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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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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0> / 심 상 운 댓글:  조회:1115  추천:0  2019-07-12
*월간 2007년 1월호 발표                                 손해일 시인의 시-「꿈꾸는 돌」「바람개비」   돌밭에 서서 나도 하나의 이름없는 돌이 된다   세상에  흔하디흔한 게 돌이지만 돌다운 돌도 드물고 흔하디흔한 게 사람이지만 사람다운 사람 또 귀하다   알게 모르게 속세의 이끼도 조금씩 묻고 물살에 부대껴 모래알처럼 작아지는 정충精虫 살아 있는 날들의 이 헛헛한 목마름   네가 내게로 와서 명석名石이 되었듯이 나는 네게로 가서 이름없는 돌이 된다 먹돌의 진한 그리움으로 시조始祖새처럼 비상飛上을 꿈꾸며 -----「꿈꾸는 돌」전문   *바람독에 서서 강강한 바람을 맞는다.   속소리나무숲 칙칙한 어둠을 따라 눈발속에 날아간 당홍연唐紅鳶 속절없는 바람을 맞는다.   마파람, 높새바람, 하늬하늬 하늬바람, 우리가 사는데 이유가 없듯이 무시로 변신變身하는 너의 변덕과 영원永遠까지를 사랑하려 한다.   너 없이 내가 바람개비일 수 없지만 너를 거스르지 않고는 돌지 못하는 나의 모순矛盾   전폭적인 내 사랑으로도 바람난 바람들은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꽃물 같은 상채기가 혓바늘로 돋는다. 머무르고 싶다. 바람개비. 역마살.   오오 누가 나에게 청청淸淸한 바람을 다오. 나도 한 줄기 힘찬 흐름이 되어 정녕 누군가의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거니. ------「바람개비」전문 *바람독: 바람막이가 전혀 없는 곳. 전라도 방언   화창한 봄날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녔는데, 깨어보니 나비가 아니고 장자莊子 자신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내가 된 것일까.” 꿈과 현실이 헷갈렸다는 ‘장자莊子의 나비의 꿈’(호접몽·胡蝶夢)‘은 단순한 우화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인 상상력의 측면에서 많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진리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따라서 무상無常은 무엇으로 변신하고 싶은 인간의 꿈을 담고 있다. 여기에 무상과 허무의 차이가 있다. 허무는 현재에 집착하는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손해일의 시편들 속에는 무상의 꿈이 들어 있다.「꿈꾸는 돌」에는 돌밭에서 시인 자신이 하나의 이름 없는 돌이 되어서 사는 꿈을 꾼다. 그리고 이름 없는 돌을 명석名石으로 만들기도 한다. 나와 돌의 이런 자리바꿈은 시인의 마음이 자연과 일체가 되어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정신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래서 라는 끝 구절은 깊은 의미로 다가 온다. 존재의 본원本源에 대한 이런 그리움은 그의 형이상학적인 정신의 영역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조始祖새처럼 비상飛上을 꿈꾸는’ 시인의 정신은 어떤 고정관념에 묶이기를 거부하는 장자莊子의 자유로운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바람개비」에도 시인의 꿈이 들어 있다. 그 꿈은 자연이 아닌 세속 속에서의 꿈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서로서로 관계 맺기를 하며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다. 그래서 인간人間이라는 단어 속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바람 속에 서서 무시로 변하는 것들과 영원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변하는 것들과 영원한 것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를 바람과 나의 관계로 환원하여 바람과 부딪쳐야만 돌아가는 바람개비 같은 나의 운명을 모순矛盾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순 속에서 모순을 사랑하며 살아가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는 그 깨달음을 라고 오도송悟道頌같이 노래하고 있다. 바람으로 변신하여 누군가의 바람개비를 돌리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열어 준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의미는 물론 그 존재들의 관계를 상승시킨다. 그것은 나와 너라는 분별 의식에서 벗어날 때 이 세상은 무한이 넓어지고 따뜻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손해일 시인의 초기 시편들을 읽으며 그가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근원을 잠시 엿보았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세계의 아름다움에 촉촉이 젖어보았다. *손해일(孫海鎰): 1978년 에 「벌거숭이 노래」「빛의 탄주」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흐르면서 머물면서」「왕인의 달」등   최두석 시인의 시 -「심봉사」「성에꽃」   해방 조국에 돌아온 일가족이 굶어 죽은 꼴 볼 수 없어 심처이가 외국 뱃놈과 거래하듯 몸을 판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밀가루 포대로 산 남자는 흑인 로이 대위 남동생을 통역으로 취직까지 시킨 대위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위가 귀국하던 날 그녀는 늙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떨어졌다 거울 뒷면 수은을 긁어 먹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검둥이 아이를 데리고 진해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동두천으로 그녀는 이른바 양색시였다 미군들은 미제 물건 뒷거래한 돈으로 그녀를 데리고 살았다   삼단 같은 머리채 성긴 백발로 변하고 이제 현역에서 은퇴했으되 한반도 미군 철수는 도무지 꿈도 꾸지 않는 할머니, 누가 그녀의 생애에 돌을 던지랴 이 땅의 심봉사인 사내들이여        ---------「심봉사」전문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보고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숨결이던가 일 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성에꽃」전문    한 시대의 성실한 관찰자로서의 시인은 그 시대를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는 두보가 석호촌에 갔을 때 한 밤중 벼슬아치가 찾아와서 백성을 강제로 징발해 가는 이야기를 담담히 서술한 시로서 1천 5백여 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도 울림을 준다.1930년대 시인 백석白石의 시편들이 주는 감흥도 카메라로 동영상의 사진을 찍 는 듯한 그의 냉정하고 날카로운 현실관찰과 언어표현의 경제성에서 우러나온다. 그의 시 은 압축된 서사 속에 한 여인의 서러운 일생이 부각되어 있다. 이때 시인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고 그려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시인이 그 속에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넣고 의식을 넣으면 오히려 사실의 생생한 전달에 방해가 되고 시의 힘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최두석 시인의 시편들도 시대를 관찰하는 그의 눈이 발굴한 사실들의 생생한 이미지가 가슴에 박힌다. 그의 눈은 시대의 힘이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삶을 짓밟으며 그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희생된 개인의 삶에 연민의 정을 보내는 시인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게 한다.「심봉사」는 고대 소설 의 패러디가 시적 효과를 주고 있지만 시인의 그런 의도적인 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공주로 살아가야 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사실적 서사 속에 한 시대의 삶의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는 서사는 한 시대의 냉혹한 삶과 연결되었으며 그것은 민족 공동체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끝부분에서 시인이 시의 주제를 의식하여 주관적인 감정과 해석을 넣은 것이다. 그것은 리얼리스트로서의 냉정함을 잃은 것으로 판단되어 아쉬움을 남긴다.「성애꽃」은 「심봉사」와 같은 계열의 ‘이야기 시’는 아니지만 과학적인 관찰, 언어표현, 시인의 의식이 깊이 있게 느껴진다. 새벽버스 유리창에 피어나는 성에꽃은 간밤에 사람들이 남기고 간 입김과 숨결이 공동으로 모아져서 만든 결정체라는 진술은 과학적으로도 타당성을 가지면서 이 시에서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무심한 사실의 현상에 불과한 성에꽃은 이 시속에서 시각적인 아름다음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공동체의 꽃으로 상승된다. 가 그것이다. 그 아름다운 성에꽃은 막막한 숨결들과 푸석한 얼굴들이 남긴 것이다. 그래서 그 꽃은 시대적 상징성을 내포하면서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의 꽃으로 재탄생한다. 이 시에는 1980년대의 아픔을 담으려는 시인의 의도가 들어 있지만 그것보다도 그 시대 서민들의 살아 있는 삶의 숨결이 전달되어서 거듭 읽혀진다. *최두석(崔斗錫):1980년 의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대꽃」「성에꽃」「임진강」「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등   백무산 시인의 시- 「달」「침묵」   도시는 달을 끄고 불을 밝혀 낮을 연장시킨다 언제 달을 봤던가 달은 정전돼 있었다   산들이 웅성거리며 달을 밀어 올리고 나는 오랫동안 캄캄한 산길에 있었다 오래 어둠에 둘러싸여 있노라니 마음속 깊은 골짜기가 열리고 아래로 흐르는 물이 보이고 그 물결 위에 달빛이 어린다   언제부터 잃어버렸을까 나의 반 대지의 반 세계의 반   달이 해의 잔해라면 저 하늘의 밤 별들도 문틈애 밀려오는 햇살에 부서진 작은 먼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밤의 표상은 저리 둥글고 낮의 배후는 저리 영롱하다 해는 살갗을 비추나 달은 희디흰 뼈를 비춘다   돌아보느니, 우리는 세상의 반만 가지고 살고 싸웠느냐 ---------「달」전문   나무를 보고 말을 건네지 마라 바람을 만나거든 말을 붙이지 마라 산을 만나거든 중얼거려서도 안된다 물을 만나더라도 입다물고 있으라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이름 없는 들꽃이 이름을 붙이지 마라 조용한 풀밭을 이름 불러 깨우지 마라 이름 모를 나비에게 이름 달지 마라 그들이 먼저 네 이름을 부를 때까지   인간은 입이 달린 앞으로 말하고 싸운다 말없는 등으로 기대고 나눈다 --------「침묵」전문   백무산은 198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시인이다.「만국의 노동자여」계열의 시편들은 그의 언어가 얼마나 격렬하고 날카로우며 한 쪽에 치우쳐 있는가를 섬쩍지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인간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계급적이고 투쟁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노동의 즐거움, 노동의 가치를 인식하기 전에 ‘노동’을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대립적인 계급의식의 눈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 그의 시는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할 수는 있지만 독자들에게 넓고 깊은 생각의 공간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와 선전에 의해서 흑 아니면 백, 어느 한 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에는 회색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시편에서「달」과「침묵」은 그의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어서 놀라움을 준다.「달」이 ‘관념의 시’에서 벗어난 ‘체험의 시’라는 것은 사상의 감옥 속에 갇혀 있던 그의 시작詩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시의 중심소재인 달은 아무런 관념에도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달이다. 시인은 그 무의미의 달을 보면서 비로소 생각의 중심점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제까지 세상의 반만 가지고 싸웠다는 것을 자성하고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게 된다. 이 시에도 도시의 불빛과 자연의 달, 해와 달에 대한 분별의식 등이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없다. 그는 다만 라고, 산 속의 어둠 속에서 그 어둠에 동화되어서 물아일체의 경지로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의 사색은< 밤의 표상은 저리 둥글고/ 낮의 배후는 저리 영롱하다/해는 살갗을 비추나/달은 희디흰 뼈를 비춘다>라고 하면서 여성적인 낮의 배후 즉 밤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그의 시에서 자연을 발견하게 하고 인간의 증오와 투쟁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을 고치게 하는 계기를 주는 것 같다.「침묵」은「달」보다 도 깊은 사색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을 자연 상태의 그대로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과의 대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의 언어를 통해서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침묵은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며 인간의 언어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공간이다. 그는 이 시에서 라는 명령조의 어투로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 단호한 어투에는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의 강한 의식이 들어 있다. 그 의식은 인간은 ‘인간의 관념’으로 자연을 인지하고 판단하려는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먼저 자연에게 말을 할 때, 그 순간 자연은 인간의 관념에 오염되어 버려서 자연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대화를 할 때에는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침묵 속에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의「꽃」에는 얼마나 건방진 인간의 자만自慢이 들어 있는지 알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백무산의 시「달」과「침묵」은 노동의 세계(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세계를 일깨워주는 시로서 거듭 읽힌다. *백무산(白無産): 1984년 를 통해서 작품 활동.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인간의 시간」「길은 광야의 것이다」등
4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9> / 심 상 운 댓글:  조회:1186  추천:0  2019-07-12
 *월간 2006년 12월호 발표                        최선영 시인의 시- 「해변海邊의 마을」「토요일土曜日 아침」   마을은 죽었다 바다에서 기어 나와 죽은 마을 해변에 빈 조개껍질처럼 누웠다   청춘이 빠져 나가버린 우리들의 잔해殘骸 도 파도가 거절하는 6월의 연서戀書도 모두가 여름이 목에 걸고 달아난 밀짚모자다   아쉬운 행여行旅의 길목에 겨울은 결코 서둘지 않는 귀먹은 우체통 이명耳鳴의 아픈 미로를 거쳐 미구에 봄의 사자는 도래하리라   그러나 아직은 식은 눈알의 인광燐光을 위해 무거운 칸타타는 들려오고 있다.          ----「해변海邊의 마을」전문 흰 벽壁은 나의 캔버스 한 폭의 신나는 추상화抽象畵를 던지며 일어나는 토요일의 건강한 안색顔色 아침은 하늘 높이 싱싱한 그네를 메어두고........... 잘 닦인 바깥 풍경風景은 활기 있는 안구眼球 속에 확대되어 빛나는 고전古典의 세계 큰 뉴스는 이웃집 소인제금가素人提琴家가 띄우는 호망의 선율 영롱한 비누방울이 되어 집집을 방문訪問한다 ---「토요일土曜日 아침」   시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 언어의 포장지에 감추어진 시인의 메시지라면 시와 산문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시의 의미는 매우 단순해진다. 그러나 독자가 상상의 들판에 나가 보물찾기하듯 각기 다른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면 시의 예술성은 그 의미의 개체만큼 확대된다. 그것은 시가 언어(의미)를 표현도구로 하지만 예술성(무의미)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예술성은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를 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그래서 시인은 언제나 시의 예술성과 의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존재가 된다. 현대시를 창작하는 시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최선영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먼저 감지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시인의 생동하는 의식이다. 언어를 감정의 늪 속에 함몰시키지 않고 객관화하려는 태도와 언어의  사물성事物性을 감성표현의 도구로 환원하는 그의 시적 연금술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를 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려고 한다.「해변海邊의 마을」은 시의 의미 쪽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시인은 그 의미를 객관적인 사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시의 예술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첫 연 “마을은 죽었다/바다에서 기어 나와 죽은 마을/해변에 빈 조개껍질처럼 누웠다”는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사건이다. 비록 그 다음 연 “청춘이 빠져 나가버린/우리들의 잔해殘骸”라는 구절에서 그 실체가 곧 해명되지만 이런 언어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상상은 입체적이며 구상적인 사물성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개성적인 상상의 공간을 구축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죽음을 여름→겨울→봄이라는 계절의 순환으로 인식하고 허무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것은 “아쉬운 행여行旅의 길목에/겨울은 결코 서둘지 않는/귀먹은 우체통/이명耳鳴의 아픈 미로를 거쳐 미구에/봄의 사자는 도래하리라”는 구절이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식은 눈알의 인광燐光을 위해/무거운 칸타타는 들려오고 있다.” 고 칸타타(Cantata)의 배경음악을 통해서 낙관적인 생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토요일土曜日 아침」은「해변海邊의 마을」보다 더 감각적이고 예술적이다. 이 시는 논리적인 구성에서 벗어나 집합적 구성으로 되어 있고 의미보다는 감각이 시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사건이 없고 이미지의 나열만 있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이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여 밝고 아름다운 꿈이 담긴 상상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런 장면에서 독자들은 미적 쾌감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얻는다. “큰 뉴스는/이웃집 소인제금가素人提琴家가 띄우는/호망의 선율/영롱한 비누방울이 되어/집집을 방문訪問한다”는 이 시의 끝 구절은 토요일의 생동하는 감각을 드러내는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것은 이웃집 소인제금가素人提琴家(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자유로움과 경쾌함이 영롱한 꿈의 비누방울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두 편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인생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와 절제된 감정 그리고 언어의 지성적 구성이다. 인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는 시를 낳는 모태가 된다. 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예술은 인생에 대한 희망과 자유정신 속에서 형성된 사리舍利 같은 보석이다. 그래서 시인은 꿈속의 파랑새를 찾아서 자신의 일생을 떠돌이로 보내는 것이다. 나는 최선영 시인의「거울의 형이상학形而上學」(1987년 6월호)을 읽고 월평에서 “다양한 의식의 흐름, 몽타주(montage) 수법 등이 매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유리알의 공간/가면을 쓴 다비떼의 춤/번쩍이는 속죄양의 눈물방울/우편배달부는 아무런 전보도/날라다 주지 않고/저승의 냄새가 점령하고 있는/ 그 장소”라는 시의 구절들이 불연속적인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과 충돌을 통해서 내면적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민중시라는 대중선동의 구호口號와 같은 시들이 범람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초현실적인 시의 언어는 디지털 시대의 영상언어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를 의미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최선영(崔鮮玲): 1959년 에 「역사」「온실」「소심」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등   강우식 시인의 시- 「사행시초四行詩抄․1」「세족계洗足戒」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방房은 한알의 사과 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 속 누가 이 순수한 외계外界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돌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물고비를 넘어나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셋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차게 새삼 피어오르던 쓰린 눈물이여.   넷 계집애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사행시초四行詩抄․1」하나~넷 산사태 지자 개울물은 더욱 맑다.   습기진 돌틈 살모사새끼들이 오글거리고   북향한 상봉 어디쯤 동자삼도 있을 법한데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발보다 마음을 씻어내고 있으려니 은어새끼들이 와서는 발가락 때를 빨아준다. 나같은 사람에게는 산문 앞 개울에 발담그는 일만도 수계受戒 같아라.         ----「세족계洗足戒」전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理性이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감성感性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감성의 숨은 힘이 들어있다. 현대시에서도 이 감성의 힘은 딱딱하게 굳은 이성(지성, 관념)의 껍데기를 부수고 원초적인 실체의 속살을 드러내는 동력이 된다. 서정시가 시의 원류로 존재하는 근원도 이 감성의 힘 때문이다. 모더니즘(지성)의 시가 현대시를 지배하고 있을 때에도 독자들은 서정시를 선호했으며 시는 감정의 표출이라는 시의 정의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감정의 표출을 어떻게 다듬어서 언어의 그릇에 맛깔스레 담아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었다. 강우식 시인의 사행시편四行詩篇들의 서정은 그런 면에서 큰 느낌을 준다. 인간의 가식적假飾的인 것들을 다 걷어내고 본질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그의 시편들은 사행四行이라는 시의 틀 속에 언어의 작고 예쁜 집을 짓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행시四行詩의 형태는 음보와 율격의 규정이 없어서 운율적인 면에서는 개방적이다. 그리고 기, 승, 전, 결의 구성법에도 억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3장 6구 45자 내외의 평시조平時調보다 여유롭다. 그러나 자유시의 형태에 비하면 너무 옹색하다. 하지만 시는 “언어의 경제”를 표현의 근본으로 한다는 면에서 볼 때 그의 사행시四行詩는 시의 원리에도 부합하는 개성적인 작시법의 표출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그의 사행시四行詩는 한국 현대시의 한 형태로도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는 압축될수록 의미가 확장된다. 구체적인 설명이나 묘사는 오히려 시의 공간을 좁히고 상상력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소리(대사, 음악, 음향 등)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던 60년대 라디오 드라마가 현재의 칼라 TV의 리얼한 장면보다 상상력의 유발과 확대란 측면에서 더 효과적인 것과 같다. 그의 사행시四行詩에는 압축된 시행 속에 신선한 비유의 언어들이 박혀있다. 그 비유의 언어들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내외여, 우리들의 방房은 한알의 사과 속 같다.”라는 구절에서 내외관계의 내밀한 장소가 되는 방房을 달고 수분이 많은 “사과 속”으로 비유한 것이 그것이다. 이 “사과 속”에는 사과의 씨앗도 들어있어서 우리들 삶의 속내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은 과즙이라는 미각으로 독자들을 미적 쾌감에 젖게 한다. 그러면서도 숨겨진 현실의 생생한 드러냄이라는 면에서 관념으로부터 해방된다. 두 번째의 시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먼 세상이나 내다보듯/초록의 물고비를 넘어나/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에서도 잎새와 순이를 연결하여 사춘기를 지난 후에도 떠오르는 머슴애에 대한 그리움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먼 세상이나 내다보듯“이라는 철학적 사유의 언어가 들어 있지만 그것이 주는 거리감이 시를 한 단계 정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짝진 머슴애“에 대한 그리움이 생생하게 살아오는 느낌을 주는 “파랗게 쳐다보네.”라는 끝 구절은 언어의 감각적 표현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게 하는지 알게 한다. 세 번째의 시에서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은  짧은 몇 개의 단어로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을 함축하고 있다. 그 언어는 그가 언어의 순도純度와 아름다움을 얼마나 높이고 있는지 알게 한다. 이런 세부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사행시초四行詩抄․1」의 시편들이 각각 독립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전체가 집합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세족계洗足戒」는 비유譬喩의 언어에서 벗어나서 사물과 직접 부딪히는 실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비유가 아무리 시적 상상력을 높여준다고 하여도 실상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실상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사물과 인지認知 사이에 구축된 관념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탈-관념의 정신작업을 하고 있다.「세족계洗足戒」에 “수계受戒”라는 단어 외에 관념어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겨/발보다 마음을 씻어내고 있으려니/은어새끼들이 와서는/발가락 때를 빨아준다.”는 이 사실적인 장면은 얼마나 맑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지 거듭 음미하게 한다.「세족계洗足戒」는 강우식 시인이 언어의 연금술에서 벗어나 실상의 세계로 나왔음 보여주고 있다. 실상은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 시인은 실상을 추구하지만 언어를 도구로 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시인의 고뇌와 새로운 가능성이 숨어 있다.  강우식(姜禹植): 1966년 에 「박꽃」「사행시초四行詩抄․」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등 다수   최동호 시인의 시 - 「독서讀書」「몽당연필」   밤이 늦으니 책장 넘기는 소리에 손이 마른다.   마른 손의 관절을 꺽어 책장을 뚝뚝 잘라낸다.   갈대숲에서 잠자던 새가 쏠리는 바람 소리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이미 책 속에선 찾을 수 없는 생목의 향기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   무너진 개미의 둑 위에 쌓아올린 책 속의 모래알 글자들이 아른 거린다.   언제이던가 마른 손의 주름살 사이로 사라진   싱그러운 유년의 날들이 불빛 가린 손등너머로 보인다.   가을이 깊어가니 책장 넘기는 소리가 맑아   빈 일기장엔 비쩍 마른 영혼의 향기만 외롭다.                  -----「독서讀書」전문 백지 위에 톡톡 부러진   까만 연필심 같은   송사리떼들 하얀 눈동자 깜박거리며   구름 일기장 맑은 물가에서 산들바람 친구와 놀다             -----------「몽당연필」전문   인간의 언어는 사물(대상, 의미)을 지시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 사물과 언어 사이에는 허구의 관념이 들어 있다. 그런 언어를 또 1차적인 언어 (음성언어)와 2차적인 언어(문자언어)로 구분하여 하여 더 본질에 가까운 언어를 음성언어라고 하고 그 다음을 문자언어라고 한다. 음성언어가 1차적인 언어가 되는 이유는 음성언어는 지적 작용으로 질서화 되기 이전의 감정과 의미가 뒤섞인 원색적인 모양이 그대로 들어 있는 데 비해 문자로 기록된 언어에는 원색적인 모양이 다 지워지고 지성으로 질서화 된 가면假面의 언어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시는 대부분 2차적 언어인 문자로 기록되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는 사물의 본질이 주는 생생함에서 멀어진 박제같이 말라버린 관념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들은 어떻게 하면 그 말라버린 관념의 껍질을 벗겨내고 생생한 원래의 언어를 살려내느냐 하는 언어와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니, 무의미의 시니 하는 발상도 모두 시인들의 언어가 현실의 사물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최동호 시인의 시「독서讀書」에는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가 드러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밤늦도록 책을 읽으면서 학문(관념)의 세계에 침잠하지만 관념이전의 기억들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기억들은 지성으로는 닿을 수 없는 원초적인 본래의 세계다. 그래서 그는 그 세계를 “갈대숲에서 잠자던 새가/쏠리는 바람 소리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이미 책 속에선 찾을 수 없는 생목의 향기/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독서讀書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지식의 전수 방법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책 속에는 인간의 역사가 들어 있고 지식과 논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책 속에 들어있는 역사는 본래의 사실이 아닌 가공加工된 사실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실의 기록일 수가 없다. 지식과 논리도 그렇다. 그 지식과 논리는 자연의 지식과 논리가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세운 가공架空의 건축물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최동호 시인의 「독서讀書」는 가공加工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본래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1차적 사유의 도정道程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사유의 도정道程은 독서라는 중간단계를 지나서 사물의 본질과 대면하는 직관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는 이 시에서 관념이전 기억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기억의 조각”들에는 이성적인 것보다도 더 소중한 맑은 향기의 서정이 들어 있다. 그 서정은 그의 마음 속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본래적 감성의 풋풋한 물기가 묻어있는 사실들이다. 그는 이 시에서 그것들을 끌어내어 소박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옷을 입혀서 맑은 서정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몽당연필」은「독서讀書」이후의 직관적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논리적 사유와 관념에서 뛰어나와서 대상과 직접 만나고 있다. 그 대상은 맑은 물가에서 산들 바람과 노는 송사리 떼다. 몽당연필의 톡톡 부러진 연필심은 어릴 적 기억을 재생 시키면서 송사리 떼를 연상하게 하는 보조언어가 된다. 그는 그 송사리 떼를 독자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무런 사족蛇足을 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의 송사리 떼는 진리의 당체를 그냥 그대로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대상으로 살아난다. 그것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석가가 수많은 제자들에게 말을 생략한 채 침묵 속에서 꽃 한 송이를 보여주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속에 들어 있는 논리를 초월하는 그의 시적 방법은 21세기 현대인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방법의 하나가 된다. 현대인들은 냉정한 논리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논리의 세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을 안고 있다. 특히 현대시의 독자들은 시인의 일방적인 설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시인의 관념과 해석이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사물(사건)을 보여주고 그 해석과 감상을 독자들에게 전부 맡기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언어”는 디지털 시대의 중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몽당연필」은 짧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직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시로 평가된다. 그래서 선禪의 맑은 정신이 담겨 있는 시인의 투명한 시선은 이 시의 인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최동호(崔東鎬): 1979년 신춘문예와 추천으로 등단. 시집 평론집 등  
43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8> / 심 상 운 댓글:  조회:1042  추천:0  2019-07-12
* 월간 2006년 11월호 발표                                 이건청 시인의 시-「황야荒野의 이리 5」 「폐광촌을 지나며」   山城에 갇혀서 왕이 운다. 눈이 내려 쌓여 나뭇가지를 휘이게 하고 눈은 내려 쌓여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 툭 하고 부러뜨린다. 山城에 갇혀서 왕이 운다. 눈에 덮인 저 비탈에 추운 斥候가 매복해 있다. 적들은 잠들고 말들만 깨어 있다. 눈을 맞으며 깨어 있다. 말들이 눈 내린 城 밖, 적들 곁에 서 있다. 말들은 적이 아니다. 山城에 갇혀서 왕이 운다. 기왓장이 하나 무너져 내린다. 말들은 적이 아니다. 눈은 풀에 내려 마른 풀들을 덮는다. 우물이 하나 지워진다. 우물이 둘 지워진다. 눈이 내린다. 깨진 기왓장과 척후 위에 내려 쌓인다. 얇은 옷을 입은 왕이 운다. 적들이 積雪을 이루고 있다. 밤새도록 쌓이고 있다. 南門이 닫혀 있다. 北門이 닫혀 있다. 東門 西門이 닫혀 있다. 눈은 내려 쌓여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 툭, 툭, 툭 도처에서 가지들이 꺾이고 있다.                         ----------「황야荒野의 이리 5」전문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까맣게 몰랐다.
