//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단다/태양이 뜨고 지는 걸 막을 수는 없단다//오해였다, 세상은, 질컥이는 오해의 푸른 바닷물/염도32%의 짜디짠 성분미정의 합성체였다//지구가 태양을 돌리든/태양이 지구를 돌리든 어차피/내 이미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였다/근심과 희망의 태양은/내 왼쪽 어깨에서/떠서 내 오른쪽 어깨로 지거든//그러니/이 막막의 망망 바다위에서 내 돗단배, 너무나, 외로워 다시 살고픈 욕망과 다시 죽고픈 욕망이/만 오천 번 쯤 휘돌며 솟구치는데//안개, 자욱한, 어디선가/오오 누군가의 낮은 휘파람 휘파람 소리 /오오//-「한때, 나는 세상이 이미지들의 단백질 합성체 같은 것 인줄 알았다」전문   다. 주관적 시각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객관화된 시각은 대상을 관조(觀照)하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시도 ‘체험의 시’에서 ‘관조의 시’로 바뀐다.「어디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는 주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각변화의 언어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이 시에서 ‘나’가 ‘그’로 바뀌는 것도 주관에서 객관으로 전환되는 인식의 변화를 표출한다. 그러나 초점이 맞지 않은 영상물을 보는 듯한 복잡한 인상은 의식의 미분화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심야택시의 경련성에 비유된 그의 모습,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 사람들이 벽을 만들고 집을 지어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 그를 당황하게 하는 인류에 대한 생각, 목적지 없는 열차표 같은 감정의 무책임성, 무용의 동작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 누군가의 사실들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 사실대로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 등’으로 표출 되는데, 이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돌출하는 무질서한 이미지와 사유 때문이다. 이런 시의 구조는 어디에도 초점이 없는 다시점(多視點)의 시를 탄생시키는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실험적인 텍스트’로 인식된다.   심야 택시들은 모두 어떤 경련성들을 지니고 있다/발작과도 같은 어떤 힘들을 지닌 채 /제 흔적들을 두려워하듯 /달려가고 있다는 점에서/그것들은 어딘가의 그의 모습들과 아주 흡사하다//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이런 바람들 때문일까/주변의 사람들이 벽을 만들고 집을 짓고/사랑을 나누는 모습들을 보게 될 때/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어떤 힘들은 이 거대한 인류구성에 참신한 활력이 되기도 한다/이런 생각들은 그를 당황케 한다, 해서 그는 당황한다/어떻던 그는 그 당황함 들에게 보여 주었던/잠시의 존경심들을 접어 두기로 작정한다//감정이란 원래가 그토록 무책임한 것이다/그는 목적지 없는 열차표를 읽어 본다//그 사소한 무용한 동작에 마음을 다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떠나야 할 곳이 없기에 머물러야 할 어떤 곳도 없다는 사실/누군가의 사실들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그 사실대로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대체로 이런 방식의 인생에는 어떤 희망도 살아남지 못한다/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아 왔기에 더 이상 잃어야 할/어떤 것도 남아 있지 못한 사람들//그 무표정한 얼굴들이 무엇인가를 안타까워하고 있다면/이것은 명백히 하나의 허위일 것이다//그는 비웃는다 최근의 가장 위태했던 그의 집착을/그는 떠나려 한다 떠날 곳이 없기에/어떤 선택의 망설임도 없는 그/그는 그를 증오한다//-「어디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전문   「사랑에 취한 눈 먼 짐승이여」에서 보여주는 교훈적인 어조는 ‘깨달은 자’의 객관화된 발언으로 이해된다. ‘-이여’라는 감탄형 종결어미의 사용이 그것을 증명한다. 끝 구절 “아우성치는 사랑이란 이름의/저 조심성 없는 갈가마귀 떼들을“은 객관화된 이미지로 과거 자신의 모습도 투영(投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에 취한 눈 먼 짐승이여/집이 있어도 돌아가 누울 곳 없는/이방의 마음들이여//한 때 그대의 앞 발이 정처없이 할퀴었을/기억의 앙가슴팍이여/눈을 떠라/비극이 난무했던 순정의 시대는 갔다//반복은 얼마나 지루할 것이며/증오란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네가 마련한/식탁의 음식들만큼/네 위장은 부풀어 오르는 법//너는 충분히 배부르다/지금까지 먹어 온 상처의 검은 고깃덩어리만으로도//그러므로 거부하라/다시 죽음의 힘을 빌려 달라고/다시 죽음의 장미 향기를 맡게 해달라고//아우성치는 사랑이란 이름의/저 조심성 없는 갈가마귀 떼들을//-「사랑에 취한 눈 먼 짐승이여」전문   「지상의 나날」은 열탕 같은 주관에서 벗어난 관조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관조는 객관적 상상을 만들어내고 질서가 잡힌 인식의 공간을 열어 준다. 시인은 과거회상의 상상적 이미지를 통해서 자기 존재의 정신적 성장과정을 형상화 하고 있다.「어디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와 대조되는 선명한 이미지는 내면의식 속 ‘나’의 진실을 탐구하는 깊은 사유와 함께 시적미감을 높이고 있다.   지상엔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나는 땅속에 있었다/무풍지대의 평화와 안락을 즐겼다//태양은 따스하게 내려 쪼이고/사람들은 한가로웠다/아무도 땅위의 말 따위에 근심하지 않았다//꿈속에 가끔씩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누군가의 음울한 휘파람소리도 따라 들렸다/내 파리한 목덜미 뒤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느다란 비명이/새어나왔다//나는 눈을 떴다/참을 수 없었다//서서히 지상으로 기어 올랐다/동그랗게 모은 나의 눈과 귀사이로/바람이 휙휙 무리져 지나쳐 갔다/간혹 번개처럼 스치는 묘비명을 읽었다//나는 기다렸다//다시 폭풍의 눈 속으로 들어 갈/지상의 무시무시한 칼의 나날//-「지상의 나날」전문   「오늘 밤은 오늘 하루보다 분명 더 길고 길 것이므로」,「지친 자들은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는다」,「나는 처녀야」 등의 시편도 성애적인 이미지의 객관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탐구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3. 나가는 글   필자는 김이원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읽으면서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언어감각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성애적 이미지를 무의식 속 욕망의 환유라는 관점에서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대입해서 그 비밀을 풀어 보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시세계의 변화과정을 가. 길 잃은 욕망의 여행기, 나. 형이상학적 인식-바다의 이미지, 다. 주관적 시각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이 분류는 임의적인 것으로 필자의 시력이 미치지 못하는 또 다른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붙어있는 화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이다. 그는 이 탐구를 위해서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환유의 언어로 내면적 욕망의 실체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사생결단의 구도의 과정을 거쳐 존재의 해방을 의미하는 바다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자크 라캉이 말한 ‘기의의 심연(深淵)’을 뛰어 넘어 실상에 도달하려는 언어의 치열한 몸부림이 얻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불교경전『화엄경』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구도기(求道記)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상투적인 언어에서 벗어나 시 속에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투영하여 집요한 내면탐구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으로서 김이원의 존재는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특이한 개성의 시인으로 평가될 것으로 생각한다.  
59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4>/심 상 운 댓글:  조회:1393  추천:0  2019-07-26
  *월간 2008년 3월호 발표*  유승우/고종목/박대영의 시       유승우 시인의 시-「강물이 바다로」「달빛의 혼」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그 가슴속에 키우던 민물고기들은 다 두고 간다. 바다의 가슴속 어디에서도 강물의 추억이나 기억을 찾을 수 없다. 송사리 새끼 한 마리도 그 품속에 숨겨두지 않는다. 이토록 깨끗한 몸바꿈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지만, 나는 송사리나 미꾸라지처럼, 아니면 산골의 가재처럼 민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강물이 바다로」전문   빛의 혼은 달빛처럼 은은하고 푸르고 깊다. 물을 많이 마신 날이면 내 정신도 푸르고 깊다. 한강 상류의 여울목에서 물살에 찬란히 빠져 죽은 달빛은 밤중의 강물처럼 푸르고 깊게 흘러온 달빛의 혼은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나오고 물을 많이 마신 날이면 달빛의 혼에 취해, 술처럼 취해 달빛이 그리워 달밤이 그리워 파리한 내 정신은 달 밝은 들판에서 머리를 푼다. -------「달빛의 혼」전문   시에 대한 관점은 시대마다 시인마다 다르다. 그 ‘다른 것’이 시의 생명을 영원히 유지하게 하는 시의 에너지가 된다. 만약 시에 대한 정의와 표현기법이 같아야 한다면 시인은 그만큼 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고, 시를 읽는 맛이나 시를 짓는 흥미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유승우 시인은 자신의 시관詩觀을 (시문학 2007년 2월호)에서 ‘신과의 대화’라는 관점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의 표현방법은 이미지의 기법을 따른다고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시는 우주의 구현 즉 ‘사람의 몸’이라는 독특한 발상을 내세우고 있다. 그의 이런 시관은 동양의 시관보다는 정통적인 서양의 시관에 맥이 닿는다. 기독교의 사유와 관념을 중시하는 서양의 시관은 현대시에서도 형이상의 관념을 추구하는 철학적 시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는 김현승의 주지적 관념시를 예로 들 수 있다.) 시의 내용을 ‘신과의 교감交感‘이라는 정신세계에 두는 형이상의 시는 기독교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 날 때, ’나‘를 버리면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는 동양의 정신세계와도 교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시에서는 이런 정신세계에 대한 천착보다 그것을 어떻게 시로 표현하고 이미지화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미지는 감각의 산물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시의 물리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대시에서는 ‘사물성의 이미지’ 그 자체를 시로 인정하기도 한다. 「강물이 바다로」는 시인의 관념을 하나의 비유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려는 것 같다. 에서, 바다는 분별과 차별이 사라진 우주적인 세계를, 강물은 분별과 차별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바다나 강은 본래는 같은 세계지만 인간의 지식과 분별에 의해서 차별화된 세계이다. 강에서 바다로 간다는 것은 차별의 세계(비본질적인 세계)에서 무차별의 세계(본질적인 세계)로 떠나는 정신적인 여행을 의미한다. 이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는 여행은 사물이 원소로 환원되는 물질의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발생하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시인은 바다로 가는 여행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 그 기도는 신과의 만남이고 대화다. 이 보이지 않는 대화의 내용을 비유적 언어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 이 시의 표상이다. 그러면 이 시는 이미지의 형상화에 성공한 것일까? 관념의 힘에 의해서 시인의 상상력이 너무 단순화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의 전달을 목표로 함으로써 시의 감각적 기능이 위축되고 설득적인 기능이 우세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점에서 그의 초기 시「달빛의 혼」과 비교가 된다.「달빛의 혼」에는 시인의 관념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관념보다는 시인의 감각이 더 진하게 묻어난다. 시인은 어느 날 푸르고 은은한 달빛에 취해서 라고,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한강 상류에서 찬란하게 빠져 죽은 달빛이 수도꼭지를 통해서 나온다는 발상은 매우 독특하고 기발하다. 그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과학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상상이고 허상이라고 할지라도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상상의 기능을 통해서 관념적인 시보다 시적 즐거움을 더 향유하게 된다. 이것을 러스킨(John Ruskin 영국 1819. 2. 8~1900.1. 20)은 “시에 있어서 표상이 진실치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경우가 흔하다”고 하면서 이를 “감상적 허위(Pathetic Fallacy)”라고 하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대시에서 시인들의 시적 방법론과 시관은 매우 다양하다. 이 다양한 시관에서 하나의 차이점을 집어낸다면 시는 ‘진리발견의 도구’가 아니라는 견해와 시는 진리를 표상해야 한다는 견해다. 따라서 전자의 시인들은 자신의 의식과 심리적인 이미지에 더 몰두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무한한 이미지의 세계를 구현하는 데서 시적 성과를 얻는 반면 후자의 시인들은 형이상학적 사유의 표상에 시의 가치를 두고자 한다. 시의 이런 형이상학적인 진리표상의 문제는 그리스시대의 시와 철학과의 갈등관계에서도 발견된다. 플라톤은 정서와 비논리를 존재의 바탕으로 삼는 시는 공리의 법칙과 엄정한 논리를 근본 바탕으로 하는 과학이나 철학에 비해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도구로서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인들 중 형이상학적 시를 추구하는 시인들은 주지적 관념을 통해서 시 속에 우주적 진리를 담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감성적인 시의 ‘시적 진실’과 형이상학적 사유시의 ‘진리’는 서로 공생하면서도 충돌하게 된다. 유승우 시인의 시「강물이 바다로」와「달빛의 혼」은 그런 관점에서도 흥미롭게 읽힌다. *유승우(柳承佑): 1969년 추천 등단. 시집: 등   고종목 시인의 시- 「APT가 아프다」「멀티카드섹션」   아파트창이 환히 조각보를 펼친다. 창 하나, 빨간 가구 빨간 옷 빨간 몸이 창 하나, 파란 수족관속에 파란지느러미의 물고기들이 창 하나, 주말 부부 뽀글뽀글 노랑머리 여자와 뽀메리온이 흔들의자에 앉은 흔들 입맞춤이 창 하나, 설날 저녁 삼대가 앉아 보는 축구경기 슛-초록축구공의 포물선 TV화면을 출렁 흔들고 창 하나, 낡은 차 안 불이 꺼졌다가 깜박 껴진다. 10년 무주택인 K씨가 타고 있다. 2월 밤 불을 켠다. 소장 〮〮〮․ 대장 ․ 십이지장 ․ 신장 ․ 비장 ․ 췌장 ․ 맹장 ․ 애간장 아파트 내장이 부글거린다. -------------「APT가 아프다」전문 * 뽀메리온: 애완용 강아지 종   바늘구멍 속에다 한 남자가 비릿한 살비늘 떨구었다 한 여자가 벽자壁紫색 도라지꽃 한 송이 놓고 갔다 한 노인이 소태 씹은 혀를 한 젊은이가 푸르게 발기한 꿈 한 페이지를 한 어린이가 구슬을 떨구었다 고운 색실로 한 땀 한 땀 그리고 또 한 망자가 삼베로 싸맨 빈 손 낙관을 한 신부가 주문하지 않은 성경책 한 권을 한 부처가 목탁소리 내려 놓았다 바늘 ‘구멍’ 속에 쫙 펼친다 멀티 카드섹션 ----------「멀티카드섹션」전문   시는 체험이라는 말이 있다. 시인의 상상이나 사유도 체험의 파생적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종목 시인은 실과 바늘을 삶의 도구로 삼아 평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조각보는 내 시의 과거, 현재, 미래의 입체적 공간이다. 또한 종교와도 같은 정신적 주체이다. 그래서 바느질로 점철된 시를 쓴다. 그 공간은 시를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만 둘 수가 없다. 작업을 통해서 시간적 공간을 넘나들며 나의 내면 깊숙이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를 바늘땀 한 땀씩 뜨듯, 받아쓰기 한 것이 내 시의 기본이 된다.”라는 그의 말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삶의 진실과 체험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언어로 된 시만이 아니라, 회화繪畵의 세계에서도 독창적인 이미지로 ‘조각보’의 예술적 공간을 열어 보임으로써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시편 중 조각보의 연결과 유사한 시들은 독특한 감각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시에는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이 불연속적인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APT가아프다」에서는 불빛이 환한 아파트 창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그의 상상을 모아놓음으로써 인과적 연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새로움을 준다. 그는 자신의 관념으로 독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주기를 통해서 ‘공감 나누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상상은 현실과 연결되지만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그 세계는 어떤 의미나 관념에서 해방된 제2의 공간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존재한다. 그것은 또 ‘독자들의 공간 넓히기’의 방법이 된다.「APT가 아프다」를 형성하는 4개의 화상畵像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적인 상상의 그림을 펼치고 있다.가 그것이다. 이 시에서 ‘빨간 가구 빨간 옷 빨간 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래서 독자들은 빨간〓욕망으로, 또는 빨간〓생명으로, 또는 빨간〓성性으로 각각 다르게 환원하여 이 시를 감상하게 된다. 그리고 4번째 화상 속에 들어 있는 무주택자 k씨의 모습은 이 시가 현실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개의 화상에 담겨 있는 동적인 영상은 디지털의 생동하는 화면이 되고 있다. 그 영상은 언제나 입체적이고 현재형이다. 그리고 가변적이다. 그 변화는 작은 단위들의 집합적인 결합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하이퍼텍스트 적인 화상에도 시인의 내적 의식의 그림자가 진하게 깔려 있다는 것을 「멀티카드섹션」은 보여주고 있다. 의 구절들이 시인의 잠재의식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중심 키워드는 바늘구멍이다. 그 바늘구멍은 시인이 지나온 삶의 현장을 찍어서 보관한 카메라의 렌즈다. 평생을 바느질을 하며 살아온 그에게 바늘구멍은 세상을 보는 창이 되고 세상을 표현하는 기호가 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논리다. 그것은 이 시가 그가 경험한 생의 풍경을 멀티 화면으로 펼쳐놓았다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도라지꽃 한 송이를 놓고 간 여자, 푸르게 발기한 꿈 한 페이지를 놓고 간 한 젊은이는 그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젊은 날의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린이, 망자, 신부, 부처 등은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해준 인연들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가벼운 터치로 언어의 화면에 그려 놓은 멀티 카드 섹션의 그림들이지만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의 인생을 형성시켜준 인연들이라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는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 대상들과 만날 수도 있지만 현실을 초월한 환상적인 그림으로 만나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삶을 관조하는 눈이 환하게 떠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보여주는 화상의 세계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 원망, 저주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도 환희, 즐거움 같은 긍정적인 정서도 다 잦아든 담담함과 맑고 투명한 의식만 남아있다. 이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 ‘건너편의’ 또는 ‘초월’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림(사진)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사실(fact)일 뿐이다. 그 속에는 감정이 들어있지 않다. 그런 심적 상태는 선禪의 세계와 같다. 선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법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고종목 시인의 시편 중 사회봉사의 체험을 표출한 작품들도 그것이 독립적인 영상이라는 점에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종목: 1996년 시집 로 시작활동. 시집:   박대영 시인의 시- 「깨밭」「김화백이 보낸 그림」   깨 심어 놓고 그날부터 깨밭에 앉은 할머니 종일 산비둘기와 다툽니다 금줄을 쳐놓고 허수아비를 세웠지만 만만찮은 놈들 할머니의 걸음으로 알아챘나 봅니다 생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영감은 비탈밭에 누워 자꾸만 말을 거는데 돌아앉은 할머니는 막대기를 두드리며 훠이 훠이 누굴 쫓는지 모르겠습니다 속없는 자식들 이제 비탈밭은 포기하라고 올 때마다 노래를 불러대지만 알았다며 그 냥 웃지요 너희들은 모른다며 돌아서 울지요 산비둘기들이 고맙답니다 종일을 앉아있어도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오늘도 지팡이 같은 막대기 들고 비둘기 쫓으러 비탈길을 오릅니다 -----「깨밭」전문   나에게는 늘 따로 셈하고 갈무리해야 하는 밑천 같은 화가 친구가 있다 무슨 한이 그리 많아 아름다운 것들은 죄다 가두어 버리고 싶어하는 욕심 많은 그림쟁이 그가 보낸 풍경화를 오늘 새벽에야 보았다 내가 살았던 어린 시절 고향집 같은 아니면 지난 밤 기억 없는 꿈속에서 한참 살았을 것 같은 나지막한 산 아래 흙담의 작은 집이 있고 꿈길 같은 황톳길을 돌아들면 고즈넉이 저녁연기 깔린 마당이 보인다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렀노라면 쇠죽 쑤던 김화백이 반갑게 뛰어 나오며 빨리 술상부터 보라고 고함지를 것 같은 꼭 들러보고 싶은 저 집 그림아래 찍힌 자그마한 문패를 들어서면 늘 배경으로 남아 있는 그 친구가 살고 있겠다 --------「김화백이 보낸 그림」전문   현대의 보편적인 도시인들에게 ‘고향故鄕’은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낱말일까? 추석이나 설이 오면 고속도로에 늘어선 귀향차량들의 행렬이 고향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한다. 고향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기억 속의 시골마을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 곳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안정감과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근래에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45억2000만원)를 기록하여 화재가 되고 있는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는 그림의 기법이 탁월한 점이 그림 값의 대부분을 차지하겠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림 속에 묻어 있는 1950년대의 삶의 추억과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다. 그 속에는 빠른 변화 속에서 도시인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삶의 향기와 정서가 들어 있다. 이런 과거회귀의 정서는 빠르게 변하는 현대 도시생활 속에서 벗어나서 느리게 사는 법을 추구하는 이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느림’을 21세기의 삶의 방법으로 내세우고 의식주에서 옛날의 생활양식을 재현하고자 한다. 시인들 중에도 그런 사고방식에 동조하여 ‘느림의 미학’을 현대시의 시적 방법으로 구조화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는 문명에 대한 반동이며 비인간적 삶에 대한 향기로운 반항反抗이라는 점에서 시대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이슈가 된다. 박대영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시편에는 단순한 향토의 풍물을 넘어서는 시인의 의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기법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삶의 한 쪽을 ‘향토鄕土’라는 배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깨밭」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다 빠져나간 현대농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할머니는 깨 밭에서 하루 종일 산비둘기와 다투며 산다. 산비둘기들이 깨의 씨앗을 파먹기 때문만이 아니다. 일찍 세상을 떠나간 남편은 산언덕에 묘지가 되어 누워 있고, 홀로 된 할머니는 남편 무덤과 무언無言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식들은 할머니에게 비탈밭을 팔아버리라고 하지만 그런 말에는 아랑곳 않는 할머니는 남편이 있는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현실의 장면을 그는 라고, 사실적인 묘사描寫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정서나 관념을 최소화하고 할머니를 하나의 이미지로 부각시킨 언어의 그림이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이미지는 고향을 지키는 상징적인 캐릭터가 되어서 독자들에게 고향의 원형原形을 느끼게 한다. 이런 원형의 이미지는 는「김화백이 보낸 그림」에서는 더 생동하는 이미지가 되어서 고향의 정취를 풍긴다. 김화백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흙담의 작은 집이나 저녁연기 깔린 마당이나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렀노라는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빨리 술상부터 보라고 고함지르는 쇠죽 쑤던 김화백의 모습은 그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싶어 하는 낭만적인 고향의 이미지다. 그는 그것을 환상 속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그림은 환상의 액자 속에서 뛰어나와 살아 있는 현실 속의 그림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생동하는 심리적인 이미지는 독자들을 시의 현장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이 환상과 현실의 조화는 박대영 시인의 시를 ‘독자적인 존재성이 있는 향토의 시’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박대영: 1998년 월간 등단 시집: 「봄을 찾아 남으로 달리지 마라」
58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3>//심 상 운 댓글:  조회:1259  추천:0  2019-07-26
