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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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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4>/심 상 운 댓글:  조회:215  추천:0  2019-07-26
  *월간 2008년 3월호 발표*  유승우/고종목/박대영의 시       유승우 시인의 시-「강물이 바다로」「달빛의 혼」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그 가슴속에 키우던 민물고기들은 다 두고 간다. 바다의 가슴속 어디에서도 강물의 추억이나 기억을 찾을 수 없다. 송사리 새끼 한 마리도 그 품속에 숨겨두지 않는다. 이토록 깨끗한 몸바꿈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지만, 나는 송사리나 미꾸라지처럼, 아니면 산골의 가재처럼 민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강물이 바다로」전문   빛의 혼은 달빛처럼 은은하고 푸르고 깊다. 물을 많이 마신 날이면 내 정신도 푸르고 깊다. 한강 상류의 여울목에서 물살에 찬란히 빠져 죽은 달빛은 밤중의 강물처럼 푸르고 깊게 흘러온 달빛의 혼은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나오고 물을 많이 마신 날이면 달빛의 혼에 취해, 술처럼 취해 달빛이 그리워 달밤이 그리워 파리한 내 정신은 달 밝은 들판에서 머리를 푼다. -------「달빛의 혼」전문   시에 대한 관점은 시대마다 시인마다 다르다. 그 ‘다른 것’이 시의 생명을 영원히 유지하게 하는 시의 에너지가 된다. 만약 시에 대한 정의와 표현기법이 같아야 한다면 시인은 그만큼 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고, 시를 읽는 맛이나 시를 짓는 흥미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유승우 시인은 자신의 시관詩觀을 (시문학 2007년 2월호)에서 ‘신과의 대화’라는 관점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의 표현방법은 이미지의 기법을 따른다고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시는 우주의 구현 즉 ‘사람의 몸’이라는 독특한 발상을 내세우고 있다. 그의 이런 시관은 동양의 시관보다는 정통적인 서양의 시관에 맥이 닿는다. 기독교의 사유와 관념을 중시하는 서양의 시관은 현대시에서도 형이상의 관념을 추구하는 철학적 시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는 김현승의 주지적 관념시를 예로 들 수 있다.) 시의 내용을 ‘신과의 교감交感‘이라는 정신세계에 두는 형이상의 시는 기독교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 날 때, ’나‘를 버리면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는 동양의 정신세계와도 교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시에서는 이런 정신세계에 대한 천착보다 그것을 어떻게 시로 표현하고 이미지화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미지는 감각의 산물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시의 물리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대시에서는 ‘사물성의 이미지’ 그 자체를 시로 인정하기도 한다. 「강물이 바다로」는 시인의 관념을 하나의 비유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려는 것 같다. 에서, 바다는 분별과 차별이 사라진 우주적인 세계를, 강물은 분별과 차별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바다나 강은 본래는 같은 세계지만 인간의 지식과 분별에 의해서 차별화된 세계이다. 강에서 바다로 간다는 것은 차별의 세계(비본질적인 세계)에서 무차별의 세계(본질적인 세계)로 떠나는 정신적인 여행을 의미한다. 이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는 여행은 사물이 원소로 환원되는 물질의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발생하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시인은 바다로 가는 여행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 그 기도는 신과의 만남이고 대화다. 이 보이지 않는 대화의 내용을 비유적 언어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 이 시의 표상이다. 그러면 이 시는 이미지의 형상화에 성공한 것일까? 관념의 힘에 의해서 시인의 상상력이 너무 단순화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의 전달을 목표로 함으로써 시의 감각적 기능이 위축되고 설득적인 기능이 우세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점에서 그의 초기 시「달빛의 혼」과 비교가 된다.「달빛의 혼」에는 시인의 관념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관념보다는 시인의 감각이 더 진하게 묻어난다. 시인은 어느 날 푸르고 은은한 달빛에 취해서 라고,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한강 상류에서 찬란하게 빠져 죽은 달빛이 수도꼭지를 통해서 나온다는 발상은 매우 독특하고 기발하다. 그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과학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상상이고 허상이라고 할지라도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상상의 기능을 통해서 관념적인 시보다 시적 즐거움을 더 향유하게 된다. 이것을 러스킨(John Ruskin 영국 1819. 2. 8~1900.1. 20)은 “시에 있어서 표상이 진실치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경우가 흔하다”고 하면서 이를 “감상적 허위(Pathetic Fallacy)”라고 하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대시에서 시인들의 시적 방법론과 시관은 매우 다양하다. 이 다양한 시관에서 하나의 차이점을 집어낸다면 시는 ‘진리발견의 도구’가 아니라는 견해와 시는 진리를 표상해야 한다는 견해다. 따라서 전자의 시인들은 자신의 의식과 심리적인 이미지에 더 몰두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무한한 이미지의 세계를 구현하는 데서 시적 성과를 얻는 반면 후자의 시인들은 형이상학적 사유의 표상에 시의 가치를 두고자 한다. 시의 이런 형이상학적인 진리표상의 문제는 그리스시대의 시와 철학과의 갈등관계에서도 발견된다. 플라톤은 정서와 비논리를 존재의 바탕으로 삼는 시는 공리의 법칙과 엄정한 논리를 근본 바탕으로 하는 과학이나 철학에 비해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도구로서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인들 중 형이상학적 시를 추구하는 시인들은 주지적 관념을 통해서 시 속에 우주적 진리를 담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감성적인 시의 ‘시적 진실’과 형이상학적 사유시의 ‘진리’는 서로 공생하면서도 충돌하게 된다. 유승우 시인의 시「강물이 바다로」와「달빛의 혼」은 그런 관점에서도 흥미롭게 읽힌다. *유승우(柳承佑): 1969년 추천 등단. 시집: 등   고종목 시인의 시- 「APT가 아프다」「멀티카드섹션」   아파트창이 환히 조각보를 펼친다. 창 하나, 빨간 가구 빨간 옷 빨간 몸이 창 하나, 파란 수족관속에 파란지느러미의 물고기들이 창 하나, 주말 부부 뽀글뽀글 노랑머리 여자와 뽀메리온이 흔들의자에 앉은 흔들 입맞춤이 창 하나, 설날 저녁 삼대가 앉아 보는 축구경기 슛-초록축구공의 포물선 TV화면을 출렁 흔들고 창 하나, 낡은 차 안 불이 꺼졌다가 깜박 껴진다. 10년 무주택인 K씨가 타고 있다. 2월 밤 불을 켠다. 소장 〮〮〮․ 대장 ․ 십이지장 ․ 신장 ․ 비장 ․ 췌장 ․ 맹장 ․ 애간장 아파트 내장이 부글거린다. -------------「APT가 아프다」전문 * 뽀메리온: 애완용 강아지 종   바늘구멍 속에다 한 남자가 비릿한 살비늘 떨구었다 한 여자가 벽자壁紫색 도라지꽃 한 송이 놓고 갔다 한 노인이 소태 씹은 혀를 한 젊은이가 푸르게 발기한 꿈 한 페이지를 한 어린이가 구슬을 떨구었다 고운 색실로 한 땀 한 땀 그리고 또 한 망자가 삼베로 싸맨 빈 손 낙관을 한 신부가 주문하지 않은 성경책 한 권을 한 부처가 목탁소리 내려 놓았다 바늘 ‘구멍’ 속에 쫙 펼친다 멀티 카드섹션 ----------「멀티카드섹션」전문   시는 체험이라는 말이 있다. 시인의 상상이나 사유도 체험의 파생적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종목 시인은 실과 바늘을 삶의 도구로 삼아 평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조각보는 내 시의 과거, 현재, 미래의 입체적 공간이다. 또한 종교와도 같은 정신적 주체이다. 그래서 바느질로 점철된 시를 쓴다. 그 공간은 시를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만 둘 수가 없다. 작업을 통해서 시간적 공간을 넘나들며 나의 내면 깊숙이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를 바늘땀 한 땀씩 뜨듯, 받아쓰기 한 것이 내 시의 기본이 된다.”라는 그의 말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삶의 진실과 체험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언어로 된 시만이 아니라, 회화繪畵의 세계에서도 독창적인 이미지로 ‘조각보’의 예술적 공간을 열어 보임으로써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시편 중 조각보의 연결과 유사한 시들은 독특한 감각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시에는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이 불연속적인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APT가아프다」에서는 불빛이 환한 아파트 창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그의 상상을 모아놓음으로써 인과적 연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새로움을 준다. 그는 자신의 관념으로 독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주기를 통해서 ‘공감 나누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상상은 현실과 연결되지만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그 세계는 어떤 의미나 관념에서 해방된 제2의 공간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존재한다. 그것은 또 ‘독자들의 공간 넓히기’의 방법이 된다.「APT가 아프다」를 형성하는 4개의 화상畵像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적인 상상의 그림을 펼치고 있다.가 그것이다. 이 시에서 ‘빨간 가구 빨간 옷 빨간 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래서 독자들은 빨간〓욕망으로, 또는 빨간〓생명으로, 또는 빨간〓성性으로 각각 다르게 환원하여 이 시를 감상하게 된다. 그리고 4번째 화상 속에 들어 있는 무주택자 k씨의 모습은 이 시가 현실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개의 화상에 담겨 있는 동적인 영상은 디지털의 생동하는 화면이 되고 있다. 그 영상은 언제나 입체적이고 현재형이다. 그리고 가변적이다. 그 변화는 작은 단위들의 집합적인 결합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하이퍼텍스트 적인 화상에도 시인의 내적 의식의 그림자가 진하게 깔려 있다는 것을 「멀티카드섹션」은 보여주고 있다. 의 구절들이 시인의 잠재의식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중심 키워드는 바늘구멍이다. 그 바늘구멍은 시인이 지나온 삶의 현장을 찍어서 보관한 카메라의 렌즈다. 평생을 바느질을 하며 살아온 그에게 바늘구멍은 세상을 보는 창이 되고 세상을 표현하는 기호가 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논리다. 그것은 이 시가 그가 경험한 생의 풍경을 멀티 화면으로 펼쳐놓았다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도라지꽃 한 송이를 놓고 간 여자, 푸르게 발기한 꿈 한 페이지를 놓고 간 한 젊은이는 그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젊은 날의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린이, 망자, 신부, 부처 등은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해준 인연들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가벼운 터치로 언어의 화면에 그려 놓은 멀티 카드 섹션의 그림들이지만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의 인생을 형성시켜준 인연들이라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는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 대상들과 만날 수도 있지만 현실을 초월한 환상적인 그림으로 만나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삶을 관조하는 눈이 환하게 떠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보여주는 화상의 세계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 원망, 저주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도 환희, 즐거움 같은 긍정적인 정서도 다 잦아든 담담함과 맑고 투명한 의식만 남아있다. 이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 ‘건너편의’ 또는 ‘초월’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림(사진)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사실(fact)일 뿐이다. 그 속에는 감정이 들어있지 않다. 그런 심적 상태는 선禪의 세계와 같다. 선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법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고종목 시인의 시편 중 사회봉사의 체험을 표출한 작품들도 그것이 독립적인 영상이라는 점에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종목: 1996년 시집 로 시작활동. 시집:   박대영 시인의 시- 「깨밭」「김화백이 보낸 그림」   깨 심어 놓고 그날부터 깨밭에 앉은 할머니 종일 산비둘기와 다툽니다 금줄을 쳐놓고 허수아비를 세웠지만 만만찮은 놈들 할머니의 걸음으로 알아챘나 봅니다 생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영감은 비탈밭에 누워 자꾸만 말을 거는데 돌아앉은 할머니는 막대기를 두드리며 훠이 훠이 누굴 쫓는지 모르겠습니다 속없는 자식들 이제 비탈밭은 포기하라고 올 때마다 노래를 불러대지만 알았다며 그 냥 웃지요 너희들은 모른다며 돌아서 울지요 산비둘기들이 고맙답니다 종일을 앉아있어도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오늘도 지팡이 같은 막대기 들고 비둘기 쫓으러 비탈길을 오릅니다 -----「깨밭」전문   나에게는 늘 따로 셈하고 갈무리해야 하는 밑천 같은 화가 친구가 있다 무슨 한이 그리 많아 아름다운 것들은 죄다 가두어 버리고 싶어하는 욕심 많은 그림쟁이 그가 보낸 풍경화를 오늘 새벽에야 보았다 내가 살았던 어린 시절 고향집 같은 아니면 지난 밤 기억 없는 꿈속에서 한참 살았을 것 같은 나지막한 산 아래 흙담의 작은 집이 있고 꿈길 같은 황톳길을 돌아들면 고즈넉이 저녁연기 깔린 마당이 보인다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렀노라면 쇠죽 쑤던 김화백이 반갑게 뛰어 나오며 빨리 술상부터 보라고 고함지를 것 같은 꼭 들러보고 싶은 저 집 그림아래 찍힌 자그마한 문패를 들어서면 늘 배경으로 남아 있는 그 친구가 살고 있겠다 --------「김화백이 보낸 그림」전문   현대의 보편적인 도시인들에게 ‘고향故鄕’은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낱말일까? 추석이나 설이 오면 고속도로에 늘어선 귀향차량들의 행렬이 고향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한다. 고향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기억 속의 시골마을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 곳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안정감과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근래에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45억2000만원)를 기록하여 화재가 되고 있는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는 그림의 기법이 탁월한 점이 그림 값의 대부분을 차지하겠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림 속에 묻어 있는 1950년대의 삶의 추억과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다. 그 속에는 빠른 변화 속에서 도시인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삶의 향기와 정서가 들어 있다. 이런 과거회귀의 정서는 빠르게 변하는 현대 도시생활 속에서 벗어나서 느리게 사는 법을 추구하는 이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느림’을 21세기의 삶의 방법으로 내세우고 의식주에서 옛날의 생활양식을 재현하고자 한다. 시인들 중에도 그런 사고방식에 동조하여 ‘느림의 미학’을 현대시의 시적 방법으로 구조화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는 문명에 대한 반동이며 비인간적 삶에 대한 향기로운 반항反抗이라는 점에서 시대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이슈가 된다. 박대영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시편에는 단순한 향토의 풍물을 넘어서는 시인의 의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기법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삶의 한 쪽을 ‘향토鄕土’라는 배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깨밭」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다 빠져나간 현대농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할머니는 깨 밭에서 하루 종일 산비둘기와 다투며 산다. 산비둘기들이 깨의 씨앗을 파먹기 때문만이 아니다. 일찍 세상을 떠나간 남편은 산언덕에 묘지가 되어 누워 있고, 홀로 된 할머니는 남편 무덤과 무언無言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식들은 할머니에게 비탈밭을 팔아버리라고 하지만 그런 말에는 아랑곳 않는 할머니는 남편이 있는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현실의 장면을 그는 라고, 사실적인 묘사描寫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정서나 관념을 최소화하고 할머니를 하나의 이미지로 부각시킨 언어의 그림이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이미지는 고향을 지키는 상징적인 캐릭터가 되어서 독자들에게 고향의 원형原形을 느끼게 한다. 이런 원형의 이미지는 는「김화백이 보낸 그림」에서는 더 생동하는 이미지가 되어서 고향의 정취를 풍긴다. 김화백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흙담의 작은 집이나 저녁연기 깔린 마당이나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렀노라는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빨리 술상부터 보라고 고함지르는 쇠죽 쑤던 김화백의 모습은 그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싶어 하는 낭만적인 고향의 이미지다. 그는 그것을 환상 속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그림은 환상의 액자 속에서 뛰어나와 살아 있는 현실 속의 그림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생동하는 심리적인 이미지는 독자들을 시의 현장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이 환상과 현실의 조화는 박대영 시인의 시를 ‘독자적인 존재성이 있는 향토의 시’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박대영: 1998년 월간 등단 시집: 「봄을 찾아 남으로 달리지 마라」
58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3>//심 상 운 댓글:  조회:208  추천:0  2019-07-26
*2008년 2월호 발표* 김시철/위상진/이솔의 시   김시철 시인의 시-「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   눈 내리는 아침 현관을 나서려니 현관마루로 올라서던 녀석 후닥닥 도망을 친다.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 한건 나다. 도망가는 놈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이 아침 놈이 웬일로 우리 집엘 온 것일까 나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눈 쌓인 산속엔 먹을 것이 없어서 혹여 내 집엘 동냥 온 건 아닐까. 그날 이후 내내 도망치던 놈의 뒷모습이 선해 먹을 것을 내다놓고 닷새를 기다렸지만 종무소식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닌 걸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 덫에 걸린 고라니가 마을 사람들 술안주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전문   요 며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만큼을 살았으니 이제는 비켜서야 할 때다. 혼(魂) 다 빠진 육신(肉身) 굳이 무덤 만들어 썩힐 것이 아니라 뒷동산 어느 소나무 밑에 다가 한 줌 수목장(樹木葬) 을 하면 어떨까. 요 며칠 그 생각에 깊이 들다보니 뒷산이 모두 내 집이요 소나무가 모두 내 몸만 같네. -「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전문   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인 자신의 체험이다. 그 체험은 시를 의미의 세계보다 한 단계 높은 존재의 세계로 끌어 올리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T.S.엘리엇의 “시란「무엇은 사실이다」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란 말도 시의 창작과정創作過程에서 체험을 중요시한 시론으로 해석된다. 이 시론은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문덕수의 수퍼비니언스(supervenience)의 원리도와 맥을 같이 한다. 김시철 시인의 연작시「강원도」에는 그가 서울을 떠나서 강원도 평창 산골에 터를 잡고 산 몇 년간의 생생한 생활체험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시가 현대시의 기법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자연발생적인 정서의 표현에 머물고 있지만, 사실(fact)이 주는 시적 감동 속으로 독자들을 들어가게 하고 시를 읽는 맛을 진하게 한다. 특히 그의 사상이나 견해가 직설적으로 들어있지 않고, 그것이 사실적 체험 속에 융합되어서 표현된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된)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공감의 깊은 울림을 준다.「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은 그런 면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는 시인의 특별한 언어적 수사가 없어서 언어와 사실이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이루고 있지만 독자들을 뜨거운 피가 흐르는 감성과 사유의 공간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는 어느 눈 내린 겨울 날 아침, 현관에서 고라니와의 예상치 않은 마주침에 놀란다. 그때 그는 도망가는 고라니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라고 고라니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서술하고 있다. 그 심경 속에는 인간과 동물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선 따뜻한 마음이 들어 있다. 그 마음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삶을 누리는 순수한 동화同化의 마음이다. 추운 겨울철을 견디는 산속의 동물들에게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 굶주림이다. 몇 년 동안 산골 생활을 한 시인은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들과 공생共生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터득하고 있다. 그 방법에는 관념적인 사상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자연과의 화합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원리가 들어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겨울철 산짐승들이 다니는 산길에 덫을 놓고, 그 덫에 걸린 짐승들을 술안주 감으로 삼고 즐기는 것을 농한기 놀이의 방법으로 당연시한다. 그는 이 시의 끝 연에서 그 인습적因襲的(원시적)이고 무지無知한 삶의 현장을 라고 담담한 어조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어조는 담담하지만 그 어조 속에 담긴 그의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은 시의 여운으로 남아서 독자들의 마음을 휘어 감는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런 현실을 인정해야 하느냐고, 독자들에게 인간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자연관(자연친화 사상)은「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에서 더 개성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서라고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라고, 한없이 넓은 또 하나의 세상을 만나는 상상에 젖어들고 있다. 그의 상상은 관념의 문을 열고 나온 사실적인 이미지가 되어서 이 세상의 생명의 뿌리와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불변하는 자연의 원리 속으로 벌거벗은 시인의 정신이 들어가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저 뒷동산의 나무와 내가 한 몸이 된다는 상상은 인간의 우월성을 모두 벗어버린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큰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것은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시의 향기를 즐기면서 철학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잠시 들어가게 되는 키워드가 되고 있다.   * 김시철(金時哲): 1956년 김광섭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 등 다수   위상진 시인의 시-「한강」(각색 시)   나는 흐르는 동안에만 물의 씨앗을 낳는다 태백에서 흘러오다 두물머리 어디쯤에서 천 년을 잘라내고 어둠이 치마폭을 들추며 달을 내려놓는다 (무대 위에서 푸른 천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굽이굽이 휘어지며 맨발로 숨차게 흘러온다 (흰옷)과 땅(검정옷)이 뒤섞인다) 오래 전 끊어졌다 이어진 다리 아래 물그림자를 밀고 가는 무늬 흐르듯 멈추듯 달이 사리를 품는 중이다 (물그림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휘감고 손가락 끝에서 CD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린다 푸른 강이 천천히 색소폰 소리를 타고 흐른다) 김창렬이 그린 흐르지 못한 물방울이 바다로 가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양수가 싹을 틔우며 내 품으로 떨어진 꽃잎 같은 이름 하나 둘 불러낸다 (원을 그리며 도는 빨간색 체조 리본 꽃잎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생명들) 나는 흐르며 단단한 심이 박힌 물의 자식을 세상으로 내보낸다 (푸른 천을 뒤집어 쓴 비밀스런 강의 뿌리에서 물의 자식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 --------------------「한강」(각색 시) 전문   21세기 한국 현대시는 잃어버렸던 음악성과 공연성을 다시 찾기 위한 시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인들은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에 시의 영상을 비추고, 조명과 배경음악과 연기, 시의 낭송과 노래 등을 통해서 자신이 꿈꾸는 시의 이미지를 관객(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시를 라고 명명命名한다. (2007년 11월 17 한국 현대시인협회 주최 제1회 전국 공연시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공식적으로 의 장르 선언을 함) 현대시의 이런 변화의 움직임은 언어(문자)를 유일한 표현매체로 삼는 모더니즘 시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창조적인 변화의 양상으로서 그 속에는 현대의 특성인 ‘경계 허물기’ 와 ‘통합하기(퓨전)’가 들어있다. 따라서 시의 공연화公演化는 시와 무용, 시와 회화, 시와 음악, 시와 연극 등이 융합하는 현대시의 혁신적 변화로서 ‘열린 시’의 의미를 갖는다. 위상진 시인의「한강」(각색 시)은 이런 관점에서 관심을 끌고 흥미롭게 읽힌다. 그는 자신이 창작한「한강」을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해서 연출의 과정을 거치고, 자신의 연기를 통해 관객(독자)들에게 ‘보여주기(showing)’를 한다. 그리고 그 연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각색시脚色詩「한강」을 새로운 창작시와 같이 발표하고 있다. 이런 그의 각색시는 일반적인 서정시를 공연시로 만드는 ‘연출 노트’를 시의 행간에 넣은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그 자체가 창조적인 시적 행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의 각색시「한강」은 원시와는 다른 독특한 시의 맛과 향기를 독자들에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한강」의 원시는 시인의 사유와 개성적인 이미지로 구성된 평면적인 서정시다. 는 첫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이 시의 ‘나’(주체)는 한강이고, 한강의 독백으로 시가 전개된다. 따라서 시인의 관념이 시의 독백을 지배하고 한강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푸른 천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굽이굽이 휘어지며 맨발로 숨차게 흘러온다/(흰옷)과 땅(검정옷)이 뒤섞인다) 라는 ( )속의 지문은 가상현실의 한강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시에 생동감과 예술적인 환상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독자들의 상상력에 자극을 가하고 환상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평면적인 시의 공간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고 시의 감각을 오감五感으로 확대한다. 이것은 연극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효과를 일반적인 서정시에 도입하는 예例로 ‘시+연극’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한 장면의 연극을 감상하는 이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물그림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휘감고/손가락 끝에서 CD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린다/ 푸른 강이 천천히 색소폰 소리를 타고 흐른다)에서는 연기자의 연기와 그가 사용하는 소도구에서 독자들은 독창적인 감각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그 환상의 공간속으로 자신들의 상상을 넣어보는 재미와도 만나게 된다. 특히 CD를 사용하여 반짝이는 한강의 물빛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현대적인 감수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objet)와도 관련되는 시적 소재의 확대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동하는 감성은 (원을 그리며 도는 빨간색 체조 리본/ 꽃잎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생명들)에서는 어떤 논리적 흐름에서 벗어난 상상의 세계로 비약하는데, 이는 시의 공간을 구체화시키고 난해성을 풀어주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것은 상상의 집합적 구조가 원을 그리며 돌다가 연기자의 다리 아래로 떨어진 빨간 체조 리본의 꽃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시의 상징이 극의 상징으로 전이轉移되기 때문이다. 이때, 연기자가 여자일 경우 시 속의 ‘양수’와 어울려서 생명의 원천을 더 본질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시의 끝부분 라는 평범한 구절이 (푸른 천을 뒤집어 쓴 비밀스런 강의 뿌리에서/ 물의 자식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로 인해 성스러운 제의적祭儀的 장면으로 승화되고, 이때 연기자(시인)는 물에서 생명을 받아내는 존재자로 부각된다. 이런 극적 전환의 장면에서 나는 원시보다 각색된 시의 매력에 더 끌리게 되고 각색시의 독립적인 완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위상진 시인의「한강」(각색시)이 아직 미완성의 실험적 작품이지만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공연성이 시사적詩史的 가치와 중요성만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위상진 : 1993년 월간 등단. 시집:「햇살로 실뜨기」   이 솔 시인의 시-「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   균근菌根곰팡이는 암벽 위 소나무를 특히 좋아하여 그 뿌리를 붙안고 산다 균근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곰팡이는 틈새의 물기를 먹고 실뿌리의 왕성한 힘을 양분으로 큰다 실뿌리는 암석을 부수며 곰팡이와 하나가 된다 은밀한 이야기 나누며 가느랗고 끊기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 암석이 갈라지고 드러난 솔뿌리의 자태 꿈같이 뽀얀 실뿌리덩이로 피어난 한줌 흙 없이도 버텨낸 거센 바람에도 암석을 붙안고 서게 한, 나는 내밀한 암각화를 그리는 곰팡이다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전문   코끼리 장식이 붙어 있는 향나무 도장을 판다 삼각칼 끝으로 코끼리의 발바닥을 파고든다 삼각칼 끝 칼날을 세우고 파고든다 장지의 굳은살에 칼을 기대고 신중하게 한 점, 한 획을 새긴다 천천히 획을 그려나가면서 깊게 파고들고 부드럽게 깎아낸다 살짝 점을 찍고 가볍게 날리듯 삐치면서 이 아무개를 새긴다 향나무의 속살은 둥근 얼굴로 나타난다 칼끝에서 찌꺼기를 털어낸다 둥근 얼굴에 살이 붙고 여린 미소 드러나면 이제 향이 우러나올 차례다 한 점, 한 획에서 둥근 얼굴에서 깊은 향이 피어난다 ------「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전문   시를 건축물에 비유하면서 정서와 사상은 시라는 건축물의 중심이 되는 설계도나 기둥과 같다고 하는 이론은 쉽게 변하지 않는 보편성을 갖는다. 그 이론은 보통의 글쓰기 이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의 기능이나 구조, 시의 겉모습이 되는 사물(사건)은 시의 중심이 아닌 부수적인 것 즉 건축물의 미적 표현도구나 소재로 평가될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서와 고정관념(이념)에 식상食傷한 현대 시인들은 시의 중심을 시인의 정서와 사상만이 아닌 언어의 기능이나 구조, 사물자체(사건)에 두려고 한다. 그들은 언어의 기능을 의미의 전달에서 언어의 순수한 예술적 기능으로 전위轉位하려 하고, 사물(사건)을 비유比喩나 상징(의미)의 도구에서 해방시켜 독립적인 ‘사물성의 세계’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 이유는 정서나 사상은 대부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인식인데 반해서 사물(사건)과 언어는 객관적이고 비교적 가변성이 적은 독자적인 존재의 세계(fact)이기 때문이다. 이솔 시인의 시편에는 이런 ‘사물인식의 세계’가 선명하게 들어 있어서, 일반적 정서의 과장된 노출이나 고정관념의 인과적 논리성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신선한 사물성의 언어를 맛보게 한다. 그는 독자들을 자신의 행위나 사물 속으로 안내하면서 사물성의 세계가 펼쳐 보이는 물질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의 앞부분은 미세한 사물의 세계를 관찰하는 시인의 눈을, 끝부분은 사물세계 속으로 들어간 자신의 모습 즉 사물과 합일合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라는, 이 시 속에는 사물세계에 대한 시인의 몰입과 세밀한 관찰만 있을 뿐, 어떤 정서나 사상의 개입이 없다. 그의 사물인식은 대상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채, 중립적인 위치에서 직관적이고 단도직입적 單刀直入的으로 사물과 만나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의 눈은 암석에서 번식하는 균근菌根곰팡이의 활동을 고성능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는 과학자의 눈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독자들의 시선은 암석에서 번식하는 균근菌根곰팡이의 생태에 집중되고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사물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끝부분 에서는 곰팡이와 한 몸이 된 시인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고, 그에 대한 해석은 어떤 관념이 아닌 독자의 상상과 감성에 맡기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중심은 사물세계에 대한 감지와 인식이고, 그 인식이 ‘사물성의 세계에 대한 환기喚起’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는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물을 만지고 또 다른 사물을 창조해내고 즐기는 행위를 보여준다. 이런 행위는 사물인식의 시원始原이 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이들이 흙이 무엇인지 개념을 알기 이전에 흙을 만지고 흙으로 무엇을 만들고 하는 놀이를 통해서 흙과 친해지고 흙을 인식하게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 시는 보는 것보다는 만지고 즐기는 것이 더 사물의 근원에 접근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삼각칼로 나무에 도장을 새기던 자신의 체험을, 라고, 극히 사실적인 시의 언어로 재현再現하면서 독자들을 사물의 내면으로 몰입시킨다. 이런 그의 사실적 진술陳述의 언어 속에는 어떤 관념도 사상도 침투할 수 없다. 그 속에는 오로지 언어이전의 ‘물질과 행위行爲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시는 언어(관념)의 시달림에 지친 독자들에게 맑은 물과 같은 투명한 사물성의 감성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의미생성 이전의 사물성의 세계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세계를 일깨우고, 세상의 풍화작용에 닳아버린 감성을 회복시키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언어이전의 세계로 떠나가는 상상에 젖게 한다. 이런 시를 시의 방법적인 면에서 ‘사물시事物詩’라고 명명命名하기도 하는데, 이솔 시인의 독특한(unique) 감성의 언어가 경이롭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이솔 : 2001년 월간 등단. 시집: 「수자직으로 짜기」「신갈 氏의 외투」  
57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2>/심 상 운 댓글:  조회:215  추천:0  2019-07-26
