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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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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미학, 그 시적 통찰 이덕주 1.  『우체부』의 시적 의미 문덕수의 『우체부』(시문학사, 2009)는 본문만 500행에 가깝다. 서문인 「무좀」(머리말)을 제외하고 1부 조셉룰랭 포함 6부로 구성된 장편시집이다. 근래에 보기 드문 장시이며 체험에 기초하면서도 종교와 철학, 역사를 아우르며 초월적 은유로 인간의 특성과 본질을 탐구하는 장엄한 시세계를 보여준다.  문덕수의 『우체부』는 그의 필생의 역작으로 자신의 총체적 정신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문덕수’라는 시인 자신이다. 그 때문에 『우체부』에 대한 문학적 평가를 어떤 한정된 이론으로 섣부르게 분석하는 작업은 유보되어야 한다. 문덕수가 시집의 제목을 ‘우체부’라고 명기한 의도를 시에 대한 유형분석 이전에 우선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문덕수는 생이 도달하는 최종목표지점을 엄정하게 응시하며 자신을 의식의 흐름 속에 의탁한 채 초탈의 자신과 대면하며 『우체부』를 써내려갔다고 보아진다. 서서히 소멸해 가는 자신의 본연에 대한 냉엄한 숙고와 통찰을 거쳐 자신의 시적 언어로 내면의 어둠을 조명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대립적 요인들을 용해시키며 자신의 모든 이상과 사상을 『우체부』에 녹여낸다. 이것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경계를 지우고 시적 무아행을 통해 분별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일이다.  ‘우체부’에 대한 정밀한 탐구는 문덕수의 『우체부』를 이해하는 토대이다. 그는 「우체부」 소제목에서 “다시 태어나 우체부 되고 싶네”라고 언술한다. 그 의미 역시 지금까지 자신의 생에서 ‘우체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남은 생에 지금껏 못 다한 ‘우체부’에 대한 소임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덕수는 자신의 삶과 연계해서 『우체부』의 6부로 나누어진 시 행간마다 ‘우체부’를 다양하게 형상화하며 유효하게 배치한다. 독자가 여러 각도에서 ‘우체부’를 조감할 수 있도록 상상을 지원한다. 언제고 ‘우체부’와 연결하여 시대를 초월하고 세상과 다양하게 관계하도록 안배하려 한다.  2. 『우체부』의 이해방식 문덕수의 『우체부』를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해방식을 도입하려 한다. 첫째, 문덕수 시가 지닌 선입견 없이 『우체부』 시편을 이해해야 한다. 시집의 행간마다 지닌 포괄적 의미를 객관적, 주지적으로 파악하며 의식의 흐름에 맡겨두고 시인이 갖는 본류의 의식세계에 몰입해야 한다. 어떤 예단 또는 특정한 방법론으로 그의 시를 분석해서는 안 된다. 그가 설정해 놓은 시의 세계에 자유롭게 정신의 본령을 맡겨 놓으며 그가 선도하는대로 연대감을 갖고 동감의식에 젖어들어야 한다.  그만큼 그의 시가 던지는 메시지가 진폭이 크고 확산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문덕수 시인의 인생역정을 통한 즉 그가 생을 통찰하고 인식하는 바탕을 형성한 그의 정신세계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는 1950년 8월 한국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 1951년 4월 육군종합학교 수료, 육군소위로 임관, 조사단에 배속되어 1953년 6월 철의 삼각지대에서 중상(좌측대퇴부 골절, 이마에 파편조각이 박히고 눈썹이 찢김)으로 후송, 야전병원-수도육군병원(서울)-제1육군병원(대구, 경북대의과대)으로 후송 가료 중 2년여 만에 불편한 몸으로 제대(육군중위)를 하였다. 이러한 전쟁에서 비롯된 상흔이 장시 『우체부』의 모티브 중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체부』의 시적 진실이라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시인의 과거 편력에 대한 정보파악도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셋째, 『우체부』를 관통하는 ‘우체부’가 지닌 의미를 주시해야 한다. ‘우체부’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한다. 편지와 엽서, 소포 등 우편물을 가방에 넣고 의뢰인의 주문대로 수취인에게 일정한 시간에 정확하게 내용물을 전해주어야 한다. 문덕수의 수많은 화자들은 『우체부』에서 메신저의 내용물을 정신적 세계의 전달과 고양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인간존재의 질문을 대신하는 ‘우체부’의 우편물의 내용을 다양하게 변주시킨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우편차량과 오토바이 등 운송수단의 발달로 택배 등 배송수단이 다양해지고 있다. 공적인 업무수행이므로 그들의 복장은 통일되어 제도권 안에 스스로를 예속시킨다. 그들은 전달자로서 자신이 전해주어야 할 내용물을 결코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의 의무이자 사명이다. 때로는 목숨까지 담보로 해야 한다. ‘우체부’가 지닌 책무는 처음 ‘우체부’ 역할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의식에 그렇게 규정을 준수하도록 각인된 것이다. 문덕수가 설정한 ‘우체부’의 사명감을 인지하면 『우체부』를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우체부』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올연히 보여주는 작품으로 내용과 형식면에서 어떤 방법론만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우체부』는 스스로 한정된 문학적 수사와 방법론을 부정한다. 『우체부』는 독립된 세계를 구현하며 특정한 시의 이해 독법을 수용하지 않는다. 『우체부』는 문덕수를 대체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장르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트인 시야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체부』를 근접해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덕수는 『현대문학의모색』(수학사,1969), 『한국현대시론』(선명문화사,1976), 『현대시의해석과 감상』(이우출판사,1982), 『현실과 휴머니즘문학』(성문각, 1986)과 시리즈로 『한국모더니즘시연구』(1981), 『문학개론』(1981), 『문학일반의이해』(1992), 『오늘의 시작법』(1994), 『시론』(1992~2002), 『모더니즘을 넘어서』(2003), 『니힐리즘을 넘어서』(2003) 등 수많은 시 이론서를 발간한 시인이다. 이와 병행해서 195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황홀』(세계문화사, 1956)을 시작으로 최근의 『우체부』까지 수많은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다. 이처럼 그는 시 이론을 겸비한 시인이다. 『우체부』를 단편적 또는 부분적으로 분석하면 안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즉 문덕수의 『우체부』는 어떤 특별한 문학이론만을 한정적으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다섯째, 문덕수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수많은 시적 테크놀러지를 자신의 시 속에 능숙하게 풀어낸다. 그동안 자신이 출간한 수많은 시문학이론연구총서를 참조하면서 은유와 상징 등 일반 수사기법을 뛰어넘는 초월은유가 더 응용되고 있음을 주시하여야 한다. 또한 이러한 기법에 더하여 그가 고안한 수사기법을 적용하면 좀 더 폭넓게 『우체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그가 수용한 테드 넬슨(1965년)이 고안한 문서 연결의 방법인 하이퍼 텍스트도 그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 문덕수는 경험하지 않은 과거와 경험했던 과거가 한 공간에서 교직이 되게 한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의식과 무의식이 병치되고 합일을 이루게 한다. 이 점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평자가 제시하는 다섯 가지 방식만으로 『우체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체부』는 문덕수의 의식 속에 체화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총체적 지각이 적재되어 시의 내면을 형상화하여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층의 내면세계는 문덕수 자신의 생래적 체험과 독서 등 지적 욕구로 습득된 지식과 성찰, 통찰을 통한 미학적 심화과정이 병존한다. 또한 논리적 사고를 뛰어넘는 자기 신뢰와 자기 확신을 토대로 수렴적 창의성을 한껏 발휘하는 작시(作詩)의 과정을 『우체부』라는 실체로 보여준다.   3.  『우체부』의 진행 1부. 조셉 룰랭  한 생의 시작으로 한 시인의 운명이 개시되고 있음을 시적 장면으로 보여준다. “노끈 한 줄 날아와 네 어깨에 걸리고/ 고무줄처럼 늘어져도 나긋나긋 끊이지 않는/ 우체부 ‘가방’하나 달랑 달렸네”라는 문면을 통해 ‘우체부’가 될 수밖에 없는 한 시인의 운명을 ‘가방’에 의해 예정한다. 그곳은 금와를 만난 유화(柳花), 그 신화 속에서의 ‘알’과 ‘사문(沙門)의 바랑’처럼 ‘우체부’의 소명의식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반 고흐의‘우체부 조셉룰랭’ 그 이상적인 외형은 임진란과 시인이 겪은 전쟁의 상흔과 시대는 다르지만 지향하는 방향이 일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문덕수의 의도에 의해 전면에 배치된 빈센트 반 고흐가 남겨놓은 초상화 「우체부 룰랭씨」(1888년작)에 주목해야 한다. 이 작품은 더부룩하게 반 이상 얼굴을 덮은 수염과 목덜미를 덮은 모습으로 당시의 ‘우체부’의 규정된 복장을 하고 있다. 어깨를 벌리고 한쪽 팔을 책상에 올려놓은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단정하고 늠름한 자세가 직업에 대한 자긍심마저 감득하게 한다. “‘포스트(postes)’ 모표가 또렷한/ 앞 차양 짤막한 캡을 썼”다고 하듯 통일된 모자와 복장이 주는 엄숙함은 반 고흐의 작품 「우체부 룰랭씨」가 ‘우체부’의 상징물인 모자와 복장을 갖추지 않았다고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반 고흐의 작품, 「우체부 룰랭씨」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우체부』의 이해방식에서 강조했듯이 문덕수의 『우체부』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드러낸다. ‘우체부’의 역할처럼 1부. 조셉 룰랭에서 9.96초의 빠른 속도를 내는 것도 두 다리, “186kg이 일순 두 팔에서 가슴과 허리로” 받치는 힘이 장미란(張美蘭)의 ‘두 발’에서 비롯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우체부’의 사명감을 일깨우며 그 사명감을 지지하고 올바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강건함이 최우선을 강조한다. 문덕수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굳게 해준 것도 체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보라, 보리수 밑의 앉은이 두 발을 무릎에서 꺾고 접어 결가(結跏)하였네 오른발을 왼발의 넓적다리 위에 얹어 바위처럼 꾹 누르고 아래로 내린 두 손가락 끝으로 두 세계 잡아 이으셨네  포탄이 날아올 땐 인지(人指)를 펴어 밑을 가리키고 전란과 굶주림 속의 모든 염원과 기도를 도맡아 손바닥을 위로 하고 다섯 손가락 다 펴니 두 발의 결과부좌가 받드네           어버이 부축한 외나무다리 길도            5백킬로 상공의 무중력 궤도도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매고 뛸 우체부도            두 다리네 ‘우체부’ 역할수행은 두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데서 비롯된다. ‘두 발의 결과부좌가’ 있음으로 깨달음의 상징인 ‘보리수 밑의 앉은’ 부처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발의 결과부좌가 받’듦으로 “아래로 내린 두 손가락 끝으로 두 세계 잡아 이으셨”다고 화자는 언설한다. ‘두 다리’는 세상과 연결하며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두 다리’는 세상을 딛고 떠받치는 지지대를 상징하는 힘이다.  ‘두 다리’가 없으면 존재의 이동은 불가능하다. 살아 있음을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다리’의 동작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시인의 장시 「우체부」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우체부’가 되어야 한다.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매고 뛸 우체부도/ 두 다리”임을 강조하며 화자는 지금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우체부’가 되어 자신이 설정할 수많은 ‘우체부’와 각자의 ‘두 다리’로 동행하기를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2부. 격군들 임진란 당시 배의 노를 젓는 격군(格軍)의 임무는 무엇일까? 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발진 명령을 복창으로 전군에 하달될 때 복창하면서 자신에게 할당된 노를 힘껏 저어야 한다. 자신의 역할을 완수할 때 배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격군이 있어야 배는 움직인다. 격군이 있어야 배는 앞으로 나아간다. 당시, 그들 격군이 있어야 사부(射夫)도 화살을 쏠 수 있고 해전을 치를 수 있다. 격군이 자기 역할을 다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확대해석하면 격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쟁의 승리가 좌우되며 나아가 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고 결정된다.  흘러내리는 MI 총대를 메고 전장에서 행진을 이끄는 구령에 따라 움직이지만 총대가 또 흘러내린다.           아이고매 죽여줍소 아이고매 죽여줍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유고메 죽여줍쇼 데이고메 죽여줍소로도 들렸지  옴마니밧메훔으로도 들렸지           그 소모품 육군소위 지금 더욱 궁금하네            예카스민 사마예 예카스멘 사마예 힘이 부쳐서 화자는 “아이고매 죽여줍소”를 반복하며 저절로 외친다. 문면을 통해 격군의 임무수행이 힘들고 한국전쟁에 임하던 화자가 된 “그 소모품 육군소위 지금 더욱 궁금하”다고 회상한다. ‘우체부’의 임무수행이 그만큼 힘든 여정임을 언어유희와 함께 언어가 주는 감각적 형상화로 여과 없이 보여준다. “예카스민 사마예”가 “영원을 중시하는 인도인의 시간관념의 일단을 암시”하듯 격군과 육군소위의 임무가 시간을 초월하여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   지금 ‘우체부’의 임무수행을 하는 ‘육군소위’는 자신에게 닥친 고행을 감수하고 있다. 회피할 수도 없다. 힘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절대자를 부르고 있다. 지금 이 시간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목청껏 자신의 절대자를 외치며 절대자에게 의탁하는 일이다. 헤드라이트를 끈 군용차들의 앞차를 따라가고 그곳에 진흙이 튕겨지고 도로는 진창이다. 네 우체부 가방도 진흙투성이네 병사들은 군복 위로 둘러쓴 판초에 머리만 내어놓고 덜커덩 덜커덕 흔들리는 자세를 가누면서 전방을 보고 두 눈을 부릅뜨고 가네 화자는 ‘진흙투성이’가 된 ‘우체부’의 가방을 그 절박한 순간에도 꼭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진흙투성이 속에서 “덜커덩 덜커덕 흔들리는 자세를 가누면서” 임무수행중이다. 전쟁의 한가운데, 생은 계속되고 생이 연결되기 때문에 ‘우체부’의 임무가 병존하고 있음을 표상한다.   가느다란 쇠소리의 저 철모는 안전할까  풀과 잎사귀와 나뭇가지로 위장했네  한 손에는 소총을 들고 어깨는 기관총을 메고 가슴에는 수류탄이 달렸네 구릉이나 언덕을 돌처럼 굴러서 오르내리고 비오듯 쏟아지는 포화 속 고지를 오르며 진격하는 보병이라는  이름의 저들은 누구일까 임란 때 사부 격군의 아들들일까 허리에 권총을 찬 소대장도  어깨는 한 자루 카빈 등에는 포탄 1발 한 병사는 포신(砲身)을 들고  또 한 병사는 포가(砲架)를 메고 또 다른 병사는 포반(砲盤)을 짊어지고 헐떡거리는 저들은 누구일까 발사의 반동으로 후진하는 포신에 부딪쳐 마냥 스스로 닦고 아끼던 105미리 야포 밑에  제 몸 영원히 눕고 싶네 화자는 고지를 오르며 진격하는 보병이 되는 일은 “임란 때 사부 격군의 아들들”이기에 그 또한 가능한 일이었음을 시적 정황으로 보여준다. 시대를 초월해 “임란 때 사부 격군의 아들들”인 보병들은 ‘격군’이 그랬듯 시공이 다른 장소에 위치하면서 “헐떡거리는 저들”이 되어 임무를 계속한다. 마찬가지로 ‘105미리 야포’와 함께하는 병사들도 공동운명체가 되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한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같이 아끼는 “105미리 야포 밑에/ 제 몸 영원히 눕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체부’의 임무수행은 멈출 수 없이 계속된다.  중단 없이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지속되어야 한다. 임진란과 한국전은 한국내의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그대로 연결되는 장면이다.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다. 화자는 고난의 연속이지만 전쟁이라는 정황을 운명으로 수용하려 한다. 일상적 언어를 뛰어 넘어 ‘우체부’의 생생한 의미가 상존하고 있음을 전란의 장면을 형상화하며 현장감 있게 보여준다. 3부. 불의 기호  인간의 속내는 알 수 없는 것. 오로지 붓다만이 인간의 욕망, 그 근원을 보았다고 전제하며 화자는 언술한다. “네 보석 눈에서 타오르는 불기둥을 보”듯이, “차디찬 샘 같은 눈 속에 들어앉은 시뻘건 불가마를 보”듯이” 그것은 우리가 보는 ‘눈’에 의해 결정이 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는 인간의 내면을 볼 수 있다.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고 해도 ‘라이오스 왕’은 끝내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화자는 ‘오이디프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본다. 그들은 왜 그러한 숙명의 살육을 피할 수 없었을까? 화자는 독자에게 그 근본이유를 숙고하기를 주문한다.    조카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수양이 보았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단종의 눈에 비친 ‘불의 칼’. 사도세자의 눈에 어린 ‘불의 왕관’, 그에 대비되는 욕망의 불꽃은 제어할 수 없다고 시적 화자는 비유를 계속한다. 이어서 “청령포에는 강물 위로 화염”, “욕망의 불꽃” 등 “저 불의 막대기 불의 칼 불의 포탄 불의 핵......” 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굴뚝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 트나 가지 한 개”밖에 점유하지 못한다며 인간의 욕망도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래도 ‘가방’을 멘 ‘우체부’의 임무는 계속된다. 원통리, 평촌에도 가고 개(犬)고개도 넘는다. 포탄이 날아와도 ‘우체부’의 소명은 멈출 수 없다. 삶과 죽음의 연속선상에서 살아남는 자의 임무는 계속된다. 죽음에는 남과 북의 구별이 없음과 죽은 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몫이 더 크다는 사실을 화자는 연속해서 강조하려 한다. 죽음 앞에서도 각자에게 주어진 ‘우체부’의 임무를 순명처럼 받들고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병사들은 뭣인가를 중얼거리며 죽어갔네  으으이 윽, 말하기 전의 시니피앙 말이 끝난 뒤의 소리를 내지르며 죽어갔네  한숨 중얼거림 신음 절규 호곡           어머니 불효자 용서하세요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 ‘뻑’하고 죽습니다.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  더그럭 덜그럭 쟁그랑 딱 딱 왁자그르 와글북적 미미발휼(浘浘浡潏) 우체부 조셉 룰랭의 금단추 벗는 소리 겉보리 찐쌀 된장 미역이 한데 섞이는 소리 논두렁에서 참 함지를 이고 가는 처녀의 속치마 소리 요강에 조용히 앉아 잠이 든 여인 요조숙녀 죽치고 마주앉아 고스톱하는 친구 죽마고우 施發勞馬 始發奴無色旗  캥캥 캥 대굴대굴 팽이처럼 돌면서 찍 찍 찍 찌르르 윙윙윙 울면서 몰려오는 두개골들 발끝에서 어깨까지 차도르(chador)를 둘러쓴 주검들 피에타의 숨소리 피에타의 맥박 소리 깨어지는 사금파리가 아니라  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네 편지와 엽서는 모두 불탔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실이 극도로 심각하지만 화자는 그 이면에 유희적 펀(pun)의 요소를 중시한다.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 ‘뻑’하고 죽습니다.”와 같이 의도적 장면의 병치로 삶과 죽음이 순간순간 교차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한다. “요강에 조용히 앉아 잠이 든 여인 요조숙녀” 등 해학적인 면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역설적으로 전쟁이라는 국면을 더욱 긴장하게 한다.   전쟁의 상흔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보여준다. “윙윙윙 울면서 몰려오는 두개골들” 사이로 “발끝에서 어깨까지 차도르(chador)를 둘러쓴 주검들”이 널려 있다. 화자는 예수를 무릎에 안고 “피에타의 숨소리 피에타의 맥박 소리”를 상상하며 흐느끼는 성모마리아를 떠올린다. 그만큼 전쟁은 주검이 난무한다.  “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 뿐인 전쟁, ‘우체부‘가 소중하게 간직하던 “편지와 엽서는 모두 불탔”음을 알게 된다. 죽음을 무릅쓰고 소중하게 가방에 간직하고 다니던 우편물마저 이미 소실되었다.  전해 줄 내용물이 없다. 불 속에서 모든 것이 불탔다. 전쟁은 그만큼 참혹하다.  화자는 외적인 파괴의 전쟁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적 세계까지 피폐하게 하고 철저히 분쇄시켜 버렸음을 보여주려 한다.   ‘우체부’가 수취인에게 전달해야 할 편지와 엽서를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 “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를 듣는 극한 상황으로 치달을 때 편지와 엽서까지 불탔다는 결과는 그만큼 참혹한 정황을 드러낸다. 소중히 간직한 영혼의 메신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나 그 내용물의 소중함만은 인식하고 내용물을 보듬어 안으면서 견디어 온 ‘우체부’의 삶이다. 화자는 지키고 전해주어야 할 대상을 상실했으니 무엇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시 확인할 것인가? 화자는 질문을 반복한다. 과연 자신의 내면을 북돋고 추스르는 근원적인 지향이 가능할 것인가? 화자는 자신에게 질문을 반복한다.  4부. DMZ ‘3부 불의 기호’에서 전제하듯이 DMZ는 서로의 필요조건에 의해서 설정된다. 6.25전쟁의 전운은 계속되고 화자가 감내하는 ‘우체부’의 역할은 일시적으로 흐트러진다. 야윈 엉덩이에서 춤추듯 덜렁거리는 가방 속에서  장총(長銃)은 막대기처럼 두 동강으로 부러지네  압록강 임진강 철교도 한갓 장난감이네  남쪽의 일요일 새벽을 놀라게 한 소련제 T34의 캐터필러도  종이네 납작 구겨지네 목에 걸려 되넘어간 유언은 많으나 그 사람 안 보이고  받을 사람 다 어디로 갔는지 문덕수의 화자는 시인의 안목으로 “압록강 임진강 철교도 한갓 장난감이”라며 전쟁의 피해는 인간의 힘을 무력하게 하는 정황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묘파한다. 특히 “목에 걸려 되넘어간 유언은 많으나 그 사람 안보이고/ 받을 사람 다 어디로 갔는지” 하는 문면은 영혼의 전령자인 ‘우체부’로서 자긍심과 소명마저 흔들리게 한다. 전쟁의 상흔은 그만큼 인간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수반하게 한다.   총을 겨누어 맞선 중간을 긋고 남북으로 2킬로씩 물러나게 하네 ...(   ).... 또 어디서 무장한 헬멧이 돌돌 말아온 쇠그물 다발을 세워서 돌리며  서에서 동에까지 144마일을 빈틈없이 펴네 이러히 땅과 나라는 두 동강 나고   ...(   )....  다람쥐 멧돼지 산토끼 오가며 놀고  푸른 숲속 백로의 햐얀 몸빛 유난히 눈부시지만  철조망 안의 DMZ네 DMZ는 부정할 수 없는 적대국가와의 경계지역이다. “서에서 동에까지 144마일을 빈틈없이 펴네/ 이러히 땅과 나라는 두 동강 나고” 38선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남북으로 갈린 상황에서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은 “다람쥐 멧돼지 산토끼”와 “푸른 숲속 백로”들이다. 사람은 왕래할 수가 없다. 남북을 왕래하던 ‘우체부’의 역할이 정지될 수밖에 없다. 공(空)이 한 시대의 밑바닥을 다 읽은 듯  탕 치고 튕기네 풍선처럼 점점 부풀다간 탁구공만해지면서 저쪽으로 굴러 가네 축구선수들 발끝에 붙어 맨체스터 밀라노까지 갔다 오네 한 군데 가만히 머물지 못하지  배트에 맞아 지구를 한 번 돌면 궤도가 되지 네가 맨 그 우체부 가방의 불룩한 무(無)의 브랜드 인도인이 맨 먼저 발견한 ‘제로’지  지층의 깊은 벽을 뚫으면 그 틈에서 발원지의 먼 맑은 물소리 오줌발처럼 새어나오고 아이들처럼 응석부리고 흥얼대면서 곤히 잠자는 이 깨우네           공이 공(空)으로 굴러가네 ‘우체부’는 자신의 자정능력을 신뢰한다. “풍선처럼 점점 부풀다간 탁구공만해지면서 저쪽으로 굴러 가”듯 확장을 거듭한다. “축구선수들 발끝에 붙어 맨체스터 밀라노까지 갔다 오”기도 한다. 공(空)이기 때문에 어디든 갈 수 있다. “배트에 맞아 지구를 한 번 돌면 궤도가 되”듯 그 힘은 무한하다. ‘궤도가 되’는 상황은 그대로 고착된 상황을 대변하기도 한다. 공(空)의 유연성이다.     네가 맨 우체부 가방의 볼록한 무(無)의 브랜드  인도인이 맨 먼저 발견한 ‘제로’지 “네가 맨 우체부 가방의 볼록한 무(無)의 브랜드”는 없으면서 있는 존재를 상징한다. ‘무(無)의 브랜드’는 “인도인이 맨 먼저 발견한 ‘제로’”이다. 모든 것은 ‘제로’가 되어야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정지된 장소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곳, 무화(無化)가 이루어진 곳에서 지층의 벽을 뚫고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그 틈에서 발원지의 먼 맑은 물소리” 들리는 정화의 힘으로 회생하기 시작한다. “공이 공(空)으로 굴러가”지만 공(空)이기 때문에 그 힘은 무한 확장된다. 시공을 넘나드는 힘으로 공(空)의 영역은 경계가 없다.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DMZ이기 때문에 자정능력이 지닌 그 특별한 힘으로 갖게 되는 화해의 몸짓을 보여준다. 바람 개스 굶주림 절망 포화(砲火) 핵버섯구름도  안으로 짓이겨 빻아서 가루로 다져 굴러가네’ 존재하는 존재자의 흐름도 이와 마찬가지다. 앞 문면의 ‘사막’도 ‘바다’도 “거두어 말아 굴러 가”듯 “핵버섯구름도” “가루로 다져 굴러 가”듯이 화자는 세상의 존재자는 모두 다시 화해가 되고 하나가 되며 시간의 운행에 따른 자연의 이치를 수용하려 한다. 지진의 무너뜨린 암석을 들어올리고  깨어진 벽돌의 틈을 비집고 빛살처럼 스며들어 숨길을 빠끔빠끔 틔웠지만  수마트라 아체에서도 쓰촨에서도            그래도 공은 바닥을 치고 솟네           네 키를 넘고 북한산을 넘네           2천 7백미터 백두산 밝은 물을 한 번 돌고           예수께서 맨발로 걸어오신 갈릴리호수 위를 굴러           8천 848미터 에베레스트 정상           룸비니에서 본 싯다르타의 시선이 상기 머무는 저 바위에도 세상은 DMZ 속에 머물고 있다. 대지진을 일으키는 “수마트라 아체에서도 쓰촨에서도” 지구는 “그래도 공은 바닥을 치고 솟”는다고 하듯이 공존할 수 있는 화해의 여력은 아직 남아 있다. “2천 7백미터 백두산 밝은 물을 한 번 돌고” 그 힘은 “예수께서 맨발로 걸어온 갈릴리호수 위를 굴러/ 8천 848미터 에베레스트 정상/ 룸비니에서 본 싯다르타의 시선이 상기 머무는 저 바위에도” 그 힘을 드러낸다. 그것은 다시 시작해야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굴레다.  예수와 싯다르타, 그들을 구분하는 것조차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은 지금 서로 다름이 아니다. 부르는 이름이 예수와 싯다르타라는 차이가 있을 뿐, 공(空)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분별의 의미를 구태여 따질 필요마저 없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불이(不二)와 불이(不異)의 존재이다.    공은 스스로를 지우네  굴러가면서 제 온갖 몸짓을 지우네 날아가면서 날아간 길을 지우네 폭발과 살육 속에서도  숨쉬며 지우네 지우는 방식까지 지우네 사무실의 안팎과 도시의 미로에 가득차 넘실거리는 것 만지거나 볼 수는 없으나 나무와 꽃을 가꾸듯이 기르고 있는 300층을 300층으로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 213360 네 군번까지 지우네  피구슬 번호의 한 자 한자  전선(電線)에 한 줄로 나란히 앉은 꽃새로 폴폴 날리네 변화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3부 “불의 기호”에서 ‘우체부’ 역할이 정지되었으나 회생이 된 공(空)이 지금까지 시도했던 모든 방식을 부정하면서 다시 긍정의 눈으로 대상을 보며 화해의 몸짓을 보낸다. 그곳에 대상을 향한 지우고 지워서 끝내 “지우는 방식까지 지우”는 무화(無化)된 공(空)이 있다. 모든 것은 공(空)이 되어 다시 시작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300층을 300층으로 꿋꿋이 세우고 있는 것”과 같은 자존과 함께 화자가  직접 몸으로 겪은 전쟁인 “213360 네 군번까지 지우”며 몸의 기억까지 지우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어서 역설적으로 “전선(電線)에 한 줄로 나란히 앉은 꽃새로 폴폴 날리네”라고 언술하며 새로운 평화, 화해의 몸짓을 상징하듯 ‘한 줄로 나란히’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DMZ의 이면을 확대해서 보여주며 새로운 희망을 예시하는 방향전환을 하고 있는 것이다.  5부. 모데라토  전쟁에서의 상흔을 딛고 새롭게 살고 있는 삶에서 몸에 각인된 전쟁의 기억은 자신의 몸이 존재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설파한다.  과거의 공자님, 예수님, 부처님의 생존당시의 삶이 인간의식에 내재되어 영원한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 그들의 생에 견준다면 문덕수 자신을 포함한 현세를 살고 있는 자는 “흙탕물 속에서 아직 칠삭둥이로 물장구”친다고 전제하면서 삶의 완성이 머나먼 길임을 인식시키려 한다.  자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신뢰를 보내는 “고물 헬리콥터의 유리조각”을 다듬어 만든 ‘인장(印章)’이 하찮아도 자신에게는 중요한 징표이다. 인장에 대한 기억이 그렇듯이 육신이 갖는 기억이 의식 속에서 자신을 서둘러 현실로 옮겨와 ‘나이만큼 몽글’해지고 모호해졌다는 실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넓적다리 뚫리고 허벅지뼈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눈썹을 가로질러 긁고 이마 앞머리 모두 찢어진 온 몸  피의 파편을 둘러썼네 죽음의 그물 둘러썼네 그때 너를 번쩍 들어 어깨에 맨 이는? ...(   )....           아직은 숨이 붙어 있어, 얼른 서둘러 “허벅지뼈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이마 앞머리 모두 찢어진 온 몸”이 된 “죽음의 그물 둘러” 쓴 총탄 속에서 아직도 살아 있음을 의식하며 “아직은 숨이 붙어 있어. 얼른 서둘러” 각인된 그 소리는 누구의 외침일까? “너를 번쩍 들어 어깨에 맨 이는?” 누구일까? 오랜 시간이 경과한 지금 무의식 속에서도 자신의 몸을 소생시켜야 한다는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전달하는 화자자신이 자신에게 던지는 외침이고 물음일 것이다. 포탄이 텐트를 물고 날아갈 듯이 펄럭이는 야전막사에서 수술의 칼을 잡은 이는 누구일까 깁스 붕대 속의 미라에게 계속 맥박이 살아 발딱발딱 뛰도록 신비의 바늘을 지른 손은 누구일가 포격에 쫓기면서 경복궁 옆의 수도육군병원까지 실어나른 이는 누구일까 신(神)을 보지 못했다고 함부로 입 열지 말라 이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 도저히 생환할 수 없는 여건인데 긍정적 상황이 연결되어 화자는 삶을 지속한다. 한 치라도 어긋나면 생환할 수 없는데 기묘하게 삶의 방향으로 전환을 거듭하며 죽음을 벗어난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화자인 문덕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회고하면서 실체적 고변이니 자신만큼은 그 상황을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을 살리기 위한 신의 기막힌 안배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 “신(神)을 보지 못했다고 함부로 입 열지 말라”는 설정은 이 세상은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는 자각과 함께 처절한 삶의 국면에서 그 당시 화자 자신이 다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밤의 대구(大邱) 제1육군병원이네, 들것은 다시 트럭으로 옮겨지고  ...(   )... 만발한 한겨울의 꽃이네 그때 네 인장은 저 별이 간직하고 있었을까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 대구 ‘제1육군병원의 후송’ 병원은 그 당시 전방의 전선에서 몰려온 부상병이 널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 부상병으로 채운 광장의 참혹한 광경을 “만발한 한겨울의 꽃밭”이라고 화자는 자조와 안도의 시선으로 본다. 그 상황을 “그때 네 인장은 저 별이 간직하고 있었을까/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라고 화자가 자신의 심경을 묘파하면서도 생의 존재에 대해 적극적인 긍정의 시각으로 보려 한다. 즉 ‘우체부’인 화자가 인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불가항력적 힘이 화자를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수긍하려 한다.  끊어지는 숨소리 헐떡거림 끙끙거림 울부짖음 아아 아야야 윽윽 음음 응응 비명의 격류  다리 잘린 이 눈 잃은 이 부러진 척추 잘린 발목 부여잡은 이 팔 없는 어깻죽지 노호 탄식 통곡 읍소 절규......  탑 속에 유폐된 탄식도 들은 제우스, 이곳엔 없네  죽은 자는 고지에서 여기 오지도 못했네 가을 들판을 덮은 온갖 풀벌레 울음의 잔치 지옥은 아니지 아니지 아니지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바지에서 동그란 것이 툭 떨어져 제 홀로 굴러가네 끝없이            에카스만 사마예 에카스민 사마예 “죽은 자는 고지에서 여기 오지도 못했네” 지금 이곳은 그대로 살아남은 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시공을 뛰어넘는 자리이다. “바지에서 동그란 것이 툭 떨어져 제 홀로 굴러가네 끝없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결론은 ‘에카스민 사마예 에카스민 사마예’라고 외치듯 운명은 끝내 알 수 없다. 아직 지옥은 아니다. ‘우체부’의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임계점에 이르러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부르짖는다. 인간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한계이며 화자의 숙명이다. “바지에서 동그란 것이 툭 떨어져 제 홀로 굴러가네 끝없이” 어디까지 저 ‘동그란 것’은 굴러갈 수 있을까? 저 작은 ‘동그란 것’은 결국 ‘제 홀로 굴러’갈 수밖에 없다. 알 수 없는 운명을 향해, ‘우체부’의 사명은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6부.