42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7> /심 상 운 댓글:  조회:1032  추천:0  2019-07-12
 *월간  2006년 10월호 발표                                                                            오탁번 시인의 시- 「애기똥풀」「라라에 관하여」     1 개구리밥 자라는 둠벙가에서 눈 깜박이며 살레살레 고개젓는 애기똥풀의 가녀린 꽃잎 위로 문득 떠오르는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아직 눈도 못 뜬 내 사타구니에 새끼 자라의 연한 살결 간지럼 태우며 애기똥풀 감황柑黃빛 꽃물 발라 주던 누나의 눈웃음이 봉숭아물 곱게 든 손톱만큼 예뻤다 둠벙도 먼 강물도 꿈꾸지 못하는 나에게 누룽지처럼 맛있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마련해주고 떠난 누나여   2 새끼 자라가 눈을 뜨고 둠벙에서 나와 흐린 강물 헤엄치며 불러보아도 이젠 영영 보이지 않는 땀방울 송송 맺히던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감장종지만한 젖가슴도 쥐이빨 옥수수같은 앞니도 세상의 강물 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 추억의 빈 공책 빛 바랜 페이지에서 옹알옹알 속삭이며 그때 그 어린 눈망울로 내 사타구니의 다 큰 자라가 미운 듯 말똥망똥 눈 흘기는 애기똥풀이여 누나여                                                   -------「애기똥풀」 전문   原州高校 이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雉岳山을 한참 바라다 보았다.   7년이 지난 2월달 아침, 나의 天井에서 겨울바람이 달려가고 대한 극장 나列 14에서 라라를 다시 만났다.   다음날, 서울역에 나가 나의 內部를 달려가는 겨울바람을 전송하고 돌아와 高麗歌謠 語釋硏究를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만드는 바람소리에서 깨어난 아침, 次女를 낳았다는 누님의 解産 소식을 들었다.   라라, 그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風車 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라여, 本能의 바탕이여. 아름다움이여.                        ------------------------「라라에 관하여」전문   시의 현실은 시인의 의식이 선택하여 재구성하고 의미를 붙인 가상현실(허구)이다. 그것은 소설이나 시나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이 시간의 풍화작용에 오래 견디는 현실이냐 하는 것이다. 시대적인 이데올로기나 가치들은 그 시대가 지나가면 사라져버리는 신기루蜃氣樓다. 물질적인 것들도 시간의 이빨에 오래 견디기 힘들다. 언젠가는 다 바스라지고 녹아서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정의한다. 시인들도 형이상학적인 인식을 통하여 해바라기처럼 진리를 향하여 언어의 날개를 펼친다. 그런데 진리는 이미 기성복같이 만들어진 것 즉 관념이기 때문에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감각이나 정서의 옷을 입혀야 한다. 그런 시들을 관념시 또는 형이상학 시라고 한다. 오탁번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가 지닌 시간성 때문이다. 그의 시는 시대적 가치나 사상,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일상적인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변하지 않는 시간성이 들어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본능本能이라는 원초적인 세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애기똥풀」에서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불러일으켜 순수한 본능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세계는 어쩌면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같다. 눈곱만한 부끄러움도 분별심도 없는 천진무구한 동심의 그 세계는 이 세상에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라나는 일이 없어질 때까지 변하지 않을 세계이며 어른들 기억의 맨 밑바닥에 잠들어있는 본래적인 세계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초적인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곳(낙원)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미지를 담고 있는 이 시의 구절들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언어보다도 영원성에 접근해 있다. 는 이 시에서 진외육촌누나와 나의 관계는 아담과 이브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기억의 재생이 환기시키는 정서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본성의 힘으로 인해서 시간의 굴레를 뚫는다.「라라에 관하여」는 그런 원초적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사춘기를 지나서 직업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인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객관적이고 간결한 사실의 나열과 압축, 그리고 냉정한 이성理性의 언어로 축조된 이 시는 본능과 이성의 갈등에서 끝내는 허물어지고 마는 이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적인 시인의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 시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겨울바람, 형언할 수 없는 꿈, 누나의 해산,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소리” 등은 결국 고려가요어석연구高麗歌謠語釋硏究를 읽는 이성理性의 나를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오탁번 시인의 이런 꾸밈없는 솔직함과 본능의 드러냄은 그의 시에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를 여는 바탕이 되고 무상無常의 시간을 극복하는 에너지가 된다. 또 서사적인 그의 시는 독자들에게 시를 읽는 재미를 주고 상상의 문을 열게 한다.   *오탁번(吳鐸藩):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당선되어 등단.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處刑)의 땅」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활동함.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오탁번 시 전집」등   임종성 시인의 시-「山行」「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     내가 바위처럼 우뚝 솟으려 할 때 산은 낮게 낮게 멀리 가는 냇물을 보여주고   내 마음이 칡넝쿨처럼 얽힐 때 똑바로 뻗은 나무를 보여주고   계곡을 오르다 내가 잡풀처럼 억세어질 때 유유히 흐르는 흰 구름을 보여주고   날 저물어 내가 잎으로 떠돌 때 산은 환한 풀꽃으로 길을 밝혀준다 -------「山行」전문   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 좁은 행간 속에 높고 먼 하늘이 내려와 앉고 한낮에도 별들이 총총 반짝인다 내가 책을 펴기도 전에 나무는 시의 내부를 거의 파악한 듯 내 시선이 다음 시행 끝에 이르기 전에 나무는 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일 때 나무는 흐려진 그늘로도 연을 이루고 그다지 밝지 않은 문장 속을 모두 비추는가 잠시 어둠에 젖은 마른 잎처럼 졸다가 시퍼런 풀빛으로 깨어나면 내게로 거침없이 부딪쳐오는 한 세상 이 산에서 사는 하나의 풀이거나 풀 속에 맺힌 이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한 점 벌레 같다는 생각에 이르는 동안 나무에 기대어 다시 시를 읽는다 --------「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전문   자연은 현대시에서도 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인공적인 변화가 빠르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자연은 그 현실을 바르게 보는 마음의 중심기둥 역할을 한다. 시인은 자연을 통해서 변화하는 현실의 의미도 짚어보고 무상한 실체를 체험하기도 한다. 특히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양적인 자연관은 자연이 객관적인 대상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얻는 사유의 언어들이 비록 실제가 아닌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시인들은 그것을 깨우침을 주는 새로운 감각의 언어로 변형시켜 독자들에게 부단히 접근한다. 임종성 시인의 「山行」은 산을 스승으로 삼아서 산의 가르침을 배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높은 것과 낮은 것, 얽히고 굽어진 것과 똑바른 것, 억셈과 유연한 것, 어둠과 빛의 대조를 통해서 삶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리고 인생을 보는 시각視角의 균형감각을 잡아주고 있다. 우리들은 높이 솟은 바위를 부러워하고 그 바위 같이 솟아보려고 하지만 산은 낮게 흘러가는 냇물을 보여 줌으로써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삶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는 구절들이 비록 관념적인 교훈의 드러냄이라고 하여도 시인의 체험이 묻어난 살아 있는 또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에 시적 생명력을 갖는다. 그 생명력의 바탕에는 시인의 담담한 서술의 언어가 한 몫을 하고 있다.「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은 자연물과 자아自我가 하나가 된 상태. 즉 대상물에 완전히 몰입沒入된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와 시인이 한 몸이 된 이런 경지에서 시의 주체는 나무가 되기도 하고 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는 상상 속의 사건이지만 시에 대한 나무의 반응이라고 생각할 때 그 발상이 매우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는 그의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고 끌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자연을 단순히 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연과 시와 나를 같은 생명체로 인식하는 임종성 시인의 정신의 경지가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 보통의 시들이 자연을 시의 보조물로 취급하고 비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비교할 때 그의 자연관은 독보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정신의 출발점은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그 지극한 사랑이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경지를 연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세계 들어가는 관문을 통과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임종성 시인의 시편들에서 감지되는 생명적인 것들이 더 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뜨거운 감응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며 그의 시와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 임종성(林鍾成): 1977년 에 「새벽바다」「자정」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땅뺏기」「숨쉬는 상처」등   이혜선 시인의 시-「나를 만난다-반파 유적지 母系氏族村에서」「고조선 빗물」   탐스런 젖무덤 실한 엉덩이 떡 버텨누운 자궁속으로 속으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만나는 눈빛 하나   시간의 끝에서 다시 끝끝까지 걸어들어가 반짝이는 꽃빛 하나 그립고그리운 너를 만난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어머니 언제까지나 그리운 그이름을 만난다   꽃이슬 반짝이는 새아침의 붙잡을 수 없는, 핏줄속에 돌고있는 그이름을 만난다   억겁 후의 이름을 돌고있는 그별을 만난다 ---------「나를 만난다-반파 유적지 母系氏族村에서」전문   한밤 내내 잠들지 않고 너 그리움으로 잠들지 않고 비가 되어 내린다. 한밤 내내   검은 땅 위의 나를 흔들어 나 빗속에 나와 서면 팔 벌린 네가 빗물이 되어 온다   마음하늘에 꽃 한 점 없어도 어둔 촉각소리 어디서 샘 솟아 그리움 되는 빛   날새 날갯죽지도 잠 못드는 마을 마다 짚단베개 고이고 잠을 청하랴   빈 뼈 속속들이 태우며 그대 지금 가고 없는 고조선 사람아 ----------------「고조선 빗물」전문   민족이니 역사의식이니 하는 사고思考의 산물들은 언어로 표현될 때 하나의 개념이나 관념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같이 느껴지는 현재의 시간도 관념이 아닌 생생한 감각으로 건져 올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 잠겨있는 돌을 건져 올리는 것과 같다. 맑은 물속에서 물과 햇빛과 조화를 이루면서 황홀하게 빛나던 수석水石은 물 밖으로 나와서 물기가 마르는 그 순간에 이미 물속의 돌멩이가 아닌 메마른 지상(관념)의 돌멩이로 변하고 만다. 사실 우리들이 시 속에서 현실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며 역사이고 가상적인 현실이며 역사일 뿐이다. 어디에도 지나간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로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관념이나 지식으로 변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수보리에게 “과거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인의 지극한 염원은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다. 이혜선 시인은 어느 날 반파 유적지 모계씨족촌母系氏族村에서 고 했다. 그 만남은 우리들 핏줄의 실체와의 만남이고 본질적인 만남이다. 그는 그 만남을 생명의 본적지며 원형인 여성의 자궁 속에서 이루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생동하는 언어로 잡아내고 있다. 그 현실은 그의 역사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다. 물속의 돌멩이같이 물과 햇빛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황홀한 꿈의 현실이다. 이런 역사의식에 몰입해 있는 이혜선 시인은「고조선 빗물」에서는 라고, 한밤 내내 잠들지 않고 고조선古朝鮮 사람과 만나는 환상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의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의 현형現形이다. 그 그리움의 원초原初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체험과 사유의 세계를 탐구해야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움의 세계가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데서 약간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 과거지향의 의식(꿈)은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상실되었던 자궁내의 생활에 대한 재귀 본능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그리움과 꿈의 세계는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 회복과 자기세계의 재발견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그리움의 원형세계原形世界로 나타나는 현실(환상)은 본래적 자아의 회복과 재생에 대한 지향이며, 환상과 상징(이미지)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 확인된다. 민족의 역사의식은 민족이 위기를 당하였을 때 더 끈질기고 강하게 발현되는데, 그 원인도 이런 자기회복과 재생의식에서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이혜선 시인의 역사의식의 시 속에는 자기발견의 깊은 내면 의식이 들어 있어서 독자들을 역사의 세계로 안내하고 때로는 독자들 스스로 자기의 원형을 찾아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나는 그의 시편들 중 역사의식에 젖어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을 만난다.「치술령 돌어미」에서는 신라시대 박재상 아내의 한恨을 만나고「서라벌 바람은」에서는 나라를 지키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소리에 담긴 염원을 듣는다. 그 한恨과 피리 소리는 과거의 역사를 뛰어넘어서 오늘의 현실로 다가오고 들려온다.   *이혜선(李惠仙): 1981년 ,시문학>에 「돌문」「나를 만남」「지장보살」「갈대밭 머리」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 「神 한 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등   * 월간 2006년 10월 호에 발표
41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6> / 심 상 운 댓글:  조회:1042  추천:0  2019-07-12
문효치 시인의 시-「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觸手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 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전문   나는 이제 천년千年의 무게로 땅 속에 가 호젓이 눕는다.   살며시 눈감은 하도 긴 잠 속 육신은 허물어져 내리다가 먼지가 되어 포올포올 날아가버리고,   그 자리에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 한 덩이의 푸르른 허공이 되어 섬세한 서기瑞氣 로 남느니.   너는 이 때에 한 채의 현금玄琴del 되어 빛깔 고운 한 가닥 선율旋律이 되어 안개처럼 멍멍이 젖어 들어오는 그리운 노래로나 서리어 다오.                 -----「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전문   문효치 시인의 시편 중에서 초기의 시에 속하는「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는 독자들에게 허공에 떠도는 무수한 사랑의 촉수를 상상하게 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물게 한다. 그러면서 “허공에 태어나/수많은 촉수觸手를 뻗어 휘젓는/사랑이여.//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가서 불이 될/온 몸을 태워서/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라는 절절한 사랑의 감성언어가 품고 있는 환상의 이미지는 허공에 떠도는 혼령들의 슬픔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혼령들이 안고 있는 한恨을 풀어내는 시인의 간절한 기원祈願의 언어-“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의 반복은 주술적인 비의秘義를 담고 있는 주문呪文 같이 독자들의 가슴에 묘한 울림을 남긴다. 그래서 그 사랑은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생명의 무한한 기운으로 연결되고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이렇게 허공에 떠도는 생명의 기운을 포착하여 간절한 언어로 형상화한 그는,「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에서는 사후의 세계를 구체적인 감각언어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죽음 또는 사후死後의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은 삶의 애착愛着이 만들어내는 환타지다. 그 환상의 이미지는 오랜 침묵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역사와 함께 죽음의 신비감을 드러낸다. 1971년 충남 공주시 금성동(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일간 신문에 발굴현장의 사진이 크게 보도되었을 때, 내가 가장 경이롭게 느낀 것은 벽돌로 쌓은 무덤 안벽에 놓여있는 등잔과 등잔에서 나온 그을음이 벽면에 까맣게 남긴 흔적이었다. 그 생생한 흔적은 천년의 시간을 현재와 같이 착각하게 했으며, 무덤이 죽은 이들의 현실玄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실居室같이 생각하게 했다. 왕은 동쪽에 왕비는 서쪽에 옻칠한 목관에 누워 있는데 나무 두침頭枕을 베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무덤을 치장하고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영생을 기원하는 고대 한국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것은 극소수의 권력층들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사후의 세계에서까지 누리고 싶어 하는 분묘양식墳墓樣式의 구조라고 생각되지만, 그 신비한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문효치 시인은 당시의 경이로움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현지답사를 오랜 동안 집중적으로 했으며 그 결과가 연작시 백제시편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한다. 그 백제시편 중「무령왕武寧王의 나무 두침頭枕」은 고대한국인의 영생의 염원을 죽은 무령왕의 독백으로 담아낸 시다. 죽어서 육신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도 나의 영혼은 “한 덩이 푸르른 허공”이 되어서 서기로 남을 것이니 너(사랑하는 이)는 내 옆에서 한 채의 현금玄琴이 되어서 그리운 노래로 서리어 달라는 것이 이 시의 중심 내용이다. 죽어서도 그 죽음을 거부하는 정신, 죽음을 삶으로 환원시키려는 의지는 어쩌면 한국인의 독특한 원형질을 형성하는 유전인자인 것 같다. 그래서 ”살며시 눈감은 하도 긴 잠 속/육신은 허물어져 내리다가/먼지가 되어 포올포올 날아가버리고,//그 자리에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한 덩이의 푸르른 허공이 되어/섬세한 서기瑞氣 로 남느니.//너는 이 때에 한 채의 현금玄琴이 되어/빛깔 고운 한 가닥 선율旋律이 되어/안개처럼 멍멍이 젖어 들어오는/그리운 노래로나 서리어 다오.“라는 구절은  몇 번을 거듭 읽어도 매력적인 맛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의 맛과 의미가 한국인의 독특한 감성과 잠재의식潛在意識에 닿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감성과 의식意識을 잘 드러낸 문효치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읽으며 그의 유현幽玄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 문효치(文孝治): 1966년 에 「산색」「바람 앞에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연기 속에 서서」「무령왕의 나무새」등 다수    이하석 시인의 시-「못 2」「투명한 속 」   그들은 녹슨 몸속에서도 여전히 쇠꼬챙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깃든 어느 곳에서든 부스럭거리며 그들은 긁고 찌른다. 흙 속, 헐어버린 건물 안, 이전해버린 공장의 빈 터, 폐쇄해버린 술집의 판자 틈, 버려진 구석 어디에서나 그들은 내팽개쳐진 채, 나무든 흙이든 풀이든 바람이든 강철이든 지나가는 쥐의 발목이든 찌른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 속에 빠지면서 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 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 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 그는 침을 숨긴 채 물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 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 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못 2」전문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 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부스러기 흙 속으로 깃들어 더욱 투명해 지고 더 많은 것들을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들어 간다. 비로소 쇠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투명한 속」 전문   이하석 시인의 시편들에서는 알레고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풀, 흙, 쇠꼬챙이, 못, 건물” 등의 사물어는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다. 따라서 독자들이 그의 시에서 1차적으로 만나는 것은 어떤 관념이 아닌 현실現實이며 사물事物이다. 이 현실과 사물은 시속에서 비약하지 않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과학적인 사실성을 확고히 구축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난해難解에서 벗어나 단순 명쾌한 의미를 드러내고 시대의 조류潮流에도 쉽게 마모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사실적인 작시법作詩法은, 21세기 시의 키워드를 “사실, 생명, 현장”에 두고 그 중심에 사물을 놓으면서 관념이 배제된 “적나라한 사물의 실제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에서 시의 새로운 방법론를 모색하는 문덕수 시인의 시론 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보인다. 이하석 시인의 이런 사실에 바탕을 둔 시적 감수성은 미세한 시각으로 사물과 현장을 응시하고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는 힘을 발휘한다. 그는 또 언어의 배경에 깔려 있는 관념의 그림자들을 지우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도 사물을 통해 함축적인 의미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관념과 탈-관념의 경계선에서 신선한 감각을 드러낸다.「못 2」에서도 그의 시선은 못의 다양하고 사실적인 일생을 끝까지 추적하면서 날카롭고 냉정한 관찰의 눈을 번득인다. 그러나 그 추적의 끝부분에서 환기시키는 것은 따스하고 온화한 화합의 감성이다. 그 감성은 녹슨 몸속에 쇠꼬챙이를 간직하고 어디서나 무엇이나 긁고 찌르던 못도 개울 물 속에 누워서 꼬부라진 쇠꼬챙이로 변해 가고 드디어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못의 일생은 쇠꼬챙이 같은 분별심分別心을 가지고 태어나 시비하고 싸우면서, 이웃들을 긁고 찌르면서도 자신만은 꼿꼿하다고 자부하면서, 그것이 부질없는 것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관棺 속에 누워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시의 구조가 인공人工과 자연으로 대비되어 있기 때문에 인공(문명)의 귀착지歸着地는 결국 자연일 수밖에 없다는 문명비판의 시각으로도 읽혀진다. 그의 시에 대한 이런 해석과 독법讀法은 독자들의 개인적인 체험과 사고思考의 기능이 만들어 낸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런 주제의식(의미추적)과 함께 이하석 시인만의 독특한 사물성의 감성이 안고 있는 현장중심의 시의식이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 속에 빠지면서/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그는 침을 숨긴 채 물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사실적인 인식과 시의 기법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판단된다.「투명한 속」은「못 2」와 대조적인 정서가 느껴진다. 그것은 광물성인 유리부스러기를 하나의 생명체로 변화시키는 감성의 작용이 만들어 낸 따뜻한 감각이 발현發顯하는 이미지다. 이 시에서 쓰인 감성적인 언어들-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유리부스러기의 날카로운 칼날들의 의미를 지우면서 인공과 자연의 화합을 유도한다. 그래서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비쳐들어 간다. 비로소 쇠조각들까지/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라는 끝 구절의 참신한 생명적인 이미지는 은은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 감동은 그의 열린 마음이 자연과 화합하는데서 솟아오르는 울림으로 이 시의 정신적인 깊이가 상당함을 감지하게 한다. 나는 이하석 시인의 시편들을 1976년 봄에 발간된 동인지「자유시自由詩」에서 처음 읽었다. 그리고 “시는 우선 자유로워야 함을 믿고 있다. 모든 것에로의 자유, 혹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어쨌든 우리는 모든 사물들에 대하여, 모든 구조들에 대하여, 모든 기능들에 대하여 자유롭기를 원한다.”는 동인들의 에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의 시편과 명제가 얼마나 서로 부합하는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명제를 시의 내적 과제가 아닌 당시의 억압적인 현실에 대응하는 정치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하석 시인의 언어가 현실문제나 고정관념의 무게, 고정관념의 그늘에서 홀가분하게 탈출하여 자유로운 언어공간을 마련한 것에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의 시편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 이하석(李河石): 1971년 에 「관계」「분위기」「이중의 처단」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백자도(공저)」「투명한 속」「김 씨의 옆얼굴」등 다수   강윤수 시인의 시- 「산(1)」「앨범에서」   말없음표다. 괄호 밖의 초연한 감탄부호다. 더 수식할 수 없는 간결체다. 오늘 같이 저 무거운 坐定이 두려운 때 으늑히 산마루로 오르던 나의 單語들. 單語들은 중턱에서 헐떡거리다가 점점이 흩어져 쉼표만 남기고 단 한줄기 문장도 이루지 못했다.   山은 山만이 아는 非文이었다.         ---------------「산(1)」전문   죽은 정자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노인의 아이 적, 할아버지 곁에 다시 자란 정자나무 그늘에 앉아 무심히 하늘을 보는 노인의 눈 렌즈의 셔터를 누르면, 더 이상 흐름은 멎을 것도 같은데 앨범 속 하나 더 할아버지의 무덤은 생겨나고, 산소길 등성이 정자나무 길 끝에 먼빛으로 새삼 태어나 호돌호돌 걸어오는 아이들, 아이들 앞에 밟히는 풀잎 같은 미련을 찰칵 셔터를 누르며 서 있는 또 다른 앨범 속의 아버지.             ---------「앨범에서」전문   이 세상 대부분의 시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화평하게 하거나 세속적인 깨달음을 주는데 익숙하고, 독자들도 그런 시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무질서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이론에 시인과 독자들이 동의하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무엇보다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그 설득의 원천은 세상을 지배하는 관념이 만들어 놓은
40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5> /심 상 운 댓글:  조회:1033  추천:0  2019-07-12
