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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활과 리라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2009  추천:0  2019-06-30
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Lozano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년 3월 31일 ~ 1998년 4월 19일)는 멕시코의 시인, 작가, 비평가 겸 외교관이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이 높았으며 19세 때에 자신의 첫 시집인 《야생의 달 (Luna Silvestre)》을 발표했다. 그는 1937년에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서 열린 반(反) 파시스트 작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1938년에 멕시코로 귀국, 멕시코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194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1946년에 외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와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을 비롯,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과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62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968년에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집 《하양 (Blanco)》 (1968년 작)과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을 비롯, 수필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81년에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 《하양 (Blanco)》 (1968년 작)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서론     시와 시편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들어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인의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항이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다.   시는 공을 향한 기원이며 무의 대화이다.   시의 양식은 권태와 고뇌와 절망이다.   시는 기도이며 탄원이고 현현이며 현존이다.   시는 악마를 쫓는 주문이고 맹세이며 마법이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자 보상이고 응집이다.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에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   시는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한다.   시는 광기이며 황홀경이고 로고스이다.   시는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교이고 낙원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향수이다.     시는 아날로지다.   시편은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고   시편의 운율과 각운은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이자 울림이다.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 – 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우리는 살아있고 고통받는 어떤 것에 대한 표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시가 우연의 응축으로 주어질 때나 혹은 시인의 창조적 의지와는   다른 힘과 여건의 결정체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시적인 것과 만나게 된다.   시인이 시적 흐름을 유도하거나 변형시킬 때 현저히 다른 어떤 것 즉,   작품의 출현을 보게되는 것이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     부분이 곧 총체이다.   각각의 시문은 유일하며 환원 및 반복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 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스타일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모든 예술가는 역사적인 공통의 스타일을 뛰어 넘으려 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공통된 자산, 그 시대의 스타일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모방하지만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변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은 스타일을 갖지 않는다.   그때 생긴 이미지는 공동재산, 즉 미래의 역사가와 문헌학자의 전리품이 된다.   이런 저런 비슷한 돌들이 사용되어 예술적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이다.     문학적 언어, 스타일은 일상 언어보다 더 정확하고 혁신적이다.   그러나 그는 언어를 뛰어 넘는다.   더 적절히 말하면 반복불가능한 시적 행위,   즉 이미지, 색깔, 리듬, 비전등을 시편으로 용해시킨다.     시편이 가지는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한 성격은   그림이나 조각, 소나타나 춤, 기념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림과 송가, 교향악과 비극을 구별짓는 차이점을 뛰어넘어   그 모두가 동일한 우주를 선회하도록 하는 창조적 요소가 있다.     조형예술과 조음예술은 이러한 ‘의미하지 않음’에서 출발하지만   양가적 유기체인 시편은 의미를 품은 존재인 말에서 출발한다.       우주의 주기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의 한 쌍의 음과 양은   철학이고 종교이며, 춤이고 음악이며, 의미로 충만한 주기적 운동이다.   또한 이것은 비유적 언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특징짓기 위하여   조화 주기성, 혹은 대조법과 같은 표현을 내포한다.     모든 작품은 의미화작용에 닻을 내린다.   인간의 손에 닿음으로서 성질이 바뀌고 작품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지향성에 물들게 되어 어딘가를 향하게 된다.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인 것이다.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활동범위와 직업이 무엇이든, 예술가이든 수공업자이든,   인간은 원료, 즉 색깔, 돌, 금속, 말을 변형시킨다.   변형이란 원료들이 맹목적인 자연의 세계를 포기하고 작품의 세계,   다시 말하면 의미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조각을 새기고 계단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사용한 재료인 돌에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조각에 쓰인 돌과 계단을 만드는데 쓰인 돌이 동일하며   이것이 모두 동일한 의미체계를 이루고 있다하더라도 변형의 속성은 다르다.   산문작가와 시인의 손에 놓인 언어의 운명이 그러한 차이점이 뜻하는 바를 보여준다.   산문작가가 되기보다 시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   산문에서 언어는 많은 의미의 가능태들을 희생시키고 그 중의 단 하나와 동일화를 시도한다.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이다.   이러한 작용이 바로 분석적 특성이며 이것의 실현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되는 법인데   왜냐하면 말은 다수의 잠재태의 기의(significado)들을 포함할뿐 아니라   다수의 방향성과 의미들의 가능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인은 결코 단어의 다의성을 거역하지 않는다.   산문과 일상언어가 강요한 구속으로 불구가 되었던 언어는 시 속에서 원초의 상태를 회복한다.   본성의 회복은 총체적이어서 의미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음악적이고 조형적인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말은 농익은 과일처럼 혹은 하늘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불꽃처럼 자신의 내부,   즉 모든 의미들과 암시들을 드러낸다.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이런 현상은 형식, 소리, 색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돌은 조각으로 변형될 때 광휘를 얻게 되며 계단으로 만들어질 때 빛을 잃게 된다.   색깔은 그림 속에서 광채를 내고 몸의 운동은 춤을 출 때 빛난다.   시적 기능은 기술적 조작과 정 반대이다.   시적기능에 힘 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서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시적 창조에는 재료나 기구에 대한 구속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자유를 부여한다.   말, 소리, 색깔 그리고 그 박의 재료들은 시의 궤도에 진입하자마자 변화를 겪는다.   여전히 의미작용과 의사소통이 도구이면서 ‘다른 사물’로 변한다.   기술의 영역과는 반대로 진행되는 변화는 원래의 본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로 들어간다.   ‘다른 사물‘이 된다는 것은 실상 ’원래의 사물‘이 되는 것이며   원래의 사물이란 태초부터 실재적인 그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조각이 된 돌, 그림의 빨강, 시편의 말은 순수하고 단순한 돌이나 색, 말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어떤 것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인 가치, 원래의 무게를 잃지 않은 채, 피안에 닿는 다리가 되며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는 말 할 수 없는 기의들의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된다.   다의적인 존재, 즉 시적인 말은 온전히 있음-리듬, 색깔, 기의-이며 동시에 다른사물, 즉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성좌를 유발시키는   이상한 힘으로서 모든 예술을 시적으로 만든다.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은 회화적 언어 이상의 어떤 것일 때 시가 된다.   그때의 작품은 기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어떤 것, 즉 이미지이며 반복불가능한 시이다.   위대한 화가는 위대한 시인으로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다.   결국, 수공예업자가 자신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돌, 소리, 색깔, 말을 이용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는 그 재료들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것들에게 봉사한다.   언어의 봉사자는 그언어가 무엇이든간에 언어를 초월한다.   이런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인 기능이 이미지를 생산한다.   예술가는 이미지의 창조자, 즉 시인이다.   이미지가 됨으로서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 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며 역사를 초월한다.     모든 독자들은 시편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만남이다.   우리들의 열정과 일상의 간만(干滿)에 모든 것이 화해하는 순간이 있다.   적대적인 것들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한 순간 융합한다.   그것은 판단중지하는 것이며 이순간 시간은 멈춘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화해는   ‘아난다(ananda) 혹은 하나 속에 노니는 쾌락이다.   틀림없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런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 찰라의 순간에 이와 비슷한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해 보았다.   사랑은 인간에게 열려있는 일치와 참여의 상태이다.   사랑의 행동에 의해 의식은 부서지기 전에 장애물을 넘어 충만한 상태로 일어서는 파도와 같다.   이러한 충만한 일어섬 속에서   위를 향해 일어서는 힘과 중력등 모든 힘은 미묘한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   동중정(動中靜).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한 순간 충만한 생명을 엿보는 것처럼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찬다.     자력을 띤 사물.   그 덕분에 우리는 시적 경험에 참여할 수 있다.   시편은 개인의 성질이나 기질 그리고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시편은 가능성일 뿐이다.   모든 시편이 갖는 공통점은 참여이며 이것없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진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컬는 상태에 참여 한다.   그러한 경험은 이런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자기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며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他者性의 발현)     시편은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은 중재 역할을 한다. 그 덕분에 시간의 시조인 태초의 시간이 순간 속에 육화된다.   직선적 시간은 순수한 현재로 변화하는데,   순수한 현재란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시 한편을 읽었을 때 느끼는 감정,   높은 파도처럼 분출하여 직선적 시간이 쌓아놓은 둑을 붕괴시키는 그 충만했던 감정은   독자들의 삶을 통해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된다.   시편은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이다.   시는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제 1부     시 편 el poema     언 어       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맨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되면서 사람들은 사물과 이름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대상과 기호가 동일하다는 믿음이 사라지자마자 언어에 대한 학문들은 그들의 자율성을 획득했다.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 사이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철학의 모호성은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말이란 실재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조악한 도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말없이 인간은 포착되지 않는다.   인간은 말로 된 존재이다.     또한 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말을 이용하는 모든 철학은 역사에 예속될 수 밖에 없다.   하이데카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없이 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앎의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미지의 실재에 부딪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   즉, 세례하는 것이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모든 배움은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우리에게 지혜의 문을 열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의 계시로 끝난다.   혹은 무지의 고백인 침묵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리고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의미화 작용이다.   말은 표상적 작용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의미화 작용은 지시적이고 감정적이며 표상적이다.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하여 경험의 한 요소를 표상하는 것,   즉 기호 혹은 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언어와 신화들은 실재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들이다.     언어의 본질은 상징적인 것인데   은유는 실제의 한가지 요소를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말 하나하나와 혹은 구와 절은 하나의 은유이며 동시에 마법적인 도구이다.   즉, 말이란 다른 사물로 변화하기 쉽고 또 건드리는 것을 변용시키는 어떤 것으로,   예컨대 태양이라는 말이 빵이라는 말을 건드리면 빵은 별로 변한다.   그리고 태양자신은 빛을 내는 음식이 된다.     말은 상징을 발산하는 상징이다.   인간은 말 덕분에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이미지와 운율을 띤 언어적 형상의 계속적 산출은 일상어의 상징적 특성, 시적 성격을 증거한다.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 되려는 경향이 있다.   매일 말들은 서로 충돌하여 금속성의 불꽃을 튀기거나 혹은 파랗게 빛을 내는 짝들이 된다.   말들로 수놓아진 하늘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천체들이 생겨난다.   차가운 비늘 위로 채 마르지 않은 물기와 침묵을 떨구는 말들과 구들이   언어의 수면위로 날마다 솟아오른다.     시는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다.   시는 일어서는 언어다.   시는 원초적 언어로 돌아가려는 시도이다.   즉, 말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었던 시간으로의 복귀이다.   혹은 사물과 이름이 동일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에 총체적 시의 실현이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원초적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정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말과 대상 사이의 거리-말이 지시하는 것의 은유로 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말에 강요되는 거리-는 다른 현상의 결과이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자마자   자연 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가 되었다.   말이 지시하는 실재와 말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그리고 더욱 심층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존재 사이에,   자신의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은 가교이며 이 다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키는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는 인간 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거리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됨을 포기하고 자연 세계로 돌아가거나   인간됨의 한계를 초월하여야 한다.     모든 역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양자의 시도는   근대인에 이르러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연유로 현대시는 양극사이를 운동하는데,   한 쪽 극은 마법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긍정이며 다른 한 쪽은 혁명적 소명이다.   이러한 양극으로의 운동은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다.   역사적 실존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역사적 실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시도는 소외된 의식의 회복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역사적 세계와 자연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의식을 갖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법칙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은 실존을 결정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인류는 두 번째의 결정적 도약을 이룰 것이다.       언어는 시이며 모든 말은 비밀스런 발화점이 건드리자 마자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은유의 전하를 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 갖는 창조적 힘은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다.       무심의 언저리-텅빈 충만   정신은 불가분의 총체이다.   만일 정신과 육체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면 ,   의지가 끝나고 순수한 수동성이 시작하는 곳을 분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정신작용은 총체적 방법으로 표현된다.   각각의 기능에는 다른 모든 기능들도 함께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수용의 상태로 침잠해 있다는 것이 욕구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증언 “없음을 욕망하며” 는 여기서 무한한 심리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즉, 욕망의 힘에 의하여 없음 상태가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열반 nirvana 도 이와 똑같이 능동적 수동성의 조화를 요구하고 정중동의 조화를 요구한다.   수동적 상태들- 내면적 빔의 경험으로부터 그와 반대되는 존재의 충만의 경험에 이르기 까지-은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원성을 깨기 위한 결연한 의지의 행사를 요구한다.     완벽한 요가 수행자는 적당한 자세로 앉아 움직이지 않고   “무심하게 자신의 코끝을 바라보면서”   망아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제어한다.   무심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무심의 경험은 방심자, 은둔자, 그리고 심약자까지도 인간의 원형으로 제시하는   서구적 문명의 지배적 경향에 반대된다.   무심한 사람은 근대세계를 부정한다.   그는 전체를 얻기위해 자신의 전체를 건다.   지적인 면에서, 그의 결단은 생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하는 욕망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의 결단과 다르지 않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이다.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즉,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침묵의 음악” 혹은 노자의 “텅빈 충만”이란 말을 상기해보자.   수동적 상태는 침묵과 빔의 경험일 뿐 아니라 능동적이고 충만한 순간의 경험이기도 하다.   즉, 존재의 핵심으로부터 이미지가 샘 솟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한밤중에 꽃을 피운다”라고 아즈텍인의 시는 말한다.   자발적 마비는 정신의 다른 부분을 상승시킨다.   한 영역의 수동성은 다른 영역의 능동성을 야기시키며   분석적이고 담론적이며 혹은 추론적인 경향에 맞서 상상력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을 뿌리채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다.   두 번째 행위는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이때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에는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채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의 힘이며   또다른 하나는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려는 중력의 힘이다.       이데올로기들과 관념 그리고 여론이라 부르는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피층을 구성하는 반면에,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시는 민중의 토대를 세우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의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에서 자신의 존재의 토대, 즉 자신의 맨 처음의 말과 마주친다.   반면에 진정한 시인은 밑에서 위로, 공동체의 언어에서 시의 언어로 움직인다.   작품은 곧바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합일의 대상이 된다.       시의 모호성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한다.   시적 즐거움은 창조의 어려움과 유사한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주어지는 것이다.   참여는 재창조를 암시한다.   독자는 시인의 몸짓과 경험을 재창조한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엇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책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는 뜻이다.   시인의 말은 시인의 존재 자체와 혼동된다.   시인이 그의 말이다.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창조는 우리의 존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떤 말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말인 것이다.   시는 필연적이며 교체할 수 없는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고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어떠한 수정이든 재창조이다.   즉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우리가 걸어온 과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단어 하나에 상처를 입히면 시 전체가 상처를 입는다.   쉼표 하나를 고치면 건물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시는 교체 불가능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살아잇는 총체이다.   따라서, 진정한 번역은 재창조에 다름 아니다.         계시   어디선가 발레리는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그러한 긴장이 곧 시라는 사실이다.   발전의 주체는 감정적 외침이 시사하는 총체적이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 가는 언어이다.   시는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듣는 귀이다.   고통 혹은 열락의 외침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그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숨긴다.   즉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지 무엇 혹은 누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감정적 외침이 가리키는 실재는 결코 이름 붙여질 수 없다.   그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상태로   이제 막 나타나거나 혹은 이제 막 영우너히 사라지려는 순간처럼 저기에 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닥쳐올 것같은 급박함,   발전한다는 것은 질문이나 대답이 아니라 소집을 의미한다.   말하는 입이며 듣는 귀인 시는 감정적 외침이 지시만 하고   이름 붙이지는 못하는 것을 계시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게시이지 설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설명이라면, 실재는 계시되지 않고 해명될 뿐이며 언어는 단지 이해될 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불구가 될 것이다.   감정적 외침인 경우에, 말은 ‘빔’을 향하여 던져진 외침이다.   거기에는 대화자가 부재한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할 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훼손 시킨다.   그러나 시인들은 말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말에게 봉사하는 자이다.   말에 봉사함으로서 말에게 말의 충만한 본성을 되돌려주고   말의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가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는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언어를 순화하는 것은 시인의 과제이며, 이것은 언어에게   원래의 본성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1부 시편     리듬   단어들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들처럼 행동한다.   단어들은 언제나 ‘이것 그리고 이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동시에   ‘저것 그리고 저것 너머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유는 단어 다스리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사유는 부득이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끊임없이 단어들을   자신의 법칙으로 환원시키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신뢰, 즉 사물과 이름은 동일한 것이라는 믿음은   인간의 자발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이다.   단어가 가지는 힘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신앙들에 대한 회상이다.   즉, 자연엔 영이 깃들여 있고, 각각의 사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갖는다.   객관적 세계의 닮은 꼴 언어에서도 역시 영이 깃들여 있다.   언어도 우주처럼 부름과 응답의 세계이다.   밀물과 썰물, 합일과 분리, 들숨과 날숨의 세계인 것이다.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든 단어들은 서로 상응한다.   일상어는 별과 식물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집합이다.   가능한데까지 자동 기술법을 실천해 보았던 모든 이들은   스스로의 자발성에 맡겨진 언어들의 기이하고도 당혹스러운 상호 연관 관계를 알고 있다.   불러드림 evocation과 불러모음 convocation.   브르통은 ‘단어들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미지들의 강에 휩쓸려서 우리는 순수한 실존의 끄트머리를 건드리고   우리의 존재가 세계의 존재와 최종적으로 합일하는 통일된 상태를 예감한다.   조수에 대항하지 못한 채 의식은 요동한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은 최종적인 이미지에 닻을 내린다.   벽이 우리의 행로를 가로막고 우리는 침묵으로 돌아간다.   이와 반대의 상태들-의식의 지나친 긴장,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감정,   이해력들이 부딪혀 불꽃 튀기는 대화들, 내면적 성찰이 무한으로 증대되는   투명한 화랑들-역시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느닺없는 구의 출현을 돕는다.   그것은 불멸의 정진 뒤에 주어지는 보상같은 것이다. 이성의 저항 뒤에 열리는   통로를 지나 우리는 조화로운 지대를 밟는다. 거기서 모든 것은 용이해 지고,   모든 것은 말없는 대립이며 기다렸던 암시가 된다.   우리들은 개념들이 운을 맞추는 것을 느낀다.   그때 우리는 사유와 구도 역시 리듬, 부름, 울림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사유한다는 것은 적절한 음률을 타는 것이며, 번쩍이는 물결이 우리를 건드리자 마자   몸을 떨게 된다. 노여움, 열광, 분노, 그리고 우리를 우리 밖으로 팽개치는 모든 감정은   똑같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힘을 갖는다.   전기 같은 힘을 가진 예기치 않은 구가 솟아오른다.   “시선이 불꽃을 튀겼다.”   “입으로 번개와 불꽃을 토했다.”........   저주받은 불순한 단어들이 난폭한 별처럼 폭발한다.   우주적 질서를 뒤흔드는 저주와 폭언.   사실 그러한 구들을 발설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고, ‘자신 밖에’ 있었던 ‘타자’였다.   사랑의 대화들도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종종 ‘말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휴지와 감탄사, 웃음과 침묵-은 동시에 발생한다.   대화는 합의 이상의 어떤 것, 즉 화음이다.   연인들 자신은 보이지 않은 입이 발음한 두 개의 조화로운 각운이다.   말은 처음에 말을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서 서로 결합한다.   이러한 결합과 이후의 결별은 순수한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즉, 어떤 질서가 말들 사이의 친밀성과 거부감을 다스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언어 현상의 밑바탕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단어들은 어떤 리듬의 원리에 따라 서로 모이고 흩어진다.   만일 언어라는 것이 비밀스런 리듬에 의해 지배되는 구가 끊임없이 변전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리듬의 재생산은 우리에게 말을 다스리는 힘을 줄 것이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   시인은 아날로지에 의거하여 창조한다.   시인이 모델로 삼는 것은 모든 언어를 움직이는 리듬이다.   리듬은 자석이다. 리듬을 재생산할 때-박자, 각운,변주,유사어   그리고 다른 방법을 통하여 - 시인은 말들을 불러 모은다.   불모의 상태에 뒤이어 언어의 풍요로운 상태가 이어진다.   내면의 수문이 열리자 구들은 샘물처럼 혹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시인과 마법사   시적 작용은 주문(呪文), 주술 그리고 다른 마법의 방법들과 다르지 않다.   시인의 행위는 마법사의 행위와 매우 유사하다.   시인과 마법사는 아날로지의 원리를 이용한다.   양자는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그들은 언어가 무엇인지 혹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들을 이용할 뿐이다.   철학자, 기술자, 현자와 달리 마법사와 시인은 자싱의 힘을 스스로에게서 추출한다.   모든 마법적 작용은 정화를 위한 고통스런 노력을 통하여 얻어지는   내면적 힘을 필요로 한다.   마법적 힘의 원천은 이중적이다.   즉, 마법을 위한 공식과 그 밖의 방법들, 그리고 마법사의 정신적인 힘,   곧 자신의 리듬과 우주의 리듬을 조화시켜주는 정신적 조율이 필요하다.   시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 드러난다.   시적 계시는 내면적 탐색을 포함한다.   내적 성찰 혹은 분석과 전혀 다른 탐색이다.   탐색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출현에 적절한 수동성을 야기시킬 수 있는 정신적 활동이다.   빈번히 마법사는 번역자와 비교된다.   마법사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의지를 긍정한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다른 모든 반역은 최초의 이러한 반역에서 출발한다.   주술사의 모습에는 과학자와 철학자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 긴장이 존재한다.   마법사에게서 신은 가정이 아니며, 신자의 경우처럼 달래고 사랑해야할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유혹이거나 정복하거나 비웃어야 하는 힘이다.   마법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항하여 인간의 힘을 긍정하는   위태롭고 신성모독적인 기도(企圖)이다.   신들에게 대항하는 마법사는 인간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있다.   그를 위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고독이며   사회성의 결여로 언제나 종국적으로 불모를 초래하는 것도 이 고독이다.   고독은 한편으로 그의 비극적 결단의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긍심의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는 , 다시 말해, 인간을 위한 선물로 변모되지 못하는 모든 마법은   자신을 삼켜버리며 끝내는 창조자까지 삼켜버린다.   마법사는 인간을 수단으로, 힘으로, 잠재된 에너지의 핵심으로 본다.   마법사의 반역은 고독한데,   그것은 마법적 행위의 핵심이 힘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법사에 대항하여 프로메테우스가 떠오르는데,   그는 서구적 상상력이 창조한 최고의 인물이다.   그는 마법사나, 철학자나, 현자가 아니라 영웅이며 불을 훔친 자이고 박애주의자이다.   프로메테우스적 반역은 인간이라는 종의 반역이다.   바위에 묶인 영웅의 고독에는 암시적으로 인간 세계로의 귀환이 내재되어 있다.   반면 마법사의 고독은 사회로 귀환하지 않는 고독이다.   마법, 즉 힘에 의한 힘의 탐색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서 끝을 맺기 때문에   마법사의 반역은 불임이다. 근대사회의 드라마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법사의 이중성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한편으로, 인간은 우주와 생생하게 관계 맺으려 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편적인 교감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법의 실현이 암시하는 것은 힘의 탐색 바로 그것이다.   마법은 ‘무엇을 위하여’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마법사가 우주적 힘과의 의사소통과-인간이 우주적 힘과 하나가 될 때를 제외하고-   인간과 의사불통 사이에서 찢겨진 인물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법은 생명-우주 전체를 가로지르는 동일한 흐름-의 친교 관계는 긍정하지만   인간사이의 친교는 부정한다.   시인은 마법사가 아니지만 언어를 ‘생명의 사회’-카시러가 조화로운 우주의 마법적 비전을   정의한 것처럼-로 보는 시인의 개념은 마법의 개념에 접근한다.   시편은 주술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지만, 안수기도의 방법으로   시인은 어넝의 비밀스런 힘들을 일깨운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시는 리듬 위에 세워진 언어적 질서, 즉 구들의 집합이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며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리듬에 우리를 부어넣고 ‘어떤 것’을 향하여 우리를 발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리듬은 의미이며 무엇이가를 말한다.   시의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이 이미 말하고 있다.   그러한 단어들은 줄기에서 꽃이 피는 것처럼 리듬에서 솟아난다.   리듬과 시 언어의 관계는 춤과 음악적 리듬 사이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모든 춤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춤이다.   리듬에는 이미 춤이 있고 춤에는 이미 리듬이 있다.   제의와 신화적 이야기는 리듬과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듬은 어떤 힘들을 매혹시켜 사로잡고,   다른 힘들을 쫒아내는 즉각적인 목표를 갖는 마법적 방법이다.   또한 리듬은 기념하기 위한 것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신화를 재생산 하기 위한 것이다., 우주적 운율의 닮은꼴로서   말 그대로 인간이 원했던 것- 기우, 풍요로운 사냥, 혹은 적의 죽음-을   마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힘이다.   춤은 이미 씨앗 상태의 표상을 품고 있다.   리듬은 측량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비전이다.   리듬은 인간의 모든 창조의 뿌리이다.   신화와 제의의 이중적 현실은 그들을 품고 있는 리듬에 의지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명은 원초적 리듬의 발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대 중국인들은 우주를 두 리듬의 혼합으로 보았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을 도라고 한다.’   그라네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음과 양은 서양적 의미의 관념이 아니다.   또한 단순한 소리나 표시도 아니다.   우주의 구체적인 표상을 품는 기장이며 이미지이다.   실재들의 창조적 역동성을 갖는 음과 양은 서로 바뀌고, 서로 바뀌면서 총체를 낳는다.   그러한 총체 속에는 아무것도 말소되거나 추상화 되지 않는다.   각각의 모습이 특수성을 잃지 않고 생생하게 존재한다.   음은 겨울이며 여성들의 게절이고 집이며 그늘이다.   그것의 상징은 문門 이며 어둠 속에서 성숙하는 것, 숨어 있고 닫힌 것이다.   양은 빛이며 농사일이고 사냥이며 낚시이고 대기이며 남성들의 시간이고   열려 있음이다.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둠,   “충만한 시간과 결핍의 시간, 남성적 시간과 여성적 시간-용의 모습과 뱀의 모습-   그러한 것이 생명이다.“   우주는 상호 대립하며 교류하고 보완하는 리듬의 양가적 체계이다.   리듬은 식물의 성장과 제국의 팽창, 수확의 증대와 제도의 확장을 다스린다.   리듬은 우주의 생생한 이미지이며 우주의 법칙이 현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번은 음이고 한번은 양인 것이 도이다.   우주를 리듬의 모임, 흩어짐, 그리고 다시 모임으로 느낀 것은 중국인 만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들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이다.   리듬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 사실- 유한한 존재, 죽을 운명의 존재,   그리고 언제나 ‘어떤 것’을 향하여, ‘다른 것’ 즉 죽음,신, 사랑하는 사람,   우리와 닮은 사람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이며 단순한 표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리듬은 하나의 태도이며 의미이고 세계에 대한 사이하고 독특한 하나의 이미지이다.   각각의 리듬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다.   이미지이고 의미-삶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태도-인 리듬은 우리 밖에 잇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표현하는 우리 자신이다.   운율은 구체적인 시간성, 즉 반복될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이다.   단테는 항성들과 영혼들을 움직이는 리듬을 사랑이라고 인식했다.   노자와 장자는 상보적 대립물로 된 다른 리듬을 듣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리듬을 투쟁으로 여겼다.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이다.   우주적 리듬과 신화     어떤 사회나 두 개의 달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상의 삶과 세속적 행위들을 다스린다.   다른 하나는 신성한 시간, 제의 그리고 축제를 다스린다.   세속적 날짜와 달리 신성한 날짜는 측량단위가 아니라 정해진 장소에   현현하는 초자연적 힘을 싣고 있는 생생한 실재이다.     모든 문화는 ‘시간의 종말’에 대하여 공포를 느껴왔다.   ‘출입(등장과 퇴장)의 제의’가 존재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 멕시코인들에게는 불의 제의는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유발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별의 언덕에 모닥불이 피워지자마자 그때까지 어둠 속에 잠겨있던 멕시코 시 전체가 반짝였다.   이 순간 다시 한 번 신화가 현현했다.   공허한 연속성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적 시간이 재생하는 것이다.   삶은 적어도 그 순간이 다 소모할 때까지는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간의 재생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다.   성배grial의 신화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으려고, 사멸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낡은 시간의 완고함을 이야기하는 신화들이 있다.   이러한 신화들에게는 불모가 지배한다.   평원은 고갈되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낳지 못한다.   ‘나감(퇴장)의 제의’는 낡은 시간으로 하여금 젊은 후계자에게 평원을 내놓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신화는 거의 언제나 젊은 영웅의 구세주적 개입에 근거한다.   신화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히는 매듭이다.   신화는 과거이며 과거는 또한 미래이다.   신화들이 발생하는 시간적 영역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끝나고 수정 불가능한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현실화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품고 있는 과거이다.   신화는 원형적 시간에서 진행된다.   원형적 시간이란 신화가 다시 재현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신성한 달력이 리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원형적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현재에 실현될 준비가 되어있는 미래적 과거이다.   시간의 일상적 개념에서 시간은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이지만 숙명적으로 과거에 닻을 내린다.   신화적 질서는 용어들을 전도시킨다.   과거는 현재에 닻을 내리는 미래가 된다.   현재 속에서 총체적인 현존 속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시간을 껴안고 있는 원초적 시간에   도달 할 수 있는 문들이 있지만, 세속적 달력은 그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신화는 인간의 삶을 자신의 총체 속에 포괄한다.   리듬을 통하여 원형적 과거를,   다시 말해 현재에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잠재적 미래인 과거를 현실화 한다.   우리가 ‘좋았던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처럼 흐름 속에 죽어간다.   반대로 신화적 시간은 죽지 않고 반복되어 현현한다.   시간에 대한 다른 표상들로부터 시화적 시간을 구별짓는 것은 원형적 특성이다.   언제나 오늘이 될 수 있는 과거로서의 신화는 언제나 반복하여 현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부동하는 실재이다.     리듬의 반복에 의해 신화는 되돌아온다.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위베르와 모스는 신성한 달력의 불연속적 성격을 보여주며   리듬의 마법에서 이러한 불연속성의 기원을 발견한다.   “시간의 신화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리듬같은 것이다.   종교와 마법에서 달력의 역할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리듬화시키는 것이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리듬의 반복은 원초적 시간의 초대이며 소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원초적 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신화들이 시는 아니지만 모든 시는 신화이다.   신화에서처럼, 시에서도 일상적 시간은 변화를 겪는다.   내용이 없는 동질적 연속성의 시간이 리듬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비극, 서사시, 노래 등의 시는 반복하여 순간을 재창조하는데,   그 순간은 원형적 사건 혹은 그 사건들의 집합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올 것, 다시 현현할 무엇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이나 지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금 되고 있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시간이다. 재생되는, 재현되는 과거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재현된다.   첫째는 시적 창조의 순간에, 그리고 둘째는 독자가 그 순간을 새로히 소환하여   시인의 이미지를 소생시켜 재창조 할 때이다.   시편은 어떤 입술이 리듬이 깃들인 구들을 반복하자마자 현실화되는 원형적 시간들이다.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가 다스리는 영토는 ‘제발....했으면’이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가능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인 듯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그럴듯한 불가능’이 아니다.   즉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시는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다.   욕망은, 최고의 욕망인 사랑의 충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거리를 지워버리려 한다.   이미지는 욕망이 인간과 실재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이다.   제발 ‘...같은, 제발 ....했으면’을 지워버리고 말하는 다른 은유-   즉, 이것은 저것이다.-가 있다.   욕망이 행동을 취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비교하거나 유사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환원 불가능해 보이는 사물들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유발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진실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시가 재창조 된다는 의미에서   모방적 창조일 때이다.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는 서정시인 조차도 미래에 다가올 과거를 소환한다.   시인은-어린아이, 원시인들, 그리고 요컨대 가장 깊숙하고 자연적인 자신의 본능을 붙잡아 매었던   고삐를 자유롭게 풀어 놓았을 때의 모든 인간들처럼 – 직업적 모방자라고 확신해도 역설은 아니다.   그러한 모방은 독창적 창조이다.   시간의 근원에 있고 모든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어떤 것,   시간 그 자체와 혼동되고 우리 자신과 혼동되는   그리고 우리 모두의 것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고 독특한 어떤 것을   불러내고 부활시키고 그리고 재창조하는 것이다.     시적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자신을 현재화actualization하는 것이다.   시구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리듬이며 근원적 시간이고 영원히 재창조되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   리듬은 언어를 구성하는 가장 오래되고 항존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일상어보다 앞서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리듬의 소산이라고 말 할수 있다.   혹은 적어도 모든 리듬은 언어를 암시하거나 예시한다.   그렇다면 산문과 시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리듬은 모든 언어적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   그것이 가장 충만되게 나타나는 것은 시이다.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런 중력의 법칙에 따르려고 하는 것처럼,   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   또한 사유가 언어인 한에 있어서, 사유도 동일한 매혹을 경험한다.   사유를 이리저리 방황하도록 내버려두면 결국 리듬으로 돌아간다.   이성은 교감으로 변화되며, 삼단논법은 아날로지로 변환되고   이성적인 행진은 이미지의 흐름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산문작가는 일관성과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명시하고자 하는 운율의   숙명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시는 모든 시대에 속한다.   반면 산문은 특정사회의 고유한 표현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시는 진보나 진화를 무시하며, 시의 기원과 종말은 언어의 기원이나 종말과 혼동된다.   원래 비판과 분석의 도구인 산문은 점진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것이며   일상어를 길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기나긴 노력 뒤에 생겨나는 것이다.   시가 닫혀진 질서처럼 보이는 반면에 산문은 열리고 직선적인   건축물의 모습이 되려고 한다.   발레리는 산문을 행진에, 시를 춤에 비유하였다.   산문이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형상은 선이다.   이와 반대로 시는 원형 혹은 구형으로 주어진다.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는 어떤 것, 즉 자족적인 우주로,   그안에서 종말은 되돌아 오고, 반복되고 재창조 된다.   그리고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과 재창조가 다름아닌 리듬이며,   밀려갔다 밀려오고,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조수(潮水)이다.   산문의 작위적 성격은 산문작가가 언어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마다 증명된다.   시인, 혹은 음악가의 방법처럼 언어의 흐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언어에 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힘에 이끌리도록 내버려 두자마자,   산문작가는 합리적 인 사유의 법칙을 위반하고   시의 울림과 교감의 분위기에 진입한다.   많은 현대 소설에서 바로 이런일이 일어나고 있다.   무라사키 부인이 쓴 는 끊임없이 산문과 리듬 사이에서,   개념과 이미지 사이에서 흔들리는 소설의 모호성을 가장 멀리 밀고나갔던   프루스트를 연상시킨다.   모든 언어적 리듬은 자신 안에 이미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완전한 시구를 구성한다.   운율은 리듬에서 생겨나서 리듬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양자 간의 경계는 희미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율은 고정된 형태로 결정화 된다.   광휘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마비의 순간이기도 하다.   언어의 간만(干滿)의 흐름에서 고립되면 시행은 소리나는 음격으로 변하고 만다.   언어는 산문과 시, 리듬과 담론사이에서 흔들린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보들레르는 “자연에서처럼 정신 세계에서도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지며,   상호적이고 상응적이다.....모든 것은 상형문자이다....그리고 시인은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사람, 즉 번역자에 다름아니다“라고 말한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엘리엇의 는 혁명적 시로 평가받았다.   그것의 주제는 단순히 냉혹한 근대 세계의 묘사가 아니라,   로마의 기독교적 질서에서 모범을 찾고 있는 보편적 질서에 대한 향수이다.   엘리엇은 근대 사회의 현실과 기독교적 질서를 대립시켰다.   그는 기독교적 질서를 다시 수용하고 변화시켜서 이교도들의 오래된 풍요의 제식에   개인적인 구원의 의미를 부여한다.   기독교적 가치의 세계, 그것의 중심은 천국과 지상과 지옥 사이의 보편적 아날로지   혹은 상응인데, 이러한 세게가 사라진 뒤에 인간에 남은 것은 사유와 이미지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연상뿐이다.   근대세계는 의미를 상실하였고 그러한 방향성의 부재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증언은   우주적이고 정신적인 리듬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관념들이 일으키는 연상의 자동성이다.   의 반대편에 이 있으며 바로 앞의 선례는 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언어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시 창작의 비밀을 찾는다. 시는 언어로 언어 너머를 표현한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28쪽) 언어는 어떻게 언어를 넘어서는 것일까?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길을 찾는다. 이미지는 감각과 어울린다. 감각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물의 감각을 가리킨다. 시인은 사물이 내보이는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무모한 일을 벌이는 존재이다.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언어는 사물의 의미를 정확히 드러낼 수 없다. 사물에 언어를 붙이면 사물은 저 멀리로 도망가 버린다. 언어란 인간의 약속 체계일 뿐이지 않은가. 인간이 만든 언어로는 사물의 본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시작(詩作)은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지은이는 “이미지가 됨으로써,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면서 역사를 초월한다.”(29)라고 주장한다. 시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이 땅을 벗어난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땅에만 머물러 있으면 시인은 결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시인은 이 땅을 넘어서는 모험에 나섬으로써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사물의 본질을 엿보는 존재가 된다.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를 사용하려면 시인은 벼랑에서 한 발을 더 내딛는 ‘치명적 도약’을 거쳐야 한다. 일상적인 자아를 넘어서는 자리에서 시인이 탄생한다. 치명적 도약을 거친 시인은 사물을 보는 시선부터 일반인과 다르다. 일반인이 볼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보고, 일반인이 들을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듣는다. 시인은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창조자인 것이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 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94쪽) 일상 언어와 시 언어의 차이는 리듬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언어는 리듬으로 표현된다. 언어는 언제나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마다 독특한 리듬이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리듬이 있고, 돌에게는 돌의 리듬이 있다. 당연히 꽃의 리듬이 있고, 비의 리듬이 있다. 시인은 저마다의 사물들이 내보이는 이러한 리듬을 시 언어로 구현한다. 지은이가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물의 리듬을 시인은 아날로지(analogy)로 표현한다. 이육사의 「광야」에는 “가난한 노래의 씨”라는 시구가 나온다. 시인은 식민지 시대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내놓는다. 가난한 노래의 씨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씨’의 리듬과 이어져 있다. 땅속에 심은 씨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 이육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을 ‘씨’라는 사물에 실어(아날로지) 새로운 삶의 리듬을 생성하고 있는 셈이다. 개념으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시인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미지는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다. 아날로지에 근거한 이미지는 사물과 사물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131쪽)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정확히 이 지점에 걸려 있다. ‘불가능한 그럴듯함’은 시에 나오는 아날로지를 제대로 설명한다. 언어로 언어를 넘어서는 비결은 무엇보다 불가능한 것을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시인의 능력에 있다. 시인은 사물을 단정하지 않는다. 사물은 다양한 길로 뻗어나갈 개연성을 그 속에 함유하고 있다. 하나에만 집중하면 수없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시인은 안에서도 사물을 보고, 밖에서도 사물을 본다. 위에서도 사물을 보고, 밑에서도 사물을 보며, 옆에서도 사물을 본다. 사방팔방에서 보는 사물들은 사방팔방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들을 내보인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 즉, 존재의 극단에 있는 언어이며 극단까지 존재하는 언어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이다.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 (146쪽) ‘차안此岸의 세계’는 상대적인 대립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설명과 까닭과 이유의 왕국이다. 큰 바람이 일어나 인과因果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이 천재지변의 첫 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이 폐기된다. 인간은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티르소와 미라 데 메스쿠아의 주인공들은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게, 수직으로 솟거나 혹은 가라앉는다. 동시에 세계의 모습도 변한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도약은, 텅 빔이나 충만한 존재로 향한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164쪽) 긴장을 하지 않는 시인은 사물이 순간에 내보이는 본질과 맞닥뜨릴 수 없다. 사물이 언제나 제 본질을 내보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직관이 뛰어난 시인만이 이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직관은 순간을 직접 보는 것이다. 순간은 찰나이다.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듣는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이성 너머에 있다. 지은이는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라고 주장한다. 사물을 직관하는 시인은 침묵 속에서 소리를 듣고, 의미하지 않음에서 의미를 본다. 언어를 들고 벼랑 끝에 선 시인을 상상해 보라. 한 발이라도 내디디면 시인은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벼랑 아래는 말 그대로 저승이다. 극도로 긴장된 이 순간에 시인은 눈을 감고 침묵하면서 벼랑에서 한 발을 더 뗀다. 앞서 말한 ‘치명적 도약’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이육사가 말한 “가난한 노래의 씨”가 이 세상에 새 생명을 퍼뜨리는 순간이라고 말해도 좋다. 지은이는 이러한 세계를 인과의 사슬이 끊어진 장소로 표현한다. 인과의 사슬이 끊어진 곳에서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중력은 존재들을 얽매는 힘이 아닌가. 중력을 잃는 존재는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깃털은 바람을 따른다. 바람이 이리 불면 이리로 가고, 저리 불면 저리로 간다. 비어 있는 듯 꽉 차 있고, 꽉 차 있는 듯 비어 있는 존재가 깃털이 된 시인이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라고 지은이는 쓰고 있다. 중력이 사라진 세계에 선과 악이 있을 리 없다. 중력에 얽매인 세계는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지만,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깃털은 중심도 주변도 없는 세계를 한없이 날아다닌다. 지은이는 중력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인간은 비로소 신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치명적 도약을 이룬 시인은 언어 너머를 보는 언어를 들고 이러한 세계와 마주한다. 인간이면서 신인 존재, 둘이면서 하나인 시인의 모습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속적이고 진부한 삶으로 덮여 있는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해낸다. (181쪽) 종교적 순간과 사랑의 순간뿐 아니라 시적 순간에도 현존과 부재, 침묵과 말, 빔과 충만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한 모든 순간에는 이성적인 요소와 비이성적인 요소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 시 역시 놀라움에서 싹트고, 시인은 신비주의자처럼 신성화하고, 누구에게 반한 사람처럼 사랑한다. (187쪽) 치명적 도약은 존재의 본성을 바꾼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거쳐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 존재는 지은이의 주장처럼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근원적인 본성으로 돌아간 사람은 문명으로 해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 사물과 소통하는 방법을 잃었다. 풍요로운 문명을 만끽한 결과 사물과 하나가 되는 신성을 상실한 것이다. 치명적 도약을 통해 신성을 획득한 시인은 이리 보면 두 세계에 발을 디딘 경계 속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현존과 부재, 침묵과 말, 빔과 충만 사이를 자유로이 거닌다. 이성으로 비이성을 재단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이 상황을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시는 가능성을 연다. 그 가능성은 종교가 말하는 영원한 삶이나 철학이 말하는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껴안고 포함하는 삶이고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존재이다. 시적 이율배반은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충만하게 실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204쪽)라는 말로 표현한다. 시인은 하나의 목소리로 사물을 재단하지 않는다. 시인은 온갖 사물들이 내보이는 소리들을 온몸으로 받아 그 이미지들을 여러 목소리로 내보낸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 이어지고, 그 이미지는 다시 또 다른 이미지와 이어진다. 말이 말을 낳는 세상에서 시인은 풍부한 이미지로 그 말들을 꾸민다. 일상 언어를 넘어서는 시 언어는 이렇게 일상 언어보다 더욱 풍부한 언어로 거듭난다. 지은이는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236쪽)고 분명히 밝힌다. 시적 가능성은 치명적 도약을 통해서만 펼쳐질 수 있다. 치명적 도약은 ‘나’로부터 벗어나 타자로 가는 길을 연다.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시학은 무엇보다 ‘나’라는 중심성을 내려놓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20    현대시의 고전, 옥따비아 빠스 댓글:  조회:1302  추천:0  2019-03-10
