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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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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촛불의 미학 의 해석 - 비수선생 댓글:  조회:922  추천:0  2019-10-24
젖어 있는 불꽃, 타는 액체가 위쪽을 향해서, 하늘을 향해서 수직의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것을 볼 것이다.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는 문장이면서도 백만 점짜리 묘사죠. 그럼 어떻게 이런 사유에 이르렀는지를 추적해볼까요? 추적방법은 바로 여러분께서 고생하셨던 보리차 끓이는 방법에서 배우셨습니다.     바슐라르는 초를 본다 불꽃아래서 녹고 있는 촛농을 본다 녹은 촛농이 심지로 스며들고, 스며든 촛농이 불꽃이 되어 치솟는 것을 본다 촛농이 심지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촛농의 본질을 찾는다 그리고 촛농의 액체적 성질을 물과 비유한다 촛불의 좁고 날렵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물과 좁고 날렵한 이미지를 결합하여 시냇물을 떠올린다 시냇물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이나 촛불은 아래에서 위로 수직으로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이해 가능한 결과에 이른다 그 과정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든다       며칠 전 과제로 제시된 보리차 끓이는 법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는지 이 풀이를 보시면 감이 잡히실 겁니다. 여러분들이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문장을 역순으로 또는 처음부터 해체하면 이처럼 좋은 문장을 만들 수 있는 매뉴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적 표현도 좋고, 세밀한 묘사도 좋으니 여러분은 이 방법을 통해 좋은 표현들을 캐내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문장들은 필사하면서 체크해두셨던 것을 이용하면 됩니다. 천천히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꼭 문장의 해체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책상 위에 촛불과 모래시계가 있는 것을 본다. 두 개 다 인간적인 시간을 말하고 있으나 그러나 얼마나 다른 스타일에서인가!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 부서져 내리는 모래보다 가벼운 불꽃은 마치 시간 자체가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할 것처럼 그 형태를 쌓고 있다.   위에서는 ‘초’라는 하나의 사물에서 불꽃과 촛농을 분리하여 상상의 문장을 만들었는데요, 여기서는 모래시계라는 사물을 추가로 끌어들여 그것보다 조금 더 어려운 문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풀어보면 이 역시 비슷한 순서로 전개된 사유입니다.       책상으로 간다 책상 위 촛불과 모래시계를 본다 모래시계를 관찰한다 위에서 아래로 모래가 떨어져 내린다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 같다 모래가 떨어져 내리는 것은 시간이 흐름을 의미한다 모래시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위가 작아진다 양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래가 작아진다 따라서 모래시계는 아래로 흐르는 시간이고 양초는 위로 흐르는 시간이다 이 얼마나 다른 스타일의 시간인가 불꽃은 위로 흐르는 모래시계다       불꽃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며 꿋꿋하다. 이 빛은 조금만 불어도 꺼진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의 불씨로서 다시 켜진다. 불꽃은 켜기도 쉽고, 끄기도 쉽다. 삶과 죽음이 여기서는 아주 나란히 놓여 있다.   불꽃을 ‘삶’으로 바꾸어 읽어봅시다.   삶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며 꿋꿋하다. 이 삶은 조금만 불어도 꺼진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의 불씨로서 다시 켜진다. 삶은 켜기도 쉽고, 끄기도 쉽다. 불꽃,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은 아주 나란히 놓여 있다.   이처럼 좋은 비유는 그것을 바꾸어 읽었을 때 전혀 어색함이 없이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 말을 꼭 기억해두셨다가 시를 쓸 때 적용하는 비유가 비유하고자 하는 원래의 그것과 동떨어지는지 아닌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몽상가의 독방에서는 아주 낯익은 물건들이 우주의 신화가 된다. 꺼지는 촛불은 죽어가는 태양이다. 촛불은 하늘의 별보다도 더 천천히 죽는다.   자연적으로 꺼지는 촛불은 어둠에 점점 잠식되어 죽어가는 태양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바슐라르는 이번에도 촛불을 다른 무엇과 비유하여 그것의 성질을 잘 나타내는데요, 이번엔 태양입니다. 촛불과 태양의 유사성이 이것들을 잘 연결시켜 놓은 것입니다만 실은 이 두 가지는 매우 다른 성질을 가진 것들입니다.   그 이유는 태양은 낮에 존재하고, 촛불은 밤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관계는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물과 불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촛불과 태양이 같거나 비슷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두 사물 모두 빛을 가졌다는 것과 어둠을 밀어낸다는 공통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같거나 다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그리트의 논문에서 성질이 다른 각각의 사물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 신비감을 자아내는 것이 ‘데페이즈망’이라는 회화기법이라 배웠는데요, 위의 초와 태양도 이것을 어떤 측면에서 보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두 사물은 매우 멀게 묘사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학적 데페이즈망을 시도해보겠습니다.   ‘도마’를 ‘자동차’화 하여 상상으로의 접근을 해볼 참인데요, 이 두 가지 사물은 매우 어울리지 않는 성질의 것들입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으므로 이 두 가지의 관념연결과 시적 비유로의 전개는 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러나 답은 ‘NO’입니다. 단지 모든 비유에서와 같이 도마를 자동차화 하기 위해선 도마에 자동차의 본질을 대입시켜야 하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럼 시도해볼까요?   먼저 도마를 자동차化 하기 위해서 자동차의 대표적인 특징인 바퀴를 도마 아래 달아서 시동을 걸어봅시다. 그 대상은 ‘노모’로 해봅시다.     /노모가 저녁을 해요, 정차된 도마에 시동을 걸어요/     어떤가요? 도마에 시동을 건다는 표현이 어색한가요? 아니죠? 이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며 시적 상상이라 불리는 전개죠.   여러분, 시인은 사물의 한쪽 면이 아닌 다른 이면을 보는 자라 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끝없이 반복하게 될 말이지만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십시오. 시의 표현에서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가 구부러지고, 심지가 까맣게 된다. 불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아편을 먹는다. 그리고 불꽃은 아무 말 없이 죽는다. 그것은 잠들면서 죽는다.   촛불의 관찰에서 잘 보셨겠지만 불꽃은 까맣게 탄 심지를 둘러싸고 어둠 속에서 자신을 깎아 없애는 아편을 먹습니다. 초는 그렇게 고독한 아편중독자가 되어 사그라지고 깨어나고 합니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며, 시간은 출렁거린다. 빛이 떨면 모든 것이 떤다.   어두운 방 안에서 촛불은 켭니다. 그리고 그것을 살짝 붑니다. 흔들리는 것은 촛불이 아닌 집 전체에 드리워져 있던 육중한 어둠들입니다. 다시 말해 작은 입김으로 어둠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힘입니다.       [과제] 위의 해설을 참조하여 ‘TV’를 ‘나무’화해서 5행짜리 상상의 시를 쓰세요.     눈물의 홈을 따라 눈물이, 숨겨진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초가 눈물을 흘렸다. 초는 촛불의 육체다. 그 육체가 녹아 눈물이 된 셈이다. 그러나 눈물은 멀리 가지 못한다. 초의 눈물은 제 몸을 흘러 다시 살이 되어 굳는다. 그래서 초는 눈물이 살이 되고, 살이 다시 눈물이 되는 윤회의 사물이다.   눈물은 짜다. 그것이 만들어낸 살점의 맛은 맹맹하다. 살점이 온전히 녹아야 한 톨의 소금을 얻는 것인가? 내가 흘렸던 그 많은 눈물도 내 몸의 일부였을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흘려온 눈물만큼의 살점들이 내 몸 어딘가에서 살점으로 붙어있을 텐데,   나는 가끔 그 눈물들이 내 살갗에 집을 짓고 동그랗게 부풀어 올라오는 일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눈물의 집, 그것을 사람들은 물집이라 줄여 읽기도 하였다. 얇은 살갗의 벽을 허물어 그 속의 맑은 눈물들을 흘려낼 때 왈칵 쏟아지는 대책 없는 눈물들, 모든 눈물들이 빠져 나온 빈 집처럼 허물어져버린 그 얇은 살점들,   빗방울도 눈물이다. 겨울에 내리는 빗방울이 처마 끝에서 굳어 물의 튼튼한 살점으로 변한다. 강도 그렇고, 호수도 그렇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눈물은 그 자체가 육체다. 살아 있음이다. 그래서 눈물 그 자체를 우리는 카타르시스라 부르기도 한다.   눈이 내린다. 저것은 구름의 육체다. 저 눈물도 땅에서 쌓여 거대한 구름을 이룬다. 비로소 땅이 하늘이 되는 순간이다.       [과제]   위의 해설을 참고 하셔서 7행짜리 시를 쓰세요. 제목은 자유입니다. 단,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쓰세요. 이해를 돕기 위해 눈물로 여러 가지 사유를 보여드린 것뿐이오니 눈물에 너무 많이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통의 생활에서는 빛을 내기 위해 불을 붙이는 것이다.   보통의 생활에서 우리는 빛을 내기 위해 전등을 켭니다. 보통 생활에서 전등은 단지 빛을 내기 위한 사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물은 스위치만 누르면 어둠을 빛으로 바꿉니다. 이것이 전등의 본질입니다.   저를 따라 해보세요. 밝은 방에서 눈을 감습니다. 방이 캄캄합니다. 다시 눈을 뜹니다. 밝은 방이 보입니다. 다시 눈을 감습니다. 방이 캄캄합니다. 눈을 감은 채로 전등을 끕니다. 다시 눈을 뜹니다. 눈 앞이 캄캄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모두 캄캄합니다. 그러나 이 체험은 언제까지나 보통의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체험입니다.   그렇다면 똑 같은 방의 똑 같은 환경에서 시적인 체험을 해보겠습니다. 밝은 방에서 눈을 감습니다. 어둠이 보입니다. 눈을 뜹니다. 방이 보입니다. 다시 눈을 감습니다. 어둠의 세계가 보입니다. 다시 눈을 뜹니다. 여전히 밝은 방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을 감아서 생기는 어둠의 세계는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거긴 벽도 없고 하늘도 없고 나무도 없고 물도 없고 오직 어두운 허공뿐입니다. 신비롭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 어둡고 넓고 신비로운 세상을 1분에 수십 번이나 다녀옵니다. 이것이 무의식이며 습관처럼 깜박이는 눈꺼풀이 여러분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번갈아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단지 앞에 있는 것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현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두 개의 세상을 공존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세계입니다.   다시 돌아갑니다. 저는 위에서 전등을 켜는 순간 어둠이 빛으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말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모순인지 느꼈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촛불이나 형광불빛은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켜지면 어둠은 제 몸에 조그마한 구멍 하나를 내어주는 것뿐입니다.   그리하여 촛불을 켜면 불꽃의 사방으로 검은 나방 떼가 몰려듭니다. 파르르 집단적인 날갯짓으로 촛불을 향해 돌진할 태세로 웅웅거립니다. 그 검은 나방 떼가 바로 어둠입니다. 형광불빛이나 가로등 불빛이나 세상의 모든 불빛으로 검은 나방 떼들이 몰려듭니다. 그 무시무시한 나방들도 어둠의 작은 살점에 불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불꽃은 그 검은 나방 떼의 습격을 받고 죽습니다.   검은 나방 떼, 그 검은 나방 떼가 어둠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와 빛을 쪼고 빛을 먹고 다시 어둠으로 가 붙습니다.   밤에 검은 나방 떼가 있다면 대낮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들도 어둠의 육체들입니다. 이 어둠의 육체들이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사물의 발목을 붙잡고 지상의 모든 발목을 붙잡다가 어스름이 내릴 즈음 어둠의 살점으로 붙어 한 몸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낮과 밤으로 어둠의 살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불꽃은 잠시 그림자와 검은 나방 떼를 우리의 등뒤로 물리는 일에만 열중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이 아닌 시적의 시안으로 빛을 보는 방법입니다.     [과제] -. 어둠과 노숙자를 잘 엮어 10행짜리 시를 만들어보세요.   ‘불꽃과 동일한 선을 따라 그것은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촛불이 왁스나 양초나 무슨 기름 따위에서 그 양분을 빨아들여 타고 있는 것처럼 땅 속에서 그 양분을 섭취하는 것이다. 즙이나 수액을 빨아들이는 줄기는 촛불에 있어 그 불이 스스로에게 당겨진 액체로 하여 자신을 유지시키는 것과 같으며, 흰 불꽃 부분에 해당하는 것은 이파리들을 달고 있는 큰 가지와 가느다란 가지들 바로 그것들이다. 그리고 나무의 마지막 목표인 꽃과 열매는 모든 것이 거기에 환원되는 흰 불꽃 부분에 다름아닌 것이다.   어떤 비유를 하기 위해서는 두 사물의 일치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위의 글은 불꽃과 나무의 일치점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촛불과 나무를 나란히 두고 상호 공통적인 부분들을 끄집어 내어 묘사했습니다.   시적 비유와 묘사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비유를 하면서 두 대상의 근접한 이미지를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 비유는 실패한 비유입니다.   시적 상상이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사물과 사물의 전범위적인 일치점을 찾는 것이 상상입니다.   늦가을, 플라타너스 낙엽이 떨어집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그 넓고 붉은 낙엽이 일제히 허공에 흩날립니다. 그 모양이 마치 새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낙엽과 새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럼 그 낙엽을 가리켜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들이 후두둑 날갯짓을 하고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오른다’는 비유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 행을 주면   낙엽   바람 분다 가지 위 새들이 일제히 후두둑 날갯짓 한다 허공으로 새 떼들 떠난다   이와 같은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시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건 어떤 사물을 다른 무엇으로 보고 그것의 연관성을 객관적으로 이을 수 있어야만 좋은 비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물이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연결만 해놓고 그것의 연관성은 고려도 않은 채 무작정 글을 쓴다면 그 시는 실패한 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여러분 모두에게 따끔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사물로 침잠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물의 정면이 아닌, 사물의 이면을 보아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과제를 통해 또박또박 잘 해내셨습니다. 그런 여러분께서 실제로 시를 쓰는 과제에선 대부분 그 말을 망각하시고 맙니다. 고정관념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정관념으로 사물을 보고, 그 관념으로 시를 쓰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자전거를 타는데 여러분 스스로가 어렵다고 생각하시고 분명히 혼자서도 잘 탈 수 있는 정도로 충분히 인지하고 계신데도 여러분은 아직 뒤에서 누가 자전거를 잡아주길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숙자를 봅시다. 노숙자라는 과제를 드렸더니 대부분 여러분은 학습된 ‘기억’에 의한 노숙자를 호출하여 사유합니다. 노숙자를 고정된 관념으로 보시고는 그들에게 연민을 가지거나 그들의 지저분한 행색을 쓰기 바쁘셨습니다. 심지어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그들의 죽음이라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의 가정사까지 넘겨짚기까지 합니다. 지하도와 광장과 대합실과 잠 등 노숙자 하면 떠오르는 관념들 모두가 일반적인, 즉 고정된 관념이란 것입니다.   노숙자에게 행복은 없습니까? 그들이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삶은 즐거워 보이지 않습니까? 내가 고단한 육신으로 어두침침한 지하도를 건널 때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잠을 청하는 그들이 오히려 행복해보이진 않습니까? 노숙자의 지저분한 얼굴이 그냥 더럽다가 아니라 어떤 부족의 성인식에서 얻은 무늬로 인식할 순 없습니까? 그들의 냄새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서 그저 ‘냄새 난다’ 가 아닌 그 냄새의 근원을 밝히는 데 집중하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슬프겠다. 힘들겠다. 아프겠다. 외롭겠다. 춥겠다. 씻고 싶겠다 등등 그들을 보면 떠오르는 이런 일반적인 사유들로 시를 쓰려 하시니 그 시가 진부하고 식상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들을 사람이 아닌 다른 사물로 볼 순 없습니까.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자루로 볼 순 없습니까? 굳이 사람 전체가 아닌 그 신체의 일부를 확장시켜 시를 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의 손톱도 있고, 머리카락도 있고, 발바닥도 있고, 찢어진 외투도 있고, 주름도 있고, 앞니 빠진 입도 있고, 발가락도 있고, 소주병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학습은 학습일 뿐이었고 직접 시를 쓰려하니 그 사유가 먹먹해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스스로 연상력을 키우는 연습을 게을리 하시면 절대 시적 상상력을 키울 수 없습니다.   길을 걷다가 발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다른 무엇으로 대입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연습을 한시도 쉬지 말고 하시길 바랍니다.     [과제] -. 고정관념을 벗은 병아리 -. 고정관념을 벗은 할머니 -. 고정관념을 벗은 수감자   각각 고정관념을 벗은 시각으로 위의 사물을 써보시기 바랍니다.      
12    가스통 바슐라르 현상학, 몽상 댓글:  조회:1195  추천:0  2019-03-12
가스통 바슐라르 현상학, 몽상   바슐라르는 프랑스 바르 쉬르 오브의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한 다음, 물리학을 전공한 뒤 철학을 연구하였다. 바슐라르는 1930년에서 1940년까지 디종 대학교의 교수를 거친 뒤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강의하였다. 새로운 과학적 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1934)이나 과학적 정신의 형성(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과 같은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과학사에 대한 연구들은 - 과학적 정신에 대한 정신분석의 한 종류로,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과학의 발전에서 심리적 요인으로서의 - 역사적 인식론에 대한 그의 관찰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바슐라르는 하이젠베르크의 1장을 사례로 들어 광입자설과 빛의 파동설을 각각의 이론을 보완하면서 다 같이 옹호한다. (새로운 과학적 정신, 4장) 바슐라르는 한 이론이 다른 입장에서 장점을 취해 내재하는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과학에서 심리학적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우수한 사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장애(obstacle épistémologique)라는 개념을 만들어 어떻게 과학적 진보가 지적 형태의 특정 유형에 의해 저지되는지 논증한다. 인식론의 한가지 과업은 과학에서의 과학자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지식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지적 형태를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오귀스트 콩트의 과학을 연속적인 진보로 보는 — 상대성이론과 같은 과학사의 불연속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과학적 진보에 의해 대체된 — 실증주의에 반대한다. 바슐라르는 과학사에 대한 저작에서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에 따라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 "인식론적 단절"의 용어는 바슐라르는 거의 쓰지 않았으나, 알튀세르를 통해 유명해진다. 이런 이유로 그는 과학사에 대한 연속적인 관점을 지지한 에밀 메이에르송에 대해 비판한다. 바슐라르는 새로운 이론들이 새 패러다임 안에서 개념들의 의미를 바꾸면서 낡은 이론들과 통합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뉴턴과 아인슈타인 이론의 두가지 다른 의미의 질량의 개념) 이렇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모순되지 않고, 큰 테두리 안에서 통합된다. 데카르트적 인식을 가진 합리주의자로서 (비록 그가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의 경향이 있지만 새로운 이론으로서 데카르트적 인식론의 뒤를 잇는다. - "새로운 과학적 정신", 결론 부분) 바슐라르는 일반적 지식에 대해 "과학적 지식"을 대치시키고, 오류는 단지 부정성이거나 착각이라고 여겼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진실을 긴 오류의 역사적 교정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경험을 공통적이고 근원적인 착각(illusion première)의 교정이라고 생각한다. [1]) 인식론의 역할은 개념의 (과학적) 제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 개념들은 단지 이론적 제안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들은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양면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이며 교육학적인 활동을 퍼뜨린다. 이것은 왜 전구는 추상적-구체적 대상의 한 예로써 과학적 사고의 대상인지 설명해 준다. [2] 인식론이 작동하는 원리를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 지식을 거쳐 지나가야 한다. 인식론은 과학적 추리를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반적인 철학이 아니다. 대신에 인식론은 과학사의 한 부분을 제시해 준다. 바슐라르는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의 이중성에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확률론은 합리성을 심화시켜 현실을 복잡하게 하는 또 다른 길이다. (켈빈 경 같은 사람이 어느 정도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더라도 [3]) "새로운 과학정신"에서 그의 주된 명제 중 하나는 근대 과학이 과정 철학으로 흡수될 수 있는 "관계의 존재론"으로 사물의 고전적 존재론을 교체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 따르면 물질과 광선의 물리적 개념은 물체와 운동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과 일치한다. 그러나 두 개념이 별개이고 물체가 존재론적으로 실제한다고 생각한 고전 철학에 반하여, 근대 과학은 광선과 물질을 구별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보면 고전적 인식론에 따른 인식의 상태인 고정된 물체를 검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에서 데카르트주의에서의 "단순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이론과 실험에 의해 만들어지고 계속하여 개선되는 복잡한 대상만이 존재한다. (VI, 4) 직관은 원초적이지 않고, 만들어진다. (VI,2). 이 주제는 바슐라르를 구성주의 인식론의 한 부류를 지지하게 한다. 바슐라르의 작업들은 인식론 외에도 시, 꿈, 정신분석, 상상 등의 많은 논제를 다룬다. 불의 정신분석(1938년)과 공간의 시학(1958년)은 그의 저작들 중에 유명한 것이다.       현재 프랑스 및 유럽 철학의 주된 두 가지 흐름인 현상학과 과학철학 중 과학철학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서, 그의 과학철학은 기존의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이나, 라캉철학식의 소위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한 철학과는 다르다. 그의 철학은 지금까지 인간이 해 온 "과학"적 행위에 대한 반성과 함께,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억압되어왔던 인간의 상상력이 오히려 인류의 발전에 기여해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특히 인터넷)에서는 라캉철학등의 등쌀에 밀려 듣보잡 취급 내지는 들어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가 프랑스 철학의 선구자인것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연구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다가 거의가 미학자로 취급하고 있는 상황.   오히려 그의 철학의 일부분을 이용한 것에 불과한 포스트모더니즘 계통의 철학자들만이 철학의 대표자인양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것을 프랑스 철학의 주류인줄 알고 공부한 학생들이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참조 2 생애 ¶ 프랑스 바르 쉬르 오브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평생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파리의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며 28세 되는 해에 수학 학사 자격증을 독학으로 취득한다. 1차 대전에 참전했다 제대한 후 35세에 고향 마을 중학교의 물리•화학 교사로 재직한다. 36세에는 역시 독학으로 철학 학사 자격증을 얻고 38세 되는 1922년에는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중학교에서 철학도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43세가 되던 해인 1927년에 소르본느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에 디종 대학에서 문과대 교수로 임용되어 철학(과학철학)을 가르치게 된다. 1940년 소르본 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부속 과학기술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4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1962년 사망할때까지 과학철학과 미학(상상력)연구에 대한 많은 업적을 남겼다. 3 사상 ¶ 국내에서는 일명 '몽상의 미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미학자 및 시학자, 문학비평가로 알려져있는 것과 달리 그는 프랑스 특유의 과학철학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의 초기 저작인 "새로운 과학적 정신" Le nouvel esprit scientifique,1934이나 "과학적 정신의 형성" 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사상은 새로운 과학의 발전을 목격한 그가 새로운 과학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그의 첫 시도는 미학적 탐구와는 거리가 있는, '과학적이지 않은 사항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철학자로서 그는 '과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과학에서 전혀 틀리거나, 극히 일부분에서만 인정하고 있는 학설[1]들이 소위 '과학적'인 이론으로 신봉되었던 역사에 주목하여, '왜 이렇게 잘못 생각해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오류를 빚어내는 원인이 인간 심리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주관성에 의심을 던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과학적 탐구에서의 역사 중에서, 현재 볼때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수많은 오류들이 발견되고 있다. 바슐라르는 이 오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이 그러한 오류를 낳게 되며, 그러한 오류의 교정은 가능한가 하는 화두를 던지게 된다. 그 의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순수 사고'는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앙리 베르그송등의 선대 철학자가 주장한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저작인 "불의 정신분석" La psychanalyse du feu 에서 그는 인간의 시간이란 비연속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계속적으로 연결된 시간에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마다 이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세계에 대항하여 싸우는 존재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한 대결을 통하여 순간순간 창조해가는 것이며, 그런 과정이서 탄생한 것이 시와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의 과학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인 "인식론적 단절"이란 이러한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사란 흔히 생각하듯 인간의 지식의 축적에서 그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실증주의의 입장에 반대하였다. 과학사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혁명들은 불연속적인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새로운 과학 정신이 기존의 이론들의 발전한 결과 새로운 과학 정신이 연속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단계에는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고 전혀 다른 새 패러다임 안에서 세계를 바라봄으로 다른 과학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과학 정신이 이전의 과학 정신을 일정한 조건 안에서만 옳다는 부분적 진리로 포용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등장이 이러한 '감싸기'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과학 정신에 포용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또한 과학 지식 자체가 객관적이며 절대적이라는 사항에 반대하여, 소위 객관적인 사실로 믿어지던 과학적 지식에 대해, 앞서 설명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더욱 객관성에 근접한 과학 지식이 탄생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객관성은 목표이지 현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객관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과학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실제적인 객관성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합리론과 유물론의 통합을 가져왔으며, 인간의 이성이란 존재하지만, 또한 그러한 이성과 만나지 않은 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도 없다. [2] 하지만 이성 또한 순수한 형태란 없고 항상 대상과 관련을 맺는 능동적인 것이라고 설정하는 응용합리주의의 태도를 세우게 된다.   이러한 과학 정신을 단절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하는 것에 대한 탐구에서, 바슐라르는 인간의 원초적 경험, 친숙한 이미지나 언어의 친숙한 의미, 역사적 상황이나 정서에 뿌리를 둔 확실치 않은 사고 등을 '인식론적 방해물'로 설정한다. 이러한 경향과 태도들에 의해 인간은 오류를 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방해물의 원흉은 '몽상에서 비롯된 시적인 이미지'이다.   이러한 시적인 이미지를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한 말 그대로의 '순수한 과학정신'의 가능성을 탐구하겠다는 과정에서 나온 저작이 앞서 이야기한 "불의 정신분석" La psychanalyse du feu 이라는 책으로서, 인간의 의식 내면에서 과학 정신(합리적인 사고, 또는 사고의 객관성)이 아닌 인간의 주관성을 탐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의식 활동으로서의 상상력의 가치를 탐구하고 있다.   상상력은 창조적 현실성을 가진 인간 심리의 또 다른 활동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상상력은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무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며, 오히려 의식 활동의 중요한 면으로 보았으며, 인간 의식의 고유한 자율적 활동으로 보았다. 이러한 상상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객관성이라는 인간 의식의 한 측면과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행복과의 사이에서 조율하는 중요한 존재로서, 인간의 합리화/객관화/과학화만을 중심으로 달려온 서구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4 영향 ¶ 현대 프랑스 철학계의 선구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난 수준이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은 이후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미셸 푸코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 역시도 그의 인식론에 기대고 있는 측면이 있다. 라캉철학에서도 그의 몇 가지 개념을 가져다가 같다붙이기재해석을 하여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상상력에 대한 연구 유산은 질베르 뒤랑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어 상상계를 인류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 [1] 예를 들어, 천동설, 용불용설, 창조론 등 [2] 한마디로 이성을 통해 물질이 인식된다.         시인보다 더욱 시적인 문체로 철학을 강의했던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은 미생물 혹은 세균을 닮은 존재다. 우리에게 영혼의 질병을 선물하여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로소 '살아 있게'하는 생명체 내부의 타자,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기에. 기계와 숫자로 깔끔하게 마름질된 합리성의 세계, 즉 '살균된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인상주의는 자신에게 최초로 전달되는 정보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다음 정보를 기다리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최초의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최초의 인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혜안의 눈을 가진 몽상이 시작되는 것은 이 최초의 인상이 걷힌 다음이다. 인식의 오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 혜안은 사물의 깊이를 보고자 하는 눈이다.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 홍명희, 중에서, 살림    바슐라르는 자연을 '자원'으로밖에 계산하지 못하는 '의식의 무능'을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무의식의 통찰'로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기중심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연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온갖 상상으로 가득한 나이일 때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상상하는지 말할 줄 몰랐다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을 폐기처분해야 한다,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만을 자랑하지 말고  - 바슐라르, 중에서    문명의 의식은 곧 '자연' 그 자체다. 문명은 자연을 질료로 창안되었지만 스스로 자연에서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타자화했다. 이 타자화된 자아의 그림자가 바로 자연인 셈이다.    인간이 자신이 이룬 문명의 업적에 자만하지 않고(처음부터 자연이 없었다면 문명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대책 없이 웃자라버린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단지 '인류'의 시점으로 자연을 해부하고 재단하지 않은 태도는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몽상하는, 사유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억압된 의식이 아니며, 잊힌 추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1의 본성이다. 무의식은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남녀양성의 힘을 유지한다. 남녀양성에 대해 말하는 자는, 이중의 안테나를 가지고,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을 건드리고 있다.  - 바슐라르, 김현 역, 중에서, 홍성사    왜 우리는 지구의 석유 보유량으로 '인간'이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우리나라'가 몇 년이나 지나면 '물 부족 국가'가 되는지, 매일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가는 원시림과 빙산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온도와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지에만 관심이 있을까. 인간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자연에 무지해졌고, 자연에 무지해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점점 알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연은 '소중하다'는 인식도 자연에 대한 소유욕의 일종이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 번도 자연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 정여울, 문학평론가         ‘상상력’이 중요한 화두인 세상이다. 상상력이 곧 경쟁력이라느니, 우리의 미래가 상상력에 달려있다느니,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느니,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느니•••. 물론 백 번 옳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런 인위적인 구호들처럼 상상력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 상상력은 숱한 오해와 왜곡에 시달리고 있는 단어다. 상상력이란 말 앞에 ‘기발한’이나 ‘엉뚱한’이란 관습적인 수식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붙이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분명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상상력은 삶 그 자체다. 먹고 자고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아우르는 우리의 모든 것이 상상력에 의해 결정된다. 정확히는 그 모든 것의 질(質)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상상력을 ‘특별한 아이디어’만으로 국한시켜서는 상상력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어린 시절 누구나 경험했을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어머니가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치댈 때면, 어린 우리는 으레 그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지켜보다 반죽 한 귀퉁이를 떼어 달라 어머니를 졸라대곤 했다. 하여 그 희고 몰캉거리는 작은 덩어리를 조몰락거리며 이런저런 모양을 빚어보던 순간의 만족감. 계곡에서의 물놀이, 바닷가나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켤 때면 그것의 불편함보다 왠지 모를 아늑함과 은밀함에 야릇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비눗방울 놀이, 바람개비나 연을 날리던 추억, 둥실 떠오른 풍선이나 기구에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의 본질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경험한 원초적인 순간들이다. 이런 체험으로부터 일찍이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가 ‘물질적 상상력’이라 명명했던 상상력이 비롯된다. 세계가 ‘물, 불, 흙, 공기’라는 4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세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에 대한 고찰은 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 다루어져 왔다. 바슐라르는 그러한 개념을 문학과 예술에 적극 도입하고 심화시켜 새로운 비평의 관점을 제시한 학자로 유명하다.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믿음, 정열, 이상, 사고의 심층적인 상상체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배하는 물질의 한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의 물질이란 물론 4가지 기본 요소인 ‘물, 불, 흙, 공기’를 지칭하지만, 상상력의 우주 속에서 그것들은 과학적인 의미의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속성 즉 상징적이고 고유한 기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슐라르의 물질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다. 에너지란 곧 잠재된 변화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구조주의자’, ‘과학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력의 정체는 시인이나 몽상가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물질적 상상력과 이미지에 대한 많은 저작들을 남겼는데, 그의 저작들은 학술적인 이론서보다는 아름다운 에세이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잠언록처럼 읽힌다. 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 속의 물을 발견하게 한다. 일상의 어느 한순간 ‘물의 이미지’가 발아(發芽)시킨 특별한 상상력은 우리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깊숙이 삼투(渗透)해 있다. “사람은 같은 강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깊이에 있어 인간 존재는 흐르는 물의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참으로 변하기 쉬운 원소이다.” 강물도 인간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 끌림으로 물의 이미지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물이라는 존재가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의 순환과 변모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순환과 변모를 본다. “물은 운명의 한 타입이며, 그것도 유동하는 이미지의 공허한 운명, 미완성된 꿈의 공허한 운명이 아닌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물은 흐르고 넘치고 고이고 스미고 증발하고 떨어져 다시 흐른다. 우리는 그러한 물을 가만히 응시하곤 한다. 김이 오르는 찻잔을, 비 내리는 창 밖을, 잔잔함 호수를, 흘러가는 강물을, 넘실대는 바다를. 우리는 물에서 물 이상의 것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시고, 더러워진 것을 물로 씻어내며, 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빚는다. 비, 눈, 구름, 안개, 이슬, 우박, 얼음, 폭포, 분수는 모두 물이다. 우리의 몸에는 피와 땀과 눈물과 젖과 양수와 정액 같은 물이 존재한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물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물은 불과 공기와 흙과 섞인다. 우리 모두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듯이. 바슐라르는 에서 상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때의 상상은 공허한 망상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꿈의 본질이다. 난폭한 물, 잠자는 물, 부드러운 물, 복합적인 물, 죽은 물, 모성적인 물•••.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 속에 또 문학작품 속에 존재하는 그러한 물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바슐라르는 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물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물은 싹을 틔우게 하고 샘을 넘치게 한다. 물은 어디서나 생겨나며,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물질이다. 샘은 억누를 수 없는 탄생, 지속적인 탄생이다. 이토록 커다란 이미지는 그것을 사랑하는 무의식적인 것을 언제나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르시스의 신화와 셰익스피어가 그린 의 오필리어의 죽음과 에드거 앨런 포우가 시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물의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물의 말을 들려준다. 그것을 좀 더 깊고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는 바슐라르의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이란 역시 삶 그 자체임을 일깨워준다. 상상력을 상상한다는 것. 삶의 전부와 관련된 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현상학, 몽상   현상학은 내면의 형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내면의 의식에 대해 직관으로 드러낸다. 후설과 하이데거에 의해 논의되는데 이것은 과학적, 합리적 접근이 불가능하다. 오직 직관에 의해 접근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면서도 예술의 주제가 없다. 그때의 직관에 의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구조주의 사고에 익숙하다. 그래서 극도의 개인적이고 고유한 현상학을 드러내는 바슐라르가 어렵다. (하지만 니체이후 철학이 없어진다. 체계에 체계를 쌓는 일이 없어진다. 헤겔의 철학을 보면 인간의 두뇌가 기계보다 더 기계적일 수 있다. 그래서 니체 이후 온전한 것은 없다는 말이 돈다. 온전하고 고유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미지가 어떻게 기원하는가를 추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에 이르고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적 이미지를 4개로 분리한다. 언어: 언어 위로 떠올라 시적 의식을 남김없이 삼킨다. 예측불가능하나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는 자, 초월하는 자, 아는 것을 명명하는 자이다. 지식: 이미지는 비지식이다. 여기서 非지식이란 무지가 아니라 앎의 초월이다. 삶: 삶이 이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시인은 삶을 살기위해 창조하지 않는다. 시인은 창조하는 것처럼 삶을 산다. 그래서 시에 진실, 솔직이란 용어를 사용은 의미상 중복이다. 열정: 울림과 반향을 가진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의 다양한 측면으로 흩어지게 하는 반면, 울림은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정신분석가는 이미지를 지적으로 만들고, 심리학자는 반향에만 사로잡혀 감정만 묘사하고, 비평가는 울림을 짓누르고 에 의해 달라진다. 정신은 헤겔이 먼저 이야기한 것이다. 세계는 정신이다. 인간의 주관이전에 세계정신이 있다. 개별자가 자기 정신을 발현해도 궁극적으로 세계정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정신과 영혼의 구분이 필요하다. 정신은 고차원적이다. 초개인적이고 세계의 원리가 섞여있다. 주관과 객관이 섞여 있다. 정신과 달리 영혼은 세계가 없다. 순수하고 불가분하며 불멸한다. 세계가 지극히 개인적이다. 영혼의 현상학은 몽상이다. 넋의 뿌리까지 가는 것을 말한다. 극단의 개인적인 상황까지 가닿는 것이다. 균열된 개인의 존재의 이야기이다. 꿈과 몽상은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분가능하다. 그래서 낮의 몽상을 더 가치 상향한다. 몽상가의 코기토가 주목되는 것이다. 꿈은 주체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 속에 와서 꿈을 꾸는 것 같다. 이것은 밤의 수동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몽상은 코기토가 있다. 주체가 있다. 구조주의 이후 주체가 없다. 고유한 의식이 살아서 자기의식을 쓰는 일이 가능할까? 주체가 없는 시는 꿈이다. 시적 몽상은 우주적 몽상이다. 우주적 몽상은 넋 뿌리에 가 닿는 것, 본질 깊숙한 곳에 가 있는 넋의 상태이다. 바슐라르는 몽상을 더 지켜나가야 한다고 한다. 주체가 있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한다고 한다. 정신을 폄하하고 영혼의 탑을 쌓으라고 한다. 몽상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상상력을 통해야 한다. 낮의 몽상의 세계는 초보 현상학에 속한다. 그래서 몽상을 통해 현상학을 이해할 수 있다. 시적이미지의 문제를 밝히기 위해 상상력의 현상학에 이르러야 한다. 시적이미지가 인간의 마음의, 영혼의, 직접적 산물로서 의식에 떠오를 때, 이미지의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오직 현상학만이 이미지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이미지의 통주관성의 크기와 힘과 의미를 가늠하게 한다. 이미지의 현상학을 밝히기 위해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영혼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몽상적인 의식이 관여한다. 정신과 영혼은 동의어가 아니다. 영혼은 불멸의 말이다. 영혼과 정신을 나누어 보는 것이 시적이미지의 발전과정을 몽상에서부터 이미지의 실현에 이르게 한다. 몽상 중에서도 낮의 삶과 밤의 삶이 섞여 있는 황혼 상태에 속하지 않는 몽상이 있다. 그것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몽상은 꿈에서 파생된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몽상은 여성적인 아니마이다. 자신의 몽상을 구분하는 자는 꿈 저 밑에서 대단히 조용한 내면의 여성적 존재를 발견한다. 그때 아니무스가 활동한다. 몽상가의 코기토. 나는 몽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몽상에서 주체가 항상 존재한다. 몽상을 꿈꾸는 자는 나다. 내 몽상을 꿈꾸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나다. 라고 말할 의식을 몽상은 갖고 있다. 이 몽상으로 우주를 상상한다.  
11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댓글:  조회:1165  추천:0  2019-02-24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이미지의 4원소론   바슐라르는 이러한 이미지의 물질성에 착안하여, 모든 이미지들을 물, 불, 공기, 흙의 네 가지 원소라는 기준에 의해 분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네 가지 원소의 이미지들을 기준으로 5권의 책을 썼는데 — 『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공기와 꿈』, 『대지와 의지의 몽상』, 『대지의 휴식의 몽상』 — 이 5권의 물질적 이미지에 대한 연구를 흔히 '이미지의 4원소론'이라 부른다. 『물과 꿈』의 서문에서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물질적 상상력에 의한 시학의 포부를 밝히고 있다.   "우리는 상상력의 영역에서 불, 공기, 물, 흙의 어느 원소에 결부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질적 상상력을 분류해주는, 4원소의 법칙을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모든 시학이 물질 본질의 구성요소 — 그것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라 할지라도 — 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시의 영혼들을 가장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것은 원초적인 물질 원소에 의한 분류임엔 분명하다. 하나의 몽상이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는 데 충분한 항구성을 가지고 계속되기 위해서, 또한 그것이 단순히 덧없는 무위(無爲)의 시간이 아니기 위해서는 자신의 물질을 찾아야만 하며, 어떤 물질 원소가 자신의 실체, 규칙, 또는 특별한 시학을 몽상에 제공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물, 불, 공기, 흙 네 가지 원소의 조합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4원소론은 사실 바슐라르가 고안해 낸 것은 아니다. 4원소론은 원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이래로 서구에서 널리 확산되어 온 인식론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저서 『자연에 대하여』에서 만물의 근원을 흙, 물, 불, 공기라고 주장했다. 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4원소가 '사랑'과 '미움'에 의해 결합하거나 분리하여 세계의 여러 가지 상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물과 포도주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잘 섞이는데 비해 물과 기름은 서로 미워하기 때문에 잘 섞이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는 이 세상이 만들어질 때 사랑이 완전히 지배하는 시기에는 4원소가 혼합된 구형(球形)의 물체가 만들어지고, 미움의 지배가 커지는 시기에는 세계와 생물이 만들어지고, 미움이 완전히 지배하는 시기에는 4원소가 각각 분리된 4개의 덩어리가 만들어지고, 사랑의 지배가 커지는 시기에는 세계와 생물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엠페도클레스의 생각을 발전시켜 더욱 구체적인 4원소설을 주장하게 된다. 그는 모든 원소는 따뜻함과 차가움 그리고 건조함과 축축함의 네 가지 기본 성질 중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4원소는 기본 성질의 조합이 달라지면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원소 전환설의 내용을 포함하였다. 예를 들어 물에 불이 작용하면 공기가 되고, 불이 식으면 흙이 된다는 식이다. 이 세상의 물질은 4원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하는 물질도 인위적으로 조합을 바꿔주면 물질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착상은 훗날 중세 연금술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4원소론은 동양의 오행설(五行說)과 유사한 점이 많다. 오행이란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다섯 가지 원소를 뜻한다. 동양에서는 자연현상을 이 오행의 원리로 설명하였다. 오행 사이에는 서로 도와주는 성질과 다른 것을 이기는 성질이 있어서, 물질을 이루거나 물질이 변하는 데 영향을 준다. 예를 들면 물을 먹고 사는 나무는 불에 타버리고, 불은 흙의 모태이며, 흙은 금의 뿌리이다. 또 금속에서는 물이 나며, 물은 나무가 살기 위한 필수요소이다. 흙에서 양분을 취하는 나무는 흙을 이기지만 금속에게는 지며, 나무에게 지는 흙은 물을 이긴다. 또 금은 물을 이길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서로 서로 연결되면서 영원한 순환의 고리를 이룬다.   4원소론은 과학적 진실의 차원이 아니라 서구적 세계관의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가 동양의 음양오행사상을 객관적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사상체계로 이해하듯이, 서구의 4원소론은 서구인의 상상계를 구성하는 체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4원소론의 네 원소는 네 개의 원소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원소를 뜻한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이 네 원소의 결합이므로 4라는 숫자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숫자이다.   역으로 5번째 원소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소를 뜻한다(뤽 베송의 「제 5원소」라는 영화를 상기해 보라.). 이 4원소론은 고대의 우주론이나 중세의 연금술 이외에도 폭넓게 서구인들의 상상계를 차지해 왔다. 이와 같은 4원소론을 바슐라르가 자신의 이미지 연구에 적용시킨 것은 그것이 과학적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서구인의 상상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틀이기 때문이었다.   4원소론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인간 정신의 '오류'이며, '인식론적 장애물'이지만, 상상계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꿈, 즉 인간의 몽상의 틀을 보여준다. 과학적 오류인 4원소론은 상상력의 세계에서는 진실인 것이다. 이 이미지의 4원소는 각기 독립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알코올이 들어있는 음료인 '펀치'는 물과 불의 결합이고, 진흙은 물과 대지의 결합이다.   바슐라르는 문학 이미지를 연구하면서, 문학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가들도 이 4원소들 중의 하나의 원소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시인은 자신이 애호하는 원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작품에 반영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프만의 작품에는 불에 대한 이미지가 주로 나오며, 에드가 포우나 스윈번 같은 작가들은 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다. 또 대기의 이미지가 강한 작가로는 니체가 있다.  