신규호 시인의 시- 「산책기散策記․1」「숯처럼」    길 위에 하나, 둘 흩어진 낙엽을 따라가 보면, 어느 덧 관산(冠山) 자락에 이르네. 후미진 산길을 밟고 오르면 매천(梅泉) 약수가 나오고, 거기 맑은 샘이 사철을 두고 반짝이며 밤낮으로 흐르네.     내 마음도 그러한 것. 저 깊은 심령의 골짜기에 숨어 남 몰래 샘솟고 있는 청정한 심성도 사시사철 밤낮으로 소리 없이 흘러 목마른 자를 기다리고 있나니.     내 할 일이란, 심신의 고통과 싸우고 싸워, 산짐승처럼 헐떡이며 가슴 속 타오르는 갈증을 부여안고, 영혼의 새 벽 샘가에 달려가 목을 축이는 짓이나 할 뿐 아닌가. *관산冠山: 관악산의 약칭                        ---------「산책기散策記 ․ 1」전문 한 백년 숨 쉬면서 하늘을 태우고 태워 목숨은 한 덩이 어둠이 되는가. 뻗쳐오르는 가지와 잎들이 춤추고 버리는 허공은 새카만 침묵이 되어 남고, 불타는 시간 속에서 번쩍이는 꿈은 차디찬 재 되어 흩어지는가. 젊음의 불꽃이 한바탕 사루고 버리는 텅 빈 공간. 돌아가 안길 수밖에 없는 대지의 품안에서 다시 윤회의 사슬에 매인다 해도 지워버릴 수 없는 이 삶의 느꺼움은 어쩔 것인가. 풀잎의 춤과 벌레의 울음이 한 생애를 설레이게 하고 밤하늘 별들의 눈짓이 이끌어 온 푸르른 목숨, 그 추억 한 덩이 아직 남아 타오를 시간을 움켜쥐고 있는 이 새까만 안타까움을 어쩔 것인가.                              ------「숯처럼」전문   형이상학 시를 시의 이상으로 생각하고 천착해 온 신규호 시인은 형이상학 시의 근원을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찾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유한하고 불완전한 언어로 무한하고 유현한 사물의 숨은 진실을 밖으로 끌어내어 표현함으로써, 고정관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미명에 갇혀 있는 새로운 진실(그것조차 또 다른 관념이지만)을 창출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 정신의 혁명이며, 새로운 가치 창조의 길이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일이다. 언어와의 싸움 없이 인간 구제나 새로운 세계의 창조는 그러므로 불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그의 견해는 그만의 독창적인 사유의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언어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불완전한 언어로 무한하고 유현한 사물의 진실을 끌어내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도구가 되고, 언어와의 싸움에서 획득한 신선한 정신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그의 시어들은 항상 긴장감에 싸여 있으며 지성과 감성의 조화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산책기散策記 ․ 1」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은 관악산 산행의 체험이지만 자신의 정신적인 지향점을 시적 형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산행 중에 발견한 사철 반짝이며 흐르는 매천(梅泉) 약수는 형이하학적인 물에서 형이상학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심령의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승화되어서 인간의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는 영혼의 생명수로 창조되고 있다. “내 할 일이란, 심신의 고통과 싸우고 싸워, 산짐승처럼/헐떡이며 가슴 속 타오르는 갈증을 부여안고, 영혼의 새/벽 샘가에 달려가 목을 축이는 짓이나 할 뿐 아닌가.”라는 끝 구절에서 그런 의미가 분명하게 감지된다. 이 구절은 자신의 삶의 정신적 내면을 드러내는 갈망의 행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일깨우고 있다. 이렇게 그의 형이상학적 시는 설득적인 기능을 내포한 종교적인 높은 의식의 세계를 지향한다.「숯처럼」은 그의 정신적 갈증을「산책기散策記 ․ 1」보다 더 강하게 드러내면서 인생의 과정을 나무가 숯이 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뻗쳐오르는 가지와 잎들이/춤추고 버리는 허공은/새카만 침묵이 되어 남고,/불타는 시간 속에서 번쩍이는 꿈은/차디찬 재 되어 흩어지는가.”라고 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의미를 절절한 언어로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워버릴 수 없는 삶의 느꺼움은” 어찌해야 하느냐고 독백조로 호소하고 있는 데, 그 호소가 이 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한 생애를 설레이게 하고/밤하늘 별들의 눈짓이/이끌어 온 푸르른 목숨,/그 추억 한 덩이 아직 남아/타오를 시간을 움켜쥐고 있는/이 새까만 안타까움을 어쩔 것인가.”라고 쉽게 허무 쪽으로 기울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는 그의 싱싱한 감성의지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를 담아내고 상징하는 것이 이 시에서 숯이다. 그 숯은 객관적 상관물로서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타오르는 새로운 삶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숯은 이 시에서 삶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숯이 되어 있다가 어느 날 다시 빨갛게 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숯은 그가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산책기散策記 ․ 1」과 「숯처럼」을 읽으면서, 분출하는 감정을 지성으로 통제하면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 감성의 싱싱함을 잘 살려내는 정통적인 모더니즘 시의 참맛을 한껏 느껴본다.     *신규호(申奎浩):1966년 에 「탄炭」「화가의 집」「등뼈」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입추이후」「사람아 사람아 슬픈 사람아」「맨발의 사람」「어둠의 눈」「누워서 가는 시계」「보랏빛 마음」   김용언의 시- 「청기와집 추억」「들개의 울음」   까까머리 어린 시절 좋아하던 계집아이는 청기와 집 높은 담 안에 살았다 발끝만 쳐다보다 얼굴 한 번 못 보았다 할 말이 있긴 있는데 언제나 청기와의 높은 담이 가로막았다   청기와 뜨락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 허기진 가슴으로 휘파람 불면 뜨락에 얼비치는 계집아이 모습 불을 만지듯 질겁을 하고 언덕을 내려 왔다 그날 밤은 알밤을 새며 불안에 떤다 말을 해야 하긴 하는데 알맹이가 잡히지 않는다   좋아하던 계집아이는 철들어 떠나 버리고 불혹이 되어 주머니에 넣어둔 말 한마디 햇빛 한 번 못 본 채 숨어 있구나                          ------「청기와 집 추억」 전문 들개의 울음이 허기진 밤하늘에 흔들린다 피붙이를 찾는 소리라 했고 고독을 위한 깃발이라 했다 울음 이외엔 존재의 가치가 없는 사막 사람들도 들개처럼 울어야 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 절실한 것은 울음이었다 푸른 빛깔의 고독을 물리칠 수 있다면 밤을 지새며 울고 싶다   귓속에 앉은 오물이 들개 울음 속으로 끌려나가고 모래알이 침몰한다 사막을 빠져나가는 날 귓속에는 송곳같은 바람소리 햇살의 흔적만 남으리라          -------「들개의 울음-사막에서 97-4」전문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추억은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은 보석이다. 그 보석은 이별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기 때문에 더 은은한 광채가 난다. 만약 그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면 그 추억은 단순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무지개처럼 떠 있다가 희미하게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추억은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아쉬움이라는 미련을 안고 더 오래 남는 것이다. 김용언 시인의 시「청기와집의 추억」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보석을 꺼내 놓은 것이다. 시인은 그 사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아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에서 지성이 서정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끝 구절 “햇빛 한 번 못 본 채 숨어 있구나”에서 감탄형 종결어미가 들어 있지만 그것은 참다 참다 터져 나온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느낌의 진동이 강하게 와 닿는다.“청기와 뜨락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허기진 가슴으로 휘파람 불면/뜨락에 얼비치는 계집아이 모습/불을 만지듯/질겁을 하고 언덕을 내려 왔다/그날 밤은 알밤을 새며 불안에 떤다/말을 해야 하긴 하는데/알맹이가 잡히지 않는다“라는 청기와 집의 예쁜 소녀와 내성적인 시골 소년의 짝사랑. 둘 사이에 어떤 작은 사건도 없었던 벙어리냉가슴의 일방적 사랑. 그 사랑을 불혹의 나이에도 간직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은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이 시의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것은 황순원의 소설「소나기」나, 알퐁스 도데의「별」과 같이 불멸하는 인간 본연의 푸른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들개의 울음-사막에서 97-4」은 사막이라는 자연환경이 배경이 되어서 인간존재의 의미조차 내세울 수 없는 원시의 경험을 드러내고 있다. 그곳에서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래서 울음이 더 절실한 전달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전하고 있다. 김용언 시인의 이 시는 그런 의미가 그의 생생한 직접 경험에서 분출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힘을 갖는다. 관념이 아닌 체험의 언어는 단단한 돌멩이 같아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쉽게 마모되지 않는다. ”들개의 울음이 허기진 밤하늘에 흔들린다/피붙이를 찾는 소리라 했고/고독을 위한 깃발이라 했다/울음 이외엔/존재의 가치가 없는 사막/사람들도 들개처럼 울어야 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절실한 것은 울음이었다/푸른 빛깔의 고독을/물리칠 수 있다면 /밤을 지새며 울고 싶다“는 그의 체험담은 그래서 느낌의 진동이 오래 남는다. 시에서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김용언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사실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실을 전하는 그의 시적 방법론에 동감했다. 그리고 ”푸른 빛깔의 고독“ 이라는 새로운 감성의 단어가 어떤 상태의 고독을 의미하는지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달빛이 푸른 바다와 같이 넘치는 사막 한 가운데서 느끼는 생존의 위험과 외로움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자연,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인간 존재의 원초적 고독이라고 생각된다. 그 고독은 김현승 시인이 깊은 명상을 통해서 발견하고 추구한 절대고독과도 일맥상통하는 고독이다. 따라서 그 '푸른 빛깔의 고독'은 들개 같은 울음을 울게 하여 존재의 절망을 극복하는 길을 열어주는 고독이 될 수도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나는 리쳐즈(Richards)의 예술적 고민을 암시하는 시구詩句,'개성은 고독 속에서 길러내 지고/성격은 세파 속에서 이루어지다.'를 떠올려보았다.   *김용언(金勇彦) :1978년 에「눈」이 추천완료 되어 등단. 시집: 「돌과 바람과 고향」「숨겨둔 얼굴」「서남쪽 끝」「너 더하기 나」「휘청거리는 강」「사막여행」등   김용오 시인의 시- 「하늘」「눈사람과 장미」   봄밤의 폭신한 요 위에서 남성의 체온이 엎드린다. 하늘은 들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는 3월의 농부. 나는 헐떡거리며 짐승처럼 엎드려 겨울을 벗는다. 강 건너 불빛들도 스르르 두 눈을 감는다. 처녀를 주고 울던 입이 큰 사랑이 떠오른다. 서쪽에서 마른번개가 번쩍거리는 자정 갑자기 깊고 먼 육신의 입구 포근한 계절의 배꼽 밑으로 촉촉이 열리는 들의 마음. 파란 전기처럼 떨고 있는 클리톨리스. 하늘은 씨앗을 물으며 음모陰毛의 이랑을 적신다. 희멀건 엉덩이로 생명의 방아를 깊이 찧는다. 뜨거운 바람들이 아, 아 흐느끼듯 몇 번이나 흙의 자궁子宮 속을 길게 지나가고 어디서 마을의 벽시계가 새벽을 알린다. 강 건너 불빛들이 하나둘 다시금 눈을 뜬다. 언제나 하늘은 안개로 일어나서 들의 젖가슴을 살그머니 빠져나가는 3월의 농부. 사랑을 벗어주고 하얗게 웃던 알몸이 떠오른다. 나는 머리맡에 놓아둔 강물소리를 천천히 마신다.                                      ------「하늘」전문 열리는 먼동을 바라보며 빌려 입은 사람의 육신이 허물을 벗듯 한꺼풀씩 벗고 있었습니다. (나는 태양의 혓바닥 위에서 아이스크림처럼 허물어지는 벌거숭이) 옛날집을 찾아 땅 아래로 내려가는 눈부신 영혼의 물소리가 졸졸졸 빛나 보였습니다. (나는 향긋한 뿌리의 유혹 앞에서 갈 길을 놓쳐버린 구름) 바위틈에 기대어 봄을 애태우는 장미의 갈증을 며칠 동안 깊숙이 밀어 넣고 흔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달콤한 여인의 살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가는 한 마리 물배암) 허벅지를 더듬으며 올라가는 아, 사랑의 가지 위로 푸른 정액精液이 돌고 입을 여는 바다조개, 주먹만한 햇덩이, 몇몇 송이 비릿한 꽃망울을 마알갛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눈사람과 장미」   성性은 이 세상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에너지 원源이다. 그래서 성을 떠나서 이 세상의 이치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꽃이 피고 꽃밭에 나비가 날아들고 열매를 맺는 자연현상은 성의 멋진 파노라마다. 들판의 짐승들은 물론 물고기가 암수 짝짓기를 하고 돌 틈에 알을 낳아서 수정하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 성생활이다. 그리고 그 성은 생명체들에게 최고의 쾌락과 풍요를 부여한다. 따라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예술작품들이 추구하는 사랑과 행복은 성性의 푸른 들판에 피어난 향기로운 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 최고最古의 시라고 알려져 있는 4000년 전 수메르 여사제女司祭의 시에도 “내게 소중한 그대여, /그대의 멋진 모습과 달콤함에 빠져버렸다오./그대에게 사로잡힌 나를, /그대 앞에 떨고 서있는 나를 침실로 데려가주오.”라는 적극적이고 대담한 애정표현이 담겨있다. “얼음 위에 댓잎자리를 깔아 님과 내가 얼어 죽더라도” 정 둔 오늘 밤이 더디 새기를 비는 고려시대의 속요「만전춘滿殿春」의 적극적인 애정표현도 사랑의 원천이 성에 있음을 드러낸다. 화산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18세기 중반이후 발견돼 발굴에 들어갔을 때 관계자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성을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한 벽화, 부조, 조각 등 외설적인 유물이 대거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유물들이 많다. 문자를 모르던 시대, 사람들은 벽화나 청동기에 그림으로 성생활을 기록했다. 특히 신라인들은 성에 대해 심하다 싶을 만큼 개방적이어서 성 관련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섹스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토우, 과장된 성기나 자위행위, 출산과정을 묘사한 것 등은 무덤의 부장품인데도 표정이 매우 밝다. 고대 신라인들은 사후의 세계에서도 현세와 같은 쾌락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성을 자연스레 표현한 것이다. 이런 성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쾌락과 종족 보존에 대한 욕구, 즉 인간의 성에 대한 본연적 가치와 갈망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김용오 시인의 시편들은 그런 면에서 볼 때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생명의 에너지 원源에서 출발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도덕이나 사회규범 등 가식적인 관념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인간생명의 원적지에 들어가서 미적 언어로 인간의 순수한 욕망을 싱싱하게 담아내고 있다.「하늘」에서는 하늘은 남성을, 땅은 여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하늘은 씨앗을 물으며 음모陰毛의 이랑을 적신다./희멀건 엉덩이로 생명의 방아를 깊이 찧는다./뜨거운 바람들이 아, 아 흐느끼듯/몇 번이나 흙의 자궁子宮 속을 길게 지나가고/어디서 마을의 벽시계가 새벽을 알린다.”라고 자신의 개인적인 상상과 자연현상을 교직交織하여 복합적인 구성으로 성행위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그의 시 세계는 자연의 원리를 드러내면서 인간의 행복(쾌락)을 미래가 아닌 현재의 행위에서 추구하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점에서 현세의 행복을 내세까지 이어가려는 고대 신라인들의 염원에 맥락이 닿는다.「눈사람과 장미」는 비유의 언어들이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바위틈에 기대어 봄을 애태우는 장미의 갈증을 며칠 동안/깊숙이 밀어 넣고 흔들어 주었습니다.(나는 달콤한 여인의 살 속에서/스멀스멀 기어가는 한 마리 물배암)/허벅지를 더듬으며 올라가는/아, 사랑의 가지 위로/푸른 정액精液이 돌고/입을 여는 바다조개,/주먹만한 햇덩이,/몇몇 송이 비릿한 꽃망울을 마알갛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성적 쾌락의 절정을 감지하게 한다. 그 쾌락은 어떤 의도도 목적도 없는 순수한 육체의 쾌락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생명력을 갖는다. 그것은 또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같이 정신의 해방감解放感을 동반하여 제도와 이념, 관습, 윤리 등에 억압되고 굴절된 성의 세계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요인을 만든다. 그리고 독자들을 그의 독특한 정신과 향기로운 성감각의 세계로 유인한다. 나는 김용오 시인의 대담한 성 묘사가 관능에만 머물지 않고 정신적으로 승화되기를 바라며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간다.   *김용오(金容五): 1982년 에 「들」「봄비」「개나리」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 「신의 수염」「동화작용」「두 사람에 관한 성찰」「멀티오르가슴」등                                                                                                                      2006년 8월호 계재  
39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4> / 심 상 운 댓글:  조회:947  추천:0  2019-07-12
이향아 시인의 시- 「후회」「문패」   비오는 날 시장 길에서 뒹구는, 고추, 가짓모 몇 그루를 주웠다. 나는 어두운 농사일 솜씨로 잔디를 쥐어뜯고 그것들을 앉히었다. 팔려가던 어떤 이의 손에서 도망쳐 하필 내 눈에 뜨인 연고, 혹은 이들을 버린 자로부터 내 손에 안기기까지의 연고, 그것들의 숙명이 미안스럽다.   겨우, 내 뜰에 오려고 씨앗에서부터 저들이 견딘 그 긴 역정을 생각해 보라.   올 여름 열릴 진보랏빛 가지 몇 개 루비빛 고추가 익을 늦가을까지 나는 황후처럼 걱정이 없을 것이지만 때때로 후회도 하면서 이들을 본다.           ---------「후회」전문   우리집 문패는 작고 초라하다. 남 보기에 하찮을 우리 행복의 크기, 남편의 겸손이 내 순종을 불러 거기 휘파람 불면서 걸려 있다.
38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3> /심 상 운 댓글:  조회:982  추천:0  2019-07-12
김석규의 시- 「오래된 우물」  「배를 깎으며」   앵두나무 그늘이 희미한 등불로 걸려 있다. 세월을 등지고 앉아 하얗게 늙어만 가는 연기 매캐한 부엌 쪽에서 타는 기침소리 기억의 먼 두레박줄을 타고 내려가면 아직도 이가 시려오는 새파란 물맛 어두컴컴한 바닥에 꽂혀 있는 은비녀로 새벽마다 별이 후둑이는 정화수 사발 조금은 서러운 후예들이 타관을 떠돌며 지치고 더위 먹을 때마다 생각하는지 한나절 내내 낮날이 하염없이 앉았다 간다. ----------------- 「오래된 우물」 전문   은빛 과도에도 향기가 번진다. 한 겹 젖은 문을 밀면 맨살의 과육 진한 과즙의 수심 아래로 유영하는 지나간 봄밤의 출렁이는 달빛 유역 흐드러지게 핀 꽃그늘 속으로 마을 큰애기들 떼지어 들어가고 그 뒤를 총각들이 우우 몰려가고 밤새도록 하얗게 들락거렸으니 한낮의 잉잉대던 꿀벌의 날개소리여 하루가 다르게 배는 불러오고 남풍 불어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 빗는 벽사창 환히 비쳐지는 구중심처 땡볕을 나서면 한 점도 흐트러짐 없이 더러는 태풍으로 모질게 부대낀 자리 단맛을 채우기 위해 수신제가하였던 이제는 둥그런 보름달로 높이 떠 사각거리는 향기 삼경을 다 채우고 남는다.   ------------------ 「배를 깎으며」전문   지나간 한 시대(1930,40년대)의 한국적 생활정서를 개성적인 화폭에 담은 박수근 화백의 그림이 요즘 가장 높은 호가呼價를 누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를 업은 아이의 모습, 길거리에 광주리를 놓고 앉아 있는 아낙의 모습 등 아주 단순한 대상의 그 서민적인 것들이 우리들 집단의 기억 속 맨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그리움의 정서를 일깨우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나는 김석규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그의 시편들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가 주는 매력의 근원을 더듬으며 나름대로 짚어보았다. 김석규의 시편에 담겨 있는 시적 대상과 정서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지나간 시절의 정서를 되살려주는 것과 어떤 주장이나 관념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김석규의 시 속에 담겨 있는 향토언어와 색채는 시인의 개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독자들을 아늑하게 감싸 안는 힘을 발휘한다. 그 향토색 이미지의 언어들은 박수근의 그림처럼 당시 사람들이 안고 뒹굴었던 슬픔과 기쁨을 은은하게 드러낸다. 그 정서의 그림자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DNA처럼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오래된 우물」에서 오래된 고향집 우물 속 새파란 물맛으로 남아 있는 시인의 의식意識의 원형을 만난다. 이 새파란 물맛은 어머니 마음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앵두나무 그늘, 희미한 등불, 기침소리, 은비녀, 정화수, 낮달” 등은 흰 옷 입고 이 땅에 살다 가신 우리들 할머니나 어머니의 그림자와 잘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을 아련한 기억의 나라로 끌어들인다. 잊어버린 듯하지만 마음의 밑바닥에서 물무늬처럼 떠오르는 고향의식. 이것은 이미지의 형상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누구나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영원한 것이기에 공감의 폭이 깊어진다.「배를 깎으며」도 청각과 시각을 통한 회화적인 표현이 시의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배 하나가 익을 때까지의 과정이 진한 이미지의 영상으로 떠오르면서 감미로운 맛을 풍긴다. 라고 봄밤에 하얗게 핀 배꽃 아래서 마을 큰애기(처녀)들과 총각들이 벌이는 사랑놀이와 그로 말미암아 배가 불러오는 배의 이야기가 시의 질량을 풍성하게 부풀리면서 재미를 준다. 그리고 싱싱한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이 생명감은 생명의 기쁨이 뿜어내는 봄밤의 무르익은 향기다. 그 속에는 자연의 오묘奧妙한 관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것을 나타내려는 시인의 의식이나 의도가 잘 감춰져 있어서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시어의 쓰임에서도"벽사창, 구중심처, 수신제가, 삼경"등 고전적인 언어들이 풍기는 맛도 음미할만하다. 나는 김석규 시인의 항토색이 짙은 회화적인 이미지에 늘 시선이 끌리곤 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지속되어 온 그의 연 가름이 없는 줄 시 형태의 시형詩形에 이제는 친근한 느낌마저 갖는다. 그의 시형詩形이 그의 개성(캐릭터)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더 주목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중시하고 그 사실 속에서 압축된 정서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그의 시기법의 건강함이다. 그의 초기시「파장」이나「황톳길」「산동네 사람들」에서 발견되는 사실성과 서민의 애환과 저항의식의 건강함은 아직도 그의 시에 저류를 형성하고 있다.「오래된 우물」과 「배를 깎으며」에서도 사실적인 영상미가 시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 김석규(金晳圭) : 1976년 에 「봄언덕」「초동」「삼천포 기행」이 천료되어 등단. 시집: 「파수병」「늪에다 던지는 토속」「풀잎」「닭은 언제 우는가」「백성의 흰옷」등 다수   정연덕 시인의 시-「황토黃土길․8-황지黃池의 가을」「청풍고물상淸風古物商」   막장의 우리 모습 눈여겨 보았는가. 흰 이빨로 허허 웃는 검은 삶을 보았는가.   바람처럼 지나가는 우리의 세월 우린 벙어리가 아닌데 왜 말이 없는가.   석탄처럼 굳어진 우리들의 걸음걸이에 채여 휘청거리는  또 하나의 하늘을 보았는가.   말라가는 눈물도 얼고 젖은 이마에도 성에가 끼이는 산읍山邑 황지黃池의 가을은 춥고 우린 빙점氷點에 섰는가.  --「황토黃土길․8-황지黃池의 가을」전문   제천군 청풍면 사무소 산허리를 따라 내리면 전기다리미 가슴 뚫린 새마을 스피커 공사판 노동자의 곡괭이 날 삽날들이 고단한 소임을 다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다.   입 깨진 병들도 혼자 울던 쭈그렁 깡통들도 산골짜기 고물상에 고단한 육신을 맡기고 저마다 깊은 잠에 빠진다.   길 건너 능강집 미스장張이 부르는 동백아가씨와 그 빨알간 입술과 고물상 주인 박씨가 부르는 철늦은 유정천리有情千里 노랫소리가 우리의 가슴에 한 잎 두 잎 낙엽으로 쌓인다.   담장 밑에 피어난 들국화 몇 송이 하늘을 우러르며 흙먼지로 분칠을 한다. -------「청풍고물상淸風古物商」전문   시의 진정한 아름다음이 언어의 수사修辭에만 있지 않다는 것은 상식이다. 언어의 분칠이 더덕더덕 묻어나는 시들은 허망하다. 그렇다고 시가 언어의 수사에서 너무 멀어지면 언어예술로서의 존재가치가 상실된다. 그래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갈등은 영원한 숙제로 시인들의 짐이 되고 있으며, 그 짐이 오히려 시의 무한한 매력을 낳는 모체가 되고 있다. 정연덕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가 안고 있는 순수성이 언어의 기교를 뛰어 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자질구레한 기교를 뛰어넘어서 사실(진실)이라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는 그의 시는 이 땅의 서민들의 애환과 눈물을 맨 몸뚱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그의 시를 세우고 있는 든든한 기둥이다.「황토黃土길․8-황지黃池의 가을」은 강원도 태백산 깊은 골짜기 황지 탄광에서 석탄가루에 시커먼 검둥이가 되어 탄광의 막장에서 광부들의 모습을 생생한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시로 열어주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적 진실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막장의 광부들은 이 땅의 변두리에서도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스한 시의 눈길을 주는 것은 열린 마음이 아니면 쉽지 않다. 그리고 시인과 대상이 한 몸이 되지 않으면 감동의 파장을 일으킬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의 첫 연 가 더욱 가슴에 닿는다. 우리는 흔히 사진을 통해서 한 시대의 현장과 사물과 인물들을 사실적인 기록으로 남긴다.「청풍고물상淸風古物商」은 시인의 눈이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서 1970년대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표정을 통해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1970년대의 흑백사진을 보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이 시는 뛰어난 사실성과 기록성을 보여주는 시로 평가된다. 첫 연의 에는 시인의 어떤 관념도 정서도 주장도 들어가 있지 않다.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나열하였을 뿐이다. 이 무심한 듯한 사실의 나열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 하고 있는지, 굳이 사물시의 이론을 붙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달된다. 그래서 둘째 연라는 구절이 서민들의 삶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드러내면서 우리들 인생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시의 깊이가 무한하게 느껴진다. 이런 정적인 이미지의 흐름이 셋째 연에서는 라고 동적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시의 사실적인 생명감이 활기를 띠고 있다. 나는 정연덕 시인의 시편들을 거듭 음미하면서 시대의 거센 흐름 속에서 우리들의 시가 살아남는 법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어떤 주장이나 관념의 허망함을 되새겨 보았다.   * 정연덕(鄭然德): 1977년 에 「3월의 부유富裕 」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 「달래강」「박달재」「망종일기」「흐르는 산」 「풀꽃들의 변주」(시선집) 등   안혜경 시인의 시- 「밤의 정원에서 들려오는」「등나무의 노래도」   네가 가버린 후 혼자 남아 밤과 마주한다 너를 맞이하는 것은 따스한 불빛 밤의 정원에서는 결코 네가 들을 수 없는 고통에 찬 소리들이 들려온다 어둠 속에서 손을 내려뜨리고 있는 나무들의 몸에서 새벽이 되도록 피가 흐르고 그제야 정원은 조용해진다 결코 네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내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바람조차 나무들의 손을 잡으러 오지 않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지 않는다 --------「밤의 정원에서 들려오는」전문   봄볕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다 뚫고 나갈 수 없는 울타리 틈새로 희미하게 불어오던 바람도 결국 울타리 앞에서 끝난다   가로막혀 있는 길 앞에서 그림자조차 방금 멈추었다 벽이 수런거린다 누구인가 얘기를 한다   봄볕은 물밑보다 더 고요하여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의 한가운데 서서 길을 찾지 못하고   주위는 너무 익숙하다 어떤 추억도 생겨나질 않는다 등나무의 노래도 듣지 못한다   그림자와 나 그리고 봄볕의 한가운데 너무 환한 빛 속에서 길은 날아가버린다 -----「등나무의 노래도」전문   환상幻想은 현대시의 중요한 표현기법 중의 하나다. 현실의 욕구가 아무리 강해도 시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시적 공간으로 변모된 현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환상 속에는 현실에 대한 풍자나 비판의 공간도 들어가지만, 공리적인 가치판단에서 벗어난 환상 속에는 시인의 심령적心靈的인 무한한 어떤 힘이 작용하여 생명의 본질을 드러낸다.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축축한 물기가 도는 생명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인정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시의 환상적 특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언어 속에서 어두운 환상의 덩어리를 부둥켜안고 살아온 안혜경 시인의 단독자적인 고독한 시의 여행은 20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편들 속에 들어 있는 절망, 고독, 불안, 공포 등의 심리적 요소들이 그의 시에서 빚어내는 어둡고 칙칙하고 음울한 환상의 세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정서에 속하는 것이지만, 문명의 그늘 속에 숨어 있는 현대인들의 공통적인 마음의 상처로 확대될 수 있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환상의 세계는 그가 현실인식과 대응에서 자기만의 세계와 기법을 확고히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공리적인 가치나 관념 등 외적요소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시인의 내면의식과 답답할 정도로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독특한 정서와 감성이 빚어내는 언어의 세계는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특유한 개성의 세계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속 세계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짧고 함축된 형식의 언어로 자기의 이야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그의 시편들은 독자에 대한 배려나 무엇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 순수한 독백언어일 수밖에 없다.「밤의 정원에서 들려오는」에서도 라는 구절에서 그의 독특한 환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에서 피를 흘리는 나무와 어둠과 정원과 바람은 자연현상이 아닌 시인의 심리적 내면을 은유隱喩하는 표현이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이별의 아픔과 슬픔을 이렇게 환상적인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래 동안 숨겨져 있던 자기내면의 빛을 향해 의식의 채널을 강하게 돌리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어둠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둠과 빛 즉 환멸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 빛의 의식이「등나무의 노래」에서 드디어 라고 폭발적인 선언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의 끝 연에서 가로막혔던 길이 빛 속에서 날아가버리는 장면은 안혜경 시인의 시에서 중요한 의미를 암시한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과 삶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정신적인 순간을 그려낸 것으로도 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안혜경 시인의 정신을 억누르고 있던 절망적인 그림자들과 어두운 자의식自意識의 무거운 굴레가 빛 속에서 사라져버린 길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시세계의 큰 변화를 의미하고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초기시에서 시작되어 20여년 간 지속되고 있는 그의 음산한 시세계는 박재릉의 한국 샤머니즘 시의 밤과 비교될 수 있는 한국 현대시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끔 그의 어두운 환상이 주는 마력魔力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 안혜경(安惠景) : 1982년 에 「망제가」로 추료 등단함. 시집: 「강물과 섞여 꿈꿀 수 있다면」「춘천 가는 길」「숲의 얼굴」「밤의 푸르름」「바다 위의 의자」 등
37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2> /심상운 댓글:  조회:910  추천:0  2019-07-12
배정웅 시인의 시- 「대어大魚」 「신神․사랑」    수중水中에서 난데없이 순백의 상아건반象牙鍵盤 두드리는 소리로 울리다가, 이 지구의 가장 높은 높이에서 낙하하는 내 영혼靈魂의 깨끗한 물소리로 출 렁이다가, 푸드득 서너 마리 새의 일제히 깃 치는 소리로 치달려 오다가, 돌 연 일진一陣의 돌풍으로 변신하여 불다가, 그믐 밤 하늘의 천둥처럼 비늘의 섬광閃光 번득번득이며 졸지간에 내게 몸 꽂혀오는 대어大魚 한 마리, 정작 피 흘리며 나둥그러지는 것은 대어大魚가 아니라 다섯 자 여덟 치의 나.                                                                                 ---「대어大魚」전문  내 일찍이 단 한 번도 뵈온 일이 없는 신神을, 이른 아침 생生의 혼미昏迷에서 깨어나 이를 닦다가 가을 높은 하늘을 치올려 보던 일순一瞬 , 처음으로 뵈었더이다.    내 일찍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무구無垢한 사 랑을, 통근버스 속에서 낮선 여자와 건전지乾電池 모양 몸을 잇대어져 있다가 처음으로 느꼈더이다.    ---신神은, 내 한 입의 물먹음이 이루는 공간空間과 질량質量 속에서 그득히 비취이시고 물결치시더이다. 나도 잘 모르는 무슨 부호符號 같은 거로 찌르르 찌르르 끝없이 수신受信되어 오더이다, 무구한 사랑 은.                                         --------「신神․사랑」전문   배정웅의 시편들에서는 생동하는 감각이 물질物質처럼 만져진다. 그것은 그의 시편들이 체험 속에서 태어난 현장의 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의 체험은 상상과 조화를 이루어 현실과는 다른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체험 속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형이상의 감각과 만난다. 「대어大魚」는 어느 날 예당저수지에서 대어大魚를 들어 올릴 때의 감각을 "상아건반象牙鍵盤 두드리는 소리→ 내 영혼靈魂의 깨끗한 물소리→ 푸드득 서너 마리 새의 일제히 깃 치는 소리→ 그믐 밤 하늘의 천둥처럼 비늘의 섬광閃光 "등 점층적인 기법으로 보여주다가 라는 놀라운 체험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대어大魚와 내가 한 몸으로 인식되는 순간의 놀라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낚시꾼들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붕어 월척越尺을 낚는 것이다. 그래서 월척을 낚으면 어떤 사람은 탁본을 떠서 날짜와 장소,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고 전장에 나가서 획득해 온 전리품같이, 아니면 자신의 경력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기 위해서 액자에 넣어서 방의 벽에 걸어 놓는다. 그런데 그는 대어大魚 한 마리를 건져 올리던 날, 물고기 대신에 다섯 자 여덟 치의 내가 피투성이로 나둥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나와 물고기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의 한 순간을 체험한 것으로 인식된다. 물고기 한 마리를 통해서 우주와 내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낚시 줄처럼 팽팽한 인연의 끈으로 묶여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뉴튼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주의 법칙을 발견한 것과 견줄 수 있는 발견이다. 이 시는 그러한 순간의 사실을 생동하는 감각의 언어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어서 강한 느낌을 준다.「신神 ․사랑」에서도 그러한 인식의 순간이 담겨있다. 신의 존재와 사랑의 느낌을 감지하고 인식하는 순간을 일상생활의 사실적인 체험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사실 우리들이 잊고 사는 것 중의 하나가 이 세상 어디에도 진리의 모습이 없는 데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동양의 선불교에서는 이를 깨우치기 위해 대도무문大道無門 천차유로千差有路라는 말이 사용되고 그것이 진리를 찾는 큰 길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이 말의 뜻은 진리로 들어가는 문은 천千 가지로 다르지만 그 문은 어디에나 있어서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神이나 사랑이 존재하는 곳은 어떤 특정한 장소만이 아니라 이 세상 구석구석 어디에나 다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신神을 만나는 시간도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어느 때나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에 신神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다고 한다. 그래서 그 순간의 경험을 온다고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자신의 정신을 투명하게 유지하면서 사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존재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다는 것은 나의 몸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그곳에 온전히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의 시인은 일상생활의 현장에서 한 순간
