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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미지 형성 방법 [퍼온 자료] 댓글:  조회:895  추천:0  2019-05-23
이미지 형성 방법   사물시는 이미지시로 볼 수 있다. 시에서 이미지는 꼭 이미지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시에서 이미지는 중요한 요소이며 어떤 형태의 시를 쓰더라도 이미지 형성이 없으면 시가 명료하게 되지 못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미지를 형성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은 원론적인 것이다. 첫째는 묘사에 의한 방법이고, 둘째는 비유에 의한 방법이다 1. 묘사에 의한 방법(서술적 이미지에 의한 방법) (예문 1) 백석의 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예문 2) 정지용의 시에서 보기   絶頂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 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웃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없어지고도 八月한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山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볕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정지용의 "백록담 1")   주관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사물 그대로의 즉물시다. 객관적이다. 관념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다. 선입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묘사한 시다. 2. 비유에 의한 방법(비유적 이미지에 의한 방법) 흔히 쓰는 방법으로 직유나 은유, 대유, 의인 등의 수사적 표현 방법에 의해 형성되는 이미지다.   -결론 이런 원론적인 방법을 가지고 동시 창작에 어떻게 이용하느냐? 우리 동시를 보면 대체로 에 의존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은 우리 동시가 특히 가치(의미)를 중시하는데다가, 또 시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주독자인 아이들과 불화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그만큼 우리 동시가 오랫동안 판에 박힌 동시에 머무른 탓도 있고, 교과서에 실린 동시라는 게 그렇게 편성되어 있어 그렇다고 본다. 막말로 하면 교과서 동시 = 틀에 박힌 동시 = 질이 낮은 동시로 치부되어 왔다. 90년대 중반부터 개선되기 시작하여 다양한 동시를 게재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전에는 판에 박힌 빤한 작품들로만 구성되어 있어 동시에 대한 정보를 극히 제한시키고 억압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저 형태만 갖춘 걸 동시로 여겼다. 그리고 동시인들도 늘 그렇고 그런 소재와 기법으로 동시를 써왔다. 말이 나왔기에 하는 말인데, 만으로 동시를 잘 써 보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사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언어를 섬세하게 다루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게 잘 안 되니 개념적, 상투적으로 쓴다.   (예) 을 소재로 시를 쓴다면 1. 묘사로만 시종일관하는 형태 2. 비유로 이미지화하는 형태 3. 상징의 형태 4. 동심적으로만 그린 형태 5. 메시지를 담은 형태 6. 이야기 형태 등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아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건 동시인 개인의 취향이다. 허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다. (2004.05.12)   출처  http://kosam43.egloos.com/1112241 
16    생활 동시에 대한 비판 [퍼온 자료] 댓글:  조회:940  추천:0  2019-05-23
생활 동시에 대한 비판   -단순한 재현이 아닌 표현하고자 하는 몸짓이 배어 있어야     삶의 모습을 단순히 '재현' 하지 않고 마음속의 끓어오르는 그 무엇인가를 화폭에 '표현'하고자 하는 몸짓이 배어 있습니다. 그런 의도적인 표현과 노력이 고흐의 을 예술 작품으로 더 빛나게 합니다. 선생님께 배운 우리의 글쓰기 방법은 어떻게 보면 '반영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삶이 절실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재현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우리는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재현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마치 작품이 거울이나 사진처럼 단순하게 기록하는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루카치의 말대로 "진리는 외양으로 주어진 것의 반영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에 대한 한층 심오하고 포괄적인 반영이다" 즉 "세계에 대한 단순한 반영이라기보다는 세계 내로의 창조적인 개입"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작가 2003년 겨울호. 도종환의 ‘정심으로 걸어간 어린이문학의 한 길'에서-)   시는 단순한 '재현'이 아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야 하듯이 생활 동시( 삶의 동시)라고 하여 단순한 재현에만 머문다면 생각해 볼 점이다. 반영론에 해당하는 동시들이 거울이나 사진처럼 단순히 반영하고 재현하는 데만 머문다면 예술성이 떨어진다. 루카치의 말대로 단순한 반영이어서는 안되고 세계 내로의 창조적인 개입이 있어야 한다. 나는 작품에서 창조성이 많이 보이면 보일수록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생활 동시라고 하여 그냥 어린이들이 쓴 시처럼 단순히 어떤 일의 재현에만 그친다면‘어린이시'보다 감동은 물론 읽는 재미도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발표되는 생활 동시를 보면 그냥 단순한 재현에만 머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재에 맞춰 그냥 기술하듯이 쓰고 있다. 이런 식으로 쓴다면 시 쓰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여기에 견주어 사물시는 사물의 발견, 새로운 인식에 있다 보니 도리어 쓰기가 어렵다. 동시인들이 이것을 모르고 생활을 소재로 서술만 하면 시가 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다 (2004. 3)   출처   http://kosam43.egloos.com/1112238  
15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시(詩) / 전 원 범 댓글:  조회:993  추천:0  2019-01-27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시(詩) 전 원 범     기존(旣存)의 의미(意味)를 벗어나서, 그리고 나와 사물(事物) 사이에 존재(存在)하는 일상(日常)의 벽(壁)을 부수고 나서, 존재(存在)의 리얼리티(reality)를 발견(發見)하는 작업(作業)이 곧 시(詩)를 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존(旣存 )의 통념(通念)을 해체(解體)하고 새롭게 사물(事物)을 명명(命名)하며 의미(意味)를 창조(創造)하게 된다.   나는 동시(童詩)야말로 시(詩)에서 가장 원초적(原初的) 발상(發想)의 감동(感動)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교(技巧)나 어떤 수사(修辭)나 긴 사설(辭說)보다는 사물(事物)이나 대상(對象)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독특(獨特)하면서도 원시적(原始的) 또는 순연(純然)의 특성(特性)을 동심(童心)으로 찾아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이 본질적(本質的) 감동요소(感動要素)이며 무엇이 주변적(周邊的)인 것인지를 늘 구별(區別)해 내고자 애를 쓴다.   동시(童詩)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시(詩)이어야 하며, 새로운 발견(發見)이어야 하고 동심(童心)을 통해서 획득(獲得)된 것이어야 한다. 1994. 가을호 '아동문학평론'에서    
참신한 이미지 연상기법을 통한 동심적 상상력의 확대   -박방희 동시집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의 시세계-     김관식             1.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현대동시는 그 출발이 동요동시 형식에서부터다. 운율과 리듬이라는 음악적 요소를 바탕으로 노래로 동심에 접근하는 동요로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그러다가 어린이의 동심을 노래보다는 현대시의 경향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회화적인 접근으로 방향이 전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시는 언어의 리듬을 중심으로 한 음악적인 요소와 이미지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회화적인 요소, 그리고 시어의 의미를 중심으로 한 의미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적용되는 동심으로 표현되는 게 이상적인 동시라고 보겠다. 동시든 시든 간에 참신한 은유구조로 텍스트화해야 언어의 내포기능을 통해 상상력을 환기시켜 줄 좋은 동시의 틀을 갖추게 된다. 짧은 언어로 정서를 환기시키고 시적 대상의 사물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 보기보다는 ‘낯설게 하기’작업으로 상상력을 증폭시켜 주는 동시가 바람직한 동시라고 하겠다. 동시의 표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적 대상의 사물에 대한 의인화 접근법이다. 모든 사물을 물활론적으로 보는 동심의 세계를 시적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의인화 표현이 참신해야 정서를 환기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동시집을 발간한 박방희 시인의 시가 시적 대상이 되는 사물을 의인화 접근을 시도하여 참신한 은유로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수작의 동시들이다.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라는 시집은 제목부터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시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참신한 이미지 연상기법을 통한 동심적 상상력의 확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은유란 “낯선 이름의 전의”라고 했다. ‘낯선’이라는 낱말은 ‘또 다른 사실을 나타내거나 하나의 다른 사실에 속함을 뜻하는 말로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일탈을 의미하기도 하며, 전의란 유(類)에서 종(種)으로 종에서 유로,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 방식으로 일어나는 유별이라는 닮음의 의미와 다른 낱말로 대체시키는 유비 전의를 포함하는 낱말이다. 은유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사학은 물론 시 쓰기에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자리 잡아왔다. 리콰르와 그 밖의 많은 학자들과 시인들에 의해 은유에 대한 연구와 실험이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수많은 시인들이 이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누가 얼마나 참신한 은유로 사물을 표현해내느냐의 문제가 바로 시를 잘 쓰느냐 못 쓰냐를 변별하는 척도가 된다. 사물의 새로운 발견은 바로 은유적인 발상을 바탕으로 한다. 은유적인 발상과 사고를 통해 언어로 표현된 참신한 동시가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다. 정어리가 바다를 끌고 왔다는 놀랍게 과장된 발상은 은유적으로 사물을 바라본 데서 파생된 상상의 세계이다. “정어리 통조림”이라는 시적 대상물을 보고 상상해서 언어로 통조림한 시다.         비좁고 꽉 막힌 통 속으로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   -『정어리 통조림』전문-           19자의 짧은 언어로 『정어리 통조림』속의 정어리가 바다를 끌고 왔다는 생각이 재미있고 과장되었으나 공감을 일으킨다. 이 시가 바로 시집을 여는 시다. 여는 시가 참신하고 호기심을 끌기 때문에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 또한 여타의 시 또한 참신성이 확실하다. 4부로 짜인 46편의 시 모두가 시적 대상을 의인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각 부의 제목만 보아도 신선하다. 『산의 귀가 닳는다』, 『새의 문자』, 『졸음의 무게』, 『따로따로 섬이다』 제4부의 표제들이다. 은유적인 신선한 시어가 참신성을 증명해준다.          졸졸졸졸   졸졸졸졸   ------   산허리를   감아 도는   물소리에   산의 귀가   다 닿는다.   -『산의 귀』』전문-           산을 인체에 비유하여 상상력을 발휘하여 형상화 한 물소리를 듣는 산의 귀, 산의 의인화가 빚어낸 은유다. 참신하고 새롭다. 그의 시의 시적대상은 항상 역동적이다. 움직인다.          조약돌에서   돌돌돌   소리가 난다.         수만 년   닳고 닳으며   스며든 물소리         돌돌돌   돌 속에서   흐르고 있다.   -『조약돌』전문-           조약돌까지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생물인 조약돌에 생명을 불어넣어 조약돌이 소리를 내고 흐르기까지 한다는 발상은 냇가에 흐르는 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속에 들여다보이는 조약돌까지 흐르고 있는 생명의 역동성까지 표현한 수작이다. 박방희 시인의 눈은 예리하다. 그리고 참신한 것을 볼 줄 아는 시인다운 눈이다. 냇가에 흐르는 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조약돌 속의 물 흐름까지 감지하고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기 때문이다. 『징검돌』에서 부처님을 보기도 하고, 『목련나무』에서 구름 방을 보기도 하고, 『봄』에서 개구리가 봄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본다. 또한 『별』에서 금단추를 보고, 『섣달』에서 늙은 감나무에서 까치밥을 통해 식은 밥을 보는 눈은 시인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시인의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끌어내 보여준다.         찍찍, 찌익, 찍   이 가지 저 가지   이 나무 저 나무에서   문자를 주고받는 새들   저들끼리 눈 맞추며   고갯짓 까닥까닥   시시덕거리다가   놀러 가고   군것질하러 가고   게임하러 간다.   -『새들의 문자』전문-           나무 위에 앉아있는 새들의 모습을 어린이의 세계로 그려낸 역동적인 시로 그 모습을 『새들의 문자』로 시각화해내고 있다.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압축해내는 시의 참신한 제목이 눈길을 끈다. 디지털시대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는 오늘의 시대 어린이들의 모습을 나무에 앉아 있는 새들을 통해 보고 있다. 그의 시편 전반에 참신한 은유와 의인화 표현이 담겨있는 시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그의 참신한 은유를 예를 든다면, 『매미 허물』=배냇저고리, 『거미집』= 하늘의 입, 『푸른 자』=하늘을 재는 대나무, 『기린의 밥상』=긴 목, 『기러기』=하늘에 쓴 글씨 등등 모두 참신성이 돋보인다.          뭐라 뭐라 해 쌓아도 세상에 무거운 건         눈 위로 쏟아지는 졸음의 무게지요.         스르르   눈꺼풀을 닫치며         목까지   툭!   툭!   -『 졸음의 무게』전문-           잠이 올 때 눈꺼풀이 감기고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상황을 『졸음의 무게』로 압축한 은유적 표현은 참신하다. 그의 시는 시의 제목 자체가 어떠한 사물과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은유 그 자체이다. 따라서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도대체 무슨 시일까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그래서 시를 읽지 않으면 안 될 강한 흡인력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상상력을 유발하는 시제로 인해 시를 스스로 읽어야겠다는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오늘날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어린이들에게 강한 흡인력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 줄 좋은 동시가 박방희의 동시다.      『육지에도 섬이 있다 』는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산짐승들이 이리 저리 오가지 못하게 고속도로가 생긴 오늘날의 육지 모습을 섬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도시문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편리함을 위해 고속도로를 만들고, 각종 첨단미디어 매체를 만들어냈지만 그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섬으로 전락되고만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   가로놓인   바다도   배를   띄우면   길이 된다.   -『배』전문-           바다가 섬을 만들 듯 섬과 섬을 오고 가려면 배가 필요하다. 사람사이에 단절을 몰고온 바다에 배를 띄우면 길이 되듯이 동시와 어린이와 단절된 상황에서 박방희 시인이 띄운 동시라는 배를 통해 동시와 어린이가 서로 소통하는 길이 될 것이 틀림없다.                3. 나오며           그의 시는 참신하다. 새롭다. 구태의연한 동시들이 주류를 이루는 동시단에 오랫만에 좋은 동시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적인 테크닉이 넘치는 참신한 박방희 동시는 동시가 재미없다고 식상해하는 오늘날의 어린이들에게 비타민 같은 동시다. 그의 동시는 한마디로 “참신한 이미지 연상기법을 통한 동심적 상상력의 확대”가 넘치는 동시다.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는 통조림 같이 동심과 단절된 어린이들에게 “동심을 끌고 온 동시”이며, "무한한 상상력을 끌고 온 동시”이다. 좋은 동시를 많이 빚어 생각하기 싫어하고 사랑과 우정이 단절된 어린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우쳐줄 박방희 시인의 무한한 상상력 비타민 동시가 많이 창작되어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동시의 맛과 멋을 즐길 수 있는 윤기 나는 삶을 살아가도록 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13    어린이를 위한 시는... 댓글:  조회:1171  추천:0  2019-01-04
월터 데 라 메어는, 어린이를 위한 시는 단순하고 달콤하게 지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엔 조금도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또 어린이의 연령의 차같은 것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어린이가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나타내는 직감적인 반응을 전폭적으로 믿는다. 어린이들한테 시를 주는 경우, 그들은 자기네가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어린이들은 직감과 상상에 의하여, 한정된 경험의 울타리를 넘어 훨씬 앞의 일까지 짐작한다. 어린이들이 시다운 시를 읽을 때, 자기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말을 쌓아 올리면서 저축해 나갈뿐만 아니라, 아직 희미하게밖에 의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길을 발견한다. 많은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시를 읽히는 것이 목적이라면, 기쁨을 주는 힘이 늘 강하게 발휘되는 시를 어린이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놓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에 대한 제재는 아주 광범하고, 휘어 잡기어려울 뿐아니라, 시의 영향을 측량할 길이 없다. "어린이에게 어떤 시를?" 하는 데 대해서는, 이와 같은 짧은 장에서는 두 서너가지 제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시와 어른들이 좋아하는 시 사이에 그므을 한줄 그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어린이들이 시를 읽을 때의 그 신선한 태도, 열심, 이것이 어린이들의 이점이라는 것을 명념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이들은 가장 좋은 시에 반응을 나타내고, 또 어린이들은 가장 좋은 시를 읽어야 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장 좋은 시와 비춰보고 어린이들한테 줄 훌륭한 시를 추려냈을 때, 또는 시인들 자신이 추려낸 것을 주었을 때, 비로소 어린이들은  좋은 시를 읽게 되는 것이다. - 릴리언 H. 스미드, , 교학연구사, 1966, 151-152쪽. 
윤삼현 작품세계 언급 비평] 2004 한국동시문학 봄호(제5호)                                  상징의 활용                                                                           유경환    동시를 쓰는데 상징(symbol)을 왜 알아야 할까?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루자. 이론을 들어본 적이 없어도 훌륭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다. 이론 공부 없이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하고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론 공부를 구태어 해야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창작 행위에 있어서 이론이란 직접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을 알아 두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이론 공부는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한 ‘거름주기’와 같다.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수준의 동시를 계속 생산하려면 이론의 뒷받침이 있어야 함을 동시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동시 창작에 있어서 상징의 활용은 필요 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이다. 쉬운 말로 한다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되 있으면 더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을 알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조건을 더 얻는 셈이다.  유치환 시인의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 곧 생명의 몹부림을 상징하는 시어로 씌였다. 이육사 시인의 ‘광야’는 광막한 현실, 곧 일제 강점기 우리의 핍진한 현실을 상징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존재론적 의미를 상징한다. 태극기는 우리나라 상징이고 푸른 색 한반도는 통일 한국의 상징이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며 학교마다 교기나 배지가 있다. 이들이 다 상징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은 복합적 의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대신하도록 특별한 의미를 확대한 표상(表象)이다. 그래서 문예이론서에서는 상징주의를 표상주의라고도 부른다.  동시 작품을 쓰는데 상징법을 활용한다는 것은 직접 표현을 미뤄놓고 간접 표현을 써서 독자로 하여금 더 깊고 더 넓은 뜻을 생각하도록 새로운 해석의 장으로 이끌고자 함이다. 일종의 유도 기법이다. 참신한 동시를 쓰고자 한다면 참신한 상징 시어를 찾아내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요즘 박두순, 이준관, 윤삼현, 이상문, 이정석, 한명순, 신형건(무순) 시인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 까닭은 상징의 활용에 남다른 기량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그 앞 세대가 구사하던 상징 기법과 아주 다른 상징 기법을 스스로 개척하여 활용하는 본보기들이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상징 활용과 상징 기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동시가 너무 어려워서…난해한 것을 써놓고 저희들끼리만 좋다고 하는,저들끼리 만의 잔치’라고. 직접 표현의 시어만 가지고 동시를 써온 세대가 있었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읽고 들으면 금세 알아듣는 직접 표현의 세대가 오늘날 70대 후반, 80대에 이른 원로 세대다. 직접 표현의 대표격이 ‘반달 같은 눈썹’ ‘앵두 같은 입술’ 등의 시어이다. 이들 시어는 상징의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퇴색하고 말았다. 6·25 전쟁 직후 새로운 세대 동시인들이 직접 표현 대신에 간접 표현의 시어를 도입 구사하는 방식으로 ‘동시도 시여야 한다’는 기치를 올렸던 까닭이다. 이 기치는 필자가 맨 먼저 들었다. 동시도 시여야 한다는 말의 뜻은 동시는 ‘어린이에게 읽힐 만한 시’라는 의미다.    동시가 한찬 전 세대의 노랫말 수준에 머물러서는 설득력이 없다. 영국의 어린이들이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를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로 받아들여 읽고 외우는 까닭을 모르면, 프랑스 어린이들이 보들레르의 시를 초등 과정에서 외워 낭송하는 까닭을 모르면 ‘동시에 왜 상징이 필요하냐’고 반문할 것이 뻔한 일이다.  좋은 동시로서 난해한 시는 있을 수 없다.  산을 다룬 동시는 산을 주제로 한 동시로 읽히면서 인물이 덕스런 할아버지의 상징성을 풍기기도 한다. 강을 다룬 좋은 동시는 강을 주제로 한 동시로 읽히면서 오랜 역사나 삶의 흐름을 넌지시 던져주기도 한다.  좋은 동시인데도 난ㄹ해하다고 우긴다면 그 상징성을 파악할 능력이 없거나 그럴 만한 독해력을 갖추지 못한 독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일반 독자도 아닌 비평가라는 사람이 좋은 동시를 놓고 난해하다고 앞장선다면, 우리는 이비평가란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 『엄마휘파람새 』(윤삼현 제2 동시집)(1996. 2.10 발간)에 실린 몇 편의 동시                              야간 비행                    밤하늘을 바라볼 때                  반짝이는 별들이                  하늘의 뜰에서 노닐고 있었다                    밤비행기를 타고 비행을 하다가                  나도 하늘의 뜰에서 노니는                  별이 되었다                    땅을 내려다 보니                  땅에도 별들이 노닐고 있었다                  우리는 저마다 반짝이는 별이었다.                                 분수                     분수는 분수는                   땡볕이 좋다                    더운 여름날이 좋다                    따가운 햇볕이 싫어                  찐득한 대낮이 싫어                  다들 그늘 속으로                  움츠러 들지만                    분수는 분수는                  햇살과 맞선다                  힘을 겨룬다                    그러다가 서로 좋아져 버렸는지                  아예 햇살과 손 잡으러                  쑤우우욱                  키를 키운다.                            꽃들의 약속                     같은 이름을 가진 꽃들은                   서두르거나 게으름 피우는 일 없이                   끼리끼리 한 날짜에                   꽃망울을 터뜨린다                     같은 얼굴을 한 꽃들은                   양지에 있거나 음지에 있거나                   또래또래 제 날짜에                   꽃봉오리 터뜨린다.                            내 마음은                       내 마음은                     한번은 밀물이다가 한번은 썰물                       밀물 들 때면                     뭍으로 뭍으로 설레임 출~렁                       썰물 날 때면                      먼 수평선으로 그리움 쏴~아.                             산을 오르다가                        산을 오르다가                      나는 뱃사람이 됩니다                        불끈 솟아난 파도 언덕 끝에서                      배를 멈추고                      저 크고 작은 산굽이 파도를                      내려다 봅니다                        넘실넘실 파도 떼                      쏴 쏴 물결소리                        내 배는 두둥실                      산 파도를 넘습니다.                                 도시에서는                    고향길에서 자주로 만나던 풀벌레 소리                  덤불 숲 같은 도심 한복판 거리를                  헤집고 다녀도                  여기선 왜 울음소리 한 개 걸리지 않지?    
11    판타지론 / 유창근 댓글:  조회:1074  추천:0  2018-11-06
판타지론 유창근     아동문학 작품에 판타지가 많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린이들이 전래동화를 좋아하므로 전래동화와 유사한 요소를 지닌 판타지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이들의 ‘동심’이 판타지를 좋아하고 그 속에 빠져들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판타지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려내는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따라서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이 함께 공존하며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탈출하여 만물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1. 판타지의 개념 판타지는 영상映像·상상을 뜻하는 그리스어인데, 일반적으로 환상이나 공상을 뜻하며, 문학에서는 몽상적 이야기를 가리킨다. 중세 유럽을 그 배경으로 하며, 19세기 말 E. 네즈비트는 마술적 존재를 그린 아동문학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주제들을 <일상의 마술>이라 하여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여 처음으로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오늘날에는 환상문학 가운데 괴기와 공포를 주제로 하지 않는 작품, 공상과학소설(SF) 가운데 과학이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에 의한 작품, 현실과 전혀 다른 가공의 신화적 세계를 무대로 영웅모험담을 그린 작품을 가리킨다. 판타지는 우리의 경험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펼쳐지는 초자연적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가상소설假想小說이라 할 수 있다. 토도로프는 판타지를 망설임의 문학으로 정의한다. 이를테면 현실의 질서와 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황당무계하고 초자연적인 이야기 앞에서 자연법칙과 상식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이 마음속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망설임과 갈등이야말로 다른 장르와는 구별되는 판타지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판타지의 독자적인 뜻이 인정되어 문학의 최고 형식이라 불리는 동화와 함께 문학적으로 성숙하였고, 프랑스에서는 18∼19세기에 걸쳐 요정이야기가 유행하였지만 괴기소설·암흑소설에 밀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43)등을 제외하고는 공포이야기가 판타지로 불리는 예가 많았다. 따라서 판타지 걸작은 앵글로색슨 및 북유럽 권에서 많이 나왔으며 L.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L.F. 봄의 『오즈의 마법사』(1900) 등이 대표적이다. 판타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톨킨(1892∼1973)의 『반지의 제왕』도 모든 판타지의 효시라기보다는 현대 장르 판타지, 곧 모험형 장르 판타지의 공식과 문법을 처음으로 제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판타지는 흔히 도피문학이라고 비판되지만, 1938년 발표된 평론 「요정이야기에 대하여」에서 톨킨이 도피를 용기 있는 행위로 평가한 뒤 인식이 바뀌어 오늘날에는 문학의 한 장르로써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근대의 아동용 공상이야기를 전승문학으로부터 구별하는 장르로 판타지를 쓰고 있으며, 성인용 공상이야기는 ‘에덜트 판타지’라 하여 구별한다.     2. 판타지의 유형 판타지의 양식을 일정한 유형별로 분류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판타지는 그 특성상 경계가 뚜렷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양식이 창조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판타지 동화에서는 다른 장르처럼 유형들 간의 특징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이다. 현대동화에 나타난 판타지의 유형은 학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① 상위판타지high fantasy : 이 세상과 관련이 없는 다른 세상을, 이른바 2차 세계secondary world를 무대로 삼는다.이 용어는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이 1939년에 쓰기 시작한 용어로, 이 세상의 실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일관된 논리에 따라 존재하는 세상을 말한다. 즉 2차 세계가 존재하며 2차 세계에서 비합리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② 하위판타지low fantasy : 이 견해는 널리 수용되어졌으나, 용어의 선택은 부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위판타지’는 스타일이나 성취도에서 낮은 작품이란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하위판타지는 모든 이야기가 현실세계를 무대로 하여 펼쳐지면서 그 안에 비합리적 현상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일컫는다. 한편, 캐롤Carol과 칼Carl은 『아동문학Children’s Literature』에서 판타지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현대 민담 : 전승적 판타지로 명명하기도 한다. 즉 전래동화나 옛날이야기에 나타나는 공상성이 풍부한 판타지를 말한다. 공상의 사전적 의미는 실행할 수 없거나 실현될 수 없는 생각이라고 적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상성은 판타지 동화에서 납득할 만한 구성과 장치가 동반된 것을 말한다. 내용에서는 인물묘사가 거의 없거나 갑자기 결심하는 등의 빨리 변하는 플롯과 애매한 배경을 들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마술 때문에 전통적인 이야기와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통 판타지가 거부반응 없이 수용 되는 까닭은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처럼 주술적 언어로 독자들을 유인하기 때문이다. 전승 판타지는 이야기의 구조상 전래동화와 현대동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다.     ② 몽환 판타지 : 등장인물이 작품 속에서 꾸는 꿈을 도입한 판타지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여서 최근에는 창작과정에서 제외되는 경향이지만, 초기의 판타지동화 중에는 꿈을 도입한 경우가 많았다. 꿈은 일체의 관념이나 제도적 틀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사고하거나 그 사고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판타지동화에 빈번히 사용한다. 환상은 꿈과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꿈을 환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고도의 세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꿈이 판타지 세계로 비상하고자 하면 상상력의 날개를 달지 않으면 안 된다. ③ 우의 판타지 : 동식물이나 무생물 등 비인격체에 인격을 부여하여 의인화한 판타지를 말한다. 동물들이 이성을 지니고, 말하고, 감성을 느끼는 등 마치 인간처럼 행동한다. 물건이나 장난감 또는 인형 등의 무생물체가 사실적 인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다. 대상과 인간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 융합은 일단 원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어린이들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모든 만물은 살아있다는 생각, 곧 물활론적 사고가 존재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신이나 영적 존재를 인격화하는 데서 발생했거나, 비인간적 존재인 무생물이나 추상개념을 인격화하는 데서 발달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의인화된 동물, 장난감, 사물들도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모두 가능하며 독자들은 흥미를 갖게 된다. ④ 마법 판타지 : 요술이나 마술, 마법과 같은 신비한 힘이 도입된 판타지다. 마법이란 판타지 동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배경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등장인물, 줄거리, 구성 속에 마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비일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마법에 관한 이야기들은 선과 악이 대결하는 싸움이 있으며 주로 유머와 익살스러움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 판타지는 어린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판타지의 유형이다. 이런 유형은 현실을 통해서만 접근하려는 노력과는 달리 현실을 뛰어넘은 과장되고 우스운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시각에서 나타나게 된 양식이다. 이는 종종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어린이들은 현실세계에서 부딪치게 되는 제약이 많기 때문에 이 제약을 무너뜨리려는 욕구가 잠재해 있다. 이 욕구는 사회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심리가 있으므로 마법의 힘에 매력을 갖게 된다. 마법은 현실에서는 생겨나기 어렵지만 판타지의 세계에서     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⑤ 심리 판타지 : 등장인물의 의식세계에서 발현되는 공상의 세계는 물론 의식의 흐름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심리판타지는 몽환판타지와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꿈의 세계를 다루지 않고 현실적 의식세계를 다루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심리판타지는 본격동화운동이 일어난 196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이 현실세계에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다양하게 행동을 전개해 가는 판타지 동화다. 동화가 가져다주는 풍부한 환상적 삶을 빼앗긴 어린이들은 대체로 마법이나 마약, 점과 같은 길을 통해 어른들 세계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욕구불만을 대리적으로 발산하기도 한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가장 어리고, 가장 힘이 없는 성격의 동화 속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좋은 판타지 동화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리적 판타지는 대개 주인공들의 의식 속에 상상의 날개를 달게 하여 현실세계를 벗어나 환상의 세계를 유영하게 한 후 다시 현실세계로 안착하는 기법을 구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환상과 현실과의 자연스러운 넘나듦은 독자들에게 환상의 무한한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심리판타지는 소유하거나 이루고 싶은 둥장인물의 욕구가 상상이라는 의식세계에서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⑥ 시적 판타지 : 시의 표현방법으로 이뤄진 판타지로 서정성이 뛰어나며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적인 문장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판타지라고는 할 수 없다. 동화의 스토리나 인물의 행동에 환상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가 실제적 관심이나 사실을 보고하는 말이라면 시어는 느낌이나 해석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는 비약, 리듬, 이미지에 의해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곧 시는 사실보다는 초월적인 것이요, 논리적인 것보다는 새로운 언어 결합에 의한 이미지로 이뤄진다. 이처럼 시는 직접 일상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세계를 이미지로 표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의 표현 방법으로 이뤄진 판타지를 시적판타지라고 명명하는 경우도 있다. 판타지가 현실세계를 초월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창조의 세계라면, 시 또한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여 상상력으로 해석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판타지와 시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적판타지의 가장 큰 특징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환상이 현실 같고, 현실이 환상 같아 그 구분이 모호한 것이다. 따라서 시적 판타지 동화에서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설명이나 상황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⑦ 역사 판타지 : 역사 판타지는 타임 워프time warp판타지라고도 한다. 현재 주인공이 다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 이야기다. 두 시대간의 대조는 현대에 사는 주인공의 그 이전 시대의 관습에 대한 놀라움과 발견을 보여준다. 역사 판타지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역사소설에서처럼 역사적 배경을 사실처럼 전개시켜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작가가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하는 과정에서 은유와 상징과 풍자를 불어넣어 창작한 판타지를 말한다. 그러나 시적판타지와 함께 은유와 상징을 투여하여 문학성을 높일 때 판타지로써의 가치가 있다. 여기서 문학성이란 판타지 속에 내적 질서를 부여하여 사건을 현실감 있게 그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⑧ 추구 판타지 : 탐색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모험 이야기다. 추구는 정의나 사랑 같은 고상한 목적이나 마술의 힘,숨겨진 보물을 찾는 등의 어떤 보상을 쫓는 것이다. 색채가 뚜렷한 추구 판타지는 하이 판타지에 속한다. 이러한 판타지에서는 가상세계의 사회나 역사, 가계, 지리적 위치, 인구, 종교, 관습과 전통 등을 자세히 그려낸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주로 선과 악의 투쟁이 중심이 된다. 대개 등장인물들은 신화나 전설에서 끌어온 것들이다. 주인공은 외부 악의 힘과 대항하고 내부적으로는 약해지려고 하는 유혹과 싸운다. 그래서 추구 판타지는 주로 주인공의 자기 발견과 개인적인 성장, 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묘사하고 있다.    ⑨ SF(공상과학)와 과학 판타지 : 과학 판타지란 첨단 과학문명의 산물인 미래의 우주세계나 외계인이 등장하고, 컴퓨터, 로봇, 레이저, 지하도시, 해저도시 등을 소재로 하여 펼쳐지는 판타지로 SF를 포함하는 판타지를 말한다. SF는 과학적 사실과 원칙에 토대를 두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보여주는 상상문학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SF이야기의 요소들은 과학적인 가능성이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을 보여주어야 한다. 배경이나 사건들이 과학적 개념이나 이미 알려진 기술의 범위에 토대를 두고 설정되기 때문에 SF에 나타난 인류와 우주의 미래에 대한 가설들은 독자들에게 그럴싸하고도 가능한 것 같     이 받아들여진다. SF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어린이가 살게 될 미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과학 판타지는 꼭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미지의 세계로 상상의 도약을 하기 위해 과학적인 설명이 덧붙여지는 유형이다.    결론적으로, 판타지란 현실 속에 비현실의 세계를 생생하게 유기적으로 관계를 창조해주면서 전개시키는 조직체다. 그러므로 그 세계가 비현실이기는 하지만 논리와 질서가 서 있어야 하며, 깊은 사상이나 철학적 주제성과 함께 힘의 관계가 유지되면서 눈에 보이는 한 세계로써 창조되어야 한다.       3. 판타지 동화의 기준 상상력이 불쑥 던져준 착상을 내용으로 한 작품을 판타지 동화라고 할 수는 없다. 판타지란 현실 속에 비현실의 세계를 생생하게 유기적으로 관계를 창조해주며 전개시키는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비현실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이면서 또한 눈에 보여야 하며 한 세계로서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리얼리티의 확보를 위한 조건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판타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한다. 오랜 세월동안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판타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그 실상을 증명할 수 있다. 어린이들은 환상을 통해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하며, 이런 환상이야말로 현실을 더욱 새롭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② 판타지는 판타지만의 힘을 가져야 한다. 힘이 넘치는 판타지의 세계는 어린이의 삶을 건강하고 윤택하게 하며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자유를 만끽한다. 또한 현실의 세계를 뛰어넘어 그보다 더 빛나고 생명력이 넘치는 세계를 창조한다. ③ 이러한 세계 창조를 위해서 판타지는 마법과 같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가공의 판타지 세계에서 리얼리티 확보는 언어의 마법과 같은 힘 때문에 가능하다. 마법사가  외우는 주술력 같은 언어야말로 어린이를 판타지와 같은 세계로 쉽게 이동시킬 수 있다. 판타지는 환상 자체를 믿지 않고서는 진실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④ 판타지는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현실에서 펼쳐지며, 작품 안에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진 두 세계(1차적 세계와 2차적 세계)가 공존해야 하고, 작가가 창조한 다른 세계, 즉 2차적 세계에 대한 독자의 믿음을 강조한다. 성공적인 판타지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2차적인 세계가 내적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세계 자체의 법칙성’보다는 그 곳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우선적으로 강조된다. 판타지가 ‘상상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합리하고 모순될수록 독특하고 멋진 판타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얼마나 독특하면서도 합리적이고 세밀한 판타지의 법칙을 제시하는가, 독자는 얼마나 영리하게 그 법칙을 파악하고 따라 가는가에 판타지의 기본적인 생명력이 달려있는 것이다. 아울러, 판타지 동화가 갖추어야 할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마법이다. 마법은 판타지 동화에서 배경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② 다른 차원의 세계, 즉 제2의 세계다. 상당수의 판타지에서 마법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장소로써 특별한 지형이나 우주가 만들어지는데, 그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지배규칙에 의해 움직인다. ③ 선과 악의 대립이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던 신화의 주제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이고 그래서 현대 판타지는 신화라는 바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④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영웅의 여행담이다. 영웅의 여행은 항상 오래된 패턴을 따르고 그 패턴은 오늘날 판타지 동화의 구조와도 같다. ⑤ 작가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인물의 유형이다. 판타지는 전설 속 인물 같은 유형이나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까지 포용하기 때문에 요정, 거인, 사악한 마녀, 도깨비, 흡혈귀, 마법사, 난장이를 비롯하여 독특한 인물유형이 판타지 동화의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⑥ 마법의 도구들이다. 이 도구들이란 마법의 망토, 칼, 빗자루, 지팡이, 가마솥, 옷장, 거울 등과 같은 것으로 마법의 힘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위의 6가지 요소들을 모두 지닐 경우 수준 높은 현대 판타지 동화가 될 수 있으며, 그 중 한 가지 요소만 지녀도 판타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따라서 판타지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구성으로 짜여있다. 즉,현실의 세계, 진리를 벌거벗겨 우리에게 내던지는 철학적인 문학이 아니라 진리, 불합리한 현실, 만족하지 못한 현실에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우리는 우선 그 아름다움에 취해 아무런 부담 없이 은연중에 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판타지는 단순히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진리를 함께 담아낸다. 암시적인 해석을 해야 하는 간접적인 묘사의 형태다.     4. 판타지 속의 장소와 인물 1) 장소(다른 차원의 세계) ① 상상의 왕국이 등장하는 판타지 ② 이상한 세계를 보여주는 판타지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배경으로 공존한다.(용궁, 하늘나라, 땅속나라 등) 예) 『오즈의 마법사』←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기묘한 세계.   2) 등장인물(특별하고 독특한 캐릭터) ①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 동물들은 모두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활동하며 오히려 인간이 갖지 못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예) 『우화』, 『샬롯의 거미줄』 ②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한다. 이들은 대체로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들이다. 예) 『어린왕자』, 『요정 컴미』, 『아기공룡 둘리』 ③ 거인과 소인을 등장시켜 상대적인 크기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현실을 다시 보게 한다. 예) 『걸리버 여행기』, 『잭과 콩나무』 ④ 장난감이나 인형이 등장하여 사람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활동하며 어린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예) 『피노키오』, 『아기 곰 푸우』 ⑤ 기타 마법, 마법의 도구, 선악의 대결, 영웅담 등     5. 판타지 동화의 예 동화의 매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데 있다. 그 속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교감하고, 바람과 나무가 말을 하며 즐겁게 보낸다. 상상으로만 그리던 일이 마치 현실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예를 들어 미야자와 겐지의 『도토리와 들 고양이』, 『오츠벨과 코끼리』, 『첼로를 켜는 고슈』, 『수선월의 나흘』 등과 같은 동화를 읽노라면,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그리고 전혀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까지도 같은 입장에 서서 말을 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아무런 위화감을 주지 않는다. 동화야말로 겐지에게는 자신의 이상을 이야기 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겐지의 동화에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동물과 풀과 나무 그리고 돌조차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으며, 언제나 머릿속에는 우주가 펼쳐지고, 별과 바람의 속삭임도 들려온다. 겐지는 소설을 쓰지 못해 시나 동화를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의 필연적인 이유로 시와 동화를 쓴 것이다. 그에게는 동물도 식물도 산천도 분명 인간과 같은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었다. 동물은 인간과 대등한 의미를 갖는다. 거기서 그려지는 것은 동물과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명으로서의 운명이다. 겐지는 동화를 통해 인간세상을 풍자하고 고치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생명과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를 말하려 한 것이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해리포터』도 훌륭한 판타지동화다. 조앤 롤링은 독자에게 환상이 현실과 비현실의 가교의 기능으로 현실의 내면을 보다 점진적으로 이해시키는 원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에게 환상 개념이란 방만한 공상이 아니라 동심을 지닌 독자가 체험하지 못한 세계를 적극적으로 경험시키는 유추적 능력이자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이며 이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동문학 역시 문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가치 있는 문학이라는 점, 동심을 지닌 독자로 자신의 꿈의 영역을 확대하여 가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문학 안에서의 상상력과 동일 개념으로 인식된다. 판타지는 독자에게 현실의 다양한 사고에 대한 불분명하거나 혼란스러운 현상을 선명한 질서와 조화의 틀로 부합되도록 하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정서를 가꾸어주고 또 현실을 바람직하게 이해시켜 주기위해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를 쓴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세계는 10대들의 텃밭인 학교와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면서 묘한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선량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사악한 교사의 괴롭힘, 아이들 사이의 묘한 경쟁과 질투심, 본능적으로 악에 저항해 가는 소년들의 정의감 등은 현실 세계의 원리들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해리포터』의 한 특징으로 마법학교에서는 우편물을 부엉이가 전달하게 하고 펜과 양피지를 사용하여 모든 것을 옛날식으로 사용해 과학기술이 부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퀴디치 게임의 속도감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속도를 가능하게 한 현대과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해리포터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현실세계의 가장 친숙한 특징인 속도감을 보여줌으로써 초현실세계와 현실세계가 밀접하게 얽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유창근 / 시인·문학평론가. 저서 『문학을 보는 눈』, 『차세대문학의 이해』 , 『문학비평연구』, 『한국 현대시의 위상』 등 40여 권이 있으며 현재 (사)한국어문능력개발원 이사장 및 계간 「창조문학」 주간으로 있다.
10    [스크랩] 동시 창작론 / 유창근 댓글:  조회:1159  추천:0  2018-11-06
동시 창작론 유창근   1. 동시의 개념 동시란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로써 어른이 썼든 어린이가 썼든 동심을 바탕으로 생각이나 느낌을 가장 적절한 언어로 가장 함축성 있게 표현한 운문이다. 내용면에서는 동요와 흡사한 점이 있으나 형식면에서는 음악성이 떨어지고 그 표현이 훨씬 자유롭다. 즉, 내재율로 감흥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글이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유경환은 ‘동시란 어린이도 읽을 수 있고 어른도 읽을 수 있는 시문학의 한 장르’로써 우선 문학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동시인도 먼저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성을 갖추지 못한 동시가 남발됨으로써 동시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지게 되고, 아동문학이 푸대접을 받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시와 성인 시는 시라는 차원에서 동일한데 다만 동시는 ‘어린이도 대상 독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이고, 성인 시는 ‘그 대상 독자에 어린이를 의식하지 않고 쓴 시’라는 점에서 구분이 된다. 2. 동시의 종류 동시는 일반적으로 형식상 분류와 내용상 분류에 의해 여러 가지 양상으로 논의되어 오고 있으나 논자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형식상 분류 먼저 형식상 대략 다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자유동시 :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쓰는 시의 양식으로 1930년대부터 김영일·박목월 등에 의해 처음 시도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동요보다 훨씬 널리 창작되어 읽혀지고 있다. 당시 자유 시론의 주창자로서 우리나라 동시단에 신경지를 개척한 김영일의 시는 특히 단시적 간결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수양버들 / 봄바람에 / 머리 빗는다. / 언니 생각난다. ──김영일, 「수양버들」 전문 ② 산문동시 : 형식상으로 자유시에 속하면서도 산문적 서술의 성격이 강한 편이다.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시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표현 양식은 산문적 형태를 취한 시이다. 살구나무 새순에 봄빛이 묻어 있다. 껍질 속에 갇혀 있던 파란 빛깔 집어 들고 마당가 한 귀퉁이에 우뚝 선 살구나무 ──노원호, 「살구나무 새순에」 일부 ③ 장동시 : 자유 동시처럼 매우 함축성이 있고, 상징 또는 비유적인 방법으로 씌어지면서 그 시의 길이가 길다는 점이 특징이다. 산문시보다 산문성은 부족하나 작품의 길이가 산문시보다 비교적 긴 편이라는 점이 산문 동시와 장동시의 차이가 된다. ④ 동화시 : 동화시는 시이면서도 우선 형식면에서 양적으로 길고, 내용면에서는 동화처럼 어떤 사건의 전개나 이야기성이 있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새 집으로 이사 온 밤 비 오고, 바람 불고, 천둥하던 밤. 뒷산에 뒷산에 도깨비가 나와 우리 집 지붕에 돌팔매질 하던 밤. 덧문을 닫고, 이불을 쓰고, 엄마한테 붙어 앉어 덜덜 떨다가 잘랴고 잘랴고 마악 들어누면 또, 탕 탕 떼구루루…… 퉁!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그래두 탕 탕 떼구루루……퉁! ──윤석중, 「도깨비 열두 형제」 일부 (2) 내용상 분류 내용상 분류는 일반적으로 다음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서정동시 : 본디 서정시는 노래 부를 수 있는 시이므로 음악성을 중요시하는 것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정감에 호소하는 개인적인 정감과 체험의 예각적 표출 형식을 취한다. 시의 소재나 내용이 자연과의 교감이나 자연과의 시적 감동을 주로 하여 형상화한 시이다. 눈밭에서 아이들이 / 햇살을 당긴다. / 언 손을 모아 / 소리를 모아// 모두모두 매달려 / 발을 구르면 / 겨울 해가 풍선처럼 / 끌려온단다. ──이상현, 「햇살」 전문 ② 생활동시 : 어린이의 실제 생활이 그대로 사실적인 표현에 의해 씌어진 시이다. 한 사람이 방에서 / 나오면서 하는 말이, / “어제보다 날이 좀 풀렸는데요.”// 한 사람이 밖에서 /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 “어제보다 훨씬 더 쌀쌀해졌는걸요.” ──윤석중, 「추위」 전문 ③ 관념동시 : 어떤 사물이나 그 사물을 통해 인식된 결과를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마음 속에서 다시 여과되고 걸러진 이미지를 위주로 형상화한 추상성이 강한 작품이다. 귤 / 한 개가 / 방을 가득 채운다. / 짜릿하고 향긋한 / 냄새로 / 물들이고// 양지 짝의 화안한 / 빛으로 / 물들이고, 사르르 군침 도는 / 맛으로// 물들이고, 귤 / 한 개가 / 방보다 크다. ──박경용, 「귤 한 개」 전문 ④ 서사동시 : 서사시는 사건을 운문으로 읊는 장시이다.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행동을 중심으로 한 파란만장한 사건과 이야기를 읊은 것이다.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서사시의 대표작이고 밀턴의 『실락원』도 서사시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승휴의 『제왕운기』나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서사시에 속한다. 바다에 그물을 놓을 때나 당길 때 알기를 보는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섬 하나 없는 동해바다 가운데에서 그물을 찾아내는 시루뫼 어부들은 언제나 큰 산을 바라보며 바라보며 살지, 시루뫼 어부들은 참말 용하기두 하지. ──김진광, 「시루뫼 마실 이야기」 일부 3. 동시창작 방법 첫째, 쓰고 싶은 동기를 잡아야 한다.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경우는 무슨 일로 인해서 마음이 크게 움직일 때인데, 그것은 반드시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만이 아니라,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의 슬픔일 수도 있고, 괴로운 일에서 오는 아픔이기도 하고, 또 불의한 일을 보았을 때의 노여움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모두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내부로 들어오는데, 이와 같은 감각 체험을 통해서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상상을 하고, 또 어떤 생각들을 낳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감정의 기복을 눈여겨보아야 하고 감수성을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마음이 강퍅하거나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동시를 쓸 수 없다.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고 마음의 문을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둘째,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스스로 마음에 느낀 바를 정직하게 써야 한다. 마음에 느끼고 어떤 움직임을 경험한다는 일은 감각 체험을 통해 심상에 비쳐진 것이 다시 형상화의 단계에 넘겨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 형상화의 표현이 바로 시의 표현이고 시를 쓰는 기법에 있어서 이 과정이 매우 중요하고 까다롭다. 이 형상화 과정에서 남의 것을 슬쩍 빌려 온다거나, 심상에 비쳐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꾸며대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싸하게 아름다운 말만 찾아 시를 쓰려고 하지 말고, 오직 진실 된 표현만이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의 느낌을 진실 되게, 소박하게 나타내도록 쓰는 일은 동시 창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셋째, 일상용어 중에서 시어를 잘 찾아야 한다. 동시는 되도록 어린이들의 일상용어에서 시의 용어를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동시가 일차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독자로 하기 때문에 정서 순화에도 그 기능이 있지만, 자라는 어린이의 지능이나 언어 발달에 크게 영향을 준다는 효용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말을 쓴다고 해서 혀 짧은 유아어를 흉내 내거나 말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엄마, 아빠, 해님, 달님, ~했어요, ~했습니다. 등의 언어를 즐겨 쓰고, 의태어나 의성어를 반복하여 쓴다고 동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어는 자기의 느낌이나 감동을 나타내는 데 가장 중요한 말, 가장 적당한 말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시어를 선택하는 작업은 대단히 어렵다. 동시이기 때문에 그저 쉬운 말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넷째, 풍부한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써야 한다. 동시를 쓰기 위해서는 실제로 자신의 삶이 겪어 낸 그 체험도 물론 작품의 바탕이 되지만, 그보다 상상적인 체험이 더 중요하다. 동시는 동심적 심상에 비쳐진 감각 체험의 재현이기 때문에 성인인 아동문학가들이 쓰는 동시에서 실제 동심 세계의 형상화가 이루어지려면 어린이의 실제 생활에 파고 들어가 항상 그들을 관찰함으로써 상상적 체험을 얻어내야 한다. 처음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가급적 어려운 사상을 나타낸 동시를 쓰기보다는 가까운 생활 주변에서 동시의 소재를 찾아내는 것이 좋다. 그리고 동심의 눈으로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다섯째, 교육적 효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인시와 달리 동시는 대상 독자 속에 어린이를 포함하기 때문에 교육성을 무시할 수 없다. 죽음이나 절망을 나타낸 것이라든가, 비인간적인 행위나 비도덕적인 내용,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파헤치는 일, 순화되지 않은 언어 사용 등은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좀더 밝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시, 보람 있고 참다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건전한 시를 써야 한다. 여섯째, 제목 붙이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한 편의 동시를 쓸 때, 제목을 붙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제목을 보면 작품의 소재가 무엇이며, 어떤 생각을 나타내려고 하는가를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시의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나서 시를 쓰고, 어떤 사람은 시를 다 써놓고 나서도 제목을 정하지 못하여 고심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제목을 붙이는 시기가 다르기 마련이다. 다만 동시에 제목을 붙일 때는 되도록 쉽고 사물적인 것이 좋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곱째, 행과 연 가르기를 바르게 해야 한다. 산문동시는 형태 자체가 산문적이지만, 정형동시나 자유동시는 행과 연을 제대로 갈라놓아야 시인의 정감이 고르고 바르게 전달된다. 시인에 따라서 한 행의 길이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지만, 한 행의 길이가 너무 길어지면 어린이들의 호흡에 무리가 간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아울러 한 연의 행수도 너무 많아 무리가 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연 가르기를 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동시가 다 되었을 때는 다시 읽고, 고치고, 매만지고, 다듬어야 한다. 시어를 제대로 찾아 썼나, 제자리를 잡았나, 군더더기가 없나 등에 대해서 신경질적으로 깎고 다듬고 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요령이다. 4. 이미지 만들기 이미지란 시작품 속에 구성된 언어조직이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어떤 영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상은 우리 마음속에 나타나는 어떤 형태라는 점에서 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는 정신적Mental 이미지, 비유적Figurative 이미지, 상징적Symbolic 이미지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심리학자들은 웰렉과 워렌Wellek & Warren의 분류와 비슷하게 정신적 이미지를 다시 시각적·청각적·후각적·미각적·촉각적·기관적·근육감각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한다. 1) 정신적 이미지 만들기 초가지붕 마루엔 / 밤낮 꽃 핀다. / 낮에는 화안히 / 호박꽃 피고 // 밤에는 소롯이 / 박꽃이 피고 / 호박꽃은 낮에 피니 / 해와 같이 붉은 꽃, // 박꽃은 밤에 피니 / 달과 같이 하얀 꽃, / 호박꽃 지며는 / 해와 같이 붉은 호박 // 박꽃이 지며는 / 달과 같이 하얀 박, /초가지붕 마루엔 / 해와 달이 열린다. ──김종상, 「박과 호박」 전문 호박꽃과 박꽃을 소재로 쓴 시이다. 호박꽃과 박꽃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했고, 이 두 꽃들이 진 뒤의 상황까지 상상한 점, 호박과 박을 해와 달이라고 비유한 점 등이 이 시를 훌륭하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귀뚜라미 또르또르 / 섬돌 밑에서 / 귀뚜라미 또르또르 / 시렁 위에서 // 또록또록 눈이 밝아 / 책을 읽고 있으면 / 또르또르 / 또르또르 / 밤이 깊는다. ──임인수, 「가을 밤」 전문 이 시의 전체가 귀뚜라미의 소리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처럼 청각적 이미지를 시에 끌어 들일 때 시의 분위기는 독자에게 훨씬 실감을 준다. 또 한 가지 덧붙여 말하면 위의 시에서는 소리의 상징으로 리듬을 잘 살려 음악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새알은 / 간간하고 짭조름한 / 미역 냄새, / 바람 냄새. 산새 알은 / 달콤하고 향긋한 / 풀꽃 냄새, / 이슬 냄새. ──박목월, 「물새알 산새알」 3·4연 물새알 냄새와 산새알 냄새를 후각적 이미지로 형성하고 있다. 또한 같은 말이나 같은 음, 같은 짜임의 되풀이에 의하여 운율을 이루고 있는 시이다. 물새는 물새알을, 산새는 산새알을 나으며, 또 신기하게도 물새알에서는 물새가 태어나고 산새알에서는 산새가 태어난다는 생명의 엄숙한 법칙을 이 시는 아름다운 말과 리듬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다. 비는 달콤한 젖 / 눈은 솜이불 / 바람은 엄마 입김. 아! 우리는 / 자란다, 눈 속에서 / 바람 속에서. ──이원수, 「새눈의 얘기」 2연 비를 달콤한 젖에 비유하고 눈은 솜이불에, 바람은 엄마 입김에 각각 비유한 점이 훌륭하다. 특히 비를 달콤한 젖이라고 미각적 이미지를 빌어 표현했기 때문에 이 시는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첫 서리 내렸다 / 전기 줄에 / 아기 참새들 / 쫑쫑쫑 / 발이 시리대. // 첫 서리 내렸다 / 감나무에 / 홍시감이 / 빠알갛게 / 볼이 시리대. // 첫 서리는 겨울 소식 / 눈사람의 편지 / 세수할 때 / 울 아기 손이 시리대. ──송명호, 「첫서리」 전문 ‘발이 시리대’처럼 촉각적 이미지는 뜨겁다거나, 차겁다는 등의 감각을 표상한다. 앗! 푸른 하늘이 / 숨을 쉬는 것일까? // 잠자리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 내뱉기도 하고! ──장만영, 「잠자리」 4연 마치 하늘이 숨을 쉬면서 잠자리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내뱉기도 하는 것처럼 느낀 지은이의 기관적 이미지 착상은 놀라울 정도이다. 기관적 이미지는 대체로 고동, 맥박, 호흡, 소화 등의 감각을 표상한다. 따라서 흐느끼는, 할딱이는, 답답한, 숨이 차는 따위의 관형어에 조응한다. 2) 비유적 이미지 만들기 별을 보았다.// 깊은 밤 / 혼자 / 바라보는 별 하나,저 별은 / 하늘 아이들이 / 사는 집의// 쬐그만 / 초인종 / 문득 / 가만히 / 누르고 싶었다. ──이준관, 「별 하나」 전문 깊은 밤하늘에 보이는 별을 하늘나라 아이들이 사는 집의 초인종으로 비유한 점이 재미있다. 이 시에서 ‘별’은 ‘초인종’이라는 전혀 다른 낱말과 밀착되어 ‘별’과 ‘초인종’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실로써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하나의 사물이 다른 하나의 사물로 치환된 하나의 증거이다. 3) 상징적 이미지 만들기 아침과 같이 고요한 나라가 있었다. / 그 나라에는 한 그루의 커다란 꿈나무가 있었다. / 꿈나무는 5월이면 / 잎사귀 대신 주렁주렁 꿈을 피워놓는 나무다.// 이상한 꿈나무의 그림자는 / 저 먼 달 속까지 비치어 계수나무가 되었다. ──김요섭, 「꿈나무」 전문 이 시에서 ‘아침과 같이 고요한 나라’는 주지하는바 우리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말이고, ‘꿈나무’는 곧 ‘어린이’를 상징하는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상징은 전통적이거나 개인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과 그리고 시의 문맥 중에서 비로소 정해지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비둘기’가 ‘평화’를,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전자의 경우요, ‘하늘’이 자기만의 높은 이상의 세계라면 이는 후자에 속한다. 5. 창작상의 유의점 동시를 창작할 때는 다음 몇 가지 유의 사항을 반드시 숙독해야 한다. ① 제재 : 어린이의 생각이나 동심의 세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동시의 제재가 될 수 있다. ② 감정정리 : 제재를 동시로 쓰기 전에 표현과 구성 등을 깊이 생각하는 감정의 정리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주제가 성숙해지고 사고와 감정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③ 이미지 : 어떤 정경을 그릴 때에는 그 이미지가 명확하게 떠오르도록 써야 한다. ④ 언어의 절약 : 시는 설명이 아닌 암시의 세계다. 되도록 짧은 말 속에 모든 의미가 간직되도록 해야 한다. ⑤ 행과 연의 구분 : 행과 연을 구분할 때에는 리듬의 단락을 짓기 위해서, 또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행과 연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⑥ 언어의 선택 : 언어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도록 알맞고 시적인 언어를 가려 써야 한다. ⑦ 비유 : 동시에 직유나 은유를 쓰되 될 수 있으면 시인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고 싱싱한 비유를 골라 써야 한다. ⑧ 생동감 : 동시는 특별히 생동감이 넘쳐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동감이란 어린이의 마음과 일치하거나 어린이의 부단한 행동성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⑨ 사상과 감정의 조화 : 동시는 표현에서 느낌으로 그리고 느낌에서 감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창작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통일 내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쓰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감정을 여러 각도로 어루만진 다음, 표현과 구성에 대한 정리를 하면서 사상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이미지는 선명할 수 없다.     유창근 / 시인·문학평론가·교수. 저서 『문학을 보는 눈』, 『차세대문학의 이해』 , 『문학비평연구』, 『한국 현대시의 위상』 등 40여 권이 있으며 (사)한국어문능력개발원 이사장, 계간 「창조문학」 주간.   가져온 곳 :  카페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글쓴이 : 김명아| 원글보기      
9    동시를 잡아라 / 글쓴이 / 동시를 잡아라 [스크랩] 댓글:  조회:1860  추천:0  2018-07-11
동시를 잡아라 글쓴이 동시를 잡아라  풀잎에 파란 색이 있듯이/ 풀에는/ 풀로 된 시가 숨었다.//  도랑물에 졸졸졸/ 소리나듯/ 물 속에는/ 물로 된 시가 숨었다.//  꽃 속에/ 향기론 냄새가 있듯/ 꽃에는/ 꽃으로 된 시가 숨었다.//  아이들아/ 너희 눈으로/ 풀잎의 시를 찾아내어라.//  너희 귀로/ 물속의 시를 소리 들어라.// 꽃 속의 시를/ 냄새 맡아라.//  아이들아/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잡듯/ 시를 잡아라.  -신현득 「시를 잡아라」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설레요.//  내가 어릴 때도 그랬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마찬가지예요./  쉰 살, 예순 살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을 거예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하루하루가/ 자연 속에서 늘 함께 있고 싶어요.  -윌리엄 워즈워드 「무지개」  1. 가까운 것들부터 관심을 갖자  나를 처음 본 게 정확히 목요일이었는지 금요일이었는지, 그때 귀걸이를 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전화 걸 때 처음에 여보세요 하는지 죄송합니다만 그러는지,  같이 걷던 한강 인도교의 철조 아치가 여섯 개인지 일곱 개인지, 그때 우리를 조용히 따르던 하늘의 달은 초승달인지 보름달인지,  우리 동네 목욕탕 정기 휴일이 첫째 셋째 수요일인지 아니면 둘째 넷째 수요일인지,  지난겨울에 내가 즐겨 끼던 장갑은 보라색인지 분홍색인지, 그게 벙어리장갑인지 손가락장갑인지,  내 새끼손가락엔 매니큐어를 칠했는지 봉숭아물을 들였는지,  커피는 설탕 두 스푼에 프림 한 스푼인지 설탕 하나에 프림 둘인지,  동화 보물섬 해적 선장 애꾸눈 잭은 안대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만화 주인공 영심이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  고깃집에서 내가 쌈을 먹을 때 쌈장을 바르고 고기를 얹는지 아니면 고기부터 얹고 쌈장을 바르는지…….  -노영심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  선생님이 시를 지어보라고/ 글 제목으로/ ‘정거장, 개구리……’를 냈다.//  기차 정거장은 무슨 역,/ 자동차 정거장은 무슨 터미널․정류소/ 배 정거장은 무슨 항구 등/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일 것이고,//  개구리는 으레껏 개골개골/ 이렇게 쓰리라고/ 선생님은 생각했지만,//  제비 정거장은 전깃줄이고/ 갈매기 정거장은 고깃배라 쓰고,/ 해질녘에 개구리는/ 숙제해서/ 엄마의 칭찬 받으러/ 제 집으로 간다고 썼다.//  선생님은 아이들보다/ 생각이 모자라서/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김상문 「시 공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그 꽃」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 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이 할 때/ 보물을 감춰 두는//  바위 틈새 같은 데에/ 나뭇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허영자 「행복」  2. 보거나 들은 것, 한 일을 그대로 써 보자  우리 아버지는/ 신문 볼 때/ “신문 걸어와”/ 하고 말합니다.//  담배 피울 때/ “담배, 혼자서/ 걸어와”/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가지러 갑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 작품 「우리 아버지」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되돌아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박두진 「돌아오는 길」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불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고재종 「파안」  엄마, 토끼가 아픈가 봐요./ 쪽지 시험은 100점 받았어?//  아까부터 재채기를 해요./ 숙제는 했니?//  당근도 안 먹어요./ 일기부터 써라.  -김미혜 「말이 안 통해」  사과 껍질/ 벗기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피는/ 조금 나지만/ 겁은/ 더 난다.//  울까/ 말까/ 피가 괸다// 울까/ 말까/ 울까/ 새빨간 핏방울!//  그런데 그런데―// 울래도/ 집에는/ 아무도 없다.//  ―이종택 「울까 말까」  그렇게 만날/ 친구랑 싸움이나 하고/ 약속도 안 지키는 너,/ 거기다 목소리는 커서/ 시끄럽기만 너,/ 도대체 커서 뭐가 될래?//  걱정 마세요 엄마/ 저, 국회의원 될래요.  -박혜선 「장래 희망」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아, 참 알이 굵기도 하다./ 아버지 주먹만이나 하구나.//  올 같은 가물에/ 어쩌면 이런 감자가 됐을까?/ 할머니는 무슨 재주일까?//  화롯불에 감자를 구우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 저녁 할머니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머리털이 허이언/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보내 주신 감자는/ 구워도 먹고 쪄도 먹고/ 간장에 조려/ 두고두고 밥반찬으로 하기도 했다.  -장만영 「감자」  참새는/ 혼자서 놀지 않는다/ 모여서 논다//  전깃줄에도/ 여럿이/ 날아가 앉고/ 풀숲으로도/ 떼를 지어/ 몰려간다//  누가 쫓아도/ 참새는/ 혼자서 피하지 않는다//  친구들하고/ 같이/ 날아간다  -안도현 「참새들」  대구 대구 대구/ 아이구 시원테이.// 전주 저언주/ 거그 거그/ 어이 시원혀.//  서어울 서울/ 그래그래/ 아이 시원해.//  부산 부산 부산/ 거어 쫌 글거바라./ 부산은 옆구리니까/ 할아버지가 긁어요.  -김하늘 「할아버지 등 긁기」  아버지께서 집에 오시자/ 맨 처음 하시는 일이/ 양말을 벗어/ 목욕탕에 던지시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일찍 집에 오신 아버지는/ 양말도 안 벗으시고/ 낮잠을 주무신다.//  스르르 감으셨다 뜨셨다 하는/ 아버지의/ 힘없는 눈빛!//  참/ 피곤하신 모습이다./ 이때, 파리 한 마리/ 아버지의 얼굴 위를 맴돈다.//  나는 몇 번 손으로 쫓다가/ 살며시 방문을 열고/ 그 파리를 데리고/ 청마루로 나간다.//  ―이종택 「파리 한 마리」  줄은/ 기러기 줄./ 아이들이 갑니다./ 저수지 말라버린 하얀 바닥을/ 콩 콩/ 새 길을 내며 갑니다.//  ―하마 오리는 가차와졌제?/ ―앙이다. 십리는 가차와졌다.//  내도 마르고/ 들도 마르고/ 저수지 스무길도 말랐습니다.//  ―작두만한 잉어도 살았다는데/ ―멍석만한 자라도 살았다는데//  오늘 넷째 시간 국어 공부는/ 을 배웠습니다./ 책을 펴 놓고,/ 책을 펴 놓고,/ 한 사람도 읽지는 못 했습니다.//  ―돌이야, 와 손 안들었노?/ ―순이 너는 와 안들었노?//  / 선생님도 예까지 읽으시고는/ 말없이 그냥 나가셨습니다.//  ―우리 선생님 와 나가셨노?/ ―선생님도 목이 맨기라.//  들도 마르고/ 내도 마르고/ 저수지 스무길도 말랐습니다.//  ―작두만한 잉어도 살았다는데/ ―멍석만한 자라도 살았다는데.//  -이문석 「가뭄」  어머니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 어머니가 그것을 주워드신다/ 내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 어머니가 다시 그것을 주워드신다/ 내가 부주의하게 떨어뜨린 수저의 개수만큼/ 허리를 굽히시는 어머니  -이선영 「수저와 어머니」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 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김영승 「반성 100」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 「장편(掌篇)」  강아지가 남긴/ 밥은// 참새가 와서/ 먹고,//  참새가 먹고 남긴/ 밥은// 쥐가 와서/ 먹고,//  쥐가 먹고 남긴/ 밥은// 개미가 물고 간다./ 쏠 쏠 쏠/ 물고 간다.  -이상교 「남긴 밥」  벼룩을 눌러 죽이며/ 입으로는 말하네/ ‘나무아미타불!’  -이싸 하이쿠  방금/ 손수레가/ 지나간 자리// 바퀴에 밟힌 들풀이/ 푸득푸득/ 구겨진 잎을 편다.  -권영상 「들풀」  엄만 옛날에/ 무엇이 되고 싶었나요?//  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엄만, 지금이/ 너무 좋단다.//  우리 예쁜/ 연이 엄마 됐으니까.  -이혜영 「엄마의 대답」  공부를 않고/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잠을 자려는데/ 아버지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워서/ 말도 안 하려고 했는데/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임길택 「흔들리는 마음」  콩 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김용택 「콩, 너는 죽었다」  감꽃 피면 감꽃 냄새/ 밤꽃 피면 밤꽃 냄새/ 누가 누가 방귀 뀌었냐/ 방귀 냄새  -김용택 「우리 교실」  엄마는 아침밥 해먹고 설거지하고/ 방 청소하고 빨래해서 걸어두고/  마당에다가 고추 널고 또 고추 따러 간다/  얼굴이 발갛게 땀을 흘리며/ 하루 종일 고추를 딴다/  해 지면 집에 와서 고추 담고/ 저녁밥 해먹고 설거지하고/  고추를 방에다 부어놓고/ 고추를 가린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가리며/ 꾸벅꾸벅 존다/ 우리 엄마는 진짜 애쓴다  -김용택 「엄마는 진짜 애쓴다」  아버지 밥상 펴시면/ 어머니 밥 푸시고/ 아버지 밥상 치우면/ 어머니 설거지 하시고/  아버지 괭이 들고 나가시면/ 어머니 호미 들고 나가시고/ 아버지가 산밭에 옥수수 심자 하면/ 옥수수 심고//  어머니가 골짝밭에 감자 심자 하면/ 감자 심고/  고무신 두 짝처럼/ 나란히 나가셨다가/ 나란히 들어오시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서정홍 「고무신 두 짝처럼」  어머니는/ 연속극 보다가도 울고/ 뉴스를 듣다가도 울고/ 책을 읽다가도 울고//  가끔 말 안 듣고/ 속을 태우는/ 형과 나 때문에 울고//  자주 술 마시고/ 큰소리치는/ 아버지 때문에 울고//  어머니는/ 어머니 때문에 울지 않고/ 다른 사람들 때문에 웁니다.  -서정홍 「어머니」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니나니/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윤석중 「넉 점 반」  내 생일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어요./ 내 동생에게 비밀이 하나 있었던 거예요./  동생은 그 비밀을 며칠이고 계속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비밀에 대해 물으면 자그맣게 노래를 부르며 딴청을 피울 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 비가 왔어요./ 잠에서 깨어나 보니 동생이 울고 있는 거예요./  동생이 나에게 말하더군요./  “누나, 정원에 내가 설탕 두 덩어리를 심어 놓았거든./ 누나가 설탕을 끔찍이 좋아하니까./  누나 생일이 되면 설탕나무 한 그루가 자라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두 녹아 없어졌을 거야.”/  아이 참, 예쁜 내 동생!  -캐서린 맨스필드 「동생의 비밀」  눈으로 먼지가 들어갔다./ 암만 비벼도 안 나온다.//  뒷담에 기대섰더니/ 옆집 아저씨 하는 소리,/ “얘, 아빠한테 꾸중 들었니?”//  큰길로 나왔더니/ 앞집 누나 하는 소리,/ “얘, 어떤놈이 때렸니?”//  아무도 모르는 눈 속의 먼지/ 암만 비벼도 안 나온다.  -사이조 야소 「먼지」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영감님을 만났네./  “어른 앞에서 뒷짐을 지다니/ 허, 그놈 버릇없군.”//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뒷집 애를 만났네./  “얘, 먹을 거냐/ 나 좀 다우.”//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삽살이를 만났네./  “뒤에 든 게 돌멩이지./ 달아나자 달아나.”  -윤석중 「흙손」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들판으로 나가던 언니가 보고/  “얘, 너 선생님께/ 걱정 들었구나.”//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동네 샘 앞에서 누나가 보고/  “얘, 너 동무하고/ 쌈했구나.”//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삽작문 밖에서 아버지가 보고/  “얘, 너 어디가/ 아픈가 보구나.”//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붴에서 밥 짓던 어머니가 보고/  “얘, 너 몹시도/ 시장한가 보구나.”  -권태응 「고개 숙이고 오니까」  추운 날/ 대문 앞에 서 있으면요,//  지나가던 아저씨가/ ―엄마를 기다리니? 발 시리겠다.//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원 저런, 감기 걸리겠다. 집에 들어가거라.//  지나가던 강아지가/ ―야단맞고 쫓겨났군, 안 됐다, 컹컹//  대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내 마음/ 알지도 못하고…….//  코를 잡고 뱅, 뱅 돌고 싶은 팽이가/ 내 주머니 속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이준관 「추운 날」  3. 보거나 듣거나 한 일에 생각을 더해 보자  덕수궁 뒷담 벽에/ 몇 개의 낙서 그림이 있다/ 아이와 손 두 개/ 나무 한 그루 또 아이 얼굴 하나/ 고궁의 담벽에 낙서하는 건/ 나쁜 일인 줄 알 텐데/ 얼마나 심심한 아이가/ 제 모습을 그리다 갔을까/ 이 봄이 오고 벌써 두 번째/ 이곳을 찾아온 내 맘속에 그려져 있다/ 일요일 덕수궁 뒤뜰에 혼자서/ 난 자꾸 그 아이와 친하고 싶다.  -유경환 「일요일에 만나고 싶은 아이」   앞을 지나면서/ 침이 꿀꺽!/ ‘떡볶이, 참 맛있겠다!’//   앞을 지나면서/ 침이 꿀꺽!/ ‘팥빵, 참 맛있겠다!’//   앞을 지나면서/ 침이 꿀꺽!/ ‘통만두, 참 맛있겠다!’//  학원 갔다 돌아오는 늦은 저녁 길/ 침이나 꿀꺽꿀꺽./ 이러다 내 인생,/ 다 끝나겠다!  -이상교 「내 인생」  바삭바삭/ 붕어빵// 매일/ 학교 담벼락 옆/ 붕어빵을 굽던 아저씨//  감기라도 걸린 걸까?// 친구 옆에서/ 덤으로 얻어먹던 붕어빵//  오늘은 꼭 하나/ 사 먹으려 했는데…….  -최윤정 「붕어빵 아저씨 결석하다」  갑자기 네가/ 보고 싶어졌어.// 책가방 속에 따라온/ 너의 지우개.  =최윤정 「짝」  “한라산 한 갑 주세요.”//  귀찮은 마음을/ 아버지 좋아하는 한라산으로/ 꾹꾹 누르며/ 집 앞에 도착하는 잠깐 사이/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제일 높은 산 이름/ 우리의 제일 오랜 산 이름/ 백두산,/ 왜 백두산 담배는 없을까?//  이제 다섯 살/ 내 동생 새롬이/ 내게서 담배 심부름/ 물려받을 때쯤이면/ 서울에서/ 평양에서/ 이런 소리 들려올까?//  “백두산 한 갑 주세요.”/ “통일 한 갑 주세요.”  -남호섭 「담배 심부름」  소가 혀를 내밀었다./ 아주 길었다./ 사람한테/ 소 같은 혀가 있다면/ 급식 먹을 때도/ 우스워서 우스워서/ 견딜 수 없을 게다.//  -초등학교 1학년생 작품 「소의 혀」  날씨가 좋아 뜰에 나가니/ 개미가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볼록렌즈를 꺼내어/ 개미한테 빛을 쬐었다./ 개미는 어디까지나 달아났다./ 왜 그럴까?/ 빛에다 손을 대니 뜨거웠다./ 미안 미안/ 난 몰랐단다.//  ―초등학교 3학년생 작품 「개미야, 미안하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3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정현종 「한 숟가락 흙 속에」  와! 이제야/ 숙제 다 했네/ 일기 다 썼네/ 이젠 편안히/ 꿈나라로 갈 시간//  오늘도 내 곁에서/ 힘들게 굴던/ + - × ÷ 수학책/ a b c d 영어책,//  컴퓨터 게임 그만 해라/ 공부 좀 해라 하시던/ 아빠 엄마 말씀,/ 이젠 안녕!//  더 이상 날 따라오지 마세요/ 꿈나라에서만은 싫어요/ 아셨죠!/ 그럼, 안녕!  -권오삼 「이곳만은 안 돼요」  체격 검사를 했다./ 내 몸무게가/ 6kg이나 불었다./ 일년 사이에//  땅덩이 무게도/ 6kg 더 늘어났겠다.//  새들이 알을 까서/ 식구들이 불어날 때/ 씨앗이 싹이 터서/ 큰 나무로 자랄 때//  땅덩이도 그만큼/ 무게가 더해지겠지.//  오늘은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나고/ 마을 앞 저수지도/ 가득히 채워졌다.//  땅덩이 무게도/ 참 많이 늘어났겠다.  -김종상 「땅덩이 무게」  잔디 사이 씀바귀를/ 잡초라 하면/ 씀바귀는 잔디를 잡초라 하지/ 잔디도 풀이고 씀바귀도 풀인데/ 잔디는 밟지 말라 하고/ 씀바귀는 뽑아라 하시니/ 선생님도 참.//  가을 햇살이/ 자박자박 밟고 다니게/ 바람도 심심하면/ 몰고 다니게/ 이른 새벽 안개비에  낙엽이 곱게곱게 내렸는데/ 날마다 주워서 태우라고 하시니/ 선생님도 참.//  교실에 뽑혀 온/ 들찔레 열매/ 산새랑 들풀이랑/ 친구가 그리워/ 밤마다 빨간 볼에 눈물짓는데/ 산자락에 가만 놔두지/ 선생님도 참.//  -이정숙 「선생님도 참」  엄마가 시장에 간 사이/ 동생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울리지 말고/ 잘 데리고 놀랬는데//  이 말썽꾸러기/ 찾기만 해봐 가만 놔두나//  어디로 갔는지/ 손바닥에 침을 뱉어 / 점을 쳐 보았다//  침이/ 사방으로 튀는 걸 보니/ 온 동네 다 돌아다니나 보다.  -신천희 「점치기」  아직,/ 신호등은/ 빨간 불인데//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그냥/ 길을 건넌다.//  “안 돼, 건너지 마!”/ 얘기해 줄/ 엄마도 없나 보다.  -최윤정 「그 강아지는」  유리접시의 물속에서/ 플라나리아 한 마리가 허리를 잘립니다./ 유유히 헤엄치다가/ 날카로운 면도날에 둘로 잘리니/ 바닥에 붙어 꼼짝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죽을 거라고 하고/ 머리가 있는 쪽만 살 거라고도 하고/ 둘 다 살 거라고도 했지만/ 나는 다시 붙을 거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과학실에 가보니/ 그놈들은 두 마리가 되어 꼬무락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놈들은 본디 한몸인 줄 모르는지/ 제각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생명력이냐고/ 선생님은 감탄하셨지만/ 그런 힘을 가지고도/ 잃어버린 반쪽을 찾을 생각도 않는/ 바보 같은 벌레라/ 개울 바닥 돌 밑에서/ 햇빛을 피해 살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서로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따로따로 꿈틀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고흥수 「플라나리아」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 넣어 주실 때마다/ 할머니도/ 아―/ 아―/ 입을 크게 벌리지요.//  할머니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이/ 밥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릴 때마다/ 할머니도/ 내 동생을 따라/ 입을 우물우물하지요.//  할머니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윤동재 「할머니 입」  아이들은 나를/ ‘은영 세탁소’라고 부른다.//  이젠 괜찮지만/ 그래 괜찮지만// 내 이름을 간판에 걸고/ 일해 오신 아버지처럼//  나도 정말 남들을/ 깨끗하게 빨아 주고// 남들의 구겨진 곳/ 곧게 펴 주고 싶다.//  아버지의 주름살을 제일 먼저/ 펴 드리고 싶다.  -남호섭 「은영 세탁소」  방문을 열면/ 닭들이 나란히 서서/ 나를 지켜본다.//  울타리로 다가가면/ 쪼루루루 몰려나와서/ 고개를 갸웃거려//  혹시 모이 줄까 하고//  그런데 모이 안 주고/ 달걀만 꺼낼 올 땐/ 정말 미안하다.  -김은영 「닭들에게 미안해」  저기/ 포크레인 덜컹거리는/ 숲에는/  소쩍새 부엉이 비둘기 꿩 지빠귀 꾀꼬리 솔새 휘파람새 까치 까마귀 할미새 다람쥐 산토끼 들고양이 청설모 너구리 오소리 고라니 꽃뱀 구렁이 족제비 멧돼지 산나리 원추리 둥글레 고사리 취 으아리 두릅 잔대 더덕 머루 다래 칡 잣 솔방울 두메부추 소나무 잣나무 옻나무 참나무 밤나무 엄나무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영지버섯 국수버섯 싸리버섯 밤나무버섯 독버섯 진달래 철쭉꽃 찔레꽃 제비꽃 할미꽃 조팝꽃 싸리꽃 산나리 물봉숭아 엉겅퀴 패랭이꽃 산도라지 달맞이꽃 솔이끼 돌멩이 바위 개미떼 벌 나비 개구리 옹달샘 골짜기 바람소리 물소리 가을단풍 겨울눈꽃 오솔길  숲 하나에는/ 내가 아는 것만도 이렇게 많은데/ 너도 아는 것 동그라미 쳐가며 읽어보고/  내가 모르는 것도 써 주렴//  숲 하나/ 이제 영영 사라지고 마는데/ 숲 하나에 있던 모든 것들/ 다만 이름이라도 남겨 놓아야 하지 않겠니.  -김은영 「숲 하나」  소설가 박범신 선배 말에 따르면/ 중국 연변 땅에 가면/ ‘첫날 이불’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혼수품 가게가 있다고 합니다/ 그 집의 분홍이불 한 채 같이 덮고 자면/ 누구나 착한 짐승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찬란한 날이 올 때까지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눈비 오듯 해야겠지요  -안도현 「첫날 이불」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 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함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이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복효근 「쟁반탑」  체격 검사를 했다./ 내 몸무게/ 6kg이나 불었다./ 일 년 사이에./ 땅덩이 무게도/ 6kg 더 늘어났겠다.//  새들이 알을 까서/ 식구들이 불어날 때/ 씨앗이 싹이 터서/ 큰 나무로 자라날 때//  땅덩이도 그만큼/ 무게가 더해지겠지.//  오늘은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나고/ 마을 앞 저수지도/ 가득히 채워졌다//  땅덩이 무게도/ 참 많이 늘어났겠다.  -김종상 「땅덩이 무게」  엄마가 사 온/ 굴비 한 두름// 몸은 꽁꽁 묶여 있어도/ 입은 쩍쩍 벌리고 있다//  고만고만한 게/ 분명 친구들이다// 그물에 걸린 그 때/ 바다 학교/ 음악 시간이었을까?//  아니 그런데/ 넌 뭐야?/ 입 꼭 다물고 있는/ 너!//  아, 친구들 다함께 노래 부를 때/ 넌 창 밖 내다보며/ 딴생각 하고 있었구나!//  그러다 덜컥/ 그물에 걸렸구나!  -한상순 「굴비」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띠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  4. 사물의 모습(전, 지금, 미래)과 본질을 보자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감자꽃」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 하이쿠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최계락 「꽃씨」  알 여섯 알/ 앵무새 둥지 속에/ 이마를 맞대고//  여섯 알 새알에 귀 기울이면/ 꿈꾸는 즐거움으로 소란하다/ 늪과 고원을 높이 날, 뒷날.//  그 꿈은 노래/ 소란스런 합창/ 알 속에 담긴 것.  -칼 샌드버어그 「앵무새 알 여섯 개」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걸  -소세키 하이쿠  노랑나비가 되어/ 꽃밭을 가로질러도/ 날,/ 징그럽다고 할까//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옮겨 주어/ 풍작이 들어도/ 날, 배추 몇 잎 갉아먹는다고/ 죽일까?  -김원석 「배추벌레」  연필은/ 산 그릴 때/ 쓱쓱 잘 그려요.// 연필은/ 새 그릴 때/ 쓱쓱 신이 나요.//  연필은/ 나무가 엄마거든요./ 숲이 고향이거든요.  -손동연 「연필이 신날 때」  5. 나만의 별명을 붙여 주자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  -장 콕도 「귀」  바다로 나가려고/ 몸살하는/ 바구니에 담아 놓은 꽃게들.  -이정석 「어린이」  봄비 오는/ 하늘은/ 물뿌리개지.// 땅 속의/ 씨앗만큼/ 꼭 그 수만큼,//  갖가지/ 씨앗만큼/ 꼭 그 크기만큼,// 뚫린 물구멍./ 고른 물구멍.//  ―김용섭 「물뿌리개 하늘」  바람은 물살/ 나뭇잎은 물고기//  물살이 일자/ 물고기들이 파들파들/  엄마 나무에 매달려 파들파들/ 엄마한테서 떨어져 나가게 될까 봐, 파들파들  -이상교 「바람 부는 날」  한겨울/ 잎 다 떨어진 아기나무에/ 참새 여덟 마리가 앉았다.//  한 마리가 뚝 떨어지더니/ 윗가지에 가 붙었다.//  두 마리가/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한 마리는 땅에 떨어지고/ 한 마리는 꼭대기에 가 붙었다.//  우르르/ 다 떨어지더니/ 나무 한 바퀴 돌아/ 아까보다 더 예쁘게 달렸다.  -이복자 「참새 나무」  으르렁 드르렁/ 드르르르 푸우―//  아버지 콧속에서/ 사자 한 마리/ 울부짖고 있다.//  생쥐처럼 살금살금/ 양말을 벗겨 드렸다.  -김은영 「잠자는 사자」  광릉 숲에 들어서면/ 푸른 갑옷을 두르고/ 팔도강산에서 모여든/ 어기찬 아저씨들을 만난다.//  임꺽정의 팔뚝 같은 나무,/ 김정호의 다리 같은 나무,/ 활대 잡은 충무공처럼 훤칠한 나무.//  임진왜란의 의병들이 튀어나오고/ 동학의 장정들이 걸어 나오고/ 솔잎 수염이 따끔따끔 침을 찌르던/ 청산리 싸움의 독립군들을 만난다.//  바람을 맞으면 더 푸른 나무,/ 눈보라 휘몰아치면 더 곧게 서서/ 파리 부는 나무.//  광릉 숲에 들어서면/ 웃자란 내 몸도/ 한 그루 옹이 박힌 나무가 된다.  -서재환 「광릉 숲에서」  엄마는/ 가지 많은 나무.//  오빠의 일선 고지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오게 하여/ 가지에 단다./ 오빠 대신/ 무거워 주고 싶다.//  시집 간 언니 집에서/ 물동이 무게 절반을 오게 하여/ 가지에 단다.//  그 무게는 무게대로/ 바람이 된다./ 동생이 골목에서 울고 와도/ 그것이 엄마에겐/ 바람이 된다.//  뼈마디를 에는 섣달 어느 밤/ 엄마는 오빠 대신 추워 주고 싶다.//  그런 맘은 모두/ 폭풍이 된다.//  엄마라는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신현득 「엄마라는 나무」  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은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 만큼에/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  글자의 이랑을/ 눈길로 타면서/ 엄마가 김을 매듯/ 책을 읽으면,//  줄을 선 글자들은/ 싱싱한 보리숲,/ 땀 젖은 흙 냄새/ 엄마 목소리.  -김종상 「어머니」  별을 보았다.// 깊은 밤/ 혼자/ 바라보는 별 하나.//  저 별은/ 하늘 아이들이/ 사는 집의/ 쬐그만/ 초인종.// 문득/ 가만히/ 누르고 싶었다.  - 이준관 「별 하나」  들길 위에 혼자 앉은/ 민들레./ 그 옆에 또 혼자 앉은/ 제비꽃.// 그것은/ 디딤돌.//  나비 혼자/ 딛/ 고/ 가/ 는// 봄의/ 디딤돌.  -이준관 「나비」  봄이/ 찍어 낸/ 우표랍니다.// 꽃에게만/ 붙이는/ 우표랍니다.  -손동연 「나비」  내 얼굴은/ 답안지// 엄마가 읽는/ 답안지//  엄마!/ 오늘은 읽지 마세요// 터질지도 몰라요/ 내 울음보//  읽었더라도/ 모른 척해 주세요.  -유희윤 「시험 본 날」  “금방 가야 할 걸/ 뭐 하러 내려왔니?”// 우리 엄마는//  시골에 홀로 계신/ 외할머니의 봄눈입니다.// 눈물 글썽한 봄눈입니다.  -유희윤 「봄눈」  흰구름 건져 먹고/ 별 건져 먹고/ 새하얀 꽃이 된다./ 연꽃이 된다.//  갈대숲에도 한 송이/ 조으는 듯 동동/ 바위그늘에도 한 송이/ 꿈꾸는 듯 동동//  흰구름 건져 먹고/ 달 건져 먹고/ 떠다니는 꽃이 된다./ 연꽃이 된다.  -이동운 「고니」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엄마, 깨진 무릎에 생긴/ 피딱지 좀 보세요./ 까맣고 단단한 것이 꼭/ 잘 여문 꽃씨 같아요./  한 번 만져 보세요./ 그 속에서 뭐가 꿈틀거리는지/ 자꾸 근질근질해요./  새 움이 트려나 봐요.  -신형건 「봄날」  마침표/ 아름다운 시작이다.//  시든 꽃이 떨군/ 마침표/ 까만 씨앗/ 꽃이 태어난다.//  돋보기로 모은/ 해님의 마침표/ 까만 점에서/ 다시 해님이 뜬다.  -김숙분 「마침표」  나무는/ 청진기// 새들이/ 귀에/ 꽂고/ 기관지가/ 나쁜// 지구의 숨결을 듣는다.  -정운모 「나무」  소말리아 아이들 다리는/ 겨울나무 가지./ 우리 반 친구 진철이, 용만이 다리는/ 여름나무 가지.//  소말리아 아이들/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지만/ 우리 반 친구들/ 핫도그, 만두, 떡볶이 보이는 대로/ 다 사 먹고는/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군것질 꾹 참고 돌아온 나도/ 덩달아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많이 먹고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내 친구 닮을까봐/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서정홍 「윗몸일으키기」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가가/ 의자 몇 개 내놓은 거여  -이정록 「의자」  6. 재미있는 특징(모습, 행동, 소리 등)을 발견하자  가갸 거겨/ 거겨고교/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한하운 「개구리」  저런,/ 등에/ 혹이/ 두 개씩이나?// 사막을 터벅터벅/ 무겁겠다, 얘//  아니야,/ 이건/ 내/ 도시락인걸!// 타박타박 사막이/ 즐겁단다, 얘//  ―손동연 「낙타」  코끼리야 코끼리야/ 네 그림을 그리는데/ 코가 어찌나 긴지/ 금방 도화지 밖으로/ 달아나 버리지 뭐니//  얼른/ 도르르 말아 줘//  ―손동연 「코끼리」  코끼리는 무엇이든지 귀찮다./ 커다란 몸뚱이를 하고서/ 먹을 것을 가지러 가는 것이/ 귀찮아서/ 저리 긴 코로 잡는다.//  ―초등학교 2학년생 작품 「코끼리」  소가/ 아기염소에게 그랬대요./ “쬐그만 게/ 건방지게 수염은?/ 또 그 뿔은 뭐람?”//  그러자/ 아기염소가 뭐랬게요?/ “쳇,/ 아저씬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 덩치에 아직도 ‘엄마 엄마’하게?”//  ―손동연 「소와 염소」  기린은/ 하루에/ 한 끼씩만 먹어도 될 거야//  목/ 이/ 길/ 어/ 서//  뱃속까지/ 가는 데도/ 하루가 다 걸릴 테니까//  ―손동연 「기린」  7. 새로운 관계를 맺어 주자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로 대답하며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 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 물방울도 처음이다  -정현종 「물방울- 말」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서정주 「춘향유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별은/ 별자리/ 제자리를 지켜요.// 하루 내내,/ 한 달 내내,/ 일 년 내내…….//  심심할 거예요./ 그러니 가끔씩/ 자리를 바꿔 주세요./ 우리 선생님처럼요.//  그래야 별들도/ 새 친구를 만날 수 있잖아요./ 사귈 수 있잖아요./ 네, 하느님.  -손동연「별도 가끔 자리를 바꾸면 얼마나 신날까」  꽃게야, 꽃게야// 튼튼한 네 집게/ 잠깐만 빌려 줄래?//  동전만 집어삼키는/ 인형뽑기통에서// 내 맘에 쏙 드는 인형 좀 뽑아 보게……  -이봉직 「꽃게야, 꽃게야」  길을 가다 문득/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다가가 그 곁에 가만히 서 보고 싶다.//  잎들이 다 지고 하늘이 하나/ 빈 가지 끝에 걸려 떨고 있는/ 그런 가을날.//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내 어깨와/ 아기새의 그 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디든 걸어 보고 싶다./ 걸어 보고 싶다.  - 이준관 「길을 가다」  아직 머리에 뿔도 나지 않은 송아지에게/ 아이가 먹을 것을 한 주먹 쥐고/  어서 먹어, 어서 먹어, 하고/ 먹을 것을 준다.//  아직 머리에 뿔도 나지 않은 송아지가/ 아이의 손바닥에 있는 것을 다 먹고 나서/  아이의 손바닥을 귀여운 혀로 간질이며/ 간지럽니?/ 이 간지럼밖에는 네게 줄 게 없구나./  그래도 괜찮니?  -이준관 「그래도 괜찮니?」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산은/ 숲은 품고// 숲은/ 나무를 품고// 나무는/ 둥지를 품고// 둥지는/ 새를 품고//  새는 새는// 노래로/ 온 산을 품고.  -김용섭 「산」  물이/ 산을 안고 돈다/ 산은 나무를 안고/ 나무는 새들을 안고//  아빠 엄마는/ 나를 안고 간다/ 나는 풀꽃을 안고/ 풀꽃은 개미를 안고//  우리는 모두가 서로서로 안고 산다.  -이성자 「우리는 서로 안고 산다」  8. ‘왜?’라는 의문에 ‘아하!’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주자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提草色多)/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수하시진(大同江水何時盡)/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  비 갠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언제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정지상 「송인(送人)」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에 났다니  -성삼문(成三問)  주려 죽으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었거니  헌마 고사리를 먹으려 캐었으랴  물성(物性)이 굽은 줄 미워 펴보려고 캠이라  -주의식(朱義植)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동안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 「성선설」  지난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겨울 양재천에 왜가리 한 마리/ 긴 외다리 담그고 서 있다//  냇물이 다 얼면 왜가리 다리도/ 겨우내 갈대처럼 붙잡힐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냇물이/ 말미를 주는 것이다//  왜가리는 냇물이 다 얼지 말라고/ 밤새 외다리 담그고 서 있는 것이다  -반칠환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윤석중 「먼 길」  종일 헤매어/ 지친 애버러지/ 떨어져 시든 꽃잎 위에 엎드리니/  내일 떨어질 꽃잎 하나가/ 보다 못해/ 미리 떨어져 이불 덮어주는/ 저녁답.  -유안진 「자비로움」  옆집 아이가/ 화경으로/ 개미를 쪼이고 있다.// ( ).  -김영일 「( )」  키가 너무 높으면/ 까마귀 떼 날아와 따먹을까 봐/ 키 작은 땅감나무 되었답니다.//  키가 너무 높으면/ 아기들 올라가다 떨어질까 봐/ 키 작은 땅감나무 되었답니다.  -권태응 「땅감나무」  비가/ 그렇게 내리고// 눈이/ 그렇게 내리고//  또, 강물이/ 그렇게 흘러 들어가도//  바다가/ 넘치지 않는 건//  //  -박병엽 「바다」  넘어가는 해/ 잠깐 붙잡고,/ 노을이/ 아랫마을을/ 내려다본다.//  새들/ 둥우리에 들었는지,/ 들짐승/ 제 집에 돌아갔는지,/ 잠자리/ 쉴 곳을 찾았는지,//  산밭에서 수수가/ 머리를 끄덕여 줄 때까지/ 노을은/ 산마을에 머무르고 있다.//  -황베드로 「노을」  내가 복도에서 뛰는 건/ 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가벼운 걸음이/ 잰걸음이 되고/ 잰걸음으로 걷다 보면/ 복도 끝이 백 미터 결승선처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뛰다가도/ 멈추지 않는 건/ 차도처럼 반듯한 보도에/  좌측통행만 있고/ 신호등이 없기 때문이다  -김은영 「복도에서 뛰는 이유」  조그만 몸에/ 노오란 털옷을 입은 게/ 참 귀엽다.//  병아리 엄마는/ 아기들 옷을/ 잘도 지어 입혔네.//  파란 풀밭에 나가 놀 때/ 엄마 눈에 잘 띄라고/ 노란 옷을 지어 입혔나 봐.//  길에 나서도/ 옷이 촌스럴까 봐// 그 귀여운 것들을/ 멀리서/ 꼬꼬꼬꼬/ 달음질시켜 본다.  -엄기원 「병아리」  비는 아프다./ 맨땅에 떨어질 때가/ 가장 아프다.//  그렇다./ 맨땅에 풀이 돋는 것은/ 떨/ 어/ 지/ 는/ 비를/ 사뿐히 받아 주기 위해서다.//  아픔에 떠는 / 비의 등을 가만히/ 받혀 주기 위해서다.//  -이준관 「비」  봄 하늘 구름은/ 빨리/ 봄비가 되고 싶다.//  땅 속/ 촉촉이 젖어들고 싶다./ 바위 틈/ 촉촉이 스며들고 싶다.//  흙 속/ 여기저기 묻힌/ 바윗돌 이 틈 저 틈 끼인/  지금 막 눈 뜰/ 이름 모르는/ 풀씨를 위해.//  -이창건 「풀씨를 위해」  꽃이/ 예쁘지 않는 일은 없다./ 열매가/ 소중하지 않는 일도 없다.//  하나의 열매를 위하여/ 열 개의 꽃잎이 힘을 모으고/ 스무 개의 잎사귀들은/ 응원을 보내고//  그런 다음에야/ 가을은 / 우리 눈에 보이면서/ 여물어 간다.//  가을이/ 몸조심하는 것은/ 열매 때문이다./ 소중한 씨앗을 품었기 때문이다.//  -정두리 「가을은」  쌀을 뿌려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 )  -이싸 하이쿠  아이들아,/ 벼룩을 죽이지 마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으니!  -이싸 하이쿠  하얀 페인트로 담벼락을 새로 칠했어./ 큼직하게 써놓은 ‘석이는 바보’를 지우고/  ‘오줌싸개 승호’ 위에도 쓱쓱 문지르고/ 지저분한 낙서들을 신나게, 신나게 지우다가/  멈칫 멈추고 말았어./  담벼락 한 귀퉁이, 그 많은 낙서들 틈에/ 이런 낙서가 끼어 있었거든./  -신형건 「낙서」  어제 저녁에 난/ 늦잠 자는/ 게으름뱅이 별들을/ 찾아다녔어.//  고롱고롱 코고는/ 고 녀석들 몰래/ 옷에 달린 단추를/ 하나씩 떼어 왔지.