10    불의 정신 분석 ㅡ 가스통 바슐라르 댓글:  조회:2551  추천:0  2018-12-24
퍼온 자료임 ^^ 불의 정신 분석 ㅡ 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精神分析 들어가는 말   序論    1    내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아서는 안 된다.  --폴 엘뤼아르    우리는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믿어버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만 말하면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들의 최초의 선택에 의해서, 대상은 우리가 거기에 지정하는 것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밝히므로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자기의 思考를 기본적인 것이라고 믿는 일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정신의 미숙성을 고백하는 일이 된다.    이따금 우리는 선택된 하나의 대상 앞에서 말할 수 없이 놀랄 때가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가설과 몽상을 축적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식으로서의 외관을 지닌 신념을 형성한다. 하지만 근원이라는 것은 불순하며, 최초의 증명이 기본적인 진리는 아니다.    사실 인간이 우선 직접적인 대상과 절연하였을 때, 또한 최초의 관찰에서 나온 여러 가지 사고를 중지시키고 금지할 때에만 과학적 객관성이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객관성도 정당하게 확인될 때에는 대상과의 최초의 관계를 부정한다.    그것은 모든 것, 즉 감각•상식, 가장 보편적인 語法, 또는 語原까지도 비판할 것이며, 노래하거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나온 말이 사고에 부딪히는 일은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고는 놀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로니를 행사하게 만든다. 이러한 짖궂은 경계심이 없이 우리는 결코 진실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나, 우리와 동등한 자, 우리의 형제들을 심문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공감이 그 방법의 기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을 살지 않고, 우리의 기쁨이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승화되지 않는, 이 惰性的世界 앞에서 우리는 모든 감정의 노출(expansion)을 멈추어야 하며, 우리의 인격(personne)을 억제해야 한다.    詩와 과학의 軸은 처음부터 逆으로 되어 있다. 철학이 바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시와 과학을 서로 보충하는 일이고, 그것을 두 개로 기초된 反對命題로서 병합하는 일이다. 따라서 외향성인 詩 정신에다 과묵한 과학정신을 대립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과학정신에 있어서는 예정된 反感이 건전한 경계가 된다.    우리는 객관적 태도가,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일이 없는 하나의 문제와 최초의 매력이 가장 강직한 여러 정신까지도 변형한 그 위치에서 몽상이 사고를 대신하고, 시가 여러 定理를 감추는 시적 요람으로 항상 이끌어갈 만큼 결정적인 문제를 연구하려고 한다.    이것은 불에 대한 신념에서 제기된 심리학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는 내가 불의 정신분석에 대해서 말하는 아무런 망설임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적으로 심리학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불의 현상이 순수한 영혼에게 던져주는 최초의 이 문제로부터 진실로 현대 과학은 완전히 외면해 왔다. 化學책 속에 나오는 불에 관한 章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점 감소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化學책은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그 속에서 불이나 불꽃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찾으려 해도 이미 헛일일 것이다.    불은 확실히 직접적인 대상이다. 다른 諸現象을 밀어 제치고, 하나의 本源的인 선택으로서 자기를 미는 對象인 불은 이미 과학적인 연구에 대해서 어떠한 전망도 열어주지 못한다.    그런데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이 현상의 가치의 폭등을 더듬어 여러 세기 동안 과학의 연구분야에 군림해 온 하나의 문제가 한 번도 해결된 적이 없는데, 왜 갑자기 分割되고 문제시되지 않았는가를 연구할 경우에는, 불은 우리에게 있어서 교훈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교양 있는 사람들 뿐아니라, 뛰어난 과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내가 여러 번 지적한 바와 같이 하고 묻는다면, 아주 낡고 공상적인 철학적 여러 이론의 무의식적 반복에 지나지 않은 모호한, 혹은 중복된 반복적인 대답이 나올 뿐이다.    그 이유는 그 문제가 인간의 직관과 과학적 실험이 섞인 불순한 客觀帶라고 할 수 있는 지점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도 다른 여러 현상보다도, 더 불의 여러 직관이 특히 중대한 결함을 짊어진 상태임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직관은 실험과 측정만을 필요로 해야 할 하나의 문제 속에 직접적인 확신을 끌어들인다.    이미 전에 쓴 책(譯註1) 속에서 나는 熱現象과 관련해서 과학적 객관화의 명확히 규정된 축을 기술하고자 한 적이 있다. 나는 여기서 실험작업을 과학적인 과정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기하학과 대수학이 어떻게 점차적으로 그 추상적인 형식과 원리를 기여시키는가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어떤 특수한 實在, 충분히 규정되어 있는 실재의 인식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당연히 동반되리라고 생각되는 二重의 전망을 예증하기 위해 찾아내려고 하는 것의 逆의 軸, 즉 이미 객관화된 축이 아니고 주관성의 축이다. 만일 우리가 주관과 객관의 事實的媒介關係에 대해서 정당하다면,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과 思想家를 더 뚜렷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 구별은 언제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하여간 우리가 여기서 연구하려는 것은 생각하는 사람인데, 불이 고독을 인식하는 것처럼 빛을 내며 탈 때, 고독의 한 가운데서, 사람은 그의 난로가에서 생각에 잠기고 있다. 그때 우리는 과학적 인식에 있어서는 최초의 인상의 共感的同意를 마음에 두지 않는, 몽상의 여러 가지 위험을 나타내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찰자를 관찰하는 일은 쉬운 일이며, 따라서 이 가치가 부여된 관찰을 통해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을 응시할 때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이 催眠에 걸린 관찰로부터 여러 가지 원리를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것은 여지없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아낸 이 가벼운 최면상태야 말로 정신분석적인 조사를 개시하는 데 아주 어울리는 것이다.    괴로와하는 영혼이 그 추억과 고통을 동시에 말하기 위해서는 겨울의 하룻밤, 집 주위의 바람으로 빨갛게 타는 불만으로도 족하다.    겨울의 따뜻한 잿속  낮은 소리에 매혹되어  묻힌 불과 닮은 이 마음  꺼지려하며 노래하네.  --뚤레    2    그런데 이 책은 한 줄 한 줄 써나갈 경우에는 쉽지만, 그것을 잘 구성된 하나의 체계로서 만들기에는 실제로 불가능한 것 같다. 인간의 여러 가지 오류를 하나의 계획서로서 써나간다는 것은 바라기 어려운 시도일 것이다.    특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과제는 역사적인 전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몽상의 오래된 여러 조건이 현대의 과학교육에 의해서 제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도 자기의 전문분야를 떠나면 원시적인 가치평정으로 역행한다.    그러므로 科學史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역행하는 하나의 사상을 역사의 지침에 따라 기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노력의 일부를, 몽상이, 체계적인 사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여러 가지 실험에 의해서 획득되어진 것에까지도 항거하여, 여러 번 原始의 주제를 되찾아 언제나 원시의 혼으로서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불의 우상숭배를 묘사하던 아주 멀고 먼 과거의 시대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흥미깊게 여기고 있는 것은 이 우상숭배의 은연한 殘像을 확인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용하는 기록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가까울수록 그것은 우리의 명제를 더 강력하게 뒷받침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심리적 진화에 대한 하나의 저항의 흔적이기도 한 영속적인 기록이다. 즉, 소년 속의 노인, 노인 속의 소년, 기술자 속에 잠긴 연금술사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몽상이 무력한 것인 것처럼 과거가 무명의 것이라면 우리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즉, 정신을 그 안락한 환상에서 눈뜨게 하여 최초의 明證이 주는 나르시시즘(Narcissisme)에서 해방하고, 정신의 단순한 소유와는 다른 확보를, 단순한 정열이나 열광과도 다른 확신적인 여러 힘을 주는, 한 마디로 말하면 정신의 불꽃 같은 것은 결코 아닌 여러 가지 증거를 주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 충분하게 이미 말했기 때문에 불의 여러 가지 현상의 인식과 관련된 주관적 확신의 의 의미를 더 요약해 말하면, 불의 정신분석의 의미를 독자에게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음에 우리는 개개의 論旨에 의해서 우리의 一般的命題를 명확하게 할 것이다.    3    우리는 하나의 머리말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고찰을 덧붙이고 싶다. 나의 독자가 이 저서를 읽어도 독자의 지식은 별로 증가되지 않을 것을 안다. 이 점은 아마도 우리의 실패가 아니고 우리가 선택한 방법의 단순한 報償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접할 때 우리는 진리를 등지게 되며, 우리가 인 실험을 할 때는 반드시 객관적 실험과는 모순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책에서 우리가 내면을 털어놓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열거하자. 우리의 저작은 그 때문에 우리가 모든 객관적 연구의 기초로서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는 저 특수한 정신분석의 한 예로서 제시될 것이다.    그것은 《과학정신의 형성》이라는 최근의 책에서 제창된 일반적 여러 명제의 例證的인 설명이다. 과학정신의 교육법은 귀납을 왜곡하는 유혹이 어떠한 것인가가 명백해지는 경우에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간단히 불을 취급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물•공기•대지•소금•술•피 등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가치를 주는 객관적 연구를 일반성이 없는 주제로 이끌고 이 실체는, 분명히 불만큼 두 가지 뜻을 가진 것도 아니고, 주관적이나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외관상의 특징이 검토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가치의 외관상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실체론적인 여러 경험보다 훨씬 理性的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직접적은 아니며, 따라서 훨씬 덜 情感的인 여러 가지 명증의 근원으로 정신분석을 가지고 오는 것은, 더욱더 곤란한 일이지만 동시에 더 풍부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동조자를 더 잘 찾아낼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그들을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과 같은 관점에서 전체•체계•요소•진화•발전 등의 여러 개념의 연구에 따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이 이러한 여러 개념의 근원은, 異質로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그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예 가운데서 사람들은 과학자나 철학자에 의해서 다소 안이하게 받아들여진 여러 가지 이론에서 이따금 아주 순진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검토되지 않은 이 확신은 어느 것이나 정신이 논증적 노력 속에서 쌓아올려져야만 하는 진리의 빛을 흐뜨리는, 어지러운 섬광과도 같은 것이다.    각자가 이 검토되지 않은 확신을 스스로 없애는 데 집중하여야 한다. 각자가 이 측근의 여러 경험과의 접촉에 의해서 형성되는 정신적 관습의 硬直으로부터 피할 줄을 알아야 한다. 각자는 최초의 직관에 대한 그 恐怖症(phobies)보다 더 주의깊게, 그 , 그 자기만족을 분쇄해야만 한다.    이를 요약하면, 우리가 독자에게 자신을 억제하는 자가 되는 것, 즉 자신을 조소하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다면 독자를 가르치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의 노력은 보상될 것이다. 이러한 자기 비평의 아이로니 없이는, 어떠한 진보도 객관적 인식에 있어서는 있을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17세기와 18세기의 오래된 과학서적의 끝없는 독서 편력 속에 쌓은 여러 기록의 극히 조그만 부분만을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조그만 저서는 단순한 拙著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어리석음을 쓰는 것이 문제이지 한 권의 책을 쓰는 일은 사실 지극히 쉬운 일일 것이다.      1. 《植物問題의 進化에 관한 硏究》.      제 1장 불과 尊重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    1    불과 열은 가장 변화가 심한 영역 속에서 여러 가지 설명방법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시드는 일이 없는 여러 가지 추억과 단순하고도 결정적인 개인적 경험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불을 이리하여 모든 것을 설명할 수가 있는 특권적 현상이 된다.    마치 천천히 변하는 모든 것이 다 생명에 의해서 설명되듯 신속하게 변하는 것은 모두 불에 의해서 설명이 된다. 불은 招生命ultra vivant이다. 불은 內在的이고 또한 보편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산다. 그것은 하늘에 산다. 그것은 실체substance의 內部에서 솟아 하나의 사랑처럼 모습을 나타낸다.    그것은 질료matiere 속으로 내려가 원한이나 복수처럼 잠재하고 포함된다. 모든 여러 가지 현상 가운데서 그것은 실로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치부여, 즉 선과 악을 동시에 단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로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낙원에서 빛나고 지옥에서 탄다. 그것은 감미로움이며 고통이기도 하다.    그것은 타는 불이며 默示의 불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명하게 난로 가까이 앉은 어린이에 있어서는 기쁨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가 너무나 불 근처에서 그 불꽃과 희롱하려고 할 때는 어떠한 불복종성도 징벌될 것이다. 그것은 安樂이며 尊重이다. 그것은 守護와 威脅, 正과 邪의 神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것은 보편적인 설명원리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최초의 가치부여 없이는 가장 명백한 여러 모순을 수용하는 견해에 대한 저 관용도, 가장 칭찬하는 형용사를 확인하지 않고 축적하는 그 열광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18세기 말에 한 의사에 의하여 씌어진 다음 페이지 속에는 얼마나 많은 자비와 무의미함이 있는 것일까    (原註1)    이 페이지는 객관적인 의미를 수용할 수 있는 논거나 형용사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얼마나 납득이 되는 일인가! 그것은 의사의 설득력과 약의 침투력을 全體化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느껴진다. 불은 무엇보다도 침투적인 藥劑이므로 의사는 불을 피움으로써 비로소 가장 설득력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페이지를 다시 읽을 때 지우기 어려운 聯想을 마음껏 전개시보면 어렸을 때 나의 베개맡에 와서는 멋진 학자 같은 말을 토하고, 불안스러운 듯 마음쓰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저 금시계를 가진 과묵하고 친절한 의사가 언제나 생각난다. 가난한 우리 집의 어느 겨울날 아침의 일이다. 불은 난로 속에서 타고 있다.    톨루(tolu)시럽을 가져오고 나는 숟가락을 핥는다. 발삼제(balsamique)의 따뜻함과 데린 약의 뜨거운 香으로 넘치던 그날들은 어데로 갔을까!    2    내가 병이 들었을 때 아버지는 나의 방에다 불을 피웠다. 그는 불을 지피기 위한 잔개비 위에 장작을 똑바로 세우고 장작을 잘 구성하여, 그 사이에 한 웅큼의 나뭇조각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불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남에게 시킨 일이 없는 그 역할에서 아버지와 맞설 만한 자기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19살이 될 때까지 불을 피운 일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난로의 주인이 된 것은 나 혼자서 생활할 때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에게 배운 은 지금도 나의 자랑거리의 하나이다. 나는 아침에 불을 피우는 일을 게을리하기보다는 철학의 강의를 게을리하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학문연구에 언제고 바쁜 한 사람의 경애할 만한 저자 의 작품 속에서 나에게는 거의 개인적인 여러 가지 추억에 넘친 다음의 페이지를 읽을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공감(原註2)을 느낀다.        그리고 뒤카를라는 그 뛰어난 재능과 불에 대한 지식이 뒤에 따르는 等比級數로서 기술된 그 야심적인 이론적 지식체계를 동시에 확대하면서 계속하고 있다. 이 수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뒤카롤라의 사고의 최초의 원리는 극히 명석하고 그 정신분석은 직접적이요, 타고난 찌꺼기는 찌꺼기에 맞대야 한다. 그러면 불꽃은 우리의 난로를 화려하게 할 것이다.    3    아마 독자는 여기서 우리가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에 있어서 추종하기를 제안하는 방법의 한 예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험적•과학적 인식의 기초로써 무의식적 여러 가치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객관적•사회적 인식으로부터 주관적•개인적 인식으로 향하는 逆의 빛을 제시해야 한다. 과학적 실험 속에 유년기의 경험의 흔적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에 대해서, 하나의 明證의 이질적인 성격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특수한 한 현상의 연구에 대해 말할 수 없이 잡다한 영역 속에 형성되어 온 여러 가지 신뢰성이 집중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하나는 불이 아마도 이기보다는 차라리 임이 충분히 착안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착안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원시사회에 있어서의 불의 역할에 관한 여러 가지 고찰을 전개할 필요는 없고 불을 유지하는 기술적인 곤란성을 역설할 필요도 없다.    敎化된 정신의 고조와 교양을 검토하는 일도, 심리학을 능동적인 것으로 하기만 하면 족하다. 사실 불의 존중은 가르침에 의한 숭배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존중은 아니다. 우리에게 촛불의 불꽃에서 손가락을 멀리하는 반사운동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는 어떠한 의식적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보적인 심리학 책 속에서 반사운동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사람들은 도리어 놀랄 것이다.    반사운동은 거기서는 반사운동 내의 일종의 끊임없는 가장 조잡한 감각 내에서의 하나의 인식에 대한 간섭 같은 예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자연적 경험은 고로 하나의 객관적 인식을 기초하기 위한, 너무 애매한 물질적 증거를 가지고 오도록 하는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火傷, 즉 자연적 제지(inhibition)는 사회의 여러 가지 금지를 확증하는 일로, 어린이의 눈에는 아버지의 지식에 대한 그만큼 더 큰 가치를 부여할 뿐이다. 그러므로 불의 유년기의 근본에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간섭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는 사회적인 것이 거의 언제나 지배적인 간섭이 된다. 아마도 그것은 만일 刺傷과 화상을 비교한다면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둘 다 反射運動을 일으킨다. 그런데 왜 刺痛은 불처럼 존중과 畏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刺痛에 관계되는 사회의 여러 가지 금지가 불과 관계되는 여러 가지 금지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 한데 불꽃에 나타나는 존중의 참된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즉, 만일 어린이가 불에 손을 대면 아버지는 그 손가락이 불에 접근 못하도록 매를 가한다.    불은 화상을 입히지 않고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이 불이 불꽃이건, 열화이건 램프이건 난로이건 양친의 조심은 마찬가지이다. 불은 그러므로 처음에는 의 대상인 것이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사회적 금지가 불에 대한 우리의 최초의 일반적 인식이다. 불에 대해서 우리가 최초로 의식하는 것은 불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자라남에 따라서 여러 가지 금지는 內面化된다. 경고를 위한 회초리는 야단치는 소리로 대치되고, 그 소리는 화재의 위험에 대한 이야기나 天上의 불에 관한 전설로 대치된다. 이리하여 자연현상은 급속하게 소박한 인식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회적이고 복합적이며 혼란한 인식 속에 구성된다.    따라서 여러 가지 制止란 무엇보다도 우선 사회적 금지이고 보면 불의 개인적 인식의 문제는 의 문제가 될 것이다. 어린이란 아버지가 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해보고 싶은 법이다. 그래서 그 작은 프로메테우스와 마찬가지로 성냥을 훔친다. 그리고 나서 들로 나아가 동료들과 골짜기의 우묵한 곳에다 학교를 빠져 나온 후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비밀의 불을 피운다.    도시의 어린이는 세계의 돌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을 거의 모를 것이다. 그는 수풀의 구운 나무 열매 맛도, 붉은 장작개비 위에서 익는 달팽이 맛도 맛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내가 종종 그 작용을 느낀 저 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콤플렉스는 그 자체로서는 매우 진부하나, 불의 아버지와 전설이 항상 만나는 재미를 이해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와 고전적 정신분석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급하게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불을 둘러싼 몽상의 성적 구성요소는 특별히 강렬하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서 그것을 명시할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콤플렉스가 어떻게 서로 관계하는가에 대해서는 뒤에 보기로 하고, 지금은 무의식적인 신뢰의 여러 가지 뉘앙스를 여러 가지 定式으로 나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따금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의 장점의 하나는, 우리가 원시적인 본능적 기능을 갖는 영역보다는 깊지 않은 영역을 검증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영역이 명확한 사고에 대해서, 그리고 과학적 사고에 대해서 규정적인 작용을 갖는 것은 그것이 매개적이기 때문이다. 아는 일과 만드는 일은 그것을 반드시 힘의 의지와 연관을 지우지 않고라도,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가 특징 지을 수 있는 욕구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참된 가 있다. 프래그머티즘과 베르그송주의가 그렇게 한 것처럼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절대적으로 유용성의 원리에 종속시킬 때, 우리는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과소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 이름 아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인 우리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 모든 경향을 일괄해서 제안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상을 조작하고 자기의 객관적 인식을 정확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양친이나 스승 속에서 찬미해온 지적 수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보다 강력한 본능을 구사하여 최고권을 획득하는 것이 당연히 훨씬 방대한 사람들에게 호소될 것이다. 가령 순수한 지성이라는 것이 예외적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종의 진화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포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지적생활에 있어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1. 테종카드(A. Roy-Desjoncades)의 《自然의 法則》.  2. 뒤카를라(Ducarla)의 《완전한 불》   제 2장 불과 夢想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    1  현대 정신병리학은 방화범의 심리학을 규명했다. 그것은 그들의 경향들 가운데서 性的인 특징을 밝혀 주었다. 한편 그것은 불을 지른 건초더미, 불꽃은 지붕, 잘 경작된 평야의 무한한 광활 속에 검은 하늘의 소용돌이처럼 휘감기는 거대한 배후의 광경에 의해서 心理가 입게 될 중대한 외상을 밝혀내었다.    거의 언제나 들에 있어서의 放火는 영혼의 표지이다. 화재 속에 불을 나르는 사람처럼 이 패배의 사나이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들의 고독한 꿈의 감염을 전달한다. 어느 화재의 광경은 한 방화범의 화재를 일으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화범을 낳는다. 불은 잿속보다 더욱 확실하게 영혼 속에 깃든다. 방화범은 범죄자 중에서도 가장 음험하다.    생틸리의 수용소에서도 아주 독특한 방화범은 너무 개성적이고 매우 친절한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단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난로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정신병리학의 외측에서 고전적 정신분석은 오랫동안 불에 관한 여러 가지 꿈을 연구해 왔다. 불의 꿈은 가장 생생하고 가장 연연한 꿈속에서도 性的인 해석이 가장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리 깊지 않고 보다 지성화된 심층의 정신을 분석하는 일에 머무르고 싶으므로 우리는 꿈의 연구를 몽상의 연구로 바꾸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작은 책에서 우리가 연구해야 할 문제는 불 앞에서의 몽상인 것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이 몽상은 언제나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에 의해서 꿈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꿈은 길을 서두르지 않기 때문에 그 방향을 망각하고 직선적으로 나간다.    몽상은 放射狀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그 중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광선을 비춘다. 그리고 불 앞에서의 몽상, 그 행복을 의식하는 달콤한 몽상이란 가장 자연스럽게 집중된 몽상이다. 그것은 그 대상 또는 그 구실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곳에 가장 집착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누구나가 그로부터 떠날 수 없는 듯한 매력을 거기에 부여하고 있는 그 정치성과 그 等質性은 거기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멋지게 성격지워지므로 우리는 난로 속에서 타는 장작불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모른 체한다. 이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굵은 장작이 조그만 불꽃이 되어 타오르는 고요하고 정연한 지배의 불이다. 그것은 단조롭고 빛나는, 진실로 전체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말하며, 날며, 노래한다.    난로 속에 갇힌 불은 아마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몽상의 최초의 주제이며 휴식의 상징이며, 휴식에의 초대였을 것이다. 타오르는 장작 불 앞에서 몽상 없이는 휴식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견으로는 불 앞에서의 몽상의 결여는 불의 참된 인간적인, 그리고 최초의 효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분명히 불은 따스함을 주고 활력을 되찾아준다. 그러나 이 활력의 회복은 꽤나 오래도록 바라보는 데서만 잘 의식화된다.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머리를 손안에 묻었을 때 불의 기분 좋음을 알 수 있다. 이 자세는 먼 곳에서 온다. 불 근처에 있는 어린이는 자연히 그런 자세를 취한다. 그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만은 아니다.    그것은 감시나 관찰의 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지극히 특수한 주의와 통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간에 다른 觀想을 위해서 이용되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다. 불 근처에서는 앉아 있어야 한다. 졸지 않고 몸을 쉬어야 한다. 특수한 대상의 몽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정신의 功利主義的 형성을 믿는 사람은 이처럼 쉽게 얻어지는 관념론적 이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불에 대해서 품고 있는 흥미를 특징지우기 위해서 불이 지니는 여러 가지 효능을 들어서 우리에게 반대할 것이다. 즉 불은 열을 줄뿐만 아니라 살을 태우기도 한다. 마치 복잡한 난로나 농가의 난로가 몽상을 방해라도 하는 듯이!    냄비걸이에 매달려 검게 그을린 세 개의 다리가 달린 냄비가 뜨거운 잿속에 놓여 있다. 뺨을 부풀리면서 강철로 된 공기통 속에 바람을 보내면 죽어가던 불이 살아난다. 모든 것이 동시에 익는다. 돼지를 위한 감자도, 가족을 위한 아주 맛좋은 감자도, 나를 위해서는 신선한 계란이 잿속에서 익고 있다.    불의 강약은 모래시계로 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란은 한 방울의 물, 때로는 한 방울의 침이 껍데기 위에서 수증기로 증발할 때 익는 것이다. 나는 데니 빠벵이 그의 냄비를 지키는 데, 나의 할머니와 똑같은 방법을 취하는 것에 대해서 최근에 그것을 읽고 매우 놀랐다. 계란을 먹기 전에 나는 빵죽을 강요당했다.    어렸을 때 어느날 매우 화가 나서 성급했던 나는 큰 숟가락에 국을 떠서 냄비걸이에다 던진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점잖은 날에는 언제나 와플 굽는 틀을 가져왔다. 그것은 장방형의 쇠로 글라디올러스의 자웅처럼 붉은 덤불 속의 불을 죽였다.    그리고 이윽고 나의 에프론 속에 넣어둔 와플을 입술에 있을 때보다도 손에 쥘 때가 더 뜨거웠다. 그때 나는 불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황금, 그 향기를 익은 와플이 나의 이빨 아래서 소리를 내는 동안은 그 소리까지도 먹는 것이다. 언제나 이와 같이 디저트와 같은 일종의 사치의 기쁨에 의해서 불은 그 인간성을 나타낸다. 불은 사물을 태울 뿐만 아니라 소리를 지르게도 한다.    그것은 빵이나 과자를 갈색으로 태운다. 그것은 인간의 축제를 물질화한다. 제아무리 시대를 소급해 보아도 美食學의 가치는 영양가보다 우선한다. 즉 인간이 그 정신을 발견한 것은 기쁨 속에서지 고통 속에서는 아니다. 잉여의 정복은 필요의 정복보다 더 큰 마음의 흥분을 준다. 인간은 욕망을 창조하는 것이며 결코 필요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2    하지만 난로가에서의 몽상은 철학적인 축을 가지고 있다. 불은 그것을 관상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신속한 생성의 한 예이며, 또 완벽한 생성의 한 예이다. 흐르는 물만큼 단조롭지도 않고, 추상적도 아니고, 숲 속에서 매일 우리가 보는 새의 새끼보다 잘 자라며, 변해가는 불은 시간을 변화시키고, 끓어오르는 욕망의 全生命을 그 종말로, 그 피안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욕망의 암시인 것이다.    몽상이 진실로 매혹적이 되고, 극적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불은 인간의 운명을 확대한다. 그것은 조그만 것을 큰 것으로, 난로를 화산으로, 하나의 장작의 생명을 하나의 세계의 생명에 연결시킨다. 매혹된 자는 에 귀를 기울인다. 그에게 있어서 파멸이란 하나의 변화 이상의 것, 즉 바로 還生인 것이다.    이 지극히 특수하면서도 일반적인 몽상은 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삶의 본능과 죽음에 대한 본능을 서로 연결하는 하나의 참된 콤플렉스를 이끌어낸다. 이것을 라고 불러두자 사람들은 조르즈 상드(George Sand)의 기발한 작품 속에서 그 전개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르 상드(Auro re Sand)라는 이름에 의해서 망각으로부터 구제받은 젊은 날의 작품이다. 아마 이 《몽상가의 이야기》는 이탈리아로의 최초의 여행 전에, 최초의 大噴火 전에, 결혼 후에, 첫 사랑 이전에 씌어졌을 것이다. 하여튼 그것은 기술되어졌다기보다는 상상되어진 대분화의 특징을 띠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예이다. 예를 들면, 대지의 아들인 태양이 융해된 산의 분화구로부터 하늘로 던져졌다고 꿈꾸는 장 폴에 있어서도 똑같이 전형적인 일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몽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꿈보다도 훨씬 校是的이기 때문에 조르즈 상드를 추종해 보자.    새벽의 반짝이는 바다에 불이 물드는 시칠리아를 보기 위해서, 나그네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 에트나의 언덕길을 올라간다. 그는 안에서 잠시동안 잘려고 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작나무 불 앞에서 꿈꾼다.    그는 물론 상태로 가만히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에트나가 噴火할 적마다 생기는 그 화염의 희롱과 용암의 응결된 영상이다.>하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하고 精靈은 몽상가에게 그 붉은 외투의 일부를 던지면서 말한다.    이와 같이 해서 난로가에서의 몽상은 불꽃이 자작나무 긴 가지와 얽힐 때, 화산이나 시체를 태우는 불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연기 속에 흩어지는 한 조각의 지푸라기만 있으면 우리가 스스로의 숙명을 알기에 족하리라!    불의 관상은 우리를 철학적 사고의 근원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그 이상 더 잘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지극히 예외적이고 희귀한 현상인 화재가 우주의 구성요소로서 포착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사고의 하나의 요소이며 몽상에 있어서 특히 선출된 요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의 심리학적 콤플렉스가 인식되었을 때, 어떤 종류의 시적인 작품은 보다 잘, 보다 종합적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사실 하나의 시적 작품은 콤플렉스에 의지하는 이외에는 그 통일성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콤플렉스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 뿌리에서 떨어져나가 작품은 이미 무의식과 서로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은 생기 없고, 조잡스러우며, 허위의 것으로 보일 것이다. 반대로 휠덜린의 《엠페도클레스》와 같은 미완의, 그리고 몇 번의 고쳐 읽음과 수많은 되풀이로 되어 있는 작품에 있어서도, 그것이 엠페도클레스에 뿌리 박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의해서 어떤 통일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히페리온이 자연의 생활과 더 밀접하게 섞여 있는 생활을 선택할 때 엠페도클레스는 화산의 순수한 요소 속에 자신을 용해하는 하나의 죽음을 선택했다. 이 두 개의 해결책은 피에르 베르토씨가 적절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최초의 외관보다 더 근접해 있는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베르테르적인 여러 요소를 제거하고, 자기 희생에 의해서 자기의 힘을 바치고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지 않는 히페리온이다.    즉, 그야말로 (原註1) 불꽃 속에서 죽는 것은 가장 고독하지 않은 죽음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거기서 전우주가 사색가와 더불어 無로 돌아가는 진실로 우주적인 죽음이다. 화형은 신화의 과정이다.      결코 죽지 않는 것만이 좋다.  그리고 다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함께 죽는 것만이  죽음을 면한다.  --다눈치오    이따금 영혼이 엠페도클레스의 콤플렉스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고 있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무한히 벌겋게 달은 숯불 앞에서이다. 희망 없는 사랑의 내적인 화염에 몸을 태우는 다눈치오의 포스카리나는 유리 만드는 도가니에 매혹된 사색 속에서 화형을 원한다(原註2). [아! 모습을 찢어 삼켜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하고 파멸의 생각에 도취된 그 여자의 마음은 신음한다.    한순간에 이 불은 포도의 어린 가지와 작음 묶음의 보릿단과 마찬가지로 나를 다 핥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열려진 분화구 입구로 접근했다. 그것을 통해서 여름의 대낮보다도 훨씬 빛나는 화염이 흙 단지에 감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속에서는 아직 型을 이루지 않은 금속이 녹아 있다. 많은 열기를 차단하는 벽의 주위와 그 배후에 위치한 일군들은 그것들을 쇠로 된 흙 통으로 건져 입으로 부는 입김으로 型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정말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화형의 외침소리가 하나의 근원적인 시적 주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 생활 속에서는 이미 어떠한 실제상의 관찰과는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빅토르 위고에서 앙리 드 레니에 이르기까지, 헤라클레스의 火葬壇上의 죽음을 하나의 자연적 상징인 것처럼 우리에게 인간의 운명을 그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객관적 인식에 관한 한 순수하게 인위적인 것이며, 따라서 무의식의 몽상에 있어서는 의연히 깊고 실재적이며 활동적인 것이다. 꿈은 진실의 체험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다.      1. 피에르 베르토(Pierre Bertaux)의 《휠덜린》  2. 다눈치오(DAnnunzio)의 《불》      제 3장 精神分析과 先史  --노발리스 콤플렉스    1  정신분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설과 신화의 연구를 시도해 왔다.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연구에 대해서 불의 정복을 둘러싼 전설을 풀기 위한 충분하고 풍부한 설명의 소재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아직도 완전하게 체계화하지 못한 것은 --융이 그 점에 대해서 크게 공헌했지만,--그것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발견을 기초지우려는 과학적 설명, 객관적 설명의 연구이다. 이 章에서 우리는 융의 관찰을 다시 체계지워 완전한 것으로 함으로써 합리적 설명의 약점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선사의 여러 가지 발견에 아주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근대의 과학적 설명에 대해서 비판해야 한다. 이 과학적 설명은 回歸的證明에서 이익을 끄집어 내기를 주장하고 그러기 위해서 원시의 여러 가지 발견의 여러 조건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메마르고 간략한 합리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의식적인 것 아래 무의식적인 것을, 객관적 증명 아래 주관적 가치를, 실험 아래 몽상을 구하는 간접적이고 또한 제 2차적 정신분석학이 등장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사람은 우선 꿈꾼 것만을 연구할 수가 있다. 과학은 실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보다는 몽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많은 실험을 필요로 하는 것은 꿈의 안개를 흩어 버리기 위한 것이 될 것이다. 특히 객관적인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동일물질에서 작용하는 똑같은 행위는, 원시인과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에 맞설 정도의 서로 다른 心性에 있어서는 동일한 주관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원시인에 있어서 사고란 집중된 몽상이고 교육을 받은 사람에 있어서의 몽상이라는 온화한 사고이다. 움직이는 방향은 두 경우에 있어 서로 반대된다. 예를 들면 원시인은 마른 두 쪽의 나무를 비벼댐으로 불이 생겼다는 것이 합리주의적 설명의 중심사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 그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느냐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응용되는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대개는 이 최초의 발견의 심리학을 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밝히려고 애쓰고 있는 극히 소수의 저자들 가운데도 그 대부분은 숲속의 불이 여름에 가지와 가지의 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고발하고자 하는 회귀적 합리주의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소박한 관찰의 여러 가지 조건을 재생시키지 않고, 하나의 이미 알고 있는 과학에서 출발하여 이 推論에 의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    현재도 사람들은 숲속의 불에 대해서 별다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할 때는, 그 분명하지 않은 것의 원인은 마찰작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이 관찰되어졌을지라도 다만 단순한 현상에 접근했을 때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찰작용은 아닐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의 으로 나무에 불이 일어나게 된 마찰과 마찬가지로, 오래 준비된 점진적인 현상을 암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결론에 이른다. 즉, 불을 낳기 위해서 원시인에 의해서 이용되는 마찰에 기초를 둔 실천의 어떠한 것도 하나의 자연현상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시사된 적은 없는 것이다.    이 난점을 실레겔(schlegel)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해결을 하지는 않았으나 합리적인 표현으로 제기된 문제가 원시인의 심리적 가능성에 적응하지 않음을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原註1) [문화라는 대건축물 전체의 초석인 불을 단순히 발견하는 일도, 프로메테우스의 우화가 그것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 거친 단계에서부터 고려하여 그것이 극복할 수 없이 곤란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불만큼 일반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몇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대지에서 불을 본 일도 없이 황야를 헤메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을 뿜고 있는 화산, 벼락에 의해서 타오르는 숲이 인간에게 인정받았다고 하자.    즉, 거칠고 불순한 계절과 마주보며 헐벗은 채로 참아온 사람이 거기서 몸을 녹이기 위해서 바로 달려간 것일까? 차라리 도망간 것이 아닐까? 불의 광경은 길들여진 생활에 의해서 거기서 익숙해진 동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동물에겐 공포를 준다. 자연이 제공한 불의 고마운 효용을 경험한 후에 인간은 어떻게 불을 보유한 것일까?    한 번 꺼져 버리면 인간은 어떻게 하여 그것을 다시 붙일 수 있었을까? 만일 마른 두 쪽의 나무가 처음으로 원시인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어떠한 경험이 그것을 재빠르게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마찰시켜서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일까?]    2    반대로 만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설명이 원시의 정신에 의한 발견의 이유를 명백하게 하는 데 불충분하다면, 보기에 제아무리 대담한 정신분석적인 설명도 결국은 진실의 심리학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첫째로 마찰은 바로 性的인 경험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고전적인 정신분석에 의해서 모아진 심리학적 기록에 눈을 돌리면 이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둘째로 만일 열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인상의 특수한 정신분석의 여러 가지 보고를 잘 체계화하려고 하면, 마찰에 의해서 불을 낳는 시도가 아주 내적인 경험에 의해서 나타나게 됨을 확신할 수 있다.    불의 현상과 그 재생산 사이의 回路가 가장 짧아지는 것은 이 방향에 있어서이다. 사람은 불의 객관적인 재생산에 있어서의 최초의 과학적 가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知的 철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늠름한 熱愛者이며 신들의 질투는 복수에 몸을 태우는 자의 복수이다.    이 정신분적인 고찰을 정식화해 버리면 바로 많은 전설과 관습을 쉽게 설명할 수가 있다. 합리적 설명의 무의식 속에 흔입되어 있는 표현이 새로운 빛 속에서 해명될 것이다. 인류의 기원의 연구에 지극히 날카로운 심리학적 직관을 가지고 온 막스 뮐러는 심오한 언어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정신분석적인 직관 가까이 그것을 식별함이 없이 지나간다(原註2).    [불에 대해서는 말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여기에 그 첫 번째의 것이 있다. [불은 나무 두 조각의 자식이다.] 어째서 일까? 이 발생론적 견해에 현혹되어 있는 것은 누구인가? 원시인인가 아니면 막스 뮐러인가. 이와 같은 영상은 어느 쪽에서 더 명석해질 것인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명백한 것일까, 아니면 주관적인 것일까? 그것을 밝히는 경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조각의 나무를 비벼댄다는 객관적 경험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육체를 불과 함께 태워버리는 더 강하고 애정이 깃든 비범의 내밀한 경험인가. 불이 나무의 자식임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족하다.    비밀로 남은 사랑의 과실인 이 불순한 불이 거의 그 발단에 있어서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새겨내고 있는데 놀랄 것인가? 막스 뮐러의 표현은 이 점에 대해서 잘 밝히고 있다. 원시의 불에 대해서 말하는 제 2의 사항은 하는 것이다. 가 이처럼 묘하고 완전하게 표시된 젓은 없었다.    만일 당신에게 불이 결여될 경우 그 좌절감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그 불이 당신의 내부에 멈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불을 낳는다면 이번에는 스핑크스가 당신을 태워버릴 것이다. 사랑이란 옮기며 전달되는 불에 지나지 않고, 불이란 농락해야만 할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막스 뮐러는 당연하게도 프로이트 시대의 심리학적 혁명이 가지고 온 새로운 지식을 이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몇 개의 모순이 그의 언어학적 명제 속에까지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원시인이 불을 思惟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였을 때, 무엇이 일어나야만 했던가?] 그는 불이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서 탕진자이거나 조명자라고 거기에 이름을 부여할 수가 있다.    여기서 막스 뮐러의 설명에 한한 경우, 사람들은 원시에 있어서 이라고 생각하고 닿기 전에 항상 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을 이름 붙이는 것은, 결국 시각적인 여러 가지 속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막스 뮐러의 말에 의하면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이라고 불리워진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간접적이고 불규칙한 일련의 현상에 의한 이 호칭은 당연히 아주 인위적으로 보일 것이다. 한데 반대로 정신분석적 설명은 모든 것을 다시 세운다. 그렇다. 불은 아그니(Ag¬nis)이고 아질(Ag¬ile)이다.    그러나 원시적이고 신속한 것, 그것이야말로 태어나게 되는 현상 이전의 원인이고, 더 내밀한 애무를 모방하여 도랑 속에 절굿공이를 처박는 손이다. 불은 나무의 자식이기 이전에 인간의 자식이다.    3    先史의 인간의 심리학을 밝히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방법은 아직도 존재해 있는 미개인을 연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궁극에 있어 더 완전하게 적합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라는 것에 대한 다른 여러 가지 예가 존재한다. 사실 적절한 객관적 태도를 취하는 일의 곤란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현상을 고찰함으로써 족하다.    현상의 의 측면은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그 객관화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라는 것에 대응하는 것은 무지가 아니고 오류이며, 그 오류는 주관적 결함에 의해서 그 짐이 과중해진 오류이다.    의 심리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본질적으로 새로운 과학적 인식을 고찰하고 다음에 유효한 과학적 발견의 방법에 무지하고 잘못 되어진 비과학적인 정신의 여러 가지 반발을 추구해 나가기만 하면 족하다.    18세기에 있어서의 電氣의 과학은 이 점에 있어 우리에게 심리학적 고찰의 끝없는 광맥이 될 것이다. 특히 은 정신분석적 관심을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현상의 위치에까지 내려진 보통 불보다 아마도 훨씬 이다.    