36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1> / 심 상 운 댓글:  조회:899  추천:0  2019-07-12
양채영 시인의 시-  「개망초 너무 작은 씨」「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   언제부턴가 겨울 벌판에 팔짱을 끼고 혼자 서 있는 그런 나무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옆에 미농지 한 장 날리고 그 미농지 속에 무슨 불덩이가 싸여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겨울 국그릇을 뒤엎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내가 잘 모르는 하이데커가 죽었다고 큰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를 압도시키지 못한 그의 콧수염보다 전염성이 강한 국제독감國際毒感이 네게 와 있다. 별 상관도 없는 것들이 나를 화상火傷입게 하고 얼게 하고 개망초의 너무 작은 씨앗들이 너무 큰 얼음덩이 속에 묻혀 겨울을 난다는 그런 생각의 얼음덩이가 덜 풀려 있다. -----「개망초 너무 작은 씨」전문   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 사이로 단조短調의 구름 몇, 비산비야非山非野에 비명에 간 울음 몇, 오기傲氣들은 빨갛게 익어서 산천에 떨어진다. 은사시나무잎 떨어지는 자리에 귀 밝은 바람만 쌓이고 아무리 흔들어도 묵묵부답黙黙不答인 저 쪽 커다란 응답應答 ------「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전문   양채영 시인의 시편들은 거듭 읽고 음미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 즉 대상을 일정한 거리에 떼어 놓고 응시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여백을 남겨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여유롭게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개망초 너무 작은 씨」에는 그의 독특한 상상이 눈길을 끈다. 겨울나무 옆에 불덩이가 미농지에 싸여 있다는 그의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열게 한다. 이 시에서 겨울과 불덩이의 대립적인 관계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그리고 겨울과 뜨거운 국그릇의 관계는 또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상반된 관계는 오히려 상반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크게 확대된다. 죽음과 삶은 겉으로 볼 때에는 상반된 개념이지만 죽음 속에 삶이 있고 삶 속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보면 결국 죽음과 삶은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겨울 속에 들어 있는 봄의 기운을 불덩이나 뜨거운 국그릇이라고 은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시는 그런 수사修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들은 왜 자신의 주체적인 사고의 집을 짓지 못하고 외국의 철학에 매달려야 하는가를 하나의 화두로 제기하고 있어서 관심을 집중시킨다. 있다고 그는 독백조의 말로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고 결론 짓는다. 독자들은 그의 논리보다도 그의 상상력과 직관에 더 동감하게 된다. 서양철학의 논리성보다도 동양의 직관이 더 날카롭고 파괴적일 때가 있다. 어떤 중이 운문雲門 스님에게 불佛(불법, 진리)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운문雲門스님은 한 마디로 건시궐乾屎橛(변소간의 뒷쓰개 작대기)이라고 대답했다. 불佛이 진리를 의미하는 숭고한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왜 운문스님은 더러운 것을 들어서 그것이 불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고정관념을 파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 말 속에는 불법에는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다는 의미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깨달음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어법을 선禪에서는 도어법倒語法이라고도 한다. 이 시의 끝 부분는 구절은 자신의 사유에 대한 성찰과 서양철학의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꼬집는 은유다. 그러면서 생각의 얼음을 풀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은 이러한 동양적 직관의 세계를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시대적인 아픔도 한 아름 안고 있다. 는 앞 구절을 살펴보면 시인이 얼마나 깊은 사유 속에 잠겨 있는지 알게 된다. 구름 몇과 울음 몇은 서로 대구對句가 되어 의미를 심화시킨다.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울음 몇 점의 의미는 구름보다 더 절실하고 크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구름 몇 점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그 응답은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선禪에서 말하는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다. 그래서 이 묵묵부답은 그 자체가 우주의 실체를 드러내는 큰 응답이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이렇게 현실의 문제를 응시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영원을 보고 있는 직관의 눈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양채영(梁彩英:):1966년 에 「안테나 풍경」「가구점」「내실의 식탁」이 천료되어 등단. 시집 「노새야」「善․그 눈」「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지상의 풀꽃」」「翰林으로 가는 길」「그리운 섬아」「그 푸르른 댓잎」등   송수권 시인의 시- 「여승女僧」「시골길 또는 술통」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짓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 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숨어 산다는 걸 알았으며 이따금 꿈 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여승女僧」전문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물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시골길 또는 술통」전문   송수권 시인의 시편 속에 담겨 있는 서정은 싱그러운 향기를 풍긴다. 그리고 사실성과 서사성이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에너지를 전한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세련된 언어에 의해서 감칠맛을 내고 있다.「여승女僧」은 소재素材에서 1930년대 시인 백석白石의 「여승女僧」을 떠올리게 하지만 서사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다만 여승의 모습이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것 같아서 연상聯想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 시를 찬찬히 읽으면 송수권 시인의 내밀한 정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의 시의 원천이 어디 있는가를 조금 짐작하게 된다. 그의 순수 서정시는 가끔 꿈속에서 만나는 여승에 대한 감정의 순수한 발산이다. 는 구절은 미당未堂이「나의 시詩」에서 자기의 시는 봄날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풀밭에 앉아 있는 어느 친척 부인의 치마폭에 풀밭에 홍건히 떨어진  낙화를 주워 모아 놓는 수진무구한 마음의 행위였다고 고백하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순수무구한 감정의 행위가 아니면 서정시는 태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의 서정시들은 공리적인 경우가 많다. 사회현상에 영합하여 이미 정해진 수순에 따라 전개되는 시들이 그것이다. 그런 시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정시라고 말할 수 없다.「여승女僧」은 공리성이나 사회성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자기만의 순수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투명한 시각적인 이미지로 떠오르는 그의 서사(추억담)는 독자들에게 어떤 논리적 해석으로도 풀이 할 수 없는 애련哀戀한 정서의 세계로 유인한다.「시골길 또는 술통」은 송수권 시인의 신명이 즐겁게 솟구쳐 나온 시다. 흡사 한 판 굿거리를 펼치듯 풀어내는 그의 신명은 정말 순진무구하여서 독자들의 마음까지 햇빛으로 가득하게 하고 그 여운을 오래 남긴다. 은 사물(술통)과 시인이 한 몸이  되지 않으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신명의 세계다. 점층적으로 반복되는 동적인 이미지가 계속하여 뿜어내는 에너지는 허무의 길을 죽이는 에너지로 상승한다. 그것이 이 시의 의미공간이다. 나는 그의 정서가 그의 열린 마음에서 용암鎔巖처럼 타오르고 솟구치고 있기 때문에 더 가슴에 와 닿고 오래 기억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허무를 이겨내는 그의 시적 방법에 깊이 동감한다.   *송수권(宋秀權):1973년 에 「산문에 기대어」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산문에 기대어」「꿈꾸는 섬」「다시 산문에 기대어」「야도」「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등 다수   오진현 시인의 시 - 「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밤비」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밤비」전문    오진현 시인의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은 그의 외롭고 치열한 시 쓰기의 한 결정체다. 1988년에 상재된 시집「탈관념」은 시단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2003년 디지털리즘의 선언으로 인해서 그의 시운동은 확실한 거점을 만들고 있다. 그의 탈관념은 대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다. 어떤 감상도 배경지식도 들어가 있지 않은 시「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은 직관적인 감성이 언어와 결합하여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여준다. 그 환상은 동적인 에너지를 안고 스스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깊은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콩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고정관념(사전지식)에 묶여 있는 독자들은 당돌하고 낯선 느낌이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는데 주저한다. 그리고 공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가로수나 황단보도 빌딩의 콩크리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언어의 끈을 잡고 늘어진다. 사실 이 시는 그런 독자들의 의식혁명(언어혁명, 깨우침의 훈련)을 위해서 감성수련感性修練의 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시다. 이 감성수련은 언어에서 해방된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을 직관을 통해 체득하게 한다. 그래서 오진현 시인은 「탈관념」시집의 후기에서 이 시의 감상법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이 시를 마음속으로 깊이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눈앞에 깨끗하고 가장 아름다운 공을 상상해서 그린다. 다음에 시의 진행에 따라서 공을 튀기어 본다. 공이 점점 높이 뛰어오르도록 한다. 그래서 천정도 뚫고 올라가서, 하늘 높이 뛰어 오른다. 이렇게 뛰는 상상을 반복해서, 파란 하늘의 끝까지 뛰어 오르게 하여 별로 박힐 때까지 계속한다. 이런 일을 반복한다. 즉 이렇게 해서 실제로 뚫고 지날 수 없는 관념의 벽인 천정도 뚫고, 중력도 뚫고 나서 눈을 떠 보도록 한다. 그러면 이 시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시의 모든 것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충동적인 의식의 흐름이 생겨서 지금까지 고정되어 있던 컵이며 휴지며 모든 사물이 뜨는 느낌(감성)을 갖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서 보면 관념의 어떤 한恨이나 얘기(내용)로부터 오는 감동보다 더 깨끗한 탈관념의 본질적인 직감만으로서 느낀, 감동과 그것의 무의식 속에서 조합되어 나오는 깊은 내용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렇게 실제의 체험을 통한 탈관념의 훈련은 언어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선禪의 세계와 같다.「밤비」는 이런 탈관념의 경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내면의식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순간 포착의 촬영기법 즉 염사念寫와 접사接寫라는 디지털리즘의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밤중에 그는 깊은 명상(집중)의 의식 속에서 빗소리를 듣는다. 그때 그는 빗소리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 빗소리는 문득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의 미루나무을 떠올리게 하고 비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리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그는 아무런 관념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라고 자신의 내면의식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과 깊은 의식의 세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파란 에너지의 불빛이다. 그것은「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에 들어 있는 동적 에너지와는 다른 내면의 에너지다. 그래서 이 시는 언어가 아닌 (언어의 껍질을 벗은) 생동하는 물질(생명체)로 감지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오진현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감지되는 이런 독특한 감각을 디지털리즘이 내재하고 있는 야성野性의 사고에서 솟아오르는 생생한 본질적인 감각이 아닌가라고 나름대로 짚어보면서도, 알 수 없는 그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즐거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오진현(吳鎭賢): 1975년 에 「입술 푸른 뻐꾸기」외 2편이 천료되어 등단. 시집 「동진강 월령」「草民」「탈관념」「東學詩」「딸아 시를 말하자」등
3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0> / 심 상 운 댓글:  조회:872  추천:0  2019-07-12
이광석 시인의 시---「석류를 따며」「나무 1」  그대 내 어둔 가슴속 설레임 하나 기다림 하나 키우더 니 마침내 노을빛 작은 등 나를 향해 켜들었네. 옷고름 푼 늦가을 억새들 취한 듯 수줍은 듯 젖은 어깨 가릴 때 나는 그대 정수리에 알몸의 달빛으로 꽂히리. 아무리 사는 일 에 부대끼고 두렵고 낯선 어둠 세상의 빈집들을 기웃거릴지 라도 따뜻했던 아름다웠던 해질녘 그대 몰래 불 밝힌 입맞춤 불러내진 못하리. 먼 훗날 우리 사랑 몸져 쓸쓸한 추억 속으로 떨어질지라도 이별의 예감만은 아껴두리. 찬 서리 하얗게 그대 창문에 커튼을 내릴지라도 내 가슴속 은밀히 숨겨둔 작은 방 한 칸 높고 깨끗하게 비워두리. 안 으로 안으로만 묻어온 빠알간 애모 가지가지마다 총총 걸 어놓고 그대 오는 길목 다시 환히 비추리.                         ---「석류를 따며」전문   나무는 제 몸 속 어딘가에서 목탁소리를 듣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천년 푸른 남해 해조음海潮音소리도 듣는다 제재소에서 갓 쓸려나온 톱밥들의 싱그러운 웃음소리도 듣는다 나무는 하루 종일 필요한 소리만 듣는다 새 움을 틔우고 잎을 내리고 헐벗은 가지마다 깊은 생각 헹구어 낼 때도 나무는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전기톱으로 고문을 당하고 뿌리까지 뽑혀도 나무는 낼 수 있는 소리가 없다 겨울밤 달빛들이 실핏줄처럼 풀어내는 대금 산조 한 소절도 흉내낼 줄 모른다 나무는 오로지 남의 소리 듣는 것이 그지없이 행복하다             -----「나무1」전문     이광석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마음의 진동振動”이란 말을 생각했다. 마음의 진동은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항상 솟아오르는 기쁨이나 환희의 감정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상승의 에너지다. 그래서 그 진동은 모든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근원과 연결된다. 그의 서정시가 관념의 장벽을 넘어서는 생생한 마음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도 그런 에너지의 작용과 관련되는 거 같다. 그 서정은 그의 깊은 사색과 명상瞑想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석류를 따며」에서는 석류라는 은유隱喩의 심상을 통해서 자신의 영원한 기다림(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데, 대중적인 흔한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그의 기다림은 존재의 근원과 연결되는 지순한 감정으로 승화되어서 독자들의 정신에 진동의 파장을 남긴다. 그것은 기다림(그리움)이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상승시키는 근원적인 정신의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는 이 시의 끝부분의 구절들이 더욱 향기롭게 감지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 속의 화자가 은밀한 작은 방 한 칸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그대는 누구일까. 에 대한 해석은 만해시萬海詩의 님과는 다른 차원에서 해석되겠지만 앞에서 말한 시인의 정신을 상승시키는 존재, 생의 근원이 되는 빛과 같은 존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나무 1」과 연관시켜보면 더 분명해진다.「나무 1」에서는 자신의 소리 즉 아상我相에서 벗어나서 공空 또는 무無의 세계에서 감지하는 그지없는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 제 몸 어디에선가 목탁소리를 듣는 나무는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고 한다. 고 한다. 이러한 정신의 경지는 앞의 시「석류를 따며」에서 보여준 기다리던 그대를 맞아들인 후의 세계인 것 같다. 그대(깨달음)가 들어 와 앉아서 목탁소리를 들려주는 환희의 세계에서는 외부의 그 무엇도 모두 그지없는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밝고 긍정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광석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맑고 환한 세계로 들어가는 기쁨을 안아 본다.   *이광석(李光碩):1959년 에 「바위」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 「겨울나무들」「겨울을 나는 흰새」「겨울 산행」「잡초가 어찌 낫을 두려워하랴」「삶 그리고 버리기」(시선집) 등   노향림 시인의 시---「창」 「꿈」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던 김 스테파노가 운명했다.   그에게는 십자고상과 겉이 다 닳은 가죽 성경, 벗어놓은 전자시계에서 풀려나간 무진장한 시간이 전부였다.   그가 나간 하늘 뒷길 쪽으로 창문이 무심히 열린 채 덜컹거린다.   한평생 그에게 시달렸던 쑥부쟁이꽃들이 따사로운 햇볕 속 상장喪章들을 달고 흔들리는   조객弔客이 필요 없는 평화로운 곳.       ---「창」전문   바다가 앞에 와 있었다 뻘밭 사이에 쳐박고 있는 그의 얼굴이 늘 보고 싶었다. 신음소리가 귀신이 되어 나오던 집 한 채, 철사토막 같은 손으로 바다 소나무들은 앙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냄새가 그리웠다 긴 복도 끝 육조 다다미 방房에 복막염으로 나는 누워 있었다 사금파리, 야생초, 생고무냄새 바람사이의 흐릿한 호얏불, 오래 문닫힌 대장간에 쌓여있는 정적靜寂들이 보고 싶었다 아, 손과 발을 달고 날아다니는 아이들 소리들이 보고 싶었다.   나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몸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미끈거리는 소금기만이 마음에 가득히 묻어났다 바다는 늘 앞에 와 있었다. ------「꿈」 전문   인식과 표현은 시의 중심축이다. 그래서 시의 대상은 시인이 감지하고 인식한 주관적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노향림 시인은 자신이 감지하고 인식한 대상을 감각적으로 객관화시키는 언어표현에 남다른 특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개인적인 감정표현을 억제하고 객관적 시각으로 대상을 관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모더니즘(주지주의)의 기본적인 기법이기도 하다.「창」에서도 그런 그의 언어기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따라서 그의 시를 대하는 독자들은 그의 독특한 시각, 신선한 감각, 깔끔하고 냉정한 언어에 호감을 갖기도 하지만 너무 감정을 죽이고 있어서 따뜻한 정감이 흐르지 않는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깊이 읽어보면 그의 차가운 언어 속에 들어 있는 삶의 용암鎔巖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섬세한 눈길이 집어내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들의 실존의 모습도 만나게 된다. 「창」에서 보여주는 김 스테파노의 죽음과 그의 한 생애를 증언하고 있는 것들 - 손바닥만한 밭, 십자고상과 겉이 다 닳은 가죽 성경, 벗어 놓은 전자시계-를 통해서 무소유無所有의 삶이 어떤 모습의 삶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끝부분 이 시의 감동과 여운을 더 길게 남긴다. 그 속에는 남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모두 주어버리는 이타행利他行의 삶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 스테파노의 가난한 삶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최대한으로 절제된 시의 언어가 빚어내는 향기로움과 이 암시하는 우주적인 인식 속에 들어 있는 김 스테파노의 죽음이다. 어쩌면 그 무진장의 시간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끈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것을 무심한 듯 슬쩍 드러내고 있어서 인상적인 그림을 남기고 있다.「꿈」에서는 사람냄새를 그리워하는 노향림 시인의 시세계의 원형原形을 만난다. 이 시 속에 들어가 있는 바다, 뻘밭, 집 한 채, 호얏불, 대장간, 육조 다다미 방房, 손과 발을 달고 날아다니는 아이들 소리는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진 꿈의 세계다. 시 속의 화자는 복막염을 앓고 누워 있다. 누워 있는 곳은 육조 다다미가 깔린 방. 그는 누워서 어릴 적 뛰어 놀던 고향의 뻘밭과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오래된 대장간 집의 고요한 시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바다의 몸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환상의 세계는 그의 정신(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원형적인 무의식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그는 이러한 무의식속의 생명세계를 라고 매우 세련된 감각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노향림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냉정한 시선으로 무소유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창」도 호감이 가지만 어릴 적 고향 바다의 생명감으로 가득한「꿈」의 세계가 노향림 시인의 출발점이면서 귀착지歸着地가 되는 것 같아서 더 정감이 갔다.   *노향림(盧香林):1970년 에 「불」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K읍기행」「눈이 오지 않는 나라」「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연습기를 띄우고」(시선집) 등   안수환 시인의 시- 「겨울산」「그 후」   겨울산은 비우는 곳입니다 비워서 바람을 채우고 다시 굳은 몸을 풀어 춤추고 메마른 떡갈나무 잎이 춤추는 곳입니다   숨은 새도 다 날아간 산에 햇빛은 거기 와서 별볼일이 없습니다 벌레들은 죽고 절벽은 더욱 무너져 혹은 생명과 부활과 믿음까지 꺼져 구름은 거기 와서 별볼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쓸쓸한 겨울산은 우리들의 한계가 아닙니다 비로소 완전한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끊임없이 감추고 감추던 물소리가 다만 골짜기에 박힌 돌이 되거나 탐내고 탐내던 집중이 북망산에 드러누운 봉분이 된 연후 그래서야 몸을 비우는 겨울산입니다   이렇게 한가지로 흘러다니는 바람에게 골격을 보이는 겨울산은 이승으로 무르녹아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습니다   이 겨울산에 깊이 들어 온 후 우리는 비로소 남은 힘이 있습니다 찬찬히 겨울산을 밟고 내려서는 남은 힘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조금 있다가 새도 부르고 벌레도 부르고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춥니다  -----「겨울산」전문   두보 논어를 읽다가 덮어버리고 나는 이따금 중앙시장 뒷골목으로 나가본다 채소전 홍씨 아주머니가 내 친구라는 것을 홍씨네 실파 꼬부라진 됫박 새우들이 다 안다 정말이지 호고好古 호고라고 떠들은 공자의 말씀이 실없는 소리였다   잡쉬봐 잡숴봐 이 새우젓국물이 얼마나 달다고       -----「그 후」전문   현대시에서 시의 건강성을 진단하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래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중심에 놓고 본다는 것은 모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건강성에서 삶의 현실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안수환 시인의 시편들 중에서 현실과 대결하는 건강한 정신의 빛이 살아 있는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예언자적豫言者的인 시인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어서 읽은 후에 생각의 여운을 남긴다. 「겨울산」도 그런 시편에 속한다. 이 시는 발표시기로 보아서 1980년대의 정치적 현실과 관련지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당시의 현실과 결부시킬 때 현실참여(저항)의 시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겨울산」은 그런 시대적 현실에만 얽매이지 않고 그 현실을 버린 겨울 산으로 비유하면서 견실한 시적 구조로 우리들의 삶의 내면을 투시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이 시가 단순한 현실저항이나 민중시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죽음의 참된 의미와 절망을 이기는 힘의 원천을 암시하고 숨어있는 세계를 발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힘의 근원을 스스로 비우는 것(공空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 비워서 바람을 채우는이라고 희망의 근원을 드러낸다. 그것은 겨울 산과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묶어주고 있는 튼튼한 밧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절정을 이루는 끝 연가 던져주는 의미의 확산은 우리들의 삶의 현실로 치환되면서 큰 울림을 남긴다. 절망적인 현실을 날카롭고 진지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냉철한 이성으로 극복(부활)의 발판을 제시하는 이 시는 안수환 시의 건강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그 후」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물인식의 생생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따금 중앙시장 뒷골목에 가서 상인들과 만나고 그곳에 있는 실파, 꼬부라진 됫박 새우들을 만져보는 시인의 정신적 산책은 책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얻는다. 그것은 문자(관념)를 떠나서 선수행禪修行으로 들어가는 스님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시의 끝 구절하는 새우젓장수의 말이 책속에 갇혀 있는 언어들보다 얼마나 더 자연(일상생활)과 가까운가를 일깨워 준다. 이렇게 깨어있는 현실인식의 시가 주는 의미와 감동은 시대를 초월하면서 관념의 장식성裝飾性에 치중하는 시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안수환(安洙環):1973년 에 「구양교九陽橋」가 천료되어 등단. 시집 「멍게나무」「신들의 옷」「징조」「검불꽃길을 붙들고」「저 들꽃들이 피어 있는」「달빛보다 먼저」「충만한 시간」「가야할 곳」「풍속」「하강시편」등  
3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9> / 심 상 운 댓글:  조회:958  추천:0  2019-07-12
  윤석산 시인의 시- 언어의 환상성과 사물성-말의 오두막집 남쪽언덕에서-                       땡초를 위해       1  현대인들은 말의 껍데기만 가지고 산다.      가령 라는 말만해도 그렇다. 우리는 흔히 너를  니 니 하고 나누지만 그  런 에게는 네 마알간 피부, 네 부드러운 머리칼, 네  가 아침마다 사용했을 샴프 냄새, 그걸 헹구던 수도꼭  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의 투명한 울림 같은 것  들은 모두 증발되고 라는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내가  똑두새벽에  홀로 일어나  우두커니 뜨락의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간밤 와 잔 게 아니라  너라는 말과 잤기 때문이다.    - 「언어의 환상성과 사물성-말의 오두막집 남쪽언덕에서-」1˜2    말과 말 사이를 떼어놓았다.  조금씩 조금씩 떼어놓았다.  햇살을 받은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송사리 소금쟁이 중태기가 헤엄 쳐 오르고  조금씩 조금씩 더 떼어놓았다.  남실거리는 물살을 타고 중태기 갈가리 모래무지 빠가사리가 퍼득대고  물비늘이 빤짝인다.  말과 말 사이가 너무 멀어  오늘 밤 달빛을 나눠주러 마을로 내려간 땡초를 위해  징검다리를 놓아야겠다.       ---「땡초를 위해」전문   언어에 대한 성찰은 그것이 사물의 본질로 들어가는 입구入口가 되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중요성이 줄어들지 않는다. 특히 사람들의 눈은 늘 본질보다는 언어의 기표에 현혹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현대 사회의 여러 현상들이 본질(실상)보다는 허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에 더 매혹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언어의 그늘진 뒷면을 들여다보는 언어의 껍질 벗기기는 시기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윤석산 시인의 시편에는 이런 현대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겨 있다. 그의 시의 바탕에는 우리들이 사용하는 현대의 언어들이 너무 추상화抽象化(기호화) 되어서 언어의 본적지인 사물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시인의 인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언어 이전의 싱싱한 사물성의 세계를 환기시켜 주면서 본질의 세계로 안내하는 그의 시편들은 현대시에서 독특한 가치를 드러낸다. 그런 그의 언어의식이「언어의 환상성과 사물성-말의 오두막집 남쪽 언덕에서-」에서는 실험적인 시도試圖로 조심스럽게 제시되고 있지만, 언어에 대한 그의 사유와 시각이 매우 사실적이고 감각적이어서 신선하게 감지된다. 그것은 《가령 라는 말만해도 그렇다. 우리는 흔히 너를 / 니 니 하고 나누지만 그/ 런 에게는 네 마알간 피부, 네 부드러운 머리칼, 네가 아침마다 사용했을 샴프 냄새, 그걸 헹구던 수도꼭/ 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의 투명한 울림 같은 것/ 들은 모두 증발되고 라는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라는 짧은 시구詩句 속에 잘 압축되어 있다. 이런 그의 시구는 언어에 대한 그의 깊은 의식과 예리한 촉각을 느끼게 하면서 현대 시인들이 얼마나 자기들의 중요한 도구(언어)에 대한 심층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언어는 본질적으로 사물이 아닌 기호이며 상징(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시인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언어의 한계는 극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한국 현대시에서 보여준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의 실험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시인들은 탈관념의 언어 찾기, 사물과 언어의 거리 좁히기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당위성과 언어의식을 강조한다.「땡초를 위해」는 말과 말 사이를 떼어 놓음으로써 생기는 침묵의 세계를 통해서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말이 사라진 침묵 속에서 생기를 되찾는 사물(자연)의 세계는 선禪의 경지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참선과 함께 묵언의 시간 속에 머무는 산사山寺의 스님들의 수행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역설적이고 극단적인 언어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의 공해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치유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들도 현란하고 난삽한 언어의 사고思考에서 잠시 벗어나 묵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오로지 생생한 마음만으로 사물과 직접 대면을 해 보는 것이 자기 시세계의 실상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나는「시향」에 발표된 윤석산 시인의 실험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독특한 발상과 함께 깨어있는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을 발견하고 섬뜩함을 느끼면서도《말과 말 사이를 떼어놓았다./ 조금씩 조금씩 떼어놓았다./ 햇살을 받은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송사리 소금쟁이 중태기가 헤엄쳐 오르고 조금씩 조금씩 더 떼어놓았다./ 남실거리는 물살을 타고 중태기 갈가리 모래무지 빠가사리가 퍼득대고/ 물비늘이 빤짝인다.》라는 그의 참신한 감성感性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은 그의 시편들이 우리들의 의식을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아득한 원시原始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또 새로운 깨우침의 사유와 함께 일상과는 다른 세계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 윤석산(尹石山) : 1972년 에 「接木」「巫女」「용왕굿」이 천료되어 등단함. 