현대시의 고전, 옥따비아 빠스   초현실주의와 동양문학   옥따비오 빠스는 현대시의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초현실주의가 사실상 중요한 시인을 산출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지금의 서양시 일반에 미친 역할은 너무나도 큰 것이다. 일차대전 이후 전위문학의 물결에서 하나의 종합 명제로 나타난 초현실주의 문학운동은 앙드레 브르똥을 비롯한 몇 명의 정치광신자들을 산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의 전위 문학운동이 다다이즘이나 미래주의, 창조주의, 울트라이즘, 이미지즘을 비롯 어떤 정치 및 사회 위기의식을 도외시하고는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프로이드의 과 함께 서구문학 전통의 뿌리를 흔들어 놓은 계기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때를 틈타 동양문학은 서구문인들의 마음과 글에 주요한 자양분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1913년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의 정의는 퍽 흥미있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이미지한 한순간의 지적이며 정서적인 일종의 종합체를 제시하는 것이다....그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 갑자기 순간적으로 어떤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종합적인 것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해방된 듯한 그런 순간적인 느낌. 갑자기 우리 자신이 한순간에 부쩍 자라버린 것 같은 느낌을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위대한 예술 작품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 말한다.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에 대한 이런 설명은 우리에게 흡사 불교의 선(禪)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선이 그토록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하는 일본의 하이꾸 시인 바쇼는 '일생에 서너 편의 하이꾸를 쓰면 시인이고 열편을 쓴 자는 대가'라는 말을 한 일이 있다. 파운드는 윗 설명의 끝에 이렇게 역설한다.   '일생에 커다란 책들을 많이 쓰는 것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더 낫다'고.... 또한 1916년 막스 자콥은 '300페이지나 되는 뻬기Peguy의 에바Eva보다는 일본의 석 줄 시가 나을 수도 있다'는 말까지 한다. 이상 앞뒤 없이 인용한 말들이 별다른 증거가 된다기보다는 그 당시부터 이들 권위문학가들이 얼마만큼 동양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짤막한 예라고 하겠다.   중략   언어해방과 비논리성의 가치   빠스의 초기 작품, 를 보면 신낭만주의와 앙가쥬망 사이에서 바장이는 일련의 시들과 함께 인간의 실존과 시간의 문제에 눈을 돌리는 소위 형이상학적인 작품이 흔히 눈에 띈다. 그러나 그가 쉬얼리얼리즘과 접촉이 있던 순간으로부터 그의 시는 언어의 해방과 비논리성의 시적인 가치의 재발견 등 새로운 국면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독수리 혹은 태양' (1949~1950)이나 장시(長詩) '태양의 돌'(1957)에는 아즈텍 문명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초현실주의 수법이 시적인 긴장감을 유지한다.   예를 들어 '태양의 돌'의 일절을 옮겨보자.   아무 일도 없다. 다만 태양의 눈짓 하나, 거의 움직임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되돌아서지 않는다. 죽은 자는 죽음 속에 응고되어 이젠 다시 죽을 수가 없다. 그대로 그 몸짓 그대로 못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 속에서, 그 죽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이제 그들 일생의 조상. 항상 그대로 있다는 것은 이제 영원히 뜻이 없다. 순간 순간이 지나가도 이제 그것은 영원히 뜻이 없다. 어느 유령이, 왕이 너의 맥박을 지배한다. 너의 마지막 몸짓을 지킨다. 너의 그 두꺼운 탈은 시시로 변하는 너의 얼굴 위에 씌워져 있다. 우리는 어떤 남의, 우리가 살지 않는, 어쩌면 우리와 상관 없는 어떤 삶의 기념물일 뿐.  (488행부터 503행까지)    시간과 영원과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니면 우리가 죽은 후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아 있는 지금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 하나의 우주의 맥박일 뿐 지금의 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기념비 같은 것을 시인은 상상한다. 그것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이 시에서 자아에 대한 사고는 짙은 관념의 세계이면서 어떤 인간 실존의 절박한 현실, 즉 타인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자아의 모습을 긴박감 속에 고조시키고 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뛰쳐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내가 없으면 남들도 없는 남들은 내게 완전한 실존감을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없다. 항상 우리가 있을 뿐이다. 삶이란 어떤 남의 것, 항상 저 멀리, 아주 멀리 너를 떠나서, 나를 떠나서, 항상 지평선 같은 것 우리에게서 삶을 빼앗고 우리를 남이 되도록 만드는 우리에게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 주고 또 그것을 낡게 닳아지게 하는 그 런 것. 뭔가 되고 싶은 갈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양식이여. (515행으로부터 524행까지)   공기는 공기가 아니다 팔도 손도 없이 목을 조른다 여명은 커튼을 찢는다 도시 부서진 언어 무더기 -의 일절   항상 우수에 젖은 그의 언어는 동시에 깊은 사념을 깔고 있다. 다음은 시인의 역사 앞에서의 사색을 들어 보자.   나의 역사, 그건 하나의 과오의 역사인가? 역사는 과오다 진리는 저것 날짜를 넘어서 보다 그 이름들 가까이, 역사가 미워하는 그 이름들 진리는 역사가 없는 시간의 밑바닥이다 무게가 없는 순간의 그 무게.     중국시와 일본시의 모방   1944년 빠스의 의 한 구절은 전위시인 따블라다의 ‘하이꾸’를 모방한 것이 분명하다.   시계가 나의 가슴을 갉아 먹고 있다. 독수리는 아니다. 생쥐다.   그러나 빠스는 그후 이미지 사용법을 보다 비약시켜서 완전히 서구적인 것으로 둔갑시킨다. 가령 ‘대낮’이라는 속에 나온 싯귀를 보자.   빛은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 시간은 分으로 비어간다 공중에 머물은 새 한 마리. 뜰의 나무들 파란 불길 마지막 불이 타면서 튀는 소리가 풀섶에 들린다. 끈질긴 곤충들.   이상의 이미지들은 관념어를 쓴다든가 지나치게 먼 비유를 끌어온 점에서 동양시의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빠스는 동양시의 병치법 내지 대조법에서 이미지의 비약에 자신을 갖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이미지는 접근만 시켜 놓으면 서로 끌어당기는 자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 페이지에 떨어진 섬 혼돈의 바다 속. (.......) 헝겊 한 조각에 유령이 나타나는 곳. 몸과 몸을 맞대고: 행동이 된 사념 사랑하는 자는 믿는다: 가득한 그림 복수의 단수의 남의 그림 빈 이것이 스스로의 모습 속에 숨쉰다: 복구한 공간 -에서   1971년 빠스가 출판한 연가(聯歌)식 연작시 방법은 일본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4인의 합작시였다. 옥타비오 빠스가 작스 로보, 이태리의 에도아르도 상기네띠, 그리고 찰스 톰 린슨이 1969년 파리 어느 호텔에 묵으면서 즉흥적으로 소네트처럼 각각 한 연씩 써내려간다. 언어는 물론 각자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 자유롭게 구사한 것으로 이런 시작 방식에서 ‘언어는 그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보다 더욱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고 한다.   옥따비오 빠스는 동양에서 옛날처럼 신기한 것을 발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와 다른 세계상을 알아보자는 것이요, 동양이 하나의 거울이 아니라 또 다른 인간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창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빠스가 동양문학에서 찾고 있었던 그 다른 점이란 우리가 빠스의 문학을 대비하면서 느끼는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19    옥타비오 파스, 그늘이 무성한 나무 댓글:  조회:1288  추천:0  2019-03-10
옥타비오 파스, 그늘이 무성한 나무 1. 시인으로서의 성숙 과정(1914 - 1943) (1) 시인의 혈통과 성장 배경 1930년대 말경의 멕시코 문단에는 『작업실』(Taller)이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 작품에서부터 문학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감수성과 새로운 자세를 표현하기 시작한 그들의 활동은 멕시코 문학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과 전 세대의 작가들을 구별짓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근대 역사의 부침 속에서 시적 작업의 위상에 대한 관점의 차이였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시란 역사에 무관심하지도 않으며 역사에 종속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문학적 창조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과 흐름에 등을 돌린 채 유유자적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문학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단순한 결과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옹호한 것은 참여시도 아니고 순수시도 아닌 새로운 시, 즉 좁은 개념적 도식을 깬 풍요로운 개념의 시였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시적 탐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형식의 발견이었으며, 그러한 작업을 용이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20세기 들어와 시작된 전세계적인 전위주의 운동의 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사학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찾고자 한 젊은 작가들의 시도를 옥타비오 파스는 「수사학」(Retórica)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사고의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새로운 감수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이후 적어도 반세기 동안 멕시코의 문단의 주된 흐름을 형성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작업이다. 중남미의 다른 나라와 스페인에서 활동하는 같은 세대의 시인들과의 교감 속에서 수행된 이러한 작업은 라틴아메리카의 시가 근대시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는 1914년 3월 31일 멕시코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계는 여러 세대 전에 멕시코에 정착한 크리오요(criollo. 중남미에서 탄생한 스페인 출신)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 가문의 딸이었다.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탁월한 지식인이자 자유 공제 조합원이었던 할아버지 이레네오 파스(1836 - 1924)는 멕시코의 역사적인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멕시코를 침공한 나폴레옹 3세의 군대와의 전투에 대령의 계급으로 참전했으며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진영에 참가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훗날 디아스의 전기를 집필했고 여러 권의 역사 소설과 향토색 짙은 소설, 희곡 작품과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파스가 일찍부터 스페인 작가들(갈도스,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알라르콘, 공고라, 케베도 등)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친할아버지가 소장하고 있었던 많은 책들 덕분이었다. 친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중남미 모데르니스모 시인들의 작품들도 있었고 프랑스 시인들과 소설가들의 작품도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숙모(“잠에 취한 듯한 처녀, 나의 숙모는/ 눈감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벽 너머 내면을 응시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에게 배운 프랑스어는 그가 프랑스 문화와 문학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하여 멕시코 사람들의 문학과 사유에 강하고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 문화가 멕시코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 파스는 「상호 영감」(Mutuas inspiraciones)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말했다. 나는 프랑스화된 멕시코의 중산 계층의 집에서 태어났다. 1910년경에는 많은 중산 계층의 사람들이 프랑스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프랑스화 되다'(afrancesamiento)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과장되게 프랑스 사람들을 흉내내다’라는 뜻이거나 지난 세기에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을 추종했던 사람들을 뜻한다. 하지만 이 말은 더 넓고, 더 고상하고,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화된 사람’이라는 말이 계몽주의를 옹호하고 프랑스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18세기말부터였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19세기말경에는 미학적 의미가 첨가되어 플로베르와 에밀 졸라를 숭배하는 상징주의를 의미했으며, 루벤 다리오가 말했던 것처럼, 빅톨 위고를 읽고 용기를 얻거나 베를렌를 읽고 모호해지는 사람을 뜻하기도 했다. 금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리아노 아수엘라와 마르띤 루이스 구스만의 사실주의, 알폰소 레예스와 훌리오 토리의 산문, 타블라다와 곤살로 마르티네스, 로페스 벨라르데와 비야우루티아, 고로스티사와 토레스 보데의 시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언급한다. 그들은―그들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비밀스럽게 프랑스 문학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파스의 아버지 옥타비오 파스 솔로르사노는, 그의 할아버지처럼, 활동적인 정치부 기자였다. 멕시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다른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에밀리아노 사파타 진영에 참여하였다. 급변하는 혁명의 와중에서 미국에 망명하여 사파타와 남부 해방군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그는 멕시코의 농지 개혁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망명에서 돌아와서는 농민당(El Partido Nacional Agrarista)을 창당했다. 농민들의 입장을 열렬하게 옹호했고 사파타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던 그는 1934년 기차에 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1974년에 쓴 회고적 장시 「선명한 과거」(Pasado en claro)에서 파스는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늘 술기운에 사로잡힌 채 구토와 갈증에 괴로워했던 나의 아버지는 불꽃처럼 살다갔다. 어느 날 오후 파리 떼와 먼지로 뒤덮힌 기차역의 침목과 레일 사이를 돌아다니며 우리는 아버지의 흩어진 몸뚱이를 주웠다.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제 죽은 자들의 희미한 나라인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한다. 서서히 몰락하는 집안에서 나는 자라났다. 나는 이름 없는 폐허 속에서 자라난 잡초였다(이다). 아버지가 남부의 사파타 진영에 합류하자 어린 파스와 그의 어머니는 미스꼬악(지금은 멕시코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멕시코 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에 있었던 할아버지의 커다란 집에서 살았다. 기울어 가는 가세, 대대로 전해지는 매우 강한 지적인 분위기, 죽은 조상들의 초상화와 책이 가득한 오래된 할아버지의 집 등이 파스의 유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집안의 넓은 정원은 훗날 신화적인 이미지로 변해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다. 끌라우디오 이삭이 감독한 영화 《나무들의 언어》(El lenguaje de los árboles)에서 파스는 자신이 처음으로 느꼈던 시적인 체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멕시코 시 교외에 있던 낡고 커다란 할아버지의 집이 떠오른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지만 책과 나무는 많았다. 집안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돌보지 않아서 밀림 같아 보였던 매우 오래된 정원에는 커다란 나무들―물푸레나무들과 소나무들―과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것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무화과 나무였다. 무화과나무는 세월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을에서부터 6개월 동안은 해골처럼 검게 시들어 있다가 다시 푸르러졌다. 열매 역시 신비로웠다. 무화과는 열매가 곧 꽃이고 꽃이 곧 열매다. 검은 껍질 속에는 빨간 꽃이 감춰져 있다. 나는 무화과를 먹는 것이 태양을 먹는 것과 같고 어둠을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촌들, 친구들과 같이 정원에서 놀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무화과나무에 기어올라 무성한 잎새에 숨어 하늘을 항해하고 탐험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무화과나무는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지만 내가 걸터앉아 있던 가지가 마치 범선의 돛대인 것처럼 수평선과 구름을 향해 항해했고, 시간을 탐험하였다. 무화과나무 위의 놀이는 영웅의 행위를 흉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금방 나의 운명은 영웅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영웅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며 철학자의 관조적인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나의 운명은 말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는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릴 적에 시인인 호메로스가 되고 싶은 지 아니면 영웅인 아킬레우스가 되고 싶은 지를 물었다. 알렉산더는 “그 질문은 나에게 나팔이 되고 싶은 지 아니면 나팔이 찬양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지를 묻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영웅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호메로스가 되고 싶었다. 나는 단지 시가 영웅의 행위와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만을 찬양하는 나팔이라고 믿지 않았다. 시는 인간의 불행과 불운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 옥타비오 파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물려준 지적인 유산과 사회적 열정을 이어받아 청소년 시절부터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에 민감했고 학생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파스는 1976년에 발표된 시집 『회귀』(Vuelta)에 실려 있는 시편「산 일데폰소 야곡」(Nocturno de San Ildefonso)에서 당시의 사회적 열정을 회상하고 때로는 순수한 열정이 폭력화되기도 하는 변질의 과정을 회고했다. 산 일데폰소는 17세기에 예수회의 수도원이었던 곳으로 나중에 국립 고등학교의 건물로 변했고 파스는 1931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다.   선(善), 우리가 원한 것은 선이었다.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것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 선을 원했던 우리 역시 결백하지 못했다. 계율과 개념, 신학자들의 오만함. 십자가가 몽둥이로 변하고, 사람들의 피를 제물로 바치며, 죄악의 벽돌로 집을 짓고, 의무적인 성찬의 전례를 공포하는 것. 그러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사에 대해 지속적이고 전투적인 열정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파스의 열정은 또 다른 통로를 통하여 성숙되어 갔다.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은 때로는 일치하기도 했고, 때로는 평행선을 긋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전 세대의 가장 중요한 선배 시인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당시의 문학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시인이었던 카를로스 페이세르와 호세 고로스티사 그리고 철학자였던 사무엘 라모스가 파스의 선생님들이었다. 또한 헤라르도 디에고가 편집한 훌륭한 시선집을 통하여 스페인 시를 알게 되었으며, 호르헤 쿠에스타의 시선집을 통해서는 멕시코 시를 총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었다.  파스가 몇 명의 동료들과 잡지 《난간》(Barandal, 1931 - 1932)를 창간하고 편집한 것이 바로 이 당시였다. 이 잡지를 통하여 문학적 전위주의를 소개했으며 자신의 첫 번째 평론인 「예술가의 윤리」(Ética del artista)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파스는 예술이 갖는 역사적이고 증언적인 가치를 언급했고, 《난간》이 폐간되고 새롭게 창간된 《멕시코 문학일지》(Cuadernos del Valle de México, 1933 - 1934)에서는 ‘순수시’를 뛰어넘는 시의 사회적 역할을 쟁점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가 그 당시에 발표한 첫 시집 『야생의 달』(Luna silvestre, 1933)은 정치와 역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신상의 문제를 표현한 시로 평가되어 동료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1934년 멕시코를 방문한 스페인 시인이자 공산당원이었던 라파엘 알베르티와의 만남도 파스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대중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을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으며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의 강연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장면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계시였다. 그 당시의 우리는 모두 좌익이었지만 그 때부터 나는 나중에 ‘참여시’라고 이름이 붙여진 정치적 시에 대해 어떤 불신감을 느꼈다.” 알베르티는 약관 20세의 젊은 파스의 시를 읽고 즉각적으로 파스의 시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가 아니라고 지적했지만 언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파스의 시도가 ‘혁명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인정했다.  1937년 23살이 되었을 때 파스는 학업(멕시코 국립대학교 법학부)을 포기하고 집과 멕시코 시를 떠나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유카탄 지방에 노동자와 농민의 아이들을 위한 진보적인 학교를 세웠다. 원주민들의 삶과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관능성은 도시의 근대적 삶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파스는 시편 「돌과 꽃 사이에서」(Entre la piedra y la flor)에서 이러한 대조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시 속에서 원주민 농민들의 질박하고 제의적인 삶과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실존을 질식시키는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추상적 체계로 대변되고 있다. 돌과 꽃 사이에서, 대지의 냉혹한 황량함과 선인장에 피는 경이로운 꽃 사이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인간이었다. 돌과 꽃 사이에, 인간.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탄생, 우리를 탄생으로 데려가는 죽음. 인간, 돌 위로 줄기차게 내리는 비 화염 사이로 흐르는 강 폭풍우를 이겨내는 꽃 번갯불의 섬광을 닮은 새. 노동과 열매 사이의 인간. 옥타비오 파스가 중요시했던 것은 정치적 해석을 넘어서는 인간의 심오한 진리, 즉 끝없이 생성하는 생명력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확연하게 드러낸 것은 스페인 내란을 계기로 쓴 시 「아무 일도 없을거야!」(¡No pasarán!, 1936)였다. 시집의 판매로 얻어진 수익금은 멕시코에 있던 “스페인 인민전선”을 위해서 쓰여졌다. 옥타비오 파스는 1937년에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인 『인간의 뿌리』(Raíz del hombre)를 출간한다. 첫 번째 시집인 『야생의 달』에서처럼 이 시집의 중심 주제는 사랑과 에로티시즘이었고 이것은 이후에도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파스에게 언어는 욕망의 발산이고, 육체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사랑하는 연인을 부르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1937년 6월에 파스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열린 “문화를 지키기 위한 제2차 반파시스트 작가들의 국제회의”에 그의 스승인 카를로스 페이세르와 함께 멕시코 대표로 초청된다. 그들을 초청한 것은 회의의 조직위원이었던 라파엘 알베르티와 파블로 네루다였다. 알베르티는 파스를 이미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네루다는 파스가 보낸 두 번째 시집 『인간의 뿌리』를 읽고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었던 파스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스페인 여행은 파스에게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의 면에서 모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전 세계의 작가들은 문화를 지키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작가들이 옹호한 문화는 현존하는 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서 태동시켜야할 새로운 문화였으며, 그들이 생각한 새로운 사회란 바로 소련이었다. 또한 공산당에 가입한 작가들은 소련의 미학적 논리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참여 문학’에 동조했다. 그러나 파스는 그들의 배타적인 사유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예가 이 회의에서 다루어진 앙드레 지드에 관한 사안이었다. 앙드레 지드는 일년 전에 자신이 직접 보았던 소련의 실상을 폭로했고 소련을 새로운 사회로 보지 않았다. 소련을 옹호하는 작가들은 이러한 지드의 행동을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했다. 파스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대단히 고압적으로 지드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중남미 대표단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여러 번에 걸쳐 비공식적으로 지드의 책과 그의 행동, 그를 징계할 필요성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모든 중남미 대표들이 서명한 징계문을 서류로 작성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모두의 동의를 얻기 위하여 투표가 실시되었다. 그 자리에서 카를로스 페이세르는 앙드레 지드가 다르게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옹호했다. 최종 투표에서 페이세르와 나는 기권표를 던졌다. 그러나 징계문은 끝내 작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날 오후에 열린 공식 회의에서 호세 베르가민이 격렬하게 지드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지드에 대한 징계문을 작성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에서 표현한 이미지와 동떨어진 스페인의 현실은 파스에게 한가지 신념을 심어주었다. 즉 이 세계에는 싸워서 지켜야 할 대의명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곧장 다음과 같은 화두로 변했다. ‘어떻게 하면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시, 순수만을 고집하지 않는 시를 쓸 것인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시대의 미학적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를 쓸 것인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것이 『작업실』을 중심으로 활동한 젊은 세대 작가들의 문제의식이었다.  그 당시 잡지 《현대》(Contemporáneos)를 중심으로 활동한 전 세대의 시인들은 폴 발레리와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강령을 쫓아 완고하게 순수시를 고집하고 있었다. 파스는 선배 시인들이 추구한 예술적 가치와 근대성을 창조적으로 모방하려는 의지는 인정했지만, 그들의 시에는 혁명에 대한 희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지의 시인들이 멕시코 혁명을 경험한 첫 번째 세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회의주의적 태도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폭력이 인간의 삶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시인들은 그것을 믿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 파스는 자신의 글 「전전날」(Antevíspera)에서 다음과 적었다. 전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전 세대와 비교하여 젊은 세대의 역사 의식이 더욱 강렬했고, 더 명철하지는 않았지만 더 깊고 총체적이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정체성과 영혼을 상실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대답되어져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우리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은 우리를 번민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옥타비오 파스는 시와 역사를 화해시키는 두 가지 시도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저항의 원리를 표현과 일치시키려는 초현실주의의 시도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전통의 부정을 통하여 새롭게 전통의 복원을 꾀한 엘리엇과 파운드의 독특한 해결책이었다. 이 두 가지 시도는 파스에게 삶의 비전에 대한 중요한 경험을 시사해주었다. 비전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실존 속에서 총체적 관점을 획득하는 일이다. 시와 역사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이지만 현실이란 언제나 드러남(現)과 숨음(實)의 이중적 방식으로 주어질 뿐 결코 하나의 관점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파스에게 시와 역사의 행복한 결합은 현실의 이중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드러남과 숨음의 변주를 통찰하는 것과 같았다. 드러남이 역사적 실존이라면 숨음을 드러내는 방식은 바로 예술적 비전이다. 순수 예술과 정치적 혁명을 등거리에서 견제하는 삶의 비전을 획득하기 위한 파스의 열망은 역사적 실존 속에서 심원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인간들의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1984년에 방송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역사가 바로 운명이다. 인간의 운명, 유한하고, 죽음을 향해 가며, 사랑하고, 태어나며, 일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운명 그 자체가 갈등하는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20세기의 도시적 삶에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인간 운명이다. 나는 그것을 선배들의 시에서 발견하지 못했고,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운명이었다. 새로운 시에 대한 성찰은 1943년에 잡지 《탕자》(El Hijo Pródigo)에 발표한 글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Poesía de soledad y poesía de comunión)에 확연하게 드러난다. 시에 대한 일종의 선언문인 이 글에서 파스는 근대 시인의 운명, 즉 시인이란 사회 안에서 사회에 저항하는 글쓰기를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임을 선언하고 있다. 시인의 도전은 “유욕(有慾)과 무욕(無慾)의 경계를 성찰하고, 경험과 표현을 일치시키며, 행위와 (행위를 표상하는) 언어를 하나되게 하는” 엄격한 진정성에 이르는 것이다.  시적 열정과 사회적 열정 사이에서 갈등하던 파스는 1943년 구겐하임 장학금을 얻어 멕시코를 떠난다. 2년 동안의 미국 생활과 이후의 유럽에서의 외교관 생활로 파스는 10년 동안 조국 멕시코에 돌아오지 못한다. 2. 새로운 시작(1944 - 1958) (1) 새로운 세계에서의 통과 의례      미국에서의 체류는 파스에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징적 탈주였고 통과의례였으며 새로운 시작이었다.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에 도착한 나그네의 주의를 끈 것은 모호하지만 강렬한 ‘멕시코적’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가 파리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근무하면서 『고독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를 쓰게 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장식하기를 좋아하고, 무심한 듯 으스대며, 태만하고, 열정적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멕시코 사람들의 분위기가 대기를 떠돌고 있었다. ‘대기를 떠돌고 있다’고 한 것은 그러한 분위기가 다른 세계, 즉 정확성과 효율성 위에 세워진 미국 세계의 분위기와 혼합되지도 못하고 섞이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딱히 존재한다고도 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바깥에서 나와 나의 조국 멕시코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 품고 있는 타인을 어슴푸레하게 보았다.”      버클리에 체류하는 동안 파스는 휘트먼, 예이츠, 블레이크, 파운드, 월러스 스티븐스, 카를로스 윌리엄스, 커밍스, 엘리엇의 시를 탐독하고 근대시에 대한 지평을 넓히게 된다. 특히 엘리엇의 시는 젊은 파스에게 과거는 현재 속에 있고 근대성과 전통이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때부터 그의 시에는 그전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요소들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징병」(Conscriptos U.S.A.)이라는 시편에는 술집에서 나누는 대화와 전통적인 시적 이미지들이 교차된다. ―우리는 감옥에 갇혔지. 나는 결국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어. 곧 이어서 찬 물 세례를 받았지. 우리는 덜덜 떨면서 옷을 벗었어. 한참 후에야 담요를 받았지. (가을 강가의 나무들은 물 잔등에 누런 잎사귀를 떨구었다. 태양은 너울거리는 강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한달 후에 그녀를 만났어. 우선 영화를 보고, 그 다음엔 춤추러갔지. 술도 몇 잔 마셨어. 길모퉁이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지... (태양, 사막의 붉은 바위들 그리고 관능적인 방울. 뱀들. 차갑게 식은 용암 위의 사랑...)      파스가 미국에 체류하던 1945년 8월 멕시코 시인 호세 후안 타블라다가 뉴욕에서 타계한다. 파스는 컬럼비아 대학의 요청으로 그때까지 멕시코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타블라다의 작품을 연구하게 되고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파스는 동양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타블라다에 관한 평론의 끝부분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블라다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고, 고향을 버리고 나쁜 문학적 습관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덕분에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노자 도덕경 7장에 나오는 말로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2) 무르익은 과일      1945년 파스는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외무부에서 일하게 되고 호세 고로스티사의 추천으로 파리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임명된다. 파스는, 그 당시 지식인들에게 공통된 분위기였던 것처럼, 유럽이 전쟁의 잿더미로부터 불사조처럼 솟아올라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럽은 카뮈, 브르통, 사르트르, 루세, 아롱, 메를로-퐁티가 두 진영으로 갈라져 유럽의 미래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투적인 논쟁의 분규 속에서 파스는 그리스 출신 역사가이자 철학자로 파리에 망명하고 있던 코스타스(1925-1981)를 만난다. 코스타스는, 루시엥 골드만이 파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확실하게 유럽의 미래를 본 높이 솟은 망루였다.” 명석하고 해박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코스타스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실과 집단 수용소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예술, 현대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코스타스와의 만남을 통해 파스는 상상적 열정은 냉철한 이성이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나는 서른 살이었다, 아메리카 출신이었고, 전후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의 알을 찾고 있었다, 너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스 출신이었지만, 너의 고향은 저항이었고 감옥이었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떠들썩하고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에서 우리는 만났다, 2월의 추위와 궁핍함을 녹이던 작은 모닥불의 열정, 우리는 사파타와 그가 타던 말에 대해서, 데메테르의 갑옷, 검은 돌, 암말의 머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잔잔한 너의 웃음이 우리의 대화 소리와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감쌌다, 불에 탄 조국의 언덕을 무리 지어 올라가는 희고 검은 양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코스타스, 나는 차가운 잿더미로 변한 유럽에서 부활의 알을 발견하지 못했다. 피에 젖은 잔인한 키메라의 발치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너의 화해의 웃음이었다.        파리에서 파스는 멕시코에서 만났던 벵자멩 페레를 다시 만났고 그를 통해 초현실주의자들의 여러 모임에 참석했다. 앙드레 브르통과 나누었던 친교에 대해서 파스는 『교류』(Corriente alterna)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마치 브르통과 말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글을 쓰는 적이 많다; 나는 그에게 묻고 대답하고, 그와 때로는 의견이 일치하고 때로는 의견을 달리했으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파스에게 초현실주의는 시의 유파나 시를 쓰는 기법이 아니었다. 그에게 초현실주의는 천박한 우리 시대에 시적 열정을 점화시키는 비밀스러운 초점이었고, 감수성이 일으키는 저항이었으며, 예술과 에로티시즘과 도덕이 갖는 본래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었고, 정치학이었다. 한마디로 파스에게 초현실주의는 생명의 모험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는 자신의 시에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자동기술법은 부정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파스는 자신의 시를 성숙시켜 나가게 되고 1949년 시집 『언어 밑의 자유』(Libertad bajo palabra)를 출간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독의 미로』를, 그 다음 해인 1951년에는 그의 중요한 산문시 『독수리 혹은 태양?』(¿Águila o sol?)을 출간한다.      비판적 전위주의의 요구에 따라 과거에 썼던 시편들을 다시 손질해 묶은 『언어 밑의 자유』에서 파스는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삶의 태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당시 중남미의 다른 시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50년대 초반에 파스와 함께 중남미에 현대시의 장을 연 호세 레사마 리마, 엔리케 몰리나, 니카노르 파라, 알바로 무티스, 곤살로 로하스 같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글쓰기에 대한 자세였다. 2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탐험하는 것이었다. 시인들을 유혹하는 미지의 땅은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곳은 안쪽과 바깥쪽이 합류하는 지점, 즉 언어의 지대였다. 시인들을 사로잡는 것은 미학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젊은 시인들에게 언어는 운명이면서 선택이었다. 언어는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우리가 만드는 것이고 우리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 밑의 자유』라는 시집의 제목이 말하듯이 인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 극중 인물의 자유는 운명이 완수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반대로 파스에게는 자유는 필연의 가면이다. 마찬가지로 시가 추구하는 자유는 언어라는 제한적 형태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시는 조건부 자유인 인간의 실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독의 미로』는 시를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방법을 사회에 적용한 구체적인 결과물이었다. 파스는 『고독의 미로』에서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20세기에 멕시코인이라는 사실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이 시대에 멕시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고독이란 다분히 멕시코 사람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을 가리키지만, 파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독이란 모든 인간, 모든 국가에 공통된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가 정교하게 분석하는 멕시코인들의 일상적 제의(祭儀)는 역사적 시간들을 동시적으로 살고 있는 현대인의 고독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다. 파스에게 민족의 정체성이란 불변적이고 실체론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즉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어떤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인과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판적 상상력의 수행을 통해서 은밀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현실을 밝혀내는 파스의 작업이 곧바로 도덕적 비판을 요구하는 정치학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귀향      1952년 옥타비오 파스는 파리를 떠나 멕시코로 돌아온다. 그 사이 약 일년 동안 그는 뉴델리와 도쿄에 머물렀다. 타블라다가 소개한 하이쿠를 통해 엿보았던 동양에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이 바로 이 때였다. 『격정의 계절』(La estación violenta)에는 이 기간에 쓰여진 시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편들에서는 『독수리 혹은 태양?』에서 해체되기 시작한 시인의 자아가 더욱 극적으로 타자와 대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출구는 없는가?」(¿No hay salida?)라는 시편을 보자. 이 순간이 바로 나다, 나는 갑자기 나를 벗어났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없다, 나는 여기 있다, 내 발치에 던져진 채로,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본다.      1955년 일본인 친구 에이키치 하야시야의 도움으로 바쇼의 『오쿠의 오솔길(奧の細道)』을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파스에게 동양은 단지 미학적 차원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사는 다른 방식, 세계와 세계 너머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일본의 전통에서 배운 것은 집중(敬)이라는 개념과 미완성 혹은 불완전이라는 개념이었다. 사물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두는 것, 불완전은 완전보다 상위의 개념이라는 것... 최소한의 요소로 강렬한 시적 효과를 가져오는 일본 시는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스페인 시의 전통과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일본 시는 하나의 시행에 엄청난 의미의 다양성을 응축시킨다. 마지막으로 일본 시는 미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지 않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외교관직을 수행하며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파스는 외국의 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국내의 작가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 등 적극적 활동을 벌인다. 1956년에는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와의 연속선상에서 시의 본성에 대해 논구한 시론서 『활과 리라』(El arco y la lira)를 출간한다. 파스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빌려온 이미지인 활과 리라를 사용하여 인간은 생물학적 몸을 갖는 존재이며 동시에 어딘가를 향해 몸 바깥으로 퉁겨져 나가려는 형이상학적 힘과의 균형 속에서만 올바로 파악될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파스가 다시 강조하는 것은 시는 역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곧 역사라는 사실이며,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을 채우는 역설적 경험이 바로 시라는 사실이다. 즉 “시적 언어의 이원적 조건은, 시간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언제나 영원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적 본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갈등이 역사를 창조한다.” 파스의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흙의 자식들』(Los hijos del limo, 1974)과 『타자의 목소리. 시와 세기말』(La otra voz. Poesía y fin de siglo, 1990)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된다.      프랑스어로 번역되는 것을 계기로 약간의 수정을 거친 『활과 리라』 2판(1967)에는 초판의 에필로그 대신에 「회전하는 기호들」(Los signos en rotación)이 실렸다. 시에 대한 새로운 선언문의 성격을 띠는 이 글에서 파스는 시의 최상의 임무는 시를 부정하는 것이며 언어와 시적 경험을 비판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듬해에 출간된 『교류』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 혹은 또 다른 어떤 실체가 혹은 외적 현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지금은 언어가 차지하고 있다. 시는 외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 말이 지시하는 것은 또 다른 말이다. 시의 의미가 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안쪽에 있다는 것을 알면, 즉 말이 가리키는 지시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저희끼리 나누는 대화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명확해진다.      시가 외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는 말은 언어 속에 자폐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은 드러나고 숨는 이중적 방식으로만 주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드러나면서 동시에 숨는 현실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어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은 곧 언어이며 언어가 곧 현실이다. 이 때문에 시의 의미는 시 안에 있으며 시의 최종적인 의미는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는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둘러싼 타자(성)를(을) 발견하는 것이다. 타자는 자아와 한 몸을 이루며 그 몸이 바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인間이 시間과 공間의 짜임으로서의 현실, 즉 비밀스럽고 스스로 그러한 현실을 발견하기 위한 탐색의 결과이다. 인간도 시간도 공간도 모두 관계(間)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스는 이러한 현실 인식을 통하여 시와 혁명, 시와 사회의 문제를 재검증한다. 그에게 시와 혁명의 임무는 현실 너머의 초월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생성하는 현실의 인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실의 원인(숨음)과 결과(드러남)는 일체적인 진여(眞如)의 양면이라는 것이 파스의 생각이다.      현실의 숨은 의미를 탐색한다는 구실 하에 저질러지는 모든 위선과 억압에 대한 파스의 비판 작업은 자연스럽게 근대성에 대한 반성으로 귀결된다. 그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훨씬 이전에 근대성의 공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격정의 계절』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태양의 돌』(Piedra de sol)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통찰력 있는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새로운 격정의 계절(1959 - 1998) (1) 구조주의와 동양 사상과의 만남      1959년 파스는 멕시코를 떠나 다시 파리로 간다. 이미 멕시코에서부터 새로운 전위주의 운동에 대한 징후를 감지하고 있던 파스는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변화를 직감한다. 유럽의 문화계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던 구조주의라는 변화의 열기는 ‘모든 것이 언어’라는 생각에 직결되어 있었으며 ‘구조’와 ‘기호’라는 용어가 핵심적인 말로 등장했다. 구조주의는 파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는 이후 그가 출간한 책들의 제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활과 리라』 2판에 새롭게 첨가된 에필로그의 제목이 「회전하는 기호들」이고, 두 개의 기호―육체적 기호와 비육체적 기호―사이의 상관 관계를 통해 분석한 문명 비평서의 제목은 『결합과 해체』(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69)이다. 육체적 기호(el signo cuerpo)와 비육체적 기호(el signo no-cuerpo)라는 개념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정신과 육체라는 실체적 개념을 피하기 위해 파스가 고안한 개념이다.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기호와 비육체적 기호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큰 무리 없이 대비시킬 수 있는 개념은 음,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1967년에서 1972년 사이에 쓰여진 글을 모은 책의 제목은 『기호와 갈겨쓰기』(El signo y el garabato, 1973)이며, 훌리안 마리아스가 파스의 글을 선집하여 출간한 책의 제목은 『기호들의 연극/투명성』(Teatro de signos / Transparencia, 1974)으로 붙여졌다.      이 시기에 파스의 사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사건은 그가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된 것이었다. 인도에 체류하는 동안 쓴 시를 모은 『동쪽 기슭(Ladera Este)』의 작품들은 에로티시즘의 시학으로 평가되던 파스의 시학에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인간의 특성을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더불어 ‘타자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찾는 파스에게 에로티시즘은 타자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러나 인도는 그에게 새로운 지혜를 가르쳐준다. 어딘가를 향해 길을 떠난 시인은 불현듯 길 자체가 목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나를 신성으로 데려가거나 신성으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경험이다. 에로티시즘은 상상력으로 변한 섹슈얼리티이고, 사랑은 한 사람의 인격체를 선택하는 에로틱한 상상력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 세계의 실재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인도가 내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지혜는 세계는 실재하지만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세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나무도 항상 동일한 나무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우주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이 되었다.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우주’라는 말은 생명이 하나의 과정임을 뜻한다. 존재는 불변이 아니고 지속이기 때문에 생명은 시간과 우연성에 저항하지 않고 깨지기 쉬운 위태로운 실존을 노래한다. 시편「헤랏에서 느낀 행복」(Felicidad en Herat)에서 파스는 이러한 실존의 모습을 “유한한 생명의 완전함”이라고 노래했다. 이것은 그가 일본 시에서 배운 ‘불완전은 완전보다 상위의 개념’이라는 생각과 일치한다. 자아가 허상이며 존재가 환색(幻色)이라는 깨달음은 곧바로 “말의 본질은 관계”라는 것을 파스에게 가르쳐주었다. 불교의 인식론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사유를 비교한 책 『레비스트로스 혹은 이솝의 새로운 향연』(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에서 파스는 “말은 상대적인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실재화하는 암호이다. 