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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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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릉과 가슴이 붉은 딱새 / 강순아 [한국] 댓글:  조회:1097  추천:0  2017-08-23
왕릉과 가슴이 붉은 딱새 강 순 아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눈부신 봄날, 가슴 붉은 어린 딱새 한 마리가 느티나무에 앉아 봄날을 노래한다.   '짹짹, 짹짹…… 지지윗지, 지지윗지, 지지윗…….'   '노란 봄볕 사이로 어린 딱새의 노래가 흩어지자 아지랑이도 덩달아 날아오른다. 아른아른 날아오르던 아지랑이는 해님이 한눈 파는 사이 산수유 가지에 꽂혔다. 산수유 그늘을 피해 쏘옥! 얼굴을 내민 노란 꽃다지. 무더기로 피어 웃고 있다. 갑자기 어린 딱새가 노래를 멈추고 입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언제부터 오고 있었을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리지어 궁월터를 지나 이 곳 능으로 오고 있었다. 산수유 노란 빛에 취해 오던 할머니 한 분이 어느 사이 꽃다지를 발견하고는,   '이것 봐. 이 꽃, 꽃다지 아냐?'   할머니 손잡고 따라오던 손녀가 동요를 흥얼거린다.   달래 냉이 꽃다지 나물 캐 보자.   종달이도 봄이라 노래하잔다…….   '그래, 맞아. 이게 꽃다지야, 꽃다지…….'   그 때야 무리지어 반짝이는 풀 이름이 생각난 듯 할머니들께서 환하게 웃으신다. 할머니 웃음 속으로 새소리가 떨어진다.   '짹짹, 짹짹…… 지지윗지, 지지윗지,지지윗…….'   '어? 이거 무슨 소리고? 새소리네. 아! 가슴이 붉은 딱새야.'   이번엔 할아버지들이 손뼉을 치며 나무위를 쳐다본다. 붉은 가슴털을 가진 작고 예쁜 새 한 마리.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호르르…… 날아간다. 건너편 나뭇가지 위로.   '세상에! 이 큰 능 위에 저 나무 좀 봐. 느티나무지? 오랜 세월 거기에서 저렇게 자랐구나.'   '오랜 세월? 그렇지. 이 능이 적어도 천 년은 넘었을 테니 오랜 세월이지.'   '얼마나 깊으면, 얼마나 넓으면 한 그루도 아닌 나무들이 이리 크게 자랐을까?'   경이롭게 능 주위를 바라보던 노인들이 능원을 빠져 나가자 그 곳은 텅 비었다. 햇빛이 이제 막 부풀어오른 잔디 위로 쏟아졌다. 가슴 붉은 어린 딱새가 다시 돌아와 느티나무에 앉는다. 하느님의 손길은 무섭게 빨랐다. 그리고 눈부셨다. 잔디가 파릇파릇 돋는가 싶더니 멀리 능 마을의 이팝나무가 꽃들을 피워댔다. 그것은 마치 흰구름 같았다. 그 사이 햇빛은 스스로 열에 들떠 안압지의 연못 물을 뜨겁게 달구었다. 가슴이 붉은 어린 딱새는 오늘도 느티나무에 앉아 무엇인가 찾고 있다. 생각에 잠겨 있다.   '딱새야, 딱새야.'   '네? 할아버지.'   '뭘 찾고 있느냐? 찾는 게 보이느냐?'   '아뇨. 보이지 않아요.'   '무얼 찾는데? 먹이도 찾지 않고 그리 오래 앉아 있느냐?'   '연못 물요. 연못 물이 매일 조금씩  조금씩 어디로 숨어 버려요. 어디로 숨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허허…… 연못 물이 어디로 숨는다? 어디로 숨는지 그걸 모르겠다, 궁금하다, 그 말이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딱새는 보이는 모든 게 다 신기했다. 능 마을의 이팝나무. 꽃처럼 피어오르는 흰구름. 하룻밤 새 분홍빛 세상이 되어 버린 벚꽃길. 꽃을 피우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딘 보람도 없이 며칠 새 팔랑팔랑 나비처럼 날으는 분홍 꽃잎들. 그리고 연못 속의 물들은 어디로 숨어 버렸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딱새를 다시 할아버지께서 부르신다.   '딱새야, 그래. 아직도 그게 궁금한 게냐? 그건 말이다. 숨은 게 아니고 하늘로 올라간 게다.'   '네? 하늘로요?'   '그래. 곧 그것들은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연못 속에도 나뭇잎에도 나무 뿌리로도, 그리고 땅 속에도 깊이 스며들지.'   '땅속 깊이요? 그럼 할아버지도 비에 젖어……?'   '나? 나는 흙이 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흙이 되어 이렇게 나무를 키우고 꽃과 열매를 맺게 하고 있지. 이건 내 힘만으론 되는 게 아니란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촉촉하게 나무들의 뿌리를 적셔줄 수 없지. 너 조금 전에 이런 생각하고 있었지? 꽃은 왜 질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나만큼 오래 살다보면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게야. 이제 정리를 해 주지. 모든 꽃과 식물들은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양분이 있어야 하지.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꽃들, 동물들의 죽은 몸은 다 거름이 되어 다시 탄생하는 것들을 키운단다. 나도 죽어서 몸은 오래 전에 흙이 되었고, 이제 영혼만 너하고 이야기하는 거야.'   '아, 그런가요? 물·구름·비·싹·꽃…… 진다. 양분, 다시 틔운다……. 그런데 할아버지…… 정리가 잘 안 돼요.'   '정리할 게 뭐 있노? 돌고 도는 거지. 물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고, 나무가 되고, 다시 물이 되고…… 내가 너고 네가 나고…… 서로 돕고 도우며 산다는 것.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되는 게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돌고 도는 것. 비도, 구름도, 나무도, 새도, 사람도. 하나 되어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서로 도와 함께 사는 것. 내가 너고 네가 나고…… 지지윗지, 지지윗지, 지지윗지지윗, 짹 짹 짹…….'   혼자 중얼대던 가슴 붉은 어린 딱새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능원에 선생님과 함께 소풍 나온 학생들이 가까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신라의 능들은 대부분 어느 왕의 능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요? 왜 그랬을까요? 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까요?'   '그건 수수께끼란다. 신라의 수수께끼지. 천마총 무덤 안에도 그 당시의 부장품들은 들어 있지만 어느 왕이란 이름도 흔적은 없었다 한다.'   어린 딱새는 궁금한 게 또 하나 생각났다.   '할아버지도 옛날 신라의 왕이셨죠? 그런데 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어요?'   '내가 왕이었을 때 말이다. 많은 신라의 백성들이 내 앞에서 벌벌 떨었지. 왕은 백성들에겐 너무나 위대한 사람이었단다. 그런데 왕이라 해서 천 년 만 년 살지도 못하면서 그게 무슨 소용이고? 이렇게 한 줌 흙이 되어 나무의 거름밖에 되지 못하거늘……. 흔적을 남긴들 무엇하겠느냐? 그래서…….'   '찍짹, 찍짹…… 지지윗지, 지지윗, 지지윗…….'   가슴 붉은 어린 딱새는 알 듯 말 듯 꽁지를 아래 위로 흔들기만 했다. 아른아른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찍 짹, 짹 찍…… 지지윗지, 지지윗지, 지지윗 지지윗…….'   가슴이 붉은 어린 딱새,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눈부신 봄날을 갸웃거리며 꽁지를 흔들고 있다. 아직도 알 듯 말 듯 아래위로 꽁지만 흔들고 있었다. 산수유꽃 사이를 지나온 연두빛 바람이 아지랑이 속을 맴돌며 능원에 노란 향기를 하늘 가득히 뿌리고 있었다. (2005년 5월『월간문학』)      강순아가 ''왕릉과 가슴이 붉은 딱새'에서 시도한 자연과 인간의 일체화는 동심의 한 특성인 물활론적 사고 영역에서 가능하다. 무생물인 왕릉과 자연물인 새의 대화를 알아듣는 이는 어린이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이는 동화 문학의 독자인 어린이와 동심을 소유한 어른을 통칭한다. 작가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자연을 인간과 조화시킨다.  어린이들의 공간 구성력을 감안했으면 한다.   작가는 역사적 소재인 왕릉을 작품 공간으로 옮겨와 환상의 기법을 보인다. 산수유 노란빛에 취한 궁궐터와 왕릉에서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 장면과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천 년이 넘은 왕릉을 보고 감탄하는 딱새로 오버랩되는 환상적인 장면이 사실성을 더한다.   작가의 의도가 과다하게 노출되지 않고 환상적 요소를 가미하여 동화의 본질에 닿아 있다. 자연 회귀가 인간성 회복을 위한 궁극적 해결책임을 담아 낸다. (최 용)  
2    할머니와 손수레 ㅡ 강민숙 [한국 ] 댓글:  조회:1167  추천:0  2017-08-23
할머니와 손수레 강 민 숙     골목 어귀 가로등 아래에 손수레가 한 대 서 있습니다. 전봇대에 비스듬히 기대 세워져 있는 이 손수레는 민희네 아랫방에 세들어 사는 할머니 것입니다.   지난 봄에 이 방으로 이사온 할머니는 동네 골목골목을 돌며 헌 신문지나 고물을 주워 모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이 곳 세검정에서 벌써 10년째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들 같으면 며느리가 해다 주는 밥상을 받고 앉았을 칠순이 넘은 나이인데도 할머니는 하루도 안 빠지고 일을 나갑니다.   화계쇼핑 앞에서 빈 상자를 차곡차곡 접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수군거립니다.   "저 할머니도 자식이 없나 봐."   "그러게 말이야,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일만 하다니……."   할머니는 하루 종일 주워 모은 빈 상자들을 나일론 끈으로 단단히 묶었습니다.   해질 무렵이면 할머니는 이것들을 신영상가 뒤에 있는 고물상에 갖다 줍니다.   저녁노을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자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쭉 펴 봅니다. 하루 종일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한 탓인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픕니다. 그렇지만 마냥 그러고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할머니는 손수레를 가지러 골목으로 갔습니다. 할머니가 세들어 사는 골목은 리어카도 못 들어올 정도로 길이 좁습니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도 겨우 다니는 길이지만 할머니는 그 골목이 좋았습니다. 피곤할 땐 눈을 감고도 걸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골목을 걸어 들어가자 전봇대에 얌전히 기대 서 있던 손수레가 활개를 치며 할머니를 맞아 줍니다.   손수레를 보자 할머니는 기운이 솟았습니다.   "아이구, 네가 효자다!"   할머니는 손수레가 그렇게 고맙고 기특할 수가 없습니다. 이 손수레를 구하기 전에는 주워 모은 폐품들을 머리에다 이고 고물상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고물상에서 이 손수레를 구한 뒤부터는 할머니의 일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이 손수레를 자식처럼 아꼈습니다. 매일같이 닦아 주고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는 저녁에는 가로등 아래에 기대 세워 놓고 행여 누가 끌고 갈까 봐 쇠줄로 매어 자물쇠까지 채워 놓곤 합니다.   "가자, 오늘도 많이 주워 놓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손수레에 걸려 있는 자물쇠를 열면서 할머니가 손수레에게 말했습니다. 손수레도 애타게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앞장서 달려갔습니다. 손수레는 리어카보다 몸집이 훨씬 작지만 짐은 꽤 많이 실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돌며 하루 종일 주워서 묶어 놓은 폐품들을 손수레에다 차곡차곡 실었습니다.   화계쇼핑 앞에 있는 빈 상자들을 싣고 나자 더 이상 짐을 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낑낑대며 손수레를 끌고 신호등 앞으로 갔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할머니와 손수레를 훔쳐보았습니다.   신호가 바뀌자 할머니는 비트적거리며 손수레를 밀고 횡단 보도를 건넜습니다.   효동빌라 앞에도 할머니가 묶어 놓은 폐품 두 뭉치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실을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는 행여 누가 그것들을 갖고 갈까 봐 손수레를 길 한쪽에 세워 놓고 폐품 뭉치들을 동해횟집 간판 뒤에다 숨겨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손수레를 밀고 육교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제 육교 아래만 지나면 바로 신영상가입니다. 그러나 육교가 문제입니다. 전에는 이 신영삼거리에 육교 대신 횡단 보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신호에 따라 건너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영삼거리에 육교가 설치되었습니다. 육교가 생기자 동네 사람들은 좋아했지만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손수레를 끌고 이 곳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교 아래까지 내려간 할머니는 주위를 한번 살펴본 뒤 아슬아슬하게 찻길로 들어섰습니다.   퇴근길의 삼거리는 몹시 붐볐습니다. 차들이 밀려 있는 틈을 타서 할머니가 손수레를 밀고 삼거리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차들이 빵빵거렸습니다. 구기터널 쪽에서 오던 차들이 좌회전 신호를 받고 북악터널 방향으로 돌자 할머니는 얼른 그 틈을 이용해서 길을 건넜습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쉰 사람은 할머니뿐만이 아닙니다. 길 가다 멈춰 서서 바라보던 사람과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다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모험 속에서 살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어차피 다 이런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고물상까지 손수레를 밀고 가자 온몸에 힘이 쏘옥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운동 삼아 조금씩만 해 오세요."   고물상 주인 김씨 아저씨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이렇게 말했습니다.   "놀면 뭐 하우? 일하는 데까진 해야지."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폐품들을 내려 준 김씨 아저시는 만 원짜리 한 장을 할머니 손에 쥐어 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수고하셨어요. 조심해 가세요."   신영상가 앞으로 나온 할머니는 차들이 밀려있는 틈을 이용해서 빈 손수레를 끌고는 얼른 길을 건넜습니다.   골목 어귀로 들어서자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푹 쉬어라."   할머니는 가로등 아래 전봇대 기둥에다 손수레를 묶어 놓고는 걸레로 먼지를 닦아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할머니는 골목 쪽으로 나 있는 문을 열었습니다. 할머니가 거처하는 작은 방 한 칸이 나왔습니다. 문을 열어 놓고 있으면 방안에서도 손수레가 마주 보입니다.   손발과 얼굴을 씻고 난 할머니는 저녁을 대강 챙겨 먹고 일찍암치 자리에 누웠습니다.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 줄 알았는데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해집니다. 시집간 딸과 두 아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떠올랐습니다.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할머니는 또 콧등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아려 옵니다. 자식들 생각을 하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되어 자식들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안 해 본 장사가 없습니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건만 장가가더니 한 달 내 가야 혼자 있는 어미에게 안부 전화 한 통 하는 놈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둘이나 있어도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이고 살 데가 없습니다. 큰아들네는 아들 며느리가 하루가 멀다고 티격태격 싸워대서 마음이 편칠 않고, 둘째는 둘째대로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대니 괜히 아들에게 짐만 되는 것 같아 같이 살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폐품을 주우며 혼자 살아갑니다. 몸이 고달파서 그렇지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들 생각이 한시도 떠나지 않습니다.   '자식도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지, 장가보내고 나면 다 남이야. 암, 그렇구말구…….'   할머니는 이렇게 마음을 달래봅니다. 그 때였습니다. 한 떼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할머니 방문 앞을 지나갑니다.   "넌 엄마 선물 뭐 샀니?"   "스카프. 넌?"   "난 예쁜 손수건 샀어."   내일이 어버이날이라고 아이들이 선물을 사 들고 재잘거리며 골목을 지나갑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머릿속에 갑자기 작은아들이 떠올랐습니다.   며칠 전 작은아들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버이날 저희 형과 함께 찾아오겠다는 전화였습니다.   '그래도 못난 에미를 잊지 않고 찾아오겠다니……. 에이구, 부모자식 사이라는 게 다 뭔지…….'   