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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오 파스, 그늘이 무성한 나무
2019년 03월 10일 12시 56분  조회:1291  추천:0  작성자: 강려
옥타비오 파스, 그늘이 무성한 나무
1. 시인으로서의 성숙 과정(1914 - 1943)

(1) 시인의 혈통과 성장 배경

1930년대 말경의 멕시코 문단에는 『작업실』(Taller)이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 작품에서부터 문학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감수성과 새로운 자세를 표현하기 시작한 그들의 활동은 멕시코 문학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과 전 세대의 작가들을 구별짓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근대 역사의 부침 속에서 시적 작업의 위상에 대한 관점의 차이였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시란 역사에 무관심하지도 않으며 역사에 종속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문학적 창조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과 흐름에 등을 돌린 채 유유자적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문학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단순한 결과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옹호한 것은 참여시도 아니고 순수시도 아닌 새로운 시, 즉 좁은 개념적 도식을 깬 풍요로운 개념의 시였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시적 탐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형식의 발견이었으며, 그러한 작업을 용이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20세기 들어와 시작된 전세계적인 전위주의 운동의 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사학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찾고자 한 젊은 작가들의 시도를 옥타비오 파스는 「수사학」(Retórica)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사고의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새로운 감수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이후 적어도 반세기 동안 멕시코의 문단의 주된 흐름을 형성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작업이다. 중남미의 다른 나라와 스페인에서 활동하는 같은 세대의 시인들과의 교감 속에서 수행된 이러한 작업은 라틴아메리카의 시가 근대시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는 1914년 3월 31일 멕시코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계는 여러 세대 전에 멕시코에 정착한 크리오요(criollo. 중남미에서 탄생한 스페인 출신)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 가문의 딸이었다.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탁월한 지식인이자 자유 공제 조합원이었던 할아버지 이레네오 파스(1836 - 1924)는 멕시코의 역사적인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멕시코를 침공한 나폴레옹 3세의 군대와의 전투에 대령의 계급으로 참전했으며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진영에 참가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훗날 디아스의 전기를 집필했고 여러 권의 역사 소설과 향토색 짙은 소설, 희곡 작품과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파스가 일찍부터 스페인 작가들(갈도스,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알라르콘, 공고라, 케베도 등)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친할아버지가 소장하고 있었던 많은 책들 덕분이었다. 친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중남미 모데르니스모 시인들의 작품들도 있었고 프랑스 시인들과 소설가들의 작품도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숙모(“잠에 취한 듯한 처녀, 나의 숙모는/ 눈감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벽 너머 내면을 응시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에게 배운 프랑스어는 그가 프랑스 문화와 문학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하여 멕시코 사람들의 문학과 사유에 강하고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 문화가 멕시코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 파스는 「상호 영감」(Mutuas inspiraciones)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말했다.


나는 프랑스화된 멕시코의 중산 계층의 집에서 태어났다. 1910년경에는 많은 중산 계층의 사람들이 프랑스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프랑스화 되다'(afrancesamiento)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과장되게 프랑스 사람들을 흉내내다’라는 뜻이거나 지난 세기에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을 추종했던 사람들을 뜻한다. 하지만 이 말은 더 넓고, 더 고상하고,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화된 사람’이라는 말이 계몽주의를 옹호하고 프랑스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18세기말부터였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19세기말경에는 미학적 의미가 첨가되어 플로베르와 에밀 졸라를 숭배하는 상징주의를 의미했으며, 루벤 다리오가 말했던 것처럼, 빅톨 위고를 읽고 용기를 얻거나 베를렌를 읽고 모호해지는 사람을 뜻하기도 했다. 금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리아노 아수엘라와 마르띤 루이스 구스만의 사실주의, 알폰소 레예스와 훌리오 토리의 산문, 타블라다와 곤살로 마르티네스, 로페스 벨라르데와 비야우루티아, 고로스티사와 토레스 보데의 시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언급한다. 그들은―그들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비밀스럽게 프랑스 문학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파스의 아버지 옥타비오 파스 솔로르사노는, 그의 할아버지처럼, 활동적인 정치부 기자였다. 멕시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다른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에밀리아노 사파타 진영에 참여하였다. 급변하는 혁명의 와중에서 미국에 망명하여 사파타와 남부 해방군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그는 멕시코의 농지 개혁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망명에서 돌아와서는 농민당(El Partido Nacional Agrarista)을 창당했다. 농민들의 입장을 열렬하게 옹호했고 사파타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던 그는 1934년 기차에 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1974년에 쓴 회고적 장시 「선명한 과거」(Pasado en claro)에서 파스는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늘 술기운에 사로잡힌 채
구토와 갈증에 괴로워했던
나의 아버지는 불꽃처럼 살다갔다.
어느 날 오후 파리 떼와 먼지로 뒤덮힌
기차역의 침목과 레일 사이를 돌아다니며
우리는 아버지의 흩어진 몸뚱이를 주웠다.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제 죽은 자들의 희미한 나라인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한다.
서서히 몰락하는 집안에서
나는 자라났다. 나는 이름 없는 폐허 속에서
자라난 잡초였다(이다).