모든 말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을 생산하며, 모든 말은 부정과 긍정 사이의 관계이다. 관계는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붙들어 맨다. 그래서 언어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파괴하며 죽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는 변증법의 왕국이다”라고 말한다. 존재와 언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여러 가지 실험적 형태의 시로 나타났다. 두루마리 형태의 시 『백지』(Blanco), 공간적 실험과 조합의 기술을 보여주는 『시각적 음반』(Discos visuales),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램과 타블라다의 구체시를 계승한 『공간시』(Topoemas)등이 그것이다.      인도에서의 생활은 파스에게 가장 창조적이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가 엘레나 가로와 이혼하고 마리 조 트라미니를 만나 결혼한 것도 인도에서였다. 그러나 이 행복한 시기는 1968년 10월 끝나게 된다. 틀랄텔롤코 광장에서 벌어진 학생들에 대한 발포 사건에 항의하여 파스는 외교관직을 사임했기 때문이다. (2) 행동과 역사      외교관직을 사임하고 국제적인 언론을 통해 멕시코 정부를 비판한 파스의 행동은 그에게 또 다른 격정의 계절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다시 멕시코에 돌아온 이후 그는 여론의 한복판에서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후아레스와 포르피리오를 이야기했고 아르헨티나의 용병과 쿠바의 탈주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탁에서는 늘 화약 냄새가 풍겼다. 술잔을 기울이며 아버지는 나에게 사파타와 판초 비야를 이야기했고 소토 이 가마와 플로레스 마곤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탁에서는 늘 화약 냄새가 풍겼다. 나는 입을 다물고 앉아 있다. 나는 누구에 대해 말해야 할까?      그의 식탁에서는 화약 냄새 대신 잉크 냄새가 풍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벌인 문화적 투쟁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투쟁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멕시코의 문화적 현실을 변화시켰다. 그는 학생 운동과 틀랄텔롤코 광장의 학살, 민주주의의 부재와 정치적 대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1970년 출판된 『추신』(Posdata)은 그 첫 번째 결과물로서 『고독의 미로』의 후속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 문화적 투쟁은 “비판적 상상력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정치에 관한 옥타비오 파스의 견해는 중남미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때로는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추신』은 10년 뒤인 1979년에 『자선가의 얼굴을 한 식인귀』(El ogro filantrópico)라는 두툼한 책이 되어 출판되었다. 멕시코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전체주의와 에로티시즘을 폭넓게 다룬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파스는 지식인과 권력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덕목은 비판적 소수 의견임을 주장했다.      멕시코 국내 문제에서 시야를 넓혀 국제 정치, 미국의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와 소련의 관료주의적 체계의 위기,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와의 관계를 다룬 글들은 『흐린 날』(Tiempo nublado, 1983)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 필요한 것은 유능한 정치인이 아니라 명철한 비판 의식이라고 말하는 파스는 정치에 관한 모든 글에서 지식인이 비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이익단체에서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파스는 70년대 초부터 잡지 『다원』(Plural, 1971 - 1976)과 『회귀』(Vuelta, 1976 - 1999)를 주간하며 70-80년대 격정의 시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멕시코와 중남미의 환부(患部)를 드러내는 파스의 비판은 대내외적으로 억압받는 중남미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혁명적 시도들과 마찰을 빚었다. 예를 들어, 소련의 전체주의에 대한 파스의 비판은 혁명의 장애물이 되는 반동적 사유이며 동시에 제국주의의 공범자로 낙인찍혔다. 결국 시간은 파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흑백 논리에 지배된 비난은 쉽사리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가지 단서가 전제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도 아니고 인간끼리의 유대감이 빚어낸 승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좀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뿐이다.” 결국, 파스가 의도했던 것은 비판이란 좌냐 우냐 하는 배타적 선택이 아니라 제도와 이념에 의해서 억압받고 은폐된 현실을 온전히 되살려내는 일이었다. (3) “내 거처는 나의 말, 대기는 나의 무덤”      예술과 문학, 정치와 사회에 대한 30여권의 파스의 평론집과 시는 서로 길항하는 영역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자력장을 형성한다. 자력장의 한극에 정치가 있다면 또 다른 극에는 시가 있다. 정치가 의도하는 것이 시간이 만드는 온갖 우연성을 가로질러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시는 시간과 우연성에 저항하지 않고 허약한 실존을 노래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당연(當然)을 주장한다면 시는 ‘본래 그러하다’는 본연(本然)을 드러낸다. 정치가 진보적인 직선적 시간을 웅변한다면 시는 순환과 회귀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격정의 시기 동안에 쓰여진 파스의 많은 시는 회귀를 노래한다. 회귀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신 너머로 간 시인을 기다리는 것은 자신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즉 시가 말하는 진실은 이탈에서 회귀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만물병작, 오이관복(萬物竝作, 吾以觀復)/ 부물운운, 각복귀기근(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만물이 더불어 자라나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뿐이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제각기 또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노자 16장)      때문에,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역사의 직선적 방향을 무화시키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파스는 「산 일데폰소 야곡」에서 돌아감을 이렇게 풀어쓴다. 시는, 역사와 진리 사이에 놓여진 다리일 뿐, 역사를 향한 길도, 진리를 향한 길도 아니다. 시는 움직임 속에서 정적을, 정적 속에서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역사는 길이다. 그 길은 방향이 없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간다, 진실은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가지도 오지도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손아귀에 있다.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다. 사랑은 비어 있음으로 가능하다.      역사가 방향 없는 길이라는 말은 역사의 다(多)방향성을 뜻한다. 이것은 자연의 다인다과(多因多果)의 방향성을 일인일과(一因一果)의 방향성으로 강제하는 역사의 독단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파스는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시에서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구조주의를 거쳐 동양적 사유와 접하면서 파스에게 구체화된 존재에 대한 개념과 부합한다. 즉 존재는 비어 있고(虛), 비어 있음은 존재의 무한한 쓰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시집 『회귀』와 『선명한 과거』에는 이런 시적 사유의 행로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파스에게 역사란 자아를 비우는 시험의 장소이다. 역사는 모든 인칭 대명사가 사라질 때 완성된다고 그는 말한다. 존재가 자기 동일성과 고유성을 고집하지 않고(無自性), 역사가 배타적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을(不自生) 때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의미를 갖고,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인간을 통해 발언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주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완성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가 되는 순간이다.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나와 타자로 분열되기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회복한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의 시학은 자연스럽게 에로티시즘과 합류한다. 오랜 침묵 끝에 1987년 출간된 마지막 시집 『내면의 나무』(Arbol adentro, 1987)에 실려 있는 아름다운 시편 「믿음의 편지」(Carta de creencia)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고 다시 사는 것이고 다시 죽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죽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들, 헤아릴 수 없이 아주 작은 이들과 커다란 전체와의 화해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시간 속의 우연들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결국 그에게 사랑은 인간에게 주어진 작은 몫의 영원이었다. 작가에게 주어지는 커다란 영예인 노벨 문학상을 수상(1990)한 뒤에도 끊임없이 글을 썼던 그가 여든의 나이에 『이중 불꽃. 사랑과 에로티시즘』(La llama doble. Amor y erotismo, 1993)을 쓴 것은 평생동안 지켜온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세계를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대지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생전에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옥타비오 파스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타계한 뒤에도 그늘이 무성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18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시학 2 댓글:  조회:1303  추천:0  2019-03-09
뜨거운 추상의 시어들   옥따비오 빠스의 시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은 또다른 이유는 우리의 시의 추상어 기피현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말에서 추상어는 모두가 한자말이다. 아니면 일본어에서 온 생경한 말이다. 일제로부터 우리말을 되찾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또한 우리가 오랜 한자문화의 전통 속에서 자란 반작용이 있기 때문에 쇄국주의적 우리말 선호풍조를 키워왔다.   우리말, 우리스러운 정서에 대한 열정은 한편으로 한국적 정서로는 우리 문학의 형이상학적 깊이를 잃게 하는 역효과도 가져왔다. '언문'이나 '내방문학'으로, 민요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우리말은 주로 여성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런 우리말이나 우리 문학어의 특징은 여성 특유의 한이나 정감을 표현하는 데는 뛰어날 수 있었지만 추상이나 관념을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옥따비오 빠스의 시는 생각과 감각이 하나 되어 이루어지는 미학이다. 어디까지가 우주만물에 대한 관조이고 어디까지가 감각이나 느낌의 형상화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말로 빠스의 시를 옮겨놓으면 시가 갖는 깊은 사고의 무늬가 그 현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만다. 나는 빠스의 이런 시학을 '맛있는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려 한다.     너의 눈동자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빛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속의 환한 빈터에 찾아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곳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맛있는 거짓 이승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여기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의 눈동자에 대한 감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첫 구절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너의 반짝이는 눈동자, 그러나 금방 눈물이 쏟아질 듯 물기어린 아름다움....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물(눈물)과 불(번개)의 역설적 만남이 시작된다. '너의 눈동자' 속에는 끝없는 역설이 산다. 말하는 고요, 침묵의 언어,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이들 이미지 속에서 너의 눈빛에 응축된 정열은 조용한 바다의 고요로 반짝이고 있다. 너의 눈빛은 수정처럼 맑다. 비인간적으로 아름답다.   "숲속의 환한 빈터에 찾아온 가을." 이 시구는 속눈썹 켜지는 깨달음 같은 사랑에의 확신을 생각하게 한다. 아니면 장자의 우주관처럼 모든 사물들이 각각의 분계를 넘어 "잎사귀는 새가 되고" "나무의 어깨 위에선 (새 대신) 빛이 노래하는" 극도의 황홀이 있다.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눈에 뒤덮인 해변 속 샛별, 하얀 얼굴에 반짝이는 눈빛, 하얀 눈빛의 파동과 파도 속에 자리한 반짝임. 시인은 마침내 너의 눈동자를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라고 부른다. 은유치고는 최고의 역설이다. 불이 어떻게 과일일 수 있는가. 그러나 너의 눈동자를 보면 그게 기적처럼 가능함을 본다. 먹을 수 있는 추상. 만질 수 있는 불. 맛있는 영원의 불길. 그래서 너의 눈빛은 '맛있는 거짓'이다.     너의 눈동자는 내게 영원한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속세의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거짓이다. 거짓이어도 믿고 싶은 '맛있는 거짓', 그것이 너의 눈동자다. 그렇다. 너의 눈동자를 보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보람을 느낀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토록 황홀한 것임을 안다. 너의 눈동자야말로 내가 이승에 살아 있기를 잘했다는 느낌을 준다. "이승의 거울." 너의 눈동자의 아름다움.   그러나 동시에 너의 눈은 내가 영원할 수 없고 영원히 사랑할 수도 없음을 확인해주는, 생의 한계성을 절박히 느끼게 하는 "저승의 문"이다. 너의 눈은 죽도록 사랑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바다)속에 떠 있는 가벼움(맥박)이다. 나는 너의 눈동자를 보며 살아 있다는 실감을 경험한다. '깜박거리는 절대', 너의 눈동자에 취한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소망한다. 동시에 나는 그것이 영원히 불가능함을 안다. 너의 눈동자의 아름다움과 그 반짝임은 모든 것을 약속하지만, 그것은 또다시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욱 큰 목마름으로, 뼈로 알게 한다.   이 시의 해설이 이렇게 길어지게 된 것은 그만큼 응축된 추상들로 시가 엮여져 있기 때문이다. 명사 중에서 고유명사가 가장 구체적이다. 루쏘의 '언어의 시원'에 따르면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가 생긴다고 한다. 태초에 '나무'란 말은 한 잎사귀 많은 기둥을 일컫는 고유명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나무'를 닮은 많은 기둥들이 보이자 이것도 나무, 저것도 나무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아는 '나무'라는 보통명사가 생겨났을 것이다. 보통명사를 아우르는 것이 '초목' '식물' 같은 총칭명사이고, 그 총칭명사를 넘어서 모두를 일컫는 말이 추상어이다. 즉, 형상 있음을 넘어선 형상 없음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말이 추상어이다. 그림에서 추상화가 가장 건조하고 알아보기 어렵듯이 시에서 추상어의 남발은 시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낯섦의 다른 표현일 뿐 인간의 구체적 느낌과 생각까지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풍경이나 집의 구체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실체성에 대한 최상급의 찬사이다. 그러므로 감동으로 육박해 오는 구체적 현실감은 이렇게 추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어떤 문학이건 종국에는 그 의미가 문제되는 법이다. 아무리 이미지성이 강한 시라도, 아무리 구체적 감각과 심상이 있는 시라도, 마지막에 그것이 엮어내는 의미의 무늬로 시와 시 아닌 것이 판가름된다. 무의미 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까를로스 보우소뇨도 '자동필기법'을 동원한 현대시의 가장 난해한 속성을 '상징화'라고 결론짓는다. 쉬르리얼리즘이 가진 극단의 불연속적 이미지도 결국은 '상징화'를 통한 의미 산출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빠스의 추상은 그렇지 않다. 빠스의 추상어는 먼저 감탄사이다. 시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감탄사로 대치하고 있다. 언어와 시가 의미를 향한다면 빠스의 시는 그 의미와 추상에서 되올아오는 시다.      손끝으로 느끼는 삶   나의 손은  네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 나의 손은 너의 몸에서 또다른 몸을 창조한다.     여기서 존재라는 말은 그 사랑과 감탄과 흥분이 빚어낸 절정감을 표현하는 추상어이다. 나의 손은 너의 존재를 손끝으로 하나하나 확인해간다. 나의 손끝이 그려가는 너의 육체는 너의 육체가 아니다. 나의 손끝이 느끼는, 나의 손끝이 그려가는 또다른 '벌거숭이 옷'이다. 나의 손은 너의 몸뚱어리 곳곳을 탐색한다. 너무도 신기하고 새롭다. 벗길수록 새로운 네 속의 그 많은 곳들, 물체들. 그러나 너는 지금 나의 손끝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네 육체가 가진 신비를 모른다. 그리고 너의 육체는 나의 손끝을 모른다. 나의 손끝이 너의 몸에서 느끼는 황홀은 너의 황홀이 아니라 나의 황홀이다. "나의 손은 / 너의 몸에서 또다른 몸을 창조한다."       추상어를 통한 이미지들   서구 르레상스 이후 오늘의 시는 절묘한 은유와 상징을 통해 오묘한 감정과 의미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왔다. 그러나 빠스의 추상어는 그 의미에서 감각과 느낌으로 되돌아와 이미지를 산출한다. 옥따비오 빠스는 보르헤스같이 가장 지것인 시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성인의 추상적인 언어로 더욱 정력적인 것을 진솔하게 선사한다.     독백   허무와 꿈 사이 부서진 기둥 밑에서 나의 불면의 시간들을 가로질러가는 너의 이름, 음절들   불그레산 너의 머리칼 한여름의 번갯불이  밤의 등뒤에서 달콤한 횡포의 불빛으로 떨리고 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꿈의 어두운 물살, 허무로부터 너를 벼리어내는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거기 눈먼 바다가 밀려와  미친듯 후려치고 있다.   모든 것은 잊혀진다. 모든 것은 밤을 향한다. 그러나 밤의 등뒤에서 문득문득 되살아나는 횡포스러운 불빛들, 기억들.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의미 없는, 그러나 너무 확실한 입술들. 그것은 날밤의 번갯불 같은, 그러나 달콤한 '횡포의 불빛'이다. '불그레한 너의 머리칼'의 젖은 냄새와 한여름밤의 꿈도 잊었다. 그것은 이제 전설이다. 전설 속에서 솟아나는 꿈의 물살. 망각이나 허무로부터 "나는 살았노라!" 다시 일깨우는, 심지어 이 밤 눈물을 가능케 하는 이름없는 추억이여.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나는 하나도 증명할 수 없는 한 여인의 사랑에 아파하며, 주소 없는 아픔의 "눈먼 바다가 밀려와" 나의 온몸을 미친 듯 후려치는 비극 아닌 비극을 실감하다.        시를 향하여 -출발점들     말들, 몇 순간의 수확들, 아침인사와 저녁인사, 입구와 출구, 아무데에서 아무데로나 가는 복도의 입구에, 불타버린 언어의 나무 숯덩이에서 끌어낸 말들. 동물성 뱃속, 광물성 뱃속, 시간의 뱃속에서 끝없이 뒤치다, 출구를 발견하는 것 : 시. 나의 시선들이 부서지는 그 얼굴의 집념 폐허화된 풍경 앞에서, 미궁을 공략한 뒤, 다시 불굴의 의지로 무장한 전선, 혹은 이마. 화산의 고뇌. 시대의 우상, 지휘자, 총수의 종이호랑이 상판때기의 인자함, '나'들, '너'들, '그'들, 거미줄을 짜는 사람들, 손톱으로 무장한 대명사들, 얼굴 없는 추상스러운 성인들, 그, 그리고 우리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람, 아무도 아닌, 누구도 아닌 그 사람. 아버지 하느님은 이 모든 우상들의 모습 속에서 복수를 당한다. 이 순간은 얼어붙는다, 응고된 백색이 눈을 흐린다, 대답이 없다 사라진다 빙빙 도는 물살들로 밀려난 북가죽 돌아오리라 환상의 탈을 벗긴다 만감한 한가운데 큰 못을 박는다 화산폭발을 자극한다 탯줄을 끊는다 성모를 잘 죽인다 : 이것이 현대 시인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저지른 범죄. 새 시인은 성모 대신 커다란 사랑의 여신을 찾아야 한다. 말하기 위해 말하기, 절망적으로 소리를 끌어내기, 파리가 날아가는 소리를, 그 말을 받아적기, 까맣게 되기. 시간은 두 갈래로 열린다 : 죽음 앞에서 뛰어내리기.       위의 시 또한 파괴적이다. 시쓰기는 말 만들어내기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오가다 찌들리고 불타버린, 생명이 없는 단어들을 그러모은다. 이미 이들이 가진 의미는 시인이 찾는 소리가 아니다. 빠스는 이들 불모의 말들을 반짝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을 시라고 말한다.   시쓰기는 '사랑 행위이며 전쟁'이다. 빠스가 좋아하는 이런 표현은 멀리는 이딸리아의 뻬뜨라르까로부터 오지만 빠스에게는 시락이 된다. 그리 의 한 구정을 보자.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과 대치하는 행위입니다, 소음이라든지 도시, 문명, 나무 들....문학은 일종의 반칙행위요. 무엇보다도 일상언어 전달의 위반행위에 속합니다. 그리고 언어의 붕기는 작가의 현실에 대한 자세에서도 보여집니다. 작가는 항상 어떤 것에 맞서서, 많은 경우 어떤 것에 대항하여 글을 씁니다. 내가 이 '대항하여'라는 말을 쓴 것은, 꼭 어떤 것을 증오하여 글을 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항하는' 것도 사랑 행위일 수 있지요. 어떻든 시쓰기는 언어의 파괴행위입니다. 아니면 언어의 표피를 깨고, 언어의 내부로 파고드는 행위지요. 그래서 글쓰기는 싸움이나 사랑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시인의 이마는 전쟁터가 된다. '황폐화된 풍경' 앞에서 다시 말을 짜내는 불타는 이마. 시 속의 호랑이는 결국 종이호랑이이다. 니체 손에서 신은 죽었다. 신과 함께 인간도 죽었다. 인간과 함께 말도 죽었다. 따라서 시인이 만들어내는 말과 상징은 이제 절대성을 잃은 공허한 우상일 뿐이다.   빠스는 전통적 어머니, 즉 가족과 사회의 모태가 되었고 사회적 의미와 의사소통을 구축해온 성모는 이제 죽었다고 말한다. "성모를 잘 죽인다 : 이것이 현대 시인이 모두를 위해 저지른 범죄, 새로운 시인은 성모 대신 커다란 사랑의 여신을 찾아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는 이제 진리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즐기고 살아가기 위한, 육체를 가진 여신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지요. 현대가 육체의 반란을 겪고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오늘날 가장 선호하는 가치로 현재성이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발전주의 전진주의가 지향해온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란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육체의 반란이란 전진주의가 숨겨온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저항입니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최상의 가치로 저축이니, 노동, 부의 축적을 들었지요. 천국을 영원성에 두는 게 아니라 미래에 두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진주의는 (미래가 내포하고 있는) 죽음이나 종말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밖에요. 크리스천에게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에게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지요. 영원으로 가는 도약이지요. 힌두교인에게도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해탈이지요. 그러나 미래를 믿고 선진조국의 건설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의미가 없지요. 미래에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미래에 대한 꿈이나 전진주의를 무력화하니까요. 우리가 추상적으로 말하는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나는 죽거든요. 더군다나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도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육체의 반란이란 미래에 대한 반란이며, 가장 중요한 가치를 현재에 두는 것입니다. 육체의 시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가능성까지를 내포한 시간입니다. 육체의 시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그러자면 새로운 죽음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정복이 될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진정한 얼굴을 발견하는 일이지요. 옛날 종교들처럼 영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얼굴이 아닌, 그렇다고 현대처럼 위장된 얼굴도 아닌 모습 말이에요. 죽음을 삶의 중요한 핵심요소로 보아야지요.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에로티시즘은 육체의 시간으로 에로티시즘 속에서는 죽음이 침해나 자해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죽음의 모습이 다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죽을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나 또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죽음의 직감과 연결된 고리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죽음의 직감과 연결된 고리 위에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죽음의 가능성 위에 말입니다."   빠스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서정주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란 시구가 생각난다. 그렇다. 지극한 사랑은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사랑을 맹세할 때도 "죽음이 둘을 떼어놓을 때까지"란 표현을 쓴다. 서정주의 절구처럼 사랑하는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을 생각할 때 나는 눈이 부신 사랑의 절실함과 깨달음에 이른다. 삶은 죽음의 그림자로 인해 더욱 햇살로 넘친다.   우리는 이제 빠스의 의 마지막 연의 뜻을 알 것 같다. 결국 시쓰기는 사랑의 행위이며, 죽음 앞에서 말의 도약을 위한 시도이다. 절망 속에서 소리를 끌어내고 삶에서 죽음을, 죽음에서 삶을 이끌어내는 사랑의 행위가 시쓰기이다.      말   말, 정확한 소리 그러나 틀린 말 어둡고 빛나는 상처난 샘물 거울 거울이면서 광휘 광휘이면서 갈날 사랑으로 살아 있는 칼 이제 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손 열매   나를 자극하는 불길 고요한 잔인한 눈동자 현기증의 절정에 머문 눈에 보이지 않는 차가운 빛이 나의 심연을 파헤친다   나를 허무로 채운다 공허한 말로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 그 바쁜 움직임에 나의 발길을 맡긴다   이제 나를 벗어난 말 하나 나의 말 내 죽은 뒤 남은 뼈다귀처럼 이름도 없는 가냘픈 내 육신의 흔적 나의 어두은 눈물의  소금맛 얼어붙은 금강석   말, 하나의 말 버림받아 웃고 있는 순수 자유 구름처럼 물처럼 대기처럼 빛처럼 온 땅을 헤매는 눈처럼 나처럼 나를 잊은 나처럼   말, 하나의 말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항상 말없는 항상 말하는 성체용 빵이면서 잿더미.   시인의 말은 정확하면서 항상 틀린 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신의 말이 아니라 상처난 말이다. 말을 찾는 작업은 늘 말의 잔인성과 공허에 맞부딪는다. 말은 항상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붓에 말을 맡긴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나의  어두운 눈물의 /소금맛, 얼어붙은 금강석"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시인이 찾는 말은 하나의 말,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말이다. 그것은 성체용 빵 같은 구원의 빵이면서 죽음의 잿더미인 패러독스이다.      
17    옥따비오 빠스 詩論 - 리듬 댓글:  조회:1251  추천:0  2019-03-09
옥따비오 빠스 詩論 - 리듬   말들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로서 다루어진다. 말들은 항상 인 동시에 을 말한다. 사고는 단념하지 않고 줄곧 말의 사용을 강요하며, 한번 또 한번 자신의 법칙에 따르도록 한다. 반면에 언어활동은 한번 또 한번 반항하면서 구문론과 사전학에 의해 구축된 제방들을 파괴한다. 어휘학과 문법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으로 판결받은 활동이다. 거기에서 마치 정적인 존재인 것 같은 문법은 언어가 소리들의 결합이며, 소리들은 보다 단순한 단위 곧 언어세포를 구성한다고 단언한다. (중략)   언어활동은 의미있는 단위, 곧 구절들에 의한 하나의 우주인 셈이다. 이러한 단언에 대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억지로 문법적인 분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가를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린 아이들은 단어들을 고립시킬 수 없다. 문법의 습득이 구절을 단어들로 나누고, 단어를 음절과 문자로 분리하도록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단어에 대한 자각은 갖고 있지 않지만 구절에 대해서는 너무도 생생하게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의미개념들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글을 쓰기 때문에 하나의 구절이 여러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겨우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이와 동일한 경향이 나타난다. (중략)   시는 언어활동 및 언어세포로서의 구절과 동일한 복합적이며 분리할 수 없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 모든 시는 자신에 대해 닫혀진 총체로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한 구절이거나 여러 구절들의 결합이다. 시인은 토막토막 잘린 어휘가 아닌 치밀하고 분리시킬 수 없는 단위들 안에서 표현한다. 시의 세포, 곧 가장 간단한 핵은 시구이다. 하지만 산문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구절의 단위, 즉 구절을 그런 식으로 구성하고 언어활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의미나 의미있는 지시가 아니라 리듬이다. (중략) 어느 누구도 말의 마술적 힘에 대한 신념을 뽑아 버릴 수 없다.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언어활동 앞에서의 보류는 지적인 활동이다. 단지 어떤 순간에서만 우리는 단어들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다. 언어활동 앞에서의 신뢰는 인간의 자발적이며 원초적인 활동으로서 사물은 스스로의 이름인 것이다. 단어의 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신앙에 관한 회상이다. 자연이 활기를 띠고 있을 때 각각의 물체는 자신의 삶을 지니고 있으며, 객관적인 세계의 이중적 존재인 단어들 역시 활기에 가득 차 있다. 언어학은 우주와 같은 존재로서 부르고 대답하는 세계 곧 밀물과 썰물, 결함과 분리, 흡기와 호기의 세계이다.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다른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두는 상응한다. 말은 살아 있는 존재, 천체와 초목들을 주재하는 것과 유사한 리듬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들의 결합이다.   자동필기를 실행해 본 모든 사람들은 – 이런 시도가 가능한 곳까지- 자신의 고유한 자발성에 맡겨진 언어활동의 기묘하게 빛나는 연합을 알고 있다. 초혼과 소리침. 앙드레 브르통은 고 말한다. 그리고 알폰소 레예스 같은 명석한 정신의 소유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언어에 대한 스스로의 지배를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는 시인에게 경고한다. 그러나 이런 문학적 증거들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꿈, 정신착란, 최면과 기타 의식의 이완상태는 구절의 분출을 도와준다. 이미지의 강물에 이끌리며 우리는 순수한 존재의 언저리를 문지르고 합일의 상태, 우리 존재와 세계 존재의 마지막 결합을 추정한다. 조수를 막아내는 방파제일 수 없을 때 의식은 동요한다. 그리고 곧바로 모든 것이 최후의 한 이미지에서 흘러나온다. 하나의 벽이 우리의 통행을 중단시키고 우리는 침묵으로 돌아간다. (중략)   모든 구두현상의 심층부에는 하나의 리듬이 있다. 단어는 몇몇 리듬원칙에 따라서 결합되고 분리된다. 만일 언어활동이 하나의 은밀한 리듬에 의해 지배되는 구절들과 말에 의한 연상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이라면, 이러한 리듬의 재생은 우리에게 단어에 대한 힘을 줄 것이다. 언어활동의 원동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끌어당기고 밀치는 동일한 세력들을 이용함으로써 말에 의한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끌어 준다. (중략)   시 작용은 주문, 요술 및 그 밖의 다른 마술행위들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인의 자세는 마술사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중략)   마술사에게 있어 신들은 가설이 아니며, 신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달래주고 사랑해야 하는 실재도 아니며, 유혹하여 극복하거나 조롱해야 할 세력이다. 마술은 위험하고 불경스런 기획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인간능력에 대한 긍정이다. 인간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마술사는 홀로 신들과 마주보고 있다. 그의 위대함은 고독에 뿌리박고 있으며, 거의 항상 무위로 끝난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의 자존심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사실상 발산되지 않은 모든 마술 – 이것은 선물, 박애로 변형되지 않은 것이다 – 은 자신을 부수고 결국에는 창조자(마술사)를 부숴 버리게 된다. (중략)   마술사는 우주적인 힘과의 상호소통, 하나의 힘을 지닌 예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될 수 없는 불가능성, 그 둘 사이에서 찢겨진 인물임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마술은 삶의 우애 – 동일한 흐름이 우주를 거닌다 –를 긍정하고 인간의 우애를 부정한다. 현대시의 어떤 창작물은 이와 동일한 긴장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마도 말라르메의 작품이 최상의 예가 될 것이다. 단어들은 결코 자신 보다 더 많이 실은 완전한 상태일 수 없으므로 교배한 덕분에 검게 되어 버린 열대꽃처럼 거의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각각의 단어는 현란하기만 한데 이것이 단어의 명백함이다. 그러나 그건 우리를 시원하게 아니면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골똘히 생각하게 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광물적인 명백함이다. 아주 높은 지점에서 벌이는 언어활동은 연극에서 내화(耐火)와 같은 존재가 될 만하다. 말라르메가 시도하였던 것처럼 오직 무대에서만 진정한 형상화가 완전히 소멸되거나 완성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는 우리에게 극적 시도인 다양한 시 단편들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고 몽상적인 극에 대한 고찰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보통의 시어가 없는 연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시적 언어활동을 이루고 있는 긴장은 자신 속에서 소멸된다. 그의 신화는 박애적이지 않다. 즉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이지튀르인 것이다.   그의 명백함은 결국 자신을 불태워 없앤다. 화살은 표적이 의문투성이인 우리의 고유한 이미지일 때 그것을 쏜 사람을 향해 되돌아온다. 말라르메의 위대함은 우주의 마술적 이중성 –하나의 우주로 생각되는 작품- 이라 할 언어활동을 창조하려는 시도에 있다기보다는 특히 이러한 언어활동을 연극, 인간과의 대화로 변형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자각에서 형성된다. 만약 작품이 연극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빈 페이지에서 흘러나오게 될 또 다른 선택권은 없다. 마술행위는 자기 살해로 변질된다. 언어활동의 마술적인 경로를 따라서 프랑스 시인은 침묵에 이른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침묵은 하나의 말을 포함하고 있다. 소르 후아나가 언급했듯이 우리는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싶던 모든 것을 어떻게 말해야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잠자코 있는 것이다. 인간의 침묵은 하나의 무언이다. 따라서 그건 말없는 가운데의 상호소통이며 잠재되어 있는 의미이다. 말라르메의 침묵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무(無)를 말한다. 그것은 침묵 이전의 침묵이다. (중략)   시는 요술이나 주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도요법과 점술방식과 같이 시인은 언어의 은밀한 힘을 눈뜨게 한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활동을 매혹시킨다. 또는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중략)   모든 리듬은 어떤 것에 대한 감각이다. 그래서 리듬은 전적으로 내용물에 대한 실속 없는 측정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 하나의 감각인 것이다. 리듬은 측정이 아닌 원초적인 시간이다. (중략)   우리 존재는 시간이며, 우리가 지나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시간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의 방향,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리듬은 시계 달력과는 상반되는 기능을 수행한다. 곧 시간은 추상적인 측정이 되기를 중단하고, 구체적이며 하나의 방향을 갖춘 존재로 되돌아간다. 끊임없는 분출, 보다 더 저쪽으로의 영원한 전진, 시간은 영속적인 발산이다. 시간의 본질은 와 이러한 에 대한 부정이다. 시간은 역설적인 방식에 의한 의미를 긍정하며, 역설적인 의미처럼 그 자신을 줄곧 부정하는 하나의 의미 –보다 더 저쪽으로 가는 것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있다-를 지니고 있다. 시간은 파괴이며, 파괴되는 순간에 반복되지만 각각의 반복은 하나의 변화인 것이다. 항상 동일한 것인 동시에 동일한 것의 부정이다. (중략)   시인에게서 나온 단어들이 말하는 것은 이미 그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을 지칭한다. 좀더 부언하면 단어들은 줄기에서 나온 꽃처럼 자연스럽게 리듬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리듬과 시어 사이의 관계는 무용과 음악적인 율동 사이를 주재하는 관계와 다르지 않다. 리듬을 무용의 울려퍼지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무용 또한 리듬의 육체적인 해석이 아니다. 모든 무용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무용이다. (중략)   리듬은 이미지, 의미이며 삶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자발적인 태도로서 우리에게서 벗어나 있지 않다. 곧 리듬은 우리를 표현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리듬은 구체적인 세상사이며 반복될 수 없는 인간의 삶이다. 단테가 인지하고, 별과 영혼들을 움직이는 리듬은 사랑이라 불린다. 노자와 장자는 상대적인 대립요소들의 산물인 다른 리듬 소리를 듣는다. 헤라클레투스는 리듬을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모든 리듬은 동시에, 각각의 독특한 내용물을 다른 것에서 증발시킴이 없이 단일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이미지, 곧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세속적인 달력은 우리에게 과거든지 미래든지간에 하나의 현재, 하나의 총체적인 실재 속에서 모든 시간을 포옹하는 원초적인 시간으로의 통행문을 닫아 놓고 있다. 신화적 날짜는 우리에게 과거를 미래와 결합시키는 현재를 추측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신화는 자신의 총체 속에 인간의 삶을 포함한다. 리듬을 통하여 전형적인 과거, 곧 현재로 구현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재적인 미래로서의 과거를 실제화한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만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없다. (중략)   존재라는 의미에서 볼 때 시는 모방에 의한 하나의 재생으로 이는 말에 대한 가장 오래된 뿌리- 원형, 신화들 – 내에서 시인이 전형을 재창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심지어 서정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도 미래로서의 과거를 소환한다. 시인 –어린 아이들, 원시인들 요컨대 모든 인간이 더욱 심원하고 본래의 성향에서 고삐를 놓을 때처럼-이 직업적인 모방가라고 단언하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 이런 모방은 원초적인 창조로서 시간들의 원점과 인간 각자의 밑바탕에 있는 어떤 것, 시간 자체 및 우리와 합일되고 모두에 대해서도 또한 유일하며 독특한 존재인 어떤 것에 대한 초혼, 재생, 재창조이다. 시의 리듬은 현재인 동시에 미래인 과거, 곧 우리들 자신에 대한 실제화이다. 시구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시간이며 영속적으로 재창조되는 리듬, 원초적인 시간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재생, 반복되는 죽음과 새로운 재생인 것이다. 산문에서 의미 또는 의미화에 의해 주어지는 구절 단위는 시에서 리듬을 통하여 획득된다. 그러므로 시적인 연관성은 산문과는 다른 질서를 지닌 존재라야 한다. 리듬을 갖춘 구절은 우리에게 그 의미에 관해 살펴보게 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시구의 의미 있는 단위가 어떻게 얻어지는지를 연구하기 전에 운문과 산문 사이의 관계를 좀더 가까이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옥따비오 빠스 (1990, 民音社; 옮긴이- 김현창) 中  
16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詩學 댓글:  조회:1180  추천:0  2019-03-09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詩學   옥따비오 빠스 (멕시코, 1914~) 옥따비오 빠스와 보르헤스를 읽지 않는 한 한국 시는 여전히 세계의 시와 거리가 있다. 물론 외국문학을 추종하는 것은 바람직한 게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란 독자가 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진대 많은 세계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우리 문학을 키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읽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세계 여러 나라 시인과 독자들이 감탄하고 모방하는 빠스의 시는 1990년 노벨문학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상표를 달고 우리 땅에 도착했어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옥따비오 빠스의 시를 소개하고 설명했지만 반향이 없었다. 이것은 물론 나의 번역과 소개의 미흡함도 한 이유이겠으나, 감상적이고 사회적인 시를 주로 보아온 우리에게 옥따비오 빠스의 시가 가진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이 낯설게 보인 것도 한 이유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보르헤스나 빠스를 이해하려면 우선 낭만주의의 위선을 벗어나야 한다. 말하자면, 내가 쓴 시 속의 ‘사랑’이 내가 실제로 겪은 사랑과 똑같아야 한다는 편견이다. 아니면, 나는 내가 느낀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언어와 싸운다는 식의 변명이다. 시속의 ‘나’는 어차피 글자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다. 그것이 아무리 나의 느낌이나 나의 모습에 가깝다 할지라도 나 자신은 아니다. 확실한 것 지금 이 램프가 실제 있는 것이고 이 하얀 불빛이 실제 있는 것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손이 실제 있다면, 이 쓴 것을 바라보는 눈은 진짜 있는 것인가? 말과 말 사이 내가 하는 말은 사라진다 내가 아는 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뿐 두 괄호 사이에서 구태여 불교의 ‘만물무상(萬物無常)’이나 플라톤의 “현실세계는 가상이다(즉 이데아의 모방이다)”를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문득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램프가 정말 여기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이 램프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를 의심해본다. 나의 눈은 나의 눈을 직접 본 일이 없다. 항상 거울을 통하거나 무엇에 비추어서 본다. ‘백문이 불여일견’ 즉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말들 하지만(“Seeing is believing"), 실제 본다는 것만큼 불확실한 건 없다. 그 보는 주체인 눈이란 존재가 불확실할 뿐,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살아 있다“라는 믿음만은, 증명할 수 없어도 물러설 수 없는 존재의 확실성이다. 확실성이라기보다 확실해야만 하는 실존의 보루이다.    철학은 시가 아니다. 사고나 관조의 깊이가 곧 시는 아니다. 삶에 대한 느낌과 영혼의 파동을 넘어 존재의 불확실성, 그 가벼움에 대한 관조가 오히려 진정한 시취로 육박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보르헤스나 옥따비오 빠스를 만난다. 말과 시인 참을 깨우치는 구도의 길에서 선불교는 “말을 세우지 말라”를 가장 큰 가르침으로 삼는다. 사물의 실상을 깨우치는 데에는 앞생각과 뒷생각을 버리라는 말이다. 참모습을 그 순간 그 실상으로 포착하려 하지 않고, 말이나 생각이 앞서고 뒤서면 우리 손에 남는 것은 항상 빈 껍질이다. 그러나 말을 떠나 사물의 실상을 포착할 수 있는가. 사물의 참모습과 등가치이며 동시적인 말이 있을 수 있는가. 선승의 대답은 “무!”이다. 한 수도승이 참선 끝에 갑작스러운 깨달음(돈오)에 이르렀다. 다른 스님이 그 깨달음을 배우려고 그 수도승에게 물었다. “스님, 깨달음의 경지가 어떻습니까?” 무상과 차별과 허상이 얼룩진 세상을 차고 올라, 가까스로 절벽 위 참의 풀뿌리 하나를 물고 있는 수도승이 어찌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옥따비오 빠스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렇게 말이 많아진 것은 선불교에 대한 그의 지식이 넓고 깊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이나 다른 곳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그는 동양철학이나 동양종교에 조예가 깊다. 특히 탄드라 불교나 선불교에 심취한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본의 하이꾸를 품격 높은 문학장르로 발전시킨 17세기의 선승 마쯔오 바쇼오의 시와 여행기 을 1957년에 에이끼찌 하야시야와 함께 스페인어로 번역한 일도 있었던 그는 여러 면에서 동양시와 불교정신에 정통한 시인이다. 빠스 스스로 바쇼오의 하이꾸와 선불교를 설명하기도 했다. 낭만주의가 말로서의 표현 불가능성을 가장 강조한 문학이었다고 한다면, 말라르메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시는 ‘주사위놀이’하듯 말에 시의 모든 운명을 거는 겸손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말이 시를 쓴다”라고 한 말라르메의 말은 유명하다. 낭만주의는 나만의 내적 체험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절절한 느낌을 표현할 때 말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현대시는 시인의 존재 이유인 말에 인간과 시인의 숙명을 맡긴다. 노발리스(Novalis)의 "사람은 이미지다“는 가장 현대시적 인식을 제시한 말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의 이 말은 ”사람은 말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말은 모든 의미체계의 모델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 또한 시각적 말일 수밖에 없다. 소위 무의미한 말, 무의미의 시로부터 시인은 다시 새로운 길,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선다. 나의 느낌을 표현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백지 위에 나의 말이 뛰노는 것을 가장 겸손하고 성실하게 지켜보는 눈을 키운다. 여기에 옥따비오 빠스가 있다. 시인의 숙명 말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말들 속에 나 또한 사라지게 하라 그러다가 어느 입술에 감도는 대기이게 하라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빠스의 이 시를 옮기고 나니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라는 신의 말이 생각난다. 시간을 사는 우리에게 이미 영원불멸의 ‘빛’은 기대할 수 없다. 시인의 숙명은 말을 통하여 살아나고 말을 통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쓰는 말, 혹은 시인이 읊조리는 시는 공기다. 빈 공간, 빈 공간의 바람, 그 바람의 무늬, 바람은 더러 모양을 짓지만 그러나 다시 보면 형상이 없는 바람이다. 나의 말, 시의 말 또한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시를 쓰면서 나의 살아 있음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고 싶다. 그러나 이미 적고 보면 그것은 과거이다. 그때 그 순간의 나의 생명성, 생기, 느낌과는 상관이 없는 이상한 흔적일 뿐이다. 결국 공허한 흔적, 겉껍질만 남는 게 시인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말들, 이 공허한 흔적들, 그 빈 공간 속의 나 또한 사라지게 하라. 내가 나를 버리고 바람이 되는 날, 그 바람은 때로는 예쁜 소녀의 입술에 감도는 대기가 될 수도 있겠지. 내 시를 외우고 다니는 예쁜 소녀의 숨결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도 헛된 나의 희망임을 나는 안다. 나는 이 우주 속에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무형의 힘을 더한다. "빛도 스스로 빛 속에 사라지나니."   말한 말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 고드름 글로 일으킨 기둥 글자 글자마다 하나씩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은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말의 정확한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가 길을 잃는 곳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 - 말하지 않은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인지도 몰라   외침 한마디 사위어간 통 속 - 다른 천체에서는 '천체'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한다 앞뒤를 생각한다 마음은 마음아프고 미친 마음 때문에 -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빠스의 시를 읽으려면 말을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하얀 종이 위에 말을 쓰다보면(쉬르리얼리즘의 '자동필기법'에 따라 아무렇게나 써보면) 말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의미가 꿈틀거린다. 아무렇게나 아무 말을 써놓아도 가만히 있는 말은 없다. 의미를 가지고 눈앞에 육박한다. 아니면 "이게 무슨 뜻이야?" 하고 묻는다.   말은 나 이전이다. 혹은 나 이후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즉 나와는 상관없다. 돌이다. 돌이니까 '돌 고드름'이나 될까. 내가 쓴 말은 나의 영혼을 전달하지 못한다. 내가 쓴 말은 쓸데없는 의미로 메아리치다가 제풀에 얼어붙는다. 나의 영혼이란 것도 모를 일, 그냥 하얗다. 나는 말을 한다. 영혼을 표현하려는 절규......나는 칼날처럼 말을 벼린다. 그러나 그런 말도 사람의 귀에 이르면 사라질 뿐이다.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즉, 나의 영혼을 전달하기는커녕 말 스스로의 연결도 당위성이 없다. 오직 소리와 소리의 속삭임 속에서 말라르메가 말하듯 이상한 '교감'만을 암시할 뿐인 것이다. "곰녀는 곰보" "마음은 마음아픔"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세상은 어지러운 의성어의 안개.   "다른 천체에서는 / '천체'를 무어라 할까?" 그렇다. 우리가 하는 말은 이 세상의 관습에 의하여 부단히 그렇게 불린 것에 불과하다. 우주가 있는데 좁은 지상에서 관습의 언어로, 논리로, 이미지로 일부러 '돌 고드름'을 세워 뜻을 이룸은 또한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불립문자(不立文字)나 화두 같은 빠스의 진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글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가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은 재판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이 글은 누구에게도 쓰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을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빠스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고 아파하지 않는다. 붓이 글을 쓰고, 말이 글을 쓴다. 이 붓도 이 말도 이 글도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또 씌어진 이 글이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쓰는 열정은 있다. 배도 의미도 들어올 수 없는 항만이 있다. 세상을 반영할 글도 말도 없다. 차라리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빠스는 '나'라는 존재가 복수임을 안다.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관습....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의 나에 참여하고 있다. 보르헤스 또한 "나는 복수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시쓰기는 알 수 없는 자신과 또 알 수 없는 자신의 재판관, 이 모두가 뜨겁게 참여하여 열심히 열심히 사라져가는, 스스로를 잃어가는 작업이다. 막상 씌어진 시는 이들  열심스러운 작업의 거뭇거뭇한 잿더미이고 나와는 전연 다른 생의 주검들이다. 그러나 그 허물이나 잿더미 속을 후비다가 혹시 손끝을 태우는 불씨가 있거든, 거기에 내가 살고 있음을 알라.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고 다시 사는 것이고 다시 죽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죽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들, 헤아릴 수 없이 아주 작은 이들과 커다란 전체와의 화해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사고의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세계를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대지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생전에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옥타비오 파스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타계한 뒤에도 그늘이 무성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15    시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191  추천:0  2018-10-31
 시 /옥타비오 파스    너는 말없이, 은밀하게 온다. 와서는 분노와 행복을 일깨우고 이 무서운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만지는 대로 불을 붙이고 사물마다 어두운 목마름을 심는다.   세상은 물러나고, 불 속에 집어넣은 쇠붙이처럼 허물어져 녹는다. 허물어진 나의 형체 사이에서 나는 홀로, 벌거숭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 일어선다. 내가 선 곳은 침묵의 크막한 바위 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를 향한 외로운 투사다.   불타는 진실이여, 너는 나를 어디로 밀어붙이는가? 나는 너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그 철없는 질문도 뭐하러 이 소득없는 전쟁을 벌인 것이냐? 인간은 너를 포용할만한 존재가 못 된다. 너의 목마름은 또 다른 목마름으로 배가 찰 뿐, 너의 불길은 모든 입술을 태울 뿐 너의 정신은 아무 형태로든 살기를 거부한다. 모든 형태를 불타오르게만 할 뿐, 너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 존재의 이름모를 중심에서 병대처럼, 밀물처럼 올라온다. 너는 점점 커지고 너의 목마름은 나를 질식시킨다 너는 폭군처럼 너의 열광의 칼 끝에 항복하지 않는 모든 무리를 추방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 혼자 나를 점령한다. 이름도 없는 너, 분노의 실체여, 지하의 목마름, 그 광기여,   너의 유령들이 내 가슴을 친다, 내 감촉을 일깨우고 내 이마를 얼리고 내 눈을 띄운다.   세상을 감지하며 너를 만진다 너, 만질 수 없는 실체여, 내 영혼과 내 육체의 조화여. 나는 내가 싸우는 싸움을 바라보며 땅의 결혼식을 본다.   상반된 이미지들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같은 이미지들에 다른, 더 깊은 이미지들이 앞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불타는 더듬거림, 더욱 숨겨진, 더욱 짙은 물길이 앞의 물길을 흩트린다. 이 젖은 어둠의 싸움 속에 삶도 죽음도 고요도 움직임도 모두 하나다.   계속하라, 승리자여, 내가 존재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입, 나의 혀도 오직 너의 존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너의 은밀한 음절들, 만질 수 없는 횡포한 말은 내 영혼의 실체다.   너는 오직 하나의 꿈. 하지만 세상은 네 속에서 꿈꾼다. 그리고 말 없는 세상은 너의 말로 입을 연다. 너의 가슴을 만지면서 나는 삶의 지평의 기류를 더듬고 어두운 피는 사랑에 취한 잔인한 입과 세상을 묶는다. 너의 입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파괴하는 것을 다시 살 욕망으로 항상 똑같은 비정한 세상과 결탁한다.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머물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어느 것 위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기에.   외로운 사람아, 나를 데려가 다오, 꿈 속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나의 어머니가 되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일깨워주고 내 너의 꿈을 꿈꾸게 하라, 내 눈을 올리브유로 적시어 내 너를 찾음으로 하여 나를 찾게 해다오.
14    변화와 생성-옥타비오 빠스의 시세계 댓글:  조회:1152  추천:0  2018-10-31
옥타비오 빠스의 시세계       옥타비오 빠스 (Octavio Paz, 1914 - )가 바라보는 세계는 정형이 없다. 그는 원칙적으로 우리 시대가 르네상스식의 이상적인 질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복합적인 요소들의 변증법적 갈등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방향을  잃고 합쳐졌다가 다시 흩어지고 대립했다가 다시 화해하면서, 다양하고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 이질적인 요소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와 생성, 이것이 빠스가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이다.    의미의 불확실과 불안정은 그의 시세계에 여실히 나타난다. 고정되지 않은 현실은 말의 단순한 전달 기능을 무시한다. 논리와 일정한 체계에 길들여 있는 말은 이제 비논리적인 불확정 현실을 더 이상 반영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은 자기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자기반영적인 언어의 모습은  외부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그려내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이다. 빠스에게 시는 서로 모이고 흩어지는 기호 들의 집합체이자 별자리와도 같은 작은 소우주의 세계이다. 시 속에서 기호들은 동일한 기호인 인간들에게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들 역시 기호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본질적 의미는 잃어버리고 만 존재하는 기호, 이 기호의 가 바로 그의 시세계이다. 그가 시를  통해 노리는 것은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이러한 언어의 유희를 통한 끊임없이 새로움의 추구이다.