*2008년 2월호 발표* 김시철/위상진/이솔의 시   김시철 시인의 시-「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   눈 내리는 아침 현관을 나서려니 현관마루로 올라서던 녀석 후닥닥 도망을 친다.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 한건 나다. 도망가는 놈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이 아침 놈이 웬일로 우리 집엘 온 것일까 나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눈 쌓인 산속엔 먹을 것이 없어서 혹여 내 집엘 동냥 온 건 아닐까. 그날 이후 내내 도망치던 놈의 뒷모습이 선해 먹을 것을 내다놓고 닷새를 기다렸지만 종무소식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닌 걸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 덫에 걸린 고라니가 마을 사람들 술안주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전문   요 며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만큼을 살았으니 이제는 비켜서야 할 때다. 혼(魂) 다 빠진 육신(肉身) 굳이 무덤 만들어 썩힐 것이 아니라 뒷동산 어느 소나무 밑에 다가 한 줌 수목장(樹木葬) 을 하면 어떨까. 요 며칠 그 생각에 깊이 들다보니 뒷산이 모두 내 집이요 소나무가 모두 내 몸만 같네. -「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전문   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인 자신의 체험이다. 그 체험은 시를 의미의 세계보다 한 단계 높은 존재의 세계로 끌어 올리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T.S.엘리엇의 “시란「무엇은 사실이다」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란 말도 시의 창작과정創作過程에서 체험을 중요시한 시론으로 해석된다. 이 시론은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문덕수의 수퍼비니언스(supervenience)의 원리도와 맥을 같이 한다. 김시철 시인의 연작시「강원도」에는 그가 서울을 떠나서 강원도 평창 산골에 터를 잡고 산 몇 년간의 생생한 생활체험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시가 현대시의 기법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자연발생적인 정서의 표현에 머물고 있지만, 사실(fact)이 주는 시적 감동 속으로 독자들을 들어가게 하고 시를 읽는 맛을 진하게 한다. 특히 그의 사상이나 견해가 직설적으로 들어있지 않고, 그것이 사실적 체험 속에 융합되어서 표현된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된)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공감의 깊은 울림을 준다.「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은 그런 면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는 시인의 특별한 언어적 수사가 없어서 언어와 사실이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이루고 있지만 독자들을 뜨거운 피가 흐르는 감성과 사유의 공간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는 어느 눈 내린 겨울 날 아침, 현관에서 고라니와의 예상치 않은 마주침에 놀란다. 그때 그는 도망가는 고라니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라고 고라니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서술하고 있다. 그 심경 속에는 인간과 동물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선 따뜻한 마음이 들어 있다. 그 마음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삶을 누리는 순수한 동화同化의 마음이다. 추운 겨울철을 견디는 산속의 동물들에게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 굶주림이다. 몇 년 동안 산골 생활을 한 시인은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들과 공생共生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터득하고 있다. 그 방법에는 관념적인 사상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자연과의 화합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원리가 들어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겨울철 산짐승들이 다니는 산길에 덫을 놓고, 그 덫에 걸린 짐승들을 술안주 감으로 삼고 즐기는 것을 농한기 놀이의 방법으로 당연시한다. 그는 이 시의 끝 연에서 그 인습적因襲的(원시적)이고 무지無知한 삶의 현장을 라고 담담한 어조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어조는 담담하지만 그 어조 속에 담긴 그의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은 시의 여운으로 남아서 독자들의 마음을 휘어 감는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런 현실을 인정해야 하느냐고, 독자들에게 인간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자연관(자연친화 사상)은「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에서 더 개성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서라고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라고, 한없이 넓은 또 하나의 세상을 만나는 상상에 젖어들고 있다. 그의 상상은 관념의 문을 열고 나온 사실적인 이미지가 되어서 이 세상의 생명의 뿌리와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불변하는 자연의 원리 속으로 벌거벗은 시인의 정신이 들어가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저 뒷동산의 나무와 내가 한 몸이 된다는 상상은 인간의 우월성을 모두 벗어버린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큰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것은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시의 향기를 즐기면서 철학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잠시 들어가게 되는 키워드가 되고 있다.   * 김시철(金時哲): 1956년 김광섭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 등 다수   위상진 시인의 시-「한강」(각색 시)   나는 흐르는 동안에만 물의 씨앗을 낳는다 태백에서 흘러오다 두물머리 어디쯤에서 천 년을 잘라내고 어둠이 치마폭을 들추며 달을 내려놓는다 (무대 위에서 푸른 천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굽이굽이 휘어지며 맨발로 숨차게 흘러온다 (흰옷)과 땅(검정옷)이 뒤섞인다) 오래 전 끊어졌다 이어진 다리 아래 물그림자를 밀고 가는 무늬 흐르듯 멈추듯 달이 사리를 품는 중이다 (물그림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휘감고 손가락 끝에서 CD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린다 푸른 강이 천천히 색소폰 소리를 타고 흐른다) 김창렬이 그린 흐르지 못한 물방울이 바다로 가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양수가 싹을 틔우며 내 품으로 떨어진 꽃잎 같은 이름 하나 둘 불러낸다 (원을 그리며 도는 빨간색 체조 리본 꽃잎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생명들) 나는 흐르며 단단한 심이 박힌 물의 자식을 세상으로 내보낸다 (푸른 천을 뒤집어 쓴 비밀스런 강의 뿌리에서 물의 자식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 --------------------「한강」(각색 시) 전문   21세기 한국 현대시는 잃어버렸던 음악성과 공연성을 다시 찾기 위한 시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인들은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에 시의 영상을 비추고, 조명과 배경음악과 연기, 시의 낭송과 노래 등을 통해서 자신이 꿈꾸는 시의 이미지를 관객(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시를 라고 명명命名한다. (2007년 11월 17 한국 현대시인협회 주최 제1회 전국 공연시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공식적으로 의 장르 선언을 함) 현대시의 이런 변화의 움직임은 언어(문자)를 유일한 표현매체로 삼는 모더니즘 시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창조적인 변화의 양상으로서 그 속에는 현대의 특성인 ‘경계 허물기’ 와 ‘통합하기(퓨전)’가 들어있다. 따라서 시의 공연화公演化는 시와 무용, 시와 회화, 시와 음악, 시와 연극 등이 융합하는 현대시의 혁신적 변화로서 ‘열린 시’의 의미를 갖는다. 위상진 시인의「한강」(각색 시)은 이런 관점에서 관심을 끌고 흥미롭게 읽힌다. 그는 자신이 창작한「한강」을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해서 연출의 과정을 거치고, 자신의 연기를 통해 관객(독자)들에게 ‘보여주기(showing)’를 한다. 그리고 그 연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각색시脚色詩「한강」을 새로운 창작시와 같이 발표하고 있다. 이런 그의 각색시는 일반적인 서정시를 공연시로 만드는 ‘연출 노트’를 시의 행간에 넣은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그 자체가 창조적인 시적 행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의 각색시「한강」은 원시와는 다른 독특한 시의 맛과 향기를 독자들에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한강」의 원시는 시인의 사유와 개성적인 이미지로 구성된 평면적인 서정시다. 는 첫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이 시의 ‘나’(주체)는 한강이고, 한강의 독백으로 시가 전개된다. 따라서 시인의 관념이 시의 독백을 지배하고 한강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푸른 천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굽이굽이 휘어지며 맨발로 숨차게 흘러온다/(흰옷)과 땅(검정옷)이 뒤섞인다) 라는 ( )속의 지문은 가상현실의 한강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시에 생동감과 예술적인 환상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독자들의 상상력에 자극을 가하고 환상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평면적인 시의 공간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고 시의 감각을 오감五感으로 확대한다. 이것은 연극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효과를 일반적인 서정시에 도입하는 예例로 ‘시+연극’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한 장면의 연극을 감상하는 이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물그림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휘감고/손가락 끝에서 CD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린다/ 푸른 강이 천천히 색소폰 소리를 타고 흐른다)에서는 연기자의 연기와 그가 사용하는 소도구에서 독자들은 독창적인 감각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그 환상의 공간속으로 자신들의 상상을 넣어보는 재미와도 만나게 된다. 특히 CD를 사용하여 반짝이는 한강의 물빛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현대적인 감수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objet)와도 관련되는 시적 소재의 확대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동하는 감성은 (원을 그리며 도는 빨간색 체조 리본/ 꽃잎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생명들)에서는 어떤 논리적 흐름에서 벗어난 상상의 세계로 비약하는데, 이는 시의 공간을 구체화시키고 난해성을 풀어주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것은 상상의 집합적 구조가 원을 그리며 돌다가 연기자의 다리 아래로 떨어진 빨간 체조 리본의 꽃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시의 상징이 극의 상징으로 전이轉移되기 때문이다. 이때, 연기자가 여자일 경우 시 속의 ‘양수’와 어울려서 생명의 원천을 더 본질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시의 끝부분 라는 평범한 구절이 (푸른 천을 뒤집어 쓴 비밀스런 강의 뿌리에서/ 물의 자식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로 인해 성스러운 제의적祭儀的 장면으로 승화되고, 이때 연기자(시인)는 물에서 생명을 받아내는 존재자로 부각된다. 이런 극적 전환의 장면에서 나는 원시보다 각색된 시의 매력에 더 끌리게 되고 각색시의 독립적인 완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위상진 시인의「한강」(각색시)이 아직 미완성의 실험적 작품이지만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공연성이 시사적詩史的 가치와 중요성만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위상진 : 1993년 월간 등단. 시집:「햇살로 실뜨기」   이 솔 시인의 시-「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   균근菌根곰팡이는 암벽 위 소나무를 특히 좋아하여 그 뿌리를 붙안고 산다 균근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곰팡이는 틈새의 물기를 먹고 실뿌리의 왕성한 힘을 양분으로 큰다 실뿌리는 암석을 부수며 곰팡이와 하나가 된다 은밀한 이야기 나누며 가느랗고 끊기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 암석이 갈라지고 드러난 솔뿌리의 자태 꿈같이 뽀얀 실뿌리덩이로 피어난 한줌 흙 없이도 버텨낸 거센 바람에도 암석을 붙안고 서게 한, 나는 내밀한 암각화를 그리는 곰팡이다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전문   코끼리 장식이 붙어 있는 향나무 도장을 판다 삼각칼 끝으로 코끼리의 발바닥을 파고든다 삼각칼 끝 칼날을 세우고 파고든다 장지의 굳은살에 칼을 기대고 신중하게 한 점, 한 획을 새긴다 천천히 획을 그려나가면서 깊게 파고들고 부드럽게 깎아낸다 살짝 점을 찍고 가볍게 날리듯 삐치면서 이 아무개를 새긴다 향나무의 속살은 둥근 얼굴로 나타난다 칼끝에서 찌꺼기를 털어낸다 둥근 얼굴에 살이 붙고 여린 미소 드러나면 이제 향이 우러나올 차례다 한 점, 한 획에서 둥근 얼굴에서 깊은 향이 피어난다 ------「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전문   시를 건축물에 비유하면서 정서와 사상은 시라는 건축물의 중심이 되는 설계도나 기둥과 같다고 하는 이론은 쉽게 변하지 않는 보편성을 갖는다. 그 이론은 보통의 글쓰기 이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의 기능이나 구조, 시의 겉모습이 되는 사물(사건)은 시의 중심이 아닌 부수적인 것 즉 건축물의 미적 표현도구나 소재로 평가될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서와 고정관념(이념)에 식상食傷한 현대 시인들은 시의 중심을 시인의 정서와 사상만이 아닌 언어의 기능이나 구조, 사물자체(사건)에 두려고 한다. 그들은 언어의 기능을 의미의 전달에서 언어의 순수한 예술적 기능으로 전위轉位하려 하고, 사물(사건)을 비유比喩나 상징(의미)의 도구에서 해방시켜 독립적인 ‘사물성의 세계’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 이유는 정서나 사상은 대부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인식인데 반해서 사물(사건)과 언어는 객관적이고 비교적 가변성이 적은 독자적인 존재의 세계(fact)이기 때문이다. 이솔 시인의 시편에는 이런 ‘사물인식의 세계’가 선명하게 들어 있어서, 일반적 정서의 과장된 노출이나 고정관념의 인과적 논리성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신선한 사물성의 언어를 맛보게 한다. 그는 독자들을 자신의 행위나 사물 속으로 안내하면서 사물성의 세계가 펼쳐 보이는 물질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의 앞부분은 미세한 사물의 세계를 관찰하는 시인의 눈을, 끝부분은 사물세계 속으로 들어간 자신의 모습 즉 사물과 합일合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라는, 이 시 속에는 사물세계에 대한 시인의 몰입과 세밀한 관찰만 있을 뿐, 어떤 정서나 사상의 개입이 없다. 그의 사물인식은 대상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채, 중립적인 위치에서 직관적이고 단도직입적 單刀直入的으로 사물과 만나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의 눈은 암석에서 번식하는 균근菌根곰팡이의 활동을 고성능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는 과학자의 눈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독자들의 시선은 암석에서 번식하는 균근菌根곰팡이의 생태에 집중되고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사물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끝부분 에서는 곰팡이와 한 몸이 된 시인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고, 그에 대한 해석은 어떤 관념이 아닌 독자의 상상과 감성에 맡기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중심은 사물세계에 대한 감지와 인식이고, 그 인식이 ‘사물성의 세계에 대한 환기喚起’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는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물을 만지고 또 다른 사물을 창조해내고 즐기는 행위를 보여준다. 이런 행위는 사물인식의 시원始原이 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이들이 흙이 무엇인지 개념을 알기 이전에 흙을 만지고 흙으로 무엇을 만들고 하는 놀이를 통해서 흙과 친해지고 흙을 인식하게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 시는 보는 것보다는 만지고 즐기는 것이 더 사물의 근원에 접근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삼각칼로 나무에 도장을 새기던 자신의 체험을, 라고, 극히 사실적인 시의 언어로 재현再現하면서 독자들을 사물의 내면으로 몰입시킨다. 이런 그의 사실적 진술陳述의 언어 속에는 어떤 관념도 사상도 침투할 수 없다. 그 속에는 오로지 언어이전의 ‘물질과 행위行爲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시는 언어(관념)의 시달림에 지친 독자들에게 맑은 물과 같은 투명한 사물성의 감성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의미생성 이전의 사물성의 세계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세계를 일깨우고, 세상의 풍화작용에 닳아버린 감성을 회복시키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언어이전의 세계로 떠나가는 상상에 젖게 한다. 이런 시를 시의 방법적인 면에서 ‘사물시事物詩’라고 명명命名하기도 하는데, 이솔 시인의 독특한(unique) 감성의 언어가 경이롭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이솔 : 2001년 월간 등단. 시집: 「수자직으로 짜기」「신갈 氏의 외투」  
57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2>/심 상 운 댓글:  조회:1318  추천:0  2019-07-26
월간 2008년 1월호 발표   송시월 시인의 시-「계곡 물 속의 풍경-언어의 감옥·1」「입춘 무렵」   계곡의 물이랑 일렁일렁 바람이 밟고 간다. 오후 3시의 햇 살이 물속에 꽂힌다. 사정하듯 햇살올챙이들 쏟아져나와 바 람의 보폭만큼 흔들리는 바위의 배꼽 위로 줄줄이 기어오른 다. 비위가 기웃 몸을 튼다. 빛살무늬의 버들치 개버들 가지 의 그물망을 빠져나와 여인의 얼굴이, 달이 잠깐 갈라졌다가 이내 붙는다. 얼굴이 찌르르 아프다. 이때, 누군가가 첨벙 손 을 담근다. 오후 3시의 풍경에 뒤엉켜 일그러지는 관념의 예수. ------「계곡 물 속의 풍경-언어의 감옥·1」전문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시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시 속에서 정서와 관념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먹고 싶은 것들을 못 먹게 하는 다이어트의 고행과 다르지 않다. 송시월 시인은 감상적인 정서와 상투적인 관념의 풍요로운 유혹을 물리치고, 대상을 직관하면서 군살이 붙지 않은 생동하는 디지털적인 감성의 언어(탈관념, 사물성의 언어)로 대상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는 그 첫 작업을 ‘언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관념을 최상의 것으로 모시고, 고정관념의 틀 속에서 시를 짓는 시인들에게는 지식과 사상, 종교적 관념으로 가득한 언어는 꿈속의 궁궐과 같겠지만, 깨어있는 시인에게는 지식과 사상, 종교적 관념이 축적되어 있는 언어는 언어의 감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곡 물 속의 풍경-언어의 감옥·1」은 그가 계곡의 물을 보면서 자신의 정신을 투명한 수면에 꽂히는 햇살같이 환하게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산 속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괴인 맑은 웅덩이를 본다. 아주 무심無心한 상태에서 계곡의 물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오후 3시의 햇살이 수면에 꽂히는 것을 보면서 집중된 자신의 마음을 계곡의 물에 일치시키고 있다. 그는 그 순간의 장면을 라고 사진을 찍 듯 영상언어로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디지털 시’에서는 사진 찍기의 기법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접사接寫’라고 한다. 그러나 이 ‘접사接寫’는 “비위가 기웃 몸을 튼다.”에서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인 대상을 그대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 거울에 비친 대상을 찍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언어에는 그의 투명한 마음의 정서가 배어들게 되고 시적 향기가 풍기게 된다. 그러면서 “이때, 누군가가 첨벙 손을 담근다.”는 감각언어를 통해서 촉각과 청각으로 전달되는 물의 물성物性을 환기시키고, 정靜의 분위기를 동動으로 전환한다. 이 동적인 전환은 시 속에 생동의 기운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절정은 시의 끝 구절 속에 들어 있다. “오후 3시”는 실제의 시간으로 정확성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의 감각인데, 이 생생한 감각의 물속에서 일그러지는 것은 ‘관념의 예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관념으로 가득한 언어의 감옥에서 과감히 탈출한 시인의 벌거벗은 정신의 일면을 보여주는 시로 탄생한다. 만약 그가 맑은 물을 보면서 상상 속의 신神의 모습을 떠올리고 신의 섭리攝理를 지향하는 정신세계를 나타냈다면, 이 시는 보통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맑고 투명한 시선과 정서와 감각의 언어로 대상(사물)을 명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동안 쌓였던 관념을 토해내는 수련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시에서도 그런 면이 보인다. 「입춘 무렵」에서도 그의 맑은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 시에서는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사실을 정확하고 명료한 언어로 표현한다. 이때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이렇게 직감적인 감각과 영상성이 사물성의 투명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디지털 시’는 시를 정서의 노출로만 여기는 감상적인 서정시(낭만시)나, 시대적 현실에 경도되어서 산문에 가까워지는 이념지향의 사회시나, 모더니즘의 주지적 관념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21세기의 새로운 영상언어의 시(탈관념 시, 사물시, 기호시, 하이퍼텍스트의 시)를 모두 포용하면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副應하는 시를 모색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현대시사韓國現代詩史에서 1930년대 대표시인 김기림이 평론
56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1>/심상운 댓글:  조회:1171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12월호 발표    문정희 시인의 시-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다른 데는 말고 내 가슴으로 들어와 뜨락에 나뒹구는 부질없는 나뭇잎들 한쪽으로 쓱쓱 치워주세요 언듯 보면 아까워 보이지만 습관뿐인 저 거실의 꽃병 먼지만 앉히고 있는 의자를 치워주세요 그리고 가장 뜨거운 곳에 심장을 다시 놓아 처음처럼 쿵쿵 뛰게 해주세요 거꾸로 돌며 추억만을 되감는 미친 시계가 새 비둘기를 낳을 수 있도록 태엽의 먼지도 털어주세요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다른 데는 말고 내 가슴에 들어와 깊고 쓸쓸하게 박힌 그의 뒷모습 쓸어내버리고 쿵쿵 뛰는 그이 심장을 나의 심장 위에 포개주세요 그의 사랑으로 눈부신 아이가 생기도록 내 안에 맑은 물길을 내주세요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전문   새 햇살 투명한 시 한편 써보려고 처녀림을 찾아 헤매는 십칠층의 겨울 아침 한 청년이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왔다 지난가을 금 간 유리를 추위가 오기 전에 갈기 위해서였다 새 유리를 갈아 끼우려면 우리는 먼저 창틀부터 허물어야 했다 갑각류 껍질처럼 마른 꿈을 부스러뜨리고 접착제로 봉할 수 없는 후미진 언어의 틈마다 더운 숨결을 훅훅 불어넣었다 고정관념이 서서히 허리띠를 풀었다 칼끝으로 민감하게 오므리는 입술을 열자 속살에서 연꽃이 발그레 피를 머금었다 하늘이 드디어 숨을 쉬기 시작했다 빛나는 상처에서 솟아나는 날카로운 무지개 오래 품은 비수처럼 빛을 발하는 시간이란 이토록 깨지기 쉬운 것일까 그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만져보고 싶다고 표현하는 순간 창가에 밧줄하나가 아찔하게 내걸리었다 청년이 거기 처형처럼 매달려 있었다 끝내 지상에 내려놓을 수 없는 나신을 납작하게 누르며 겨울 아침, 새 햇살로 빚은 시 한편이 나의 생을 환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겨울 유리창」전문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경건한 제의祭儀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먼저 자신의 내면을 말끔하게 비우는 일부터 한다. 그리고 습관(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일상에서 일탈하려는 자세를 갖춘다.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먼지 쌓인 인연들에서 떠나기를 시도한다.「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은 그런 시인의 내면의식을 소박하고 단순한 기원祈願의 언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라고. 그러나 유사한 주제의식이지만「겨울 유리창」은 새로운 시적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시의 생생한 속살을 만지게 한다. 문정희 시인은 어느 겨울 날 십 칠층 아파트에서 새 햇살처럼 투명한 시를 쓰기 위해서 정신의 처녀림處女林을 찾아 헤맨다. 그때 한 청년이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온다. 지난 가을 금 간 유리를 갈아 끼우기 위해서다. 그는 청년과 함께 먼저 창틀을 허문다. 이 창틀 허물기는 시인의 내면에 잠재한 갑각류의 껍질 같은 마른 꿈을 부스러뜨리는 일과 이미지가 겹친다. 이렇게 전개되는 ‘유리창 갈아 끼우기’는 이 시에서 중심사건으로 부각되면서 은유隱喩의 문을 연다. 새 유리를 갈아 끼우는 작업과 새로운 시를 쓰는 일은 은유의 세계에서는 두 개의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는 구절은 ‘유리창 갈아 끼우기’라는 사건을 바탕으로 함으로써 견실한 사실적 구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를 던진다.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온 청년이 처형당한 것처럼 밧줄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복합적인 이미지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 발단은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온 청년의 이미지와 생생한 아름다움을 만져보고 싶은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가 결국은 ‘깨지기 쉬운 시간’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시인이 순간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라고. 그래서 이 구절에서는 공연시적公演詩的인 특성이 발견된다. 처형처럼 밧줄에 매달려 있는 청년의 이미지는 극적인 요소(심리적 갈등)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이 시를 무대에서 공연한다면, 푸른 유리창을 들고 들어온 청년과 밧줄에 처형처럼 매달려있는 청년은 대조적인 이미지로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하는 요소가 될 것 같다. 그것은 또 현대의 서정시가 단순한 기원祈願의 어조나 영탄과 감상으로부터 과감히 탈출하여 극적인 영상의 이미지를 창출할 때, 단순구조에서 복합구조로, 주관에서 객관으로, 서정적 진술에서 주지적 이미지로, 평면에서 입체로 성공적인 변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例가 된다. 나는 문정희 시인의「겨울 유리창」을 거듭 읽으면서 푸른 유리를 든 청년의 이미지를 통해 그가 어떤 자세로 ‘현대시’를 쓰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의 시는 그의 치열한 시정신이 뿜어내는 눈부신 광선光線이었다.   *문정희(文貞姬): 1968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꽃숨」「새떼」「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찔레」「우리는 왜 흐르는가」등   문태준 시인의 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는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 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전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족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의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 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가재미」전문   이웃에 대한 뜨거운 연민憐憫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서적 에너지가 된다. 그 에너지는 지적인 깨달음의 언어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현대시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들어 있는 서정시가 독자들과 가깝게 연결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로 부각된다. 문태준 시인의 시에는 이런 연민의 정이 흥건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축축하게 적셔준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영탄이나 주관적 감상에서 벗어나서 신선하고 독창적인 비유와 사실적인 정황情況의 세밀한 표현에 의해서 객관화되어 있다. 이 객관화는 그의 시를 공감하게 하고 견고한 시로 만들어 주는 원천이 된다. 에서 그는 움막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어물전의 개조개의 맨발 비유하고 또 그들의 맨발을 죽은 부처의 맨발로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이중의 비유를 통해서 그는 움막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과 부처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사실 부처라는 존재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인식하는 ‘자비慈悲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의 비유는 타당성이 있고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비유가 된다. 따라서 는 이 시의 끝 구절은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가장들을 떠올리게 하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실직 가장들의 눈물을 느끼게 하면서, 독자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사회적 환경에서 자신의 삶과 어떤 끈으로 이어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런 정황을 그는 가상현실의 이미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여주고 있을 뿐, 독자들을 향해 어떤 주관적 언설도 늘어놓지 않는다. 그것이 이 시의 아름다움이다.「가재미」에서는 그의 객관적인 자세가 대상과 한 몸이 되는 동화同化의 자세로 바뀐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실성을 바탕으로 함으로써 추상적인 개연성에만 의존하는「맨발」보다 시적 공감을 더 진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가재미처럼 누워있는 그녀의 곁에 가재미가 되어 눕는다고 한다. 이런 그의 행위는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시적현실에서는 진실이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라고. 그런데 이 시에서 그녀와 그가 어떤 관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녀는 한 평생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 온 농촌의 아낙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녀의 옆에 가재미처럼 누운 그는 라고 한다. 그는 왜 그녀와의 관계를 밝히지 않고 ‘그녀’라는 모호한 대명사로 표현했을까? 그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고모’나 ‘누이’라고 하는 것보다 그녀라고 하는 것이 시의 의미를 더 넓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라는 대명사는 친척이나 고향 사람들만이 아닌 흙냄새 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대상을 객관화시킨다. 그것은 부처가 모든 생명체를 평등하게 포용하는 것과 같다. 이 시의 끝부분 는 사람사이의 사랑과 그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산소호흡기로 들이 마신 물을 마른 그의 몸 위에 적셔주는 그녀의 행위는 과학적 사실과는 다르더라도 뜨거운 마음을 전하는 행위로서 감동을 준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그녀의 넉넉한 삶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문태준 시인의 참신한 비유와 사실성, 뜨거운 연민이 더 큰 시의 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시를 거듭 읽는다.   *문태준: 1994년 신인상으로 등단함