아버지가 남부의 사파타 진영에 합류하자 어린 파스와 그의 어머니는 미스꼬악(지금은 멕시코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멕시코 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에 있었던 할아버지의 커다란 집에서 살았다. 기울어 가는 가세, 대대로 전해지는 매우 강한 지적인 분위기, 죽은 조상들의 초상화와 책이 가득한 오래된 할아버지의 집 등이 파스의 유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집안의 넓은 정원은 훗날 신화적인 이미지로 변해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다. 끌라우디오 이삭이 감독한 영화 《나무들의 언어》(El lenguaje de los árboles)에서 파스는 자신이 처음으로 느꼈던 시적인 체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멕시코 시 교외에 있던 낡고 커다란 할아버지의 집이 떠오른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지만 책과 나무는 많았다. 집안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돌보지 않아서 밀림 같아 보였던 매우 오래된 정원에는 커다란 나무들―물푸레나무들과 소나무들―과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것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무화과 나무였다. 무화과나무는 세월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을에서부터 6개월 동안은 해골처럼 검게 시들어 있다가 다시 푸르러졌다. 열매 역시 신비로웠다. 무화과는 열매가 곧 꽃이고 꽃이 곧 열매다. 검은 껍질 속에는 빨간 꽃이 감춰져 있다. 나는 무화과를 먹는 것이 태양을 먹는 것과 같고 어둠을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촌들, 친구들과 같이 정원에서 놀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무화과나무에 기어올라 무성한 잎새에 숨어 하늘을 항해하고 탐험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무화과나무는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지만 내가 걸터앉아 있던 가지가 마치 범선의 돛대인 것처럼 수평선과 구름을 향해 항해했고, 시간을 탐험하였다. 무화과나무 위의 놀이는 영웅의 행위를 흉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금방 나의 운명은 영웅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영웅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며 철학자의 관조적인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나의 운명은 말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는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릴 적에 시인인 호메로스가 되고 싶은 지 아니면 영웅인 아킬레우스가 되고 싶은 지를 물었다. 알렉산더는 “그 질문은 나에게 나팔이 되고 싶은 지 아니면 나팔이 찬양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지를 묻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영웅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호메로스가 되고 싶었다. 나는 단지 시가 영웅의 행위와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만을 찬양하는 나팔이라고 믿지 않았다. 시는 인간의 불행과 불운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

옥타비오 파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물려준 지적인 유산과 사회적 열정을 이어받아 청소년 시절부터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에 민감했고 학생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파스는 1976년에 발표된 시집 『회귀』(Vuelta)에 실려 있는 시편「산 일데폰소 야곡」(Nocturno de San Ildefonso)에서 당시의 사회적 열정을 회상하고 때로는 순수한 열정이 폭력화되기도 하는 변질의 과정을 회고했다. 산 일데폰소는 17세기에 예수회의 수도원이었던 곳으로 나중에 국립 고등학교의 건물로 변했고 파스는 1931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다.
 
선(善), 우리가 원한 것은 선이었다.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것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
선을 원했던 우리 역시 결백하지 못했다.
계율과 개념, 신학자들의 오만함.
십자가가 몽둥이로 변하고,
사람들의 피를 제물로 바치며,
죄악의 벽돌로 집을 짓고,
의무적인 성찬의 전례를 공포하는 것.

그러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사에 대해 지속적이고 전투적인 열정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파스의 열정은 또 다른 통로를 통하여 성숙되어 갔다.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은 때로는 일치하기도 했고, 때로는 평행선을 긋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전 세대의 가장 중요한 선배 시인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당시의 문학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시인이었던 카를로스 페이세르와 호세 고로스티사 그리고 철학자였던 사무엘 라모스가 파스의 선생님들이었다. 또한 헤라르도 디에고가 편집한 훌륭한 시선집을 통하여 스페인 시를 알게 되었으며, 호르헤 쿠에스타의 시선집을 통해서는 멕시코 시를 총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었다. 

파스가 몇 명의 동료들과 잡지 《난간》(Barandal, 1931 - 1932)를 창간하고 편집한 것이 바로 이 당시였다. 이 잡지를 통하여 문학적 전위주의를 소개했으며 자신의 첫 번째 평론인 「예술가의 윤리」(Ética del artista)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파스는 예술이 갖는 역사적이고 증언적인 가치를 언급했고, 《난간》이 폐간되고 새롭게 창간된 《멕시코 문학일지》(Cuadernos del Valle de México, 1933 - 1934)에서는 ‘순수시’를 뛰어넘는 시의 사회적 역할을 쟁점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가 그 당시에 발표한 첫 시집 『야생의 달』(Luna silvestre, 1933)은 정치와 역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신상의 문제를 표현한 시로 평가되어 동료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1934년 멕시코를 방문한 스페인 시인이자 공산당원이었던 라파엘 알베르티와의 만남도 파스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대중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을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으며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의 강연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장면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계시였다. 그 당시의 우리는 모두 좌익이었지만 그 때부터 나는 나중에 ‘참여시’라고 이름이 붙여진 정치적 시에 대해 어떤 불신감을 느꼈다.” 알베르티는 약관 20세의 젊은 파스의 시를 읽고 즉각적으로 파스의 시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가 아니라고 지적했지만 언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파스의 시도가 ‘혁명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인정했다. 