13    말한 말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527  추천:0  2018-10-30
말한 말     / 옥타비오 파스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 고드름 글로 일으킨 기둥 글자 글자마다 하나씩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인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말의 정확한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가 길을 잃는 곳.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 -- 말하지 않은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인지도 몰라.   외침 한마디 사위어간 통 속-- 다른 천체에서는 '천체'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한다 앞뒤를 생각한다. 마음은 마음아프고 미친 마음 때문에--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12    어떤 시인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123  추천:0  2018-10-30
어떤 시인 / 옥타비오 파스                  ― 음악과 빵, 우유와 술, 사랑과 꿈, 이 모두가 공짜이다. 서로 사랑하는 상대방끼리 죽도록 아린 포옹으로 생긴 상처는 샘이다. 그들은 날카롭게 칼날을 세워 마지막 만남을 준비한다. 목숨을 건 만남이다. 불꽃을 튀기고 몸씨름을 하면서 밤을 세운다. 인간이 인간의 먹이감이다. 안다는 것은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꿈꾸는 것은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정신이 모든 시에 불을 붙였다. 언어를 포용하고, 이미지를 포용했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괴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제 이름 짓는것은 창조하는 것이고, 상상하는 것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 그러면, 곡괭이를 집어들라. 이론화하라. 확실하게 하라. 대가를 치르고 월급을 받아라. 한가한 시간에는 배가 터지도록 풀을 뜯어라. 신문 지면은 넓고도 넓으니 말이다. 아니면 저녁마다 다탁 위에서 혀가 부르트도록 신물나게 정치를 논하라. 입을 다물거나 제스처만 보여라―이나 저나 똑같은 것이지만. 어차피 너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불명예나 교수대밖에 출구가 없다. 네 꿈은 너무 야무진데, 강고한 철학이 없구나.         ―『독수리 혹은 태양?』(Aguila o sol?) 중에서  
11    <시(poetry)와 시편(poem)>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281  추천:0  2018-10-30
  옥타비오 파스, 김홍근・김은중 옮김,활과 리라, 1998.    1. 시에 대한 다양한 정의(13~14쪽 읽어볼 것)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13쪽)  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교이고 낙원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향수이다.  시는 민중의 목소리이자 선민의 언어이고 고독한 자의 말이다.  2. 시편에 대한 정의  시편은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고, 시편의 운율과 각운은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이자 울림이다.(14쪽)  3. 시와 시편에 대한 종합적 정의  시는 순수하면서 순수하지 않고, 신성하면서도 저주받았고,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밤—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14쪽)  시는 모든 시편들의 합계가 아니다. 모든 시적 창조물은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인 단위이다. 부분이 곧 총체이다.(17쪽)  시편의 다양성은 시의 단일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29쪽)  모든 시편은 유일하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작품에는 시의 맥박이 뛰고 있다. 이 때문에 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이고 문헌학적인 연구보다 단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이 더 확실하다.(29쪽)  4. 시(시편)의 조건  운율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시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는 양극화되기도 하고 한곳으로 모이기도 하면서 그림, 노래, 연극의 형식으로 생산된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단순한 문학적 형식이 아니라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15쪽)  5. 시(시편)에 대한 역사 전기적 접근  시편의 공감을 일으키는 열쇠는 역사적 탐구가 아니라 전기이다.  역사와 전기는 역사적 시기와 삶에 대한 주조를 말해주고 작품의 경계를 보여주며 작품의 외재적 스타일을 설명해준다. 또한 하나의 경향성이 가지는 의미를 명확히 보여줄 수도 있고 시편이 왜 씌어졌으며 어떻게 씌어졌는지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편이 무엇인지는 말해줄 수 없다.(19쪽)  6. 시와 스타일  시인은 스타일에서 자양분을 공급받고, 스타일은 자라서 죽지만, 시편은 영속한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시편은 자기 충족적인 단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독립된 본보기를 이루기 때문이다.(22쪽)  예술의 다양성은 예술의 단일성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시키는 것이다.(22쪽)  재료의 면에서나 의미의 면에서나 작품은 인간을 초월할 수 없다.(25쪽)  *하나의 스타일 안에서, 시편을 운문으로 씌어진 논문과 구별짓고, 그림과 교육적 삽화를 가르며, 가구와 조각을 분리시키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차별적 요소가 바로 시이다. 창조와 스타일을 구별짓고, 예술 작품과 도구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시이다.(26쪽)  7. 시와 산문  산문의 가장 상위의 형태는 담론이다.  산문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씌어지는 것이다. 말해지는 언어는 산문보다 시에 가깝다. 말을 하는 것은 글로 쓰는 것보다 덜 반성적이며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산문 작가가 되기보다 시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26~27쪽)  산문에서 언어는 많은 의미의 가능태들을 희생시키고 그 중의 단 하나와 동일화를 시도한다.(27쪽)  시인은 결코 단어의 다의성을 거역하지 않는다. 산문과 일상 언어가 강요한 구속으로 불구가 되었던 언어는 시 속에서 원초의 상태를 회복한다 . 본성의 회복은 총체적이어서 의미론적 가치뿐만 아니라 음악적이고 조형적인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말은 농익은 과일처럼 혹은 하늘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불꽃처럼 자신의 내부, 즉 모든 의미들과 암시들을 드러낸다.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 작가는 말을 구속한다.(27쪽)  돌은 조각으로 변형될 때 광휘를 회복한다. 시적 기능은 기술적 조작과 정반대이다. 시적 기능에 힘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시적 창조에서는 재료나 기구에 대한 구속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자유를 부여한다 .(27쪽)  시적 창조에서 시의 재료(언어)는 의미 작용과 의사 소통의 도구이면서 ‘다른 사물’로 변화한다. 다른 사물이 된다는 것은 원래의 사물이 되는 것이다.(27쪽)  8. 다른 예술장르와 시  광채를 발하거나 혹은 불투명한 재료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려서 유용성의 세계를 부정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이미지로 변화시키며 동시에 의사 소통을 위한 특별한 형태로 만드는 시적 작용을 고려한다면, 조형 작품이나 음악 작품도 시로 간주될 수 있다.(28쪽)  그림은 회화적 언어 이상의 어떤 것일 때 시가 된다.(28쪽)  수공예업자가 자신의 도구라 할 수 있는 돌, 소리, 색깔, 말을 이용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는 그 재료들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것들에게 봉사한다. 언어의 봉사자는 그 언어가 무엇이든지 간에 언어를 초월한다.(29쪽)  9. 시의 독서  모든 시편이 갖는 공통점은 참여이며, 이것 없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진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컫는 상태에 참여한다. 그러한 경험은 이런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며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31쪽)  시편을 읽는 것은 시적 창조와 거의 흡사하다. 시인은 이미지, 즉 시편을 창조하며 시편은 다시 독자를 통해 이미지, 즉 시로 태어난다.(32쪽)  *시편은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이다. 시는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32쪽)   
10    시인이란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195  추천:0  2018-10-30
시인이란     홀로 독백하는 외로운 산책자이다   시인이란 숭고하면서도 괴상하고 가련한 악마이며 타고난 채플린이다   사소한 것, 가까이 있는 것, 친근한 것에 대한 미적 향수자이다 즉 일상적 언어가 갖는 비밀스런 호흡이며, 힘이다   하나의 독백 속에 반성과 서정, 노래와 아이러니 산문과 운문이 뒤섞이고 분리되며, 관조하고 또다시 합일된다   그것은 노래의 단절이다 더듬거리는 독백이며, 그것은 침묵의 여백으로 끊긴다   시는 노래의 단절에서 비평의 체계로 변했다 여기에 엉뚱한 이미지와 상투어 같은 말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결국 노래일 수밖에 없으며 포퓰리즘(대중)의 공유재산이 아니라 고독한 자의 사유재산이다                
9    새 천년에 되돌아보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학/ 김은중 댓글:  조회:1450  추천:0  2018-10-27
새 천년에 되돌아보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학   김 은 중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 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옥타비오 파스     I. 시인의 편력―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0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그의 역사적 실존 속에서 파스는 무엇보다 시인이기를 원했다. 끊임없는 편력을 통하여 수많은 주제에 대해 글을 썼고, 전체를 바라보는 형안과 자기 성찰을 통하여 역사의 한복판에서 지식인의 임무를 치열하게 수행했지만, 그는 언제나 시인이기를 원했다. 일관되게 시인이기를 바랐던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새로운 천년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희망과 부정하기 어려운 위기가 복합되어 있는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해 이제 직접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나 그가 지나왔던 사유의 행로를 더듬어가며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몇 가지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적이고 문학적인 편력에 있어서 옥타비오 파스는 ‘보편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많지 않은 시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80년대에 들어와 스페인어 문학권의 노벨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르반테스상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하고 9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경력, 그리고 멕시코의 뿌리에서 자라나 중남미의 줄기로 성장하고 세계적인 꽃을 피운 그의 문학적 편력을 살펴보면 이러한 단정은 수긍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시인에 대한 진정한 인정은 상을 수여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행사가 아니며 “소수의 좋은 독자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는 데 그는 자신의 시를 “거대한 소수의 독자에게” 바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하는 ‘보편성’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구호가 되었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말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탈근대적인 상황에서 파스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가 프랑스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재직하면서 썼던 책 『고독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의 결론 부분에서 읽을 수 있는 그의 직관적이고 과감한 선언이다. 그의 선언은 “오늘날 중남미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全) 인류와 동시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1) 전 인류와 동시대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자생적인 문화의 뿌리를 갖는 모든 민족주의는, 만일 그것이 편협한 우상화가 아니라면, 최종적으로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탐구의 대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제 한 문화적 집단이나 한 국가가 당면한 위기와 기회는 인류 전체의 위기이며 기회라는 의미다. 사라져버린 유위(有爲)의 폐허 앞에서 발레리나 엘리엇이 노래했던 문명에 대한 우울한 반성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내일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특정한 제국이나 문명이 아니라 인류 전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제 모든 문화 유형론은 보편 인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파스의 보편성에 있어서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서구의 어떤 시인보다도 동양적 세계관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The Meeting of East and West)이라는 책에서 노드롭(F. S. C. Northrop)은 현대 세계의 중요한 네 가지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 동양과 서양의 관계 증진이며, 둘째, 미국 문화와 중남미 문화의 동시적 등장이고, 셋째,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산주의적 가치의 동등한 옹호이며, 마지막으로 중세적 가치와 근대적의 가치 사이의 진정한 화해를 들고 있다. 그 중에서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진실성과 성실함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금세기에 들어와 동양적 세계관이 서구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수없이 많으며 동양과 서양의 화해적 만남은 일반적인 조류가 되고 있다.2) 1952년에 인도와 일본을 처음 방문하여 거의 일 년간 머물렀던 파스는 1962년에는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부임하여 약 6년 동안 그 곳에 살았다. 이 기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으며 개인적으로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코르시카 섬 출신의 마리-조 트라미니(Marie-Joe Trimini)를 만나 ‘님’(Nim) 나무 아래서 결혼한 일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파스는 인도가 자신에게 다른 문명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고, 무엇보다도 침묵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회상한다. 예일대학의 교수였던 마누엘 두란(Manuel Durán)이 말한 것처럼 언젠가 파스에 대한 훌륭한 전기가 쓰여진다면 그의 삶과 문학에 있어서 6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로 강조될 것이다.3) 슈펭글러가 지적한 것처럼 다른 문화에 대한 해석이 “정교한 오해의 기술”이라는 한계를 가질지라도4), 동양적 세계관에 대한 파스의 해석학적 접근 방법은 결코 이국적 취향에서 비롯된 얄팍하고 현혹적인 비전에 그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점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불교에서 우리의 전통과 다른 말을 찾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확인하려는 것이다. 서양은 그들 스스로 그리고 자신들의 지적이고 기술적인 방법으로 동양이 이미 이천 년 전에 발견한 것과 유사한 증거를 이제 막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새로운 행위는 동양적 교의에 대한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서구 역사의 편력의 결과이다. 어떤 진리도 배워지는 것이 아니며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대의 세 명의 사상가―비트겐쉬타인,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의 책에서 불교의 사상과 비교하여 그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사유는 동양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적이 없으며 그들 서로간에도 상이한 경향성을 보여주며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언어에 대한 것이었으며 모두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 결론은 모든 말은 침묵으로 용해된다는 것이다.5)   헨리 제임스나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보르헤스의 비평이 서구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주의 깊게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레비스트로스나 탄트리즘에 대한 파스의 언급도 전문가들 사이에 흥미 있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의 지적 명철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실례이다. 어떤 진리도 개념적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자신의 몸으로 터득해야 한다는 파스의 말은 문화적 상대성을 통한 진리로의 접근을 의미한다. 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원칙이 명철한 사고와 계몽적 지성임을 보여주는 언급이다. 많은 평자들이 파스의 글을 로고스중심주의로 해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파스의 계몽적 지성에 대한 옹호는 로고스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섣부른 신비주의나 무질서로의 퇴행을 비판하는 작업의 일환일 뿐이다. 이성의 편협성을 견제하는 힘은 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신비가 아니라 이성을 사용하는 인간의 성숙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스의 관점은 근대적 이성의 명철함과 계몽성에 대한 옹호와 더불어 그가 줄곧 개체적 성찰을 이야기하는 글 속에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두 개의 축은 명철한 비판과 개체적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II.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근대시   II-1. 비판 위에 세워진 근대성   파스의 글이 겨냥하는 곳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경험의 애매한 부분이다. 그러한 애매한 부분에 대한 누락이나 신비화로 인해서 인간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오류를 저질러왔다. 그리고 그가 인정하는 그의 문학의 뿌리는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의 역사적 배경은 근대성이므로 결국 그의 인식의 뿌리는 근대적 인간의 조명에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낭만주의는 문학 운동이었으며 동시에 도덕이고 에로티시즘이고 정치였다. 근대를 성립시킨 것은 종교에 대한 비판이었으므로 낭만주의가 표방하는 것이 종교는 아니었지만 단순한 미학이나 철학을 넘어서서 사유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투쟁하며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방법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민중들에 의하여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헤겔은 몇몇의 친구들과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 헤겔이 이해한 불란서 혁명은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신대륙 발견과 과학 혁명,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과 계몽사상 등의 근대성을 상징하는 사건들의 마지막 국면으로 비로소 인간 역사의 보편론적 인식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간 역사의 보편적 인식이란 바로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가? 인간은 군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 군주에게 신권을 부여한 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인들은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한 근대의 자유의 개념은 전근대적 종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는 전체와의 교감이라는 부분을 희생시킨 값비싼 대가였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낭만주의는 근대성의 소산이면서 근대성에 반기를 들어야 했다.   근대성과 더불어 탄생했으면서도 (근대성에) 반항하는 낭만주의는 (근대의) 비판적 이성을 비판하며 역사의 직선적 시간을 반대하고 역사 이전의 근원적 시간을 옹호하였으며, 유토피아가 내세우는 미래 시간을 비판하고 열정, 사랑 그리고 혈기의 현재적 시간을 지지하였다. 낭만주의는 비판적이며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이성으로 인식되었던 근대성에 대한 중대한 부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적 부정, 즉 근대성의 영역 안에서의 부정이었다. 오직 비판의 시대만이 그런 식의 부정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6)   파스는 근대성을 성립시킨 가장 핵심적 요소는 비판(crítica)이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역시 이러한 근대의 비판 개념을 무시하고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판은 주체로서의 인간을 역사의 중심에 등장시킨 것이며 비판을 통하여 인류는 비로소 근대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낭만주의가 가졌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운명을 인지하지 못한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역설적 출생증명이었다. 모르고 저지른 일에 대한 참회와 뉘우침이 아니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이 낭만주의의 운명이었다. 근대를 탄생시킨 비판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판 역시 또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인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파스의 생각이다.     II-2. 사유의 이가적(二價的) 대비극: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그렇다면 근대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는 낭만주의가 이해하는 근대적 인간 이해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근대적 자유의 획득의 대가로 상실한 전체와의 교감이란 무엇인가?   낭만주의는 거듭해서 근대성에 거역하기 위해서만 근대성과 동거하며 근대성에 융합한다. 그러한 거역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지만 언제나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그 두 가지 방법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이다. 내가 이해하는 아날로지란 우주를 상응의 체계로 보는 비전이며 또한 언어를 우주의 복제(doble)로 보는 비전이다. 이것은 대단히 오래된 전통으로, 문예 부흥기의 신플라톤학파에 의하여 재정비되어 16~17세기의 다양한 비의적(秘義的) 흐름에 전달되었고 18세기의 철학적이고 방탕한 분파들에 자양분을 공급한 다음 낭만주의자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에게로 이어졌다. 비록 지하에 숨어 있기는 했지만 아날로지는 초기 낭만주의 시인들에서부터 예이츠와 릴케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근대시의 주된 전통이었다. 우주적 상응의 비전과 동시에 아이러니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아날로지에 대해 적의를 품은 쌍둥이 자매이다. 아이러니는 아날로지로 엮어진 그물에 생긴 구멍이며 상응을 저지하는 예외이다. 만일 아날로지가 이것과 저것,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활짝 펼쳐진 부챗살이라면, 아이러니는 이러한 상응의 부챗살을 찢어 놓는다. 아이러니는 상응이 빚어내는 화음을 깨고 소음으로 만드는 불협화음이다. 아이러니는 예외, 불규칙함 혹은 보들레르가 말했던 것처럼 기이함(lo bizarro) 등의 여러 가지의 이름을 갖는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의 이름은 죽음―중대한 우연―이다.7)   파스가 파악하는 근대시는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의 이중의 원리에 의하여 규율되고 있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비판적 명철한 비판과 개체의 성찰이라는 두 개의 축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의 원리가 동양의 음양의 원리를 상기시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56년에 발표한 자신의 시론집 『활과 리라』(El arco y la lira)에서 파스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들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이다. 모든 문화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창조로 표현되기에 앞서서 리듬으로 나타나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러한 태도는 중국인들에게는 음과 양이다. 아스테카인들에게는 사박자 리듬이며 히브리인들에게는 이원적(dual) 리듬이다. 그리스인들은 우주를 대립물들의 투쟁과 결합으로 파악했다. 서구의 근대 문명은 삼박자 리듬으로 충만되어 있다”라고 말한다.8)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중심으로 언어와 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혹은 이솝의 새로운 향연』(Claude 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과 서구 기독교 문명, 인도 문명 그리고 중국 문명에 대한 비교 문명론을 논하고 있는 『결합과 해체』(Conjunciones y disyunciones)에서는 이러한 리듬의 가장 보편적 형태는 이박자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원성, 즉 이가적 사유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며 문명들을 구별짓게 하는 것은 이 기본 짝을 결합하는 방법―삼가적, 사가적, 순환 구조 등―이다.9)   서구의 근대성은 삼박자를 역사의 기본 리듬으로 생각했으며 이러한 삼박자의 리듬이 의지하고 있는 시간관은 묵시록적 시간관의 단선이며 직선이다. 근대성을 두 세기 이상 경험한 현시점에서 이러한 시간 개념은 오류이며 근대성의 “3박자 사관의 오류는 리듬 구조의 원초성과 가치 구조의 인위성을 혼동한데 있다.”10) 이러한 3박자 사관이 갖는 인위론적 가치 조작의 토대는 희랍과 히브리의 이박자 사관인데 이것이 음양의 이박자와 다른 것은 그들의 이가적 사유는 상대적(相對的)이고 상극적(相克的) 실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극을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실체로 이해할 때 이러한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제3의 실체가 따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체론적 이가와 인위적 삼가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서양은 존재와 비존재(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을 그었다.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태초의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낸 최초의 구분이 서양적 사유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개념 위에 ‘확실하고 분명한 관념들’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서양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 이러한 관념의 건축물은 그런 원리를 통하지 않고 존재를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를 불법적인 것으로 처단했다. (...) 서양의 형이상학이 마침내 유아론(唯我論)에 닻을 내리고 만 사실을 이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유아론을 깨기 위해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그의 시도가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견고한 변증법의 유리성은 결국 거울의 미궁임이 드러났다. 훗설은 문제를 새롭게 설정하고 “사물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훗설의 관념론 역시 유아론으로 끝났다. (...) 서양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즉 이중적 의미의 탈선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즉, 인간은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말았다. 서양은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11)   근대성의 실체론적 이가와 인위적 삼가에 대해서 낭만주의는 생성론적 이가를 옹호했다. 파스에 의하면 서구가 새로이 시작하는 방법은 바로 생성적 이가에 대한 재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가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를 뜻하며, 생성적이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의 역동적이며 상대적(相待的) 관계를 뜻한다. 아날로지는 총체를 규율하는 원리이며 아이러니는 개체로서의 근대적 인간을 규율하는 원리이다. 이러한 사유의 이가적 대비극은 대비극에 놓이는 개념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대비극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즉, 상대(對)적이고 상극(克)적이냐 아니면 상대(待)적이고 상보(補)적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파스는 이런 생성적이고 역동적인 이가적 원리에 대해서 대단히 일찍 깨달았다. 십자가의 성 요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1942)에서 발표한 「고독의 시와 참여의 시」(Poesía de soledad y poesía de comunión)라는 글에서부터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결합과 해체』에서는 언어의 원리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술어들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립성 혹은 유사성이다. 지나친 대립성은 관계를 형성하는 술어들 중의 하나를 제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지나친 유사성 역시 관계를 망가뜨린다. 그러므로 술어들 사이의 관계는 과장된 유사성이나 과장된 대립성에 의해서 언제나 위협받고 있다. 술어를 구성하는 것 중의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우세하면 양자 사이의 관계에 불균형―억압 혹은 이완―을 초래하게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양자 사이의 완벽한 동등함은 중립 상태를 유발하고 결국은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이상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술어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는 첫째, 양자 사이의 미세한 힘의 불균형을 필요로 하며 둘째, 서로간에 상대적인 자율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가 승화(문화)의 원천이며 자발성(창조)을 가지고 문화를 개간해 가는 가능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한된 상대적 자율성이 곧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술어 사이의 관계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움직임과 정지 사이의 역동성이 문화에 생명력을 부여하며 생명에 형태를 부여한다.12)   이러한 이가적 대비극은 근대적 비판과 비판에 의하여 추방당한 종교적 총체성에도 적용된다. 비판은 총체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총체성을 달리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아이러니와 아날로지의 관계가 보여주듯이 비판 속에는 총체성이 들어 있고, 총체라는 개념은 비판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생-존 페르스의 『아나바시스』에서 불란서의 모더니즘을 발견하고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영, 미의 모더니즘을 발견한 (양자의 모더니즘은 중남미의 모데르니스모와 다르며 이와 구분하기 위해서는 전위주의라고 함이 더 적당하다) 파스는 종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던 총체적 비전을 ‘기독교적’ 신의 개념이 탈색된 자연의 신성에서 찾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가치가 기독교적인 사회에서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파스가 인식한 자연은 자연스러움, 즉 “스스로 그러함”이다. “스스로 그러한 실재”, 즉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우리를 받쳐주며 살찌우는 동시에 삼켜버리는 실재란 그것을 담으려는 상징적 체계보다 더 풍요롭고, 더 역동적이며, 더 생생한 무엇이다. “스스로 그러함”이 가지는 풍요롭고 거의 공격성에 가까운 자발성을 인간의 관념적 완고함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의 가장 매혹적인 특성인 자연스러움을 훼손시킨다. 만질 수 없는 스스로 그러한 생생한 실재를 대하는 인간의 본래적인 반응은 놀라움이며, 놀라움은 그러한 실재를 신성화시키고 매혹 혹은 공포의 감정이 인간으로 하여금 실재와의 합일의 상태를 부추기는 것이다. 이러한 예찬의 행위의 뿌리는 사랑이며 사랑이란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고 동시에 자신을 잊고 “타자” 속에 존재를 용해시키고 합일하려는 열망이다. 파스는 22살의 젊은 나이에 쓴 시 「인간의 뿌리」(Raíz del hombre)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모든 목소리들이 불타오르고 입술들이 재가 된다. 가장 높은 꽃봉오리에 밤이 멈추어 있다.   이제 아무도 너의 이름을 모른다. 비밀스러운 너의 기운이 부동의 바다 같은 정지된 밤과 별을 찬란하게 성숙시킨다.   사랑하는 이여, 모든 것은 입을 다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이글거리는 목소리 앞에. 사랑하는 이여, 모든 것은 고요하다. 이름도 없이, 말을 벗어버린 밤 속의 그대여.13)     파스가 노래하는 사랑에는 개체적 존속을 부추기는 본능(Eros)과 죽음의 본능(Tanatos), 즉 영혼의 중력이 이끄는 상실의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모순적 인간을 구성하는 양면이며 이것 역시 아이러니와 아날로지의 이가적 사유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II-3. 인간의 본성과 글의 본성   예술과 문학, 정치와 사회 그리고 기타의 주제들에 대해 쓰여진 30여권이 넘는 파스의 평론집들과 수많은 시작품들은 상반된 영역을 관통하여 서로의 힘을 견제하는 거대한 자력장(磁力場)을 형성한다. 그 자력장의 한 극은 명철한 근대적 비판에 의해서 형성되는 기호들의 단절적 형상이며 다른 한 극은 망아적(忘我的) 참여이다. 이 말을 쉽게 하자면 한 극은 비평이요, 다른 한 극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시의 뿌리를 낭만주의에 두고 있는 파스가 파악하고 있는 근대시는 언어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언어에 대한 비판은 곧 바로 현실에 대한 가장 과격하고 통렬한 형태의 비판이 된다. 근대시는 시이며 동시에 시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것이다. 1974년에 옥타비오 파스는 『흙의 자식들』(Los hijos del limo)과 『문법적 원숭이』(El mono gramático)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른 두 권의 책을 거의 동시에 출간하였다. 『흙의 자식들』은 스페인어로 출간되기 이전에 영어 번역본이 먼저 나왔고, 『문법적 원숭이』는 불어로 먼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흙의 자식들』은 서구의 시와 정치 그리고 그것이 겨냥하고 있는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문법적 원숭이』는 힌두교 문명의 신성에 대한 글이다. 전자는 비평적 담론이며, 후자는 산문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매우 피상적인 것이며 이 두 책은 깊숙한 상응의 관계에 있다. 양자의 저술을 자극한 근간은 언어와 의사소통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변증법적 투쟁이다. 즉 한쪽 극에는 자의적이지만 연상 관계에 있는 기호들의 불연속적인 표상으로서의 언어가 있고, 또 다른 한 극에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수행하는 의사소통이 있다. 그리고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로부터 글(시)이(가) 탄생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호들이 또 하나의 기호인 인간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의문부호이며 동시에 하나의 기호인 인간이 기호들―언어―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의문부호이다.14)   글의 본성에 관한 파스의 위의 언급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기호들의 순환―기호/인간에서 기호들/언어로의 방향 전환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하는―이며 이러한 순환의 중심축으로서의 의문부호(의미한다는 것)이다. 파스가 보는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의 관계의 역사”이다. 기호/인간에서 기호들/언어로, 그리고 다시 기호들/언어에서 기호/인간으로의 순환이 인간의 역사라는 것인데, 여기서 사유는 말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유가 말보다 먼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유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소쉬르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란 자의적이고 서로간에 연상 관계에 있는 기호들의 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언어를 사물의 세계(자연)와 의사소통시키는 것이 인간이라는 기호가 던지는 질문이다. 자연에는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적어도 인간이 자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식의 의미는 없다는 말이다. 파스에게 있어 이러한 글의 본성을 규율하는 원리는 곧 인간의 본성을 규율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프톨로메우스에게 바치는 시 「親交」(Hermandad)에서 파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찰나를 사는 인간이고 밤은 거대하다. 하지만 나는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거기 별들이 글을 쓴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건 나 역시 글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풀어쓴다.15)       II-4. 근대적 자아의 편력   플로베르는 “예술가가 만드는 모든 것은 진실하다”고 말했는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혹은 문화적 영웅으로서의 인간에 있었다. 데카르트 이래로 적어도 서구의 전통에 있어서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이성적 자아였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이 역사의 주체로 들어서면서 아날로지적 우주관은 단절되었다. 이러한 단절은 말과 사물 사이에 존재했던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제 말은 사물들의 진정한 실재를 표상하지 않으며 사물들은 투명성을 잃어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중세의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알레고리의 형식은 빛을 잃고 근대 세계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근대 소설의 효시로 꼽는 이유도 말과 사물의 의사불통이 가져온 선택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의 말을 들어보자.   사물과 말 사이의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양자 택일이었다. 돈키호테가 미치지 않았다면 세상이 미친 것이며, 돈키호테의 언어가 잠꼬대라면 그는 세상에서 추방되어야만 한다. (...) 근대 세계는 두 번 째의 해결을 택했고 그 결과 돈키호테는 광기에서 회복되어 시골 양반 알론소 키하노의 현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둔다. 세상이 비실재를 표상하는 언어의 전형인 돈키호테를 추방했을 때 우리가 상상력, 시, 신성한 언어, 다른 세상의 목소리로 부르던 것들도 함께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비일관성, 소외, 광기 등의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16)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적 주체의 등장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상응을 단절시킨 것인데, 이러한 단절은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의 상응도 무너뜨렸다. 파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밀도 있게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시와 종교는 같은 샘에서 솟아 나왔으며 그것들의 기능은 인간을 변화시켜 본래면목을 보게 하는 것이다. 파스의 말은 달리 설명하면, 시적 증언은 우리에게 이 세계 안에 있는 다른 세계 즉, 이 세계이면서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감각들은, 그들의 기능을 잃지 않고, 상상력의 조력자가 되어 우리에게 말하여지지 않은 것을 듣게 하고 느낄 수 없는 것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파스는 “인간의 본래적 행위는 시이며 종교들은 시적 언어의 법전화이다. 거의 모든 위대한 종교적 텍스트들―베다, 성경 혹은 코란―에는 본래 말의 계시가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서구의 모든 문학 작품의 위대한 법전이라는 윌리암 블레이크의 언급과 인생의 말년에 『위대한 법전(Great Code)』이라는 책을 쓴 노드롭 프라이의 의도에서도 공감대를 찾을 수 있다. 블레이크가 그랬던 것처럼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도는 종교를, 더 정확하게는 종교적 신성함을 시적인 관점에서 끌어안는 것이다. 시의 관점에서 바라본 신성함의 경험을 파스는 다시 이렇게 설명한다.   신성(神聖)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은총이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를 열어제치는 것으로 변화한다.17)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다. 이때 “타자성”이란 유한하며 변화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타자화될 때 비로소 인간은 실현되고 충족된다. 타자화될 때 나와 타자가 분리되기 이전의 본래적 존재를 회복하는 것이다. “본래 일체 중생이 부처였는데 망상에 사로잡혀 그를 잊었으니 딱하다. 내가 방편을 써서 그들로 하여금 본래 부처임을 알게 하리라”는 석가모니의 사자후와 동일한 맥락이다. 그런데 여기서 파스가 강조하는 것은 망상으로 중생됨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태어남의 원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됨의 원초적 조건, 즉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타자화의 욕구는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합일을 향한 열망과 개체적 소유의 욕구, 존속 본능과 상실 본능 사이의 불균형 상태에서 유발되며 이는 창조적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무한성의 신 앞에서 결핍으로 인식되는데 바로 이 결핍이 예술적 창조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멕시코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비평을 겸하고 있는 후안 가르시아 폰세는 이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에 두 개의 기본적인 흐름이 나란히 존재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평행하는 두 개의 흐름 안에서 시인은 작품을 창조하고 자신을 세워 나가며 그것을 운명으로 시인한다. 하나의 흐름은 인간의 삶에서 타락과 은총의 부재를 아는 것인데 이러한 인식은 뿌리 뽑힘의 감정, 세상에서 떨어져 나옴 그리고 본래의 순진함을 상실한데서 오는 소외의 느낌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은, 파스가 이러한 타락의 인식에 맞서는 자세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되는 것인데, 예술적 창조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소외되어 있는 세계를 언어의 힘을 빌어 세계를 재구성하고 재 정렬하여 우리와 화해시키는 것이다. 후자의 흐름은 전자에서 비롯되는데 왜냐하면 타락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파스는 결코 기독교적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어디에도 잃어버린 신앙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지 않고 그러한 신앙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 타락이란 본래 가지고 있었으나 빼앗겨버린 재능이 말소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총은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에서 본래 부재한 것이다. 인간은 혼자이며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조건의 최종적 본질이기 때문이다.18)   파스는 종교적 신성(함)을 언어적 창조를 통하여 껴안으려 한다. 파스가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언어의 전능함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최종적 본질을 철저히 수긍하기 때문이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노자 도덕경 1장을 인용할 만큼 실재의 스스로 그러함과 언어의 한계성을 잘 알고 있다. 언어와 생생한 실재(道)의 관계에 대한 파스의 인식은 이중적이다. 한 쪽 극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고 다른 한 쪽 극에는 오로지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실재가 있는 것이다. 고로 언어에 대한 파스의 관심은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말을 낚는 그물은 말로 만들어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파스에게 언어는 초월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나 이 때의 초월은 “이데아적이거나 하늘나라에로의 초월이 아니라 거꾸로 현상에로의 복귀를 뜻한다.”19) 그의 시 「수사학」(Retórica)을 읽어보자.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 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이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20)     흐르는 물이란 道이며 도는 길이고 길은 어디론가 흐른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하지 않던가(上善若水)! 위의 시가 암시하는 것은 ‘수사학’이란 의미의 투명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말의 쓰임의 상선(上善)이다. 의미의 투명성이란 현상의 총체로서의 도에로 끊임없이 돌아오는(흐르는) 것이며, 현상의 총체란 말이 가지는 본래적 다의성(多意性)이다. 이때 시인은 무엇인가?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말도 괴로워한다. 인간처럼 말도 착취당하고 분규에 휘말리고 거짓과 중상모략에 시달린다. 시인은 괴로워하는 말을 해방시키는 것이며 말에게 본래의 순수와 신뢰와 천진함을 되돌려주는 사람이다. 파스가 「시」(La poesía)라는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인은 “허상의 가면을 벗기고 가장 예민한 부위에 창을 꽂아 분출하게 하는 것”이다.21) 이러한 시인의 작업은 상처 입은 언어에 향유를 발라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료는 역설적으로 일상의 언어를 부수는 과격한 파괴를 뜻하기도 한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뒤집어엎어라,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라(비명을 질러봐, 더러운 년들아), 두들겨 패라, 입에 단물을 마구 들이 부어라, 풍선처럼 부풀려서 터뜨려버려라, 피와 골수를 마셔버려라, 말라비틀어지게 해, 거세해버려라, 짓밟아버려, 멋진 수탉처럼, 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 털을 벗겨버려라, 창자를 꺼내버려, 투우처럼, 숫소처럼, 질질 끌고가라, 가르쳐준대로 해, 시인아, 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22)     언어에 갖는 파스의 관심은 취향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절되기도 하는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전적으로 참여시키는 동기에 의해 선택하는 결단의 문제이다. 언어에 생긴 상처는 인간에게도 세상에게도 피를 흘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반응은 온전한 인격의 결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 앞에 선 시인의 결단은 무엇인가? 시인의 결단은 죽음 다음에 오는 언어의 부활이다. 그리고 언어의 부활은 생생한 실재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사명과 결단은 말과 생생한 실재 사이의 미세한 불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언어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통하여 총체를 포착하려고 시도하지 않지만 총체의 포착은 언어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주체와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가능해진다.     III. 탈근대적 근대시   파스는 1956년에 그의 시론집이라 할 수 있는 『활과 리라』 초판을 출간하였는데 11년이 지난 1967년에 초판을 개정 증보하여 이판을 출간한다. 초판과 이판 사이에 생긴 중요한 변화는 언어에 대한 파스의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초판에서 파스는 앞서 말한 문화적 영웅으로서의 시인의 창조성을 강조했다. 파스는 시는 자유로운 창조 행위이므로 창조적 마음이 없으면 시도 없고, 시적 창조는 단지 인간의 자유의 실천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자유의 개진이며 선언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구조주의의 영향과 인도에서의 경험이었다.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의 지적을 살펴보자.   이제 파스에게 동양은 서구의 동양학 전문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얻은 직관이나 현혹적 비전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이 말은 파스가 이제 더 이상 서양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예전보다 더 서양적이다. 그러나 동양은 이제 서양 사람으로서의 그의 비전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동양 문화를 통해서 그는 서구 세계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23)   개정판에서 파스는 시인의 영웅적 역할 대신에 구조주의와 동양적 경험의 영향을 받아 언어의 새로운 역할을 강조한다. “말하는 것과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대화는 순전한 말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마치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척하는 걸 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모두들 언어의 가장 특이한 점을 모르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란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이다”24)는 노발리스의 언급에 파스도 동의한다. 그는 “시는 무엇을 지칭하는가?”(¿Qué nombra la poesía?)라는 글에서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시는 외부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 말의 지시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 이렇게 시의 의미가 시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면 시에 있어서 의미의 문제가 명백해진다. 다시 말해, 시의 의미는 말이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이 지시하는 다른 말이다.”25) 앙드레 브르통에 대한 언급에서는 “진실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즉 영감을 받은 사람은 단지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그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언어이다”라고 말한다.26) 시인은 말을 부리고 조종하는 자가 아니라 말에 봉사하는 자이다. 창조적 행위의 소관은 시인의 손에서 언어로 자리를 옮겨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는 “시는 시인의 희생의 대가로 완수된다”고 말한다. 근대에 들어와 역사의 중심을 차지한 이성적 주체가 이제 언어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후퇴는 전근대적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는가? 또 이것이 시인에게만 국한된 상황이라면 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제 풀에 꺾이고 근대시는 근대성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일 이것이 시인이 언어 앞에 백기를 든 것이 아니라면 이제 시인은 어떻게 세계의 중심에 서서 세계를 움직여나가는 동인(動因)이 될 것인가? 파스가 구조주의와 동양적 세계관에서 새롭게 인식한 것은 침묵과 사변(contemplación)의 개념이다. 근대적 자아의 개념에 근본적인 회전을 가져온 것이 바로 이 침묵의 개념이었다. 근대적 자아 개념에 대해서는 초현실주의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이미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특히 불란서 주재 멕시코 대사관에 말단 외교관으로 머무는 동안 그는 벵자멩 페레(Benjamin Peret)의 작품에서 자아와 세계,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사이의 오래된 대립을 해소하는 방법―초현실주의 시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힌 문제이지만, 그들은 자동 기술법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려고 한 점에서 페레와는 다르다―을 발견한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글에서 파스는 그가 페레의 책에서 발견한 “숭고한 자아”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햇빛에 반사된 폭포수처럼 수많은 영롱한 물방울로 흩어지는 자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임을 발견한다.   이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서구의 시는 자아란 허상이며 감각과 사유 그리고 욕망의 덩어리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발견한다.27)   파스가 바라보는 인간은 자기 초월의 욕망으로 고통받는 존재이다. 인간의 숙명은 부정과 긍정의 팽팽한 긴장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를 긍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아의 부정은 개체의 소멸이 아니라 개체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존재로서 설정된 자아 개념을 버리고 열린 개체로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우주 속에서 주체와 객체가 교차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파스가 초현실주의를 통하여 배운 것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28) 시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은 손이기도 하다.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29)   수동성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완전히 수동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수동성의 상태에는 실상 극도의 능동적 의지가 필요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많은 의지를 필요로 하지만 의지의 절반은 의지를 가라앉히는데 사용해야한다. 시는 계획적이고 의지적인 의식 행위의 산물이며 동시에 잠재 의식 혹은 전의식 혹은 무의식의 과정의 산물이다. 시인의 수동성은 적극적 수동성이며 결단을 통한 수동성이다. 결단을 통해서 자신을 비우고 언어가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장 자리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30) 그래서 시인은 욕망을 버리고 말(言)의 길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길을 가는 사람은 시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움직임에 동인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풍경은 늘 제자리에 있지만 시인이 길을 감으로써 늘 바뀌어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은 둥그니까 시인이 서 있는 자리는 언제나 중심이다. 그러나 시인은 늘 길의 중간에 있다. 그가 가는 길의 목표가 어디든지 간에 그는 늘 새로운 풍경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는 십자로에 있지 않다. 길을 선택하는 것은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의 중간에 있다. 나를 어디로 데려 가는 걸까? (...) 나는 중간에 있다, 새장 속에 갇혀, 이미지에 붙잡혀. 시작은 멀어지고 끝은 사라진다.   끝도 시작도 없다. 나는 멈추어 있다, 끝나려는 것도 시작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발도 머리도 없다. 나는 내 속에서 맴돈다 내가 만나는 것은 똑같은 이름들, 똑같은 얼굴들일 뿐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한다.31)     파스가 말하는 시인이란 형식의 완고함과 이미지의 추상성을 등(等)거리에 두고 마음을 놓은 자이다. 마음을 놓은 자는 방관자가 아니라 우주 만물에 이끌림을 느끼는 자이다. ‘언제나 길의 중간에 있음’은 절망이며 동시에 희망이다. 왜냐하면 길의 끝에 도달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길이 품고 있는 모든 가능성에의 열림을 동시에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시인의 마음을 군자의 마음에 비유해도 좋을까? 군자는 (어떤 집단에) 조화되지만 그렇다고 같아지지는 않는다(君子和而不同). 군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세상을 소요하며 이따금씩 몇 마디 말들을 두런거린다. 그는 혼자서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가 되며 시는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시는 부정과 긍정의 팽팽한 양극의 긴장을 한 순간 둥근 화해의 원으로 닫아놓는 것이다. 파스가 일본의 단가와 하이쿠에서 확인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시적 경이로움과 일상의 단조로움의 교차이다. 일상의 단조로움은 시적 비상을 늘상 지상으로 추락시키지만 시인의 편력은 천천히 대지에 뿌리를 내린다. 실상 시를 통한 언어의 초월은 세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시간의 부챗살이 접히고 이미지가 그림자를 거두어드릴 때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부유(浮遊)한다 죽음에 둘러싸여서, 기지개를 켜는 을씨년스러운 밤의 위협 속에, 가면을 쓴 끈질긴 죽음의 뜻 모르는 소음의 위협 속에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스며든다, 움켜진 주먹처럼, 안으로 안으로 익어 들어가 마침내 자신을 마시고 흘러내리는 과즙처럼 불투명한 순간은 둥그렇게 닫히고 안으로 성숙하고, 뿌리를 내려, 내 안에서 자라나, 나를 온통 점령하고, 나는 무성한 잎새들의 두런거림에 쫓겨난다, 나의 사유는 그 나무에서 노래하는 새일 뿐이다, 나무의 은빛 수액이 나의 핏줄을 타고 돈다, 정신의 나무, 무르익은 시간의 과일들.32)     시는 무르익은 시간의 파편이다. 우주는 파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사는 생성하는 실재를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주는 낱알로 흩어진다. 그 중 하나의 세상이 땅에 떨어져 씨앗으로 싹트고 말들이 고동친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의 맥박을 듣는다. 모래 시계의 수수께끼를 듣는다.” 우주의 영원한 시간과 파편 속에 숨쉬는 생생한 순간이 수렴되는 공간으로서의 시는 언어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두 개의 극단이 역동적 균형을 유지하는 본래적 자연의 속성이다.     모든 것은 門이다 모든 것은 다리(橋)이다 지금 우리는 피안으로 걸어간다 기호들의 강이 흘러가는 천체들의 강을 바라본다 그들은 포옹하고 헤어지고 다시 껴안는다 그들은 서로 격정의 언어로 말한다 그들의 투쟁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창조이며 파괴이다 밤이 열린다 거대한 손 기호들의 성좌 세기들 세대들 시대들 글 노래하는 침묵 누군가 말하는 음절들 누군가 듣는 말들 투명한 石柱들의 回廊 울림들 부르는 소리들 표적들 미로들 순간이 깜박인다 그리고 말한다 무언가를 듣는다 눈을 떴다 감는다 물결이 일어서고 무언가를 예비한다33)     파스에 의하면 글은 변화하는 공간이며 끊임없이 관계의 망을 짜는 기호들의 총체이다. 관계의 망을 짜고 풀고 다시 짜는 역동적 작업에서 예비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침묵이다. 말 뒤에 오는 침묵이다. 수많은 고통스러운 편력 뒤에 오는 잔잔한 미소 같은 침묵이다. 말은 침묵을 향해 열리고 의미는 무의미를 향해 열린다. 시는 끊임없이 타자성을 향해 열려 가는 길이며 이러한 타자성과의 만남을 통하여 존재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인데 여기서 파스가 발견한 것은 시의 목표는 곧 길이라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인도 시도 언제나 길 중간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길의 중간이라는 뜻은 시는 말과 침묵의 수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詩)는 말(言)이며 도량(寺)이다. 글은 글이 쫓아낸 의미의 탐색이다. 탐색의 끝에서 의미는 소산하고 글자 그대로 무차별하고 무분별한 실재가 우리 앞에 드러난다. 이러한 실재 앞에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글의 이중의 움직임 즉, 의미를 향한 길과 의미의 소산이 남을 뿐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글은 쓰여지면서 지워지고 부서진다. 끝은 없고 모든 것은 영원히 다시 시작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결코 말을 끝마치지 못할 것을 끝없이 말하는 것이며 언제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의미의 탐색은 의미 저 편에서 의미를 해체하고 의미를 부수는 실재의 등장으로 끝난다. 시는 출현의 장소이며 동시에 사라짐의 장소이다.     말하는 것: 행위하는 것   로만 야콥슨에게   1.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사이에, 침묵하는 것과 꿈꾸는 것 사이에, 꿈꾸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 사이에, 시. 그렇다와 아니다 사이를 미끄러져 간다: 시가 말하는 것은 내가 침묵하는 것이고, 시가 침묵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며, 시가 꿈꾸는 것은 내가 잊은 것이다. 시는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하는 것이다. 시가 행위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시는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듣는다. 그것이 실재이다. 그리고 “그건 실재야”라고 내가 말하자마자 사라진다. 그래서 더 실재일까?     2. 만질 수 있는 관념, 만질 수 없는 말: 시는 있음과 없음 사이를 오고 간다. 그것들의 비추임을 짜고 다시 푼다. 시는 종이 위에 눈(目)을 뿌리고, 눈에는 말(言)을 뿌린다. 눈들은 말하고, 말들은 바라보며, 시선들은 사유한다. 생각을 듣고, 말하는 것을 보고, 관념의 몸을 만진다. 눈들은 눈을 감고, 말들은 열린다.34)       근대성에 대한 파스의 비판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로의 낭만적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근대성의 편력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이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근대성의 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자기 성찰과 인간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성찰과 문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근대성이 세운 명철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관조적 자기 비판을 수행하는데서 완성된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의 작품에서 시와 담론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상호 삼투한다. 이성적 담론이 적절한 방법으로 질서의 세계에 거주하는 길을 탐색하도록 조언해준다면, 시적 느낌은 이러한 질서의 세계를 투명하게 한다. 비판의 기능은 객관적 실재에 도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내세운 모든 그릇된 시도들을 경계하는데 있으며 동시에 신비주의적 이상주의에 의탁하는 것 또한 거부한다. 탈근대적 비판은 ‘있음’(여기서의 있음이란 존재론적 유(有)가 아니라 관계의 양상이다)과 ‘없음’(없음 또한 존재론적 무(無)가 아니라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빔(虛)이다) 사이에 위태롭고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를 유지하는 중용론적 자세이다. 이러한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격리되고 고립된 자아가 아니고 역사의 미궁 속에서 길을 잃은 미아도 아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전체의 부분임을 깨닫는 것이며 우주의 숨결을 느끼는 맥박임을 깨닫는다. 또는 파스가 말한 것처럼 “무지(des-conocimiento) 즉, 존재가 무인 것을 알면서 의미를 존재 속에 용해시키는 순간”35)임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IV. 문명화된 공존의 새 천년을 위하여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이곳 저곳을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뿌리는 견고하게 대지에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36) 파스는 글쓰기를 유혹하는 두 개의 힘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하나는 당대적(當代的)이고 현장적(現場的)인 가치를 내세우는 역사이며, 또 다른 하나는 초월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는 진리다. 역사와 진리가 상대방을 배타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도 문명도 한꺼번에 절름발이가 된다.     역사와 진리를 소통시키는 다리인 시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않는다. 시는 움직이면서 제자리에 있고 제자리에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37)     왜곡된 세상을 곧게 하고자 시도했던 근대의 비판이 또 다른 왜곡을 초래하는 것을 역사의 한복판에서 지켜보았던 파스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완전무결함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고 말했다.38)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겸손함이란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만 매달려왔던 근대인들에게 또 다시 가치의 문제를 일깨워주는 자기 성찰의 씨앗이다.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며 “비어 있음으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깨달음이다.39) 시간의 경계는 다분히 자의적인 설정에 불과하지만 유한한 생명을 갖는 인간에게 새로운 시간의 경계는 희망과 불안의 양면성을 내포한다. 새로운 천년의 경계에서 근대성에 대한 검증은 근대적 인간과 문명에 대한 총체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화해, 종교간의 화해, 삶과 지식의 화해 등은 새로운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1998년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옥타비오 파스는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에 대해서 밀도 있는 사유를 진행시켰다. 그는 평생에 걸친 편력의 과정을 통해 상관적 세계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주체성이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화해하는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 속에서 근대적 인간과 근대적 문명의 근원적 형성 원리를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옥타비오 파스는 생성적 이원론의 시각에서 세계를 파악한다. 전통과 전통에 대한 비판, 자아와 타자, 동양과 서양, 이성과 감성 등은 세계를 구성하는 이가적(二價的) 구성 요소들이다. 이가적 요소들은, 그것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생명을 유지하는 미세한 불균형의 원리 속에서 서로 길항한다. 다시 말해 생성적 세계는 두 힘 사이에 작용하는 미세한 불균형 상태를 유지하면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인정한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며 언어의 존재 조건이다. 그가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논의에 접근하는 방법론 역시 동일한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파스에게 역사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생명의 원리를 성찰하는 시험의 장소이다. 그래서 그는 너와 나를 가르는 모든 인칭대명사가 사라지고 인간의 문화가 우주의 생성 원리에 순응할 때 역사는 완성된다고 말한다. 존재가 동일성과 고유성을 고집하지 않고(無自性), 역사가 배타적인 단일한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을 때(不自生)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다만 그는 언제나 정체성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넘나들며 정체성의 영토화된 사고와 행동을 탈영토함으로써 끊임없는 생성적 현실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새로운 시간의 경계선 앞에서 우리가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 문헌   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 통나무, 1986) ______, 『아름다움과 추함』 (서울: 통나무, 1987) ______, 『절차탁마대기만성』 (서울: 통나무, 1987) 노자, 『도덕경 (서울: 통나무, 1989) 마테이 칼리네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서울: 시각과 언어, 1994)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서울: 솔, 1998) Duran, Manuel, "La huella del Oriente en la poesía de Octavio Paz", en Octavio Paz, Edición de Pere Gimferrer (Madrid: Taurus) García Ponce, Juan, "La poesía de Octavio Paz", en Aproximación a Octavio Paz, Edición de Angel Flores (México, Joaquín Mortiz, 1974) Novalis, Fragmentos (México: Juan Pablo Editor, 1984) Octavio Paz, Edición de Pere Gimferrer (Madrid: Taurus, 1982) Paz, Octavio, El laberinto de la soledad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 2ª ed., 1959) ____________, Claude 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 (México: Joaquín Mortiz, 2ª ed., 1969) ____________, Conjunciones y disyunciones, (México: Joaquín Mortiz, 1969) ____________, Las peras del olmo (Barcelona: Seix Barral, 1971) ____________, El siglo y el garabato (México: Joaquín Mortiz, 1973) ____________, Los hijos del limo (Barcelona: Seix Barral, 2ª ed., 1974) ____________, Corriente alterna (México: Siglo XXI, 8ª ed., 1975) ____________, La otra voz (Barcelona: Seix Barral, 1990) ____________, Obras poética (1935~1988) (Barcelona: Seix Barral, 1990) Rodriguez Monegal, Emir, "Relectura de El arco y la lira", en Revista Iberoamericana, Vol XXXVII, Núm. 74 (Pittsburgh: Universidad de Pittsburgh, 1971) Schärer-Nussberger, Maya, Octavio Paz: Trayectorias y visiones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 1989)     ======================================================================================     태양의 돌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순간 하나만이 이 밤을 되찾고, 꿈 하나에 대항하며 모아 놓은 이미지들을 꿈꾸며, 꿈에 대항하며 모질게 조각된, 이 밤의 허무, 글자글자마다 일어선 맥박을 뽑아 버린 순간만이, 한편 바깥에선 시간이 풀려져 내 영혼의 문들을 부순다 잔혹한 시간표를 지닌 세계, 다만 순간 하나 한편 도시들, 이름들, 맛들, 살아 있는 것이, 내 눈먼 이마에서 허물어진다, 한편 밤의 괴로움 내사고는 고개를 수그리고 내 해골, 이제 내 피는 좀더 천천히 걸어간다 이제 내 치아는 느슨해지고 내 눈은 흐려지고 하루들과 연도들 그 텅빈 공포들이 쌓여간다, 한편 시간은 그의 부채를 접는다 이제 그 이미지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순간이 가라앉아 떠돈다 죽음에 둘러싸여, 밤과 그 음산한 하품에 위협 받고, 질기고 가면 쓴 죽음의 아우성에 위협 받고 있다 순간이 가라앉아 흡수된다, 주먹만한 크기로 닫힌다, 자신의 내부를 향해 익어가는 과실 하나처럼 자신에 입맞추며 흩어진다 이제 내부를 향해 무르익는다, 뿌리를 내린다, 나의 내부에서 성장한다, 모두가 나를 차지 한다 몽롱할 정도로 무성한 잎새들이 나를 몰아낸다, 나의 사고들은 다만 그 새들이다, 그의 수은이 내 혈관들, 정신의 나무, 시간의 맛난 열매들을 순환한다,     오! 살아가기 위한 삶과 이미 살고 있는 삶, 하나의 큰 파도로 바뀌어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물러나는 시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라져가는 다른 순간에서 말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초석과 돌멩이의 오후 눈에 보이지 않는 칼들로 무장한 오후를 마주보며 해독할 수 없는 붉은 문자 하나가 나의 피부에 글을 쓰고 그 상처들은 하나의 불꽃옷처럼 나를 덮는다, 나는 자신을 소멸함이 없이 불탄다, 나는 물을 찾는다, 이제 네 눈망울에는 물이 없다, 돌이 있다, 이제 네 가슴, 네복부, 네허리는 돌로 되어 있다, 네 입에선 먼지맛이 난다, 네 입에선 썩어 버린 시간맛이 난다, 네 육체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이다,     반복되는 거울들의 회랑 목마른 자의 눈동자,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랑, 이제 너는 무작정 내 손을 잡아끌고 저 끝이 가물가물한 통로로 원의 중심부를 향해 데려가서 버티고 서 있다 횃불 속에서 얼어붙은 하나의 광휘처럼, 껍질을 벗기는, 매혹적인 빛처럼 사악한 자를 위한 교수대처럼, 채찍처럼 탄력 있고 달과 짝을 이룬 하나의 무기처럼 화사하게, 이제 날을 세운 네 단어들이 내 가슴을 파내고 나를 황폐하게 하고 텅비게 한다, 하나씩 하나씩 너는 내게서 기억들을 뽑아낸다, 나는 내 이름을 잊었다, 내친구들은 돼지들 사이에서 꿀꿀대거나 벼랑에 걸친 태양에 잡아먹혀 썩어간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길다란 상처 하나뿐, 이미 아무도 거닐지 않는 동굴 하나, 창문들 없는 현재, 사고가 돌아와, 되풀이되고, 반사된다 이제 그 동일한 투명 속에서 사라진다, 눈 하나에 의해 옮겨진 의식 밞음으로 넘쳐흐를 때까지 돌아봄을 서로 마주보는 의식: 나는 네 지독한 비늘을 보았다. 멜루시나, 동틀녘에 녹색으로 빛나는, 너는 시이트 사이에 동그라미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이제 너는 깨어나 한 마리 새처럼 부르짖었다 이제 끝없이, 부숴진 창백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아무것도 네게는 남지 않았다 네 외침만이, 이제 세기들의 말에 나는 발견한다 기침을 해대며 흐릿한 시선으로, 오래 묵은 사진들을 뒤섞으며: 아무도 없다, 너는 아무도 아니다, 잿더미 하나와 빗자루 하나, 이빠진 나이프 하나와 깃털하나, 몇몇 뼈다귀들이 매달린 가죽 하나, 이미 말라 버린 꽃송이 하나, 시꺼먼 구멍 하나 이제 구멍 바닥에는 천년 전에 질식해 버린 한 여자아이의 두 눈이 있다, 한 우물에 묻혀 있는 시선들, 태초부터 우리를 보는 시선들, 늙은 어머니의 어린 시선 덩치 큰 아들에게서 보는 한 젊은 아버지, 고만한 여자아이의 어머니 시선 몸집 큰 아버지에게서 보는 한 어린 아들, 삶의 바닥으로부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이제 죽음의 함정들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 눈 속에 떨어짐이 진정한 삶에로의 회귀인가?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 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 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 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일이 없다. 우리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   감촉         내 두 손은 네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 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무수한 육체들을 벗긴다   네 두 손은   네 몸에서 또 다른 육체를 창조한다.  