월간 2008년 1월호 발표   송시월 시인의 시-「계곡 물 속의 풍경-언어의 감옥·1」「입춘 무렵」   계곡의 물이랑 일렁일렁 바람이 밟고 간다. 오후 3시의 햇 살이 물속에 꽂힌다. 사정하듯 햇살올챙이들 쏟아져나와 바 람의 보폭만큼 흔들리는 바위의 배꼽 위로 줄줄이 기어오른 다. 비위가 기웃 몸을 튼다. 빛살무늬의 버들치 개버들 가지 의 그물망을 빠져나와 여인의 얼굴이, 달이 잠깐 갈라졌다가 이내 붙는다. 얼굴이 찌르르 아프다. 이때, 누군가가 첨벙 손 을 담근다. 오후 3시의 풍경에 뒤엉켜 일그러지는 관념의 예수. ------「계곡 물 속의 풍경-언어의 감옥·1」전문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시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시 속에서 정서와 관념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먹고 싶은 것들을 못 먹게 하는 다이어트의 고행과 다르지 않다. 송시월 시인은 감상적인 정서와 상투적인 관념의 풍요로운 유혹을 물리치고, 대상을 직관하면서 군살이 붙지 않은 생동하는 디지털적인 감성의 언어(탈관념, 사물성의 언어)로 대상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는 그 첫 작업을 ‘언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관념을 최상의 것으로 모시고, 고정관념의 틀 속에서 시를 짓는 시인들에게는 지식과 사상, 종교적 관념으로 가득한 언어는 꿈속의 궁궐과 같겠지만, 깨어있는 시인에게는 지식과 사상, 종교적 관념이 축적되어 있는 언어는 언어의 감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곡 물 속의 풍경-언어의 감옥·1」은 그가 계곡의 물을 보면서 자신의 정신을 투명한 수면에 꽂히는 햇살같이 환하게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산 속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괴인 맑은 웅덩이를 본다. 아주 무심無心한 상태에서 계곡의 물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오후 3시의 햇살이 수면에 꽂히는 것을 보면서 집중된 자신의 마음을 계곡의 물에 일치시키고 있다. 그는 그 순간의 장면을 라고 사진을 찍 듯 영상언어로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디지털 시’에서는 사진 찍기의 기법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접사接寫’라고 한다. 그러나 이 ‘접사接寫’는 “비위가 기웃 몸을 튼다.”에서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인 대상을 그대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 거울에 비친 대상을 찍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언어에는 그의 투명한 마음의 정서가 배어들게 되고 시적 향기가 풍기게 된다. 그러면서 “이때, 누군가가 첨벙 손을 담근다.”는 감각언어를 통해서 촉각과 청각으로 전달되는 물의 물성物性을 환기시키고, 정靜의 분위기를 동動으로 전환한다. 이 동적인 전환은 시 속에 생동의 기운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절정은 시의 끝 구절 속에 들어 있다. “오후 3시”는 실제의 시간으로 정확성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의 감각인데, 이 생생한 감각의 물속에서 일그러지는 것은 ‘관념의 예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관념으로 가득한 언어의 감옥에서 과감히 탈출한 시인의 벌거벗은 정신의 일면을 보여주는 시로 탄생한다. 만약 그가 맑은 물을 보면서 상상 속의 신神의 모습을 떠올리고 신의 섭리攝理를 지향하는 정신세계를 나타냈다면, 이 시는 보통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맑고 투명한 시선과 정서와 감각의 언어로 대상(사물)을 명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동안 쌓였던 관념을 토해내는 수련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시에서도 그런 면이 보인다. 「입춘 무렵」에서도 그의 맑은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 시에서는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사실을 정확하고 명료한 언어로 표현한다. 이때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이렇게 직감적인 감각과 영상성이 사물성의 투명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디지털 시’는 시를 정서의 노출로만 여기는 감상적인 서정시(낭만시)나, 시대적 현실에 경도되어서 산문에 가까워지는 이념지향의 사회시나, 모더니즘의 주지적 관념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21세기의 새로운 영상언어의 시(탈관념 시, 사물시, 기호시, 하이퍼텍스트의 시)를 모두 포용하면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副應하는 시를 모색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현대시사韓國現代詩史에서 1930년대 대표시인 김기림이 평론
56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1>/심상운 댓글:  조회:229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12월호 발표    문정희 시인의 시-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다른 데는 말고 내 가슴으로 들어와 뜨락에 나뒹구는 부질없는 나뭇잎들 한쪽으로 쓱쓱 치워주세요 언듯 보면 아까워 보이지만 습관뿐인 저 거실의 꽃병 먼지만 앉히고 있는 의자를 치워주세요 그리고 가장 뜨거운 곳에 심장을 다시 놓아 처음처럼 쿵쿵 뛰게 해주세요 거꾸로 돌며 추억만을 되감는 미친 시계가 새 비둘기를 낳을 수 있도록 태엽의 먼지도 털어주세요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다른 데는 말고 내 가슴에 들어와 깊고 쓸쓸하게 박힌 그의 뒷모습 쓸어내버리고 쿵쿵 뛰는 그이 심장을 나의 심장 위에 포개주세요 그의 사랑으로 눈부신 아이가 생기도록 내 안에 맑은 물길을 내주세요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전문   새 햇살 투명한 시 한편 써보려고 처녀림을 찾아 헤매는 십칠층의 겨울 아침 한 청년이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왔다 지난가을 금 간 유리를 추위가 오기 전에 갈기 위해서였다 새 유리를 갈아 끼우려면 우리는 먼저 창틀부터 허물어야 했다 갑각류 껍질처럼 마른 꿈을 부스러뜨리고 접착제로 봉할 수 없는 후미진 언어의 틈마다 더운 숨결을 훅훅 불어넣었다 고정관념이 서서히 허리띠를 풀었다 칼끝으로 민감하게 오므리는 입술을 열자 속살에서 연꽃이 발그레 피를 머금었다 하늘이 드디어 숨을 쉬기 시작했다 빛나는 상처에서 솟아나는 날카로운 무지개 오래 품은 비수처럼 빛을 발하는 시간이란 이토록 깨지기 쉬운 것일까 그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만져보고 싶다고 표현하는 순간 창가에 밧줄하나가 아찔하게 내걸리었다 청년이 거기 처형처럼 매달려 있었다 끝내 지상에 내려놓을 수 없는 나신을 납작하게 누르며 겨울 아침, 새 햇살로 빚은 시 한편이 나의 생을 환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겨울 유리창」전문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경건한 제의祭儀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먼저 자신의 내면을 말끔하게 비우는 일부터 한다. 그리고 습관(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일상에서 일탈하려는 자세를 갖춘다.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먼지 쌓인 인연들에서 떠나기를 시도한다.「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은 그런 시인의 내면의식을 소박하고 단순한 기원祈願의 언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라고. 그러나 유사한 주제의식이지만「겨울 유리창」은 새로운 시적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시의 생생한 속살을 만지게 한다. 문정희 시인은 어느 겨울 날 십 칠층 아파트에서 새 햇살처럼 투명한 시를 쓰기 위해서 정신의 처녀림處女林을 찾아 헤맨다. 그때 한 청년이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온다. 지난 가을 금 간 유리를 갈아 끼우기 위해서다. 그는 청년과 함께 먼저 창틀을 허문다. 이 창틀 허물기는 시인의 내면에 잠재한 갑각류의 껍질 같은 마른 꿈을 부스러뜨리는 일과 이미지가 겹친다. 이렇게 전개되는 ‘유리창 갈아 끼우기’는 이 시에서 중심사건으로 부각되면서 은유隱喩의 문을 연다. 새 유리를 갈아 끼우는 작업과 새로운 시를 쓰는 일은 은유의 세계에서는 두 개의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는 구절은 ‘유리창 갈아 끼우기’라는 사건을 바탕으로 함으로써 견실한 사실적 구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를 던진다.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온 청년이 처형당한 것처럼 밧줄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복합적인 이미지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 발단은 푸른 유리를 들고 올라온 청년의 이미지와 생생한 아름다움을 만져보고 싶은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가 결국은 ‘깨지기 쉬운 시간’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시인이 순간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라고. 그래서 이 구절에서는 공연시적公演詩的인 특성이 발견된다. 처형처럼 밧줄에 매달려 있는 청년의 이미지는 극적인 요소(심리적 갈등)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이 시를 무대에서 공연한다면, 푸른 유리창을 들고 들어온 청년과 밧줄에 처형처럼 매달려있는 청년은 대조적인 이미지로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하는 요소가 될 것 같다. 그것은 또 현대의 서정시가 단순한 기원祈願의 어조나 영탄과 감상으로부터 과감히 탈출하여 극적인 영상의 이미지를 창출할 때, 단순구조에서 복합구조로, 주관에서 객관으로, 서정적 진술에서 주지적 이미지로, 평면에서 입체로 성공적인 변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例가 된다. 나는 문정희 시인의「겨울 유리창」을 거듭 읽으면서 푸른 유리를 든 청년의 이미지를 통해 그가 어떤 자세로 ‘현대시’를 쓰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의 시는 그의 치열한 시정신이 뿜어내는 눈부신 광선光線이었다.   *문정희(文貞姬): 1968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꽃숨」「새떼」「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찔레」「우리는 왜 흐르는가」등   문태준 시인의 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는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 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전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족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의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 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가재미」전문   이웃에 대한 뜨거운 연민憐憫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서적 에너지가 된다. 그 에너지는 지적인 깨달음의 언어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현대시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들어 있는 서정시가 독자들과 가깝게 연결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로 부각된다. 문태준 시인의 시에는 이런 연민의 정이 흥건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축축하게 적셔준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영탄이나 주관적 감상에서 벗어나서 신선하고 독창적인 비유와 사실적인 정황情況의 세밀한 표현에 의해서 객관화되어 있다. 이 객관화는 그의 시를 공감하게 하고 견고한 시로 만들어 주는 원천이 된다. 에서 그는 움막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어물전의 개조개의 맨발 비유하고 또 그들의 맨발을 죽은 부처의 맨발로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이중의 비유를 통해서 그는 움막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과 부처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사실 부처라는 존재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인식하는 ‘자비慈悲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의 비유는 타당성이 있고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비유가 된다. 따라서 는 이 시의 끝 구절은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가장들을 떠올리게 하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실직 가장들의 눈물을 느끼게 하면서, 독자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사회적 환경에서 자신의 삶과 어떤 끈으로 이어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런 정황을 그는 가상현실의 이미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여주고 있을 뿐, 독자들을 향해 어떤 주관적 언설도 늘어놓지 않는다. 그것이 이 시의 아름다움이다.「가재미」에서는 그의 객관적인 자세가 대상과 한 몸이 되는 동화同化의 자세로 바뀐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실성을 바탕으로 함으로써 추상적인 개연성에만 의존하는「맨발」보다 시적 공감을 더 진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가재미처럼 누워있는 그녀의 곁에 가재미가 되어 눕는다고 한다. 이런 그의 행위는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시적현실에서는 진실이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라고. 그런데 이 시에서 그녀와 그가 어떤 관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녀는 한 평생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 온 농촌의 아낙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녀의 옆에 가재미처럼 누운 그는 라고 한다. 그는 왜 그녀와의 관계를 밝히지 않고 ‘그녀’라는 모호한 대명사로 표현했을까? 그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고모’나 ‘누이’라고 하는 것보다 그녀라고 하는 것이 시의 의미를 더 넓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라는 대명사는 친척이나 고향 사람들만이 아닌 흙냄새 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대상을 객관화시킨다. 그것은 부처가 모든 생명체를 평등하게 포용하는 것과 같다. 이 시의 끝부분 는 사람사이의 사랑과 그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산소호흡기로 들이 마신 물을 마른 그의 몸 위에 적셔주는 그녀의 행위는 과학적 사실과는 다르더라도 뜨거운 마음을 전하는 행위로서 감동을 준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그녀의 넉넉한 삶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문태준 시인의 참신한 비유와 사실성, 뜨거운 연민이 더 큰 시의 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시를 거듭 읽는다.   *문태준: 1994년 신인상으로 등단함
5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0> / 심 상 운 댓글:  조회:201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11월호 발표                    이낙봉 시인의 시-「050106」「040823」   지금 시를 쓰려는 내가 식은 커피 잔 가위 구두 종이 의 자 책 연필 벗어놓은 양말 실비듬으로 떨어지고, 지금 시를 쓰는 내가 흐린 하늘 고층아파트 마을버스 보도 블 록 세탁소 약국 부동산 찢어진 비닐봉지로 휘날리고, 지 금 시를 쓴 내가 머리카락 담배 베개 이불 불 꺼진 전 등 재떨이 멈춘 시계 구겨진 잠옷으로 늘어지고, 지금 시 를 지우는 내가 어제의 내가 디지털 시계의 1,2,3,4,5, 6,..........쪼개지고 부서져 바다로 뛰어 들고, 지금 시를 지 우는 내가,                                               -----------------「050106」전문    불타는 지붕 위에서 초록염소가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는다) 불타는 지붕 위에서 초록염소와 연보라색누드가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는다) 불타는 지붕위에서 초록염소가 사라지고 연보라색누드 와 붉은 꽃이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고 손톱을 깎는 다) 불타는 지붕 위에서 초록염소와 연보라색누드가 사라지 고 붉은 꽃이 회색하늘과 논다 (우울증과 놀던 나는 머리를 감고 이빨을 닦고 손톱을 깎고 코털을 자르고......)   그는 그의 흐린 햇빛마을에서 색 색 색과 놀고 나는 나 의 흐린 햇빛마을에서 색 색 색에 묶여 雨期의 말과 논다 ---------------「040823」전문                                                                              음악가가 소리를, 화가가 선과 색채를 예술의 소재로 삼듯이 시인들은 언어를 소재로 하여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시인은 음악가나 화가에 비해서 비예술적인 면이 너무 두드러진다. 그 까닭은 ‘소리’나 ‘색채’에는 의미가 없지만 언어에는 소리(기호)와 함께 의미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예술을 지향하는 시인들에겐 언어가 ‘존재의 집’(하이데카)이나 ‘존재의 무기’가 아닌 ‘존재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언어를 예술의 오브제로 사용하려는 시인들에게 언어의 의미는 ‘고정된 사고思考의 감옥’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의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한국 현대시에서 김춘수가 제창하고 실험한 것이 ‘무의미 시’다. 말년에 그는 무의미의 실험을 포기하고 의미 쪽으로 회귀하였지만 그의 ‘무의미 시’는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언어의 퍼포먼스였다. 그의 ‘무의미 시’에는 언어학의 원리가 밑받침이 되어 있다. 언어는 실체가 아닌 자의적恣意的이고 추상적인 기호다. 예컨대, ‘백두산 문방구’라는 상점의 명칭에서 문방구는 실체의 매재媒材가 되는 자의적인 기호이지만 ‘백두산’은 실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추상적인 기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언어가 이렇게 실체를 떠나 ‘추상적인 기호’로 존재한다는 것은 실체(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의 언어가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색채같이 의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성을 갖게 되는 근거가 된다. 미당의 대표시로 알려진 에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에서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는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나 형이상학적 판타지를 구현하는 기호로서의 언어일 뿐 실제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 시에 쓰인 언어들은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미적 공간’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에서 언어의 역할은 순수 회화에서 색채의 역할과 같다. 그래서 실제의 용도, 공리성에서 이탈된 사물을 예술의 오브제로 사용하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 이론’과도 맥이 닿는다. 이낙봉의 시에도 언어의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강하게 감지된다. 그는 ‘의미’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 위해서 시의 제목을「050106」등의 숫자로 표시하고 있다. 그의 시집(‘미안해 서정아’)을 보면, 이 숫자의 나열은 시를 쓴 연월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私的인 언어행위일 뿐 공적인 의미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따라서 공적으로는 무의미한 기호가 된다. 시의 내용에서도 그는 현실적인 인과관계나 의미형성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의식적인 행위를 한다.「050106」에서 라는 구절을 보면, 그의 언어가 현실로부터 이탈하여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내면의식 쪽으로 떠나가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시가 의미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의 예비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쓰인 시어들은 모두 구상어具象語이지만 의미면에서는 구체성이 없는 환상에 가까운 추상抽象이 된다. 그러나 이 시에는 ‘나’라는 주체의 의식이 들어 있어서 시인의 내면의식의 추적을 통해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고약같이 붙어있는 끈끈한 정서의 작용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040823」에는 추상적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무대’가 보이고, 칙칙하고 끈적거리는 의미(관념)가 말끔하게 지워진 언어(기호)의 가벼운 몸놀림이 경쾌하게 느껴진다. 라는 시상의 전개가 거칠 것 없는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불타는 지붕, 초록염소, 연보라색누드, 우울증, 머리를 감는다, 이빨을 닦는다’ 등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나 관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현실의 행위와도 관계가 없는 기호화된 언어로 다시 탄생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아무 부담 없이 시인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서 자유롭게 놀게 되는 것이다. (  )를 경계로 하여 지붕 위의 풍경과 나(캐릭터)의 행위를 분리하여 입체적인 표현을 한 것도 재미있는 착상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시적 행위(언어유희)에 라고 주석註釋을 붙이고 있다. 이 ‘주석 붙이기’에는 의미(현실)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은, 의미 쪽으로 창문을 열어놓고 있는 그의 의식이 보인다. 이 의식은 현실과 상상의 조화라는 면에서 ‘기호시’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건강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이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펼친 정신적인 퍼포먼스가 얼마나 치열하였나, 하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언어실험에 몰두하던 1930년대 이상李箱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낙봉: 198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내 아랫도리를 환히 밝히는 달」「돌 속의 바다」「다시 하얀 방」「미안해 서정아」등   이승하 시인의 시- 「소가 싸운다」   모래사장는 시방 엄청나다 뜨거운 힘과 힘이 맞서 있다 쏘아보는 저 소의 눈이 링에 오른 격투기선수 같다 거품을 입가에 디그시 물고 앞발로 호기롭게 모래사장을 찬다 징이 울리자   힘이 힘을 향해 달려나간다 사방팔방으로 모래가 튀고 사람들의 함성........소와 사람의 힘이 튄다 저놈이 지면 내 힘이 날아가고 저놈이 이기면 남의 힘이 내 힘이 되는 세상 함쪽 소의 뿔에 더 큰 분노가 �려 다른 소의 뒷발이 밀리기 시작한다   힘으로 들이 받자 힘으로 맞받는다 모래사장에 튀는 피 뿌려지는 침 쥐 죽은 듯 고요해지는 싸움판 침을 질질 흘리며 고통을 참던 소가 마침내 삼십육계를 놓자 징이 울린다 싸움이 끝나자 한쪽은 더 큰 함성을 지르고 다름 쪽은 욕설을 내뱉는다   쫒겨 달아난 소가 못내 미운지 이긴 소 못 다한 힘을 어떻게 하지 못해 씩씩거린다 이긴 소의 주인은 소 등을 어루만지고 진 소의 주인은 카악 가래침을 뱉는다 푸른 지폐와 누른 수표가 오갈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이 소의 눈빛보다 더 살벌하다 더더욱 분노에 차 있다 ---------「소가 싸운다」전문   ‘소싸움’은 두 소를 맞붙여 싸우게 하는 경상남도 진주 일대의 전래 민속놀이다. 매년 음력 8월 보름을 전후하여 연중행사로 거행된다. 소 임자는 소를 깨끗하게 씻긴 다음 가지각색의 천으로 정성들여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를 갖가지 아름다운 천으로 장식하며 소목에는 쇠방울을 단다. 소 임자도 깨끗한 무명옷으로 갈아입고 실로 수놓은 주머니를 차고 소 싸움터로 소를 몰고 간다. 소 싸움터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꽹과리와 북을 울리고 새납을 불면서 모여들어 각기 자기 마을소가 우승하기를 기원한다. 소싸움을 주관할 노련한 도감都監이 선발되며, 싸움 붙일 짝소는 연령과 체구를 고려하여 비슷한 것끼리 골라 약한 소들부터 싸움을 시킨다. 도감이 순서에 따라 호명하면 양측에서 소 임자가 소를 앞세우고 나와서 2~3m 떨어진 뒤에서 기세를 돋우며 성원한다. 이때 소는 고삐를 다 풀어주어 몸에 걸치는 것이 없도록 한다. 대개 소싸움은 15~20분이면 쉽게 결판이 난다. 싸움에 이긴 소 임자는 소잔등에 올라타 상품을 소에 싣고 우승기를 들고서 풍물소리에 맞추어 흥겹게 마을을 돌고 돌아온다. 참가자들은 인근 남강南江 터로 가서 흥겨운 대동놀이판을 벌인다. 농민들은 소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구입할 때 키가 크고 몸체가 길고 발이 실하며 골격이 조화되고 뿔도 멋지게 좌우로 뻗은 소를 고르며, 늘 관심을 갖고 소를 관리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민속 문화) 이런 풍속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축인 소를 귀하게 여기고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주민들의 단합시키는 ‘대동놀이판’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전통성을 갖는다. 오늘 날에도 추석 때면 진주지방을 비롯하여 인근 지방에서는 ‘소싸움’ 판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명절풍속의 놀이판도 현대사회에서는 물질주의에 오염되어서 ‘대동大同’이라는 목적에서 이탈되고, 개인의 이기심을 채우는 동물학대의 격투기로 변질되었음을 이승하 시인의「소가 싸운다」는 생생한 사실적 사생寫生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이면을 꿰뚫는 시선으로 인간의 욕망이 뿜어내는 비인간적인 면을 고발하고 있다. 라는 구절에서 그의 그런 시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그의 시적방법에는 두 가지의 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첫째로 그의 시는 현실을 사진을 찍 듯이 객관적으로 리얼하게 사생함으로써 시어의 기능을 단순화시킨다. 그의 시에서 언어와 사물(사실)이 1:1의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이루고 있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그의 시는 언어의 예술적 기능과는 거리가 멀지만 체험적 사실을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명쾌하고 생동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탈-관념적이다. 이런 방법은 ‘현실고발’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시적 효과를 발휘한다. 이것이 리얼리즘 시의 특성이다. 두 번째로는 ‘현실고발’ 속에 들어있는 시인의 가치관과 사상이다. 그것은 휴머니즘 시의 특성과 관련된다. 휴머니스트는 이 세계에 완전하고 아름다운 이념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이상주의자다. 그들의 이념은 철학이나 종교적 관념, 또는 개인적인 차원의 사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신념이 되어 행동화된다. 따라서 완전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휴머니스트는 이지러진 인간성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과 비애를 느끼며 비판하고 분노한다. 이 시에서 그가 ‘소싸움’의 현장에서 느낀 비인간성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그것이다. 라는 이 시의 끝 구절은 그런 그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소싸움’이라는 객관적 대상에 주관적인 높은 인간성과 도덕적 가치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그는 결코 너그러운 마음으로 소싸움 꾼들을 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그에게 소싸움의 현장에서 분출되는 생의 에너지나, 그 광경을 보고 잃어버렸던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관객들의 심리적 현상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 하는 것은 부질없는 행위일 수도 있다. “휴머니스트에게 대해서 사상은 체험의 한 단계로서 감각이나 감정과 불가분리不可分離한 관계에 있다. 그는 체험의 요소들이 결합해서 생동하는 모양에 늘 주목하기 때문에, 사상의 객관면과 주관면의 차별을 그렇게 예민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사상과 정서의 융합된 상태를 추구하여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데 흥미를 갖지만, 객관적인 현실이 횡폭橫暴하게도 인격을 분단하여 체험의 조화를 유린할 때에는 그는 분연憤然히 일어나 싸움을 사양치 않는다.”(최재서「문학원론」Ⅺ사상) 이 구절에는 휴머니즘 시에 들어있는 체험적 생동감과 사상과 정서의 관계, 사상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분출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이 이론에 이승하의 시를 대입하면 그의 시는 체험적 생동감이라는 면에서는 이 이론에 부합된다. 그러나 그의 시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집단적 이념의 시’(1920대의 카프계열, 1980년대의 민중주의 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개인적인 이념(사상, 신앙)에 근거를 둔 휴머니즘 시로 분류된다. 따라서 독자들이 그의 시에서 더 순수한 공감과 전율을 느끼는 이유가 해명된다. *이승하(李昇夏):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생명에서 물건으로」「뼈아픈 별을 찾아서」「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나희덕 시인의 시-「벗어 놓은 스타킹」「소나무의 옆구리」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마한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 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그것은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벗어 놓은 스타킹」전문 어떤 창에 찔린 것일까 붉게 드러난 옆구리에는 송진이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기어가던 개미 한 마리 그 투명하고 끈적한 피에 갇혀버린 것은 함께 굳어가기 시작한 것은   눌러서 버둥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춘 개미, 그날 이후 나는 소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제 목숨보다도 단단한 돌을 품기 시작한 그의 옆구리를 보려고   개미가 하루하루 불멸에 가까워지는 동안 소나무는 시들어 간다 불멸과 소멸의 자웅동체가 제 몸에 자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소나무의 옆구리」전문   인간에게 옷은 단순한 입성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옷이 사람의 몸에 입혀졌을 때 그 옷은 육체의 일부만이 아닌 그 사람의 인격과 감정과 정신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이 입었던 헌 옷에는 그 사람의 혼이 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가 걸쳤던 넝마 같은 옷을 기독교인들은 ‘성의聖衣’라고 하면서 그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신과 접촉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생각은 그 옷이 예수를 대신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옷에 대한 이런 감성과 생각은 남자보다 감성이 섬세한 여자가 더 하다. 나희덕 시인은 어느 날 자신이 벗어놓은 스타킹을 보면서 잠시 사유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벗어놓은 자신의 스타킹을 이라고 삶의 피로감에 젖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스타킹에 이입移入 시키면서 감각적인 비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라고, 무겁거나 칙칙하지 않게, 자신의 체온이 생생하게 묻어나는 감각의 언어로 촘촘한 사유의 올을 풀어낸다. 그는 생에 대한 부정에도 환한 긍정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생동하는 현재의 자기를 그려내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대상을 사생寫生 하는 주체의 위치다. 낭만주의자들처럼 대상에 자신을 전적으로 이입하거나 대상을 자기화自己化 하면 대상과 주체가 너무 밀착되어서 객관적인 관조의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상과 너무 멀리 떨어지면 감각과 사유는 개념화 되고 구체성을 잃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희덕 시인의 대상과의 거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적당하게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감정노출을 억제하면서 감성적인 사유의 언어로 대상을 스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감성적이고 이성적 자세는「소나무의 옆구리」에서 날카로운 사유의 눈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소나무의 옆구리에서 끈적끈적한 송진이 흐르다가 굳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끈적하고 투명한 속에 개미가 갇혀서 송진과 함께 굳어 있는 것을 관찰한다. 그는 소나무의 옆구리에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송진이 소나무를 소멸시키는 암 덩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송진에 갇힌 개미는 불멸에 가까워지고 소나무는 소멸에 가까워진다고 하면서 이 상대적인 둘의 존재를 한 몸 속에 안고 있는 소나무를 자웅동체로 인식한다. 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인식의 절정을 이루는 구절은 ‘불멸과 소멸의 자웅동체’라는 구절이다. 자웅동체[雌雄同體,hermaphroditism]는 암수의 생식기가 한 몸에 있는 생명체다. 자웅동체성 동물은 대부분 연형동물蠕形動物·태충류苔蟲類·흡충류吸蟲類·달팽이·민달팽이·삿갓조개 등과 같은 무척추동물로서 주로 기생하며, 느리게 이동하거나 다른 동식물에 항상 고착하여 사는 생명체들이다. 사람에게도 비정상적인 매우 드문 일로 자웅동체가 되어 태어나 경우가 있다. 이때 성의 선택은 어느 편이 더 우월한가에 따라서 외과수술로 결정된다고 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자웅동체는 이런 생물학적인 의미의 자웅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불멸과 소멸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존재의 모습에 대한 시인의 개성적인 인식이다. 따라서 소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소나무의 옆구리에 불멸에 가까워지는 송진 속의 투명한 개미의 모습은 사유의 공간을 확대하는 상징적인 그림이 된다. 이 그림은 소나무가 불멸과 소멸의 대립적 운명을 안고 조금씩 시들어 가는 것같이 우리 인간들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인식하게 한다. 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송진 속에서 불멸에 가까워지고 있는 개미 같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 시에서는 ‘자웅동체’ ‘불멸’ ‘소멸’이란 단어가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그래서 두 편의 시 속에 들어 있는 사유의 공간은 독자들에게 시를 읽는 시간이 사유의 오솔길을 걷는 시간이 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나희덕(羅喜德) :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등