그것은 신비적이기 때문에 명백하게 성적이다. 우리가 명료하게 제 1의 적인 성적 특성을 지적한 마찰의 관념에 관해서 우리는 불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이 전기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샤를르 바비코는 1753년에 《원소적 불의 광경 또는 실험적 전기론》이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 속에는 마찰에 의해서 불이 생기는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章에서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정신분석적 명제의 하나의 (換位命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찰이 전기의 원인인 점에서 라비코는 마찰의 문제에 관해서 의 전개를 시도한다.    [기분 좋은 마찰은 우리가 精液이라고 부르는 精氣的物質을 포함한 물질의 통과와 탈출을 막는 공기의 정기로 된 부분을 전개한다. 이 전기를 일으키는 마찰은 우리의 내부에서 희박해지고 불의 精氣가 마찰된 장소에 축적됨에 따라 어느 감각, 즉 불의 정기의 끝의 섬세함에 의해 간지러움을 일으킨다.    이때 그 液은 분위기 속에 축적된 불의 정기의 경쾌함에 못 견디어 그 자리를 떠나, 또한 하나의 분위기에 지나지 않는 子宮속에 퍼붓는다. 膣은 이 자궁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는 종합적 貯水槽로 통하는 관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性器 안에는 성감부분이 있다. 이 부분과 여성과의 연결은 남성의 성감부분과 남성의 관계와 같다.    이 부분도 비슷한 희박한 기능, 간지러움, 감각 등을 받는다. 이 同一部分도 또 마찰작용에 참여한다. 불의 정기의 첨단은 여성의 성기 안에서 더욱더 감각적이 된다........여성의 성기는 卵巢 속에 있는 조그만 人間球體를 보관하는 것이다. 이 조그만 구체는 타성적이고 생기가 없는 전기를 일으키는 물질이다.    즉, 그것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초나 또는 생명의 불꽃을 받고자 대기하는 알, 과일의 씨, 종자식물의 씨 같은 것이다. 결국 그것은 불의 정기를 기다리는 불쏘시개나 성냥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이미 독자의 인내심을 지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넓은 범위에 걸쳐 그 수도 무수한 같은 원본이 실로 명확하게 우리에게 에 열중하려는 그 정신의 밀도 있는 기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신뢰의 중심이 결코 객관적 실험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찰되어 타오르는 전기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고 생식행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다.    마찰에 무의식의 성적인 倍振動이 결여될 때, 그 배진동이 윤기 없는 단단한 영혼 속에서 활홀케 하는 공명을 일으키지 않을 때, 마찰작용은 순수한 역학적인 장소로 돌아가 그 설명력을 상실한다. 이 관점에서 아마도 熱動力學理論이 맞부딪친 오랜 저항을 精神分析的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적인 표상에 있어서는 매우 명석하고 사실, 실증적인 정신에 있어서는 매우 만족할 만한 이 이론도 前科學的精神에 있어서는 깊이가 없는, 즉 무의식의 충족이 없다고 이해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일련의 서간형식으로 와트슨(G. Watson)에게 보낸 《전기의 원인에 대한 試論》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자기의 환멸을 표명하고 있다. [나는 불이 마찰에 의해서 생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이론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나에게는 물이 펌프에 의해서 생긴다는 주장과 똑같아 보인다.]  드 샤틀레 부인으로 말하면 그녀는 이 명제 속에서 조금 계몽되는 점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불은 하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가장 맹렬한 불이 외관상은 가장 냉정한 육체가 부딪침으로써 순간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야말로 의심없이 대자연의 최대의 기적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와 같이 근대 에네르기론이 가르치는 바에 기초를 두고, 부싯돌의 粒子의 충돌이 그 灼熱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즉시 이해하는 과학정신에 있어서는 자명한 것의 하나인 사실도, 드 샤틀레 부인 같은 前科學的인 정신에 있어서는 불가해한 대상이 된다. 그녀는 실체론적 설명,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감추는 것이고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그것을 생각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4    만일 독자가 완고한 공리주의로부터 자기를 해방하고 선사의 인간은 불행과 필요성에 싫건 좋건 얽매어 있다고 상상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명제는 그다지 대담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여행자가 우리에게 미개인의 무관심성을 가볍게 말한다. 우리는 그 점에도 불구하고 동굴에서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 관한 생활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소름이 끼친다.    아마도 우리의 조상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에 민감하지 않았기에 더욱 기쁨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고 자신의 행복을 더 의식했을 것이다. 육체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뜨거운 기분 좋은 행복이 원초적인 경험에 가치를 부여했는지 모른다.    마른나무의 오목한 곳에 몽둥이를 넣어 그것이 타도록 하려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노동은 그 몽상이 아주 성적인 하나의 存在者에 있어서는 매우 감미로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이 노래하는 것을 배운 것도 아마 이 우아한 노동 속에서일 것이다. 하여튼 그것은 분명히 율동적인 노동이고 일하는 자의 율동에 그에게 기분 좋은 여러 가지의 메아리를 가지고 오는 노동이다.    마찰하는 팔, 서로 부딪치는 나무, 노래하는 소리, 모든 것이 같은 조화, 같은 율동적인 機能亢進 속에 통일되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희망, 그 가 알려져 있는 하나의 목적에 집중한다. 사람은 마찰하는 일에 관계하기가 무섭게, 감미로운 객관적인 따뜻함을 경험하는 동시에 기분 좋은 행동의 뜨거운 인상을 가질 것이다.    리듬은 서로가 서로를 昻揚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유도하고 자기유도에 의해서 지속된다. 만일 우리가 진동하는 것에만 을 주라고 우리에게 충고하는 핀하이로 도스 산토스씨의 리듬분석의 심리학적 여러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율동적인 노동 속에 발생하는 활력에 넘치는 다이나미즘, 조화있는 심리작용의 가치를 이해할 것이다.    향연에 가담하는 것은 바로 존재 전체이다. 원시인들이 처음에 그 자신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 자기 의식을 되찾는 것은 고통 속에서보다는 향연 속에서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방법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이따금 더 敎示的이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마찰에 의해서 불을 일으키는 원시적인 방법을 그 신선학과 그 공감에 도취되기 위해서는, 이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르지니와 생각에 잠긴 폴은 그의 친구에게 조금 자란 캐비지야자의 꼭대기에 있는 을 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도끼로도 찍기가 힘든데 폴은 칼도 갖고 있지 않다. 폴은 나무뿌리를 태워버리고자 하나 부싯돌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이 섬은 바위로 덮여 있으면서도 부싯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서 버려져 있음을 나타내는 이 생각과 새로운 생각에 넘치는 간결한 문장에 유의한다. 이 문장은 정신분석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결심, 즉 흑인들의 방법에 의지하는 필요를 나타내고 있다. 이 방법은 그 적용에 앞서 의외로 놀랄만한 간단한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原註3).    [돌의 뾰족한 모서리로 그는 잘 마른 하나의 나뭇가지에 구멍을 뚫고 그 가지를 그의 두 다리 밑에 꽉 누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돌의 예리한 날이 된 부분으로 똑같이 메마른 質이 다른 나뭇가지의 끝을 뾰족하게 하여, 그 끝을 그가 발로 밟고 있는 나무의 조그만 구멍에 처박고, 초콜렛에 거품을 일게 하기 위해서 젓는 棒을 돌리듯 그 봉을 두 손 사이에 끼고 재빨리 돌렸다.    그러자 바로 가지가 서로 닿는 곳에서 연기와 불씨가 나타났다. 그는 마른 잎과 잔가지를 모아 캐비지야자의 나무뿌리 아래서 불을 피웠다. 이윽고 그 나무는 큰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또 그 불은 새싹을 쌓고 있는 목질의 가시가 많은 긴 잎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비르지니와 그는 새싹의 일부를 날로 먹고 나머지를 잿속에 묻어 구워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것이나 맛이 있다고 느꼈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의 두 조각의 나무를 권한 점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시적 심성에 있어서 이 차이는 성적인 차원이다.    《아르카디아 기행》 속에서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는 전혀 아무런 이유 없이 송악(liere)과 월계수(laurier)를 열거할 것이다. 마찰봉과 초콜렛에 거품을 일게 하는 얼레봉의 비교가 이 과학적인 주장에 눌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언제나 읽고 있던 놀레수도사의 속에서 되찾게 된다.    이 꿈과 독서의 혼돈은 그것만으로도 이성화의 징후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이 작가는 자기의 이야기의 부조리를 눈치챈 것 같지 않다. 도취시키는 공상이 그를 싣고 가고 그의 무의식은 서로 사랑하는 감미로운 신뢰 속에서 고통 없이 커지는 태초의 불의 기쁨을 되찾는다.    마찰운동이 충분히 기분 좋게 계속되는 것이라면 활발한 마찰운동의 가 을 일으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간단할 것이다. 심한 가속도가 가라앉고, 다른 리듬이 준비되고, 일하는 자의 얼굴에 미소와 편안함이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기쁨은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특수한 감정의 힘의 표시이다. 어느 주부들의 지나치게 섬세한 마음씀 속에서도 그 충분한 설명을 찾아낼 수 없는 마찰, 닦고, 갈고, 윤을 내는 일의 기쁨도 이처럼 설명되는 것이다. 발자크가 《고브섹크》 속에서 노처녀들의 가 가장 윤기로 둘러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청결함은 불결의 하나의 형식이다.    어느 정신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초과학적인 이론 속에서 아주 몽상 속에 있는 고독한 사랑의 상태를 넘어서 육체적인 상호간의 사랑의 단계에 이르는 마찰의 을 주저함이 없이 강조한다. 그의 저작이 수없이 판을 거듭한 J•B•로비네는 176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빛을 주기 위해서 닦여진 돌은 자기 속에서 무엇을 구하는가를 이해한다.    고로 그 빛은 겸양의 표시이다......나는 광석이 선행의 으뜸가는 그리고 최대의 보수인 달콤한 충족을 享有함이 없이는, 스스로의 미덕에 의해서 우리에게 그처럼 많은 좋은 일을 해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는 매우 부조리한 의견이라도 깊이 뿌리박은 심리적 원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때로는 로비네는 을 두려워하여 글을 멈춘다. 정신분석가라면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긴장은 이미 아주 명백하다. 긴장이야말로 해명되어져야만 하는 심리적 실재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여러 가지 결과에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과학사가 하는 것처럼 그것을 묵살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다.    요약하면 우리는 구스타프 칼 융이 한 것처럼 일체의 원시적인 활동 속에 리비도의 구성요소를 체계적으로 탐구하기를 제안한다. 실제 리비도가 승화되는 것은 예술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행위적 인간의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어떤 사람이 인간을 손과 언어로써 규정지을 때,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잘 그것을 표명할 것이다.    그러나 동작이 동작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손은 목소리가 노래하는 기관인 것처럼 애무하는 기관이다. 처음 애무와 노동은 서로 연결된 것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노동은 상대적으로 기분 좋은 노동이다. 어느 여행자는 우리에게 두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노동에 종사함으로써 비로소 물건을 연마해서 형성하는 미개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완성시키는 도구가 부드러우면 부드러울수록 그 연마하는 일은 더욱 아름답고 섬세한 것이 된다. 좀 역설 같지만 우리는 새겨진 돌의 나이를, 애무를 받은 돌의 나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난폭한 사람은 부싯돌을 부숴버린다. 그는 그것을 잘 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부싯돌을 잘 쓰는 사람은 부싯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여성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을 사랑한다.    우리가 잘 닦은 부싯돌의 날을 응시할 때, 말할 수 없이 멋지게 생긴 그 잘리는 면은 힘의 에 의해서 억제되고 함축이 있는 방향지워진 힘에 의해서, 즉 힘에 의해서 얻어졌다는 생각을 누를 수가 없다.    닦여진 돌과 더불어 우리는 간헐적인 애무로부터 계속적인 애무로, 기분 좋게 감싸는 율동적이고 매혹적인 운동으로 옮겨간다. 모든 경우에 이처럼 힘차게 일하는 사람은 추억과 희망의 양자에 의해서 힘을 얻는다. 고로 우리는 그의 몽상의 비밀을 감정의 여러 가지 힘의 영역에서 구해야만 한다.    5    축제의 신호는 언제나 마찰에 의한 불의 생산과 연결된다. 중세에는 매우 유명하고 미개한 부족들에 거의 보급되어 있는 불의 축제 속에서도 때로는 그 始原의 관습에의 回歸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불의 이 그 숭배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A•모오리에 의하면 게르마니아 지방에서는 노스포이에르 또는 노드픠르라는 두 개의 나무쪽을 비빔으로써 불을 붙이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샤토브리앙은 나체쯔 지방에서 행해지는 에 관한 기술을 길게 하고 있다. 그 축제의 전날 밤 1년 동안 계속 타던 불은 꺼지도록 내버려둔다.    새벽이 되기 전에 사제는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우면서 두 개의 나무쪽을 천천히 마찰시킨다. 새해의 태양이 나타나면 사제는 그 운동의 속도를 빨리 한다. [대사제가 성스러운 외침을 지르는 순간 불은 마찰에 의해 열기 띤 나무에 붙는다. 유황을 칠한 불씨가 불을 받는다. 주술사가 갈대굴레에 불을 옳긴다. 그러자 불꽃은 그 굴레를 둘러싸고 나선형으로 타오른다.    참나무 껍질이 제단 위에서 불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불이 마을 집들의 꺼진 화로에 새로운 불씨를 준다.](原註4) 이와 같이 하여 나체쯔 지방에 있어서의 태양신 숭배의 제사를 겸한 이 의식은 특히 불의 의식이다. 그 불씨는 씨로서의 완전한 힘을 갖기 위해서, 불을 일으키는 마찰도구에서 태어난 그 최초의 강렬함으로써 잡아야 한다. 여기서 마찰하는 방법은 자연의 방법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인간이 거기에 자기의 독자적인 자연을 통해서 도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 번 더 되풀이하자. 진실로 불은 천계로부터 훔쳐오기 전에 우리의 내부에서 발견된 것이다.    프레이저는 마찰에 의해서 점화된 祝火에 매우 많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 벨르텐 제사의 스코틀랜드의 불은 혹은 에 의해 불태워진다(原註5). [두 개의 나무쪽을 심하게 비벼댐으로써 불이 생겨나며, 불씨가 흩어지면 그 틈을 타서 참나무 고목에서 자라는 매우 잘 타는 버섯의 일종을 거기에 댄다.    이 불은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것처럼 보이고 여러 가지 공덕이 나타난다.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나 가축을 위해 마귀를 제거하는 힘이며, 염병에 대한 최량의 약이라고 믿는다.] 프레이저가 고 말했을 때 그는 도대체 어떠한 출현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부터 프레이저의 모든 설명체계가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프레이저는 실제로 그의 설명의 모티브를 유용성에 둔다. 그러기 때문에 祝火로부터 아마밭•밀밭•보리밭들을 풍부하게 하는 재가 나오는 것이다.    이 최초의 입증은 탄산염과 또 다른 화학비료의 효용을 간단히 믿고 있는 오늘날의 독자를 그릇되게 하는 일종의 무의식의 이성화를 도입한다. 그러나 깊고 모호한 가치로 빠지는 것을 더 가까이서 보자. 신불에서 얻은 이 재는 수확을 가져오게 될 대지에 기여할 뿐아니라 동물을 살찌게 하는 사료에도 혼합된다.    또 때로는 그것은 가축을 늘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결국 그 습관의 심리학적 원리가 명백해진다. 동물이 살찌건 전답이 비옥해지건 명백한 유용성 저쪽에는 더 내밀의 꿈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시없는 性的인 형식을 취한 다산성의 꿈인 것이다. 축화의 재는 동물과 전답들을 수태시킨다.    이 재들은 여성들을 수태시킨다. 객관적 귀납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는 것은 불꽃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다. 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은 기분 좋음이라는 설명에 양보해야 되며, 합리적 설명은 정신분석적인 설명에 양보해야 된다는 것을 거듭 말해둔다.    우리들은 그러기를 제안하지만 그 중점이 기분 좋은 가치에 놓일 때 설사 불이 후에 할지라도 그것은 그 준비 속에서 이미 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나중보다는 그 전이 더 감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만일 미개인이 축화, 즉 始原의 불은 모든 종류의 효력을 갖고 힘과 건강을 준다고 믿더라도, 그것은 그 불이 번쩍이고 그의 여러 가지 욕망을 충족하려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사는 인간의 행복, 그 內密의 그리고 거의 이겨낼 수 없는 힘을 그가 체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더 밀고 나가서 그 모든 세부에 있어서 프레이저의 설명을 역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이저의 경우 축화는 식물의, 특히 숲속 식물의 신성한 죽음과 관계가 있는 제사로 되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식물의 신성이 미개의 영혼 가운데서 이다지도 큰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나무의 최초의 기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모의 보잘것없는 과일인가? 아니면 그것은 불이 아닌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생긴다. 즉, 프레이저가 믿고 있듯 그들은 나무를 예배하고자 불을 일으키는가, 또는 보다 깊은 애니미즘적인 설명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불을 숭배하고자 나무를 태우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이 후자의 해석이 프레이저의 해석에서는 설명되지 않은 채로 있는 에 관한 세부에 대해서 많은 빛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옛날부터의 관습으로 이따금 젊은 남녀가 함께 또는 그 마을에서 막 결혼한 남자에 의해 祝火의 불을 붙이도록 권하는 것일까?    프레이저가 우리에게 위를 뛰어넘는 젊은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 열거한 세 개의 동기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명백하게 압도적인 무엇은 없는 것일까? 왜 갓 결혼한 마을의 새색시가 불 위를 뛰어넘어야 하는가? 왜 아일랜드에서는 왜 어떤 젊은이들은     아주 다른 신뢰성을 기초잡기 위해서 그들은 개관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내밀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브라질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도대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무모한 일을 하도록 하는 근본적 경험은 무엇일까? 왜 아일랜드 사람들은     게다가 레크(Lech)계곡의 다음과 같은 전설도 역시 명확하다. [젊은 남자와 아가씨가 함께 夏至 때 불을 뛰어넘는 순간 불에 타지 않는다면 그 아가씨는 일 년 이내에는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즉, 불꽃이 그녀에 닿지 않아 잉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 몸을 태움이 없이 불과 희롱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프레이저는 이 후자의 실례에 대해서 을 연결할 수 있는지 어떤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에게 되는대로 참조를 늘어놓은 책에서 이 불의 향연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는 북부 인도에 있어서의 불의 축제, 축제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우리에게 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 최후의 평은 설명방법의 어떤 단절을 나타낸다. 우리는 프레이저의 이론 속에서 해덥을 얻지 못하지만 그러나 불의 원초적 性化作用이라는 사고방식에 의해서 해명되는 문제를 많이 들 수가 있다. 사회학적 설명의 불충분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카알 융의 리비도를 병행해서 읽는 것이 좋다.    와 같이 극도로 명확한 점에 관해서도 정신분석가의 통찰은 결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또 사람들은 융의 책 속에서 마찰과 원초적인 불의 성적인 성격에 관한 우리의 이론을 지지하는 많은 논증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들 여러 논증을 체계화하고, 거기에 깊이는 없어도 객관적 인식과 가까운 심성의 고뇌에서 끄집어낸 여러 가지 기록을 덧붙인 데 지나지 않는다.    6  《불의 기원에 관한 신화》라는 제목이 붙은 프레이저의 특수한 책은 페이지마다 정신분석이 실제에 있어서 불필요한 정도로 명백한 성적 흔적을 암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시도하는 우리의 목적은 근대의 心性을 연구하는 데 있으므로 우리는 프레이저에 의해 연구된 미개의 심성을 상세히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로 우리는 사회학자의 해석을 정신분석적 의미로 정정하는 필요성을 나타내고자 두세 개의 예를 들기로 한다.    이따금 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의 특성인 붉은 표지를 꼬리에 단 또 한 마리의 조그만 새이다. 어떤 오스트레일리아의 부족에 있어서는 그 전설이 매우 불쾌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는 차라리 그 새가 불을 훔치는 데 성공한 것은 그것이 유쾌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는지도 모른다.    [귀머거리의 殺母蛇가 옛날에 불을 독점했었다. 그는 자기 몸속에 그 불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새나 모두 그것을 훔치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조그만 매가 갑자기 날아와 아주 재미있는 광대놀이를 하자, 그 살모사는 그 찡그린 얼굴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어 웃고 말았다. 이때에 불은 그에게서 도망쳐 마침내 共有의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왕왕 불의 전설은 방종한 사랑의 전설이었다. 불은 무수한 농담과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불은 맞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창조적인 모든 동물에 대해서 산재해 있다. 불을 훔치는 것은 대부분 새, 즉 굴뚝새•울새•벌새 등 조그만 동물들이다. 때로는 그것은 꼬리 끝으로 불을 나르는 토끼•오소리, 또는 여우일 때도 있다.    다른 곳에서는 여자들이 서로 때리고 싸우는 일도 있는데 불은 또     수없이 불의 창조는 심한 힘에 연결되어 있다. 즉, 불은 내적인 분노가 타오르는 손에 의해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하나의 객관적 발견의 근원으로서 감정성을 강하게 띤 심리상태에 언제나 부딪친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때 우리는 몇 종류의 불을, 즉 온화한 불, 음험한 불, 반역적인 불, 난폭한 불이라는 구별을 지어 그것을 욕망과 정열의 기초 심리학에 따라서 특징지을 수가 있다.    어느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은 어떤 토템 신앙의 동물인 유로(Euro)와 같은 동물이 그 몸 속에 불을 넣고 다닌다는 것을 되새기고 있다. 한 남자가 그것을 죽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 동물이 불을 만드는가, 또는 그것이 어디서 오는가를 알기 위해서 몸을 주의 깊게 조사했다. 그리고 매우 긴 수놈의 생식기를 뜯어내어 그것을 둘로 잘라 거기에 붉은 불이 있는 것을 알아내었다.]    만일 어느 세대나 그것을 믿을만한 내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와 같은 전설이 어떻게 계승되었을까?    다른 부족에 있어서는 [남자들은 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여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숲속으로 사냥을 나간 사이에 여자들은 자기들이 음식물을 익혀서 자기들끼리 먹었다. 여자들이 자기의 식사를 마쳤을 때 그녀들은 멀리서 남자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불에 대해서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빨리 불씨가 남아 있는 재를 긁어모아 남자들이 그것을 볼 수가 없도록 자기들의 음부에 감추었다. 남자들이 돌아와 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나 여자들은 불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연구할 경우 사람들은 을, 그리고 바로 그때 반대로 정신분석적 설명이 직접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에 있어서는 , 을 많은 신화가 말하고 있듯이, 몸의 내부에 감출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명료한 사실일 것이다.    또 사람들이 이처럼 쉽게 거짓말을 하고 어떠한 명백한 증거에도 거역하여 가장 내적인 욕구를 부정하면서 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의 평면에 있어서라는 것도 동등하게 옳을 것이다.    남미의 신화에서는 어떤 영웅이 불을 얻고자, 한 여자를 추적한다. [그는 그녀를 달려가서 붙잡았다. 그는 그녀에게 만일 네가 나에게 불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면 너를 약탈하겠다고 말했다. 몇 마디의 구실을 붙인 후에 여자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여자는 땅에 누워 두 발을 벌리고 배 위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불덩어리가 본래 달려 있는 수로를 통해 大地로 굴러 나왔다. 그것은 오늘날 알고 있는 불은 아니다. 그것은 타고 있지도 않았고 물건을 익히지도 못했다.    그러한 특성은 여자가 그것을 놓았던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지제코는 그것을 본래의 상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태울 수 있는 나무껍질•과일•붉은 후추의 열매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들과 여자의 불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불을 만든 것이다.]    이 例는 우리에게 옮겨가는 명석한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이 이동은 실재론적 설명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서 비유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주 반대로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이론의 착상과 일치하여 주관적 기원의 비유로부터 객관적 실재로 가는 것이다.    사랑의 불과 후추의 불이 결합하여 마침내 마른 풀을 태우는 것이다. 불의 발견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不條理性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그 실재론적인 설명의 부족함에 대해 놀라지 않고서는 프레이저의 풍부하고 매혹적인 그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연구되어 있는 전설의 수는 아마 1천 개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다만 성과 연결된 것은 2,3개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로 말하면 그 바닥에 있는 감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객관적 설명을 주기 위한 목적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는 토끼에 의한 불의 도난은 그 꼬리의 짙은 갈색 또는 흑색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객관적 細部에 사로잡혀 있는 이와 같은 설명은 감정적 관심의 원초성을 고려에 넣지 않게 된다.    원초의 현상학이란 감정의 현상학이다. 그것은 몽상에 의해서 투사되어 있는 환상으로부터 객관적 존재를, 욕망으로부터 이미지를, 신체적 경험으로부터 물질적 경험을, 사랑으로부터 불을 창조한 것이다.    7    다소 원초성의 영속적인 경험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낭만파의 사람들은 그것을 추호도 의심함이 없이 성적인 가치를 부여받은 불의 주제를 재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폰 슈베르트(G.H. von Schubert)는 불의 정신분석에 의해서만 해명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原註6).    [우정이 우리에게 사랑을 길러주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몸을 서로 비빔으로써 향수(열기)가 태어나고 사랑(불꽃)이 솟는다.] 향수란 보금자리의 따뜻한 추억이며, 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지는 사랑의 추억이라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보금자리나 잠자리에서의 詩想은 다른 어떠한 근원도 갖고 있지 않다. 수풀 근처의 보금자리 속에서 얻어진 어떠한 객관적인 인상도 보금자리의 쾌적함, 감미로움, 따뜻함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이 수많은 형용사의 풍부함을 그토록까지 풍부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연의 따뜻함을 마치 2배로 하는 것 같은 인간에 의해 따뜻해진 인간의 추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자기들의 조그만 보금자리에 대해서 말하는 연인들을 마음에 그릴 수 없을 것이다. 보드랍고, 따뜻한 느낌은 이와 같이 행복의 의식의 근원에 있는 것이다. 더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행복의 의식의 기원이라 말할 수 있다.    노발리스의 시상은 모든 것은 우리가 만일 거기에 불의 정신분석을 가하려 한다면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詩란 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다. 노발리스에 있어서 이야기란 언제고 다시 우주발생론이다.    그것은 태어나는 영혼과 세계와의 공시적인 존재인다. 이야기란 (原註7)라고 그는 말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데서 우리는 그의 명백한 양극성 속에 불과 사랑을 낳으려 하는 을 본다.    즉,       이 빛은 내부의 빛이다. 애무당한 것은 행복으로 빛난다. 애무란 상징화된 마찰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장면은 계속된다.        그러자 그는 동의는 했으나,                만일 이 새야말로 로, 이 불사조는 순간 가라앉은 욕망처럼 잿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라고 덧붙인다면, 우리는 이 정경이 불과 사랑의 이중의 原初性에 의해서 특징지워짐을 충분히 알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불을 붙이는 것이라면 우리가 불을 붙일 때 그것은 우리가 사랑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정확한 정신분석적 영상이라면 노발리스로 하여금 라고 말하게 했을 것이다.    하여튼 (原註8)    만일 우리가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원시의 불의 직관을 깎아낸다면 모든 시상과 모든 꿈은 동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노발리스의 경우는 거기에서 특정한 콤플렉스의 형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특징적이다.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는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침전물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명칭 앞에는 型이 없는 흐린 溶液管이 있다. 명칭 뒤에는 結晶을 액체 밑에서 볼 수 있다. 노발리스 콤플렉스는 이때 마찰에 의해서, 즉 서로 나누는 열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불을 향한 추진력을 종합까지 한다. 이 추진력은 그 원초성에 있어서 불의 先史的인 정복을 재구성할 것이다.    노발리스 콤플렉스는 항상 빛의 순수하게 시각적인 지식을 능가하고 있는 내부의 열의 의식에 의해 특정지워진다. 그것은 열감각의 충족과 열을 내는 행복성의 깊은 의식 위에 기초한다. 열은 하나의 재산이며 하나의 소유이다.    그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며, 당연히 서로 접하고, 서로 녹기에 어울리는, 융화되고, 선택된 것에만 주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희롱하고 웃는다. 다만 열만이 침투한다. 실레겔의 편지 속에서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데 [당신은 나의 얘기 속에 빛과 그늘의 희롱에 대한 나의 반감과 명확하고도 뜨겁고 또한 침투적인 에테르(Ether)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것, 사물의 까지, 존재의 내부에까지 뚫고 들어가려는 이 희망은 내부의 심오한 열에, 직관에 하나의 牽引作用을 한다. 눈이 닿지 않는 곳과 손이 닿지 않는 곳, 거기에 열은 넌지시 스며든다. 내부에서의 이 교감, 이 열의 공감은 노발리스의 작품 속에서 산의 따뜻함과 동굴과 광산에서의 下降에 있어서 그 상징을 되찾을 것이다.    열이 확산되고 균등해지고 꿈의 윤곽처럼 몽롱해지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노디에(Nodier)가 지극히 절실하게 인정한 것처럼 지옥에의 타락의 어떠한 기술도 꿈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原註9). 노발리스는 다른 것들이 하늘의 차디차고 찬란한 확산을 꿈꾸듯 대지의 뜨거운 내부를 꿈꾸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광부는 인 것이다. 노발리스는 빛의 放射에서보다는 차라리 집중된 열 속에서 산다. 얼마나 많이 그는 로서 명상을 한 것인가! 그는 광산의 기사였기 때문에 광물의 시인은 아니다. 그는 시인이기는 했으나 땅속의 부름소리에 복종하기 위해서, 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기사가 된 것이다.    그가 말하듯 광부는 태세를 갖춘 심오한 영웅이다. 광부는 대지를 노래한다. [그야말로 대지와 맺고 다정스럽게 정을 나누고 새 부인을 그리워하는 뜨거운 생각으로 대지를 휩쓴다.] 대지는 어린이의 무의식의 마음속, 어머니 가슴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어머니의 유방이다.    그 똑같은 열이 암석과 광부의 마음에 생기를 준다. [사람들은, 광부는 그를 대지를 파고 나가도록 하는 대지의 내적인 불을 그의 혈맥 속에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中心에는 싹이 있다. 즉, 중심에는 낳도록 하는 불이 있다. 싹튼 것은 타고, 타는 것은 싹트는 것이다. [나는 불속에서 자란 꽃이 필요하다.    亞鉛이여! 하고 왕(原註10)은 외쳤다. 꽃을 달라......꽃 지배인이 群臣 속에서 나와 불꽃이 가득 든 분을 가지고 와 찬란하게 빛나는 種粉을 그속에 뿌렸다. 이윽고 꽃들이 솟아나왔다......]    아마도 실증적인 정신의 소유자라면 여기서 인 해석을 전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실증주의자는 우리에게 亞鉛에서의 반짝이는 불꽃이 공중에 그 산화물의 흰, 눈부실 정도의 엷은 조각이 분출하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그는 산화작용의 공식을 쓸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현상의 화학적 원인을 발견하면서도 우리를 결코 영상의 중심에 노발리스적 콤플렉스의 핵심에 동반하지는 않는다. 이 해석은 시인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종류의 이미지가 우위를 차지하는가에 대한 분류에 대해서는 우리를 기만하기라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해석에 따르면 노발리스와 같은 시인에 있어서는 느끼는 욕구가 보는 욕구를 압도하고 있는 것, 그리고 괴테의 빛에 앞서, 존재의 모든 자질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모호하고 부드러운 열이 놓여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도 없이 노발리스의 작품 속에서는 더 완화된 면도 있다. 이따금 사랑은 폰 슈베르트의 의미 그 자체에 있어서의 향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열의 특성은 사라짐이 없이 멈추어 있다. 당신들은 그래도 노발리스는 의 시인이고, 파멸의 극에서 죽음의 그늘 속에 빠지는 일이 없는 추억의 담보로서 던져진 망각된 시인이라고 반대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의 심층에까지 내려가 시인과 함께 원초의 꿈을 찾아보라. 그러면 당신은 명확하게 조그만 파란 꽃은 붉다는 진리를 볼 것이다.      1. 오귀스트 기요므 실레겔(Auguste-Guillaume de Schlegel)의 《프랑스語 作品集》  2. 막스 뮐러(F.Max Muller)의 《宗敎의 起源과 發展》  3.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Bernardin de Saint-pierre)의 《自然硏究》 34章  4.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美國紀行》 P.123-124  5. 프레이저(J.G, Frazer)의 《金葉枝 제 3권 p.474  6. 알베르 베겡(Albert Beguin)에 의한 引用 《낭만적 혼과 꿈》 제 2권 p.191  7. 노발리스(Novalis)의 《헨리 오프터딩겐》 p.241, p.191의 註  8. 노발리스의 前揭書 p.237  9. 노디에(Charles Nodier)의 《스마라Smarra》 중 제 2의 序文 참조  10. 노발리스의 《헨리 오크터딩겐》 p.227    제 4장 性化된 불    1  만일 불의 정복이 본원적으로 性的 이라면, 불은 매우 오랫동안 아주 강렬하게 성적인 것으로 존속해 왔음에 대해서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에는 불에 관한 객관적 연구를 극도로 막는 가치부여작용의 주제가 있다.    따라서 다음 章에서 불의 化學을 취급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의 필요성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가 나타내고자 하는 성적인 가치부여작용은 감추어져 있을 경우도 있고, 또는 나타나 있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신분석에 대해서 가장 거역하는 것은 은밀하고 난해한 여러 가지 가치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장 활동적이기도 하다. 명백한, 혹은 알려진 여러 가치라는 것은 순식간에 축소되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무의식의 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이 저항이 지극히 미약하여 우리가 그 뚜렷한 과오를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고, 독자가 웃으면서 스스로 還元한다는 실례에서 시작하자.    로비네의 의견(原註1)으로는 원소적인 불은 동류의 것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보통의 경우는 주의를 끄는 일없이 할 수 있는 다 낡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로비네는 거기에 강한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고 생각한다. 따라서 불은 어떠한 힘도 그러한 것처럼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不姙에 사로잡힌다. 새로운 불의 축제, 불을 바꾸는 불 등의 축제와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서 어떠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듯한데, 그때부터 로비네는 몽상 속에서 불의 發生論적 필연성을 재발견한다.    만일 불이 자기의 자연의 생명에 몸 맡겨져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것이 양육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동물이나 식물처럼 나이가 들면 죽어 버린다.    물론 여러 가지 불은 각기 개별적인 지울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原註2) [보통불•전기불•성냥불•화산의 불•번갯불은 동일의 火性的인 質料를 바꾼다고 생각되는 우연의 사건보다도 더 내적인 원리에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한 본질적•내재적인 자리를 지니고 있다.]    이미 그 내부에 있어서, 그 생명에 있어서 포착되고 이윽고 그 생식력에 의해서 포착될, 저 실체의 직관이 작용하고 있는 보게 될 것이다. 로비네는 계속한다. [각기 천둥이 火性적 존재의 새로운 생산의 결과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화성적 존재로 말하면 그것을 배양하는 다량의 수증기에 의해서 급속히 증대하면서 바람에 의해서 모아져 대기층 사이로 여기저기 운반된다. 미국에 있어서 매우 수많은 새로운 분화구도 낡은 분화구의 새로운 噴火와 마찬가지로 지하의 불의 受胎와 다산성의 표현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다산성이란 비유가 아니고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성적인 의미로 잡아야 한다.    천둥에서 태어난 이 화성적 존재는 하나의 번개가 됨으로써 관찰에서 도피한다. 그러나 로비네는 마음 내키는 대로 섬세한 관찰을 하기를 구한다(原註3).    [한 장의 종이 위에서 부싯돌을 치면 불꽃이 떨어져 검은 조그만 반점을 찍는 바로 그곳을, 성능이 좋은 현미경으로 조사하던 후크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거기에 둥글고 번쩍이는 원자를 보았다. 그것은 조그만 幼蟲이었다.]    불꽃이 되고 또 명멸하는 불의 생활은 개미를 먹는 짐승의 생활을 상기하지 않는 것일까? [조그만 사건에도 개미는 꿈틀거리며 그 땅속의 거주지에서 흔들거리며 나오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燐에 의한 약간의 충격으로 火性의 極微動物이 모여 반짝거리며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은 생명만이 색채의 명백한 개별성에 대해서 근거를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스펙트럼의 일곱 무지개 색을 설명키 위해서 로비네는 를 제안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프리즘을 지나갈 때 이 동물은 제각기의 힘과 나이에 따라 굴절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처럼 각기 그 고유의 색을 띠게 된 것이다.] 꺼지려고 하는 불이 붉게 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꺼져가는 불은 불어 일으키고자 하는 자에 있어서는 불은 빛이 되어 단단한 불과, 어느 연금술사가 아주 묘하게 말한 것처럼 으로 기울어지는 젊은 불 사이에는 매우 명확한 구별이 있다.    꺼져가려고 하는 불에 대고 부는 사람은 힘이 빠진다. 그는 그 자신의 힘을 불에 전달하고자 하는 넘치는 듯한 熱意를 이미 느끼지 않는다. 만일 그가 로비네와 같은 실재론자라면 그는 자신의 실망과 無力을 시킬 것이다.    그는 자신의 초조를 하나의 幻影으로 삼을 것이다. 이리하여 변덕장이의 특징은 사물 속에 자리잡는다. 우리들 가운데서 쇠퇴하거나 용솟음치는 것은 현실 속에서 질식되거나 또는 분투하거나 그 어느 것인 생의 표지가 된다. 이와 같은 시적인 교류가 객관적 인식에 있어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오류의 요인이 된다.    게다가 우리가 자주 지적한 바와 같이 한 번 詩化되고 그 주관적 의미에 도달한 이 직관이 별 곤란없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로비네에 의해 주어진 型으로는 매우 우스운 것이지만, 그 직관을 막연하고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함으로써 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색채의 생기 있는 형상이 때로는 심하게 타고 때로는 시들어버리는 영혼적인 여러 가지 힘을 간직한다면, 또 그들이 대상에서 瞳孔으로 나가는 軸 위에서가 아니고 욕망과 사랑을 투사하는 정열적인 눈초리의 축 위에서 창조된다고 한다면, 그것들은 그때에 애정의 미묘한 뉘앙스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쓸 수가 있는 것이다(原註4). [한 줄기의 빛은 굴절하여 색채가 아주 다른 것이 될 수가 있다. 더구나 광선이 생명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거기서 만나는 영혼도 역시 굴절하여 영혼적인 색채를 띤다. 이 순간에 자기가 사랑한 것의 눈초리를 생각지 않는 자가 있을까?]    잘 생각해보면 노발리스라면 몽롱하고 그 에테르성의 形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영상을 로비네는 강조하고 묵직하게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데 무의식 속에는 이 두 개의 영상은 같은 종류의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객관적인 改作詩文은 노발리스의 내적인 몽상의 찬란한 모습을 더욱 과장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시적인 혼의 소유자들에게는 당돌하게 보이는 이 비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재성의 對蹠點에 위치하는 이 두 몽상가를 교차로, 정신분석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철학을 낳은 동시에 시를 낳게 하는 욕구가 섞여 있는 저 여러 형식의 하나의 예를 우리에게 준다.    가령 시가 아름다워도 철학은 졸렬할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2    우리는 불의 애니미즘論的, 성적인 직관의 그릇된 해석의 例證을 주었으므로 우리는 아마 영원의 진리로서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불은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의 불이라는 이 확언의 무익함을 더욱 잘 이해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불과 생명을 연결하려는 이 허위의 명증을 고발코자 한다.    이 동화의 근원에는 胚種과 마찬가지로 불꽃은 큰 결과를 낳는 하나의 조그만 원인이 된다는 인상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火性적인 힘에 관한 신화의 강한 가치부여작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배종과 불꽃의 방정식을 나타내는 데서 시작하자. 그리고 서로 연결된 명제의 換位作用에 의해서 배종이 불꽃이 되고 불꽃이 배종에 되는 데서부터 설명하자 전자는 후자 없이는 되지 않는다.    두 개의 직관이 그와 같은 것으로서 연결될 때 정신은 하나의 비유에서 또 하나의 비유로 움직이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때 정신은 고 믿고 있다. 객관적인 인식의 정신분석은 바로 이 변화하기 쉬운 轉移에 빛을 던지는 일에 있다. 우리의 견해로는 이 전이가 아무 것에도 기초를 두지 않고 서로 의존하고만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서로 나란히 놓기만 해도 충분하다.    여기에 우리가 비난하고 있는 안이한 同化의 하나의 예가 있다(原註5). [대량의 목탄에 더 약한 빛, 꺼져가는 불꽃에 의해서 불이 붙는다고 하자......두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은 당신이 관솔불에 의해서 일제히 태우는 그 맹렬한 불과 아주 똑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다음에는 생식행위의 이야기이지만, 제아무리 사치스런 사나이도 생식을 위해서는 매우 풍부한 불을 조달한다.    그러므로 교환행위에 있어서 그의 불은 훨씬 강한 사나이의 불과 마찬가지로 강하다.] 이러한 비교는 혼란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만족시킬 수가 있다. 사실 여러 가지 현상의 이해를 조장하기는커녕 그것은 과학적 교양에 대해서 참된 장해를 형성한다. 1771년의 어느 날인가 한 의사가 지상의 부의 원천이며 생식력이기도 한, 어느 불에 기초를 둔 인간의 受胎理論을 길게 진술하고 있다(原註6).    [精液의 射出 후에 나타나는 해이는 적어도 그 순간 우리가 격렬하게 타는 듯한 활동적인 액체의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精囊에 들어 있는 부드럽고 감지할 수 있는 液의 약간의 상실을 비난할 것인가? 생체의 유기조직에 있어 그 액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체는 이 體液(humeur)의 도주를 바로 알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대답은 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정의 분량밖에 갖고 있지 않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저 불의 질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따라서 육체•수액•정액•유동체 등을 상실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불을, 정액의 불을 잃는 것이야말로 큰 희생이다. 그리고 이 희생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불의 未檢討의 가치가 얼마나 쉽사리 기초잡아지는가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류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일 때문에 무의식에 의해서 가치가 부여된 여러 가지 성적 직관을 더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는 著者들은 때로는 열과 특별히 연결되어 있는 주제에 기반을 둔 性理論을 명확하게 전개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어서 정액과 불의 직관 사이에 존재하는 시원적인 혼동을 밝히고 있다. 피에르 장 파브르박사는 1636년에 남자와 여자의 출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논제를 전개하고 있다. [정액은 어느 부분이나 하나이고, 마찬가지이며, 그리고 동일질의 것이면서 자궁에 들어가면 분할되어 하나는 오른쪽으로, 또 하나는 왼쪽으로 갈라진다. 정액의 분할이라는 이 유일한 사실이 모습만이 아니고 하나는 남성 또 하나는 여성이라는 性의 차이를 낳게 한다.    보다 열기에 차 있고 활력에 넘치는 신체의 부분인 것처럼 보이는 오른쪽으로 가서 정액의 힘과 강렬한 열등을 보유하게 될 정액 쪽에서 남자가 출생한다. 그리고 인체보다 차디찬 부분인 왼쪽으로 끌리는 또 한쪽은 거기서 정액의 강한 힘이 줄어들고 왜소화해 버리는 차디찬 물질을 받을 것이다. 그 결과 거기에서 시원에 있어서는 남자였던 여자가 태어날 것이다.](原註7)    더 앞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는 어떠한 것이든간에 어떠한 경험과 조금도 관계를 갖지 않는 이와 같은 주장의 완전한 무근거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관찰로는 이 주장의 구실조차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착란이 만일 불에 부여된 현상의, 약간 품이 나쁜 가치부여작용에서 유래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파브르는 불에 의해서 힘•용기•열정•생식력이라는 모든 특성을 더 실체화하고 있다. [차고, 습기찬 체질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없고 더 겁쟁이고 용기가 적다. 