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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선(禪)과 시 (詩)_ 낯설게 하기를 중심으로/심상운 댓글:  조회:1020  추천:0  2019-03-02
선(禪)과 시(詩) -낯설게 하기를 중심으로   심 상 운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는 일상적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인식에 충격을 가하고 시의 표현을 새롭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1916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어연구회와 모스크바 언어학회에서 평범한 언어를 예술적 언어로 변모시키기 위한 기법으로 제시한 형식주의(Formalism)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표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인식능력을 신장하여 철학적 형이상학적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 그래서 시인은 선승(禪僧) 같은 투명한 눈으로 대상을 응시하고 새로운 관점과 감성의 언어로 생명의 세계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잠시 그는 땅에서 솟구쳐 오른 암흑의 빈 탑이었다. 날개를 잃은 학이었다. 어느 날 그는 발 밑을 들석들석하더니 죽죽 몸을 펴 뻗었다.   불룩하다간 꺼지고 또 불룩하는 잉태와 유산流産의 흥분에서 조용히 육신肉身의 붕괴를 다스렸다     -----------문덕수 1,2연 말 오양간 냄새가 나는 이에스 크리스도의 머리에서 빛난 기적처럼 너는 전쟁의 계단을 포복하는 군단의 불면이 겹싸여 탄피와 같이 굳어진 나의 눈시울 속에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장미와 인간을 위한 하늘처럼 별처럼 노오랗게 새파랗고 또 무슨 여러 가지 샛말간 색깔의 과실들과,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들과 바다처럼 부드러운 나래처럼 음악이여 ------------------전봉건 1,2연 두 편의 인용시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50년대 전후의식(戰後意識)의 시다. 문덕수(文德守)의「항아리 1」은 항아리를 ‘암흑의 빈 탑’ ‘날개를 잃은 학’으로 비유하여 일상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이미지는 전후(戰後)의 폐허 속에서 생존하며 희망을 열어가는 시인자신의 존재성과 연결되면서 항아리를 ‘잉태와 유산’이란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갈망의 그림자가 내면적으로 시의 이미지와 결합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전봉건(全鳳建)의「음악」은 전쟁 속에서도 잃지 않은 시인의 내면의식의 세계를 이질감을 주는 언어로 표현하면서 ‘전쟁과 음악’이라는 대립적 상황을 통하여 인간이 지향하여야 할 것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두 시의 공통점은 시인의 시선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과 ‘일상성과 타성’에서 벗어난 시인의 사유와 이미지가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선(禪)의 첫걸음도 일상성과 타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선에서는 본질적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도구로서 언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선승들은 입을 여는 순간에 진리는 사라져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입문자(不立文字)라고 했으며, 진리를 전하는 방법으로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을 때,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깨달아 미소를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라는 말을 통해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진리를 전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묵언(黙言)을 수행의 한 과정으로 실천한다. 그러나 선에서도 깨우침을 전하는 방법으로 언어를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언어를 떠난 방법이 너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선승들이 전하는 오도송(悟道頌)은 고도의 언어로 표현된 선시(禪詩)가 된다.  달빛 비친 강산 고요한데  내 스스로 웃으며 터뜨리는 한 소리에  하늘과 땅이 놀란다 孤輪彼照江山靜 自笑一聲天地驚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에서     이 시는 서산대사의 오도송으로 알려져 있다. 깨달음을 얻은 후 터뜨리는 사자후(獅子吼)가 들리는 듯하다. 이 시에서 달을 고륜(孤輪)이라고 ‘무한 허공에 떠 있는 외로운 바퀴’로 표현하고 있는 데, 이는 현대시의 낯설게 하기와 상통하는 면이 보인다.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  불 속에 옮겨다 심었다 새봄의 비를 가져오지 않아도  난만하게 핀 붉은 꽃. 一樹無影木, 移就火中栽 不假三春雨, 紅花爛漫開1)  - 소요 태능(逍遙 太能,)의 선시에서    서산대사의 제자 소요 태능(逍遙 太能,)의 선시는 일반적인 상식과 언어의 경계를 초월하는 언어감각이 현대의 초현실주의 시외 비견(比肩)된다.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 불 속에 옮겨 심었다”는 이 시에는 태능 자신의 깨달음의 경계와 불법의 묘지(妙旨)가 숨어있는 듯하다.    다음 글은 김석 시인의「조향의 초현실주 문학의 이론과 기법」에서 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글이다. 이 글은 선의 언어와 초현실주의 시(언어유희)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생각하게 한다. 선의 언어 속에는 ‘깨달음의 자명종’이 숨겨있는 데 반해서 언어유희에는 ‘논리적 사고로부터의 해방’이 들어있다. 둘의 공통점은 상투적인 언어로부터의 도피(逃避)이다.  마치 눈가림한 사람이 숲 속에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 부딪히는 것처럼, 指導도 방향도 없이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에로, 의식이 흐르는 대로 생각을 맡겨두고 쓰는 일이다. 동양식으로는 東問西答式 시의 놀이이다. 이런 면에서 선시나 偈頌과 맥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는 억눌림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위한 ‘정신적 사냥’으로 동문서답식 시의 기교인데 반하여 동양은 법통을 잇기 위한 ‘진리파지’의 큰 주제 아래 그 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래 보기의 시는 조향 선생님이 서울의 某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실험했던 단어와 단어 사이, 시행과 시행 사이에 의식의 단층을 만들었던 합작 시로 『아시체』의 한 시 놀이다.  B__태양을 향한 한 마리 山羊의 갈망은?  J__프로이드가 씹어 먹는 날개란 말야,  K__그 사람은 언제 떠났지?  S__철도 연변의 들국화야,  J__여름 얼굴 위에 흐르는 지렁이는?  K__고양이 생일이었어,  B__연못 옆에 있는 것은 뭐지?  J__전등 속에 든 베레모 같은데,(이하 생략)  1950년대의 시인 조향(趙鄕)은 아무런 연관성이 전혀 없는, 동떨어진 사건들이 서슴없이 한 자리에 모여서 현실로부터 해방과 일탈을 추구하는 언어행위를 데뻬이즈망(depaysement) 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질적인 언어(사건)들 사이에서 발생되는 ‘차이(差異)의 작용’을 새로운 창조적인 시의 미학으로 상승시키려고 한 초현실주의의 시의 기법이다.    선시와는 다르지만 선문답(禪問答)도 ‘일상적인 타성의 인식을 깨뜨리는 언어’를 도구로 삼고 있다.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라는 말로 유명한 운문(雲門) 스님에게 하루는 제자가 물었다. “무엇이 ‘참나’입니까?” 운문스님이 대답했다.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는 자이지” 어느 날 동산(洞山) 스님에게 제자가 질문을 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동산스님이 대답했다.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 선문답에는 제자에게 깨우침을 주려는 스승의 마음이 들어있다. 그러나 선은 지식의 전수 같은 가르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정신의 경지이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고 가리키는 것’으로 방법을 삼는다. 그래서 제자가 스스로 체험을 통해서 마음 속 자명종의 울림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선문답에는 설명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설명의 생략’은 선문답의 답을 화두(話頭)로 만든다. 제자들은 선정(禪定)을 통해서 그 화두의 의미를 탐구하고 해결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설명의 생략’은 시의 구조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설명이 들어가는 순간에 시는 사라지고 산문(散文)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문답이 퍼포먼스(performance) 같은 행위와 결합될 때 그 구조가 다양해지고 상상력의 폭이 확장된다.    조주(趙州) 스님은 어느 날 스승 남전(南泉)에게서 제자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끊어버리기 위해 고양이를 칼로 두 동강이 낸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다 들은 뒤 아무 대꾸도 않고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남전이 말했다. “그때 만일 자네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려주었을 텐데”. -오경웅(吳經熊) 지음 유시화 옮김 『禪의 황금시대』에서 발췌정리    신발을 머리에 이고 가는 조주의 행동은 몇 가지의 의미를 유추하게 한다. 구도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뒤바뀐 가치관과 인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신발을 머리 위에 이고 걸어가는 것은 그들의 시시비비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행위라는 것. 진리에는 머리와 발의 경계가 없다는 것.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첨부하면 우스꽝스런 행동으로 스승의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했다는 것 등이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일상에서의 일탈(逸脫)이라는 유희성(遊戱性)과도 연결된다. 조주스님의 행위는 현대시의 퍼포먼스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21세기 현대시의 현장에서 시인들은 단순한 시낭송에서 탈피하여 시에 음악과 영상, 시인의 연기를 부가하여 공연무대에서 언어문자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시운동을 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는『시적 순간과 형이상학적 순간』에서 그가 인식한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詩)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詩篇) 속에서 시는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시가 단순히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다.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을 즉석에서 삶으로써만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때서야 시는 가장 산만하고 가장 이완된 존재가 그의 통일을 획득하는 근원적 동시성(同時性)의 원칙이 된다.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경험들은 끝없는 서론(緖論)으로 준비되는 것인 데 비하여 시는 소개말과 원칙과 방법론과 증거 따위를 거부한다. 시는 의혹을 거부한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침묵의 서두(序頭) 정도이다. 우선 시는 속이 텅 빈 말을 두드리면서, 독자의 영혼 속에 사고(思考)나 중얼거림의 어떤 계속성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는 산문(散文)과 서투른 멜로디를 침묵시킨다. 그러고 나서 진공(眞空)의 울림을 거쳐서 시는 자기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선도 순간의 언어로 표현된다.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총체적 인식이 한 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 선의 언어이다. 직관적이고 총체적 인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시와 선은 같다. 그리고 일상에 대한 전도(顚倒)와 비약(飛躍)이라는 점에서도 상통한다. 따라서 시가 ‘대상에 대한 해방(解放)’을 추구한다면 선은 구도자 자신의 ‘해탈(解脫)’을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라는 말이 기존의 관념이나 인식방법에서 풀려나는 것을 의미하는 데 비해 해탈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유무(有無)를 초월하는 제 3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에서 “진공(眞空)의 울림”은 미당(未堂) 서정주(徐定柱)의 시「동천(冬 天)」같이 일상이나 기존관념으로부터의 해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을 초월하는 시의 궁극을 표현한 말로 인식된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의「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는 실체와 실질적 관계가 없는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가 만들어 낸 ‘이미지의 언어’다. 이런 언어를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erd  inand de Saussure)의『일반 언어학 강의』를 근거로 ‘기호’라고도 한다. 이 시속에는 미당이 일생동안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한 ‘사랑의 진실’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 진실은 선의 진리와 상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시는 조주 스님이 신발을 머리에 이고 걸어 간 행위에 대입할 수 있을까? 현대시의 낯설게 하기와 선의 관계를 통해서 그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24    나의 시를 말한다/심상운 댓글:  조회:873  추천:0  2019-03-02
나의 시를 말한다   심 상 운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온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 빨간 오토바이가 달린다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린다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하얀 오토바이가 달린다 산맥을 넘어 붉은 토마토 즙을 온 몸뚱이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떼를 지어 뛰어가는 도시 위를 달린다  노란 오토바이가 달린다 혼자서 신나게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어이, 저거 봐, 오토바이가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있어.”  시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현실에서 해방된 대상의 이미지 시 나는 이 시에서 하나의 운동 이미지 속에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시적 현실’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시를 언어예술로 인식하고 새로운 창조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가상세계에 대한 무한긍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는 현실에서 해방된 대상의 이미지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시의 대상은 아무런 현실적 의미가 없는 순수성을 가진다. 그 순수성은 무한한 상상과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세계를 열어 주는 바탕이 된다.  독자들은 이 시에서 푸른, 빨간, 하얀, 노란 등 오토바이 앞에 붙은 색채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이 시에서는 ‘의미’보다 이미지라는 시각적(예술적) 영역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이 시는 ‘보여주는 시’ ‘연출된 시’ ‘또는 ’사이버성의 이미지의 시’ 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의미는 진리로 들어가는 문틈이 되지만, 니체가「힘에의 의지」에서 말한 것같이 ‘예술은 진리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발명의 영역이 되고 진리는 발견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오토바이’가 일상적인, 합리적인 목적에서 해방된 초현실주의 시의 오브제(objet)와 같은 예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런 오브제를 통한 ‘자유연상’의 방임된 시상은 시의 영역을 확장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이 시의 첫 연 바그다드는 현실과 연결되지만, 둘째 연부터는 점층적으로 현실에서 이탈하는 ‘현실이탈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끝 연 “그때 그는 손에서 리모컨을 아주 놓아버린 것이다”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방임상태의 표현이 된다. 이 방임상태는 현실에서의 해방(자유정신)이라는 관점에서 21세기 현대시에서 새로운 감성적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새로운 감성 영역의 시인들은 소크라테스적인 이지적 경향의 시인들과는 대조적인 위치에서 전위적인 시 창작을 하고 있다.   
23    나의 시 쓰기 여정-자작시 해설/심상운 댓글:  조회:1026  추천:0  2019-03-02
나의 시 쓰기 여정-자작시 해설    현실문제에서 존재의 의미 찾기와 순수서정 그리고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                          ------2015년 4월 3일에서 발표                                                                                                                                                심 상 운 (시인, 문학평론가)       내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21살까지 살았다. 내가 태어난 낙원동 그 터에는 지금 춘천관광호텔이 서있다. 1950년대의 춘천은 6, 25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시장을 중심으로 복구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생산 시설이 없는 군사적인 소비도시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춘천의 인구는 2만을 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소양강(북한강)이 휘감고 흐르는 봉의산, 삼악산, 대룡산의 빼어난 자연 풍광은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소년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어린 시절 헤엄치고 물고기 잡으며 놀던 공지천(곰짓내), 대밭이의 물소리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문학보다는 미술에 더 마음이 끌렸고 화가(畵家)를 동경하였다. 그래서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였다. 1958년 춘고(春高)에서는 소풍 갈 때 스케치북을 가지고 가서 풍경화를 그리게 했다. 미술 시간에도 도회지의 거리에 나가서 자유롭게 스케치를 하게하고 그때 그린 그림들을 뽑아서 교내에 전시했다. 내 그림도 뽑혀서 몇 달 동안 교실 벽에 붙었던 기억이 있다. 그림그리기와 함께 독서도 내 마음을 붙들었다. 라디오도 TV도 없던 시절, 문학에 대한 동경에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에 빠져서 독서삼매에 몰입했다. 책은 주로 헌 책방에서 밑돈을 깔아 놓고 빌려보았다. 이때 헤르만헷세, 톨스토이 등 외국의 유명작가들을 만났으며, 이광수, 방인근, 나도향, 김동인, 김말봉 등의 소설도 남포등을 밝히고 밤을 새워 가며 읽었다. 이런 폭풍 같은 독서가 훗날 내 문학적 토대를 이루었으며 문학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시는 대학에 들어와서 쓰게 되었는데, 내 시의 길잡이는 박목월의 『보라빛 소묘』, 유치환의 『구름에 그린다』, 장만영의 『이정표』 등 당시에 발간된 시인들의 자작시 해설집이었다. 나는 장만영의 『이정표』에 매혹되었다. 시를 언어의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그의 시작 방법이 그림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문리대 학회지 등에 시를 발표하던 나는 1963년 대학 4학년 때 에서 당선이 되어 학생시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조병화 시인이 당선시를 2편 뽑았는데, 함께 당선된 학생은 영문과 4학년 노향림(시인)이었다.    1964년 대학 졸업 후, 10년간은 문학의 공백기가 되었다. 군대, 취직, 직장생활 등 시 창작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공백기를 지나 1973년 11월 월간 에 조병화 시인의 첫 번째 추천을 받고, 1974년 2월에 완료추천을 받아서 등단하였다. 완료 추천인은 문덕수 시인이었다. 완료추천작 「목공환상(木工幻想)」은 관념을 배제한 사물성의 이미지 감각의 시로서 평가를 받았다.    1981년에 첫 시집『고향산천』을 상재하였는데, 이 시집에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분단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저항의식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발간되자마자 5공 정권에 의해 이념서적으로 분류되어 판금(販禁)이 되고, 금서(禁書)가 되었다. 당시 금서가 된 시집은 양성우의『겨울공화국』김지하의『타는 목마름으로』조태일의『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와 내 시집『고향산천』이었다. 그 후 1985년 6월 8일 해금 조치가 있을 때까지 나는 노량진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요시찰인이 되었다. 그들은 수시로 학교에 들려 나의 언행을 점검하고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교장은 시와 관계가 먼 법과 출신이지만『고향산천』을 탐독하였고, 내 시에 감동했다며 중국음식점에서 조촐하게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이 시집으로 인해 발행처인 와 발행인 김규화 시인은 문화공보부로부터 압박을 당했고, 그로 인해 나는 정신적인 고통과 불길한 위험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서 발간 후 서평이나 평론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1981년 12월 22일자 분야별 평론가 5인이 선정한 의 후보로 올라가서 문학적인 면에서는 뜻밖의 보람을 남겼다. 그리고 에서 발간한 1995년 봄『펜 문학』의 특집 에서 박철희 교수(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시의 경향을 거론하면서 “정치적인 폭력, 빈부의 격차, 계층의 갈등, 공동체 파괴와 이에 따르는 인간관계의 왜곡이 이 시대 시의 대표적인 주제 내지 소재로 나타났다.”고 했고, 시인으로는 “김지하, 고은, 신경림, 이성부, 황동규, 김명수, 강은교, 조태일, 양성우, 심상운, 이시영, 정희성 등의 이 시기의 시를 먼저 거론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중요한 한국 현대시사(詩史)의 정리 즉 사초(史草)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것은『고향산천』이 남긴 귀중한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에는 31편의 연작시 있다. 그 중 2편을 소개한다.    고향산천 . 12 -싸리꽃    이른 여름 강원도 산비탈엔 살내음 환한 싸리꽃    스물 두 살의 나는 小銃을 버리고 한 아름 싸리꽃과 함께 땅바닥에 누웠다.    여름은 온통 치마폭 가득 푸른 불길    나는 방금 불속에서 새로 태어난 청록색 풀잎이었다.    「고향산천 . 12-싸리꽃」은 81년 봄 시문학 출신들의 모임 사화집에 발표한 작품이다. 나는 이 시의 시상을 어느 해 여름 강원도 원통 골 산비탈에서 무더기로 피어 있는 싸리 꽃 속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소총을 들고 포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앞에 발그레한 빛과 향기를 뿜으며 피어있는 싸리 꽃. 나는 무릎이 벗겨져 뻘겋게 번지는 혈흔의 아픔도 잊고 싸리 꽃 무더기 속으로 내 온 몸을 던졌다. 나는 이 시에서 역사 속의 나와 자연본래의 나를 결합시켜 새로운 생명적 창조의 나로 그려 보았다. 스물 두 살의 나는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다. 그런 내가 이 시대에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소총(증오심, 적대감)을 버리고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고향산천에 환히 핀 싸리꽃(순수한 사랑)을 가슴으로 껴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원형적(原形的)인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는 정신적으로 분단(分斷)의 역사를 극복한 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산천 . 18 -어느 소년병의 잠    그는 이제 눈 감고 풀잎에 내리는 흰 눈을 보고 있다. 새소리도 마침내 맑은 이슬로 내리고 질경이 뿌리에 닿는 볕이 손등의 눈을 녹이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소총 멜방에 끌려 청솔 돋는 마을을 떠나갔을 뿐 죽은 것 같지 않다.    눈감고 편안히 누워 산천의 흰 눈 맞으며 언 땅 밑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소년병의 잠    「고향산천 . 18-어느 소년병의 잠」은 어릴 적 기억의 재생이다. 6,25 때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춘천에서 30리쯤 떨어진 시골 ‘곰실’이란 곳으로 피란을 갔다. 시내에서는 식량도 없고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후퇴하는 한패의 인민군 병사들을 보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은 그들은 패잔병으로 기진맥진한 몰골이 처참했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다리를 절며 걸어와선 쓰러지던 그들의 모습. 그 중에는 총신을 질질 끄는 소년병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시화하며 그들의 죽음은 결코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언젠가 깨어나야 할 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봄이 오면 그들은 깨어나리라. 그들은 잠을 자면서 비로소 산천의 햇빛과 만나고 맑은 새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언 땅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의지를 그려 보았다    『고향산천』이후 나는 20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을 광풍 같이 휩쓸고 간 1980년대의 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내 존재에 대한 탐구와 순수서정시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시절 내 시의 표현이 지향하는 것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의 시어가 빚어내는 이미지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지는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시의 의미를 싱싱하게 지속시켜주는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이미지는 그 자체가 언어의 투명한 보석이 되어 자율적(自律的)인 독립적 가치를 지니면서 언어의 한계를 돌파하고 시의 세계를 무한히 넓혀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나에게 고민이 되는 것은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적인 정서의 적절한 조화(調和)와 현실의 문제였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혼, 생명, 그리움, 신적(神的)인 존재 등 ―을 중시하여도 현실의 문제들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 되는, 시인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현실의 문제들도 문제의 원형(原形)속으로 들어가서 이미지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나는 또 시각적(視覺的)인 이미지와 함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시속에 담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이 소리는 시속에서 의미를 감각화(感覺化) 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시의 리듬을 돋구어주고 신명을 불러들이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3편의 시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두 번째 시집『당신 또는 파란 풀잎』에서 골라 본 것이다.     