//  그랬더니 글쎄,/ 한밤중에야/ 부시시 깨어나던 녀석들이/ 오늘은/ 초저녁부터 반짝 눈을 뜨지 않겠어?//  그리곤/ 자꾸 내 창가를/ 기웃거리지 뭐야!// 어떡할까?/ 돌려줄까? 말까?  -신형건 「기웃거리는 까닭」  엄마가 아기 손등을/ 잘근잘근 물었습니다/ “엄마, 내 손등을 왜 물어?”/ “응, 그건 엄마가 너를/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아기도 엄마 손등을’ 꽈-악 깨물었습니다/ “아야야! 아프게 물면 어떡하니?”/ “응, 그건 내가 엄마보다/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야.”  - 김소운 「손등 물기」  경주박물관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에 눈부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 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정호승 「소년 부처」  겨울 산사에/ 자작나무라면 몰라도/ 작살나무라니/ 작살 모양으로/ 누구 도륙 낼 일 있나/ 비아냥거리다가/ 나무 이름 아래/ 뭐라 적힌 글씨를 읽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열매는 둥글며/ 새에게 좋은 먹이가 됩니다/ 새가 먹기 좋은/ 둥근 열매가 되려고/ 바람결에 제 살을 다듬었을까?/ 산을 내려오다 말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안준철 「작살나무의 보시」  9. 모든 사물은 살아있다고 생각하자. 의인화를 시키자  ― 통일이 됐다./ 나누어져 있기 싫어/ 통일이 됐다./  교실 귀퉁이에서/ 지구본이 돌면서 떠들어댄다.//  그 소식을 듣고부터/ 필통 안 컴퍼스가/ 그냥 있는 게 아니었다.//  뒷벽 그림 속의 꼬마들도/ 그 바람에/ 모두 튀어나와/ 떠들며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도무지 / 그림 속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제/ 우리 나라 지도를 다 그리고/ 신의주 가는 찻길을 그려 놓고,/  백두산까지 달리는 바람이/ 구름 밀고 가는 걸/ 내다보았다.//  교실은/ 책상들까지/ 덜컹거리는 것이었다.//  연필도/ 제가 필통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 이제부터 더 열심히/ 조약돌은 조약돌 노릇을 하고/ 소나무는 열심히/  산에 서서 푸르고/ 그럼 컴퍼스도/ 그만 필통 안 네 자리에/ 들어가거라.  -신현득 「통일이 되는 날의 교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이 옷을 뒤집고/ 가려운 곳을 긁어 달라고/ 등을 굽힌다.  -김은영 「바람과 나무」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뿌리들이 일하는/ 방에 가 보면//  꽃나무가 가진/ 쬐그만/ 펌프./ 작아서/ 너무 작아서/ 얄미운 펌프.//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꽃씨들이 잠들고 있는/ 방에 가 보면//  꽃씨들의 / 쬐그만 밥그릇./ 아, 꽃씨보다/ 작아서/작아서/ 간지러운 밥그릇.  -오규원 「방」  어둠이/ 커다란 어둠이// 꽃들을 재웠다고/ 큰소리치지만//  꽃들은/ 자는 척/ 향기로 이야기 나누는 걸// 어둠은/ 고건 모르지요.  -이화주 「고건 모르지요」  목장에 갔더니/ 송아지가 물었단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마신 우리 엄마 젖이 몇 컵인 줄 아니?”/  송아지처럼 풀밭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내가 말했지./ “맞춰 봐. 네가 맞춰 봐.”//  과수원에 갔더니/ 사과나무가 내게 물었단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먹은 내 열매가 몇 바구니인 줄 아니?”/  사과 향기 폴폴 나는 뺨을 내밀며/ 내가 말했지./ “맞춰 봐. 네가 맞춰 봐.”  -이화주 「맞춰 봐」  안경을 써야 할 거야./ 까마득한 옛날부터/ 너무 오랫동안/ 눈만 쓰고 계시니까 말야.//  해종일 우주의 아이들을 바라보다/ 눈이 어두워졌을 거야./ 아이가 어른이 되고/ 새끼가 어미가 되고/ 새싹이 나무가 되고/ 시내가 강물이 되는 걸/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바라보다가/ 아마 눈이 어두워졌을 거야.//  이어폰을 꽂아야 할 거야./ 까마득한 갓날부터/ 너무 오랫동안/ 귀만 쓰고 계시니까 말야.//  해종일 우주의 소리만 듣다/ 귀가 어두워졌을 거야./ 재깔거리는 공장의 기계 소리/ 딱총 소리/ 천둥소리/ 태풍 부는 소리/ 기차 자동차 오토바이 소리/ 비행기 소리……/ 핵폭탄 터지는 소리에/ 귀가 멀었을 거야.//  목발을 짚어야 할 거야./ 까마득한 갓날부터/ 너무 오랫동안/ 발만 쓰고 계시니까 말야.//  해종일 아이의 꿈만 쫓다/ 발이 아플 거야./ 아닌 밤중에 담 넘는 도둑을 쫓다/ 핏빛 전쟁터를 걷다/ 검은 밤을 쫓다/ 혼자 여럿을 쫓다/ 아마 발이 부러졌을 거야.//  우스워도 할 수 없지 뭐./ 온갖 보이는 거로부터/ 들리는 거로부터/ 느끼는 거로부터/ 하나밖에 없는/ 해님을 보호해야지.  -김흥수 「해님」  한낮,/ 해님이 눈을 크게 뜨고/ 뜨거운 입김 훅―// 살짝 바람이 딛는 순간,//  오롱조롱 매달려 있던/ 봉숭아 꽃씨 형제들/ 톡/ 토독//  나는 장독대/ 너는 우물가……// 누가 더 멀리 뛰나/ 내기한 거야.//  지금은 모르지/ 내년 이맘때/ 꽃피면/ 알지.  -한상순 「꽃씨들의 멀리뛰기」  낡은 구두는/ 젖은 발이 안쓰럽습니다.// 젖은 발은/ 새는 구두가 안쓰럽습니다.  -유희윤 「비 오는 날」  신발주머니에 들어간 신발은/ 미안했어요,/ 흙이 묻어서.//  “괜찮아./ 주인을 위해 일했잖아.”/ 신발주머니는 신발을/ 꼭 안아 주었어요.//  둘이는 똑같이/ 흙투성이가 되었어요.  -이혜영 「둘이는 똑같이」  참새가 수수 모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아이고 무거워/ 내 고개 부러지겠다 참새야/  몇 알 따먹고/ 얼른 날아가거라  -김용택 「참새와 수수 모가지」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뿌리들이 일하는/ 방에 가 보면//  꽃나무가 가진/ 쬐그만/ 펌프./ 작아서/ 너무 작아서/ 얄미운 펌프.//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꽃씨들이 잠들고 있는/ 방에 가 보면//  꽃씨들의/ 쬐그만 밥그릇./ 아, 꽃씨보다/ 작아서/ 작아서/ 간지러운 밥그릇.  -오규원 「방」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 놓아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 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겨울이 오는 길이/ 쓸쓸하지 않도록//  몇 송이 코스모스를/ 계속 피게 하는 일이다.//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만/ 마중 가는 일이다.  -오규원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사다리가 전봇대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하나밖에 없네.”/  전봇대도 사다리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두 갠데도 혼자 못 서지?”//  사다리가 말을 바꿨어요./ “넌 대단해!/ 다리가 하난데도 혼자 서잖아.”/  전봇대도 고쳐 말했어요.?네가 더 대단해!/ 사람들을 높은 데로 이끌어 주잖아!“  -오은영 「고쳐 말했더니」  오늘 새벽/ 장닭보다 먼저 일어나 들판을 걸었어//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났겠지/ 마음을 솔솔 부풀리고 있었지//  아, 그 순간/ ―난 밤새 잠 한 숨도 안 잤다/ 돌돌돌 도랑물이 말을 걸며 지나가는 거야//  그런데 그 도랑물을/ 들판이 벌컥벌컥 마시고 있잖아/  우리가 잠든 사이 도랑물이 들판에게/ 그런 착한 일 몰래 하고 있었다니…….  -정갑숙 「도랑물이」  해님은 날마다/ 출석을 그림자로 확인한다.//  온 세상 모두가/ 일 학년 교실처럼 대답하다가는/ 지구의 귀가 터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키 큰 가로수는 길게/ 세 살배기 우리 아가는 짧게/ 육 학년 언니는 조금 길게/ 모두모두 그림자로 대답을 한다.  -윤이현 「그림자로 대답하기」  우리 할머니가/ 산 속 마을/ 작은 무덤집으로 이사 간다//  산에 사는 짐승들/ 풀꽃들은 참 좋을 거다/ 할머니랑 함께 살 수 있어서/ 날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들을 수 있어서//  재미난 이야기 먹으며/ 무럭무럭 자리고/ 할머니의 자장가 들으며/ 토실토실 살찌고//  정말로 좋을 거다/ 오늘부터/ 우리 할머니의 손자, 손녀가 될 수 있어서  -이성자 「참 좋을 거다」  여름 가뭄 때/ 물 한 통이라도 준 일 있니? 아―니요.//  비바람 몰아칠 때/ 한 번이라도 지켜 준 일 있니?/ 아―니요.//  그래도 가을 되니/ 가져가라고/ 예쁜 열매 아낌없이 떨어뜨리는//  밤나무 대추나무 도토리나무…….  -권오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상수리나무 밑에서/ 상수리알 줍다가/ 꿀밤 많이 먹었다.//  톡!/ (목마를 때 물 한 모금 안 준 것들이!)//  톡!/ (벌레 물려 아플 때 약 한번 안 발라준 것들이!)//  톡! 톡!/ (줍기나 하지 쿵! 쿵! 발길질까지 하다니!)//  아빠랑 상수리알 줍다가/ 상수리나무에게/ 나 많이 혼났다.  -서재환 「상수리알 줍다가」  10.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 보자  조그만 파리 눈에는/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크게 보일까?//  장미 꽃봉오리는 비단 침상만해 보이겠지.// 뾰족한 가시는 창만해 보이겠지.//  이슬 방울은 경대만하고/ 머리카락은 금빛 철사만하고/ 작고 작은 겨자씨는 불붙은 숯덩이만해 보이겠지.// 빵덩이는 높은 산으로,/ 꿀벌은 무서운 표범으로 보일까?/ 조금 집어 든 흰 소금은/ 목동들이 지켜 주는 흰 양떼처럼/ 환해 보이겠지.//  -월테 데 라 메어 「파리」  11. ‘~만약에’ 라는 가정을 해 보자  내가 만일 사과라면/ 그리고 가지에 달려 있다면/ 나처럼 얌전하고 착한 아이 앞에/ 뚝 한 개 떨어져 주지.//  착한 아이를 기쁘게 해 주지 않고/ 왜 맨날 가지에 달려 있나?//  착한 아이가 오기만 하면/ “자, 어서 맛있게 먹어봐.”/ 하고 그 앞으로 데구루루 굴러가 주지.  -베이야드 테라 「내가 사과라면」  만약에/ 빗방울이/ 세모나 네모여 봐// 새싹이랑/ 풀잎이/ 얼마나 아프겠니?  -손동연 「빗방울은 둥글다」  만일에 제가/ 어머니의 귀여운 아들이 아니고/ 강아지라면,/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으려 할 때/“저리 비켜! 요놈의 강아지.”/ 하고 야단을 치고 내쫓으시겠어요?/ 그러시겠다면/ 저는 지금 당장 집을 나가 버리겠어요./ 아무리 불러 보세요, 돌아오나.//  만일에 제가/ 어머니의 귀여운 아들이 아니고/ 앵무새라면,/ 날아가지 못하게 쇠사슬로 묶어 놓고/ 손가락으로 톡톡 치시면서/ “요놈의 새는 밤낮 쇠사슬만 물어뜯네.”/ 하고 흉을 보시겠어요?/ 그러시겠다면/ 저는 지금 당장 날아가 버리겠어요./ 숲 속으로 날아가 버리지 뭐./ 어머니 손에 다시는 안 잡힐 걸.  -타고르 「동정」  12. 호기심과 엉뚱한 생각, 상상한 것 등을 써 보자  바다가 한데 모여/ 한 바다가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바다가 되겠지.//  나무가 한데 모여/ 한 나무가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되겠지.//  도끼가 한데 모여/ 한 도끼가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도끼가 되겠지.//  사람이 한데 모여/ 한 사람이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사람이 되겠지.//  큰 사람이 큰 도끼로 큰 나무를 베어서/ 큰 바다로 쓰러뜨린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물결이 출렁거리겠지.  - 영국 「마더구스」에서  서로 등을 돌린 채 보이지 않은 곳까지 달려갔다. 들꽃이 한들거리며 말을 걸어도 둘 다 말이 없었다.  뿌앙― 기차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달려갔다. 기적소리 멀어질 때쯤 귓불을 스쳐가며 바람이 말했다. 어디 깊숙한 터널 속에서, 아니면 산모롱이 돌아갈 때쯤에 둘이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았을 거라고. 그러고는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넸을 거라고.  은빛 등을 반짝이며 나란히 나란히 철길 두 줄 달려갔다. 향긋한 들꽃의 웃음과 함께.  -신형건 「철길 두 줄」  키가 작아진/ 내 동생/ 크레파스.// 작아진 키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흙담이 되고/ 아른아른/ 흙담벽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되었을 거여요.//  풀잎이 되고/ 꽃잎이 되고/ 팔랑팔랑/ 노랑나비가 되어/ 날아갔을 거여요.//  장독대에 돋은/ 몇 오라기/ 머리카락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닻을 내린/ 통통배가 되고.//  그래요./ 또/ 무지개가 되고…….//  키가 작아진/ 내 동생/ 크레파스.// 몽당/ 크레파스.//  -손광세 「크레파스」  내가/ 학교로 가는 아침/ 8시에는//  히히덕거리며 친구들과/ 학교로 가는 아침/ 8시에는//  이 세상 골목길마다/ 학교로 가는 어린이들로/ 꽉/ 차 있겠지.//  태백산/ 작은 소릿길에도/ 제주도 한라산/ 풀밭길에도/  나와 같은 나의 친구들/ 형과 같은 형의 친구들.//  몇 명이나 될까,/ 헤아릴 순 없지만/ 학교로 가는 우리 친구들.//  8시 반에는/ 학교마다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마다/ 들어오신다.//  “차렷, 경례”/ 아아,/ 이 세상 어린이는 일제히 일어서서/ 선생님께/ 경례를 드릴 테지.  -박목월 「아침 8시 반」  사슴아, 사슴아,/ 네 뿔엔 언제 싹이 트니?// 사슴아, 사슴아,/ 네 뿔엔 언제 꽃이 피니?  ―강소천 「뿔」  아기돼지가/ 엄마에게 물었답니다.//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병아리는//  소/ 말/ 개/ 닭의/ 아기 이름인데// 왜/ 나는 없어?//  ―손동연 「돼지」  라디오 꼭지를 틀면/ 갇혀 있던 소리들이/ 우르르 와글와글/ 쏟아져 나오고.//  수도꼭지를 틀면/ 갇혀 있던 물방울들이/ 쏴아 쏴르르/ 쏟아져 나오고.//  바람의 꼭지는/ 누가 틀어 놓았기에/ 온종일 풀려/ 돌아다니는 걸까?//  누가 열어 놓고/ 잠그지 않은 꼭지에서/ 비는 쉬지 않고/ 쏟아지는 걸까?//  가볍고 상큼한 것 말고/ 지나쳐 넘치는/ 모든 것에/ 꼭지를 달아 주고 싶다.//  필요할 때마다/ 열고 닫을 수 있는/ 조그만 꼭지를/ 달아 주고 싶다.  -민현숙 「꼭지」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이문구 「산 너머 저쪽」  새소리보다/ 고운 소릴 내는/ 악기가 되고 싶었어요./ 지팡이가 된 나무.//  폭풍우에 조금씩 뒤틀리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번개가 스치고 갔을 땐/ 정신을 잃었지요./‘이젠 악기가 될 수 없구나.’//  그래도 나무는/ 꿈을 버리지 못했어요./ ‘한 사람을 위한 소리라도 낼 거야.’//  -똑 똑 똑/ 높낮이는 없지만/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을 위해/ 온몸으로 소리내는/ 지팡이가 됐어요.//  -똑 똑 똑/ 고운 소리는 아니지만/ 나무는/ 앞 못 보는 사람의/ 눈이 되었어요.  -이혜영 「악기가 되고 싶었던 나무」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면/ ‘따스함’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물 것 같다./  그 따스한 몸무게 아래엔/ 잠자는 풀벌레 풀벌레 풀벌레 ……/ 꿈꾸는 풀씨 풀씨 풀씨……/  제 몸을 갉아먹던 벌레까지도/ 포근히 감싸주는/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물에 달면/ 이번엔/  ‘너그러움’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무를 것 같다.  -신형건 「가랑잎의 몸무게」  우리 집에서 제일 야위신/ 우리 엄마./ 그러나/ 저울 위에 올라서면/ 바늘이 빙그르르/ 아빠의 눈금보다/ 더 돌아갈 거예요.//  엄마의 마음 속엔/ 걱정의 무게가 있고/ 안타까움의 무게/ 너그러움의 무게/ 참고 견딤의 무게/ 그 잔잔한/ 사랑의 무게가 있으니까요.// 그래요./ 어쩌면/ 눈금이 모자랄지도 몰라요.  -윤이현 「엄마의 몸무게」  유리병 속의 사마귀가/ 어젯밤에/ 메뚜기의 배를 먹어 버렸다.//  먹을 때 사마귀는 뭐라고 말했을까?/ “네 배를 한 입만 먹어야겠다./ 정말 미안하다.”/ 하고 사마귀말로 사과했을까?//  메뚜기는 뭐라고 말했을까?/ “죽기는 싫어./ 내 배를 너에게 줄 수 없어.”/ 하고 메뚜기말로 말했을까?//  -초등학교 5학년생 작품 「사마귀와 메뚜기  」  얄미운 생쥐가/ 하늘에도 사나 봐요.// 낮에는 숨었다가/ 밤만 되면 야금야금//  둥근 달/ 다 갉아먹고/ 손톱만큼 남았어요.  -서재환 「초승달」  13. 고정관념에 똥침을 주자  내가 얼룩말에게 물었다/ 너는 검정 바탕에 흰 줄무늬니?/ 흰 바탕에 검정 무늬니?/  얼룩말이 대답했다/ 너는 나쁜 버릇의 좋은 애니?/ 좋은 버릇도 있는 나쁜 애니?  - 쉘 실버스타인「얼룩말의 줄무늬」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오든 광명을!  -유하 「오징어」  추위에 웅크리던 나뭇잎이/ 팔랑 떨어진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그리고 모여든다./  “다치지 않게.”/ 저마다 손을 벌려/ 나뭇잎의 등을 받쳐 준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내려서서//  땅 위에 뉘인다.  -권영상 「바람」  ‘훠어이!’/ 아기 참새/ 쫓는 척만 하고.// ‘네끼놈!’/ 아기 참새/ 겁준 척만 하고.//  정말은……//  //  두/ 팔/ 벌렸다.  -박정식 「허수아비」  그토록 많은 삼림의 나무들이 땅에서 뿌리뽑혀/ 마구 쪼개지고/  으깨어져 생명을 잃고/ 윤전기에서 돌고 있다//  그토록 많은 삼림의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 종이 펄프를 만드느라고/  숲과 삼림의 벌목의 위험에 관한 이야기로 해마다 독자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수천 수만의 신문에 쓰이는 종이를 만드느라고  -쟈크 프레베르 「그토록 많은 나무들이…」  사람들은 참 웃겨/ 다리 하나 잡고/ 한 쪽 다리로만 싸우며/ 닭싸움이래/ 닭은 다리가 두 갠데/ 차라리 허수아비 싸움이라 하지//  사람들은 참 웃겨/ ‘윷놀이’라 이름 붙이고/ ‘윷’ 나오는 거보다/ ‘모’ 나오면 좋아해/ 윷이 주인공인데/ 차라리 ‘모놀이’라 하지//  너도 참 웃겨/ 오리싸움이면 어떻고/ 닭싸움이면 어때?/ ‘윷놀이’면 어떻고/ ‘모놀이’면 어때?/ 괜히 트집 잡고/ 너도 정말 웃겨  -김미희 「참 웃겨」  아무렇게나 버려진/ 밭 모퉁이에서도/ 쑥쑥 크는 가시나무.//  그 가시나무/ 조그마한 그림자 속에 들어가면/ 땡볕을 막고 선/ 시원한 바람이 있다.//  아무 짝에도 쓰잘 데 없는/ 가시나무가/ 뜨거운 햇볕을/ 가로막고 선다는 걸//  가시나무 그림자 속에/ 들어가기 전엔/ 나는 몰랐다.//  ―권영상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요./ 그래야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만약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요./ 하지만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요.  -쉘 실버스타인 「일찍 일어나는 새」  감이 열면 감나무/ 밤이 열면 밤나무// 다래 열면 다래나무/ 머루 열면 머루나무//  고욤 열면 고욤나무/ 개암 열면 개암나무// 오디 열면 오디나무/ 아니, 방귀 뽕나무.  -김은영 「뽕나무」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을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 가를/ 어째서 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바다를 와서야 비로소 이제껏 헛돌았다는 것을 안다// 튜브 속에 거북한 바람을 품지 않고/ 고무 타는 냄새 없이도/ 질주할 수 있다니// 목선 양 겨드랑이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폐타이어,/ 지상에서 밀려난 게 외려 다행스럽다// 하지만 여럿을 다치게 했던 기억을 뿌리치지 못하고/ 파도 속을 자맥질한다// 소금기에 절고 삭아서 어느 새 둥그래진 상처,/ 닳고닳은 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제 몸 깊이 충격을 받아들인다  -손택수 「바다를 질주하는 폐타이어」  까치 주려고 따지 않은 감 하나 있다?//  혼자 남아 지나치게 익어가는 저 감을 까치를 우해 사람이/  남겨 놓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지 땅이 제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감나무가 웃을 일 제 돈으로 사 심었으니 감나무가 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저 해가 웃을 일 그저 작대기가 닿지 않아 못 땄을 뿐 그렇지 않은데도 저 감을 사람이 차마 딸 수 없었다면 그것은 감나무에게 미안해서겠지 그러니까 저 감은 도둑이 주인에게 남긴 것이지//  미안해서 차마 따지 못한 감 하나 있다!  -이희중 「까치밥」  미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고/ 러시아에도 없고/ 프랑스에도 없는,/  그런 밭이/ 우리 나라에 있대요./ 뭔지 아세요?//  감자밭? 고구마밭? 옥수수밭?/ 참깨, 들깨, 보리, 밀, 고추, 담배밭?/  아니면 콩, 배추, 무, 포도밭?/ 아이구, 모르겠다. 뭐꼬?//  휴전선 155마일 비무장 지대에 있다는,/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2억9천7백6십만 평짜리/  지뢰밭이래요.  -권오삼 「수수께끼」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 「뒤편」  눈 덮인 새벽/ 관음사 올라가는 길/ 얼음 녹은 여울물 속에/ 송사리 떼 분주한 몸짓/ 햇살 퍼지는 산골짝에 오늘은/ 꼬끼요오 수탉의 목청이 빠졌다/ 민박집 뒤뜰의 토종닭/ 모조리 백숙으로 고아먹고/ 부처님 앞에 지그시 합장하는/ 관광호텔 손님들.  -김광규 「토종닭」  제단에 돼지머리를 받치며 빈다/ 아무도 아무를 해치지 않는 세상 되게 하옵소서  -반칠환 「어떤 기구(祈求)」  친구야,/ 이름 때문에/ 놀림 당한 적 많았지?//  아무리 고운 빛을 내도/ 개똥 개똥/ 개똥벌레.//  말똥 쇠똥/ 뎅글뎅글 말아/ 아기 밥 주는 게 뭐가 나빠?/ 말똥구리, 쇠똥구리/ 웃기부터 하잖아.//  사람이 먹을 음식 들쑤시는/ 집파리 보단/ 몇 배 착한 똥파리.//  그래 그래/ 지저분한 이름 때문에/ 속상한 벌레들아/ 여기 모여라./ 똥방개 너도 왔구나.//  그런데 문 밖에서/ 살랑살랑 꼬리 흔드는/ 넌……?!/ 벌레도 아닌 네가/ 얼마나 속상했으면.  -박혜선 「‘똥’자 들어간 벌레들아」  ‘엄마’의 반대말은/ ‘아빠’래요./ 아녜요 아냐./ 아빤 엄마의/ 참 좋은 짝인걸요.//  ‘남’의 반대말은/ ‘북’이래요./ 아녜요 아냐./ 북은 남의/ 참 좋은 짝인걸요.//  ‘하늘’의 반대말은/ ‘땅’이래요./ 아녜요 아냐./ 땅은 하늘의/ 참 좋은 짝인걸요.//  - 우리 가족,/ 우리 나라,/ 우리 별 지구……/ 자꾸자꾸 불어나는/ 참 좋은 짝인걸요.  -손동연 「짝ㆍ1」  모자야, 모자야/ 슬픈 모자야/ 군인 아저씨가 쓰면/ 그리 용감해 보이더니/  지하도 입구 계단에/ 뒤집어놓은 모자야/ 딸랑, 동전이 담기는/ 슬픈 모자야  -안도현 「모자」  새로 들어온 1학년 동생들을/ 힘 약하다고 얕잡아 봐선 안 돼요.//  1년만/ 기다려 봐요.//  언니들을 한 계단씩 위로/ 쑥 밀어 올리게 힘이 자랄 테니까요.//  그땐 힘이 넘쳐서/ 맨 위에 있는 6학년 언니들/ 아마 학교 밖까지 떠밀려 나갈 걸요.//  1학년 1년 동안은/ 힘이/ 열 배로 스무 배로/ 크거든요.  -박정식 「힘이 열 배로 스무 배로」  갈매기 한 떼가/ 어거적어기적/ 선창 바닥에 돌아다닌다.//  미끈한 몸매 어디다 두고/ 피둥피둥한 날개/ 접지도 못할까!//  나른한 햇살 받으며/ 무거운 몸 뒤뚱뒤뚱/ 쓰레기통 뒤지는 뚱보들//  빵 쪼가리/ 과자 부스러기/ 달콤한 과일 맛에 푹 빠져서//  사람들 속에서/ 사람인 양/ 똑같이 먹고 산다.  -김기리 「사람 갈매기」  별자리들을 보았어요.//  독수리, 까마귀, 사자, 큰곰, 전갈, 토끼, 돌고래, 백조, 물고기……//  한자리에 살아요/ 날짐승/ 들짐승/ 바다짐승까지//  삼팔선 같은/ 은하수 띠 두르고 있어도/ 곰이 물괴를 잡아먹지 않고/ 독수리와 토끼가 함께 뛰고 놀아요.//  밤하늘의/ 동물 친구들은.  -이봉희 「밤하늘」  14. 매혹적인 제목을 붙이자  ○ 고건 모르지요 ○ 바다는 한 숟갈씩 ○ 무릎 학교  ○ 쿵 쿵 쿵 쿵 ○ 신발 속에 사는 악어 ○ 콩, 너는 죽었다  ○ 처음 안 일 ○ 우리 집 콩쥐 ○ 붕어빵 아저씨 결석하다  ○ 지구는 코가 없다 ○ 텔레비전으 무죄 ○ 별, 돌려줘요!    1. 시심과 동심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되, 착상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맞추자. 그러나 아이들에게 영합하려 말자.  2. 주제와 교훈은 내 몸의 흉터처럼 숨겨라. 아이들은 설교를 싫어한다.  3. 시각적 구상 표현을 하자. 아이들은 리얼리틱한 걸 좋아한다.  4. 쉽게 쓰되 평범하지 않게, 재미있게 쓰되 비속하지 않게 쓰자.  5. 상상력을 친구로 삼고 현실과의 조화를 꾀하자.  6. 오늘의 새로움도 내일에는 낡음이 된다. 계속 새로움을 추구하라.  7. 불량품 방지를 위해 내일도 다듬고 모레도 다듬고 글피도 다듬어라.  8. 말에도 아이엠에프가 적용된다. 동시의 언어도 마찬가지. 긴축!  9. 생산품에도 실명제가 있다. 내 작품도 그와 같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10. 특색(개성) 있는 작품을 생산하자.  11. 깨끗한 우리말로 쓰자.(이건 특별 준칙!)  詩作을 위한 열 가지 방법/ 테드 휴즈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 곤충류, 어패류, 동물들의 이름. 가령 종달새, 굴뚝새, 파리, 물거미, 소라고둥,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 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 폭풍, 빗소리, 구름, 4계절의 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닌다고 표현한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비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유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인이나 신화 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 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 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 으며 뚫려 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 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는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 려 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 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마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터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 번을 되풀이해 자유자 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 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퍼온 글  [스크랩 ]  최근 동시 논쟁을 읽고- 난해함을 주제로(어린이와문학. 2016.8) / 글쓴이 /  이야기밥     최근 동시 논쟁을 읽고 -난해함을 주제로- 최근 동시단에서 벌어졌던 논쟁글들을 읽어보았다. 이 글들을 읽으며 든 생각을 몇 가지 글로 정리해 본다. 김제곤은 최근 10년간 나온 동시들이 난해함의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런 난해함의 문제를 유발시킨 동시의 한 예로 이안의 뱀 연작시를 들고 있다. 김제곤이 예로 든 이안의 시를 우선 내 나름대로 감상을 해 보도록 하겠다. 참기름병에서나와콩기름병으로들어갔습니다.-  전문. 어떤날은마당에버려둔막대기가기어가기도합니다- 전문. 막대기를들고막대기를쫒아갑니다- 전문. 땅군아저씨, 그 많은 막대기 주워다 뭣에 쓰게요?- 전문 (고양이의 탄생. 문학동네. 2012) 이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먼저 긍정적인 시각으로 이 시를 한번 감상해보겠다. 위의 뱀 연작시는 은유의 비유법을 재미있게 활용하고 있다. 은유는 유사성에 의미를 두는 비유법의 하나이다. 저 위의 시를 보면 뱀은 길고, 막대기도 길다. 그러니까 길다라는 유사성에 감각을 집중하면 뱀은 곧 막대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당에서 막대기가 기어간다고 말을 한다. 일종의 말놀이의 하나이다. 참고로 환유라고 하는 비유법도 있는데, 이 환유는 인접성에 기초를 둔 비유법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서 왕과 왕관은 늘 인접해 있으니, 왕관하면 왕을 뜻하는 것이고, 글을 쓰는 작가는 늘 펜을 들고 있으니, 글쓰는 직업을 펜 하나로 산다로 표현하는 식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은유나 비유의 말놀이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런 은유나 환유에 해당하는 말놀이를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저 위의 시는 일단 논리의 비약을 무릅쓰고 긍정적인 자리에서 본다면, 존재를 표현하는 다양한 관점의 하나인, 신화적인 언어 감각을 길러주는 구실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각의 논리를 구사한다는 신화시대 사람들의 상상력은 은유와 환유의 말놀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 언어의 마법사, 말놀이의 마법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신화에서 저런 은유와 환유의 말놀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번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인도네시아 포소족의 짧은 신화 한 편을 소개한다. 태초에 인간은 신이 새끼줄에 묶어 하늘에서 내려준 바나나 열매를 먹으며 영원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나나 대신에 돌이 내려오자 먹을 수 없는 돌 같은 건 필요없다며 신에게 화를 냈다. 그러자 신은 돌을 끌어올려 버리고 다시 바나나를 내려보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돌을 받아두었다면 인간의 수명은 돌처럼 단단하고 오래 지속되었을 텐데, 돌을 거부하고 바나나 열매만을 원했기 때문에 인간의 목숨은 앞으로 바나나 열매처럼 짧으며 썩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그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고 죽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나카자와신이치. 동아시아. 37쪽) 바나나는 말랑말랑하고 맛도 좋고, 부드럽긴 하지만, 오래두면 썩고 만다.돌은 딱딱하고 맛도 없지만,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바나나와 돌이 이항대립을 하고, 이런 속성에 유사성을 두고, 죽음과 영생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화 한편을 두고 감상을 할 때에도, 위의 시가 담고 있는 비유의 말놀이가 담고 있는 어떤 긍정적인 요소는 분명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일단 이안의 뱀 연작시와 같은 작품이 담고 있는 긍정적인 요소를 우리는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제곤은 저 뱀 연작시를 예로 들며 최근 10년간의 동시가 많은 성취가 있었지만, 난해함의 자리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제곤은 이안의 시에 대해 이런 비판을 하고 있다. “이안이 쓴 위 시에서 보듯 짧은 길이의 동시라도 문장과 행간, 시어 하나하나가 갖춘 함축은 웬만한 시를 능가한다. 난해함의 요소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이안 자신의 표현대로 이런 시들은 독해를 지연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시에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를 오랫동안 골똘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독자란 대개 아이 독자이기보다는 이미 시를 골똘하게 읽은 경험이 있는 어른 독자들이 아닐까.”(. 어린이와 문학. 2015년. 10월. 15쪽) 저 뱀 연작시는 감각의 논리로 볼 때는 전혀 난해한 시가 아니다. 그냥 직감으로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고 즐기면 되는 시이다. 저 시를 읽고, 이성의 합리적인 논리의 관점에서 볼 때, 왜 막대기가 기어가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이성의 논리적인 생각보다 감각의 논리로 먼저 시를 느끼고 즐기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아이를 폄하하는 사람은 아마 적을 것이다. 오히려 그 아이의 감각을 보고 놀라는 사람 쪽이 더 많지 않을까. 뱀이 참기름병에서 나와 콩기름병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이 문장은 미끄럽다는 어떤 감각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해서 쓰였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유사성이라고 하는 것도 워낙 다양해서 작가는 이런 미끄러짐 말고도, 또 다른 유사성을 발견하고, 저런 시를 썼을 것이다. 이안 시인 자신이 독자로 하여금 독해를 지연시킨다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의문이 간다. 독자로 하여금 독해를 지연시킨다는 말이 내게는 명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게 긍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뱀 연작시는 감각의 논리로 볼 때는 독해를 지연시키는 작품이 아니다. 그냥 읽으면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시이다. 그런데 이 감각이 그냥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는다면, 그냥 하나의 텅빈 기호나, 아니면 외면의 풍경으로만 남는다면, 시가 갖고 있는 감정의 깊이는 아무래도 덜 느껴질 것이다. 맑은 풍경이 주는 수채화같은 아름다움도 물론 있지만, 위에 인용한 시들이 그런 느낌을 주는 건 또 아니다. 아래 시를 한번 감상해 보자. 송찬호의 이란 시이다. 내가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열차에 뛰어올랐을 때,내 옆자리 창가에눈사람이 앉아 있었다찌는 듯한 한여름 밤인데도 눈사람은 더워 보이지 않았다겨울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땀도 흘리지 않았다눈사람의 모습은 뭐랄까,기나긴 겨울전쟁에서 패하고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가는상이군인 같았다지난 겨울전쟁에서 우리가 선거에 패했던 것처럼,눈사람은 나를 향해 한 번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찌는 듯 더위도그의 흰 피가 흘러내려의자의 시트를 더럽히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 이상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열차는 한여름 밤자정을 향해 끝없이 달렸다그새 내가 깜빡 졸았던 것일까어느덧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그는 어디쯤에서 내렸을까털모자나 목도리 하나 남겨두지 않고 (. 송찬호. 문학과지성사) 나는 이 시를 이렇게도 감상해 본다. 시인은 이 시를 창작할 때 어디에서 힌트를 얻었을까. 아마도 실제 저 시에 나타나는 것처럼, 어느날 헐레벌떡 시간에 쫒겨 열차에 뛰어 올랐을 때, 자기 옆 자리에 어떤 아저씨 한 사람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아저씨의 모습이 이 시인의 눈에는 영락없는 눈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감각의 논리를 작동하여, 유사성의 언어 감각인 은유의 언어 감각을 발휘하여, 아니 이런 은유니 유사성이니 할 것도 없이, 그냥 이 시인은 이렇게 한 사람의 존재가, 눈사람으로도 보이고, 장미로도 보이고, 호랑이로도 보이는, 그야말로 신화적인 사유 체계로 본다면, 일종의 모든 존재가 다양한 기호로 변환되고 전환되어 보이는 그런 언어 감각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저 눈사람이란 시의 맛은 일상의 한 존재를 눈사람으로 바꾸어내는 시인의 은유적인 언어 감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언어 감각이 무언가 삶의 내부, 삶의 내적인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데 까지 나아가고 있다.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의 언어 감각이 존재 내면의 섬세한 감정의 울림까지, 삶의 애환까지 건드린다. 눈사람이란 시는 독자인 나로 하여금 독해를 지연시키지는 않는다. 저 은유의 언어가 무슨 의미인 거지, 하고 오래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직감으로 감각으로 느끼게 하면서, 또한 저 시는 독자의 감정선을 자극한다. 무언가 울림이 있다. 그래서 저 시는 시인이 억지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슴에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일반 시와 동시를 직접 비교하는 것이 위험하긴 한데, 논의를 위해서 일단 무리를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이안의 뱀 연작시는 무언가, 사물과 사물이 우발적으로 마주쳐서 반짝 하는 삶의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 은유 특유의 언어 감각이 돋보이기는 한데, 존재와 존재가 무언가 기계적으로 일대일로 단순 대응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은유의 신화적인 언어 감각이, 독자의 내면 우주를 한번 크게 흔들어 어떤 깊은 무의식의 감정까지 건드리는 점이 미약한 것이다. 은유의 언어가 담고 있는 본질적인 에너지는 절대 개량적으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이렇게 단정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하여튼 나의 관점으로 볼 때는 무언가 뱀 연작시는 울림이 적다. 이안의 을 한번 더 감상해 보자. 모과나무에서 쿵! 달이 떨어졌어. 노오란, 바람에 긁힌 상처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 향 노오란, 재미있게 읽힌다. 모과나무에 달린 모과를 보고 둥그런 달에 비유하였다. 역시 둥그런 모양의 유사성을 보고 시인의 감각이 작동을 하여, 달이 쿵 하고 떨어졌다고 가정할 때 무언가 이 시가 갖고 있는 언어 감각이 보이고, 독자인 나의 마음 속에도 따뜻한 풍경이 그려진다. 그런데 모과나무에서 달이 쿵 하고 떨어진 그 울림, 바람에 긁힌 달의 향내가 내 마음 속 풍경에서 은은하고 깊이있게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이 시 또한 일대일 대응 방식의 은유의 언어가 무언가 기계적인 느낌을 주어, 독해를 오히려 방해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건 난해해서 독해가 방해받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감정선의 흐름이나 여운을 깊이있게 느끼고 싶은데, 그런 독해의 과정에 몰입하고 싶은데 감정선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지는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안의 시는 이 정도로 하고, 이번에는 김제곤이 난해함의 또 한 예로 든 김륭의 시를 한번 보도록 하자. 604호 코흘리개 새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6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다시 6층으로 코를 훌쩍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고 있어요 훌쩍훌쩍 코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비스킷처럼 감아올린 코가 길을 잡아당기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흘깃흘깃 쳐다보지만 엄마가 타고 다니는 빨간 티코를 감아올릴 때까지 새봄이 코는 길을 잡아당길 거예요 집으로 오는 모든 차들이 빵빵 새봄이 콧구멍 속으로 빨려들고 있어요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 김륭) 이 시는 관념적으로 인과관계를 따지는 사람의 자리에서 볼 때, 도대체 이게 뭐야 할 수도 있겠다. 그저 난해하기만 한 말장난의 시가 아닐까, 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감각의 논리로 이 시를 본다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 온갖 사물들을 일종의 기호로, 상징으로 가져와서 은유의 언어로 이 아이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감각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신화적인 언어의 흐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코끼리가 된 아이가 길을 다 빨아들이고 하는 장면들도 그렇고, 집으로 오는 차들을 다 빨아들이는 장면에 숨어 있는 아이의 내밀한 감정선의 변화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와 같은 시는 난해함의 관점보다는 이 시가 과연 다 읽고 났을 때, 어떤 절실한 감정선을 자극하느냐 하는 자리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위에 예로 든 이안의 시가 일대일 대응방식으로 은유의 기법을 사용하면서 무언가 말놀이의 재치나 흥미를 느끼게 하는 데 비해, 김륭의 시에 동원된 은유의 언어들은 사물들이 일대일 대응관계로 기계적으로 연결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김륭의 시에는 간절한 자기 욕망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의 감정선이 만들어내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의 언어들이 작동을 하고 있다. 이성의 논리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대일 대응 관계를 통해 이해가능한 언어 조합을 넘어 겉으로 보면 난해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간절한 주인공 아이의 내면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이러한 엉뚱한 존재들의 비유언어가 독자인 나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점도 있다. 아래 임길택의 이란 시를 한번 감상해보자. 공부를 않고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잠을 자려는데 아버지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워서 말도 안 할려고 했는데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이 시에는 아무도 난해하다는 말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무슨 은유니 유사성이니 하는 말도 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않았다 뿐이지, 시의 내면에는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그런 감정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아주 잘 포착해 내고있다. 그 곳에서 어떤 유사성의 감정 에너지가 발생하고 있다. 와 을 같이 이어 읽어볼 때, 두 시 모두 어떤 간절한 내면을 가진 아이가 존재한다. 그 아이의 내면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있는데 그 표현 방법은 서로 다르다. 만약에 난해하다는 이유로 와 같은 작품이 동시단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면 과 같은 리얼한 삶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시들도 자기와 개성이 다르지만 내면은 비슷한 색다른 시를 잃고 슬퍼하지 않을까. 풍부한 동시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데, 난해함이란 잣대로 본다면, 다양한 차이를 유발시키는 많은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가 있어서, 오히려 임길택의 이 더욱 소중해 보이고, 거꾸로 과 같은 시가 있어서, 는 색달라 보인다. 서로 다른 차이가 오히려 각각의 존재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최근 동시 논쟁관련 글들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여기서 그치기로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지난  여름 연수(2015년)에서 김제곤의 란 글이 발표된 이후로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두고 좀 더 토론을 이어갈 계획이었으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토론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아동문학판이 점점 김이 빠지며 시들해져간다고 하는데, 동시단 만큼은 오히려 열기가 식지 않고 뜨거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관점에서 시를 바라보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고 하는 비평의 자리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런 뜨거움은 작가들 자신의 친분이나 인맥관계의 내부적인 틀 내에 고착되어, 결국은 계모임으로 떨어져내릴 것이고, 독자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아동문학사를 아는 사람들은 일제시대 아동문단의 중심이 동요 동시에 있었다는 걸 다 알 것이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생각해 본다면, 100여 년 만에 동시의 시대가 아동문학판에 살아 돌아온 느낌이다. 1920~1930년대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당시의 동요 동시 논쟁은 정말 치열하였다. 이런 치열함이 한 시대의 열기를 계속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지금 모처럼 맞이한 동시의 열기가 인맥이나 자본의 권력으로 재편되는 계모임으로 전락하지 말고, 부디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서로의 다름을 오히려 자극하는, 그래서 더욱 풍요로운 총체의 모습을 간직한 동시 세계를 이루어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써 보았다. 동시를 둘러싼 치열한 토론 자리가 많이 만들어지기를, 그래서 지금의 동시단의 열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끝)  
7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 권오삼 댓글:  조회:1393  추천:0  2017-10-14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 권오삼     만남 동시인 권오삼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취재, 정리 : 최현정     ‘동시인’ 하면 떠오르는 아동문학의 ‘어른’이 있다. 1975년 동시로 등단, 아동문학 시장이싹트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동시’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시인 권오삼. 수원의 자택으로찾아가 4시간 가까이 살아온 이야기, 권정생 작가의 이야기, 동시에 대한 그리고 아동문학에 대한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70년대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80년대에는 장사를 하면서 90년대 후반부터 사업을 접고 동시쓰기에 전념하기까지 그가 살아온 다양한 인생이 현실 참여 동시집부터 동심이 가득 담긴 저학년 동시집과 고학년 동시집까지 그가 만들어낸 시세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났던 것은 아니었다.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한참동안 망설였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여러 번 듣다 보니 마치 ‘동시 창작 개론’처럼 경험을 토대로 한 동시 창작의 원칙 혹은 노하우로 정리할 수 있었다. 경험을 토대로 전하는 생생한동시 창작 개론, 이번 호 만남에서는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의 이야기를 담았다.   주변의 사물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라   “나는 95년에 수원으로 와서 13년 동안 여기 공원에서 동시를 썼어요. 그러고 보니 시집네 권이 여기서 나온 꼴이네요. 시를 쓰려면 사물과 교감이 있어야 해요. 내 가까이 있는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 돼요.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무심히 보면 안 돼요. 여기저기 다니며 많이 보면 인식의 폭은 넓어지겠지만 시가 되고 글이 되는 건 아니지요. 동시는 성인시와 달라서 삶의 깊이, 무게를 다룰 수 없잖아요. 내가 공원의 도토리나무를 소재로 서너편 쓴 게 있는데, 만날 보는 도토리나무지만 어제 본 것하고 오늘 본 게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르고, 또 해마다 보는 느낌이 다르지요. 얼마 전에 울산 암구대 반각화를 보고 왔어요. 같이 간 다른 동시인들은 반각화에 있던 고래랑 아기 고래를 보면서 시를 떠올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길에 버려져 있던 아기 신발을보고 시를 떠올렸어요. 설마 신발을 버렸을까, 잘못 두어서 잃어버렸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고 돌아오는 내내 그 신발이 눈에 밟혔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신발을 보고 시상이 떠올랐는데 아직 쓰지는 못 했어요. 작은 거라도 나에게 의미를 줘야 그게 시가 되는 거지요. 시인이라면 언제라도 사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사물이 다가오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겠지요. 머리(의식)가 깨어있어야지요. 의식이나 감각이 깨어있어야 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시가 쓰여 진다고 봐요.”     제대로 된 시 열 편만 써라   “일본 하이쿠의 대가 마쓰오 바쇼가 한 말이 있어요. ‘다섯 편만 쓰면 당신은 시인이다. 열편을 쓰면 당신은 대가다.’ 여기서 말하는 다섯 편이나 열 편은 그냥 다섯 편이나 열 편이아니라 제대로 쓴 다섯 편 열 편이겠지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 유명 시인들 중에도 좋은 작품 열 편을 가진 시인은 흔치 않다고 봐요. 김소월, 이상화, 김영랑 등 이들 시인의 작품 중에서 좋은 작품이 몇 편이나 되는지 생각해 봐요. 뛰어난 시가 열 편만 된다면대단한 시인이지요. 그리고 그 시들이 시간의 무게를 견뎌내어 50년, 100년 뒤에도 남는다면 정말 대단한 거지요. 보들레르나 랭보, 김소월 같은 시인은 시집을 한 권만 냈잖아요. 시집은 평생 한 권만 내면되는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작품이 나올까 싶어 쓰다 보니 시집이여러 권 되는 거지요.” 퇴고 과정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라     “나는 지금도 습작생이에요. 미당 선생이 이런 말을 했지요. ‘작품은 언제나 미완성이다’라고. 6월호에 발표한 「바람 부는 날」은 작년에 낸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있던 건데 다시 보니까 미흡한 점이 보여 고쳐서 발표했어요. 함께 발표한 「나무」도 다시 보니까 세 군데나 미흡해서 고친 뒤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올렸어요. 쓸 때는안 보이다가 활자로 된 다음에야 꼭 눈에 띈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습작생이에요. 완전하게 써서 첨삭할 때가 한 군데도 없다, 마음에 든다, 그래야 되는데. 김소월도 「진달래꽃」을 스무 번 정도 고쳐서 발표했다고 했나, 가끔은 발표한 작품을 다시 고쳐 보기도하지만 고치지 않은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고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보면 나스스로 혼란에 빠져서 판단이 잘 안서요. 그럴 때는 시간을 두고 봐야 돼요. 쓴 작품을 묵힌 뒤에 다시 보고 나서 만족하면 발표를 해야 돼요. 몇 년 전에 쓴 거라도 계속해서 그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고쳐야 해요. 얼마만큼 그 작품에 시간을 투여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쉽게 써서 급하게 발표하면 안 돼요. 두고 두고 고친 뒤에 발표해야 돼요. 나 역시 충분히봤다고 생각하고 작품을 보낸 뒤, 발표된 작품을 보면 또 미진하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는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돼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습작생이에요.”     동화와 비교하지 마라     “동시를 동화와 비교하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들어요. 7,80년대에는 동화나 동시나 시장이없어 대부분 자비 출판했고, 인쇄 출판은 거의 없었어요. 상대적 박탈감이 없었지요. 90년대 이후부터 동화는 아주 빠르게 시장이 커지고 동시는 느린 상태였으니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동시도 30년 전보다는 시장이 커졌어요. 나도 80년 초에 동시집을 자비출판을 했지만 그때는 거의 그랬어요. 동시는 동시인 지망생이나 동시인들끼리만 보는 거였어요. 돌이켜 보면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아졌어요. 지금은 경제적 여유도 있고, 부모들도 아이에게 동시를 읽히려고 하지요.”   동시는 본래 어려운 장르다     “동시가 동화보다 독자들에게 확산이 안 되는 이유는 운문문학의 특성 때문이라고 봐요.시는 본래 어려운 거예요. 쉬우면 시가 아니고 유행가 가사여야지요. 서사문학은 스토리거든요. 이야기니까 사람들이 그 내용을 따라가면 되지요. 옛이야기는 지금 봐도 재미있잖아요. 시대를 초월해서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라든가 재미는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는 정서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정서를 표현하다 보니 그 정서를이해하지 못하면 독자가 못 따라 오는 거지요. 정서라는 건 1학년과 3학년이 틀리고, 5학년하고도 틀리잖아요. 그래서 동시가 참 어려워요. 개선책은 있을 수 있지만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이원수 선생님 동시를 예로 들어볼게요. 이원수 선생님의 동시 200여 편 중에 아이들이좋아할 동시만 4,50편 묶어서 동시집을 낸 게 있잖아요. 그러면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왜 그럴까요? 공감하는 독자도 있지만 공감 못하는독자도 있다는 거지요. 이원수 선생님의 좋은 동시는 삶을 표현한 것인데 요즘 독자들에게는 정서가 안 맞는 거지요. 이런 게 동시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요, 한계라고 봐요. 성인시는 그렇지 않지만.   동시가 안 팔린다고 해서 서운해 할 필요 없어요. 좋게 생각하면 동시는 동화와는 다른 고고한 물건이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보면 돼요. 그렇다고 동시 쓰는걸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아이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교훈을 주고, 아이들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심성을 곱게 하고……. 나도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시를 썼어요.그래야 내가 보람된 일을 하는 것 같고, 내가 하는 일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음악이나 그림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듯 동시도 그렇게즐겁게 감상하면 되는 것이고, 고급 오락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대단하게 여길 건 없다고봐요. 독자가 소수더라도, 그 소수의 독자가 내 동시를 읽고 잠시라도 즐거웠다면, 잠시라도 기쁨을 맛봤다면 그걸로 족한 거지요.” 상상력을 해방시켜 틀 밖으로 나와라     “성인시 쓰던 시인들이 쓴 동시를 보고 나도 많이 느낀 게 있어요. 불성실한 답변일지는모르지만 정직하게 말한다면 시는 고급 오락이라고 생각해요. 동시단에 있는 이들은 전형적인 동시를 고수하지요. 동시의 원줄기가 있다면 거기서 다양한 곁가지들이 뻗어 나와야하잖아요. 그런 시가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나 김기택, 최명란 시인의 동시라고 봐요.말놀이 동시에도 약점이 있어요. 그게 한 권으로 그쳐야 하는데 2권, 3권, 4권 계속되면 첫권의 모방밖에 안 된다는 거지요. 나는 그렇게 봐요. 정통적인 동시는 새로운 소재를 만나발상이 참신하면 새로운 동시가 되지만, 말놀이 동시의 경우는 양적으로 늘이는 것뿐이지매 권마다 새로울 수는 없지요. 상투성에 빠지기 쉽지요. 아쉬운 건 왜 동시인들은 이제까지 그런 동시 쓸 생각을 못했나 하는 거지요. 오래 전 나도말놀이 동시를 몇 편 썼어요. 그땐 이건 동시가 아니다, 라고 낙인찍어 버리고 더 이상 안쓴 거지요. 이제까지 대다수 동시인들은 틀 안에 갇혀서 벗어날 줄 몰랐어요. 그만큼 상상력이 빈곤했다는 거지요. 최승호 시인이나 김기택, 최명란 시인은 그런 면에서 자유로웠던 거예요. 동시인들은 교육적인 것에 매여서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못했는데, 그 사람들은 그런 게 없었던 거지요. 그들이 그런 동시를 발표하면서 동시인들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주었다고 봐요.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동시만 쓰는 동시인들은 동시를 의미 있게 쓰려고 하고, 성인시를 쓰는 시인들은 동시를 그냥 재미있게 쓰려고 한다는 겁니다. 역할이 뒤바뀐 거예요. 표현 방법에서도 동시인이 써야 할 방법을 그들이 쓰고, 성인시인들이 써야 할 방법을 동시인들이 쓰고. 까닭은 성인시를 쓰는 이들은 의미나 메시지 따위는 성인시로 풀어낼 수 있으니 동시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동시를 발랄하게 재미있게 쓰려고 한 거지요. 그들은 성인시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동시로 풀어낸 거지요. 반면에 동시인들은 자신이 겪은 인생이라든가, 하고 싶은 말을 달리 풀어낼 길이 없으니 거꾸로 동시에다가 담아 보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느끼지요. 그러다 보니 동시가 무거워지고딱딱해지고 그러는 거 같아요.”     꾸준히 실험시도 써보라     “동시를 쓸 때는 독자를 배려해야 돼요. 나도 예전에 뭘 모르고 쓸 때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었어요. 지금은 쓰면서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해요. 작품을 읽을 때도 아이의 눈높이로 작품을 보려고 해요. 아이들이 이 작품을 이해할까? 어떻게 생각할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감응을 할까? 이런 걸 생각하면서 동시를 읽고 써요. 내가 쓴 시 중에도 순전히 내 문학적 욕심으로 쓴 게 있어요. 실험시라고 할 수 있는 건데독자를 위해 쓴 게 아니라 순전히 동시문학을 위해서 쓴 거지요. 성인시에서는 실험시가많이 나오잖아요. 동시도 필요하다고 봐요. 3년 전부터 시도하고 있는데 어려워요. 실제로해 보면 실패할 확률이 높거든요. 지금까지 쓰던 시 쓰면 위험부담은 없지요. 하지만 새로운 것도 시도해 봐야 돼요. 동시문학을 위해서죠. 그렇게 하다보면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때가 있겠지요. 능력 있는 후배 동시인들이 실험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고 설령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건 작품이 실패한 것이지 시도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인시도 여러 갈래가 있듯이 동시도 여러 갈래의 시를 위해 새로운 길을 찾으면서 계속업그레이드 시켜나가야 돼요. 전통적인 방법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냥 대필이라고 할 수있지요. 지금부터 현대적인 작품을 써야 몇 십 년 지나도 구닥다리가 안 되는 거지, 지금부터 현대성이 없는 시를 쓰면 5, 6년만 지나도 낡은 시가 되어 버릴 수 있지요. 오늘 새로운것도 내일이면 낡은 것이 되잖아요. 동시를 쓰다 보면 고민거리가 많이 생겨요. 고민거리가 많다는 건 좋은 현상 아닙니까? 고민거리가 없으면 현실에 만족하고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보면 됩니다. 상품과 마찬가지로작품도 늘 불만을 가져야 새로운 게 나오겠지요. 불만을 가지려면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해요. 낡은 시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새로운 좋은 시를 쓸 수는없는 거지요. 기성 동시인들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해야 합니다. 나도 노력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아요. 쉽지 않으니까 도전해 볼만 한 거지요. 새로운 형식과 내용, 기법으로쓰느라 전달에 문제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어린독자를 제대로 배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시간이 지나 어느 단계 이르면 독자 배려 문제도 해결된다고 봐요.”     최고가 될 수 있다, 용기를 가져라     “어떤 후배가 지금부터 30년 이내에 발표된 동시들을 보니 제대로 된 동시가 별로 없더라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기회가 좋네! 네가 조금만 잘 써도 되겠네.’ 했지요. 그렇지않아요? 이제까지 마음에 드는 시가 별로 없다면 자신이 조금만 노력해서 쓰면 우뚝하게드러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동시는 시시해, 좋은 동시가 없어, 그렇게 냉소적으로 부정만 해버리면 바람직하지 않지요.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쓰면 내가 아무리 잘 써도 돋보일 확률은 낮지요. 모두가 잘 못쓴다고 여겨질 때 생각을 바꾸어 내가 조금만 잘 쓰면 되겠구나,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동시를 쓰면 좋잖아요. 권오삼 동시를 보니 형편없네,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권오삼이보다는 더 잘 쓰겠다, 이러고 쓰면 후배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신나고 통쾌하고 재미있어요. 그러니 용기를 내어 치열하게 작품을 쓰라고 말해두고 싶어요.” 권오삼 시인은 인터뷰 말미에 필자에게 ‘아동문학을 위해 애쓰는 젊은 사람’ 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 했다. ‘젊은 사람들이 잘 해주길 부탁한다’는 말 속에는 아동문학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가 오랜 동안 동시인의 자리를 지키면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동시를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 권오삼)     194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5 월」이, 1976년 소년 중앙문학상에 「그네 타는 아이」가 각각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집으로 『강아지풀』, 『가시철조망』, 『물도 꿈을 꾼다』, 『고양이가 내 뱃속에서』, 『도토리나무가 부르는 슬픈 노래』,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 있다. (어린이와 문학 2008년 8월호)    
6    평생교육원 <동시심화과정> 수업자료 / 권영세[ 한국 ] 댓글:  조회:1452  추천:0  2017-09-26
평생교육원 <동시심화과정> 수업자료 / 권영세   제2강 시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시는 역사가 쓰여지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도 인류에게 역사가 있었고, 이때의 역사는 대체로 종족이 살아온 내력, 혹은 종족이 이동해 온 흔적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는 훌륭한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된다. 그런 점에서 문자로 기록된 역사 이전에 이야기가 있었고,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되었다. 그러나 후대로 올수록 이야기꾼들은 그들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했고, 이런 필요 때문에 이야기꾼들은 이야기에 리듬을 부여하여 같은 낱말이나 문장을 반복하게 된다. 시는 이렇게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기술과 함께 발전한다. 우리가 말하는 정형시의 기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각운과 어구 반복은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태어난다. 그런 점에서 시가 최초로 태어난 곳, 말하자면 시가 온 곳은 이야기이고, 각운과 반복은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차츰 이런 수단과 함께 긴 이야기는 짧게 축소되거나 압축되기 시작한다. 결국 시는 간단히 정의 한다면 응축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고대 시가인「공후인箜篌引」혹은 「공후도하가公無渡河歌」로 불리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생각해도 알 수 있다.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公無渡河) 님은 마침내 물속으로 들어가셨네 (公竟渡河) 물속에 빠져 죽은 님 (墮河而死) 아아 저 님을 어찌 다시 만날까 (將奈公何)   위의 노래는 슬픈 이야기를 미적으로 승화시키고, 따라서 이 시가를 읽을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비록 슬픈 이야기를 동기로 하지만 정형률과 낱말의 반복이 주는 즐거움, 각운이 주는 즐거움이고, 이것이 시 읽기 나아가 시 쓰기가 우리에 즐거움을 주는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감동이고 기쁨이고 가난한 영혼을 채워주는 정신의 양식이다. 많은 이론가나 시인들이 시를 ‘여과된 삶’ 혹은 ‘순수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가 거대한 삶의 이야기들을 걸러 그 핵심을 보여주고, 이때 여과된 것, 곧 최초의 이야기보다 강력한 호소력을 띠기 때문이다. 시는 고대부터 존재했고, 그것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이런 고대 시가의 특성은 시를 처음 쓰려는 사람들에게 암시하는 게 많다. 예컨대 처음부터 시를 쓰지 말고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산문으로 적고, 이 산문을 줄이고, 정형률에 맞게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여옥이 부른 ‘공후인’의 경우도 남편이 전한 이야기를 토대로 하지 않았는가? 또한 이야기는 정서를 동반해야 한다. 물론 시는 역사적으로 각 시대에 맞는 시의 유형을 소유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록 각 시대가 그 시대에 고유한 시를 생산하지만 모든 시가 크게 보면 동일한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모든 시인이 말하는 것은 ‘내가 혹은 우리가 경험한 것은 이렇다’로 요약된다. ‘이렇다’는 것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본다는 뜻이고, 따라서 시를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배우고 체험하게 된다.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 15-17   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 동시를 읽고 감상해 보자. 아무도 거짓말 안 했다 김마리아   여러분, 오늘은 거짓말에 대한 수업을 합니다 잘, 생각해 보고 손 드세요 솔직하게   지금까지 거짓말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나는 고개를 돌리며 옆을 봤다 친구들도 두리번거렸다   조용했다   손을 든 사람 아무도 없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아무도 거짓말 안 했다 그 시간에는     내가 더 좋다 권영세   식사 때마다 조심조심 앉으려 해도 쿵쾅 쿵쾅 소리 내는 우리 집 식탁 의자   엄마가 시장에 가서 예쁜 꽃이 달린 의자 양말 사 오셨다   그제야 발이 편한지 소리 없이 살짝 내딛는 양말 신은 식탁 의자   이제는 아파트 마당에서 아래층 호랑이 할머니 만나도 눈치 보지 않아서 참 좋다   고운 양말 신은 식탁 의자보다 내가 더 좋다               제3강 시의 기능은 무엇인가?   시에는 고대 시가가 그렇듯이 사회적‧현실적 효용성이 있다. 고대 시가는 이야기를 쉽게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이었다. 고대의 시인들은 종교나 정치의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데 기여했다. 좀 더 나은 수확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시인들은 노래하고, 이 노래가 사회를 끌고 나가며, 시인들은 또한 전쟁의 역사를 노래하고, 권력을 비판하고, 그 무상함을 노래하고 신들을 찬양했다. 그렇기 때문에 포악한 왕은 시인들을 죽였고, 반대로 훌륭한 왕은 시인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시의 이런 기능은 현대라고 해서 달라진 것이 아니고 다만 그 표현 형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 시인들은 이런 권력이나 실제적‧현실적 효용성보다는 근대 미학의 특성인 이른바 순수 예술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현실적 효용성보다는 시 자체의 아름다움,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혹은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렇게 현실과 거리를 두고 시 자체를 사랑하는 태도가 현실과 다른 시의 공간을 낳고, 이런 공간은 일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아니라 상상력을 낳는다. 예컨대 주요한은 가 아닌 상상의 공간을 노래한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 주요한,「빗소리」부분   이 시는 봄밤에 내리는 빗소리를 노래한다. 일상인들의 시각에서 빗소리는 빗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소리’로 상상한다. 뿐만 아니라 밤은 어미닭처럼 깃을 벌리고, 비는 어미닭 품에서 지껄이는 병아리가 된다. 요컨대 ‘뜰 위에 내리는 비’가 이 시에선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처럼 속삭인다. 봄밤에 내리는 비는 이렇게 다정하고 기쁘고 따뜻하다. 시는 이렇게 상상력의 세계를 강조하고 상상력의 세계는 과학적 진리도 아니고 종교적 진리도 아닌 이른바 미적 진리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시의 기능은 상상력에 의한 미적 공간을 창조함에 있다. 그러나 이런 근대 미학이 심화되면서 시인들은 이렇게 현실과 다른 시적 공간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 자체에 관심을 두게 된다. 시인들은 부패한 일상적 언어를 순화하고 정화시키는 일도 하지만 일상적 언어의 가치나 기능과는 다른 시적 언어의 가치와 기능을 추구하고, 심하면 일상적 언어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파괴가 노리는 것은 일상적 언어를 초월하는 전혀 새로운 언어이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인들이 추구하는 게 그렇다. 앞에서 보기로 든 ‘빗소리’는 일상어를 순화한, 그런 점에서 때 묻지 않은 언어이다. 그런가 하면이 시의 언어, 곧 시적 어법은 일상적 어법과 다른 시적 어법을 보여준다. ‘밤’을 어미닭에 비유하고, ‘빗소리’를 병아리 소리에 비유하는 게 그렇다. 그러므로 시적 언어는 시적 어법을 뜻한다. ‘병아리’라는 낱말은 일상인도 사용하고 시인도 사용한다. 그러나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다. 일상인의 경우 ‘밤’은 그대로 ‘밤’이지만 시인의 경우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린다’ 그러니까 말하는 방법, 어법이 다르다. 비유는 시적 어법의 출발이고, 이런 비유가 발전하면 상징, 아이러니, 역설 등 여러 가지 어법이 드러난다.이 문제는 뒤에 다시 살필 예정이다. 결국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자각이 심화되면서 우리는 시적 언어의 특성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이런 언어의 가치와 기능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 17-19.   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 동시를 읽고 감상해 보자. 그림자에도 빛깔이 있네 하청호   봄날이네 벚꽃나무 밑에 아기가 곤히 자고 있네 그림자가 이불처럼 아기를 덮고 있네   이불 위로 벚꽃송이 떨어지네 수놓듯 수놓듯 그림자에 분홍 꽃 곱네   그림자에도 아름다운 빛깔이 있네.       철없는 개나리꽃 엄마 권영세   기다리던 새봄과 늘 함께 와서 정말 반가웠는데   생뚱맞게 겨울 나뭇가지에 노란 꽃송이 몇 개를 피워 놓을 게 뭐람.   저 어린 것들을 찬바람 쌩쌩 부는 바깥에 내 보내 입술 파르르 떨게 하는   요즘 개나리꽃 엄마는 참 철이 없어.   제4강 시인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인을 보는 사람, 견자見者, 광기에 홀린 사람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때 본다는 것은 시인의 사유와 영감이 시인 자신을 초월해서 자신도 모르는 어떤 초월적인 것에 근거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의해 사물을 보고 세계를 보기 때문에 시인은 광기에 홀린 자가 되고, 신비한 영감에 지배받는 자가 되고, 이른 바 견자가 된다. 따라서 시인은 일상인보다 크고 높고 귀중한 힘이 부여된 자로 인식된다.   시인에 대한 이런 인식은 틀린 것이 아니다. 사실 시인은 일상인과는 다르게 세계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특이한 감각, 정서, 사유, 상상은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에게 조금씩 있게 마련이고 시인은 이런 이상한 능력을 일상인들 보다 더 신뢰하고 믿고 개발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그 후 낭만주의 시대에는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에는 무의식이나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아직도 시인의 기본 조건으로 간주된다. 그런 점에서 시인에 대한 인식 역시 시대마다 다르고 이 시대적 차이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문학 초기만 하더라도 이광수가 말한 것처럼 시인 혹은 문인의 조건은 대학을 중퇴할 것, 연애에 실패할 것, 폐결핵을 앓을 것,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것, 장발이고 얼굴이 창백할 것, 가난할 것 등으로 요약된다. 이런 조건들은 일종의 세기말 퇴폐주의를 반영하고 당시 일제 식민지 시대의 병든 청춘들의 내면을 반영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시인들은 이와는 다르지 않은가? 1960년대를 살던 시인들이 다르고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시인들이 다르다. 사실 오늘 이 시대의 시인들은 누가 시인이고 누가 은행원이고 대기업 사원인지 모를 정도로 구별이 안 된다. 지금 시인들의 외모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외면은 내면을 반영하고, 얼굴은 마음을 반영하고, 스타일은 영혼을 반영한다. 요컨대 시인을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과 문화에 의해 정의된다.   이 시대 시인들은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살 수도 있고, 우울증에 시달릴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도 있다. 넥타이를 맬 수도 있고 매지 않을 수도 있고,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전혀 못 마실 수도 있다.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 있고, 금연을 단행한 시인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엔 시인의 상투형, 그러니까 시인 하면 떠오르는 개성이 사라지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엔 시인과 일상인이 같아진 것인가? 그리고 모두가 시인이란 말인가? 사실 이 시대엔 시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운문으로 혹은 시적 표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자가 시인일 뿐이다.   최소한 시인은 일상인들과 다르게 사물을 보고 사물들을 낱말로 연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시대엔 시만 쓴다고 시인이 되는 게 아니라 신춘문예, 문학잡지라는 제도를 통과해야 하고, 아니면 시집을 내야 시인 행세를 한다. 이건 근대 문학이 가진 근대 제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황진이는 신춘문예에 당선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사회 제도와 관계없이 시인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이 있어야 하고, 상상력은 훈련에 의해 개발되고, 시 쓰기도 훈련에 의해 개발된다.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21-22.    다음 시를 읽고 감상해 보자. 편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공룡이 되고 싶은 날 노원호   너무 심심해서일까 오늘은 괜히 공룡이 되고 싶다.   날개가 달려 하늘은 나는 공룡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면 티라노사우루스가 되어 횡단보도를 뚜벅뚜벅 걷다가 달려오는 자동차를 멈추어 보고 지팡이를 짚고 오는 할머니를 보면 훌쩍 안아서 횡단보도고 건너 주고 할머니가 고맙다고 과자라도 주면 야금야금 맛있게 먹어도 보고 그래도 심심하면 어기적어기적 뒷동산으로 올라가 크게 소리도 질러보고 그러다 푸른 하늘이라도 활짝 열리면 나는 드디어 공룡이 되었다고 크게 한 번 외치고 싶다.     제5강 왜, 시 읽기와 시 쓰기인가?   시인이 되기 위해 혹은 시인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를 많이 읽는 일이다. 그것도 잘 읽는 일이다. 잘 읽는다는 것은 시를 시로서 읽어야 함을 의미한다. 시집은 신문이나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신문을 읽을 때 관심을 두는 것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말하자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이고, 과학 교과서를 읽을 때 관심을 두는 것은 과학적 진리나 법칙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시집에 실린 시를 읽는 것은 이런 읽기와는 다른 것인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각자 한 번 생각해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자.    나는 시를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 ................................................................................................................................................................................. 발 권오삼   나는 발이지요. 고린내가 풍기는 발이지요. 하루 종일 갑갑한 신발 속에서 무겁게 짓눌리며 일만 하는 발이지요. 때로는 바보처럼 우리끼리 밟고 밟히는 발이지요.   그러나 나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빈 대동여지도 김정호 선생의 발 아우내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누나의 발 장백산맥을 바람처럼 달렸던 김좌진 장군의 발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발   그러나 나는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고 어두컴컴한 뒷자리에서 말없이 사는 그런 발이지요. 풀잎 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이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제6강 시 쓰기엔 재주가 있어야 하는가?   선천적으로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재주는 개발하기 나름이다. 천재가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역사상 위대한 천재들은 재주에 앞서 일상인보다 더 노력한 사람들이고 고독한 사람들이고 근면한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천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재는 만들어진다. 영국 속담에 ‘천재는 일종의 정신병’이란 말도 있다. 이런 말이 암시하는 것은 천재는 일상인과 다르게 사물을 보고 느끼고 상상하고, 이런 상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재는 자기의 능력을 특별한 렌즈로 초점을 맞추는 자이고, 재주를 낭비하지 않고 언제나 집중하는 자이고, 남들이 볼 때 다소 이상한 자이다. 사실 상상력이란 일종의 정신병, 곧 일상적 사유에서 이탈하고 이성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들을 수용하고 종합하는 이상한 정신능력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자들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고독하다. 그러면 상상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어딘가 소리 있는 곳으로 귀 기울이는 예쁘디예쁜 열린 창이여   꽃이슬 젖은 새벽길 위에 서서 그 많은 소녀들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단 한 번인 목숨 누구를 위하여도 죽을 수 없는 그 자라가는 소녀들의 열린 창이여 - 김춘수,「곤충의 눈」             김춘수의「곤충의 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대상은 ‘곤충의 눈’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이상하게도, 말하자면 일상인들과는 다르게 ‘열린 창’에 비유한다. 시인은 ‘곤충의 눈’을 보면서 ‘열린 창’에 비유한다. 시인은 ‘곤충의 눈’을 보면서 ‘열린 창’을 상상하고, 2연에서 이런 상상은 ‘새벽길 위의 소녀’들로 발전하고, 마침내 3연에 오면 ‘곤충의 눈’은 ‘자라고 있는 소녀들의 창’이 된다. 물론 이때 ‘창’은 ‘눈’을 암시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곤충의 눈’이 ‘열린 창’이고 ‘자라고 있는 소녀들의 창’이란 말인가? ‘빗소리’에서 ‘병아리’를 연상하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상상은 시인의 고독과 남다른 직관과 사유의 소산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 성찰로 매개한다. 요컨대 시의 천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쓰기를 좋아하고, 꾸준히 시 쓰기에 노력하고, 언제나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고독한 자가 있을 뿐이다. 물론 시 쓰기에는 어느 정도 시에 대한 재능, 재주도 요구된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상상력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주는 살아가면서 대부분 낭비되기 때문에 재주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노력과 훈련이다. 따라서 재주라는 말보다 경향, 혹은 취향, 재미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사실 시는, 그리고 모든 예술은 고독한 놀이이고, 시인은 이런 놀이를 좋아하는 자이다. 축구 선수가 축구가 좋아서 볼을 차고, 과학자는 실험이 좋아서 밤늦도록 실험실에서 실험을 한다. 어디 운동선수와 과학자뿐인가? 사업가는 돈 버는 게 좋아서 사업을 하고, 학자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공부를 한다. 돈을 벌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고 이름을 내려고 공부를 하는 게 아니다. 시도 좋아서 쓴다. 좋지도 않고 취미도 없다면 돈도 안 생기고 괴로운 이 작업을 왜 하는가? 시인 혹은 시인을 지망하는 사람은 재주보다 시 쓰기에 취미가 있어야 하고, 재미를 느껴야 하고, 취향이 그래야 한다. 물론 사람마다 기호나 취미는 다르다. 시인은 시에 취미가 있는 자이고, 이 취미는 단순한 취미의 영역이 아니라 창조의 세계를 지향한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남들과 다르게 보고 이 사물들을 언어로 남들과 다르게 연결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이유나 동기는 시인마다 다를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시간을 시 쓰기에 소비하는 것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23-25.      다음 시를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감상해 보자. 꽃을 보려고 정호승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고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고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엄마를 만나려고 내가 먼저 들에 나가 봄이 됩니다 새들처럼 이옥근   파란 하늘이 자꾸만 높아지던 어느 날   느티나무 단풍 든 잎새들이 - 우리도 새들처럼 날아 보자   바람 타고 함성 지르며 새가 되어 날았습니다   제7강 시인은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이미지의 유형   시는 관념이 아니라 감각을 강조한다. 관념을 전달하는 경우에도 직접 진술하기보다는 감각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중요하다. 이미지는 지각, 기억, 환상, 공상, 연상에 의해 태어난다. 하지만 모든 이미지는 감각에 호소한다는 특성을 공유한다. 인간만 해도 그렇다. 어떻게 태어났는가? 이런 문제도 중요하지만 태어난 인간들이 공유하는 특성도 중요하다. 탄생 과정도 중요하고, 탄생한 존재들이 공유하는 특성도 중요하다. 인간은 물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인간은 안방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태어나고, 새벽에 태어나고, 아침에 태어나고, 저녁에 태어나고, 깊은 밤에도 태어난다. 순산인 경우도 있고, 난산인 경우도 있다. 태어나는 과정은 이렇게 다양하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과정을 겪으며 태어났지만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 혹은 이런 성적 차이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감성적으로 사물을 지각한다는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이성, 양심, 감성을 공유한다. 이 세 가지 특성가운데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이성적 인간, 도덕적 인간, 감성적 인간이 나타난다. 이런 분류는 시각이나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미지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미지도 지각에 의해 태어나고, 기억에 의해 태어나고, 환상에 의해 태어나고, 공상‧연상에 의해 태어난다. 그런 점에서 그 탄생의 과정은 복잡하고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감각적 실체 혹은 감각적 현실이라는 점에서 모든 이미지는 같다. 이 감각의 세계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여러 유형의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은 눈, 귀, 코, 혀, 피부 등 다섯 가지이다. 이 다섯 기관을 이른바 5관官이라고 부른다.그러므로 이미지에는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가 있다. 물론 이밖에도 운동적(기관적) 이미지, 근육감각적 이미지, 공감각적 이미지 등이 추가된다. 이런 이미지들은 감각적 경험 자체를 전달한다. 이렇게 감각적 경험만을 목표로 하는 이미지를 시론詩論에서는 이른바 정신적 이미지라고 부른다. 이와는 달리 어떤 관념을 전달하거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미지는 비유적 이미지, 이미지가 상징이 되는 경우는 상징적 이미지 혹은 상징이라고 부른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   첫째로 시각적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사물성, 말하자면 사물에 대한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시는 음악보다 회화의 특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많은 현대 시인들은 회화성, 곧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나아가 이런 이미지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하기도 한다. 다음은 시각적 이미지로 한 편의 동시가 구성된 보기이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 떴다 드넓은 호수에도 붉은 노을   누구일까!   하늘과 호수에 똑같이 찍어낸 저 엄청난 그림   데칼코마니. - 하청호,「데칼코마니」전문   둘째로 청각적 이미지는 귀에 들리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각적 이미지처럼 이미지 자체만으로 한 편의 시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설명적 기능을 하는 비유적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다음은 청각적 이미지로 구성된 동시이다.   늦은 밤 부엌에서 보글보글, 보글보글…….   그게 무슨 소린지 넌 알겠니?   일 나간 우리 아빠 돌아오셨다고 찌개냄새가 좋아서 노래하는 소리야. - 문삼석,「보글보글」전문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51-21. 제8강 시인은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냄새, 맛, 촉각의 이미지   셋째로 후각적 이미지는 코에 닿는 감각을 강조한다. 시인이 후각적 이미지, 특히 향기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러니까 향기의 상상력에 의해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각적 이미지나 상상력으로 한 편의 시를 짓는 일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다음 하청호 시인의「아버지의 등」을 읽고 후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한 편의 동시로 구성되었는지 살펴보자.   아버지의 등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 하청호,「아버지의 등」전문   이 동시는 후각적 이미지를 제시하기 보다는 이런 이미지, 특히 냄새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편의 시로 구성하였다. 즉 아버지의 등에서 나는 땀 냄새, 즉 땀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라는 말보다는 후각적 상상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시인은 아버지의 등에서 나는 땀 냄새를 중심으로 상상력을 전개한다. 따라서 시인은 아버지가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겉으로 소리 내어 울지 않고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이고, 그 땀 냄새가 바로 속울음이라고 상상했다. 넷째로 미각적 이미지는 혀에 닿는 감각의 전달을 목표로 한다. 이런 감각 역시 여간 세련되지 않고는 단순한 설명의 차원에 머무는 수가 많다. 다음은 김영기 시인이 쓴「단비와 쓴비」이다. 미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자   가뭄에 목마를 때/ 찾아온 비는 단비/“야, 그 비 참 달다.”/ 물꼬 내러 가는 아빠// 달다고/ 말은 못해도/ 춤을 추는 나뭇잎.// 태풍을 등에 업고/ 오는 비는 몹쓸 비/“야, 그 비 참 쓰다.”/ 과수밭을 보신 아빠// 쓰다고/ 말은 못해도/ 눈물 맺은 이파리.// 김영기,「단비와 쓴비」전문   이 동시는 ‘달다’, ‘쓰다’라는 맛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써서 가뭄의 단비와 태풍과 함께 오는 비를 중심으로 시를 구성하였다. 여기서 비가 ‘달다’, ‘쓰다’라는 표현은 식물의 입장이 아닌 단지 시인의 상상일 따름이다.즉 가뭄에 와서 식물에 고마우니까 ‘단비’이고 세찬 비바람을 몰고 와서 식물에 해로우니까 ‘쓴비’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촉각적 이미지는 신체, 주로 신체 표면에 닿는 감각을 전달한다. 부드럽다, 딱딱하다, 물렁하다,단단하다, 꺼칠하다 등으로 표현되는 이미지이다. 다음은 권영세 시인의 동시「손때」이다. 이 동시에 촉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자.   시골집 농기구 광 속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 연모들이/ 가지런히 벽에 걸려있다.// 지금은/ 일손 없어 쉬고 있는/ 겹겹 손때 묻은/ 괭이, 삽, 가래, 호미……// 이제는/ 그 날의 주인도 떠나고 없는/ 괭이로 텃밭을 고른다.// 이마에는 어느 새 땀방울이 맺히고/ 문득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어느 할아버님의 손길인가.// 잠시 일손 멈추고/ 얼굴은 모르지만/ 손잡이에 스며있는/ 따스한 정을 느껴 본다.// 권영세,「손때」전문   이 동시에는 어느 곳에도 촉각적 이미지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다만 ‘문득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어느 할아버님의 손길인가.’ 와 ‘손잡이에 스며있는/ 따스한 정을 느껴 본다.’에서 밑줄 친 ‘손길’과 ‘정’이라는 말에서 촉각적 이미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시인은 앞의 ‘손길’과 ‘정’이라는 두 말을 중심으로 시의 메시지를 설정하고 있다. 이 말 외의 시적 표현들은 결국 ‘시골집 농기구 광속에 있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부터 겹겹 손때가 묻은 농기구’를 통해 조상의 손길과 따스한 정을 시에 담고자 하는 상황 전개를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다.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51-21.   제9강 우리는 비유 속에서 산다   시인은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그렇지만 시 쓰기는 감각적 능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수용이 시인의 잠재적 능력이라면 이런 능력을 언어로 구현해야 한다. 따라서 시인에게는 특수하게 말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시 쓰기는 일상인들과 다르게 말하기, 다르게 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시인은 말을 잘못 사용하는 자이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하지 않는 자이다. 일상인들은 ‘장미가 피었어’라고 말하지만 시인은 ‘장미는 타오르는 램프야’라고 말한다. 흔히 이런 말하기를 비유라고 한다. ‘장미는 타오르는 램프야’라는 표현에서 ‘장미’는 ‘램프’에 비유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일상인의 시각에서는 말이 되지 않고, 그런 점에서 비유적 표현은 일상적 어법에서 이탈하고 벗어나는 이상한 말하기가 된다. 그러나 이런 말하기를 통해 우리는 ‘장미’에 대한 새로운 감각,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또한 답답한 세상을 신선하게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이런 표현을 통해서 시인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교육에 의한 사유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지 말고 스스로 경험하라는 것, 그것도 사물을 새롭게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런 비유적 표현은 시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은 비유 속에서 비유에 의해 비유와 함께 수행된다. 비유는 우리 주위를 감싸고 우리는 비유와 함께 삶을 영위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물들의 이름을 생각할 수 있다.         ▪ 괭이갈매기         ▪ 물총새          ▪ 딱따구리       ▪ 칼새                  ▪ 집게발톱        ▪ 강아지풀       ▪ 비단풀               ▪ 애기풀           ▪ 할미꽃   위에 보기로 든 본래의 각 사물들은 모두 다른 사물에 의해 비유되었다. 이런 비유를 통해 우리는 각 사물들의 특성을 좀 더 명료하고 신선하고 구체적으로 이해한다. ‘괭이갈매기’의 경우, 갈매기는 괭이 곧 고양이에 비유되고, 그것은 이 갈매기 울음소리가 고양이 소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총새’의 경우엔 물새가 총알에 비유되고, 그것은 이 새가 물가의 나뭇가지에 앉아 있거나 공중의 한 자리에 떠서 물을 살피다가 총알처럼 날쌔게 물속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아먹기 때문이며, ‘딱따구리’의 경우엔 이 새가 딱딱한 부리로‘딱딱’ 소리를 내며 나무에 구멍을 내어 그 속의 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표현은 비유가 아니라 소리 상징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딱딱’ 소리를 그대로 새의 이름으로 한 점에서 이 새는 소리를 비유한다고 할 수도 있고 상징 역시, 비유의 한 유형이기 때문이다. ‘칼새’는 새가 칼에 비유되고, ‘집게발톱’은 발톱이 집게에 비유되며, ‘강아지풀’은 풀이 강아지에 비유된다. 그것은 이 풀이 여름에 강아지 꼬리 같은 이삭이 나오기 때문이다. ‘비단풀’은 바다 속에 자라는 풀로 비단에 비유되고, ‘애기풀’은 풀이 애기에 비유되고, ‘할미꽃’은 꽃이 할미에 비유된다. 요컨대 이런 이름들은 비유적 특성을 보여주고, 이런 비유적 표현이 강조하는 것은 각 사물의 특성에 대한 명료한 이해이다. 그런 점에서 비유적 표현은 결코 시인만이 독점하는 독과점적 표현 형식이 아니다. 일반인도 이런 표현, 곧 비유 속에서 산다. 이렇게 비유 속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름들, 이런 사물들, 갈매기, 물고기, 풀, 새들은 얼마나 많은 다른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가? 그런 점에서 이런 사물들은 바로 시이고 혹은 시가 아니다. 아무튼 이런 사물을 통해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세계에 대한, 삶에 대한 생생한 감동이다.    다음 시를 읽고 비유적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빨래집게 한상순   난 입이 있어도 누굴 흉보지 않아   누가 뭐래도빨래 줄에 빨래가 널리면   그때 내 입은 번쩍 열리게 돼   그리고 덥석 문 빨래 함부로 뱉지 않지             내가 가지고 싶은 생각 조기호   내 생각은 동그랬으면 좋겠다. 굴렁쇠처럼 동네방네 맘껏 구르다가 누구라도 어깨동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은 빵빵했으면 좋겠다. 공처럼 통통 튀어 오르다가 높다랗게 둥지 하나 틀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은 단순했으면 좋겠다. 한곳 깊은 땅속을 흐르다가 맑은 샘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67-69.   제10강 직유도 직유 나름이다   비유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바 우리는 그것을 취의와 매재라고 부른다. ‘괭이갈매기’의 경우 ‘갈매기’는 취의이고, ‘괭이’는 매재이다. 취의란 비유의 주체, 말하자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뜻하고 매재는 비유되는 사물을 뜻한다. 취의란 본래 말하려는 것을 의미하고 매재는 이 본래의 사물을 말하기 위한 수단, 즉 수레라는 의미이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우리의 삶이 비유로 이루어지고 비유 속에서 영위 되고 비유를 통해 전개된다. 하나 이미 우리가 알고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경우, 그런 비유를 상투적 비유 혹은 죽은 비유라고 한다. 한편, 상투형에 속하는 비유의 경우에도 관점에 따라서는 신선한 비유가 될 수도 있다. 직유는 말 그대로 두 사물을 유사성을 토대로 비교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직유는 흔히 취의와 매재 사이에‘-처럼’, ‘같은’, ‘-듯’ 등의 낱말들을 사용해서 비교되는 두 사물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직유는 은유와는 다른 시적 효과, 이를 테면 사물에 대한 설명적‧해설적 기능이 강하다. 그러나 처음 시를 쓰는 초심자들은, 상상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시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직유적 표현부터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직유도 나름이다. 직유라고 해서 모두 사물에 대한 설명(‘우리 아내의 손은 솥뚜껑 같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월의 더딘 해 고요히 내리는 화단// 하루의 정열도/ 파김치같이 시들다/ 바람아, 네 이파리 하나 흔들 힘이 없니!// - 오일도,「오월의 화단」부분   불 피어오르듯 하는 술/ 한숨에 키어도 아아 배고파라.// 수 접듯 놓인 유리컵/ 바쟉바쟉 씹는 대로 배고프리. - 정지용,「저녁 햇살」부분 폭탄처럼 벌거벗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눈을 크게 뜨고// 보아라/ 우리는 불안과 죄의/ 바다를 건너/ 드디어 폭발했다// - 이승훈,「사랑 1977」전문   위의 보기는 사물이나 관념에 대한 산문적 설명의 차원을 극복하고 뛰어넘고 또한 같은 직유라 해도 서로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오일도의 경우, ‘하루의 정열’(취의)이 ‘파김치’(매재)에 비유되고, 이런 비유는 나른한 5월의 정서를 매개로 한다. 특히 5월의 화단, 바람도 불지 않고 해만 하염없이 내리는, 노곤한 그런 5월의 화단을 보면서 시인이 느끼는 정열은 정열이 아니라 정열의 소멸이고 정열이 시들어가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매개로 ‘파김치’가 선택된다. ‘파김치가 되었다’는 말은 기운이 몹시 지쳐 나른하게 되었음을 비유한다. 이 시에서는 취의가 정서나 관념으로 되어 있고 매재가 사물 혹은 이미지로 되어 있지만, 정지용의 경우에는 취의가 사물(술)이고 매재도 사물(불)로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취의와 매재의 관계는 (1) 사물/사물 (2) 사물/관념 (3) 관념/사물 (4)관념/관념   같은 유형으로 나타나고, 시 쓰기의 초심자들은 (1)부터 단계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사물을 사물에 비유하기는 사실 쉬운 것 같지만(‘우리 오빠는 전봇대처럼 키가 크다’) 정지용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다. 쉬운 것은 대체로 설명의 차원에 머물고 쉽지 않은 것은 사물에 대한 신비한 의미를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정지용의 경우에는 은유적인 특성이 나타난다. 이 시에서 말하려는 것은, 취의는 ‘술’이라 했지만 다시 읽어 보면 표제 ‘저녁 햇살’을 전제로 할 때 취의는 이고, 따라서 시인은 ‘저녁 햇살’(취의)을 ‘술’(매재)에 비유한다. 그리고 이 ‘술’은 다시 ‘불’에 비유되기 때문에 결국 저녁 햇살(취의)/술(매재), 술(취의)/불(매재)이라는 이중적 직유 형식이 나타난다. 요컨대 저녁 햇살을 보면서 술을 생각하고, 이 술이 불처럼 피어오르는 것은 그것이 붉게 타고 있는 저녁 햇살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는 모두 ‘갈증’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런 술, 저녁 햇살, 피어오르는 불을 한숨에 마셔도 시인을 배가 고프다. 갈증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밥을 먹어야 하나? 다음 이승훈의 시에 나오는 직유는 앞의 두 시인과는 다르다. 이 다름의 차이도 중요하다. 두 얼굴(취의)이 폭탄(매재)에 비유된 것은 ‘벌거벗다’는 낱말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폭탄처럼 벌거벗은 얼굴’이라는 표현은 난해하다. 그것은 이 시를 쓸 즈음 시인은 초현실주의 미학에 빠져 이성과 의식보다 무의식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시를 그림에 비유하면 바다에 떠 있는 두 얼굴이 서로 맞대고 있고, 이 얼굴에 폭탄이 오버랩되거나 병치되는 이미지이다. 문제는 ‘폭탄’이다. 폭탄은 폭발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사랑의 아름다움, 따뜻한이 아니라 ‘불안과 죄의 바다’를 건너 폭발하고 만 사랑을 노래한다. 한편 ‘벌거벗은’은 ‘폭탄’과 ‘얼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이른바 양행 걸림 기법이다. 한편 여기서의 ‘벌거벗은’은 어떤 가식, 장식, 속임, 꾸밈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직유는 두 사물의 결합이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종의 초현실주의적 기법에 속하고 초현실주의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억압된 무의식, 욕망을 노래한다.    다음 동시를 읽고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봅시다. 뜻밖에 권영세   길을 가다가 뜻밖에 너를 만났지.   생각지도 않았는데 너무너무 반가웠어.       늘 만나는 그들과도 뜻밖에 너를 만난 듯   그렇게 반가웠으면 정말정말 좋겠어.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67-69.   제14강 리듬은 시의 숨결이다   시 쓰기는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지만 한편 그의 이탈 행위, 곧 시 쓰기는 반복되고 시의 내용과 형식 역시 반복된다. 시의 주제나 소재 가운데 새로운 것은 별로 없고 옛날이나 오늘이나 비슷한 주제이고 시라는 형식 역시 크게 보면 소설이 아니라 시라는 점에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시 쓰기에서의 반복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1. 낱말을 반복하라 반복은 시뿐만 아니라 산문, 연설 등의 경우에도 사용되고 이런 사용에 의해 미적 효과, 시적 효과, 주제 전달의 효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경우 반복이 주는 미적 효과 및 시적 효과는 무엇이고 어떤 유형으로 나타나는가?   나비 나비 노랑나비   꽃잎에서 한 잠 자고, 나비 나비 노랑나비   소뿔에서 한 잠 자고, 나비 나비 노랑나비   길손 따라 훨훨 갔네. - 김영일,「노랑나비」전문   이 동시는 전체가 여섯 개의 연으로 구성되었지만 의미구조로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나비/ 나비/노랑나비’를 각 부분의 앞에 두고 그 뒤에 ‘꽃잎에서/ 한 잠 자고’ 와 ‘소뿔에서/ 한 잠 자고’, 그리고 ‘길손 따라/ 훨훨 갔네’라는 짜임이다. 동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자연스레 운율이 살아나는 것은 ‘나비/ 나비/ 노랑나비’의 반복과 그 뒤의 글자 수를 같게 한 때문이다.   2. 구와 절을 반복하라 낱말이 아니라 구와 절이 반복되면서 한 편의 시가 완성되고, 시로서의 통일성과 리듬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구와 절은 시에서 주제를 암시하거나 계속 반복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끈다. 구는 둘 이상의 낱말로 구성되지만 주어와 동사의 형식을 띠지 못하고 다만 절이나 문장을 수식하는 문장의 한 요소로 드러난다. 명사구, 동사구, 형용사구, 부사구 등이 있다. 한편 절은 주어와 동사의 형식, 곧 문장의 형식을 띠지만 완전한 문장이 되지 못하는 경우, 예컨대 주절, 종속절, 대등절 등이 있다. 먼저 구가 반복되는 경우,   밭을 갈아 콩을 심고 밭을 갈아 콩을 심고 꾸륵꾸륵 비둘기야   백양 잘라 집을 지어 초가삼간 집을 지어 꾸륵꾸륵 비둘기야   대를 심어 바람 막고 대를 쪄서 퉁소 뚫고 꾸륵꾸륵 비둘기야 -박목월,「밭을 갈아」일부   시의 전반부이다. ‘밭을 갈아 콩을 심고’는 대등절에 해당하지만 여기서는 다음 절이 생략된 형식이고 그러나 이런 절이 각 시행마다 반복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명사구 ‘꾸륵꾸륵 비둘기야’가 각 시행마다 반복된다. 이런 반복을 흔히 후렴구라고 하는 바 이 시의 미적 효과는 절의 반복과 구의 반복, 특히 후렴구가 성취한다. 다음과 같은 명사구가 반복되지만 형식을 같고 내용은 일부가 변주되는 경우,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누운 제일 큰 자라.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제일 큰 자라 등판 위에 올라간 그 다음 큰 자라.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제일 큰 자라 몸통에 몸을 기댄 세 번째 자라. - 박찬일,「웃기는 자라」부분   시의 앞부분이다. 네 개의 시행으로 되어 있지만 크게 보면 이 시는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누운 제일 큰 자라’라는 명사구가 세 번 반복되면서 변주된다. 단순한 반복이 반복과 반복 사이를 강조한다면 이렇게 변주되는 반복은 변주 자체가 시적 의미를 암시한다. 시의 후반 역시 크게 보면 이런 형식의 변주로 구성된다. 다음 명사구의 반복의 경우,    날 만든 것은 사랑 날 맞아준 사랑 날 요정으로 만들어준 사랑 그래 어디로 가버렸나 내가 사랑했던 그이 내게 기쁨을 주고 내게 꿈을 주고 날 춤추게 해주던 그이 …(중략)… 날 만든 것은 사랑 날 맞아준 사랑 날 요정으로 만들어준 사랑 나는 당신들을 짐승으로 만든다 기분 내킬 때마다 당신들의 사랑은 우스운 것 …(중략)…     날 만든 것은 사랑 날 부순 것도 날 버린 것도 사랑 내가 사랑했던 그이 어디로 가버렸나 어디로 가버렸나 어디로 나버렸나 - 프레베르,「날 만든 것은 사랑」 (김종호 역) 부분   시의 2,3,4연이다. 1연만 빼면 이 시는 명사구 ‘날 만든 것은 사랑’이 각 연마다 반복되고, ‘날 맞아 준 사랑’, ‘날 요정으로 만들어준 사랑’은 2회 반복된다. 그런 점에서 이런 명사구의 반복이 시의 주제를 암시하고 시에 통일성을 주고 리듬을 준다. 1연에서는 태어남과 삶에 대해 말 하는 바 ‘나’는 발가벗고 태어났고 태어난 대로 산다는 것. 다음은 절의 반복,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박용래,「저녁눈」전문 박용래의「저녁눈」이다. 이 시에서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은 이른바 주절에 해당하고, 이 절이 각 시행마다 반복되고, 또한 서술어 ‘붐비다’로 각 시행이 완성된다. 한편 이 시는 같은 문장 형식이 반복되는 보기도 된다. 절의 반복 역시 변주되면서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 조병화,「초상」전문   시의 전문이다. 각 연마다 종속절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이 반복된다. 그러나 일반 문장에서는 이런 절이 종속적 기능으로 끝나지만 시의 경우 특히 이렇게 반복됨으로써 그대를 보는 순간이 강조되고 시에 통일성이 주어진다. 이 시에서는 ‘그대를 보는 때’가 순차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적 순서로, 통시적으로 반복되지만 공시적으로는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 동안 살아 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하아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 이승훈, 「너를 본 순간」부분     이 시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같은 표현의 반복이지만 앞의 시와 이 시가 다르다는 점이다. 앞의 시는 시간적 순서를 따르고 이 시는 그런 순서가 아니라 공시성, 혹은 동시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너를 본 순간’에 나를 찾아오는 복잡한 정서, 상상, 관념을 노래한다.   3. 문장과 연을 반복하라 이상에서 한 편의 시가 낱말, 구, 절의 반복에 의해 통일성을 획득하고 미학을 획득하고 리듬을 획득한다는 것, 따라서 시에서 반복의 기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끝으로 문장과 연의 반복,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작은 아씨여 갓 꺾은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처녀여 시들을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고운 여인이여 떨어지는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늙은 여자여 죽어가는 꽃을 들고 승리자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 프레베르,「꽃다발」(김화영 역) 전문   시의 전문이다. 1연에서는 시인 혹은 화자가 여인에게 묻고 2연에서는 여인이, 혹은 여인들이 대답한다. 시에는 한 여인이 아니라 여자의 일생을 압축하는 네 여자, ‘작은 아씨’, ‘처녀’, ‘여인’, ‘늙은 여자’가 나오고 네 여자가 ‘승리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 유머러스하고 슬프고 사랑스럽다.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는 반복되고 ‘작은 소녀여’는 변주된다. 그러나 문장이 변주되지 않고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여름이었어 나, 그 나무 아래 누워 강물 소리를 멀리 들었지 - 김용택,「나무」부분   시의 1,2연이다.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서 있었지’라는 문장은 5연까지 각 연의 첫 행에서 반복되고 이런 반복이 이 시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가을에는 기대서서 멀리 흐르는 강물을 보고, 겨울에는 강물에 눈이 오고, 다시 봄이 오면 그냥 기대 앉아 있었다는 것. 이상은 문자의 반복이고 다음은 연이 반복되는 경우,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불국사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 박목월,「달」전문   이 시는 불국사 터를 잡은 언저리를 배경으로 달이 가는 풍경을 노래하지만 같은 연의 반복이 문제이다. 1연에서는 달이 강조된다면 3연에서는 불국사 터를 배경으로 가는 달이 강조된다. 따라서 같은 달이지만 1연에서는 달이 전경에 드러나고 3연에서는 달이 배경으로 드러난다.    그대 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대 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잠이 들었다     이런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 시의 경우 시간은 변하지만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 따라서 한결같이 지속되는 정서나 관념의 흐름을 강조한다. 내가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그대가 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그대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잠이 드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아름다운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나만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85-103.  