1937년 23살이 되었을 때 파스는 학업(멕시코 국립대학교 법학부)을 포기하고 집과 멕시코 시를 떠나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유카탄 지방에 노동자와 농민의 아이들을 위한 진보적인 학교를 세웠다. 원주민들의 삶과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관능성은 도시의 근대적 삶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파스는 시편 「돌과 꽃 사이에서」(Entre la piedra y la flor)에서 이러한 대조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시 속에서 원주민 농민들의 질박하고 제의적인 삶과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실존을 질식시키는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추상적 체계로 대변되고 있다. 돌과 꽃 사이에서, 대지의 냉혹한 황량함과 선인장에 피는 경이로운 꽃 사이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인간이었다.


돌과 꽃 사이에, 인간.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탄생,
우리를 탄생으로 데려가는 죽음.

인간,
돌 위로 줄기차게 내리는 비
화염 사이로 흐르는 강
폭풍우를 이겨내는 꽃
번갯불의 섬광을 닮은 새.
노동과 열매 사이의 인간.

옥타비오 파스가 중요시했던 것은 정치적 해석을 넘어서는 인간의 심오한 진리, 즉 끝없이 생성하는 생명력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확연하게 드러낸 것은 스페인 내란을 계기로 쓴 시 「아무 일도 없을거야!」(¡No pasarán!, 1936)였다. 시집의 판매로 얻어진 수익금은 멕시코에 있던 “스페인 인민전선”을 위해서 쓰여졌다.

옥타비오 파스는 1937년에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인 『인간의 뿌리』(Raíz del hombre)를 출간한다. 첫 번째 시집인 『야생의 달』에서처럼 이 시집의 중심 주제는 사랑과 에로티시즘이었고 이것은 이후에도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파스에게 언어는 욕망의 발산이고, 육체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사랑하는 연인을 부르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1937년 6월에 파스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열린 “문화를 지키기 위한 제2차 반파시스트 작가들의 국제회의”에 그의 스승인 카를로스 페이세르와 함께 멕시코 대표로 초청된다. 그들을 초청한 것은 회의의 조직위원이었던 라파엘 알베르티와 파블로 네루다였다. 알베르티는 파스를 이미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네루다는 파스가 보낸 두 번째 시집 『인간의 뿌리』를 읽고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었던 파스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스페인 여행은 파스에게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의 면에서 모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전 세계의 작가들은 문화를 지키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작가들이 옹호한 문화는 현존하는 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서 태동시켜야할 새로운 문화였으며, 그들이 생각한 새로운 사회란 바로 소련이었다. 또한 공산당에 가입한 작가들은 소련의 미학적 논리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참여 문학’에 동조했다. 그러나 파스는 그들의 배타적인 사유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예가 이 회의에서 다루어진 앙드레 지드에 관한 사안이었다. 앙드레 지드는 일년 전에 자신이 직접 보았던 소련의 실상을 폭로했고 소련을 새로운 사회로 보지 않았다. 소련을 옹호하는 작가들은 이러한 지드의 행동을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했다. 파스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대단히 고압적으로 지드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중남미 대표단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여러 번에 걸쳐 비공식적으로 지드의 책과 그의 행동, 그를 징계할 필요성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모든 중남미 대표들이 서명한 징계문을 서류로 작성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모두의 동의를 얻기 위하여 투표가 실시되었다. 그 자리에서 카를로스 페이세르는 앙드레 지드가 다르게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옹호했다. 최종 투표에서 페이세르와 나는 기권표를 던졌다. 그러나 징계문은 끝내 작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날 오후에 열린 공식 회의에서 호세 베르가민이 격렬하게 지드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지드에 대한 징계문을 작성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에서 표현한 이미지와 동떨어진 스페인의 현실은 파스에게 한가지 신념을 심어주었다. 즉 이 세계에는 싸워서 지켜야 할 대의명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곧장 다음과 같은 화두로 변했다. ‘어떻게 하면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시, 순수만을 고집하지 않는 시를 쓸 것인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시대의 미학적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를 쓸 것인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것이 『작업실』을 중심으로 활동한 젊은 세대 작가들의 문제의식이었다. 

그 당시 잡지 《현대》(Contemporáneos)를 중심으로 활동한 전 세대의 시인들은 폴 발레리와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강령을 쫓아 완고하게 순수시를 고집하고 있었다. 파스는 선배 시인들이 추구한 예술적 가치와 근대성을 창조적으로 모방하려는 의지는 인정했지만, 그들의 시에는 혁명에 대한 희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지의 시인들이 멕시코 혁명을 경험한 첫 번째 세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회의주의적 태도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폭력이 인간의 삶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시인들은 그것을 믿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 파스는 자신의 글 「전전날」(Antevíspera)에서 다음과 적었다.