아직 개발開發되지 않은  컴컴하고 습한 지역을 아시나요     눈 내리는 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  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인가人家와는 멀리 떨어져  마을의 길은 이미 끊어지고  컴컴하고 습한 진흙 벌만 계속되는  미개발의 그 곳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면  자연의 거대한 사원寺院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  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  젊은 신神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  -------- 전문     이 시의 제목을 처음에는 “신神들의 마을”이라고 했는데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서 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시 전체의 이미지는 흰 색과 검은 색을 대조시켜 시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나는 이 시에서 생명의 고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면서 개발(開發)이라는 인위(人爲)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컴컴한 잡목림(雜木林)속에서 벌어지는 생명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환희를 동적(動的)인 이미지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젊은 신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라고 시의 앞뒤에 시청각(視聽覺)이 서로 한 데 어울린 동적인 이미지를 넣은 것은 생명의 움직임과 환희의 감정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그려보려는 의도였다. 윤강원(尹江遠)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월평(月評)에서 “성스러운 것, 활달하고 자유로운 것. 평화스러우면서도 원형적(原形的) 생명감이 충만한 것에 대한 열망이 일종의 복귀의지의 꿈으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 시를 깊이 이해하고 시에 담긴 의미를 높은 정신세계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적 생명의 기운을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신(神)을 등장 시켰다. 이 신은 생명의 원형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자들은 원시적인 에니미즘(animism)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각적인 이미지에 중점을 둔 시로 또 「수부水夫의 꿈」과 「벼랑 위의 꽃」을 들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검은 꿈의 바다를  떠도는 수부水夫  한밤중 달의 은사시빛  밧줄이 부서진 내 배의  동체를 끌고 간다.  나는 저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곁으로 가고 싶다.  그것이 항해의 끝이 되어도  설령 내가 영혼만으로  떠돈다 할지라도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나는 얼마나 황홀한 빛의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인가.  그 곳에는 악惡도 선善도,  오직 순수한 신神들의 소리만 살아  고생대古生代의 바다가 아직도 파도 친다.  아아, 나의 첫 항해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차디찬 꿈의  빙산氷山을 지나 더 멀고 먼  푸른 바다로 떠나가야 한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그 모래밭까지  --「수부水夫의 꿈」전문     앞의 시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 숲- 신神들의 마을」이 외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데 반해 「수부水夫의 꿈」은 시인의 내면의식을 시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시다. 두 편의 시에 공통점이 있다면 생명의 원적지(原籍地)를 찾는 의식의 흐름이다. 나는 이 시에서 내 존재의 고향을 찾아 항해하는 수부(水夫)가 되었다.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황홀한 빛의 침대, 고생대古生代의 바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등은 내 의식을 객관화하여 드러내기 위한 은유의 언어이고 상상(想像) 속의 그림이다. 나는 불교의 선(禪)이 지향하는 세계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 세계는 선(善)과 악(惡), 죽음과 무(無)의 세계를 넘어선 푸른 바다와 같은 생명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시는 관념적(觀念的)이고 사색적(思索的)인 내용이 중심이 되는 시다. 나는 벽돌같이 딱딱한 관념을 부드럽고 신선한 상상의 언어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어는 관념어와 구상어(具象語)의 조화를 시도하였으며, 객관적인 이미지와 주관적인 정서를 조화시켜 독자들에게 친근감과 시적인 감흥(感興)을 주기 위해서 "나"를 시의 화자로 삼아 독백조(獨白調)의 어조로 시를 구성하였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들을 아시는가     우리들이 산을 오르다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땀을 들일 때  그 꽃들 만나고 가는 바람이  우리들 머리나 가슴을 향기롭게 스치고 지나가고  그 때마다 하늘은 유난히 파란 가슴을 드러내곤 하였지     높은 산 까마득한 벼랑 위  바위틈에 뿌릴 박고 피어 있는 꽃     햇볕 따뜻한 날이면  누군가 그 꽃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을 거 같다     이 세상과는 영영 이별을 해버린 모습으로  한평생 찾아 헤매던 사랑을 찾은 듯한 모습으로  속살까지도 빨간 꽃 옆에서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그 곳이 먼 옛날 떠나온 제집인 양 누워 있을 거 같다  ----「벼랑 위의 꽃」 전문     이 시는 어느 봄날 산행 중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갈무리한 시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은 실제의 꽃도 될 수 있지만 상상 속의 꽃으로도 확대된다. 저 신라시대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유혹했던 절벽 위의 철쭉꽃으로,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피어있는 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산행(山行)을 할 때 우리들의 가슴을 더 향기롭게 해주는 것은 그 상상 속의 꽃들을 만나고 가는 바람의 향기라고 차원을 높여보았다. 그리고 햇볕 따스한 봄날 그 꽃 옆에 누군가 잠을 자고 있으리라고 상상의 세계를 넓혀 보았다. 여기서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 속에 잠들고 싶어 하는 내 존재의 본래적(本來的)인 모습일 수도 있고, 떠나온 낙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존재의 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속의 “속살까지도 빨간 꽃”은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상징(象徵)하는 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시의 기능 중에서 이 세상의 허무(虛無)를 극복할 수 있는 기능을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벼랑 위의 꽃」은 그런 면에서 내가 아끼는 시가 되었다. 나는 이 시에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시속의 빨간, 파란 등 색채언어(色彩言語)는 회화적인 효과를 높이고 또 의미를 상승시키는 구실을 하면서 미적 감각과 서정성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의 속뜻을 짚어보면 시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만드는 존재의 암시와 발견, 존재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발견자요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나는 내 시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모색하는 시간을 갖고 새로운 시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문덕수 시집『선․〮 공간』(1966,12 성문각)의 시편들을 다시 읽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동영상으로 표출된 초현실의 이미지 세계를 다루었는데, 아쉬운 것은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이 시집의 시편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인이나 평론가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시편들은 40여년이 지난 2008년에 거론되기 시작한 ‘하이퍼 시’의 근원이 되는 시가 되었다.)    나는 2005년 한국현대시인협회 사화집『새는 휘파람소리로 난다』에 게재할 2004년 시단의 총평을 의뢰받고,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을 집필했다. 그때 현대시의 기법에서 이미지를 중시하는 내 눈을 놀라게 한 것은 오남구 시인을 중심으로 들이 시도하고 있는 ‘디지털리즘 시’ 운동이었다. 그들의 시운동은 넓고 깊은 디지털의 이론을 포괄하지 못하고, 대상에 대한 시인의 직관적인 감성과 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지만 언어에 대한 인식(탈관념, 기호성)과 대상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 찍기(염사, 접사)를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이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의 ‘디지털리즘 시’를 21세기 새로운 시의 모델로 설정하고 집중적인 조명을 하였다. 그들의 시가 나에게 준 영감은 현대시가 의미의 세계(관념)에서 영상의 세계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개인적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한 지식을 쌓고, 오남구 시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생각을 토대로 하여「디지털 시의 이해-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시론을 집필하고, 2006년 11월 금요포럼에서 이 시론을 발표하였다. 당시 포럼에서 돈키호테 같은 내 디지털시의 이론을 지지하고 격려해준 시인은 문덕수 선생님뿐이었다.     2008년 오남구 시인의 제의로 김규화 시인과 함께 3인이 최초의 이 되었다. 나는 2008년 4월호 『시문학』 ‘이슈의 숲길’에서 김규화 시인과의 대담을 통해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시대적 당위성과 미래지향성에 합의를 하고, 하이퍼시의 창작에 몰입했다. 처음엔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명명했던 것을 하이퍼시라고 개명한 이유는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를 전제로 한 명칭이라는 점에서 종이 위에 전개하는 하이퍼텍스트시의 명칭은 하이퍼시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현대는 영상 시대이고 인테넷을 통한 수평적인 네트워크 시대다. 따라서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시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디지털 시는 21세기의 감각에 부합하는 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영상 시대의 언어미학과 가상현실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로서 컴퓨터 공간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에서 생성된 ‘하이퍼 시’의 모태가 되는 시가 되었다. 디지털시에서 이미지의 집합적 구조의 바탕이 되는 모듈(Module) 이론은 하이퍼시에서 리좀(Rhizome)의 이론으로 바뀌었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정신의학자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가 합동으로 저술한 『천개의 고원』에서 말한 리좀은 수직적 선형(線形)을 탈피한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이루어졌으며, 서로 대립적인 독립관계를 갖는 세계지만 서로 연결되고 결합함으로써 다양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연출한다는 점에서는 모듈 이론과 부합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시를 수직적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시라고 하면 하이퍼시는 수평적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하이퍼시(디지털 시)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의 수직적 논리적 사고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내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2010년 5월 푸른 사상사)에 들어 있는 하이퍼 시의 조건과 특성이다. 그러나 이 조건과 특성은 굳어진 틀에 갇힌 고착적(固着的)인 것이 아니라는 데서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하이퍼시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내 하이퍼시(디지털시) 초기의 시 한편을 예로 들어본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공간의 시 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4개의 단위(unit)로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에 흐르는 의식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이 시의 내면에는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갈구는‘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설득적 표현과는 전혀 다른 암시적인 보여주기(showing)의 기법이다. 이성혁(문학평론가)은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에서 이 시에 대한 평가로‘특이성이 없는 범용성’의 시라는 지적과 함께 “그 주제에 속할 수 있는 장면을 누구라도 계속 이어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시가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특이성이 없는 범용성(凡庸性)이라는 그의 지적은 하이퍼시의 일반화(난해성의 해소와 독자와의 소통)를 위한 방향제시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이해될 것 같다.    한국 현대시는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현대시의 시대정신이다. 언제까지 과거의 언어에 갇혀 있을지 답답하다. 그런 면에서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는 이 시대의 시 현장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의 길은 다양하고 모두가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 쪽만 고집하고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현대시인협회 기관지 『한국현대시』12호 에서 “현대시의 전통과 변화를 그 대립적인 면만 강조하면 현대시는 시대정신의 범위에서 이탈 되고 말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할 때,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다양한 에너지가 충만한 시가 탄생하리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끝으로 위에서 서술한 나의 시 쓰기의 방법을 요약하면 197,80년대의 현실문제의 시⟶1990년대의 존재의 의미 찾기와 순수서정시⟶2000년 이후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의 3단계로 나누워진다. 이 3단계의 밑바탕에는 이미지즘(imagism)이 들어있다. 자연발생적이고 관념적 표현에서 벗어나 하나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려는 이미지즘은 내 시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중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지로 형성된 내 시편들의 내면에 끊임없이 ‘생명의식’이 흐르고 있기를 염원한다.  
22    시와 생명/심상운 댓글:  조회:996  추천:0  2019-03-02
  시와 생명                                             심 상 운                  그리움, 사랑, 이별, 고향, 어머니, 아버지, 당신(임), 만남, 세월 등의 단어를 벌려놓고 보면 한국현대시에서 서정시가 위치하고 있는 영역을 조감(鳥瞰)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이 단어들은 이성(理性)보다는 감성(感性) 쪽에 더 가까운 단어들로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추출한 단어들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의 서정시에는 이성이 자리 잡기 힘들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사유(思惟)의 시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시가 주관적 정서의 배출구가 되고 대부분의 시인은 새로운 세계를 기피하는 안일(安逸)에 젖게 된다. 그러나 그런 소재(素材)의 시들도 사물(事物)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실제경험이 시어와 정밀하게 교직(交織)될 때, 시의 차원(次元)이 상승되고 독자들에게 신선한 감각과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시가 되기도 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향수」1,2연  이 시에서는 “지즐대는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등의 세밀하고 감각적 표현이 신선한 생동감(生動感)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반복적인 구절이 만들어내는 음악적 리듬을 음미하게 한다. 정지용 시인은 1930년대의 시단에서 주관적 관념, 영탄적인 서정의 언어와 대립되는 객관적이고 사실(사물)적인 이미지의 시를 보여줌으로써 ‘서정시의 혁신(革新)’을 몰고 온 모더니즘의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사물과 정서와 언어를 냉정하게 이어주는 이성이 숨어있다.   이성보다 감성과 정서를 중시하는 경향의 시풍은 18세기~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浪漫主義)와 같은 계열로 인식된다. 대표시인 W.워즈워스는『서정민요시집(抒情民謠集)』에서 “시란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함속에서 회상되는 정서에 그 기원을 둔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엄격한 규율이나 규칙, 정형화되고 교훈적인 고전주의(古典主義)의 틀을 깨고 인간의 상상력(想像力)과 감정을 최고조로 높이는데 시의 중심을 두었으며, 무의식적(無意識的) 정신작용, 꿈과 환상(幻想), 초자연적 세계, 순수하고 원시적인 세계관을 크게 강조했다.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진지하고 강렬한 시는 기본적으로 창조적 상상력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서 발췌정리) 지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어디 있으랴: 그냥 지나쳐가는 자의 영혼은 무디어라 이처럼 감동적인 장관을 두고: 이 도시는 지금 옷을 입고 있구나 아침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드러내놓고, 선박, 탑, 원형지붕, 극장, 교회들이 누워 있다 들판과 하늘을 향해, 모두들 매연 없는 대기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태양은 일찍이 이보다 더 아름답게 첫 햇살로, 골짜기, 바위 혹은 언덕을 비춘 적 없고;  나는 이같이 깊은 정적을 보지도 느낀 적도 없나니! 강물은 제멋에 유유히 흘러간다; 오 하나님! 집들마저 잠든 듯 하네요; 그리고 저 힘찬 심장은 고요히 누워 있고! ----- 워즈워드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김철교 번역  이 시는 시인의 객관적인 관찰(觀察)이 보이지만 감각적인 언어의 이미지보다는 낭만적이고 개인적인 감성과 영탄이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워즈워드)는 이른 아침 템즈 강의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의 도시를 보고 “모두들 매연 없는 대기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문명과 대립되는 원시적 자연을 찬양하는 시인의 정신이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낭만적인 시에도 깊은 사유가 들어있으며 그 사유는 개인적인 범주를 벗어나서 인간의 본성과 일치되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한국의 서정시와는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문학비평가 브룩스 (Cleanth Brooks) 는 해설에서 “이 시는 아이러니를 내장하고 있다”고 했다. 깨어나서 활발하게 북적대는 도시가 실은 가장 죽은 상태이고 오히려 죽은 듯 고요한 순간의 도시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현대시에서 1936년에 간행된 서정주(徐廷柱) 주재의 시 동인지『시인부락(詩人部落)』과 유치환(柳致環)이 주재한 시 동인지『생리(生理)』(1937)를 중심으로 서정주, 오장환, 함형수, 유치환 등이 ‘생명파(生命派)“란 시의 한 그룹을 형성한 것은 높은 가치를 갖는다. 그들은 일상적인 서정에서 탈피하여 가장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인간 생명의 탐구라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고 시적가치를 삶 자체의 여러 현상에 두고 있다. 그 중에도 서정주의「화사(花蛇)」와 유치환의「생명(生命)의 서(書)」가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길  저놈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드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 ----서정주 「화사(花蛇)」전문       이 시는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의 표제가 되는 시로서 그의 초기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배암’은 이 시의 바탕이 되는 토속적 원시(原始) 생명주의(生命主義)의 관능적 세계를 상징하는 존재로 ‘원초적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순녀에 대한 시적화자의 육체적 욕망이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입술……스며라, 배암!”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관능을 통한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세계라는 독창적인 미적(美的)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19세기『악의 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샤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퇴폐적 관능미와 저항정신이 한국의 토속적 원시 생명주의와 결합하여 생긴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성적욕망의 예술적 드러냄이라고도 해석된다. 따라서 이 시는 구약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뱀의 유혹을 중심소재로 하고 있지만, 인간을 타락시키기 전의 원초적 생명의 신비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생명(生命)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나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처럼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생명의 서」전문    이 시에는 시적 화자가 삶의 가치에 대한 회의와 번민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현실의 삶을 떠나 아라비아 사막의 불모지대로 가서 생명의 본질을 치열히 추구하겠다는 열망이 들어있다. 그래서 시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고민, 좌절, 절망의 끝에서 허무의식(虛無意識)을 극복하고 일어서려는 강인한 의지가 뜨거운 시적 공간을 형성한다.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열렬한 고독”의 길을 가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의식에는 참된 '나'를 깨닫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는 죽음의 비장한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참된 '나'란 세사(世事)에 집착하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넘어서서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초인(超人)’과 맥을 같이하는 허무를 극복한 근원적 생명과 순수성의 자아라고 해석된다.     서정주의「화사(花蛇)」와 유치환의「생명(生命)의 서(書)」는 ‘생명’을 대상으로 한 시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화사(花蛇)」는 ‘뱀’이란 소재를 통해 원시적 생명력을 감성적으로 포착하여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반면,「생명(生命)의 서(書)」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이성적이고 의지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對照)를 이루는 시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시는 생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탈색되지 않는 강렬하게 생동하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아래에 인용한 김규복의 시「설거지」,「청소부」도 개인적 서정에서 벗어나서 생명의식을 시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라는 점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잘 가거라, 너희들 꽁치뼈 명태살 젖은 상추도 갈 때는 탁 트인 큰길로 함께 가거라 살 주고 피 주고 머리 잘리고 마지막 남은 뼈로 어깨동무해 잘 가거라, 너희들 주인집 등불 꺼진 다 저녁에 밑둥 잘려 바스라져 흐느적해도 뜯겨진 옆구리를 서로 껴안고 마지막 남겨진 붉은 눈으로 엉키고 안겨서 함께 흘러라 손 없고 입 없는 그 몸으로 지하에서 지하로 끝없이 가서 인도지나 반도 그 어느 해안가 같이 살 따순 마을 이룰 때까지 서로 부벼 다정히, 부디 너희들. --------김규복 「설거지」전문 나는 바퀴벌레의 아버지 기인 아파트 맨 밑구멍 쓰레기 하치장 문을 열고 자루마다에 폐기더미를 담을 때 다정한 그 놈들 내 어깨와 등을 타고 올라와 입 맞출 때 수백 마리 바퀴벌레로 옷 입은 나는  흡사 갑옷과 투구를 쓴 위대한 병사 가득가득 자루에 담아놓고 잠시 도시락을 풀으면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 흰밥을 까맣게 덮으며 달려드는 그 놈들 묵중한 기중기를 앞세워 내가 쓰레기 정글 속을 빠져나갈 때에도 끈질긴 한 놈 장화 속을 파고드네 그래, 같이 가자 이다음 이다음에 땅속에 함께 들어박힐 때까지 우리 껴안고 썩는다면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리 ------김규복 「청소부」전문   나는 1991년 이 시편들이 들어있는 김규복 시인의 시집 『줄 타는 사내』의 을 쓰면서 이 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설거지」는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으며 삶의 본질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어 독자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실적인 서술이 갖는 객관성과 냉혹성이 시인의 뜨거운 모성애에 의해 용광로의 쇳물처럼 녹아 감동적인 울림을 전해 주고 있다. 흡사 지장보살의 말씀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다. “손 없고 입 없는 그 몸으로/지하에서 지하로 끝없이 가서//인도지나 반도 그 어느 해안가/같이 살 따순 마을 이룰 때까지/서로 부벼 다정히, 부디 너희들.”이라는 끝 부분의 구절에 들어있는 이 시인의 모성적인 마음이 이 시를 얼마나 따뜻한 생명의 시로 만들어 주고 있는지 거듭거듭 음미하게 한다.「청소부」에서도 이러한 시인의 마음이 짜릿하게 감전되어 온다. 미물 중에서도 사람의 미움을 받는 바퀴벌레를 노래하는 이 시인은 첫 연에서 “나는/ 바퀴벌레의 아버지”라고 선언하고 “그래, 같이 가자// 이다음에/ 땅속에 함께 들어가 박힐 때까지// 우리 껴안고 썩는다면/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리”라고 끝 연을 맺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중생이요, 중생의 마음은 모두 같으며 그 마음을 포용하는 것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는 말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생명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바탕으로 한 생명존중의 근본 마음으로 대상을 관조하고 그것을 절절한 감동의 언어로 승화시킬 줄 아는 이 시인의 건강한 정신세계의 깊이를 독자들은 이 시를 통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으로 가늠하리라고 생각한다. 라고 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그때 나의 해설이 빗나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생각, 저 새와 나무와 짐승들과 사람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생각, 이러한 생각을 넓히고 깊게 하면 생각의 폭이 무한해지고 세상이 새로 보이게 된다.    십여 년 전 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인터뷰기사를 보고 스크랩을 하였다. SBS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가 한 말이다. 그는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됩니다.” 이 말은 시에도 해당됨은 물론이다.    다음 시는 『세계명작 동요동시집』(계몽사 1977년 4월 9일)에 실려 있는 영국 시인 월터 드라 메어의「살려주」라는 시다. 일상생활 속에서 특히 주부들이 늘 경험하는 주방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충격적인 울림을 준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얼마나 뜨거운 가슴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는가를 거듭 생각해보았다. 에그 에그 어서 빨리 와 봐요 기름에 튀기는 빵 속에서 생선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애 유리처럼 들여다보이는 기름 속에서 주둥이를 불쑥 내밀고 “살려주” 그랬어 울상이 되어서 나좀 살려 달랬어 그러면서 보글보글보글 기름 속으로 갈아 앉았어 ----월터 드라 메어「살려주」전문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에게 묻더라도 생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생명은 사람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다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의 우월성을 내세워서 인간의 생명만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인간중심주의(humanism)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현대철학자들 사이에서 현명한 인간이란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자연과 문명을 공존시키는데 실패한 인간이라는 의미로 추락하고, 공생인간(共生人間)이라는 호머심비우스(Homo symbious)가 거론되고 있는 것도 인류의 생존을 위한 사고(思考)의 전환을 의미한다.   끝으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본다. 좋은 시는 우리들의 생각을 열어주는 시, 고정관념을 허물게 해주는 신선한 상상과 감각이 들어 있는 시, 깊은 사유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시. 그리고 독자들의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심어주는 시라고 결론을 지어본다. 이런 시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영속적인 힘을 스스로 안고 있으며, 그 자체가 약동하는 정신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  