초저녁이 되자 소쩍새가 옆집 고목나무에서 구슬프게 울어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내일 아들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다시 골목으로 나 있는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가로등이 환히 켜져 있는 골목에는 카네이션을 사 들고 달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할머니는 하얀 고무신을 찾아 신고 골목으로 내려섰습니다. 전봇대에 기대고 서 있던 손수레가 할머니를 보자 반갑게 맞아 줍니다.   할머니는 손수레를 가만히 쓰다듬어 봅니다.   지난 삼 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를 도와주던 손수레였습니다. 손수레는 마치 '할머니, 뭘 도와 드릴까요?' 하고 묻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네가 자식보다 낫구나.'   할머니는 손수레를 가만히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손수레를 보자 할머니는 갑자기 아까 줍다 만 빈 상자 생각이 났습니다.   '잠도 안 오고 한데, 아까 하다 만 일이나 계속해야지…….'   할머니는 미닫이문도 활짝 열어 놓은 채 손수레를 끌고는 바삐 골목을 빠져 나갔습니다.   손수레를 끌고 문방구 앞을 지나다가 안집 민희 엄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 어두운데 어딜 가세요?"   "잠이 안 와서 아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하려구……."   "할머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병나면 어쩌시려구요?"   "먼저 들어가. 내 금방 돌아올게."   민희 엄마와 헤어진 할머니는 화계쇼핑 앞으로 갔습니다.   빈 라면 상자와 과일 상자들이 길가에 널려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납작하게 펴서는 묶었습니다.   아무래도 내일은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올해는 손주 녀석도 데려올지 모르니까 함께 놀아야지요. 놀이 공원에라도 갈 작정입니다. 작년에는 그러지 못했었지만 올해는 꼭 그럴 생각입니다.   손수레에 빈 상자를 반쯤 실은 할머니는 아까 길 건너 동해횟집 간판 뒤에 숨겨 놓은 폐품들을 가지러 길을 건너려 했습니다.   길을 건너려면 소방서 앞 횡단 보도까지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일을 한 탓인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거기까지 걸어 올라가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화계쇼핑 앞에서 바로 길을 건너려 했습니다.   길은 차들로 만원이었습니다. 차 소리가 귀에 따갑고 차들이 늘어선 길은 온통 빨간 샐비어 꽃밭 같았습니다.   시내 쪽으로 나가는 차들이 밀려 있는 틈을 타서 할머니는 찻길로 내려 섰습니다. 그리고는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비집고 들어가 길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차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끼이익―!'   그 날 밤, 소쩍새들은 더욱 애끓는 소리로 밤새 울었습니다.      할머니와 손수레   갖은 고생을 다하며 키웠건만 결혼해 나간 뒤에는 늙은 부모를 돌보지 않는 아들딸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우리의 그런 현실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고 그린 작품입니다.   자식의 부양 대신 손수레에 의지하여 살아가던 할머니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자라나는 세대의 할 일입니다.      강민숙   1948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습니다.   1983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노천명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슬픈 눈의 코카》 《풀과 나무의 집 아이들》 등이 있습니다.    
1    강소천 동화 묶음 [한국] 댓글:  조회:1540  추천:0  2017-06-07
꽃신 강 소 천   1.   아기 아버지께!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당신을 이렇게 불러 봅니다. 당신이 아기 아버지가 된 것같이 나도 이젠 아기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난이 엄마는 난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난이 아버지는 지금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입니다. 난이 엄마가 난이 아버지와 결혼한 것은 재작년 겨울―일년이 지난 요즘 첫아기를 낳았습니다.   난이를 낳기 한 달 전, 난이 아버지는 휴가를 얻어 잠깐 다녀갔었습니다. 그 때 난이 엄마에게, 아들을 낳으면 준이라고 하고, 딸을 낳으면 이름을 난이라 지으라고 했습니다. 난이 엄마는 아기의 난 날과 시간과 그리고 아기의 모습을 낱낱이 아기 아버지께 보고하는 긴 편지를 썼습니다. 백일이 되면 사진도 찍어 보낸다고 썼습니다.   난이 아버지한테서 답장이 오기도 전, 난이 엄마는 한 주일이 되기도 전에 또 편지를 썼습니다.   갓 나서는 젖만 빨면 밤낮 없이 쌔근쌔근 잠만 자던 것이, 차차 두 눈을 또록거린다는 둥,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제법 귀가 틔어 깜짝깜짝 놀란다는 둥, 아기의 재주가 한 가지 늘 적마다 엄마는 아빠한테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아기가 엄마를 쳐다보고 빵긋빵긋 웃기 시작한 날, 엄마는 또 부랴부랴 편지지와 봉투를 찾았습니다.   백일이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엄마는 사진사를 불러 백일 사진을 찍었습니다.   일선이 분주해서인지, '군사우편'이 잘 연락되지 않아서인지, 난이 아빠의 답장이 좀처럼 빠르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빵긋빵긋 웃는다는 편지를 받았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그러고는 아기의 돌이 거의 되어도 아빠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지난 해 같으면 휴가를 얻어 거의 돌아올 무렵이 되었으나, 역시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아기가 따로 서는 재주를 배운 날, 편지지와 봉투를 찾아 들었으나, 어쩐 일인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밤낮 편지만으로 말고, 아기 아빠에게 난이의 재롱을 그냥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못 견디게 따스한 봄날―바로 난이 엄마가 처음으로 어머니가 되던 날이 바로 내일 모레―그러니까 난이 돌이 내일 모레입니다.   단 세 식구―일선에 가 계신 아버지를 빼면 단 두 식구―엄마와 난이뿐. 이웃에 일가도 친척도 없는 난이 엄마는, 아기의 첫돌이 내일 모레라고 생각하니 그만 마구 울고만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난이의 첫돌 바로 전날 우체부가 일선에 계신 아빠를 대신하여 찾아왔습니다.   한 장의 편지와 조그만 소포 꾸러미 한 개를 두고 갔습니다.   엄마는 얼른 편지 봉투를 떼어 읽었습니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지금은, 아직 난이의 돌이 멀었지만 이 편지를 받을 때면 난이의 첫돌 날이 거의 될 거라고, 그래서 일선 가까운 곳에 공무로 잠깐 나왔던 길에 아기 신발을 한 켤레 사 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빠가 보던 중 제일 작은 것으로 샀다는 것과, 이 꽃신을 사기 위하여 그 거리의 상점을 샅샅이 뒤졌는 이야기가 씌어 있었습니다.   난이가 인제 걸음마를 타서 걷기 시작할 때까지엔 한 번 휴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아빠의 편지는 퍽도 길었습니다. 아빠가 곁에 안 계시는 것이 한없이 쓸쓸하기도 하였지만, 오래간만에 아빠의 소식을 들은 엄마는 무척 반갑기도 하였습니다. 이만하면 난이의 첫돌 기념도 아주 뜻 없이 지내 버리지는 않는 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엄마는 학교 시절의 몇몇 친구들을 초대하여 돌상을 난이에게 차려 주었습니다.   누구나 하는 버릇대로 돌상에는 책과 연필과 돈과 과자와 그 밖의 밥과 반찬을 늘어놓고 난이에게 집게 하였습니다.   난이는 제일 먼저 책을 쥐었습니다. 모여온 어머니들은, 난이는 커서 공부를 잘할 거라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난이 엄마도 숟가락을 들어 걸신스럽게 제일 먼저 밥만 퍼먹는 아이들이 많던 것을 생각하면 난이가 무척 귀여워 보였습니다.   또 하나 일선 아빠에게 보고할 자랑이 늘었습니다.   2.   아빠가 보내 준 난이의 꽃신은 퍽 컸습니다. 꽃신이 큰 게 아니라, 난이의 발이 작지요. 난이가 정말 신발이 필요하도록 잘 걷게 될 무렵이 되면 난이의 발도 훨씬 더 커질 거예요. 그 때면 오히려 신발이 작아서 걱정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돌이 지난 난이는 제법 아장아장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보내 준 꽃신을 난이에게 신겨 줍니다. 신발이 커서 걸음발을 옮겨 놓을 때마다 신발이 벗겨졌습니다.   엄마는 신 앞에 헝겊을 틀어막아 주었습니다. 그래도 신발은 잘 벗겨졌습니다. 이번엔 들메끈(신발이 벗어지지 않게 매는 끈)을 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난이는 그게 갑갑한지 곧잘 그 끈을 풀어 버렸습니다.   난이에게는 그 꽃신이 신는 것보다 가지고 노는 편이 훨씬 더 재미가 있었습니다.   늦은 봄이 되어, 앞뜰 길섶에는 커다란 금단추 같은 민들레가 막 피었습니다. 엄마는 민들레꽃을 사랑해서인지 아기에게 민들레꽃 빛 노란 저고리를 해 입혔습니다. 그리고는 늘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길가에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첫돌맞이 우리 아기도 노랑 저고리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 보아라.     아가야 방실방실 웃어 보아라.     길가에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첫돌맞이 우리 아기도 노랑 저고리,     아가야 아장아장 걸어 보아라,     민들레야 아장아장 걸어 보아라.   첫여름이 되면서부터 난이는 민들레를 닮아 그 노랑 저고리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난이를 발가벗겨 밖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햇볕이 오히려 옷보다 더 따가웠습니다. 눈같이 희던 난이의 몸뚱이가 볕에 그을었습니다. 엄마는 그게 난이의 건강에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삼복 더위가 심해짐에 따라 난이의 장난도 한층 더 심해졌습니다.   난이는 엄마 없이도 제법 밖에서 혼자 놉니다. 하루 종일 가야 트럭 하나 다니지 않는 고요한 마을이니까 아무 걱정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집 앞이 빈터 잔디밭이니까 난이의 놀이터로는 훌륭했습니다.   난이에게는 새로 정다운 친구가 하나 생겼습니다. 난이 외가에서 데려온 바둑이입니다.   난이는 바둑이가 좋았습니다. 바둑이도 난이가 좋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바둑이는 난이보다도 더 장난이 심했습니다. 서로 무척 정답게 놀다가도 바둑이는 곧잘 난이를 울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난이의 꽃신을 빼앗아 가지고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둑이는 민민하게 생긴 제 발에 몇 번이고 발을 들여밀어봤자, 어디 걸려 있지 않는 신발을 발에 신을 수는 없으니까, 심술이 났는지도 모릅니다. 걸핏하면 난이의 꽃신을 입에 물고는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난이는 '으아아'하고 급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난이의 꽃신은 곧잘 난이의 꽃바구니도 되고 물동이도 되었습니다.   잔디밭에 핀 제비꽃 같은 것을 따 담아 가지고는 머리에 이고 다니기를 즐기었습니다. 때로는 모래를 가득 담아 가지고 방안까지 들어오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빠가 사다 준 꽃신을 아껴 신어야지 이렇게 더럽혀서는 못 쓴다고 꾸중을 하시었습니다.   앞밭의 홍옥(사과)이 제법 빨갛게 익을 무렵, 그러니까 그게 초가을 아니겠어요.   엄마가 마당에 빨래를 널고 저녁을 짓고 나니, 늦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난이는 꽃신 한 짝만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한 짝은 어쨌느냐고 아무리 물어봐야 아직 말을 못하는 난이가 그런 걸 알 리가 있겠습니까? 말할 줄 아는 서너 살 먹은 아이라도 자기 장난에 팔리다보면 언제 어디서 잃었는지 모를 텐데. 아직 두 돌도 안 지난 난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습니다.   엄마는 얼른 밖에 나가 난이가 놀던 뜰과 풀밭을 찾아보았으나 난이의 꽃신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밤새 잠이 오지 않으리만큼 서운했습니다.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이 서운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엄마는 다시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난이의 꽃신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조반(아침밥)을 끝내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오래간만에 난이 아빠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서 휴가를 얻어, 아빠가 사 보낸 준 꽃신을 신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난이가 보고 싶다는 편지였습니다.   편지를 읽고 나니, 엄마는 한층 더 서운해졌습니다. 아빠가 돌아오면 무어라 말할까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엄마는 곁에 앉아 있는 난이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엄마는 아직 한 번도 그런 눈초리로 아가를 바라본 적이 없었습니다. 바라본다기보다 매섭게 쏘아보았습니다. 처음엔 난이도 그건 엄마가 자기가 귀여워서 그러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엄마는 한 짝만 남은 신발을 손에 쥐기가 바쁘게 난이의 엉덩짝을 후려갈겼습니다.   이게 난이가 처음 어머니에게 맞은 매였습니다. 난이는 그만 서러워서 까무러치다시피 울기를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악을 쓰는 난이가 이날 따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엄마는 다시 한 번 난이의 궁둥이를 꽃신으로 때렸습니다. 난이는 좀더 크게 울었습니다.   볼기짝 두 대 -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난이는 흑흑 느껴 울며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울음이 더 늦게 멎은 것은 난이가 아니라 사실은 난이 엄마였습니다.   엄마는 난이를 등에 업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 난이를 재웠습니다.   칭얼칭얼하다가 난이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잠결에도 때때로 흑흑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밤부터 난이는 깊은 잠을 들지 못하고 깜짝깜짝 놀라 소스라쳐 깨어서는 기절이라도 할 듯이 '으앙으앙' 울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난이의 머리는 더웠습니다. 몸도 더웠습니다. 그렇게 잘 놀던 난이는 그만 핼쓱해졌고, 일어나 앉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엄마는 난이를 업고 병원에 가서 주사도 맞히고 약도 먹였으나 난이의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벌써 난이에게 중대한 사건이 연달아 생겼습니다. 그러나 난이 엄마는 아빠에게 편지를 쓰지 못합니다. 여지껏 보낸 편지는 모두 반가운 자랑뿐이었으나, 이런 걱정스럽고 서글픈 소식을 일선에까지 차마 보내기는 싫었습니다.   3.   난이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한 짝의 꽃신을 잃었기 때문에 생긴 일로 세상을 떠난 난이에겐 벌써 그 한짝마저가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엄마는 울며 울며 한 짝만인 신발을 난이의 품에 넣어 무덤에 보냈습니다.   4.   엄마는 어젯밤에도 또 난이를 꿈에 만났습니다. 꿈나라에 간 난이는 생전과 똑같이 언제나 꽃신 한 짝을 신고 있었습니다. 이런 꿈을 꾸고 난 아침마다, 난이 엄마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서러웠습니다.   찬 서리가 몇 번이고 내려, 뜰에 풀들이 다 말라 버린 어느 날 아침, 밖에서 혼자 돌아다니던 바둑이가 무얼 물고 부엌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난이 엄마는 기절이라도 할 듯 얼른 바둑이의 입에서 그것을 빼앗았습니다.   그것은 꿈나라에 가버린 난이의 꽃신이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난이가 살아 있어서야겠지요.   엄마는 꽃신 한 짝을 뺨에 대고, 네가 어디 갔다 인제 왔느냐고 흑흑 느껴 울었습니다.   설움은 눈물이 되어 흘러나와도 샘물 같아서 그칠 줄 몰랐습니다.   엄마는 눈물 젖은 눈으로 꽃신을 가지고 난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5.   그 날 밤 꿈에, 난이는 반가운 듯이 엄마 앞에 나타났습니다.   두 발에 꽃신을 신고 민들레 핀 길섶을 아장아장 걷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옛날의 노래를 되풀이해 불러 주었습니다.     아가야 아장아장 걸어 보아라,     민들레야 아장아장 걸어 보아라.   이튿날 아침   엄마는 큰 맘 먹고 난이 아버지에게 이런 뜻의 편지를 썼습니다.   난이는 우리 집에 왔다 두 돌도 못 되어 돌아갔습니다.   이 엄마가, 너무 푸대접한 까닭이에요.   아니, 아기가 집에 찾아와도 한 번도 와 주지 않는 아빠가 더 나빴는지도 몰라요.   아기가 영영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꿈나라에서 살 것을 생각하면 서글퍼져요. 