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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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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현대비평의 이해)- 자크 데리다[스크랩] 댓글:  조회:975  추천:0  2018-10-21
(현대비평의 이해)- 자크 데리다   ◈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  대표적인 탈구조주의자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입장은 오늘날 탈구조주의로 통칭되는 새로운 사조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그의 이론은 일부 구조주의적인 측면과 일치하지만 궁극적으로 구조 개념까지 해체함으로써 탈구조주의를 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의 이론 가운데에는 그가 만든 신조어 ‘차연’의 개념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 ‘차연’의 개념을 중심으로 자크 데리다의 탈구조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기존 구조주의자(소쉬르)가 말하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  탈구조주의자들은 기표(시니피앙-‘표시하는 것’)와 기의(시니피에-‘표시되는 것’)의 임의적인 관계에 주목한다. 소쉬르(언어활동에 있어서의 언어와 말을 구별한 구조주의의 선구자)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전의 앞뒷면처럼 안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탈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 사이는 불안정하면 기표와 기의는 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고 서로 끊임없이 흐르다가, 의미의 형성은 아주 순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자크 데리다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 차연  ▶ 소쉬르의 견해에 반(反)하는 기호의 의미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이론, 즉 언어의 의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통해 언어체계 속에서 구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기호는 횡적으로 다른 기호들과의 변별된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정해질 뿐만 아니라, 종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나타난 기호는 물론 앞으로 나타날 기호들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결국 기호의 의미는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코 최종적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신조어 ‘차연’의 생성  그는 의미작용의 이 같은 끝없는 운동, 즉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 차이와 지연의 첫 글자를 따서 ‘차연(差延, la differance)’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고안했다. ‘차연’은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 ‘차연’의 세 가지 의미  (1)「다르다」- 본성이나 질, 형태에 있어서 같지 않거나 닮지 않는다. (2) 「흩뜨리다」- 흩뿌리다, 퍼뜨리다. (3) 「연기하다」- 늦추다, 미루다.  처음 두 의미는 공간적 구분임에 비해 세 번째 의미는 시간에 있어서의 차이를 가리킨다. 프랑스 어로는 차연(differance)의 「a」가 들리지 않으므로 이 단어는 difference(차이)로 기록된다. 이 간파되지 않는 차이는 오직 글쓰기에서만 나타난다.  데리다는 의미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차이의 개념을 ‘차연’의 개념으로 대치한 것이다. 요컨대 데리다를 비롯한 탈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언어 외적인 의미의 원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니피앙의 끝없는 유희를 강조함으로써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고 시니피앙의 의미화 기능을 여린 지평으로 개방하였다.  ▶논문 속 ‘차연’의 개념 인용  - 차연은 생산적이고 원초적인 구성적 인과율, 즉 절단과 분할의 과정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차연의 차이지음(differing)과 차이는 구성된 산물 또는 효과가 될 것이다.  - 우리가 이것을 아무리 뛰어나고 독특하며 중요하고 또는 초월적인 것으로 만들더라도 이것은 현존재가 아니다.  - 이것이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단지 특정 순간에 현존하며 나타날 수 있는 것, 즉 그 자체의 진리, 현존재의 진리 또는 현존재의 현존 속에서 현존하는 것으로서 보여지고 제시될 수 있는 것만 해명할 수 있을 뿐이다.  3. ‘차연’의 의의  ‘차연’의 의의는 ‘차이화하다’(differ)와 ‘연기하다’(defer)에 해당하는 두 프랑스 어 동사 사이에 매달려 있다. 두 동사는 ‘차연’의 텍스트적인 힘에 기여는 하고 있지만, 둘 다 그 의미를 충분히 파악할 수는 없다. 언어는, ‘차이’에 의존한다. 소쉬르가 딱 잘라서 보여 준 바와 같이, 언어란 그 기본적인 구성을 만들어내는 변별적 대립항으로 이루어진 구조이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새로운 장을 연 것은 ‘차이하다’가 ‘연기하다’로 차차 변화해 가는 데서이다. 여기서는 의미는 의미 작용의 놀이 때문에 항시 연기되어서, 아마 끝없는 보족 대리성[보유상태(補遺狀態)]를 낳는다고 하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차연은 단지 이 테마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불안정한 의미를 통해서, 그 ‘차연’의 과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문자에 의해서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4. 자크 데리다의 약력  1930년 프랑스령 알제리 엘리아르 출생  1952년 고등사범학교시절 알튀세르를 만나 20년 동안 동료가 됨  1956년 논문 로 교수자격시험 합격  1957년∼59년 알제리 독립전쟁 중 군 복무  1960년∼64년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 강의  1980년 소르본 대학교에서 국가박사학위 취득  1981년 체코 지식인을 돕기 위해 얀 후스 협회 창설, 부회장이 됨  1983년 국제철학학교 창설, 초대 교장으로 취임  1990년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모스크바 대학에서 세미나 개최  현재 미국 예일대학 문학교수들과 접촉, 신비평을 해체비평으로 급회전시키는 영향력 발휘 중  ◈참고◈  권택영(1993) 「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 문예출판사 (지은이:빈센트 B. 라이치)  이기우(1996) 「해체비평」, 한국문화사  이상우, 이기한, 김순식(2002) 「문학 비평의 이론과 실제」, 집문당  네이버(www.naver.com): 검색어(자크 데리다)  http://www.libro.co.kr/books/author_file_1.asp?mcode=인문사회과학&scode=국외&aname=자크+데리다   
14    <현대비평의 이해> 롤랑 바르트 댓글:  조회:842  추천:0  2018-10-21
롤랑 바르트     문학 비평가-롤랑 바르트  일생  소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들에 대한 '읽기'를 시도하며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문학과 이론의 전위적 움직임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 바르트(1915∼1980)는 프랑스 북부 쉐르부르에서 태어났다. 그가 한살 때 사망한 아버지의 몫까지 맡았던 어머니는 프랑스와 독일이 번갈아 차지했던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이었고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 남부 바욘은 프랑스와 스페인, 바스크 문화가 혼재된 곳이었다.  청년시절 폐결핵으로 고등사범학교 진학과 교수자격시험을 포기한 바르트는 소르본느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한 후 젊은 시절 루마니아와 이집트의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르트가 프랑스 지성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3년 '글쓰기의 영도'와 1957년 '현대의 신화'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현대의 신화'에서 이미 바르트는 프로레슬링, 그레타 가르보, 포도주와 우유 등을 통해 현대사회 대중문화 속에 내포된 기호를 분석했다. 문학비평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저작은 1970년에 발간 된 '텍스트의 즐거움'. 이 책에서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선언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저자와 독자는 일방적인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텍스트를 즐겨야 할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70년대 그의 관심은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외국문화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는 데까지 뻗어 '기호의 제국'(1970)에서 스모, 파친코, 가부키, 사시미 등의 이미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는 텍스트와 그 독서 위를 마치 얼굴에 띤 홍조처럼 스쳐간다"('텍스트의 즐거움' 중)는 식의 현란하고 독특한 문체는 난해하고 무거운 주제를 풀어주며 그에게 대중적 인기도 안겨줬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 부르주아사회를 둘러싼 신화를 읽어내고 그 베일을 벗겨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그는 1980년 미테랑 사회당 당수가 주최한 회식에 참석하고 걸어서 귀가하다 트럭에 치인 후유증으로 한 달 후 사망했다.  문학과 언어의 관계  바르트의 문학작품 연구는 언어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고 언어학적 개념은 그것을 설명하는 수단이며, 그에 대한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는 사회문화적인 현상을 분석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문학의 특수한 위상은 언어로 만들어진다는데 있다. 그러나 문학어 체계는 자신의 것이 아닌 질서 즉 자연어 체계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문학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시스템 속으로, 하지만 자신과 동일한 목적 즉 의사소통이라는 목적으로 기능한다.  그 결과 어떻게 보면 언어와 문학 사이의 분쟁이 문학의 실재 그 자체를 형성한다. 작가들이란 인위적인 언어체계를 설립하는 ‘논리 창시자들’이다.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텍스트는 자기 외의 다른 어디에도 규칙을 빌려와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더니즘의 독창성과 자율성의 개념이 바르트에게서 문학 형식과 언어에 대해 혁명적인 요구를 하고 있음을 본다. 미학의 규칙을 자체 내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미리 정해진 규율을 강요하는 장르의 개념을 제거해야 하고, 또 이미 알려진 언어 구조들을 부숴야한다.  ‘하나의 코드, 문법, 규범에 대한 빗나감들은 항상 글쓰기를 나타내는 것들이다. 규칙이 위반되는 곳, 그곳에서 글쓰기는 과도함으로 나타난다. 그 아유는 글쓰기란 예견되지 않았던 한 언어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들은 한편으로는 상징주의와 아방가르드의 전통에 대한 경의 표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르트를, 글자 그대로의 문학에 머무르고자 하는 누보 로망의 작가들과 언어의 환기적이고 주술적인 본래의 위상을 되찾고자 하는 현대 작가들의 대변자로 만드는 것이다.  랑그(langue), 문체(style), 글쓰기(e'criture)  일정한 가시적 기호를 사용하여 인간이 의사소통하는 체계로서 언어학적 글쓰기의 개념을 문학언어 연구에 전용하여 그 용어를 부각시킨 것이 바르트이다.  바르트의 글쓰기 그 자체에 대하연 논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글쓰기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을 작가에 의해서 이루워지는 행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바르트가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즉 쓰는- 경우 그는 무엇보다 우리의 고종관념을 깨뜨리는데 일차적인 목적을 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 작가란 사상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는 작가란 자신의 사상이나 정열 또는 상상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장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설파하기도하고 구조주의 전성기에 모든 사람이 내용 즉 의미보다 형식에 관심을 가질 때, 그는 구조주의가 탐구해야할 새로운 인간형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인간이다라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글쓰기를 랑그와 문체간의 대비관계를 통하여 설명한다. 그는 소쒸르의 랑그 개념을 이어받아 그것을 시대와 사회에 공통적인 의사소통과 표현의 틀이라고 보고, 문체를 작가의 비밀스런 개인적 신화속에 빠져드는 자족적 언어행위라고 정의한다. 아울러 문채란‘빠롤의 하위체’로서 ‘수신자가 제외된 형식’. ‘충동의 산물’이고 문학에 대한 선택이나 성찰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부연한다. 그에 비하여 ‘총체적 기호’, ‘인간적 행동양태의 선택’, ‘어떤 선의 단언’에 비유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은 막연하고 문체를 ‘수신자가 없는 형식’이라고 한다든지, 성찰의 산물이 아니다라고 단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결국 바르트는 글쓰기란 개인의 언어, 즉 빠롤을 역사와 단순히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연대성을 보여주는 행위로서, 그것은 사회라고 하는 수신자에 대한 고려에 의하여 변모되는 문학 언어이며 창조와 사회와의 관계이고 기능이라고 하고 있다. 즉 바르트가 포착한 것을 정리해 보자면, 랑그는 사화와 시대가 제공하는 언어의 틀이고 문체는 개인적인 취향과 재주가 만들어내는 글의 형태론적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에 비하여 글쓰기는 독자와 사회에 대하여 작가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랑그와 문체는 글쓰는 과정에서부터 나타나서 글을 끝내는 순간 구체적으로 표출되지만 글쓰기는 그것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취하는 심적인 자세라고 하겠다. 바르트가 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글의 내용 즉 기표의 집합으로부터 작가가 지니고 있는 생각과 사상을 조합하는 것 속에 그러한 심적인 자세나 문제도 포함하게 된다. 이 경우 구체적인 지표들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글을 읽고나서 머리에 남는 인상을 바탕으로 종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막연하고 주관적인 평가에 그치기 쉽다. 보다 구체적인 글쓰기의 구성요소로서 예를 드는 것은 어조, 말하는 투, 목적, 도덕관, 언사의 자유로움 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적용할 때 바르트 자신은 구체적인 문장 분석을 통하여 글쓰기를 설명하기보다 그것을 문학사적 차원으로 가져가서 설명한다. 가령 메리메와 페늘롱은 150여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차이와 양자의 문체론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의 지향성이, 참조대상으로 삼고 있는 형식와 내용에 대한 개념이 그들이 준수하는 규약의 성격이 동일하다는 이유 때문에 같은 성격의 글쓰기를 실천한다고 보고 있다. 그 반면 동시대에 사용하는 랑그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글쓰기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들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시대가 달라도 유사성을 보여주는 작가가 있고 그런가 하면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종류의 글을 쓰는 작가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13    (현대비평의 이해) 미셀푸코 - 20010314 정문경 댓글:  조회:767  추천:0  2018-10-21
(현대비평의 이해) 미셀푸코 - 20010314 정문경   *미셸 푸코  1926년에 푸아티에의 중상층 가문에서 태어난 푸코는 의사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카톨릭 학교에 진학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젊은 푸코는 파리 앙리 4세 고등학교의 기숙사 학생에 되었고, 프랑스의 명문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했다. 23세살 되던해에 푸코는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같은해 철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곧이어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1951년에 탈당을 했다. 그 후 1년에 못되어 철학에 불만은 느낀 푸코는 심리학 교육을 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정신병리학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하여 1954년, 이 분야의 연구서인 『정신병과 심리학』을 자신의 첫 저서로 써냈다. 1960년 푸코는 오베르뉴에 있는 클레르몽-페랑 대학의 철학과 주임이 되어, 이 곳에 머무르는 동안 구조주의 전성기의 고전적 작품 『말과 사물』을 출판했다. 그는 좌파주간지인 『리베라시옹』을 편집했고, "교도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모임"을 통해 형법 개정을 추진했다. 또 동성애 허용 운동에도 앞장서서 가담했다. 그는 "현재의 역사"를 쓰는 것이라고 종종 말했다. 근대 문화의 일부 중요한 실천들을 지탱하는 개념적 밑바탕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밑바탕을 역사적 원근법 속에다 위치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20년에 걸쳐 집필한 대부분의 저작에서 노렸던 목적이었다.  *원형감옥설  어떤 도시에서 페스트가 발생한 경우 취할 조치에 대한 17세기 말의 규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공간을 엄격히 분할하여 이탈하면 사형에 처하고 떠돌아다니는 동물들은 사살되었다. 또한 도시를 세분화하여 각 길거리는 1인의 담당자가 관리했는데 지정된 날에는 감금되어 외출이 금지되었고 위반하면 사형에 처했다. 담당자는 집의 자물쇠를 밖에서 잠가 열쇠를 담당지구의 행정관에게 인계했고 행정관은 검역의 40일이 지날 때까지 열쇠를 보관했다. 사람들은 필수품을 사두어야 했고 집을 떠나는 경우에도 타인과 일체 교통할 수 없었다. 도시 성문지구에는 순찰대가 감시했으며 각 길거리의 담당자는 매일 길거리를 순회하며 창문 밖에서 가족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내밀게 하여 전원의 상태를 조사했다.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사망자나 병자를 숨긴 것이 발각되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감시를 뒷받침하는 장부기입의 구조도 발달했는데 담당자가 행정관에게 이는 다시 시장이나 시 간부에게 보고되는데 명부에는 성명, 나이, 신분과 더불어 방문시의 관찰사항-사망자, 병의 상태, 불만, 부정행위-등이 기록되어 있다. 보고서를 받은 행정관과 사법관은 의료면 또한 완전히 통제해 책임의사 외에는 아무도 처방을 내릴 수 없으며 고해성사 신부도 병자를 위문할 수 없었다. 40일의 검역 기간이 지나면 5, 6일째에 각 집의 정화가 시작되는데 거주자를 퇴거시키고 각 방을 향료를 태워 소독시킨다. 이때, 신체검사도 행해진다. 폐쇄되고, 세분화된 감시체제의 이러한 공간에서 각 개인은 고정된 장소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규제된 채, 모든 사항이 기록된다. 이는 감시적인 장치의 축약이며 이를 통해 권력은 계층 질서적이며 연속된 형태로 행사된다. 이처럼 현실적이기도 하고 상상적이기도 한 무질서 형태로서의 페스트는 의료면과 정치면의 야합으로 모세관처럼 권력의 운용을 확보하는 완전한 계층질서를 매개로한 규칙의 침투로서 감시체제 아래의 사람들을 교묘하게 억압하는 체계이다. 교화, 낙인을 위해 오늘날 배치되는 모든 권력기구를 뒷받침하는 기술과 제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벤덤의 은 이러한 -권력과 기술 제도간- 조합의 건축학적인 형상이다. 이는 주위에는 원형의 건물, 중심에는 탑을 배치하고 탑에는 원주에 그것을 둘러싼 건물의 배부에 면한 커다란 창을 몇 개 붙여 탑에서 주위의 건물 내부를 감시하는 방식이다. 주위의 건물은 독방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독방에는 탑을 향한 내부측과 건물 외부를 향해 창이 2개 있어 빛이 통하게 되어 있다. 이로써 중앙탑 속에 배치한 감시인은 독방 내의 광인, 병자, 수형자, 노동자, 생도 등 각 1인씩 유폐된 자들을 역광선의 효과를 통해 그림자 속에서 떠오르는 자세를 파악, 감시하게끔 되어 있다. 원형감시의 이러한 구조는 중단없이 상대를 볼 수 있고 즉석에서 판별할 수 있는 공간상의 단위를 계획 배치하고 있는데 충분한 빛과 감시자의 시선으로(가시성의 올가미로) 토굴감옥의 어두움보다도 훌륭하게 상대를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고야가 그리고, 하워드가 저술한 유폐장소 속에서 다수인이 밀집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상태를 회피할 수 있었다. 즉 감시자에게만 보여지고 각 방은 접촉할 수 없는 채로 보여지기는 해도 볼 수 없는 상태는 정보의 차단을 의미했다. 이는 밀집된 다수, 다종 다양한 교환의 장이 해체되고, 대신 구분된 개인의 집합이라는 새로운 시설의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한편 실험실의 측면에서 은 실험을 하고 행동을 변화시키며 개개인을 훈육하고 재훈련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즉 이는 처벌 중 가장 유효한 것, 의학의 효능, 교육적인 실험, 감정상의 변이 등 인간을 대상으로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무엇을 발견할 기회를 실험하는 공간이 된다. 즉 이는 인간에 대한 실험 작업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변화를 분석하기 위한 특권적인 장소인 것이다. 또한 이는 권력 실험실로 작용한다. 즉 관찰기구를 통해 인간의 행동에 개입하는 능력과 효력면의 성과는 다시 지식의 어떤 종류의 확대가 권력이 미치는 모든 영역의 하단부터 권력이 행사되는 모든 표면까지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고 그 객체의 성격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이는 일상 생활과 권력의 여러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벤덤은 이 시설을 그 자체로 지극히 폐쇄적인 특정의 제도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의 잔혹함과 교묘함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데 에 적용이 가능하다. 이는 기능 속에서 권력의 여러 관련을, 권력의 여러 관련에 의해 어떤 기능을 작용시키는 방법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교묘한 장치는 과거에는 감시해야 할 구조가 어두운 방이었으나 이제는 그곳이 권력의 행사가 사회 전체에 의해 규제 가능한 투명한 건물로 변했다. 원형 감시 방식의 이러한 성격으로 그 도식은 사라지지 않고 사회 전체의 속으로 확대, 일반화되어 여러 가지 힘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즉 이는 제도의 그물망으로 권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는 얼굴 없는 시선인 것이다. 이처럼 감시는 권력의 물리학, 해부학, 기술론이다. 감시는 인간의 다양성에 관한 질서화를 확보하기 위한 기술로 경비가 들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강렬함에 도달하고, 실패도 없이 가능한 멀리까지 확산되어 권력이 행사되는 장치(교육, 군대, 산업, 의료 등등)의 성과와 결부되어 순종, 효용을 증가시킨다. 자본주의 경제의 증대는 감시적인 권력이라는 양식을 추구, 이의 정치해부학은 정치 및 다양한 장치 제도를 통해 작용되어 왔다. 이는 감시가 법률형식의 실제적이고 제도화된 내용으로 변화는 점에서 경악할 만한 것으로 의 무한히 긴밀한 그물조직망의 확대가 바로 법의 보편의식을 대체해 버린다. 문제는 이것이 추상적이어서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러한 형식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2    보들레르 시학 흐름 자료 두편[ 스크랩] 댓글:  조회:808  추천:0  2018-10-19
보들레르는 라바테르로부터, 특히 스웨덴보르그로부터 이끌어낸 ꡐ유추ꡑ라는 추상적 개념에다가 ꡐ상징ꡑ과 ꡐ상응ꡑ이라는 보다 직접적으로 시적인 이론을 결부시킨다. 그는 또한 이라는 글에서 스웨덴보르그와 라바테르를 직접 언급하면서 자연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상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다 뚜렷이 강조한다.      더구나 훨씬 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스웨덴보르그는 일찌기 하늘이 하나의 거대한 인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 있다. 그리고 또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형태, 운동, 수, 색깔, 향기 등 모든 것이 의미 깊고 교호적이고, 상호 봉사적이고, 상응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바 있다. 사람의 얼굴에 우주적인 진실이 나타나고 있음을 국한시켜 살폈던 라바테르도 우리에게 윤곽, 형태, 차원의 정신적 의미를 밝혀준 바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욱 긴밀히 보들레르의 상응 이념에 결부되는 사람으로는 푸리에와 죠셉 드 메스트르를 들 수 있다. ꡒ자연은 하나의 언어다ꡓ라고 말한 푸리에와, 에서 ꡒ감각적 법칙이면서 정신적 법칙을 지니고 있지 않은 어떤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적 법칙이란 정신적 법칙의 가시적 표현에 불과하다ꡓ고 말한 죠셉 드 메스트르의 주장은 보들레르로 하여금 시적 또는 미학적 ꡐ초자연주의ꡑ에 대한 확신을 보다 강하게 갖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보들레르는 이러한 초자연주의에다 카발라비법의 계시나 플라톤의 이데아의 이념을 접목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ꡐ무덤 저너머에 있는 기적들에 대한 환희에 찬 통찰력ꡑ을 보다 확고하게 믿게 만든 것은 의 저자인 에드가 포우이다. 보들레르는 1859년에 쓴 테오펄 고티에에 관한 유명한 글에서 자신의 시적 신념을 표명하기 위해 에드가 포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그대로 빌려 온다.       미를 향한 바로 이 경탄스럽고 영원불멸한 본능으로 해서 우리는 이 ꡐ대지ꡑ와 거기에 펼쳐지는 장엄한 광경을 마치 하나의 전체적인 포착, 혹은 ꡐ하늘ꡑ의 상응처럼 바라보게 된다. 저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것, 삶이 환기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갈망은 우리의 불멸성을 증명해 주는 가장 활기찬 증거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무덤 저너머에 있는 찬란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시에 의해서, 그리고 시를 통해서이고, 또 동시에 음악에 의해서, 그리고 음악을 통해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가 이들 신비사상가들이나 시인들로부터 ꡐ철학적으로ꡑ 영향을 받아 상징의 시학을 수립하게 된 것으로 쉽사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보들레르는 그의 시를 통해서 ‘상징ꡑ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에서 ꡐ상징ꡑ이라는 말이 직접 나오는 시는 , , 등 세 편에 불과하다. 그는 차라리 ꡐ상징ꡑ이라는 낱말보다는 ꡐ알레고리ꡑ나 ꡐ상응ꡑ이라는 낱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다. 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상징주의라는 말을 적용하고자 한다면, 알프레드 드 비니가 말하는 ꡐ상징적 전이ꡑ와 같은 의미 밖에는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보들레르에 있어서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넘쳐 흐르는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직조물, 알레고리의 편물, 상응의 그물을 재료로 하여 ꡐ깊고 어두운 통일성ꡑ을 꿰뚫어 보는 일이다. 가장 빼어난 상징시학의 이론이며 동시에 선언이기도 한 저 유명한 소네트 을 읽어보면, 보들레르가 추구하고자 한 ꡐ상징의 숲ꡑ의 두 개의 기본적인 축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은 수평적 상응과 수직적 상응이라는 기하학적 은유의 축이다. 가로좌표로서의 수평적 상응은 비교 및 은유와 같은 수사법을 통해 언뜻 보기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요소들을 서로 접근시키고 화해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 의 중심부를 이루는 6행의 시귀는 전형적인 공감각 세계의 놀라운 변주를 보여주면서 지극히 조화로운 상호적 유추관계를 이룬다.     어둠처럼 빛처럼 광막한    깊고 어두운 통일성 속에서    아스라히 뒤섞이는 긴 메아리처럼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화답한다.    어린아이 살결처럼 싱그러운 향기, 오보에 소리처럼    부드러운 향기, 초원처럼 푸르른 향기가 있다.       세로좌표로서의 수직적 상응은 수평적 상응과는 달리 훨씬 더 절묘하고 본질적이다. 수직적 상응에 있어서는 감각적 현실의 흩어져 있는 요소들을 서로 접근시키고 화답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요소들이 지니는 의미가 천상적인 계시나 정신적인 신성함을 지닐 수 있게끔 어떤 지고한 합일의 상태, 즉 열광의 절정 상태에까지 고양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소네트의 마지막 4행의 시귀는 이같은 ꡐ확신ꡑ과 ꡐ열광적 전이ꡑ를 역동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썩고, 풍부하고, 호기로운 향기    무한한 것들의 확산을 지니면서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정신과 감각의 열광을 노래하는 향기도 있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상응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그의 주목할 만한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외계의 자연을 ꡐ아날로지의 거대한 저장고, 일종의 상상력의 자극제ꡑ로 간주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ꡒ가시적 세계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것들에게 제각기 알맞는 자리와 가치를 부여하기를 기다리는 이미지와 기호들의 저장고일 뿐이며, 그것은 상상력이 먹어서 소화하여 다른 것으로 변형시켜주지 않으면 안될 일종의 목초지인 것이다.ꡓ    그러기 때문에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의 역할이다. 그는 1856년 1월 21일자 알퐁스 뚜스넬에게 보낸 편지에서 ꡒ상상력이 기능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것ꡓ으로, ꡒ이 기능의 여왕으로서의 상상력을 소유한 사람, 즉 참다운 시인만이 가시적인 것과 물질적인 대상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번역하고 해독할 수 있다ꡓ고 쓰고 있다. 우주만상이 상형문자이지만 그 뜻을 해독할 줄 아는 사람(시인)에게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해독력이란 지식의 영역이 아니고 합리적인 사고를 초월한 ꡐ거의 초자연적인 어떤 영혼의 상태ꡑ에 도달한 시인의 투시력에 속한다. 그러한 영혼의 상태에서 시인은 ꡒ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는ꡓ 것을 알아차릴 수 있고 ꡐ어둡고 깊은 통일성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스웨덴보르그, 호프만, 라바테르, 네르발, 발자크 등에 의해 개발된 신비주의의 전통을 참조하여, 그렇지만 스스로의 상상력을 희생시킴이 없이 의 소네트를 씀으로써 상징주의의 시조가 된다. 이 유명한 상응의 시학은 보들레르의 자연관과 우주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1890년대의 상징파 시인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이론의 복음이 되었을 뿐 아니라 20세기의 후계자들의 시창작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1924년 라는 제목으로 행한 한 강연에시 발레리는 ꡒ베를렌느나 말라르메 그리고 랭보가 결정적인 시기에 을 읽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렸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ꡓ 라고 단언한 바 있다. 이는 보들레르가 상징주의 시의 제 2세대의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는 세 시인들에게 끼친 영향의 깊이를 말해 준다.    마르셀 레이몽이 에서 명쾌하게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발레리 역시 보들레르를 근원으로 해서 두 개의 줄기로 흘러 내려가는 계보를 그려 보여준다. ꡒ베를렌느와 랭보가 감성과 감각의 질서 속에서 보들레르를 이어 받았다면, 말라르메는 완벽성과 시적 순수성의 분야에서 보들레르를 신장시켰다.ꡓ 이 두 가닥의 계열은 다같이 로부터 영향을 받아, 한편에서는 ꡐ여행ꡑ의 시인인 보들레르가 그 입구에서 멈추어 선 ꡐ심연의 밑바닥ꡑ에까지 내려가보려는 모험을 감행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존재와 세계의 신비를 언어로 번역하고 암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베를렌느, 랭보, 로트레아몽, 초현실주의 시인 등의 ꡐ연금술사들ꡑ을 가리키며, 후자는 말라르메를 비롯한 상징파 시인들과 발레리 등의 ꡐ예술가들ꡑ을 가리킨다. http://cafe.daum.net/beautiful926/Cu9L/504?q= 상징주의/ 보들레르 시학의 흐름      1. [상징주의] 상징주의 시학의 성립...    서구 상징주의 시학의 성립과 전개    ─ 보들레르 시학의 흐름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시의 주요 흐름을 특징짓는 상징주의가 무엇인가를 엄밀한 말로써 정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상징주의는 흔히 그것을 보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알카의 용에 비유되는 매우 종잡기 어려운 사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폴 발레리의 다음과 같은 정의가 상징주의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데 비교적 가까이 다가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ꡒ상징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미적 태도는 음악에서 자신들의 재산을 다시 찾아가겠다는 여러 집단의 시인들이(사실 그들 서로간의 의견대립 또한 대단하지만) 공통으로 지닌 의도라고 매우 간단하게 요약된다.ꡓ 그러나 이같은 발레리의 간단한 요약에도 불구하고, 문예사조로서의 상징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의 성립 시기와 전개과정, 그리고 그 쇠퇴기를 명확히 구분하여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1936년 벨기에의 국영방송은 ꡐ상징주의 50주년ꡑ을 기념하는 소책자 《상징주의 1886~1936》의 간행을 기획하여, 당시 상징주의에 가장 정통한 시인으로 알려진 발레리에게 기고를 의뢰한 바 있다. 1936년이라는 해는 쟝 모레아스가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지에 이른바 을 발표한지 50년의 세월이 흘러간 해이다. 상징주의 선언문의 발표 5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는 벨기에 방송 측의 시사적 기획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기는 하나, 이른바 모레이스 등이 벌인"상징파" 시인들의 운동을 상징주의 성립의 기점으로 삼는 것은 편협한 관점이다.        '상징주의'를 "상징파"와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쟝 모레아스를 비롯하여 르네 길, 스튜아트 매릴, 프랑시스 비엘레 그리팽, 귀스타브 칸 등 1880년 경에 활동한 군소 시인들에게 상당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느, 말라르메를 단순한 선구자로서만 취급해 버린다면 상징주의 이해에 혼선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론 좁은 의미에서, 1885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운동을 하나의 문학 유파로 규정하여 그것을 "상징파"로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상징주의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전개된 시적 이상주의의 방대한 흐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정토로의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반동, 합리적 이성과 과학정신을 표방하는 실증주의와 결정론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반동, 딱딱하고 고정되고 대리석같이 싸늘한 형식미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파로니스파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상징주의는 보들레르라는 한 혁신적인 ꡐ현대성ꡑ의 시인에 의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게 된다. 따라서 상징주의의 기본적 성격과 이론적 핵심을 어느 정도 체계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징주의 시의 원점에 놓여 있는 보들레르 시학의 골자를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이다.        "삼라만상이 상형문자로 되어 있다" 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보들레르의 독특한 우주관은 1840년부터 그의 사상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이나 신비주의 작가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맨 먼저 언급해야 할 사람은 에른스트 호프만이다. 보들레르는 이 독일 낭만주의 작가에게서 소리와 향기가 서로 화답하는 공감각 체계를 발견한다. 그는 미술평론 에서 호프만의 작품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 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상응의 이념을 간접적으로 피력한다.        내가 색깔과 소리와 향기들 사이의 어떤 유추관계나 내적 결합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잠들기 전에 찾아오는 가벼운 혼미와 꿈 속에서 뿐만 아니라, 깨어 있을 때, 즉 음악을 듣고 있을 때도 가능하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 모든 것이 어떤 한 같은 광원(光源)에서 태어났던 것 같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어떤 한 협주곡 속에서 통합되어야 하는 듯이 보인다.