5    프랑스 동시문학의 세계 댓글:  조회:1793  추천:0  2017-08-10
海外 兒童文學/프랑스  프랑스 동시문학의 세계  ―어린이 동심견문록, 童心, 어른의 Micro-Cosmos 『색깔들couleurs―시로 엮는 어린 시절enfnace en poésie』(청소년 갈리마르 출판사 Gallimard Jeuness, 에르베 뛸래Hervé Tullet 그림, 강금희 옮김) 姜金希(총신대 강사) 제1부 11명 프랑스 대시인들의 童詩   색깔들Couleurs / 모리스 카렘Maurice CAREME   -난 말이야, 보라색을 좋아해, 7월달 색이거든.   월귤이 흰족제비에게 말한다. -난 말이야, 주황색을 더 좋아해, 게다가 난 절대 변하지 않아 오렌지가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난 빨강색이야, 딸기가 말한다.   -난 말이야, 노랑색이야, 참외가 말한다.   사과는 몹시 으스대며, -빨간색 아니면 노란색 난 경우에 따라 달라.   연못은 파란색으로 옷 입고 벚꽃 나무는 하얀 꽃으로 옷 입고 초록 잎은 나무 가지들을 즐겁게 하고 금은 불에게 마술을 건다.   그리고 목넘이 마을에 폭풍우가 지나가 급작스런 우박에 놀라지만 예쁜 꽃 드레스를 입고 무지개 목도리를 하고 총천연색으로 웃고 있다   ―시집 『레네뜨사과Pomme de reinette』에서   지나가는 시간Le temps qui passé / 앙드레 이베르노Andree HYVERNAUD   회색 월요일 수국의 분홍색 화요일 파란색 수요일 : 너 다시 올 거지? 주중 다른 날들은?   나무 아래서 티티새와 놀이하는 초록색 목요일   치즈에서부터 생크림에 이르는 하얀색 금요일   그리고 당근의 빨간색 토요일 일요일 그는 두 팔 사이 줄기 위에 태양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시집 『투명성Transparences』에서   아이들을 위한, 그리고 세련된 사람을 위한 Pour les enfants et pour les raffinés / 막스 쟈콥Max JACOB   난 네 생일에 개암색 모자를 줄게. 네 손에 들고 다닐 사틴(반드러운 천)으로 만든 작은 가방이랑 손잡이에 술이 달린 하얀 비단 양산이랑 금빛 자락 달린 옷이랑 주황색 구두랑    그런데 목걸이 보석들은 일요일에만 해야 해! 티우! 근사할거야!   ―시집 『성-마토렐Saint-Matorel』   이 수수께끼 좀 풀어볼래Devine un peu la devinette / 끌로드 루와Claude ROY   쥐색인 수십만 잿빛 고양이들 다리 끝은 하얗다. 가만히 뻗고 있는 발톱을 감춘 벨벳 다리들 온통 잿빛 하늘에서 수십만 잿빛 고양이들 밤에 감추어진 수십만 잿빛 고양이들 천천히 눈이 내리고 있다   ―시집 『변덕스런 아이의 소설Nouvelles Enfantasques*』   *‘아이’라는 단어 ‘enfant’과 ‘변덕스러운’ 이란 형용사 ‘fantasque’의 합성어 파랑과 하양Bleu et Blanc / 모리스 카렘Maurice CAREME   하얀 물방울무늬 위의 파란 작은 고양이 하난 물방울무늬 위의 하얀 커다란 쥐 그들의 귀여운 꼬리들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 하지만  파란 고양이 코는 너무 너무 하얗다 하얀 쥐의 코는 너무 너무 파랗다. 그들의 뺨과 눈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 하지만 파란 고양이 눈썹은 아주 아주 하얗고 하얀 쥐의 눈썹은 아주 아주 파랗다   하양과 파랑의 이 조금 차이로 아주 적은 이 차이 때문에 그 둘은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시집 『귀뚜라미 초롱La cage aux grillons』   지구는 파랗다 오렌지처럼La terre est bleue cpmme une orange / 폴 엘루아르Paul ELUARD   지구는 파랗다 오렌지처럼 이건 결코 잘못 아니다 단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단어들은 더 이상 당신에게 노래거리를 주지 않는다. 미친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통하는 입맞춤으로 지구는 약속의 입 모든 비밀들 모든 미소들   그리고 발가벗고 믿게 하는 면죄부의 어떤 옷 말벌들이 초록색 꽃을 피우고 새벽은 목둘레에 窓 목걸이를 걸어주고 날개들은 잎을 덮고 너는 모든 태양의 기쁨을 지녔다. 지구 위에 온 태양을 너의 아름다움의 길들 위에   ―시집 『사랑 詩L’amour la poésie』   검은 땅 위의 푸른 밤/nuit bleue sur terre noire / 모리스 퐁뵈르Maurice FOMBEURE   검은 땅 위의 푸른 밤 푸른 땅 위의 검은 밤 모든 말(馬)들이 마시러 간다 내 기억의 물속으로   ―시집 『작은 고양이에게』   바다La mer / 폴 포르Paul FORT   바다가 빛난다 조개처럼 그것을 잡고 싶다 바다는 초록색이다 바다는 회색이다 쪽빛의 바다 은빛과 레이스의 바다다   편애 없이Sans manie / 뮈리엘 베르스티쉘Muriel VERSTICHEL   내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은 하얀색에게다 최상의 하얀색에게 순결무구의 신비의 하얀색에게 새벽의 눈의 하얀색에게 하얀색에게   내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은 검은색에게다 불타고 있는 내 친구 피부의 검은색에게 수천 년 묵은 석탄의 검은색에게 검은색에게 그 가운데서 검정색과 하얀색 사이에서 춤추고 있다 색깔들이 춤추고 있다   ―시집 『미발표Inédit』   바다La mer / 알렝 보스케Alain Bosquet   바다는 파란 물고기를 쓰고 회색 물고기를 지운다 바다는 불붙은 순양함을 쓰고 잘못 쓴 순양함을 지운다   시인들보다 더 시인 음악가들 보다 더 음악가인 바다는 나의 통역자이다   옛 바다 미래의 바다는 꽃잎의 대리모 모피의 대리모인 바다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속에 자릴 잡는다   바다는 초록빛 태양을 쓰고 연보라 빛 태양을 지운다 바다는 황급히 도망가는 수 천 마리의 상어 위로 반쯤 입 벌린 태양을 쓴다   ―시집 『시,하나Poèmes, un』   노래Chanson / 마리 노엘Marie NOEL   히드가 무성한 땅을 가면서 -붉은 덤불, 하얀 덤불- 바람 가운데서 자라는 마지막 꽃을 꺾기 위해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참으아리 곁을 지나면서 -붉은 목 울새가 그 안에 있다-   나는 아이들을 숲으로 데려가는 유모를 만났었다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보다 예쁜 세 아이들은 뒤에 가고 보다 명랑한 세 아이들은 앞에 가고 그러나 맨 꼴찌 꼬마 여자에는 신발을 끌며 걸어가고 있다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토기풀밭을 지나면서 -걔 오빠들은 들 저 멀리 있는데-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다.   그녀는 울면서 발걸음을 멈춘다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시집 『가을의 노래와 시편Chants et psaumes d’automne』   내일은 일요일이다C’est demain dimanche / 필립 쑤포Philippe SOUPAULT   미소 짓는 법을 배우라고 날씨가 잿빛으로 흐릴 때라도 말야   왜 울어야 하는데 오늘 태양이 빛나고 있어   내일은 친구들의 생일 개구리들과 새들 버섯들과 달팽이들 곤충들도 잊지 말자 파리들과 무당벌레들도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정오다 난 무지개를 기다릴 테야 보 남 파 초 노 주 빨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그리고 우린 돌차기-깨금집기 놀이를 할 거야   ―시집 『Julie의 새 화환La nouvelle Guirande de Julie』     2부. 해설 : 빛의 나라 색깔나라-색깔이야기 색은 혼자서 존재하지 않으며 빛이라는 존재와 함께 어울려야 한다. 색은 빛의 강도와 방향, 원근 등에 의해 확연하게 변신하는데 하지만 ‘색즉시공 공즉시공(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처럼 태초에 형체(色)도 없어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는 없고 모든 사물의 참모습은 공일뿐 실체가 아니라는 데 사실인가? 게다가 실제로는 세상에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자연에는 색이라는 관념조차도 없다. 색은 인간의 뇌가 사물을 특정한 공식으로 인지하면서 나타나는 결과 중의 하나다. 우리가 오렌지라고 부르는 과일의 색도 인간의 되가 만들어내는 오렌지라는 사물에 대한 인식 방법일 뿐 실제의 과일 오렌지는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색맹(色盲)은 빨강과 초록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뇌가 그 색들에 대한 정보를 다르게 인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색과 남이 보는 색도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결국 색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다. 인간의 뇌는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마술사”가 아닐 수 없다고 화가 김이산은 『똑!똑!똑! 그림책/현암사』에서 정의하고 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 한마디로 흑백 세계에서 드러난 칼라 세계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옮겨감을 의미하지만 아이가 캄캄한 엄마 뱃속에서 10개월간 들어 있다가 거의 병실이지만 혹 방안 전구 불빛 아래 태어날 때 아이에겐 빛은 폭력에 가까운 카오스가 아닐까? 아이가 우는 첫 呱呱聲은 바로 어둠에 익숙해져 있다 갑작스런 빛에 노출되었을 때 확실한 건 잘 모르지만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해도 틀렸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흔히 영화관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환한 날빛에 맛보는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일시적이지만 앞 못 보는 시각장애를 일으키는 것처럼……. 그 후 색맹이 아니면 누구나 반짝반짝 빛의 나라 알록달록 색의 나라에 살게 되면서 우리 오감 중 시각은 자연 주위의 모든 빛깔과 색깔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조화로운 색채를 배우게 된다. 자연은 가장 지혜롭게 색을 가르쳐 주는 좋은 선생이며 우리 정서에도 균형과 안정감을 준다. 그리하여 무슨 색인지를 물을 때 프랑스어론 ‘De quelle couleur est-il?’, 영어처럼 ‘What color is it? 이것은 무슨 색깔 인가?’로 묻는 것이 아니고 ‘de’라는 전치사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색의 속성을 묻기 때문이다. 자연의 색에서 색을 구별했기에 이런 질문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늘색, 금색, 살색, 쥐색, 오렌지색 가지색 등등.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색은 無色을 빼고 온갖 색이 존재한다. 본색을 드러내지 않아도 원색에서 死色(사색)에 이르기까지 없는 색이 없다. 먼저 모든 빛깔을 재현할 수 있는 기본 적인 세 색깔로 물감의 三原色으론 빨강-노랑-파랑이 있고 빛의 삼원색으론 빨강-초록-파랑이 있다. 그 외 모색/사색/박색/정색/채색/주색/특색/희색 등등 색자(色字)가 들어간 상용 합성어들은 형형색색만큼이나 많다. 신현득은 「한 색깔만 없어도」안 된다고 한다.   크레용 스무 색깔에서 파랑 색 하나만 없어도 안돼/하늘 색깔을 칠할 수 없거든/무지개를 그려도 파랑, 한 색깔이 모자라지/노랑 색깔 하나만 빠져도 안돼/개나리 노랑 꽃도, 귀연 병아리도 못 그리지/우리 여럿 중에서 한 사람만 빠져도 골목 축구 뛰는 데서 편이 기울 듯.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白衣民族이라 무명실로 짠 무명베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1886년 6월 31일자 한성주보 22호에 일본 상인들의 광고 이후 염색법을 배운 후에는 달라졌다고 마정미는 『광고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에서 백의민족의 종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염색약 제조법 광고에는 ‘감색 비색 기타 각색 염액 제조 급 염양법 전수광고’라는 제목으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산기승차랑 이라는 사람이 염색법을 깊이 연구하여 가르쳐주고자 하는데 이를 배우면 생계를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보라색 꽃 색 등 여러 가지 색 제조법을 배우려면 지화 2원을 보내야 하고 붉은 비단 색, 매화 색, 복숭아 색 등의 여러 가지 색을 배울 사람은 1원 50전을 보내면 그 자세한 제조법을 기록해서 보낼 줄 것이다. 만일 염색법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보낸 금액을 도로 환불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항과 더불어 백의민족의 흰옷을 물들이려는 염료들이 밀려들어온 후 1905년 10월 경무사 신태휴는 독특한 법령을 발포했다는데 흰옷 대신 검정색 등 짙은 색 옷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해 흰옷을 입은 사람의 등에다 ‘흑’ 혹은 ‘묵’ 자를 써서 짙은 색으로 물들이지 않으면 입고 다닐 수 없게 했다는데 위생을 위해서 신문명 시세에 따라야 한다는 요지였다지만 일본의 염료산업이 한국에 진출하는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그 후 ‘흰옷은 더욱 희게’ 라는 슬로건으로 ‘청백분’ 이라는 표백제도 관심을 끌었다는데 명절이 돌아오면 형형색색 색동옷 때때옷을 입다가 평상복으로 돌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동시에 이용한 일본사람들의 교활한 상술에 한국은 차츰차츰 알게 모르게 무색세상이 아닌 유색세상으로 바뀌어 간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 미스코리아를 뽑을 때 미인의 기준이 몸의 형태도 형태지만 색깔로 기준을 삼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三色이 기준인데 黑色으론 눈동자와 머리털과 눈썹이 검고 白色으론 치아와 손과 피부가 하얗고 紅色으론 입술과 뺨과 손톱이 붉어야 미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성형으로 몸이나 얼굴 형태는 바뀔지 몰라도 색으로 드러나는 건강상태는 숨길 수 없기 때문이리라. 윤극영의 「설」에서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우리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저고리/아버지와 어머니 호사내시고’ 그리해 ‘나는 나는 설날이 참말 좋아요’라는 동요는 바로 이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흑백영화, TV에서 1981년 4월 1일을 기해 총천연색 영화, 텔레비전 컬러화는 화려한 영상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한층 발전시켰다. 이미 미국에서는 1951년 CBS가 처음으로 컬러화면을 내보냈지만 그만큼 늦었어도 우리나라에선 컬러영상의 색 재현에서 질감의 문제를 극복하고 그 다음 단계로 표현의 차별화를 추구한 이래로 2000년 이후 디지털TV 시대에 이른 요즘 흑백사진 D.&P.가게가 폐점에 이르게 되고 영화에서도 흑백화면은 과거 기억용 화면으로 밖에는 삽입되지 않을 정도로 유색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부모님들이 보는 신문은 드라마와 사고들로 온통 흑백이지만 내가 보는 잡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동시들로 아주 명랑하고 유치찬란 아니 오색찬란하다’는 ‘신문과 잡지’. 게다가 목장에서 오래 갇혀 사는 동물마저도 총천연색 자연을 보고 싶어 할 정도로. 아름다운 초록색이 끝없이 펼쳐진 목장에서 암소마저도 목장 너머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날마다 초록 풀만을 먹고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초록색이어서 싫증난 데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미셀 피크말의 글, 에릭 바뛰의 그림 책인 『물총새와 색깔나들이』(원제: 색깔 낚시꾼Pecheur de Couleurs), 여명미디어, 2000)의 주인공 당딘느가 친구 물총새 마르탱에게 예쁜 다른 색의 나라를 가보고 싶다고 부탁하게 된다. 물총새와 함께 떠난 첫 여행은 검정색의 밤의 나라였고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하얀 나라를 꿈꾸고 그 다음 나라는 목화송이보다 더 부드럽게 하얀 눈이 내리고 있는 나라였고 그 다음엔 청록빛깔, 짙은 남빛, 보랏빛을 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나라, 그 수평선 위를 지나고 있는 배를 보고 다시 꿈을 꾼다. 그 후 노란 모래사막을 지났고 모래 언덕위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나라로 간다. 거기서 처음으로 보는 무지개 나라에 도착한다. 마르탱 물총새가 당딘느 암소를 열기구에 태워 노랑 파랑 빨강 까망 초록 그리고 하양 온갖 꽃으로 울긋불긋한 바둑판을 이루고 있는 무지개 나라 꽃밭을 보여주었다. 모처럼 물총새 덕분에 너무 근사하고 멋진 색깔나들이를 했지만 암소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역시 초록이고 초록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인데 그건 바로 내가 먹고 살고 있는 목장의 초록 풀 때문이라고 물총새에게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물총새 날개에 색깔나라를 여행하면서 보았던 아름다운 색깔들이 다 들어 있어 문득 또 어디론가 여행을 가고 싶을 땐 다시는 건초 풀을 담아 애써 여행 가방을 꾸리지 않고도 물총새에게 와달라는 문자만 날리면 된다는 것도. 여기에 번역한 11명의 프랑스 대시인들의 어린이를 위한 아니 어른들의 어린시절 마이크로-코스모스인 동심으로 각인된 색깔에 관한 동시들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색깔에 대해 깊이 너비로 통찰 할 수 있게 한다. 여기 처음으로 옮겨 본 열 한 명의 프랑스 동시들은 독자의 명도-채색-보색 감각능력에 따라 글로 그린 색채론에 감응하는 반응이 어떠한지를 실험할 수 있도록 소개하는 걸로 그치고 따로 개인적인 해설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색 모음집을 기회로 프랑스 어린이를 위해 주변 환경에서 관찰하면 보고 느끼면서 색깔에 관해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그림과 더불어 글로 시도한 꼬린느 알보Corinne Albaut의 『무지개 동시집Comptines Arc-En-Ciel』(악트 쉬드 주니어Actes Sud Junior출판사 1999)을 가지고 비교 분석하기로 한다  ‘사계절의 색깔, 무지개처럼 명랑하고 목화 솜처럼 가벼운 동시들, 변덕쟁이 변색의 귀재카멜레온의 모자이크 동시들, 아주 미묘한 구석이 많은 수채화이거나 악동의 연필로 크로키한 동시들을 맛보기 위한 것이다.’는 취지의 이 동시집은 도미니크 티보Dominique Thibault의 파스텔 톤 그림으로 색깔의 나라로 초대된 독자와 총천연색 색깔 나들이를 해보자. 프랑스는 국기가 삼색기ldrapeau tricolore로 파랑-하양-빨강인데 이 삼색은 각각 자유-평등-박애라는 국가의 3대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폴란드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삼색-파랑bleu/하양blanc/빨강rouge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관용이라는 톨레랑스tolerance가 프랑스에서 만연하는 데는 십인십색이기에 ‘취향이나 색깔은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Des gouts et des couleurs on ne discute pas’는 속담에 기여한 건 아닐까? 예술의 나라 건축의 나라 프랑스에선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의 옷이나 갖고 노는 장난감이나 사용하는 물건에 원색을 잘 사용하지 않는데다 색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으로 으뜸인 많은 그림책과 색에 관한 동시를 통해 동시에 자연학습체험으로 아이들은 절로 색을 인지하게 된다.  네델란드 작가 리오니의 글/그림책 『파랑이와 노랑이』(물구나무, 2003)에선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관계를 주제로 다루면서 어린아이의 독립된 자아의식을 보여준다. 손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집안에 있던 《라이프》지의 종이를 찢어서 즉흥적으로 구성 시각적으로 명확하면서도 유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종이들은 의인화되어 인간 세계와 비슷한 공간에서 살아 움직인다. 사람을 상징하는 종이는 색다른 종잇조각과의 접촉으로 가족 친구 놀이 하교 등과의 핵심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개성 있는 회화적 표현 방식과 한 장한 장 페이지마다 돌아가며 연결되는 의미는 굉장한 동질성으로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야기의 완벽한 흐름은 새롭게 일어나는 사건을 전체적이며 단계적으로 완전하게 표현한다. 그림의 바탕색은 공간을 설정하여 색종이 조각을 포용하며 색종이 조각과 강한 색의 대비를 이루면서 각기 다른 색종이의 개별성을 잘 부각 시킨다. 텅 빈 하얀 배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도록 만든다. 교실을 상징적으로 규정하는 검은 사각형에는 학생이 교실 책상에 얌전히 앉아 있듯이 여러 색의 종잇조각을 정렬해 놓았다. 무거운 느낌의 검정색은 어린이가 느끼는 지루함과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는 딱딱한 부동자세 등 학교에서 느끼게 되는 억압을 잘 나타낸다. 파랑이가 친구 노랑이를 정신없이 찾는다. 온통 검정색으로 덮인 배경을 통해 당황한 파랑이의 심리를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 다음 장면은 갑자기 노랑이를 발견해서 기쁜 파랑이의 마음을 선명한 빨강색 바탕으로 표현한다. 색들은 무척 단순한 원색이고 간결하지만 색의 상호관계와 형태를 조화롭고 상징적으로 시각적으로 산뜻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어린이는 그림을 보면서 색과 형태를 통하여 사유하는 모험을 하면 시각의 조화를 배우게 된다. 먼저 활을 쏘는 과녁은 바깥 원주로부터 하양-까망-파랑-빨강-노랑으로 오방색인데 이 과녁 색으로 이미 고정되어 사용되는 합성어가 꽤 많이 사용되고 있다 :  하얀 거짓말, 흰구름, 백지, 백발, 백포도주, 백자/블랙 유머, 블랙 커피, 검은 고양이, 흑빵/파랑새, 청룡, 청마, 청기와, 푸른 수염, 청자/홍해, 적포도주, 적혈구, 붉은 군대, 홍삼/황인종, 누런 이빨, 황해, 황열, 노른자위처럼 여러 색은 그 단어를 구체적으로 상징 정의하는데 필수이다. 그리하여 코카 나뭇잎과 콜라 열매라는 이름으로 처음엔 소화제로 판매된 코카콜라가 음료수로 판매를 시도한 것은 사장 로버트 우드러프인데 , , , , 콜라가 세계의 대체음료로 장악하기까지는 초록과 빨강색의 힘이 작용한 셈이다. 콜라 병의 녹색은 ‘조지아 그린’이라 불리기도 하고 ‘코카콜라의 빨강’이라 불리는 색상도 상표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빨강이 왜 눈에 잘 띄는가 하면 색채심리학적으로 스펙트럼의 적색 쪽의 색깔들은 눈의 망막 조금 뒤에서 초점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적색은 보고 있는 동안 눈 쪽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고 청색은 눈의 망막 조금 앞에서 초점이 만들어져 멀어져 가는 듯이 나타난다. 적색은 정력과 흥분의 색이고 전세계 국기의 45%에 적색이 사용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겨울에도 산타가 코크를 마시는 광고 덕분에 청량음료 콜라는 계절을 모르는 갈증처럼 불황을 모르는 전천후 아니 철부지 음료가 되고 만 것은 그만큼 색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온통 색이 지배하고 있다 : ‘반들반들 빛나는 토마토, 강렬한 초록색 상치, 하얗고 둥그런 버섯, 반으로 쪼개어 노른자에 마요네즈를 얹은 삶은 달걀, 검붉은 석류석 색의 무, 금빛 낟알의 옥수수, 양념의 구름과 파슬리의 살랑거림’이란 꼬린느의 「복합 샐러드」처럼 그리고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잿빛 연못 위로 무지개가 미소 짓는다 총천연색으로/하늘이 울고 있다 큰 소리를 내며 무지개가 전보다 심하게 소리 내 웃는다 수채화처럼 명랑하게’라는 「즐거운 무지개」만큼이나 김용택의 섬진강 아이도 오줌으로 「무지개다리」를 놓을 만큼 ‘아주 많이 마려웠던 오줌을 참고 해가 쨍쨍 비칠 때 쪽 싸면 작은 줄기는 밑으로 떨어져 보라색과 파남색을 만들고 굵은 오줌을 네 가지 색을 만들어 무지개 다리를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까지도 색 투성이다. 일찍이 시인 랭보는 심지어 5가지 모음(아-에-이-오-우)을 색으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아’에 해당하는 모음 ‘A’는 검정, ‘에’에 해당하는 모음 ‘E’는 하양, ‘이’에 해당하는 모음 ‘I’는 빨강, ‘우’에 해당하는 모음 ‘U’는 초록, ‘오’에 해당하는 모음 ‘O’는 파랑이라 했다 A는 새벽이 등장하는 어둠의 세계 동쪽하늘을 의미하고 E는 아지랑이, 안개 즉 흰 새벽빛을 치환한 것이다. I는 적색 새벽빛의 주홍빛 피 분노를 상징 U는 녹색의 바다 부지런히 밀려드는 물결의 해면 그리고 O는 오메가, 새벽의 절정을 알리는 나팔의 팡파레인데 나팔은 놋쇠의 황금색과 함께 그 앞면의 형태 O의 끝 오메가로 빛의 색깔과 소리의 조화correspondance를 이룬다. 보들레르가 ‘향기, 색깔, 소리들은 서로 반응한다.’고 말한 것처럼……. 랭보 이후 많은 장래가 촉망된 프랑스 어린이poete en herbe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모음-색깔론을 피력하여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미리암이란 친구는 ‘I’ 는 풀잎의 초록이라 했다. I를 많이 그리면IIIIIIIII 혹은 iiiiiiiii처럼 풀처럼 보인다나 어쩐다나? 늘 푸르게 보이는 하늘만 해도 아침과 저녁 때 비가 올 때 와 눈이 내릴 때 달과 별이 빛나는 밤과 구름 낀 밤하늘 색이 다르다 : ‘아침 해가 떠오를 땐 빨간 하늘/소나기 비가 올 땐 검은 하늘/펄펄 눈 내릴 땐 하얀 하늘/해님 달님 없어질 땐 어두운 하늘/날마다 변해가는 요술 하늘’의 김신철의 「요술 하늘」과 ‘풀벌레 얘기하며 혼자 피는 하얀 들꽃처럼/내 마음 언제나 하얀색 될래요/별님과 얘기하며 몰래 피는 파란 산꽃처럼 내 마음 언제나 파란 색 될래요’의 김완기의「내 마음」처럼. 그리고 색의 착시현상으로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윤석중의 「꽃밭」을 들수 있다. ‘아기가 꽃밭에서/넘어졌습니다/정강이에 정강이에/새빨간 피/아기는 으아 울었습니다/한참 울다 자세 보니/그건 그건 피가 아니고/새빨간 새빨간 꽃잎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속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자연마저도 거의 다 바뀌어 가고 있어 누군가가 염려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이란 단어밖에 남지 않을 거라지만 아직 색은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에서 자연스레 접할 수 있다. 권태응의 「감자꽃」의 ‘자주꽃 핀 건/자주 감자/파 보나 마나/자주 감자//하얀 꽃 핀 건/하얀 감자/파 보나 마나/하얀 감자’는 꼬린느 알보의 「아주 하얀」의 ‘하얗다 눈송이처럼 양처럼 목화처럼/하얗다 무처럼 우유잔처럼 은방울꽃처럼/하얗다 하얀 빵을 뜯어 먹는 네 치아처럼’과 비교해보면 권태응은 눈에 보이는 꽃과 보이지 않는 (불어로는 감자를 ‘땅의 사과pomme de terrre’라 일컬음) 땅 속에 감추고 있는 주먹, 감자 색이 일치함을 보여 주고 꼬린느 알보는 은유를 사용하여 하얀색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기윤의 「눈꽃새」의 ‘하얀 눈 하얀 눈 어째서 하얀가 마음이 맑으니 하얗지. 빨강 꽃 빨강 꽃 어째서 빨간가 마음이 예쁘니 빨갛지. 파랑새 파랑새 어째서 파란가 파란 콩 먹으니 파랗지’, 그리고 어효선의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에요 산도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처럼 우리의 정신에게까지 색의 연금술은 그 영향을 미친다.  결정적으로 박경종의 「초록 바다」의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초록빛 여울물에 두 발을 담그면 물결이 살랑 어루만져요 우리 순이 손처럼 간지럼 줘요’는 색과 혼연일체 가능함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파랑도 아니고 초록도 아닌 투명한 유리잔은 절망한다. 빛이 자기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 우유를 부으면 금새 하얗게 된다. 놀랍다’는 「무색 유리잔」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속담으로 ‘옷은 중을 만들지 않는다L’habit ne fait pas le moine‘속담과는 반대로 유리잔은 내용물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이 가능함도……. 하지만 색이 섞여 또 다른 색이 되는 경우 꼬린느는 ‘노랑이 빨강과 춤을 춘다 서로 몸을 흔들며 움직인다 오렌지색에게로 돌아간다. 거참 이상하다!/파랑이 노랑과 수영한다. 론 강에서 그들은 온통 초록이 된다. 이게 무슨 일이람!/빨강이 파랑을 바라본다. 두 눈을 똑바로 그들은 보라가 된다. 그것 참 지독히 따분한 일이군!’이라며 「뉘앙스」에서 색상이 다른 두 빛깔이 합하여 다른 빛깔로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검정에 하양을 섞으면 회색이 되는데 꼬린느는 검정과 회색」에서 ‘나는 검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회색을 좋아한다. 나는 저녁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밤을 좋아한다.’고 색깔과 현실을 동일시할 줄 안다. 그리고 「생쥐와 코끼리」에선 한 놈은 너무 작고 다른 놈은 너무 크고, 한 놈은 긴 코 다른 놈은 주둥일 가지고 있고, 한 놈은 큰소리로 울부짖고 다른 놈은 작은 소리로 찍찍대고, 생김새도 달라 차이가 많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두 놈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색깔이 회색으로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정과 하양이 함께 있으나 섞이지 않는 걸로 피아노 건반이 있다. 피아노는 하얀 건반 52개, 검은 건반 36개, 전부 88개의 건반을 갖고 있다. ‘도-레-미-파-솔 하얀 건반은 재미있게 웃지만 반음 올림표, 샤프#기호와 반음 내림표, 플랫♭기호인 검은 건반은 상복을 입고 솔-파-미-레-도 슬픔에 잠긴다.’는 검정과 하양, 그리고 「신호등의 빨간 불과 초록 불」에선 색깔의 상징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보여 준다. ‘빨간 꼬맹이다 :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보행자들 기다려요 우리/초록 꼬맹이다 : 이번엔 정반대다. 보행자들, 건너요 우리!’ 그리고 총천연색의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는 동시로 「공작새」와 「극락조」그리고 「불꽃놀이」가 있다. ‘이것 봐, 공작새, 우린 널 기다리고 있어! 네 꼬리의 깃털 속에 초록-파랑 커다란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제발 부탁인데 꼬리를 부채처럼 한번만 펴 우리에게 보여줘.’라는 「공작새」,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새 ‘여기서 아주 먼 나라에 극락조가 살고 있다. 산불처럼 붉은 불 깃털이 파란 하늘에 타오르고 있다.’는 「극락조」또한 ‘색종이 조각 비처럼 조명탄 불꽃이 밤하늘을 번쩍이는 금속조각으로 콕콕 쪼아대면서 우릴 매혹시킨다. 두 눈엔 별들로 가득한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낸다. 꽃불놀이 만세!’라는 「불꽃놀이」, 하지만 이 ‘불꽃놀이’로 태어난 시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쟈크 프레베르Jacques Préert이다. ‘엄마 뱃속 羊水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은 겨울 2월 어느 밤이었다. 여러 달 전 봄이 한창일 때 엄마 아빠 사이 불꽃놀이가 있었는데 그건 생명의 태양이었다. 그리해 그 안 에 들어 간 내 몸 속에 그들은 피를 부어주었다. 그건 지하 술 창고의 것이 아닌 생명의 샘 포도주였다. 그리해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떠나가리라.’는 「축제」에선 불꽃놀이는 밤하늘을 잠깐 동안 찬란하게 아름답게 수놓고 이내 추락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 아닌 생명의 꽃으로 환원된다. ‘밤이면 빛나고 반짝이는 저 빛의 정점은 무엇인가? 빛나는 이 작은 곤충은 바로 반딧불이’라는 「반딧불이」는 제 혼자서 조용히 소리 없이 요란스런 폭죽소리를 내지 않고 불꽃놀이를 한다. 캄캄한 밤에 불 밝힌 창호지문에 그림자로 드러나는 수놓은 여인의 침묵을 밤의 정적에 더해준다.  봄 여름 가고 가을 겨울을 지나노라면 사계절의 다양한 색들로 다채롭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봄의 색깔들은 꽃들과 들판의 색들이다. 여름은 초록-파란색이다 바다 위 파도처럼. 가을의 색깔들은 바람에 바스락대며 떨고 있는 나뭇잎 색들이다. 겨울은 연못 위 얼음처럼 빛나는 하얀색이다’는 「계절의 색깔」처럼 사시사철 변하는 색을 알기 위해선 우린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새벽에 하얀 가벼운 베일이 들판, 시냇물들 길들 위로 펼쳐진다. 시골마을은 잠에서 태어난다. 색깔들을 되돌려 주려고. 나무들과 꽃들은 태양을 기다리고.’라는 「새벽에」처럼. 그런 다음 우리는 ‘난 제비 깃털로 온통 파스텔 톤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싶다. 거기에 바다를 춤추게 해 가볍게 파도가 일렁이도록 파랑 색과 초록색을 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위다 구름들을, 내 그림책들만큼 역시 가볍고 역시 얌전한, 구름들을 살짝 올려놓을 것이다.’는 「수채화」처럼 이젠 색을 가지고 놀면서 이 세상이 색처럼 다양하게 조화롭게 때론 세탁기 통 속, 옷처럼 섞이기도 하고 때론 그냥 옆에 있어줘서 그 색이 돋보이게 해주며 ‘마가레뜨의 정원은 화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색을 짜 놓은 팔레트를 닮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가장하여 마가레뜨는 실제론 자기가 초대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줄 꽃다발을 만들고 있다.’는 「마가레트의 꽃다발」처럼 서로 묶여 사는 법을 배울 일이다.  모리스 카렘(1899-1978) :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후에 그는 시에만 전념했고 널리 아이들에 의해 인용되는 수많은 시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시에 세상을 살면서 믿고 얻는 행복을 표현하고 있다. 앙드레 이베르노(1910-2005) : 이란 동시처럼 단순하고 통찰력 있는 시의 저자인 그녀는 그녀가 사랑했던 작가 죠르즈 이베르노가 죽고 난 후 그를 추억하며 그와의 변함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저녁이면 오는 것Qui mene au soir』와 『죽은 물가에서Au bord des eaux  mortes』. 막스 쟈콥(1876-1994) : 근대주의 시인, 초현실주의 선구자, 아폴리네르Apollinaire와 피카소Picasso와 친구인 그는 뷔르레스크(고상하고 웅장한 주제를 비속화함으로써 희극적 효과를 자아내는 장르)하고 현학적인 그리고 의미로 가득하지만 제멋대로인 작품을 남겼다. 끌로드 루와(1915-1997) : 소설가, 수필가, 비평가, 시인, 대 여행가이면서 현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간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아주 예민, 민감한 끌로드 루와는 그 중에서도 아이들을 위한 맛깔스러운 시들을 썼다. 모리스 카렘((1899-1978) :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후에 그는 시에만 전념했고 널리 아이들에 의해 인용되는 수 많은 시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세상에서 얻은 행복을 시에 표현하고 하고 있다. 폴 엘루아르(1895-1952) : 초현실주의 시인, 참여시인, 자유를 위해 투쟁한 엘루아르는 항상 이길 원했다. 소박하고 맑고 정열적인 그의 시는 사랑을, 찾아온 봄처럼 거듭남을, 욕망을 노래한다. 모리스 퐁뵈르((1906-1981) : 문학 교수인 그는 초현실주의자 측에서 우회한 후에 진짜 사물에 대한 취미를 되찾았다. 토지에 대한 취미랑, 언어의 순수성과 익살 그리고 말놀이에 대한 그의 사랑을 그대로 다 간직한 채…    폴 포르(1872-1960) :  온갖 인간성과 건강한 부드러움에서 영감을 얻는 다작 시인인 그는 1896년에 프랑스 발라드『Ballades Françaises』즉 짧은 시형의 일종라는 첫 시집을 출판했다. 1912년에 시인들의 왕자로 선출. 연극에 심취한 그는 파리에 예술극장le Théâtre d’Art을 창설했는데 이것은 작품극장le Théâtre de l’Oeuvre이 되었다. 뮈리엘 베르스티쉘 : 프랑스 북부 릴르Lille에서 태어난 그녀는 글쓰기와 낭독-공연 아틀리에 진행자, 『황혼과 새벽 사이Entre le crépuscule et l’aube』와 『시의 대기실에 있는 체크무늬 표범나비Damier, dans l’antichambre du poème』는 시집 외에 열 권의 시집을 출판했다. *알렝 보스케(1919-1998) : 그의 시에선 사람과 우주, 물질, 언어, 사람과 그 자신 사이의 새 관계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작가이면서 문학 비평가인 그는 역시 수많은 소설을 출판하였다. 마리 노엘(1883-1967) : 1966년에 파리 시 문학 대상을 받은 그녀는 매일매일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 신선함과 열정이 가득한 시들을 썼다. 가끔은 노래를 닮은 그런 시들 또한. 필립 쑤포(1897-1990) : 여행가, 기자, 라디오 진행자, 비평가인 그는 다다이즘 운동의 선전자 중 하나이고 후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과 더불어 초현실주의를 창설하였다 특히 자동글쓰기(1920년『매혹적인 들Les champs magnetiques』를 통해서. 강금희  1949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 불문과 졸업. 프랑스 프로방스대학 불문학 박사 수료. 저서 『바이블팡세·불붙은 나무떨기』,번역서 『지나가는 슬픔』, 『다음 사랑』, 『영원의 계곡』외 다수. 현재 총신대 및 신학대학원에 출강.   
4    동시 잘 쓰는 법 [ 스크랩] 댓글:  조회:2963  추천:0  2017-05-15
< 시 쓰는 요령 요약 > 리듬이 살아있게 쓴다. 쉽고 간결하며 아름다운 말을 사용한다. 연과 행을 꼭 나누어 써야 한다. 알맞은 비유와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착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쓴다.   동시를 쓰는 방법 ① 글감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 주위의 사물을 관심 있게 바라보며 지나쳐 버리기 쉬운 것에서 글 감을 찾아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마음을 스쳐 가는 짧은 생각,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연 속의 일부분도 좋은 글감이 됩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든 동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둡시다. 착하고 고운 마음에서 동시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됩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력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린이다운 정서 속에서 글감을 찾아냅시다.   ② 거짓없이 솔직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 동시는 맑고 깨끗한 마음의 글입니다. 억지로 기교를 부리거나 가식적으로 표현한다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어린이의 마음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부끄러움이나 잘못도 정직하게 표현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착한 마음으로 동시를 씁니다.   ③ 남의 글을 흉내내지 말아야 합니다.   - 동시는 짧은 글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다른 사람의 것을 암기했다가 모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경우, 습관이 되어서 창작활동에 방해가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내어서 나만의 글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낱말 하나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 하나, 연 하나에 정성을 다해 자신의 표현을 찾아냅니다.   ④ 리듬이 나타나게 씁니다.   - 동시는 노래에서 비롯된 글입니다. 노래처럼 아름다운 리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짧게만 쓰면 된다는 생각에 운율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처럼 율동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듯이 쓰는 동시에서 동시의 참맛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설명하거나 이야기하듯이 쓰여서는 안 되며, 일정한 리듬과 흥겨운 가락이 숨어 있어야 합니다.   ⑤ 연과 행을 바르게 나누어 씁니다.   - 산문과 시의 구별은 연과 행의 구분에 있습니다. 동시는 산문과는 달리 글자와 글자가 효과적으로 이어져야 하며, 행과 연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의성어나 의태어도 사용하고 반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됩니다. 의미가 비슷한 행들이 모여서 각 연을 이루고, 이 연이 모여 한 편의 동시가 완성됩니다. 제멋대로 나눈 행과 연은 호흡이 끊어지게 되므로 잘 짜 맞추어 나누어야 합니다.   ⑥ 알맞은 비유를 사용합니다.   - 짧은 글 속에서 많은 내용을 표현해야 하므로, 다른 것에 견주어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비유를 사용하면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효과적으로 시를 표현하게 합니다. 직유는 두 개의 사물을 견주어서 '-같이, -처럼' 을 사용하는 것이며, 은유는 다른 사물로 그 의미를 대신 나타내어 원래의 의미를 감추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냅니다.   ⑦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 동시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의 감각이 모두 동원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나 사물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더 새롭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감각을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느낌으로 새롭게 표현합니다.     좋은 동시를 쓰는 요령   ① 다른 사람의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 동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윗사람이나 친구들의 좋은 시를 자주 읽고 암기하여 그 의미를 파악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 나름대로 그 시를 소화시켜서 자기의 감정으로 만들어 둡니다.   ② 자주 써서 정리해 둡니다.   - 동시의 글감이 될만한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써 둡니다. 막상 새롭게 쓰려면 안 되는 경우가 있으니, 계절이 지나기 전에 그 계절의 감상을 써두고, 기쁜 일, 슬픈 일 등을 겪고 난 뒤에 곧바로 동시로 표현합니다. 처음부터 잘 쓰려면 무리를 하게 되어, 좋을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주 메모하듯이 시의 구절을 써두면, 꼭 필요할 때 정리하여 좋은 동시를 쓰게 됩니다.   ③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 계절이 변화하면, 온갖 자연의 모습이 바뀌며, 새 학년에 올라가면 친구들의 얼굴도 바뀝니다. 그러한 변화를 자주 찾아내어 자신의 감정으로 만들어 둡니다. 다른 사람이 찾지 못하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동시 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남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하는 자기만의 생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면 좋은 동시가 됩니다.   시의여러가지 표현방법 ① 의성법; 소리를 비슷하게 흉내 내어 표현함으로써 그 소리가 직접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 일으켜 생동감을 더해 주는 방법입니다.   예) 귀뚜라미 귀뚜르르   ② 의태법; 사물의 모습이나 동작을 비슷하게 흉내 내어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예) 반짝반짝 빛나는 별   ③ 의인법;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의인법은 무생물이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표현을 하므로 활유법에 속합니다.   예) 부끄러움을 가득 안은 아카시아 꽃   ④ 생략법; 낱말이나 구절을 빼어 버리거나, 간단하게 줄여서 여운을 남기도록 하는 표현법입니다.   예) 네 손을 잡듯…….   ⑤ 반어법; 문장에 나타난 뜻과 실제의 뜻을 서로 반대되게 나타내는 표현법입니다. 예) 아이, 얄미워라. (여기서 '얄밉다'는 귀엽고 예쁘다는 뜻)   ⑥ 역설법;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나, 실제로는 그 속에 진리가 담기도록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예)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동시’란 어린이를 위한 시로, 동심(어린이의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시이다. [동시의 특징] 1. 짧게 줄여 쓴 글이다. 2. 글쓴이의 상상력과 느낌 등이 담겨 있다. 3. 다양한 표현 방법을 사용한다. 예) 빗대어 표현하기, 말의 순서 바꾸기,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기, 흉내내는 말 사용하기, 반복되는 말 사용하기 등 4. 연과 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시 짓는 방법] 1. 시의 글감을 정한다. -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다. 2.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적는다. - 어떤 내용을 쓸지, 먼저 자유롭게 글로 표현하여 본다. 3.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이 재미있는 말로 표현한다. - 빗대어 표현하기, 말의 순서 바꾸기,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기, 흉내내는 말 사용하기, 반복되는 말 사용하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 본다. 4. 솔직하게 쓴다. - 꾸미지 않고 솔직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살아 있는 시를 쓸 수 있는 방법이다. 5. 시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도 살아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 시에 나오는 물건들을 살아 있다고 표현해서 재미있게 나타낸다. 6. 리듬을 살려 써 본다. - 리듬을 살리기 위해서는 글자 수를 일정하게 되풀이 하거나 소리나 모양을 흉내내는 말을 쓸 수 있다.  7. 행과 연으로 나눈다. - 내용과 리듬에 따라 행과 연을 알맞게 나눈다. 8. 다 쓴 다음에는 다시 한 번 살펴본다. - 시를 다 쓴 다음에는 사실과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은 없는지 등을 살펴서 고치고 다듬는다. 9. 제목을 붙인다. - 제목은 시를 쓰기 전에 정해도 좋고, 시를 다 쓴 다음에 정해도 좋다. 시의 내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을 정해 본다. [동시를 잘 쓰려면] 1. 무엇이든지 관심을 갖고 바라본다. 2. 꾸미지 말고,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다. 3. 사물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며 쓴다. 4.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동시를 쓴다. 5. 사물을 볼 때 새로운 방향에서 보고 느끼도록 한다. 6. 책을 많이 읽고, 동시를 많이 써 본다. 비유법이란 표현하려는 대상이나 내용을 독자가 알기 쉬운 다른 대상이나 내용에 빗대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비유법의 목적] 비유법의 목적은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을 더욱 정확하고, 참신하고, 힘 있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려는 데에 있다. [비유법의 종류] 1. 직유법 표현하려는 대상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다른 대상에 직접 빗대어 나타낼 때, ‘~처럼’, ‘~같이’ 등의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달 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 달 → 달을 쟁반에 직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냄. 2. 은유법 표현하려는 대상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다른 대상을 간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낼 때, ‘~은 ~이다.’의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내 마음은 호수요. → 내 마음을 호수에 간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냄. 3. 의인법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예)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 햇발과 샘물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속삭이고 웃음 짓는다고 표현함. 4. 풍유법 속담이나 격언, 우화는 대부분이 풍유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비유하는 말만 드러내 숨은 뜻을 넌지시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 공든 탑이 무너지랴. →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한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헛되지 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5. 대유법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거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물로 대신하여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 여기에서 ‘빵’은 ‘음식’을 대신하여 나타낸 것임. 6. 의성법과 의태법 의성법이란 실감나는 표현을 위하여 사물이 내는 소리를 그대로 흉내내어 표현하는 방법이고, 의태법이란 사물의 모양이나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어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예) 시냇물은 졸졸졸졸 / 고기들은 왔다갔다 / 버들가지 한들한들  
3    중고생을 위한 시강의 [스크랩] 댓글:  조회:1949  추천:0  2017-05-15
  카페 >머털도사의 즐거운 교실, 시문관 글 쓴이 정진명   중고생을 위한 시강의  제 1부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수업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터넷의 신나는 가상현실 속을 떠도느라 고생하시는 학생 여러분을 생각하면 기성세대로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 운명은 여러분들의 몫이지만, 그 운명을 만든 것은 기성세대의 무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장래는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어깨에는 특별히 한국 시의 장래가 달려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이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국에 살면서 시를 자신의 희망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한 20년 동안 시를 쓰면서 든 생각입니다만, 한국 시의 수준은 다른 인접 갈래와 비교해볼 때 별 볼 일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설과 비교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나라의 소설 수준은 정말 대단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작품들이 아주 많습니다.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 같은 작품이 다 그렇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그렇지를 못해서 딱히 우러러 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냐면 시에 뜻을 가진 여러분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좋은, 위대한 작품이 아직 안 나왔으니, 그것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엘리어트의 황무지 같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시인들이 아니라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시를 자신의 희망으로 택한 여러분은 정말 좋은 기회를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막 시를 시작하려는 여러분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까요?   혹시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분야에 눈독을 들이는 학생들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장래희망을 얼른 시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더 희망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밥벌이가 된다는 보장을 못 하지만, 이상에 한참 불타는 여러분이라면 그 밥벌이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쓴 동기는 간단합니다. 한국 시의 장래는 젊은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는 시 쓰는 법을 배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를 올바르게 읽는 것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는 시는, 평론가들이 이미 정리해놓은 이론을 시에 어거지로 꿰맞추는 작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는 정서를 전하려고 하는 물건인데, 그것을 토막내어 내부구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정서가 전달될 리가 없지요. 발 앞에서 튀는 개구리를 보자는 것인데, 그것의 안이 궁금하다고 갈기갈기 찢어놓은 꼴입니다. 시험지로 묻는 내용은 바로 그 내부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시는 그런 모양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놀라 팔짝 뛰는 개구리의 모습을 보자는 것이지요. 이 자명한 사실을 가르치는 교재도 없고 교사도 없습니다. 입시가 원흉이지요.   시중에 나와있는 창작 안내서를 보면 창작보다는 이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창작에서 이론은 수박 껍데기를 핥는 일에 불과합니다. 수박 맛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거든요. 이론으로 백날 설명한들 단 한 번 쓰도록 유도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시중에는 그런 맛을 느끼게 할 만한 이론서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도서관을 뒤져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직접 쓴 시를 인용하면서 실제로 창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제가 발벗고 나섰습니다.    글쎄요, 여러분들이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얻을지 모르지만,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돈을 많이 벌면 저한테 그 돈 좀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이 원고를 좀 책으로 내게. 하하하.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 시의 유일한 희망인 여러분에게 저의 작은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이 연재가 끝나면 여러분의 작품을 직접 봐드릴 예정입니다. 여러분이 평상시에 연습한 작품을 이 사이트의 회원 문단에 올리시면 제가 할 수 있는 한도까지 손봐드리겠습니다. 단, 학생인 경우에만 말이지요. 이미 대가리가 다 커버린 것들은, 가르쳐봤자 소용없습니다. 잔머리만 굴리거든요. 하하하.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 군소리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학생 여러분을 위한 시 창작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자 하니 알아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무엇이든 태도가 중요합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시를 쓰는 방법도 방향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시 창작 기술을 얘기하기 전에 그 동안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몇 가지를 먼저 얘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시 창작 강의에서 하는 말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책탕물+1(?)     시 창작 강의라? 이건 물론 시 쓰는 법을 강의한다는 얘깁니다. 그렇기는 한데,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강의를 하자고 결심하기까지는 적잖은 고민이 뒤따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 쓰는 법에 관한 책이라면 이미 많이 나왔는데, 다시 한 번 더 반복해서 책탕물(?)에 또 다시 별 볼 일 없는 책 한 권을 보태어 독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책탕물이 뭐냐고요? 흙탕물이라는 말이 있죠? 여기에다가 ‘흙’ 대신 ‘책’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애써 글을 썼는데 쓸모없는 책이 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은 책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합니다. 책이란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귀중한 방법인데, 쓸데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거나 이미 남들이 다 써놓은 내용을 반복하면 그러잖아도 출판물이 홍수를 이루는 요즘 세상에 정말 처치 곤란한 쓰레기 하나를 더 보태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꽤 오래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쓰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나섰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서관에 가서 시 창작에 관한 책들을 주욱 훑어보다가,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뭐냐면, 지금까지 시에 관한 창작이나 이론을 써낸 책들은 모두 어른들을 위한 책이라는 겁니다. 특히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안내서나 개론서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다소 벅찬 내용들입니다. 또 창작을 위한 책이라고 하는 것들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시를 쓰는 데는 크게 필요하지 않은 이론들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그런 책을 봤다가는 시 쓰는 일을 오히려 더 어려워 할 것 같았습니다. 궁색하지만,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미 나온 것들의 내용이나 질서를 무시하고 그 동안 제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방법과 이론을 중심으로 설명하되, 어떻게 하면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시를 쓸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 궁리를 해보겠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이 책의 맨 뒷장을 덮으면서 여러분들이 판단하겠지요.     이왕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지금은 학생들이나 청소년들이 읽을 책이 많아졌습니다. 제 또래의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많이 펴냈고, 또 외국의 청소년 서적을 많이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라던 197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책이 귀해서 동화책을 읽기도 어려웠지만, 그나마 동화책을 마칠 때쯤이면 어른들이 읽는 책으로 단계를 뛰어 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청소년을 위한 도서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노키오나 삼총사들이 나오는 책을 읽다가 갑자기 프로이드 심리학이나 실존철학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간에서 무협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니 중 고등학교 때에 우리 세대가 겪었던 공부의 어려움은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안 가니 포기를 하던가, 아니면 아예 문장 전체를 외워버려서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서 터득이 되는, 그런 미련 맞은 방법으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방법을 ‘독서백편의자현’이라던가요?   그런데 요즘은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런 고생을 한 세대들이 어른이 되면서 다음 세대에는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고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맺은 결실이 아닌가 합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이 많이 나오기 시작해서 1990년대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청소년 도서가 출판되었습니다. 2천 년 대 중반에 접어든 이제는 학생들을 겨냥한 도서가 출판업계의 소득과 생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는 아주 다행한 일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실용서 부분에서는 많이 나왔는데, 정작 중요한 인문학 분야, 즉 철학, 문학, 예술, 사회학, 경제학 같은, 여러분들이 듣기만 해도 머리가 딱딱 아픈 분야에서는 아직도 청소년을 위한 도서가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이름도 없는 제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개론서가 나왔습니다만, 대부분 대학 강단에 선 교수님들이 대학생 언니들을 상대로 쓴 것들이어서 여러분 같은 청소년들이 읽을 책은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책을 따라가면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여러분의 시각으로 충고를 해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고치겠습니다. 지금 이 책은 저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필요한 책을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시대가 변했다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유사 이래 계속 있어온 말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벽에도 ‘요즘 젊은 애들 싸가지 없다’는 말이 나온다니, 이 말이 진짠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 법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있는 것에 익숙한 어른들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모험에 늘 의구심을 보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다른 그 어느 때의 그 말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보 매체의 발달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편지를 쓰고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방법은 책밖에 없었고, 소식을 전하는 방법은 편지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방식을 아날로그라고 한다는 것은 신세대인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책 읽는 것이 새로운 정보를 얻는 유일한 창구였고, 바로 그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우리 시골 마을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에 처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그 후에 텔레비전이 들어왔지요. 그러니까 우리 세대만 해도 젊은 날의 가장 중요한 때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세상을 더듬은 것입니다.   바로 이 전기 때문에 세상은 확 뒤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활자로 찍혀 나오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몇 달이 걸립니다. 가장 빠른 것이 신문인데, 신문은 하루가 걸리죠. 그러나 책은 그렇게 빨리 나올 수가 없습니다. 조판과 제본을 하고 그리고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장사꾼의 손을 거치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이 지은이의 손에서 여러분의 손까지 도착하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보통은 3~6개월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텔레비전에서는 사건이 발생하는 그 즉시 화면을 타고 안방으로 전달됩니다.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지요. 이 속도는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더욱 빨라졌습니다. 더욱이 인터넷이라는 온라인 체계가 일상화되면서 지구 저편의 일까지도 책상 앞에서 금새 알아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인터넷은 한쪽에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체계라는 것이 앞의 텔레비전과는 또 다른 점입니다. 이러니 몇 달이 걸려서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출판 매체가 사양길에 접어들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세상을 확 바꾸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고, 그로 인해 세상을 사는 방법까지도 바꾸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지금 시대가 변했다고 하는 탄식은 옛날에 시대가 변했다고 탄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세대가 아날로그 세대와 가장 다른 점은 사고의 방식일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책으로 사고 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책으로 사고하기보다는 그 즉시 눈앞에 나타나는 화면을 통해 사태를 파악합니다. 즉 세상을 그림으로 읽어 들인다는 말이지요. 아프리카의 굶주림에 관해서 진단하고 해부한 몇 권의 책보다 그곳에서 찍어 보낸 사진 한 장이 여러분의 행동과 사고를 결정합니다. 우리 세대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들을 돕는 일일까 고민하는 동안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후원회를 검색하지요. 또 애인이 필요하면 우리 때는 ‘썬데이서울’이라는 주간지의 뒤쪽을 뒤적여서 거기 나온 주소로 편지를 썼는데, 여러분은 인터넷 채팅 방에서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사진까지 보며 상대를 고르지요. 생각과 표현, 행동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디지털 세대의 이러한 사고방식과 행동은 출판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골치 아픈 책은 팔리지 않습니다. 팔리는 책들은 그림책이거나 만화책, 그것도 아니면 본격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중간중간에 그림이 들어가서 눈맛을 시원하게 자극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문학보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서 스스로 영화나 드라마에 미쳐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는 폐인임을 자처합니다. 2003년도에 라는 미니 시리즈 드라마에 미친 사람이라는 이라는 말이 그 효시이지요.   그러니 이런 열광이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들이 내는 시집을 보지 않고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소설은 머잖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기다립니다. 예술을 생각하는 기준과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 때는 시인을 아주 고상한 예술가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감수성이 조금 있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문학청년의 시절을 겪었습니다. 어쩌다가 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나 청소년 잡지에 자신의 작품이 실리기라도 하면 천하를 다 얻은 듯이 자랑을 하고 자부심을 느꼈지요. 주변의 친구들도 그러는 그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관심 분야가 다르다 보니 이러한 세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탤런트나 영화배우, 또는 슈퍼모델이 되는 것을 꿈꿉니다. 그러니 얼굴을 고치면서까지 그 꿈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델이나 탤런트를 양성하는 기관이 생기고 가수를 배출하는 전문회사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영향은 시나 문학에서 독자의 감소로 나타납니다. 영화판으로 젊은이들의 관심이 몰리자 문학판에는 텅 비어버리는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새 무슨 문학상이나 신인상 같은 데 응모해오는 사람들의 연령을 보면 대부분 30대 후반이라고 합니다. 세월과 세태의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그렇다고 해도 글의 중요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고는 잠시 스쳐가는 영상 몇 컷이 아니라 머릿속에 새겨진 깊은 이해력과 그러한 영상을 제공하는 현실세계 속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조리 있는 사고는 대부분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의하면 시대의 변화 때문에 시의 독자가 감소한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면도 있습니다. 어차피 젊은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문학을 배웁니다. 하기 싫더라도 거쳐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현실을 잠시 거쳐야 할 곳으로 생각하지 내가 앞으로 미래를 걸고 한 번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탓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지금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문학을 너무 엄숙한 분위기로 했습니다. 무슨 상이라도 타면 마치 옛날에 과거 급제한 사람 모양으로 대접을 했고, 또 주변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 엄숙주의가 젊은이들의 발랄한 사고를 용납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재미가 있어야 거기에 오래 매달립니다. 그런데 엄숙한 분위기에서는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재미없는 곳에 누가 오래 머무르겠습니까?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맞이해서 문학판이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은 문인들 스스로 자초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시도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여러분들이 배운 시, 또는 그 시를 배운 시간을 돌이켜보십시오. 과연 재미있었는지요? 아마도 그렇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국어시간의 시 공부는 지루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여러분들을 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지요. 이 지루함의 원인은 앞으로 이 책 곳곳에서 지적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천천히 따라오면서 감상해보기 바랍니다 3) 학생도 변했다     앞서 시대가 변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변한 그 시대에 따라서 학생들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 변화의 조짐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문예반 학생을 지도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맞닥뜨립니다. 제일 골치 아픈 것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학생들을 참가시켜달라는 주문입니다. 문예반 학생들을 지도하면 그런 공문이 전부 넘어와서 학생들을 대회에 내보내라는 은근한 압력이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대상이나 금상이라도 타면 학교에서 전교생이 보는 가운데 시상을 하지요.   그러다 보니 그런 대회에는 일종의 형식이 있습니다. 예컨대 민족의 비극인 6.25을 소재로 한 글짓기 대회가 열리면 할아버지의 얘기를 꺼내서 당시의 아픔을 회상한 다음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힘써야겠다는 식의 수필을 쓰고 시를 짓지요. 그러면 이따금 운이 좋아서 상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행사가 학생들의 문예활동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주최 측에서도 내보내는 학교 측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학생들의 문예의식을 망가뜨리는 일이냐 하면, 그런 대회에 참가하면서 상 타기 위한 거짓말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일종의 거짓이 조금씩 다 들어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또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해서 몇 차례 상을 타면 그 학생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통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부리와 같은 것이어서 나중에는 문학이 일종의 거짓을 통해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점차 문학을 잊고 맙니다. 진실하지 않은 것에 평생을 매달린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금방 지루해지고 또 남들이 봐주는 재미도 없으면 스스로 그 판을 떠납니다.   바로 이런 점을 중고등학교의 문예반에서 차단하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느낌을 글로 적은 것이 문학임을 깨닫는 것이 청소년 때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시를 보는 시각과 시를 평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은 대개 시를 감상하는 법입니다. 창작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1992년에 제천상고라는 학교에서 문예반을 지도할 적에,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습니다.   먼저 본받을 만한 좋은 시집 목록을 30여권 골라주면서 구해 읽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학생들 개개인이 이 많은 시집을 사려면 용돈이 바닥날 것이니, 한 학생 당 한두 권씩 사서 동아리에 기증하고, 그렇게 해서 모은 시집을 서로 돌려서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시를 가져와서 친구들과 돌려 읽으며 잘못 된 곳과 잘된 곳을 검토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시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이론서를 쉬운 것으로 골라서 소개했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학생들은 잘 따라 주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날 학교에 남아서 학생들 스스로 창작한 시를 돌려 읽으며 잘못된 부분과 잘 된 부분을 지적하며 몇 달을 지내니, 학생들이 시를 보는 안목과 시 쓰는 능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마다 한 번씩 시민회관을 빌려서 시화전을 했습니다.   그때 학생들의 관심은 자신의 고민과 생활의 느낌을 시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상을 타겠다던가 하는 다른 욕심은 있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대도시의 한 인문계고등학교로 전근을 왔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부탁으로 이미 있던 문예반을 기꺼이 맡았습니다. 그리고는 회장을 불러서 앞서 제천상고의 학생들에게 주문했던 것을 그대로 다시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1달이 가고 2달이 가도록 어떻게 했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회장을 불러서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내가 요구한 사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학과 공부 때문에 바쁘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학생들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속으로 굉장히 실망을 했지요. 과연 시대가 변했다더니 애들이 어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하고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롭고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처한 환경이 10년 전과는 그 근본부터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대학에서 내신 성적을 반영하여 수시로 신입생을 뽑는데, 그 내신 점수에 영향을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국 고교생들이 참여하는 백일장의 수상 경력이었던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대상을 타면 입학할 때 혜택을 주는 제도가 그 10년 사이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상을 한 번 타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고, 관심이 글쓰는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장에 온통 쏠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학생들에게는 원론에 가까운 나의 요구가 오히려 이상했던 것이지요. 문학의 기초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몇 달 후에 벌어질 백일장에서 상 타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동상이몽이라고 하지요? 한 침대에서 잠자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시 쓰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데, 학생들은 상 타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학생들의 이 같은 그릇된 열망을 채워줄 선생님조차도 일선 학교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국어선생님들도 문학을 다 배워서 알고 있지만, 창작하는 법은 따로 배우지를 않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창작은 순전히 혼자서 궁리해야 할 몫이지요. 그러나 장래에 국어 교사를 하겠다고 해서 창작에 나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창작하는 분들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한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일선에서 애 타는 학생들을 위해서 누군가 그에 필요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몇 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기에 재주 둔한 줄도 모르고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는 나름대로 다 의도가 있습니다.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행사가 학생들에게 안겨주는 좌절감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닙니다. 대상은 한 명한테 돌아가는데 거기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1천명에 육박하거든요. 그러니 그 한 명 때문에 나머지 1천여 명이 재주 없는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일장의 맹점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가 갖는 나쁜 점을 백일장 역시 그대로 안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백일장은 시를 삶의 표현으로 놔두지 않고 이벤트로 만들어서 극소수에게 엄청난 영광을 돌리고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각 대학에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계속 강행하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만 단정 짓기도 어렵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런 백일장에 응모하는 것을 보면 학생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니까요.   그러나 먼 장래를 내다보고서 말하자면 그런 기획성 행사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습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히 우러나서 시가 되어야지 어떤 행사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는 작전으로 시를 쓰는 것은, 오래 우려서 국물을 내려고 하지 않고 조미료를 부어서 맛을 내려는 것과 같습니다. 입맛을 확 당길지는 몰라도 몸에 좋을 리는 없겠지요.      새 학교에 와서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되자, 안타깝지만, 학생들이 시를 잘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을 수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해서 빨리 가려는 학생들에게 달리는 방법을 아예 안 가르쳐주는 것도 역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학생들이 빨리 시 잘 쓰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둘러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쁘더라도 원칙부터 해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서 법칙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시 창작이라고 해서 그 원칙에서 벗어날 리는 없습니다.  4)어른들의 시가 재미없는 사연은?     2004년 10월부터 1년 동안 시집을 1,000여 권 읽었습니다. 손에 닥치는 대로 다 읽은 것입니다. 옛날에 읽었던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 나온 것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읽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은 물론 시립 도서관, 그리고 시집을 갖고 있는 벗들이 소장한 것까지 빌려다가 모조리 읽었습니다.   이런 무모한 짓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고 또 그것은 사사로운 것이어서 굳이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시집 1천 권을 읽고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인들은 거대담론에 집착해있다는 것과, 그 결과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 읽기의 즐거움을 시인들의 시집에서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대담론이란 커다란 주제라는 말입니다. 즉 민족의 장래, 국가의 통일, 이 시대 문명의 폐해나 방향,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 생명과 환경……, 이런 것들 말입니다. 시인들의 시와 시집에서는 이런 커다란 주제들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커다란 주제를 말하면서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뭐, 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니까 시인들은 너무 진지한 주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느라고 시가 원래부터 갖고 있는 놀이와 재미의 속성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시가 진지하고 무겁고 부담 가는 주제를 다루게 되면서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보통 사람들은 저절로 시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인문학의 위기네 시의 몰락이네 하면서, 독자를 탓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수수께끼 하나 내겠습니다. 한 번 맞춰보기 바랍니다.       약 오르면 빨개지는 것은?   답은 뭐지요? 답은, 고추입니다. 썰렁하다구요? 썰렁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자라던 시대에는 이런 수수께끼를 들으며 낄낄거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이와 똑같은 수수께끼는 아니겠지만,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수수께끼나 삼행시 짓기를 하면서 연인들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아주 재미있게 보내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재미는 우리 시대나 여러분의 시대만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이런 말장난은 우리의 생활을 재미있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심하면 실없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리고 삶을 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컨대, 제가 한 학생을 혼내려고 불러서 ‘너 도대체 몇 살이야?’ 그랬더니 ‘게맛살!’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화가 치밀어서 종아리를 때렸지요. 농담도 좋지만, 상황을 구별하지 않으면 큰 오해를 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장난은 함부로 할 게 못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말장난이 꼭 필요한 분야가 바로 문학이고, 그 중에서도 시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내용 때문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시에서 말이 만드는 재미를 또한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먹고사는 문제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먹고사는 일에 허덕이다 보면 어느덧 세월은 가고 살 만해지면 이미 나이가 들어서 옛날 청춘 시절에 꿈꾸었던 것들은 아득해져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모든 문제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러다 보니 시도 이런 문제를 자꾸 다루게 됩니다. 이런 커다란 문제들은 인생사의 중요한 일이기에 시에서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통일이라든지 민족의 장래라든지 문명 비판이라든지 환경 문제라든지, 하는 모든 것들이 시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지금 제가 읽은 1,000권의 시집 대부분이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겁습니다.   그렇지만, 시가 다루어야 할 것이 꼭 그런 것이어야만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는 우리가 우리 생활의 느낌을 표현하는 문학의 갈래입니다. 그러니 거기에는 우리 같은 소심한 사람들의 애환과 고민, 기쁨 같은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런 것을 우리 스스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표현을 받아주고 발표해줄 수 있는 어떤 기관이나 잡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여러분들이 고민하는 바를 시로 쓸 수 있습니까? 일기장에 써놓은 시를 발표할 잡지가 여러분 주변에 있던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시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의 시는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시도, 서점에서 사보는 기성 시인들의 시도 모두 큰 주제에 집착해서 시가 가진 가볍고 재미있는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자꾸 무거운 주제를 다룬 시들만을 좋다고 강요하다보니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이 사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시가 너무 무겁고 큰 것만을 다루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느낌과 감정을 그때그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방법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구요.   기성 시인들이 쓴 시를 읽으면 여러분은 당장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은 아주 작은 것인데, 시인들이 쓴 시는 시란 큰 것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작용하니까요.   따라서 여러분은 우선 그런 생각부터 벗어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아주 작은 감정들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이 좀 더 깊어지고 시 쓰는 실력이 나아지면 그때 가서 좀 더 큰 주제를 노래해도 된다. 지금은 말장난이라도 좋으니 글을 쓰고 말을 꾸미는 재미에 빠져서 시의 맛을 느끼는 일부터 하자. 시는 놀이의 일종이다.   이것이 앞으로 시를 즐기면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이와 같은 생각으로 시를 가볍게 생각하고 매일 부딪치는 감정을 일기 쓰듯 쓰기 바랍니다. 시라는 거 별거 아닙니다. 엄청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맛있는 사탕 같은 것입니다. 쓰디쓴 것을 억지로 삼키려고 할 것 없습니다. 맛있는 것부터 핥아먹기 바랍니다. 지금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고, 마침내는 그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끝까지 따라가면 저절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5) 엉뚱함은 예술의 원천     혹시 평소에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해서 어른들한테 혼난 적은 없나요? 아마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청소년 시절에 그런 적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그런 중에도 유난히 엉뚱한 짓을 많이 해서 혼나는 사람이 있지요?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거기에 해당할 것이고, 말과 행동은 안 해도 주변에서 혼나는 친구들을 보면서 혼내는 어른들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인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 엉뚱함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둘러싼 환경은 이미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안정된 모습이란 가장 필요한 것만을 해서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는 방향으로 오랜 세월 발전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이 빨리 성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미 있는 질서와 환경이 장애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장애를 뚫어야만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새로운 길을 뚫어서 성공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술에서는 그 엉뚱함이 생명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예술을 성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는 경제성을 본능에 가깝게 추구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경제성과는 상관없이 놀고자 하는 욕망도 있습니다. 노는 데는 경제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지요. 바로 놀고자 하는 이 욕망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이 예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성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이 정말로 즐거움을 주는 원천이 되곤 합니다.   그러니 평소에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혼나는 학생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술 쪽으로 방향을 바꾸십시오. 그 엉뚱함을 예술 쪽에서 살리면 칭찬 받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에서는 이 엉뚱함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봄에 일제히 피는 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름답지요? 당연하지요. 봄에 피는 꽃의 특징은 잎새보다 먼저 핀다는 것입니다. 잎이 피기도 전에 꽃이 피고, 꽃이 지면서 잎사귀가 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저는 봄꽃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가지 끝에서 밀려나오는 꽃이 꼭 똥으로 보이는 겁니다. 꽃은 나무가 누는 똥이다. 하하하. 웃기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저녁 밥상에서 아빠한데     아빠, 오늘 꽃피는 것 보니까 꼭 똥 싸는 것 같애.   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 아빠가 예술가가 아니라면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사람이 다른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한테     어째 꽃이 똥으로 보이네요.   라고 한다면,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속으로는,     미친 눔!   할 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게 궁금하거든 옆 친구한테 한 번 그렇게 말해 보세요. 그 반응을 보면 알겠지요.   그런데도 그 발상이 너무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저는 이것을 시로 쓰기로 했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변비   뛰어가 앉으면 나오지 않고 멫 방울 힘겹게 떨구고 나와도 뒤끝이 영 개운치 못한 내가 변비 환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요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창밖의 꽃나무들도 심한 변비를 앓고 있구나. 겨우내 참고 참았던 것을 밀어내느라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버들강아지들 바야흐로 봄볕 아래서 끙끙거리고 있다. 힘겹게 밀려나온 꽃이 지자 파릇한 화장지까지 한 장씩 톡톡 밀어낸다.     여러분이 보기에 어떤가요? 혼날 짓인가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작품을 보고 시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시지요.   이 시를 써 가지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읽어줬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더군요. 그러면서 ‘뭐, 그런 시가 있담?’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재미로 학생들은 시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간 것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제가 시를 잘 썼다고 자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시 중에는 이런 시, 이렇게 쓰는 시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꺼낸 것입니다. 이 시가 잘 쓴 것인지 못 쓴 것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를 것입니다. 사물을 인식하는 시각의 신선함으로 보면 잘 썼다고 할 것이고, 지금 유행하는 시집들의 무거운 분위기로 보면 시가 무슨 장난이냐고 힐책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그런 말에 개의치 않습니다. 재미없는 시는 그 시가 재미없는 것을 떠나서 시를 독자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마침내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재미있는 모습으로라도 독자의 곁에 머무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편 더 보겠습니다. 봄에 벚꽃 피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벚꽃은 어느 날 갑자기 확 피었다가 불과 열흘을 못 버티고 순식간에 져버리지요. 불어오는 봄바람에 하얀 꽃잎이 눈발처럼 날릴 때는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확 피었다가 급히 지는 꽃의 특성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그 꽃을 가장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민족성에 갖다 붙입니다만, 꽃에서 국수주의의 냄새를 읽을 필요는 없겠지요. 어쨌거나 여러분은 이런 벚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아무 생각 없다구요? 하하하.   무슨 폭발이라도 하듯이 피는 벚꽃을 보고,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거, 무슨 뻥튀기 장사가 튀밥 튀겨내는 것 같다.     쌀알을 뻥튀기면 하얀 튀밥이 되어 나오지요. 벚꽃 피는 모양이 그렇게 보인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떨까요? 그래도 이번에는 아까 그 똥 연상보다는 나으니, 아빠한테 혼나는 일은 없겠지요. 그렇지만 엉뚱하다는 핀잔은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엉뚱하기는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아주 소중한 발상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를 썼습니다. 다음이 그겁니다.     벚꽃   4월의 봄바람에 가지를 흔드는 벚나무 뿌리 밑에서는 뻥튀기 장사가 기계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 맹꽁이처럼 똥똥한 몸통을 스스로 풀무질한 장작불 위에서 시커먼 숯검댕이가 되도록 궁굴리며 고압계 바늘이 허용하는 눈금까지 가까스로 참았다가 손가락으로 꼭 막은 우리들 어린 날의 귓바퀴를 뻥! 하고 때리면 하얀 콧김과 함께 헤벌어진 검정 아가리로 와르르르르 쏟아지던 튀밥과 강냉이들, 지금은 벚나무 가지에서 정신없이 터지고 있다. 뒤쫓아온 우리를 동구밖에 세워두고 황톳길로 돌아간 그 뻥튀기 아저씨일까? 우주의 손잡이를 잡고 지구를 빙글빙글 돌려 겨우내 땅속에서 풀무질 하다가 뜸 잘 들었다는 표시로 아지랑이가 오르면 앞이빨처럼 하얀 강냉이들이 폭발음을 내며 검은 가지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계절이 뻥틀 자루를 잡고 시간을 돌리는 벚나무 밑을 지나노라면 이 가지에서 뻥 저 가지에서 뻥 뻥뻐벙뻥 뻥뻥 뻐버버버벙뻥 뻥뻥 강냉이들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귓구멍을 활짝 열어놓는다.     정신없이 터지는 벚꽃들을 보며 강냉이를 먹던 옛날의 추억을 떠올린 것이지요.   자, 이렇게 설명해놓으니까 어떤가요? 엉뚱함도 아주 버릴 것만은 아니죠? 엉뚱함도 쓸모가 있는 겁니다. 사람의 행동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사람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여러분들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공상이나 엉뚱함을 굳이 없애려 하지 말고 이렇게 예술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엉뚱함이 너무 심해서 일상생활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예술의 열정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많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짜라투스투라로 유명한 니체가 그랬고, 함형수도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삶을 마감했고, 김소월도 말년에 앓던 우울증을 아편으로 달래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엉뚱함의 열정이 삶을 망가뜨린 경우에 해당합니다만, 그런 엉뚱함이 이룬 예술의 성취 때문에 그 뒤를 살아가는 우리는 높은 정신의 경지를 감상하고 사는 것이지요. 개인으로서는 불행이지만, 그 뒤의 인류에게는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시인이 된다는 것.     우리가 시인, 시인, 하는데 그 시인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시 쓰는 사람’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시라고는 모르는 어떤 직장인이 술을 마시고 와서 저녁에 시를 썼습니다. 그 시는 일기장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시인인가요? 시인이 아닌가요?   어때요? 갑갑하지요? 앞의 말에 의하면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니 시인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시 한 편 썼다고 시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이를 어쩌지요?   자, 우리가 보통 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어쩌다 시를 한 편 쓴 직장인의 사이에는 이상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이상한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장황하게 서두를 꺼낸 것입니다.     1) 시인이 되는 방법     앞서 말한 대로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은 다 시인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보통 앞서 시 한 편을 쓴 직장인에 대해서는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관습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인이라고 부르는 일군의 사람들은 시 쓰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되는 데는 일정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 절차란 이른바 을 말합니다. 등단이란 무대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다는 말은 시인으로 활동하는 시인들의 무대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시인이라는 무대에서 활동하도록 해주는 어떤 단체나 조직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맞습니다. 우리가 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시인이라는 인정을 누군가한테서 받은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그런 자격을 인정해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일을 할까요?     보통은 문학잡지사에서 그런 일을 합니다. 잡지사에서는 문학작품을 싣는 잡지를 냅니다. 보통은 정기간행물로 내지요. 거기에는 문학 전반을 다루는 잡지도 있고, 시만을 다루는 시 전문지도 있습니다. 이런 잡지들이 출판되면 그런 잡지를 사서 읽는 사람이 생깁니다. 문학에, 또는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들 가운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잡지사에서는 추천해주겠다는 광고를 합니다. 그리고는 작품을 받아서 그 중에서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이 발견되면 그 작품을 잡지에 발표해줍니다. 이런 것을 추천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관문을 통과하여 잡지에 계속 시를 발표하고 그러한 시를 모아서 시집을 내면 그때부터 시인이라는 호칭이 따라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추천을 잡지사에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각 신문사에서도 매년 초에 이런 행사를 합니다. 이름하여 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매년 말에 상금을 걸어놓고서 작품을 모은다고 광고한 다음에 응모작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을 뽑아서 이듬해 첫날 신문에 발표하고는 수상자를 불러서 상금을 주지요. 여기에 당선되는 것을 우리나라 문학지망생들은 가장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좀 우스운 일이지요? 그런데 그 우스운 일이 왜 전통으로 굳었을까요?     잠깐 골프 얘기 좀 하겠습니다. 골프는 유럽에서 발생한 운동인데 미국에서는 메이저 대회가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종목으로 성장했지요. 아마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기 있는 종목인 만큼 그것을 즐기는 사람도 많아서 대중 스포츠로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바라보는 골프는 어떻습니까? 돈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귀족스포츠지요? 왜 이렇게 됐을까요? 그것은 전파과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골프가 이미 대중화되었고, 마음만 먹으면 일반 시민들도 다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얘기는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그 용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따라서 골프를 치고 나오면서 흘린 땀을 씻을 수 있는 샤워 실이나 한 칸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골프가 들어오면서 성격이 약간 변했습니다. 일본은 땅이 좁은 나라입니다. 땅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골프장을 짓는 사람은 거기에 든 본전을 뽑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찾아오는 손님들이 주머니를 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부대시설을 좋게 만들어서 그 사용료를 비싸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프를 치기 위해 골프장에 들어서면 우선 옷을 갈아입는 곳이 있고, 대기실이 있고, 휴게실이 있고, 샤워 실이 있습니다. 매점도 만들어야겠지요. 이런 시설을 아주 으리으리하게 해서는 그만큼 비싼 이용료를 받는 겁니다. 좋은 시설에서 골프를 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골프라는 운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시설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단가가 올라가면 일반 봉급쟁이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차원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골프는 일반 대중 스포츠가 아니라 귀족 스포츠가 되는 겁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하기 어렵겠죠.   문제는 한국의 골프 역시 신분계층을 가르는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점입니다. 웬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계층이 아니고는 골프를 즐기기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미국식 골프 문화가 들어온 것이 아니고 일본식 골프 문화가 들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위공직자들이 골프를 친다는 고발이 뉴스에서 이따금 나오는 것은 골프 문화의 이런 속성 때문입니다.     추천제도라고 하는 관행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유럽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추천제도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문단을 형성하는 어떤 장치가 있겠지만, 그것은 쌀롱이라든지 아카데미라든지 하는 식의 운영방법이 있지, 마치 옛날에 과거제도처럼 군림하는 우리나라 식의 추천제도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들은 시를 써서 시집을 내면 그것이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추천제도가 정착한 것은 일본의 제도를 본뜬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런 제도가 있었고,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면서 그 제도가 그대로 들어와 정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을 뒷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따르는 것은 우리나라에 그런 전통이 수백 년 이어져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과거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제도는 지방에서 실력이 뛰어난 후보자들을 시험으로 뽑아서 중앙으로 올려보내고 중앙에서 두 차례에 걸쳐서 시험을 치른 다음에 장원을 내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도 합니다. 따라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공부를 해서 과거를 치른 다음 거기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는 것만이 선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무언가 뽑히지 않으면 자격을 주지 않는 어떤 관행이 생긴 것이지요. 바로 이런 관행이 잡지사에서 신인을 뽑는 제도로 정착하고, 거기에 신문사까지 가세해서 오늘날의 문단이라는 세력이 형성된 것입니다.   물론 근대문학 초기에 신문사에서 문인들의 작품을 신문에 실어준 것은 당시에는 문인들이 작품을 써도 딱히 발표할 지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을 실어서 신문을 한 장이라도 더 팔아보겠다는 속셈도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뽑히는 자가 있으면 뽑는 자도 있는 법입니다. 신춘문예건 잡지사건 어떤 추천을 통과하면 뽑힌 나와 나를 뽑은 사람의 관계가 저절로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뽑는 사람의 시각에 맞는 작품이 뽑힌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무슨 얘기냐면 누구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만 뽑힌다는 얘깁니다.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과와 배, 바나나를 주고서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사과를 고르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배나 바나나가 잘못 된 것은 아니거든요. 이처럼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저절로 묻히게 됩니다. 묻힌 그것이 아무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까요? 신춘문예 심사에서 초심을 맡은 사람이 버린 것을 본심을 맡은 사람이 주워서 당선시켰다는 얘기가 종종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런 우려는 그냥 우려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추천해주는 잡지사가 잡지 경영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의도를 깔고 추천을 감행한다면 그건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키지요. 그것은 장사꾼들이 하는 흥정과 같습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자격증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추천제도 하에서 이런 일은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추천제라고 하는 것은 옛 시대 과거제도의 잔상이 남아서 전해오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얽매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랑스러울 리 없는 일이지요.     이런 관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그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동인지를 내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돈을 걷어서 시집을 내는데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참여하여 시집 한 권 안에 여러 사람의 시를 싣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동인 활동이라고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자신들의 세계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여러분도 주변에 시 쓰는 친구들이 있으면 한 번 모여서 해보기 바랍니다. 꼭 출판사에 의뢰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 세 명이 모여서 복사기로 복사를 해서 10부만을 해도 좋고, 아니면 부모님들의 지원을 받아서 출판을 해도 좋습니다. 미숙하더라도 어릴 때 그런 일을 해본 것이 나중에 굉장한 추억이 됩니다. 사실 이런 방법으로 시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야 시가 진정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스스로 시집을 내는 것입니다.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오래도록 시를 쓰다가 50편이 되고 100편이 되면 그것을 시집으로 묶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집을 평생에 한 권만 내고도 유명해지는 사람도 있고, 한 권도 내지 못한 채 죽고서 나중에 뒷사람들이 시집을 내줘서 유명해진 경우도 많습니다. 여러분이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는 윤동주 같은 분도 생전에는 시집을 한 권도 못 냈는데, 그 뒤 해방 후에 친지들이 그가 남긴 유고를 모아서 낸 시집으로 유명해진 경우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시를 쓰는 일입니다. 그것을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내가 즐거워서 시를 쓰면 지금 당장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듣지 못해도 나중에 언젠가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시인이 들어있습니다. 그 시인을 불러내어 노래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지금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숨어서 잠자고 있는 시인의 방문을 두드리십시오. 똑똑똑! 2) 시의 관행과 전통을 이해하는 방법 : 남의 시집 읽기     이 정도 하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시인이 되는가 하는 것을 대충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습니다. 추천제도 같은 억지 제도가 해줄 수 없는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시라는 전통과 관습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시는 이미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써서 그것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전통의 한 분야로 굳었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분야라고 하는 것은 그 분야에 오래도록 종사한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다른 분야와는 다른 그 분야의 전통과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시만을 놓고 보면 시라는 전통이 섰으면 시 아닌 것과 시인 것을 구별하는 방법이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문단에서 추천을 해주든 말든,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시의 전통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시의 역사는 아주 오랩니다. 문헌으로 기록된 것을 보더라도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은 ‘꾀꼬리의 노래’라는 것이 있지요. 