시집: 「亞細亞의 풀꽃」「벽속의 산책」등   박명용 시인의 시-  「구경거리」「몸」     울안에 갇힌 곰을 보러 갔더니 곰은 는 듯 줄줄이 밀려드는 인간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인간이 곰을 구경하는지 인간이 곰의 구경거리인지 하느님 이 세상 울은 어딥니까. -------「구경거리」 전문   태풍 루사가 지나간 강변에 남루한 양복상의 하나 볼썽사납게 축 늘어져 있었다 무심코 집어들어 모래를 훌훌 털며 이리저리 훑어보는데 단추에 묻었던 햇살 한 줄기 사정없이 내 눈을 찔렀다 순간, 정신 번쩍 들어 그 자리에 급히 놓았다 저 옷 입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 하다가 문득, 내 옷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집어들어 보았다 아, 그것은 양복이 아니라 이른 새벽 깨어나 두렵게 만져보던 내 몸의 일부였다      --「몸」 전문   시를 읽는 재미중의 하나는 읽고 난 뒤에 묻어나는 언어의 맛과 곱씹어보는 생각이다. 이런 곱씹음의 여지가 남아 있는 시는 독자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리고 독자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시각視角의 날을 날카롭게 세워준다. 박명용 시인의 시「구경거리」는 그런 면에서 다른 시들과 구별된다. 그는 어느 날 동물원 우리에 갇혀 있는 곰을 구경하다가 우리에 갇힌 곰이 오히려 인간들을 구경하고 있다는 상황전환狀況轉換의 생각에 빠져든다. 그래서 《곰은 는 듯/줄줄이 밀려드는 인간들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생각 속에 갇혀서 순간적으로 당황한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이 세상 울은 어딥니까.》라는 물음을 던져보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역설逆說로써 한 순간의 착각이 빚어낸 생각의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각視角을 바꿔보면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들에게는 구경하러 몰려드는 인간의 무리가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편견과 우월감에 젖어 있는 인간들이 오히려 지능이 낮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보는 눈은 몇 개의 단계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육안肉眼이고 둘째는 천안天眼 셋째는 혜안慧眼 넷째는 법안法眼 다섯째는 불안佛眼이다. 우리들은 보통 육안肉眼만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이 육안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의 중심은 차별(분별)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대립과 갈등을 조성하고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다투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육안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육안에서 벗어난 시각에서 볼 때 비록 우리 속에 갇혀 있지만 분별심이 없는 존재인 곰은 자유롭고 우리 밖에서 차별의 울타리를 쌓고 있는 인간들은  우리에 갇힌 의식(구속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박명용 시인의「구경거리」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 있는 화두를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다. 이런 시각 바꾸기는「몸」에서 오도송悟道頌과 같은 새로운 자기 존재 발견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태풍 루사가 지나간 강변에서 주운 남루한 양복상의를 보고 그 양복상의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고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 옷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양복이 아닌《이른 새벽 깨어나 두렵게 만져보던/내 몸의 일부였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이 이 시의 중심 내용이다. 이 시는 시 전체가 점층적인 구조를 이루면서 독자들에게 시각 전환의 단계를 보여준다. (남루한 양복상의의 주인→ 알 수 없는 누구→ 내 옷 →이른 새벽 만져보는 내 몸의 일부) 그러니깐 이 시의 핵심은 태풍 루사가 지나간 강변에서 누군가 버리고 간 양복상의를 통해서 잃어버렸던(또는 새로운)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과정이다. 그 참모습 찾기는 너/나라는 분별의식에서 벗어난 시인 자신의 열린 의식意識의 눈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본질적인 의식의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내적 수련 없이는 불가능한 정신의 높은 경지다. 나는 박명용 시인의 사유가 던져주는 존재의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는 그의 시적 방법론(시각전환)을 곰곰이 내 나름대로 짚어보면서 그의 시편들이 함축하고 있는 사색의 깊은 맛을 음미하며 거듭 읽는다. 그리고 환한 빛이 보이는 길을 따라가 본다.   *박명용 (朴明用): 1977년 에 「햇살」「모발지대」「편집」등이 추료되어 등단. 시집: 「알몸 序曲」「강물은 말하지 않아도」「꿈꾸는 바다」「안개밭    속의 말들」「날마다 눈을 닦으며」「뒤돌아보기」등       김시종 시인의 시- 「상흔」「우는 농」   민보단民保團 시절에 몰매맞아 미친 영수永壽 흰 수염을 흩날리는 백수광부白首狂夫로 새파란 예비군모를 쓰고 있다   사상이 불온하다고 뭇매 끝에 돌아버린 사내 삼십년이 훨씬 넘은 요즘도 포수만 보면 기겁을 한다   미치면 단명하다는데 이름 잘 지어 장수하는 늙은 광부 영수永壽   오늘밤도 공터에서 모닥불을 지핀다   수염 속에 파묻힌 착한 얼굴 나에게 묘한 감동을 준다 -----「상흔」 전문   머리맡에 놓여 있는 오동장롱이 밤만 되면 웁니다.   오동장롱은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해 오신 거랍니다.   장롱 속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입던 입성도 들어 있었습니다.   오밤중에 홀로 깨면 따닥따닥.....장롱 우는 소리에 소름이 끼쳐   장롱을 할머니 방으로 옮겼으면 싶어도 청상靑孀인 어머니는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우는 장롱을 어루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장롱에 아버지의 넋이 깃들어 운다는 점장이의 말을 듣고 나서부턴 장롱에 흠이 질까봐 장롱 옆에서 나를 못 놀게 하셨습니다. -----「우는 농」전문   김시종의 시편들은 현실과 밀착되어 있으며 실제의 경험이 들어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언어의 특별한 수사修辭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도 시 한 편이 한 시대의 단면斷面을 예리하게 도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시가 하나의 알레고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상흔」에서는 우리들이 역사라고 말하는 한 시대의 거대하고 냉혹하고 광적인 체제 속에서 한 인간의 인간성이나 존재성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를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상이 불온하다고 뭇매 맞아 미쳐버린 백수광부白首狂夫 영수永壽라는 인물의 이미지를 통해서 언제나 피해만 받고 살아가는 이 땅 민초들의 상징적인 원형을 해학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다.《민보단民保團 시절에/몰매맞아 미친 영수永壽/흰 수염을 흩날리는 백수광부白首狂夫로/새파란 예비군모를 쓰고 있다//사상이 불온하다고/뭇매 끝에 돌아버린 사내/삼십년이 훨씬 넘은 요즘도/포수만 보면 기겁을 한다.》에는 그런 이미지가 압축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시는 이렇게 큰 주제를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무겁지가 않다. 그것은 맑은 눈으로 정확하게 현실의 심층深層을 투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포수만 보면 기겁을 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시대의 또 다른 광풍 속에서 집을 나온 영수永壽 같은 인물들이 광화문 지하도나 지하철역에서 웅크리고 자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래서 김시종 시인이 발견해낸 인물은 역사성과 함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백수광부白首狂夫라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의 고대시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의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처妻의 애절한 만류를 뿌리치고 강물에 빠져 죽은 머리가 하얗게 센 미친 남자) 시대를 넘나드는 그의 현실감각과 풍자성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의미공간을 확대시키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흥미롭게 자극하는 그의 독특한 시 기법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현실감각에 뛰어난 그의 시는「우는 농」에서는 모진전란戰亂 속에서 살아온 이 땅 여인들의 아픈 삶의 일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남편을 잃은 청상靑孀의 여인이 밤마다 듣는 장롱의 소리는 죽은 남편의 울음소리다. 그것은 또 시인 자신의 아버지의 울음소리인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가슴에 그 울음소리의 그림자를 전하고 있다. 시인 자신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솔함이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현대시에서 시를 발견하는 눈은 다양하다. 언어의 기적은 우리들에게 가지각색의 풍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관념이 아닌 실제의 사물事物로 만져지는 민중언어의 생명력은 언제나 그 중심에 꿋꿋하게 뿌리박고 있다. 나는 김시종 시인의 풍자 시편들의 단순명쾌함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역사 속에서 진솔하게 다시 살아나는 민중적인 언어들의 영상을 더 인상 깊게 기억한다.    * 김시종(金市宗 ) :1967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69년 에 자   유시 타령조」발표로 등단. 시집 「오뉘」「청시」「 불가사리」 「창맹 의 입」「 교정의 소리」「 흙의 소리」「외팔이 춘희 등」 다수   
33    심상운 시모음 댓글:  조회:982  추천:0  2019-06-30
심상운 시모음   헤드라이트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축축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 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 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모형 전시실 또는 깨진 유리창       6월의 태양이 눈부신 한낮 국립박물관 모형 전시실에서는 신석기시대 근육질 젊은 사내의 돌칼 가는 소리가 난다. 사내는 숫돌에 칼을 갈다 가끔씩 고개를 들고 사냥할 때 쓰던 돌화살촉을 움켜쥐고 유리 상자를 깨고 뛰쳐나오려는 듯 허연 수은등 불빛을 노려보고 있다.     12월이 되면 카메라를 메고 세찬 눈보라로 뒤덮인 겨울날 뻘겋게 이글거리던 드럼통 석탄 난로 곁에 둘러서서 외지外地로 떠나려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방금 검은 탄 속에서 나온 듯 이빨이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젊은 광부들의 뿌연 입김이 깨진 유리창에 묻어 있는 30년 전의 K역을 찾아서 눈길을 떠나는 그녀.     낮 12시 20분, 나는 그녀의 모형 작업실 벽에 걸려있는 컬러사진 검붉은 고철古鐵들의 무더기 사이로 돋아난 풀잎의 푸른 혈관 위에 앉아 있던 벌 한 마리가 잉잉 잉잉 방안을 돌며 유리창에 몇 번 몸을 부딪칠 듯하다가 열린 유리창 밖 환한 빛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다.               뱀과 그녀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은 금 간 아스팔트 위에 무리지어 똬릴 틀고 있다. 풀밭을 떠나온 뱀들이 화물차가 100km 이상 달리는 검고 뜨거운 바닥에서 서로 엉겨 바들바들 고무락거린다. 햇빛이 그들의 허리에서 번쩍인다.     화랑畵廊에서 돌아 온 날 밤 침대 위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린 나는 키가 30cm로 줄어들고 팔과 다리가 없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내 옷걸이가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옷걸이는 “넌 누구니”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하룻밤 사이에 내가 뱀이 되었다고?     아침 햇빛이 소리치듯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의 뼈가 나를 일으킨다. 내 몸이 점점 커진다.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긴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다. 빛A 빛B 빛C........빛A에는 구름의 살 향기가 묻어 있고 빛B에는 자동차의 경적이 묻어 있고 빛C에는 전화벨소리가 묻어있다.     그녀는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창 밖 허공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짝이고 있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 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 물방울 뿌리며 빌딩 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멘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저수지 수초水草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빛 또는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노랑나비       비오는 날 번쩍이는 빛을 향해   어두운 헛간을 뛰어나간 고양이의 눈빛 같은     노랑나비 하나   내 숲의 어둠 속을 떠다니며 반짝인다     李箱은 에서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 본다. 그것은靈界에絡繹   되는秘密한通風口“라고 했다     그는 오늘도 영계의 컴컴한 숲속에서   죽은 나비와 춤을 추고 있을까?     정리해고 된 40대의 사내가   중고 트럭 조수석에 아내를 태우고   휘파람 불며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       노랑나비 한 마리   푸른 강물을 배경으로 날고 있다.         블랙홀(black hole)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되어 소멸하는 거대한 별에는 정지된 시간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고요? 그들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화석化石 속의 물고기처럼 박혀 있을 거라고요?     아산병원 영안실에 있는 그녀의 시신屍身도 자세히 관찰하면 연료가 모두 소모된 마지막 순간에 자체의 중력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되어 생성하는 죽은 별들의 검은 구멍과 다르지 않다고요?     오늘 밤 당신은 35000피드 상공의 비행기가 컴컴한 허공 벽에 얼어붙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우주의 얼음덩이 속에서도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남녀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초여름 풍경                 뱀 굴에서 미끈미끈한 몸뚱일 좌우로 흔들며 뱀 한 마리 뱀 두 마리 뱀 세 마리 뱀 네 마리 나온다. 가늘고 긴 혀 날름거리며 나온다. 엊저녁 기억들은 푸른 가지 사이에 허연 비닐봉지같이 걸어놓고 햇빛 속으로 스르르르 스르르르 미끄러지며 나온다.     발가숭이 햇빛들은 분수噴水에서 물장구치며 깔깔거리고 아이스크림처럼 햇빛을 빨아먹는 가로수 잎사귀들 사이로 풍선 하나 풍선 둘 풍선 셋 풍선 넷 둥둥 떠오른다. 찢어진 풍선들은 보이지 않고 새 풍선들이 떠오른다.     초여름 풀 향기 풍기며 19살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청계천 물속에서 나온다. 눈이 큰 헵번, 입이 큰 헵번이 눈웃음치며 나온다. 휴대폰을 들고 시청 앞 광장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목이 긴 헵번은 빨간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있다.     가슴에 철퇴를 맞고 허물어진 50년 전 건물들의 폐자재 더미 속에서 나온 유리창의 파편 조각들이 반짝인다. 덤프트럭에 실린 우그러진 창틀을 향해 반짝인다. 원주민들의 구멍 난 양말짝, 찌그러진 양재기, 찢어진 홑이불에 묻어있는 얼룩을 보며 반짝인다.                   한여름의 검은 자전거와 파란 비닐봉지와 빨간 모자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에 쓰러져 있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이 햇빛에 번쩍이고 있다. 오전 10시 46분,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가로수 밑으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 (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자전거 보관대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자신의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다.     그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왜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을까요? 지금 을지로 상공을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는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이에요.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바람에 출렁이며 청계천 다리 위를 가고 있어요. 나처럼 가끔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눈을 감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0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리고 몸의 무게를 계속 줄여 보세요. 그러면서 저기저기 빌딩 창문 위 하늘로 둥둥 떠가는 자신을 느껴 보세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노랑 풍선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며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 아, 여보세요. 8월의 풀밭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발가숭이 아이들이 모여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뱀과 놀고 있다고요? 그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서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요? 그 시간에 꿈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빨간 꽃잎 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디 달다고요? 그것이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요?                     가방 또는 붉은 바닷물       나는 나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고   그는 그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서   불을 켠다     내 가방은 빨간 토마토들이 제각기 불을 반짝이는   도시의 상공을 떠다니고   그의 가방은 하와이 푸른 해변 위로 둥둥 떠간다     나는 가방 속에서 방울토마토를 깨물며   젊은 가방들이 터뜨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20대의 백남준이 도끼를 휘두르고   부서지는 피아노가 비명을 지른다     피아노의 비명 속에서 튀어나온 붉은 바닷물이   허공에서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순간 내 가방도 꿈틀대며 다른 허공으로 치솟는다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중계동 은행사거리 40대 사내의 붕어빵틀에서   뜨겁고 말랑말랑한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전자상가 TV 화면에는 시리아 반정부군의 자살폭탄으로   반쯤 부서진 건물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상자들     나는 제주산 노란 감귤 한 봉지를 사들고 행인들이 붐비는   4차선 도로를 건너가고     내 옆을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10대 여자 아이들     아파트 화단 젖은 흙속에서 10cm 가량의 검붉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통화       아 아, 여보세요. 40대의 사내가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서 집 나간 아내를 찾아달라며   자살소동을 벌이고 있는 걸 봤다구요. 그 사내는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 뛰어내릴 듯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었다구요. 3월의 하늘에선 확성기를 든 경찰과 구경꾼들에게 주는 선물인양 하얀 눈송이를 흩뿌렸다구요.     말수가 적은 40대의 회사원 K씨는 1년에 한두 번 손에 날카로운 못을 들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 고급 승용차들의 차체에 굵은 금을 긋고 다닌다구요.     망치를 들고 깨진 유리창 조각들을 더 잘게 부수고 있는 인부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고   있어요. 그들은 망치질에 신명을 풀어내는 듯 리듬을 타고 있어요. 작은 알갱이로 돌아간 유리들도 햇빛에 반짝이고 있어요.     아 아, 여보세요. 조주 선사가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한강대교를 걸어가고 있다구요?     * 조주 선사(778-897):『육조단경』에 나오는 중국의 선승. 선가(禪家)에서는 조주고불(趙州古佛) 또는 조주라 부른다. 불교의 근본원리를 묻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는 말을 했다.       자살폭탄 또는 푸른 울음       자신의 부풀어 오른 봉오리를 만지며 은밀한 욕망 속으로 잠입하는 영화 속의 그녀. 밤마다 폭탄을 준비하는 그녀의 몸은 800만 화소의 선명한 영상 속에서 움직인다.     날카로운 과도果刀로 사과를 도막내어 빨갛게 익은 사과의 중심에 박혀서 스스로 소리 없는 폭발을 꿈꾸고 있던 까만 씨앗 몇 개를 들여다본다. 그들도 촉촉한 살의 유혹 속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있던 걸까?         TV 뉴스 자막이 사라지자, 한여름 밤 안동 지레 마을 산 개구리들이 어둠 속에서 일제히 쏟아내는 푸른 울음소리가 달빛 속을 벗어나서 무한허공으로 출렁거리며 퍼져나가고 있다.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사각형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각종 스크린이 보인다. 아침 7시. 사각 침대 위에서 기지갤 켜며 일어난 삼각형이 사각문을 열고 나오고, 원이 통통통통 튀면서 그 뒤를 따라온다 삼각형은 원의 손을 잡고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가로 뛰어간다 사각형의 바다 위에서 삼각형의 돛배가 하얀 물보랄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몇몇 삼각형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사각형의 오래된 집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사각형의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100여 명의 삼각형과 원이 둘러서서 응원을 한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다가 가슴팍 속주머니에서 노랑 풍선을 꺼내서 하늘로 날린다. 그 풍선들은 허공에서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을 할 때마다 풍선의 입 속에서 또 노랑 풍선들이 나와서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운다 대도시의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다     밤 12시 20분.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육각형 빙산 벽이 철썩철썩 무너져 내려 새파란 육각수의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수천만 톤의 새 육각수가 바다를 넘어 사각형의 도시건축물都市建築物들을 우르릉우르릉 흔들며 밀려오고 있는 밤이다           물고기 그림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온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     빨간 오토바이가 달린다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린다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하얀 오토바이가 달린다 산맥을 넘어   붉은 토마토 즙을 온 몸뚱이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떼를 지어 뛰어가는 도시 위를 달린다     노란 오토바이가 달린다 혼자서 신나게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어이, 저거 봐, 오토바이가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있어.”   시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파란 의자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     그녀는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 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타 쌍둥이 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고?)     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   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환각제 복용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의 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볼록한 가슴 선에선 노란 봄꽃냄새가 물씬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있던 둥근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가득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는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여름밤엔 노란 불을 켜고 여우, 뱀, 방패, 전갈, 화살, 직녀, 도마뱀, 헤라클레스, 돌고래, 백조, 견우의 나라를 지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키론이 사는 은하수의 남쪽 궁수자리로 가는 기차. 젊은 화가들은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별나라 여행을 한다. 기차 옆에서는 우주의 고래들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며 신나게 솟구치고, 기차의 창을 열고 고래 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와 소리치는 아이들. 펄떡펄떡 솟구치는 고래 옆으로 우주 로켓이 유유히 지나가는 한낮, 초록 별 연못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식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나는 먼 은하수로 날아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 파란색 기차는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파란 나라로 들어간다. 한여름 어느 바닷가 물개들의 도시. 건물의 지붕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물개들의 쇼. 물개들의 등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5월의 햇빛이 내 뇌 속을 파랗게 휘감는 일요일이다.           사각형 스크린       비 그친 아침, 나는 닫힌 창문을 연다. 스르륵 열린 사각형의 스크린 속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경쾌하게 달리는 구름 A, 구름 B,구름 C. 이어서 펼쳐지는 파란 여름바다의 영상.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출렁인다 동해 화진포에는 빨간 사과 빛 안개. 나는 그곳에 푸른 비늘 덩이로 살아 움직이는 집을 지어 놓았다 그 집은 환상의 집.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시간 밖에서 일하는 푸른 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별빛이 찬란한 밤바다 모래 위를 걷는다 사각형 스크린은 무한 공간. 그 속에 가득한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는 나뭇잎에서도 출렁이고 땅강아지 집에서도 출렁이고 아스팔트 속에서도 출렁이고 노래방에서도 출렁인다 젊은이들은 동해의 고래를 잡으러 가자며 매일 밤 어깨동무를 하고 여름바다로 떠난다. 그들에게 바다는 황홀한 전율의 출렁임. 햇빛 번쩍이는 검푸른 등을 보이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사각형 속 스크린도 부르르 부르르 온 몸을 떤다. 스크린은 사각형을 확 밀어버리고 수영복차림으로 뛰어나가려는 거 같다 그때 사각형 스크린 밖에서 사람 A가 열무, 가지, 오이, 호박을 트럭에 싣고 와서 스피커로 “무공해 싱싱한 채소를 싸게 팝니다”라고 소리친다. 캄차카 바다 돌고래들이 펄떡펄떡 솟구치고 있는 장면이 TV 화면에 가득한 아침이다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에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그림 또는 링크           산 너머에서 산 너머로 오가면서 어디론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타나는 것은 구름? 그 구름들은 수분덩이. 사람보다 더 많은 수분을 안고서도 유유하다 한 목동이 언덕 풀밭에 앉아 풀피릴 불고 있다 메에 메에 우는 양들은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경사진 돌밭 길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그들 머리 위에는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있다 19세기 그림이 21세기의 나를 유유하게 휘감는다 나는 어디로 가야 그 구름과 양을 만날 수 있나? 지하철 4호선 분실물 센터에는 양털실로 짠 모자가 있다. 그 모자는 울지 않는다 그 모자의 DNA에는 고산지대의 기억이 들어있지 않을까? 나는 양털의 기억 속 좁은 경로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는다. 양털 속에는 하얗게 말라버린 양의 숨소리만 묻어있다 나는 햇빛이 환한 내 의식의 방으로 들어가서 양이 걸어갔음직한 북한산 향로봉 계곡 바위 길을 링크한다. 순간 양은 지워지고 5월의 하얀 아카시아 꽃향기가 물씬물씬 솟아나며 쌔애롱찍 쌔애롱찍 능선의 산새들 소리가 귀를 울리는 사이사이로 "순수한 떨림은 기호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나는 그 소리에 취해 일행들과 더 깊은 산속 숲길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다가, 깜박하는 사이에 하루 종일 녹취한 북한산 계곡 물소리와 어른 손바닥보다 큰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푸른 숨소리가 출렁이는 등산 가방을 지하철 4호선 전동차 바닥에 놓고 내렸다     * DNA: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의 약자. 모든 살아 있는 세포에서 볼 수 있고 유전형질을 전달하는 복잡 한 유기 화학적 분자구조           우주의 시간         그 미술관 대형 바다 그림 속에는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그녀의 가족들이 푸른 살 번득이며 파도치고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반짝이며 춤을 추고 있다     밤 11시20분, 사이언스 TV에선 은하계 넘어 어느 별에 납치되었던 지구의 사람들이 눈부신 빛에 휩싸여 귀환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4,400명의 귀환인 들은 우주의 0의 시간 속에서 살다왔다고 한다       3월에 내리는 함박눈은 서로 다른 집에 살면서 애태우다가 떠나간 이들이 만나서 산과 들과 바다에 눈부신 알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하얗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눈의 입자 속에서는 눈물을 안고 살아온 1000년도 우주의 0의 시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공과 아이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꿈속에서 가지고 나온듯한 빨간 공을 길바닥에 굴리며 놀고 있다. 공은 반짝이며 굴러가고 아이는 공을 쫒아 소리 지르며 뛰어간다 거리의 유리창들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는 아침 9시, 공을 따라 신나게 뛰어가는 아이. 공은 주택가를 빠져나와 통통통통 공장 굴뚝을 오르기도 하고, 통통통통 푸른 가로수 가지 위로 올라가 나무 위에서 건너뛰기를 하다가 초록 들길을 달리는 버스 지붕 위에 내려 앉아 잠시 멈춰 있다 아이도 버스지붕 위에서 흰 구름을 보며 쉬고 있다       긴 사다리를 허공에 설치하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TV 속 사내가 당신을 유혹한다고요? 그래서 당신도 파란 옷의 아이처럼 빌딩과 빌딩을 휙휙 건너뛰고 싶을 때가 있다고요? 오늘도 꿈속에서 본 빨간 공을 찾아서 뛰어다니다가 빌딩 옥상 구석에 누워서 10월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요? 그 아이의 집은 해초들이 나부끼는 바다 속인 거 같다고요? 아이의 몸에선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요? 빨간 공은 수평선의 해 같다고요?       버스 지붕 위에서 쉬고 있던 아이가 빨간 공과 함께 노랗게 불타는 한낮의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간다. 그 뒤를 밀짚모자를 쓴 이중섭이 화판을 메고 걸어가고 있다       30대 여인 또는 구렁이       한 청년이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딴다. 검푸른 살의 꽁치 한 마리가 책처럼 잘 요약되어   삭아 있다. 이집트 미이라의 여인이 관棺 속에서 꿈틀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대신전古代神殿의 조각상에서 나온 30대 여인이 혼자 중얼거린다. “가면을 쓴 사내가 칼을 들고 말했어” “신神은 인간의 피를 좋아 한다고” “나는 그와 잔 적이 있어” 그녀의 그림자 뒤에서 붉은 노을이 TV 화면 가득 이글거린다     작은 새들이 찌르르 쫑쫑 찌르르 쫑쫑 경쾌한 소리로 날고 있는 5월의 물푸레나무 숲에서 어젯밤 드라마 속 여인이 자신의 검은 머리 위로 물을 쏟아 붓고 있다 그녀의 허리가 푸른 잎 사이에서 구렁이처럼 햇빛에 번득인다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순식간에 내 눈의 자동 셔터가 찍은 한 컷의 동영상. 2008년 5월 25일 정오 일행들과 북한산 사모바위 틈에 뿌리 뻗어 만개한 라일락 꽃 짙푸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햇빛 환한 비봉碑峰 쪽으로 휘익 날아가던 은백색 깃털들. 야아, 소리 지를 틈도 주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던지며 10분의 1초의 속도로 내 시야를 벗어나는 은빛 부챗살. 그 반짝이는 부챗살은 화창한 초여름 날 산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쾌한 UFO? 