그 이유는 힘과 용기와 행동은 불과 공기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과 공기는 어느 것이나 활동적 원소와 남성적 원소라 불리운다. 이에 대해서 다른 원소, 즉 물과 대지는 수동적•여성적 원소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매우 기묘한 所論을 많이 축적함으로써 우리는 말할 수 없이 무의미한 비유를 충분히 하나의 정신상태를 예증하고자 해온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정신은 여러 번 구조를 바꾸어 왔기 때문에 그것은 의미의 다양한 轉移에 익숙해져 그것이 그 자신의 표현의 희생이 되는 일은 것의 없다.    모든 과학적 개념은 再規定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생활에 있어서는 始源의 어원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절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先史의 심성은 말할 것도 없이 무의식은 사물에서 말을 분리하지 않는다. 만일 불로 가득찬 한 사나이를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이 그 남자의 내부에서 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요한 때는 이 불은 음료수에 의해서 유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안의 느낌은 언제나 강심제에서 생긴다. 모든 강심제도 무의식에 대해서는 하나의 催淫劑인 것이다. 파브르는 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불의 원리란 남성적인 활동성이며, 그리고 팽창작용과 같은 모든 물리적인 활동성이야말로 생명의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 이외에 더 좋은 표현법이 있을까? 남성이란 열에 의해서 팽창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이미지를 정신분석하기는 쉬울 것이다.    우리는 또 열•음식물•생식작용이 뒤섞인 여러 가지 관념의 막연한 연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남자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더운 화성의 좋은 음식물을 섭취하려고 할 것이다.]    불은 물리학적인 여러 가지 특성과 마찬가지로 윤리상의 여러 가지 특성도 지배한다. 남성의 거친 행동은 그 뜨거운 체질에서 생긴다. [이 점에는 관상가들은 탁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냘픈 체질로, 머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눈은 빛나고, 머리털은 갈색이나 혹색이고, 키는 중간 정도이며, 몸은 네모지고 깡마른 남자를 볼 때, 그 남자가 신중하고 총명하며, 게다가 기지와 예민함에 넘쳐 있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키가 크고 뚱뚱한 남자는 습기가 많고 변덕장이이다. 이러한 남자의 경우에는 지혜와 현명함의 표지인 예민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퍼져 있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지혜와 현명함이 생기는 불은 이처럼 크고 넓적한 신체에 있어서는 방황과 확산으로 결코 힘세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방황하고 확산되어 있는 것이 힘세고 힘에 넘쳐 있는 것이 되어본 적이 없다. 힘은 긴밀하고도 응결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알다시피 화력은 그것이 위축되고 수축될 때 가장 강한 것이 된다. 火砲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불은 모든 富가 그러하듯 집중을 꿈꾼다. 꿈꾸는 자는 그것을 지키는데 보다 편리한 조그만 공간에 불을 가둬둔다.    모든 형의 몽상도 우리를 집중된 명상으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큰 것에 대한 작은 것의, 뚜렷한 것에 대한 감추어진 것의 설욕이다. 이러한 종류의 몽상을 품기 위해서 全科學的 정신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같은 부조화의 이미지, 즉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와 大砲의 영상을 집중시킨다.    거의 습관적인 규칙으로서 오랫동안 反芻해 왔던 정신이 마침내 그것을 과학적인 사고로 이끄는 과정을 되찾게 되는 것은 조그만 것과 집중된 것의 몽상에 있어서이며 커다란 몽상에 있어서는 아니다. 하여튼 어떠한 다른 원리의 思考 이상으로 불의 사고는 집중된 힘으로 향하는, 이 몽상의 언덕길을 오른다. 그것은 對象의 세계에 있어서는 과묵한 사람의 마음에 간직된 사람의 몽상과 같은 것이 된다.    불이 모든 정액의 원리라는 것은 전과학적 정신에 있어서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외부의 약간의 외관만으로도 그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라세페드 백작에 있어서는(原註8),     그것은 물질의 객관적 화학의 최소의 노력마저도 반박해 온 표면과 색채  의 화학의 肯定이다.    때때로 불은 개체성의 형상적 원리이다. 1723년에 《코스모폴리트》의 속편으로서 발표된 《철학서간》을 쓴 한 연금술사는 우리에게 불은 소위 신체가 아니고 여성의 물질에 생기를 주는 남성적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적 물질이란 물을 말한다. 元素的인 물은 (原註9). 저자는 우리를 로 보낸다. 여기서는 어렴풋한 형상이기는 하지만, 로비네의 영상에 의해서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된 그 직관이 재확인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류라는 것을 무의식 속에 덮어둠에 따라, 즉 그 명확한 윤곽을 잃음에 따라서 더욱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철학적 비유의 온화하고 안전한 땅을 찾기 위해서는 이 길을 다시금 더듬기만 하면 충분하다. 불이 하나의 라고 되풀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견해로는 성적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물체를 그 생성작용에 있어서와 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며 불에 의해서 되는 물과 대지에 대해서, 유황에 의해서 하는 물질에 대해서 말한 연금술적 영감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 명확한 윤곽이, 또는 이 의 여러 가지 경과의 상세한 기술이 없는 한 원시의 영상의 신비와 함에서 이중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에 우리의 마음을 활기로 채우는 불과, 세계에 생기를 주는 불을 똑같은 하나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지극히 강하고 원시적인 감정 속에서 사물과 교감하므로 적당한 비판도 무장해제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한 비판에서 완강하게 도망치려 하고 또 각기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시원적인 결함을 무겁게 짊어지거나 애인의 꿈과 같은 소박성도 스스로 노출하는 하나의 일반원리로 충족코자 하는 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만 할 것인가?    3    우리는 전번 저서(原註10) 속에서 모든 연금술이 끝없는 성적 몽상에 의해서, 富와 젊음의 몽상에 의해서, 힘의 몽상에 의해서, 일관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이란 에 지나지 않음을 나타내고 싶다. 연금술이란 의 성적인 여러 가지 특징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이란 객관적인 여러 가지 형상의 이기는커녕 사물의 핵심에 인간의 사랑을 시도이다.    우선 처음에는 이 정신분석적인 특징에 가면을 씌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연금술이 재빨리 추상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연금술사는 로, 즉 화덕 속에 갇힌 불로 일을 한다. 불꽃에 의해서 아낌없이 생겨나 비약하고 자유로운 몽상에까지 높이려는 영상은 그때보다 정밀한 더 집중된 꿈 때문에 분해되고 색이 바래버린다.  그렇다면 지하의 실험실에서 그 화덕에 몸을 기대고 있는 연금술사를 보자.    연금사들에 의해서 사용되는 몇 개의 화덕과 증류기가 부정할 바도 없이 성기의 형을 본땄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지적되어 왔다. 인 니콜라스 드 록크는 1655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原註11). [ 秘藥을 조제하여 조합할 때처럼 표백하고, 용해하고, 농축하기 위해서 연금술사들은 동물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씨를 만들어 내기 위해 유방과 고환의 모습을 닮은 용기를 사용한다.]    의심할 바 없이 여러 가지 연금 용기와 인체의 여러 부분과의 이상적인 유사성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널리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사성이 아주 명백하고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은 아마도 성의 측면에서일 것이다. 성적인 증류기 속에 갇혀진 불은 그 근원에 있어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불은 그때에 자신의 모든 효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연금술에 있어서의 불의 기법, 즉 그 철학은 매우 선명한 성적인 細目에 의해서 지배되어 온 것이다. 17세기 말엽에 어느 익명의 저자가 쓰고 있듯이(原註12) 그것은     여기에 부착된 여성 표시에 쥘르 르나르의 표현을 빌면 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베일에 덮인 어떠한 유령도, 무의식이 성화작용(sexualisation)의 기본원리에 의해서 여성인 것이 아닐까? 즉, 감추어진 것은 다 여성적이 것이 아닐까? 계곡에 출몰하는 흰 여인이 깊은 밤에 연금술사를 방문한다.    그것은 모호한 영상처럼 아름답고, 꿈처럼 변하기 쉽고, 사랑과도 닮아 찰나적이다. 잠시 동안 그녀는 자고 있는 남자를 그의 애무로 감싼다. 너무나 갑작스런 깊은 한숨에 그녀는 갑자기 모습을 감춘다......그래서 화학자는 하나의 반작용을 놓쳐 버린다.    열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의 분별은 정말로 명백하게 상호보충적이다. 사물에 관한 여성원리는 표면과 외피의 원리이며, 무릎이며, 대피소며, 빛을 발산하는 따뜻함이다. 남성원리는 중심원리이며 불꽃과 의지와 마찬가지로 활기에 넘치는 당돌한 힘의 중심이다.    여성의 열은 외측으로부터 사물에 도전하고 남성의 열은 내측에서 본질적인 존재의 마음에서 사물에 도전한다. 연금술사의 몽상의 깊은 의미란 이와 같은 것이다. 또 연금술사의 불의 이 성화작용과 정액 중의 활동적인 남성의 불에 부여되어 있는 우울한 가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연금술이 남자의, 독신남자, 부인이 없는 남자, 남성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의 교류를 금지당한 선도자의 과학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금술은 여성적 몽상의 영향을 직접 받은 일은 없다. 따라서 그 불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욕구불만에 의해서 매우 편파적인 것이 된다.    고독한 남자의 명상의 대상이 이 내면의 남자다운 불은 가장 강렬한 불이라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수 있는 것은 이 불이다. 18세기의 초기에 쓴 한 익명의 저자는 물질 속에 갇혀 있는 불의 이 가치부여작용에 대해서 아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秘術은 대자연을 모방하며 불에 의해서 물체를 밀어 열지만, 그것은 갇힌 불꽃의 불에서 생기는 大火災보다는 훨씬 치열한 불을 사용해서이다.] 지나친 불은 超人을 예시한다. 반대로 오직 주체적인 힘의 회복의 요구로서 상상되어지는 그 부조리한 형을 한 초인은 거의 과도의 불에 지나지 않는다.    물체의 이 , 내부로부터의 물체의 이 전체적인 소유는 때로는 명백하게 성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어떤 연금술사들이 말하듯 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연금술사에 관한 어느 책 속에 넘쳐 있는 똑같은 표현과 소식은 이 소유의 의미에 대해서 약간의 의혹도 남기지 않는다.    불이 애매한 기능밖에 다하지 않을 때 성적인 영상이 이처럼 명백하게 남는다는 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사실 직접적인 상징작용의 혼란상태의 영역 속에 이 영상이 끈질기게 존속한다는 것은 불에 대한 여러 관념의 성적인 기원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금술에 관한 책 가운데 불과 대지의 에 관한 긴 이야기를 읽으면 족할 것이다. 우리는 이 을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가 있다. 즉, 하나는 모든 化學史家들이 언제나 하는 것처럼 質料的 의미작용에서, 또 하나는 문학비평가들이 하는 것처럼 詩的 의미작용에 있어서, 또 하나는 여기서 우리가 시도하려고 하는 그 시원적이며 무의식적 의미작용에 있어서이다. 이 세 가지 설명법을 잘 표현한 연금술사의 싯귀를 인용해 보기로 하자.      만일 네가 고체를 녹일 수가 있다면  그 용질을 증발시켜  그 휘발물을 분말로 굳혀 보라.  너의 고통은 크게 위로받을 것이다.    용해액을 증류함으로써 계속 승화되는 녹아버린 대지의 현상을 예증하는 화학적인 실례를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때에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순수한 소금, 즉 가질 것이다.    우리는 하늘과 대지의 질료적인 결혼을 실현한 것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장중한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또는 을 갖는다.    노발리스는 똑같은 주제를 사랑스런 꿈의 세계로 옮겨놓고 있다(原註13). [우리들의 사랑이 언제고 불꽃의 날개가 되어 소년과 죽음이 가까이 오기 전에 우리들을 하늘의 고향으로 데려가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막연한 동경은 그 대립물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노발리스 속에서 파브르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위 틈에서 커다란 쇠방패를 든 페루세우스를 보고 그것을 분명히 안 것이다. 가위는 자연스레 방패를 향해서 날아간다. 파브르는 페루세우스에게 그 가위로 그 정령의 날개를 자르고, 그리고 방패로 자매들을 불멸로 되게 하도록 그 큰일을 성취해 주도록 부탁했다......그때는 길쌈할 亞麻는 이미 없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영혼까지도 상실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만이 앞으로 지배할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 없는 것에 형태를 만들어 주어 사용할 것이다. 내적인 것이 모습을 나타내고 외적인 것은 모습을 감춘다.]    고전적 취미 이외에는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바가 없는 약간 변모된 詩 속에 잠겨 있는 이 페이지 속에는 불에 관한 성적 명상의 깊은 흔적이 있다. 욕망의 배후에는 불꽃이 접해 있어야 한다. 불은 꺼지고 운명은 다해져야만 한다.    이 일 때문에 연금술사와 시인은 빛의 타는 활동을 억누르고 가라앉힌다. 그들은 대지에서 하늘을, 승화물에서 재를,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을 분리한다. 그리고 행복한 시간이 지나면, 전기석(Tourmaline)은, 부드러운 전기석은     은 뛰어난 모든 상징을 연결하는 굴레이다. 그것은 물질과 정신, 악덕과 미덕을 연결한다. 그것은 물질주의적인 인식을 이념화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념적인 인식을 물질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매력이 없지는 않으나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사용법 속에서, 즉 유물론자와 관념론자에게 대항해서 끊임없이 인정하고 정신분석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양위성의 원리이다.    고 연금술사가 말하면 하고 말하고, 고 노발리스가 말하면 고 말한다. 이처럼 깊은 兩位性의 조건이야말로 불이 우리의 안과 밖에 있고, 보이지 않는 동시에 눈부신 것으로, 정신인 동시에 연기인 것이다.      4    만일 불이 그처럼 인간을 오류에 빠뜨리고 兩意的인 것이라면 객관적 인식의 어떠한 정신분석도 불에 관한 여러 가지 직관의 정신분석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불은 인간정신을 최초의 대상이고, 이라는 것을 믿기는 어렵지 않다. 先史의 인간에 있어서 모든 현상 가운데 불만이 알고자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불은 사랑하고자 하는 희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불의 정복이 인간을 동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했다는 것은 여러 번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소박한 정신, 그 시, 과학을 동반한 정신은 불을 둘러싼 명상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을 것이다. 은 표면적 인간이고, 그 정신의 약간의 친근한 대상 위에, 약간의 조잡한 기하학적 도형이 고정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天空은 어떠한 중심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손을 합장하는 그 몸짓의 실재화에 지나지 않는다. 난로 앞에서 은 반대로 속이 있는 사람이고 생성하는 사람이다. 또한 아마도 불은 꿈꾸는 사람에게 생성의 과정에 있는 하나의 깊이 있는 과목을 교수한다고 하면 한층 더 잘된 것일까, 즉 불꽃은 타오르는 가지의 마음에서 생겨난다.    막스 셀러가 그것에 주석을 달지 않고, 따라서 의심할 바 없이 그 명백하고 소박한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 인용한 로비네의 다음과 같은 직관은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原註14). [즉 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이 그 존재를 짊어지고 있는 불꽃이 미치는 범위에 있음에 불과하다.] 만일 내밀의 형성적인 불, 우리의 여러 관념과 여러 가지 꿈의 요인으로써 파악되는 불, 胚腫으로서 생각되어지는 불이라는 사고방식이 없었더라면 객관적이고, 철저하고, 파괴적인 불꽃이 로댕의 깊은 직관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직관을 생각하는 일로 우리는 로댕이 심오한 조각가라는 것, 그리고 그가 그의 기법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법으로 생명처럼 또는 불꽃처럼 안에서 밖으로 향해서 생생한 표현을 밀어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들을 알면 우리는 불을 취급하고 있는 여러 작품이 제아무리 쉽게 성적인 것이 되어도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다눈치오는 우리에게 유리공장의 용광로 속에 을 관상하는 스테리오를 그려 보인다. [이윽고 이 아름답고 약한 제조품은 그 아버지를 저버리고, 영구히 그와 이별한다.    그것은 냉철함에서 깨어나 차가운 보석이 되고 세계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경영하기 시작하고, 향락을 구하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여러 가지 위험에 부딪치고 빛의 다채로운 번쩍임에 몸을 맡겨 꽃이나 취하게 하는 술을 인수한다.](原註15) 이와 같이 하여 는 그 작품이 가장 깊은 인간적 특징과 소박한 사랑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것에 유래한다.    그것들은 한 아버지의 작품이다. 불에 의해서 창조된 형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폴 발레리가 멋지게 말한 것처럼 형성된 것이다(原註16).    그러나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은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외관을 변화시키는 세계에 직면함이 없이 현상의 세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원적으로는 불에 의한 변화만이 깊고, 충격적이고, 재빠르고, 영묘하고, 결정적인 변화인 것이다. 낮과 밤의 교차, 빛과 그늘의 상호작용은 대상의 단조로운 인식에 대해서 산란해지지 않는 외면에 끌리는 모습이다. 그것들의 교체 사실은 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들의 인과관계의 성격을 무효로 하고 있다. 만일 낮이 아버지로 밤의 원인이라면 밤은 어머니로 낮의 원인이 되며, 운동 그 자체는 거의 아무런 반성도 낳지 않을 것이다.    인간정신은 물리의 수업처럼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과일도 흐르는 시냇물도 소박한 정신에는 어떠한 불가해한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원시인은 개울을 생각지 않고 관조한다.    잠들려고 하는 한 목동이  물의 흐름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다음 것에는 실체적인 변화가 있다. 즉, 불이 핥은 것은 사람의 입속에서 별다른 맛이 있다. 불은 닦아낸 것에 불멸의 빛을 준다. 불이 애무하고 아까와하고 사랑한 것은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서 순진한 것을 잃어버린다. 俗語로 타버리다(flambe), 상실하다(perdu) 등 성적인 의미를 포함한 야비한 말 대신에 쓰인다.    불에 의해서 모든 것이 변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변하기를 원할 때에 불을 부른다. 최초의 현상, 그것은 무위의 시간에 그 생명과 그 빛남 속에서 관조된 불의 현상일 뿐아니라 불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이다. 불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이야말로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감각적인 것이다. 가장 잘 지켜야 할 것은 이 현상이다. 그것을 솟게 하거나 가라앉혀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의 실존을 찍어내는 사랑의 순간과 닮은 하나의 실체를 표시하는 불의 찰나의 온도를 포착해야만 한다.    발레리가 《불의 여러 예술》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도중에서 쉬지 않고 이것저것 생각에 잠기거나 힘내거나 낙담하거나 하는 기분의 변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는 인간과 형식과의 극한의 순간이 가장 극적인 상황 밑에 연기된다. 여기서 사람이 가장 믿는 불은 동시에 최대의 적이다.    그것은 아주 까다로운 자기 편으로 그 열이 사람들이 바라듯, 소재에 대해서 멋지게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키기가 어려운 몇 개의 물리적 또는 화학적인 常數에 의해서 엄밀하게 억제되고, 위협받고, 규정되어야 한다. 어떠한 광증도 치명적인 것이 되고 작품은 엉망이 된다.    만일 불이 약해지거나 또는 맹렬해질 때에는 이러한 변동을 일으키는 자는 재난을 겪는다. 불을 통한 이 현상이 모든 현상 가운데 가장 감각적이지만, 물체의 깊은 곳에 특징지워져 있는 이 현상에 k나의 명칭이 주어져야 한다.    인간의 주의를 끌만한 제 1의 현상은 이다. 우리는 지금 선사의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비밀리에 이해된 이 초성현상이 어떻게 하여 몇 세기 동안 과학자들의 노력을 배반해 왔는가를 보려고 한다.      1. 로비네(Robinet)의 《자연에 대해서》 4권 p.217  2. 로비네 前揭書 p.219  3. 로비네 前揭書 p.234  4. 노발리스의《일기Journal intime》 p.106  5. 드마롱(De Malon)의 《人間의 피의 보존》 p. 146  6. 장 피에르 다비드(Jean pierre mortelle David)의 《영양섭취론》  7. 장 피에르 파브르(Jean-pierre Fabre)의《 化學的 秘義槪要》 p. 374  8. 라세페드 백작의 《人工的 내지 자연의 電氣에 대한 試論》 2권 p. 169  9. 《우주와 화학광선》 p. 7  10. 바실라르의 《科學精神의 形成》  11. 니콜라스 드 로크(Nicolas de Locques)의 《자연철학개론》 2권  12. 《암흑 그 자체에서 나오는 빛》  13. 노발리스의 《핸리 오프터딩엔》 p. 186  14. 막스 셀러( Max Scheler)의 《自然과 共感의 형성》  15. 다눈치오(D′A nnunzio)의 《불Le Feu》 p. 325  16. 폴 발레리(Paul Valery)의 《예술에 관한 단편》  17. 폴 발레리 前揭書      제 5장 불의 化學  ---虛僞問題의 歷史    1  이 章에서 우리는 연구분야를 바꾸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은 불에 의해서 태어난 여러 가지 현상, 즉 焦性現象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여러 가지 노력을 연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이 문제는 결코 과학사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과학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앞의 여러 장에서 그 작용을 나타낸 가치부여작용에 의해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궁극에 있어서 불에 관한 여러 가지 직관이 과학의 영역에 끼친 혼란의 역사만을 취급해야 한다.    불에 관한 이들 여러 가지 직관은 그것이 심리학에 의해서 명백하면 명백할수록 극복하기 어려운 가 된다. 고로, 다소 왜곡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계속되고 있는 정신분석을 역시 취급하고 있다.    시인과 몽상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 정신분석은 지난 세기의 화학자와 생물학자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유와 몽상의 을 가려내고 사유와 꿈의 결합 속에서 변형되고 패배되는 것은 언제나 사유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작품 속에서 제안한 것처럼 과학정신을 정신분석하는 것, 그것은 몽상을 는커녕 그것을 멈추게 하고 분쇄하고 제압하는 논증적 사유에 매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의 문제가 역사적인 진술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증거로써 증거를 삼고 있다. 그레고리(J. C. Gregory)시는 헤라클레이스토스에서 라보아지에 이르는 연소이론에 관해서 명석하고 지적인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여러 가지 관념을 20세기의 을 말하는데 50페이지이면 충분하다는 식의 빠른 속도로 써나가고 있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이 여러 가지 이름을 라보아지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그릇된 것으로서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할지라도 무엇인지 석연치 않은 것이 이 학설의 성격에 대해서 생겨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설은 시인할 만하다든가, 그것들은 적당한 수정만 가하면 과학적인 인식의 다른 여러 계단을 설명할 수가 있고 어느 시기에 철학에 적응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반론을 펴도 헛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학설의 부동성과 영속성을 그것들의 객관적 설명으로서의 가치를 제거함으로써만은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로서 남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야만 한다.    그때에 우리는 무의식의 여러 가치에 관련되게 될 것이다. 몇 개의 설명원리에 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들 무의식의 가치이다. 공손하게 비난함으로써 정신분석자가 과학자에게 말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동기를 고백시키도록 해야 한다.    2  불은 아마도 화학자들의 마음을 가장 많이 빼앗은 현상일 것이다. 오랫동안 불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대우주의 중심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믿어져 왔다.    1720년경 씌어진 책 속에서 보에라에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原註1). [ 만일 당신이 에 대한 설명에서 잘못을 저지른다면 당신의 오류는 물리학의 모든 분야에까지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모든 자연적인 생산활동 속에서 불이 언제나 그 중요한 動因이기 때문이다.]    반세기 후에 셀레는 한편 을 상기하며(原註2) 라고 말하고, 또 한편 라고 말하고 있다.    즉, 거기에서 그것은 이미 지구 전체에 퍼져 있고 그리고 원소적인 불의 추진력은 그 직접적인 운동을 지구에 전달하는가 하면, 다른쪽에서는 빛은 사람들이 (譯註1)를 사용하며 포착할 수가 있고, 이 가정된 酸의 확대에 의해서 해방된 하나의 원소라고 말하고 있다.    셀레에 의해서 이처럼 묘하게 지적되어 있는 이 동요는 애매성르로부터 완전한 무지로 기울어지면 문제사항 그 자체를 문제해결로서 쉽게 생각하는 무지의 변증법의 커다란 징조이다. 불이 자기의 신비를 구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우주원인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때에 모든 것이 설명된다.    전과학적인 정신이 몽매하면 할수록 선택하는 문제는 큰 것이 된다. 그 정신은 이 큰 문제에 대해서는 한 권의 책까지도 필요할 것이다. 샤틀레 후작 부인의 책은 139페이지에 이르며 그 주제는 불에 관한 것이 된다.    따라서 전과학적인 시대에 있어서 연구주제를 한정하기는 어렵다. 다른 어떠한 현상보다도 불에 대해서는 애니미즘론적인 생각과 실체론적 생각이 구별하기 어렵게 혼합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급할 경우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개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그 혼란한 형태로써 연구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 분석을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조금씩 그 오류를 구별하는 것을 가능케 한 화학적인 여러 관념의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불은 전기가 이룬 것 같은 스스로의 과학을 아직 되찾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전과학적인 정신속에 화학과 생물학에 동시에 의존하는 복합적인 현상으로서 머물러 왔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왕복운동에서부터 생명에서 실체로, 교대로 이동하는 설명 방법의 양의성에 대응하는 전체화의 측면이라는 것을 불의 개념 속에 확보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은 그때 우리가 《과학정신의 형성》이라는 우리의 책 속에서 주장한 여러 명제의 예증으로써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불은 그것을 둘러싸고 전개되어 왔던 소박한 여러 관념을 통해서 둘 다 과학적 사고를 방해하는 와 의 예를 든다.    우리는 첫째로 실체론적인 주장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제시되고 있은 예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카스텔 신부는 을 의심하지는 않는다(原註3). [繪畵의 검은색은 대부분 불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불은 항상 그 강렬한 인상을 받은 육체성 속에 부식성의 타는 듯한 그 무엇을 남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참된 불로 되어 있어 여러 가지 석회 속에, 회 속에, 목탄 속에, 연기 속에 멈추어 있는 火性의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색깔을 띤 물질 중에는 불의 저 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불에게 부채를 진 것은 언제까지나 계속 타야 하기 때문에 부식하기 쉽다는 것 가운데서 실체론적 사고의 작용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실체론에 대한 주장이 어떠한 증거나 영상으로부터도 진실로 해방된 순수성 속에 나타날 때가 있다. 따라서 뒤칼라는 다음과 같이 썼다(原註4). [화성의 분자는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뜨거워진다. 즉, 화성의 분자는 그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 작용은 원료가 없어졌을 때야 비로소 더 계속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실체론적 歸屬化에 유사어의 반복적 성격은 여기서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잠들게 하는 아편의 최면 효과에 대한 몰리에르의 농담 때문에 18세기 말에 중요한 한 저자가 열의 열효력은 열을 가하는 특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수많은 정신에 있어서 불은 어느 것이나 그 영토의 한계를 지을 수 없는 하나의 가치를 갖고 있다. 보에라아베는 불에 관해서는 어떠한 억설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주저없이 말한다. [불의 여러 원소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물체에서도 가장 단단한 금속에나 토리첼리의 진공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原註5) 철학자와 화학자, 몽상가와 교양인, 그 어느쪽의 경우에도 동등하게 불은 매우 쉽게 실체화되며 그들은, 불을 물질로 충만된 공간이나 진공에도 아주 동등하게 연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근대 물리학은 진공이 수천 개의 복사열의 방사선에 의해서 횡단되어 있음을 승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방사선이 진공공간의 하나의 분량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빛이 흔들리는 기압계의 진공 속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과학정신은 여기에서 토리첼리의 진공은 잠재하는 불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결론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불의 실체와는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성격과 쉽게 일치한다. 즉, 불은 그 분산된 형상으로는 예리하고 신속할 수 있고, 집중된 형상으로는 깊고 지속적인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 가장 다양한 여러 가지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을 응용하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다.    18세기 말에 자주 인용되는 저자인, 카라에 있어서는 이러하다(原註6). [밀짚과 종이 속에는 연소성분이 거의 없지만 이에 반해서 석탄 속에는 풍부하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짚과 종이는 불에 닿으면 바로 타오르지만, 석탄은 불붙는 데 시간이 걸린다. 효력에 있어서의 이 차이는 밀짚과 종이의 연소성분이 석탄보다 훨씬 희소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처럼 집중되어 있지 않고 더 확산되어 있으며, 따라서 더 쉽게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이리하여 삽시간에 불을 일으키는 한 장의 종이의 실험과 같이 아무 의미도 없는 실험이 연소의 실체집중작용의 강도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최초의 경험의 를 설명코자 하는 이 욕구를 강조해야만 한다.    면밀한 설명을 하려고 하는 이 욕구는 아무것도 내버려두지 않고 구체적인 경험의 모든 양상에 대해서 유의하기를 주장하는 비과학적 정신에 있어서는 지극히 상징적인 것이다. 불의 은 이처럼 허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즉, 바로 이 민첩함이야말로 우리의 소년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상상력을 그처럼 뒤흔든 것이다. 밀짚불은 무의식에 있어서 여전히 하나의 특징적인 불이다.    지성의 힘을 별로 느끼게 하지 않는 前科學的인 정신의 소유자인 마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실체론적인 직관과 최초의 경험과의 연결은 등등하며 직접적이다. 그는 의 개설에 지나지 않는 어느 작은 책자 안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原註7).    [왜 화성의 유체는 인화성의 물질에만 달라붙어 있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이들 물질에 포화되어 있는 그 작은 球體와 연소 사이의 특수한 친화력에 의해서이다. 이 引力作用은 지극히 명확하다.    吹管을 통하여 공기를 보냄으로써 우리가 可燃性의 물질로부터 그것을 태워버리는 화염을 분리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화염이 아무런 저항 없이는 거기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곧 버려진 공간을 다시 잡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라가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애니미즘론적 영상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 덧붙였을는지도 모른다.    이 일상적인 경험은 불이 그 원료에 딱 달라붙을 때의 접착도와 같은 것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불의 의 주관적인 측정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끈기 있게 불이 타고 있는 촛불을 끄려고 하거나 더 강하게 타고 있는 펀치(punch)를 끄려고 하는 것만으로 족할 것이다.    그것은 불에 닿으려고 할 때에 타성적 대상이 나타내는 저 저항만큼 그렇게 노출된 저항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런데 그만큼 그것은 어린이가 불에 관한 애니미즘의 이론을 채택하는 데 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어떠한 환경에 있어서도 불은 그 심술궂은 의지를 나타낸다. 불은 붙이기도 어렵고 끄기도 어렵다. 그 실체는 변화하기 쉽다. 그러므로 불이란 하나의 인격이다.    물론 불의 그 재빠름과 그 끈기는 과학적 인식에 의해서 완전히 환원되고 해명되는 2차적인 성격이다. 건전한 추상이라면 그것들을 시야에 멈추어 두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적 추상은 무의식을 고친다. 그것이 일단 우리의 교양의 토대를 형성하면 그것은 경험의 모든 세부에 흩어져 있는 여러 가지 이의신청을 처리하게 된다.    3  우리의 무의식이 불에 대해서 형성하는 의견 가운데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이 관념일 것이다. 근대정신에 있어서는 불에 양식을 준다는 것은 그것을 유지한다는 것과 같은 말로 쓰여진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말이 우리에게 떠오를 때는 오래된 영상이 이따금 정신에 다시 나타난다.    불의 이 그 말의 최근의 의미를 보유하는 몇 개의 原書를 쌓아올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17세기에 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상기한다(原註8). [이집트인들은 불의 탄생과 성장을 경험하는 모든 것을 탐식하는 영혼을 빼앗긴 탐욕의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음껏 먹고 배가 가득찬 후에도 또 먹고 먹을 것이 없어져 버리면 자기 자신까지도 먹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열과 운동의 두 가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양식과 호흡하기 위한 공기 없이는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즈네르는 그의 책 전부가 이 영감에 따르면서 전개된다.   그는 불의 화학 속에 소화작용의 모든 특징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다른 많은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 연기는 불의 배설물이다. 같은 시대에 또 한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原註9).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의 불 앞에 희생물을 바칠 때 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재단 위에 음식을 바치는 것이다.]    18세기가 되자, 보에라아베는 또 은 어떻게 이해되어져야만 하는가를 오랜 연구를 통하여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양식을 좁은 의미에서 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물질은 실제에 있어서 불에 있어서의 음식물로서 도움이 되고 그 작용을 통해서 그것들은 元素的인 불, 그 자체의 물질로 전환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불의 본성을 다하기 위해서 스스로 본래의 본성을 버린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깊이 검토할 만한 하나의 사실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原註10). 이것이야말로 보에라아베가 자기가 환원코자 하는 애니미즘론적인 직관에 대한 매우 미약한 저항을 나타내는 몇 페이지 속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은 시간을 들여서 공격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편견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어느 면에서 보아도 보에라아베는 실체론적인 편견을 강화함으로써 비로소 애니미즘론적인 편견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의 학설 속에는 은 로 전환되고 있다. 동화작용에 의해서 양식은 불이 되는 것이다. 이 물체의 동화작용은 화학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화학이란 여러 물체가 어떻게 결합되고, 혼합되며 병렬되는가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변화할 수 있는 3개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화학은 하나의 물체가 어떻게 해서 또 하나의 다른 물체에 에 대해서는 연구할 수 없다. 화학을 다소 이라는 개념에서 배운 이 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보다 애매한 것에 의해서 애매한 것에 빛을 던지는 것이 된다. 그것은 차라리 객관적 해명에 소화작용의 내적인 경험에서 얻어진 허위의 지식을 부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에 무의식적인 가치부여작용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가를, 그리고 하나의 전과학적인 무의식 속에 있는 라고 불리우는 것은 정신분석하는 일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사실 타는 물건은 어느 것이나 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의 前科學的인 원리이다. 이리하여 중세와 과학 이전 시대의 우주론에 있어서 가장 공통된 개념의 하나는 별에 대한 음식물에 관한 것이다.    특히 별에 대해서 음식을 바친다는 것은 이따금 대지의 發散作用의 일이다. 발산물은 彗星의 양식이 되고 혜성은 태양의 양식이 된다. 물질적인 여러 현상을 설명할 경우에 소화작용의 신화가 갖는 그 힘과 그 영속성을 잘 나타내기 위해서 별로 멀지 않은 시대로부터 골라낸 약간의 原本만을 조사해 보자. 로비네는 1766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原註11).    [아주 당연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져 왔다. 번쩍이는 球體는 그것이 불투명한 구체로부터 빠져나오는 發散物을 언제나 먹는다는 것, 그리고 불투명한 구체의 자연의 양식은 번쩍이는 구체가 끊임없이 거기에 보내고 있는 화성 미립자의 흐르는 묶음이라는 것,    거기에서 나날이 퍼지고 점차로 검은빛을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태양의 흑점은 태양이 자기에게 끄는 입자의 거친 증기의 集積에 지나지 않고, 그리고 그 양은 증가되고 있다는 것, 또 우리가 그 표면에서 솟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저 구름연기는 사실은 반대로 그 표면을 향해서 돌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태양은 너무나 다량의 질이 다른 물질을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데카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포용되고 덮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침투될 것이며 그때 태양은 불이 꺼지고, 말하자면 태양의 생명 그 자체의 빛의 상태로부터 태양에 관해서 말하면 바로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불투명의 상태로 옮아가면서 죽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거머리가 피를 너무 빨아먹어서 죽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보다시피 소화의 직관이 지배적이다. 로비네에 있어서는 태양왕은 너무 먹기 때문에 즉는 것이다.    불로 별을 양육한다는 이 원리는 또한 18세기의 사상가들에게도 공통되는 관념, 즉 이 될 것이다.    그들은 미세한 하늘의 불로부터 형성되는 별들과, 자연 그대로의 대지의 불에서 형성되는 금속성의 유황 사이에 하나의 근원적인 유사성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대지의 여러 현상과 하늘의 여러 현상을 통일하고 하나의 보편적인 세계관을 손에 넣었다고 믿고 있다.    이리하여 낡은 여러 관념이 여러 시대를 일관하여 살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최초의 소박성을 받아들이면서 다소 학문적인 몽상 속에 되돌아온다. 예를 들면 17세기의 한 저자는 고대의 견해와 당시의 견해를 간단하게 통일한다(原註13).    [별은 밤에 자기의 기운을 되찾기 위해서 낮 동안 증기를 끌어 잡아당긴다는 이유에 의해서 에우리피데스가 밤을 라고 부를 것이다.]    소화작용의 신화 없었다면 그 자체가 대우주이며 밤과 낮이 될 적마다 그때의 양식을 먹고서 잠드는 저 의 胃의 꿈틀거림과 같은 리듬이 없었다면 수많은 과학 이전의 시적 직관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4  불의 직관과 같은 감정성을 잔뜩 짊어진 하나의 직관이 새로운 여러 현상을 설명하려고 할 때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는 것은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아주 흥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前科學的 사고가 전기현상을 설명코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생길 것이다.    사람들이 한 번 실체론적인 직관의 유혹에 몸을 맡기고 만족할 때 전류한 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망젱 修士는 아주 쉽게 이것을 납득한다(原註14).    [천둥이 그 전기의 물질을 태양의 작용에 의해서 끌려진 역청과 유황으로부터 끄집어내어짐으로써 전기의 물질이 발견되는 것은 첫째로 유리나 피치와 같은 역청 모양의 모든 물체 속에 있어서이다.]    그렇다면 유리가 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유리를 유황과 피치의 범주에 넣는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드 망젱수사에 있어서는     게다가 우리는 언제나 전과학적인 정신 속에 작용하는 낡은 어원, 즉 부식성의 유황염은 이라고 한 어원을 상기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실체론적 직관과 매우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내재성과 내밀성의 직관은 다음 예에서는 실로 잘 규정된 과학적 여러 현상을 설명할 작정이며, 그것은 놀랄 수밖에 없는 순진성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신은, 불을 넣어둘 수 있는 용기 속에 가두어 두는 것처럼 불을, 특히 기름•역청•고무•송진 속에 넣어두는 것이다.]    하나의