고구려는 기원전에 선 나라이니 벌써 2000년도 넘은 세월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한자가 들어와서 기록으로 남기는 바람에 이루 헤아릴 길이 없을 만큼 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국어시간에 배운 것들만 해도 민요,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시조, 가사, 한시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시의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시의 전통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선배 시인들이 써놓은 시를 읽으면 됩니다. 남의 시를 읽다 보면 시라는 것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하는 판단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익혀서 거기에 맞춰서 나의 감정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방법을 이렇게 시 읽기가 아닌 설명으로 배우는 중이구요.     아까 앞서서 제가 시집 1000권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1000권이나 되는 시집을 다시 읽고 또 읽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점, 과연 정말 좋은 시가 되려면 어떤 속성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직접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이론으로 시를 배우지만 남의 시를 읽으면서 확인을 하고, 그렇게 해서 터득한 원리로 내가 직접 써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1000권이라는 숫자에 기죽지는 말기 바랍니다.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여러분처럼 이제 막 시 쓰는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마음을 먹은 경우에는 많이 익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 이미 등단의 과정을 마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프로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한 것입니다. 프로는 프로다워야 합니다. 프로답다는 것은 자신이 택한 전문 분야의 일을 전부는 아니라도 큰 줄기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0권에 도전한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앞서 시의 전통을 배우려면 남의 시를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시인들의 시집이 참 재미없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 많은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고, 설령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좋은 작품을 골라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점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1000권을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건 정말 고민될 일입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시집만을 골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좋은 시집을 골라놓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에서 좋은 시집 목록을 골라놓은 분 보셨나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시 몇 편을 뽑아서 소개한 책들은 있겠지요. 궁여지책으로 그런 책들을 사서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 장래에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분들을 위해서 이 자리에 그 목록을 제시할까 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1000권을 읽고 그 가운데서 이런 건 시 쓰는 사람이 꼭 읽어볼 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 시집들입니다.   □진달래꽃□김소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 미래사, 199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3, 미래사, 1991 □님의 침묵□한용운,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 미래사, 1991 □광야□이육사,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8, 미래사, 1991 □접시꽃 당신□도종환, 실천문학의 시집 37, 실천문학사, 1986 □농무□신경림, 창비시선 1, 창작과비평사, 1975 □뿔□신경림, 창비시선 215, 창작과비평사, 2002 □탄광 마을 아이들□임길택, 실천문학의 시집 75, 실천문학사, 1990 □나그네□박목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0, 미래사, 1991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정유화, 시작시인선 24, 천년의시작, 2003 □땅의 연가□문병란, 창비시선 26, 창작과비평사, 1981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임영조, 민음의 시 94, 민음사, 2000 □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창비시선 229, 창비, 2003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복효근, 경계시선 8, 문학과경계사, 2002 □대설주의보□최승호, 오늘의 시인총서 22, 민음사, 1983 □노동의 새벽□박노해, 풀빛판화시선 5, 풀빛, 1984 □정선 아리랑□박세현, 문학과지성시인선 103, 문학과지성사, 1991 □오라, 거짓 사랑아□문정희, 민음의 시 102, 민음사, 2001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박미라, 현대시시인선 16, 현대시, 2004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문정희, 민음의 시 119, 민음사, 2004 □적멸의 불빛□오세영, 문학사상 신작시집, 문학사상사, 2001 □너는 꽃이다□이도윤, 창비시선 113, 창작과비평사, 1993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도종환, 문학동네 시집 2, 문학동네, 1994 □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 문학과지성시인선 80, 문학과지성사, 1989 □만국의 노동자여□백무산, 청사민중시선 33, 청사, 1988 □난초□이병기,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8, 미래사, 1991 □세속도시의 즐거움□최승호, 세계사시인선 4, 세계사, 1990 □머나먼 곳 스와니□김명인, 문학과지성시인선 71, 문학과지성사, 1988 □우리 이웃 사람들□홍신선, 문학과지성시인선 39, 문학과지성사, 1984 □산시□이성선, 시와시학 시인선 4, 시와시학사, 2000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창비시선 86, 창작과비평사, 1990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이면우, 창비시선 211, 창작과비평사, 2001 □제비꽃 여인숙□이정록, 민음의 시 105, 민음사, 2001 □몸에 피는 꽃□이재무, 창비시선 144, 창작과비평사, 1996 □이 짧은 시간 동안□정호승, 창비시선 235, 창비, 2004 □물 건너는 사람□김명인, 세계사시인선 21, 세계사, 1992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박남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9, 미래사, 1991 □별빛 속에서 잠자다□김진경, 창비시선 143, 창작과비평사, 1996 □향수□정지용,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9, 미래사, 1991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창비시선 19, 창작과비평사, 1979 □백년 자작나무 숲에 살자□최창균, 창비시선 236, 창비, 2004 □기억들□송재학, 세계사시인선 107, 세계사, 2001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신용목, 문학과지성시인선 290, 문학과지성사, 2004 □멧새 소리□백석,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0, 미래사, 1991 □오감도□이상,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9, 미래사, 1991 □사랑의 기교□오규원, 오늘의 시인총서 11, 민음사, 1975 □외롭고 높고 쓸쓸한□안도현, 문학동네시집 1, 문학동네, 1994 □길은 광야의 것이다□백무산, 창비시선 82, 창작과비평사, 1999 □가난한 사랑노래□신경림, 실천문학의 시집 50, 실천문학사, 1988 □경주 남산□정일근, 문학동네, 2004 개정판 □절정의 노래□이성선, 창비시선 96, 창작과비평사, 1991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정일근, 시와시학 시인선 15, 시와시학사, 2001 □동두천□김명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9, 문학과지성사, 1979 □거미□박성우, 창비시선 219, 창작과비평사, 2002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안도현, 현대문학북스의 시 1, 현대문학북스, 2001 □오래 말하는 사이□신달자, 민음의 시 122, 민음사, 2004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이정록, 문학과지성시인선 221, 문학과지성사, 1999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유하, 열림원, 1999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뜻하다□주용일, 경계시선 20, 문학과경계사, 2003 □천지현황□김종길,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1, 미래사, 1991 □세상의 밥상에서□김은자, 세계사시인선 69, 세계사, 1999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김선우, 창비시선 194, 창작과비평사, 2000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이윤학, 문학과지성시인선 159, 문학과지성사, 1995 □조국의 별□고은, 창비시선 41, 창작과비평사, 1984 □한 잔의 붉은 거울□김혜순, 문학과지성시인선 288, 문학과지성사, 2004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정영선, 문학동네 시집 42, 문학동네, 2000 □서울의 예수□정호승, 오늘의 시인총서 21, 민음사, 1982 □무화과는 없다□김해자, 실천문학의 시집 135, 실천문학사, 2001 □내 안의 열대우림□정해종, 생각의 시 1, (주)생각의 나무, 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정일근, 문학사상사, 2003 □지상의 편지□조성림, 우리시대의 시인 100인 선집, 문학마을사, 2002 □강릉, 프라하, 함흥□이홍섭, 문학동네 시집 29, 문학동네, 1998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김수우, 시와시학 시인선 19, 시와시학사, 2002 □우포 늪 왁새□배한봉, 시와시학 시인선 17, 시와시학사, 2002 □어두워진다는 것□나희덕, 창비시선 205, 창작과비평사, 2001 □개□최준, 세계사시인선 14, 세계사, 1991 □청산행□이기철, 오늘의 시인총서 20, 민음사, 1982 □세상의 모든 저녁□유하, 민음의 시 56, 민음사, 1993 □사랑의 감옥□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02, 문학과지성사, 1991 □자신 없는 것들은 걸려있다□금기웅, 문학동네 시집 68, 문학동네, 2003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비시선 125, 창작과비평사, 1994 □집은 아직 따스하다□이상국, 창비시선 174, 창작과비평사, 1998 □개같은 날들의 기록□김신용, 세계사시인선 9, 세계사, 1990 □국경의 밤□김동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7, 미래사, 1991 □알 시□정진규, 세계사시인선 77, 세계사, 1997 □젖은 눈□장석남, 솔의 시인 11, 솔출판사, 1998 □이용악 시 전집□윤영천 편, 창작과비평사, 1988 □푸르른 날□서정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3, 미래사, 1991 □무지개가 되기까지는□박정만, 문학사상한국시선 18, 문학사상사, 1987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조용미, 문학과지성시인선 283, 문학과지성사, 2004 □악어를 조심하라고?□황동규, 문학과지성시인선 53, 문학과지성사, 1993 □다보탑을 줍다□유안진, 창비시선 240, 창비, 2004 □우리 낯선 사람들□이하석, 세계사시인선 3, 세계사, 1989 □처용 이후□김춘수, 오늘의 시인총서 19, 민음사, 1982 □비단길□강연호, 세계사시인선 42, 세계사, 1994 □천년의 바람□박재삼, 오늘의 시인총서 7, 민음사, 1975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69, 문학과지성사, 1988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장정일, 민음의 시 16, 민음사, 1988 □산정묘지□조정권, 민음의 시 33, 민음사, 1991 □풀잎□강은교, 오늘의 시인총서 5, 민음사, 1974 □쓰러진 자의 꿈□신경림, 창비시선 115, 창작과비평사, 1993 □맨발□문태준, 창비시선 238, 창비, 2004 □모래인간□최승호, 세계사시인선 101, 세계사, 2000 □우리들의 양식□이성부, 오늘의 시인총서 4, 민음사, 1974 □햄버거에 대한 명상□장정일, 민음의 시 7, 민음사, 1987 □자명한 산책□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281, 문학과지성사, 200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신경림, 창비시선 172, 창작과비평사, 1998 □붉은 눈, 동백□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239, 문학과지성사, 2000 □추억의 푸른 이끼□장병천, 현대시 시인선 14, 현대시, 2004 □지상의 그 집□홍윤숙, 시와시학사, 2004 □나나 이야기□정한용, 민음의 시 92, 민음사, 1999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32, 문학과지성사, 1983 □인간의 시간□백무산, 창비시선 152, 창작과비평사, 1996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김남주, 창비시선 128, 창작과비평사, 1995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장경린, 민음의 시 21, 민음사, 1989 □진흙소를 타고□최승호, 민음의 시 8, 민음사, 1987 □지상의 인간□박남철, 문학과지성시인선 36, 문학과지성사, 1984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이윤학, 문학동네 시집 22, 문학동네, 1997 □여우를 살리기 위해□이학성, 민음의 시 58, 민음사, 1994 □낯선 길에 묻다□성석제, 민음의 시 39, 민음사, 1991 □처용□김춘수, 오늘의 시인총서 2, 민음사, 1974 □김씨의 옆 얼굴□이하석, 문학과지성시인선 35, 문학과지성사, 1984 □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한승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60, 문학과지성사, 1995 □벽을 문으로□임동확, 문학과지성시인선 149, 문학과지성사, 1994 □황금 연못□장옥관, 민음의 시 44, 민음사, 1992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4, 문학과지성사, 1978 □무인도를 위하여□신대철, 문학과지성시인선 7, 문학과지성사, 1994 □예레미야의 노래□박두진, 창비시선 29, 창작과비평사, 1981 □별의 집□백미혜, 민음의 시 112, 민음사, 2002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이성복, 문학과지성시인선 13, 문학과지성사, 1980 □지리산의 봄□고정희, 문학과지성시인선 64, 문학과지성사, 1987 □게 눈 속의 연꽃□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97, 문학과지성사, 1990 □자유가 시인더러□조태일, 창비시선 60, 1994 □겨울날□김광섭, 창비시선 4, 창작과비평사, 1975 □그대의 하늘길□양성우, 창비시선 63, 창작과비평사, 1987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심재휘, 제3의 시 10, 문학세계사, 2002 □내 몸이 유적이다□이순현, 문학동네 시집 62, 문학동네, 2002 □변명은 슬프다□권경인, 창비시선 181, 창작과비평사, 1998 □사무원□김기택, 창비시선 185, 창작과비평사, 1999 □유리의 나날□이기철, 문학과지성 시인선 211, 문학과지성사, 1998 □수런거리는 뒤란□문태준, 창비시선 196, 창작과비평사, 2000 □이팝나무 길을 걷다□박정남, 문학세계현대시선집 180, 문학세계사, 2001 □이형기 시 99선□이형기, 도서출판 선, 2003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허만하, 솔, 2002 □두고 온 시□고은, 창비시선 213, 창작과비평사, 2002 □버려진 사람들□김신용, 시작시인선 16, 천년의시작, 2003 □바늘구멍 속의 폭풍□김기택, 문학과지성 시인선 151, 문학과지성사, 1994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김승희, 민음의 시 99, 민음사, 2000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장석남, 문학과지성 시인선 156, 문학과지성사, 1995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이윤학, 문학과지성 시인선 241, 문학과지성사, 2000 □적멸의 즐거움□김명리, 문학동네 시집 37, 문학동네, 1999 □사물의 운명□하종오, 문학동네 시집 19, 문학동네, 1997 □뒤란이 시끌시끌해서□조달곤, 작가정신, 2004 □국토□조태일, 창비시선 2, 창작과비평사, 1975 □파천무□송수권, 경계시선 1, 문학과경계사, 2001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조정인, 시작시인선 37, 천년의시작, 2004 □염소좌 아래 잠들다□전명숙, 시작시인선 39, 천년의시작, 2004 □상처가 스민다는 것□강미정, 시작시인선 15, 천년의시작, 2003 □몽유 속을 걷다□김신용, 실천문학의 시집 118, 실천문학사, 1998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이준관, 문학과지성시인선 122, 문학과지성사, 1992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송찬호, 민음의 시 22, 민음사, 1989 □10년 동안의 빈 의자□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148, 문학과지성사, 1994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문학과지성시인선 118, 문학과지성사, 1992 □고슴도치의 마을□최승호, 문학과지성시인선 46, 문학과지성사, 1985 □그리운 바다 성산포□이생진, 동천사, 1987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9, 문학과지성사, 1981 □북 치는 앉은뱅이□양성우, 창비시선 23, 창작과비평사, 1980 □사평역에서□곽재구, 창비시선 40, 창작과비평사, 1983 □전야□이성부, 창비시선 30, 창작과비평사, 1981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최승호, 문학 판 시 1, 열림원, 2003 □꽃산 가는 길□김용택, 창비시선 70, 창작과비평사, 1988 □어여쁜 꽃씨 하나□서홍관, 창비시선 80, 창작과비평사, 1989 □밤의 공중전화□채호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01, 문학과지성사, 1997 □대머리와의 사랑□성미정, 세계사시인선 71, 세계사, 1997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임동확, 민음의 시 31, 민음사, 1990 □풍경 뒤의 풍경□최하림, 문학과지성 시인선 254, 문학과지성사, 2001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신현림, 세계사시인선 41, 세계사, 1994 □화개□김지하, 실천문학의 시집 141, 실천문학사, 2002 □섬진강□김용택, 창비시선 46, 창작과비평사, 1985 □반시대적 고찰□박남철, 세계사시인선 89, 세계사, 1999 □푸른 삼각형□강유정, 청하시선 8, 도서출판 청하, 1983 □국어선생은 달팽이□함기석, 세계사시인선 86, 세계사, 1998 □1차원 나라□박순업, 세계사시인선 25, 세계사, 1992 □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세계사시인선 59, 세계사, 1995 □지리산 갈대꽃□오봉옥, 창비시선 69, 창작과비평사, 1988 □자본주의의 약속□함민복, 세계사시인선 31, 세계사, 1993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이수명, 세계사시인선 62, 세계사, 1995     물론 이 중에는 여러분이 소화하기 힘든 시집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 권 읽어보고 어렵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이 중에서 구미에 맞는 것부터 골라 읽으면 됩니다. 시간이 가면서 시를 보는 안목이 발전하고 정신이 성숙하면 저절로 다 이해가 될 만한 시집들입니다. 접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순서로 배열하려고 애썼습니다만, 그게 제대로 됐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다르다면 저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의견을 감안해서 순서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3)일기 쓰기의 중요성      장래에 시인이 될 꿈을 꾸는 학생들을 위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장래에 시인까지 될 필요가 없는 학생들은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되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단순히 남이 써놓은 시를 읽는 독자로만 남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도 좋습니다.   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것 같아도 그렇게 되기까지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사전에 몇 가지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무슨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준비 땅! 하고서 해도 되는 일이라면 일상생활에서 버릇까지 들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시 쓰는 일은 시의 격식과 형식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맞추는 일입니다. 그런 훈련이 되어있을 때 시로 표현할 느낌이 찾아오면 그 순간에 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로 시를 발상하는 순간은 몇 초에 불과하지만, 몇 초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시를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은 그 전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크게 오해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시는 천재성에 의존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굳이 시의 형식을 배우지 않아도 천재 시인은 나타나서 위대한 작품을 쓴다는 것입니다. 시의 천재는 어릴 때부터 재주를 드러내서 굳이 시 쓰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어른이 되기 전에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어린 시절에 시를 몇 편 써보고서 뜻대로 안 되면 ‘아, 나는 재주가 없는가보다!’ 하고는 등을 돌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착각은 없습니다. 시에는 형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그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 형식을 배우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립니다. 물론 그런 형식을 전혀 모르고서도 쓸 수 있는 것이 시이기는 합니다만, 역사 이래 위대한 작품은 그런 형식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서 이루어진 작품은 없습니다.   시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것은, 등산에 비유할 때 9부 능선 언저리쯤입니다. 누구나 노력하고 시간을 들이면 8부 능선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형식을 완전히 배워서 익힌 다음에 그 사람의 감수성이 절묘하게 작용하여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위대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작품을 쓰고 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부분이 작용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위대한 작품만을 위해서 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우리 일상생활의 즐거운 도구입니다. 감상하는 것도 이런 창작의 비밀을 알 때 정말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의 위대성을 알아보는 것 역시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를 쓰기 위해서 평상시에 길들여야 할 버릇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기입니다. 일기를 꾸준히 쓰면서 시의 감성을 닦아야 합니다. 감성이라는 것은 느낌입니다. 이 감수성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줄어듭니다. 그냥 두면 20대 후반에 메말라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감수성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감수성을 갈고 닦아서 나이가 들어도 세상을 그런 감수성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자세를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이 일기 쓰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쓰는 일기와 똑같이 쓰면 그건 부족합니다. 일반인들이 쓰는 일기는 보통 사건을 중심으로 씁니다. 오늘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으며,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시인 지망생의 일기는 달라야 합니다. 일기의 초점을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 즉 감수성에 맞추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끼었는데, 그 모습이 어땠다던가, 그 하얀 안개를 보니 무슨 느낌이 들었다던가 하는 그런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건을 접하더라도 그 사건의 개요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보는 나의 느낌을 적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감성과 느낌을 중심으로 일기를 오랜 세월 쓰면 어떤 사물을 보고 어떤 사건을 접하는 순간 말해야 할 느낌을 금방 잡아내게 됩니다. 시는 사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전하는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일기를 ‘감성일기’라고 합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감성일기를 꼭 써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해서 백 번을 강조해도 좋습니다. 감성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은 30 중반이 못 되어 시를 떠납니다. 감수성이 메말라서 세상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시를 쓴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약간 빗나갑니다만, 말이 나온 김에 소설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역시 소설을 지망하는 학생들도 일기를 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시인 지망생이 쓰는 감성일기와는 약간 다르게 써야 합니다.   소설은 사회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문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는 사람의 의식과 풍속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수성이나 생각도 중요하지만, 소설 지망생은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꼼꼼히 적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이라는 말을 했지요? 무슨 드라마와 관련하여 폐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한 50년 세월이 흐른 뒤에 2002년도의 사건을 소설로 쓴다고 합시다. 그런데 2002년도에는 김두한의 일생을 다룬 라는 드라마가 유행했습니다. 소설에서 2002년도의 그 드라마에 반한 사람을 등장시키는데 여기서 이라는 말을 쓰면 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됩니다. 시대 배경이 2002년인데 그 후에 생긴 말을 쓰면 안 되지요. 또 임진왜란 때 고추장을 담갔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왜냐? 고추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가져온 것이거든요. 그러니 그 후에는 되지만 그 전에는 안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점입니다. 소설은 사회의 변화를 꼭 읽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일기에 꼼꼼하게 적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인터넷이 발달하여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터넷에는 거짓 정보가 하도 많아서 그것을 걸러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료가 가장 정확한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놓으면 세월이 갈수록 자신에게 귀중한 소설의 자료가 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소설 지망생이 해야 할 일은 소설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는 공책을 만드는 일입니다. 소설을 읽으면 그에 대한 정리를 하는 버릇을 길러야 합니다. 즉 제목, 지은이, 출판사, 발행년도, 소설의 시점을 차례대로 적고 줄거리를 요약한 다음, 그에 대한 느낌과 문제점을 정리하는 버릇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설을 읽는 대로 정리를 해두면 나중에 그것이 좋은 자료가 되거니와, 그런 작업을 하면서 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아가게 됩니다. 깊은 이해는 창작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4) 진정으로 살아있는 시는 생활을 노래한 시이다     시인들이 쓴 시는 거대담론에 빠져서 재미가 없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데는 다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은 우리나라의 복잡하고 한 맺힌 역사에서 비롯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군 소위였던 사람이 해방 된 뒤에 장군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4.19로 어지러운 정국을 틈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대통령이 됩니다. 자신의 과거를 덮기 위해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대통령을 하려는 욕심으로 헌법을 고칩니다. 그것이 저 악명 높은 유신헌법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1979년에 자신의 부하가 쏜 권총을 맞고 죽습니다. 20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던 독재자가 죽자 우리나라 정치권은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에 빠졌습니다.   이 때 서울을 지키던 젊은 군인 몇몇이 흑심을 품고 또 한 번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대를 이용하여 서울을 장악했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휴전선을 지키는 군대까지도 몰래 빼내어 동원했습니다. 군대가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로 간 것입니다. 나라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날마다 거리로 나와서 데모를 했고, 많은 시민들이 여기에 동참했습니다. 전국의 각 도시는 날이면 날마다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습니다.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은 마침내 칼을 뽑았습니다. 전국의 도시 하나를 택하여 본때를 보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를 택했습니다.   1980년 5월의 일입니다. 다른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당시 광주는 매일 같이 학생들의 시위로 최루탄이 터졌습니다. 18일 새벽에 공수부대가 도시를 점령했고, 군인들은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학생들을 공수부대들은 몽둥이로 무참히 때렸습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분노하여 군인들에게 항의하자 군인들은 이들을 역시 몽둥이로 다스렸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 군인들의 무지막지한 행동에 항의하기 위해 수만 명의 시민들이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들에게 총을 쏘았고, 그들이 모여들었던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을 변했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5.18광주항쟁의 발단입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광주에서 피를 뒤집어 쓴 그 군인들은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하고, 친구가 친구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며 10년 동안 한국을 주물럭거립니다. 문제는 이 젊은 군인들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던 미국이 끝내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미를 외치지 않던 나라 대한민국이 이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정체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한국의 정치를 다시 보고, 미국을 다시 보고, 그리고 진정 무엇이 조국을 위하는 길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잘못된 일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 시작합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을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믿음이 당시 민주주의를 꿈꾸던 평범한 젊은이들을 투사로 만듭니다. 그리고 군부독재를 타도하여 민주주의를 이루자는 혁명의 길로 나섭니다. 이것이 1980년대 내내 팽배했던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여러분이 시인이었다면 이런 시기에 어떻게 했을까요? 뒷짐 지고서 한가하게 세월을 노래하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을까요?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거든요. 순수하다는 것은 욕심 없이 올바르다는 것이고, 올바른 사람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합니다. 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시인은 순수하기 때문에 옆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가족과 이웃과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결정하는 커다란 일이라면 목숨을 바쳐서 바로잡으려고 하겠지요. 당연한 일 아닌가요?   1980년대 이후의 시는 이런 상황을 빼놓고서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인들은 당시의 독재 정권이 만드는 암울한 세태에 대해 절규를 했고,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시도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의 주제가 통일이라든가 민족, 문명, 환경 같은 거대한 주제를 다루었던 것입니다.   어른들의 시가 재미없어진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10년이 넘게 매일 같이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통일을 해야 하고,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도시 문명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이어져온 것입니다. 좋은 얘기도 한두 번이지 10년이 넘고 20년이 넘도록 들으면 어떻겠어요? 지겹지요?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경향에 반발을 보이는 시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주제들이 틀렸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통일이 되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가장 중요한 시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그러한 주제들이 너무 강해서 상상력이 딱딱해지고 그 바람에 시의 즐거움이 많이 줄었다는 것과 그런 영향으로 인해 시가 일반 독자들로부터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는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현실의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1980년대의 시인들이 그러한 거대담론을 주제로 삼은 것은 그 당시에 그들의 고민이 거기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떨까요? 여러분도 그런 주제에 깊은 고민을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그런 내용을 시로 써야 할 것입니다. 어떤가요? 그런가요? 날마다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나요?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게 여러분 고민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성적을 더 올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할 테고, 아니면 어떻게 하면 예쁜 여학생과 사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멋쟁이 남학생을 사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할 것입니다. 아니면 어떻게 하면 용돈을 더 올려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극히 사소하지만 중요한 고민들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시로 써야 할까요? 답은 자명하지요? 시는 여러분들의 고민을 담아야 합니다. 당연히 공부 때문에 걱정하는 내용이 시에 담겨야 하고, 이성 친구에 대한 관심이 시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나이에 써야 할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평생토록 그런 내용으로만 시를 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관심은 계속 바뀝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도 바뀌겠지요. 대학에 가서 운동권이 된 학생은 조국의 장래를 노래할 것이고, 평범한 주부가 된 사람은 평범한 주부의 일상을 노래하는 시를 쓸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억지로 감정을 만들어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를 쓸 때는 그 당시의 고민을 솔직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고민하는 것을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간이 오고, 그때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주 감동스런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프로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자기 주변의 일과 감정을 시로 쓰면서 시의 재미를 느끼다가 나중에 가서 실력이 쌓이고 재능을 발휘하게 되면 저절로 시인이 되는 겁니다. 진정한 시의 즐거움과 발전은 프로페셔널리즘이 아니라 아마튜어리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시의 그런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나이이고 그런 때라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5) 시평 하는 법     여러분들이 시에 관심을 갖고 살다보면 주변에서 그런 친구들을 만납니다. 시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진도가 빠릅니다. 재미도 있구요. 그래서 혹시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동아리를 만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주에 한 번씩 모여서 자기가 쓴 작품을 보여주고 그들의 견해를 들으면 혼자서 고민하고 쓸 때에는 볼 수 없던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콧대가 높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해주기를 바라지 단점을 지적 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시평을 하다가 크게 상처를 받고 싸워서 그예 시를 그만두고 마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 손핸가요? 그만 두는 사람 손해겠지요? 남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시평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26살이 되던 1985년에 시를 처음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몸담고 있던 이라는 문학 동아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시평 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시평 하는 방법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창문학에서 하던 그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만약에 나중에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되면 그때 가서는 그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지요.     ① 자리를 둥글게 배치한다.   먼저 자리를 둥글게 배치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을 볼 수 있고, 어느 한쪽이 논의를 주도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둥근 배치가 어려우면 네모난 배치를 해서 될수록 가운데를 향해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사회자는 사회 보기 편한 자리에서 합니다.   사회자는 보통 모임의 회장이 합니다. 회장이 없을 때는 연장자나 부회장이 맡게 되지요. 사회자는 특별히 할 것이 없고 회의 진행을 원만하게 하면 됩니다. 대개 논의가 시작되면 두 패로 나뉘어 격론을 벌이기 쉽습니다. 그러면 사회자는 눈치를 봐가면서 그 논쟁이 개인의 감정을 상하는 단계까지 나가지 않도록 적절히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행을 위한 발언 이외에는 될수록 아끼는 것이 좋습니다.     ② 시를 미리 복사해온다.   시는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복사해옵니다. 사회자가 미리 확인을 해서 시를 쓴 사람에게 복사해오라고 하던가 시를 미리 받아서 복사해둡니다.   지금은 복사하기가 편해서 좋지만, 옛날에는 칠판에 쓰고 그것을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복사해서 보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쓰여 있는 시를 맨눈으로 볼 때와 손으로 한 번 옮겨 적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눈으로 읽을 때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손으로 적으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복사 얘기를 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시를 자신이 직접 손으로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집을 읽다가도 유난히 좋다고 느껴지는 시가 있으면 꼭 한 번 공책에 적어두기 바랍니다. 눈으로 대충 읽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 많이 발견됩니다.     ③ 시를 돌려주고서 5분가량 읽는 시간을 준다.   시를 돌리면 그것을 읽느라고 조용해집니다. 그 상태로 5분가량 둡니다. 그러면 시를 받아든 사람은 시를 읽으면서 자신이 말해줄 부분을 표시하고 내용을 정리해둡니다. 그리고 발표할 시간이 되면 발표합니다.     ④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지은이가 한 번 소리 내어 읽는다.   반드시 소리를 내어 읽어야 합니다. 옛날에 시는 노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이 잘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대부분 잊고 삽니다. 시를 소리 내어 읽을 때하고 그냥 눈으로 읽고 말 때하고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느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또 시 낭송의 즐거움을 이런 때가 아니면 누리기 어렵습니다. 보통 때에 우리는 시집을 사서 눈으로 읽지 그것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지은이 자신이 읽는 것은 혹시 글로 적는 과정에서 잘 못 적은 것이 있는가 확인하는 차원입니다.     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낭송한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읽습니다. 아무나 읽고 싶은 사람이 읽도록 하고, 자원자가 없을 경우에는 사회자가 지정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⑥ 자유롭게 시에 대해서 견해를 발표한다.   두 번 낭송이 끝나면 이제 사회자는 시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시의 문제점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순서는 굳이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나 한 사람의 발표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발표하면 됩니다. 종종 서로 발표하려는 수가 있는 그 때는 사회자가 교통정리를 해주면 됩니다. 또 반대로 모두 침묵을 지키는 수가 있는데 그때도 사회자가 눈치를 봐서 시키면 됩니다.   중요한 건 이 부분입니다.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시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습작기의 여러분이 완벽한 작품을 쓸 리 없기 때문이지요. 시의 초보자인 여러분이 쓰는 시에는 아무래도 미숙한 부분이 많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부분은 시의 전문가가 아니라도 금세 눈에 띕니다. 그래서 그런 단점을 지적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적을 당하고 나면 시를 쓴 사람은 큰 충격을 받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신은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경험을 처음 하면 약이 얼마나 오르는지 그날 밤에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한 사람은 그날 당장 시를 때려치우지요. 실제로 그래서 시를 그만 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 손해인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벽한 시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지적하는 단점을 겸허히 받아들여 더 좋은 작품을 쓰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정도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이면 그 사람은 시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미워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고치라고 지적하는 것이 시평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시평을 해주는 사람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를 비평하는 것은 그것의 잘못 된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과 관련하여 상처를 받을 듯한 발언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시에 잘못된 점이 발견되었을 때 그 점을 지적한 뒤에 반드시 자기의 체험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런 문제점을 이렇게 해보니까 시 쓰기에 훨씬 좋더라, 하는 식으로요. 말하자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회자는 논쟁이 격해지면 특히 조심해서 운영해야 합니다. 논쟁이 너무 뜨겁게 진행되면 식혀주어야 하고, 너무 진행이 안 되면 잘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논쟁과정에서 개인이 상처를 입을 듯한 상황이 오면 재빨리 제지를 해서 좋게 풀도록 해야 합니다. 시평이 개인의 인격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좀 더 성숙된 토론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단점을 지적해주는, 그래서 오히려 격려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계속 부각시켜주어야 합니다.     ⑦ 더 이상 새로운 견해가 없으면 마친다.   모임이 진행되다 보면 잠잠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할 이야기가 대부분 나왔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눈치를 봐서 시평을 마칩니다. 이때 사회자가 대충 총정리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작품 발표자입니다. 작품을 낸 사람은 발언권이 없습니다. 시평이 끝날 때까지 일체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글 쓴 사람에게 발언권을 줘놓으면 이상하게도 변명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작품을 쓴 동기가 어떻고, 어떤 구절은 어떤 의미로 썼으며,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뭐, 이런 얘기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그건 변명이 되지요. 작자가 그렇게 얘기를 해놓고 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겠어요. 시평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반박을 하면 시인을 욕하는 것이 되고요. 이래서 작품을 낸 사람에게는 일체 발언권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무를 뽑아서 총무가 이 시평의 내용을 정리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⑧ 뒤풀이를 한다.   시평을 마친 뒤에 반드시 뒤풀이를 합니다. 우리는 신분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주로 막걸리를 마셨습니다만, 중고생인 여러분들은 그러면 안 되겠지요? 빵집에 가서 빵을 사먹든가, 아니면 음료수와 간단한 먹을 것을 사다가 먹는 것도 좋습니다.   왜 이것을 해야 하냐 하면, 시평을 하다 보면 감정이 상합니다. 아무리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더라도 단점을 지적하는 것인데, 서로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요. 그래서 말은 안 해도 속이 편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바로 그런 찜찜한 기분을 없애주는 것이 뒤풀이입니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시평에서 못 다한 이야기도 하고, 시평에서 마음이 상했으면 위로도 해주고, 생활하면서 겪는 고민도 털어놓고 또 고약한 성미를 지닌 선생님들 흉도 보고, 하면서 마음을 푸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 층 더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자, 이상 장황하게 시평하는 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자리를 둥글게 배치한다. ② 시를 미리 복사해온다. ③ 시를 돌려주고서 5분가량 읽는 시간을 준다. ④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지은이가 한 번 소리 내어 읽는다. 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낭송한다. ⑥ 자유롭게 시에 대해서 견해를 발표한다. ⑦ 더 이상 새로운 견해가 없으면 마친다. ⑧ 뒤풀이를 한다.     자, 지금까지 사설이 좀 길었지요? 이제부터 진짜 시 쓰는 법으로 넘어갑시다.   3.시 창작의 원리와 실제     시를 쓰는 방법은 모두 3가지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① 빗대어 쓰기 ② 그리듯이 쓰기 ③ 직접 말하기     애개개! 겨우 세 가지 뿐이예요? 시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방법이 모두 세 가지 뿐이라구요? 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어나지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위의 세 가지 방법만 기억하면 어떤 내용이든지 원하는 것을 모두 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는 뭐라고 설명하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한 20년 넘게 시를 쓰다 보니 이 정도로 나누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실은 이것도 많이 늘려서 얘기한 겁니다. 아예 두 가지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좋아도 실제로는 조금 불편하니 그대로 두겠습니다.   너무 간단하지 않냐구요? 하하하. 별 걱정을 다 하는군요. 바둑 두는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전략과 계획은 무한대라고 하는군요. 바둑알은 색깔이 많아서 작전과 전략이 많은가요? 단 두 가지 색깔인데도 바둑판에 드러나는 정신의 질서와 배열은 무한대로 확대됩니다. 시 역시 그렇습니다. 이 세 가지가 혼자서, 또는 서로 섞이면서 만드는 시의 양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무한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한 가지씩 보면서 연습을 하겠습니다. 1)빗대어 쓰기 : 비유와 상징     빗대어 쓰기란 시를 비유의 방법으로 쓰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는 내 생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상대가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시는 시인이 보고 느낀 것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보고 느낀 것은 그 사람만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특수한 것이죠. 그 특수한 체험을 그대로 쏟아놓으면 혼잣말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혼자 느낀 내용이 어렵거나 복잡할 때 그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미 익숙한 것에 빗대어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자는 사바나 지역에 살기 때문에 온대 기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은 볼 수 없는 짐승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옛날 우리네 할아버지들이 외국에 가서 이것을 보고 왔다면 사자가 뭐냐고 궁금해 하는 이웃들에게 뭐라고 알려주었을까요? 이거 궁금하지 않은가요? 나는 무척 궁금하던데……. 사자를 본 사람은 사자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할 겁니다.   먼저 사자는 맹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짐승에 비유할 겁니다. 조선의 호랑이가 먼저 얘기되겠죠. 그런데 사자와 호랑이는 여러 모로 다릅니다. 그래서 먼저 전체 모습이 비슷하다고 한 다음에 부분부분의 다른 점을 열거할 겁니다. 우선 목둘레에 긴 털이 수북이 난다는 것이 호랑이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머리가 훨씬 더 크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큰 얼굴 때문에 눈이 더 강조되죠. 뭐라고 하겠어요? 왕방울 만하다고 하겠죠. 거기다가 커다란 입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머리통은 몸의 절반쯤이나 되게 크고, 목엔 목도리처럼 털이 달렸고, 입은 귀밑까지 찢어지고, 두 눈은 왕방울만하고…….   이와 같이 새로운 사물에 대해 설명할 때는 그것과 비슷한 것을 통해서 재구성하도록 듣는 사람이 잘 아는 것과 비교합니다. 그래야 빨리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유의 기능입니다. 이를 토대로 비유를 정리해보면 비유는, 이미 있는 것을 토대로 낯선 것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앞서 사자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설명을 듣고서 우리 조상들이 떠올린 사자의 모습을 알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어디에? 탈춤에! 탈춤에 나오는 사자들이 우리 조상들이 말로만 듣고서 머릿속에 그려본 그것입니다. 이제 알겠지요? 탈춤의 눈에 왜 커다란 방울이 달렸는지를요! 사자의 큰 눈을 보고 왕방울 만하다고 누군가 표현했고, 그 말이 비유인 줄을 모르는 순진한 할아버지가 진짜로 커다란 방울을 달아버린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사자는 두 눈에 방울이 달린 괴상망측한 모습이었습니다. 하하하.     이 비유는 같은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갈래 예컨대 소설이나 수필, 희곡보다 시에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쓸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있게 쓰입니다. 시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옛날부터 시인들이 써온 방법입니다. 그래서 시를 배우는 첫 번째 항목에서 이 방법을 다루는 것입니다.   비유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그것입니다. 보통 문학이론서나 시 개설서에서는 비유와 상징을 많이 다른 것으로 다루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시를 오래 쓰면서 보니까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조금 다른데 시를 쓰는 원리와 방식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같은 항목으로 묶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론가와 시를 쓰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론가는 이미 나타나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사람이고, 시인은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지금 시의 이론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시 쓰는 방법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론가들의 생각과는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비유를 살펴본 다음에 상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유는 한자로 라고 쓰는 데 이 나 는 모두 옛날 한문에서 쓰이던 표현법입니다. 비는 좀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이고, 유는 하고픈 말을 직접 하지 않고 슬쩍 돌려 말해서 상대가 말하는 이의 의중을 눈치 챌 수 있도록 하는 표현법입니다. 메타포라는 서양의 이론을 번역하면서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라고 한 것이지요.   비와 유의 뜻을 보면 비유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직접 말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상황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좀 과장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러분의 말로 좀 뻥을 치는 것이지요.   우리 집 아이가 어렸을 때 음악 책의 악보를 보더니 꼭 콩나물 같다고 말하더군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음악 책의 음표가 하고자 하는 말이고, 콩나물이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밤중에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보고서도 역시       아빠, 저거 콩나물 같아.   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가로등의 모습과 콩나물의 모습이 비슷하게 생긴 것이고, 그것을 연결시켜서 말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비유의 시초이고 시의 출발점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풍경을 보거나 사물을 보면 이런 연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비유는 새로 발견한 것을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바꾸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콩나물을 먹었기 때문에 이미 익숙한 것이죠.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 책에서 악보에 그려진 음표를 봤습니다.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서 얘기한 겁니다. 이것이 비유의 의미이고 기능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재주이고 기능입니다. 다만 시에서는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뿐이지요.     자, 그러면 이번에는 비유를 활용해서 시를 쓰기 위한 예행연습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머뭇머뭇 거립니다. 그건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비유보다 더 잘, 그리고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은 그냥 마주보고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랑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편지를 쓸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편지를 쓰는데 달랑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만 달랑 써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여간 날씨는 어떻고 어쩌고 하면서 분위기를 잡은 다음에 사랑 얘기를 꺼내야 하지 않겠어요? 일종의 기교가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때 비유는 사랑을 표현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 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쓰는 것보다   내게 당신은 별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 영혼 속에서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이지요.   라고 쓴다면 그것을 받아본 사람은 그냥 사랑한다고 쓴 것보다는 훨씬 더 감동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감동의 진폭을 크게 만들어주는 손쉬운 방법이 바로 비유입니다.   비유는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 하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랑을 표현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은 ~이다, 라고 해놓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사닥다리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유를 말해봅니다. 한 번 해보세요. 사랑이 왜 사닥다리일까요? 제가 한 번 해볼까요?   사랑은 사닥다리다. 왜냐 하면,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가게 해주니까.   어때요? 그럴듯한가요? 별루라고요? 하하하하. 그러면 여러분들이 좀 더 좋은 해석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합니다.   사랑은 가로등이다. 왜냐 하면 당신에게 가는 길을 환히 밝혀주니까.   어때요? 이번에도 시원찮았나요? 자꾸 그렇게 구박하면 곤란합니다. 자,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아무거나 갖다 붙이고서 그것을 설명해보는 겁니다. 엉뚱하면 엉뚱할수록 좋습니다. 해보셨나요? 그러면 제가 생각나는 대로 한 번 나열할 테니 여러분은 그 뒤에다가 이유를 써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동전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유리창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봄바람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느티나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이쑤시개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빵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폭탄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참새다.  왜냐 하면, ~   자, 해보셨나요? 이 밖에도 여러분이 얼마든지 만들어서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런 재치가 시를 잘 쓰는 바탕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비유를 활용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비유의 성질을 좀 설명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국어시간에 시를 배우면서 이것에 대한 설명을 많이 들었을 거예요. 지루하겠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복습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비유는 내 생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에 따라서 다시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그 두 가지는 다음입니다.     -직유:   -은유:     이 차이는 엄청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말로 하다 보니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말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연결사가 있으면 직유, 없으면 은유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살펴본 대로 라는 생각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 생각을 나타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사랑은 사닥다리 같다.     -사랑은 사닥다리이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와 의 차이지요? 는 생략해도 됩니다. 이 차이를 두고 직유와 은유라고 합니다. 직유는 위에서 보듯이 라는 연결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연결사가 들어가지 않으면 은유라고 하지요. 은 인데 곧장이라는 뜻이고, 은 인데 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직유는 문장의 겉으로 직접 드러난다는 뜻이고, 은유는 그런 연결사가 문장 뒤로 숨어서 안 보인다는 얘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직유 : ~처럼, ~같이, ~인 양, ~답게, ~하듯     -은유 :     이것이 교과서나 이론서에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 쪽에서 보면 이런 것은 굳이 구별하자고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결국 같은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을 붙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시 쓰는 사람에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번에는 앞서 제시한 비유를 시의 모양으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요? 그러면 아래를 봅시다. 앞서       사랑은 사닥다리다. 왜냐 하면,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가게 해주니까.   라는 놀이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놓으면 발상은 될지언정 시가 되지는 않습니다. 시가 되려면 이 생각을 좀 더 다듬어야 합니다. 다듬는다는 것은 이 엉뚱한 연결을 그럴 듯하게 생각하게끔 살을 붙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살을 붙여야 할까요? 한 번 살을 붙여보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늘 높은 곳에 계십니다.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은 사닥다리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으로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당신이 나를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내가 만든 사랑으로 당신에게 날마다 다가갈 것입니다. 내게 사랑은 사닥다리입니다. 당신에게 다가가는 사닥다리.   자, 이렇게 써놓으면 어떤가요? 잘 쓴 것까지는 못 되어도 그럭저럭 시라고 할 만큼은 되지 않았나요? 시가 아니라구요? 떼끼! 하하하.   웃지만 말고 발상법을 배우기 바랍니다. 이렇게 비유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알맞은 상황을 만들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시의 기초입니다. 알맞은 상황이라는 건 비유된 두 가지 사이의 닮은 점을 계속 찾아내는 겁니다. 그러면서 찾아낸 그것을 연관 지어 설명하면 묘한 긴장을 이루면서 시가 됩니다. 이건 시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시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해보시기 바랍니다. 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라고 방금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방법을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지요.   앞서 제가 제시한 사랑에 대한 비유 가지고 한 번씩 시를 만들어보기 바랍니다. 사랑은 동전이라는 것 갖고 한 번 더 해볼까요?   사랑은 동전입니다. 내가 앞면이면 당신은 뒷면 그래서 완벽한 사랑을 만듭니다. 내가 향하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이 향하고 당신이 향하지 못하는 곳으로 내가 향하여 당신과 내가 동그란 한 세상을 만듭니다. 둥글게 만든 그 세상으로 우리 사랑의 길을 갑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빛나는 우리 사랑은 동전입니다.     시는 이런 식으로 쓰는 것입니다. 전혀 어렵지 않지요? 어려운가요? 몇 번 연습하면 아주 쉽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시인이 한 명씩 들어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해서 작품 한 편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할미꽃   할미꽃을 보면 우리 할머니 같다.   할머니를 보면 할미꽃이 생각난다.   내 친구 할미꽃은 장미보다 예쁘다.   할미꽃 내 친구 할미꽃이 좋다.   우리 할머니 같으니까…….   난, 할머니가 좋다.     할미꽃의 모습에서 자신을 친근히 감싸주는 할머니를 연상하고 이렇게 쓴 것이겠지요. 할미꽃을 할머니에 빗대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때요? 잘 썼나요? 못 쓴 것은 아니지만, 썩 잘 쓴 것 같지 않다구요? 제 눈에는 이것이 아주 잘 쓴 것으로 보입니다. 내막을 알면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학생은 한글을 잘 모르는 중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초등학교 때 미처 한글을 떼지 못한 채 중학교로 올라온 것이지요. 특히 받침을 제대로 적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 머지않아 다 깨우치겠지요. 그럼 어떻게 시를 썼느냐구요? 시화전을 할 테니까 시를 써보라고 하고 난 뒤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이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에게는 시를 말로 쓰고 옆 학생에게 받아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을 옆 학생에게 했고, 옆 학생이 받아 적어서 가져온 것입니다.   어때요? 그래도 못 쓴 시로 보이나요? 아주 잘 썼지요? 저는 이 학생에게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시화전을 무사히 마쳤고, 아주 즐거운 시화전이 되었습니다. 이 학생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굳이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시는 특별한 사람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을 일상 생활 속에서 즐기는 것이 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를 더 감상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공부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한 동안 고민했습니다. 비유와 관련하여 그 원리를 설명하는 일인데, 주로 이론가들이 즐겨 다루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것까지 말하면 너무 어려워질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길 듯하여 일단을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비유는 두 가지를 전제로 합니다. 내가 하려는 말이 있고, 그것을 표현해주는 대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라고 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을 꾸며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듣게 해주는 것은 동전입니다. 이것을 일러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해야만 나중에 시가 어떻게 쓰이기 시작했는가 하는 원리를 설명할 때 아주 편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원관념이고, 동전이 보조관념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론서나 시 안내서를 읽으면서 늘 못 마땅하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뭐든지 서양에서 들어온 이론이라고 해서 전부 이상한 말로 번역을 하는 겁니다. 대부분 일본에서 쓰던 번역어를 그대로 베껴다 씁니다. 철학이니, 문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대부분 다 알아듣는 것이지만, 택배니, 구좌니, 하는 말들은 아직도 생소합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쓴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영어권에서 쓰는 것을 자기들 실정에 맞게 번역해서 쓴 것을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가져다 쓴 결과입니다. 학문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자들이 쓴 논문을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초 용어의 낯섦 때문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원관념과 보조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말들입니다. 좀 더 쉽고 친근하게 번역하면 어디가 덧나는가요? 예를 들어 원관념은 원래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란 뜻이고, 보조관념은 그것을 쉽게 전달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과 라고 번역하면 안 되나요? 이란 말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를, 어른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라고 쓰면 우스워 보이죠. 참 이상한 관행이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지금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 할까 보통 고민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쓴 시 이론서를 보면 전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고 나올 텐데, 나만 원생각, 도우미라고 쓰면 여러분들이 고생할 거란 말입니다. 이를 어쩌지요?   해서, 일단 여러분을 덜 고생시키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책에서 쓰는 용어를 쓰는 것으로 하고 중간중간에 여러분이 어렵지 않게 제가 만든 용어를 쓰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겠습니다. 됐지요? 자,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있고, 생각들이 있습니다. 나무, 책상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있는가 하면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사랑, 믿음, 꾸지람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름 붙은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철수라는 학생이 있으면 그 김철수라는 이름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노릇을 합니다.   꼭 사람의 이름만이 그런 건 아닙니다. 장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미는 다른 꽃으로부터 그 꽃을 구별시켜주는 일을 합니다. 장미란, 해바라기나 깨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름은 그 이름이 담는 내용을 다른 이름으로부터 구별해줍니다. 세상의 만사 만물을 구별 짓기 위해서 사람이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엔 다른 점만 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통점도 많습니다.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이 구별하도록 이름을 지은 사람들의 생각을 반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세상에 전혀 관련이 없는 사물들 사이에서 같은 점을 찾아내는 방법이 비유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세상을 모두 같은 것으로 보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라는 시를 소개했을 겁니다. 꽃과 똥을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꽃과 똥이 같을 리 없지요.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구별을 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죠. 그러나 그렇게 다른 것에서 공통점을 보는 것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 공통점이 남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질 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감동을 합니다. 그 감동의 원인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꽃을 똥과 같다고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 공통점을 찾아내잖습니까?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관련이 있고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시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한 형제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한 바탕 위에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한 송이 꽃이라는 말입니다. 이쯤 되면 이제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거지요? 시의 철학. 우리는 지금 너무 진도를 많이 나갔네요. 시를 많이 쓰다 보면 시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 만큼 넓은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라는 시를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변비   뛰어가 앉으면 나오지 않고 멫 방울 힘겹게 떨구고 나와도 뒤끝이 영 개운치 못한 내가 변비 환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요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창밖의 꽃나무들도 심한 변비를 앓고 있구나. 겨우내 참고 참았던 것을 밀어내느라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버들강아지들 바야흐로 봄볕 아래서 끙끙거리고 있다. 힘겹게 밀려나온 꽃이 지자 파릇한 화장지까지 한 장씩 톡톡 밀어낸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제가 이 시를 인용한다고 해서 이 시가 잘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잘 썼다던가 못 썼다던가 하는 평가는 어떤 관점과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방법만을 보기 바랍니다.   꽃과 똥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원관념 : 꽃 보조관념 : 똥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꽃이 피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똥이 나오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보고 똥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지요. 원생각은 꽃이고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해주는 도우미는 똥인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른 것에 견주어서 표현하는 것이 시의 아주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잊지 말고서 이제부터는 작품을 감상해보겠습니다. 먼저 직유부터 볼까요?   봄이 되면                김준옥(3-1)   방긋방긋 들녘 길가에 피어나는 진달래는 상진이의 얼굴을 닮았고 막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성식이의 흰머리를 닮았네.   들녘에서 농부들이 한해 농사가 잘 되기 기원하는 마음은 마치 노총각이 올해는 장가를 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같고   밤하늘에 초롱초롱 떠있는 별들은 개나리를 꼭 닮았고 사람이 아기들을 낳듯 식물들은 싹을 틔운다.     한 행마다 비유가 나오지요? 같은 매개어로 다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원래생각과 그것을 전하기 위해 도우미로 나선 것들을 분류해보겠습니다.   원관념 상진이 얼굴 성식이 머리 농사꾼 마음 별 싹 보조관념 진달래 아지랭이 노총각 마음 개나리 아기   이렇게 되겠지요? 상진이가 누구인지 성식이가 누구인지 굳이 알지 않아도 이 시를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이름까지 써서 아주 특수한 사람을 끌어들인 것 같지만, 잘 살피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보편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비유를 거꾸로 유추하면 상진이는 얼굴이 곧잘 벌게지는 사람이고, 성식이는 머리에 새치가 많이 있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나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다 아는 것들입니다.   이 시에서 생각할 것은 이 시가 어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시골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농사지을 사람이 부족하고, 쓸 만한 처녀들은 힘든 농사꾼에게 시집을 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농촌에 사는 총각들은 장가도 못 갑니다. 이 학생이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에는 그런 정경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농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솔직함보다 더 큰 힘과 감동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에서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고 솔직하게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답습니까? 이렇게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이 쉽고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 작품은 특별한 기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학생이 무슨 시의 대가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학생인데, 이렇게 빼어난 시를 쓴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정직하게 썼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시의 본성이 숨어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주변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끌어다가 서로 연결시켜 본 것이 이 시의 원리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연결만 시켜 놓아도 이렇듯 감동이 옵니다. 아주 쉬운 방법이면서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적극 활용하기 바랍니다.     학생의 이름 뒤에 이라고 나오지요? 제가 한 동안 근무한 학교입니다. 그런데 전화로 내북중학교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꼭 다음과 같이 되묻곤 합니다.       내복이요?   그러면 저는 웃으면서 다시 교정해줍니다. 내복이 아니라 내북이라고요. 그래도 잘 못 알아  들어서 몇 번은 다시 얘기하죠. 한자로는 이라고 씁니다. 내복은 이죠. 속옷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내북은 낫습니다. 충북 단양에는 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는 학생에게       너 어디 사니?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가리요.     내북이라고 하면 어딜 가서든 이름 때문에 꼭 한 번씩 웃습니다. 내복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전교생수는 32명(2004년 현재)이고 한 학급에 열 명 안팎입니다. 그래도 정말 내복처럼 따뜻한 학교입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국어시간에 학생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갑니다. 뒷산을 한 바퀴 돌고 오면 딱 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시간에 한 마디 하지요.       얘들아! 시 쓰자.   그러면 아이들은 괴성을 지릅니다. 그리곤 곧 잔잔해집니다. 지난 시간에 산에 가서 봄꽃을 본 풍경이 눈에 선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느낌이 선명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10분이면 시 한 편을 씁니다. 그리고는 다시 떠들지요. 그래서 이렇게 쓴 작품으로 해마다 5월이 되면 시화전을 합니다. 자기가 쓴 시로 자기가 도화지에다가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하는 것입니다. 시는 미리 써놓았으니 작품을 만들기만 하겠지요?   이 책에서 소개되는 시들은 모두 그런 시화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입니다. 따라서 소속을 표시하지 않은 학생들은 모두 내북중학교 학생으로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의 작품일 경우에는 소속을 밝히겠습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닮았네 닮았어             김준석(2-1)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는 제성이의 싹스를 닮았고 산에서 깝치는 토끼는 희성이를 닮았고 외양간에서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염소는 연호를 닮았네.   들판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는 영어선생님의 흰머리를 닮았고. 마당에서 뼝알거리는 병아리는 병덕이를 닮았고. 부엌에서 냄새나는 누룽지는 제성이를 닮았네.   비광에서 우산 들은 바보는 남주의 모습을 닮았고. 드라마에서 멋있는 원빈은 윤표를 닮았고. 김칫독에서 각이 진 깍두기는 봉진이를 닮았네.   “짱”에서 나오는 “현상태”는 영근이의 맞짱 실력을 닮았고. 학교에서 회장인 방제연은 국어선생님의 카리스마를 닮았고. 교실에서 주접떠는 정근이는 이성진을 닮았네.   학원에서 공부하는 현자는 조선시대 망나니를 닮았고. 학교에서 눈이 찢어진 순실이는 엽기토끼를 닮았고. 학교에서 잠자는 현진이는 호빵맨을 닮았네.   투성이지요? 잘 보십시오. 어떻게 시를 썼는가를. 주변의 인물들을 모두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빗대어 나타내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 학생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는가 하는 것이 눈에 잡힐 듯이 드러나지요? 여기에 나오는 이름의 주인공들이 어떤 사람들인가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한 번 비춰봄으로써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표현해보는 것입니다. 각 구절마다 얼마나 정겹고 새롭습니까?   병덕이가 뼝알거린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인데, 병덕이라는 이름 때문에 뼝덕 뼝덕 하고 불렀겠지요. 그래서 종알거린다는 말을 변형시켜 뼝알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없는 말을 함부로 만들면 안 됩니다만, 여기서는 아주 정겹게 잘 쓰였지요. 방제연은 학생회 회장을 한 녀석인데, 늘상 머리에다 뭘 바르고서 폼 잡고 다녔습니다. 빳빳하게 선 머리 때문에 카리스마라고 별명이 붙었고, 방 카리스마가 줄어서 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표현입니다.   엽기토끼, 망나니, 호빵맨은 별로 좋지 않은 내용으로 이루어졌지요? 이걸로 보아 여학생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표현을 선택했겠지요. 남녀 합반이거든요. 얼마나 귀여운 발상입니까? 여기서 원관념이니 보조관념이니 하는 말을 떠들 필요는 없겠지요? 한 눈에 들어오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다음에는 나열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관찰을 담은 시로 넘어가겠습니다.   진달래 사스              박은범(2-1)   산에 사스가 유행한다. 진달래만 걸리는 사스   우리는 산에 문병을 갔다. 생각했던 것 보다 심한 사스 유행   모두들 사스가 무서워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어쩔 수  없이 나온 진달래꽃   사스 걸리기 전에 광놈 민호와 철한테 죽는다. 불쌍한 진달래꽃들.     산에 갔다가 진달래가 피어있는 모습을 보았겠지요? 붉게 핀 진달래에서 무엇을 연상했나요? 뜨거움을 연상했지요. 뜨거움에서 다시 자신이 감기 걸렸던 경험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리고 좀 더 뻥을 치느라고 최근에 중국에서 유행한 유행성 괴질인 사스라고 한 겁니다. 감기에 걸리면 얼굴이 열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에서 진달래가 핀 것을 그것과 연관 지은 것입니다. 시의 발상 과정이 이해가 되나요? 지금 이렇게 조리 있게 설명하지만, 이 발상은 정말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친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 즉시 받아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달래 핀 것을 감기 걸린 것으로 하고 나니, 산에 가는 것은 저절로 문병이 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연상 작용이 다른 연상으로 금방 넘어간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자기 체험을 적었습니다. 민호와 철이라는 친구가 진달래를 꺾었겠지요. 감기 걸린 데다가 그나마 꺾여 버렸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은 그래서 나온 결론입니다.   이란 말이 나오지요? 아마도 이것은 만든 말인 것 같은데, 은 미칠광(狂)자겠지요. 미친놈이란 뜻인데, 친구한테 미친놈이라고 하면 평상시야 그렇게 하겠지만, 그래도 시를 쓴다고 하는 마당에 그냥 미친놈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민망하고 불편하니까 슬쩍 바꿔 표현한 것이겠지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냥 애교로 봐줍시다.   자, 광놈이라는 표현을 보면 민호와 철이가 진달래를 어떻게 꺾었을까요? 곱게 꺾지는 않았겠지요? 아마 장난삼아 난폭하게 꺾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의 남학생들은 대개 그렇잖아요?   우리 학교의 봄                 이순실(3-1)   봄이 되니 왕눈을 가진 홍석영 선생님처럼 큰 눈을 가진 개구리가 울어대고   봄이 되니 손 매운 과학 선생님처럼 매운 고추들이 밭에 심어지고   봄이 되니 우리학교 공주님 조경애 선생님처럼 꽃들이 예쁜 옷을 입고   봄이 되니 우리교실을 청소하시는 체육 교생 선생님처럼 우리들의 마음마저 깨끗해지고   봄이 되니 이 모든 것들을 미술 선생님께서 봄이라는 하얀 도화지에 그려 넣으신다.     재미있지요? 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학교의 선생님들에 비유해서 시를 썼습니다. 이 역시 자기 주변에서 소재를 찾아서 썼다는 점에서 크게 칭찬 받을 일입니다. 위의 시에 선생님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역시 어떤 이름이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학교에든 그와 비슷한 분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특수한 사실이 흔한 사실을 가리키는 기능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시에 나왔으니 재미 삼아 한 번 알아보고 갈까요?    시의 표현대로 홍석영 선생님은 눈이 큼지막합니다. 눈 크고 얼굴은 갸름하고 키는 작달막하고 살빛은 하얗고…….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아주 예쁜 선생님입니다. 게다가 처녀 선생님이고, 집은 서울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아주 좋아한다는 겁니다. 사회 과목인데 늘 아이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시골의 아이들에게 인기 있지 않겠어요? 이 시에 등장한 뒤 1년쯤 지나서 결혼을 했고, 다시 1년 뒤에 아들을 낳았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에서 눈 큰 개구리를 연상하고 다시 눈이 큰 선생님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과학 선생님은 몸집이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리고 한시도 자리에 앉았지를 못하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닙니다. 수업시간에도 애들을 데리고 들로 나가서 나물을 캐곤 합니다. 산과 들을 얼마나 뒤지고 돌아다녔으면 학교 근처에서 새끼손가락만한 산삼을 다 캤겠어요? 또 학교 옆 공터를 삽으로 뒤집어서 밭을 만들었습니다. 상추도 심고, 고추도 심고, 하지요. 그런 선생님의 동작에서 봄을 연상한 것입니다. 손이 맵다는 것을 고추와 연결시켰는데, 고추가 맵기 때문이겠지요? 선생님은 몸집이 좋아서 손도 큽니다. 좀 뻥을 튀기면 솥뚜껑 만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잘 활용하여 아이들을 통제합니다. 그 큰 손으로 떠드는 놈의 등을 쾅 내려치면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지요. 안 맞아본 학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매운 손맛에서 고추를 연상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덩치 큰 사람이 마음은 비단결 같은 법이어서 이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리고 좋답니다.   조경애 선생님은 메일 아이디가 입니다.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이지요.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 선생님인지 금방 연상할 수 있지요? 나이는 마흔 안팎인데, 옛날에는 꽤나 공주병이 심했겠다 싶답니다. 발랄하고 자존심 강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나이 마흔 줄에도 곳곳에서 고운 자태와 애교 넘치는 마음씨가 엿보이는 분이랍니다.   고동춘이라는 교생 선생님이 한 달 동안 다녀갔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학교가 작아서 아이들 수가 적다 보니 선생님은 아이들하고 매일 축구하고 과자 사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 말로 인기 짱이었죠. 그리고 교생 때에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이들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시절이지요. 그 열정과 사랑을 아이들은 느낍니다. 이 시에서처럼 아이들 교실 청소까지도 같이 하는 분입니다. 지금은 발령을 받아서 아마 어디서 훌륭한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주변에 있는 선생님들을 봄을 표현하는 데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친근하게 살아났습니까? 마지막 연에 이것을 미술로 그리는 동작으로 통합까지 했으니, 시로서는 완벽에 가깝게 마감 처리된 것이지요. 앞에서 비슷한 구조로 나열한 다음, 그것을 다시 통합시키는 발상입니다.   발가락            유제성(3-1)   다섯 명의 가족이 살고 있는 양말 속   발가락 중에 제일 큰 아빠 발가락 두 번째로 큰 엄마 발가락   그리고 아빠를 닮은 세 번째 발가락 또 네 번째 발가락은 엄마를 닮았네.   그럼 다섯 번째 발가락은 누굴 닮았을까?   그건 바로 아빠 발가락과 엄마 발가락을 모두 닮은 잘 생긴 막둥이 발가락이다.     가지런히 모여 있는 발가락의 모양을 보고 가족을 연상했지요? 그리곤 각각의 발가락을 가족구성원들에게 갖다 적용시켰습니다. 제일 큰 건 아빠, 그 다음 큰 건 엄마, 그리고 주욱 나가야겠지만, 이미 예측되는 것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마지막 새끼발가락으로 건너뛰었습니다. 전개와 생략이 잘 조화된 작품이지요.   대부분 학생들은 자신이 시를 써놓고서 그게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 판단을 못합니다. 이 학생도 상을 받을 때까지 자신의 이 시가 좋은 작품인지 모르고 있다가 시상식을 할 때 이름을 부르니까 놀라서 뛰어나간 경우입니다.   분필가족              정철(3-1)   분필가족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우리가족의 가장은 아빠다. 아빠의 몸은 하얀 피부 엄마는 노랗게 뜬 피부 나는 뻘건 피부 동생은 파란 피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아빠가 직장을 나가신다. 아빠가 다니는 직장 이름은 칠판 그런데 너무 시끄럽다. 그러다가 우리엄마가 나가신다. 우리엄마가 키 작은 여자선생님한테 잡히셔서 높이 들린다. 얼마 후 내가 그 선생님한테 잡혀서 높이 들린다. 아이들은 모두 벌을 받고 조용하다.     가족과 분필을 대비시켰습니다. 분필은 칠판 밑에 모여 있죠. 종이컵에 담겨있거나 바닥 홈에 나란히 누워있죠. 옹기종기 모인 그 모양에서 가족을 연상한 것입니다. 한 가지 색깔만이었다면 이런 상상은 어려웠겠죠? 그런데 분필의 색깔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서 하얀 색 분필을 가장 많이 쓰지요. 하얀 색이 아빠가 된 사연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필이 움직이는 공간을 가족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만들어놓고서 그 상황을 서로 이은 것입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칠판에 글씨를 쓰는 동안 이 학생은 이런 엉뚱한 상상에 빠져서 혼자서 빙긋이 웃었겠지요. 그런데 그런 엉뚱함이 그냥 낭비가 아니라 이렇게 시를 만나서 좋은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엉뚱한 생각이 시에서는 가장 중요한 글감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이런 시들은 발상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에서는 발상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정겹습니까? 자기 주변에서 소재를 찾아 쓴 것도 칭찬 받을 일입니다.   나무는 청개구리              양영주(3-1)   나무는 나무는 청개구리 우리학교 운동장의 나무도 청개구리 산에 있는 나무와 모든 나무도 청개구리   더운 여름에는 벗고 있어야 할 옷을 가지각색으로 입고 있어서 나무는 청개구리   추운 겨울에는 입고 있어야 할 옷을 뼈만 앙상하게 벗고 있으니까 나무는 청개구리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행동하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자연의 하나이지요.     엉뚱한 생각이지요? 생각이 엉뚱할수록 그것을 연결시키는 논리가 많이 드러납니다. 이 시에서도 그렇습니다. 청개구리는 부모님의 말을 안 듣다가 나중에 후회하지요. 개구리 아들이 하도 거꾸로 행동해서 개구리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죽어서 자신이 물가에 묻힐까봐 걱정하면서 죽은 뒤 물가에 묻어달라고 하지요. 그러면 매번 거꾸로 행동하는 아들은 당연히 양지바른 언덕에 묻지 않겠어요? 아들의 그런 뒤잡이 심성을 미리 예측하고 남긴 유언이지요. 그런데 매번 아버지의 말과 반대로 행하던 아들이 이번에는 마지막 소원이라도 들어드리겠다고 진짜로 냇가에 묻었습니다. 비가 오면 어떻겠어요? 빗물에 쓸려가겠지요? 그래서 걱정이 돼서 개굴개굴 우는 거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시에 적용시켰습니다.   나무는 추운 겨울에 옷을 벗습니다. 더운 여름에 옷을 입지요. 잎새가 나무에게 옷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학생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거꾸로 된 겁니다. 이 거꾸로 된 것에서 개구리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고, 행동을 거꾸로 하는 청개구리의 특성과 나무의 행동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비유의 방법에 실려서 시를 만든 경우입니다.   봄의 무도회              김이슬(3-1)   봄이 오면 산과 들에 무도회가 열려요.   여기 저기 노랑 옷, 분홍 옷 … 초록 옷. 알록달록 옷을 입고 기지개를 피며 얼굴을 내밀어요.   현진이네 뜰에서도 미란이네 마당에서도 정훈이의 마음에서도   봄이 오면 모두 색동옷을 입고 나와 온 세상이 무도회장이 돼요.     이슬, 이름이 참 예쁜 학생이지요? 실제로도 예쁩니다. 예쁜 애들은 예쁜 짓을 하느라고 운동을 잘 못하는데, 이 학생은 오래 달리기를 하면 꼭 전교 1등입니다.   간단한 원리가 눈에 보이나요? 봄이 오는 것을 무도회의 광경과 연관 지었습니다. 무도회는 춤추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복장을 하기 마련입니다. 나무에게도 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래서 예쁜 차림으로 나서는 무도회의 상황에다가 연결시킨 것입니다.   1연에서 봄을 무도회라고 전제해놓고, 2연에서 그 이유를 말한 다음에, 3연에서 장소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그래서 무도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요. 특히 3연에서 장소를 말할 때 1행과 2행에서는 실제 장소인 과 을 말하다가 3행에서는 실제의 장소가 아닌 사람의 마음속을 말하는 것은 아주 기발한 방법입니다. 사물에서 관념으로 생각을 확산시키는 방법이지요.   물론 이 학생은 이 이론을 알고 쓰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씁니다. 이것은 시가 요구하는 어떤 아름다움의 질서가 사람의 마음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런 질서를 알든 모르든 세상을 정직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려고 하고 시를 쓰면 그것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의 형제             김경수(1-1)   비는 여러 형제가 있다. 제일 큰 장마비 둘째 소나기 막내 이슬비   장마비는 말썽쟁이 아주 많은 비를 내여 많은 사람들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비   소나기는 착한 둘째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 가끔씩 내려주는 착한 비   이슬비는 소심한 비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 아주 조금만 내려주는 소심한 비   가끔씩 비가 와서 우리 마음이 우울할 때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과 이야기를 나누어요.     비의 다양한 모습을 형제에 빗대어 표현해본 경우입니다. 먼저 형제의 관계임을 설명한 뒤 각 비의 모습을 다시 사람에 빗대어 구체화시켰고, 다시 이것을 끝에서 종합해서 정리했습니다. 아주 논리 정연한 구조와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표현을 통해서 각 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비가 사람에게 미치는 관계와 영향을 평소에 체험하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시죠.   발상을 보면, 시를 쓰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비 온 날 창문에 흘러내리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는데, 거기서 흘러내리는 비를 보다가 빗방울을 연상했고, 빗방울에서 다시 빗방울의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 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같은 빗방울인데도 사람들의 반응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같은 형제이면서도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는 점과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비유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발상의 과정이 이렇게 해서 정리됩니다. 결코 시를 쓰는 발상이 어려운 일이 아니죠.   빨래                       김선영(1-1)   빨랫줄에 빨래가 걸려있습니다. 남자 빤스 여자 빤스   아우 민망해 남자 빤스가 말합니다.   맞아 여자 빤스가 말합니다. 맞아 사람들이 한 번씩 힐끔힐끔 보고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 무슨 물건이라도 된다고   아우 기분 나뻐. 그래도 우리는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썬탠을 합니다.     의인화시켰지요? 의인화란 사물을 사람에 비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 비유한다고 해서 비유가 아닌 건 아닙니다.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원리입니다.   팬티는 가장 은밀한 곳을 감추는 옷이기 때문에 빨래가 널려있어도 사람들이 뚫어지게 쳐다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힐끔거리며 볼 것은 다 보고 가지요. 하하. 마음에 은근히 걸리면서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심리를 아주 잘 잡나냈습니다.   는 가 표준어겠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누구나 사용하는 빤스라는 말이 더 시를 살립니다. 시에서는 맞춤법이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분위기를 전하는 데는 오히려 사투리나 맞춤법에 안 맞는 말들이 더 잘 어울릴 때가 많습니다. 도 마찬가지죠. 틀린 표기이지만,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차장        김경애(마산 무학여고 3)   흰 선으로 둘러싸인 바둑판에 고수인 아저씨의 흰 알 초보인 아빠의 검은 알이 놓여있다. 한참 헤맨 끝에 찾았는데 서툰 아빠… 흰 선 안에 바둑알을 놓는 게 여간 쉽지 않다. 아저씨는… “뭐가 어렵냐”며 성화다. 날마다 늘어나는 한숨과 조여드는 삶의 공간에서 아빠는 흰 선과의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   아빤 오늘도 바둑알을 놓을 바둑판을 찾고 있다.                2003년 경남대 제32회 전국고교생 한마백일장 운문 차상1)     주차장에서 차를 대는 상황을 바둑판의 상황에 빗대어 표현했습니다. 가지런하게 그어진 하얀 주차 선은 바둑판의 선으로 보인 것이고, 그 위에 놓여있는 차들은 바둑알로 보인 것입니다. 바둑알은 흰 색과 검정 색 단 둘 뿐이죠. 그런데 차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색깔이 있는데, 주차 선을 바둑판으로 인식한 순간 나머지 색깔은 보이지 않는 것이죠. 이렇게 무리한 적용이 갑갑하고 어색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 시에서 필요합니다. 이미지를 단순화시키기 위한 것이죠. 초보 운전인지 주차에 서툰 자신의 아빠와, 숙련된 솜씨로 주차를 하는 아저씨를 비교하고서 바둑의 초보와 고수를 거기다 갖다 맞추었습니다. 전체의 시상이 바둑판의 상황과 주차장의 상황을 겹쳐놓는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비유를 활용한 시 쓰기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전에 무슨 운동을 하다가 목을 삐끗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형광등을 켜고 사진을 달아놓으니까 신기하게도 나의 몸속에 들어있는 등뼈의 배열이 나타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내 등뼈의 속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등뼈의 배열은, 내가 아기들에게 보여주던 공룡의 그림책에 나오는 공룡들의 뼈와 똑같더군요. 그때 ‘아하, 내가 짐승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그리고서는 문득 느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습니다. 길어도 이런 시 쓰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공룡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 듯한 헝겊으로 몸뚱이를 덮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에 비친 나는 쥐라기나 백악기 어느 한 지층 속에 납작하게 박혀있어야 할 한 마리 공룡. 목에서부터 등마루를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의 화려한 뼈들이 흑백의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억 년 내력의 탐욕과 난폭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뼈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이제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데도 마음속에서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물욕과 옷 밖으로 송곳처럼 치밀던 공격성, 그리고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내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말미암는지 여태까지 좀처럼 알 수 없던 것들이 공룡의 뼈들 사이로 분명히 드러난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며 등줄기 따라 톱날처럼 뻗어간 우람한 뼈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 끝의 뿔은 엉덩이 밑의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감추었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진화하지 못한 채 한 마리 공룡이 내 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발상법을 알겠지요? 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인간의 탐욕성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성이 들끓는데,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룡을 떠올린 것이고, 그 계기를 엑스레이 사진을 본 것에서 얻은 것입니다.   먼저 공룡의 뼈와 나의 뼈가 같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공룡의 난폭한 성질과 탐욕성을 나의 그런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시상을 전개시킨 순서 역시 뼈의 모양에서 심리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의 동일성에서 성격의 문제까지도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운명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별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속에서 이렇듯 아름답게 깜빡일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달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의 중심까지 이렇듯 인력으로 끌어당길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해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의 모든 곳을 이렇듯 환하게 비추어줄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바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속에 이렇듯 힘차게 나부낄 리 없지요.     이번에는 사랑에 관한 시를 골라 봤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맺어진 것이 아니고 무언가 뗄 수 없는 어떤 질긴 인연이 운명처럼 엮여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절실할수록 사랑은 무언가 그럴 듯한 운명에 의해 연결되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날에도 삼신할미나 월하노인 같은 어떤 신이 맺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시 중에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길인 운명이 작용한다고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감정이 아주 애절하게 잘 전달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그런 이상에 가까운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 잘 따라온 학생은 이 시의 비밀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변치 않는 어떤 존재들에 잇따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죠. 따라서 원생각은 사랑하는 당신이지만 당신이라는 그 존재를 알리기 위해 도우미로 나선 말들은 별, 달, 해, 바람입니다.   비슷한 구절과 구조가 반복되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함을 느낍니다. 음악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죠. 시에서는 그것을 운율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가락인 셈입니다. 이 시에서도 별, 달, 해, 바람으로 바뀌어 나타나지만, 각 연의 구조는 똑같습니다. 읽으면서 속도가 붙기 마련이죠. 그 속도에 빨려들어 갑니다. 사람에게 시를 익숙하게 하는 방법 중의 한 가지입니다.   은행   전생의 쥐라기 하늘에서 띄운 내 영혼의 꽃가루가 무수한 기억의 퇴적층을 뚫고 활짝 편 당신의 가지에 내립니다.   받아주셔요. 내 고단한 사랑을. 당신이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당신이 아무리 먼 세월 뒤에 있어도 내 영혼은 꽃가루가 되어 당신의 사랑을 찾아갑니다.   받아주셔요. 전생의 쥐라기 하늘에서 당신께 띄운 내 영혼의 꽃가루를.     우리가 흔히 보는 은행나무는 참 독특한 식물입니다. 우선 오래 산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500년, 1000년도 삽니다. 청주에는 고려 때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장수하는 이면에는 병충해에 강하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행나무가 이런 장수를 누리는 데는 지구가 주는 시련을 몇 억 년째 이겼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는 공룡이 살던 시절에도 있던 나무랍니다. 놀랍지요? 공룡은 쥐라기, 백악기 때 최전성기를 누리지요. 그리고는 어느 순간 전멸하고 맙니다. 은행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암수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물론 암컷 나무에서만 열매가 열립니다. 그러면 주변에 수컷 나무가 있어야 수정이 된다는 얘기겠죠. 어떻게 수정을 할까요? 