21    하이퍼시의 소통 공간/심상운 댓글:  조회:959  추천:0  2019-03-02
하이퍼시의 소통 공간                                                                                    심  상  운   21세기 현대시의 이미지는 의미나 심상(心象)의 단계를 넘어서서 기표(記標)가 생동하는 하이퍼(hyper)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상상은 유추(類推)의 끈을 매달고 있지만 공상은 유추의 끈을 끊어버리고 무한한 미지(未知)의 영역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런 현상을 문덕수 원로시인은 그의 시론「내면세계의 미학」에서 ‘대상에서의 해방’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세계의 공간과 시간의 질서가 혼란해진(anarchy) 내면세계의 무의식(無意識)의 표출이라고 하였다.  의 하이퍼시는 이런 이미지의 세계를 원천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하이퍼시는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 언어작업의 예술적 산물(産物)이 되었다. 따라서 그 새로운 이미지의 공간은 현실과의 만남에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자율적(自律的)이고 창의적(創意的)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시로서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하이퍼시의 시론이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젊은 시인들의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표현양상을 포용하는 시론으로 부각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 기존 관념의 해체와 단절은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적영감(詩的靈感)의 원천이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여도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극복해야할 과제가 남는다.  그래서 기존 관념의 해체와 단절을 소통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기법으로 하이퍼시는 다선구조(多線構造) 속에 ‘현실과 초월의 결합’이라는 구조를 정립하였으며, 서사적(敍事的) 이미지 속에 의식과 무의식의 자연스런 합성공간(合成空間)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이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과 초월’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이미지들의 합성’을 계기(契機)로 하여 새로 열리는 의미의 공간은 기존의 시와 차별화를 이루는 바탕이 되고, 독자들에게 의미유추(意味類推)의 즐거움도 안겨주는 시적 소통의 공간이 되고 있다.      발간사  2016년 7월   
한국현대시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 이미지의 생산적 활용                                                                        심 상 운 어떤 시든 시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현실의 모사(模寫)가 될 수밖에 없다. 현대시에서 관념을 배제한 사물시(事物詩)도 현실의 모사(simulacre)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은 어떤 대상이라도 그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인식과 표현에서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을 추구하는 현대시는 대상의 내면을 투시하려고 하지만 주관이 개입된 감성적이고 객관적인 관점과 언어의 상징성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진실추구’라는 현대시의 명제이다. 진실 또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문제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ideal)와 연결되는 문제로서 신(神)이나 절대적 또는 영원한 존재 아래에 인간의 현실이 위치한다는 위계적(位階的) 사고(思考)에 머물게 되기가 쉽다.  그래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진실이니 진리니 하는 관념에서 탈출하여 이미지의 결합을 중심으로 ‘이미지의 다양성과 평등성과 독립성’을 통해 시의 예술성을 중요시하는 하이퍼 시(hyper poetry)의 시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미지의 평등성과 독립성은 현실의 모사나 반영을 모두 수용하면서도 거기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과 공상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시에서 시뮬라크르의 이미지가 새롭게 생명력을 펼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예로 필자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 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그녀는 파란 의자 위에서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넣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 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터 쌍둥이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고?) 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 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심상운의「파란 의자」 전문  
19    변화하는 시의 현실과 하이퍼시 / 심 상 운 댓글:  조회:934  추천:0  2019-03-02
 변화하는 시의 현실과 하이퍼시 심  상  운                                                                                            1.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젊은 시들의 변화는 필연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 기성세대가 관념시, 낭만적이고 독백적인 서정시, 사회적 이념의 시를 고수하려고 해도 젊은 시인들은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와 함께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남조 시인이 부정적으로 지적한 “실험적인 젊은 시인들이 해부칼로 인체를 갈라 보여주는 것 같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것”(2010,1, 18)과도 연관된다. 이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이해된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혁신적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시(事物詩)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 있다. 디지털적인 감성(感性)은 하이퍼 시에서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가상현실은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같이 현실과 비현실을 통합하는 제 2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 공간은 이미지들이 관계를 맺는 순간의 상황에 따라  변화가 이루어지는 창발적(創發的)인 공간이 된다.  21세기 현대철학에서 ‘창발론(創發論)’을 제창한 승계호 인문학 석좌교수(미국 택사스 대학교)는 2007년 대우재단과 조선일보사가 공동 주최한 에서 그의 논문「마음과 물질의 신비」를 발표하였는데, 그는 그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분자는 분리 불가능한 속성을 가지므로 창발적 존재자이다. 분자들이 결합하여 세포를 형성할 경우, 이 또한 창발적인 작용이다. 단세포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할 경우에 다세포 유기체가 창발한다. 그런데 창발은 물리적이거나 유기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동차나 시계도 창발적인 생산품이다. 이들 기계는 그 부분들이 분리되어 작용할 경우에는 수행할 수 없는 기능을 수행한다. 모든 예술 작품들 또한 창발적이다. 아름다운 그림은 그 부분들의 단순 합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음악은 그 음악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소리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속성을 갖는다. 모든 사회적인 조직도 핵가족이 되었건 국가가 되었건 간에 창발적이다.”    이 글에서 단세포를 보통 시의 단선구조의 이미지로 다세포를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의 이미지로 바꾸면 창발적인 구조의 하이퍼 시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단절된 이미지들의 집합적 결합과 연결을 시의 기본 구조로 하는 하이퍼 시는 창발론과 연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 이미지들이 지향하는 사고(思考)의 공간은 20세기 프랑스의 사회 인류학자이며 구조주의 철학자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가 말한 ‘야생적 사고의 세계’와도 연결된다. 그 연결은 디지털 시의 모듈(module) 이론을 대신하여 질 들뢰즈((Gilles Deleuze) 가 펠릭스 과타리(Félix Guattari )와 함께 저작한『천개의 고원』에서 큰 줄기가 잘못되면 전체가 위험한 수목형의 반대 유형으로 제시한 뿌리 형의 사고-땅속에서 부단히 증식하면서 다른  뿌리줄기와 마주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식물의 뿌리-를 의미하는 리좀(rhizome) 이론을 중심이론으로 설정한 하이퍼 시의 이론과 미리 정해진 목표가 없는 미지(未知)를 지향하는 야생적 사고와의 만남이다. 야생의 사고는 경험을 중심으로 한 감성적 표현으로 세계를 조직화하는 ‘구체성의 논리적 사고’이면서도 기호적(記號的)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적 기법에서 구체적인 재료를 사용해 매번 새로운 의미나 관계를 만들며 어떤 질서를 창조해내는 기법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는 그런 예술기법을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한다.    따라서 문명적이고 과학적 사고가 추상적(抽象的)인 논리의 틀 속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길들여진’ 사고라고 한다면, 구상적(具象的)이고  야생적 사고(신화적인 사고)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시인들이 이미 길들여지고 정해진 관념에 기대지 않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길들여지지 않은 고도의 암시성(暗示性)의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시적 경향은 하이퍼 시가 지향하는 다선구조의이미지 세계와 동반적(同伴的)인 관계(關係)가 된다.  2. 이런 변화의 양상은 2015년 신춘문예 당선시의 심사평에서 드러난 현대시의 난해성(難解性)에 대한 이해에서 발견된다. 일부 심사위원들은 시의 완성도(完成度)를 중요시하면서도 신인들의 시가 개척하고자하는 새로운 시의 공간과 미개지(未開地)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암시(暗示)의 매력에 대한 평가도 인색하지 않게 하고 있다. 그들은 시의 서정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난해성을 인정하고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것은 어두운 사회현상에서 받은 정신적 상처를 상상의 언어로 암시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의미보다는 자유로운 상상 쪽으로 시를 유인(誘引)하는 언어감각의 시편들에 대한 인정이다. 이런 경향의 시편들은 언어의 유희성(遊戱性)을 발판으로 언어의 연상(聯想)이 펼쳐내는 신선하고 새로운 감각과 의미를 담은 다선구조의 이미지 창출(創出)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시에서 발견과 발명은 구분된다. 발견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라면, 발명은 대상과 무관하게 낯선 의미를 빚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발견은 소통 가능성(서정시), 발명은 소통 불가능성(비서정시)과 직결되고, 다시 발견은 언어의 투명성(우리), 발명은 언어의 불투명성(나)과 연관된다. 우리 현대시는 발견과 발명 사이에 서식한다.”는 황지우, 이문재, 남진우의 심사평과 “시라는 이름의 관행적 작문방식에 갇혀 오히려 생과 세계의 피 흐르는 실상으로부터 시 자체가 유리되는 자가당착을 돌파하는 패기의 글쓰기, 한국어의 갱신과 재구성이 그로부터 시발될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것은 무조건 정당한가. 바로 이 오래된 물음을 또한 고통스럽게 치르는 가운데 일종의 시적 윤리성을 확보한 글쓰기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희망의 새로움이지 ‘새것 흉내’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문정희, 김사인의 심사평은 한국현대시의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의 흐름에 어울리는 평문(評文)으로 주목되었다.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에 살짝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춧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 곤란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 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 조창규「쌈」전문 *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 식 쌈장  의 당선작 조창규의「쌈」에는 ‘쌈’ ⟶ ‘동굴 속의 어둠’⟶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구멍난 방충망’⟶‘달의 뒷장’,⟶‘긴 혀’⟶‘보쌈’으로 이어지면서 쌈장 속에 사물과 자연 현상을 포괄하는 다양한 상상의 다선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도 구속되지 않는 시적 화자의 유머가 일상적인 관념을 깨뜨리고 있다.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대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 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 최은묵 「키워드」전문   의 당선작 최은묵의 「키워드」는 우물을 상상의 키워드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는 1,2연만 읽어보아도 이 시의 우물은 실제의 우물과는 전혀 다른 감성과 상상의 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의 ‘우물’ 이미지는 이 시대의 우울한 상황과 결부된 암시적 비유(譬喩)라고 말할 수 있으며, 발상(發想)의 측면에서는 구체적인 재료를 사용해 매번 새로운 의미나 관계를 만들며 어떤 질서를 창조해내는 브리콜라주(Bricolage)의 예술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 ‘죽은 우물’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가 지나치게 모호해서 소통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고도의 암시성은 시에 있어서 결함보다는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나희덕, 정호승의 심사평이 신선하게 감지된다.   12월,눈발에 꺾여 소리가 유턴한다 시비월 시비시비 걸면서 월월월 개들이 짖는다 노을을 향해 짖는다 철도노조 위원장 코스닥판 김선달 갓 삶은 행주로 흘러내리는 붉은 해를 닦아내야 하는지 검푸르게 녹스는 수평선 청동거울을 내버려야 하는지 是非是非是非 月月月 동굴이다 개기일식이다 묵은 친구 묵은 체증 묵은똥을 갈무리한다 일단 그냥 가자 正正正 정월이 온 뒤에 U턴을 해야겠다 -김예태 「U턴」전문  
18    하이퍼시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심상운 댓글:  조회:1019  추천:0  2019-03-02
하이퍼시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      심 상 운                                                                              1. 독자와의 소통문제에 대한 해명    하이퍼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독자와의 소통이다. 독자들은 논리와 감성을 통한 직접적인 소통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비순차적이고 비논리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골간으로 하는 하이퍼 시의 ‘의미의 불확정성(不確定性)’에 당황하게 된다. 그 근본원인은 현대시의 대부분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의미의 발굴’을 시의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 하이퍼 시는 기존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난 전혀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을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불확정성은 하이퍼시에서 이미지 사이에 인과관계가 직선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서로 굴절되고 단절됨으로써 독자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만 떠다니고 의미의 형성이 분명해지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과 초월, 무한한 상상을 통한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결합과 확장은 기존의 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시의 미개지(未開地)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언어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의식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보다 더 깊고 넓고 모호(模糊)한 무의식(無意識) 속에서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융합된 제3의 세계를 시를 통해 경험하는 것은 독자들의 입장에서 매우 신선하고 새로운 시적 개안(開眼)의 경험이 될 것이다.    다음의 글은 2015년 2월호 월평에서 발췌한 양병호(시인, 전북대 국문과 교수)의 평문(評文)이다. 이 평문을 인용하여 김석규의「저녁 귀가」와 심상운의 시「빛 또는」의 시적구조의 차이와 두 편의 시가 지향하는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줄곧 젖어 있는 일에 이력난 가난은 죄가 아니다 꾸부정한 비애의 어깨 너머로 물드는 잿빛 도시 건너 동네에 어둠이 오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간다 솔기 터진 일상의 피댓줄에 꼬여 사정없이 돌아가버린 허리 아픈 하루도 이렇게 속절없이 저물고 마는 것을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꾸려들고 돌아가는 저녁 변두리 백일장 나가서 장원하고 온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석규, 「저녁 귀가」 전문    이 작품은 일상의 시간 특히 저녁 무렵의 시간을 섬세한 묘사를 통해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일상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시상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다. 서정시의 특징인 단일한 정서 혹은 순간적 서정을 압축하여 제시하는 전범을 보인다. 여기서 시간은 시인의 전경화 된 인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배경화 되어 있다. 예컨대 시간은 이 작품의 정서를 얼비쳐주는 배경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화자의 생은 가난하고 피곤하다. 그러나 가난은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죄’가 아님을 확인한다. 이는 가난한 삶에 대한 보호적이며 위안하는 심리이다. 화자가 생활하는 공간 역시 ‘잿빛 도시’로서 우울하고 권태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화자는 이러한 도시 공간에서 우울과 비애에 젖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생활은 “어둠이 오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가”는 상황으로 표상된다. 말하자면 ‘어둠’이 앞장서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가는 암울한 삶의 과정이 은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후반 생략)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심상운, 「빛 또는」 전문    이 작품은 시상 전개 혹은 이미지 결합 층위에서 의도적으로 완결성을 방해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대상은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설정 역시 인과성이 나 논리성을 자의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예컨대 임의적이고 의도적으로 의미의 불확정성을 강화하고 있으며, 시상 전개 과정에서도 의도적인 절연을 통해 공소를 배치하고 있다. 우선 시제에서부터 “빛 또는”이라는 불완전한 어구 제시를 통해 미완의 의도성, 여백의 판단정지를 강조하고 있다. 1연은 이 작품의 시간 배경에 대해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시간 표상을 목표하고 있지는 않다. 우선 1행의 ‘검은 옷을 입은 빛’이라는 역설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하여준다. ‘빛’과 ‘검은’은 서로 친밀성이 희박한, 아니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러나 ‘옷’이라는 매개물과 ‘입은’이라는 매개 속성의 개입으로 의미성을 획득한다. 예컨대 ‘빛’은 ‘검은 옷’을 ‘입어서’ 발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빛’이 ‘검은 옷’에 차단 유폐되어 자신의 진실 혹은 본질을 발현하지 못하는 왜곡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그 ‘빛’은 현재 시간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 있다. 이 구절에서 부각되는 의미소는 ‘무표정한’이라는 감정의 노출 억제 상황이다. 또한 ‘매미’라는 사물의 속성이 환기하는 짧은 생애라는 시간성이다. ‘붙어’있는 상황 역시 고정된 상태가 아니어서 위약한 접합성을 드러낸다. 결국 ‘빛’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떨기’시작한다. 따라서 시간 배경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1연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암시적으로 재현한다.  2연은 ‘개들’의 행위가 집중적으로 중첩되어 표상되고 있다. 개들은 우선 원인을 알 수 없는 ‘성’이 난 상태이다. 하여튼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상태인 것이다. 여전히 개들은 ‘어둠’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그 개들의 지향은 길을 따라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4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나아가고 있다. 동시에 개들은 ‘번쩍이는 빛’을 향해 짖어대고 있다. 이는 어둠 속에서 빛을 거부하는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즉 이 시의 1, 2연은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시간 공간 상황을 부각하고 있다.  그런데 3연에서는 장면이 급격하여 전환되어 환한 여름의 바닷가로 장소 이동을 한다. 시간은 ‘빛’의 절정기인 여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공간은 해변으로서 완전하게 개방되어 자유로운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시공 속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 인지 대상인 ‘여자들’역시 ‘맨발’과 ‘비키니’차림으로 육체를 완전하게 노출하고 있다. 말하자면 폐쇄되고 차단된 시공 때문에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1,2연과 달리, 3연은 개방되고 자유로운 시공의 특성으로 인하여 밝고 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4연은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의 모습과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화자가 주목하고 있는 인물 ‘남자’를 묘사하고 있는 이 구절에서, ‘흰옷’은 ‘검은 옷’과 ‘장발’은 ‘맨발’과, ‘50대 남자’는 ‘30대 비키니’와 각각 대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실내 즉 임시로 가설된 ‘무대’에서 외부의 ‘하늘’을 향하여 팔을 벌리고 있다. 예컨대 이 남자는 폐쇄 차단된 어둠의 공간에서 무한한 빛의 공간인 ‘하늘’을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주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시상 전개를 의미 부여를 통해 재구축하여 보았다. 이 시는 서로 대립되거나 이질적인 요소 혹은 사물 특성을 자유연상으로 처리함으로써 빛과 어둠의 혼성이 주는 추상적인 감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은 현실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 혹은 심리에 내재한 관념적인 것이다. 이 작품은 독자가 시인 혹은 화자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시적 정조에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 「시간, 관념과 실재 속에 유랑하는」(양병호) 『시문학』 2015년 2월호 에서 발췌 인용    김석규의 「저녁 귀가」에 대해 “일상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시상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다. 서정시의 특징인 단일한 정서 혹은 순간적 서정을 압축하여 제시하는 전범을 보인다.”