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까지 죄 없이 살아온 자는 아무도 없음을 예수가 몸으로 보여주는데 세상의 모든 유언은 눈(雪)에 쓰듯 다 녹아버린다. 물 건너 이민 간 누나의 발자국은 하늘이 지우네  어둔 병실 구석에서 콜록거리다가 종적을 감춘 아버지  모깃불 피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밤하늘의 손주 별을 찾던 백발의 머리 든 채로 화석이 된 할머니 아들 만나려고 강 가의 나룻배 기다리는 동안 넋을 잃고 홀연히 실종된 어머니 네 가방, 해산한 어머니의 뱃가죽처럼 쭈그러들고 집히는 편지도 없고 받을 이도 없네 세상과의 인연은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면서 정리된다. “이민 간 누나”와 “종적을 감춘 아버지” 그리고 “화석이 된 할머니”와 “홀연히 실종된 어머니” 등 자신을 존재하게 했던 인연은 끊어지고 혼자 남아있는 화자다. 그 때문인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우체부’의 임무는 완수하지 못하고 텅 빈 가방이 되었다. ‘네 가방, 해산한 어머니의 뱃가죽처럼 쭈그러들고/ 집히는 편지도 없고 받을 이도 없네’. 절절하게 화자의 심경을 고변한다. 그 곳은 화자가 전제하듯이 바로 ‘지금 여기’인 것이다. 아버지 로봇과 아들 로봇 울돌목의 일자진 뒤에 배치한 가병(假兵)들이네  ...(   )... 전사한 할아버지 애비 손자의 두개골들이  고지(高地)를 왕릉처럼 덮네 공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네  어깨에 멘 황갈색 가방에 부딪쳐 튀어나가 저 쪽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멎네  ...(   )... 지렁이로 몸을 비틀며 꾸물꾸물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원숭이로 변해 날쌔게 떡갈나뭇가지로 뛰어올라가 숨네 지금 문덕수의 화자는 전라남도 신안과 진도(珍島)사이 폭 300미터 물살이 거칠게 흐르는 울돌목을 바라보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이순신 장군이 남은 전선 12척으로 왜적을 격퇴하는 그 모든 것의 배치가 이순신 장군만의 힘이 아닌 것이라고 단정 지으면서 잠시 『우체부』의 결론을 내리는 부분에서 화자의 시선은 파도 넘실대는 울돌목을 명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전사들은 “전사한 할아버지 애비 손자의 두개골들이/ 고지(高地)를 왕릉처럼 덮”고 있다고 기억하듯이 모두 죽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다. 로봇 전사들이 “가병(假兵)들이” 되어 대리로 전쟁을 한다. 영혼이 없는 로봇이 대신해 주는 싸움이다. 로봇병사, 복제병사들이 상황에 따라 “지렁이로 몸을 비틀”고 “원숭이로 변”하듯 온갖 형상으로 변화하며 싸움에 임한다.  탱크를 장난감처럼 뒤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들  가을의 붉은 속치마를 두른 680고지 673고지 749고지 펀치볼을 두른 칼날의 능선바위도 오르내리네  지금 네 빈 가방에는 무엇이 울고 있느냐 파편이냐 보석이냐 두개골이냐 더그럭 덜그럭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미래의 전쟁, ‘우체부’는 어떻게 존재방식을 바꾸어야 하는가. 화자의 상상 속 그 미래에도 ‘우체부’는 존재해야 한다. “펀치볼을 두른 칼날의 능선바위도 오르내리”며 ‘우체부’의 역할수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어쩌면 화자는 미래의 ‘로봇’의 힘을 차용하고 발휘해 ‘우체부’의 임무를 완수하기를 소망했었을 것이다. 화자는 ‘우체부’의 가방이 비어 있음을 확인한다. “파편이냐 보석이냐 두개골이냐” 묻고 있지만 이미 비어 있는 가방이다. “더그럭 덜그럭” 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우체부’는 공허하다. 전달해 줄 내용물에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 의미마저 퇴색되고 있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다.  화자는 공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이대흠의 시, 「아름다운 위반」은 승객과 버스기사와의 어긋나면서도 정겨운 대화에서 “이러히 그들은 연애하네”라는 서로의 교집합을 확장시킨다. 서정우의 시, 「소 닭보듯」은 소와 닭의 관계가 무심해 보이지만 서로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이러히 소와 닭은 연애하네”라고 표현한다. 김원일 소설, 「용초도의 동백꽃」 인용 부분도 인연에 대해 서로 연관성이 있으니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며 그 또한 공감대의 확장인 공존으로 본다. PC TV 냉장고 에어콘 로봇 해골 하나님 손때 묻어 반질반질하네 ...(   )...           휴대폰 좀 빌려줘 하나님과 통화하고 싶네            이러히 모두 연애하고 싶네 화자는 “PC TV 냉장고 에어콘 로봇 해골/ 하나님 손때 묻어 반질반질하네”라며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서로 관계되고 있음을 주시한다. ‘하나님 손때’라는 의미는 우리가 쓰고 있지만 우리 안에 바로 하나님의 힘이 우리의 손을 빌려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언제든지 환치되는 관계다. 화자의 내면은 “이러히 모두 연애하고 싶네”라는 일체 대상을 포용하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로 시적 대상을 형상화 한다고 할 수 있다.  뭍과 섬 하나로 붙은 견내량(見乃梁) 울돌목(鳴粱) 동과 서 이어 백성 지킨 그 물길 더욱 푸르네 한 뿌리에서 뿜는 압록 한강 영산 낙동 멀리 태평양 대서양 감쌌네 제 타원형 궤도를 잡아 도는 이 초록별 알구슬 이브의 손 들어 올리니 온 몸 떨려 두렵네 화자는 세계 사이의 팽팽한 줄을 잇고 있듯이 육지와 섬이 붙은 ‘견내량(見乃梁) 울돌목(鳴粱)’을 보며 남북은 갈려 있어도 “동과 서 이어” 압록강에서부터 대한민국 전체를 관통하는 물줄기가 태평양, 대서양 감쌌“다고 그 화합된 장면을 보여주려 한다. “압록 한강 영산 낙동강” 그 모든 원류는 ‘한 뿌리’인 대한민국의 땅에서 나왔으며 그 힘으로 지구를 감싸 안았음을 거듭 강조한다. 내면적으로 남과 북의 갈림을 봉합하고 화합해야 통합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칼 세이건은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의 작은 푸른 점이라고 했다. 화자는 지구를 “제 타원형 궤도를 잡아 도는 이 초록별 알구슬”로 표현하며 생명이 있는 유기체로 본다. 우주에 존재하는 절대적 힘에 의해 지구가 생겼고 인류를 탄생시켰다고 여긴다.   처음 세상과 소통이 시작된 아담과 이브가 공존했던 에덴동산에서 “이브의 손을 다시 들어 올리니 온 몸 떨려 두렵”다고 고해하듯 심경을 토로한다. 화자는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본성과 영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때문에 자신의 깨달음이 두렵기만 하다. 뒤늦게 세상의 공존하는 그 이유와 본질을 알게 되는 과정을, 깨달음에 대한 경애를 화자는 자신을 향해 두려움으로 표명한다.   잠시 『우체부』의 머리말인 무좀에서 그 결론에 대해 “다만 그 ‘진실’에 반치라도 다가서고 싶은 내 언어. 헉헉거리네” 하며 스스로 절감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내는 실토의 언어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우체부’ 역할을 하고 싶다는 그 염원으로 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을까. “온 몸 떨려 두렵네”라는 화자의 마지막 언술이 동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궁구하게 하는 것이다. 4.  운명적 존재, ‘우체부’ 문덕수의 시집 『우체부』를 살펴보면서 문덕수의 ‘우체부’는 문덕수의 ‘우체부’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운명의 흐름을 주시하며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직관력에 의하여 자신의 생을 투시하고 본질을 통찰하려 한 『우체부』를 어떤 단편적인 담론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 통합적 관점으로 시를 대하는 그의 시편을 특정한 관점의 방법론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 또한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평자는 『우체부』 시집의 면면을 해독하듯이 총체적인 분석을 하려 했다. 그 이유는 문덕수가 『우체부』를 왜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당위성을 찾기 위해서였음을 밝히며 『우체부』가 지닌 몇 가지 특성을 평자 나름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첫째, 문덕수는 세상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며 궤도 수정을 할 수 없는 능력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하지만 자신이 기묘하게 수많은 우연과 행운을 거쳐 운명적으로 생을 이어왔듯이 아주 특별한 ‘존재자’임을 긍정하려 한다. 그 때문에 운명을 주재하는 절대자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한 자존감으로 의식의 흐름 즉 시적 진실을 분석하고 재해석하며 자신이 ‘우체부’의 소임을 충실히 하지 못한 연유를 ‘우체부’의 언어로 전해주려 한다.  그와 함께 자신의 존재의미를 ‘우체부’를 통해 탐구하려 한다. 반 고흐가 남겨놓은 초상화 「우체부 룰랭씨」를 시집 전면에 배치하며 ‘우체부’의 존재에 대해 궁구하게 한 것도 여러 각도에서 인간의 모습을 조명해보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속적으로 격군, 사부, 보병, 육군소위 등 역할분담에 따라 ‘우체부’를 변주하게 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세상의 흐름을 연결해주는 그 내면의 메신저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문덕수의 『우체부』는 모든 시적 대상의 교감으로 동감하고 공명(共鳴)할 수 있는 합일을 추동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계를 지워나간다. 의미와 관념이 짓는 경계를 없애려 한다. 상생과 공존을 향한 공감의식을 생성하려 한다. 상반과 이질을 벗어 화합되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병존시키려 한다.   문덕수는 시적 대상에 대해 합일을 이루는 방편을 현장감 있게 수용하려 한다. 자신의 지나간 생에 대해 분별지가 작용했음을 수긍하며 그 과오를 교정하여 공존과 화합을 추동하려 한다.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시적 대상들에 대해 다름과 다양한 개별적 특성을 인정하며 공존의 시적 미학을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은 자신의 저서 『공감의 시대』(믿음사, 2010)에서 “공감의 확장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와 인프라를 가능하게 하는 접착제이다. 공감이 없는 사회생활이나 사회적 조직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공감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이처럼 공감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방식을 문덕수는 주시했다고 보아진다. 누구든 소통과 교류의 메신저인 ‘우체부’가 될 수 있으며 인간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관계형성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고 본 것이다.  셋째, 『우체부』는 시의 행간마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문장과 언어가 병치되고 난무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이 혼합되고 문학적 수사기법이 뒤섞이면서도 기묘하게 균형을 이룬다.  문덕수는 앞의 ‘『우체부』의 이해방식’에서 예시하였듯이 수많은 시 이론서와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다. 자신이 주창한 시 이론을 자신의 시에 응용하고 적용시키려 노력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1992년 로 발간한 『시론』의 ‘머리글’에서 “해외의 이론과 동양의 고전적 이론을 토대로 시론이나 시학의 새로운 이론 창출과 그 체계화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고 스스로 실천해 왔듯이 『우체부』는 문덕수가 그 오랜 기간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착시키려 한 시집이다.   그 때문인지 『우체부』는 상반되고 이질적인 언어가 맺는 관계가 ‘우체부’라는 운명적 존재 앞에서 연관되고 서로 혼용되어 질서를 이룬다. 이러한 고도의 문학적 수사는 통합적 시론을 숙지하고 그 기법을 다양하게 문면에 적용시킬 때 가능한 수사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문덕수의 『우체부』는 그의 총체적인 사유와 통찰이 내장된 시편을 담고 있다. 진솔한 자기고백과 증언이며 자기만의 본원을 향해가는 지향의 원리를 확인하게 하는 특별한 기록물이다. 문덕수가 세상과 공존해온 나름의 조용한 존재방식이다. 이 특별한 시편은 그만이 갖고 있는 천성의 능력 즉 수렴적 창의력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정해본다.   문덕수의 『우체부』는 인간의 욕망을 통찰하면서 생이 갈 수 있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 비로소 인간존재의 비밀의 덮개를 벗겨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멸해가는 존재의 나약함을 인지하면서 운명적 존재를 지속하기 위한 그 역할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복합적 요인이 적용되고 자신의 특성을 살리는 문덕수의 『우체부』는 그만의 개성적인 시가 된다. 물론 앞에 제시한 네 가지 방식만으로 그의 시를 규정할 수는 없다. 그만큼 그의 『우체부』는 단편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지닌다.  195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시력 50년 이상의 문덕수가 견내량, 울돌목 앞바다의 넘실대는 파도 끝에 눈길을 두며 마음의 지향을 어디에 두고 있었을까? 그는 오랜 기간 자아의식의 심화를 통해 자신을 개혁하고 자신을 초월하려 했다. 인간본성의 존재와 신비를 확인하고 새로운 의미의 인간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양수에서부터 시작하여 태평양 대서양을 돌아 시공을 초월하여 또 다른 신성의 ‘지금 여기’에 당도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이 없으면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오기까지 문덕수는 수없는 ‘지금 여기’를 연결해왔다. 문덕수는 어머니의 상징 그 이상인 이브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지금 여기’의 엄정함에 못내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그 축소된 심사로 그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응집된 ‘지금 여기’를 지켜내려 한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서 깨달음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획득했다면 그 또한 다행으로 여겨야 할 뿐이다.   비로소 ‘무좀(머리말)’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 문덕수는 신의 영역에 근접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자신의 언어로 반치라도 ‘진실’에  다가가고 싶어 한다. 인간존재의 신비를 확인하고 새로운 의미의 인간영역을 확장하려 한다. 경계를 지우며 경계를 세운다.  문덕수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과 함께 우리 모두가 경계 없는 ‘우체부’가 되어 자신이 다하지 못한 진정한 전령사 역할을 수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이다. 앞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문과 그 나름의 해답을 각자 궁구하게 하는 『우체부』가 독자와 함께 널리 읽힐 것이다. 인간 본성과 인간적 탐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우체부』가 보여주는 시적 진실이 많은 공감을 일으키길 예견한다.
49    문덕수 시인의 연작시 --선에 관한 소묘」에 대한 소고 댓글:  조회:247  추천:0  2019-06-17
문덕수 시인의 연작시  --선에 관한 소묘」에 대한 소고   김석환 1. 머리말  문덕수(1928-) 시인은 등단 이후 『황홀』을 비롯한 17여 권의 시집과 『한국모더니즘시 연구』 등 문학 연구서를 발간하고 수많은 평론을 발표하며 한국 시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월간 시 전문지 『시문학』을 1971년 창간한 후 현재까지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발간하며 한국시단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오랜 동안 대학 강단을 지키며 지속적으로 시에 관한 이론을 탐구하고 이를 창작을 통해 실험하고 실천하였다. 초기에는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시를 선보이기도 하였고 현실의식이 강한 시를 발표하기도 하며 다양한 시세계를 보여 주었다. 본고는 문 시인이 초기에 발표한 「선에 관한 소묘」 연작시(1963-1965) 5편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편들은 실험의식이 강하여 평자들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이후에 창작한 문 시인의 시적 원형이 잠재되어 있다고 본다.  기존의 평자들은 「선에 관한 소묘」 연작시 5편은 인간의 무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해석이 어려운 ‘무의미시’라는 평을 주로 해왔다. 특히 시를 해석하여 의미를 유추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 시편들이 기존의 시보다 상상의 비약이 커서 논리의 일탈이 심하다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실제로 있는 어떤 대상을 그리기보다 무의식을 그리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문 시인 자신도 자신은 무의식의 세계, 즉 ‘내면세계’로 시선을 옮겨 그 구조를 반영하려 했다는 것을 이 시편들을 쓰고 난 후 『사상계』에 발표한 시론 「내면세계의 미학」에서 언급하고 있다.   시가 외면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외면세계의 구조가 그대로 시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외면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러한 문 시인의 주장이나 기존의 논의는 무의식이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되었는가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의 타당성을 뒷받침 해 준다. 본고는 문 시인이 그의 시를 통하여 어떻게 내면세계의 무의식적 욕망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카오스적인 무의식적 욕망을 이미지의 자율적인 연상에 의해 표현하려 시도한 시편들에서 구조적 특징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거나 일정한 주제를 찾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선택하여 배열한 이미지의 연쇄가 어떻게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일은 흥미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라깡은 인간의 정신 층위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처음 밝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서 무의식과 언어 구조와의 관계를 밝혔다. 프로이트는 생리학적 관점에서 무의식적 층위에 잠재된 ‘리비도’가 인간의 행동과 의식을 조정하고 지배한다고 하였다. 그에 비해서 라깡은 오히려 “언어활동은 무의식의 조건”이며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하였다. 즉 인간이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무의식적 욕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자신의 본 생각을 부정하는 법칙을 지니고 있어서 언어 기호의 기표인 문자나 소리는 주체가 그것을 통하여 드러내려는 기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기의는 기표들의 연쇄구조에서 겨우 나타나거나 한 개의 기표가 여러 개의 기의로 분열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기의와 분리된 채 “떠도는 기표”는 주체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작용한다. 따라서 주체가 선택하여 사용한 기표가 오히려 주체의 욕망을 억압하며 그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기표를 필요로 하며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 선, 그 무의식적 욕망의 기표 5편의 연작시는 모두 ‘선’에 대한 무의식적인 자유연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선택하여 배열하고 있다. 배열되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커서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어떤 관계를 찾기 힘들다. 이미지 사이의 차이 또는 유사성으로 관계의 망을 구축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데 그러한 특징은 자연히 이미지가 내포한 의미나 시 텍스트 전체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의 파악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 독해를 하는 것도 읽는 이의 역할이며 몫일 것이다.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좇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 「선에 관한 소묘.1 」 전문. (1963.7. 『시단』 2집) 이 시의 전반부에는 ‘선’, 후반부에는 ‘꽃’의 움직임과 상태를 묘사를 하며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선’은 만물의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환원한 추상어로서 그것의 기초요 근원이다. 그 선은 ‘실뱀, 빗살, 뱀, 불꽃’ 등에 차례로 비유되고 변주되는데 그것들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원형적 이미지들이다. 그런데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하여 응답으로서 발생하며 그것이 형성되는 주체적인 공간이 환상이다. 환상에서 만들어진 그 욕망의 이미지들은 달아나고, 뒤쫓고, 쏟아져 나와 꽃을 무는 등 역동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주체의 욕망을 상징하는 뱀이 다가가 무는 꽃은 그것이 추구하는 ‘대상a’ 이다. 그렇게 선의 비유적 이미지들이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성 자체인 ‘절대적 대상’에 다가가 주체의 ‘결여’를 메우고 상실한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대상a’인 ‘꽃’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전체적 또는 절대적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순간마다 그것이라 믿고 물지만 ‘부분 대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체의 환상 속에서 ‘또 하나의’ 꽃이 반복적으로 피었다 떨어지고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주체의 욕망이 결코 뛰어넘기 불가능한 절대적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거미줄을 짜듯 욕망의 기표를 선택하고 결합하여 끝없는 망사(網絲), 즉 관계의 망을 구축하는 일이다. 그것은 곧 시간과 공간적 좌표와 ‘달걀처럼’ 완전한 생명력을 가진 예술적 텍스트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한편 전반부에 나타난 욕망을 상징하는 선의 비유적 이미지들의 움직임과 후반부에 나타나는 꽃의 피고 지는 상태는 동시성을 갖는다. ‘대상a’인 꽃은 주체의 욕망을 발생시키는 원인이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동시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문 시인은 이렇게 ‘절대적 대상’을 향해 끝없이 발동되는 무의식적 욕망의 역동적인 흐름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곧 문 시인에게 있어서 시라는 언어적 텍스트를 창조하는 치열한 작업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일까. 한 가닥의  선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이 와서 걸린다 불꽃을 품고 얽히는  난무(亂舞),  불사(不死)의 짐승일까.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삭아서 멀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 - 「선에 관한 소묘. 2」 전문. (1963.7. 『시단』 2집) 시인은 ‘선’이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이라고 명명하며 의문을 갖는다. 그것은 형상이 있는 모든 만상을 추상화함으로써 일체의 개념이 제거된 기표일 뿐이다. 그 ‘허리에/ 또 하나의 선’이 걸리어 관계를 맺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상을 창조한다. 만상을 생성하는 기초요 근원인 ‘선’은 ‘불꽃을 품고’ 얽혀 ‘난무’가 되는데 시인은 그것을 ‘불사의 짐승’일 것이냐 묻는다. 주체의 욕망을 품은 선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논리와 질서를 일탈하여 예술의 한 장르인 난무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비유한 ‘불사의 짐승’은 욕망을 표현하는 예술이 일상적 논리를 초월하는 특성을 암시한다. 그것은 과일과 같은 언어에서 고정된 기의를 제거한 채 ‘텅빈 기표’만 남아 일상적 언어로부터 멀어지며 절대적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는 ‘신비한 매듭’, 즉 예술적 텍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대상에 대한 의식적인 인식의 내용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욕망이 이입된 언어를 독자적 어법으로 결합하여 구축한 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은빛 실날을 뽑으며 그물을 짜는  한 올의 바람, 이윽고  환상처럼 걸리는 조롱(鳥籠), 천사의 손도 얼씬 못하는 조롱.  그 속에 지구는 무한의 구석을 울리는 쓸쓸한 새. 금빛 구름을 뿜으며 그물을 짜는  한 가닥의 지푸라기, 이윽고  허무의 가지 끝에 걸리는 초롱. 신의 눈도 얼씬 못하는  초롱. 그 속에  우주는 영겁의 모서리를 밝히는  호젓한 불꽃. - 「선에 관한 소묘. 3」 전문. (1964.7. 『시단』 5집) ‘은빛 실날’을 뽑아 그물을 짜서 끝내는 ‘조롱’을 짓는 바람은 무의식적 공간인 환상에서 솟아나는 욕망의 상징이다. 그 욕망이 구축한 무한한 우주의 상징인 ‘조롱’ 속에서 지구는 그 ‘구석 끝을 울리는 쓸쓸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우주적 환상은 새가 된 지구가 ‘한 가닥의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 지구가 지푸라기를 엮어 그물을 짜면 ‘조롱’은 불을 밝히는 ‘초롱’이 된다. 그것이 걸리는 ‘허무의 가지 끝’은 곧 언어가 지배하는 상징계인 현실의 극단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의 ‘틈’ 또는 ‘빈자리’를 일컫는다. 조롱이 변주된 ‘초롱’을 걸리게 하는 근원적 힘인 욕망은 곧 그 ‘빈자리’ 또는 ‘결여’ 자체이거나 그곳에서 솟구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롱은’ 주체가 독자적으로 구축한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한 ‘신의 눈도 얼씬 못하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18세기의 내장 속을  기생하는, 한 마리  세균(細菌). 그것은  벽(壁) 뒤로  폭동과 군중을 거느린 하나의 점(點).  그것은 침묵의 축축한 밑바닥을  핥는  파편. 그것은 실패한 지도의 꿈.  아니  지구를 둥근 3각형으로  변조하려다  들킨  미충(微虫).   - 「선에 관한 소묘. 4」 전문. (1964.12. 『시단』 6집) ‘선’은 ‘세균, 점, 파편, 지도의 꿈, 미충’ 등의 기표로 변주되면서 그 내포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그 기표들을 수식하는 구절은 논리를 일탈한 진술로써 그것에 묶여 있는 일상적인 의미를 제거해 준다. 따라서 ‘선’을 통해서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기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이 거느리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물론 그것을 한정하고 수식하는 구절을 연쇄적으로 고찰해야 할 것이다. ‘선’은 제도와 규율을 중시하던 시대인 18세기엔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것은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와의 관계를 차단하는 ’벽 뒤’에 감금된 채 억압을 당하다 폭동을 일으키는 군중들이 품고 있는 광기로 취급되기도 했다.  또한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의 빈자리에서 솟아오르기를 기다리는 ‘결여’ 자체이다. 그것은 현실의 도상인 지도는 그 실재를 보여주는 데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 기표와 기의 또는 지시체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우려는 시도이다. 지구는 둥글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삼각형’으로 새롭고 낯설게 변조하여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한 가닥  선이 여윈 내 손목을 묶어 보고, 몇 번이고 내 모가지를 묶어 금빛으로  졸라 보고, 벽 못에서  풀려 내려온 노끈이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였다. 그 때의 눈알 그리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었던 한 가닥  선이, 경부선(京釜線) 레일로 시장댁(市長宅) 뜨락의 살의(殺意)의 나뭇가지로  십년 전의 누나 얼굴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닥  선이, 지중해 연안(沿岸)을 구석구석 더듬은,  내 누나 같은  낫세르 중령(中領)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의 윤곽으로 들어앉아 쉬고 있었다. - 「선에 관한 소묘. 5」 전문. (1965.3 『사상계』.) ‘내 손목’이나 ‘모가지’를 묶고 졸라 보는 ‘선’은 벽의 못에 걸려 있다가 풀려나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라도 풀어질 수 있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어 그녀를 타락하게도 했다. 그 선은 주체의 욕망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타자의 폭력적 욕망의 상징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경부선 레일’과 ‘시장댁’에 있는 ‘살의의 나뭇가지’ 그리고 ‘십년 전의 누나 얼굴’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시인은 그렇게 ‘선’과 관련된 나와 누나 그리고 여러 이질적인 사물들을 상상하며 연쇄적으로 제시한다. 그 선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낫세르 중령’을 찾느라 ‘지중해 연안’을 그리다 죽었을 ‘내 누나’ 같은 그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의 윤곽으로 들어앉아’ 있다. 이처럼 선은 다양한 존재자들과 관련을 맺는데 그 범위가 마침내 ‘낫세르 중령의 눈동자와 지중해 연안 등 이국적 공간까지 확장된다. 그렇게 선은 논리와 예측을 벗어나며 다양한 대상들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독자에게 누나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유추와 의미의 해석을 난감하게 한다. 그 모호성과 난해성은 오히려 선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특히 누나가 지중해 연안을 더듬다 낫세르 중령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 연안으로 들어앉아 있다는 진술은 두 사람 사이의 비극적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3.맺음말 시인은 ‘선’을 다양하고 낯선 이미지에 비유하고 역동적 움직임으로 어떻게 대상에 다가가는지를 암시한다, 연쇄적으로 배열된 기표들을 종합하여 ‘선’이 내포하는 의미를 유추해 보면 그것은 언어와 질서가 지배하는 현실 또는 상징계의 빈자리인 무의식적 공간에서 그 결여를 채우기 위해 솟는 ‘욕망’이다. 그리고 문 시인은 그 ‘선’을 비유하는 기표들이 얽히어 관계를 맺으며 예술적 텍스트를 이루는 과정을 시로써 보여 준다. 특히 시인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시선을 기울이고 무의식적 욕망을 보여 주기 위해 논리적 서술을 벗어난 낯선 이미지 또는 기표들을 제시하고 있다. 무의식은 문자 그대로 논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의식이 없는 카오스적인 층위이기 때문에 일상적 어법을 일탈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의 해독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독자의 상상을 무한히 자극하고 시가 암시하는 의미의 자장을 확대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곧 문 시인의 시가 ‘비대상의 시’ 또는 ‘무의미의 시’로 불리게 하는 요인이며 시인이 창조한 독특한 미학일 것이다.   그러한 경향은 문 시인이 주장한 ‘내면세계’를 반영하려는 시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논한 시편들은 ‘비대상’이라기보다는 ‘내면세계’, 즉 무의식적 욕망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무의미’라는 말은 논리적이고 외연적 의미를 도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를 대할 경우 기표들이 어떻게 무의식적 욕망을 보여 주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그 ‘무의식적 욕망’이 곧 이 시편들이 암시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떠한 시든지 시인은 논리적 서술을 벗어나 낯선 어법으로 새로운 시텍스트를 구축한다면 시에는 시인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의 시편들에서 나타나는 이질적 이미지들의 비약적 연결로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며 새로운 의미를 보여 주는 미학은 시 쓰기의 모델이 될 것이다. 문 시인이 이 시편들을 통해 내면세계의 형상화를 위한 시도가 이후 문 시인의 시에서 어떻게 변화를 거치며 유지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은 남은 과제이다.  