그보다 당신이 때때로 꿈나라에 찾아가도 난이를 못 찾을 것을 생각하면 한층 더 서글퍼져요.   모처럼 사 보낸 꽃신이―아니, 꽃신 때문이 아니었어요. 이 엄마 때문이었어요.   처음 당신이 꽃신을 사 보냈을 때, 그 꽃신은 퍽 컸어요. 그러나 난이가 꽃신을 신고 다니기 시작한 때에는 거의 맞았어요.   엄마는 그 꽃신이 작아질까봐 걱정까지 했었어요. 그러나 그 꽃신은 영영 작아지지 않을 거예요.   엄마는 그 꽃신이 해질까 봐도 걱정을 했어요. 그러나 인제는 그런 걱정은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난이에겐 그 꽃신 한 켤레 이상 더 필요하지는 않아요.   꿈나라에선 영원히 신고 다닐 수 있는 꽃신이어요.   그러나 여보!   당신이나 나나 이젠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에요.   우리가 난이 아빠와 난이 엄마의 자격을 가지는 것은 오직 꿈나라에 갔을 적만이에요.   '난이 아버지―'   난이를 안고 섰던 당신 뒤에 서서 이렇게 한 번 불러 보지 못한 채 난이를 보낸 것은 못 견디게 슬픈 일이에요.   편지를 다 써서 봉투에 넣고 봉한 뒤 힘없이 붓을 놓은 엄마는 남편의 사진 앞에 서서   "난이 아빠!"   이렇게 가만히 불러 보았습니다.   아마 이게 정말, 난이 엄마가 자기 남편을 아빠라는 이름을 붙여서 불러 보는 마지막일는지도 모릅니다.      '꽃신'은 6·25전쟁이 배경이 되는 동화입니다. 6·25전쟁은 온 국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슬프고 가슴 아픈 사연을 남겼습니다.   전쟁터로 나간 아버지에게, 새로 태어난 아기에 대한 소식을 적어서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어느 날, 아기가 그 꽃신 한 짝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말도 아직 할 줄 모르는 아기의 엉덩이를 나머지 한 짝의 꽃신으로 때렸습니다. 아기는 까무러치고 열병을 앓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열병으로 아기가 일어나지 못하고 기어코 저 세상으로 가버립니다.   그 아기도 본 적이 없는 전쟁터의 아빠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요?(최지훈)       꾸러기와 몽당연필 강 소 천   내 동생 이름은 영식이입니다. 그러나 우리 언니와 나는 내 동생 이름을 영식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이름 대신에 별명을 부릅니다.   여러분은 내 동생의 별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요? 아주 재미있는 별명이에요. 내 동생의 별명은 '꾸러기'랍니다.   '꾸러기'라는 게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장난꾸러기, 잠꾸러기, 말썽꾸러기, 욕심꾸러기, 하는 꾸러기 말입니다. 참말 내 동생은 무척 장난꾸러기고, 또 지독한 잠꾸러기랍니다. 내 말이 거짓말인가 아닌가 조오기 조기, 우리 어머니가 와 앉아 계실 테니 물어봐 주세요. 아마 낮에 장난을 너무 하니까 고단해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벌써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인데도 아침마다 어머니께서,   "얘 영식아! 이제 그만 자구 어서 일어나, 세수하구 옷 갈아입구 학교에 가야 하지 않니? 학교 시간 늦을라." 하셔도 꾸러기는 쿠울쿨 잠만 잔답니다.   우리들이 조반(아침밥)을 다 먹고 학교를 갈 준비를 할 때에야, 꾸러기는 부스스 일어나서 걸신들린 사람처럼 밥을 푹푹 퍼먹고는,   "나 책가방 줘! 하고는 학교로 내빼는 것입니다.   "영식아! 아무리 바빠도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는 하고 가야 하지 않니?" 하고 어머니가 웃으시면   "어머니, 학교에…… " 하고 말을 채 끝마치지도 않고 대문 밖으로 내빼는 꾸러기입니다.   그러나 대문을 나서 한 골목을 돌면 그저 그만, 아무 바쁜 일이 없는 것 같은 꾸러기입니다.   길가 집 울타리에 개나리가 봄볕에 활짝 폈습니다.   꾸러기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정신 없이 개나리 울타리를 바라봅니다.   "저 꽃 한 가지만 줬으면……. "   그렇지만 하는 수가 없어서 또 걸어가지요. 빈터가 있는 길가 풀밭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 못하는 꾸러기입니다.   "앉은뱅이꽃이 아직도 안 폈나?"   무얼 잃어버린 사람처럼 두리번두리번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까 지각이라는 것은 예사예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한 반 친무들이 '대장'이라고 부른다나요. 얼른 들으면 훌륭한 이름 같지요? 그렇지만 대장 위에 '지각'이란 말이 붙는답니다. 그러니까 '지각 대장'이 아니겠어요? 어떤 애들은 '빵꾸차'라고까지 부른다나요. 그건 좀 안 됐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 '꾸러기', '지각대장', '빵꾸차'라는 별명 부자 내 동생 영식은, 학교 가는 길가 풀밭에서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를 따 들었습니다.   "길가에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첫 돌맞이 울 아기도 노랑 저고리"   내가 국어책 읽는 흉내를 내며, 너무 좋아서 깡충깡충 앙감질(한 발을 들고 한 발로만 뛰어가는 짓)을 하며 학교로 갔다는 것입니다.   영식이가 토끼처럼 깡충깡충 뛸 때마다, 영식이 책가방에서는 짤랑짤랑 소리가 났을 게 아니에요?   영식이는 신이 나서 한층 더 깡충깡충 뛰었을 거예요.   그 바람에 필통 속에 들었던 조그만 몽당연필이, 필통 구멍을 쏘옥 빠져 나와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풀밭에 살짝 숨어 버렸대요.   영식이가 그런 걸 알 까닭이 있겠어요? 필통에는 지우개와 칼과 크레용 부스러기가 남아 있으니까, 그대로 짤랑짤랑 소리는 날 테니까요.   필통에서 빠져 나온 몽당연필은 너무 시원해서,   "아이 시원해! 이젠 갑갑하지도 않구, 그 장난꾸러기 손에서 빠져 나왔으니 속이 시원하다. 글쎄 내 키가 요게 뭐람?   꼭 난쟁이야. 딴 친구들은 아직 다 키가 큼직들 할 텐데……. 이틀 동안에 이 모양이 됐으니……. 그놈의 꾸러기라는 자식, 어머니가 공부하라면 공부는 하지 않고, 그저 칼을 가지고 나만 못살게 굴지 않아! 글쎄, 아무 죄도 없는 필통은 왜 입으로 물어뜯느냐 말이야. 그 덕분에 내가 빠져 나올 수는 있었지만…… "   몽당연필이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매애해해…… 매애해해…… " 하는 염소 소리가 들려 왔대요. 몽당연필은 그만 소름이 좌악 끼쳤을 게 아니에요? 고개를 가만히 쳐들고 있으려니까, 염소 한 마리가 점점 자기 있는 데로 다가오고 있었대요.   "아유! 이걸 어쩌나? 염소는 종이를 잘 먹는다는데, 나두 통째로 삼켜 버리지나 않을까?"   울상이 된 몽당연필은 몸을 웅크리고 풀잎 아래 꼭 숨어 버렸대요. 다행히 염소가 딴 데로 지나가 버리니까 그제야 몽땅연필은,   "휴우…… " 하고 길게 숨을 내뿜었을 테지요.   몽당연필을 갑자기 영식이가 그리워졌답니다.   '필통엔 연필이라곤 나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연필이 없어서 어떻게 공부를 할까? 선생님께 꾸중이나 안 들을까?'   온종일 몽당연필은 영식이 생각만 했대요.   그러나 봄볕에 몸이 노곤해서 그만 깜박 잠이 들어 버렸대요.   "야아, 여기 내 몽당연필이 떨어졌었구나!"   몽당연필이 깜짝 놀라 깨어 봤더니, 벌써 자기는 어느새 영식이 손에 쥐어져 있었답니다.   "연필아! 내가 잘못했어! 죄 없는 너만 자꾸 깎아 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작아졌어! 오늘은 연필이 없어서 아주 혼이 났단다. 내 옆에 앉은 웅길이에게 연필을 빌려 달랬더니, '자아식! 연필도 안 가지고 공부하는 자식이 어디 있어?', 하면서 너보다 더 작은 연필을 빌려 주잖아. 그래도 손에 잘 쥐어 지지도 않는 그 연필 때문에 선생님께 꾸중을 안 들은 거야. 너는 아직 쓸 날이 멀었어. 인제부턴 참말 아껴 쓸래…… "   잃어버렸던 연필을 다시 찾은 영식이는 얼마나 기뻤겠어요? 아니, 그보다 영식이를 다시 만난 몽당연필이 한층 더 기뻤는지도 모르지요.      '꾸러기와 몽당연필'의 몽당연필은 꾸러기에게 몹시 시달렸기 때문에 가방에서 튕겨나와 풀밭에 떨어진 것이 시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꾸러기가 걱정되고 그립습니다.   아마 꾸러기가 몽당연필의 임자이면서 친구인 탓이겠지요?   그래서 서로 다시 만나게 되자 둘이 모두 아주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최지훈)     꿈을 찍는 사진관 강 소 천   I.   따사한 봄볕은 나를 자꾸 밖으로 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젯밤만 해도, 내일은 일요일이니 어디 나가지 말고, 방에 꾹 틀어박혀 책이라도 읽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정작 조반을 먹고 나니 오늘은 유달리 날씨가 따뜻했습니다.   나는 스케치북과 그림물감을 가지고 뒷산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리거나, 그림에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빈손으로 가기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들고 앉아 그 따사한 봄볕에 읽는 것은 한층 더 싱거울 것 같았습니다.   봄을 그리려고 산에 오른 이 서투른 화가는, 좀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내 눈이 맞은편 산허리에 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리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활짝 핀 꽃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살구꽃이 피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할텐데, 저렇게 연분홍 꽃이 전등이라도 켠 듯이 환히 피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꽃나무 있는 데로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골짜기를 내려 다시 산으로 기어올라, 그 꽃나무 아래까지 갔습니다.   단숨에 달린 나는 숨이 차서 그만 땅에 주저앉았습니다.   숨을 돌리며 내가 꽃나무를 자세히 바라보았더니, 나무 밑줄기에 이런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 꿈을 찍는 사진관으로 가는 길 - 동쪽으로 5리 ★    나는 그 연분홍 꽃나무에 핀 꽃 같은 건 생각할 사이도 없이, 곧 이 꿈을 찍는 사진관을 찾아 떠났습니다.   동쪽으로 사뭇 좁다란 산길을 걸어가느라니까, 정말 조그만 집 한 채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집 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약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 문 앞엔 또 이런 것이 씌어 있었습니다.   ★ 꿈을 찍는 사진관은 여기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   나는 남쪽을 향해 또 걸었습니다.   지금 온 만큼 가니까, 정말 또 한 채가 보였습니다.   나는 참 잘 왔다고 좋아라 집 문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까보다 좀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와 똑같은 글이 문 앞에 붙어 있었습니다.   아니 꼭 한 자만 틀립니다.   그것은 남쪽으로 5리가 아니라, 서쪽으로 5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나는 조금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만 더 속아 보자 하고 또 서쪽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꿈을 찍는 사진관을 찾은 것입니다.   이런 산중엔 어울리지 않으리만큼 커다랗고 훌륭한 양옥집이었습니다.   벽과 창문만이 아니라 지붕까지 새하얀 집 - 다만 정문에 커다랗게 써 붙인,「꿈을 찍는 사진관」이라는 일곱 글자만이 파아란 하늘빛이었습니다.   나는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시오? 들어오시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늘빛 파란 가운을 입은 점잖은 신사 한 분이, 하늘빛 파아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으며, 회전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오셨지요?"   "저어 … 여기가 꿈을 찍어주는 사진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찍지요?" 하고, 나는 찍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내게 조그맣고 얄팍한 책 한 권을 주며, 저 쪽 7호실에 가 앉아 소리 내지 말고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7호실을 찾아갔습니다.   1호실 다음엔 3호실, 그 다음이 5호실, 바로 그 다음이 7호실입니다.   어쩌면 사진관이 꼭 여관집과도 같습니까?   나는 그제야 이 집의 방 번호는 모두 홀수만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벽과 천장까지 새하얀 방 -   들어가는 문외에는 들창 하나도 없는 방입니다.   나는 그 방에 앉아, 지금 받은 얄팍한 책을 펴 들었습니다.   불도 안 켠 방이, 왜, 이리 화안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빛이라곤 들어올 곳이 조금도 없습니다.   9포 활자만큼 작은 하늘빛 글씨가, 어쩌면 그리도 잘 보입니까.   꿈을 찍으시려는 분들에게!   이렇게 멀리서 찾아오신 손님에게 먼저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께서 이 곳까지 찾아온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을 줄 압니다.   그 하나는 신기한 것을 즐기는 마음이요,   또 하나는 무척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당신이니 말이지만, 오늘 저 세상 사람들은 오늘의 문명을 자랑해서 '텔레비전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 이 일에 비하면, 그까짓 게 다 무엇입니까? 문제도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 더우기 6.25 사변을 치루고 난 우리들에겐, 많은 잃은 것 대신에 가진 것은 안타깝게 보고 싶고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 우리에게 없지 못할 가장 귀한 것의 하나는 과거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묵은 앨범을 꺼내어 사진 위에 머물러 있는 지난날의 모습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진이란 다만 추억의 그 어느 한 순간이요, 그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란 흔히 사진첩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불완전한 것이나마 사변으로 인하여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행히 우리에겐 '꿈'이란 게 있습니다.   이미, 저 세상에 가 버리고 없는 그리운 얼굴들도 꿈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이라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꿈길에는 38선이 없습니다.   정말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 꿈이란 사람의 마음대로 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 꿈에 보려고 애를 써도 뜻대로 잘 안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잠깐 꿈을 꾸게 된다 해도, 그 꿈이 곧 깨면 한층 더 안타까운 것뿐입니다.   여기에 생각을 둔 나는, 이번 꿈을 찍는 사진기를 하나 발명했습니다.   이는 결코 거리의 사진사들처럼 영업을 목적한 건 아닙니다.   내게는 안타깝게 그리운 아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아기의 사진까지 송두리째 잃어 버렸습니다.   내가 이 사진기를 만들게 된 게,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자아,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럼, 인제 꿈을 찍는 방법을 설명해 드려야죠.   무엇보다 그게 더 궁금하실 테니까요.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방에서 나오는 한 줄기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바로 사진기가 놓여 있는 곳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꿈을 꾸기만 하면 그 꿈은 곧 사진기 렌즈에 비치게 됩니다.   꿈이 비치기만 하면, 사진기가 저절로 '쩔꺼덕'하고 사진을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필름에 사진이 찍히면 곧 현상하여 손님의 요구대로 크게 또는 작게 인화지(사진종이)에 옮겨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꿈을 꾸는 일입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꿈을 꿀 수 있으며, 또 꿈을 꾼다 해도 그게 정말 자기가 사진에 옮기고 싶은 꿈을 꾸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로 내가 제일 오랫동안 연구에 고심을 한 것이 이것입니다.   꿈을 찍는 것쯤은 이것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오래 가졌었고,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는 마음대로 꿈을 꿀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실로 이것은 세계적인 아니 세기적인 발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럼 당신도 곧 그리운 이를 만나는 꿈을 꾸십시오.   그리운 이의 꿈을 사진 찍어 드릴 테니.   그 방법 - 당신이 있는 방 한구석에 흰 종이와 한 장과 만년필 한 개가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그 종이에 그 파란 잉크로 당신이 만나고 싶은 이와 지난날의 추억의 한 토막을 써서, 그걸 가슴속에 넣고 오늘밤을 주무시오.   내일 날이 밝으면, 당신은 지난밤에 본 꿈과 꼭 같은 사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을 겁니다.   