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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시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심상운
2019년 03월 02일 17시 58분  조회:1021  추천:0  작성자: 강려
하이퍼시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
  
  심 상 운
  
                                                                   
  
  
1. 독자와의 소통문제에 대한 해명
  
하이퍼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독자와의 소통이다. 독자들은 논리와 감성을 통한 직접적인 소통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비순차적이고 비논리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골간으로 하는 하이퍼 시의 ‘의미의 불확정성(不確定性)’에 당황하게 된다. 그 근본원인은 현대시의 대부분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의미의 발굴’을 시의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 하이퍼 시는 기존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난 전혀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을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불확정성은 하이퍼시에서 이미지 사이에 인과관계가 직선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서로 굴절되고 단절됨으로써 독자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만 떠다니고 의미의 형성이 분명해지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과 초월, 무한한 상상을 통한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결합과 확장은 기존의 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시의 미개지(未開地)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언어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의식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보다 더 깊고 넓고 모호(模糊)한 무의식(無意識) 속에서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융합된 제3의 세계를 시를 통해 경험하는 것은 독자들의 입장에서 매우 신선하고 새로운 시적 개안(開眼)의 경험이 될 것이다. 
 
다음의 글은 2015년 2월호 <시문학> 월평에서 발췌한 양병호(시인, 전북대 국문과 교수)의 평문(評文)이다. 이 평문을 인용하여 김석규의「저녁 귀가」와 심상운의 시「빛 또는」의 시적구조의 차이와 두 편의 시가 지향하는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줄곧 젖어 있는 일에 이력난 가난은 죄가 아니다
꾸부정한 비애의 어깨 너머로 물드는 잿빛 도시
건너 동네에 어둠이 오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간다
솔기 터진 일상의 피댓줄에 꼬여 사정없이 돌아가버린
허리 아픈 하루도 이렇게 속절없이 저물고 마는 것을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꾸려들고 돌아가는 저녁 변두리
백일장 나가서 장원하고 온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석규, 「저녁 귀가」 전문
  
이 작품은 일상의 시간 특히 저녁 무렵의 시간을 섬세한 묘사를 통해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일상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시상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다. 서정시의 특징인 단일한 정서 혹은 순간적 서정을 압축하여 제시하는 전범을 보인다. 여기서 시간은 시인의 전경화 된 인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배경화 되어 있다. 예컨대 시간은 이 작품의 정서를 얼비쳐주는 배경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화자의 생은 가난하고 피곤하다. 그러나 가난은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죄’가 아님을 확인한다. 이는 가난한 삶에 대한 보호적이며 위안하는 심리이다. 화자가 생활하는 공간 역시 ‘잿빛 도시’로서 우울하고 권태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화자는 이러한 도시 공간에서 우울과 비애에 젖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생활은 “어둠이 오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가”는 상황으로 표상된다. 말하자면 ‘어둠’이 앞장서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가는 암울한 삶의 과정이 은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후반 생략)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심상운, 「빛 또는」 전문
  