48    새로운 시론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 사례 / 김철교 댓글:  조회:165  추천:0  2019-06-17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 사례 김철교 1. 열린 예술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 이후』(이성훈·김광우 역, 미술문화, 2012, 13쪽)에서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미술의 개념은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쓴 르네상스 때에 비로소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미술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며, 바자리 이후 1964년까지의 서양미술사를 하나의 르네상스 패러다임에 비유했는데, 이 전형이 1964년 워홀의 가 등장하면서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1965년부터를 ‘서양미술사 이후’의 시기로 인식하면서, 예술가는 이제 모든 형식과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예술가의 유일한 역할은 ‘예술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화장실의 낙서도 시집(詩集)으로 들어오면 시가 될 수 있고, 거리에 버려진 찌그러진 깡통도 전시장에 전시되면 예술이 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예술의 본질과 교신하는 예술 철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예술은 열려 있어야 한다. 작품을 통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질문과 해답을 읽을 수 있다. 생산자인 예술가의 의도와 소비자인 수용자(관객/독자)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예술이다. 수용자 사이에도 일치할 수가 없다. 무의식의 역동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양한 질문과 다양한 해답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술의 존재가 더 우리 삶에 귀중한지도 모른다. 삶의 본질과 행복에 대한 물음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 해답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모든 물음과 모든 해답이 다 옳다고도 할 수 있고 그르다고도 할 수 있다. 오직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김철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7쪽) 최근 예술은 미술이라는 장르를 앞세워, 활발한 융·복합을 통해 각자의 품을 넓히면서 영역을 계속 확장하여 왔다. 파리의 퐁피두 현대미술관, 니스의 근현대미술관은 물론, 우리나라 현대미술 전시장에 가면 회화, 조각, 사진, 음악, 영상, 스토리텔링 등을 비롯하여, 오만가지 혐오스런 오브제까지 어울려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필자는, 문학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 장르를 넘겨다보며, 미술과 음악을 문자로 은유해 내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시문학의 좌표를 그려보고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을 2018년 12월에 출간한 바 있다. 이에 앞서, 관련된 실험시들을 2018년 8월에 시집 『무제2018』에 묶었다. 본고에서는 이 시집의 제5부 「이미지의 반란」에 수록된 열여섯 편을 해설하면서, 각종 미술 및 음악 이론과 기법을 어떻게 시 창작에 활용할 수 있는 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들 시는 마치 추상화 그림 앞에 서 있을 때처럼 나름대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의도된 시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면 쉽게 다가 설 수 없다. 마치 이우환(1936~)의 점·선·면 관련 작품들 앞에서 현상 저 너머의 세계를 유추한다든지, 호완 미로(1893~1983)의 동화 같은 추상화를 보면서 즐거운 상상에 빠진다든지,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추상화 앞에서 가부좌하고 명상에 빠진다든지 하는 것처럼, 독자들이 어떤 분명한 메시지나 의도를 캐려 하지 말고 오직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오직 리듬만을 추구했다면, 『무제2018』 제5부 「이미지의 반란」에 실린 시들은 음악과 미술이 한판 거나하게 어우러졌으면 하는 바램을 담았다. 앞으로 이어질 몇 편의 글에서는, 단지 비평가의 견지에서 시인(생산자)의 이미지를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수용(소비자)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예술 비평가의 역할은 흔히 예술가의 이미지를 번역 혹은 해설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번역의 우열, 번역의 정오(正誤)는 없다. 단지 비평가의 눈으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는 비평가에게 동의할 필요도 없다. 다만, ‘저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정도면 되는 것이다. 원본도 번역본도 ‘실재’는 아니다. 원본도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 시인이 쓴 시(원본)도 결국 현상 혹은 인식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시인의 손짓(열망)일 뿐이니까. 시인의 작품도, 그에 대한 평설도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좋은 시뮬라크르들이다. 일반적으로 시뮬라크르는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복사물을 지칭하지만, 필자는 시뮬라크르에 원본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고 본다(김철교,『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21-24쪽) 2. 읽기 「그림으로 쓴 시」는 호안 미로가 그린 「시(Poesia)」라는 그림을 보고 쓴 시다. 호안 미로는 나름대로 떠오르는 詩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렸다. 시인은 이 그림을 보고 문자로 시를 그렸다. 우리는 추상화나 절대음악을 들을 때에 나름대로 이미지를 떠올리며 감상을 한다. 비록 문자로 된 메시지가 없어도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수용을 하는 것이다. 추상예술은 예술가에게나 수용자(관객/독자)에게 무한한 자유를 준다. 호안 미로는 물론이요, 시인도, 호안 미로의 그림을 본 관람객도, 시인의 시를 읽는 독자도, 모두 머리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각기 다를 것이다. 호동그랗게 검은 눈 검은 눈 소녀 잠 기지개 아주 큰 기지개 물구나무 하늘 바다 손자국 손금 영혼길 길 큰길 작은길 크레센도 쿵쾅쿵쾅쿵 돛 닻 갈매기 부두 어시장 선혈 해변 장미 말벌  쾅 데크레센도 라르고 묘지 흰나비 흰국화 비너스의 하얀 젓가슴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 「그림으로 쓴 시-호안 미로 」 호안 미로는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하여, 1907년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12년 이후 갈리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1925년에 초현실주의 제1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의 초현실주의는 아주 밝은 시정과 단순화되고 순수화된 형태와 색채의 조화에 의한 율동적인 구성에 의하여, 조형성(造形性)의 긴밀감을 준다. 별·여자·새 등을 거의 상형문자와 같이 환상화(幻想化)하여, 그것들을 조화시킨 화면은 건강하고 명쾌한 유머마저 풍긴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호안 미로의 그림 「시(Poesia)」를 보고 있노라면, 시인에게는 해변가에서 커다란 검은 눈의 소녀가 큰 기지개를 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이내 물구나무를 선다. 하늘과 바다가 뒤집혀 보인다. 땅 바닥에는 손자국이 선명하다. 손금에는 사람의 굴곡진 한평생 가는 길이 나타나 있다. 젊은 시절에는 겁 없이 세상에 도전을 하게 된다. 세상을 거꾸로 보고 싶은 것이다. 음악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소녀는 물구나무를 선 채, 부두와 배와 갈매기를 뒤로 하고 어시장으로 들어간다. 시장에는 싱싱한 고기들이 팔딱팔딱 선혈을 흘리고 있다. 어시장만큼 생과 사가 분주한 곳이 어데 있으랴.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거친 도전에서 때때로 피도 흘리게 된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 가까이 해변에 장미꽃밭이 보이고, 아름다운 말벌이 꽃에 앉았다 날았다 하며 점점 커지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쾅하면서 크게 한번 울리고 음악이 점차 잦아들자 소녀는 물구나무서기에서 벌떡 일어난다. 저 멀리 해변가의 묘지로 눈을 돌리자 하얀 국화에 흰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소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 사이로 하얀 젖가슴을 드러내고 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음악과 함께 점점 사라진다. 한 소녀가 이 세상으로 건너와 격렬하게 살다가 퇴장해야 하는, 인간 삶의 한 노정이 파노라마처럼 상상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특히 명사만을 사용함으로써 속도감을 높이려는 장치를 하였다. 「그림으로 쓴 시」는 데페이즈망 기법과 표현주의 기법을 사용하되, 특히 색채 이미지와 음악 기호를 차용하였다. 호안 미로의 「시」라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색깔과 음향의 이미지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때 마음속에 격하게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쓴 시가 「그림으로 쓴 시」이다. 전혀 엉뚱한 이미지들이지만 합쳐지면 통일적인 이미지가 형성되도록 유념하였다. 데페이즈망기법이란 사물을 상식적인 관계를 벗어나 엉뚱한 관계에 두는 것을 말한다. 초현실주의자의 선구자인 시인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eamont, 1846-70)의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2010). 표현주의 기법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에 있음을 나타낸다. 구성(구도)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 혹은 왜곡된다. 여기에서 소녀, 배, 어시장, 선혈, 해변, 말벌, 장미, 국화, 젖가슴 등은 엉뚱한 이미지들의 집합이지만 소녀의 격정적인 삶이라는 통일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강약, 고저 등 음악에 사용되는 용어들을 활용함으로써 음악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미술적 이미지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한편의 영상을 마음속에 떠올리게 인도한다.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  김철교 [[이 글은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인 『한국시학연구』 49호(2017. 2. 28)에 실린 논문으로, 이미 에서 요약 발표한 바 있다.]] I. 들어가는 말 현대예술은, 특히 세계 2차 대전 이후 과학기술이 깊숙이 스며들어, 앞으로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 어떤 것은 클래식으로 자리를 잡고, 어떤 것은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키이란(Matthew Kieran)은 『예술과 그 가치(Revealing Art)』에서 좋은 예술작품이란,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풍부하게 해주는,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반면 나쁜 작품은 경험의 확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없고, 단선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작품들이다. 모든 예술이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바로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 내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 때문이기도 하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술에만 그치는 현상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보다 낳은 편리성의 발견, 새로운 아름다움의 추구, 다양한 사상의 부침 등 전반적인 가치관의 변화 양상이 바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 각지에서 혁신적인 미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르네상스 이래 전개되어 온 전통적인 미(美)의 개념을 초월하여, 사실적이고 표피적인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현대 예술과 예술론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예술 장르들 간의 경계 붕괴 내지는 융·복합에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모든 예술에 과학기술이 접목되면서 경계허물기 혹은 상호협력과 보완이 가속화되고 있다.  화가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베토벤을 위대한 예술가의 표본으로 보았으며,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서 영감을 얻어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를 그렸다. 베토벤은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시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 1786)」에서 영감을 얻어 「합창 교향곡」을 작곡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미술관의 대형 벽화 「베토벤 프리즈」는 시와 음악, 조형을 통합한 총체적인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클림트의 열망을 구현한 작품이다. 문학과 음악, 특히 시와 음악은 시 자체가 운율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엘리엇은 음악연구가 시에 기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네 개의 사중주」는 바로 베토벤의 「사중주」라는 표제가 붙은 음악과 연결되어 있다. 소설에 있어서도 헉슬리는 「연애대위법」에서 대위법이라는 음악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대위법이란 음악에서 2개 이상의 선율들을 결합하는 기법을 말하듯이, 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이다. “모든 예술이 서로 가까워지도록 한 장소에 모으고, 한 예술에서 다른 예술로 옮겨가는 변화를 추구해야만 한다. 잭슨 폴록과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에게서 마침내 주제와 의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회화만이 아니라 문학도 주제를 벗어던지고, ‘단어가 논리에서 해방될’ 경우에만 비로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이 융 복합을 모색하고 있는 요즘, 미술 분야에서는 활발하게 음악, 영상, 사진, 회화, 조각, 스토리텔링 등이 함께 협력하여 등장함으로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음악-미술-문학에서 각각의 이론과 방법론들이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상호의 영역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김춘수의 ‘무의미시’이론은 미술과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서술적 이미지’는 미술의 ‘미니멀리즘’과 비견되며, 무의미시이론을 적용하여 쓴 시들은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처럼 시문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이론과 기법의 개발을 위해서 이웃 예술이론과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도 예술 융 복합의 긍정적인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융 복합문제와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본고에서는 음향예술인 음악을 제외하고, 언어예술의 하나인 시와 형상예술에 속하는 회화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특히, 예술 융 복합의 시대에 시문학과 미술의 상호관계를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II. 시와 미술에 있어서의 이미지 1. 시와 미술의 상호관련성 문학과 미술의 상호관련은 내용(주제), 형식, 수용 등 여러 방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첫째, 작품의 제재나 주제 측면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 예술의 공통된 소재를 제공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불후의 명화는 후세의 많은 시인들에게 시를 쓰는 동기가 된다. 작가들은 인접 예술의 작품에서 얼마든지 창작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상상력이란 모든 예술에 공통된 창조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둘째, 표현방식과 매체사용에서의 관계이다. 모방(미메시스)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시학원리는 고대 이후 두 예술의 공통성을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25장에서 시인과 화가를 함께 모방하는 작가로 소개한 이후 두 예술가는 매우 가까운 사이에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호라티우스 『시학』에서도 ‘시는 그림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 매체사용의 이질성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예술작품의 해석과 수용의 문제이다.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은 추구하는 목표, 기능, 영향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예술작품의 수용자(독자 및 관객 등)들은 모든 예술작품이 제공하고 있는 이미지들에 대한 해석과 수용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으나, 예술이라는 큰 틀에 함께 묶일 수 있는 것이다. 시와 그림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소식(蘇軾, 1037-1101)은 당나라 왕유(王維, 701-761)의 시와 회화를 칭찬하면서 ‘왕유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하였다. 북송(960-1127) 화가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시는 무형의 그림이고 그림은 유형의 시이다”라는 말이 있다. 남송(1127-1279)시대의 오룡한(吳龍翰)은 ‘그려내기 어려운 정경을 그려낼 때에는 시로써 보완하며, 읊조리기 어려운 시를 읊을 때는 그림으로써 보완한다.(畵難畵之景, 以詩湊成; 吟難吟之詩, 以畵補足)’라고 하여 시와 회화의 결합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의 시와 그림에 대한 입장을 받아들여, 고려에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시화일치는 사대부 문인들의 삼절의 추구와 맞물려 장려되었다. 이인로(1152-1220)는 “시와 그림이 묘한 곳에서 서로 도와주는 것이 한결같다 하여 옛 사람이 그림을 소리없는 시라 이르고, 시를 운율이 있는 그림이라 일렀다”고 하였다. 사대부 문인화가로 시를 잘 짓고 그림에 뛰어난 인물은 강희안(1419-1464)이다. 동생 강희맹은 시화일치의 경지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인물로 왕유를 거론하면서, 그의 형 강희안을 왕유와 비견하고 있다. 이러한 시화일치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백악그룹,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연암그룹, 그리고 19세기 당대 최대의 삼절로 이름 높았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으로 그 흐름을 이어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학, 음악, 무용처럼 뮤즈 여신의 보호를 받는 뮤즈 예술과 회화나 조각처럼 기술, 즉 손재주를 필요로 하는 미술을 구분하였다. 미술이 문학과 음악의 버금가는 위치로 올라서게 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회화가 시와 수사학보다 우월하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시인이자 문학이론가인 시드니(Philip Sidney, 1554-86)는 「시의 옹호: Apology for a Poetry」에서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그림과 같은 시’를 이상적으로 대표한 화가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그림으로 그려진 시’라고 칭찬했는데, 이는 글(성경)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76년 레싱(G.E. Lessing, 1729-81)에 따르면, 문학은 시간의 영속을 특징으로 하고,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은 공간에 의존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회화의 대상은 형, 색채, 선 등의 ‘공간적 병존’으로 파악되지만, 문학은 ‘시간적 순서’, 즉 ‘행위’의 진행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한 레싱은 회화우위 가치관을 반박하면서, 창조적 상상력은 회화와 시 모두에 해당하지만, 화가보다는 시인의 환상적 재능에 더 높은 무한성을 부여하고 있다. 괴테(J.W. von Goethe, 1749-1832) 역시 『시와 진실, 1833』에서 레싱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미술가는 미에 의해서만 만족되는 외형의 의미를 위해 작업하나, 언어예술가는 추(醜)와도 함께 하는 상상력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더 광범위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괴테도 문학과 미술은 “매체조건, 대상, 예술법칙과 영향형식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한편, 낭만주의 예술론에 있어서 예술의 통합은 ‘공감각’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 서로 다른 감각의 연상과 교환 작용인 ‘공감각’은 예술이 함께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낭만주의 예술의 공감각적 표현기법은 바그너(R. Wagner, 1813-1883)의 ‘총체예술작품(Gesammtkunstwerk)’의 이념으로 발전한다. ‘총체예술작품’은 바그너가 1849년 「미래의 예술작품」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사용한 말로서, 음악, 춤, 시, 시각예술, 무대기술을 종합한 개념이다. 슐레겔(A.W. Schlegel, 1767-1845)은 낭만주의자들의 기관지 『아테네움 Athen um, 1798』에서 시, 음악, 회화의 내면의 친밀성을 주장한다. 이처럼 낭만주의에서 추구된 예술의 통합화 경향은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 등으로 계승된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67)의 「교감(Correspondances)」과 랭보(A. Rimbaud)의 「모음들(Voyelles)」은 공감각을 잘 활용한 작품이다. 2. 시와 회화의 결합 방식 시와 회화의 결합방식에는 (1)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 (2) 그림을 제재나 대상으로 하여 시를 짓는 방법, (3) 그림과 문자가 한 화면에 공존하며 상호보완하는 문자도(文字圖), 구체시, 문인화 등이 있다.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적지 않았다. 글을 얼마나 그림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가를 연구했던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의 말레이(J.E. Millais)는 테니슨의 시 「마리아나(Mariana, 1830)」를 그림(Mariana, 1851, Oil on Mahogani, 59.7×49.5,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으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를 그림(Ophelia, 1851-52, 76.2×112.8Cm, Oil on canvas,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다. 이중섭도 백석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갤러리 서림에서는 1987년부터 매년 우리나라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한국중견화가들이 그림으로 그려서 전시하고 있다. 그림을 대상으로 시를 짓는(이를 형상시라고 한다) 방법은, 시인이 그림을 감상하고 시적 감흥을 얻어 시를 쓰는 것이다. 아킬레스의 방패무늬 제작과정을 서술한 호머의 『일리아드』(18번째노래)가 형상문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조각가 로뎅의 비서였던 릴케는, 화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경험을 살려,『형상시집』과 『신시집』을 통해 조형예술의 소재들을 시에 활용하였다. 여기에 실린 소네트「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는 조각작품인 ‘밀레의 토르소’를 보고 지은 시로, “독자는 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시인의 형상적 관조의 배후에 깃든 심오한 내면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중섭, 샤갈, 고흐, 뭉크, 피카소, 김정희 등의 작품 및 작가의 삶을 주제로 쓴 형상시가 적지 않다. 특히, 『시집 이중섭』(문학과비평사, 1987)은 화가 이중섭의 삶과 그림을 주제로, 시인들이 쓴 시와 ‘시인의 말’, ‘해설’ 등을 묶어 한권으로 엮은 것이다.  문자도(文字圖)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 유교덕목을 중국의 옛 이야기들과 연관시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글자 속에는 잉어, 죽순, 할미새, 용, 파랑새, 거북이, 복숭아꽃, 봉황, 충절비 등 글씨의미와 관련된 그림들이 글자마다 포함되어 있다. 글씨의 의미를 그림이 보완해줌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구체시의 사례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비롯하여, 고대 중국이나 인도의 전통회화 및 서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말라르메 「주사위던지기(Un Coup de Des, 1897)」, 아폴리네르 「칼리그람(Xalligrammes, 1913-6)」 등의 시에서는 종이 위에 자유로이 시행을 배열, 알파벳을 사용한 그림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말라르메나 아폴리네르의 작품은 시각적, 언어적 표현이 하나로 합쳐지는 이중예술품이라 하겠다. 문인화에서는 시와 그림이 함께 존재한다. 시와 회화는 창작방법만 다를 뿐 작가 정신의 반영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똑같은 그림이 그려졌어도 각기 다른 시를 써 넣으면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또 그림 안에 시를 쓰는 경우, 시를 쓰는 위치는 화면 구성에 영향을 주며, 시를 쓴 형식, 공간의 크고 작음, 글씨체도 영향을 미친다. 조선 초기부터 중국 문인화의 시화일치사상(詩畵一致思想)이 유입되어, 우리나라 사대부들에게 문인화의 기법적(技法的) 토대를 제공해 주었고, 외적인 기교보다 내적인 사상이나 철학 등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문인화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문인화에서는 시의 의미와 글씨의 미적 이미지 그리고 그림의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글씨도 그림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그림의 주제는 시의 주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3. 시와 미술의 이미지 시와 미술이 같은 울타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지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마음 속에 그리는 그림을 뜻하는 이미지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이 의미하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하여, 내용을 보다 잘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모든 예술은 이미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미지의 어원을 보면, 거울에 비친 상이라는 뜻의 모상(模像: eidolon)이다. 플라톤은 현상계가 진리의 세계(이데아)를 모방한 모상이라고 보았다. 이는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로 나눌 수 있다. 에이콘은 원본(이데아)을 곧바로 묘사한 것으로 유사관계(resemblance)를 말하며, 실재와 닮은꼴로 실재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판타스마는 복사물을 다시 복사한 것, 즉 시뮬라크르(simulacre) 관계를 말하며, 실재를 부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시뮬라크르가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미학적 담론에는 이미지(image)와 상상력(imagination)이 핵심으로 등장한다. 드브레(R. Debray, 1940-)의 견해에 의하면 이미지는 마술(magic)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술이란 무의식적인 꿈과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술에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냄이다. 마술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가시적인 것의 배후에 들어 있는 비가시적인 것의 기호이며,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 머물고 저장된 장소인 것이다.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란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을 지칭한다고 여겨지지만, 개인무의식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이래 서구 예술론을 지배해 온 ‘실재의 재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모방론’의 관점에서든 그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18세기의 낭만주의적 ‘감정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표현론’의 관점에서든, 예술은 이미지를 매개체로 한 의미작용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이미지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통해 서구 예술사에서 문학과 미술이 가장 근접한 정신 활동으로 인정된 것은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예술이 공통적으로 무의식적인 정신 활동에 기반을 둔 이미지의 생산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예술작품은 대상을 보고 그리되 대상과는 무관한 창조된 가상객체(virtual object)요 창조된 이미지이다. 가상(假象)이란 주관적으로는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현상을 말한다. 수용자(독자 및 관객)들마다 다른 이미지로 받아들이며 또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비평가도 해석을 내리는 데 고심하여, 의문스러운 곳은 그 의미를 부연하는 것이 고작인 난해함도 하나의 시적 요소다. 때로는 독자에게 그 중 한 행의 의미조차 분명히 알 수 없는 정도여서, 그것은 명암화법적인 회화 속 형식의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이 창조한 이미지라는 것의 추상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와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이미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또 다른 창조’라 할 수 있다.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과 무의식을 참조하여, 자신의 이미지로 변환하여 수용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의사소통수단이 된다. 4. 이미지 해석의 다양성 이미지의 생산 못지않게 해석도 중요하다. 특히 예술의 가치 평가는 수용자들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미술, 음악의 공통분모로서의 언어는 ‘의미하는 언어’가 아니라 제2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해석’이다. 예술 혹은 예술가는 나무에 있어서 큰 줄기와 같다. 예술가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 등 제반 환경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과 지정의(知情意)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모든 자양분을 흡수하여 큰 줄기를 통과해 잎, 꽃, 열매라는 작품을 생산한다. 예술가는 자기를 포함하여 자기를 둘러싼 모든 역사적, 현재적 환경에 대한 예술가 자신의 해석을 작품에 투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산된 예술작품을 소비하는 수용자들은, 생산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주어진 역사적, 현재적 환경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수용한다. 이처럼 예술작품의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해석이라는 단계가 존재한다. 그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면서, 수용자들이 해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것은 바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세계 인구의 수만큼이나 많은 해석의 가능성과 다중의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이미지의 특성이다. 개개 언어나 문장, 그림의 색조나 명암 등이 생산하는 개별 이미지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이미지(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도 중요하다.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심리적 역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독자반응이론에서 ‘독자가 텍스트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시각과 일치한다. 생산자(예술가)가 생산한 제품(예술작품)의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거쳐 자신의 이미지로 치환한 후 수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이미지 수용자의 해석 수용자 이미지로 치환 수용자의 수용 단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수용자는 어떻게 예술적 이미지를 해석할까? 이를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스투디움(studium)이란 우리가 지식과 교양에 따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영역으로, 양식화될 수 있고 전형적인 정보로 되돌려질 수 있는 부분이다. 감상자는 이와 같은 평균적 정보로 환원될 수 있는 영역을 인지하고 이를 감상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그림과 사진의 경우,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작품이 구성하는 시각상의 어느 영역에서 갑자기 감상자의 눈을 찔러오는 부분도 있다. 롤랑 바르트는 바로 이것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지칭했다. 어원상으로 이 푼크툼은 평균적 교양과 상식으로 이해되는 스투디움의 영역을 깨뜨리며 마치 화살처럼 감상자를 찌르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감상자의 시선이 작품에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푼크툼 때문이다. 좋은 시들은 인식의 스투디움을 깨뜨리며 인지 충격을 안겨주는 푼크툼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소위 사물을 새롭게 보게 하고 기존의 인식을 뒤흔드는 효과 역시 시적 푼크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두 가지 층위, 곧 정보적 층위와 상징적 층위에서 읽혀지는 두 의미는 이 이미지를 제작한 예술가에 의해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바르트가 제3의 의미라 부른 이미지의 세 번째 층위는 그만큼 자명하지도 않고 포착하기도 어렵다. 묘사는 불가능하고 헤아리기만 가능하며 지적(知的) 인식이 아닌 사적(私的)인 파악을 통해서만 포착된다.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언어가 어찌할 수 없는 이미지의 요소를 푼크툼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3의 의미는 주로 수용자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주제를 간추리고자 시를 읽는 것은 지나치게 비경제적 행동이다. 시에는 리듬과 이미지 그리고 비유와 상징 등, 그림의 경우 회화적 중심에 비견될 만한 다채로운 요소들이 있다. 시를 읽으면서 이런 요소들을 놓치고 테마적 중심에만 현혹되는 것은 시인이 애써 여러 요소를 활용해 구성해 놓은 텍스트를 다시 평범한 전언으로 풀어 놓는 것과 같다.” 그림도 주제 못지않게 색과 선과 면의 어울림 등 기법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처럼, 시에서도 각종 언어적 장치(리듬, 이미지, 비유 등)들이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수용자들은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제3의 의미, 즉 푼크툼까지 천착해야 한다. 물론 생산자인 예술가도 푼크툼까지 헤아려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랭보가 말하는 투시자(voyant)가 되어야 한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모든 인습적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려 영원한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가 투시자인 것이다. 예술가나 수용자 모두 라깡이 말하는, 현상이라는 커튼 뒤에 있는 실재(the real)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부단히 예술작품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읽고 보고 사색해야 한다. III. 나오는 말 예술의 생산과 수용 그리고 이를 중개하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면, 그림과 시는 단지 표피적인 표현매체만 다를 뿐이지 동일한 것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등 추상예술에 있어서는 표피적인 것마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추상에 의해 다른 영역에 속해 있던 문학과 미술, 나아가 음악은 하나의 차원으로 총괄된다. 예술적 언어가 생산하는 추상은 생산자가 똑같은 이미지를 생산해서 내놓아도 수용자가 푼크툼 영역까지 확장하여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피카소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칸딘스키와 클레는 미술과 음악이 통합될 수 있음을 보였다. 바그너는 음악, 시, 미술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예술, 특히 미술과 음악과 시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그림에서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시에서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며 상상력의 지원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호안 미로는 회화와 시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으며, 그의 그림의 총합은 새로운 종류의 언어를 구성하는 시각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호안 미로가 그린 그림 「시」(1968, 캔버스에 유채, 목탄, 259.5×173.5 Cm)는 ‘그림으로 시를 쓴 것’이다. 이 그림에서 수용자들은 나름대로 시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한국 시단에서 ‘독해가 불가능한 시’의 경우보다는 오히려 호안 미로의 「시」라는 그림이 훨씬 수용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시(詩)가 아닐까? ‘시는 반드시 언어로만 창작해야 하는가?’, ‘시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매체의 이합집산은 20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형태로 진전되고 있다. 특히 지난 수십 년간 컴퓨터를 위시한 신매체의 등장은 말, 형상, 음의 융 복합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오늘날 다매체 예술에서는 장르나 형식의 독자성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다원적이고 총체적인 텍스트에서는 읽기, 보기, 듣기 등 개별 지각방식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융 복합을 통해 예술적 효과가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는 수상 작품을 보면 이러한 예술 장르의 통합적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수상자인 믹스라이스(조지은, 양철모)는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식되는 식물들의 ‘이주’ 과정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제 ‘이주’된 아시아 근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추적”하고 있는데, 특히 에서 음악, 사진, 벽화, 영상,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져 주제를 부각시키는데 통합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다만,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단순한 사실의 소개에 머물고 있어 아쉬움이 남았고, 시적 형상화 작업이 좀 더 이루어졌으면 전체적인 예술적 효과가 증대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예술의 다양화, 융·복합화가 진전됨에 따라, 앞으로 시와 음악과 미술 등이 서로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을 연구하는 통합학회 내지는 예술단체가 구성되어, 예술 특히 시문학의 품을 더 넓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예술을 아우를 수 있는 ‘시극의 활성화’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시극의 경우, 단순히 대화와 지문을 시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무대 및 의상 디자인 등 미술영역과, 음악과 무용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관객에게 좋은 작품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 쓰기와 관련하여, 호안 미로가 ‘그림으로 시를 썼다’고 말한 바와 같이, ‘시를 문자언어로만 창작해야 한다.’는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시는 문자로 써야만 한다.’고 고집하더라도 다른 매체(영상, 음악, 미술 등) 등과의 융 복합을 통해 더 수용자에게 다가갈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서 단토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46    현실을 뛰어넘어 정신을 해방하라 - 앙드레 브르통 댓글:  조회:208  추천:0  2019-05-19
현실을 뛰어넘어 정신을 해방하라 -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 프랑스에서 결성된 아방가르드 그룹이다. 이들은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계산적이고 논리적인 시민사회의 사고방식과 문화의 귀결이라 보고, 부르주아적 합리성에 입각한 삶의 방식 거부를 예술실천의 동기로 삼았다. ‘초(超)-현실(sur-real)’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현실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상상해냄으로써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정신을 해방하려는” 지향을 드러낸다.   예술창작에서 이 지향은 현실을 모방하는 대신, 현실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지닌 ‘초-현실’의 창조로 이어졌다. 논리적 구상과 계획에 따라 제작되는 대신, 즉흥적이고 우연하게 생겨나는 흔적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소산물을 소재로 삼고, 한 개인 예술가의 창조력 대신, 누구에게나 내재해 있을 초개인적 무의식을 창작 동력으로 삼았다. 이들이 남긴 회화와 조각, 문학작품은 이후 현대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충격적 신선함을 준다.   번역자의 말처럼 “초현실주의 선언과 그에 잇단 몇 가지 선언 형식의 글들이…처음 발표될 당시의 효력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초”-현실주의의 근본지향이 오늘날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과는 달리 『착색 판화집 Illumination』의 랭보와 로트레아몽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상상력을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시키고 상상력의 유일한 힘을 믿었다. 그들은 이성에 의한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고, 미적인 혹은 윤리적인 관심에서 완전히 떠난 상상력을 이용하였다.     브르통이 정의하는 초현실주의는 은유적인 창의력의 완벽성에 대한 믿음, “상상력의 힘은 절대로 지배될 수 없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1922년, 바르셀로나의 한 강연에서 브르통은 이러한 해방의 조짐을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언젠가는 과학들이 처음 보기에는 자신들과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 시적 정신에 접근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지금 그 과학들의 쇠사슬을 끊고, 여러 측면에서 부드럽게 휩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발명이라는 천재이다.     1924년부터 브르통의 어조는 더욱 확실해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설득력을 얻었다. 브르통은 상상력의 해방이 어떤 결과를 낳든지 간에 전통적인 예속에서 상상력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상상력을 노예 상태로 축소시킨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숭고한 정의를 외면하는 것이다. 오직 상상력만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가르쳐준다.       자동기술법의 초기 작업, 꿈과 무의식의 탐구, 꿈의 이미지나 신문에서 오려낸 제목들을 결합하여 만든 초현실주의 시 등의 경험을 통하여 브르통은 “상상력은 이제 그의 권리를 회복할 단계에 왔다”고 확신한다. 그런 이유로 초현실주의는 모방의 시와 예술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순수한 창조의 시와 예술, 해방된 상상력만의 순수한 창작품을 대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이제 시인과 예술가는 대상의 종속에서 벗어난 현대 예술의 특권이자 쟁취인 완전한 창의력의 자유를 즐기려 한다. 초현실주의는 상상력의 자율성이라는 원칙 위에 있으며, 그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원칙 위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상상력의 해방은 단지 시와 예술의 새로운 개념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의 해방과 인간의 사회적 해방까지도 결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에 이른다.     앙드레 브르통은 창의력을 해방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상상력의 진정한 ‘현상학’을 탐구하며 상상적인 능력의 기능을 실험적으로 연구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이브 탕기(Y. Tanguy)의 회화에 대하여 브르통은 “예술적 상상력의 전개 능력은 우주의 다양한 현상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은밀함이 상상력으로 하여금 우주에 대응하고 현상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게 만든다. 여기서 상상력은 인간 미래의 해방의 도구가 되고 세계와 물질 변화의 동인(動因)이 된다.     즉, 상상력은 하늘에서 받은 능력이나 시적 은총이 아니라 바로 ‘전형적인 정복의 대상(par excellence objet de conquete)’인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에게 있어서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교란을 일으키고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았던 재앙을 부를 수 있는 변화시키는 힘, 혁명적인 힘이다. 상상력으로 인해 시인은 세계의 구조와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세계의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흰 머리털이 난 권총 Le Revolver a cheveux blancs』의 서문에서 브르통은 상상의 세계(l'imaginaire)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시도하기도 한다. “상상의 세계는 현실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 초현실주의가 이해하는 절대적 현실(le reel absolu)은 자연주의 미학의 대상들인 외부의 모델이나 물질적 자료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가능성과의 동일화이기 때문이다. 즉, 상상력의 기능은 외양의 세계에 실재를 부여하고, 현실을 심화시키고, 직감적으로 가능성의 심장부에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력 속에서 그 현실이 포함하고 있는 암시적인 계시들을 이해하게 된다. 헤겔(Hegel)의 뒤를 따라 브르통은 상반되는 것들을 결합시키고, 초현실의 범위 안에서 그 둘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변증법적 열쇠를 찾으려 한다. 다시 말해서 브르통은 주체와 대상, 정신과 물질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꿈과 행동, 심리적 현실과 외부적 현실이 상응하도록 노력한다.   초현실주의 운동 초기부터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연과 초자연,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은밀한 연결이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 단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있는데, 시인의 역할이 바로 그 연관성을 찾아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924년 브르통은 이미 정신적인 삶의 모순적인 요소들이 서로 뒤섞이기 위해 모여드는 ‘일종의 절대적 현실성, 즉 초현실성’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1930년에는 브르통은 이를 좀 더 자세히 부연 설명한다.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소통 가능한 것과 소통 불가능한 것이 모순으로 인식되지 않는 정신의 어떤 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든 것이 믿도록 해준다. 그런데 초현실주의 활동에서 이 점을 설정하려는 희망 이외에 다른 동기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다.       미셸 카루즈(M. Carrouges)에 의하면 상반되는 것들이 통합되는 초현실적 장소는 ‘현실의 전체성’을 포함하는 속성을 갖는다. 이는 ‘창조의 기원점’을 상징하는 신비주의자들의 숭고한 점과 동일하다. 그렇지만 브르통이 주장하는 초현실은 신의 존재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므로,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숭고한 점이라기보다는 현실 속에 육화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브르통의 초현실은 내재성의 원칙에 대응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은 내재성의 특수한 철학에 이끌리도록 하는 것인데, 그 철학에 따르면 초현실은 실재의 외부나 상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 현실이란 통합하는 힘이고, 세계에 내재하는 중심이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외양상으로 보면 모순적인 요구들이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게 하는 자기(磁氣)적인 힘이다. 이 절대적 현실은 존재의 의식적인 능력들뿐만 아니라 그 근본적인 비이성까지도 감싼다.     시적 창작의 측면에서 보면 절대적 현실은 감각적인 지각과 정신적인 재현의 통합을 이룬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지성적인 능력과 감각적인 능력을 결합시키려는 이러한 의지, 구체와 추상을 구분하려는 태도의 이러한 거부는 바로 상상력의 힘에 의거하고 있다. 이 상상력의 힘이 기호와 의미로 표현된 사물과의 중계 역할을 한다.     현대적인 시와 예술에 있어서 대립적인 것의 융합을 축복하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사물에 대한 지각과 지각된 사물을 재현하는 능력을 결합시키고, 바로 이 종합하는 행위에 의해 사고를 객관화시킨다. 상상력은 이 둘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할 수 있는데, 세계에서는 사물들을, 지각에서는 심리적인 가치와 자율적인 정신적 형상을 추출한다.     오늘날 예술의 중요한 문제는 정신적 재현이라는 것을 상상력과 기억의 의지적인 연습을 통해서 점점 더 객관적인 정확성으로 이끌어가는 데 있다. ……오늘날 초현실주의가 이러한 수술을 통해서 얻은 가장 큰 장점은 일반 사람들에게 격렬하게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용어, 즉 지각과 재현을 변증법적으로 조화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이 둘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에 다리를 놓았다는 사실이다.   지각과 재현은 정신 쪽으로도 향하고 또 물질 쪽으로도 향하는 상상력의 이중의 활동에 대응한다. 이 둘은 상상적인 사고라는 하나의 능력의 이중적인 기능일 뿐이다.   출처- "디바인 센터"  