11    발레리 시학 자료 두편 [스크랩] 댓글:  조회:864  추천:0  2018-10-19
자료 1   발레리의 시학      발레리의 문학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에도 봉사치 않는 자유로운 창조적 지성의 훈련이고, 따라서 시적 영감·감상·정열·안일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테마에 규약·정형·통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싸늘한 순수지성의 미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고난 관능적인 감각에서 오는 풍부한 이미지와 절묘한 음악적 운율의 구사로 하여 그의 미학을 넘은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그의 대표적 시론을 담고 있는 에는 먼저 말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즉 말은 "복합적 실체로서, 실제로는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기능상 '독립'적인 고유성들의 결합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 연구가 음성학, 의미론, 통사론, 논리학, 수사학, 그리고 운율학, 어원학 등에 의하여 차례차레 검토되어야 하듯이, 시인도 소리와 의미에 대해 차례로 사색하여야 하며 인습적인 규칙들 외에도 화성과 악절 그리고 논리성, 문법, 시의 주제, 문채 및 온갖 부류의 장식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바로 여기서 문학예술의 불확실하고 치밀한 '조작'들이 시작되는데, 발레리는 그것을 다시 '산문'과 '운문'이라는 두 양식으로 나누고 아래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있다.   산문을 보행에 비유하고 시를 무용에 비유했다 ...      위의 비유는 단순한 외면상의 유사성 이상의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빌리면 시와 산문은 "동일한 요소, 동일한 메카니즘에 적용된 운동이나 기능의 순간적인 특정규칙 혹은 관습의 차이"데 의해 구별되기 때문이다. 산문을 다루듯 시를 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할 것이다. 그의 비유를 좀 더 들어보자.      산문처럼 보행에는 언제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다르고자 하는 어떤 목적을 지향한 행위입니다. ... 보행의 모든 특징들이 언제나 그때그때 특이하게 구성되는 이 즉각적인 조건들로부터 연역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이동에는 단 두 개의 동일한 이동도 존재할 수 없고, 매번 즉각 폐기되어 성취된 행위 속에 통합되어 버리는 각각의 특수한 창조가 있을 뿐입니다.    무용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그 자체에 자신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는 행위체계가 분명합니다. ... 그러나, 공리적인 운동과 아무리 다르다 해도, 무용은 보행 자체와 동일한 사지, 동일한 신체기관과 뼈대, 근육, 신경들을 사용한다는 이 극히 단순하면서 중요한 주석에 유의해 주십시오.      위의 인용에서 보행은 "어떤 목적을 지향한 행위"이고 무용은 "그 자체에 자신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는 행위체계"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아무리 "동일한 사지, 신체기관 등을 사용한다"손치더라도 그 나타난 결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면 과연 그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우선 산문이라는 언어의 실제적이거나 추상적인 사용에 있어서, 형식은 보존되지 않고 이해작용이 끝난 후까지 존속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명확성 속에 해소되어 영향을 미치고, 이해하게 해주었으며, 그리고 사라져버린다. 이와는 달리 시는 사용된 후에도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발레리는 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시는 자신의 형식 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영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도록 부추긴다, ... 산업기술에서 빌린 용어를 써서 표현하면, 시적 형식은 자동적으로 자신을 회복시킨다.      윗글은 시의 특징적인 고유성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형태와 내용 사이, 소리와 의미 사이, 한 편의 시와 시적 상태 사이에는 일종의 왕복운동이, 대칭이, 가치의 균등성과 힘의 균등성이 뚜렷이 나타나는데, 발레리에 의하면 인상과 표현 사이의 이 조화로운 교환작용은 시적 역학, 즉 언어에 의한 시적 창조의 주요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본업은 언어의 이 특이한 형식들을 행운에 의해 발견하고 직업적으로 탐구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발레리는 이번에는 '소설독자'와 '시의 독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독자가 일종의 '정신착란'과 '경신의 발작'에 사로잡혀 "그의 본성을 분열시키고 순전히 허구적인 거짓 삶에 대한 환상을 부여함으로써"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시의 독자는 "영혼의 순종"과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함을 아래와 같이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리듬에 의해 그의 근육조직을 자극하고, 자신이 그 총체적 활동을 촉진시키는 언어기능을 해방 혹은 폭발시키며, 그를 심층적으로 조직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총동원하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 나타나는 자아의 통일성과 조화, 놀라운 통일성을 환기시키거나 재창조하려는 까닭입니다.        요컨대, 시의 작용과 평범한 이야기의 작용간의 차이는 생리학적 目의 차이이다. 특히 후자가 "환각에 사로잡힌 꿈과 기능의 주체로 변모"되어버리는데 반해서 전자는 "완전한 행위에 보다 가까운 적극적 참여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다시 초점을 시인의 조작 자체와 구성과 제작의 문제로 옮겨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시인의 작업을 세상에서 가장 불확실하고 고된 것으로 만드는 무한한 고뇌와 결코 끝날 수 없는 논쟁들, 시련, 수수께끼, 근심거리 심지어 절망까지 존재한다. 발레리는 시작이 "영감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시의 창조가 우연의 결과라는 점을 인정"하거나 혹은 "초자연적 교섭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인데 이것들은 시인을 수동적인 역할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들은 노고로 얻어진 걸작들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열광이나 황홀경의 녹음기의 특성으로 환원되기엔 지나치게 다양한 특성들을 요구하는, 지성과 줄기찬 작업의 기념비들이요 의도와 분석의 산물입니다. ...      윗글에서처럼 발레리는 시인에게 특별한 자질, 즉 고유한 개인적 에너지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시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만 가치 있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이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그대로의 경이들이 그 안에서 해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이들도 그에 의하면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열광과 섬광 속에서 번쩍거리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발레리는 자신이 해방시키는 자연발생적인 표현력에 의해 성격지워지는 감정이 시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문학사상 가장 지성적이었던 그의 시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정제된 어휘와 고양된 정신이 방사하는 광채로 가득 차있다. 바로 그러한 그의 시정신은 아래의 글 속에 잘 요약되어있다. 이 글을 음미해보며 그의 시론의 요약을 마치기로 한다.      왜냐하면, 만약 시인이 자기 예술의 최상을 겨냥하고 있다면, 그의 욕망은 그의 조화된 삶의 숭고한 지속, 모든 형식의 구성, 측정되며 그의 온갖 감각적, 운율적 잠재력의 반응들이 교환되는 지속으로 낯선 영혼을 안내해 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료 2   폴 발레리의 시학 (1)      젊은 파르크(1917) 및 매혹(1922)과 함께 시로 돌아온 폴 발레리는, 자기 자신과 남에 비추어, 시 창조의 메카니즘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 "나는 언제나 시를 쓰는 나를 관찰하면서 시를 써 왔다" 한 시인의 수첩, 이러한 체험, 이러한 성찰이, 콜레드 즈 프랑스에 시의 강의와, 바리에떼와 땡 껠에서 서술된 하나의 시학을 낳았다. 그의 시들에 대한 연구에의 정상적인 길잡이는 그러니, 시의 본질과 문학 창조의 조건들에 관한 그의 생각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발레리 자신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시란 무엇인가 ?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에 이어 발레리도 산문에 딸린 불순한 요소를 시에서 몰아내려고 든다 ; 그래서 시의 우주의 개념을 구해냄으로써 순수시가 나타낸 이상을 밝혀낸다.       1. 언어 속의 한 언어 시는 "특수한 한 악곡"과 합쳐진 "하나의 산문 이야기"가 되고 말 수는 없다 ; 시란 하나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되기는커녕, "감각있는 존재 모두를 끌어넣는 하나의 시적 상태의 전달"인 것이다 ; 시는 죽지 않고서는 다른 표현들로 옮겨질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산문에서는 내용만이 요구되는 데 반해, 시에서는 형식만이 정리하고 살아 남는다,       일정한 뜻 하나로 소비된다는 낱말들의 특성을 희생시켜 가며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음이고, 바로 리듬이고, 바로 낱말들의 물리적인 접근이고, 낱말들의 귀납 효과 또는       상호 영향인 것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에서는 뜻이 형식을 능가해 깨뜨려 버릴 수가       없어야 한다 ; 반대로 그것은, 형식이 독자에게 방금 발생시킨 상태나 생각, 시의 힘의       원동력인 상태나 생각의 재현이자 보존된 형식이며, 더 정확히는 필요한  유일한 표현       으로써 재현된 형식인 것이다. 한 줄의 아름다운 싯귀는 제 잿더미에서 무한정 되     살아나, 또다시 --- 마치 제 결과의 결과인양 --- 저 자신의 조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매혹의 주석)   시란 그러니 "언어 속의 하나의 언어"인 것이다.           2. 시의 우주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마치 소리들 중이 한 순수음이 넋더러 하나의 음악의 우주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듯이, 넋을 시의 우주로 끌어넣는 하나의 공명"을 일깨우는 데 있다.           1. 어떤 다른 삶을 살기 일련의 파고든 분석들을 통해 발레리는 우리를, 진짜 시의 텍스트 하나가 우리 속에서 창조하는 이러한 "우주의 감동"을 안내한다 ; "그 텍스트는 우리 더러 어떤 다른 삶을 살며 그 제 2의 삶에 따라 호흡하도록 작용하며, 하나의 상태나 세계를 가정한다. 그 속에서는 저기 있는 대상들과 존재들이, 아니 그보다도 그것들이 이미지들이 실지 세계의 그것과는 다른 자유들과 관계들을 갖는 그런 상태나 세계를 말이다, (---)   이 모두가 하나의 홀린 본성을, 마치 어떤 마술에 걸린 듯 변덕과 현혹과 언어의 힘들에 굴복한 본성을  짐작케 해준다"  (영적인 찬가)         2. 말과 정신의 밀접한 결합 이러한 마력은 인위적인 리듬을 붙임으로써 얻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이 별난 말은 저를 지탱해 주는 리듬과 하머니들을 통해,  이 말의 발생과 하도 밀접하게, 아니 하도 신비롭게조차 매어지게 마련이어서, 음과 뜻이 서로 갈라질 수도 없이 기억 속에서 무한정 서로 어울릴 정도인 리듬과 하머니들을 통해 제 이름을 대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처지)  말라르메의 작품이 이러한 시이 마력의 더없이 훌륭한 본보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교묘하게 부딪히거나 녹아들어, 하나의 광채로, 하나의 충만으로, 하나의 놀라운 공명으로 싯귀들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의미들과, 울려퍼짐들과, 심지어는 표정들과도 맞먹는 그런 가치들을 시는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놀라운 성과들을 통해 입증했다.  한편으로는 각운과 두운들이, 또 한편으로는 상징과 비유와 은유들이 여기서는, 이야기의 없어도 되는 디테일이나 장식들은 이미 아니고 ; 작품들의 실질적인 특성들인 것이다 ; "내용"은 이미 형식의 원인이 아니다 ; 그 결과들의 하나인 것이다."(말라르메)    그러니 시는 낭독되는 순간에만 제 가치를 다 발휘하게 될 것이다. 즉 "작자의 창조 행위에 생명과 힘찬 현존을 주기 위해, 우리의 목소리와 지능 그리고 우리의 감성의 원동력들 모두가 합쳐지도록, 우리 자신이 그 쓰여진 것의 악기가 될 때에만 말이다", 그래서 "시작품의 연주가 바로 시작품인 것이다."   폴 발레리의 시학 (2)   (이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한계 ; 순수시       폴 발레리는 1920년에 어느 시집의 머리말을 쓰다가 "순수시"라는 표현을 함부로 써 버린 적이 있다. 이 용어가 곧 빚어내게 될 말썽은, 특히 브레몽 신부의 글을 통해 빚어내게 될 말썽은 생각지도 않고 말이다. 시와 기도의 유사성에 언급하던 이 신부는 드디어 발레리를 두고, 지적, 또는 감성적인 요소와는 상관 없는 시에 대한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순수시, 1926년 ; 라시느와 발레리.1930) 순수시에 관한 논쟁이 그래서 벌어지고, 발레리는 자기가 시의 우주의 감동에다 밀접하게 결합시키던 그 개념을 합리적인 한계들로 되돌려보낼 생각을 하게 된다.   감각 없는 것이라고 내가 부른 언어의 요소들과는 그토록 판이하게 뚜렷한 이 요소들에 힘입어 하나의 작품 전체를 구성할 수 있느냐는 것, ---따라서, 운문으로 씌여진 또는 그렇지 않은 하나의 작품에 힘입어, 한편으로는 우리의 관념들과 이미지들,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표현수단들 사이의 상호 관계들의 완전한 조직, -- 넋의 민감한 상태 창조에 특히 부합되는 조직의 인상을 줄 수 있느냐는 것, 순수시의 문제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물리학자가 순수한 물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뜻에서 나는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적이 아닌 요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런 작품 하나를 구성해낼 수 있는냐의 여부를 아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거야말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고, 시란 언제나 이 순전히 이상적인 상태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고, 또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의 시작품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실지로, 한 이야기의 자료 속에 끼워 넣어진 순수시 조각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썩 아름다운 싯귀 하나는 시의 썩 순수한 요소의 하나인 것이다. 아름다운 싯귀를 흔히 금강석에다 비교한다는 사실이, 순수함의 이러한 특질에 대한 깨달음이 모든 사람 정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순수시 라는 용어의 단점은,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도 않는 어떤 정신적인 순수함을 생각케 한다는 데 있다. 순수시의 관념이 내게는 반대로 하나의 주로 분석적인 관념인데 말이다.  요컨대 순수시란 일반적인 사작품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어 준다, 언어와 언어가 사람들에게 내는 효과와의 갖가지 다양한 관계들에 대한 그토록 어렵고도 중요한 연구로 우리를 이끌어 주어야 하는, 관찰에서 연역된 하나의 픽션인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순수시라는 말 대신 절대적인 시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며 그 때는 이 말을, 낱말들의 관계들에서, 아니 그보다도 낱말들 서로 사이의 공명들의 관계들에서 말미암는 효과들의 탐구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언어가 다스리는 이 감성의 영역 모두의 탐험을 암시하는 뜻으로 말이다. 이 텀험은 더듬어서 행해질 수가 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조직적으로 인도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역설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만 있다면, 말하자면, 산문에 딸린 것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게 되고 말 그런 작품들을, 음악적인 영속성이 말 그대로 중단되지 않고, 의미들의 관계들 자체가 화성의 관계들을 늘 닮게 될 그런 시작품들을, 생각들 서로 사이의 변모가 생각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보이고, 말의 겉모습들의 활동이 주제의 알맹이를 지니게 될 그런 시작품들을, 시인이 구성해내는데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 때 우리는 마치 실존하는 사물에대해 그러듯이 순수시에 대해 말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데 사정을 그렇지가 못하니,--- 순수시의 개념은, 가 닿지 못할 어떤 전형의 개념이고, 시인의 욕망들과 노력들과 능력들에 가해진 하나의 이상적인 한계의 개념인 것이다,(한 시인의 수첩, 순수시)   폴 발레리의 시학 (3)   (이어서)   영감과 작업  시인 발레리가 영감에는 등을 돌렸다고들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 설사 그가 "흥분(영감)은 작가의 넋의 상태는 아니다" 라고 쓴 적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흥분만에 의해" 글을 쓰는 것을 그가 못난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시인 특유의 개인적인 일종의 정신력(에너지) 이, "보다 나은 정신력 ; 말하자면 다른 모든 인간 에너지들이 꾸미거나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에너지"가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1. 영감받은 시인의 신화 "꿈에 보물을 보는 것이, 깨어나 자기 침대 밑에 반짝이는 보물을 되찿기에 족하지는 않듯이", "영감받은" 것만으로는 딱하게도 시인 되기에 족하지는 않은 것이다. 시인의 구실이 "시적인 상태"를 느끼는 일이 아니고, 그 상태를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창조해내는 일. 독자를 "영감받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이 생긴 발레리는, 영감받는 시인이라는 신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어떤 길이의 한편의 아름다운 시 앞에서 우리가 곧잘 깨닫는 것은, 끊임없는 밑천들과 한결같은 조화및 늘 잘된 생각들을 지녀 유달리 자신만만한 이야기 하나를, 우연한 사고도 약함이나 무능력의 흔적도, 황홀을 깨뜨려 시의 우주를 망가뜨릴 그 딱한 말썽들도 없어 호리기를 그만두지 않는 그런 이야기 하나를, 한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쓰거나 진술하는 고생 말고는 다른 고생도 없이 그 자리서 곧장 꾸며낼 수 있기에는 아주 작은 찬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감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 다만 영감은 "짧고 우연한 표시들에 의해서"만 작용하며, 그래서 변덕스럽고 고르지가 못한 것이다 ; "이 한없이 값진 순간들, 제가 낳는 관계들과 직감들에 일종이 보편적인 품위를 주는 이 찰나들은, 허망하거나 전달되지 못할 가치들이 덜 많은 것이 아니다.--- 흥분의 고비에서는,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닌 것이다. (시에 관한 프로포)     2. 의식적으로 창조하기 "마음 설레임에서 용솟음치는" 이 표현들은 이따금씩밖엔 순수하지 않으므로, 발레리는 "늘 영감없이 얻어지는 원리"라는 것을 시인할 줄은 모른다 ; 시란 하나의 선택의, 하나의 의식적인 노고의 열매일 것이다.       a 작업의 필요성 "백개의 거룩한 순간도 한 편의 시를 구성하진 않는다. 성장의 한 지속이자 시간 속의 하나의 형상과도 같은 시를 말이다 ; 그래서 자연적인 시 현상이란,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음들의 혼란 속에서의 하나의 예외적인 만남에 지나지 않다. 그러니 이 예술에서 시는우리가 운수좋게만 이어진 일련의 시도 끝에만 나타날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고 싶다면, 숱한 인내와 끈덕짐과 솜씨가 필요하다 ; 또한 우리의 시작품이, 심사숙고라는 문제들에 맞서 응수하는 것 못지않게 리듬과 음향과 이미지들의 마력으로 뜻들을 사로잡기를 우리가 바란다면, 우리는 이제 더없이 엉뚱한 내기들과 마주하게 되고 만다, (나는 가끔 스테파느 말라르메에게 말했었다 ---)    "신들은 고맙게도 어떤 첫 싯귀를 우리에게 거저 준다 ; 그러나 그것과 화음을 이루어 초자연적인 재 형과 어울리지 않아서는 안 될 둘 째 싯귀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그것을 하나의 선물이던 첫 싯귀와 견줄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경험과 정신의 밑천들을 다해도 지나치지는 않는 것이다." (아도니스에 대해)   b 의식적인 창조의 고귀함 발레리는 영감받은 시인을, 제가 신비롭게 받아쓰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통 없는 그 "순간적인 영매"를 비웃는다, 매혹의 작자는 반대로 자발적인 창조의 고귀함을 강조한다 ;" 정신적인 우연이 (10만 번의 시시한 시도 중에) 우리에게 엄겨 주는 흥미롭거나 쓸모있는  성과들과도 비슷한 어던 성과들을 의식적인 의지로 되찾아 보려고 애쓰기"가 그 공식이 될 그런 자발적인 창조의 고귀함을 말이다. 그는 이렇게 언명하는 수조차 있었다 ; "나는 어떤 최면상태 덕분에 흥분해서 가장 아름다운 걸작들 중의 하나를 낳기보다는 철저히 의식하고 온전히 맑은 정신으로 엉성한 그 무엇을 쓰는 편이 사뭇 더 낫겠다."고 (말라르메에 관한 편지). 그리고는 이런 모욕적인 말에 화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번갯불이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번갯불은 나 자신에 감탄할 건덕지밖엔 내게 갖다주지 않는다, 아주 작은 불티를 내 마음대로 만들어낼 줄 아는 데에 나는 사뭇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한 시작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폴 발레리이 시학 (4)  (이어서)   시의 솜씨  그러니 시의 솜씨 없이는 시도 없다. 발레레의 고찰들이 여기서는, 자신의 내적인 체험에 의지하고 있는 만큼 우리에게는 더욱 값지다 ; 이 솜씨란, 영감이 우리에게 "이따금씩"주는 불가사의들을 분간해 이용할 줄 아는 데 있고, 그래서 못나지도 않은 명석한 자발적 창조를 통해 그 불가사의들을 보충하는 데 있는 것이다,        1. 기능중인 시인은 하나의 기다림이다 첫 특성은 참을성이다. 시작품을 낳아 줄 "씨눈"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이 인간 속에서 깨어나는 것은, 어떤 뜻하지 않은 사건, 밖이나 안에서 생기는 어떤 우발적 사건에 의해서다 ; 즉 한 그루의 나무, 하나의 얼굴, 하나의 "테마" ,  하나의 감동, 하나의 낱말에 의해서인 것이다. 또 때로는, 내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표현 의지. 즉 자기가 느끼는 바를 나타내려는 욕구이다 ; 그러나 때로는 반대로, 하나의 형식 요소, 즉 제 원인을 찾는, 내 넋의 공간에 저를 위해 하나의 뜻을 찾는 그런 표현의 초안이기도 하다 --- 그 무엇이 자기 표현을 바라다가는, 어떤 수단이 쓸모있는 그 무엇을 바라기도 하는, 내기 시작이 가능한 이 2원성을 잘 관찰하도록 하라." (시의 추상적 사고) 이 문제에서는, 젊은 파르크, 아폴로 신전의 무녀, 바다의 묘지에 관한 발레리 자신의 속내 이야기들보다 더 교훈적인 것은 없다. 또한 매혹을 빚어낼 낱말들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 "우리는 뜻하지 않은 낱말을,  ----- 예측될 수는 없어도 기다려질 수 있는 낱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맨 먼저 그 낱말을 알아듣는 것이다 (한 시인의 수첩)       2. 능력의 바램과 대담 기다림, 명석한 선택, 자발적인 거부, 쉬운 것에 대한 저항, 의식적인 창조의 의사 표시들, " 어떤 사람의 능력과 바램과의 사정없는 대담, "시작품의 건축가"는 주로 표현 문재들과 드잡이한다 ; "사람들의 싯귀들을 만드는 것은 관념들을 가지고가 아니고, 낱말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 라고, 이미 말라르메가 말했었다. 그러니 시인이란 무엇보다도, 깊은 전문지식을 가지고, 언어의 밑천들을, "음과 뜻의 일치들"을, " 낱말들과 낱말들의 표정들의 집단들이 빚어내는 물리적 효과들"을 알아보는 사람인 것이다. --- 시인은 말하고 있다. "나는 여성형이고, 2음절로 된  P나 F를 포함한, 무음글자로 끝나는, 틈이나 분열의 동의어이고, 현학적이기도 드물지도 않은, 그런 낱말 하나를 찾고 있다. 7가지 조건  - 적어도 !" (나침판의 다른 각거리들), 끝없이 꼼꼼하고 복잡한 탐구 ! 그리고 이러한 뉘앙스들로 고생하는 예술가는 그러나, 자기 작 품이 그 속에서 느껴질 판이한 조건들도 고려해야 한다 ; "심지어는 아주 짧은 시 한 편의 제작 기간이 여러 해를 삼킬 수가 있는데도, 그 시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작용은 몇 분만에 끝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몇 분만에 그 독자는, 탐구와 기다림과 참을성과 조바심의 몇 달 동안에 쌓이고 쌓인 발견들과 비교 대조들과 표현의 섬광들의 쇼크를 받게 될 것이다" (시와 추상적 사고)       3. 희한한 답답함들 의식적인 노고를 치러 흥분의 단계, 또는 낭만풍의 심정토로 단계를 넘어서기. 이게 바로 위대한 시인들의 비결이다. 그래서 발레리는 자기가 낭만주의 엉성함과 대응시키는 그 고전 예술의 완벽에 대해 자신의 감탄을 숨기지 않는다 ; "제 솜씨를 배운 낭만주의자는 고전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또는, "낭만주의는 다 앞선 하나의 낭만주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는 단일성들이나 고정된 형식들, 운율법적 규칙들, 어휘의 제한들에 항의하기는 커녕, 이러한 속박들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의 걸작들의 근원 자체를 본다. 그것은 이 모든 "희한한 답답함들"이 영감의 충동적이고 무정부적인 비약을 억누름으로써, 시작품의 제작을 명석하게 통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고전주의자란, 자기자신 속에 하나의 비평가를 지니고 있어, 마음 속으로 그 비평가를 자기 작업들에 가담시키는 그런 작가인 것이다" (보들레르의 처지)      4. 하나의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시작품은 다 "거의 언제나 손질해 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작업 상태" 다. 발레리에게는 하나의 "완성된 소네트"란 실지로, 노고에 의해 여전히 뜯어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버려 둔 소네트"인 것이다. ; "하나의 작품은 꼭 완성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가 거기서 끌어낸  능력이나 날쌤이 그것을 개선할 재능 등등을 바로 그에게 태워 주는 것이니까 --- 그는 거기서 그것을 지워 다시 만들 건덕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 (한 시인의 수첩), 발레리는 가능한 것들이 이러한 양성을 시 창조 중에 스스로 체험했다 ; 그는 익살스럽게 말하고 있다. "나는 같은 시의 다른 텍스트들을 발표하는 수도 있었다 ; 심지어는 서로 어긋나는 것들도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제로 영락없이 나를 비판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고쳐쓰기를 내가 삼갔어야 할 까닭을 내게 말해 주지는 않았다." ( 한 시작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이러한 객관적 고찰에들에서 우리는 발레리 - 텍스트를 알아보게 된다. 그는 드디어 시 창조를 하나의 "내기"로, 하나의 순수한 훈련으로, 그 가장 중요한 산물도 작품이 아니고 그 작자의 지능의 성장인 그런 훈련으로, 정신의 메카니즘에 대한 하나의 보다 깊은 인식으로, 여기게 되지 않았던가?   (이어서 마지막 회)   시의 난해성 마치 말라르메의 연금술 비밀에 대해 말하듯이 발레리의 난해성에 대해 말들을 한다. 그런데도 그는 젊은 파르크에 대해, 자신의 난해성은 말라르메의 그것처럼 고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언명한 적이 있다.      1. 젊은 파르크의 모험 1913년에 예시 앨범 수록 작품들을 손질하다가 발레리는, 40행 가량의 시 한 편을, 이를테면 "그 청년기의 장난들에 대한 작별 인사와도 같은 것"을 거기에 덧붙이고 싶어졌다. 이게 바로 "그가 시인한 것보다는 백 배나 더 읽기 어려운"  412행의 시, 젊은 파르크의 시초였다. 이 별난 현상은, 4년(1913~1917)이나 끈 노고 동안의 "한 송이 조화의 자연적인 성장"으로 설명이 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자기가 운문 예술을 이미 잊고만 것으로 알고 있던 발레리는, 시작품을 하나의 "훈련"으로 우선 생각했던 것이다. (앙드레 지드에의 헌시). 이어 전쟁이 왔고, 훈련은 불안 속에서 또 반은 불안과 맞서 가며" 계속되었다 ; 동원될 수 없었던 시인은, 겉보기에는 잔잔하면서도, 더없이 엄격한 운율법에 짐짓 굴복한 작품 하나에 자기 모두를 바침으로써 자신의 괴로움을 속였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위협받고 있는 프랑스어에다, "가장 순수한 낱말들과 그 가장 고상한 형태들로 된" 이 작품을 불러주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여기게 되었다. 그것이 점점 더 벗어나 마지막의 크기로 부풀어나고 말았다고, 그는 1917년에 쓰고 있다. 이 512행의 싯귀를 위해 그는 100도 더 되는 초고들을, 옮겨 베끼면서 600페이지나 될 초고들을 작성했던 것이다 !      2. 젊은 파르크의 난해성  "나는 결코 난해해지고 싶지 않으며, 그러나 내가 난해하다면 - 내 말은 : 교양 있고 피상적이 아닌 어느 독자에게 내가 난해하다면, - 난해하지 않을 능력이 없어 나는 난해한 것이다" (에메 라퐁에게, 1922). 이러한 난해성은 오래 전부터 자기 머리를 차지해 오던 관념적인 우리 말투가, 한 살아 있는 존재의 넋의 복잡한 상태들을 우리가 정확히 표현하려들 때는 극도로 빈약하며, 더구나 우리말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태반이 시의 음조와 조화되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는 그것을 빈약하게 만들도록 강요 당하기도 한다. 어려움은 아닌게 아니라 시인에게 과해지는 조건들 때문에 갑절로 늘어나게 마련이다 ; " 시인이 조화를, 이 조화의 연장을, 조형적인 효과들의 계속을, 생각 자체의 계속을, 구문의 멋과 유연성을, 충족시키려 들면, 그래서 고전적인 운율법의 뼈대 속에 전체가 포함되기를 바라면, 그의 노력의 복잡함이, 그가 스스로에게 과한 조건들의 독립성이 그를, 자기 문체에 지나친 부담을 주는 위험에, 자기 작품의 소재를 너무 빽빽하게 만드는 위험에, 독자의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요약과 생략을 이용하는 위험에 빠져들게 하는 수가 있고, 또 그렇게 되게 마련이다" (프레데릭 르페르에게, 1917). 젊은 파르크의 난해성 은, 그 푸짐한 밑천들, 그 뉘앙스들, "하나의 시 텍스트 이의 너무 오래 끈 작업의 축적" 덕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3. 고된 예술의 이론 이러한 설명들은, 매혹 속의 어떤 작품들의 일부러 그런 것만 같아 보이는 연금술 비빌 (난해성)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 한 시작품의 난해성은, 읽혀지는 사물과 읽는 존재라는 두 요인의 산물이다." 라고 발레리는 언명하고 있다. 여느 사람에게는 데카르트나 몽테스큐도 난해하다. 매혹의 작가는 엘리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고, 말라르메의 제자인 그는, 깨우침 받은 사람의 주의력을 부추기고, 그를 "적극적이게" 만들어 그의 시적인 감흥을 북돋우는 것이 능사인 고된 예술의 아론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때 시작품은, 독자의 넋과  정신이 연주하는 하나의 "악보"가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 ; 하나의 텍스트의 진짜 뜻이란 없다. 작자의 권위란 없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건, 그는 자기가 쓴 것만을 썼다. 하나의 텍스트란 한 번 발표되고 나면 저마다가 자기 방법에 따라 제멋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구와도 같은 것이다 ; 제작자가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사용한다는 말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다." (바다의 묘지에 관해서).   끝.  