5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0> / 심 상 운 댓글:  조회:1148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11월호 발표                    이낙봉 시인의 시-「050106」「040823」   지금 시를 쓰려는 내가 식은 커피 잔 가위 구두 종이 의 자 책 연필 벗어놓은 양말 실비듬으로 떨어지고, 지금 시를 쓰는 내가 흐린 하늘 고층아파트 마을버스 보도 블 록 세탁소 약국 부동산 찢어진 비닐봉지로 휘날리고, 지 금 시를 쓴 내가 머리카락 담배 베개 이불 불 꺼진 전 등 재떨이 멈춘 시계 구겨진 잠옷으로 늘어지고, 지금 시 를 지우는 내가 어제의 내가 디지털 시계의 1,2,3,4,5, 6,..........쪼개지고 부서져 바다로 뛰어 들고, 지금 시를 지 우는 내가,                                               -----------------「050106」전문    불타는 지붕 위에서 초록염소가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는다) 불타는 지붕 위에서 초록염소와 연보라색누드가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는다) 불타는 지붕위에서 초록염소가 사라지고 연보라색누드 와 붉은 꽃이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고 손톱을 깎는 다) 불타는 지붕 위에서 초록염소와 연보라색누드가 사라지 고 붉은 꽃이 회색하늘과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고 손톱을 깎고 코털을 자르고......)   그는 그의 흐린 햇빛마을에서 색 색 색과 놀고 나는 나 의 흐린 햇빛마을에서 색 색 색에 묶여 雨期의 말과 논다 ---------------「040823」전문                                                                              음악가가 소리를, 화가가 선과 색채를 예술의 소재로 삼듯이 시인들은 언어를 소재로 하여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시인은 음악가나 화가에 비해서 비예술적인 면이 너무 두드러진다. 그 까닭은 ‘소리’나 ‘색채’에는 의미가 없지만 언어에는 소리(기호)와 함께 의미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예술을 지향하는 시인들에겐 언어가 ‘존재의 집’(하이데카)이나 ‘존재의 무기’가 아닌 ‘존재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언어를 예술의 오브제로 사용하려는 시인들에게 언어의 의미는 ‘고정된 사고思考의 감옥’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의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한국 현대시에서 김춘수가 제창하고 실험한 것이 ‘무의미 시’다. 말년에 그는 무의미의 실험을 포기하고 의미 쪽으로 회귀하였지만 그의 ‘무의미 시’는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언어의 퍼포먼스였다. 그의 ‘무의미 시’에는 언어학의 원리가 밑받침이 되어 있다. 언어는 실체가 아닌 자의적恣意的이고 추상적인 기호다. 예컨대, ‘백두산 문방구’라는 상점의 명칭에서 문방구는 실체의 매재媒材가 되는 자의적인 기호이지만 ‘백두산’은 실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추상적인 기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언어가 이렇게 실체를 떠나 ‘추상적인 기호’로 존재한다는 것은 실체(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의 언어가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색채같이 의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성을 갖게 되는 근거가 된다. 미당의 대표시로 알려진 에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에서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는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나 형이상학적 판타지를 구현하는 기호로서의 언어일 뿐 실제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 시에 쓰인 언어들은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미적 공간’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에서 언어의 역할은 순수 회화에서 색채의 역할과 같다. 그래서 실제의 용도, 공리성에서 이탈된 사물을 예술의 오브제로 사용하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 이론’과도 맥이 닿는다. 이낙봉의 시에도 언어의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강하게 감지된다. 그는 ‘의미’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 위해서 시의 제목을「050106」등의 숫자로 표시하고 있다. 그의 시집(‘미안해 서정아’)을 보면, 이 숫자의 나열은 시를 쓴 연월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私的인 언어행위일 뿐 공적인 의미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따라서 공적으로는 무의미한 기호가 된다. 시의 내용에서도 그는 현실적인 인과관계나 의미형성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의식적인 행위를 한다.「050106」에서 라는 구절을 보면, 그의 언어가 현실로부터 이탈하여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내면의식 쪽으로 떠나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시가 의미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의 예비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쓰인 시어들은 모두 구상어具象語이지만 의미면에서는 구체성이 없는 환상에 가까운 추상抽象이 된다. 그러나 이 시에는 ‘나’라는 주체의 의식이 들어 있어서 시인의 내면의식의 추적을 통해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고약같이 붙어있는 끈끈한 정서의 작용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040823」에는 추상적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무대’가 보이고, 칙칙하고 끈적거리는 의미(관념)가 말끔하게 지워진 언어(기호)의 가벼운 몸놀림이 경쾌하게 느껴진다. 라는 시상의 전개가 거칠 것 없는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불타는 지붕, 초록염소, 연보라색누드, 우울증, 머리를 감는다, 이빨을 닦는다’ 등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나 관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현실의 행위와도 관계가 없는 기호화된 언어로 다시 탄생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아무 부담 없이 시인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서 자유롭게 놀게 되는 것이다. (  )를 경계로 하여 지붕 위의 풍경과 나(캐릭터)의 행위를 분리하여 입체적인 표현을 한 것도 재미있는 착상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시적 행위(언어유희)에 라고 주석註釋을 붙이고 있다. 이 ‘주석 붙이기’에는 의미(현실)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은, 의미 쪽으로 창문을 열어놓고 있는 그의 의식이 보인다. 이 의식은 현실과 상상의 조화라는 면에서 ‘기호시’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건강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이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펼친 정신적인 퍼포먼스가 얼마나 치열하였나, 하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언어실험에 몰두하던 1930년대 이상李箱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낙봉: 198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내 아랫도리를 환히 밝히는 달」「돌 속의 바다」「다시 하얀 방」「미안해 서정아」등   이승하 시인의 시- 「소가 싸운다」   모래사장는 시방 엄청나다 뜨거운 힘과 힘이 맞서 있다 쏘아보는 저 소의 눈이 링에 오른 격투기선수 같다 거품을 입가에 디그시 물고 앞발로 호기롭게 모래사장을 찬다 징이 울리자   힘이 힘을 향해 달려나간다 사방팔방으로 모래가 튀고 사람들의 함성........소와 사람의 힘이 튄다 저놈이 지면 내 힘이 날아가고 저놈이 이기면 남의 힘이 내 힘이 되는 세상 함쪽 소의 뿔에 더 큰 분노가 �려 다른 소의 뒷발이 밀리기 시작한다   힘으로 들이 받자 힘으로 맞받는다 모래사장에 튀는 피 뿌려지는 침 쥐 죽은 듯 고요해지는 싸움판 침을 질질 흘리며 고통을 참던 소가 마침내 삼십육계를 놓자 징이 울린다 싸움이 끝나자 한쪽은 더 큰 함성을 지르고 다름 쪽은 욕설을 내뱉는다   쫒겨 달아난 소가 못내 미운지 이긴 소 못 다한 힘을 어떻게 하지 못해 씩씩거린다 이긴 소의 주인은 소 등을 어루만지고 진 소의 주인은 카악 가래침을 뱉는다 푸른 지폐와 누른 수표가 오갈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이 소의 눈빛보다 더 살벌하다 더더욱 분노에 차 있다 ---------「소가 싸운다」전문   ‘소싸움’은 두 소를 맞붙여 싸우게 하는 경상남도 진주 일대의 전래 민속놀이다. 매년 음력 8월 보름을 전후하여 연중행사로 거행된다. 소 임자는 소를 깨끗하게 씻긴 다음 가지각색의 천으로 정성들여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를 갖가지 아름다운 천으로 장식하며 소목에는 쇠방울을 단다. 소 임자도 깨끗한 무명옷으로 갈아입고 실로 수놓은 주머니를 차고 소 싸움터로 소를 몰고 간다. 소 싸움터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꽹과리와 북을 울리고 새납을 불면서 모여들어 각기 자기 마을소가 우승하기를 기원한다. 소싸움을 주관할 노련한 도감都監이 선발되며, 싸움 붙일 짝소는 연령과 체구를 고려하여 비슷한 것끼리 골라 약한 소들부터 싸움을 시킨다. 도감이 순서에 따라 호명하면 양측에서 소 임자가 소를 앞세우고 나와서 2~3m 떨어진 뒤에서 기세를 돋우며 성원한다. 이때 소는 고삐를 다 풀어주어 몸에 걸치는 것이 없도록 한다. 대개 소싸움은 15~20분이면 쉽게 결판이 난다. 싸움에 이긴 소 임자는 소잔등에 올라타 상품을 소에 싣고 우승기를 들고서 풍물소리에 맞추어 흥겹게 마을을 돌고 돌아온다. 참가자들은 인근 남강南江 터로 가서 흥겨운 대동놀이판을 벌인다. 농민들은 소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구입할 때 키가 크고 몸체가 길고 발이 실하며 골격이 조화되고 뿔도 멋지게 좌우로 뻗은 소를 고르며, 늘 관심을 갖고 소를 관리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민속 문화) 이런 풍속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축인 소를 귀하게 여기고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주민들의 단합시키는 ‘대동놀이판’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전통성을 갖는다. 오늘 날에도 추석 때면 진주지방을 비롯하여 인근 지방에서는 ‘소싸움’ 판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명절풍속의 놀이판도 현대사회에서는 물질주의에 오염되어서 ‘대동大同’이라는 목적에서 이탈되고, 개인의 이기심을 채우는 동물학대의 격투기로 변질되었음을 이승하 시인의「소가 싸운다」는 생생한 사실적 사생寫生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이면을 꿰뚫는 시선으로 인간의 욕망이 뿜어내는 비인간적인 면을 고발하고 있다. 라는 구절에서 그의 그런 시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그의 시적방법에는 두 가지의 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첫째로 그의 시는 현실을 사진을 찍 듯이 객관적으로 리얼하게 사생함으로써 시어의 기능을 단순화시킨다. 그의 시에서 언어와 사물(사실)이 1:1의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이루고 있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그의 시는 언어의 예술적 기능과는 거리가 멀지만 체험적 사실을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명쾌하고 생동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탈-관념적이다. 이런 방법은 ‘현실고발’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시적 효과를 발휘한다. 이것이 리얼리즘 시의 특성이다. 두 번째로는 ‘현실고발’ 속에 들어있는 시인의 가치관과 사상이다. 그것은 휴머니즘 시의 특성과 관련된다. 휴머니스트는 이 세계에 완전하고 아름다운 이념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이상주의자다. 그들의 이념은 철학이나 종교적 관념, 또는 개인적인 차원의 사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신념이 되어 행동화된다. 따라서 완전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휴머니스트는 이지러진 인간성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과 비애를 느끼며 비판하고 분노한다. 이 시에서 그가 ‘소싸움’의 현장에서 느낀 비인간성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그것이다. 라는 이 시의 끝 구절은 그런 그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소싸움’이라는 객관적 대상에 주관적인 높은 인간성과 도덕적 가치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그는 결코 너그러운 마음으로 소싸움 꾼들을 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그에게 소싸움의 현장에서 분출되는 생의 에너지나, 그 광경을 보고 잃어버렸던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관객들의 심리적 현상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 하는 것은 부질없는 행위일 수도 있다. “휴머니스트에게 대해서 사상은 체험의 한 단계로서 감각이나 감정과 불가분리不可分離한 관계에 있다. 그는 체험의 요소들이 결합해서 생동하는 모양에 늘 주목하기 때문에, 사상의 객관면과 주관면의 차별을 그렇게 예민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사상과 정서의 융합된 상태를 추구하여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데 흥미를 갖지만, 객관적인 현실이 횡폭橫暴하게도 인격을 분단하여 체험의 조화를 유린할 때에는 그는 분연憤然히 일어나 싸움을 사양치 않는다.”(최재서「문학원론」Ⅺ사상) 이 구절에는 휴머니즘 시에 들어있는 체험적 생동감과 사상과 정서의 관계, 사상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분출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이 이론에 이승하의 시를 대입하면 그의 시는 체험적 생동감이라는 면에서는 이 이론에 부합된다. 그러나 그의 시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집단적 이념의 시’(1920대의 카프계열, 1980년대의 민중주의 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개인적인 이념(사상, 신앙)에 근거를 둔 휴머니즘 시로 분류된다. 따라서 독자들이 그의 시에서 더 순수한 공감과 전율을 느끼는 이유가 해명된다. *이승하(李昇夏):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생명에서 물건으로」「뼈아픈 별을 찾아서」「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나희덕 시인의 시-「벗어 놓은 스타킹」「소나무의 옆구리」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마한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 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그것은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벗어 놓은 스타킹」전문 어떤 창에 찔린 것일까 붉게 드러난 옆구리에는 송진이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기어가던 개미 한 마리 그 투명하고 끈적한 피에 갇혀버린 것은 함께 굳어가기 시작한 것은   눌러서 버둥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춘 개미, 그날 이후 나는 소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제 목숨보다도 단단한 돌을 품기 시작한 그의 옆구리를 보려고   개미가 하루하루 불멸에 가까워지는 동안 소나무는 시들어 간다 불멸과 소멸의 자웅동체가 제 몸에 자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소나무의 옆구리」전문   인간에게 옷은 단순한 입성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옷이 사람의 몸에 입혀졌을 때 그 옷은 육체의 일부만이 아닌 그 사람의 인격과 감정과 정신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이 입었던 헌 옷에는 그 사람의 혼이 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가 걸쳤던 넝마 같은 옷을 기독교인들은 ‘성의聖衣’라고 하면서 그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신과 접촉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생각은 그 옷이 예수를 대신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옷에 대한 이런 감성과 생각은 남자보다 감성이 섬세한 여자가 더 하다. 나희덕 시인은 어느 날 자신이 벗어놓은 스타킹을 보면서 잠시 사유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벗어놓은 자신의 스타킹을 이라고 삶의 피로감에 젖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스타킹에 이입移入 시키면서 감각적인 비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라고, 무겁거나 칙칙하지 않게, 자신의 체온이 생생하게 묻어나는 감각의 언어로 촘촘한 사유의 올을 풀어낸다. 그는 생에 대한 부정에도 환한 긍정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생동하는 현재의 자기를 그려내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대상을 사생寫生 하는 주체의 위치다. 낭만주의자들처럼 대상에 자신을 전적으로 이입하거나 대상을 자기화自己化 하면 대상과 주체가 너무 밀착되어서 객관적인 관조의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상과 너무 멀리 떨어지면 감각과 사유는 개념화 되고 구체성을 잃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희덕 시인의 대상과의 거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적당하게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감정노출을 억제하면서 감성적인 사유의 언어로 대상을 스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감성적이고 이성적 자세는「소나무의 옆구리」에서 날카로운 사유의 눈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소나무의 옆구리에서 끈적끈적한 송진이 흐르다가 굳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끈적하고 투명한 속에 개미가 갇혀서 송진과 함께 굳어 있는 것을 관찰한다. 그는 소나무의 옆구리에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송진이 소나무를 소멸시키는 암 덩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송진에 갇힌 개미는 불멸에 가까워지고 소나무는 소멸에 가까워진다고 하면서 이 상대적인 둘의 존재를 한 몸 속에 안고 있는 소나무를 자웅동체로 인식한다. 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인식의 절정을 이루는 구절은 ‘불멸과 소멸의 자웅동체’라는 구절이다. 자웅동체[雌雄同體,hermaphroditism]는 암수의 생식기가 한 몸에 있는 생명체다. 자웅동체성 동물은 대부분 연형동물蠕形動物·태충류苔蟲類·흡충류吸蟲類·달팽이·민달팽이·삿갓조개 등과 같은 무척추동물로서 주로 기생하며, 느리게 이동하거나 다른 동식물에 항상 고착하여 사는 생명체들이다. 사람에게도 비정상적인 매우 드문 일로 자웅동체가 되어 태어나 경우가 있다. 이때 성의 선택은 어느 편이 더 우월한가에 따라서 외과수술로 결정된다고 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자웅동체는 이런 생물학적인 의미의 자웅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불멸과 소멸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존재의 모습에 대한 시인의 개성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소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소나무의 옆구리에 불멸에 가까워지는 송진 속의 투명한 개미의 모습은 사유의 공간을 확대하는 상징적인 그림이 된다. 이 그림은 소나무가 불멸과 소멸의 대립적 운명을 안고 조금씩 시들어 가는 것같이 우리 인간들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인식하게 한다. 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송진 속에서 불멸에 가까워지고 있는 개미 같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 시에서는 ‘자웅동체’ ‘불멸’ ‘소멸’이란 단어가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그래서 두 편의 시 속에 들어 있는 사유의 공간은 독자들에게 시를 읽는 시간이 사유의 오솔길을 걷는 시간이 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나희덕(羅喜德) :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등
5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9>/심 상 운 댓글:  조회:1120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 10월호 발표      양병호 시인의 시-「카오스 이론 3-심심하다 심심해」「카오스 이론 9- 꿈의 해석」     악몽이 없는 잠은 심심하다 심심해 반칙이 없는 축구는 심심하다 심심해 대형사고 없는 뉴스는 심심하다 심심해 바람 없는 하늘은 심심하다 심심해 전쟁 없는 세계사는 심심하다 심심해 안주 없는 술자리는 심심하다 심심해 술자리 없는 연애는 심심하다 심심해 돌지 않는 바퀴는 심심하다 심심해 변태 없는 섹스는 심심하다 심심해 섹스 없는 인생은 심심하다 심심해 죽음 없는 인생은 정말 심심하다 심심해 그런데 죽음 있는 인생도 심심하고 섹스 있는 인생도 심심하고 변태 있는 섹스도 심심하고 돌고 있는 바퀴도 심심하고 술자리 있는 연애도 심심하고 안주 있는 술자리도 심심하고 전쟁 있는 세계사도 심심하고 바람 부는 하늘도 심심하고 대형사고 있는 뉴스도 심심하고 반칙 있는 축구도 심심하고 악몽 뒤척이는 잠도 심심할 때 재밌게 놀면서도 심심할 때는 어떻게 하지?               -------- 「카오스 이론 3-심심하다 심심해」전문   #1 다리가 겁나게 무겁고 축축하다 지각변동으로 흔들리는 침대 누군가 소리 없는 고함을 지르고 무채색으로 일그러지는 풍경 실컷 얻어터지고 싶다 억울하다 울고 싶다 담배 피우고 싶다 피융 날아오는 것을 낚아챈다 시퍼렇게 날선 도끼이다 도끼로 다리를 찍는다 여러 번 피가 나지 않는다 살 속에서 빛나는 뼈가 가느다란 아름다움 아프지 않다 전혀 통증 �는 세상으로 잠적하기를 꿈꾸는 삶이여 허망이여 현실 같은 꿈이여                             ----------「카오스 이론 9- 꿈의 해석」#1 전문   우주론에서 카오스 (chaos)는 혼돈상태,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우주의 시원적 공허를 의미한다.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은 동적인 변화가 매우 불규칙적이어서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운동 상태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미분화 된, 질서 이전의, 어쩌면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카오스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현대시에서 실험성이 강한 시운동을 카오스적인 면에서 논할 수 있는 것도 기성의 질서를 부숴버리고 혼돈된 상태로 돌아가서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모색하는 시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한국의 현대시에서 일어난 해체시 운동은 이성理性 중심의 세계관의 허위를 해부하여 (파괴가 아님) 보여주고 그 허구성을 깨닫게 하는 데리다의 해체이론에 기반을 둔 시운동이었다. ‘패러디’를 주축으로 하는 풍자와 야유, 테레리즘 적 언어의 사용은 당시의 민중적 현실과 결부되어서 현대시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는 흔적을 남겼지만, 시어의 저질화, 경박성, 형이상학적 사유의 부족으로 현대시에 상처를 주기도 하였다. 양병호 시인의「카오스 이론 3-심심하다 심심해」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 속에 현실에 대한 시인의 날카로운 진단이 들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에서, 라고, 없는 세계와 있는 세계를 대립적으로 배치하여 ‘없다’와 ‘있다’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를 모색하고자 하는 지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없어서 심심하고, 있어도 심심할 때, 아니 “재밌게 놀면서도 심심할 때는/어떻게 하지?” 라는 시인의 물음은 역설이나 억설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너무 크게 들어 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기 때문이다.「카오스 이론 9- 꿈의 해석」#1은 라고, 그의 ‘심심함’에 대한 치유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무엇에선가 강한 자극을 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실컷 얻어터지고 싶은 꿈, 시퍼렇게 날 선 도끼로 자신의 다리를 찍는 꿈을 꾼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자신의 심리적 무료감無聊感을 치유하려는 본능적인 심리치료행위다. 이런 그의 심리상태는 그의 사유가 ‘허무’에 너무 가까이 닿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수필「권태倦怠」에는, 이상이 시골 생활의 권태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최 서방 조카와 장기를 두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는 번번이 이기기만 한다. 그래서 “나는 왜 저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상태放心狀態가 되어버릴 수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세些細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하고 자신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말한 ‘방심상태’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도道의 경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초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상의 실험적인 다작多作은 세상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여겨진다. 양병호 시인의 ‘심심함’도 그가 허무의식에서 탈출하여 독창적인 카오스의 시론을 심화 확대할 때, 실험성이 강한 시정신의 힘이 될 것 같다. * 양병호: 1992년 으로 등단 시집: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하 늘 한 번 참말로 맑게 반짝이더라」「시간의 공터」   김충규 시인의 시-「손자국」「구름의 장례식」     보수공사를 끝낸 시멘트 골목길 누가 찍어놓은 것일까 발자국이 아닌 손자국 선명하게 찍혀 있다 시멘트 굳기 전 누가 작심하고 찍어놓은 자국, 자세히 보니 새끼손가락 턱없이 짧다 斷指-. 분명 그 흔적인 듯! 옛적 병중인 부모에게 제 피를 내어 먹이려고 끊었다던, 조폭 세계에서 의리를 보이려고 끊는다던, 입대하지 않으려고 작두에 넣고 자른다던, 화석 같은 손자국을 보며 별의별 상상을 다 해보는 아침. 내 오랜 친구 녀석은 연상의 여인에게 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온통 붉은 문장의 편지로 고백했다고 말하며 훗날 사실은 그게 아니라 돼지 피였다고 농을 한 적이 있지만, 손가락 마디 하나 없는 손자국 섬뜩해서 누군지 몰라도 세상을 향해 뭔가 항의를 하려고 찍어 놓은 듯해서 쭈그리고 앉아 그 자국 위에 내 손 맞춰 보는데 허, 마치 내가 찍어 놓은 듯 별 어긋남이 없다 다만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자국 밖으로 삐죽 나와 만약 내가 마디 하나를 끊게 된다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생각해 보다가 흠칫 놀란다 그 손자국, 길 가던 이들을 섬뜩하게 했던지 저물 무렵 다시 그곳을 지나쳐 오는데 새 시멘트가 뭉클 덧씌워져 있다                                     ----------「손자국」전문   비를 뿌리면서 시작되는 구름의 장례식. 가혹하지 않은 허공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엄숙한, 날아가는 새들을 확 잡아들여 깨끗이 씻어 허공의 제단에 바치는, 죽은 구름의 살을 찢어 빗줄기에 섞어 뿌리는, 그 살을 받아먹고 대숲이 웅성거리는, 살아있는 새들이 감히 날아갈 생각을 못하고 바르르 떠는, 하늘로 올라가는 칠 일 만에 죽은 아기 영혼을 아삭아삭 씹어먹는, 산 자들은 우산 속에 갇혀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만이 참여하는, 지상에 흥건하게 고이는 빗물에 살냄새가 스며 있는, 그 순간 나무들의 이파리가 모두 입술로 변해서 처연하게 빗물을 삼키는, 손가락으로 빗물을 찍어 먹으면 온 몸에 구름의 비늘이 돋는, 비를 그치면서 끝나는 구름의 장례식.                                         -----------「구름의 장례식」전문   현대시에서 언어의 신선한 감각과 상상력의 확대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초현실주의 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낭만주의 시나 모더니즘의 주지시도 상상력과 언어 감각이 부족하면 성공작이 될 수 없다. 이 ‘신선한 상상력’은 현대시에서만이 아니고 21세기 기업운영에서도 핵심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2007년 2월16일자 기사에는 2007년 주요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주제가 ‘창조교육’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 신제품 만들기다. 연수의 결과물 중에서 '아이-라이크(Eye-Like)‘라는 제품이 있다. 콘택트렌즈처럼 이 제품을 눈에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한다. 집에 들어와 아이라이크를 빼내 별도 플레이어(재생기)에 장착하면, 그날 일상에서 본 모든 영상이 아이라이크에 담겨 있다. 플레이어를 통하면 그날 하루 일과가 그대로 재생된다. 눈에 끼는 캠코더를 연상케 하는 제품이다. 이 제품은 미래 지향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신제품이다. 