9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댓글:  조회:1304  추천:0  2018-10-30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3.29.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1장 : 촛불의 과거   *불꽃이 현자들을 사색하게 했던 그 아득한 지식의 시대에 촛불은 ‘은유=사유’를 나타냈던 것. 고독한 철학자에게 수많은 꿈을 주었고, 철학자의 책상 위에는 자신들의 형태에 갇힌 사물들이나 서서히 가르침을 주는 책들 옆에 촛불의 불꽃이 무제한의 사유를 촉발시켰고 한없는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던 것. 그 때 불꽃은 다양한 세계들을 꿈꾸는 몽상가에겐 세계의 한 현상이었다. (촛불은 어떤 사유의 시발점을 안내하는 물체)   *꿈-우리가 우리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지닌 꿈의 소통에서 단순성의 뿌리와 다시 만날 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불꽃 앞에서 우리는 세계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 물론 명상하는 철학자의 몽상에 끼어드는 낯선 사유가 그렇듯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방해를 받는다.그러나 고요의 시간이 진정으로 울려 위대한 고독이 진정으로 지배하게 되면, 몽상가의 마음과 불꽃의 중심에 동일한 평화가 자리 잡고,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간직하며, 확고한 사유처럼 수직성의 자기 운명으로 곧장 달려간다. (평화로운 몽상, 우아한 연속성, 평온이야말로 촛불이 주는 생의 이미지임.)   *세계에 대한 몽상가는 자신의 희미한 등불로부터 하늘의 거대한 별들까지 손쉽게 이동하는 과정의 독서를 하며 그런 지적 행위를 통해 열광한다. 특별한 이미지가 우주적인 가치를 지닐 때, 그것은 현기증나는 사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예: “불꽃은 축축한 불이다.” (불과 물의 결합에 대한 사유)-불타는 액체-하늘을 향해 수직적인 냇물처럼 흘러가는 것-몽상하는 글 속에서 초월적 사유가 나타남.)   *불꽃은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드는 유혹이다. 주베르(프랑스의 모랄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가 우리를 이끌어가는 진지한 몽상 속에는 세계의 현상 하나가 표현되고 따라서 지배된다. 이 현상은 그것의 현실을 넘어선 어떤 피안에서 표현된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인간적 현실로 바꾼다.   *불꽃 앞에서 밤샘하는 자—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불꽃은 꺼지기 쉬우면서도 꿋꿋하다. 한번만 바람이 불어도 이 불빛은 꺼져 버린다. 불씨 하나가 그것을 다시 살린다. 불꽃은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다. 삶과 죽음—단순한 논리의 톤으로 존재와 부의 변증법들을 전개하는 철학자들의 사유 놀이는 태어나고 죽는 불빛 앞에서 극적으로 구체적이 된다. -촛불의 몽상가, 작은 불꽃의 모든 몽상가는 이 점을 알고 있다. 사물들의 삶과 우주의 삶에서 모든 것은 극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촛불을 동반하고 몽상할 때 두 번 몽상한다. 불꽃 앞에서 명상은 “두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파라셀스 (스위스의 연금술사. 점성가. 의사, 정신신체의학의 선구자)   *불꽃 속에서 철학자는 인간화의 사례인 하나의 사례-현상, 우주의 한 현상을 만난다. -‘우리의 부정한 것들을 태우는 현상’- 불꽃은 정화되고 정화시키는 사물이다. 두 눈과 영혼을 통해 두 번 몽상가를 비춘다. 여기서 은유들은 현실들이고, 현실은 관조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우리는 현실을 은유화하면서 그것을 관조한다.   *이러한 몽상 속에서 세계는 그것의 모든 사물들에게서 인간의 어떤 운명을 띤다. 그런데 세계는 그것의 내밀한 신비 속에서 정화의 운명을 원한다. 인간이 보다 나은 인간의 씨앗이고, 노랗고 무거운 불꽃이 희고 가벼운 불꽃의 씨앗인 것처럼 세계는 보다 나은 세계의 씨앗이다. 불꽃은 그것의 흰빛을 통해서 흰빛의 활력 있는 정복을 통해서 그것의 본연적 장소와 합류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현상들을 주재하는 모든 가치들보다 더 큰 가치가 정복된다. (삶의 두려움이나 부정적인 어떤 것들은 불꽃이라는 몽상을 통해서 흰 불꽃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실제로 그 과정을 통해 삶은 정화된다.)   *불꽃은 더 이상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대상이 된 것이다. 그때 모든 게 가능하다.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자신이 연소되는 한 세계의 증인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에게 불꽃은 어떤 생성변전으로 향한 하나의 세계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고, 시간은 출렁인다. 빛이 떨릴 때 모든 것이 떨린다. 불의 생성변전은 생성변전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불 속에서 상상하면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 모든 것을-폭력과 평화까지- 꿈꿀 수 있다. (촛불인 불꽃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가장 철학적 생성변전을 맛볼 수 있다는 것. 태어나고 죽고 변화하고 그리고 흘러가는 불꽃의 변화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사유하는 이미지의 최대치가 아닐까...하는 비평적 논리. 그것이 평화로운 삶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시와 몽상의 씨앗)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4.5.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촛불의 몽상가의 고독     *촛불의 몽상과 기억의 몽상으로부터 우리는 고독의 몽상 속으로 들어간다. 고독한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 몽상가의 고독을 가중시키는데,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 켜진 촛불 앞에서는 보다 덜 고독을 느끼는데....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환적 개성이 있다. 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상가에게는 자신의 생성변전에 의해 마음이 빼앗긴 존재의 상징이다. 불꽃은 생성변전의 존재이고, 존재의 생성변전이다.자신을 고독하고 완전한 불꽃으로 느끼고, 생선변전의 존재의 드라마 자체 속에 있는 불꽃으로 느끼는 것,이것이 한 위대한 시인의 이미지들 아래서 나타나는 사유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불꽃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보쉐르)   “나의 사상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게 했던/외피를 불속에서 상실했다./그것은 내가 원인이자 쏘시개 된/화재 속에서 타버렸다./그러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불꽃의 내부이고 중심축이다. ............... 하지만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장 드 보쉐르, [어두운 자의 마지막 시편]   *생명의 영웅적 행위의 사례-‘외피를 찢어버리는’ 힘찬 불꽃!   *고독한 불꽃으로, 나는 홀로 있다. -트리스탕 차라 [늑대는 어디서 물을 마시는가] 홀로 타고 홀로 몽상한다는 것은 —위대한 상징이며 이해되지 못하는 이중적인 상징이다. 몽상가는 몽상의 우수, 그러니까 실질적인 추억과 몽상의 추억을 뒤섞어버리는 우수로 되돌아간다. 촛불의 몽상가는 이전의 삶(과거 추억)에 대한 위대한 몽상가들과 소통하고, 고독한 삶의 위대한 저장고와 교류한다.   *시인과 시인의 공감에 대하여 – 시인은 촛불이 꺼졌는데도 자기 고양이의 눈빛을 받아서 시를 계속 쓴다.촛불은 공통의 삶. 영감에 찬 삶, 영감을 받은 시인과 더불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영위했다. 책상 위에 있는`` 각각의 사물은 그 나름의 희미한 후광을 지니고 있었고, 고양이가 거기 시인의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비존재 아니라 약간의 존재, 자기 존재의 그림자를 부어 넣는다. 어둠 속에서 그 나름의 글을 쓴다. 시 자체는 그것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고, 시인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촛불이 꺼져 가는 순간에 고양이의 눈이 빛을 바치는 존재가 된다. ....고양이, 이 주의 깊은 동물은 천재성이 빛을 비추는 시인의 얼굴과 빛의 화합 속에서 밤샘을 계속 한다.   *빛의 드라마와 그 빛의 생명이 들려주는 소리—불꽃은 소리를 내고 신음한다. 음과 울림 현상, 한 언어의 소리 공간은 그것의 고유한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시인의 귀에는 ‘깜박거리다’라는 동사의 촛불이 지닌 의성어가 놀랍게 체험된다. 낱말의 몽상가인 시인은 이 울림들을 공감하며 그 떨림을 느낀다.   *촛불의 불꽃과 날개 타는 소리—생명의 불꽃 소리에 몽상가는 마음속에서 우지끈 찢어지는 것 같은 놀라움을 느낀다. (파리, 나방)   “나는 유충으로서의 나의 의식이 최초로 깨어날 때부터 너를 열망했다. 나는 번데기였을 때 너만을 꿈꾸었다. 수많은 나의 동료들이 너로부터 발산되는 약한 불빛을 향해 날아가다가 소멸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지만 그때 가면 나의 연약한 존재도 끝장이 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노력은 나의 최초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너의 영광에 접근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황홀한 순간 속에 너를 어렴풋이 바라본 후, 만족하여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만은 나는 아름다움, 열기, 생명의 원천을 완벽한 찬란함 속에서 관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태양 속에서 죽기를 원하는 몽상녀의 상징인 나방의 노래; 칼 융의 여자 정신분열증 환자가 지은 시-   “오, 내게 날개가 있다면 땅에서 날아올라가/운행 중인 태양을 끊임없이 쫓아가련만!/나는 소리의 광휘 속에서 영원히 볼 수 있으련만/나의 발밑에 펼쳐진 침묵하는 세계를............/그러나 새로운 충동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구나./나는 태양의 영원한 빛에서 마시기 위해 언제나 더 멀리 비약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미지의 확장]   “.....전략....../너는 매혹된 채 날아가면서 달린다,/그리고는 마침내 빛의 연인으로서/ 오, 너는 이제 연소된 나비가 되었구나.” -괴테   *나방은 촛불의 불꽃에 몸을 던진다. (적극적 굴광성) 죽음의 본능을 따르는 나방을 파우스트적 엠페도클레스 (4원소 설-불, 공기, 물, 대지)를 몽상하는 몽상가의 영혼을 상징한다. 몽상하는 영혼은 자신의 장식물을 태우고, 자신의 존재를 태우는 일을 끝없이 명상했다는 것.   *프랑스의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인 ‘피에르 장 주브’가 자신의 작품 [폴리나]에서 – 폴리나가 자신의 첫 무도회에 앞서 자신의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때, 그녀가 수녀처럼 순결한 존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모든 남자들을 유혹하고 싶을 때. 그녀가 환기시키는 것은 불꽃 속에서 죽어가는 나비이다. “하지만 내 소중한 나비여, 불꽃을 조심하려무나. 아직도 한 마리 나비가 지난밤의 나비처럼 죽어가려 한다. 그것은 곧바로 죽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불속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불을 이해하지 못하며 날개의 반은 이미 타버렸다. 그것은 되돌아오고 다시 되돌아온다. 불행한 나비 같으니, 그건 불이야, 그건 불이라고!” -피에르 장 주브 [폴리나]   *주브의 소설 속의 두 본능- 생의 본능이자 죽음의 본능 (에로스와 타나토스 ; 사랑의 욕망과 죽고자 하는 욕망) 그 두 본능은 깊이와 원초성이 드러날 때 대립적인 게 아니라, 한 운명의 리듬 속에서 끊임없는 변혁들을 하나의 삶 속에 갖다 놓는 그 리듬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 무도회의 밤에 촛불에 타버린 나비의 이미지이다. (여성적 운명의 이미지의 근원적 이미지)   *고독과 영혼의 중심, 마음의 어떤 구석에서 정신의 어떤 모퉁이에서 위대한 고독한 자는 혼자이며, 과연 혼자인가? 갇혀있는가 아니면 위로 받고 있는가? 어떤 독방에서 피난처에서 시인은 진정으로 고독한가? -고독을 사랑하거나 물리치기 위해선, 또 조용히 있거나 용기를 내기 위해선,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인상적 이미지- 이미지를 증식해야 하고 모든 이미지를 배가시켜야 한다. 고독한 인간은 자랑스럽게 혼자 있으면서 때때로 고독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마다 나름의 고독이 있는 법이다.   *촛불, 책은 정신과 밤이라는 이중적 어둠에 대항한다. “나는 연구한다!” 책에서 눈을 뗄 때 “나는 꿈꾼다!”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들도 필요하다. 나는 작은 불빛 아래서 했던 내 작업을 추억하고, 나 역시 촛불의 몽상가였다는 것을 추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몽상이 필요하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12.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불꽃의 수직성     **불꽃의 몽상은 수직성이면서 높이의 몽상이다. 높이의 몽상은 수직성의 본능을 북돋우는데, 이 본능은 평범한 삶, 평평하게 수평적인 삶의 의무들에 의해 억압되어 있다. 수직화하는 몽상은 몽상들 가운데 가장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어떤 다른 곳을 꿈꾸는 것은 잘 몽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수직적인 사물의 천정에 살며 수직성의 몽상들을 축적하면서 우리는 존재의 어떤 초월을 경험한다. 수직성의 이미지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들의 지배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   *몽상의 대상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몽상은 더욱 위대하다. 불꽃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직화하는 의지의 몽상가는 자신도 다시 일어서야 함을 배운다. 그는 높이 타오르고, 온 힘을 다해 열기의 절정에까지 도달하려는 의지를 다시 발견한다. 길게 늘어나면서 끝이 뾰족해지는 불꽃의 미묘한 생명력, 그리하여 삶과 꿈이라는 가치들은 결합되어 존재한다.   “한 줄기 불! 향기롭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될까?” -에드몽 자베 “촛불은 높이 타오르고 그것의 주홍빛은 발끈 일어선다.”--트라클   **가장 위대한 꿈이 있는 곳은 정상이다. 불꽃은 지극히 본질적으로 수직적이기 때문에 존재의 몽상가에게는 어떤 피안, 어떤 에테르적인 비존재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인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이여.“ --로제 아슬리로   **불을 만드는 것은 빛이다. 빛은 불의 과정에서 정수이다. 왜냐하면 빛의 우선권은 불에서 절대적 주체로서의 힘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꽃의 고통 속에서 불이 자신의 모든 물질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것이 빛이 되는 과정이 마감될 때에만 그것은 자신으로서의 진정한 존재를 부여받는다.   **“정신의 운동은 불의 운동과 같다. 그것은 자신을 상승하는 존재로 만든다.”-클로드 드 생 마르탱 [새로운 인간] **촛불의 불꽃에서는 대자연의 모든 힘이 활동적이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자체를 구성한다. 불꽃은 말하자면 적나라한 동물성이고, 과격한 동물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대식가이다. 따라서 각각의 생명계는 하나의 개별적인 불꽃 유형이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밖에 될 수 없고, 인간은 말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으며. 동물은 방황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다.”--노발리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서 무형적인 것,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생성된다.” “하나의 특이한 대목을 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불꽃의 분비물처럼 제시된다. 우리는 한 불타오르는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괴테   **동물은 자신의 형태로 행위를 나타내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을 태우면서, 또 자신 안에 웅크린 불의 굶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을 획득하면서 이 형태를 유지한다. 불꽃은 여기서 창조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적 직관을 주어 세계의 타오르는 삶에 동참하도록 한다. 이때 불꽃은 살아 있는 실체이고, 시화(詩化)시키는 실체이다. 시인 철학자의 불붙이는 직관에 동참하다 보면 불꽃이 살아있는 존재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삶은 하나의 불이다. 그것의 본질을 경험하기 위해선 시인과 일체가 되어 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불꽃의 명상은 일종의 초생명적인 비약, 다시 말해 삶을 상승시키고, 통상적인 질료의 모든 쇠퇴에도 불구하고 삶을 삶 너머로 연장시키는 그런 비약을 만나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뛰어오르는 기술은 어디에서나 가장 고귀한 행위이다. 그것은 삶의 기원점이고 삶의 생성이다. 불꽃은 이런 종류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철학하는 자가 스스로를 철학하는 지점, 다시 말해 자신의 소모하고 갱신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노발리스   “생명은 스스로 자신의 지고한 장애물을 창조하였다. 이제 그것은 자신의 사유 너머로 뛰어오른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붙여 번역한 시작품, 알베르   **동물화된 불꽃을 노발리스처럼 꿈꾸는 몽상가에게 불꽃은 날아오르기 때문에 한 마리 새가 된다.   “그대는 불꽃 속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그 새를 잡겠는가?” -피에르 가르니에   **빛이 잠들어 버리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빛이 깨어나도록 서둘러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은 사물들은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촛불의 미학).hwp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3.29.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1장 : 촛불의 과거   *불꽃이 현자들을 사색하게 했던 그 아득한 지식의 시대에 촛불은 ‘은유=사유’를 나타냈던 것. 고독한 철학자에게 수많은 꿈을 주었고, 철학자의 책상 위에는 자신들의 형태에 갇힌 사물들이나 서서히 가르침을 주는 책들 옆에 촛불의 불꽃이 무제한의 사유를 촉발시켰고 한없는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던 것. 그 때 불꽃은 다양한 세계들을 꿈꾸는 몽상가에겐 세계의 한 현상이었다. (촛불은 어떤 사유의 시발점을 안내하는 물체)   *꿈-우리가 우리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지닌 꿈의 소통에서 단순성의 뿌리와 다시 만날 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불꽃 앞에서 우리는 세계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 물론 명상하는 철학자의 몽상에 끼어드는 낯선 사유가 그렇듯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방해를 받는다.그러나 고요의 시간이 진정으로 울려 위대한 고독이 진정으로 지배하게 되면, 몽상가의 마음과 불꽃의 중심에 동일한 평화가 자리 잡고,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간직하며, 확고한 사유처럼 수직성의 자기 운명으로 곧장 달려간다. (평화로운 몽상, 우아한 연속성, 평온이야말로 촛불이 주는 생의 이미지임.)   *세계에 대한 몽상가는 자신의 희미한 등불로부터 하늘의 거대한 별들까지 손쉽게 이동하는 과정의 독서를 하며 그런 지적 행위를 통해 열광한다. 특별한 이미지가 우주적인 가치를 지닐 때, 그것은 현기증나는 사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예: “불꽃은 축축한 불이다.” (불과 물의 결합에 대한 사유)-불타는 액체-하늘을 향해 수직적인 냇물처럼 흘러가는 것-몽상하는 글 속에서 초월적 사유가 나타남.)   *불꽃은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드는 유혹이다. 주베르(프랑스의 모랄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가 우리를 이끌어가는 진지한 몽상 속에는 세계의 현상 하나가 표현되고 따라서 지배된다. 이 현상은 그것의 현실을 넘어선 어떤 피안에서 표현된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인간적 현실로 바꾼다.   *불꽃 앞에서 밤샘하는 자—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불꽃은 꺼지기 쉬우면서도 꿋꿋하다. 한번만 바람이 불어도 이 불빛은 꺼져 버린다. 불씨 하나가 그것을 다시 살린다. 불꽃은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다. 삶과 죽음—단순한 논리의 톤으로 존재와 부의 변증법들을 전개하는 철학자들의 사유 놀이는 태어나고 죽는 불빛 앞에서 극적으로 구체적이 된다. -촛불의 몽상가, 작은 불꽃의 모든 몽상가는 이 점을 알고 있다. 사물들의 삶과 우주의 삶에서 모든 것은 극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촛불을 동반하고 몽상할 때 두 번 몽상한다. 불꽃 앞에서 명상은 “두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파라셀스 (스위스의 연금술사. 점성가. 의사, 정신신체의학의 선구자)   *불꽃 속에서 철학자는 인간화의 사례인 하나의 사례-현상, 우주의 한 현상을 만난다. -‘우리의 부정한 것들을 태우는 현상’- 불꽃은 정화되고 정화시키는 사물이다. 두 눈과 영혼을 통해 두 번 몽상가를 비춘다. 여기서 은유들은 현실들이고, 현실은 관조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우리는 현실을 은유화하면서 그것을 관조한다.   *이러한 몽상 속에서 세계는 그것의 모든 사물들에게서 인간의 어떤 운명을 띤다. 그런데 세계는 그것의 내밀한 신비 속에서 정화의 운명을 원한다. 인간이 보다 나은 인간의 씨앗이고, 노랗고 무거운 불꽃이 희고 가벼운 불꽃의 씨앗인 것처럼 세계는 보다 나은 세계의 씨앗이다. 불꽃은 그것의 흰빛을 통해서 흰빛의 활력 있는 정복을 통해서 그것의 본연적 장소와 합류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현상들을 주재하는 모든 가치들보다 더 큰 가치가 정복된다. (삶의 두려움이나 부정적인 어떤 것들은 불꽃이라는 몽상을 통해서 흰 불꽃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실제로 그 과정을 통해 삶은 정화된다.)   *불꽃은 더 이상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대상이 된 것이다. 그때 모든 게 가능하다.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자신이 연소되는 한 세계의 증인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에게 불꽃은 어떤 생성변전으로 향한 하나의 세계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고, 시간은 출렁인다. 빛이 떨릴 때 모든 것이 떨린다. 불의 생성변전은 생성변전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불 속에서 상상하면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 모든 것을-폭력과 평화까지- 꿈꿀 수 있다. (촛불인 불꽃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가장 철학적 생성변전을 맛볼 수 있다는 것. 태어나고 죽고 변화하고 그리고 흘러가는 불꽃의 변화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사유하는 이미지의 최대치가 아닐까...하는 비평적 논리. 그것이 평화로운 삶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시와 몽상의 씨앗)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4.5.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촛불의 몽상가의 고독     *촛불의 몽상과 기억의 몽상으로부터 우리는 고독의 몽상 속으로 들어간다. 고독한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 몽상가의 고독을 가중시키는데,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 켜진 촛불 앞에서는 보다 덜 고독을 느끼는데....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환적 개성이 있다. 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상가에게는 자신의 생성변전에 의해 마음이 빼앗긴 존재의 상징이다. 불꽃은 생성변전의 존재이고, 존재의 생성변전이다.자신을 고독하고 완전한 불꽃으로 느끼고, 생선변전의 존재의 드라마 자체 속에 있는 불꽃으로 느끼는 것,이것이 한 위대한 시인의 이미지들 아래서 나타나는 사유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불꽃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보쉐르)   “나의 사상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게 했던/외피를 불속에서 상실했다./그것은 내가 원인이자 쏘시개 된/화재 속에서 타버렸다./그러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불꽃의 내부이고 중심축이다. ............... 하지만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장 드 보쉐르, [어두운 자의 마지막 시편]   *생명의 영웅적 행위의 사례-‘외피를 찢어버리는’ 힘찬 불꽃!   *고독한 불꽃으로, 나는 홀로 있다. -트리스탕 차라 [늑대는 어디서 물을 마시는가] 홀로 타고 홀로 몽상한다는 것은 —위대한 상징이며 이해되지 못하는 이중적인 상징이다. 몽상가는 몽상의 우수, 그러니까 실질적인 추억과 몽상의 추억을 뒤섞어버리는 우수로 되돌아간다. 촛불의 몽상가는 이전의 삶(과거 추억)에 대한 위대한 몽상가들과 소통하고, 고독한 삶의 위대한 저장고와 교류한다.   *시인과 시인의 공감에 대하여 – 시인은 촛불이 꺼졌는데도 자기 고양이의 눈빛을 받아서 시를 계속 쓴다.촛불은 공통의 삶. 영감에 찬 삶, 영감을 받은 시인과 더불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영위했다. 책상 위에 있는`` 각각의 사물은 그 나름의 희미한 후광을 지니고 있었고, 고양이가 거기 시인의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비존재 아니라 약간의 존재, 자기 존재의 그림자를 부어 넣는다. 어둠 속에서 그 나름의 글을 쓴다. 시 자체는 그것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고, 시인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촛불이 꺼져 가는 순간에 고양이의 눈이 빛을 바치는 존재가 된다. ....고양이, 이 주의 깊은 동물은 천재성이 빛을 비추는 시인의 얼굴과 빛의 화합 속에서 밤샘을 계속 한다.   *빛의 드라마와 그 빛의 생명이 들려주는 소리—불꽃은 소리를 내고 신음한다. 음과 울림 현상, 한 언어의 소리 공간은 그것의 고유한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시인의 귀에는 ‘깜박거리다’라는 동사의 촛불이 지닌 의성어가 놀랍게 체험된다. 낱말의 몽상가인 시인은 이 울림들을 공감하며 그 떨림을 느낀다.   *촛불의 불꽃과 날개 타는 소리—생명의 불꽃 소리에 몽상가는 마음속에서 우지끈 찢어지는 것 같은 놀라움을 느낀다. (파리, 나방)   “나는 유충으로서의 나의 의식이 최초로 깨어날 때부터 너를 열망했다. 나는 번데기였을 때 너만을 꿈꾸었다. 수많은 나의 동료들이 너로부터 발산되는 약한 불빛을 향해 날아가다가 소멸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지만 그때 가면 나의 연약한 존재도 끝장이 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노력은 나의 최초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너의 영광에 접근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황홀한 순간 속에 너를 어렴풋이 바라본 후, 만족하여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만은 나는 아름다움, 열기, 생명의 원천을 완벽한 찬란함 속에서 관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태양 속에서 죽기를 원하는 몽상녀의 상징인 나방의 노래; 칼 융의 여자 정신분열증 환자가 지은 시-   “오, 내게 날개가 있다면 땅에서 날아올라가/운행 중인 태양을 끊임없이 쫓아가련만!/나는 소리의 광휘 속에서 영원히 볼 수 있으련만/나의 발밑에 펼쳐진 침묵하는 세계를............/그러나 새로운 충동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구나./나는 태양의 영원한 빛에서 마시기 위해 언제나 더 멀리 비약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미지의 확장]   “.....전략....../너는 매혹된 채 날아가면서 달린다,/그리고는 마침내 빛의 연인으로서/ 오, 너는 이제 연소된 나비가 되었구나.” -괴테   *나방은 촛불의 불꽃에 몸을 던진다. (적극적 굴광성) 죽음의 본능을 따르는 나방을 파우스트적 엠페도클레스 (4원소 설-불, 공기, 물, 대지)를 몽상하는 몽상가의 영혼을 상징한다. 몽상하는 영혼은 자신의 장식물을 태우고, 자신의 존재를 태우는 일을 끝없이 명상했다는 것.   *프랑스의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인 ‘피에르 장 주브’가 자신의 작품 [폴리나]에서 – 폴리나가 자신의 첫 무도회에 앞서 자신의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때, 그녀가 수녀처럼 순결한 존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모든 남자들을 유혹하고 싶을 때. 그녀가 환기시키는 것은 불꽃 속에서 죽어가는 나비이다. “하지만 내 소중한 나비여, 불꽃을 조심하려무나. 아직도 한 마리 나비가 지난밤의 나비처럼 죽어가려 한다. 그것은 곧바로 죽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불속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불을 이해하지 못하며 날개의 반은 이미 타버렸다. 그것은 되돌아오고 다시 되돌아온다. 불행한 나비 같으니, 그건 불이야, 그건 불이라고!” -피에르 장 주브 [폴리나]   *주브의 소설 속의 두 본능- 생의 본능이자 죽음의 본능 (에로스와 타나토스 ; 사랑의 욕망과 죽고자 하는 욕망) 그 두 본능은 깊이와 원초성이 드러날 때 대립적인 게 아니라, 한 운명의 리듬 속에서 끊임없는 변혁들을 하나의 삶 속에 갖다 놓는 그 리듬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 무도회의 밤에 촛불에 타버린 나비의 이미지이다. (여성적 운명의 이미지의 근원적 이미지)   *고독과 영혼의 중심, 마음의 어떤 구석에서 정신의 어떤 모퉁이에서 위대한 고독한 자는 혼자이며, 과연 혼자인가? 갇혀있는가 아니면 위로 받고 있는가? 어떤 독방에서 피난처에서 시인은 진정으로 고독한가? -고독을 사랑하거나 물리치기 위해선, 또 조용히 있거나 용기를 내기 위해선,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인상적 이미지- 이미지를 증식해야 하고 모든 이미지를 배가시켜야 한다. 고독한 인간은 자랑스럽게 혼자 있으면서 때때로 고독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마다 나름의 고독이 있는 법이다.   *촛불, 책은 정신과 밤이라는 이중적 어둠에 대항한다. “나는 연구한다!” 책에서 눈을 뗄 때 “나는 꿈꾼다!”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들도 필요하다. 나는 작은 불빛 아래서 했던 내 작업을 추억하고, 나 역시 촛불의 몽상가였다는 것을 추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몽상이 필요하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12.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불꽃의 수직성     **불꽃의 몽상은 수직성이면서 높이의 몽상이다. 높이의 몽상은 수직성의 본능을 북돋우는데, 이 본능은 평범한 삶, 평평하게 수평적인 삶의 의무들에 의해 억압되어 있다. 수직화하는 몽상은 몽상들 가운데 가장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어떤 다른 곳을 꿈꾸는 것은 잘 몽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수직적인 사물의 천정에 살며 수직성의 몽상들을 축적하면서 우리는 존재의 어떤 초월을 경험한다. 수직성의 이미지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들의 지배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   *몽상의 대상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몽상은 더욱 위대하다. 불꽃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직화하는 의지의 몽상가는 자신도 다시 일어서야 함을 배운다. 그는 높이 타오르고, 온 힘을 다해 열기의 절정에까지 도달하려는 의지를 다시 발견한다. 길게 늘어나면서 끝이 뾰족해지는 불꽃의 미묘한 생명력, 그리하여 삶과 꿈이라는 가치들은 결합되어 존재한다.   “한 줄기 불! 향기롭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될까?” -에드몽 자베 “촛불은 높이 타오르고 그것의 주홍빛은 발끈 일어선다.”--트라클   **가장 위대한 꿈이 있는 곳은 정상이다. 불꽃은 지극히 본질적으로 수직적이기 때문에 존재의 몽상가에게는 어떤 피안, 어떤 에테르적인 비존재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인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이여.“ --로제 아슬리로   **불을 만드는 것은 빛이다. 빛은 불의 과정에서 정수이다. 왜냐하면 빛의 우선권은 불에서 절대적 주체로서의 힘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꽃의 고통 속에서 불이 자신의 모든 물질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것이 빛이 되는 과정이 마감될 때에만 그것은 자신으로서의 진정한 존재를 부여받는다.   **“정신의 운동은 불의 운동과 같다. 그것은 자신을 상승하는 존재로 만든다.”-클로드 드 생 마르탱 [새로운 인간] **촛불의 불꽃에서는 대자연의 모든 힘이 활동적이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자체를 구성한다. 불꽃은 말하자면 적나라한 동물성이고, 과격한 동물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대식가이다. 따라서 각각의 생명계는 하나의 개별적인 불꽃 유형이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밖에 될 수 없고, 인간은 말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으며. 동물은 방황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다.”--노발리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서 무형적인 것,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생성된다.” “하나의 특이한 대목을 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불꽃의 분비물처럼 제시된다. 우리는 한 불타오르는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괴테   **동물은 자신의 형태로 행위를 나타내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을 태우면서, 또 자신 안에 웅크린 불의 굶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을 획득하면서 이 형태를 유지한다. 불꽃은 여기서 창조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적 직관을 주어 세계의 타오르는 삶에 동참하도록 한다. 이때 불꽃은 살아 있는 실체이고, 시화(詩化)시키는 실체이다. 시인 철학자의 불붙이는 직관에 동참하다 보면 불꽃이 살아있는 존재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삶은 하나의 불이다. 그것의 본질을 경험하기 위해선 시인과 일체가 되어 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불꽃의 명상은 일종의 초생명적인 비약, 다시 말해 삶을 상승시키고, 통상적인 질료의 모든 쇠퇴에도 불구하고 삶을 삶 너머로 연장시키는 그런 비약을 만나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뛰어오르는 기술은 어디에서나 가장 고귀한 행위이다. 그것은 삶의 기원점이고 삶의 생성이다. 불꽃은 이런 종류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철학하는 자가 스스로를 철학하는 지점, 다시 말해 자신의 소모하고 갱신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노발리스   “생명은 스스로 자신의 지고한 장애물을 창조하였다. 이제 그것은 자신의 사유 너머로 뛰어오른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붙여 번역한 시작품, 알베르   **동물화된 불꽃을 노발리스처럼 꿈꾸는 몽상가에게 불꽃은 날아오르기 때문에 한 마리 새가 된다.   “그대는 불꽃 속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그 새를 잡겠는가?” -피에르 가르니에   **빛이 잠들어 버리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빛이 깨어나도록 서둘러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은 사물들은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19.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4장 : 식물적 삶에서 촛불의 시적 이미지   **각각의 사물이 하나의 형태를 유지하는 힘들에 대해 몽상할 때—하나의 수직적 불꽃이 모든 수직적 존재를 지배하고 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빗살, 우리도 그런가?) 특히 불꽃은 똑바른 삶의 역동적 요소이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에 다름 아니다” -노발리스   **불꽃의 이미지가 식물적 세계의 어떤 진리를 말하기 위해 시인에게 위용을 드러낼 때, 이미지는 하나의 문장에 담아져야 한다. 상상력은 새로운 이미지를 통해 세계의 어떤 진실을 매우 확실하게 붙들기 때문에 상상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논쟁은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다. (식물적 삶의 불꽃에 대해 신선한 문장들을 다시 말하고 끝없이 말하고....)   **모든 시는 시작이다. (결정적인 이미지들과 시적인 결정들의 지배가 시작될 때) -우리는 새로운 표현의 의지가 풍부한 이 문장-이미지를 시적 센텐스라 부른다.   **“모든 식물은 하나의 램프이다. 향기는 빛이다.” -빅토르 위고 **“모든 향기는 공기와 빛의 결합물이다.” -발자크   **“어떤 나무들은 무지개가 닿을 때 더욱 향기를 뿜어낸다.” -라 샹브르 공 -일종의 보들레르적인 상응이 위쪽을 통해, 정점을 통해 활발하게 나타난다. 마치 정상의 가치들이 바닥의 가치들을 자극하러 오듯이. 그리하여 향기와 빛의 상응을 두 방향으로 체험하는 몽상가는 부드러운 빛에 가치를 부여한다. (식물-램프-향기-빛)   **나무의 내밀함 속에서 타고 있는 하나의 불꽃에 대한 증언 – 불타오르는 삶의 온전한 하나의 약속-에 대하여, 루이 기욤은 [늙은 참나무]라는 시에서 위대한 나무를 칭송하기 위해 ‘수액의 장작더미’라고 말한다. (참나무에게 위대한 운명을 예언함. 장작더미의 불꽃 속에서 자기 존재의 신경을 기울여 자신의 찬란한 피날레를 준비하는 식물적인 헤라클레스다. 시적 언어만이 드러낼 수 있는 과감성,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의 영역. 세 마디로 불과 물을 결합시킨 루이 기욤)   **단 하나의 이미지로 고독한 물의 분수, 정원의 모든 나무들보다 더 곧게 솟아오르는 존재에 불꽃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 활기찬 물의 불꽃이고, 자신의 수직적인 행동의 끝에서 최대한 높이에서 물을 튀기는 불.   “석양의 돌 틈에서 고독한 분수가 불타오르는 정원들이 있다.“ ” -코베르의 분수   --네 원소의 차이들을 초월하는 시-물이 불타는 것이며 차갑지만 강하며, 그것은 일종의 자연적인 초현실주의 속에서 상상적 불의 미덕을 받아들이는 것, 불꽃-분수의 이 적극적인 초현실주의에서는 아무것도 원해진 게 없고 아무것도 제작된 게 없다. 이미지의 초현실주의를 단 하나의 낱말에 응축시킴. 불타오른다는 낱말은 탈현실화, 초현실화 시키는 말. 그리하여 획득된 이미지는 ‘창조적 우수’를 나타낸다.   **사물들의 이러한 종합, 분수와 불꽃, 나무와 불꽃의 융합과 같은 상이한 형태들 속에 갇힌 사물들의 융합은 산문의 언어로는 거의 표현될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시가 필요하고, 시의 유연성이 필요하며, 시적인 변모가 필요하다.   **“불의 포플러이자 분수이다.” -옥타비오 파스 (나무의 불꽃과 분수의 매우 수직적인 불꽃을 결합해야 하는 시적 센텐스! 이러한 시들은 급격한 시, 다시 말해 장황하지 않지만 언제나 근원적인 말로 체험하기를 원하는 시의 세계로 들어간다. 시는 말의 차원에서, 말 속에서, 말에 의해서 경이로움이 된다.)   **“한그루 나무는 한 그루 나무 훨씬 그 이상이다.” -질베르 소카르   **“새들이 빛나는 눈을 지닌 것은 그것들이 먹는 반짝이는 붉은 장과(漿果) 때문이다.”-디킨스   “샘으로서의 나무, 솟아오름으로서의 나무, 불의 아치.” -옥타비오 파스   **노발리스적 몽상가라면...즉, 꽃에 대한 몽상가는 이와 같은 불꽃 되기를 느끼고, 자신이 보는 대상의 초월처럼, 현실의 초월처럼,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시인 몽상가는 모든 아름다움의 후광 속에서, 비현실의 현실 속에서 산다. 색깔을 통한 창조자인 화가의 특권이 없는 시인은 회화의 마력과 경쟁해보았자 아무 소득이 없다. 그는 꽃을 말하고 꽃을 이야기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말의 불꽃을 통해 꽃의 불꽃에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만 꽃을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철학적 관조에서 예감했던 그 빛 되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문제는 현실을 비현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명/암 속에서 살면서, 현실에 희미한 빛이나 미광을 가져다주고 —매번 자신의 표현에 예기치 않은 뉘앙스를 부여한다.   “하늘은 저물고 마로니에들은 불탄다.” -장 부르데예트   “달리아는 태양의 잉걸불을 지켜왔다.” --나무 그리고 꽃 사이에서 어떤 불의 통일성을 구현하고 있다. 시적 표현이 세계에 부여하는 작용의 통일성.   “이 오월의 열기 속에서 비틀린 청동 튤립이여 불의 튤립이여.“ -장 부르데예트 “조용한 램프처럼 푸른 부채꽃이 타고 있었다.“-장 부르데예트   **모든 꽃 중에서 장미는 식물적 불꽃의 상상력을 위한 이미지들의 중심원이다. 불과 장미가 하나가 되는 시간을 꿈꾸는 한 시인의 다음과 같은 단 한 줄의 시구에서 그 강도를 느낄 수 있다.   “불과 장미는 일체가 될 것이다.” -엘리엇   “방 안의 램프는 한 송이 흰 장미이다.-로덴바흐   “거울 속에 수련을 피게 하는 램프.“ (수직적 연못을 창조했을 정도로 우주생성적이다. 시인은 자기 방의 벽을 수련의 그림들로 뒤덮는다. 모든 빛 속에서 꽃을 보는 상상하는 존재를 멈추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이 붉은 장미들 좀 봐! -불타고 있네. 화관 속에 불이 붙은 석탄이 있는 것 같아. 정말 불타고 있어.“ -다눈치오   (하나의 꽃 이름을 부르는 것은 녹은 유리이며, 이는 하나의 이중 이미지가 지닌 두 축의 상호작용에 대한 새로운 증거이다.) --색깔은 불의 현현이고, 꽃은 빛의 존재 현현이다.   **각각의 꽃은 그 자신의 빛을 지니고 있다. 저마다의 꽃은 하나의 서광이다. 하늘에 대한 몽상가는 각각의 꽃에서 어떤 하늘의 색깔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바라는 것이 정상에서의 생의 의지 차원에서 초보들레르적인 상응을 모든 사물에 작동시키는 몽상이다.   **불, 공기, 빛 등 위로 올라가는 모든 것은 또한 신적인 것을 지니고 있다. 전개된 모든 꿈은 꽃의 존재를 이루는 구성요소이다. 꽃 피는 존재가 지닌 생명의 불꽃은 순수한 빛의 세계를 향한 긴장이다. 이 모든 생성은 완만함의 행복한 생성이다. 인간의 정원에 있는 꽃들과 합일한 하늘의 정원에 있는 횃불은 확실한 불꽃이고, 완만한 불꽃이다. 하늘과 꽃은 명상하는 자에게 완만한 명상, 기도하는 명상을 가르치는 데 일치하고 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에게 고유한 기도 및 찬미의 방식을 알고 있다. -에라노스 연보 ---------------------------------------------------------------------------- **모든 사물에서 상승하는 불꽃의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언어의 마술사, 시인이란, 현실의 비현실화, 현실의 초현실화, 이미지의 탈이미지화와 같은 나무의 너머, 꽃의 너머, 생명의 너머에서 황홀한 불꽃을 몽상하는 사람이다. 그 몽상의 행위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꽃이 있다. 나무가 있다. --나의 시와 내 생명을 불꽃으로 피우기를 원하는 어느 날의 몽상.....[이민숙]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26.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5장 : 램프의 빛   **나의 수줍은 램프가 담대해지도록 광대한 밤은 모든 별들에 불을 켠다. -타고르,   **삶과 사물-그 안의 몽상, “우리네 삶은 ‘설명할 수 없어서(choisir=choose)’ 또는 선택할 수 없는 삶이어서 그 안에서 우리가 좋아했던 사물들의 그 비좁은 박물관 속에 간직된 물건들은 몽상의 부적들이다.”라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우리는 그런 만큼 그 이름들, 그 해묵은 이름들이 대상을 바꾼다거나, 오랜 신비한 삶의 해묵은 좋은 물건과 전혀 다른 사물과 결부된다면 꽤나 재앙적인 몽상이 될 것이다....왜 그럴까? (각자 몽상 후에 이야기하기)   **램프!....전구....우리의 물건들과 함께 지내온 그 시절의 언어가 갑자기 모양을 바꾸었음에 대하여....오늘 저녁의 심지는 어제의 심지와 꼭 같은 게 아니다! 우리는 친근한 물건들에 이것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주의 깊은 우정을 줄 때 언제나 얻는 게 있다. (추억은 아름다워??)   **우리가 덧없는 행동들에 인간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런 순간의 다발을 경험하는 것---시인들이 그들의 사물들에 대해 지니는 우정들....(이 무의미의 의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낮의 사물들-이 어떤 유용성을 잃을 뻔한 밤—날이 어두워지고, 벽을 따라 더듬으며 도는 것만이 허용되는 그 미광이 침투한 고독한 집에서 방황할 때, 당신이 찾아보지만 더 이상 찾아내지 못 하다가 그것이 있었던 망각된 장소를 발견할 때-그것이 시인들이 경험하는 마음, 안도감이다. (‘도구’는 분명한 지식으로서 추억의 몽상 따위는 필요 없지만, ‘추억’은 시인들에게 충실한 물건들과 함께 하는 그 ‘동반관계’를 깊게 해 준다.)   **사물들에 특질들을 부여하고 활동적인 존재들에 정당한 힘을 마음속으로부터 부여해 보라. 그러면 우주는 찬란하게 빛난다. 좋은 램프, 좋은 심지, 좋은 기름이 있으면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빛이 나타난다.아름다운 불꽃을 좋아하는 자는 좋은 기름을 좋아한다. 그는 세계의 개별 사물이 세계의 싹이 되는 모든 우주생성론적 몽상들의 비탈을 따라간다. 노발리스와 같은 시인에게 기름은 빛의 질료 자체이고, 아름다운 노란 기름은 응축된 빛, 팽창되고 싶어하는 응축된 빛이다. 가벼운 불꽃으로 인간은 물질 속에 갇혀 있는 빛의 힘을 해방시키러 온다. (꿈과 어두운 물질에 빛나는 생명을 부여하는 램프-오래된 램프일수록 더욱 확실한 몽상!)   **“ ---이 주의 깊은 램프와 저녁은 서로 상의한다.---” -레옹 폴 파르그(말라르메의 제자) 말줄임표~~의 의미. 빛과 어둠, 그것에 대해 말하라!고 시인은 명령한다.   **“램프는 조가비 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노래를 한다.” -레옹 폴 파르그   **“석유 램프의 미광, 논지를 전개하고 훈계하며 자기 자신과 의논하는 미광, 그것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에게 말한다.” -옥타비오 파스   **“소금같이 스미는 침묵이 램프들을 땡그랑거리게 하고 있었다.” -로제 브뤼쉐   **“방은 지속하는 이 행복에 놀라워한다.”-조르주 로덴바흐   **눈 덮인 평원에서 “나는 거기 있는 램프를 보곤 했다. 나를 붙잡곤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것을 은밀한 애정을 가지고 주시하곤 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그것에 불을 켰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램프인 것이다. 그렇게 늦은 밤에 훈훈한 빛 아래서 밤샘하는 그 남자를 나는 나와 같은 사람으로 상상하기에 이르렀더. 때때로 이와 같은 닮음을 넘어 그 이상으로 휩쓸려 감으로써 나는 바로 내 자신이 어떤 명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나에게 이 명상은 침투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앙리 보스코,   *를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결코 동일한 독서를 한 적이 없다....우리는 얼마나 시원찮은 문학교수가 되었을 것인가! 우리는 읽으면서 너무 많이 몽상한다. 우리는 또한 너무 많이 추억한다. 매번 읽을 때마다 우리는 돌발적인 개인적 몽상, 돌발적인 추억을 만난다. 하나의 낱말, 하나의 몸짓이 나의 독서를 정지시킨다. 보스코의 화자가 자신의 빛을 감추기 위해 덧문을 내리면, 나는 내가 옛날의 집에서 같은 동작을 했던 저녁들을 추억한다.....덧문들 한가운데 두 개의 하트 모양을 그려 놓았다. 그리하여 저녁에 그리고 밤늦게 덧문에 난 두 개의 구멍을 통해 램프, 우리의 램프는 잠든 시골들판에 두 개의 황금색 하트 모양의 빛을 던지고 있었다......그 빛! (우리는 어디에서 그런 빛을 보았는가? 이야기하기)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 4장 몽상가의 ‘코기토’ (1)   **너 자신을 위해 붉은 밀과 연기의 꿈이 되어라 (...) 너는 결코 늙지 않으리라. -장 루슬로,   **항상 손안에 열정이 없는 사람에게 삶은 견딜 수 없다. -모리스 바레스    **밤의 꿈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산이 아니다. 밤들은 이야기가 없다. 그것들은 서로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시인의 형이상학적인 감성은 우리가 밤의 심연으로 접근하는 것을 도와준다. “마치 밤에 꿈들이 자리에 없는 자를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어떤 다른 잠자는 자에 의해 형성되는 꿈들이 있다고 믿는다. 자리를 비우는 존재에게서 자리를 비우게 되는 것, 이것이 절대적인 달아남이고, 존재가 지닌 모든 힘들의 포기이며,우리 존재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흩뿌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절대적인 꿈 속에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존재의 그런 재앙으로부터 무엇을 되찾을 수 있는가? 밤의 생활에는 우리가 묻혀버리고 우리가 더 이상 살고 싶은 의향이 없는 그런 심층이 존재한다. 그런 심층에서 내밀하게 우리는 무(무 ne’ant) 우리의 무를 스쳐간다. 밤에 일어나는 모든 소멸은 우리 존재의 이와 같은 무로 수렴한다. 극단적인 경우, 절대적인 꿈은 우리를 무(Rien) 세계에 잠기게 한다. -무 (Rein): 네앙, 여명의 상태, 니힐(허무, 텅빔)이지만 생물학적인 면, -무 (ne’ant) -無 (철학적 없음)   **우리는 이 무(Rien)가 물로 가득 찰 때 생명을 다시 얻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존재론적 드라마에서 구원되어 보다 잘 자게 된다. 깊은 잠의 물속에 잠길 때, 우리는 평화 속에서 한 세계와 균형있게 존재한다.   무(Rien)나 물속에는 이야기 없는 꿈들, 절멸의 관점에서만 밝혀질 수 있을 꿈들이 존재한다. **나는 꿈을 꾼다. 그러므로 나는 꿈꾸는 실체이다. “그때 꿈은 꿈꾸는 실체 속에 더없이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 될 터이다.” 우리는 사유를 반박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꿈은? 꿈꾸는 실체의 꿈은? -이와 같은 꿈꾸는 실체에서 나는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그렇다. 모든 것은 밤의 형이상학의 문턱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그처럼 멀리 나아가기 전에, 아마 밤의 정신이 꾸는 꿈보다 더 접근하기 쉬운 영역에 있는 보다 덜한 미흡 존재 속에 잠기는 현상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밤의 꿈의 코기토가 아니라 몽상의 코기토를 다루면서 깊이 생각해 볼 것.   ****인간 정신 현상의 시적인 힘 —단순한 몽상의 특수성을 분명히 도출하려고 시도하면서 우리의 연구를 단순한 몽상에 집중시키는 것. 밤의 꿈과 몽상의 근본적 차이, 즉, 밤에 꿈을 꾸는 자가 자신의 자아를 상실한 그림자인 반면에, 몽상하는 몽상가는 그가 다소라도 철학자라면 몽상하는 자아의 중심에서 하나의 코기토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몽상은 의식의 섬광이 존속하는 몽환적 활동이다.   **몽상이 태어나게 되는 것은 긴장 없는 자각 속에서이고, 즐거움을 주는 이미지 —이 이미지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떠한 책임도 벗어나 몽상의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그것을 방금 창조했기 때문이다. --를 맞이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수월한 코기토 속에서이다.   **몽상하는 자의 존재는 그가 자극하는 이미지들에 의해 구성된다. 이미지는 우리를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고 우리의 깨어남은 하나의 코기토로 알려진다. 또 한 번의 가치 부여를 하면 우리는 긍정적인 몽상 앞에 있게 되며, 이 몽상은 그것이 산출하는 것이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무언가 산출을 하며 시적인 몽상이라 명명될 수 있다. 몽상은 몽상가 주변에 존재를 결집시킨다. 그것은 그에게 그가 현재의 존재 모습 그 이상이라는 환상을 준다. 몽상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우리를 존재론의 뉘앙스로 초대한다. 이러한 존재론은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락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몽상이 없이는 안락도 없다. 안락이 없이는 몽상도 없다. (존재는 하나의 가치!)   **생각하는 코기토는 방황하고, 기다리며 선택할 수 있다 —몽상의 코기토는 곧바로 그것의 대상,그것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위대한 몽상가는 반짝이는 의식의 대가들이다. 일종의 다원적인 코기토가 한 편의 시의 닫혀진 세계 속에서 소생한다. 아마 이 시의 총체성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의식적인 힘이 필요할 것이다. (텍스트 195쪽까지)   **코기토적 몽상에 대한 의미부여:     **내 시적 가치는 어떤 코기토를 지향하는가?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5장; 몽상과 우주(1)   **“영혼이 있는 인간은 우주에만 복종한다.” —가브리엘 제르맹   **“나는 매우 방대한 금언 속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우주가 필요했다.” -로베르 사바티에   **몽상을 하는 자가 일상을 가득 채우는 모든 ‘관심사들’을 물리쳤을 때, 그가 타자의 근심으로부터 오는 근심에서 벗어났을 때, 그리하여 그가 진정으로 자기 고독의 장본인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가 시간을 따지지 않고 우주의 아름다운 측면을 관조할 수 있을 때, 이 몽상가는 자신 안에서 열리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 갑자기 그런 몽상가는 세계의 몽상가가 된다. 그는 자신을 세계로 개방시키고 세계는 그에게 자기를 개방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었던 것을 몽상하지 않았다면, 세계를 결코 잘 보지 못한 것이다. .....시간은 정지된다. 시간은 더 이상 어제도 내일도 없다. 시간은 몽상가와 세계의 이중적 깊이 속에 매몰된다.   **이성적 인간은 아마 도취라는 낱말을 추상적인 낱말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를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도취가 진실하도록 시인은 세계의 잔에도 마신다. 그에게 은유만으로는 안 된다. 그에게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예컨대 확대된 잔의 우주적 이미지는 이렇다.   “수평선이 가장자리를 이루는 내 잔에도 나는 한 잔 가득히 창백하고 얼음장 같은 태양빛을 단숨에 꿀꺽 마신다.“ -피에르 샤퓌   **피에르 샤퓌의 매력은 용어들의 이례적인 결합과 은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미지가 확대되는 변화 정도를 따라가는 독자에게 모든 것은 위대함 속에 결합된다. 시인은 방금 세계의 잔에다 구체적으로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고독한 몽상 안에서 우주적 몽상을 하는 자는 '관조하다'라는 동사의 진정한 주체이고, 관조가 지닌 힘을 첫 번째로 증언한다. 몽상하면서 응시하는 것은 안다는 것인가? 그것은 이해한다는 것인가? 물론 그것은 지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몽상하는 눈은 보는 게 아니거나 최소한 그것은 다른 시각으로 본다. 우주적인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지각 이전이라고 지칭해야 할 상태에서 살도록 해준다. 몽상가와 그의 세계 사이의 소통은 고독한 몽상 속에서 아주 가까우며 ‘거리’가 없다. 지각된 세계, 지각에 의해 파편화된 세계를 나타내는 그 거리 말이다.   ** -하나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사상가들이 기나긴 반성의 길을 그리는 반면에 우주적 이미지는 즉각적이다. 그것은 부분보다 먼저 전체를 우리에게 준다. 그것은 그것의 기호들 가운데 하나로 우주를 붙들고 있다. 단 하나의 이미지가 전 우주에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묶어둔다. --과일은 그것만으로도 세계의 약속이고, 세계에 존재하도록 권유하는 초대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주적 상상력이 이와같은 근본적 이미지에 작용할 때, 거대한 과일은 세계 자체이다. 달과 대지는 과일 맛이 나는 별들이다.   “오 대지처럼 둥근 침묵 말없는 별의 움직임 점토질 핵을 중심으로 한 과일의 인력.” --장 케이론   --이처럼 세계는 둥근 모습으로, 과일 같이 둥근 모습으로 몽상된다. 그때 행복은 세계로부터 과일로 역류한다.   **시인이 하나의 특수한 이미지에 위대함의 운명을 부여하자마자 하나의 특수한 우주가 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시인은 현실적 대상에 자신의 상상적인 분신, 자신의 이상화된 분신을 부여한다. 이 이상화된 분신은 곧바로 이상화 작용을 하며, 그렇게 하여 확대되는 이미지로부터 하나의 우주가 탄생한다.   **몽상과 이미지 –4원소   **확실히 이미지는 우주적 생성에까지 확대되는 가운데 몽상의 통일적 단위가 된다. 몽상가가 자신의 몽상 속에서 ‘사물의 심층’으로 내려갈 때, 몽상이 우주와 실체가 결합하며 모든 것은 위대하고 동시에 안정적이다. 인간이 세계의 통일적 단위를 주장하기 위해 예로부터 끊임없이 상상해 왔던 ‘4원소’라는 물질의 상상력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매우 자주 우리는 전통적으로 우주적인 이미지들의 작용에 대해 몽상했다. 