암컷 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할 때 수컷 나무에서는 꽃가루를 뿌리는 겁니다. 그러면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암컷 나무에게 날아가서 수정되는 것이죠.   나무에게 암수가 있다는 사실과 마치 동물처럼 꽃가루를 날려서 수정을 한다는 사실. 무언가 신경을 탁 건드리는 바가 없나요? 나는 그런 은행나무에서 오래 된 사랑 법을 느꼈습니다. 천 년을 살고 수억 년 전부터 목숨을 버티어 오늘까지 살아온 은행나무의 특성을 이용해서 사랑을 노래한다면 무언가 절실한 느낌을 주겠지요. 그래서 쓴 것입니다.   1) 이재무 유성호 편, 전국고교백일장수상작품집, 천년의시작, 2003 이하 청소년백일장 작품들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자, 한 편을 더 살펴보고서 다음 단계인 상징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수렵도          박윤배   달리는 흰 말의 안장 위에서 상반신을 뒤로 젖힌 채 작은 체구의 사내가 달리고 있다. 우둔한 20대의 화살촉을 뽑아 아직도 푸르게 뛰는 수렵도의 사내처럼 펄떡펄떡 살아있기로 한다. 청년기가 지나더라도 포획된 용기와 젊음을 남기기 위하여 은밀히 은밀히 그려놓는…… 부장품으로 남길 시를 쓰는…… 내 스무 살의 수렵도.   나는 내 시대의 젊음을 위하여 수렵도를 그린다. 탄피 흩어진 이 터의 숲을 무너뜨리고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한숨뿐인 포획물을 끌고 돌아올지라도 저녁노을 뭉개는 어둠 자락을 빈 도시락 가득 채워올지라도 달아나는 노루와 사슴을 겨누고 있다. 불멸을 끌고 산 속을 달려 황산벌의 갈대숲 새떼들 날리며 달려 백두까지 오르고 있다. 그렇게 젊은 날을 살아있던 날의 함성을 부장품으로 남긴 한 사내의 수렵도.     이 작품은 1985년 어느 대학의 신문에 실린 작품입니다. 대학문학상의 수상 작품이죠. 상을 받았으니까 잘 썼다는 뜻이겠죠? 여러분이 보기에 어떤가요? 발상법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죠?   시인은 수렵도를 보고 있습니다. 수렵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것이 유명합니다. 벽화 중에서도 무용총이라고 하는 벽화의 수렵도가 제일 유명하죠. 여러분도 많이 보았을 겁니다. 무용총은 벽화에 춤추는 인물들을 그려 넣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순 우리말 쓰기를 좋아하는 북한에서는 춤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수렵도는 어때요? 수렵도 역시 북한에서는 사냥그림이라고 합니다. 수렵도라는 말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사냥그림이라는 말이 어쩐지 좀 늘어진 듯한 느낌을 주지요? 말의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뭐, 어느 수렵도를 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요는 시인은 수렵도를 보고 있고, 그 수렵도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엉뚱한 생각이란 무엇인가요? 수렵도는 힘찹니다. 당연하지요. 짐승을 사냥하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화면에는 사슴과 범이 있습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쉽지 않은 사냥이죠. 그런 힘찬 기상이 넘치는 그림을 보면서 무얼 떠올릴까요? 절망이나 우울함 같은 것은 아니겠지요? 당연히 힘찬 기상과 관련이 있는 내용일 겁니다.   시를 읽어보면 시인이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젊은 날입니다. 수렵도는 힘찬데, 바로 저것처럼 자신의 젊은 날도 힘차게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요? 이 시인이 젊은 날에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시를 쓰는 일입니다. 좋은 시를 쓰는 일이지요. 이것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발상은 이렇게 된 겁니다. 먼저 수렵도를 봅니다. 그림이 힘차지요. 거기서 무언가 강한 힘을 느낀 겁니다. 그 힘은 곧 젊음을 떠올립니다. 젊음이 이루는 것은 희망이지요. 그 희망 중에서 자신이 하고픈 것, 즉 시를 쓰는 일입니다. 그래서 먼저 수렵도의 사내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 그 사내처럼 나도 힘찬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고 뒤이어 시를 쓰고 싶다는 욕심을 말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시에서 정작 하고픈 말은 앞부분의 1연에 다 나옵니다. 뒷부분의 2연은 이러한 희망을 한 번 더 반복해서 보여준 것이 되겠습니다. 과 까지 나아간 것은 용맹한 기상으로는 다 좋은데 너무 많이 나가서 좀 허풍스럽다는 생각도 조금은 듭니다. 그러나 전체의 흐름을 보면 허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겠죠. 그런 기상은 젊음의 특권이랄 수도 있으니까요.   자,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맞춰보기 바랍니다. 이 시에는 문장 구조상 앞 뒤 문맥이 잘 맞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이 둘 있습니다. 어디 어디가 그런지 한 번 맞춰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완벽한 시를 보고 많이 배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완벽하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시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좀 허술하고 잘 정리가 안 된 작품들을 보는 것이 시의 원리를 배우는 데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약간 문제가 있는 작품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발상만으로도 대단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러분이 확인할 수 있잖습니까? 다만 여기서는 그런데도 간간이 보인 허점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작품의 발상이 좋아도 때로 허물이 있는 법이고, 그것을 찾을 줄 알아야 시 쓰는 법을 빨리, 그리고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자, 찾아봤나요? 잘 안 보인다구요? 당연하지요. 잘 안 보여야 정상입니다. 이 시 속의 문제점을 찾아낼 정도이면 여러분은 정말 눈이 매우 날카로운 사람입니다. 평론가로 나서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연 1~3행에 문제가 있습니다. 뭐라구요? 다시 봐도 안 보인다구요. 하하하. 당연하지요. 이렇게 가르쳐 주어도 잘 안 보이는 것이 시 속의 단점입니다. 자, 보겠습니다.   달리는 흰 말의 안장 위에서 상반신을 뒤로 젖힌 채 작은 체구의 사내가 달리고 있다.     어때요? 밑줄을 쳐놔도 모르겠어요? 달리는 동작이 겹쳤지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내가 달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사내는 가만히 있고 말이 달리는 것입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또 달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분명히 틀렸지요? 지은이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부분입니다.   또 한 군에 있는데 찾아보세요. 못 찾겠다구요? 4행에 있습니다. 그래도 못 찾겠죠?       우둔한 20대의 화살촉을 뽑아     그래도 못 찾겠어요? 그럼 가르쳐 주죠. 이 문젭니다. 그래도 몰라요? 무얼 뽑았나요? 화살이 아니라 화살촉을 뽑았지요? 화살촉을 뽑으면 어떡하나요? 화살을 뽑아 쏘아야지 화살촉을 뽑아 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웃기죠? 전문가 시인들도 이따금 이런 실수를 한답니다. 그런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배우면서 날카로운 눈매를 길러 가는 겁니다. 그런 눈매를 갖추면서 자신의 작품에 생기는 실수를 줄여 가는 것이죠.   이 시인도 나중에 이런 실수를 깨닫고 시집에 실을 때는 고쳤습니다. 하하하.   시를 읽다가 참 잘 쓴 시를 만나면 오래도록 그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하다가 나중에는 질투가 납니다. 왜 나는 저런 시를 쓸 생각을 못했을까? 수렵도를 본 것은 이 시인만이 아니잖습니까? 나 자신도 맨날 수렵도를 보면서 왜 그것을 이 시인처럼 시로 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탄식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질투가 나서 그보다 더 좋은 시를 한 번 써보겠다고 벼르는 것이죠. 그래서 1985년에 이 시를 접하고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한 번 수렵도를 소재로 이보다 더 좋은 멋진 작품을 쓰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발상을 먼저 빼앗겼기 때문이지요. 시에서는 발상이 제일 중요합니다. 동일한 소재라고 하더라도 어떤 발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수준이 천차만별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발상으로 쓴 시를 보면 질투가 나는 겁니다. 언젠가는 쓰고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985년에 이 작품을 봤으니 실로 20년만에 저도 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그러나 제 작품이 위의 작품보다 더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발상을 먼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로 발설은 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어느 작품이 안 좋다고 말한다면 박시인이나 저, 둘 중의 하나는 상처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만 판단하고 한 번 빙그레 웃고 말기를 바랍니다.   수렵도   내 안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 컴컴한 그곳으로 들어가면 깊은 어둠에 익어 가는 속도로 개이는 눈앞에 벽화가 나타난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가 연꽃 하늘 위의 북두칠성에서 걸어나와 내 젊음의 뒷편에 그린 수렵도.   왼여밈 한 허리를 질끈 동인 사내가 디귿(ㄷ)자로 굽은 활을 가슴 가득히 끌어안고 굽이치는 산봉우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꽁지로 달겨드는 헛살 소리에 달아나던 범이 놀라 고개를 돌릴 찰라 이마 한 복판의 임금 왕짜 무늬에 꽂히며 나뒹군 포획물에서 부르르 깃을 떠는 대우전. 방금 넘어온 산봉우리들이 말발굽 아래 엎드려 등성이 너머로 새벽을 쏘아 올린다.   뭉툭한 명적(鳴鏑) 하나 가만히 산 너머로 날리면 어둠 속 곳곳에 박혀있던 젊은 날의 꿈들이 매화포처럼 와아 솟아오르고 반구비로 날아오르던 명적 소리, 어두운 밤하늘의 배경으로 올라가 지상의 길을 비추는 별이 된다. 그 별빛 속으로 영혼의 더듬이를 내밀며 비로소 중심을 잡는 청춘의 뼈.   세월은 흘러도 벽화는 남는다. 흘러간 세월의 길이만큼 동굴은 스스로 더욱 깊어져 지상의 덧없는 꿈들이 사위어갈 때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간을 꿈꾸던 첫새벽의 빛과 말발굽 소리로 지평선 저쪽을 발 밑까지 끌어당기던 할아버짓적 기상이 천장과 벽의 딱딱한 돌 속으로 파고든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나의 일은 가없는 화폭 속에 얼어붙은 꿈을 깨우는 것. 할아버지의 영혼이 새겨놓은 수렵도 속의 꿈을 불러 달리다 멎은 그의 말발굽을 지상에 옮겨놓는다. 그러면 시위처럼 팽팽해진 벌판 위로 동굴 벽에서 방금 살아난 꿈들은 쏜 살 같이 달려나가고 그 꿈을 타고 달려간 사내들과 함께 무용총의 벽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서 가슴 가득히 활을 당긴다.     그러면 상징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빗대어 쓰기의 두 번째 방법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론가들은 비유와 상징을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만, 시를 쓰는 쪽에서 보면 같은 원리에 해당합니다. 다만 시에 나타나는 결과는 다르게 보입니다.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로 대응합니다. 즉       사랑은 사닥다리다.   라고 했으면 이 비유는 의 대응이 쉽게 눈에 띕니다. 말하고자 하는 원생각이 사랑이라면, 사닥다리는 그것을 전해주기 위한 도우미이지요. 로 정확히 맞습니다.   그러나 상징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징은 1:1이 아니라 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나는 어려서 어렵게 자랐어. 그래서 내게는 어둠이 많아.   라고 했다고 칩시다. 여기서 은 무슨 뜻인가요? 아픔? 돈 없음? 쪼들림? 마음의 상처? 아픈 추억? 괴로움? 가족이 없음? 이 중에 무엇일까요?   자, 이와 같이 이 어둠이라는 말은 한 가지 뜻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문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사실을 가리키는 말인데, 뒤의 어둠이란 말은 그것을 뭉뚱그려 나타내는 비유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직유나 은유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로 대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1:1로 대응한다면 비유라고 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안 되고 1:여럿이 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리고 원관념이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읽는 사람이 알아서 짐작할 뿐이죠.   이렇게 앞 뒤 정황을 참작해서 여러 가지 뜻을 한꺼번에 지니는 것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잘만 쓰면 시에서는 굉장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상징이란 말은 영어의 심볼(symbol)을 번역한 것입니다. 한자로는 이라고 씁니다. 이 은 원래 하늘에서 천체가 움직이면서 나타내는 조짐을 뜻합니다. 은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서 땅에 나타나는 기운의 양상을 말합니다. 하늘의 기운에 따라서 지상에 기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생물들이 나타내는 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둘을 합쳐놓은 상징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나타나는 조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죠.   그러면 앞서 말한 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일지 알아봅시다. 그런데 이것은 그 말을 한 사람 이외에는 이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뜻을 유추할 뿐이죠. 그러니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안 좋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보면 되겠죠. 예를 들면 가난, 불화, 굶주림, 이별 같은 것들이 이 범주에 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징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많은 뜻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만 쓰면 비유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 쓰면 애매모호해서 오히려 시의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막 시를 배우려고 하는 여러분들은 함부로 아는 체하면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7월 중순에 3학년 교실에 수업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보통 7월초에 기말고사를 보니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이 코앞에 다가와서 대부분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게다가 7월 중순이면 무더위가 시작되는 때지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더워서 헉헉거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제가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한 학생이       선생님, 우리 물놀이하러 가요!   하는 겁니다. 그러자 마치 메아리라도 울리듯이 교실 전체가 떼를 쓰는 분위기로 변하더군요. 아무래도 이놈들이 작전을 짰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관찰 수업한다고, 체험 학습한다고 학교 뒷산으로, 들로 몇 차례 데리고 나갔더니 저를 만만하게 보고서 그러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그 전전달에는 애들을 데리고 학교 앞개울에서 물고기까지 잡은 적이 있거든요. 국어시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물놀이하러 가자는 것은 앞개울이 아닙니다. 한 20분쯤 걸어가면 꽤 큰 개울이 나옵니다. 거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멀리 가는 데다가 물놀이를 하면 위험까지 동반되기 때문에 관리자인 교장은 허락하지 않기가 쉽습니다. 이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마찰이 있어야 할 듯한 일입니다. 그래도 평상시에 수업에 관심도 없던 놈들이 무얼 하자니까 신이 나서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좋다. 가자! 총대는 내가 메지.   그러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뛰어나갔고 나는 허락을 맡으러 교장실로 갔습니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웅성웅성 거리니까 다른 학년 아이들이 밖을 내다보고는 물놀이 간다는 소리에 다른 선생님한테도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전교 세 반 중에서 한 반이 물놀이 간다는데 다른 두 반의 수업이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한테 허락을 받고 나오니, 전교생이 다 나와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래서 전교생을 데리고 물놀이를 하러 갔습니다.   여기서 를 멘다고 할 때의 총대가 바로 상징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총대를 멘다는 것은 결과에 대해서 감당을 하겠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이런 뜻을 갖는 데는 총대라는 말이 그 전부터 그와 비슷하게 쓰였기 때문입니다. 총대는 총을 얘기하는 것이고, 총은 전쟁에서 쓰는 무기입니다. 그러니까 총대를 멘다는 것은 전쟁터에 나간다는 얘기고,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시켜 공동체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목숨은 하나인데, 누가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바치려 하겠어요? 올바른 일인 줄은 알지만 목숨을 바쳐가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그래서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는데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총대를 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남을 위해서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총대를 멘다는 뜻이 그와 유사한 상황에 적용되어 쓰이는 겁니다.   내가 총대를 메겠다는 것은 학생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학교 관리자는 막으려 들 것이고, 막으려는 학교 관리자와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면서 그 일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진다는 얘기지요. 모든 책임이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총대란 말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말에 여러 뜻이 담기는 경우를 상징이라고 하는 겁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요? 그렇게 돼서 전교생이 물놀이를 갔습니다. 장소는 도리비라는 곳입니다. 이름이 참 아름답지요? 라니! 이곳은 물길이 둥글게 돌아나가면서 만들어진 기슭에 동네가 들어섰고 그런 까닭에 동네 이름이 도리비입니다. 안동 하회마을의 본이름이 물도이동인 것을 보면 이 도리비도 물이 돌아나간다는 뜻과 관련이 있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6교시 두 시간 연이어서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했습니다. 애들끼리 서로 물속에 집어넣고 발버둥치는 여학생들까지 끌고 들어가서 온통 물귀신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양복 입은 남녀 선생님들까지 붙잡혀서 몽땅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신나게 노는데 방송사의 차가 오더니 멀리서 촬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무더위가 오니까 시원한 여름을 보낸다는 보도 기사의 화면으로 내보내려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속에서 손으로 V자를 그리며 흔들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사히 물놀이를 마쳤는데, 물에서 나오면서 방송국 카메라가 찍은 곳에 가서 보니 무슨 표지판이 있고 그 표지판을 가만히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수 영 금 지   다음날 학교에 출근하니 학교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제 오후에 찍힌 그 화면이 텔레비전의 지방방송 뉴스에 나왔답니다. 물론 화면이 좀 흐릿하게 처리되어 사람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게는 했습니다만, 그 위치라든가 상황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거든요. 게다가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익사 사고의 위험이 높아진다며 자료 화면으로 내보냈다니 기가 막힐 일이지요. 저 대신 애꿎은 일과계 선생님이 교장실에 불려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꾸중 비슷한 넋두리를 들었답니다. 당사자인 저를 부르지 않은 것은 제가 그날 몇 분 늦게 간 탓도 있지만, 울뚝불뚝한 저보다는 고분고분한 여 선생님이 더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하여간 한 바탕 소란이 일면서 저보다는 일과계 선생님한테 불똥이 튀어(이 불똥도 상징입니다.) 덕분에 예쁘고 맘씨 착한 홍선생님이 애를 먹었습니다.   출근하는 나를 보더니 애들이 먼저 긴장을 하고서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래도 사고 안 났으니 괜찮다고 교장선생님은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그나마 학생들을 야외로 데리고 나가면서 하는 수업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분이 교장으로 계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 소란으로 이어질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교장 선생님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 분의 이름은 안응락입니다.     그러면 박윤배 시인의 에서 상징이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2연 앞부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내 시대의 젊음을 위하여 수렵도를 그린다. 탄피 흩어진 이 터의 숲을 무너뜨리고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한숨뿐인 포획물을 끌고 돌아올지라도 저녁노을 뭉개는 어둠 자락을 빈 도시락 가득 채워올지라도 달아나는 노루와 사슴을 겨누고 있다.     여러분이 한 번 찾아보시죠. 어떤 것이 상징에 해당하는 말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겁니다. 모르겠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잘 알면 굳이 배울 필요도 없겠지요.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요. 모르면 세 살배기 아이한테도 머리 숙이고 배워야 합니다.   답은 입니다.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의 말입니다. 여기서 어둠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 시 전체의 상황을 전제로 해서 유추해내야 합니다. 이 시의 상황은 수렵도라는 그림을 보고서 내 젊음 역시 그처럼 우렁찬 기백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렵도의 사내처럼 우렁찬 모습의 시를 써야 하는데, 막상 살다보면 그게 안 되는 상황이 생길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외부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되는 요인이 있겠지요. 그런 모든 요인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즉 내 젊은 날 좋은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 전부가 이 어둠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시간이 없어 쫓기는 것, 아니면 둔한 재주, 아니면 성실하지 못한 태도, 뭐 이런 모든 것들이 이 어둠에 다 포함됩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상징은 어느 한 가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뜻을 안에 간직합니다. 그래서 잘만 쓰면 굉장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뜻을 많이 끌어안을 수 있는 만큼 자칫 잘못 쓰면 오히려 시 전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를 만큼 모호해지는 수도 있으니 어설프게 알고서 흉내 내면 안 됩니다.   다음의 짧은 시를 보겠습니다.     맹수   ①맹수가 사라진 곳에 ②맹수가 산다. 온갖 ③맹수들 다 쫓아내고 ④맹수인 줄도 모르는 채 저희들끼리 으르렁거리며 ⑤맹수로 산다.     이 시를 보면 맹수란 말이 모두 다섯 번 나옵니다. 번호는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같고 어떤 것이 다를까요? 한 번 짝을 지워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①의 맹수는 그냥 사나운 짐승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범, 사자, 악어 같은 짐승들 말이지요. 그 맹수가 사라졌으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맹수는 틀림없이 ①의 맹수는 아니겠네요. 그러니까 ②의 맹수는 우리가 아는 그런 사나운 짐승을 쫓아버린 존재들을 나타내는 것이 되겠지요. 사나운 짐승들까지 쫓아내는 그런 짐승이 무엇이 있을까요? 현재 지구상에는 인간들 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짐승들과 공존을 꾀하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서 다른 짐승들의 멸종을 생각지 않는 그런 인간세계를 비꼰 것이라고 볼 수 없을까요? 그렇다면 ③은 맹수지만, ④의 맹수는 그냥 짐승이 아닙니다. ⑤역시 ④와 같지요. 그러면 이 시 속의 맹수라는 말은 단순히 그냥 사나운 짐승을 가리키는 뜻이 있고, 사나운 짐승이 아닌 무언가를 암시해주는 뜻이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사나운 짐승의 맹수 : ① ③ 다른 존재를 암시하는 맹수 : ② ④ ⑤     그러면 다른 존재를 암시하는 맹수는 무엇일까요? 위에서는 그냥 인간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이 맹수 속에 다 포함될까요? 잘 생각해보면 다른 종류의 맹수와 공존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다른 종족의 멸종을 전혀 생각지 않은 탐욕스런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포함된다고 보기는 좀 어렵겠죠? 그렇습니다. 이 맹수는 인간들 중에서 탐욕에 찌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탐욕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상은 아마도 읽는 사람이 알아서 추측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특정 범위를 정해주지 않고 읽는 사람이 무한정 추정해 들어가야만 그 뜻이 확연히 정리가 됩니다. 이런 방법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이러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비유는 앞서 보았듯이 1:1로 대응을 시킵니다. 어떤 것을 보니 무엇을 닮았더라, 하는 생각이 들면 그 둘의 공통점을 찾아서 설명해주면 됩니다. 닮은 그것과 원래의 그것을 연결시켜주면 되지요.   그러나 상징은 1:1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달리 해야 합니다. 원리는 비유와 같습니다. 그러나 원관념을 정하는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상징 수법을 활용할 때의 원관념은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 생각으로 정해서 그것을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찾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시절에 저는 무언가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아주 강해서 남들이 싫은 소리 하는 것을 싫어했고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일로 저에게 강요를 하면 한 판 붙었습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대들어 싸웠습니다. 싸움은 승산이 있어서 이길 때 해야 하는데, 젊어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다치고 내가 죽더라도 싸웠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저 놈은 다칠 것이고, 그러면 아플 것이니 내가 죽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생각이었지요. 죽기 살기로 산 것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저를 볼 때 어떻겠어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한 발 물러서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사소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 불끈거리는 심사를 무어라고 하면 좋을까요? 불평불만? 정의? 분노? 화? 신념? 열등감? 치기? 어느 것으로 갖다 붙여도 적당한 것이 없지요? 그렇다고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은 다 관련이 있어요. 그렇지만 딱히 이거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딱 부러지게 이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머릿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표현할 때 상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복잡한 심사를 나타내줄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찾아서 설명하는 겁니다.   저는 위에서 말한 그런 저의 심란한 심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느 날 그 감정이 송곳이나 뿔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을 찔러서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그런 도구를 떠올린 것이지요. 송곳이나 뿔은 얌전한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뿔은 그렇지요. 그래서 ‘야,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뿔   한창 때 내겐 뿔이 하나 있었다. 그 뿔은 젊음만큼이나 영롱한 빛을 냈고 우람한 그 만큼 무엇이든 들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느 구석에도 그 뿔보다 더 크고 드센 뿔이 있으리라는 가정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내 뿔은 최고였다. 어쩌다 호락호락치 않은 뿔이 나타나면 그 뿔보다 작을지언정 섬뜩한 점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때까지 뾰족하게 갈고 또 갈았다.   지금도 그 뿔이 있다. 어쩌다 난폭한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스쳐 가는 나보다 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오랫동안 잊고있던 그 뿔이 기억의 퇴적층을 뚫고 불끈 돋는다. 그러나 삼십대란 뿔의 상처를 헤아릴 줄 아는 나이 어르고 다독거려서 잠시 돋은 뿔이 가라앉을 때쯤이면 곰곰이 생각한다. 이 뿔을 좀 더 따스한 곳에 쓸 수 없을 것인가를.     이곳의 뿔은 어떤가요? 사람에게는 뿔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자신에게 뿔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뿔은 짐승의 뿔은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무언가 다른 것을 나타내주는 그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뿔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만약에 이 뿔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한 가지여서 뿔과 그 한 가지가 1:1로 대응하면 무엇이 되나요? 그렇죠! 비유죠. 만약에 1:1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건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상징인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그 뜻을 찾아보겠습니다.   이 시의 뿔은 크고 드셉니다. 그리고 뾰족하기도 하지요. 섬뜩합니다. 난폭한 말을 뱉는 사람들을 보면 사라졌던 뿔이 돋아납니다. 다독거려서 달래면 또 가라앉기도 합니다. 자, 이렇게 해놓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지요? 어쨌든 딱 한 가지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마음속의 어떤 복잡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상징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잘 읽어보면 뿔은 용도에 따라서 무례한 젊은 친구들을 무찌를 수도 있고, 또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따뜻한 곳에 쓸 수도 있습니다. 남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좋은 뜻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돋았다 가라앉는 것으로 보아 몸 안에 있으면서 감정에 따라서 생기고 말고 합니다. 무엇일까요? 틀림없이 감정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정의감이나 혈기왕성함, 나아가 못 마땅한 것을 참지 못하는 어떤 심리상태를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뜻을 파악하면 되지 않겠어요?   이 시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대신에 어떤 방법으로 이런 상징을 쓰는 것인가 하는 것은 한 번 더 앞으로 돌아가서 확인해두기 바랍니다.   소 망                  장미(3-1)   저 깊은 숲 속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이리저리 미처 보지 못했던 곳까지 바라본다.   바라보지 못했던 곳에는 작은 꽃이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 속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소망들이 담겨있다.     열매라는 말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언뜻 보면 그냥 열매일 것 같은데, 앞의 상황이 약간 다릅니다. 늘상 보던 곳에 있던 열매가 아니라 평상시에는 바라보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열매입니다. 시에서는 이쯤 되면 아 무언가 있구나 하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평상시에 보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꽃이 피운 열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열매 속에 무엇이 들었나요? 소망이 들었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천상 지은이에게 물어보던가 아니면 내 체험을 바탕으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은이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읽는 사람이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미를 해석하여 재구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바로 상징입니다.   열매는 꽃과 관련이 있습니다. 꽃은 화려하지만 속이 없지요. 반면에 열매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알찹니다. 꽃의 화려함은 결국 이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 식물이 취한 동작입니다. 열매의 가장 큰 임무는 종자를 퍼뜨리는 것이지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꽃이 맺는 열매는 희망을 안으로 가진 것일 수밖에 없지요. 그 희망은 여건이 주어지면 곧 싹을 틔워서 아름다운 꽃을 보여줍니다. 희망은 곧 소망입니다.   평상시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 학생은 숲에 와서 바로 그런 새로운 것을 자신도 모르게 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학생이 이러한 생물의 순환 과정까지 계산을 하고서 이 시를 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굳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더라도 우주의 섭리 속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의 관찰 속에는 뜻밖으로 우주의 깊은 섭리가 담기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멋을 억지로 부리려는 허황한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바라보는 자에게 우주는 자신의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겨울밤      이윤정(포항 유성여고 3)   할머니는 화롯가에 앉아 내 스웨터를 짜셨다.   한 올은 나뭇꾼 이야기로 한 올은 선녀 이야기로 돌리고 빼고 엮으면 밤은 숯칠 한 채 익어 가는 소리만 투둑투둑  할머니 무릎을 울리고 입혀주신 옷은 낮게 웅성이는 말들로 엮여 진눈깨비 졸음을 가렸다.   까치밥으로 남은 감이 마당가에서 쉬쉬거리며 겨울 바람을 쫓고 있을 때   따뜻한 베갯머리 맡에서 우리 할머닌 내 겨울을 짜고 계셨다.                    2003년도 배재대 청소년 소월문학상 운문 대상     여기서는 스웨터를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 스웨터는 그냥 옷이 아닙니다. 할머니와 관련된 추억이 담겨있습니다. 스웨터는 두꺼운 겨울옷입니다. 추위를 막아주는 기능을 합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스웨터를 손수 짜 줄 때는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추위를 막는다는 것은 단순히 온도가 차갑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세상의 추위까지도 함께 한다고 읽어야 합니다. 할머니는 나에게 스웨터를 짜주는데 그것은 곧 추위에 노출될 손주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직접 짜는 스웨터는 단순히 겨울바람만을 막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늑한 사랑과 그 스웨터를 짜는 할머니를 바라보던 나의 추억까지도 입혀주는 기능을 합니다.   할머니는 스웨터를 짜면서 나무꾼 이야기를 해주었겠지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곤 했습니다. 할머니와 맺은 좋은 추억이지요. 따라서 스웨터를 보면 할머니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런 옷을 입으면 단순히 가게에서 산 옷과는 다른 느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추위라든가 하는 것은 누구한테나 같은 조건이지만, 추위를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따스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추위를 덜 느끼겠죠. 추억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의 스웨터는 그냥 추위를 막는 장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추억을 돌이켜 주는 그런 기능까지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가지 뜻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분위기를 한꺼번에 보여주기 때문에 스웨터는 상징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와 비슷한 발상을 시인의 작품에서 보겠습니다.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송찬호   우리 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 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버릇이나 행동 특성이 세대를 넘어서 이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렁손톱이 자식에게 연결되고 손자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있지요. 이와 같이 습관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건망증 같은 경우도 그렇죠. 이 시에서는 집안 내력으로 건망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건망증은 노망든 할머니에게서 나타났겠죠. 그런데 그것이 얼룩, 박하 냄새, 냄새, 자국에 비유되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비유를 사용한 시입니다. 그런데 그 건망증이 나나 식구들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할머니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 노릇을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나 혹은 다른 식구들이 겪은 건망증을 보면서 할머니를 떠올린 것이고, 건망증에 걸린 할머니와 맺었던 추억까지 아울러 떠올린 것입니다. 여기서 건망증은 나와 할머니를 이어주는 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이죠. 그러니까 비유와 상징이 동시에 들어있는 시입니다.   아버지의 휴대폰                     임태운(전주 영생고 3)   태양처럼 붉은 벽돌에 자식의 하루를 짊어져야 하는 아버지의 허리 같이 안테나가 휘어진 그 핸드폰은 언제나 꽃씨를 날리지 못하는 꽃잎이었다.   벌떼들처럼 온갖 소리들이 금 간 안전모 사이로 촉수를 뻗는 공사 현장도 하루살이 같은 내 희미한 목소리로는 닿을 수 없는 모래 화단이었고 찢어진 꽃잎처럼 깨어진 액정은 방향을 잃은 문자 메시지만이 먼지처럼 쌓여 있는 아버지의 휴대폰에는 동그란 종료 버튼만이 잎맥을 지운 채 닳아 있었다.   귓가에 와 닿는 몇 개의 구멍 너머 아버지의 낡은 생은 내 플라스틱 버튼으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그 어느 수신 지역에 피어 있는 것일까. 질 때를 알고 고이 지는 꽃잎처럼 아버지의 휴대폰은 늘 기본요금을 넘어서는 법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휴대폰이 더 짙은 향기를 뿜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나는 오늘도 나만이 특수문자로 나비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송신해본다. 그 작디작은 나비의 더듬이를 아버지가 볼 수는 없을 테지만 아버지의 핸드폰 안에 피어있는 꽃잎 속에서만큼은 힘차게 날갯짓할 수 있도록.                  2003년 인하대 제9회 인하백일장 운문 장원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휴대폰을 통해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휴대폰의 사용법을 잘 모르는 아버지와 휴대폰 없이는 살 수 없는 나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나는 휴대폰 속의 이미지나 언어를 잘 활용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익숙지 않아서 휴대폰을 끄고 켜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말하자면 보통 전화기의 용도 이외에는 활용할 줄을 모르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아버지는 나의 삶을 책임집니다. 그런 책임을 맡은 아버지의 노력 위에서 나는 휴대폰을 사용하는 세대죠. 그래서 아버지에게 휴대폰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볼 줄 모릅니다. 세대 간의 단절된 거리를 휴대폰의 상황으로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단절을 다시 휴대폰을 통하여 해결하려는 의지가 아버지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노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휴대폰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잇고 갈등을 해결하는 구실을 합니다. 당연히 상징입니다.   가는 비 온다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다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여기서 가 나타내는 바는 무엇일까요? 죽음이라고 재빨리 대답한 사람들은 앞의 설명을 아주 잘 이해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앞으로 시에서 얼마든지 이 상징 기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짝짝짝!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눈이 있어서 쉽게 알아본 건 아닐 겁니다. 앞의 시를 읽어보면 그렇게 해석하도록 상황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납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의 시간이 흐르죠. 그 시간의 흐름은 언뜻 보면 한 방향입니다. 자, 여러분은 지금 16세 안팎일 겁니다. 한창 나이죠. 16세라면 여러분들은 한 살이라도 더 살았노라고 제 나이를 속일 나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16년을 살아왔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시간으로 환산해보겠습니다. 16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한 번 묻겠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70세까지 산다고 가정을 하면 이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54년이겠죠. 그러면 살았다고 대답한 이 16년은 시간을 줄여온 것인데, 산 게 맞나요? 아니면 죽어온 건가요? 시간이 줄어들었으니, 분명히 명줄이 짧아진 겁니다. 그러면 그게 죽은 것이죠. 어때요?   특별한 해결책이 없는 한 사람은 이와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니 이대로 가다가는 저절로 다음을 알 수 없는 컴컴한 구멍으로 빨려들겠죠?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들이 위 시에는 여러 가지 나옵니다. 떨어지는 낙엽, 인질극, 식탁에 오를 나날에는 관심이 없는 거위……. 이렇게 무심한 듯이 묘사하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작용하도록 시인이 배치한 이미지들입니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소낙비나 장마비는 굵기 때문에 바깥에 나가면 금방 젖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안개의 경우는 어떤가요? 또 안개보다 입자가 조금 더 굵은 는개는 어떨까요? 만약에 는개 속에 있다면 옷이 눅눅하다고 생각할 뿐, 비에 젖는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랑비도 마찬가지죠. 신경 쓰지 않고 나돌아 다니면 어느 새 젖어있는 것이 가랑비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요? 16년을 살아온 줄 알았는데, 조금씩 조금씩 시간은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드디어 죽음이 다가오죠. 이렇게 죽음으로 젖어 가는 것이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린다고 직접 말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가랑비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빌리러 전당포로 간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 정황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 시의 는 존재하는 것을 무로 바꾸어버리는 어떤 존재를 나타냅니다. 거기에는 죽음도 있고 시간도 있고 허무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징입니다. 이 중에서도 죽음이 가장 중요한 의미로 들어있죠.   대답 없는 바람            조수현   내가 바람에게 물어 보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그러나 바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굳어있는 바위처럼 또 내가 바람에게 물어 보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그러나 바람은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든 인형처럼 다시 또 내가 바람에게 물었다. 바다 건너 들을 질러 산을 넘는 동안 무엇을 얻었으며, 잃었느냐고 그리고 이 세상 다 휘돌고 난 끝에 무엇을 얻겠으며 잃겠느냐고. 그러나 바람은 이미 내게서 보이지 않을 만큼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여기서는 바람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바람이 무엇일까요? 우선 나는 삶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고 있지요?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이와 같지요. 그래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이 답을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은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요? 아마도 자신에게 묻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의 끝에서 바람이 멀어져 가는 것으로 봐서는 답을 얻었나요? 못 얻었지요. 원래 얻을 수 없는 답입니다. 그런데 답을 얻지 못해도 궁금한 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끝없이 되묻는 것이 그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바람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있는 어떤 가상의 존재일 것입니다. 신일 수도 있고, 자신의 내면에 깃든 본성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질문하는 사람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딱히 어떤 존재라고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죠. 분명히 무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상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989년의 일입니다. 한 후배가 찾아와서 부탁을 하나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자기네 동네에 어려서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은 사람이 있는데, 거동조차 불편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시를 쓰곤 한다는 거예요.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혹시 주변에 시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 부탁을 받은 후배는 나한테 와서 그 사람에게 시 쓰는 법도 알려주고 실제로 시를 봐달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어려울 것 없으니, 그리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대화도 하고 사진도 보내고 하지만 1989년에는 286컴퓨터가 막 나오는 시점이었고, 컴퓨터를 접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편지로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주소를 받아서 시를 쓰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마음가짐과 시 쓰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분한테서 답장이 오고, 그 때부터 편지로 하는 시 창작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의 창작법이 대부분 그때 뼈대가 잡힌 것입니다.   열흘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 그에게서 두세 번에 한 번씩 답장이 왔고, 그때 자신이 쓴 시를 한두 편 보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시를 평해서 고칠 점을 다시 써 보냈죠. 이렇게 한 1년 남짓 편지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시점부터인가 편지가 끊겼습니다. 아마도 제 쪽에서는 시 창작 강의의 중요한 부분을 거의 다 했기 때문에 저절로 편지를 중단한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을 즈음에 다시 그 후배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사람 소식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면서 윙윙 소리가 들리더군요. 저와 편지를 나누기 시작한 1년쯤 뒤에 작고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저한테 답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저는 그것을 모르고 계속 편지를 썼던 것이고, 답장이 오질 않자 제 풀에 꺾여 그만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맨 막바지에 보낸 편지 몇 장은 그가 아니라 그의 영전으로 배달되었겠지요.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여 혹시 그를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와서 시 한 편이라도 남긴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드리운 아름다운 인연의 자취일 것이고, 그런 인연을 저버린다면 또한 그를 영원 속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이 책의 첫 출발은 그에게서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시와 함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아름다운 인연의 마지막 결산이라고 믿고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뒤늦은 명복을 빌면서 시인의 이름을 밝힙니다. 조수현 씨. 이승에서 못 다 이룬 시인의 꿈을 저승에서는 꼭 이루기를 빕니다. 2)그리듯이 쓰기 : 이미지     지금까지 비유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쓰는 방법을 배우겠습니다. 이것은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이미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겠지요?     이미지는 물론 영어입니다. 라고 쓰지요. 이것을 심상(心象)이라고 번역하여 씁니다. 심상이란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미지가 중요해진 것은 서양에서 20세기 들어 일어난 시의 한 유파 때문입니다. 즉 시에서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활용하여 쓰기를 주장한 사람들이 이미지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에즈라 파운즈, 흄,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은 엘리어트 같은 시인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여러 이미지 중에서도 특히 눈에 보이는 시각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즘이라는 시사의 중요한 문예사조가 등장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은 동양의 시들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세력이 한참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시인들에게 일본의 시가 많이 알려졌습니다. 거기에 중국의 한자 문학이 가세를 한 형편이지요. 서양의 시인들이 일본의 시와 중국의 시를 보니까 희한하게도 깔끔하게 풍경묘사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도 아주 절제된 풍경 묘사만으로도 주제를 잘 전달합니다. 그 원리가 무엇일까를 골똘히 연구하고 고민한 결과 그들은 일본과 중국의 옛 시인들이 이미지를 아주 잘 활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곧 그 방법을 시에 적용시켰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이미지즘이라는 문예사조입니다.     그러면 이미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젓가락!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을 들은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젓가락이 한 짝 떠오를 겁니다. 안 떠오르는 사람은 졸았거나 딴 짓 하던 사람이죠. 하하하. 바로 이렇게 말을 듣고서 머릿속에 떠올린 그것을 바로 이미지라고 합니다. 이것을 심상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을 듣거나 글을 읽고서 머릿속에 떠오른 사물이나 상황을 이미지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 다 했지요? 그러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방금 제가 젓가락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의 머릿속에 젓가락이 떠올랐는데, 그 젓가락은 옆에 앉은 친구의 머릿속에 떠오른 젓가락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를 겁니다. 다를 수밖에 없지요. 자기가 평소 쓰는 젓가락이 쇠젓가락인 사람은 쇠젓가락을 떠올릴 것이고, 거기에다가 황금을 입힌 금젓가락이면 금젓가락을 떠올릴 것이고, 일본에 자주 가는 사람은 네모난 나무젓가락을, 중국에 자주 여행하는 사람이면 길다란 대나무젓가락을 떠올릴 것입니다. 짜장면을 자주 시켜먹은 사람은 두 개가 들러붙은 배달용 나무젓가락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에서 여전히 두 가닥을 짜개고 있을 것이고요.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똑같은 이미지를 제공해도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경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의 체험이 시의 감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즘 시인들은 이러한 개인차를 최대한 극복하고 상황을 가장 효과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로 느낌을 말로 전하는 그 전의 시에 대해서는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맞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후로 이미지는 시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미지가 체험에 의존하여 해석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암시합니다. 내가 이렇게 시를 써도 그것을 읽는 사람은 내가 의도한 대로 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엘리어트는 ‘의도의 오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죠. 독자에게는 그렇게 읽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이 독자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것인가 하는 것까지 감안을 해서 써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겠지요. 그렇지만 시를 쓰면서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교훈은 남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점점 개발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인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그리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어긋남 현상을 최대한 자극하여 이미지가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효과를 추구하는 방법이 있기도 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여러분들이 시를 많이 접하고 쓰면서 점차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미지의 종류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건 뭐 그토록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지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습니다.   -시각 이미지 -청각 이미지 -후각 이미지 -촉각 이미지 -공감각 이미지     이것은 감각을 어디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정한 겁니다. 무슨 필연성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편의상 나누어본 것이죠.   시각 이미지는 눈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청각은 듣는 것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를, 후각은 냄새와 관련된 것을, 촉각은 접촉과 관련된 것을 말하고, 공감각 이미지는 이상의 이미지가 둘 이상 결합한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시각 이미지 : 빛나는 아침 햇살 -청각 이미지 : 짹짹짹 참새소리 -후각 이미지 : 고소한 누룽지 냄새 -촉각 이미지 : 꺼끌꺼끌한 마룻바닥 -공감각 이미지 : 수정처럼 빛나는 목소리   어려운 것 없으니 공감각 이미지만 설명하겠습니다. 공감각 이미지는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결합한 것입니다. 를 보면 빛난다는 것은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목소리는 귀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각과 청각이 결합한 것이죠.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만, 이 중에서도 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시각 이미지입니다. 다른 것과 다르게 시에서는 시각 이미지만으로도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이미지들은 하나만으로 시를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청각 이미지인 소리만으로 시를 쓰려면 참 어렵겠지요. 그러나 시각 이미지는 그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지에 의한 시 쓰기라고 하면 시각 이미지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이 단원의 제목을 라고 한 것입니다.   작품을 보겠습니다. 강아지          배형준(2-1)   얼마 전 태어난 새끼 강아지   9 마리의 강아지가 와글와글 북적북적   젖 달라고 우는 소리 깨갱깨갱   제일 귀여운 새끼 강아지 쓰다듬어 주고 만져주는데   내 손가락을 쪽쪽 빤다. 간지러운 가운데 손가락   그러다 내 손가락 깨물면 한 대 때려준다.   9 마리의 귀여운 새끼 강아지.     이 시를 읽고 나면 그림 같은 장면이 떠오르지요?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고, 한 아이가 거기서 강아지들을 만집니다. 사람과 강아지가 어울린 한 폭의 풍경화가 연상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듯이 그리는 것도 아주 중요한 시의 방법입니다.   그런 걸 누가 못 쓰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 번 해보세요. 어떤 풍경을 눈에 쏙 들어오도록 묘사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될 겁니다. 먼저 무엇을 그려야 할지 선택하기가 참 애매합니다. 선택을 해도 어떤 것을 그리고 어떤 것을 빼야 할지 선택하기가 힘들어요.   예를 들면, 이 시에서도 무슨 강아지인지 알 수가 없지요. 그냥 똥개인지, 사냥개인지, 시베리안 허스키인지, 불독인지, 발바리인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도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한 소년이 장난치는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요. 만약에 불독이라든지 해서 강아지의 종류를 밝혔다면 오히려 더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또 개집은 어떤 모양인지 전혀 안 나타나 있어요.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꼭 필요한 부분만 선택해서 보여주었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물론 이 시를 쓴 학생이 일부러 이렇게 계산해서 썼을 리는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가 귀여우니까 생각나는 대로 보인 대로 쓴 것이겠지요. 꼭 이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아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절묘한 감각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잃어버립니다. 그리고서 어른이 된 뒤에 한 번 시를 써보라고 하면 엉뚱한 묘사만 잔뜩 하다가 괴상망측한 시를 내지요. 이런 감각을 잃지 않고 되찾는 일이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걸 배우는 것이 창작법이고요.   사실 배우지 않아도 순수한 마음으로 본 세상을 정직하게 적으면 그게 감동을 주는 시가 된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무슨 엄청난 기술을 배워서 시를 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깨끗한 영혼을 회복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가장 좋은 기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병아리                 김은지(2-1)     어미 닭 쫓아다니느라, 나들이 나가느라, 정신없는 병아리.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때지어 쫓아다니고,   까만 눈 속에 흑진주 박은 듯이 반짝거리며,   합창하듯이 ‘삐약’거리는 귀여운 병아리.   노란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유치원 아이들처럼   노란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랑스런 병아리.     비유가 일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전체 흐름은 병아리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습니다. 연노란 색 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를 보면 누구나 귀엽다는 생각을 합니다. 병아리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아주 잘 잡아내고 있지요. 봄에 눈에 잡힌 한 풍경을 그렸는데,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병아리를 보면서 감탄했던 순간으로 안내합니다. 딱히 병아리가 어때서라기보다는 그런 상황에 처한 자신의 체험을 떠올리기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죠. 그런 순간은 아주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독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을 깔끔하게 그려놓기만 해도 좋은 시가 된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줍니다.   부처님 오신 날              장미(2-1)   지금 목탁소리가 들린다.   스님들이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   불경소리가 들린다. 불경을 외우는 스님 옆에서.   사람들이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다.   부처님은 행복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우리 모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신다.     절에 간 체험을 간략하게 잘 요약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미소를 짓고 있지요. 부처님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서 그 미소의 의미를 나름대로 제시했습니다. 부처님이 왜 미소를 짓고 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설명일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오신 날 사람들이 많이 가서 소원 비는 것을 보니까 그런 마음을 부처님이 아시는 거라고 추측한 것입니다. 그 추측이 생뚱한 것이 아니라면 시에서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해석할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석한 장면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서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면을 찾아내어 노래하는 것 역시 시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 시는 그런 방법에 충실한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절터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르지요? 이렇게 생활의 느낌을 보이는 대로 그리듯이 쓰는 것도 시의 한 방법입니다.   요즘 나는             정해남(제천상고 3)   친구들이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면 난 힘없이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친구들이  자기 집안 얘기를 하면 난 무척 바쁜 양 딴청만 피웁니다.   친구들이 심술궂은 내 짝 이야기를 하면 난 어디를 가는 척 슬며시 뒤로 물러 나와버립니다.   친구들이 조기 취업 이야기를 하면 난 나와 무관하다는 듯 하품만 해 버립니다.   무언가에  속하지 않으면 딴 세상 사람이 되어야 하는 세상의 법칙.   요즘 나는 이렇듯 모든 것에서 예외인 아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톨이가 되어 가는 학생의 모습이 아주 깔끔하게 묘사되었지요?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습니다. 이란 말이 나오네요. 이 말은 실업계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얘깁니다. 실업계 학생들은 3학년 2학기 때 현장실습이라는 것이 있어서 공장이나 회사에 취업을 나갑니다. 이때 각 업체에서 추천해달라고 주문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성적을 보거나 생활 태도를 보고서 점수에 따라 순서대로 취업을 내보냅니다. 못 나가거나 늦게 나가면 전에는 못난이 취급을 하곤 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학생의 심리와 행동을 아주 잘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 학생만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당시의 이런 환경에 처한 학생들은 열에 아홉은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니 마치 자기 얘기인 것처럼 말했지만, 이것을 읽는 사람은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해도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시입니다.   이 시에서 보듯이 그리듯이 쓰는 방법은 어떤 것을 그릴 것이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노릇을 합니다. 남들이 별로 공감할 수 없는 것을 아무리 충실하고 빼어나게 그린들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요. 그래서 시인들은 고민을 하는 겁니다. 과연 어떤 부분을 그릴 것인가? 정답은 늘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에게 절실한 것은 남에게도 절실한 것입니다. 그런 부분을 흥분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주는 것이 좋은 작품을 쓰는 비결입니다.   5연에는 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이 중에 하나는 다른 말로 바꾸어주는 것이 좋겠죠? 불필요한 반복은 시에서 단점으로 봅니다 농무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서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는 시골에서 농사꾼들이 상모를 돌리면서 한 바탕 추는 춤을 말합니다. 물론 장구라든가 북 같은 도구들이 따라 나오지요. 이 시는 그런 시골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이 시를 쓰던 상황의 시골을 보면 농사를 지어도 비료 값도 안 나오죠. 사는 게 답답하고 고달픕니다. 시골 살림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 어려움에 찌든 사람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나 는 조선 중기 사람들입니다. 벽초 홍명희가 소설 을 썼는데,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죠.   답답하고 살기 어려운 시골의 정경이 잘 요약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풍경 중에서 하필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는 시골을 상대로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를 했을까요? 여기에 시인의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촌은 날로 피폐해졌습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지요. 우리나라는 농사를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하늘처럼 떠받들며 살아온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어요.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농사는 이제 사람을 먹여 살리는 기능을 도시에 떠넘긴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지요. 이렇게 되면 수 천 년 동안 이어져온 농촌이 파괴됩니다. 그러나 거기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잘 살 수 있을까요? 그 반대입니다. 떠나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삽니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래도 농촌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런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린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동정심을 겉으로 드러냈다면 이 만큼의 감동을 주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감정을 살짝 감추고서 안타까운 풍경만을 슬며시 그려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미지로 그림 그리듯이 쓴 시가 어떤 효과를 내려고 하는 것인지 잘 알겠죠? 감정이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그림 전체를 머릿속에 그린 후에 한꺼번에 감동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주막                      백석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 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보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제목이 주막입니다. 나그네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옛날 숙박업소를 말합니다. 백 시인은 평안북도 사람입니다. 해방 전에 자신의 고향집 풍경을 그린 것이죠. 풍경만 그려놓았을 뿐 가타부타 무슨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풍경만 제시해도 그것을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그림이 떠오르면서 어떤 감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친구 엄마가 운영하는 주막에서 친구가 호박잎에다가 잘 고은 붕어를 가져다준 모양이죠? 장꾼들이 망아지를 끌고 와서 밥을 먹고 가는 그런 추억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살아나서 그런 정황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묘한 향수를 자극하게 됩니다. 이렇게 풍경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불국사                 박목월   불국사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보살   바람소리  솔소리   범영루 뜬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달빛 자하문   바람소리 물소리.     이 시는 묘사의 극단까지 나갔지요? 불국사에 대해서 시를 쓰는데, 자신의 의견을 모두 버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적었습니다. 그것도 거의 명사만을 썼습니다. 어떻습니까? 불국사의 분위기가 잘 전달이 되나요? 읽는 사람은 이 명사들이 나타나는 대로 불국사의 정경을 떠올리면서 따라갑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불국사의 정경이 그림처럼 나타나겠지요?   사실 절에 대해서 시를 써보면 만만찮습니다. 절이란 부처님이 사는 곳인데, 그곳에 대해서 섣불리 말했다가는 망신만 당하기 일쑤입니다. 불교의 사상이나 철학이라는 것이 쉽게 접근해서 얻기 어려울뿐더러 설령 얻었다고 해도 문자 밖의 세계이기 때문에 말로 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놀러왔다는 듯이 묘사를 해 가지고는 또 절의 그 신성한 모습이 담기지를 않거든요. 그래서 아주 절제된 감각으로 불교의 신앙체계와 관련이 있는 이미지들을 끌어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도 설명을 자꾸 하게 되어 짧은 지식을 드러내곤 하지요. 이렇게 명사만 나열해서 시 한 편을 이루어야겠다고 판단한 것 자체가 굉장한 고수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듯이 쓰기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때때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이나 상황을 마주치는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5.18 광주항쟁 때 열 살 안팎의 한 아이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안은 채 제 품에 안은 사진틀에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는 사진 한 장이 신문에 실려 전 세계인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광주 사태를 떠올릴 때 그 사진이 먼저 떠오릅니다. 한 장면이 그대로 한 사건의 인상을 결정해버린 것입니다. 비단 이런 커다란 사건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런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장면은 특별한 설명 없이 제시만 해주어도 큰 울림을 갖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떤 전형이 될 만한 사건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에 가장 좋은 시의 방법이 바로 입니다.   디지털 세대인 여러분들이 이런 효과를 가장 많이 그리고 쉽게 접하는 것은 광고일 것입니다. 10초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광고는 가장 짧은 순간에 시청자의 뇌리로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에 옛날식으로 물건의 쓰임새나 효과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했다가는 당장 리모콘이 다른 번호를 눌러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장면을 제시해주는 방법을 많이 씁니다. 바로 이 광고식 보여주기 수법을 연상하면 시에서 쓰는 이 방법을 이해하기 좋을 듯합니다. 시를 오래 쓸수록 이 방법의 위력을 점점 더 느낍니다. 3)직접 말하기     위의 두 가지 방법은 무엇엔가 의탁해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에는 이런 것을 전혀 몰라도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나는 것을 정리해서 수필 쓰듯이 쓰는 것입니다. 체험하면서 느낀 점을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이 방법은 가장 흔하게 쓰이는 방법이고, 또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생각나는 것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본래 속성대로 내 생각을 전해주는 수단으로 여기고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인데, 막상 글을 쓰면 이상하게도 생각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말로 적을 때의 감정까지도 전달됩니다. 시는 바로 이 점을 노린 겁니다. 생각을 전달하되, 거기에다가 최대한 많은 감정이 실리도록 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글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감정이 잘 실리도록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언어 자체에 시의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가 감정을 최대한 갖고 가도록 쓰는 방법에 시의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방법을 잘 터득할 수 있는가? 그건 딱히 어떻다고 말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로 설명하자면 너무 어려워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왼쪽 신발을 먼저 신었던가 오른쪽 신발을 먼저 신었던가를 말하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 쓰면서도 왜 그렇게 썼느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시입니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읽고, 또 많이 쓰면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쓰는 요령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겪은 일 가운데서 새로 깨달은 부분을 과장되지 않고 솔직하게 적으면 됩니다. 그런 일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점차 숙련이 됩니다.   그러면 작품을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안의 적                    김민지(3-1)   이번만은 꼭 하겠다고 이번만큼은 해 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말일뿐이다. 생각일 뿐이다.   몸과 마음은 서로 적이다. 그래서 인지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상한 현상이다.   진실하게 말하자면 나도 몸이 하는 행동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지 모른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몸과 마음을 구별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 같다.     자, 이 시에 앞서 배운 어떤 표현이 있나요? 없지요? 특별한 기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학생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생각의 질서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갈등을 아주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간략한 정리 역시 생각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런 생각의 질서를 아무런 꾸밈없이 드러내는 것 역시 시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라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생각을 직접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학생의 작품을 한 편 더 보겠습니다. 겉모습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원리는 같은 시입니다.   나들이 가던 날           김민지(3-1)   어미 닭과 그 뒤를 졸졸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우리도 선생님 뒤를 따라 쫑쫑거리며 봄나들이를 간다.   우리가 나들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곤히 자던 잠을 깨고 눈을 비비며   서로서로 먼저 나올려고 발버둥을 친다. 할미꽃은 허리 많이 아픈지 고개를 들을 생각도 않는다.   진달래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줄지어 서서 바람을 따라 산들산들거린다.   진달래가 샘이 났는지,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우리를 막아서서 못 가게 가시를 이용해 마구 찔러댄다.   우리는 ‘아야’ ‘아야’ 하며, 화를 내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샘이 나서가 아니라 관심을 끌기 위해서란 걸…….     중간 중간에 비유도 나오지만 이 시를 잘 보면 선생님을 따라서 산으로 봄나들이 간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봄나들이야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도 이것이 시가 되는 것은 이 학생이 경험한 느낌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체험은 같을지 몰라도 그것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선생님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 학생만 간 건 아닙니다. 다른 학생들도 다 갔지요. 그런데 이 느낌은 이 학생만의 것입니다.   앞서 자신의 느낌을 적으라고 했던 것 기억날 겁니다. 자신의 느낌이라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시에서는 사람마다 다 다른 그런 느낌을 존중합니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 같다면 시라는, 나아가 문학이라는 예술이 성립할 수도 없습니다. 예술은 독자성이 그 생명입니다.   가는 도중에 꽃도 구경하고, 바람도 느꼈고, 나무들에게 찔렸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고 샘을 냈다고 썼습니다. 아마 그 날 산에 가서 본 것은 이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구름도 봤을 것이고, 동네도 봤을 것이고 무덤도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에서 자신의 체험을 쓸 때 모든 것을 다 쓰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추려서 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경험 중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요약해서 제시하는 방법이 바로 지금 우리가 세 번째의 방법으로 제시한 방법입니다. 어떤 다른 표현법을 사용하지 않고 체험을 추려서 중요한 부분만 직접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비유도 들어있지만, 전체의 흐름은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라고 미리 말했습니다. 그래서 의 범주에 넣은 것입니다.   4연 첫 행의 는 가 맞는 것이겠지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시에서는 그런 거 너무 골치 아프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런 거 시시콜콜 따지다가는 정작 생각이 끊겨서 시를 잘 못 씁니다. 그리고 이런 틀린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 그렇게 발음하고 쓰면 그게 오히려 더 시의 분위기를 살려줍니다. 시에서는 맞춤법보다 어감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래 5연을 보면   진달래가 샘이 났는지,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우리를 막아서서 못 가게 가시를 이용해 마구 찔러댄다.   는 굳이 없어도 되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없어도 앞 뒤 의미 연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경우에는 없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계속해서 작품을 보겠습니다.   시 쓰는 친구들             김봉진(2-1)   지금은 국어시간. 노는 시간이라 착각하고 놀고있는 친구들   병덕이는 나무에 매달리고. 광섭이는 돌아다니며 시를 자랑하고. 연호는 노래를 리매이크를 하고. 제연이는 “방카”의 카리스마를 자랑하고. 팔장 끼고 돌아다니는 윤표. 시를 쓰고 들어오는 정근이와 희성이 춤을 추며 들어오고.   우리 반은 시 쓰는 시간이 체육시간보다 쬐금 재미있다.     시를 쓰라고 시간을 주면 얌전히 앉아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꾸 떠들려고 하지요. 한 번은 시상을 떠올려야 한다면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야외수업을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하고 허락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 쓸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장난만 하면서 놀더군요. 그래도 그냥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들이 해놓은 말이 있으니까 뒤가 켕겼는지 집에서 써왔습니다. 이 시도 그 중의 하나죠.   국어 시간에 시 쓰는 친구들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돼있죠? 여기서 병덕이니, 광섭이니, 연호니 하는 학생들이 누구인가를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여러분의 경험으로 보아 어떤 상황인지 모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름은 특수한 명사이지만,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연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쓰이면 보통 명사처럼 쓰인답니다.   이 시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어떤 상황을 잘 요약한 겁니다. 특별히 화려한 표현도 없고, 재미있는 표현도 없지만, 시 쓰라고 준 시간을 활용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에 잡힐 듯이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살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을 잘 요약하여 옮겨놓으면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줄에는 재미있는 심리가 드러나 있지요? 남학생들에게 체육시간보다 더 재미있는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국어시간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 투영된 것이겠죠? 앞부분에서 제시했듯이 시를 쓴다고 하면서 엉뚱한 짓을 하는 데도 혼내거나 뭐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까 일종의 아부를 한 것이겠죠. 그런 순수한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시의 장점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애개개! 이런 정도는 누가 못써?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학생들은 여태까지 약간 잘못된 고정관념에 빠져있던 것입니다. 시는 무언가 그럴 듯한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 말입니다. 그런 고정관념은 틀림없이 교과서의 시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학생들처럼 자신의 생활을 노래하는 과정을 충분히 거쳐서 그런 시에서 시의 재미를 느끼게 된 다음의 일입니다. 시는 결코 특별한 것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소박하게 담는 훌륭한 그릇입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시를 잘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무시무시한 놀이터              이세호(1-1)   놀이터는 위험을 주는 곳 항상 조심해야 할 곳.   시소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엉덩이가 다칠 수도 있다.   그네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뒤에 있다가 부딪칠 수도 있으며 떨어질 수도 있다.   미끄럼틀도 재미있다. 하지만 굴러 떨어질 수 있다.   놀이터는 언제 다칠지 모르는 위험한 곳.     재미있지요? 놀이터를 재미있는 곳으로만 생각했지, 위험하다고 노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내막을 살펴보면 정말 그렇지요. 누구나 놀이터에서 다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이터라는 머릿속의 개념 때문에 그런 위험을 노래한다는 생각을 미처 못 한 것입니다. 이 학생은 놀이터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자신이 처했던 위험한 경험을 시로 쓸 생각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남들이 흘려버리기 쉬운 것을 한 번 깊이 생각해서 옮겨 놓는 것도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많지요.   시작과 끝 부분에 비슷한 말을 반복하면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냅니다. 물론 이 학생이 그러한 시의 이론을 알고 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잘 정리하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명쾌히 몰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이 시를 잘 짓는 것입니다. 시의 이론을 배운다고 해서 시를 잘 쓸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움직이는 방향을 면밀히 살피면 복잡한 시의 이론에서 설명하는 효과를 나도 모르게 시에서 발휘하게 됩니다.   봉진이                김준석(2-1)   우리 반의 실장 우리 반의 덩치 얼굴에는 여드름 꽃.   얼굴에는 하얀 미소를 띠고 귀에는 항상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부르네.   내가 놀리면 도끼눈을 뜨고 나는 도망을 가네. 잡히면 죽으니까.     사람의 특징을 아주 짧게 요약하여 보여주는 것도 시의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무수히 만나면서 살고 사람 사이에서 감정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런 감정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서 그들의 특징을 노래하는 것 역시 즐거운 일입니다.   맨 끝에 보듯이 장난을 많이 치는 관계인가 봅니다. 잡히면 죽는다는 표현은 좀 과장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친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장난치고 도망가고 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게 상황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내 필통               채희성(2-1)   내 필통은 갈곳 없는 볼펜들의 종착점 갈곳 없는 볼펜은 다 내 필통으로 온다.   교실에 굴러다니는 볼펜도…… 복도에 굴러다니는 볼펜도……   내 눈에만 띠면 전부 다 내 필통으로 모여든다. 그래서 내 필통에는 내 볼펜 조금. 줏은 볼펜 하나 가득.     우리가 자랄 적에는 연필도 귀했고 볼펜은 더더욱 귀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잉크를 펜촉으로 찍어서 썼지요. 그런데 잉크는 병에 담겨서 가지고 다니면 아주 불편합니다. 깨지는 수도 있고 엎질러지는 수도 있고, 또 펜촉은 너무 날카로워서 찔리는 수도 있습니다. 연필 같은 경우에는 쥐고 쓸 수 없을 정도로 짧게 닳으면 볼펜깍지에 끼워서 썼습니다. 종이도 그렇습니다. 그때는 질도 나빴고 귀했습니다. 교과서도 몇 해를 건너면서 빌려다 보아야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새는 물자가 너무 흔해서 탈입니다. 연필은 절반도 쓰기 전에 잃어버리기 일쑤이고, 볼펜 종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생들이 돌아가고 난 교실에 가보면 볼펜이나 공책 따위는 쉽게 주울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은 볼펜을 줍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지요? 자신의 그런 습관을 잘 묘사한 작품입니다. 옛날 같으면 남의 볼펜을 주워서 자기 필통에 넣기 쉽지 않습니다. 도둑놈으로 몰릴 테니까요. 그런데 요즘이야 물자가 흔한 세상이니 설사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 해도 그거 돌려달라고 할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흘린 것이니 말이죠.   이와 같이 자신의 습관을 소재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재미입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버릇이나 생활을 꼼꼼히 살피는 것이 시를 잘 쓰는 지름길입니다. 시는 주변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3년 마지막 행의 은 이 맞겠지요? 그러나 이런 거 함부로 따지면 안 된다고 아까 말했죠? 그 사람의 말버릇이라고 봐도 되기 때문입니다. 시에서는 개인의 그러한 소소한 버릇까지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우유             길영근(2-1)   월 화 수 목 금 토 매일 매일 나오는 매일 우유   화요일엔 정근이 얼굴처럼 검은 초코 우유   금요일엔  소풍을 가고 싶던지 피크닉 우유   우리 학교엔 언제나 3가지 맛! 우유가 찾아온다.     요새는 학교마다 거의 우유를 먹습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지요. 면장 아들이라든가 아니면 최소한 양조장 주인의 조카쯤은 되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유 역시 흔한 것이 돼놓으니, 이젠 잘 먹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학생들이 돌아간 뒤에 교실에 가보면 교탁에는 꼭 우유가 몇 개씩 남아있습니다. 그 만큼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학교에서는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이 우유를 먹도록 갖가지 꾀를 냅니다. 그 중에 좋은 것이 입맛을 당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 우유를 주다가 어떤 때는 딸기 우유, 초콜렛 우유같이 다른 맛이 나는 우유를 주기도 하지요. 어떻게든 먹여보려는 선생님들의 노력입니다.   이 시는 그렇게 해서 배달되는 우유를 보며 장난삼아 쓴 것입니다. 매일 우유, 초코 우유, 피크닉 우유. 이렇게 오는 우유 이름을 갖고 나름대로 해석을 붙여본 것이죠. 매일 오니까 , 초코 우유는 밤색이니까 친구의 얼굴색을 닮아서 , 피크닉에서는 소풍을 연상하고는 , 모두가 친근하고 엉뚱한 생각입니다.   발상이 참 재미있지요? 그런데 잘 보면 비유도 있어서 시 전체의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의 흐름은 매일 공급되는 우유에 대해서 쓴 것이기 때문에 비유에서 다루지 않고 이 단원에서 다룬 것입니다. 이렇게 재미를 느끼면서 시를 쓰다 보면 나중에 저절로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게 됩니다. 그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생활 주변에서 재미있는 시의 소재를 찾는 일입니다.   처마 밑 고드름                   노은희(1-1)   언제 녹아서 고드름이 되었는지 처마 밑엔 고드름이 줄지어 서있다.   누가 더 키 크나, 누가 더 뚱뚱하나 대결하기 바쁘다.   제일 큰 고드름은 뽐내다가 어느 개구쟁이의 손에 떼어지고   두 번째로 큰 고드름도 뽐내다가 두 번째 개구쟁이의 손에 떼어진다.   이렇게 처마 밑의 고드름들은 개구쟁이 손에 하나 둘씩 떼어져 간다.   언제 녹아서 고드름이 되었는지 처마 밑엔 고드름이 줄지어 서있다.     이 시에도 역시 비유가 나오지요? 그렇지만, 비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고드름을 보고서 그것을 관찰했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고드름은 추녀 끝에서 땅 쪽으로 자라지요. 추울수록 굵기도 굵어지다가 햇빛을 받으면 물을 뚝뚝 흘립니다. 아이들이 이것을 신기하게 여기고서는 똑똑 떼어서 먹기도 하고 차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눈에 보이는 대로 정리하여 적은 것이지요. 어른들의 눈에는 보일 리 없는 현상입니다. 세심한 관찰이 이룬 일이지요.   그림                정윤섭(3-1)   하얀 백짓장 위에 색색깔로 그림을 그린다. 살색으로 얼굴을 그리고 검은색으론 머리를 그리고 파랑색으로는 옷을 그리고 회색으로 바지를 그리면 나의 모습 완성   옆에서 누군 줄 모르는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서 빨간색을 날린다. 누군 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사람이 누굴까?   다음 장으로 넘기고 그림을 한 장 더 그린다. 이번엔 그 사람이 보인다. 누구지? 아직 내가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나에 사랑에 상대 그 사람의 색깔을 모르겠다. 나는 사람에 색깔을 모르는 아직 애송이다.     사춘기 학생이면 누구나 이성에 대해서 사랑을 느낍니다. 대부분 그것이 부끄러운 것인 줄 알고 숨기지요. 그리고는 혼자서 끙끙 앓습니다. 표현력이라도 좋고 배짱이라도 좋으면 과감하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면 되는데,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속을 속 태우지요. 그런 감정을 시로 쓴 것입니다. 그것을 그림에다 비유를 했고, 그림을 보면서 완성하고픈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사춘기의 섬세한 감수성이 아주 잘 나타난 경우가 되겠습니다.   시험             김영주(2-1)   시험은 나에게 어려운 문제 시험을 보면 틀릴까봐 마음이 콩닥콩닥.   풀고도 걱정되어 또다시 풀어보고 수학시험을 보면 내 마음은 긴장하듯   시험은 왜 어려울까? 아이들은 고민하네. 틀린 문제 싫어   시험을 부모님께 보여 주면 부모님이 나에게 하시는 잔소리.     자, 이 시는 학생들의 절실한 고민을 담은 시지요? 무슨 기법이나 기술을 가지고 쓴 시가 아닙니다. 성적을 두고 걱정되는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저 시험 때문에 애간장 타는 심정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직접 말하듯이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는 감동을 줍니다. 아주 많은 시들이 이 방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모기향                엄유진(안양예고 1)   초등학교 1학년 정식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친구들과 얼음땡을 하고 들어와서는 얼굴과 손, 발에 물만 대충 묻히고 잔다 땀냄새 때문에 극성을 부리는 모기 소리에 찡얼대며 일어난 준식이는 미색바탕에 백합 무늬가 그려져 있는 이빠진 접시 위에 모기향을 피워 동생 머리맡에 놓는다. 그래도 형이라고.                     2003년 경남대 제32회 전국고교생 한마백일장 운문 장원   이 시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한 형이 동생을 위해 모기향을 피우는 사연을 동작이 이어지는 대로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시답게 해주는 것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맨 마지막에 제시함으로써 앞에서 무심한 듯이 묘사해온 구절들을 한 순간에 시로 만들어줍니다. 그럼으로써 동생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을 아주 잘 나타냈습니다.   이런 시를 보면 좋은 시를 쓰는 것은 글재주가 아니라 주변의 사소한 일들에 대한 관심과 관찰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에서도 특별히 엄청난 기교나 재주가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생을 생각하는 한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여 그것을 시로 써볼 생각을 한 계기가 좋은 시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이 학생이 시를 쓰는 재주가 부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겠죠? 이 상황을 이만큼 간략하면서도 필요한 말들만 골라 쓸 줄 아는 것도 아주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오랜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죠.     앞서 살펴본 두 방법, 즉 1)빗대어 쓰기와 2)그리듯이 쓰기는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방법인 직접 말하기 수법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느낀 점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됩니다. 물론 어떻게 쓰면 시가 단단해지고 군더더기 없이 자기의 생각이 잘 전달될 것인가 하는 것을 익히고 연습하는 숙제가 남아있습니다만, 달리기 연습을 많이 한 학생이 잘 달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많은 작품을 쓰면서 조금씩 숙달시켜 가면 될 일입니다.     금강산   글 깨나 한다는 사람치고 읊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림 깨나 그린다는 사람치고 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런 작품을 위해 나도 기꺼이 절망의 순간을 맞고 싶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조화옹의 손길 앞에서 절망한 나머지 시 한 구절 읊조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이 너무 긴 나머지 막상 보았을 때 조화옹의 솜씨가 그 동안 꿈속에서 그려낸 내 작품만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순전히 생각만으로 썼습니다. 비유도 없고 상징도 없고 이미지도 없습니다. 그냥 금강산을 생각하는 마음뿐입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아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지요. 그런데 분단으로 인해서 남쪽에서는 가볼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금강산에 다녀온 옛날 분들한테 금강산 칭찬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금강산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금강산을 마음속에 만들었습니다. 분단의 세월이 깊어가면서 그 그림 역시 화려해지지요. 한 사람의 상상력을 최대한 가동해서 그렸으니까요.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북한 금강산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얼마 전부터는 육로로도 가지요. 그래서 지금은 갈 수 있는데도 이제는 겁이 나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생각한 금강산보다 실제 금강산이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나는 겁니다. 오랜 분단이 사람의 마음속에 만들어놓은 상처지요. 이런 상태를 있는 그대로 생각 따라 적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만을 적어도 시가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이 작품은 비유나 이미지가 없이 생각으로만 썼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꼭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생각을 직접 말하는 방법으로 시를 쓰더라도 그 안에 이미지도 나타나고 비유도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더 흔한 방법입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가족이 서울 나들이를 간 적이 있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롯데월드를 가서 놀다 오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려서 잠실 가는 지하철을 탔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아내, 그리고 아이 둘, 해서 모두 넷이었습니다. 낮이어서 그랬는지 자리가 비는 바람에 우리 넷은 나란히 앉았습니다. 몇 시간 기차에 시달리다 보니 피곤했는지 옆에 앉은 아내가 꾸벅꾸벅 졸다가 제 어깨에 머리를 대는 겁니다. 곧 이어서 아이들도 엄마 옆구리에 끼여서 졸더구만요.   그런데 저는 졸 수가 없는 겁니다. 넷 중에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저뿐이고 만약에 제가 졸다가 역을 지나치면 낭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졸음이 쏟아지는데도 저는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마음속으로 내려야 할 역을 꼽으면서 기다렸지요.   그런데 그 순간 묘한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이거 상황이 꼭 제가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남편이라고 아빠라고 한 가족이 저를 따라나섰는데, 저 자신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잘 알 수 없고, 그러면서도 한 가족을 이끌고 그들을 어디론가 데려가는 제 처지가 생각난 겁니다. 순간 순간의 내 결정에 따라서 이들의 삶도 바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묘한 상황입니까?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흘러가는 것이 내 인생인데, 그런 인생에 또 다른 인생 여럿이 딸려서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면서 막막해지더구만요.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나이 마흔 아저씨가 어디 울 수가 있나요? 한 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갑자기 시의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담담히 속으로 이 시를 썼습니다. 그리곤 집에 와서 정리했지요.     지하철에서   그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운이 좋게도 우리 식구 넷이서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아이들이 졸고, 양쪽 옆구리에 아이들의 몸을 받친 아내도 존다. 롯데월드 가는 길, 나는 잠이 오질 않는다. 우리 식구가 누릴 한 때의 즐거움을 향하여 지하철이야 잠실에서 끝나겠지만, 그곳에서 끝나지 않을 또 다른 길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살아갈수록 길은 험하고 흐려지는데 방향을 물어도 분명해지는 건 없고 캄캄한 창 밖은 불빛이 번뇌처럼 스쳐간다. 종착점과 방향을 분명히 모르는 한 가장과 그 가장을 철썩 같이 믿고 따라나선 곤한 식솔들을 태우고 지하철은 덜컹거리는 어둠 속을 달린다. 롯데월드 가는 길 간간이 서는 간이역을 잊은 채 식솔들은 곤히 잠들고 나는 잠이 오지 않는 지하철에서.     비유도 나오고 이미지도 나오지만 시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지하철을 타고 롯데월드를 찾아가던 체험입니다. 이 체험의 과정에서 깨달은 내용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직접 말하기의 수법으로 시는 써집니다.     라는 창작 방법을 마치기 전에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하기는 누군가 듣는 것을 전제로 하고 속삭이듯 쓰는 것입니다. 산문 중에서 그러한 방법으로 쓰는 것이 바로 입니다. 따라서 편지의 어법을 시에서 활용하면 아주 좋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해바라기의 사랑                 최희정(제천상고 2)   당신의 뒷모습에서 빗물이 묻어납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형태를 흐리게 하고 내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언제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서 있는 기다림의 마음을, 그것만으로도 행복과 슬픔을 모두 느낄 수 있는 해바라기의 사랑을 당신은 모르십니다.   바람이 세차어도 꺼지지 않을 촛불 하나 가지고 있지만 당신에게서 묻어나온 빗물에 내 가진 촛불 하나 슬픔으로 가물거립니다. 이젠 돌아서서 날 보아주지 않으시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편지의 투를 흉내 낸 시입니다. 누군가에게 말하는 형태로 쓰였지요? 물론 이 시의 원리는 비유를 활용한 방법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면서 삽니다. 해와 해바라기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관계로 바꿔놓고서 쓴 시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 비유가 아니라 말투입니다. 편지에 쓰이는 말투로 쓰면 시를 쓰기가 굉장히 편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시를 써야 할지 막막할 때는 편지투를 사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신혼 초에 주말부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요일 날 새벽에 떠나서 토요일 날 오후에 오는 것이죠. 사랑하니까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이 결혼인데, 결혼을 하자마자 떨어져서 일주일에 한 번 보니 얼마나 애절하겠어요? 월요일마다 아내는 눈물바람입니다. 그런 아내를 보는 저의 심사는 어떻겠어요. 감정이 북받칠 밖에요.   그런데 현실이 현실이다 보니 아내를 위로해야 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편지를 썼지요. 그런데 감정이 애절하다 보니 써놓은 편지를 읽어보면 시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참에 시를 쓰자 마음을 먹고 그날 그날의 느낌을 시로 썼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것을 엽서에 적어서 보냈습니다. 아내가 무척 감동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어렵던 시절을 건넜습니다. 옛날에 냈던 시집에서 두 편만 소개합니다.   완행열차   좌석표가 이미 매진이 되어 하는 수 없이 완행열차에 올랐습니다. 긴 의자 두 줄뿐인 맨 뒷칸으로 가니 텅 빈 것이, 속도에 떠있는 것은 덜컹거리는 고요와 나 혼자 뿐입니다. 느긋한 마음에 늘어질 대로 늘어져 긴 의자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웠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이렇게 마음 편하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허리띠를 한 칸 늘여놓고 돌아갈 그 어떤 곳이 있다는 것은 이 각박한 세상에 당신이 내게 내린 커다란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투명한 햇살과 시원한 봄바람이 열린 창으로 손뼉 치듯 쏟아집니다.     이 시는 정말 편지 그대로지요? 일요일 날 아내를 헤어져서 돌아오다가 기차를 타고서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꽃   아름다움이란 개나리, 튜울립, 장미 같은 꽃들을 염두에 둔 말이지요. 그러나 복숭아, 살구 혹은 사과나 배꽃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들임을 이 아침 과수원 길에 잠시 서서 깨닫습니다. 목적에 가려진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삶의 그늘에 가려진 아름다움을 어느 날의 당신에게서 문득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듯이 아름다움이 목적인 꽃나무들보다 더 아름다운 과일나무의 꽃들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아침입니다. 꽃이 지면 그저 풀일 뿐인 꽃들과 가지마다 풍성한 가을의 예감을 매달고 있는 과일나무의 아름다움을 잠시 생각하곤 이 시간 생활의 먼지 속에 가려져 있을 당신의 빛과 풍성한 당신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비유가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유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지투로 된 방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자, 이렇게 해서 시를 쓰는 원리 세 가지를 다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이렇게 분류한 것은 이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칭찬 받을 일인지 비난  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읽고서 실제로 시 쓰는 데 도움을 받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고 저러고,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를 했는데, 그냥 이렇게 설명만 해놓으면 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방법에 대해 간단한 이름을 한 번 붙여볼까 합니다.   