5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9>/심 상 운 댓글:  조회:195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 10월호 발표      양병호 시인의 시-「카오스 이론 3-심심하다 심심해」「카오스 이론 9- 꿈의 해석」     악몽이 없는 잠은 심심하다 심심해 반칙이 없는 축구는 심심하다 심심해 대형사고 없는 뉴스는 심심하다 심심해 바람 없는 하늘은 심심하다 심심해 전쟁 없는 세계사는 심심하다 심심해 안주 없는 술자리는 심심하다 심심해 술자리 없는 연애는 심심하다 심심해 돌지 않는 바퀴는 심심하다 심심해 변태 없는 섹스는 심심하다 심심해 섹스 없는 인생은 심심하다 심심해 죽음 없는 인생은 정말 심심하다 심심해 그런데 죽음 있는 인생도 심심하고 섹스 있는 인생도 심심하고 변태 있는 섹스도 심심하고 돌고 있는 바퀴도 심심하고 술자리 있는 연애도 심심하고 안주 있는 술자리도 심심하고 전쟁 있는 세계사도 심심하고 바람 부는 하늘도 심심하고 대형사고 있는 뉴스도 심심하고 반칙 있는 축구도 심심하고 악몽 뒤척이는 잠도 심심할 때 재밌게 놀면서도 심심할 때는 어떻게 하지?               -------- 「카오스 이론 3-심심하다 심심해」전문   #1 다리가 겁나게 무겁고 축축하다 지각변동으로 흔들리는 침대 누군가 소리 없는 고함을 지르고 무채색으로 일그러지는 풍경 실컷 얻어터지고 싶다 억울하다 울고 싶다 담배 피우고 싶다 피융 날아오는 것을 낚아챈다 시퍼렇게 날선 도끼이다 도끼로 다리를 찍는다 여러 번 피가 나지 않는다 살 속에서 빛나는 뼈가 가느다란 아름다움 아프지 않다 전혀 통증 �는 세상으로 잠적하기를 꿈꾸는 삶이여 허망이여 현실 같은 꿈이여                             ----------「카오스 이론 9- 꿈의 해석」#1 전문   우주론에서 카오스 (chaos)는 혼돈상태,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우주의 시원적 공허를 의미한다.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은 동적인 변화가 매우 불규칙적이어서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운동 상태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미분화 된, 질서 이전의, 어쩌면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카오스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현대시에서 실험성이 강한 시운동을 카오스적인 면에서 논할 수 있는 것도 기성의 질서를 부숴버리고 혼돈된 상태로 돌아가서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모색하는 시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한국의 현대시에서 일어난 해체시 운동은 이성理性 중심의 세계관의 허위를 해부하여 (파괴가 아님) 보여주고 그 허구성을 깨닫게 하는 데리다의 해체이론에 기반을 둔 시운동이었다. ‘패러디’를 주축으로 하는 풍자와 야유, 테레리즘 적 언어의 사용은 당시의 민중적 현실과 결부되어서 현대시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는 흔적을 남겼지만, 시어의 저질화, 경박성, 형이상학적 사유의 부족으로 현대시에 상처를 주기도 하였다. 양병호 시인의「카오스 이론 3-심심하다 심심해」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 속에 현실에 대한 시인의 날카로운 진단이 들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에서, 라고, 없는 세계와 있는 세계를 대립적으로 배치하여 ‘없다’와 ‘있다’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를 모색하고자 하는 지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없어서 심심하고, 있어도 심심할 때, 아니 “재밌게 놀면서도 심심할 때는/어떻게 하지?” 라는 시인의 물음은 역설이나 억설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너무 크게 들어 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기 때문이다.「카오스 이론 9- 꿈의 해석」#1은 라고, 그의 ‘심심함’에 대한 치유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무엇에선가 강한 자극을 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실컷 얻어터지고 싶은 꿈, 시퍼렇게 날 선 도끼로 자신의 다리를 찍는 꿈을 꾼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자신의 심리적 무료감無聊感을 치유하려는 본능적인 심리치료행위다. 이런 그의 심리상태는 그의 사유가 ‘허무’에 너무 가까이 닿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수필「권태倦怠」에는, 이상이 시골 생활의 권태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최 서방 조카와 장기를 두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는 번번이 이기기만 한다. 그래서 “나는 왜 저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상태放心狀態가 되어버릴 수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세些細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하고 자신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말한 ‘방심상태’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도道의 경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초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상의 실험적인 다작多作은 세상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여겨진다. 양병호 시인의 ‘심심함’도 그가 허무의식에서 탈출하여 독창적인 카오스의 시론을 심화 확대할 때, 실험성이 강한 시정신의 힘이 될 것 같다. * 양병호: 1992년 으로 등단 시집: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하 늘 한 번 참말로 맑게 반짝이더라」「시간의 공터」   김충규 시인의 시-「손자국」「구름의 장례식」     보수공사를 끝낸 시멘트 골목길 누가 찍어놓은 것일까 발자국이 아닌 손자국 선명하게 찍혀 있다 시멘트 굳기 전 누가 작심하고 찍어놓은 자국, 자세히 보니 새끼손가락 턱없이 짧다 斷指-. 분명 그 흔적인 듯! 옛적 병중인 부모에게 제 피를 내어 먹이려고 끊었다던, 조폭 세계에서 의리를 보이려고 끊는다던, 입대하지 않으려고 작두에 넣고 자른다던, 화석 같은 손자국을 보며 별의별 상상을 다 해보는 아침. 내 오랜 친구 녀석은 연상의 여인에게 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온통 붉은 문장의 편지로 고백했다고 말하며 훗날 사실은 그게 아니라 돼지 피였다고 농을 한 적이 있지만, 손가락 마디 하나 없는 손자국 섬뜩해서 누군지 몰라도 세상을 향해 뭔가 항의를 하려고 찍어 놓은 듯해서 쭈그리고 앉아 그 자국 위에 내 손 맞춰 보는데 허, 마치 내가 찍어 놓은 듯 별 어긋남이 없다 다만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자국 밖으로 삐죽 나와 만약 내가 마디 하나를 끊게 된다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생각해 보다가 흠칫 놀란다 그 손자국, 길 가던 이들을 섬뜩하게 했던지 저물 무렵 다시 그곳을 지나쳐 오는데 새 시멘트가 뭉클 덧씌워져 있다                                     ----------「손자국」전문   비를 뿌리면서 시작되는 구름의 장례식. 가혹하지 않은 허공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엄숙한, 날아가는 새들을 확 잡아들여 깨끗이 씻어 허공의 제단에 바치는, 죽은 구름의 살을 찢어 빗줄기에 섞어 뿌리는, 그 살을 받아먹고 대숲이 웅성거리는, 살아있는 새들이 감히 날아갈 생각을 못하고 바르르 떠는, 하늘로 올라가는 칠 일 만에 죽은 아기 영혼을 아삭아삭 씹어먹는, 산 자들은 우산 속에 갇혀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만이 참여하는, 지상에 흥건하게 고이는 빗물에 살냄새가 스며 있는, 그 순간 나무들의 이파리가 모두 입술로 변해서 처연하게 빗물을 삼키는, 손가락으로 빗물을 찍어 먹으면 온 몸에 구름의 비늘이 돋는, 비를 그치면서 끝나는 구름의 장례식.                                         -----------「구름의 장례식」전문   현대시에서 언어의 신선한 감각과 상상력의 확대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초현실주의 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낭만주의 시나 모더니즘의 주지시도 상상력과 언어 감각이 부족하면 성공작이 될 수 없다. 이 ‘신선한 상상력’은 현대시에서만이 아니고 21세기 기업운영에서도 핵심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2007년 2월16일자 기사에는 2007년 주요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주제가 ‘창조교육’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 신제품 만들기다. 연수의 결과물 중에서 '아이-라이크(Eye-Like)‘라는 제품이 있다. 콘택트렌즈처럼 이 제품을 눈에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한다. 집에 들어와 아이라이크를 빼내 별도 플레이어(재생기)에 장착하면, 그날 일상에서 본 모든 영상이 아이라이크에 담겨 있다. 플레이어를 통하면 그날 하루 일과가 그대로 재생된다. 눈에 끼는 캠코더를 연상케 하는 제품이다. 이 제품은 미래 지향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신제품이다. 김충규 시인의「손자국」에는 싱싱하게 살아 있는 언어감각과 상상이 넘치고 있다. 마치 바다에서 금방 잡아 올려 퍼들거리는 등 푸른 물고기 같다. 그의 상상은 독자들에게 구태의연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상의 갖가지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시를 읽는 재미와 자기 성찰의 계기를 주고 있다. 시인은 어느 날 시멘트 공사를 하는 골목길 바닥에 찍힌, 새끼손가락이 잘린 손자국을 보면서 등의 상상을 펼쳐 놓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을 그 위에 겹쳐 보면서, 고 말한다. 현장성과 사실성 그리고 시멘트에 손자국을 남간 사람과 자신과의 동일성을 드러내어 긴장감을 조성하고 공감의 영역을 확대한다. 이런 그의 상상은「구름의 장례식」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의 세계로 퍼져나간다. 구름이 비가 되어서 내리면 하늘의 구름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시인은 그 자연현상을 의식화儀式化하여 ‘구름의 장례식’이라고 창의적인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 의식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가상현실의 세계이지만 사실화된 표현의 힘에 의해 독자들은 신선한 감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비를 맞음으로써 지상의 먼지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더 활발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을 이라고 표현하여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빗줄기를 맞을 때 대숲에서 나는 소리를 이라고 하여 대숲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더욱이 이라는 빗소리에 대한 그의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놀라움을 준다. 그의 이런 감각세계는 이라고 하여 탈-관념의 현장성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라는 상대적인 공간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상상의 언어들은 논리적, 인과적인 구성과는 다른 집합적集合的 구성構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상상의 다양함과 새로움을 배가시키고 있다. 시상을 이끌어가는 “.....하는,”이란 동사動詞의 관형형어미冠形形語尾의 종결시구는 그 다음에 연결되어야 하는 논리적 언어인 체언體言과 단절되면서, 어떤 관념의 형상화가 아닌 순수 이미지의 공간을 활짝 열어 준다. 만약 논리와 인과因果에 의한 상상이라면 그의 상상은 관념의 감옥 속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논리와 인과는 자유로운 상상과 싱싱한 감성을 죽이는 사막砂漠과 같은 언어구조의 완고한 틀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지(상상)의 집합적 결합’ 이라는 방법으로 자기 시의 영토를 푸른 풀들이 무성한 초원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야생의 꽃을 피워내고 있는 김충규 시인의 시세계를 즐거운 마음으로 답사해본다. * 김충규: 1998년 문예공모「낙타」외로 등단 시집:「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김선호 시인의 시-「몸 속에 시계를 달다」「대형 할인 마트에 갇히다」     새벽 6시면 알람시계가 울린다 시계소리 한 알을 삼킨다 둥글고 매끄러운 시그너스 시계 캡슐이 몸에 들어오면서부터 아침이 시작된다 몸 속의 시계는 쉬지 않고 약물을 퍼트리며 나를 데리고 어디로든 가려고 한다 몸과 마음은 시계에 갇힌 채 시계바늘을 따라서 둥근 세상을 돈다 시계는 제가 정한 처방대로 나를 이끈다 밥을 먹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나를 재촉한다 내 안의 시계는 시간의 경계가 확실치 않아서 슬픔 너머 저쪽 지나간 시간을 불러오거나 희망 언저리를 따뜻하게 데우기도 한다 약효가 소모될 때쯤이면 시계에 의지했던 하루가 제자리로 돌아 오고 내일 삼키게 될 알약을 다시 준비한다 --------「몸 속에 시계를 달다」전문   정전된 건물에 들어오니 산 속 암자처럼 조용하다 쉴 틈 없이 돌려대던 환풍기 소리가 멎으니 천정에서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빼곡이 앉아 있는 나한상들처럼 몸 맞대고 서 있던 바코드들만 분주하게 움직인다 대량의 소비를 촉진하던 욕망들에게 창틈으로 빛이 안쓰럽게 비칠수록 이들의 욕망은 배로 번식한다 나가지 못하고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슬슬 부패를 시작하거나 제 몸 속의 물을 내보내며 가벼이 날기를 기도한다 이곳은 세상의 속인가 바깥인가 나는 이곳에 한 오년 갇혀도 살 듯 싶은데 동안거에 들어가 박스 속에 담긴 상품들을 화두 삼아 겹겹이 포장된 옷 벗겨 보고 싶은데 소비 사이클이 순간 정지 하자 금방이라도 질식할까 봐 저들은 불안해 한다 --------「대형 할인 마트에 갇히다」전문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어떤 곳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하겠지만,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벗어나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을 갖게 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벗어나면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생존의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라는 답이 보편성을 가질 것 같다. 그래서 현대의 도시인들은 건설, 개발, 풍요, 대량소비가 발생해 내는 공해, 비인간화, 물질주의 등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도 그 조직의 원소元素가 되어서 살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손익계산마저도 잊어버린 채, 마치 마법魔法에 걸린 동화 속의 캐릭터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공해, 비인간화 등을 피해서 도시의 생활기반을 버리고 자연으로 들어가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간 자연은 순수한 자연이 아니고 이미 도시화都市化된 반쪽 자연일 뿐이다. 김선호 시인의 시에는 물질문명이 고도화된 현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가 들어 있다. 그는 반문명反文明 또는 문명비판이라는 상투적 메시지에서 벗어나서 인공적인 것들과 화합하면서 새로운 삶의 꿈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그 꿈을 보여주기 위해 몸속에 알약처럼 시계를 넣는다는 독창적인 상상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리포터가 되어 대량소비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의 그런 행위에는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스스로 내적사유의 세계를 확대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것은 인간이 문명과 자연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과 부합된다.「몸 속에 시계를 달다」는 전자에 해당하는 시다. 그는 아침 6시에 알람시계의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는 것을 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고 한다. 시계소리를 알약처럼 매일 먹으면서 사는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시계가 정해준 일과日課에 따라서 움직이고 생각하는, 로봇robot 같은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고 한다. 그것은 일방적인 반문명의 메시지를 넘어서는, 인공적인 것(문명)과 자연적인 것(인간의 감성)의 화합을 통해 제3의 길을 여는 사유의 열쇠를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여겨진다. 이 시에서 시계소리는 알약에 연결되고 알약은 현대인들의 행동을 구속하는 시계의 기능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슬픔 너머 저쪽”이라는 세계를 지향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런 발상 속에는 약을 많이 먹는 현대인들의 생활습관도 들어있어서 독자들의 거부감을 최소화시킨다.「대형 할인 마트에 갇히다」에는 자신의 몸을 현대도시를 상징하는 대형 마트 속에 밀어 넣고 공포와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모습이 들어 있다. 그는 어느 날 대형 마트에 들어갔다가 정전停電이 된 공간 속에 놓이게 된다. 그 정전된 대형 마트의 공간 속에서 그는 고 오히려 자연 속과 같은 안정감을 찾는다. 그리고 라고 여유로움을 보이고 있다. 그 여유로움은 그의 내면적인 사유의 힘에 의한 것이다. 그 사유의 바탕에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 불교적인 마음이 들어 있다. 그리고 변화에 부동不動하는 선禪의 정신이 담겨있다. 정전은 현대사회에서 대형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정전이 되면 은행의 컴퓨터는 물론 지하의 전동차가 멈추고, 통신,TV 등이 제 기능을 잃는다. 냉장고의 음식이 상하는 것은 작은 일에 속한다. 이렇게 순식간에 도시전체가 마비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감에 떨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대도시의 허점이며 아킬레스건이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 현대도시이고 그 속에서 불안감을 안고 사는 존재가 현대인이다. 그런 현대인들이 스스로 평화를 만들며 자유로워지는 삶의 모습을 그려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김선호의 시는 그것을 인간의 내적 해방이라는 체험적 행위로 보여주려고 한다. 나는 거기에 ‘도시선都市禪의 시적 체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본다. 그리고 문명비판을 넘어서는 모더니즘 시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 김선호: 2001년 월간 등단 시집: 「몸 속에 시계를 달다」
53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8>/심 상 운 댓글:  조회:189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년 9월호에  발표   남진우 시인의 시-「깊은 밤 깊은 곳에」「전갈에 물리다」   깊은 밤 잠자리에 누우면 차갑게 식은 몸에서 비명이 스며나온다 스며나와 방바닥을 가로 지른다 내 몸을 떠나가는 저 하루치의 쓰라림 서서히 모든 집 문지방에서 비명이 새어나온다 새어나와 피처럼 골목을 적신다 때로 웅덩이를 이루고 때로 거품을 일으키며 텅 빈 거리와 광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흘러가는 비명소리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비명은 모여 든다 모이고 모여 마침내 일어선다 일어서서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비명이 다 빠져나간 몸은 침침한 어둠 속에 가라앉고 지상은 눈부신 달빛 아래 치솟아 오르는 비명의 소용돌이 비명으로 뒤덮인 세상은 참으로 고요하다 ---------「깊은 밤 깊은 곳에」전문 책을 펼치면 보인다, 지난 밤 나를 물고 사라진 전갈이 기어간 자국 사막을 가로질러 지평선까지 무수한 문장이 이동한다 낙타 등에 실려 전갈에 물린 내 발뒤꿈치에서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온 몸에 독이 퍼진 채 나는 죽어 간다 낙타 등에 미끄러져 내리면 끝장이다 곧 회오리바람이 그치고 무시무시한 정적이 찾아 올 것이다 차가운 별빛이 이마를 적실 것이다 흰구름이 떠가는 하늘에 책이 펼쳐진다 전갈이 내 몸 속을 빠져나간다 낙타 등에 실린 채 혼곤한 내가 책에서 실려나온다 눈먼 탁발승 하나 문간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다 ------------「전갈에 물리다」전문    새벽 3시 쯤 주택가의 골목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집의 문틈이나 창문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연기처럼 골목길을 흘러가는 것을 한 번쯤 느꼈을 것이다. 통행금지가 없는, 밤새도록 자동차가 다니는 대도시의 아파트 지역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지금도 중소도시의 주택가 골목에서는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린 새벽에 접하게 되는 정경情景이다. 남진우 시인의「깊은 밤 깊은 곳에」는 그런 정경이 담겨 있어서 독자들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개성적인 영상映像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현대사회에서 시인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중에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게 하는 존재라는 말이 가장 공감을 준다. 그런 말의 이면에는 현대시의 기능이 들어있다. 그 기능의 대표적인 것이 이미지다. 이미지는 심상心象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현대사회에서 그림, 사진, 영상, 인상, 느낌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간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생명의 비명’을 영상의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이 시에서 비명은 ‘하루치의 쓰라림’이 되어서 모든 집 문지방에서 새어 나와서 텅 빈 거리와 광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흘러가고, 그 비명들은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모여들어서 마침내 소용돌이를 하며 일어선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고 한다. 시인은 ‘비명’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자신이 감지한 것을 그대로 영상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의 해석과 느낌에 따라 ‘비명’의 의미가 다양해진다. 만약 이 시에 시대적인 어떤 상황의 옷을 입히면 ‘모여서 일어서는 비명들’의 의미는 사회적 저항의 기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옷을 입히지 않고 순수한 관점에서 보면 비명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향하는 ‘생명의 본질적인 현상’으로 해석된다. 시를 사회적, 시대적 산물로만 인식할 때 시의 영토는 좁아지고 시인의 위치도 선동가의 수준에 머물게 되기 쉽다. 그래서 시의 해석은 언제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좋다.「전갈에 물리다」는 인공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남진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생명의 현상’ 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이 시에서 ‘전갈’은 ‘나’의 본질적인 생명을 해치는 존재로 등장한다. (전갈은 꽁지에 독침이 있어서 쏘이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거미류의 독충이다.) 그래서 이라는 이 시의 첫 연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인간이 책을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얻는 독서讀書 행위가 전갈에 물려서 죽음으로 끌려가는 과정과 같다는 것이 너무 역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그는 라고 심각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라고 필사적으로 독서에 매달려야 하는 자신(현대인)의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 가상현실의 언어영상은 현대 지식인들의 ‘독서’에 대한 맹신을 지적하기 위한 과장된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식의 창고라고 하는 ‘책’은 반자연적인 인공의 산물이라는 것. 책을 이루고 있는 문자언어는 본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기호일 뿐이라는 것.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는 경구警句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과장된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라는 자연과 시인(화자)이 만나는 장면이 시속의 문제(갈등)를 해결하는 선명한 이미지로 피어나는 까닭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연이 가장 생명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인간이 갈 길은 어디인가? 이 시가 던지는 화두話頭다. *남진우(南眞祐) : 1981년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등   최문자 시인의 시-「닿고 싶은 곳」「달맞이꽃을 먹다니」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닿고 싶은 곳」전문 감마리놀렌산이 혈행에 좋다고 그렇다고 그 꽃을 으깨다니 그 꽃 종자를 부수고 때리고 찢어서 캡슐 안에 처넣다니 그 피범벅 꽃을 먹고 혈관의 피가 잘 돌아 가다니 욕심껏 부풀린 콜레스테롤이 그 꽃에 놀아나다니 그렇다고 나까지 하루 두 번 두 알 씩 그걸 삼키다니 머지않아 꽃향기로 가득 찰 혈관 그렇다고 하필 그 환한 꽃을 죽이다니 밤마다 달을 바라보던 그 꽃을 꽃 심장에 가득 찼을 달빛을 그 달빛으로 기름을 짜다니 노오란 꽃에 앉았던 나비의 기억까지 모두 모두 으깨다니 부서진 달빛, 꽃잎, 나비, 두 알씩 삼키고 내 피가 평안해지다니 생수 한 컵으로 넘긴 감마리놀렌산 두 알 혈관에 달맞이꽃 몇 송이 둥둥 떠다닌다 -----「달맞이꽃을 먹다니」전문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는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에서 주제가 되는 문제다. 불교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명제를 내세워 생과 멸을 모두 부정한다. 그러면서 이 근본적인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반야심경) 여기서 말하는 생멸은 현상現象이 아닌 본질本質이다. 서양철학에서는 창발과 환원의 원리라는 물질세계의 사이클로 해명하려고 한다.(승계호의 ‘마음과 물질의 신비’) 이것도 대상을 본질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현상現狀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관념과 감성에 물들어 있는 언어로 표상해야 한다. 만약 시인이 직접적으로 본질을 표현하려고 한다면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서의 세계에서 완전한 이탈’이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최문자 시인의「닿고 싶은 곳」은 비록 본질과는 거리가 먼 주관적인 사유와 감성의 표출이지만, 죽음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슬픔의 세계’가 은은한 울림을 준다. 슬픔 속에는 삶의 아름다운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객관적인 논리도 종교의 명상도 닿을 수 없는 삶의 따뜻한 체온과 호흡과 꿈이 서려있다. 그래서 는 구절은 독자들에게 죽음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한다. 나무가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은 새들이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와서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 슬픈 땅을 찾는 새의 이미지는 철학이나 종교가 들어갈 수 없는 시인의 감성영역에 속한다. 독자들은 그런 이미지를 통해서 자기 삶의 이면을 성찰하게 된다. 이것이 시적사유와 감성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이고 신비한 기능이다.「달맞이꽃을 먹다니」에서는 시인이 안고 있는 연민憐憫의 감정이 물에 흠뻑 젖은 수건처럼 축축하게 감지된다. 그 연민의 감정은 인간의 탐욕스러움과 자연과 인간의 동화同化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는 혈액 순환 약 감마리놀렌산을 매일 두 번 두 알씩 먹으며 산다. 그런데 그 약이 달맞이꽃을 으깨서 만든 약이라는 것을 알고, 라고, 자기성찰의 고뇌에 빠진다. 현대문명은 인간위주의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을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한다. 이 휴머니즘을 자연에 대입시키면 자연은 인간의 존재를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휴머니즘이 품고 있는 독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깨달아야 자연과 화합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시의 주류를 이루는 연민의 감정, 시인의 자기성찰과 내적갈등은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자신의 행위지만) 달맞이꽃의 피범벅으로 이루어진 알약을 하루에 두 번 두 알씩 먹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상상을 자극해서 달맞이꽃에 담겨 있는 달빛, 나비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으깨서 기름을 짜서 먹는 인간의 철저한 강탈행위로 확대된다. 따라서 그의 내적갈등과 연민의 언어는 그런 행위를 당연시하고 무신경하게 처리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반발과 경종警鐘이 된다. 휴머니즘은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탐욕과 편견에 사로잡힌 반자연적인 사상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과 종교, 각종 문화도 인간위주의 관념이나 휴머니즘의 맥락과 연결될 때 반자연적인 것이 된다. 인간을 위해서 실험실의 흰 쥐들이 오늘도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 주사를 맞고 있다. 이것이 휴머니즘의 현실이다. 이 시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반자연의 무서운 현실을 상기시키면서 독자들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를 던지고 있다. 21세기 문학은 ‘휴머니즘의 굴레에서의 해방’이라는 무겁고 큰 과제를 지고 있다. *최문자(崔文子):1982년 추천으로 등단. 시집: < 울음소리 작아지다> 등     박유라 시인의 시-「흘러가는 아침」「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   간밤 태풍 지나고 출렁, 산들이 내려앉은 식탁 위 2004년 6월 28일 아침 필루자에서 부산까지 비행기가 흘러 간다 된장찌개 김치 미나리 꽈리고추 오이무침 구이김 버섯볶음 디지털 풍경이 빠르게 흐르고 소화하기엔 너무 아픈 육질들 훈제오리, 삼겹살, 삼치토막...... 냉장고 문을 도로 닫는다 흘러가는 풍경 사이 어떤 꽃은 피고 어떤 꽃은 지고 오늘다라 유난히 뜨거운 잡곡밥을 아이에게 먹여 매운 바람 속으로 보낸 뒤 나는 어금니 사이로 질긴 마늘쫑 장아찌를 오래 씹다가 푸성 귀들 남은 반찬을 다독거린다 음악 검색 창에 ‘Climbing up the walls' 무한반복 흐를 동안 설거지를 끝내고 씻어 둔 현미에서 쌀눈 뜨는 소리 싸르륵 싸르륵 다시 비가 내린다 흘러가는 아침 문득 돌아서면 자꾸만 어두워지는 손 행주와 도마와 칼을 함께 소독제에 담그고 눈물 한 방울 출렁, 대기권을 흔들며 간다 --------「흘러가는 아침」전문 햇빛을 탁탁 털어 청소한다. 락스를 뿌려대면 무균의 햇살 알갱이들이 비수처럼 반짝인다. 텔레비전에서는 ‘히말라야 동산’이 디지털 시험방송 중이고 강아지는 제 그림자를 보며 엎드려 있다. 눈부신 방의 한 순간,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 장면들이 잘게 떨린다. 1000분의 1초쯤, 화면 속 티벳의 흰 돌집과 화면 밖 강아지 숨소리, 그 아 리아리한 것들을 포를 뜨듯 살짝 저며 낸다면, 30도 각도 로 칼집을 넣는 소리는 나지 않게, 피 한 방울도 나지 않게, 겨울 오전 10시 15분의 적막이 난자당한다. 소리 없이 점 멸하는 나날들. 날 선 햇살이 눈물 나게 한다. ------「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전문    형식과 내용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형식을 그릇에 내용은 그릇에 담긴 물질(내용물)로 비유하여 구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비유에 불과할 뿐이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 현상들에서 형식과 내용의 구분은 칼로 무를 썰 듯이 그렇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형식이 내용의 대부분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는 집의 형태에 따라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달라지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고, 환경이나 제도가 사람의 생활 형태와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容器라고 말할 수 있다. 시에서 현대시와 근대시를 구분하는 기준도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찾게 된다. 그 형식은 언어의 표현방법이다. 박유라의 시「흘러가는 아침」은 형식이 내용(의미)을 만들어 내는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매우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중심 소재로 하고 있다. 아침에 주부가 식탁을 차리고, 아이에게 밥을 먹여 학교로 보내고, 설거지를 하고 하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반복되는 어쩌면 권태로울 그 일상이 이 시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옷을 입고 독자들에게 다가 온다. 시인은 한 편의 시에 두 개의 장면을 겹치게 하여 평면적인 시의 공간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의미로부터 벗어나서 현상의 흐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현상은 그가 지각하는 현실의 선명한 모습이다. 그는 그것을 라고, 공간 속을 ‘흘러가는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이미지 속에는 관념의 요소(의미)가 제거된 사실(사물)의 나열과 집합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의 나열과 집합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존재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시점과 입체적인 현실인식이 만들어 내는 세계다.「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에서도 그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의 감각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시의 내용도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이다. 아침에 집안 청소를 하면서 텔레비전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히말라야의 풍경과 티벳의 흰 돌집(사이버의 현실)과 화면 밖의 강아지 숨소리를 있는 그대로 살짝 포를 뜨듯 자신의 의식 속에 인화印畵하려고 한다. 그것은 사진 찍기의 방법이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현실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그는 그 순간의 장면을 이라고 언어의 기표로 옮겨 놓고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관념이나 감상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에 들어온 현실의 영상을 그대로 포를 뜨듯 찍어내려고 한다. 그 현실은 시인자신의 투명한 의식에 투영된 현실이다. 이러한 그의 시적 방법은 탈-관념의 직관直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이 내용을 창조하는 용기라고 한다면 그의 시적 방법은 21세기 사이버 시대에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를 여는 새로운 창조적인 용기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 박유라 : 1987년 추천으로 등단. 시집: 등
52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7>/심 상 운 댓글:  조회:191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8월호 발표                 이수익 시인의 시- 「겨울 판화版畵」「배후는 따뜻하다」                 겨울 나루터에 빈 배 한 척이 꼼짝없이 묶여 있다.               아니다! 빈 배 한 척이 겨울 나루터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홀로 남기를 두려워하며               함께 묶이는 열망으로, 더욱 가까워지려는               몸부림으로, 몸부림 끝에 흘리는 피와              오오 눈물겹게 찍어내는              겨울 판화版畵                 ---------「겨울 판화版畵」전문              길옆            자전거보관소에            몸이 뜯긴, 오래 된, 주거불명의            자전거 몇, 버려져 있다.            안장이 사라지고            체인이 풀린            타이어가 땅바닥까지 함몰된 자전거들이            구겨진 풍경의 액자를 만들며            어둠 속을 비스듬히 누워 있다.            오랜 무관심에 길들여진 편안함이            어느덧 그 심연에            맞닿아            나태와 궁핍이 제법 반질반질하다.            이제는 더 이상 뜯길 것이 없으므로            자유가 너희들을            화평케 하리라!            날마다 이맘때쯤 찾아오는 그늘이            친구처럼 유정하게 툭, 툭,            바큇살을 건드리는 오후            자전거들은            왕년에 달리던 기세를 되살려            저렇게 뻗어나간 아스팔트길을            씽씽 내질러보고 싶은 푸른 욕망에 진저리치며            한 번 씩은 꿈틀,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배후는 따뜻하다」전문    인간 존재의 의미는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성립된다. 이는 개인의 원자적 가치에 기반을 둔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다른 동양의 유교적儒敎的인 관점이라고 하지만 개인은 분리 불가능한 사회적 원자라는 점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특히 도시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일만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어느 하나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공동체는 마치 하나의 인체 조직과 같아서 그 관계의 밀접성과 인과성은 무섭도록 치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상호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면 아무런 존재성을 갖지 못한다.  이수익 시인의 시 「겨울 판화版畵」에서는 인간의 이런 상호관계와 부분/전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겨울 나루터에 묶여 있는 배를 보고 그는(시적 화자) 나루터가 배를 묶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배가 나루터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배와 나루터의 상호관계는 인과관계가 되고 유의미한 관계가 된다. 그는 그 원인을 라고 독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한 정경을 칼로 파서 새긴 ‘판화版畵’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그런 삶의 원초적인 관계가 인간의 숙명적인 모습이라고 인식한 까닭인 것 같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고독이고 외로움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엔가 자신을 묶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명예와 돈에, 또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무형의 세계에 자신을 묶으려고 한다. 이성간의 사랑도 묶고 묶여짐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창발적인 생성의 원리다. 「겨울 판화版畵」는 그런 본질적인 관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에 비해「배후는 따뜻하다」에는 환원의 원리가 들어 있다. 시인은 어느 날 자전거 보관소에서 기능을 잃고 분해된 버려진 자전거를 발견하고 깊은 사유 속으로 들어가서, 라고 그 자전거의 존재의 자유와 만난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대한 기억과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라고 끝을 맺고 있다.  기능을 상실하고 순수한 물질의 세계, 원자의 세계로 환원되는 낡은 자전거에 대한 시인의 명상은 인간의 삶에 대한 명상과 다르지 않다. 탄생→ 성장 → 소멸의 반복되고 회전하는 사이클 속에서 우리들의 삶도 벗어 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쓸모를 잃음으로서 얻어지는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다. 관계의 묶임으로부터 벗어나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존재의 해방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상적인, 합리적인 관념에서 해방시켜버린 특수한 객체를 의미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오브제에 대한 해석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끝내버리지 못하는 ‘푸른 욕망’은 이 시에서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 ‘푸른 욕망’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생명체의 소중한 꿈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수익 시인의 시「겨울 판화版畵」와「배후는 따뜻하다」를 읽으면서 그의 사유가 존재의 본질적인 것에 닿아 있으며 완벽하게 시적형상화의 옷을 입고 있음을 확인하며 시를 읽는 즐거움을 혼자 맘껏 누려 본다.   *이수익(李秀翼): 1963년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함. 시집: 등           이재무 시인의 시- 「트럭」「감나무」                심야의 고속도로              트럭 행렬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거친 사내들은 단내 나는 더운 숨              연신 토해 내며 살 맞은 짐승처럼 고함              질러대고 있었다 딱딱한 밤공기가              과자부스러기가 되어 부서졌다              하늘에 핀 별꽃들이 경기 들린 아이처럼              놀라 자지러지고 있었다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              우락부락한 다혈질의, 각진 얼굴의 사내들은              힘이 세다 그들이 실어 나르지 못할              물건은 없다 조폭의 무리 같기도 한 그들이              지날 때 함부로 그들을 나무라지는 말자              그저 절로 벌어진 입 당분간 닫지 말고              사고 없이 어서 이 위기의 시간이              지나가길 소원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바지런을 떨어도 생의 저속을 사는              그들은 언제든지 분노로 폭발할 수 있는              슬픔 몇 됫박씩은 가슴에 지니고 산다 밤의              질주에는 그런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트럭」전문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으로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감나무」전문    시인의 형이상학적인 관심과 시선은 세상을 조감鳥瞰하게 하지만, 독자의 가슴을 움직이는 것은 살 비비며 사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며 시선이다. 그것은 시가 왜 정서적이어야 하는가의 해답이 된다. 시의 정서는 시의 사물성과 다르다. 사물성은 보고 듣고 감촉할 수 있는 유형적有形的 감각인데 비해 그리움, 두려움, 사랑, 미움 등의 정서는 무형無形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이 ‘무형의 감성적 정서’는 강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건조한 견고성(dry hardness)을 내세우는 현대시에서도 정서의 기능은 무시될 수가 없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내세우고 있는 카타르시스의 기능도 시의 정서적인 힘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이재무 시인의 시「트럭」은 사실적인 표현이 주는 현장성과 긴장감이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시의 정서가 폭발일보 직전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먹이사슬의 밑바닥에 있는 트럭 운전기사들의 터질 듯한 분노의 숨소리가 그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라고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라고 그들의 거친 행동을 연민의 시선으로 보면서 이해하고 있다. 시인은 그들의 위험한 질주의 원인을 라는 구절 속에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사회계층간의 갈등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긴장감이 조성하는 분위기는 “..... 온 나라의 화물 취급자/떠들썩하고 꺼칠한 목소리에 왁자지껄한/어깨가 떡벌어진 건장한 도시”라고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신흥도시 시카고를 노래한 미국시인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의 시「시카고(Chicago)」연상시킨다. 따라서 그의 시「트럭」은 관념과 주관적 환상, 언어유희 등으로 점점 작아지고 힘을 잃어가는 한국현대시의 언어에 건강한 야성의 힘(이미지)을 드러내는 존재성을 갖는다. 그의 저소득층에 대한 연민의식은 계급의식을 조성하고 선동하는 사회주의적 경향의 시와는 다르다. 그는 시의 정서적 기능을 바탕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있을 뿐 자신의 관념을 전혀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감나무」도 그런 그의 시적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주인이 없는 어느 집의 감나무가 이 시의 대상이다. 감나무 주인이 무슨 일로 도망기차를 탔는지 그 구체적인 사연은 시 속에 없다. 독자들은 그 사연을 시대적 상황과 연계하여 유추하고 상상해 볼 뿐이다. 그 감나무는 사립문 쪽으로 가지를 더 뻗는다. 그 까닭을 시인은 감나무가 주인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 심리적 현상의 시적표현을 단순한 감정이입感情移入의 기법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영적인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생각은, 물리적인 세계가 아무런 목적 없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편견을 반영한 것이다.”라는 승계호 교수 글 「마음과 물질의 신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감나무의 마음과 행위’는 시인의 직관적直觀的 시선에 의해 인식되는 세계다. 그래서 라는 구절은 자연스럽게 공감의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나는 이재무 시인의 이 풍기는 현장성과 긴장감 그리고 생동하는 언어들이 주는 감각에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감나무와 시인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장면에서 그것이 단순한 시적 기법이 되기 이전에 거기에도 깊은 철학적 사유의 세계가 잠재하고 있음을 생각해보았다.   * 이재무(李載武):1983년 에 등단. 시집: 등             이은봉 시인의 시- 「늙은 바람과 함께」「폐타이어」                   하루의 일 마치고 14층짜리 공중무덤 납골당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길가 생맥주집 앞                푸른 평상이 벌떡 일어나 반갑다고                손 마주잡고 흔들어댄다 오늘 하루                저도 많이 외로웠나 보다                엉덩이를 내밀며 좀 깔고 앉아 쉬었다 가라고 보챈다                생맥주집 안 늙은 바람도 달려 나와                가슴 끌어안고 등허리 토닥여준다                공중무덤 텅 빈 납골당으로 돌아가 보았자                누가 날 기다려주겠는가                푸른 평상이며 늙은 바람도 잘 알고 있어                지금 손 마주 잡고 흔들어대는 거다                푸른 평상의 엉덩이를 깔고 앉아                늙은 바람과 주고받는 맥주 맛이 쓰다                안주로 씹고 있는 멸치 대가리 맛도 쓰다                더는 해찰하면 안 되지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 마음 너무 잘 알고 있는 길가의 황매화가               귀볼 가까이 다가와 혀 끌끌 차댄다               돌아가지 않으면 14층짜리 공중무덤 텅 빈 납골당                저도 그만 외로우리라.                                          --------------「늙은 바람과 함께」전문                버려진 폐타이어는 검다              검게 저무는 지장보살이다              반쯤 땅속에 묻힌 채              세상의 질병 온몸으로 앓고 있는              지장보살은 둥글다              둥근 마음으로 사방 그는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만든              피고름을 삭히고 있다              지장보살이 아프니              땅도 아프다 검게              저무는 것은 다 아프다              아픈 몸으로도 그는              거름 만들고 있다 사루비아 몇 송이              빨갛게 꽃피울 꿈꾸고 있다.                                       -------「폐타이어」전문    ‘낯설게 하기’는 현대시만이 아닌 모든 예술의 중요한 기교다. 평범하고 상투적인 표현으로는 결코 사람들의 눈을 끌어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는 그런 면에서 인기가 높은 그림이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양손을 들어 귀를 감싸고 있는 인물의 해골 같은 얼굴과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자세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 인물은 황혼의 다리 위에서 무슨 외침을 듣고 있는 것일까? 관람객들에게 공포의 분위기와 함께 의문에 잠기게 한다. 이 그림을 그린 뭉크의 일기에는 “나는 두 명의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일몰을 보고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깐 이 그림은 상상화가 아니고 자신의 실제체험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을 그는 개성적인 직관의 이미지로 낯설게 그린 것이다.  이은봉 시인의「늙은 바람과 함께」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자기가 기거하는 아파트를 ‘14층짜리 공중무덤 납골당’이라고 하면서 생맥주집 사람들과 행인들을 ‘푸른 평상’ ‘늙은 바람’ ‘길가의 황매화’이라고 동화적인 발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의 시선을 끌게 되고 시인의 정서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만약 “하루의 일을 마치고 14층 아파트로 가는 길이 너무 외로워서 생맥주 집에서 아가씨들과 맥주를 마시고 노닥이다가 14층 아파트로 돌아왔다.“라고 사실적으로 기술했다면 시의 세계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극히 평범한 산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동화적인 상상과 그로테스크한 언어표현은 시인의 의도적인 ‘낯설게 하기’의 한 기법으로서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기법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외로움이라는 정서다. 외로움은 살아 있는 것들이 살 비비며 사는 마음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살아 있는 것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 시의 독특하고 깊은 감성이며 사유다. 는 구절 속에 들어 있는 그의 열린 감성이 그것이다. 「폐타이어」는 자신의 개인적 정서 세계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이 세상의 넓은 정서와 연결되는 시다. 이 시에서 폐타이어는 세상의 아픔, 피고름을 안고 앓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상징하는 소재로서 긍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폐타이어는 ‘버려진 존재’라는 것. ‘검다’는 것. ‘둥글다는 것’ ‘땅과 관련 된다는 것’ 등이 지장보살상과 부합되는 이미지다. 그래서 반쯤 땅 속에 박혀 있는 검은 폐타이어를 보고 땅과 함께 앓고 있는 지장보살이라고 감지한 시인의 감성과 사유가 타당성을 갖는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그는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그는 중생들의 영혼이 구제되어 그들이 모두 열반에 들지 않으면 자신도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서원한다. 그래서 라는 구절이 불교적인 관념의 형상화라는 카테고리에만 머물지 않는 열린 세계로 향하게 된다. 도시화로 인해서 파괴되고 공해에 시달리는 자연환경을 거대한 유기체라고 볼 때, 이 시는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구원하는 서원과 함께 땅의 병을 치유하는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라는 구절은 ‘땅의 모태’인 지장보살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시적 상상으로서 신선한 감각과 의미를 던지고 있다.   * 이은봉(李殷鳳): 1984년 에 등단. 시집: 등
51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6>/심 상 운 댓글:  조회:203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년7월호 발표   성찬경 시인의 시- 「나사.1」「유리와 병」   길에서 나사를 줍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암나사와 수나사를 줍는 버릇이 있다. 예쁜 암나사와 예쁜 수나사를 주우면 기분좋고 재수도 좋다고 느껴지는 버릇이 있다. 찌그러진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투박한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큼직한 수나사도 쓸 만한 건 물론이다. 나사에 글자나 숫자數字나 무늬가 음각이나 양각이 돼 있으면 더욱 반갑다. 호주머니에 넣어 집에 가지고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하고 슬슬 돌려서 나사를 나사에 박는다. 그런 쌍이 이젠 한 열 쌍은 된다. 잘난 쌍 못난 쌍이 내게는 다 정든 오브제들이다. 미술품이다. 아니, 차라리 식구 같기도 하다. --------「나사.1」전문   유리가 병으로 있는 한 언제까지나 병이다. 인간의 수족이다. 깨어져야 유리는 유리가 된다. 병은 기능이요 쓸모다. 소유의 차원이다. 값을 매겨 사고 판다. 파편은 무엇이고 그것 자체다. 쇠는 쇠요 구리는 구리요 은은 은이다. 존재의 차원이다. 무값이다. 에덴동산이 어디뇨. 있는 것 모두가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나뒹굴면 바로 거기지. 산산조각난 것들이 창궁의 별처럼 모여들어 존엄의 왕좌에서 반짝이고 있다. 빛 뿜는 파편의 삼천대천세계다. -------「유리와 병」전문   삶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 다양성은 개개인의 취향과 성격과 감각과 관념의 척도의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속에는 시대적인 유행도 들어 있다. 이런 것이 모여서 형성된 것을 문화라고 한다. 성찬경 시인은 길거리에서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나사를 줍는 취미가 있다. 그는 그 나사들을 주워서 집에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을 하고 암수 나사를 맞추어본다. 그는 그런 자신의 취미생활을 이렇게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라고. 이 시에서 나사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퇴출당한 퇴직자와 같은 존재들이다. 시인도 나사들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재활용하기 위해서 모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장난감 같은 오브제로서 모으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의 손에 주워진 나사들은 나사로서의 임무를 모두 끝내고 그의 집에서 제2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 나사들을 미술품으로, 식구와 같은 존재로 승격시키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부속품에서 벗어난 나사가 미술품 같은 존재로 승격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사가 나사로서의 용도에서 벗어나 어느 한 가지의 영역에 구속되지 않는 무無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곳은 존재의 자유가 열리는 지점이다. 우리들의 사유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사유의 자유를 누리고 그만큼 상상력의 세계가 넓어진다.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오브제 이론이며「나사.1」이 안고 있는 사유의 세계다.「유리와 병」은 이런 취미 정도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존재의 근원을 더 깊게 추구한다. 따라서 「나사.1」보다 더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가 들어있다. 철제나사들은 형태를 유지한 채 용도만 바꾼 상태이지만 (그래서 다시 재활용될 수도 있지만) 유리병들은 깨어진 형태가 됨으로써 순수한 유리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는 그것을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사고思考는 생生과 사死라는 관념에 묶여서 유리병이 깨지면 그것은 유리병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유리병이 유리로 환원되는 새로운 경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관념도 이와 같다. 인간의 죽음을 존재의 해방. 존재의 자유영역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원인은 인간의식의 중심에 ‘나’라는 관념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의식은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현재상태의 유지를 소망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나’의 변화를 죽음으로 오해하고 생로병사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중생衆生의 삶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깨달은 이들은 ‘나’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면 이 우주의 원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시에도 그런 깨우침을 주는 교훈성이 있다.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시인은 물질의 탐구를 통해서 의식형성 이전의 무의식의 세계까지 인간 존재의 문제를 상상하고 있다. 사실 에덴동산도 또한 ‘나’의 존재를 전제로 한 관념의 세계이지만 그 깨달음은 매우 중요한 정신적 체험이 아닐 수 없다. 그 세계는 이미 불교의 사유를 통해서 관념적으로 알려진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과감하게 시로 형상화하여, 우주의 현상을 라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발산시키고 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체득한 세계와 그의 시선이 통과한 오브제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한껏 누려본다.   *성찬경(成贊慶): 1956년 에 등단. 시집: , , , , 등   이상옥 시인의 시-「아포리아」「조물」   고야가 물고 온 너구리 속을 엿본 적 있다 내장 안에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산의 계곡에 살았을 법한 비단개구리 열 마리 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너구리 한 마리가 하루의 끼니로 비단 개구리 수십 마리를 먹어치운 것이다 오늘 점심으로 안양해물 탕을 먹었다 새우, 게, 소라, 고동, 아 이름 모를 많은 생명, 한 끼 점심으로 좀 과할 정도의 개체. 어제 교회 오는 길에 트럭 에 실려 가는 암소 네 마리를 보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크 고 순한 눈망울 두려움의 기색이 완연하더라, 도살될 운명을 알기라도 하는 양. 덩치가 크니 몇 사람의 며칠 분 생명은 이어 갈 수 있을 터 생명은 생명을 먹고 생명을 이어가는............, 난해한 네트워크 ----------「아포리아」전문   연구실에는 강동주 선생에게서 얻어온 물풀이 오지항아리 에서 자라고 있다 마산 어시장에서 산 오지항아리에 물을 붓고 물풀을 키우기 시작한 지 벌써 달포가 지나고 있다 물표면이 일렁이는 듯하다 작은 고동이다 비닐봉지에 담아온 물풀에 붙어 왔나 자세히 보니 눈에 띄는 녀석 들만 해도 열 마리 정도다 돋보기를 들고 관찰하니 죽은 물풀도 먹는다 고인 물이지만 깨끗한 것이 물풀의 정화작 용과 함께 요녀석들의 청소부 노릇도 한몫한 때문이다 신기하기도 대견스럽기도 하여 틈틈이 물을 보충하며 햇빛이 드는 곳으로 오지항아리를 두 손으로 들어 옮겨놓 는다 나는 우주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조물」전문   SBS TV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는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몇 년 전 에서 본 인터뷰 기사의 내용이다. 이상옥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윤동혁 PD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시선이 생명세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세계가 얼마나 신비하고 경이로운 세계인가 하는 것은 우주를 생각해 보면 안다. 이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천체天體의 수효는 엄청나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라는 초과학적인 용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많은 우주의 천체 중에서 지구는 생명체(유기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곳이다. 우주의 암흑 속에서 파란 루비 같이 빛나는 것이 지구라고 한다.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지구를 푸른빛의 보석 같다고 했다. 그래서 우주 속에서 지구의 존재를 생각하면 신의 은총 또는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생명세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생태계의 구조는 먹이사슬로 되어 있다. 그 속에는 원래 생명체의 본능적인 행동만 존재할 뿐 감정이나 정서는 개입될 수 없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은 꽃의 종족보존의 방법이지 인간을 위한 꽃의 쇼가 아니다.「아포리아」에서 시인은 고야에게 잡힌 너구리의 뱃속에 들어 있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비단개구리를 보고 고 한다. 비단개구리에 대한 연민이나 어떤 관념의 개입이 없이 냉정하게 관찰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라고 자신의 경험을 삽입하고 있다. 이 삽입구절 속에 “아 이름 모를 많은 생명”이라는 감성적인 표현이 들어 있다. 이 감정노출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시적 정서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이런 그의 감성은 그 다음 구절 에서 더 적극적으로 생명체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드러낸다. 자연을 보는 우리들의 눈은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는 것이 옳다. 야생에서는 어떤 존재 건 먹는 자 아니면 먹히는 자일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태계의 법칙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다르다. 시인은 인간에 의해 죽으러 가는 소에 대한 연민의 정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적인 감성이며 과학자와 시인의 다른 점이다. 이 시에는 이런 생명세계의 법칙을 라고 풀이하여 독자에게 생명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의 계기를 주고 있다.「조물」에서는 ‘물풀의 생태가 들어 있는 오지항아리’라는 생명세계의 한 덩어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물풀이 자라고 죽고 하는 오지항아리를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생명세계의 신비로움을 체험하고 있다. 라는 구절은 그가 오지항아리에서 이루어지는 생태계의 시스템을 얼마나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오지항아리는 공기의 유통이 잘 되고 생명체들이 제각기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또 하나의 생명공간이다. 그 생명공간은 작은 우주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그래서 끝부분 라는 구절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인도 힌두사상(우파니샤드)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큰 우주에 속하는 수많은 소우주의 개념으로 생명의 실재적 본성을 말하고 있다. 이 시의 ‘오지항아리의 생명 공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상옥 시인은 디지털 카메라의 사진과 시를 결합하여 ‘디카시’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시는 창조하기보다는 포착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창조와 포착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서 공존한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준다. 창조의 순수한 뜻은 세상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면 그것도 창조가 된다. 태초에 하느님이 이미 존재한 사물에 명칭을 붙이는 행위와 같다. 그런데 이 창조의 전단계가 포착이다. 이 시에서 오지항아리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들었다 놓으면서 “나는 우주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라는 순간적 인식이 포착이며 오지항아리를 ‘우주’로 명명命名는 것이 창조다. 포착은 현실 속에서 눈의 기능만이 아닌 마음(의식)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상옥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그가 포착하고 창조한 생명세계의 관람자가 되는 즐거움을 누린다. 좋은 시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우주를 발견하게 하는 시라고 생각하면서.   * 이상옥: 1989년 월간 등단. 시집: 등
50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5>/심 상 운 댓글:  조회:185  추천:0  2019-07-26
* 월간 2007년 6월호 발표   송준영 시인의 시-「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습득」     기차보다 한 뼘 앞에 검은 바람이 지난다 낫과 톱을 어깨에 맨 갱부의 환한 장화발이 소리도 없이 지난다 하얀 이빨이 이 빨을 마주보며 바삐바삐 떠간다 역사 안 드럼통 난로에 괴탄 이 이글거린다 플랫폼엔 급행열차가 잠시 멈춘다 이곳은 철 암, 산이 떠나가고 산보다 먼저 사람이 캐고 버린 버력만 산이 되어 어둠에 배를 깐다 무게적재함에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 이 검게검게 볼록한 이마를 내민다 금세 어둠이 꺼먼 버력에 엎친다 바람이 검은 철사 줄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괘달려 윙 윙 강철소리를 낸다 저탄장의 탄가루를 업고 간혹 분간 어려 운 칠흑 뚫은 별빛 같은 마을을 휘 몰아친다 어둠의 사타구니 속으로 돌진한다 형광등과 네온이 창백한 통리 역사엔 괴탄이 이글거리던 드럼통 난로가 없다 이빨과 눈이 유난히 빛나던 갱부들도 없 다 탄가루와 긴 쇠꼬챙이가 콱콱 내리찧으면 빨갛게 흘러내 리던 불티들도 없다 바람이 분다 멍멍한 하늘 사이 머얼건 땅 위로 바람이 분다 영화 속 같은 사람들이 파리한 형광등 대합 실에서 앉거나 서 있다 유령처럼 땅을 밟지 않고 미끄러 진다 빛깔을 분간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사이로 파리한 눈이 온다 나는 오늘 통리역에 내리다 -----------「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전문   1호선 지하철 분실물센터에 있는 건 하얀 차돌 두어 개와 나를 따라온 청태 사이로 비치는 오대산 맨가슴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청량선원이네 그곳엔 내가 주워온 금빛 옷을 걸친 늙은 부처 아니 법당 왼쪽에 단정히 앉아 있던 이마 말간 문수동자가 있네 아니 이 날 툇마루에 졸고 있는 하늘 한 자락과 푸른 솔잎 입에 문 물총새 한 마리 그리고 솔바람이 있네 아니 지하철분실물센터 알림판엔 깔깔 웃음 웃던 습득물이 붙어 있네 동굴 속으로 고함지르며 사라진 습득*이 붙어 있네 습득이 보이네 ----------「습득」전문   *습득은 당나라 때 사람. 국청사 풍간 선사가 주워 키웠다. 한산과 늘 같이 한암 깊은 굴에서 지냈고 절에서 허드렛일하여 밥을 얻었고 미친 짓 하면서도 선도리에 맞았고 시를 잘 했다. 태주사자가 한암으로 찾아가 옷과 약을 주니 ‘도적놈아 조적놈아 물러가라’하며 웃으면서 한암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이 오랜 시간 쌓아놓은 학문, 예술, 종교, 철학, 도덕, 등 온갖 인공적인 것들의 총체가 문화이고, 그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진보상태가 문명이다. 인간은 그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문명은 야만의 반대이고 자연과는 대립적 개념이 된다. 문명은 인간에게 안전과 편함과 행복을 제공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제한하고 억압하여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 반작용으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근원적으로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욕망이 잠재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친환경 건강법이니, 친자연의 주택이라는 것들도 모두 인간의 행복이 인공적인 문명으로만 충족될 수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송준영의 시편들은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성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에서는 철암과 통리라는 지역적 경계가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철암에는 검은 석탄더미라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는 비록 가난하지만 인간적인 정과 삶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한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석탄도시에는 라는 표현 그대로 점차 인공화 되어가는 자연의 삭막한 풍경이 노출된다. 하지만 이 철암에는 근대화 이전의 이 있다. 통리에 오면 그 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그뿐 아니라 그곳에는 . 그는 철암과 통리의 대조적인 풍경을 통해서 문명에 의해 자연성을 상실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비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면 철암을 지나 통리에 도달한 현대인이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시인은 그 해답을「습득」에서 암시하고 있다. 이 시에서 습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닌 분실이후에 생기는 행위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실낙원의 현대인에게 복락원의 꿈을 회복하는 방법이 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지하철 1호선 분실물센터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의 본성을 습득하게 된다는 이 시의 공간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시인은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의 지하철을 가상현실의 무대로 삼아서 라고, 현대인들이 분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러면서 끝내는 그 진면목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라고. 이 시는 이 끝 장면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자연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도시선都市禪으로서 독자들에게 한 순간이지만 흙탕물 같은 자신의 내면을 맑게 투시하는 의식의 힘을 찾게 하는 것이다. 이때 선禪은 그들의 본성을 밝히는 불빛이 된다. 그는 그런 방법으로 선과 시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하고, 선의 감각을 현대시에 접목시키려 한다. 이 시의 언어에서 풍기는 선미禪味가 그것이다. 사실 선은 스님들의 선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잡한 도시의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서 엉뚱하게도 당나라 때의 선승 습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송준영 시인의 의도적 방법-현대시와 선의 융합-은 깊은 의미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문명과 자연의 새로운 만남을 일깨워주는 언어의 포퍼먼스라고 말할 수 있다.   * 송준영: 1995년 으로 등단. 시집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   정유준 시인의 시- 「목공소에서」 「살구나무는」   작업이 끝났다. 먼지 속에서 목을 늘어뜨린 알전구가 도구들을 흔든다. 이가 두 개 빠진 기계톱은 열기를 식힌다. 대패는 누워 있다. 결이 선 명한 대패밥, 잘게 썰린 톱밥의 가벼움, 보드라움을 만져본다. 나무의 혼들이 걸어나온다. 여린 잎들의 친근함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줄기의 비틀림, 바구미의 가느다란 길까지도 읽을 수 있다. 허공 속으로 나뭇 잎이 떨어진다. 바람이 분다. 나이테가 무수히 생겨난다. 먼지 속 한 켠에 웅숭그리고 있는 나무들이 오늘밤도 저마다의 꿈을 꾼다. --------------------「목공소에서」전문   살구나무는 간지럽다. 세월의 더께, 무딘 껍질을 기어오르는 노린재 더 듬이에도, 나폴거리는 배추나비 날갯짓에도 몸을 뒤틀고 싶다. 혼곤히 갈라지는 햇살사이로 곤두박질치고 싶다. 늙은 수양버들들은 쿨렁거리 고 까치는 식욕을 돋구고 우체부가 지나가는 한낮이 반짝거린다. 개미 들이 발목을 스멀거리는 아우성의 봄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구나무 꽃불을 치쳐든다. ------------------------ 「살구나무는」전문   조선시대의 산수화山水畵의 자연풍경은 진경眞景도 있지만 거의 추상적인 가상현실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연과 인간의 정신이 하나가 되는 세계를 추구하면서 산수화를 그리고 감상했던 것이다. 따라서 산수화는 자연을 그린 풍경화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는 그림이기 때문에 독특한 맛과 향기와 정신적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과학적인 사실성을 중시한 서양의 인상파 풍경화와 동양의 산수화의 다른 점이다. 그림 속의 안개 낀 골짜기와 높은 봉우리들은 보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주고 상상의 세계를 펼치게 하면서 궁극적이며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이와 같이 산수화는 현실적인 자연의 미美와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의 높고 깊은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현대 한국화의 거장 운보 김기창 화백의 도 사실성과 일상으로부터 일탈된 천진한 동심의 세계가 관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의 그림은 현대인들의 정신을 정화하는 일종의 예술적 아이콘(ic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유준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편들이 동물적인 욕망의 언어들이 넘쳐나고 자연이 소멸되어가는 현대의 과도한 인간주의人間主義의 문명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나무의 명상」속에 담겨있는 그의 식물성의 명상언어들은 시대적인 현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의 언어이지만, 그 시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정화작용은 조선 시대의 산수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들의 소외감과 고독감은 정신적으로 연대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에 원인이 있다. 그 연대성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물론 사물과 인간(나)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 확대 된다. 따라서 연대성의 상실은 자아自我와 타자他者의 단절이며 열린 세상과의 단절이다. 정유준의 시편은 이런 단절의식을 연대의식으로 회복시키고, 자아自我와 타자他者의 융합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명상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만나고 그 내밀한 만남의 순간을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느끼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내고 있다.「목공소에서」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과 따스함, 겸허한 마음이 일을 끝낸 목공소 안의 풍경을 깊이 있고 정겹게 그려내고 있다. 시인과 나무의 친근함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죽은 나무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어서 죽은 나무와 시인이 결코 다른 세계로 분리되지 않고 한 세계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는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잘게 썰린 톱밥의 가볍고 보드라운 감각, 목공소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나무들의 혼, 허공 속으로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나무들의 생전 모습, 먼지 속 한 켠에 웅숭그리고 있는 나무들의 꿈....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포착하여 새로운 생명체로 살려놓는다. 이런 그의 언어는 사물과 한 몸이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들어가는 경이로움을 독자에게 느끼게 하고, 시인과 함께 그런 경험을 하게 한다. 「살구나무는」에서는 사물과의 융합이 더 생기를 띠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가 아닌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에서 감지되는 무아無我의 경지는 시인과 살구나무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시인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전혀 찾을 수 없고, 오로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만 감지되는 그 세계. 그래서 시인의 마음과 살구나무는 한 몸이 되어버리고 환한 봄날의 한 때와도 한 몸이 되는 그 세계는 도道의 경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신적 경험의 세계는 독자들의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관념이나 지식과는 별개의 세계다. 마치 산수화 속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상상에 빠지게 하는 그 세계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아이콘(icon)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정유준(鄭有俊): 1998년 에 등단. 시집 「사람이 그립다」「풀꽃도 그냥 피지 않는다」「나무의 명상」「물의 시편」     김상미 시인의 시- 「죽지 않는 책」「하얀 늑대」     이따금 사람들은 책 밑에서 토론을 한다. 나무 그늘 밑에서 토론을 하듯. 그럴 때 책 속의 언어들은 바람처럼 우리들 내부로 시원하게 불어오기도 하고 태풍처럼 비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삶이 책 속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은 제 자신을 얘기하듯 책을 읽고 읽은 책들로 은밀한 자신만의 정원을 꾸민다. 이따금 나는 그들의 정원에 초대되어 햇빛이 아닌 다른 빛에 열광하는 꽃과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그들만의 비탄을 탐색한다. 아직도 그들 속에 숨쉬는 자연의 일부인 그들을 훔쳐본다. 그들에게 책은 큰 평화이기도 하고 가장 큰 불안이기도 하고 끝끝내 이기고 싶은 敵이기도 하지만 책읽기란 맨 얼굴로 산소를 들이 마실 때처럼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 운명을 씹듯이 책을 씹으며 자꾸만 작아지는 사람들. 그들의 타는 입술은 무덤 같아 혀 밑에 파묻힌 죽은 자들의 얼굴을 보는 듯하지만 책에 대한 경의는 책에 빠진 그 사람만의 행복. 때로는 행복한 책 한권 때문에 임종을 앞 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내 속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부싯돌처럼 서로 비비며 불꽃을 만들어 내는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방 저 방에서 불이 켜지는 책. 그들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는 책. 죽지 않기 위해 자꾸만 창백해지는 책! --------「죽지 않는 책」전문   늑대 한 마리를 그렸다 크고 무시무시하고 털이 무성한 그러자 스무 마리의 늑대 사냥개들이 나타나 둥그렇게 늑대를 둘러쌌다 20대 1의 팽팽한 살기殺氣가 먹고 먹히기 직전의 생명체에서 살인적인 에너지를 뽑아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늑대를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들 그럼에도 침착할 정도로 도저한 늑대의 자신감! 오른쪽과 왼쪽, 뒤쪽과 앞쪽,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는 핏빛 외마디 비명소리들! 픽픽 내팽개쳐지는 개, 개, 개들의 시체 20대 1의 피비릴내 나는 압도적 승리! 그 앞에 홀로 포효하는 불굴의 전시 나는 그를 색칠했다 굽힐 줄 모르는 순백의 혈통 작렬하듯 단숨에 내 영혼을 휘저어 놓고 우아하게 흰 목털을 곤두세우며 웃는 거대한 야성! 이제 지구 위에서 영원히 사라진 하얀 늑대 한 마리 --------「하얀 늑대」전문     독서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반자연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죽지 않는 책」에서 시인의 갈등과 고민은 인공과 자연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작게 만드는 책을 운명적인 현실로 받아들이고, 임종을 앞 둔 인간에게도 책은 죽지 않는 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죽지 않는 그만의 책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것이 이다. 현실과 상상의 결합이 빚어내는 사유의 공간이 깊이 있게,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상상은 가상현실 속에서 더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실존적 모습 때문이다. 예술에서 리얼리티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드는 이들은 이미지의 사실성을 무시하고, 실재하는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때때로 예술 그 자체가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외면한다. 「하얀 늑대」는 순수한 심리적 이미지의 시다. 시인은 어느 날 하얀 늑대의 그림을 그리면서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 이 늑대와 사냥개들의 혈투는 악과 선의 경계가 없는 순수한 본능적인 싸움이다. 시인은 그 본능적인 싸움의 장면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잠재된 야성野性의 일부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야성은 문명 속에 파묻혀버린 자연의 에너지다. 그러나 인간의 DNA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 야성은 언제 분출될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 그는 그런 인간 심리의 내면적인 강렬한 의식을 가상현실의 ‘늑대 이미지’로 구체화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 생생한 가상현실의 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이 경계 허물기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현대시가 나아갈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인간의 심리적인 현상을 이미지로 구현하고 그것을 실상의 세계와 동일하게 처리하는 ‘디지털 시’의 가상현실과 같다. 디지털 시대의 이런 문학현상을 이인화는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조선일보 2007,4,9) 김상미의「하얀 늑대」는 그런 가상세계의 이미지와 함께 시의 끝부분 에서는 195,60년대의 미국 서부영화의 낭만적인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서부 영화는 한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 수십 명의 악당을 상대로 싸우는 보안관의 우직하고 늠름한 모습을 그려내어서 정의를 지키는 영웅의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당시 명배우 등에서 잔인한 총잡이의 이미지로 인해 큰 상처를 입고 사라졌지만, 당시 스크린 속 배우들의 모습은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뇌리腦裏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하얀 늑대」를 읽으면서 195,60년대의 미국 서부영화의 배우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미지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미지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된다. 따라서 21세기의 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무한한 상상의 공간에서 피어나는 언어의 꽃이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 김상미: 1990년 여름호로 등단. 시집