우리가 우리의 불 앞에서 몽상에 잠기면, 상상력은 이 불이 한 세계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샘 앞에서 몽상을 하면, 상상력은 물이 대지의 피이고, 대지는 살아있는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부드럽고 향기 나는 반죽을 손가락에 느끼면 세계의 실체를 반죽하기 시작한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우주적 물질에 의해 실체화된 세계들에 대한 분명한 증언을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꿈이었다. 몽상을 몽상하고,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보다도 더 과감한 몽상: 우주생성론은 사유를 조직화하지 않았다는 것, 과감한 몽상이며 신화의 환상태로 몽상했다는 것, 그 중 “물은 원소들 가운데 가장 신화적인 것”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이미지의 우주성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은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우주적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에 거주케 한다. 그것은 몽상가에게 상상된 우주 속에서 자신의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상상된 세계는 확장되는 자신의 집, 방 안에서 느끼는 자신의 집과는 반대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 몽상하면서 끊임없이 떠나고, 다른 곳 -언제나 안락한 다른 곳-에 거주한다. 몽상된 세계를 잘 지칭하기 위해선 그 세계를 행복을 통해 나타내야 한다.   **우주적 이미지는 구체적인 휴식을 우리에게 준다. 이러한 휴식은 어떤 욕구, 어떤 식욕에 부응한다. “세계는 나의 재현이다”라는 철학자의 일반적 표현을 ‘세계는 나의 식욕이다’라는 표현으로 대체해야 한다. ‘물어뜯는다’는 행복 이외에 다른 ‘염려’ 없이 세계를 물어뜯는 것, 이것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어뜯기는 세계에 대한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인가.   “부드러운 살, 강한 이빨, 총체적 존재의 얼마나 대단한 조화이고, 얼마나 대단한 통일성인가!” -장 발(철학자)   “물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능한 유일한 증거, 가장 설득력 있고 가장 내밀하게 진실한 증거---그것은 목마름이다.” -프란츠 폰 바아더   **각각의 식욕마다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 때 몽상가는 세계의 실체들 가운데 하나에서 영양을 취하면서 세계에 참여한다. 이 실체는 그의 상상력의 기질에 따라 밀도가 높거나 낮고, 따뜻하거나 부드러우며, 투명하거나 어스레한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이 세계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갱신하면서 몽상가를 도와주러 올 때, 몽상가는 우주적 건강에 다다른다.   ##나에게 찾아온 우주 맞이하기 – 내가 창조한 우주적 이미지를 시적 언어로 표현하기:   ##이민숙 : 바람 연작시, 하화도 연작시,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4) : (텍스트 138쪽~ )   **지극히 먼 추억을 추구하는 시인은 자기 이야기의 어떤 사건에 대한 단순한 추억보다 더 큰 근본적인 가치, 어떤 의지처를 원한다.   “내가 추억한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내가 다만 원했던 것은 약간의 소금이고 나를 알아보고 다시 떠나는 것이네.“   **감각이 기억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영원한 어린 시절’ 안에서 세계와 결부시키는 이 광물적 꿈, ‘원소들’의 그 꿈을 감성적인 것의 고고학에서 되찾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나이는 광물적 꿈이 아닐까? (의미 생각해 보기: )   **시인이 기억할 줄 모르는 영역은 어떤 저편인가? 근본적인 삶은 영원의 시도가 아닌가?   **우리가 삶의 시작에 대해 명상할 때 삶은 얼마나 위대한가! 기억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몽상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기원에 대해 몽상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망각이 우리를 죌 때, 과거를 돌파하기 위해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다시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우리에게 ‘기억의 과감성’을 가르쳐 준다.   “꾸며내라, 기억을ㅡ 깊은 곳에 소멸된 축제는 없다.”   (생각해 보기) : 기억 속의 추억을 향하여 시적인 문장 하나: @ @   **어린 시절은 인간적 물이고, 어둠에서 나오는 물이다. 안개와 섬광 속에 있는 그 어린 시절, 완만한 모호한 영역 속에 있는 그 어린 시절, 완만한 모호한 영역 속에 있는 그 삶은 우리에게 탄생들의 어떤 두께를 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시작했던가! 그러나 흘러가 사라져 버린 원천은 얼마나 많은가! 몽상은 상상력의 기억술이다.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운명이 사용할 줄 몰랐던 가능성들과 접촉한다.   **어린 시절은 존재의 우물: 그리하여 하나의 원형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몽상할 때면, 나는 내가 또 다른 원형에 사로잡히고 있음을 잘 안다. 우물은 하나의 원형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영혼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이다. -후안 라몬 히메네즈- “우물! 그 얼마나 깊고 ,청록색이며,신선하고 잘 울리는 낱말인가1 돌면서 어두운 땅을 파 신선한 물에까지 이르는 게 이 낱말 자체인 것 같지 않은가”   **순수한 추억, 무용한 어린 시절의 그 무용한 추억은 얼마나 자주 몽상의 양식처럼, 우리가 잠시 삶의 여백에서 살도록 도와주는 비(非)삶의 혜택처럼 되돌아오는가. 휴식과 행동, 몽상과 사유의 변증법적 철학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은 무용한 것의 무용성을 꽤 명료하게 말해준다.   **시인이 체험하는 ‘미소 짓는 그리움’ 속에서 우리는 그리움과 위안의 이상한 종합을 실현하는 것 같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우리로 하여금 매우 오래된 슬픔을 용서하게 해준다. 그 어떤 옛날의 분위기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억을 탈사회화해야 한다. 또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우리가 초창기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가르쳐 준 그 모든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 언급되고 이야기된 추억들을 넘어서, 우리는 어린아이의 영혼이라는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의 총합인 미지의 존재를 되찾아야 한다. 어린 시절에는 어린아이 전체가 놀라운 존재이고, 존재의 놀라움을 실현하는 존재인 때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달력의 톱니바퀴로부터 해방된 부동의 어린 시절, 변전이 없는 어린 시절을 우리 내부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삶을 부코의 이름을 통해서만 나타내면서 일상의 시간을 매일 배급하는 존재인 성인들의 시간도 인간들의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위대한 네 신(神)인 사계절이다. 순수한 추억은 날짜가 없다. 그것은 계절이 있다. 그 계절은 추억의 근본적인 흔적이라는 계절이다. 잊기 어려운 그날 태양은 어떠했고, 바람은 어떠했던가? 이것이 무의지적인 기억의 어김없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이다. 그렇게 하여 추억은 커다란 이미지, 확대되고 확장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것은 어떤 계절의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 이 계절은 속이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완벽의 부동성 속에서 휴식하는 총체적 계절이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이 총체적 계절인 이유는 그것의 모든 이미지들이 동일한 가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요, 우리가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를 통해 그것의 본질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겨울, 가을, 태양, 여름의 강은 총체적인 계절의 뿌리들이다. 그것들은 시선을 통한 광경들일 뿐 아니라 영혼의 가치들이며, 직접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부동의 심리적 가치들이다. 기억 속에서 체험될 때, 그것들은 언제나 호의적이다. 추억의 계절은 미화한다.-우리가 몽상하면서 어린 시절의 계절이 지닌 단순함의 깊이로, 그것의 가치의 중심 자체로 내려 할 때, 그것은 시인의 계절이 된다.   **모든 어린아이는 신화적이고 당연히 신화적이다. 어린아이의 상상력은 어른들처럼 화석화된 이야기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의 우화들로 살아간다. 어린아이는 바로 그 자신의 몽상 속에서 자신의 우화들, 그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그런 우화들을 발견한다. 그래서 우화는 삶 자체이다.   “나는 내가 나의 우화를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살았다.”   **우화는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매혹시킨다. 우리는 매혹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꿈을 말하려는 데 성숙한 나이의 속에서 애를 태우기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꿈은 그것의 언어를 배울 수 있기도 전에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 버린다.” -데이비드 소로-     (빗살의 시간과 몽상)     -우리의 우화를 복원하는 시간, 우리의 어린 시절 우화의 가장 선명한 장면은?       -우화는 현실적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 속에서 드러내고 싶은 몽상적 사건: 그 사건에 의미부여하기.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5) : (텍스트 153쪽~ )     **시적 실존주의 → (상상력×기억의 융합) :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념적 특권을 강제하는 역사가의 기억에서 벗어나야 한다. 추억의 장소들에 충분히 머물지 않은 채 날짜들에 따라 달려가는 기억은 살아있는 기억이 아니다.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발적인 것들에서 벗어나는 시적인 것의 실존주의로 비(非) 실존주의를 체험한다. 추억하면서 상상하는 몽상 속에서 우리의 과거는 실체를 되찾는다. 인간 영혼과 세계의 관계는 그림 같은 것을 넘어서 강력하다. 그때 우리의 내부에서는 이야기의 기억이 아니라 우주의 기억이 살고 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들이 되돌아온다.   “권태는 지방이 주는 가장 큰 행복이다. 나는 격렬함을 통해 우리의 내부에서 몽상을 끌어내는 그 심층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권태의 소리를 듣는다.” --그런 시간들은 되찾은 상상력 속에서 영속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고요의 세계 속에, 몽상의 세계 속에 있었다. 삶을 지배하는 어떤 삶 속에서, 지속하지 않는 어떤 지속 속에서 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복원시켜 줄 줄 아는 매력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기억은 매우 생생한 상상력, 다시 말해 감동을 주기 쉽고, 따라서 과거의 장면들을 삶의 매혹처럼 제시함으로써 그것들을 매 감각에 의지해 환기시킬 수 있는 상상력 속에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들레르   **몽상은 폭넓은 촬영이 되도록 충분한 빛으로 현실을 둘러싼다. (추억의 촬영, 일종의 본능) -수완 있는 사진작가는 자신의 스냅사진에 어떤 지속, 아주 정확히 말해 몽상의 지속을 부여할 줄 안다.시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시적인 것의 실존주의에 따라 우리의 기억에 맡기는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에 속하며 우리 자신이다.   **“나는 내가 나 지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인정했던 온전한 어린 시절을 상상적 기억으로부터 받아들였다.” “아마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이미 열망했던 금지된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고요하고 친근한 집에서 놀이 동무들과 함께 살았다. 내가 때때로 그런 동무들을 갖고자 열망했던 것처럼 말이다.” -앙리 보스코, 『히아신스』   **어린 시절은 심층심리학의 바로 그 양식으로 진정한 원형처럼 나타난다. 확실히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하나의 이미지이며, 행복한 이미지들을 끌어당기고 불행의 경험들을 물리치는 이미지들의 중심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그 원리상 전적으로 우리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단순한 추억보다 더 심층적인 뿌리를 갖고 있다.   **원형들의 시적 합일: 우리는 시가 인간 존재를 위한 종합의 힘임을 입증할 수 있기를 참으로 바라고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원형들은 우리가 세계를 믿고 세계를 사랑하며 우리의 세계를 창조하도록 도와주는 영감의 보고들이다. 각각의 원형은 세계로의 개방이고, 세계로의 초대이다. 각각의 개방으로부터 비상의 몽상이 솟아오른다.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은 우리를 근본적 몽상의 효력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어린아이의 물, 어린아이의 불, 어린아이의 나무, 어린아이의 봄꽃......세계의 분석을 위한 얼마나 많은 진정한 원리들인가!   **원형은 강력한 이미지의 기원으로 언제나 남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부성적인 힘, 모성적인 힘....모든 위대한 원형들)--그것들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은 콤플렉스가 없다. 몽상 속에서 어린아이는 시적 통일성을 실현한다.     &&질문: 내가 실현하고 싶은 시적 통일성은??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 찾아가서 몽상하기: 세계로의 초대 세계로의 개방을 실현하는 시 쓰기               **어린 시절이 몽상되고 명상될 때, 고독한 몽상의 그 내밀함 속에서 명상될 때, 그것은 철학적인 시의 색조를 띤다. ‘철학적 반성’ 속에서 몽상에 어떤 위치를 부여하는 철학자는 명상된 어린 시절을 통해 하나의 코기토를 경험한다. 이 코기토는 어둠으로부터 나오며, 어둠의 가장자리를 간직하고 있고, 아마 어떤 ‘어둠/그림자’의 코기토라 할 것이다. -삶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몽상하지 않는 삶 속에서인가 몽상하는 삶 속에서인가? 그 처음은 어디였는가?   **코기토 에르고 슘(Cogito Ergo Sum) -코기토의 진정한 의미: 인식론의 시초-단순한 ‘생각’이 아닌 ‘이성’-복합적 정신 기능—방법적 회의의 의미. 신으로부터의 독립. **인간 존재의 무의미들의 총체인 어린 시절은 고유한 현상학적 의미, 순수한 현상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탄의 기호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시인 덕분에 우리는 경탄하다는 동사의 순수하고 단순한 주체가 된다.   **지붕에서 올라가는 연기....! 그것은 마을과 하늘을 연결하는 선이다......추억 속에서 그것은 언제나 푸르고, 완만하며 가볍다.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보는 것, 어른들이 보여준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인들의 보여줌은 이미 자신들의 잃어버린 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본다’고 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몽상하는 어린아이는 얼마나 대단한 우주적 존재인가!   **모든 몽상이 태어나게 하는 가벼운 우울과 많이 몽상을 한 어린아이의 아득한 우울 사이의 일치는 심원하다. 몽상하는 어린아이의 우울을 통해서 모든 몽상의 우울은 과거를 지닌다. 존재의 연속성, 그러니까 몽상하는 존재의 실존주의의 연속성은 이러한 일치 속에서 형성된다.   **정신분석학은 사건의 삶을 연구한다. 그러나 시인은 사건 없는 삶,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삶과 맞물리지 않는 삶을 경험하고자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사건들을 가져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이다. 모든 사건들은 몽상 속에서만 우리의 내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아니마, 즉 여성적 존재의 자연스러운 평화를 동요시키는 ‘외상’이고 남성적인 난폭함이다.......   **그러므로 사건은?? 시적 질료면에서 어떤 것인가?? (개념 이해하기) : 몽상의 시학은 몽상을 고요함의 의식 속에 유지하는, 몽상의 유익한 점들을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   (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그것은 충실성에 대한 향수이다!   **상태의 추억과 마주하는 일: 색깔도 없고 사건도 없는 시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상태들을 알아본다. 왜냐하면 더없이 소란스럽고 지극히 즐거운 어린 시절에도 ‘북쪽’의 시간들은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시계 없는 그 시간들 또한 우리 안에 있다.몽상은 호의적이고 진정시키는 그 시간들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그것들은 단순하게 그러나 고귀하게 인간적이다.   **우리에게 그런 존재의 가치들을 드러내주기 위해선 아마 시인이 필요할 것이다.....우리의 내부에서 여전히 우리의 내부에서, 언제나 우리의 내부에서 어린 시절은 영혼의 상태이다.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6) : (텍스트 168쪽~ ) ** –선함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은 우리의 몽상들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것인 바, 우리에게 평화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아이가 인간의 스승이 된다면, 인간은 얼마나 형이상학적으로 위대할 것인지 이해했다. “누가 나에게 어린아이의 선한 마음을 가르칠 것인가! 상상적 혹은 현실적인 욕구가 근심이나 낙담에 빠뜨리고, 침울하게 만들거나 의기소침하게 만들 때, 우리는 어린아이의 친절한 영향을 느끼고 싶고, 그에게서 배우고 싶으며, 영혼이 평온해지면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우리 자신의 스승으로 부르고 싶어한다.”-키에르 케고르   ** – 신화 속의 어린아이는 신화소(神話素)의 분명한 사례이다. 이 신화소,다시 말해 존재가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그 진입의 가치와 작용을 잘 포착하기 위해서는 전기의 흐름을 멈추어야 하고, 어린 시절의 상태가 삶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삶의 불사신이 될 수 있을 만큼 어린아이에게 뚜렷한 위상을 부여해야 한다. -에르베 루소   **인간의 가족에서는 고아이지만 신들의 가족에서는 사랑받는다는 것, 이것이 신화소의 두 극점이다. 우리가 이 두 극점의 모든 몽환을 인간적 차원에서 되살리기 위해선 대단히 긴장된 몽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다소간 고아였고 우리의 희망을 이상화된 존재들, 즉 희망의 신들 자체로 향하게 했던 그런 몽상이 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몽상으로 보면, 우리가 신격화된 어린 시절의 신화소에 민감하게 되는 것은 본원적인 우주에 밀착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린아이 신(神)은 세계의 아들이다. 그리고 세계는 연속적인 탄생을 표상하는 이 어린아이 앞에서 젊다. 달리 말하면 젊은 우주는 고양된 어린 시절이다.   **신격화된 그 모든 어린 시절은 인간 영혼의 심층에 살고 있는 한 원형의 활동을 증거한다. 모든 몽상가 내부에는 어린아이, 몽상이 찬양하고 안정시키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몽상은 어린아이를 내력 이야기에서 떼어내고, 그를 시간에서 벗어나게 하며, 시간에 낯설게 한다. 또 하나의 몽상으로서 찬양받는 항구적인 이 어린아이 그가 바로 신이다.   **-어린 시절의 식물적 힘을 전설에 의해 자양을 얻어 인생 내내 우리의 내부에 존속한다. 우리의 심층적 식물적 태도가 지닌 비밀은 거기에 있다. “어린 시절은 우리 안에서 죽어가고 주기를 마치자마자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보물 가운데 가장 살아 있는 것이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해준다.....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할 줄 모르고, 자신의 육체 안의 육체처럼, 낡은 피 속의 새로운 피처럼 자신 안에서 어린 시절을 다시 포착할 줄 모르는 자는 불행할 지어다. 그는 어린 시절이 그를 떠나자마자 죽어버린 것이다.” -프란스 엘렝스   **시인을 따라갈 때, 우리가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을 심화시키면 우리는 우리 운명의 나무를 보다 깊이 뿌리박게 하는 것 같다. 인간 운명의 진정한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나는 대단히 안도를 느낀다. 나는 긴 여행에서 돌아오고 다음과 같은 확신을 얻었다. 즉 인간의 어린 시절을 그의 삶 전체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성숙한 나이의 소관이다. 나는 이 수수께끼를 지니고 30년을 걸었지만 그것에 어떤 사상을 주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내가 길을 나섰을 때 모든 게 이미 언급되었다는 것을 안다.” -프란스 엘렝스   ** - 냄새! 그것은 세계와 우리의 융합을 나타내는 최초의 증거이다. 옛날의 냄새에 대한 그 추억을 우리는 두 눈을 감을 때 되찾는다. 현재에서처럼 과거에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냄새는 내밀성의 중심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냄새의 다발이다. -Louis Chadoume   “달아난 날들의 막연한 매력을 환기시킨다. 숨을 쉬는 게 기억일 때는 모든 냄새가 좋다. 위대한 몽상가는 그렇게 과거를 호흡할 줄 안다.” 사라진 집들의 방들, 복도, 지하실, 다락방은 변함없는 냄새의 거처인데, 이 냄새는 몽상가가 알고 있듯이 그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빌로드의 향기를 영원하게 만든다. -Yves Cosson   **하나의 계절, 개인적인 계절이 그 특이한 냄새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가을 너에 의해/ 축축하게 젖은 가련한 두건 냄새/   /--새싹의 씁쓰름하고 끈적끈적한 향기 속에 [담긴]/ --포플러의 끈적이는 새싹을 손가락으로 으깨어 보고,그 미끈거리는 씁쓰름한 반죽을 맛보가. 그러면 그대들은 온 생애 동안 추억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알랭 보스케   /박하로 둘러쳐진/오솔길의 향기가/내 어린 시절 속에서 춤춘다./ -C.A.Bozombres   **이미지들 가운데 가장 번역 불가능하고 가장 미묘한 냄새적 이미지-장 드 구르몽   **어린 시절의 눈에 대해-‘장미와 소금의 냄새’-앙리 보스코-를 맡았다. 그것은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차가움의 냄새 자체이다.   **씁쓰름한 회양목과 사향 냄새 나는 카네이션의 조화 –마리 도게   **“내 고장의 냄새는 한 개의 사과였다.” -뤼시 들라뤼 마르드뤼스   **“나는 땅, 밀, 새 포도주의 냄새 속에서 자랐다. 내가 그 냄새에 대해 생각할 때면, 기쁨과 젊음의 생생한 향기가 나에게 되살아난다.” -앙리 보스코 (추억은 과거 속에 보관된 향이다.)   **행복한 날들에 세계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향연을 준비했던 대단한 냄새들이 기억 속에 떠오를 때,보들레르를 좋아했던 나는 ‘추억들을 먹는’ 것 같다. 갑자기 나는 모든 더운 빵을 시인들에게서 수집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재시작되는 축제의 대단한 냄새, 우리가 최초의 행복에 대해 단호하게 표명하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그런 삶의 대단한 냄새를 내가 추억에 부여하도록 그들이 도와줄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   &&냄새에 대한 추억, 추억에 냄새의 이미지 부여해서 스케치해 보기.   -나는 그에게서 (                                     )냄새를 맡았다.   -내 고향에서는 (                                                )냄새가 났다.   -내 추억의 가장 강렬한 냄새는??
6    몽상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제 2장 -아니무스, 아니마 댓글:  조회:1013  추천:0  2018-10-20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6.21.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   **“과거의 근원이 결합되어 있는 심연보다 더 깊은 심원한 여인이여. 왜 그대는 나하고만 함께 있지 않은가?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그대는 전생의 존재들의 골짜기로 소멸하는구나“ –이반 골, [다양한 모습의 여자]   “내 영혼은 목신의 영혼이자 쳐녀의 영혼이다.” -프랑시스 잠, [토끼 소설]   **꿈과 몽상의 대립 속에서—말로 하는 사랑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부재하는 연인에게 하게 될 말을 준비하는 몽상에서 낱말들, 아름다운 낱말들은 충만한 생명력을 얻는다.   **우리가 또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낱말들이 몽상의 언어에 속하느냐, 명료한 삶의 언어에 속하느냐 (휴식의 언어에 속하느냐, 감시받는 언어에 속하느냐) 자연스러운 시의 언어에 속하느냐, 권위적인 운율법에 단련된 언어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신적 ‘무게’가 다르다는 점이다. 밤의 꿈은 검열에 대한 격렬한 혹은 교활한 투쟁일 수 있다.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겸열 없는 언어를 알게 해준다.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진정 우리 자신에게만 말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명료한 의식을 아직은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성과 여성으로 동시에 경험한다고 해서 놀랄 게 아무것도 없다. 어떤 정념의 미래를 체험하는 몽상은 자신의 정념의 대상을 이상화한다. 이상적인 여성적 존재는 정념에 사로잡힌 몽상가에 귀를 기울인다. 몽상은 이상화된 남자의 고백을 야기한다.   **우리 자신을 현실적 존재와 이상화하는 존재로 이중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몽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몽상이 ‘심층심리학’의 가장 좋은 학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심층심리학으로부터 배웠던 모든 가르침을 우리는 몽상의 실존주의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적용할 것이다. 인간 정신 현상의 그 어떠한 요소에도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는 완전한 심리학 같으면 가장 극단적인 이상화, 즉 우리가 앞서 출간한 한 책에서 절대적인 승화라고 지칭했던 지대에 도달하는 이상화를 통합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완전한 심리학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인간에 결부시켜야 하고, 몽상의 시학을 삶의 단조로움과 결합시켜야 한다.   **사실 우리가 볼 때 분명한 것은 말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심충에서 움직이는 지극히 멀고 지극히 모호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무의식은 중얼거리며 우리는 그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자신의 진실을 듣는다. 자유로운 몽상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서로에게 고백하기 위해. 잘 화합된 고요한 이중적 본성 속에서 교감하기 위해 이야기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모든 학파 가운데, 인간 정신 현상이 그 원초성에서 양성적이라는 점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 것은 C.G.융의 학파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억압된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망각된 추억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은 성적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는 자기 무의식의 심층을 이중의 안테나를 갖고 가볍게 건드린다. 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는 현재의 심리학이 될 정도로 흥미롭다. 예컨대 왜 니체는 “엠페도클레스가 자신이 사내와 계집이었음을 (...) 기억했다”고 이야기하는가? 니체의 여성성읜 보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다 심원하다.   **우리의 검토를 몽상의 세계로 한정하는 우리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경우에도 조화로운 양성성은 마음을 평온케 하는 작용 속에 몽상을 유지시켜 주는 그 나름의 역할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원초적인 양성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에 나타나는 그것들 사이의 경쟁을 표시한다. 양성성은 자신의 거처 —심층적 몽상의 거처 같은 곳—를 떠나자마자, 불균형 상태가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흔들림에 빠진다. 심리학자가 비정상 상태라고 표시하면서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흔들림이다. 그러나 몽상이 깊어지면 이런 흔들림은 잦아들고, 정신 현상은 성의 평화, 즉 말의 몽상가가 경험하는 그 평화를 되찾는다.   **심리학자 뵈이텐디예크는 [여자]라는 아름다운 책에서 정상적 남자는 남성성이 51퍼센트이고 정상적 여자는 여성성이 51퍼센트라는 점을 참조하고 있다. .....완전한 남성성과 완전한 여성이라는 두 평행적인 단일주의에 대한 조용한 확신을 깨트리는 것, 그러나 시간은 모든 균형에 영향을 미친다. 낮과 밤, 계절과 나이는 우리의 균형 잡힌 양성성을 고요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각각의 인간 존재 안에서 남성적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와 여성적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는 수치와 측정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여성의 시계는 조용하게 흐르는 지속 속에서 연속적으로 나아간다. 남성의 시계는 급격한 움직임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몽상과 인식노력을 솔직하게 변증법적으로 대비시켜 보겠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점을 보다 잘 느낄 수 있을 것.   **남성과 여성의 변증법은 심층의 리듬을 따라 전개된다. 그것은 보다 덜 깊은 것, 언제나 덜 깊은 것(남성)으로부터 언제나 깊은 것, 언제나 더 깊은 것(여성)으로 간다. 단순한 고요함의 휴식 속에서 포괄적으로 펼쳐지는 여성성을 우리가 만나는 곳은 몽상 속에서이고, 앙리 보스코가 언급하듯이 ‘잠재적 삶의 무궁한 저장고’에서이다. 정염의 삶에서조차 남자와 여자는 각기 자신의 이중적인 힘을 이용할 줄 안다. 따라서 두 파트너의 각자 안에 그들이 지닌 이중적 성의 조화를 가져오거나 유지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 어려운 문제가 된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6.28.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2)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성격학적 분류를 결정하기 위해 열거하는 여성성의 징후들은 정상적인 아니마, 다시 말해 정상적인 모든 인간 존재 안에서 살아가는 아니마와의 진정한 접촉을 제시하지 못 한다. 그건 심리학자의 방식이며 동요된 아니마, 그러니까 ‘문제’로 괴롭힘을 당하는 아니마의 거품만을 주목한다. 마치 여성적인 휴식의 안전을 경험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리적인 성적 구분의 두 기호로 인간은 너무 급격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부드러움, 이중적 부드러움, 아니무스의 부드러움과 아니마의 부드러움을 다루는 심리학이 가동될 수가 없다. 새로운 낱말들을 가지고 오래된 언어를 말한다는 건 나름의 모순에 빠질 수가 있다는 뜻.   **일상 속의 남자와 여자는 드레스와 바지로 이해되듯이 두 개의 반대 개념으로 규정된다. 아니무스는 정신적 성장 속에서 밝혀지고 지배하는 반면, 아니마는 존재의 지하실을 향해 심화되고 그 속에서 지배한다는 것이다. 몽상적 차원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다르다. 그것은 몽상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마라는 점이다. 아니마는 고독이다. 몽상은 모든 아니마의 자유로운 확장이다. 시인이 아니무스적인 관념들에 노래의 구조, 노래의 힘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자기 아니마의 몽상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아니마의 몽상이 없다면, 시인이 아니마의 몽상으로 쓴 것을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 “시인들은 몽상을 하면서만 읽을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심리학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가 아니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모순적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인 직무에서는 권위적인 사람들, 빳빳한 군모를 쓴 어떤 군인이, 저녁이면 부인이나 노모의 권위에 움츠린 채 매우 겸손해진다. --이러한 성격상의 모순들이 소설적 진실 속에 깃든 심리적 정확성이다.   **심층적 인간, 곧 고독 속에 있는 인간을 다루는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처럼 단순하고 그처럼 명백한 결정이 정교한 존재론의 연구를 멈추게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비스마르크의 눈물(융이 그것을 보았다면), 그 눈물에서 돌연한 실체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무스의 그와 같은 무너짐이 아니마의 긍정적 나타남을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아니마는 허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아니무스의 가사 상태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라, 그것의 고유한 힘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 휴식의 내적 원리이다. ‘눈물’이 아니마의 기호는 아니다. 슬픔, 회한, 피로의 길 끝에서 오는 게 아니다. 심리학적 관찰은 서로 분리되는 시점이 아니라,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결합에 의해 관찰된다. 그것은 우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의해서만 관찰되지는 않는다.   **아니마는 우발적인 일들을 혐오한다. 그것은 부드러운 실체이고, 자신의 화합된 존재를 부드럽고 천천히 즐기고자 하는 화합된 실체이다. 우리는 몽상을 심화시킬 때, 몽상, 특히 잔잔한 물의 대단한 휴식 속에서 물의 몽상을 사랑할 때 보다 확실하게 아니마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 이상화하는 몽상 속에서 아니마의 순수성을 새롭게 해 주는 죄 없는 물이여! 휴식 상태에 있는 물에 의해 이처럼 단순화된 세계 앞에서 몽상하는 영혼의 자각은 단순하다. 단순하고 순수한 몽상의 현상학은 우리를 우발사(遇發事) 없는 정신 현상으로, 휴식의 정신 현상을 향해 인도하는 길을 열어준다. 잔잔한 물 앞에서의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아니마의 선(善)인 항구적인 정신적 일관성을 경험하게 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고요함의 가르침이로, 우리의 본성이 지닌 고요함, 우리의 아니마가 지닌 실체적인 고요함을 자각하라는 간청이다.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있는 본성, 스스로 자족하는 본성이고, 고요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심층적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진정 우리 안에 있는 잔잔한 물의 존재이다.   **연금술사의 애니미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찬가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실험하고 수많은 실험을 통해 스스로를 증식시키는 것의 애니미즘이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자신의 몽상을 실험한다. 이때부터 연금술의 언어는 몽상의 언어이고, 우주적 몽상의 모어이다. 이 언어는 몽상되었던 바대로 고독 속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연금술의 책을 읽을 때 가장 혼자가 된다. 우리는 세상에 홀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곧바로 우리는 세계를 몽상하며 태초의 언어를 말한다. 그런 몽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런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 언어의 용어들을 주의 깊게 탈사회화(脫社會化)해야 한다. 그러니까 은유에 완전한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전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낱말의 몽상가에게는 얼마나 많은 훈련인가!   **이때 은유는 기원, 다시 말해 직접적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이미지의 기원이다. 연금술사의 몽상에서 왕과 왕비가 어떤 실체를 만드는 데 참석하러 온다며 그들은 요소들의 결합을 주재하기 위해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작품의 위대함의 상징인 것만이 아니다. 진정으로 그들은 우주적 창조를 위해 작업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위엄을 나타낸다. 단번에 우리는 분화된 애니미즘의 정점으로 이동해 있다. 살아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위대한 활동 속에서 왕과 왕비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분리시킨다면 현실이 없는 결합된 두 힘이다. 연금술사의 왕과 왕비는 세계의 아니무스와 아니마이며, 이것들은 몽상하는 연금술사의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확대된 모습들이다. 이 원리들은 우리 내부에서 가까이 있듯이 세상에서도 아주 가까이 있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7..5.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3)     **연금술사의 언어는 정열적인 언어이고, 몽상가의 영혼 속에 결합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대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이다.   ##연금술은 왜 서로 통합된 언어를 필요로 하는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대화에서 어떤 보석으로 제련시킬 것인가? 연금술사의 사유를 펼쳐보자.   **아니무스와 아니마는 그 나름의 어휘를 지니고 있고, 그 어휘를 따라갈 때 모든 것은 이 두 어휘의 결합으로부터 태어난다. 사물, 물질, 별....그것들의 이름이 지닌 위엄에 복종해야 한다.   **이 이름들은 찬양이나 멸시를 나타내지만, 거의 언제나 찬양을 나타낸다. 어쨌거나 저주의 어휘는 보다 간단하다. 저주는 몽상을 깬다. 연금술에서 그것은 실패를 의미한다. 물질의 힘을 일깨워야 할 때 찬양은 절대적이다. 찬양은 마법적 작용을 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찬양과 찬탄의 언어, 몽상적 연금술로 연습하기) 예; 1.찔레꽃 그대는 ***이다! 2.고양이 너는 ***하다! 3.돌멩이는 ***을 위하여 **한다! 4.바다는 ***하다! 5.( )은 나의 ( )처럼 아름답다. 6.나의 ( )을 위하여 오늘 지금 ( ) 할 것이다.   “그처럼 찬양에 뒤덮이자 인드라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뒤메질’-   **반죽의 아니마—우리가 작업을 할 때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몽상은 손으로부터 사물로 이어지며 몽상적 상태를 체험한다. 영혼과 사물에게 신비는 내부에 있으므로, 인간의 내면은 몽상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열린다. 우리는 관념과 몽상의 복합체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 **실체에 대한 몽상, 말로 표현된 몽상은 물질이 탄생, 생명, 정신성을 획득하기를 바란다. 문학은 여기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문학이 없다면 모든 것은 소멸하고, 현상들은 가치의 광채를 상실하고 만다.   **투사: 서로 사랑하는 두 존재의 교감에 관한 심리학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변증법은 ‘심리적인 투사’의 현상처럼 나타난다.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자신의 아니마에서 자기가 경배하는 모든 가치를 이 여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자는 자신의 아니무스가 정복하고자 하는 모든 가치를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투사한다. ---이 두 교차된 투사가 균형이 잘 잡혀 있을 때, 그것들은 강력하게 결합한다. 이 ‘투사’ 가운데 어느 하나가 현실에 실망을 한다면 실패한 삶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그러나 몽상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삶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몽상의 진정한 본능은 우리의 아니마 속에서 활동적이며 정신에 연속적인 휴식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실패의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비현실적인 기능이 지닌 구체적인 용도는 매우 정연한 이상화(理想化) 속에 있다. 여자의 아니무스가 투사하는 이상적인 남자와 남자의 아니마가 투사하는 이상적인 여자는 현실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결합적인 힘들이다.   **고독한 몽상의 비밀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암영들이 아니라 사랑의 새벽을 밝히는 미광들이다. (아니무스의 잠재성과 아니마의 잠재성을 포함하는 두 개의 정신 현상 사이에 4극적인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상화와 현실 그 어느 쪽도 망각하지 않는 것! (교재 97페이지 도표 참조)   **어떤 책들의 등장인물들 속에서 발견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형태들은 독서의 시기들 그때마다 동일한 풍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위대한 책은 특히 심리적으로 살아있다. 우리는 그것을 읽고 또 읽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예를 들어)   **연금술에서 우리는 지적인 인내와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한 의식의 불순물들을 뒤지는 심적 인내의 작용 자체 속에 있다. 연금술사는 물질을 가르치는 자이다. 지상의 모든 실체에게 그것의 젊은 활력을 다시 주겠다는 꿈은 근본적인 덕성이 얼마나 대단한 꿈인가! 그 덕성의 기나긴 작업을 한 후 자웅 양성 속에 결합된 원리들은 성스러운 결혼이라 마땅할 정도로 ‘순화’된다. 양성에서 성혼(聖婚)으로까지 이것이 연금술의 명상이 가는 심리적 거리이다.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힘에 의지한 복잡한 확신을 통해 연금술사는 세계의 영혼을 포착하고 이 영혼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연금술은 세계에서 인간으로 가는(물질로부터 언어적 몽상으로 투사되는) 영혼의 문제가 된다.   **고독한 몽상 속에서 사랑받으며 미덕으로 치장된 존재의 모든 이상화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또 삶을 몽상하면서 표명된 이상적인 것들에 심리적인 현실을 부여하는 그 모든 치환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자가 만나는 전이와는 전혀 다른 중요성을 지닌 복잡한 전이를 생각해야 한다. ‘전이’(몽상적인 의미)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우주적인 상황을 연결시키기 위해 일상적인 세부적 관계를 넘어서며. 사회적 상황을 넘어선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그가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뿐 아니라 세계를 가공하는 그의 이상화 충동을 따라서 이해하도록 요구받는다. 그것은 자웅양성적 특성인데, 그 특성의 이중적 고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자웅양성적 특성은 생명의 모호한 기원에, 어떤 불분명한 동물성 속에 묻혀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정점(頂點)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부터 오면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고양을 보여준다. 그것은 초(超)남성성과 초(超)여성성이 결합된 몽상을 준비한다.     ------------------------------------------------------------ ------------------------------------------------------------     ##몽상적 아니마와 결합적 자웅양성과 정점의 변증법을 위하여! 창작의 언어를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 그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투사와 복잡한 전이의 다양한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할 것이다. 빗살의 눈빛들이여 몸과 영혼의 아니마 아니무스의 총체적 시간들이여 함께 가자 이상화의 세계를 향해! 현실의 몽상적 길을 밟으며....한 발 한 발, 매순간 아름다운 시어를 만나보자!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7.12.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4)     **몽상은 몽상가를 다른 세계로 옮겨 놓음으로써 몽상가를 그 자신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다른 존재는 여전히 그 자신이고, 그 자신의 복제 분신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를 반영하는 존재인가?” 철학자라면 그것들을 회의(懷疑) 속에서 강화할 것이다. 사실 몽상은 존재를 보다 부드럽게, 보다 자연스럽게 양분한다. 그것도 참으로 대단한 다양성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내가 나보다 덜한 존재가 되는 몽상이 있다. 그때 그림자는 풍부한 존재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의 심리학자보다 더 예리한 심리학자이다. 우리 존재의 분신인 그림자는 우리의 몽상 안에서 ‘심층심리학’을 경험한다. 우리 자신이 아니무스와 아니마로 이중적이듯이 이중적 분신인 그림자를 통해, 역설들의 핵심에 다다른다. ‘분신은 이중적 존재의 분신이다.’     **지극히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가 죽은 존재를 불러올 때, 우리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를 이상화시킬 때, 독서 속에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유로울 때, 우리는 삶 전체가 이중화되는 현상을 느끼고 세계가 우리의 공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통합함을 느낀다. 공상의 심리학이 없다면 진짜 심리학도 없으며, 완전한 심리학도 없다. 자신의 몽상 속에서 인간은 절대권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몽상을 하는 고독한 자에게 제공되는 모든 심리적인 잠재력을 분석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명구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혼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넷이다. 고독한 몽상가는 4극(책 97쪽, 표 참조)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우리는 한 여자 옆에 우리의 영혼을 부분부분 놓아둠으로써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다.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양분하고 예전에 우리에게 중성적이었고 무심했던 사랑받는 여자는 우리의 또 다른 자아의 옷을 입기 시작하고 이중적이 된다.” /스트린드 버그/   **몽상은 창조하는 심리의 작품인 것이다. 이상화된 존재는 이상화하는 존재와 말하기 시작한다.....자신의 이중적 분신에게 말하면서 이중적이 되는 존재에게 이원적인 언어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이원적인 두 배, 즉 ‘사중(四重)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여기서 사유와 몽상, 현실의 정신적 기능과 비현실의 기능의 매개적 유희가 인간 상상력의 그 심리적인 경이로움을 생산하기 위해 증대되고 교차한다. 인간은 상상해야 할 존재이다. 왜냐하면 결국 비현실의 기능은 우주 앞에서처럼 인간 앞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을 창안하는 소설가와 인간적인 것의 매력적인 멋을 계속해서 창안하는 시인들을 읽을 때 우리는 참으로 심리학적 세련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말없는 몽상 속에서 감히 말하지 않고 체험하는 것은 그 모든 자기 초월이다.   “누이야, 나와 함께 기도하러 가자, 식물의 영속성을 되찾기 위해.” -에드몬드 반데르캄멘-   ‘식물의 영속성,’ --아니마를 나타내는 진실, 몽상에 어울리는 세계, 영혼의 휴식을 위한 얼마나 대단한 상징인가!   **가치의 개입은 사실이 제기하는 문제를 철저하게 변화시킨다. 철학과 종교는 자웅양성적 특성을 하나의 인류학의 토대로 만들기 위해 협력할 수 있다. 수많은 감정적 실패를 통해 이 러시아 철학자(솔로바예프)는 내세의 자웅양성적 삶을 준비하는 순수한 사랑의 그 영웅적 태도를 유지했다. **두 진정한 연인 사이의 상호적 이상화의 심리학을 위한 명구:   “너의 가치를 크게 하기 위해 너의 사랑을 더 크게 하라.” -바레트 브라우닝-   **작품의 예; 발자크의 에세이  -제1장; 세라피투스 , 제2장; 세라피타, 제3장; 세라피타-세라피투스, (Seraphita –양성적 인간을 이르는 발자크의 소설 및 에세이에서 쓰인 용어) (--인간의 총체인 완전한 인간은 남성적 요소의 능동적 미덕들로, 그리고 여성적 요소에 의한 보존하는 힘들로 계속적으로 제시되며, 마침내는 그것들의 종합이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전적인 결속처럼 이루어진다.) 발자크의 소설에서 자웅양성적 존재를 사랑하려는 두 사람이 있고, 분신 존재를 사랑하려는 두 사람이 있기 때문에—세라피투스, 세라피타만이 모든 몽상을 유인하는 이중의 자기(磁氣)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우리는 네 개의 극을 지닌 몽상 앞에 있다. 두 정념을 이상화된 삶으로 상승시키고자 할 때, 아니무스가 아니마로, 아니마가 아니무스로 가는 얼마나 많은 ‘투사’가 이루어지는가!   **이상화하는 몽상은 점점 더 높이 올라가면서 수준이 높아지는 일방통행이다. 그러나 보다 잘 몽상하는 자는 아무것도 억압할 게 없다는 것을 깨우친다. 극단적인 이상화의 몽상은 모든 억압에서 해방되어 있다.그것은 날아오르는 상태에서 ‘정신분석학자의 벽을 넘어선’ 것이다.   **아무튼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은 여자를 훌륭하게 이상화하려면 남자가 되어야 하며, 아니마의 의식에서 원기가 풍부한 몽상의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테의 철학—베아트리체; 지극히 위대한 이상화들의 종합 —여자, 교회, 신학—그것은 인간적 가치들의 몽상가에게는 현학적인 대문자 아니마이다. 그것은 마음과 지성을 통해 빛을 발한다.....을 참조할 것.   ------------------------------------------------------------------- -------------------------------------------------------------------     **빗살과 아니마를 위한 질문 및 시어 탐사     ## 내 안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총화는 현실 속에서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시어( 詩語)로 표현해보자.   **나는 ----------------------------------------------------!!   **나는 ----------------------------------------------------!!   ## 가장 나다운 아니마는 어떤 아니무스를 향해 사랑을 퍼부었던 기억이 있는가? (둘의 결합이 보여준 결과와 그 과정에 대하여)       ## 요즘의 자연 현상에서 느낀 아니마의 진실을 시어로 표현해보자. ‘식물의 영속성’을 대입해서.
