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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詩學 -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2019년 03월 09일 21시 08분  조회:1452  추천:1  작성자: 강려
보르헤스 詩學 -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사이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데리다(J. Derrida)는 ‘쓰기학’에서 사람의 마음을 표시할 수 있는 어떤 말도, 쓰기도 불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소위 ‘차연’(differance)이라는 말로 데리다는 종래의 ‘논리 중심주의’에 반기를 든다. 데리다는 서구의 논리 중심주의의 뿌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소리 중심적 사고에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소리는 영혼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말을 들으면 진실을 알 수 있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영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믿었다. 쓰기는 말을 받아적는 부차적 행위로 생각되었다. 여기에서 인류는 말하고 쓰는 행위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믿는 논리 중심주의를 전통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차연’이란 말로 이들 전통에 반발하면서, 쓰기나 말하기는 항상 어떤 현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동시에 표상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예를 들어 나의 지금 느낌을 표현한 ‘춥다’라는 말은 이미 추웠던 느낌의 대치물일 뿐인 것이다. 동시에 내가 느꼈던 ‘춥다 !’는 느낌의 질이나 양을 ‘춥다 !’는 말이 대변하지 못한다. 말과 느낌 사이만 해도 이토록 시간적 차이(지연)와 질적 차이가 나는 것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 문화는 언어를 통하여 다르게 구현되어왔다. 그러나 데리다나 라깡(Jacques Lacan)에 와서 그 언어라는 것이 어떤 본질이나 대소망(라깡의 ‘Phallus’)을 직접적으로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도 없음이 이야기된다.
 
이들 해체주의의 사고는 보르헤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맨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많은 사고는 보르헤스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사람이다. 모든 시인들처럼 시를 읽고 시를 쓴다. 책이나 시가 나의 마음이나 느낌을 포착함과 동시에 처음 그대로 투영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시 속의 나의 느낌이란 것도 남의 느낌, 시의 언어의 느낌, 남의 시를 읽어 아는 느낌일 수 있다. 나의 시 속의 나의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시를 쓸 때는 이미 지나간 느낌일 뿐이어서 시나 글은 나의 살아 있음의 어느 호흡도, 세포의 움직임도,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음도 체크하지 못한다. 나의 시에 그런 살아있음의 현실감이 잡힌다면 그건 실감나는 현실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언어는 관습의 산물이고 문학, 철학 또한 이런 관습의 소산이라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나의 사고이기 이전에 관습의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구약성서의 말을 시학으로 구현한 ‘해체주의 시인’이 바로 보르헤스다. 대부분의 시는 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시 속에 다시 한번 ‘그’다. 즉 ‘타인’ (elotro)이다. 보르헤스는 시를 쓰다 말고 묻는다. “그 둘 중의 누가 이 시를 쓰고 있는가 / 그 복수의 나, 아니면 단 하나의 그림자?/ 말이 무슨 상관이랴, 내게 오는 이 말이, / 결국 구분할 수 없는, 똑같은 저주.....” 그 ‘복수의 나’는 역사 속에서 나처럼 인생을 살았고 그 삶을 책으로 남긴,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그 책을 읽고 내 가슴을 움직인, 그 많은 지나간 삶 또는 앞으로 올 삶들을 점지해 가는 단수가 아닌 여러 사람의 나다. 그러나 이들 나를 이루고 있는 삶이나 문화의 흔적들은 모두가 허상 즉 ‘하나의 그림자’임에서 일치한다. 신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책을 읽었고 읽어가고 있는 중생들은 그 알 수 없는 그림자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저주받은 영토도 동시에 지금 나의 삶이 숨쉬고 있는 은혜의 터다. 바벨탑 이전의 언어, 신의 언어는 우리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미로이며 미궁이다. 그러나 그 부서지고 흐트러진 형상 속에 또한 참 삶의 모습이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
 