49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4>/심 상 운 댓글:  조회:176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5 월호에 계재   김지향 시인의 시-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소나기 온 밤 집 없는 도둑고양이, 어둔 헛간에서 내 신경을 긁어 댔다 나는 노트북을 들고 깜깜한 어둠 속 을 잠입했다 순간, 차량의 전조등 같은 사파이어가 잽싸게 내 눈에 발을 넣었다 나를 신어볼 눈치였다 나도 잽싸게 인터넷 사이트를 열었다 고양이 눈동자 가 왜 사파이어인지 인터넷 만물박사에게 물어볼 참 이었다 만물박사를 깨우는 사이 사파이어는 한바탕 잠든 공기를 뒤흔들어놓고 뒷구멍으로 내뺐다 창밖엔 소나기에 섞여 번개가 몇 차례 창문에 불똥 을 갈겼다 어둠에 잠겨있던 나는 문득 고양이가 가엾 어졌다 (번개에 명중되었을 지도 모를 집 없는 도둑고 양이!) 요 며칠 툭, 부러뜨려 놓았던 여린 감성이 슬그 머니 머리를 내 밀었다 감성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인터넷 속에서 ‘마음’의 소재지를 찾아보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부에 누워 있는 내장 속속들이 잎사귀를 들춰보며 조직검사하듯 사이트와 사이트를 한 잎 한 잎 열어제쳤다 (처음에‘ 마음’은 어떻게 짜깁기 되어 있을까?) 창밖은 벌써 뿌연 새벽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번개가 창문에 불꽃을 질렀다 언뜻 언뜻 눈을 깜박이는 벽걸이가 나체를 드러내고 나를 놓아 준 어둠이 창밖으로 발을 옮기 는, 하늘엔 간간이 꼬리뿐인 전기 코드가 빗금을 긋고 간다 바로 그때 잃어버린 고양이가 야-웅, 자기의 건 재함을 알려 왔다 아, 그렇군! 잃어버린 생각을 돌려준 고양이, 우레 속에 야영한 그가 반가웠다 이 반갑다는 ‘마음’이 또 어디에 감춰져 있을까 생각 속에 있을까 생각은 늘 잡동사니로 가득한 머리 속에 있지만. -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전문   ‘마음’에 대한 문제는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만큼 심오하다. 그리고 존재의 실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흔히 말하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마음이 무한한 에너지’라는 작은 범위로부터 우주만상의 존재에 대한 문제와 답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냐 하는 답은 미궁 속에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의 성과도 만족스럽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지 못하고 단지 마음의 한 모서리나 마음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의 입구를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설령 발견하였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어서 불교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불입문자不立文字’ 라는 경지를 스스로 깨우치게 할뿐이다. 중국 선종의 초대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달마達磨는 소림사 토굴에서 면벽面壁을 하던 중 법을 구하러 온 제자 혜가慧可와 이런 문답을 한다. “제가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십시오.”“편안치 못하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오면 편안케 해주리라.”“아무리 마음을 구하려 해도 구할 길이 없습니다.”“구할 길이 없는 마음이 어떻게 편하고 안 편함을 아는고”. 도를 찾아서 헤매던 혜가는 한때 도교를 신봉하기도 했는데,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눈 속에서 밤을 새우며 스스로 왼팔을 잘라 피를 뿌리면서까지 달마에게 법을 얻기를 간구했다고 한다. 혜가의 간절한 마음을 확인한 달마는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고 혜가는 이 ‘안심安心법문’을 듣고 홀연히 깨쳤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후세의 제자들이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 꾸민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간절한 희구의 구도과정’은 선禪의 핵심이 체인體認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그 과정을 지나온 당사자인 혜가는 달마의 법문을 듣고 깨우침을 얻지만, ‘간절한 희구와 구도’의 체험과정을 거치지 않은 제 3자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이라는 것을 탐색하는 계기를 얻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김지향 시인의「마음은 어디에 있을까」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 속에 자기 마음의 향방을 추적하는 ‘작은 체험’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오는 날 밤에 도둑고양이를 만난다. 그 고양이는 어둠 속에서 사파이어 같은 눈빛을 빛내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 순간 그는 왜 고양이의 눈이 사파이어 같이 빛이 나느냐에 관심을 둘뿐 고양이의 존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때 창밖에서 번개가 치고 번갯불이 불통을 튕기며 번쩍인다. 이때 그는 고양이가 가엾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그는 라고 ‘마음의 실체 찾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일 뿐, 그의 관심은 고양이로부터 떨어져서 번개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벽걸이나, 전기 코드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그의 마음에 닿는 두 번째의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그의 관심을 다시 고양이에게 돌아가게 하고 한 걸음 더 자신의 마음의 실체에 다가가게 한다. 그 장면이, 이라고 이 시의 끝 구절을 예기치 않은 마음의 체험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시적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의 마음은 한순간도 그냥 있지 않고 허공에 떠다니는 풍선처럼 떠돈다. 특히 많은 사건들이 계속 터지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마음을 잠시라도 한군데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자신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일반적인 현대인들의 삶이다. 이 시는 그런 현대인들의 ‘마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찾는 과정을 감각적인 언어로 긴장감 속에 드러내고 있다. 지식 속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그 마음을 찾기 위해서는 잡동사니로 가득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암시가 그것이다. 그 암시는 이 시를 선적 경향의 현대시로 분류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런 분류보다도 언어들의 참신성이나 긴장감, 어둠속 고양이의 사파이어의 눈빛으로 함축되어 있는 현대인의 마음의 모습 등 모더니즘 언어의 감각이 이 시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음을 거듭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나이의 한계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그의 현대적 사고와 체험을 통한 언어표현은 나를 경이로움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김지향(金芝鄕): 1956년 시집 로 등단. 시집 등     김종섭 시인의 시- 「내 뼈가 걸려있다」「성자처럼 눕다」     내 몸이 한 장의 필름으로 분리되어 판독기에 걸려있다. 검고 희멀건 채색에 담긴 앙상한 늑골들의 빗살 구조. 그 중심부로 휘어져내린 척추. 골반은 육중한 내 육신을 힘겹게 지탱하며 예까지 왔다. 한번도 너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이 나이까지 용케 버티어왔다. 문득 낯선 사람이 불을 끈다. 캄캄한 어둠속으로 내 몸은 감춰지고, 젊은 사나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최후의 심판을 준비한다. 나약해진 내 의식은 두려움에 졸아들고, 생명이란 것이, 육체란 것이 내 의지로부터 이렇게 쉽사리 떨어져나갈 수도 있는 걸까? 그의 논고가 神처럼 무서워진다. 혹시나 뻥 뚫린 허파, 퉁퉁 부운 간덩이가 안막을 덮어오는데, 창백한 벽면을 타인처럼 바라본다. 그곳엔 선고를 기다리는 내 뼈들이 기도처럼 걸려있다.                                         ------------「내 뼈가 걸려있다」전문   젊은 교수의 퍼즐 같은 말장난에 주눅들어 더위 먹은 하루 며칠 간 그 방황의 끝 이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한여름 비웠던 방문을 열면 슬며시 방을 점거한 저 많은 곰팡이들의 무자비한 침입 벽마다 검은 꽃들이 피어 냄새를 풍기고 간혹 붉게 충혈된 눈알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본다 내 식욕을, 내 미감을 채워주던 달디단 한 알의 과일 마저 부재중 모반에 가담하여 역겨운 악취로 나를 기습한다 이 정물들의 반란 습지가 된 내 침구를 접으며 나는 오늘 밤 성자처럼 눕는다 창문을 열고 별들의 무욕을 마신다 아, 이제야 돌아가는 모터소리의 생동감이여. ----------「성자처럼 눕다」전문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허구는 실제성이 없는 이미지나 환상이나 가상세계이기 때문에 임의적인 변경이 가능하지만, 과학적 사실에서는 그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방법 외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김종섭 시인의 시「내 뼈가 걸려있다」에는 허구에서 벗어나서 사실과 만났을 때의 두려움과 허무감이 들어있다. 그는 어느 날 병원에 가서 전신 X 레이 촬영을 하고 자기의 뼈 조직 필름을 보면서 자기로부터 분리된 또 하나의 자기를 보는 체험을 한다. 그때 그는, 라고, 자기 육체에 대한 연민의 정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의사의 판정을 기다리는 순간, 라는 허망감에 사로잡히면서,라고, 의사의 존재를 신처럼 인식한다. 이 시는 그런 사실 체험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알레고리가 아닌 사실적 기술記述을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간접체험의 효과와 충격을 준다. 그것은 사실적 언어가 발휘하는, 살아있는 힘이다. 이렇게 자신의 정서와 사고思考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실 그대로 기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인의 객관적인 눈과 인내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시에는 그것이 잘 극복되고 성취되어서 독자들에게 공감을 안겨주고 생명의 실존에 대해 생각하는 사고공간을 제공한다.「성자처럼 눕다」에는 그가 냉정하게 사물을 대하게 되는 정신의 수련과정이 담겨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 시는 또 그가 허상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사물의 실체와 만나는 생생한 과정을 감지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젊은 교수의 퍼즐 같은 말장난에 주눅이 들어서 정신적인 방황을 하다가, 한여름 내내 비워 두었던 자기 방에 들어와서 방안에 있던 것들의 변한 모양을 보고 관념의 놀이에서 벗어나서 사물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그는 그때의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부재중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이 일상의 작은 사건들은 그에게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그는 관념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실체와 만나는 공간속의 자신을 보여주게 된다. 라고. 이 시의 끝 구절 ‘창문을 열고 별들의 무욕을 마신다’와 ‘ 모터소리의 생동감’이 함축하고 암시하는 것은 생생한 사물성의 세계에 대한 접근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과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과일을 그대로 먹어보는 감각적 체인體認인 것이다. 나는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퍼즐 같은 말장난’의 허상에서 탈출하여 사물의 실체와 삶의 정체성에 접근하는 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시는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것을 되새기면서. 살아있는 정신의 날카로움을 느끼면서.   *김종섭(金鍾燮):1983년 에 가 당선 등단. 시집 등     김기택 시인의 시- 「토끼」「소」     햇빛이 비치자 좁은 토끼우리도 환해졌다. 토끼 한 마리 한 마리는 그대로 움직이는 불빛이 되어 판자와 철망으로 막힌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머리 위로 솟은 귀들은 햇빛에 연분홍색이 되어 토끼들이 움직일 때마다 봄꽃처럼 흔들렸다. 주인은 이 토끼들을 어떻게 할까. 잡아먹을까? 시장이나 음식점에 팔까? 죽을 때까지 기르다가 쓰레기와 함께 버릴까? 희디힌 털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은은하게 빛났으므로 무위의 경지에서 오물거리는 입들은 너무 흥겨웠으므로 갑자기 그 위에 엉뚱한 미래가 겹쳐보였다. 어린토끼 한 마리를 가슴에 안아보니 뜻밖에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 속에서 떨고 있었다. 토끼의 두려움은 내가 쓸데없이 걱정한 미래와 상관없이 오로지 지금 내 팔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토끼」전문   소의 커다란 눈은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옹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고 그저 끔벅 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둥근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베어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는 것이다. --------------------「소」전문     대상과 시인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은 존재의 독립성에 의한 간격이다. 따라서 그 간격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상의 실체와 만나느냐하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의 어려움이다. 너무 가깝게 밀착되면 시인의 개인적인 감상성에 의해서 대상의 모양이 변질되기도 하고, 또 너무 멀어지면 시인의 정서가 메말라서 시가 아닌 지식이나 관념의 표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김기택 시인의 시는 그런 면에서 좋은 텍스트가 된다. 그의 시편들은 대상과 시인의 간격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정서적인 밀착성과 함께 깊은 사유를 내포하고 있어서 거듭 읽힌다. 그 까닭은 시 속에 시인의 날카로운 관찰력만이 아니라 대상과 한 몸이 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편들은 관념과는 거리가 먼 실제적 체험의 산물이다. 그 체험 속에는 그의 시적감성이 잘 녹아 있다. 그래서 최소의 알레고리나 수사修辭만으로도 시의 맛을 충분히 내고 있다.「토끼」를 읽어보면, 그의 시가 일상의 가장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범상치 않은 시적 감성과 사유의 공간을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느 날 시골 농가 뒤뜰에 있는 토끼장에서 어린 토끼들을 본다. 그때 환한 햇살이 비친 토끼우리의 풍경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라고. 여기서 감지되는 시인의 개성적 표현은 햇빛에 비친 토끼들의 귀를 연분홍색이라고 한 것과 토끼들의 움직임을 봄꽃에 비유한 것이다.‘봄꽃’은 토끼를 아름답게 느낀 소박한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심리적 이미지는 토끼에 대한 시인의 연민으로 이어져서 라고, 인간과 토끼의 관계, 인간 속에서 토끼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라고, 인간의 척도로 토끼의 존재성과 가치를 평가하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시의 끝부분은 어린 토끼의 실체적 인식과 생명체에 대한 정감을 생생하게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다. 그 충격은 라는 구절에 들어 있다. 인간의 잔인성을 이미 직감한 듯이 어린 토끼의 떨리는 감각은 오로지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의 팔에만 집중되어 있는 생존의 엄연한 현실이 그것이다.「소」에서는 소가 하고 싶은 말이 소의 둥근 눈 속에 그렁그렁 눈물이 되어 달려 있다는 그의 관찰이 생동하는 감각으로 전해진다. 그는 라고, 소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情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소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인간적인 연민의 정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표출이다. 따라서 그 마음은 소와 인간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 같다. 그 길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길이다. 마음은 언어이전의 정서와 사유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말보다 더 근원적이다. 수도승들이 가끔 말을 버리고 묵언 속으로 들어가는 수행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만약, 소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인간도 소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가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태초의 신성한 말은 이미 사라지고 허상만 남은 말이, 간교한 지혜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들의 말을 생각해보면 부정적인 추측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의 말은 소에게 무아無我의 낙원을 앗아갈 수도 있다고. 이 시는 이렇게 둥글고 큰 눈을 끔벅거리고만 있는 소. 침묵 속에 잠겨 있는 소의 말을 통해서, 독자들이 말에 관해 넓고 깊은 사유의 세계를 펼치게 하고 말의 실체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침묵과 언어의 득실을 분별하게 한다. 나는 이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김기택 시인의 사실적인 세계 속에 내포되어 있는 건강하고 따뜻한 삶의 진정성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사유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만끽해본다.   *김기택(金基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등
48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3>/심 상 운 댓글:  조회:186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4월호에 발표   이기철 시인의 시- 「고요의 부피」「들판은 시집이다」     저 새의 이름이 뭐더라, 저 풀의 이름이 뭐더라 하는 동안 해가 진다 땅의 가슴이 더워질 때까진 날아간 새의 이름을 부르지 말자 어제의 산이 그늘을 데리고 와서 이제 그만 세상을 미워해라, 이제 그만 세상을 발길질해라 하며 문설주에 산그늘을 걸어 놓는다 조그만 생각을 끌고 가던 물이 마른 풀잎 끝에 고드름을 단다 청둥오리가 날아가고 짧은꼬리할미새가 날아와도 차마 그곳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바람이 시든 깃고사리 위로 버석거리는 신발을 신고 지나간다 지금쯤 찌르레기, 벌새들이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늙은 밤나무는 다 안다는 듯 한 겹 더 껍질의 옷을 껴입지만 아직도 숲이 추운 곤줄박이만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바쁘게 날아 다닌다 춥다고 산 것들이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숲이 깊은 숨 쉬고 새가 길게 날면 고요의 부피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저물면 낯 선 것들이 낯익어진다 해지는 광경만큼 황홀한 음악은 없다 -------「고요의 부피」전문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 줄 넝쿨풀들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의 긴 구절 나비 날갯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는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이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들판은 시집이다」전문    2000년대 들어와서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새로운 외래어로 크게 유행하더니 이제는 우리말이 된 것 같이 보편적으로 쓰인다. 행복, 안녕, 복지, 복리라는 의미의 이 말을 우리말로 ‘참살이’라고 하자고 의견을 내는 것을 어느 잡지에서 보았다. 행복이나 안녕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휴일이면 아파트의 규격화 된 공간 속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찾는 등산화의 발길이 도시의 인근 산을 누비고, 식탁에는 인공식품보다 신선한 채소류가 중요한 식품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자연성의 회복이라고나 할까, 자연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여하튼 자연이 인간에 끼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현대인들이 늦게나마 깨닫는 것은 다행이다.    현대시에서도 이 자연성의 회복은 매우 중요한 화두(話頭)가 된다. 원래 동양의 시인들에게 자연은 시의 원적지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서양정신에 대응하는 동양정신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신(神)의 개념도 동양에서는 자연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동양의 시인들은 자연을 관념화하여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숨결이나 욕망의 몸짓이나 무언의 언어를 충실하게 시에 담아내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황진이(黃眞伊)의 시조에 나오는 ‘청산리벽계수(靑山裏碧溪水)’도 멋진 비유와 풍자의 언어는 되지만 실재하는 자연의 존재 즉 ‘산 속의 푸르고 맑은 냇물’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 상황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된다.    이기철 시인의 시「고요의 부피」는 인공식품 같은 지식과 관념들이 지배하는 의식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나 자연과의 사실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신선하고 새로운 감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정신적인 ‘참살이’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숨을 쉬고 사는 시인의 생활이 진솔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념도 배경에 넣지 않은 그의 언어는 식탁 위에 놓인 채소의 신선한 향기를 풍기며 온갖 인공 조미료 같은 관념에 절어진 독자들의 미적 감각을 회복시킨다. 라는 구절을 그냥 읽어만 봐도 관념 이전의 자연의 실체가 살아서 숨 쉬는 현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을 버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도道의 경지다. 아니 도라는 관념의 옷마저 벗어버린 무아(無我)의 경지다. 이때 자연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 속에서 숨 쉬고 퍼덕거리고 날개 짓을 한다.   「들판은 시집이다」는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은유의 구조를 시의 골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관념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잎처럼 돋아난 단순한 비유이기 때문에 오히려 관념을 뛰어넘는다. 는 구절은 자연과 한 몸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접근도 하지 못 할 실제의 세계다. 인간 세상의 시시비비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세계를 시에 비유한 것은 어쩌면 21세기 현대시의 ‘자연의 재발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연은 누구나 시의 재료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생활을 하며 자연과 일체가 되어서 무심(無心)의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기철 시인의 자연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가 도달한 거리낌 없는 정신의 경지를 가늠해본다.   * 이기철(李起哲): 1972년 추천으로 등단. 시집 「낱말추적」「청산행」「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우수의 이불을 덮고」「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가 아름다웠다」등     신현정 시인의 시- 「별사탕」「극명(克明)」     별들 속에서도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이 꿈인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들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의 색깔을 갖고 싶은 별들이 있다 별사탕처럼 안이 환히 비치는 셀로판 봉지에 색색깔로 담겨 보고픈 별들이 있다 그렇다 그래서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의 꿈이 있었기에 별사탕은 탄생 했던 것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집 앞 가까운 구멍가게에서 별을 봉지째 팔았다 ---------------「별사탕」전문   이른 아침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 와서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고 마당을 종종걸음 치기도 하고 재잘재잘 하고 한 것이 방금 전이다 아 언제 다들 날아 간나 눈 씻고 봐도 한 마리 없다 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 간 이 가지 저가지가 반짝이고 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 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 ---------「극명(克明)」전문      언어의 형이상학적 추구의 결과로 언어가 ‘존재의 집’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인정된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는 존재(실상)가 될 수 없고 단지 존재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여서 선(禪)이나 직관(直觀)을 통한 존재의 파악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에서는 언어를 ‘존재의 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어를 떠나서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시에서 불가능한 일이고 시의 예술적 본질과도 상충되기 때문에 현대시에서 언어를 탐구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포착하는 행위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으로 여전히 중요시된다. 따라서 언어와 존재의 이런 관계 즉 허상을 통한 실상의 발견과 포착은 현대시에서 언어와 존재에 대한 시인의 투명한 인식에 의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 언어의 허식(虛飾)이나 실감이 없는 관념적 언어로는 존재의 그림자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현정 시인의「별사탕」은 이런 언어와 존재(실상)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게 하는 시로 재미있게 읽힌다. 그는 ‘별사탕’ 즉 ‘별+사탕‘이라는 언어를 포착하여 인간의 꿈을 인식하게 하고 꿈의 맛과 아름다움을 독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누구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차츰 희미하게 색이 바랜 어린 시절 꿈의 세계를 환기시켜 독자들을 그곳으로 안내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언어인식의 투명함이 시 속에서 움직이는 에너지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움직이는 인식의 에너지는 천진하고 열린 상상을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처럼 펼치는데, 그것이 언어의 허상이 아닌 아름다운 꿈의 이미지가 되어서 존재의 실상으로 상승한다. 그래서 “별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들고 싶은 별들이 있다//별사탕의 색깔을 갖고 싶은 별들이 있다//별사탕처럼 안이 환히 비치는 셀로판 봉지에 색색깔로//담겨 보고픈 별들이 있다//그렇다 그래서 별사탕이 되고 싶은 별들의 꿈이 있었기에//별사탕은 탄생 했던 것이다”라는 엉뚱하고 단순한 의미의 구절들이 생명력을 얻은 언어가 된다.    이런 그의 인식능력은「극명(克明)」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침에 참새들이 앉아다 떠나간 나뭇가지를 보면서 ‘반짝이는’이라는 심리적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별사탕」처럼 언어를 통한 인식이 아니라 현장의 사물을 보고 발견한 현장에서의 직관적 인식이기 때문에 더 삶의 실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탈-관념화 된 투명한 인식의 눈은 어쩌면 분별심이 가득한 육안(肉眼)을 넘어서서 빛의 경지인 천안(天眼)이나 혜안(慧眼) 쯤에 도달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아침에 참새가 앉았다가 날아간 나뭇가지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누구나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정경이지만 거기서 ‘반짝이는’ 느낌을 감지하고 포착하는 것은 남다른 마음의 눈에 의한 직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눈은 어둠도 밝은 빛의 세계로 보는 눈이다. 그래서 “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 간 이 가지 저가지가 반짝이고/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라는 구절이 경이로운 감각으로 살아난다. 그 자신도 그런 인식의 경지가 너무 놀라워서 ‘극명(克明)’이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눈이 밝아야 한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여 보이는 것으로 변환할 수 있다. 신현정 시인은 오랜 시업(詩業)의 수련을 통해서 밝은 눈을 얻게 된 것 같다. 나는 대상의 내면을 투시하는 그의 시「별사탕」과「극명(克明)」을 거듭 읽으면서「극명(克明)」은 그가 포착한 오도(悟道)의 한 순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나름대로 확인해 본다.   * 신현정(申鉉正): 1973년 에 「그믐밤의 수(繡)」가 당선 되어서 등단. 시집 「대립」등     이재훈 시인의 시-「보길도 갯돌」「황홀한 무게」     돌은 시간의 은유다 긴 세월 동안 견뎌온 피부는 거칠어졌다가 이내 속살처럼 안락하다 만질한 자갈이 된 사연, 선술집에서 침묵을 지키는 사내의 등, 역마살로 떠돈 자의 주름잡힌 미소, 생일날 아침 공복의 커피, 할증시간 택시기사의 붉은 눈, 술이 깨는 새벽 라디오 소리, 노트에 적어 넣은 정지된 시간들, 그리고 서서히 딱딱 해지는 연보 네 기억이 드문드문 찾아오게 되면 모든 사물은 굳은 껍질로 스스로의 집을 만든다 딱딱함 속에 들어앉은 기억들이 제 몸을 뒹굴어 내는 소리 나는 너의 눈을 기억한다 너의 하얀 이를 기억한다 구르고 굴러 환멸까지도 그리움이 돼버린 이 소란스러운 돌의 은유                                                --------「보길도 갯돌」전문   눈이 나뭇잎에 앉았다가 햇살을 참을 수 없어 제 몸을 녹였 다 사람들은 그것을 학대라 부르기도 하고, 혁명이라 부르기 도 한다 체 게바라가가 위대한 이유는 자신을 죽여 또 한 생 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혜화동, 시위대가 장대 깃 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다 깃발을 두 명이 잡고 겨우 걷는다 나는 그 행렬을 보는 대신 버스에서 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몇 사람들은 그들이 깃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 는 지금 내 가방도 무겁고, 늦어진 약속도 무겁다고, 혼잣말을 했다 한 아저씨가 버스 창문을 열고 외쳤다 힘내요, 파이팅! 싸락눈이 비로 바뀌었다 나대신 깃발을 지고 가는 사람, 제 몸 을 거리에 내버린 풍경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황홀한 무게」전문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의 관계는 현대시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관념의 극단과 물리적 이미지의 극단은 시의 성립에 위태로운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덕수시인은 그의 시론 ‘수퍼비니언스의 원리(2005년 시의 날 주제 발표)’에서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한국 현대 시사(詩史)를 간략히 조감하면서 현대시의 과제로 “형식주의 (언어주의)는 역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역사주의는 형식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고, “실험적 언어주의나 극단적 관념시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시론은 한국 현대시에서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 즉 현실참여의 역사주의와 모더니즘의 조화(調和)를 강조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재훈의 시편들은 비교적 관념과 물리적 이미지의 관계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것 같아서 시를 읽는 부담감이 줄어든다. 그것은 그의 시가 문맥조차 통하지 않는 조작된 모더니즘 시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물론 한 두 개 정도의 이미지를 통해서 확장되는 의미의 세계를 안고 있으며, 그 속에 구체적인 현실이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새로운 시의 모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시정신이 풀어야할 과제로 남는다.   「보길도 갯돌」은 ‘돌의 은유’라는 발상이 시의 폭을 넓힌다. 그 돌은 인간의 삶을 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개성적인 관념으로서 독자들을 상상의 세계로 유인하고 인간의 삶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보길도 갯벌에는 바닷물에 쓸린 돌들이 널려있다. 그 돌들도 처음에는 예리하게 각이진 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닷물에 쓸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각진 돌들은 만질만질한 자갈이 된 것이다. 그것을 그는 라고 한 생애의 고단한 삶으로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는 라고 연민의 정까지 넣어서 독자와 밀착시킨다. 하지만 이 시는 독자들에게 시적 상상 속에서 삶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게 해줄 뿐, 어떤 사고思考를 유발하거나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는 삶에 대한 성찰은 들어있지만 생의 에너지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황홀한 무게」는「보길도 갯돌」과 대조를 이룬다. 그는 싸락눈이 내리는 어느 날 혜화동 버스 안에서 시위대를 보고 느낀 감정과 생각을 시로 형상화 하면서 젊은 시인답게 자신을 죽여 또 한 생을 꿈꾸었다는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죽음의 의미를 떠올리고 있다. 그러면서 라고 솔직하게 소시민적(小市民的)인 자기의 심정을 토로한다. 그의 솔직하고 정직한 감정의 드러냄은 독자들에게 현실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확산시킨다. 그래서 그런 감정은 소극적이지만 생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끝부분 라는 구절은 그의 정직성이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또 하나의 심리적 공간을 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공간이 시인 자신만의 심리적 공간이 아니라는데 의미가 있다.「황홀한 무게」라는 이 시의 제목이 그것을 암시한다.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꿈이 살아 움직이는 그 공간은 현실만이 아니라, 생의 허무를 무너뜨리는 에너지가 함축된 심리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재훈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현실인식이 들어있는 시적 상상과 젊은 정신이 생동하는 감성 속으로 들어가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 이재훈 : 1998년 에 등단
