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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엘리엇 새로 읽기 :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2019년 03월 09일 21시 23분  조회:1457  추천:0  작성자: 강려

T.S. 엘리엇 새로 읽기 :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엘리엇이 그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라는 논문에서 전통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가 이 논문에서 말하는 것을 보기로 하자.
 
시인이 어떤 점으로든지 특출하거나 흥미를 끄는 것은, 그의 개인적 정서, 다시 말하면 그의 생활의 어떤 특수한 사건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서 때문이 아니다. 어느 시인 그 사람만이 가진 특수한 정서는 단순하고 생격하고 멋없는 것일 수 있다. [중략] 물론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고, 시를 쓰는 데 염두에 두고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사실상 졸렬한 시인은 흔히 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무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의식적이다. 어느 쪽이든지 이런 오류로 말미암아 그 시인은 <개성적>으로 된다. 시는 정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정서에서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에서의 도피이다. 그러나 물론 개성과 정서의 소유자라야 개성과 정서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이유를 알 것이다. (이창배 12-13)
 
같은 논문에서 엘리엇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것은 [시인이] 시를 쓰고 있는 순간에 좀더 가치 있는 것에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예술가의 발전은 계속적인 자기 희생이며, 지속적인 개성의 멸절이다.
 
이러한 개성의 소멸 과정과 이것이 역사 의식과 맺는 관계를 정의하는 일이 이제 남아 있다. 여기서 엘리엇이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집단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전통은 긴 역사의 형성 과정에서 무의식 속에 가라앉은 개성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그가 강조하는 바는 이 같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개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전통은 따라서 개성이라는 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타자로서의 무의식인 셈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개인 차원의 개성을 죽이고 집단 무의식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롤랑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사라지는 중립적이고 복합적이며 비스듬한 공간이다. [글쓰기는 또한]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몸을 위시하여 모든 정체성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이다. [중략] 말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언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략] 내가 아니라 언어이며, "내"가 아니라 언어만이 움직이고 "행위"하는 곳에 다다르는 것이다. [중략]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작가란 결코 글쓰는 행위 이상이 아니다. 이는 <나>라는 말하는 행위 이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언어는 <주체>만을 알 뿐 [개인으로서의]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술 자체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이 텅 빈 주체는 언어에게 <구심점을 주는 것>만으로 족할 뿐이다.
 
물론 엘리엇과 바르트는 각기 다른 문맥에서 말하고 있지만, 결국 이 둘은 같은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즉, 엘리엇이 작가란 자신의 개성이 아닌 전통이라는 집단 무의식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닌 주체로서의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살리는 대신에 정체성이 멸절하는 곳에 이르는 일이 곧 글쓰기라는 바르트의 주장과 일치한다.
 
작품은 (서점에서, [도서관의] 도서 목록에서 그리고 시험준비를 위한 지정 필독서 목록에서) 볼 수 있다. 텍스트는 전개 과정이며,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또는 이러한 규칙을 어기면서) 말하다. 작품은 우리 손안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언어로만 담아 낼 수 있으며, 담론의 움직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담론을 의미화의 사슬로 바꿔 말한다면, 우리는 텍스트가 작가에 의해 그 의미가 확정되거나 종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텍스트는 반대로 무한한 기의의 지연을 실행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암유(allusion)하며, 또한 다른 텍스트들과의 상호텍스트성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생산하는 "전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기호들은 단지 떠 다니는 기표들일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인가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시의 저자는 엘리엇도 그리고 파운드도 아니며 또한 이 둘을 합친 것도 아니다. 이 시에는 무수한 인용과 암유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시의 저자(이제 우리는 저자 대신에 글쓰기의 주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는 엘리엇과 파운드 말고도 이 시에 인용되고 암유된 성경을 비롯한 무수한 동서양의 텍스트들의 글쓰기의 주체들이다. 이 시는 단지 이 같은 주체들의 정체성이 소멸된 자리에 타자로 남아 있는 집단 무의식이며, 이 집단 무의식은 곧 언어인 셈이다. 그러나 누가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완전히 답해진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글쓰기의 주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가 언어라면 이 같은 언어는 또한 글쓰기의 주체의 참여뿐만 아니라 또한 글읽기의 추제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이는 언어가 우리 모두의 참여를 요구하는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쓰기가 글읽기를 전제로 한 것이며, "텍스트가 하나의 생산적 활동에서만 경험되는 것"이라면 [황무지]의 글쓰기의 주체는 위에서 말한 모두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엘리엇, 파운드, 인용되고 암유된 모든 텍스트들의 글쓰기의 주체 및 집단 무의식과 이 시를 읽는 독자들 모두를 이 텍스트의 글쓰기의 주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엘리엇이 이 시에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나오는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의 동포여, 나의 형제여!"-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가 또한 독자도 포함함을 엘리엇 자신이 상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로서의 무의식은 이 시 텍스트의 공간을 이처럼 활짝 열린 글쓰기의 공간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넓은 의미화의 공간으로 만들어, 무수한 텍스트 사이의 연계가 가능한 넓고 넓은 해석의 공간을 제공한다. 타자로서의 무의식의 반란은 이제까지 무의식을 억압하던 의식을 여지없이 전복시켜 의식을 단지 "한 무더기의 깨어진 성상들"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같이 붕괴된 의식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글쓰기의 주체로서의 독자와 다른 텍스트들의 집단 무의식을 복원시킨 셈이다. [중략]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의 욕망"이라고 라캉은 주장한다. 이 같은 욕망은 단지 대상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욕구와 욕구가 채워진 후에도 아직도 채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나머지를 지칭한다. 이 같은 나머지로서의 욕망은 결핍의 존재(want-to-be)로서의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을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중략] "욕망하기"는 곧 "욕망하기를 원하지 않기"라는 억압된 욕망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욕망의 억압을 습관화한 현대인의 특질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희열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심리적인 가정을 전복시키고 그의 취향과 가치관 그리고 기억의 일관성을 교란시키며, 그와 언어의 관계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따라서 상징질서로서의 언어를 위기로 몰아 이를 전복시키는 것은 타자로서의 무의식이며, 이 같은 무의식은 구심점이 없는 조각난 텍스트들의 집합인 셈이다.   
 
*이정호 (서울대학교 출판부) : 제4장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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