10    야콥슨 시학[ 공유] 댓글:  조회:1439  추천:0  2018-10-08
 문화센타여의제 | 지유  http://jijiu00.blog.me/140012169585   야콥슨의 시학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그의 유명한 논문 에서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다(The poetic function projects the principle of equivalence from the axis of selection into the axis of combination.)'고 설명한다.   한 문장의 배열 방식은 '선택(selection)'과 '결합(combination)'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자고 있다'라는 문장을 배열하는 방식은 주어인 '아이' 대신에 '소년' '꼬마' '어린이'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서술어인 '자고 있다' 대신에 '졸고 있다' 혹은 '꾸벅꾸벅하고 있다' 등 어느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의 축에 있는 언어들은 등가성이나 유사성의 규제 하에 놓인다. 한편 선택된 언어들의 결합(주어+서술어, 혹은 수식어+피수식어 등)은 인접성의 지배를 받는다. 즉 '나무가 자고 있다' 라든지 '검은 나뭇잎' 같은 연결은 단어와 단어간의 인접성의 결여로 결합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말하자면 하나의 문장을 배열하는 데 있어서 단어를 선택하는 문제는 등가성의 원리가 지배하고, 단어를 결합하는 문제는 인접성의 원리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문장과는 달리 詩인 경우는 '등가의 원리'가 단어를 연결하는 '결합의 축'에서도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야콥슨의 견해다.   야콥슨은 시와 일반 문장의 변별성을 그렇게 언어학적 입장에서 설명하려 했다. 언어학자다운 발상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라는 논문의 7할에 해당하는 나머지 부분을 자신의 이 이론을 입증하기 위한 예로 활용하고 있다.   시에서 한 음절은 같은 배열의 다른 어떤 음절과도 등가의 관계를 이룬다. 하나의 어강세는 다른 어강세와, 무강세는 다른 무강세와 등가로 된다. 작시법상의 모든 장음은 장음끼리, 단음은 단음끼리, 어경계는 어경계끼리, 그리고 어경계의 부재는 또한 그 부재끼리 등가이다. 통사적 휴지는 통사적 휴지끼리, 휴지의 부재 역시 그들끼리 등가를 이룬다. ―로만 야콥슨『문학 속의 언어학』(문학과 지성사) pp.61-2   시를 율격 구조로 파악할 때 하나의 동일한 율격 단위(강약, 고저 혹은 장단이 만들어 낸)의 반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율격 단위들은 서로 등가의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7•5조의 자수율인 경우는 7•5가 하나의 율격 단위가 되어 되풀이되는 것이므로 앞뒤의 7•5들은 서로 대응 등가의 관계에 놓인다.    또한 야콥슨은 '압운은 시에 있어서 보다 일반적이고 근본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문제, 곧 병행성의 특수하고도 집약적인 예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홉킨즈의 논문(Journals and Papers, p.85)을 인용하고 있다.   시의 구조라는 것은 히브리 시에 나타나는 기술적인 소위 대구법이나 교회 음악의 응답 송가에서부터 복잡한 희랍, 이탈리아, 영국의 운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속적인 병행성의 구조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병행성에도 그 대립이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와 전이적이거나 변색적인 것, 이렇게 두 종류가 필히 존재한다. 분명한 대립을 보이는 첫번째의 병행성만이 운문의 구조와 관련이 있으니, 음절의 일정한 배열의 반복인 리듬에서, 리듬의 일정한 배열의 반복인 운율에서, 두운에서, 모음운에서 그리고 각운에서 그러하다. ―위의 책, p.75   홉킨즈가 시 구조의 특징으로 제시한 '병행성'을 야콥슨은 그의 '등가성'과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 율격에서와 마찬가지로 압운(두운, 모음운, 각운 등) 역시 등가의 구조로 보는 것이다. 압운이란 동일한 소리의 반복에서 빚어지는 것이니까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야콥슨이 등가의 예로 제시한 것들은 율격과 압운 그리고 활음조(euphony)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시의 주도적 기능을 운율로 보고 그 운율 구조를 문장 구조의 입장에서 설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운율만이 어찌 시적 기능이라고 하겠는가. 더욱이 율격이나 압운 같은 외형률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현대시에 있어서는 운율이 시의 주도적 기능의 자리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시적 기능에 관한 야콥슨의 정의는 국부적인 것으로 현대시 일반에 대한 설명으로는 적절치 못하다. 현대시의 기능은 운율보다는 오히려 역설이나 고도의 비유에 의해 주도된다고 할 수 있다.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는 진술이다. 예를 들어 '죽는 자는 살고 사는 자는 죽으리라'(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요, 자신의 목숨만을 도모하는 자는 나라와 함께 망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표면 진술만으로 본다면 어불성설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상극의 정황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역설이다.   한편 시에서 즐겨 사용하는 비유는 은유와 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은유는 직유에서와는 달리 공유소가 생략된 비유이므로 논리적 모순을 담게 된다. 즉 '그는 하마처럼 뚱뚱하다'의 직유와는 달리 '그는 하마다'의 은유는 의사진술(擬似陳述)―거짓말이 된다. 의인법 또한 비인물을 인물처럼 대우하여 표현하는 기법이니까 이 역시 의사진술이 아닐 수 없다.    역설이나 은유, 의인법들은 이처럼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불림(과장성)의 기법들이다. 이들은 '결합의 축'을 지배하고 있는 '인접성'을 거부한다. 앞에서 인접성의 결여로 일상적 문장에서는 결합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지적한 바 있는 예문 '나무가 자고 있다'와 '검은 나뭇잎'도 詩文인 경우는 달라진다. 이들 문장도 의인법과 은유로 시 속에서는 훌륭히 구사될 수 있다. 따라서 시적인 문장이란 야콥슨의 규정과는 달리 '결합의 축에서 인접성의 파괴를 도모하는 글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시가 그러한 문장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시인들이란 기존의 어법에 만족할 수 없는 상상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9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1885~1972 ) 시론 간단정리[공유] 댓글:  조회:1735  추천:0  2018-09-02
◎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1885~1972 ) 시론   "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 (= 작은 작품에 집중하고 오랫동안 고쳐 써라.)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 냈다. 이미지를 현대시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끌어올렸다.     파운드의 시론= " 군더더기 없는 시각적 이미지" 가장 핵심에 있던 것은 이미지즘. 보들레르가 현대시의 시조라면 에즈라 파운드는 현대시의 중시조라고 할 수 있다. 즉, 현대시에 에즈라 파운드가 끼친 영향이 대단하다.  이미지즘은 당시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가 지배하던 영국시의 침체된 전통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으로 시도된 '혁신적 모험'이었다.   에즈라 파운드는 철학자이자 시인인 흄을 만나게 된다.  파운드는 번역시집을 내면서 그 부록에 흄의 등 시 5편을 수록하고 '이미지스트(Les Imagistes)'란 말을 최초로 사용했다. 이때 사용한 '이미지스트'와 '이미지즘'이란 용어는 프랑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미지즘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서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파운드가 내세운 이미지즘 이론은 흄의 반 낭만주의 사상과 중세 문학 및 동양 시에서 추출한 고전주의 시론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이 운동은 프랑스 상징주의를 계승했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단시 그리고 중국의 한시와 일본의 하이쿠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당시 영시가 지닌 감상주의와 느슨하고 장신적인 언어를 청산하게 만들었던 이미지즘 운동은 기본적으로 사물과 언어, 대상과 표현을 정확하게 1대1로 대응시키려는 '일사일언'을 목표로 했다. 시인은 자신의 주관에 의해 대상을 굴절시켜선 안 되며,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낭만주의란 감정을 최대한으로 폭발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반 낭만주의 = 감정 거부, 이성의 뜻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성과 감정이 함께 하는 시를 말한다. '시작법의 궁극적인 달성(ultimate attainments of porsy)'을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흄이 주장한 '절대적으로 정확한 표현','군말의 폐지'와 비슷한 입장이다.     1. 사물을 보듯이 그려내라 (= 회화적 기법, 보듯이 그려내는 것) 2. 미적(美的)이어야 한다. 3.교훈적 경향에서 탈피하라. (= 20c까지만 해도 고전주의적, 계몽주의적 이론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지금 현대시는 탈피 했다. ) 4. 다른 시를 더 좋게 또는 더 간단하게 반복해도 좋다. 완전한 독창성이란 불가능하다. ( 엘리아르의 와 김지하의 사이의 유사성과 같은 말을 하는 듯하다.)         파운드는 이와 같은 '시작법원칙'을 발전시켜 1912년 리처드 알딩톤, 힐다두리틀과 함께 '좋은 글의 3원칙'을 마련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룰 것. (사물에 대한 이미 만들어진 관념을 배제하고 너의 개념을 만들어 내야한다.)     2.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말 것. (장식적인 말 사용 X ) 3. 리듬은 메트로놈의 규칙에 따르기보다 음악적 구절의 연속성을 따라갈 것. (외재율이 아닌 내재율로서의 리듬 형성을 말하고 있음)         파운드는 이를 보완하여 1913년 월간 에 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발표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서구 문단 최초로 이미지의 중요성을 논의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미지의 개념 : " 이미지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이성적이라고 바꿔말해도 무방하다.)인 복합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      이미지의 효과 : " 그러한 '복합체'를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런 해방의 의식,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 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러운 성장 의식을 고취시킨다," (= 이미지는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우리는 갑작스런 인지,인식하게 된다.)  -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 것. '어렴풋한 평화의 땅'과 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 것은 이미지를 둔화 시킨다. (= 평화/ 땅 중 무엇을 수식하는지 애매함. 의미 또한 불명확! ) - 추상화를 두려워하라. 훌륭한 산문에서 이미 행해진 것을 어줍잖은 운문으로 다시 얘기 하려 하지 말라. - 자신의 마음을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최상의 운율들로 채우라. 그런데 낱말들의 뜻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외국어로 된 글들을 보라 - '그럴 듯 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예쁘장한 철학적 에세이들을 쓰는사람들에게 맡겨라. 묘사적이 되려고 하지 말라. 화가가 당신보다 훨씬 잘 경치를 묘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구구절절 무언가를 표현X) - 각 행이 말미에서 뚝 그치는 일이 없이 하며, 다음 행을 매번 고양시켜 시작할 것. 확연한 긴 휴지(休止)를 원하는 때가 아니라면, 다음 행의 시작을 리듬 물결이 올라갈 때를 택하라.     이는 '시어'와 '운율' 그리고 '표현방법'에 대한 논의였다.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의 수식을 피해야 한다는 말은 '추상화'를 그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추상화'는 표현의 간결성과 정확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모호한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파운드는 일체의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을 직접 다룰 것을 주문했는데, 그러면서 시의 음악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기계적인 운율 대신 시어의 리듬을 그대로 따라가는 '자유시형(free verse)'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행갈이의 리듬까지 고려해야 된다는 게 파운드의 주장이다. 게다가 파운드는 낱말들의 뜻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했다. 흔히 이미지라면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고 요즘도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데, 파운드는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시의 리듬'을 더욱 중시했다. 이 점이 바로 T.E 흄의 이미지 이론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 즉 파운드는 이미지즘 창조, 이미지스트로서의 시를 창조했으나 음악성을 중요시 했다는 것!★ ) ​파운드는 좋은 예술은 참된 증언을 하는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시 표현의 정확성을 강조한 셈이다.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다. … 그리고 저 좋은 예술은 아무리 '비도덕적'이라고 하여도 전적으로 훌륭한 것이다.결코 좋은 예술은 비도덕적일 수 없다. (※ 근데 여기서 논의 할 점. 예를 들어 작품 '로리타'도 훌륭..? 숙고가 필요하지 않나. ) 나는 좋은 예술을 가지고 참된 증언을 하는 예술, 가장 정확한 예술이라고 말한다. 막연한 것을 나타내는 데도 아주 정확할 수 있다. 예술의 시금석은 정확성이다. … "예술의 최고의 기능은 고귀하리만치 풍부한 소리와 이미지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며, "시에는 음악을 지향하는 시와 조각이나 그림을 지향하는 시,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 첫째, 발화 되는 소리에 의해 충전되는 청각적 언어인 '음악시', 둘째는 시각적 상상력에 의해 이미지가 투영되는 시각적 언어인 '회화시', 셋째는 직접적인 의미와 문맥에 기초를 둔 '언어시'라는 것이다. 파운드는 이 세 종류의 시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시에 모두 나타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모든 글은 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고 여겼기 때문이다. (= 시에서는 음악성과 회화성, 언어성(의미성)이 적절하게 배합이 되어 나온 시가 좋은 시라고 보았다.) ​ 이와 같은 파운드의 시론은 당시 시인들의 산발적이고 혼돈된 시작 활동의 좌표가 되었고, 보다 새로운 시 쓰기의 지향점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파운드는, 흄이 을 이미지즘 시의 전형으로 써 보인 것 처럼, 자신또한 1913년 월간 를 통해 저 유명한 를 발표했다.       파운드의 시 에 드러나는 '감정의 객관화'는 후일 T.S 엘리엇에 의해 한층 발전 되어 '객관적 상관물'을 낳게 했다. 이것은 외부 대상과 창작자의 지성이 결합된 시적 감수성의 결정체이다.     ※ 여기서 알아 둘 것은, * '정서적 등가물' = 대상의 정서와 화자의 정서가 일치 * '객관적 상관물' = 대상의 정서와 화자의 정서가 꼭 일치될 필요X, 그렇지만 이를 통해 화자의 정서가 드러나는 것.         파운드가 말하는 시의 요체 =  간결한 언어, 객관적인 표현, 구어체     (특히 파운드는 형용사를 격렬히 싫어했다.)  시는 산문처럼 잘 쓰여져야 합니다.(=일물일어설을 주장했던 소설가들을 염두하는 말, 일물일어설을 주장하고 정확한 문장구사를 주장한 산문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  시의 언어는 훌륭한 언어이어야 합니다. 고양된 강렬성(즉 단순성)에 의한 경우를 빼면 구어체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책의 언어도, 에두르는 표현도, 도치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는 모파성의 산문과 스탕달의 산문처럼 간결해야합니다. (=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대상을 접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각으로.)       감탄사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어떠한 말도 허공을 향하여 날아가서는 안 됩니다. (=  1. 필요 없는 수사어구 X 정확한 문장 필요 2. 구체적으로 표현. 추상성 X) … 객관성, 그리고 다시 객관성, 그리고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앞뒤가 바뀌는 것도,("썩은 이끼 낀 각진 모서리"와 같이)양다리 걸친 형용사도, 테니슨이 사용하는 것 같은 말도, 어떤 환경, 어떤 감정의 압박 상태에 있어서, 실제로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논의한 '구어체'는 '시의 음악성'과 결부되는 요소인데 '입말'이 '리듬'을 저절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 = 음악적인 시들은 외재율이 아니라 내재율. 각편의 시들이 가지고 있는 독립적 리듬을 중요시. 외형을 가진 정형시 X)            이미지즘 운동이 정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 창출에만 매달리는 '인상주의'로 흐르게 되자 에즈라 파운드는 사물이 아닌 인간의 의식세계를 탐구 하기 시작했다. … 그는 사물의 존재보다 인식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당시 첨단 전위 예술이었던 '소용돌이 주의(Vorticism)'에 몰입했다.   그가 떠났어도 이미지즘 운동은 계속 되었다. <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이라는 시집에서는 이들이 합의 한 '이미지즘 6원칙'이 실려 있다.  1. 일상적인 언어를 쓰되 유사하거나 장식적인 단어는 결코 사용하지 말고 정확한 단어만을 사용한다.  2. 새로운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도록 한다. 우리는 자유시를 유일한 시작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자유의 원칙을 위해 싸우듯이 자유시를 위해 싸운다. (중략) 시에서 새로운 운율은 곧 새로운 생각을 뜻한다. (= 시조가 근대로 들어와 사상을 담기엔 역부족 (민족주의적 사상입장에서 시조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 3. 시 제재 선택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 세상 모든게 시가 될 수가 있다. +과거 ,현재 모두 좋은시가 될 수 있다.) 4.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시각적인 것에 기울여져있음)  5. 흐릿하거나 확실치 않는 것은 완전히 배제하고 견고하고 명료한 시를 쓴다. 6. 끝으로, 우리 대부분은 압축이 바로 시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정확한 단어' = 정확히 모사 X 시인의 마음에 나타난 대상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라는 뜻. "새로운 운율은 곧 새로운 생각을 뜻한다"= ex) 80년대는 왜 해체시인가? 기존의 시적 문법으로는 변화된 80년대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것을 담아내려면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이 무렵 파운드는 이미 '소용돌이주의'로 발걸음을 옮겨가 있었다. … 이미지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적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는 '소용돌이주의'를 통해 객체적 사물의 세계보다는 시인의 창조적 인식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 삼아 대하 서사시 를 집필해 나갔다. 이 작품에는 그가 영향 받은 다다이즘(dadaism)과 초현실주의도 개입되어 있는데, 이들 사조를 보다 새로운 시학을 추구하는 동인(動因)으로 삼았다.          는 이미지즘, 소용돌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을 거치면서 점점 확장되어 집필되었다.     흄 :  언어란 의사소통의 도구, 언어란 개념이 정확하지X 언어는 우리의 개념을  추상화 시킨다. → 정확한 이미지즘을 창출하려 했음. 정확한 표현, 군더더기 없는 시각적 세계 But 시각적 이미지만으로는 강렬한 것을 전달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려고 파운드는 소용돌이 이론(시= 집중된 표상) 으로 발걸음을 옮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8    현대시 창작시론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공유] 댓글:  조회:1361  추천:0  2018-09-02