8    [스크랩] 중남미 시와 옥따비오 빠스-정경원 댓글:  조회:1217  추천:0  2018-10-19
중남미 시와 옥따비오 빠스  정경원         시인의 운명   단어들? 그래, 바람의 단어들, 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렸구나. 나를 단어들 속으로 사라지게 해주소서, 나를 입술 사이의 바람되게 해주소서, 윤곽없이 헤매는 단 한번의 입김 바람을 잠재운다.   빛 또한 제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Condici`on de nube, 1944)   야수(夜水)   밤이면 떨어대는 두 눈을 가진 말이 있는 밤이, 잠든 들녘에 물의 눈을 가진 밤이, 떠는 말의 눈을 가진 네 눈에 있고, 비밀스런 물의 눈을 가진 네 눈에 있다.   어두운 물의 눈, 연못 물의 눈, 꿈결 물의 눈,   침묵과 고독, 달에 인도되는 어린 두 마리 짐승, 그 눈에서 마시고, 그 물에서 마신다.   네가 눈을 뜨면,  밤은 이끼낀 문들로 열리고, 밤의 복판에서는 물로 비밀스런 왕국이 열린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달콤하고 잔잔한 강의 흐름은 안으로 너를 빠뜨리며 어둡게 한다: 밤은 네 영혼의 해변을 적신다.  (El girasol, 1943-1948)     다리(橋)   지금과 지금 사이에, 지금의 나와 지금의 너 사이에, 다리라는 두 글자.   네가 글자로 들어갈 때, 너는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의 반지되어 세상은 닫힌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언제나 몸은 펼쳐지고, 하나의 무지개된다.   나 그 아치 아래에서 잠을 청하리라.  (Salamandra, 1958-1961)     내 안의 나무   내 이마에 자란 한 그루 나무, 내 안으로 자랐다. 뿌리는 혈관, 신경은 가지, 어수선한 나뭇잎은 사유.   너의 시선은 나무를 불 붙이고 어둠의 열매는  피의 오렌지 불씨의 석류.   동이 튼다 몸둥아리의 밤으로부터. 먼 저 속에서, 나의 이마에서, 나무가 말한다. 가까이 오너라, 들리느냐?  (Arbol adentro, 1976-1988)   Ⅰ. 중남미 시   1. 원주민 문학   정복 이전 아메리카 원주민 문학은 문학사적 발전과 의미가 미미했다. 이렇게 문학이 침체했던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언어적 통일과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같은 완벽한 언어 체계를 가진 문자가 없었다.1) 둘째, 상이한 문화가 동일한 지역에서 공존하며 발전했다. 셋째 문자 문학에 대한 구전 문학의 우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다수의 작가들이 무기명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많은 시, 이야기, 희곡 등이 익명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오늘날 알려진 시인으로는 잉까 빠차꾸떽(Inca Pachacutec)과 네싸우알꼬요뜰 데 떽스꼬꼬(Netzahualcoyotl de Texcoco)왕이다. 그러나 이러한 척박한 상황에서도 문학 작품들이 서정시, 서사시, 희곡 등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서정시는 노래와 음악이 곁들어졌다. 서사시에서는 한 제국의 창시자를 기리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신화나 전설이 소개되었으며2) 희곡은 신에게 바치는 제식 행사에서 유래되었다. 대표적인 희곡 작품으로는 마야-끼체어로 된 『라비날-아치』Rabinal-Achi)와 께추아어로 된 『오얀따이』(Ollantay)가 있다.    1) 서정시 신비한 사상은 아름다운 시로 표현되었다. 은유와 상징을 통해 상류층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신비의 시대, 종교의 시대, 정복 이전 역사의 시대 등의 개념이 혼재되어 우주에 대한 개념이 설명되었다. 멕시코에서 고고학적으로 3천 년 전부터 인류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당시의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무력했으며 신비한 힘에 사로잡힌 채 소규모의 농경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축복을 기원하기 위해 주문을 외웠는데 이 때 사용한 언어는 제식의 성격이 농후하며 즉흥적이고 계시적이었다.  후에 이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는 비장한 나우아틀어로 씌어진 시의 형태로 정복자의 손에 의해 원주민의 문화가 말살되는 현장의 산 증거가 된다.     (1)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서정시 나우아뜰어로 ‘시’를 ‘꾸이까뜰’(Cuicatl)이라고 한다. 또 그림으로 표현될 때는 꽃으로 장식된 소용돌이 무늬가 되며 ‘꽃이 만발한 단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시인은 ‘꾸이까삑끼’(Cuicapicqui)로서 ‘꽃이 만발한 단어들’을 노래하거나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떽스꼬꼬(Texcoco)와 떼노치띠뜰란(Tenochtitlan)의 예배장에서는 춤과 노래의 집들(Casas de Danza y Canto)이 있어 가수, 무용수, 음악가들이 황실의 후견 아래 그 곳에 거주했다. 아스떼까인들의 서정시는 ‘꽃들의 노래’(Xochicnicatl), ‘슬픔의 노래’(Ecnocuicatl), ‘사색의 노래’ 등 세 가지 종류의 시로 분류된다. 그 중 ‘사색의 노래’ 시는 짤막해서 일본의 하이꾸와 대단히 유사하다. 주로 다루어지는 시의 주제로는 이별, 인생무상 등이다. 『멕시코의 노래』(Cantares mexicanos) 중의 시 한 수를 보기로 하자.   우리는 두 번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닐진대 치치메까 왕자들이여 즐기세! 우리의 꽃들을 무덤으로 가지고 갈 셈인가? 단지 우리는 꽃들을 빌렸을 뿐이다.3)   (2)안데스 지역의 서정시 이 지역에서는 주로 현인들과 대중 시인들에 의해서 지어졌다. 시의 각 행은 3음절에서 8음절 내로 다양하며 수확과 축제를 주로 노래했다. 가끔 시인과 합창단 사이에 대화가 시 중에 등장하는 것이 특이하다. ‘아이모라이’(aymoray)는 농부들의 축제를 다룬 시이고, ‘아이예’(haylle)는 시골과 영웅심이 주된 주제이고 ‘아라위스’(harawis) 또는 ‘하라비’(jaravi)는 감정적인 주제로 슬픔을 그렸으며 ‘우르삐’(urpi)와 ‘와이노’(waino)는 다음의 시 같이 따뜻한 사랑 노래를 담고 있다.    네가 입고 있는 꽃 뜨개질된 외투 황금실로  꿰매어져 있고 섬세한 장식은  나의 순진함에 연결되어 있네.4)   (3)아마존 지역의 서정시 아메리카인들의 또 다른 시 언어의 보고는 아마존 셀바 지역과 큰 강들이 있는 지역이다. 구아라니인들과 뚜삐족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우주의 기원, 교육, 예식, 가정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음브야(mbya)족의 자장가 속에 나타난 순박함이 다음 시에 엿보인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냐 아들아; 자거라 어서 오너라 잘자라 아가야, 아빠가 네 애완동물로 점박이 사슴 한 마리와  네 목걸이로 토끼 귀 하나와 네 장난감으로 점박이가 있는  가시나무 열매를 가지고 오신단다.5) 2. 정복 시기의 문학   끄리스또발 꼴론(콜럼부스)의 항해 일기로부터 정복 시기의 문학이 시작된다. 그의 일기에 아메리카 대륙의 자연과 인간이 처음 소개된다. 다시말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연대기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연대기 작가들은 유럽의 독자들을 신세계의 경이로운 자연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놀라게 했다. 이 연대기에서 우화와 먼 옛날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연대기 작가들이 현실과 환상을 혼재하여 묘사하였기 때문에 15세기에 역사적 사실과 허구 문학 사이 또는 현실과 상상적인 것 사이에 벽이 없었다. 그래서 신화적 인물들인 아마존 전사, 식인종, 거인족들이 거주하던 지명이 실제 지도에 나타나곤 했다. 꼴론은 그의 일기에서 인어를 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베르날 디아스 델 까스띠요는 아스떼까 제국의 수도를 기사 소설에 등장하는 환상의 세계와 비유하기도 했다. 원래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정복자들은 세 가지의 기본적인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금, 영광, 복음이 그것이다. 이렇게해서 정복 시기의 문학은 연대기 작가들의 글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럽 문화의 이식, 인디오 문화의 말살, 두 문화의 혼합으로 특징지워지는 식민지 시대의 출현이 동시에 이루어 진다. 앞에서 언급한 현실과 환상 그리고 역사와 상상의 융합은 많은 역사가들과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흥미심을 야기시켰다. 20세기 중남미 문학에 나타나는 ‘환상적 현실’은 바로 연대기 문학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이다. 이 연대기 문학과 20세기 중남미 문학에도 기사 문학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음을 알 수있다. 당시의 역사가들과 연대기 작가들은 베르날 디아스같은 평범한 군인 또는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같은 교육받은 성직자 그리고 곤살로 훼르난데스 데 오비에도와 같이 르네상스 문학에 조예가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Bernardino de Sahagun)은 『누에바 에스빠냐 일반사』(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la Nueva Espana)에서 인디오들의 습관과 문화를 최초로 소개했다. 또 아메리카에서 태어나 그들 자신의 연대기를 작성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황실주해』(Comentarios reales)를 남긴 꾸스꼬 왕가의 자손인 잉까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Inca Garsilaso de la Vega)이다. 일반적으로 연대기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첫째,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일반 연대기, 둘째, 한 통치 기간의 연대기, 셋째, 특별한 일의 연대기 등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관한 연대기는 세번째 부류에 속한다. 끄리스또발 꼴론이 항해 내용을 그의 후견인인 왕에게 보낸 편지와 같이 많은 연대기 작가들의 연대기들이 전 유럽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자 공명심 많은 독자들은 정복에 관한 사실을 인지하며 나름대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더우기나 현실과 상상이 교묘하게 섞인 채로 언급되어 있는 연대기 정보를 근거로 당시 스페인에 반기를 들고 있던 유럽의 궁정들은 정치적 종교적 이유들로 인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가톨릭교 복음 전파라는 명분으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을 옹호하는 이론과 인디오의 권리를 찬탈하려는 목적으로 정복을 자행하는 스페인의 무력을 비난하는 이론간의 논쟁이 비롯되었다. 휄리페 2세는 왕실의 권위 유지를 위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에 관한 글을 집대성해서 『인디아스 대연대기』(Cr -onica Mayor de las Indias)를 작성했다. 1571년에는 스페인 수석 연대기 작성자로 지리학자 로뻬스 데 벨라스꼬(Lopez de Velasco)가 임명되어 『인디아스 전도』(Geografia Universal de las Indias)를 작성했다. 같은 해에 뻬루의 부왕인 후란시스꼬 똘레도는 연대기 작가 뻬드로 사르미엔또 데 감보아(Pedro Sarmiento de Gamboa)에게 잉까의 공식적인 역사를 저술하는 임부를 부여했다. 또 후란시스꼬 쎄르반떼스 살라사르(Francisco Cervantes de Salazar)도 멕시코에서 누에바 에스빠냐의 연대기 재편집자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연대기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대조적인 시각이 있었다. 다시말해 인디오 문화와 유럽 문화의 관점에서 정복을 기술할 때 서로의 관점은 정면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유럽 대륙의 연대기 작가들은 르네상스시대의 정신이 번영과 과학의 발전을 가져올 것임을 암시하며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반면 인디오 연대기 작가들은 불길한 역사의 흐름을 예견하는 등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 주었다.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인간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의미가 있었으며 반면에 인디오 연대기 작가들에게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은 파국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3. 식민지시대 문학   15세기와 16세기 동안에 연대기 작가들은 그들이 참여했던 정복 사업의 업적을 소개하거나 그들이 본 신세계를 묘사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정복과 식민지 과정에 근거했다. 17세기부터 이러한 문학의 성격은 부왕 제도로 사회의 안정이 도모됨에 따라 변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는 16세기 말 경부터 초기 스페인 정복자들의 후예들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인디오의 피를 받은 혼혈인이었다. 경제적 번영, 사치스러운 도시 귀족의 출현, 대학과 수도원의 소수 지식인층 등은 아메리카 대륙에 머지 않아 훌륭한 문인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끄리오요(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작가들은 스페인적 요소와 인디오적 요소를 혼합한 아메리카의 독특한 바로크 양식 문학으로 유럽의 문학가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문필 활동을 했다.  한 예로 후안 데 에스삐노사 메드라노(Juan de Espinosa Medrano, 1640-1688)는 인디오의 후예로 뻬루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 공부를 시작해 후에 꾸스꼬 대학에 입학했다. 스페인어와 께추아어를 구사했던 그는 연설가, 신학교수, 극작가, 수필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1) 식민지 시대 초기 문학(16, 17세기) 정복시기에서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연대기의 역사적 형식에서 궁중 교육을 반영하는 바로끄 형식의 문학으로 바뀐다. 둘째, 유럽 문화, 스콜라 철학, 과학 지식을 습득한 끄리오요 작가들이 유럽의 작가들과 견줄만한 작품 활동을 한다. 셋째, 인디오 언어들과 스페인어의 혼용 과정에서 새로운 아메리카 정신이 형성된다. 이 시기에 문화적 발전은 스페인 문학의 형식과 문체의 이식에서 기인한다. 많은 작가들이 스페인의 문학을 모델로 삼고 기존의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 작가들의 작품 영향을 받아 새로운 문체의 문학 작품을 생산해 냈다. 그러나 이러한 이식 활동이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럽보다 아메리카의 문학은 항상 시기적으로 뒤졌다.    (1)서정시 아메리카 시는 서정적인 요소와 서사적인 요소를 같이 담고 있다. 알론소 데 에르시야(Alonso de Ercilla)의 『라 아라우까나』(La Araucana)의 뒤를 이어 종교시를 남긴 레오노르 데 오반도(Leonor de Ovando)와 멕시코의 서정시인 후란시스꼬 데 떼라사스(Francisco de Terrazas)가 등장한다. 후란시스꼬는 16세기 중남미 최고 시인으로 사랑의 감정이 배어 있는 그의 시는 구띠에레 데 쎄띠나(Gutierre de Cetina)와 가르실라소(Garcilaso)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소네트는 지방색보다는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이태리식 표현을 선호했다. 쎄르반떼스는 그의 작품 『라 갈라떼아』(La Galatea)에서 후란시스꼬를 ‘새로운 아폴로’(nuevo Apolo)라고 격찬했다.   (2)풍자시 이 당시 아메리카 문학을 특징짓는 문학 양식 중의 하나로 풍자시를 꼽을 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과 끄리오요들을 비방하는 시들이 발표되었지만 이 중에는 익명으로 발표된 시도 있었다. 세비야 출신인 마떼오 로사스 데 오껜도(Mateo Rosas de Oquendo)는 리마에 거주하면서 『1598년 뻬루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풍자』(Satira a las cosas que pasan en el Peru, ano de 1598)를 남겼다.   (3)연대기 현실이 환상과 교차하며 운율을 수반하며 시적으로 전개된다. 1589년 후안 데 까스떼야노스(Juan de Csatellanos)의 기념비적 작품인 「인디아스의 저명한 남성들에 대한 애가」(Elegias de varones ilustres de Indias)가 발표된다.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인 마르띤 델 바르꼬 쎈떼네라(Martin del Barco Centenera)는 1602년 그의 연대기시 『라 아르헨띠나』(La Argentina)를 세상에 내놓는다.   2) 바로끄 시대(17, 18세기)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더불어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 분야에서 성숙된 창작력은 예술 가치의 기본적인 잣대가 되었다. 이러한 면이 새로운 문학 양식 또는 불후의 아메리카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래 ‘바로꼬’라는 단어는 라틴어 ‘verruca’라는 단어에서 기인된 말로 그 의미는 비정상적인 진주를 뜻하는데 예술 분야에서 처음 이 용어가 쓰인 예는 르네상스 후기의 장식이 많은 건축 양식을 지칭한 것이다. 바로끄 문학은 열려진 형식의 문학이다. 한 편의 시에 있어서 바로끄 시대와 같이 한 개의 중심축이 해체가 되어 여러 개의 하위 중심축들이 조화를 이룬다.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끄루스(Sor Juana Ines de la Cruz)의 「첫 꿈」(Primero sueno)이 대표적인 예로서 시의 형식적인 면에서 역동적인 요소가 두드러져 주제가 복잡하며 복합적 의미를 추구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요소는 문체, 반어, 대조, 과장 그리고 은유와 같은 수사법의 빈도 높은 사용을 통해 알 수 있다.   (1)서사시 스페인에서의 서사시는 휄리뻬 2세때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 이후에도 꾸준하게 발전되었다. 아메리카에서는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베르나르도 데 발부에나(Bernardo de Balbuena)의 『까르삐오의 베르나르도 혹은 론세스바예스의 승리』(El Beernardo del Carpio o la Victoria de Roncesvalles)같은 작품이 나타났다. 또 다른 서사시의 양식은 종교적 서사시이다. 디에고 데 오헤다(Diego de Hojeda, 1571-1615)는 리마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바로끄 시 「라 끄리스띠아다」(La Cristiada)를 발표한다.    (2)서정시 또는 신비주의 과식주의 또는 공고리즘은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졌으며 세속적인 사랑을 성스러운 사랑으로 대치시켰다. 소르 후란시스까 호세파 델 까스띠요 이 게바라(sor Francisca Josefa del Castillo y Guevara)는 ‘라 마드레 까스띠요’(la Madre Castillo)로 더 잘 알려졌는데 작품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추구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신비적인 싯귀를 『영적인 호감 또는 감정』(Afectos o sentimientos espirituales)에서 선보였다. 또한 그녀의 산문은 소르 후아나 이네스와 함께 바로끄 문학의 대표적인 여류 작가로서의 자리를 확실하게 했다.   (3) 풍자시 식민지 시대의 풍자시는 께베도의 영향을 받아 서민적인 영감으로 종전보다 과격하고 공격적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후안 델 바예 까비에데스(Juan del valle Caviedes, 1652-1697)의 『빠르나소의 이』(Diente del Parnaso)가 있다.   4. 독립 시대 문학   중남미 문학에서 1800년에서 1830년까지는 신고전주의 시대에 해당한다. 이러한 문예사조는 유럽의 불란서와 서반아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신고전주의 문학적 특징은 바로끄 시대와는 달리 균형을 이룬 이성, 과거의 전통과 보편성 추구, 예술의 제 원칙 준수, 예술을 도덕적 측면과 연관하여 이해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의 고전주의 문학 작품은 위에 언급된 일반적인 특징 외에도 다음과 같은 독특한 면들이 있었다. 첫째, 독립을 위해 문학을 정치적인 도구로도 사용했다. 둘째, 끄리오요 출신 작가들이 고전적 규칙을 고려하기 이전에 아메리카 사회를 반영하는데 더 충실했다. 셋째,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인종적 가치를 재고했다. 넷째, 아메리카 대륙의 자연을 인간이 개발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1) 신고전주의 시 바로끄주의에 반발하면서 나타난 개념으로 국가를 찬양하는 서정시와 혁명을 고취하는 경향이 짙다. 일반적인 분위기는 서정적인 면 보다는 국가를 찬미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목가시 호세 마누엘 마르띠네스 데 나바레떼(Joe Manuel Martinez de Navarrete, 1768-1809)수사의 『시적 유희』(Entretenimientos po-eticos)와 후안 바우띠스따 아기레(Juan Bautista Aguirre)의 연가에서 볼 수 있듯이 친밀한 시적 감흥을 노래했다. 예수회 신부인 후안 바우띠스따 아기레는 바로끄 시대와 신고전주의 시대의 과도기적 인물로 『이그나시오 성인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는 영웅시』(Poema heroico sore las acciones y vida de San Ignacio)를 남겼다. 1937년에는 뒤늦게 『서반아 운문, 청춘기 작품들, 잡기들』(Versos castellanos, obras juveniles, miscelaneas)라는 이름으로 그의 서정시들이 출판되었다. 그의 서정시는 불란서의 영향을 받아 바로끄의 흔적이 없으며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과식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서간집에 있는 『구야야낄과 끼또시에 대한 간단한 도안』(Breve diseno de las ciudades de Guayaquil y Quito)이라는 시에 향토와 국가를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2)영웅시 또는 애국시 대부분의 영웅시와 애국시들이 서반아 시인들인 마누엘 호세 데 낀따나(Manuel Jose de Quintana), 후안 니까시오 가예고스(Juan Nicasio Gallegos), 알바레스 씨엔후에고스(Alvarez Cienfuegos) 그리고 훼르난도 데 에레라(Fernando de Herrera)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웅시와 애국시는 독립심을 고취시켰고 장엄하고 서사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애국가도 그 한 형태였다.   (3)아메리카 자연을 노래한 시 이 분야의 시에서는 단연 안드레스 베요(Andres Bello)의 『실바스 아메리카스』(Silvas Americanas)가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지엽적인 주제를 지양한 채 교육적인 의도를 가지고 아메리카의 자연을 묘사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시인들로는 마누엘 호세 데 라바르덴(Manuel Jos de Lavarden), 마누엘 데 세께이라 이 아랑고(Manuel de Zequeira y Arango), 호세 마리아 데 에레디아(Jose Maria de Heredia) 등이다. 구아테말라 출신의 라파엘 란디바르(Rafael Landivar) 신부는 『루스띠까띠오 메히까나』(Rusticatio Mexicana)에서 자기 고향의 땅을 노래했다.    (4)대중시(poesia plpular) 가우쵸 시(la poes`ia gauchesca)의 형식은 리오 데 라 쁠라따(Rio de la Plata)지역에서 바르똘로메 이달고(Bartolome Hidalgo)에 의해 시작되었다. 우화의 형태로 인위적으로 창작된 동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정치 현실과 도덕적인 교훈을 제시한다. 우화 작가로는 호세 누뇨스 까세레스(Jose Nunez Caceres), 도밍고 데 아스꾸에나가(Domingo de Azcuenaga), 마띠아스 데 꼬르도바 수사(fray Matias de Cordoba), 라파엘 가르시아 고예나(Rafael Garcia Goyena) 등이 있다.   5. 낭만주의 문학   중남미의 낭만주의 문학은 대략 1830년에서 1860년까지를 포함한다. 이 기간은 사회적 불안, 내란, 전제주의로 특징지워진다. 또한 지역의 족장들이 국가 권력의 공백을 대신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힘있는 자들이 출현해 정적들과 역경을 이겨내며 통치했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는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며 1829년에서 1852년까지 아르헨띠나를 통치했다. 에꾸아도르에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ia Moreno)가 1854년에서 1861년까지 신정 정치를 유지했다. 베네스엘라에서는 안또니오 구스만 블랑꼬(Antonio Guzman Blanco)가 1870에서 1887년까지 독재 정치를 자행했으며 빠라구와이에서는 후란시아(el doctor Francia)가 1840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잡았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군주제로 복귀하는 현상이 있었다. 이뚜르비데(Iturbide)와 합스부르가의 막시밀리아노의 군주제가 있었으나 막시밀리아노는 1876년 베니또 후아레스(Benito Juarez)에 의해 제거되었다. 폭력으로 대변되는 내란의 시대가 지나고 정치적인 안정의 시대가 도래해 국가권력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낭만주의 특징으로는 자기 중심적, 이국적 요소, 독창성, 개인주의, 상상력, 자연과 사랑을 노래하는 것 등이 있다.    1)시  낭만주의자를 시와 동일시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다. 인간의 가장 고양된 정신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는 시보다 더 좋은 표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인은 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슬픈 심적 상태를 표현할 욕구를 느낄 때에는 고통을 토로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랜다. 따라서 주정적인 한 편의 시가 사회에 주는 영향은 점점 커진다. 주요 작품으로는 에스떼반 에체베리아(Esteban Echeverri -a)의 『포로』(La Cautiva), 『도살장』(El matadero), 호세 안또니오 마이띤(Jos Antonio Maitin)의 『시집』,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띤(Juan Zorrilla de San Martin)의 『따바레』(Tabare), 가우쵸 문학6)으로 호세 에르난데스(Jos Hernandez)의 『마르띤 휘에로』(Martin Fierro)가 있다.   6.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   중남미대륙의 19세기는 역사적 정치적으로 3시기로 나누어 진다. 첫째 독립기(100-1830), 둘째, 지방 호족의 시대 또는 무정부 시대(1830-1860), 셋째, 국가 확립기(1860-1890) 등이다. 첫째 시기가 신고전주의 시대에 해당되었고 낭만주의가 둘째 시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셋째 시기에 각각 해당된다. 낭만주의는 국가적 특징을 추구하였고 후에 국민의 생활상과 습관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 시기가 바로 초기 산업주의의 개혁과 이민의 물결이 있었던 때이다. 또 이 때부터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과도기에 후기 낭만주의 작품이 나타난다. 소리야 산 마르띤의 『따바레』가 그 한 예이다. 이렇게 신대륙에서는 새로운 문학 조류가 뒤 늦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문학 사조가 유행하였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사에서 나타나는 동질성의 결여는 정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주의나 자연주의 시대에는 소설이 문학의 흐름을 주도한 결과 상대적으로 시가 매우 위축되었다.   7. 모더니즘   모더니즘 문체를 특징짓는 요소들은 상징주의(simbolismo)와 고답주의(parnasianismo)에서 영향을 받은 혁신과 새로운 언어의 추구이었다. 원래 고답주의는 사회적 측면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면서 언어적 측면에서는 형식의 잔잔함을 옹호하였다. 그리스 고전 신화에서 작품의 주제를 삼아 시를 통해 정적이고 대리석같은 미를 표현하였다. 불란서의 T. 고띠에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한편 상징주의는 불란서에서 1870년에서 1880년까지 고답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문예 운동이다. 음악적으로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순수한 언어를 찾는다. 언어는 더이상 이성의 언어가 아니고 상징으로 짜여진 환상의 언어이다. 한 담론의 논리적 구문적 연결은 서정적 음악적 연결로 대치된다. 운율, 리듬, 유성 현상, 첩운법 등이 상징주의자들의 시에서는 관능적인 이메지의 부각을 위해 무시된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폴 발레리 등이 문학에서 음악성을 추구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모더니즘 문체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면은 루벤 다리오가 언급했듯이 시에다 ‘언어의 조화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운율감이 있는 세련된 시어들을 사용하여 시의 형식에서 자연스러운 음악성이 베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고답주의에서 회화적인 면으로 중요시 되었던 시어들과 상징주의자들 사이에서 음악적으로 가치를 부여 받았던 시어들이 모더니즘의 시인들과 산문가들에 의해 새로운 운율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단순한 언어적 표현과 귀족적인 시각에서 요구되어온 교훈적 내용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의 구사를 지향했다. 모더니즘 시인들은 상아탑의 주인임을 자각한다. 그 상아탑은 일상적인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 루벤 다리오(Ruben Dario)는 ‘나의 시에서 공주, 왕, 황실의 일, 먼 나라와 상상적인 나라들의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무엇을 바라는가! 나의 삶과 내가 태어난 시간을 나는 혐오한다…’라고 말했다. 속세에서 격리된 시인의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예술이외의 다른 목적에는 무관심한 예술, 다시 말해서 소수를 위한 예술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초창기에 등장한 무관심의 예술, 이름지어 ‘세련주의예술’(preciosista)은 사실주의와 실증적 물질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예술 운동이다. 세게적인 예술가의 의지는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는 길목을 준비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문학 운동도 그들에게 남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답주의의 변화없는 형식과 상징주의자들이 추구한 시에 내재하는 음악성을 그들 나름대로 수용해서 모더니즘을 완성시켰다. 이밖에도 예술가를 일반인과 차별하여 예술가의 낭만적인 정신을 고양하여 고독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신의 탑이여! 시인이여! 하늘의 피뢰침이여! (루벤 다리오)   모더니즘주의자들은 사실주의를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아름다움의 순수한 형태를 형상화할 수 있는 먼 도시, 신화, 상징, 이국적인 이름 등을 찾아나섰다. ‘모데르노(moderno)’라는 용어도 불란서의 상징주의에서 택했고 복잡하고 모순적인 하나의 광범위한 지적, 예술적 운동을 이루었다. 중남미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문학운동을 넘어 19세기와 20세기의 과도기로서의 ‘한 시대’를 뜻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성격이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1) 시 19세기 말부터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은 독립국가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예술가들 사이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미국 문학도 월터 휘트만과 에드가 알렌 포우의 시와 함께 더 이상 영국 문학의 아류가 아님을 선언했다.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의 작가들도 모더니즘의 첫 세대들로서 불란서의 고답주의와 상징주의를 소화해내며 중남미 문학이 스페인 문학의 음지가 아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루벤 다리오의 『푸름』(Azul)으로부터 이러한 문학적 독립은 중남미 대륙에서 커다란 물결을 이루며 진행되었다. 주요 작가와 작품으로는 호세 아순시온 실바(Jose Asuncion Silva)의 『야곡 III』(Nocturno III), 호세 마르띠(Jos -e Marti)의 『이스마엘리요』(Ismaelillo), 『자유시』(Versos libres), 『유배지의 꽃들』『Flores del destierro), 『황금시기의 시』(Versos de la edad de oro), 마누엘 구띠에레스 나헤라(Manuel Gutierrez Najera)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La serenata de Schubert), 『그 때를 위하여』(Para entonces), 『공작부인 욥』『La duquesa Job), 루벤 다리오(Ruben Dario)의 『푸름』(Azul), 『불경스런 산문들』(Prosas profanas), 『삶과 희망의 노래들』(Cantos de vida y esperanza), 아마도 네루보(Amado Nervo)의 『흑진주』(Perlas negras), 『작은 목소리로』(En voz baja), 『고즈넉함』(Serenidad), 훌리오 에레라 이 레이시그(Julio Herrera y Reissig)의 『시간의 빠스꾸아』(Las pascuas del tiempo), 『밤의 근행』(Los maitines de la noche), 레오뽈도 루곤네스(Leopoldo Lugones)의 『황금산』(Las montanas del oro),『가축과 과일 예찬』(Oda a los ganados y las mieses), 『마른 강의 로만세』(Romances del Rio Seco) 등이 있다.   8. 현대시   중남미 현대시는 20세기 예술이 경험했던 모든 혁신적인 면들이 그대로 반영했다. 모더니즘의 정신을 최초로 그려낸 루벤 다리오를 선두로 전위시를 선 보인 바예호(Vallejo), 네루다(Neruda), 우이도브로(Huidobro), 보르헤스(Borges), 히론도(Girondo) 등의 낯설지 않은 시인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감수성’을 소개한 위에 언급된 시인들의 노력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안목이 젊은 세대의 시인들 사이에 심어졌다. 시기적으로 볼 때 중남미 시의 발전 단계는 후기 모더니즘(Posmodernismo), 전위주의(Vanguardismo), 후기 전위주의(Posvanguardismo)로 나뉘어진다.     1) 후기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모더니즘과 전위주의 사이의 세대를 일컫는다. 구체적인 시기는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에 해당된다. 후기모더니즘의 문체적 특징은 간결함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적인 표현형식과 내용을 순화하는 것이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발도메로 훼르난데스 모레노(Baldomero Fernandez Moreno)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생이며, 의사이면서 시인이었다. 두 직업 사이에서 시를 선택하기까지의 고뇌를 노래한 『한 의사의 삶과 사라짐』을 1957년에 발표한 데 이어 『꽃 한송이 없는 70개의 발코니』를 선보인다. 몬떼비데오 태생인 델미라 아구스띠니(Delmira Agustini)는 『흰 책』(El libro blanco, 1907), 『아침의 노래』(Cantos de la manana, 1910), 『빈 성잔들』(Los calices vacios, 1903) 등이 있다. 『아침의 노래』의 시집은 인간 내면의 세계, 꿈의 비젼, 힘의 원동력으로서의 삶, 감정을 담은 어둠의 세계를 주제 면에서 다루고 있다. 라몬 로뻬스 벨라르데(Ramon Lopez Velarde)는 멕시코풍의 시를 남긴 시인으로 중남미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직설적인 감정 표현을 심오한 시적 형상으로 옮기는 빼어난 면이 돋보였다.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현란한 장식을 피하면서 구어체 표현법을 견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숭고한 피』(La sangre devota, 1919), 『비탄』(Zosobra) 등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은 칠레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남긴 예술가의 십계명을 보기로 하자. 첫째, 우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셋째,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어라. 넷째, 방종이나 허영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말고 신성한 연습으로 삼으라. 다섯째,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성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은 동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너의 가슴속에서 너의 노래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의 가슴이 너를 정화할 것이다. 일곱째,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리울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줄 것이다. 여덟째, 한 어린아이가 잉태되듯이 네 가슴 속 피로 작품을 남겨라. 아홉째, 아름다움은 너에게 졸리움을 주는 아편이 아니고 너를 활동하게 하는 명포도주이다. 네가 남자나 여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는 더이상 예술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열째,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요 작품으로는 『황폐』(Desolacion)가 있는데 이 시집은 「예술가의 십계명」을 비롯해 불후의 명작인 「시골 선생님」(La maestra rural), 「바램」(El ruego)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 등의 시를 담고 있다.   2) 전위주의(El vanguardismo) 일 이차 세계대전(1914-1918, 1939-1945)기간 동안의 전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비롯된 20세기의 혁신적인 예술 경향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전위주의이다. 이러한 경향은 주로 비이성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회화, 음악, 문학 분야에서 다양한 예술 운동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바로 그 예이다. 전위주의는 시기적으로 1920년과 1940년 사이에 유행한 예술 운동으로 공통적인 미적 특징은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포기,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의 옹호 등이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전위주의 시 운동으로는 칠레에서 비센떼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Creacionismo),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과격주의(Ultraismo), 뿌에르또 리꼬에서 루이스 요렌스 또레스(Luis Llorens Torres)의 빤깔리스모(Pancalismo), 도미니까에서 도밍고 모레노 히메네스(Domingo Moreno Jimenez)의 뽀스뚜미스모(Postumismo), 꼴롬비아의 레온 데 그레이프(Leon de Greiff)가 주도한 ‘로스 누에보스’(Los Nuevos)그룹, 꾸바에서 마리아노 브불(Mariano Brull)의 순수시, 뻬루에서 알베르또 이달고(Alberto Hidalgo)의 단순주의(Simplismo), 멕시코에서 마누엘 마쁠레스 아르쎄(Manuel Maples Arce)의 에스뜨리덴띠스모(Estridentismo) 등이 있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비센떼 우이도브로는 1931년 『알따소르』(Altazor)를 발표한다. 그의 창조주의는 형식의 자유로운 면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의 일관성을 무시한 면에서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순수한 은유로써 경이롭고 환상적인 그의 시세계를 창조했다.   내가 한 개의 명멸하는 별 또는 반딧불이라면. 가슴엔 나비들이 머물고 상승하는 노래를 타고 한 줄기의 빛은 사막을 식민지로 삼고 이 눈빛 종달새는 나로부터 사라져만 간다.7)   뻬루의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는 젊은 시절에 혁명적 사상가들과 교류를 통해 시적 안목을 다졌다. 1918년에 『검은 전령들』(Los heraldos negros)을 발표하고 뒤이어 1922년 『뜨릴세』(Trilce)를 발표했다. 『뜨릴세』는 표현법, 그림, 심상, 구어체 언어, 연금술적 언어기법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어, 교양어, 속어, 기교, 토착어 등을 사용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창조했다.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기교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조각내어 조망함으로써 각 시행마다 끊임없이 사상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나 지금에야 점심을 먹었고 가진 게 없네 어머니, 소원, 음식을 권하는 말, 물, 혼혈인이 달변으로 봉헌기도할 때,  심상의 늦음과 소리의 커다란 이음매 단추들에 관해 질문하실 아버지조차도 없네8)   빠블로 네루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sperada, 1924), 『땅에서의 거주』(Residencia en la tierra), 『총 가요집』(Canto general), 유고집인 『내가 살았음을 고백한다』(Confieso que he vivido)가 있다. 『땅에서의 거주』는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시집으로 이성을 배제하고 소위 ‘자동기술법’을 도입했다. 세계를 해체해서 보는 시각을 견지했으며 외부적인 현실을 답습하는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했다. 자유시는 연금술의 언어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비교법, 심상, 수사법, 그림자와 공간 사이에 위치한 ‘하나의 심장’의 시각에서 사물을 투영하는 몽상적인 상징법은 이해될 만하다. 20세기 예술의 새로운 경향은 원초적인 문화의 재평가이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시를 ‘검은 시’(poesia negra)라 명명했다. 중남미에서 검은시는 스페인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결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시를 낳았다. 1930년경 꾸바, 뿌에르또 리꼬, 도미니까는 흑인들의 검은 혼을 그들의 리듬, 춤, 음악, 역사, 미신을 통해 표출하는 중심 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검은시가 출현하였다. 대표적인 시인과 작품으로는 루이스 빨레스 마또스(Luis Pales Matos)의 『검은 춤』(La danza negra), 꾸바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시에 담은 니꼴라스 기옌(Nicolas Guillen)의 『군인들을 위한 노래와 관광객을 위한 소리』(Cantos para soldados y sones para turistas, 1937), 『송고로 꼬송고와 다른 시들』(Songoro cosongo y otros poemas, 1942), 『전체의 소리』(El son entero, 1947), 흑인적인 요소와 정치적요소 그리고 사회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대중의 몸짓으로 날으는 비enf기』(La paloma de vuelo popular, 1958)가 있다.    3) 후기전위주의(El posvanguardismo)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시는 전위주의 추구와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구어체와 일상적인 언어를 선호하지만 단지 사실묘사나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서사적 담론의 형태로 현실의 비리를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증언한다. 중남미 후기전위주의 시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시의 구조가 열려져 있다. 한 편의 시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독자들이 자기나름대로 시를 해석할 수 있다.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열려진 시를 ‘움직이는 시’라고 했다. 둘째, 시어가 이미지와 은유법의 사용이 아니라 다양한 글자의 혼합인 ‘꼴라쥬’ 라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셋째, 주제의 선택은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 후기전위주의자의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는 오늘날 중남미의 시와 비평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인간의 뿌리』(Raiz del hombre, 1937), 『단어속에 자유』(Libertad bajo palabra, 1949), 산문으로는 『고독속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 『활과 칠현금』(El arco y la lira) 등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있다. 니까노르 빠라(Nicanor Parra)는 칠레에서 ‘반시’(antipoesia)를 주창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현실을 증언하는 시각과 초현실주의의 시각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태동되기 시작해 신중한 산문시가 되거나 놀람과 유머가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와 반시』(Poemas y antipoemas, 1954), 『러시아의 노래들』(Canciones rusas, 1967)이 있다.  문학아카데미에서  
7    영감靈感편 /옥타비오파스 댓글:  조회:1461  추천:0  2018-08-25
영감靈感편 /옥타비오파스       우리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드러냄(啓示)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엔 언어적인 형태를 띄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조차도, 현시하는 주체의 창조, 즉 인간의 창조는 수반된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은,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이다. 어쨌든,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된다. 시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중에 낱말들로 옮겨지는 경험이 아니라, 낱말들 자체가 핵을 이루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이름 불려지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실존을 결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분석하는 것은 그 경험의 표현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앞장에선 시적 계시의 의미를 규명했고 분석했다. 이젠,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시는 어떻게 씌어지는가? 207       우리들의 물음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이다. 시인들의 말을 믿는다면,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이 있다고 한다. 이 도움은 우리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과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를 취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는 대체 누구이며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그를 악마, 뮤즈, 영靈(espiritu), 정령精靈(jenio)으로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으로 부른다. 어떤 이들은 시는 외부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어떤 이들은 시인 자신에게서 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예외는 번번이 일어나서, 단순히 예외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작에 관한 이런 상반된 개념들을 이상적으로 반영하는 두 타입의 시인을 가정해보자.        책상 위에 엎드려, 골똘하지만 텅 빈 듯한 시선으로, 영감을-믿지-않는-시인은 미리 그려놓은 계획에 따라 시의 첫 연을 이미 썼다.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았다. 각각의 각운과 이미지를, 자명한 원리에 따른 엄격한 필연성 그리고 기하학적 놀이 같은 즐거움과 가벼움을 준수하며 썼다.    하지만, 11음절의 마지막 행을 끝내기 위한 한 단어가 필요했다. 시인은 생각나지 않는 각운을 찾아 사전을 뒤적인다. 하지만, 찾지 못한다. 담배를 피워 물고, 일어섰다 앉았다, 다시 일어선다. 무無, 공허와 불모. 그러다 갑자기 각운이 생각난다.    시를,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쩌면 초기의 계획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예상 못했던 다른 것―항상 다른 무엇―이다. 이 이상한 도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인이 착상을 자극해서 그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게 했다고는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에서는 무에서만 나온다. 그 단어는 어디에 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 발생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208        반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속삭임의 무진장한 흐름'에 내맡긴 채, 외부 세계로 향한 눈을 지긋이 감고 시인은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 간다. 처음엔 문장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지만, 점차 펜을 쥔 손의 리듬은 사고의 흐름과 일치한다. 이제 사고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고, 둘은 같은 리듬을 탄다.    시인은 그의 행위에 대한 의식마저도 잊어버렸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혹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돌연히 길을 가로막는 단어 하나, 혹은 단어의 이면인 침묵이 나타나 흐름을 중단시킬 때까지 모든 것은 순탄하다. 시인은 줄기차게 장애물을 피하려고, 그것을 돌아 어떻게 해서든지 비껴 나아가려고 시도한다. 다 소용없다. 길들은 항상 동일한 벽 앞에 이른다. 샘은 흐르기를 멈춘다.    시인은 방금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뒤얽혀 있는 듯한 그 글이 비밀스런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한다.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음조와 리듬과 체온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다. 혹은 여전히 살아 있는 부분들은 아직도 빛을 내며,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시의 통일성은 물리적이거나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조, 체온, 리듬 그리고 이미지들이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시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은, 모든 작품은, 원재료를 소기의 계획에 종속시키고 변형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글을 쓰는 데에 이성적 의식이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텍스트엔 반복되는 단어들, 일정한 경향에 의해 계속 다른 것들을 생산해내는 이미지들, 잡을 수 없는 단어를 찾아 팔을 길게 뻗친 듯이 보이는 문장들이 있다. 시는 흐르고, 달린다. 이 흐름이 바로 시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210     그런데, 흐름이란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또한 무엇을 향해 간다는 것도 의미한다. 단어들을 존재하게 하고, 또한 앞으로 향하게 하는 긴장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단어들은 자신의 행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행진을 멈추게 할 단어를 찾는다. 시는 이 마지막 단어에 의해, 그리고 그 단어 앞에서야 환하게 밝아진다.    시편은 숨어 있는, 어쩌면 말해질 수 없는 그 단어를 향한 겨냥이다. 결국, 시의 통일성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그 방향과 의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갈 지之자 모양의 시편의 흐름에 마지막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색적인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신비한 외부의 도움, 즉 예기치 못한 타인의 목소리의 출현과 만나게 된다. 낭만주의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속삭임을 딱 들어맞는 말로 바꾸고, 희미한 예감을 현실화하는―앞의 경우와 같이 설명할 수 없는―어떤 의지의 출현과 마주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좀 부정확하지만 임시 방편으로 '타자의 의지 침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라고 불리는 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쩌면 그것은 의지보다 훨씬 오래되고, 오히려 의지가 기대고 있는 그 무엇이다.    사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지란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정한 규범에 우리의 행위를 종속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말하는 의지란 사색, 계산, 혹은 예상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지적 작용보다 우선하며,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의지의 진정한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우리 것인가? 210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경계는 희미해진다. 우리의 언표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너'나 '그'가 아닌,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다른 대명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이 모호성에 영감의 신비가 자리한다.    신비인가, 난제인가? 둘 다이다. 영감이 고대인들에게 하나의 신비였다면, 우리들에겐 세계라는 개념과 우리의 심리적 개념 자체에 모순되는 난제이다. 이렇게 영감의 신비를 심리적인 문제로 왜곡하는 것은, 시적 창조가 무엇에 기초하는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처음부터 외부 세계의 실존을 의문시했던 인도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서구 사상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의 존재를 안심하고 믿어버려 우리 눈이 본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타자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개입하는 시적 행위는 언제나 어둡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어, 세계라는 개념을 위협하는 문제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대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계 속에 포함되고, 세계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는 현상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의 객관성, 사실성 그리고 역동성의 증거로까지 인정되었다.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자로 보았다. 시인의 몽환夢幻과 열정은 악마적 강신降神의 표지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온Ion』에서 말하길, "시인은 열정의 포로가 되어 자신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창조를 말할 수 없는 가볍고, 신성하며, 날개 달린 존재이다…… 시인의 말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신의 입이 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고 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으로 보았다. 211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자연이란 혼으로 가득한 것, 하나의 유기체 그리고 살아 있는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모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해설에서 가르시아 바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은 다소간 신비적 물활론物活論에 의해 영靈이 깃들인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였다.    따라서 시적 '발생'은 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다.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그리스의 물활론은 후에 기독교적인 초월로 변한다. 이러한 연계성으로 인해 외부 세계는 존속한다. 혼령의 터전이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건 간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외부 세계는 우리 앞에 필요한 지평으로서 존재한다.    천사, 돌, 동물, 악마, 식물 그리고 '타자'까지도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가지며, 때때로 우리를 포로로 잡아 우리 입을 통해 말한다. 외부 세계가 의심받지 않고 개념과 원형을 산출해내는 사회에서, 그것이 영감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타자' 즉 신이거나 귀신과 정령이 깃들인 자연이다. 영감은 신성한 힘의 현현이기 때문에 계시이다. 영감이 인간의 자리에서 대신 말을 한다. 신성하거나 세속적이거나 간에, 서사시이거나 서정시이거나 간에, 시는 외부에서 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이다.    시적 창조는 신들이 인간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하지만 그 신비는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212       데카르트로부터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근대적 주관주의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단지 의식에 근거해서만 인정하였다. 초월적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유아론이었다. 의식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계를 세울 수 없었다. 그 사이 자연은 우리에게 대상과 관계의 얽힘으로 변하고 말았다.    신은 우리의 생생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대상, 본체, 인과의 개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의 영역에서와 같이, 관념론이 외부 현실을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 외부 현실은 하나의 대상, 하나의 '경험의 장'으로 변화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속성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연은 살아 있고 혼이 깃들인 생명체, 즉 은밀하고 의도를 갖는 하나의 힘이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오래된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감의 개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자의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도전해온다. 이렇게 영감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사이에는 하나의 벽이 세워진다.    영감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의 존재는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지적 믿음을 부정한다. 따라서 19세기 내내, 신성한 그 옛 힘을 외부 현실에게 되돌려주고자 하는 골칫거리 운동들을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증가되어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영감이 우리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 16세기부터는 영감을 하나의 수사학이나 문학적 비유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하는 주체는 시인의 의식뿐이었다. 당시의 대표적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고, 부르는 대로 받아 적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자의식에 충만한 깨어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213     시적 창조를 진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답을 구하기가 불가능해진 사실은, 슬그머니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으로 변화되었다. 한동안 영감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탈선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의 진정한 이름은 게으른, 부주의, 즉흥주의, 편의주의였다.    몽환과 영감은 광기와 질병의 동의어로 변했다. 시적 행위는 노동과 훈련이 되고, 글쓰기는 '흐름에 거슬러 싸우기'가 되었다. 이런 사고 방식 속에서, 여러 가지 부르조아지 도덕 개념들이 미학의 영역에 과도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이 장사꾼 미학의 도덕적 뿌리를 고발한 것이다. 사실 영감은 상과 벌이라는 개념을 숨기고 있는 편의성과 난해함, 게으름과 노동, 부주의와 테크닉 등의 천한 개념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맑스가 지적한 대로, 부르조아지 사회가 오래된 인간 관계를 대체한 '엄격한 계약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한 작품의 가치는 그것에 투자한 작가의 노동의 양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시적 창조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영감은 심연에서 싹튼다. 시인의 언표는 침묵과 불모, 가뭄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충만함과 일치에 도달하기 전의 결핍이고 목마름이다. 그 뒤, 결핍은 더욱더 커지는데, 왜냐하면 시는 시인의 손에서 벗어나 더 이상 시인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시의 앞뒤 좌우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 '우리', 그 '나' 역시 사라지고 침몰한다. 시인은 몸을 숙이고 스스로 백지 위로 굴러 떨어진다. 이렇게 시적 창조에는 이득과 손실, 노력과 대가와 같은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시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득이다. 모든 것이 손실이다.    하지만 부르조아지 도덕의 압력은 시인들에게 그 오래된 정령들의 '목소리' 앞에 귀를 막게끔 강요한다. 보들레르조차도 은근히 노동을 찬양했다. 불모의 황무지와 게으름의 천국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썼던 그 조차도! 하지만 비평가들과 작가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영감의 샘은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도전이며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214       현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는 추상적인 신들을 양산했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유대인들을 꾸짖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정반대의 질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탈육체화에 정신이 없다. 현대의 우상들은 육체도 없고, 형태도 없다. 그것들은 관념, 개념, 권력 등이다.    신들과 악마들이 살았던 고대 자연과 그 뒤 기독교적 유일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인종, 계급, (집단적 혹은 개인적) 무의식, 민족성, 유산 등 얼굴 없는 존재들이 차지했다. 이런 개념들에 의지하면 영감조차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그저 영매靈媒로서 성性, 日記,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개념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즉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두에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사실을 붙잡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이 자명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그 결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비로운 '예술 능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감쪽같이 문제를 감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근본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현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16     시인의 언어와 노이로제 환자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구분해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는 예술가들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들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꿈이나 몽상같이 방향성을 결여한 생각 속에도 이미지와 언어의 흐름은 의미가 있다.    "목적이 없는 표상들의 흐름에 우리를 맡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멈출 때, 그 즉시 다른 알 수 없는 개념―부적절하지만 흔히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표상들의 행진들을 결정짓게 된다.    목적의 개념 없이는 하나의 사상을 형성할 수 없다…… "1) 여기서 프로이트는 핵심을 찌르고 있는데, 목적이라는 개념은 무의식의 흐름에서조차도 필요 불가결하다는 점이다. 단지 그는 인간을 의식, 무의식 등 여러 층으로 나누고, 두 개의 상이한 목적을 인식할 뿐이다.    하나는 우리들의 의지가 참여하는 이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무관한 '무의식' 혹은 순수하게 본능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무시된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리비도나 본능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설명을 빠뜨렸다. 그 본능적인 목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의식적'인 목적이란 사실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욕구, 자연적인 작용이므로 대상과 의미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 게 아니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비록 한없이 어둡지만, 도달하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앎을 내포한다. 목적의 개념은 의식의 개념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과 그 모든 분과 학문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제를 바르게 제기하는 데도 실패했다.      1) 프로이트S. Freud, 『꿈의 해석La interpretacion de lod suends』 (원주) 216       시인의 개념을 역사의 '대변자'나 '표현자'라고 보는 데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역사의 힘'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로 전환되며,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하는가? 모든 역사적 삶이 가지는 상호 연관성에 대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人이며, 간間이다. 가장 신비주의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시인의 목소리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정신 분석학에서와 같이, '역사'나 '경제의 흐름', 즉 '역사적 목표'가, 리비도의 '목적'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말로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역사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이며,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다. 시는 사회의 메아리가 아니라, 다른 인간 행위들처럼 사회를 만들고 또한 사회의 산물이다.    결국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이나 주체 혹은 단순한 외부 현실은 성性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니며, 또한 역사도 아니다. 세계는 우리 밖에 있지 않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안에 있지도 않다.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17             지식인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감은 하나의 문젯거리 혹은 미신 또는 현대 과학의 설명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 어깨를 움칠하고는 머리 속에서 그 문제를 지워버릴 수 있다. 반대로 시인들은 그것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혀서 투쟁해야 한다.    현대시의 역사는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이다. 이 갈등을 제일 처음 겪었던 이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명철하고 충실하게 그것에 대처하였으며, 그 모순에 고통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초극하려 애쓴 유일한 사람들―초현실주의 이전까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자식이면서 다른 한편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자식이기도 한 그들은 나폴레옹 제국의 칼날과 신성 동맹의 반동 사이에서, 구태여 표현하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은 채 살았다. 그들의 내부는 대립물의 싸움터였다.        이런 시인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고집스럽게 유지되어온 영감은, 낭만주의가 전투적으로 포교하는 주관주의 관념론과 화해할 수 없었다. 결별이 야기한 폭력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담하고 무모한 시도를 유발했다.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라고 노발리스가 선언한 것은, 아마도 현대인을 분열시키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영감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려는 필요성을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제기한 것이 아닐까?    다만 모순의 법칙을 제거하는 것―예를 들어, '통일성에로의 회귀'를 통하여―은, 글을 쓰게 하는 힘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인이라는 이중적 요소로 구성된 영감을 파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노발리스는 단일성은 이루어지자마자 곧 깨져버린다고 확신했다.    상호간의 끝없는 생성 과정 속에서 모순은 동일성으로부터 탄생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기 자신과 합의하고 헤어졌다 다시 합치는 대화이며, 다의성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이며, 그 여러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이기도 하다. 218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창조는 어디에 의지하는가? 노발리스는 말하기를, 시인은 "작作하지 않고 술述한다"고 했다. 섬광과도 같은 이 말은 시 쓰기의 현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술'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시인으로 하여금 '작'하도록 도와주는가?    노발리스는 이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때로 그 '작'하는 주체는 성령, 민중, 이념, 혹은 소위 대문자로 씌어지는 그 무엇들이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주체로서의 시인이라는 관점에 대해선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시적인 존재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는 시적 창조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선천적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성스러움을 지각하게 하는 신격화 성향과 유사한 것이다.    시적 창조 능력은 선험적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의 신자에게 신성을 심기 위해서는 그의 내부에 있는 '의존의 감정'에 호소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 사상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떤 낭만주의 시인도 종교로부터 시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았다.    많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이 개종한 것은 종교를 시적으로 해석하고, 시를 종교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시는 야생 상태의 종교 같은 것이고, 종교는 실천시이거나 행위시라고 노발리스는 거듭 확언했다. 따라서 시적인 것의 범주는 신성神聖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19     시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둘 다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의 해석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작용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이름부르기로 이루어진다. 말(言)이야말로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한다. 시 쓰기는 말로써 창조하는 것, 즉 시를 창작한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이다. 시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선험적 영역이나 선천적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시가 부르고자 했던 것, 즉 이름 불려지기 전에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의 형태로만 보여졌던 바로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는 것이다. 독자와 시인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시를 창조할 때, 독자와 시인은 스스로를 창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 언어가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시적 상태라는 것도 따로 있지 않다. 시의 특성은 끊임없는 창조이며, 창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내동댕이치고 자신에게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데리고 간다는 점이다. 220       초조도, 사랑의 열정도, 기쁨도, 열광도 그 자체로는 시적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시적 요소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체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쓰러뜨린다. 이때 우리에겐 죽어 있는 언어를 포함한 침묵이나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 무엇, 이름 없는 것을 이름짓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부르기 위해 우리가 창조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는 창조자의 희생을 통해 생겨난다. 일단 시가 씌어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 ―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의 경험은 단지 그 방향만 바뀌어 반복된다. 이미지는 독자에게 스스로를 열어, 자신의 불투명한 심연을 열어 보인다.    독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심연으로 떨어질 때, 혹은 상승하거나, 이미지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시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나 할 때 그때까지 모르거나 무시하던 '진짜 나'가 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시인처럼 독자도, 스스로를 투사하고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름붙일 수 없는 것과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로 변한다. 시인과 독자 양자의 경우, 시는 자기 밖에 있는 시 작품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 안의 우리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고, 또한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노발리스의 금언을 이렇게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작하지 않고 술한다. 그리고 작자는 창조자로서의 인간이다. 시적인 것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시작詩作은 우리 내부에서, 마치 '누군가'가 우리 내부에 저장해놓았거나 혹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나는 '물건'처럼 시를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다.    시인의 의식은 숨겨진 보물처럼 시가 묻혀 있는 동굴이 아니다. 미래의 시 앞에서 시인은 어눌해져서 발가벗고 서 있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221       갈등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어왔다. 갈등은 반복되면서 깊어지고, 동시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모순은 더 첨예해졌고, 찢겨짐의 의식이 커갈수록, 그것에 정면으로 대항할 명증성과 그리고 해결해낼 용기는 작아졌다.  영감의 희생양이나 증거자 혹은 공조자인 19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그 누구도 노발리스처럼 투철한 의지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들 모두는 해결책 없는 모순 속에서 논쟁했을 뿐이다. 영감을 버리는 것은 시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정당화해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인간관 및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점 때문에, 종종 이 시인들은 세계를 거부하고 비난했다. 물론 도덕적 관점에서 보들레르의 공격과 말라르메의 멸시 그리고 포우의 비판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즉, 그들이 살게 된 그 세계는 구역질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들의 시대는, 현대의 비할 바 없는 끔찍함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무도 그가 속한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그 부정과 비난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는 방법, 즉 소극적으로 견뎌내는 방법일 뿐이다. 보들레르나 콜리지 혹은 말라르메의 글 이상으로 시적 작용의 신비와 그것이 낳는 황무지와 천국에 대해 통찰적이고 명징하게 묘사한 것은 없다. 동시에, 영감의 개념과 현대적 세계관을 조화시켜보려는 그들의 설명과 가설처럼 선명한 것도 없다.    그들의 혼란스럽고 모순에 가득 찬 명증성과 맹목성을 살펴보기 위해선, 현대 시학의 중요한 텍스트(예를 들어, 포우의 『글쓰기 철학』 등) 중 그 어디라도 한번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 그 이전 글들과의 대조는 너무나 선명하다.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22       스스로의 확신으로 가득 찼던 단테는, 꿈에서 사랑의 신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어 시를 받아 적게 했고,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철저하게 확신시키는 상황 속에서 계시가 언제라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쉽고도 단순하게 얘기했다.    "말들을 마치자 그는 사라져버렸고, 잠이 몰려왔다. 그 뒤, 그 환상을 돌이켜보았을 때, 아침 9시에 그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 집을 나서기도 전에 그 서정시를 끝냄으로써, 주(사랑의 신)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2)    단테에게 9라는 숫자는 네르발에게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와 유사하다.3) 단테에게 숫자 9의 반복은 베아트리체가 가지는 구원의 의미와 그들 사랑의 특별한 성격을 순수한 빛으로 조명하기 위한, 비록 신비롭고도 성스럽지만, 다분히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네르발에게 7이란 숫자는 모호하며, 때로는 불길하고 또 때로는 좋아서, 그 진정한 의미는 명확히 밝힐 수 없다. 단테는 계시를 받아들여, 그것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비경秘境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2) 『신생Vita nuova』, XII.(원주) 3) 단테는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만났다고 했다. 다시 구년 뒤, 정확히 아홉시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환상은 오전이나 오후 아홉시에 일어났다. 베아트리체는 13세기의 90년에 죽었다. 즉 성스러운 숫자인 10이 아홉 번 겹친 해였던 것이다. 또한 네르발은 그의 작품 『아우렐리아』의 곳곳에서 자기 생에서 7이란 숫자가 가졌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주) 223     네르발은 흠칫 놀라며 매혹되었다. 그는 자신의 환상을 우리에게 알리려 하지도 않았고, 그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의 꿈을 직시하여 그 비밀을 밝혀내고자 했다. 스스로에게 말하길, 어쨌든 나의 감정들을 찾아내는 대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내 모든 의지로 무장한 채 이 비밀의 문을 열어제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매혹적이고 두려운 환상을 이겨내는 것, 우리들의 이성을 조롱하는 정령들에게 법칙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단테에게 영감은, 시인이 겸양과 겸손과 경배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 초자연적인 신비였다. 네르발에게 그것은 우리에게 싸움을 걸고 도전해오는 재난이며 신비였고, 밝혀내야할 그것이었다. '해독해야 할 신비'와 '풀어야 할 숙제' 사이의 왕래는 쉽게 지각되지 않는 것이고, 이 점은 네르발의 계승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였다.  
6    시와 세기말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471  추천:0  2018-08-22
시와 세기말 / 옥타비오 파스      1. 소수와 다수    ‘시를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누가 시를 읽는가?’라는 비슷한 질문에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자신의 어느 시집에서 “거대한 소수에게 바침”이라는 헌사로 대답했다. ‘소수’라는 명사는 독자의 수를 스탕달의“행복한 소수”로 환원하지만, ‘거대한’이라는 형용사는 ‘소수’라는 명사를 별안간 ‘소수가 곧 다수’라는 뜻으로 확장시킨다. 히메네스는 헤아릴 수 있는 다수라는 상대적 개념에 반하여 비교 불가능한 소수라는 절대적 개념을 내세웠다.  시를 읽는 독자는, 아무리 그 수가 늘어나도 사회적으로 한상 소수에 속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거대한 무엇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소수이면서 다수인 시의 독자는 불가공약적인 현실로 들어가고, 그 언어의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의 무한성을 발견한다. 시를 읽는 것은 독자를 초개인적인 공간, 즉 말 그대로 거대한 공간과 접속시키는 것이다.  예술은 기술과 사회적 여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지속될 것이다. 사회적 쟁점들과 영웅들은 간 곳 없지만, 시와 그림과 교향곡은 의구하다. 물론 과학과 철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예술이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소수의 작업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인가 다수인가 하는 수치상의 문제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의미를 가지려면 두 가지 문제가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공간적인 분리로서 대중과 관람자의 다양성의 문제다. 둘째는 시간적인 지속성으로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독자와 청중의 연속성이다. 다양성과 지속성모두 단순한 숫자상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현대인은 늘 주의가 산만한 상태로 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의 일상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비밀스럽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상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산만함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하찮고 무분별한 소란스러움에 매몰되어 자기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산만함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는 올바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독서는 정찰이다. 광고와 의미 없는 의사소통이 난무하는 시대에 몇 사람이나 그런 독서를 할 수 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통계상의 수치가 아니라, 그 소수의 독자들에게 우리의 문명의 지속성이 달려 있다.    근대가 시작될 때부터 시는 근대성과 이중의 관계를 맺어왔다. 시와 근대성 사이의 갈등은 19 세기 말에 두드러졌고, 20세기 초반 전위주의에 이르러 갈등은 불화로 변했다. 시는 정통족인 도덕적, 미학적 가치를 무시했고 종종 비웃기까지 했다. 시는 언어의 지반을 붕괴 시켰고 기화와 그 의미를 변형시켰다. 또한 시는 매혹적인 언어의 과물이 거주하는 세계를 건설하기도 했고, 의식을 빨아들이는 투명한 누속임의 연못을 만들기도 했다. 시에 대한 대중적 무관심은 시인들이 매혹되었고 동시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던 근대성을 실현시킨 부르주아 계급이 시에 보인 반응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먼저 낭만주의 시인들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상징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 전위주의자들에 의해서 불신되고 무시되었다. 근대 예술에 대한 반감을 정당화하고 부추긴 것은 적의에 찬 강단 비평과 악의적인 무지한 언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화는 파국으로 치달을 만큼 총체적이진ㄴ 않았고, 근대성과 시 사이의 불화는 필연적이었다.    근대시는 그것이 ‘근대적’이기 떼문에,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 시를 읽는 독자들도 동일한 과정으로 인해 자신이 근대인이란 것을 느낀다. 근대성은 탄생과 더불어 스스로와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여기에 근대의 이중성이 있고, 지속적인 변화와 변모의 비밀이 숨어 있다.    2.양적기준과 가치    시는 다른 영역, 특히 에로티시즘, 우정, 쾌락, 신에 대한 경건함과 불운한 이웃에 대한 동정심(프리아모스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감정), 고독, 우울함에서 오는 쓰디쓴 쾌락, 허약한 기억 같은 친밀한 삶의 영역에도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시인들은 우리에게 선망, 관능성, 잔인함, 위선, 콤플렉스 같은 인간의 정념을 가르쳐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주었다.  시적 전통은 공간 축과 시간 축이 교차한 결과이다. 공간 축은 끊임없이 상호 의사 소통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시간 축은 세대를 이어가는 시인과 독자의 연속성으로 이루어진다. 다양한 지역의 독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의사 소통은 신선한 젊음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시적 전통을 풍요롭게 한다.  근대적 출판체제에서는 모든 장소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조차도, ‘여기’에 있다. 여기는 바로 ‘지금’이다. 공간축은 시간축이 된다. 시장의 작용은 시적 전통을 형성하는 시간 축도 부식시킨다. 지금이 특권을 갖게 됨으로써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키는 매듭을 끊어버린다. 18세기부터 서양문명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순례를 인도하는 안내자는 진보라는 개념의 북극성이다. 몇 년 전부터 그 별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현재가 그 영광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현재는 부동할 뿐 상승하지 못하며, 움직일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무게없는 현재이다.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재이다. 목표가 증발함으로써 그 반대급부로 수단이 증가한다. 현대인의 현재는 동쪽도 없고 북쪽도 없는, 그야말로 방향을 상실한 현재다. 문학적 전통 내에서 현재의 확장은 순간적인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추세로 나타난다. 이제 완전함의 속성은 지속이라기 보다는 재빠른 소비이다. 과거는 실종되고 미래는 희미하다. 현재 또한 순간을 향하여 날을 세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증발한다. 순간은 폭발음과 함께 사라진다.  시인 한사람 한사람은 전통이라는 강의 한 맥박이며 언어의 한 순간이다. 때때로 시인들이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전통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주기적이며 근대에 들어와 더 두드러진다. 낭만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운동은 자신의 전통을 만들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시인들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패러디였으며 대학의 졸업 시험에 대한 패러디였다. 시인은 자신의 쇠사슬의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즉 어제와 내일을 잇는 다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갑자기 그 다리가 두 개의 까마득한 심연-멀어져가는 과거라는 심연과 붕괴되는 미래라는 심연- 사이에 걸쳐져 있음을 발견했다. 시인은 시간 속에 길을 잃었음을 느낀다.  시에서 본질적인 것은 시적 형식인데, 형식은 죽음과 세월의 마모에 저항하는 인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형식은 지속을 위한 것이다. 형식은 때로는 도전이며, 때로는 요새이고, 또 때로는 기념비 이지만, 언제나 오래도록 지속하려는 의지이다. 새롭게 응축되고 변형된 시간은 현실적 시간에 맞서 불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숨쉬는 건축물이 되고자 한다.    3. 균형과 예측    시 운동의 부재는 우리 시대가 경험하고 있는 커다란 변화 중의 하나를 반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절의 전통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성이 끝나고 있거나 혹은 달라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 중의 하나다.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다른 시대가 시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시대는 근대의 변형인가? 새로운 시작이건 근대의 변형이건 간에 세기말의 표식은 모든 것에 의문 부호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불확실성의 시대도 시적이고 예술적인 창조에서는 늘 풍성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시의 건강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상황이다.  서로 다른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에 수익의 기준이 도입됨으로써 예술을 타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적 생산을 자극한다. 어쨌든 시는 지하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지만 살아남았다. 또한 시에 대한 긍정적인 표시들을 보면, 분산되어 있지만 광업위한 독자들이 있고 그 수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시인들이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가졌던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중남미와 다른 곳에서는 시인이 여전히 대중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와 중국, 중앙유럽의 모든 나라에서는 시인들이 공산주의 관료제도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왔다.  부정과 긍정, 단절과 유대의 이중적인 운동은 모든 문학의 역사에서 늘 일어나는 현상이며 특히 근대문학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오늘날의 문학에서 이러한 이중적인 운동이 보이지 않은 것이 불안한 징조이다. 근대에서 소우의 행동은 문학적 전통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왔다. 잡지와 작은 출판사 같은 소수집단의 활동이 가설적인 전원 합의를 위해서 사라진다는 것은 문학이라는 생명체를 불구로 만들고 혹은 죽일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의 몬든 영역에서 불안감이 지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현대문학에 무엇인가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것은 ‘아니다NO’라는 말이 아니며, ‘아니다’는 그 다음에 올 대긍정을 예비하는 알람이다.  시가 노래하는 것은 지금 지나쳐가는 것들이다. 시의 기능은 일상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고 가시화화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가장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보편적 임무라는 것이다. 모든 민족이 신곡이나 실낙원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역사와 혼재되어 있는 시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사랑이나 결투, 고독이나 집단적 환희를 표현하는 노래와 로망스가 만들어졌다.    *보들레르의「젊은 시인들에게 주는 충고」의 몇 구절을 보면 “나는 열심히 시를 쓰는 재능있는 젊은 시인들에게 결코 시를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시는 결실이 풍요로운 예술이다. 시는 고양된 결실을 거두기 위한 일종의 투자지만 수확을 거두는 일은 매우 더디다.”    근대 과학 기술과 시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대립을 제시해보면, 첫 번째 대립은 세계의 이미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천에 관한 것, 즉 세계를 바꾸려는 행동, 어떤 면에서는 세계를 추방시키려는 행동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대립은 언제나 세계의 비전에 관한 것이다. 시가 이미 새로운 의사소통의 방법들을 더욱 과감하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도록 시인들에게 말한다. 대중 앞에서 시를 읽는 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는 시의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첫째 카세트의 보급률이 늘어나면서 시청률의 횡포에서 벗어나 대중을 향한 길이 열리고 있다. 둘째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커다란 두 갈래의 시 전통, 즉 구어체의 전통과 문어체의 전통이 합류된다. 이런 방업은 책과 인쇄술만큼이나 심원한 방법으로 시의 발표와 수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시각과 청각, 이미지와 말이라는 인간이 갖는 두 가지의 특권적인 감각 사이에 결합이 이우러질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미학적 쾌락과 시적 경험, 즉 축제와 관조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축제는 참여와 교감의 예술이며, 관조는 우주와 나누는 침묵의 대화이다.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미래의 시에서는 두 가지의 경험이 결합될 것이다. 축제와 관조: 화면이라는 살아 있는 페이지 위에 색깔과 움직임을 갖는 기호들, 선들, 이미지들이 솟아올라 인쇄될 것이다. 목소리들은 울림과 반향의 기호학, 소리와 의미가 결합된 공기의 천을 수놓을 것이다.    4. 타자의 목소리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시는 다른 목소리였다. 그 소리가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정열과 계시의 소리이고,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 지금의 소리이며 동시에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태초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시는 이단적이고 이교도적이며, 순수하면서 퇴폐적이고, 깨끗하면서도 진흙투성이이고, 하늘에 떠 있으면서 땅속에 숨어있고, 고요한 암자의 것이면서 동시에 거리 한 모퉁이의 카페의 것이고,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저 멀리 비껴 있는 존재다. 그 시간이 길거나 짧거나, 반복적이건 일회적이건 간에 그들이 진정으로 시인이 되는 그 순간에 모든 시인들은 다른 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타인의 것이고, 누구의 것이 아니면서 모두의 것이다. 시인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자기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타인이 되는 그 드문 순간에 그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근대 시인의 특성은 그의 행동이나 사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음성에서 온다. 차라리 그 음성이 깃들여 있는 어조에서 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의 할 수도, 혼동될 수도 없는 어조여서 필연적으로 그 소리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원죄에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다름의 표시다.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갈라지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눈물과 데모크리토스의 웃음사이에서 동요된 우리 시의 반근대적인 근대성은 진정한 위반을 뜻한다. 그러나 그 위반은 거의 항상 무의식적으로 시인이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나타난다. 위반은 앞서 말했듯이 근원적인 차이에서 싹튼다. 그것은 근대에서 시가 부속품이 아니라 시 자체가 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는 그 주제, 언어, 그리고 형식적인 면에서 근대적일 수 있지만 그 깊은 본성은 반근대적인 음성일 수밖에 없다. 시는 근대성과는 동떨어진 현실, 가장 오래되고 역사의 변화와 무관한 내부적인 심층세계를 표현한다.    시는 비록 그 땅의 현실과 역사에 매여 있으나 실제로 표현되는 각각의 시는 항상 저 너머의 초역사적인 것을 향하여 열려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저 너머의 종교적인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면에 대한 지각을 뜻하는 것이다.    시는 이미지화한 ‘기억’이고 또 음성으로 변한 이미지다. 다른 목소리는 저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각자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인간의 소리다.  시적인 사고가 작용하는 방식은 상상력이며 이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거나 반대되는 세계들을 관계지어주는 능력에 기초한다. 모든 형태의 시와 언어의 모든 형상은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상이한 사물들간에 감추어진 유사성을 찾고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반대적인 것들까지도 서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시의 작용은 언어를 끌어당김과 밀어냄이라는 두 흐름에 의해 흘러가는, 살아있는 우주로 인식한다. 언어 내에서는 천체와 세포 간의, 입자와 인간간의 투쟁과 사랑 그리고 뭉침과 흩어짐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 주제, 형식, 그리고 사상이 어떻든 간에 각각의 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살아 있는 소우주다.    *시는 기술과 시장에 대한 해독제다. 바로 이것이 우리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에서의 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특히 상상력이라는 인간의 특수한 능력에서 나왔기 때문에 만일 상상력이 죽거나 썩게 되면 시도 깨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시를 잊어버리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태초의 혼돈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 '흙의 자식들' 中 '시의 세기말'    
5    <언어>편/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415  추천:0  2018-08-22
편(옥타비오 파스, 김홍근・김은중 옮김, 활과 리라 , 1998.)        1. 언어에 대한 인간의 태도      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맨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35쪽)      갑자기 단어의 효능에 대한 믿음이 상시되자, 시인(아르튀르 랭보)은 “난 내 무릎 위에 상처난 아름다움을 길게 뉘었다. 그리고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말일까?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말없이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36쪽)      모든 철학의 모호성은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36쪽)      말은 인간 자신이다.(37쪽)      인간이 미지의 실재에 부딪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 즉 세례하는 일이다.(37쪽)        2. 인간의 언어가 동물의 것과 다른 점      (1) 인간의 일상어가 비할 데 없이 복합적이다.      (2) 동물의 언어에는 추상적 사유가 부재하다.      (3) 마샬 어번이 설명하는 말의 세 가지 기능(39쪽)      -말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혹은 지시하는 이름이다.      -말은 감탄사와 의성어의 경우처럼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자극에 본능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말은 표상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동물들의 어떤 외침에는 지시를 나타내는 미약한 징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상징적이거나 혹은 표상적 기능이 있다고는 증명되지 않았다.(40쪽)        3. 언어의 발생과 전개      언어의 발생과 전개를, 단순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점차적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으로, 예를 들어, 감탄사, 외침 혹은 의성어로부터 지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가설들 역시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원시 언어들도 대단한 복잡성을 과시한다.(40~41쪽)      일상 언어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전문가들은 “모든 말들과 언어의 형태들이 일차적으로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듯싶다 .(41쪽)      “시초부터 언어와 신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 언어와 신화의 기본적인 특성은 상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모든 상징적 기능의 내부에 있는 철저한 은유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것이다.”(42쪽)        4. 인간과 언어      인간은 말 덕분에, 즉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42쪽)        5. 언어와 시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상어는 시를 이루는 물질 혹은 자양분이지만 시는 아니다. 시와 시적 표현들—어제 발명되었거나 혹은 전통적 지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민중들이 오래 전부터 반복해온—의 차이점은, 시는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43쪽)      말과 사물,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 사이의 융합—혹은 결합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은 그보다 먼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화해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시는 계속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심원하고 원초적인 것을 만나러 가기 위한 많지 않은 방법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5쪽)        6. 시적 창조와 언어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47쪽)      시는 독창적이며 유일한 것이지만 독서와 음송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고 민중들은 음송을 통하여 시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시인과 독자는 동일한 실재의 두 순간일 뿐이다. 순환적이라고 말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는 방법으로, 시인과 독자는 번갈아가면서 시라는 불꽃을 일으킨다 .(47~48쪽)      유머는 시가 사용하는 주된 무기 중의 하나이다.(49쪽)        7. 현대사회와 시      시인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근대의 특징은 시인이 주변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사회에서 시는 부르주아 계급이 소화할 수 없는 양식이다. 계속해서 시를 길들이려고 시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군의 시인들이나 어느 시 운동이 이러한 시도에 굴복하여 사회적 질서에 복귀하자마자, 새로운 비판과 물의를 야기하는 또 다른 창조가 솟아나게 마련인데, 이것은 때로는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49쪽)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 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50쪽)      근대의 정치적 당파들은 시인을 전도사로 만들어 타락시킨다.(51쪽)      우리 시대의 시는 사회와 인간 자신의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고독과 반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대 시인의 행위는 단지 개인과 소집단에만 행사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한계성이 역으로 이 시대에 현대시가 가질 수 있는 유효성과 미래에 풍요롭게 꽃필 수 있는 토대가 된다.(53쪽)      한 사회의 피폐가 반드시 예술의 사멸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며 시인의 침묵을 유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즉, 고독한 시인과 작품의 출현을 유발하는 것이다.(55쪽)      시가 만드는 말의 우주는 사전의 단어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단어들로 만들어져 있다. 시인은 죽은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소리의 거부(巨富)다. 개인적 언어는 시인에 의해서 드러나거나 혹은 변형된 공통의 언어를 뜻한다. 비의적 시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시인의 사명을 “부족의 말에 가장 순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57쪽)      시인은 말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인가?(57쪽)      어디선가 발레리는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긴장이 곧 시라는 사실이다. 양자 중의 하나가 사라지면, 시는 기계적인 감탄사로 복귀하거나 혹은 장황한 부연, 묘사 혹은 정리로 변한다.(58쪽)      시는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한 것을 듣는 귀이다.(58쪽)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서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가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언어를 순화하는 것은 시인의 과제이며, 이것은 언어에게 원래의 본성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말은 본래 다의적이다. 만일 시를 통하여 말이 자신의 본성, 다시 말해 동시에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사물을 의미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한다면, 시는 언어의 본질 자체인 의미화 작용 혹은 의미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는 쓸모없으며 동시에 기괴한 작업—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언어를 박탈하고 그 대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의 울림을 되돌려주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시의 말들과 구문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60쪽)     
4    활과 라라 / 옥타비오파스 [스크랩] 댓글:  조회:2025  추천:0  2018-08-11
시 →이중적 성격 앎 구원 힘 포기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향 들숨과 날숨 근육 운동 공을 향한 기원 무의 대화 시의 양식 : 권태 고뇌 절망 기도 탄원 현현 현존 악마를 쫓는 주문 맹세 마법 무의식의 승화 보상 응집 계급과 국가, 인종의 역사적 표현이면서 역사를 부정 경험 느낌 감정 직관 방향성이 없는 사유 우연의 소산 계산된 결과물 세련된 형식을 사용하여 말하는 기술이자 원시적 언어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 선대를 흉내내는 것 실제의 모방 이데아의 모방에 대한 모방 광기 황홀경 로고스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성교 낙원과 지옥, 연옥에 대한 향수 놀이 노동 금욕적 행위 고백 본래적 경험 비전 음악 상징 아날로지 교육 도덕 계시 춤 대화 독백 시의 기능 :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시적 행위 : 혁명적인 것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편 →시의 표면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 시편의 운율과 각운 :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 울림 시는 민중의 목소리이자 선민의 언어이고 고독한 자의 말이다. 시는 순수하면서 순수하지 않고, 신성하면서도 저주받았고,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를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시적 경험이 개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시적경험, 시편을 살펴보아야 한다. 시가 우연의 응축으로 주어질 때나 혹은 시인의 창조적 의지와는 다른 힘과 여건의 결정체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시적인 것과 만나게 된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단순한 문학적 형식이 아니라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 시를 표방하는 형식은 다양하다.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은 시편을 하나의 장르로 환원시키려고 애쓰는데, 여기는 두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다. 1. 만일 시를 일단의 형식들, 즉 서사시, 서정시 극시로 환원한다면 많은 예외가 발생한다. 2. 분류가 가지는 표면적인 것에 대해서 한계가 드러난다. (이는 문체론에서부터 정신 분석학에 이르기까지 문학 비평이 이용하는 타문학적 방법론들에도 적용된다.) 시는 모든 시편들의 합계가 아니다. 모든 시적 창조물은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인 단위 (부분이 곧 총체) 각각의 시문은 유일하며 환원 및 반복 불가능 다양성 역사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어느 시기,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한 다양성이 존재 시편의 공감을 일으키는 열쇠는 역사적 탐구가 아니라 전기. 그러나 같은 시인의 글일지라도 하나하나의 작품은 저마다 독특하고 개별적이며 환원 불가능하다. 모든 작품은 스스로의 생명을 가지며 때로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부정하기도 한다. 역사와 전기는 역사적 시기와 삶에 대한 주조를 말해주고 작품의 경계를 보여주며 작품의 외재적 스타일을 설명해준다. 또한 하나의 경향성이 지니는 의미를 명확히 보여줄 수도 있고 시편이 왜 씌어졌으며 어떻게 씌어졌는지까지도 드러내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편이 무엇인지는 말해줄 수 없다. 모든 시편의 공통점 : 인간의 생산품, 작품 하나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 스타일 일군의 예술가나 한 시대에 적용되는 공통된 방법 상속이며 변화, 집단적 방법이라는 면에서 기술과 유사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 모든 예술가는 역사적인 공동의 스타일을 뛰어넘으려 한다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공통된 자산, 그 시대의 스타일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모방하지만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변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은 스타일에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스타일 없이는 시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타일은 태어나고 자라서 죽지만 시편들은 영속한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시편은 자기 충족적인 단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독립된 본보기를 이루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 시편 : 색깔이고 소리이면서 의미이기도 한 말로 이루어지는 애매한 존재 조형 예술, 조음 예술 : ‘의미하지 않음’에서 출발 양가적 유기체인 시편 : 의미를 품은 존재인 말에서 출발 의미와 작용이 결핍된 그 자체로의 색깔과 소리는 없다. 인간의 손에 닿음으로써 성질이 바뀌고 작품의 세계로 진입 - 모든 작품은 의미화 작용에 닻을 내림. 인간의 손길이 스치면 지향성에 물들게 되어 어딘가를 향하게 되는 것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 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언어 말하여지거나 씌어진 언어와 조형적이거나 음악적인 언어 사이의 차이는 대단히 크지만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언어, 즉 의미를 나타내고 의사 소통할 수 있는 표현의 체계라는 사실은 공통된다. 재료의 면에서나 의미의 면에서나 작품은 인간을 초월할 수 없다. 모든 작품들은 ‘~를 위한 것’ 그리고 ‘~를 향해 가는 것’이며 이것들은 필연적인 역사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간에 닻을 내린다. (한 시대의 생산물들은 역사, 즉 스타일에 용해되어 있다.) 하나의 스타일 안에서, 시편-운문으로 씌어진 논문/ 그림- 교육적 삽화/ 가구- 조각 을 분리시키는 차이점, 차별적 요소는 시. 창조와 스타일을 구별짓고, 예술 작품과 도구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줄 수 있는 것 : 시 -하나 : 산문 -다수 : 시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 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시적기능 ↔ 기술적 조작 도구로 전락하거나 모양이 일그러졌던 재료는 예술 작품 속에서 본래의 광휘를 회복한다. 시적 기능에 힘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이미지 그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어떤 것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인 가치, 원래의 무게를 잃지 않는 채, 피안에 닿는 다리가 되며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기의들의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된다. 다의적인 존재, 시적인 말은 온전히 있음이며 동시에 다른 사물, 즉 이미지 이다. 이미지는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성좌를 유발시키는 이상한 힘으로서 모든 예술을 시적으로 만든다. -광채를 발하거나 혹은 불투명한 재료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려서 유용성의 세계를 부정 -그것을 이미지로 변화시키며 동시에 의사 소통을 위한 특별한 형태로 만드는 시적 작용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 이미지가 됨으로써,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면서 역사를 초월한다. 시편의 다양성은 시의 단일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   가능성 모든 시편은 유일하다. 그러나 시편에 대한 경험-독서나 음송을 통한 재창조- 역시 혼란스러운 다양성과 이질성을 보여준다. (독서는 거의 언제나 본래적 의미의 시와는 다른 것을 드러낸다.) 모든 독자들은 시편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다. 시편은 개인의 성질이나 기질 그리고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모든 시편의 공통점 : 참여 독자가 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컫는 상태에 참여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것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 시편의 경험도 역사 속에서 주어지며, 역사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부정한다.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 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 : 중재 역할 ~ 태초의 시간 - 순간 속에 육화 ~ 직선적 시간 - 순수한 현재로 변화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 시편을 읽는 것 ≒ 시적 창조 시인은 이미지, 즉 시편을 창조하며 시편은 다시 독자를 통해 이미지, 즉 시로 태어난다.   시편이란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가? 시편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적 언어들은 어떻게 의사 소통하는가?   시편 :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 시 :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서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편   기호 ≠ 대상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 사이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위기의 시대는 언어에 대한 비판과 일치한다. “난 내 무릎 위에 상처난 아름다움을 길게 뉘었다. 그리고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말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 사물도 똑같이 피를 흘린다.   모든 철학의 모호성 →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 인간은 말로 된 존재 그리고 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말을 이용하는 모든 철학은 역사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한 쪽에는 말이 표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단지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실재가 있다. 말은 우리의 유일한 실재이거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실재를 표현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언어 없이 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앎의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인간 실존의 조건인 것이지,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대상도, 체계도, 유기체도 아니다. 언어에 대한 연구는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학문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언어의 기원 ○동물의 의미화 작용이 발전하여 사람의 언어가 되었다는 주장 이의 제기 : 1. 인간의 일상어는 복합적 2. 동물의 언어에는 추상적 사유가 부재 →이런 유의점은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   마샬 어번 : 말의 세가지 기능 1. 말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혹은 지시하는 이름 2.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자극에 본능적, 자발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감탄사 의성어) 3. 표상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 →의미화 작용 : 지시적, 감정적, 표상적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해서 경험의 한 요소를 표상하는 것, 즉 기호 혹은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 언어는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지는 것이다.   ○단순한 것(감탄사, 외침 의성어) → 지시적, 상징적인 표현 원시 언어들도 대단한 복합성을 지님. 거의 모든 고대 언어들에는 구나 완벽한 문장을 구성하는 말이 존재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이행은 자연 과학에서는 확실하지만 문화 과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언어에 대한 동물적 기원의 가설~ “언어를 표현적인 운동의 장”에 포함시킨다는 면에서 독창성을 지님 제스처와 동작은 의미화 작용(지시, 감정, 표상)을 가진다.   언어와 신화 : 은유 “모든 말들과 언어의 형태들이 일차적으로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 언어와 신화는 실재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 언어의 본질 : 상징적인 것 ~ 실재의 한 가지 요소를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 인간은 말 덕분에, 즉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이미지와 운율을 띤 언어적 형상의 계속적인 산출은 일상어의 상징적 특성, 시적 성격을 증거한다.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되려는 경향이 있다. 언어 한복판의 내전 : 모든 것은 하나를 향하여 투쟁하고 하나는 모든 것을 향해 투쟁한다.   시와 시적 표현(일상어)의 차이 시 :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 시적 표현 : 일상어와 동일한 수준에 머물며 인구에 회자되는 언어들의 왕복 운동의 결과   말과 대상사이의 거리 말이 지시하는 것의 은유로 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말에 강요되는 거리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자마자 자연 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가 되었다. 말이 지시하는 실재와 말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그리고 더욱 심층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존재 사이에, 자신에 대한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은 다리이며 이 다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키는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는 인간 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거리 소멸 1. 인간됨을 포기하고 자연 세계로 돌아감 2. 인간됨의 한계를 초월 모든 역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거리 소멸의 시도는 근대에 이르러 극단적으로 나타남 현대시 1. 마법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긍정 2. 혁명적 소명 양극으로의 운동 :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역   세계와 인간 사이에 원초적인 단일성이 회복된다면, 소외가 사라지면 언어도 사라질 것이다. 말과 사물,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 사이의 융합은 그보다 먼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화해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의지 창조적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시가 존재할 수 없다. 말이 갖는 창조적 힘은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다. 언어를 움직이게 하는 것 : 인간 모든 것은 의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신은 불가분의 총체   무심(無心) 무심한 사람은 근대 세계를 부정한다. 근대 세계를 부정할 때, 그는 전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전체를 건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창조적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위반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1. 말들은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2.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의 두 가지 적대적인 힘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째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의 힘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는 중력의 힘 시는 독창적이며 유일한 것이지만 독서와 음송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다. 시인과 독자는 동일한 실재의 두 순간일 뿐   공용어 결별과 복귀의 두 작용은 시가 공용어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 도시, 국가, 계급, 동아리 혹은 분파가 뜻하는 집단의 언어   유럽 민족들의 언어가 창조될 때, 전설과 서사시들은 그 민족 자체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그 민족들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의식을 부여함으로써 민족 수립의 토대를 세웠다. →시로 인하여 각 민족의 공용어는 원형의 가치를 지닌 신화적 이미지로 변화되었다. 근대시는 부르주아 세계에서 추방당하고 탈퇴한 사람들의 양식으로 변했다. 반역의 시가 가능 그러나 이 경우에는 사회적 언어로 시가 쓰인다.   ‘시인이 속한 집단이 무엇이든지 간에, 시인의 언어는 집단의 언어이다.’ 시인 - 연통관(통과의례, 공범관계) - 집단 현재, 분열의 과정   근대가 각 개인들 사이에 세워놓은 공허의 장벽을 제거하기를 원하는 많은 현대 시인들은 잃어버린 청중을 찾으려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제 민중은 없고 조직된 대중이 있을 뿐이다. 시인이 관리로 변했다.   이데올로기들과 관념 그리고 여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피층을 구성하는 반면에,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 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시는 민중의 토대를 세우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의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에서 자신의 존재의 토대, 즉 자신의 맨 처음 말과 마주선다. 그 본래적 말을 하면서 인간은 성장해왔다.   시인이 자신의 추방 -진정한 반역의 유일한 가능성- 을 포기한다면, 시도 포기하는 것이 되고 그러한 추방이 합일로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이중의 오류 전도 시인 : 민중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고 믿음 민중: 시의 언어를 듣고 있다고 믿는 것   모호함 시적 창조는 언제나 수평적 완만함의 저항을 받기 마련 모든 작품이 갖는 어려움은 그것의 혁신성에 기인 습관적인 쓰임에서 떨어져 나와 대화와 담론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 속에 편입된 말들은 자극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 시적 즐거움은 창조의 어려움과 유사한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주어지는 것   모든 신성한 말은 비밀스러운 것 그리고 모든 비밀스러운 말들은 신성함과 닿아 있다. 비의적 시편의 시의 위대함과 역사의 빈곤함을 선언한다.   특정한 사회의 가치에 반대하는 위대한 비의적 시인 혹은 반역적인 시 운동이 나타날 때마다, 치유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라 사회라는 사실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원인 1. 공통적 언어의 부재 2. 고독한 노래 앞에 사회가 귀를 막고 있다 시인이 고독하다는 것은 사회가 하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조는 언제나 일정한 높이에서 역사적 수준의 하강을 고발한다. 가끔씩 난해한 시인들이 더욱 높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관점의 오류이다. 그들이 높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낮은 곳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영역을 떠나 시의 말이 될 때. 