45    보르헤스 <하버드대 강의> 댓글:  조회:273  추천:0  2019-03-10
  1. 시라는 수수께끼   그는 시를 '마신다' 고 표현한다. 인간과 우주 앞에서 느낀 당혹감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고 고백한다. 시의 실체는 열정과 즐거움이다.   2. 모든 단어는 잠자는 은유   눈과 별, 시간과 강, 여자와 꿏, 인생과 꿈, 죽음과 잠, 전투와 불 은유의 변형은 무한하다.   3. 이야기하기   이야기 하는 것과 시를 읊는 것이 합쳐지기, 를 즉 이야기의 즐거움에 시의 기품이 추가되기를 소망. 소설이 무너지고 있다. 보르헤스는 시인의 어원이 원래 만드는 사람을 뜻했기에 다시 그런 역할을 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만들다는 의미는 이야기를 지어내 읊다는 뜻이다.   4. 시의 번역   번역은 반역이다 라는 인구에 회자되는 이탈리아 경구에도 불구하고, 원작을 뛰어넘는 훌륭한 변역이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직역의 기원이 성경의 번역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쓴 텍스트를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직역 덕분에 사람들은 모국어와 다른 묘사 방법을 배우고 표현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고 믿는다. 세상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볼 때, 그 역사적 상황보다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한다.   5. 사고思考와 시   이론에 의해 정의된 문학론 보다는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지 않은 문학 그 자체를 추구한다. 그는 말이 가진 마법의 힘을 설명하고, 중요한 것은 문체의 정교함이 아니라 시가 살았느냐 죽어 있느냐 하는 점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저는 제 자신을 본질적으로 독자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감지하듯이 저는 감히 글을 써왔습니다만, 제가 읽었던 것이 제가 썼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읽지만, 누구든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쓰기 때문입니다.   시가 정체를 드러낸 결정적인 순간의 중요성을 보르헤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어떤 생각과 씨름해 왔습니다. 그 생각이란, 한 사람의 인생이 수천 수만의 순간들과 날(日) 들로 혼합되어 있더라도 그 많은 순간들과 그 많은 날들을 단 한순간, 즉 인간이 스스로가 누구인가를 아는 순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問道夕死可矣)"를  떠올리는 말이다. 그 결정적 순간이 심지어 한 인간의 이미지까지도 결정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예수에게 키스하는 순간이 그를 영원히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배신자로서의 이미지를 만든 것과 같이. 그 순간을 겪으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키츠가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어느 한마리 새의 노래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새소리라고 느끼면서 영원을 맛보았다는 그 시 이야기는 보르헤스의 산문과 시 곳곳에서 인용된다. 핵심은 보르헤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즉 문인으로서의 소명을 알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저의 인생에서 중심적인 사실은, 언어의 존재 및 그 언어를 시로 짜낼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그 사건이 일어난 아버지의 서재가 그의 고향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십분 이해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문학 인생은 그 순간의 자기 복제와 재생인지 모른다. 보르헤스 문학의 비밀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물론 그를 글쟁이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외면의 형식이고, 내면적인 내용은 초월(꿈)이 지상으로 드러나는 영매靈媒 로서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제가 무언가를 쓰고 있을 때, 저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성이 작가의 작품과 많은 관련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대문학의 죄악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너무 자의식적(self- conscious)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을 쓸 때,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상황들에 대해 잊습니다. 저는 꿈이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평론가들에게 감사하지만, 어쩌면 그들의 거창한 철학적 의미보다는 소박한 꿈을 나누는 일반 독자가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어스름 황혼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유대인의 손은 렌즈를 몇 번이고 윤을 내고 있다. 저물어 가는 오후는 두렵고 춥다. (모든 오후는 저물어갈 때 그렇게 마련이다.) 게토의 변두리에서 창백해져가는 히아신스 빛 공기와 그 손은 그 말 없는 이에겐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명백한 미로를 꿈꾸고 있었다. 다른 거울의 꿈속에 비춰진 꿈의 반영에 불과한 명성과 처녀들의 두려운 사랑도 그를 흔들지 못했다. 은유나 신화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힘들게 수정을 갈고 있다. 모두 자신의 별들인 ,조물주'의 무한 지도地圖를.   보르헤스의 시 '스피노자'   1969년에 보르헤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자신의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유대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스라엘을 동경했었다. 이때도 중남미 좌파 지식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한 보르헤스를 비판했다. 어쨌든 이제는 국제적으로 보르헤스의 명성은 확고한 것이 되어, 어딜 가나 그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구루(정신적 스승)' 의 대접을 받았다.   꿈의 책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삶의 책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위의 단편이 그 점을 생생히 보여준다. 노년이 깊어가며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느낀 보르헤스 역시 이 삶이란 꿈에서 그만 깨어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누구나 가끔 악몽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란 걸 알고,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로 안심하는 것처럼, 보르헤스도 인생 자체가 하나의 일장춘몽이란 걸 인식하고 언제라도 꿈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면서 이 고해苦海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44    T.S. 엘리엇 새로 읽기 :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댓글:  조회:257  추천:0  2019-03-09
T.S. 엘리엇 새로 읽기 :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엘리엇이 그의 이라는 논문에서 전통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가 이 논문에서 말하는 것을 보기로 하자.   시인이 어떤 점으로든지 특출하거나 흥미를 끄는 것은, 그의 개인적 정서, 다시 말하면 그의 생활의 어떤 특수한 사건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서 때문이 아니다. 어느 시인 그 사람만이 가진 특수한 정서는 단순하고 생격하고 멋없는 것일 수 있다. [중략] 물론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고, 시를 쓰는 데 염두에 두고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사실상 졸렬한 시인은 흔히 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무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의식적이다. 어느 쪽이든지 이런 오류로 말미암아 그 시인은 으로 된다. 시는 정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정서에서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에서의 도피이다. 그러나 물론 개성과 정서의 소유자라야 개성과 정서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이유를 알 것이다. (이창배 12-13)   같은 논문에서 엘리엇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것은 [시인이] 시를 쓰고 있는 순간에 좀더 가치 있는 것에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예술가의 발전은 계속적인 자기 희생이며, 지속적인 개성의 멸절이다.   이러한 개성의 소멸 과정과 이것이 역사 의식과 맺는 관계를 정의하는 일이 이제 남아 있다. 여기서 엘리엇이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집단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전통은 긴 역사의 형성 과정에서 무의식 속에 가라앉은 개성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그가 강조하는 바는 이 같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개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전통은 따라서 개성이라는 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타자로서의 무의식인 셈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개인 차원의 개성을 죽이고 집단 무의식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롤랑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사라지는 중립적이고 복합적이며 비스듬한 공간이다. [글쓰기는 또한]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몸을 위시하여 모든 정체성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이다. [중략] 말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언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략] 내가 아니라 언어이며, "내"가 아니라 언어만이 움직이고 "행위"하는 곳에 다다르는 것이다. [중략]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작가란 결코 글쓰는 행위 이상이 아니다. 이는 라는 말하는 행위 이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언어는 만을 알 뿐 [개인으로서의]의 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술 자체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이 텅 빈 주체는 언어에게 만으로 족할 뿐이다.   물론 엘리엇과 바르트는 각기 다른 문맥에서 말하고 있지만, 결국 이 둘은 같은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즉, 엘리엇이 작가란 자신의 개성이 아닌 전통이라는 집단 무의식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닌 주체로서의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살리는 대신에 정체성이 멸절하는 곳에 이르는 일이 곧 글쓰기라는 바르트의 주장과 일치한다.   작품은 (서점에서, [도서관의] 도서 목록에서 그리고 시험준비를 위한 지정 필독서 목록에서) 볼 수 있다. 텍스트는 전개 과정이며,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또는 이러한 규칙을 어기면서) 말하다. 작품은 우리 손안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언어로만 담아 낼 수 있으며, 담론의 움직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담론을 의미화의 사슬로 바꿔 말한다면, 우리는 텍스트가 작가에 의해 그 의미가 확정되거나 종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텍스트는 반대로 무한한 기의의 지연을 실행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암유(allusion)하며, 또한 다른 텍스트들과의 상호텍스트성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생산하는 "전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기호들은 단지 떠 다니는 기표들일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인가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시의 저자는 엘리엇도 그리고 파운드도 아니며 또한 이 둘을 합친 것도 아니다. 이 시에는 무수한 인용과 암유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시의 저자(이제 우리는 저자 대신에 글쓰기의 주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는 엘리엇과 파운드 말고도 이 시에 인용되고 암유된 성경을 비롯한 무수한 동서양의 텍스트들의 글쓰기의 주체들이다. 이 시는 단지 이 같은 주체들의 정체성이 소멸된 자리에 타자로 남아 있는 집단 무의식이며, 이 집단 무의식은 곧 언어인 셈이다. 그러나 누가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완전히 답해진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글쓰기의 주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가 언어라면 이 같은 언어는 또한 글쓰기의 주체의 참여뿐만 아니라 또한 글읽기의 추제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이는 언어가 우리 모두의 참여를 요구하는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쓰기가 글읽기를 전제로 한 것이며, "텍스트가 하나의 생산적 활동에서만 경험되는 것"이라면 [황무지]의 글쓰기의 주체는 위에서 말한 모두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엘리엇, 파운드, 인용되고 암유된 모든 텍스트들의 글쓰기의 주체 및 집단 무의식과 이 시를 읽는 독자들 모두를 이 텍스트의 글쓰기의 주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엘리엇이 이 시에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나오는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의 동포여, 나의 형제여!"-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가 또한 독자도 포함함을 엘리엇 자신이 상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로서의 무의식은 이 시 텍스트의 공간을 이처럼 활짝 열린 글쓰기의 공간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넓은 의미화의 공간으로 만들어, 무수한 텍스트 사이의 연계가 가능한 넓고 넓은 해석의 공간을 제공한다. 타자로서의 무의식의 반란은 이제까지 무의식을 억압하던 의식을 여지없이 전복시켜 의식을 단지 "한 무더기의 깨어진 성상들"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같이 붕괴된 의식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글쓰기의 주체로서의 독자와 다른 텍스트들의 집단 무의식을 복원시킨 셈이다. [중략]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의 욕망"이라고 라캉은 주장한다. 이 같은 욕망은 단지 대상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욕구와 욕구가 채워진 후에도 아직도 채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나머지를 지칭한다. 이 같은 나머지로서의 욕망은 결핍의 존재(want-to-be)로서의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을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중략] "욕망하기"는 곧 "욕망하기를 원하지 않기"라는 억압된 욕망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욕망의 억압을 습관화한 현대인의 특질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희열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심리적인 가정을 전복시키고 그의 취향과 가치관 그리고 기억의 일관성을 교란시키며, 그와 언어의 관계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따라서 상징질서로서의 언어를 위기로 몰아 이를 전복시키는 것은 타자로서의 무의식이며, 이 같은 무의식은 구심점이 없는 조각난 텍스트들의 집합인 셈이다.      *이정호 (서울대학교 출판부) : 제4장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151쪽~  
43    T. S. 엘리엇 비평의 대화적 상상력 댓글:  조회:261  추천:0  2019-03-09
시론을 '시작' 하며 또는 용의 머리(龍頭) : 소위 '포스트' 시대에 교활한 엘리엇 '되' 살리기  또는 '새로' 읽기 또는 '다시' 좋아하는 법 배우기 중에서.       엘리엇은 좋은 의미에서 '교활한' 야누스이다. 여기서 '교활한'이란 말은 다면체적 엘리엇에게서 우리는 그의 한 면만을 보고자 고집하게 때문에 생기는 그의 알 수 없는 다른 면에 대해 의혹/의심하는 우리 자신의 '불평'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는 담장에 걸터 앉아 언제나 양쪽을 바라보는 포월(匍越)하는 니체의 '초인'이다. 엘리엇은 미국 '남부인'으로 태어나 동부의 최고 대학을 다닌 '동부인'이 되었으며,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아버지와 문학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어머니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갈등과 대화의식은 그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 시절에서부터 지적 호기심이 강한 방랑자, 유목민으로 철학을 전공하였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가 없었고 ('철학'과 '문학'의 보이지 않는 대화이던가?) 시의 습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서양 철학은 물론 동양 철학(특히 인도 철학)에도 심취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이미 정신적 지적 유목민이었다.   엘리엇은 위대한 이민자였다. 미국에서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스스로 지적 정신적 망명자가 되었으며, 스스로를 급진적으로 '타자화' 하였다. 그는 약속되었던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 자리를 의연히 떨쳐버리고 I.A. 리차드가 제시하였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 영문학과의 자리도 거절하고 치열한 세속적 삶의 싸움터인 런던의 야시장 바닥에 자신을 내던졌다.   엘리엇이란 작가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시대적 '산물'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의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작가로서 키워져 버린(만들어진)-자신의 의지에 반(反)하여-분열되 버린 자기 시대 속에서의 실존적 지식인이었다(이는 초기시 [프루프록의 사랑노래]나 [황무지]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시의 '심적' 자아는 초기 산문에서 '공적' 자아로 나타난다.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의 뒤얽힘과 갈등은 [푸루프록의 사랑노래]에 실존적으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대화구조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초기의 '시'와 '산문'의 갈등구조는 자신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또 다른 양상인가? '시'에서는 엄청난 형식파괴를 통한 실험 그리고 [황무지]의 경우에서처럼 시 텍스트 구성에 있어서 상호 텍스트의 예상치 못한 병치와 접합으로 새로운 충격과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논하는 바흐친의 눈으로 보자    그의 [도스토예프스키의]의 생각은 어디에서든지 목소리들, 반(半)목소리들, 다른 사람들의 말, 다른 사람들의 몸짓이라는 미로를 통해 나아간다. 그는 다른 추상적인 입장을 토대로 하여 그 자신의 입장을 결코 증명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어떤 지시적인 원칙에 따라 생각을 서로 연결하지 않으며 여러 견해들을 병치시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 자신의 견해를 구축한다.   같은 맥락에서 엘리엇 자신은 병렬적 상상력과 중층적 구조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터너와 미들턴의 시행을 보면, 언어의 끊임없는 작은 변모가 일어나고, 어휘들은 끊임없이 새롭고도 갑작스러운 결합 속에서 병치되고, 의미들은 끊임없이 다른 의미들과 중첩된다. 이것은 감각의 아주 높은 단계로의 발전 -아마도 우리가 지금까지 결코 필적할 수 없었던 영어라는 언어의 발전-을 증명하는 예이다. 그리고 정말로 체프먼, 웹스터, 터너, 단의 죽음과 더불어 우리는 지성이 즉각적으로 감각과 닿아 있었던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감각은 어휘가 되었고 어휘는 감각이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지성과 감성이 손쉽게 교류하는 대화관계에 있고 감각과 어휘 사이에 자연스럽게 환유적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엘리엇의 시의 이러한 대화적 중첩적 특징들은 산문에서는 문체나 내용적인 엄청난 절제와 통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의 엘리엇에게 분명 시는 산문의 알터 에고(alter ego)였다. 어느 것이 진정한 엘리엇인가? 왜 이와 같은 긴장관계를 만드는가? 분열증은 시에서 토해 내고 다시 산문에서 편집증적으로 추스린 것은 엘리엇 특유의 담론전략이었던가? 분열증인가? 편집증인가? 그러나 엘리엇 자신의 자신의 시와 산문과의 상호보완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비평에서 가장 정확한 의견들을 주장하는 반면 나의 운문에서는 그 의견들을 파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개의 얼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중적 역할을 가진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수치감도 느끼지 않는다. [...] 산문에서는 사색이 이상과 합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반면 시작(詩作)에서 우리는 단지 실제만을 다룰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는 다른 시뿐 아니라 산문으로부터도 배울 만한 것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산문과 시 사이의 상호관계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관계처럼 문학에서 생명력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엇은 주위의 끔찍한 현실 -서구 문명의 몰락과 와해의 '시작'-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해명할 수도 없었다. 절대적 진선미를 추구하려던 자신은 이미 산산이 파편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자신이 통합하고자 했던 (서구 중심의) 세계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중략   엘리엇 자신도 그 어느 비평도 후세에 계속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떤 문학비평도 후세대를 위해서 그것이 자체로 계속 유용하지 않다면 그리고 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본질적 가치를 계속 가지지 않는다면 호기심 이상의 감성을 자극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 비평의 일부가 이러한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진다면, 우리는 만일 우리가 또한 그 작가와 그의 첫번째 독자들의 입장 속에 우리 자신들을 집어 넣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경우 그 가치를 그만큼 더 정확하게 향유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무엘] 존슨과 콜리지의 비평을 공부한다면 틀림없이 커다란 보상을 받을 것이다.   대화적 비평의 대가들인 존슨과 콜리지를 보고 엘리엇이 끊임없이 배웠듯이 우리는 엘리엇의 의식구조[대화구조]에 우리 자신을 새로 끼워 넣어 다시 읽고 새로 써서 그의 비평의 가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보자. 다시 말해 알튀세적인 '징후적 읽기'를 통해 엘리엇을 우리 시대에 다시 보이게 만들자. 이러한 시도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42    보르헤스 詩學 -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댓글:  조회:288  추천:0  2019-03-09
보르헤스 詩學 -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데리다(J. Derrida)는 ‘쓰기학’에서 사람의 마음을 표시할 수 있는 어떤 말도, 쓰기도 불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소위 ‘차연’(differance)이라는 말로 데리다는 종래의 ‘논리 중심주의’에 반기를 든다. 데리다는 서구의 논리 중심주의의 뿌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소리 중심적 사고에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소리는 영혼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말을 들으면 진실을 알 수 있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영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믿었다. 쓰기는 말을 받아적는 부차적 행위로 생각되었다. 여기에서 인류는 말하고 쓰는 행위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믿는 논리 중심주의를 전통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차연’이란 말로 이들 전통에 반발하면서, 쓰기나 말하기는 항상 어떤 현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동시에 표상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예를 들어 나의 지금 느낌을 표현한 ‘춥다’라는 말은 이미 추웠던 느낌의 대치물일 뿐인 것이다. 동시에 내가 느꼈던 ‘춥다 !’는 느낌의 질이나 양을 ‘춥다 !’는 말이 대변하지 못한다. 말과 느낌 사이만 해도 이토록 시간적 차이(지연)와 질적 차이가 나는 것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 문화는 언어를 통하여 다르게 구현되어왔다. 그러나 데리다나 라깡(Jacques Lacan)에 와서 그 언어라는 것이 어떤 본질이나 대소망(라깡의 ‘Phallus’)을 직접적으로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도 없음이 이야기된다.   이들 해체주의의 사고는 보르헤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맨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많은 사고는 보르헤스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사람이다. 모든 시인들처럼 시를 읽고 시를 쓴다. 책이나 시가 나의 마음이나 느낌을 포착함과 동시에 처음 그대로 투영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시 속의 나의 느낌이란 것도 남의 느낌, 시의 언어의 느낌, 남의 시를 읽어 아는 느낌일 수 있다. 나의 시 속의 나의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시를 쓸 때는 이미 지나간 느낌일 뿐이어서 시나 글은 나의 살아 있음의 어느 호흡도, 세포의 움직임도,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음도 체크하지 못한다. 나의 시에 그런 살아있음의 현실감이 잡힌다면 그건 실감나는 현실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언어는 관습의 산물이고 문학, 철학 또한 이런 관습의 소산이라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나의 사고이기 이전에 관습의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구약성서의 말을 시학으로 구현한 ‘해체주의 시인’이 바로 보르헤스다. 대부분의 시는 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시 속에 다시 한번 ‘그’다. 즉 ‘타인’ (elotro)이다. 보르헤스는 시를 쓰다 말고 묻는다. “그 둘 중의 누가 이 시를 쓰고 있는가 / 그 복수의 나, 아니면 단 하나의 그림자?/ 말이 무슨 상관이랴, 내게 오는 이 말이, / 결국 구분할 수 없는, 똑같은 저주.....” 그 ‘복수의 나’는 역사 속에서 나처럼 인생을 살았고 그 삶을 책으로 남긴,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그 책을 읽고 내 가슴을 움직인, 그 많은 지나간 삶 또는 앞으로 올 삶들을 점지해 가는 단수가 아닌 여러 사람의 나다. 그러나 이들 나를 이루고 있는 삶이나 문화의 흔적들은 모두가 허상 즉 ‘하나의 그림자’임에서 일치한다. 신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책을 읽었고 읽어가고 있는 중생들은 그 알 수 없는 그림자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저주받은 영토도 동시에 지금 나의 삶이 숨쉬고 있는 은혜의 터다. 바벨탑 이전의 언어, 신의 언어는 우리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미로이며 미궁이다. 그러나 그 부서지고 흐트러진 형상 속에 또한 참 삶의 모습이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   청동으로 새긴 6각운의 시 수천개의 길고 긴 시구 맨 처음에 그리스 시인은 기원한다 그 어려운 뮤즈, 혹은 신비한 불꽃에게 아킬레스의 분노를 노래할 힘을 달라고, 호메로스는 알고 있었다, 타인이 –어떤 커다란 신이- 우리의 어두운 작업을 사나운 불빛으로 상처내고 있음을; 몇 세기가 지난 뒤 성서는 말하리라, 성령은 마음내키는 대로 불어닥친다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정한 신은 반드시 선택받은 자에게만 완전한 도구를 준다: 밀턴에게는 사방에 어두운 벽을, 세르반떼스에게는 추방과 무명의 아픔을, 세속의 시간의 기억 속, 영원한 것은 신의 목소리뿐, 그 찌꺼기만 우리 것.   그렇다. 불멸의 작품은 이름모를 신의 뜻이다. 이름을 모름은 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은 오히려 부재의 모습으로 지금 나의 인생과 나의 시의 됨됨에 참여하고 있다. “무정한 신은 / 반드시 선택받은 자에게만 완전한 도구를 준다.” 이해할 수 없는 우연과 고난과 불멸의 영광을 말이다. 롱기누스(Longinus)는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함을 시쓰기의 방편으로 제시하면서, 고전 속에는 뮤즈로부터 받은 혼이 숨쉬고 있다는 소리를 한다. 그 혼은 글을 읽는 독자를 매혹하고 또다른 시를 쓰게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영감론을 재해석한 롱기누스의 창조적 모방론은 보르헤스에게도 통한다. (중략)   보르헤스는 말라르메와 함께 ‘말이 시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전통 속의 말일 수밖에 없다. 즉 나의 말이 아니라 남의 말, 남들의 말이다. 따라서 나의 시는 ‘다른 사람’ 즉 남이 쓴다. 그것은 나의 시 앞에서 나의 절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의 시가 내 것이 아니듯이 남의 시도 남의 것이 아니다. 다 똑같이 ‘어둠의 자식들’이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말을 쓰지만 같은 냄새, 같은 체험, 같은 뜻으로 쓸 수는 없다. 이 시를 쓰는 나는 내 시 앞에서 타인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를 읽으면서 내 시로 공감할 수 있다. 내가 내 시의 작가가 아니라는 말과 내 시의 시인이라는 말은 똑같은 소리, ‘똑같은 사람’의 어두운 발성일 뿐이다.   그러나 내 시가 남의 시인 것은 그것이 특히 독자들의 읽음을 통하여 살아가는 숙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일단 쓰고 나면 나는 내 시의 하나의 독자일 뿐이다. 나의 시는 독자의 시다. 내 시를 쓰는 나도 내 시앞에서 타인이며, 내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를 읽는 독자도 타인이다. 내 시는 타인의 시다. 모든 타인의 시는 동시에 나의 시다. 모두 똑같은 사람의 시다.(중략)   보르헤스는 영감을 믿는 시인인 점에서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영감의 자유를 믿지 않는 숙명론자인 점에서 비극적 감성주의자이자 회의주의자다. 아니면 안또니오 마차도처럼 나그네 삶의 ‘우수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르헤스는 그의 시가 그의 생명도 삶도 그 어느 것도 대변하거나 살릴 수 없음을 안다. 그는 시를 믿지 않는다. 그는 시 없는, 책 없는 인생을 믿지 읺는다. 보르헤스는 시를 쓰지 않는 인생, 아니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무명의 삶의 위대성에 각별한 애착을 갖는다.     사화집의 한 무명시인에게   지상에 오직 너만의 것이었던, 우주가 오직 너만을 위해 존재했던, 그 고통과 행복으로 짠 비단, 그 아름다운 날들의 기억은 어디 있는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강물의 나날들 그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너는 이제 사화집 목차 속의 한 이 름.   신들은 남들에게 끝없는 영광을 내렸다. 비문이며 공적문이며 기념비며 정확한 역사가들까지; 자네에 대하여 아는 유일한 것은, 희미한 친구여 어느 하오에 두견새 울음을 들었다는 사실.   어둠의 수선화 사이, 자네의 희미한 그림자는 신들이 너에게만 깍쟁이었다고 하겠지. 하지만 세월은 하찮은 빈곤의 그물 같은 거지, 망각으로 짜여진 잿더미의 평화보다 더욱 훌륭한 결론이 있을 수 있을까 ?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들이 녹슬지 않는 영광의 빛을 던졌지, 마음의 내장을 비추고 그 균열을 하나하나 들추어낼 수 있는, 그러나 그 영광 또한 그토록 경애하는 장미를 끝내 송두리째 으스러뜨리고 말게 하는.... 자네에게만은 신들이 비교적 자비로웠던걸세.   아직 밤이 아닌, 밤일 수 없는 어두운 하오의 황혼 속에서 자네는 아직 테오크리토의 두견새 울음을 듣지 않는가.   보르헤스는 백과사전 출신, 도서관 출신 시인이면서 반독서주의자다. 고전처럼 유명시인의 시처럼 많이 읽히는 시인이 진정한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신의 일이다. 시의 영광과 패배는 타인의 일이다. 신들이나 타인의 장난은 알 수가 없듯이 더러 시인은 성공하고 실패한다. 그렇다고 시를 살지 않고 삶을 사랑하지 않는 시인은 없다. 오늘 독자에게 영광을 얻지 못한 시와 시인은 내일과 신에게서 더욱 영원한 독자를 만날 수 있다. 이딸로 깔비노(Italo Calvino) 말처럼 독자는 미래를 안다. 시는 독자의 것이며 신의 것, 망각의 것이다.   보르헤스는 ‘무명시인’ 혹은 ‘작은 시인‘ (Poeta Menor)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아래의 시는 위 시의 해석이 된다.   종착점은 망각 나는 조금 빨리 도착했을 뿐   위 두 시에서 보르헤스는 시와 시인의 길은 어차피 파멸과 망각을 향해 있음을 안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그 유명한 에서 “죽음은 시와 시인을 잡아간다”라고 했던 것을 아르헨띠나 시인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어느 영광도 장미도 부서지고 으깨어지는 숙명일밖에, 그래서 차라리 “망각으로 짜여진 잿더미의 평화”가 오히려 먼저 도착한 미명의 영광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미리 영광이니 명예를 주지 않은 ‘무명시인’에게는 신이 오히려 떨리는 슬픔, 무너지는 아픔을 면제해주는 자비를 베푼 게 아닌가.   보르헤스는 노자의 ‘무명(無名)’을 배운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유달리 무명시인, 작은 시인에 대한 애착이 두드러진다. 무명시인은 시와 시인이 가야 할 길에 미리 와 있는, 그 망각의 강가에 미리 도착해 무상의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는 득도의 맛을 풍긴다. 득도의 경지이기에는 아직 서글픔과 우수가 얼룩지는 라틴계의 핏기가 있지만....“ 아직 밤이 아닌, 밤일 수 없는 어두운 하오의 황혼 속에서/ 자네는 아직 테오크리토의 두견새 울음을 듣지 않는가.” 그렇다.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 강가에서 듣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두견새 울음에서 황홀감을 느낀다. 그의 또다른 무명시인에 관한 시를 보자.   1899년 어느 무명시인에게   하루의 가장자리쯤,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는 서글픈 시간을 위해 시를 남긴다는 것, 황금빛 반짝임과 희미한 그림자의 아픈 날짜에 너의 이름표를 단다는 것, 그것이 네가 원했던 것. 하루가 기울고 있을 때, 또 얼마나 열심히 그 이상한 시구를 쓰고 다듬고 했었을까 ! 우주가 흩어져 사라질 때까지, 여기 이상한 푸르름이 존재했음을 알리려는 그 이상한 시구 ! 네 뜻이 성공했는지, 심지어 나는 네가 실제 존재했는지조차도 나는 모른다, 세월 속의 희미한 이름의 힘아, 하지만 나 또한 홀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망각에게 세월 속에서 너의 가벼운 그림자를 다시 찾아오도록 부탁한다, 땅거미가 지는 순간에, 이 지친 나의 안타까운 말벗이라도 되어주도록.   보르헤스는 시가 황금 월계관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살아 있음은 곧 망각을 향하여 가는 길임을 안다. 다만 땅거미가 질 무렵의 푸르름, 그 작은 위안을 위해 시가 있다고 믿는다. 영원한 것은 무명에 가까운 작아짐의 형태에서만 또렷해진다. 그것은 세월 속에 너도 나도 살아 있었음의 더러는 슬프고 더러는 행복했었음의 마지막 증표다.     시학   세월과 물로 된 강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시간은 또다른 강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강물처럼 사라져갈 것을 알며 얼굴들 또한 강물처럼 떠내려가는 것을 보며   눈을 뜨고 본다는 것도 또 하나의 꿈임을 느끼며 꿈을 꾸고 있지 않다고 꿈꾸는 꿈,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두려워하는 죽음 또한 밤마다 꿈이라고 부르는 그런 죽음밖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며   하루의 한 해 속에 사람의 나이와 세월들의 상징을 읽으며, 세월이 앗아간 인생의 아픔을 음악으로, 소음으로, 상징으로 바꾸어가는 일.   죽음 속에 꿈을 보고, 석양에 하나의 슬픈 황금을 보는 일, 이것이 시 영원한 가난의 되풀이: 시는 여명처럼 석양처럼 늘 되돌아온다.   이따금 하오가 되면 거울 한가운데서 한 얼굴이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예술은 바로 그런 거울 같은 거, 우리 스스로의 얼굴을 밝혀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율리시스는 그 위대한 업적에도 지치고 지쳐, 고향 이타카에 돌아와 마을을 바라보며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초라하고 파란 마을을 보며....예술은 위대하지 않다: 이타카 마을, 그 파란 영원.   또한 그것은 끝없는 강물 같다 흘러가고 남고.... 만물은 흘러간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수정거울: 모든 것은 다 똑같다 그리고 다르다, 끝없는 강물처럼.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 구태여 헤라클레이토스만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동서가 세월의 흐름을 알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율리시스나 보르헤스나 우리는 똑같다. 보르헤스 앞에서 낭만주의의 독창성은 갈 길이 없다. 강물은 흘러가지만 강은 길게 누워 있다. 수많은 철학자와 시인들이 흘러가고 흘러오지만 도서관은 여기도 저기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지금 여기 살지만 죽은 사람들을 읽고 또 나의 죽음을 창조한다. 거울 속에 비춰보는 나는 나지만 모든 사람의 얼굴을 닮았고 같은 인간이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과 다르다. 나는 때때로 나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나의 인생 ! 나의 공적 ! 나의 시 !’ 그러나 목소리를 낮춰라. 모든 것은 부서지게 되어 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파란 이타카 고향 마을, 그 파란 영원에서 다시 만나리라. 시는 그 가난과 파란 언저리에 돋는 풀이다. 보르헤스의 시의 주제는 거의 모두 지나간 다른 작품, 다른 시인들에 관한 것들이다. 똑같은 작품에 보르헤스의 숨결과 보르헤스의 덧입힌 되읽기, 되쓰기, 풀어쓰기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는 하나도 새로운 것을 쓴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고 또 죽어갈 사람들에게 읽힌다.   지금 내 시를 읽고 있는 분에게   당신은 무적이다, 당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법칙을, 먼지의 확실성을 느껴본 적이 없는가 ?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당신의 시간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의 거울 속 세월의 무상함의 상징 그 강물의 시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읽지 못할 대리석 비문, 거기, 당신의 날짜와 도시 그리고 기록이 이미 적혀 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시간의 꿈들. 견고한 청동도 정교한 황금도 없다. 우주는 당신처럼 변덕쟁이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의 것. 그림자여, 당신이 가는 곳은 당신을 기다리는 또하나의 어둠, 거기 어둠이 숙명처럼 당신의 여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라, 어떤 형태로든 당신 또한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민용태 (1995년, 창비) p218 ~ 229    
41    이정문<세계문학사조의 흐름> 댓글:  조회:227  추천:0  2019-03-09
세계문학사조의 흐름     (1) 고대 서양 문학   서양의 고대 문학은 인간 중심적이며, 합리적· 심미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 문학에서 시작한다. 그리스 문학의 주된 양식은 서사시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대표적이다. 한편 기원전 7세기경에는 서정시가 발달하여 사포(Sappho)와 같은 여류 시인이 나왔다. 또한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연극이 크게 흥행하여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등 3대 비극 작가가 활동하였고, 희극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시사 문제를 제재로 인간과 사회를 풍자, 비판하며 이름을 떨쳤다.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던 로마는 광대한 제국의 통치라는 과업에 몰두하여 심미적이며 사색적인 분야에 탐닉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현실적 성격의 문화가 발달하였다. 대표적 작가로는 생동적인 서민풍의 희극을 많이 남긴 플라우투스(T.M. Plautus:BC254-BC184), 민족적 서사시 `아에네이스`를 쓴 로마 제일의 시인 베르길리우스(M.P. Vergilius:BC70-19), 아름다운 「서정시집」을 쓴 호라티우스(F.Q. Horatius:BC65-BC8) 등이 있다.   (2) 대표작가 및 작품   ① 그리스 신화 신화는 고대인의 민간 신앙을 근원으로 하는 작가 불명의 전승적인 이야기로서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최초의 문학 창작물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 자연계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해석하며 나름대로 인간관과 우주관을 정립하였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일찌기 신이라는 상징을 만들어 그들 사이에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신들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였다. 그리스 신화를 특별히 중요시하는 이유는 서양의 문화, 문학, 미술이 여기에 근거하는 바가 크며 내용적으로 인간 존재의 근저에까지 깊이 파고들며 삶의 다양한 국면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② 고대 그리스의 작가 · 호메로스(Homeros:기원전 8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작가로 알려졌다. 이들은 구술 낭송을 위한 작품으로 여기에는 각 장면에 적합한 상투적인 문구와 레퍼토리를 자유자재로 빌려 온 흔적이 드러난다. · 소포클레스(Sophokles:BC486?~404)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이다. 그는 비극의 전승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를 가장 이상에 가까운 비극 시인으로 꼽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안티고네`, `오이디푸스왕`,  `아이아스` 등이 있다. · 아이스킬로스(Aischylos:BC525~456)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이다. 일찍부터 연극 경연에 참가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오레스티아`, `페르시아 사람들`,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등이 있다. · 에우리피데스(Euripides:BC484~406)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이다. 주요 작품으로 `메디아`, `트로이의 여인`, `박쿠스의 신녀(信女)` 등이 있다. ·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BC445?~485?) 그리스 최대의 희극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 `구름`, `여자들의 평화`, `개구리` 등이 있다.   ③ 베어울프(Beowulf) 고대 영국 문학의 최대 걸작이다.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부로 구성된 줄거리에서, 제1부는 국왕의 조카인 베어울프가 궁전을 밤마다 습격하는 그렌델이라는 악귀와 그 어미를 죽이는 이야기이다. 제2부는 50년 이상 세월이 지나 왕위에 오른 베어울프가 나라를 괴롭히는 용을 물리치지만 용의 독기 때문에 전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와 소재를 바탕으로 무인 사회 영웅들의 이상적 상을 그려 보여 준다.   ④ 힐데브란트의 노래(Das Hildebrandslied) 독일어로 된 최고(最古)의 영웅 서사시이다. 800년경 수도원의 승려가 글씨 연습을 위해 기도서에 적어 놓아 후세에 전해지지만, 시의 제작은 이보다 100여 년 전의 일로 추산된다. 동코트 족의 장군인 힐데브란트는 고국을 떠났다가 3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힐데브란트의 부대는 국경에서 수비대와 대치하게 되고, 결투에 앞서 젊은 수비 대장이 30년 전에 남기고 간 그의 유일한 혈육임을 알게 된다. 놀라움과 기쁨 속에 힐데브란트는 순금 팔찌를 증거물로 보이며 부친임을 알리지만, 부친이 이미 전사한 것으로 아는 젊은 대장은 정정당당히 결투할 것을 요구한다. 대치한 양군에서도 두 영웅의 결투를 바라는 심리도 있어 할 수 없이 힐데브란트는 단장의 심정으로 아들과 결투를 한다. 필사(筆寫)는 여기에서 중단되어 있지만, 전설로 전하는 다른 자료에서는 힐데브란트가 유일한 혈육을 죽인다. ⑤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서 작가는 알려져 있지 많다. 778년 샤를마뉴 대제의 에스파냐 침공군이 돌아오는 길에 계곡에 잠복해 있던 적군의 기습을 받아 후미 부대가 전멸한 역사적 사실을 작품화한 것이다. 여기서 롤랑은 후미 부대의 대장으로서 이교도 군에 대한 승리야말로 참다운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위급을 알리는 뿔피리를 분다. 그러자 대제가 본대를 이끌고 달려와 적군을 물리치고 후미 부대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이다. 투철한 십자군 정신, 봉건적 주종의 충성심, 조국애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는다. ⑥ 길가메시(Gilgamesh) 바빌로니아 수메르 지방의 서사시로서 대략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길가메시는 여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반신반인의 인물로서 위압적인 폭군이다. 그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에서 삶의 허무를 목격하고 영생의 길을 터득하기 위해 죽지 않는 인간 우트나피쉬팀(Utnapishitim)을 찾아 나선다. 길가메시는 먼 여행 후 그를 만나지만 “나도 영생의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기에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듣는다. 하지만 그 아내가 젊어지는 신비의 약초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줘, 길가메시는 그 곳에서 약초를 얻어 귀향길에 오른다. 그러나 오랜 여행으로 지친 길가메시가 시원한 물을 만나 목욕하는 사이 물 속에서 나온 뱀이 그 약초를 먹어 버리는 바람에, 그는 인생의 깨달음(생·노·병·사)만 얻고 빈손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⑦ 마하바라타(Mahabharata) 산스크리트로 쓴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이다. 기원전 약 15세기경에 인도 북부의 어느 호전적 종족이 치른 전쟁에 대한 전설에 근거하여 쓰여졌다. 내용은 판두 왕국이 크리시나와 판차라스 왕국의 도움으로 쿠루 왕국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승리의 이야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하바라타`는 인간들의 진실한 삶이 지닌 충만성을 보여 주고 등장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들을 선명하게 묘사하여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이 서사시는 인도의 문화, 종교와 윤리 등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었다.     (1) 특징   중세는 보편 종교의 출현과 공동 문어의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문학이 귀족층의 상층 문학과 일반 평민들의 하층 문학으로 이원화된 것이 눈에 띈다. 상층 문학은 유럽의 라틴어, 동양의 한자, 인도의 산스크리트와 같은 그 문명권의 공동 문어에 의해 주로 창작되어 기록 문학으로 전해진다. 반면에 하층 문학은 개별 민족 및 지방의 토착어에 의한 구비 문학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상층 문학이 공동 문어를 사용함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을 초월한 보편적 미의식을 향유한 반면에, 하층 문학은 각 지역의 풍토와 생활을 토착어로 표현하는 향토적 성격이 강하였다.   (2) 중세 성직자 문학과 기사 문학   중세에는 봉건적 규범이 유럽인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의 토대를 이루고 있던 것은 기독교 이념이었다. 그리하여 문학에서도 성직자들의 참여가 가장 두드러진다. 성직자 문학은 공동 문어를 사용하며 속세를 초월하는 이상 추구를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지역 특유적인 인간의 심리나 삶의 태도를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인 영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성직자 문학과 대비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 기사 문학이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세상의 여러 문물을 접한 기사 계급들은 세속적인 문제들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하였다. 