세 가지 방법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는 내 생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비유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서 같은 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과 같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것은 서로 다른 사물의 사이에서 동일점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시의 시학’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요?   두 번째 는 이미지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지로 말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그림을 그린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쉽게 ‘그리기의 시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는 자기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는 데는 듣는 사람을 전제로 합니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의 시학’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서툴지만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빗대어 표현하기 - 동일시의 시학 ②그리듯이 쓰기 - 그리기의 시학 ③직접 말하기 - 이야기의 시학  4)변형과 종합     시를 쓰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라는 것이 여태까지 말해온 지론이었습니다. 방법상으로 보면 분명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을 섞어서 쓰는 또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방법을 둘 또는 세 가지를 모두 섞어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원칙은 세 가지이지만, 이 섞어 쓰는 정도에 따라서 다시 몇 가지로 더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변형과 종합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변형의 방법에 대해 한 번 훑어보고 가겠습니다. 그냥 참고로 하기 바랍니다. 어차피 위의 세 가지 원칙만 알면 나머지 변형은 그 세 가지를 가지고 적당히 섞은 것이기 때문에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순수하게 위의 방법 한 가지만으로 쓴 시들이 있을 것입니다.   [1] 순수한 동일시의 시학 [2] 순수한 그리기의 시학 [3] 순수한 이야기의 시학   여기에다가 두 가지를 섞어서 쓴 것이 있을 수 있으니, 그 경우의 수를 만들어보면 다음 네 가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1+2] -[1+3] -[2+3] -[1+2+3]     관찰력이 민감한 학생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1+2]와 [2+1]은 다른 것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수학에서는 맞는데 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섞인 양상이 거의 비슷합니다. 물론 동일시의 시학을 주로 하고 그리기의 시학을 곁들이로 하는 것과, 그리기의 시학을 주로 하고 동일시의 시학을 곁들이로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막상 그 정도로 정확하게 구별해서 섞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섞이나 저렇게 섞이나 다 비슷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것은 [3]을 뼈대로 하고 거기에 [1]이나 [2]를 추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접하는 시의 한 7~80% 가량이 이런 형태에 속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느끼거나 깨달은 것을 담담히 서술하면서 거기에다가 신선한 비유와 상징, 또는 이미지를 곁들여 쓰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자세한 구별이 필요하다면 더 자세히 나누어도 됩니다. 다만 그렇게 너무 세세히 구별하면 시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이런 정도로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법이 섞인 시를 보겠습니다. 유성음            -야학일기 3.-                               강규선   저무는 날. 처음부터 우리들은 흔들림이었고.           Ⅰ 비틀대는 수업을 가로지르며 네가 다가왔다. 썬생니, 수업을 하노라면 흐르는 시간 따라 떠돌던 마음도 문득 깨어나, 그렇지 너도 읽어야지, 국어 책을 읽히고, 순간 깜빡이는 불빛으로 불안하던 눈동자들.   저무는 바람 속. 무심히 드러누운 활자 사이를 더듬으며 비틀대는 반신불구, 네 혀 주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한 어둠을 보았다. 종결어미 없이 스러지는 너의 말 끝으로 부끄러이 스며드는 한 얼굴을 보았다. 견고하게 아름답던 세상 풍경마저 비스듬히 돌아누워 아 우 어 우 으, 으, 으.   결국은 소리죽인 울음으로 끝나가던 책 읽기. 끝없이 응고하며 주저앉는 너의 침묵이 크낙한 말의 벽으로 일어서는 역설 앞에서 웅웅대며 흩어지던 시야 끝 돌연 반신불구처럼 뒤틀며 키득이던 아이들.              Ⅱ   모든 우리들은 어디에도 없어. 오늘 국어시간. 하루의 안전을 확인하듯 조심스레 출석을 부르면, 너의 번호 위에서 언뜻 비틀대는, 붉은 두 줄의 확고함. 꿈꾸듯 걸어온 나의 실족들을, 꼭꼭 디디며 이어서는 너의 빈자리. 사실 산다는 것은 흔들림 이외에 또 무엇인가. 살아있는 우리들은 잠시 역설일 뿐이라며 교탁을 후려치는 불빛.     그러나 이제 책을 펴야지. 가진 것 너무 많은 우리여서 서글픈 확신 하나, 아는 것이 힘. 어둠 저 너머로 별 하나 흐르듯 자 찔끈 두 눈 감고 오늘은 유성음을 공부할 차례. 저…… 선생님. 유성음(流星音)이란 우리들처럼 어디에도 없는 소리인가요. 아 아니야 유성음(有聲音)은 떨려, 떨리는 음. 코를 잡고 발음해 봐, ㄴ-ㄹ-ㅁ-ㅇ- 그래 너희들처럼 코가 울리지 울리는 너희들이 유성음.     이라는 부제가 달린 것으로 봐서는 연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야간학교 생활을 다룬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추려보면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발음을 잘 못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발음이 잘 안 되니 국어시간에 곤란하겠지요. 그 때문에 아이들은 웃고요. 당사자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교사의 마음은 너무나 아프고 게다가 그런 상황을 어찌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교사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야간학교는 일반 학교를 갈 여건이 못 돼서 다니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배우고자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은 사람이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체험이 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고 있지요. 직접 말하기를 택하는 입니다. 그런데 섬뜩하면서도 날카로운 표현들이 들어있습니다.   무심히 드러누운 활자 말의 벽 반신불구처럼  너의 번호 위에서 언뜻 비틀대는, 붉은 두 줄의 확고함 유성음(流星音) - 유성음(有聲音) 울리는 너희들이 유성음.     이런 표현들은 비유에 바탕을 둔 표현들입니다. 의인화도 들어있고요. 또 자세히 보면 상징도 들어있습니다. 다음이 그런 구절들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들은 / 흔들림이었고 우뚝 솟아오르는 한 어둠을 꿈꾸듯 걸어온 나의 실족들을, 꼭꼭 디디며 이어서는 너의 빈자리.   의인화니 상징이니 하는 것들은 빗대어 쓰기의 수법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에 이 결합된 경우입니다.   이렇게 시는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이 결합하면서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학생의 작품을 보겠습니다.   대망석재                박미라(옥천고)   바닥에 널린 돌조각들 밟고 선 아버지의 신발 속으로 불편한 시간이 들어가 있다 아버지는 돌을 깎는다 살점 떨어져나갈수록 더 선명한 눈물자국 보여주는 대리석에 형의 숨소리 박아넣는다 돈을 벌어오겠다며 뛰쳐나간 형은 석재상의 간판 주름처럼 거미줄이 생기고 색 바래가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형을 기다리며 날마다 무딘 망치소리 사이에 흐느끼는 신음 채워넣는다 전기톱이 살을 뚫고 오는 소리에 톱날을 물어버리는 대리석 돌가루 날리는 허공에 물 뿌려보지만 뿌연 그리움은 쉽게 진정되지 못한다 아버지의 닳은 옷소매에 채워지는 기다림 털어도 헤진 자리 깊숙이 파고 들어가 털어지지 않는다 망부석처럼 말이 없는 석상 앞에서 아버지는 굳게 다문 입으로 바람 드나드는 것 허락하지 않은 채 구름도 멈춰선 하늘을 오래 바라본다 신발 속에서 뒤척이는 돌조각들 서로 부딪혀 모서리 헐어내고                         2003년 배재대 청소년 소월문학상 운문부 우수     이 시는 석재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삶을 요약한 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묘사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을 깎아서 석물을 만들면서 이루어지는 동작을 동원시켜서 말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거기에 할 말이 사이사이 끼어들어서 읽는 사람에게 설명을 해줍니다. 돈벌이가 안 되는지 형은 돈을 벌어오겠다며 뛰쳐나갔습니다. 그 만큼 아버지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지요. 그런데 시인은 아버지의 생활이 힘들고 어렵다고 쓰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을 석재상의 여러 도구와 작업으로 대신 묘사를 하면서 중간 중간에 자기가 하고픈 말을 곁들인 것입니다. 묘사와 할 말이 적당히 배합된 작품입니다.     시의 형식을 보고서 발상법을 구별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예컨대 비유를 사용하는 동일시의 시학에서도 가짓수를 무제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동일시의 시학은 비유이기 때문에 비유하는 것과 비유 당하는 것 두 가지가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그것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관념을 더 많이 드러내느냐 보조관념을 더 많이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시의 모습이 많이 달라집니다. 원관념만 많이 드러내고 보조관념은 조금만 드러낸 시와, 원관념은 조금 드러나고 보조관념이 많이 드러난 시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아주 조화를 이루어서 균형 잡히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구별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원관념을 더 많이 드러낸 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비슷하게 드러난 시 -보조관념을 더 많이 드러낸 시   이렇게 하면 셋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 사이사이에도 무한정으로 종류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이사이에 무수히 색깔이 들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지요.   -원관념 10% + 보조관념 90% -원관념 20% + 보조관념 80% -원관념 30% + 보조관념 70% -원관념 40% + 보조관념 60% …………… -원관념 90% + 보조관념 10%     물론 이 사이에도 계속 숫자를 잘게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현실 속에서 정확히 그숫자만큼 달아서 시를 판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요. 이론상으로는 그렇다는 얘깁니다.   게다가 이것을 위의 분류와 결합시키면 시의 가짓수는 무한대에 가깝게 많아집니다. 그것을 다 다루어 볼까요? 어때요? 머리가 딱딱 아프지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방법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황에 따라서 섞여서 나타난다고 보면 간단합니다. 5)퇴고하기     시에서 이미 써놓은 작품에 손을 대거나 고치는 것을 퇴고(推敲)라고 합니다. 물론 한자말이죠. 이 말은 중국의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아니! 이 어려운 말은 쉬운 말로 바꿔 쓸 생각을 안 하셨나요? 더욱이 남의 것을 갖다 쓰는 것은 더 싫어하시면서. 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 법도 합니다. 없다구요? 없으면 말구요. 하하하.   사람이 하는 일이 전문화가 이루어지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려운 용어가 등장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말을 쓰지 않고 전문용어를 쓴다고 해서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자기들이 하고 있다는 식의 권위를 세운다든지, 그것을 바탕으로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한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법률 용어나 의학 용어를 보면 이런 혐의를 지울 수 없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가피한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영어나 한문 같은 어려운 말을 써서 일반인들이 따라가기 참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뜻 보면 이 퇴고라는 말도 그렇게 보입니다. 어려운 말이지요. 그 말이 생겨난 사연까지 알아야 하는 경우니까요. 그런데 이 말에 작품을 고치는 어떤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사연이 들어있다면 어떨까요? 그런 사연으로 인해서 시 쓰는 사람들 사이에 관습으로 전해졌다면, 그 아름다운 사연을 기억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 말들은 좀 어렵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연을 좀 보겠습니다.     옛날 당나라 말기에 가도(賈島)라는 중이 있었습니다. 이 중이 나귀를 타고 가다가 기가 막힌 시 한 구절을 얻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새는 연못가 나무에 깃들고,(鳥宿池邊樹)     중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   어때요? 길을 가다가 저녁때가 되면 시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할 법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써놓고 나니 이 자가 문제였습니다. 중이 문 앞에 서서 인기척을 낼 때 두드린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까, 민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까 잘 판단이 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 위에서 직접 동작을 해보았습니다. 미는 동작을 했다가 두드리는 동작을 했다가, 이렇게 혼자 움직이고 흥얼거리며 어떤 글자를 쓸까 골똘히 고민하는 사이 나귀는 등에 탄 사람이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자 엉뚱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간 곳은 공교롭게도 경윤의 행렬이었습니다.   경윤(京尹)은 요즘으로 치면 서울시장쯤 됩니다. 당시 서울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가 호위군사를 대동하여 지나가는 행렬로 밀고 들어간 것입니다. 당연히 소란이 일었지요. 으리으리한 원님 행차가 지나가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어디에 온 줄도 모르고 밀고 두드리는 동작을 하면서 흥얼거리고 있으니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겠어요? 시위들이 당장 붙잡아서 경윤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자 그 경윤은 어찌 된 사연이냐고 물었고, 가도는 시 구절에 들어갈 말을 고르지 못해서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그랬다고 사연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경윤은 어떤 구절이냐고 물었고, 가도는 앞의 두 구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구절을 한참 생각하던 그 경윤은 가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 경윤은 누구냐 하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유명한 한유라는 선비였습니다. 다행히도 그 나귀는 가도라는 이름 없는 한 중을 당시의 대학자이자 높은 벼슬아치에게 데려가 소개를 해준 셈입니다. 아주 묘한 인연이지요. 사정이 이쯤 되니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겠어요? 당연히 친해졌겠지요? 이 사연을 전해주는 이야기책의 끝 구절이 ‘드디어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여 돌아갔다’(遂與竝轡而歸)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 뒷이야기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한유의 권유로 이 중은 환속하여 나중에 벼슬생활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한유의 명성 덕분에 단숨에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시가 지닌 경향은 다소 달랐습니다. 한유는 당나라 말기의 시 풍조가 화려한 표현을 좋아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그것을 비판하면서 꾸밈이 없는 옛날 한나라 때의 순수한 분위기로 돌아가자는 쪽이었고 가도는 당시 화려한 재주를 한껏 뽐내며 멋을 부리는 쪽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친다는 뜻으로 쓰는 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가도가 로 할 것이냐 로 할 것이냐 고민하듯이 정성 들여서 고친다는 뜻이 담긴 말이지요. 이 정도면 아름다운 일 아닌가요? 그래서 라는 말보다는 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시를 생각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퇴고를 하는 방법에 무슨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그리고 많이 쓰다 보면 저절로 고치는 요령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런 일에 수학 문제 풀 듯이 어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죠. 시는 이 세상에는 없는 마음속의 느낌을 언어에 담아서 질서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이 쓰다 보면 저만의 어떤 원칙이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창작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무언가 기댈 언덕은 있어야겠죠? 먼저 시를 쓸 때는 발상을 메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메모를 마친 다음에 그 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봅니다. 쉽게 말하면 주제를 찾는 것입니다. 처음 시상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는 주제가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상상만으로도 존재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대부분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입니다. 나머지 표현 방법들은 이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표현은 이 시의 주제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작용한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상을 메모했으면 주제를 한 번 더 생각하고, 그 주제에 맞는 내용을 보충합니다. 이 때의 내용이란 주제를 보충해주는 할말도 포함되고 거기에 필요한 표현이나 장식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는 다시 처음부터 읽어가면서 주제를 전달해주는데 잘 어울리는 이미지들은 놔두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잘라버립니다. 라고 하는 것은, 표현이 아깝다고 그대로 두지 말라는 얘깁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표현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이런저런 좋은 표현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시에 필요할 때 쓰죠. 좋은 표현을 얻는 일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써 얻은 구절들은 버리기 아까워하죠.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바로 그 아까운 구절 때문에 시 전체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버린다고 해서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쓰는 날이 생기니 염려 말고 지금 당장은 과감하게 버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읽어가면서 부족한 부분은 표현이든 주제든 추가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읽어 가면서 다듬으면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몇 차례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읽어가면서 가락도 생기고 눈으로 볼 때와는 또 다른 단점들이 눈에 띕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 발상부터 재빨리 적는다. ② 초고를 보면서 시의 주제를 명확히 정한다. ③ 그 주제를 중심으로 이미지를 재배치한다. ④ 불필요하거나 조금 거리가 먼 이미지나 표현은 과감하게 잘라낸다. ⑤ 다시 읽으면서 부족한 주제나 표현을 보충한다. ⑥ 세밀한 부분을 다듬는다. ⑦ 몇 차례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면 퇴고의 과정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비유로 쓰는 동일시의 시학을 소개하면서 이란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그 작품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목이 삐끗해서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고 내 몸 속의 뼈가 드러난 그 사진을 보면서 쓴 시입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어떤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대충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흉측한 모든 뼈대를 살가죽으로 덮고 헝겊으로 잘 싸기까지 한 저 백악기나 쥐라기의 한 공룡이다.   정형외과에서 찍은 엑스레이 사진에 내 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등뒤로 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목뼈부터 등뼈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 뼈들의 나열. 엑스레이 앞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제야 풀린다. 옷으로 덮어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탐욕과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밖으로 치솟던 공격성과 난폭함 이런 것들은 공룡한테 당연한 것이다. 어디서 말미암은 것인지 분명해진다.   수 억 년이 지났는데도 완전히 퇴화하지 못한 채 내 살과 가죽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한 마리 공룡이 깃들어있다.     먼저 형광 사진에서 본 뼈를 통해서 나를 공룡으로 규정을 하고, 그 모습의 실상을 제시한 다음에, 내 속의 난폭성이 공룡에서 왔음을 말한 다음에, 그런 공룡이 내 몸 속에 들어있다고 제시하고자 한 방법입니다. 그 순서대로 정리됐죠.   그런데 좀 거칩니다. 이렇게 제시하면 뭐 시라고 못 할 것까지는 없지만 잘 썼다고 보기는 힘들겠죠. 이렇게 네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독자가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못하고 저절로 따라가게 하려면 이 비약과 비약 사이를 좀 더 매끈하게 연결시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제입니다. 이 정도에서도 주제가 분명하기는 합니다. 육식공룡의 탐욕성이 내 안이 있다는 것이죠. 그 탐욕성에 대한 설명이 그냥 뼈대만 나와 있어요. 그래서 공룡과 인간의 탐욕성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한 추가설명과,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이번 퇴고의 목적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쳤습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약육강식이 판을 치던 저 쥐라기나 백악기의 한 지층에서 살아온 한 마리 육식공룡임을 정형외과에 와서 알았다. 엑스레이선이 통과한 뒤 형광불로 밝혀진 벽에 드러나는 나의 본모습. 비록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듯한 헝겊으로 덮기는 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이 흑백으로 밝혀주는 나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살에 가려서 거울로는 볼 수 없었지만 목에서부터 등을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의 화려한 뼈들이 엑스레이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내 마음속엣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탐욕과 옷으로 덮어도 송곳처럼 밖으로 치밀던 공격성,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는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하던 것들이 질서정연한 뼈와 뼈 사이로 가지런하게 이제야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의 뿔은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내 살과 살갗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한 마리 공룡이 깃들어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연을 없앴다는 겁니다. 연은 의미와 이미지를 구성하는 한 매듭입니다. 대개는 연을 넘어갈 때 상상력의 비약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상상력의 비약이라고는 두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몸의 뼈 배열이 공룡의 뼈와 같기 때문에 공룡의 탐욕성이 내게도 남아있다는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두 상황을 설명하려면 시가 길어질 것이고, 시가 길어진 것에서 굳이 연을 나누어야 좋은 효과를 얻기 어렵다고 본 것이죠. 차라리 설명하듯이 끌고 나가면서 두 가지를 서로 대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연을 없애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고 나니까 좀 더 상황이 자세하게 설명되었고, 또 이 시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도 명확히 잡혔습니다. 그런데 너무 길어졌고, 또 설명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앞쪽의 든가 든가, 다든가, 라든가 하는 것의 거의 산문 수준입니다. 그래서 산문 투의 문장을 없애고 군더더기를 조금 덜어내는 작업이 남았습니다. 아래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드러날 것입니다.     공룡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 듯한 헝겊으로 몸뚱이를 덮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에 비친 나는 쥐라기나 백악기 어느 한 지층 속에 납작하게 박혀있어야 할 한 마리 공룡. 목에서부터 등마루를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르스의 화려한 뼈들이 흑백의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억 년 내력의 탐욕과 난폭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뼈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이제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데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물욕과 옷 밖으로 송곳처럼 치밀던 공격성, 그리고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내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말미암는지 알 수 없던 것들이 공룡의 뼈들 사이로 분명히 드러난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칠 것임을 예고하며 등줄기 따라 톱날처럼 뻗어간 우람한 뼈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 끝의 뿔은 엉덩이 밑의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감추었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진화하지 못한 채 한 마리 공룡이 내 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문장의 배열 구조가 바뀌고 위치가 바뀌면서 좀 더 단정해졌다는 느낌이 올 것입니다. 형광벽에서 공룡의 뼈를 연상하고 그것을 정신세계까지 연장하여 욕망과 탐욕에 시달리는 나, 나아가 인간의 속성을 고발하고자 한 작품이 된 것입니다. 큰 뼈대는 변하지 않았지만, 중간중간의 말투나 문장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바뀐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시를 고치는 방법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많이 써나가는 과정에서 이런 점들을 터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부터 시에 천재가 없다고 자꾸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과정 때문입니다. 발상은 천재성으로 얻는 것일 수 있지만, 이런 것은 천재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천재 역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충북 보은에 가면 장안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인내천을 기치로 내건 동학의 출발점이 된 곳이죠. 원래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경주사람이었습니다. 창시자 최제우의 후계자였죠. 그런데 동학을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규정한 관청의 탄압을 피해 깊은 산중으로 숨었습니다. 북으로 올라가서 소백산 기슭의 마을에 숨었다가 다시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보은의 깊은 산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숨어 지냅니다. 교세가 확장되자 신도들은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초대교주 최제우의 죄를 풀어달라는 신원운동을 합니다. 초대교주 신원운동을 하려면 2대교주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그가 사는 곳으로 모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각 지역의 동학 지도자들은 최시형이 살던 보은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이 장안입니다.   이 신원운동을 시발점으로 하여 한국의 근대사는 벌집을 쑤셔놓은 모양으로 요동을 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동학농민전쟁이 그것입니다. 정부는 백성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탐관오리들은 날뛰고 하니 참을 수 없는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일어납니다.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군까지 가세한 정부군을 상대로 몇 년에 걸쳐 전쟁을 하지요. 그리고는 쫓기고 쫓긴 농민군이 다시 보은의 북실이라는 곳에 와서 마지막으로 궤멸 당하고 맙니다. 이 북실이라는 곳은 장안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의 시작과 끝이 충북 보은이라는 곳에 있는 셈입니다.   지금 북실에는 종곡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종곡은 한자로 이라고 쓰는데 북의 골짜기라는 뜻이죠. 당연히 을 한자로 번역한 것입니다. 동네 이름도 종곡리입니다. 이 학교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그곳이 바로 그 북실임을 알고는 머릿속이 텅 비면서 한 가지 시상이 문득 스쳤습니다. 북실, 북처럼 생긴 동네. 그런데 북은 소리를 내서 무언가를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그 북은 천지개벽을 알리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동학의 의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학은 잠든 백성들의 마음속에 천지개벽의 기쁨을 알리는 종교였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죽은 곳이 북실이라면 그들의 행동과 사상을 북이라는 도구에 상징화 시켜서 시로 쓴다면 아주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퍼뜩 스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재빨리 그 발상을 메모지에 썼습니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네. 저 어두운 세상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를 내기 위하여 온 신명으로 소리를 내려다가 깨진 북.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이 걸렸네. 100년 전의 자취 찾아볼 수 없어도 어디선가 쇠북소리 들리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들리고 여인의 소맷자락에서 들리고 소달구지, 뛰노는 아이들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이렇게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골짜기 전체를 북으로 묘사하고 그 북을 천지개벽을 알리는 어떤 상징물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을 상징물로 사용하되 거기에 어떤 주제를 넣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은 백성들의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어선 것이고, 그것은 곧 민주주의를 뜻할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백성들은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삽니다. 완전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죠. 입으로는 백성들의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면서도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뇌물 받아먹다가 검찰에 붙잡혀가고, 대통령이 되고 나면 공약은 기억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이 소란스럽게 일어나는 꼴을 우리는 매일 안방의 텔레비전에서 봅니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도 당시의 실패한 혁명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민주주의 내지는 백성들의 나라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내용을 대폭 추가시켰습니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네. 새로운 시대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저 어두운 세상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도 듣게 하기 위하여 온 신명으로 소리를 내려다가 깨진 북. 그 북소리 다시 들으려 만장의 물결 앞세우고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이 걸렸네. 한 번 열린 세상은 다시 닫히지 않는 법이니 만장의 물결 따라 어디선가 북소리 들린다. 처음엔 두근두근 심장 박동소리 같다가 한 사람의 한 발자국 모으고 두 사람의 두 발자국 모아서 조금씩 커진다. 개벽을 알리기 위해 기꺼이 깨진 100년 전의 북이 공명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하늘을 모신 마음속에서 둥 두둥 운다. 마음의 골짜기에서 큰 북이 울다가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이 정도 되면 일단 주제는 확정됐고, 발상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셈입니다. 2000년에 보은에서 작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동학군들의 넋을 추모하는 행사였습니다. 그러니 거의 100년만에 보은에서 죽은 동학군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열린 것이지요. 는 것은 그것을 암시하기 위해 집어넣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시에서는 꼭 그 사건이나 행사를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고, 이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의 현재와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하지요.   그런데 어딘가 좀 산만하지 않은가요? 할 말만 제시되어 그렇습니다. 이 산만함을 없애려면 상상해간 방향을 뚜렷이 드러내야 하고 그에 따라 주제를 아울러 더 드러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시상의 전개 방법과 순서를 좀 더 뚜렷이 하는 것입니다.   북실에서 천지개벽을 알리는 북을 떠올렸습니다. 그 북소리를 사람들은 듣기도 하고 못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러 북실에 왔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기억하는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100년만에 그들을 그런 의미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보겠죠. 현재 북실에는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도 아울러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얘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설득하면 안 되고 북이라는 상징물에 실어야 하지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북이라는 사물을 묘사해주면 됩니다. 앞의 글도 그런 방향이 어느 정도 잡혀있지만, 조금 불투명하지요. 그래서 시가 좀 산만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하면서 이렇게 완성했습니다.   북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새 세상 밖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라도 들을 큰 소리를 내려고 온 신명으로 부딪다가 깨진 북. 그 북소리 다시 들으려 만장의 물결 앞세우고 여기까지 오는데 1백년이 걸렸다. 솔잎죽창이 삭풍과 싸울 뿐 백년 전의 자취 찾아볼 길 없어도 한 번 열린 세상은 다시 닫히지 않는 법이니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북소리 들린다. 처음엔 두근두근 심장 소리 같다가 모여드는 발자국들 따라 공명을 일으키며 커지다가 마침내 세상을 삼켜버리는 큰 울림. 개벽을 알리기 위해 백년 전에 깨어진 북이 묻힌 마음의 골짜기에서 북이 운다. 큰 북이 울리며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한결 단정해졌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런 뼈대를 만들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오랜 훈련을 거치고 연습을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꾸 반복하다 보면 저절로 요령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갑자기 천재가 되려 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해서 좋은 시를 쓰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송나라 때 적벽부라는 유명한 시를 쓴 소동파라는 선비가 있습니다. 이름은 식이고 동파는 호죠. 그런데 이 사람은 평소 자기가 시의 재주를 타고났다고 큰소리 쳤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친구들이 찾아갔는데, 시를 보여주더랍니다. 그게 저 유명한 적벽부라는 시입니다. 삼국지의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그 적벽인데, 그곳을 유람하고 난 뒤의 소감을 시로 쓴 것입니다. 친구들이 명작이라고 모두 찬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동파는 그것을 단 한번의 가감도 없이 한 달음에 써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더욱 감탄했습니다. 그러는 벗들을 바라보며 우쭐거리는 소동파의 모습에 눈앞에 선합니다. 잠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소동파가 다른 일로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 사이에 친구들이 혹시 다른 글이 없나 하고서 소동파가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니 방석 밑으로 무슨 종이가 삐죽 나와있는 겁니다. 꺼내보니 거기에는 방금 보여준 적벽부를 고친 흔적이 역력한 글들이 수북이 쌓여있더랍니다. 적벽부를 고치다가 친구들이 오자 얼른 방석 밑으로 숨긴 것이죠. 소동파 역시 자기 재주를 한껏 자랑하고픈 마음을 지닌 평범한 사람임을 이런 데서 깨닫습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고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로 퇴고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2    신현득 동시론 [ 한국 ] 모셔온 향기 댓글:  조회:1755  추천:1  2016-08-10
동시 창작법 ① 동시(童詩) 산책(散策) 신 현 득   동시가 어떻다는 말을 하기 전에 나는 나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나는 사범학교 출신이지만 그 때 어느 곳에서나 다 그랬듯이 아동문학이란 말은 조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졸업했다. 간혹 동화란 말은 들었지만 동시란 말은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학장 시절 나도 남만 못지 않은 문학 지망생이었다. 시(詩)도 쓰고 소설도 습작을 했다. 이 중 소설은 그 뒤 지방의 작은 규모의 현상 모집에서 뽑히기까지 했으니 약간은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이런 것을 씁네 하고 제법 우쭐거리기도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곧 교사로 부임을 하게 됐는데 마침 도내(道內)의 무슨 글짓기 행사가 있어 글짓기 지도를 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종목은 동요·동시·산문이었다. 나는 이 때 처음 동시라는 말을 들었다. 동요는 알고 있었지만, 동시란 말을 처음 들은 나는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봤다.   「동요가 4·4조 7·5조 등의 정형시이니 동시는 아마 어린이들이 읽을 자유시를 말할 것이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내 생각대로 아이들을 지도해 간 것이 도내 행사에서 3등이란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뒤 그 때 씌어진 아동작품이 모두 지상에 발표되었는데 아이들이 쓴 글은 동요는 없고 모두 동시뿐이었다. 그러자 동시 동요의 구별없이 통틀어 상을 주고 만 것이다.   그 때부터 아동들의 운문은 동시가 되었고 동요는 이들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단계가 되었다. 이것이 1955∼6년 때의 일이다.   동요가 아이들의 글짓기에서 사라지게 되기까지는 이상의 과정들을 겪었다. 아마 아동들에게는 자유스런 표현이 가능한 동시보다는 동요가 더 구속적이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을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아직도 신춘문예는 동요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요를 응모하는 사람이 없어서 뽑히는 것은 모두 동시뿐이었다. 동요 모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동시를 당선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는 신춘문예에서도 동시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이것이 60년대의 초기다. 이런 모든 것이 동요와 동시의 미분화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이상의 이야기에서처럼 동시는 동요에 맞서는 아동문학의 장르로 동요가 정형시인데 반해 동시는 자유시의 한 형태이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 나라에서 동시만을 전공하는 사람이 백 명이 넘게 되었지만 그 당시만해도 동시는 개척 단계여서 지금 손꼽을 수 있는 아동문학의 대가급 외엔 없었다.   물론 아동문학과 글짓기 지도는 별개의 것이며, 전자가 창작 행위인데 비해 후자는 하나의 교육 활동이지만, 어쨌든 나는 나의 아동문학에 접한 코오스가 아동작문이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나는 아동들을 지도하면서 나도 아이들처럼 이런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 지도하는 일은 되는데 내가 글을 쓰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던 것을 지금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습작기에서 애를 태우고 있는 아동문학 지망생들을 선험자(先驗者)로서 동정을 하면서 격려하고 싶다.   나는 하루종일 작품을 생각하다가 지쳐서 저녁이면 술을 들이키곤 했다. 괴로운 작업이기도 했다. 빠꼼 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   스무 글자가 되지 않는 이 작품은 이런 피나는 작업 긑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69년도 조선일보에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 그와 같은 힘을 들였던가 싶은 마음뿐이다. 이 작품의 짜임새나 깊이가 뭐 대단하지 못한데도 실망이 되지만 지금 같으면 단 몇 시간만에 써버릴 것을 몇 달을 두고 머리를 짜내던 일이 우습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 때 나에게는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가 창호지로 바른 문을 뚫는 것이다. 어느 아이나 그런 버릇이 있다. 곧잘 손가락을 내밀어 구멍을 뚫는다.   아이가 있는 집이면 으레 문구멍이 있다. 문구멍이 없는 집처럼 서글픈 집은 없다. 자식이 흔하지 않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문구멍을 뚫을 때마다 아이에게 야단을 쳤다. 셋방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문구멍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문구멍의 높이와 아이의 키와의 관계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상당히 긴 시를 썼다고 기억이 된다. 그러다가 그것을 줄이고 줄인 끝에 남은 것이 이 열여덟 개의 글자였다.   나는 이 열여덟 자의 동시를 완성하고   「길이가 너무 짧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내는 작품 가운데 별반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끼워 넣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것이 가작에 뽑힌 것이다. 이리하여 내 이름 석 자가 신문에 발표되었다.   작품을 써 놓고   「왜 이렇게도 뭇난이 작품을 썼을까?」   「참 할 수 없어.」 하고 부족을 느끼는 이들은 이제 안심해도 될 것이다.   나는 1961년 첫 동시집 을 냈다. 7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4·6판의 작은 책이다. 내가 고백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집의 체재가 못되고 책이 얇다는 말이 아니다. 못난이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뽕잎이 핍니다. 뽕잎이 피면서 생각합니다. 아까시아 잎이 핍니다. 아까시아 잎이 피면서 생각합니다.   이라는 작품이다. 어떤 이들이 이 작품을 읽고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사 이 작품이 객관성이 없는 표현에서 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고민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어쩔 수도 없었다. 내딴은 뽕잎이 피면서 누에의 입맛을 생각하고 아까시아가 피면서 아까시아를 가장 즐기는 토끼의 입맛을 생각하는 내용을 그려낸다고 쓴 작품이다. 그런데 그 표현 수법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그밖에도 실패작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읽어봐도 괜찮다 느껴지는 것도 더러 있다. 까만 아기 눈 속 샘 그림자. 조그만 샘 속에 엄마 그림자. 그림자 덮고 잠이 들면 그림자 살아서 꿈이 되지요. 꿈 속에서 엄마와 뛰어다니면 찰방찰방 잔물결이 일어나지요.   이 작품은 제법 시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역시 표현들이 분명하지 못하다. 그것은 끝연에 가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이 변변치 못한 작품을 쓰기 위해 땀을 흘렸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기의 눈 속에 내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 그림자를 엄마 그림자로 바꾸어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기눈의 그림자가 어쩌면 옹달샘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는 데서 이런 시를 잡은 것이다.   어쨌든 힘드는 작업이었다.   「작품이 잘 씌어지지 않는다. 왜 이렇게도 잘 되지 않는가」 하고 자신을 투덜대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안심해도 될 것이다. 아가씨가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뒷밭에 목화씨가 베짜는 장단에 싹이 틉니다. 한 눈. 한 눈. 또 한 눈……. 뒷밭에는 하룻밤 사이에 목화꽃이 소복이 나왔습니다. 목화싹은 베짜는 장단에 쑤욱쑤욱 키가 컸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잎이 돋고 가지가 나고, 베짜는 장단에 꽃망아리를 맺고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 또 한 송이……. 목화밭은 하룻밤 사이에 아름다운 꽃밭이 되었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뚝뚝 꽃이 지고 베짜는 장단에 복숭아 같은 다래가 열고 다래가 벌어 목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 또 한 송이……. 목화밭은 하룻밤 사이에 하얀 솜밭이 되었습니다.   의 전문이다.   산문시 목화밭을 쓰기 위해서도 힘드는 작업이 필요했다. 첫째는 베틀 소리에 맞추어 목화싹이 트고 목화꽃이 피고 목화송이가 피도록 하는 일이었고, 그보다도 힘이 든 것은 목화밭을 베틀 가까이로 끌어들이는 작업이었다. 두 번째의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 이 산문시는 절반의 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사실 목화밭을 들판 가운데 두고서는 이 시의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목화밭을 집뒤로 끌어온 것이다. 이것이 아직 그 당시의 내 사고력으로서는 큰 작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목화밭을 집뒤에 두고 나니 베짜는 소리에 목화가 크도록 하는 일은 쉽게 진행되었고 베틀 소리에 싹이 트는 일, 꽃 피는 일 등을 적당한 대구(對句)로 만들어 행(行)을 잡음으로써 시각적(視覺的) 효과도 노릴 수가 있었다. (1978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9호)   동시 창작법 ② 동시(童詩) 산책(散策) 신 현 득   학교 종이 땡땡 친다. 어서 가 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이 노래의 「땡땡 친다」는 어법에 맞지 않다 해서 지금은 「땡땡땡」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첫 행에서 「땡땡」을 빼버리면 「학교 종이 친다」가 된다. 「종이 친다」는 「글씨가 쓴다」「옷이 입는다」「공이 친다」와 마찬가지로 문법적인 모순이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동시가 얼마든지 있다. 이 동요를 지은이도 처음 그 문장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글이 되었고 그것이 작곡되어 상당히 오랜 동안 어린이들 입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시처럼 어법을 따지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동시는 더욱이 그렇게 해야 되고 그렇게 해야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되는 것이다.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라는 이 동요는 교육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권한다면 도의 교육이 어떻게 되겠는가? 어른을, 특히 나이 많은 할아버지를 놀리는 것이 되고 만다.   도의를 범하는 것이 아동문학일 수는 없다. 아동문학은 교육과 문학의 중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교육이 되지 않는 문학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따위의 글은 동요뿐만 아니라 어느 노래의 가사로도 좋은 것이 아니다.   섹스를 동원할 수 없는 게 아동문학이라고 한다. 섹스가 꼭 비도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어린이들은 아직 섹스가 그들의 생활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아동문학의 소재가 되지 않는다.   이런 도덕 문제나 섹스 문제를 생각지 않고 씌어진 아동문학 작품이 눈에 띄기도 하는 것이다. 땅 속엔 땅 속엔 누가 있나 봐. 손가락으로 쏘옥 올려미나 봐 쏘옥 모란꽃 새싹이 나온다.   이 아동시는 조금 전까지도 교과서에 실려 전국 어린이들의 본보기 글이 되어 주었다. 땅속에다 손가락을 두고 봄날 돋아나는 새싹의 광경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 시에는 모순이 있다. 모란싹은 땅 속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모란의 가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모순을 처음 발견해낸 사람은 시인 박목월씨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아무리 착상을 잘 잡은 글이라해도 내용에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는 작품이 되지 않는다.   이런 보기는 얼마든지 있다.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병아리가 놀던 곳은 무논 가운데가 아니다. 그런데 미나리는 미나리논 같은 물이 고인 데서 싹을 틔운다. 물론 마른 땅에서 미나리가 돋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보편성이 없다. 보편성이 없는 경우는 작품에서 피하는 것이 좋다.   언젠가 나는 백두산 천지에 대해서 재미나는 걸 생각햇다. 천지의 물이 그 넓은 호수에 하나 가득 괴자면 얼마나 깊은 땅밑에서부터 많은 물이 솟았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백두산의 뿌리쯤 되는 깊이에서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퍽 재미가 있었다.   이 물이 백두산에 고여 있다가 압록강 두만강이 돼 흐르는 것이다. 이 때 호수의 물은 절반씩 나뉘어서 서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얘, 너는 압록강물 되어라. 나는 두만강물 될께.」   「그래 그래 지금부터 작별이야. 그렇지만 바다에서 만나게 될걸.」   나는 이렇게 천지의 물이 압록강 두만강의 물줄기로 나뉘어 흐르는 장면을 생각했다.   나는 이런 착상이 좋은 시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며칠 밤이나 시를 낳느라 끙끙거렸다. 하나의 물줄기로 같이 솟아서 너는 압록강 나는 두만강 나뉘어져 흐르는데 손 흔들며 헤어지지만 너른 바다에서는 다시 하나가 돼 만날 걸.   나는 며칠만에 이런 낱귀절 몇을 생각하고 더 다듬어 보면 대작이 되리라는 기대를 해봤다.   그렇지만 확인을 해야 한다. 정말 압록강 두만강이 천지에서 흐르는가? 그 때 어느 교과서에 그렇게 배운 듯하고 학교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확인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런데 온갖 서적을 다 뒤진 결과 천지에서 흐르는 것은 엉뚱하게도 송화강(松花江) 하나뿐이었다. 백두산에 오른 등정기(登頂記)를 읽어봐도 역시 그러했다.   실망은 컸지만 다행이었다. 이것을 잘못 알고 이 작품을 발표했더라면 나중에 얼마나 웃음거리가 됐을까?   결국 이렇게 해서 이 엉터리 작품은 폐기가 되고 말았다. 비가 돼 내리면서 내려다봤네. 하나의 반도가 젖고 있네. 산맥이 젖고 있네. 총부리가 젖네. 나의 한 끝은 벌써 강을 이루며 긴 구비를 돌아 바다로 흐르고 있네. 저쪽 영상강으로도 흐르고 있네. 도롱이를 쓴 농부들이 논둑을 걷고 있네. 틀림없는 같은 나라 사람이 걷고 있네. 시들었던 땅이 푸르게 일어서네. 백두산 천지가, 작은 그릇이 나를 받아 모으네. 송화강으로 나를 쏟아 보내고 있네. 저쪽에서도 한라산이 백록담이란 그릇을 들고 방울방울 나를 받아 모으네.   이 시는 동시라는 이름으로 지난 여름 『소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은 였다.   이 시의 내용에서 는 구름이다. 구름인 가 비가 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표현으로 봐서는 구름이 백두산 한라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이에 떠 있다. 이것은 인공위성 정도의 높이에 있어야 한다. 도대체 그런 소나기 구름이 있을 수 있는가? 사실은 한 고장을 내려다볼 만한 높이의 구름도 잘 있을 것 같지 않다.   시는 허풍이며 거짓말일 수 있다. 그러나 이치에 맞는 거짓말이어야 한다. 그런 점으로 봐서 이 시는 단단히 얻어맞아야 하고 그 책임은 지은이인 필자가 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모순을 알면서도 이 엉터리 글을 발표한 것은 이 시를 낳기까지의 수고와 이 시에 담긴 나의 염원 같은 것이 아까워서였던 것이다. (1978. 10. 『아동문학평론』 제10호)   동시 창작법 ③ 철저히 의인(擬人)을 하라 신 현 득   ―연필이 말을 한다   거짓말이다.   ―이슬비가 속삭인다   거짓말이다.   ―나무가 생각한다   거짓말이다.   연필이 말을 한다든가, 이슬비가 속삭인다든가, 나무가 생각한다든가, 모두가 거짓말이다. 그러나 시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이런 생각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느껴지기를 바라다 보면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 해도 느껴지는 것이다. 이 때 온 세상 자연과 자연스런 대화가 될 때, 참 편안하게 앉아서 쉽게 시를 쓸 수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고 생활이 되도록 노력해 보는 것이 좋다.   ―사람만이 생각한다.   ―사람만이 말을 한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을 구별하는 생각이다. 나와 남을 구별하는 생각인 동시에 차별하는 생각이다.   ―사람이니까 당연히 저런 나무보다는 낫다. 훌륭하다.    ―그러니 저까짓 나뭇가지 하나쯤 꺾으면 어떠랴.   이런 생각이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생각이요 차별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발전하면「나만 제일이다」하는 자만에 빠지게 된다. 이웃과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 나만 편하고 배 부르고 잘 견디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이런 생각이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쓰는 마음은 그러해서는 안 된다.   ―남도 나와 똑같으리라.   이것이 시를 낳게 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남도 나와 같이 배고프리라. 남도 나와 같이 괴롭고 아프리라.   이런 생각을 하고 보면 세상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나와 같이 생각한다. 나와 같이 말을 하리라. 나와 같이 그도 나를 사랑하리라.   이런 것은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생각이다. 모든 것은 나와 똑같다. 모든 것은 나와 평등하다는 생각이다.   ―연필이 말을 한다.   이 생각은 바로 연필이 나와 똑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필이 나와 같지 않다고 생각할 때 연필이 말을 한다는 건 거짓으로 들리게 된다.   ―이슬비가 속삭인다.   이런 생각도 그렇다. 이슬비가 나와 똑같은 생각과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모든 걸 하나로 본 것이다.   ―나무가 생각한다.   역시 그렇다. 나무와 나를 하나로 생각지 않고는 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든 걸 하나로 보는 눈」   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하나로 생각하자. 나무에는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무의 팔이다.   하나로 생각하자. 나무의 가지에는 꽃이 피어 있다. 그것은 나무의 팔에 달린 꽃이다. 꽃은 자라서 열매가 된다. 그것은 나무의 팔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나무가 과일을 들고 있다고 표현한다.   ―나무는 들고 있네     조롱조롱 열린 과일   그렇게 보고 있으니 재미있다.   ―나무는 그 많은 과일을 들고, 낑낑거리네.   이렇게 생각해 봐도 재미있다.   어쨌든 가지가 나무의 팔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손에 과일을 들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 나무는 과일을 많이 익혀서 들었을 때 어떻게 할까?   『얘, 이거 하나 먹어 봐.』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동무의 손에 과일 하나쯤을 던져 줄 것이다. 나무도 그럴까? 그렇고 말고. 여기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을에 빨간 감을 많이 익혔다. 여기 또 사과나무가 있다. 가지에 사과가 잘 익은 사과가 달려 있다. 어떻게 할까?   돌각담 너머로   감나무 긴 팔이   감 한 개 들고   아가 손에 와 닿는다.   ―이거 내가 익힌 거야   맛 좀 봐.   탱자 울타리 밖으로   사과나무도   아기 손에   사과 한 개 놓아주면서   ―이거 내가 익힌 거야   맛 좀 봐 줘.   이건「가을」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이다. 재미있다.   가을이다. 가을에 감나무도 사과나무도 열매를 익혔다. 익혀서 그냥 떨어뜨리고 마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 줄까? 같은 값이면 예쁘고 착한 아이에게 더 많이 줘야지.」   이런 생각에서 과일나무들은 과일을 들고 있는 것이다. 참 재미있고 평화스러운 광경이다.     대추나무   돌각담 위에   가지를 얹고   마당 끝에 서서   대추나무가   오롱조롱   가지에   대추를 달고   꼬마들이 모이기를   기다립니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주면   마당 끝에 서서   대추나무가   빨간 대추   하나 둘   던져 주면서   어서어서 주워 가라   손짓합니다.   이 글은「대추나무」라는 동요다. 여기서도 나무의 착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린다. 소리를 내면서 흔들린다. 그런데 정말 흔들리는 걸까? 모든 건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만 생각하자. 바람이 분다고 흔들려본 일이 있는가. 그렇지 않았을 테지. 그러니까 그건 대번에 알 수 있다.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몸을 흔드는 거로군.   그런데 자기 몸을 자기가 흔들 때는 무슨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틀림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나 보다.   시인이면 누구나 나무가 흔드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재미있다. 다음의 시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자.     몸짓   말로는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어요   몸짓을 하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아   그 많은 잎을 흔들어 댈까요?   나무는   가지마다 꽃을 단 날은   얼마나 자랑이 하고 싶을까요?   몸이라도 흔들어   보여야지요.   나무를 관찰하는 김에 다시 나무의 가지를 바라보자. 나뭇가지에는 새가 집을 짓는다. 새둥지 안에는 새새끼가 자란다. 이 때 나무가 흔들리는 건 바로 새새끼를 잠들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시인은 쉽게 알아낸다.   엄마 까치   아빠 까치   일터에 가고   둥지 속 새끼 까치   누가 봐 주나?   나무가   흔들흔들   흔들어 주어   둥지 속 새끼 까치   낮잠 들었다.   이 글은「까치 둥지」라는 동요다.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까치 새끼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뜻에서 씌어진 글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을 보거든 우선 이런 생각을 하자.   ―내가 이 나무라면?   ―내가 이 꽃이라면?   ―내가 이 방아깨비라면?   ―내가 이 돌멩이라면?   이렇게 해서 습관이 되면 무엇을 보든지 우선 이런 방법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꽃송이가 돼 나뭇가지에 열려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아주 꽃송이로 나무에 열렸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꽃송이가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예쁘다고 모두 쳐다보는군.   ―벌과 나비가 나를 향해 모여드는군.   벌써 시가 되었다.     꽃송이   지나는 사람마다   쳐다보네.   벌과 나비가   모여드는군.   다음은 방아개비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아주 작은 방아개비가 된 것이다.   돌멩이가 되었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자. 아주 돌멩이가 되었을 때의 광경을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불국사의 층계다리   누구의 발이나   한 번은   불국사 올라가는   층계 위에 놓인다.   층계는   여러 개 돌이 누워   눈을 감고서도   제 위에   그 여럿 발자국이 생기는 걸   느낀다.   발자국 위에 놓이는 신발   신발 속에 담긴   사랑의 무게.   옛날의 왕에서   옷차림과 말씨는 변했어도   그만한 사람의   무게는 같다.   발자국 위에   발자국이 놓여 지워지듯   옛 기억은   오늘의 일로 희미해지지만   온 신라를 살다 간 사람의   몸 무게를   제 안에 새겨 둔 층계는   그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돌이기 때문에 참는다.   이 시는 불국사 자하문을 올라가는 층층대인 청운교, 백운교를 놓고 지은 시이다. 물론 자기가 층층대가 되었다는 가정에서 씌어진 글이다. 층층대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이다. 누구나 불국사의 자하문 올라가는 층층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 대해 지은이는 이렇게 작품을 지은 동기를 말하고 있다.      (1979년 봄『아동문학평론』제11호)   동시 창작법 ④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서 들어야 신 현 득   자연의 어느 것도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자연의 어느 것도 음성(언어)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정말이다.   그래서 냇물이 속삭인다고 한다. 그래서 산들바람이 속삭인다는 말을 한다. 이슬비가 속삭인다고도 한다.   이들은 모두 제대로의 음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말로 속삭여 주지 않는 것으로 들린다. 냇물은 냇물의 소리만 낸다. 산들바람은 산들바람의 소리만 낸다. 이슬비는 이슬비의 음성으로만 말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   그래도 시인은 그 음성을 알아 듣는다. 이것이 시인의 특기다. 아프리카 사람의 말은 우리말로 번역해야 알아 듣는 것처럼 냇물의 말이나 산들바람의 말이나 이슬비의 말이나 모두 우리들 사람의 말로 번역을 해야 한다. 번역을 하는 것이 시인의 기술이다. 사물의 음성을 번역하는 것은 시인만이 할 수가 있다.   번역을 잘해야 한다.   엉터리 번역은 번역을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럼 냇물의 소리를 들어보자.   ―졸졸졸 졸졸졸, 졸졸졸…….   아무리 들어도 졸졸졸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번역해서 들어야 한다.   ―졸졸졸……   그 물 소리 속에는「달이 밝구나」하는 음성이 있다. 그 물소리 속에「오늘은 물레방아를 돌렸지. 참 재미있던데」하는 말이 들어 있다.「자, 우리 모두 모여서 바다로 가는 거야」하는 뜻이 들어 있다.   산들바람 소리 속에도 그렇다. 번역을 잘해야 한다.   ―귀를 간지려 줄까?   ―머리칼을 날려 줄까?   ―나뭇잎을 흔들어 보자.   ―잔디를 쓰다듬어 보자.   ―…….   이렇게 무수한 언어가 있다. 이 산들바람의 음성을 잘 번역해 들어야 한다.   이슬비의 음성도 그런 것이다.   ―박꽃에 사뿐이 앉을까?   ―아니야, 연못물에 앉아 동그라미 그려 보는 게 재미있어.   ―…….   이런 무수한 음성이다.   이런 음성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이야 참 바보같이만 느껴진다. 그런데 시인만이 이 말은 알아듣는다. 그러니, 시인만이 바보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시란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 듣는 그것이다.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 듣는 그것.   그렇다. 시는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강소천은 이슬비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 동요를 지었다. 그래서 처음 이 동요의 제목을 이라 했다.   이와 같이 냇물이나 산들바람이나 이슬비는 소리를 스스로 내기 때문에 번역이 쉽다. 사람의 목소리로 번역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물소리가 나는구나」「바람 소리가 나는구나」「이슬비 내리는 소리가 나네」정도는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말 없는 돌멩이나 마른 나무 막대기 같은 것, 빈 병 같은 것, 축구공 같은 것도 음성이 있을까?   음성이 있다. 그들 나름대로 음성이 있다. 그들 나름의 말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가 실험을 해 보자. 돌멩이의 언어를 들어보기로 하자.   냇가에 가서 두 개의 자갈돌을 마주 들고 두드려 보자.   ―딱 딱!   분명히 말을 한다. 돌에게도 언어가 있다. 제대로의 음성이 있는 것이다.   ―딱 딱…….   그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한다. 번역을 해서 우리들 말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돌을 마주 두드려 보자.   ―딱 딱!   (나는 돌멩이다.)   ―딱 딱 딱!   (꼬마들과 공기놀이라도 하고 싶어.)   ―딱 딱 딱 딱!   (냇물에 뛰어들어 수제비라도 뜨고 싶구나.)   ―딱딱 딱딱!   (깊은 물에 퐁당 빠지고 싶어.)   돌멩이에게 계속 말을 시켜 보자. 그 말을 알아들으려고 애를 써 보자. 그 목소리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온갖 부딪히는 소리를 다 알아듣게 된다. 까마귀 까치가 우짖는 소리쯤이야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물소리나 바람소리나 비소리나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처럼 어떤 음성으로든지 소리를 내어 주어야 그 말을 알아듣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정말 남의 뜻을 잘 살피는 사람은 사람의 눈빛만 보고도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안다. 표정만 보고도 그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알아낸다.   마찬가지다.   정말 시인은 사물이 놓여 있는 모습만 보고도 그 음성을 알아듣는다.   몽당연필을 보면 몽당연필의 하소연이 들린다.   지우개 조각을 보고 지우개 조각의 하소연을 듣는다.   나팔꽃을 보고 그 꽃 속에서 쏟아지는 노래를 듣는다.     빈 화분·빈 병   화분이 빈 그릇으로   교실 구석에 놓여 있게 되자   『국화 한 포기만 심어 주셔요.』   사정을 한다.   국화는 선생님 손으로 심겨진다.   국화가 화분 속에 들어 앉자   물주개가 가랑비를 뿌려 준다.   병이 빈 병으로 굴러 다니며   『내 안에 물이라도 채워 줘.』한다.   물을 채워 주니   『꽃 한 포기만 꽂아 다오.』한다.   꽃은 우리 손으로 꽂혀진다.   화분과 꽃병은   양지바른 창 밑에 놓여   마주보고 웃는다.   이 시에 대하여 지은이는 시를 지을 때까지의 일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날이었어요. 교실의 대청소를 하고 있었지요.   교실 뒤의 급식대를 들어내고 교실 바닥을 닦을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숨겨둔 화분이 있었어요. 정말 지난 초겨울에 담고 있던 꽃부리를 비우고 여태까지 교실 구석에 박혀 있었지요.   화분은 참 심심하고 답답하게 겨울을 난 거예요. 누구도 화분의 마음을 알아주지는 못했을 거여요.   화분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화분은 무엇인가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요.   그 커다랗게 벌린 입의 모습에서 나는 대번에 그걸 알아차렸지요.   참 그래요.   「화분이 얼마나 말을 하고 싶을까?」   내 생각은 틀림이 없었지요. 곧 그 화분의 커다란 입에서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어요.   ―무엇이나 심어 줘. 국화 한 포기라도 심어 줘. 제발 그렇게 해 줘.   화분의 하소연이었어요. 참 가여운 화분이었어요.   나는 곧 그 화분을 들고 꽃밭에 나갔지요. 국화 모 한 포기를 떠서 그 화분에 심어 주었어요. 보드라운 흙에 부엽토를 섞어 넣었지요. 그리고   ―잘 자라라.   속으로 말을 하면서 국화의 뿌리를 다져 줬지요. 그러자 화분이 그냥 있는 게 아니었어요.   ―고마워요, 선생님.   나는 그 화분으로부터 분명히 이런 소리를 들었어요. 분명히 그런 소리가 났던 거지요.   ―그것 참 희한한 일이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할 테지요. 그렇지만 나의 귀에는 그 말이 틀림없이 들렸던 것이었어요.   나는 국화가 심겨진 화분에 물을 뿌려 주었어요. 가랑비를 뿌려 주었지요. 화분이나 화분에 심겨진 국화 모는 참 기쁜 모습을 하는 것이었어요.   화분을 교실의 창가에 갖다 두고 다시 청소를 계속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교실 구석에 빈 유리병 하나가 굴러 다니는 것이었어요.   나는 생각했지요.   「이 병은 또 얼마나 심심할까?」   그런데 정말 빈 병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어요.   ―심심하고 말고요. 내 안에 물이라도 채워 주십시오. 제발 제발 제발…….   이것은 빈 유리병이 사정을 하는 목소리였지요.   「가엾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곧 이 유리병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을 시켜 수도에 가서 물을 채워 오라고 했지요.   그런데 물을 채워 넣고 보니 병은 다시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선생님. 이왕 수고하시는 김에 나에게 꽃 한 송이 만 꽂아 주셔요.   나는 참 그렇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빈 병에 물을 채워 넣었으니 꽃을 꽂아야지요.   꽃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리병은 반드시 사이다나 쥬우스만 담아야 하는 것이 아니어요. 꽃을 꽂으면 꽃병이 되는 것입니다.   꽃은 곧 아이들 손으로 꽂혀졌어요.   나는 화분이 놓인 양지바른 창가에 병을 갖다 놓았지요. 꽃병과 화분, 꽃병의 꽃과 화분의 국화 모가 서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었어요. 그 웃음 소리도 분명히 들리는 것이었지요.   ―히히히히…….   나는 분명히 그 웃음 소리를 들었어요.   이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자연에서 호소해 오는 많고 많은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숲에서도 그렇다.   나무와 나무끼리는 저들끼리의 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소리를 못 들으면 시인이 아니다.   나무들 끼리는 서로가 남이 아니다.   도토리 열매를 여는 떡갈나무를 보기로 들자.   떡갈나무 그 옆에 있는 나무는 남이 아니다. 서로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에 있는 나무가 있다. 할아버지와 손주가 되는 나무도 있다. 이들은 같은 골짜기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에 살면서 서로 바라보면서 모른 척할까?   그렇지 않다.   ―어머니 어머니!   ―그래 그래 너는 내 씨앗에서 태어난 나무로구나.   ―그럼요 어머니.   산에 가 보면 분명히 이런 말소리가 들린다.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누구의 귀에도 들리는 목소리다.   ―우리는 형제다. 같은 나무 같은 가지에서 정답게 씨앗으로 익었댔지.   ―그럼 그럼 우린 형제야.   이런 말도 들려 온다. 사람이었다면 서로 손을 잡아보고 끌어안기도 할 것이다. 이런 나무의 심정을 아는 이가 시인이다.     나무끼리   산에 가면   나무끼리   주고 받는 말이 들리네.   ―잎을      내 놔 봐라.   ―꽃을     피워 보자.   잎이 같을 때   나무끼리 반갑네.   꽃이 같을 때   더욱 반갑네.   나무는   같은 나무 아니면   꽃가루를 나누지 않네.   같은 나무끼리는   멀리서도   잎을 흔들어 서로 반기네.   한 날 한 모양의 열매를 다네.   ―너는 형제다.     너는 내 형제.   추운 겨울을 눈 속에 떨면서도   같은 나무는   그 나무끼리   서로 생각하네.   목이 메이네.   이 시는 산에 가서 나무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시로 옮긴 것이다.     첨성대   눈을 감으면   들리는 듯하네.이 돌을 다듬을 때   울리던 정 소리.   이 돌을 쌓을 때   메기던 노래들이.   신라의 옷을 입은   그 때 아이들이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겠지.   이 돌을 다듬고 쌓는 것을.   이 돌이 쌓여지던 날   어여쁜 그 때의 여왕님이   금관을 쓰고   비단 수레를 타고 와   첨으로 불러 줬겠지   첨성대란 이름을.   그 날부터 점잖은 학자님들이   여기서 밤마다 별을 바라보고   저 많은 별의 이름을 지었겠지.   저 별을 바라보고   별자리를 그렸겠지.   그리고   그 넓은 우주 안의   작은 자기를 생각했겠지.   거기 비하면   이 서울도   신라도   얼마나 작은 겔까 생각했겠지.   이 시는 지은이가 첨성대를 바라보고 지난 날을 미루어 생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 첨성대에게 물어보아 첨성대가 대답하는 것을 적은 것이다.   경주에 가는 길이 있으면 누구든지 첨성대 앞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으면 이런 소리가 들린다.   ―나는 첨성대이다.   ―내 몸뚱이의 돌은 정으로 다듬었지. 옛날 신라의 석수장이들이 말이야.   ―그것을 쌓으면서 메기던 노래들이 아직도 들려.   ―내 이름은 선덕여왕이 지어 주셨지. 그 날 비단 수레를 타고 오셔 처음「첨성대다!」하고 내 이름을 부르셨어.   이렇게 첨성대가 시인의 귀에 일러 주는 그것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 이 작품이다. (1979년 여름『아동문학평론』제12호)   동시 창작법 ⑤ 손은 생각지 않아도 된다 신 현 득   사람의 손이 작용을 해 주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수레는 밀어주어야 움직인다. 사람의 손이 미는 것이다. 더구나 자동차는 운전기사의 손에 의해 움직인다.   양말은 손이 있어야 신을 수 있다. 양말 스스로 발에 와 신겨지는 법은 잘 있지 않다.   청소할 때의 빗자루 역시 그렇다. 손이 들어야 비로소 방의 먼지를 쓸어낸다. 의사의 주사기도 그렇다. 의사의 손이 있어야 주사약을 혈관에 넣어 사람을 치료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팽이도 그렇다. 팽이채를 쥔 손이 있어야 팽이가 맴을 돌 수 있다.   바느질할 때의 바늘도 그렇다.    밥 먹을 때의 숟가락도 그렇다.   가위도 그렇다. 송곳도 그렇고 책상의 빼닫이도 그렇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모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손 이상 가는 보배가 없다고 한다.   인류는 손이 있음으로써 지구를 지배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 때 손을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 세상의 움직임에서 세상을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동차는 이름 그대로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 즉 「자동차」가 된다. 운전기사의 손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양말은 스스로 발에 와 신겨지는 것이 된다. 빗자루는 혼자 걸어다니게 된다. 팽이는 혼자서 맴을 돌게 된다.   바늘은 혼자서 바느질을 하게 된다. 숟가락은 혼자서 밥을 뜨게 되고 송곳은 혼자서 구멍을 뚫게 되고 빼닫이는 저절로 열리고 저절로 닫긴다.   그것뿐인가? 컵은 사람에게 물을 마셔주고 귀비개 혼자서 귀를 후벼주고 호미는 혼자서 밭을 맨다.   만일 이런 세상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재미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시를 쓸 때 특히 동시를 쓸 때 이 사람의 손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물건은 사람의 손에 의해 움직여진다.   ―그런데 그 손의 동작을 꼭 그대로 표현하는가?   가령 여기 감나무가 있다고 하자. 감나무는 가을에 많은 감을 열었다. 빨갛고 탐스러운 감이다.   감을 따고 싶다. 그런데 감이 스스로 움직여 줄 리 없다.   「감아 내려오너라. 가지에서 내려오너라.」   이렇게 말해봐야 감이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제 스스로 중력을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는 가지에 매달려 있다. 사람이 말한다 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없이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딴다. 감을 따는 「감집게」라는 것이 있다. 긴 대나무장대 끝에 작은 그물을 달아 감이 떨어져 깨어지는 걸 막는다. 그래 이 감집게로 감을 하나씩 담아 가지를 비틀어 꺾어 내린다.   감을 따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이 과정을 시로 표현해 보자.       나무에 올라가        빨간 감을 따        광주리에 담고        ……………….   이런 시의 구절이 된다.   그런데 이 때 손을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의 손을 생각지 않고 장대 끝에 달린 감집게도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감은 제 스스로 나무에서 내려와 광주리에 담긴 것이 된다.   이 때의 시구절을 생각해 보자.       빨간 감이        나무에서 내려와        광주리에 쌓이고….   아무래도 감이 제 스스로 내려왔다는 표현에 맘이 끌린다.   이 경우에서는 손을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말이 된다.       소 등을 타고 오든지       지게 위에 놓여 오든지       시월에        대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봄에 나갔던 씨앗이        몇 백 배의 열매를 거느리고       들어와 이엉을 쓰고 쌓이고       산에서 여문 도토리도        멍석에 널리고       가을 씨앗이 대신 나가       이랑에 묻히고 나면       텅 비어버린 들판.   10월을 노래한 시의 구절이다. 10월이 마당이다. 추수를 해들이는 광경이다. 어느 것이나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다. 실어 들이는 것도 져 들이는 것도 그렇다. 가을 씨앗을 묻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곡식이 소 등이나 기게 위에 놓여 스스로 들어와 마당에 쌓이는 것처럼 표현하고 보니 가을 마당이 더 실감되는 것 같다.   ―연필이   공책 위를 걷는다.   이런 시의 구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다. 논리만을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연필이 어떻게 걸어다녀? 사람의 손이 잡아주는 거지.』   이렇게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엉터리요 억지라고 우길 수도 있다.   ―지우개가   글씨를 지우다.   이런 시의 구절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된다.   『지우개가 어떻게 글씨를 지워? 사람이 손으로 지우개를 잡아주는 거지.』   틀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시는 과학이나 논리가 아닐 수도 있다. 과학이나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산 것, 산 것이 아닌 것, 숨쉬는 것, 숨 쉬지 않는 것, 생각을 가진 것, 생각을 가지지 않는 것, 말을 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을 구별해 생각지 않는다.   또한 모두가 생명있는 것이며, 숨쉬는 것이며, 같이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연필이 공책 위를 걷기도 하는 것이다. 지우개가 스스로 글씨를 지우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입장에 눈의 위치를 두어야 한다.       학교는 제 시간에       품을 연다.       교문이 문짝 두 개를        열어젖혔다.       학교 이름을       커다랗게 가슴에 달고       교문은 아침마다       교장 선생님이 된 기분이다.       교장 선생님의 눈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마음 속을 읽는다.       첫 번째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       완장을 팔에 감은       선도 반장.       그러다가 학교 앞에       줄이 이어진다.       집에서 밭갈이를       거들던 아이       그 아이는        손마디가 텄다.       저녁 썰물에       조개를 캐던 아이       그 아이 손에는        개흙이 묻었다.       그러나 더러는       숙제를 잊은 아이       그렇지만 그 아이도       들여보내고       집은 가까워도        정해 논 지각생       그렇지만        그 아이도 들여보내고       학교의 품은 크다.       참새가 우짖고       아침해가        산 위에 한 뼘.       그래도 오는 아이가 없나?       살피며        교문은        두 개 문짝을 닫는다.   이야기가 담긴 이런 시를 읽고도   『뭐가 이래? 교문이 문짝을 열어젖혔다니?』   이런 말을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도 사람을 손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 되어 있다. 교문이 스스로 열리는 것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훨씬 더 시다운 표현이 되었다는 결론이다. 시를 이해하는 어린이라면 여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침에 교실에서       철수가 책보를 푼다.       같이 쌓여 온       풀 냄새가 한 보자기.       영희가 보자기를 풀었다.        들에서 같이 쌓여온 새 소리       ―찌찌꼴 찌찌꼴 찌찌꼬르르르…       교실이 새소리로 찬다.       드르륵―       문을 열고 꽃다발이 들어온다.       학교 길에서 꺾어 모은 꽃다발.       하품만 하고 있다가       꽃병이 입을 벌려 받는다.       (하략)   5월의 교실을 노래한 이 시에서 「문을 열고 꽃다발이 들어온다」 「꽃병이 입을 벌려 받는다」의 두 구절을 두고 생각해도 그렇다.   전혀 사람의 손을 생각지 않는 데서 실감을 더 느끼게 한다.       골목에 아침에       대문이 열리며       아이 하나를 내보낸다.       저 집서도 대문이 열리며       아이를 내보낸다.       책가방을 맨 아이.       ―학교 가자.       ―안녕!       아이들은 골목을 나간다.       골목이 아이들을 내보낸다.       저 골목서도       아이들을 내보낸다.       책가방을 맨 아이들       참새 짹짹        우짖는 아침에       학교를 향하는       길다란 행렬.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있는 골목의 광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손을 생각지 않은 것이다.   손을 생각지 않을 때 대문이 아이를 내보내는 것이 된다. 작은 골목은 큰 골목으로 아이를 내보내는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세상은 하나의 요술나라 같기도 하다.    신은 사람의 발에 신겨 사람을 따라 다니게 된다. 신이 사람의 몸뚱이를 담고 다니는 것이다.   괭이는 제 혼자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의 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괭이가 제 스스로 흙을 파고 논밭을 가꾸게 된다.   크레용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는 스스로 곡을 연주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실에서 손이라는 관념을 지워버리고 세상을 바라보자.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것은 시를 짓는 한 방법일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소재나 표현하는 각도에서 따라 이런 표현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손을 생각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손을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과는 다르다.   즉 사람의 손이 작용하는 소재가 아닐 때는 이런 입장의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된다.       거울 속에        우리 한 식구       정답게 살고 있어요.       새벽이면       거울 속에 불이 켜지고       엄마가 아침 쌀을 갖고 나가고       밥상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요.       거울 속에서        문이 열리고        아빠가 장난감 사가지고       들어오셔요.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거울에서 내다보는       내가 보여요.       거울 속에 내다보며       이쪽을 거울 속이라 생각겠지요.       우리를        그림자라 생각겠지요.   이 시는 거울 속의 세상을 두고 생각한 내용이다. 즉 이 소재에는 사람의 손이 작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손이 있고  없고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1979. 겨울.  13호에서     동시 창작법 ⑥ 모든 것을 하나로만 본다 신 현 득     시를 쓰는데 있어서 비인격물을 인격화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세상을 하나로 보는 작업이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출발이 된 것이다.   비인격물의 인격화뿐만 아니라 인격체인 사람을 딴 것에 비유하는 것도 같은 작업이 된다.   내 한 몸뚱이가 사람이지만 나무일 수도 있고 돌일 수도 있고 흐르는 물일 수도 있고 햇볕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나무가 곧 돌일 수도 있고 돌이 나무일 수도 그것이 곧 내 몸일 수도 있다.   이것이 나와 남을 하나로 보는 작업이다.   비유라는 것이 또한 그렇다. ㄱ이 ㄴ에 비유된다는 것은 ㄱ과 ㄴ에서 같은 속성을 찾는 것이요 ㄱ과 ㄴ을 동일화시키는 작업일 수 있다.   역설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 ㄱ을 지칭하기 위해 그와 반대가 되는 ㄴ을 가르치는 것은 ㄱ과 ㄴ을 같은 입장에서 하나로 본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매우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밉다고 한다. 낮은 것을 오히려 높다고 한다. 흐르는 것을 멈추어 있다고 한다.   이 때 사랑과 미움은 같은 것이며 높은 것과 낮은 것은 같은 것이며 흐르는 것과 멈춤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원수와 친구가 따로 없고 나쁜 것 좋은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들어가고 나감이 없이 쪽 골라 보인다. 모두가 평등해 보인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눈이다.   이런 눈으로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보자. 교장실의 시계 속 아득한 시간을 감은 태엽이 퇴근 시간을 치는 시간에 상당히 먼 옛날일 텐데 쉽게 와서 페스탈로찌 선생이 축하의 손을 잡았어요. ―중략― 벙글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거느리고 교문을 나오셨을 때 기다리던 안데르센 할아버지가 불쑥 손을 잡았어요.   이 시는 유여촌 선생의 회갑을 축하하는 시의 몇 구절이다. 유 선생은 교단에서 회갑을 맞으셨다. 동화 작가다. 그러므로 페스탈로찌나 안데르센과 관계를 가진다. 그런데 페스탈로찌와 안데르센은 생존자가 아니다. 그러나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한자리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생사를 하나로 보았을 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곧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꿰뚫어 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고향 마을로 드는 오솔길에서 발가숭이 적 나를 만났네. 내 옛날을 만났네. 발가숭이 적 나와 손을 잡았네. 나와 같이 크던 산짐승 그들은 층바위에서 그대로 메아리를 부르며 살고 있었네.   고향에 돌아와서 옛일을 회상하는 장면을 노래했다.   "아, 옛날이 그립구나!"   이렇게 회고의 탄식을 하는 일은 너무도 바보스런 것이다. 10년 전, 20년 전, 30·40년 전의 일을 바로 오늘 이 시간 안에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과거와 현재는 바로 하나다. 그 때 그 옛날의 나와도 만날 수 있다.   이런 눈으로 먼 데 가까운 데를 하나로 보고자 아주 거리 감각을 없애는 것이 좋다. 선생님이 걷는 길은 교실과 교실 사이 쪽지 한 장을 들고 산을 넘는다. 한 교실 두고 온 아이들이 되돌아보며 울며 울며 걷는 걸음도 새 소리 솔바람이 길을 이끌어 쉽게 쉽게 발이 놓인다. ―중략― 산꿩이 우는 골을 내려다보니 학교 두 교실이 가지 끝에 와 보이고 산토끼들이 모이라는 듯 ―땡 땡 땡. 학교 종이 울린다.   발령장을 들고 먼 산골로 전근가는 교사의 심정을 노래했다. 여기서 교사가 걷는 길을 교실과 교실 사이라 했다. 이것은 전에까지 근무했던 교실과 이동해서 근무해야 할 교실의 사이다. 사실 교실과 교실 사이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먼 것 가까운 것을 하나로 보지 않았을 때는 이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엄마는 가지 많은 나무 오빠의 일선 고지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오게 하여 가지에 단다.   어머니를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 이 시에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가지에 단다는 구절을 음미해 보자. 일선 고지와 나무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멀리에 있는 소총을 끌어 오는데 있어 마치 옆에 있는 물건을 거머쥐는 듯이 표현했다. 거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눈으로 보면 많고 적은 것이 하나로 보인다. 전체와 부분이 하나로 보인다. 전체는 부분인 동시에 또한 전체다. 1은 10과도 같지만 또한 1이 된다. 수에 대한 관념을 아주 없애는 것도 좋다. 나의 하나는 바다로 보내고 나의 그 하나는 산으로 보내고 나의 또 하나는 오지 않는 내일에도 보내어 두고 나는 누워서 그들을 보네. ―중략― 그러나 바다에서 가지고 온 것 그러나 산에서 가지고 온 것 내일에서 가지고 온 것을 틀리지 않게 내 안에 쌓아 두네. 그것들이 작게 나를 이루네.   내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자라고 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외부에서 받아들여진 것이 쌓여서 나를 형성하고 있다. 이 때 나는 하나이지만 사실 열도 되고 백도 된다. 그것이 모두 또한 나다. 그 많은 나가 하나인 나 안에서 나타나 외부와 작용을 하고 있다.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생각이 미치는 데까지를 쏘다닌다.   하나인 나는 누워서 여럿인 나를 본다. 이것들은 내가 생각을 거두었을 때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해서 보면 나는 하나라고 우길 수가 없다. 어째서 내가 하나뿐이란 말인가?   이런 눈으로 형체가 있는 것 없는 것을 하나로 보자. 아기 울음이 바위에 스며들어 다져집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차례로 스며들어 다져집니다. 바위도 내일부터 입을 다물면 박혁거세가 날 때까지 견뎌냅니다.   석기시대의 어느 날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아기 울음과 이야기다. 울음은 형체가 없다. 이야기도 형체가 없다. 그러나 어떤 액체의 형태가 되어 바위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계절은 오다가 강가에 머물러 남몰래 배에 실려 건너옵니다. 남쪽 나라 건너 북쪽 나라로 살구꽃이 차례로 꽃잎을 엽니다. ―중략― 저녁 해에 돌아오는 시골 장꾼의 시끄런 사투리도 한 배 가득 건넙니다. 산 넘어 사라지는 해그림자도 강가에 머물러 배를 탑니다.   여기서 「계절」이란 말을 두고 생각하자. 계절은 물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배를 탄다는 것이 거짓으로 들리지 않는다.   사투리도 부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배에 실린다는 것이 어색하기는 커녕 아름답고 재미있게만 들린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지 않는 걸 쌓아도 부피와 무게가 된다. 나무― 그 많은 잎에는 종일 햇살이 와서 만져집니다. 송아지 우는 소리 학교의 종소리가 와서 만져집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것뿐인 그것이 나무에게는 가지 끝에 무게가 되어 달립니다. 가슴 둘레가 커집니다.   이 시는 햇살이나 송아지 울음, 학교의 종소리 같은 것이 쌓여 무게를 갖는 과정을 노래했다. 재미있는 생각이라 느껴지는 것이다. 햇볕은 물 위에 쌓인다. 따뜻하다. 햇볕은 피라미 새끼의 체온이 된다. 햇볕은 붕어 새끼의 체온이 된다. 따뜻하다. ―중략― 바람 소리 새 소리가 물 밑에 쌓인다. 물 소리가 커진다.   봄 개울을 노래한 것이다. 형체가 없는 햇볕이나 바람 소리·새 소리가 물밑에 쌓이면서 부피를 느끼게 한다. 그 부피는 커지는 물 소리에서도 나타나 있다. 도라지 뿌리가 기지개 켜는 소리도 모이면 커다란 메아리가 됩니다. 소나무 큰 뿌리에 물 오르는 소리도 모이면 커다란 메아리가 됩니다. ―중략― 새 움의 입김이 모여 하얀 안개가 산을 감고 하늘로 피어오릅니다.   봄 산의 광경이다. 도라지가 기지개 켜는 소리, 소나무에 물 오르는 소리들이 모인다. 메아리가 커졌다는 데서 그 부피를 느끼게 한다. 새 움의 작은 입김들이 모여 산을 감을 수 있는 커다란 안개를 이룬다. 입김의 부피가 쌓인 것이다.   액체는 그 온도에 따라 기체가 되든지 고체가 된다. 그래서 물은 얼어서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증기가 되고 구름이 된다. 바위는 부서지면 돌이 되고 돌은 모래가 되고 다시 부서져 흙이 된다. 그러나 세상을 하나로 보면 변화가 일정하지 않다. 모든 것은 하나이며 같은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물은 같은 것이어서 서로 변하면서 옮겨다니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키가 되어 크는가? 길가에 우는 아기를 달래어 준 일. 아, 그런 것이 조그맣게 내 위에 와서 쌓이네. 자는 사이 밤 사이에   이 시에서는 착한 일 한 것이 쌓여 키가 되고 있다. 키 크는 원인이 착한 일 한 것에 있는 것이다. 영양분이 쌓여서 키를 이룬다는 생각이 아니지만 거짓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종일 뻐꾸기 수다스런 울음이 한 개씩 머루 알이 돼 열리고, 종일 푸르른 산의 색깔이 바위 틈 물소리로 돼 들리고,   여름 산의 정경을 읊은 것이다.뻐꾸기 울음이 머루 알이 되고 산의 빛깔이 물 소리가 된다.   이런 눈으로 주위를 살피면 도대체 불가능이란 것이 없다. 온갖 조화를 다 가지게 되는 것이어서 홍길동이라도 된 기분이다.      (1980년 봄 『아동문학평론』 제14호)   동시 창작법 ⑦ 의인(擬人)에는 난이도(難易度)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신 현 득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해를 그리기 좋아한다. 그리고 해에다 눈이나 귀·코·입들을 그려 넣는다.   이것은 해에게 사람의 모습을 주려는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미분화된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무엇이나 자기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즉 그들의 사고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생각하고, 말하고, 웃고, 동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에게도 얼굴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특히 나이 어린 아이일수록 그들은 철저히 의인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를 위해 시를 쓸 때 철저히 의인을 하라는 말은 이런 어린이의 심리를 이용하자는 것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의인화된 것일수록 거기서 재미와 친밀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동물을 좋아하지만 사납고, 불결하고, 잔인한 동물의 그 성질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동물에게 사고력·웃는 모습 등 사람이 가진 능력을 모두 주어 놓고 동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사고에서 느껴지는 동물은 언제나 어느 정도 의인이 된 동물이다.   이와 같은 어린이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 동물 만화다. 그러므로 동물 만화는 문장상의 의인법을 그림에 적용시킨 것이다. 즉 동물 만화는 의인된 그림인 것이다.   세계 어린이들이 모두 좋아한다는 미키마우스는 손과 발을 가지고 있고 아래 윗도리 옷을 차려 입은 새양쥐다. 이 의인된 동물은 말도 잘하고 영리하며 비상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만화가가 미키마우스에게 손과 발과 옷과 판단력을 주었으므로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동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미키마우스는 하수구에 버리는 음식찌꺼기나 찾아다니는 불결하고 연약한 새양쥐가 아니다.   그러면서 화가들은 동물에게만 의인법을 쓰는 것이 아니다. 연필이나 돌멩이·나무, 심지어는 물방울에까지 의인법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이 때는 대개 연필이나 돌멩이·나무·물방울에게 눈·코·입 등을 곁들여서 얼굴을 만들어 주고 때에 따라서는 팔과 다리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동물의 경우에서처럼 실감이나 친근감이 덜하다.   왜 그럴까?   여기서 우리는 사물의 속성이 사람과 닮아 있는 것일수록 의인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인형이 웃는다.   ―나무가 웃는다.   ―돌멩이가 웃는다.   ―물방울이 웃는다.   위의 네 가지 표현을 읽어보면 의인에도 어렵고 쉬운 정도, 즉 난이도(難易度)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네 가지의 표현 가운데 에 가장 공감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 공감을 주기까지는 거기에 상당한 상황 설명이 따라야 한다. 그래도 그것이 실감있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철저히 의인을 하라는 말과는 상대적으로 덮어놓고 의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비 오는 날 비가 온다. 마당이 운다. 빗방울을 맞아 마당이 운다. 빗방울을 빗방울을 자꾸 맞으며 「앙 앙!」운다. 비가 개었다. 울던 마당이 이제 살았다고 활짝 웃었다.   이 시는 놀랍지도 못한 글이지만 마당을 의인한데서 더욱 어색한 느낌을 갖게 한다.   마당은 입체가 아니다. 사람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여기에 인격을 주어 사람의 모습으로 바꾸어 생각하는데 저항을 느낀다. 따라서 마당이 운다는 표현이나 웃는다는 말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감 감나무 빨간 감은 여러 형제다. 형아, 아우야, 부르며 익는다…….   감나무에 달린 감은 의인화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것은 감이 가지고 있는 모양과 몸빛깔에서 사람과 닮은 요소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아주 닮아버린 인형에서 더욱 실감과 재미를 느낀다.   인형 내 다리로 달리게 해 주세요. 내 팔을 움직이게 해 주세요. 정말이어요. 나를 예쁘다 칭찬만 하지 말고 나를 걷게 해 주세요. 영이를 따라 학교에도 가고 싶어요.   이 인형의 호소는 실감나게 들린다. 그것은 인형이 아주 어린 아이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을 하는데서는 이 세 가지 소재의 경우서만 보아도 「마당 < 감 < 인형」의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종이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연기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배추잎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비닐끈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그런데 연상이 잘 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사람과 닮은 데가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하면 이런 것은 거의 의인이 되지 않는다.   ―도토리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돌멩이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연필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공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그래도 앞의 네 가지 경우보다 연상이 잘 된다. 의인이 쉬운 것은 어느 정도 입체물이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입체물이라 해서 사람의 성질을 다 가진 것이 아니다. 모든 각도로 다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 말이다.   ―돌멩이가 운다.   ―돌멩이가 웃는다.   ―돌멩이가 노래한다.   ―돌멩이가 성낸다.   ―돌멩이는 야물다.   ―돌멩이는 구른다.   ―돌멩이는 달린다.   ―돌멩이는 부딪힌다.   위의 는 모두 사람의 성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두 돌멩이의 속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 등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돌멩이는 야물다. 그리고 동글동글하다. 그리고 잘 구른다. 구르다 보면 다른 물건들과 부딪히길 잘 한다.   그러므로 돌멩이를 의인할 경우 이런 돌멩이의 성질에 맞추어야 한다.   돌멩이 ① 돌멩이가 굴렀다. 산위에서 굴렀다. 냇물에 퐁당 빠졌다. 고기들이 깜짝 놀랐다.   돌멩이 ② 돌멩이가 말했다. 항아리가 말했다. 돌멩이가 대들었다. 커다란 항아리가 빌었다.   이상의 작품은 돌멩이의 성질을 잘 알아서 의인했기 때문에 실감과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돌멩이가 갖는 성질과 맞지 않을 때는 저항을 느끼게 된다.   돌멩이 ③ 냇가에 돌멩이가 뙤약볕을 쬐었다. 몸뚱이가 뜨끈뜨끈 달아 올랐다. 소나기 한 줄기가 지나갔다. ―시원해요, 시원해요.   아이고 시원해. 돌멩이가 좋아서 노래를 불렀다.   여기서 돌멩이가 노래를 불렀다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노래라는 것이 돌멩이의 특성에는 맞지 않아서이다.   어떤 사물이나 소재가 사람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사물은 사람과 같은 성격을 몇 가지는 지니고 있으므로 그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가령 라는 소재가 있다면,   ○ 무게가 있다.   ○ 입을 다물고 있다.   ○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 간사한 말로 꾀어봐야 잘 넘어가지 않는다.   ○ 많은 일을 참는다.   ○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 오랜 세월 견뎌낸다. 와 같은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의 방향으로 의인화해서는 바위의 이미지를 살릴 수 없다.   「꽃이 웃는다」는 것은 꽃의 빛깔의 밝기와 꽃의 모양과 사람의 웃는 모습과 사람의 입모양이 연관되므로 이루어진 표현이다. 세상의 꽃이 모두 어두운 검정색이었다면 꽃이 웃는다는 표현이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꽃의 모양이 꽃잎을 벌린 모양이 아니고 태초부터 주먹이나 공과 같은 모양이었다면 꽃이 웃는다는 말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같은 밝은 빛깔을 띤 전깃불이나 초롱불을 보고 「전깃불이 웃는다」「초롱불이 웃는다」라고 말하고 보면 어색하게 들리는 걸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양이야 어떻게 생겼든, 또는 형체가 없는 추상물일지라도 그 소재가 사람을 닮은 성질이 강하면 그 성질의 방향으로 의인이 쉽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질이 강할 때만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천둥 소리」나「바람」은 형체를 따질 수 없지만 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의인이 되고 또한 실감을 느낄 수 있다.   천둥이라면,   ○ 고함 소리   ○ 무서운 목소리   ○ 성낸 목소리 등으로 의인이 쉽게 된다. 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하여 씌어진 작품을 살펴보자.   천둥 누군가 하늘에서 소낙비 오는 날 성이 났다. 먹구름 속에서 소리를 친다. 겁먹은 나무들이 비를 맞는다.   바람의 경우에도 그렇다.   ○ 나뭇가지를 흔든다.   ○ 세상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 아무것이나 만져보고 쓰다듬는다.   ○ 물위를 걸어다닌다.   등이 바람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바람 ① 감나무 잎을 흔들어 보다가 잘못해 「톡!」 풋감 한 개 떨어뜨리고, 개암나무 가지를 흔들다가 잘못해 「톡!」 개암 한 알 떨어뜨리고.   바람 ② 바람이 물 위로 걸어간다. 물 위로 발을 끌며 걸어간다. 바람의 발끝에 걸려 물결이 사르르 일어난다.   바람 ①에서는 바람의 손을 생각했고, ②에서는 바람의 발과 발끝을 생각했으나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그럴 만한 조건만 있다면 어느 소재를 어느 경우에서나 의인화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기도 한다. 이것은 돌멩이가 웃는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라면 돌멩이가 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보기를 들어보자.   ―나무가 소리를 듣는다.   이 한 구절의 표현으로는 약간 어색하게 들리는 싯구도 여기에 그럴 만한 분위기, 즉 그럴 만한 이유를 설정해 줌으로써 어색하게 들리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작품을 한 편 살펴보자.   달밤의 나무 달이 뜨면서 나무의 영혼이 가지 끝에 나와 반짝이게 되면서 나무는 귀가 열린다. 개울가 물소리를 알아듣는다.   이 시에서 나무가 물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은 달이 떴다는 사실 때문이다. 달이 뜸으로써 나무의 영혼이 가지 끝에 나와 달빛에 반짝이게 되고 영혼의 문이 열리면서 나무는 귀로써 개울물 소리를 듣게 된다. 이렇게 그럴사한 분위기를 설정해 놓고 보니 나무가 소리를 듣는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처음으로 되돌아 생각해 봐야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의인에 난이도(難易度)가 있다는 말이 모두 거짓으로 느껴진다.   이것은 결국 시에는 방법이 많으면서 별다른 방법이 따로 없다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1980년 여름 『아동문학평론』 제15호)   동시 창작법 ⑧ 표현(表現)과 객관성(客觀性)의 사이 신 현 득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지만 독자인 어린이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 공감이란 독자가 그 작품에 대해서 작가와 같은 걸 느끼는 일이다.   ―그것 참 그렇겠다!   ―참 재미있네!   ―나는 미처 생각지 못 했더니!   이렇게 감탄사를 내면 이는 독자가 작자의 작품에 동조하는 이상의 것이 되지만 아무 저항 없이 읽고 작가의 뜻이 전달되기만 해도 이것으로 공감이 된 것이다.   작가의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 독자는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시원치 못한 글 같다.   ―어색하다.   이렇게 느낀다. 이 때 작가가 옆에 있다면 그 작가의 체면을 위해 그 말을 직접 표현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내심으로는 좋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작품은 성공한 것이 아니다. 물론 독자도 그 계층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독자, 아동문학 작품을 꼭 읽어야 할 독자를 상대했을 경우를 뜻한다.   대체로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는 표현에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작품이 주관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남이 정말 내 생각에 동조할까? 공감해 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독자에만 영합해서 글 아닌 글을 써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습작기의 경우 이것이 참으로 힘드는 과정이 된다.   습작기의 경우 대개 그 작품이 자기 위주의 주관이 되기 쉽다. 자기만 아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은 물론 표현의 미숙에서 온다. 그래서 남이 읽어보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습작기를 벗어났다 해서 반드시 객관성이 있는 글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관과 객관을 어느 정도 일치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 두 가지 관점의 일치가 이루어질수록 그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공감을 하게 되고 공유의 것이 된다.   여기에 남의 예를 들 것이 아니라 내 습작기의 노우트를 뒤져 한 작품을 꺼내어 보자.   박덩굴 박덩굴이 지붕에 올라갔다. 높은 지붕 마루에 올라갔다. 어떻게 어떻게 올라갔나? 사다리를 놓아주어 올라갔다.   놀랍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해되지 않을 구절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쓰고 몇 해 후에 느낀 것은 는 두 행이 독자들에 그릇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자들은 문면에 나타난 대로 사람이 정말 사다리를 놓아주어 박덩굴이 며칠 동안 쉬엄쉬엄 지붕까지 기어올라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표현한 의도는 그와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지만 박은 대개 뒤안에 심어 지붕으로 올린다. 박이 자라서 덩굴손을 휘두르게 되면 지붕까지 올라가는 덕을 만들어 준다. 나뭇가지나 막대기 또는 못쓰는 장대 같은 것으로 덩굴손을 이끌어 지붕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때 지붕에 걸쳐준 그 나무막대기는 바로 박덩굴의 사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 혼자의 생각이었다. 주관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의 문면에 그것을 깨우치거나 힌트를 줄 만한 낱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 나는 작품이 일단 완성되면 여태 나를 휩쓸던 영감이나 환상 같은 것을 완전히 가라앉혀 놓고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내 작품을 바라보고 수정하게 되었다.   일단 작자가 아닌 독자의 눈으로 내 작품을 바라볼 때 내 작품은 모순투성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작품을 보기로 하자.   꽃나무 가지 꽃나무가 흔들리네. 꽃가지가 흔들리네. 바람이 살짝 밀어주네. 꽃냄새가 풍겨오네. 꽃가지를 뛰어오네. 바람이 살짝 날라다주네.   언뜻 읽어서 무난한 글 같지만 나는 얼마 후 이 글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물론 독자가 되어 이 작품을 완전히 객관적인 자리에 두고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하는 구절이다.   나는 여기서 꽃향기가 꽃가지에서 나의 코에 와 닿는 상태를 표현했던 것이다. 누가 이 문맥을 그렇게 인정해 주겠는가. 