는 평문과 심상운의 「빛 또는」에 대해 ‘의도적으로 완결성의 방해’ ‘의미의 불확정성’ ‘의도적인 절연을 통해 공소의 배치’ ‘몽타주 기법’, ‘시인의 내면심리’, “이 작품은 독자가 시인 혹은 화자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시적 정조에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등의 비평언어는 일반적 서정시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집어낸 것으로 인식된다.    김석환 (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은 이런 한국 모더니즘 시의 현상을「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에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는 양립관계의 개념으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 위에 예시한 시를 김석환의 이론에 대입하면 김석규의「저녁 귀가」는 구축적 구조의 시이고, 심상운의 「빛 또는」은 탈구축적인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에서    구축의 시는 유기적 관계로 전체성을 형성 하는 시적 구조를 형성하고, 탈구축 시는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모호한 의미, 암시적이며 다의적이라는 그의 해석은 하이퍼시의 탈구축적 특성의 한 부분을 적시(摘示) 것으로 이해된다.     현대철학에서도 구성(구축)과 해체(탈구축)라는 개념으로 동서양의 철학을 분류하고 있다. 철학자 김형효(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조성택(고려대 교수), 한형조(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이도흠(한양대 교수)과의 에서 동서양의 철학사를 관통하는 관점에서 철학을 구성주의 철학과 해체철학으로 양립시키고 있다. 구성주의 철학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기반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지배하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는 철학이고 해체철학은 진리를 구성하는 인간주의(人間主義)의 이성을 부정하고 자연 본래의 면목을 드러내고자 하는 철학으로 이해된다. 이런 철학적인 관점은 시의 내용과 주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다음 글은 인터뷰의 일부다.    “철학이란 동서고금에 너무 많고 철학사를 보면 너무 복잡해서 진리가 무엇인지 회의가 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철학은 대단히 간단해서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구성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해체철학입니다. 구성주의는 자연의 인간동형론(人間同形論)이죠. 다시 말해, 인간을 설명할 때 자연과 비교하여, 즉 인간만 얘기하면 동어반복에 그치니까 변증법적으로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여서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모든 이성주의(理性主義) 철학과 동양의 주자학(朱子學)을 들 수 있습니다. 구성주의 철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형이하학적인 구성주의로 세상을 어떻게 편리하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그런 의미의 형이하적인 구성주의가 있고, 형이상적인 이성주의가 있는데 도덕형이상학적(道德形而上學的)으로 정의의 입장에서 세상을 재편하겠다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명사에서 보면, 편리의 진리는 자본주의와 직결되고 정의의 진리는 사회주의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지만 철학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둘 다 이성(理性)에 의해서 세상을 구성하고 지배하겠다는 의도에 있어서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해체주의는 바로 이러한 구성주의의 철학적 한계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물론 해체주의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해체주의적 전통이 있었는데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과거 독일의 심미주의 시인들,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대표적이고, 동양은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교(佛敎)가 해체주의를 대변해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해체주의는 인간이 진리를 구성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보편적인 자아(自我)든 이기적인 자아든 간에 인간의 자아에 의해 생각된 진리로 세상을 구성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세상은 이미 여여(如如)하게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무명(無明)에 의해서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괴롭습니다. 세상엔 여여한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무시하고 인간들이 자기중심으로 세상에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더 괴로운 것입니다.”    김형효 교수가 분류한 구성철학과 해체철학에서 구성주의 철학의 유위(有爲)는 현대시의 관념(觀念)에, 해체철학의 무위(無爲)는 현대시의 탈관념(脫觀念)에 이어진다.   철학은 시인들에게 사유(思惟)의 나침반역할을 하고 시의 내용과 언어형식에도 관여한다. 독자들도 자기가 읽는 시가 어떤 철학과 연결되느냐 하는 것을 인식할 때 더 흥미롭고 깊은 읽기가 될 것이다. 그래야 구성주의의 상투적인 대중적 서정시, 사상의 권력화를 형성하는 ‘사회적 의식의 시’ 형이하학적 사유의 ‘교훈적인 시’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옹호하는 ‘관념시“의 틀에서 해방될 수 있고, 하이퍼시의 난해성(難解性)이 또 다른 시의 영역을 여는 문(門)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성주의와는 다른  사물성(事物性)의 탈관념의 세계, 모호한 의미와 암시성의 이미지가 떠도는 가상의 공간, 다의적 감각의 이미지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현대시의 심층을 탐색하는 언어 탐험가가 되어 현대시가 제공하는 독특한 정신적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현대음악, 현대회화를 감상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 분야를 집중공부해서 얻는 즐거움과도 같다.         2. 하이퍼시의 탈관념에 대한 해명     관념이 지배하는 시는 시인의 사상, 주장, 감상 등이 노출되는 시다. 이런 시는 시어 사이의 유사성과 논리적 관계로 인해 구축적(構築的)인 기존 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하이퍼시의 가상공간이 만들어 내는 시적 현실과 다의적이고 암시적인 이미지가 떠도는 상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 탈관념의 완강한 고수(固守)는 하이퍼시를 현실과 유리된 언어유희의 시로 몰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필자는 이런 점을 예측하여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53쪽 ②에서 “디지털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관념에 대한 지나친 배척은 자칫하면 황당성과 미로, 미궁 그 자체에 머무르고 말 확률이 사뭇 크다. 따라서 독자들에게서 외면당할 수 있는 확률도 그만큼 크다.”는 김몽의 견해와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 ㅡ감각하고 사유하는 시」연변 조간신문 2014,6,26) 최진연이「하이퍼시의 이해」에서 제시한 “일체의 관념을 배제한다면 유희성만 남을 수 있으므로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살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가치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모두 수용할 여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은 관념어의 노출과 설명적, 개념정의적(槪念定義的) 언어는 하이퍼시가 중심요소로 삼는 이미지의 형성을 방해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배제되지 않을 수 없다.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결합과 확장을 통해서 시적 정서와 감성과 의미를 암시하는 이미지의 덩어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퍼시의 탈관념은 무관념이 아니라 기존 관념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개념정리도 매우 조심스럽게 수용하게 된다.         3. 하이퍼시의 비판에 대한 해명   새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문화관광부의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기획 프로그램으로 정과리가 주도한 「언어의 새벽」, 2004년 11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최동호‧이성우 등이 구현한 「팬포엠 Fan Poem」 프로그램 제작 프로젝트 등은 하이퍼텍스트의 기법을 시의 창작에 응용(應用)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국현대시의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정부와 민간의 자금으로 시도한 이 작업은 그 기획의도가 시대성에는 부합되었지만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여 시장성에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였으며 작품의 완성도도 미흡해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사이버 공간 속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는 실험이었다는 데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실패의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텍스트(작품)가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보다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에 독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기존의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허물어버리고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는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의 ‘이상적 텍스트’의 개념도 독자들에게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함으로써 독자들의 입장에서 흥미 없는 작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좌절의 환경 속에서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종이에 인쇄된 시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시적 공간을 구현해 보자는 시적 방법론을 제창한 것이 하이퍼시 탄생의 모태가 된 심상운(필자)의 시론 「디지털시의 이해」(2006년 12월『시문학』에 발표)이다. 이 시론에서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탈관념  (사물성의 언어)의 언어들이 디지털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디지털시가 '의미의 예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시의 공간 확장이다. 그것은 한 편의 시 속에 하나만이 아닌 몇 개의 언어단위(이미지)가 결합될 수 있으며, 그 언어단위(단어, 문장)들은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디지털시의 기법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하이퍼시에는 탈관념, 언어의 기호성과 영상성, 가상현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등 디지털시의 원리가 깔려 있다. 디지털시의 모듈은 하이퍼시의 리좀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혁(문학평론가)은「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에서 “문제는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의 ‘통치기계’로서의 일면을 억제하고 그 시스템이 지닌 긍정적인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데에 있으며, 그래서 하이퍼텍스트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그 환경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시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라고 하면서 심상운( 필자)의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에서 내세우는 하이퍼시의 시론을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한국 현대시의 대응 태도’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의 한 예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라는 자신의 시를 들고 있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가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로 되어 있지만 ‘하이퍼시’는 다선구조로 이루어진다면서, 위의 시를 그 예로 들고 있다. 그는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①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② 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③ 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④ 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되었고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의 공간의 시”며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와 관련된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고 한다.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는 나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 시적 화자가 “푸른 야채를 먹는” 방에서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가구들,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모두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이 시는 본능적인 움직임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이 자연풍경, 사회, 실내의 식탁, TV 화면에서 포착되어 ‘다선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각 연은 ‘본능적인 갈구’를 따라 링크되어 ‘하이퍼’하게 연결된다. " ----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이성혁)에서 발췌인용   그는 이렇게 심상운(필자)의 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를 하이퍼텍스트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1930년대 김기림의 장시「기상도」와 비교하면서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허를 찌르는 풍자나 위트, 전복적인 표현이 거의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의 시는 그 주제에 속할 수 있는 장면을 누구라도 계속 이어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시가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시는 특이성을 성취하지 못한 범용성만을 보여주고 있어서 독자의 의식에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질적인 이미지들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하이퍼시의 특성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이해와 인식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하이퍼시가 풍자나 위트 전복적인 표현이 가지고 있는 현실참여적인 비판과 이념(理念)의 구축적 시와는 대립되는 탈관념의 언어, 의미의 불확정성, 다의적이고 암시적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탈구축적 시라는 점에서 비교의 잣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가 비판한 ’특이성을 성취하지 못한 범용성‘은 하이퍼시와 독자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현대시의 하이퍼성은 이미 초현실주(超現實主義) 시에서  시도하고 구현하였으며 하이퍼시라고 이름 붙여지지 않은 현대시에서도 구현되고 있다는 그의 지적에 동의한다. 따라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자생(自生)한 하이퍼시는 이미 잠재되어 있는 현대시의 하이퍼성에 의해 이해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일반화되어 한국현대시 담론의 중심에 오를 것을 기대하게 된다.   
17    하이퍼시와 형이상시의 결합을 위한 시론試論/심상운 댓글:  조회:1028  추천:0  2019-03-01
하이퍼시와 형이상시의 결합을 위한 시론試論                                                                                      심 상 운    1. 현대시에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요소는 예술적 감흥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드러낸다. T. S.엘리엇은 문학평론
   의식의 흐름이 들어있는 옴니버스(omnibus) 기법                                                                                        심 상 운       21세기 현대시의 이미지는 의미意味나 심상心象의 단계를 넘어서서 기호記號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상상은 유추類推의 끈을 매달고 있지만 공상은 유추의 끈을 끊어버리고 무한한 미지의 영역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런 현상을 문덕수의 시론 「내면세계의 미학」에서는 ‘대상에서의 해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세계의 공간과 시간의 질서가 혼란해진(anarchy) 내면세계의 무의식無意識의 표출이라고 한다. 월간『시문학』을 중심으로 한 의 ‘하이퍼시 운동’도 이런 이미지의 세계를 원천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하이퍼시는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뛰어 넘는 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 언어작업의 산물産物이 된다.   그 작업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관념의 제로(zero) 지대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현실이 배제된 순수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기호의 세계’가 초현실의 새로운 예술적 공간으로 탄생한다. 그 공간은 현실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율적自律的인 순수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객관적 공감을 얻지 못할 때, 언어의 박제剝製가 되어 허무虛無 속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노출한다.  현대시가 언어유희를 ‘무목적의 목적’, ‘쾌락적 공간’으로 허용하고 가치를 부여하지만 독자들은 의미의 소통이 단절되는 공간에서 오래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의미의 단절은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적영감의 원천이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여도 하이퍼시가 극복해야할 과제로 부상浮上한다.   나는 그런 점을 해결하고 허무를 생명生命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하이퍼시에 ‘현실적 이미지와 비현실적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결합’하는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런 기법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으로 형성되는 다선구조多線構造 속에 넣었다. 그 구조의 내면에는 시인의 의식의 흐름이 들어있어서 그 흐름이 영화의 옴니버스(omnib us) 기법으로 표출될 때, 서사적敍事的 동영상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자연스런 교접공간交接空間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움직이는 이미지의 공간은 기존의 시형식과 차별화差別化를 이루는 바탕이 되고, 독자들에게 의미유추意味類推의 즐거움도 안겨주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월간 2012년 10월호 '집중 이 시인'에서  
15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심상운 댓글:  조회:954  추천:0  2019-03-01
                하이퍼시와 포스트구조주의                                           심 상 운 1, 롤랑 바르트의 이상적 텍스트와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구조주의적 분석에서 해체 비평으로 넘어가는 접점에 위치한『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 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langue)를 말하면서‘저자(著者)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記意)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의 이론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 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 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가 아닌‘기표(記標)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단위(unit)들로 형성된‘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이미지들은  ‘의식의 링크(link)’에 의해 연결된다. 이 링크는 하이퍼텍스트의 용어이지만 하이퍼시에서도 사용된다. 그 단위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단위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땅속줄기들의 연결과 같은 개념으로도 인식되는 이 흐름은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想像)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공간도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구조(경계)를 고수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이퍼시 구조의 특성이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전통적인 시에서 중요시하는 메시지(주제, 관념)의 전달보다 상상이나 공상(空想) 속의 현상(現象)에 대한 감지(感知)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고정된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과 결합이 만들어내는 암시(暗示)에서 찾게 된다. 이러한‘무경계(無境界)의 기법’은 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어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경계를 만드는 분절선(分節線)들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층(層)이나 영토(領土)를 만드는 선(線)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은 인간의 전통적 의식에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無意識)의 사고(思考)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자연(自然)에 더 가깝게 접근된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위계적(位階的)이고 계층화, 영토화된 철학적 사고를 수평적 사고의 구조로 개혁하기 위해서『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이다.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앞에서 언급한 탈-경계의 상상과 사유의 이미지로서 땅속줄기 즉 리좀(Rhizome)의 이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14    21세기 젊은 시 운동-‘하이퍼시’/심상운 댓글:  조회:1159  추천:0  2019-03-01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젊은 시 운동-‘하이퍼시’ -기존관념에서 해방,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 우주적 개안開眼                                                                                     심 상 운   「시문학」에서 2008년 5월부터 2009년 7월까지 4회에 걸쳐 특집으로 엮은 김규화, 오남구, 심상운의 60편, 2009년 1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3회에 걸쳐 기획특집으로 발표한 57편(참여시인 19명)을 비롯하여 하이퍼시 운동의 추진력으로 작용한 이슈의 숲길 과 , , 등은 21세기의 감각과 문화현상에 대응하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젊은 시 운동의 치열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하이퍼시는 한국현대시를 오래 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 이미지를 동적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현대시의 개혁운동이다.    이런 개혁성으로 인해서 하이퍼시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일부 시인이나 독자들에게 당혹감과 거부감을 안겨주고 ‘소통疏通의 단절, 자기들만의 만족’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인들과 독자들의 호응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이 추세趨勢다. 이 호응에는 젊은 감각을 선호하는 독자들과 시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밀착된 사실적인 이미지와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의 뒤섞임을 즐기고자 한다. 이 뒤섞임은 그들에게 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 비약飛躍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경향傾向은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환상적인 디지털의 감각을 선호하는 현대시의 변화로 파악된다.    변화는 하이퍼시의 생명이다. 이제까지 하이퍼시는 영화의 몽타주 기법과 같은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시구조의 바탕으로 하였다. 그래서 장면을 연결하는 링크를 당연한 기법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링크를 답답하게 여기고 링크를 클릭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과격한 성향의 텍스트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 하이퍼 시의 현장이다. 나는 ’상상의 클릭‘이라는 개념을 하이퍼시에 넣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하이퍼시의 기법은 컴퓨터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현대시의 기법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텍스트를 빼고 하이퍼시로 명칭을 정한 이유의 일부도 거기에 있다.    2006년 나는 라는 시론에서 ‘디지털 감각’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모듈(module)’, ‘샘플링(sampling)’ 등의 용어를 검증절차 없이 과감하게 디지털 시의 이론에 도입하여 시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보여주기(showing)의 ‘디지털 감각’이나 ‘가상현실’은 개념의 일반화 과정에 들어간 것 같으며, 모듈 이론은 하이퍼시에서 리좀 이론으로 언어만 바뀌었을 뿐, 그 중심개념은 그대로 살아있다고 생각된다. 샘플링 즉 견본추출이라는 개념도 ‘시와 현실의 관계’를 논의할 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탈관념, 링크, 클릭 등의 용어도 현대시의 이론 속에 흡수되어서 새로운 기법의 용어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탈관념은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자는 것이지, 시에서 관념을 아주 없애자는 무관념이 아니다. 기존관념에 집착하지 않을 때 더 큰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탈관념의 세계이며, 현실과 상상이 결합된 새로움으로 가득한 하이퍼(hyper)의 세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서 중요한 것은 기존관념으로부터 과감한 탈출과 창의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거기에는 우주적인 개안開眼이 들어있다.  