이 작품은 시상 전개 혹은 이미지 결합 층위에서 의도적으로 완결성을 방해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대상은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설정 역시 인과성이 나 논리성을 자의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예컨대 임의적이고 의도적으로 의미의 불확정성을 강화하고 있으며, 시상 전개 과정에서도 의도적인 절연을 통해 공소를 배치하고 있다. 우선 시제에서부터 “빛 또는”이라는 불완전한 어구 제시를 통해 미완의 의도성, 여백의 판단정지를 강조하고 있다.
1연은 이 작품의 시간 배경에 대해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시간 표상을 목표하고 있지는 않다. 우선 1행의 ‘검은 옷을 입은 빛’이라는 역설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하여준다. ‘빛’과 ‘검은’은 서로 친밀성이 희박한, 아니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러나 ‘옷’이라는 매개물과 ‘입은’이라는 매개 속성의 개입으로 의미성을 획득한다. 예컨대 ‘빛’은 ‘검은 옷’을 ‘입어서’ 발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빛’이 ‘검은 옷’에 차단 유폐되어 자신의 진실 혹은 본질을 발현하지 못하는 왜곡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그 ‘빛’은 현재 시간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 있다. 이 구절에서 부각되는 의미소는 ‘무표정한’이라는 감정의 노출 억제 상황이다. 또한 ‘매미’라는 사물의 속성이 환기하는 짧은 생애라는 시간성이다. ‘붙어’있는 상황 역시 고정된 상태가 아니어서 위약한 접합성을 드러낸다. 결국 ‘빛’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떨기’시작한다. 따라서 시간 배경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1연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암시적으로 재현한다. 
2연은 ‘개들’의 행위가 집중적으로 중첩되어 표상되고 있다. 개들은 우선 원인을 알 수 없는 ‘성’이 난 상태이다. 하여튼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상태인 것이다. 여전히 개들은 ‘어둠’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그 개들의 지향은 길을 따라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4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나아가고 있다. 동시에 개들은 ‘번쩍이는 빛’을 향해 짖어대고 있다. 이는 어둠 속에서 빛을 거부하는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즉 이 시의 1, 2연은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시간 공간 상황을 부각하고 있다. 
그런데 3연에서는 장면이 급격하여 전환되어 환한 여름의 바닷가로 장소 이동을 한다. 시간은 ‘빛’의 절정기인 여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공간은 해변으로서 완전하게 개방되어 자유로운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시공 속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 인지 대상인 ‘여자들’역시 ‘맨발’과 ‘비키니’차림으로 육체를 완전하게 노출하고 있다. 말하자면 폐쇄되고 차단된 시공 때문에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1,2연과 달리, 3연은 개방되고 자유로운 시공의 특성으로 인하여 밝고 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4연은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의 모습과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화자가 주목하고 있는 인물 ‘남자’를 묘사하고 있는 이 구절에서, ‘흰옷’은 ‘검은 옷’과 ‘장발’은 ‘맨발’과, ‘50대 남자’는 ‘30대 비키니’와 각각 대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실내 즉 임시로 가설된 ‘무대’에서 외부의 ‘하늘’을 향하여 팔을 벌리고 있다. 예컨대 이 남자는 폐쇄 차단된 어둠의 공간에서 무한한 빛의 공간인 ‘하늘’을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주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시상 전개를 의미 부여를 통해 재구축하여 보았다. 이 시는 서로 대립되거나 이질적인 요소 혹은 사물 특성을 자유연상으로 처리함으로써 빛과 어둠의 혼성이 주는 추상적인 감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은 현실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 혹은 심리에 내재한 관념적인 것이다. 이 작품은 독자가 시인 혹은 화자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시적 정조에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 「시간, 관념과 실재 속에 유랑하는」(양병호) 『시문학』 2015년 2월호 <이달의 문제작>에서 발췌 인용
  
김석규의 「저녁 귀가」에 대해 “일상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시상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다. 서정시의 특징인 단일한 정서 혹은 순간적 서정을 압축하여 제시하는 전범을 보인다.”는 평문과 심상운의 「빛 또는」에 대해 ‘의도적으로 완결성의 방해’ ‘의미의 불확정성’ ‘의도적인 절연을 통해 공소의 배치’ ‘몽타주 기법’, ‘시인의 내면심리’, “이 작품은 독자가 시인 혹은 화자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시적 정조에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등의 비평언어는 일반적 서정시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집어낸 것으로 인식된다.
  
김석환 (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은 이런 한국 모더니즘 시의 현상을「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에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는 양립관계의 개념으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 위에 예시한 시를 김석환의 이론에 대입하면 김석규의「저녁 귀가」는 구축적 구조의 시이고, 심상운의 「빛 또는」은 탈구축적인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에서 
 
구축의 시는 유기적 관계로 전체성을 형성 하는 시적 구조를 형성하고, 탈구축 시는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모호한 의미, 암시적이며 다의적이라는 그의 해석은 하이퍼시의 탈구축적 특성의 한 부분을 적시(摘示) 것으로 이해된다. 
  
현대철학에서도 구성(구축)과 해체(탈구축)라는 개념으로 동서양의 철학을 분류하고 있다. 철학자 김형효(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조성택(고려대 교수), 한형조(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이도흠(한양대 교수)과의 <집중 인터뷰>에서 동서양의 철학사를 관통하는 관점에서 철학을 구성주의 철학과 해체철학으로 양립시키고 있다. 구성주의 철학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기반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지배하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는 철학이고 해체철학은 진리를 구성하는 인간주의(人間主義)의 이성을 부정하고 자연 본래의 면목을 드러내고자 하는 철학으로 이해된다. 이런 철학적인 관점은 시의 내용과 주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다음 글은 인터뷰의 일부다.
  
