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시 100선 <시향> 2007년 봄호 (25)에 게재
*시사랑 문예대학 학술 세미나 (2003,8,13)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
-최동호 시인의 <디지털 시대와 시의 독자들>에 대한 반론
심 상 운
1.
최동호 시인은 <시사랑문예대학>에서 주관한 학술세미나[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2003.8.13)의 기조발표문 <디지털 시대와 시의 독자들>에서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 출현한다면 대중적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폭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21세기 영상성의 시대에 오히려 서양의 고대나 중세에 활동하던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다리는 이유는 일부시인의 대중적인 인기를 빌어서 현대시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시의 내적 방법론보다는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populism)을 선택한 그가 현대시의 미래에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현대시의 시론을 탐색해야 할 입장의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내세우는 가설에는 그의 실증적 체험이 들어있지 않고 막연한 예언 같은 추상성만 들어 있어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는 그 가설의 근거를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김소월이 민요 시인으로 불리면서(본인은 그 명칭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20세기적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김소월과 대극점에 이상의 시가 있고, 김수영이나 김춘수 같은 시인은 관념의 세계를 파고들어 그 나름의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앞으로 노래와 결합되지 않는 시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견된다.” 라고 한국현대 시사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어디에도 오늘의 현실에 입각한 실증적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시대의 변화와 다양한 취향의 독자들을 외면하고 21세기에도 김소월과 같은 민요조의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백남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국 현대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1980년대 한국시단을 휩쓸고 간 베스트셀러의 열풍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베스트셀러의 시집들이 지금도 인기가 있고 문학적 가치가 있는 시집으로 존재하는가를 한번이라도 냉정하게 검토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 하는 방법을 디지털 시대의 매체의 기능에서 찾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여러 매체들을 종합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이 시의 쟝르적 특징이고, 이를 살려 시와 음악, 시와 무용 등이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시와 음악, 시와 무용의 결합을 현대시의 한 방법“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의 연구”라는 말을 통해서 음악과 무용과 결합할 수 있는 시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의 결합방식에는 현대시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현대시의 언어를 종합예술의 형태 속에 넣어서 음악이나 무용의 힘을 이용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다. 이때 시가 음악이나 무용에 붙어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가를 숙고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그러면 먼저 그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돌파구로 내세우고 있는 그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이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 대안인지 검토해보자. 그가 거론한 음유시인은 중세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각지에서 봉건 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던 시인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광장이나 길거리에서 오랜 동안 전승되어 오는 서사시를 간단한 악기의 운율에 실어서 대중들에게 들려주던 형태와 같은 시인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본뜬 현대의 음유시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공원이나, 카페나, 다방에서 자기가 지은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거나 낭송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시인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구조 속에서 음유시인의 일반적인 형태는 시인이 쓴 시를 작곡가의 곡에 붙여서 가수가 노래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에 곡을 붙여서 대중들에게 가수가 들려주는 것처럼. 그럼 그때 '음유시인'은 누가되는 것일까. 시인일까? 작곡가일까? 가수일까? 이런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세밀하게 구상되어 있지 않은 채,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는 시를 말하기 위해서 ‘음유시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그의 <음유시인론>은 매우 즉흥적이고 아마추어적 발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현대는 그가 말한 대로 디지털의 여러 매체를 종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시인이 대중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활자매체’ 한 가지 만은 아니다. 활자매체에 영상 이미지를 넣고 음악과 시인의 음성을 담아서 컴퓨터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서 독자들과 만날 수 있다. 만약 그가 인터넷 가상공간의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음유시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라면 그의 <음유시인론>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하지만 현대성을 획득하는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다음은 두 번째로 음유시를 위한 시의 연구가 현대시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는 시론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검토해보자. 음유시가 되기 위해서는 현대시가 대중가사의 노랫말같이 읽고 노래하기에 적합한 운율적인 언어로 조직되어야 하고 시인의 정서를 대중들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탄형의 구문이 되어야 한다. 고려시대의 속요에도 음악성을 나타내는 후렴구가 들어 있고, 시조에도 4음보와 3,4 4,4 조의 운율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가사에도 3,4, 4,4 조의 가락이 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도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이런 비슷한 운율을 현대시에 넣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런 시가 진정으로 대중과 가까워지는 현대시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이때 현대시와 대중가사와의 거리는 또 어떤 기준으로 설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제까지 쌓아온 한국 현대시의 언어적 성과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그의 <음유시인론>인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만 든다.