청동으로 새긴 6각운의 시
수천개의 길고 긴 시구 맨 처음에
그리스 시인은 기원한다
그 어려운 뮤즈, 혹은 신비한 불꽃에게
아킬레스의 분노를 노래할 힘을 달라고,
호메로스는 알고 있었다, 타인이 –어떤 커다란 신이-
우리의 어두운 작업을 사나운 불빛으로
상처내고 있음을; 몇 세기가 지난 뒤
성서는 말하리라, 성령은 마음내키는 대로
불어닥친다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정한 신은
반드시 선택받은 자에게만 완전한 도구를 준다:
밀턴에게는 사방에 어두운 벽을,
세르반떼스에게는 추방과 무명의 아픔을,
세속의 시간의 기억 속, 영원한 것은
신의 목소리뿐, 그 찌꺼기만 우리 것.
 
그렇다. 불멸의 작품은 이름모를 신의 뜻이다. 이름을 모름은 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은 오히려 부재의 모습으로 지금 나의 인생과 나의 시의 됨됨에 참여하고 있다. “무정한 신은 / 반드시 선택받은 자에게만 완전한 도구를 준다.” 이해할 수 없는 우연과 고난과 불멸의 영광을 말이다. 롱기누스(Longinus)는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함을 시쓰기의 방편으로 제시하면서, 고전 속에는 뮤즈로부터 받은 혼이 숨쉬고 있다는 소리를 한다. 그 혼은 글을 읽는 독자를 매혹하고 또다른 시를 쓰게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영감론을 재해석한 롱기누스의 창조적 모방론은 보르헤스에게도 통한다. (중략)
 
보르헤스는 말라르메와 함께 ‘말이 시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전통 속의 말일 수밖에 없다. 즉 나의 말이 아니라 남의 말, 남들의 말이다. 따라서 나의 시는 ‘다른 사람’ 즉 남이 쓴다. 그것은 나의 시 앞에서 나의 절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의 시가 내 것이 아니듯이 남의 시도 남의 것이 아니다. 다 똑같이 ‘어둠의 자식들’이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말을 쓰지만 같은 냄새, 같은 체험, 같은 뜻으로 쓸 수는 없다. 이 시를 쓰는 나는 내 시 앞에서 타인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를 읽으면서 내 시로 공감할 수 있다. 내가 내 시의 작가가 아니라는 말과 내 시의 시인이라는 말은 똑같은 소리, ‘똑같은 사람’의 어두운 발성일 뿐이다.
 
그러나 내 시가 남의 시인 것은 그것이 특히 독자들의 읽음을 통하여 살아가는 숙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일단 쓰고 나면 나는 내 시의 하나의 독자일 뿐이다. 나의 시는 독자의 시다. 내 시를 쓰는 나도 내 시앞에서 타인이며, 내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를 읽는 독자도 타인이다. 내 시는 타인의 시다. 모든 타인의 시는 동시에 나의 시다. 모두 똑같은 사람의 시다.(중략)
 
보르헤스는 영감을 믿는 시인인 점에서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영감의 자유를 믿지 않는 숙명론자인 점에서 비극적 감성주의자이자 회의주의자다. 아니면 안또니오 마차도처럼 나그네 삶의 ‘우수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르헤스는 그의 시가 그의 생명도 삶도 그 어느 것도 대변하거나 살릴 수 없음을 안다. 그는 시를 믿지 않는다. 그는 시 없는, 책 없는 인생을 믿지 읺는다. 보르헤스는 시를 쓰지 않는 인생, 아니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무명의 삶의 위대성에 각별한 애착을 갖는다.
 
 
사화집의 한 무명시인에게
 
지상에 오직 너만의 것이었던, 우주가
오직 너만을 위해 존재했던, 그 고통과
행복으로 짠 비단, 그 아름다운 날들의 기억은 어디 있는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강물의 나날들
그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너는 이제 사화집 목차 속의 한 이
름.
 
신들은 남들에게 끝없는 영광을 내렸다.
비문이며 공적문이며 기념비며 정확한 역사가들까지;
자네에 대하여 아는 유일한 것은, 희미한 친구여
어느 하오에 두견새 울음을 들었다는 사실.
 