시인은 자신의 말을 선택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릭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었다. 시인 = 시인의 말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 말인 것이다.   시의 말들은 모두 유일. 동의어가 없다. 유일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어서, 단어 하나에 상처를 입히면 시 전체가 상처를 입게 된다.   시인의 말도 역시 공동체의 말 시인은 살아 있는 목소리의 거부 개인적 언어는 시인에 의해서 드러나거나 혹은 변형된 공통의 언어   시가 말을 순화한다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긴장 = 시 발전의 주체 : 감정적 외침이 시사하는 총체적이고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가는 언어 시 :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한 것을 듣는 귀   시인은 말에게 봉사하는 자이다 말에 봉사함으로써, 말에게 말의 충만한 본성을 되돌려주며, 말이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서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사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리듬 구 고립된 단어는 의미 단위를 구성할 수 없다. 토막난 단어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가 아니다. 우연에 맡겨진 낱말들의 연속도 언어가 아니다.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기호들과 소리들이 의미를 암시하고 전달하도록 조합되어야 한다. 일상어의 가장 작은 단위를 구성하는 것 : 구 혹은 문   각각의 시는 언어와 언어의 세포인 구와 같이 복합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성격을 갖는다. 모든 시는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는 총체성이다. 시의 세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핵 : 구 운문적 구를 구성하며 언어를 만드는 단위 : 리듬   시인과 리듬 단어가 갖는 마법적인 힘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든 단어들은 상응 일상어는 별과 식물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 있는 존재들의 집합   사유, 구 역시 리듬, 부름, 울림 사유한다는 것은 적절한 음률을 타는 것 노여움, 열광, 분노 그리고 우리를 우리 밖으로 팽개치는 모든 감정을 똑같이 우리는 해방시키는 힘을 갖는다. 대화 : 함의 이상의 어떤 것. 화음   언어는 인간이며 그 이상의 어떤 것 처음에 말들은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서 서로 결합 어떤 질서가 말들 사이의 친밀성과 거부감을 다스린다. →모든 언어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 시인이 모델로 삼는 것은 모든 언어를 움직이는 리듬 (리듬 = 자석) 시적 창조는 유혹의 동인으로서 리듬의 자연적 흐름을 이용한다   시인은 언어가 무엇인지 혹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들을 이용할 뿐이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 드러난다. 시적 계시는 내면적 탐색을 포함한다. 이미지의 출현에 적절한 수동성을 야기할 수 있는 정신적 활동   예 : 말라르메 말라르메의 시적 언어의 긴장은 그 자신에게서만 수행된다. 그의 선명성은 자신을 태워버림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말라르메의 위대함은 우주의 마법적 복제 - 조화로운 우주로 인식되는 단 하나의 작품- 인 언어를 창조하려는 시도와 특히 그러한 언어를 연극의 장으로, 인간과의 대화로 변화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이렇게 지배적인 리듬의 기능은 시를 다른 모든 문학적 형태들로부터 구별한다. 시는 리듬 위에 세워진 언어적 질서, 즉 구들의 집합이다.   리듬 타격과 휴지의 연속은 어떠한 지향성, 즉 방향과 같은 어떤 것을 드러낸다. 리듬은 기대를 유발하며 어떤 바램을 떠받치고 있다. 리듬은 우리 안에 어떤 감정의 상태를 유발시키는데, 그 감정은 ‘어떤 것’이 돌출될 때에만 비로소 잠잠해질 수 있다. 리듬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그 어떤 것이 무언인지 모를지라도, 우리는 리듬이 어떤 것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느낀다. 리듬 : 방향성, 느낌, 원초적 시간   리듬이 우리 앞에 전개될 때, 시간과 더불어 우리가 지나간다. ‘……를 향하여 가는 것’ 그곳은 우리가 무엇인지 드러날 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리듬에 우리를 부어넣고 ‘어떤 것’을 향하여 우리는 발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리듬은 의미이며 ‘무엇’인가를 말한다.   시의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이 이미 말하고 있다. 제의와 신화적 이야기는 리듬과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듬 -어떤 힘들을 매혹시켜 사로잡고, 다른 힘들을 쫓아내는 즉각적인 목표를 갖는 마법적 방법 -기념하기 위한 것, 신화를 재생산하기 위한 것 -우주적 운율의 닮은 꼴, 인간이 원했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 힘 -제의   운문에는 이미 구와 구의 가능한 의미화 작용이 잠재태로 있다. 장중한 리듬이 있는가 하면 경쾌한 리듬도 있고, 춤추는 리듬이 있는가하면 장엄한 리듬도 있고, 희열에 찬 리듬이 있는가 하면 슬픔에 찬 리듬도 있는 것. 인간과 리듬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리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리듬은 인간의 모든 창조의 뿌리이다. 역사 자체가 리듬이다. 각각의 문명의 원초적 리듬의 발전으로 환원될 수 있다. 예) 중국인- 음과 양 / 아즈텍인 - 사박자 리듬 / 히브리인 - 이원적 리듬 / 그리스인 - 대립물들의 투쟁과 결합 / 서구의 근대 문명 - 삼박자 리듬   리듬은 우주의 생생한 이미지이며 우주의 법칙이 현시적으로 드러난 것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 모든 문화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창조로 표현되기에 앞서서 리듬으로 나타나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깔려 있다.   리듬은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 사실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이며 단순한 표명   리듬을 동질의 공간으로 나누어진 순수한 측량으로 환원시키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리듬을 추상화하고 합리적인 도식으로 변화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각각의 리듬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다. 이미지이고 의미인 리듬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표현하는 우리 자신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   리듬의 기능 리듬의 반복에 의하여 신화는 되돌아온다 “시간의 신화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리듬 같은 것이다. 종교와 마법에서 달력의 역할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리듬화하는 것이다”(원초적인 시간을돌아오게 하는 것) 시에서 내용이 없는 동질적 연속성의 시간이 리듬으로 변화한다 비극, 서사시, 노래 등의 시는 반복하여 순간을 재창조하는데, 그 순간은 원형적 사건 혹은 그 사건들의 집합이다.   이야기 속의 시간은 연속성을 단념한다. 지금 되고 있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시간 재상되는, 재현되는 과거   시간의 재현 방법 1. 시적 창조의 순간 2. 독자가 그 순간을 새로이 소환하여 시인의 이미지를 소생시켜 재창조 할 때 시편은 어떤 입술이 리듬이 깃들인 구들은 반복하자마자 현실화되는 원형적 시간이다. 이러한 구들이 우리가 운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의 기능은 시간을 재창조하는 데 있다. 모방적 재생산이라는 말을 시인이 원형을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진실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시가 그런 의미에서 모방적 창조일 때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는 서정시인조차도 미래에 다가올 과거를 소환한다   시적 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 자신을 현재화하는 것 시구는 살아 있는 구체적인 시간 : 리듬, 근원적 시간, 영원히 재창조 되는 것,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죽고 또 다시 새로 태어나는 것     운문과 산문      산문과 시를 구분하는 방법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리듬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적어도 모든 리듬은 언어를 암시하거나 예시한다. 모든 언어적 표현은 리듬   리듬은 모든 언어적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가장 충만되게 나타나는 것은 시 리듬이 없이는 시가 될 수 없으며, 리듬만으로는 산문이 될 수 없다. 리듬은 시가 되기 위한 조건인 반면, 산문의 필수요소는 아니다.   산문 작가는 일관성과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명시되고자 하는 운율의 숙명적인 흐름에 저항   시 : 인간 표현의 자연스러운 형태 산문 : 비판과 분석의 도구. 점진적인 성숙을 요구, 일상어를 길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기나긴 노력 뒤에 생겨나는 것   산문의 진척도는 사유가 말을 정복한 정도로 가늠된다. 언어의 자연스러운 경향에 대항한 영원한 싸움을 통해 성장 산문의 가장 완벽한 형태 : 담론, 예증   시는 닫혀진 질서, 산문은 열리고 직선적인 건축물 산문 : 사열, 개념들과 사건들에 대한 사실적 이론, 선,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언제나 앞으로 나아간다. 산문의 원형- 담론과 이야기, 사색과 역사 시 : 원형 혹은 구형으로 존재, 자기 자신에게 닫혀있는 어떤 것, 자족적인 우주, 그 안에서 종말은 되돌아오고 반복되고 재창조된다. 끊임없는 반복과 재창조=리듬   운율vs리듬 운율과 리듬은 동일하지 않다 리듬 : 구와 떼어놓을 수 없다. 이미지이며 의미, 리듬 이미지 그리고 의미는 분리 불가분의 조밀한 단위들인 시구와 시행에 동시에 주어져 있다, 독자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질이고 구체적인 내용 운율 : 이미지와는 별개로 추상적인 음격, 각각의 시행에 필요한 음절과 강세, 의미가 빠진 음격   운율과 리듬의 구별은 바르게 운을 맞춘 많은 수의 작품들을 시라고 부를 수 없게 한다. 문학 안내서는 타성에 젖어 운율이 맞는 작품만을 시로 취급한다. 구는 개념적 질서 혹은 이야기에 복종하여 전개되지 않고, 이미지와 리듬의 법칙에 이끌린다. 거기에는 시의 확실한 표징인 이미지와 강세, 그리고 리듬의 간만이 있다. 자유시는 리듬의 통일성이다.   리듬이 언어 자체와 혼동되는 반면, 운율은 역사적이다. 근대 언어에서 운율은 음수율, 즉 강세와 휴지에 의해서 끊어졌다 이어지는 지속으로 이루어진다. 음수율적 음격은 추상성의 원리, 수사학, 그리고 언어에 대한 반성을 암시한다.   서구 근대 언어들에서 언어의 자연스러운 경향성과 추상적 사유의 강제성 사이의 투쟁은 운율의 이중성을 통하여 표현된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예) 프랑스와 영국의 근대시의 발전 예) 스페인 스페인어권 근대시는 산문과 운문, 리듬과 운율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다.   리듬과 이미지는 분리 불가능하다. 시행, 즉 리듬을 갖는 구가 또한 의미를 갖는 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단지 이미지만이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정의 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 모든 언어적 형태, 시인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 각각의 이미지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많은 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 비극적 영웅도 하나의 이미지 이미지는 인간 조건의 표식   모든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개념·과학적 법칙과 시의 차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미지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을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 :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지 ‘~이 될 수 있다’가 아니다   이미지를 이해하는 틀 시를 읽는 해석의 틀1 변증법 시를 읽는 해석의 틀2 뤼파스코 : 상보적 모순의 원리 But. 이는 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는 대립되는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도 선언한다 각각의 용어가 갖는 특성을 환원시키는 것도 아니고 변형시키는 것도 아닌 이러한 화해는 아직껏 서양의 사유가 뛰어넘지도, 뚫고 나가지도 못하는 벽이다   찬도가야 우파니샤드 : “네가 바로 저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대립은 상대적이며 동시에 필연적이만, 베타적으로 보이는 용어들 사이에 적의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 과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 우리의 모든 활동 :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 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 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의미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언어로 되어 있으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때문이다. 장자 :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언어와 이미지 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 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은 거두어 고양시킨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이미지의 의미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 창조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가치가 있다 시인은 이미지들이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언인가를 말하며, 그 무엇은,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시와 이미지 이미지는 단어의 가변성과 상호 교환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낱말들은 교체 불가능하며, 수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낱말들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더 이상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시심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 시는 언어를 초월한다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침묵에 맞서기 위한 절망스러운 수단이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 존재의 극단에 있는 언어이며 극단까지 존재하는 언어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   이미지의 이편에는 낱말, 설명, 역사의 세계가 있으며, 이미지의 저편에는 실재의 문이 열린다. 의미화와 무의미화는 등가치의 용어가 된다 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미지 그 자체이다.   어떤 이미지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용어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미지들은 세계, 언어 혹은 인간의 부조리한 성격을 폭로하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절대적인 무의미를 유발한다 어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의 복합성과 상호 의존성을 드러낸다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을 실현하는 이미지 →동일한 과정이 목격 ~실재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본질적인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그 다양성이 최종적인 통일성으로 드러나거나 표현되는 것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에서 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름과 이름붙여진 것은 같은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것은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 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현실에 거주하는 것, 혹은 현실 그 자체이다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고 현실을, 문자 그대로, 재생시킨다. 시인의 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다.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 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는 공간, 즉 이미지로 만든다. 이미지로 될 때, 타자가 될 때, 태어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시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것)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이다 그 자신이며 타자 리듬이고 이미지인 구를 통하여 인간,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 시는 ‘존재로 들어가기’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1부 시편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적계시   피안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 - 원초적인 순간의 재창조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의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 부재에 대한 증거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   피할 수 없는 두가지 문제 1.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 2.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인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 종교와의 교전 :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   ‘신성한 것’에 대한 연구사 의식, 제의의 주체 → 원시인, 정신병자(우리와 다른 사람) -> ‘원시 사회’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 → 사회제도 여러 사회 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 제의, 신화, 축제, 전설 - ‘물질화’ 대상화 사물화 ->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 제도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며, 또한 ‘원시적 사고 방식’이나 신경증이 신성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성스러운 것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뿐 신성함 :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   신적인 것의 경험 : 우리를 전체의 일부로 포함하며, 그 세계에 대한 묘사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묘사가 될 것이다.   치명적 도약 성 -터부- 속 성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 속의 성스러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 세계로 직접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치명적 도약’ 바다의 파도처럼 부침하는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탈피하는 것 피안에 이름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타자’로 만드는 공통된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것 예) 스페인 희곡 티르소 데 몰리나, 본성의 급격한 변화, 순간적인 전의 천재지변의 첫 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 폐기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 이중적 감정 우리가 신이나 신의 형상과 마주쳤을 때, 동시에 끌림과 두려움, 사랑과 공포, 매혹과 혐오를 느낀다 순교자들이 말하듯이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신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기반이며 한계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어놓는다 성의 체험은 여기가 저기라고 믿게 한다 몸은 편재, 공간은 더 이상 연장이 아니라 질 어제는 오늘, 과거는 돌아오고, 미래는 이미 일어났다 신성한 시간은, 육체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며,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며, 선을 악으로 바꾸는 그 리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리듬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초자연적인 것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다 가장 일상적이며 명백한 표현으로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대상들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모든 것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 종교적 제의들은 이 이중성을 강조   모든 제의는 하나의 공연이다. 제의에 참여한 사람 - 연극 공연 중의 배우, 극중 인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의 장소역시 재연 - 산은 용왕의 궁전이며, 무심히 흐르는 강은 신성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 산과 강은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각각은 모두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가 아니다 이중적 성격   믿음의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이 세계는 실재이면서 실재가 아니다.   낯설음 :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느끼는 어리둥절함   무엇 앞에서 놀라워하는가? 자기 자신 앞에서,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 일상 속의 자신,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 - 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 - 은 평범한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타자성의 느낌 루돌프 오토, 타자의 출현은 -타자성의 느낌까지도- 일종의 ‘가공스러운 신비, 우리를 전율케하는 신비’의 형태로 다가온다 가공스러움 1. 성스러운 공포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섬뜩함 2. 현존 혹은 출현의 위험 : ‘무시무시한 위엄’ 3. 빛나는 에너지 : 이렇게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 2,3은 종교적 신성의 속성, 가공스러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부차적 산물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 ‘신비’는 바로 다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 한 무엇 망연자실 - 무서움 현현한 것이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 현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무섭다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내면이 드러나는 얼굴, 존재의 안과 밖을 보여주는 것   무서움을 근접할 수 없는 충만한 전체 앞에 섰다는 놀라움에서 발생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이 현현 앞에서, 선과 악은 더 이상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들의 몸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아니, 다른 측정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의 존재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생의 내장이 눈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생의 내장은 바로 죽음이다. 삶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이다. “모든 것은 현존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공이다”는 말과 동격이다   놀라움, 망연자실, 기쁨 등 ‘타자’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다양하다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마음의 첫 번째 움직임의 방향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는 사실 이 물러섬에 이어 반대의 동작이 이어진다   거부와 매혹, 그리고 현기증, 몸을 던져 ‘자아’를 벗고 ‘타자’와 하나가 된다. 비우는 것, 무가 되는 것. 전체가 되는 것, 존재하는 것, 죽음의 중력, 자아의 망각, 포기 그리고 동시에 그 이상한 현현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타자’는 나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엣 정점에 달한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치명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사랑 : 우리는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 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사랑과 신성의 경험 같은 연원에서 흘러 나온 현상 단지 각 존재의 상이한 층위에서 도약을 시도하여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일 뿐 신성은 우리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근원이 원초적인 것이며 우리 자신의 존재와 뒤섞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 인간 존재의 뿌리가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들 그 경험들에는 이전의 상태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우리가 떨어져 나왔으며, 매순간 떨어져 나오고 있는 그 근원적인 통일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원초적인 존재 조건을 이룬다   태초의 삶에 대한 향수는 미래의 삶에 대한 예감 과거와 미래의 삶은 지금 여기이며, 번개 같은 순간 속에 녹아든다 향수와 예감은 시, 신화, 사회학적 유토피아 혹은 영웅의 과업 등 모든 위대한 인간 업적의 본질은 이룬다.   인간의 진정한 이름, 인간 존재의 표식은 ‘욕망’인지 모른다 사랑의 만남, 시의 이미지, 그리고 신의 현현에는 갈증과 충족감이 뒤섞인다   시적 계시       종교와 시 종교와 시 :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 본성을 바꾸는 것/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시와 종교는 계시이다 시 언어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선다 이미지는 이성적 증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 종교적 언어-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같은 샘에서 탄생하고 또 같은 변증법에 지배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둘이, 어쩌면 그렇게 상호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 구체화되어 갈라서게 되는 것일까?   신성 신성을 초자연적 경험에도 있지 않고, 수많은 종교적 개념에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합리적 선험성으로 여겨지는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신성의 개념에서만 성립될 것이다.   신성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 (두려운 무엇으로 이끌리는 경험) 내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며, 존재의 내장을 보이는 것   정화 혹은 순화를 통하여, 경험의 잔혹한 요소들은 신의 모습에서 유리되고 종교 윤리가 생성될 토양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계율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 되든 간에, 그 계율이 신성의 최종적 근거가 되지 못하고, 또한 순수한 윤리적 직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층을 들추는 원초적 경험의 합리화 내지 정화의 산물일 뿐이다.   신령한 대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너무나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미지나 역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종교적이거나 신격화 성향 오토숭고한 감정의 출현은 신성한 감정의 출현보다 나중에 일어난다. 신성의 특이점은 그 우선성에 있다 성스러움은 근원적인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성함이 다른 모든 영역보다 우선하면서 근원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선험적인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 선험적 영역을 고집하려고 할 때마다, 신성의 경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경험 속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모든 경험에는 서로간의 우선성을 따질 수 없는 동일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 경험들을 서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이다 신성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 경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지시체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이란 것도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성이 인간에게서 탄생하는 그 순간 신성한 공포 -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 자아의 왜소화 스스로에 대한 감정과 무엇에 의지하고픈 마음에서 신성의 관념이 태어난다   피조물의 상태는 창조주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결과 우리는 전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작은 부분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낀다. 우리가 창조주를 희미하게나마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의식한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 막 탄생한 그 상태는 우리의 생애 내내 지속된다. 매 순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다 낯선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오토가 말한 피조물의 상태란,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하면, 바로 하이데거가 부른 “그곳에 처해졌다는 섬뜩한 느낌”이다.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 순간 태어난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그곳에 처해졌다’는,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하고 비보호의 상태로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사건은, 전지전능한 의지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고 언젠가는 그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로 변한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계시의 의미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해석을 뿐   우리의 근원적인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신성은 자신의 성스러운 형태에 존재의 충만함을 담는다. 성스러운 것은 ‘장엄한 것’인데, 이것은 선과 도덕의 개념을 초월한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전체인 존재에 비해 작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우리들의 부족함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불충분함이다. 원죄란 부족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은 신을 달래고, 신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것, 충만한 존재에 이른다.   ‘결점’은 바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 즉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 우연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로서 주어진다. 인간은 추락되거나 구원받을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자체 원죄는 ‘부족한 존재’와 동의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결핍을 의미 “은총과 함께 우리가 은총의 힘을 능가하는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 의지가 은총에 의하여 그 힘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 죽음으로부터 우리는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에서 근원적 결핍을 속죄하는 것으로 만듦. 죽음을 죽임으로써, 종교는 삶도 죽이게 된다.   시 종교처럼 인간의 원초적 상황, 인간이란 잔혹하고 냉담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   영감은 불모의 상태 다음에 온다 시적인 말은 가뭄의 시기를 거쳐 움튼다 시의 구체적 내용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지 간에 시 언어는 이 땅 위의 삶을 긍정한다. 시편 개개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시적 행위, 시를 쓰는 일, 시인의 언표는 어떤 해석이 아니라 본래부터 인간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리듬이며 끊임없이 솟아나고 소생하는 시간성 리듬이면서 또한 대립되는 것들을, 삶과 죽음을 한마디로 껴안는 이미지 실존 그 자체처럼, 한껏 고양된 순간에조차도 그 안에 죽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삶처럼, 시간의 흐름인 시 언어는 죽음과 삶을 동시에 긍정한다.   솟구쳐오르는 리듬과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 시의 단어가 갖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 (시적 행위의 의미) 시가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를 쓴다는 것이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적인 결함에 대한 판단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결핍은 인간의 근원적 조건. 인간은 본래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 시를 쓴다는 것이 진실로 인간의 원초적이고 영원한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 생명을 가진 것은 죽는 것처럼, 죽음이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삶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삶을 완성시키니다. 산다는 것은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 낯선 것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진은 우리 자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것을 만나는 것은 긍정적이다.   삶과 죽음, 존재 혹은 무는 별개의 실체나 사물이 아니라. 부정과 긍정, 결핍과 충만은 우리 안에 공존한다. 아니 바로 우리다. 존재는 비존재를 암시한다. 그리고 비존재는 존재를 암시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관조하자마자, 자신이 의미 없는 사물들과 대상들의 총체 속에 들어 잇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미가 부재한다는 것을, 인간은 사물들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지만 그 의미란 바로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됨으로써 비롯된다. 우리 자신이 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세게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는 존재의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마주하고 사는 것은 삶 속의 죽음을 끼워넣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존재는 무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음 죽음과 삶을 재통합할 수 있다. 우리는 존재를 통해서 무로 다가갈 수 있으며, 무를 통하여 존재로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부정의 근거’이면서, 또한 그러한 부정의 초월이기도 하다.   인간의 하찮음의 드러남은 존재의 드러남으로 변한다. 죽음과 삶, 우리는 살면서 죽고, 죽으면서 산다.   사랑~ 사랑 혹은 사랑의 기쁨은 존재의 드러냄이다. 사랑은 존재와 무의 동시적 드러냄이다. 우리가 참여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우리를 만들어가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존재의 창조다. 그때 창조되어지는 존재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창조할 때 우리를 소멸시키며, 소멸시킬 때 창조한다   우리를 존재의 창조로 이끌어가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무에 던져진 인간은 무에 맞서서 자신을 창조한다   시적 경험 : 우리의 근원적인 조건의 드러냄 : 우리 자신의 창조로 귀결 시인은 존재를 창조한다 (존재 : 만들어지는 것) 인간의 원초적인 조건은 가능성 인간의 자유 : 가능성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것 -시인이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창조해가는 인간   시 쓰기가 보여주는 것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 조건의 양면성 중의 한 면일 뿐이라는 사실. 또 다른 한 면은 살아가는 존재. 태어남은 죽음을 포함한다. 그러나 죽음과 삶이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태어남은 부족과 형벌의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의 최종적 의미   결론 시의 말과 종교의 말은 역사를 통해 혼동되어왔다 종교적 계시(그것이 말인 한에 있어서) : 원초적 행동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 시 : 인간 조건의 계시. 이미지에 의한 인간의 창조. 시적 언어는 인간의 역설적인 조건 (타자성)을 드러내며, 그럼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실현시킨다. 인간에게 존립 근거를 주는 것은 종교의 경전이 아니라 시적 언어다.   영감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 :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됨   시는 어떻게 씌여지는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 : 악마, 뮤즈, 영, 정령 :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   시인은 그저 영매로서 성, 일기,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개념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 경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 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인간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현대시의 역사 :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 그는 듣는 귀,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 시인의 꿈은 좀 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   말 :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함 시 쓰기 : 말로써 창조하는 것, 시를 창작하는 것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 시는 하나의 가능성.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 - 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치 않았던 것-를 창조하는 것   시가 씌여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것-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   시적 창조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사색하고 몰두해야 할 필요성 - 근대의 산물 ~그 행위 속에 근대성이 기초 시인들의 불쾌함 - 근대인의 의식과 세계관 속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근대의 기초 관념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상한 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는 무능에 기인   영감의 문제를 정확히 제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뒤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시사에서 그 순간을 초현실주의로 불린다   초현실주의 : 주체와 현상(객체)사이의 투쟁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 객체에 대해 공격했지만 객체를 녹였던 그 산은 주체마저 녹여버렸다. 자아도 없고 창조자도 없으며, 단지 시적 힘만이 근거 없고 설명할 길 없는 이미지만을 선호하고 양상하는 종이 위를 휩쓸고 다닐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시를 쓸 수 있게 됨. 왜냐하면 시적 행위는 문자 그대로 비자발적이 되어, 항상 주체의 부정으로서 행해졌기 때문 시인의 사명 - 시의 힘을 불러 고압 전류로 바꿔서 이미지들을 방전하도록 하는 것. 주체와 객체는 영감을 위해 용해됨   양가적 가치 사이의 모순과 유아론을 부수고자 하였다 단호한 의자로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도 없고, 의식도 없다. 세계의 의식도 없고 의식에 바친 세계도 없다 상상력이라는 천장으로의 비행 외에는 환풍구도 없어졌다. 영감은 이미지로 나타나거나 실현. 영감 → 상상 → 주체와 객체 해체. 우리 자신 해체, 모순 제거   영감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사고 → 세계관의 파괴 세계관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이 단순한 환영임을 고발하기 때문 영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상정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독창성은 영감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까지 확대했다는 데 있다. ~처음으로 영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다른 관념들과 충돌하지 않았다   인간과 영감 우리가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부분’이거나 ‘구성 요소’로서의 의식이나 무의식에서도 아니고, 충동이나 수동성 혹은 깨어 있음에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모두가 모여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림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말들을 창조하고 발명해내야 한다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 - 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 - 매일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이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다.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된다.   영감 :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 사실 영감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인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영감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되기를 멈춘다. 두 번째 단계에서 자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더욱더 전체적인 자신이 된다.   인간은 세상을 자화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삼라만상은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의미를 머금게 되고,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겨냥한다   인간은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완성한다. 타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낙원에서의 추방과 이 땅으로의 전락 이전의, 나와 ‘타인’ 사이의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재정복한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재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서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   모든 언어는, 나이며 타자들이고, 나의 목소리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고, 모든 사람이면서 각 개인인 그 원초적 대명사의 은유들이다. 영감은 존재로의 투신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존재를 기억해내서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로 돌아가는 것’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2부 시적 계시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의 력사   순간의 성화       시편이란 다른 경험으로 환원 불가능한 시적 행위가 어떻게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지   시 작품으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과 다른 어떤 것, 즉 그것 없이는 시편으로 구체화될 수 없는 어떤 것에 의지한다 시편 = 시 + α α = 시편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순수 시편 : 시를 쓴다는 행위 그 자체만을 의미하기 위해서, 말이 특정한 의미를 갖거나 이것 혹은 저것에 대한 지시체이기를 포기하는 것. 말의 소멸을 요구. →말로 씌여질 수도 없고, 사실상 말해질 수도 없는 것   시편 : 말을 초월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으로 말에 의존한다 말로 씌어진 시편은 말 너머를 향하며 역사는 시편의 의미를 고갈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시편에 근거를 제공하고 또한 역으로 시편이 근거를 제공하는 공동체와 역사가 없다면 시편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시인의 말 : 말이라는 그 사실로 인해 자신의 것이며 타인의 것 : 역사적, 민중에 속하는 것이며 그 민중이 말을 사용하는 특정 시기에 속하는 것 : 역사적 시점의 말이자 모든 역사적 시점 이전의 말, 태초의 말   시편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언어 : 역사 역사는 시적인 말이 육화하는 장소   시편은 원초적 경험과 그 뒤에 오는 행동과 경험의 총체 사이의 중재 시편은 특별한 순간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선을 긋는다 순간은 시에 의해서 성화되어 있다 - 시간은 살아 있고,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으로 가득 찬 순간. 동시에 다른 순간에반복되고 재생산되면서 자신의 빛으로 새로운 순간들, 새로운 경험들을 비추는 것   역사가 없이는 시편은 태어나거나 육화될 수 없다. 그리고 시편이 없다면 역사 또한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기원도 시작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은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적 1. 사회적 생산물로서 2. 역사적인 것을 뛰어넘는 창조물로서 ~ 시편이 다시 역사 속에서 육화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반복될 필요가 있다 ~ 잠재적이며 영원히 현재인 시간, 한정된 바로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현재화됨으로써만 실현되는 시간 ~ 원형적 시간   시편의 이중성 시편이 갖는 다의성은 시편의 이원적 본성의 결화 갈등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의 내부에 존재 시적 작용의 이중 운동에 기인 시편은 역사적 시간을 원형적 시간으로 변화시키며, 그러한 원형을 다시 특정한 역사적 현재로 육화 이중적 운동 : 본래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존재 방법 시가 취하는 역사적 방식이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자신이 부정하는 시간과 연속성을 다시 긍정하기 때문   이미지는 결코 ‘이것 혹은 저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이것과 동시에 저것’을 말한다. 심지어 ‘이것이 저것’이라고 말한다.   시와 인간 시적 언어의 이원적 조건은, 시간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언제나 영원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적 본성과 다르지 않다   순간을 순간으로 만들며, 시간을 시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들을 유일하며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순간, 그 시간과 하나가 되는 인간   자신의 시간적 조건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간 속에 더 완벽하게 함몰 유일하며 한 번 뿐인 순간을 창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역사에 기원을 제공 인간의 조건은 인간을 타자가 되도록 이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면서 자신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시적 경험은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 - 인간의 본질 시적 기능을 특징짓는 것 : 언표 - 모든 언표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 무언가 -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   시인이 성화시키는 것 : 언제나 역사적 경험으로서,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도, 사회적인 경험도 될 수 있으며 혹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경험도 될 수 있다 모든 사건들, 느낌들, 경험들 그리고 인물들에 대해서 말할 때, 시인은 우리에게 다른 것, 즉 만들어가고 있는 것, 우리 앞과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에게 창조하고 이름 부르는 행위인 시 자체에 대해 말한다. 독자로 하여금 시를 반복하고 재창조하도록 한다. 그가 이름 부른 것을 다시 이름 부르게 하여 그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게 한다 시인은 시로부터 시를 만들어낸다   시인이 쓴 시와 독자가 읽는 시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창조의 행위 자체는 동일하다. 독자는 순간을 재창조하며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   시는 새로운 독자와의 만남으로 늘 완전해지려고 하는, 언제나 미완성의 작품이다.   시적 계시 - 시인이 드러내는 것 - 본래의 우리로 복귀하는 것 -결코 추상적 형태를 취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 의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행위 -인간 조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 드러나거나 혹은 밝혀지는 경험   시적 경험 - 자유 그 자체, 무언가에 다다르기 위해 펼쳐지며, 그렇게 순간적으로 인간을 실현시킨다 영웅적 세계       그리스 서사시 그리스 영웅들을 다른 영웅들과 구별짓는 것 - 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도구가 아니라는 점 호메로스의 주제 : 영웅들의 운명 ~신들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고, 우주의 구원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종교적 주제가된다 그리스 서사시의 또 다른 특징 : 종교성 (도그마화된 종교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두 가지 종교 1. 신들에 대한 종교 - 자연신 숭배, 태양신 제우스 2. 조상들에 대한 종교 - 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뛰어난 인물 숭배, 아가멤논   에게 해 문명 분열 영웅들은 이제 무덤 속에 있는 사자들이 아니라, 신화적 인물로 변함 신화는 종교적 찬양과 기원으로부터 벗어나, 영웅들을 신화적 대상으로 다루게 됨으로써, 서사시의 자양분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덤 속의 영혼과 인간을 이어주던 신성한 끈이 끊어지면서, 영웅-신은 인간의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화는 올림푸스의 신들도 감염시켜 그들 역시 인간화했다.   호메로스 : 끝이며 시작 끝-올림푸스 신들을 섬기는 종교의 승리와 조상 숭배의 패배로 완결된 기나긴 종교적 진화의 끝 시작-호메로스의 시들이 종교와 삶의 이상과 윤리의 바탕을 제공한 귀족적이고 기사도적인 새로운 사회의 시작   영웅 : 두 개의 세계-자연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가 합류하며 투쟁하는 장소 : 탄생에서부터 영웅은 독립적인 두 개의 힘이 결합하는 연결 고리의 이미지 영웅의 본질은 두 세계의 투쟁이다. 모든 비극은 영웅의 서사적 개념 속에 고동치고 있다.   영웅이 행동하는 세계에 대한 관념 형성 제거 “그리스 이전에는 몰랐고, 그리스에 와서 그들의 정신적 특징이 알아낸 것은사물의 내재적 합법성에 대한 의식이다.” 우주적 법칙, 충동, 리듬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는 역동적 총체의 개념 인간을 그러한 총체성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부분으로 보는 관념 ~인간이 갖는 책임 관념 모순적 이러한 모순 내에서 영웅적인 것의 뿌리와 나아가 비극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 발견   그리스 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반적인 운행 속에 삽입시키며, 여기에서 영웅됨의 갈등과 모범적인 가치가 비롯됨   영웅들과 신들의 세계는 인간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우주. 살아있는 총체, 그것의 운동은 정의, 질서, 운명이라 불림 탄생과 죽음은 이러한 생생한 조호의 협주곡을 구성하는 두 개의 극단적 음표이며, 위태로운 인간의 모습은 이 두 극단 사이에 나타남 삶과 죽음이라는 두 세계가 합류하는 장소가 인간이기 때문   이러한 개념으로 총체적 자연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건강도 우주의 건강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영웅의 광기나 병약함은 우주 전체로 전염되며, 하늘과 땅을 위태롭게 한다.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헤라클레이토스 : 존재를 생성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우주적 투쟁이 전개되는 장소로 여긴다.   그리스 비극 비극과 희극은 그리스가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이며, 자신을 세운 토대와 나누는 대화   아이스킬로스 : 인간의 운명을 인간의 의지가 참여하는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인식 : 고통, 불행, 재난의 본래적 의미는 절제를 초과하려는, 다시 말해서 각자가 위치하는 영역의 극한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 너머로 감으로써 신이 되거나 악마가 되려고 하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형벌 : “모두에게 똑같이 태양을 비추어주는 하늘이여! 그대는 내가 이토록 부당하게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구나.” : 아무도 그를 고통에서 끌어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의 비극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 : 비극적 행위가 운명이 갖는 우월한 힘뿐만 아니라 우주적 정의를 완수함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 참여 또한 내포하고 있다. : 비극이 가르치는 것은 무의식적인 체념이 아니라, 운명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일이다. : 인간이란 신의 손아귀에 든 ‘도구’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거듭 확신했다.   운명과 자유라는 모순되면서 상보적인 두 개의 단어 덕분에, 인간은 인간일 수 있고 세계는 세계일 수 있다. 비극성은 이가적 대립물을 동등하게 보며 절대적으로 긍정하는데서 연유한다. 가혹한 운명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우리에게 만유적 질서의 빛을 던져주는 유일한 것은 운명에 대한 의식이다. 사유와 운명은 서로 대립되며 상보적인 단어이다. 그것의 신비는 사물의 본성 그 자체에 속한다.   에우리피데스 : 우주적 합법성의 신성함과 정의로움에 관해 감히 터놓고 질문한 첫 번째 사람 : 존재의 영역을 버리고 도덕적 비판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 과오 - 주관적, 심리적인 개념   운명의 정의로움을 부정하자마자, 고통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혼란이 찾아온다. 운명의 침입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 자신 안으로 숨거나 혹은 이상적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 개인적 신비주의, 정치적 유토피아 - 객관적 적법성을 상실한 세계가 나갈 수 있는 출구   우리는 벌을 받고 속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백하면서 죄인이기 때문이다.   비극을 인간의 가장 뛰어난 시적 창조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갈등에서 충만되고 심오하게 나타나는 ‘다른 목소리’-기본적인 인간 조건의 드러남-이다. 비극의 위대성 : 그러한 개념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이가적 대립물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모순을 육화시켰다 비극적 영웅들은 의식을 버리지 않으며 그의 존재를 조건짓는 궁긍적인 이유에 대해 끊없이 질문한다 그리스 비극은 존재의 근거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운명은 신성한가? 인간은 죄인인가? 정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 사회를 지탱하는 가설 자체에 대한 것. 폴리스를 세운 모든 가치 체계를 의문시하는 것   모든 행위의 앞면과 뒷면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보여주기 위해서, 비극 시인들은 가장 성스러운 행동과 가장 지독한 신성모독까지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비극은 신선모독에 대한 광범위한 사색이며 애매한 가치 - 구원하고 벌하며, 벌하고 구원하는-에 대한 검토이다.   운명이 스스로를 완수하기 위하여는 인간의 자유 행위를 요구한다 자유는 운명이 갖는 여러 얼굴 중의 하나이기 때문 비극은 우주와 인간의 이미지이다. 모든 비극적 행동, 모든 갈등은 한 가지로 환원 : 자유 ~필연성의 조건 그리스인에게 삶은 자유와 운명이 얽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엮어내는 무훈 매듭 : 인간 -인간 안에는 인간의 규칙, 신의 규칙 그리고 양자를 다스리는 불문율이 서로 얽혀 있다   유한하며, 늙고, 병들고, 터무니없는 열정과 심정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피조물인 인간은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이며 운명에 의해 선택된 주체이다. 그러한 선택은 인간의 수락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의 범죄는 우주를 진동시키며, 그의 행위는 삶의 과정을 회복시킨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스페인 연극 서사적 전통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1. 로망스 시와 중세 전설의 보물 2.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인 기독교적 서사시 중세 스페인의 정치적 개념 : 만인지상 모든 사람은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며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 이중의 충성 양자에 대한 충성이 병립될 수 없을 때, 드라마가 생겨난다. →그리스 영웅들처럼 인간 조건의 신비와 운명에 대해 질문하는 용기가 빠져 있다 스페인 극작가들은 인간의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이미 만들어진 대답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 희극 사건의 얽힘이거나 혹은 관습에 대한 비판일 뿐 진정한 희극은 일종의 발레 시 -인위적 유희로서 연극을 빛나게 하는 것 : 속도감 있는 행동, 상황의 얽힘, 우아한 대화 인간의 자유와 신의 은총이라는 중심 주제를 독창적이고 보편적으로 다루는 작품 국민 연극의 개념과 자유 의지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의 옹호와 계몽을 융합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진실로 어울리는 유일한 서양 연극 중요한 주제 : 영혼의 운명 문제에 대한 해답 - 스페인 극작가들은 정정을 허용하지 않는 기독교 교리를 이용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들에게 자유는 신의 은총이다. 양립 불가능한 이가적 대비극 사이에서 움직인다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만일 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유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진정한 자유는 우리를 신에게 복속시키면서 실현된다 스페인 영웅들의 자유는 인간의 본성에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반대로, 운명을 긍정하는 것은 인간이 비극적 존재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간 : 신과 악마라는 두 사람의 배우가 등장하는 무대 숙명과 자유 의지에 대한 교리 - 신학적 미로, 미로의 입구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것은 무이거나 존재 신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렸다. 인생은 꿈이고 인간은 그 꿈에 나타나는 환영일 뿐이다.   영국 연극 스페인 연극에서 신과 자유 의지가 차지하는 자리를, 그리스 연극에서는 자유와 운명이 차지하며, 영국 연극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차지한다. 그 본성의 신성한 성질은 오래된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을 저지르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시인 : 이제 막 인간을 발견 열정의 조수는 무대에서 신을 쫓아낸다. 인간의 본성은 이중적인 신성이다.   셰익스피어와 웹스터의 영웅들은 근본적으로 홀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절규는 허공에 흩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늘에는 더 이상 신과 운명이 살지 않는다. 신들이 사라져버리자 우주는 일관성을 상실하고 우연이 급습한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는 우연이 필연을 대신한다. 동시에 결백과 죄는 무가치한 말로 변한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연극의 인물들은 영웅이 아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유치함이 존재한다. 유치하고 야만적인. 잔인하건 부드럽건, 순결하건 부정하건, 용감하건 비겁하건 간에, 그들은 한 사발의 피와 한 줌의 해골이며, 신들린 본성의 갈망을 순간적으로 달래야하는 처지에 처한 신경질적인 존재들이다. 기운이 잦아진 호랑이(영웅)은 연극에서 퇴장하고, 무대 위에는 피투성이의 인간들만 남았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 우리는 혼돈의 복귀를 목격한다. 사물과 존재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범죄가 덕이 될 수 있으며, 결백은 죄가 될 수 있다. 적법성의 상실은 세계를 동요하게 만든다. 현실은 꿈이며 악몽이다. 우리는 또다시 환영 사이를 걷는다.   유럽이 영국의 시인들에게 전해준 철학은 총괄적인 교리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의 철학이었다 유동적인 것, 이본, 정정,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해결책을 받아들인 것   프랑스 연극 프랑스 연극은 그리스 비극을 미학적 모델로 선택 라신의 인간 - 일종의 정형외과 수술을 받은 모습 - 인간을 더 순수하고 추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서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 자신의 인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상위와 하위의 세계들과 관계를 맺는 인간의 신비로운 차원도 제거해버렸다. 