김충규 시인의「손자국」에는 싱싱하게 살아 있는 언어감각과 상상이 넘치고 있다. 마치 바다에서 금방 잡아 올려 퍼들거리는 등 푸른 물고기 같다. 그의 상상은 독자들에게 구태의연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상의 갖가지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시를 읽는 재미와 자기 성찰의 계기를 주고 있다. 시인은 어느 날 시멘트 공사를 하는 골목길 바닥에 찍힌, 새끼손가락이 잘린 손자국을 보면서 등의 상상을 펼쳐 놓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을 그 위에 겹쳐 보면서, 고 말한다. 현장성과 사실성 그리고 시멘트에 손자국을 남간 사람과 자신과의 동일성을 드러내어 긴장감을 조성하고 공감의 영역을 확대한다. 이런 그의 상상은「구름의 장례식」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의 세계로 퍼져나간다. 구름이 비가 되어서 내리면 하늘의 구름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시인은 그 자연현상을 의식화儀式化하여 ‘구름의 장례식’이라고 창의적인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 의식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가상현실의 세계이지만 사실화된 표현의 힘에 의해 독자들은 신선한 감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비를 맞음으로써 지상의 먼지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더 활발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을 이라고 표현하여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빗줄기를 맞을 때 대숲에서 나는 소리를 이라고 하여 대숲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더욱이 이라는 빗소리에 대한 그의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놀라움을 준다. 그의 이런 감각세계는 이라고 하여 탈-관념의 현장성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라는 상대적인 공간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상상의 언어들은 논리적, 인과적인 구성과는 다른 집합적集合的 구성構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상상의 다양함과 새로움을 배가시키고 있다. 시상을 이끌어가는 “.....하는,”이란 동사動詞의 관형형어미冠形形語尾의 종결시구는 그 다음에 연결되어야 하는 논리적 언어인 체언體言과 단절되면서, 어떤 관념의 형상화가 아닌 순수 이미지의 공간을 활짝 열어 준다. 만약 논리와 인과因果에 의한 상상이라면 그의 상상은 관념의 감옥 속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논리와 인과는 자유로운 상상과 싱싱한 감성을 죽이는 사막砂漠과 같은 언어구조의 완고한 틀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지(상상)의 집합적 결합’ 이라는 방법으로 자기 시의 영토를 푸른 풀들이 무성한 초원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야생의 꽃을 피워내고 있는 김충규 시인의 시세계를 즐거운 마음으로 답사해본다. * 김충규: 1998년 문예공모「낙타」외로 등단 시집:「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김선호 시인의 시-「몸 속에 시계를 달다」「대형 할인 마트에 갇히다」     새벽 6시면 알람시계가 울린다 시계소리 한 알을 삼킨다 둥글고 매끄러운 시그너스 시계 캡슐이 몸에 들어오면서부터 아침이 시작된다 몸 속의 시계는 쉬지 않고 약물을 퍼트리며 나를 데리고 어디로든 가려고 한다 몸과 마음은 시계에 갇힌 채 시계바늘을 따라서 둥근 세상을 돈다 시계는 제가 정한 처방대로 나를 이끈다 밥을 먹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나를 재촉한다 내 안의 시계는 시간의 경계가 확실치 않아서 슬픔 너머 저쪽 지나간 시간을 불러오거나 희망 언저리를 따뜻하게 데우기도 한다 약효가 소모될 때쯤이면 시계에 의지했던 하루가 제자리로 돌아 오고 내일 삼키게 될 알약을 다시 준비한다 --------「몸 속에 시계를 달다」전문   정전된 건물에 들어오니 산 속 암자처럼 조용하다 쉴 틈 없이 돌려대던 환풍기 소리가 멎으니 천정에서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빼곡이 앉아 있는 나한상들처럼 몸 맞대고 서 있던 바코드들만 분주하게 움직인다 대량의 소비를 촉진하던 욕망들에게 창틈으로 빛이 안쓰럽게 비칠수록 이들의 욕망은 배로 번식한다 나가지 못하고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슬슬 부패를 시작하거나 제 몸 속의 물을 내보내며 가벼이 날기를 기도한다 이곳은 세상의 속인가 바깥인가 나는 이곳에 한 오년 갇혀도 살 듯 싶은데 동안거에 들어가 박스 속에 담긴 상품들을 화두 삼아 겹겹이 포장된 옷 벗겨 보고 싶은데 소비 사이클이 순간 정지 하자 금방이라도 질식할까 봐 저들은 불안해 한다 --------「대형 할인 마트에 갇히다」전문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어떤 곳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하겠지만,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벗어나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을 갖게 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벗어나면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생존의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라는 답이 보편성을 가질 것 같다. 그래서 현대의 도시인들은 건설, 개발, 풍요, 대량소비가 발생해 내는 공해, 비인간화, 물질주의 등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도 그 조직의 원소元素가 되어서 살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손익계산마저도 잊어버린 채, 마치 마법魔法에 걸린 동화 속의 캐릭터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공해, 비인간화 등을 피해서 도시의 생활기반을 버리고 자연으로 들어가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간 자연은 순수한 자연이 아니고 이미 도시화都市化된 반쪽 자연일 뿐이다. 김선호 시인의 시에는 물질문명이 고도화된 현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가 들어 있다. 그는 반문명反文明 또는 문명비판이라는 상투적 메시지에서 벗어나서 인공적인 것들과 화합하면서 새로운 삶의 꿈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그 꿈을 보여주기 위해 몸속에 알약처럼 시계를 넣는다는 독창적인 상상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리포터가 되어 대량소비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의 그런 행위에는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스스로 내적사유의 세계를 확대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것은 인간이 문명과 자연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과 부합된다.「몸 속에 시계를 달다」는 전자에 해당하는 시다. 그는 아침 6시에 알람시계의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는 것을 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고 한다. 시계소리를 알약처럼 매일 먹으면서 사는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시계가 정해준 일과日課에 따라서 움직이고 생각하는, 로봇robot 같은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고 한다. 그것은 일방적인 반문명의 메시지를 넘어서는, 인공적인 것(문명)과 자연적인 것(인간의 감성)의 화합을 통해 제3의 길을 여는 사유의 열쇠를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여겨진다. 이 시에서 시계소리는 알약에 연결되고 알약은 현대인들의 행동을 구속하는 시계의 기능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슬픔 너머 저쪽”이라는 세계를 지향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런 발상 속에는 약을 많이 먹는 현대인들의 생활습관도 들어있어서 독자들의 거부감을 최소화시킨다.「대형 할인 마트에 갇히다」에는 자신의 몸을 현대도시를 상징하는 대형 마트 속에 밀어 넣고 공포와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모습이 들어 있다. 그는 어느 날 대형 마트에 들어갔다가 정전停電이 된 공간 속에 놓이게 된다. 그 정전된 대형 마트의 공간 속에서 그는 고 오히려 자연 속과 같은 안정감을 찾는다. 그리고 라고 여유로움을 보이고 있다. 그 여유로움은 그의 내면적인 사유의 힘에 의한 것이다. 그 사유의 바탕에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 불교적인 마음이 들어 있다. 그리고 변화에 부동不動하는 선禪의 정신이 담겨있다. 정전은 현대사회에서 대형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정전이 되면 은행의 컴퓨터는 물론 지하의 전동차가 멈추고, 통신,TV 등이 제 기능을 잃는다. 냉장고의 음식이 상하는 것은 작은 일에 속한다. 이렇게 순식간에 도시전체가 마비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감에 떨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대도시의 허점이며 아킬레스건이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 현대도시이고 그 속에서 불안감을 안고 사는 존재가 현대인이다. 그런 현대인들이 스스로 평화를 만들며 자유로워지는 삶의 모습을 그려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김선호의 시는 그것을 인간의 내적 해방이라는 체험적 행위로 보여주려고 한다. 나는 거기에 ‘도시선都市禪의 시적 체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본다. 그리고 문명비판을 넘어서는 모더니즘 시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 김선호: 2001년 월간 등단 시집: 「몸 속에 시계를 달다」
53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8>/심 상 운 댓글:  조회:1155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년 9월호에  발표   남진우 시인의 시-「깊은 밤 깊은 곳에」「전갈에 물리다」   깊은 밤 잠자리에 누우면 차갑게 식은 몸에서 비명이 스며나온다 스며나와 방바닥을 가로 지른다 내 몸을 떠나가는 저 하루치의 쓰라림 서서히 모든 집 문지방에서 비명이 새어나온다 새어나와 피처럼 골목을 적신다 때로 웅덩이를 이루고 때로 거품을 일으키며 텅 빈 거리와 광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흘러가는 비명소리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비명은 모여 든다 모이고 모여 마침내 일어선다 일어서서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비명이 다 빠져나간 몸은 침침한 어둠 속에 가라앉고 지상은 눈부신 달빛 아래 치솟아 오르는 비명의 소용돌이 비명으로 뒤덮인 세상은 참으로 고요하다 ---------「깊은 밤 깊은 곳에」전문 책을 펼치면 보인다, 지난 밤 나를 물고 사라진 전갈이 기어간 자국 사막을 가로질러 지평선까지 무수한 문장이 이동한다 낙타 등에 실려 전갈에 물린 내 발뒤꿈치에서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온 몸에 독이 퍼진 채 나는 죽어 간다 낙타 등에 미끄러져 내리면 끝장이다 곧 회오리바람이 그치고 무시무시한 정적이 찾아 올 것이다 차가운 별빛이 이마를 적실 것이다 흰구름이 떠가는 하늘에 책이 펼쳐진다 전갈이 내 몸 속을 빠져나간다 낙타 등에 실린 채 혼곤한 내가 책에서 실려나온다 눈먼 탁발승 하나 문간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다 ------------「전갈에 물리다」전문    새벽 3시 쯤 주택가의 골목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집의 문틈이나 창문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연기처럼 골목길을 흘러가는 것을 한 번쯤 느꼈을 것이다. 통행금지가 없는, 밤새도록 자동차가 다니는 대도시의 아파트 지역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지금도 중소도시의 주택가 골목에서는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린 새벽에 접하게 되는 정경情景이다. 남진우 시인의「깊은 밤 깊은 곳에」는 그런 정경이 담겨 있어서 독자들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개성적인 영상映像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현대사회에서 시인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중에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게 하는 존재라는 말이 가장 공감을 준다. 그런 말의 이면에는 현대시의 기능이 들어있다. 그 기능의 대표적인 것이 이미지다. 이미지는 심상心象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현대사회에서 그림, 사진, 영상, 인상, 느낌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간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생명의 비명’을 영상의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이 시에서 비명은 ‘하루치의 쓰라림’이 되어서 모든 집 문지방에서 새어 나와서 텅 빈 거리와 광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흘러가고, 그 비명들은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모여들어서 마침내 소용돌이를 하며 일어선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고 한다. 시인은 ‘비명’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자신이 감지한 것을 그대로 영상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의 해석과 느낌에 따라 ‘비명’의 의미가 다양해진다. 만약 이 시에 시대적인 어떤 상황의 옷을 입히면 ‘모여서 일어서는 비명들’의 의미는 사회적 저항의 기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옷을 입히지 않고 순수한 관점에서 보면 비명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향하는 ‘생명의 본질적인 현상’으로 해석된다. 시를 사회적, 시대적 산물로만 인식할 때 시의 영토는 좁아지고 시인의 위치도 선동가의 수준에 머물게 되기 쉽다. 그래서 시의 해석은 언제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좋다.「전갈에 물리다」는 인공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남진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생명의 현상’ 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이 시에서 ‘전갈’은 ‘나’의 본질적인 생명을 해치는 존재로 등장한다. (전갈은 꽁지에 독침이 있어서 쏘이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거미류의 독충이다.) 그래서 이라는 이 시의 첫 연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인간이 책을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얻는 독서讀書 행위가 전갈에 물려서 죽음으로 끌려가는 과정과 같다는 것이 너무 역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그는 라고 심각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라고 필사적으로 독서에 매달려야 하는 자신(현대인)의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 가상현실의 언어영상은 현대 지식인들의 ‘독서’에 대한 맹신을 지적하기 위한 과장된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식의 창고라고 하는 ‘책’은 반자연적인 인공의 산물이라는 것. 책을 이루고 있는 문자언어는 본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기호일 뿐이라는 것.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는 경구警句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과장된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라는 자연과 시인(화자)이 만나는 장면이 시속의 문제(갈등)를 해결하는 선명한 이미지로 피어나는 까닭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연이 가장 생명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인간이 갈 길은 어디인가? 이 시가 던지는 화두話頭다. *남진우(南眞祐) : 1981년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등   최문자 시인의 시-「닿고 싶은 곳」「달맞이꽃을 먹다니」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닿고 싶은 곳」전문 감마리놀렌산이 혈행에 좋다고 그렇다고 그 꽃을 으깨다니 그 꽃 종자를 부수고 때리고 찢어서 캡슐 안에 처넣다니 그 피범벅 꽃을 먹고 혈관의 피가 잘 돌아 가다니 욕심껏 부풀린 콜레스테롤이 그 꽃에 놀아나다니 그렇다고 나까지 하루 두 번 두 알 씩 그걸 삼키다니 머지않아 꽃향기로 가득 찰 혈관 그렇다고 하필 그 환한 꽃을 죽이다니 밤마다 달을 바라보던 그 꽃을 꽃 심장에 가득 찼을 달빛을 그 달빛으로 기름을 짜다니 노오란 꽃에 앉았던 나비의 기억까지 모두 모두 으깨다니 부서진 달빛, 꽃잎, 나비, 두 알씩 삼키고 내 피가 평안해지다니 생수 한 컵으로 넘긴 감마리놀렌산 두 알 혈관에 달맞이꽃 몇 송이 둥둥 떠다닌다 -----「달맞이꽃을 먹다니」전문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는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에서 주제가 되는 문제다. 불교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명제를 내세워 생과 멸을 모두 부정한다. 그러면서 이 근본적인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반야심경) 여기서 말하는 생멸은 현상現象이 아닌 본질本質이다. 서양철학에서는 창발과 환원의 원리라는 물질세계의 사이클로 해명하려고 한다.(승계호의 ‘마음과 물질의 신비’) 이것도 대상을 본질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현상現狀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관념과 감성에 물들어 있는 언어로 표상해야 한다. 만약 시인이 직접적으로 본질을 표현하려고 한다면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서의 세계에서 완전한 이탈’이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최문자 시인의「닿고 싶은 곳」은 비록 본질과는 거리가 먼 주관적인 사유와 감성의 표출이지만, 죽음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슬픔의 세계’가 은은한 울림을 준다. 슬픔 속에는 삶의 아름다운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객관적인 논리도 종교의 명상도 닿을 수 없는 삶의 따뜻한 체온과 호흡과 꿈이 서려있다. 그래서 는 구절은 독자들에게 죽음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한다. 나무가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은 새들이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와서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 슬픈 땅을 찾는 새의 이미지는 철학이나 종교가 들어갈 수 없는 시인의 감성영역에 속한다. 독자들은 그런 이미지를 통해서 자기 삶의 이면을 성찰하게 된다. 이것이 시적사유와 감성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이고 신비한 기능이다.「달맞이꽃을 먹다니」에서는 시인이 안고 있는 연민憐憫의 감정이 물에 흠뻑 젖은 수건처럼 축축하게 감지된다. 그 연민의 감정은 인간의 탐욕스러움과 자연과 인간의 동화同化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는 혈액 순환 약 감마리놀렌산을 매일 두 번 두 알씩 먹으며 산다. 그런데 그 약이 달맞이꽃을 으깨서 만든 약이라는 것을 알고, 라고, 자기성찰의 고뇌에 빠진다. 현대문명은 인간위주의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을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한다. 이 휴머니즘을 자연에 대입시키면 자연은 인간의 존재를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휴머니즘이 품고 있는 독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깨달아야 자연과 화합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시의 주류를 이루는 연민의 감정, 시인의 자기성찰과 내적갈등은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자신의 행위지만) 달맞이꽃의 피범벅으로 이루어진 알약을 하루에 두 번 두 알씩 먹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상상을 자극해서 달맞이꽃에 담겨 있는 달빛, 나비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으깨서 기름을 짜서 먹는 인간의 철저한 강탈행위로 확대된다. 따라서 그의 내적갈등과 연민의 언어는 그런 행위를 당연시하고 무신경하게 처리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반발과 경종警鐘이 된다. 휴머니즘은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탐욕과 편견에 사로잡힌 반자연적인 사상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과 종교, 각종 문화도 인간위주의 관념이나 휴머니즘의 맥락과 연결될 때 반자연적인 것이 된다. 인간을 위해서 실험실의 흰 쥐들이 오늘도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 주사를 맞고 있다. 이것이 휴머니즘의 현실이다. 이 시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반자연의 무서운 현실을 상기시키면서 독자들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를 던지고 있다. 21세기 문학은 ‘휴머니즘의 굴레에서의 해방’이라는 무겁고 큰 과제를 지고 있다. *최문자(崔文子):1982년 추천으로 등단. 시집: < 울음소리 작아지다> 등     박유라 시인의 시-「흘러가는 아침」「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   간밤 태풍 지나고 출렁, 산들이 내려앉은 식탁 위 2004년 6월 28일 아침 필루자에서 부산까지 비행기가 흘러 간다 된장찌개 김치 미나리 꽈리고추 오이무침 구이김 버섯볶음 디지털 풍경이 빠르게 흐르고 소화하기엔 너무 아픈 육질들 훈제오리, 삼겹살, 삼치토막...... 냉장고 문을 도로 닫는다 흘러가는 풍경 사이 어떤 꽃은 피고 어떤 꽃은 지고 오늘다라 유난히 뜨거운 잡곡밥을 아이에게 먹여 매운 바람 속으로 보낸 뒤 나는 어금니 사이로 질긴 마늘쫑 장아찌를 오래 씹다가 푸성 귀들 남은 반찬을 다독거린다 음악 검색 창에 ‘Climbing up the walls' 무한반복 흐를 동안 설거지를 끝내고 씻어 둔 현미에서 쌀눈 뜨는 소리 싸르륵 싸르륵 다시 비가 내린다 흘러가는 아침 문득 돌아서면 자꾸만 어두워지는 손 행주와 도마와 칼을 함께 소독제에 담그고 눈물 한 방울 출렁, 대기권을 흔들며 간다 --------「흘러가는 아침」전문 햇빛을 탁탁 털어 청소한다. 락스를 뿌려대면 무균의 햇살 알갱이들이 비수처럼 반짝인다. 텔레비전에서는 ‘히말라야 동산’이 디지털 시험방송 중이고 강아지는 제 그림자를 보며 엎드려 있다. 눈부신 방의 한 순간,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 장면들이 잘게 떨린다. 1000분의 1초쯤, 화면 속 티벳의 흰 돌집과 화면 밖 강아지 숨소리, 그 아 리아리한 것들을 포를 뜨듯 살짝 저며 낸다면, 30도 각도 로 칼집을 넣는 소리는 나지 않게, 피 한 방울도 나지 않게, 겨울 오전 10시 15분의 적막이 난자당한다. 소리 없이 점 멸하는 나날들. 날 선 햇살이 눈물 나게 한다. ------「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전문    형식과 내용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형식을 그릇에 내용은 그릇에 담긴 물질(내용물)로 비유하여 구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비유에 불과할 뿐이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 현상들에서 형식과 내용의 구분은 칼로 무를 썰 듯이 그렇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형식이 내용의 대부분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는 집의 형태에 따라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달라지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고, 환경이나 제도가 사람의 생활 형태와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容器라고 말할 수 있다. 시에서 현대시와 근대시를 구분하는 기준도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찾게 된다. 그 형식은 언어의 표현방법이다. 박유라의 시「흘러가는 아침」은 형식이 내용(의미)을 만들어 내는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매우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중심 소재로 하고 있다. 아침에 주부가 식탁을 차리고, 아이에게 밥을 먹여 학교로 보내고, 설거지를 하고 하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반복되는 어쩌면 권태로울 그 일상이 이 시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옷을 입고 독자들에게 다가 온다. 시인은 한 편의 시에 두 개의 장면을 겹치게 하여 평면적인 시의 공간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의미로부터 벗어나서 현상의 흐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현상은 그가 지각하는 현실의 선명한 모습이다. 그는 그것을 라고, 공간 속을 ‘흘러가는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이미지 속에는 관념의 요소(의미)가 제거된 사실(사물)의 나열과 집합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의 나열과 집합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존재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시점과 입체적인 현실인식이 만들어 내는 세계다.「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에서도 그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의 감각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시의 내용도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이다. 아침에 집안 청소를 하면서 텔레비전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히말라야의 풍경과 티벳의 흰 돌집(사이버의 현실)과 화면 밖의 강아지 숨소리를 있는 그대로 살짝 포를 뜨듯 자신의 의식 속에 인화印畵하려고 한다. 그것은 사진 찍기의 방법이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현실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그는 그 순간의 장면을 이라고 언어의 기표로 옮겨 놓고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관념이나 감상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에 들어온 현실의 영상을 그대로 포를 뜨듯 찍어내려고 한다. 그 현실은 시인자신의 투명한 의식에 투영된 현실이다. 이러한 그의 시적 방법은 탈-관념의 직관直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이 내용을 창조하는 용기라고 한다면 그의 시적 방법은 21세기 사이버 시대에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를 여는 새로운 창조적인 용기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 박유라 : 1987년 추천으로 등단. 시집: 등