기사 문학은 영웅 서사시, 기사도 이야기, 서정시 등으로 나뉘는데, 게르만 영웅 전설을 집대성한 `니벨룽겐의 노래` 영국의 `아서왕 이야기` 등은 모두 영웅적인 기사들의 용맹과 무훈을 노래한 것들이다. 한편 중세에는 프랑스의 트루바두르, 독일의 민네징거와 같은 음유 시인들이 등장하여 귀부인에게 바치는 기사들의 정신적 사랑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중세 유럽의 문학은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도 세속적인 삶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3) 주요작품     ① 니벨룽겐(Nibelungen)의 노래 중세 독일 문학의 대표적 장르인 영웅 서사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대체로 1200년 무렵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내용은 5, 6세기 민족 이동기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부에서는 멜로빙거 왕조의 피비린내 나는 집안 싸움, 제2부에서는 아틸라가 거느리는 훈족과 부르군트족과의 싸움, 아틸라가 죽은 뒤 훈족 내부에서 전개되는 왕자들 사이의 투쟁이 다루어진다. 전체적으로 이교도적인 분위기와 게르만인들의 숙명적 세계관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기사풍의 요소와 궁중 문화적 요소가 함께 가미되어 있다. ② 신곡(神曲) 단테(A. Dante:1265~1321)의 작품으로 중세 말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우주관과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중세 문학적 전통의 절정을 이룬다. 형식은 전체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3부로 나뉘고 각 부는 또 33개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단테 자신이 등장 인물이 되어 처음에는 베르길리우스를, 다음에는 베아트리체를 안내자로 삼아 피안의 세계를 편력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게되고 드디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삼위일체의 깊은 뜻을 깨닫는다. ③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중세 영국의 최대 작가인 초서(G. Chaucer:1340~1400)의 대표작으로서 이야기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데카메론`이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캔터베리에 순례하러 가는 29명의 사람이 어느 여관에 함께 묵게 되는데, 각자 다른 신분과 직업을 가진 이들은 지루함을 덜기 위해 교대로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서론에 이들의 직업과 성격을 미리 밝히고 각자의 특성에 부합하는 얘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이야기 내용과 이야기하는 사람 사이에 연관성이 형성된다. 각각의 이야기 사이에는 사회자인 여관 주인의 비평과 사회의 말이 들어가기도 하고, 청중의 감상이 튀어나오기도 하며, 심지어 얘기를 방해하여 서로 다투거나 초서 자신이 등장하여 하나의 역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풍부한 해학과 날카롭고 넓은 통찰을 바탕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물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 근대 문학의 특성   시대 구분으로서의 근대는 문예 부흥에서 시작한다. 문예 부흥은 중세 이후 억눌려 왔던 인간성을 다시 회복시킴으로써 개인적 특성을 존중하는 풍토를 낳는다. 근대에 개성적이며 수준 높은 문학 예술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온 원인도 이러한 개인적 존재에 대한 신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근대를 형성한 동력으로는 구텐베르크에 의한 금속 활자의 발명, 시민 계급의 대두와 상업의 발달, 민족적 고유성에 대한 관심 등을 꼽을 수 있다. 근대는 국가 단위로 공동체적 유대감을 나누는 민족주의의 시대이다. 즉 중세적 보편성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결속력이 더욱 부각된다. 근대로 오면서 세계 문학의 개념이 형성된 것도 민족 단위로의 분화를 순화하려는 하나의 이념적 기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 세계 문학은 지방성과 민족성을 토대로 형성된 이념으로서, 실제로는 개별 민족 단위의 물리적 연결을 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근대 문학은 지역성과 민족성의 영양분을 섭취하며 자란 개인의 탁월한 재능이 낳은 현상이다. 그러나 문학에서 개인적 특성은 국민적 특성과 연결되고 다시 보편적 의미로 확산되기 때문에, 근대 저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민족적 우수성을 넘어 세계 보편적 가치로 승격된다.     (2) 근대 문학과 사조   근대 서양 문학은 사조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편리하다. 작가들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또 인간의 삶과 시대를 이해하는 관점에 유사성이 확산되면서, 시대별로 문학 작품들에 유형적 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조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 하나의 공통적인 흐름으로 존재하는 문학적 경향을 말한다. 사조를 유형화하는 데 작용하는 요소들로는 이성과 감성의 작용 범위, 현실과 작품의 관계, 환상의 개입 정도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문학은 시대적 조류인 사조로부터 동떨어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문학이 근본적으로 작가의 개성에 의해 창조된 개인적 사실이라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비록 시대 사조를 받아들여 창작의 동력으로 삼기는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자신의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문학이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게 한다. 창작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사조는 작가의 창의력에 의해 작품 속에 용해되기 때문에, 사조는 개성을 자극하고 개성이 모여 사조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주요 문학 사조       ① 고전주의   ⓐ 개념: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이 지니고 있던 조화, 균정(均整), 명석함을 본받고자 하는 경향을 두루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17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문학의 흐름을 일컫는다. ⓑ 배경:감각이나 감성에 의한 인식을 의심하고 이성을 통해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것을 주장한 데카르트의 철학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절대 군주제 하에서 질서와 안정으로 회귀하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그리스·로마의 고전에 심취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 특징 -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것보다는 사회적 보편성을 지닌 것이나 도덕적으로 전범이 될 만한 것을 중시한다. - 내용과 형식이 조화되는 질서와 균형미를 추구한다. - 완벽한 구성이 필요한 비극을 최상의 장르로 간주한다. ⓓ 대표 작가 소개 - 코르네유(1606~1684):프랑스의 극작가. 주요 작품으로 `르 시드`, `오라스` 등이 있다. - 몰리에르(1622~1673):프랑스의 극작가. 주요 작품으로 `수전노`, `인간 혐오`, `여인 학교` 등이 있다. - 라신(1639~1699):프랑스의 극작가. 주요 작품으로 `페드르`, `아탈리` 등이 있다. - 포프(1688~1744):영국의 시인. 주요 작품으로 `머리카락 훔치기`, `인간론`, `던시어드` 등이 있다. - 스위프트(1667~1745):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작가. 대표작으로 풍자 소설 `걸리버 여행기`, `통(桶) 이야기` 등이 있다. - 괴테(1749~1832):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 대표작으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 `파우스트` 등이 있다. - 실러(1759~1805):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 대표작으로 `발렌슈타인`, `빌헬름 텔` 등이 있다.   ② 낭만주의   ⓐ 개념: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독일과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 사조로서 고전주의의 균형미와 도덕성 추구에 반대하며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 배경:고전주의는 문학적 법칙에 의거하여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는데, 시민 사회가 정착된 이후 차츰 해방된 개인 정신이 보편적 법칙성을 대체하여 간다. 또한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는 낭만주의 인간관의 기초가 된다.   ⓒ 특징 - 주지적 고전주의에 반대하여 주정적 태도를 취한다. -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며 멀리 있는 것, 이국적인 것, 신비로운 것에 동경을 표시한다. - 천재적 독창성을 문학 창작의 주된 에너지로 여긴다. - 반항 정신 및 이상주의적 경향을 지닌다.   ⓓ 대표 작가 소개 - 괴테와 실러:괴테와 실러가 젊은 시절에 심취한 스트룸 운드 드랑은 낭만주의의 전초가 된다. 대표작으로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실러의 `군도`가 있다. - 샤토브리앙(1768~1848):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르네`, `아탈리` 등의 소설이 있다. - 위고(1802~1885):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 대표작으로 `에르나니`, `노트르담의 꼽추` 등의 소설과, 시집인 「정관 시집」이 있다. - 워즈워스(1770~1850):영국의 시인. 대표적 시집으로 「서정 가요집」, 「서곡」, 「소요편」 등이 있다. - 콜리지(1772~1834):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대표작으로 `늙은 수부(水夫)의 노래`, `문학적 자전(自傳)`, `쿠블라 칸` 등이 있다. - 바이런(1788~1824):영국의 시인. 대표작으로 `맨프레드`, `돈 주앙`, `판결의 환상` 등이 있다. - 키츠(1795~1821):영국의 시인. 대표작으로 `엔디미온`, `히페리온` 등이 있다.   ③ 사실주의 ⓐ 개념:현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그려내려고 하는 문예 사조를 일컫는다. 좁은 의미로는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문학 흐름을 지칭한다.   ⓑ 배경: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공상에 의존하기보다는 현실에 충실한 묘사 방법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근대 합리주의 및 실증주의, 공리주의, 다윈의 진화론 등이 철학적 배경을 이룬다. ⓒ 특징 - 주관적 태도를 자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 인간과 더불어 주변 세계까지도 묘사의 대상으로 삼아 현실의 온전한 재현을 추구한다. -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부정적 면이 있으면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삶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중시한다.   ⓓ 대표 작가 소개 - 발자크(1799~1850):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고리오 영감`, `사촌 베트`,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데` 등이 있다. - 스탕달(1783~1842):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연애론`, `적과 흑`, `파르므의 승원` 등이 있다. - 플로베르(1821~1880):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보바리 부인`, `살람보`, `감정 교육` 등이 있다. - 디킨스(1812~1870):영국의 작가. 대표작으로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코퍼필드`, `쓸쓸한 집`, `두 도시의 이야기`, `위대한 유산` 등이 있다. - G.엘리엇(1819~1890):영국의 여류 작가. 대표작으로 `플로스 강의 수차(水車)`, `미들 마치` 등이 있다. - 고골리(1809~-1852):러시아의 작가. 대표작으로 `외투`, `검찰관`, `죽은 농노` 등이 있다. - 톨스토이(1828~1910):러시아의 작가. 대표작으로 `전쟁과 평화`, `안나 카테리나`, `부활`, `바보 이반의 이야기` 등이 있다. -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러시아의 작가. 대표작으로 `죄와 벌`,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 등이 있다.   ④ 자연주의 ⓐ 개념:사실주의를 더욱 극단화하여 인간의 생태를 자연 현상으로 보며 작가도 자연 과학자와 같은 태도로 문학을 창작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 배경:과학적 실험을 하는 태도로 작품을 묘사해야 한다는 에밀 졸라의 실험 소설론, 인간의 행동과 운명은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는 환경 결정론 등이 배경을 이룬다. ⓒ 특징 -작품 속의 인간은, 자연 현상의 일부로 본능이나 생리의 필연성에 의해 강력하게 지배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대체로 세기말적 분위기를 반영하며 전체적으로 어둡고 염세적이다. -내면적으로는 빈약하고 단순할 수밖에 없다. ⓓ 대표 작가 소개 -졸라(1840~1902):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목로 주점`, `나나`, `제르미날` 등이 있다. -하우프트만(1862~1946):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대표작으로 `해뜨기 전`, `방직공들`, `한넬레의 승천` 등이 있다. -드라이저(1871~1945):미국의 작가. 대표작으로 `아메리카의 비극`, `시스터 캐리` 등이 있다.   ⑤ 상징주의 ⓐ 개념: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예술 운동과 그 경향을 일컫는다. ⓑ 배경:제국주의의 태동, 사회적 계급 사이의 갈등으로 위기감과 불안감이 팽배해지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이상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난다. ⓒ 특징 -분석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정서의 시적 정착을 목표로 한다. -자아를 구속하는 객관적 규범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징의 방법을 통해 형이상학적, 신비적 내용을 표현한다. -현실 세계를 초월적 정신 세계의 상징으로 보고 문학을 통해 여기에 접근하려 한다. -개별적인 것 하나 하나가 소우주적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 대표 작가 소개 -보들레르(1821~1867):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악의 꽃`, `파리의 우수` 등이 있다. -말라르메(1842~1898):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주사위 던지기`, `목신(牧神)의 오후` 등이 있다. -베를렌(1844~1896):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말 없는 연가`, `예지(叡智)` 등이 있다. -랭보(1854~1891):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지옥에서 보낸 한철`, `레 일루미나시옹` 등이 있다. -릴케(1875~1926):오스트리아의 시인. 대표작으로 `말테의 수기`, `가을날의 기도` 등이 있다. -시몬즈(1865~1945):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프랑스의 상징주의 문학을 영국에 소개한 「문학에 있어서의 상징파의 운동」이라는 평론집이 있다.   ⑥ 초현실주의 ⓐ 개념: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20세기의 문예 사조이다. ⓑ 배경: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한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이 중요한 배경을 형성한다.   ⓒ 특징 -이지(理智)의 논리를 배격하고 잠재 의식이 상상에 의해 위대한 작품을 낳는다고 간주한다. -초현실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를 보다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간주한다. -무의식, 성, 꿈, 욕망의 세계를 정면으로 다룬다.   ⓓ 대표 작가 소개 -브르통(1896~1970):프랑스의 시인. 초현실주의 운동의 주창자이며 이론가이다. 대표작으로 `나자` 등이 있다. -엘뤼아르(1895~1952):프랑스의 시인. 대표 시집으로 「의무와 불안」, 「그치지 않는 노래」 등이 있다.   ⑦ 모더니즘 ⓐ개념:1920년대에 일어난 근대적인 감각을 나타내는 예술 사조, 좁은 의미로는 영· 미의 이미지즘이나 주지주의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 20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실험적인 문학 운동, 즉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을 총칭하기도 한다. ⓑ특징 -도시 문명 및 산업 사회에 대한 비판을 기본 축으로 한다. -전통적 문학 수법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실험을 시도한다. -문학을 통해 새로운 문명 의식의 확산을 추구한다. ⓒ 대표 작가 소개 -T.S. 엘리엇(1888~1965):영국의 시인. 대표작으로 `황무지`, `4편의 사중주` 등이 있다. -흄(1883~1917):영국의 비평가이며 시인. 이미지즘 시운동의 선구자로서 E. 파운드, T.S. 엘리엇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시론집으로 「성찰」이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근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근대의 특징은 합리성과 이성을 중시하며, 과학 지상주의를 가지고 세계의 체계화와 총체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 도전 받기 시작한다. 반이성의 맥락에서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를 규탄하고, 정전을 타파하며 스스로 미학적 대중주의로 내세우는 철학적· 문학적 경향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매끄러운 논리가 해체되고 실체와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내용도 극도로 불안정한 무질서의 세계를 그리는 초현실주의로 바뀐다. 독자 참여 소설의 경향을 띠기도 한다. 어떤 실험 작가는 아예 소설을 언어의 각종 시험장으로 바꾸어 버린다. 문장을 토막내기도 하고 질문지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도 하고, 진지한 내용과 하찮은 내용을 대비시켜 놓기도 하여 게임을 하는 듯한 즐거움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은 혼돈과 대적하는 길은 혼돈 그 자체가 되는 것, 아니 더 나아가 더 깊은 혼돈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는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콜롬비아의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를 들 수 있다. 마르케스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은 1967년 아르헨티나에서 출판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 오다가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외에 주목할 만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으로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기도 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으로`와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을 꼽을 수 있다.  
40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 연구 / 이철(강릉대교수) 댓글:  조회:326  추천:0  2019-03-07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 연구 / 이철(강릉대교수)   1. 문제제기   20 세기 초 서구 문예사에 주된 흐름으로 나타난 모더니즘(modernism)은 시에 있어서는 이미지즘(imagism)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등이 중심이 된 이미지즘 운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영시가 보여준 감상주의(Sentimentalism)와 매너리즘(mannerism)을 극복하여, 정확하고 간결한 시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풍을 확립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시인들보다는 오히려 스땅달, 플로베르, 모빠상 등의 프랑스 소설가들이 보여준 정확한 산문정신에 힘입고 있었다.   당대 영시의 느슨하고 장식적인 언어를 청산하게 만들었던 이 정신은 기본적으로 사물과 언어, 대상과 표현을 정확하게 1대1 대응시키려는 일사일언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미지스트들이 이어받은 이 정신 속에는 기본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주관에 의해 대상을 굴절시키지 않고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하는 태도가 숨어 있었다.    현대 영시에 이런 혁신을 가져왔던 이미지즘 운동은 그러므로 정확성과 객관성이 그 중요한 특징들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2~3년이 지나면 그 본질적인 부분인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 등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일종의 자유시 운동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 운동을 주도했던 파운드는 자신을 여전히 이미지스트로서 지칭하면서도 객체적 사물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식 세계에 투영된 바로서의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문제는, 객관성을 그 핵심으로 하던 이미지즘 운동을 끌어가던 파운드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어떻게 주관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운드 자신의 단순한 취향변화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크게는 당대 예술의 전반적인 흐름에 영향을 입고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이미지즘이 갖고 있었던 이중성, 혹은 변화 가능성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지즘의 이중성을 상정하지 않고는 파운드가 그 이후에 보여준 변화나 자기모순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미지즘의 이런 이중성에 대한 이해는 또한 1910년대 중반 이후 파운드의 이미지즘이 객관적 세계보다는 예술가의 통합적 창의력을 중시하는 보티시즘(Vorticism)으로 흡수되는 과정과 파운드의 중, 후기의 대작 시편(The Cantos)에 보이는 주관성 과잉을 자연스럽게 설명해 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하는 시인의 객관적 태도를 마치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변치 않은 핵심처럼 여기는 통념은 수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미지스트 운동의 중심에 서서 이 운동을 주도하며 새로운 방향을 유도했던 시인이 파운드인 만큼 그의 이미지즘에 대한 이해는 이미지즘의 통합적 성격에 대한 이해에 다름 아니다.   2. Imagism의 모호성   예술사조란 당대에는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 자체로는 실체가 없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우리가 과거에 서구 예술사에서 풍미하던 예술사조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예술사조가 한 시대를 휩쓸며 그 시대의 예술가들의 정신을 빌어 만들어낸 여러 작품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와도 혹은 거센 바람과도 같은 예술사조들은 당시로서는 어떤 경계도 없고 확실한 모습도 없어 보일지라도, 그 시대가 흘러가고 그 사조도 흘러가 버리면 후대에 남는 것은 화석과 같은 작품 들 뿐이다. 우리는 이런 작품들과 그 밖의 다른 기록들을 통해 과거의 예술 사조를 역으로 가늠하고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비교적 명확한 기록들과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근거로 삼는다고 해서 그러나 하나의 예술사조가 손에 잡힐 만큼 명확하게 규정되기는 쉽지 않다. 이를테면 현대 예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낭만주의나 모더니즘 같은 경우도 그 성격을 놓고 비평가들 간의 의견이 여러 가지로 갈라진다. 이 글이 그 성격을 규명하려는 이미지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크게 보아 이미지즘은 모더니즘의 한 부분으로서,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시적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격 규정의 어려움이 그 범위가 작아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즘의 경우 그 어려움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서 더욱 가중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즘의 정확한 모습을 알기 어려운 이유는 우선 이미지즘 시선집이 거의 발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이미지즘은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만큼 그 시들이 읽히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미지즘은 모더니즘의 한 부분으로서, 혹은 20세기 초 영시상의 하나의 새로운 운동으로서, 시사(詩史)에서만 중요하게 다루어질 뿐, 그 시들을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읽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부재는 책의 출판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이미지즘 시 선집은 이 운동이 활발하던 1910년대에만 몇 권 발간되었을 뿐 그 이후로는 거의 출판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미지즘에 관심을 갖고 이들 시를 읽으려는 사람들은 영시 앤쏠로지에서 이곳저곳을 찾아가며 읽을 도리 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의 수효는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적으며, 또 이것들을 읽어봐야 회화적 특징이 강조된 짧은 영시들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미지즘의 중심인물 중의 하나인 파운드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미지즘 고유의 시라고 얘기될 수 있는 것은 실제 몇 편이 되지 않는다.    이미지즘을 규정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이미지즘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그 '이미지(image)'라는 것이 20세기 시에서 비로소 언급되거나 중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아마 시가 생겨날 때부터 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므로 특별히 20세기 초 영국시단이 산출한 특정한 시들만을 이미지가 강조된 시, 혹은 이미지즘시로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은 실제의 시를 살펴보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기우는 달(The Waning Moon) 그리고 미치고 약해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흐릿해져 가는 정신에 이끌려 침실로부터 엷은 베일에 싸인채, 비틀거리며 나오는 여위고 창백한, 죽어가는 여인처럼,  달은 어두운 동녁에서 솟아올랐다.  희고 모양새 없는 덩어리 And like a dying lady, lean and pale, Who totters forth, wrappt in a gauzy veil, Out of her chamber, led by the insane And feeble wanderings of her fading brain, The moon arose up in the murky East, 부두 위에서(Above the Dock) 한밤중 조용한 부두 위 밧줄 매인 높은 돛대 꼭대기에 엉긴 채 달이 걸려 있다. 그렇게도 멀리 보였던 것은 아이가 놀다가 잊어버린 한 개의 풍선일 뿐. Above the quiet dock in mid night. Trangled in the tall mast's corded height, Hangs the moon, What seemed so far away Is but a child's balloon, forgotten after play.   인용된 첫 번 째 작품은 쉘리(P.B Shelley)의 것으로 1820년에 씌어진 시이고, 두 번째 것은 흄(T.E Hulme)의 시로 1912년에 나온 파운드의 시집 "재치 있는 즉답"의 권말 부록으로 실린 여섯 편 중 하나이다. 이미지즘의 원조격인 흄이 1908년 을 창설한 후 이 클럽의 회원들은 매주 수요일 소호(Soho)가(街)에서만나 시낭송회를 개최하고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인용된 두번째 시는 바로 이 당시 1908~1909년 사이에 씌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런 점에서 이 시를 이미지즘시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시는 어떠한가 ? 두 번째 시의 경우처럼 시사적(詩史的)인 배경을 고려해서 규정한다면 이를 낭만주의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두 시의 유사성에 주목하면 이미지즘과 낭만주의가 일종의 친연관계(親緣關係)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미지즘과 낭만주의는 서로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즘에는 낭만주의에서 이어받은 유산보다는 낭만주의를 극복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제로 낭만주의가 결(缺)한 고전주의적 기율(紀律)로 향하는 경향은 이미지즘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된 이 두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전문(全文)을 인용하고 있는 이들 두 시가 매우 짧다는 점이 눈에 띈다. 시가 짧다는 것이 어떤 류의 시를 규정하는 기준이 되기는 어렵지만, 소위 이미지즘시들이 다른 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이들 시는 모들 '달'을 소재로 삼고 있다.    시의 길이나 소재에 있어서의 유서성만을 가지고 이들이 같은 종류의 시라고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시가 모드 '달'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축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시는 달을 죽어가는 여인에 비유하고 있다. '엷은 베일'에 싸였다는 표현으로 보아 이 달은 옅은 구름에 어슴프레 가리우진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어가는'이라는 표현은 솟아오르는 달 보다는 지는 달에 더 어울리는 표현일 수 있지만, 이 시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달이 뜨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어두운 동녘에서 달이 나오는 것을 어두운 침실에서부터 어떤 여인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에 빗대고 있다. 인간의 광기가 달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 관념은 '미치고(insane)'라는 표현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이 미친 여인이 '비틀거리며 나온다(totters forth)'는 것은 달이 서서히 그러나 시각적으로 불규칙해 보이는 속도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첫머리에 있는 '그리고(And)'라는 표현은 글의 시작부분으로서는 이례적인 것일텐데, 이 표현 때문에 여기에서는 달이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일련의 어떤 계속되는 과정의 연장으로 보인다. 굳이 얘기하자면 어떤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윽고 거기에서 일어나 나오듯 달이 지평선(동족의 들, 산 혹은 바다)아래 숨어 있다가 때가 이르자 그곳에서 나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표현이 달의 움직임을 느리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그리고'라는 말 앞에 숨어있는 것은 솟아오르기 전 달의 상황이 아닌 전혀 다른 제3의 상황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고, 그 이후에 달이 동녘에서 솟는 모습이 부가적으로 그저 덧붙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쨌든 제3의 상황이 있었다고 해도 이 시 자체로는 그것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추측할 수는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달을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도 끝내 달을 하나의 사물로 보는 시인의 객관적 시각에 주목하는 일이다. 마지막 행의 '희고 모양새 없는 덩어리(A white and shapeoess mass)'라는 표현에는 감상(感傷)에 젖지 않으려는 시인의 결연한 태도가 나타나 있다. 애절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달의 여인 같은 모습이 결국 차가운 하나의 천체덩어리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인용된 두 번째 시에서는 달이 이미 한참 솟아올라 돛대 꼭대기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전개되어 있다. 이 시의 배경은 배가 정박해 있는 한밤중의 한적한 항구인데, 이때 어떤 배의 돛대 꼭대기에 매달인 듯한 달이 사실은 낮에 아이가 놀다가 잊어버린 풍선이라고 이 시는 말한다. '풍선' 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달은 아마 보름달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실제의 달을 아이가 잦고 놀던 풍선으로 비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돛대 위에 걸린 아이의 풍선을 처음에는 달로 비유했다가 결국 그것은 달이 아니고 풍선이었음을 말하고 있는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두 번째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도 멀리 보였던 것은' 혹은 '풍선일 뿐'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적인 이미지는 역시 하늘에 걸려있는 달의 모습이다.   인용된 두 시에 대한 분석에서 이들의 구조상의 유사성도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첫 번째 시는 달을 여인에 비유하다가 그것이 결국 달덩어리임을 보여주고, 두 번째 시는 풍선을 달로 보았다가 그것이 결국 아이의 풍선이었다고 말한다. 의 전환이 첫 번째 시의 흐름이라면, 은 두 번째 시의 흐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들이 모두 유비(analogy)를 시적 방법으로 하여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첫 번째 시는 ' -처럼(like)'이라는 말로써 그 유비의 명확성이 두 번째 시에 비해 더 잘 드러날 뿐이다. 대신 두 번째 시는 그 유비관계가 숨겨져 있는 만큼 하는 발견의 놀라움 같은 것을 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미지즘시를 변별해낼 것인가? 하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짜여진 시를 모두 이미지즘시라 할 것인가 ? 적어도 영시사에서는 그런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축으로 씌어진 시는 엄청나게 많다. 사실상 모든 시작(詩作)은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쉐익스피어의 많은 극작품에 나타난 기발하고 다양한 이미지,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기상(奇想 conceit)같은 것들은 모두 이를 말해준다. 말하자면 '이미지'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비평가들이 작품을 분석하고 그 중요성을 설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인과 작가들은 이를 문학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즘 혹은 이미지즘시라는 것을 따로 규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20세기 초의 서구의 이미지스트들이 주장하던 이미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어떤 점에서 기존의 관념과 차이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지스트들의 주장을 요약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미지스트라는 시운동 집단이 사실상 그 범위가 확실히 정해진 시인들의 단일한 모임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지즘에 대한 규정을 어렵게 만드는 세 번째 요인으로서 이미지즘의 변천사와 관계가 있다. 이미지즘이 단일한 줄기를 중심으로 발전 혹은 변모해간 것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규정도 단순하게 내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즘의 본류를 어떤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평자 들 간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그중 하나는 이미지즘이 흄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나고 알려지다가 미국시인인 로웰 여사(Amy Lowell)에게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이미지즘이 파운드에 의해 주창되고 전파되다가 로웰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이다. 흄을 중심으로 이미지즘을 설명하는 전자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파운드가 이미지즘의 발전에 약간의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그 역할이 미미했다고 보고, 파운드 보다는 오히려 1908~1909년 사이 흄과 같이 활동했던 플린트(F.S.Flint)나 스토러(Edward Storer)를 중요한 인물로 꼽는다. 반면 후자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파운드와 함께 소위 을 마련한 힐다 두리틀(Hilda Doolittle)과 올딩턴(Richard Aldington)을 중시하고, 흄의 역할은 단지 하나의 예고편이었다는 생각을 편다.   흄과 파운드의 시론이 가진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미지즘의 중심인물을 누구로 잡느냐에 따라 이미지즘의 전체적인 성격규정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1908~1909년 무렵 런던 시단의 중심인물은 흄이었고, 흄의 시론이 1912년 이후 파운드가 이미지스트 운동을 전개하는데 적지 아니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평자에 따라서는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보다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 포드(Ford Madox Ford)를 거론하는데 포드의 중요성은 파운드 자신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미지즘에 강한 영향을 미친 불란서 사실주의 소설가들의 태도도 포드를 통해 배웠다고 할 수 있다.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는 이들 두 사람의 영향 말고도, 파운드 자신의 프로방스 문학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운드는 이들의 영향을 받기 이전부터 중세 로망스 문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자신의 문학관을 어느 정도 정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따라서 이제 흄과 포드의 시이론을 살피고, 파운드가 자신의 연구와 이들의 영향하에서 어떻게 자신의 이미지즘 이론을 정립했는가. 또 그 이론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어떻게 변모해 갔는가를 살피기로 하겠다.   3. T.E Hulme과 F.M Ford의 영향   이미지즘이 하나의 시운동으로 정립되는 배경은 단순하지는 않지만, 이미지스트들이 지향하고 있었던 목표는 어떤 점에서 통일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낭만적이라기 보다는 고전적인 예술을 지향하고 있었고, 따라서 언어에 있어서의 정확성과 견고성 등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다.  20 세기 초 런던에서 흄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문학회는 1908~1909년 사이에 있었던 과 그것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1909년의 이 있었다. 처음에 플린트는 "새로운 시대"에서 의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공격을 가했지만 흄과의 이후 가까운 사이가 되어 1909년3월에 스토러, 조셉 캠벨(Joseph Cambell),플로렌스 파(Florence FArr)등과 함께 이 을 만들게 된다. 파운드가 이 모임에 소개된 것은 같은 해 4월이었는데, 이 당시만 해도 파운드는 이들과의 문학적 교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훗날 파운드가 이미지즘 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이들에게 진 빚을 부인 하는 데서도 엿보인다. 1912 년 이후 파운드가 펼친 이미지즘 운동과 1908~1909년의 흄 중심의 문학운동이 어떤 연관성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미지즘을 애기하는데 흄에 관한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론의 중요한 부분은 이미 흄 등이 주장한 것과 다를 바 없고, 또 파운드가 초기에 이들과 일정한 교류를 한 것이 사실이므로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이들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파운드가 흄 등으로부터 이어받은(혹은 이들과 공감한) 문학관은 크게 보아 고전주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흄이 처음 가지고 있었던 태도는 오히려 낭만주의적인 것이었다. 초기의 흄이 낭만주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주로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영향이 크다. 그는 베르그송의 견해를 그대로 이어 받아 인간의 직관을 중시하는 대신 지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함으로써 반지성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생각은 그의 문학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그는 고전주의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래서 그는 현대시가 그 형식에 있어서 고전주의적 엄격성과 절제를 갖는 대신 자유시형을 가져야 하며, 내용도 시인 자신의 내면세계를 다루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흄의 시이론의 핵심 중의 하나는 이미지에 관한 것인데, 그는 현대시가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고전주의적인 특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미지가 시각ㄱ적이고 구체적이므로 고전주의에서 흔히 그리는 거대한 사건이나 영웅적 행위 대신 개인의 사적이고 비밀스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또 자유시를 옹호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인데, 그에 의하면 자유시는 개인의 '어떤 모호한 기분(some vague mood)'을 전달해 줄 수 잇다는 것이다.  초기의 흄은 이렇듯 베르그송의 영향 하에 자유시와 이미지를 강조하며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문학관을 펼쳤지만, 1911년 무렵부터 라세르(Lasserre)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초기와는 달리 오히려 반 낭만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라세르는 19세게 말의 데까당 운동이 지닌 감상적 낭만주의를 배격하고 대신 고전주의의 질서와 절제의 정신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흄이 자신의 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바로 이러한 생각의 반영이다. 흄에 의하면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억압적 질서에 의해 타락하게 되므로 이런 질서를 깨드림으로써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낭만주의라면, 고전주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고정적이고 제한된 동물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전통과 조직에 의해 훈련되어야 한다고 보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흄은 서구에서 지난 백년간 낭만주의가 계속되었으나 이제 '고전주의의 부흥'을 맞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따라서 '건조하고 견고하며 고전적인 시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낭만주의자들은 고전이 주는 건조한 견고성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축축하지(damp)'않는 시를 시로 생각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확한 묘사(accurate description)'가 시의 올바른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있어서의 흄의 영향력을 부인하는 비평가들의 논리는 어떤 점에서 일리가 있으나 그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주로 1908~1909년의 흄의 활동이나 그 당시 흄이 가지고 있었던 시이론과 파운드의 이미지즘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초기와는 달리 1911년 이후 고전주의자로서의 흄이 주장하는 시의 건조함과 견고성, 그리고 정확성은 그대로 파운드 이미지즘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흄의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않게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강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포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포드의 인상주의적 문학관은 파운드의 이미지즘이 새로운 변신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다리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리의 역할을 했다는 말은 포드가 파운드 이미지즘 발전의 기초가 된 동시에 극복 대상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미지즘에 있어서 흄과 포드이 상대적 중요성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적어도 파운드는 흄의 역할을 경시하는 대신 포드를 매우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파운드에 의하면 포드는 당시 영국 최고의 비평가였다. 파운드는 제1차 대전 직전 몇해 동안 런던에서 글을 쓰는 문제에 관한한 그 빛이 흄이 아닌 포드에게서 나왔다고 말한다. 파운드가 이 당시 포드를 주목한 것은 바로 포드가 불란서 사실주의 작가들로부터 정확한 산문정신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심지어 운문에서 조차도-명료성과 정확성, 산문 전통을 주장하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 효과적인 글쓰기에 대해 주장하기 때문에, 그를 중요하고 혁명적인 인물이라고 본다 포드나 그를 이어 받은 파운드에게 있어서 '산문' 혹은 '산문정신'이란 '시' 또는 '운문정신'이라는 말과 대립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모든 종류의 글에서의 간결함과 정확성을 지향하는 어떤 글쓰기 혹은 글쓰기의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포드는 '산문'을 '하나의 정신적 습성'이라고 말한다. 포드는 또한 1912년 이전에 자신이 접한 유일한 시는 산문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고 말하며, 시인들에게 고집스럽게 '산문을 포착'하도록 권한다.   파운드에 의하면 포드는 '영국 인상주의 작가들의 목자'로서 제1차 대전 이전의 인상주의는 거의 그를 통해서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포드의 인상주의는 이처럼 산문정신을 중시함으로써 결국 사실주의적, 객관주의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포드가 예술가의 주관적인 생각보다 세계의 객관적 사실의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가 당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단순한 문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일반 하회 문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드의 이런 관심은 문학적인 문제로 넘어올 때 결국 객관적인 사회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를 지향하게 마련이었다. 그는 예술가의 목표가 '자기 시대의 관점에서 자기 시대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파운드 등의 이미지스트들을 '삶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아무런 논평 없이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자들로 지칭한다.   인상주의를 이처럼 사실주의로 해석하고 간결하고 정확한 산문 정신을 중시한 포드의 문학적 태도는 그의 영향을 받은 파운드의 시이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파운드는 포드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술에 있어서의 '객관성(objectivity)'을 강조하며 그 중요성을 자신에게 주입시켜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미지즘 초기의 파운드가 시에 있어서의 객관성, 사실성, 정확성 등을 중시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포드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는 이상과 같이 흄과 포드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후기의 흄이 가진 고전주의적 태도와 포드의 인상주의가 갖고 있는 사실주의적인 태도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기본적 목표가 객관적 사실의 정확한 기록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이미지즘은 어떤 대상을 시인의 주관에 의해 변형하거나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하기 보다는 그 대상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Pound의 Imagism 이론   1) 초기의 산문집   파운드의 이미지즘 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흄과 포드이 예술이론 뿐만이 아니다. 그의 이미지즘 시이론과 실제 시작(詩作)은 이들의 예술이론 외에 프로방스시와 라틴, 희랍의 서정시, 그리고 나중에 중국 한시와 일본시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특히 파운드의 프로방스와 라틴시 연구는 그의 초기 시작과 이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이한 점은 이때 그의 시와 이론이 일종의 괴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파운드가 런던에 도착한 1908년에 낸 처녀시집 "꺼진 촛불(A Lume Spento)"에는 장식적이고 수사적인 형용사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반해, 그이 시이론은 매우 현대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초기 시로써 이미지즘을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장식적이고 수사적인 형용사의 사용은 그의 시이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로망스 문학에 대한 연구는 한편으로 그의 시에 장식적인 요소를 갖게 했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연구는 사실상 이미지즘을 태동하게 한 일종의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년 간에 걸친 파운드의 연구 결과는 1910년 "로망스의 정신(The Spirit Romance)"이라는 책으로 나타나는데, 이 속에는 이미지즘의 핵심적 내용들이 이미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운드는 단테(Dante)와 카발칸티(Cavalcanti), 카툴루스(Catullus)등의 중세와 라틴계 시인들의 연구를 통해 시를 쓸 때의 표현의 '정확성(precision)' , '생생함(vividness)' , '명료성(clarity)'등을 주장하고 있고,. 