5    대지 그리고 휴식의몽상 - 바슐라르 [스크랩] 댓글:  조회:1051  추천:0  2018-10-20
바슐라르 -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스의 철학자, 과학철학 및 과학사 교수, 문학 비평가, 시인. 독창적인 사고와 기발한 문체, 새로운 철학적 화법으로 프랑스 현대 사상사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했으며,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자,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 일컬어진다. 상파뉴 지방의 바르 쉬르 오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교사, 우체국 직원 등으로 일하다, 마흔 무렵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1927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디종 대학을 거쳐 1940년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 흙의 시학  나는 대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흙은 다른 원소보다 훨씬 불활성이며 고정되기 쉽고 포착하기 쉽다. 흙은 확실하고 선명하게 우리 앞에 물질적 대상으로 주어진다. 흙은 손에 쥘 수도 있으며 뭉칠 수도 있고 불로 반죽할 수도 있다. 흙은 주물러 형태를 만들기도 쉽고 우리의 일상적 지각방식을 쉽게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감각적이다. 물은 손아귀를 벗어나 미끄러지고 불은 만질 수 없으며 공기 역시 손에 잡히지 않지만 흙은 다르다. 흙은 만져지고 쥐어지고 잡힌다. 흙은 우리 앞에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 분명한 존재감, 분명한 실재감은 우리로 하여금 흙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하려는 욕망을 불러낸다. 우리는 흙을 다루고 흙에 대항하며 그렇게 해서 흙으로 작업한다. 말하자면 흙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흙을 다루고자 할 때 흙에 대한 외향적 상상력이 작동한다.    흙의 물체성, 고정성, 단단함이 우리로 하여금 흙을 다루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낸다. 그러나 흙은 우리의 욕망이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흙은 흙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욕망에 대립하는 흙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를 불러낸다. 우리는 흙의 의지와 대립하여 싸우고 분노하며 달래고 설득한다. 흙의 세계에 우리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흙을 때리며 부수고 깨트린다. 망치와 끌, 칼 등 도구가 이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흙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남성적 흙의 세계이다.    흙과 돌, 바위, 산 등 단단함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는 흙의 세계. 이 세계 앞에 선 인간은 이 세계와 대항하고 싸우고 길들이면서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다. 그런데 이 양자 간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흙의 세계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은 의지 대 의지의 싸움이다. 여기서 망치로 두드리는 바위나 쇠는 대장장이의 힘을 거부하면서 허용한다. 망치의 두둘김은 대장장이 편에서의 힘과 쇠의 편에서의 힘이 서로 맞붙어 싸우는 상태인 것이다. 이 싸움 속에서 바위나 쇠의 힘은 대장장이에게 전이되고 대장장이의 힘 역시 그가 두드리는 대상에게 전이된다. 이 두 존재 사이에서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어떤 리듬이 탄생하는 것이다.    2. 진흙 덩어리  우리는 진흙을 빚어 세계를 창조해왔다.   돌과 바위와 같은 단단한 사물이 우리에게 불러내는 상상이 도발과 저항, 의지의 실현과 관계되어 있고 이를 실현하는 방식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를 지닌다면 물과 섞인 진흙은 이와는 다른 분위기를 선사한다. 진흙 덩어리, 밀가루반죽, 밀랍덩어리 등 반죽으로 된 부드러운 사물들은 우리 내면의 부드러운 의지, 완화된 의지를 불러낸다. 이 세계는 우리의 촉각적 욕망을 건드리는 세계이며 우리는 손으로 이 세계와 만난다.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주물럭대면서 우리는 이 세계에 우리의 꿈을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세계에 부여하는 우리의 꿈은 이 세계에서 우리를 향해 주어지는 힘과 만나면서 변형된다. 반죽의 세계는 한편으로 끌어당기면서 한편으로 밀어낸다. 우리는 손으로 이 반죽의 세계와 만나 우리 역시 이렇게 하면서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반죽은 생명체의 이미지를 낳는다. 반죽으로 작업하는 조각가는 미리 설계된 관념을 일방적으로 투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성형이다. 반죽의 꿈은 반죽과의 교감이며 이 교감을 통한 활동의 과정을 통해 현실화된다.    반죽하는 코기토의 창조성은 어린아이를 출산하는 창조성이다. 그의 작품은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다. 반죽하는 코기토에게 세계는 관조적 대상도 아니며 기하학적 세계도 아니다. 이 세계는 끈적이는 세계이며 주무르는 세계, 내 손의 힘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내 힘을 수용하는 세계다. 세계는 나의 욕망, 나의 꿈, 나의 의지를 저항하면서 받아들인다. 그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반죽을 상대로 작업하는 예술가는 반죽 속에 숨은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 그는 이때 산파가 된다. 이 반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주적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사유와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상상과 이미지가 생기며 이것은 다시 꿈과 몽상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다시 꿈과 몽상은 무의식으로부터, 그리고 집단무의식 너머 우주적 무의식으로부터 이미지가 길어 올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꾸는 인간, 몽상하는 인간은 우주적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간이다.    3.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연금술의 몽상 속에서 연금술사와 물질은 서로 연결되어 얽히며 투쟁한다.   땅 속에서는 금속과 보석들이 자란다. 땅 속의 보석들은 완성된 대지의 태아다. 이들은 모두 씨앗이며, 별이며, 생명이다. 보석들은 불변의 아름다움으로, 단단함으로, 투명함으로, 빛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땅이 잉태하고 키운 것이므로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다른 생명체들 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훨씬 완성된 생명체의 이미지를 갖는다. 연금술의 몽상은 이 오래된 생명의 과정을 연금의 용기 속에서 단 기간에 재현하려는 욕망에서 탄생한다. 황금은 영원하며 빛나며 오래되었고 생명력으로 가득찬 지하세계의 태양왕의 이미지이다. 연금술의 몽상에서 식물, 동물, 광물은 모두 같은 생장법칙을 공유한다. 광물 역시 식물처럼 씨를 뿌리며 동물처럼 아이를 낳는다. 그러므로 황금이라는 아이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연금술사는 땅의 자식들인 여러 가지 금속들에게 인간의 삶의 조건들을 강요한다. 금속들은 땅이라는 생명의 자궁의 대리물인 연금술사의 그릇 속에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미워하고 싸우며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이 드라마는 금속들의 드라마인 동시에 우주적 드라마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천체계를 넘나들며 가면을 바꿔 쓴다.    연금술의 몽상은 아타노르 위에 놓인 그릇 속에서 죽음과 재탄생의 서사를 실현하는 것이다. 비천한 금속들은 내부에 적의를 지니고 있다. 금속들은 차겁고 무겁고 모가 나 있으며, 상처를 입힌다. 그러므로 연금술사들은 금속들의 적의에 맞서 이들 속에 숨겨진 생명의 불을 끄집어내어 이들을 변형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연금술사는 먼저 이들의 때를 벗겨내야 한다. 부패의 단계를 거친 금속은 다시 끓여진다.    금속의 드라마는 연금술사의 몽상 속에서 태어나 연금술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그의 삶을 변형시킨다. 연금술은 황금이라는 물질을 만들어 이득을 보려는 기술이 아니다. 연금술은 꿈의 기술, 영혼의 기술이다. 연금술의 몽상 속에서 연금술사와 물질은 서로 연결되어 얽히며, 연금술사의 의지와 금속의 의지가 싸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일종의 사랑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 서평  바슐라르의 몽상  사유와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상상과 이미지가 생기며 이것은 다시 꿈과 몽상으로부터 비롯된다.   저는 가스통 바슐라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집에 대한 명상 글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의 책 ‘공간의 시학’과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의 집에 관한 부분을 보십시오. 저는 이 사람의 책 이 부분만을 조금씩 다시 읽곤 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끄떡없는, 숲 속이나 벌판의 오두막집에서 안전하게 머무르는 몽상을 그 사람 파리 한복판의 아파트 안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해 했습니다. (오마이뉴스 2005. 7. 31)      우리는 대지 위에 살며 대지에 저항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대지가 없으면 우리 인간은 살 수 없으며 또 땅을 일구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이렇게 대지와 인류는 서로 불가분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놓여 있다.    대지의 흙은 우리와 가장 친숙하기도 하다. 우리는 흙을 반죽해 집도 짓고 그릇도 만들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흙의 세계는 우리의 촉각적 욕망을 건드리는 세계이며 우리의 의지를 충동질한다. 우리는 흙을 빚어 이 세계를 만들어 내고 지배해왔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창조성은 흙을 반죽하면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는 나의 욕망, 나의 꿈, 나의 의지를 저항하면서 받아들인다. 그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반죽을 상대로 작업하는 예술가는 반죽 속에 숨은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 이 반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주적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사유와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상상과 이미지가 생기며 이것은 다시 꿈과 몽상으로부터 비롯된다.   
퍼온 자료 불꽃의 수직성              높은 곳에서... 빛은 그의 옷을 벗는다. - 옥타비오 빠스.   1. 우리들을 가볍게 하는 몽상 가운데서도 아주 유효하며 단순한 것은 높이의 몽상이다. 모든 직립되어 있는 사물들은 천정을 가 리키고 있다. 직립된 형태는 솟아오르고, 우리들을 그 수직성에 실어 데려간다. 현실의 정상을 정복한다는 것은 스포츠적인 장 한 일에 그치는 것이다. 꿈은 더욱 높이 올라가며, 수직성의 피안에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간다. 똑바르고 수직인 존재를 앞에 한 수직성의 결합에서 많은 비상의 꿈이 태어난다. 높이의 몽상은 우리들의 수직성의 본능, 공동생활과 평평하게 수평적인 생 활의 의무에 의해 억눌려진 본능을 양육한다.   인간을 수직화시키는 몽상은 여러 몽상들 가운데서도 가장 인간을 해방시키는 몽상이다. 다른 곳을 꿈꾸는 것만큼 잘 꿈꾸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없다. 그러나 다른 곳 가운데서도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위쪽에 있는 다른 곳이 아닐까? 위쪽이 아래쪽을 잊 어버리고 제거해 버린 꿈. 직립해 있는 사물의 천정에 살며, 수직성의 몽상을 쌓음으로써, 우리들은 존재의 하나의  초월을 알 게 된 것이다. 수직성의 이마주는 우리들을 가치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한다. 상상력을 통하여 직립해 있는 사물의 수직성과 일 체가 된다는 것. 그것은 상승력의 은혜에 힘입은 것이며, 또한 그것은 아름다운 형태, 스스로의 수직성을 보증하는 형태에 사는  숨어 있는 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줄저 의 한 장에서 이와 같은 수직성의 주제를 상세하게 논한 바 있다. 그 장을 참조해 본다면, 불꽃 의 수직성에 대해 당면한 몽상의 배경을 모두 보게 될 것이다.   2.   대상이 단순하면 할수록 몽상은 커진다. 고독한 사람의 책상 위에서 촛불의 불꽃은 수직성에 대한 모든 몽상을 준비한다. 불꽃 은 꿋꿋하고 약한 수직이다. 한번으 입김이 불꽃을 흐트러지게 하지만 그것은 다시 곧바로 선다. 일종의 상승력이 그의 마력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촛불은 고고하게 타며, 그 주홍빛은 불끈 일어선다. - 독일 사화집 제 2 권   이렇게 트라클의 한 시구가 말하고 있다. 불꽃은 생명이 깃들어 있는 수직성이다. 모든 불꽃의 몽상가는 불꽃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수직성을  예민한 반사 작용으로 지킨다. 연소에 지장을 가져와 천정에의 비약이 방해되면 불꽃은 바로 반사 작용을 일으킨다. 불꽃 앞에 서 교훈을 얻게 된 수직화의 의지와 몽상가는 그 자신도 다시 곧바로 서야 함을 배운다. 그는 높게 타며 온 힘을 다하여 열정의 꼭대기까지 가고자 하는 의욕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촛불이 잘 타고 있는 시간은 얼마나 커다란 시간,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길게 뻗치고, 끝이 뾰족해진 불꽃 속의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생명의 미묘함! 삶과 꿈의 가치가 그때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한 줄기의 불! 사람들은 과연 향기롭게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  에드몽 자베.   이렇게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 불꽃의 줄기는 아주 곧바르고 연약해서 그것은 꽃과도 같다. 그리하여 이마주와 사물은 서로 그들의 미덕을 교환한다. 불꽃의 몽상가의 방 전체가 수직성의 분위기를 띤다. 부드러운, 그러 나 확고한 역동성이 몽상을 정점으로 끌고 간다. 사람들은 심지를 둘러싸고 있는 내적 선풍에 매우 흥미를 가질 수 있으며, 불 꽃의 복부에서 어둠과 빛이 싸우고 있는 소용돌이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불꽃의 몽상가는 그의 꿈을 정점 쪽으로 끌어올 린다. 불이 빛이 되는 것은 바로 그곳이다. 빌리에 드 릴라당은 그의 라는 작품 제 1 장의 제사로서 다음과 같은 아 라비아 속담을 채용하고 있다. 즉 '관솔불은 자기 밑을 비추지 않는다.'라는 말을.   가장 큰 꿈이 있는 곳은 꼭대기이다. 존재의 몽상가에게 있어서 불꽃은 피안의 저편, 에텔적인 비존재 쪽으로 몸을 뻗깇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본질적으로 수직 읻. '불꽃'이라는 제목을 붙인 어떤 시 작품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쳐진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함이여    -  로제 아슬리노   무(無)로써, 불꽃으로써, 아아 단순히 상상된 불꽃으로써, 존재와 비존재를 연주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게시받은 형이상학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러나 모든 심오한 혼은 그 개인의 피안을 가지고 있다. 불꽃은 모든 초월을 깨닫게 한다. 꽃 앞에서 클로델은 이렇게 자문한다. '어디서 이 소재는 성스러운 범주 안으로 가기 위한 비상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만약 우리들이 예전적(禮典的)인 주제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불꽃의 상징주의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기란 아주 쉬운 일일 것이 다. 그때 우리들은 지식을 마주 대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상징주의의 윤곽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 작은 책의 기도를 넘 어서게 될 것이다. 불의 표징 밑에 놓여있는 상징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칼 마르틴 에즈만의 대작 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3.   서장에서 우리들은 지식에 대한 모든 배려, 불꽃의 현상에 대한 모든 과학적 내지는 의사과학적 실험을 멀리했다. 우리들은 상 상하는 몽상, 고독한 몽상가의 것인 몽상의 동질성 속에 머무르도록 최선을 다했다. 불꽃을 깊이 꿈꿀 때,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일 수는 없다. 괴테와 에케르만이라는 선생과 제자에 의해 공동으로 이룩된 저 천진난만한 관찰은 어떤 사상을 마련해 주 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은 과학적 탐구에 알맞는 진지한 개조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은 독일 낭만주의에 얼마만큼 영향을 끼친 우주 철학에의 통로를 우리들에게 열어 주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   노발리스와 함께 사람들이 가치의 물리학의 지배 아래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실의 물리학의 지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두기 위해, 미노르판에 수록되어 있는 짧은 금언 '빛이 불을 붙인다'는 말에 주석을 달아 두기로 한다. 독일어로 표기하 면 3음절로 된 이 문장은 극히 훌륭한 것으로서 그것은 보통의 감각이 그 찢긴 상처를 곧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빠른 사상의 화살이다. 모든 일상 생활은 우리들에게 이 말을 거꾸로 읽도록 가르치고 있다. 보통의 생활에서 빛을 내기 위해 불을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가치의 우주론에 동의할 때야 바로소 이러한 도전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Licht macht Feuer'라는 세 음절의 문장은 불꽃의 현상상의 관념론적 혁명, 제 1막이다. 이것은 몽상가가 자기의 신념을 굳히기 위해 반복 하는 중추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다. 몇 시간이라도 계속하여 시인의 입술 위에서 이 세 개의 음절이 반복되는 것을 나는 상상하 며 듣는다.   관념론적 증거는 그것이 틀린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노발리스에게 있어서 빛의 관념성이 불의 물질적 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노발리스의 단장(斷章)은 더욱 계속된다. '빛은 불의 과정의 수호신이다.' 이것은 물질적 여러 요소의 시학에 있어서 매우 중대 한 선언이다. 왜냐하면 빛의 우위성이 불에서 그의 절대적 주체로서의 권한을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은 이미 거 기에서 빛이 되는 하나의 과정의 종국에서만 참다운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더욱이 그러한 때에는 불꽃의 고뇌 속에서 불은 그의 모든 물질성을 박탈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 의 필자는 '불'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밝고 생기 있는 불꽃은 벌겋게 달은 숯불보다 더 많은 열을 낸다.]   만약 불꽃에서 이와 같은 인과관계의 전도를 읽는다면 그 작용을 저장하고 있는 것은 첨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첨단에서 정화된 빛은 심지 전체 위에 내려앉는다. 그때 빛은 불꽃의 상승하는 존재를 결정하는 참다운 동력이 된다. 그 행위 자체에 있 어서 사실을 뛰어넘고 스스로의 상승하는 존재를 발견하는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노발리스의 관념화하는 우주 론의 원리 자체다. 모든 관념론자들은 불꽃에 대해 명상하면서 동일한 상승적 허위를 발견한다. 클로드 드 생-마르탱은 이렇게 쓰고 있다.'정신의 운동은 불의 그것과 같으며, 스스로를 상승시킨다'라고   4.   노발리스가 불꽃의 수직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단장을 모두 정리해 보면, 대우주 안에서 직립하고 있는 모든 것, 수직인 모든 것은 하나의 불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즉 위로 올라가는 모든 것을 불꽃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의 환위명제는 다소 그 강도를 약하게 할 뿐 아주 명백하다. '촛불의 불꽃 속에서는 모든 자연의 힘이 활동하고 있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그 자체를 구성한다. 노발리스는 이것을 역으로 '불꽃의 동물적 본성'이라고 쓰고 있다. 불꽃은 어떤 점에 있어서 벌거벗은 그대로의 동물성이며 일종의 극단적인 동물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대식가이다. 이와 같은 아포리 즘들이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 흩어져 있는 단장이 되고 있다는 것은 신념의 직접적인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 이 깊은 몽환 상태를 체험하여 성찰하기보다는 오히려 몽상하는 것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는 몽상의 진실이다.   각각의 생명계는 그때는 특수한 불꽃의 한 타입이 된다. 메테르링크가 번역한 일부분 가운데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 을 수 있다.   '나무는 꽃 피는 불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말하는 불꽃, 동물은 떠돌아다니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꽃의 배설물로 표현되어 있는 특이한 페이지를 참조할 것. 우리들은 타고 있는 존재의 찌꺼기에 지    나지 않는다. 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 / 미완성의 것으로,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동화된다.'   폴 클로델은  
3    불의 시학의 단편들/가스통 바슐라르 댓글:  조회:1053  추천:0  2018-10-20
내 가슴에는  정열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그것을 빼냈다  이제 더 이상 내 가슴을 느낄 수 없다    시의 끝부분은 이렇다    내 노래가 다시 불평을 한다  “날카로운 금 가시여,  나 그대을 느끼고 싶구나  내 가슴속에 박힌 그대를.“  -안토니오 마차도-    날개 돋친 불꽃과 재, 죽고 다시 태어나는 불새에게 끌리는 매력  “낮에서 밤, 밤에서 낮 사이, 우리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피닉스는 몇 살인가? 인생의 만년(晩年)에 불사조적 몽상들은 노령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은 추억을 태우며 죽는다. 그렇지만 추억을 태우면서 추억을 더욱 사랑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체험한 사랑의 영원함을 누릴 만한 자격을 얻는다.”    피닉스. ‘둥지와 장작더미의 중대한 이미지들의 기묘한 종합’, 자웅동체의 새, 최후의 원대한 꿈 속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중개자.  “나의 불사조적 꿈들’, 부제는 ‘명암과 잿빛 삶’이 될 것이다. 나는, 내 존재의 책상 앞에 있기보다는, 나의 무(無)를 쓰다듬으면서 내 비존재의 책상 앞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씌어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사람을 늙게 한다. 언젠가는 결론을 맺고 끝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제한된 문학 이미지들의 문제는 그 어떤 철학적 도구의 도움없이 아주 단순하게 취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학적 사고를 연구해오던 방식처럼 될 수 있는대로 객관적으로 이미지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견치 않던 것을 언어에까지 부여하는 상상력의 비약을 ‘객관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지 나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예들을 추가하다보면 어떤 법칙을 찾아내리라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독서량을 늘린다면 글쓰기의 의지로 부각된 언어, 즉 시적 언어의 인문과학적 조감도가 그려지리라 기대했다.    내가 산책하고 있는 식물학자이며, 나의 독서가 이끄는 대로 ‘시적 꽃들’을 모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우주론의 상상력에 관한 기초 철학에 중요한 기반이 되는 4원소, 즉 불, 물, 공기, 대지는 우주론의 백과사전을 위한 책 제목으로 서두가 장식되었다. 많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4원소 중 하나의 기호 아래 세계를 ‘사고’했으므로, 우리는 시인들의 이미지가 우주론의 소박함을 되살리면서 매우 오래된 학설들을 다시 빛내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별 문제 없이 독서에 내 열정을 쏟아 부을 계획을 세웠다. 네 개의 자료. 네 개의 곳간이라니, 추수한 곡식과 수확한 포도를 저장하기에 얼마나 안전한 곳인가. 끊임없이 작업하기 이한 얼마나 멋진 상상 속의 시설인가!    시는, 그 자체로-시적 이미지 그 자체- 내게는 특별한 연구대상이 될 만한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상상력의 현상으로 간주된 시는 교감할 수 있는 현상이다. 상상하는 독자는 상상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시인에게서 상상력의 충동을 받아들인다.    고전 심리학에서 상상력보다 더 막연하게 정의된 정신적 힘은 없다. 극도로 혼동하는 경우에는 상상력을 사라져버린 과거의 지각에 종속시키면서 ‘재생적 상상’과 혼합할 뿐 아니라, 가장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이 상상력을 모든 정신의 창조적 활동에 연결시키고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든 기발함에 결합시킨다. 사람들은 상상력을 학자에게, 정치가에게 부여한다.    사고 영역에서 창안하는 것과 이미지들을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정신적 행위이다. 게다가 사고 영역에서 작업할 때는 이미지들을 쫒아내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수정하지 않고는 사고를 창안하지 못한다. 수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진정한 사고를 끌어내리라 기대해볼 수 있다. 원초적인 진리란 없고, 단지 원초적인 오류들만 있을 뿐이다. 과학적 사고는 오류로 점철된 기나긴 과거를 가지고 있다. 시적 상상력, 그것에는 과거가 없다. 그것은 준비된 모든 것을 위반한다. 시적 이미지란 진정 말 paroled 의 한 순간으로, 베르그송적 의식의 분리될 수 없는 연속성 상에 위치를 설정하려 할 때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순간이다. 시적 언어의 기습을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만화경적인 의식에 내맡겨야 한다.    시적 이미지가 있으면 우리는 언어가 씌어지기를 원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글쓰기의 행복을 알 때는 거기에 몸과 마음, 손과 작품을 바쳐야 한다. 조르주 상드는 그점을 알고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생각과 말은 서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 글쓰기란, 이를테면 말 위로 불쑥 솟아오른 차원이다. 문학 이미지는 말해진 언어, 즉 의미에 종속된 언어 위로 올라온 진정한 돌출부이다. 돌출부라고? 지적 가치는 판타지의 분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견고해지는 것을 체험하고, 유희적이었던 문학 이미지가 시적 이미지화할 때, 우리는 시란 언어의 세계라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존재의 철학가들은 세상을 말하고, 유일하고 동일한 언어로 그들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항상 존재, 한존재, 여러 존재들은 말의 보증서이다. 말의 존재는 존재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말은 절대로 자율성을 지닐 수 없다. 그것은 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나아봤자 그것은 외침의 문명이다. 말의 존재 안에는 항상 말의 존재 이전의 존재가 있는것이며 말은 ‘표현한다’. 그 표현의 존재는 단지 위임받은 한 존재, 즉 말하는 존재의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주의에서 드러나는 초인간성의 분출이 위대한 서정적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조화롭게 맞춰지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살펴 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상은 이미지를 능가하길 원한다. 불은 그 유용성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지성주의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중요한 이미지들은 시초의 지배력을 잃지 않는다. 항상 어떻게 인간이, 초인간이, 반신이, 제우스의 아들이 태양 원반 속으로 불을 찾으러 갔다가 그것을 훔칠 수 있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의도를 보여주지만, 급히 만들어진 이 분명한 한 문장이 이 해괴한 이야기를 요약해준다. 특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주기 위해 하늘의 불을 훔쳤다는 것이다. 이미지들을 꿈꾸고 자신의 몽상 한가운데에 중심 이비지를 놓는, 이미지에 의한 분석만이 허황된 이야기의 모난 부분을 둥글게 할 수 있다. 그 어두운 구멍이 작은 태양, 태양 원반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주형에 뾰족한 도구를 돌리면서 많이 꿈꿔야 한다. 그러면 붗으로 넘치는 도가니에서 불을 훔치게 된다.    불 또는 빛, 작업 또는 지식, 이 양극 사이에서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광대한 영역이 돈개된다. 이 범위는 대단히 넓어 프로메테우스의 시학에서는 그 단일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허무에는 이미지들이 없다. 허무란 관념에 불과하다. 오로지 이미지들, 시적 이미지들만이 파괴적인 순간을 불멸화시킬 수 있다. 소멸의 미학은 엠페도클레스의 이미지에서 중요한 시적 이미지를 발견한다. 즉 그것은 미(美) 안에서의, 미를 위한 소멸인 것이다.    피닉스, 프로메테우스, 엠페도클레스라는 부제 아래 씌어진 이 세장이 바로 아니무스로 씌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지배하는 존재들이다. 절대적인 아니무스의 이상형 속에서, 아니마의 온화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니무스의 힘의 의지에 몰두해야만 비로소 그들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삶은 순수하고 강인한 아니무스처럼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경험하고 자신 안에서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안다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체험의 의식을 이렇게 결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단 하나의 단어로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체험’이란 단어는 다른 모든 경험이 그렇듯 끊임없이 분석으로 정제되어야 하는 경험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    ‘체험’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체험’을 다루지 않고 쉬운 추상 놀이에 만족하는 자들이라고 우리가 조금은 성급하게 판단해버리는 철학자들에 대립하여 씌어졌다.    사실 스쳐 지나가는 사건 속에서, 특별한 정신적 선택에 따라 느끼는 상대적인 강렬한 속에서, 사람들이 모든 삶을, 깊이 있는 모든 삶을 소중히 여긴다고 어떻게 믿을 것인가. 체험은 그것이 재체험될 수 없다면 덧없음을 나타내는 표시를 지닌다. 그리고 규율이 없는 것 중에 으뜸인 상상된 체험을 어떻게 체험과 융합하지 않겠는가? 인간적 체험, 인간 존재의 현실은 상상적인 것을 만드는 요인이다.    게다가, 누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며 누가 본래의 삶의 풍부함과 다양함 속에서 그 삶을 살고 있는가? 본래의 삶은 우리 없이 우리 안에서 체험된다. 우리가 그 삶을 잘 산다면, 그와는 반대로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을 너무 능숙하게 표현한다면, 그 삶을 더 이상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기 한 존재로 결정될 수 있는 존재의 단위가 아니다. 인간 존재란 존재들이 밀집해 있는 벌집이다. 존재의 꿀을 만들고 시적 삶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아련히 먼 생각들이며 광적인 이미지들이다. 한 사람의 삶에는 중심이 없다. 삶은 어느 주변에서 생동하는가? 그런데 삶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면서 생동하는 것이니, 존재는 과연 어떤 이미지 부근에서, 어떤 시들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 넘치는 생명을 찾아내는 것일까? 인간 존재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른 이들이 그가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시간에, 또 스스로 자신이 살고 있다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시간에 살아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절대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파도에서 흘러나와 모든 존재를 존재의 일반적인 생성으로 데려가는 물줄기로 간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아니 거의 항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지나간 정체된 존재들이다. 우리 안에서 삶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베르그송은 체험의 경험 속에서 시간 측정기란 쓸모없거나 혹은 속아넘기는 도구라는 걸 별 어려움 없이 보여 주었다. 시간 측정기, 그것은 다른 이들의 시간이며, 우리의 체험시간, 즉 지속을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시간대’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은 잘 묶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시간들의 다발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간들’은 우리의 체험 시간(지속)을 조절할 박자를 찾지 못한 채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이다. 우리 존재의 역동성, 우리 존재의 다양한 역동력을 강한 필치로 나타내줄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시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미지들만 바꾸면 된다. 불의 세계에서 우리는 여러 존재로 형성된 불덩어리이다. 우리에게 에너지와 생명을 주는 우리의 불 속에 중심 시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내일의 불을 따뜻하게 지탱해주는 재의 시간인가?    불새가 탄생하는 그 결합에 의해 더 큰 가치가 부여된 두 단어의 매듭에서 다양한 현실이 연합한다. 즉 날아다니는 불길,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룻밤에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섬광의 날개, 알록달록한 몇 마리 새들이 여름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것이다. 불새들이 불의 특성들이다.   내가 불새를 처음으로 본 것은 불새가 나의 강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였다.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유년기에 더욱 커 보이는 강, 하늘처럼 고요하고 아주 푸르른 강, 그 강의 이름이 바로 오브였다. 창공으로 쏘아올린 화살처럼 불새가 솟아오른다. 날카로운 외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다. 새는, 아주 빨리, 수면을 흔들며, 아마 그의 유일한 노획물이었을 물방울을 뿌리면서 하늘을 향해 다시 떠났다. 불로 달궈진 쇠처럼 푸른 물총새였다. 새는 사라졌고 꿈이 시작된다. 그 새는 나무들 저편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온 것이다! 이 불새는 태양 속에, 유월의 태양 속에 자기 둥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토록 평화로운 물에 대한 얼마나 큰 침해이며 죄인가! 자연에서는 빨리 가버리는 모든 것이 범죄이다. 하늘에서 내려운 이 불길은 어째서 거울 같은 물에 살며시 자신을 비춰보러 오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멋진 존재가 어떻게 그토록 탐욕스러울 수 있는가? 물총새와 은빛 잉어의 결합이라니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이런 푸르름의 잔혹함이 한 어린아이의 세계관을 뒤흔들 수 있을까?    한 어린아이의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은 그 어린아이의 세계의 사건이 아닌가. 그러니 곧 이 세계의 사건이 아니던가. 이러한 추억은 그것이 단일하다는 점에서 우주극cosmodrame이다. 하나의 추억이 이렇게 우주극으로 상승할 수 있을때는 그것이 역사의 한 점인지 아니면 하나의 전설의 출발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나의 물총새는 내 회상의 나라에서는 한 마리 피닉스이다.    신기한 일이 허무해져버렸을 때 경이로움은 우수로 바뀌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시절 나는 다시 한번 같은 강에서 그 물총새를 보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름날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날 우리 둘이 있었다! 나는 책에서 읽은 전설들과 연결시키면서 이미지들을 늘리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전설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며, 우리는 경이로운 이미지를 응시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섬광을 발하는 새는 피닉스의 근본 이미지이다.    그후로 피닉스-물총새는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사는 동안 중요한 것은 거의 못 본다. 망태기 속에 노획물을 집어 넣는 사냥꾼이 여름날의 하늘이나 서늘한 강물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가 어떻게 그 지극한 영광 속에서 죽음을 맞는 새를 생각하고 또 꿈꿀 수 있겠는가? 찬란함에서 유용함으로 넘어가면서 사냥꾼은 ‘멋진 깃털은 맛없는 고깃살을 감추고 있다’는 식도락가들의 격언을 떠올리기나 할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멀리서 꿈꾸는 것을 금지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몽상가는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멋진 대상이 있을 만한 세상을 보는 비율 속에서 본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화살, 불새, 타는 듯한 이미지는 한 세계의 중심이다.    T.S 엘리엇은 이 이미지를 빛의 순간으로 적고 있다.    물총새의 날개가 빛에 빛으로 화답하고 나서  ......빛은 고요하다.  시인은 이 능동적인 빛의 순간을 진정한 시간의 부조relief 여 temps로 느낀다. 엘리엇은 다음 두 행으로 시를 끝맺는다.    우스꽝스럽구나 슬프고 헛된 시간이여  이전과 이후로 펼쳐지니.    우리는 ‘인간에게 불을 주기 위해서 하늘의 불을 훔친 영웅 프로메테우스’라는 프로메테우스적 정신의 근본 이미지를 주시할 것이다. 이 시적 이미지가 시적 몽상들의 어떤 통합에서 정당하게 인정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시적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를 인간의 미학에 초대한다.  -태양 원반에서 프로메테우스이 불까지  -찔린 눈과 시선의 불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몽상이 솟아오르는가!  키플로페스 이마 한 가운데 외눈이라. 키클로페스의 눈이 회오리치는 불을 내던지지는 않는가? 눈의 둥근 윤곽을 따라 완전히 돌려가면서 그 눈을 후벼파야한다. 많이 돌려 후벼팔수록 많이 복수하는 것이다. 단검으로 잘라 다듬은 올리브 나뭇가지 끝이 투창처럼 뾰족해진다해도 충분치 않으리라. 오디세우스는 나무를 불태워 단단하게 만든다. 초록빛 나무가 검은 나무로 변한다. 나무는 뜨거운 쇠와 같은 것이리라. 키클로페스 눈 속에서 깊은 불이 타고 있다. 그리고 이 시선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 반(反)불이 있어야 한다. 이 흉기는 그의 불구멍 속에서 뾰족한 도구가 된다. 불을 끄려는 몽상이 불을 탄생시키는 몽상과 합류한다. 이 시선의 불을 끄기를 원할 때, 그 깊숙한 온상까지 불을 끄기를 원하면, 뽀족한 도구로 불을 창조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불의 탄생과 불의 죽음이 같은 인미지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언급하면서 가장 자주 덧붙이는 것이 불복종의 표시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콤플렉스의 시사성을 느낀다. 신화에서 사람들은 오로지 불복종의 매혹만 생각한다.    영웅 프로메테우스는 건설적인 불복종의 상징이다. 아버지보다 더 잘 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불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불복종하는 것은 창조자의 신념이다. 불복종은 벌을 피할 만큼 미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매한 죄의식, 혼미한 죄의식이 남는다. 모든 지식에 활력을 주는 불복종의 역동성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불을 준비하는 것이 ‘더할 나위없는’의식의 행위이며, 불은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어두운 상태를 없앤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의 가족으로 제우스가 그들에게 가한 박해에 관련이 되었다. 그는 카프카스 산이 있는 스키티아에 은거해야 했고, 제우스가 통치하는 동안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황량한 고장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비애는 그의 간을 갉아먹는 독수리이다. 아니면 이 독수리가 한 철학자의 깊고 비통한 명상의 생생한 이미지는 아닐까? 스키티아 주민들은 극도로 야만스러웠으며 법도 관습도 없이 살고 있었다. 공손하고 학식있는 이 왕자는 그들에게 좀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가르쳤다. 어떠면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가 미네르바의 도움을 얻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그가 하늘에서 빌려온 이 불은 그가 스키티아에 세운 대장간들이다. 아마도 프로메테우스는 그 고장에서 불을 찾아내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며칠공안 불을 보존하기에 알맞은 식물인 큰 회향풀 줄기속에 불을 넣어 그곳에 가져왔을 것이다. 마침내 프로메테우스는 스키티아의 쓸쓸한 생활에 지루해져서 최후의 날을 맞으러 그리스로 온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에세 신들의 영예, 적어도 영웅의 영예를 되찾아 주었다. -이 항목은 Jaucourt가 작성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산꼭대기에서 불을 훔치고 카프카스 산 정상에서 신들의 복수를 감내한다. 프로메테우스는 한 새에게 고통받는다.  불, 새, 대담한 사람은 정상의 존재다.    에트나 화산 위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불의 시학을 격상시킨다.    엠페도클레스는 소멸의 시학을 보여주는 가장 중대한 이미지들 중 하나다.    불에 헌신하는 것, 그것은 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는 불에 헌신한다는 것은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닌가? 불길의 장엄함에서 무의 장엄함으로 가는 중요한 이행passage. 또는 이 중대한 불, 이 완전한 불은 총체적인 정화의 근거가 아닌가? 그런데, 정화된다는 것은 재탄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가? 피닉스에 대한 몇 가닥 희망이 철학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석의 장은 열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철학에 대립하여, 다음과 같이 죽음 안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철학자가 있다. 분명 탄생과 죽음은 두 가지 모두 순간의 영광이다. 그렇지만 탄생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질 때, 엠페도클레스는 처음으로 자유롭다.    전설에는 날짜가 없다. 전설은 머무는 것이며, 어떤 시인이 전설을 보여주기 위해서 새로운 이미지들을 발견하면 그 즉시 전설은 새로운 삶을 되찾기 때문이다. 정상의 전설들은 변하지 않는다. 카프카스 이에 못박힌 프로메테우스, 에트나 산의 불이 사방에 뿌리는 엠페도클레스, 이러한 전설에서 정상은 하나의 인물이다.    신세계의 주민,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같은 시인은 자신의 우주성에 대한 몽상들에 고 사고의 고귀함을 부여하기 위해 지중해를 필요로 한다. 포는 그의 『유레카』를 선포하기 ㅇ위해 불의 산 정상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정상에서 초인간적인 존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동과 서, 남과 북, 뜨고 지는 모든 것을 같은 시선 속에 , 원래의 시선 속에 통합시키기 위해 사방에서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에트나의 정상에서 한가로이 자기 주변을 두루 살펴보는 자는 무엇보다도 경관의 광활함과 다양함에 감동한다. 그는 발꿈치를 축으로 한 바퀴 재빨리 돌아야만 그 숭고한 단일성 속에서 파노라마를 포착한다고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우주(나는 가장 광범위하고 유일하게 합법적인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구상을 철회시키는 단 하나의 조약도 모른다. 그러니 에트나의 관념성은 영원히 찬양받지 않는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은 분명히 굴광성의 피해자이다. 이것이 동물심리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가 즉각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몽상가에게는 어떠한가? 보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시인에게는 어떠한가?  “나는 어느 아틀리에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나는 라마 모양의 거대한 동물을 점토로 빚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동물은 커다란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불길이 그 괴물을 관통하며 그에게 조금씩 생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그리하여 수천 개의 자줏빛 망이 파고 들어간 그 괴물은 동맥과 정맥을 형성하면서, 그리고 털 뭉치와 지느러미의 섬유질 부속체로 즉석에서 만들어진 식물의 모습을 띠고 있던, 말하자면 자동력이 없는 물질을 번식력이 있게 만들면서 몸을 비틀었다. 나는 이 걸작품을 감상하느라 걸음을 멈췄다. 뜻하지 않게 신의 창조의 비밀을 간파한 것 같았다.    질료에 활력을 넣어주는 프로메테우스적 행위를 꿈꾸자마자 그는 곧 금은 세공사들이 지상에 알려지지 않은 철강을 가지고 일하는 또다른 아틀리에로 들어간다.  “진사와 흡사한 붉은 철과 쪽빛 철. 장식들은 망치로 두드려져 단련되지도 않았고 끌로 조각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형태가 잡히고 착색되었으며 마치 어떤 화학적 혼합이 만들어내는 철제식물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적 행위의 서곡이 아니겠는가? 네르발이 한 직공에게 묻는다. “인간은 만들지 않나요?” 내가 한 직공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아래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할 수 있겠소?”  “우리 모두 지니고 있는 인간의 공동 운명은 지적 기능의 발달과정이 더 조숙하고 폭넓은 자들에게 더욱 무거운 것이리라...... 결국, 인간은 항상 자신을 성찰하도록 강요당한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사람들은 가장 힘든 순간에 ‘의사여, 너 자신을 치료해라’ 라고 소리친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얼마나 여러 번 고통스러운 한숨을 지으며 ‘나는 혼자서 압착기를 압착한다’ 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 했던가. 나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방법을 생각할 때면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가진 풍요로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오래된 신화적 형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신들에게서 떨어져나와 자신의 아틀리에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온 세계를 채워 넣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였다. 나는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고는 주목할 만한 그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큰 성공을 거둔 내 작품들은 고독의 산물이었다. 내가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래도, 나에게는 힘도 창작적 열정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지만 작품 완성은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산문이나 시에서 내 고유의 문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도움을 차단하고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던 나는 프로메테우스를 본받아 신과 나를 분리했다. 왜냐하면 내 성격과 지적 습관에서는 늘 하나의 생각이 다른 것들을 매몰시키고 내쫒아버리기 때문이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내 안에서 활기를 띠었다. 나는 내 크기에 맞춰 티탄의 낡은 옷을 제작했다. 통치하고 있던 신들은 티탄과 인간 사이에 불법으로 개입한 존재로 간주될 수 있었으니 불평할 자격이 있었다. -괴테-    일신교에서 악마가 그렇듯이, 다신교에서는 티탄들이 이를테면 그림에서의 어둠과 같은 것이다.    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유혹은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작은 화상 앞에서 벌써 망설인다. 애초부터 너무 뜨거운 것은 피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리적 방어현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안전하게 엠페도클레스적인 유혹을 즐길 수 있다. 결국 엠페도쿨레스는 한 번도 희생자를 만들지 않은 아주 희귀한 이미지들이다.    때로는,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은 육체 안에서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장작더미이다. 사람들은 불태워질 수 있다. “사람과 대등한 불에 의해 산 채로 불태워질 수 있다”고 시는 말한다.  명상가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나에게 이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보여주는 자는 밝히지 않는다. 증명하는 자는 보여주기를 싫어한다.”  이미지가 빛날수록 그 모호성은 더욱 당혹스럽다. 그것은 깊이의 애매함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들은 이미지가 피상적이고 덧없기를 바란다. 움직이지 않는 모래 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물, 그 흐름에 아득한 하늘을 반사하는 물…… 그러나 하늘과 대지는 모두 이미지에 수직성을 부여한다. 상승하는 모든 것은 깊이의 힘을 감추고 있다.   
