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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미학 의 해석 - 비수선생
2019년 10월 24일 20시 41분  조회:929  추천:0  작성자: 강려
<밑줄>
젖어 있는 불꽃, 타는 액체가 위쪽을 향해서, 하늘을 향해서 수직의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것을 볼 것이다.
 
<해설>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는 문장이면서도 백만 점짜리 묘사죠. 그럼 어떻게 이런 사유에 이르렀는지를 추적해볼까요? 추적방법은 바로 여러분께서 고생하셨던 보리차 끓이는 방법에서 배우셨습니다.
 
 
바슐라르는 초를 본다
불꽃아래서 녹고 있는 촛농을 본다
녹은 촛농이 심지로 스며들고,
스며든 촛농이 불꽃이 되어 치솟는 것을 본다
촛농이 심지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촛농의 본질을 찾는다
그리고 촛농의 액체적 성질을 물과 비유한다
촛불의 좁고 날렵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물과 좁고 날렵한 이미지를 결합하여 시냇물을 떠올린다
시냇물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이나
촛불은 아래에서 위로 수직으로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이해 가능한 결과에 이른다
그 과정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든다
 
 
 
며칠 전 과제로 제시된 보리차 끓이는 법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는지 이 풀이를 보시면 감이 잡히실 겁니다. 여러분들이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문장을 역순으로 또는 처음부터 해체하면 이처럼 좋은 문장을 만들 수 있는 매뉴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적 표현도 좋고, 세밀한 묘사도 좋으니 여러분은 이 방법을 통해 좋은 표현들을 캐내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문장들은 필사하면서 체크해두셨던 것을 이용하면 됩니다. 천천히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꼭 문장의 해체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밑줄>
같은 책상 위에 촛불과 모래시계가 있는 것을 본다. 두 개 다 인간적인 시간을 말하고 있으나 그러나 얼마나 다른 스타일에서인가!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 부서져 내리는 모래보다 가벼운 불꽃은 마치 시간 자체가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할 것처럼 그 형태를 쌓고 있다.
 
<해설>
위에서는 ‘초’라는 하나의 사물에서 불꽃과 촛농을 분리하여 상상의 문장을 만들었는데요, 여기서는 모래시계라는 사물을 추가로 끌어들여 그것보다 조금 더 어려운 문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풀어보면 이 역시 비슷한 순서로 전개된 사유입니다.
 
 
 
책상으로 간다
책상 위 촛불과 모래시계를 본다
모래시계를 관찰한다
위에서 아래로 모래가 떨어져 내린다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 같다
모래가 떨어져 내리는 것은 시간이 흐름을 의미한다
모래시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위가 작아진다
양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래가 작아진다
따라서 모래시계는 아래로 흐르는 시간이고
양초는 위로 흐르는 시간이다
이 얼마나 다른 스타일의 시간인가
불꽃은 위로 흐르는 모래시계다
 
 
 
<밑줄>
불꽃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며 꿋꿋하다. 이 빛은 조금만 불어도 꺼진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의 불씨로서 다시 켜진다. 불꽃은 켜기도 쉽고, 끄기도 쉽다. 삶과 죽음이 여기서는 아주 나란히 놓여 있다.
 
<해설>
불꽃을 ‘삶’으로 바꾸어 읽어봅시다.
 
삶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며 꿋꿋하다. 이 삶은 조금만 불어도 꺼진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의 불씨로서 다시 켜진다. 삶은 켜기도 쉽고, 끄기도 쉽다. 불꽃,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은 아주 나란히 놓여 있다.
 
이처럼 좋은 비유는 그것을 바꾸어 읽었을 때 전혀 어색함이 없이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 말을 꼭 기억해두셨다가 시를 쓸 때 적용하는 비유가 비유하고자 하는 원래의 그것과 동떨어지는지 아닌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밑줄>
몽상가의 독방에서는 아주 낯익은 물건들이 우주의 신화가 된다. 꺼지는 촛불은 죽어가는 태양이다. 촛불은 하늘의 별보다도 더 천천히 죽는다.
 
<해설>
자연적으로 꺼지는 촛불은 어둠에 점점 잠식되어 죽어가는 태양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바슐라르는 이번에도 촛불을 다른 무엇과 비유하여 그것의 성질을 잘 나타내는데요, 이번엔 태양입니다. 촛불과 태양의 유사성이 이것들을 잘 연결시켜 놓은 것입니다만 실은 이 두 가지는 매우 다른 성질을 가진 것들입니다.
 