이것은 그대로 이미지즘의 주장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파운드는 '정확성이 예술가의 능력과 명예, 진정함을 가름하는 시금석'이며 단테의 "신곡"이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표현의 '적확성' 혹은 '정확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운드가 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나는 오리리스의 사지를 거둔다"와 같은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단테가 가지고 있었던 예술가로서의 미덕인 '관찰과 언급의 정확성'을 강조하고, 예술가들은 그저 '제시(present)'할 뿐 '논평(comment)'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파운드는 또한 "시와 드라마"의 1912년2월호 "서문"에서 표현에 있어서의 정확성을 강조하며, 19세기 시에 대해 평가하고 20세기 시에 대해 전망을 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다소 흐릿하고(a rather blurry)' '다소 감상적이며(a rather sentimentalistic)'' 매너리즘에 빠진 시대(mannerism sort of a preiod)'인데, 그래서 그는 이제 앞으로의 20세기 시가 '더 견고하며(harder)' '더 건전할(saner)'것이라고 말하며 '엄격하며, 직접적이고, 감정으로 미끄러들지 않을 것(austere, direct, free from emotional slither)'을 기대한다.    이상의 사실들은 파운드가 이미지스트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몇 년 전부터 다른 시인, 예술가들과의 교류 이전에 이미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 등을 토대로 이미지즘의 중요한 내용을 어느 정도 확립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파운드가 자신의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다른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미지즘을 하나의 시운동으로 확립하고, 이런 운동을 토대로 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2) Imagism의 3원칙 재고   파운드가 자신의 로망스 문학 연구들을 토대로 흄과 포드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미지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봄의 일이다. 파운드는 이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두리틀, 올딩턴 등과 함께 소위 좋은 글의 '3원칙'을 마련한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이 시운동 집단을 '이미지스트(Les Imagistes)'라고 지칭함으로써 '이미지스트' 혹은 '이미지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공식화가게 된다. 이들이 의견의 일치를 본 이 '3원칙'은 1913년3월 "시"지에 "이미지즘"이라는 표제하에 실리게 된다.   a.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취급 할 것. b. 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말 것. c. 리듬에 관해서는 ; 메트로놈적 연속이 아니라 악구(樂句)의 연속 원리에 따라서 쓸 것.    이 3원칙은 이미지스트들이 펼친 주장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표현에 있어서의 간결성, 정확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제1원칙이 말하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취급이나 제2원칙이 규정하는 불필요한 말의 배제 등은 바로 이를 말한다. 다만 제3원칙은 이미지스트가 중시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 기계적인 리듬 대신 음악적인 리듬, 즉 자유시형(free verse)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표현의 정확성과 자유시를 주장하고 있는 이 3원칙 속에는 사실상 이미지즘이 가지고 있었던 자기 모순적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모순은 이미지즘의 변형 혹은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먼저 제1원칙은 시인들에게 '사물'을 직적 취급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시인이 다룰 대상을 '사물'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 우리는 이미지스트들이 얼마나 단순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그들은 시를 시인 의식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사물의 표현으로서 생각하고 있다. 시인이 어떤 사물을 표현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물 자체보다는 그 사물에 대한 시인의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시인이 기본적으로 다루는 대상을 '사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그 연원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술에 있어서의 모방론(mimesis heory)의 한 형태이다.   20 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이론을 전개하는 이미지스트들의 생각이 19세기 이전 예술관의 답습임을 볼 때 기이한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이 이런 고전적인 예술관을 전개한 배경이 무엇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방론의 핵심은 사물의 정확한 모사(模寫)이다. 사물의 모사가 정확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을 표현하는 시인의 언어가 정확하게 그 사물에 들어맞을 때 가능하다. 이것은 불란서 사실주의 작가들의 산문정신에 다름 아니다. 그 산문 정신의 요체(要諦)중의 하나는 사물과 언어를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일사일언이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의 영시들은 말하자면 이미지스트들이 보기에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고, 시인이 표현하려는 사물과 언어의 정확한 1대1 대응은 이에 대한 일종의 처방전이었다는 말이다. 파운드는 '하나의 용어(a term)'는 오직 '하나의 사물(one particular thing)'을 의미해야 하며, 아무리 차이가 사소하다고 해도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뭉뚱거려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이 사물에 더 이상 밀착되지 않을 때는(when words cease to cling to things)'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그는 말하기도 한다.   정확한 언어에 대한 관심은 제2원칙에도 나타나 있다. 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말라는 주문은, 불필요한 말을 삼가해서 말을 경제적으로 의미를 최대한 충전시켜 쓰라는 뜻이다. '위대한 문학은 의미를 가능한 최대로 충전시킨 언어에 불과하다'고 파운드가 말하는 것도 같은 문맥으로 풍이 할 후 있다. 말을 충전하는 기술은 바로 불란서 사실주의 작가들에게서 배워온 것으로, 파운드는 스땅달(Stendhal)이나 플로베르(Flaubert)를 알지 않고서는 정말 좋은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한다.    이미지즘의 원칙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 혹은 모순은 제2원칙의 '표현(presentation)'이라는 말에서 나타난다. 이 말은 시인이 대상을 변형하거나 논평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진술하고 제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제1원칙에 나오는 '사물(thing)'이라는 말과 맞지 않는다. 사물이 표현 대상이라고 할 때 시속에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이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재현(representation)된 것이다. 말하자면 시속에서 '사물'은 '재현'될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그대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물의 정확한 표현은 오직 그 사물 자체이다. 파운드 자신의 다른 표현을 빌자면, '매는 매(ahawk is a hawk)'다. 매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은 매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재현' 대신 '표현'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이들이 언어를 통해 대상이 간접화되는 것을 피하고 그 대상에 가까이 가고자, 달리 말하면 그 대상을 그대로 시에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런 열정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표현의 정확성을 지향하는 이들의 태도가 이 원칙에 배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시인이 표현하는 것이 사물인가 언어인가. 대상인가 혹은 그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의식인가 하는 문제로 확대된다. 이것은 제1원칙에 나오는 '주관적이든(subjective)' 혹은 '객관적이든(objective)'이라는 말에서도 엿보이는 문제이다. '주관적'이라는 말은 시인의 내면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 또 '객관적'이라는 말은 시인의 외부에 있는 사물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단순한 해석이다. 시인의 내면 정신을 표현했다고 할 때, 표현된 것은 그 정신의 구조 자체 보다는 사실상 그 정신이 활동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낸 제3의 그 무엇이다. 또한 시인의 외부에 있는 사물을 묘사했다고 할 때. 그 표현이 아무리 정확하다 해도 그것은 사물 자체는 아니다. 시인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지고 그 의식 작용에 따라 재구성되고 변형된 그 무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이 경우 기본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물이다. 사물이 인간에게 이해되는 것이 인간의 인식작용을 떠나서는 불가능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인간의 인식 문제로 돌린다고 해도, 언제나 인식은 주관과는 별개의 객관적 존재를 상정하게 마련이다.   3) 이미지즘의 변화 혹은 발전   표현의 정확성과 경제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미지즘의 3원칙 속에 숨어있는 이 이중성은 이미지즘에 대한 규정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면서도 이미지즘의 급격한 변화 혹은 발전을 설명해 줄 열쇠로 보인다. 시인이 표현하는 것이 사물인가 아니면 그것에 대한 시인의 인식인가 하는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존재와 인식이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이 글이 논의하는 주제도 아니다. 결국 이것은 시인들의 개성과 문학관의 차이에 따라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파운드가 이미지즘을 형성하도록 크게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 흄과 포드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인식 보다 사물을 중시하고, 그 사물을 정확하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게 된 것은 물론, 감상적이고 부정확한 언어들로 가득한 당대 영시에 대한 진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파운드도 초기에는 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시인으로서의 주관적 인식 보다는 객관적 사물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정확하게 그려내려 한다. 이것은 이미지즘의 출발점이 언제나 사물이었음을 말해 주며, 이런 점에서 데이비(Davie)는 파운드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자(realist)였다고 말한다.   적어도 이미지즘의 3원칙을 발표할 때 까지의 파운드에게는 위의 칭호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3원칙 속에는 파운드가 의식했건, 의식치 않았건 변화의 조짐이 숨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미지즘 3원칙은 1912년 경까지 흄, 스토러, 폴린트, 토드, 파운드 등의 문학적 논의를 몇 개의 원칙으로 정리한 것이면서도, 이미 이 원칙은 새로운 변화를 예견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3원칙은 1913~1914년을 전후한 예술가들의 관심 변화, 특히 파운드의 시적 태도의 새로운 변화에로 넘어가는 일종의 다리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파운드는 이 원칙을 발표하던 당시는 때로는 인간의 객관적 사물세계에, 또 때로는 주관적 의식세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와 이라는 두 축을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점차 사물 보다는 인간의 의식에, 존재 보다는 인식의 세계로 관심을 돌리고, 결국 사물, 존재 세계를 떠나 인간의 의식 세계, 의식을 구성하는 언어의 세계에 몰두하게 된다.이것은 바로 파운드가 이미지즘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당시의 새로운 예술 운동이었던 보티시즘으로 향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파운드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보티시즘은 이후 그의 모든 시와 산문을 규정하는 하나의 원리로 작용한다. 그의 시 "케세이(cathay) 1915)","휴우 셀윈 모벌리(Hugh Selwyn Mauberley), 1920)" 그리고 "시편들(The Cantos), 1930-1969"은 파운드가 보티시즘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현재의 모습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즘 3원칙에 내재한 이중성 혹은 모순은 결국 후기 파운드의 변모의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운드가 사물의 세계보다는 인식의 세계에 관심을 돌리고 그래서 마침내 이미지즘을 떠나게 되는 데는 파운드 자신의 방향 변화 뿐만 당시 문단의 사정 변화 또한 한 몫을 하게 된다. 이 변화는 1913년 후반기에 이르러 이미지스트 그룹에 몇몇 시인이 새로 참가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로렌스(D.H Lawrence)와 윌리암스(W.C.Williams),로웰(Amy Lowell)등으로, 기존에 이 그룹에 속해 있던 시인들과 함께 그들은 최초의 이미지즈트 엔쏘로지 출판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책의 출판과정에서 일어난 로웰과 파운드의 불화로 끝내 파운드는 이 그룹을 떠나고 만다.   파운드가 이미지스트 그룹을 떠나게 된 것이 그러나 이런 불화 때문만은 아니다. 파운드가 보기에 로웰을 새로운 주축으로 한 이 그룹은 과거에 자신이 주장했던 이미지즘의 핵심을 잃어버린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지즘'이라는 말은 '어떤 명료성과 강렬성(a cettain clarity and intensity)'과 연관 되는 것인데, 새로운 그룹은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자유시'에만 매달려 있다고 말한다.    파운드의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 1915년에 출판한 "몇몇 이미지스트 시인들"이라는 엔쏠로지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이 그룹의 여섯 위원들이 합의를 한 6원칙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1913년 시"지에 파운드 등이 실은 이미지스트 3원칙과 거의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이들이 제시한 원칙들 중 첫째의 '장식적이지 않은 정확한 말' , 다섯째의 '흐릿하거나 불명료하지 않은, 견고하고 명료한 시' , 그리고 여섯째의 '집중' 등에 대한 주문은 이미지즘 3원칙의 제1,2원칙과 다를 바 없다. 또한 둘째의 '새로운 정조 표현으로서의 새로운 리듬'과 '자유시'에 대한 언급은 이미지즘의 제3원칙과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적어도 원칙에 있어서 만은 초기 이미지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도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파운드의 비난대로 자유시형을 추구하는 집단에 머물고 만다. 1915년에 나온 이들의 엔쏠로지가 성공을 거둔 후 많은 모방자들이 나타나지만, 이들은 이미지즘의 본질이라 할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 강렬성 등의 정신은 잃어버린 채 자유시에만 몰두한다. 결국 로웰 중심의 이 후기 이미지즘은 한 때 인기가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역량 있는 시인들의 부족으로 곧 그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1917년에 나온 세 번째 엔쏠로지의 판매가 부진하자 이 여섯 시인들도 이제는 이 운동을 그만 둘 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파운드 이후 로웰로 명맥이 이어지던 이미지즘은 끝이 나게 된다.   파운드가 이미 이 일이 있기 전인 1914년경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나선 것은 위에 말한 대로 로웰 중심의 이미지즘의 한계성, 그리고 로웰과의 불화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1913년 중반부터 다른 곳에 관심을 쏟게 되는 그는, 고디에 브르제스카(Gaudier-Brzeska)를 통해서 조형예술을 알게 되고 또 페놀로사(Ernest Fenollosa)의 원고 정리를 하며 한자(漢字)의 세계를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또한 파운드가 변모를 하는 데는 당시의 많은 예술가들의 영향도 크게 작용한다. 예를 들면 1913년 12월 런던에서 열렸던 엡슈타인(Epstein)의 개인전과 관련된 논쟁에서, 당시 독일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온 흄은 기하학적, 추상적 예술을 옹호하고 나선다. 이와 함께 칸딘스키(Kandinsky)의 영향도 적지 않았는데, 1912년에 나온 그의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파운드에게 추상적 예술의 세계를 다시 일깨워 준다. 이런 모든 경향은 결국 파운드로 하여금 이미지즘을 떠나 보티시즘의 세계로 향하게 만든다.   1914 년 이후 파운드의 작품을 지배하게 되는 보티시즘은 기본적으로 객체적 사물의 세계보다는 시인의 창조적 인식을 중시한다. 그래서 파운드는 사물의 단순한 수용보다는 언어를 통한 예술가의 새로운 세계 창조에 관심을 기울인다. 파운드의 이런 변화에는 앞서 살핀 대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파운드가 이미지즘 운동의 정립 단계에서 발표한 이미지스트 3원칙에도 이러한 변화의 조짐이 숨어 있었고. 나중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경향의 발전적 형태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즘의 단계별 변화 혹은 발전을 가져온 여러 다른 요소들 못지않게, 이미지즘 이론 자체가 그 내부에서 출발점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러한 이중성 혹은 모순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 맺는 말    20세기 초 파운드가 주도했던 이미지즘 운동은 그 강력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 운동을 통해 창작된 시는 의외로 그 양에 있어서 빈약하다. 그리고 그나마 발표된 시들도 대부분 짧은 자유시에 불과하다. 스피어스(Spears)는 표현의 정확성과 경제성을 규정하는 이미지즘의 제1,2원칙은 후기 빅토리아조와의 결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진정으로 규범적인(truly descriptive)'것은 제3원칙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제1,2원칙의 '정확성'에 대한 주문은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애매한 요구이고, 따라서 시인들이 시를 쓸 때 따를 수 있는 실질적인 것은 제3원칙이라는 것이다. 제3원칙이 자유시를 규정하는 것이고 보면 이미지즘 시가 결국 자유시의 일종으로 결말이 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즘 시가 가진 한계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소 이분법적이기는 하지만 시를 주제와 기법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고 할 때, 이미지즘이 관심을 가진 것은 말하자면 기법적인 측면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미지즘은 따라서 시의 내용이나 주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정확성과 견고성을 일단 확보하면 시는 그 주제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문제를 삼기 어려웠다. 그래서 데이쉬즈(Daiches)에 의하면 이미지즘 시들은 과도한 정확성과 자유시형 등을 주장할 뿐 인간의 이상이나 신념과는 상관이 없는 일종의 '표면예술(a surface art)'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시들이 정확한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 효과를 강조할 뿐 전체적인 유기적 통일성을 찾기 어려우며, 따라서 그 핵심에는 '공허(emptiness)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미지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아무리 많다 해도 그러나 이미지즘이 현대 영시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지스트들이 주제나 내용보다 기법과 형식에 치우친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 자신의 편향된 관심 때문이라기보다 그 당시 영시가 가진 문제점이 주로 그런 기법이나 형식의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언어의 정확성에 대한 그들의 주문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당대의 시가 가진 문제점이 느슨하고 감상적인 언어의 사용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바로 언어이므로 언어의 정확성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바로 훌륭한 시의 기본 요건에 대한 요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미지즘 운동을 통하여 서구의 현대시는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 등에 대한 각성을 함으로써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영시가 보여준 부정적인 모습들을 극복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Vorticism    소용돌이주의(Vorticism)는 파운드가 런던에 머물고 있을 당시(1908-1920) 영국 전위예술가들의 예술적 취향이나 태도, 또는 그들의 예술을 시에 적용시켜 보자는 생각에서 창안해 낸 시작법의 일종이다. 소용돌이주의는 소용돌이(vortex)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그룹의 이념은 미래파의 문학사회 이론 및 입체파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소용돌이는 에너지의 최고점이며, 메카닉 가운데 가장 큰 효과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소용돌이를 세계관의 상징으로 삼는 역동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영국의 정적인 예술 전통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 운동은 파운드가 이미지즘이 지나치게 정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의 소용돌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의 출현을 알려 주는 유일한 전위예술의 한 분야였다. 파운드는 "소용돌이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어느 한 진영에 모여 있는 표현주의, 입체주의, 이미지즘이고, 다른 진영에서는 미래주의이다. . . . 그것이 하나의 예술운동이 되는 한, 그것은 일종의 가속화된 인상주의"(심인보 296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소용돌이" 또는 "회오리 바람" 등으로 정의되는 "Vortex"라는 단어는 영원히 지속되는 자아재생의 힘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끓어 오르는 힘(동적 상황)과 조용한 형태의 무력감(정지상태)을 결합시킨 용어로 해석되어 왔다. 이미지즘과 소용돌이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미지즘이 정적 이미지만을 표현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반면, 소용돌이주의는 이미지즘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적 이미지를 시로써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파운드의 시 「장기시합과 놀이에서의 독단적인 말」("Dogmatic Statement in the Game and Play of Chess")라는 시에서는 동적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파운드의 시도가 잘 보여진다.  이 시는 소용돌이파의 그림처럼 선, 색채, 모형을 기본 바탕으로 한 추상시로서, 장기판의 딱딱한 규칙에 따른 난폭한 힘의 소용돌이를 나타낸다. 장기 두는 사람이 대문자 L 모양으로 채색된 장기판을 때린다.    손 뻗쳐 여러 각도에서 공격하고,  한 가지 색으로 버틴다.  장기판은 빛으로 살아 있다. . . .  한 판이 끝나고 장기에 진 사람은 판 모양을 헐어 버리고 다시 만들며 이기는 순간까지 계속 장기를 두려고 한다.  빙글빙글 돈다, 가운데 모이고, 외퉁수 장군, 소용돌이 속에서 왕은 쓰러진다.  충돌, 눈에 띄는 줄무늬들, 강한 색채의 진선들,  안에서 작용하는 차단된 빛, 도망, 시합의 재개.    이 시는 빛과 공간의 틈새로 만들어진 장기판의 선이나 색깔에 도취되어 장기를 두는 추상적인 모습을 그린 시이다. 즉, 기세가 불리하여 쫓겨 도망갔다가 돌아서서, 다시 상대방의 말(馬)을 잡아먹으려는 상황을 그림처럼 재미있게 표현한 이 시는 소용돌이주의 시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여준다.    소용돌이주의 시인들은 위의 시에서 본 것처럼 동적 심상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 특별한 활자체 모양을 도입하였다. 소용돌이주의자들은 이전 시대의 예술작품의 특징인 온순, 화해, 자연, 부드러움, 19세기, 교육, 민주주의, 곡선, 부드러운 선, 혼합된 색채 등과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예술적 장식물을 공격하였다. 그 대신 그들에게 거칠음, 양극단, 난폭, 현재, 기구, 딱딱함, 날카로움 등으로 이루어진 금속성의 물체는 유동적이며 가변성이 있어 엉키거나 똑같은 모양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호의 대상이 되었다. 소용돌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시상을 강화하기 위하여 특별히 고안한 활자체로 모양을 다음고, 활자체 모양의 배열을 통해 시각적 효과를 고조시키려고 하였다. 소용돌이파는 활자체 모양을 다루는 솜씨가 제일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일종의 자유산문형의 넓은 공간을 큼직하고 묵직한 글자로 조심스럽게 메꾸고 있다. 사실 이들은 크고 넓든 텅 빈 흰 종이 위에 굵직굵직한 검은 선이나 글자로 얽힌 추상화 같은 시를 짓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시에다 그림과 같은 글자체를 보충하여 시각적 효과를 노린 시를 자신들의 예술로 고정시키려 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그들의 글에서는 글 자체가 만들어 내는 그림들이 날카로운 기하학적 도형을 이룬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시각적 경험의 변화와 큰 관련이 있다. 산업혁명을 지나면서 그 이전의 구조물들이 목재나 석재로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철골 구조물이 생겨났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1889년에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높은 철탑인 에펠탑(Eiffel Tower)는 기존의 석목재 구조물과 구별되는 철골 구조물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인 것이다. 이 탑은 높이가 984피트(약 300 m)로 그 이전에 건설된 어떤 건물에 비해서도 약 2배에 이르는 높이였다. 사물 혹은 장면의 정확하고 객관적 표현을 목표로 했던 소용돌이주의자들이 그들의 활자 모양을 고안하고, 글 자체로서 만들어내는 그림들이 날카로운 기하학적 도형을 이룬다는 점은 시각적 경험의 변화에 따른 필수불가결한 산물일 것이다.    또한 소용돌이주의는 사진술의 발달과도 연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인데, 고정되어 있는 사진(still pictures)은 1890년대에 움직이는 사진(moving pictures)으로 발전하였다. 촬영되고 영사되는 활동사진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낸 1887년부터 계속된 다양한 혁신들의 상대적 가치는 불분명하다(엘리스 32). 하지만 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에서 선보인 최초의 영화 시사회장에서 관객들이 화면상의 역에 도착하는 기차가 곧장 자신들에게로 와서 충돌할 줄 알았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던 일례를 보면, 그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시각적 경험의 재생이 보다 구체화되고 동적으로 표현되는 시점에서 소용돌이주의자들의 동적 심상의 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2. Objectivism    객관주의(objectivism)란 객관적인 예술 혹은 문학의 이론 또는 실천이다. 이 용어는 1930년대에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에 의해서 사용된 것으로 시를 기계적인 형태로 고려하고 분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려는 운동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이 용어는 시의 구조상의 외견을 검토하고 어떻게 그 시가 구성되었는지를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운동에 참여한 시인들은 Louis Zukofsky, George Oppen, 그리고 Charles Reznikoff이다. 이 유파는 실용주의와 물질주의를 중요시 여겼는데, 다시 말하면 그들은 미국인들의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고전주의적이고 유럽 식의 영향이 시에 너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느꼈다. 그는 현대 미국사람들이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언어를 시어로 삼아 전통적인 시형을 무시한 시를 썼다. 그래서 브래들리(Sculley Braddley) 등은 그를 미국문학의 "전위파"(avant-guard)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윌리엄스와 관련해서만 살펴볼 것인데, 서론에서 기술했듯이 윌리엄스에게서 이미지즘과의 연관성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실제로 파운드와 시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파운드는 1908년 10월 21일자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에게 보낸 서한에서 흄이 주장하는 "절대적으로 정확한 표현 및 군말의 폐지(absolutely accurate presentation and no verbiage)"의 내용과 비슷한 "시작법의 궁극적인 달성(ultimate attainments of poesy)"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1. 사물을 내가 그것을 보듯이 그려내라.  2. 미.  3. 교훈적 경향에서의 탈피.  4. 만약 당신이 적어도 더 좋게 혹은 더욱 간단하게 다른 소수의 사람을 반복한다면 훌륭한 일이다. 완전한 독창성이란 불가능하다.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첫 번째 항목은 특히 이미지즘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 항목이다. 윌리엄스는 아마도 이 항목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수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시에서 어떤 교훈이나 사상의 직접적 표현을 배제하였으며, 어떤 전경을 표현할 때는 마치 그림을 그려내듯이 하였다. 아래에 인용한 윌리엄스의 「빨간 손수레」("The Red Wheelbarrow")에서 이러한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이  빠알간 손수레에  의존해 있다  빗물에 씻긴  손수레  그 옆엔 하이얀  병아리떼.    비록 전에 살펴본 파운드의 시에서처럼 각종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한 가지 장면을 표현해 내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라"는 파운드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은 오히려 이미지즘보다도 더욱 깊게 사진 예술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여겨진다. 육안에 의한 상상 의식으로 표상된 현실상과, 상상 의식과는 관계없이 물리적 정확성으로 재생하는 영상 사이의 상극성으로 사진은 스스로 표현의 가능성을 깊게 하는 것이다.    회화는 보는 이를 명상으로 유도하여 연상 작용에 몰두케 한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한 화면을 눈으로 포착했는가 싶으면 이미 화면은 바뀌어져 가고 있어, 정착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 . . 화면을 보는 사람의 연상의 흐름은 화면의 변화에 의해 즉각 중단되는 것이다. 여기에 영화의 쇼크 작용이 있는 것으로, 이것은 고도의 신경 활동으로 포착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회화와 유사하다. 그러면서도 회화처럼 명상으로 유도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회화가 미크로코스모스적(Mikro-kosmos)미시적 공간인데 대하여 . . . 따라서 완결된 세계인데 대하여 . . . 사진은 미완의 부분적 공간이며, 명상이라는 작품과 자기와의 독자적이며 폐쇄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지향보다도, 작품에 대해서 체험적이며 미지의 공간에 자기를 해방시키려는 지향이 본질 속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화 작품은 작자의 모든 사고와 상상과 구체화의 완결이고, 또 집약이며 결과이다. 그러므로 보는 이는 그 결과로서의 화면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 작품은 그것이 작자가 사건의 곁에서 목격했다는 입증인 한, 작품을 통하여 작자의 체험을 우리는 추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영상이 구상적이라는 이유로서만이 아니라, 영상이 작자의 체험 기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진을 보는 법은 명상적이기보다는 체험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글은 어쩌면 윌리엄스의 시들을 해석하는데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윌리엄스는 우리는 물질 세계로부터 사고를 받고 형성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라이트 형제는 처음에 새를 보지 않았다면 결코 인간의 비행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새의 날개가 그들에게 비행기에 대한 사고를 제공했던 것이다. 윌리엄스가 말했듯이 "물질 속이 아니고서는 사고가 있을 수 없는 것(No ideas but in Things)"이다. 로젠탈은 "모든 사물은 우리가 색깔, 모양, 상호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영역은 그것, 의식의 자유, 즉 우리가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으로서 서로간에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에 의존한다"고 윌리엄스의 객관적 사고영역을 표현한다(심인보 248-9 참고). 즉 윌리엄스의 시는 독자들에게 오로지 이미지만을 보여 주고, 그 이미지를 보면서 독자들이 나름의 사고를 갖기를 요구한다.   출처,.dungdan.com,최재규님  
39    좋은 시에 대하여 / 정민 댓글:  조회:242  추천:0  2019-03-07
좋은 시에 대하여 / 정민   '좋은 시란 운문으로서의 운율적 요소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이미지와 새로운 인식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 일 것이다'   1.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는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2.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즉 시인은 이미지(형상)를 통해서 말한다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3. 진짜시와 가짜시      시인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속에 시인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이 아름다워도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겉꾸밈이 아니라 참된 마음이 깃든 시를 써야한다   4. 다 보여 주지 않는다     시에서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5. 사물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6.사물이 가르쳐 주는 것     사물 위에 마음 얹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는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시인은 사물을 관찰하며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7. 새롭게 바라보기     좋은 시는 남들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쓰인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해 준다 어느 날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 대화를 할 수 있게되면, 사물들은 마음 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시인에게 건네 오기 시작한다 시는 사물이 시인에게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8.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이런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 하든 자신이 몰두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들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다   9. 시는 그 사람과 같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다 드러난다 시인이 사물과 만난다 마음 속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시로 옮긴다 이때 사물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래서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오늘 무심히 하는 말투와 행동 속에 내가 품은 생각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10. 다의적 의미가꾸기     시 속에서 시인이 일부러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이렇게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 모호성이라 할 수 있으며 다의적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다 말해 버리고 나면 독자들이 생각할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는다   11. 울림이 있는 말       직접 말하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좋다 시 속에서 시인이 말하는 방법도 이와 같다 다 말하지 않고 조금만 말한다 그리고 돌려서 말한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대신 스스로 깨닫게 한다. 마음이 고이는 법 없이 생각과 동시에 내뱉어지는 말, 이런 말속에는 여운이 없다 들으려 고는 않고 쏟아 내기만 하는 말에는 향기가 없다 말이 많아질수록 어쩐 일인지 공허감은 커져만 간다 무언가 내면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쁨이 없다.   12. 한 글자의 스승       시에서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소중하다 한 글자가 제대로 놓이면 그 시가 살고, 한 글자가 잘못 놓이면 그 시가 죽는다 훌륭한 시인은 작은 표현 하나가 가져오는 미묘한 차이도 놓치지 않는다.   출처, 네블, 잃어버린나를찾아서  
38    시 창작의 가장 핵심적 비법 댓글:  조회:249  추천:0  2019-02-28
시 창작의 가장 핵심적 비법           * 시학 (詩學)                                                           시인.사상가 - 손홍집      - 시는 점등의 불빛을 하나로 엮은 사슬처럼 미지적 숲에 등불을 켜고 홀로    걷는 나그네의 가장 고독한 숨결이요,그 역사이다.   -시는 시인의 삶이 항상 치열하고,예술혼은 불타며 내면은 끓어오르고,   육체는 그 뭔가를 위해 방황해야 비로소 그 깊이를 추구 할 수 있다.   - 시는 자신을 거친 도마 위에 올려놓는 파닥이는 고기처럼 스스로 실험하고   그 깊이가 아니면,결코 큰 울림이나 거시적 미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다.   -시는 작가적 사상과 철학이 농축되어 맑은 물처럼 가라앉은 상태에서    마치 고요한 연꽃처럼 피어있는 형체.   - 시란 간결함 속에 그 뜻을 비치고 그것이 은은한 향기로 독자에게 다가와    마침내 그 상대의 내면과 정신에 큰 울림을 준 그 가치와 척도.   - 시란 관념에 해당하는 나무의 뿌리나 줄기의 흐름을 새롭게 변형시켜     꽃으로 환하게 피운 최후의 숨결과 그 자취의 흔적.   -시란 현실이란 작은 촛점을 거대한 망원렌즈로 바라보는 시각이요,   반대로 지나온 세월을 보다 작게 축소시켜 비쳐주는 새로운 거울.   -시란 현실이란 미개세계를 작가적 지각에서 빛처럼 투망하여   보다 먼 미래적 싯점을 비쳐주는 햇살같은 빛의 일종.   -시는 작가적 내면의 숭고한 정신과 영혼을 그 모체(母體)로 탄생하여    마침내 개체적 변환을 거친 후 개성적 순환을 거친 어떤 유형체.   -시란 깊은 고뇌와 고통의 수레바퀴에 자신을 내던져 그 안에서 싹튼   숭고한 의식과 새로운 정신을 갖춘 최후의 작업이요,그 의식체.   -시란 단 한순간 빛처럼 떠오른 착상을 새롭게 영상매체로 꾸미는 작업이요,   그로 인해 자신의 지각을 일깨워 잠든 사물을 일깨우는 위대한 힘.   -시란 마음의 눈으로 품고,정신으로 그 의미성을 일깨우며,최후 그 이미지를    생성하는 과정이요,그로 인해 천 개의 눈빛을 갖춘 영혼의 집합체이다.   -시란 작가적 삶과 체험이 녹고 응축되어 흐른 영혼의 슬픈 목가적 빗소리와    그 음률이요,보다 높은 사상성을 위해 비상하는 새의 깃털같은 것.   -시란 자신이 마지막 절망에 도달했을 때 마치 구원의 손길을 스스로 뻗쳐   종교에 구원하듯이,작가의 혼과 정신을 그에 바친 최후의 기도서이다.     * 시는 지식이 아니다.보다 고도의 경험적 세계이다- 고로 생을 많이 체험하고,    많이 비교하며 사고하고, 많이 퇴고하고, 쓴 것을 많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마치 포도주가 숙성되듯,아님 물이 정화되듯이 조용히 그 시간을 기다리는    지혜도 꼭 갖춰야 정작 훌륭한 시를 완성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위대한 인물이라면 자신의 타오르는 심장을 용광로 속에서     담금질한 언어를 직접 탄생시킬 수 있다!   ---------------------------------------------------------------------    *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저 바닷속 밑바닥의 조개에서 한알의 진주를 케내온 작업이다.-(열정)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가슴속의 사무친 멍울이 피를토해 마지막 단절된 그 숨결을 어루만지는 일이다.-(실천)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동굴에서 포도주가 오랫토록 숙성되어 최후의 그 깊고 오묘한 맛을 드러내는 순간이다.-(인내)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고욱(苦煜)의 참담한 눈꽃들이 핀 외진 산길을 한없이 고독하게 홀로 걷는 발걸음이다.-(고행)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모든 사물과 자연을 한 호흡에 갖추기 위한 나의 최후의 몸부림이요,그 열매이다.-(사랑,나눔)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과정과 그 환희의 불꽃들을 보다 찬란하게 펼치는 환희의 광경이다.-(예술적 승화)           * 시 창작의 열가지 비법   첫째: 모든 사물과 친근한 벗이되라.        (모든 사물은 곧 시의 재료이며 또한 자신을 키우는 훌륭한 스승에 해당한다.)   둘째:작게 스친 영감을 그대로 놓치지 말라.        (짧게 스쳐간 착상이나 영감은 그것이 테마가 되어 정작 큰 작품의 줄기를 형성한다.)   셋째:삶에 대한 철저한 체험을 갖추라.        (어떤 일을하면 그냥 쉽게 처리하려든 생각보다 그 일의 깊이에 빠져 생활해야 한다.미친듯이-)   넷째: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버릇을 길들여라.        (작은 환경에 만족하면 그 의식체는 곧 고인 물에 해당한다.고로 창조자는 항상 새로움에 눈뜨라.)   다섯째:항상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라.        (어느 순간에 훌륭한 착상이나 영감이 떠오를지 모른 상태기에 항상 그것을 기다리는 자세라야 한다)   여섯째:때론 긍정보다 부정적 시각을 갖추라.       (긍정은 가장 일반적인 시각이다.그러나 그 긍정을 부정으로 바라봄은 파라독스를 제공한다.)   일곱째:모든 사물을 쳐다보면 먼저 의심하는 눈초리를 갖추고 점차 깊은 시각으로 관찰 투시하라.       (작은 돌맹이 하나에서부터 이름없는 풀 한포기를 쳐다봐도 그들의 깊은 내면을 읽어야 한다)   여덟째:고독한 환경에 갖혀 생활하고 최대한 말을 줄여라.       (고독은 시인의 집이다.또한 말이 많으면 정화될 시어들을 모두 미리 흘려버린 경우에 해당한다. 말은 곧 시다)   아홉째:문체와 문장을 항상 다듬고 조율하라.       (시어에 꼭 필요한 낱말이 들었는지,아님 전체 문장은 꼭 짜임새를 갖췄는지 항상 그것을 연구해야 한다)   열번째:홀로 고요히 참회하는 습관으로 시를 쓰라.       (참회란 곧 자신을 씻는 일이다.그로 인해 항상 마음을 닦고 정신을 일깨우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얼어붙은 토양을 일궈 그곳에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스쳐가는 바람을 붙잡아 작고 투망한 그물에 가둔 일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피끊는 정열로 사막에 오아시스를 건설하는 일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약속없는 땅에 새로운 약속의 뜻을 세우는 거룩한 작업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생명이 없는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그것이 부활토록 하는 일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타인과 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의 교량을 건설하는 일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그곳에 미래적 사유의 집을 짓는 작업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진리가 철저히 외면당할 때 그것을 보상받기 위한 노력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범람하던 자신의 의식체를 다스려 고요히 그 강물이 잠들게 하는 일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절망의 나락에서 최후로 자신의 의식을 찾는 작업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고요한 아침의 햇살을 품에안고 새로운 에너지를 축적시키는 일이다.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삶의 가장 진실한 참회록이다.     * 글을 쓰는 의미와 방법 P{margin-top:2px;margin-bottom:2px;}    첫째: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자세로 써야 한다. 둘째:생을 관조하는 정신으로 써야한다. 셋째: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개척하는 위치에서 써야한다. 넷째:타인과의 동조의식에서 나눔이란 법칙을 성립해야 한다. 다섯째:그 모두를 다 버리는 과정으로 다시 되새김질 해야 한다.   ------------------------------------------------------------     ** 시에 대한 몇가지 명언들.. -시는 간소함에 대한 사색이다.-시란 좋은 친구, 관용의 미소이다. -시란 곧 부활하는 생명의 몸짓이다.-시란 경험에 의한 자신의 미래적 성찰이다.-시란 고상한 감정의 순환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기법이요, 보다 고차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간들의 욕구이다.-시란 기다림의 미학이요,관찰자적 영감과 철학이 내재된 운율의 오묘한 조화성이다. *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나의 생명이 위태롭거나 험한 수렁에 빠질 때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함이다.고로 그것은 나의 신비로운 생명의 힘이요,축적된 구원자의 언어요,힘차게 솟구치는 대지 위의 파란 새싹들의 함성이다. *시를 쓰는 것은,즉 예술가가 그 예술행위를 하는 것은 곧 죽음의 문턱을 스스로 두드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을 뿌리쳐도 다시 그 세계에 빠지는 이유는 오직 그것을 극복함으써만이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poem-reader?t__nil_cafemy=item  
37    생각 속의 여우 / T․휴즈 댓글:  조회:370  추천:0  2019-02-04
생각 속의 여우 T․휴즈   나는 이 한밤 순간의 숲을 상상한다. 무언가 살아 있다. 시계의 고독과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이 백지 옆에서.   창 밖엔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비록 어둠 속에서 깊어졌으나 더욱 가까워진 무엇인가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차갑고 검은 눈(雪)처럼 섬세하게, 한 마리 여우의 코가 잔가지와 잎을 건드린다. 두 눈이 하나의 동작을 대신한다, 그리고 또 그리고 지금,   흰 눈 속에 선명한 자국을 찍는다, 나무들 사이에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절룩거리는 그림자가 그루터기 옆을 느릿느릿 지나간다 그리고 숲 속의 빈터를 대담하게 가로질러 나온 몸뚱아리의 움푹 둘어간 공동(空洞) 속에서, 눈 하나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초록 하나가, 휘황하게 골똘하게 제 일을 시작하고 있다   문득 여우의, 코를 찌르는 악취와 함께 그게 어두운 머리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창에는 여전히 별이 보이지 않는다. 시계는 똑딱거리고 백지가 채워진다. (글이 쓰여진다)     *테드 휴즈(Ted Hughes, 1930~1998 : 영국의 시인.극작가.비평가). 시작법(한기찬 역,청하출판사,1993)   [감상] 여우의 움직임을 통해 시 창작 과정을 밝히고 있는 이 시에서 1연은 한밤중 화자인 나는 시상을 정리하기 위해 숲의 모습을 생각한다. 그 숲속에는 시인 이외 다른 무언가가 살아 있다. 방안에는 시계의 째깍거림 이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한 적막이다. 적막 가운데 화자는 백지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있다. 2연에서는 화자가 숲속 광경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창문을 통해 별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그는 별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상상의 대상이 아니라, 보다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느낀다. 그것은 어둠 속에 보다 깊이, 보다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고독 속에서 시상은 떠오르는 법. 3연은 보다 가까이 있는 그것은 다름아닌 여우다. 여우는 코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살며시 만진다. 여우의 코가 나뭇잎과 나뭇가지에 닿는 모습이, 흡사 어두운 밤에 눈이 살포시 내리는 것 같다고 한다. 시상이 매우 부드럽게 착상되는 순간이다. 여우는 두 눈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본다. “지금”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된 것은 여우가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여 준다.    