그럼 지금 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성하게 돋아난 녹색 이파리들이 노랑 하양 보라 꽃들과 어우러져 한창 신명나는 판을 벌이고 있는 중! 12월 아침 아이들과 식탁에서 죽은 닭의 살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찬란한 별밤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점령해버린 은백색의 젊은 눈들.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린 눈들의 몸에서 나온 맑은 피는 도로에 줄줄 흐르고, 아이들은 포크를 던지고 와아, 환성을 지르며 공터로 뛰어나가고, 도시는 하루 종일 은백색의 축제. 너는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無意識 속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환한 불꽃들을 팡팡 터뜨리는 UFO의 고향을 찾아 네팔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고산지대白色高山地帶. 그곳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지점. UFO의 탄생지는 그곳 새파란 공기층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UFO:미확인 비행물체       이미지 여행             너는 이미지가 형성되기 이전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거기에는 빛도 어둠도 아닌 것들이 웅숭그리고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다만 무엇이 휘익 휘감는 느낌만 든다고? 너는 그림자여서, 그 느낌은 빛이 발산하는 백색의 전율이라고?     어디서 둥둥둥둥 소리가 들려오고 막이 오르면, 무대 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너는 거기서 또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는 원소가 된다고? 그곳에는 시간을 지워버리는 안개의 덩어리들이 솟구쳐 오르고, 너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것으로 둥둥 떠올라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너는 아침 햇빛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나일 강을 내려다보다가 히말라야 하얀 눈 산 위를 지나간다고? 너는 도시의 전동차 안을 떠돌기도 하고,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나는 너와 통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앙코르와트 사원 숲 푸른 공기 속을 둥둥 떠간다. 그때 사원의 짙은 그늘과 무한 질량의 환한 햇살 사이를 넘나들며 UFO처럼 번쩍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보인다       맨살에 링크하기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아스팔트 위의 맨살 여자       아스팔트 위에서 30대의 여자가 전라의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허벅지 사이에 넣고 앉아있다. 둥근 여자의 몸은 매끈한 살덩이 바퀴가 되어 아스팔트 도로를 굴러갈 것 같다     (화가는 왜 여자를 달팽이같이 둥글게 말아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놓은 것일까?)     (여자는 화가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시공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 것일까?)     나는 상상 속에서 그녀를 굴려 본다 그녀는 공기가 팽팽한 고무공같이 가볍게 구른다 그녀는 통통 튀기도 한다 구름이 그녀를 태워 하늘로 오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에서 파란 바다로 굴러가며 깔깔거린다 그때 100km로 달려오던 육중한 화물차가 삐익 소리를 내며 간신히 그녀를 비켜간다 핏발선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휙 스친다     지금 내 눈 앞에는 파란 바다가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도로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듯 맨살로 앉아있는 30대의 여자가 있다. 그녀의 숨소리가 너무 뜨겁다           우아우아 아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검푸른 파도 펄떡이는 돌고래   (산의 어깨 위로 솟구치는 검붉은 불길)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다시마 미역 멍게 해삼 조개   (풀과 나무들의 울부짖음 불길 속의 주택들)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란 바다 빨간 구름 허연 맥주 거품   (47인치 모니터에서 풀썩풀썩 뿜어져 나와 중계동 은행사거리 상공을 떠도는 LA의 검은 연기 검은 연기)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도소리 기타소리 사각사각 사과 먹는 소리   (거대한 공동묘지 상공 떼 지어 떠도는 검은 비닐봉지 위에서 반짝이는 하얀 눈 하얀 눈)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뜨거운 모래밭 달빛 속 엉덩이   (당신은 죽은 30대 여인의 목에서 반짝이던 나비날개 모양의 보석을 보았다고요?)   (그녀는 나비가 되어서 봄 나라로 날아갔을 거라고요?)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모닥불 하얀 잿더미 빈 맥주병   (당신은 사람들이 모두 복제품 같다고요?)   (검푸른 파도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 혁명을 꿈꾸는 체 게바라의 가슴을 껴안고 싶다고요?)       꿈틀꿈틀 아침 바다 붉은 핏덩이 핏덩이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노란 색을 주조로 한 세 개의 그림       구파발에서 의정부 쪽으로 뻗은 큰 도로 옆엔 봄바람에 흔들리는 개나리꽃 울타리가 석재상 마당 한쪽과 세상에 나오기 이전의 돌부처 돌마리아 돌사자 돌여인 돌사슴의 머리와 가슴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나는 그 석물들과 손잡고 노는 상상을 하며 노란 개나리꽃 울타리를 툭툭 치고 흔들었다 그때 그 소리 때문일까? 돌부처와 돌마리아가 손을 잡고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처럼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둘레를 돌사자 돌사슴 돌여인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그들이 뛸 때마다 개나리 울타리에서 노란 빛이 뿜어져 나와 그늘진 석재상 마당이 환해지곤 한다     목만 있는 늘씬한 젊은 여인이 노란 원피스를 걸치고 서 있는 대형 마트 의류 코너. 그 건너편 쪽에는 목만 있는 청년이 청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앉아있다                   강남 터미널 대형 TV에서 갑자기 콸콸콸콸 흙탕물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나고, 홍수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떠내려 온 가재도구들이 큰 물살에 둥둥 떠가다가 나무그루에 걸려있는 게 보인다 주민들은 무너진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무어라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멀리서 털털털털 헬리콥터 소리가 나고 노란 조끼를 입은 구조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구경을 하던 청년 셋이 TV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 들어간다 그때마다 모니터에서 튀어나온 흙탕물이 내 몸에 확확 끼얹힌다 내 옷에서는 노란 개나리꽃 향기가 난다
32    하이퍼시론 묶음 / 심상운 댓글:  조회:1195  추천:0  2019-06-20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   이런 무의미의 탈-관념 언어들이 디지털 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디지털 시가������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가 되기도 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한 편의 시가 하나 또는 몇 개의 언어단위로 표현되면서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원형은 1930년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와 1950년대 조향의「바다의 층계層階」에서 발견된다.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   이런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파악된다. 그 중 첫 번째의 방법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 1호)에서 구현된 독특한 추상화 기법이다. 탈-관념된 언어 단위들을 사용하여 시인이 상상한 현실의 추상화를 그려서 보여주고 작가의 개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시의 기법은 디지털적인 구조에 맞는 기법이다. 특히 시 속에 시인이 창조한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어떤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언어의 환상적인 면(언어유희)에서도 새로운 감각과 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두 번째 방법은 염사와 접사의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염사와 접사는 현실이 반영(反映)된 마음속의 직관상을 사진 찍 듯이 찍는 것이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적 샘플링 기법이 된다. 염사는 직관을 통해서 내면에 잠재된 대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면 세계에 대한 직관과 시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원근법을 깨뜨려버리고 대상의 실상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염사와 접사는 병적인 망상(妄想)이나 터무니없는 환상(幻像)과는 구별된다. 염사와 접사는 선적(禪的)인 의식 즉 고도의 집중된 정신의 현상 속에서 발생한 투명한 의식의 그림이다.   세 번째의 표현 방법은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사물의 충돌, 사물과 사물의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런 사물성의 이미지 세계는 사물성의 감각을 포착하여 직관의 영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사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반영(反映)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가 된다.   네 번째 표현방법은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포착된 영상자료들의 변형으로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키는 이미지의 세계다. 이것은 디지털 시의 독특한 표현방법이 된다. 이 때 시인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 등을 융합하여 감각의 통합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통합은 디지털 언어의 감각이 된다.   이 네 가지의 표현방법의 중심에는 샘플링 된 현실이 들어 있다. 샘플링 된 자료(이미지)는 하나의 독립된 단위를 형성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위들의 결합이나 연결 방법이다. 아날로그 시는 대부분 관념 또는 사유의 연속적인 연결(인과관계)방법을 선호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연결로 의미(관념)와 정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보다는 감각이나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디지털 시는 단위와 단위의 연결을 “집합적 결합”으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탈-관념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것에서 디지털의 불연속 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자유롭게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언어 단위들 사이에는 간섭(干,interference) 과 잔상(殘像, afterimage) 현상이 발생하여 아날로그 시와 같은 효과를 구현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위의 조합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디지털의 성격과도 부합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컴퓨터의 모듈과 같이 시의 언어단위를 독립적인 단위로 인정한다. 그것은 위에 제시한 시인의 추상적인 현실 이미지, 염사․접사, 사물성의 이미지, 영상자료의 변형으로 포착하는 감각 등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시(하나의 시스템)를 형성하기도 하고 집합적 결합을 이룬 종합적인 구조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합적 결합은 “대상의 결합이나 구성방법의 종류를 다양화할 수 있고, 구문과 비구문, 의식․무의식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시의 구성 영역의 공간을 무한히 넓힐 수 있다.”(문덕수-「문덕수 시전집」“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음은 디지털 시의 정서다. 디지털은 정서나 감각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이기 때문에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감각에서서 멀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아날로그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정서를 드러낼 수 있다. 샘플링 된 현실은 사실이 아니고 마음 속 화면에 반영(反映)이 되어서 나타난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 반영 속에는 시인 자신의 의식(관념)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순수한 탈-관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실과 밀착된 마음의 영상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디지털의 생동하는 감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이 생동하는 감각은 추상적인(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아니라, 현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시의 정서는 샘풀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 될 때 이미지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관념의 위로 솟아올라온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다. 따라서 시의 밑바닥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다. 그래야 인간적인 시가 탄생할 수 있고, 그 시에 담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진 맑은 정서가 될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했을 때 디지털 시는 관념이 가라앉은 후에 떠오르는 맑은 향기 즉 원래의 자연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화된 상태의 자연 본연의 향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굳이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샘플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되는 탈-관념의 디지털 시의 정서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정화시키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추상적인 상상을 통한 간접적인 샘플링의 방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시에는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생길 수도 있다.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와 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간밤, 회색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반짝������을 빼고 가시장미������가시������를 올   렸다. 갑자기 ������푸른가시������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갈이 찢고 온   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   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오남구「푸른가시 짐승 -빈 자리x.3 」전문       이 시의 중심점은 빈자리 x의 무한한 변신이다.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감각과 상상의 세계가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것(분리와 결합)이 탈-관념된 디지털 단위들의 특성이다. 만약 어떤 고정된 의미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면 감각과 상상의 변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탈-관념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 심상운 「빈자리 -낮 12시 25분」전문       이 시도 오남구의「푸른가시 짐승 -빈자리x.3 」같이 빈자리 즉 최소 단위(unit)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감각과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전동차 안의 풍경과 감각, 시인의 상상이 생동하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것은 이 시 속에서 언어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감각의 흐름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시인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이미지의 생명력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전문       이 시는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사와 염사를 통해서 샘플링한 시다. 샘플링 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단순화되었으며 탈-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검은 색과 푸른 색, 하얀 색”의 색채가 의미하는 관념과 “눈물”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서 시의 정서가 되고 있다. 그 정서형성의 원리 속에는 디지털 시에서도 관념의 완전한 제거는 시를 성립시키는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인지단계의 관념은 오히려 디지털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 시에서도 장면의 변화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과 디지털의 감각과 상상을 표현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간섭(干涉, interference)과 잔상(殘像, afterimage)을 통해서 이미지 형성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 「밤비」전문       이 시의 중심은 직관을 통한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샘플링이다. 그 잠재의식 속에는 현실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염사와 접사로 나누면 잠재의식 쪽에 더 가까운 것을 염사라 하고 현실 의식 쪽에 가까운 것을 접사라고 한다. 염사와 접사는 대상을 사진 찍 듯이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미지로 재생하는 샘플링의 방법이다. 이 기법은 디지털 시의 기본적인 표현 방법이다. 이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에도 비 오는 밤에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의식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이 시에는 디지털적인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다. 이 데이터는 디지털 시에서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감각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탈-관념된 언어단위가 된다. 이와 함께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 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461120-10675xx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싱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   경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 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   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   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   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 탄생!������화면이 겹   친다. 몸이 떨린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   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7번   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싸늘한 바람,   번쩍,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   하는 신호,→⑤번 출구, 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남구「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염사」 전문       이 시는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합된 감각의 세계를 디지털적인 순간순간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다층구조의 감각과 이미지는 팔순노구→ 목사가 하늘에서 뿌리는 파란 만원짜리 지페→미래의 내 모습의 환영인 노구들의 허우적거리는 아우성→복제아기의 탄생의 화면이 겹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시인은 시공을 이동하며 잠재의식과 현실의식 속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겹쳐져서 나타나는 화면을 생생하게 사진 찍 듯 찍어내고(염사) 있다. 그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 분 사이의 사건이다. 이런 디지털 시의 감각은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저장, 전달, 재생하는 디지털적 감성통합과 맥을 같이 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 , 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과 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방법(詩作方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의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추리(知的推理)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이 하이퍼텍스트 시도 ‘디지털 시’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게재한 시론(대담형식의 글)「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畵)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에는(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사단법인 한국 현대 시인협회 기관지 2호에 발표 (2007,12,24 수정)                               사단법인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 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 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작 하이퍼시에 대한 해설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 오전 8시 30분 백화점 지하창고에서  점원들의 들것에 실려 나오는  가슴이 깨진 20대의 남녀 마네킹 새 두 마리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날아올라  아침 햇빛 눈부신   빌딩 사이로 날아간다 햇빛 속에서 반짝이며  출렁이기 시작하는 나뭇가지들 > 바이칼 호수 마을에서 둥 둥 둥 둥   푸른 하늘로 울려 퍼지는 북소리 운길산 수종사 나한전에서는 환한 빛을 향해  맨머리의 나한들이 웃고 있다 시작 노트 이 세상 존재들의 보이지 않는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 이미지 현대는 원본이 없는 이미지가 실재가 되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시대라고 한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원본 없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로 둔갑한다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이를 시뮬라크르(simulacra,模寫)라고 했다. 그리고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이론을 만들어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에서 시뮬라크르는 실재가 아닌 것이 더 실재 같이 행세를 하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세계로 이동한다는 개념을 내세우고 있다.  현대사회의 현상에서 원형상실이라는 부메랑과 함께 진실추구의 관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하이퍼리얼리티는 언론 매체들의 보도행태에서 크게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예술의 세계에서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작업공간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시는 가상현실의 시뮬라크르를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인과적인 비유와 관념의 서술에서 벗어나 시 속에 아무런 설명도 넣지 않고 오로지 디지털적인 가상현실의 독립된 이미지와 이미지들의 연결과 결합을 통해서 현실의 문제와 철학적인 사유, 시인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래서 하이퍼시는 이미지들의 연결과 결합이 ‘다선구조의 이미지 망(網)’을 형성한다. 그 이미지의 망은 이미지 자체가 실재가 된다는 장보드리아르의 이론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이미지들의 차이를 위계적인 차이가 아닌 동일한 존재성을 바탕으로 한 차이로 인정하는 존재의 일의성(一意性)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존재의 일의성은 『천개의 고원』으로 알려진 질 들뢰즈(GillesDeleuze)의 리좀(Rhizome) 이론의 원천이 되는 이론으로서 모든 존재는 하나로 모아진다는 이론이다. 하이퍼시가 현실과 연결되는 상상을 넘어서 현실의 끈이 사라진 공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여는 것도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들의 관계(리좀)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을 형성하는 5개의 연은 독립적인 이미지들의 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1연에서 백화점 지하창고에서 점원들의 들것에 실려 나오는 가슴이 깨진 20대 남녀 마네킹, 2연의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날아오르는 새의 이미지, 3연의 아침 햇빛 속에서 출렁이는 나뭇가지들, 4연의 바이칼 호수 마을에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 5연의 운길산 수종사 나한전의 이미지 등이 수직적인 논리의 틀에서 벗어난 수평적인 리좀의 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의 내면으로 흐르는 시인의 의식(意識)이 수정(水晶)을 꿰는 실이 되어 시적공간을 형성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가슴이 깨진 남녀 마네킹의 존재를 일반 생명체의 존재와 동일하게 인식하고 그들이 지하창고에서 들것에 실려 나올 때,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날아올라 햇빛이 빛나는 빌딩 사이로 날아가는 새 두 마리를 그들의 영혼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나뭇가지들도 햇빛 속에서 출렁이고, 바이칼 호수의 마을에서는 죽음의 세계를 통과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북소리가 울리고, 운길산 수종사 나한전에서 맨머리의 나한(羅漢)들이 햇빛을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가상현실의 시적공간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나한은 산스크리트어의 아라한(arhan)을 줄여서 음역한 말로 불교에서는 불제자로서 번뇌(煩惱)와 생사(生死)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이 세상 존재들의 모습과 그들의 관계를 환히 볼 수 있는 깨달은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런 높은 정신적 경지에 있는 나한들과 백화점의 마네킹이 가상의 존재로서 같은 조상(彫像)이라는 것도 시의 의미에 부가적 작용을 할 것 같다. 4연에서 바이칼 호수의 마을을 등장시킨 것도 단순히 시의 공간을 확대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그곳에는 오랜 옛날부터 알타이 원시종교의 샤먼(shaman)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연에서 오전 8시 30분이라고 시간을 밝힌 것은 아날로그와 다른 디지털의 감각과 특성(정밀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 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은 이 시를 높은 차원에서 조감(鳥瞰)하는 것이다. 그러면 독립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이 시의 이미지들이 존재의 일의성을 바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이 지상의 존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인식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그들에게 이 세상 존재들에 대한 형이상적(形而上的) 사유와 상상의 문을 여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실재가 아니면서도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세계를 영화로 구현한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영화 에서 구체적인 영상으로 흥미롭게 시현(示顯)된 판도라(Pandora) 행성의 생태계 모습이 이 시에 들어 있는 중심사유 -‘존재들의 수평적 네트워크’-와 하나의 끈으로 묶여질 수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영화 의 무대가 되는 판도라(Pandora) 행성의 지표면에서는 뿌리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네트워크를 형성한 수많은 식물들과 그로 인해 인간 뇌의 신경망(neuranetwolrk)보다 더 촘촘하게 서로를 연결하는 판도라의 밀도 높은 생태환경이 위계 없이 서로의 차이들이 무수히 얽혀 있는 생태계의 숭고한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판도라 행성의 나비(Na’vi)족들은 자신들의 큐(cue)를 생태계의 신경망에 연결하여 판도라에 살았던 수많은 영혼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판도라의 가상세계가 가장 이상적인 생명체들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가상 이미지로 이루어진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는 현실과 완벽하게 단절된 가공의 판타지(fantasy)의 세계이지만, ‘생명의 원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진실추구의 아이러니(irony)적 공간이 되어서 그 생태계의 현장은 관객들에게 판도라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5연으로 구성된 짧은 시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이 내포하고 있는 존재세계의 형이상적인 이해를 위해 영역이 다른, 영화 「아바타」의 한 부분을 인용(引用)하여 연결하는 것은 무리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바탕에 질 들뢰즈의 리좀 이론이 깔려 있다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 이 리좀의 이론을 ‘판도라 행성의 생태계 네트워크 이미지’로 구현한 영화 「아바타」와 하이퍼시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에서 시도한 ‘이 세상 존재들의 보이지 않는 수평적 네트워크 이미지’는 서로 합치되고 호응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월간 2008년 11월,12월 호에 발표된 문덕수 시인의 470행 장시 를 시의 표현형식면에서 고찰한 작품론입니다. 장시는 한국 현대시의 핵심을 관통하는 그의 시론과 함께 한국 현대시사에 남을 중요 작품이라고 평가됩니다. 관심 있는 분은 읽은 후에 소감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법과 무한 상상의 세계   ------문덕수의 장시 『우체부』       심 상 운           1. 독법讀法의 문제       21세기 대부분의 한국 현대시는 시의 언어구조가 어떤 주제(의미)를 향해 집중되어야 한다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평론가들이나 전문적인 시연구가들도 시를 읽을 때 먼저 그 시가‘무엇’(내용 또는 주제)을 말하고 있는가에 80% 이상의 주의를 집중하고, 나머지 20%는 어떻게(형식)와 왜(창작의도)에 배분하는 것이 상례常例다.   이런 경향에서 볼 때, 장시「우체부」는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시難解詩에 속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시에는 통일되고 집중된 서사구조敍事構造에서 벗어난 시인의 의식意識 속 또는 무의식無意識 속의 사건들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단편적인 이미지나 불연속적不連續的인 스토리의 표출이 시 전체를 뒤덮고 있어서, 그곳에서 어떤 고정된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문덕수는 이 장시에서 논리적인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재래적 구성을 거부하고 텍스트와 텍스트의 불연속적인 연결과 단절斷絶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언어의 기능을 의미에 한정 시키지 않고 기표(시니피앙)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 들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기법의 다양성은 새로운 독법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장시「우체부」를 이해할 수 있는 독법을 '하이퍼텍스트(Hypertext)적인 독법’이라고 나름대로 명명命名 해보았다.   하이퍼텍스트는 1965년 테드 넬슨(Ted Nelson)이 고안해 낸‘문서 연결의 방법’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문서 중간에 특정 키워드를 두고 문자나 그래픽 파일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만든 문서를 말한다. 