  “시인도 알 수 없는 시, 그저 한때 소나기였으면 … ”에 대한 반론  『시가 있는 아침』 출간회 모인 시인•평론가 30여 명 말하다                                                                                        심  상  운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한국시단의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진단하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보았다. 먼저 짚어본 것이 “시가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명제(命題)다. 시에 대한 이런 견해는 너무 당연한 것 같다. 시는 언어예술이고 감동은 예술이 존재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 감동(感動)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풀이 하고 있다. 이 말을 분석하면 먼저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느낌이 발생하고 그 느낌에 의해서 마음의 움직임이 생기는 것이 감동이다. 따라서 감동에는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형이하학적 감각으로부터 오는 즉물적(卽物的)인 감동, 가슴으로부터 오는 정서적(情緖的)인 감동, 형이상학적인 지적(知的)인 감동, 종교적인 영혼(靈魂)의 감동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 느낌은 주관적인 지각(知覺)이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 “나는 느낌이 오는데 너는 왜 느낌이 오지 않느냐?” 라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가 된다. 느낌은 강요나 관념적인 당위성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느낌은 과거의 경험을 재생해주는 대상에서도 오지만, 새로운 현상이나 경험에서 더 강하게 분출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선한 느낌’과 ‘감동’은 과거시제보다 현재시제의 것이 된다. 과거시제의 느낌을 상투적, 구태의연한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가슴의 정서’ 속에만 갇혀있는 서정파(抒情派) 시인들이 “시는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새로운 시대의 지성, 감각, 정서, 영혼을 담고자 하는 ‘미래파(未來派)’ 시를 폄하하는 무기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둔감한 것만이 아니라, 현대시의 즉물적 이미지가 주는 신선한 감동을 비롯하여 독자들에게 정신적 전율을 주는 수준 높은 지적감동과 영혼의 감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만족의 좁은 울타리에서 활개 치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시를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쓰자는” 것은 18,19세기의 낭만주의적(浪漫主義的) 경향의 시 쓰기이다. 낭만주의 시는 당시에 금기(禁忌)였던 구어체(口語體)의 시어를 사용함으로써 영국의 시단을 혁신하는 새로운 시운동으로 부상하였다. “콜리지와 워즈워스의 서정민요집(抒情民謠集, Lyrical Ballads,1790) 제2판(1800년)의〈서문 Preface〉에는 시가 '강렬한 감정의 자연스러운 넘쳐흐름'이라는 워즈워스의 유명한 정의와, 시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쓰여져야 한다"는 그의 이론을 담고 있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     이 운동은 당시 귀족적인 고전주의(古典主義) 시의 틀을 부수는 강한 동력이 되었으며, 시를 귀족의 언어에서 평민들의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성과로 해서 낭만주의 시는 영국에서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시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의 “자연, 사랑, 인생의 안일한 가정생활과 전원풍경, 소박한 시어와 운율형식”(안영수, 「형이상학시와 모디니즘 시: 신비평읽기」, 2009,8월호)과 정서과잉의 상투적인 언어는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주어서 이를 혁신하려는 시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20세기 대표적인 시인 T.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 등이 중심이 된 모더니즘 시 운동이다. 이 모더니즘 시 운동은 정서위주의 주관적인 서정시를 ‘객관적이고 지적(知的)인 사유(思惟)의 시, 이미지의 시’로 바꾸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의 유물론과 관계 깊은 사실주의를 개인정신의 부자유라는 측면에서 배격하고, 시의 영역을 인간의 의식세계에 한정하지 않고 내면의 무의식(無意識) 세계로 확장했다. 이와 함께 초현실(超現實)이라는 개념을 포용하여 시를 의미로부터 해방시켜서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의 영역을 시에 부여하였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모더니즘(초현실주의 포함)으로 변화해 온 시의 역사에서 변화의 원동력이 된 것은 과거의 시에 대한 개혁(改革)이다. 이 개혁 속에는 시대정신과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고, 의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시의 독자적인 생명력이 들어있다   20세기 초엽 근대화의 과정에서 서구의 시를 받아들인 한국 현대시 100년의 역사도 서구시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 한다. 정지용, 김기림, 이상, 조향, 김춘수, 문덕수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 모더니즘 시의 계보가 그것이다. 그것은 현대 한국인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과거의 조선시대로 회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한국 현대시의 변화도 19세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 한국 현대시는 신준봉 기자가 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구충돌’의 와중에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는 젊은 시인들이 시단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일부의 실험적인 젊은 시인들은 김남조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해부칼로 인체를 갈라 보여주는 것 같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혁신적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실주의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 있다.      디지털적인 감성(感性)은 가상현실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하기도 한다. 가상현실은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같이 현실과 비현실을 통합하는 제 2의 새로운 공간이다. 그래서 19세기적 자연발생의 서정시와는 전혀 다른 시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적 공간의 시는 구시대의 관념에 안주하는 보수적인 서정시인 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가 되기도 한다.     ‘시의 난해성(難解性) 문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에서 ‘서정파 시인들’이 새로운 형식, 표현, 사유의 시를 공격하는 무기의 하나다. 난해성 때문에 독자와의 소통이 단절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서정시인 들이 사용하는 난해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시는 ‘해석의 대상’이라는 시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들어있는 것 같다.     시를 해석한 다는 것은 시를 분해하여, 시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시를 그 의미의 망(網) 속에 가두는 것이다. ‘이 시의 소재는 무엇이고 형식은 어떠하며, 주제가 무엇이라고’, 시를 지식화(知識化)하여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지식을 시험문제로 출제하여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발랄하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정답 아닌 정답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난해성을 시의 본질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가? 시는 해석(解釋)의 대상이 아니라 감상(鑑賞)의 대상이며, 의미보다는 상상력(想像力)이 우선되는 언어예술(言語藝術)이라는 것을 왜 외면하려고 하는가?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의 대표작 「동천(冬天)」은 현대시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暗示)하고 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공간은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의 공간이다. 그리고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은 실체와 관계없는 언어 기호일 뿐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해석보다는 감상에, 의미보다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따라서 의미의 난해성이 이 시의 생명력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가 산문처럼 명백한 논리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시의 예술성(藝術性)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예술성은 난해성 속에 들어있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시를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쓰자는”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한국의 서정시인 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주관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 독백적인 시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을 거부하고, 매스컴의 비예술적 대중영합주의의 옹호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매스컴은 대중성에 영합할 수밖에 없는 매체다. 그러나 이런 매체가 앞장서서 시의 무한한 가능성과 예술성을 무시하고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를 공격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그것은 매스컴의 횡포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2010년 1월 18일자 “시인도 알 수 없는 시, 그저 한때 소나기였으면 … ”은 시의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답답함을 안겨 주는 독선적이고 편향적인 기사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2    하이퍼 시에서 상상과 공상 그리고 정서의 문제/심상운 댓글:  조회:907  추천:0  2019-03-01
하이퍼 시에서 상상과 공상 그리고 정서의 문제                                                                                                             심 상 운             1. 상상과 공상      공상(空想) 또는 몽상(夢想)으로 번역되는 Fancy는 상상(imagination)에 비해 문학 창작의 능력으로서 낮은 평가를 받아 왔다. 19세기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리지(Coleridge)는 그 이유를 “Fancy는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된 기억의 한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문학작품이 갖추어야 할 의도적 질서(목적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들어 있다.     상상력은 이성적인 사고능력의 한 부분에 속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적 생각을 발생시키는 능력을 보유한다. 따라서 상상은 기억의 재생,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감각적 생기, 연상 작용, 등으로 시의 영역을 확대하고 시를 습관적인 관성에서 이탈하게 하지만 실재성에 기초를 둔 엄숙한 사상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공상은 이성적 사고능력의 밖에서 해방된 공간을 형성한다. 그래서 공상은 자의적이고 비현실적이고 허황하지만 상상이 안고 있는 엄숙한 사상성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서 유희성, 변화성, 경쾌성이라는 매력을 시에 부여하고 새로운 감각을 독자들이 즐기게 한다. 이것이 상상과 공상의 차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공상을 근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를 발명하게 한 상상의 시초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자유로운 공상을 펼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베른 (Jules Verne 1828. 2. 8 프랑스 낭트~1905. 3. 24)이 고안해낸 잠수함 노티러스 호는 당시에는 공상과학(空想科學) 소설 의 소재였지만 20세기에는 원자력에 의해서 현실화된 잠수함이라는 것도 공상과 상상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공상이 상상의 원천이 되는 이유는 공상이 상상보다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나 관념의 굴레에서 훨씬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위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고(思考) 작용으로서의 상상력과 아무런 의도성이 없이 아무 것이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의 가지나 줄기가 자유롭게 이어지고 벋어나게 내버려두는 공상이 현대시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활용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적인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Coleridge)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假想空間)을 제공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 추리 작용(推理作用)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자율적 공간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함으로써 시 속에 새로운 자유의 공간을 형성한다.      인조수지나무에 종이컵이 난쟁이 고깔처럼 조랑조랑 과일들 맺어 풍성이 영글면 다 따서 담아 주스라도 빚을 듯이 종이컵 하나 따서 길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꾹 밟고 눌러 본다 빈 알루미늄 깡통처럼 쭈그러지면서 한마디 꽥소리 없다 이리저리 굴리고 뭉쳐 손아귀로 꼭 쥐어 본다 오렌지 커피 녹차 혹은 그런 갈증과는 아예 관련이 없다 이 빈 기도 속에 지구地球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 -문덕수 「종이컵」전문     문덕수의「종이컵」은 시인의 창조적인 상상의 밑바탕에 자유분방한 공상의 영역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조수지나무의 종이컵에서 “이 빈 기도 속에/ 지구地球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에 이르기까지의 자유롭고 유희적인 시인의 행위에는 현실적인 어떤 목적의식이나 논리적 인과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변화 속에서 미적 쾌감과 충격적인 의미가 살아나고 있다.   하이퍼시는 한국현대시를 오래 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單線構造)의 틀을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靜的) 이미지를 동적(動的)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編輯者)로, 고정된 관념(觀念)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想像)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感覺)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개혁운동이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중심은 연상을 매개로한 창조적 상상일 수밖에 없다. 이 창조적 상상의 밑바탕에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공상이 들어있다.      높은 빌딩 위 전광판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가 운반되고 있다. 경례하는 미국 대통령의 확대된 모습     사이에서 나는 짙푸른 오이를 꺾어 한 입 힘차게 베어 문다. 입안에 푸른 피가 철철 흐른다. -신규호 「풍경․1」2 전문     신규호의 하이퍼시「풍경․1」2에는 두 개의 풍경이 병치되어 결합돼 있다. 이 두 풍경에는 어떤 유사함도 없다. 오히려 대조적이다. 따라서 두 이미지의 충돌 감각이 미적 쾌감을 일으킨다.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시 속의 캐릭터의 행위에서 찾아진다. 엄숙한 의식(儀式)의 공간을 보는 장면에서 입안에 철철 흐르는 오이의 푸른 피를 보여주는 행위는 공상에서 솟아나는 퍼포먼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유희성의 표출이다. 그것은 하이퍼 시가 감각적 순수 이미지로 보여주려는 정서와 암시적인 사유공간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재서는「문학원론」에서 상상을 문학 작품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공상을 배척하지 않고 옹호하고 있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실재성에 기초를 두니까 엄숙하지만, 공상은 자의적이나까 비현실적이다. 문학에서 상상이 존중되고 공상이 매양 배척을 받는 것은 그럴 법도 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이 상상적이고 무엇이 공상적이냐 하는 문제는 무엇이 실제적이고 무엇이 비현실적이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비평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여기서는 그런 논쟁적인 문제를 불문에 부치고, 다만 공상이 문학에서 차지할 수 있는 정당한 지위를 지적해 두려한다. 첫째로 공상은 그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으로 말미암아 문체의 장식적 요소가 된다. 인생은 엄숙한 것이지만, 이런 것까지도 버린다는 것은 퓨리턴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로 극이다. 희극에서처럼 공상의 매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과 같은 상상의 문학을 존중하는 반면에 같은 공상의 문학도 즐겨할 줄 안다. 심지어 이나 에서처럼 상상과 공상이 교착하는 문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매력을 느낀다. 이들 작품은 현실과 이상을 대조하고 상상과 현실과 이상을 교체함으로써 실재감을 더욱 감명 깊게 하기 때문이다. -최재서「문학원론」14장 상상(2) 3. Fancy와 Wit에서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과 공상이 뒤섞여서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을 즐기고 거기서 다른 갈래의 실재성의 근원을 발견한다. 여기에 하이퍼시의 공상이 형성하는 다양한 이미지 세계의 당위성이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에 더 기울게 된다.          2. 정서의 문제     공상을 하이퍼 시의 바탕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관념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공상이 시인의 정서와 어떻게 결합되느냐 하는 것이다. 정서는 시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공상과 정서의 결합여부는 시의 생명을 좌우하게 된다. 그 예는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서의 결핍이다. 초현실주의 시들은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새로움을 주지만, 시인의 내적의식의 흐름이 시 전체에 혈관조직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동일성이 결여되고, 한 편의 시가 파편화된 이미지의 나열 또는 집합형식에 머물고 말기 때문에 시적 감동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비합리적이고 무목적의 순수공상(탈-관념)으로 형성되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속에 시인의 정서를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시인의 무한한 공상 속에 축축한 수분의 정서를 넣어서 시의 이미지를 수목처럼 싱싱한 생명체로 만들어 내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정서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다. 독일의 미학자인 게르노트 뵈메(Gernot Bohme)는 “정서를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발생하는 분위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전의 해석을 빌리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 부딪쳐 일어나는 온갖 감정”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비교적 약하고 장시간 계속되는 정취(情趣)와 구분한다. 정서는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된다는 점에서 정동(情動)이라고도 한다. 희노애락(喜怒哀樂)•애증(愛憎)•공포•쾌고(快苦) 등이 정서이며, 의식적으로는 강한 감정이 중심이 되며, 신체적으로는 내장적(內臟的)인 생활기능의 변화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 요약하면, 정서는 인간이 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인간의 내적감정이 일으키는 심리적인 에너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게르노트 뵈메의 분위기(atmosphere)라는 정의는 정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는 정서에는 분위기만 아니라 행동의 직접적 계기가 되는 심리적 에너지가 들어 있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      정서의 심리적 현상은 강한 폭발력을 내재하고 있으며, 그 내재된 폭발력은 서정시에서 감동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정서가 제거된 이성적인 주지시보다 이성이 약화된 정서 위주의 서정시가 독자들을 더 유인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지성을 중시하는 현대시에서도 정서가 사물이나 지적 사유보다 강하게 인식되는 이유다. 그것은 대중가요의 흡인력과 같다. 특히 이성적인 논리성보다 인정과 눈물에 더 치우치는 감성적인 한국인들에게는 시에서 이성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것이 더 평가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서의 발생은 주체의 내적감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집단적 감정도 정서 발생의 원인이 되지만 정서의 대부분은 대상과 주체의 심리적인 상태의 관계에 의해서 발생한다. 따라서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감정이 표현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서정시의 시점이 1인칭시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주체인 ‘나’ 또는 ‘우리’의 감정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의 특성을 하이퍼 시에서 어떻게 담아내어야 하는가? 하이퍼 시는 주체(화자)의 일방적인 정서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서정시가 아니기 때문에 새롭고 독특한 방법이 요구된다.      다음 글은 월간 「시문학」2009년 3월호 신진과 조명제 시인의 대담 ‘하이퍼 시의 가능성’에서 발췌한 것이다.     신진: 하이퍼 시는 원칙적으로 허구를 제시하되 그 세계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현실을 재구성하게 하는 시뮬라시옹의 시라 할 것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전제와 확신에도 갇히지 않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양식이며 이 논리의 골격은 리좀(rhizome)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쉬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사물의 상호연관성이란 뜻으로 쓴 리좀은 원래 식물학적인 용어로 줄기와 뿌리가 같이 이어져 땅속으로 뻗어나는 줄기를 뜻하며, 스스로 뿌리이기도 한 식물을 가리킵니다. 시작도 끝도 아니고, 언제나 중간에 있으면서 접속 가능한 모든 차원과 접속될 수 있는, 복잡한 상호연관성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깨어지고 부수어지며 재생하는 반계보학적 네트워크입니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시학을 포용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2차원의 종이텍스트를 언제나 유동적인 4차원의 사이버 공간까지 확대한다는 하이퍼 시 동인의 논리에 부합합니다. 심상운 시인의 시를 한 편 들겠습니다.     7월 아침나절 갑자기 쏟아지는 비   한낮의 아프리카 대평원엔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사슴의 붉은 살덩이가 내뿜는 싱싱한 비린내   6월의 태양 아래 이글이글 벌어지는 초원의 잔치!     나는 TV에서 가슴 떨리는 아프리카 생태계를 보다가 식탁의자에 앉아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우쩍우쩍 씹는다.     그때 휴대폰을 울리는 그녀의 가쁜 목소리   그녀는 여름비의 유혹이 참을 수 없어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굵고 기운찬 빗줄기에 온몸 부르르 떠는 녹색 가로수들이 제각기 잎사귈 퍼덕이며 소리치는 도로를 지나 녹색의 광기를 한껏 즐기고 있는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 ―심상운 「녹색전율」     인과(因果)의 틀을 벗어나 나열되는 이미지들이 상호 연계되면서 리좀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7월 아침의 비와 6월의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사투, 식탁에 앉아 우적우적 씹는 방울토마토, 휴대폰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하이퍼 실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오남구 시인의 시도 한 편 들어봅시다.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 불그스레 실눈을 뜬 쪽달이 베갯잇 속으로 미끄러진다. 베갯잇의 조각보에 꿈오라기 오락가락 청-백-적-흑-황 지금 신행 온 딸아이가 베고 있다. 꾸륵 꾸륵 흑두루미가 철원하늘을 날아간다. 오르르∼ 신부가 떠는 입춘에 나뭇가지에서 오락가락 햇살 따뜻한 에너지가 스민다. 꿈틀 꿈틀 망울이 가렵고 겨드랑이가 가렵다. 거울 속에 팝콘 같이 흰 철쭉 꽃망울이 터진다. ―오남구 「입춘詩」전문     서두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에서부터 표준 어법을 이탈하고 있고, 한 마디의 서술 없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나열하여 연결함으로써 입춘의 추상을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시의 길이에 비해 움직임이 큰 동사와 형용사,‘오락가락, 꾸륵 꾸륵, 오르르∼, 꿈틀 꿈틀’ 등과 같은 의성어, 의태어를 빈번하게 사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은 특히 오남구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명제: 김규화의「매미소리」의 방법적 특질은 화자가 강의를 듣고 나오면서 ‘미륵론’의 환청처럼 들리는 매미소리와 그 울음의 유사성으로 하여 연상되는 염소 울음소리, 심지어 기차를 놓친 과거 어느 날 떠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마저 맹랑한 매미소리로 환치 혼융된 감각적 변용에 있어 보입니다.‘미륵’과 ‘매미’는 ‘미’라는 기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기의에는 유사성이 전연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강의의 잔상효과와 ‘미륵’/‘매미’ 두 말이 지닌 기표의 유사성만으로 그 관련성을 맺어 줍니다.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미륵 미륵 미륵,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 사정한다   염소에게서 배웠나,매해해 얌얌 염소 입술을 뾰죽이 내밀어 매매매 하는 그그그 미 매 하는 미,매미이이이를   플랫폼에 혼자 두고 가는 기차가 소리 한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맴맴맴 매애애 매앵매앵 앵앵앵 미잉미잉 잉잉잉 ―김규화의 「매미소리」 전문     매미소리는 매미의 언어로서 어떤 의미신호가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귀에는 그저 카랑한 울음소리의 기표만 들릴 뿐이지요. 우리가 노승의 독경소리를 들을 때 그 의미는 전연 알지 못하면서도 그 유려한 독경소리 자체에 매료되어 열복(悅福)을 느끼는 절대 순수의 순간처럼 매미소리의 시니피앙 속으로 빠져들어 추억과 환상의 절대적 세계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퍼 시는 일반적 서정시들의 대상과 주체의 밀착에서 벗어나 대상과 주체와의 간격을 중요시 한다. 그 간격은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것이 링크(연결고리)다. 링크로 연결된 이미지의 내면에는 어떤 의도성이나 목적성이 가미되지 않은 시인의 ‘순수한 의식의 흐름’이 들어 있으며, 그 의식의 흐름 속에는 주체의 정서가 들어 있다. 이 정서는 기계 속의 윤활유와 같이 시간과 공간, 사물과 사물을 서로 부드럽게 연결하여 이미지의 세계에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 흐름의 정서 속에서는 신선한 감각의 공간이 열린다. 그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캐릭터의 퍼포먼스 같은 행위는 주체의 정서를 드러내는 감각적 행위가 된다. 앞에서 예시한 신규호의 풍경․1」2에서 보여주는 캐릭터의 입 안에 철철 흐르는 오이의 푸른 피, 심상운의「녹색 전율」에서 빨간 방울토마토를 우쩍우쩍 씹는 행위,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가 환기시키는 감각적인 이고 원시적 본능의 정서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오남구의「입춘詩」에서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이미지의 돌출, 의태어와 의성어가 빚어내는 동적인 감각, 김규화의「매미소리」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순수한 청각 시니피앙은 대상과 주체(시인) 사이의 공간과 시인의 내면 의식의 흐름이 어우러져서 형성된 감각적인 정서의 표출로 인식된다.    정서는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감성의 현상이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시인의 주관을 제로상태로 줄일 때 객관화 되어서 드러난다. 따라서 하이퍼 시의 정서는 일반적 서정시의 정서와 같이 어느 한 쪽으로 경도된 주체의 정서가 아니라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는 탈-관념된 정서가 된다. 그 정서는 노출된 정서가 아니라 이미지 속에 내장된 정서라는 데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하이퍼 시에서 주체의 정서를 담아내는 방법은 이미지의 병치와 대립, 연상적 이미지의 전개, 무의식 속의 환상, 자유분방한 유희적 퍼포먼스, 불연속적인 시간과 공간의 결합, 펀(pun)의 삽입을 통한 변화 등 엄숙한 사상성에서 벗어난 정서의 다양한 감각화와 순수한 의식의 흐름을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시 전체에 흐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1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심상운 댓글:  조회:1035  추천:0  2019-03-01