그 이유는 태양은 낮에 존재하고, 촛불은 밤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관계는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물과 불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촛불과 태양이 같거나 비슷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두 사물 모두 빛을 가졌다는 것과 어둠을 밀어낸다는 공통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같거나 다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그리트의 논문에서 성질이 다른 각각의 사물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 신비감을 자아내는 것이 ‘데페이즈망’이라는 회화기법이라 배웠는데요, 위의 초와 태양도 이것을 어떤 측면에서 보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두 사물은 매우 멀게 묘사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학적 데페이즈망을 시도해보겠습니다.
 
‘도마’를 ‘자동차’화 하여 상상으로의 접근을 해볼 참인데요, 이 두 가지 사물은 매우 어울리지 않는 성질의 것들입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으므로 이 두 가지의 관념연결과 시적 비유로의 전개는 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러나 답은 ‘NO’입니다. 단지 모든 비유에서와 같이 도마를 자동차화 하기 위해선 도마에 자동차의 본질을 대입시켜야 하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럼 시도해볼까요?
 
먼저 도마를 자동차化 하기 위해서 자동차의 대표적인 특징인 바퀴를 도마 아래 달아서 시동을 걸어봅시다. 그 대상은 ‘노모’로 해봅시다.
 
 
/노모가 저녁을 해요, 정차된 도마에 시동을 걸어요/
 
 
어떤가요? 도마에 시동을 건다는 표현이 어색한가요? 아니죠? 이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며 시적 상상이라 불리는 전개죠.
 
여러분, 시인은 사물의 한쪽 면이 아닌 다른 이면을 보는 자라 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끝없이 반복하게 될 말이지만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십시오. 시의 표현에서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밑줄>
심지가 구부러지고, 심지가 까맣게 된다. 불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아편을 먹는다. 그리고 불꽃은 아무 말 없이 죽는다. 그것은 잠들면서 죽는다.
 
<해설>
촛불의 관찰에서 잘 보셨겠지만 불꽃은 까맣게 탄 심지를 둘러싸고 어둠 속에서 자신을 깎아 없애는 아편을 먹습니다. 초는 그렇게 고독한 아편중독자가 되어 사그라지고 깨어나고 합니다.
 
 
<밑줄>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며, 시간은 출렁거린다. 빛이 떨면 모든 것이 떤다.
 
<해설>
어두운 방 안에서 촛불은 켭니다. 그리고 그것을 살짝 붑니다. 흔들리는 것은 촛불이 아닌 집 전체에 드리워져 있던 육중한 어둠들입니다. 다시 말해 작은 입김으로 어둠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힘입니다.
 
 
 
[과제]
위의 해설을 참조하여 ‘TV’를 ‘나무’화해서 5행짜리 상상의 시를 쓰세요.
 
 
<밑줄>
눈물의 홈을 따라 눈물이, 숨겨진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해설>
초가 눈물을 흘렸다. 초는 촛불의 육체다. 그 육체가 녹아 눈물이 된 셈이다. 그러나 눈물은 멀리 가지 못한다. 초의 눈물은 제 몸을 흘러 다시 살이 되어 굳는다. 그래서 초는 눈물이 살이 되고, 살이 다시 눈물이 되는 윤회의 사물이다.
 
눈물은 짜다. 그것이 만들어낸 살점의 맛은 맹맹하다. 살점이 온전히 녹아야 한 톨의 소금을 얻는 것인가? 내가 흘렸던 그 많은 눈물도 내 몸의 일부였을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흘려온 눈물만큼의 살점들이 내 몸 어딘가에서 살점으로 붙어있을 텐데,
 
나는 가끔 그 눈물들이 내 살갗에 집을 짓고 동그랗게 부풀어 올라오는 일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눈물의 집, 그것을 사람들은 물집이라 줄여 읽기도 하였다. 얇은 살갗의 벽을 허물어 그 속의 맑은 눈물들을 흘려낼 때 왈칵 쏟아지는 대책 없는 눈물들, 모든 눈물들이 빠져 나온 빈 집처럼 허물어져버린 그 얇은 살점들,
 
빗방울도 눈물이다. 겨울에 내리는 빗방울이 처마 끝에서 굳어 물의 튼튼한 살점으로 변한다. 강도 그렇고, 호수도 그렇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눈물은 그 자체가 육체다. 살아 있음이다. 그래서 눈물 그 자체를 우리는 카타르시스라 부르기도 한다.
 