한 가지 미안한 것은, 이 곳은 산중이어서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미안하지만 하룻밤 그냥 주무셔 주십시오.   꿈을 찍는 사진관 아룀.     II.   나는 종이쪽에 이렇게 썼습니다.   살구꽃 활짝 핀 내 고향 뒷산 - 따사한 봄볕을 쪼이며, 잔디 위에서 같이 놀던 순이, 노랑 저고리에 하늘빛 치마 - 할미꽃을 꺾어 들고 봄 노래를 부르던 순이 - 오늘 밤 정말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아직 해가 지기엔 시간이 좀 남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글 쓴 종이를 가슴에 품고 방바닥에 눕자, 방은 그만 캄캄해졌습니다.   참말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샘처럼 솟아오르는 지난날의 추억들.   정말 내가 민들레와 할미꽃을 좋아하는 까닭은 순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순이의 그 노랑 저고리가 어쩌면 그 때 내 마음에 그렇게도 예뻐 보였을까요?   III.   "순아! 오늘은 정말 네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감추려고 했지만 역시 알려 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만 순아, 울어서는 안 돼! 응?"   "무슨 얘기냐? 어서 말해 줘!"   "정말 안 울 테냐?"   "울긴 왜 우니? 못나게 …"   "그래! 픽하면 우는 건 바보야, 울지 말아 응?"   "그래! 어서 말해!"   "저어 …"   "참, 네가 바보구나, 왜 재깍 말을 못하니? 아이 갑갑해 - 어서 말해 봐!"   "저어, 말이지, 이건 정말 비밀이야,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랬어. 아무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만 난 네게 숨길 수 없어. 우리는 며칠 있으면 38선을 넘어 서울로 이사를 간단다. 여기서야 살 수가 있어야지. 지난 해 8월 해방이 되었다구 미칠 듯 즐거워했지만, 우리는 토지와 집까지 다 빼앗기지 않았어? 지주라구. 그리구, 우리를 딴 데로 옮겨가 살라구 그러지 않아. 빈손이라도 좋아. 우리는 마음놓고 살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을 찾아가야 해 …"   "얘, 나보고 울지 말라더니, 제가 먼저 울지 않아?"   소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는 원산이나 함흥에 같이 가자던 순이, 너와 내가 헤어진 것은 겨우 소학교 5학년 때 …   IV.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생각한 대로 곧 꿈꿀 수 있고 그 장면을 곧 사진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은 …   잠을 깬 것은, 아니 꿈을 깬 것은 아침이었나 봅니다.   전혀 밖의 빛이 방안에 비치지 않아 때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내겐 시계도 없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사진사가 있는 방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을 밀었으나, 문은 밖으로 잠겨져 있었습니다.   내가 손잡이를 돌리자 내 앞에는 한 장의 종이쪽이 날아 떨어졌습니다.   아직, 시간이 이릅니다.   그냥 거기서 2시간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꿈을 찍는 사진관 주인 아룀. ]   "옳아, 아직 두 시간 더 있어야 된단다.   내가 너무 일찍 일어났는지도 몰라.   날이 아직 밝지 않았을까?   그 동안, 나는 어제 저녁 순이와 고향 뒷산에서 꽃을 따며 놀던 꿈을 다시 되풀이해 보자.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꿈이었나!   사진은 어느 장면을 찍었을까?   나와 순이가 나란히 살구나무 그늘에 앉은 장면일까?   그렇지 않으면 순이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일까?   그렇지도 않으면 순이가 내게 할미꽃을 꺾어 주는 장면일까?”   V.   내가 사진관 주인에게서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사진 한 장을 받아 들었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순이와 나의 나이의 차이었습니다.   실지 나이로는 순이와 나는 동갑입니다.   그런데 사진에는 여덟 해나 차이가 있는 게 아닙니까?   순이의 나이는 열 두 살 그냥 그대로인데, 나는 지금 나이 스무 살이니까요.   그 동안 나만 여덟 해 나이를 먹은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사실 순이도 북한 땅 어디에 그냥 살아 있다면 꼭 내 나이를 똑같을 게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그 뒤의 순이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순이는 언제나 열 두 살 그대로입니다.   스무 살 - 스무 살이면, 제법 처녀가 되었을 순이, 머리채를 치렁치렁 땋았을까?   제법 얼굴에 분을 발랐을지도 몰라.   지금은 노랑 저고리와 하늘빛 치마가 어울리지 않을 꺼야.   모처럼 찍어 준 꿈 사진도 그런 걸 생각하니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이게 제일 귀한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사진관 주인에게 몇 번이나 감사를 드리고 나는 그 곳을 나왔습니다.   벌써, 아침해가 하늘 높이 올랐습니다.   하루를 꼬박 굶었으나 나는 배고픈 생각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처음 앉았던 뒷동산에 와 앉아 다리를 쉬며 가슴속에 간직했던 사진을 꺼냈을 때, 나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내가 넣었던 곳에서 꺼냈는데, 내가 사진관에서 받아 든 순희와 같이 찍은 사진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동화집 갈피 속에 끼어 있던 노란 민들레 카드였습니다.      꿈을 찍는 사진관   6·25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 그리고 정다운 동무를 빼앗아 갔습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모두들 가슴 속에 꿈에도 잊지 못할 사연과 그리운 얼굴들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 작품은 6·25 전쟁 이후, 모든 것이 파괴되고 그리운 추억만 남은 시대에 씌어진 작품입니다.   추억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의 일이 언젠가는 꿈에만 나오는 그리운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 때 꿈을 찍는 사진관이 있다면 정말 좋겠지요?   남쪽으로 내려온 주인공(나)은 어릴 때 같이 놀던 북쪽의 순이를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이 꿈을 찍는 사진관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스무 살인데 사진 속의 순이는 아직도 열두 살 그대로라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추억 속의 모습은 언제나 마지막 본 그 때 모습으로 남아 있는 법이지요.      강소천   1915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났습니다.   1931년에 《아이생활》에 동화 를 발표하고, 1936년에 《소년》에 동시 을 발표하여 등단하였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나 혼자 부른 합창> 등이 있습니다.   ■ 꿈을 찍는 사진관 - 동화 해설   '꿈, 고향, 그리움'은 강소천 아동문학의 키워드입니다.   강소천 아동문학 전집(배영사 간행) 총 6권에 실린 111편의 동화 중에 이 세 단어가 들어있지 않은 동화는 거의 없습니다.   강소천 동화는 이 세 단어를 넣어 각각 다른 방법으로 짠 비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문학은 그 시대인들의 삶을 표현합니다.    문학은 작가가 생존했던 동시대인들의 슬픔과 기쁨과 소망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학은 동시대인들의 슬픔과 기쁨과 소망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데 그치지만, 어떤 문학은 그들의 슬픔과 기쁨과 소망을 쟁취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학연구에서 이런 종류의 문학을 열쇠의 문학(이재선, 한국문학사)이라고 부릅니다.   한국문학사에서 볼 때 은 조선조 서얼차대의 불합리한 사회적 관습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고, 은 여성이 자기 존엄성을 지키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영국의 는 영국 여성이 세계 최초로 참정권을 얻는 데 기여했으며, 미국의 은 흑인노예 해방을 여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렇게 인류 역사에서 볼 때, 문학작품은 새로운 사회 지평을 여는 열쇠의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학은 사회적인 제도 뿐 아니라 과학과 발명의 문을 여는 열쇠의 역할도 해왔습니다.   는 잠수함을 만드는 열쇠가 되었고, 은 비행기 발명에 공헌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학의 열쇠의 기능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가 비행기 발명의 열쇠가 되었고, 은 자동문의 열쇠가 되었으며, 의 수직 상승의 모티브가 엘리베이터의 열쇠가 되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시각을 중심으로 하여 저는 오늘 강소천의 을 ‘열쇠의 문학’이라고 명명하고자 합니다.    ■ 해설 : 문학박사 남미영     꿈을 파는 집 강 소 천   지난 겨울 크리스마스 때, 나는 어느 친구로부터 한 쌍의 작은 새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언제나 부모도 처자도 없이 사는 외로운 신세라서 새에게라도 마음을 붙이고 살라고 가져다 준 건지도 모릅니다   참새보다도 훨씬 작은 새인데, 그보다도 더 검은 빛이 많아 보기에는 그다지 예쁘지 않았으나, 카나리아의 일종이어서 퍽 잘 운다고 하였습니다.   새장을 받아든 나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 날 밤엔 새 때문에 잠도 잘 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나는 새장 앞으로 갔습니다. 모이가 떨어지지나 않았나, 물이 더럽혀지지나 않았나, 추워하지나 않았나, 늘 이런 걱정을 하였습니다.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와도 먼저 새장 있는 데부터 들여다보곤 하였습니다. 방 안에서 책을 읽다가도 새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글을 읽던 눈은 어느 새 새장 있는 데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새는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었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묘사음악에서 듣던 새 소리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 나는 묘사음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숲속의 대장간'이니, '새 우는 하와이'니 하는 음악 소리 속에 섞여 들리는 새 소리는 어쩌면 그리도 신기했던지 모릅니다.   그런 새 소리를 가만히 듣고 앉았노라면, 어느 새 나는 '숲속의 대장간'을 좋아하던 그런 소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 때 내가 악기 소리로 흉내 내는 새 소리를 그다지도 좋아한 까닭은, 진짜 새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 자란 나는 눈 내리는 겨울만 되면, 추운 줄도 모르고 맷새잡이를 다니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사랑방 아저씨더러 새덫을 만들어 달라고 울며 조르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습니다.   지금도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는 새 가운데, '콩새'라고 우리 마을 아이들이 부르던 새가 있었는데, 참새보다는 훨씬 큰 새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그 새를 잡아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면, 어찌도 부럽던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꽃과 소녀'라는 책의 출판 기념회를 끝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게 된 날이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곁에 앉았던 여류 소설가 김 여사가 '꽃과 소녀'의 사인첩에 쓰던 글귀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죽어 꽃이 된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죽고 싶다.'   나는 문득 별을 쳐다보며,   '꽃보다도 별이 더 아름답지, 나는 죽어 별이 되리라.'   그러나, 나는 문득 다시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내 한 쌍의 작은 새를 생각하며,   "별보다 더 아름다운 새다. 나는 죽어 새가 되리라."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벌써 효자동 전차는 끊어졌습니다.   나는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면서도 나는 꽃과 별, 별과 새, 이런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대문을 열기가 바쁘게, 나는 새장 앞으로 갔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철사로 꼭 동여맨 새장 문이 열렸고 새장 속에 들어 있어야 할 한 쌍의 새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없고, 빈 새장만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내 감정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내가 잠을 깬 것은 벌써 아침 해가 중천에 떠오른 뒤였습니다.   잠을 깨자,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새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일어나 새장 앞으로 걸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전 같으면 얼른 일어나 새장 앞에 가서,   "밤새 잘들 잤니? 내 귀여운 아기들!"   하였을 것이나, 나는 자리에 누운 채 멍하니 새장 있는 곳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텅 빈 새장…….'   이렇게 생각하니 내 마음까지 텅 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젯밤 나가버린 한 쌍의 내 새가 창가에 다시 날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새들이 얼른 날아 들어오라고 유리창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잠옷을 입은 채, 새들이 날아와 앉은 창가 나무 있는 데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새들은 나를 보자, 곧 날아서 길가 전선줄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나는 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새는 또다시 날아 딴 데 가 앉았습니다. 그러니까 새와 나의 거리는 언제나 비슷했습니다. 따라가면 날아가고, 날아가면 또 따라가고…….    그러는 사이 나는 새를 따라 한길을 지나, 골목길을 돌아서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산 속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새를 잃은 것만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새가 어디로 영영 날아가버려 다시 찾을 길이 없다고 단념했을 땐, 나는 벌써 내가 돌아가야 할 길까지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갑자기 나는 내가 기르던 한 쌍의 새가 원망스러졌습니다.    '그렇게 끔찍이 귀여워했는데, 왜 나를 이런 알지 못할 산 속에 꾀어다 놓았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밖엔 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그러니까 조반도 점심도,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저녁인데도 빵 한 조각 먹지도 못하고 그저 산 속을 헤매 다녔으나, 길이라곤 나서지 않았고, 사람의 흔적도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비로소 배가 고픈 생각이 났고, 목이 마른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어느 골짜구니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두 손으로 움켜 마시고, 바윗돌 위에 주저앉아,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해를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해가 넘어가고, 저녁놀이 사라지고, 그리고 푸욱 내려 덮이는 어둠의 장막. 나는 이제 더 어디로 갈 곳도 없고, 갈 힘도 없었습니다.   바위 위에 앉은 바위 같은 나……. 그러나 나는 곧 다시 벌떡 일어났습니다. 불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불빛이 어떤 종류의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한 나는, 그 불빛이 반짝이는 저쪽 편을 향하여 달음질쳐 갔습니다.    이런 산 속에 있는 집은 낮보다 도리어 밤에 더 찾기가 쉬울는지 모릅니다. 집 앞에 갔을 때, 나는 그게 사람이 사는 집인 것을 알고 몹시 기뻤습니다.   "계십니까?"   나는 이제 살았다는 듯이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요?"   "접니다. 대문을 좀 열어 주시오."   "저라는 게 누구요?"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퍽 늙은 할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지나가다 길을 잃고 헤매던, 거리에 사는 젊은 사람입니다. 