♧ 현대시 창작 시론을 읽었다. 시문학 논쟁의 황금기를 열었던 14명의 시인들,  이름만 들어도 면면을 알 수 있는 당대의 대표적 시인들의 '창작시론' 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시의 모습을 한 정리하여  논평한 책으로, 현대시의 금자탑을 세운 시인들의 세계관과 현대시의 변증법의 전개과정을 탐구할수 있는 일목요연한 편찬이 시를 쓰거나 시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금자탑으로 다가올 것 같다.     ------------------------------------------------------------------------------------- [차례]   책머리에   시는 아직 써지지 않았다. 시를 쓸수록 시는 오리무중이다.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시는 거대한 관념의 추상체이다. 시를 쓰기 위한 번민과 고독, 실패의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시는 형이상학적 추상성과 현실적인 구체성이 서로 만나 충돌과 삼투를 거듭하다가 하나의 언어로 육화되는 공간이다. 정말 그런 것인가? 시는 무엇인가? 여기, 시인들이 육성(肉聲)으로 토해낸 시론(詩論)이 있다. 지금껏 시를 쓰고 공부하고 강의하면서 필자는 국내의 여러 시론집을 접해왔던 바, 뚜렷한 변별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국 현대시가 서구에서 유입되었기 때문일까, 서구의 시론을 번역하여 정리한 책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시론집은 대체로 ‘시어’ ‘이미지’ ‘비유’ ‘상징’ ‘리듬’ ‘화자’를 중심으로 시를 논했다. 서구 문예 이론가들의 논리를 시의 구성 요소별로 분류해서 체계화한 것인데, 여기엔 시인의 육성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필자는 지금껏 대학에서 시를 강의하면서, 줄곧 머릿속의 의문 하나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시인들이 생각하는 시의 모습이었다. 시인들은 과연 시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이 말하는 ‘시란 무엇인가?’였다. 시인들의 직접 토로한 ‘경험적 시론’, 나아가 ‘창작시론’은 어떤 것일까? 탁월한 시인에게는 탁월한 시론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런 것인가? 필자는 이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모인 14명의 시인들, 이름만 봐도 그 면면을 알 수 있는 당대의 대표적 시인들이다. 특이하게도 이들은 시를 쓰면서 시를 논했고, 시문학 논쟁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 결과, 종래의 시의 개념이 요즘처럼 바뀌게 되었고, 이름하여 ‘현대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됐다. 시에 대한 논의의 역사는 유구하다. 플라톤이 그의 『국가론』을 통해 ‘시인 추방’을 명령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율어(律語)에 의한 모방(模倣)’이라고 정의하면서 시의 리듬과 비유 그리고 시의 기능을 논했다. 그가 말한 모방(imitation)이란 사물이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모사(mimesis)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여기엔 ‘있을 수 있는 세계’를 그럴듯하게 담아내는 ‘창작의 개연성’이 개입되어 있었고, ‘당위적 진실’을 지향하는 ‘표현(expression)’과 ‘이상화(idealization)’라는 지향점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때 이미 ‘유비적 상상력’에 의한 비유의 필요성이 논해졌던 셈이다. 이러한 ‘모방론’은 17세기 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시문학 이론의 핵심이 되어왔다. 이 ‘모방론’은 자아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세계관에 따른 것인데, 18세기 낭만주의가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진다. 시가 더 이상 대상을 모방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적 대상보다도 시인 자신의 개성을 중시하는 ‘표현론’이 나타난 것인데, 이때부터 시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꾀하였다. 다시 말해 시적 주체와 객체가 혼융된 ‘동일성의 시학’을 지향하면서 이를 ‘서정시’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말 상징주의에 이르러 또다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비로소 ‘현대시’에 관한 논의가 시작됐던 것이다. 시적 정서는 물론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배격하고, 낭만주의와도 구분되는 새로운 시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상징주의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샤를 보들레르가 바로 그 출발점이었다. 이후 프랑스·독일·영국·러시아·스페인 등 유럽을 비롯해 미국을 거쳐 멕시코·칠레 등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현대시의 개념과 성격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20세기 중반까지 벌어진 이 논쟁은 가히 폭발적이었고, 그 어느 세기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문학 논쟁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그때의 시인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당대의 시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변증법적 투쟁의 궤도를 달려왔다. 각 시인의 시론은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보완됐고, 정반합(正反合)을 거듭하면서 또 다른 시의 시야를 열어젖혔다. 바야흐로 현대시의 새로운 미학이 창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의 시론은 이단(異端)의 언어였고 자신은 물론 이 세계와의 험난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이들에게 있어서의 현대시는 시인의 존재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불과 50여 년의 논쟁이었지만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시의 영역이 최대치로 확장되어 오늘날의 현대시가 이토록 다변화됐다. 현대시의 개념과 특징 그리고 시의 구성 요소에 관한 치열한 논쟁 끝에 오늘날의 시론이 정립됐던 것이다. 아쉽게도 논쟁은 더 이상 이어지질 않았다. 시문학 논쟁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시인들이 직접 시를 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시인들은 다만 시를 썼고, 시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이나 시론을 피력해왔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14명의 시인은 자신의 시론을 거침없이 토로했고, 이론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 창작의 미학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필자는 그 자료를 찾기 위해 지난 5년간 이들이 남긴 일기를 비롯해 창작 노트, 편지글, 문학상 심사평, 신문·잡지 기고문, 저서 그리고 〈노벨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 수상 소감을 뒤졌다. 여기엔 당대의 정치 상황과 이데올로기,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대의 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 통찰력을 살피는 동안 필자는 시인의 육성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뜨겁고 생생한 시론, 시의 육성(肉聲)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이들의 시론이 그러했듯이, 시는 ‘움직이는 언어’이다. 리듬이 그러하고 의미가 그러하다. 시는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을 숨긴다. 그 목소리와 얼굴을 종잡을 수 없다. 그렇게 불투명하고 불연속적이기 때문에 시의 생명력이 지속되는 게 아닐까? 시는 독자들에 의해 거듭거듭 육화되는 존재이다. 시가 그러하듯 이들의 창작시론 역시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화두이자 질문이며 시적 잠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현대시 논쟁의 전개 과정에 따라 시인들을 배열했다. 각 시인의 삶을 요약하면서 스스로 밝힌 시론을 실었고, 이에 대한 비평가의 논평을 덧붙였다. 인용한 문장은 각주를 달아 이를 밝혔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각주를 따로 붙이기도 했다. 이 책은 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시를 쓰거나 시론을 공부하는 이들이 현대시의 금자탑을 세운 시인들의 시적 세계관을 살펴보는 한편 현대시의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탐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샤를 보들레르(1821~1867)          예술의 현대성—추(醜)의 미학   저는 제가 유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오로지 악에 대한 공포와 혐오만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보들레르는 "변해가는 것에서 영원성을 이끌어내는" 행위를 '현대성'이라 보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에서 "현대 예술의 새로운 징후를 파악했다. 이러한 현대성엔 보들레르가 창조해낸 미의 새념이 개입되어 있는데 " 모든 미는 , 모든 일어날 수 있는 현상들처럼, 영원한 어떤 것돠 순간적인 어떤 것"을, "절대적인 것과 독특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 절대적이고 영원한 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히 존속하는 부분을 예술의 영혼으로, 변하는 부분을 예술의 육체로 생각하라" 순순한 것과 기괴한 것, 경악스러움과 익살스러움, 상상력은 예술가의 첫번째 자질, '아날로지의 그물을 과감하게 찢어버리는 아이러니. 죽음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기괴하고 촌스럽고 독특한 아이러니와 자연만불과 상응하는 아날로지를 시에 흡수하고 표현하려고 했다     스테판 말라르베(1842~1898)          순수관념으로서의 시   "순수한 작품이란 필연적으로 화자로서의 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시인은 낱말들에게 주도권을 양도한다.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함으로써 동원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낱말들은 마치 보석들 위에 길게 뻗어있는 허상의 불빛처럼 그 상호간의 반영으로 점화된다   개인적 감성을 배제시킨 사물과 현상의 '순수관념'   아르튀르 랭보(1854~1891)                       견자(見者)의 시 나는 감히 견자이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견자란,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자, 투시자, 깨달은 자, 초자연의 본질적 세계를 파악한자,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미지의 세계를 향한 감각의 착란....시인은 나를 버리고 타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생각되어진다의 코키토   폴 발레리(1871~1945)              순수시—시의 음악성 ​ 신들은 고맙게도 어떤 시의 첫 구절은 공짜로 준다. 그것과 화음을 이룰 둘째 구절을 불러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렇게 하나의 단어로 시작되는 시는 ‘아직 말을 더듬거리기 때문에’ 우발적인 단어를 빌려 쓸 수밖에 없는데, 그 단어들은 ‘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또 다른 단어를 불러온다.   리듬에서 시작하여 의미와 이미지를 찾아내는 시작법, "단어가 단어를 불러온다"   고트프리트 벤(1886~1956)                   절대시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다. 작가는 그의 텍스트를 아직 모를 뿐이다.   언어를운용하고 배열하고 짜맞추는 '공작성'을 시창작의 제1명제로 삼았다. 시에는 우연의 요소가 들어 잇어서는 안된다. "서정시인은 밀려드는 우연에 대항해서 자기 시를 밀폐시켜야 한다" 이 때의 우연이란 외부세계로부터 촉발되는 시적안 감흥을 의미하는데 , 이를 차단시킬 때 '절대시'가 탄생된다는 것이다. 절대시, 믿음이 없는 시, 희망이 없는 시,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는 시, 당신들이 매혹적으로 짜맞추는 말로 된 시, "시상이 아니라 언어가 시를 쓰게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시의 효용   시를 통해서는 개인들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 개인들이 속한 계급도 표현된다. 또한 여러 시대의 모습이 시 속에 표현되는가 하면 인간의 격한 감정 역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결국 표현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다.    '사회적 자아'와 일치되는 '시적 자아' .. 상징주의 이분법을 극복시킨 시적주체. 화법상의 모든 장식적이고 감상적인 액서서리를 벗어던짐 언어세척,, 새로운 내용만이 새로운 형식을 지탱할 수 있다.   에즈라 파운드(1885~1972)                   시와 이미지 ​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시작법원칙 1, 사물을 보듯이 그려내야 한다 2, 미적이어야 한다 3, 교훈적 경향에서 탈피하라 4,다른 시를 더 좋게 또는 더 간단하게 반복하라. 완전한 독창성이란 불가능하다. ​ 좋은 글의 3원칙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룰 것 2, 표현에 도움이 안되는 말은절대 사용하디 말 것 3, 리듬은 메트로놈의 규칙에 따르기 보다 음작적 구절의연속성을 따라할 것   시의 세가지 언어   청각적 언어인 음악시 시각적 언어인 회화시 직적접인 의미와 문맥에 기초를 둔 언어시  이 세가지는 한편의 시에 모두 나타나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키는 동시성의 기법   T. S. 엘리엇(1888~1965)            시의 화자—탈(脫)개성의 시   예술가의 과정은 계속적인 자기희생의 과정, 즉 계속적인 개성 소멸의 과정이다.     '경험적 자아를 희생시킨 페르소나 를 활용하여 시의 다중인격을 창출, 이들의 극적인 독백이 현대시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 앙드레 브르통(1892~1966)                초현실의 시—무의식의 메시지   시인은 문장 속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자신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들, 기묘한 유사점들을 주의 깊게 포착하는 일종의 감시병이 된다.   "미와 추,진실과 허위, 선과 악" 등의 관념을 초월한 자리에 초현실주의가 있다. 감각적 체험의 재생이 아닌, 생소하고 이질적인 두 요소의 결합을 이미지라고 보았다   "시인은 문장 속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자신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들, 기묘한 유사점들을 주의깊게 포착하는 일종의 감시병이 된다" 시 자유연합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미래주의—투쟁의 시   왜 어째서 문학은 한쪽 구석으로 몰려야 하는가? 그것은 모든 신문에, 매일같이 모든 페이지마다 실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디저트 정도로만 내놓는 문학 따위라면 죽어버려야 한다.   이념으로서의 문학, 도구로서의 문학, 새로운 형식이 새로운 내용을 창조한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 시와 영감(靈感)   "예술 작품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기법 뿐 아니라 영감이라는거대하고도 신비로운 불꽃이 필요하다. 시는 입으로 읊어야 한다.   파울 첼란(1920~1970)   시와 현실   "시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에게는 하나의 사건이며. 움직임이며, 또한 유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방향을 구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이 질문은 시계의 시침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시는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물론 시는 무한성에 대한 요청이 있지만 시대를 관통합니다 시대를 관통하지만 그것을 초월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의 푸가 고통받는 언어 불구의 언어, 기존의 어법과 신조어를 동시에 사용, 언어해체   옥타비오 파스(1914~1998) 무의식의 시—타자의 언어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 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러운 중력의 법칙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 시는 계시이지 설명이 아니다. 일상의 언어를 붕괴시킴으로써, 새로운 시가 탄생한다. 언어는 은유이며 마법적 도구,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시인은 언어의 주술사, 영매와 다름없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고 보상이고 응집,     파블로 네루다(1903~1974) 광장의 언어—해방의 언어   대낮에 광장에서 읽는 시가 되어야 한다. 책이란 숱한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   야생의 자연, 시의 원적지, 거리에서 주워온 말로 시를 쓴다. 누구나 똑 같이 나눠가질 수 있는 빵과도 같은 시... 만인의 시, 나는 나의 시들에게서는 더 단순해지려고 했다. 매일같이 더 단순해지려고.. 사물의 내부를 파헤치려는 전위적 실험을 거쳐 라틴아메리카위 역사를 노래하다      [저자 소개]   오정국 시인 1956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문학박사). 198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내가 밀어낸 물결』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문학평론집 『시의 탄생, 설화의 재생』 『비극적 서사의 서정적 풍경』을 펴냈다.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서대 인문사회학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7    [스크랩]이상(李箱) 시 58편 해설-360 쪽 全 ​ 댓글:  조회:2643  추천:0  2018-06-25
 이상(李箱) 시 58편 해설-360 쪽  全  ​   저자 신영삼 1958년 부여 출생     ​ 머리말   이상의 시가 세상에 나오자, 사람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도 했다. 의학 박사님들은 이상의 두개골과 가슴을 절개하고 병인을 찾았다. 두개골에서는 뚜렷한 병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가슴에서는 폐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처방을 내리고, 입원 시키고, 치료하고, 퇴원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두통과 답답함은 계속되었다. ​ 그러자 저마다 한 가닥 한다는 박사님들이 나름대로 진단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자신의 의술을 과시하기 위한 동기에서부터 출발했다. 더러는 먹고 살기 위한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두개골과 가슴에만 머물렀다. 두개골과 가슴은 수없이 절개되고 봉합되었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독자들의 두통과 가슴 답답한 증세는 악화되었다. ​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한 어떤 박사님 중에는, 이상 시가 외계인의 말로 되었기 때문에, 지구인들은 해독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이상의 정신병적 병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초현실주의라는 전염병에 감염되었다고 하는 박사님들도 있었다. 그들의 진단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시골 돌팔이까지 타났다. 자기도 한 번 사람들의 두통과 답답증을 풀어보겠다는 것이다. 접근 방식은 지극히 형이하학적이었고, 말은 어눌했으며, 주로 민간요법에 의존했다. 호기심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2012. 1. 20 보령에서 신영삼 ​ ▣ 차례 ▣   엮으면서 12 1. 異常한 可逆反應 異常한可逆反應 14 破片의景致 22 ▽의遊戱 29 수염―― 36 BOITEUX · BOITEUSE 45 空腹 ―― 51   2. 烏感圖 (1) 二人…… 1 …… 60 二人…… 2 …… 63 神經質的으로肥滿한三角形 66 運動 72 興行物天使 76 ​ 3. 三次角 設計圖 線에關한覺書 1 88 線에關한覺書 2 97 線에關한覺書 3 105 線에關한覺書 4 109 線에關한覺書 5 112 線에關한覺書 6 115 線에關한覺書 7 124 ​ 4. 建築 無限 六角體 AU MAGASIN NOUVEAUTES 136 出版法 149 且8氏의出發 161 대낮 170 ​ 5. 烏感圖 (2) 烏瞰圖 詩第一號 178 烏瞰圖 詩第二號 183 烏瞰圖 詩第三號 186 烏瞰圖 詩第四號 188 烏瞰圖 詩第五號 192 烏瞰圖 詩第六號  196 烏瞰圖 詩第七號 203 烏瞰圖 詩第八號 解剖 211 烏瞰圖 詩第九號 銃口 221 烏瞰圖 詩第十號 나비 224 烏瞰圖 詩第十一號  228 烏瞰圖 詩第十二號 231 烏瞰圖 詩第十三號 234 烏瞰圖 詩第十四號 238 烏瞰圖 詩第十五號 244 ​ 6. 易斷 火爐 254 아침 260 家庭 263 易斷 271 ​ 7. 危篤 禁制 282 絶壁 285 白書 288 買春 292 生涯 295 自像 299   8. 無題 一九三三. 六. 一 306 꽃나무  309 이런詩 312 普通記念 315 거울 322 紙碑 328 明鏡 331 ​ 9. 遺稿 肉親의章 338 最後 344 悔恨의章 346   1. 異常한 可逆反應 ​ ​ ▣ 異常한可逆反應 任意의半徑의圓 (過去分詞의 時勢)   圓內의一點과圓外의一點을結付한直線 二種類의存在의時間的影向性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하다)   直線은圓을殺害하였는가   顯微鏡 그밑에있어서는人工도自然과다름없이現象되었다.   ☓    같은날의午後 勿論太陽이存在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處所에存在하여있었을뿐만아니라그렇게하지아니하면아니될步調를美化하는일까지도하지아니하고있었다.   發達하지도아니하고發展하지도아니하고 이것은憤怒이다.    鐵柵밖의白大理石建築物이雄壯하게서있던 眞眞5"의角바아의羅列에서 肉體에對한處分法을센티멘탈리즘하였다. 目的이있지아니하였더니만큼冷靜하였다.   太陽이땀에젖은잔등을내려쬐었을때 그림자는잔등前方에있었다.   사람은말하였다. 「저便秘症患者는富者집으로食鹽을얻으려들어가고자希望하고있는것이다」 라고 ............ ​ ― 1931. 7 ―     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무엇인가 시의 제목으로는 낯설다. ‘이상한 가역반응’은 원래 화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가역반응이란 정반응이 일어나면 다시 그것의 역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이다. 따라서 가역반응이란 어떤 동일한 현상을 놓고 정반응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역반응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시에서는 이상하게도 동일한 현상을 놓고 서로 다르게 보는 반응이다. ​ 이 시의 구체적 상황을 설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몇 가지 단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단서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생각하면 대체적인 시적 상황의 윤곽이 잡힌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화자가 과거에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는 시로 보인다. 이상 시인의 몇 편의 다른 시들은 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 시들을 읽어본 것을 바탕으로 소설(fiction)을 쓰겠다.   『소년인 화자는 어느 과부의 집에 가끔 놀러 갔다. 우연히 과부를 통해 여자를 알게 되었던 소년은, 이후로도 가끔 과부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과부와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과부도 좋아했고, 소년도 좋았다. 사흘 전에도 과부의 집에 갔었다. 어제 밤, 어떤 놈이 몰래 담을 넘어서 과부를 겁탈하고, 과부의 금반지며 목걸이까지 훔쳐서 달아났다. 과부는 경찰서에 신고 했다. 곧 수사관이 왔다. 과부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지문도 채취했다. ​ 오늘 정오, 소년은 강간범으로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취조를 당하고 있다.』   任意의 半徑의 圓 (過去分詞의 時勢) ​ 화자가 경찰서에 잡혀갔다. 조사관이 임의의 반경의 원을 볼펜으로 그렸다. 임의의 반경을 가진 원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부자의 집’ 즉 과부의 집을 그린 것이다. 아니다. 과부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 분사의 시세다. 이미 어떤 사건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 圓內의 一點과 圓外의 一點 을結付한 直線 ​ 원 내의 일점과 원외의 일점을 결부시키는 직선이 그려진다. 화자가 과부의 집에 침입하여 과부를 겁탈하고 물건을 훔쳐가지 않았느냐고 심문하는 것이다.   二種類의 存在의 時間的 影向性 / (우리들은 이것에 관하여 무관심하다) 두 종류의 존재의 시간적 영향성 즉 화자가 과부의 집에 갔던 시간과 어떤 놈이 과부의 집을 침입한 시간이, 화자가 범인인가 아닌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들’이라는 말로 봐서 화자와 조사관 모두 이 시간성에 무관심한 채 심문하고, 심문을 당하고 있다. 이를테면 심문 과정은 이랬을 것이다. 조사관 : 너, ○○집에 침입하서 강간하고 강도질 했지? 화자 :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조사관 : 증거가 있는데……. 바른 대로 불어. 화자 : 절대로 강간하고 강도질 한 적 없습니다. 위 대화에는 범인이 그 집에 침입한 시간과 화자가 그 집에 간 시간이 나타나지 않는 대화다. 시간적 영향성이 결여되어 있다.  直線은 圓을 殺害하였는가. / 顯微鏡 / 그 밑에 있어서는 人工도 自然과 다름없이 現象되었다.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화자가 어제 밤 과부를 겁탈했는가? 조사관은 화자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화자는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사관은 증거로 지문을 제시하는 것 같다. 현미경 아래에서는 인공도 자연과 다름없이 현상되었다. 현미경에는 세포 관찰을 할 때처럼, 지문도 자세히 나타났다. 꼼짝없이 강간범으로 몰린 것이다. 같은 날의 午後 / 勿論 太陽이 存在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處所에 存在하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步調를 美化하는 일까지도 하지 아니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물론 태양이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처소인 중천에 존재하였고, 태양은 아주 느리게 서쪽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화자는 아주 지루하게 오후 내내 취조를 받았다. 發達하지도 아니하고 發展하지도 아니하고 / 이것은 憤怒이다. 조사 방법이 발달하지도 아니하고 발전하지도 아니한 것에 화자는 분노를 느꼈다. (순전히 자백과 고문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수사 방법이다.) 鐵柵 밖의 白大理石 建築物이 雄壯하게 서 있던 / 眞眞 5"의 角바아의 羅列에서 / 肉體에 對한 處分法을 센티멘탈리즘하였다. 대리석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는 도회의 어느 철책 안,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진진5"’는 ‘진~진~하는 오 초’라고 읽자. 취조실에 있는 전기 고문기의 스위치를 올리면, 5초 동안 ‘진~~~진~~~’하고 소리가 난다. 전기 고문기와 각목이 늘어서 있는 취조실, 이런 상황에서 화자는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고민하였다. 고문을 당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 자백을 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目的이 있지 아니하였더니 만큼 冷靜하였다. ‘부자의 집’ 즉 과부의 집에 갔던 것은 사실이나, 과부를 겁탈할 목적이 있지 아니하였던 것인 만큼 냉정하였다. 거짓 자백을 하지 않기로 했다. 太陽이 땀에 젖은 잔등을 내려쬐었을 때 / 그림자는 잔등 前方에 있었다 ‘태양이 땀에 젖은 잔등을 내려 쬐었을 때 그림자는 잔등 전방에 있었다.’는 말과, 앞에 나왔던 ‘태양이 존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처소에 존재하였다’는 구절과 연관시켜 보자. 그러면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때부터 태양이 질 때까지 오후 내내, 아주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취조를 받았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사람은 말하였다. / 「저 便秘症患者는 富者 집으로 食鹽을 얻으려 들어가고자 希望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 ............ ‘사람’은 말을 하였다. 사람은 과부다. 과부가 경찰서 취조실로 찾아왔다. 범인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범인이라는 자가 바로 자기가 잘 아는 총각이 아닌가! 과부는 “저 변비증 환자는 부잣집으로 식염을 얻으러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총각은 나를 만날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총각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석방 됐다. 그러면 과부가 “저 총각은 나를 만날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총각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과부는 왜 “저 변비증 환자는 부잣집으로 식염을 얻으러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는가? 화자가 과부의 집에 가는 것은 식염을 얻으러 가는 것이다. 여기서 식염은 정액을 비유한 것이다. 암염을 절구에 넣고 절구 공이로 찧으면 소금가루를 얻을 수 있듯이, 남자가 여자의 음부에 남근을 절구질하면 소금가루와 같은 하얀 정액이 나온다. (의 ‘血紅으로 染色된 巖鹽의 粉碎’라는 구절은 이와 유사한 상황의 비유다.) ‘변비증 환자’는 똥을 누고 싶어도 누지 못하는 자다. 성적 욕구가 생겨도 해결할 대상이 없는 화자도 변비증환자다. 변비증 환자가 소금을 먹으면 효험이 있듯이, 성적 욕구를 해결할 마땅한 대상이 없는 화자는 과부를 찾아가, 과부의 음부에 절구질을 하고, 그리고 하얀 소금가루와 같은 정액을 내보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부가 “저 총각은 성적 욕구를 해결할 마땅한 곳이 없어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식염을 얻으려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에서 ‘있는’이라는 말의 시제에 유의하면, ‘화자는 식염을 얻으려고 부자의 집에 들어가고자 늘 희망하고 있다.’는 의미다. 성욕을 해결하고자 과부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의미다.  그러면 왜 과부의 집이 ‘부자의 집’일까? 그 집에는 소금이 많아서 부자의 집이다. 과부의 음부에는 과부를 겁탈했던 어떤 놈의 소금도 있을 것이고, 가끔 찾아가 암염을 절구질하는 화자의 소금도 있을 것이니, 과부는 참으로 부자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부자의 집은 과부의 집이다. 아니 과부의 음부인지도 모른다.       ▣  破片의景致  △은나의AMOUREUSE이다 ​ 나는하는수없이울었다   電燈이담배를피웠다 ▽은 I/W이다        × ▽이여! 나는괴롭다   나는遊戱한다 ▽의슬리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떻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 쓸쓸한들판을생각하고 쓸쓸한눈나리는날을생각하고 나의皮膚를생각하지아니한다   記憶에對하여나는剛體이다   정말로 「같이노래부르세요」 하면서나의무릎을때렸을터인일에對하여 ▽은나의꿈이다 스티크! 자네는쓸쓸하며有名하다   어찌할것인가         × 마침내▽을埋葬한雪景이었다 ― 1931. 7 ―      破片의 景致 /  △은나의AMOUREUSE이다 ​ 제목 '파편의 경치'라는 말에서부터 무슨 말인지 읽기 어렵다. 