52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7>/심 상 운 댓글:  조회:1166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8월호 발표                 이수익 시인의 시- 「겨울 판화版畵」「배후는 따뜻하다」                 겨울 나루터에 빈 배 한 척이 꼼짝없이 묶여 있다.               아니다! 빈 배 한 척이 겨울 나루터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홀로 남기를 두려워하며               함께 묶이는 열망으로, 더욱 가까워지려는               몸부림으로, 몸부림 끝에 흘리는 피와              오오 눈물겹게 찍어내는              겨울 판화版畵                 ---------「겨울 판화版畵」전문              길옆            자전거보관소에            몸이 뜯긴, 오래 된, 주거불명의            자전거 몇, 버려져 있다.            안장이 사라지고            체인이 풀린            타이어가 땅바닥까지 함몰된 자전거들이            구겨진 풍경의 액자를 만들며            어둠 속을 비스듬히 누워 있다.            오랜 무관심에 길들여진 편안함이            어느덧 그 심연에            맞닿아            나태와 궁핍이 제법 반질반질하다.            이제는 더 이상 뜯길 것이 없으므로            자유가 너희들을            화평케 하리라!            날마다 이맘때쯤 찾아오는 그늘이            친구처럼 유정하게 툭, 툭,            바큇살을 건드리는 오후            자전거들은            왕년에 달리던 기세를 되살려            저렇게 뻗어나간 아스팔트길을            씽씽 내질러보고 싶은 푸른 욕망에 진저리치며            한 번 씩은 꿈틀,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배후는 따뜻하다」전문    인간 존재의 의미는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성립된다. 이는 개인의 원자적 가치에 기반을 둔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다른 동양의 유교적儒敎的인 관점이라고 하지만 개인은 분리 불가능한 사회적 원자라는 점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특히 도시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일만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어느 하나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공동체는 마치 하나의 인체 조직과 같아서 그 관계의 밀접성과 인과성은 무섭도록 치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상호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면 아무런 존재성을 갖지 못한다.  이수익 시인의 시 「겨울 판화版畵」에서는 인간의 이런 상호관계와 부분/전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겨울 나루터에 묶여 있는 배를 보고 그는(시적 화자) 나루터가 배를 묶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배가 나루터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배와 나루터의 상호관계는 인과관계가 되고 유의미한 관계가 된다. 그는 그 원인을 라고 독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한 정경을 칼로 파서 새긴 ‘판화版畵’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그런 삶의 원초적인 관계가 인간의 숙명적인 모습이라고 인식한 까닭인 것 같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고독이고 외로움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엔가 자신을 묶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명예와 돈에, 또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무형의 세계에 자신을 묶으려고 한다. 이성간의 사랑도 묶고 묶여짐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창발적인 생성의 원리다. 「겨울 판화版畵」는 그런 본질적인 관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에 비해「배후는 따뜻하다」에는 환원의 원리가 들어 있다. 시인은 어느 날 자전거 보관소에서 기능을 잃고 분해된 버려진 자전거를 발견하고 깊은 사유 속으로 들어가서, 라고 그 자전거의 존재의 자유와 만난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대한 기억과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라고 끝을 맺고 있다.  기능을 상실하고 순수한 물질의 세계, 원자의 세계로 환원되는 낡은 자전거에 대한 시인의 명상은 인간의 삶에 대한 명상과 다르지 않다. 탄생→ 성장 → 소멸의 반복되고 회전하는 사이클 속에서 우리들의 삶도 벗어 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쓸모를 잃음으로서 얻어지는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다. 관계의 묶임으로부터 벗어나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존재의 해방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상적인, 합리적인 관념에서 해방시켜버린 특수한 객체를 의미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오브제에 대한 해석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끝내버리지 못하는 ‘푸른 욕망’은 이 시에서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 ‘푸른 욕망’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생명체의 소중한 꿈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수익 시인의 시「겨울 판화版畵」와「배후는 따뜻하다」를 읽으면서 그의 사유가 존재의 본질적인 것에 닿아 있으며 완벽하게 시적형상화의 옷을 입고 있음을 확인하며 시를 읽는 즐거움을 혼자 맘껏 누려 본다.   *이수익(李秀翼): 1963년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함. 시집: 등           이재무 시인의 시- 「트럭」「감나무」                심야의 고속도로              트럭 행렬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거친 사내들은 단내 나는 더운 숨              연신 토해 내며 살 맞은 짐승처럼 고함              질러대고 있었다 딱딱한 밤공기가              과자부스러기가 되어 부서졌다              하늘에 핀 별꽃들이 경기 들린 아이처럼              놀라 자지러지고 있었다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              우락부락한 다혈질의, 각진 얼굴의 사내들은              힘이 세다 그들이 실어 나르지 못할              물건은 없다 조폭의 무리 같기도 한 그들이              지날 때 함부로 그들을 나무라지는 말자              그저 절로 벌어진 입 당분간 닫지 말고              사고 없이 어서 이 위기의 시간이              지나가길 소원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바지런을 떨어도 생의 저속을 사는              그들은 언제든지 분노로 폭발할 수 있는              슬픔 몇 됫박씩은 가슴에 지니고 산다 밤의              질주에는 그런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트럭」전문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으로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감나무」전문    시인의 형이상학적인 관심과 시선은 세상을 조감鳥瞰하게 하지만, 독자의 가슴을 움직이는 것은 살 비비며 사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며 시선이다. 그것은 시가 왜 정서적이어야 하는가의 해답이 된다. 시의 정서는 시의 사물성과 다르다. 사물성은 보고 듣고 감촉할 수 있는 유형적有形的 감각인데 비해 그리움, 두려움, 사랑, 미움 등의 정서는 무형無形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이 ‘무형의 감성적 정서’는 강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건조한 견고성(dry hardness)을 내세우는 현대시에서도 정서의 기능은 무시될 수가 없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내세우고 있는 카타르시스의 기능도 시의 정서적인 힘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이재무 시인의 시「트럭」은 사실적인 표현이 주는 현장성과 긴장감이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시의 정서가 폭발일보 직전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먹이사슬의 밑바닥에 있는 트럭 운전기사들의 터질 듯한 분노의 숨소리가 그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라고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라고 그들의 거친 행동을 연민의 시선으로 보면서 이해하고 있다. 시인은 그들의 위험한 질주의 원인을 라는 구절 속에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사회계층간의 갈등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긴장감이 조성하는 분위기는 “..... 온 나라의 화물 취급자/떠들썩하고 꺼칠한 목소리에 왁자지껄한/어깨가 떡벌어진 건장한 도시”라고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신흥도시 시카고를 노래한 미국시인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의 시「시카고(Chicago)」연상시킨다. 따라서 그의 시「트럭」은 관념과 주관적 환상, 언어유희 등으로 점점 작아지고 힘을 잃어가는 한국현대시의 언어에 건강한 야성의 힘(이미지)을 드러내는 존재성을 갖는다. 그의 저소득층에 대한 연민의식은 계급의식을 조성하고 선동하는 사회주의적 경향의 시와는 다르다. 그는 시의 정서적 기능을 바탕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있을 뿐 자신의 관념을 전혀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감나무」도 그런 그의 시적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주인이 없는 어느 집의 감나무가 이 시의 대상이다. 감나무 주인이 무슨 일로 도망기차를 탔는지 그 구체적인 사연은 시 속에 없다. 독자들은 그 사연을 시대적 상황과 연계하여 유추하고 상상해 볼 뿐이다. 그 감나무는 사립문 쪽으로 가지를 더 뻗는다. 그 까닭을 시인은 감나무가 주인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 심리적 현상의 시적표현을 단순한 감정이입感情移入의 기법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영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생각은, 물리적인 세계가 아무런 목적 없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편견을 반영한 것이다.”라는 승계호 교수 글 「마음과 물질의 신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감나무의 마음과 행위’는 시인의 직관적直觀的 시선에 의해 인식되는 세계다. 그래서 라는 구절은 자연스럽게 공감의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나는 이재무 시인의 이 풍기는 현장성과 긴장감 그리고 생동하는 언어들이 주는 감각에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감나무와 시인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장면에서 그것이 단순한 시적 기법이 되기 이전에 거기에도 깊은 철학적 사유의 세계가 잠재하고 있음을 생각해보았다.   * 이재무(李載武):1983년 에 등단. 시집: 등             이은봉 시인의 시- 「늙은 바람과 함께」「폐타이어」                   하루의 일 마치고 14층짜리 공중무덤 납골당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길가 생맥주집 앞                푸른 평상이 벌떡 일어나 반갑다고                손 마주잡고 흔들어댄다 오늘 하루                저도 많이 외로웠나 보다                엉덩이를 내밀며 좀 깔고 앉아 쉬었다 가라고 보챈다                생맥주집 안 늙은 바람도 달려 나와                가슴 끌어안고 등허리 토닥여준다                공중무덤 텅 빈 납골당으로 돌아가 보았자                누가 날 기다려주겠는가                푸른 평상이며 늙은 바람도 잘 알고 있어                지금 손 마주 잡고 흔들어대는 거다                푸른 평상의 엉덩이를 깔고 앉아                늙은 바람과 주고받는 맥주 맛이 쓰다                안주로 씹고 있는 멸치 대가리 맛도 쓰다                더는 해찰하면 안 되지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 마음 너무 잘 알고 있는 길가의 황매화가               귀볼 가까이 다가와 혀 끌끌 차댄다               돌아가지 않으면 14층짜리 공중무덤 텅 빈 납골당                저도 그만 외로우리라.                                          --------------「늙은 바람과 함께」전문                버려진 폐타이어는 검다              검게 저무는 지장보살이다              반쯤 땅속에 묻힌 채              세상의 질병 온몸으로 앓고 있는              지장보살은 둥글다              둥근 마음으로 사방 그는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만든              피고름을 삭히고 있다              지장보살이 아프니              땅도 아프다 검게              저무는 것은 다 아프다              아픈 몸으로도 그는              거름 만들고 있다 사루비아 몇 송이              빨갛게 꽃피울 꿈꾸고 있다.                                       -------「폐타이어」전문    ‘낯설게 하기’는 현대시만이 아닌 모든 예술의 중요한 기교다. 평범하고 상투적인 표현으로는 결코 사람들의 눈을 끌어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는 그런 면에서 인기가 높은 그림이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양손을 들어 귀를 감싸고 있는 인물의 해골 같은 얼굴과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자세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 인물은 황혼의 다리 위에서 무슨 외침을 듣고 있는 것일까? 관람객들에게 공포의 분위기와 함께 의문에 잠기게 한다. 이 그림을 그린 뭉크의 일기에는 “나는 두 명의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일몰을 보고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깐 이 그림은 상상화가 아니고 자신의 실제체험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을 그는 개성적인 직관의 이미지로 낯설게 그린 것이다.  이은봉 시인의「늙은 바람과 함께」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자기가 기거하는 아파트를 ‘14층짜리 공중무덤 납골당’이라고 하면서 생맥주집 사람들과 행인들을 ‘푸른 평상’ ‘늙은 바람’ ‘길가의 황매화’이라고 동화적인 발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의 시선을 끌게 되고 시인의 정서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만약 “하루의 일을 마치고 14층 아파트로 가는 길이 너무 외로워서 생맥주 집에서 아가씨들과 맥주를 마시고 노닥이다가 14층 아파트로 돌아왔다.“라고 사실적으로 기술했다면 시의 세계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극히 평범한 산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동화적인 상상과 그로테스크한 언어표현은 시인의 의도적인 ‘낯설게 하기’의 한 기법으로서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기법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외로움이라는 정서다. 외로움은 살아 있는 것들이 살 비비며 사는 마음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살아 있는 것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 시의 독특하고 깊은 감성이며 사유다. 는 구절 속에 들어 있는 그의 열린 감성이 그것이다. 「폐타이어」는 자신의 개인적 정서 세계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이 세상의 넓은 정서와 연결되는 시다. 이 시에서 폐타이어는 세상의 아픔, 피고름을 안고 앓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상징하는 소재로서 긍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폐타이어는 ‘버려진 존재’라는 것. ‘검다’는 것. ‘둥글다는 것’ ‘땅과 관련 된다는 것’ 등이 지장보살상과 부합되는 이미지다. 그래서 반쯤 땅 속에 박혀 있는 검은 폐타이어를 보고 땅과 함께 앓고 있는 지장보살이라고 감지한 시인의 감성과 사유가 타당성을 갖는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그는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그는 중생들의 영혼이 구제되어 그들이 모두 열반에 들지 않으면 자신도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서원한다. 그래서 라는 구절이 불교적인 관념의 형상화라는 카테고리에만 머물지 않는 열린 세계로 향하게 된다. 도시화로 인해서 파괴되고 공해에 시달리는 자연환경을 거대한 유기체라고 볼 때, 이 시는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구원하는 서원과 함께 땅의 병을 치유하는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라는 구절은 ‘땅의 모태’인 지장보살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시적 상상으로서 신선한 감각과 의미를 던지고 있다.   * 이은봉(李殷鳳): 1984년 에 등단. 시집: 등
51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6>/심 상 운 댓글:  조회:1087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년7월호 발표   성찬경 시인의 시- 「나사.1」「유리와 병」   길에서 나사를 줍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암나사와 수나사를 줍는 버릇이 있다. 예쁜 암나사와 예쁜 수나사를 주우면 기분좋고 재수도 좋다고 느껴지는 버릇이 있다. 찌그러진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투박한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큼직한 수나사도 쓸 만한 건 물론이다. 나사에 글자나 숫자數字나 무늬가 음각이나 양각이 돼 있으면 더욱 반갑다. 호주머니에 넣어 집에 가지고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하고 슬슬 돌려서 나사를 나사에 박는다. 그런 쌍이 이젠 한 열 쌍은 된다. 잘난 쌍 못난 쌍이 내게는 다 정든 오브제들이다. 미술품이다. 아니, 차라리 식구 같기도 하다. --------「나사.1」전문   유리가 병으로 있는 한 언제까지나 병이다. 인간의 수족이다. 깨어져야 유리는 유리가 된다. 병은 기능이요 쓸모다. 소유의 차원이다. 값을 매겨 사고 판다. 파편은 무엇이고 그것 자체다. 쇠는 쇠요 구리는 구리요 은은 은이다. 존재의 차원이다. 무값이다. 에덴동산이 어디뇨. 있는 것 모두가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나뒹굴면 바로 거기지. 산산조각난 것들이 창궁의 별처럼 모여들어 존엄의 왕좌에서 반짝이고 있다. 빛 뿜는 파편의 삼천대천세계다. -------「유리와 병」전문   삶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 다양성은 개개인의 취향과 성격과 감각과 관념의 척도의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속에는 시대적인 유행도 들어 있다. 이런 것이 모여서 형성된 것을 문화라고 한다. 성찬경 시인은 길거리에서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나사를 줍는 취미가 있다. 그는 그 나사들을 주워서 집에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을 하고 암수 나사를 맞추어본다. 그는 그런 자신의 취미생활을 이렇게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라고. 이 시에서 나사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퇴출당한 퇴직자와 같은 존재들이다. 시인도 나사들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재활용하기 위해서 모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장난감 같은 오브제로서 모으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의 손에 주워진 나사들은 나사로서의 임무를 모두 끝내고 그의 집에서 제2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 나사들을 미술품으로, 식구와 같은 존재로 승격시키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부속품에서 벗어난 나사가 미술품 같은 존재로 승격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사가 나사로서의 용도에서 벗어나 어느 한 가지의 영역에 구속되지 않는 무無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곳은 존재의 자유가 열리는 지점이다. 우리들의 사유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사유의 자유를 누리고 그만큼 상상력의 세계가 넓어진다.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오브제 이론이며「나사.1」이 안고 있는 사유의 세계다.「유리와 병」은 이런 취미 정도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존재의 근원을 더 깊게 추구한다. 따라서 「나사.1」보다 더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가 들어있다. 철제나사들은 형태를 유지한 채 용도만 바꾼 상태이지만 (그래서 다시 재활용될 수도 있지만) 유리병들은 깨어진 형태가 됨으로써 순수한 유리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는 그것을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사고思考는 생生과 사死라는 관념에 묶여서 유리병이 깨지면 그것은 유리병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유리병이 유리로 환원되는 새로운 경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관념도 이와 같다. 인간의 죽음을 존재의 해방. 존재의 자유영역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원인은 인간의식의 중심에 ‘나’라는 관념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의식은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현재상태의 유지를 소망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나’의 변화를 죽음으로 오해하고 생로병사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중생衆生의 삶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깨달은 이들은 ‘나’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면 이 우주의 원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시에도 그런 깨우침을 주는 교훈성이 있다.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시인은 물질의 탐구를 통해서 의식형성 이전의 무의식의 세계까지 인간 존재의 문제를 상상하고 있다. 사실 에덴동산도 또한 ‘나’의 존재를 전제로 한 관념의 세계이지만 그 깨달음은 매우 중요한 정신적 체험이 아닐 수 없다. 그 세계는 이미 불교의 사유를 통해서 관념적으로 알려진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과감하게 시로 형상화하여, 우주의 현상을 라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발산시키고 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체득한 세계와 그의 시선이 통과한 오브제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한껏 누려본다.   *성찬경(成贊慶): 1956년 에 등단. 시집: , , , , 등   이상옥 시인의 시-「아포리아」「조물」   고야가 물고 온 너구리 속을 엿본 적 있다 내장 안에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산의 계곡에 살았을 법한 비단개구리 열 마리 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너구리 한 마리가 하루의 끼니로 비단 개구리 수십 마리를 먹어치운 것이다 오늘 점심으로 안양해물 탕을 먹었다 새우, 게, 소라, 고동, 아 이름 모를 많은 생명, 한 끼 점심으로 좀 과할 정도의 개체. 어제 교회 오는 길에 트럭 에 실려 가는 암소 네 마리를 보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크 고 순한 눈망울 두려움의 기색이 완연하더라, 도살될 운명을 알기라도 하는 양. 덩치가 크니 몇 사람의 며칠 분 생명은 이어 갈 수 있을 터 생명은 생명을 먹고 생명을 이어가는............, 난해한 네트워크 ----------「아포리아」전문   연구실에는 강동주 선생에게서 얻어온 물풀이 오지항아리 에서 자라고 있다 마산 어시장에서 산 오지항아리에 물을 붓고 물풀을 키우기 시작한 지 벌써 달포가 지나고 있다 물표면이 일렁이는 듯하다 작은 고동이다 비닐봉지에 담아온 물풀에 붙어 왔나 자세히 보니 눈에 띄는 녀석 들만 해도 열 마리 정도다 돋보기를 들고 관찰하니 죽은 물풀도 먹는다 고인 물이지만 깨끗한 것이 물풀의 정화작 용과 함께 요녀석들의 청소부 노릇도 한몫한 때문이다 신기하기도 대견스럽기도 하여 틈틈이 물을 보충하며 햇빛이 드는 곳으로 오지항아리를 두 손으로 들어 옮겨놓 는다 나는 우주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조물」전문   SBS TV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는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몇 년 전 에서 본 인터뷰 기사의 내용이다. 이상옥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윤동혁 PD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선이 생명세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세계가 얼마나 신비하고 경이로운 세계인가 하는 것은 우주를 생각해 보면 안다. 이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천체天體의 수효는 엄청나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라는 초과학적인 용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많은 우주의 천체 중에서 지구는 생명체(유기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곳이다. 우주의 암흑 속에서 파란 루비 같이 빛나는 것이 지구라고 한다.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지구를 푸른빛의 보석 같다고 했다. 그래서 우주 속에서 지구의 존재를 생각하면 신의 은총 또는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생명세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생태계의 구조는 먹이사슬로 되어 있다. 그 속에는 원래 생명체의 본능적인 행동만 존재할 뿐 감정이나 정서는 개입될 수 없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은 꽃의 종족보존의 방법이지 인간을 위한 꽃의 쇼가 아니다.「아포리아」에서 시인은 고야에게 잡힌 너구리의 뱃속에 들어 있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비단개구리를 보고 고 한다. 비단개구리에 대한 연민이나 어떤 관념의 개입이 없이 냉정하게 관찰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라고 자신의 경험을 삽입하고 있다. 이 삽입구절 속에 “아 이름 모를 많은 생명”이라는 감성적인 표현이 들어 있다. 이 감정노출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시적 정서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이런 그의 감성은 그 다음 구절 에서 더 적극적으로 생명체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드러낸다. 자연을 보는 우리들의 눈은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는 것이 옳다. 야생에서는 어떤 존재 건 먹는 자 아니면 먹히는 자일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태계의 법칙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다르다. 시인은 인간에 의해 죽으러 가는 소에 대한 연민의 정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적인 감성이며 과학자와 시인의 다른 점이다. 이 시에는 이런 생명세계의 법칙을 라고 풀이하여 독자에게 생명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의 계기를 주고 있다.「조물」에서는 ‘물풀의 생태가 들어 있는 오지항아리’라는 생명세계의 한 덩어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물풀이 자라고 죽고 하는 오지항아리를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생명세계의 신비로움을 체험하고 있다. 라는 구절은 그가 오지항아리에서 이루어지는 생태계의 시스템을 얼마나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오지항아리는 공기의 유통이 잘 되고 생명체들이 제각기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또 하나의 생명공간이다. 그 생명공간은 작은 우주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그래서 끝부분 라는 구절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인도 힌두사상(우파니샤드)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큰 우주에 속하는 수많은 소우주의 개념으로 생명의 실재적 본성을 말하고 있다. 이 시의 ‘오지항아리의 생명 공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상옥 시인은 디지털 카메라의 사진과 시를 결합하여 ‘디카시’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시는 창조하기보다는 포착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창조와 포착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서 공존한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준다. 창조의 순수한 뜻은 세상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면 그것도 창조가 된다. 태초에 하느님이 이미 존재한 사물에 명칭을 붙이는 행위와 같다. 그런데 이 창조의 전단계가 포착이다. 이 시에서 오지항아리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들었다 놓으면서 “나는 우주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라는 순간적 인식이 포착이며 오지항아리를 ‘우주’로 명명命名는 것이 창조다. 포착은 현실 속에서 눈의 기능만이 아닌 마음(의식)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상옥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그가 포착하고 창조한 생명세계의 관람자가 되는 즐거움을 누린다. 좋은 시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우주를 발견하게 하는 시라고 생각하면서.   * 이상옥: 1989년 월간 등단. 시집: 등