어서 대문을 좀 열어 주셔요. 들어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요."   그제야, 할머니는 문을 열고 나와 나를 맞아들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은 뒤, 밖에 나와서 처음으로 나는 이 집 문앞에 푸른 글씨로 써붙인 자그마한 간판을 보고 안 것이지만 그 간판엔, '꿈을 파는 집' 이라는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밖엔 딴 글자도, 그림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어젯밤 나를 맞아 주시던 할머니가 이 집 주인인 꿈을 파는 할머니라는 것도 곧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먼저, 내가 이 꿈을 파는 집에 찾아 온 까닭을 물었습니다. 나는 조금도 숨김 없이 죄다 이야기했더니, 할머니는 껄껄 웃으시면서,   "그럼 온 김에 꿈이나 하나 사가지고 가지."   하셨습니다.   "하나에 얼마씩인데요?"   "하나에 한 장이지."   "한 장이라니요? 백원입니까? 천원입니까?"   "돈 한 장이란 말이 아니고, 사진 한 장이란 말이야."   "예, 사진이요? 어떤 사진입니까?"   "사고 싶은 꿈의 사진이지." 하며, 할머니는 내게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내 지갑 속에는 주민등록증과 신분증명서, 그 밖에 몇 장의 증명서가 들어 있고, 그리고 이북에 두고 온 내 아이들의 사진이 석 장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얼른 지갑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들었습니다. 순이와 웅이와 영이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한 장에 꿈을 한 번 보여 준다고 하니, 이 사진 한 장이면 나는 보고 싶은 세 아이를 한 꿈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내가 내 놓은 세 아이의 사진을 받아든 할머니는,   "벌써 4년 전 사진이로구먼, 지금 애들을 만나면, 아무리 아버지라도 잘 모르겠는데? 멀리들 버려 두고 왔군! 애들의 어머니는 보고 싶지 않소?"   "보고 싶지만, 사진이 있어야죠."   "음, 그거 안 됐는데……" 하고 할머니는 내 아이들의 사진을 자기 가방 속에 집어 넣더니, 콩알 만한 푸른 알약 한 개를 내게 내어 주면서,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이 집을 나가서 당신이 어제 저녁 물을 마시던 곳에 가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이 약을 잡수시오. 긴 설명은 필요 없으니……. 자 그럼 밤도 깊고 고단도 할 테니 그만 주무시오."   그러더니 할머니는 등불을 껐습니다.   그 뒤, 나는 어찌 되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잠이 깬 것은 날이 밝은 뒤였습니다.   나는 곧 어제 저녁 앉았던 바위 있는 데를 다시 찾아가, 두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문 뒤, 그 알약을 입에 넣고 물과 함께 꿀꺽 삼켜 버렸습니다.   약을 먹은 나는 금방 한 마리의 새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내가 앉은 바위 앞 나무에 우리 집 새장에 들어 있던, 바로 어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한 쌍의 새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잘 잤소? 짹짹!"   "그래, 잘 잤다. 쫑쫑쫑."   "그럼, 곧 떠납시다."   한 쌍의 새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떠난다는 말이냐?"   "콩새의 고향! 세 아이를 만나러 가야지 않아요? 짹짹!"   나는 그제서야, 이 한 쌍의 새가 나를 데리고 고향 집으로 가려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그럼 곧 떠나자. 쫑쫑쫑."   우리 세 마리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북쪽으로 날아갔습니다.   한나절이 되어 우리는 내 어릴 때 고향에 다다랐습니다.   "아, 반가운 내 고향 하늘이여! 산과 강물이여! 그리고 나무와 숲이여! 그러나, 있어야 할 내 집과 내 꽃밭은 없구나!"   나는 나뭇가지에 앉아, 이렇게 탄식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자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세 아이, 그것은 틀림없는 어젯밤 꿈할머니에게 준 사진에 있는 내 아이들이었습니다.   누더기를 입고, 맨발에 파리해진 세 얼굴!   나는 나뭇가지에 앉아 그만 목놓아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얘, 저게 콩새가 아니냐?"   "응, 그래, 저게 콩새야. 우리 아버지가 늘 좋아하시던 콩새야."   "참 지금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실까?"   세 아이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앉아, 나를 쳐다보며 눈물이 글썽글썽하였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란다, 쫑쫑쫑."   그러나, 새가 된 내 말을 내 아이들이 알아들을 리 없습니다.   "누나, 어서 내려가! 배 고파! 나 밥 줘!"   제일 나이 어린 것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내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훨훨 날아 마을을 떠났습니다.   "고향아! 잘 있거라. 내 아이들아! 잘 있거라.   내 이제 곧 다시 오리라.   새가 아니라 버젓이 너희들의 아비가 되어,   이 고향의 새로운 임자가 되어, 태극기 앞세우고 찾아오리라.   그 때까지만 참아다오. 고향아! 그리고 내 아이들아!"   한 쌍의 작은 새들도 내 뒤를 따라 날아왔습니다.   나와 새들이 38선을 넘어 서울 거리에 날아든 것은 어스름 저녁 때였습니다.   약 기운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그 가볍던 내 날개는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만 더 날지 못하고, 어느 전신줄 위에 날아 앉았습니다. 앉기가 무섭게 막 졸음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꼬박!"   나는 전신주에서 졸다가 그만 땅에 떨어졌습니다.   퍼뜩 잠이 깨어 정신을 차렸을 때, 나와 함께 날아오던 한 쌍의 새는 어디 갔는지 없고, 나만 혼자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딜까?' 하고 멍하니 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더니, 바로 세종로 네거리였습니다. 내 앞에는 효자동 가는 전차가 와 섰습니다. 나는 얼른 전차에 올라탔습니다.   "여어! 강 선생님! 어디 갔다 오는 길이오?" 하고 날 아는 사람이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 예! 좀……."   나는 그 이상 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작선동에서 전차를 내려,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들어오며, 나는 여지껏 일어난 일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집 대문을 열자, 얼른 새장 있는 데로 가 보았습니다.   새장 문은 여전히 닫혀 있고, 그 속에는 한 쌍의 새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벌써 오랫동안 단잠을 자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니까 놀라 깬 것 같았습니다.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보면 38선을 나와 함께 넘은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얼른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내 보았습니다. 세 아이가 가지런히 서서 찍은 사진도 그냥 그대로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옳아, 꿈 할머니는 내가 불쌍하니까, 그 사진을 내가 자는 동안 다시 또 지갑 속에 넣어 주셨는지도 몰라. 이 사진만 있으면 나는 다시 그 애들을 만나러 갈 수가 있으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꿈을 파는 집'이 어느 산에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길이 없고, 설사 안다 하여도 새가 되어 다시 고향 집에 가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이 동화를 읽다 보면, 북쪽 고향 땅에 삼 남매를 두고 온 주인공의 자식을 그리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이 저절로 찡해 옵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가슴 속 상처와 외로움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상처는 전쟁을 겪고 난 후의 아픔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1950년 한국전쟁 때 한민족끼리 서로 반대편이 되어 총과 칼을 겨누었고, 또한 그로 인해 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전쟁의 상처와 아픔은 민족의 가슴 속 깊이깊이 박혔고, 남과 북으로 나뉜 채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가슴에는 치료할 수 없는 고통이 뿌리 깊게 박혀 버렸습니다.   주인공은 전쟁 중에 가족과 떨어져 홀로 남쪽에 남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가족들은 북쪽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수많은 슬픔 중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 이별이 주는 슬픔이 가장 큽니다. 주인공은 '꿈을 파는 집' 할머니를 만나면서 자신의 가슴 속 꿈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한 마리의 새가 되어 자유롭게 훨훨 날아서 보고 싶어 하던 아이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날아갑니다. 꿈을 판다는 환상적인 공간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잊게 해 주었습니다. 새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간 주인공은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비록 새의 모습으로나마 보고 싶었던 아이들을 만나 가슴 속 응어리를 풀게 됩니다.   비록 꿈을 꾼 것이라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간절하게 바라던 소망을 이루게 해 준 그 꿈은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마음 속을 가득 채운 희망과 소망의 샘을 퍼올린다면 현실 속의 두려움과 외로움, 절망감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화는 전쟁의 아픔과 자식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과 소망을 절실하게 보여 줍니다. 또한 이런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꿈을 파는 집'과 그 주인인 '할머니',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새'로 변하는 장치들은 환상 그 이상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환상이라는 편안하고 안락한 세계로 이끌고 들어감으로써, 글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던 꿈과 환상, 그리움과 희망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환상 속 여행을 함께 하며, 가족과 헤어져 혼자 사는 주인공의 안타까움을 나눠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돌멩이 강 소 천 돌멩이 (1)   ■ 경구의 혼자 생각 돌멩이 - 큰 돌멩이, 작은 돌멩이, 둥근 돌멩이, 넓적한 돌멩이, 흰 돌멩이, 검은 돌멩이, 노란 돌멩이,알록달록한 돌멩이. 돌멩이 - 돌멩이는 어디든지 있다. 산에도 있고 들에도 있다. 길바닥에도 있고 냇가에도 있다. 땅 위에도 있고, 땅 속에도 있다. 돌멩이 - 둥근 돌멩이, 새알 같은 돌멩이, 새하얀 돌멩이, 달걀 같은 돌멩이, 달걀에 귀가 없는 것같이, 돌멩이에도 귀는 없다. 달걀에 눈이 없는 것같이, 돌멩이에도 눈은 없다. 달걀에 입이 없는 것같이 돌멩이에도 입은 없다. 달걀에 발이 없는 것같이 돌멩이에도 손과 발은 없다. 달걀 - 달걀은 움직이지는 않아도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돌멩이 - 돌멩이는 달걀처럼 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같지 않다. 여름 날 나는 냇가에 나가 돌멩이를 하나하나 만져 본다. 돌멩이는 따뜻하다. 금방 낳은 달걀처럼 따뜻하다. 돌멩이도 산 것인지 모른다. 돌멩이도 마음을 가졌는지 모른다. 돌멩이도 생각할 줄 아는지 모른다. 나는 돌멩이를 볼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여 본다. 커다란 돌멩이 옆에 놓여 있는 조그만 돌멩이를 볼때, 나는 그 커다란 돌멩이가 어쩐지 아빠 돌멩이나 엄마 돌멩이 같아 보이고, 조그만 돌멩이가 어쩐지 아기 돌멩이들만 같아 보인다. 여름날이면 냇가에 수많은 아이들이 나와 돌멩이를 주워 가지고 놀지만 나처럼 돌멩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언제인가 나는 냇가에 빨래하러 나온 귀순이에게 이런 말을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귀순아! 너 이 큰 돌멩이 옆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나니?" "어떤 생각이라니?" "그래, 아무런 생각도 안 난단 말이야?" "글세 어떤 생각이 날까? 내 이제 생각해 봐서 생각이 나면 말하지, 아직 아무런 생각도 안 나니까, 호호호 …" "아, 무얼 생각해 볼 게 있담? 얼른 보자, 생각나는 게 없단 말이냐?" "없어, 없어. 몰라, 몰라. 난 빨래할 테야 …" 이런 대답은 귀순이만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냇가에 나와 앉아 수많은 돌멩이를 만져 보기도 하고 한 개 한 개 돌멩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도 한다. 돌멩이 - 나는 돌멩이와 친하고 싶다. 나는 돌멩이와 얘기하고 싶다. ■ 돌멩이의 이야기 나는 냇가의 한 개의 커다란 돌멩이다. 들은 이야기, 본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많지만, 내게는 입이 없다. 내게 만일 입이 있다면, 나는 늘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경구라는 아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게다. 그저 나는 언제나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고만 있다. 언제 내가 말할 수 있게 된다면, 한 번 이렇게 말해 보련만 - 우리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는 아주 딴판이다. 물론 짐승이나 새들과도 같지 않다. 첫째로 우리는 사람들처럼 옷을 입지 않는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들처럼 밥이나 떡이나 과자나 과일 같은 것을 먹지도 않는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집이 없다. 우리는 그저 이 곳서 저 곳으로 옮겨지는 대로 가서 산다. 여기저기 걸어다니지도 않는다. 우리는 열이나 스물 이상, 더 많은 셈을 셀 줄 모르니까, 이 냇가에 우리의 일가 친척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아마 모르리라. 더구나, 한 해 여름 장마를 한 번 치르고 난 뒤에는, 우리의 동무들이 수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고, 그 대신 또 다른 동무들이 우리 곁에 와 살게 된다. 내가 이 냇가에 온 지도 벌써 여러 해 되지만, 나도 본시 여기서 나지는 않았다. 내 고향은 본시 깊은 산골이다. 고향 - 사람들은 한 해 , 두 해만 다른 곳에 가 살아도 고향이 그립다고들 하더라. 그러나 한 번 떠난 후 다시 고향에 가 보지 못한 나야, 고향이 그리우면 얼마나 그리울 것이냐. 아아, 지금 내 고향은 몰라보게 변하였으리라. 나는 벌써 고향으로 가는 길을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부모 동생들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될는지.  그렇지만 그걸 누가 알 수 있으랴? 꼭 만나리라 믿을 수도 없는 일이다. 지금 나는 단 홀몸이다. 단 하나밖에 없던 내 아들 차돌이까지도 얼마전에 잃어버렸다. 나는 내 나이 지금 몇 살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냇가에서 내가 제일 나이 많으리라. 내 나이 어렸을 때 - 그 때는 참 옛날이다. 우리 할머니는 어린 나를 안고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 가을 볕이 따스하다. 졸음이 온다. 곁에 있는 아이 놈들은 다 자나 보다.  오늘은 아무도 냇가에 나오지 않는구나. 사방이 조용하다. 이 날이면 나는 곧잘 차돌이 꿈을 꾼다. 차돌이 - 나는 차돌이가 몹시 그립다. "사랑하는 내 아들 차돌아!" 불러 보고 싶은 날이다. 그러나, 차돌이는 내가 부른대도 듣지 못하리라. 차돌이는 앞마을 영이네 집에 가 살고 있다. 영이 할아버지 쌈지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내 아들 차돌이가 나는 그립다. 지난 여름, 나는 차돌이를 만났었다. 차돌이 - 내가 지금 내 아들을 차돌이라고 부르지만, 지금 내 아들 이름은 차돌이가 아니다. 지금 내 아들 이름은 부싯돌이다. 사람들이 부르는 내 아들의 이름이다. 부싯돌 - 그러나, 내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는다. 차돌이 - 내 아들의 이름은 언제나 차돌이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어느 여름 날 이 마을에 사는 남이하고 영이가 이 냇가에 와서 돌멩이를 주워가지고 놀다가, 영이가 그 만 내 아들 차돌이를 쥐더니, "남이야! 이 돌멩이 참 예쁘지?" "참!" "이거 우리 할아버지 갖다 드릴까?" "할아버지가 돌멩이는 해서 뭘하게?" "부싯돌 하지, 부싯돌 …" "참, 그거 부싯돌 했으면 좋겠다." 이리하여 내 아들 차돌이는 그만 영이의 손에 잡혀 영이네 집에 가게 되었다. 여름마다 나는 영이 할아버지가 이 냇가에 나오기만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다. 