사단법인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 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  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               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             락을 추적해 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             으로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                     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                    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                    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reterritorialization)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0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대담 -김규화/ 심상운 댓글:  조회:914  추천:0  2019-03-01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대담     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  김규화 / 심상운     아무리 아니라고 머리를 저어도, 우리는 인터넷, TV, 핸드폰 등의 IT기기들로 둘러싸인 환경, 즉 하이퍼텍스트의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위아래(상하), 앞뒤(전후), 좌우라는 3차원의 공간에서만 살고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현실을 초월한(hyper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오늘의 삶과 시가 변화된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하이퍼텍스트로 가고자 하는 노력은 시대의 불가피한 한 흐름으로 생각됩니다. 시대에의 맹목적 예속보다는 시읽기와 시쓰기의 새로운 리터라시(literacy)를 정립해 보고, 소외된 삶의 모습을 조명하는 비판적 시각도 시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이 시대의 한 자원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오남구(吳南球) 시인의 제의로 심상운(沈相運), 김규화(金圭和), 오남구 세 시인이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지를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IT시대를 선도할, 에콜 있는 동인지가 출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심상운 시인은 오남구와 더불어 디지털 시와 그 이론을 양역(兩役)해 왔고, 김규화는 이번 동인 운동의 동참으로 변신과 더불어 새로운 하이퍼텍스트를 지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 동인의 영입도 있겠지만, 우선 심상운, 김규화 두 분께서 다음 토픽으로 새 동인운동의 계획과 포부에 대한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주기 바랍니다.  ― 편집자    1. 동인지 운동에 앞선 소감은?    심상운:문학에서 에콜 활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학적 특성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나는 오남구와 몇 년 동안 동인 아닌 동인활동을 해왔습니다. 「2004년의 한국시단의 동향」(한국현대시인협회의 연간 사화집, 2005)의 평문을 쓸 때, 오남구가 제창한 「디지털리즘」에 대해 퍽 흥미를 느끼고, 그 방법론에서 시대적인 당위성과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남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하였습니다. '탈관념 시'와 '디지털 시'를 주창하는 오남구를 동인이라고 서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김규화 시인의 시에서 디지털의 기법이 보이고, 그것이 신선한 감각으로 느껴졌습니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있는 관념에서 해방되어 관념이 아닌 언어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김규화 시인이 시에서 디지털 시의 언어기법이 생동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움과 기쁨을 느끼고 동인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의 사고방식과 문화감각은 21세기에 와 있는데, 많은 시인들의 의식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동인운동은 시대적 중요성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시 창작의 기본이 되는 언어, 정서, 사물, 관념, 상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한 표현방법에 대한 모색과 실험은 현대시의 길을 여는 작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규화:우리 시(한국현대시)는 계속하여 2천여년 전의 예수나 석가 시대의 비유, 상징의 기법으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해 왔습니다. 이제 형식과 내용면에서 조금은 반성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21세기는 전자 테크놀로지 시대입니다. 이러한 변화한 시대에 맞는 변화한 시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인터넷 인구가 날로 증가해 가고 있습니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구분할 정도로 종이책(시)이 안 읽히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대신 인터넷 속의 하이퍼텍스트를 대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쓰는 사람들의 인성을 즉흥적.도발적.비선형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비판적 시각에서 여기에 상응하는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연유로 오남구와 심상운 제가 하이퍼텍스트시를 쓰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앞으로의 시문학은 동인지 운동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문학은 한 지역 안에서 10명 내외의 그룹이 모여앉아 읽고 감상하는 정도로 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 경향 각지의 문학지들도 동인지적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남구 시인은 처음부터 실험시의 깃발을 들고 써왔고, 심상운 시인은 근년에 와서 디지털 시에 대한 이론과 시작품을 쓴 사람입니다. 여기에 신입생인 내가 합류한 셈입니다.    2. 동인지는 '하이퍼텍스트 시'(또는 '하이퍼 시')로 할 예정인 것 같은데, 동인지의 방법이나 에콜로서 '하이퍼텍스트'라는 방법적 지표를 세운 이유나 동기를 말씀해 주세요.    심상운:동인지의 명칭은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이 생각되지만 '텍스트'와 '시작품'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하이퍼 시'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쉽게 이해하기 좋게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디지털 시'의 가장 발전된 상태를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말한 것과 같이,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의 에콜로서의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하이퍼텍스트에는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3차원 세계를 뛰어넘은 자유연상의 이미지 등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흔히 버추얼 세계라고도 일컫는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세태를 가진 현실입니다. 이것은 21세기적인 상상의 공간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를 동인지의 지표로 세운 이유가 되겠습니다.  김규화:앞서도 말했지만, '혁명'이라 할 만큼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 속에 사는 우리는, 문학 작품도 변화를 하지 않고는 살아 남지 못할 시대에 와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의 선형적∙순차적 질서, 구문론적 선조성, 서론∙본론∙결론 식의 글쓰기의 틀을 지켜야 한다는 시대를 지나, 지금은 디지털 시대의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를 외면하는 시(글)쓰기는, 현재에 살면서도 현재에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직선적인, 즉 리니어(linear)시대가 아니라 '넌 리니어,(non-linear)' 시대라는 인식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3. 하이퍼텍스트란 무엇인가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 또는 定義를 말씀해 주세요.    심상운:『IT용어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자, 그래픽, 음성 및 영상을 하나의 복잡한 비연속적인 연상의 거미집(web of associations)과 같이 서로 연결시켜, 제목의 제시 순서에 관계없이 이용자가 어떤 제목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 제공 방법. 이와 같이 연상을 연결하는 링크는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의도(목적)에 따라 종종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작성자와 이용자 둘 다에 의해 생성된다. 예를 들면, 어떤 화제 또는 제목에 들어 있는 '쇠(iron)'라는 단어와 연관된 링크들을 조사하여, 이용자는 철기시대의 연대표를 찾거나 철기시대 유럽에서의 야금술의 발달∙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를 찾을 수도 있다.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1965년 넬슨(Nelson)이 책, 필름, 연설 등의 선형 구성(linear format)과는 대조적으로 비선형 구조(non-linear structure)로 컴퓨터를 통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다. 최근에 도입된 하이퍼미디어라는 용어는 하이퍼텍스트와 거의 같은 의미이지만, 하이퍼텍스트의 비문자적 구성 요소 즉 애니메이션, 녹음된 음성 및 영상 등을 강조하는 용어다. "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넬슨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됩니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집니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를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텍스트의 유동성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닙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세계로서,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流動性)의 문학형태가 됩니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합니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 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적인 시입니다.    김규화: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넬슨(Nelson)이 처음 쓴 용어입니다.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텍스트에서 그림이나 밑줄 친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연결되어 떠오르는데, 이렇게 다른 텍스트로 연결해 주는 것을 하이퍼링크라 하고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복수의 텍스트 전체가 하이퍼텍스트입니다. 기존의 모든 정보(텍스트)가 평면 형태, 즉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이었지만 하이퍼텍스트 구조는 이러한 선조성, 고정성, 유한성을 파괴한 한편, 하이퍼텍스트는 매체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하이퍼미디어라고도 합니다.    4. 시에서 말하는 하이퍼텍스트는 종이에 손으로 기록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컴퓨터나 TV에서의 '전자 하이퍼텍스트'와 전자장치가 없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시 하이퍼텍스트, 또는 하이퍼텍스트 시)와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심상운: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된 시입니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 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를 기록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기록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숨어 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됩니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됩니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립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됩니다.    김규화:하이퍼텍스트 문학이라고 하면 하이퍼링크가 적용된 문학으로서, 링크에 의해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존의 문자 텍스트는 텍스트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작가(또는 시인)가 정해놓은 한 가지 주제나 한 가지 이미지가 형성하는 문맥의 시간적 순서로(순차적으로) 이어나가는 데 반해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독자가 마우스로 선택적 링크를 하여 갈라져나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건이나 이미지를 만들고, 한 문장 중의 단어나 어구에서 문맥의 가지가 파생하여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장들이 종합된 하나의 복합 네트워크로 구성된 것입니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발달된 컴퓨터 기술의 특성을 종이 위의 문자면에서 최대한 활용하여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형태입니다.    5.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시 인용도 무방함)    심상운: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됩니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합니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합니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입니다.    김규화:종이 위의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 화면이 아니면 입력할 수 없는 그림, 소리, 동영상, 그래픽, 음악 만을 제외한 모든 특성을 종이 시에 이용한 것을 말합니다. 하이퍼텍스트에서 보이는, 순차적 질서나 위계적 시스템 구조를 안 지킨, 혼란스럽기까지 한 비선형성, ―어쩌면 인간의 사고과정이나 뇌세포의 덩어리(의식의 흐름)를 닮은―, 어떤 논리적 체계가 있는 수목(樹木)과 같은 시스템이 아니라, 감자의 알뿌리 같은 근경(根莖)처럼 사방으로 마구 이동하여 중심이 없이 그물 상태를 만들어내는 리좀(rhizome)성, 그로 인한 일방향적이 아니라 다방향적, 혹은 쌍방향적인 네트워크를 하이퍼텍스트시에 이용하여야 합니다. 하이퍼텍스트(시)를 이루는 마디(node:단어, 행, 연)들은 동시적으로 공존하거나 나열하여 존재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무화시키거나 초월하거나 평준화시켜 닫힌 코드가 아닌 열린 코드로 무한한 상상력(공상∙환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게 합니다.    6. 구체적인 작품을 들어 설명해 주세요.    심상운:다음은 내 시에 대한 자작시 해설입니다. 나는 나름대로 하이퍼텍스트 적인 시를 구현해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전문(『시문학』 2007년 6월호)    이 시의 기법은 첫째, 사물어의 사용(탈-관념), 둘째, 가상현실, 셋째, 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넷째, 영화의 몽타주 기법(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등입니다. 그래서 자연풍경+사회 및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 등의 결합은 하이퍼텍스트적인 공간이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 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먹는다'라는 욕망 행위와 '아우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회를 먹습니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생명현상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기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입니다. 그래서 연극적인 기법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나'와 '그'는 시 속의 캐릭터입니다. 끝부분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입니다.  나는 현대시론, 「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모듈 이론도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점이 많습니다. 기존의 문장에서 낱말, 문장, 문단과 같은 구성단위의 전후 관계를 바꾸게도 하고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틀을 깸으로써 독자에게 재구성의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연결 관계의 논리성이 아니라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입니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입니다. 그것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을 아무리 치밀하게 전개하여도, 다양한 상상의 집합, 그 집합의 내면으로 흐르는 시인의 의식, 동적인 이미지, 해방감 등을 독자와 함께 나누는 시를 어떻게 종이 위에 '문자시'로 구현하느냐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로 남습니다.    김규화:설명하기 쉬운 졸시 「한강을 읽다」를 들겠습니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우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리다가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지른다    이 시는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강과 한강가에 늘어선 고층 아파트들의 '현실'과, 한강 물속에 비치는 아파트와 그 속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환상)'을 병치시켜 놓고,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이 모든 것(현실과 환상)을 지워버리는 가상현실(?)을 표현해 본 것입니다.    7. 앞으로의 계획은?    심상운:디지털 시의 이론을 더 충실하게 연구하여 가다듬고 그 이론에 부합되는 시를 모아서 '하이퍼텍스트 시집'을 상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동인활동을 통해서 한국 시문학사에 남을 유파를 형성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서 벗어나서 길 없는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어쩌면 현실에서 벗어난 공상(空想) 또는 몽상(夢想)으로 번역되는 환상(Fancy)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성적 사고를 넘어서는 해방된 공간을 나름대로 시로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간 속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창의적 생각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상상과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즐거움을 줍니다. 언어는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놓고 있습니다.  김규화:이 시에 공감하는 시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 시는 더욱 다듬어서 좋은 동인지를 만들 계획입니다. 특히 덧붙이고 싶은 점은, 부분이나 작은 단위를 자유연상에 의해 연결하는 '링크'는 어떤 정해진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연상에 의한 '무한 링크'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링크 작업이 어느 지점에서 스톱하여 한 작품의 전체로서의 네트워크의 형태나 스타일을 형성하는가도 큰 문제입니다. 앞으로의 모색 과제입니다. 
9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심상운 댓글:  조회:814  추천:0  2019-03-01
  2007, 11,17 사단법인 현대시인협회 주최 제1회「전국 공연시 경연대회」주제 발표문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                                                심 상 운  1.  현대는 사회의 곳곳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이 활화산처럼 분출되는 시대다. 이 상상력은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서로의 존재성을 높이면서 다양한 가치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대표적인 예(例)가 현대예술의 첨단에 위치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다. 그는 이전의 예술가들에게는 전혀 예술의 재료가 되지 못했던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 최초의 ‘테크놀로지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실험적인 시인들은 언어문자의 틀을 넘어서, 시가 음악과 영상, 시인의 연기를 포함하고, 연극의 무대로 진출하여 독특한 시의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시에서 시가 언어의 의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무의미시, 탈관념시). 시가 사물화 되려는 것(사물시). 시가 순수 이미지의 집합만으로 만족하려는 것(디지털 시, 기호시)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이다. 이런 변화는 언어(문자)를 유일한 표현매체로 삼는 전통적 시의 기능에서 벗어나는 창조적인 변화의 양상으로서 그 속에는 현대의 특성인 ‘경계 허물기’ 와 ‘통합하기(퓨전)’가 들어있다. 그들은 시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시인의 사상, 감성, 상상, 영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시의 공연화(公演化)는 시와 연극, 시와 무용, 시와 회화, 시와 음악 등이 융합하는 현대시의 혁신적 변화로써 독창적인 표현영역을 확립해야 하는 미래지향적 과제를 안고 있지만, 영상매체에 위축된 현대시의 독자(관객)를 향해 새로운 소통의 문을 여는 ‘열린 시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존재의미가 평가된다.    2. 공연시(公演詩)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르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공연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의 낭송언어를 공감각적 이미지에 조화시켜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시(perfomance poetry)는 글자 그대로 ‘공연+시’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시와 다른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공연시를 창작할 때에는 첫째로 ‘공연을 위한 시’의 요소(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둘째로 무대에서 연출되기 위해 시인, 연출자, 배우 등의 역할분담(분업화)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공연시의 독자성을 살리기 위해서 연극, 음악, 무용 등 기존의 예술들과 융합되면서 ‘시의 언어감각과 이미지와 상징성’을 살려나가는 독창적인 표현양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연을 위한 시의 목적에 부합되는 새로운 장르로서의 공연시가 정착되고 창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창작된 기존의 작품들은 ‘각색(脚色)’의 과정을 거치거나 창조적 연출의 기능에 의해서 공연시(각색시)로 재탄생할 수 있다.   현재 무대에서 공연되는 공연시는 ‘1인 낭송시’, ‘합송시’, ‘무용시’, ‘퍼포먼스’, ‘영상시’ 등으로 분류된다. 1인 낭송시의 경우에는 도우미가 캐릭터의 역할을 하고, 배경음악, 효과음, 소품사용 등을 통한 시인의 낭송연기로 문자시의 한계를 벗어나는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일반적인 시낭송(詩朗誦)과 차별성을 갖는다. 그리고 녹음된 시의 낭송을 곁들이는 무용시(舞踊詩)는 언어의 시를 몸의 시로, 퍼포먼스는 간단한 무대 장치를 갖춤으로써 언어의 시를 극적인 연출의 시로, 영상시(映像詩)는 노래나 해설과 함께 사이버 공간에서의 영상과 시의 결합이라는 방법으로 시의 이미지를 표현하여, 문자를 유일한 매개로 하는 ‘종이 속에 갇힌 시’와는 차원이 다른 전달성을 드러낸다. 이런 공연시의 표현 효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평면성을 입체성으로, 청각이나 시각을 공감각으로 바꾸는 이미지의 다양한 변화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영상시를 제외한 공연시에서 이루어지는 시공연자(시인)와 관객(독자)의 직접적인 만남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객(독자)들에게 문자시에서 맛보지 못하는 즐거움을 주고 독자와 함께 시의 호흡을 나누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객(대중)들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공통적 특징인 비유적, 상징적 표현이나 문맥 파괴적인 현대시의 공연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3. 공연시는 시의 커뮤니케이션에서만 아니라 시의 창조적인 이미지 면에서 현대시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 예상된다. 공연시는 언어와 문자를 기본으로 하지만 무대의 공연을 통해서 시인(배우)의 연기와 무대장치, 조명, 소리 등의 효과로 전달되는 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로,그 변화의 양상에 일반적인 현대시를 대입해보면  영상시를 지향하는 시에서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통한 복합적인 이미지의 세계(하이퍼택스트)를 구현하는 시가 더 확산 될 것 같고, 짧은 서정시에도 극적인 요소를 넣어서 입체적인 표현을 하는 시가 일반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전망이 가능한 것은 공연시가 확산되면 그것이 전통(일반) 서정시의 표현 방법에 도미노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의 주체는 시인(창작자)이라는 고정관념의 변화다. 시를 무대에서 행위예술로 표현하는 배우나, 시를 각색하고 연출하는 연출자도 시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독창적 해석에 의해 시의 의미와 감각이 여러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다.  셋째로는 시의 표현에 사용되는 음향과 영상기기와 시의 만남이다. 악기와 전자기기들이 시의 표현양식 속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언어를 대신하는 매체로 자리를 잡게 된다. 따라서 물리적인 기기(機器)와 시의 합성은 새로운 감각의 시를 탄생하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이외에도 시가 한정된 종이의 공간에서 무한정한 사이버의 공간으로 확산되어서 시의 대중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예상이다.   공연시의 이론을 세우고 실제적 공연에 앞장서서 새로운 시의 영역을 개척해온 신규호 시인(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은 이제까지 벌여온 공연시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현대사회에서 구현가능한 공연시의 전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2007, 4,27) “실제로,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무대 위에서 직접 창작시를 합송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낭송하거나,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거나(노래시), 또는 시극이나 무용시, 퍼포먼스 등을 시청각 매체를 이용해서 무대 위에 올림으로써, 청중들에게 몸으로 다가가고자 시도하는 ‘공연시’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2000년 1월부터 현재까지 ‘좋은시 문학회’가 총 88회에 걸쳐 실험하고 있음.)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시는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나 카메라 폰 등으로 녹화하여 다시 사이버 공간이나 DMB, TV 등에 재생하여 감상하게 함으로써 ‘공연시’의 재생산, 재활용도 가능하다고 본다. 더구나, 최근에 새로 등장한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나 'SECOND LIFE'와 같은 콘텐츠 제작 방법을 ‘공연시’가 앞으로 잘 활용하면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전망은 현대 영상매체의 기기와 공연시를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는 백남준이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든 것과 유사한 독창적인 비전이다.   4 공연시를 창작하고 발표하는 시인은 ‘시인, 연출가, 배우’의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종합예술인의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시를 언어(문자)에서 해방시켜서 온 몸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전문가적인 정신과 열정이 있다. 그래서 “ ‘공연시’는 보다 ‘인간적’이다. 시인과 청중이 시를 가지고 직접 서로 만나서, 면대 면으로 호흡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발표해 보여줌으로써, 창조적인 시적 상상력을 통한 감동을 서로 공유한다는 데에 참뜻이 있다. 비인간화 시대에 시적 정서를 직접 교환함으로써 인간적 유대감을 증진함은 실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신규호 시인의 글(「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은 더욱 공감을 준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 현상들에서 형식이 내용의 대부분을 만들어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근거가 되는 예(例)는 집의 형태에 따라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달라지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고, 환경이나 제도가 사람의 생활 형태와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容器)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공연시의 앞날을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오늘 열리는 ‘한국 현대 시인협회 주최 제1회 ’는 이제까지 검토한 여러 가지 사실에 비추어볼 때 매우 의미 있는 행사라고 생각된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시인과 도우미(조연)는 전문적인 연기자가 아닌 순수한 아마추어들이지만 그들은 자기가 창작하는 시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있으며 열정이 넘친다. 따라서 어설픈 장면도 많겠지만 전문가를 넘어서는 재치와 상상력의 싱싱함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그들이 보여주는 몸의 시, 행위의 시를 받아들이고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말자.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한 몸이 되어 보자. 그러면 ‘종이’에서 해방된, 뜨겁고 빛나는 새로운 시의 혼(魂)과 만나게 될 것이다.  