2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댓글:  조회:1246  추천:0  2018-10-20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우리의 정신이 갖는 상상적힘은 매우 다른 두개의 축위에서 전개된다. 그 하나는 새로움앞에서 비약을 찾는, 즉 회화적인것이나 다양함, 예기치 않은 사건을 즐기는것이다. … 또 하나의 상상적힘은 존재의 근원에 파고 들어가 원초적인것과 영원적인것을 동시에 존재속에서 찾아내려고 한다. 8   작품의 언어의 다양성과 변화하는 빛의 생명을 지니기 위해서는 감상적 요인이나 심정적요인이 형식적요인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질의 이미지가 형식, 즉 소멸하기 쉬운 형식,공허한 이미지, 변화하는 표면에서 멀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본질과 내면의 깊은 곳에서 꿈을 꾼다. 그것은 무게를 가지며 핵심을 갖게 되는것이다.9   우선 파괴적인 철학자들만이 미에서 모든 접미사를 떼여내고, 나타나있는 이미지뒤에 숨어있는 이미지를 찾아내기위해 전력을 다하며, 상상하는 기능의 뿌리 자체에이르는 이 막중한 일에 손을 댈수 있는것이다. 물질의 근원에는 어두운 하나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물질의 밤에는 검은 꽃들이 피여있다. 꽃들은 이미 벨벳의 꽃잎과향기의 방식을 갖고있다.10   시적이미지는 하나의 물질을 갖는것이다.12   우리는 상상력의 령역에 있어서 불,공기, 물, 흙의 어느것에 결부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질적상상력을 분류하는 , 4원소의 법칙을 규정하는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12   담즙질 인간의 몽상은 불과 화재와 전쟁과 교살이며, 우울 질인간의 몽상은 매장과분묘와 유령과 도망과 무덤, 즉 음산한 모든것들이며, 점액질인간의 몽상은 호수와강물의 범람과 난파이며, 다혈질인간의 몽상은 새의 비상과 경쟁과 향연과 음악회,그리고 사람이 차마 이름 붙이기를 꺼리는것과 같은 사물들이다.13-14   꿈의 우주론에서 물질적원소는 근본적원소 그대로이다.14   몽환적인 풍격은 여러인상으로 가득 차있는 하나의 액자가 아니고, 부풀어오르는 하나의 물질인것이다. 15   존재란 무엇보다 먼저 각성이며, 더욱이 이상한 인상의 의식 속에서 눈을 뜨기때문이다.20   고향이라는것은 공간의 넓이라기보다는 물질이다. 즉 화강암 이나 흙, 바람이나 건조함, 물이나 빛인것이다.21   심리적대립감정의 기회를 갖지 못한 물질은 끊임없이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시적분신을 찾을수 없다. 28   에드거포의 말 ‘만일 가능한 론리와 과학을 비주체화 해야 한다면,  반대로 어휘와 통사론을 비객체화하는것도 그에 못지 않게 불가결 한것이다.’라고 말하고있다. 대상의 이러한 비객체화가 없다면, 또 대상밑에 우리가 물질을 볼수있게 하는 형식의 변형이 없다면, 잡다한 사물들로 움직이지 않고 생기없는 고체나 우리들 자신들과 무관한것으로 , 세계는 흩어져버릴 것이다.29   실체가 없는 작품은 생명력이 없다35   상상력은 그 어원이 암시하는바와 같이 현실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 아니고 ,현실을 넘어서 현실을 노래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초인간성 능력이다…. 상상력은 사물과 드라마이상으로 창조하는것이며, 새로운 생명과 정신을 창조하고 , 여러가지 새로운 타입을 지니는 비전의 눈을 뜨게 하는것이다. 36   참다운 포에지(시, 시작법, 시학…)라고 하는것은 눈을 뜨게 하는 기능을 말한다37   상상할수 있는 세계의 지도(그림)는 꿈속에서밖에는 그릴수 없다. 감각할수 있는 세계는 무한히 적다! 몽상과 꿈은 어떤 혼(사람)에게는 미의 재료가 되는것이다. 38   신이나서 그린 환상은 행동하기를 멈추는 환상이다. 여러가지 물질원소에는 힘을 지니고있는 환상이 호응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물질에 충실한 한도내에서이며, 또한거의 같은것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원초적꿈에 충실한 한도에서이다39   콤플렉스는라는것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에너지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문화의 콤플렉스는 이러한 변형을 계속한다…만약 승화작용이 개념에 관한 단순한 일이라면, 이미지가 개념론적 도식속에 갇히게 되자마자 곧 그작용을 멈추게 된다. 그러나 색갈은 넘쳐흐르고 , 물질은 부풀어오르고 , 이미지는 스스로를 교화한다. 40   한편의 시를 낳는 꿈의 이러한 항구성을 갖기 위해서는 현실적이미지이상의것을 눈앞에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속에서 태어나 우리의 꿈속에서 사는 이 이미지, 물질적 상상력을 위해 무궁무진한 양식인 풍부하고 농밀한 꿈의 물질로 가득찬이 이미지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42   피상적인 포에지와 같은 포에지를 구별하는 이러한 밀도를 사람들은 ‘감성적가치’에서 ‘감각적가치’로 이행시킴으로써 맛보게 될것이다. ‘감각적가치’와의 관계에서 바르게 분류할수 있을 때에만 상상력의 교의가 밝혀지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단지감각적가치만이 ‘만물조응’을 부여하는 것이다. 감성적 가치는 번역밖에는 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적이란 의미는 감각과 지각의 수용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것이고, 감각적이라 함은 지각하고 감각하는 능력을 가리키는것이라 할수있다. 주해에서.)46   인생은 자라나고, 존재를 변형시키고 순결함을 취하여 꽃을 피게 하며 상상력은 가장 먼 은유로 열려 갖가지 꽃의 삶에 참가하는것이다. 51   백조는 문학에서 벌거벗은 여성의 대용물이다.73   무의식에서 움직이는 모든 이미지와 같이, 백조의 이미지는 남녀양성인것이다. 백조는 빛나는 물의 응시에 있어서는 여성이며 , 행동에 있어서는 남성이다. 무의식에 있어서 활동은 행위이다. 무의식에 있어서는 ‘어떤 현실적행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행위를 암시하는 이미지는, 무의식계에 있어 여성에서 남성에로 발전하는것이다. 76   석양의 수평선 깊숙이 붉은 백조는 변함없이 영원한 도전을 펼치고 있다. … 그는 공간의 왕이며 , 빛나는 왕관의 발밑에 있는 노예처럼 바다는 창백해있다. 87   역동적인 포에지에 있어서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는것이 아니고 생성하는것이다. 사물은 이미지에 있어서 우리의 몽상, 끝없는 몽상속에 생성하는것이다. 물을 응시한다는것, 그것은 흘러간 다는것, 분해한다는것, 죽어간다는것이다. 95   몽상은 때때로 무한한 반영과 수정을 닮은 음악으로 소리를 내는 맑은 물앞에서 시작된다.95   만약 독자가 시인의 모든 이미지를 현실로 인정하고 자신의 리얼리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그는 여행에의 유혹을 겪게 될것이며, 이윽고 그 자신도 ‘이상함의미묘한 감정에 감싸일’것이다. “자연의 관념은 아직 존재하고있으나 이미 변질되여,그 성격에 있어 흥미깊은 수정을 받고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의 신비하고 장엄한 균형이며, 감동적인 균일성, 마법적인 정정인것이다. ” …환영이 현실을정정 하는것이다. 환영은 현실로부터 이음매나 비참함을 떨쳐버  리는것이다.98-99   물질화하는 몽상-물질을 꿈꾸는 저 몽상- 은 형식의 저쪽에 있는것이다.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물질은 형식의 무의식 의이라는것이 이해될것이다. 그것은 덩어리속의물 그자체이다. … 다만 물질만이 복잡한 인상과 감정의 무게를 받아들일수 있는것이다. 물질은 감정의 재산이다. 101   물의 요정, 즉 환영의 수호자는, 하늘의 모든 새들을 자기손으로 붙잡고있는것이다.물웅덩이는 우주를 내포하고 있다. 꿈의 한순간은 홈 전체를 내포하고 있는것이다.101   물은 일종의 우주적 고향이 되여, 하늘에 고기를 번식시 키는것이다. 고생하는 이미지가 깊은 물에 새를, 그리고 하늘에 물고기를 주는것이다. 별-섬이라는 무력하고 양의적인 개념으로 나타낸 도치가 여기서는 새-물고기라는 살아있는 양의적 개념으로표현되여있다. 이러한 양의적개념을 상상력속에서 구성하도록 노력해주기 바란다.이렇게 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이미지가 갑자기 얻게 되는 매혹적인 애매성을 맛보게될것이다.103   죽어가는 어머니의 추억은 에드거포의 작품에서는 독창적으로 두드러진것이다. 그는 동화의 힘과 괴상한 표현의 힘을 지니고있다. 그러나 그토록 다양한 이미지가 어떤 무의식의 추억에 강하게 덧붙혀있는것은 이미 그 이미지들이 미래의 긴밀함을 서로들 사이에 지니고있기 때문인것이다. 아무튼 바로 이것이 우리의 주체이다. 물론이러한 긴밀성은 논리적인것이 아니다. 또 직접적으로 현실적이지도 않다. 현실속에서 나무그늘이 물결에 빨아들여지는것을 보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상상력은이미지와 몽상의 이러한 긴밀성을 정당화 하는것이다…. 이미지의 측면 그자체, 표현수단의 단계 그자체에 따라 발전시키는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거듭 되풀이되여 말하지만 , 우리의 현재의 연구가 바쳐지는것은 , 이미지이에 대한 보다 표면적인 삼리학에 대해서인것이다.112   새로운 분석방법에 따라서 책을 읽게 되자마자 멀리 떨어져있는 이미지를 받아들여,다양한 길로 상상력을 자유로이 비약시키는, 매우 변화 많은 승화작용에 참가하게 되는것이다. 고전적인 문학비평은 이러한 다양한 비약을 구속한다.114   끊임없이 다시 상상하고 있을 때만이 시적기능이 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새로운형식을 부여하는것임을 비평은 쉽사리 잊어버리고있는것이다.114   몽사가는 이제 더 이상 이미지를 꿈꾸지 않고, 물질을 꿈꾼다.124   우리는 상상력이 그 창조적형식에 있어서 , 창조하는 모두에 생성을 강요하고 있음을 믿고(있다)130   참으로 강력한 리익이란 공상적인것이다. 즉 그것은 꿈꾸는 리익이지 계산하는 리익이 아니다. 가공적리익인것이다. 바다의 영웅은 죽음의 영웅이다. 최초의 수부는 사자(死者)와 마찬가지로 영감했던 최초의 생자를 말하는것이다. 141   죽음은 여행이며 여행은 죽음인것이다 142   나는 그대가 출발한 오솔길을 보았다! 잠과 죽음은 우리를 더 오랫동안 때어놓지 않으리라… 들어보라! 환영같은 급류가 와글거림을 멀리서 음악으로 가득찬 숲의 속삭이는 미풍에 뒤섞고있다. (셸리의 시)145   이미지의 자연스런 싹, 물질적원소의 힘에 의해서 길러진 싹에 의해서만 이미지는번식되고 모아지는것이다. 161   아침의 조용한 물소리 장미처럼, 내일물의 사자는 거슬러 오리라. 은빛종소리는 헤염치리라, 얼마나 상냥한 바다인가… 아! 내방의 갈대는 얼마나 울부짖고 있는것일가(정채로운 이미지)165   시의 기능을 지니는 모든 위대한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오필리아의콤플렉스도 우주적 단계에까지 올라갈수가 있다. 그때 오필리아의 콤플렉스는 달과 물결의 일치를상징화 한다.165   이미지가 갖는 특징이 전혀 현실주의적인 기원을 갖지 않는다느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가? 그것들의 특징은 꿈꾸는 존재의 투영에 의해서 생기는것이다. 물에 비친달속에서 다시 오필리아의 이미지를 발견하기에는 강한 시적교양이 필요한것이다. 167   다양한 이미지를 동일한 주제아래 모을수는 없는것이다 169   닫힌 물속을 흘러가는 배와 같아 죽은자처럼 단 하나의 원소를 지니고있었을뿐173   형식이란 상상력에는 ‘구성’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물질적 상상력은 ‘결합’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176   몽상의 이미지는 일원적이거나 아니면 이원적이다. 그런 이미지들은 실체의 단조로움속에서 꿈꿀수 있다. 만약 그런 이미지들이 결합을 원한다면, 그것은 두 원소의 결합인것이다… 물질적상상력의 지배속에서 모든 결합은 결혼이며, 삼자사이의 결혼이란 존재하지않는것이다.181   돌발적인 은유, 놀라운 대담성, 전격적인 아름다움이 독창적인 이미지의 힘을 증명할수 있다…. ‘물은 불타는 물체이다’ ‘물은 젖은 불꽃이다’ 라고 말하는 노발리스의수수께끼같은 완벽한 말도 똑같은 말이다. 183-184   본질적인 몽상은 , 그야말로 반대물들의 결혼인것이다.185   상상력은 작은것을 커다란것에, 그리고 커다란것을 작은것에 번갈아 투영하는것이다. 만약 태양이 바다의 영광스러운 남편이라면, 리바송의 차원에서 물은 불에 몸을바치는것이 필요하며 , 불은 물을 지니는것이 필요하리라. 불은 자신의 어머니를 낳는것이지만 , 이것이 바로 연금술사들이 리그베다를 모르는채 싫증날만큼 사용하는공식인것이다. 이것은 물질적 몽상의 근원적인 이미지이다.187   ‘구리빛’의 독특한 똑같은 구름이 나타난다.192   상상할수 있는것을 뛰여넘어보라. 그러면 당신들은 마음과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족할만큼 강력한  현실을 갖게 되리라. 193   밤의 꿀은 천천히 소모된다. 태양의 냄새는 너무나 강해서 햇볕을 쬔 물은 자신의 향기를 우리에게 줄수가 없다.밤이 너무나 고요하여 내게는 그것이 짜디짜게  생각될 정도이다. 밤은 때때로 가까이에서부터 우리를 감싸며 입술을 차갑게 하려고 다가오는 아주 가벼운 물과 같다.우리는 자신속에 있는 수분에 의해서 밤을 빨아들이는것이다. 196   반죽의 꿈(흙과 물의 어울림)에 속하는 이와 같은 꿈은, 창조하고 , 형성하고, 변형하고, 반죽하기위한 투쟁 또는 패배의 교차인것이다.200   열손가락은 양조통속에서 준마를 내갈기고있다.204   눈물은 너의 비참한 뇌수를 물에 빠지게 했던것이다. 소금기 없는 언어는 너의 입위로 미지근한 물처럼 흐르고 있다.211   물질적몽상은 조각하는것이다. 조각하는것은 언제나 몽상 이다.213   형식은 완성된다. 그러나 물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물질 이란 끝없는 몽상의 도식인것이다.213   사랑과 공감의 감정이 은유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근원적 감정속에서 힘을 길어올리러 갈 필요가 점점 더 많아 질것이다.218   마음을 다 바쳐 어떤 현실을 사랑하자마자 그것은 벌써 혼이 되고 추억이 되는것이다. 219   상상력의 령역에서 사람들이 흰색에 대해 기분을 맞추기는 어렵지 않을것이다. 달의 금빛 어린 빛이 내물위에 덧붙혀질 때… 227   우리의 모든 문학교육은, 형식에 관한 상상력과 명확한 상상력을 기르는데 만족하고있다. 244   모든 이미지는 부재이며, 하늘은 텅 비여있으나, 운동은 생생하고 원만하게 , 또 리듬을 지닌채 거기에 있다.247   물질적상상력만이 끊임없이 전통적이미지를 활기차게 하며, 몇몇 오래된 신화적형식을 부단히 소생시키는것이다. 물질적상상력은 형식을 변형시킴으로써 형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형식이 변형하는것은 스스로의 존재양식에 반대되는것이다. 254   순수성을 몽상할수 없이는 순수성을 알수 없는것이다. 255   사라져버린 문명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 특별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은 이러한 ‘몽상’인것이다. 단지 사실의 무게를 잴뿐만 아니라 꿈의 무게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왜내하면 문학의 세계에서는 아주 단순한 묘사라 할지라도 모든것은 보여지기전에 꿈꾸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256   물질적상상력은 근원적법칙의 한 례가 있다. 즉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서 가치부여된 실체는, 미소한 량이라도 , 다른 실체를 매우 큰 덩어리에 작용학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힘의 몽상의 법칙 그자체. 즉 손바닥속의 작은 량으로 우주적지배의 수단을 지니는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형태로서는 열쇠가 되는 말이나 조그만  말이 아주 깊숙이 숨겨진 비밀도 드러나게  할수있다는 리상이기도 하다… 순수한 한방울의 물은 태양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불순한 한방울의 물은 우주를 오염시키기에 충분한것이다. 모든것은 물질적상상력으로 선택된 행동의 윤리적의미에 달린것으로서, 만약 그것이 악을 꿈꾼다면, 불순성을 전파하여 악마적싹을 개화시킬것이고 만약 선을 꿈꾼다면 순수한 실체의 한방울을 신뢰하여 자비로운 순수성을 빛나게 할것이다. 실체의 행동은 스스로의 내면성에서  원했던 실체적생성으로서 꿈꾸어진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인격의 생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행동은 모든 상황을 뒤엎고 모든 장해를 뛰여넘으며, 모든 경계를 부숴버릴수 있는것이다. 사악한 물은 음흉하나 , 순수한 물은 예민하다. 두가지 의미에서 물은 의지가 된다. 모든 일상적성질이나 표면적가치는 부차적특성의 한단게로 옮겨진다. 명령하는것이 바로 내면인것이다. 실체적 행동이 빛을 발하는것은 , 중심적인 점이나 응집된 의지로부터인것이다.270   물질적상상력에 전적으로 복종하게 됐을 때, 스스로의 원소적 힘속에서 꿈꾸어진 물질은 정신이나 의지가 되기까지 앙양 되는것이다. 273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의미사이에 ‘교감’이 있다고 할 때,그러한 비유의 심리학은 만들어진것이 아니고-속임수로 감추어진것이다. 그때의 교감은 련상일 뿐이리라. 사실 교감은 감성적인 여러 인상의 살아있는 통합인것이다. 참으로 물질적인 상상력의 진전을 사는生 자에게 비유적의미는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모든 비유적의미는 감성의 일정한 무게, 즉 일정한 감성적물질을 유지하고 있는것이다. 모든것은 이러한 영속적인 감성적 물질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273   ?상상력의… 직접적인 행동이 명백하게 되는것은 , 문체의 신선함이 가장 어려운 성질에 속하는 문학적상상력을 물로 할 때이다. 그것은 작가에 달린것이지 취급된 주제에 달린것은 아니다183   물질적상상력은 세계를 깊이에서 연극화한다. 물질적상상력은 인간의 내면적삶의 모든 상징을 여러 실체들의 깊이속에서 찾아내는것이다.280   선천적으로 위대한 시인은, 깊은 삶속에 자신의 자연스런 자리를 갖고있는 여러가치를 상상하는것이다. 281   바람을 일으키는 영웅은 “나는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다”는 갈대의 금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다리는것, 힘앞에서 자신을 구부리는것을 권하는 ‘수동적인 금언’에 다름 아니기때문이다. 그것은 걷는 사람의 능동적 금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굴’의 보행자는 바람을 마주하고, 또 바람에 대항해서, ‘전진하면서’ 스스로를 굽히기 때문이다. 그의 지팡이는 폭풍을 똟고 대지에 구명을 내며,질풍을 검으로 자른다. 역동적관점에서 본다면, 바람속의 보행자는 갈대의 반대인것이다.303   폭풍속에 둘러싸인 보행자는 얼마나 쉽게 사모트라케의 승리를 상징하고있는가! 그는 곧 작은 깃발이고, 국기이며, 군기인 것이다. 그는 용기의 표시이고 , 힘의 증거이며, 토지의 점령인것이다. 폭풍에 펄럭이는 외투는 그러므로 바람의 영웅에 내재하는 일종의 깃발, 빼앗을수 없는 깃발인것이다.304   특수화된 콤플렉스는 원초적콤플렉스의 산물이기는 하나 , 회화적특징으로 스스로를 덮고, 객관적 아름다움속에서 스스로 를 나타내면서 우주적 경험속에서 스스로를 특징화할 때에만 미적기능을 갖기에 이르는것이다. 315   상상된 사실은 ‘현실적사실’보다 더 중요한것이다. 330   현실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심리학적으로 광기어린 은유는, 그러나 시적진실인것이다. 그것은 은유가 시적인 혼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의 현상이며,우주적자연위에 던져진 인간적지연의 투영이기도 한것이다. 343   눈을 깜박거리는것의 행위는 현실적인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다른 행위는 그것이 수반하는 소리에 의해서 그 말의 뿌리역할을 하는 음향을 아주 잘 상기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듣기 위해서  ‘생산하며’ ‘투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일종의 대표적의성어, 즉 떨어지는 눈꺼플에 소리를 주는 일종의 추상적의성어가 존재하는것이다. 폭풍이 지나간위에 나뭇잎에서 떨어지면서 이상에서 말한바와 같이 눈을 깜박거리며 빛과 물의 거울을 떨게 하는 물방울이 있다. 그것을 ‘바라볼’ 때, 떠는것이 ‘들리는’것이다.353   ㅁ 물은 가장 충실한  ‘목소리의 거울’ ㅁ싸락눈은 타닥타닥 튀고 ㅁ바다는 번쩍이는 등뼈, 벌겋게 달군 쇠로 낙인을 찍히는 얼빠진 암소와 같다. ㅁ 나는 흐름을 바이올린처럼 지닌다 ㅁ물에 대한 말라르메의 노래   오! 거울이여   권태로 인해 너의 테두리속에 얼어붙은 차디찬 물 몇번인가 , 그리고 몇시간 동안인가, 가지가지의 꿈으로 비탄에 잠기며 깊은 구덩이의 네 얼음밑에 나뭇잎같은 내추억을 찾아 헤매며, 아득한 그림자처럼 나는 네속에 나타났다. 하지만 두렵구나! 저녁이면 네 엄숙한 샘물속에 어수선한 내 꿈의 적나라한 모습을 나는 알았다49   2015.2.9.  
1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적 상상력[스크랩] 댓글:  조회:2055  추천:0  2018-02-20
가스통 바슐라르  바슐라르 [Bachelard, Gaston, 1884.6.27~1962.10.16]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활동분야  철학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 《부정(否定)의 철학》(1940)   글 올린 이 / 이충이          본문     구조주의(構造主義)의 선구자이며 시론(詩論) ·이미지론(論)으로도 유명하다. 1927년 《근사적 인식(近似的認識)에 관한 시론》으로 학위를 취득한 후 디종대학의 강사·교수를 거쳐 1940년 소르본(파리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동 대학 부속인 과학사 ·기술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4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20세기 초두, 약 4분의 1세기에 걸친 ‘물리학의 혁명’을 목격하면서 과학을 그 동적(動的)인 변화발전의 위상(位相)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이 변혁기의 과학활동에 맞는 의미를 종래의 철학이나 일상적 인식 또는 과학자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데에서 ‘과학의 철학’의 위치를 구하였다. 초기의 대표적인 저작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은 상대성이론의 비(非)뉴턴 역학적(力學的)인 성격이나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비결정론(非決定論)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통하여 현대과학에서의 인식의 양식(樣式)을 ‘비(非)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서 제시한 것인데, 이러한 파악이 《부정(否定)의 철학》(1940)에서 ‘비(非)의 철학’으로서 결실되었다.  이상의 저작에서 과학이 초래하는 새로운 인식에 대하여 개방된 정신, 나아가서는 과학의 발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같은 자세를 볼 수 있다면 《과학적 정신의 형성》(1938)의 목표는, 그것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해’의 정신분석에 의한 배제였다. 이러한 방향은 앞서 말한 과학의 진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근저(根底)에서 교착되면서 시와 이미지의 자유분방한 역동성(力動性) 자체를 구하는 ‘4원소(元素)’에 매개된 심층심리의 분석으로 발전하였다. 이 양자를 끊임없이 ‘상보적(相補的)’으로 전개시킨 바슐라르의 사상적인 영위는 프랑스의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현대적인 의미 확립에 기여한 동시에 J.피아제와 L.알튀세르 또는 G.캉길램을 통하여 M.푸코에게로 다채로운 영향을 끼쳤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과학철학자이자 시인이며 문학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에 관한 연구서로, 바슐라르 사후 26년 만인 1988년, 딸 수잔 바슐라르의 손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보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이 근본적으로 불 물 공기 흙 네 가지 원소로 분류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른바 4원소설을 펼쳤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과 마찬가지로 불의 이미지를 고찰하고 있는 책으로, 문학 상상력에 관한 바슐라르의 기나긴 연구 도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미 있는 저작이다.     1. 촛불의 미학     “촛불은 혼자 탄다. 불꽃은 혼자이고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이고,  또 그것은 혼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외로운 불꽃이여, 나는 홀로 있다. 불꽃은 소리를 내고, 불꽃은 투덜거린다. 불꽃은 괴로운 존재이다. ”  “산다는 것은 생성하는 것,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미래를 획득하면서 진행하는 창조의 과제이다. 따라서 그는 과거조차도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닌, ‘하나의 항구적인 이마주’, 도달해야 할 하나의 미래로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하여, 상상력과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삶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소재로 하면서 빛을 얻기 위해 항상 위를 향해 타고 있는 촛불의 불꽃과 같다.”  "결국 인생의 여러 가지 경험들, 이리저리 찢겨지고 갈래갈래 조각난 경험들을 숙고해 보건대 내가 참으로 실존의 책상에 임하는 것은 차라리 백지 앞에서, 나의 램프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어 책상 위에 펼쳐진 흰 페이지 앞에서이다.  그렇다. 내가 최대한의 실존, 팽팽한 실존, 앞을 향해서, 보다 앞을 향하여,  또 그 위를 향하여 긴장되어 있는 실존을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실존의 책상에서이다."  ---------------------------------------  노발리스가 불꽃의 수직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단장을 모두 정리해 보면, 대우주 안에서 직립하고 있는 모든 것, 수직인 모든 것은 하나의 불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動)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즉 위로 올라가는 모든 것은 불꽃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의 환위명제는 다소 그 강도를 약하게 할 뿐 아주 명백하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그 자체를 구성한다. 노발리스는 이것을 역으로 이라고 쓰고 있다. 불꽃은 어떤 점에 있어서 벌거벗은 그대로의 동물성이며 일종의 극단적인 동물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대식가이다. 이와 같은 아포리즘들이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 흩어져 있는 단장(斷章)이 되고 있다는 것은 신념의 직접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이 깊은 몽환 상태를 체험하여 성찰하기보다는 오히려 몽상하는 것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는 몽상의 진실이다.    각각의 생명계는 그때 특수한 불꽃의 한 타입이 된다. 메테르링크가 번역한 일부분 가운데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  * 노발리스, .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꽃의 배설물로 표현되어 있는 특이한 페이지를 참조할 것. 우리들은 타고 있는 존재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사이스의 사도들, 제 2권, p. 216). [동서시편]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        --------------------------------------    2.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뿌리는 언제나 하나의 발견이다. 뿌리란 못 보는 만큼 더욱 꿈꾸게 되는 법. 실제 발견된 뿌리는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ː뿌리는 바윗덩어리이자 머릿단이고 자유자재로 구부러지는 필라멘트 같으면서도 단단한 목재가 아닌가?  3. 공간의 시학  "잘 말함은 잘 삶의 한 요소이다.”  “집을 인간의 영혼에 대한 분석도구로 생각함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같은 책, 123쪽)        “때로 집은 커지고 늘어나기도 한다. 그런 집에서 살려면, 한결 더 유연한 몽상이, 한결 덜 명확히 그려진 몽상이 필요하다.”   (책 속에서, 가스통 바슐라르)              4. 몽상의 시학  5. 불의 시학의 단편들  가스통 바슐라르가 임종 직전까지 몰두했던 불에 관한 연구서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는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도 같은 것이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과학철학자이자 시인이며 문학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에 관한 연구서로, 바슐라르 사후 26년 만인 1988년, 딸 수잔 바슐라르의 손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보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이 근본적으로 불 물 공기 흙 네 가지 원소로 분류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른바 4원소설을 펼쳤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과 마찬가지로 불의 이미지를 고찰하고 있는 책으로, 문학 상상력에 관한 바슐라르의 기나긴 연구 도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미 있는 저작이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이 출간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딸이자 이 책(프랑스어본)의 편집자인 수잔 바슐라르가 책머리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우선 바슐라르는 불에 관한 두 저서(『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존재의 양극에서 체험되는 상반된 불의 이미지, 즉 아니마의 불과 아니무스의 불을 고찰하고자 했다. 제1부에서는 아니무스의 불을, 제2부에서는 아니마의 불을 연구하려는 것이 최초의 구상이었다. 그런데 집필하는 중에 또다른 아이디어들이 생각났고 그때마다 그것을 집필 계획에 포함시켰다. 바슐라르의 그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과 끝없는 몽상 덕분에 책은 점점 방대해져갔다. 수잔 바슐라르는 이런 아버지를 "영원한 학생"에 비유했다.  영원한 학생이었던 아버지는 배우기를 좋아했다. 우리는 그의 저서에서 그가 유년 시절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유년 시절을 그리워했다는 표시도, 순진함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표시도 아니다. 그것은 유년 시절의 능력, 즉 몽상적이고 자유로운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경탄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배우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수잔 바슐라르, 「책머리에」  이런 와중에 건강이 나빠진 바슐라르는 결국 제2부를 포기하고 제1부를 쓰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피닉스에 관한 '피닉스의 시학'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래서 '불의 시학' 원고는 미완성인 채로 제쳐두고, '피닉스의 시학'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슐라르는 이 책 역시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딸 수잔 바슐라르가 애초에 구상한 '불의 시학' 서론과 '피닉스의 시학' 서론 그리고 '불의 시학' 제1부에 해당하는 원고를 분류·정리·편집하여 바슐라르 사후 26년이 지난 1988년 『불의 시학의 단편들』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피닉스의 시학' 원고는 서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분실되었으므로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어 아쉽지만, 가스통 바슐라르가 임종 직전까지 몰두했던 불의 테마에 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으니, 독자들로서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불을 품은 신화적 존재들의 시적 이미지론  이 책은 서론과 '피닉스' '프로메테우스' '엠페도클레스'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슐라르는 고대 전설과 신화 속 존재들이 가진 불의 이미지에 대한 몽상에서 출발, 상승의 의지를 가진 인간존재의 정신현상을 탐구한다.  피닉스… 영원히 죽지 않는 새, 삶과 죽음의 변증법에서 시적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피닉스에 관한 장. 바슐라르는 유년 시절 어느 햇빛 찬란한 여름날 강가에서 물 속으로 뛰어드는 불새, 피닉스를 보았다. 불을 최초로 체험한 이 순간, 그는 세계관이 뒤흔들렸다고 고백한다. 이 장은 특히 피닉스가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우주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피닉스)는 유일하다. 그는 독특하다. 그는 삶과 죽음의 마술적 순간들의 스승이며, 둥지와 장작더미의 중대한 이미지들의 기묘한 통합이다. 그는 자신의 장작더미가 불타오르는 최후의 순간에 최고의 영광에 도달한다."  프로메테우스… '인간에게 불을 주기 위해 하늘의 불을 훔친 영웅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주시하는 장. 바슐라르는 불의 유용성을 넘어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초인간성 그리고 그것의 절대적 승화를 보여준다. "시적인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들은 항상 인간의 본성을 한층 더 높여주는 정신적 행위를 가리킨다. 정신현상의 미학, 다시 말해 정신의 삶을 견고하게 하고 활기차게 해주는 정신적 행위가 프로메테우스의 기호 아래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엠페도클레스… 에트나 산 위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관한 명상. 그의 죽음은 단순히 철학사의 잡보기사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실로 삶과 죽음을 숙고하고 불을 꿈꾸는 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불에 뛰어들어 죽음을 선택하는 의지의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소멸의 미학에 관한 장. "우리가 존재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철학에 대립하여, 죽음 안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철학자가 있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질 때, 엠페도클레스는 처음으로 자유롭다. 이러한 결정의 순간들은 시간의 시학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는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도 같은 것이다.  바슐라르는 우리 존재를 불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긴장 속에서 항상 생동하고 있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며 빛나거나 어두워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불의 솟구침을 포착하고 불에 참여하면서 존재 자체가 불처럼 용솟음친다고 이야기한다. 바슐라르는 불의 역동성과 끝없이 상승하려는 존재의 의지를 동일하게 이해하고, 발레리, 엘리엇, 횔덜린, 니체 등 시인들의 저작들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고찰한다. 바로 여기서 몽상과 상상력이 응축된 절정의 언어미학이 탄생했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비록 완성되지 못한 저작이나, 바슐라르가 구축하고자 한 언어미학을 음미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철학자-시인의 몽상으로 탄생한 새로운 언어와 행복하게 조우하고 높이를 향해 치닫는 몽상에 빠질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낮에서 밤, 밤에서 낮 사이, 우리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피닉스는 몇 살인가?  인생의 만년에 불사조적 망상들은 노령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은 추억을 태우며 죽는다.  그렇지만 추억을 태우면서 추억을 더욱 사랑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체험한 사랑의 영원함을  누릴 만한 자격을 얻는다"  6. 꿈꿀 권리 - 미술평론 에세이  -창조적인 화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초적인 삶의 존재들을 바라보고, 드러내 준다.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목은 '모네, 샤갈, 바로끼에, 칠리다, 꼬르티, 마르쿠시스, 플로꽁을 통해 펼쳐 나가는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미술론'이다. 내가 본 부제목 가운데 단연 가장 긴 부제목이다. 부제목을 이렇게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의 작품을 통해 펼치는 바슐라르의 철학적 몽상,' 목차는 다음과 같다. 수련, 또는 여름 새벽의 놀라움 / 샤갈의 '성서(聖書) 서설 / 빛의 근원 / 원소에 자극 받은 화가 / 시몽 세갈 / 조각가 앙리 드 바로끼에 / 철(鐵)의 우주 / 어떤 물질의 몽상 / 마르쿠시스 작품에 있어서의 점과 시선 / 물질과 손 / 풍경의 역학(力學) 서설 / 알베르 플로꽁의 '끌에 관한 시론' / 환영의 성(城).  미술 작품을 놓고 펼쳐지는 바슐라르 특유의 '몽상'에 동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행히도 몽상의 레훠런스, 그러니까 미술 작품 사진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샤갈과 모네 이외의 작가 이름이 생소한 독자들도 안심할 수 있다. 클로드 모네의 그림 '수련'을 주제로 하는 첫 장의 시작부분은 다음과 같다.    문장의 상당 수가 사실상 아포리즘에 가깝다. 바슐라르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마치 '자동 기술'해놓은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문학 작품, 예술, 신화, 종교, 철학, 심리학, 자연과학 등의 분야에 걸친 바슐라르의 식견이 문장 곳곳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바슐라르의 몽상을 따라가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포인트는 그런 식견 또는 지식에 있지 않다. 표현 또는 그냥 문장에 있다. 다음은 '풍경의 역학 서설'의 한 부분. (pp.118.)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 책을 보면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미술 작품을 보는 바슐라르의 눈은 그의 앎에 바탕을 두고 있다. 덕분에(?) 앎의 깊이가 깊지 못한 (나 같은) 독자들로서는 바슐라르의 앎을 막연하게 가늠하며 읽을 도리밖에 없다. 다행히 번역자 이가림 선생의 주석이 그러한 가늠을 돕는다. (물론 충분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원소(元素)에 자극 받은 화가'의 첫 부분. (p71.)    한편 클로드 모네는 1883년에 파리 북쪽의 마을 지베르니에 집을 빌려 정착했다. 그리고 1900년에 그 집을 사들인 뒤, 정원을 꽃밭으로 가꾸고 연못을 파 근처의 에프트강 줄기에서 물이 직접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1906년부터 그는 수련의 연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모네의 '수련'하면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대형 작품들은(파리 오랑쥬리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이 시기의 모네는 개인적으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소용돌이는 물론이거니와, 1911년에 두 번째 아내를 잃었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아들까지 잃었다. 더구나 모네 자신의 시력에 이상이 생기고 있었다.  그러한 모네는 오랜 친구이자 저명한 정치인인 클레망소의 물심양면의 도움과 격려로, 오래 전부터 구상하던 수련 또는 연못 풍경 연작에 착수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지베르니 저택의 정원 한쪽에 폭 12미터, 길이 20미터의 대규모 화실을 세우고 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모네의 수련 연작의 특징은 역시 수면에 비치는 세계와 수면 위에 떠 있는 사물(수련) 사이에 어떤 구분 또는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요컨대 화폭 전체가 빛의 반영 그 자체가 된다. 경계가 없는 빛의 잔치!  최근 몇 년 사이에 미술 작품을 '알기 쉽게' 해설하는 내용의 책이 제법 자주 출간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일진대, 알면 알수록 더욱 잘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도 쉽게 알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책과 함께 바로 이 책과 같은, 그러니까 깊고 내밀하며 유일무이한 사색의 자취를 담은 책도 꾸준히 출간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지.  ------------------------------------------  샤갈의 의 序說                                                              I    모든 사물에 빛과 찬란함을 투영시키는 현대의 눈, 한 화가의 눈은 이 책의 각 페이지마다에서 전설적인 역사의 어둠의 밑바닥을 바라본다. 이 살아있는 눈은 과거 속에서도 가장 위대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삶의 존재들을 발견하고, 바라보며, 드러내 준다. 생물들이 꿋꿋한 나무줄기와 같이 태어나 성장하고, 인간이 그대로 초인간적 존재였었던 저 확고부동한 위대한 시대를, 우리들에게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 마르크 샤갈, 우주의 창조자로서 붉은색과 황토색, 짙은 청색과 엷은 청색을 배합할 줄 아는 이 화가는 낙원시대의 색깔들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샤갈이 성서를 읽는다. 그러면 그의 독서는 곧바로 한줄기의 빛이 된다. 그의 화필, 그의 연필 아래서 는-자연스럽게, 아주 간단명료하게-한 권의 그림책이 되고, 한 권의 초상화집이 된다. 그리하여 여기에 인류의 가장 위대한 한 가족의 초상이 모아지게 되는 것이다.    독자로서의 내 고독 속에서 그 '성스러운 책'에 대해 깊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 목소리가 너무 강하게 울려서 나는 언제나 선지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곤 하는 것이다. 모든 선지자가 내게 있어서는 예언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 이 아름다운 화집의 삽화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오래된 책을 읽는다. 나는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듣는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갈, 그 見者가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샤갈은 나의 귀에 빛을 비춰 준 것이다.                                      II    형상의 창조자, 한 사람의 천재적인 화가에게 있어서, 낙원을 그리는 임무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무슨 특권일까! 아! 바라볼 줄 알고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눈에는 모든 것이 낙원인 것이다. 샤갈은 세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를 바라볼 줄 알고, 특히 세계를 드러내 보여줄 줄 알기 때문이다. 낙원이란 아름다운 색깔들의 세계이다. 하나의 새로운 색깔을 발명하는 것이 화가에게 있어서는 낙우너의 기쁨인 것이다! 이와같은 기쁨 속에서 화가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즉, 창조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화가마다에 자신의 낙원이 있다. 그리고 색깔을 조화시키는 것을 체득하게 된 사람은 확실히 한 세계의 화합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낙원에 대한 모든 몽상가의 원초적 몽상에 있어서, 아름다운 색깔들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화해시킨다. 모든 존재들은 아름답기 때문에 순수하다. 모든 것은 함께 사는 것이다. 물고기들이 공중에서 헤엄치고, 날개 달린 당나귀가 새의 길동무가 되며, 우주의 청색이 모든 피조물들을 가볍게 만든다. 조금 꿈꾸어 보라. 땅 위에서 꺾여 창공 속으로 운반되어  은방울꽃에 온 몸이 향기로와, 하늘에서 그토록 잘 꿈꾼 나머지 머리 속에 한 마리 비둘기를 떠오르게 하는 초록색 당나귀처럼.    이와같이 낙원은 일종의 고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말로써 표현하는 데는 숱한 詩작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샤갈의 단 한 점의 데상이 이 모든 위력을 응축시켜 버린다. 단 한 장의 그림이 끝없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색깔이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회화야말로 언어의 원천이며 시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낙원의 그림 앞에서 꿈꾸는 사람은 讚歌의 합창을 듣는 것이다. 형태와 색깔의 결혼식은 번식력이 강한 결합이다. 모든 존재들은 신의 손에서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생하고 풍부하게 화가의 화필에서 태어난다. 의 최초의 동물들은 신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어록집의 낱말들이다. 예술가는 천지창조의 추진력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예술가가 '창조한다'는 동사를 끊임없이 활용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는 창조에 얽힌 모든 행복을 자기 것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창조하는 예술가를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인가. 왜냐하면 샤갈은 빨리 창조하기 떄문이다. 빨리 창조한다는 것은 생생하게 창조하기 위한 커다란 비결인 것이다. 생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생명은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초벌그림이란 결코 있을 수 없고, 언제나 불꽃뿐이다. 샤갈이 그리는 존재들은 모두 최초의 불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정경에 있어서, 샤갈은 발랄함의 화가인 것이다. 그의 낙원은 실증나지 않는다. 새들의 비상과 더불어 무수한 눈뜸이 하늘에 울려퍼진다. 대기 전체에 날개가 돋혀 있는 것이다.   -------------------------------------------------------------    7. 불의 정신분석  8. 물과 꿈    9. 공기와 꿈  10. 물과 불  "호프만의 술은 불타는 술이다. 그것은 매우 질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불이 지니고 있는 아주 남성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포의 술은 낮게 가라앉게 만들며, 망각과 죽음을 가져오는 술이다. 그것은 매우 양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의 아주 여성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에드커 포의 천재성은 어셔 가 저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연못 속의 잠자고 있는 물, 죽은 물에 연관되어 있다." (물과 불)  11. 불의 정신분석  12 부정의 시학  13. 순간의 시학  14. 어록  [출처] 시와 산문 그리고 시와 록색 http://cafe.daum.net/kpoetry/CU9q/114?q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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