눈이 내린다. 저것은 구름의 육체다. 저 눈물도 땅에서 쌓여 거대한 구름을 이룬다. 비로소 땅이 하늘이 되는 순간이다.
 
 
 
[과제]
 
위의 해설을 참고 하셔서 7행짜리 시를 쓰세요.
제목은 자유입니다. 단,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쓰세요.
이해를 돕기 위해 눈물로 여러 가지 사유를 보여드린 것뿐이오니
눈물에 너무 많이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밑줄>
보통의 생활에서는 빛을 내기 위해 불을 붙이는 것이다.
 
<해설>
보통의 생활에서 우리는 빛을 내기 위해 전등을 켭니다. 보통 생활에서 전등은 단지 빛을 내기 위한 사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물은 스위치만 누르면 어둠을 빛으로 바꿉니다. 이것이 전등의 본질입니다.
 
저를 따라 해보세요.
밝은 방에서 눈을 감습니다. 방이 캄캄합니다. 다시 눈을 뜹니다. 밝은 방이 보입니다. 다시 눈을 감습니다. 방이 캄캄합니다. 눈을 감은 채로 전등을 끕니다. 다시 눈을 뜹니다. 눈 앞이 캄캄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모두 캄캄합니다. 그러나 이 체험은 언제까지나 보통의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체험입니다.
 
그렇다면 똑 같은 방의 똑 같은 환경에서 시적인 체험을 해보겠습니다.
밝은 방에서 눈을 감습니다. 어둠이 보입니다. 눈을 뜹니다. 방이 보입니다. 다시 눈을 감습니다. 어둠의 세계가 보입니다. 다시 눈을 뜹니다. 여전히 밝은 방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을 감아서 생기는 어둠의 세계는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거긴 벽도 없고 하늘도 없고 나무도 없고 물도 없고 오직 어두운 허공뿐입니다. 신비롭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 어둡고 넓고 신비로운 세상을 1분에 수십 번이나 다녀옵니다. 이것이 무의식이며 습관처럼 깜박이는 눈꺼풀이 여러분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번갈아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단지 앞에 있는 것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현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두 개의 세상을 공존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세계입니다.
 
다시 돌아갑니다.
저는 위에서 전등을 켜는 순간 어둠이 빛으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말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모순인지 느꼈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촛불이나 형광불빛은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켜지면 어둠은 제 몸에 조그마한 구멍 하나를 내어주는 것뿐입니다.
 
그리하여 촛불을 켜면 불꽃의 사방으로 검은 나방 떼가 몰려듭니다. 파르르 집단적인 날갯짓으로 촛불을 향해 돌진할 태세로 웅웅거립니다. 그 검은 나방 떼가 바로 어둠입니다. 형광불빛이나 가로등 불빛이나 세상의 모든 불빛으로 검은 나방 떼들이 몰려듭니다. 그 무시무시한 나방들도 어둠의 작은 살점에 불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불꽃은 그 검은 나방 떼의 습격을 받고 죽습니다.
 
검은 나방 떼, 그 검은 나방 떼가 어둠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와 빛을 쪼고 빛을 먹고 다시 어둠으로 가 붙습니다.
 
밤에 검은 나방 떼가 있다면 대낮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들도 어둠의 육체들입니다. 이 어둠의 육체들이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사물의 발목을 붙잡고 지상의 모든 발목을 붙잡다가 어스름이 내릴 즈음 어둠의 살점으로 붙어 한 몸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낮과 밤으로 어둠의 살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불꽃은 잠시 그림자와 검은 나방 떼를 우리의 등뒤로 물리는 일에만 열중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이 아닌 시적의 시안으로 빛을 보는 방법입니다.
 
 
[과제]
-. 어둠과 노숙자를 잘 엮어 10행짜리 시를 만들어보세요.
 
<밑줄>
‘불꽃과 동일한 선을 따라 그것은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촛불이 왁스나 양초나 무슨 기름 따위에서 그 양분을 빨아들여 타고 있는 것처럼 땅 속에서 그 양분을 섭취하는 것이다. 즙이나 수액을 빨아들이는 줄기는 촛불에 있어 그 불이 스스로에게 당겨진 액체로 하여 자신을 유지시키는 것과 같으며, 흰 불꽃 부분에 해당하는 것은 이파리들을 달고 있는 큰 가지와 가느다란 가지들 바로 그것들이다. 그리고 나무의 마지막 목표인 꽃과 열매는 모든 것이 거기에 환원되는 흰 불꽃 부분에 다름아닌 것이다.
 