이 시를 끝까지 읽어보아도 파편의 경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파편의 경치, 조각난 경치, 조각나서 완전하지 않은 경치, 전체가 아닌 조각난 몇 개의 경치, 그 경치를 가지고, 그 조각난 경치를 맞추어서 완전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부터 조각난 몇 개의 경치를 맞추어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 보겠다. ​ 이 시에는 × 표를 중심으로 네 개의 경치가 있다. 그리고 그 네 개의 경치를 맞추어서 하나의 완전한 경치를 만들어야 한다. 조각난 네 개의 경치를 가지고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로 조합을 해야 이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 된다. ​ 부제 '△은나의AMOUREUSE이다'는 프랑스 말로 ‘△은 나의 연인’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화자는 △을 좋아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도 △은 나오지 않는다. ▽만 나온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면 ▽은 화자에게 괴로운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 화자가 좋아하는 대상, △과 대비되는 ▽은 싫어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이렇게 어떤 대상을 부호나 기호로 표현하는 방식은 서양 학문의 방식이다. 이상은 서양 학문 특히 수학과 과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 학문에서 무엇을 무엇이라고 하자는 그 발상을 활용하고 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울었다 화자는 하는 수 없이 울었다. 왜 울었으며, 왜 하는 수 없이 울었으며, 우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뒤에 나오는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라는 말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말인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화자는 아픔을 갖고 있다. 그것은 화자가 살아오면서 갖은 아픔들이다. 이를테면 양자로 가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든가, 대를 잇기 위해서 돈을 받고 양자로 간 것 등은 이상의 삶에서 가장 큰 아픔들이다. 그래서 집을 나와서 여급들과 동거도 하고, 금홍이도 만나게 된다. 물론 폐병도 이상에게는 커다란 아픔이었을 것이다. 화자에게는 그동안 삶에서 고통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왜 울까? 그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이 시에서 우는 행위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이 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우는 행위는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고통을 울음으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잊는 행위다. 무엇인가 아픔을 표현하는 행위는 바로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電燈이 담배를 피웠다 / ▽은 I/W이다 아픔이 많았던 화자는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그런데 전등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면, 담배 연기 때문에 방 안의 공기가 뿌옇게 된다. 마찬가지로 전등이 뿌옇게 켜졌으니까 전등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은 I/W이다. ‘I/W’에서 ‘I’는 전류를 나타내는 기호다. ‘W’는 전력을 나타내는 기호다. 보통 V=I/W라는 공식이 있다. 전압은 전류를 전력으로 나눈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은V 즉 전압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는 ‘전등을 켜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화자가 싫어하는 ▽은 ‘전등을 켜는 것’이다. 지금부터 ‘전등을 켜는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기호화하여 표현하는 서양의 수학이나 과학의 발상이다.   ▽이여! 나는 괴롭다 ▽ 곧 전등을 켜는 것이여! 나는 괴롭다. 화자는 아픔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등을 켜는 것이 괴롭다. 밤에 편안히 잠도 못자고 일어나 전등을 켜고 있는 것이 괴롭다.   나는 遊戱한다 / ▽의 슬리퍼어는 菓子와 같지 아니하다 /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   그래서 화자는 유희를 한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즐거운 놀이를 한다. ▽의 슬리퍼어, 밤에 고통 때문에 전등을 켜고, 슬리퍼를 신고, 남들이 다 잠자는 시간에 화장실도 가고, 또 혼자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과자와 같지 않다. 과자처럼 달콤한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 나는 나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지금 화자는 생각하고 있다. 고통스러울 때 우는 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따라서 어떻게 울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고통을 잊을까, 무엇으로 고통을 잊을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고통을 잊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쓸쓸한 들판을 생각하고 / 쓸쓸한 눈 나리는 날을 생각하고 / 나의 皮膚를 생각하지 아니한다 화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쓸쓸한 들판을 생각한다. 화자는 쓸쓸한 들판에 혼자 놓여 있었던 것과 같이 외로웠던 지난날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등을 켜고 그것을 글로 쓴다. 글로 쓰는 행위는 우는 행위와 같다. 고통을 글로 드러냄으로써 고통을 잊고자 하는 행위다. ​ 화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쓸쓸한 눈이 내리는 날을 생각한다. 화자는 쓸쓸한 눈이 내리던 지난 시절,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씀으로써 고통을 잊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피부를 생각하지 않는다. 폐결핵을 인해서 창백해진 현재의 자신의 피부를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폐결핵의 고통보다는 화자의 기억 속에 있는 고통이 더 크기에, 폐결핵으로 망가져가는 몸도 잊고 밤에 글을 쓴다.   記憶에 對하여 나는 剛體이다 기억에 대해서는 화자는 강한 육체를 가졌다. 화자는 과거 슬프거나 외롭거나 쓸쓸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매우 강하다. 과거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글로 쓰는 데는 소질이 있다.   정말로 / 「같이 노래부르세요」/ 하면서 나의 무릎을 때렸을 터인 일에 對하여 / ▽은 나의 꿈이다 / 스티크! 자네는 쓸쓸하며 有名하다 정말로, ‘같이 노래 부르세요’ 하면서 화자의 무릎을 때렸을 터인 일,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무릎을 툭 치면서, 자꾸 그렇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만 하지 말고 ‘같이 노래 부르세요. 즐겁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함직한 일이다. 결국 그 일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 ▽ 곧 전등을 켜는 것은 화자의 꿈이다. 전등을 켜고 그 슬픔과 고통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화자가 가지고 있는 꿈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그 떠올린 것을 글로 적는 것은 화자의 꿈이다. 그래서 그것을 전등을 켜고 글로 쓴다. 그러면 고통을 잊을 수 있다. ​ 스티크는 필기도구다. 이를테면 만년필이다. 만년필은 쓸쓸하며 유명하다. 만년필은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려서 그것을 밤에 홀로 전등을 켜 놓고 외롭게 기록하는 도구다. 그래서 스티크는 쓸쓸하다. 사실은 화자가 스티크를 가지고 고통을 잊기 위해서 무엇인가 기록하면서 쓸쓸해 한다. 또 만년필은 유명하다. 화자가 과거의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고통을 잊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만년필은 마치 유명한 의사와 같은 존재다.   어찌할 것인가 자, 그렇다면 과거의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쓸까? 시로 쓸까? 소설로 쓸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면서 화자는 만년필로 무엇인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을 埋葬한 雪景이었다 ​ 마침내 ▽ 곧 전등을 켠 것을 매장한 설경이었다. 전등을 켠 것을 매장했다는 것은, 전등을 켠 것이 생명을 다 해서 땅에 묻었다는 것인데, 이는 전등을 껐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등을 매장한 설경은 눈이 하얗게 내리듯이 밖이 하얗게 밝은 아침이 되었다는 의미다. 과거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과거의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을 떠올렸고, 그리고 그 기억들을 기록하는 가운에 밤이 지나갔다. ​ 결국 화자는 과거의 고통과 슬픔을 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지나온 삶, 슬프고도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일들을 시나 소설 혹은 수필로 썼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이상의 문학 작품들이 모두 이상의 과거의 고통의 기억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 ​ ​ ▣ ▽의遊戱――    ▽은 나의 AMOUREUSE이다.   종이로만든배암을종이로만든배암이라고하면 ▽은배암이다.   ▽은춤을추었다.   ▽의웃음을웃는것은破格이어서우스웠다.   슬립퍼어가땅에서떨어지지아니하는것은너무나소름끼치는일이다. ▽의눈은冬眠이다. ▽은電燈을三等太陽인줄안다.          ×  ▽은어디로갔느냐. 여기는굴뚝꼭대기다.   나의呼吸은平常的이다. 그러한데탕그스텐은무엇이냐. (그무엇도아니다.)   屈曲한直線 그것은白金과反射係數가相互同等하다. ▽은테이블밑에숨었느냐.         × 1 2 3 3은公倍數의征伐로向하였다. 電報는아직오지아니하였다. ― 1931. 7 ―     ▽의 遊戱―― 시인은 지금 ▽를 가지고 유희를 하고 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다. 우매한 독자를 향하여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이, 이러한 시를 써 놓고 시인은 즐기고 있다. 사실 이상의 시를 아직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상이 저승에서도 즐거워할 일인지도 모른다. ‘――’으로 봐서 아마 즐거운 유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왜냐하면 이상의 시에서 ‘――’이 있는 경우는 항상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은 나의 AMOUREUSE이다. 부제에 나오는 ‘AMOUREUSE’는 프랑스어로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라는 의미다. 화자는 ▽을 자신이 연인처럼 사랑하는 어떤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추리해 보아야 한다.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하면 / ▽은 배암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하면, ▽은 배암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은 비록 가짜 배암이지만, 이것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가정한다면, ▽은 배암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을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으니 이제부터 ▽은 실제로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은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은 배암과 같은 것이고,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이다. ​ 이렇게 ‘▽은 배암이다’처럼 ‘무엇을 무엇이라고 하자’ 하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발상은 서양식 학문에서 비롯한다. 서양학문에서는 어떤 것을 기호화하거나 부호화하여 표현하는 방식이 발달한 학문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수학이나 과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 기차가 시속 120km로 2시간 동안 달릴 때, 그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인가? 또 기차가 시속 150km로 3시간 동안 달릴 경우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인가? 하는 것들을 서양 학문에서는 간단히 기호화하여 표현합니다. 즉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기차의 속도에 시간을 곱하면 됩니다.’ 이것을 서양 학문에서는 s를 거리라고 하고, v를 속도라고 하고, h를 시간이라고 하면, ‘s = vh’라고 간단히 부호화합니다. 여기서 다시 속도는 어떻게 구하는가 하는 것을 v = s/h 라고 간단히 공식화한다. 이러한 방식이 서양 학문의 부호화, 기호화 방식이다. 이상 시인도 이러한 서양식 부호화, 기호화 방식을 이용하여 ▽을 배암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배암’은 다시 무엇인가의 비유한 것인데, 여기서 ‘배암’은 화자를 비유한 것이다. ▽은 춤을 추었다. ​ ▽은 춤을 추었다. ▽은 배암이니까, 배암이 똬리를 튼 상태에서 대가리를 들고 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은 배암과 같은 어떤 것을 비유한 것이다. 똬리를 틀고 머리를 들고 춤을 추는 배암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상상했다. 화자가 밤에 일어나 앉아서 기침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기침을 할 때는 상체가 앞뒤로 몹시 흔들린다. 이 시는 1931년에 지은 시인데, 이때부터 이상은 폐병을 앓았던 것 같다. 이상이 밤에 일어나서 기침을 하는 모습이다. 똬리를 틀고 앉아서 머리를 들고 춤추는 배암이 화자다.   ▽의 웃음을 웃는 것은 破格이어서 우스웠다. ​ ▽의 웃음을 웃는 것 즉 화자가 배암과 같은 자세로 똬리를 틀고 앉아서 기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웃는 것은 아주 파격(破格)이어서, 도리어 우스웠다. 화자가 배암과 같은 자세로 기침을 하고 있는 장면은 결코 우스운 장면이 아니다. 우스운 장면이 아닌데 이를 보고 웃는다는 것은 아주 파격이고, 그것이 도리어 우습다는 것이다. 화자가 폐병으로 똬리를 틀고 고개를 들고 있는 뱀이 춤을 추듯이, 앉아서 상체를 앞뒤로 심하게 움직이면서 기침을 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슬립퍼어가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슬립퍼어가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 하는 것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화자는 기침으로 인해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잠을 못 자는 화자는 슬리퍼를 신고 이를테면 화장실도 가고, 물도 먹고 해야 할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는 밤에 홀로 일어나 돌아다니려면 조용조용 다닐 수밖에 없다. 슬리퍼를 조용히 끌면서 다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슬리퍼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밤에 홀로 조용히 다니는 것이며, 밤에 기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일어나서 다녀야 하는 것은 화자에게는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 ▽의 눈은 冬眠이다. ▽의 눈은 동면(冬眠)이다. 화자는 눈을 배암이 동면하듯이 감았다. 그러나 완전히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눈만 감고 누워 있다.  ▽은 電燈을 三等太陽인 줄 안다. ▽은 전등을 삼등 태양인 줄 안다. 배암인 화자는 전등을 세 번째 등급의 태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밤에 전등을 켜 놓고 일어나서 잠을 자지 않고 있다. 태양이 있는 낮에는 우리는 일어나서 활동을 한다. 전등을 삼등 태양으로 아는 화자는 밤에 일어나서 활동을 한다. ▽은 어디로 갔느냐. / 여기는 굴뚝 꼭대기다. ▽은 즉 배암인 화자는 어디로 갔느냐. 여기는 굴뚝 꼭대기다. 화자가 간 곳은 굴뚝꼭대기다. 굴뚝 꼭대기는 연기가 난다. 연기가 나는 곳에서는 기침을 할 수밖에 없다. 화자가 기침을 아주 심하게 한다는 뜻이다. 나의 呼吸은 平常的이다. / 그러한데 탕그스텐은 무엇이냐. / (그 무엇도 아니다.) 화자의 호흡은 평상적이다. 평상시와 같이 숨을 쉬고 있다. 죽은 것은 아니다. 호흡이 평상시처럼 남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텅스텐은 무엇이냐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괄호를 치고 그 안에 그 무엇도 아니라고 했다.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은 텅스텐이 형상을 가진 어떤 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형상을 가진 어떤 물체가 아닌 것 중에서, 호흡과 관련시켜 상상해 보면, 호흡에서 마치 텅스텐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가 난다 뜻이다. 따라서 아직 살아 있으나 호흡은 매우 가쁘며, 텅스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屈曲한 直線 / 그것은 白金과 反射係數가 相互 同等하다. ​ 굴곡한 직선. 화자가 배암이다. 배암은 원래 긴 직선이다. 그 직선의 배암이 굴곡 상태로 있다. 길게 펼쳐져 있어야 할 화자가 굽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기침이 멈추고 화자는 몸을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 있는 것 같다. 몸을 옆으로 뉘어 웅크리고 잠을 자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원래 직선이 굴곡한 모습이다. ​ 또 그것은 백금과 반사계수가 상호 동등하다. 백금은 하얗다. 굴곡한 직선 즉 화자가 광선을 반사하는 계수가 백금과 상호 동등하다는 것은, 화자가 백금처럼 하얗다는 뜻이다. 화자의 창백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폐병을 앓는 사람의 창백한 모습이다. ​ ▽은 테이블 밑에 숨었느냐. ▽은 테이블 밑에 숨었느냐. 배암이, 화자가 마치 테이블 밑에 숨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다. 시끄럽던 것이 조용하면 어디에 숨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기침이 가라앉았다. 1 / 2 / 3 / 3은 公倍數의 征伐로 向하였다. 기침을 한 번 한다. 조용해졌던 기침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기침을 두 번 한다. 기침이 조금 잦아졌다. 기침을 세 번 한다. 기침이 조금 더 잦아진 것 같다. 3은 공배수의 정벌로 향하였다. 잦아진 기침이 마치 3의 공배수를 정벌하려는 듯이 삼의 공배수 쪽을 향하여 계속해서 나가고 있다. 3, 6, 9, 12~~~ 이런 식으로,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 이런 식으로 기침이 자주 나고 있다. 기침이 점점 잦아진다. 電報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다. 전보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다. 전보는 누가 죽었을 때 멀리 있는 사람에게 급히 알리기 위한 통신 수단이다. 편지는 여러 날이 걸린다. 그래서 전보를 보낸다. 전보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것은 결국 매우 위독한 상태라는 것이다. 화자는 매우 위독한 상태다. ​ ​ ​   ▣  수염―― ​  (鬚 · 髭 · 그밖에수염일수있는것들 · 모두를이름)               1   눈이存在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處所는森林인웃음이存在하여있었다             2   홍당무             3   아메리카의幽靈은水族館이지만大端히流麗하다 그것은陰鬱하기도하다            4   溪流에서―― 乾燥한植物性이다 가을            5   一小隊의軍人이東西의方向으로前進하였다고하는것은 無意味한일이아니면아니된다 運動場이破裂하고龜裂할따름이니까            6   三心圓            7   조(粟)를그득넣은「밀가루」布袋 簡單한須臾의夜月이었다           8   언제나도둑질할것만을計劃하고있었다 그렇지는아니하였다고한다면적어도乞人이기는하였다           9   疎한것은密한것의相對이며또한 平凡한것은非凡한것의相對이었다 나의神經은娼女보다도더욱貞肅한處女를願하고있었다             10   말(馬)―― 땀(汗)――              X     余, 事務로  써散步하라하여도無防하다   余, 하늘의푸르름에지쳤노라이같이閉鎖主義로다 ― 1931. 7 ―     1931년 6월 21세의 젊은 혈기의 이상, 어느 날 아메리카의 젊은 남녀의 벌거벗은 사진을 보았나 보다. 젊은 여자의 나체 사진, 그리고 젊은 남자의 나체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시를 썼다. 수염―― /  (鬚 · 髭 · 그밖에 수염일 수 있는 것들 · 모두를 이름) 제목 '수염――'은 차마 여자의 음모를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수염이라고 말하면서 한참 생각하는 것 같다. 독자가 못 알아차릴까 봐서 괄호를 하고, 그 안에 상상할 수 있도록 썼다. 수―턱수염, 자―콧수염, 그밖에 수염일 수 있는 것들, 모두를 말하는 것이라고. 따라서 여기서는 수염은 여자와 남자의 성기 주변에 난 음모라고 상상하는 것이 좋다.   눈이 存在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될 處所는 森林인 웃음이 存在하여 있었다 눈이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곳은, 눈이 원래 있어야 한 곳이다. 눈에는 삼림처럼 음침한 웃음이 존재하였다. 화자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나체의 남녀 사진을 보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는 화자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고 속눈썹만 삼림처럼 보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속으로 음침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홍당무 화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화자의 성기가 벌겋게 발기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좋다.   아메리카의 幽靈은 水族館이지만 大端히 流麗하다 / 그것은 陰鬱하기도 하다 아메리카의 유령 곧 여자의 나체 사진은 비록 수족관이지만 대단히 유려했다. 유령은 형상은 있으나 실체가 없다. 여자도 형상은 사진 속에 있으나, 그 여자의 실체는 지금 화자 앞에 없다. 그래서 유령이다. 수족관이라는 것은 그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은 볼 수는 있으나, 유리가 가로막아 그 물고기를 만질 수는 없다. 사진 속의 여자 또한 그 형상은 있으나 그 여자의 실체를 만질 수가 없다. 수족관이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여자는 대단히 유려하다. 미끈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음울하기도 하였다. 음울(陰鬱)은 그늘지고 울창하다는 뜻이다. 사진 속의 여자의 음모가 매우 많아서 숲으로 말하면 짙은 그늘이 질 만큼 울창했다.   溪流에서―― / 乾燥한 植物性이다 / 가을 여자의 사타구니를 보고 있다. ‘――’으로 봐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한 마디 한다. “건조한 식물성이다”라고. 음모는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즉 여자의 음부의 갈라진 양옆에서, 건조한 식물성이다. 건조한 식물성은 계곡의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의 계곡에서 애액이 흐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을이다. 여자의 음모가 단풍이 들었는가 보다. 아니 음모의 색갈이 단풍의 색처럼 붉다. 금발의 백인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一小隊의 軍人이 東西의 方向으로 前進하였다고 하는 것은 / 無意味한 일이 아니면 아니 된다 / 運動場이 破裂하고 龜裂할 따름이니까 ​ 일개 소대의 군인은 많은 숫자의 군인이다. 군인은 남근이다. 군인은 머리에 철모를 썼다. 철모를 쓴 군인은 남근의 모습이다. 일개 소대의 군인이 계곡에서 동서 방향으로 전진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동쪽으로 전진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전진하였으면 제자리다. 전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성행위 장면을 연상해 보자. 열심히 전진하고 후퇴를 거듭한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왕복 운동을 하는 것이다. 결국 제자리에 있는 셈이다. 그것은 전진한 것이 아니라 운동장 즉 여자의 음부가 파열하고 균열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음부가 갈라져 열리고, 제자리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였다는 말이다. 성교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화자는 여자의 음모가 난 계곡을 보면서, 많은 남자들의 남근이 여자의 성기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三心圓 이제는 남자의 나체 사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삼심원은 세 개의 중심이 있는 세 개의 원이다. 남근과 고환 두 쪽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삼심원이다. 정면으로, 발기된 남근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사진 속의 아메리카 남자를 보고 중얼거리는 말이다.   조(粟)를 그득 넣은「밀가루」布袋 / 簡單한 須臾의 夜月이었다 이제는 고환을 바라보고 있다. 고환은 조를 그득 넣은 밀가루 포대다. 고환 속에는 정액이 있고, 정액 속에는 정자가 들어 있다. 정액과 정액 속의 정자는 고환이라는 포대 속에 담겨 있다. 따라서 조는 정자, 밀가루는 흰색의 정액, 그리고 포대는 그것이 담겨 있는 고환이다. 사진 속의 남근을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상상한다. 남근은 간단(簡單)한 수유(須臾)의 야월(夜月)이었다. 성교는 잠깐 동안 쾌감에 젖는, 간단한 정액의 사정일 뿐이었다. 야월? 밤에 뜨는 달은 초승달, 보름달, 하현달처럼 커졌다가 작아진다. 그리고 커졌다가 작아지는 남근에서 방출되는 정액은 달처럼 뿌옇다. 언제나 도둑질할 것만을 計劃하고 있었다 / 그렇지는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乞人이기는 하였다 남근은 도둑질할 것만 계획하고 있었다. 도둑질은 몰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근은 아내 몰래 다른 여자와 바람피울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는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걸인이기는 하였다. 걸인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애걸하는 사람이다. 남근은 여자를 보면 한 번 잠자리를 함께 하기를 애걸하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疎한 것은 密한 것의 相對이며 또한 / 平凡한 것은 非凡한 것의 相對이었다. 성기다고 하는 것은 빽빽하다는 것의 상대이며, 평범하다고 하는 것은 비범하다는 것의 상대였다. 화자는 사진 속의 남자의 음모와 남근의 크기, 그리고 자신의 음모와 남근의 크기를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있다. 사진 속의 남자의 음모는 빽빽하고 무성하고 자신의 음모는 거기에 비하면 성기게 났는가 보다. 사진 속의 남자의 성기는 대단히 커서 비범하며, 자신의 성기는 작아서 평범한가 보다. 나의 神經은 娼女보다도 더욱 貞肅한 處女를 願하고 있었다. 화자의 신경은 창녀보다도 더욱 정숙(貞肅)한 처녀를 원하고 있었다. 화자의 흥분된 신경은 창녀를 원하기 보다는 즉 흥분된 성적 욕망을 창녀에게 가서 해결하기 보다는, 더욱 정숙한 처녀를 원하고 있습니다. 정숙한 처녀처럼 창녀가 있는 곳에 가지 않고 정조(貞操)를 지키면서, 조용하고 엄숙하게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화자는 남녀 나체 사진을 보고 자위를 하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말(馬)―― / 땀(汗)―― 그래서 오랫동안 말을 달리듯이 자위를 했다. 그리고 그 말이 땀을 흘렸다. 오랫동안 말을 달렸다는 것은 자위를 했다는 것이다. 자위 할 때의 동작은 말을 타고 달릴 때의 동작과 흡사하다. 기수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말 등을 중심으로 사람이 앞으로 몸이 쏠렸다가 뒤로 쏠렸다가 하는 동작을 한다. 