50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5>/심 상 운 댓글:  조회:1035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년 6월호 발표   송준영 시인의 시-「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습득」     기차보다 한 뼘 앞에 검은 바람이 지난다 낫과 톱을 어깨에 맨 갱부의 환한 장화발이 소리도 없이 지난다 하얀 이빨이 이 빨을 마주보며 바삐바삐 떠간다 역사 안 드럼통 난로에 괴탄 이 이글거린다 플랫폼엔 급행열차가 잠시 멈춘다 이곳은 철 암, 산이 떠나가고 산보다 먼저 사람이 캐고 버린 버력만 산이 되어 어둠에 배를 깐다 무게적재함에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 이 검게검게 볼록한 이마를 내민다 금세 어둠이 꺼먼 버력에 엎친다 바람이 검은 철사 줄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괘달려 윙 윙 강철소리를 낸다 저탄장의 탄가루를 업고 간혹 분간 어려 운 칠흑 뚫은 별빛 같은 마을을 휘 몰아친다 어둠의 사타구니 속으로 돌진한다 형광등과 네온이 창백한 통리 역사엔 괴탄이 이글거리던 드럼통 난로가 없다 이빨과 눈이 유난히 빛나던 갱부들도 없 다 탄가루와 긴 쇠꼬챙이가 콱콱 내리찧으면 빨갛게 흘러내 리던 불티들도 없다 바람이 분다 멍멍한 하늘 사이 머얼건 땅 위로 바람이 분다 영화 속 같은 사람들이 파리한 형광등 대합 실에서 앉거나 서 있다 유령처럼 땅을 밟지 않고 미끄러 진다 빛깔을 분간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사이로 파리한 눈이 온다 나는 오늘 통리역에 내리다 -----------「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전문   1호선 지하철 분실물센터에 있는 건 하얀 차돌 두어 개와 나를 따라온 청태 사이로 비치는 오대산 맨가슴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청량선원이네 그곳엔 내가 주워온 금빛 옷을 걸친 늙은 부처 아니 법당 왼쪽에 단정히 앉아 있던 이마 말간 문수동자가 있네 아니 이 날 툇마루에 졸고 있는 하늘 한 자락과 푸른 솔잎 입에 문 물총새 한 마리 그리고 솔바람이 있네 아니 지하철분실물센터 알림판엔 깔깔 웃음 웃던 습득물이 붙어 있네 동굴 속으로 고함지르며 사라진 습득*이 붙어 있네 습득이 보이네 ----------「습득」전문   *습득은 당나라 때 사람. 국청사 풍간 선사가 주워 키웠다. 한산과 늘 같이 한암 깊은 굴에서 지냈고 절에서 허드렛일하여 밥을 얻었고 미친 짓 하면서도 선도리에 맞았고 시를 잘 했다. 태주사자가 한암으로 찾아가 옷과 약을 주니 ‘도적놈아 조적놈아 물러가라’하며 웃으면서 한암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이 오랜 시간 쌓아놓은 학문, 예술, 종교, 철학, 도덕, 등 온갖 인공적인 것들의 총체가 문화이고, 그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진보상태가 문명이다. 인간은 그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문명은 야만의 반대이고 자연과는 대립적 개념이 된다. 문명은 인간에게 안전과 편함과 행복을 제공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제한하고 억압하여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 반작용으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근원적으로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욕망이 잠재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친환경 건강법이니, 친자연의 주택이라는 것들도 모두 인간의 행복이 인공적인 문명으로만 충족될 수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송준영의 시편들은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성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에서는 철암과 통리라는 지역적 경계가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철암에는 검은 석탄더미라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는 비록 가난하지만 인간적인 정과 삶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한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석탄도시에는 라는 표현 그대로 점차 인공화 되어가는 자연의 삭막한 풍경이 노출된다. 하지만 이 철암에는 근대화 이전의 이 있다. 통리에 오면 그 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그뿐 아니라 그곳에는 . 그는 철암과 통리의 대조적인 풍경을 통해서 문명에 의해 자연성을 상실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비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면 철암을 지나 통리에 도달한 현대인이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시인은 그 해답을「습득」에서 암시하고 있다. 이 시에서 습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닌 분실이후에 생기는 행위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실낙원의 현대인에게 복락원의 꿈을 회복하는 방법이 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지하철 1호선 분실물센터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의 본성을 습득하게 된다는 이 시의 공간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시인은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의 지하철을 가상현실의 무대로 삼아서 라고, 현대인들이 분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러면서 끝내는 그 진면목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라고. 이 시는 이 끝 장면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자연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도시선都市禪으로서 독자들에게 한 순간이지만 흙탕물 같은 자신의 내면을 맑게 투시하는 의식의 힘을 찾게 하는 것이다. 이때 선禪은 그들의 본성을 밝히는 불빛이 된다. 그는 그런 방법으로 선과 시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하고, 선의 감각을 현대시에 접목시키려 한다. 이 시의 언어에서 풍기는 선미禪味가 그것이다. 사실 선은 스님들의 선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잡한 도시의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서 엉뚱하게도 당나라 때의 선승 습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송준영 시인의 의도적 방법-현대시와 선의 융합-은 깊은 의미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문명과 자연의 새로운 만남을 일깨워주는 언어의 포퍼먼스라고 말할 수 있다.   * 송준영: 1995년 으로 등단. 시집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   정유준 시인의 시- 「목공소에서」 「살구나무는」   작업이 끝났다. 먼지 속에서 목을 늘어뜨린 알전구가 도구들을 흔든다. 이가 두 개 빠진 기계톱은 열기를 식힌다. 대패는 누워 있다. 결이 선 명한 대패밥, 잘게 썰린 톱밥의 가벼움, 보드라움을 만져본다. 나무의 혼들이 걸어나온다. 여린 잎들의 친근함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줄기의 비틀림, 바구미의 가느다란 길까지도 읽을 수 있다. 허공 속으로 나뭇 잎이 떨어진다. 바람이 분다. 나이테가 무수히 생겨난다. 먼지 속 한 켠에 웅숭그리고 있는 나무들이 오늘밤도 저마다의 꿈을 꾼다. --------------------「목공소에서」전문   살구나무는 간지럽다. 세월의 더께, 무딘 껍질을 기어오르는 노린재 더 듬이에도, 나폴거리는 배추나비 날갯짓에도 몸을 뒤틀고 싶다. 혼곤히 갈라지는 햇살사이로 곤두박질치고 싶다. 늙은 수양버들들은 쿨렁거리 고 까치는 식욕을 돋구고 우체부가 지나가는 한낮이 반짝거린다. 개미 들이 발목을 스멀거리는 아우성의 봄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구나무 꽃불을 치쳐든다. ------------------------ 「살구나무는」전문   조선시대의 산수화山水畵의 자연풍경은 진경眞景도 있지만 거의 추상적인 가상현실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연과 인간의 정신이 하나가 되는 세계를 추구하면서 산수화를 그리고 감상했던 것이다. 따라서 산수화는 자연을 그린 풍경화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는 그림이기 때문에 독특한 맛과 향기와 정신적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과학적인 사실성을 중시한 서양의 인상파 풍경화와 동양의 산수화의 다른 점이다. 그림 속의 안개 낀 골짜기와 높은 봉우리들은 보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주고 상상의 세계를 펼치게 하면서 궁극적이며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이와 같이 산수화는 현실적인 자연의 미美와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의 높고 깊은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현대 한국화의 거장 운보 김기창 화백의 도 사실성과 일상으로부터 일탈된 천진한 동심의 세계가 관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의 그림은 현대인들의 정신을 정화하는 일종의 예술적 아이콘(ic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유준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편들이 동물적인 욕망의 언어들이 넘쳐나고 자연이 소멸되어가는 현대의 과도한 인간주의人間主義의 문명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나무의 명상」속에 담겨있는 그의 식물성의 명상언어들은 시대적인 현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의 언어이지만, 그 시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정화작용은 조선 시대의 산수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들의 소외감과 고독감은 정신적으로 연대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에 원인이 있다. 그 연대성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물론 사물과 인간(나)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 확대 된다. 따라서 연대성의 상실은 자아自我와 타자他者의 단절이며 열린 세상과의 단절이다. 정유준의 시편은 이런 단절의식을 연대의식으로 회복시키고, 자아自我와 타자他者의 융합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명상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만나고 그 내밀한 만남의 순간을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느끼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내고 있다.「목공소에서」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과 따스함, 겸허한 마음이 일을 끝낸 목공소 안의 풍경을 깊이 있고 정겹게 그려내고 있다. 시인과 나무의 친근함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죽은 나무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어서 죽은 나무와 시인이 결코 다른 세계로 분리되지 않고 한 세계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는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잘게 썰린 톱밥의 가볍고 보드라운 감각, 목공소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나무들의 혼, 허공 속으로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나무들의 생전 모습, 먼지 속 한 켠에 웅숭그리고 있는 나무들의 꿈....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포착하여 새로운 생명체로 살려놓는다. 이런 그의 언어는 사물과 한 몸이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들어가는 경이로움을 독자에게 느끼게 하고, 시인과 함께 그런 경험을 하게 한다. 「살구나무는」에서는 사물과의 융합이 더 생기를 띠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가 아닌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에서 감지되는 무아無我의 경지는 시인과 살구나무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시인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전혀 찾을 수 없고, 오로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만 감지되는 그 세계. 그래서 시인의 마음과 살구나무는 한 몸이 되어버리고 환한 봄날의 한 때와도 한 몸이 되는 그 세계는 도道의 경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신적 경험의 세계는 독자들의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관념이나 지식과는 별개의 세계다. 마치 산수화 속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상상에 빠지게 하는 그 세계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아이콘(icon)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정유준(鄭有俊): 1998년 에 등단. 시집 「사람이 그립다」「풀꽃도 그냥 피지 않는다」「나무의 명상」「물의 시편」     김상미 시인의 시- 「죽지 않는 책」「하얀 늑대」     이따금 사람들은 책 밑에서 토론을 한다. 나무 그늘 밑에서 토론을 하듯. 그럴 때 책 속의 언어들은 바람처럼 우리들 내부로 시원하게 불어오기도 하고 태풍처럼 비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삶이 책 속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은 제 자신을 얘기하듯 책을 읽고 읽은 책들로 은밀한 자신만의 정원을 꾸민다. 이따금 나는 그들의 정원에 초대되어 햇빛이 아닌 다른 빛에 열광하는 꽃과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그들만의 비탄을 탐색한다. 아직도 그들 속에 숨쉬는 자연의 일부인 그들을 훔쳐본다. 그들에게 책은 큰 평화이기도 하고 가장 큰 불안이기도 하고 끝끝내 이기고 싶은 敵이기도 하지만 책읽기란 맨 얼굴로 산소를 들이 마실 때처럼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 운명을 씹듯이 책을 씹으며 자꾸만 작아지는 사람들. 그들의 타는 입술은 무덤 같아 혀 밑에 파묻힌 죽은 자들의 얼굴을 보는 듯하지만 책에 대한 경의는 책에 빠진 그 사람만의 행복. 때로는 행복한 책 한권 때문에 임종을 앞 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내 속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부싯돌처럼 서로 비비며 불꽃을 만들어 내는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방 저 방에서 불이 켜지는 책. 그들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는 책. 죽지 않기 위해 자꾸만 창백해지는 책! --------「죽지 않는 책」전문   늑대 한 마리를 그렸다 크고 무시무시하고 털이 무성한 그러자 스무 마리의 늑대 사냥개들이 나타나 둥그렇게 늑대를 둘러쌌다 20대 1의 팽팽한 살기殺氣가 먹고 먹히기 직전의 생명체에서 살인적인 에너지를 뽑아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늑대를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들 그럼에도 침착할 정도로 도저한 늑대의 자신감! 오른쪽과 왼쪽, 뒤쪽과 앞쪽,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는 핏빛 외마디 비명소리들! 픽픽 내팽개쳐지는 개, 개, 개들의 시체 20대 1의 피비릴내 나는 압도적 승리! 그 앞에 홀로 포효하는 불굴의 전시 나는 그를 색칠했다 굽힐 줄 모르는 순백의 혈통 작렬하듯 단숨에 내 영혼을 휘저어 놓고 우아하게 흰 목털을 곤두세우며 웃는 거대한 야성! 이제 지구 위에서 영원히 사라진 하얀 늑대 한 마리 --------「하얀 늑대」전문     독서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반자연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죽지 않는 책」에서 시인의 갈등과 고민은 인공과 자연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작게 만드는 책을 운명적인 현실로 받아들이고, 임종을 앞 둔 인간에게도 책은 죽지 않는 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죽지 않는 그만의 책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것이 이다. 현실과 상상의 결합이 빚어내는 사유의 공간이 깊이 있게,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상상은 가상현실 속에서 더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실존적 모습 때문이다. 예술에서 리얼리티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드는 이들은 이미지의 사실성을 무시하고, 실재하는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때때로 예술 그 자체가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외면한다. 「하얀 늑대」는 순수한 심리적 이미지의 시다. 시인은 어느 날 하얀 늑대의 그림을 그리면서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 이 늑대와 사냥개들의 혈투는 악과 선의 경계가 없는 순수한 본능적인 싸움이다. 시인은 그 본능적인 싸움의 장면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잠재된 야성野性의 일부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야성은 문명 속에 파묻혀버린 자연의 에너지다. 그러나 인간의 DNA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 야성은 언제 분출될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 그는 그런 인간 심리의 내면적인 강렬한 의식을 가상현실의 ‘늑대 이미지’로 구체화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 생생한 가상현실의 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이 경계 허물기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현대시가 나아갈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인간의 심리적인 현상을 이미지로 구현하고 그것을 실상의 세계와 동일하게 처리하는 ‘디지털 시’의 가상현실과 같다. 디지털 시대의 이런 문학현상을 이인화는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조선일보 2007,4,9) 김상미의「하얀 늑대」는 그런 가상세계의 이미지와 함께 시의 끝부분 에서는 195,60년대의 미국 서부영화의 낭만적인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서부 영화는 한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 수십 명의 악당을 상대로 싸우는 보안관의 우직하고 늠름한 모습을 그려내어서 정의를 지키는 영웅의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당시 명배우 등에서 잔인한 총잡이의 이미지로 인해 큰 상처를 입고 사라졌지만, 당시 스크린 속 배우들의 모습은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뇌리腦裏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하얀 늑대」를 읽으면서 195,60년대의 미국 서부영화의 배우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미지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미지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된다. 따라서 21세기의 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무한한 상상의 공간에서 피어나는 언어의 꽃이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 김상미: 1990년 여름호로 등단. 시집
49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4>/심 상 운 댓글:  조회:1076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5 월호에 계재   김지향 시인의 시-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소나기 온 밤 집 없는 도둑고양이, 어둔 헛간에서 내 신경을 긁어 댔다 나는 노트북을 들고 깜깜한 어둠 속 을 잠입했다 순간, 차량의 전조등 같은 사파이어가 잽싸게 내 눈에 발을 넣었다 나를 신어볼 눈치였다 나도 잽싸게 인터넷 사이트를 열었다 고양이 눈동자 가 왜 사파이어인지 인터넷 만물박사에게 물어볼 참 이었다 만물박사를 깨우는 사이 사파이어는 한바탕 잠든 공기를 뒤흔들어놓고 뒷구멍으로 내뺐다 창밖엔 소나기에 섞여 번개가 몇 차례 창문에 불똥 을 갈겼다 어둠에 잠겨있던 나는 문득 고양이가 가엾 어졌다 (번개에 명중되었을 지도 모를 집 없는 도둑고 양이!) 요 며칠 툭, 부러뜨려 놓았던 여린 감성이 슬그 머니 머리를 내 밀었다 감성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인터넷 속에서 ‘마음’의 소재지를 찾아보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부에 누워 있는 내장 속속들이 잎사귀를 들춰보며 조직검사하듯 사이트와 사이트를 한 잎 한 잎 열어제쳤다 (처음에‘ 마음’은 어떻게 짜깁기 되어 있을까?) 창밖은 벌써 뿌연 새벽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번개가 창문에 불꽃을 질렀다 언뜻 언뜻 눈을 깜박이는 벽걸이가 나체를 드러내고 나를 놓아 준 어둠이 창밖으로 발을 옮기 는, 하늘엔 간간이 꼬리뿐인 전기 코드가 빗금을 긋고 간다 바로 그때 잃어버린 고양이가 야-웅, 자기의 건 재함을 알려 왔다 아, 그렇군! 잃어버린 생각을 돌려준 고양이, 우레 속에 야영한 그가 반가웠다 이 반갑다는 ‘마음’이 또 어디에 감춰져 있을까 생각 속에 있을까 생각은 늘 잡동사니로 가득한 머리 속에 있지만. -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전문   ‘마음’에 대한 문제는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만큼 심오하다. 그리고 존재의 실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흔히 말하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마음이 무한한 에너지’라는 작은 범위로부터 우주만상의 존재에 대한 문제와 답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냐 하는 답은 미궁 속에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의 성과도 만족스럽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지 못하고 단지 마음의 한 모서리나 마음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의 입구를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설령 발견하였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어서 불교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불입문자不立文字’ 라는 경지를 스스로 깨우치게 할뿐이다. 중국 선종의 초대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달마達磨는 소림사 토굴에서 면벽面壁을 하던 중 법을 구하러 온 제자 혜가慧可와 이런 문답을 한다. “제가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십시오.”“편안치 못하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오면 편안케 해주리라.”“아무리 마음을 구하려 해도 구할 길이 없습니다.”“구할 길이 없는 마음이 어떻게 편하고 안 편함을 아는고”. 도를 찾아서 헤매던 혜가는 한때 도교를 신봉하기도 했는데,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눈 속에서 밤을 새우며 스스로 왼팔을 잘라 피를 뿌리면서까지 달마에게 법을 얻기를 간구했다고 한다. 혜가의 간절한 마음을 확인한 달마는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고 혜가는 이 ‘안심安心법문’을 듣고 홀연히 깨쳤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후세의 제자들이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 꾸민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간절한 희구의 구도과정’은 선禪의 핵심이 체인體認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그 과정을 지나온 당사자인 혜가는 달마의 법문을 듣고 깨우침을 얻지만, ‘간절한 희구와 구도’의 체험과정을 거치지 않은 제 3자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이라는 것을 탐색하는 계기를 얻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김지향 시인의「마음은 어디에 있을까」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 속에 자기 마음의 향방을 추적하는 ‘작은 체험’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오는 날 밤에 도둑고양이를 만난다. 그 고양이는 어둠 속에서 사파이어 같은 눈빛을 빛내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 순간 그는 왜 고양이의 눈이 사파이어 같이 빛이 나느냐에 관심을 둘뿐 고양이의 존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때 창밖에서 번개가 치고 번갯불이 불통을 튕기며 번쩍인다. 이때 그는 고양이가 가엾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그는 라고 ‘마음의 실체 찾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일 뿐, 그의 관심은 고양이로부터 떨어져서 번개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벽걸이나, 전기 코드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그의 마음에 닿는 두 번째의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그의 관심을 다시 고양이에게 돌아가게 하고 한 걸음 더 자신의 마음의 실체에 다가가게 한다. 그 장면이, 이라고 이 시의 끝 구절을 예기치 않은 마음의 체험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시적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의 마음은 한순간도 그냥 있지 않고 허공에 떠다니는 풍선처럼 떠돈다. 특히 많은 사건들이 계속 터지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마음을 잠시라도 한군데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자신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일반적인 현대인들의 삶이다. 이 시는 그런 현대인들의 ‘마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찾는 과정을 감각적인 언어로 긴장감 속에 드러내고 있다. 지식 속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그 마음을 찾기 위해서는 잡동사니로 가득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암시가 그것이다. 그 암시는 이 시를 선적 경향의 현대시로 분류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런 분류보다도 언어들의 참신성이나 긴장감, 어둠속 고양이의 사파이어의 눈빛으로 함축되어 있는 현대인의 마음의 모습 등 모더니즘 언어의 감각이 이 시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음을 거듭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나이의 한계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그의 현대적 사고와 체험을 통한 언어표현은 나를 경이로움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김지향(金芝鄕): 1956년 시집 로 등단. 시집 등     김종섭 시인의 시- 「내 뼈가 걸려있다」「성자처럼 눕다」     내 몸이 한 장의 필름으로 분리되어 판독기에 걸려있다. 검고 희멀건 채색에 담긴 앙상한 늑골들의 빗살 구조. 그 중심부로 휘어져내린 척추. 골반은 육중한 내 육신을 힘겹게 지탱하며 예까지 왔다. 한번도 너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이 나이까지 용케 버티어왔다. 문득 낯선 사람이 불을 끈다. 캄캄한 어둠속으로 내 몸은 감춰지고, 젊은 사나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최후의 심판을 준비한다. 나약해진 내 의식은 두려움에 졸아들고, 생명이란 것이, 육체란 것이 내 의지로부터 이렇게 쉽사리 떨어져나갈 수도 있는 걸까? 그의 논고가 神처럼 무서워진다. 혹시나 뻥 뚫린 허파, 퉁퉁 부운 간덩이가 안막을 덮어오는데, 창백한 벽면을 타인처럼 바라본다. 그곳엔 선고를 기다리는 내 뼈들이 기도처럼 걸려있다.                                         ------------「내 뼈가 걸려있다」전문   젊은 교수의 퍼즐 같은 말장난에 주눅들어 더위 먹은 하루 며칠 간 그 방황의 끝 이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한여름 비웠던 방문을 열면 슬며시 방을 점거한 저 많은 곰팡이들의 무자비한 침입 벽마다 검은 꽃들이 피어 냄새를 풍기고 간혹 붉게 충혈된 눈알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본다 내 식욕을, 내 미감을 채워주던 달디단 한 알의 과일 마저 부재중 모반에 가담하여 역겨운 악취로 나를 기습한다 이 정물들의 반란 습지가 된 내 침구를 접으며 나는 오늘 밤 성자처럼 눕는다 창문을 열고 별들의 무욕을 마신다 아, 이제야 돌아가는 모터소리의 생동감이여. ----------「성자처럼 눕다」전문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허구는 실제성이 없는 이미지나 환상이나 가상세계이기 때문에 임의적인 변경이 가능하지만, 과학적 사실에서는 그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방법 외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김종섭 시인의 시「내 뼈가 걸려있다」에는 허구에서 벗어나서 사실과 만났을 때의 두려움과 허무감이 들어있다. 그는 어느 날 병원에 가서 전신 X 레이 촬영을 하고 자기의 뼈 조직 필름을 보면서 자기로부터 분리된 또 하나의 자기를 보는 체험을 한다. 그때 그는, 라고, 자기 육체에 대한 연민의 정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의사의 판정을 기다리는 순간, 라는 허망감에 사로잡히면서,라고, 의사의 존재를 신처럼 인식한다. 이 시는 그런 사실 체험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알레고리가 아닌 사실적 기술記述을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간접체험의 효과와 충격을 준다. 그것은 사실적 언어가 발휘하는, 살아있는 힘이다. 이렇게 자신의 정서와 사고思考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실 그대로 기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인의 객관적인 눈과 인내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시에는 그것이 잘 극복되고 성취되어서 독자들에게 공감을 안겨주고 생명의 실존에 대해 생각하는 사고공간을 제공한다.「성자처럼 눕다」에는 그가 냉정하게 사물을 대하게 되는 정신의 수련과정이 담겨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 시는 또 그가 허상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사물의 실체와 만나는 생생한 과정을 감지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젊은 교수의 퍼즐 같은 말장난에 주눅이 들어서 정신적인 방황을 하다가, 한여름 내내 비워 두었던 자기 방에 들어와서 방안에 있던 것들의 변한 모양을 보고 관념의 놀이에서 벗어나서 사물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그는 그때의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부재중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이 일상의 작은 사건들은 그에게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그는 관념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실체와 만나는 공간속의 자신을 보여주게 된다. 라고. 이 시의 끝 구절 ‘창문을 열고 별들의 무욕을 마신다’와 ‘ 모터소리의 생동감’이 함축하고 암시하는 것은 생생한 사물성의 세계에 대한 접근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과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과일을 그대로 먹어보는 감각적 체인體認인 것이다. 나는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퍼즐 같은 말장난’의 허상에서 탈출하여 사물의 실체와 삶의 정체성에 접근하는 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시는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것을 되새기면서. 살아있는 정신의 날카로움을 느끼면서.   *김종섭(金鍾燮):1983년 에 가 당선 등단. 시집 등     김기택 시인의 시- 「토끼」「소」     햇빛이 비치자 좁은 토끼우리도 환해졌다. 토끼 한 마리 한 마리는 그대로 움직이는 불빛이 되어 판자와 철망으로 막힌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머리 위로 솟은 귀들은 햇빛에 연분홍색이 되어 토끼들이 움직일 때마다 봄꽃처럼 흔들렸다. 주인은 이 토끼들을 어떻게 할까. 잡아먹을까? 시장이나 음식점에 팔까? 죽을 때까지 기르다가 쓰레기와 함께 버릴까? 희디힌 털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은은하게 빛났으므로 무위의 경지에서 오물거리는 입들은 너무 흥겨웠으므로 갑자기 그 위에 엉뚱한 미래가 겹쳐보였다. 어린토끼 한 마리를 가슴에 안아보니 뜻밖에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 속에서 떨고 있었다. 토끼의 두려움은 내가 쓸데없이 걱정한 미래와 상관없이 오로지 지금 내 팔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토끼」전문   소의 커다란 눈은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옹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고 그저 끔벅 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둥근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베어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는 것이다. --------------------「소」전문     대상과 시인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은 존재의 독립성에 의한 간격이다. 따라서 그 간격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상의 실체와 만나느냐하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의 어려움이다. 너무 가깝게 밀착되면 시인의 개인적인 감상성에 의해서 대상의 모양이 변질되기도 하고, 또 너무 멀어지면 시인의 정서가 메말라서 시가 아닌 지식이나 관념의 표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김기택 시인의 시는 그런 면에서 좋은 텍스트가 된다. 그의 시편들은 대상과 시인의 간격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정서적인 밀착성과 함께 깊은 사유를 내포하고 있어서 거듭 읽힌다. 그 까닭은 시 속에 시인의 날카로운 관찰력만이 아니라 대상과 한 몸이 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편들은 관념과는 거리가 먼 실제적 체험의 산물이다. 그 체험 속에는 그의 시적감성이 잘 녹아 있다. 그래서 최소의 알레고리나 수사修辭만으로도 시의 맛을 충분히 내고 있다.「토끼」를 읽어보면, 그의 시가 일상의 가장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범상치 않은 시적 감성과 사유의 공간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느 날 시골 농가 뒤뜰에 있는 토끼장에서 어린 토끼들을 본다. 그때 환한 햇살이 비친 토끼우리의 풍경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라고. 여기서 감지되는 시인의 개성적 표현은 햇빛에 비친 토끼들의 귀를 연분홍색이라고 한 것과 토끼들의 움직임을 봄꽃에 비유한 것이다.‘봄꽃’은 토끼를 아름답게 느낀 소박한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심리적 이미지는 토끼에 대한 시인의 연민으로 이어져서 라고, 인간과 토끼의 관계, 인간 속에서 토끼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라고, 인간의 척도로 토끼의 존재성과 가치를 평가하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시의 끝부분은 어린 토끼의 실체적 인식과 생명체에 대한 정감을 생생하게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다. 그 충격은 라는 구절에 들어 있다. 인간의 잔인성을 이미 직감한 듯이 어린 토끼의 떨리는 감각은 오로지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의 팔에만 집중되어 있는 생존의 엄연한 현실이 그것이다.「소」에서는 소가 하고 싶은 말이 소의 둥근 눈 속에 그렁그렁 눈물이 되어 달려 있다는 그의 관찰이 생동하는 감각으로 전해진다. 그는 라고, 소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情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소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인간적인 연민의 정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표출이다. 따라서 그 마음은 소와 인간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 같다. 그 길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길이다. 마음은 언어이전의 정서와 사유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말보다 더 근원적이다. 수도승들이 가끔 말을 버리고 묵언 속으로 들어가는 수행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만약, 소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인간도 소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가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태초의 신성한 말은 이미 사라지고 허상만 남은 말이, 간교한 지혜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들의 말을 생각해보면 부정적인 추측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의 말은 소에게 무아無我의 낙원을 앗아갈 수도 있다고. 이 시는 이렇게 둥글고 큰 눈을 끔벅거리고만 있는 소. 침묵 속에 잠겨 있는 소의 말을 통해서, 독자들이 말에 관해 넓고 깊은 사유의 세계를 펼치게 하고 말의 실체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침묵과 언어의 득실을 분별하게 한다. 나는 이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김기택 시인의 사실적인 세계 속에 내포되어 있는 건강하고 따뜻한 삶의 진정성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사유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만끽해본다.   *김기택(金基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등