36    환유적으로 시 쓰기/윤석산 댓글:  조회:372  추천:0  2019-02-04
[공유] 환유적으로 시 쓰기/윤석산   3) 환유적으로 시쓰기       자아 이제 서정적 줄거리를 완성했으니 환유적 어법으로 시를 써보기로 할까요? 지금 쓰자면 ‘나중에 쓰지요’라고 말할 테니까 저랑 함께 써보기로 합시다. 어떤 것을 쓸까요? 앞에서 시인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하는 1인칭 화제로 쓴 경우는 예문을 통해 확인했으니 3인칭 화제로 써보는 건 어떻겠어요?  대답이 없으니 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느 날 글을 쓰다가 피곤해 차를 몰고 해안도로에 있는 카페에 갔습니다. 커피를 시켜놓고 창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을 보면서 피로를 풀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커플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말 속에는 또 다른 말이 있는 것 같아’라고 하더군요.   순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말 속’에 말이 있다면 ‘말 밖’에도 말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안’과 ‘밖’이 있다면 말은 입체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이라면 사람도 살고, 도시도 있고, 빌딩도 있고, 구멍가게도 있고, 그 구멍가게 안에는 사탕항아리도 있을 테고, 그 아래에는 지하실도 있을 수 있고, 밤마다 고양이가 계단에 올라와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군요.   그러다가 언어철학(言語哲學)을 공부하느라고 읽은 책들의 구절들이 떠오르대요. 그러니까, ‘언어는 이데올로기’라든지, ‘언어는 존재다’라든지, ‘존재에 이르는 통로’라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폭력을 낳는다’는 말도 떠오르대요. 평소 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은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떠오른 모양입니다. 그러더니 다시 언어가 존재라면 화살로도 만들 수 있고, 고래로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 때 아마 바다 저편에 여객선이 지나가고, 그 여객선을 고래의 모습으로 바꿔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종업원에게 종이를 달라고 해 다음과 같이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①글을 쓰다가 피곤해서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심 ②옆자리의 젊은 커플이 ‘당신 말 속에는 또 다른 말이 있다’고 말함. ③순간 말 속에 말이 있다면 언어는 입체적 공간이고 사물이며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음. ④그리고 또 언어는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떠올랐음 - 이 세상의 모든 분쟁은 언어로부터 시작됨…   뭐, 이런 식으로 시의 줄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어떻게 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3인칭 지향형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물론 어느 지향형으로도 쓸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형을 택한 것은 언어에 대한 제 느낌이나 말 속에는 말이 들어 있으니 말할 때 상대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교훈보다 언어 그 자체의 속성을 드러내고 싶어서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화제 지향형은 자기감정을 자제하면서 객관적으로 말하기에 적합한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줄거리를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제외한 것은 ①번이었습니다. 이 모티프는 과정을 나타내는 로서, 이들을 그냥 놔둘 때는 서사적 산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적  모티프’가 뭐냐구요? 이 용어는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토마쉐프스키(B. Tomaševski)가 쓴 것으로서, 그는 이야기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모티프의 유형을 , , , 로 나눕니다. 그리고 고정 모티프는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단위로서 탄생이나 죽음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단위를 말하고, 동적 모티프는 ‘뛰었다’든지 ‘결혼했다’와 같이 정황(情況)의 변화를 알리는 단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 모티프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갈 때 날씨가 화창했다든지 음악을 들으며 갔다는 식으로 생략해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단위를 말하고, 정적 모티프는 ‘그녀는 아름답다’와 같이 묘사하는 단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동적 모티프를 배제하면 화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축소하고, 자유 모티프와 정적 모티프를 이야기할 때 포함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 시를 평할 때 ‘서사성이 강하다’든지 ‘산문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작품들은 이들을 그냥 놔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뺀 다음 줄거리에 따라 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쭉 쓰다가 보니까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대요. 그리고 어떤 곳은 너무 장황하고, 설명으로 흐르는 곳이 생기데요.  그래서 주제에 해당하는 ‘말 속에는 말이 있다’와 ‘말 밖에도 말이 있다’라는 구절을 적당히 바꾸면서 각 연마다 배치했지요.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는 곳을 잘라 연(聯)을 바꾸면서 자른 빈 틈에서 독자들이 상상하도록 만들어 작품으로 완성했습니다. 한번 보실래요?   말 속에는 말이 있고 말 밖에는 말이 있다.   말과 말 사이에는 빌딩이 있고  빌딩과 빌딩 사이에는 구멍가게가 있고 구멍가게 한 가운데에는 꿈을 담은 사탕 항아리가 있고 그 뒤 쪽 지하실 계단 아래에는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가 있고 그 고양이는 밤마다 층계 위에 올라와 밤새도록 운다.   말과 말 사이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숲이 있고 발랑발랑 뒤집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들 뒤엔 명털 뽀얀 소녀들이 있고 깔깔대는 그 소녀들 웃음은 화살이 되어  산등성이를 달리는 사슴 정갱이를 꺼꾸러뜨린다.   그러나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또 다른 말이 있고 또 다른 말 내부에는 눈부신 이데올로기가 있고  이데올로기는 도시 상공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되고 펄럭이는 깃발은 저를 위해 다른 말들을 공격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간혹 전쟁터에서 혼자 죽는다.   말과 말 사이에는  쓸쓸히 비가 내리는 바다가 있고 비 내리는 바다에는 죽은 고래 한 마리가 있고 그 고래는 밤마다 제 짝을 찾아 울며 지구 저쪽으로 떠나고  그래서 지상의 우리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필자,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어때요? 재밌지요? 환유적으로 시 쓰는 방법을 정리해드릴 테니 여러분들도 앞에서 만든 줄거리를 가지고 작품 한편을 완성해보세요.   □ 환유적으로 시 쓰기 순서   ① 화제가 떠오르면 자유연상(自由聯想)을 하면서 시상을 풍부하게 만든다. ② 시상을 검토하면서 지향성을 결정한다. ③ 시적 인물과 배경, 어조 등을 결정한다. ④ 줄거리를 검토하면서 고정모티프와 동적 모티프를 제거하거나 자유모티프와 정적 모티프에 포함시키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⑤ 주제에 해당하는 모티프를 군데군데 배치하여 주제를 강화하고, 모티프 단위로 연을 구성하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동적 모티프를 어떻게 약화시키느냐구요? 아, 그에 대한 설명을 빠뜨렸군요. 흔히 시의 제재로 택한 화제에 과거의 이야기를 오버랩(overlap)하거나 몽타주(montage)하는 방법을 쓰지요. 다시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이 쓸쓸해서 하루 종일 방황하고 아래와 같은 시적 줄거리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① 그녀가 떠난다게 해서 항구로 갔다. ② 하루 종일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을 들으며 방황했지만 여전히 쓸쓸했다.  ③ 해가 지고,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포장마치에서 소주를 마셨지만, 여전히 쓸쓸했다.   만일 이 이야기를 차례대로 쓴다면 틀림없이 ‘산문적’이라든지 ‘서사적’이라는 평을 들을 겁니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마지막 모티프인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는 장면에 그녀가 떠나는 장면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겹쳐 놔야 합니다.   차가운 소주잔 아래 항구로 가는 사내가 보인다. 파도는 밀려오고, 갈매기는 울고 차가운 소주잔 아래 바바리코트 깃을 여미며 돌아서는 여인이 보인다. 여객선은 부우부우 고동을 울리며 항구를 빠져나가고 차가운 소주잔 아래 늦가을 저녁 혼자 술마시는 사내가 보인다. 술잔 밑으로 저녁 해가 지고, 포장마차 비닐 포장이 펄럭이고…   뭐, 이런 식으로 겹쳐 놓거나 비유하면 지나간 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아, 그럼 써봅시다. 나중에 쓰겠다구요? 한 마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없거나 운이 없어 그런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길러야 할 기초적인 능력을 내일 하지 모레하지 미루고, 그렇게 미룬 것들이 누적되어 그렇게 된 겁니다. 이 강의가 끝나기 전에 시인이 되고 싶은 분들은 어서 쓰기 시작하세요. 자아, 씁시다. 시자악!  
35    초현실주의와 그로테스크를 활용한 시형식 댓글:  조회:311  추천:0  2019-02-04
    초현실주의와 그로테스크를 활용한 시형식       -박상순     1)박상순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졸업.  91년『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데뷔.  93년 『6은 나무, 7은 돌고래』, 96년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을 발간.  96년 현대시동인상 수상.    2) 박상순 시의 작법적 특성    ① 박상순의 언어는 초현실과 무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정체불명의 화자(발화자)와 청자(수화자)을 등장시켜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을 활용한다.  우리 시에서 새로운 발성법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시적 모호성과 난해성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② 이국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초현실적이미지를 구사한다.  상상력의 비약과 이미지 사이의 충돌이 크다.    ③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편안하게 읽히는 것은 반복적 병렬과  시각적 배치를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 병렬은 이 시의 호흡을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불안하고 불길한 존재-장소-이미지를 끊임없는 반복적으로 왔다갔다하기,  그 끊임없는 미끄러짐이 바로 그의 전략이다.  반복적 병렬이나 적절한 시각적 배치는 즐거움, 슬픔, 분노, 갈망 등의 정서적 표현을  절제하도록 하며, 나아가 시적 긴장을 유발하도록 한다. 
3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줄거리 [퍼온 자료] 댓글:  조회:311  추천:0  2019-02-0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줄거리 [퍼온 자료]   1. 모방에 관하여  우리의 주제는 작시술(作詩術)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는 예술 일반의 본질 뿐 아니라 그 종류와 기능에 관해, 좋은 시에 요구되는 플룻의 구조에 관해, 시 구성성분의 요소와 본질에 관해, 그리고 같은 탐구과정에서의 다른 예술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희곡은 물론이거니와 서사시와 극시, 그리고 많은 관현악곡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모방(模倣)의 양식이다. 동시에 이들은 모방매체, 즉 수단의 종류, 대상의 차이, 모방의 방법이라는 세 가지에 의해 구별된다. 모방매체로서의 수단은 전체적으로 리듬, 언어, 화음 등이다. 이는 단독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에 차이를 가져오는 요소를 모방의 매체, 즉 수단이라 부른다.  모방자가 모방하려는 대상은 인간의 행위인데, 이 행위자는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미덕과 악덕 사이의 경계가 모든 인간을 구분 짓는데, 모방의 대상으로서 인간은 선함에 있어 평균인 이상이거나 혹은 그 이하이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수준이다. 예술은 이러한 차이점을 인정해야 하며, 이러한 차이의 관점으로 표현된 대상에 의해 서로 분리된 예술이 나온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차이점은 비극과 희극을 구분 짓는 것이기도 한데, 후자는 오늘날의 평범한 사람보다 더 천한 인물을 만드는 것이라면 전자는 더 훌륭한 인간을 다룬다.  예술의 차이 가운데 또 하나는 각 대상의 모방방법에 있다. 모방할 때 수단과 대상이 같은 종류라면, 시인은 어떤 때는 서술체로 어떤 때는 작중인물이 되어 말할 수 있다. 또는 그런 변화 없이 계속 자신에 머물 수도 있다. 모방자가 모든 것을 실제 행하는 것처럼 극적으로 전체 이야기를 표현할 수도 있다. 이들 예술의 모방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결국 그 수단과 대상 및 방법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에 기인하는 것이다.    2. 예술(시)의 기원  시의 일반적 기원이 인간 본성의 각 부분인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모방적 창조물이며 모방에 의해 지식을 배우게 된다. 또한 모방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에 기쁨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철학자뿐 아니라 아무리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라고 해도 최상의 기쁨을 선사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모방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화음과 리듬도 역시 그렇다. 시는 각 시인의 성격 차이에 의해 두 종류로 나뉘는데, 찬가와 찬사, 그리고 풍자시가 그것이다. 비극과 희극이 실제로 나타나자 자연히 시적 취향에 따라 일부 시인들은 풍자시인 대신에 희극시인이 되었고, 다른 취향의 사람들은 서사시인 대신에 비극시인이 되었다. 이 새 예술형태가 전의 것보다 더 장엄하고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희․비극은 즉흥적인 것에 기원을 둔다.  희극은 보통 사람 이하의 악인을 모방한다. 모든 결점 때문이 아니라 특이한 결점, 추악함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우스운 것 때문에 악한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나 해를 주지 않는 과오 혹은 결함이라 규정할 수 있다. 웃음을 자아내는 가면은 고통을 주지 않는, 추하면서도 왜곡된 것이다. 서사시는 장엄한 체의 운문으로 진지한 주제를 모방한 점에서 비극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비극에서의 선악의 판단은 서사시에 있어서의 그것과 유사하다. 서사시의 모든 부분은 비극에 포함된 것이지만, 비극의 모든 부분이 서사시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3. 비극의 정의와 효과  비극은 진지함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일정한 길이의 행동을, 즐거움을 주는 장식적 요소와 어울리는 언어로 모방하는 것이다. 비극은 극적이거나 비설명적 형태로, 연민과 공포를 일으켜 주는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이룩하게 해준다. ‘기쁨을 주는 장식적 요소의 조화된 언어’라는 것은 언어에 리듬과 화음, 혹은 노래가 부가되어짐을 의미하며, ‘분리된 종류’라는 것은 어떤 작품은 운문으로만 완성되고 어떤 작품은 역으로 노래로만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1) 이야기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첫째로 장경(場景)이 전체의 몇 부분이어야 한다는 사실과, 둘째로 가락과 조사법이 그들 모방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뒤따르게 된다. 여기서 ‘조사법’(diction)이란 그저 운문의 작법을 의미하며, 가락이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더 이상 설명을 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표현된 주제 역시 행동을 통해 구현되며, 행동은 성격과 사상 양면에서 현저한 특질을 필연적으로 지녀야 하는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 어떤 특질을 그들의 행위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사물이 자연적 질서를 이룸에는 그 행위의 두 원인이 있으니 성격과 사상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결과로 그들 삶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현실의 행동이 극에서는 이야기와 구성에 의해 표현된다. 행동의 모방이 바로 플롯이다.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구성’이란 용어의 의미는, 이야기상에서 이루어지는 사건과 행위의 결합이며, 거기에서 성격이라는 것은 어떤 도덕적 특질이 행위자에 기인한다고 우리에게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사상이라는 것은 특이한 점을 증명하거나 혹은 보편적 진실을 드러내려할 때 그들이 말하는 모든 언어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극은 그 질을 결정하는 여섯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니, 구성, 성격(인물), 조사법, 사상, 장경, 그리고 멜로디가 그것이다. 이들 중 조사법과 멜로디는 모방의 수단에서, 장경은 모방의 양식에서, 나머지 셋은 모방의 대상에서 나온 것이다.  2) 여러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상의 사건을 결합하는 것, 즉 구성이다. 비극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모방이 아니라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의 모방이다. 모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행동양식을 취하며 우리 삶의 궁극목적도 어떤 종류의 활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성격이 인간의 성질을 알려주지만, 우리가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극에서 그들은 성격을 전해주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성격을 그 속에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비극의 결과이며 목적인 것은 단편적 이야기와 구성 속에 있는 행동이며, 그 결과는 어디서나 중요한 것이다. 또한 비극은 행동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인물의 성격 없이는 가능할 수 있다. 비극에서 흥미를 끄는 가장 강한 요소인, 급전(急轉)과 발견은(發見)은 구성의 일부분이다. 그 증거의 하나로, 시작 초보자들은 이야기의 구성보다 조사법과 성격에 쉽게 능하게 되는데, 거의 모든 초보 극작가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가장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비극의 생명이며 영혼인 것은 구성이고, 성격은 이차적으로 오는 것인즉, 이는 무질서하게 아름다운 색깔만 칠해 놓아, 단순하게 흑백으로 그린 초상화만큼의 기쁨도 주지 못하는 그림에 비유할 수 있다. 비극은 일차적으로 행동의 모방이며, 그것이 행위자를 모방함은 주로 행동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결국 비극의 핵심원리는 구성이고 성격은 두 번째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오는 요소는 사상, 즉 말하려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경우에 꼭 맞는 것을 말하는 힘이다. 이것은 비극의 대사에서 나타나며, 정치학과 수사학의 영역에 공통으로 속한다. 극에 있어서의 성격은 행위자의 도덕적 목적을 보여 준다. 한편 사상은 어떤 특별한 점을 밝히거나 덮어주거나, 혹은 보편적 명제를 밝힐 때 인물이 말하는 언사에서 드러난다. 네 번째 것은 조사법이다. 즉 실제 운문이나 산문이 같다고 할 수 있겠는데, 언어로 그들의 사상을 포현하는 것이다. 멜로디는 비극에서 가장 즐거움을 주는 장식적 요소이다. 장경은 흥미를 끄는 것이지만 모든 요소 중 가장 미미한 미적 요소이며, 작시술과 관계가 가장 적다.    4. 비극의 구조  비극에 있어 일차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는 단편적 이야기나 사건이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비극은 전체적이면서도 부분적으로 완전하며 또한 일정한 행동의 길이를 가진 행동의 모방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길이 그 자체는 아니다. 전체라는 것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지는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다. 끝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면서 또한 그것의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런 결과이어야 하며, 뒤에 아무 것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중간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면서 또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구성은 아무데서 시작하거나 끝나서는 안 된다. 시작과 끝은 지금 말한 것에 적절하게 어울려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살아있는 생물체이건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건 모두가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어떤 질서를 필요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크기와 질서의 문제인 것이다. 부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전체나 아름다운 생물체가 눈으로 보아 파악할 수 있는 크기여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나 구성도 적절한 길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주인공이 개연적 혹은 필연적인 일련의 과정을 거쳐 불행에서 행복으로, 혹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전도하기까지의 길이’는 이야기의 길이 제한에 있어 충분한 여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5. 비극의 특성과 시의 본질 - 문학의 허구성  행동의 모방은 하나의 전체적 행동, 완전한 전체를 표현해야 한다. 그에 부수되는 여러 사건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어느 한 사건이라도 위치를 바꾸거나 삭제하면 전체 연결과 배치가 일그러지게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집어넣거나 빼는 것이 현저한 차이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체에 필요한 부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기능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가능성을 가진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시인의 구별은 산문으로 쓰느냐 운문으로 쓰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는 일어난 일을 쓰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쓴다. 그러기에 시는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는데, 시의 서술은 본질적인 좀더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서술이라 함은 일반적인 인물이 개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서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단순히 운문 창조자라기보다는 이야기나 플롯의 창조자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의 작품에 모방적 요소가 있다 하여도 그는 시인인 것이며, 그가 모방하는 것은 바로 행동인 것이다. 단순한 구성이나 행동에서 가장 나쁜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삽화의 상호간에 어떤 개연성이나 필연성이 없을 때 그것을 구성에서 삽화적(揷話的)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연민과 공포를 일으켜주는 사건의 모방이다. 그런 사건은 돌발적이면서도 다른 것의 결과로 일어날 때 마음에 대단히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그 사건이 재발성, 즉 스스로에 의하거나 우연에 의해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경탄스런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이런 필연의 구성은 다른 어떤 것보다 훌륭한 것이다.    6. 구성의 종류와 요소 - 복합구성과 단순구성, 급전과 발견, 비극의 구성단계  구성은 단순하거나 복잡한데, 그것은 사람의 행동이 자연히 이 두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단일한 행동이란 하나의 연속적 전체를 이루고 있는 행동을 말한다. 이때 주인공의 운명변화는 급전이나 발견 없이 일어난다. 복잡한 행동이란 급전과 발견 중 어느 하나 혹은 이들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할 때 일어난다. 이것들은 모두 구성 자체의 구조에서 생겨나며, 앞 사건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이어야 한다. 필연적 관련으로 맺어지는 두 사건과 단순한 시간적 병렬의 두 사건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급전(Peripety)이란 극내에서 어떤 일이 한 상태로부터 그 반대 상태로 급격히 변화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또한 사건의 개연적 혹은 필연적 결과이다. 발견(Discovery)이란 말의 의미에서도 그렇듯이 행운이나 불운을 숙명으로 가진 인물이 무지의 상태에서 깨달음의 상태로 바뀌게 되고, 그래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적대적으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급전을 내포하는 발견은 동정심과 공포감을 일으킬 것이다. 구성의 두 부분인 급전과 발견은 이러한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파토스(pathos)인데, 우리는 그것을 파격적이고 고통스런 본성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양적인 관점 즉 개별부분으로 구분할 때 비극은 다음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사(Prologue), 삽화(Episode), 결미(Exode), 합창가요(Choral) 부분이 그것이다.    7. Catharsis - 비극의 목적, 예술적 쾌락  시인은 구성을 짜는데 있어 무엇을 택해야 하며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 비극의 목적은 어떠한 수단에 의하여 달성될 것인가. 비극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위하여 구성은 단순함을 피하여 복잡하여야 하며, 모방의 뚜렷한 기능으로 보아 동정심과 공포심을 일으켜 주는 행동을 모방한 것이어야 한다. 완전한 구성은 단일해야 하며 두 가지 일을 함께 다루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의 운명은 비참함에서 행복으로가 아니라, 반대로 행복에서 비참함으로 바뀌어야 하며, 그 반대의 원인은 어떤 결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인공에 있어서의 어떤 큰 잘못에 의하여 이끌어내져야 한다. 인물은 보통사람 이상으로 훌륭하게 기술되어야 하며 악한 존재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가장 훌륭한 비극은 말한 바처럼 단일한 구성을 가진다.  비극적 연민과 공포는 장경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고 사건의 구성과 사건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는데, 후자의 방법이 더 좋으며 훌륭한 시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구성은 실제 보지 않고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동정심으로 가득 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쾌락이란 연민과 공포로부터 야기되는 기쁨이며 시인은 그것을 모방에 의하여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사건의 원인은 사건 내부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8. 인물론 - 성격창조론  성격을 이야기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네 가지 점이 있다. 그 가운데 첫째이며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선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이 선한 것이라면 성격요소도 선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선은, 여러 형태의 인물들에 있어 비록 그가 비열한 인간이거나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 주의점은 성격이 인물에 특유하고 적절하게 꾸며져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성격을 전설상에 있었던 것과 유사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넷째로 전편을 통하여 성격을 지속적으로 통일적으로 꾸미는, 즉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필연적 혹은 개연적으로 후에까지 일관성 있고 지속적이어야 함은 성격에 있어서나 극의 구성에 있어서나 온당한 일이다. 그것은 어떤 인물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성격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이기 위함이다. 또한 사건이 연속될 때 어느 사건이든지 그것이 앞 사건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여야 하기 때문이다.    9. 구성의 구조 - 구성론 종합  발견의 종류에 관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첫 번째 것은 가장 예술적이지 못한 것인데, 시인들이 창의력 부족으로 인해 흔히 사용하는 것으로 기호나 표식에 의한 발견이다. 그런데 기호나 표식의 사용에는 훌륭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증거의 수단으로 표식을 사용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모든 게 그렇듯이 예술적이지 못하다. 다음은 발견이 시인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조작되는 경우인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것은 예술적이지 못하다. 세 번째 종류는 기억에 의한 발견으로, 이미 보았거나 들었던 어떤 것에 의해 주인공이 회상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종류는 추론에 의한 발견이다. 그밖에 상대편의 잘못된 추론에 의하여 일어나는 복잡한 발견이 있다. 발견의 가장 훌륭한 형태는 사건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구성을 설정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점에 유념해야 한다. 먼저 실제의 장면을 눈으로 보듯이 설정하여야 한다. 사물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관찰하여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적합한 방법을 고안해내게 되고 간과해버리기 쉬운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가능하면 시인은 작중인물의 몸짓까지 스스로 행동해 보아야 한다. 같은 재능을 갖고 있다면 자기가 그리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확신을 주고 감동을 던져줄 수 있다. 그리고 삽화의 삽입으로 이야기의 길이를 늘이기 전에 시인은 자기의 이야기를 우선 소묘하고 보편적 형태로 축약시켜 나아가야 한다. 예컨대 ‘오디세이’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다. 그는 해신 포세이돈에게 항시 감시를 받았으며 늘 혼자 외로웠다. 그의 집에서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이 그의 재산을 망쳐버렸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획책하였다. 그때 그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적에게 달려든다. 결국 그는 구제되고 적들은 죽는다. 이것이 ‘오디세이’의 요지이고 나머지는 삽화다.  모든 비극은 갈등의 부분과 해소의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극이 열리기 전의 사건과 극내에서의 사건 중 어떤 것은 갈등을 형성하고 그 나머지는 해소의 부분을 이룬다. 갈등이라 함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운명이 불행에서 행운으로 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기 직전까지의 부분을 말하고, 해소는 시점에서부터 끝까지의 운명의 전환이 시작되는 부분을 의미한다. 비극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복잡한 비극으로 이것은 급전과 발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둘째는 파토스를 일으켜주는 비극이고, 셋째는 성격적인 비극이다. 네 번째 구성요소는 장경이다. 시인은 앞서 말하는 바를 기억하여야 한다.    10. 사상성과 조사법 - Metaphor  사상성은 ‘수사학’에서 논의할 것이기에 그것을 전제로 한다. 사상성의 연구는 수사학에 더 밀접한 것이다. 극에서 인물의 사상은 그들이 쓰는 말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것, 증명하거나 반박하고, 감정을 일으키고, 사물을 과장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인물이 동정이나 공포심을 일으키고 중요성이나 개연성에 대한 적절한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그들의 심리과정이 실제 언사 및 행동과 확실히 일치하여야 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행동에 의한 효과는 일상에 대한 설명 없이 생겨나야 한다는 점이다. 효과는 화자가 구어를 사용하여 생겨나야 하며, 그의 언어로부터 결과된 것이어야 한다. 조사법에 관해서, 이런 제목 아래 탐구되는 주제 중 하나는, 말할 때 언어에 가해지는 어조인 것이다. 즉 명령과 기원, 단순한 진술과 억압, 질문과 대답의 차이를 나타내는 어조의 문제가 그것이다. 어쨌든 그런 문제의 이론은 웅변술이나 웅변전문가에게 속한다. 시인이 이런 것을 알든 모르든 시인으로서의 그의 예술은 그 점에 대하여 심하게 비평받는 일은 없다.  명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단순한 것 즉 무의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 가지가 합성된 것인데, 후자의 경우는 의미부분과 무의미부분으로 구성되거나 두 개의 의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합성명사는 또 세 개, 네 개 혹은 그 이상의 부분으로 구성될 수 있는데 확대된 이름의 대부분이 그렇다. 구조가 어떻든 명사는, 사물에 붙이는 일상어이거나, 외래어이거나, 은유이거나, 수식어, 신어이거나, 연장어이거나, 단축어이거나, 변형어이다. 일상어라 함은 한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을 의미하며 외래어라 함은 다른 나라에서 차용된 말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같은 말이라도 외래어일 수도 있고 일상어일 수도 있음은 명백하지만, 그것이 모든 국민에 대한 언급일 수는 없다. 은유(隱喩)는 한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이하는 것인데, 그 전환은 유(類)에서 종(種)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유에서 종으로의 은유의 예는 ‘여기에 나의 배가 서 있다’와 같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물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종에서 유로의 은유의 예는 ‘정말로 율리시즈는 일만 가지 선행을 했다’와 같은 표현이다. ‘일만’이라는 특수한 숫자가 ‘수많은’이라고 쓸 유의 자리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종에서 종으로의 은유의 예는, ‘놋쇠로 생명의 물을 퍼올리며(즉 놋쇠로 만든 칼로 베여 피를 흘리게 하며)’와 ‘불멸의 놋쇠로 베면서’(즉 놋쇠로 만든 두레박으로 물을 푸면서)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시인은 ‘벤다’는 의미로 ‘퍼올린다’를 사용하여, 두 말이 모두 무엇인가를 ‘갈라낸다’는 의미를 지니게 한다. 유추에 의한 은유는, 예컨대 네 개의 사항이 있을 때, 제2의 사항(B)이 제1의 사항(A)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가 제4의 사항(D)이 제3의 사항(C)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와 같은 때를 말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D대신에 B를, B대신에 D를 은유적으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대치된 말의 관계어를 은유에 부가함으로써 은유를 적합하게 하는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잔(B)의 디오니소스(A)에 대한 관계는 방패(D)의 아레스(C)에 대한 관계와 같다. 따라서 잔은 은유적으로 ‘디오니소스의 방패’(A+D)라 표현되고 방패는 ‘아레스의 잔’(C+B)이라고 표현될 것이다. 그런 유추의 관계에 있는 용어들 몇 가지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나 이름을 지니지 못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꼭 같은 방법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씨앗을 심는 것을 ‘뿌린다’라고 부르는데, 태양의 불꽃이 쏟아지는 것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다. 그 이름없는 동작(B)이 대상인 햇빛(A)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뿌리는 행위(D)의 씨앗(C)에 대한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시인은 ‘신이 만든 불꽃을 주위에 뿌리면서’(A+D)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적합한 은유의 또 다른 형태가 있다. 한 사물에 다른 이질적 이름을 부여하면서, 그 새로운 이름과 자연히 관련을 맺고 있는 속성 중의 하나를 새로운 의미를 얻음으로써 부정하는 것이다. 한 예로 앞에서처럼 ‘아레스의 잔’이라 부르지 않고 ‘술이 없는 잔’, 즉 빈잔이라 부르는 것이다. 신어는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시인 자신이 만들어낸 말이다. 변형어란 한 부분은 본래대로 남아 있고 또 한 부분이 시인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때를 말한다.  조사(措辭)의 완전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명석해야 하고 저속하거나 조야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어로 이루어진 조사는 가장 명확하지만, 한편 새로운 표현, 즉 외래어, 은유, 연장어 등 일상대화와는 다른 여러 가지를 사용함으로써 조사는 뚜렷하고 운문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말만을 쓰면 전체적으로 보아 수수께끼가 되거나 야만인의 언어가 된다. 수수께끼라는 것은 단어의 불가능한 조합(다시 말하면 은유적 대치물로는 관계가 되지만 사물의 실제 속성과는 관계가 되지 않는)으로 사실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외래어, 은유, 수식어 등은 말이 조야하고 평범하게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고, 한편 일상어는 필요한 명확성을 지켜준다. 조사를 가장 명석하고 비범하게 해주는 것은 연장어, 단축어 및 변형어 등이다. 이것들은 일상어와는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 용법에 변화를 가져다 줌으로써 창조적인 면모를 가지게 하여 주고, 일반적 용법에서 일상어와 많은 공통점을 지님으로써 그것을 명석하게 하여 준다. 따라서 이런 언어수법을 비난하거나 몇몇이 그를 사용하였다 하여 그 시인들을 조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시적 허용을 과대하게 사용하면 우스운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것은 이 수법에 의한 것에 국한되지 않고, 적절히 사용한다면 시어의 모든 구성요소에 이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시인이 부적절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사용했다면 은유든 외래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그 효과는 동일할 것이다. 시적 허용의 적절한 사용은 대단히 상이한 일이다. 상이점을 알기 위하여 시인은 서사시를 택하여, 일상어가 사용되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읽혀지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여야 한다. 외래어, 은유 및 다른 나머지에 관하여도 같은 방법을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우리가 말하는 바가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만 일상어를 적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어만의 사용은 그저 평범한데 비해 일상어 대신 한 마디의 외래어를 대치하는 일어의 변화를 가함으로써 시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11. 극예술과 시 - 서사시  운문으로 된 행위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모방하는 것이 시라면, 그것은 비극과 여러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이 확실하다. 1) 이야기의 구성은 희곡의 구성과 비슷하여 단일한 행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짐으로써 그 자체로서 완전한 전체를 이루어, 생물체의 유기적 통일성과 더불어 그 자신의 적절한 즐거움을 낳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 역사에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하나의 행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에 여러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인데 이 여러 사건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  2) 이 외에 서사시는 비극과 동일한 종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단순한 것이거나 복잡한 것이어야 하고, 성격적 이야기이거나 파토스적인 이야기여야 한다. 각 부분도 가요와 장경을 제외하고는 비극과 동일하여야 한다. 즉 서사시에서도 비극과 마찬가지로 급전, 발견 및 파토스의 장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비극과 비교해 볼 때 서사시에는 다른 점이 있다. 구성의 길이에 있어, 그리고 운율에 있어서 그렇다. 행동이 없거나 드러난 성격이나 사상성이 없는 곳에서 오직 요구되는 것은 뛰어난 조사법이다. 반면 성격이나 사상성이 있는 곳에서 과장적으로 수식된 조사법은 오히려 시를 애매하게 하는 수가 있다.    12. 비평에 관하여 - 허구의 진실성  시인은 미술가처럼 모방가이거나 이와 유사한 창작자이기에, 모든 경우에 있어서 다음의 세 가지 양상 중에서 어느 하나로 사물을 표현하여야 한다. 즉 과거에 있었거나 현재 있는 사물, 있다고 혹은 있었다고 말하여지거나 생각되는 사물, 또 있어야 하는 사물 등이다. 이 모든 것을 시인은 단어의 다양한 수식형태처럼 외래어나 은유를 혼합한 언어로 표현한다. 정치술이나 다른 기술에서처럼 작시술에 있어서 정당성의 규준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작시술에서 두 가지 오류, 즉 하나는 그 자체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단지 우연으로 예술과 관련을 가지는 부대적인 것을 범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시인이 사물을 올바르게 모방하려고 하다가 표현력 부족으로 실패한다면, 그의 작시술 자체가 잘못이다. 그러나, 시인이 모방함에 있어, 기법적인 오류(의술이나 기타 기술에 관한 문제)나 사물의 불가능성을 포함시키는, 어떤 부정확한 방법(예를 들면, 움직이고 있는 말을 그리는데 오른쪽 다리 두 개를 모두 앞으로 놓게 하는 것)으로 사물을 기술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에, 그의 오류가 작시술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로부터 우리는 여러 문제점에 관해 비평자의 비판을 고찰하고 해결 또는 반박해야 한다.  1) 시인이 행하는 작시술 자체에 관련하여 비평에 대하여 언급한다. 시인이 기술함에 있어 있을 수 없는 불가능사를 그렸다면 그것은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과오가 시의 목적을 이룸에 도움이 되거나 작품의 어느 부분의 효과를 훨씬 놀랍게 만든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시의 목적이 그런 것에 있어 기법적인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 없이도 퍽 쉽게 얻어질 수 있었다면, 불가능사를 그린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술은 전혀 과오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류가 그런 일에 있어 작시법과 본질적으로 관련된 것인가 혹은 단지 우연에 의해서 부대적으로 관련된 것인가 하고 묻게 될 것이다.  2) 만약 시인이 그려낸 것이 사실에 맞지 않는다고 평을 받는다면, 그것이 이상상을 그린 것이라고 답변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그려낸 것이 사실적인 것도 아니고 이상상의 적도 아니라면 그 평가는 세평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시에서 말하고 행하여진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는 실제의 말과 행동의 내적인 성질뿐 아니라, 그것을 말하고 행하는 인물, 그 상대자, 시간, 방법, 행위, 동기를 고려하여야 한다.  3) 시인이 사용한 용어를 생각해 보면 또 다른 비평들을 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불가능사라도 그것이 시에서 필요하거나, 이상형이거나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일 때에는 정당화되어야 한다. 시의 목적상 믿을 수 없는 불가능사는 믿을 수 없는 가능사보다 정당한 것이다. 불가능사는 그것이 일반적 견해에 따른 것임을 보여 주거나, 한 순간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주장함으로써 정당화되어야 한다. 하나의 개연성에 기인하여 발생되는 또 다른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모순을 우리는 논쟁에서 상대자에게 논박을 가하듯 정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시인 스스로 말한 것으로 모순을 범한 것이라든지 양식이 있는 사람이 진실이라고 확신한 바의 것을 인정하기 전에, 그가 의미하는 것이 동일한 관계가 동일한 의미로 동일한 사물에 대한 것인지 아닌지를, 즉 모순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아야 한다. 비평가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대략 다섯 가지에 기인한다. 비평에서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합리하거나, 유해한 것이거나, 모순이 있거나, 기법적인 정확성에 어긋나는 것 등이다.    13. 서사시와 비극의 비교론  더 고양된 모방 형식이 비극인가 서사시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만약 덜 비속한 것이 더 고양된 것이며 항상 더 훌륭한 관객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대중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예술은 매우 비속한 것임에 틀림없다. 비극은 서사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중요한 음악과 장경을 함께 가지고 있다. 비극 표현의 사실성은 실제 연기를 할 때뿐 아니라 읽기만 하여도 실제 공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극의 모방은 결말에 이르기 위해 그리 많은 시간적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큰 이점을 가졌다고 하겠는데, 훨씬 집중된 효과는, 시간을 길게 잡아 복잡하게 엮어나가 오히려 실망하게 되는 효과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비극이 이런 점은 물론 다른 점에서도 그 시적 효과에 있어 서사시보다 쉽게 효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더 고양된 예술 형식이라고 할 것이다. 비극과, 서사시의 일반적인 본질과 종류에 대해서, 구성 성분의 수와 성질에 대해, 성패의 원인에 대해, 비평가의 비판 그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해결에 대하여 고찰하였으므로, 이제 이 두 가지 예술에 대하여는 그만 논의하기로 하자.   