즉, 일반 문서에 정지된 그림이나 움직이는 그림과 소리 그리고 음악 등을 삽입하고, 하나의 문서 내에 관련되는 여러 문서를 연결시켜서 읽는 사람이 쉽게 원하는 문서를 참조할 수 있게 만든 문서이다.”(엠파스 용어사전)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이퍼텍스트는 문서(텍스트)와 문서(텍스트)를 연결(link)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연결기능을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에서 문학에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문학(Hypertext literature)이다.   문덕수는 이런 텍스트의 연결기능을 현대시에 응용하여 상상과 상상, 현실과 비현실을 교직交織하는 방법으로 시를 제작해내려고 한다. 그것이 470행의 장시『우체부』에 들어있는 시의 기법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이 어떤 의미의 틀(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시인의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서 텍스트의 연결과 연결의 맥락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 주제 찾기에 골몰하는 것보다 올바른 읽기가 된다. 이 시의 앞부분 을 읽어보자.         고향 뒷산 기슭에 옥으로 박힌 호수 그 /어머니의 양수(羊水)에서 너는 물장구쳤네/잉어 가물치와 놀고 물밤 먹고 자랐네/어느날 서낭당 나무에 몸 칭칭 묶어놓을 듯이/노끈 한 줄 날아와 네 어깨에 걸리고/고무줄처럼 늘어져도 나긋나긋 끊이지 않는/우체부 ‘가방’ 하나 달랑 달렸네/지구의 궤도 같은 빈 동그라미/달마상처럼 눈에 잘 띄게 또렷하네/물결 서로 부르며 몸 섞고 짙푸른/우발수(優渤水) 가에서 금와를 만난 유화/미쓰 고구려 유화(柳花)의 침실에 햇빛이 들어와 좇으니 태기 있어/닷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으니/네 가방 그 알만 하네/네 가방 그 알만큼 불룩거리네/나라를 밴 첫 어머니의 배만큼 둥글해지네/사문(沙門)의 ‘바랑’ 이네 ----에서         이 시에서 ‘너‘로 불리는 우체부 조셉룰랭의 탄생을 고향의 뒷동산 호수→어머니 양수→잉어가물치→서낭당 나무→노끈→우체부가방→빈 동그라미→달마상→우발수→유화→닷되들이만한 큰 알→사문의 바랑으로 연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시인의 의식의 흐름이나 자유연상 이외에 어떤 인과나 논리도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연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현실과 비현실을 초월한다. 여기서 ’초월한다(Hyper-)‘ 는 것은 이질적인 것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결합하고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관념이 탄생되기 이전의 무의미의 공간이며 현대시에서 말하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세계다.   초현실주超現實主義의 시에서는 일상의 가치나 용도에서 해방된 오브제의 전위轉位를 말하고 있는데, 이 시의 소재들- 빈 동그라미, 달마상, 우발수, 유화, 닷되들이만한 큰 알, 사문의 바랑 등도 시인이 연상해낸 일종의 초현실적 오브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오브제들에 의해 독자들은 나름대로 자유로운 생각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어떤 독자가 우체부의 가방을 빈 동그라미에 연결한 것을 두고 그것을 불교의 공空과 연관시켜 관념을 추출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독자의 자유에 속하는 일로 허용된다. 그러나 우체부의 가방이 빈 동그라미에 연결되었다고 해서 불교의 공空에 고정시켜 버린다면 시인의 상상력은 거기에서 정지되고 이 시의 언어들은 굳어버린 화석 같은 관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열림과 닫힘의 이치를 이해하고 접근함으로써 이 시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따라서 이 시를 읽는 기본적인 태도는 고정된 시각이나 굳어버린 관념의 틀에서 해방되어서 어린아이처럼 자유롭게 시인의 상상 속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2. 기법技法 들여다보기         가.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과 총체적인 현실 인식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은 단절과 단절의 결합이라고도 한다. T.S.엘리엇의「황무지」의 앞부분 에는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의 기법이 단절된 시의 공간을 형성한다. 잔인한 4월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스타른벨거제호의 여름소나기 이야기가 나오고 또 이어서 호프갈텐에서 커피 마신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아무 예고 없이 대공의 사촌 누이동생인성 싶은 어떤 소녀의 쫑알거림이 들리는 것이 그것이다. 한 연에 4개의 사건이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불연속적으로 집합되어 있다. 이런 기법을 조향趙鄕은 에서 외부와 내부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현실은 외부현실과 내부 현실이 한꺼번에 표현되었을 때, 비로소 ‘토텔리티totality’로서 진짜 현실이 파악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총체적 현실인식의 논리는 현대시에서 중요한 기법으로 진화된다.   「우체부」에는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을 통한 총체적 현실인식이 작품전체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에서는 신화와 역사 속의 인물들을 불연속적으로 연결하면서 권력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총체적인 시각에서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을 투시하는 눈은 붓다의 눈이다. 그 부분을 정리하면, ㉠네 보석 눈에서 타오르는 불기둥㉡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쳐죽인 오이디푸스㉢어린 조카의 눈에서 수양(首陽)이 본 불의 칼㉣어린 아들 사도의 눈에서 영조가 본 불의 왕관㉤ 6,25전쟁을 일으킨 욕망의 불꽃㉥불의 막대기 불의 칼 불의 포탄 불의 핵....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이미지의 연결방법은 에서는 전쟁터의 현장을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지워버리고 하나의 현실로 통합한다.         쇠나팔이 울돌목을 휘감아 길게 세 번 울고 그 꼬리 허공으로/풀리니 발진 명령이 복창으로 전군에 하달되네/배의 노가 일제히 물위로 치솟다가 내려가고/이물에 덤비는 물결은 길길이 뛰며 달라들고/부딪친 물결이 깨어져 갈리며 소용돌이치네/노 한 자루에 네 사람이 붙어/서로 마주보며 몸을 숙이고 젖히네/온 몸이 북소리 한 번에 앞으로 밀고/또 한 번에 뒤로 당기네/노를 질타하는 북소리 다급해지니/빠른 뇌고(雷鼓)로 바뀌고/역류로 달라드는 물결과 북소리 틈새에서/격군들 몸은 으스러지네*//펜대를 쥐었던 연약한 손이/MI을 받들어총의 자세로 잡고/하낫 둘 하낫 둘 역사의 구령에 길들여지네/구슬땀이 염주알로 익어 한 겹 두 겹 모가지를 두르네/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한 시대가 그대로 시뻘건 용광로로 달구어지네   ------에서         임진왜란 당시 울돌목에서 조선수군과 왜군이 전투하는 장면에 이어 국군 신병훈련소에서 훈련하는 훈련병들의 모습이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이어진다. 이 연결로 인해 두 개의 장면이 하나가 되고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된다. 이것은 시인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시간과 공간의 ‘토텔리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연결을 통한 총체적 현실인식은 에서 지구전체의 공간으로 확대되고 과거 현재 미래를 망라網羅한다.         룩소르의 오벨리스크 꼭대기에서 나일강을 굽어보다 내려온 망령/9.11테러로 죽은 해골들과 얼싸절싸 어울리네/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해골들이 날아오네/파르테논 신전 주춧돌에 눌리다가 빠져나온 야윈 혼령들이/돌계단을 내려와선 올리브 숲으로 얼른 숨거나/북쪽의 에렉트리온 신전 담을 뛰어넘어 사라지네/로봇들이 924고지의 어둔 계곡을 다 덮네/토끼처럼 재빠르게 개울을 뛰고/지렁이로 몸을 비틀며 꾸물꾸물 산비탈을 기어오르고/원숭이로 변해 날쌔게 떡갈나뭇가지로 뛰어 올라가 숨네/탱크를 장난감처럼 뒤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들   가을의 붉은 속치마를 두른 680고지 673고지 749고지/펀치볼을 두른 칼날의 능선바위도 오르내리네/지금 네 빈 가방에는 무엇이 울고 있느냐/파편이냐 보석이냐 두개골이냐 더그럭 덜그럭   ------에서       파르테논 신전과 9,11테러, 탱크를 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한 이미지들이다. ‘탱크를 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은 미래의 전쟁 상황을 상상한 동영상이다. 이 부분은 시공時空을 집합하고 하나로 통합한 것을 보여준다. 이 통합은 시인의 의식 속에서 해체의 과정을 거친(관념을 다 벗어버린) 통합이라는 데서 시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다음의 예시는 사상과 종교를 통합한 이미지다. 의 붓다와 예수의 등장이 그것을 선명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공(空)이 한 시대의 밑바닥을 다 읽은 듯/탕 치고 튕기네/풍선처럼 점점 부풀다간 탁구공만해지면서 저쪽으로 굴러가네/축구 선수들 발 끝에 붙어 맨체스터 밀라노까지 갔다 오네/ 핵버섯구름도/안으로 짓이겨 빻아서 가루로 다져 굴러가네(생략)/호주의 모랫바람에 숨구멍이 막히고/2004년던가 지중해 신화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바람둥이 파리스가 아프로디테 누나에게 준/탐스러운 사과도 맛보았지/(생략)수마트라 이체에서도 쓰촨에서도/그래도 공은 바닥을 치고 솟네/네 키를 넘고 북한산을 넘네/2천 7백미터 백두산 맑은 물을 한 번 돌고/예수께서 맨발로 걸어오신 갈릴리 호수 위를 굴러/8천 848 미터 에베레스트 정상/룸비니에서 본 싯다르타의 시선이 상기 머무는 저 바위에도   --------- 에서         이 부분에서는 공空을 공으로 환원하여 기표연상記標聯想의 상상력이 펼치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파노라마가 지구전체를 휘감으며 웅장하게 전개된다. 공(空)→공→멘체스터→밀라노→호주의 모랫바람→지중해 신화의 숲→파리스가 이프로디테 누나에게 준 탐스런 사과→수마트라 이체→쓰쏸→북한산→백두산→예수께서 맨발로 걸어 온 갈리리 호수→에베레스트 정상→룸비니 싯다르타의 시선이 머문 바위. 이런 웅장한 상상의 공간은 우체부(시인)가 80년 동안 쌓아온 인식과 사유가 총체적인 이미지로 분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시의 캐릭터 우체부는 현실(현상)의 실상을 ‘불연속적인 공空의 변화’라는 렌즈를 통해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텍스트와 텍스트의 불연속적인 결합 또는 병치倂置는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총체적 현실인식의 세계는 20세기의 시와 21세기의 시를 가르는 경계가 된다.         나. 단선구조에서 해방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과 결합은 시의 구조를 다선구조多線構造로 만든다. 필자는 시론「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시문학」 2008년 10월호)에서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21세기한국의 시인들은 대부분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쓰고 있다. 시 속에 사건과 인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건과 인물들은 시 속에서 시인(시적화자)에게 종속되어서 독립된 시점을 나타내지 못하고 시의 대상(소재)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단일한 시점의 단선구조는 그림의 ‘원근법遠近法’과 같이 어떤 한 곳에 중심을 두고 하나의 시점에 대상을 집중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작가가 의도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런 기법은 미술의 역사에서는 19세기적인 기법이다. 이 단일시점의 ‘원근법遠近法’을 깨뜨린 것이 20세기 초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가 일으킨 큐비즘Cubism 운동이다. 이 큐비즘Cubism이 현대미술 기법에서 상식이 된지는 이미 오래다.   그들은 “자연을 예술의 근거로 삼았지만 그 형태와 질감 및 색채와 공간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상을 철저히 분해하여 여러 측면을 동시에 묘사함으로써 사실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엠파스 백과사전) 피카소의 그림 은 큐비즘의 기법으로 비동시적인 것을 동시화 함으로써 2차원의 평면에 입체적立體的인 시각視角을 제시하고 있다.   이 큐비즘과 같은 기법의 시가 다시점多視點의 시다. 앞에서 말한 16세기 임진왜란 해전의 장면과 20세기 한국전쟁(6,25) 장면의 동시적 보여주기,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한 이미지들은-파르테논 신전과 9,11테러, 탱크를 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 등의 장면- 모두 미술의 원근법 같은 인과적 관계로 형성된 일반적인 서사구조를 깨뜨린 다시점의 시각이 펼치는 비동시적인 사건의 동시화 기법이다. 이와 함께「우체부」에서 보여주는 다시점의 구조는 다양한 화자話者의 목소리를 통해서 흥미로운 보여주기showing로 표현된다. 이것이「우체부」에 들어있는 다시점의 다선구조다.   이 시에는 제1의 화자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 행동을 전하는 우체부, 주인공 우체부를 소개하고 그의 행동을 응시하는 제2의 화자, 그리고 세상을 전지적 시점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제3의 화자, 전쟁터나 야전병원 등 현장의 인물들(제4의 화자), 펀pun의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제5의 화자) 등 다양한 화자들이 등장하고 각자 독자적인 모습으로 다른 환경과 시점에서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는 독자들을 하나의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상의 무한한 변화變化와 조화調和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래서 이 시를 공연公演하기 위해 오페라의 대본으로 각색脚色할 경우, 무대舞臺에는 불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전쟁의 사실적인 장면들과 함께 중심 캐릭터 우체부와 그 우체부를 응시하고 있는 인물, 신적인 존재, 신화속의 인물, 역사 속의 인물, 현장의 인물, 펀 속의 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질퍽하게 빚어내는 형이상학形而上學과 형이하학形而下學의 파노라마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리라고 생각된다. 이 시속에서는 그런 다양한 화자들의 목소리(이야기)가 시행詩行의 변형變形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우체부 가방은 다시 ‘개(犬)고개’를 넘었지   가전리(加田里)로 가는 구불구불한 산길에 솟은   ‘개고개’ 왼편에는 저 멀리   흰 거품을 뿜으며 산골을 굽이굽이 적시는 소양강 상류가 보이고   그 앞의 나즈막한 구릉 기슭에 제1소대 제2소대   제3소대 순으로 진을 쳤네 박격포 12문을 방렬(放列)했네   호를 깊이 파, 더 깊이   머리를 내어 멀리 지평선까지 투시할 수 있도록   호를 2층으로 파라구   포탄이 날아들면 자라처럼 머리를 옴츠려넣고 몸을 옹크려야   탄약도 충분히 준비해   중대장의 이런 다급한 소리 들었지   --------에서       이 장면에는 우체부(제1화자)의 이야기와 “호를 깊이 파, 더 깊이” 파라는 중대장(제4의 화자)의 목소리가 시행의 변형으로 표현됨으로써 시점이 두 개로 구분된다. 그리고 화자도 우체부와 중대장으로 나누어진다. 시점과 화자의 구분은 사실의 표현을 정확하게 해 줄뿐 아니라, 우체부의 행동과 사고思考와 관찰觀察의 눈을 더 자유롭게 해주는 효과를 드러낸다.         병사들은 뭣인가를 중얼거리며 죽어갔네   으으이 윽, 말하기 전의 시니피앙   말이 끝난 뒤의 소리를 내지르며 죽어갔네   한숨 중얼거림 신음 절규 호곡   어머니 불효자 용서하세요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 ‘빽’하고 죽습니다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   더그럭 덜그럭 쟁그랑 딱 딱   왁자그르 와글북적 미미발휼(浘浘浡潏)   우체부 조셉 룰랭의 금단추 벗는 소리   --------에서         이 장면에는 제1화자인 우체부와 죽어가는 병사(제4의 화자)와 우체부를 응시하는 제2의 화자가 등장한다. 우체부와 병사들은 전쟁터라는 현장에 있는데,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라고 묻는 제2의 화자는 그들과는 먼 거리에서 엉뚱한 질문과 상상을 한다. 이 제2화자의 존재는 우체부를 시의 캐릭터로 내세운 시인의 무의식無意識 속에 존재하는 타자他者 즉 제3의 무형無形의 인물 같기도 하다.         룩소르의 오벨리스크 꼭대기에서 나일강을 굽어보다 내려온 망령   9.11테러로 죽은 해골들과 얼싸절싸 어울리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해골들이 날아오네   파르테논 신전 주춧돌에 눌리다가 빠져나온 야윈 혼령들이   돌계단을 내려와선 올리브 숲으로 얼른 숨거나   북쪽의 에렉트리온 신전 담을 뛰어넘어 사라지네   로봇들이 924고지의 어둔 계곡을 다 덮네   토끼처럼 재빠르게 개울을 뛰고   -------- 에서         이 장면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전지적이고 거시적인 제3의 시점 즉 신적神的인 존재의 시점이 들어 있다. 화자가 바뀌는데 따라 시점이 거시화巨視化(확대) 또는 미시화微視化(축소)되면서 다이내믹한 극적효과劇的效果를 만들어 낸다. 이런 다양한 시점의 포용과 표출이 이 시를 형성하는 다선구조의 특성이다.         다. 사건을 생생하게 감지하게 하는 사실적인 표현기법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시적 상상의 밑바탕이 된다. 이 시에서는 상상의 비탕이 되는 사실의 생생한 인식과 표현이 생동감과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 주는 힘이 발산하는 현장감의 효과다. 형이상학을 앞세운 시에서는 담을 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정서이기도 하다. 에서 보여주는 6,25 전투장면의 현장은 독자들을 목격자目擊者처럼 만든다. 그리고 정밀한 수학적 언어들은 냉정하고 치밀한 관찰이라는 사물시事物詩physical poetry의 기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사실성은 독자들에게 사실의 생생한 감각을 감지하게 하고 체험하게 할뿐 아니라 시의 기반을 튼튼하게 한다. 의 대구大邱 제1육군병원의 현장묘사는「우체부」가 관념의 시가 아닌 실제 체험의 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발사준비 편각(偏角) 1635 고각(高角) 777 장약 20호!/1번 포수가 편각과 고각을 맞추고/2번 포수가 각도를 올렸다 내렸다 조정하고/3번 포수가 장약을 맡고/4번 포수가 포탄을 들어 포구(砲口)에 집어넣으니/포강(砲腔)에 떨어져 바닥의 격침에 닿는 순간 쾅! 발사되네   ------에서         포성을 맞으며 새벽을 떠난 후송 열차는 느릿느릿/한밤의 대구(大邱) 제1육군병원이네, 들것은 다시 트럭으로 옮겨지고/닭도 울지 않는 달구벌에 내려졌네/전선에서 몰려든 부상병들이 누더기처럼 광장을 다 덮었네/하늘의 은하수처럼 빽빽하게 쏟아부었네/만발한 한겨울의 꽃밭이네/그때 네 인장은 저 별이 간직하고 있었을까/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추위가 추위에 눌려 지층(地層)으로 켜켜이 쌓인 달구벌의 겨울밤은 차라리 원시적 아픔이었네 눈물과 신음이 얼어붙는 북극 도시였네/끊어지는 숨소리 헐떡거림 끙끙거림 울부짖음/아아 아야야 윽윽 음음 응응 비명의 격류/다리 잘린이 눈 잃은이 부러진 척추/잘린 발목 부여잡은이 팔 없는 어깨죽지/노호 탄식 통곡 읍소 절규……   ---------에서         1930년대의 시인 김기림金起林은 그의 『시론詩論』32쪽 에서 “主張을 품은 모든 命題는 事實의 檢證에 비추어서 그 眞假를 결정하는 것을 眼目으로 한다. 論理 自體는 權利가 없다. 그것이 事實-실로 事實과 相應하지 않을 때는 거짓이라는 烙印을 얻어맞는다. 科學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理論物理學이다. 形而上學이 科學 앞에서 드디어 그 地位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면서 현대시인의 과학적 태도를 요망하고 있다.         라. 펀(pun)       「우체부」에서 느닷없이 튀어 나오는 펀(pun)은 의미를 따지기 전에 흥미를 돋워준다. 이 펀(pun)을 시의 맥락과 연결시키는 독자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 시에서 그 자체의 독립적인존재성을 갖는다. 펀(pun)은 시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고 활력을 불어 넣는다. 1950년대 악극단공연樂劇團 公演에서 막과 막 사이의 시간에 재담꾼들이 나와서 관객을 웃기곤 했는데, 시에서의 펀(pun)은 그 방법의 전위轉位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펀(pun)의 기법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 하이브리드의 기능을 한다. 하이브리드는 이질적인 것의 결합을 통한 시의 영역확대의 기법이다. 이 시에서도 펀(pun)은 강파르고 심각한 전쟁 상황 속에서 인간적인 훈훈한 마음의 꽃을 피우는 역할을 하고 웃음을 공급한다.         기사 양반 저짝으로 쪼깐 돌아서 갑시다/어찮게 그런다요 버스가 머 택신지 아요/아따 늙은이 물팍이 어링께 그라재/쓰잘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저번 착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그 기사 미쳤는갑소// 이러히 그들은 연애하네/가끔씩 닭이 보이지 않으면/소가 목 빼고 두리번거리고요/소가 한 구석에 엎디어 있으면 닭은 소막까지/가서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뒤뚱뒤뚱 돌아나오지요/이러히 소와 닭은 연애하네//저녁 바람이 이렇게 드세니 동백꽃도 뺨따구 맞듯 다 저버리겠어 진 꽃잎은 땅에서도 서성거리지 못해 바다로 쓸려 가버리겠고 동백꽃은 왜 선혈처럼 그렇게 붉고 붉은지…/그러면 보자 그 여자분 열 아홉 살 영감님 나이 수물 한 살에 만나가꼬 용초도에 동백꽃 필 때 동백나무 숲에서 오 년마다 미아이하기로 하고 마 헤어졌다는 그런 말씀 같으신데… 참말로 세상에 그런 기구한 곡절도 있다니 소매자락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 말도 있드키 시상 오래 살고 볼 일임더/이러히 그들의 연애 동백꽃도 붉네   -------- 에서         굴뚝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 트나 가지 한 개요/두더지는 황하(黃河)를 탐하나 쬐그마한 제 배 채울 뿐이네/누가 투덜거렸나 쯧쯧   ----------에서         마. 언어유희       언어를 구성하는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를 분리하여 기표만 이용하는 언어유희는 경박한 말장난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이 시에서 언어유희는 펀(pun)과 같이 시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 기여한다.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더그럭 덜그럭 쟁그랑 딱 딱/왁자그르 와글북적 미미발휼(浘浘浡潏)/우체부 조셉 룰랭의 금단추 벗는 소리/겉보리 찐쌀 된장 미역이 한데 섞이는 소리/논두렁에서 참 함지를 이고 가는 처녀의 속치마 소리/요강에 조용히 앉아 잠이 든 여인 요조숙녀/죽치고 마주 앉아 고스톱하는 친구 죽마고우/施發勞馬 始發奴無色旗/캥캥 캥 대굴대굴 팽이처럼 돌면서/찍 찍 찍 찌르르 윙윙윙 울면서 몰려오는 두개골들/발끝에서 어깨까지 차도르(chādor)를 들러쓴 주검들/피에타의 숨소리 피에타의 맥박 소리/깨어지는 사금파리가 아니라/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네/편지와 엽서는 모두 불탔네   --------에서         전사한 할아버지 애비 손자의 두개골들이/고지(高地)를 왕릉처럼 덮네 공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네/어깨에 멘 황갈색 가방에 부딪쳐 튀어나가/저쪽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멎네/솔제니친이 삽 들고 헐떡이다 남겨놓은 굴라그(Gulag)/으슥한 흥안령 기슭을 돌아 밤의 두만강을 건넌/굴라그 구라게 굴라그 구라게/갓 속에서 촉수의 쇠그물 늘여친 クラゲ 굴라그   -------- 에서         에서 ‘施發勞馬 始發奴無色旗 ’는 한자의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소리(시니피앙)이다. 욕설을 한자로 음사하여 표현함으로써 한자의 뜻과 욕의 뜻이 겹치는 이 중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에서는 전쟁이 휩쓸고 간 고지에서 해골들이 굴러다니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굴러다니네→굴라그(Gulag)→구라게 굴라그 구라게→クラゲ 굴라그, 라는 소리의 유사성이 만들어내는 연상의 음성언어로 시상을 전개하는 재미난 시니피앙의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솔제니친이 삽 들고 헐떡이다 남겨놓은 굴라그(Gulag)”에서는 소련의 강제수용소 굴라그에서 노역을 하던 솔제니친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전쟁과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게도 한다. 이런 엉뚱하고 파생적派生的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시니피앙의 연상 방법은 하이퍼텍스트의 기표 건너뛰기 기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3. 나가는 글         문덕수는 『문덕수 시 99선』(오늘의 시인총서 2004, 7,5 선)의 후기 시론 에서 “시의 방법이란 무엇일까? 기술技術이나 기교만이 아닐 것이다. 언어를 매만지고 다루는 솜씨도 방법이지만, 시의 방법은 그러한 범주를 뛰어넘는 넓이와 깊이를 갖는다. 말하자면 의도한 시를 완성하기 위한 모든 의식적 절차나 수단의 총칭이다. 시의 개념이나 대상에 대한 반성은 물론이요, 재료의 선택․배열․결합, 정서와 이미지와 언어 등의 모든 문제를 포함한다.”고 했다. 이 말은 그의 장시「우체부」에 그대로 적용된다.   필자는「우체부」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감상하고 비평하면서 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 앞에 선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어가야 할지 난감하였고, 능력의 부족을 절감했다. 그래서 ‘재료의 선택․배열․결합, 정서와 이미지와 언어 등의 모든 문제’ 중 다른 많은 미확인지대未確認地帶는 남겨두고 말할 수 있는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이 하이퍼텍스트 시의 ‘독법문제’와 ‘기법 들여다보기’에서 확인한 것을 소제목으로 붙인 ‘가.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과 총체적인 현실 인식’, ‘나. 단선구조에서 해방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 ‘다. 사건을 생생하게 감지하게 하는 사실적인 표현기법’, ‘ 라. 펀Pun’. ‘마. 언어유희’ 등이다. 따라서 이 시의 주제파악 등 세세한 내용문제와 T.S.엘리엇의「황무지」와의 비교는 차후로 미루어졌다.   시를 창작하는 동기는 시인마다 다르고 그것이 시의 기법이나 내용에 미치는 영향도 시인마다 같지 않다. 이 시는 시인의 전쟁체험이 창작동기와 결부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체험이 장시「우체부」에 끼친 영향은 20% 미만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시를 시인 문덕수의 사적연보私的年譜에 결부하여 해부하고 의미를 추출하고 비평하는 것은 이 시가 안고 있는 현대적 기법의 자유롭고 광활한 이미지의 세계에 전혀 이가 맞지 않는 언어행위라고 생각된다.   470행의 이 장시에는 붓다, 예수, 공자 등 인류의 성인이 등장하고 그리스 신화를 비롯하여 창세이래創世以來 지구상에서 일어난 숱한 사건들이 망라되고, 현대인의 인권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이 바다 속의 물고기처럼 편린片鱗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용솟음치는 전쟁의 광기狂氣와 그 광기의 와중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선량한 민초民草들이 살아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로봇이 만들어 낼 미래의 세계도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어떤 관념에도 기울지 않고 그런 것들이 생동하는 현장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가상현실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시속의 화자(시인)가 이 시에서 아무런 메시지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 시의 중심 캐릭터 우체부는 둥근 가방을 메고 지금도 한반도를 벗어나서 지구 또는 지구 밖의 어느 곳을 떠돌고 있을 것 같다. 이 시속에는 20세기 한반도의 시공에 중심을 두고 지구전체의 시공 속을 여행하다가, 제3의 공간- 4차원의 미래로 떠나는 우체부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공空의 가방이 있다. 그 둥근 알 같은 가방 속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보와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것 같다.   따라서 인간의 실체적인 존재의 모습과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와 역사, 인류의 사상이 시인의 언어(기법) 속에 ‘토텔리티totality’의 형태로 담겨있는 현대적 기법(하이퍼텍스트)의 장시「우체부」는 1930년대 김기림金起林의「기상도氣象圖」와 함께 우리 현대시사現代詩史에 문제작으로 남으리라고 생각된다.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리즘의 詩     심상운(시인, 문학평론)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주지주의)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풍성한 암시와 반짝이는 상상의 언어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잃어버렸던 신화를 되돌려주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중세의 허풍장이기사騎士에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상상 속에 살아 있는 것은 그의 비현실적인 꿈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때문이다. 모더니즘도 우리들의 시에 언어의 꿈을 담아주었기 때문에 현실주의자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만약 시인들이 현실과 역사의 진보에만 매달려서 싸웠다면 시인들은 전사戰史에 기록될 수 있는 영웅은 되었을지 몰라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상상력이 고갈된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주권을 일제日帝에 침탈당한 국권상실시대에 일제에 직접 저항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1930년대 이육사李陸史의 시편들 속에서 발견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아름다운 만남이 명징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絶頂」전문   이 시의 끝 구절 에서 강철+무지개가 던져주는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의 경이로운 상상과 암시는 지금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더니즘의 이미지, 즉물적卽物的 감각이 우리의 현대시에 수놓은 금싸라기 같은 수사의 미학을 귀중한 재산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시인과 독자들을 자연발생적인 시들의 고식적인 감상感傷과 영탄성詠嘆性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딱딱한 관념어의 굴레에서 시를 해방시켰다는 공적만이 아니라,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생명력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현실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한 개 벽돌이나 되겠다. 이 살덩이를 흙가루로 빻고 썩기 전에 이 피로 곱게 물들여 1천도의 시뻘건 불 속에서 다시 벽돌로 태어나고 싶다. 그리하여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여 백 층이나 삼백 층의 빌딩이 되거나 반월형半月形 의 만리장성이 되거나 원수의 포탄이 우박처럼 박혀도 끄덕도 않는........ 구름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단단한 벽돌이나 되겠다. --문덕수의「벽돌」전문      이 시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쓰인 과 , 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또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또 사물어事物語의 쓰임이 이 시에서 어떤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어디까지 자극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시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80년대의 사나운 현실 속에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모더니즘 언어의 바른 자세와 당당함이다. 이 시의 앞부분 는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정신과 함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시 속에서 결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예술)과 리얼리즘(현실)의 이런 아름다운 만남은 더 이상 넓게 확산되지 못 했다. 대부분의 모더니즘 시들이 현실의 뒤쪽으로 물러서서 스스로 존재영역의 범위를 축소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몇 가지 면에서 더 검토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모더니즘 시가 안고 있는 언어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신뢰(언어주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지나친 신뢰는 시작과정詩作過程에서 시인의 관심을 현실(사실)보다 시인의 고정관념과 언어에 치중하게 하였으며, 비유, 상징, 이미지 등의 언어의 조직을 시의 궁극인 양 내세워 모더니즘의 시를 언어의 시라고까지 명명命名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 모더니즘의 시인들이 현실과 예술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건강한 긴장감과 조화를 깨뜨리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생동하는 이미지나 환상과 상징을 잃어버린 극단적인 언어주의 시로 변질되면서 모더니즘 시의 한계가 노정露呈된 것이다. 그것을 간단히 압축하면 모더니즘 시의 극단적 언어주의는 모더니즘 시의 함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과 꿈을 담은 시의 탄생을 기다리게 하는 원인이 되고, 병든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을 치유하고 개혁해야하는 당위성의 원천이 된 것이다.   모더니즘의 시를 언어의 시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시인의 순수한 정서에 의해서 시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는 시인의 수공업적인 언어 작업에(의식적 방법) 의해서 시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이 수공업적인 언어작업은 어떤 관념을 중심에 두고 환상적 이미지와 감각을 중시하면서 시인의 감정까지 감각적인 언어로 만들어 지성(의도성과 논리성)이 시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시의 기법으로 발전한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서정 시인들은 이러한 시의 기법에 익숙하고 그것을 정통적인 시의 기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어떤 시인은 아주 엄밀하고 냉랭하게 계산된 논리적인 비유, 상징의 언어(관념, 고정관념)를 시의 중심에 넣고 감정까지도 객관화하여 독자들의 반응을 계산하면서 시를 제작한다. 