48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3>/심 상 운 댓글:  조회:1078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4월호에 발표   이기철 시인의 시- 「고요의 부피」「들판은 시집이다」     저 새의 이름이 뭐더라, 저 풀의 이름이 뭐더라 하는 동안 해가 진다 땅의 가슴이 더워질 때까진 날아간 새의 이름을 부르지 말자 어제의 산이 그늘을 데리고 와서 이제 그만 세상을 미워해라, 이제 그만 세상을 발길질해라 하며 문설주에 산그늘을 걸어 놓는다 조그만 생각을 끌고 가던 물이 마른 풀잎 끝에 고드름을 단다 청둥오리가 날아가고 짧은꼬리할미새가 날아와도 차마 그곳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바람이 시든 깃고사리 위로 버석거리는 신발을 신고 지나간다 지금쯤 찌르레기, 벌새들이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늙은 밤나무는 다 안다는 듯 한 겹 더 껍질의 옷을 껴입지만 아직도 숲이 추운 곤줄박이만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바쁘게 날아 다닌다 춥다고 산 것들이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숲이 깊은 숨 쉬고 새가 길게 날면 고요의 부피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저물면 낯 선 것들이 낯익어진다 해지는 광경만큼 황홀한 음악은 없다 -------「고요의 부피」전문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 줄 넝쿨풀들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의 긴 구절 나비 날갯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는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이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들판은 시집이다」전문    2000년대 들어와서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새로운 외래어로 크게 유행하더니 이제는 우리말이 된 것 같이 보편적으로 쓰인다. 행복, 안녕, 복지, 복리라는 의미의 이 말을 우리말로 ‘참살이’라고 하자고 의견을 내는 것을 어느 잡지에서 보았다. 행복이나 안녕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휴일이면 아파트의 규격화 된 공간 속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찾는 등산화의 발길이 도시의 인근 산을 누비고, 식탁에는 인공식품보다 신선한 채소류가 중요한 식품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자연성의 회복이라고나 할까, 자연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여하튼 자연이 인간에 끼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현대인들이 늦게나마 깨닫는 것은 다행이다.    현대시에서도 이 자연성의 회복은 매우 중요한 화두(話頭)가 된다. 원래 동양의 시인들에게 자연은 시의 원적지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서양정신에 대응하는 동양정신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신(神)의 개념도 동양에서는 자연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동양의 시인들은 자연을 관념화하여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숨결이나 욕망의 몸짓이나 무언의 언어를 충실하게 시에 담아내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황진이(黃眞伊)의 시조에 나오는 ‘청산리벽계수(靑山裏碧溪水)’도 멋진 비유와 풍자의 언어는 되지만 실재하는 자연의 존재 즉 ‘산 속의 푸르고 맑은 냇물’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 상황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된다.    이기철 시인의 시「고요의 부피」는 인공식품 같은 지식과 관념들이 지배하는 의식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나 자연과의 사실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신선하고 새로운 감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정신적인 ‘참살이’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숨을 쉬고 사는 시인의 생활이 진솔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념도 배경에 넣지 않은 그의 언어는 식탁 위에 놓인 채소의 신선한 향기를 풍기며 온갖 인공 조미료 같은 관념에 절어진 독자들의 미적 감각을 회복시킨다. 라는 구절을 그냥 읽어만 봐도 관념 이전의 자연의 실체가 살아서 숨 쉬는 현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을 버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도道의 경지다. 아니 도라는 관념의 옷마저 벗어버린 무아(無我)의 경지다. 이때 자연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 속에서 숨 쉬고 퍼덕거리고 날개 짓을 한다.   「들판은 시집이다」는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은유의 구조를 시의 골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관념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잎처럼 돋아난 단순한 비유이기 때문에 오히려 관념을 뛰어넘는다. 는 구절은 자연과 한 몸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접근도 하지 못 할 실제의 세계다. 인간 세상의 시시비비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세계를 시에 비유한 것은 어쩌면 21세기 현대시의 ‘자연의 재발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연은 누구나 시의 재료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생활을 하며 자연과 일체가 되어서 무심(無心)의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기철 시인의 자연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가 도달한 거리낌 없는 정신의 경지를 가늠해본다.   * 이기철(李起哲): 1972년 추천으로 등단. 시집 「낱말추적」「청산행」「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우수의 이불을 덮고」「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가 아름다웠다」등     신현정 시인의 시- 「별사탕」「극명(克明)」     별들 속에서도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이 꿈인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들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의 색깔을 갖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안이 환히 비치는 셀로판 봉지에 색색깔로 담겨 보고픈 별들이 있다 그렇다 그래서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의 꿈이 있었기에 별사탕은 탄생 했던 것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집 앞 가까운 구멍가게에서 별을 봉지째 팔았다 ---------------「별사탕」전문   이른 아침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 와서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고 마당을 종종걸음 치기도 하고 재잘재잘 하고 한 것이 방금 전이다 아 언제 다들 날아 간나 눈 씻고 봐도 한 마리 없다 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 간 이 가지 저가지가 반짝이고 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 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 ---------「극명(克明)」전문      언어의 형이상학적 추구의 결과로 언어가 ‘존재의 집’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인정된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는 존재(실상)가 될 수 없고 단지 존재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여서 선(禪)이나 직관(直觀)을 통한 존재의 파악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에서는 언어를 ‘존재의 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어를 떠나서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시에서 불가능한 일이고 시의 예술적 본질과도 상충되기 때문에 현대시에서 언어를 탐구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포착하는 행위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으로 여전히 중요시된다. 따라서 언어와 존재의 이런 관계 즉 허상을 통한 실상의 발견과 포착은 현대시에서 언어와 존재에 대한 시인의 투명한 인식에 의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 언어의 허식(虛飾)이나 실감이 없는 관념적 언어로는 존재의 그림자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현정 시인의「별사탕」은 이런 언어와 존재(실상)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게 하는 시로 재미있게 읽힌다. 그는 ‘별사탕’ 즉 ‘별+사탕‘이라는 언어를 포착하여 인간의 꿈을 인식하게 하고 꿈의 맛과 아름다움을 독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누구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차츰 희미하게 색이 바랜 어린 시절 꿈의 세계를 환기시켜 독자들을 그곳으로 안내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언어인식의 투명함이 시 속에서 움직이는 에너지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움직이는 인식의 에너지는 천진하고 열린 상상을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처럼 펼치는데, 그것이 언어의 허상이 아닌 아름다운 꿈의 이미지가 되어서 존재의 실상으로 상승한다. 그래서 “별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들고 싶은 별들이 있다//별사탕의 색깔을 갖고 싶은 별들이 있다//별사탕처럼 안이 환히 비치는 셀로판 봉지에 색색깔로//담겨 보고픈 별들이 있다//그렇다 그래서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의 꿈이 있었기에//별사탕은 탄생 했던 것이다”라는 엉뚱하고 단순한 의미의 구절들이 생명력을 얻은 언어가 된다.    이런 그의 인식능력은「극명(克明)」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침에 참새들이 앉아다 떠나간 나뭇가지를 보면서 ‘반짝이는’이라는 심리적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별사탕」처럼 언어를 통한 인식이 아니라 현장의 사물을 보고 발견한 현장에서의 직관적 인식이기 때문에 더 삶의 실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탈-관념화 된 투명한 인식의 눈은 어쩌면 분별심이 가득한 육안(肉眼)을 넘어서서 빛의 경지인 천안(天眼)이나 혜안(慧眼) 쯤에 도달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아침에 참새가 앉았다가 날아간 나뭇가지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누구나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정경이지만 거기서 ‘반짝이는’ 느낌을 감지하고 포착하는 것은 남다른 마음의 눈에 의한 직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눈은 어둠도 밝은 빛의 세계로 보는 눈이다. 그래서 “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 간 이 가지 저가지가 반짝이고/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라는 구절이 경이로운 감각으로 살아난다. 그 자신도 그런 인식의 경지가 너무 놀라워서 ‘극명(克明)’이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눈이 밝아야 한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여 보이는 것으로 변환할 수 있다. 신현정 시인은 오랜 시업(詩業)의 수련을 통해서 밝은 눈을 얻게 된 것 같다. 나는 대상의 내면을 투시하는 그의 시「별사탕」과「극명(克明)」을 거듭 읽으면서「극명(克明)」은 그가 포착한 오도(悟道)의 한 순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나름대로 확인해 본다.   * 신현정(申鉉正): 1973년 에 「그믐밤의 수(繡)」가 당선 되어서 등단. 시집 「대립」등     이재훈 시인의 시-「보길도 갯돌」「황홀한 무게」     돌은 시간의 은유다 긴 세월 동안 견뎌온 피부는 거칠어졌다가 이내 속살처럼 안락하다 만질한 자갈이 된 사연, 선술집에서 침묵을 지키는 사내의 등, 역마살로 떠돈 자의 주름잡힌 미소, 생일날 아침 공복의 커피, 할증시간 택시기사의 붉은 눈, 술이 깨는 새벽 라디오 소리, 노트에 적어 넣은 정지된 시간들, 그리고 서서히 딱딱 해지는 연보 네 기억이 드문드문 찾아오게 되면 모든 사물은 굳은 껍질로 스스로의 집을 만든다 딱딱함 속에 들어앉은 기억들이 제 몸을 뒹굴어 내는 소리 나는 너의 눈을 기억한다 너의 하얀 이를 기억한다 구르고 굴러 환멸까지도 그리움이 돼버린 이 소란스러운 돌의 은유                                                --------「보길도 갯돌」전문   눈이 나뭇잎에 앉았다가 햇살을 참을 수 없어 제 몸을 녹였 다 사람들은 그것을 학대라 부르기도 하고, 혁명이라 부르기 도 한다 체 게바라가가 위대한 이유는 자신을 죽여 또 한 생 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혜화동, 시위대가 장대 깃 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다 깃발을 두 명이 잡고 겨우 걷는다 나는 그 행렬을 보는 대신 버스에서 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몇 사람들은 그들이 깃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 는 지금 내 가방도 무겁고, 늦어진 약속도 무겁다고, 혼잣말을 했다 한 아저씨가 버스 창문을 열고 외쳤다 힘내요, 파이팅! 싸락눈이 비로 바뀌었다 나대신 깃발을 지고 가는 사람, 제 몸 을 거리에 내버린 풍경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황홀한 무게」전문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의 관계는 현대시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관념의 극단과 물리적 이미지의 극단은 시의 성립에 위태로운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덕수시인은 그의 시론 ‘수퍼비니언스의 원리(2005년 시의 날 주제 발표)’에서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한국 현대 시사(詩史)를 간략히 조감하면서 현대시의 과제로 “형식주의 (언어주의)는 역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역사주의는 형식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고, “실험적 언어주의나 극단적 관념시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시론은 한국 현대시에서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 즉 현실참여의 역사주의와 모더니즘의 조화(調和)를 강조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재훈의 시편들은 비교적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의 관계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것 같아서 시를 읽는 부담감이 줄어든다. 그것은 그의 시가 문맥조차 통하지 않는 조작된 모더니즘 시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물론 한 두 개 정도의 이미지를 통해서 확장되는 의미의 세계를 안고 있으며, 그 속에 구체적인 현실이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새로운 시의 모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시정신이 풀어야할 과제로 남는다.   「보길도 갯돌」은 ‘돌의 은유’라는 발상이 시의 폭을 넓힌다. 그 돌은 인간의 삶을 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개성적인 관념으로서 독자들을 상상의 세계로 유인하고 인간의 삶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보길도 갯벌에는 바닷물에 쓸린 돌들이 널려있다. 그 돌들도 처음에는 예리하게 각이진 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닷물에 쓸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각진 돌들은 만질만질한 자갈이 된 것이다. 그것을 그는 라고 한 생애의 고단한 삶으로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는 라고 연민의 정까지 넣어서 독자와 밀착시킨다. 하지만 이 시는 독자들에게 시적 상상 속에서 삶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게 해줄 뿐, 어떤 사고思考를 유발하거나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는 삶에 대한 성찰은 들어있지만 생의 에너지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황홀한 무게」는「보길도 갯돌」과 대조를 이룬다. 그는 싸락눈이 내리는 어느 날 혜화동 버스 안에서 시위대를 보고 느낀 감정과 생각을 시로 형상화 하면서 젊은 시인답게 자신을 죽여 또 한 생을 꿈꾸었다는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죽음의 의미를 떠올리고 있다. 그러면서 라고 솔직하게 소시민적(小市民的)인 자기의 심정을 토로한다. 그의 솔직하고 정직한 감정의 드러냄은 독자들에게 현실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확산시킨다. 그래서 그런 감정은 소극적이지만 생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끝부분 라는 구절은 그의 정직성이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또 하나의 심리적 공간을 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공간이 시인 자신만의 심리적 공간이 아니라는데 의미가 있다.「황홀한 무게」라는 이 시의 제목이 그것을 암시한다.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꿈이 살아 움직이는 그 공간은 현실만이 아니라, 생의 허무를 무너뜨리는 에너지가 함축된 심리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재훈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현실인식이 들어있는 시적 상상과 젊은 정신이 생동하는 감성 속으로 들어가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 이재훈 : 1998년 에 등단
47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2>/심 상 운 댓글:  조회:1182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3월호에 발표   황송문 시인의 시-「물레」「돌」     木花茶房에 한 틀의 물레가 놓여 있었다. 수십 년만에 햇볕을 받는 할머니의 뼈다귀처럼 물레는 앙상하게 낡아 있었다. 都市의 詩가 他殺되던 날 밤 다방을 피신해 온 나는 물레소리에 미쳐들고 있었다. 할머니의 眞言처럼 사른사른 살아나는 물레 소리가 너무너무 좋아서 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靑竹 같은 자식을 戰場에 보내놓고 四方八方 치성을 드리던 할머니의 물레소리가 내 가슴을 다르륵 물어 감고 있었다. 보기도 아까운 그 얼굴 한 줌의 재되어 온 자식을 끌어안다가 까물치던 할머니의 목쉰 소리 다르륵, 숨이 막혀 울지도 못하고 낮은 음자리 돌아 감기는 恨의 물레소리 가락에 시름을 감으며 지렁이 울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달지는 밤이면 버언한 창호지 마주 앉아 남편 생각 자식 생각에 손을 멈추다가도 꺼지는 한숨, 달달달달 다르륵, 시름을 감아 돌리고 있었다. -----「물레」전문   불 속에 한 천년 달구어지다가 山賊이 되어 한 천년 숨어살다가 칼날 같은 소슬바람에 염주를 집어 들고 물속에서 한 천년 원없이 구르다가 영겁의 돌이 되어 돌돌돌 구르다가 매촐한 목소리 가다듬고 일어나 神仙峰 花潭先生 바둑알이 되어서 한 천년 雲霧속에 잠겨 살다가 잡놈들 들 끓는 속계에 내려와 좋은 詩 한 편만 남기고 죽으리 ------「돌」전문    어떤 대상으로부터 펼쳐지는 상상은 시인의 내면세계의 표출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황송문 시인의「물레」에서는 현대문명과 대비되는 감성의 세계와 우리민족의 독특한 한(恨)의 세계가 담겨있어서 전통적인 서정시의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도시의 문명에 의해서 자신의 시가 ‘타살(他殺)’ 되었다고 절망한 그가 도피처로 택한 ‘목화다방(木花茶房)’에서 발견한 한 틀의 물레는 그에게 향토의 정서를 환기시켜주는 상징적인 매체가 된다. 그는 그 물레의 소리를 환청같이 들으며 스스로 ‘미쳐들고’ 있다. 그리고 ‘사른사른’ 들려오는 물레소리는 그를 어린 시절 할머니 곁으로 돌아가게 하고, 라고 전쟁이 휩쓸고 고향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게 한다.    그가 물레를 통해서 명주실처럼 풀어놓는 어느 할머니의 비극적인 이야기의 이미지는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전쟁의 비극이 그려놓은 우리겨레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의 보편적인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그래서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바꾸어도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이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존재는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집안에서 물레를 돌리던 할머니의 환생(還生) 이미지라고 해석된다. 이 여성적인 이미지는 늘 남성의 그늘에 가려서 숨어있는 음성적인 이미지이지만 남성적인 이성보다는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 되는 감성적인 이미지다.    현대의 도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문명의 성채(城砦)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성채는 인공의 화려함 속에 삭막한 인간관계와 비극적인 미래의 시간을 운명처럼 안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인공적인 이성의 문명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그것은 그가 비록 남성이지만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적인 온화함과 눈물과 그리움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가 지향하는 반문명적인 세계는 인간의 마음이 돌아가야 하는 원초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세계다.    서양의 문명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바뀌는 것도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들 때문이다.「물레」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사유의 공간은 문명과 인간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돌」은「물레」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의 정신세계를 조감하게 한다. 에서 보여주는 동양적인 초월과 환상 그리고 환생이 그것이다. 이런 초월과 환생은 그의 동양적인 정신수련의 과정을 단편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서양적인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의 세계에 천착하는 그의 감성과 현실 초월의지는 현대문명 속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확대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나는 그의 반문명적인 축축한 감성과 현실 초월의식과 환생의 이미지가 담긴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시세계를 방문하는 즐거운 탐방객이 된다.   *황송문(黃松文): 1971년 에 등단. 시집: 「조선소」「목화의 계절」「내가슴 속에는」「메시아의 손」「그리움이 살아서」등     이길원 시인의 시- 「두더지」「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엘리베이터 자판기 커피 마시고 전화 받다 구내식당 서류 뒤적이다 소주 마시고 지하철 오늘도 바람은 부는데 이웃집 김대리가 결이 곱던 은행의 김대리가 교통사고로 이승을 빠져 나갔단다. ------「두더지」전문   승무를 추는 비구니의 외씨버선이 슬프도록 고운 까닭이 아닙니다 감전이라도 된 양 온몸에 흐르는 그대의 뜨거운 노래 때문만도 아닙니다 때로는 달빛이 미루나무에 머무는 밤에도 나비처럼 흐르는 까닭을 나는 모릅니다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너울거리는 두 팔의 의미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 합니다 나의 춤이 그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더 더욱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살아 숨쉬며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황홀한 춤을 추워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그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나는 온몸을 적시어 춤을 추어야만 합니다 푸른 하늘이 거기 있기에. ---------「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전문     인류의 문화유산 중에 그리스의 비극은 살아있는 유산이다. 그래서 현대의 문화 속에는 그리스의 비극이 등장한다. 소포클레스의 대표적인 비극 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적 비극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생부(生父)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인간 비극의 절정을 보여줌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한 프로이트는 그 비극의 내면을 투시하면서 그와 같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로 개념화 하였다. 