지난 여름, 영이 할아버지가 기다란 담뱃대를 가지고 이 강변에 왔을 때,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쌈지 속에서 영이 할아버지가 내 아들을 꺼내었을 때, 나는 얼른 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차돌이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던 것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아, 또 눈물이 난다. 그 때 차돌이와 나는 오래간만에 만났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영이 할아버지는 차돌이와 나 사이를 영 모르는 모양이었다. 담뱃불을 붙이자 영이 할아버지는 내 아들 차돌이를 다시 쌈지 속에 넣어 버리고 말았다. 아아, 벌써 해가 지나 보다. 벌써 어둠이 오나 보다. 벌써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하나 보다. 오늘 밤도 어젯밤처럼 달이 밝으리라. 오늘 밤은 차돌이가 그리워서 어떻게 잠이 드나? 귀뚜라미는 왜 저리도 몹시 우느냐. "내 아들 차돌아, 쌈지 속에서나마 편히 잠들거라." 날씨가 이리 따뜻한 것을 보니 아마 또 봄이 왔나 보다. 음산하던 가을이 간 후에, 춥던 겨울이 간 후에 오는 것은 언제나 봄인가 보다. 다 죽은 줄 알았던 나뭇가지에 눈이 트나 보다. 다 죽은 줄 알았던 금잔디가 다시 파래지기 시작하나 보다. 싹이 트나 보다. 눈이 트나 보다. 잎이 피나 보다. 지금은 싹트는 때, 지금은 눈트는 때, 지금은 잎 피는 때 … 아아, 나는 갑갑하다. 아아, 나는 답답하다. 나는 왜 돌멩이가 되었나? 돌멩이는 왜 싹트지 못하나? 돌멩이는 왜 눈트지 못하나? 돌멩이는 왜 잎 피지 못하나? 돌멩이 - 몇 백 년 봄을 맞이해도 싹 나지 않고, 눈 트지 않고, 잎 피지 않는 돌멩이. 나 - 나는 이런 커다란 돌멩이가 되기보다 조그만 한 개의 밀알이 되고 싶다. 한 개의 달걀이나 새알이 되고 싶다. 한 개의 옥수수알이나, 감자알이 되어 보고 싶다. 아무래도 나는 이 냇가에 굴러 다니는 아무 쓸데없는 물건인가 보다. 누가 나를 들어다 영이네 집 토방돌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  는 한 개의 쓸 수 있는 물건이 되어 보고 싶다. 벌써 버들가지에 물이 오른가 보다. 아이들의 버들피리 소리가 들려 온다. 확실히 봄이 왔구나, 봄이. 아아, 나는 한 가지의 버들이라도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나는 노래할 수 있으리라. 나는 경구와 친할 수 있으리라. 봄이다. 나도 눈 트고 싶다. 나도 자라고 싶다. 아아, 갑갑하다. 아아 답답하다. 나는 돌멩이다. ■ 돌멩이의 이야기 오늘은 경구가 오는 날이라고 계성이와 진수, 영이는 몇 차례나 이 냇가에 나와 앉아 경구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경구는 오지 않는다. 나는 어쩐지 서운한 생각이 난다. 영영 못 만나 볼 내 아들 차돌이 생각도 난다. 강을 건너가고 건너오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을까? 옳아! 낼모레가 희성이와 귀순이의 결혼식 날이라지? 벌써 해가 서산으로 꼴깍 숨어 버렸다. 가을 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온다. 아마도 경구가 오늘은 못 오나 보다. 아이들이 지껄이며 또 나온다. 계성이와 진수와 영이로구나. "우리 이 강을 건너 웃마을까지 마중을 갈까? 안 올리가 없는데 …" "그래, 가 보자." 계성이와 진수와 영이는 강을 건너간다. 어디까지 경구의 마중을 가려느냐? 어둠이 점점 깊어 간다.  하늘에는 별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경구는 안 오나 보다. 계성이와 진수아 영이는 왜 돌아오지 않느냐? "어어이, 어어이." 사람들 부르는 소리가 난다. 아이들이 돌아오나 보다. "경구가 왔다." 기쁨에 넘치는 계성이의 목소리로구나. 경구가 왔구나, 정말 온다는 날 왔구나. 경구야, 어서 건너 오너라, 더 어둡기 전에 네 얼굴이나 좀 보자. 경구가 강을 건너왔다. 진수와 계성이와 영이와 경구, 얼마나 너희들은 친한 친구들이냐? 그들은 웃으며 지껄이며 내 앞으로 온다.  "얘들아! 우리 여기서 잠깐 쉬어 가자!" 아아 낯익은 경구의 목소리로구나, 반가운 경구의 목소리로구나. "경구야! 그 동안 잘 있었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경구는 몰라보게 컸다. 삼 년 동안에 아주 어른이 된 셈이다. 경구는 내 앞에 오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말문이 막혔나 보다. 경구의 손이 눈가로 가는 것을 보아 나는 경구가 우는 줄을 알았다. 경구의 부드러운 손이 나의 등을 어루만져 준다. 나도 따라 울었다. "내일 다시 만나자, 돌멩이야." "잘 가거라. 경구야!" 경구는 친구를 따라 천천히 마을로 들어간다. 아! 경구는 만났거만 내 아들 차돌이는?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아들이라면 이다지 슬프지는 않았으리라. 휴우, 이젠 차돌이 생각을 하지 말리라. "경구, 경구, 경구, 경구가 왔다." 내일은 경구가 친구를 데리고 이 냇가에 나오리라.  그러나, 희성이와 귀순이 만은 이 냇가에 나오지 못하리라. 생각하면 우습고도 재미있는 일이 아니냐? 한 마을에서 나서 같이 놀고 싸우고 자라던 아이들이 벌써 저렇게 커서 장가를 가느니 시집을 가느니 야단이니 아무도 희성이와 귀순이가 어려서 이런 우스운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리라. 그게 아마 희성이와 귀순이의 나이가 열 살 하고 겨우 한두 살 먹었을 때였으리라. 한창 추워지는 초겨울 어느 날 귀순이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느랍시고 또닥거리는데 희성이가 마침 징검다리를 건너오다가, 이걸 보고 장난 잘 하는 아이인지라 슬그머니 돌멩이 하나를 들어 귀순이가 있는 앞에 퉁 하고 던지는 바람에 그만 물이 튀어서 귀순이가 옷을 함빡 적셨다. 이걸 본 희성이는 너무 우습고도 고소해서 징검다리 중간에 선채 깔깔깔 웃다가 그만 고무신 한 짝을 물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귀순이는 이걸 보고 고거 싸다고 가만히 흘러가는 고무신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던 모양인지, 제 앞으로 흘러가는 고무신을 빨래 방망이로 끌어 내어 희성이에게 주었더니, 희성이는 그만 얼굴이 빨개서 고무신을 받아 신고는 뺑소니를 쳤다. 희성이도 컸다. 귀순이도 컸다. 아니 경구는 더 컸다. 세월이 잠깐이다. 빠알간 아침해가 떠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희성이와 귀순이의 결혼식이 지나니 이 냇가는 전같이 조용하다. 경구는 몇 날이나 더 이 곳에 머무를는지 모르겠다.  이건 또 누구의 휘파람이냐, 경구로구나. 이 쪽 건 누구냐? 영일 테지, 옳아 영이다. 경구와 영인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으냐? 그럴 테지, 삼 년이나 모아 두었던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테지. 경구와 영인 내 옆에 와 앉아 별별 이야기를 다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돌아간 영이 할아버지 이야기를 또 시작한다. 경구는 웬일인지 얼른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나는 이 부싯돌을 볼 때마다 너의 할아버지 생각이 나더라." 부싯돌이라니? 그게 사람이 부르는 내 아들 차돌이의 이름이 아니냐? 내 마음은 몹시도 두근거렸다.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하였다. 경구는 정말 내 아들을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었다. "경구야! 그게 바로 내가 여기에서 주운 것이란다. 남이하고 놀다가 주운 건데 할아버지 부싯돌 하라고 그런 거야." "그래 나두 안다, 그런 줄을. 너의 할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하시며 주시더라." "그게 바로 이 큰 돌멩이 곁에 있었어." "어디 이 돌멩이 곁에?" "응." 경구는 갑자기 무엇을 깨달은 모양이다. 차돌이와 내가 아버지와 아들인 것을 알아냈는지도 모른다.  나는 차돌이를 알아봤다. 차돌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버지!" "차돌아!" 그러나, 영이나 경구 귀에 이런 말이 들릴 리 없다. "영이야! 너 이런 큰 돌멩이 곁에 조그만 돌멩이가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나니?" 바로 이건 시집간 귀순이에게 묻던 말이다. 오래 전부터 경구가 이 곳을 떠나기 전 귀순이의 나이 아직 영이 같을 때에 묻던 말이다. 귀순이는 그 말 대답을 못한 채 나이 먹어 시집을 갔다. "큰 돌멩이는 아빠나 엄마 돌멩이 같고, 작은 돌멩이는 아가 돌멩이들 같애 … 호호호 …" "영이야? 너두 그렇게 생각되니?" 경구는 너무도 기쁘고 좋은 모양이다. "영이야? 그럼 이 차돌은 이 커단란 돌멩이의 아들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들일 게다. 그러니 우리 이걸 옆에 놓아 주자!" "참말, 그랬으면 좋겠어." 경구와 영이는 나와 차돌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는다. "차돌아 - 그 동안 잘 있었니?" "예, 아버지도 잘 계셨어요?" "응, 난 잘 있었다. 정말 나는 내가 경구를 따라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 꼭 네가 영이 할아버지 무덤 속에 들어가 있을 줄만 알았다." "나는 그 동안 경구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잘 있었어요. 내 인제 천천히 그 곳 이야기를 아버지께 해 드리지요." "그래!" "그 곳서 나는 늘 이 곳이 그립고 아버지가 그리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나두 늘 네가 그리워서 울었단다." "정말, 아버지 - 내일 모레나 글피는 경구가 또 이곳을 떠나간대요." "경구가 떠나가?" 나는 얼른 머리를 들어 경구와 영이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봤으나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벌써 저 쪽 버들 있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경구는 착한 아이다. 좋은 아이다. 우리에게 제일 고마운 아이다. 우리는 경구의 앞날이 복되기를, 그리고 빛나기를 아침마다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빌자!"  "그럽시다, 아버지." 오오, 하늘이여! 경구의 앞길에 밝은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돌멩이(2) ■ 경구의 혼자 생각 내가 고향을 떠나 이 곳에 온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내 머리에는 아직도 그 때 그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에 나서 열 두 해를 자란 정든 내 고향, 내 마을, 내 집, 내 동무들을 두고 떠나던 내 슬픔이란 말할 수 없이 컸었다. - 경구야! 잘 가거라. 가거든 곧 편지해라! 하던 귀순이의 목소리라든지, - 그 곳 가도 학교에는 계속하여 다녀라! 하던 남이의 목소리라든지, - 언제 한번 올 테냐? 하던 영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들리는 듯 쟁쟁하다. - 귀순아! 영이야! 남이야! 보고 싶구나! 내가 지금 여기서 소리질러 그 애들을 불러 본대도 그 애들은 내가 부르는 줄을 알 리 없으리라. 아직도 나는 그 때 그 일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바로 내가 집을 떠나던 전날이다. 나는 진수와 계성이를 데리고 냇가에 나와 앉아,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계성아! 난 내일 떠난다.” “벌써 영이에게서 들었다.” “그럼 진수도 아니?” “..............” 진수는 말문이 막혔는지, 고개만 아래위로 약간 끄덕거릴 뿐, 말이 없다. - 진수야! 계성아! 너희들은 지금 무엇하고 있느냐?  제일 보고 싶은 내 동무들아! “경구아!” 진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이런 말을 물어 본다. “너 그 곳 가면 우리들은 아예 잊어버리고 말 테지? 그 곳 가면 또 다른 친구가 많이 생길 테니.” 나는 진수가 왜 이런 말을 묻는지를 알았다. 그 곳 가도 이 곳에 남아 있는 우리들을 잊지 말라는 뜻이리라. “몇 해만 지나면 경구도 나이 먹고 키가 크면 아무리 먼 곳에 가 있을지라도 고향에 찾아올 수 있을 테지. 경구야! 어서 커라.” 계성이가 이런 말을 하며 하하하......하고 웃었으나, 계성이도 사실은 나처럼 흠뻑 마음이 슬펐으리라. “경구야! 네가 좋아하는 버들피리나 좀 불어 보렴.” 나는 진수의 말에 못 이겨서가 아니라, 내일이면 이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동무들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진수의 말과 같이 버들피리라도 힘껏 불어보고 떠나고 싶은 생각이 났다. 우리 세 동무는 아무 말 없이 버들피리를 만들었다.  사실 버들피리는 나보다 계성이가 훨씬 더 잘 부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먼저 부는 것이 순서일는지도 모른다. 나는 피리를 입에 물었다. 전 같으면 아주 흥이 나서 잘 불었을 버들피리지만, 이것이 떠나는 마지막 피리라고 생각하니, 그만 목이 메고 숨이 가빠서 좀처럼 불수가 없다. 나는 마디마디 끊어지는 힘없고 흥 안 나는 피리를 조금 불었으나, 너무 싱거운 피리였다. “나는 못 불겠다. 너희들이나 좀 잘 불어 봐라. 내일 떠나는 나를 위하여 실컷 들려 다오.” 진수가 피리를 물고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수는 불다 말았다. 그 잘 부는 계성이도 역시 조금 불다 말았다. “자아, 그럼 우리 다 함께 불어 보자. 내일 서로 이별한다는 생각일랑 아예 말고, 기쁘게 흥이 나게 불어 보자.” 그 날 나는 있는 힘을 다 내어 이렇게 즐거운 듯이 말을 했다. 우리는 잠깐 동안 모든 생각을 잊어버린 듯이 피리를 불었다. “경구야! 이러고 보니 오늘이 학교 졸업식날 같구나.” “참, 재학생들이 졸업 노래를 한 절 부르고 졸업생들이 한 절 부르고, 마지막엔 다같이 부르고......” “하하하......참 그래......그런데 오늘 우리는 순서가 조금 바뀌었어......” “정말......우리가 먼저 불고 경구가 두 번째로 불어야겠던 걸.” 눈을 감으니 계성이의 웃는 낯이 눈앞에 또 나타난다. 나는 이 이상 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옳으리라. 더 생각한대야 눈물나는 기억밖엔 더 없을 터이니, 나는 또 냇가로 가리라. 돌멩이나 주우며 내 마음을 달래 보리라. ■ 돌멩이의 이야기 또 여름이 왔다. 여름처럼 우리 돌멩이들에게 답답한 때는 없다. 냇가에 있으면서도 목욕 한 번 해보지 못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는 눈이 빠지게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검은 구름이 뜨기만 바라고 소나기가 오기만 바랄 뿐이다. 날씨가 점점 더워 갈수록 이 냇가는 점점 더 분주해 간다. 오늘도 이 마을 아이들이 많이 나와 목욕을 하며 놀았다. 진수, 계성이, 태유, 상덕이, 계림이, 선우, 귀봉이 … 아무리 보아야 경구는 없다. 경구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나는 행여나 경구나 나오지나 않았나 하고 경구를 찾아본다. 그렇다. 경구는 갔다. 머얼리 멀리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경구가 정말 좋았다. 경구도 나를 퍽 좋아했다. 경구는 곧잘 다른 아이들 몰래 이 냇가에 나와, 내 등에 걸터앉아 무얼 자꾸만 생각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경구네가 이 마을에서 살 수가 없어, 외삼촌네가 있는 어느 먼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얼마나 가슴이 뜨금하고 서글펐는지 모른다. 경구가 이 마을을 떠나던 전 날, 경구는 나의 몸을 어루만지며,  "아아, 사랑하는 돌멩이야, 내가 네 위에 앉아 보기도 오늘이 마지막이로구나!  돌멩이야! 너도 잘 있거라 널랑은 부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지 말로, 이 냇가에서 오래오래 살아라. 아마 이 마을에서 지낸 모든 일을 네가 제일 잘 알리라 언제나 무얼 생각하고 혼자 슬퍼하던 나를 잘 아는 것도 너밖엔 없으리라. 나는 갑갑할 때마다 너를 찾았고, 마음이 슬플 때마다 너를 찾아 나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랐었지 돌멩이야, 부디 잘 있거라. 나는 내일이면 영영 마을을 떠난다." 나는 경구가 그립다. 내 아들 차돌이 만큼이나 그립다. 경구는 올는지 모른다. 그러나, 차돌이는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다.  내 아들 차돌이를 부시 쌈지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영이 할아버지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내 아들 차돌이도 같이 파묻혀 버렸을 것이다. 차돌이가 내 아들인 줄을 영이가 알았다면, 그리고 차돌이가 그리워 내가 밤마다 남 몰래 우는 줄을 영이가 알았다면, 영이는 할아버지 쌈지 속에서 내 아들 차돌이를 꺼내어 내 곁에 갖다 놓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이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경구라면, 혹시 그런 생각을 할른지 모르지만, 영이나 계성이나 진수나 귀순이가 그런 생각을 하지는 못하리라. 아이들의 지껄이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또 누가 나오는가 보다. 누구냐? 어디 보자? 귀순이, 서분이, 이 쪽은 누구냐? 영이다, 영이다.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말하고 싶다. 영이에게 할 말이 있다. 물어볼 말이 있다. 아이 갑갑해. 내게는 왜 입이 없나? 나는 왜 말할 수 없나? "영이야, 너 내 아들 차돌이를 어쨌니? 너의 할아버지 부싯돌 하겠다고 주워 간 내 아들 차돌이를 어쨌느냐 말이다. 너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쌈지 속에 넣은 채, 그냥 넣어 할아버지와 함께 내 아들을 관속에 넣어 보냈느냐?" 말하고 싶다.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말할 수 있게 만들어진 사람은 얼마나 좋겠느냐? 부럽다. 사람이 되어 보고 싶다. 나는 사람이 되어 봤으면 … 사람은 못 되나마, 새처럼 노래할 수나 있었으면 하다 못해 조그만 벌레같이 소리내어 울어 볼 수나 있어도 좋지 않겠느냐? 나는 말할 줄도, 노래할 줄도, 울 줄도 모르는 돌멩이구나. 나는 내가 얼마나 갑갑한 물건인가를 생각해 보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지만 오늘처럼 갑갑해 본 적이 없다. "귀순아! 목욕하지 않겠니?" "이런 곳에서 어떻게 대낮에 목욕을 한담!" "왜 못해?"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보면 어쩌니?" "보면 뭣하니?" 