전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전 세대와 비교하여 젊은 세대의 역사 의식이 더욱 강렬했고, 더 명철하지는 않았지만 더 깊고 총체적이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정체성과 영혼을 상실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대답되어져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우리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은 우리를 번민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옥타비오 파스는 시와 역사를 화해시키는 두 가지 시도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저항의 원리를 표현과 일치시키려는 초현실주의의 시도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전통의 부정을 통하여 새롭게 전통의 복원을 꾀한 엘리엇과 파운드의 독특한 해결책이었다. 이 두 가지 시도는 파스에게 삶의 비전에 대한 중요한 경험을 시사해주었다. 비전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실존 속에서 총체적 관점을 획득하는 일이다. 시와 역사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이지만 현실이란 언제나 드러남(現)과 숨음(實)의 이중적 방식으로 주어질 뿐 결코 하나의 관점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파스에게 시와 역사의 행복한 결합은 현실의 이중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드러남과 숨음의 변주를 통찰하는 것과 같았다. 드러남이 역사적 실존이라면 숨음을 드러내는 방식은 바로 예술적 비전이다. 순수 예술과 정치적 혁명을 등거리에서 견제하는 삶의 비전을 획득하기 위한 파스의 열망은 역사적 실존 속에서 심원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인간들의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1984년에 방송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역사가 바로 운명이다. 인간의 운명, 유한하고, 죽음을 향해 가며, 사랑하고, 태어나며, 일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운명 그 자체가 갈등하는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20세기의 도시적 삶에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인간 운명이다. 나는 그것을 선배들의 시에서 발견하지 못했고,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운명이었다.

새로운 시에 대한 성찰은 1943년에 잡지 《탕자》(El Hijo Pródigo)에 발표한 글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Poesía de soledad y poesía de comunión)에 확연하게 드러난다. 시에 대한 일종의 선언문인 이 글에서 파스는 근대 시인의 운명, 즉 시인이란 사회 안에서 사회에 저항하는 글쓰기를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임을 선언하고 있다. 시인의 도전은 “유욕(有慾)과 무욕(無慾)의 경계를 성찰하고, 경험과 표현을 일치시키며, 행위와 (행위를 표상하는) 언어를 하나되게 하는” 엄격한 진정성에 이르는 것이다. 

시적 열정과 사회적 열정 사이에서 갈등하던 파스는 1943년 구겐하임 장학금을 얻어 멕시코를 떠난다. 2년 동안의 미국 생활과 이후의 유럽에서의 외교관 생활로 파스는 10년 동안 조국 멕시코에 돌아오지 못한다.



2. 새로운 시작(1944 - 1958)

(1) 새로운 세계에서의 통과 의례

     미국에서의 체류는 파스에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징적 탈주였고 통과의례였으며 새로운 시작이었다.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에 도착한 나그네의 주의를 끈 것은 모호하지만 강렬한 ‘멕시코적’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가 파리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근무하면서 『고독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를 쓰게 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장식하기를 좋아하고, 무심한 듯 으스대며, 태만하고, 열정적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멕시코 사람들의 분위기가 대기를 떠돌고 있었다. ‘대기를 떠돌고 있다’고 한 것은 그러한 분위기가 다른 세계, 즉 정확성과 효율성 위에 세워진 미국 세계의 분위기와 혼합되지도 못하고 섞이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딱히 존재한다고도 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바깥에서 나와 나의 조국 멕시코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 품고 있는 타인을 어슴푸레하게 보았다.”

     버클리에 체류하는 동안 파스는 휘트먼, 예이츠, 블레이크, 파운드, 월러스 스티븐스, 카를로스 윌리엄스, 커밍스, 엘리엇의 시를 탐독하고 근대시에 대한 지평을 넓히게 된다. 특히 엘리엇의 시는 젊은 파스에게 과거는 현재 속에 있고 근대성과 전통이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때부터 그의 시에는 그전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요소들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징병」(Conscriptos U.S.A.)이라는 시편에는 술집에서 나누는 대화와 전통적인 시적 이미지들이 교차된다.


―우리는 감옥에 갇혔지.
나는 결국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어.
곧 이어서 찬 물 세례를 받았지.
우리는 덜덜 떨면서 옷을 벗었어.
한참 후에야 담요를 받았지.
(가을 강가의 나무들은
물 잔등에
누런 잎사귀를 떨구었다.
태양은 너울거리는
강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한달 후에 그녀를 만났어. 우선 영화를 보고,
그 다음엔 춤추러갔지. 술도 몇 잔 마셨어.
길모퉁이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지...
(태양, 사막의 붉은 바위들
그리고 관능적인 방울. 뱀들.
차갑게 식은 용암 위의 사랑...)