“철학이란 동서고금에 너무 많고 철학사를 보면 너무 복잡해서 진리가 무엇인지 회의가 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철학은 대단히 간단해서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구성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해체철학입니다. 구성주의는 자연의 인간동형론(人間同形論)이죠. 다시 말해, 인간을 설명할 때 자연과 비교하여, 즉 인간만 얘기하면 동어반복에 그치니까 변증법적으로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여서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모든 이성주의(理性主義) 철학과 동양의 주자학(朱子學)을 들 수 있습니다. 구성주의 철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형이하학적인 구성주의로 세상을 어떻게 편리하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그런 의미의 형이하적인 구성주의가 있고, 형이상적인 이성주의가 있는데 도덕형이상학적(道德形而上學的)으로 정의의 입장에서 세상을 재편하겠다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명사에서 보면, 편리의 진리는 자본주의와 직결되고 정의의 진리는 사회주의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지만 철학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둘 다 이성(理性)에 의해서 세상을 구성하고 지배하겠다는 의도에 있어서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해체주의는 바로 이러한 구성주의의 철학적 한계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물론 해체주의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해체주의적 전통이 있었는데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과거 독일의 심미주의 시인들,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대표적이고, 동양은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교(佛敎)가 해체주의를 대변해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해체주의는 인간이 진리를 구성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보편적인 자아(自我)든 이기적인 자아든 간에 인간의 자아에 의해 생각된 진리로 세상을 구성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세상은 이미 여여(如如)하게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무명(無明)에 의해서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괴롭습니다. 세상엔 여여한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무시하고 인간들이 자기중심으로 세상에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더 괴로운 것입니다.” 
 
김형효 교수가 분류한 구성철학과 해체철학에서 구성주의 철학의 유위(有爲)는 현대시의 관념(觀念)에, 해체철학의 무위(無爲)는 현대시의 탈관념(脫觀念)에 이어진다. 
 철학은 시인들에게 사유(思惟)의 나침반역할을 하고 시의 내용과 언어형식에도 관여한다. 독자들도 자기가 읽는 시가 어떤 철학과 연결되느냐 하는 것을 인식할 때 더 흥미롭고 깊은 읽기가 될 것이다. 그래야 구성주의의 상투적인 대중적 서정시, 사상의 권력화를 형성하는 ‘사회적 의식의 시’ 형이하학적 사유의 ‘교훈적인 시’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옹호하는 ‘관념시“의 틀에서 해방될 수 있고, 하이퍼시의 난해성(難解性)이 또 다른 시의 영역을 여는 문(門)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성주의와는 다른  사물성(事物性)의 탈관념의 세계, 모호한 의미와 암시성의 이미지가 떠도는 가상의 공간, 다의적 감각의 이미지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현대시의 심층을 탐색하는 언어 탐험가가 되어 현대시가 제공하는 독특한 정신적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현대음악, 현대회화를 감상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 분야를 집중공부해서 얻는 즐거움과도 같다.
  
 
  
2. 하이퍼시의 탈관념에 대한 해명 
  
관념이 지배하는 시는 시인의 사상, 주장, 감상 등이 노출되는 시다. 이런 시는 시어 사이의 유사성과 논리적 관계로 인해 구축적(構築的)인 기존 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하이퍼시의 가상공간이 만들어 내는 시적 현실과 다의적이고 암시적인 이미지가 떠도는 상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 탈관념의 완강한 고수(固守)는 하이퍼시를 현실과 유리된 언어유희의 시로 몰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필자는 이런 점을 예측하여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53쪽 <디지털시의 조건> ②에서 “디지털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관념에 대한 지나친 배척은 자칫하면 황당성과 미로, 미궁 그 자체에 머무르고 말 확률이 사뭇 크다. 따라서 독자들에게서 외면당할 수 있는 확률도 그만큼 크다.”는 김몽의 견해와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 ㅡ감각하고 사유하는 시」연변 조간신문 <해란강> 2014,6,26) 최진연이「하이퍼시의 이해」에서 제시한 “일체의 관념을 배제한다면 유희성만 남을 수 있으므로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살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가치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모두 수용할 여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은 관념어의 노출과 설명적, 개념정의적(槪念定義的) 언어는 하이퍼시가 중심요소로 삼는 이미지의 형성을 방해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배제되지 않을 수 없다.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결합과 확장을 통해서 시적 정서와 감성과 의미를 암시하는 이미지의 덩어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퍼시의 탈관념은 무관념이 아니라 기존 관념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개념정리도 매우 조심스럽게 수용하게 된다. 
 