47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2>/심 상 운 댓글:  조회:178  추천:0  2019-07-26
 *월간 2007년 3월호에 발표   황송문 시인의 시-「물레」「돌」     木花茶房에 한 틀의 물레가 놓여 있었다. 수십 년만에 햇볕을 받는 할머니의 뼈다귀처럼 물레는 앙상하게 낡아 있었다. 都市의 詩가 他殺되던 날 밤 다방을 피신해 온 나는 물레소리에 미쳐들고 있었다. 할머니의 眞言처럼 사른사른 살아나는 물레 소리가 너무너무 좋아서 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靑竹 같은 자식을 戰場에 보내놓고 四方八方 치성을 드리던 할머니의 물레소리가 내 가슴을 다르륵 물어 감고 있었다. 보기도 아까운 그 얼굴 한 줌의 재되어 온 자식을 끌어안다가 까물치던 할머니의 목쉰 소리 다르륵, 숨이 막혀 울지도 못하고 낮은 음자리 돌아 감기는 恨의 물레소리 가락에 시름을 감으며 지렁이 울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달지는 밤이면 버언한 창호지 마주 앉아 남편 생각 자식 생각에 손을 멈추다가도 꺼지는 한숨, 달달달달 다르륵, 시름을 감아 돌리고 있었다. -----「물레」전문   불 속에 한 천년 달구어지다가 山賊이 되어 한 천년 숨어살다가 칼날 같은 소슬바람에 염주를 집어 들고 물속에서 한 천년 원없이 구르다가 영겁의 돌이 되어 돌돌돌 구르다가 매촐한 목소리 가다듬고 일어나 神仙峰 花潭先生 바둑알이 되어서 한 천년 雲霧속에 잠겨 살다가 잡놈들 들 끓는 속계에 내려와 좋은 詩 한 편만 남기고 죽으리 ------「돌」전문    어떤 대상으로부터 펼쳐지는 상상은 시인의 내면세계의 표출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황송문 시인의「물레」에서는 현대문명과 대비되는 감성의 세계와 우리민족의 독특한 한(恨)의 세계가 담겨있어서 전통적인 서정시의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도시의 문명에 의해서 자신의 시가 ‘타살(他殺)’ 되었다고 절망한 그가 도피처로 택한 ‘목화다방(木花茶房)’에서 발견한 한 틀의 물레는 그에게 향토의 정서를 환기시켜주는 상징적인 매체가 된다. 그는 그 물레의 소리를 환청같이 들으며 스스로 ‘미쳐들고’ 있다. 그리고 ‘사른사른’ 들려오는 물레소리는 그를 어린 시절 할머니 곁으로 돌아가게 하고, 라고 전쟁이 휩쓸고 고향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게 한다.    그가 물레를 통해서 명주실처럼 풀어놓는 어느 할머니의 비극적인 이야기의 이미지는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전쟁의 비극이 그려놓은 우리겨레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의 보편적인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그래서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바꾸어도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이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존재는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집안에서 물레를 돌리던 할머니의 환생(還生) 이미지라고 해석된다. 이 여성적인 이미지는 늘 남성의 그늘에 가려서 숨어있는 음성적인 이미지이지만 남성적인 이성보다는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 되는 감성적인 이미지다.    현대의 도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문명의 성채(城砦)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성채는 인공의 화려함 속에 삭막한 인간관계와 비극적인 미래의 시간을 운명처럼 안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인공적인 이성의 문명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그것은 그가 비록 남성이지만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적인 온화함과 눈물과 그리움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가 지향하는 반문명적인 세계는 인간의 마음이 돌아가야 하는 원초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세계다.    서양의 문명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바뀌는 것도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들 때문이다.「물레」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사유의 공간은 문명과 인간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돌」은「물레」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의 정신세계를 조감하게 한다. 에서 보여주는 동양적인 초월과 환상 그리고 환생이 그것이다. 이런 초월과 환생은 그의 동양적인 정신수련의 과정을 단편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서양적인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의 세계에 천착하는 그의 감성과 현실 초월의지는 현대문명 속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확대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나는 그의 반문명적인 축축한 감성과 현실 초월의식과 환생의 이미지가 담긴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시세계를 방문하는 즐거운 탐방객이 된다.   *황송문(黃松文): 1971년 에 등단. 시집: 「조선소」「목화의 계절」「내가슴 속에는」「메시아의 손」「그리움이 살아서」등     이길원 시인의 시- 「두더지」「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엘리베이터 자판기 커피 마시고 전화 받다 구내식당 서류 뒤적이다 소주 마시고 지하철 오늘도 바람은 부는데 이웃집 김대리가 결이 곱던 은행의 김대리가 교통사고로 이승을 빠져 나갔단다. ------「두더지」전문   승무를 추는 비구니의 외씨버선이 슬프도록 고운 까닭이 아닙니다 감전이라도 된 양 온몸에 흐르는 그대의 뜨거운 노래 때문만도 아닙니다 때로는 달빛이 미루나무에 머무는 밤에도 나비처럼 흐르는 까닭을 나는 모릅니다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너울거리는 두 팔의 의미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 합니다 나의 춤이 그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더 더욱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살아 숨쉬며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황홀한 춤을 추워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그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나는 온몸을 적시어 춤을 추어야만 합니다 푸른 하늘이 거기 있기에. ---------「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전문     인류의 문화유산 중에 그리스의 비극은 살아있는 유산이다. 그래서 현대의 문화 속에는 그리스의 비극이 등장한다. 소포클레스의 대표적인 비극 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적 비극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생부(生父)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인간 비극의 절정을 보여줌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한 프로이트는 그 비극의 내면을 투시하면서 그와 같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로 개념화 하였다. 이 그리스의 비극은 인간은 주어진 운명의 굴레 속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시인들도 이 운명론과 싸우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이길원 시인의「두더지」에는 현대인의 운명적인 비극성이 들어있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이들과 인사도 못하고 이승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는 이웃집 김대리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냉엄한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 하고 순간적인 착오나 실수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에 비해서 인간적인 고뇌와 극적요소는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허망한 비극을 함축하고 있는가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 시인은 이러한 비극을 단순한 시적구조 속에 담아서 단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신의 관념을 넣지 않고 남의 얘기하듯 단순 명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그의 객관적 서술은 현대사회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런지 시의 전달효과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라는 최대로 생략된 시의 구문은 사실의 압축과 언어의 경제라는 단순한 시적 방법론을 넘어서 문명의 이기가 주는 반대급부 즉 부정적인 측면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는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낸 인간이 문명의 이기에 의해서 그들의 운명이 어떤 현실을 맞이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부각하고 있다. 문명의 횡포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식물들의 문제도 포함하는 것이기에 그 비극성은 엄청나게 확대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비극에만 묻혀있지 않고 「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에서는 희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의 양면성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는 현실이라는 주어진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연극 속의 삐에로 같은 존재로 표현하면서도 ‘푸른 하늘’ 즉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그의 희망의지는 독백적인 진술에 담겨서 직접적인 울림을 준다. 그래서 라는 구절은 절실한 감정을 내포하면서 독자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열어준다.    이 시의 ‘푸른 하늘’은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발견이라는 철학적·종교적인 의미를 붙일 수도 있다. 그것은 동양에서의 자연은 서양의 신(神)과 같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춤을 추는 이유를 라고 부정을 통해서 긍정을 찾는 어법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적인 감성에서 벗어나서 이성적인 세계를 추구하고자하는 의도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궁극적인 세계는 인간을 벗어난 자연 즉 절대적인 존재성에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관념을 어떤 고정된 틀 속에 넣는 것보다도 허무를 극복하려는 개인적인 의지나 정신적인 경지의 지향이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간의 비극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 내는 정신적인 굴레에서 비롯된다. 만약 인간이 희로애락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서 밝은 마음의 눈으로 자연을 보면 자연은 그 자체가 빛나는 열락의 세계가 된다. 이것은 갇힌 사고와 열린 사고의 차이를 의미한다. 따라서「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이 지향하는 세계는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정신적인 수련의 결과물이라 해석된다. 나는 현대인의 비극을 담은 「두더지」와 현실의 허무를 극복하는 정신적인 지향을 노래한「내가 춤을 추는 까닭은」을 읽으면서 이길원 시의 현실인식 속에 들어 있는 균형감각을 음미해 본다.   *이길원(李吉遠): 1991년 에 등단 시집: 「어느 아침 나무가 되어」「겨란껍질에 앉아서」「은행 몇 알에 대한 명상」「하회탈 자화상」     이춘하 시인의 시- 「고구마 모종을 내시는 어머니」「하늘공원」     팔순을 훨씬 넘기신 내 어머니 여름날 새벽안개 속으로 들어가신다 베렌다 한 켠에 세워둔 녹슨 호미날도 뒷짐에 챙기신다 (나풀나풀 초록이 멈춘 곳) 이 빠진 주택가 공터가 내 어머니 농장이시다 어머니 굼뜬 손으로 고구마 줄기 걷어 올려 모종내신다 삿갓처럼 호박잎으로 낸 모종 위에다 초록봉분 만드신다 팔남매 이부자리 다독이듯이 꼭꼭 흙으로 눌러놓으신다 바람 불어 날리지 않게 뜨거운 햇볕 가려주라고 중얼중얼, 당부의 말씀 잊지 않으신다 (고깔 쓴 초록봉분들 고만고만한 자식들처럼 다소곳하다) -------「고구마모종을 내시는 어머니」 전문   지하철을 타고 내려 시장골목을 지나 사람 사는 마을의 다리를 건너, 딴 세상으로 들어서는 초입에서 미아가 된다. 어느 우주의 한 귀퉁이, 작은 역에서 내려 이름 없는 외딴집 담장을 기웃거리다가 갑자기 한 무더기 억새풀 속에 갇히고 말았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을 나누는 걸까? 손등이 붉고 손가락이 긴 억새풀들이 물결을 이루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강건너 신기루 같은 빌딩들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떼를 지어 몰려다 니는 멧새들만 바쁘다 번지수나 문패가 없는 데도 여유롭기만 하다 그늘 한 점 없이 종일 땡볕에 앉아 이마를 그을리고 있는 패랭이꽃도 소소롭다 밤에는 별들이 내려와 노숙을 하고 지친 영혼들 쉬어갈 수 있는, 하늘과 땅 사이, 이승과 저승 사이, 너와 나 사이에 하늘공원이 있다 -----------「하늘공원」전문      시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해도 시의 옷은 다 벗겨지지 않는다. 벗기고 벗겨도 다 벗겨지지 않는 옷. 손에 움켜잡았다고 하는 순간에 물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시의 실체. 그것 때문에 영원히 청순한 연인으로 다가오는 시의 가슴. 그래서 시에 대한 해석은 무모(無謀)하고, 그 무모함이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한다. 시인은 자기의 시 속에 신생아의 울음소리 같은 생명의 근원을 담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어떤 이론으로도 해석될 수 없는, 물이나 불이나 공기나 땅 같은, 그것들을 운용하는 신(神)의 마음 같은 그런 자유롭고도 조화로운 무한한 무엇이 자기의 시 속에 들어 있기를 바라고 그것을 독자들이 발견하여 제 멋대로 해석해 주기를 원한다. 그런 마음이 시인을 외로움과 허무로부터 구원한다.    이춘하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읽으면서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의 시편 속에서 신선하게 솟아오르는 발랄한 생명의 기운 때문이다. 그 기운은 그의 시어 곳곳에서 감지된다. 따라서 그의 언어감각은 단순한 수사(修辭)에서 벗어나서 언어이전의, 대상에 대한 그의 감성작용을 느끼게 한다. 그는 대상에 대한 감지능력이 남다르고 자신의 감정 노출보다 객관적 사실에 충실하다. 그리고 대상과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주관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객관성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고구마 모종을 내시는 어머니」에서도 대상과 시인의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시인은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끈적끈적한 관계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하나의 피사체로 생각하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그려내고 있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감정에 치우쳐서 냉정함을 잃게 되고 또 너무 멀어지면 그림자만 남게 되기 쉬운데, 이 시는 그것을 잘 조절하여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풍경화를 보듯 아무런 부담도 없이 시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에서 어머니의 행위는 독자들에게 아파트가 밀집된 현대 도시공간에서 삶의 근본인 농촌을 떠나온 노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 인간과 자연의 관계, 현대사회의 공해문제 등,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라는 이 시의 중심 장면은 독자에게 그런 것들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  아파트 공터에서 초록생명들을 자식같이 다독이면서 키우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이 세상에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떤 존재의 모습까지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하늘공원」에서도 그의 사실적인 시의 기법이 새로운 감각의 시어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하늘공원’이라는 공원으로 가는 과정도 사실적이면서도 현실과 유리되는 환상적인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그 그림 속에 그의 우주적인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는 끝 부분이 맑고 투명한, 열린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 주어서 독자들의 마음을 잡는다.    이 열린 사유의 공간은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은 그의 시적감성과 기존의 어떤 유형에도 가담하지 않은 그의 독창적인 어법의 산물이라고 판단된다. 나는 어떤 관념의 그림자도 들어 있지 않고 감정의 절제가 잘 이루어진 이춘하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읽으면서 현대시의 기법에서 탈-관념이 왜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형이상학적 시라 하더라도 고정 관념에 갇혀 있는 사유의 언어에서는 결코 새로운 시의 탄생은 기대할 수 없고, 그런 언어로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독자들의 관심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이춘하: 1994년 에 등단. 시집 :「콩꽃을 해부하다」「낮선 곳에서의 자유」「세석능선에 걸린 달」
46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1>/심 상 운 댓글:  조회:279  추천:0  2019-07-12
*월간 2007년 2월호 발표   박명자 시인의 시-「누군가 4월에는」 「九月의 끝」   4월의 뜨락에 조용히 나서 보면 누군가 스르르 다가와서 목과 겨드랑이를 간지럼 태운다. 지난 겨울 밤 얼어붙은 침묵의 가지 위에 누가 훅 체온보다 더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 천길 깊은 허무의 굴헝에서 누가 수액을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리는 소리. 긴 기다림의 시간 뒤에서 누가 생명의 향유를 항아리 가득 준비했나 보다. 누군가 등 뒤에 가만가만 다가 와서 귀엣말로 나직이 속삭인다. 지난 겨울 몸을 망친 땅 위에 누가 이라고 썼다가 얼른 지운다. 아침 무거운 커튼을 드르륵 열어 주고 동구 밖을 긴 망토를 이끌고 누군가 나가고 있다. ----------「누군가 4월에는」전문   그토록 많은 곤충들이 밤새도록 높은음자리표를 숲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물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땀으로 나의 시간을 밀고 오르면 九月의 꼬리가 피부로 만져진다. 이쯤서부터 부질없는 꿈의 껍데기를 버려야지 중얼거리며 늦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숲에서 어떤 눈이 나의 고독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리며 서둘러 산마루에 오르자 내 몸은 어느새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다. -------「九月의 끝」전문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근원이며 선천적인 틀이다. 그러나 공간은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데 비해 시간은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데 차이가 있다. 이것을 공간의 가역성可逆性과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고 한다. 만약 시간에도 가역성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과거의 시간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영화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면 이 세상은 또 얼마나 혼란스럽고 흥미로운 상황의 무대가 될까. 그런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의 불가역성이 우리들의 삶에 부여하고 있는 깊고 큰 의미를 알게 된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시간의 엄숙한 법칙 속에 놓여있는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박명자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은 그의 시편 속에는 무엇보다도 시간의 의미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누군가 4월에는」에서는 모더니즘적인 언어감각의 연출도 돋보이지만 그 언어감각 속에 들어있는 존재의 모습 즉 관념적 이미지에 눈길을 더 주게 된다. 이 시에는 ‘누군가(누가)’라는 어떤 존재의 모습이 들어있다. 그 ‘존재’는 독자들에게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단순한 연극적인 캐릭터가 될 수도 있고 시를 통한 존재자의 발견과 인식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존재의 의미가 주는 상상의 폭이 이 시의 이미지와 의미형성에 주는 변화는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지난 겨울 밤 얼어붙은 침묵의 가지 위에/누가 훅 체온보다 더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천길 깊은 허무의 굴헝에서/누가 수액을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리는 소리.//긴 기다림의 시간 뒤에서 누가 생명의 향유를/항아리 가득 준비했나 보다.//누군가 등 뒤에 가만가만 다가 와서//귀엣말로 나직이 속삭인다.”라는 이 시의 중심구절에서 드러나는 대립적인 이미지 ‘허무의 굴헝’과 ‘생명의 향유’는 이 시가 단순한 계절의 시가 아닌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시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사실 속에서 새로운 대상의 인식이라는 시인의 시적 감각과 투명한 의식의 눈을 기억하게 한다. 관념의 동적인 형상을 발견하여 보여주는 그의 투명한 의식의 눈은「九月의 끝」에서는 체험적인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땀으로 나의 시간을 밀고 오르면/九月의 꼬리가 피부로 만져진다.//이쯤서부터 부질없는 꿈의 껍데기를 버려야지/중얼거리며 늦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숲에서 어떤 눈이 나의 고독을 하염없이 지켜본다.//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리며/서둘러 산마루에 오르자/내 몸은 어느새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열정만으로도 행복했던 여름의 삶이 지나가고 가을의 초입 9월에 들어서면 지나간 시간의 아름다운 모습들은 점차 사라지고 냉정하고 본질적인 인식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공통적인 감성의 변화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의 체험(사실적 또는 사유적 체험)으로 녹여서 깊이 있고 감각적인 사유의 시어로 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꿈의 껍데기’를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숲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어떤 눈을 만난다. 그래서 그는 ‘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린다. 그리고 산마루에 올라서서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유과정은 집착이나 경계에서 해방될 때 마음이 가벼워지고 투명해지는 도道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봄까지 살아남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이 꺼지지 않는 불덩이 하나를 간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박명자 시인의 시편 중에서 계절과 관련된 시편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나의 시간’의 의미와 한 생애의 허무를 극복하는 과정을 생각해본다.   *박명자(朴明子) : 1973년 에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이 천료되어서 등단. 시집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빛의 시내」「시간의 흔적을 지우다」 등   문인수 시인의 시- 「대숲」「창포」   시퍼렇게 털 세운 대숲 한 덩어리가 크다. 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사실 전국 어디에나 붙박인 유적 같은 것이다. 그들은 왜 마을 뒤, 산 아래에다 대숲 우거지게 했을까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 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 놓았을까. 날 풀어놓고 싶어 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 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 잘디잘게 씹히거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신생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무넘이 무넘이 시퍼렇게 넘어가곤 한다. --------「대숲」전문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 들은 척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롬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 소래네/ 닥실이/ 봉산댁/ 새촌네/ 분네/ 개야네/ 느미/ 꼭지/ 뒷뫼댁/ 부리티네/ 내동댁/ 흠실이/ 모금골댁/ 등골댁/소독골네/ 갈갯댁/ 순이/ 봉계댁 우거진 한 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창포」전문     조선 선비들은 사군자四君子를 마음의 표상으로 삼고 살아 왔다. 그 중에 무욕無慾 하면서도 춥고 매서운 겨울을 이기는 꿋꿋한 대나무의 기상은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대나무는 선비들이 즐겨 그렸던 묵화나 산수화의 대상이 되었고, 대숲의 정경은 그림 속에서 운치를 드러냈다. 그것은 오늘 날에도 계속 이어지는 한국화의 전통이다. 그러나 상징과 사실은 크게 다르다. 상징은 사물이 아닌 하나의 관념이기 때문에 실제의 자연과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상징은 생명의 기운이 말라붙은 관념의 뼈대로 존재하게 된다. 대나무 숲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대숲이 얼마나 여러 가지 느낌으로 다가 오는지 체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대낮에도 하늘을 가린 울창한 대숲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하루 종일 어둡고 우중충하다. 그리고 사방 천지가 대나무뿐일 때 대나무가 주는 압박에 공포감도 생긴다. 거기에는 운치니 기상이니 하는 말들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과 관념의 차이다. 예술의 미적가치는 생동감에서 우러나온다.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 그려낼 때 거기에 생동하는 기운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 인상파印象派 그림이 오늘날까지 색이 바라지 않는 것도 빛에 대한 그들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관념의 벽을 허물어버린 과학적 사고의 화풍 때문이다. 문인수 시인의「대숲」은 인상파의 그림처럼 생동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의「대숲」에는 어떤 관념에도 감염되지 않은 싱싱한 사물성의 감각이 살아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대숲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시라는 형식도 의식하지 않은 듯 아주 자연스럽게 글로 풀어놓고 있다. 그래서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 놓았을까. 날 풀어놓고/싶어 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잘디잘게 씹히거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신생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는 구절들이 제각각 살아서 숨을 쉬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 시의 문장과 문장이 인과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서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래서 이 시가 주는 의미는 불분명해지고, 그 분명하지 않은 의미(무의미)는 이 시의 생명 감각이 되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어떤 관념이나 논리적인 사유를 시 속에 담기 위해서 비유나 상징적인 어법을 사용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시의 언어가 사물과 분리되어서 관념화 되었을 때의 감각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감지感知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줄 때의 감각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문인수 시인의 이런 언어감각은 「창포」에서 더 친근하고 예민하게 드러난다. 우포늪에 우거진 창포들의 모습을 “노리실댁/ 소래네/ 닥실이/ 봉산댁/ 새촌네/ 분네/ 개야네/느미/꼭지/ 뒷뫼댁/ 부리티네/ 내동댁/ 흠실이/ 모금골댁/등골댁/소독골네/ 갈갯댁/ 순이/ 봉계댁 우거진 한 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라고 우리나라 여인네들의 이름과 연결 지어서 보여준 것이 그것이다. 그 여인네들은 논밭에서 평생을 흙과 함께 살다간 농투성이 여인네들이다. 그 여인네들의 꿈과 삶, 질긴 생명력은 박경리의 소설「토지」속에 잘 담겨있다. 들병이란 1930년대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들에서 사내들에게 술과 몸을 파는 여인네의 별명이다. 시인은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창포 잎에다 붙이고 있다. 그 이름들은 언제 들어도 정겹고 눈물 나는 이 땅의 여인네들의 이름이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이름들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그 이름들의 이미지와 창포의 이미지를 겹쳐 보여주는 것으로 어떤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 의미를 자기의 지식과 정서와 감각에 맞추어서 상상하고 음미하게 된다. 여기에도 어떤 관념의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의 화면같이 장면이동을 하는 끝 구절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멀리 가버린다 창포,/긴 허리가 아름답다.”라는 영상이 깔끔한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문인수 시인의 이미지 조형 기법이 현대적인 디지털 감각과도 연결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의 냉정하고 사실적인 이미지의 기법이 탈-관념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그의 시를 거듭 읽는다.   *문인수(文寅洙): 1985년 에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함. 시집 「늪이 늪에 젖듯」「세상의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뿔」「동강의 높은 새」등         고진하 시인의 시-「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라이락」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마천루 숲속, 아크릴에 새겨진 ‘조류연구소’란 입간판 아래 검은 점이 또렷이 빛나는 눈부신 황금빛 관冠을 뽐내며 쏘는 듯 노려보는 후투티 눈빛이 이상한 광채를 뿜는다.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 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 새어나오다니.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 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 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 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 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 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 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오, 그렇다면 나도 이제 허울 좋은 이 조류연구소 주인처럼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피와 살과 푸들푸들 떨리는 내장을 송두리째 긁어내고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를 가득 채운, 잘 길 들여진 행복에 더 이상 소금 뿌리지 않아도 될 것인가. 때때로 까마득한 마천루 위에서 상한 죽지를 퍼덕이며 날아 내리는 풋내 나는 주검들마저 완벽하게 포장하는 그의, 그의 도제徒弟로 입문하기만 하면 과연 나도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껍질만으로도 눈부신 --------「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전문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을 토해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 천 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 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디 향낭香囊을 움켜지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라이락」전문   시인들은 한때 문명을 예찬하고 인류의 밝은 미래를 전망한 적이 있다. 모더니즘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모더니즘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성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장밋빛 청사진을 펼쳤다. 그러나 그 장밋빛 그림은 점점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공해나 생태계의 문제들이 인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관적인 징후와 예상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적인 세계, 즉 남성, 과학, 인간 등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여성, 신화, 자연을 찾아내어서 이성적인 것과 대면시킴으로써 기존의 이성적인 것에 새로운 시선을 던지게 하였다. 그것이 질서와 규칙을 넘어서거나, 어긋나는 현상을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다. 요즘 보통으로 쓰이는 퓨전(fusion)이라는 말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이다. 고진하 시인의「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시 속에 문명과 자연이라는 대립적인 이미지가 중심화두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들이 빚어내는 묘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문명과 자연의 이미지는 마천루의 숲 속에서 퍼덕거리며 날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박제剝製가 된 새 후투티를 상징하는 복합적인 요소가 된다. 시인은 후투티의 인공 눈알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놀라면서 그것을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새어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새어나오다니./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시인의 감수성은 독자들에게 문명에 의해서 파괴된 자연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자연의 혼魂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현대의 도시문명을 동화 속 마법魔法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어둠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박제가 된 새의 “잘 길들여진 행복”이라는 구절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일깨우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문명비판적인 시인의 의식을 짚어보게 한다.「라이락」은「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와 같이 사실적인 체험의 진술이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밝고 단조로운 이미지가 생동감을 준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인공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서 자연의 감각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천수관세음보살이라는 불교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불교적인 사유보다는 직감을 통한 사물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시인은 라이락 꽃이 주는 값으로 환산 할 수 없는 무량의 공덕을 어떤 보살의 공덕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찬탄하고 있는데, 그 관념이 허황되지 않아서 공감을 준다.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을 토해내는/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천수관음보살을 떠 올렸다.”는 구절이 사물성의 감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관념시와는 다른 선사물先事物 후관념後觀念의 인식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는 또 맑고 향기로운 시인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라이락의 공덕을 찬탄하는 그 마음이 불도의 경지에 이른 마음임을 알게 한다. 나는 이 시의 빛과 향기기 오래 내 마음에 남기를 바라면서 거듭 음미한다.   * 고진하(高鎭河): 1987년 에 「폐가」등을 발표하며 등단함. 시집 「지금 남은 골짜기엔」「트란체스코의 새들」「얼음 수도원」등