그러나 시와 음악과의 결합은 근래에 산문화 되고 있는 현대시의 ‘음악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과 함께 현대시의 새로운 운동으로, 일부의 시인들이 독자(관객)와 호흡을 함께하는 <공연시>나 <퍼포먼스>의 시가 매스컴의 외면으로 대중화에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디지털 시대의 시와 독자>라는 주제를 논하고, 음유시인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편향된 시각이나 좁은 안목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게 한다.
2.
이상으로 디지털 시대의 시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최동호 시인의 음유시인의 등장에 대한 검토를 나름대로 해보았다. 다음은 왜 최 시인이 디지털의 시대에 사는 세대들이 선호하는 영상 이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짚어보자. 그는 <디지털 시대와 시의 독자들>의 도입부에서 갑작스런 사이버 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하면서 사이버 세계에 의한 독서 인구의 감소를 지적하고 있다. 이 독서 인구의 감소 문제가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온 원인이 된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에서 ‘문학의 이해’ 수업시간에 경험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박목월의 시 ‘청(靑)노루’를 다루면서 우선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반응에 놀라게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론이 붕괴되고 해체시와 정신주의가 충돌하던 90년대 초반에 이 시에 대해 학생들은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계가 이미 자신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이 시에 그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청노루’ 전문
60년대 이후 회화적인 구도를 가진 자연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거론되어온 박목월의 ‘청노루’가 젊은 세대들에게 이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필자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시들은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이거나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작품들이었다. 물론 많은 시인들에 의해 전통적인 서정시가 쓰여지고 있었지만 그런 류의 시들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작품으로 치부되는 듯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학생들에게 박목월의 ‘청노루’를 다시 읽혀보고, 종전과 유사한 반응을 기대했었는데, 의외로 2000년대 초의 학생들은 이 시에서 그들 나름의 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크게 부정될 줄 알았던 것과 정반대의 반응에서 필자는 일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최근의 학생들이 이 작품에 공감을 보인 것은 이미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 흥미를 느끼는 그들이 ‘청노루’ 정도의 표현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그만큼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
최동호 시인의 현실진단은 정확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진단에 대한 그의 해석은 한마디로 부정확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인터넷의 가상세계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거기에 대응하는 시적 방법론을 새롭게 찾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해답이 되는 시적 방법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 대한 그의 진단 속에 들어있었다. 1990년대 초에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던, ‘청노루’가 2000년대 이후의 독자들에게 읽히는 이유가 그 해답의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는 학생들의 반응 속에 정답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 까닭은 세대 차이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이 활짝 열려 있지 않았다는데, 근본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시들은 현실에 대응하는 참여시로서의 가치는 있었지만, 시의 상상력을 추구하는 예술적인 본령에서는 멀리 떨어진 시의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2000년대의 학생들은 직감한 것이다. 컴퓨터 인터넷을 생활의 일부로 삼는 그들은 시에서 의미보다 영상성(이미지)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가스통 바스라르와 같이 철학적 명상에는 잠겨보지 않았겠지만 ‘가상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서 현실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대시에 대한 이런 감각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얼마나 건전하고 바른 접근인가 거듭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이 단지 사이버의 가상세계에 빠져서 독서를 등한시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감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부정적으로만 몰아간 것이 과연 현대시의 강의 현장에서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원하는 방향이든 원하지 않는 방향이든 필연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 시대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의 표현대로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그들에게 그들이 선호할 수 없는 시만 보여주고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고집일 뿐”이라는 말을 그에게 되돌릴 수밖에 없다.