나 혼자 도취되어 지껄인 나 혼자만 아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지만 우선 내 작품의 두 가지 예를 들어둔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습작기의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이 많지만 습작기의 사람이 아닌 누구의 작품에도 이런 면이 더러는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요즘 동시가 난해하다느니 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미숙한 표현, 즉 객관성이 없는 표현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 시가 되지 않아 독자에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무슨 뜻인지 모르니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전체의 독자가 시에 소양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인즉 작품이 되었느니 어떠니 하고 따질 능력이 없어 털어놓고 어렵다 모르겠다고만 하는 것이다.   응모되어 오는 작품을 살펴보면 객관성이 없는 표현인 경우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낱말이 제자리를 찾아앉지 못한 것이다. 낱말이 뜻하는 의미, 낱말에서 풍기는 분위기, 이미지 등을 깊이 생각지 않았을 때다. 시에서 비슷한 말은 안 된다. 비슷한 말은 같은 말이 아니며 같은 말이란 없기 때문에 제자리에 맞는 하나뿐인 낱말을 찾아야 한다.   다음은 지나친 과장이다. …… 등은 주위의 분위기를 여간 잘 끌어가지 않고는 과장된 것으로 읽혀지게 된다.   다음은 몇 구절의 표현은 좋으나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지 못한 것이다. 이 때는 시의 중간에 빈 곳이 생기는 수가 있거나 동강이가 나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표현에 통일성이 없는 것이다. 어느 부분은 직관적이다가 엉뚱한 데 하나가 추상물이 돼버리는 경우다. 어느 부분은 시가 돼 있고 어느 부분은 산문이 돼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표현에 보편성이 없는 것이다. 나팔꽃이 위로만 감아 올라가는 것은 보편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래로 감아 내려가는 것을 하나 보았다 해서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예와 같은 것이다.   다음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 밤 하늘에 은하수가 떴다든가(새벽이 되면 뜰 때도 있지만) 압록강이 천지에서 흐른다든가 하는 표현은 모두 관찰 부족·조사 부족에서 온 것이다. 작가는 어떤 씨앗이 언제 싹트며 어느 나무는 언제 꽃이 피는가를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한다.   다음은 도덕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이다. 이웃집의 감을 따먹는다든지 아무 죄책감도 없이 심한 장난을 하는 것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   다음은 아동 심리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럴 때는 아예 아동문학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하며 동시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때 이런 초심자에게 우리는   ―알맞은 낱말을 찾아라.   ―알맞은 표현을 찾아라.   ―지나친 과장을 삼가라.   ―부분을 두고 전체를 생각하라.   ―표현에 통일성을 두라.   ―표현은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사실에 근거를 두라.   ―도덕성에 위배돼서는 안 된다.   ―아동 심리에 근거를 두라. 하고 일러준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말은 표현에 객관성을 두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라는 말이 된다. 나 하나의 생각으로 작품을 쓸 것이 아니라 독자의 눈으로 작품을 써라는 말이 된다.   겨울의 노래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수정보다 맑은 한얼음 유리판 위로 식식식 달리며 커다랗게 그려보는 오색 무지개. 눈이 오면 눈싸움 편을 갈라서…… 눈싸움에 지치면 썰매를 탄다. 야호야호 달리는 썰매. 바람이 부는 날은 연을 날린다. 팽팽한 연줄을 감을 때마다 연도 즐거워 붕붕거리며 하늘 복판에서 노랠 부른다. 팽이도 쳐야지 양지바른 골목에 함께 모여서 윙윙 우는 팽이의 노래 윙윙 우는 겨울의 노래. 처마마다 기다란 수정 고드름 한 개씩 꺾어내어 골목마다 전쟁놀이도 신나지.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이 작품은 4학년 국어 교과서 12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시 한 편이다.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작품이라면 어린이들에게 본보기글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분위기는 되어 있으나 몇 구절의 표현이 모호해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아동문학 세미나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말이 나와 토론을 벌인 일이 있다. 그래서 이왕 말이 난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예문으로 든 것이다.   이 시의 의 부분이 모호한 것이다.   얼음판 위에 무지개를 그려 본다는 이 대목을 두고 교사들의 생각이 구구한 것이다.   어떤 교사는 이 무지개라는 표현이 스케이트의 자국일 것이라고 말한다. 스케이트의 빙 돌아가는 자국이 마치 무지개의 곡선과 같지 않느냐고 한다.   그럼 「오색」이란 수식어를 왜 끼웠느냐는 말에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으니 무지개 같지 않느냐고 한다.   또 어떤 참고서에는 이 오색 무지개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스케이트를 타게 될 때 느껴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해석에서는 스케이트를 탈 때 얼음가루가 해에 비쳐져 프리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시는 이런 입장에서 표현됐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표현은 보편성을 잃었다.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프리즘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린이에게 스케이트를 지도하던 교사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사실은 잘 모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하나의 구절 때문에 야단이다. 표현이 전혀 객관화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로부터 공감이 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라 한 것이다. 겨울의 노래라 했다. 팽이 우는 소리를 정작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해도 그것을 노래에 비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얼음판 위에서 돌리는 팽이라 해도 팽이가 노래로 흥겹게 들릴 만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윙―」 소리를 몇 초 동안 내고 만다. 이것을 겨울의 노래라 표현한 것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어색한 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로 비유한다면 선풍기 도는 소리·기계 소리·비행기 소리를 모두 노래로 보아야 한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분위기만으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 주관적인 표현만으로도 동시가 되지 않는다. 하는 주장은 모두 객관성이 있는 문장이 되게 하자 그 소리다.    (1980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16호)   동시 창작법 ⑧ 표현(表現)과 객관성(客觀性)의 사이 신 현 득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지만 독자인 어린이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 공감이란 독자가 그 작품에 대해서 작가와 같은 걸 느끼는 일이다.   ―그것 참 그렇겠다!   ―참 재미있네!   ―나는 미처 생각지 못 했더니!   이렇게 감탄사를 내면 이는 독자가 작자의 작품에 동조하는 이상의 것이 되지만 아무 저항 없이 읽고 작가의 뜻이 전달되기만 해도 이것으로 공감이 된 것이다.   작가의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 독자는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시원치 못한 글 같다.   ―어색하다.   이렇게 느낀다. 이 때 작가가 옆에 있다면 그 작가의 체면을 위해 그 말을 직접 표현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내심으로는 좋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작품은 성공한 것이 아니다. 물론 독자도 그 계층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독자, 아동문학 작품을 꼭 읽어야 할 독자를 상대했을 경우를 뜻한다.   대체로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는 표현에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작품이 주관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남이 정말 내 생각에 동조할까? 공감해 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독자에만 영합해서 글 아닌 글을 써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습작기의 경우 이것이 참으로 힘드는 과정이 된다.   습작기의 경우 대개 그 작품이 자기 위주의 주관이 되기 쉽다. 자기만 아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은 물론 표현의 미숙에서 온다. 그래서 남이 읽어보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습작기를 벗어났다 해서 반드시 객관성이 있는 글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관과 객관을 어느 정도 일치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 두 가지 관점의 일치가 이루어질수록 그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공감을 하게 되고 공유의 것이 된다.   여기에 남의 예를 들 것이 아니라 내 습작기의 노우트를 뒤져 한 작품을 꺼내어 보자.   박덩굴 박덩굴이 지붕에 올라갔다. 높은 지붕 마루에 올라갔다. 어떻게 어떻게 올라갔나? 사다리를 놓아주어 올라갔다.   놀랍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해되지 않을 구절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쓰고 몇 해 후에 느낀 것은 는 두 행이 독자들에 그릇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자들은 문면에 나타난 대로 사람이 정말 사다리를 놓아주어 박덩굴이 며칠 동안 쉬엄쉬엄 지붕까지 기어올라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표현한 의도는 그와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지만 박은 대개 뒤안에 심어 지붕으로 올린다. 박이 자라서 덩굴손을 휘두르게 되면 지붕까지 올라가는 덕을 만들어 준다. 나뭇가지나 막대기 또는 못쓰는 장대 같은 것으로 덩굴손을 이끌어 지붕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때 지붕에 걸쳐준 그 나무막대기는 바로 박덩굴의 사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 혼자의 생각이었다. 주관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의 문면에 그것을 깨우치거나 힌트를 줄 만한 낱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 나는 작품이 일단 완성되면 여태 나를 휩쓸던 영감이나 환상 같은 것을 완전히 가라앉혀 놓고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내 작품을 바라보고 수정하게 되었다.   일단 작자가 아닌 독자의 눈으로 내 작품을 바라볼 때 내 작품은 모순투성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작품을 보기로 하자.   꽃나무 가지 꽃나무가 흔들리네. 꽃가지가 흔들리네. 바람이 살짝 밀어주네. 꽃냄새가 풍겨오네. 꽃가지를 뛰어오네. 바람이 살짝 날라다주네.   언뜻 읽어서 무난한 글 같지만 나는 얼마 후 이 글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물론 독자가 되어 이 작품을 완전히 객관적인 자리에 두고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하는 구절이다.   나는 여기서 꽃향기가 꽃가지에서 나의 코에 와 닿는 상태를 표현했던 것이다. 누가 이 문맥을 그렇게 인정해 주겠는가. 나 혼자 도취되어 지껄인 나 혼자만 아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지만 우선 내 작품의 두 가지 예를 들어둔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습작기의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이 많지만 습작기의 사람이 아닌 누구의 작품에도 이런 면이 더러는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요즘 동시가 난해하다느니 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미숙한 표현, 즉 객관성이 없는 표현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 시가 되지 않아 독자에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무슨 뜻인지 모르니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전체의 독자가 시에 소양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인즉 작품이 되었느니 어떠니 하고 따질 능력이 없어 털어놓고 어렵다 모르겠다고만 하는 것이다.   응모되어 오는 작품을 살펴보면 객관성이 없는 표현인 경우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낱말이 제자리를 찾아앉지 못한 것이다. 낱말이 뜻하는 의미, 낱말에서 풍기는 분위기, 이미지 등을 깊이 생각지 않았을 때다. 시에서 비슷한 말은 안 된다. 비슷한 말은 같은 말이 아니며 같은 말이란 없기 때문에 제자리에 맞는 하나뿐인 낱말을 찾아야 한다.   다음은 지나친 과장이다. …… 등은 주위의 분위기를 여간 잘 끌어가지 않고는 과장된 것으로 읽혀지게 된다.   다음은 몇 구절의 표현은 좋으나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지 못한 것이다. 이 때는 시의 중간에 빈 곳이 생기는 수가 있거나 동강이가 나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표현에 통일성이 없는 것이다. 어느 부분은 직관적이다가 엉뚱한 데 하나가 추상물이 돼버리는 경우다. 어느 부분은 시가 돼 있고 어느 부분은 산문이 돼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표현에 보편성이 없는 것이다. 나팔꽃이 위로만 감아 올라가는 것은 보편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래로 감아 내려가는 것을 하나 보았다 해서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예와 같은 것이다.   다음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 밤 하늘에 은하수가 떴다든가(새벽이 되면 뜰 때도 있지만) 압록강이 천지에서 흐른다든가 하는 표현은 모두 관찰 부족·조사 부족에서 온 것이다. 작가는 어떤 씨앗이 언제 싹트며 어느 나무는 언제 꽃이 피는가를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한다.   다음은 도덕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이다. 이웃집의 감을 따먹는다든지 아무 죄책감도 없이 심한 장난을 하는 것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   다음은 아동 심리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럴 때는 아예 아동문학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하며 동시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때 이런 초심자에게 우리는   ―알맞은 낱말을 찾아라.   ―알맞은 표현을 찾아라.   ―지나친 과장을 삼가라.   ―부분을 두고 전체를 생각하라.   ―표현에 통일성을 두라.   ―표현은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사실에 근거를 두라.   ―도덕성에 위배돼서는 안 된다.   ―아동 심리에 근거를 두라. 하고 일러준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말은 표현에 객관성을 두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라는 말이 된다. 나 하나의 생각으로 작품을 쓸 것이 아니라 독자의 눈으로 작품을 써라는 말이 된다.   겨울의 노래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수정보다 맑은 한얼음 유리판 위로 식식식 달리며 커다랗게 그려보는 오색 무지개. 눈이 오면 눈싸움 편을 갈라서…… 눈싸움에 지치면 썰매를 탄다. 야호야호 달리는 썰매. 바람이 부는 날은 연을 날린다. 팽팽한 연줄을 감을 때마다 연도 즐거워 붕붕거리며 하늘 복판에서 노랠 부른다. 팽이도 쳐야지 양지바른 골목에 함께 모여서 윙윙 우는 팽이의 노래 윙윙 우는 겨울의 노래. 처마마다 기다란 수정 고드름 한 개씩 꺾어내어 골목마다 전쟁놀이도 신나지.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이 작품은 4학년 국어 교과서 12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시 한 편이다.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작품이라면 어린이들에게 본보기글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분위기는 되어 있으나 몇 구절의 표현이 모호해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아동문학 세미나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말이 나와 토론을 벌인 일이 있다. 그래서 이왕 말이 난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예문으로 든 것이다.   이 시의 의 부분이 모호한 것이다.   얼음판 위에 무지개를 그려 본다는 이 대목을 두고 교사들의 생각이 구구한 것이다.   어떤 교사는 이 무지개라는 표현이 스케이트의 자국일 것이라고 말한다. 스케이트의 빙 돌아가는 자국이 마치 무지개의 곡선과 같지 않느냐고 한다.   그럼 「오색」이란 수식어를 왜 끼웠느냐는 말에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으니 무지개 같지 않느냐고 한다.   또 어떤 참고서에는 이 오색 무지개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스케이트를 타게 될 때 느껴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해석에서는 스케이트를 탈 때 얼음가루가 해에 비쳐져 프리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시는 이런 입장에서 표현됐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표현은 보편성을 잃었다.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프리즘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린이에게 스케이트를 지도하던 교사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사실은 잘 모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하나의 구절 때문에 야단이다. 표현이 전혀 객관화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로부터 공감이 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라 한 것이다. 겨울의 노래라 했다. 팽이 우는 소리를 정작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해도 그것을 노래에 비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얼음판 위에서 돌리는 팽이라 해도 팽이가 노래로 흥겹게 들릴 만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윙―」 소리를 몇 초 동안 내고 만다. 이것을 겨울의 노래라 표현한 것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어색한 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로 비유한다면 선풍기 도는 소리·기계 소리·비행기 소리를 모두 노래로 보아야 한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분위기만으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 주관적인 표현만으로도 동시가 되지 않는다. 하는 주장은 모두 객관성이 있는 문장이 되게 하자 그 소리다.    (1980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16호)   동시 창작법 ⑩ 동시(童詩)는 동화적(童話的)인 시(詩)다 신 현 득              바다 속                                                      강소천       조개들의 조그만 단간 집들이      올망졸망 둘러앉은 동구 밖엔       사철 산호꽃이 만발하고      조용히 흔들리는 미역 숲에선      하루 종일 아기 고기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푸른 바다를      멋지게 날아다니는       가지가지 고기들      등대에 배들에 불이 켜지면,       "별 하나 나 하나…."      등불을 세고.    지난 날 초등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됐던 이 동시(童詩)에 대해 지은이 소천(小泉)은 어느 교육지(敎育誌)에 그 해설을 곁들이면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즉 처음에 이 작품은 동화(童話)로 구상을 했다는 것이다. 동화로 쓸려던 것이 그 결과(結果)에서 동시(童詩)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교과서에 본보기글로 수록될 만큼 수작이다. 훌륭한 동시(童詩)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 동화가 되게 할 수가 있다는 것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다.    결국 소천의 말은 헛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을 소재로 해서 동화를 썼다면 역시 수작의 동화를 뽑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말은 동시 동화의 거리 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 된다.   일반 쟝르에서는 소설의 소재로 희곡을 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소재로 시를 쓴다는 말은 잘 듣지 못한다. 시의 소재로 시조를 쓴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다. 그것은 자유시와 정형시의 차이밖에는 없는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소설(小說)을 무대에 올렸을 때는 희곡이 된다는 것도 같은 이야기를 곁들일 수 있는 산문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관계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말을 동시와 동화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동문학(兒童文學)의 작가(作家)들 사이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런 것을 느껴왔지만 아직 이론적(理論的)인 전개(展開)를 한 사람은 없다.   여기서 동화(童話)란 사실적(寫實的)인 문장(文章)으로 된 소년소설(少年小說)이나 생활동화(生活童話)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팬터지로써 씌어진 본격동화(本格童話)를 말한다.    이런 환상동화(幻想童話)와 동시(童詩)의 관계를 먼저 그 문장수사(文章修辭)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환상동화의 경우 동물(動物)이나 사물에 인격(人格)을 주어 사람차럼 사고(思考)와 언어(言語)를 갖게하는 의유(擬喩)가 쓰인다. 이것은 시(詩)의 수사(修辭)에 쓰이는 한 방법(方法)이다. 동시(童詩)의 수사(修辭)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냇물이 지껄인다.   ―나무가 춤을 춘다.   이렇게 간단한 동시(童詩)의 구절(句節)도 냇물과 나무를 하나의 인격체(人格體)로 보고 있는 데서 시작된 표현이다.   이런 동시(童詩)의 의유법(擬喩法)을 동화(童話)가 공유(共有)하고 있는 것이다. 전래동화(傳來童話) 창작동화(創作童話)를 막론하고 의인적(擬人的)인 전개(展開)가 많은 양(量)을 차지하고 있다.   "옛날 호랑이 한 마리가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하는 구전(口傳)의 이야기나    "돌멩이는 생각했지요. '산꼭대기에서 내리굴렀으면 재미있겠는데' 하고…"   이런 창작동화(創作童話)의 한 대목도 모두 그렇다.   그러므로 철저히 의인(擬人)된 문장(文章)이라는 데서 동시(童詩) 동화(童話)는 가깝다. 환상(幻想)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   동심(童心)을 담은 같은 그릇이라는 점, 재미성을 지녀야 할 수밖에 없는 문장(文章)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므로 동화(童話)는 산문(散文) 가운데서 동시(童詩)에 가까운 것이며 동시(童詩)는 운문(韻文) 가운데서 동화(童話)에 가까운 것이라는 설명이 된다.   김요섭씨는 동시(童詩) 동화(童話)가 하나의 포에지(poesy), 즉 이 포에지라는 시(詩)의 광석(鑛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광석의 제련술(製鍊術)에 따라 동시(童詩)로도 동화(童話)로도 결정이 되는데 그 바탕인 광석(鑛石)은 같은 것이라는 풀이가 된다. 이 제련술(製鍊術)이라는 것은 바로 형식(形式)이요 모티브이다.   그래서 김요섭씨는 동화(童話)야말로 시인(詩人)이 써야할 쟝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시(詩)의 소양 없이는 환상동화(幻想童話)를 쓰기 어렵다는 말로도 느껴진다.   요즈음 동시(童詩)작가들이 동화((童話)를 많이 쓰고 있고 사실 이 두 가지 쟝르를 겸하는 작가들이 대단히 많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으나 원체 가까운 문장(文章)에 가까운 발상(發想)의 것이기 때문에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동시로 씌어져야 할 소재로 동화를 썼다는 말은 조유로씨도 말한 바가 있고 필자도 이런 경험이 더러 있다.    이것을 다시 동시(童詩)의 입장에서 보면 동시(童詩)는 동화적이어야 된다는 말로 해석이 된다. 이것은 동시(童詩)가 산문(散文)이 되라는 말과는 다르다.   그 문장(文章)의 전달면(傳達面)이나 문장난해도(文章難解度)에 있어 동시(童詩)는 동화(童話)를 본받아야 된다는 말이 된다. 곧 동시(童詩)는 동화(童話)의 문장(文章) 이상으로 난해해서는 전달(傳達)에 지장이 된다는 것이다. 동화(童話)의 문장(文章)을 하나의 자로 삼아야 된다는말이다.   되풀이 말했듯이 동시(童詩)는 그 개념이 지닌 그대로 구속성(拘束性)을 갖고 있다 . 이 구속(拘束)을 벗어버리면 이것은 일반 자유시(自由詩)가 된다. 동시(童詩)의 기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성(拘束性)이 있으므로 동시(童詩)인 것이다.   여기서 백번 양보를 해도 동시(童詩)는 시(詩)의 모더니즘을 따라갈 수도 없고 그런 방법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모호(模糊)한 표현이 오히려 시(詩)다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어(言語)의 건축(建築)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들 표현(表現)을 위해 암시(暗示)와 상징(象徵)과 은유(隱喩)의 방법(方法)을 동원한다. 이것이 현대시(現代詩)의 수사(修辭)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동시(童詩)의 방법(方法)이 될 수 없다.    동시(童詩)에서 모호(模糊)한 표현은 지탄이 돼야하며 은유(隱喩)나 암시(暗示)는 독자인 어린이에게 거리를 두게 한다.   같은 포에지에서 출발된 동시(童詩), 동화(童話)는 근본 문장(文章) 수사(修辭)에서도 같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시(童詩)는 난해(難解)한 현대시(現代詩)보다 동화(童話)쪽에 가까운 문장(文章)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시(童詩)는 동화적(童話的)인 시(詩)요, 동화(童話)는 동시적(童詩的)인 산문(散文)이다.    여기에 그 예문(例文)을 들어 이를 실증(實證)할 수도 있다.           엄마 심부름                                                      윤석중       아기가 반찬 가게로      엄마 심부름을 갑니다.      조그만 소쿠리를 옆에끼고      아장아장 콩나물을 사러 갑니다.      콩나물을 담아 놓은 치룽이 너무 높아서      아기는 못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자꾸자꾸 걸어갑니다.      집이 점점 멀어집니다.      집을 잃어버리고 우는 아기를      엄마가 달려가서      넬름 업어 왔습니다.    이 '엄마 심부름'은 1961년에 출판된 윤석중 동요집 중의 한 편이다. 이 시는 저학년 어린이의 감각을 잘 살린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 말고라도 윤석중씨의 작품만큼 어린이들과 친밀한 작품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동시에서 동화적인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이런 소재라면 좋은 유년동화 감이다. 동화로 썼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1981. 봄.  제18호에서     동시 창작법 ⑪ 자연(自然)에게 물어보라.  가르쳐 줄 것이다. 신 현 득     자연(自然)의 음성(音聲)을 듣는 것만으로는 시(詩)가 씌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 때는 자연물(自然物)에게 대화(對話)를 거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연(自然)은 나름의 음성(音聲)으로 대답해 줄 것이다.   ―내가 짤깍짤깍 소리내면 동네 꼬마들이 모여들지.   이것은 엿장수 가위의 대답이다.   ―나는 방망이로 얻어맞기만 해.   이것은 빨랫터의 빨랫돌의 대답이다.   ―네가 꼬마였을 땐 이랬단 말이야.   이것은 내 돌사진이 하는 말이다.   어느 것이나 몇 마디의 대답은 하여 준다.   ―나는 뱃속에서 종소리를 낼 수도 있다.   괘종시계의 말이다.   ―꽃밭에 이슬비를 오게 해 주는 굉장한 재주가 있지.   이것은 물뿌리개의 말이다.   그런데 이 때는 가장 깊이있게 대답해 줄 만한 놈에게 가서 수작을 거는 것이 한 가지 요령이다. 시는 있을 만한 곳에 있으니까.   도랑물에게 가서 물어보자.   "도랑물아 어디로 가니? 어디를 거쳐서 가니? 무슨 일을 하면서 가니?"   이렇게 물어 놓고 기다리자. 대답이 없거든 하루종일이라도 도랑가에 앉아서 대답을 기다리자. 그러면 도랑물은 대답할 것이다.   "바다까지의 긴 여행이다. 우리는 여행을 하다가 쉬는 일이 없단다."   "밤낮 쉬지 않고 흘러 가지. 밤에는 달그림자를 띄우고 낮에는 산그림자를 띄우고 흘러 가지."   "긴 여행에 지치지 않게 노래를 부르며 흐르지."   "종이배도 띄우고, 나룻배도 띄우게 될 걸."   "마을 앞을 지나다가 물레방앗간에 들르게 될 거야. 쿵덕쿵덕 물레방아를 올려 봐야지."   자연(自然)의 대답은 모두가 시(詩)다 . 이것을 그대로 정리해 보자.           달그림자를 띄우고            산그림자를 띄우고           마을 앞을 지나다가           물레방아를 돌린다.           -쿵덕 쿵덕 쿵덕!   다시 더 깊은 이야기를 해 줄 것과 대화를 나누어 보자. 우리에게는 두 개의 손이 있다. 내 가장 가까운 손에게 물어 보자.   "손아 내 손아 네가 하는 일은?"   ―공을 치는 일이지. 그렇지만 커서는 큰일을 하게 될 걸. 나는 (손은) 자라고 있어.   "할머니 손이 하는 일은?"   ―아기 궁둥이를 닦아 주는 일.   "엄마손이 하는 일은?"   ―쌀단지를 긁어 퍼내는 일이지.   "오빠의 손은?"   ―구두닦는 일(마침 이 때는 6.25전쟁 때였다)   손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충분히 시가 될 수 있다.                손           할머니가            아기 둥둥이르 닦아 주고 있다.           엄마가            쌀 단지를 긁어 퍼낸다.           오빠는 구두닦이에서 돌아왔다.           할머니 손에           아기 똥이 묻지 않았나 보셔요.           오빠 손에는            거멓게 구두약이 묻었다.           죽 한 그릇씩을 먹고           저녁상을 치우고 나서           자 이리로            손을 모아 보셔요.           아기 손부터           차례로 놓아 보셔요.           작은 손들이 어떻게 커서           어른이 되는가를 알게.           내 손이 커서           오빠 손만해지고           오빠 손이            엄마손보다 커졌을 때           우리집은 아무도           쌀단지를 긁어내지 않아도 된다.           아기가 커서            오빠만 해졌을 때는           아기 손에            구두약이 묻지 않아도 된다.   자연에 물어보니 자연은 무엇이나 가르쳐 주고 있다.   어느 때 시골 학교에 가서 자취를 하며 1년 3개월을 지낸 일이 있다. 학교서 자취방까지에는 과수원이 있었고 과수원을 둘러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한적한 시골이라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 외에는 자연을 만나는 일밖에는 없었다. 나는 탱자꽃이 피는 봄부터 여기를 지나다니며 과일나무보다는 탱자울타리가 재미있는 소재(素材)라는 걸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시(詩)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하루는 재미있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탱자나무에게 물어보면 될 게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탱자나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탱자나무다.   "미처 몰랐구나!"   나는 아침마다 이 탱자나무 울타리르 지나며 조용히 대화를 걸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야!"   "응"   대답을 해 줄 때도 있었고 대답이 없을 때도 있었다. 며칠인가 지났을 때다.    "우리는 여럿이 어깨동무를 하여 울을 만들고 있단다."   울타리는 재미있는 대답을 해 주었다. 역시 탱자나무에 대해서는 탱자나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는 이런 대답을 얻어내었다.   "우리에겐 가시가 있어. 문을 지키는 이는 무기가 있어야 되거든 우리는 이 뾰족한 무기를 이파리 밑에 숨겨두고 있단다. 누구든지 과일밭에 들어오기만 해 봐."   가을 날이 되고부터 과일밭의 사과가 빨갛게 익어 있었고 과일밭을 지키는 탱자나무도 노란 구슬로 된 자기 열매를 들고 익히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다가 보니 탱자나무 울타리 한 곳이 해쳐져 있었다.   '간밤 도적이 들었구나!'   그러면서 탱자나무의 이야기를 들었다. 탱자나무의 말을 들으면 어제 저녁 밤중에 과일밭의 사과를 탐내는 사람이 들어오다가 가시에 찔려 달아났다는 것이다.   나는 이 탱자나무들이 그 밤도적을 물리치기 위해 어떻게 힘을 합쳐 싸웠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참으로 기특한 탱자나무다. 이렇게 하여 나는 한 편의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탱자나무           같은 나무이지만           착한 탱자나무는           과일나무 울이 돼 준다.           여럿이 어깨동무하고           울이 되어 서서           봄 사월           날이 선 가시 위에            잎과 꽃을 단다.           잎은 자라           가시를 덮는다.           가시는 움츠리고           이파리 밑에 숨는다.           과일밭의 과일이 익을 무렵에           탱자꽃은 커서           향기를 가득 담고           구슬이 돼 다시 열린다.           그러나 어둡고 무서운 밤에           가슴이 떨리도록 무서운 밤에           발자국 소리 여럿이 몰려 온다.           검은 그림자가 손을 내민다.           ―과일을 탐내는 놈이냐?           ―내 열매를 탐내는 놈이냐?           숨었던 가시가 나와           마구 찌른다.           ―아야 아얏!           ―아야 아얏!           자국 소리도 그림자도           달아나고           여러 개 구슬을 가지고 놀면서           탱자나무는            한가을까지 즐겁다.           과일밭을 지키면서            즐겁다.    의 한 작품도 자연과의 대화에서 씌어졌다. 처음에는 흙과의 대화였다.   "나는 세상의 어머니다."   이것이 흙의 대답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흙을 의지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풀과 나무가 나를(흙을) 의지해 살고 있지. 이 풀을 먹고 나무의 과일을 먹고 온갖 동물이 자라고 있지. 내가 없다면 누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겠니. 나비도 잠자리도 살 수 없다."   이것도 들판을 덮고 있는 흙의 말이었다.   "나는 젖을 주고 있다. 배나무가 뿌리를 뻗어 오면 배맛이 나는 열매가 되도록 젖을 주지. 복숭아나무에게도 살구나무에게도…."   이것도 흙의 말이었다.    "내가 나무의 뿌리를 잘 잡아 두니까 나무가 서 있을 수 있는 거야. 나무뿐 아니지. 모든 풀뿌리도 내가 잡아 주고 있다."   이것도 흙의 말이었다.   "나무끝 새집에서 새새끼가 잘 크는 것도 내가 잘 흔들어 주기 때문이야."   이것도 흙의 말이었다.   다음에는 나무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흙을 엄마라 생각하니?"   "그럼, 흙은 우리 엄마다. 지평선 끝으로 아침해를 띄우는 것도 모두 흙엄마가 하는 일이야. 그리고 내가 익힌 씨앗이 가서 묻히는 것도 흙엄마다. 내가 넘어져 묻힐 곳도 흙엄마야."   흙의 말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 흙과 나무끼리 대화하는 소리까지 엿듣게 됐다. 분명히 저희끼리도 엄마와 자식 사이처럼 다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흙과 엄마           "나는엄마다."           흙은 그런 생각으로           하늘을 마주 보고 누워 있어요.           배나무가 뿌리를 뻗어 오면            배맛 될 것만 골라           젖을 주어요.           미루나무 키다리를           젖으로 키워요.           흙은 넘어지지 않게           뿌리를 잡고           그 줄기 끝에다 새집을 달고           새집을 흔들어 새끼새를 키우며           그 위로            구름이 흐르게 해요.           아침에 태양이 지평선에 떠서            나무꼭지서            열두시를 만나게 해요.           "엄마야!"           "나다 나다."           "엄마야!"           나다.           흙과 나무는            불러주고 대답해요.           "엄마야            내 씨가 떨어지면           어디로 가노?"           "그야 엄마한테로 오지."           "엄마야           내가 넘어지면           어디로 가노?"           "그 때도           엄마께로 와 묻힌다."  1981.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20호에서     동시 창작법 ⑫ 동요운동(童謠運動)에 붙여 신 현 득   동요(童謠)를 쓰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근 30년 동안 자유동시(自由童詩), 즉 동시(童詩) 일변도가 되어온 아동문학의 시분야(詩分野)가 동요도 아동문학의 책임영역이라는 자기 반성을 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동요의 학술용어(學術用語)는 「정형동시(定型童詩)」다. 그러므로 동시의 한 갈래로 정의(定義)가 된다. 다만 오랫동안 「동요」라는 용어를 써온 습관상 이 학술용어를 취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냥 「동요」라고만 할 때는 시(詩)로서의 의미와 곡(曲)으로서의 의미를 같이 지니고 있어서, 낱말 구성의 분위기를 따지지 않으면 구별이 되지 않는 수도 있다.   즉 「동요를 쓴다」와 「동요를 작곡한다」「동요를 부른다」에서 씌어지는 동요라는 의미는 각각 다른 것이다. 동요를 정형동시로 불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동요는 정형시(定型詩)이지만 시조( 時調)·경기체가(景幾體歌)·가사(歌辭)나 한시(漢詩)의 칠언절구(七言絶句)·오언시(五言詩)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외형률(外形律)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4·4조나 7·5조가 반드시 동요의 요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요는 어느 정형시보다 그 표현이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면서 동요는 정형시로서의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그 작품 나름의 리듬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과 연(聯)과 연 또는 절(節)과 절 사이의 대칭관계(對稱關係), 즉 대구(對句)를 유지하는 데에 있다. 모든 동요는 그 첫 연이 기준이 된다. 그 다음의 연이 여기에 맞추어져 대칭을 유지함으로써 정형시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대칭관계의 맞서는 자리에 같은 자수(字數)의 시어(詩語)를 두되 서로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것이나 대구가 될 수 있는 낱말을 두어 전체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           봄비                       김종상 보슬보슬 봄비야 잔디밭에 내려라. 마른 잔디 속잎을 파릇파릇 피워라. 산과 들을 파랗게 융단으로 덮어라. 보슬보슬 봄비야 꽃나무에 내려라. 가지마다 꽃잎을 곱게곱게 달아라. 산과 들을 예쁘게 꽃밭으로 꾸며라.   위의 동요의 경우를 두고 보자. 첫 연과 둘째 연을 볼 때 「보슬보슬 봄비야」로 시작이 되고 있다. 「잔디밭에 내려라」와 「꽃나무에 내려라」의 대구다. 행을 살펴보면 「파릇파릇 피워라」와 「곱게곱게 달아라」의 대구다. 끝맺음을 「융단으로 덮어라」와 「꽃밭으로 꾸며라」의 대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 형식을 따져 보면 맞서는 자리에 같거나 비슷한 내용의 시어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문장의 종지를 「내려라」「피워라」「덮어라」 등 「라」로 끝나는 낱말을 받혀 전체의 조화를 이룬 것도 이 동요의 재미있는 구성이다.   이와는 반대로 맞서는 자리에 전혀 반대가 되는 낱말을 놓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 「높다」와 「낮다」,「길다」와 「짧다」,「검다」와 「희다」 등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마방진(魔方陣)처럼 낱말이 있을 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동요는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다. 쓰기에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동요는 이런 구속에서조차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반드시 연을 가지지 않아도 동요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연이 없는 단련동요(短聯童謠)는 특히 구전동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의 민요는 4·4조를 기본 외형률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동요의 경우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다. 성인(成人)의 작의(作意)가 작용하지 않는 것일수록 그 표현이 아주 자유롭다. 황새야 덕새야 네 모가지 짜르고(짧고) 내 모가지 길―고   이것은 황새를 보고 부르는 구전동요이지만 4·4조도 7·5조도 아니다. 별 하나 똑 따서 행주 닦아 망태에 담아서 동문에 걸―고 별 둘 똑 따서 행주 닦아 망태에 담아서 서문에 걸―고…….   별을 세는 이 구전동요(口傳童謠)도 4·4조와는 멀다. 이것만 보아도 동요는 그 리듬이 퍽 다채로우면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련의 동요가 지어지고부터 표현이 자유스러워진 반면 자유시와의 한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시조는 글자가 한정돼 단수에서도 시조의 성격을 지닌다. 가사는 정해진 음률이 있어서 길이에 관계 없이 그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   자수의 제한도 정해진 음률도 없는 동요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때의 척도를 문장의 리듬과 담긴 내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창작동요(創作童謠)가 씌어진 것은 1908년 육당에 의해서였다. 이후 20년대부터 동요는 아동문학의 주류로서 그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이룬다. 그러나 이 당시의 동요는 현재의 동시적인 성격의 것도 있었다. 즉 현재의 동시와 동요의 기능을 다 맡고 있었다. 동시·동요의 미분화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형시인 동요를 써도 노래가 될 수 있는 것과 노래가 되기에 용이했던 것과 노래가 붙여질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형시라 해서 다 노래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현대의 자유동시를 동요의 틀에 잡아 넣었다 해서 반드시 노래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요는 오히려 외형적인 것보다 그 내용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된다. 즉 시의 내용에서 악상(樂想)이 풍겨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동시를 함축미(含蓄美)의 시라고 한다면 동요는 밖으로 발산되는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푸른 물 출렁출렁 어디로 가나?」   이 시구(詩句)는 1행(行)만으로도 동시의 문장과는 구별이 되고 있다. 악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의성어나 의태어가 악상을 잡아 주는데 역할을 한다고 믿어 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동요는 경쾌하고 발랄하면서 재미있고 흥겨운 표현이 되어야 한다.   동시를 쓴다 해서 동요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동요를 쓸 때 동시와는 전혀 다른 표현 방법을 가지고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시인들이 동요에 실패하는 원인은 동시에서 배배 꼬인 비유들을 동요의 틀에 잡아 넣기 때문이다. 문장에다 의미를 강조해 두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딱딱하고 뻣뻣한 것이 돼버린다. 이런 것은 노래가 될 수 없다. 동요의 문장은 부드러워야 한다. 따라서 시의 소재에서도 동시보다 제약을 받아야 한다. 충분히 노래가 담길 만한 소재여야 하는 것이다.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이 있는 것이 좋다.     이슬 눈 방울 눈                     유경환 풀잎 끝에 마알간 이슬 눈 한 개. 풀잎 끝에 은빛의 방울 눈 한 개. 눈빛을 반짝이는 풀잎들이 세상은 파랗다 생각할 거야.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 눈 한 개 풀잎 끝에 또로록 방울 눈 굴러 해님을 쳐다보다 잠이 들면 풀잎은 눈 감고 꿈나라 간다.   이 동요는 소재를 잘 택한 보기가 된다. 「이슬 눈 방울 눈」이라는 제목에서 벌써 노래가 연상돼 온다. 좋은 동요가 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요를 쓰고자 할 때 소재의 발견이 큰 열쇠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주제가 정해졌을 때 거기에서 재미나는 몇 개의 사실을 골라 알맞게 배치해 놓고 그것을 전체의 뼈대로 삼는 것이다.   2연이나 3연의 노래를 지을 경우 이 뼈대 위에 대구가 될 만한 시어들을 배치한 다음 문장을 다듬어 간다.   그러나 동요는 어디까지나 문학인 만큼 문학적인 조화가 어느 정도인가에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때 동요가 아동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만큼 동요에는 훌륭한 문학을 담을 수 있다.         겨울 밤                         김재원 나무 속에 하늘이 들어와 있다. 가지마다 매달린 수많은 별들 나무들은 별을 세며 추위를 잊고 별들은 가지에서 겨울을 난다. 나무들아 춥거든 별을 보아라. 반짝반짝 눈부시게 살아있잖니? 별들아 춥거든 나무를 보렴. 찬 바람 이겨내고 살아있잖니?   이 작품에서 느끼는 것은 강한 문학성(文學性)이다. 그러므로 이만한 작품을 쓰기가 쉽지 않다. 각고(刻苦) 끝에 낳아진 작품이다.   동요가 아동문학의 책임 분야라는 것을 새삼스레 강조해야겠다. 만일 아동문학인이 동요를 써 주지 않을 경우 어린이들은 첫째 노래에서 굶주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요의 기능은 그것뿐이 아니다. 어린이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전달이 쉬운 시를 제공해 주게 된다.   그러나 동요운동이 자유시로서의 동시가 발전하는데 지장을 주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한편 동요운동을 일으키는 단계에서 살펴볼 때 우리의 할 일은 너무도 많다.   육당(六堂)은 창작동요를 처음 쓰면서 『흥부전』 『나무꾼과 선녀』 『별주부전』 같은 옛 얘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 노래를 창작했다. 7、5조 4행을 1연으로 하는 이들 이야기 노래는 현재의 동화시(童話詩)와는 다르다. 동화시는 자유시인데 반해 이 이야기 노래는 철저한 7、5조의 정형시다.   이러한 작품은 처음부터 노래를 위해서라기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해 주기 위한 수법으로 보인다. 그 길이가 엄청나게 길기 때문이다.   별주부전을 주제로 한 을 예로 들면 56행의 정형시다. 또한 이보다 긴 작품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작품은 7·5조로 된 가사(歌辭)로 보아도 될 만하다.   만일 이와 같은 작업이 현대에 와서 이루어질 때 우리의 고전 이야기는 물론 지리적인 기행문, 물건의 생산 과정, 유통 과정(流通過程)을 모두 노래에 담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작품을 시도한다고 할 때 현대적인 감각에서 씌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고전동요인 구비전래동요(口碑傳來童謠)를 현대동요에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의 문제다.   구전동요(口傳童謠) 중에는 녹두새요(謠)처럼 현대적인 가락에서 곡이 지어진 것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이 많은 노래의 소재(素材)들이 방치되고 있는 상태다.   구전동요가 현대적인 노래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 시어들이 낡고, 길이가 너무 길고, 표현이 모호하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동요에서 구전동요를 받아들인다면 그 전체가 아니고 소재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약간의 수정으로 현대적인 노래가 될 수 있는 것도 있다.   임동권 교수의 한국민요분류표(韓國民謠分類表)에 의하면 우리 나라 민요 362형 중에서 동요가 절반이 넘는 197형이다. 이들 전래동요는 동물요, 어류요, 식물요, 채약요(採藥謠), 수무자장요(受撫자장謠), 정서요, 자연요, 풍소요(諷笑謠), 어희요(語戱謠), 수요(數謠), 유희요(遊戱謠) 등 참으로 다양하고 많다. 이것이 모두 현대동요의 자산(資産)이다.   동화의 경우 우리의 동화는 전래동화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동요 또한 전래의 것에 뿌리를 두어야 우리 것이 될 것이다. 맡겨진 자산을 어떻게 키워가야 할까?   이렇게 생각할 때 동요운동에서 지워진 일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1982년 여름 『아동문학평론』 제23호)  출처 ㅡ 허동인의 동시교실
1    유경환 동시론 [한국] 모셔온 향기 댓글:  조회:1599  추천:1  2016-08-10
동시 창작론 ① 직접 표현은 피해야 유경환(시인,동시인)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이 석 줄 한 연(聯)으로 씌어진 글을 한 편의 동시로 보아야 할 것인가.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이렇게 이어붙여 보면, 틀림없는 산문이다. 주어, 동사가 뚜렷하고 주어와 동사의 서술 관계가 분명하다.   그러니 한 줄의 완벽한 산문이다. 하건만 위에 인용했듯 석 줄로 바꿔 놓고서 동시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즉 운문이라고 여긴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만 운문일 뿐, 그러니까 형식으로 운문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운문이 아니다. 다른 말로 동시라고 하기가 어렵다.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위의 글이 작품이 되려면, 적어도 '아름답게'라는 부사어는 다른 표현으로 바뀌어야 한다. '아름답게'라는 형용사적 부사어를 직접 표현으로 구사하면, '아름답게'라는 표현의 분위기가 사전적 의미에 갇히고 만다. 따라서 쓴 사람이 지녔던 느낌이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기 어렵다.   읽는 사람에게 아무런 감동이 오지 않는다. '아름답게'라는 표현은 시어(詩語)가 되기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미 일상어로 때묻어 있어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정서 이동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감정을 전달하는 정서 이동, 이것이 쓴 사람에게서 읽는 사람에게 옮겨지려면, '아름답게'라는 표현 대신 다른 표현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냥 쉬운 표현으로 '아름답게'가 아니라, 쓴 사람만의 새로운 표현 기법이 요구된다.   쓴 사람이 생각해 낸 새로운 표현 방법, 없던 것을 있도록 하는 표현 방법 찾기가 곧 창작인 것이다. 창작을 크리에이션(Creation)이라 한다.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되풀이 사용하면 되풀이의 Re가 붙어서 리크레이션(Recreation)이 된다. 오락이다. 이미 있는 표현을 재사용하는 경우가 유행가의 노랫말이다. 동시는 창작이어야 한다.   '산길에'는 어디라는 것을 나타내는 부사적 조건이다. '풀꽃이'는 주격으로 상징적 존재일 수 있다. 주어인 풀꽃이 다른 의미의 해석을 가능케 구사되었다. 그러기에 이 석 줄에서 시적 분위기를 조성할 요체는 '아름답게 피었어요'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일상적 대화에서 하듯 그냥 '아름답게 피었어요'라고 하면 읽는 사람이 쓴 사람의 내면에 접근할 수가 없다. 쓴 사람이 어떻게 아름답게 보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감동을 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   쓴 사람이 이 석 줄을 쓸 때 지닌 내적 정서, 이것을 읽는 사람이 짚어낼 수 없다. 쓴 사람이 지녔던 내적 체험이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못하면, 어떤 감응도 생기지 않는다. 곧 감동이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서 이동이 안 된다.   정서 이동의 불가능은, 한마디로 감동의 차단이다. 그런데도 적잖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소정의 절차를 밟아 등용의 관문을 통과한 동시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산길에/풀꽃이/아름답게 피었어요.'라고 써놓고, '이렇듯 아름다운 모습을 시적으로 묘사했는데…… 어째서 작품이 덜 되었다고 평가하느냐'고 불만스러워한다. 쓴 사람은, 풀꽃이 핀 산길의 정경을 잘 옮겨 놓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항변하는 것이다.   이런 불평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설명해야 '발효되지 아니한 표현'인 것을 깨닫도록 할 수 있을까. 어떤 방법으로 일러줘야 숙성한 감정이 바탕하고 있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 산길에 풀꽃이 수를 놓듯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나서 '산길에/풀꽃이/아름답게 피었어요.'라고 쓰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생도 가능한 것이다.   소정의 등단 절차를 거쳤다면 한 20년은 살았을 것이다.그런데 7살이면 써낼 정도의 표현 기교밖에 못 지니는가? 20년, 30년, 40년, 심지어 60년을 살아보고도 나이에 걸맞는 삶의 체험을 겪어내고도, 초등학교 1학년생이 표출하는 정서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인가.   살아낸 세월만큼 나무의 나이테처럼 자기 내면에 축적한 것이 있을 것이다. 단순한 경험일 수 있고, 생각 깊은 체험일 수 있으며 또 아픔을 이겨낸 쓰라림일 수도 있겠다. 이것을 눈에 안 띄게 대입할 경우, 의인화의 풀이나 이중 해석이나 상징 분석이 가능해진다.   필자는 '생각의 우물'이라는 표현을 오래 전부터 써 왔다. 얼마나 깊게 생각의 우물을 파 왔으며, 얼마나 오래 사색에 젖어 왔으며, 얼마나 깊은 고뇌에 빠져 보았느냐에 따라 동원 선택하는 시어(詩語)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산길에 풀꽃이 예쁘게 핀 것을 보나, 아… 아름답구나… 이런 분위기를 글로 옮겨서 남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라는 충동에 따라 위의 인용처럼 썼다면, 이 사람 나이가 60대일지라도 정서 연령은 10대일 수밖에 없다. 만약 유치원에 다니는 원아나 초등학생이 이렇게 썼다면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인생을 겪어본 사람의 안목으로 이렇게 썼다면 돌아서서 한숨을 뿜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산길에   풀꽃이   ○○○○○○…피었어요.   위에 ○○○○○○… 남겨진 자리를 자기 체험처럼 자기 사상에 바탕한 자기만의 표현으로 채우려 애쓰고 고민할 때, 비로소 생각이 숙성되고 발효하여 자기다운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동시 창작을 위한 표현 기교에서 기법이라는 것은 가장 적절한 한마디를 찾아내는 데 있다. 이것이 표현 기법의 개발이다. 윗줄과 아랫줄 그리고 앞과 뒤, 그 사이에 들어서서 전체 분위기를 살려내는데 걸맞는 한마디를 만들어 내는 일, 이 일은 어렵고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사물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달리 보인다. 슬픈 심정으로 달을 쳐다보면 달이 슬퍼 보이고 즐거운 감정으로 쳐다보면 달이 웃는 것으로 보인다. 보이는 대상은, 보는 사람의 심상(心象)에 걸맞게 보인다. 더 쉽게 말하면 볼록렌즈로 보느냐 오목렌즈로 보느냐와 같다. 곤충의 모듬눈[複合眼]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 영상을 곤충이 인식하도록 작용한다. 보이는 대상이 보는 사람의 눈을 통해 보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 자리하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내면화하는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 보는 풀꽃과 생각이 단순한 사람이 보는 풀꽃이 같지 않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깊은 고뇌에 갈등하는 시인의 눈을 통해 내면화한 풀꽃의 이미지가 어찌 '아름답게'라는 단어로 표출될 수 있겠는가.   부모와 헤어져 살고 있는 초등학생이 보았다면 '산길에/풀꽃이/어우러져 피었어요'라고 쓸 것이고, 서로 싸우고 돌아선 사람이 보았다면 '산길에/풀꽃이/서로 외면한 채 피었어요'라고 쓸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산길에/풀꽃이/아무도 듣지 못하는 말로 속삭이고 있어요' '산길에/풀꽃이/길이 외로울까 봐 피었어요' '산길에/풀꽃이/어머니 발자국으로 피었어요' '산길에/풀꽃이/햇볕을 붙잡고 있어요' '산길에/풀꽃이/볕을 기다리고 있어요 '산길에/풀꽃이/달빛 마시려 목을 쳐들고 있어요'…….   얼마든지 '아름답게'라는 형용사적 부사어를 대신하여 시적 요건을 보태줄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어떤 표현이 '아름답게'라는 것 대신 시적 요건을 충족시켜 줄 것인가. 그것은 이 석 줄의 위와 아래에 올 다른 연(聯)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직접 표현은 되도록 피해야 은유라고 하는 비유의 역할이 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직접 표현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산문에서 운문으로 형식을 바꾸기 위한 조건으로 ①명사 뒤에 붙는 토씨(조사)를 가능한 떼어버리고, ②문법적 어문 구조를 해체하는 손질이 필요하다. 토씨를 생략하고 산문 구조를 해체해야만, 그만큼 빈 자리가 생긴다. 이런 빈 자리가 만드는 공백이 있어야, 읽는 사람의 상상이나 폭 넓은 해석이 들어갈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감정의 여운에서 다양한 해석이 증폭되며 확대 해석이 가능해진다. 쓴 사람이 생각 못했던 비유나 상징까지, 읽는 사람에 의해 지적되면, 동시의 감상은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곧 독자에 의해 상징 의미가 발견되는 셈이다. 고속도로에 제한 속도를 60 Km라고 표시해 놓으면 60 Km로 달려야 하는 규제를 당한다. 그 이상의 속력을 내면서 느끼는 쾌감이나 그 이하의 속력을 내면서 풍치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박탈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라고 써 놓으면, '아름답게'라는 직접 표현이 지닌 사전적 의미 또는 일상의 어의(語意)에 구속되기 때문에 그 이상의 멋을 읽는 사람이 느낄 수 없게 된다. 시는 산문과 다르다. 상상을 제약하거나 해석을 제한하는 언어의 구속, 이런 구속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또는 문법 구조의 해체를 시도하는 작업에서 오히려 매력을 얻는다.   (2003년 봄 『한국동시문학』창간호)   동시 창작론 ② 「생략」으로 빛나는 동시 유경환(시인, 동시인)   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이 제품을 만들 때 갈고 닦고 하는 모습을 보면 장인(匠人) 정신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동시를 쓰는 일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산문 형태에서 운문 구조로 바꾸는 1차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지워 버리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이 생략 작업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는 나무의 가지치기와 다름없다.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보기로 하자.   좋은 산문은 한 가지 뜻만 드러나되 그 뜻이 분명해야 한다. 이런 뜻인지 저런 뜻인지 헷갈리는 산문은 좋은 산문이 못 된다. 운문은 이와 반대이다.   운문은 여러 가지 뜻을 품을 수 있어야 매력 있는 운문이 된다. 좋은 운문은 여러 가지 뜻을 담을 수 있으므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이 운문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산문과 운문의 차이는 이렇게 확실하다. 산문과 운문에는 겹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2002. 12∼2003. 2) 잡지에 실린 '동시'라는 글을 보니, 산문과 운문의 구별이 안 되는 것을 '동시'라고 발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동시를 쓰는 아동문학가'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회원의 글이면 다 실어주는 협회지(協會誌)에 발표하고 싶어 보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쓰는 글을 어떻게 동시 작품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아마도 어떤 등단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소정의 절차를 밟는 동안, 자기 글도 동시 작품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혹 심사위원이나 추천위원이 있었다면 그들의 안목에 책임이 귀착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동시' 수준에 오르지 못한 글을 (어떤 생각에서인지) '인정'하여 준 그 대가(代價), 그 대가의 결과로 오늘날 아동문학 풍토엔 잡초가 무성하게 휘날리게 된 것이 아니랴.   다시 말머리를 돌리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바로 이 점에 운문의 멋과 맛이 있다. 시는 동시를 포함하여 운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물론, 동시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인은 첫 번째로 산문과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문장을 해체하고, 두 번째로 복합 의미를 지닌 상징 언어를 시어로 선택한다.   문장을 해체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①주어 동사 따위의 문법 구조를 일부러 무너뜨리거나 ②주어 동사 따위의 문법적 배열을 의도적으로 뒤바꾼다거나 ③명사 뒤에 붙는 토씨 따위를 잘라버리는 생략 기법을 쓰거나 ④명사 앞에 오는 형용사 부사 따위를 철저하게 지워버리는 기법(技法)이다.   독자가 작품을 한 번 읽어서 어떤 느낌(feeling)은 알아낼 수 있으되 그러나 어떤 말(message)을 담고 있다고 대번에 짚어내기엔 애매하도록 시인은 모호한 시어를 선택 구사하기 일쑤다. 여기서 모호한 시어란, 다중(多重) 의미를 지닌 어휘를 가리킨다. 어떤 연유에서 시를 읽을 때 두 번 세 번 읽도록 유도하는 술책으로 상징 단어를 시어(詩語)로 동원하는 것이 예사(例事)이다.   왜 두 번 세 번 읽도록 유도하는 술책을 쓰는가? 되풀이 읽어내면서 글 속에 시인이 숨겨 놓은 뜻을 찾아내 감지(感知)하도록, 곧 독자를 시 속에 끌어들이는 술책이다. 달리 쉽게 말하면 '간단히 직설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을 철사를 구부리듯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복잡 구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비치는 방법이 시의 작법일 수 있다.   왜 이렇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것일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작업은, 마치 반도체의 집적(集積) 회로처럼 다양한 의미를 글 속에 축적하는 작업이다. 한눈에 대번에 읽어내는 글은, 글이 지닌 밑바닥 내용이 금세 드러나므로, 액면가가 곧 실제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어야 비로소 글의 밑바닥 사상이 드러나는 시는, 독자의 정서 상태와 독자의 체험의 폭과 그리고 독자가 살아온 삶의 농도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독자에게 안겨주게 한다. 여기서 시작품이 '시로서 읽히는' 매력이 발견되는 것이다. 같은 동시를 읽더라도 읽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가 지닌 메시지와 독자의 수용 태도가 서로 상관 관계(相關關係)를 이루는데, 독자는 이를 잘 모르거나 간과한다.   이쯤에서 이 창작론의 본론으로 들어가자.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가슴에 스며오는 정감(情感)이 괸다면 ①우선 그 정서를 줄글(산문)로 쓰기 시작하라. 바로 적어두어야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정감이 흩어지거나 엷어져서 정서를 포착하기 어렵다. ②그 다음 해야 할 일은, 생선을 토막 내듯이 이 줄글(산문)을 토막토막 잘라서 두 줄이나 석 줄이나 넉 줄, 다섯 줄……로 나누어 배열하고 되풀이 읽어보라.(대부분의 발표 '동시'는 이 단계에서 작업이 중단된 것들이다.) ③적잖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작업 과정이 이 세 번째 단계의 작업이다. 여기서는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명사 뒤에 붙어다니는 토씨를 떼어내고, 가급적 형용사 부사 따위 수식어를 지워버려야 한다. 이 생략 기법의 활용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자기 글을 자기가 자른다는 행위는, 고도의 장인 기술이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흔히 '열 손가락 안 아픈 것 없다'고 말하지 않은가? ④끝으로 글의 기본 문법인 주어 동사 따위 배열 순서를 의도적으로 뒤바꿔 도치법(倒置法)을 활용해 효과를 높이는 효과 측정을 해야 한다.   이런 네 단계 작업을 마친 뒤에 다시 읽어보면서 '속으로 느껴지는 논리' 곧 내면으로 수긍할 수 있는 논리(정서 논리)가 통하고 있다고 여기면, 산문에서 운문으로의 변이(變移)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시는 먼저 마음 속에 산문으로 오게 마련이며, 그 다음 다듬는 과정에서 운문 형식으로 탈바꿈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동시 쓰기에서도 마찬가지 일반 순서이다. 박목월도 그랬을 것이고 박두진도 그랬을 것이다. 이분들이 남긴 동시를 읽어보면 일반 순서에 따라 지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대가(大家)가 되면 산문에서 운문으로 전이(轉移)하는 과정을 안 거치고 바로 운문 형태로 들어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는 산문적 기초에서 출발하여 운문적 구조로 이월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번에는 실례를 들어 설명하기로 하자. 아름다운 경치를 눈 앞에 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아, 참으로 멋진 풍경이다.…… 이 경관을 오늘 여기에 함께 자리하지 아니한 뉘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혼자 보기엔 너무 고운, 아까운 경치야…….' 이렇게 감탄할 만한 풍경 앞에 서 있다고 치자.   어떤 이는 카메라를 꺼내 찰칵 찍을 것이다. 사진에 그대로 담길 것이다. 어떤 이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것이다. 화가가 하는 작업이다. 사진 작가의 작업과 화가의 작업은 모두 그 풍경을 재현하는데 초점을 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작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는 생략이라는 작법 곧 생략 기법인 것이다. 사진에는 생략 없이 모든 것이 담긴다. 그러나 그림에는 화가의 선택대로 생략된 나머지만 담긴다.   정밀 사진기로 감탄 대상을 정확히 담아낸 사진 작품과 그리고 무디지만 감성적인 선택으로 그려낸 미술 작품을 비교해 보자. 화가의 정서가 이입(移入)된 (화가가 붓으로 표현하되 물감의 농도로 강조된) 주관적 선택이 더 황홀한 감정을 현장 부재자에게 전달할 수 있잖은가? 밴 고흐가 남긴 작품이 그 시대의 사진 작품보다 더 선호되는 이유와 같다.   시와 동시가 애매 모호한 문장 구조를 지니도록 하는 것은, 한마디로 작품에 시인의 의도가 숨겨지도록 하는 작법이다. 시인이 그 작품을 쓸 때 (안 보이도록) 작품 행간 속에 깔아놓은 정서, 이것을 비슷한 체험을 지닌 독자가 읽어낼 수 있도록 '숨겨 놓는' 것이 시인이 즐겨 택하는 시작법이다. '나만큼 고민한 사람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큼 관찰한 사람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큼 생각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런 부담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문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지극히 당연시되는 요구이며 또 아울러 독자에겐 최소한의 의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를 읽고 감상하는 행위는, 누워서 TV 연속극을 보거나 TV 가요를 듣는 것과 같을 수 없는 최소한의 부담을 지불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부담'을 지불하지 않고 읽고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 수준에서 '동시'를 써내거나 발표하는 글이 바로 '시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시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그런 '동시'들인 것이다. 흔한 말로 수준 미달의 것을 이른바 '동시'라고 발표하면서, '어째서, 왜 내 동시에 대해선 혹평을 일삼느냐?'고 항변하기 일쑤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이 있다. '목마른' 경험이 없다면 이 속담의 진의를 알기 어렵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먼저 목마른 경험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목말랐던 경험 없이 물맛이 어떻다고 불만 불평을 쏟아놓는 데 문제가 있다.   동시를 그냥 언어의 유희라고만 여기면 유리알 굴리듯 예쁜 낱말 고운 낱말을 추려서 이리저리 맞추는 작업에 그치고 만다. 이런 이들에겐 문학적 고민이나 시대의 아픔이나 역사의 앙금 같은 것들이 과연 필요한 것일 수 있을까? 동시는 어린이나 또 피곤한 어른에게 삶을 따뜻이 품어안도록 위안을 주며, 그런 위안을 안겨주는 일(몫)도 아울러 해내는 문학 작품으로의 값을 지닌다. 동시는 어린이나 어른에게(특히 생각이 달리는 어른에게) 주는 정서 영양일 수 있다. 그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는 샘과 다르지 않다.   이 글의 결론을 위해 긴 말을 짧게 줄여 보자.   동시를 쓰겠다는 사람은, 첫 번째 단계로 쓰고 싶은 내용을 우선 산문으로 써 놓고 나서 줄일 수 있는 것을 모두 잘라내 길이를 줄여 운문 형태로 바꿔 놓은 뒤에, 두 번째 단계로 반드시 숨겨져 있어야 할 음률과 운치 곧 내재율과 율동성을 속으로 외워 맞춰야 한다. 세 번째 단계로 은유적으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낱말, 곧 비유가 가능한 시어(詩語)로 자기가 사용한 낱말을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러한 세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감한 생략 기법이다. 이준관의 동시를 읽어보면, 긴 산문체에서 퇴고 과정을 거치는 동안 몇 줄씩 지워버렸거나 아주 잘라버린 흔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준관 시인은 시와 동시를 함께 쓰는, 시를 아는 동시인이기 때문에 좋은 동시도 잘 써내고 있는 것이다. (2003년 여름 『한국동시문학』 제2호)   동시 창작론 ③ 형상화란 무엇인가? ―간결하게 소재를 선택하면 형상화의 어려움 덜 수 있다 유 경 환   동시 쓰기에서 세 번째로 다뤄야 할 것은, 형상화(形象化)의 문제라고 여겨 왔다. 형상화라는 말은 창작 기법 이론서에 자주 나오는 어휘이다. 그러나 쉽게 풀이하여 놓은 것을 보지 못했다. 이 기회에 형상화에 대하여 진지하게 다가서 보고자 한다.   형상화라는 말이 한자로 되어 있어서 우리말로 바꿔볼 수 없을까 하고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쉽사리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모양 만들기'라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한마디가 못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양 만들기에 가깝거나, 비슷하다고 할 만하다.   어쨌거나 창작이라는 작업에서는, 형상화가 창작인의 가슴에 먼저 밑그림으로 들어서야 하느니만큼, 문학에서는 물론 미술 조각 따위에서도 한결같이 형상화가 중요한 일몫을 한다.   창작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기에, 창작이 예술의 첫 번째 조건이 된다. 목수는 통나무를 가지고 온갖 도구를 사용하여 자기가 만들고자 하는 것의 모양을 나무 속에서 찾아 뽑아낸다. 이 때 '만들고자 하는' 것의 밑그림이 곧 형상화의 대상이 된다.   조각가의 경우, 조각을 빚는 과정에서 자기 예술 속의 것을 모양이 있는 것으로 빚어내는 일에 따라다니는 생각이 곧 형상화의 대상이 된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경우, 시인의 가슴 속에 괸 정서를 가슴 밖으로 꺼내어 모양이 있는 것으로 바꿔 놓을 때, 글자들이 갖추는 모양이 형상화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형상화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마음이 아닌 것(모양이 있는 것)으로 바꿔 놓을 때, 만들고 싶어하는 모양으로 옮겨진 심상의 변화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형상화가 어째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일까. 형상화 작업이 아니면 어떤 느낌이나 감동이나 떠오른 상(像)이 예술가의 가슴 속에 한동안 담겨 있다가 그냥 스러지고 만다. 때문에 예술가의 가슴에만 담겨 있게 하지 말고, 가슴 밖에 존재하도록 모양을 갖춰 입혀야 하는 작업이 중요한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들 가슴에 괴어 있던 생각이, 그들 가슴 밖에 존재하도록 창작되지 않고, 예술가와 함께 사라진 에는 부지기수다. 예술가의 가슴 밖에 있을 때에는 구상이나 예감이나 상상일 수도 있고, 예술가의 가슴 밖에 있을 때엔 창작물이 되는 것이다.   가슴 안과 밖의 차이는, 가슴살 한 겹의 차이가 아니라, 무(無)와 존재의 차이다. 아무리 좋은 착상을 가지고 있다 한들,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노래할 수 있게, 눈으로 감상할 수 있게, 창작품으로 바꿔 놓지 못하면 그것은 여전히 무인 것이다. 인간의 육신 속의 영혼은 육신과 헤어져 따로 서야만 존속될 수 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분리가 중요하다.   예술가의 심상 속에 깃든 영혼은 만인의 영혼으로 바뀌어야, 그 값을 빛처럼 발휘할 수 있다. 예술가의 심상 속의 영혼은 고독한 영혼이되, 예술가의 심상 밖으로 나온 영혼은 만인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는 기능으로 값지게 된다. 죽은 육신에서 영혼이 나올 수는 없다.   동시 작가의 동시 쓰기에서도 위에 말한 일반론이 그대로 적용된다. 동시 작가의 가슴에 스며든 시정(詩情)이, 가슴 밖으로 나와 글자라는 수단에 힘입어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되면, 이 때 비로소 동시 작가의 정서가 형상화하고 이 형상화에 담긴 작가 의도가 독자에게 전달된다.   동시 작가가 동시를 쓰기 전 또는 쓰는 동안, 어떤 작가 의도를 형상화시키려 했던지, 그것은 동시 작가의 기량에 달린 문제다.   여기서는 만질 수 없고 느낄 수만 있는 마음, 곧 작가 의도를 내가 아닌 남이 만지거나, 읽거나, 듣거나, 보거나 할 수 있도록 모양을 갖춰 '독립적 존재'로 바꿔 놓는 작업이 중요하며, 이 작업 과정에서 형상화는 다양한 모양 가운데 한 가지 형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조각가가 창작한 조각, 미술가가 그려낸 미술 작품, 음악가가 창작한 작곡, 시인이 쓴 시 작품…… 모두 마음을 영원히 존재하도록 변형시킨 결과물이다. 이 창작물이 예술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대변하므로 창작인의 창작 의도를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도예가가 빚은 자기를 바라보면서, 도에가가 흙을 빚을 때 담아 넣으려던 마음을, 우리는 자기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선이 아름다운 곡선 허리의 자기를 감상하면서, 도예가의 작가 의도를 유추 해석한다면, 애초에 도예가가 형상화하려던 그 마음까지 짚어볼 수 있다.   이 말은 그대로 동시를 놓고 되풀이할 수 있다. 뜻을 지닌 낱말들을 골라 적당한 위치로(속으로 정서 논리가 통하도록) 배열해 놓으면, 글자들의 논리에 따라 머리에 그릴 수 있는 추상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바로 이것이 동시 쓰기에 잇어서 형상화 작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글자의 논리라는 것은, 문법이라든가, 어법이라든가, 어감(語感)이라든가, 또는 복합 의미(複合 意味), 이중 해석(二重 解釋) 따위가 어우러져 만드는 질서이다. 우리 말과 글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과 그리고 우리 말과 글을 외국어로 쓰는 사람의 차이는, 이 「글자의 논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느냐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물며 정서 논리에 있어서는, (아무리 우리 말과 글을 잘 한다 하더라도) 외국인인 경우 이해하고 납득하는 데 우리 나라 사람을 따르지 못한다.   동시 쓰기에서, 이 글자 논리와 질서 논리는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형상화를 쉽지 않은 작업으로 보는 것이다.   한 줌의 찰흙을 쥐어 주면서 잔을 형상화하라고 이르면, 한국인은 소주를 마시는 술잔 모양으로 빚어내는데, 아랍인은 아랍식 다기 모양으로 빚어낸다. 이 차이를 흔히 문화의 차이라고 이야기하려 든다.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 본다면, 정서 논리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정서 논리는 이렇듯, '마음을 굳혀서' 존재로 변형시키는데 변수(變數) 같은 기능을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형상화라는 것을, '마음 빚기'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형태가 없는 마음 곧 예술가의 심상을, 형태가 있는 것으로 바꿔 놓기라고, 위에서 길게 늘어놓았다.   형상화의 대상은 마음이다. 가슴 속의 마음을, '가슴 밖에 존재하는 마음'으로 남기기 위해, 모양을 갖추게 하는 작업이 형상화 작업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마음 빚기가 된다. 작곡가는 오선지 위에 음표로 마음을 빚어 나타내며, 시인은 원고지 위에 글자로 마음을 빚어 나타낸다.   변형된 마음, 곧 빚어진 마음은 예술가가 지구에서 사라져도 계속 존속한다. 그래서 창작품은 예술가의 분신(分身)이라고 일컫는다. 예술가의 분신은, 영혼을 얼마만큼 형상 속에 지닌다.   이렇게 거꾸로 소급하여 생각해 보면, 동시를 쓸 때 동시 작가의 의도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알 수 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경건하고 가장 진지한 마음, 이것을 바꿔 담을 만한 글자의 그릇을 찾는 일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글자로 빚어진 그릇, 마음 빚기로 만든 마음 덩어리를 그대로 폭 빠뜨려 담아낼 수 있는 그릇, 이런 글자로 된 그릇이 쉽게 찾아지는가.   길을 가다가도 문득 걸음을 멈추고 펜을 꺼내 끄적이고, 뭘 먹다가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돌아앉아 펜을 꺼내 끄적이고, 잠을 자려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떠오른 것을 적어 놓는 작업이 모두 마음 빚기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도공은 빚은 마음을 1600도의 고열 가마에 넣고 구워서 형상이 유지되도록 하나, 시인은 빚은 마음을 흙가마가 아닌 고뇌의 가마에 넣고 구워내야 한다. 이런 고뇌가 몇 도인지 사람들이 알겠는가?   정작 형상화 작업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을 이제 하겠다.   시인이 성인을 위한 시를 쓰는 작업에서는 1600도를 넘는 고뇌의 과정을 앓아야 하겠지만, '동시를 쓰는 과정에서도 그런 과정이 필요하겠는가'라며 지껄이는 말을 들을 땐 참으로 기가 막힌다.   동시 쓰기에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위해, 낱말 고르기에 하루가 아닌 한 달을 고심하거나, 썼다 지웠다를 열 번 스무 번이나 되풀이하거나, 윗줄과 아랫줄을 붙였다 떼었다 줄였다 늘였다를 수없이 실험하는, 이런 '목마르는 체험'을 못해본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지만…….   끝으로 형상화 작업에서 형상화하고자 하는 대상의 선택, 이 선택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사진기로 찍어내는 대상은 렌즈의 기능에 따라 담길 수 있는 영역 전부가 축소되어 재현된다. 그러나 화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시선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기가 선택하는 것만 골라 옮겨 그린다. 이 때 선택은, 화가의 의도에 따라 선별된 선택이다.   화가는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옮겨 그리지 않고, 그리고 싶은 몇 가지만 소재로 삼아 캔버스에 옮겨 그리면서 자기 감정도 그림 속에 집어 넣는다. 결국 사진 예술 작품과 화가의 미술 작품과의 차이는, 인간의 정서가 선별적으로 선택한 조재의 강조에서 나타나게 마련이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도 소재의 선택에서, '얼마나 생략하느냐'에 따라 분명하게 차이가 나타난다. 선택의 차이가 아주 극명한 경우를 우리는 화가와 그리고 판화가의 눈으로 선택한 최소한의 선택만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동시 쓰기에서도, '선택'은 판화가의 선별 선택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몫이다. 꼭 선택해야 하는 것만 선택한 경우, 형상화 작업에서 어려움을 덜 겪게 된다. 그러나 이것 저것 선택하는 욕심을 부릴 경우, 형상화 작업에서 매우 어려운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동시 쓰기에서 최소한의 것만 선택한 간결한 소재는, 형상화 작업에서 겪는 어려움을 덜어주는 몫을 해준다.   흙에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는, 자라는 데 십년 이십년이 걸린다. 그러나 마음에 씨앗을 심어 키우는 형상화는, 하루에도 가능하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아니하다. 마음에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는 예술이다. 형상화는, 십년 자란 나무를 하루에 키우는 신비를 지닌다. 형상화는 창작을 위한 밑그림이요, 아울러 예술 전단계의 필수 작업이다.      (2003-여름 한국동시문학 3호)   동시 창작론 ④ 이미지의 연결 유 경 환(동시인/시인)     이번에는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미지를 우리말로 어떻게 써야 하며, 어떤 표현법이 서양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것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냥 이미지라는 외국어를 그대로 차용한다.   이미지란, 이야기로 쓰기가 아주 예민한 낱말이므로, 여지껏 미뤄온 것이다. 그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이미지'가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적기부터 하는 것이 현명하다.   떠오르는 그대로, 조각 조각이어도 좋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이미지를 놓치면 다시 불러오기 어렵다. 이것이 이미지의 속성이다. 사람의 가슴이나 머리는, 이런 이미지를 차근히 붙잡아둘 능력에서, 아직 덜 개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지란 과연 어떤 것인가?   간단히 말해, '구름이 한 마리 양으로 보였다면' 이 때에 양은 이미지다. 상상 속에 떠올라 겹쳐지는 생각의 그림이라고나 할까?   대상을 보는 순간, 또는 어떤 생각이 가슴에 차오르는 순간에, 매우 빠르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직관(直觀)이므로, 이를 재빠르게 잡아야 한다. 이런 이미지는 떠오르는 대로, 스며오는 대로 그대로 기록하여,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만일 그것들을 연결시키려고 애를 쓴다면, 그 동안에 뒤미쳐오는 다른 이미지를 놓쳐버리기 쉽다.   이미지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느닷없이 오기도 하고, 산책을 하거나 산엘 오르거나 잠에서 깨어나면서 시나브로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갑작스레'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머리 속에 또는 가슴 속에 늘 담아 왔기에 그것이 넘쳐 나오듯 다가오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은유(메타포어 metaphor)란 언어로 이루어지는, 언어로 비유되는 어떤 상(像)이지만 이미지란 언어 이전의 상(像)이므로 그냥 서양말 이미지를 빌어쓰기가 오히려 편하다. 그래도 설명이 구태어 있어야 하겠다면 '어떤 것을 보고 다른 무엇을 생각나도록 하는, 이런 연상 작용의 밑바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지는 시를 신선하게 표현하는데 아주 좋은 일몫을 한다.시가 참신하다는 평을 듣는 데는, 동원된 이미지가 아주 새롭거나 또는 독자들이 생각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 구해왔다는 이유가 잠재한다.   남들이 여러 번 동원한 이미지를 다시 쓰면, 되풀이된 만큼 신선한 감각을 잃게 되어, 구태의연한 표현 기법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따라서 이미지를 옮겨 놓는 기법에서, 낡은 단어나 식상한 낱말은 피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남들이 이미 사용한 이미지 구사법은 피해야 한다는 결론과 만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배의 작품을 되도록 많이 읽는 것이 상책이다. 앞서 발표된 작품이나 작품집을 읽는 길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언젠가 '병아리들이 흙담 밑의 봄볕을 쫑쫑 물고 간다'는 이미지 표현이 활자화되었는데, '병아리', '노란 주둥이' 그리고 '햇볕' 이렇게 세 가지를 연결시킨 표현이 잇달아 작품으로 발표되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봄을 눈앞에 둔 절기)에 비슷한 생각(유사한 동질 상황 속에서)을, 따로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쓴 사람은 '모방이 아니고 표절은 더구나 아니'라고펄쩍 뛸 노릇이다. 하지만 같은 이미지가 포개진다면, 결과적으로 부분 모방 또는 부분 표절로 몰릴 수밖에 없다. 말은 안 해도 독자는 속마음으로 그렇게 간주할 것이다. 속마음(내심)으로 굳히는 판단이니, 따라다니며 변명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이미지라는 것은, 시 작품 속에 전개된 내용에서 앞과 뒤, 그리고 위와 아래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서로 잘 어울려야, 이미지의 기능을 제대로 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서술된 표현 속에 이미지는 마치 천조각들로 이어 맞춰진 조각보처럼, 아우러진 조화와 균형 이것들을 생명으로 기능한다.   한 편의 시 작품 속에서 이미지가 조화스럽고 균형되게 아우러졋다면, 이를 놓고 문학 이론서에선 '정서 논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유의할 것은 일반 논리(一般論理)가 아닌 정서 논리다. 큰 기게를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듯, 또는 손목시계 속에서 작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듯, 정서적으로 척척 맞아떨어지는 경우라야 독자에게 상상 연상 또는 환상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이런 황홀한 세계를 독자가 만나야, 시인의 내면 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잇으며 실제 이상의 세게로 들어갈 수 있다. 이미지는 생각의 조각에다, 천사의 날개 같은 날개를 달아주는, 멋진 기능을 시 속에서 하는 것이다.   또 이미지는, 다른 한편, 낡은 시형식이나 오래 전부터 자주 동원된 시어를 물갈이하는 방법으로 채택된다.   시에 동원되는 단어들이 새로운 단어로 바뀌는 것은, 시인이 시를 창작할 때 전에 한번도 쓰이지 아니한 새 이미지로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요즘 새로 등단하는 신인들의 작품을 읽으면, 그들이 사물을 보고그 사물에게서 뽑아낸 이미지가 얼마나 새로운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곧 이미지의 표출 방식이 그 전 세대와 달라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의 진화(進化)는 새로운 이미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시적 대상에서 시적 메시지를 끌어내기 위하여 새로운 감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참신한 이미지의 표출을 위해 전연 새로운 발상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꿈을 꾸고 이를 표현할 언어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로 말미암아, 전세대의 수용 감각과 신세대의 수용 감각에 차이가 나고,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의 진화는 이루어지고, 수용 감각의 차이로 시를 대하는 감각이 달라지며, 마침내 이미지를 표출하는 능력까지 '같지 않게' 되고 만다. 같은 재료를 쓰면서 다른 차원의 형상을 빚는 감각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이미지의 처리에서도 또한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옛 사람들의 정서 작품인 시조(時調)를 보면, 꽃의 이미지로 여인을 글 속에 숨겼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활용 기법은, 생존하는 시인 김춘수의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기까지……'라는 작품 '꽃'에까지 지속되어 왔다.   '호박꽃도 꽃이냐?'라고 한다면 이 경우 호박꽃의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활용된 것이지만, '수더분한 누나가 생겨날 때면 호박꽃을 보러 울타리로 간다'고 했다면 호박꽃의 이미지는 긍정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렇듯 이미지의 활용은 시인의 잠재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이미지의 활용은 결정적 일몫을 한다. 이미지의 활용을 천박하게 하면, 시가 아닌 '유행가'로 전락하고 만다.   따라서 시 작품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내적 잠재의식이 고상해야 할 것은 당연지사이다. 오늘날 어린이도 읽을 만한 시, 곧 동시 속에 시인들이 어떤 이미지를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나라 동시의 미래와 직결되는 과제가 된다.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라고 해서, 유치한 이미지 활용을 생각없이 일삼는다면, 동시가 천한 것이 될 것은 확실하다.   요즘 동화의 소재로 '똥'이 자주 채택되는데, 이는 일부 사실주의 작가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철학이 빈곤한 작가들의 짓거리일 수도 있다.   어린이에게 권할 만한 시, 곧 동시에도 이런 경향이 옮겨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시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언어의 조각이고 정서의 보석이다. 시에는 조각 같고 보석 같은 영혼이 담겨야 시로서 존재할 수 있다.   아이들이 글짓기 시간에 써내듯, 아동문학가로 등단한 시인이 한두 시간 안에 동시라고 써내는 글을 보면, 말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은 이미지의 연결에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일까?   '꽃밭에 가장 큰 해바라기꽃은 우리 아버지……' 이것은 초등학생의 글인가, 아동문학가의 글인가? 초등학생이 능히 써 낼 수 있는 글을 아동문학가의 작품이라고 발표한다면, 그는 스스로 자기의 위치를 초등학생 수준으로 퇴장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시를 쓴다고 하는 아동문학가들이여, 발표하기 전에 한 주일에 한 번씩 한 달쯤, 두고두고 퇴고하길 바란다. 서로 상충되는 이미지는, 원고지만 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동문학의 얼굴까지 구겨 놓기 때문이다.  (2003-겨울 『한국동시문학』 제4호에서)   동시 창작론 ⑤ 상징(象徵)의 활용(活用) 유경환(시인, 동시인)     동시를 쓰는데 상징(symbol)을 왜 알아야 할까?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루자. 이론은 들어본 적이 없어도 훌륭한 동시 작품을 써낼 수 있다. 이론 공부 없이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하고 문예지의 추천으로 등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론 공부를 구태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 창작 행위에 있어서 이론이란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을 알아 두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이론 공부는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거름주기'와 같다.   한두 번 동시를 써본다거나, 아니면 몇 편 써낸 동시 가운데 잘 된 것으로 한 편이 뽑히거나 가려진 경우엔 '이론 없이도 된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수준의 동시 작품을 계속해서 생산하려면, 이론의 뒷받침이 있어야 함을 동시 작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문학은 원래 혼자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 창작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아심이 자기 속에서 떠오를 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이론서를 꺼내 뒤적여야만 한다.   마치 '저쪽이 내가 가려는 남쪽'이라 믿고 배를 몰고 나가다 한참 뒤에 동서남북을 가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게 되면, 그 때에야 나침반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훌륭한 동시를 써내겠다면 상징의 활용이 어떤 효과를 작품에 얹는지 알아야 한다. 동시 창작에 있어서 상징의 활용은 필요 조건이 아닌 충분 조건이다. 쉬운 말로 한다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만 있으면 더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을 알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조건을 더 얻는 셈이다.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상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존의 이론서처럼 하자면 제1장 제1과 이렇게 나눠 놓고 상징의 의미, 상징의 구사, 상징의 효과……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도 좀 바꿔 보자. 다른 나라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식으로 우리도 부드럽게 이야기식으로 풀어가 보자.   교과서에 나온 동학혁명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을 때 그 시절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노래를 불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이 노래 속의 녹두는 곡식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을 상징하였다. 녹두장군이란 말도 있었다.   아침에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해서 까치는 반가운 새로 여겼으며, 그와 반대로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여겼다.(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까마귀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유치환 시인의 알려진 시 작품에서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 곧 생명의 몸부림을 상징하는 시어로 씌였다.   이육사 시인의 알려진 시 작품에서 '광야'는, 광막한 현실, 곧 일제 시대의 우리 나라 형편을 상징하는 시어로 구사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알려진 시작품 가운데 '꽃'은 어떤 상징으로 동원되었는지는 이미 지난번에 이야기하였다.   태극기는 우리 나라의 상징이고 푸른색 한반도는 통일된 나라의 상징이다. 태극무늬, 장고도 상징으로 씌이는 경우가 있다. 시야를 넓히면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며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지구본은 유엔의 상징이다. 학교마다 교기가 있고 모표나 배지가 있다. 이만하면 상징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쯤에서 어려운 말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징은, 복합적 의미들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를 대신하도록 특별한 의미를 확대한 표상(表象)이다. 그래서 문예 이론서에서는 상징주의를 표상주의라고도 부른다.   동시 작품을 쓰는데 상징법을 활용한다는 것은 직접 표현은 미뤄 놓고 간접 표현을 써서 독자로 하여금 더 깊고 더 넓은 뜻을 생각하도록 새로운 해석에 이끌어 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일종의 유도 기법이다.   동시 작가들이 동시를 창작하는데 무덤가에 핀 할미꽃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도록, 하늘에 일찍 뜬 이른 별은 하늘에 올라간 언니나 동생을 생각하도록 , 또 안 보이는 곳에서 울어대는 산새는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도록, 상징법을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할미꽃, 별, 산새…… 따위들은 이미 상징 시어로서 생명을 잃은 낱말이 되었다. 더 이상 상징 시어로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닳고 때묻은 낱말이 되었기에, 이런 상징 시어는 독자에게 참신하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지속적으로 동시를 써내야 하는 동시 작가라면 상징 시어로서 새로운 낱말을 찾아내고 골라내야만 하는 부담을 그래서 안게 된다.   말을 뒤집어 하면, 참신한 동시 작품을 쓰고자 한다면 먼저 참신한 상징시어를 찾아내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요즘 박두순, 이준관, 윤삼현, 이상문, 이정석, 한명순, 신형건(무순) 시인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 까닭은 상징의 활용에서 남다른 기량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그 앞 세대가 구사하던 상징 기법과 아주 다른 상징 기법을 스스로 개척하여 활용하는 본보기들이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상징 활용과 상징 기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동시가 너무 어려워…… 난해한 것을 써놓고 저희들끼리만 좋다고 하는, 저들끼리만의 잔치'라고.   직접 표현의 낱말만 가지고 동시를 써온 세대가 있었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읽고 들으면 금세 알아듣는 직접 표현의 낱말만 시어로 선택하였던 세대가 오늘날 70대 후반과 80대에 이른 원로 세대이다.   그러나 직접 표현의 낱말을 시어로 써온 80년 동안, 그런 낱말들은 '반달' 같은 눈썹, '앵두' 같은 입술에서 반달이나 앵두처럼, 상징의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퇴색하고 말았다.   그래서 6.25전쟁 직후부터 새로운 세대의 동시 작가들이 직접 표현 대신에 간접 표현의 시어를 도입 구사하는 방법으로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기치를 올렸던 것이다. 이 기치는 필자가 맨 먼저 들었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말의 뜻은, 동시는 '어린이에게 읽힐 만한 시'라는 것이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발맞춰 가며 부르는 노래의 노랫말 같은, 틀에 맞춘 동요― 틀에 맞도록 한 가지 이야기를 줄 바꿔가며 짧게 줄인 노랫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벗어나기 위해 간접 표현을 중시했고 상징 활용을 은유적으로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간접 표현 중시와 상징 활용을 눈치 채지 못하는 일부 동시인들이(일부 비평가와 함께) 입을 맞춰 '난해하다'는 불평을 터뜨렸던 것이다. 아마 그들은 계속 할미꽃, 별, 산새, 반달, 앵두…… 이런 정도의 낱말만 상징 용어로 쓰이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이야기 한 토막을 몇 줄로 줄 바꿔가며 나열하는 것이 쉬운 동시라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유아 동요나 유년 동시에는 상징을 활용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사실이다. '짝자꿍' 같은 유아 동요나 유치원 원아들 수준에 맞는 유년 동시에서 상징을 구사하면 오히려 혼란이 온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의 '새 나라', '어린이'는 그냥 직접 표현으로 충분하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서의 '나팔꽃'이나 또는 '과꽃'도 직접 표현으로 충분하다. 이런 동시는 한 줄의 이야기를 내재율이나 외재율에 맞도록 줄을 바꿔 쓴 '이야기'이므로(이야기 속에 모든 것이 이미 들어가 있으며) 한 번 읽어서 대번에 들어있는 뜻을 알 수 있으므로 구태어 상징을 동원할 필요도 구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동시가 언제까지나 이런 노랫말에 맞는 동시 수준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정서면에서 지체 또는 장애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나라 어린이들 그리고 청소년(teen-ager)들이 어떤 시를 읽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를 권한다. 모르면 배워서라도 바로 알아야 할 일이다. 우물 속에 들어가 앉아 하늘 둘레가 지금 몇 미터라고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아니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100년 전도 아닌 오늘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현실이다.   영국의 어린이들이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를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로 여기면서 읽고 외우는 까닭을 모르면, 프랑스의 어린이들이 보들레르의 시를 초등학교 과정에서 외우는 까닭을 모르면, '동시에 왜 상징이 필요하냐?'고 반문할 것이 뻔한 일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동시에서 상징을 활용하면 동시가 지니고 있는 함의(함축된 의미)를 확대시킨다. 물 위에 뜬 얼음만 읽어도 물 속에 잠긴 빙산의 규모까지 해석할 수 있도록 상징 기법을 쓰는 것이다. 물 위에 뜬 글자만 읽어도 물 속에 잠긴 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물 위의 글자를 직접 표현으로 하지 않고 간접 표현으로 쓰는 것이 최종적 대답이다.   좋은 동시로서 난해한 시는 있을 수 없다.   산을 다룬 좋은 동시는 산을 주제로한 동시로도 읽히면서 아울러 덕스러운 할아버지의 상징성을 풍기기도 한다. 강을 다룬 좋은 동시는 강을 주제로 한 동시로 읽히면서 오랜 역사나 전통의 상징성을 독자에게 넌즈시 던져주기도 한다. 나무를 다룬 좋은 동시는 그냥 나무의 시로 읽히기도 하지만 아울러 인격이 높은 사람으로 읽히기도 한다.   문제는, 좋은 동시가 품고 있는 그 내면의 이중성을 독자가 감지하지 못하거나 찾아내지 못할 경우, 좋은 동시를 '난해하다'고 단정해버리는 태도에 있다. 백두산을 다룬 동시에서 '백두산'이 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리면서 다른 동시가 속깊이 품고 있는 상징성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 독자의 능력과 수준의 문제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좋은 동시를 읽고 '난해하다'고 하는 사람은 좋은 동시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를 식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좋은 동시가 못 되는 작품(?)을 놓고 '난해하다'고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좋은 동시와 난해한 동시의 상관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핳 수 있다.   ① 좋은 동시는 난해한 시가 아니다.   ② 난해한 시는 좋은 동시가 될 수 없다.   ③ 난해한 것은 좋은 동시가 못 된다.   ④ 좋은 동시는 난해하지 않다.   되풀이하자면, 좋은 동시인데도 난해하다고 우긴다면 그 상징성을 파악할 능력이 없거나 그럴 만한 독해력을 갖추지 못한 독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반 독자도 아닌 비평가라는 사람이 좋은 동시를 놓고 난해하다고 앞장선다면 우리는 이 비평가라는 사람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2004년 봄 『한국동시문학』 제5호)   동시창작론 ⑥ 비유의 정체와 기능 ―비유를 모르면 시를 못 쓰는가? 유 경 환   '비유컨대, 한용운의 시에서 님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한다. 비유라는 낱말이 문장에 등장한 경우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김동명의 시에서는 호수가 마음의 비유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성서는 비유로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의 양, '나의 목자시니'의 목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의 포도나무는 모두 비유이다. 불교의 법구경도 비유로 말한 경구들의 모음이다.   윌리암 워드워즈는 무지개를 이상에 비유했다. '용비어천가'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비유의 시다. 월인천강은 '1천 개의 강줄기에 달이 빠져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1천 개의 강줄기는 수많은 강의 과장 표현이다. '임금이 어질면 그 은총이 어디에나 고루 퍼진다.' 이런 해석이 위의 한자 넉 자에서 나올 수 있다. 달은 군주의 비유로 쓰였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라는 강소천의 '닭'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이상을 쳐다보는 인생을 비유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동요 '병아리떼 종종종'의 병아리도 귀여운 어린이의 비유일 수 있다.   자, 이 정도의 예문을 읽어보면 비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떤 관념이나 사물을 그와 비슷한 것을 끌어대어 설명하는 일'이 사전적 비유의 뜻이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 정의를 읽으면 알 듯한 뜻이 더 알쏭달쏭하게 안개 속에 숨겨진다.   비유란 쉬운 말로 빗대어 하는 말이다. 빗댄다는 말이 흔히 나쁜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개념의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빗댄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는 이미지를 끌어오기 위해 빗댄다고 여기면 된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끌어다 설명하는, 간접적 묘사의 방법이라고 받아들이면 비유의 개념은 단순해진다.   그러면 왜 다른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끌어다 간접적으로 설명하려는 방법을 쓰는가? 비유의 방법을 쓰면 독자에게 해석의 폭을 넓혀 줄 수 있다. 독자에게 해석의 폭을 넓혀주는 일몫이 바로 비유의 기능인 까닭이다.   독자는 독자 나름으로 제각기 체험(내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독자 체험과 쉽게 연결시켜주는 일몫이 비유의 효과에 들어 있다. 그래서 비유의 기법은 독자의 체험과 서로 관계가 있는 상관 관계라고 말한다.   강소천의 작품 '닭'에서 닭을 그냥 마당가에 이리저리 다니는 닭으로 읽는 독자는 어린 독자이고, 닭 이상의 것으로 읽는 독자는 그만큼 성숙한 독자이다. 한 군주가 어질면 만 백성이 편하게 산다는 해석을 하는 이는, 월인천강의 달을 임금으로 해석하는 사람이다.   비유의 기법을 써서 다른 사물의 이미지를 끌어다 간접적으로 설명하면 그만큼 해석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체험을 지닌 폭 넓은 독자층에겐 전달 의지가 쉽게 수용될 수 있다. 독자는, 성숙한 독자일수록 다양한 체험을 축적하고 있으므로, 그만큼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비유와 체험 사이를 말하는 상관 관계의 참뜻인 것이다.   비유는 영어로 메타포어(metaphor)이다. 비유는 직유(直喩)와 은유(隱喩)로 갈라볼 수 있다. 직유는 한자 그대로 직접적인 비유를, 은유는 한자 글자대로 은근한 비유를 가리킨다. 시에서는 직유보다 은유가 더 쓰인다. 영어에서 a heart of stone 이라고 쓰면 비유가 되는데, a heart like stone 으로 쓰면 직유가 된다. 직유의 예문으로 꿀벌처럼 부지런하다를 as busy as a bee 라고 쓰면 꿀벌은 직유인 것이다. 비유의 개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영문으로 예문을 들었지만 이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에서 영어를 공부할 때 한번씩 짚고 넘어갔던 것이기에, 비유가 문장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확실하게 밝혀보기 위해 재인용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비유를 시 쓰는 작업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어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기로 하자. '이런 비유를 왜 알아야 하는가'로 줄여서 말할 수도 있다. 몰라도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독서를 하다보면, 한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다량의 책을 읽다보면, 문장의 파악에서 저절로 비유의 일몫을 일깨우게 된다. 문법상 비유의 기능은 해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a heart of stone 이라고 할 때에, '돌 속에 들어 있는 마음'으로 읽는 이는 아주 적을 것이다. 돌 같은 마음(a heart like stone)으로 읽고 감상할 것이다. 그러나 문장으로서는 a heart of stone 이 더 멋지다. 왜 더 멋질까? 비유가 시에 있어서 빼어놓을 수 없는 '시적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데 비유를 모르면, 낱말의 사전적 의미에 한정된 것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뒤집어 말하면, 비유가 없는 문장에선 사전적 의미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에 비유가 시에서는 중요한 시적 요소가 된다.   한 문장에서 또는 글에서 사전적 의미에 한정된 감상밖에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삭막한 문장이 되겠는가. 뼈가시만 남은 물고기를 뱃전에 잡아매고 돌아온 헤밍웨이의 소설 '바다와 노인'의 그 '앙상한' 해석만 가능할 것이 아닌가. 이쯤에서 비유의 개념과 기능을 더 분명하게 짚어보자. 비유는, '시에 함축된 의미를 독자의 체험만큼 확대시켜주는 효소'라고 할 만하다. 시어로 동원된 언어의 뜻을 기량껏 더 깊고 더 높게 확대시키는 마술적 기능을 비유가 한다. '기량껏'이라는 것은 독자가 지닌 '체험의 질(質)과 수준에 따라서'라는 말이다. 언어의 요술사가 바로 이 비유인 것이다.   복사꽃이 이울게 되어 바람에 날릴 때, 시인이 '꽃비'가 온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꽃잎이 눈 내리는 것보다 더 자욱하게 날리는 것을 보지 못한 독자는 (이런 체험의 결여 때문에) '꽃비'라는 비유에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 독자는, '꽃비'라는 비유를 바로 받아들이게 된다. 비처럼 꽃잎이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체험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내면적으로 생각해 본 독자는, 1차 비유인 꽃잎을 넘어서 2차 비유로 '목숨이 진 낙화'로 '꽃비'를 확대 해석한다.   이렇듯, 시어의 함의(함축된 의미)를 한 겹만이 아닌 두 겹 세 겹까지 벗겨내는 해석, 이것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기능이 비유의 숨겨진 기능인 셈이다.   사람이 그 주변 분위기나 환경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비유는 시를 이루는 글의 옷을 맞춰 입히는 일몫을 한다. '가을이 오자 나무도 나뭇잎을 떨군다"는 글은 산문이고, '노란 빨간 옷 / 벗는 나무'의 두 마디는 운문이다. 같은 독자가 위의 산문과 운문을 읽었을 때,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글은 어떤 것인가. 뒤의 것이다. 사막에선 / 바람이/ 줄무늬 만들고 // 가슴에선 / 그리움이 / 줄무늬 만든다.// 그리운 이름 하나 / 가슴에 묻고 / 살지 않으면 / 어이 가슴에 / 줄무늬 일겠는가.// (졸작 '사막' 전문)   이 시에서는 사막도 줄무늬도 모두 비유다. 내셔날 지오그래픽 쏘사이어티가 보여주는 사막의 필름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장면의 모래줄무늬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 모래사막을 자신의 가슴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위의 필름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아예 달라진다.)   사막을 자신의 가슴에다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리움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 본 사람이다. 그리움, 이 때문에 잠을 제 때에 제대로 잘 수 없을 만큼 속앓이를 해 본 사람만이 사막의 줄무늬와 자신의 내면에 그어진 줄무늬를 연결시킬 수 있다. 가슴앓이라는 체험이 이 시에 구사된 비유를 직감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므로 비유는 '체험을 매개로 하여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윤석중이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자선한 동시 '꽃밭'은 아기가 넘어져 한참 울다가 보니 정강이에 피가 아니고 꽃잎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윤석중은 새빨간 피와 새빨간 꽃잎을 비유로 쓰지 않았다. '새빨간 피가 아닌 것을 자세히 보니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피와 꽃잎은 몇 번을 읽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피와 꽃잎일 뿐이다. 절대로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시 '꽃밭'이라는 동시의 감상은 이렇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피가 아닌 꽃잎'이라는 설명을 시 속에 넣지 않고 생략했더라면, 감상의 폭은 더 넓게 확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비유가 시의 함의와 그 해석을 확대시킴으로써 시의 멋과 격(格)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지난 날, '동시에도 비유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때엔, 동시 창작에 비유가 거론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동시를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로 수용하는 오늘날에는, 비유에 대한 공부가 당연히 있어야 하겠다. 다만 유치원 원아들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읽을 만한 동시 창작에는, 비유의 활용과 기법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 실정법상 미성년자는 모두 어린이이면서 아울러 청소년이다. 