4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0> / 심 상 운 댓글:  조회:270  추천:0  2019-07-12
*월간 2007년 1월호 발표                                 손해일 시인의 시-「꿈꾸는 돌」「바람개비」   돌밭에 서서 나도 하나의 이름없는 돌이 된다   세상에  흔하디흔한 게 돌이지만 돌다운 돌도 드물고 흔하디흔한 게 사람이지만 사람다운 사람 또 귀하다   알게 모르게 속세의 이끼도 조금씩 묻고 물살에 부대껴 모래알처럼 작아지는 정충精虫 살아 있는 날들의 이 헛헛한 목마름   네가 내게로 와서 명석名石이 되었듯이 나는 네게로 가서 이름없는 돌이 된다 먹돌의 진한 그리움으로 시조始祖새처럼 비상飛上을 꿈꾸며 -----「꿈꾸는 돌」전문   *바람독에 서서 강강한 바람을 맞는다.   속소리나무숲 칙칙한 어둠을 따라 눈발속에 날아간 당홍연唐紅鳶 속절없는 바람을 맞는다.   마파람, 높새바람, 하늬하늬 하늬바람, 우리가 사는데 이유가 없듯이 무시로 변신變身하는 너의 변덕과 영원永遠까지를 사랑하려 한다.   너 없이 내가 바람개비일 수 없지만 너를 거스르지 않고는 돌지 못하는 나의 모순矛盾   전폭적인 내 사랑으로도 바람난 바람들은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꽃물 같은 상채기가 혓바늘로 돋는다. 머무르고 싶다. 바람개비. 역마살.   오오 누가 나에게 청청淸淸한 바람을 다오. 나도 한 줄기 힘찬 흐름이 되어 정녕 누군가의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거니. ------「바람개비」전문 *바람독: 바람막이가 전혀 없는 곳. 전라도 방언   화창한 봄날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녔는데, 깨어보니 나비가 아니고 장자莊子 자신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내가 된 것일까.” 꿈과 현실이 헷갈렸다는 ‘장자莊子의 나비의 꿈’(호접몽·胡蝶夢)‘은 단순한 우화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인 상상력의 측면에서 많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진리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따라서 무상無常은 무엇으로 변신하고 싶은 인간의 꿈을 담고 있다. 여기에 무상과 허무의 차이가 있다. 허무는 현재에 집착하는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손해일의 시편들 속에는 무상의 꿈이 들어 있다.「꿈꾸는 돌」에는 돌밭에서 시인 자신이 하나의 이름 없는 돌이 되어서 사는 꿈을 꾼다. 그리고 이름 없는 돌을 명석名石으로 만들기도 한다. 나와 돌의 이런 자리바꿈은 시인의 마음이 자연과 일체가 되어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정신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래서 라는 끝 구절은 깊은 의미로 다가 온다. 존재의 본원本源에 대한 이런 그리움은 그의 형이상학적인 정신의 영역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조始祖새처럼 비상飛上을 꿈꾸는’ 시인의 정신은 어떤 고정관념에 묶이기를 거부하는 장자莊子의 자유로운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바람개비」에도 시인의 꿈이 들어 있다. 그 꿈은 자연이 아닌 세속 속에서의 꿈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서로서로 관계 맺기를 하며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다. 그래서 인간人間이라는 단어 속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바람 속에 서서 무시로 변하는 것들과 영원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변하는 것들과 영원한 것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를 바람과 나의 관계로 환원하여 바람과 부딪쳐야만 돌아가는 바람개비 같은 나의 운명을 모순矛盾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순 속에서 모순을 사랑하며 살아가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는 그 깨달음을 라고 오도송悟道頌같이 노래하고 있다. 바람으로 변신하여 누군가의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열어 준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의미는 물론 그 존재들의 관계를 상승시킨다. 그것은 나와 너라는 분별 의식에서 벗어날 때 이 세상은 무한이 넓어지고 따뜻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손해일 시인의 초기 시편들을 읽으며 그가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근원을 잠시 엿보았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세계의 아름다움에 촉촉이 젖어보았다. *손해일(孫海鎰): 1978년 에 「벌거숭이 노래」「빛의 탄주」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흐르면서 머물면서」「왕인의 달」등   최두석 시인의 시 -「심봉사」「성에꽃」   해방 조국에 돌아온 일가족이 굶어 죽은 꼴 볼 수 없어 심처이가 외국 뱃놈과 거래하듯 몸을 판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밀가루 포대로 산 남자는 흑인 로이 대위 남동생을 통역으로 취직까지 시킨 대위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위가 귀국하던 날 그녀는 늙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떨어졌다 거울 뒷면 수은을 긁어 먹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검둥이 아이를 데리고 진해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동두천으로 그녀는 이른바 양색시였다 미군들은 미제 물건 뒷거래한 돈으로 그녀를 데리고 살았다   삼단 같은 머리채 성긴 백발로 변하고 이제 현역에서 은퇴했으되 한반도 미군 철수는 도무지 꿈도 꾸지 않는 할머니, 누가 그녀의 생애에 돌을 던지랴 이 땅의 심봉사인 사내들이여        ---------「심봉사」전문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보고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숨결이던가 일 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성에꽃」전문    한 시대의 성실한 관찰자로서의 시인은 그 시대를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는 두보가 석호촌에 갔을 때 한 밤중 벼슬아치가 찾아와서 백성을 강제로 징발해 가는 이야기를 담담히 서술한 시로서 1천 5백여 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도 울림을 준다.1930년대 시인 백석白石의 시편들이 주는 감흥도 카메라로 동영상의 사진을 찍 는 듯한 그의 냉정하고 날카로운 현실관찰과 언어표현의 경제성에서 우러나온다. 그의 시 은 압축된 서사 속에 한 여인의 서러운 일생이 부각되어 있다. 이때 시인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고 그려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시인이 그 속에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넣고 의식을 넣으면 오히려 사실의 생생한 전달에 방해가 되고 시의 힘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최두석 시인의 시편들도 시대를 관찰하는 그의 눈이 발굴한 사실들의 생생한 이미지가 가슴에 박힌다. 그의 눈은 시대의 힘이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삶을 짓밟으며 그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희생된 개인의 삶에 연민의 정을 보내는 시인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게 한다.「심봉사」는 고대 소설 의 패러디가 시적 효과를 주고 있지만 시인의 그런 의도적인 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공주로 살아가야 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사실적 서사 속에 한 시대의 삶의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는 서사는 한 시대의 냉혹한 삶과 연결되었으며 그것은 민족 공동체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끝부분에서 시인이 시의 주제를 의식하여 주관적인 감정과 해석을 넣은 것이다. 그것은 리얼리스트로서의 냉정함을 잃은 것으로 판단되어 아쉬움을 남긴다.「성애꽃」은 「심봉사」와 같은 계열의 ‘이야기 시’는 아니지만 과학적인 관찰, 언어표현, 시인의 의식이 깊이 있게 느껴진다. 새벽버스 유리창에 피어나는 성에꽃은 간밤에 사람들이 남기고 간 입김과 숨결이 공동으로 모아져서 만든 결정체라는 진술은 과학적으로도 타당성을 가지면서 이 시에서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무심한 사실의 현상에 불과한 성에꽃은 이 시속에서 시각적인 아름다음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공동체의 꽃으로 상승된다. 가 그것이다. 그 아름다운 성에꽃은 막막한 숨결들과 푸석한 얼굴들이 남긴 것이다. 그래서 그 꽃은 시대적 상징성을 내포하면서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의 꽃으로 재탄생한다. 이 시에는 1980년대의 아픔을 담으려는 시인의 의도가 들어 있지만 그것보다도 그 시대 서민들의 살아 있는 삶의 숨결이 전달되어서 거듭 읽혀진다. *최두석(崔斗錫):1980년 의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대꽃」「성에꽃」「임진강」「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등   백무산 시인의 시- 「달」「침묵」   도시는 달을 끄고 불을 밝혀 낮을 연장시킨다 언제 달을 봤던가 달은 정전돼 있었다   산들이 웅성거리며 달을 밀어 올리고 나는 오랫동안 캄캄한 산길에 있었다 오래 어둠에 둘러싸여 있노라니 마음속 깊은 골짜기가 열리고 아래로 흐르는 물이 보이고 그 물결 위에 달빛이 어린다   언제부터 잃어버렸을까 나의 반 대지의 반 세계의 반   달이 해의 잔해라면 저 하늘의 밤 별들도 문틈애 밀려오는 햇살에 부서진 작은 먼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밤의 표상은 저리 둥글고 낮의 배후는 저리 영롱하다 해는 살갗을 비추나 달은 희디흰 뼈를 비춘다   돌아보느니, 우리는 세상의 반만 가지고 살고 싸웠느냐 ---------「달」전문   나무를 보고 말을 건네지 마라 바람을 만나거든 말을 붙이지 마라 산을 만나거든 중얼거려서도 안된다 물을 만나더라도 입다물고 있으라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이름 없는 들꽃이 이름을 붙이지 마라 조용한 풀밭을 이름 불러 깨우지 마라 이름 모를 나비에게 이름 달지 마라 그들이 먼저 네 이름을 부를 때까지   인간은 입이 달린 앞으로 말하고 싸운다 말없는 등으로 기대고 나눈다 --------「침묵」전문   백무산은 198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시인이다.「만국의 노동자여」계열의 시편들은 그의 언어가 얼마나 격렬하고 날카로우며 한 쪽에 치우쳐 있는가를 섬쩍지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인간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계급적이고 투쟁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노동의 즐거움, 노동의 가치를 인식하기 전에 ‘노동’을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대립적인 계급의식의 눈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 그의 시는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할 수는 있지만 독자들에게 넓고 깊은 생각의 공간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와 선전에 의해서 흑 아니면 백, 어느 한 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에는 회색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시편에서「달」과「침묵」은 그의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어서 놀라움을 준다.「달」이 ‘관념의 시’에서 벗어난 ‘체험의 시’라는 것은 사상의 감옥 속에 갇혀 있던 그의 시작詩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시의 중심소재인 달은 아무런 관념에도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달이다. 시인은 그 무의미의 달을 보면서 비로소 생각의 중심점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제까지 세상의 반만 가지고 싸웠다는 것을 자성하고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게 된다. 이 시에도 도시의 불빛과 자연의 달, 해와 달에 대한 분별의식 등이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없다. 그는 다만 라고, 산 속의 어둠 속에서 그 어둠에 동화되어서 물아일체의 경지로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의 사색은< 밤의 표상은 저리 둥글고/ 낮의 배후는 저리 영롱하다/해는 살갗을 비추나/달은 희디흰 뼈를 비춘다>라고 하면서 여성적인 낮의 배후 즉 밤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그의 시에서 자연을 발견하게 하고 인간의 증오와 투쟁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을 고치게 하는 계기를 주는 것 같다.「침묵」은「달」보다 도 깊은 사색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을 자연 상태의 그대로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과의 대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의 언어를 통해서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침묵은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며 인간의 언어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공간이다. 그는 이 시에서 라는 명령조의 어투로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 단호한 어투에는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의 강한 의식이 들어 있다. 그 의식은 인간은 ‘인간의 관념’으로 자연을 인지하고 판단하려는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먼저 자연에게 말을 할 때, 그 순간 자연은 인간의 관념에 오염되어 버려서 자연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대화를 할 때에는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침묵 속에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의「꽃」에는 얼마나 건방진 인간의 자만自慢이 들어 있는지 알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백무산의 시「달」과「침묵」은 노동의 세계(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세계를 일깨워주는 시로서 거듭 읽힌다. *백무산(白無産): 1984년 를 통해서 작품 활동.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인간의 시간」「길은 광야의 것이다」등
4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9> / 심 상 운 댓글:  조회:268  추천:0  2019-07-12
 *월간 2006년 12월호 발표                        최선영 시인의 시- 「해변海邊의 마을」「토요일土曜日 아침」   마을은 죽었다 바다에서 기어 나와 죽은 마을 해변에 빈 조개껍질처럼 누웠다   청춘이 빠져 나가버린 우리들의 잔해殘骸 도 파도가 거절하는 6월의 연서戀書도 모두가 여름이 목에 걸고 달아난 밀짚모자다   아쉬운 행여行旅의 길목에 겨울은 결코 서둘지 않는 귀먹은 우체통 이명耳鳴의 아픈 미로를 거쳐 미구에 봄의 사자는 도래하리라   그러나 아직은 식은 눈알의 인광燐光을 위해 무거운 칸타타는 들려오고 있다.          ----「해변海邊의 마을」전문 흰 벽壁은 나의 캔버스 한 폭의 신나는 추상화抽象畵를 던지며 일어나는 토요일의 건강한 안색顔色 아침은 하늘 높이 싱싱한 그네를 메어두고........... 잘 닦인 바깥 풍경風景은 활기 있는 안구眼球 속에 확대되어 빛나는 고전古典의 세계 큰 뉴스는 이웃집 소인제금가素人提琴家가 띄우는 호망의 선율 영롱한 비누방울이 되어 집집을 방문訪問한다 ---「토요일土曜日 아침」   시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 언어의 포장지에 감추어진 시인의 메시지라면 시와 산문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시의 의미는 매우 단순해진다. 그러나 독자가 상상의 들판에 나가 보물찾기하듯 각기 다른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면 시의 예술성은 그 의미의 개체만큼 확대된다. 그것은 시가 언어(의미)를 표현도구로 하지만 예술성(무의미)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예술성은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를 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그래서 시인은 언제나 시의 예술성과 의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존재가 된다. 현대시를 창작하는 시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최선영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먼저 감지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시인의 생동하는 의식이다. 언어를 감정의 늪 속에 함몰시키지 않고 객관화하려는 태도와 언어의  사물성事物性을 감성표현의 도구로 환원하는 그의 시적 연금술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를 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려고 한다.「해변海邊의 마을」은 시의 의미 쪽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시인은 그 의미를 객관적인 사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시의 예술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첫 연 “마을은 죽었다/바다에서 기어 나와 죽은 마을/해변에 빈 조개껍질처럼 누웠다”는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사건이다. 비록 그 다음 연 “청춘이 빠져 나가버린/우리들의 잔해殘骸”라는 구절에서 그 실체가 곧 해명되지만 이런 언어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상상은 입체적이며 구상적인 사물성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개성적인 상상의 공간을 구축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죽음을 여름→겨울→봄이라는 계절의 순환으로 인식하고 허무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것은 “아쉬운 행여行旅의 길목에/겨울은 결코 서둘지 않는/귀먹은 우체통/이명耳鳴의 아픈 미로를 거쳐 미구에/봄의 사자는 도래하리라”는 구절이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식은 눈알의 인광燐光을 위해/무거운 칸타타는 들려오고 있다.” 고 칸타타(Cantata)의 배경음악을 통해서 낙관적인 생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토요일土曜日 아침」은「해변海邊의 마을」보다 더 감각적이고 예술적이다. 이 시는 논리적인 구성에서 벗어나 집합적 구성으로 되어 있고 의미보다는 감각이 시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사건이 없고 이미지의 나열만 있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이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여 밝고 아름다운 꿈이 담긴 상상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런 장면에서 독자들은 미적 쾌감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얻는다. “큰 뉴스는/이웃집 소인제금가素人提琴家가 띄우는/호망의 선율/영롱한 비누방울이 되어/집집을 방문訪問한다”는 이 시의 끝 구절은 토요일의 생동하는 감각을 드러내는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것은 이웃집 소인제금가素人提琴家(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자유로움과 경쾌함이 영롱한 꿈의 비누방울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두 편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인생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와 절제된 감정 그리고 언어의 지성적 구성이다. 인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는 시를 낳는 모태가 된다. 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예술은 인생에 대한 희망과 자유정신 속에서 형성된 사리舍利 같은 보석이다. 그래서 시인은 꿈속의 파랑새를 찾아서 자신의 일생을 떠돌이로 보내는 것이다. 나는 최선영 시인의「거울의 형이상학形而上學」(1987년 6월호)을 읽고 월평에서 “다양한 의식의 흐름, 몽타주(montage) 수법 등이 매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유리알의 공간/가면을 쓴 다비떼의 춤/번쩍이는 속죄양의 눈물방울/우편배달부는 아무런 전보도/날라다 주지 않고/저승의 냄새가 점령하고 있는/ 그 장소”라는 시의 구절들이 불연속적인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과 충돌을 통해서 내면적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민중시라는 대중선동의 구호口號와 같은 시들이 범람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초현실적인 시의 언어는 디지털 시대의 영상언어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를 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최선영(崔鮮玲): 1959년 에 「역사」「온실」「소심」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등   강우식 시인의 시- 「사행시초四行詩抄․1」「세족계洗足戒」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방房은 한알의 사과 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 속 누가 이 순수한 외계外界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돌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물고비를 넘어나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셋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차게 새삼 피어오르던 쓰린 눈물이여.   넷 계집애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사행시초四行詩抄․1」하나~넷 산사태 지자 개울물은 더욱 맑다.   습기진 돌틈 살모사새끼들이 오글거리고   북향한 상봉 어디쯤 동자삼도 있을 법한데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발보다 마음을 씻어내고 있으려니 은어새끼들이 와서는 발가락 때를 빨아준다. 나같은 사람에게는 산문 앞 개울에 발담그는 일만도 수계受戒 같아라.         ----「세족계洗足戒」전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理性이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감성感性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감성의 숨은 힘이 들어있다. 현대시에서도 이 감성의 힘은 딱딱하게 굳은 이성(지성, 관념)의 껍데기를 부수고 원초적인 실체의 속살을 드러내는 동력이 된다. 서정시가 시의 원류로 존재하는 근원도 이 감성의 힘 때문이다. 모더니즘(지성)의 시가 현대시를 지배하고 있을 때에도 독자들은 서정시를 선호했으며 시는 감정의 표출이라는 시의 정의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감정의 표출을 어떻게 다듬어서 언어의 그릇에 맛깔스레 담아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었다. 강우식 시인의 사행시편四行詩篇들의 서정은 그런 면에서 큰 느낌을 준다. 인간의 가식적假飾的인 것들을 다 걷어내고 본질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그의 시편들은 사행四行이라는 시의 틀 속에 언어의 작고 예쁜 집을 짓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행시四行詩의 형태는 음보와 율격의 규정이 없어서 운율적인 면에서는 개방적이다. 그리고 기, 승, 전, 결의 구성법에도 억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3장 6구 45자 내외의 평시조平時調보다 여유롭다. 그러나 자유시의 형태에 비하면 너무 옹색하다. 하지만 시는 “언어의 경제”를 표현의 근본으로 한다는 면에서 볼 때 그의 사행시四行詩는 시의 원리에도 부합하는 개성적인 작시법의 표출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그의 사행시四行詩는 한국 현대시의 한 형태로도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는 압축될수록 의미가 확장된다. 구체적인 설명이나 묘사는 오히려 시의 공간을 좁히고 상상력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소리(대사, 음악, 음향 등)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던 60년대 라디오 드라마가 현재의 칼라 TV의 리얼한 장면보다 상상력의 유발과 확대란 측면에서 더 효과적인 것과 같다. 그의 사행시四行詩에는 압축된 시행 속에 신선한 비유의 언어들이 박혀있다. 그 비유의 언어들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내외여, 우리들의 방房은 한알의 사과 속 같다.”라는 구절에서 내외관계의 내밀한 장소가 되는 방房을 달고 수분이 많은 “사과 속”으로 비유한 것이 그것이다. 이 “사과 속”에는 사과의 씨앗도 들어있어서 우리들 삶의 속내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은 과즙이라는 미각으로 독자들을 미적 쾌감에 젖게 한다. 그러면서도 숨겨진 현실의 생생한 드러냄이라는 면에서 관념으로부터 해방된다. 두 번째의 시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먼 세상이나 내다보듯/초록의 물고비를 넘어나/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에서도 잎새와 순이를 연결하여 사춘기를 지난 후에도 떠오르는 머슴애에 대한 그리움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먼 세상이나 내다보듯“이라는 철학적 사유의 언어가 들어 있지만 그것이 주는 거리감이 시를 한 단계 정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짝진 머슴애“에 대한 그리움이 생생하게 살아오는 느낌을 주는 “파랗게 쳐다보네.”라는 끝 구절은 언어의 감각적 표현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게 하는지 알게 한다. 세 번째의 시에서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은  짧은 몇 개의 단어로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을 함축하고 있다. 그 언어는 그가 언어의 순도純度와 아름다움을 얼마나 높이고 있는지 알게 한다. 이런 세부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사행시초四行詩抄․1」의 시편들이 각각 독립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전체가 집합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세족계洗足戒」는 비유譬喩의 언어에서 벗어나서 사물과 직접 부딪히는 실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비유가 아무리 시적 상상력을 높여준다고 하여도 실상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실상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사물과 인지認知 사이에 구축된 관념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탈-관념의 정신작업을 하고 있다.「세족계洗足戒」에 “수계受戒”라는 단어 외에 관념어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겨/발보다 마음을 씻어내고 있으려니/은어새끼들이 와서는/발가락 때를 빨아준다.”는 이 사실적인 장면은 얼마나 맑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지 거듭 음미하게 한다.「세족계洗足戒」는 강우식 시인이 언어의 연금술에서 벗어나 실상의 세계로 나왔음 보여주고 있다. 실상은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 시인은 실상을 추구하지만 언어를 도구로 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시인의 고뇌와 새로운 가능성이 숨어 있다.  강우식(姜禹植): 1966년 에 「박꽃」「사행시초四行詩抄․」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등 다수   최동호 시인의 시 - 「독서讀書」「몽당연필」   밤이 늦으니 책장 넘기는 소리에 손이 마른다.   마른 손의 관절을 꺽어 책장을 뚝뚝 잘라낸다.   갈대숲에서 잠자던 새가 쏠리는 바람 소리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이미 책 속에선 찾을 수 없는 생목의 향기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   무너진 개미의 둑 위에 쌓아올린 책 속의 모래알 글자들이 아른 거린다.   언제이던가 마른 손의 주름살 사이로 사라진   싱그러운 유년의 날들이 불빛 가린 손등너머로 보인다.   가을이 깊어가니 책장 넘기는 소리가 맑아   빈 일기장엔 비쩍 마른 영혼의 향기만 외롭다.                  -----「독서讀書」전문 백지 위에 톡톡 부러진   까만 연필심 같은   송사리떼들 하얀 눈동자 깜박거리며   구름 일기장 맑은 물가에서 산들바람 친구와 놀다             -----------「몽당연필」전문   인간의 언어는 사물(대상, 의미)을 지시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 사물과 언어 사이에는 허구의 관념이 들어 있다. 그런 언어를 또 1차적인 언어 (음성언어)와 2차적인 언어(문자언어)로 구분하여 하여 더 본질에 가까운 언어를 음성언어라고 하고 그 다음을 문자언어라고 한다. 음성언어가 1차적인 언어가 되는 이유는 음성언어는 지적 작용으로 질서화 되기 이전의 감정과 의미가 뒤섞인 원색적인 모양이 그대로 들어 있는 데 비해 문자로 기록된 언어에는 원색적인 모양이 다 지워지고 지성으로 질서화 된 가면假面의 언어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시는 대부분 2차적 언어인 문자로 기록되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는 사물의 본질이 주는 생생함에서 멀어진 박제같이 말라버린 관념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들은 어떻게 하면 그 말라버린 관념의 껍질을 벗겨내고 생생한 원래의 언어를 살려내느냐 하는 언어와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니, 무의미의 시니 하는 발상도 모두 시인들의 언어가 현실의 사물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최동호 시인의 시「독서讀書」에는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가 드러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밤늦도록 책을 읽으면서 학문(관념)의 세계에 침잠하지만 관념이전의 기억들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기억들은 지성으로는 닿을 수 없는 원초적인 본래의 세계다. 그래서 그는 그 세계를 “갈대숲에서 잠자던 새가/쏠리는 바람 소리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이미 책 속에선 찾을 수 없는 생목의 향기/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독서讀書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지식의 전수 방법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책 속에는 인간의 역사가 들어 있고 지식과 논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책 속에 들어있는 역사는 본래의 사실이 아닌 가공加工된 사실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실의 기록일 수가 없다. 지식과 논리도 그렇다. 그 지식과 논리는 자연의 지식과 논리가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세운 가공架空의 건축물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최동호 시인의 「독서讀書」는 가공加工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본래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1차적 사유의 도정道程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사유의 도정道程은 독서라는 중간단계를 지나서 사물의 본질과 대면하는 직관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는 이 시에서 관념이전 기억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기억의 조각”들에는 이성적인 것보다도 더 소중한 맑은 향기의 서정이 들어 있다. 그 서정은 그의 마음 속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본래적 감성의 풋풋한 물기가 묻어있는 사실들이다. 그는 이 시에서 그것들을 끌어내어 소박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옷을 입혀서 맑은 서정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몽당연필」은「독서讀書」이후의 직관적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논리적 사유와 관념에서 뛰어나와서 대상과 직접 만나고 있다. 그 대상은 맑은 물가에서 산들 바람과 노는 송사리 떼다. 몽당연필의 톡톡 부러진 연필심은 어릴 적 기억을 재생 시키면서 송사리 떼를 연상하게 하는 보조언어가 된다. 그는 그 송사리 떼를 독자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무런 사족蛇足을 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의 송사리 떼는 진리의 당체를 그냥 그대로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대상으로 살아난다. 그것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석가가 수많은 제자들에게 말을 생략한 채 침묵 속에서 꽃 한 송이를 보여주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속에 들어 있는 논리를 초월하는 그의 시적 방법은 21세기 현대인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방법의 하나가 된다. 현대인들은 냉정한 논리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논리의 세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을 안고 있다. 특히 현대시의 독자들은 시인의 일방적인 설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시인의 관념과 해석이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사물(사건)을 보여주고 그 해석과 감상을 독자들에게 전부 맡기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언어”는 디지털 시대의 중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몽당연필」은 짧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직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시로 평가된다. 그래서 선禪의 맑은 정신이 담겨 있는 시인의 투명한 시선은 이 시의 인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최동호(崔東鎬): 1979년 신춘문예와 추천으로 등단. 시집 평론집 등  
43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8> / 심 상 운 댓글:  조회:242  추천:0  2019-07-12
* 월간 2006년 11월호 발표                                 이건청 시인의 시-「황야荒野의 이리 5」 「폐광촌을 지나며」   山城에 갇혀서 왕이 운다. 눈이 내려 쌓여 나뭇가지를 휘이게 하고 눈은 내려 쌓여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 툭 하고 부러뜨린다. 山城에 갇혀서 왕이 운다. 눈에 덮인 저 비탈에 추운 斥候가 매복해 있다. 적들은 잠들고 말들만 깨어 있다. 눈을 맞으며 깨어 있다. 말들이 눈 내린 城 밖, 적들 곁에 서 있다. 말들은 적이 아니다. 山城에 갇혀서 왕이 운다. 기왓장이 하나 무너져 내린다. 말들은 적이 아니다. 눈은 풀에 내려 마른 풀들을 덮는다. 우물이 하나 지워진다. 우물이 둘 지워진다. 눈이 내린다. 깨진 기왓장과 척후 위에 내려 쌓인다. 얇은 옷을 입은 왕이 운다. 적들이 積雪을 이루고 있다. 밤새도록 쌓이고 있다. 南門이 닫혀 있다. 北門이 닫혀 있다. 東門 西門이 닫혀 있다. 눈은 내려 쌓여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 툭, 툭, 툭 도처에서 가지들이 꺾이고 있다.                         ----------「황야荒野의 이리 5」전문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까맣게 몰랐다.