 
  
3. 하이퍼시의 비판에 대한 해명
 
새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문화관광부의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기획 프로그램으로 정과리가 주도한 「언어의 새벽」, 2004년 11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최동호‧이성우 등이 구현한 「팬포엠 Fan Poem」 프로그램 제작 프로젝트 등은 하이퍼텍스트의 기법을 시의 창작에 응용(應用)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국현대시의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정부와 민간의 자금으로 시도한 이 작업은 그 기획의도가 시대성에는 부합되었지만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여 시장성에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였으며 작품의 완성도도 미흡해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사이버 공간 속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는 실험이었다는 데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실패의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텍스트(작품)가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보다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에 독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기존의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허물어버리고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는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의 ‘이상적 텍스트’의 개념도 독자들에게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함으로써 독자들의 입장에서 흥미 없는 작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좌절의 환경 속에서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종이에 인쇄된 시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시적 공간을 구현해 보자는 시적 방법론을 제창한 것이 하이퍼시 탄생의 모태가 된 심상운(필자)의 시론 「디지털시의 이해」(2006년 12월『시문학』에 발표)이다. 이 시론에서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탈관념  (사물성의 언어)의 언어들이 디지털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디지털시가 '의미의 예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시의 공간 확장이다. 그것은 한 편의 시 속에 하나만이 아닌 몇 개의 언어단위(이미지)가 결합될 수 있으며, 그 언어단위(단어, 문장)들은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디지털시의 기법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하이퍼시에는 탈관념, 언어의 기호성과 영상성, 가상현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등 디지털시의 원리가 깔려 있다. 디지털시의 모듈은 하이퍼시의 리좀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혁(문학평론가)은「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에서 “문제는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의 ‘통치기계’로서의 일면을 억제하고 그 시스템이 지닌 긍정적인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데에 있으며, 그래서 하이퍼텍스트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그 환경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시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라고 하면서 심상운( 필자)의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에서 내세우는 하이퍼시의 시론을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한국 현대시의 대응 태도’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의 한 예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라는 자신의 시를 들고 있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가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로 되어 있지만 ‘하이퍼시’는 다선구조로 이루어진다면서, 위의 시를 그 예로 들고 있다. 그는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①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② 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③ 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④ 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되었고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의 공간의 시”며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와 관련된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고 한다.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는 나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 시적 화자가 “푸른 야채를 먹는” 방에서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가구들,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모두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이 시는 본능적인 움직임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이 자연풍경, 사회, 실내의 식탁, TV 화면에서 포착되어 ‘다선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각 연은 ‘본능적인 갈구’를 따라 링크되어 ‘하이퍼’하게 연결된다. "
----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이성혁)에서 발췌인용
 
그는 이렇게 심상운(필자)의 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를 하이퍼텍스트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1930년대 김기림의 장시「기상도」와 비교하면서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허를 찌르는 풍자나 위트, 전복적인 표현이 거의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의 시는 그 주제에 속할 수 있는 장면을 누구라도 계속 이어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시가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시는 특이성을 성취하지 못한 범용성만을 보여주고 있어서 독자의 의식에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질적인 이미지들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하이퍼시의 특성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이해와 인식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하이퍼시가 풍자나 위트 전복적인 표현이 가지고 있는 현실참여적인 비판과 이념(理念)의 구축적 시와는 대립되는 탈관념의 언어, 의미의 불확정성, 다의적이고 암시적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탈구축적 시라는 점에서 비교의 잣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가 비판한 ’특이성을 성취하지 못한 범용성‘은 하이퍼시와 독자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현대시의 하이퍼성은 이미 초현실주(超現實主義) 시에서  시도하고 구현하였으며 하이퍼시라고 이름 붙여지지 않은 현대시에서도 구현되고 있다는 그의 지적에 동의한다. 따라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자생(自生)한 하이퍼시는 이미 잠재되어 있는 현대시의 하이퍼성에 의해 이해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일반화되어 한국현대시 담론의 중심에 오를 것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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