어둠의 수선화 사이, 자네의 희미한 그림자는
신들이 너에게만 깍쟁이었다고 하겠지.
하지만 세월은 하찮은 빈곤의 그물 같은 거지,
망각으로 짜여진 잿더미의 평화보다
더욱 훌륭한 결론이 있을 수 있을까 ?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들이 녹슬지 않는 영광의
빛을 던졌지, 마음의 내장을 비추고 그 균열을 하나하나
들추어낼 수 있는, 그러나 그 영광 또한 그토록 경애하는
장미를 끝내 송두리째 으스러뜨리고 말게 하는....
자네에게만은 신들이 비교적 자비로웠던걸세.
 
아직 밤이 아닌, 밤일 수 없는 어두운 하오의 황혼 속에서
자네는 아직 테오크리토의 두견새 울음을 듣지 않는가.
 
보르헤스는 백과사전 출신, 도서관 출신 시인이면서 반독서주의자다. 고전처럼 유명시인의 시처럼 많이 읽히는 시인이 진정한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신의 일이다. 시의 영광과 패배는 타인의 일이다. 신들이나 타인의 장난은 수가 없듯이 더러 시인은 성공하고 실패한다. 그렇다고 시를 살지 않고 삶을 사랑하지 않는 시인은 없다. 오늘 독자에게 영광을 얻지 못한 시와 시인은 내일과 신에게서 더욱 영원한 독자를 만날 수 있다. 이딸로 깔비노(Italo Calvino) 말처럼 독자는 미래를 안다. 시는 독자의 것이며 신의 , 망각의 것이다.
 
보르헤스는 ‘무명시인’ 혹은 ‘작은 시인‘ (Poeta Menor)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아래의 시는 위 시의 해석이 된다.
 
종착점은 망각
나는 조금 빨리 도착했을 뿐
 
위 두 시에서 보르헤스는 시와 시인의 길은 어차피 파멸과 망각을 향해 있음을 안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그 유명한 <시론>에서 “죽음은 시와 시인을 잡아간다”라고 했던 것을 아르헨띠나 시인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어느 영광도 장미도 부서지고 으깨어지는 숙명일밖에, 그래서 차라리 “망각으로 짜여진 잿더미의 평화”가 오히려 먼저 도착한 미명의 영광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미리 영광이니 명예를 주지 않은 무명시인에게는 신이 오히려 떨리는 슬픔, 무너지는 아픔을 면제해주는 자비를 베푼 아닌가.
 
보르헤스는 노자의 ‘무명(無名)’을 배운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유달리 무명시인, 작은 시인에 대한 애착이 두드러진다. 무명시인은 시와 시인이 가야 할 길에 미리 와 있는, 그 망각의 강가에 미리 도착해 무상의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는 득도의 맛을 풍긴다. 득도의 경지이기에는 아직 서글픔과 우수가 얼룩지는 라틴계의 핏기가 있지만....“ 아직 밤이 아닌, 밤일 수 없는 어두운 하오의 황혼 속에서/ 자네는 아직 테오크리토의 두견새 울음을 듣지 않는가.” 그렇다.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 강가에서 듣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두견새 울음에서 황홀감을 느낀다. 그의 또다른 무명시인에 관한 시를 보자.
 
1899 어느 무명시인에게
 
하루의 가장자리쯤,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는
서글픈 시간을 위해 시를 남긴다는 것,
황금빛 반짝임과 희미한 그림자의 아픈 날짜에
너의 이름표를 단다는 것, 그것이 네가 원했던 것.
하루가 기울고 있을 때, 또 얼마나 열심히
그 이상한 시구를 쓰고 다듬고 했었을까 !
우주가 흩어져 사라질 때까지, 여기 이상한 푸르름이
존재했음을 알리려는 그 이상한 시구 !
네 뜻이 성공했는지, 심지어 나는 네가 실제 존재했는지조차도
나는 모른다, 세월 속의 희미한 이름의 힘아,
하지만 나 또한 홀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망각에게
세월 속에서 너의 가벼운 그림자를 다시 찾아오도록
부탁한다, 땅거미가 지는 순간에, 이 지친 나의
안타까운 말벗이라도 되어주도록.
 