     파스가 미국에 체류하던 1945년 8월 멕시코 시인 호세 후안 타블라다가 뉴욕에서 타계한다. 파스는 컬럼비아 대학의 요청으로 그때까지 멕시코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타블라다의 작품을 연구하게 되고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파스는 동양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타블라다에 관한 평론의 끝부분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블라다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고, 고향을 버리고 나쁜 문학적 습관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덕분에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노자 도덕경 7장에 나오는 말로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2) 무르익은 과일

     1945년 파스는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외무부에서 일하게 되고 호세 고로스티사의 추천으로 파리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임명된다. 파스는, 그 당시 지식인들에게 공통된 분위기였던 것처럼, 유럽이 전쟁의 잿더미로부터 불사조처럼 솟아올라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럽은 카뮈, 브르통, 사르트르, 루세, 아롱, 메를로-퐁티가 두 진영으로 갈라져 유럽의 미래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투적인 논쟁의 분규 속에서 파스는 그리스 출신 역사가이자 철학자로 파리에 망명하고 있던 코스타스(1925-1981)를 만난다. 코스타스는, 루시엥 골드만이 파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확실하게 유럽의 미래를 본 높이 솟은 망루였다.” 명석하고 해박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코스타스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실과 집단 수용소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예술, 현대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코스타스와의 만남을 통해 파스는 상상적 열정은 냉철한 이성이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나는 서른 살이었다, 아메리카 출신이었고, 전후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의 알을 찾고 있었다, 너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스 출신이었지만, 너의 고향은 저항이었고 감옥이었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떠들썩하고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에서 우리는 만났다,
2월의 추위와 궁핍함을 녹이던 작은 모닥불의 열정,
우리는 사파타와 그가 타던 말에 대해서, 데메테르의 갑옷, 검은 돌, 암말의 머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잔잔한 너의 웃음이 우리의 대화 소리와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감쌌다,
불에 탄 조국의 언덕을 무리 지어 올라가는 희고 검은 양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코스타스, 나는 차가운 잿더미로 변한 유럽에서 부활의 알을 발견하지 못했다.
피에 젖은 잔인한 키메라의 발치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너의 화해의 웃음이었다.
 

     파리에서 파스는 멕시코에서 만났던 벵자멩 페레를 다시 만났고 그를 통해 초현실주의자들의 여러 모임에 참석했다. 앙드레 브르통과 나누었던 친교에 대해서 파스는 『교류』(Corriente alterna)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마치 브르통과 말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글을 쓰는 적이 많다; 나는 그에게 묻고 대답하고, 그와 때로는 의견이 일치하고 때로는 의견을 달리했으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파스에게 초현실주의는 시의 유파나 시를 쓰는 기법이 아니었다. 그에게 초현실주의는 천박한 우리 시대에 시적 열정을 점화시키는 비밀스러운 초점이었고, 감수성이 일으키는 저항이었으며, 예술과 에로티시즘과 도덕이 갖는 본래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었고, 정치학이었다. 한마디로 파스에게 초현실주의는 생명의 모험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는 자신의 시에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자동기술법은 부정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파스는 자신의 시를 성숙시켜 나가게 되고 1949년 시집 『언어 밑의 자유』(Libertad bajo palabra)를 출간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독의 미로』를, 그 다음 해인 1951년에는 그의 중요한 산문시 『독수리 혹은 태양?』(¿Águila o sol?)을 출간한다.

     비판적 전위주의의 요구에 따라 과거에 썼던 시편들을 다시 손질해 묶은 『언어 밑의 자유』에서 파스는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삶의 태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당시 중남미의 다른 시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50년대 초반에 파스와 함께 중남미에 현대시의 장을 연 호세 레사마 리마, 엔리케 몰리나, 니카노르 파라, 알바로 무티스, 곤살로 로하스 같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글쓰기에 대한 자세였다.

2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탐험하는 것이었다. 시인들을 유혹하는 미지의 땅은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곳은 안쪽과 바깥쪽이 합류하는 지점, 즉 언어의 지대였다. 시인들을 사로잡는 것은 미학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젊은 시인들에게 언어는 운명이면서 선택이었다. 언어는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우리가 만드는 것이고 우리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 밑의 자유』라는 시집의 제목이 말하듯이 인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 극중 인물의 자유는 운명이 완수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반대로 파스에게는 자유는 필연의 가면이다. 마찬가지로 시가 추구하는 자유는 언어라는 제한적 형태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시는 조건부 자유인 인간의 실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독의 미로』는 시를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방법을 사회에 적용한 구체적인 결과물이었다. 파스는 『고독의 미로』에서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20세기에 멕시코인이라는 사실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이 시대에 멕시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고독이란 다분히 멕시코 사람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을 가리키지만, 파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독이란 모든 인간, 모든 국가에 공통된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가 정교하게 분석하는 멕시코인들의 일상적 제의(祭儀)는 역사적 시간들을 동시적으로 살고 있는 현대인의 고독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다. 파스에게 민족의 정체성이란 불변적이고 실체론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즉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어떤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인과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판적 상상력의 수행을 통해서 은밀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현실을 밝혀내는 파스의 작업이 곧바로 도덕적 비판을 요구하는 정치학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귀향

     1952년 옥타비오 파스는 파리를 떠나 멕시코로 돌아온다. 그 사이 약 일년 동안 그는 뉴델리와 도쿄에 머물렀다. 타블라다가 소개한 하이쿠를 통해 엿보았던 동양에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이 바로 이 때였다. 『격정의 계절』(La estación violenta)에는 이 기간에 쓰여진 시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편들에서는 『독수리 혹은 태양?』에서 해체되기 시작한 시인의 자아가 더욱 극적으로 타자와 대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출구는 없는가?」(¿No hay salida?)라는 시편을 보자.