8    시와 기호(記號)/심상운 댓글:  조회:927  추천:0  2019-03-01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발음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2007,7,30, '시문학사')에 게재한  대담형식의 시론「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化)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에는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생략)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비슷하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오늘의 시작법』2004, 개정판 )-   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엘리트시 100선   2007년 봄호 (25)에 게재   *시사랑 문예대학 학술 세미나 (2003,8,13)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 -최동호 시인의 에 대한 반론                                                                                      심 상 운    1. 최동호 시인은 에서 주관한 학술세미나[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2003.8.13)의 기조발표문 에서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 출현한다면 대중적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폭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21세기 영상성의 시대에 오히려 서양의 고대나 중세에 활동하던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다리는 이유는 일부시인의 대중적인 인기를 빌어서 현대시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시의 내적 방법론보다는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populism)을 선택한 그가 현대시의 미래에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현대시의 시론을 탐색해야 할 입장의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내세우는 가설에는 그의 실증적 체험이 들어있지 않고 막연한 예언 같은 추상성만 들어 있어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는 그 가설의 근거를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김소월이 민요 시인으로 불리면서(본인은 그 명칭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20세기적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김소월과 대극점에 이상의 시가 있고, 김수영이나 김춘수 같은 시인은 관념의 세계를 파고들어 그 나름의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앞으로 노래와 결합되지 않는 시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견된다.” 라고 한국현대 시사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어디에도 오늘의 현실에 입각한 실증적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시대의 변화와 다양한 취향의 독자들을 외면하고 21세기에도 김소월과 같은 민요조의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백남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국 현대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1980년대 한국시단을 휩쓸고 간 베스트셀러의 열풍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베스트셀러의 시집들이 지금도 인기가 있고 문학적 가치가 있는 시집으로 존재하는가를 한번이라도 냉정하게 검토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 하는 방법을 디지털 시대의 매체의 기능에서 찾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여러 매체들을 종합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이 시의 쟝르적 특징이고, 이를 살려 시와 음악, 시와 무용 등이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시와 음악, 시와 무용의 결합을 현대시의 한 방법“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의 연구”라는 말을 통해서 음악과 무용과 결합할 수 있는 시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의 결합방식에는 현대시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현대시의 언어를 종합예술의 형태 속에 넣어서 음악이나 무용의 힘을 이용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다. 이때 시가 음악이나 무용에 붙어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가를 숙고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그러면 먼저 그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돌파구로 내세우고 있는 그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이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 대안인지 검토해보자. 그가 거론한 음유시인은 중세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각지에서 봉건 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던 시인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광장이나 길거리에서 오랜 동안 전승되어 오는 서사시를 간단한 악기의 운율에 실어서 대중들에게 들려주던 형태와 같은 시인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본뜬 현대의 음유시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공원이나, 카페나, 다방에서 자기가 지은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거나 낭송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시인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구조 속에서 음유시인의 일반적인 형태는 시인이 쓴 시를 작곡가의 곡에 붙여서 가수가 노래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정지용 시인의 시 에 곡을 붙여서 대중들에게 가수가 들려주는 것처럼. 그럼 그때 '음유시인'은 누가되는 것일까. 시인일까? 작곡가일까? 가수일까? 이런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세밀하게 구상되어 있지 않은 채,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는 시를 말하기 위해서 ‘음유시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그의 은 매우 즉흥적이고 아마추어적 발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현대는 그가 말한 대로 디지털의 여러 매체를 종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시인이 대중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활자매체’ 한 가지 만은 아니다. 활자매체에 영상 이미지를 넣고 음악과 시인의 음성을 담아서 컴퓨터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서 독자들과 만날 수 있다. 만약 그가 인터넷 가상공간의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음유시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라면 그의 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하지만 현대성을 획득하는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다음은 두 번째로 음유시를 위한 시의 연구가 현대시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는 시론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검토해보자. 음유시가 되기 위해서는 현대시가 대중가사의 노랫말같이 읽고 노래하기에 적합한 운율적인 언어로 조직되어야 하고 시인의 정서를 대중들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탄형의 구문이 되어야 한다. 고려시대의 속요에도 음악성을 나타내는 후렴구가 들어 있고, 시조에도 4음보와 3,4 4,4 조의 운율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가사에도 3,4, 4,4 조의 가락이 있다. 정지용 시인의 에도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이런 비슷한 운율을 현대시에 넣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런 시가 진정으로 대중과 가까워지는 현대시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이때 현대시와 대중가사와의 거리는 또 어떤 기준으로 설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제까지 쌓아온 한국 현대시의 언어적 성과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그의 인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만 든다.    그러나 시와 음악과의 결합은 근래에 산문화 되고 있는 현대시의 ‘음악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과 함께 현대시의 새로운 운동으로, 일부의 시인들이 독자(관객)와 호흡을 함께하는 나 의 시가 매스컴의 외면으로 대중화에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라는 주제를 논하고, 음유시인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편향된 시각이나 좁은 안목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게 한다.       2. 이상으로 디지털 시대의 시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최동호 시인의 음유시인의 등장에 대한 검토를 나름대로 해보았다. 다음은 왜 최 시인이 디지털의 시대에 사는 세대들이 선호하는 영상 이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짚어보자. 그는 의 도입부에서 갑작스런 사이버 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하면서 사이버 세계에 의한 독서 인구의 감소를 지적하고 있다. 이 독서 인구의 감소 문제가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온 원인이 된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에서 ‘문학의 이해’ 수업시간에 경험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박목월의 시 ‘청(靑)노루’를 다루면서 우선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반응에 놀라게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론이 붕괴되고 해체시와 정신주의가 충돌하던 90년대 초반에 이 시에 대해 학생들은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계가 이미 자신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이 시에 그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청노루’ 전문       60년대 이후 회화적인 구도를 가진 자연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거론되어온 박목월의 ‘청노루’가 젊은 세대들에게 이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필자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시들은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이거나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작품들이었다. 물론 많은 시인들에 의해 전통적인 서정시가 쓰여지고 있었지만 그런 류의 시들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작품으로 치부되는 듯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학생들에게 박목월의 ‘청노루’를 다시 읽혀보고, 종전과 유사한 반응을 기대했었는데, 의외로 2000년대 초의 학생들은 이 시에서 그들 나름의 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크게 부정될 줄 알았던 것과 정반대의 반응에서 필자는 일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최근의 학생들이 이 작품에 공감을 보인 것은 이미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 흥미를 느끼는 그들이 ‘청노루’ 정도의 표현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그만큼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     최동호 시인의 현실진단은 정확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진단에 대한 그의 해석은 한마디로 부정확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인터넷의 가상세계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거기에 대응하는 시적 방법론을 새롭게 찾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해답이 되는 시적 방법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 대한 그의 진단 속에 들어있었다. 1990년대 초에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던, ‘청노루’가 2000년대 이후의 독자들에게 읽히는 이유가 그 해답의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는 학생들의 반응 속에 정답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 까닭은 세대 차이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이 활짝 열려 있지 않았다는데, 근본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시들은 현실에 대응하는 참여시로서의 가치는 있었지만, 시의 상상력을 추구하는 예술적인 본령에서는 멀리 떨어진 시의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2000년대의 학생들은 직감한 것이다. 컴퓨터 인터넷을 생활의 일부로 삼는 그들은 시에서 의미보다 영상성(이미지)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가스통 바스라르와 같이 철학적 명상에는 잠겨보지 않았겠지만 ‘가상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서 현실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대시에 대한 이런 감각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얼마나 건전하고 바른 접근인가 거듭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이 단지 사이버의 가상세계에 빠져서 독서를 등한시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감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부정적으로만 몰아간 것이 과연 현대시의 강의 현장에서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원하는 방향이든 원하지 않는 방향이든 필연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 시대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의 표현대로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그들에게 그들이 선호할 수 없는 시만 보여주고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고집일 뿐”이라는 말을 그에게 되돌릴 수밖에 없다.      3.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영상 언어의 세계를 제시한 운동은 아날로그와 대칭되는 디지털이라는 관점에서 ‘기계의 시’ ‘반인간적인 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외면하는 시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의 그런 자세는 현대의 물질주의적 상황에서 인간의 정서를 옹호하고 시의 생명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태도라는 점에서 공감이 가는 행위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이 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어처구니없는 태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도 이제까지 현대시를 이끌어온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와 같이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 가상세계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의 존재 이유가 첫째,‘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시의 서정성을 근본적인 바탕으로 한다는 것. 둘째, ‘모더니즘의 절제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 슈르의 반지성적인 ‘상상의 확대’,‘자유연상’, ‘창조적인 이미지에의 유혹’은 물론 리얼리즘의 ‘현장성’ 까지 모두 포함하는 시의 큰 그릇이라는 것. 셋째,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직관을 통한 염사와 접사’,‘무의미(탈관념)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의 공간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 선결과제가 된다. 그것은 현대시의 문제의 해결 방법을 외부가 아닌 현대시의 언어내부에서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적 지향점을 안고 있는 는 과학적인 사실주의(실증주의)도 중시하지만 인간 내면의 심리적 현상에도 깊이 있는 시선을 던진다. 그것은 가 ‘언어의 의미’에서 탈출하여 ‘이미지의 세계’를 시의 근원으로 삼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슬라르는 과 에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가스통 바슬라르의 과 을 강의 하는 김용희는 그의 강의 노트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요약․정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가스통 바슬라르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은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고 하는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학생들의 시적 인식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실제로 행하여졌던 이미지의 실재성을 인정한 것일 뿐, 그가 새로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실증적 관찰을 통한 이미지의 실재성은 현대시에서 ‘상상의 가치’를 높이는 데 힘이 되고 있으며, 미래지향의 가치를 창조하는 동력을 공급고 있다고 생각된다. 는 상상력의 확대와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라는 면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상상의 시학과 맥을 같이 한다.      4. 그가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 들은 어떤 상상력을 가진 세대이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기성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이슈가 ‘창조적 상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2007년 2월 16일자 기사에는 2007년 주요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 주제가 ‘창조교육’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 신제품 만들기다. 그 제품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한 것이어야 한다. 제품은 실제 물건일 수도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제도나 시장ㆍ금융상품ㆍ마케팅 아이디어도 포함된다고 한다. 이런 미래지향적 연수의 결과물 중에서 '아이-라이크(Eye-Like)‘라는 제품이 있다. 콘택트렌즈처럼 이 제품을 눈에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한다. 집에 들어와 아이라이크를 빼내 별도 플레이어(재생기)에 장착하면, 그날 일상에서 본 모든 영상이 아이라이크에 담겨 있다. 플레이어를 통하면 그날 하루 일과가 그대로 재생된다. 눈에 끼는 캠코더를 연상케 하는 제품이다.'루미트리(Lumi-Tree)'란 제품도 이와 같다. 반딧불이의 발광 DNA를 식물의 DNA와 합성해 나무나 꽃의 잎(또는 줄기)에서 발광물질을 발산하게 한다. 식물 자체에서 나오는 빛으로 가로등을 대체할 수 있다. 이런 상상의 제품은 미래 시장을 향한 제품이다. 과거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가상세계의 현실화에 도전하는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꾸는 꿈은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 세계 속에서도 존재하는 꿈이라는 점에서 의 꿈과 같다. 따라서 현대시의 전위적인 실험시도 그들의 신제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감성과 상상력의 조화와 확대로 새로운 시의 원천이 되는 아이템을 찾아내는 일이다. 상상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모태가 된다. 그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지만 실재(실상)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실제적인 이해타산과 인과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이미지’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심리적 이미지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적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현대시에서 이미지를 ‘심상(心象)’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미지의 범위를 좁힌 점은 있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단어로 존재성을 갖는다. 그 심리적 이미지는 오랜 옛날부터 예술의 동력이 되어서 사람들을 움직여왔지만 실상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이미지의 비중이 커지고 비약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현대시에서 상상력의 확대를 추구하는 는 가상세계를 포함한 인간의 심리적 이미지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한다. 그 변화 속에 디지털 시대에 시가 존재하는 방식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6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심상운 댓글:  조회:769  추천:0  2019-03-01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                     -------문제 시집과 시와 시론을 중심으로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     현대시의 도전 양상은 무엇보다도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시인들의 자세와 젊은 의식에서 발견된다. 시의 숙명은 언어의 한계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갖기 때문에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고 도전하고 변화를 꿈꾸는 시인들의 의식은 그 자체가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면서 새로운 현대시를 낳는 모태가 되어왔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현대시의 역사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의 박용철・ 김영랑 등의 순수시 운동이나, 이상李箱의 심층심리와 초현실주의, 김기림 ・정지용의 모더니즘 시운동 등은 외국의 문예사조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과 당대의 현실을 외면한 것을 지적하여 비판할 수 있지만, 한국 현대시의 준거를 마련하고 시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공적을 남긴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시에 대한 개념을 확대시켜 현재까지 한국 현대시의 다양한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이때부터 시작된 한국 현대시의 회화성과 내면의식의 표현, 사상의 감각화 등은 전통적인 서정시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서 서정시의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IT, DIGTAL, DNA 등이 주도하는 빠른 변화의 21세기에도 20세기의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의 방법으로 인간과 자연과 생명의 문제에 대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지각知覺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사물인식事物認識과 표현기법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시론과 시집과 시편들을 중심으로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을 예시하고 새로운 시의 모습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밖에도 한국 전통적 서정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샤머니즘 계열의 시인들과 시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서정시인들의 시편들. 언어의 감각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 풍자나 역설, 사상의 감각화를 중시한 주지시. 사상이나 메시지 전달을 강조하는 관념시. 언어의 유희적 기능을 내세우는 초현실적인 시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국 현대시의 시편들의 모습을 나름대로 살피면서 변화의 징후를 발견해보려고 한다.   먼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21세기 시에 대한 대안으로 문덕수가 제시하는 사물시事物詩에 관한 시론이다. 문덕수는 「오늘의 시인 총서- 문덕수시 99선」의 후기 시론에서 “21세기에는 언어 예술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어야한다”고 전제하면서, 라는 새로운 아이템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국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원로시인이 젊은 시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끊임없는 탐색의 정신에서 솟아나는 사고思考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다.   두 번째는, 현대의 언어는 인간의 존재 상황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인간의 사유思惟를 담고 있는 언어는 지식知識의 틀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그것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가 갖고 태어난 것을 얼마나 잘 담고 있는가, 하는 언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바탕으로 하면서, 오진현(필명 오남구) 시인을 중심으로 IT 시대에 고뇌하고 도전하는 일군一群의 젊은 시인들이 벌이고 있는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이다. 