이 그리스의 비극은 인간은 주어진 운명의 굴레 속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시인들도 이 운명론과 싸우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이길원 시인의「두더지」에는 현대인의 운명적인 비극성이 들어있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이들과 인사도 못하고 이승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는 이웃집 김대리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냉엄한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 하고 순간적인 착오나 실수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에 비해서 인간적인 고뇌와 극적요소는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허망한 비극을 함축하고 있는가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 시인은 이러한 비극을 단순한 시적구조 속에 담아서 단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신의 관념을 넣지 않고 남의 얘기하듯 단순 명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그의 객관적 서술은 현대사회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런지 시의 전달효과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라는 최대로 생략된 시의 구문은 사실의 압축과 언어의 경제라는 단순한 시적 방법론을 넘어서 문명의 이기가 주는 반대급부 즉 부정적인 측면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는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낸 인간이 문명의 이기에 의해서 그들의 운명이 어떤 현실을 맞이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부각하고 있다. 문명의 횡포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식물들의 문제도 포함하는 것이기에 그 비극성은 엄청나게 확대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비극에만 묻혀있지 않고 「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에서는 희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의 양면성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는 현실이라는 주어진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연극 속의 삐에로 같은 존재로 표현하면서도 ‘푸른 하늘’ 즉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그의 희망의지는 독백적인 진술에 담겨서 직접적인 울림을 준다. 그래서 라는 구절은 절실한 감정을 내포하면서 독자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열어준다.    이 시의 ‘푸른 하늘’은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발견이라는 철학적·종교적인 의미를 붙일 수도 있다. 그것은 동양에서의 자연은 서양의 신(神)과 같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춤을 추는 이유를 라고 부정을 통해서 긍정을 찾는 어법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적인 감성에서 벗어나서 이성적인 세계를 추구하고자하는 의도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궁극적인 세계는 인간을 벗어난 자연 즉 절대적인 존재성에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관념을 어떤 고정된 틀 속에 넣는 것보다도 허무를 극복하려는 개인적인 의지나 정신적인 경지의 지향이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간의 비극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 내는 정신적인 굴레에서 비롯된다. 만약 인간이 희로애락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서 밝은 마음의 눈으로 자연을 보면 자연은 그 자체가 빛나는 열락의 세계가 된다. 이것은 갇힌 사고와 열린 사고의 차이를 의미한다. 따라서「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이 지향하는 세계는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정신적인 수련의 결과물이라 해석된다. 나는 현대인의 비극을 담은 「두더지」와 현실의 허무를 극복하는 정신적인 지향을 노래한「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을 읽으면서 이길원 시의 현실인식 속에 들어 있는 균형감각을 음미해 본다.   *이길원(李吉遠): 1991년 에 등단 시집: 「어느 아침 나무가 되어」「겨란껍질에 앉아서」「은행 몇 알에 대한 명상」「하회탈 자화상」     이춘하 시인의 시- 「고구마 모종을 내시는 어머니」「하늘공원」     팔순을 훨씬 넘기신 내 어머니 여름날 새벽안개 속으로 들어가신다 베렌다 한 켠에 세워둔 녹슨 호미날도 뒷짐에 챙기신다 (나풀나풀 초록이 멈춘 곳) 이 빠진 주택가 공터가 내 어머니 농장이시다 어머니 굼뜬 손으로 고구마 줄기 걷어 올려 모종내신다 삿갓처럼 호박잎으로 낸 모종 위에다 초록봉분 만드신다 팔남매 이부자리 다독이듯이 꼭꼭 흙으로 눌러놓으신다 바람 불어 날리지 않게 뜨거운 햇볕 가려주라고 중얼중얼, 당부의 말씀 잊지 않으신다 (고깔 쓴 초록봉분들 고만고만한 자식들처럼 다소곳하다) -------「고구마모종을 내시는 어머니」 전문   지하철을 타고 내려 시장골목을 지나 사람 사는 마을의 다리를 건너, 딴 세상으로 들어서는 초입에서 미아가 된다. 어느 우주의 한 귀퉁이, 작은 역에서 내려 이름 없는 외딴집 담장을 기웃거리다가 갑자기 한 무더기 억새풀 속에 갇히고 말았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을 나누는 걸까? 손등이 붉고 손가락이 긴 억새풀들이 물결을 이루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강건너 신기루 같은 빌딩들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떼를 지어 몰려다 니는 멧새들만 바쁘다 번지수나 문패가 없는 데도 여유롭기만 하다 그늘 한 점 없이 종일 땡볕에 앉아 이마를 그을리고 있는 패랭이꽃도 소소롭다 밤에는 별들이 내려와 노숙을 하고 지친 영혼들 쉬어갈 수 있는, 하늘과 땅 사이, 이승과 저승 사이, 너와 나 사이에 하늘공원이 있다 -----------「하늘공원」전문      시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해도 시의 옷은 다 벗겨지지 않는다. 벗기고 벗겨도 다 벗겨지지 않는 옷. 손에 움켜잡았다고 하는 순간에 물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시의 실체. 그것 때문에 영원히 청순한 연인으로 다가오는 시의 가슴. 그래서 시에 대한 해석은 무모(無謀)하고, 그 무모함이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한다. 시인은 자기의 시 속에 신생아의 울음소리 같은 생명의 근원을 담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어떤 이론으로도 해석될 수 없는, 물이나 불이나 공기나 땅 같은, 그것들을 운용하는 신(神)의 마음 같은 그런 자유롭고도 조화로운 무한한 무엇이 자기의 시 속에 들어 있기를 바라고 그것을 독자들이 발견하여 제 멋대로 해석해 주기를 원한다. 그런 마음이 시인을 외로움과 허무로부터 구원한다.    이춘하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읽으면서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의 시편 속에서 신선하게 솟아오르는 발랄한 생명의 기운 때문이다. 그 기운은 그의 시어 곳곳에서 감지된다. 따라서 그의 언어감각은 단순한 수사(修辭)에서 벗어나서 언어이전의, 대상에 대한 그의 감성작용을 느끼게 한다. 그는 대상에 대한 감지능력이 남다르고 자신의 감정 노출보다 객관적 사실에 충실하다. 그리고 대상과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주관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객관성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고구마 모종을 내시는 어머니」에서도 대상과 시인의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시인은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끈적끈적한 관계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하나의 피사체로 생각하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그려내고 있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감정에 치우쳐서 냉정함을 잃게 되고 또 너무 멀어지면 그림자만 남게 되기 쉬운데, 이 시는 그것을 잘 조절하여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풍경화를 보듯 아무런 부담도 없이 시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에서 어머니의 행위는 독자들에게 아파트가 밀집된 현대 도시공간에서 삶의 근본인 농촌을 떠나온 노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 인간과 자연의 관계, 현대사회의 공해문제 등,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라는 이 시의 중심 장면은 독자에게 그런 것들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  아파트 공터에서 초록생명들을 자식같이 다독이면서 키우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이 세상에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떤 존재의 모습까지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하늘공원」에서도 그의 사실적인 시의 기법이 새로운 감각의 시어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하늘공원’이라는 공원으로 가는 과정도 사실적이면서도 현실과 유리되는 환상적인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그 그림 속에 그의 우주적인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는 끝 부분이 맑고 투명한, 열린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 주어서 독자들의 마음을 잡는다.    이 열린 사유의 공간은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은 그의 시적감성과 기존의 어떤 유형에도 가담하지 않은 그의 독창적인 어법의 산물이라고 판단된다. 나는 어떤 관념의 그림자도 들어 있지 않고 감정의 절제가 잘 이루어진 이춘하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읽으면서 현대시의 기법에서 탈-관념이 왜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형이상학적 시라 하더라도 고정 관념에 갇혀 있는 사유의 언어에서는 결코 새로운 시의 탄생은 기대할 수 없고, 그런 언어로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독자들의 관심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이춘하: 1994년 에 등단. 시집 :「콩꽃을 해부하다」「낮선 곳에서의 자유」「세석능선에 걸린 달」
46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1>/심 상 운 댓글:  조회:1244  추천:0  2019-07-12
*월간 2007년 2월호 발표   박명자 시인의 시-「누군가 4월에는」 「九月의 끝」   4월의 뜨락에 조용히 나서 보면 누군가 스르르 다가와서 목과 겨드랑이를 간지럼 태운다. 지난 겨울 밤 얼어붙은 침묵의 가지 위에 누가 훅 체온보다 더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 천길 깊은 허무의 굴헝에서 누가 수액을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리는 소리. 긴 기다림의 시간 뒤에서 누가 생명의 향유를 항아리 가득 준비했나 보다. 누군가 등 뒤에 가만가만 다가 와서 귀엣말로 나직이 속삭인다. 지난 겨울 몸을 망친 땅 위에 누가 이라고 썼다가 얼른 지운다. 아침 무거운 커튼을 드르륵 열어 주고 동구 밖을 긴 망토를 이끌고 누군가 나가고 있다. ----------「누군가 4월에는」전문   그토록 많은 곤충들이 밤새도록 높은음자리표를 숲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물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땀으로 나의 시간을 밀고 오르면 九月의 꼬리가 피부로 만져진다. 이쯤서부터 부질없는 꿈의 껍데기를 버려야지 중얼거리며 늦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숲에서 어떤 눈이 나의 고독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리며 서둘러 산마루에 오르자 내 몸은 어느새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다. -------「九月의 끝」전문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근원이며 선천적인 틀이다. 그러나 공간은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데 비해 시간은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데 차이가 있다. 이것을 공간의 가역성可逆性과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고 한다. 만약 시간에도 가역성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과거의 시간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영화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면 이 세상은 또 얼마나 혼란스럽고 흥미로운 상황의 무대가 될까. 그런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의 불가역성이 우리들의 삶에 부여하고 있는 깊고 큰 의미를 알게 된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시간의 엄숙한 법칙 속에 놓여있는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박명자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은 그의 시편 속에는 무엇보다도 시간의 의미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누군가 4월에는」에서는 모더니즘적인 언어감각의 연출도 돋보이지만 그 언어감각 속에 들어있는 존재의 모습 즉 관념적 이미지에 눈길을 더 주게 된다. 이 시에는 ‘누군가(누가)’라는 어떤 존재의 모습이 들어있다. 그 ‘존재’는 독자들에게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단순한 연극적인 캐릭터가 될 수도 있고 시를 통한 존재자의 발견과 인식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존재의 의미가 주는 상상의 폭이 이 시의 이미지와 의미형성에 주는 변화는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지난 겨울 밤 얼어붙은 침묵의 가지 위에/누가 훅 체온보다 더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천길 깊은 허무의 굴헝에서/누가 수액을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리는 소리.//긴 기다림의 시간 뒤에서 누가 생명의 향유를/항아리 가득 준비했나 보다.//누군가 등 뒤에 가만가만 다가 와서//귀엣말로 나직이 속삭인다.”라는 이 시의 중심구절에서 드러나는 대립적인 이미지 ‘허무의 굴헝’과 ‘생명의 향유’는 이 시가 단순한 계절의 시가 아닌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시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사실 속에서 새로운 대상의 인식이라는 시인의 시적 감각과 투명한 의식의 눈을 기억하게 한다. 관념의 동적인 형상을 발견하여 보여주는 그의 투명한 의식의 눈은「九月의 끝」에서는 체험적인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땀으로 나의 시간을 밀고 오르면/九月의 꼬리가 피부로 만져진다.//이쯤서부터 부질없는 꿈의 껍데기를 버려야지/중얼거리며 늦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숲에서 어떤 눈이 나의 고독을 하염없이 지켜본다.//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리며/서둘러 산마루에 오르자/내 몸은 어느새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열정만으로도 행복했던 여름의 삶이 지나가고 가을의 초입 9월에 들어서면 지나간 시간의 아름다운 모습들은 점차 사라지고 냉정하고 본질적인 인식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공통적인 감성의 변화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의 체험(사실적 또는 사유적 체험)으로 녹여서 깊이 있고 감각적인 사유의 시어로 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꿈의 껍데기’를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숲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어떤 눈을 만난다. 그래서 그는 ‘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린다. 그리고 산마루에 올라서서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유과정은 집착이나 경계에서 해방될 때 마음이 가벼워지고 투명해지는 도道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봄까지 살아남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이 꺼지지 않는 불덩이 하나를 간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박명자 시인의 시편 중에서 계절과 관련된 시편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나의 시간’의 의미와 한 생애의 허무를 극복하는 과정을 생각해본다.   *박명자(朴明子) : 1973년 에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이 천료되어서 등단. 시집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빛의 시내」「시간의 흔적을 지우다」 등   문인수 시인의 시- 「대숲」「창포」   시퍼렇게 털 세운 대숲 한 덩어리가 크다. 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사실 전국 어디에나 붙박인 유적 같은 것이다. 그들은 왜 마을 뒤, 산 아래에다 대숲 우거지게 했을까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 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 놓았을까. 날 풀어놓고 싶어 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 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 잘디잘게 씹히거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신생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무넘이 무넘이 시퍼렇게 넘어가곤 한다. --------「대숲」전문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 들은 척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롬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 소래네/ 닥실이/ 봉산댁/ 새촌네/ 분네/ 개야네/ 느미/ 꼭지/ 뒷뫼댁/ 부리티네/ 내동댁/ 흠실이/ 모금골댁/ 등골댁/소독골네/ 갈갯댁/ 순이/ 봉계댁 우거진 한 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창포」전문     조선 선비들은 사군자四君子를 마음의 표상으로 삼고 살아 왔다. 그 중에 무욕無慾 하면서도 춥고 매서운 겨울을 이기는 꿋꿋한 대나무의 기상은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대나무는 선비들이 즐겨 그렸던 묵화나 산수화의 대상이 되었고, 대숲의 정경은 그림 속에서 운치를 드러냈다. 그것은 오늘 날에도 계속 이어지는 한국화의 전통이다. 그러나 상징과 사실은 크게 다르다. 상징은 사물이 아닌 하나의 관념이기 때문에 실제의 자연과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상징은 생명의 기운이 말라붙은 관념의 뼈대로 존재하게 된다. 대나무 숲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대숲이 얼마나 여러 가지 느낌으로 다가 오는지 체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대낮에도 하늘을 가린 울창한 대숲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하루 종일 어둡고 우중충하다. 그리고 사방 천지가 대나무뿐일 때 대나무가 주는 압박에 공포감도 생긴다. 거기에는 운치니 기상이니 하는 말들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과 관념의 차이다. 예술의 미적가치는 생동감에서 우러나온다.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 그려낼 때 거기에 생동하는 기운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 인상파印象派 그림이 오늘날까지 색이 바라지 않는 것도 빛에 대한 그들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관념의 벽을 허물어버린 과학적 사고의 화풍 때문이다. 문인수 시인의「대숲」은 인상파의 그림처럼 생동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의「대숲」에는 어떤 관념에도 감염되지 않은 싱싱한 사물성의 감각이 살아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대숲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시라는 형식도 의식하지 않은 듯 아주 자연스럽게 글로 풀어놓고 있다. 그래서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 놓았을까. 날 풀어놓고/싶어 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잘디잘게 씹히거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신생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는 구절들이 제각각 살아서 숨을 쉬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 시의 문장과 문장이 인과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서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래서 이 시가 주는 의미는 불분명해지고, 그 분명하지 않은 의미(무의미)는 이 시의 생명 감각이 되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어떤 관념이나 논리적인 사유를 시 속에 담기 위해서 비유나 상징적인 어법을 사용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시의 언어가 사물과 분리되어서 관념화 되었을 때의 감각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감지感知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줄 때의 감각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문인수 시인의 이런 언어감각은 「창포」에서 더 친근하고 예민하게 드러난다. 우포늪에 우거진 창포들의 모습을 “노리실댁/ 소래네/ 닥실이/ 봉산댁/ 새촌네/ 분네/ 개야네/느미/꼭지/ 뒷뫼댁/ 부리티네/ 내동댁/ 흠실이/ 모금골댁/등골댁/소독골네/ 갈갯댁/ 순이/ 봉계댁 우거진 한 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라고 우리나라 여인네들의 이름과 연결 지어서 보여준 것이 그것이다. 그 여인네들은 논밭에서 평생을 흙과 함께 살다간 농투성이 여인네들이다. 그 여인네들의 꿈과 삶, 질긴 생명력은 박경리의 소설「토지」속에 잘 담겨있다. 들병이란 1930년대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들에서 사내들에게 술과 몸을 파는 여인네의 별명이다. 시인은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창포 잎에다 붙이고 있다. 그 이름들은 언제 들어도 정겹고 눈물 나는 이 땅의 여인네들의 이름이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이름들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그 이름들의 이미지와 창포의 이미지를 겹쳐 보여주는 것으로 어떤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 의미를 자기의 지식과 정서와 감각에 맞추어서 상상하고 음미하게 된다. 여기에도 어떤 관념의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의 화면같이 장면이동을 하는 끝 구절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멀리 가버린다 창포,/긴 허리가 아름답다.”라는 영상이 깔끔한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문인수 시인의 이미지 조형 기법이 현대적인 디지털 감각과도 연결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의 냉정하고 사실적인 이미지의 기법이 탈-관념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그의 시를 거듭 읽는다.   *문인수(文寅洙): 1985년 에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함. 시집 「늪이 늪에 젖듯」「세상의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뿔」「동강의 높은 새」등         고진하 시인의 시-「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라이락」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마천루 숲속, 아크릴에 새겨진 ‘조류연구소’란 입간판 아래 검은 점이 또렷이 빛나는 눈부신 황금빛 관冠을 뽐내며 쏘는 듯 노려보는 후투티 눈빛이 이상한 광채를 뿜는다.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 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 새어나오다니.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 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 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 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 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 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 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오, 그렇다면 나도 이제 허울 좋은 이 조류연구소 주인처럼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피와 살과 푸들푸들 떨리는 내장을 송두리째 긁어내고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를 가득 채운, 잘 길 들여진 행복에 더 이상 소금 뿌리지 않아도 될 것인가. 때때로 까마득한 마천루 위에서 상한 죽지를 퍼덕이며 날아 내리는 풋내 나는 주검들마저 완벽하게 포장하는 그의, 그의 도제徒弟로 입문하기만 하면 과연 나도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껍질만으로도 눈부신 --------「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전문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을 토해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 천 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 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디 향낭香囊을 움켜지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라이락」전문   시인들은 한때 문명을 예찬하고 인류의 밝은 미래를 전망한 적이 있다. 모더니즘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모더니즘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성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장밋빛 청사진을 펼쳤다. 그러나 그 장밋빛 그림은 점점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공해나 생태계의 문제들이 인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관적인 징후와 예상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적인 세계, 즉 남성, 과학, 인간 등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여성, 신화, 자연을 찾아내어서 이성적인 것과 대면시킴으로써 기존의 이성적인 것에 새로운 시선을 던지게 하였다. 그것이 질서와 규칙을 넘어서거나, 어긋나는 현상을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다. 요즘 보통으로 쓰이는 퓨전(fusion)이라는 말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이다. 고진하 시인의「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시 속에 문명과 자연이라는 대립적인 이미지가 중심화두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들이 빚어내는 묘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문명과 자연의 이미지는 마천루의 숲 속에서 퍼덕거리며 날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박제剝製가 된 새 후투티를 상징하는 복합적인 요소가 된다. 시인은 후투티의 인공 눈알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놀라면서 그것을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새어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새어나오다니./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시인의 감수성은 독자들에게 문명에 의해서 파괴된 자연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자연의 혼魂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현대의 도시문명을 동화 속 마법魔法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어둠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박제가 된 새의 “잘 길들여진 행복”이라는 구절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일깨우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문명비판적인 시인의 의식을 짚어보게 한다.「라이락」은「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와 같이 사실적인 체험의 진술이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밝고 단조로운 이미지가 생동감을 준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인공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서 자연의 감각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천수관세음보살이라는 불교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불교적인 사유보다는 직감을 통한 사물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시인은 라이락 꽃이 주는 값으로 환산 할 수 없는 무량의 공덕을 어떤 보살의 공덕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찬탄하고 있는데, 그 관념이 허황되지 않아서 공감을 준다.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을 토해내는/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천수관음보살을 떠 올렸다.”는 구절이 사물성의 감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관념시와는 다른 선사물先事物 후관념後觀念의 인식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는 또 맑고 향기로운 시인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라이락의 공덕을 찬탄하는 그 마음이 불도의 경지에 이른 마음임을 알게 한다. 나는 이 시의 빛과 향기기 오래 내 마음에 남기를 바라면서 거듭 음미한다.   * 고진하(高鎭河): 1987년 에 「폐가」등을 발표하며 등단함. 시집 「지금 남은 골짜기엔」「트란체스코의 새들」「얼음 수도원」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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