손으로 성기를 잡고 자위를 하는 장면이 이와 유사하다. 땀은 말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위 후 남근에서 정액이 땀처럼 조금 비쳤다.   余, 事務로써 散步하라 하여도 無防하다. 나는 이제 사무로써 산보하라 하여도 무방하다. 사무(事務)는 ‘볼일’이다. 소변을 보는 것을 ‘볼일’ 본다고도 한다. 자위를 마친 화자, 이제는 소변을 보기 위해서 천천히 걸어가라 하여도 괜찮다. 조금 전까지는 남근이 발기하였기 때문에 소변을 보려고 해도 남들이 볼까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위가 끝났고, 발기된 성기가 작아졌다. 소변을 보러 밖으로 나가라고 하여도 괜찮다. 余, 하늘의 푸르름에 지쳤노라 이 같이 閉鎖主義로다 화자는 하늘의 푸름에 지쳤다. 우리의 사회는 이같이 폐쇄주의다. 푸른 하늘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맑은 우리 사회다. 아메리카에 비해서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맑고 깨끗한 것만을 강요한다. 화자는 이러한 우리 사회에 대해서 지쳤다. ​ ​ ​ ▣   BOITEUX · BOITEUSE ​ 긴것   짧은것   열十字       ×   그러나 CROSS 에는기름이묻어있었다   墜落   不得已한平行   物理的으로아팠었다     (以上平面幾何學)        ×   오렌지   大砲   葡萄        ×   萬若자네가重傷을입었다할지라도피를흘리었다고한다면참멋적은일이다   오―― 沈默을 打撲하여주면좋겠다 沈默을如何이打撲하여나는洪水와같이騷亂할것인가 沈默은沈默이냐   매쓰를갖지아니하였다하여醫師일수없는것일까 天體를잡아찢는다면소리쯤은나겠지   나의步調는繼續된다 언제까지도나는屍體이고자하면서屍體이지아니할것인가 ― 1931. 7 ―   ​ BOITEUX · BOITEUSE 절름발이 남성명사, 절름발이 여성명사. 절름발이는 길이가 하나가 길고 하나는 짧은 것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두 막대기도 길이가 다른 절름발이다. 보통 남자와 여자도 길이가 다르다. 절름발이다.   긴것 / 짧은것 / 열十字 긴 것, 짧은 것, 크로스 된 열십자. 기독의 상징 십자가.   그러나 CROSS 에는기름이 묻어 있었다 / 墜落 / 不得已한 平行 / 物理的으로 아팠었다 / (以上 平面幾何學) 그러나 십자가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미끄러져 추락했다. 십자가의 추락. 기독의 타락. 긴 것과 짧은 것이 부득이하게 평행을 이뤘다. 남녀가 십자가 아래에서 평행을 이루어 서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물리적으로 아팠었다. 사물의 이치로 당연히 괴로워했었다. 과거완료형 시제다. 과거에 그랬다. 화자가 정신적으로 괴로워했던 듯하다. 평면기하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복잡한 사람의 삶을 마치 평면기하학에서 간단한 도형을 그려 설명하듯 설명을 했다. 화자의 경험을 말한 것이다. ​ 아마 화자가 과거에 과부와 십자가가 매달려 있는 어느 방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 , , , , 가 모두 같은 상황이다. 화자는 과부의 집 십자가가 걸린 방에서, 과부와 관계했다.   오렌지 / 大砲 / 葡萄 오렌지처럼 표면이 오톨도톨한 고환, 대포처럼 정액을 발사하는 남근, 정액 속의 포도알과 같은 정자들.   萬若 자네가 重傷을 입었다 할지라도 피를 흘리었다고 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만약 자네가 중상을 입었다 할지라도, 피를 흘렸다고 말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중상을 입은 기독의 모습을 보고 피를 흘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멋쩍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만족을 하기도 전에 사정을 하여 남근이 힘없이 늘어져, 마치 중상을 입은 기독처럼 되었다 할지라도, 이를 사정을 하였다고 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화자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성급하게 사정을 했고, 그래서 참 멋쩍었다.   오―― / 沈默을 打撲하여 주면 좋겠다 / 沈默을 如何이 打撲하여 나는 洪水와 같이 騷亂할 것인가 / 沈默은 沈默이냐 ​ 오―― 그래서~~ 화자는~~ 침묵을 타박하여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침묵하는 것을 침묵하지 않도록 두드려 주면 좋겠다. 여기서 침묵은 바로 상대 여자가 흥분하지 않아 교성을 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남성은 자신의 남근을 가지고 여성의 음부를 힘차게 타박한다. 힘차게 두드린다. 침묵을 어떻게든지 두드려서 홍수와 같이 소란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사정하여 홍수처럼 넘쳐나는 정액과 함께 여자를 소란하게 만들 것인가를 생각한다. 침묵은 그냥 침묵이냐? 아니다. 침묵은 그냥 침묵이 아니라 소리가 나지 않음이다. 여성의 입에서 교성(嬌聲)이 나지 않는 것이다.   매쓰를 갖지 아니하였다 하여 醫師일 수 없는 것일까 / 天體를 잡아 찢는다면 소리쯤은 나겠지 매스를 갖지 아니하였다 하여 의사일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의사가 아니어도, 매스가 없어도 천체(天體)를 잡아서 찢는다면 소리쯤은 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사가 아니겠는가. 침묵을 치료하는 의사다. ​ 남녀가 성교를 할 때,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여성을 치료하는 의사는, 여성의 천체 즉 머리 부분, 그 중에서도 입을 잡아 찢어야 교성이 난다. 여성의 음부에 남근이 들어가서 격렬하게 성행위를 하는 것은 곧 여성의 입이 열리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곧 천체를 잡아 찢는 행위다. 그러면 자연히 천체 즉 머리 부분에 있는 입이 열리고, 교성을 낼 것이다. 그러면 화자는 비록 메스가 없어도 침묵을 치료하는 의사인 셈이다.   나의 步調는 繼續된다 / 언제까지도 나는 屍體이고자 하면서 屍體이지 아니할 것인가 ​ 나의 걸음걸이의 속도는 일정하게 계속된다. 나의 성교의 보조는 언제까지 일정하게 계속된다. 성급하게 절정에 도달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도 나는 시체이고자 하면서 즉 남성이 사정을 마치고 축 늘어진 시체를 갈망하면서도, 시체이지 아니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남근이 발기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성행위가 오래 지속되어야, 상대가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입에서 교성이 나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사정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여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 ▣   空腹 ―― 바른손에菓子封紙가없다고해서 왼손에쥐어져있는菓子封紙를찾으려只今막온길을五里나되돌아갔다         × 이손은化石하였다   이손은이제는이미아무것도所有하고싶지도않다所有된물건의所有됨을느끼기조차하지아니한다 只今떨어지고있는것이눈(雪)이라고한다면只今떨어진내눈물은눈(雪)이어야할것이다 나의內面과外面과   이件의系統인모든中間들은지독히춥다   左右 이兩側의손들이相對方의義理를저바리고두번다시握手하는일은없이 困難한勞働만이가로놓여있는이整頓하여가지아니하면아니될길에있어서獨立을固執하는것이기는하나   추우리로다 추우리로다          × 누구는나를가리켜孤獨하다고하느냐 이群雄割居를보라 이戰爭을보라          ×   나는그들의軋轢의發熱의한복판에서昏睡한다 심심한歲月이흐르고나는눈을떠본즉 屍體도蒸發한다음의고요한月夜를나는想像한다   天眞한村落의畜犬들아 짖지말게나 내體溫은適當스럽거니와 내希望은甘美로웁다 ― 1931. 7 ―     空腹 ―― ‘공복(空腹)’을 보통 빈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腹’은 ‘가운데’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공복(空腹)’은 ‘텅 비어있는 가운데’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 ‘腹’은 ‘앞, 전면(前面)’을 의미하기도 한다. ‘등(背)’이 ‘뒤, 후면(後面)’을 의미한다면, ‘배(腹)’는 ‘앞, 전면(全面)’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복(空腹)은 ‘텅 빈 앞, 즉 텅 비어 있는 미래’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상의 시 중에 제목 옆에 ‘――’처럼 표시되어 있는 시들이 몇 편 있다. 이를테면 , , , 등의 시가 그것이다. 이런 경우에 시인은 ‘――’ 혹은 ‘……’을 심심해서 붙여놓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목 ‘空腹’은 단순히 ‘비어 있는 배’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1930년대 초반, 이른바 조선 땅에는 실용적인 서양의 학문을 하여야 한다는 부류의 사람들과, 동양적 학문이 바른 학문이라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논쟁을 하던 시기였던가 보다. 물론 필자가 조사해 본 것은 아니다. 다만 ‘공복(空腹)’을 읽고, 그렇게 생각해 본 것이다.  이상 시인이 생각하기에는 서양적 학문은 실용적이기는 해도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동양적 학문만이 전부 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이상의 시에서 많은 부분 서양 학문의 문제점을 비판한 시들이 있지만, 이 시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바른손에 菓子封紙가 없다고 해서 / 왼손에 쥐어져 있는 菓子封紙를 찾으려 只今 막 온 길을 五里나 되돌아갔다 단순히 문장을 읽기도 어렵다. 화자는 바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바른손에는 과자봉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과자봉지를 찾으려 막 온 길을 오 리나 되돌아갔다. 결국 지금 화자의 왼손에는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다. 따라서 화자는 지금 바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고, 왼손에는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다. 좌우 양손에 모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데, 왼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과자봉지다. 화자가 바른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동양의 학문이다. 동양의 학문에는 과자봉지에 담긴 과자처럼 당장 먹기에 달콤한 것이 없다. 당장 먹기에 달콤한, 과자가 들어 있는 과자봉지는 서양의 학문이다. 지금 화자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 과자봉지 속에는 당장 먹기에 달콤한 과자 즉 서양의 실용적 학문들이 담겨 있다. 서양의 학문은 당장 현실에 적용하기 용이한 학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지금 바른손에는 동양적 학문, 왼손에는 서양적 학문을 모두 쥐고 있다. 사실 이상은 처음에는 동양적 학문인 한학을 했고, 다음에 서양 학문을 공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부모님 혹은 주변의 사람들의 의견을 좇아서 서양의 학문도 공부한 사람인 것 같다. 결국 이상은 동서양의 학문을 모두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이 서양의 학문에 대해서 비판하는 많은 시를 쓴 것을 보면, 서양 학문에 대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동양의 학문이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더욱 소중한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이 적절히 상호 보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손은 化石하였다 화자의 두 손은 굳어서 돌이 되었다. 바른손에는 동양의 학문이 쥐어져 있고, 왼손에는 서양의 학문이 쥐어져 있는데도 두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차차 나온다. 미리 설명하면, 세상에는 서양적 학문이 실용적이어서 바르다(옳다, 좋다)는 사람과 동양적 학문이 바르다는 사람 이렇게 둘로 갈라져서, 서로 열을 내면서 싸우고 있다. 이상과 같이 동양적 학문도 하고, 서양적 학문도 함으로써, 두 학문의 장점과 문제점을 고루 알아서, 두 학문이 상호 보완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던가 보다. 세상에는 동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화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손은 이제는 이미 아무것도 所有하고 싶지도 않다 所有된 물건의 所有됨을 느끼기조차 하지 아니 한다 그래서 이 화자의 손은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도 않다. 소유된 물건의 소유됨을 느끼지도 못한다. 동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화자는 무엇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양적 학문이건 서양적 학문이건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도 않고,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이 모두 소유되었음에도,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을 느끼기조차 아니하고 있다. 여기서 ‘아니 한다’는 것은 화자의 의지의 부정이다. 능력의 부정이 아니라, 의지의 부정이다.   只今 떨어지고 있는 것이 눈(雪)이라고 한다면 只今 떨어진 내 눈물은 눈(雪)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눈(雪)이라고 한다면, 지금 화자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淚)은 눈(雪)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서양식 학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雪)이나 화자의 눈에서 나오는 눈물(淚)나 결국 같은 것이다. 모두 H2O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서양식 사고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자가 떨어뜨린 눈물은 그 성분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같을 수 있으나, 정신과 감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흘린 눈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적 사고는 다양한 현상을 종합하여 개념화 추상화 일반화는 데는 뛰어나지만, 인간이 가진 다양한 정신과 문화와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학문이다. 따라서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의 적절한 조화만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나의 內面과 外面과 이 件의 系統인 모든 中間들은 지독히 춥다 화자는 내면적으로는 동양적 학문을 중시한다. 외면적으로는 서양적 학문을 했다. 서양적인 학문만이 옳다는 사람과 동양적인 학문만이 옳다는 사람만 있는 세상에서, 두 가지의 적절한 보완과 종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외롭다. 左右 / 이 兩側의 손들이 相對方의 義理를 저바리고 두 번 다시 握手하는 일은 없이 /  困難한 勞働만이 가로놓여 있는 이 整頓하여 가지 아니하면 아니 될 길에 있어서 獨立을 固執하는 것이기는 하나 좌우, 즉 서양적 학문과 동양적 학문, 이 양측의 주장들이 상대방의 의리 즉 상대방의 학문이 서로에게 기여하는 바른 이치를 저버리고, 두 번 다시 서로 악수 즉 화해하는 일이 없이, 곤란한 근심스러운 일만이 가로놓여 있는, 이 정돈하여 가야할 길에, 화자는 또 화자대로 자신의 독립을 고집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보면, 화자는, 동양적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만 있는 세상에서 홀로 두 학문이 상호 보완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추우리로다 / 추우리로다 화자는 생각한다. 동양적 학문만 옳다고 주장하거나, 서양적 학문만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는 지금의 현실로 볼 때, 우리의 미래는 추울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제목 ‘空腹(공복)’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의 미래는 텅 비어 있다. 배가 고플 것이다.   누구는 나를 가리켜 孤獨하다고 하느냐 /  이 群雄割居를 보라 /  이 戰爭을 보라 누구는 화자를 가리켜 고독하다고 하느냐? 화자는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기에, 고독할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였나 보다. 그러나 화자는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사람들과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사람들이 제각각 군웅할거 식으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화자는 결코 고독하지 않다.    나는 그들의 軋轢의 發熱의 한복판에서 昏睡한다 / 심심한 歲月이 흐르고 나는 눈을 떠 본 즉 / 屍體도 蒸發한 다음의 고요한 月夜를 나는 想像한다 화자는 그들의 ‘알력의 발열’ 즉 서로 의견이 맞지 아니하여 열나게 싸우는 한복판에서 혼수한다. 여기서 혼수한다는 것은 정신없이 잠을 잔다는 말이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상태다.  화자는 미래에 자신이 죽고, 시체도 썩어서 증발한 다음의 고요한 달밤을 상상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고 주장한 사람이나,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모두 고요한 달밤처럼 조용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적 학문만이 바른 것도 아니고, 서양적 학문만이 바른 것도 아니라는, 화자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러한 미래를 상상한다.   天眞한 村落의 畜犬들아 짖지 말게나 /  내 體溫은 適當스럽거니와 /  내 希望은 甘美로웁다 천진하고 순진하리만큼 어리석은, 시골에서 가축으로 기르는 개와 같이 미련한 놈들아, 짖지 말게나. 떠들지 말게나. 엉터리 주장 하지 말게나.  내 체온은 적당스럽다. 서양에 치우치지도 않았고, 동양에 치우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희망은 감미롭다. 미래에 분명히 내 말이 맞을 것이라는 달콤한 희망을 갖고 있다. ​ ​ ​ ▣  2. 烏瞰圖 (一) 二人…… 1 …… ​ 基督은襤褸한行色하고說敎를시작했다. 아아ㄹ· 카아보네는橄欖山을山채로拉撮했다        x 一九三○年以後의일――. 네온사인으로裝飾된어느敎會의門깐에서는뚱보카아보네가볼의傷痕을伸縮시켜가면서入場券을팔고있었다. ― 1931. 8 ―     二人…… 1 …… 제목 에서 은 ‘二人’은 ‘두 사람’이라는 의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그냥 ‘二人’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인데, ‘二人’이라고 써 놓고 그 옆에 ‘……’ 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시에는 이런 식의 표시가 되어 있는 시들이 있다. 이를테면 , 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 그냥 단순히 ‘수염’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단순히 ‘공복 즉 비어 있는 배’라고 해석할 수 없다. 이상 시인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표시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제목은 ‘두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이중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에 나오는 ‘기독(基督)’과 ‘아아ㄹ 카보네’는 동일 인물이다. 基督은 襤褸한 行色하고 說敎를 시작했다. / 아아ㄹ· 카아보네는 橄欖山을 山채로 拉撮했다. 기독(基督)과 같은 사람은 마치 기독처럼 남루한 행색을 하고 설교를 시작했다. 여기서 ‘기독’은 ‘사람들이 그를 마치 기독인 듯이 생각하는, 어느 교회의 목사’다. 남루한 행색을 하고 설교를 했다는 것은, 이를테면 사욕을 버리고, 교회에 들어오는 헌금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어 주고,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면서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돈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은 남루한 행색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그러한 목사를 기독이라고 칭송한다. 그런데 그 목사는 사실은 ‘아아ㄹ 카보네’다. 그리고 그 아아ㄹ 카보네는 감람산을 山(산)채로 납촬해 왔다. 알(Al)은 흔히 서양에서 남자의 이름에 붙는다. 그리고 ‘카보네(carvone)’는 ‘카본’(carvon)의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우리말로는 탄소라고 한다. 연탄이나 흑연을 구성하는 물질이다. 연탄이나 흑연은 검을 색을 띠고 있다. 따라서 ‘아아ㄹ 카보네’는 마음이 시커먼 교회의 목사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어느 교회의 목사가 처음에는 기독과 같은 남루한 행색으로 설교했으나, 사실은 마음이 시커먼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목사가 이제는 감란산을 통째로 교로 가져왔다. 기독의 감람산 연설을 듣기 위해서 많이 모여 있던 군중들을 교회로 데려 온 것이다. 기독과 같은 훌륭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一九三○年 以後의 일――. / 네온사인으로 裝飾된 어느 敎會의 門깐에서는 뚱보 카아보네가 볼의 傷痕을 伸縮시켜가면서 入場券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1930년 이후――, 교회의 목사는 남루한 행색을 하던 기독이 아니었다. 달라졌다.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어느 교회의 문간에서는 잘 먹어서 뚱보인, 마음이 시커먼 목사가 열변을 토한다. 기독의 볼에는 피를 흘리는 상처가 있는데, 이 마음이 시커먼 목사의 볼에는, 잘 먹어 살이 쪄서 생긴 주름살이 있다. 그 주름살을 씰룩거리면서 열변을 토하면서, 천국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교회에 다녀야 천국에 가고, 헌금을 많이 해야 천국에 간다고, 기독 팔아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목사는 사기꾼이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이 기독인 것처럼 행동을 하고,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이제는 기독을 팔아서 사욕을 채우는 사람이다. 따라서 제목 ‘二人 ……’은 이중성을 가진 어느 목사다. ​ ​ ​   ▣   二人…… 2 …… ​ 아아ㄹ · 카아보네의貨幣는참으로光이나고메달로하여도좋을만하나基督의貨幣는보기숭할지경으로貧弱하고해서아무튼돈이라는資格에서는一步도벗어나지못하고 있다.    카아보네가프렛상이래서보내어준프록코오트를基督은最後까지拒絶하고말았다는것은有名한이야기거니와宜當한일이아니겠는가. ― 1931. 8 ―      아아ㄹ · 카아보네의 貨幣는 참으로 光이 나고 메달로 하여도 좋을만 하나 基督의 貨幣는 보기 숭할 지경으로 貧弱하고 해서 아무튼 돈이라는 資格에서는 一步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에 헌금이라는 것을 한다. 십일조를 바치기도 한다. 교회에 들어온 돈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살림을 하는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독의 뜻대로,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한다. 그런데, 마음이 검은 아아ㄹ 카아보네 목사에게 들어오는 돈은 빛이 난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기부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칭송되고, 그 이름은 영광된 것이다.  그래서 아아ㄹ 카보네의 교회에 들어온 헌금은 메달(medal)로 하여도 좋다. 메달은 목에 건다. 메달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영광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의 이름과 그가 낸 돈의 액수를 기입하여 메달처럼 게시한다. 그래프로 그려서 헌금의 실적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를 보고 더욱 더 많은 헌금을 한다.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자랑스럽다. 더 많이 하고 싶다. 헌금을 적게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보기가 민망하여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시커먼 목사의 돈벌이 방법이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온 헌금 중에서, 아아ㄹ 카보네 목사가 기독의 뜻에 따라,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기독의 화폐’는 보기 흉할 정도로 빈약해서 아무튼 돈이라는 자격에서는 일보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돈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카아보네가 프렛상이래서 보내어 준 프록코오트를 基督은 最後까지 拒絶하고 말았다는 것은 有名한 이야기거니와 宜當한 일이 아니겠는가. 카아보네가, 기독이 프렛상(flatちん)이라고 해서 즉 십자가의 기독이 마치 가난해서 잘 먹지 못하여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빈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 듯이, 그리스도에게 프록코오트를 보내 주자, 기독은 최후까지 거절하고 말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거니와, 아아ㄹ 카보네의 자선을 거절하는 것이 의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옷을 벗은 채, 겨우 아랫도리만 가리고 있다. 기독은 목사가 보내준 프록코트를 거절하여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아ㄹ 카보네 목사를 외면하는 듯한 모습, 고개를 모로 돌린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그러한 기독의 모습을, 화자는 마치 아아ㄹ 카보네 목사가 보내준 프록코트를 기독이 거절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기독이 사기꾼 아아ㄹ 카보네 목사를 외면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의당한 일이다.   ​ ​ ▣   神經質的으로肥滿한三角形    ――△은나의AMOUREUSE이다 ​ ▽이여  씨름에서이겨본經驗은몇번이나되느냐. ▽이여  보아하니외투속에파묻힌등덜미밖엔없고나. ▽이여  나는그呼吸에부서진樂器로다.     나에게如何한孤獨은찾아올지라도나는xx하지아니할것이다.     오직그러함으로써만나의生涯는原色과같이하여豊富하도다.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 1931. 8 ―      神經質的으로 肥滿한 三角形 / ――△은 나의 AMOUREU -SE이다 제목은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이다. 부제는 ‘――△은 나의 AMOUREUSE이다’이다. 부제를 보면, ‘――’이 있다. 혹시 무슨 의도가 있지 않을까? 있다. ‘――’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보인다. 무슨 말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뭔가 약간 수상하다. △은 화자가 사랑하는 연인과 같은 그 어떤 것을 지칭한다. 그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기호화하여 말하는 방식은 서양 학문 즉 현대 수학이나 과학에서 일반화된 표현 방식이다.  이를테면 반지름과 원주의 길이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 서양의 학문에서는, 반지름을 r이라고 하고, 원주의 길이를 ℓ이라고 하고, 원주율을 π라고 한다면, π=ℓ/2r= 3.14 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반지름을 r 이라고 한다, 원주의 길이를 ℓ이라고 한다, 원주율을 π라고 한다’는 것은, 바로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는 서양식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제목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에서 ‘삼각형’은 화자가 연인처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을 기호화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삼각형이 비만하다. 따라서 삼각형(△)으로 기호화된, 그 무엇을 화자는 연인처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 ‘신경질적으로’라는 제목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삼각형(△)은 ‘신경’과 관련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너무 비만하여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어떤 대상임을 추리할 수 있다. ▽이여  씨름에서 이겨본 經驗은 몇 번이나 되느냐. △을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해 놓고, 이 시에는 △은 나오지 않고, ▽만 나온다. 