이 애매한 지칭 때문에 '어린이'라는 말의 개념 범주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고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우린…… 동시는 유치해서 안 읽어요'라고 거침없이 내뱉는 현실에서, 동시를 계속 유치원 원아나 초등학교 저학년 계층에 걸맞도록 창작할 것인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나라 현재의 동시는,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접근을 막거나 배척하는 그런 수준의 동시인 것이 분명하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읽힐 것을 바라며 동시를 쓰는 시인들은, 심각하게 들어야 하고 냉철하게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유아 동시 유년 동시에서 어린이에게 읽힐 만한 시로 위상을 바꾸려면, 동시 창작에서 비유의 기법을 충분히 활용하는데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비유는 시의 발효를 돕는 효소, 꼭 있어야 할 효소이다.   (2004년 여름 『한국동시문학』 제6호)   동시 창작론 ⑦ 고쳐쓰기 유경환(동시인/시인)   옛날에 쓰던 교과서엔 '고쳐쓰기'를 퇴고라고 하였다. '퇴고'라고 한자로는 '堆敲'라고 쓴다. '시문의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일'이, 사전에 나와 있는 풀이다. 한자 때문에 한때엔 '추고'라고도 했다. 어떻게 일컫든, 고쳐쓴다는 뜻은 같다. 그러기에 '고쳐쓰기'로 한다.   글을 쓰는 일에서 고쳐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는 것은 글을 쓰는 경력과 관계가 있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나이에선 고쳐쓰기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잘 쓰면 되지, 왜 쓰고 나서 또 고치고 고치고 해야 돼?' 이런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이런 의문을 지닌 사람에겐 '그래, 네 말도 맞다.'라고 하는 것이 상책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사람에겐 아무리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설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쓸 만한 속담이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었다. 그러나 차차 글쓰기가 쉽지 아니한 일임을 알아차리게 되고 글쓰기가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되자, 비로소 고쳐쓰기가 왜 필요한지를 납득하게 되었다.   고쳐쓰기는 단순히 고쳐 쓴다는 것으로 여길 일이 아니다. 고쳐쓰기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내는 기회와 만남이기도 하다. 고쳐쓰기는 '생각의 우물'을 더 깊이 파고드는 기회가 된다는 말이다. 고쳐쓰기는 그냥 이미 써놓은 것을 되짚어 보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쳐쓰기는 반드시 거쳐야 할 창작의 과정이다. 건너뛸 수 없는 글쓰기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흔히 고쳐쓰기를 '써놓은 것을 다듬는 일'로 여기기 쉽다. 이런 것으로 여기면 건너뛸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왜? 사람은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좁은 병목에 걸려 잘 나오지 않듯이, 글을 쓸 때 생각도 손을 기다려주지 않고 앞질러 나오려 하는 것을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이런 경우, 생각이 국수 기계에서 국수발이 가지런히 나오지 못하고 뭉개지듯 또는 실타래에서 할머니들이 실을 풀어낼 때 실이 엉키는 일과 비슷하게 된다. 글을 쓸 때 손을 통해 펼쳐지는 생각도 이와 같다. 가슴속의 생각과 그리고 손끝의 생각이 뒤엉키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되면 '생각'이 차분하게 순서에 맞게 서술되지 못하거나 서술이 뒤바뀌는 결과가 된다.   이렇기 때문에 글은 (운문이거나 산문이거나) 반드시 고쳐쓰기 과정에서 고쳐져야 옳다. 만일 고쳐지지 아니하면,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혼란을 주거나 또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치 못하게 되므로 받아들여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고쳐쓰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① 틀린 곳을 바로잡는다.   ② 문법과 어법에 맞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③ 빠뜨린 것을 알게 되어 보태어 넣는다.   ④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뒤늦게 집어넣는다.   ⑤ 더 깊은 뜻을 스스로 깨닫고, 새로운 의미를 글에 덧붙인다.   여러 번 (다른 글에서도 이미 이야기했듯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셈이지만, 나의 경우 작품 한 편을 완성시키는데 평균 다섯 번 원고지에 옮겨 쓴다.   지겹고 귀찮은 작업이다. 하지만 활자로 찍혀나간 뒤에는 고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내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기에 미흡한 글인 경우, 굴곡 왜곡 또는 와전될 가능성이 크기에 안타깝다.   그래서 지겹고 귀찮아도 옮겨 쓰고 또 옮겨 쓴다. 다시 옮겨 쓰면서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발견'하며 위안을 얻으면서 보람을 느낀다.   고쳐쓰기가 지니는 또다른 의미는 '객관적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 객관적 시각이란, 글을 읽는 냉정한 눈길을 말한다. 흥분된 나의 눈이 아니라 냉정한 남의 눈인 셈이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글을 쓸 때에는 누구나 그 나름의 흥분을 지니게 된다. 이런 내적인 긴장 상태는 글을 계속 써 나가도록 밀어주는 힘, 곧 추진력을 팔과 손에 실어주지만 그 대신 '신나는' 흥분을 느끼게 한다.   이 흥분은 글을 쓰는 이로 하여금 객관적 시각을 잃게 하거나 또는 주관적 판단을 우선시키도록 유도하기 일쑤다. 그러므로 '잘 씌어진다' 또는 '잘 나간다'는 엉뚱한 생각에 빠지게 한다. 이런 함정에서 헤어나오는 기회가 바로 고쳐쓰기의 기회다. 고쳐쓰기는 나의 눈이면서 동시에 남의 눈인 '객관적 시각'으로 다시 훑어보게 하는 기회를 안겨준다. 남에게 읽어보도록 하고 나서 틀린 곳 고칠 곳을 지적받는 작업에 버금가는 기회인 셈이다.   나의 눈과 남의 눈은 같지 않다. 틀리기 때문에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글에 대한 나의 주장보다 독자의 주장을 고맙게 여겨야 글이 늘 수 있다. 일단 발표되고 나면 독자의 평가에 변명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발표되기 전에 (고칠 수 있을 때에) 고쳐쓰기를 통해서 고쳐 쓰는 것이 바른 작법이다.    또 고백하자면 초기에는 마침표를 찍자마자 청탁된 주소로 보내었다. 마음에 드는 글을 마쳤다는 기쁨이 나를 서둘러 우체통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밥을 지을 때 불을 끄고도 한참 동안 뜸을 들이듯 글에서도 뜸을 들인다. 뜸 들이는 시간에 고쳐쓰기를 되풀이한다. '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그전에 못햇었지?' 아니면 '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빠뜨리고 그냥 넘어갔지? 하면서 원고지를 더럽힌다.    원래 원고지라는 인쇄된 용지는 고쳐쓰기를 하기 쉽도록 고안된 용지다.  줄을 그어 글의 순서를 바꾸거나 옮기고 또 덧붙인 글을 줄로 끌어들이며 중복된 부분을 지우게 한다. 예전에 고쳐쓰기를 할 때 빨간 색 잉크나 볼펜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쳐쓰기를 끝낸 원고지를 인쇄소 사람들이 '빨간 종이'라고 불렀었다.   사람의 생각은 끊이지 않고 나오는 법이 없다. 논리적인 서술인 경우 더 그렇다. 토막토막 끊긴 사유의 결과를 한 줄의 글로 이어맞춰 나가려면, 생각을 가다듬어야 하고 가다듬은 생각을 순서대로 줄 세워 체계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줄 세운 생각을 이어가면서 써나간다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유도 어렵지만 사유의 결과를 쓰는 작업도 힘드는 일이다.   이런 순서, 곧 배열과 전개의 서술은 운문에서 더욱 어렵고 힘드는 일이다. 이렇게도 놓아보고 저렇게도 놓아보면서 몇 번이나 다른 시도를 실험한다. 이 또한 고쳐쓰기에서 가능한 작업이다.   작품을 쓰고 나서 고쳐쓰기를 서둘지 않는다. 일부러 간격을 둔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안목으로 평가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읽되 남이 보듯 다시 읽는 데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대강 한 주일쯤 뒤에 다시 본다. 작품을 쓸 때에 만나게 되는 내적 긴장, 이 긴장이 완전히 풀어진 다음에라야 자기 흥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 흥분에서 '자유로워야' 비로소 남의 눈으로 읽게 된다. 이렇게 해야 '고쳐야 할 곳'이 제대로 눈에 띈다. '다섯 손가락 안 아픈 데 없다'는 속담은 자기가 써놓은 글, 곧 작품에도 그대로 적중한다. 애써 힘들여 써놓은 글일수록 어느 부분을 쉽게 잘라버리기가 아주 어렵다.   이렇게 한 주일만에 한 번 고쳐쓰기를 하고 또 미뤄 두었다가 다시 며칠 뒤에 다시 고쳐쓰기를 하고…… 몇 번 되풀이하면 그 과정을 다 거치는 동안에 '더 손 댈 데 없는 듯한' 결과로 낙찰된다. 손목이 저리고 눈이 아픈 경우가 왜 없으랴. 헌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써왔다면 이런 태도는 올바른 창작 태도라 할 수 없다.   글쓰기는 길 없는 곳에서 길을 묻는 일과 다름없다. 길 없는 곳에서 누구에게 길을 물을 수 있는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기 위해 자신에게 묻는 것과 똑같은 일을 고독하게 해내야 한다. 이런 일의 한 가지로 고쳐쓰기도 자신에게 길을 묻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고쳐쓰기 또한 고독한 작업이다. 혼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내는 작업.   한번 지나간 길을 되짚어 다시 오고 가듯 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고치고 하는 되풀이는 지루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처음에 썼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 되기 십상이다. 나의 경우 끝부분이 크게 달라지곤 한다. 이런 결과를 놓고 '괜찮은 일인가? 하고 자문하거나 반신반의하는 경우가 흔하다. 처음에 생각하였던 것과 아주 달라진 끝부분이 되어도 전연 개의치 않는다.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뜻에서 첫 생각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처음 생각에 미련을 가지고 집착하다 보면 완성도를 높이는데 지장이 온다. 자꾸 되풀이하며 읽다가 문득 멋진 생각이 떠올라 비로소 마음에 드는 맨 끝줄 한 줄과 만나기도 한다. 혼자서 무릎을 치게도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크게 보아 '고쳐쓰기'의 범주에 드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덧붙이는데 그것은 외국에서 하는 글짓기 방법이다.   밖에 나가 공부하는 동안 방학을 맞아 일리노이 스프링필드라는 곳에 가서 '시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가'를 살펴본 적이 있다. 본 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칠판에 휫트먼의 작품 '풀잎'을 써 놓으면서 선생은 일부러 단어를 빈칸으로 남긴다. 그리고는 학생으로 하여금 빈 칸에 가장 적당하다고 여기는 단어를 시어(試語)로 선택하여서 메꾸도록 한다. (벽돌 담에서 갈라진 벽돌을 깨뜨려 버리고 새 것으로 채우게 하는 것과 같다.) 대강 한 반에 12명 정도인데 앞의 학생이 선택한 단어와 같은 것을 뒤의 학생이 택하여도 괜찮다. 12명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선택한 시어가 같은 것이라면 가장 알맞는 시어라고 우선 1차로 판정한다.   선생은 원작자인 휫트먼보다 더 나은 예비 시인을 기다리는 것이다. 시적 감각이 예민한 학생은 휫트먼이 생각지 못했던 시어의 구사 능력을 보인다. 휫트먼을 능가하는 새 시인을 이런 식으로 키우는 이다. (후배에 의해 교실에서 시가 고쳐지는 셈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를 교과서에서 배운 적이 있다. 선생은 이 시(시조)를 가르치는데, 작자인 남구만(南九萬)이 어떤 사람이고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따위…… 작품 외적인 것만 들려 주었다. 원문에서 한두 자를 바꿔 읽었다가는 큰일이 나는 것처럼 우리는 공부하였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물론 원문을 훼손하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원작보다 더 나은 작품을 기대하는 방법론에서는 '실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교실에서의 수업 방법이다.   이름난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면 가봉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아주 꿰매기 전에 한번 입혀보고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마무리 작업이다. 그러나 큰 백화점 같은 곳에서 파는 기성복을 사 입는 경우, 이 가봉이라는 절차는 있을 수 없다. 맞춤양복이 몸에 맞는 것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글쓰기에서 고쳐쓰기란 바로 이 마지막 과정이라 여기는 것이 좋겠다.  (2004년 가을『한국동시문학』제7호)   *동시 창작론 ⑧ 감동, 체험의 일치에서 오는 감동 유 경 환   1   창작론에서 아직까지(7회에 걸쳐) 다루어 온 것은 외적인 틀(하드웨어)에 관한 것이었고, 이제부터는 알맹이에 해당하는(소프트웨어) 내적인 질(質)에 관하여 다루겠다.   2   시의 알맹이는 감동(感動)이다. 시에는 감동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줄여서 말하면, 시는 곧 감동이다. 감동을 줄 수 없는 시는, 쓴 사람이 혼자 즐기는 시다. 그러므로 시라고 일반화하기 어렵다. 흔히 시의 생명은 감동이라고 말한다. 읽는이에게 감동을 전해주므로, 시는 널리 읽힌다. 이렇게 감동이 시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그러나 대부분 감동적 요소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기 때문에,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경우엔,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시에 감동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모르게 된다. 시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 비롯된다.   동시도 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고 1950년대 말에 외친 사람은 필자다.) 동시도 시이므로 또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를 여기서 왜 다시 해야 하는가. 시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동시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부정적으로 쓰는 부사다) 많다. 더구나 아동문학인 가운데, 동시를 잘못 알고 있는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동시」작품이라고 발표되는 글의 질적 수준이 매우 유치하다. 동시라는 명사의 첫 글자 아이동(童) 한 자로 말미암아, 어린이의 입재롱감으로 동시를 인식하는 현실이 확대된다.   「동시」라는 일컬음이, 문학으로서의 동시의 본질을 왜곡시켰고, 그 원인은 1920∼1960년까지 우리 나라 문학에 대해 제대로 눈을 뜰 겨를이 없었다는 공백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잘못된 인식이 그 동안 화석(化石)처럼 굳어 대물림되었다.   잘못된 인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첫째, '동시이므로 시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여도 된다.' 둘째, '동시이므로 시의 차원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왜 자꾸 대물림되는 것인가. 서울의 신춘문예나 또는 권위 있는 문학 전문지에 여러 번 응모하였어도 등단에 실패하는 경우, '시는 어려우니까 이제부터 동시나 해봐야지…'라는 말을 서슴없이 지껄이는 인사들(?)에 의해서 퍼진다.   왜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에서 번번이 실패하는가? 그것은 시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해가 오류에 기반하는 것이기에 시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시는 서두에 말했듯이 감동을 내포하고 있는 운문이다. 감동, 그렇다. 이것이 들어 있어야 시의 기능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3   동시도 시이므로 당연히 시적(詩的) 요건(要件)을 갖추어야 한다. (이 한마디는 좀 번거로우므로, 이하 시적 요건을 그냥 시라고 말하겠다.) 동시와 그리고 일반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이해를 돕게 하자면, 지름의 길이가 다른 동심원(同心圓)을 그려서 설명할 수 있다.   일반 성인시는 지름이 길다. 그러나 동시는 성인시에 비해 지름의 길이가 짧은 편이다. 이해와 감상의 폭이 같지 않다는 뜻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포함하는, 또는 어린이를 주된 독자라고 여기는, 이러한 대상을 의식하면서 쓴 시다.   지난 날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하여 쓴 시라고 하였으나 이는 편협된 견해이다. 이런 견해가 한동안 지배적이었던 것이 바로 1920∼1960년까지의 공백 상황인 것이다. 오늘날 동시의 독자는 어린이에 한하지 않는다. 어린이에 한정한다는 생각은 폐쇄적 사고의 소산이다. '아동문학은 3대(代)에 걸쳐 효용을 발휘하는 문학'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영국의 이름난 시인들의 '어린이를 위한 시' 작품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등을 읽고 그 효과를 수용하는 계층은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른다. 우리 나라의 문단이 1920∼1960년까지 지극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우물 속에 들어가 앉아 하늘의 넓이를 재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에게 읽히는 문학 작품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포함하는 (또는 어린이를 더 많은 독자로 여기는) 대상을 위하여 문인이 써내는 시 작품이다. 그러므로 아동이 써내는「아동시」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아동시」와「동시」의 질적인 차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인사(?)들로 말미암아 혼동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 기가 찰 일은, 적잖은 아동문학인들까지 어린이가 써내는 아동시 수준의 것을 자신의 문학 작품으로 읽어달라며 발표하고 있는 현상이다.   아동시와 동시의 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짧게 이야기하자면, 아동시에는 (위에 여러 번 강조한 그대로)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하다. 시가 들어가 있지 아니하다는 말의 뜻은, 체험의 일치를 유발할 내용(또는 철학)이 들어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경륜이 짧으면 체험의 깊이도 얕을 수밖에 없다. 체험의 깊이가 얕으면, 감동시킬 핵(核)이 엷거나 약하거나 또는 없을 수밖에 없다. (이 핵은 바로 시적 요건이다.)   4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글을 동시라고 하면서 발표하는 것을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귀여움을 나타내고자, 예쁜 생각을 꾸려서, 어린이들이 늘 쓰는 낱말을 동원하여, 줄을 끊어서 몇 줄로 써내는 형식.'   이런 형식에 그친 것이 대부분이다.   시는 글자로 형상화된다. 글자로 형상화되므로, 글자가 수단이자 재료이다. 이런 기능을 지닌 글자를 배열하는 데엔, 눈에 잘 안 띄는 기술이 요구된다. 글자를 배열하는 주체(사람 = 어른 = 문인)는 글자들이 이루는 줄 사이 어딘가에 자기 체험을 깔아서 직접 나타나지 않는 어떤 생각(체험의 연장)을 불러 일으키는 기술을 숨겨 넣어야 한다. (이런 기술 숨겨넣기가 쉬운 것이 아니므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동시에도 이런 기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푸념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벽돌 쌓기처럼 고운 말을 쌓아 연결시키면, 재미있다고 어린이가 손뼉을 친다. 그러면 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 아닌 항의에 맞서서 대답을 하면, 곧이어 나오는 한마디가 '그건 어린이에게 난해하다'이다. 이런 사람에겐 당분간 대답을 안 하는 것이 상책이다. 받아들일 수준이 못 되기에 그렇다. 좀더 문학을 알게 되고 좋은 동시 작품을 읽게 되고, 그래서 혼자서라도 좋은 동시에서 오는 잔잔한 감동을 느껴보게 된다면, 그 때 비로소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하게 되리라.   교직자로 일생을 보내다 퇴직한 교감, 교장 출신 아동문학인이 발표하는 작품을 보면 대부분 대칭 기법을 쓰고 있다. 대칭 기법이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 연에서 '맑은 하늘'을 쓰면 두 번째 연에선 '푸른 바다'를 쓴다. 첫 연에서 '푸른 산'을 쓰면 다음 연에선 '깊은 강'을 쓴다. 이런 식이다. 이런 식은 동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동시를 뜯어맞추는 것이다.   1920년대 창가(唱歌)라는 것이 있었다. 창이니 타령이니 하는 악보 없는 노랫가락만 전수하다가 악보가 있는 노래가 처음 보급되던 그 시기에 불리던 노래다. 오늘날 70대 할아버지 세대가 부르는 학도가(學徒歌)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학교의 교가도 그 즈음에 제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노래의 가사(歌辭)에는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하다. 전형적인 틀에 맞추어 찍어내는 붕어빵식이니 시가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 영향을 아직 못 벗어난 교직자 출신 아동문학인들, 그들은 어린이의 글짓기 경험만 가지고 동시를 쓴다고 나선다. 시를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으므로「자신」을 모를 수밖에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짜맞추기씩「동시」의 본보기를, 그래서 써내게 되는 것이다.   5   조선 시대의 시조 틀에서 최남선에 의해 자유로워진 것이 1920년대 1차 시의 해체이다. 그리고 신체시라는 이름으로 자유시가 씌어지고 퍼지고 한 것이 지난 30년간이다. 이 30년 동안에 윤석중이 정형율(3,4조, 4,4조, 7,5조 등)에 맞게 동요와 동시를 개발하고 보급시켰다. 정형율에 맞도록 써냈기 때문에, 작곡가들이 곡을 붙이기에 아주 수월하였다. 그래서 동요는 부르는 노래와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 혼용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윤석중은 우리 나라 최초의 동시집을 내면서 동시의 문학사적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요즘 신현득이 새로 쓰는 '한국 동시사' 연재에서 밝혔듯이, 우리 나라 자유 동시는 1950년대 말에 2차 시의 해체가 시도된다. 신현득은 '유경환. 조유로, 박경용, 신현득'에 의해서 주창되었다고 썼다. 가장 정확한 기술이다. 어떤 아동문학사(史)의 기술에는 이와 다르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저자가 ○○지방 아동문학사의 기본 자료를 가지고 ○○대신 한국을 붙여 개작하였기 때문에 생긴 오류인 듯하다.   유경환이 1950년대 말에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기치를 들었을 적에, 지면을 내준 곳은 배영사와 그리고 교육자료사였다. 이 기치에 때맞춰 이론으로 걸맞게 옹호하고 나선이가 박경용이고, 조유로는 그 때까지 중앙에는 낯선 이름이었으며 2년 뒤에 신현득이 작품으로 동참하였다.   필자가 1950년대 말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고 외쳤을 적에, 당시 아동문학계는 건방지다는 투의 시선을 보냈다. 다만 이원수만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데 그런 말을 하려면 우선 작품으로 보여줘야지… 나는 유군이 동화를 쓸 줄 알았는데….' 라고 하였다. 이원수는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내게 제1회「소년세계문학상」을 준 분이다. (당선작은 동화 '오누이 가게', 상으로 받은 금 5돈·메달 형식을 팔아서 1953년 고등학교 입학 등록금으로 요긴하게 쓴 것을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 있다.)   1957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작 없는 가작, '아이와 우체통')를 선고(選考)한 윤석중, 어효선(그 뒤 50년간 줄곧 가까이 찾아뵙곤 하였지만)은 필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번 더 응모하여 당선작을 내놓으라'는 충고를 따르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다. (1957년 11월호 지에 박두진에 의해 초회시 추천이 이루어졌고, 1958년 4월호로 추천 완료 등단하였기에) 그러나 신현득은 2년 뒤에 가작 그리고 당선의 절차를 밟아 마친다.   이런 상황과 분위기에서 '동시도 먼저 시이어야 한다'는 외침은, 저항이나 거역으로 비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다행이도 박경용이, 필자와 사전 의논이라도 한 듯, 같은 주장을 펴준 덕택에 기진할 일이었으나 문단에서의 외로움을 참고 견뎌낼 수 있었다. 필자는 이원수의 '작품으로 해야지…'하는 말에 걸려서 서둘러 첫 동시집 을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책방 겸 출판사인 숭문사에서 낸다.(1966) 이 때 숭문사에서 함께 나온 황영애의 동화집, 최효섭의 동화집을 기억한다.   6   동시도 시이므로, 시적 수준에 이른 것만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에 맞대고 나온 것이 동시의 난해성이라고 앞서 말했다. 난해성을 들고 나오면서 방어 태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강 다음과 같은 보충 설명을 붙인다.   '동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글이기 때문에 쉬워야 하며 또 재미있어야 한다. 동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우선적 조건이다.'   이 말은 반만 맞고 반은 맞지 않는다. 우선적 조건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우선적 조건은 '우선 시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가 안 되어 있는데 쉽고 재미있으면 시인가? 그런데 적잖은 아동문학인들이 '쉽고 재미있는 운문이면 되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운문에서 시는 왜 찾아?' 라고 아전인수격의 주장을 편다. '쉽고 재미있으면 된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갖추어야 할 시적 요건은 슬며시 흘려버리는 태도다.   색깔 있는 나무토막이나 장난감 레고같이, 낱말을 짜맞추어 읽기 쉽고 보기 좋게 틀을 짜놓고서, 이를 동시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겐 동시의 감동이 중요할 수가 없다. 동시를 어린이의 입재롱 놀이감쯤으로 여기는 태도이기에 그렇다.   시의 감동, 이는 시를 살리는 요체다. 동시에서도 똑같다. 동시를 읽고난 뒤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더 이상 읽겠는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될 경우 한 번 더 읽을 수 있겠다. 그래도 감상이 안 되면 체험의 일치를 위한 바탕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겉만 동시 형식이지 속이 없는 박제된 새, 곧 표본실의 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2004년 겨울『한국동시문학』8호)   동시 창작론 ⑨ 생각의 우물 파기 유 경 환   1.   필자는 오래 전부터 '생각의 우물파기'라는 말을 써왔다. 한데 이 말에 낯설어 하는 독자가 있다면, 아마 동시에 대해 그 동안 피력해 온 필자의 글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퍼낼수록 맑은 샘이면 좋은 샘이듯이, 파내려 갈수록 생각의 우물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사유(思惟)를 우물에 비유하면 납득이 쉬워진다.   달리는 차를 타고 보게 되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서 동시의 소재를 얻기보다는, 깊은 연못처럼 폭 넓은 사색과 깊이 있는 사유에서 동시의 소재를 찾아내기가 바람직스럽다.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의 우물파기로 얻어낸 시상(詩想)을, 먼저 문삼석의 작품에서 엿보기로 하자. 숲 속의 풀들은 모두 풀빛인데요. 어쩌다 풀빛이 아닌 풀들이 섞여 있더라도 모두들 조금씩 제 빛들을 풀어내어 다 같은 풀빛이 되게 합니다. 숲 속의 나무들은 모두 나무빛인데요. 어쩌다 나무빛이 아닌 나무들이 섞여 있더라도 모두들 조금씩 제 빛들을 풀어내어 다 같은 나무빛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된 풀빛과 나무빛들 쌓이고 쌓여 숲빛이 됩니다. 깊은 빛이 됩니다.              ―문삼석 '숲빛' 전문   작품 '숲빛'은 눈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씌어진 시다. 필자만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든 한 번만 읽어보면, 생각 깊은 사색으로 발견해 낸 시의 세계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사유가 없다면 이런 작품을 써낼 수가 없다. 생각의 우물을 파는 작업 끝에 얻어낸, 하나의 시상인 것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생각이 없다면 시도 없다'는 한마디 말을 할 수 있는, 증언 같은 것이 바로 '숲빛'이다. 문삼석의 깊은 사유가 이 작품에다 시를 흥건히 담아준 것이다.   다른 보기를 들겠다.   생각의 우물파기로 얻어낸 시상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작품을, 이준관이 '길을 가다'로 제시한다. 길을 가다 문득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다가가 그 곁에 가만히 서보고 싶다. 잎들이 다 지고 하늘이 하나 빈 가지 끝에 걸려 떨고 있는 그런 가을날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내 어깨와 아기새의 그 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디든 걸어보고 싶다. 걸어보고 싶다.           ―이준관 '길을 가다' 전문   이준관은 길을 가다가 작은 새 한 마리를 보고, 아니 작은 새가 눈에 띄자, 그 때부터 계속 새에 대해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생각의 우물파기를 하면서 상당 기간 머리 속에 작은 새를 품었을 것이다. 이준관의 가슴이 곧 새장이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아기새'로 가슴속의 새가 '형상화'되어, 이준관의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마음의 동무로.   자기 어깨 높이로 새의 어깨를 크게 치켜올려, 나란히 함께 걷는(노는) 동무로 여겼을 것이다. 생각이 작은 새를 이준관의 동무로 만든다. 이런 새의 변신(變身)이 가능한 것이 사유 세계이다.   세 번째 보기를 들겠다.   이창건의 작품이다. 시인의 생각이 바로 작품이 된다는 보기다. 시인의 가슴이 곧 작품의 터요. 아울러 작품이 담기는 그릇이 된다. 나는 구석이 좋다. 햇살이 때때로 들지 않아 자주 그늘 지는 곳 그래서 겨울에 내린 눈이 쉽게 녹지 않는 곳 가을에는 떨어지는 낙엽들이 구르다가 찾아드는 곳 구겨진 휴지들이 모여드는 곳 어쩌면 그 자리는 하느님이 만든 것인지도 모르지. 그 곳이 없으면 나뭇잎들 굴러다님이 언제 멈출 수 있을까.          ―이창건 '구석' 전문   목숨 있는 것 가운데 생각이 깊은 사람들만이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시가 생각의 우물에서 길어올려지는 사색의 앙금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시를 만든다는 말은, 생각이 시의 재료라는 말로 다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사물을 보든 그 사물을 놓고 생각의 깊은 우물을 파내려 가지 않는 한, 눈앞의 사물은 그냥 사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사물을 놓고 생각의 우물을 깊이 파내려가 보면, 사물은 슬거머니 변신하게 마련이며 '형상화'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이 진행되게 마련이다.   2.   동시를 쓴다면서(시를 짓는다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슴에 시가 담길 그릇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결코 동시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옮겨 적는 일로는 씌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시인의 생각으로 해석하고, 시인의 생각으로 다시 빚고 시인의 바람대로 태어나도록 새로운 모양을 지니게 형상화(形象化)시켜야 비로소 '창작'이 된다. '형상화'라는 말은 표의문자의 원래 지닌 뜻대로 '상징적 모양을 갖추도록 한다'는 것인데, 한번 더 굴려서 말하자면 사물이 본래 지니고 있는 모양과는 달리 지니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형상화 작업은 겉모양만 바꿔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 들어 있는 본질적 내용까지 바꿔 지니도록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상화 작업은 시를 창작하는 알파요 아울러 오메가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시인 김춘수는 작품 '꽃'에서 꽃을 꽃이 아닌 다른 것으로까지 바꿔 놓지 아니했던가.   이쯤에서 뒤집어서(연역적으로) 설명하여 보자. 만약 생각의 우물파기를 하지 아니하고 '동시'라는 것을 써본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될 것인가 살펴보자.   첫 번째,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이는 상태 그대로 묘사한다면, 산문이 될 것이다. 이 산문을 운문 형식으로 바꾸기 위해,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몇 줄씩의 행(行)으로 나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줄 바꿔 쓴 산문, 곧 '산문의 줄 바꿔 쓰기'에 지나지 않는 글이다. 이런 까닭에 ①동시의 요건인 '시가 들어 있음'에서 벗어난 글이 되며, ②동시의 요체인 감동이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두 번째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이는 현상 그대로 묘사한다면 의미가 삽입될 틈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글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색깔 있는 단어를 동원한다든가 또는 대칭 단어를 짜집기 식으로 구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억지로 꾸며 쓴 글에 그치고 만다. 흔히 보아온 종이접기식이나 장난감인 나무벽돌 맞추기 같은 '짜맞춘 글'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   시가 어떤 것인지, 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일부 아동문학인(?)들이 지면에 발표하는 것들 가운데 '산문의 줄 바꿔 쓰기'나 '짜맞춘 글'이 많은 까닭은 이렇게 해명된다. 이들에겐 '동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동시는 이런 것이다'라는 말을 먼저 들려주어야 옳은 순서이다.   그러나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 아니, 여지껏 미뤄온 셈이다.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일깨워 줄 묘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말하여 왔다. 누구든 동시를 제대로 공부하려거든, 먼저 동시집을 3백 권쯤 읽으라고. 3백 권이면 이 가운데 동시집다운 작품집이 3분의 1쯤 될까 말까 할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3백 권쯤 읽어내면, 그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것은 동시이고 또 어떤 것은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 형식인지를 스스로 식별할 능력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만일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 형식'에 질리게 된다면, 모름지기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거부 반응을 감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닫게 되는 이 방법론은 뉘의 자존심도 건드리지 않는 자기 수련이 될 것이다. 문학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고 선인들이 일찍부터 말해 오지 않았던가.   3.   생각의 우물파기라는 사유 세계의 확장과 심화(深化)는, 돌을 던져서 물주름을 퍼뜨리는 연못의 크기와 깊이에 비유할 수 있고 또 나무의 내면에 감기는 나이테에 비유할 수도 있다.   작은 연못에 돌을 던져 물주름을 만들 때, 퍼져나가는 파문의 크기는 연못의 크기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깊고 큰 연못에서는 연못 둘레만큼 큰 파문을 기대할 수 있다. 생각의 우물파기에서도 깊이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여야만 큰 감동을 작품 안에 담아 낼 수 있다.   동시 작품에 담기는 시적 요건과 시적 요체에서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동시 작품의 질(質)과 격(格)에 있어서도, 깊이 생각한 결과와 넓게 생각한 결과로만 비로소 좋은 작품을 얻게 된다. 깊이 생각하고 넓게 생각하고 얻은 작품의 소재와 내용은, 깊은 의미와 감동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 대신 톡톡 튀는 듯한 가벼운 의미와 재미를 느끼게 하는 재치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이바지 못한다.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충족시키는 질과 격에서 이미 처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들의 말을 통한 놀이감으로서 유희성에 이바지할 뿐이다.   나무가 자라면서 내면에 감게 되는 나이테. 이 나이테와 생각의 우물파기를 연결시켜 보자. 가늘고 작은 어린 나무에 들어 있는 나이테는 가는 몇 줄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고목에 감겨 있는 나이테는 그 연륜만큼 겹겹이 감겨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동들이 써내는 '아동시'에는 과연 몇 줄의 체험적 사유가 감겨 있을 것인가. 인생을 체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아동문학인, 이들이 창작하는 동시에는 작가로서 살아온 연륜만큼 축적된 체험적 사유 세계가 감겨 있을 법하다. 분명한 것은 체험적 사유 세계의 넓이다.   때로 아이들이 써내는 '아동시'에서 재미를 느끼는 재치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동문학인이 창작한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견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사유 세계의 넓이나 깊이에서 견줄 만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는 재치는 그것으로 끝날 뿐이지 결코 문학적 감동에 앞서지 못하는 것이다.   재미로 읽는 동시가 있고, 감동 때문에 읽는 동시가 있다. 재미로 읽는 동시는 한두 번 읽는 것으로 끝나나 감동을 느껴 읽는 동시는 오래 계속 읽힌다. 감동을 주는 동시가 문학 작품으로서 생명이 긴 것은 자명한 이치다. 진정한 동시 작가라면 어떤 동시를 쓰고자 할 것인가.   4.   생각은 열쇠다.   생각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으면, 어떤 사유 세계로도 들어갈 수가 없다. 깊은 사유 세계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의미 깊은 작품을 써낼 수가 없다. 아니 구상(構想)조차 불가능하다.   발목이나 차는 냇물에 들어가 놀면서, 깊은 의미가 담긴 시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어린 묘목 한 그루를 심어 놓고, 겹겹이 감긴 연륜의 나이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생각의 우물파기는 자기 가슴에 깊고 깊은 사유의 우물을 파라는 말이다. 깊이 가라앉은 사유의 결과를 퍼올릴 수 있으려면, 체험의 깊이만큼 해석의 깊이도 깊어야만 한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해석은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형상을 찾아내거나 남들이 꿈도 못 꾸는 상징을 발견해 낸다. 이 체험이라는 것, 그리고 이 체험의 해석이라는 것, 그 다음에 오는 형상화를 위한 상징의 발견이라는 것이, 사물을 응시하는 시인의 눈길에서 차례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시가 창작되는 과정이다. 동시 또한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창작된다.   리차드 바크는 '높이 나르는 갈매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광산은 깊이 파야 광물을 얻는다는 개념을 뒤집었으나 그 본질에서는 반대가 아니다.   진정한 아동문학인이면 교실 복도나 운동장에 뛰노는 어린이에게 집착하는 대신, 벌판을 달리는 어린이에게도 눈길을 돌릴 만하다. 어린이에게도 어린이가 알아들을 만한 언어로 인생을 일깨워 줄 수가 있고, 삶과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하도록 암시해 줄 필요가 있다. 어린이는 '자라지 않는 어린이'가 아니라 매일매일 성장하는 어린이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작품성은 인간 삶의 고달픔을 위로하고 위안한다. 삶의 고달픔은 어린이의 어려운 삶에도 있다. 동시의 작품성은 어린이에게도 필요하다. 아니,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도 필요하다. 동시의 기능과 효용은 이렇게 확대된다.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동시는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두에게 읽힐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의 우물을 더 깊이 팔 필요가 있다.   생각의 우물파기에는 아무런 연장이 없다. 있다면 짧은 관념의 호미가 우리들 마음 속에 있을 뿐이다. (2005년 봄『한국동시문학』제9호)   동시 창작론 ⑩ 묘사―외다리 걷기식 묘사법 유 경 환   1.   동시 쓰기에서 묘사 기법을 나는 '외다리 걷기'에 비유해 왔다. 외다리 걷기에는 (줄타기 놀이에서 보듯) 균형이 아주 중요하다. 균형을 못 잡거나 잃으면 떨어지고 말 듯이, 동시 쓰기에도 균형을 못 잡거나 잃으면 바로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외다리 걷기식이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으라는 것이다. 이 중심 잡기를 구체적으로 다음 3가지 기법으로 설명한다.   그 첫째는 짧게 쓰기다.   그 둘째는 간결하게 쓰기다.   그 셋째는 순수하게 쓰기다.   위의 3가지는 동시 쓰기의 묘사 기법에 기본이다. 이것들을 기본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기본에서 이탈할 때 산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동시는 운문이다. 그래서 운문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문이 될 소지를 배제해야만 한다.   짧게 쓰고, 간결하게 쓰고 그리고 순수하게 쓰라는 것은, (같은 말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운문의 형식을 지키라는 것이다. 아주 쉬운 말로 다시 말하면, 형용사나 부사를 되도록 쓰지 아니하는 것이 위의 3가지를 이행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산문에서는 (더구나 소설 문장에서는) 형용사나 부사를 작가의 의도대로 중복하거나 또는 강조하는 뜻에서 겹쳐 쓰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 쓰기에서는 이와 다르다. 기둥과 가지만 남긴 채 겨울을 난 과수원 과수에 봄이 오면 잎이 돋아 나듯이, 기둥과 가지만 갖춰 주는 것이 시인의 몫이고 잎을 다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동시 쓰기의 묘사 기법에서 형용사나 부사를 덜 쓰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법의학자들이 아주 오래된 두개골을 발견하여 그 구조적 특징을 살펴서 인체 공학적으로 생전의 모습을 재현해 내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정서의 기본 뼈대만 갖춰 제시하면, 독자가 읽으면서 상상의 살을 붙여가며 감상하는 것이 제대로 동시를 읽는 법이다.   동시 읽기의 재미는 어디까지나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정서의 뼈대에 기본이 되는 짧고 간결하고 순수함의 3가지만 요구된다. 쓰지 않아야 할 형용사나 부사를 묘사를 위해 썼다면,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독자의 상상인 독자의 재미를 앗아버리는 것이 된다. 물론 꼭 필요하거나 있어야 할 형용사 부사까지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급적 덜 쓰는 것이 가장 쉬운 기법이다.   2.   동시를 쓰는 묘사 기법에서 두 번째로 마음에 두어야 할 점은, 시인의 의도를 (버선목 뒤집어 보여주듯이) 다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흔히 동시를 쓰는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은 독자가 이런 뜻을 짚어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스럽고 염려스러워서 쓰는 의도를 밝히려고 한다.   이렇게 '이 글은 이런 의도로 썼다'고 밝혀 놓는다면, 그 글의 성격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동시의 매력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듣는 목적시들, 예를 들면 '어린이날 노래'라든가 '한글날 노래'라든가 '개천절 노래'들은 아무리 숭고한 뜻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날 하루만 불리는 노래일 뿐이다.   그러므로 동시를 쓰는 묘사 기법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은, 독자의 눈에 쉽사리 드러나지 아니하도록 이중 해석이 가능한 낱말을 골라 시어로 쓰는 그 '어떻게'에 있다.   필자가 여기서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어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중 해석이 가능하지 않는 낱말로는 동시가 되지 않느냐?'고. 이런 질문엔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중 해석이 어려운 낱말의 모음만으로는 유치원 원아들이 부르는 노래 수준의 작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유치원 원아들이 즐겨 부르는 수준의 작품이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 문학 작품으로 남기는 어렵다.   이름난 시인 정지용이 남긴 어린이를 위한 시 가운데 '해바라기씨'라는 것이 있다. 여기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해바라기씨를 심자. 담모퉁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고양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 감고 한 밤 자고나면 이슬이 내려와 같이 가고 가고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햇빛이 입맞추고 가고 해바라기는 첫새악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꽥!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청개구리 고놈이다.                 ―정지용 '해바라기씨' 전문   여기서 '해바라기씨'는 그냥 해바라기씨일 수도 있으며 아울러 다른 뜻을 상징하거나 비유할 수도 있는 그런 씨다. 이 시가 씌어진 일제 시대에 일본 경찰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참새'라는 은어로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나 알아 낸다면 이중 해석은 그만큼 쉬워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 해석'이란 꼭 두 가지 해석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라는 뜻을 다중(多重) 해석으로 풀이하여도 좋다.   이 이중 해석은 읽는 독자의 체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체험 수준은 거의 나이에 따라 그 폭과 수준이 비례하므로, 이중 해석은 흔히 나이에 따라 나타난다고도 말한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할 때에 유치원 원아에겐 그냥 소의 새끼인 작고 귀여운 송아지의 이미지가 전달되겠지만, 그러나 세상을 살 만큼 살아본 어른에게는 그냥 송아지가 아닌 것이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3형제……'에서도 별은 그냥 별로 듣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별에서 다른 뜻을 찾아 내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쓴 사람의 의도가 다 드러나는 글이 산문에선 환영받으나 운문에서는 그렇지 않다.   3.   동시 쓰기에서 묘사 기법은 그 말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감(語感)이나 율동감(律動感)에 의해 제약된다.   영국 동요집 (1760)를 읽어보면 음악적인 율동감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원래 영국에서 전래되어온 (입으로 전해진) 노래 같은 동요를 모은 모음집이기 때문에 율동감이 쉽게 감지된다.   영국에서 이름을 떨친 A.A.밀느(Alan Alexander Milne 1882∼1956)의 동시집 속 작품들도 귀에 들려오는 사운드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면서 쓴 작품들이다. 흔히 아기곰 푸우푸우를 쓴 동시인으로 그를 알고 있다.   동시. 이를 읽을 때에 힘을 들이거나 힘을 빼는 발음의 강약(强弱)이라든가, 낱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음량(사운드)을 참고하여서 동시를 쓸 때 낱말의 순서를 바꾸거나 또는 도치법(倒置法)으로 앞뒤와 위아래를 뒤섞거나 할 필요가 있으면, 문법대로 쓰지 않으며 또 줄을 바꿔서 새로운 줄을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장가라도 들어보면 일정한 율동감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것이다. 이렇게 일정한 율동의 감각이 되풀이 되도록 운(韻)을 맞춰 쓰는 것이 초기 영국 동시의 틀이었다.   우리 나라 아동문학의 개척자인 윤석중도,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영국의 운문 형식의 영향을 아니 받은 것이 아니어서, 우리 말의 율동과 장단 그리고 숨결 이 3가지를 고르고 다듬어 가며 윤석중 동시의 틀을 짰다. 이런 까닭에 작곡가에 의해 쉽게 멜로디가 붙을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 된 것이다.   어쨌거나 동시 속에는, 안으로 접어 넣은 율동이 일정한 박자처럼 감각으로 살아나도록 스며 있으며, 또 멀리 퍼져 나가는 종소리처럼 은은한 여운이 스며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동시 쓰기 묘사 기법은 이런 감각적인 제약을 수용하며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런 제약 속에서도 멋진 동시를 써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래 목수일을 해온 목수가 자 없이도 척척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아니한가.   동시 쓰기를 할 때, 낱말의 순서를 왜 바꾸며 그리고 언제 어느 때 줄을 바꿔 써야 하는지를 자신있게 알려면 노련한 목수처럼 충분한 체험을 쌓아야 한다. 동시 쓰기는 결코 수학 문제를 풀 듯이 공식에 대입하거나 법칙을 응용하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동의 감각적 제약을 수용하는 능력 또한 목수의 수련과 마찬가지이다.   4.   동시 쓰기 묘사 기법에서 '묘사를 위한 감정 절제'가 필수적임을 말할 차례다.   시어(詩語)로서 '상큼한'이라는 형용사와 그리고 '봄'이라는 명사가 만나면, '상큼한 봄'이라는 한 구절이 성립된다. 그런데 상큼한 봄이라는 4글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실로 다양한 것이다. 이런 이미지의 분위기는 들판을 가득 덮을 수도 있고 골짜기를 메울 수도 있는 그런 색깔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동시에 재래시장 한 구석 장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이든 아줌마의 봄나물 한 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를 다 늘어놓는다면, 이것은 시가 아닌 산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에는 절제가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필수 사항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오래 전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라는 영상이 소개된 적이 있다. 마리 이야기는 하얀 털옷을 입은 마리가 2시간 동안에 보여주는 영상 스토리다. 그런데 관객은 이 영상을 보면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읽어낸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만일 관객이 눈으로 보면서,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가슴으로 상상하지 못한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그냥 아이들의 장난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수준 이상으로 평가되었다.   시에서도, 시를 이루는 몇 줄은 독자의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아픔 비슷한) 정서를 찌르는, 그런 힘을 지녀야 한다. 그 힘이 곧 시의 매력이다. 이 매력은 단 한 줄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시가 몇 줄로 씌어졌는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리거나 나이들었거나 상관없이 사람의 가슴 속 어느 한 구석에 담겨 있는 마음을 건드려 줄 수 있는 한마디! 이런 숨겨진 메시지가 시를 시답게 만드는 요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한 2년 전부터 김용택이나 안도현 같은 시인들의 작품이 우리들 마음을 보자기로 싸담듯이 다잡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은 어디에서도 아동문학가로 불리지 않으며 동시인이나 동시작가라는 바이라인을 달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이 써내는 작품들이 기성 아동문학인들이 차지하던 자리에 밀물처럼 침식하여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 나라 아동문학과 관계 있는 잡지에 발표되는 동시의 성격과 형식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현상을 보아 왔다. 왜일까? 한마디로 그들의 작품에는 절제된 시가 들어 있으되 아주 쉬운 그리고 자연스러운 묘사 기법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절제. 감정의 절제는 물론이거니와 묘사에서도 절제는 당연한 것이다. 그냥 늘어놓으면 시가 안 되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냥 늘어놓는다'는 말에는 절제없이 형용사나 부사를 자꾸 붙인다는 뜻도 들어 있다. 다 자라 옥수수대에 붙어 있는 옥수수잎보다 적은 단어 몇 개로 김시인이나 안시인은 그들의 속내를 그럴 듯하게 형상화하고 있지 않은가?   5.   동심이라고 일컬어 온 '어린이 마음'은 간결하고 짧고 순수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3가지를 합쳐서 말하면 시에는 군더더기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어린이 마음으로 동시를 쓴다면, 간결하고 짧고 순수한 낱말을 시어로 선택하여야 어린 독자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구태어 논리라는 어려운 말을 빌려올 것 없이, 동시에 구사하는 시어는 겉으로 투명하되 해석에선 두 겹일 수 있는 그런 단어이어야 하겠다. 여리고 고운 마음을 담아내는 글(자)그릇은 거기 담아내는 마음 그대로 덧칠 안 된 단어일 때에 독자 가슴에 밀착될 수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빼앗긴'은 얼마나 큰 뜻으로 씌인 단순한 시어인가? (2005년 여름『한국동시문학』10호)   동시 창작론 ⑪ 쉽게 쓰기 유경환(동시인/시인)   읽기는 쉬워도 실제로 쓰기에는 쉽지 아니한 것이 바로 '쉽게 쓰기'이다. '동시는 쉽게 써야 한다'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알면서도 어렵게 쓰는 버릇을 못 고치는 편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쓰는 것이 쉽게 쓰는 것이고 그리고 어떻게 쓰는 것이 어렵게 쓰는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된 적이 없기에, 막연히 모호하고 포괄적인 기준만 내세워 '쉽게 쓰자' 또는 '어렵게 쓰지 말자'고 말해온 탓이다.   1. 관념어(觀念語)는 피해야   먼저 필자는 쉽게 쓰기를 위한 실제 방안으로 관념어는 피하자고 말한다. 관념어라는 것은 한자가 표의(表意)하는 그대로 관념을 나타내는 낱말이다. 예를 들면 '역사'라든가 '사상'이라든가 또는 태고(太古)라든가 하는 낱말들이다.   우리들의 사유 세계에만 존재할 뿐이고, 실제로 접근하여 만나거나 만져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낱말이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보거나 접촉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인 까닭에, 어린이나 청소년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는 이런 정서 작업에 동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 어린이나 청소년도 독자 대상에 포함하는 동시에, 관념어를 동원 구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읽히길 바라는 시를 쓰면서 그들에게 낯선 낱말을 선택하는 이런 실제의 경우를 필자는 요즘에도 적지 않게 보고 있다. 더 실증적으로 밝히자면, 교육 기관에서 퇴직한 교직자들 가운데 특히 교감 교장 같은 고위직 경력자들이 발표한 이른바 '동시'라는 글에서 다반사로 관념어를 만난다.   왜 그럴까? 동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오랜 교직 경력을 쌓았음에도 제대로 이해할 기회를 못 가졌을까? 기회를 못 가진 것이 아니라, 동시를 문학 작품으로 수용할 기회를 못 가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줄여서 지적한다면 동시를 얕보아온 탓이다. 어린이가 써내는 '아동시'와 그리고 문학 수업을 거친 문학인이 창작한 '동시'와의 차이를 모르는 그 개념 혼돈에서, 자신을 구출해 내지 못한 채 고위 교직에 오른 탓이다. 그러므로 동시도 아동시처럼 쉽게 씌어진다고 여기는 것이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 이것이 인정되는 동시는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는다. 어렵게, 참으로 어렵게 창작된다. '쉬운 표현을 위해 쉬운 낱말을 선택하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이다.   여기서 동시 '쉽게 쓰기'는 '쉬운 낱말로 쓰도록 하는 노력'이라는 것으로 결론된다. 쉬운 낱말로 동시 쓰기는(모순 같지만) 사실상 어렵게 쓰기와 상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동시를 쓰고자 하면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가당착일 뿐이다.   2. 쉽게 쓰기와 유치하게 쓰기   쉽게 쓰기. 이는 읽기에 쉽도록 또는 감상하기에 쉽도록 쓰자는 것이지, 결코 유치하게 쓰자는 것이 아니다.(이런 말을 이 창작 강좌에서 해야만 하는 것인가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요즘 어떤 종합 문예지에 활자화되는 것을 읽어보면 그래도 '해야 하겠다'고 작심하게 된다.   어른이 쓴 글인데 어째서 유치한 글이 되는 것일까? '동시는 어른이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가서(동심으로) 써야 한다'는, 이런 일부 평자들의 말을 마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처럼 듣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쓰라는 이런 주장은 ①때묻지 아니한 마음으로 ②순수한 감정으로 ③또는 투명한 심사로 소재를 해석하라는 주장일 뿐이고, 쓰는 사람이 갑자기 어린이의 정서 수준으로 내려가서 쓰라는 말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적잖은 발달 장애 현상을 보고 있다. 키가 한창 클 시기에 어떤 원인 작용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결국 평균 신장에 못 미치는 키를 갖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서가 한창 발달할 시기에 어떤 원인 변수가 개입하여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면, 몸과 나이에 걸맞도록 제대로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정서 지체에 걸리게 된다.   그런데,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동시를 쓰란다고 마치 정서 지체자처럼 어린이의 사유 능력과 어린이의 사유 세계 안에서 뒹구는 모습을 글로 보이고 있다. 이런 글인 경우 정상적 기준으로 보면 유치한 글로 읽혀질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쉽게 쓰기는 유치하게 쓰기와 같을 수 없다. 이의 차이나 간격을 식별하지 못하고 동일시(同一視)한다면, 정서 발달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사실의 인지(認知)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쉽게 쓰기와 그리고 유치하게 쓰기. 이것들이 분명히 다르다는 차이점은, 첫째 낱말의 선택에서 찾아야 할 일이고, 둘째 낱말의 배열인 전개 방법에서도 찾아야 할 일이며, 셋째 낱말들의 서술에서 기술적으로(또는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그 기교에서까지 찾아야 할 일이다. 위에 열거한 3가지는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만큼 표현 기교는 예민하고 까다롭고 또 델리케이트한 처리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다.   3. 정서의 집적회로(集積回路)   '동시도 시(詩)이어야 한다'는 말을 필자는 1950년대 말에 시작하였다. 이것은 '우선 시가 되어 있어야 동시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의 이런 주장에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다. 일부 평자들은 참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 했는지 또는 이해 수용에 오해가 끼었는지 아니면 정서 지체가 있었는지, 하여간 동시의 난해성(難解性)을 제기하면서 '유 아무개가 한 말 때문에 동시가 갑자기 어려워지고 독자를 잃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고 난해성에 결부시켰다.   1970년대 동시가 일부 독자층으로부터 외면당했다고 하는 말은, 1970년대 아동문학 독자의 주계층이 분화(分化) 분류되는 현상을 오해한데 기인한 말이다.   1920년대부터 50년간 지속된 동요의 흐름에서 시(詩)다운 동시의 새 흐름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그 즈음이다.   유치원 시설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유아 교육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던 시절, 유아들의 정서 생활에 걸맞는 운문이 정서 교육의 교재용으로 요청되는, 이런 시대적 수요에 따라 동시의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50년간 지속된 동요의 형식에서 동시의 형식으로 외적 변형을 이루자, 음악동요에 필요한 노랫말 즉 음률적으로 내재율이 뚜렷한 노랫말이 귀해져서, 새로운 노랫말 틀에 맞는 운문의 수요가 교육 현장에 급증하였기에, 동시의 분화가 곁들여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가 열리면서 다원화(多元化)로 개방되는 기회를 통하여, 해외의 아동문학이 소개되고 그 가운데 선진국의 동시와 청소년시에 노출되는 기회가 늘면서, 우리 나라의 동시도 그 격과 위상을 높이자는 의식과 함께 '동시는 어른도 독자일 수 있다'는 해석이 짙어졌다.(이런 자극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글에서 앞섰다)   위에 분석한 3가지 상황과 현상을 간과한 일부 평자들은 '시가 되어가는 동시'를 놓고, 계속 종래의 동요 가사의 기준에서 바라보면서, 자기네 기대를 넘었다며 '난해하다'고 한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모두가 현명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의 격(格)과 난해성과의 상관 관계에는 상관성이 지극히 약한 사실을 살펴야 오해를 벗어날 수 있다.   ①1920년대의 신체시와 그리고 창가(唱歌)의 가사, ②1930∼50년대의 동와 동요 가사, ③1960∼70년대 동시와 동요 노랫말. 이렇게 3단계로 발전한 발전 과정을 살피면, 동시가 시로서의 위상을 차지할 충분한 이유가 나타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누어 살펴야 마땅할 상황과 현상을 한데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아니한 발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부 평자들이 자기 평가의 기준을 계속 그 전 시대에 맞추어 놓은 채, 197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다운 동시'를 난해한 동시로 규정하는 일은, 앞으로 동시를 공부하여 창작 생활에 들어갈 아동문학 지망생에게 적당치 못한 견해를 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4. 동시의 원리(原理) 알아야   두루 알고 있다시피 컴퓨터 작동 원리인 디지털 능력은 0과 1,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만드는 순열조합의 집합체에서 나온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동시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여온 낱말이지만, 이 가운데 시어로 쓸 만한 낱말들만 동원하여, 그것들을 이어 놓거나 나눠 놓거나 또는 줄바꿔 놓거나 하는 배열 형식을 통해 일상적으로 통하던 감정 이상의 정서 곧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를 담아내는 것이 시의 창작이다.   그런데 동원된 낱말들이 엮는 정서회로, 이것이 전해 주는 의미를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능력에 못 미치는 사람이 평자로 등장하는 경우, 난해시와 그리고 난해시가 아닌 것을 식별하지 못하고 평하기 일쑤다. 정말 어려운 낱말을 구사하여 독자가 수용하기 어렵도록 쓴 난해시와 '시다운 동시'까지 한데 뭉뚱그려 '난해하다'고 치부하는 결과를 내놓는다.   시에는 누가 봐도 난해한 난해시가 있다. 열 사람이 읽고 나서 모두 난해하다고 한다면, 결국 쓴 사람 혼자만 아는 난해시일 수밖에 없다. 문예 사조사(史)에 보면, 실험적으로 시도된 첨단적 성격의 작품들이 거의 난해시의 대접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경우와 달리 '시다운 동시'가 품고 있는 고도의 기교적 완성도, 이것이 만드는 정서회로의 효과를 추적해 낼 능력이 부족하면 작품 속에 숨겨진 작품성의 가치를 발견 못하게 된다.   결국, 시어로 선택된 낱말들이 시인의 의도에 따라 이어졌을 때 구축되는 정서회로의 효과, 즉 시적 분위기의 느낌을 감지해내는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서회로가 내뿜는 효과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모자라서 난해하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참 많다. 이를 놓고 필자는 '적절하지 못한 치부'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쉽게 쓰기.   이는 시다운 동시를 쓰려고 노력을 하되,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친숙한 낱말을 시어로 구사해야, 어린이나 청소년이 자기들 나름의 시적 상상을 충분히 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관념어는 쇠에 녹이 슬 듯 때가 낀 낱말과 같아서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시적 상상을 불러일으키거나 시적 자극을 주기에 적합하지 아니한 낱말이다. 감동을 전달하고자 하거나 느낌을 전달하고자 하는 동시 쓰기에서, 기능적으로 이미 녹슨 관념어를 계속 고집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2005년 가을『한국동시문학』제11호)   동시 창작론 ⑫ 내면화(內面化) 들여다보기 유경환(동시인/시인)   1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를 설명한, 재미있는 한마디 이야기가 있다. 의사이면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사람도 거울을 보고 원숭이도 거울을 본다. 그런데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는 이렇게 나타난다. 원숭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만 보나, 사람은 거울에 안 비치는 내면(內面)까지 본다.'   필자는 내면(內面)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 한마디를 주석을 달지 않은 채 인용하였다. 이 한마디가 나온 지는 퍽 오래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아동문학가들에게는 아직 낯선 편이겠다.   내면(內面)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시의 의미를 깊게 하는 마술 같은 일몫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겠다. 시어들이 나란히 조합되어 시인의 생각을 형상화시킬 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담아내는 일몫이 있다는 것을, 시인이 아니면 미처 생각지 못하는 편이다. 바로 내면의 문제다.   이런 까닭에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동시라고 작품을 써낼 때, 물 밑으로 담기는 뜻을 아예 처음부터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시를 통해 글자들이 빚어내는 이미지를 그려보려 하지만, 그와 아울러 물 밑으로 담겨지는 뜻은 생각지도 못한다. 잘 씌어진 동시와 그렇지 못한 동시와의 차이는 여기서 벌어진다. 이 차이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퍽 많이도 동시인으로 등단하였으니까 말이다.   2   동시를 발표하면서 만약 어린이들이 감상하는 작품이기에, 선택한 시어들 밑에 다른 뜻을 깔아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어린이들에게 일회용 읽거리의 작품성 때문에, 두고두고 펼쳐볼 읽거리가 못되고 만다. 적잖은 동시인들이 기성 문단에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일회용 대접밖에 못 받는 데 있다. 하지만 왜 그런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은 간과하고 있다.   동시집 출판은 참으로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판된 동시집을 읽어보면, 아깝게도 수록된 작품들의 상당수가 일회용품이라는데 혀를 차게 된다. 이런 일회용 수준의 작품을 써내면서, 어떻게 시인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때로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 아닌가 싶게 안타깝기도 하다)   '주된 독자층이 어린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편견인 줄 모르고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독자층을 얕보는 태도에서 한번 읽으면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것을 써내는 사람들이, '나도 동시인!'이라고 자부하는 셈이다.   시 앞에다 아이 동(童)자를 붙인 동시라고 하여도, 첫 번째 독자인 어린이가 성장 과정을 통해 계속 자라면서 다시 읽고 또 읽고픈, 이런 작품을 내놔야 비로소 기억되는 시인이 되는 것 아닌가. 동시도 시이어야 계속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별다른 생각 없이 '어린이'가 되어 갑자기 어린이가 된 그런 눈으로, 깊은 고민의 흔적도 없이 옛날을 되돌이켜 보고 자시의 어린 시절 회상기를 동시라고 써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창작 태도이고 보면, 시로서 갖춰야 할 시적 요건이 들어갈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어린이 글, 곧 아동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길고 길게 설명을 하였지만, 요체는 내면화(內面化)이다. 내면화가 안 된 것은, 속이 빈 허물과 다르지 않다. '속 빈 강정'이라는 속담이 꼭 맞는 말이다.   내면화는 동시를 시의 지위에 올리는 격(格)이다. 내면화는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겉으로 읽히는 것과 다른 뜻을 시가 그 물 밑에 지니게 하는 묘한 일을 한다. 내면화는 그래서 시의 매력이고 신비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내면화는 오직 느낌(feeling))으로만 감지되고 느낌으로만 전달된다. 작품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정서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은 이론이 아닌 느낌에서 터득된다.   3   시인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고민하는 사람이고 늘 고뇌에 차 있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이런 고뇌 없이 '어린이가 되어' 맑은눈으로 순수한 것만 골라 '생각의 난쟁이'처럼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들을 글자로 짚어내, 틀에 맞게 써 내면 이 글이 곧 동시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무리 동시라고 할지라도, 한 편의 동시 작품 안에 시가 들어가 제자리를 잡고 있지 아니하면, 글자 맞춤의 형식에 지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 이런 것을 줄맞춰 나타낸다 하여도, 이런 것을 어린이눈으로 그려낸다 하여도 결코 동시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동시에도 사람의 사람다운 마음이 들어가 내재(內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사람다운 마음'은 기쁨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 따위 온갖 정서가 다 녹아들 수 있는 마음이다. 동시의 일차적 독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슬픔이나 괴로움의 정서를 외면할 수 있는가. 이는 변명일 수밖에 없다. 여러 번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였지만, 동시는 더 이상 어린이만을 주독자층으로 삼지 아니한다. 어린이를 주독자층으로 설정한 범주 규정은, 우리 나라 1930년대 사회 문화 구조와 상관관계가 있다. 당시 민족의 희망을 어린이에게 걸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민족적 현실에서, 동시의 범주를 좁혀 감상과 보급의 농도를 어린이에게 집중시키고자 한 의도가 그런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는 인간의 온 생애에 걸쳐 위안과 위로를 안겨 주는 문학 형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것이 세계 보편적 현상이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좋아하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즐겨 듣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인생을 담아낼 그릇의 효용이 인정되는 시가 동시인 것이다.   그러니, 동시라고 하여 더 이상 그 격을 낮추지 말 일이다. 동시인 스스로 동시의 격을 낮추면 그것을 생산하는 동시인도 사회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4   햇살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분해하면 일곱 가지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빛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적외선이 있고 자외선이 있다.   만약 이를 볼 수 없기에 적외선이나 자외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물리학 공부를 더 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동시, 동시다운 동시 한 편에서는 읽을 땐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과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속마음에 전달되어 오는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속마음에 전달되는 깊은 뜻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작품을 쓰는데 왜 어째서 좋은 동시로 쳐주지 않는가' 하고, 기회 있을 대마다 불만을 터뜨리고 불평을 일삼는다. 문제는 나열된 글자들이 형상화해 낸 이미지 밑에서(물 밑으로) 전달되고 있는 뜻의 기능을 감지할 만큼, 충분히 삶이나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거나 고뇌에 빠지지 않았다는 생활 자세 또는 생활 태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생각 없이 씌어지는 시가 없고, 생각 없이 씌어지는 동시 또한 없다. 이 말은 고민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고, 고뇌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고민 없이, 고뇌 없이 어린이가 써 내는 것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다)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그냥 '어린이가 되어'서는 결코 진솔한 어린이의 흉내도 낼 수 없다. 어린 사람에게도 생각이 있고 고민이 있으며 그 나름의 고뇌가 있다고 말하니까, 작품에다 고민이니 고뇌니 하는 한자(漢字)를 그대로 써넣는 동시인(?)도 있었으니, 이 어찌 한심한 실정이라 아니 하겠는가.   좀더 추적해 보면, 여러 잡지나 기관이 신인을 등단시키는데, 그 심사위원이나 추천위원 가운데 동시를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위원'이 끼어 있어서,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신인을 등단시키고 있다. 이것이 동시의 내면화를 모르는 일부 위원들의 심사나 추천의 결과이다.   5   한 채의 집을 아담하게 잘 지으면 투시도만 보았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고 좋아하게 된다. 한 편의 동시다운 동시를 읽게 되면, 글자의 조합이 풍기는 것 이상의 느낌과,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속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내면화는 동시를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다 고스란히 옮겨 줄 수 있는 글자 밑의 얽힘이다.   반도체 칩이 서로 연결되어 정보를 전달하듯이, 사전에 나와 있는 글자들이 얽혀서 사전에 나와 있지 아니한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내면화가 해 낸다.   사람의 마음은 반도체 칩이 아니므로 일정한 형식으로 내몀화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마다 다른 체험 곧 내적인 체험에 따라 다른 뜻을 전달한다. 여기 감상의 묘미가 있고, 그래서 해석의 폭이 넓어진다.   윤석중은 기찻길 옆에서도 잠을 잘 자는 아기에서, 편히 잠들 수 없는 사회를 기찻길로 해석될 수 있게 썼다. 박목월은 엄마소도 얼룩소에서 창씨개명을 부추기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송아지를 썼다.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작품이 지니고 있는 내면화된 세계는, 작품의 작품성을 높이고 완성도를 결속시킨다.   동시의 창작에서 내면을 중시하고 내면화의 세계를 천착하는 것은, 돌 한 덩이를 가지고 어떤 모양을 파내 다면체(多面體)적인 해석을 끌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표본실에 진열되어 있는 박제된 동물에는 내면이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는 동시라고 할 수가 없다. 내면은 분해된 기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내면은 전체로서 생리 기능을 한다. 마찬가지로 시에서 내면화는 전체로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다른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감당한다. (2005년 겨울『한국동시문학』12호)   동시 창작론 ⑫ 내면화(內面化) 들여다보기 유경환(동시인/시인)   1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를 설명한, 재미있는 한마디 이야기가 있다. 의사이면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사람도 거울을 보고 원숭이도 거울을 본다. 그런데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는 이렇게 나타난다. 원숭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만 보나, 사람은 거울에 안 비치는 내면(內面)까지 본다.'   필자는 내면(內面)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 한마디를 주석을 달지 않은 채 인용하였다. 이 한마디가 나온 지는 퍽 오래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아동문학가들에게는 아직 낯선 편이겠다.   내면(內面)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시의 의미를 깊게 하는 마술 같은 일몫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겠다. 시어들이 나란히 조합되어 시인의 생각을 형상화시킬 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담아내는 일몫이 있다는 것을, 시인이 아니면 미처 생각지 못하는 편이다. 바로 내면의 문제다.   이런 까닭에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동시라고 작품을 써낼 때, 물 밑으로 담기는 뜻을 아예 처음부터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시를 통해 글자들이 빚어내는 이미지를 그려보려 하지만, 그와 아울러 물 밑으로 담겨지는 뜻은 생각지도 못한다. 잘 씌어진 동시와 그렇지 못한 동시와의 차이는 여기서 벌어진다. 이 차이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퍽 많이도 동시인으로 등단하였으니까 말이다.   2   동시를 발표하면서 만약 어린이들이 감상하는 작품이기에, 선택한 시어들 밑에 다른 뜻을 깔아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어린이들에게 일회용 읽거리의 작품성 때문에, 두고두고 펼쳐볼 읽거리가 못되고 만다. 적잖은 동시인들이 기성 문단에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일회용 대접밖에 못 받는 데 있다. 하지만 왜 그런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은 간과하고 있다.   동시집 출판은 참으로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판된 동시집을 읽어보면, 아깝게도 수록된 작품들의 상당수가 일회용품이라는데 혀를 차게 된다. 이런 일회용 수준의 작품을 써내면서, 어떻게 시인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때로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 아닌가 싶게 안타깝기도 하다)   '주된 독자층이 어린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편견인 줄 모르고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독자층을 얕보는 태도에서 한번 읽으면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것을 써내는 사람들이, '나도 동시인!'이라고 자부하는 셈이다.   시 앞에다 아이 동(童)자를 붙인 동시라고 하여도, 첫 번째 독자인 어린이가 성장 과정을 통해 계속 자라면서 다시 읽고 또 읽고픈, 이런 작품을 내놔야 비로소 기억되는 시인이 되는 것 아닌가. 동시도 시이어야 계속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별다른 생각 없이 '어린이'가 되어 갑자기 어린이가 된 그런 눈으로, 깊은 고민의 흔적도 없이 옛날을 되돌이켜 보고 자시의 어린 시절 회상기를 동시라고 써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창작 태도이고 보면, 시로서 갖춰야 할 시적 요건이 들어갈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어린이 글, 곧 아동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길고 길게 설명을 하였지만, 요체는 내면화(內面化)이다. 내면화가 안 된 것은, 속이 빈 허물과 다르지 않다. '속 빈 강정'이라는 속담이 꼭 맞는 말이다.   내면화는 동시를 시의 지위에 올리는 격(格)이다. 내면화는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겉으로 읽히는 것과 다른 뜻을 시가 그 물 밑에 지니게 하는 묘한 일을 한다. 내면화는 그래서 시의 매력이고 신비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내면화는 오직 느낌(feeling))으로만 감지되고 느낌으로만 전달된다. 작품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정서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은 이론이 아닌 느낌에서 터득된다.   3   시인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고민하는 사람이고 늘 고뇌에 차 있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이런 고뇌 없이 '어린이가 되어' 맑은눈으로 순수한 것만 골라 '생각의 난쟁이'처럼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들을 글자로 짚어내, 틀에 맞게 써 내면 이 글이 곧 동시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무리 동시라고 할지라도, 한 편의 동시 작품 안에 시가 들어가 제자리를 잡고 있지 아니하면, 글자 맞춤의 형식에 지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 이런 것을 줄맞춰 나타낸다 하여도, 이런 것을 어린이눈으로 그려낸다 하여도 결코 동시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동시에도 사람의 사람다운 마음이 들어가 내재(內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사람다운 마음'은 기쁨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 따위 온갖 정서가 다 녹아들 수 있는 마음이다. 동시의 일차적 독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슬픔이나 괴로움의 정서를 외면할 수 있는가. 이는 변명일 수밖에 없다. 여러 번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였지만, 동시는 더 이상 어린이만을 주독자층으로 삼지 아니한다. 어린이를 주독자층으로 설정한 범주 규정은, 우리 나라 1930년대 사회 문화 구조와 상관관계가 있다. 당시 민족의 희망을 어린이에게 걸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민족적 현실에서, 동시의 범주를 좁혀 감상과 보급의 농도를 어린이에게 집중시키고자 한 의도가 그런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는 인간의 온 생애에 걸쳐 위안과 위로를 안겨 주는 문학 형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것이 세계 보편적 현상이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좋아하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즐겨 듣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인생을 담아낼 그릇의 효용이 인정되는 시가 동시인 것이다.   그러니, 동시라고 하여 더 이상 그 격을 낮추지 말 일이다. 동시인 스스로 동시의 격을 낮추면 그것을 생산하는 동시인도 사회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4   햇살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분해하면 일곱 가지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빛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적외선이 있고 자외선이 있다.   만약 이를 볼 수 없기에 적외선이나 자외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물리학 공부를 더 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동시, 동시다운 동시 한 편에서는 읽을 땐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과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속마음에 전달되어 오는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속마음에 전달되는 깊은 뜻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작품을 쓰는데 왜 어째서 좋은 동시로 쳐주지 않는가' 하고, 기회 있을 대마다 불만을 터뜨리고 불평을 일삼는다. 문제는 나열된 글자들이 형상화해 낸 이미지 밑에서(물 밑으로) 전달되고 있는 뜻의 기능을 감지할 만큼, 충분히 삶이나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거나 고뇌에 빠지지 않았다는 생활 자세 또는 생활 태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생각 없이 씌어지는 시가 없고, 생각 없이 씌어지는 동시 또한 없다. 이 말은 고민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고, 고뇌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고민 없이, 고뇌 없이 어린이가 써 내는 것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다)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그냥 '어린이가 되어'서는 결코 진솔한 어린이의 흉내도 낼 수 없다. 어린 사람에게도 생각이 있고 고민이 있으며 그 나름의 고뇌가 있다고 말하니까, 작품에다 고민이니 고뇌니 하는 한자(漢字)를 그대로 써넣는 동시인(?)도 있었으니, 이 어찌 한심한 실정이라 아니 하겠는가.   좀더 추적해 보면, 여러 잡지나 기관이 신인을 등단시키는데, 그 심사위원이나 추천위원 가운데 동시를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위원'이 끼어 있어서,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신인을 등단시키고 있다. 이것이 동시의 내면화를 모르는 일부 위원들의 심사나 추천의 결과이다.   5   한 채의 집을 아담하게 잘 지으면 투시도만 보았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고 좋아하게 된다. 한 편의 동시다운 동시를 읽게 되면, 글자의 조합이 풍기는 것 이상의 느낌과,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속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내면화는 동시를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다 고스란히 옮겨 줄 수 있는 글자 밑의 얽힘이다.   반도체 칩이 서로 연결되어 정보를 전달하듯이, 사전에 나와 있는 글자들이 얽혀서 사전에 나와 있지 아니한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내면화가 해 낸다.   사람의 마음은 반도체 칩이 아니므로 일정한 형식으로 내몀화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마다 다른 체험 곧 내적인 체험에 따라 다른 뜻을 전달한다. 여기 감상의 묘미가 있고, 그래서 해석의 폭이 넓어진다.   윤석중은 기찻길 옆에서도 잠을 잘 자는 아기에서, 편히 잠들 수 없는 사회를 기찻길로 해석될 수 있게 썼다. 박목월은 엄마소도 얼룩소에서 창씨개명을 부추기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송아지를 썼다.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작품이 지니고 있는 내면화된 세계는, 작품의 작품성을 높이고 완성도를 결속시킨다.   동시의 창작에서 내면을 중시하고 내면화의 세계를 천착하는 것은, 돌 한 덩이를 가지고 어떤 모양을 파내 다면체(多面體)적인 해석을 끌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표본실에 진열되어 있는 박제된 동물에는 내면이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는 동시라고 할 수가 없다. 내면은 분해된 기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내면은 전체로서 생리 기능을 한다. 마찬가지로 시에서 내면화는 전체로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다른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감당한다. (2005년 겨울『한국동시문학』12호)   동시 창작론 ⑭ 감동을 담아내기 유 경 환   1   산의 높이는 해발 3백 미터니 3천 미터니 한다. 바다가 기준이다. 지도에는 등온선이 그려진다. 시에서도 이처럼 수치로 급수를 매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을 때 '좋은 시'라는 느낌이 오게 된다. 이런 좋은 시에도 여러 층이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좋은 시는 읽는이에게 감동을 주는 시다. 분명한 것은, 읽는 뉘에게나 감동을 전달하는 작품은 좋은 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몇몇 지면에 발표되는 동시라는 것을 보면, 좋은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와는 거리가 먼 '맹물' 같은 것들이 놀랍게도 참 많다. 어째서 이런 형편에 이르렀을까.   시인의 내면에 내재하는 감동적 요소를 작품에 옮기는 표현 기법, 이것이 서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겠다. '이 정도면 내가 옮겨 놓고자 한 대로 독자가 감동을 받겠지…'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 대신 맹물이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시인은 자기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표현 기법 찾기에 참으로 많은 시간을 두고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주된 독자가 어린이일 뿐'이라는 잘못된 지식(1930·40년대 우리나라에선 그랬다) 탓에 '아이들이 읽어서 알 수 있는 표현 기법'만 내세워, 아무런 고민 없이 쉽게 표현하려고만 하였다. 그래서 의도와 전달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   2   무엇보다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쉬운 시(동시)와 그리고 쉽게 씌어진 시(동시)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쉬운 시와 그리고 쉽게 씌어진 시는 다르다. 달라도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르다. 이 차이를 모르거나 지나치므로 두 가지를 혼동하게 된다.   좋은 시는 쉬운 시일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시가 쉽게 씌어지기는 어렵다. 이런 개념 혼동으로 말미암아 쉽게 씌어진 것을 발표하는 사례가 흔하게 되었다.   윤석중, 강소천, 박목월이 표현 기법이 쉬운 시를 보여 주지만, 결코 쉽게 씌어진 작품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오랜 동안에 걸쳐 깊은 사유 끝에 어렵게 씌어진 작품들이다. '기찻길 옆에서 잘도 자는 아이'나,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번 쳐다보는 닭'이나, '얼룩송아지'가 쉽게 창작된 것이라 본다면 이는 잘못된 감상이다.   아이들 가슴은 유리병처럼 투명한가? 아니다. 그것은 인형이나 유리 모형에서나 그렇다. 아이들 가슴에도 가늘고 여린 심상이 차 있고, 때로는 그것이 얽히기도 한다. 이것이 그들의 고민이다.   우리가 숨 쉬는데 필요한 공기는,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똑같은 신선한 공기이다. 이와 다르지 않게,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나이에 따른 고민이 다 있게 마련이다. 그렇건만, 아이에겐 고민이 없고 있다면 장난스러운 생각만 있으리라는 일방 통행적인 사고 방식, 이런 사고 방식의 소유자들 안목 탓에 동시가 혼란에 빠진다.   '아이에겐 고민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런 것을 담을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을 작품에 담을 필요가 없으니, 아이들 생각 그대로를 옮겨 쓰면 된다.' 이런 안목에서 아이들 입에 붙은 표현으로 어렵지 않게 옮겨지는데, 다시 말하면 쉽게 씌어지게 된다.   '어린이가 읽는 시에 왜 그리고 어째서 표현 기교를 도입하라는 것이냐'가 쉽게 써내는 사람들의 항변이다. 고민 없이 자란 사람만이 (자신의 유년기나 청소년기를 준거하여) 이런 항변을 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메마른 (유년기·청소년기를 거친) 정서 결핍의 성장 과정을 지닌 사람, 이들이 문단 등단 절차를 쉽게 마치면 아이동(童) 글자 '동'자에 집착하여 쉽게 써내는 버릇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소급하여 따지면, 동시라는 어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동(童)자를 시 앞에다 접두어(接頭語)로 붙인 것이 원죄가 되는 것이다.   3   사람에겐 대체로 12∼15살이 빠른 성장기다. 이는 눈에 보이므로 이런 의학 상식을 수긍한다. 그런데 심성 발달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빠른 성숙 시기가 있다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으므로) 수긍하려 하지 않는 편이다.   정서 발달 기간에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문인으로 양산(量産)되면, 그 원천적 정서 결핍 때문에 작품에 담아내야 할 내면 정서에 약하거나, 그것을 드러내도록 하는 표현 기법에 서툴 수밖에 없다.   육체의 성장기에 필요 영양이 충분치 못하여 체격이 작게 굳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성의 성숙기에 감성 훈련이 충분치 못했다면 자신의 정서 결핍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경우, 표현 기법에 서툴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시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해야 마땅하다. 대장간의 대장장이도 불덩어리 무쇠 두드리는 연마를 어깨 팔뚝이 부풀도록 거쳐야 쟁이가 된다. 그런데 '아이들 생각'을 단순하게 글자로 바꿔 놓으면 동시가 되는 줄 알고, 붕어빵 찍어내듯 아이들 생각을 찍어내는 형편이니,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읽는이에게 감동을 주겠는가.   시 공부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등단 절차를 마친 사람들 가운데, 교직자 출신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매우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그들에겐 오랜 동안 아이들의 글짓기 지도를 해온 경험이 있는데, 이 지도 경험을 시 공부라고 착각한다. 아이들이 써내는 '아동시'와 그리고 시인이 창작하는 '동시'에는, 인생을 살아본 만큼의 차이가 있다. 아동시와 그리고 동시와의 차이를 식별 못하고, 글쓰기 지도의 '실제 경험'만으로 등단 절차를 마쳤기에, 표현 기법의 기교를 모르는 것이다. 기교는 기술의 문제이다. 모자라면 연마해야 한다.   4   시는 고민이 익히는 열매다. 동시도 시이므로 다르지 않다. 햇살 없이 익는 열매 없고 고민 않고 완성되는 작품 없다. '아이들이 읽는 것인데 왜 고민해?' 이런 사고 방식이 바로 맹물 같은 작품들 생산의 주범이다. 동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말은 자기 옹호이거나 변명이다.   아동문학은 인간학(人間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기초 인간학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주장한 바 있다. 필자의 주장이다. '아이들이 읽는 글을 쓰는데 왜 고민을 해야만 하느냐? 이런 편견이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위상을 높이지 못하고 지금의 수준에 붙잡아 매놓고 있는 첫째 원인이다.   아동문학가라는 명함을 내밀고 인사를 나눠 보라.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가. 이것이 우리가 받고 있는 사회 대접이 아닌가. 아동문학가의 의식에서 하루빨리 아이동(童)자를 지워야 옳다. 그래야 작품에 인간의 문제가 담길 수 있고, 아이동(童)자의 구속에서 벗어나야 작품성 높고 완성도 치밀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초롱에 든 새는 날지 못하며, 의식에 구애된 사고는 장애를 못 벗는다.   어린이가 읽어서 감동할 작품 수준이면 할아버지·할머니가 읽어도 감동한다. 역(逆)도 진(眞)이라는 말은 수학에서만 통하는 한마디가 아니다. 할아버지·할머니가 읽어서 감동할 작품이면 어린이가 읽어도 당연히 감동한다.   어른이 읽어서 맹물로 치면, 어린이에게도 맹물이고, 어른이 읽어서 유치하면 어린이에게도 유치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다 아는 프랑스의 단편 '별'이나 '곡예사', 쌩키비치의 '등대지기', 황순원의 '소나기'는 어른이나 어린이에게나 똑같은 감동을 안겨 주는 작품의 예이다. 감동을 전달하는 정서 매체는 같아서 시, 동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   문학은 혼자 하는 작업이다. 시에 대한 공부도 혼자 하는 일이다. 좋은 동시 곧 감동을 주는 동시도 혼자 쓰는 것이다. 혼자 하되, 앞서 살다간 국내외의 문인들 작품을 읽으면서 '뒤따르지 말아야 할 점을 밝혀가며 읽는' 이런 독서가 핑요하다.   시에 대한 공부를 하여도 인접 학문 분야에까지 폭넓게 읽어야 사고의 바탕이 넓어지고 보편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 밑줄 쳐 놓았다가 자신을 위해서 해 둔 한마디처럼 인용하는, 주(註)도 달지 않고 슬쩍 옮겨 쓰는, 그런 독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인격을 해치는 결과만 얻는다.   만일 독해력(讀解力)의 문제에 걸려서 그것이 안 된다면, 차라리 수도승이나 수도사처럼 벽을 보고 앉아 묵상하는 것이 훨씬 나은 시 공부가 되리라. 왜냐하면 문학은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서 결국엔 인간학에 귀결되듯, 동시 공부 역시 기초 인간학의 탐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장난감인 색색의 레고를 맞추듯이 써내는 동시는 말장난이므로 어린이에게 재미는 줄 수 있으되 그러나 감동은 주지 못한다. 어린이가 자라면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감동, 이는 자라는 가슴에 심겨진 보석과 같다. 그래서 오래 간직될 수 있다.   말장난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허황된 것일 뿐, 결코 가치 있는 꿈일 수 없다. 감동을 읽는이 가슴에 옮겨 주는 표현 기법은, 말장난처럼 뜯어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심겨지는 씨앗처럼 자리하는 것이다.   씨앗처럼 자리하는 것은, 생각이 담긴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는 것이다. 이는 넓은 사고 깊은 사유의 어망(漁網)으로만 건져 올려지는, 비늘이 번쩍이는 싱싱한 물고기와 다름없는 메시지다. 그런데 떨어진 비늘 조각을 모아 붙여 펄펄 뛰는 물고기를 만들 수 있는가.   감동을 주는 작품은, 인간의 문제나 어린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에게서 노인에게까지 감동을 전한다. 그러하건만 '어린이가 읽는 글에 왜 고민이 필요해?' 라고 말하는 이가 아직도 많다. (2006년 가을『오늘의 동시문학』제15호)   동시 창작론 ⑮ 童詩의 形式 유 경 환     1. 압축의 묘미   아동문학 이론서의 '동시'편에 보면 동시의 형식이 맨 앞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의도적으로 이 글의 마지막 편으로 미루어 왔다. 왜냐하면, 동시 형식이라는 개념은 이론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수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을 하지 않는 이론가들은, 동시의 형식을 맨 먼저 다루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창작을 하는 나는, 동시의 형식은 맨 뒤에 마무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동시가 어떤 운문인가를 알고 나면, 그 형식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 수밖에 없다.   2. 의미의 압축   줄글(산문)을 엿가락 자르듯 뚝 뚝 끊어서 서너 줄로 나눠 놓으면, 과연 동시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라고 누구나 대답할 것이다. 줄글을 뚝 뚝 잘라놓아도 동시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줄글과 동시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줄글과 동시, 이것은 산문과 운문이라는 형식에서만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동시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 생각을 거꾸로 돌려보자.   우리는 한 편의 동시를 가지고 원고지 20장이나 30장 정도의 긴 줄글을 만들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을 암시하는 말일까. 동시는 줄글을 줄여서 만들 수 있다는, 그런 말이다.   기나긴 강물처럼 구비구비 긴 줄글을 단 몇 줄의 짧은 글로 줄여 놓은 것이 동시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시는 압축의 묘미를 지닌다. 줄이고 또 줄여서 더 이상 줄일 수 없도록 의미를 구겨넣는, 그 결과 깊은 뜻을 숨겨 지니게 되는, 그런 압축의 기술을 요구한다.   의미의 묘미를 얻으려 하는 압축에는, 단순한 길이의 압축만이 아니라 내용의 압축까지 들어간다. (이것을 흔히 양(量)의 압축과 질(質)의 압축이라고 말한다.) 줄이고 또 줄여서 더 이상 줄일 수 없도록 구겨넣은 의미를 놓고 우리는 함축된 의미라고 말한다.   함축된 의미를 풍기려면, 한 가지 뜻만 지닌 낱말이 아니라, 여러 가지 뜻을 복합적으로 지닌 낱말을 골라 써야 한다. 여러 가지 뜻을 이중 삼중적으로 지닌 낱말은, 흔히 비유나 상징에서 선택되는 낱말들이다. 비유나 상징을 써서 뜻을 압축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곧 질의 압축이 되는 것이다.   '동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이름난 시인이 일찍이 말한 적이 있다. (시인의 이름을 오래 전에 읽어서 잊엇기에 못 밝히는 것임) 동시에서는 일반시에 비해 비유나 상징을 덜 쓰는 편이거나, 쓴다 하여도 그 농도가 엷은 비유나 상징을 쓰는 편이므로 '말하는 그림'이라는 한마디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동시를 쓰고자 할 때, 사물의 모양이 비슷한 것들이나 또는 성질이 비슷한 것들을 비교해 가면서 간접적 비유를 통해 두 가지를 한 가지로 묘사하는 것이 곧 시 쓰기의 기술이다. 이 기술을 드러내지 않고자 토막 토막 끊어서 배열하거나 또는 장작을 포개 쌓듯이 짧게 포개는 것이다.   3. 「말의 그릇」 빚기   원래 낱말은 한 개의 사물을 대신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에 시어로 쓰일 경우엔 달라진다. 시어로 선택되어 시 속에 쓰여지면, 낱말은 기호 이상의 뜻을 스스로 품게 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뜻까지 얹어 지니게 된다. 이런 신비스러운 일이 시를 쓰는 일에선 일어난다.   시에 쓰이는 하나의 낱말은, 그 다음에 오는 낱말과의 만남을 통해 낱말이 본래 지니고 있던 뜻과는 다른 뜻을 새롭게 풍기게 된다. 이것이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그 원리(原理)이다.   누구나 다 쓰는 말을 가지고 시인은 좀 유별난 뜻이 담기는 말의 그릇을 빚어낸다. 이 한마디 말에서 시의 본질(本質)이 어느 정도 밝혀진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쓰는 말로 엮어지되, 누구나 쉽게 짐작하는 것과는 다른, 별난 의도를 담아내는 「말의 그릇」이 곧 시요 동시인 것이다.   시인은 「말의 그릇」을 빚기 위해서 낱말을 가지고 말의 순서인 어순(語順)을 바꿔놓거나 뒤집어 놓거나, 또는 비유되는 낱말을 대입(代入)하는 그런 기교를 부려서 말의 그릇을 빚어내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냥 줄글이 아닌 토막난 글의 형식이 나타나게 된다.   시인은 또 말의 그릇을 빚기 위해서 줄글에서와는 달리, 일반 문장의 서술법을 무시하기 일쑤이다. 일반 문장에서의 서술법대로 쓰지 아니하고, 주어와 동사의 자리를 바꾸는 도치법(倒置法) 따위의 여러 기교를 부려 형식의 묘미를 얻어내는가 하면, 아예 있어야 할 주어나 동사 따위를 아주 생략해버리는 기교를 다반사(茶飯事)로 즐겨 쓴다.   그런데 동시도 시인 만큼, 시에서처럼 동시에서도 율(律)과 운(韻)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런 까닭에 길이를 압축하여 의미를 함축시키되, 율과 운이 어긋나지 않고 서로 아물려지도록 '말의 정서적 기능'을 살려내는 작업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   말로 빚는 그릇이라고 앞서 말하였다. 사발엔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고 접시엔 무엇인가를 얹어 놓을 수만 있다. 접시엔 담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깊이가 없어 주르르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국물은 흘러내려 건더기만 얹을 수 있는 접시와, 그리고 옴폭한 깊이가 있어 국물까지 담을 수 있는 사발, 이것은 동시의 형식에서도 좋은 비유일 수 있다.   접시 모양의 동시에선 이야기만 얹을 수 있으나 시상(詩想)까지 고이게 하지 못한다. 요즘 엿가락처럼 재미있게 늘여가다 뚝 뚝 끊어내는 동시의 형식은, 접시 모양일까 사발 모양일까? 참신한 소재를 발견하여 그것을 이야기식으로 길게 전개한다지만, 시상이 결여되면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말은 본래부터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뜻과, 그리고 함께 스스로 지니고 있는 음향적 리듬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이 뒷것을 일컬어 말의 정서적 기능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말의 정서적 기능을 아주 잘 활용하여 시를 쓴 시인으로 김소월을 들 수 있다. 또 윤동주도 들 수 있으되, 정서적 기능에 가장 먼저 눈길을 둔 이는 역시 김소월이다.   이런 까닭으로 위의 두 시인은 오래도록 독자들 입술에 오르내리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율과 운을 잘 살려가며 작품을 쓴 시인들이라 하겠다. 이렇듯, 동시의 형식에는 율과 운을 잘 살려내는 특별한 관심까지 요구된다.   동시 쓰기는 또 말의 의미적 기능과 그리고 정서적 기능, 이 두 가지를 읽기 좋게 배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읽기 좋게, 보기 좋게 배열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힘들고 괴로운 작업이다.   4. 마음눈이 읽어내는 시심   시인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속뜻은 작품을 이루는 몇 줄의 글 속에다 감추어 놓고, 시어로 선택한 낱말들이 은근히 그 속뜻을 겉으로 드러내도록, 그렇게 시치미 떼고 유도하는 일을 저지르기 일쑤이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아주 고약한(?) 짓이지만, 시를 읽히도록 어떤 형식의 틀 안에 집어넣기 위한 전략에서는, 매우 묘한 술책으로 볼 수도 있다.   나뭇잎들이 서로 좁건 넓건 거리를 두고 어울려야 비로소 한 그루의 나무로 보인다. 나무라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무로 인식하는데, 나뭇잎들의 어울림은 대단히 중요한 일몫을 하는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낱말들이 서로 상관(相關)된 거리를 나눠 갖고 만나야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틀지어진다. 여기에 거리를 두고 어울리는 상관된 거리가 충분히 갖춰진, 그런 결과로 시의 형식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얼굴눈만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마음눈으로 살피면 어느 정도 본질 테두리를 알아 볼 수 있다. 동시도 마음눈으로 사물을 살필 때에 시심을 찾아낼 수 있으며, 마음눈으로 읽어야 그 시심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아주 좋은 시는 최대한의 의미를 지닌 언어라고 하겠다.' 이는 에즈라 파운드(1885~1972)라는 시인이 남긴 말이다. 좋은 동시 또한 최대한의 의미를 함축한 작품일 때에 무한한 암시력을 풍길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말을 놓고 재해석하자면, 좋은 동시는 극한적으로 압축되고 생략되어 더 줄일 수 없을 만큼 줄여졌으나, 그 대신 지니는 속뜻은 최대한으로 늘일 수 있는 그런 시 작품이다.   모르는 사람 없을 만큼 알려진 영국 시인 엘리옷은 이런 말을 남겼다.   '시에 대한 정의(定義)의 역사는 곧 오류의 역사이다.' 시를 놓고 여러 사람들이 내린 온갖 정의를 다 모으면 모을수록 잘못의 길이만 길게 늘어날 뿐이라는 말이다. '시란 …… 무엇이다.'라고 정의한 것을 모두 다 모아놓는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시의 본질을 완벽하게 드러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시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은 필요 없는 것이다. 시는 그냥 시일 뿐이다. 우리 나라 어느 스님의 말(법어)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와 다를 것이 없다.   아주 넓게 보면, 어떤 형식이든  시라고 써내는 것들은 모두 시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외우고 싶을 만큼 좋은 시나 좋은 동시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요즘 한 방송사의 지구 탐험대가 찍어오는 필름을 보면, 아랫입술을 뚫어 작은 접시 모양의 물건을 끼워넣어야 미녀라 여기는, 그런 검은 색 피부의 여인들이 오늘날에도 살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구태여 우리가 바꿔 주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동시의 형식, 이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보고자 한다. 다만, 요즘 동시의 형식을 길게 늘이는 그들의 그 인식에 대해, 그들 스스로 신중하게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일깨월 줄 수 있을지 문제라 여긴다.   아름다움 또는 미(美)에 대한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므로 누가 상관할 일이 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도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보는 것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5. 유치원 원아에 들려줄 동화처럼?   하루살이가 내일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흔히 말해 왔다. 매미들이 다음해 여름을 어떻게 알겠느냐고도 말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의 가설(假說)일 뿐이다. 유충으로 있을 동안 '선택적 입력'이 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사람의 판단과는 달리, 땅 속에 7년 있는 동안, 7년 전의 정보가 계속 보전되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이 정도가 아니도록 경이롭다. 그 놀라움의 두 가지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1백살 정도밖에 못 사는 사람이, 빛이 1년 동안 달리는 거리를 생각하여 '1광년'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그 후손에게 3천억 광년 밖에 있는 은하계를 그려볼 수 있게 머리를 물려 주고 있다.   그뿐이랴. 몸 안에 퍼져 있는 핏줄 속으로 달리는 마이크로 로봇을 만들고 렌즈를 달아 몸 속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를 찾아내는 진단을 하고 있다. 우주의 넓이와 크기를 알아내는 머리와 그리고 핏줄 속의 로봇을 만드는 나노기술의 머리가 오늘날 사람의 두뇌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이런 두뇌만이 꼭 있어야 할 것들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또 있어야 할 두뇌도 있다. 그것은 어떤 두뇌인가?   봄 여름 가을, 세 철을 알아낸 나뭇잎 그 맨 밑에 달리는 아침이슬에 찬란히 첫 햇살이 닿을 때의 순간적인 눈부심을, 동시로 표현하는 동시 쓰기의 능력 또한 위에 두 가지 어느 것 못지 않게 가치 있는 두뇌가 아닌가? 카메라 렌즈가 잡아내는 모습, 그 이상의 감동을 전해 주는 한 편의 동시를 창작하는데, 여기 무슨 형식이라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창작(創作, Creation)이다. 이미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하는 것을 되풀이하면 그것은 창작이 아니고 다만 오락(Re+cre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예술의 장르에서도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이며, 문학 장르 안에서 동시 쓰기에서도 또한 같다. 동시 쓰기에서의 창작은, 소재의 발견이나 소재의 선택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의 개발에서도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동시의 형식도 그 전과 같지 않고 달라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줄글을 엿가락 뚝 뚝 잘라 적당한 길이로 장작 포개 쌓듯 배열하는, 요즘의 그 길어진 형식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자. 산문시(散文詩)도 아니고, 산문시의 형식을 따라 (요즘 일반적으로 성인시가 길어졌듯이) 길게 늘여가며 율도 운도 무시한 채, (마치 유치원 원아들에게 들려주는 동화처럼) 적당히 끊어서 줄 바꿔 쓰는 요즘 동시의 형식은 ① 그래야만 할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으로서의 까닭을 그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② (독자들에게) 설명할 정서 논리를 그렇게 쓰는 까닭이 지니고 있는 것일까 ③ 과연 독자들은 그런 작품에서 어느 정도 「감동」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도움이 되는 글을 누군가에게서 받고 싶다.  출처  ㅡ 허동인 동시감상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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