서분이가 영이 대신 대답한다. "그럼, 너희들이나 하렴 … 난 세수나 할 테다." 세월이 빠르구나, 참 빠르구나. 엊그저께 코를 줄줄 흘리며 발가벗고 엄마를 따라 이 냇가에 나와 물장난을 치던 귀순이가 벌써 제법 부끄러워할 줄 아는 색시가 되었으니. ■ 차돌이의 이야기 내가 경구의 호주머니에 들어서 이 산골에 온 지도 벌써 삼 년이 지났다. 경구는 벌써 지난 봄에 이 곳 소학교를 졸업했다. 그렇게 공부 잘하는 경구가 중학교에 못 가게 된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이라고 떠드는 소리를 들을 때, 어쩐지 조그만 나이지만 몹시도 슬펐다. 경구는 오늘도 아버지를 도와 밭으로 나갔었다. 지금은 점심 시간이 되어 경구는 집에 들어와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에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경구는 흰 종이쪽에 연필로 무어라 벅벅 자꾸만 쓰는 모양이다. "누구에게 보낼 편지일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느라니까, 경구는 편지를 다 써 놓고 한번 주욱 내려 읽는다. 나는 그때서야 경구가 무어라 썼는지 알 수 있었다.  계성이와 진수에게 하는 편지였다. 아마 전번 계성이에게 온 편지에, 귀순이가 이번 가을에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를 이용하여서 이번 가을에는 고향에 한번 갈 터이라는 편지였다. 나는 경구의 호주머니 속에서 이런 말을 듣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구가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내게는 기쁠 것도 아무것도 없지 않나? "경구야, 나를 데리고 갈 테냐?" 고 물어보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몸이라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이 문득 났다. 돌멩이는 얼마나 불쌍한 물건이냐? 입이 없으니 말할 수도 없고 발이 없으니 걸을 수도 없고 …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경구의 손이 덥석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더니 나를 집어낸다. "차돌아! 부싯돌아! 너도 나와 같이 갈 테냐?" 나는, "응!" 이 간단한 한 마디의 대답을 하기에 무척 애를 써 보았으나, 대답은 종시 나오지 않는다. 경구는 내 속을 알 리 없다. 내가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어하는지를 ... "차돌아! 부싯돌아! 우리가 고향을 떠난 지도 벌써 삼 년이 지났구나. 너는 아직도 모르리라만, 영이 할아버지는 우리가 이 곳으로 이사를 온 후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더라. 부싯돌아! 나는 지금 영이 할아버지가 너를 내게 주며 하던 말씀을 그냥 그대로 따로 외울 수도 있다. '경구야! 네가 이 차돌을 늘 곱다고 했기에, 이걸 네게 준다. 이 돌멩이를 볼 때마다 나를 생각하고 내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 또 타일러 주던 말을 잘 지켜라. 응? 그러면 너는 장래에 훌륭한 사람이 될 터이니.' 차돌아! 그게 바로 내가 고향을 떠난다고 그러던 몇날 전 일이었다. 참으로 영이 할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다. 내가 너를 곱다는 말을 언제 꼭 한 번 밖에는 하지 않은 듯한데, 그 말을 잊으시지 않고 내게 너를 주셨다. 차돌아! 너는 고향이 그립지 않느냐? 보고 싶은 친구는 없니?" 나는 그만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경구는 내가 우는 줄을 모를 것이다. 눈에 눈물이 없고, 흐느껴 우는 소리가 안 나니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경구도 고향이 그리운 모양이다. 친구가 그리운 모양이다. 돌아가신 영이 할아버지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경구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구나. 경구도 나처럼 우는구나. 경구가 만일 경구네 고향 앞 시냇가에 있는 커다란 돌멩이가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데리고 가리라. 그리하여 나와 아버지가 만날 기회를 주리라. 어떻게 하면 경구에게 내 아버지를 알려 줄 수 있을까? 아아,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 내 아버지는 내가 여기 온 줄 꿈에도 모르리라. 나는 다시 경구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갔다. 경구는 편지를 부치러 가는 모양이다. 편지를 부치고 난 경구는 약간 마음이 가벼워진 모양이다. 경구는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나도 경구의 호주머니 속에서 마음이 즐거워 집으로 돌아온다. ■ 돌멩이의 이야기 오늘은 경구가 오는 날이라고 계성이와 진수, 영이는 몇 차례나 이 냇가에 나와 앉아 경구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경구는 오지 않는다. 나는 어쩐지 서운한 생각이 난다. 영영 못 만나 볼 내 아들 차돌이 생각도 난다. 강을 건너가고 건너오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을까? 옳아! 낼모레가 희성이와 귀순이의 결혼식 날이라지? 벌써 해가 서산으로 꼴깍 숨어 버렸다. 가을 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온다. 아마도 경구가 오늘은 못 오나 보다. 아이들이 지껄이며 또 나온다. 계성이와 진수와 영이로구나. "우리 이 강을 건너 웃마을까지 마중을 갈까? 안 올리가 없는데 …" "그래, 가 보자." 계성이와 진수와 영이는 강을 건너간다. 어디까지 경구의 마중을 가려느냐? 어둠이 점점 깊어 간다.  하늘에는 별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경구는 안 오나 보다. 계성이와 진수아 영이는 왜 돌아오지 않느냐? "어어이, 어어이." 사람들 부르는 소리가 난다. 아이들이 돌아오나 보다. "경구가 왔다." 기쁨에 넘치는 계성이의 목소리로구나. 경구가 왔구나, 정말 온다는 날 왔구나. 경구야, 어서 건너 오너라, 더 어둡기 전에 네 얼굴이나 좀 보자. 경구가 강을 건너왔다. 진수와 계성이와 영이와 경구, 얼마나 너희들은 친한 친구들이냐? 그들은 웃으며 지껄이며 내 앞으로 온다.  "얘들아! 우리 여기서 잠깐 쉬어 가자!" 아아 낯익은 경구의 목소리로구나, 반가운 경구의 목소리로구나. "경구야! 그 동안 잘 있었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경구는 몰라보게 컸다. 삼 년 동안에 아주 어른이 된 셈이다. 경구는 내 앞에 오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말문이 막혔나 보다. 경구의 손이 눈가로 가는 것을 보아 나는 경구가 우는 줄을 알았다. 경구의 부드러운 손이 나의 등을 어루만져 준다. 나도 따라 울었다. "내일 다시 만나자, 돌멩이야." "잘 가거라. 경구야!" 경구는 친구를 따라 천천히 마을로 들어간다. 아! 경구는 만났거만 내 아들 차돌이는?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아들이라면 이다지 슬프지는 않았으리라. 휴우, 이젠 차돌이 생각을 하지 말리라. "경구, 경구, 경구, 경구가 왔다." 내일은 경구가 친구를 데리고 이 냇가에 나오리라.  그러나, 희성이와 귀순이 만은 이 냇가에 나오지 못하리라. 생각하면 우습고도 재미있는 일이 아니냐? 한 마을에서 나서 같이 놀고 싸우고 자라던 아이들이 벌써 저렇게 커서 장가를 가느니 시집을 가느니 야단이니 아무도 희성이와 귀순이가 어려서 이런 우스운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리라. 그게 아마 희성이와 귀순이의 나이가 열 살 하고 겨우 한두 살 먹었을 때였으리라. 한창 추워지는 초겨울 어느 날 귀순이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느랍시고 또닥거리는데 희성이가 마침 징검다리를 건너오다가, 이걸 보고 장난 잘 하는 아이인지라 슬그머니 돌멩이 하나를 들어 귀순이가 있는 앞에 퉁 하고 던지는 바람에 그만 물이 튀어서 귀순이가 옷을 함빡 적셨다. 이걸 본 희성이는 너무 우습고도 고소해서 징검다리 중간에 선채 깔깔깔 웃다가 그만 고무신 한 짝을 물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귀순이는 이걸 보고 고거 싸다고 가만히 흘러가는 고무신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던 모양인지, 제 앞으로 흘러가는 고무신을 빨래 방망이로 끌어 내어 희성이에게 주었더니, 희성이는 그만 얼굴이 빨개서 고무신을 받아 신고는 뺑소니를 쳤다. 희성이도 컸다. 귀순이도 컸다. 아니 경구는 더 컸다. 세월이 잠깐이다. 빠알간 아침해가 떠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희성이와 귀순이의 결혼식이 지나니 이 냇가는 전같이 조용하다. 경구는 몇 날이나 더 이 곳에 머무를는지 모르겠다.  이건 또 누구의 휘파람이냐, 경구로구나. 이 쪽 건 누구냐? 영일 테지, 옳아 영이다. 경구와 영인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으냐? 그럴 테지, 삼 년이나 모아 두었던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테지. 경구와 영인 내 옆에 와 앉아 별별 이야기를 다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돌아간 영이 할아버지 이야기를 또 시작한다. 경구는 웬일인지 얼른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나는 이 부싯돌을 볼 때마다 너의 할아버지 생각이 나더라." 부싯돌이라니? 그게 사람이 부르는 내 아들 차돌이의 이름이 아니냐? 내 마음은 몹시도 두근거렸다.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하였다. 경구는 정말 내 아들을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었다. "경구야! 그게 바로 내가 여기에서 주운 것이란다. 남이하고 놀다가 주운 건데 할아버지 부싯돌 하라고 그런 거야." "그래 나두 안다, 그런 줄을. 너의 할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하시며 주시더라." "그게 바로 이 큰 돌멩이 곁에 있었어." "어디 이 돌멩이 곁에?" "응." 경구는 갑자기 무엇을 깨달은 모양이다. 차돌이와 내가 아버지와 아들인 것을 알아냈는지도 모른다.  나는 차돌이를 알아봤다. 차돌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버지!" "차돌아!" 그러나, 영이나 경구 귀에 이런 말이 들릴 리 없다. "영이야! 너 이런 큰 돌멩이 곁에 조그만 돌멩이가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나니?" 바로 이건 시집간 귀순이에게 묻던 말이다. 오래 전부터 경구가 이 곳을 떠나기 전 귀순이의 나이 아직 영이 같을 때에 묻던 말이다. 귀순이는 그 말 대답을 못한 채 나이 먹어 시집을 갔다. "큰 돌멩이는 아빠나 엄마 돌멩이 같고, 작은 돌멩이는 아가 돌멩이들 같애 … 호호호 …" "영이야? 너두 그렇게 생각되니?" 경구는 너무도 기쁘고 좋은 모양이다. "영이야? 그럼 이 차돌은 이 커단란 돌멩이의 아들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들일 게다. 그러니 우리 이걸 옆에 놓아 주자!" "참말, 그랬으면 좋겠어." 경구와 영이는 나와 차돌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는다. "차돌아 - 그 동안 잘 있었니?" "예, 아버지도 잘 계셨어요?" "응, 난 잘 있었다. 정말 나는 내가 경구를 따라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 꼭 네가 영이 할아버지 무덤 속에 들어가 있을 줄만 알았다." "나는 그 동안 경구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잘 있었어요. 내 인제 천천히 그 곳 이야기를 아버지께 해 드리지요." "그래!" "그 곳서 나는 늘 이 곳이 그립고 아버지가 그리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나두 늘 네가 그리워서 울었단다." "정말, 아버지 - 내일 모레나 글피는 경구가 또 이곳을 떠나간대요." "경구가 떠나가?" 나는 얼른 머리를 들어 경구와 영이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봤으나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벌써 저 쪽 버들 있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경구는 착한 아이다. 좋은 아이다. 우리에게 제일 고마운 아이다. 우리는 경구의 앞날이 복되기를, 그리고 빛나기를 아침마다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빌자!"  "그럽시다, 아버지." 오오, 하늘이여! 경구의 앞길에 밝은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맨발 강 소 천   소풍날 아침 학교 운동장입니다.   철이는 새 구두를 신고 왔습니다.   남이는 새 운동화를 신고 왔습니다.   그러나, 식이만은 오늘도 다 떨어진 고무신 그대로입니다.   이 질질 끌리는 고무신을 신고 어떻게 먼 소풍 길을 가느냐고, 몇 번이나 할머니를 졸라 보았으나, 새 고무신은 종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없는 소풍을 안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학교 운동장에 모인 애들은 마치 먼 여행이나 떠나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 많은 것을 어떻게 하루 동안에 다 먹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무얼 많이들 가지고 갑니다.   호루라기 소리에 아이들의 행렬은 교문을 나섭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의 입에선 저절로 노래가 나옵니다.   "산에 산에 산으로 우리 우리 가보자."   그러나, 식이는 노래는 커녕 한 반 애들 속에 섞여 따라가기도 힘이 듭니다.   해어진 고무신이 질질 끌리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지나, 아이들의 행렬이 조용한 들길로 나왔을 때, 아이들의 걸음은 한층 더 가벼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식이는 정말 더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식이는 행렬에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멈춰 선 채 식이는 다시 한 번 제 헌 고무신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식이는 고무신 한 짝을 벗어 들어 높이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랬더니 고무신은 금방 가벼운 나비 날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한 식이는 나머지 한 짝을 마저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고무신도 또 나비 날개가 되었습니다.   식이는 그 날개를 하나씩 양손에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자 식이의 몸은 그만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손을 조금 움직여 보았더니 두웅둥 하늘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야아, 이것 멋진데 … "   식이는 훨훨 날아 아이들의 행렬을 따라갔습니다.   아이들의 머리 이를 스칠락말락하며 식이는 아이들의 행렬을 따라갑니다.   "야아 - 이것 봐라. 호랑나비가 우리들과 함께 소풍을 간다."   아이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지껄였습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 "   노래까지 나왔습니다.   아이들의 행렬은 어느 새 산모퉁이를 돌았습니다.   "아이, 다리 아파! 왜 이렇게 먼 곳으로 갈까?"   벌써부터 쩔쩔매는 애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도 나비처럼 날아다닐 수가 있으면 좋을 텐데 … "   이렇게 생각한 아이 하나가 자기 머리 위로 날아가는 호랑나비를 '탁'하고 손으로 때렸습니다.   "아이, 난 새 구두를 신었더니 발이 아파서 못 걷겠어."   그러나, 식이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한 손에 한 짝씩 헌 고무신을 들고 가니까 아플 리가 없습니다.   맨발이 한결 가볍고 시원했습니다.       조그만 사진첩 강 소 천   "그리운 동생, 영식아, 순이야! 지금 너희들은 저 멀리 후방에 있다. 그러나, 또 언제나 나와 함께도 있다. 밤을 새워 가며 앞으로 앞으로 진격을 계속하다가도, 이렇게 조용한 시간이 있을 때마다, 다른 동지들은 곧 담배를 피우며, 신문과 잡지를 펴 들고 웃고 떠들어대지만, 네 형은 또 이렇게 너희들이 만들어 준 사진첩을 꺼내들고,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그러면 어느새, 너희들은 새들처럼, 내 곁에 날아와 앉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고, 우리들 사이엔 정다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식아, 순이야!    너희들이 만들어 준 이 조그만 사진첩 하나가, 얼마나 이 형을 기쁘게 하여 주는지 모른다. 이 사진첩은 내게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는, 이상한 힘을 가졌다……."    순이는 오빠의 편지를 다시 읽다가 살며시 두 눈을 감고, 오빠가 집에 돌아왔다 가던 일과, 사진첩을 만들어 드리던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벌써 두 달 전이었습니다. 순이 오빠는 일 년 반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얻어 그리운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순이 오빠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이웃 어른들까지 모여들어, 순이 오빠에게 여러 가지 일선의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순이 오빠는 일선에서 싸우던 아슬아슬한 이야기며, 또 통쾌했던 이야기를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들려드렸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순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순이와 순이 언니도 오빠를 위하여 있는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어린 영식이도 형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 어머니들은, 달걀을 가져온다, 떡을 가져온다 하여, 순이 오빠는 그만 배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순이 오빠는 다시 일선으로 갔습니다.    