이 때 시인은 현실(현장)에서 벗어나서 시라는 무대에 올라가 연기하는 배우가 되기도 한다. 이런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에서 시인의 자기 노출은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난 해질 무렵 몽상가 소부르주아 시인 세상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의자, 작은 방, 개미, 염소   피와 이슬로 된 술 난 현실 따윈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난 현실을 모르는 국문과 교수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고 거울을 연구하는 교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감기엔 맥을 못 춥니다 30년 전부터 어디론지 떠나고 싶었지만   --이승훈 「오토바이」 전문   이러한 시들은 비록 시인의 관념이 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지만 시인과 독자들이 갈구하는 낯설음, 새로운 기법의 언어, 경쾌한 감각의 현대성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 등의 언어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존재의 탐구에만 전념하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서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실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과 환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강한 집착이 모더니즘 시의 원형인 것처럼 독자들을 유인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생동하는 시의 실체는 언어(관념)의 감옥 속에 갇혀버리고 시인의 언어유희가 독자들을 현혹하기도 한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제1부의 Ⅳ」에서     나 는 통념적인 의미의 세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인의 몸부림이 개척한 의미단절의 언어세계다. 그것은 '있음/없음'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놓은 “또 다른 언어세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춘수의 시에서) 후속 시행에 의한 선행 시행의 차단”(문덕수 「인식의 혁명」에서)은 시의 의미를 무화無化시켜서 시를 응고된 틀에 갇히게 한다. 이런 무의미의 시는 내재적인 모순에 의해 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언어에 염증을 느끼고 절망하고 탈출하는 이유를 만든다. 그래서 그것은 모더니즘 시의 한계로 드러나는 지나친 현실 외면(도피), 시의 관념화(도식화, 논리화), 의미의 단절, 단순 이미지의 나열, 언어유희(무의미)에 대한 성찰의 근거가 되고 시에 대한 정의를 다시 찾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극단적인 모더니즘(언어주의) 시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현실(현장) 속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향기 나는 생명체를 모셔놓은 언어의 집이라는 시의 정체성을 다시 찾게 한 것이다. 따라서 시에서 관념이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의 마음과 영혼(생명)이라는 것. 그 마음과 영혼은 시인의 환상과 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만약 관념에 의해서 영혼이 만들어진다면 그 영혼은 가짜의 영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그래서 오히려 모더니즘의 언어예술로서의 시보다 자연발생적인 서정시가 더 본래적인 시에 가깝게 인식되는 것이다.   비오는 날 묵밭에 소를 먹이고 있으면 어디서 깊은 소리가 들리네.   온 天地가 共同墓地같은데  오동나무만  저승의 길잡이처럼 서 있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도 푹 빠졌을까. 안개사이로 인업이 꼭 걸어올 것만 같네.   喪輿를 놓고 그렇게 울던 곳. 그 곳엔 이상한 불빛이 서려 있었네. --이성교「비오는 날(1)」 전문   자연발생적인 서정은 시인의 언어조직만으로는 만들어내기가 매우 어렵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자연스런 서정의 시에는 이성(지성)보다 감성이 주류를 이루어서 때로는 원시적인 야성의 감성이 시의 생명력을 키워내는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에서 관념과 비유, 상징을 떨쳐버리고 직관의 눈으로 직접 대상과 만나자는(의식→대상→이미지) 디지털리즘의 시 운동은(오진현) 시의 현장성과 내재적인 생명성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인 서정시와 연결된다. 그것은 디지털리즘의 시가 극단적인 모더니즘의 시(관념의 시, 언어유희의 시)보다 시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이성(지성)보다는 감각(감성)이 시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북한산 비가 오락가락, 찜통 더위 속 , 땀을 흘리고 확 터진 능선에 올랐다. 앞에 서 있는 봉우리들 얇은 구름이 그림이다. 주저앉아 상상하며 가슴쯤 산의 옷을 벗기면서, 이렇게 시에 빠져들고 있는데, 한 시인이한다. 나는 내색을 못하고 하고 이성理性을 말했다. 그 때 지나가는 등산객이 했다. 멍! 모두 몽둥이로 한 대씩 맞은 기분이었다.   이 날 산행은 흰수염을 휘날리고 아슬히 바윗서리에 걸터앉은 내가 희죽이 웃으며, 리모콘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비밀한 얇은 비단을 밀어 올리고, --오남구「산행」전문    이 시는 때 묻은 감각과 지식을 뛰어 넘는 디지털 시대의 감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맑은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관념도 미리 들어가 있지 않은 탈관념의 빈 마음은 새로운 감각이 모여드는 맑은 못이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새로운 감각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열린 마음이 디지털시대의 시인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숨을 쉬고 지느러미를 펄떡이면서 움직이는 자기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직관(초논리超論理, 비논리非論理)의 눈이 언어 카메라로 찍어내는 디지털 감각(염사念寫, 접사接寫)의 이미지 시와 어떤 관념을 솟대같이 중심에 세워놓고 언어의 조직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모더니즘의 이미지 시의 차이를 선명하게 구분 짓게 한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밤비」전문    오진현의 디지털리즘의 실험시에 전류처럼 흐르는 알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들어 갈 틈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기술과도 구별된다. 다만 마음의 눈이 마음에 비친 의식의 영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리즘의 시인은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리즘의 시는 또 문명적 사고(객관적이며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와 대립되는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구체적 사고)에 맥이 닿는다.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는 구체적이고 주술적이고 감각적이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신화적 사고라고 한다. “신화적 사고는 표상(image)에 묶인 채 지각(percept)과 개념(concept)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에게는 표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나름으로는 과학적일 수 있다고 레비-스트로스는 주장한다.” 이런 면을 중심에 두고 생각할 때, 디지털리즘의 시는 비인간적인 기계의 시가 아니라 언어적인 면에서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미지와 감각도 포함하는 매우 인간적인 직관과 감성에 의해서 탄생하는 탈관념의 새로운 감각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리즘의 시는 사실, 생명, 현장을 바탕으로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중시하는 21세기적인 감수성(디지털 감각)과 인간의 내면에 잠겨 있는 야성적 감각이 만나서 순수 직관의 이미지(탈관념, 시공간 초월), 즉 신화적인 언어 표상(image)으로 탄생되는 시라고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디지털리즘의 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뛰어넘는 시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문명적인 면에서 볼 때, 과학적 사고(문명)와 야생의 사고(문명이전)의 융합이다. 그러나 디지털리즘의 시는 시인의 사유와 감각과 언어의 수사修辭에 의해서 제작되는 모더니즘의 시에 비해서 시의 일반화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탈관념의 의식이 전제가 되고 이제까지 사용된 익숙해진 언어(비유, 상징)로부터 벗어나서 때 묻지 않은 원초적 언어와 디지털 감각(염사, 접사)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더니즘 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리즘 시의 “새로운 신화 만들기”는 매우 어려운 도정이 예상된다. 그러나 21세기는 도처에서 새로운 변화(IT, DNA 등)의 구름을 계속 몰아오고 있어서 시인들도 그것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28    현대시의 이해 / 심상운 댓글:  조회:1014  추천:0  2019-03-02
현대시의 이해   『世界 戰後問題 詩集』(1961년 신구문화사) 독일 편에서   이 글은 독문학교수 이동승 님이 1961년『世界 戰後問題 詩集』에 발표한 오래된 글이지만 내용의 첨단성과 강렬함이 21세기의 현대시의 이론을 능가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글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현대시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재발표한다. 현대시를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글 속의 한자는 단어의 느낌에서 생기는 미묘한 변화나 차이와 상관되어서 그대로 싣는다.- 심상운    시    알베트 아아놀드 숄 (Albert Arnold Scholl) 이동승(李東昇) 역          시는  내용이 끝나는데서 시작된다.    신비로운 장미는 피어난다 황금의 언어의 피안에서 성곽의 저 바깥에서 논의되는 형태의 피안에서 思考體系의 바깥에서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壁紙의 白馬 무늬에서 제단의 背面에서 生起하지 않는 것의 焦點에서,    母音으로 된 시는 分子模型 名詞로 된 교회의 창문 회상으로 된 거미줄 理想鄕에서 온 分光器 버려진 것으로 된 星座圖    太陽系 너머의 태양계    무상하기에 무상하지 않고 일시적이기에 결정적이며 시간적이기에 무시간적이고 단편적이기에 완전하며 무방비이기에 강력하며 모방할 수 있기에 반복할 수 없고 非論理的이기에 논리적이며 비현실적이기에 현실적이고 포착할 수 없기에 포착할 수 있다.    가까이 있기에 宇宙船으로도 도달할 수 없고 다치기 쉽기에 전술적, 전략적 무기로도 다칠 수 없다.    사람들은 시를 조그마한 사슬에 달아 내복 밑 발가벗은 피부 위에 달고 있다.           李東昇에서 발췌    (전략)   詩는 인간의 與件에 대한 地震計이어야 하고 시 이외의 아무것도 代置될 수 없는 생명의 有機體이어야 한다. 현대시인은 급격히 진척되어 가는 현대인의 의식의 범위의 확장을 命名해야하고 核分裂이라든지 宇宙旅行이 爐邊에 불꽃이나 家庭事들과 마찬가지로 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知性의 尖端에 서고 蓄積된 지식의 總動員이 요구된다.  현실을 한 개의 單一體로 잡으려면 통합이 요구된다. 內面世界와 外的世界가 시 속에서 同時에 反影되어야 한다. 이런 통합은 자주 瞬間의 竝列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分裂되지 않은 상태의 표현을 하기 위해 언의의 최고도의 凝固가 요구된다. 이것은 일종의 瞬間을 수단으로 한 시간성의 극복을 뜻한다. 이런 과중한 부담 앞에 현대시인은 과거의 언어를 수단으로 造花를 만들어 낼 수 없게 됐고, 현대시인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고 새로운 언어의 表現可能性을 모색하고 있다. (중략) 적어도 1920년대 이후에 출생한 시인들에게 있어서는 시란 이제는 사상의 표현도, 교훈적인 언어의 나열도, 재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調和의 추구도, 우주관, 인생관의 표현이나 탐색도 아니며, 감정의 솔직한 流露도, 자연의 謳歌나 形而上學的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魅惑의 曲藝를 전제로 하는 언어의 遊戱인 것이다. 시는 표현하기 이전에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서 사용되는 시어는 그가 지니는 역사성을 無視 내지는 輕視하고 所用의 한계에서 벗어나서 언어에 대한 狂躁曲을 형성한다. 언어는 현대회화에 있어서의 色彩나 현대음악에 있어서의 音과 같은 뜻을 갖게 된다. 詩中의 단어는 그 의미 내용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音響에다 더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오스카 뢰르케(Oscar Loerke)의 말을 빌리면 라고 한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의미의 전달이 아닌 이미지의 전달 밖에는 문제로 삼고 있지 않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다만 자기자신을 통해서만 論證되는 旣存하는 모든 詩形態에 대한 항의가 되고 극히 自律的인 것이 된다.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내용에 先行하는 것이다.  현역작가이며 문예학자인 훨레러(Walter Hollerer)는 을 수단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시인은 심중에서 일어나는 幻覺을 예리하게 오려내서 언어를 수단으로 모자이크한 벽처럼 한 편의 시를 組立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은 그 역사성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것이 극단으로 나가면 순수상징에 의한 감각적 경험의 파괴에 도달한다. 이 수단으로 현대시는 時空의 한계를 극복해서 한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려고 하고 이른바 에까지 가려고 한다. 이 태도가 재래의 시와의 단절을 가져온다. 이리하여 현대시에는 언어에 대한 신앙이 그 근저에 놓여 있고 언어가 그 綜合的機能을 발휘하지 못할 때 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게오르게 (Stefan George)는 고 한 말이 이런 입장을 입증하고 있다. 이런 純粹象徵으로서의 언어는 그 자체로서 벌써 역사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차원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시는 몽타주의 방법을 통해 조립되는 것이다. 이른바 을 시인은 수집하고 분석하고 해부하고 琢磨해서 꿰어 맞춤으로써 현대시는 구성될 수 있다고 본다.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서 絶對的 自律性에 도달하려는 피나는 시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른바 가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공간, 시를 위한 새로운 차원을 찾기 위한 도상에 오른 현대시는 과거와의 訣別을 선포했고, 소재의 선택에서도 과거의 것과 판이해서 古典的詩에서 있어서의 調和 대신에 不調和를, 정상적인 것에 대신해서 非正常的인 것을, 자연적인 것 대신에 人工的인 것을 표방하고, 否定을 통해 긍정에로 도달하고자 하고 언어의 幾何學的 조립을 통해 불협화를 구성하고자 하고, 종합 대신에 解剖를 통해 재래의 형태의 파괴를 기도하는 까닭에 현대시에서는 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현대시에서는 논리가 아닌 幻想이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언어를 수단으로 한 暗示力의 최고의 驅使를 통해서 성립되는 상징을 매개로 旣存限界의 突破가 試圖되고 있다. 보다 큰 협화음은 不協和音까지도 그 자신 속에 내포하는 것이다. 현대시는 否定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려고 하고 不調和 너머의 조화를 추구한다. 현대시는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는 과거와의 斷絶의 시이며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이며 철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라고 命名될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현대시가 성립되는 까닭에 현대시는 어떤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魔術師이며 자기 언어가 가져오는 이미지의 空間에서 절대적 고독과 대결하게 된다.     현대시는 릴케가 『두이노의 悲歌』를 쓸 때 겪었다고 하는 靈感의 폭풍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意識的인 知識의 동원을 요구한다. 현대시인에게서는 詩作과 自己觀察 및 批評의 과정이 竝存한다. 感性的인 孕胎를 전제로 하지 않고 바로 頭腦의 소산인 것이다. 골프리드 벤에서 자주 언어의 曲藝라는 말이 나오는데 현대시는 이 언어의 曲藝로써 성립된다고 했다. 이 사람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라고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언어와 內容은 분리할 수 없고 형태가 바로 내용임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는 독자의 理解可能與否에 아무런 介意도 하지 않고 독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시가 성립하는가 하는 것을 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 했다. 이런 까닭에 시는 써지기 전에 시인에게 內在하고 創作過程은 이 내재하는 것을 언어라는 실마리를 통해 표현하는 과정이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 있어서 시의 각개의 단어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 할 수 없는 것이며 飜譯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또 그를 구성하는 각개의 단어의 槪念의 外延을 거의 無視 내지 輕視하는 까닭에 意味以前의 것이며 형태와 내용은 동일한 것이 된다. 에밀 슈타이거(Emil Staiger)는 라고 極言하고 있다. 外界의 대상들은 시인의 창작의 욕구를 자극하는 誘引에 불과하고 시는 외계의 具象的 세계의 再現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자신 외의 아무 것도 眼中에 없다. 라고 벤은 말한다. 고 호프만슈탈도 일찍이 말했었다. 이리하여 알베트 아아놀드 숄(Albert Arnold Scholl)의 말을 빌리면, 현대시는 내용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고, 시는 존재하는 것이고 太陽系 너머의 太陽系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란 신앙도 희망도 안중에 없고 누구를 위한 시도 아니며 시인이 매혹되어 조립하는 언어에 의한 시라고 벤은 말하고 있다. 언어가 지니는 시간적 制約性의 무시를 통해 현대시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하고 논리적 체계에 대한 체념으로서 절대적 자유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모두 限界의 擴張을 위한 피나는 기초공사이다. 하이데거(Heidegger)가 말한 것처럼 바로 현대시에서는 언어가 인 것이다. 라고 크로이더(Ernst Kreuder)는 말하고 있고 라고 로마노 구바르디니는 말했다. 지금까지의 論述은 戰後獨逸詩의 주류를 이루는 이른바 벤을 鼻祖로 하는 超現實派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후략)   
27    시뮬라크르 (simulacra)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심상운 댓글:  조회:1108  추천:0  2019-03-02
시뮬라크르 (simulacra)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심 상 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의 저서『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플라톤(Platon)의 동굴비유를 예로 들면서  실체를 비추는 빛과 벽에 나타나는 실체의 그림자의 관계를 실재와 시뮬라크르 (simulacra)의 관계로 설명한다.  (플라톤의 동굴비유)  이데아의 빛→실체→(시뮬라시용)→ 그림자(시뮬라크르)   여기서 벽의 그림자는 시뮬라크르이고 실체에서 벽까지 가는 그림자의 이동형태를 시뮬라시옹이라고 한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작용을 의미한다. 이 동굴비유에서 플라톤은 이데아(ideal, 영원한 실재의 세계)의 빛에 반사된 그림자(복제의 세계)만 보고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실재를 보는 것 같지만 인간의 눈에 비치는 현실세계는 실재의 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가 복제된 세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는 이데아의 기준에서 가치가 없는 복제의 복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는 실재의 주위에서 감도는 신령스런 아우라(aura 靈氣)가 사라진 세계라는 것이다. 철학에서도 시뮬라크트(이미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의미한다.      장보드리야르는 이 책에서 플라톤과 달리 원본 없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로 둔갑한다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이를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현상을 근거로 하여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이론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에서 시뮬라크르는 실재가 아닌 것이 더 실재 같이 행세를 하는 하이퍼 리얼리티(hyper reality)의 세계로 이동한다는 개념을 내세우면서 현대사회에서 이미지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1,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다. → 2, 이미지는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킨다.→ 3, 이미지는 실재와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 4, 이미지는 스스로 순수한 시뮬라크르가 된다.→5. 순수한 시뮬라크르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가 된다. 이것을 3단계로 요약하면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실재의 왜곡→이미지 자체로의 독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미지가 형성하는 실재의 왜곡과 그 자체의 독립성은 현대사회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를 생산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 예로 성형수술을 들 수 있다. 성형수술은 실재의 왜곡을 위한 투자(소비)이지만 자기 얼굴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면에서는 생산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인들은 자기의 본래 얼굴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실재의 왜곡은 '이미지는 기호화 되고 모든 실재는 기호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남미 쿠바의 혁명가로 알려진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들 수 있다. 남미의 젊은이들이 그의 얼굴이 찍힌 티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로 그의 얼굴은 혁명가로서의 이미지로 미화되어 있다. 그 미화된 이미지(기호)는 젊은이들에게 그의 잔혹성이나 무자비한 살인 행위를 감추는 작용을 한다. 이와 같이 사진에 멋지게 찍힌 유명 인물들의 이미지는 실재의 인물이 아닌 상징화되고 스스로 독자성을 드러내는 변형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예는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의 네트워크 방송인 CNN이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에 대한 무차별 야간공습을 전자오락 이미지로 유통시킨 사건이다. 컴퓨터 게임의 이미지 같은 이 야간공습 장면에는 이라크인 들이 당한 전쟁의 참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참혹함은 감춰지고 전쟁이 가상공간 속의 게임과 같은 이미지로만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가 이미지의 기호 속으로 사라지는 매우 충격적인 실재의 은폐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은 현대사회에서 언론 매체들이 대중들에게 객관적인 사실만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실재를 감추고 변형시킨 이미지를 보도하기도 한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 예가 되는 것이 2003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바탕으로 감행된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이다. 침공 후 미국의 조사팀이 무력해진 이라크에 들어가서 대량살상무기의 실체를 조사하였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사건이 보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도가 사건을 만드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언론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보도의 내면에 숨어있는 실상(진실)을 통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재가 부정되고 실재가 아닌 것이 실재보다 더 실재가 되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에서 현대인들이 살고 있다는 ‘현대의 상황’을 깨우쳐주고 있다.
26    아이러니(irony)의 효과/심상운 댓글:  조회:1271  추천:0  2019-03-02
아이러니(irony)의 효과                                                                                        심 상 운   아이러니는 에이로네이아(eironeia)에서 파생된 말로 "은폐" 즉 감추는 것을 뜻 한다. 이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 희곡에서 재치를 발휘하여 허풍선이 알라존(alazōn)을 패배시키는 영리한 인물 에이론(eirō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를 세부적으로 분류하면 ‘언어 아이러니’와 ‘상황 아이러니’로 크게 나누어진다. 언어 아이러니는 수사적 아이러니, 반어적 아이러니, 풍자적 아이러니로 분류되고, 상황 아이러니는 극적 아이러니와 일반적 아이러니로 분류할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는 언어 아이러니 중 수사적 아이러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무지와 겸손을 가장한 소크라테스가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아테네의 여러 사람과 토론할 때, 토론의 끝 부분에서 어리석은 듯한 말로 반박할 수 없는 의미의 질문을 함으로써 상대편이 무지(無知)하다는 것을 드러내는데 성공한다. 이런 사례에 의해 아이러니에는 '아닌 척 하는', '모른 척 하는"이라는 의미가 더 붙었다고 한다.    반어적 아이러니를 반어법(反語法)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엉터리로 하거나,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오히려 "아주 잘 났어"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말 속에는 ‘잘 났다’는 의미와는 정반대가 되는 ‘못났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렇게 겉으로 나타나는 표현(외연)과 실제 속내의 의미(내포)가 정반대인 경우를 반어법이라고 한다.    이런 반어적 아이러니는 1920년대 한용운의「님의 침묵」의 끝 부분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송혁(宋赫)은『현대불교시의 이해』에서 이 구절을 “객관적인 현실로는 님은 갔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결코 보내지 않았다는 아이러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님은 없는 것이 아니라 님은 실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의 해설을 인정하면서 시의 끝부분을 음미하면 이 시의 핵심어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사랑의 노래가 절실하게 다가오고 의미가 확대되는 근원이 반어적 아이러니에 있음을 알게 된다.    김춘수는「시와 아이러니」에서 “소월의 시 「진달래 꽃」의 끝 행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는 아이러니가 되고 있다. 외연과 내포(감추어진 의도)의 긴장상태가 시적밀도를 빚어내고 있다. 이 대목이 이 시의 전체 내용에도 뉘앙스를 주고 있다.”라고 했다. 김춘수의 지적대로 이 끝 구절의 외연과 내포가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반어적 아이러니를 통해서 시적효과를 상승시키고 있다고 해석된다.   풍자적(諷刺的) 아이러니는 어떤 현상이나 사실에 대한 발언을 슬며시 돌려서 말하는 조소적인 표현. 직설적인 화법이 아닌 기지 넘치는 우회(迂廻)로 현상을 분해하는 특성을 가진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는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의 의 일부 이 시에는 시인 자신이 스스로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독자들에게 소시민적(小市民的)인 사고방식의 생활에 대한 반성을 유도하고 있다. 사회적인 강자들(땅주인, 구청직원)에게는 한 마디 저항의 말을 못하면서 약자인 이발쟁이나 야경꾼에게 돈 몇 푼에 반항하고 있는 화자 자신의 옹졸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진술이 풍자시의 아이러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는 언어보다는 작품의 구조에서 드러나는 아이러니이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희곡「아가멤논 Agamemnon」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수의(壽衣)가 될 자줏빛 융단 위를 걸어가는 주인공 아가멤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장면은 등장인물은 알지 못하는 자신의 운명을 관객들이 알고 있을 때 생기는 극적구조의 아이러니이다. 이런 극적 아이러니는 미국의 소설가 O. 헨리의 단편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기치 않은 결말로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살리기 위한 무명화가의 숭고한 예술혼이 아름답게 그려진「마지막 잎새」의 구성은 극적 아이러니의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 아이러니에는 평범한 독자들의 눈에는 잘 발견되지 않는 진리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숨은 의도가 들어있다. 그 예가 김소월의 「금잔디」에서 발견되는 아이러니이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深深)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김소월 「금잔디」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가신님과 봄이 되어 소생하는 금잔디를 대립시킴으로써 가신님의 ‘부활의 불가능’을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시인의 의도성이 보이지 않지만 부활의 불가능은 생동하는 봄의 이미지 속에 숨어서 가신님에 대한 그리움을 더 절실하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의 진실을 표출하고 있다. 그래서 숨어있는 것과 겉으로 드러난 것의 대립적 관계로 구성된 이 시의 구조는 진리나 진실을 드러내는 일반적 아이러니로 인식된다. 이 대립적 구조 속에는 독자들의 사고력을 확장시키는 에너지가 들어있다.    영국 낭만주의 시대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는 워즈워드의 시「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에도 대립적인 구조의 일반적 아이러니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어디 있으랴: 그냥 지나쳐가는 자의 영혼은 무디어라 이처럼 감동적인 장관을 두고: 이 도시는 지금 옷을 입고 있구나 아침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드러내놓고, 선박, 탑, 원형지붕, 극장, 교회들이 누워 있다 들판과 하늘을 향해, 모두들 매연 없는 대기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태양은 일찍이 이보다 더 아름답게 첫 햇살로, 골짜기, 바위 혹은 언덕을 비춘 적 없고;  나는 이같이 깊은 정적을 보지도 느낀 적도 없나니! 강물은 제멋에 유유히 흘러간다; 오 하나님! 집들마저 잠든 듯 하네요; 그리고 저 힘찬 심장은 고요히 누워 있고! ----- 워즈워드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전문 , 김철교 번역 이 시의 화자(워즈워드)는 이른 아침 템즈 강의 웨스트민스트 다리 위에서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의 도시를 보고 “모두들 매연 없는 대기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고 낭만적인 영탄의 언어를 터뜨리고 있다. 그 영탄의 언어 속에는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에 대한 예찬이 들어 있다. 그래서 C. 브룩스는 해설에서 “이 시는 아이러니를 내장하고 있다”고 했다. 깨어나서 활발하게 북적대는 도시가 실은 가장 죽은 상태이고 오히려 죽은 듯 고요한 순간의 도시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C. 브룩스의 해설을 받아들일 때 이 시는 문명비판의 시로 읽힌다. 그리고 이 시의 아이러니는 문명(죽음)과 자연(삶)의 대립적인 구조가 들어있는 진실추구의 일반적 아이러니로 인식된다.   아이러니와 유사성이 있는 역설(paradox)은 넓은 의미의 반어적 아이러니에 포함된다. 모순구조의 언어는 표면적인 부조리한 진술 속에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을 강렬한 인상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역설의 수사법이다. 역설은 언어적 역설과 구조적 역설로 나누어진다. 언어적 역설은 ‘소리 없는 아우성’ ‘찬란한 슬픔의 봄’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어둠의 빛’ 등 수사의 언어로 표현되는 역설이다. 이 역설의 수사법은 외연의 표현이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언어를 보인다는 점에서, 겉과 속의 의미가 정반대이지만 언어표현에서는 모순구조가 없는  반어법과 차이가 있다. 구조적 역설은 작품 내부의 구조가 형성하는 역설이다. 대립적인 사건이나 사물을 영화의 몽타주 방식으로 결합시켜서 거기서 발생하는 이미지가 삶의 진실과 연결될 때 구조적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일반적인 서술형식에서 벗어난 극적인 연출의 역설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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