보르헤스는 시가 황금 월계관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살아 있음은 곧 망각을 향하여 가는 길임을 안다. 다만 땅거미가 질 무렵의 푸르름, 그 작은 위안을 위해 시가 있다고 믿는다. 영원한 것은 무명에 가까운 작아짐의 형태에서만 또렷해진다. 그것은 세월 속에 너도 나도 살아 있었음의 더러는 슬프고 더러는 행복했었음의 마지막 증표다.
 
 
시학
 
세월과 물로 된 강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시간은 또다른 강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강물처럼 사라져갈 것을 알며
얼굴들 또한 강물처럼 떠내려가는 것을 보며
 
눈을 뜨고 본다는 것도 또 하나의 꿈임을 느끼며
꿈을 꾸고 있지 않다고 꿈꾸는 꿈,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두려워하는 죽음 또한 밤마다 꿈이라고 부르는
그런 죽음밖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며
 
하루의 한 해 속에 사람의 나이와 세월들의
상징을 읽으며, 세월이 앗아간 인생의 아픔을
음악으로, 소음으로, 상징으로 바꾸어가는 일.
 
죽음 속에 꿈을 보고, 석양에 하나의
슬픈 황금을 보는 일, 이것이 시
영원한 가난의 되풀이: 시는 여명처럼
석양처럼 늘 되돌아온다.
 
이따금 하오가 되면 거울 한가운데서
한 얼굴이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예술은 바로 그런 거울 같은 거,
우리 스스로의 얼굴을 밝혀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율리시스는 그 위대한 업적에도
지치고 지쳐, 고향 이타카에 돌아와 마을을 바라보며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초라하고 파란
마을을 보며....예술은 위대하지 않다: 이타카 마을, 그 파란 영원.
 
또한 그것은 끝없는 강물 같다
흘러가고 남고.... 만물은 흘러간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수정거울: 모든 것은 다 똑같다
그리고 다르다, 끝없는 강물처럼.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 구태여 헤라클레이토스만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동서가 세월의 흐름을 알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율리시스나 보르헤스나 우리는 똑같다. 보르헤스 앞에서 낭만주의의 독창성은 갈 길이 없다. 강물은 흘러가지만 강은 길게 누워 있다. 수많은 철학자와 시인들이 흘러가고 흘러오지만 도서관은 여기도 저기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지금 여기 살지만 죽은 사람들을 읽고 또 나의 죽음을 창조한다. 거울 속에 비춰보는 나는 나지만 모든 사람의 얼굴을 닮았고 같은 인간이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과 다르다. 나는 때때로 나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나의 인생 ! 나의 공적 ! 나의 !그러나 목소리를 낮춰라. 모든 것은 부서지게 되어 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파란 이타카 고향 마을, 그 파란 영원에서 다시 만나리라. 시는 그 가난과 파란 언저리에 돋는 풀이다. 보르헤스의 시의 주제는 거의 모두 지나간 다른 작품, 다른 시인들에 관한 것들이다. 똑같은 작품에 보르헤스의 숨결과 보르헤스의 덧입힌 되읽기, 되쓰기, 풀어쓰기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는 하나도 새로운 것을 쓴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고 또 죽어갈 사람들에게 읽힌다.
 
지금 내 시를 읽고 있는 분에게
 
당신은 무적이다, 당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법칙을, 먼지의 확실성을 느껴본 적이 없는가 ?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당신의 시간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의 거울 속 세월의 무상함의 상징
그 강물의 시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읽지 못할 대리석 비문,
거기, 당신의 날짜와 도시 그리고 기록이 이미 적혀 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시간의 꿈들.
견고한 청동도 정교한 황금도 없다.
우주는 당신처럼 변덕쟁이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의 것.
그림자여, 당신이 가는 곳은 당신을 기다리는
또하나의 어둠, 거기 어둠이 숙명처럼
당신의 여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라, 어떤 형태로든 당신 또한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민용태 <스페인, 중남미 현대시의 개척자들: 로르까에서 네루다까지> (1995년, 창비) p218 ~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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