이 순간이 바로 나다, 나는 갑자기 나를 벗어났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없다,
나는 여기 있다, 내 발치에 던져진 채로,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본다.


     1955년 일본인 친구 에이키치 하야시야의 도움으로 바쇼의 『오쿠의 오솔길(奧の細道)』을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파스에게 동양은 단지 미학적 차원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사는 다른 방식, 세계와 세계 너머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일본의 전통에서 배운 것은 집중(敬)이라는 개념과 미완성 혹은 불완전이라는 개념이었다. 사물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두는 것, 불완전은 완전보다 상위의 개념이라는 것... 최소한의 요소로 강렬한 시적 효과를 가져오는 일본 시는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스페인 시의 전통과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일본 시는 하나의 시행에 엄청난 의미의 다양성을 응축시킨다. 마지막으로 일본 시는 미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지 않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외교관직을 수행하며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파스는 외국의 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국내의 작가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 등 적극적 활동을 벌인다. 1956년에는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와의 연속선상에서 시의 본성에 대해 논구한 시론서 『활과 리라』(El arco y la lira)를 출간한다. 파스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빌려온 이미지인 활과 리라를 사용하여 인간은 생물학적 몸을 갖는 존재이며 동시에 어딘가를 향해 몸 바깥으로 퉁겨져 나가려는 형이상학적 힘과의 균형 속에서만 올바로 파악될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파스가 다시 강조하는 것은 시는 역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곧 역사라는 사실이며,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을 채우는 역설적 경험이 바로 시라는 사실이다.“시적 언어의 이원적 조건은, 시간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언제나 영원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적 본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갈등이 역사를 창조한다.파스의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흙의 자식들』(Los hijos del limo, 1974)과 『타자의 목소리. 시와 세기말』(La otra voz. Poesía y fin de siglo, 1990)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된다.

     프랑스어로 번역되는 것을 계기로 약간의 수정을 거친 『활과 리라』 2판(1967)에는 초판의 에필로그 대신에 「회전하는 기호들」(Los signos en rotación)이 실렸다. 시에 대한 새로운 선언문의 성격을 띠는 이 글에서 파스는 시의 최상의 임무는 시를 부정하는 것이며 언어와 시적 경험을 비판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듬해에 출간된 『교류』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 혹은 또 다른 어떤 실체가 혹은 외적 현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지금은 언어가 차지하고 있다. 시는 외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 말이 지시하는 것은 또 다른 말이다. 시의 의미가 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안쪽에 있다는 것을 알면, 즉 말이 가리키는 지시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저희끼리 나누는 대화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명확해진다.


     시가 외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는 말은 언어 속에 자폐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은 드러나고 숨는 이중적 방식으로만 주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드러나면서 동시에 숨는 현실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어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은 곧 언어이며 언어가 곧 현실이다. 이 때문에 시의 의미는 시 안에 있으며 시의 최종적인 의미는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는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둘러싼 타자()() 발견하는 것이다. 타자는 자아와 한 몸을 이루며 그 몸이 바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인間이 시間과 공間의 짜임으로서의 현실, 즉 비밀스럽고 스스로 그러한 현실을 발견하기 위한 탐색의 결과이다. 인간도 시간도 공간도 모두 관계()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스는 이러한 현실 인식을 통하여 시와 혁명, 시와 사회의 문제를 재검증한다. 그에게 시와 혁명의 임무는 현실 너머의 초월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생성하는 현실의 인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실의 원인(숨음)과 결과(드러남)는 일체적인 진여(眞如)의 양면이라는 것이 파스의 생각이다.

     현실의 숨은 의미를 탐색한다는 구실 하에 저질러지는 모든 위선과 억압에 대한 파스의 비판 작업은 자연스럽게 근대성에 대한 반성으로 귀결된다. 그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훨씬 이전에 근대성의 공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격정의 계절』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태양의 돌』(Piedra de sol)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통찰력 있는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새로운 격정의 계절(1959 - 1998)