42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7> /심 상 운 댓글:  조회:201  추천:0  2019-07-12
 *월간  2006년 10월호 발표                                                                            오탁번 시인의 시- 「애기똥풀」「라라에 관하여」     1 개구리밥 자라는 둠벙가에서 눈 깜박이며 살레살레 고개젓는 애기똥풀의 가녀린 꽃잎 위로 문득 떠오르는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아직 눈도 못 뜬 내 사타구니에 새끼 자라의 연한 살결 간지럼 태우며 애기똥풀 감황柑黃빛 꽃물 발라 주던 누나의 눈웃음이 봉숭아물 곱게 든 손톱만큼 예뻤다 둠벙도 먼 강물도 꿈꾸지 못하는 나에게 누룽지처럼 맛있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마련해주고 떠난 누나여   2 새끼 자라가 눈을 뜨고 둠벙에서 나와 흐린 강물 헤엄치며 불러보아도 이젠 영영 보이지 않는 땀방울 송송 맺히던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감장종지만한 젖가슴도 쥐이빨 옥수수같은 앞니도 세상의 강물 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 추억의 빈 공책 빛 바랜 페이지에서 옹알옹알 속삭이며 그때 그 어린 눈망울로 내 사타구니의 다 큰 자라가 미운 듯 말똥망똥 눈 흘기는 애기똥풀이여 누나여                                                   -------「애기똥풀」 전문   原州高校 이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雉岳山을 한참 바라다 보았다.   7년이 지난 2월달 아침, 나의 天井에서 겨울바람이 달려가고 대한 극장 나列 14에서 라라를 다시 만났다.   다음날, 서울역에 나가 나의 內部를 달려가는 겨울바람을 전송하고 돌아와 高麗歌謠 語釋硏究를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만드는 바람소리에서 깨어난 아침, 次女를 낳았다는 누님의 解産 소식을 들었다.   라라, 그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風車 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라여, 本能의 바탕이여. 아름다움이여.                        ------------------------「라라에 관하여」전문   시의 현실은 시인의 의식이 선택하여 재구성하고 의미를 붙인 가상현실(허구)이다. 그것은 소설이나 시나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이 시간의 풍화작용에 오래 견디는 현실이냐 하는 것이다. 시대적인 이데올로기나 가치들은 그 시대가 지나가면 사라져버리는 신기루蜃氣樓다. 물질적인 것들도 시간의 이빨에 오래 견디기 힘들다. 언젠가는 다 바스라지고 녹아서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정의한다. 시인들도 형이상학적인 인식을 통하여 해바라기처럼 진리를 향하여 언어의 날개를 펼친다. 그런데 진리는 이미 기성복같이 만들어진 것 즉 관념이기 때문에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감각이나 정서의 옷을 입혀야 한다. 그런 시들을 관념시 또는 형이상학 시라고 한다. 오탁번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가 지닌 시간성 때문이다. 그의 시는 시대적 가치나 사상,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일상적인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변하지 않는 시간성이 들어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본능本能이라는 원초적인 세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애기똥풀」에서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불러일으켜 순수한 본능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세계는 어쩌면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같다. 눈곱만한 부끄러움도 분별심도 없는 천진무구한 동심의 그 세계는 이 세상에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라나는 일이 없어질 때까지 변하지 않을 세계이며 어른들 기억의 맨 밑바닥에 잠들어있는 본래적인 세계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초적인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곳(낙원)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미지를 담고 있는 이 시의 구절들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언어보다도 영원성에 접근해 있다. 는 이 시에서 진외육촌누나와 나의 관계는 아담과 이브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기억의 재생이 환기시키는 정서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본성의 힘으로 인해서 시간의 굴레를 뚫는다.「라라에 관하여」는 그런 원초적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사춘기를 지나서 직업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인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객관적이고 간결한 사실의 나열과 압축, 그리고 냉정한 이성理性의 언어로 축조된 이 시는 본능과 이성의 갈등에서 끝내는 허물어지고 마는 이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적인 시인의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 시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겨울바람, 형언할 수 없는 꿈, 누나의 해산,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소리” 등은 결국 고려가요어석연구高麗歌謠語釋硏究를 읽는 이성理性의 나를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오탁번 시인의 이런 꾸밈없는 솔직함과 본능의 드러냄은 그의 시에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를 여는 바탕이 되고 무상無常의 시간을 극복하는 에너지가 된다. 또 서사적인 그의 시는 독자들에게 시를 읽는 재미를 주고 상상의 문을 열게 한다.   *오탁번(吳鐸藩):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당선되어 등단.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處刑)의 땅」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활동함.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오탁번 시 전집」등   임종성 시인의 시-「山行」「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     내가 바위처럼 우뚝 솟으려 할 때 산은 낮게 낮게 멀리 가는 냇물을 보여주고   내 마음이 칡넝쿨처럼 얽힐 때 똑바로 뻗은 나무를 보여주고   계곡을 오르다 내가 잡풀처럼 억세어질 때 유유히 흐르는 흰 구름을 보여주고   날 저물어 내가 잎으로 떠돌 때 산은 환한 풀꽃으로 길을 밝혀준다 -------「山行」전문   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 좁은 행간 속에 높고 먼 하늘이 내려와 앉고 한낮에도 별들이 총총 반짝인다 내가 책을 펴기도 전에 나무는 시의 내부를 거의 파악한 듯 내 시선이 다음 시행 끝에 이르기 전에 나무는 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일 때 나무는 흐려진 그늘로도 연을 이루고 그다지 밝지 않은 문장 속을 모두 비추는가 잠시 어둠에 젖은 마른 잎처럼 졸다가 시퍼런 풀빛으로 깨어나면 내게로 거침없이 부딪쳐오는 한 세상 이 산에서 사는 하나의 풀이거나 풀 속에 맺힌 이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한 점 벌레 같다는 생각에 이르는 동안 나무에 기대어 다시 시를 읽는다 --------「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전문   자연은 현대시에서도 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인공적인 변화가 빠르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자연은 그 현실을 바르게 보는 마음의 중심기둥 역할을 한다. 시인은 자연을 통해서 변화하는 현실의 의미도 짚어보고 무상한 실체를 체험하기도 한다. 특히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양적인 자연관은 자연이 객관적인 대상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얻는 사유의 언어들이 비록 실제가 아닌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시인들은 그것을 깨우침을 주는 새로운 감각의 언어로 변형시켜 독자들에게 부단히 접근한다. 임종성 시인의 「山行」은 산을 스승으로 삼아서 산의 가르침을 배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높은 것과 낮은 것, 얽히고 굽어진 것과 똑바른 것, 억셈과 유연한 것, 어둠과 빛의 대조를 통해서 삶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리고 인생을 보는 시각視角의 균형감각을 잡아주고 있다. 우리들은 높이 솟은 바위를 부러워하고 그 바위 같이 솟아보려고 하지만 산은 낮게 흘러가는 냇물을 보여 줌으로써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삶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는 구절들이 비록 관념적인 교훈의 드러냄이라고 하여도 시인의 체험이 묻어난 살아 있는 또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에 시적 생명력을 갖는다. 그 생명력의 바탕에는 시인의 담담한 서술의 언어가 한 몫을 하고 있다.「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은 자연물과 자아自我가 하나가 된 상태. 즉 대상물에 완전히 몰입沒入된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와 시인이 한 몸이 된 이런 경지에서 시의 주체는 나무가 되기도 하고 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는 상상 속의 사건이지만 시에 대한 나무의 반응이라고 생각할 때 그 발상이 매우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는 그의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고 끌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자연을 단순히 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연과 시와 나를 같은 생명체로 인식하는 임종성 시인의 정신의 경지가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 보통의 시들이 자연을 시의 보조물로 취급하고 비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비교할 때 그의 자연관은 독보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정신의 출발점은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그 지극한 사랑이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경지를 연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세계 들어가는 관문을 통과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임종성 시인의 시편들에서 감지되는 생명적인 것들이 더 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뜨거운 감응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며 그의 시와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 임종성(林鍾成): 1977년 에 「새벽바다」「자정」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땅뺏기」「숨쉬는 상처」등   이혜선 시인의 시-「나를 만난다-반파 유적지 母系氏族村에서」「고조선 빗물」   탐스런 젖무덤 실한 엉덩이 떡 버텨누운 자궁속으로 속으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만나는 눈빛 하나   시간의 끝에서 다시 끝끝까지 걸어들어가 반짝이는 꽃빛 하나 그립고그리운 너를 만난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어머니 언제까지나 그리운 그이름을 만난다   꽃이슬 반짝이는 새아침의 붙잡을 수 없는, 핏줄속에 돌고있는 그이름을 만난다   억겁 후의 이름을 돌고있는 그별을 만난다 ---------「나를 만난다-반파 유적지 母系氏族村에서」전문   한밤 내내 잠들지 않고 너 그리움으로 잠들지 않고 비가 되어 내린다. 한밤 내내   검은 땅 위의 나를 흔들어 나 빗속에 나와 서면 팔 벌린 네가 빗물이 되어 온다   마음하늘에 꽃 한 점 없어도 어둔 촉각소리 어디서 샘 솟아 그리움 되는 빛   날새 날갯죽지도 잠 못드는 마을 마다 짚단베개 고이고 잠을 청하랴   빈 뼈 속속들이 태우며 그대 지금 가고 없는 고조선 사람아 ----------------「고조선 빗물」전문   민족이니 역사의식이니 하는 사고思考의 산물들은 언어로 표현될 때 하나의 개념이나 관념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같이 느껴지는 현재의 시간도 관념이 아닌 생생한 감각으로 건져 올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 잠겨있는 돌을 건져 올리는 것과 같다. 맑은 물속에서 물과 햇빛과 조화를 이루면서 황홀하게 빛나던 수석水石은 물 밖으로 나와서 물기가 마르는 그 순간에 이미 물속의 돌멩이가 아닌 메마른 지상(관념)의 돌멩이로 변하고 만다. 사실 우리들이 시 속에서 현실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며 역사이고 가상적인 현실이며 역사일 뿐이다. 어디에도 지나간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로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관념이나 지식으로 변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수보리에게 “과거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인의 지극한 염원은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다. 이혜선 시인은 어느 날 반파 유적지 모계씨족촌母系氏族村에서 고 했다. 그 만남은 우리들 핏줄의 실체와의 만남이고 본질적인 만남이다. 그는 그 만남을 생명의 본적지며 원형인 여성의 자궁 속에서 이루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생동하는 언어로 잡아내고 있다. 그 현실은 그의 역사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다. 물속의 돌멩이같이 물과 햇빛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황홀한 꿈의 현실이다. 이런 역사의식에 몰입해 있는 이혜선 시인은「고조선 빗물」에서는 라고, 한밤 내내 잠들지 않고 고조선古朝鮮 사람과 만나는 환상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의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의 현형現形이다. 그 그리움의 원초原初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체험과 사유의 세계를 탐구해야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움의 세계가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데서 약간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 과거지향의 의식(꿈)은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상실되었던 자궁내의 생활에 대한 재귀 본능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그리움과 꿈의 세계는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 회복과 자기세계의 재발견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그리움의 원형세계原形世界로 나타나는 현실(환상)은 본래적 자아의 회복과 재생에 대한 지향이며, 환상과 상징(이미지)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 확인된다. 민족의 역사의식은 민족이 위기를 당하였을 때 더 끈질기고 강하게 발현되는데, 그 원인도 이런 자기회복과 재생의식에서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이혜선 시인의 역사의식의 시 속에는 자기발견의 깊은 내면 의식이 들어 있어서 독자들을 역사의 세계로 안내하고 때로는 독자들 스스로 자기의 원형을 찾아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나는 그의 시편들 중 역사의식에 젖어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을 만난다.「치술령 돌어미」에서는 신라시대 박재상 아내의 한恨을 만나고「서라벌 바람은」에서는 나라를 지키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소리에 담긴 염원을 듣는다. 그 한恨과 피리 소리는 과거의 역사를 뛰어넘어서 오늘의 현실로 다가오고 들려온다.   *이혜선(李惠仙): 1981년 ,시문학>에 「돌문」「나를 만남」「지장보살」「갈대밭 머리」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 「神 한 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등   * 월간 2006년 10월 호에 발표
41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6> / 심 상 운 댓글:  조회:211  추천:0  2019-07-12
문효치 시인의 시-「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觸手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 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전문   나는 이제 천년千年의 무게로 땅 속에 가 호젓이 눕는다.   살며시 눈감은 하도 긴 잠 속 육신은 허물어져 내리다가 먼지가 되어 포올포올 날아가버리고,   그 자리에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 한 덩이의 푸르른 허공이 되어 섬세한 서기瑞氣 로 남느니.   너는 이 때에 한 채의 현금玄琴del 되어 빛깔 고운 한 가닥 선율旋律이 되어 안개처럼 멍멍이 젖어 들어오는 그리운 노래로나 서리어 다오.                 -----「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전문   문효치 시인의 시편 중에서 초기의 시에 속하는「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는 독자들에게 허공에 떠도는 무수한 사랑의 촉수를 상상하게 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물게 한다. 그러면서 “허공에 태어나/수많은 촉수觸手를 뻗어 휘젓는/사랑이여.//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가서 불이 될/온 몸을 태워서/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라는 절절한 사랑의 감성언어가 품고 있는 환상의 이미지는 허공에 떠도는 혼령들의 슬픔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혼령들이 안고 있는 한恨을 풀어내는 시인의 간절한 기원祈願의 언어-“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의 반복은 주술적인 비의秘義를 담고 있는 주문呪文 같이 독자들의 가슴에 묘한 울림을 남긴다. 그래서 그 사랑은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생명의 무한한 기운으로 연결되고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이렇게 허공에 떠도는 생명의 기운을 포착하여 간절한 언어로 형상화한 그는,「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에서는 사후의 세계를 구체적인 감각언어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죽음 또는 사후死後의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은 삶의 애착愛着이 만들어내는 환타지다. 그 환상의 이미지는 오랜 침묵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역사와 함께 죽음의 신비감을 드러낸다. 1971년 충남 공주시 금성동(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일간 신문에 발굴현장의 사진이 크게 보도되었을 때, 내가 가장 경이롭게 느낀 것은 벽돌로 쌓은 무덤 안벽에 놓여있는 등잔과 등잔에서 나온 그을음이 벽면에 까맣게 남긴 흔적이었다. 그 생생한 흔적은 천년의 시간을 현재와 같이 착각하게 했으며, 무덤이 죽은 이들의 현실玄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실居室같이 생각하게 했다. 왕은 동쪽에 왕비는 서쪽에 옻칠한 목관에 누워 있는데 나무 두침頭枕을 베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무덤을 치장하고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영생을 기원하는 고대 한국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것은 극소수의 권력층들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사후의 세계에서까지 누리고 싶어 하는 분묘양식墳墓樣式의 구조라고 생각되지만, 그 신비한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문효치 시인은 당시의 경이로움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현지답사를 오랜 동안 집중적으로 했으며 그 결과가 연작시 백제시편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한다. 그 백제시편 중「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은 고대한국인의 영생의 염원을 죽은 무령왕의 독백으로 담아낸 시다. 죽어서 육신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도 나의 영혼은 “한 덩이 푸르른 허공”이 되어서 서기로 남을 것이니 너(사랑하는 이)는 내 옆에서 한 채의 현금玄琴이 되어서 그리운 노래로 서리어 달라는 것이 이 시의 중심 내용이다. 죽어서도 그 죽음을 거부하는 정신, 죽음을 삶으로 환원시키려는 의지는 어쩌면 한국인의 독특한 원형질을 형성하는 유전인자인 것 같다. 그래서 ”살며시 눈감은 하도 긴 잠 속/육신은 허물어져 내리다가/먼지가 되어 포올포올 날아가버리고,//그 자리에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한 덩이의 푸르른 허공이 되어/섬세한 서기瑞氣 로 남느니.//너는 이 때에 한 채의 현금玄琴이 되어/빛깔 고운 한 가닥 선율旋律이 되어/안개처럼 멍멍이 젖어 들어오는/그리운 노래로나 서리어 다오.“라는 구절은  몇 번을 거듭 읽어도 매력적인 맛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의 맛과 의미가 한국인의 독특한 감성과 잠재의식潛在意識에 닿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감성과 의식意識을 잘 드러낸 문효치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읽으며 그의 유현幽玄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 문효치(文孝治): 1966년 에 「산색」「바람 앞에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연기 속에 서서」「무령왕의 나무새」등 다수    이하석 시인의 시-「못 2」「투명한 속 」   그들은 녹슨 몸속에서도 여전히 쇠꼬챙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깃든 어느 곳에서든 부스럭거리며 그들은 긁고 찌른다. 흙 속, 헐어버린 건물 안, 이전해버린 공장의 빈 터, 폐쇄해버린 술집의 판자 틈, 버려진 구석 어디에서나 그들은 내팽개쳐진 채, 나무든 흙이든 풀이든 바람이든 강철이든 지나가는 쥐의 발목이든 찌른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 속에 빠지면서 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 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 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 그는 침을 숨긴 채 물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 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 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못 2」전문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 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부스러기 흙 속으로 깃들어 더욱 투명해 지고 더 많은 것들을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들어 간다. 비로소 쇠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투명한 속」 전문   이하석 시인의 시편들에서는 알레고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풀, 흙, 쇠꼬챙이, 못, 건물” 등의 사물어는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다. 따라서 독자들이 그의 시에서 1차적으로 만나는 것은 어떤 관념이 아닌 현실現實이며 사물事物이다. 이 현실과 사물은 시속에서 비약하지 않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과학적인 사실성을 확고히 구축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난해難解에서 벗어나 단순 명쾌한 의미를 드러내고 시대의 조류潮流에도 쉽게 마모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사실적인 작시법作詩法은, 21세기 시의 키워드를 “사실, 생명, 현장”에 두고 그 중심에 사물을 놓으면서 관념이 배제된 “적나라한 사물의 실제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에서 시의 새로운 방법론를 모색하는 문덕수 시인의 시론 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보인다. 이하석 시인의 이런 사실에 바탕을 둔 시적 감수성은 미세한 시각으로 사물과 현장을 응시하고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는 힘을 발휘한다. 그는 또 언어의 배경에 깔려 있는 관념의 그림자들을 지우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도 사물을 통해 함축적인 의미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관념과 탈-관념의 경계선에서 신선한 감각을 드러낸다.「못 2」에서도 그의 시선은 못의 다양하고 사실적인 일생을 끝까지 추적하면서 날카롭고 냉정한 관찰의 눈을 번득인다. 그러나 그 추적의 끝부분에서 환기시키는 것은 따스하고 온화한 화합의 감성이다. 그 감성은 녹슨 몸속에 쇠꼬챙이를 간직하고 어디서나 무엇이나 긁고 찌르던 못도 개울 물 속에 누워서 꼬부라진 쇠꼬챙이로 변해 가고 드디어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못의 일생은 쇠꼬챙이 같은 분별심分別心을 가지고 태어나 시비하고 싸우면서, 이웃들을 긁고 찌르면서도 자신만은 꼿꼿하다고 자부하면서, 그것이 부질없는 것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관棺 속에 누워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시의 구조가 인공人工과 자연으로 대비되어 있기 때문에 인공(문명)의 귀착지歸着地는 결국 자연일 수밖에 없다는 문명비판의 시각으로도 읽혀진다. 그의 시에 대한 이런 해석과 독법讀法은 독자들의 개인적인 체험과 사고思考의 기능이 만들어 낸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런 주제의식(의미추적)과 함께 이하석 시인만의 독특한 사물성의 감성이 안고 있는 현장중심의 시의식이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 속에 빠지면서/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그는 침을 숨긴 채 물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사실적인 인식과 시의 기법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판단된다.「투명한 속」은「못 2」와 대조적인 정서가 느껴진다. 그것은 광물성인 유리부스러기를 하나의 생명체로 변화시키는 감성의 작용이 만들어 낸 따뜻한 감각이 발현發顯하는 이미지다. 이 시에서 쓰인 감성적인 언어들-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유리부스러기의 날카로운 칼날들의 의미를 지우면서 인공과 자연의 화합을 유도한다. 그래서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비쳐들어 간다. 비로소 쇠조각들까지/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라는 끝 구절의 참신한 생명적인 이미지는 은은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 감동은 그의 열린 마음이 자연과 화합하는데서 솟아오르는 울림으로 이 시의 정신적인 깊이가 상당함을 감지하게 한다. 나는 이하석 시인의 시편들을 1976년 봄에 발간된 동인지「자유시自由詩」에서 처음 읽었다. 그리고 “시는 우선 자유로워야 함을 믿고 있다. 모든 것에로의 자유, 혹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어쨌든 우리는 모든 사물들에 대하여, 모든 구조들에 대하여, 모든 기능들에 대하여 자유롭기를 원한다.”는 동인들의 에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의 시편과 명제가 얼마나 서로 부합하는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명제를 시의 내적 과제가 아닌 당시의 억압적인 현실에 대응하는 정치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하석 시인의 언어가 현실문제나 고정관념의 무게, 고정관념의 그늘에서 홀가분하게 탈출하여 자유로운 언어공간을 마련한 것에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의 시편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 이하석(李河石): 1971년 에 「관계」「분위기」「이중의 처단」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백자도(공저)」「투명한 속」「김 씨의 옆얼굴」등 다수   강윤수 시인의 시- 「산(1)」「앨범에서」   말없음표다. 괄호 밖의 초연한 감탄부호다. 더 수식할 수 없는 간결체다. 오늘 같이 저 무거운 坐定이 두려운 때 으늑히 산마루로 오르던 나의 單語들. 單語들은 중턱에서 헐떡거리다가 점점이 흩어져 쉼표만 남기고 단 한줄기 문장도 이루지 못했다.   山은 山만이 아는 非文이었다.         ---------------「산(1)」전문   죽은 정자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노인의 아이 적, 할아버지 곁에 다시 자란 정자나무 그늘에 앉아 무심히 하늘을 보는 노인의 눈 렌즈의 셔터를 누르면, 더 이상 흐름은 멎을 것도 같은데 앨범 속 하나 더 할아버지의 무덤은 생겨나고, 산소길 등성이 정자나무 길 끝에 먼빛으로 새삼 태어나 호돌호돌 걸어오는 아이들, 아이들 앞에 밟히는 풀잎 같은 미련을 찰칵 셔터를 누르며 서 있는 또 다른 앨범 속의 아버지.             ---------「앨범에서」전문   이 세상 대부분의 시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화평하게 하거나 세속적인 깨달음을 주는데 익숙하고, 독자들도 그런 시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무질서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이론에 시인과 독자들이 동의하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무엇보다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그 설득의 원천은 세상을 지배하는 관념이 만들어 놓은
40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5> /심 상 운 댓글:  조회:188  추천:0  2019-07-12
신규호 시인의 시- 「산책기散策記․1」「숯처럼」    길 위에 하나, 둘 흩어진 낙엽을 따라가 보면, 어느 덧 관산(冠山) 자락에 이르네. 후미진 산길을 밟고 오르면 매천(梅泉) 약수가 나오고, 거기 맑은 샘이 사철을 두고 반짝이며 밤낮으로 흐르네.     내 마음도 그러한 것. 저 깊은 심령의 골짜기에 숨어 남 몰래 샘솟고 있는 청정한 심성도 사시사철 밤낮으로 소리 없이 흘러 목마른 자를 기다리고 있나니.     내 할 일이란, 심신의 고통과 싸우고 싸워, 산짐승처럼 헐떡이며 가슴 속 타오르는 갈증을 부여안고, 영혼의 새 벽 샘가에 달려가 목을 축이는 짓이나 할 뿐 아닌가. *관산冠山: 관악산의 약칭                        ---------「산책기散策記 ․ 1」전문 한 백년 숨 쉬면서 하늘을 태우고 태워 목숨은 한 덩이 어둠이 되는가. 뻗쳐오르는 가지와 잎들이 춤추고 버리는 허공은 새카만 침묵이 되어 남고, 불타는 시간 속에서 번쩍이는 꿈은 차디찬 재 되어 흩어지는가. 젊음의 불꽃이 한바탕 사루고 버리는 텅 빈 공간. 돌아가 안길 수밖에 없는 대지의 품안에서 다시 윤회의 사슬에 매인다 해도 지워버릴 수 없는 이 삶의 느꺼움은 어쩔 것인가. 풀잎의 춤과 벌레의 울음이 한 생애를 설레이게 하고 밤하늘 별들의 눈짓이 이끌어 온 푸르른 목숨, 그 추억 한 덩이 아직 남아 타오를 시간을 움켜쥐고 있는 이 새까만 안타까움을 어쩔 것인가.                              ------「숯처럼」전문   형이상학 시를 시의 이상으로 생각하고 천착해 온 신규호 시인은 형이상학 시의 근원을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찾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유한하고 불완전한 언어로 무한하고 유현한 사물의 숨은 진실을 밖으로 끌어내어 표현함으로써, 고정관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미명에 갇혀 있는 새로운 진실(그것조차 또 다른 관념이지만)을 창출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 정신의 혁명이며, 새로운 가치 창조의 길이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일이다. 언어와의 싸움 없이 인간 구제나 새로운 세계의 창조는 그러므로 불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그의 견해는 그만의 독창적인 사유의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언어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불완전한 언어로 무한하고 유현한 사물의 진실을 끌어내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도구가 되고, 언어와의 싸움에서 획득한 신선한 정신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그의 시어들은 항상 긴장감에 싸여 있으며 지성과 감성의 조화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산책기散策記 ․ 1」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은 관악산 산행의 체험이지만 자신의 정신적인 지향점을 시적 형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산행 중에 발견한 사철 반짝이며 흐르는 매천(梅泉) 약수는 형이하학적인 물에서 형이상학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심령의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승화되어서 인간의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는 영혼의 생명수로 창조되고 있다. “내 할 일이란, 심신의 고통과 싸우고 싸워, 산짐승처럼/헐떡이며 가슴 속 타오르는 갈증을 부여안고, 영혼의 새/벽 샘가에 달려가 목을 축이는 짓이나 할 뿐 아닌가.”라는 끝 구절에서 그런 의미가 분명하게 감지된다. 이 구절은 자신의 삶의 정신적 내면을 드러내는 갈망의 행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일깨우고 있다. 이렇게 그의 형이상학적 시는 설득적인 기능을 내포한 종교적인 높은 의식의 세계를 지향한다.「숯처럼」은 그의 정신적 갈증을「산책기散策記 ․ 1」보다 더 강하게 드러내면서 인생의 과정을 나무가 숯이 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뻗쳐오르는 가지와 잎들이/춤추고 버리는 허공은/새카만 침묵이 되어 남고,/불타는 시간 속에서 번쩍이는 꿈은/차디찬 재 되어 흩어지는가.”라고 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의미를 절절한 언어로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워버릴 수 없는 삶의 느꺼움은” 어찌해야 하느냐고 독백조로 호소하고 있는 데, 그 호소가 이 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한 생애를 설레이게 하고/밤하늘 별들의 눈짓이/이끌어 온 푸르른 목숨,/그 추억 한 덩이 아직 남아/타오를 시간을 움켜쥐고 있는/이 새까만 안타까움을 어쩔 것인가.”라고 쉽게 허무 쪽으로 기울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는 그의 싱싱한 감성의지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를 담아내고 상징하는 것이 이 시에서 숯이다. 그 숯은 객관적 상관물로서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타오르는 새로운 삶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숯은 이 시에서 삶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숯이 되어 있다가 어느 날 다시 빨갛게 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숯은 그가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산책기散策記 ․ 1」과 「숯처럼」을 읽으면서, 분출하는 감정을 지성으로 통제하면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 감성의 싱싱함을 잘 살려내는 정통적인 모더니즘 시의 참맛을 한껏 느껴본다.     *신규호(申奎浩):1966년 에 「탄炭」「화가의 집」「등뼈」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입추이후」「사람아 사람아 슬픈 사람아」「맨발의 사람」「어둠의 눈」「누워서 가는 시계」「보랏빛 마음」   김용언의 시- 「청기와집 추억」「들개의 울음」   까까머리 어린 시절 좋아하던 계집아이는 청기와 집 높은 담 안에 살았다 발끝만 쳐다보다 얼굴 한 번 못 보았다 할 말이 있긴 있는데 언제나 청기와의 높은 담이 가로막았다   청기와 뜨락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 허기진 가슴으로 휘파람 불면 뜨락에 얼비치는 계집아이 모습 불을 만지듯 질겁을 하고 언덕을 내려 왔다 그날 밤은 알밤을 새며 불안에 떤다 말을 해야 하긴 하는데 알맹이가 잡히지 않는다   좋아하던 계집아이는 철들어 떠나 버리고 불혹이 되어 주머니에 넣어둔 말 한마디 햇빛 한 번 못 본 채 숨어 있구나                          ------「청기와 집 추억」 전문 들개의 울음이 허기진 밤하늘에 흔들린다 피붙이를 찾는 소리라 했고 고독을 위한 깃발이라 했다 울음 이외엔 존재의 가치가 없는 사막 사람들도 들개처럼 울어야 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 절실한 것은 울음이었다 푸른 빛깔의 고독을 물리칠 수 있다면 밤을 지새며 울고 싶다   귓속에 앉은 오물이 들개 울음 속으로 끌려나가고 모래알이 침몰한다 사막을 빠져나가는 날 귓속에는 송곳같은 바람소리 햇살의 흔적만 남으리라          -------「들개의 울음-사막에서 97-4」전문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추억은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은 보석이다. 그 보석은 이별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기 때문에 더 은은한 광채가 난다. 만약 그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면 그 추억은 단순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무지개처럼 떠 있다가 희미하게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추억은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아쉬움이라는 미련을 안고 더 오래 남는 것이다. 김용언 시인의 시「청기와집의 추억」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보석을 꺼내 놓은 것이다. 시인은 그 사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아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에서 지성이 서정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끝 구절 “햇빛 한 번 못 본 채 숨어 있구나”에서 감탄형 종결어미가 들어 있지만 그것은 참다 참다 터져 나온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느낌의 진동이 강하게 와 닿는다.“청기와 뜨락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허기진 가슴으로 휘파람 불면/뜨락에 얼비치는 계집아이 모습/불을 만지듯/질겁을 하고 언덕을 내려 왔다/그날 밤은 알밤을 새며 불안에 떤다/말을 해야 하긴 하는데/알맹이가 잡히지 않는다“라는 청기와 집의 예쁜 소녀와 내성적인 시골 소년의 짝사랑. 둘 사이에 어떤 작은 사건도 없었던 벙어리냉가슴의 일방적 사랑. 그 사랑을 불혹의 나이에도 간직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은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이 시의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것은 황순원의 소설「소나기」나, 알퐁스 도데의「별」과 같이 불멸하는 인간 본연의 푸른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들개의 울음-사막에서 97-4」은 사막이라는 자연환경이 배경이 되어서 인간존재의 의미조차 내세울 수 없는 원시의 경험을 드러내고 있다. 그곳에서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래서 울음이 더 절실한 전달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전하고 있다. 김용언 시인의 이 시는 그런 의미가 그의 생생한 직접 경험에서 분출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힘을 갖는다. 관념이 아닌 체험의 언어는 단단한 돌멩이 같아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쉽게 마모되지 않는다. ”들개의 울음이 허기진 밤하늘에 흔들린다/피붙이를 찾는 소리라 했고/고독을 위한 깃발이라 했다/울음 이외엔/존재의 가치가 없는 사막/사람들도 들개처럼 울어야 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절실한 것은 울음이었다/푸른 빛깔의 고독을/물리칠 수 있다면 /밤을 지새며 울고 싶다“는 그의 체험담은 그래서 느낌의 진동이 오래 남는다. 시에서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김용언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사실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실을 전하는 그의 시적 방법론에 동감했다. 그리고 ”푸른 빛깔의 고독“ 이라는 새로운 감성의 단어가 어떤 상태의 고독을 의미하는지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달빛이 푸른 바다와 같이 넘치는 사막 한 가운데서 느끼는 생존의 위험과 외로움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자연,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인간 존재의 원초적 고독이라고 생각된다. 그 고독은 김현승 시인이 깊은 명상을 통해서 발견하고 추구한 절대고독과도 일맥상통하는 고독이다. 따라서 그 '푸른 빛깔의 고독'은 들개 같은 울음을 울게 하여 존재의 절망을 극복하는 길을 열어주는 고독이 될 수도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나는 리쳐즈(Richards)의 예술적 고민을 암시하는 시구詩句,'개성은 고독 속에서 길러내 지고/성격은 세파 속에서 이루어지다.'를 떠올려보았다.   *김용언(金勇彦) :1978년 에「눈」이 추천완료 되어 등단. 시집: 「돌과 바람과 고향」「숨겨둔 얼굴」「서남쪽 끝」「너 더하기 나」「휘청거리는 강」「사막여행」등   김용오 시인의 시- 「하늘」「눈사람과 장미」   봄밤의 폭신한 요 위에서 남성의 체온이 엎드린다. 하늘은 들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는 3월의 농부. 나는 헐떡거리며 짐승처럼 엎드려 겨울을 벗는다. 강 건너 불빛들도 스르르 두 눈을 감는다. 처녀를 주고 울던 입이 큰 사랑이 떠오른다. 서쪽에서 마른번개가 번쩍거리는 자정 갑자기 깊고 먼 육신의 입구 포근한 계절의 배꼽 밑으로 촉촉이 열리는 들의 마음. 파란 전기처럼 떨고 있는 클리톨리스. 하늘은 씨앗을 물으며 음모陰毛의 이랑을 적신다. 희멀건 엉덩이로 생명의 방아를 깊이 찧는다. 뜨거운 바람들이 아, 아 흐느끼듯 몇 번이나 흙의 자궁子宮 속을 길게 지나가고 어디서 마을의 벽시계가 새벽을 알린다. 강 건너 불빛들이 하나둘 다시금 눈을 뜬다. 언제나 하늘은 안개로 일어나서 들의 젖가슴을 살그머니 빠져나가는 3월의 농부. 사랑을 벗어주고 하얗게 웃던 알몸이 떠오른다. 나는 머리맡에 놓아둔 강물소리를 천천히 마신다.                                      ------「하늘」전문 열리는 먼동을 바라보며 빌려 입은 사람의 육신이 허물을 벗듯 한꺼풀씩 벗고 있었습니다. (나는 태양의 혓바닥 위에서 아이스크림처럼 허물어지는 벌거숭이) 옛날집을 찾아 땅 아래로 내려가는 눈부신 영혼의 물소리가 졸졸졸 빛나 보였습니다. (나는 향긋한 뿌리의 유혹 앞에서 갈 길을 놓쳐버린 구름) 바위틈에 기대어 봄을 애태우는 장미의 갈증을 며칠 동안 깊숙이 밀어 넣고 흔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달콤한 여인의 살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가는 한 마리 물배암) 허벅지를 더듬으며 올라가는 아, 사랑의 가지 위로 푸른 정액精液이 돌고 입을 여는 바다조개, 주먹만한 햇덩이, 몇몇 송이 비릿한 꽃망울을 마알갛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눈사람과 장미」   성性은 이 세상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에너지 원源이다. 그래서 성을 떠나서 이 세상의 이치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꽃이 피고 꽃밭에 나비가 날아들고 열매를 맺는 자연현상은 성의 멋진 파노라마다. 들판의 짐승들은 물론 물고기가 암수 짝짓기를 하고 돌 틈에 알을 낳아서 수정하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 성생활이다. 그리고 그 성은 생명체들에게 최고의 쾌락과 풍요를 부여한다. 따라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예술작품들이 추구하는 사랑과 행복은 성性의 푸른 들판에 피어난 향기로운 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 최고最古의 시라고 알려져 있는 4000년 전 수메르 여사제女司祭의 시에도 “내게 소중한 그대여, /그대의 멋진 모습과 달콤함에 빠져버렸다오./그대에게 사로잡힌 나를, /그대 앞에 떨고 서있는 나를 침실로 데려가주오.”라는 적극적이고 대담한 애정표현이 담겨있다. “얼음 위에 댓잎자리를 깔아 님과 내가 얼어 죽더라도” 정 둔 오늘 밤이 더디 새기를 비는 고려시대의 속요「만전춘滿殿春」의 적극적인 애정표현도 사랑의 원천이 성에 있음을 드러낸다. 화산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18세기 중반이후 발견돼 발굴에 들어갔을 때 관계자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성을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한 벽화, 부조, 조각 등 외설적인 유물이 대거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유물들이 많다. 문자를 모르던 시대, 사람들은 벽화나 청동기에 그림으로 성생활을 기록했다. 특히 신라인들은 성에 대해 심하다 싶을 만큼 개방적이어서 성 관련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섹스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토우, 과장된 성기나 자위행위, 출산과정을 묘사한 것 등은 무덤의 부장품인데도 표정이 매우 밝다. 고대 신라인들은 사후의 세계에서도 현세와 같은 쾌락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성을 자연스레 표현한 것이다. 이런 성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쾌락과 종족 보존에 대한 욕구, 즉 인간의 성에 대한 본연적 가치와 갈망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김용오 시인의 시편들은 그런 면에서 볼 때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생명의 에너지 원源에서 출발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도덕이나 사회규범 등 가식적인 관념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인간생명의 원적지에 들어가서 미적 언어로 인간의 순수한 욕망을 싱싱하게 담아내고 있다.「하늘」에서는 하늘은 남성을, 땅은 여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하늘은 씨앗을 물으며 음모陰毛의 이랑을 적신다./희멀건 엉덩이로 생명의 방아를 깊이 찧는다./뜨거운 바람들이 아, 아 흐느끼듯/몇 번이나 흙의 자궁子宮 속을 길게 지나가고/어디서 마을의 벽시계가 새벽을 알린다.”라고 자신의 개인적인 상상과 자연현상을 교직交織하여 복합적인 구성으로 성행위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그의 시 세계는 자연의 원리를 드러내면서 인간의 행복(쾌락)을 미래가 아닌 현재의 행위에서 추구하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점에서 현세의 행복을 내세까지 이어가려는 고대 신라인들의 염원에 맥락이 닿는다.「눈사람과 장미」는 비유의 언어들이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바위틈에 기대어 봄을 애태우는 장미의 갈증을 며칠 동안/깊숙이 밀어 넣고 흔들어 주었습니다.(나는 달콤한 여인의 살 속에서/스멀스멀 기어가는 한 마리 물배암)/허벅지를 더듬으며 올라가는/아, 사랑의 가지 위로/푸른 정액精液이 돌고/입을 여는 바다조개,/주먹만한 햇덩이,/몇몇 송이 비릿한 꽃망울을 마알갛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성적 쾌락의 절정을 감지하게 한다. 그 쾌락은 어떤 의도도 목적도 없는 순수한 육체의 쾌락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생명력을 갖는다. 그것은 또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같이 정신의 해방감解放感을 동반하여 제도와 이념, 관습, 윤리 등에 억압되고 굴절된 성의 세계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요인을 만든다. 그리고 독자들을 그의 독특한 정신과 향기로운 성감각의 세계로 유인한다. 나는 김용오 시인의 대담한 성 묘사가 관능에만 머물지 않고 정신적으로 승화되기를 바라며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간다.   *김용오(金容五): 1982년 에 「들」「봄비」「개나리」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 「신의 수염」「동화작용」「두 사람에 관한 성찰」「멀티오르가슴」등                                                                                                                      2006년 8월호 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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