<해설>
어떤 비유를 하기 위해서는 두 사물의 일치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위의 글은 불꽃과 나무의 일치점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촛불과 나무를 나란히 두고 상호 공통적인 부분들을 끄집어 내어 묘사했습니다.
 
시적 비유와 묘사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비유를 하면서 두 대상의 근접한 이미지를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 비유는 실패한 비유입니다.
 
시적 상상이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사물과 사물의 전범위적인 일치점을 찾는 것이 상상입니다.
 
늦가을, 플라타너스 낙엽이 떨어집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그 넓고 붉은 낙엽이 일제히 허공에 흩날립니다. 그 모양이 마치 새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낙엽과 새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럼 그 낙엽을 가리켜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들이 후두둑 날갯짓을 하고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오른다’는 비유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 행을 주면
 
낙엽
 
바람 분다
가지 위 새들이 일제히
후두둑 날갯짓 한다
허공으로 새 떼들
떠난다
 
이와 같은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시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건 어떤 사물을 다른 무엇으로 보고 그것의 연관성을 객관적으로 이을 수 있어야만 좋은 비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물이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연결만 해놓고 그것의 연관성은 고려도 않은 채 무작정 글을 쓴다면 그 시는 실패한 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여러분 모두에게 따끔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사물로 침잠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물의 정면이 아닌, 사물의 이면을 보아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과제를 통해 또박또박 잘 해내셨습니다. 그런 여러분께서 실제로 시를 쓰는 과제에선 대부분 그 말을 망각하시고 맙니다. 고정관념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정관념으로 사물을 보고, 그 관념으로 시를 쓰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자전거를 타는데 여러분 스스로가 어렵다고 생각하시고 분명히 혼자서도 잘 탈 수 있는 정도로 충분히 인지하고 계신데도 여러분은 아직 뒤에서 누가 자전거를 잡아주길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숙자를 봅시다.
노숙자라는 과제를 드렸더니 대부분 여러분은 학습된 ‘기억’에 의한 노숙자를 호출하여 사유합니다. 노숙자를 고정된 관념으로 보시고는 그들에게 연민을 가지거나 그들의 지저분한 행색을 쓰기 바쁘셨습니다. 심지어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그들의 죽음이라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의 가정사까지 넘겨짚기까지 합니다. 지하도와 광장과 대합실과 잠 등 노숙자 하면 떠오르는 관념들 모두가 일반적인, 즉 고정된 관념이란 것입니다.
 
노숙자에게 행복은 없습니까? 그들이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삶은 즐거워 보이지 않습니까? 내가 고단한 육신으로 어두침침한 지하도를 건널 때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잠을 청하는 그들이 오히려 행복해보이진 않습니까? 노숙자의 지저분한 얼굴이 그냥 더럽다가 아니라 어떤 부족의 성인식에서 얻은 무늬로 인식할 순 없습니까? 그들의 냄새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서 그저 ‘냄새 난다’ 가 아닌 그 냄새의 근원을 밝히는 데 집중하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슬프겠다. 힘들겠다. 아프겠다. 외롭겠다. 춥겠다. 씻고 싶겠다 등등 그들을 보면 떠오르는 이런 일반적인 사유들로 시를 쓰려 하시니 그 시가 진부하고 식상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들을 사람이 아닌 다른 사물로 볼 순 없습니까.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자루로 볼 순 없습니까? 굳이 사람 전체가 아닌 그 신체의 일부를 확장시켜 시를 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의 손톱도 있고, 머리카락도 있고, 발바닥도 있고, 찢어진 외투도 있고, 주름도 있고, 앞니 빠진 입도 있고, 발가락도 있고, 소주병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학습은 학습일 뿐이었고 직접 시를 쓰려하니 그 사유가 먹먹해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스스로 연상력을 키우는 연습을 게을리 하시면 절대 시적 상상력을 키울 수 없습니다.
 
길을 걷다가 발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다른 무엇으로 대입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연습을 한시도 쉬지 말고 하시길 바랍니다.
 
 
[과제]
-. 고정관념을 벗은 병아리
-. 고정관념을 벗은 할머니
-. 고정관념을 벗은 수감자
 
각각 고정관념을 벗은 시각으로 위의 사물을 써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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