(1) 구조주의와 동양 사상과의 만남

     1959년 파스는 멕시코를 떠나 다시 파리로 간다. 이미 멕시코에서부터 새로운 전위주의 운동에 대한 징후를 감지하고 있던 파스는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변화를 직감한다. 유럽의 문화계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던 구조주의라는 변화의 열기는 ‘모든 것이 언어’라는 생각에 직결되어 있었으며 ‘구조’와 ‘기호’라는 용어가 핵심적인 말로 등장했다. 구조주의는 파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는 이후 그가 출간한 책들의 제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활과 리라』 2판에 새롭게 첨가된 에필로그의 제목이 「회전하는 기호들」이고, 두 개의 기호―육체적 기호와 비육체적 기호―사이의 상관 관계를 통해 분석한 문명 비평서의 제목은 『결합과 해체』(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69)이다. 육체적 기호(el signo cuerpo)와 비육체적 기호(el signo no-cuerpo)라는 개념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정신과 육체라는 실체적 개념을 피하기 위해 파스가 고안한 개념이다.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기호와 비육체적 기호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큰 무리 없이 대비시킬 수 있는 개념은 음,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1967년에서 1972년 사이에 쓰여진 글을 모은 책의 제목은 『기호와 갈겨쓰기』(El signo y el garabato, 1973)이며, 훌리안 마리아스가 파스의 글을 선집하여 출간한 책의 제목은 『기호들의 연극/투명성』(Teatro de signos / Transparencia, 1974)으로 붙여졌다.

     이 시기에 파스의 사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사건은 그가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된 것이었다. 인도에 체류하는 동안 쓴 시를 모은 『동쪽 기슭(Ladera Este)』의 작품들은 에로티시즘의 시학으로 평가되던 파스의 시학에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인간의 특성을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더불어 ‘타자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찾는 파스에게 에로티시즘은 타자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러나 인도는 그에게 새로운 지혜를 가르쳐준다. 어딘가를 향해 길을 떠난 시인은 불현듯 길 자체가 목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나를 신성으로 데려가거나 신성으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경험이다. 에로티시즘은 상상력으로 변한 섹슈얼리티이고, 사랑은 한 사람의 인격체를 선택하는 에로틱한 상상력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 세계의 실재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인도가 내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지혜는 세계는 실재하지만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세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나무도 항상 동일한 나무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우주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이 되었다.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우주’라는 말은 생명이 하나의 과정임을 뜻한다. 존재는 불변이 아니고 지속이기 때문에 생명은 시간과 우연성에 저항하지 않고 깨지기 쉬운 위태로운 실존을 노래한다. 시편「헤랏에서 느낀 행복」(Felicidad en Herat)에서 파스는 이러한 실존의 모습을 “유한한 생명의 완전함”이라고 노래했다. 이것은 그가 일본 시에서 배운 ‘불완전은 완전보다 상위의 개념’이라는 생각과 일치한다. 자아가 허상이며 존재가 환색(幻色)이라는 깨달음은 곧바로 “말의 본질은 관계”라는 것을 파스에게 가르쳐주었다. 불교의 인식론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사유를 비교한 책 『레비스트로스 혹은 이솝의 새로운 향연』(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에서 파스는 “말은 상대적인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실재화하는 암호이다. 모든 말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을 생산하며, 모든 말은 부정과 긍정 사이의 관계이다. 관계는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붙들어 맨다. 그래서 언어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파괴하며 죽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는 변증법의 왕국이다”라고 말한다. 존재와 언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여러 가지 실험적 형태의 시로 나타났다. 두루마리 형태의 시 『백지』(Blanco), 공간적 실험과 조합의 기술을 보여주는 『시각적 음반』(Discos visuales),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램과 타블라다의 구체시를 계승한 『공간시』(Topoemas)등이 그것이다.

     인도에서의 생활은 파스에게 가장 창조적이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가 엘레나 가로와 이혼하고 마리 조 트라미니를 만나 결혼한 것도 인도에서였다. 그러나 이 행복한 시기는 1968년 10월 끝나게 된다. 틀랄텔롤코 광장에서 벌어진 학생들에 대한 발포 사건에 항의하여 파스는 외교관직을 사임했기 때문이다.


(2) 행동과 역사

     외교관직을 사임하고 국제적인 언론을 통해 멕시코 정부를 비판한 파스의 행동은 그에게 또 다른 격정의 계절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다시 멕시코에 돌아온 이후 그는 여론의 한복판에서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후아레스와 포르피리오를 이야기했고
아르헨티나의 용병과 쿠바의 탈주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탁에서는 늘 화약 냄새가 풍겼다.

술잔을 기울이며 아버지는 나에게
사파타와 판초 비야를 이야기했고
소토 이 가마와 플로레스 마곤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탁에서는 늘 화약 냄새가 풍겼다.

나는 입을 다물고 앉아 있다.
나는 누구에 대해 말해야 할까?


     그의 식탁에서는 화약 냄새 대신 잉크 냄새가 풍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벌인 문화적 투쟁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투쟁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멕시코의 문화적 현실을 변화시켰다. 그는 학생 운동과 틀랄텔롤코 광장의 학살, 민주주의의 부재와 정치적 대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1970년 출판된 『추신』(Posdata)은 그 첫 번째 결과물로서 『고독의 미로』의 후속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 문화적 투쟁은 “비판적 상상력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정치에 관한 옥타비오 파스의 견해는 중남미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때로는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추신』은 10년 뒤인 1979년에 『자선가의 얼굴을 한 식인귀』(El ogro filantrópico)라는 두툼한 책이 되어 출판되었다. 멕시코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전체주의와 에로티시즘을 폭넓게 다룬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파스는 지식인과 권력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덕목은 비판적 소수 의견임을 주장했다.