3.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영상 언어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운동은 아날로그와 대칭되는 디지털이라는 관점에서 ‘기계의 시’ ‘반인간적인 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외면하는 시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디지털 시>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의 그런 자세는 현대의 물질주의적 상황에서 인간의 정서를 옹호하고 시의 생명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태도라는 점에서 공감이 가는 행위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디지털 시>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이 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어처구니없는 태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디지털 시>도 이제까지 현대시를 이끌어온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와 같이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 가상세계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존재 이유가 첫째,‘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시의 서정성을 근본적인 바탕으로 한다는 것. 둘째, ‘모더니즘의 절제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 슈르의 반지성적인 ‘상상의 확대’,‘자유연상’, ‘창조적인 이미지에의 유혹’은 물론 리얼리즘의 ‘현장성’ 까지 모두 포함하는 시의 큰 그릇이라는 것. 셋째,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직관을 통한 염사와 접사’,‘무의미(탈관념)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의 공간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 선결과제가 된다. 그것은 현대시의 문제의 해결 방법을 외부가 아닌 현대시의 언어내부에서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적 지향점을 안고 있는 <디지털 시>는 과학적인 사실주의(실증주의)도 중시하지만 인간 내면의 심리적 현상에도 깊이 있는 시선을 던진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언어의 의미’에서 탈출하여 ‘이미지의 세계’를 시의 근원으로 삼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슬라르는 <순간의 시학>과 <불의 시학>에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가스통 바슬라르의 <순간의 시학>과 <불의 시학>을 강의 하는 김용희는 그의 강의 노트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요약․정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가스통 바슬라르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은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고 하는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학생들의 시적 인식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실제로 행하여졌던 이미지의 실재성을 인정한 것일 뿐, 그가 새로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실증적 관찰을 통한 이미지의 실재성은 현대시에서 ‘상상의 가치’를 높이는 데 힘이 되고 있으며, 미래지향의 가치를 창조하는 동력을 공급고 있다고 생각된다. <디지털 시>는 상상력의 확대와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라는 면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상상의 시학과 맥을 같이 한다.
4.
그가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 들은 어떤 상상력을 가진 세대이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기성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이슈가 ‘창조적 상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매일경제>2007년 2월 16일자 기사에는 2007년 주요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 주제가 ‘창조교육’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 신제품 만들기다. 그 제품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한 것이어야 한다. 제품은 실제 물건일 수도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제도나 시장ㆍ금융상품ㆍ마케팅 아이디어도 포함된다고 한다. 이런 미래지향적 연수의 결과물 중에서 '아이-라이크(Eye-Like)‘라는 제품이 있다. 콘택트렌즈처럼 이 제품을 눈에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한다. 집에 들어와 아이라이크를 빼내 별도 플레이어(재생기)에 장착하면, 그날 일상에서 본 모든 영상이 아이라이크에 담겨 있다. 플레이어를 통하면 그날 하루 일과가 그대로 재생된다. 눈에 끼는 캠코더를 연상케 하는 제품이다.'루미트리(Lumi-Tree)'란 제품도 이와 같다. 반딧불이의 발광 DNA를 식물의 DNA와 합성해 나무나 꽃의 잎(또는 줄기)에서 발광물질을 발산하게 한다. 식물 자체에서 나오는 빛으로 가로등을 대체할 수 있다. 이런 상상의 제품은 미래 시장을 향한 제품이다. 과거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가상세계의 현실화에 도전하는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꾸는 꿈은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 세계 속에서도 존재하는 꿈이라는 점에서 <디지털 시>의 꿈과 같다. 따라서 현대시의 전위적인 실험시도 그들의 신제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감성과 상상력의 조화와 확대로 새로운 시의 원천이 되는 아이템을 찾아내는 일이다. 상상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모태가 된다. 그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지만 실재(실상)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실제적인 이해타산과 인과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이미지’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심리적 이미지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적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현대시에서 이미지를 ‘심상(心象)’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미지의 범위를 좁힌 점은 있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단어로 존재성을 갖는다. 그 심리적 이미지는 오랜 옛날부터 예술의 동력이 되어서 사람들을 움직여왔지만 실상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이미지의 비중이 커지고 비약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현대시에서 상상력의 확대를 추구하는 <디지털 시>는 가상세계를 포함한 인간의 심리적 이미지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한다. 그 변화 속에 디지털 시대에 시가 존재하는 방식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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