그렇다면 ▽은 무엇일까? △과 ▽을 나란히 놓고 곰곰 생각해 보면, ▽은 화자가 싫어하는 것,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이라는 제목과 관련시켜 보면,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은 화자가 신경질적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그 어떤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은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화자는 ▽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여, 씨름에서 이겨본 경험은 몇 번이나 되는냐”하고. 아마 ▽은 씨름에서 별로 이겨본 적이 없는가 보다. 그래서 화자는 ▽을 아주 싫어할 것이다. 그러면 씨름에서 별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는 것과 관련시켜 ▽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보자. 씨름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잡고, 힘을 쓰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호흡이 가빠오면서, 이기려고 하는 경기다. 그러나 화자는 그러한 씨름과 같은 어떤 행위에서 이겨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2행과 제3행의 ‘▽이여, 보아하니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엔 없고나. / ▽이여, 나는 그 호흡에 부서진 악기로다.’와 관련하여 곰곰이 상상해 보면, ▽은 신경질적으로 지나치게 잘 발기되지 않는, 힘이 빠진 화자의 남근임을 추리할 수 있다. 화자는 힘이 빠져서 늘어진 남근으로 여자와의 씨름 즉 성교에서 이겨본 적이 없는가 보다. 여자를 제대로 만족시켜 준 적이 별로 없었는가 보다. 그렇다면 △은 잘 발기된 화자의 남근을 의미한다 할 것이며, 그러한 남근을 화자는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연인처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화자는 잘 발기된 남근으로 여성과 성교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할 것이다.  ▽이여  보아하니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엔 없고나. ▽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에 없는 그 어떤 것이다. 남근을 사람의 형상에 비유한다면, 귀두 부분을 머리, 그 아래 잘록한 부분을 목, 그리고 그 아래 부분을 등 아래쪽의 몸의 형상과 유사하다. 따라서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 밖에 없는 ▽은 힘이 빠진 남근의 모습이다. 발기된 남근은 사람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부분이 확연히 드러나지만, 힘이 빠진 남근은 귀두를 둘러싸고 있는 표피가 귀두를 감싸서 잘 보이지 않다. 외투가 감싸고 있는 등덜미만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여  나는 그 呼吸에 부서진 樂器로다. / 나에게 如何한 孤獨은 찾아올지라도 나는 xx하지 아니할 것이다. / 오직 그러함으로써만 나의 生涯는 原色과 같이하여 豊富하도다. 화자가 힘이 빠져 늘어져 있는 자신의 남근을 보면서 “나는 그 호흡에 부서진 악기로다”하고 독백하듯이, 탄식하듯이 말하고 있다. 호흡은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화자의 가쁜 호흡이다. 성적으로 흥분했을 경우의 가쁜 호흡 때문에 화자는 자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다음 행에 있다. 부서진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악기는 소리를 내는 도구다. 부서지지 않은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듯이, 잘 발기된 남근은 여자로 하여금 아름다운 교성을 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자위로 인해서 힘이 빠진 남근은 부서진 악기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여성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교성을 내도록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약간 행을 들여쓴 것은 화자가 속으로 생각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다.) 화자에게 여하한 고독은 찾아올지라도 xx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서 고독은 성적으로 흥분된 상태를 홀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도 xx하지 않겠다 즉 자위를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평소에 흥분이 되어 이를 해결할 수 없어서 오는 고독이 찾아올지라도, 자위를 하지 않고 힘을 비축해 두어야, 다음에 여자와 성교를 할 때, 여자라는 악기를 교성이 나도록 잘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오직 홀로 있을 때 자위를 하지 않음으로서 나의 생애는 원색과 같이 즉 남근이 본래의 붉은 색으로 잘 발기되어 화자의 삶이 풍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은 아주 잘 발기된 남근의 기호화다. 신경질적으로 ▽은 신경질 적으로 발기가 되지 않는 남근의 기호화다.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화자가 독백하는 것 같다. 같은 문장이 두 번 반복되었다. 이것을 ‘그런데 내가 캐러반이라고 하느냐, 그런데 내가 캐러반이라고 하느냐’라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언뜻 보면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함으로써 강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캐러반은 대상(隊商)이다. 무거운 짐을 낙타나 말에 싣고 여기저기 장사를 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다. 화자는 캐러반인가? 맞다. 화자는 △만 있다면, △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혼자 자위도 하고 여자와 성교하기도 좋아하는 캐러반이다. 또 이 여자와 저 여자와 성교하기를 좋아하는 캐러반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화자는 캐러반이 아니다. 화자는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이 있을 뿐이다. ▽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제대로 자위는 할 것이며, 여자와 제대로 성교는 할 수 있겠는가. 또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이 여자 저 여자와 성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화자는 결코 캐러반이 아니다.   ​ ​ ▣   運動 ​ 一層우에있는二層우에있는三層우에있는屋上庭園에올라서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屋上庭園밑에있는三層밑에있는二層밑에있는一層으로내려간즉東쪽에서솟아오른太陽이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時間은맞는것이지만時計는나보담도젊지않느냐하는것보담은나는時計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時計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 1931. 8 ―      運動 '운동(運動)'이 제목이다. 무슨 뜻일까? 보통은 사람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운동이라 한다. 그런데 '물체의 운동'이라고 말할 때의 '운동'도 있다. 이때의 운동은 이동(移動)과 같은 의미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 운동 혹은 이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다. 그래서 더욱 난해하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겠다. 一層 우에 있는 二層 우에 있는 三層 우에 있는 屋上 庭園에 올라서 일층 위에 이층, 이층 위에 삼층, 삼층 위에 옥상, 그리고 그 옥상에는 정원(庭園)이 있다. 우리는 보통 아내를 ‘집’이라고 한다. 내 아내는 우리 집사람이다. 따라서 집에서 운동하는 것 혹은 이동하는 것은 부부가 서로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의 순서 혹은 단계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부가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는, 먼저 입을 맞추면서 서로의 사람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입을 맞추면서 서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일층이다. 첫 번째 단계다. 그 다음 남자는 아내의 유방을 애무한다. 그러면서 서로 서서히 흥분이 되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감정을 고조시켜 나간다. 따라서 입이 일층이라면, 유방은 이층이다. 두 번째 단계다. 다음으로 아내의 음부를 애무한다. 육체적 사랑을 위한 준비는 최고조에 이른다. 삼층이다. 세 번째 단계다. 이처럼 입에서 유방으로, 다시 유방에서 음부로 이동하면서,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는 성교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근이 여자의 음부를 향한다. 음부가 옥상이다. 옥상은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옥상에는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잘 가꾸어진 꽃과 풀과 나무가 있다. 초목이 자라는 정원은 음모가 나 있는 음부와 유사하다. 옥상 정원에 올랐다는 것은 아내의 음부에 남근을 삽입한다는 것이다. 南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北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해서 屋上庭園 밑에 있는 三層 밑에 있는 二層 밑에 있는 一層으로 내려간 즉 東쪽에서 솟아오른 太陽이 西쪽에 떨어지고 東쪽에서 솟아올라서 쪽에 떨어지고 東쪽에서 솟아올라 西쪽에 떨어지고 그런데 한참 열심히 하다가 남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북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남쪽은 따뜻한 곳이다. 뜨거운 곳이다. 아내와 화자 모두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았다. 북쪽은 차가운 곳이다. 추운 곳이다. 그런데 북쪽에도 아무것도 없다. 아내와 화자 모두 차갑게 식은 것도 아니다. 아마 한참 서로 육체적 사랑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아서 미지근한 상태다. 아내도 제대로 달아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열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음부 애무 아래 단계인, 유방 아래 단계인, 입으로 갔다. 화자는 입맞춤에서부터 유방 애무, 그리고 음부 애무, 그리고 삽입의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입에서부터 솟아올라 유방을 거쳐 음부에 이르렀을 때 뜨겁던 태양이, 한참 하다 보면 서쪽으로 떨어진다. 열기가 식어버린다. 그래서 다시 입에서 유방으로 유방에서 음부로 이동하면서 열기를 고조시키고, 하다 보면 또 떨어지고, 그래서 다시 입에서 유방을 거쳐 음부로 그리고 옥상에 올라보면 또 식어버리고~~. 열심히 운동한다. 이동한다. 東쪽에 솟아올라 하늘 한복판에 와 있기 때문에 時計를 꺼내 본 즉 서기는 했으나 時間은 맞는 것이지만 時計는 나 보담도 젊지 않느냐 하는 것보담은 나는 時計보다는 늙지 아니하였다고 아무리 해도 믿어지는 것은 필시 그럴 것임에 틀림없는 고로 나는 時計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동쪽에서 뜬 태양이 한복판에 와 있어서, 즉 사랑의 열기가 다시 가장 뜨겁게 고조된 상태가 되었기에, 시계를 꺼내서 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동하면서 운동했는가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 시계를 꺼내 본 것이다. 그랬더니 시계는 서기는 하였으나 맞는다. 그런데 시계는 나보담 젊지 않느냐 하는 것 보다는, 나는 시계보다는 늙지 아니하였다고 아무리 해도 그것이 믿어지는 것은 필시 그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서 시계는 화자보다 젊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시계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오래도록 멈춰 있다. 그러나 화자의 남근은 커졌다가는 이내 줄어들었다. 발기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했다. 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멈춰선 시계는, 발기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한 화자보다 젊다고 할 수 있다. 젊은이는 발기된 남근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화자가 시계보다 늙지 아니하였다고 말해도 그것이 믿어진다. 멈춰선 시계는 운동하지 않았으나, 화자는 여러 번 운동을 하였다. 입에서 유방으로 다시 음부로 그리고 삽입하여 노력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열심히 운동을 했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젊은 사람이고 잘 못하는 사람이 늙은이라면, 화자는 멈춰선 시계보다 운동을 많이 했으니까, 화자가 시계보다 늙지 아니 하였다고 하는 것도 또한 믿어진다. 그래서 화자는 시계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시계보다 늙지 않은 화자, 다시 입에서 유방으로 유방에서 음부로 음부에서 삽입으로, 일층에서 삼층 위 옥상까지 열심히 오르내리며 운동을 했다.   ​ ​ ▣   興行物天使   ――어떤後日譚으로―― 整形外科는여자의눈을찢어버리고形便없이늙어빠진曲藝象의눈으로만들고만것이다. 여자는실컷웃어도또한웃지아니하여도웃는것이다. 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 北極은초겨울이다. 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여자의눈은바닷개(海狗)잔등과같이얼음판위에미끄러져떨어지고만것이다. 世界의寒流를낳는바람이여자의눈을불었다. 여자의눈은거칠어졌지만여자의눈은무서운氷山에쌓여있어서波濤를일으키는것은不可能하다. 여자는大膽하게NU가되었다. 汗孔은汗孔만큼荊刺되었다. 여자는노래부른다는것이찢어지는소리로울었다. 北極은鐘소리에戰慄하였던것이다.        ◇ 거리의音樂師는따스한봄을마구뿌린乞人과같은天使. 天使는참새와같이瘦瘠한天使를데리고다닌다. 天使의배암과같은회초리로天使를때린다. 天使는웃은다. 天使는고무風船과같이부풀어진다. 天使의興行은사람들의눈을끈다. 사람들은天使의貞操의모습을지닌다고하는原色寫眞版그림엽서를산다. 天使는신발을떨어뜨리고逃亡한다. 天使는한꺼번에열個以上의덫을내어던진다.        ◇ 日曆은쵸콜레이트를늘인(增)다. 여자는쵸콜레이트로化粧하는것이다. 여자는트렁크속에흙탕투성이가된즈로오스와함께엎드러져운다. 여자는트렁크를運搬한다. 여자의트렁크는蓄音機다. 蓄音機는喇叭과같이紅도깨비靑도깨비를불러들였다. 紅도깨비靑도깨비는펜긴이다. 사루마다밖에입지않은펜긴은水腫이다. 여자는코끼리의눈과頭蓋骨크기만한水晶눈을縱橫으로굴리어秋波를濫發하였다. 여자는滿月을잘게잘게썰어서饗宴을베푼다. 사람들은그것을먹고돼지같이肥滿하는쵸콜레이트냄새를放散하는것이다. - 1931. 8 -   興行物 天使 / ――어떤 後日譚으로―― ‘흥행물 천사’는 축음기 레코드 판 속에서 노래하는 여자 가수다. 레코드판은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물건이다. 천사는 천국에서 인간 세계에 파견되어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使者)다. 축음기의 레코드판도 실제 가수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다. 부제 ‘――어떤後日譚으로――’는 축음기로 레코드판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썼다는 의미로도 보이고, 축음기로 레코드판의 노래를 듣고 난 뒤, 그 후에 벌어질 경과에 대하여 덧붙이는 이야기로 썼다는 의미로도 보인다. 整形外科는 여자의 눈을 찢어버리고 形便없이 늙어빠진 曲藝象의 눈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여자는 실컷 웃어도 또한 웃지 아니하여도 웃는 것이다. 정형외과는 여자 가수의 눈을 찢어버리고 형편없이 늙어빠진, 곡예하는 코끼리의 눈처럼 커다란 레코드판을 만들고 만 것이다. 레코드판은 커다란 코끼리의 검은 눈동자와 같다. 검은 눈동자에는 그 안에 검은 동공이 있는데, 이는 레코드판 전체가 커다란 코끼리의 눈과 같다면, 동공은 음악이 기록되지 않은 안쪽 부분이다. 코끼리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에는 홈이 주름처럼 새겨져 있다. 그래서 형편없이 늙어빠진 곡예상의 눈이다. 그래서 코끼리의 눈은 실컷 웃어도 또한 웃지 아니하여도 웃는 것이다. 주름 모양의 홈이 있으니 웃거나 웃지 않거나 웃는 모습처럼 보인다.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 北極은 초겨울이다. 여자 가수의 눈인 레코드판은 레코드 바늘과 위쪽에서 만났다. 위쪽이 북쪽이다. 북극은 초겨울이다. 레코드판 위에 처음 레코드를 재생하기 위해서 레코드 바늘을 올려놓으면 마치 북극에서 부는 바람과 같은 잡음이 들린다. 그 잡음 소리가 마치 초겨울에 부는 바람 소리 같다. 여자의 눈에는 白夜가 나타났다. 여자의 눈은 바닷개(海狗) 잔등과 같이 얼음판 위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 것이다. 여자 가수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에는 백야가 나타났다. 북극의 얼음판 위에 백야가 나타나면 햇빛이 얼음판에 반사되어 빛난다. 마찬가지로 레코드판에는 홈에 햇빛이 반사되어 마치 지평선 위에서 해가 비친 것처럼 햇빛이 반사된다.  마치 바닷개의 잔등과 같은, 눈의 흰자위에서 얼음판 위에 미끄러져 떨어진 눈동자처럼, 레코드판의 표면이 빛에 반사되어 빛난다. 世界의 寒流를 낳는 바람이 여자의 눈을 불었다. 여자의 눈은 거칠어졌지만 여자의 눈은 무서운 氷山에 쌓여 있어서 波濤를 일으키는 것은 不可能하다. 세계에 한류를 불러오는 북극의 바람과 같은 잡음이 레코드판에서 일었다. 그래서 여자 가수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은 주름이 있어 거칠어졌지만, 여자의 눈인 레코드판은 빙산과 같이 딱딱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바람에 의해서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는 大膽하게 NU가 되었다. 汗孔은 汗孔만큼 荊刺되었다. 여자는 노래 부른다는 것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北極은 鐘소리에 戰慄하였던 것이다. 여자 가수는 대담하게 NU가 되었다. 여자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가수가 된 것이다.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 여자 가수의 땀구멍은 땀구멍 수만큼 레코드 바늘로 찔렸다. 레코드 바늘이 찌르는 대로 레코드판 속의 가수는, 땀을 흘리는 듯이, 있는 힘을 다해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노래 부른다는 것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북극은 종소리에 전율하였던 것이다. 종소리의 파문처럼 나 있는 홈에, 레코드바늘이 얹히고, 홈의 요철을 따라 레코드 바늘이 지나가자, 마치 찢어지는 듯 절규하는 목소리로, 전율하는 듯 소리를 냈다. 거리의 音樂師는 따스한 봄을 마구뿌린 乞人과 같은 天使. 天使는 참새와 같이 瘦瘠한 天使를 데리고 다닌다. 거리의 음악사는 따스한 봄을 마구 뿌린 걸인과 같은 천사다. 따스한 봄은 쵸콜레이트가 잘 녹는 계절이고, 쵸콜레이트처럼 녹은 레코드판의 원료로 레코드판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레코드판을 거리에 마구 뿌리고, 그 뿌린 레코드판으로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마치 걸인과 같이 돈을 요구하면서 음악을 전해주는 천사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축음기 속의 가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요구하면서, 돈을 요구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마치 걸인과 같다. 축음기 속에서 노래 부르는 실제 가수는, 참새와 같이 수척한 천사, 참새와 같이 자그만 레코드판 속의 노래 부르는 가수를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그 가수를 흥행시켜서 돈을 벌고자 한다. 天使의 배암과 같은 회초리로 天使를 때린다. / 天使는 웃은다. 天使는 고무風船과 같이 부풀어진다. 천사의 똬리를 틀고 있는 배암과 같은 회초리로 천사를 때린다. 가수는 똬리와 같은 홈이 있는 레코드판을 찍어낸다. 천사는 돈이 많이 들어오니까 좋아한다. 천사는 부풀어진 고무풍선처럼 많은 돈을 번다. 天使의 興行은 사람들의 눈을 끈다. / 사람들은 天使의 貞操의 모습을 지닌다고 하는 原色 寫眞版 그림엽서를 산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천사의 노래는 사람들의 주위를 끈다. 사람들은 천사의 정조한 모습, 실제와 변함없는 모습을 지닌다고 하는, 그 원색 사진판 그림엽서 즉 원래 가수의 목소리를 그대로 찍어 놓은 레코드판을 산다. 天使는 신발을 떨어뜨리고 逃亡한다. 여자 가수는 자신의 자취만을 레코드판 속에 남겨 놓은 채 사라진다. 레코드판 속에 실제 여자 가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자취만 남겨진다. 신발을 떨어뜨리고 간 것은 자취만 남기고 간 것이다. 天使는 한꺼번에 열 個 以上의 덫을 내어 던진다. 여자 가수는 레코드판 하나에 열 개 이상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노래를 판 속에 실어 놓는다. 日曆은 쵸콜레이트를 늘인(增)다. / 여자는 쵸콜레이트로 化粧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레코드판을 많이 낸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레코드판을 새롭게 고쳐서 단장하는 것이다. 여자는 트렁크속에 흙탕투성이가 된 즈로오스와 함께 엎드러져 운다. 여자는 트렁크를 運搬한다. 여자 가수는 여자가 들어가는 큰 가방과 같은 축음기 속에서, 흙탕투성이가 된 속바지와 함께 엎드려서 운다. 축음기 속에는 많은 가수들의 레코드판이 들어가 재생된다. 따라서 그 축음기 속은 많은 가수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므로 흙이 많다. 그리고 축음기 속의 여자 가수는 레코드 바늘이 땀구멍을 찌를 때마다 땀을 흘리면서 마치 아파서 우는 것처럼 열심히 부른다. 그러니 흙과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흙탕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서양 여자들은 마치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속옷과 같은 팬티를 입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레코드판은 축음기 위에 납작하게 놓여 재생된다. 엎드러져 우는 것이다. 여자는 트렁크 즉 축음기를 운반한다. 레코드판을 재생하기 위해서는 축음기가 있어야 한다. 축음기를 운반해야 한다. 축음기를 사게 하는 것이다. 여자의 트렁크는 蓄音機다. / 蓄音機는 喇叭과 같이 紅도깨비 靑도깨비를 불러 들였다. 여자를 담는 큰 가방은 축음기다. 축음기는 소리를 크게 들리게 하는 나팔과 함께 홍도깨비와 청도깨비를 불러 들였다. 도깨비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어,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한다. 이렇게 축음기와 레코드판이 보급되자, 도깨비처럼 사람을 홀리는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가 모여들었다. 紅도깨비 靑도깨비는 펜긴이다. 사루마다밖에 입지 않은 펜긴은 水腫이다. / 여자는 코끼리의 눈과 頭蓋骨 크기만 한 水晶 눈을 縱橫으로 굴리어 秋波를 濫發하였다. 사람을 홀리는 가수는 펭귄과 같은, 하얀 와이셔츠에 턱시도를 입고 노래 부른다. 사루마다 즉 팬티밖에 입지 않고 노래 부르는 가수는 몸이 붓는 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납작한 레코드판에 들어갈 수가 없고, 노래 대신 몸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이다. 노래로 사람들의 관심을 살 수 없으니까 몸으로 사람을 홀리는 가수다. 여자 가수는 코끼리의 눈과 두개골 크기만 한, 수정처럼 딱딱한 레코드판을 종횡으로 굴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서 가로로, 그리고 밖에서 안쪽으로 세로로 눈을 굴리면서 사람들에게 추파를 남발하였다. 레코드판 속의 노래는 주로 이성을 유혹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는 滿月을 잘게잘게 썰어서 饗宴을 베푼다.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돼지같이 肥滿하는 쵸콜레이트 냄새를 放散하는 것이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보름달과 같은 레코드판을 홈을 따라서 잘게 썰어서 노래로 사람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잔치를 베푼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여자가 주는 노래를 먹고, 돼지 같이 돈을 버는 레코드판 냄새를 방산하는 노래를 부른다. 레코드판 속의 가수가 주는 노래에 가수는 돈을 벌고, 대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3. 三次角 設計圖 ​ ▣   線에關한覺書 1       1  2  3  4  5  6  7  8  9  0 1 ⦁ ⦁ ⦁ ⦁ ⦁ ⦁ ⦁ ⦁ ⦁ ⦁  2 ⦁ ⦁ ⦁ ⦁ ⦁ ⦁ ⦁ ⦁ ⦁ ⦁  3 ⦁ ⦁ ⦁ ⦁ ⦁ ⦁ ⦁ ⦁ ⦁ ⦁  4 ⦁ ⦁ ⦁ ⦁ ⦁ ⦁ ⦁ ⦁ ⦁ ⦁  5 ⦁ ⦁ ⦁ ⦁ ⦁ ⦁ ⦁ ⦁ ⦁ ⦁  6 ⦁ ⦁ ⦁ ⦁ ⦁ ⦁ ⦁ ⦁ ⦁ ⦁  7 ⦁ ⦁ ⦁ ⦁ ⦁ ⦁ ⦁ ⦁ ⦁ ⦁  8 ⦁ ⦁ ⦁ ⦁ ⦁ ⦁ ⦁ ⦁ ⦁ ⦁  9 ⦁ ⦁ ⦁ ⦁ ⦁ ⦁ ⦁ ⦁ ⦁ ⦁  0 ⦁ ⦁ ⦁ ⦁ ⦁ ⦁ ⦁ ⦁ ⦁ ⦁     (宇宙는冪에依하는冪에依한다)  (사람은數字를버려라)  (고요하게나를電子의陽子로하여라) 스펙톨   軸 X 軸 Y  軸 Z   速度 etc의 統制例컨대光線은每秒當三○○○○○킬로미터달아나는것이確實하다면사람의發明은每秒當六○○○○○킬로미터달아날수없다는法은勿論없다. 그것을幾千倍幾萬倍幾億倍幾兆倍하면사람은數十年數百年數千年數萬年數億年數兆年의太古의事實이보여질것이아닌가. 그것을또끊임없이崩壞하는것이라고하는가. 原子는原子이고原子이고原子이다. 生理作用은變移하는것인가. 原子는原子가아니고原子가아니고原子가아니다. 放射는崩壞인가. 사람은永劫인永劫을살수있는것은生命은生도아니고命도아니고光線인것이라는것이다.   臭覺의味覺과味覺의臭覺      (立體에의絶望에依한誕生)    (運動에의絶望에依한誕生)    (地球는빈집일境遇封建時代는눈물이나리만큼그리워진다) ― 1931. 10 ―     이 시는 무한히 팽창하며 펼쳐진 우주,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광선, 광선과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원자 물리학 등을 공부한 이상이, 광선을 중심으로 현대 서양의 과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시다. 제목 에서 ‘선’은 광선이다.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첫 번째 시로 적었다. 여기서 광선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상징한다. 이상한 그림 맨 처음에 나오는 숫자와 점들로 이루어진, 이상한 그림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를 나타낸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숫자들이 씌어 있고, 계속해서 그 숫자들이 증가하면서 무한히 펼쳐지는 우주를 형상한다.  (宇宙는 冪에 依하는 冪에 依한다) 이상 시인은 이 이상한 그림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봐서 친절하게도 아래에 괄호를 하고, 그 안에 몇 자 적어 놓았다. 서양의 과학에 의하면, 우주는 제곱에 의하는 제곱에 의한다고 했다. 제곱이 거듭 제곱되는 것에 의해서 무한히 펼쳐진다. 이러한 문제를 지금 이상 시인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數字를 버려라)  사람은 숫자를 버리라고 했다. 서양 과학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초당 30만 킬로미터로 우주를 향해 달아나고, 그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면,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볼 수 있고, 또 과거로 돌아가 젊어질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서양 학문에 따르면, 인간은 몇 살까지 산다는 숫자를 버려도 된다. 서양 학문에서는 숫자를 버리라고 한다. 또 서양의 과학인 양자역학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중심부에 양자가 있고, 양자의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간, 이를테면 80세, 90세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양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사람은 죽어서도 그 물질은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양자와 전자가 다른 형태로 우주의 어디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가 과연 옳은지를 지금 이상 시인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고요하게 나를 電子의 陽子로 하여라)  고요하게 나를 전자의 양자로 하라고 하였다. 서양의 현대 물리학적인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양자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인간도 결국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화자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옳은지 생각에 잠겨 있다. 스펙톨 스펙톨. 분광(分光). 물체에서 반사된 광선이 분광되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달아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광선이 사람의 몸에 닿으면 그 광선은 반사되어 우주로 날아간다. 