33    현대시의 단절의식 / 강영환 댓글:  조회:315  추천:0  2019-02-04
현대시의 단절의식 / 강영환         反주지에서 찾을 수 있는 현대시에 있어서 의식의 특징을 스피어즈는 그의 저서 에서 현대시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야기한 문제점을 '단절'이라는 말로 포괄하였다.       단절은 불연속성을 말하며 시에 있어서 심상주의의 이념적 토대를 제시한 흄의, 이 연속성의 개념의 파괴는 상대적으로 현대성의 개념을 깨닫게 해 준다. 연속과 불연속, 곧 단절의 원리는 주로 19세기 생물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회의가 동기를 이루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연속된 존재라는 확신은 다윈이나 마르크스의 경우 자연주의 그리고 신의 소멸이라는 측면으로 드러난다.       1900년 생물학자들은 유전법칙의 연구에 있어서 불연속의 변주와 마주치게 되었고 그들은 멘델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플랑크의 양자이론에서도 에너지, 움직임, 물질의 본질 속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있음을 드러내었으며, 특히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는 그 후 불연속성 개념에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후 발견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제 4차원, 곧 시-공 연속체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불연속을 포함하는 새로운 유형의 연속개념인 것이다.       이런 인식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전혀 다른 새로운 전망을 낳게 하였다. 곧 시간과 공간, 에너지와 물질 그 뿐만이 아니라 일체의 인과관계, 관찰자와 대상의 관계도 매우 복잡하고 기이한 내적 관계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스피어즈는 현대문학에 나타나는 기본적 단절을 네 가지로 들고 있다.                   (1) 형이상학적 단절                   유기체의 세계와 무기체의 세계 그리고 윤리적 세계와 종교적 세계 사이에는 절대적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교량도 놓여질 수 없으며, 이 점을 통찰함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물의 진면목과 해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단절은 엘리엇의 세 가지 질서 개념인 자연과 인간과 초자연적 세계 상호간의 단절의식, 그리고 신비평가 그룹의 한사람인 테이트의 물질과 정신의 근원적인 단절의식 등으로 현대문학론 속에 수용된다.                   햇빛이 환할수록/우거진 숲 속은       방울꽃 흔적, 마치/밤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달고       빛을 기다린다                   그것이 누구의 숲인지/꽃들은 알지만       가끔씩 한 계절 머무르고/떠나가는       이름 모를 들풀들의 짧은 생에서       우리는 우리의/육십 년 인생을 보람으로 여겨야 한다                   되풀이 될 수 없는/각각의 사연들을 안고       웃음 한 번 제대로 띄워보지 못하고       빛없는 생을 살고 가는/무명의 인생일지라도                   숲 속에 말없이 피어/햇볕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노래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말라 바스라져 버린       방울꽃 두포기만큼/찬란한 생을 탐하진 않을거니까                   숲 속에/저 들풀의 환희 속에/사람들의 깨달음이 숨어있다                   먼 길/어둠이 내리기 전에/우리는 숲을 벗어나       서로의 갈 길을 가야 한다/이른 서리가 발길을 적시기 전에       서로의 갈 길을 가야 한다                   독자의 시 중에서                   방울꽃의 세계를 인간의 삶으로 변주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내고 있는 위 작품에서도 는 서로 간의 단절을 대비시켜 시적 분위기를 환기 시키고 있다. 이 시가 앞부분의 성공에 비해 대체로 실패로 보이는 것은 는 부분 이후에서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이고 고답적인 분위기로 빠지면서 형식에 치우쳐 상상력을 차단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냥 방울꽃을 상황을 제시해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마음속에 그 의미를 발견하도록 여지를 주는 것이 이 시의 진폭을 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심미적 단절                   시인의 모습을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아직도 사람들의 생각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낭만주의가 뿌려놓은 결과라 본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를 넘어서면 그것은 박물관의 유리관 속에 진열되어 있는 화석이 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스피어즈는 두 번째 단절로 심미적 단절을 내세우고 있다. 그것은 예술과 인생 사이의 단절을 의미하며 포우와 보들레르 이래 여러 상이한 문맥속에 다양하게 부각되었던 개념이다. 그러나 자연주의, 도덕주의, 속물주의에 저항하는 상징주의, 특히 퇴폐주의는 예술과 인생 사이에 있는 무서운 단절감을 환기한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삶과 현실인으로써의 삶 사이에 메꿀 수 없는 단절의 늪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리차즈도 시가 띄는 환영적인 미적 상태를 꼬집고 시를 여러 다른 인간경험의 세계와 접촉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엘리엇에 의하면 시인은 신비로운 자가 아니라 모든 다른 인간들처럼 범속한 생활을 하는 자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의, 시인은 그의 개성을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의해 강조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술을 모방의 양식이 아니라 이질적인 세계의 합금, 화학반응의 양식, 곧 형식의 문제에 국한 한다는 그의 이론은 그 자체가 일종의 심미적 단절을 시인하는 것이다. 오든에 의하면 는 것이다. 곧 시는 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 시대의 시인들의 삶에서 낭만주의의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은 예술과 삶을 동일시하면서 심미적 단절을 가져오지 못한 결과로 보여지는 것이다.                   (3) 수사학적 단절                   심미적 단절과 깊은 관련이 있는 수사학적 단절은 시를 산문과 대조적으로 인식함을 뜻한다.       산문에 비하여 시는 구조적 단절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시는 산문의 논리와는 다른 일종의 비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생략적인 스타일, 산문적 연결방식의 무시, 어떤 설명도 없는 병치적인 이미지 연결, 비합리적인 순서에 의한 낱말 배열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은 영화의 몽타쥬 기법의 영향과 꿈 및 무의식의 논리를 따르는 초현실주의에 의하여 가장 명료하게 파악된다.                   먹구름 춤       하염없더니       참을 수 없는 정열의 몸짓       하늘 밖으로 곤두박질한다       ……       지금       비는 태양이다.                   독자의 시 일부분                   비를 이나 으로 파악하는 것은 산문적인 논리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시적인 의미로 다가서면 그것은 이면의 논리에 의해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 시간적 단절                   아인슈타인의 시간과 공간의 상호 확산개념에서 추출되며 그 공개적 형식이 영화이다. 공간적 형식, 동시성에 대한 인식은 말할 것도 없이 20세기 초기 주지주의에서는 매우 중요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비가 내린다.       그칠 줄 모르고 밤에도 낮에도       쌓였던 눈물을 한꺼번에 내려놓는다       마을에도 산에도 붐비는 거리에도       비가 내린다.                   하늘은 물방울을 가득 담은 호수.       그 속에서 바람은 깃을 달고       날아온다.       유리문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은 전설의 고향 소리를 낸다                   비가 내린다. 쉬지 않고 내린다.       하늘은 언제까지 태양을       숨겨둘 모양이다.       흔들리는 문 소리에 외로움이       덜컹거린다.       우산 없이 이대로 하늘 밑에       있고 싶어라.                   가슴 귀퉁이 젖은 하루의 토막이       빗속에 서있다.                   독자의 시 전문                   시간적 단절은 한마디로 시간적 질서의 파괴이다. 시 속에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한정 지워 사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5) 그 밖의 단절                   이상 네 가지 단절 외에도 다른 범주의 단절이 있을 수 있다. 에를 들면 내부에서의 분열감을 뜻하는 [심리학적 단절] 즉 심리적 분열감 인식으로 엘리엇이 말한 에 포괄되는 의미이다. 현대 시인은 이 분열의 극복, 곧 감수성의 통합을 시도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지성과 감성, 이성과 감정의 통합을 목표로 한다.           다음으로 역사적 단절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시간적 단절의 역사적 양상을 의미하며 아무리 우리가 현대를 그럴듯하게 정의하더라도 현대인은 언제나 라는 의미로 수용된다. 여기에서 20세기 예술은 과거의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과거와의 단절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것은 최후의 주지주의자들, 곧 입센이나 쇼우, 니체 등에서 두드러진 특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의식은 역사상으로는 미래주의, 다다주의, 초현실주의 등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스피어즈에 의하면 역사적 단절인식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 반응은 첫째로 미래주의자 혹은 오늘날 티뷔에 의한 자동적 구원에 전폭적 신뢰를 표명하는 맥루헌에게서 보며, 이들은 모두 낙관적 세계관을 표명한다. 또 하나의 반응은 과거와의 단절을 소멸 혹은 전락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파국주의는 현대예술의 중심 테마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를 황무지로 파악한다든가 문명은 파괴되고 인간의 본질은 변화되고, 따라서 상실감만이 지배적 신화가 된다는 견해가 그것들이다. 현대의 가장 혁신적인 행동파 화가 로젠버그는 과거의 예술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는 불모의 시대요, 무의미의 시대요, 기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미술 비평가인 리드로 하여금 현대회화를 반항의 회화 곧 정신적이고 미적인 가치에 무관심한 야만적인 문화인이 시대문화에 반항하는 한 양식으로 보게하며, 또한 우리가 앞서 지적한 50년대 후기 주지주의로 요약되는 부조리 예술을 낳게 했다.       신이 소멸한 시대에 예술가들은 현재의 무의미성과 원시적인 의미성 사이에 어떤 대비적 주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는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에의 신념은 아직도 문학예술로 성숙한 표현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32    김상환 : 리쾨르의 은유시학 댓글:  조회:314  추천:0  2019-02-02
리쾨르의 은유 시학(The Metaphor Poetics of Paul Ricoeur)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F.니체)       1. 은유에 대하여    1.1. 은유의 어원 metaphor=meta +phora = meta(over, beyond) +phorein(bring, carry) : 초월하여 옮기다, 변형하여 전하다.   1.2. 은유의 개념과 의미   (1) 은유는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그 의미가 轉移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2) 은유(유사성/선택의 축)는 환유(인접성/결합의 축)와 함께 언어의 한 양상이다.(R•야콥슨)   (3) 은유는 한 단어의 보편적 의미에서 새로운 의미 전환이나 그 이동을 말한다.(I•A•리챠즈) (3) 은유는 의미론적 변화이다.(P•휠라이트) (4) 은유는 시적 상상력을 구성하고, 주제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T•S•엘리엇) (5) 은유는 진실 발견 혹은 통찰력의 수단이다.(C•브룩스) (6) 은유는 하나의 패턴pattern이다. 즉, 서로 다른 것들의 심층에 놓여진 유사성 혹은 동일성을 말한다. (G•베이트슨)   (7) 詩經(比-직유, 興-은유), 文心雕龍(文已盡而意有餘, 興也.)   1.3. 은유의 기본 원리와 유형 은유의 기본 원리는 에 있다. 그러나 그 전이의 토대가 되는 것은 (유사성)이다. 은유는 기본적으로 동일성(유사성, 연접성)의 원리에 근거한다. 은유의 유형은 죽은 은유(死은유dead metaphor, 관습적 은유), 살아있는 은유(live metaphor, 창조적 은유), 置換은유(epiphora), 竝置은유(diaphora), 의미 은유(sense metaphor), 정서 은유(emotive metaphor), 장식 은유(decorative metaphor), 조명 은유(illuminative metaphor), 정령 은유(또는, 의인 은유) 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은유란 다른 것 속에서 같은 것을 직관적으로 감지하는 것을 말하며, 엘리엇이 말한 좋은 은유란 동떨어진 은유(far-fetched metaphor)를 말한다.   (1) 수사학과 은유 : 장식적 효과를 내는 여러 가지 비유적 표현법들 중의 하나.   (2) 의미론과 은유 : 다른 사물에 속하는 명칭의 전용. 의미 창출과 의미 확장의 능력.   (3) 해석학과 은유 :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은유   1.4. 은유와 시 일 포스티노Il Postino : 마리오를 시의 세계로 이끈 것은 메타포, 즉 은유이다.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묻는다."바다와 하늘과 비와 구름과... 이 세상이 다른 것의 은유란 말인가요?"이 질문에 네루다는 답변을 미루다, 결국 답을 하지 않는다. 허나 그 답변은 정작 영화 속에서 영상과 소리로 암시되고 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김광섭,〈마음〉전문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김춘수,〈나의 하느님〉전문     2. 리쾨르 은유론의 특질 : 상징과 해석, 진리/구원으로서의 은유   2.1. 리쾨르(1913-2005, Paul Ricoeur)에 대하여 데카르트, 베르그송, 마르셀, 메를로 퐁티를 잇는 철학자 폴 리쾨르는 1913년 프랑스 남동부 발랑 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이었다. 2세 때 부모가 사망하여 브르타뉴 렌느 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고 대학을 졸업하였다. 1935년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고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마르셀에게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독일군에 잡혀 스위스에서 5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당시 E.후설의 저서들을 탐독한 것이 계기가 되어 후설 연구가로도 알려졌다. 1950년 후설의《현상학의 이념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하였다. 여기서 그는 현상학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밝히고 그러한 유한성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1948 1956년 스트라스부르대학, 1956년부터는 파리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1949)에서 의지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을,《유한성과 죄악 가능성 Finitude et culpabilit  》(1960)에서 종교적인 상징에 대한 해석학을,《해석에 관하여 De l'interpr  tation》(1965)에서 정신분석학적 상징에 관한 해석학을 개진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였다. 1966년 그리스도교 좌파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낭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68년 학생혁명이 좌절되자 급진적인 학생들과 지식인들로부터 외면당하여 1970년 해임되었다. 그 뒤 시카고대학과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 동안 몰두해온 해석학의 철학적인 주제도 상징에서 텍스트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상징언어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너무 좁다고 여겨, 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1975년에《살아 있는 메타포 La m taphore vive》를, 1983 1984 1985년에 연이어서《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 cit 1,2,3》를 펴냈다. 1990년에는《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Soim me comme un autre》을, 1992년에는 대표적인 논문을 모아놓은《강좌 Lecture》를 출간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리쾨르 사상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해석의 우회로 ② 의미의 매개성 ③ 언어의 창조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인간의 의지와 악, 신화와 상징, 은유와 이야기 등의 다양한 주제와 실존주의, 현상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 비판, 분석철학 등 현대철학의 방법들을 해석학의 관점에서 종합하려는 시도의 연속이다. 이 점에서 리쾨르의 철학은 끊임없는 '해석의 모험'이라고 불려진다. 뿌리깊은 악과 바탕의 선함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이야말로 리쾨르 사상 전체를 꿰뚫는 인생관이자 세계관이다. 그의 원죄(론)은 개념이 아니라, 죄의 고백에 들어있는 더 깊고 더 충실한 그 무엇의 상징이다. 이해의 문제 또한 인식론의 문제라기 보다는 윤리의 문제에 속한다. 그런 만큼 리쾨르의 해석학은 윤리를 중시한다. 리쾨르는 해석학의 전통과 (레비스트로스의 인간학, 바르트/그레마스의 기호학과 관련한) 구조주의를 연결시키는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특히 언어(학)과 관련해서는 인식론적 전제 없이 존재에 대한 직접 서술이 가능한 언어 속에 타자의 원초적 경험이 숙명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2.2. 리쾨르 은유론의 특질 : 상징/은유/이야기 리쾨르의 은유론은 상징론의 일부이다. 그가 말하는 에는 말고도 가 있다. 이야기는 문장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며 줄거리가 있는 꾸민 말이다.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은유를 푸는 것과 비슷한 해석 행위다. 꾸민 이야기는 거대한 은유이다. 은유 이론(살아있는 은유La m taphore vive, 1975)과 이야기론(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 cit, 1983)은 서로 다른 것들을 종합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은유와 유사하게 통용된다. 말하지 않은 것(삶의 현실)은 말하지 못한 것(삶의 현실)이다. 못다한 말을 담고 있는 말이 곧 은유이다.         은유와 이야기는 상징철학 내지는 해석학에 속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수정하고, 의미론을 거쳐 존재론으로 나아간다. 즉 인식론과 존재론의 종합을 말한다. 그것은 주체의 제약이라기 보다는, 주체의 깊이를 찾는 일이다. 존재나 욕망은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되지 않으며 기술 언어가 직접 서술임에 반해, 저쪽에서 오는 가 다름아닌 상징 언어다. 존재는 거룩한 경험을 낳고, 욕망은 꿈을 낳는다. 즉, 종교현상학에서 말하는 '(거룩한) 경험의 언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욕망의 언어'가 곧 상징 언어이다. 상징은 할 말을 다 못해서 나온 게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는 말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구원은 억압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데 있다. 즉, 상징으로 된 욕망의 언어나 무의식의 언어를 풀어 해석하는 데 있다. 삶의 의미를 찾아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힘이 다름아닌 시적 상징(또는, 실존)이다. 그에게서 삶은 지성과 의지를 넘어서는 것. 논리를 넘어 존재하는 신비다. 그리고 삶은 여러 겹의 뜻을 지닌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되지 않는다.       한편, 의미 혁신은 은유의 경우 낱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문장 혹은 술부에서 발생한다. 은유가 술부에서 발생하는 것은 현실을 새롭게 그리는 상상력의 동원을 말한다. 수사학에서 특정 어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지만. 은유의 차원에서는 문장 전체가 새로운 뜻을 지닌다. 랑그 보다 말이 우선이다. 이 경우 말은 낱말이 아니라, 현실과 관련된 하나의 문장을 말한다. 말은 할 말을 하는 것이므로 구조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건이다. 은유는 날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주부와 술부가 이어지면서 발생한다. 이 점에서 은유는 낱말이 낱말을 대체하는 換喩와는 다르다. 환유는 기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은유는 말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은유는 뜻하는 사건이다. 그것이 곧 살아있는 은유이다. 살아있는 은유는 여러 겹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언어가 창조한다, 고 했을 때 은유와 상징은 곧 살아있는 은유와 상징이 된다. 은유나 상징은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은유가 명사의 문제라면 단순한 개념의 전이겠지만, 술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논리의 문제가 된다. 논리란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말법이다. 은유는 진리(판단 진리가 아니라 존재론의 진리)의 문제이다. 은유는 새로운 현실을 넘보는 언어이다. 리쾨르가 자주 말하는 은유의 힘이란 '현실'을 말한다. 은유의 해석은 창조적 상상력에서 발현된다. 은유의 넘치는 뜻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다. 은유는 은총(또는 존재) 내지 생명과 연관된다.       은유는 말이면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되어야 할 말이다. 살아있는 은유는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거룩한 존재와 분리되지 않은 경험을 담고 있다. 무의미를 극복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은유는 비유가 아니라 구원의 언어다. 분열을 통합하려는 영혼(지성, 상상, 감성 포함한 정점)의 의지가 시간 체험(현재를 중심으로 미래, 과거, 현재의 분열을 통합)을 구성한다. 언어의 역할은 무의미의 극복(의지) 내지는 구원에 있다. 언어는 할 말에서 생기고, 할 말은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의지다. 다하지 못한 할 말을 품고 있는 말이 은유다. 은유는 그 엉성함 때문에 풍요로운 언어요, 구원의 언어이다. 해석학이 언어 철학의 범주에 드는 것이라면, 리쾨르가 특별히 은유나 상징에 관심을 갖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하여 그에게 있어 은유는 거룩한 존재의 현현을 말하는 우주 상징과 욕망의 기호론이 되는 꿈(또는, 리비도)의 상징을 아우르는 차원을 말한다. 우리가 세상과 우주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면, 세상과 우주 또한 우리를 향해 말하고 싶어한다. 사람이 말로 하면서 세상은 비로소 상징이 된다. 시를 해석하면서 사람은 욕망의 문제를 풀고, 거룩한 체험에 이끌리게 된다.   (1) 리쾨르는 메타포를 계열체가 아닌 통합체의 일종으로 본다. 이는 곧 문장의 배열관계인 맥락에서 메타포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2) 살아있는 은유를 통해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철학이 가능하다. (3) 메타포는 의미의 유사성을 지니는 데 반해, 시는 소리의 유사성을 갖는다.     3. 적용과 분석의 가능성 : 김광섭 시〈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저녁에〉전문   이 시의 특이점은 대상(별)과 주체(나)에 관한 현상학적 태도와 視線에 있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의 이나 에 나타난 서정적 또는 윤리적 차원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주체가 대상을 일방적으로 바라다보는(또는,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대상이 주체를 바라보는(또는, 쳐다보는) 것도 아니다. 이는 그야말로 주체와 대상이 서로 만나는 접점에서 지상의 와 천상의 의 대비contrast가 절묘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 경우 나와 별의 대화, 아니 밤하늘 별을 향한 나의 독백이란 실상 침묵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그런 만큼 말이 배제되어 있으며, 무언의 (별/눈)빛과 침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하는 법. 시가 침묵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침묵을 동경하는 것이라면, 시는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도상에 있게 마련이다. 1연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e로서 '별'은 다른 어떤 낱말의 대체를 불허하며, 死은유dead metaphor로서 피상적인 별이 아니라, 절대적 이미지 내지 살아있는 은유와 상징으로 기능해 있다. 그것은 나의 온생명을 지속적으로 추동하고 관여하며, 새로운 현실을 넘보는 기제로 작용한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 또한 多中一("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의 특별한 인연과 만남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2연의 전반부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깊이(심연) 속에서 주체(자연)와 대상(자아)이 대조의 양상("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사라지는 것이 더 이상의 소멸과 부재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과 나의 밝음과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 함은, 소멸 보다는 離散에 가깝다. 그 기운aura이 우주에 편재해 다름아닌 생명의 홀씨로 거듭나게 된다.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나(인간)와 별(자연/사물)의 관계가 나(인간)와 너(인간)의 관계로 변모하게 된다. 그런 너와 나는 말미에 와서 깊은 반향과 생명의 울림마저 가져오게 되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하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유일의 인격적 주체와 주체 간의 만남이 갖는 가치와 은총 내지 생명의 의미가 보다 강조될 필요가 있다. 무수한 별처럼 무수한 사물과 자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의 全존재를 일깨우고 미적 쾌감을 가져다 주는 절대의 시간이 중요한 것이다. 밤의 시간(또는 정신. 시간은 은유적으로 정신) 속에서 나의 고백은 강한 호소력과 생의 秘義 마저 지닌다. 게다가 詩題 또한 '저녁'이 아니라 '저녁에'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경우 '~에'는 시간과 처소, 진행 방향의 부사어를 나타내는 격조사로 시인의 정신과 사유, 영혼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어 보다 역동성을 지닌다. 만남과 이별이 생명을 가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모티프라면, 그 만남의 순간은 별(빛)의 생생한 은유와 이미지로 영원을 향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천상(은총)의 별은 단순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진리와 언어, 사물의 범주에 포함된다. 사물의 의미와 관련하여 정신의 주된 특징이 실재reality를 알고 이해함에 있다면, 정신은 다른 사물을 아는 힘을 가진 사물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별은 사물의 힘과 창조적 생명의 핵심이다.     4. 은유, 너머의 사유   시를 이해하는 것은 은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은유는 단순한 수사의 차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과 역사, 나와 세계, 존재의 안과 밖에 대한 비산문적, 비일상적, 우회적 언급을 말한다. 시의 이해가 은유의 이해라면, 이는 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은유를 통한 자기 이해, 그것은 결코 평면적이거나 상투적인 해석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창조적 언어와 해석, 내지는 상징과 진리와 구원으로서의 은유, 살아있는 은유를 말한다. 뿐 아니라, 은유는 너머의 사유를 요한다.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환경으로서의 내재성을 요구한다. 내재성이란 초월적인 존재의 인식을 위한 한 방법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말대로라면, 이는 내재성(의 쁠랑plane)에만 내재한다. 사유의 바깥, 사유되지 않는 것에 내재한다. 이는 흡사 우리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내면의 소리/頌歌와도 같다. 존재의 대연쇄(The Great Chain of Being)에서 비롯되는 妙悟한 소리와 華嚴의 세계, 그것이 곧 은유다. (끝)         ■ 참고문헌 양명수,「은유와 구원」,『은유와 환유』, 한국기호학회 편, 1999. 정기철,『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 문예출판사, 2002. 신지영,『내재성이란 무엇인가』, 그린비, 2009. 김영철,『현대시론』, 건국대출판부, 1993. R•G•콜링우드/유원기 역,『자연이라는 개념The Idea of Nature』, 이제이북스, 2004. [출처] 김상환 : 리쾨르의 은유시학|작성자 옥토끼  
31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댓글:  조회:300  추천:0  2019-02-01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김경린(시인/평론가) 1918-2006.  저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주변 이야기’ 중에서 (요약자/정숙)     포스터모더니즘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상반기를 휩쓸었던 모더니즘의 기본 정신과 그 방법을 알아야 하며 공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시에 과학은 어떻게 접목하는가   ♣모더니즘의 태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 중엽까지 농경사회의 단순성 환경에서 평면적으로 보려는 리얼리즘이 모든 문학. 예술 분야를 지배해 왔지만 세기말에 이르러 영국 산업혁명에 힘입어 재래의 가내 공업으로부터 대량생산을 위주로 산업화 사회를 이루게 되었고, 사물을 보는 시각도 달라져 인간의 마음속 깊이 내재해 있는 제2의 심의의 세계를 발굴하려는 상징주의가 대두되게 되었다.    20세기 과학은 더욱 발전하였고 현대의 문화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인구도 늘어나게 되었다. 인구밀도가 문제시되고 토지이용도가 높아지면서 모든 시설이 입체화됨에 따라 인간이 사물을 보는 시각도 입체성을 띠게 된 것이다.      이에 즈음하여 20세기 제2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피카소의 입체파가 1907년에 프랑스에서, 기계의 역동감을 주축으로 마리네티의 미래파가 이태리에서, 대두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20세기 상반기를 지배해 온 변형의 미학의 기조를 이루는 미학의 원리이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 표현기법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급기야 인간을 대량 살상할 수 있는 무기의 생산을 가능케 하면서 타민족을 정복하려는 정치가들의 야욕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세계1.2차 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지구는 포화 속에 불타고 사람들은 총탄과 파편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현실앞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과학문명에 의한 인간의 불안의식이 대두하면서 모더니즘은 그런 의식을 기본 바탕으로 모든 사물을 지적인 시각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경험을 질서화 하였으며 기법에 있어서도 변형의 미학을 기저에 두면서 추상성을 주축으로 문학. 예술의 세계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모더니즘의 기본 정신과 방법론이 온 지구의 지성인들에게 자극을 주는 결과가 되어 각기 스스로의 전통과 환경 토양에 따라 여러 가지 유파를 파생하게 되었다. *기성 관념의 파괴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려는 다다이즘이 1916년에 스위스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세계를 기저에 두는 초현실주의가 1924년 프랑스에서, *이미지의 입체적인 조형성을 위주로 하는 이미지즘이 1913년 영.미를 중심으로, *시적 언어의 과학적인 분석을 표방하는 러시아 포말리즘이 1915년에 대두하는 등 건축. 회화. 사진. 조각. 음악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구미에서 효시를 이루면서 전 세계로 전파되어 동양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시와 시론' 운동이 1928년에 '신영토'와 'VOU의 운동' 전후 '아레지'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이상의 '오감도' 김기림의 '기상도'가 1936년에, (동인/사화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대한 운동이 1948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더니즘이 순조롭게 서식해 왔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상반기를 송두리째 삼켜버리기라도 하듯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고 타민족을 정복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국가들(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 소련의 사회주의)등은 정치적 야욕을 국민들에게 침투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더니즘을 타락한 예술이라는 지탄으로 탄압하기도 했다. 이에 동조하여 분에 넘치는 영광을 누렸거나 항거하다 생명을 잃은 문학. 예술가도 많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전쟁중인 탓도 있지만 '신영토' 1942년 'VOU'1943년에 친미 문학 단체라며 강제 폐간 시켰다. 동경 유학시절 VOU의 회원이었던 김경린 선생님도 수시로 일본 경찰의 사찰을 받으셨다. 사조가들은 20세기를 모더니즘과 이데올로기의 투쟁사로 규정짓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현상 20세기 하반기에 들어오면서 전쟁 복구가 완료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과학은 더욱 발전되어 인공 두뇌 개발에 즈음하여 정보화 사회에 이르게 되었다.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사회 구조도 다원화와 다중화를 이루게 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현상이 노정되기 시작하였다. 1) 인공 두뇌(컴퓨터)가 인간이 하던 일을 대신 하는데서 오는 인간의 소외감(존재의식) 2) 경제 구조가 대형화되면서 커다란 관리 사회가 가져다 주눈 인간의 개성 상실. 3) 고도의 소비문화가 만연하면서 물질 문명에 대한 욕구와 이에 수반하지 못하는 정신적 불균형  에서 오는 사회악.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모던사회의 특징이라 규정 짓는다면 모더니즘 시대의 종속성이나 서열성과 다른 병렬성과 무서열성의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좀처럼 과학을 인정하지 않던 철학마저도 니체 이후 이를 인정하면서 여러 가지 학설을 낳게 되었다. 프랑스/미셀 푸코. 독일/하버마스. 미국/다니엘 벨 등 이데올로기에 대한 학설들은 하반기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광채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하반기 현상에 대한 방향제시로 자크 데리다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견지에서, 다니엘 벨은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로만 야곱슨은 기호론 견지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속출하였지만 김경린선생님은 프랑스 철학자(파리의제8대학 교수)인 프랑수아 리오타르를 가장 꼽았다. 그 이유로 프랑수아 저서(포스트모던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 1979)의 서두에 "고도로 발전한 선진사회에 있어서의 지知의 상태를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용어는 현 미국 대륙의 사회학자와 비평가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19세기말기에 시작되어 과학과 문학. 예술의 게임 규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의 또 다른 저서(포스트모던 통신 La postmoderne exqlique aux enfants 1986)에서  "포스트모던이란 모던의 내부에 있어서 제시상提示像 그 자체 속에 제시가 불가능한 것을 찾아내려는 그 무엇인가일 것이다" 불가능한 것에의 노스탈자를 공유하는 것을 용허하는 것과 같은 취미의 컨센서스의 입장에서 새로운 여러 가지 제시,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제시할 수 없는 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하게끔 하기 위하여 찾아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으로서는 찾아낼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표출하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해석이다.    ♣모더니즘의 공과 그렇다면 그동안 모더니즘의 공과에 대해서 규명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바 방법론이 도출되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모더니즘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기저로 무의식세계의 (초현실주의), 이미지의 입체적 조형성(이미지즘), 기성 관념의 연상 파괴(다다이즘), 시적 언어의 발굴(러시아 포말리즘) 등에 크나큰 공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물을 지적인 시각에서 관찰한 나머지 서정성과 휴머니즘을 배제한 데서 시의 세계를 건조하게 만들었으며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지나친 은유의 편중으로 독자로 하여금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 시의 라인을 지나치게 응축함으로써 난해성을 초래하여 독자와 커뮤니케이션에 장해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추상성에 의한 미지의 미학에 매력은 있다손 치더라도 극단의 엘리트 의식으로 흘렀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런 의식으로는 오늘의 복잡다기한 포스트모던 사회를 더 이상 모더니즘 기법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모색 의식적인 면에서는 과학문명의 발달에 의한 인간의 소외의식을 바탕으로 1)아무런 기성 관념없이 현대적인 시각에서 직시하며, 2)거기에서 얻어지는 경험을 질서화함에 있어서도 현장감을 중요시하며, 3)소재면에서도 자잘한 일상 생활에서의 이벤트. 공해로 인한 환경문제에 대한 에콜로지와 페미니즘문제. 우주개발에 수반되는 우주관에 대한 관심.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4)이미지 구성면에서도 지나친 응출성을 배제하고 이미지군에 연계 작용에 의한 매크로이미지 세계를 구축하면서 작자의 현대적인 시각에서의 메시지를 깔아보자는 것이다. 5)표출기법에 있어서도 재래의 시적인 신택스를 해체한 다음 새로운 신택스로서의 참신성을 위해 언어의 기호론에도 관심을 가지며 대화체로 발전시켜 보자는 것이다.   최근에 급속히 대두되는 시낭송과도 관련지으려는 의도도 깔려있다. 모더니즘시가 은유에 편중되어 있는 대신 직유. 은유. 환유. 제유. 등을 적절히 혼용하면서 새로운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뉴리얼리즘으로서 언어의 신선감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스위스에서 1953년에 구체시의 새로운 구문에 대한 관심과 미국에서 60년대에 대두한 (투사시/비트파운동), 70년대의(페미니즘) 80년대의(미니멀리즘)등이 세계적인 영향을 받았다. 오늘과 같은 국제사회에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출처] 알기쉬운/포스트모더니즘 시론|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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