오빠가 떠날 때, 집안 식구들은 제각기 오빠에게 선물을 드렸습니다. 순이와 영식이도 무얼 종이에 곱게 싸서 오빠에게 드렸습니다.    오빠는 선물을 받아 들고,    "너희들까지 선물을 주니? 주는 것이니 받아 가지고는 가겠다만…… 어떻든 고맙고 기쁘다."    오빠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일선에 돌아온 순이 오빠는, 조용한 틈을 타서 영식이와 순이가 준 선물을 끌러 보았습니다. 너무 정성스럽게 싼 것이어서, 함부로 종이를 뜯기도 조마조마할 지경이었습니다. 겉종이를 벗겼더니, 그 속에는 봉투 편지 한 장 과, 또 한 번 곱게 싼 물건이 있었습니다. 선물의 종이를 뜯기 전, 오빠는 봉투를 뜯어 먼저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영식이의 형, 순이의 오빠, 그리고 대한민국의 씩씩한 군인께!"    순이 오빠의 얼굴엔 빙그레 웃음이 떠돌았습니다.    오빠는 한 자 한 자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편지의 사연은 대강 이러했습니다.    "영식이와 나는, 오빠에게 드릴 선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의논한 끝에, 여기 드리는 것 같은 조그만 가족 사진첩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재료는 아버지 어머니께서 주셨고, 푸른 리본은 큰언니가 주신 것입니다. 가족 사진을 찍은 것은, 아니, 그림을 그린 것은, 영식이 솜씨입니다. 아직 서투른 사진사가 되어서 시원치는 못합니다. 사진 설명은 순이가 썼어요. 일선에서 싸우시다 피곤하실 때마다 보시고 웃어주셔요……."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영식이와 순이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습니다.   오빠는 선물의 종이를 정성스럽게 벗겼습니다. 정말, 그 속에는 푸른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맨, 조그만 그림 사진첩이 들어 있었습니다. 겉 뚜껑에는 '승리 사진첩'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오빠는 사진첩 첫 장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씨가 씌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들은 밤낮으로 아들, 오빠, 형님의 승리를 빌고 있습니다. 어서 이기고 돌아와 주십시오."    그 다음 장을 넘겼습니다. 왼쪽 페이지에 점잖게 앉아 계신 아버지의 얼굴 ―머리카락이 벌써 절반도 더 희셨습니다. 사진 밑에는 잔글씨로 이런 설명이 씌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을 좋은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밤낮 없이 애쓰시는 우리 아버지, 우리들의 걱정 한 번에 머리카락 하나씩 세셨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 걱정을 시키지 않을게요"    오른쪽 페이지에는 어머니의 얼굴. 옛날 사진에, 주름살 하나 없으시던 어머니의 얼굴에 굵다란 주름살이 많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오빠는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  하고 불렸습니다. 갑자기 눈앞이 뜨거워졌습니다. 눈물이 어려 사진 설명이 보이질 않습니다. 오빠는 또 페이지를 넘깁니다. 왼쪽 페이지엔, 세일러복을 입은 순이 언니의 얼굴, 아주 얌전을 빼고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 설명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얌전한 우리 언니, 요즈음에는 더 말이 적어졌습니다. 국군 오빠들에게 보낼 손수건을 정성스럽게 만드느라고 꼬옥 다문 작은 입이, 한층 더 작아졌습니다."    오른쪽이 순이. 무슨 우스운 이야기를 하고, 웃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 웃음이 탁 터질 듯한 얼굴입니다. 순이 오빠 얼굴에도 빙그레 웃음이 떠돌았습니다. 설명을 읽을 사이도 없이 얼른 다음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영식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다음이 영식이. 5월 하늘같이 맑은 눈을 가진 영식이. 장래에 훌륭한 미술가가 된답니다. 지금도 자기 반에서는, 아니 전교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린답니다.    그 다음이 윤이. 한 손에 장난감을 쥐고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얼굴.    오빠는 속으로 가만히 ―윤아! 윤아! 하고 불러봅니다.    그 다음이 바둑이와 나비로 사진첩은 끝입니다. 마지막이길래 사진 설명을 읽어 보았더니,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나는 바둑이입니다. 정신 차려 집을 잘 지키겠습니다. 영식이 언니도 자 싸워 주셔요. 멍멍."    나비(고양이) 아래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나도 영식이 언니가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 부지런히 쥐를 잡으렵니다. 야옹 야옹"    순이 오빠는 사진첩을 덮고, 가만히 두 눈을 감아봅니다. 오빠는 어느새, 고향집에 가 있습니다. 지금 온 식구들과 한자리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집합!"  하는 호령과 함께 순이 오빠는 다시 싸움터에 섰습니다.   순이는 밤늦도록 오빠에게 답장을 썼습니다. 그 사연은 대강 이러했습니다.    "엊그제 언니가 보내드린 편지를 보면, 집안 소식을 잘 알 줄 믿습니다. 오랜만에 오빠의 편지를 받은 온 식구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책상 앞에 걸려 있는 오빠의 사진을 바라보며, 날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참, 어제 영식이와 나는 이런 약속을 하였답니다. 이제 겨울 방학이 되어, 통지표를 받게 되면, 우리 세 사람(언니까지 합해서)의 성적을 오빠에게 보고하자고요."    "그래, 그 성적 보고서는 내가 쓸게!"  하고 언니가 말했습니다.    "누나 혼자 쓰면, 엉터리 보고서를 꾸밀는지 모르니까, 그건 안 돼!"  하고 영식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감시단을 만들지!"  하고 곁에서 아버지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씀에 한바탕 크게 웃었답니다.    정말 우리 언니는 요즈음 오빠와, 다른 국군 오빠들에게 보낼 선물을 만드느라고 무척 분주하답니다. 우리는 그림과, 위문편지를 써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의논을 하고 있답니다.   편지 쓰기를 끝마친 순이는 오빠 사진을 쳐다보며 "그럼, 오빠, 밤 안녕!" 하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오늘 밤, 순이는 편지 먼저, 꿈속에 오빠를 찾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아래 동화는 《강소천 동화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저에겐 과거 일간 신문이나 교육지에 발표된 아동문학 작품을 스크랲해 둔 노트가 있는데, 거기에서 최근에 새로이 발견하여 뽑아올린 것들입니다.    발표 지면은 확실치 않으며 발표 연대도 1960년대, 아니면 1970년대일 거라고 짐작할 따름입니다.   문학적 가치를 따지기 전에, 발굴 작품으로서의 자료적 가치를 더 중히 여겨 여기에 공개하는 바입니다. (허동인) 꾸러기의 일요일 강 소 천     오늘은 꾸러기네 이웃 마을 학교의 운동회날입니다. 새로 학교를 지은 기념으로 인제서야 운동회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구경꾼들 속에 꾸러기와 그의 친구들도 앉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순서가 지난 뒤 아이들만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들의 경기도 있었습니다. 눈을 싸고 깡통을 때리기, 사과를 머리에 이고 달리기……. 사람들은 즐겁게 웃었습니다.   그 다음이 이웃 학교 어린이들의 순서였습니다. 많은 아이들 속에 끼여 꾸러기도 나갔습니다.「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맨 먼저 달리리 시작한 게 꾸러기였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뒤밀려오는 많은 아이들에 섞여 꾸러기는 넘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등수에 들지 못한 것은 물론 겨우 꼴찌를 면했습니다.   꾸러기는 무척 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또 한번 다른 학교 아이들의 순서가 있었습니다.「속셈 경기」였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꾸러기가 나섰습니다.   다른 애들보다 속셈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아까 뛰다가 넘어진 게 분해서 또 나온 것입니다.   「탕!」 그러나 웬일인지 꾸러기는 딴 애들보다 늦게서야 문제를 쳐들고 선 곳까지 왔습니다.   달리던 아이들은 모두 여기 와서 발이 땅에 붙기나 한 듯 서서 종이에 쓴 숫자만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 아이 하나가 빠르르 앞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꾸러기 동무들은 속으로   '저 자식이 왜 저렇게 먼저 달릴까? 먼저 가면 뭘해? 답을 맞춰야지. 또 틀렸어!' 하고 생각햇습니다.   그 다음 아이들이 하나둘 달려갔습니다. 꾸러기를 처음에 앉히고 뒤이어 오는 아이들을 차례로 앉혀 놓았습니다.   이제 한 사람씩 가만가만 답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속셈 경기를 맡은 선생님이 꾸러기를 불러 일으키더니 자기 귀에 대고 가만히 답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꾸러기가 뭐라고 했는지 선생님은   "오―케! 일등!" 하며 꾸러기의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꾸러기 손에 1등 기가 쥐어졌습니다. 꾸러기 친구들은 서로 마주보고 놀랐습니다.   꾸러기는 빨래비누 석 장을 상으로 받아가지고 친구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왔습니다.   '오늘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야지.'   꾸러기 가슴엔 이런 생각이 꽉 찼습니다.   "얘, 창덕아! 너 어떻게 그렇게 빨리 속셈을 했니? 틀리지 않구……."   "문제가 쉬웠어. 숫자 넷을 더하는데, 4·5·6·7이 아냐? 넷, 다섯, 여섯, 일곱……. 문제가 쉬우니까 달려가면서 답을 생각해 냈지.   "참, 그렇구나!"   "오늘은 장난꾸러기가 꾀꾸러기가 됐구나!"   아이들이 즐겁게 웃었습니다. 암소와 돼지 강 소 천   미야가 집으로 막 달려 들어오려는데 어디서 하모니카 부는 소리가 뿡빠뿡빠 들려왔습니다.   미야는 소리나는 쪽을 바라봤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당에 앉아 있는 암소가 옥수수 속을 물고 하모니카 부는 시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응? 네가 하모니카를 불고 있니?"   "그래! 이리와. 이 하모니카 네게 주려구 내가 만든 거야."   "뭐? 네가 하모니카를 만들어?"   "자, 이거 불어보면 알 게 아냐?"   암소가 주는 하모니카를 받아들고 미야는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옥수수 알맹이를 다 뜯어먹고 두 줄만 남겨 논 옥수수 속입니다.   "이게 하모니카야?"   "글쎄, 어서 불어 봐. 멋진 소리가 날 테니. 미야는 여름내 내게 풀도 뜯어다 주고 물도 길어다 주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새해 선물로 주는 거야."   미야는 입을 얼른 대고 불어봤습니다. 정말 뿡빠뿡빠 멋진 소리가 났습니다.   "미야는 올해가 우리들의 해라는 것을 알 테지?"   "그럼 알고 말고."   "미야는 왜 해마다 짐승의 해가 있는지 아나?"   "그건 나도 잘 몰라."   "그건 말이야, 짐승에게두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거던. 그래서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은 버리라고 있는 거야."   "그래? 그렇지만 소에게야 좋은 점이 없지 않아?"   "미야야, 너 그게 무슨 소리니?"   "사람들은 너희들을 가리켜 이라지 않아?"   "그런 사람은 우리들보다 열 곱 더 미련한 사람이야. 우리들처럼 부지런하고 참으성 있고 끈기 있는 짐승이 어디 또 있을까?"   "나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어서 추운데 가지고 들어가 봐."   "고맙다, 암소야!"   미야는 대문을 향해 막 달려갑니다. 바로 그 때 저쪽 돼지 우리에서 돼지가 꾸울꿀 울고 있었습니다.   "이놈의 돼지야, 미련한 건 너다!"   "뭐? 내가 미련해? 미련한 건 소지, 짚만 얻어먹고도 일만 하는 게……."   "뭐? 일만 하는 게 미련해? 넌 놀고 먹다가 고기를 선사하는 거야."   "나쁜 기집애 같으니……. 조그만 기집애가 고런 암통스러운 소리를 한담."   "너 하모니카 만들 줄 알아? 모르지? 그러니까 네가 미련한 놈이란 말이야."   "뭐? 하모니카? 어디 보자!"   "자, 이거 봐! 어디 한 번 불어봐."   돼지는 하모니카를 받아들더니 낮은 소리서부터 차례로 하나씩 불어 올라갑니다.   "하하하……, 하모니카도 불 줄 모르는 바보! 미련한 자식!"   돼지는 화가 나서 하모니카를 마당에 던져 버렸습니다.   미야는 얼른 하모니카를 집어들었습니다.   미야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돼지는 차례로 하모니카를 불어 올라가며 옥수수알 두 줄을 몽땅 뜯어 먹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하모니카에서 소리가 날 까닭이 있습니까? 미야는 큰 소리로 울어버렸습니다.   미야는 문을 열고 앞마당 암소 있는 데로 갑니다.   "암소야, 내 꿈이야기 할까?"   그러나 암소는 모른 척합니다.   '하모니카를 못 쓰게 만들었다고 화가 났구나!'   미야는 댓바람에 돼지 있는 데로 달려갔습니다.   "이놈의 돼지! 내 하모니카 내 놔!"   그렇지만 돼지는 들은 척도 안하고 꿀꿀꿀 먹을 것만 달라고 야단입니다.   짱구와 왕눈이 강 소 천   "짱구! 짱구!"   "짱구야!"   아이들마다 뒤에서 이렇게 놀려대도 인호는 못 들은 척했습니다.   "짱구야!" 하고 마주 서서 부르면 인호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키도 크고 몸도 튼튼해 보이는 인호가 왜 저렇게 바보 노릇을 하는지 아이들의 눈엔 이상할 정도이었습니다.   "이제 전학해 온 지 얼마 안 되니까 그렇지! 조금 더 있으면 인호는 우리 반에서 제일 힘센 아이가 될 거야!"   어떤 아이가 이런 말을 했더니,   "인호가 제일 힘센 아이가 돼? 넌 도무지 사람을 볼 줄 모르는구나! 인호의 머리에 힘이 들어 있단 말이야! 크기만 했지, 그건 호박장군이야!"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호박정군을 넌 모르니?"   그 말이 옳을는지도 몰랐습니다. 키가 크고 아주 힘이 없는 애가 '짱구'라고 놀려줘도 인호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이라도 동무들이 인호를 '인호'라고 부르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짱구'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인호네 반에서 제일 싸움을 잘 하는 명덕이란 애가 저보다 약한 애와 싸우고 있는 것을 인호가 보았습니다.   싸움이라기보다 명덕이가 영구를 그저 까닭없이 못 견디게 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명덕이를 나무라지는 않았습니다. 나무라는 게 다 무엇입니까. 명덕이가 하는 짓이면 다 잘한다 했고 옳다 했습니다.   그러나 인호는 명덕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명덕아! 왜 남의 구슬을 빼앗니?"   물론 이것은 명덕이더러 야단을 치거나 따지려드는 말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부드럽게 사정하는 말투였습니다.   "뭐가 어째? 이 짱구 자식아! 네게 무슨 상관이 있어? 건방지게. 저리 가!"   그러나 인호는 다시 한번 정다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명덕아! 줘라! 영구는 너보다 어리고 힘도 약하지 않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명덕이는 인호를 한 대 후려 갈기려고 주먹을 들어 인호의 얼굴을 향해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인호는 언제 그걸 알았는지 곧 명덕이의 내민 손목을 꼭 잡았습니다.   "아야얏!"   손목을 꼭 잡힌 명덕이는 금시 죽어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떻게나 꼭 잡았던지 인호의 손아귀에 손목을 잡힌 명덕이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새 아이들이 죽 둘러섰습니다.   "어서 영구에게 빼앗은 구슬을 돌려 줘."   아이들은 처음 이런 인호의 묵직한 말소리를 들었습니다.   손목을 놓아준 인호는 명덕이가 이제 어쩌나 하고 가만히 선 채 쏘아보고 있습니다.   명덕이는 얼른 포케트에서 구슬 다섯 개를 꺼내어 영구에게 주었습니다.   "왜 다섯 개야? 열 개지!"    그러니까 명덕이는 다시 다섯 개를 더 꺼내어 영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명덕이는 비실비실 그 곳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아이들이 인호 둘레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명덕이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들도 이젠 명덕이 뒤를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내 말이 맞았어! 인호는 힘이 세지만 뽐내지 않은 거야! 그렇지만 약한 애를 못 살게 구니까 화가 난 거야!"   "그래! 이젠 아무도 명덕이 부하가 되진 않을 거야!"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아무도 인호를 '짱구'라고 부르는 애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아이들은 명덕이를 '왕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커서만이 아니라 겁이 많다는 뜻으로 '왕눈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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