     멕시코 국내 문제에서 시야를 넓혀 국제 정치, 미국의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와 소련의 관료주의적 체계의 위기,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와의 관계를 다룬 글들은 『흐린 날』(Tiempo nublado, 1983)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 필요한 것은 유능한 정치인이 아니라 명철한 비판 의식이라고 말하는 파스는 정치에 관한 모든 글에서 지식인이 비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이익단체에서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파스는 70년대 초부터 잡지 『다원』(Plural, 1971 - 1976)과 『회귀』(Vuelta, 1976 - 1999)를 주간하며 70-80년대 격정의 시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멕시코와 중남미의 환부(患部)를 드러내는 파스의 비판은 대내외적으로 억압받는 중남미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혁명적 시도들과 마찰을 빚었다. 예를 들어, 소련의 전체주의에 대한 파스의 비판은 혁명의 장애물이 되는 반동적 사유이며 동시에 제국주의의 공범자로 낙인찍혔다. 결국 시간은 파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흑백 논리에 지배된 비난은 쉽사리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가지 단서가 전제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도 아니고 인간끼리의 유대감이 빚어낸 승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좀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뿐이다.” 결국, 파스가 의도했던 것은 비판이란 좌냐 우냐 하는 배타적 선택이 아니라 제도와 이념에 의해서 억압받고 은폐된 현실을 온전히 되살려내는 일이었다.


(3) “내 거처는 나의 말, 대기는 나의 무덤”

     예술과 문학, 정치와 사회에 대한 30여권의 파스의 평론집과 시는 서로 길항하는 영역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자력장을 형성한다. 자력장의 한극에 정치가 있다면 또 다른 극에는 시가 있다. 정치가 의도하는 것이 시간이 만드는 온갖 우연성을 가로질러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시는 시간과 우연성에 저항하지 않고 허약한 실존을 노래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당연(當然)을 주장한다면 시는 ‘본래 그러하다’는 본연(本然)을 드러낸다. 정치가 진보적인 직선적 시간을 웅변한다면 시는 순환과 회귀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격정의 시기 동안에 쓰여진 파스의 많은 시는 회귀를 노래한다. 회귀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신 너머로 간 시인을 기다리는 것은 자신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즉 시가 말하는 진실은 이탈에서 회귀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만물병작, 오이관복(萬物竝作, 吾以觀復)/ 부물운운, 각복귀기근(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만물이 더불어 자라나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뿐이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제각기 또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노자 16장)
    
때문에,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역사의 직선적 방향을 무화시키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파스는 「산 일데폰소 야곡」에서 돌아감을 이렇게 풀어쓴다.
시는,
역사와 진리 사이에 놓여진 다리일 뿐,
역사를 향한 길도, 진리를 향한 길도 아니다.
시는 움직임 속에서 정적을,
정적 속에서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역사는 길이다.
그 길은 방향이 없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간다,
진실은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가지도 오지도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손아귀에 있다.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다.
사랑은 비어 있음으로 가능하다.


     역사가 방향 없는 길이라는 말은 역사의 다(多)방향성을 뜻한다. 이것은 자연의 다인다과(多因多果)의 방향성을 일인일과(一因一果)의 방향성으로 강제하는 역사의 독단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파스는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시에서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구조주의를 거쳐 동양적 사유와 접하면서 파스에게 구체화된 존재에 대한 개념과 부합한다. 즉 존재는 비어 있고(虛), 비어 있음은 존재의 무한한 쓰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시집 『회귀』와 『선명한 과거』에는 이런 시적 사유의 행로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파스에게 역사란 자아를 비우는 시험의 장소이다. 역사는 모든 인칭 대명사가 사라질 때 완성된다고 그는 말한다. 존재가 자기 동일성과 고유성을 고집하지 않고(無自性), 역사가 배타적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을(不自生) 때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의미를 갖고,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인간을 통해 발언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주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완성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가 되는 순간이다.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나와 타자로 분열되기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회복한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의 시학은 자연스럽게 에로티시즘과 합류한다. 오랜 침묵 끝에 1987년 출간된 마지막 시집 『내면의 나무』(Arbol adentro, 1987)에 실려 있는 아름다운 시편 「믿음의 편지」(Carta de creencia)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고 다시 사는 것이고 다시 죽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죽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들,
헤아릴 수 없이
아주 작은 이들과
커다란 전체와의 화해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시간 속의 우연들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결국 그에게 사랑은 인간에게 주어진 작은 몫의 영원이었다. 작가에게 주어지는 커다란 영예인 노벨 문학상을 수상(1990)한 뒤에도 끊임없이 글을 썼던 그가 여든의 나이에 『이중 불꽃. 사랑과 에로티시즘』(La llama doble. Amor y erotismo, 1993)을 쓴 것은 평생동안 지켜온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세계를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 물었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대지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생전에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옥타비오 파스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타계한 뒤에도 그늘이 무성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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