오진현은 90년대 중반에 탈관념의 시적 방법론을 제시한 이후 2002년에 과감하게 디지털리즘을 선언하고, 2년 만에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를 시발점으로 하는 「디지털리즘 선언」 3집(2004, 9, 11)을 내놓고 있어서 그 열정과 힘이 더욱 강하게 감지된다.    세 번째는 산업사회의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의 존재를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는 환경문제에 대응하여 생태시(녹색시, 환경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군一群의 시인들도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보여주고 있는 건강한 시인들로 분류된다. 신진, 송용구 등 이 분야의 시인들은 시작詩作에서 방법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있어서 현실 참여시의 폭을 넓히고 그 분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시운동은 모두 2004년 한국 현대시에 젊고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어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변화의 시대에 과거의 틀에 안주하는 시인과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며 새로운 시를 꿈꾸는 시인들을 구분하고 그들의 시사적 위치를 가늠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2. 21세기 새로운 시의 모색       가. 사실과 생명과 현장 체험을 중시하는 사물시事物詩      문덕수는 「오늘의 시인 총서- 문덕수시 99선」( 2004,7,5)의 후기 시론 에서 21세기 시의 키워드로 “사실, 생명, 현장”이라는 세 가지 전제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DIGITAL, DNA, DMZ”의 공통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아닌 사물事物이야 말로 21세기 시의 모든 문제를 내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중적 리얼리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시학'으로 심화된 김지하의 시론, 이상李箱의 심층심리를 기점으로 출발한 탈관념의 실험, 에콜로지즘에 의한 녹색시학의 시도, 그리고 분단현장의 새로운 관찰과 전망 등은 모두 적나라한 사물의 실제에 대한 직접적 체험에서의 출발로 볼 수 있다.'사실''생명''현장'이라는 전제를 일관하는 밑바닥에는 '사물事物'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는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찾고자 하는 시인들의 오랜 방황의 길목에서의 불가피한 만남이다. 21세기 시는 언어 이전 또는 모든 사유를 벗어난 사물 그 자체의 날것에서 출발한다. 21세기의 시는 모더니즘의 모든 언어주의(특히 언어유희)를 초극하고 내면세계와 외면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그대로의 적나라한 '사물'에서 새로운 시의 원점(제로지점)을 찾으며, 시의 내재적 특징과 지향적 특징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 속에는 모더니즘의 언어주의(언어유희, 언어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허구성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라는 언어의 숙명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해보고자 하는 시인의 치열한 도전의식이 들어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시인의 주관적인 감성이나 사상,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의 본질과 만나는 방법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또 시속에서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인내심과 내공內空의 힘을 드러내게 하여 시를 도道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려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는 사물시의 특성을 안고 있는 시다. 두 편의 시를 살펴보자. 이솔의 시집 「수자직繻子織으로 짜기」(2003, 10, 30)에서 사물시의 구체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큰집 마루에 앉아서 꽈리를 분다/아랫입술에 구멍을 대고 부풀린 다음 윗니로 살짝 누른다/뽀르륵 꽈리소리에 빠져서 자꾸 불어댄다//햇빛이 가득한 큰집 마루에 혼자 앉아 꽈리를 분다/원추형의 치마를 들치면 동그란 꽈리가 매달려 있다/아주 조심스럽게 만져가며 말랑말랑하게 만든다/심지가 만져지고 씨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꼭지를 살살돌리면서 천천히 심지를 뺀다/바람을 불어 넣고 햇빛을 담으니 동동 뜰 것 같다//꽈리 속에는 소리가 많다/입을 오므리고 불면 개울물이 굴러 흐른다/돌틈으로 비비대며 흐르는 개울물소리/바람을 잔뜩 부풀리고 서서히 불면 굴렁쇠소리가 난다/맨발로 마당을 빙빙 돌며 굴리던 둥근소리/입을 옆으로 하고 누르듯이 불면/칭얼대는 아기소리가 난다/돌사진 한번 찍어보지 못한 아기/입안 가득히 흐르고 구르는 소리//큰집 마루기둥에 기대앉아/꽈리를 부는 일은 지치지도 않는다//  -----------이솔 전문    이솔의 시에는 사물을 직접 보고 만지고 체험하는 시인의 독특한 사물인식의 양식이 보인다. 이러한 사물인식의 방법은 사실성과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언어 이전의 사물세계에 접근시키고 있다. 그래서 시를 모더니즘의 언어주의(특히 언어유희)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시는 또 사물시에서 지향하는 순수직관의 방법도 보여주고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언어감각을 감지하게 한다. 최진연의 「여름시편․4-소나기」에서도 사물시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해열제를 먹고 누워서 듣는 이웃집의 피아노소리/갈매기한두 마리 끼룩거리며 날고 있을뿐/아직도 비어 있는 바다가 보임./시골에도 비가 온다는 조카의 고추밭 고추들처럼/얼굴이 환해지는 아내/방안에서도 비를 맞는 행운 목 잎들이 길게 늘어져 있음./비를 받아 먹느라 쳐들었던 그간에 마른 얼굴의 꽃들/보나마나 이젠 고개 숙이고 있을 것임./해열제를 먹은 내 몸에서도 소낙비는 쏟아지고/자면서도 나무들 지절거리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음.//  ---최진연 「여름시편․4-소나기」 전문    이 시에서는 시인과 사물과의 관계가 '사물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솔 시인의 시편들은 시인의 위치가 중립적인데 비해 이 시는 시인이 사물 쪽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내면(혼)까지 드러내려고 한다. 사물이 시의 원점(제로지점)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시인이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사물과 만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솔, 최진연의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시의 모습은 문덕수가 제시하고 추구하는 사물시의 한 부분이다. 언어 이전의 사물인식은 “DIGITAL, DNA, DMZ”의 시편에 내재된 공통개념이다. 모더니즘의 언어주의(언어유희, 언어 이미지)와 관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사실과 생명과 현장 체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운동으로서의 '사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나, 디지털리즘의 선언과 디지털리즘의 시    오진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디지털리즘 시운동은 사물시의 연장선상에서 더 구체화되고 세밀화 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사실, 생명, 현장”이라는 사물시가 지향하는 전제前提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모더니즘의 언어유희, 언어 이미지를 포함하는 다른 측면을 실험시의 형태로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리즘」 1집(2003,3, 15)에서 선언한 디지털리즘의 핵심 내용을 인용해보면, “지금까지 아날로그 시대의 시가 '기술記述' 또는 '자동기술自動記述 '하는 것이라면, 미래의 디지털 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 念寫'또는 '찍는다'는 행위로 구분 짓기도 한다. 그래서 ”인체人體의 신비전神秘展“에서 보듯 '진열된 세계'의 시신屍身을 종으로 갈라놓거나 횡으로 갈라놓아 진실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그런 현란한 색깔의 무늬를 보고 황홀해 하는 '디지털리즘'을 실험하였다. 마치 이것은 현미경으로 보는 '생명의 절편切片'으로서 일찍이 초현실주의 작가 부르통이 몸에 유리관을 끼워서 내장을 들여다보았던 '상상의 세계'가 실제 시신의 절편을 통해서 충격적으로 직접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선언문의 내용을 찬찬히 짚어보면 디지털리즘의 표현방식은 염사念寫'또는 '찍는다'는 행위이고, 충격적인 사실을 직접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여주는 것은'생명의 절편切片'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시의 전제 조건 “사실, 생명, 현장”을 구체화한 것으로 사물시의 공통 개념에 부합된다. 그런데 “현란한 색깔의 무늬를 보고 황홀해 하는'디지털리즘'”이라는 말에서는 언어 이미지나 언어유희의의 세계가 발견된다. 이것은 사물시가 벗어나고자 하는 모더니즘의 언어주의 세계와는 다르지만 디지털리즘의 언어유희와 언어감각의 모양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언어 이미지, 언어유희, 찍어서 보여주기의 방법에서 디지털리즘은 사물시와 별개의 시로 나누어 진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단순히 읽히는 시가 아닌 사실 또는 현상을 보여주는 시, 언어 그림의 시이면서 시인의 내면적 의식을 떠올리는 시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아침바다, 나의 첫 말言들이 꽃과 섹스를 시작한다./ 오늘/ 「미역국」 「미끄러졌다」는 탈脫의 이미지 미끄러지기/ 탈관념脫觀念이, 해日에서 「꽃」 꽃에서 「춤」으로 미끄러지기, 유쾌히 말이 미끄러진다./--수평선에 이쁜 눈썹 같은 민족이란 언어가 기우뚱하다. (단, 민모 또는 민족시인*이 내말을 못 알아/ 들어도 어쩔 수 없다.)/창가에서 언어와 꽃의 고독한 섹스,이미지 미끄러지기. 힘차게 꽃대 뽑아올리고 있는 제주 한란寒蘭, 뚝 뚝 피멍울이 져버리는 한란寒蘭, 순백이 일순간 흔들리면서, 오르르르...... . 전 신경이 떤다./ 꽃아,/ 달 하나 반짝이며 떨어진다/천 개 만 개 별들이 쏟아진다/간밤에 맺힌/ 이슬 한 방울 선한 자식듣,/모어母語의 첫 언어 아-.아-.                              ---오남구 < 해맞이 첫 언어- 디지털리즘 ①> 전문   * 민족시인:큰 고정관념을 상징. 참고로 나는 신(神)을 고정관념의 대표선수로 노래한 적이 있음      이 시는 「디지털리즘」 1집에 수록된 첫 실험시다. 이 시에서 먼저 발견되는 것은 “-시작한다, -미끄러지기, -미끄러진다 , -신경이 떤다, -쏟아진다” 등의 현재형 종결어미가 보여주고 있는 어떤 사실(현상)의 순간적 변화다. 의식의 흐름이 아닌 의식의 깜박임(단절과 이어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 시계의 깜박이는 영상과 흡사하다. 여기엔 지나간 사실은 순간순간 지워지고 현재의 사실만 보인다. 모더니즘의 언어유희, 언어 이미지와는 다른 디지털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언어유희, 언어감각이다. “연속적 흐름”이라는 아날로그 세계의 개념을 넘어서 시간時間이 아닌 시각時刻이 지배하는 디지털 세계의 현상이 담겨있다. 첫 행, 에서는 “해맞이 첫 언어”의 신선한 감각적 이미지가, < 「미역국」 「미끄러졌다」는 탈脫의 이미지>에서는 탈관념 언어유희의 한 부분이 보인다. 한 언어로부터 연상되는 이미지가 해→꽃→춤으로 이어지고, 이'이미지 미끄러지기'는 제주 한란寒蘭→꽃→달→별→이슬방울→모어母語의 첫 언어 아- 아-로 맺어지는데, 어떤 의미나 관념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독자는 관념에서 해방되어 시의 언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시의 전개는 순수하게 시인의 내면적인 염사念寫의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디지털리즘 선언」 2집(2003,12,15)에서 시 한 편을 또 읽어보자.    비,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편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닥팔닥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남구 「부드러움의 단상」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디지털리즘의 핵심은 대상(사물)을 접촉할 때 관념을 배제하고 대상(사물) 그 자체에 의식의 촉수를 넣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은 의식의 집중에 전념해야하고 의식의 힘으로 건저올린 사물(대상)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순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이 때 대상에 대한 표현 방법을 염사念寫와 접사接寫로 나누고 있는데, 염사는 내적인 의식의 흐름을 포착하여 순간적으로 사진을 찍듯이 표현하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적인 대상을 순간적 감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는 방법이다. 그래서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사진을 찍는 듯한 언어표현의 방법을 현대과학의 용어인 디지털의 개념에 융합시켜 만들어 낸 “디지털리즘 시”라는 용어가 새로운 문학 언어로 성립된 것이다.  이 디지털리즘의 시론은 탈관념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과는 다르다. 무의미시는 대상이 없이 언어를 유희적으로 사용하여 만들어낸 단순한 언어 이미지인데 반해 디지털리즘 시는 눈에 보이는 대상(또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상)을 어떻게 포착하여 표현하느냐 하는, 대상의 표현 방법에 관한 시론이다. 따라서 이 시론은 어떤 관념의 표현을 위해 사용되는 비유적인 이미지의 기법과도 다르다. 보통의 시들이 의식→대상→관념→ 비유적인 언어(이미지)→의미의 표현이라는 방식인데 반해 디지털리즘의 방법론은 의식→대상→이미지다. 이것을 순수 직관적 표현이라고 한다. 이 직관적 표현은 불교의 선시禪詩와도 차이가 있다. 선시는 하나의 분명한 관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리즘의 시에는 어떤 뚜렷한 의미(관념, 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의식→대상→이미지로서 최종적인 것은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독자의 판단과 해석에 의해 재창조되는 소재로 탄생한다. 그래서 디지털리즘 시는 독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맡기는 시, 즉 독자참여의 시로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리즘의 시는 독자들에게 기존의 시와는 전혀 다른 경험과 맛을 느끼게 해준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또 '사진 찍기의 기법'이라는 측면에서 시인에게 종합적인 사고와 예술적인 다양한 기법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디지털리즘의 시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처럼 TV화면에 영상화 될 수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디지털리즘은 현대적인 감각과 시대의 조류에 잘 어울리는 시론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진 찍기’의 기법이 안고 있는 가벼움과 차가움(비인간적인 면)은 문제로 남는다. 디지털리즘 시의 종결어미가 대부분 현재형 이라는 점이 그런 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 복잡다기한 의식과 관념, 인간정서의 은은한 맛, 강렬한 감정 등을 표현하는 데에는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이 오히려 특징으로 남는다. 남과 다른 면이 있을 때 이것이 장점이 된다.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은 현대와 미래사회에서 요구하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을 내포하고 있어서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리즘선언」3집(2004,9,11)에 실려 있는 박유라, 송시월, 이낙봉, 심언주, 김서은, 이인선, 류기봉, 김병휘, 박햇살, 고종목 등 동인들의 시편들이 풍기는 디지털리즘의 참신한 감각과 독특한 표현양식은 실험시의 범위를 넘어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한 유파流派를 형성할 수있음을 보여준다. 그 중 한 편의 작품을 읽어보자.    아침, 나무사이/은색 자전거가 싱싱하게 지나간다/파란 산소 초록을 흘리며 간다/바짝, 4차선 쪽으로 촘촘히 걸어나오는 햇빛/물오른 캔버스를 한획 한획 푸르게 덪칠하며 걸어온다/초고층 아파트에서 졸고 있던 낮달이/슬며시 횡단 보도를 건너/하늘 파란 울음 한 조각 옆구리에 끼고서/빠르게 차창 안으로 날아든다./-누군가 내 핸드폰에 보내온/초록 문자 멧세지/전철안이 푸릇푸릇하다./누-구-세-요-?//---김서은 전문     김서은의 은 어느 여름날 전철 안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한 풍경(사물)이다. 이 영상은 한 순간에 마음(염사)과 눈(접사)을 통과하면서 어떤 관념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하고 선명한 형태의 감각(디지털 감각)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싱그러운 향기까지 풍기면서.    다. 현실 참여와  생명 사랑의 생태시      생태시의 바탕에는 생명의 근본 사상이 깊이 간직되어 있다. 그래서 환경시, 녹색시 등 인간의 환경파괴를 고발하고 무분별한 인공人工과 비자연성非自然性, 공해에 저항하는 사회참여의 시에서 출발한 생태시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생명의 근본 세계를 포함하는 보다 상승된 세계를 지향한다. 여기에는 인간을 위한 환경보존만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생태계의 문제가 들어있다. 그래서 생태주의 시는 환경시보다 더 적극적으로 생명세계를 지향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생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시로 변화하고 있다. 이것이 환경시, 녹색시와 생태시의 차이점이다.   생태시라는 용어는 생태학生態學과 시의 합성어로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래서 송용구는 “자연환경과 생명체의 질적 변화를 생태학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 및 생명의식에 근거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고발하는 현대시의 한 장르”라고 생태시를 정의하고 있다. 그가 소개한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송용구 번역)는 파괴된 생태계의 문제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저항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 사화집에 들어 있는 시편들은 주제, 내용, 관심에서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21세기 한국의 생태시에 많은 영향과 자극을 주고 있다. 신진의 시집 「녹색엽서」(2002)도 산업화이후 파괴되고 훼손된 한국의 환경문제에 정면 대응하는 생태시로 평가 받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한 「시문학」의 생태주의・생명주의 시운동, 「문학사상」,「현대시학」,「녹색평론」 등의 생태시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생태시의 위치를 확고하게 정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시정신 운동으로 한 단계 높이고 있다. 2000년 10월 호 「시문학」에 발표된 의 「환경선언문」은 인간과 예술과 환경의 인과관계를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고 황폐화 되는 환경과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정신의 황폐화와 정서의 궁핍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 인간과 자연을 똑같이 존중하는 생명사랑의 시정신을 천명闡明하고 있는데, 이 생명사랑의 시정신은 21세기 한국 생태시의 핵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생태시의 언어에도 문덕수의 사물시가 전제로 내세운 “사실, 생명, 현장”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초여름 아침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져 초록숲을 뒤흔든다// (황금꼬리를 낚아야겠다)//산수유 골진 잎사귀와 산벚꽃나무 팔랑팔랑 까불어대는 숨구멍 사이에다 초록그물을 친다 그물코에, 하루살이 작은 몸뚱이가 걸렸다//_ 작다고 얕보지마!// 이래뵈두 천일동안 물속에 잠겼다가 스물다섯번이나 허물을 벗은 후에 태어난 생이야/ 어디, 하찮고 떫은 생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그 누가/여름날 하루해가 너무 길다고 했던가?           -------- 이춘하 전문 (시문학, 2004, 8)     이춘하 시인의 는 파괴된 생태계의 문제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신음하며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저항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기존의 환경시, 생태시와는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언어 이미지나, 주장, 고발, 당위적인 관념 등에서 벗어나 생태계의 모습을 세밀히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독자들에게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잘 것 없는 미물이지만 천일동안 물속에 잠겼다가 스물다섯번이나 허물을 벗은 후에 태어난 하루살이의 생. 그 하루살이를 포획하는 초록그물. 이런 생태계의 사슬 관계를 시인의 미시적인 눈이 자연스럽게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생명존중, 생명평등의 열린 마음이 포옹抱擁한 생명세계의 현장이다. 이 말은 하루살이의 항변만이 아닌 시인의 항변이다. 이 세상에는 가치 없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명존중 의식. 여기서 새로운 생태시 모습이 발견된다. 이것이 21세기 한국 생태시의 미래를 예시해 주는 단서라고 한다면 지나친 예단일지도 모르지만.    라. 변화의 징후徵候를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    진헌성의 연작시(시문학, 2004,9)은 물성物性이 본래 가지고 있는 비의를 우주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시화詩化하고 있다. 신神보다 앞선 물질계의 본성을 직관적인 감성과 과학적인 추리로 통찰하고 있다. 관념적인 면이 강하지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우주적 신비세계를 추적하는 시인의 의지와 상상력이 뜨겁게 감지된다.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물성의 본질을 이만큼 추적하고 드러낸 시는 아직까지 없었다고 생각된다. 문덕수의 '사물시'시론과 원초적인 면에서 조화調和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샤머니즘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 박재릉은 시집「삭발하고 분바르고」(2002) 이후에도 신작시 특집 등을 통해 활발하게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 (시문학, 2004,9)에서, 아직도 시속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에너지는 여전하지만, 무속巫俗 세계의 뜨거운 인간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탈속脫俗과 관조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을 넘어선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바다같이 출렁이는 생명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또 풍자와 역설로 관념의 속살을 드러내며 흥겨운 시의 판을 벌이고 있는 안수환의 시집 「하강시편」(2004,2)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감성과 관념 너머의 세계. 그리고 언어 놀이도 새로운 변화의 징후를 감지하게 한다.   이 밖에도 내적(정신적) 시선의 이동으로 시의 의미(상징)를 확장하고 놀라움을 주는 박찬일의「모자나무」, 독자들을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의 언어를 즐기게 하는 양준호의 「포크」, 디지털리즘의 언어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내면찍기를 보여주고 있는 박유라의 「겨울 X-Ray」, 봄에 산에서 꽃이 피는 평범한 사실을 감각적이고 우주적인 발상의 이미지로 순간적인 언어자극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는 이종현의 「우주가 하혈하는 희한한 풍경」, 사물과 사물의 연결을 통한 비유 속에(허물어진 �달의 그림자, 쭈그러져 누운 단화 등) 자신의 꿈과 현실을 함축하고 이를 “다시 피는 들꽃”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송문헌의 「소리의 넋-자화상」, 대상(나무)과 시인의 관계가 일체가 되어서 시인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만이 감지되는 정유준의 시집「나무의 명상」(2004,6,30) 속에 들어 있는 시편들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개성적인 언어기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로 평가된다.      3. 맺는 글     이 글에서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융합하는 문덕수의 '사물시', 탈관념을 바탕으로 사실과 현상을 순간적인 생각의 속도에 실어 사진 찍듯 찍어서 보여주는 오진현의 '디지털리즘의 시론과 실험시,'사회참여의 저항성에서 출발하여'생명사랑으로 변화하는 생태시', 그 밖에 개성적인 언어 기법과 변화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시들을 대상으로 하여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변모를 모색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이유는 1년간 상재된 시집을 열거하고 사족蛇足을 붙이는 일보다는 젊고 발랄한 정신을 뿜어내는 시인들의 참신한 의식과 언어를 추적하면서 새로움을 모색해보는 것이 더 즐겁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법의 변화에는 생각의 변화가 수반隨伴되고 생각의 변화는 새로운 기법을 탄생시킨다. 이 둘의 관계는 인과因果를 만들면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사실・생명・ 현장을 전제로 하는 사물시, 디지털리즘 시, 생태시 등의 시들은 현대인들의 변화하는 생활과 사고思考와 환경과 행동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함으로써 당위성當爲性과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사실(사물)의 본질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감각과 순간적인 변화를 즐기는 현대인들의 생활과 사고와 감성과 행동양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사물시와 디지털리즘의 시는 20세기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통합하는 21세기 새로운 현대시의 모델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시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내면의식의 서정시나 풍자나 역설, 사상의 감각화를 중시하는 주지시나 사상이나 메시지 전달을 강조하는 관념시 등 다양한 모습의 현대시들도 그 존재가치를 지속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21세기의 시대적 흐름을 수용受容하는 새로운 시로 변모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의 한국 현대시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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