라신의 연극 :성격과 상황의 연극 라신의 등장 인물들은, 우주와 신성의 개념이 사라져버리고 구체적인 개별성조차 사라져버린 텅 비고 순수한 정확 속에서 움직인다. 라신은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투명한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그 투명함은 애매하고 어두운 영역, 진정한 어둠의 입-그곳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과 합일하는 저 너머로 들어가는 문-을 녹여버린다.   독일 연극 괴테의 위대한 파우스트적 신화는 자신의 창조물에 끊임없이 자신을 비쳐보는 서양 정신-모든 것은 거울이다-의 끝없는 독백 괴테는 평생 동안 그러한 주관주의에 대항해 싸웠으며, 그가 보여준 ‘어머니들’에 대한 숭배-고대 신비의 반향-는 총체적 자연의 신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 괴테 이후의 극작가들은 주관주의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다.   셰익스피어도, 라신도, 칼데론도 세계를 의문시하지는 못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를 처단하고 그들의 연극은 세계에 대한 고소장이다. 시인과 역사의 관계는 급격하게 변화한다.   근대 연극 모든 근대 연극은 세계를 부정하며 거울의 장난으로 세계를 지워버린다.   세르반테스는 소설에 대한 소설을 쓰고, 셰익스피어는 연극 속에서 연극에 대한 비판을 행하며,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데, 거기서 그가 보는 것은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자신의 얼굴이다.   근대의 영웅들은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모호하다.   근대에 출현한 유머는 겉모습을 해체시키고 현실을 비현실로, 비현실을 현실로 만든다. 과거의 시는 프로메테우스 혹은 세히스문도, 안드로마케 혹은 로미오라고 칭하는 영웅들을 신성화했다. 근대 소설은 그 영웅들을 시험대에 올리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만큼 그들을 부정한다. 소설의 모호성       근대 근대 : 인간이라는 가치 위에 세계를 세우고자 했던 것 -근대적 우주를 떠받치는 초석은 인간의 의식 예 1. 맑스 역사란 소외된 인간이 역사의 최종적 단계에서 자기 자신, 즉 자기 의식의 주인이 되는 기나긴 과정 의식이 사회적 실존을 결정 예 2. 근대희 과학 개념 자연은 자극과 반응의 고리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그물망 사실의 조각들을 선택해서 토막내고, 단지 관찰에 적합한 조건이 조성되었을 때만 실험 객관적 현실은 의식의 영상(이미지)이며 또한 의식의 가장 완벽한 생산물   우주와 자기 자신 앞에서 취하는 근대인의 태도는 과거의 인간들이 취했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인간은 자시의 지상의 거주지를 재구성한다는 조건으로 권좌에서 축출되어 고아로남게 되었다. -생을 정당화하고 역사에 근거를 제공해왔던 개념들의 소멸 -신성함, 신성 혹은 초월 등으로 알려진 복합적인 믿음의 체계가 붕괴 역사적인 변화, 혁명적인 변화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가치 체계가 다른 가치 체계로 대체되는 것   모든 혁명은 세속화 작업인 동시에 신성화 작업 혁명은 과거의 이미지들을 파괴하기 때문에 세속화 운동이다. 하지만 이 몰락은 항상 그때까지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왔던 것의 신성화를 동반한다.   근대의 혁명을 특징짓는 차별성은 자신이 서 있는 토대로서의 원리를 신성시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불경에 뒤이어 새로운 원리의 신성화가 뒤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의 진공 상태가 발생했다. 진공 상태 : 재가 정신, 중립성 “저기 신들이 죽은 곳에서, 유령들이 탄생한다.” 근대의 유령은 추상적이고 무자비하다. -국가 -기계에 대한 숭배 기술테크닉은 근대인들에게 아무런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인이 자연과 혹은 다른 인간들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오히려 닫아버린다.   부르주아지 혁명 인간의 권리 - 사유 재산과 자유 무역 자유 - 재화의 종속물 민중의 통치권과 인간의 평등 - 제국주의적 침략   근대의 혁명을 과거의 혁명과 구분짓는 것은 딱히 근대 혁명에서 원천적인 이상이 부패하고 자유의 원칙들이 새로운 억압의 기구로 변질되는 것뿐 아니라, 바로 ‘인간’을사회의 기초로 성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기인한다. 이성적 회의.   부르주아지가 사회를 통치하는 슬로건은 분명치 않다. 그 동안의 것들은 마치 요술사처럼 손을 재빨리 바꿔온 결과에 불과하다. 군주 체제와 귀족 사회를 몰락시킬 때 사용한 비판을 이제는 자신의 몫을 차지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은 왕위 찬탈자일 뿐이다. 그 어느것에 의해서도 아물지 않는 비밀스런 상처처럼, 근대 사회는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건설하고 그리하여 그 건설을 지속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다시 부정하고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칙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 비판은 근대 사회의 양식이며 동시에 독이다.   근대 사회의 서사시 시의 역사적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시급한 사명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순간을 원형으로 승화하거나 변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시적 언어는 한 민족의 기초가 된다. 부르크하르트 “소설이야말로 근대 사회의 서사시”   소설의 독특한 성격 언어 : 소설은 산문인가? 소설가는 논증하거나 서술하는 게 아니라 한 세계를 재창조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순간 혹은 일련의 순간들을 되살려서 한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 그는 언어의 리듬이 갖는 힘과 이미지의 형상력에 의지 그의 작품 전체 = 하나의 이미지 시와 역사에, 이미지와 지라학에, 신화에 심리학에 동시에 이웃하고 있다 리듬이면서 의식의 실험이며, 비판이면서 이미지 →이중적 산문과 시, 개념과 신화 사이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에서 기인 →근원적인 비순수성   돈 키호테의 이성과 광기, 라스티냐크의 허영과 사랑, 베니그나의 탐욕과 관대는 모두 하나의 천을 짜고 있다.   근대 소설의 많은 인물들은 염세주의자이고, 다른 인물들은 차라리 반항아이고 반사회적 인간이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의 세계와 공개적이거나 비밀리에 투쟁하고 있다. 그 소설들은, 자기 자신과 투쟁하고 잇는 사회의 서사시이다.   소설 속의 영웅이 자신에 대한 품는 의심은 그대로 그를 떠받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의심으로 연결된다. 소설의 사회주의는 현실의 비판이며, 현실은 돈 키호테의 꿈과 환상처럼 비현실적인 것으로 의심해보기도 한다. 영웅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그 인물들처럼 그렇게 모호하기만 하다.   유머 덕분에, 세르반테스는 근대 사회의 호메로스가 되었다. 헤겔은 아이러니가 (비판적)주관성을 객관성의 체계에 삽입시킬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세르반테스의 가장 엉뚱한 인물조차도 자신의 상황에 대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의식 →비판 비판 의식 앞에서 현실은, 비록 모든 것을 양도하지는 않지만, 주저한다. 유머는 그것이 가서 닿는 것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현실과 그 가치에 대한 암묵적인 판단이며, 그것들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일종의 임시적인 휴지이다.   아이러니와 유머는 근대 정신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비극적 갈등에 견줄 만한 것이다. 아이러니적 결합은 실질적인 결말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잠정적인 통합니다. 소설의 갈등은 비극의 예술을 탄생시킬 수 없다.   비판 위에 건설된 사회의 서사시인 소설은 그 사회 자체에 대한 암묵적인 심판이다. 현실이 현실에 대해 던진 질문이다. 문제 제기 자체에서 모든 해답을 미리 배제했기 때문에 가능한 답변을 기대할 수 없는 그 질문은 모든 사회 질서를 부식시키는 염산이다.   소설은 자기 자신에게 거슬러 돌아와 자신을 삼중으로 부정하는 서사시이다. 1. 산문에 의해 부식된 시적 언어 2. 유머와 심리 분석으로 영웅과 세계를 모호하게 창조 3. 소설의 언어가 성화하고 고양하려는 것이 분석과 비난의 대상으로 변하는 노래   프랑스 - 소설의 요람 불어는 현존하는 언어 중 가장 분석적인 언어, 근대 정신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프랑스에서 최고의 적확성과 명료성의 꽃을 피웠다. 그 어떤 나라와 언어도 라클로에서 프루스트에 이르는 위대한 소설가들이 끊임없이 계승해온 프랑스 소설의 역사에 견줄 수는 없다. 프랑스 사회는 그 일련의 창작물들을 통해 일면 스스로를 성화하고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를 검증했다. 스스로를 노래하면서, 스스로를 심판하고 형벌을 내렸다.   근대 사회의 위기 : 우리 세계를 떠받치는 원칙의 위기 소설 속에서 시로 돌아가려는 시도로 나타남 세르반테스에 의해 시작된 운동은 지금은 역방향으로 조이스, 프루스트, 카프카에게서 반복된다. 20세기 초반부터 소설은 다시 시로 돌아가고자 한다. 프루스트 : 느린 리듬, 마치 시적 영감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기억에 의해 유발된 이미지 조이스 : 논설적 사상의 맥락을 끊기 위하여 단어로 하여금 본래의 독자성을 회복 리듬의 밀물이 넘침 영웅적 성향의 재정복이 시도   근대 사회의 탄생과 더불어 내재되어왔던 산문과 시 사이의, 성화와 분석 사이의, 노래와 비판 사이의 투쟁은 시의 승리로 귀결지어져가고 있다.   이 시대의 연극과 소설은 한 경향의 탄생이 아니라 그 장례식을 노래한다. 즉, 이 시대의 종말과, 이 시대를 낳은 형식들의 종말을 노래한다. 시- 인간 조건의 계시.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의 성화 소설과 근대 연극 - 그 시대를 부정할 때조차도, 그 시대에 의지한다. 과거의 신성들은 죽고 객관적 현실은 의식에 의해 부정되었을 때, 시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제외하고는 노래를 불러줄 아무런 대상도 가질 수 없었다. 시는 이제 말을 통해 육화되는 게 아니라, 삶 자체 속에서 육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적 언어는 역사를 성화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가 되고 삶이 될 것이다. 육화되지 못하는 언어       혁명과 종교 사이의 시 소설, 연극 : 비판적 정신과 시적 정신 사이에 상호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 서정시 : 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소비적이고 낭비적인 열정과 경험들. 사랑에 대한 찬양 - 선동을 유발, 근대적 세계에 대한 도전 사랑이란 분석할 수도, 분류할 수도 없는 예외적인 것   ‘저주받은 시인들’ 동화되지 않는 것들을 추방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 “부르주아지는 의사, 변호사, 성직자, 시인 그리고 과학자를 보수를 받는 봉사자로 변화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시인들에게 금고 문을 닫아버렸다. 시인은 하인이나 어릿광대가 아니라, 천민 계급이고 허깨비이며 부랑자이다.   시의 글을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 자신의 계시 근대시 = 시에 대한 이론 콜리지 : 시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시편이 진실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문하기 위하여 시적 창조에 몰입한 맨 처음 시인 상상력을 인간의 가장 높은 재능으로 여김 상상력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 “인간 의식의 가장 본래적 기능” “상상력은 존재의 형상이거나, 진실로 지금-여기의 유일한 지식이며, 다른 모든 과학은 상상력의 상징적 표현일 때만 실제적이다.” 원래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었던 상상력과 이성은 상징적 표상, 즉 신화를 통하지 않고는 표현될 수 없는 자명함 속에서 하나가 된다. 상상력 - 원초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기능 - 모든 지각의 필수 조건 - 신화와 상징을 통하여 최상의 지식을 표현하는 기능   시와 철학은 신화로 완결된다. “종교는 인류의 시이다.” 시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나타나는 제의와 역사로 변화된 형태가 종교 시 - 스스로를 비판 정신의 경쟁적 원리라고, 또한 과거의 신성한 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고 선언 -종교의 진리가, 억압적인 강요와 가면적 은폐가 아니라, 부차적이고 역사적인 표현으로 드러나서 숨쉴 수 있는 태초의 원리   노발리스 “종교는 실천적 시 바로 그것이다.” 원초적 언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시인의 임무는 교회와 국가라는 도그마가 성립되기 이전의 원초적 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같다. 윌리엄 블레이크 “시 정신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다. 모든 민족의 종교는 시 정신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차이에서 유래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는 본래 시 정신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성은 종교보다도 더 어두운 감옥을 만들었다. 진리는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적 인식, 즉 상상력으로부터 나온다. 본래적인 인식 기관은 감각도 아니고 추론도 아니다. 양자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최종적 본질인 끝없는 욕망에 대립된다. “그 무엇도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인간은 상상력이며 욕망이다. 상상력의 작용으로,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채우며, 그 자신이 무한한 존재로 변한다. 자신의 욕망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 인간의 진정한 역사는 이미지의 역사, 신화   독일의 낭만주의 “낭만주의 시는 진보적 보편 철학인데 그것의 목표는 모든 종류의 시를 집합시켜서 시와 철학 그리고 수사학 사이에 의사 소통을 확립하는 데 있다. 또한 그것은 시와 산문, 영감과 비판, 자연적인 시와 인위적인 시를 혼융시켜야 하고, 시를 생기 있게 하고 사회화해야 하며, 삶과 사회를 시적으로 만들고, 정신을 시화하며, 예술적 형태들을 본래의 다양한 본질로 충만하게 가득 채우고 아이러니를 통하여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근대시는 탄생에서부터 흐름에 거스르는 독자적인 과업이었다. 비판과 조약을 체결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교회에 의지할 수도 없었다.   시는 가장 혁명적인 혁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보수적인 계시인데, 그 이유는 원초적인 말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시와 종교가 갈라지게 된 근원은 시적 정신이 합리적 정신과 출동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지만, 그 결과는 유사하다. 부르주아지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시인들을 추방했다.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던 지난 세기의 시적 운동이 보여주는 들쭉날쭉하고 은밀한 흐름의 일화 -매번 찬동은 단절로 끝났으며, 매번의 개종은 추문으로 끝났다.   근대시는 역사의 정면에서가 아니라 지하나 후면에서 은밀한 신비와 비밀스러운 제의로서 육화되었다.   근대 시인 역사의 하층부에 살도록 운명지어진 근대 시인은 고독하다. 어떤 법도 근대 시인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떠나도록 강요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추방된 자이다. 근대 개인이 사회 속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은 그가 사실상 ‘가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시는 상업적 재화의 교환 체계게 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아니라면, 현대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진정한 실존을 갖지 못한다. 시의 기화 현상 시인이 말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상품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실제적이 아니다) 시적 창조는 직업이나 노동 혹은 일정한 생산 활동이 아니다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근대시가 ‘실제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은, 태초부터 시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현실의 한 부분을 말소시켜버리기로 근대 사회에서 사전에 결정되어졌기 때문이다. 브르통 “환상적인 것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 환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라는 사실이다.”   근대 예술의 모든 과업은 그 잃어버린 절반과의 대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중적 시의 유행, 꿈과 섬망 상태에 의지하는 일, 우주의 열쇠로 아날로지를 채택하는 일, 원초적 언어를 회복하려는 시도, 신화로의 복귀, 밤으로의 하강, 원시 예술에 대한 애정 ~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편력   자기 자신과 인간으로부터 추방당한 시인은 고독의 극단까지 가서야 형벌이 멈추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최후의 변방에서만 ‘타자’가 출현하며 ‘전인간’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던져져, 모든 의지할 것을 잃어버린 채 빈손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고독한 인간이 바로 원초적 인간이며, 실제적 인간이고, 잃어버린 반쪽이다. 원초적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다.   시를 공동의 자산으로 만들어내려는 가장 절망적이고 총체적인 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에서 발생 →초현실주의 시화를 위한 첫걸음인 객관적 현실의 파괴는 객체에 주체를 삽입하는 것으로 달성 낭만주의의 ‘아이러니’와 초현실주의의 ‘유머’의 결합 중심 : 사랑과 여성   낭만주의 vs 초현실주의 낭만주의 :독일철학 :역사를 부정했고, 꿈으로 도피 :과거의 봉건주의와 과격 혁명 세력의 자코뱅주의 정신의 공통된 무능을 고발     초현실주의 :아폴리네르의 시, 현대 예술, 프로이트, 맑스의 분위기 :역사 의식 명확 :당이 언어를 행동의 필연성으로 종속시킬 경우에조차도 당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허무주의와 관료주 . 의적 볼셰비키즘을 고발   ~ 양자는 기하학적 정신이 보여주는 정신적 불모에 대항한 항의이며, 당대에서 혁명을 겪었지만 그 혁명이 결국 무단적이거나 관료주의적인 독재로 변화되는 것을목격하고 말았으며, 마지막으로 둘 다 이성과 종교를 초월하여 새로운 신성을 성립시키려는 시도였다.   영감 : 무의식의 표명 시편을 집단적으로 창조하려는 시도 - 시적 창조의 사회화를 암시 영감은 공동의 자산이다. 이미지가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것으로 충분하다 “시적 천재성에서 모든 사람은 엇비슷하다” 우리 모두는 시를 쓸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시가 될 수 있다. 시 속에 산다는 것은 시 작품이 되는 것이며,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영감의 사회화는 시 작품을 삶 속에 용해되어 사라지게 한다. 초현실주의가 의도하는 것은 시 작품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을 살아 있는 시작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시인과 시, 시 작품과 독자, 너와 나라는 이율 배반을 해소시키기 위한 수단 : 자동 기술법 나는 너이고, 이것은 저것이다. 대립물의 통일은 인식이 멈추는 상태인데, 왜냐하면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되는 대상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분수이다. 어려움 1. 현대 세계에서 유효한 모든 개념들과 반대 방향으로 실현되는 행위-노력의 가치를 공격 2. 시적 자동 기술법이 요구하는 수동성은 과격한 결단을 암시- 개입하지 않으려는의지 →언제나 사회성을 띨 수 밖에 없는 언어와 개체적 인간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 사물, 인간 그리고 언어 사이에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이루는 방법 그러한 상태에 도달한다면, 사물과 언어, 언어와 인간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것. 언어를 발생시키는 것은 바로 그 거리이다. 자동 기술법이 희망하는 상태는 언어가 아니라 침묵   역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느낌과 이미지들-특히 자유, 사랑, 시가 결합한 백열하는 삼각형-은 대부분 초현실주의의 창조이며 또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시인들의 창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초현실주의는 유래 없는 정신적 위기와 전쟁을 겪은 뒤, 20세기 중반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조 그것이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와 그것의 이념들이 미래에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상관없이, 자명한 것은 현대시의 지배적인 특징이 여전히 고독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는 역사 속에 육화되지 않았고, 시적 경험은 예외적 상태이며, 시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시들, 그림들 그리고 소설들을 창조해내는 오래된 길뿐이다. 미래의 시가 진정으로 시가 되고자 한다면, 위대한 낭만주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3부 시의 역사 (요약)|작성자 옥토끼   에필로그   회전하는 기호들       이 책의 주제는 시에 대한 사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이 시에 대한 성찰의 시작과 끝에서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하는 것을 가리키는 지표가 아닐까?   시는 사회적 삶을 시화하려 하고, 사회는 시어를 사회화하려 한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후엔, 우리의 위대한 시인들은 시의 부정을 통해 최상급의 시를 창조해왔다. 그들의 시는 시적 경험에 대한 비판이며, 언어와 의미에 대한 비판이며, 시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시적 언어는 언어의 부정을 먹고 자란다. 이렇게 원은 닫히고 만다.   시적 전통이 맑시즘 못지않게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구체적인 현실과 일반적인 움직임에 근거하여 사회를 아우르며 변화시키는 지식이다. 그것은 능동적 이성이다.   새로운 시인들이 직면할 상황들의 몇몇 모습 - 세계의 이미지를 상실하는 것 - 기술이라는 능동적 기호로 이루어진 보편적 어휘의 등장 - 의미의 위기   오늘날 우리는 세계 속에 외롭게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은 현존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파편과 분산 속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 하나 속에서 타자를 인지하는 것은 언어에게 은유의 능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즉, 언어로 하여금 타인들에게 현존을 부여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란 타인들을 찾는 것이며,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술은 자기 자신을 상상력과 부딪치고, 세계의 이미지의 부재에 직면해서 상상력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형상을 갖도록 한다. 그 형상이 시이다. 기술의 기호들처럼 미정형의 것 위에 세워져서, 그들처럼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의미를 찾아 헤매는 시는 급박함으로 가득 찬 빈 공간이다. 그것은 아직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미를 찾아 편력하고, 그러한 편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기호의 다발이다.   우리들의 시대는, 상상할 수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라는 것이 종말을 맞이한 시대이다. 더욱더 좁아지는 현재 속에 갇혀 우리는 자문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제로는,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아야 옳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물음에 확실히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일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의 가속화와 지구를 동질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기술의 보편화는, 마침내 어느 곳이든 똑같은 장소에서 광란하는 부동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시는 여기- 지금의 탐색이다. “우리는 신을 위해서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존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도착했다.” “우리의 최초의 시는 존재이다.” 시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위로해주지 않고, 오히려 삶과 죽음이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구체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짝을 재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나 속에서 너를 재정복하며, 그렇게 해서 분산되어 있는 파편들 속에서 세계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주사위 놀이는 결코 우연을 배제하지 못하리』 ‘관념론적’ 시에 대한 처단 『지옥에서 보낸 한 철』‘유물론적’ 시에 대한 처단   창조의 중심을 이동시켜서 언어의 본래적 기능을 언어에게 되돌려주는 것 인간은 말에 봉사하게 되고, 시인은 언어의 봉사자가 되었다. 우리들의 세기는, 의심해보지 않았던 길을 통해, 르네상스 이후 부정되었거나 혹은 최소한 무시당해왔던 힘인 옛 영감으로 돌아가는 회귀의 시대이다.   조이스. 아담(모든 인간), 영어(모든 언어) 그리고 책 자체와 작가는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인 말’이라는 순환적인 담론을 통해 흐르는 단지 하나의 목소리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창조적 행위가 채택하는 비판적 경향을 표현 관심사 1. 학문적인 차원에서 창작과정은 무엇에 근거하는지, 시의 구절, 리듬, 이미지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조사해보는 것 2. 시적 차원. 개인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곳까지 창작의 마당이 넓어졌다   시는 음악도 회화도 아니다. 시의 음악은 언어의 음악이다. 시의 이미지들은 선이나 색채가 아니라, 말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영상들이다. 공간도 글씨로 변한다. 여백은 기호들이 말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글씨는 하나의 전체를 투사하지만, 어떤 결핍에 의지한다. 그것은 음악도 침묵도 아니지만, 양자 모두에게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모든 예술에 참여하지만 그러한 모든 예술적 동반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만 생명을 갖는 것이 시의 이중성이다.   변화하는 공간 위의 글, 공중이나 백지 위의 단어 그리고 축제인 시는 하나의 의미를 찾는 기호들의 총체, 자기 자신을 맴돌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상형 문자이다. 의미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비추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현실은 있지만 이미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어느 부재 주위를 돌고 있고 그 부재 앞에서 우리의 모든 의미는 무효화된다. 순환의 궤도에서 시는 깜박거리는 빛을 발한다. 그 깜박임이 뜻하는 바는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라 너와 나의 순간적인 결합니다. 시는 너를 탐색하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귀를 쫑긋 세우고, 침묵의 목소리, 즉 자신을 육화할 단어를 찾는 죽얼거림을 감지한다. 시인은 시간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인다. 비록 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종이 위에 몇 개의 단어들이 모이거나 흩어진다. 그 형상은 하나의 예시, 금방이라도 드러나고자 하는 현현의 급박함이다.   리라는 인간을 성화해서 우주 속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홀은 인간을 그 자신 너머로 쏘아 보낸다. 모든 시적 창조는 역사성을 띠지만, 반면 모든 시는 (역사의) 직선성을 부정하고 영속하는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이다.   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여기와 저기의, 너와 나와 그와 우리들의 순간적인 화해이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시는 현존이 될 것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에필로그 (요약)|작성자 옥토끼
3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댓글:  조회:1882  추천:0  2018-07-25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1)        이미지라는 단어도 다른 말들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면, 아폴로 신이나 성모 마리아의 조각처럼 상의 의미를 갖기도 하고, 상상력을 통하여 상기하거나 만들어내는 실재적 혹은 비실재적  모습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은 심리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결과물들이 이미지가 갖는 유일한 의미도 아니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미지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모든 언어적 형태, 즉 시이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라는 것을 밝혀둔다.      수사학은 이러한 표현들을 분류하여 비교, 은유, 말의 유희, 유사어, 상징, 알레고리, 신화, 우화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을 가르는 차이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묶는 공통점은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들오 이루어진 각각의 시편--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많은  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침묵의 음악"이라는 시적 구를 사용하여 겉으로 보기에 화해 불가능한 두 단어를 걸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비극적  영웅도 하나의 이미지이다. 가령, 안티고네라는 인물은 선험적 가치인  효와 사회적 가치인 인간 법 사이에서 고뇌하는 비극적 영웅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사랑과 프리아모스에 대한 연민, 영광스러운 죽음에 대한 매혹과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의 대립이 얽혀 있다. 세히스문도에게서는 불면과 꿈이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오이디수스에게는 자유와 운명이 얽혀 있고........이처럼 이미지는 인간조건의 표식이다.   서사적이거나 희극적 혹은 서정적이거나 간에, 하나의 구에 농축 되어 있거나 혹은 천 페이지에 걸쳐 풀어 헤쳐져 있거나 간에, 모든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시 말해,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개념과 과학적 법칙이 의도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일한 논리적 환원 덕분에 개체적 대상들--가벼운 깃털과 무거운 돌--은 동질적인 단위로 변화된다. 어느 날 어린아이들이 돌 일 킬로그램은 깃털 일 킬로그램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돌과 깃털을 킬로그램이라는 추상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돌과 깃털이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속임수에 의해 그것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환원이 갖는 통일적 기능은 그러한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망가뜨리고 빈약하게 만든다. 시에서 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인은 이것은 깃털이고, 저것은 돌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느닷없이 돌이 깃털이고, 이것이 저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돌은 여전히 거칠고, 딱딱하고, 불투명하고, 태양처럼 누렇거나, 이끼에 덮여 초록빛을 띄거나 간에 어쨌든 돌, 무거운 돌이다. 그리고 깃털은 여전히 가벼운 깃털이다.이미지는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이다'라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을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은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 중에서 [출처] 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 이미지(1)|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   이러한 반대되는 언급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 이지,'~이 될 수 있다' 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는 존재를  재창조한 다고 말한다. 이미지의 철학적 권위를 회복하려는 욕심에서 어떤 이들은 변증법적 논리로부터 그 근거를 찾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도 한다. 결국, 많은 이미지들은 변증법적 과정의 세 시기에 부합된다. 즉, 돌은 실재의 한 단계이며, 깃털은 또 다른 단계이고, 양자의 충돌에서 새로운 실재로서의 이미지가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이 모든 것에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미지들을 무한히 열거할 필요는 없다. 어느 때는 첫번째 용어가 두번째 용어를 삼켜버린다. 또 어느 때는 두번째가 첫번째를 중화한다. 혹은 세번째 용어는 산출되지 않고 두 요소가 환원 불가능하고 적대적인 상태로 마주서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유머의 이미지들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모순은 단지 현실이나 혹은 언어의 복구 불가능한 부조리한 특성을 가리키기 위하여 쓰인다. 결국,많은 이미지들이 헤겔의 변증법적 질서에 의거하여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거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정과 반의 진짜 동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사함이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돌과 깃털은 돌도 아니고 깃털도 아닌 제 3의 현실을 위하여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어미지 정확히 말해 가장 높은 이미지에서는 돌과 깃털은 여전히 돌과 깃털이다. 즉,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저것이다. 돌은 돌이면서 깃털이다.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이다. 여기에는 과학이 요구하는 양적인 환원도 없고, 헤겔의 변증법이 요구하는 질적인 변화도 없다. 요약하면, 변증볍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물의를 일으키는 도전이며, 사유의 법칙을 침해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현실의 모습적인 성격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논리적 원리들, 특히 모순의 법칙(이것이 이것이지 저것이 될 수 없다) 같은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변증법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소위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처럼 그렇게 실제적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라고 보인다. 정은 반과 동시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양자는 새로운 긍정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는데, 새로운 긍정은 양자를 포괄하면서 그것들을 변화시킨다. 세 단계들의 각각에는 모순의 원리가 지배한다. 긍정과 부정이 결코 동시적인 실재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과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말살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모순의 법칙을 존중하는 변증법적 논리는 그러한 법칙을 뛰어넘는 이미지를 비난한다.   여타의 학문들처럼, 논리학도 모든 체계가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하는 질문, 즉 자신들의 근거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버틀란트 러셀의 역설이 의미하는 것과, 러셀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훗설의 연구가 의미하는 것도 역시 논리의 근거에 대한 질문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논리적 체계들이 출현해다.  어떤 시인들은 뤼파스크의 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자신이 상보적 모순의 원리라고 부른 것에 기초한 일련의 명제들을 발전시키자고 제안했다. 뤼파스코는 대립되는 용어들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양자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였다. 각각의 개념을 상호 직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하고 있는 상대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 즉, A는 B와의  모순적 기능에 의해 존재한다. A에서 발생하는 하나하나의 변화는 겨로가적으로 B에게 상반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온다. 부정과 긍정, 이것과 저것, 돌과 깃털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대의 상보적인 기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출처] 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3)       동양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앎은 공식이나 이성으로 전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경험이며 각자가 스스로 위험 무릅쓰고 경험해야만 한다.  가르침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지만, 아무도 우리 대신 그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명상의 기법들이 중요하다. 배움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명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모든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모든 지식을 포기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 뒤에 우리는, 아는 것을 감소하지만 더 가벼워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는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아찔하고 텅 빈 진리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정중동이며 만중허, 헤겔이 절대의 무와 충만한 존재 사이의 최종적인 일치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우파니샤드는 범의 상태를 존재와의 교감의 순간들로 정의했다.  "오감이 고요해지면서 정신 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때, 그 안정된 정신을 통해 인간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이며 고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오래된 오솔길, 즉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영감을 받은 탄트라 불교의 체계는 육체를 우주의 은유 혹은 이미지로 인식한다. 육체의 경락은 에너지의 매듭이며, 별자리와 혈액과 신경의 흐름이 합류하는 곳이다. 포옹하는 육체들이 취하고 있는 각각의 자세는 수액, 혈액 그리고 빛의 삼중 리듬에 의하여 움직이는 점성술의 황도 12궁에 해당한다. 남인도의 코나락 사원은 서로 위얽힌 현란한 육체들이 밀림처럼 뒤덮여있다. 이 육체들은 화염의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태양들이며, 서로 교미하는 별들이다. 돌은 불타오르고 사랑에 빠진 사물들은 서로 결합한다. 연금술적 결합은 인간의 결합과 다르지 않다. 백거이는 자전적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한밤중에 나는 슬쩍 훔쳐보았다 음양이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한 자태로 아내와 남편처럼 껴안고 있었다. 두 마리 용처럼 서로 칭칭 감은 체.   동양적 전통에서 진리는 개인적 경험이다. 그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진리는 소통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의 탐구는 각자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이다. 충만함에 도달했는지, 존재와의 동일함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체험적 앎은 말로 전달할 수 없다.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는 너털웃음, 미소 혹은 역설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러한 미소는 수행자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경전들은 자주  이러한 모순적인 말을 한다. 가르침은 침묵으로 귀결된다. 도는 규정할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길은 길이라 말하면 늘 그 러한 길이 아니고,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장자는 언어란 본래 절대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상징 논리 학의 창시자들을 노심초사케 하는 난제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대림물들의 세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언어의 무능력이 말의 근원적 한계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 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 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는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   결국, 의미하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4)     장자는 언어를 비판했지만, 말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선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언어적 창조물인 연극 노오와 바쇼의 하이쿠는 역설과 침묵으로 용해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자는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고 확신한다. 기독교와 달 리 도교는 좋은 가르침도 나쁜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 면, 언어로 된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장자가 말하는 말없는 가르침 이란 모범이 되는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되어 있으 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을 뜻한다. 장자는 이것과 저것의 의미를 초월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언어가 시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의 글은 이미지, 말의 유희, 그 밖의 시적 형태들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장자에게서 시와 사유는 날줄과 씨줄이 되어 하나의 기막힌 천을 짜낸다. 다른 경전 들도 마찬가지이다.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대문이다. 장자가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 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때, 그 말은 말의 유희, 즉 시적 수수께끼를 암시하는 것이다. 본래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는 경험은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새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새들은 말을 의미하기에, 이 말은 결국 말없이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여함의 왕국인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즉 " 이름이 필요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혹은 이름과 사물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곳, 즉 말이 존재가 되는 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벼운 깃털은 무거운 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가 어떻게 말하는 지 보기 위해서는 언어를 살펴봐야 한다. [출처]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3) (4)|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5)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  깃털은 가볍고 돌은 무겁다.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과의 관계 속에서 가벼운 것이며, 어두운 것 은 밝은 것에 비교해서 어두운 것이다. 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수의 경우에 왼쪽에 쓰인 영은 오른쪽에 쓰인 영과 같지 않다. 숫자는 놓이는 위치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단지 기타의 의미화와 의사 소통 수단에 비해 가변성의  폭이 더 넓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잇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 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낱말들의 다른 의미들은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혹은 달리 말한다면,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산문에서 구의 통일성은 의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의미는 구를 이루는 모든 낱말들을 동일한 대상 혹은 동일한 방향을 겨냥하게 겨냥하는 화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을 거두어 고양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가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상반되는 여러 힘들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명제들은 문법적이며 논리적인 구문으로는 완벽하게 옳지만, 의미상으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가르시아 바카가 그의 책 [근대의 논리학 입문]에서 인용하는 있는 것처럼 (" 숫자2는 두 개의 돌이다"). 논리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명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는 모순도, 무의미도 아니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만일 다양하며 서로 다른 의미들이 이미지의 내부에서 투쟁한다면, 이미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이미지는 시인이 본 것이며 들은 것이고, 세계에 대한 시인의 비전과 경험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다. 그 때문에 이미지는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를 다르는 것이며, 명백히 우리가 걱정하는 논리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로, 그러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즉, 이미지들은 작품들이다. 공고라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경은 자연 풍경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할지라도, 양자는 현실성과 확실성을 갖는다. 즉, 서로 병행하며 자율성을 갖는 현실의 두 질서이다. 이 경우에, 시인은 진리를 말하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한다. 즉, 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를 창조한다. 시적 이미지들은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며,  시인이 '물은 유리이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물오리는 수양버들의 사촌이다" (카를로스 페이세르)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를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대해서 무엇인 가를 말하며, 그 무엇은,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 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고 확신한다. 시적 이미지들에 관련된 이러한 주장은 어떤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 것일까? 시적 언어가 보여주는 외견상의 모순 혹은 무의미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자각할 때, 이 대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성질들, 감각들, 의미들의 복합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복합성은 접촉의 순간에 즉시 동일된 상태로 지각된다. 다양한 성질과 형태의 모순적인 총체를 동일시키는 요소는 의미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갖는다. 현상학적인 분석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가장 단순하고 우연적이고 방심한 상태로 지작하는 경우에조차도 어떤 지향성이 주어진다. 이렇게 의미는 언어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실재를 포착하는 근거이다. 실제의 복합성과 모호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의미 속 에 녹아든다. 일상적인 지각과 비슷하게, 시적 이미지는 실재의 복합성을 살려내는 동시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여기까지는 시인이 하는 바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실재를 표현하는 다른 형태들과 이미지를 구별시켜주는, 이미지의 통합 작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옥타비오 파스]이미지(6)     실재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해석들 --삼단논법, 묘사, 과학적 공식, 실천적인 수준의 논평 등--은 표현하고자 의도하는 것을 재창조하지 않고 그것을 표상하거나 혹은 묘사하는 데 그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자를 본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의자의 색깔, 형태, 재료 따위를 지각한다. 이러한 분산적이고 모순적인 특성들에 대한 감지는 그것의 의미, 즉 의자가 기구이며 도구라는 것을 아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의자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묘사하기를 원한다면, 세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맨 먼저, 의자의 형태, 그 다음에는 색깔 그리고 의미에 이를 때까지 이렇게 계속해야 한다.  묘사의 과정에서 대상의 총체성은 점점 상실되어간다. 처음에 의자는 단지 형태였다가 나중에는 나무의 종류가 되고 마침내는 순수한 추상적 의미 '의자는 앉기 위해 사용하는 대상이다' 가 된다. 시에서 의자는 느닷없이 우리의 주의를 자극하는 순간적이고 총체적인 현존이 된다. 시인은 의자를 묘사하지 않고 대신 우리 앞에 의자를 보여준다. 지각의 순간에서처럼, 의자는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성질들을 지닌 채 우리 앞에 주어지며, 그 순간의 정점에는 의미가 자리잡는다. 이렇게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 리듬을 갖는 구인 운문은 일깨우고, 되살려내고, 환기시키고, 재창조한다. 혹은 마차도가 말했던 것처럼, 한 번 걸러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현시한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재창조하며 되살린다. 그러한 부활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우리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의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이 된다. 앉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쓰임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이 자신의 충만함을 회복하자마자, 잃었던 의미들과 가치들을 다시 획득 하게 된다. 지각의 순간에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의 복합성은 실재의 복합성과 다르지 않다. 즉각적이고 모순적이며 복합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의미를 갖는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주체와 객체는 매우 충만한 일치를 이룬다. 만일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미지 덕분에 그 언어가 원초적인 풍요로움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견의 일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말이 맨 처음의 상태로, 다시 말해, 의미의 복합성으로 복귀하는 것은 시적 기능의 첫 번째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 시적 이미지의 의미를 완전히 포착하지 못했다.    모든 구는 다른 구와 관련되며, 다른 구로 설명되는 것이 가능하다.  기호의 가변성 덕분에, 말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있다. 뜻이 모호한 구문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이것이 나 혹은 저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 혹은 저것'을 말하기 위해서 또 다른 말들에 의탁한다. 모든 구는 다른 구에 의해서 말해지거나 설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의미는 말하고자 함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언표이다. 이와 반대로,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 될 수 없다. 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로만 설명된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이미지가 의마흔 것을 말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의자를 볼 때, 우리는 즉시 그것의 의미를 감지한다. 아무 말없이 우리는 의자에 앉는 것이다. 시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는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이 내게 "소리 얼음을 쌀쌀맞게 내뱉는다"라고 시인이 말할 때, 그는 새하얀 것 혹은 교만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긴말이 필요 없이 직접 현실에 마주서게 한다. 즉, 치아., 말, 얼음, 입술, 부조화한 실재가 느닷없이 우리 눈 앞에 출현한다. 고야는 전쟁의 공포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주석도, 지시체도, 설명도 필요치 않다. 시인은 의미하지 않고 말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이렇게 원초적인 복합성을 최복한 말은 이제 또 다른 당황스럽고 과격한 변형을 겪는다. 이것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중에서 [출처]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5/6)|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7)        언어의 중요한 성질로부터 파생된 두 가지 속성이 단어를 특징짓 는다. 첫째는 가변성 혹은 상호 교환 가능성이며, 둘째는 이러한 가 변성에 힘입어 한 단어는 다른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 리는 가장 간단한 관념도 여러 가지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혹은 의미를 심하게 손상시키기않고 텍스트나 구의 단어를 바꿀 수 있 다. 혹은 하나의 구문을 다른 구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모든 것 이 이미지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산문에서는 동일한 사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할 수 있지만, 시에서는 단 한 가지 방법뿐이다.  "발가벗은 채 빛나는 별"이 의미하는 바는 "별은 빛난다. 왜냐하면 발가벗고 있기 떄문이다"와는 다르다. 후자의 표현에서 의미는 약 화되었다. 직관은 천박한 설명으로 바뀌었다. 시적 흐름의 긴장이 약해졌다. 이미지는 단어의 가변성과 상호 교환 가능성을 잃어버리 게 한다. 낱말들은 교체 불가능하며, 수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낱 말들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더 이상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최종적인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원초의 본성으로 언어가 복귀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과격한 작 용을 위한 예비적 과정이 된다. 시심詩心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 달리말하면 가변적이며 의미를 갖는 기호들의 집합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초월한다. 이제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말했던 것이 이해된다. 시는 산문이나 의사 소통에서 훼손된 언어 이전의 언어이지만, 또한 그 이상의 어떤 것 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은 단지 언어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이다. 말에서 태어난 시는 말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된다.       시적 경험은 말로 환원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이다. 이미지는 상반되는 것을 화해 시키지만, 이러한 화해는 언어이기를 그만둔 이미지의 언어를 제외 하고는 설명될 수 없다. 이렇게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우 리에게 밀어닥치는 침묵에 맞서기 위한 절망스러운 수단이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 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이다.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 이미지의이편에는 낱말, 설명, 역사의 세계가 있으며, 이미지의 저편에는 실재의 문이 열린다. 의미화 와 무의미화는 등가치의 용어가 된다. 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 미지 그 자체이다.       물론 모든 이미지들에서 상반되는 것들이 파괴되지 않은 채 화 해하는것은 아니다. 어떤 이미지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용어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비교라고 정의 했다--을 발견한다. 르베르티가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 미지들은 세계, 언어 혹은 인간의 부조리한 성격을 폭로하는 극복 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절대적인 무의미를 유발한다(유머의 구사와, 시의 경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재담들이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어 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의 복합성과 상호 의존성을 드 러낸다. 마지막으로, 언어학적으로그리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 이는 것, 즉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을 실현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 러한 모든 이미지들-완전히 이루어지기도 어렵고 완전히 이해되 기도 어려운-에서 동일한 과정이 목격된다. 실재의 다양성을 구 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본질적인 개성을 잃어버리지않은 채, 그 다 양성이 최종적인 동일성으로 드러나거나 표현되는 것이다. 깃털은 깃털이면서 돌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 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 한다.       장자가 말에 가했던 비판은 이미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 면 엄격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언어적 기능이아니기 떄문이다. 결 국,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 의미는 사물과 이름 사이의 연결이다. 이렇게 의미는 이름과 우리가 이름 붙이는 것 사이의 거 리를 암시한다. 우리가 "전화는 먹는 것이다", "마리아는 삼각형이 다"등의명제를 말할 때는 무의미가 발생하는데, 왜냐하면 말과 사물, 기호와 대상 사이의 거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 이다. 즉 다리(의미)가 부서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에 갇혀 홀로 남는다. 그리고 현실은 언어없이 남겨지게 되는데, 왜냐 하면 뱉어내는 말들은 이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순수한 소리이 기 때문이다. 이미지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는 넓혀지는 대신에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 진다.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은 이제 같은 것이다. 다리 구실을 하는 의미 역시 사라진다. 이제 포착해야 할 것도 없고, 지시해야 할 것 도 없다. 그러나 이떄 만들어진 것은 무의미나 반의미가 아니라,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신이다. 언어는 이 것과 저것의 상대적인 의미를 넘어, 말할 수 없는 것-돌은 깃털이 다, 이것은 저것이다-을 말한다. 언어를 가리키며 표상한다. 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 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따 금씩 성취한다.고로, 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것, 현실에 거주하는 것, 혹은 현실 자체이다.       시의 진리는 시적 경험에 의지하는데, 이러한 시적 경험은 동양 사상과 일부 서양 사상에 의해서 지적된 것처럼, 인간이 '현실의 현실'과 일치하는 경험과본질적으로 다르지않다.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러한 경험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의사 소통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혼란스러운 속성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미지의 의사 소통 방법은 개념의 전달이 아니다-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 는 좀더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설명하지않고 현실 을, 문자그대로, 재생시킨다. 시인의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 다.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 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 는 공간, 즉 이미지로 만든다. 이미지로 될 때, 타자가 될 때, 태어 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시는 변신이며, 변화이며, 연금술적 작용이다. 그래서 시는'이 사람'과 '저 사람' 을 변화시켜 자기자신인 '타자'로 만들기 위해 마법, 종교, 그리 고 그 밖의 체제들과접해왔다. 우주는 더 이상 이질적인 사물들이 쌓여 있는 거대한 창고가 아니다. 항성, 신발, 눈물,전차, 수양버 들, 여자, 사전, 이런 모든 것들은 광대한 가족이며, 서로 의사 소통 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모든 형태에는 똑같은 피가 흐르고, 인간 은 마침내 그의욕망- 그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시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이다. 즉 그 자신이며 타자이다. 리듬이고 이미지인 구句를 통하여 인간,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한다. 시는'존재로 들어가기'이다. [출처]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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