그 날아가는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쫓아가면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수없이 많은 광선으로 분광되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 나누어져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것이 된다.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그 광선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우주에서 수없이 많은 같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과연 서양의 과학의 이론대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지금 화자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軸 X 軸 Y  軸 Z X축과 Y축과 Z축으로 이루어진, 삼차원의 입체 공간을 표현한 것이다. 우주는 삼차원의 입체 공간이다.   速度 etc의 統制 例컨대 光線은 每秒當 三○○○○○킬로미터 달아나는 것이 確實하다면 사람의 發明은 每秒當 六○○○○○킬로미터 달아날 수 없다는 法은 勿論 없다 속도 기타의 통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주 공간에서 속도와 기타 이를 통제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예컨대, 광선은 매초당 삼십만 킬로미터로 나아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사람의 발명 즉 사람이 발명한 타임머신과 같은 것은 매초당 육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나아갈 수 없다는 법을 논하지 말라는 것은 없다.  화자는 광선이 초당 삼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면, 인간이 만든 물건 즉 타임머신 같은 것이 육십만 킬로미터로 날아간다는 모형을 설정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발명품은 초당 육십만 킬로미터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勿論(물론)’이라는 글자 위에 강조점이 있다. 이것은 ‘논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것을 幾千倍 幾萬倍 幾億倍 幾兆倍하면 사람은 數十年 數百年 數千年 數萬年 數億年 數兆年의 太古의 事實이 보여질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발명품의 속도를 몇 천 배, 몇 만 배, 몇 억 배, 몇 조 배 높여서,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따라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수억 년, 수조 년의 아득한 옛날의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을 따라가면 아득한 옛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을 또 끊임없이 崩壞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原子는 原子이고 原子이고 原子이다.  태고로 가서, 또 거꾸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고, 죽고, 죽고, 죽고 하는 것을, 끊임없는 원자가 붕괴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원자는 다시 원자(붕괴의 근본이 되는 것)가 되고, 다시 원자가 원자가 되어야 한다. 즉 사람이 죽어서 붕괴하여 원자가 되고, 다시 그 붕괴한 원자가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고, 다시 그것이 붕괴하여 원자가 되고, 다시 그것이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수없이 반복하여야 한다. 원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데 그것이 어찌 다시 붕괴의 근원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어찌 죽음을 끊임없이 붕괴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生理作用은 變移하는 것인가. 原子는 原子가 아니고 原子가 아니고 原子가 아니다. 그러면 생리작용은 변하여 이동하는 것인가? 태고로부터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할 때, 그 태어나고 죽는 사람마다 생리작용이 다른데, 그러면 그 생리작용은 변이하는 것인가? 변이한다면 원자 붕괴의 근본이 되는 사람은 원자가 아니고, 원자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은 원자가 아니고, 또 다시 붕괴의 근원이 되는 그 사람은 원자로 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자는 모든 종류의 물질에서 동일한 성질을 띠는 것이기 때문이다.   放射는 崩壞인가 인간의 몸에서 출발하여 우주로 날아가는 광선을 쫓아가면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도 있고, 다시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광선이 사방을 반사되어 달아나는 것이 곧 물질이 붕괴하여 원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말인가. 광선이 우주를 향해 달아나는 것이 곧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永劫을 살 수 있는 것은 生命은 生도 아니고 命도 아니고 光線인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인간이 영겁을 살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사는 것도 아니고, 목숨이 사는 것도 아니고, 광선이라고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보다 빨리 우주로 나아가면 태고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인간이 영겁을 살 수 있는 것이 과연 광선에 있는 것인가.   臭覺의 味覺과 味覺의 臭覺 인간이 단순히 원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관점에서 존재를 설명한다면, 취각이 미각이 될 수도 있고, 미각이 취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후각도 물질로 이루어졌고, 후각을 구성하는 물질이 흩어졌다가 다시 미각으로 결합하면 후각이 미각이 된다. 그게 과연 그러한가. 현대 물리학적 이론에 대해서 이상 시인은 상당한 회의를 품은 채 생각하고 있다.   (立體에의 絶望에 依한 誕生)  (運動에의 絶望에 依한 誕生)  동양에서는 인간은 죽어서도 영원히 산다. 훌륭한 시를 쓴 사람은 그가 죽어서도 시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좋은 업적을 남긴 사람은 그가 죽은 후에도 역사 속에서 그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을 원자의 구성체로 보는 서양 과학의 사고는, 서양 사람들이 인간을 죽어서도 살 수 있는 존재로 볼 수 없는 절망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은 죽어서도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절망에서 인간을 쪼개서 원자로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살아서의 삶이 죽어서의 삶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절망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과 문화가 죽어서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자, 서양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도 그 사람에게서 방사된 광선은 계속하여 우주로 날아가고, 그 광선을 따라가면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는 괴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다. (地球는 빈집일 境遇 封建時代는 눈물이 나리만큼 그리워진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지구는 빈집이다. 서양의 현대 물리학에 따라서 인간을 본다면, 지구에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원자의 집합체, 물질의 집합체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는 빈집이다. 그렇다면 봉건시대 즉 현대 물리학이 없던 시대인 봉건시대, 인간을 단순한 물질 이상의 존재로 생각했던 봉건시대는 눈물이 날만큼 그리워진다. ​ ​   ▣   線에關한覺書 2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1 + 3 3 + 1   3 + 1 3 + 1 1 + 3     線上의一點 A 線上의一點 B 線上의一點 C   A + B + C = A A + B + C = B A + B + C = C   이선의교점 A 삼선의교점 B 수선의교점 C   3 + 1 1 + 3 1 + 3   3 + 1 3 + 1   1 + 3 3 + 1   3 + 1 1 + 3   1 + 3 1 + 3 3 + 1   (太陽光線은, 凸렌즈때문에收斂光線이되어一點에있어서爀爀히빛나고爀爀히불탔다. 太初의僥倖은무엇보다도大氣의層과層이이루는層으로하여금凸렌즈되게하지아니하였던것에있다는것을생각하니樂이된다. 幾何學은凸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死亡해버린오늘유크리트의焦點은到處에있어서人文의腦髓를마른풀과같이燒却하는收斂作用을羅列하는것에依하여最大의收斂作用을재촉하는危險을재촉한다. 사람은絶望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絶望하라.) ― 1931. 10 ―       이 시는 볼록렌즈와 볼록렌즈를 통과하여 한 점에 수렴하는 光線(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문명, 유클리드의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수학 등이, 인류의 다양한 사고를 말살시키고 결국 인류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생각을 표현한 시다. 이 시의 제목 는 선 즉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서 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광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광선은 서양 과학 문명의 상징이다.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1 + 3 3 + 1   3 + 1 3 + 1 1 + 3 위 숫자들로 이루어진 이상한 것은 전체적으로 볼록렌즈 모습을 하고 있다. 예전에 세로쓰기 할 때의, 이상의 시집에 나타난 모습하고는 방향이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는 가로쓰기를 한다. 그래서 위 숫자들, 그리고 숫자들로 이루어지는 그림을 가로쓰기 방식으로 적었기 때문에 원래 이상의 시집에 나오는 모습하고는 다소 다르다. 위 그림에서 오른쪽으로 90도 돌리면 윗면이 평평하고 아래고 볼록한 볼록렌즈가 되는데 원래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 있건 시를 이해하는 데는 전혀 불편을 주지 않아서 이렇게 썼다. 괜찮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이 볼록렌즈를 통과한 광선은 한 점으로 수렴된다.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모두 한 점에 수렴된다. 볼록렌즈의 초점에 모두 수렴된다. 그러면 이상 시인은 광선이 통과하는 볼록렌즈의 각 지점을 왜 ‘1+3’의 형태로 표현하였을까? 다른 숫자도 많은데 왜 1과 3의 숫자로 표기했을까? 1+3은 4가 되고 4=死(사)이다. 한 점에 수렴되는 광선은 모든 것을 태워 죽인다. 모든 것을 말살한다. 그래서 1과 3의 숫자로 표기했다. 서양문명으로 상징되는 볼록렌즈를 통과해서 한 점에 수렴되는 광선은 모든 인문적 정신을 말살하는 서양 학문의 상징이다.   線上의一點 A / 線上의一點 B / 線上의一點 C // A + B + C = A / A + B + C = B / A + B + C = C  // 이선의교점 A / 삼선의교점 B / 수선의교점 C 임의의 광선 하나가 볼록렌즈를 통과한다. 그 임의의 한 선상의 어느 한 점을 A라고 하자. 또 다른 광선의 선상의 임의의 한 점을 B라고 하자. 또 다른 광선의 선상의 임의의 점을 C라고 하자.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을 합해도 결국 A점을 통과한 광선과 같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한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A, B, C 세 점을 통과하는 광선을 합해도 결국 B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같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A, B, C 세 점을 통과하는 각각의 광선을 합해도 결국 C점을 통과하는 광선 하나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두 광선의 교점을 A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두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A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한 세 광선의 교점을 B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세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B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여러 광선의 교점을 C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여러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C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3 + 1 1 + 3 1 + 3   3 + 1 3 + 1   1 + 3 3 + 1   3 + 1 1 + 3   1 + 3 1 + 3 3 + 1 여기의 볼록렌즈는 처음의 볼록렌즈와 유사하다. 그러나 숫자가 조금 다르다. 숫자가 달라도 마찬가지다. 3+1을 통과한 광선이나, 1+3을 통과한 광선이나 어떤 숫자를 통과한 광선도 결국 한 점에 수렴된다. 그것이 볼록렌즈를 만든 서양 문명인 것이고, 그것이 서양 학문의 근본적 사고다.    (太陽光線은, 凸렌즈 때문에 收斂光線이 되어 一點에 있어서 爀爀히 빛나고 爀爀히 불탔다. 太初의 僥倖은 무엇보다도 大氣의 層과 層이 이루는 層으로 하여금 凸렌즈되게 하지 아니하였던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樂이 된다) 독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게도 괄호를 하고 자세히 설명을 했다. 볼록렌즈로 상징되는 서양 문명, 한 점으로 수렴되는 서양 문명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삭막한 문명인지를 독자들이 잘 알아들으라고 괄호를 하고 자세히 설명했다. 태양광선은, 볼록렌즈 때문에 수렴광선이 되어, 한 점에서 혁혁히 빛난다. 아주 밝게 빛난다. 그리고 혁혁히 불탄다. 아주 거세게 불타버린다. 태초의 요행 즉 이 지구가 처음 생겨날 때의 요행은 무엇보다도 대기의 층과 층, 이를테면 대기권 성층권 등이 이루는 층으로 하여 볼록렌즈가 되게 하지 아니하였던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즐거움이 된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광선을 대기의 각 층들이 한 점으로 수렴하도록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것이 볼록렌즈처럼 태양 광선을 한 점으로 모았다면 지구는 불타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래서 인류는 지구에서 살게 되었고, 다양하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인문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정신적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幾何學은 凸렌즈와 같은 불장난은 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 死亡해 버린 오늘 유크리트의 焦點은 到處에 있어서 人文의 腦髓를 마른 풀과 같이 燒却하는 收斂作用을 羅列하는 것에 依하여 最大의 收斂作用을 재촉하는 危險을 재촉한다 기하학은 볼록렌즈와 같은 불장난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양의 기하학은 모든 현상을 기하학적 사고로 해결한다. 인류의 모든 삶을 기하학에 수렴되고 그것으로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 한다. 볼록렌즈를 통과한 광선이 한 점에 수렴되면 그 곳에서 혁혁히 불타듯이, 인류의 다양한 삶을 기하학에 수렴시켜 해석하려는 서양문명은 다양한 문명을 태워 없애지 않을지 염려한다. 유클리드는 사망해 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유클리드의 초점은 도처에 있다. 원과 초점 이야기가 나오는 기하학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도처에 남아 있다.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사망 후에도 남아서 도처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따라서 인문의 뇌수로 이룩한 인문학의 정수들을 마른 풀과 같이 태우는 수렴 작용을 나열하는 것에 의해, 즉 모든 인문학을 유클리드 기하학 하나로 수렴하여 해결하는 것들에 의해, 더욱 더 수렴 작용을 재촉하는 위험을 점점 더 재촉하고 있다.   사람은 絶望하라. 사람은 誕生하라. 사람은 誕生하라. 사람은 絶望하라 따라서 화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볼록렌즈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대변되는 서양 문명에 대한 희망을 버려라. 그리고 새롭게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탄생하라. 동양의 학문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탄생하라. 동양 학문을 간절히 그리워하라. ​ ​ ​ ▣   線에關한覺書 3 3   2    1    •    •    •    1 •    •    •    2 •    •    •    3 ​ 1   2    3    •    •    •    3 •    •    •    2 •    •    •    1   ∴ nPn = n (n-1) (n-2) …… (n-n+1) (腦髓는부채와같이圓까지展開되었다. 그리고完全히回轉하였다) ― 1931. 10 ―     제목 는 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선은 광선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광선을 말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 이 시는 서양의 현대 학문의 상징인 기하학, 기하학 중에서도 원을 통하여, 서양의 현대문명이 인간이 이룩한 다양한 가치, 문화, 종교, 인문 등을 어떻게 말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따라서 이 시는 문명비판적인 시, 혹은 서구문명의 한계를 지적한 시라 할 것이다. 3   2    1    •    •    •    1 •    •    •    2 •    •    •    3 이 숫자와 점들을 기하학적으로 바라보면 부채꼴이다. 원의 중심을 기준으로 가로와 세로로 잘랐을 경우, 이 그림은 원의 오른쪽 위 부분에 해당하는 부채꼴이다. 다만 부채꼴에는 위에서 아래로 1, 2, 3 이라는 숫자가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 순서로 1, 2, 3 이라는 숫자가 있다. 그러한 부채꼴이다. 1   2    3    •    •    •    3 •    •    •    2 •    •    •    1 이 그림도 앞의 그림과 유사하다. 그러나 앞의 부채꼴과는 다른 부채꼴이다. 이 부채꼴은 앞의 부채꼴에 비해서 숫자가 다르다. 가로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3, 2, 1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고, 세로로 위에서 아래로 3, 2, 1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따라서 두 부채꼴은 서로 다르다.  만약 이것을 단순히 부채꼴로 보지 않고 인류의 다양한 사고, 문화, 역사, 삶, 인문 등으로 해석한다면 두 개의 부채꼴은 서로 다른 사고요, 문화요, 역사요, 삶이요, 인문이다. ∴ nPn = n (n-1) (n-2) …… (n-n+1) 위 그림 외에 또 다른 부채꼴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위에 있는 두 개의 부채꼴 외에도 다양한 부채꼴이 이 세상에는 더 존재한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서로 다른 부채꼴이 존재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nPn = n (n-1) (n-2) …… (n-n+1) 개만큼의 부채꼴이 존재한다. 만약 부채꼴을 우리의 사고와 문화와 역사로 본다면, 이 세상에는 (∴) nPn = n (n-1) (n-2) …… (n-n+1)   개만큼의 사고와 문화와 역사와 삶과 인문 등이 존재한다. 수학에 약한 분을 위해서 복잡한 수식을 설명하겠다. (사실 필자도 수학에 자신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들한테 물었다. 아들이 설명해 주어서 이해했다.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다.) 부채꼴의 호에 있는 숫자들을 보자. 만약 숫자가 n개 있다고 하면 부채꼴의 종류는 nPn 만큼 있는 것이다.  nPn은 n 개의 숫자에서 n 개만큼 뽑아서 이를 나열하는 방법의 수를 나타낸다. n! 만큼 다양한 부채꼴이 존재할 수 있다.  n! 은  n (n-1) (n-2) …… (n-n+1) 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서로 다른 부채꼴이 존재하며,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서로 다른 사고와 문화와 역사와 삶과 인문 등이 존재한다.   (腦髓는 부채와 같이 圓까지 展開되었다. 그리고 完全히 回轉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혹은 수학을 생각해 낸 그들의 뇌수 즉 사고는 부채와 같이 펼쳐져서, 원까지 전개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회전하였다. 서로 다른 숫자가 적힌 다양한 부채꼴을 회전시켜 보라. 그러면 다양한 숫자가 적힌 부채꼴은 각각의 다른 부채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으로 존재한다. 동일한 모양의 원이 된다. 부채꼴 호에 아무리 다양한 숫자가 적혀도 이를 회전하면 부채꼴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하나의 원만 남는다. 이처럼 다양한 것을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설명하려 드는 서양의 학문이나 과학은 인류의 다양한 가치, 사고, 역사, 문화, 인문 등을 모두 말살하고, 이를 하나의 원으로 단순화시킨다. 이것이 서양 학문의 특성이다. 이러한 서양 문명은 결국 인류의 다양한 인문 정신을 말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서양 과학의 핵심은 귀납추리에 의한 일반화, 추상화에 있다. 다양한 사례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 드는 것이 서양의 학문이요 문명이다. 이러한 사고는 일견 위대해 보이지만, 개별적인 것들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정신을 낳을 우려가 있다. 시인은 서양적 학문과 문명의 이러한 점을 우려하여 이와 같은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는 서구문명 혹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라 할 것이다. ​ ​   ▣   線에關한覺書 4            (未定稿)     彈丸이一圓壔를疾走했다 (彈丸이一直線으로疾走했다에있어서의誤謬等의修正)   正六雪糖 (角雪糖을稱함)   瀑筒의海綿質塡充 (瀑布의文學的表現) ― 1931. 10 ―                                                          제목 는 광선에 관해서 깨달은 것을 적은 것이다. 광선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의 상징이다. 이 시는 서양의 학문과 과학적 사고가 인류의 다양한 정신적 가치들을 말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제목 밑에 미정고(未定稿)라고 적혀 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원고라는 의미로 보인다. 아니면 원래는 미정고로서 확정되지 않은 원고인데, 이를 정리하여 발표하면서, 미정고라는 말을 지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시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미정고라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   彈丸이 一圓壔를 疾走했다 (彈丸이 一直線으로 疾走했다에 있어서의 誤謬等의 修正) 만약 우리가 서서, 전방을 향하여 총을 한 방 쏘았다고 하자. 우리는 보통 그것을 탄환이 일직선으로 빠르게 달려갔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을 서양의 현대 과학적 입장에서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한다. 탄환이 일직선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고, 탄환이 둥근 지구의 언덕을 따라서 빠르게 달려갔다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탄환도 자연히 둥근 지구의 언덕을 따라서 날아갔다는 것이다.   正六雪糖 (角雪糖을 稱함) 지금 화자는 앞에 각설탕, 정육면체의 각설탕을 놓고 생각에 잠긴다. 이 각설탕을 맑은 물이 든 유리컵에 넣었다고 상상해 보자. 컵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각설탕은 뽀글뽀글 하얀 공기를 뿜어내면서 가라앉게 되고, 마침내 녹아서 설탕물이 된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서양의 과학으로는, 각설탕의 입자 사이의 공극에 물이 침투하게 되고, 그 결과 공극에 있던 공기가 밖으로 빠져 나오고, 설탕이 녹은 것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이것이 설탕이 녹는 현상을 설명하는 서양 과학의 발상이다.   瀑筒의 海綿質 塡充 (瀑布의 文學的 表現) 그렇다면, 마치 각설탕이 물이 든 컵의 바닥으로 떨어질 때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면서 녹는 것처럼, 하얀 물거품을 내면서 떨어지는 저 폭포는, 해면질로 된 지구의 공극을 메우기 위해서 저렇게 하얀 물거품을 뿜으면서 떨어지는 것이란 말인가. 폭포를 보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떨어지는 폭포를 보면서, 서양의 과학적 설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아름다움과 장엄함과 그리고 거센 기세와 자신을 투신하는 헌신 등의 다양한 문학적 상상, 인문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 학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각설탕이 컵에서 녹는 방식으로만 설명한다. 따라서 서양의 과학적 사고는 결국 우리의 다양한 인문적 사고를 말살시키는 한계를 가진 것이다. ​ ​ ​ ▣   線에關한覺書 5   사람은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면사람은光線을보는가. 사람은光線을 본다. 年齡의眞空에있어서두번결혼한다. 세번結婚하는가. 사람은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 未來로달아나서過去를본다. 過去로달아나서未來를보는가. 未來로달아나는것은過去로달아나는것과同一한것도아니고未來로달아나는것이過去로달아나는것이다. 擴大하는宇宙를憂慮하는자여, 過去에살으라. 光線보다도빠르게未來로달아나라. 사람은다시한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보다젊은나에게적어도相逢한다. 사람은세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젊은나에게적어도相逢한다. 사람은適宜하게기다리라. 그리고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퓌스트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 速度를調節하는사람은나를모은다. 無數한나는말(譚)하지아니한다. 無數한過擧를傾聽하는現在를過擧로하는것은不遠間이다. 자꾸反復되는過去. 無數한過去를傾聽하는無數한過去. 現在는오직過去만을印刷하고過去는現在와一致하는것은그것들의複數의境遇에있어서도區別될수없는것이다. 聯想은處女로하라. 過去를現在로알라. 사람은옛것을새것으로아는도다. 健忘이여. 永遠한忘却은忘却을求한다. 到來할나는그때문에無意識中에사람에一致하고사람보다도빠르게나는달아난다. 새로운未來는새로웁게있다. 사람은빠르게달아난다. 사람은光線을드디어先行하고未來에있어서過去를待期한다. 于先사람은하나의나를맞이하라. 사람은全等形에있어서나를죽이라. 사람은全等形의體操의技術을習得하라. 不然이라면사람은過去의나의破片을如何히할것인가. 思考의破片을反芻하라. 不然이라면새로운것은不完全이다.聯想을죽이라. 하나를아는者는셋을아는것을하나를아는것의다음으로하는것을그만두어라. 하나를아는것의다음은하나의것을아는것을하는것을있게하라.  사람은한꺼번에한번을달아나라. 最大限달아나라. 사람은두번分娩되기前에xx되기전에祖上의祖上의祖上의星雲의星雲의星雲의太初를未來에있어서보는두려움으로하여사람은빠르게달아나는것을留保한다. 사람은달아난다. 빠르게달아나서永遠에살고過去를愛撫하고過去로부터다시그過去에산다. 童心이여. 童心이여. 充足될수야없는永遠의童心이여. ― 1931. 10 ―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정하고 이 시를 읽어 보자. 나의 몸에서 반사되어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그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간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무수한 나를 만날 수 있다. 조금 전의 나도 만날 수 있고, 어제의 나도 만날 수 있고, 작년의 나도 만날 수 있고, 10년 전의 나도 만날 수 있다. 10년 전의 나로부터 반사된 광선은 지금도 우주의 어딘가를 초당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아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을 전제로 해서 이 시를 읽어 보자. 그러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처음 한 연만 읽어 보겠다. 사람은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면 사람은 光線을 보는가. 사람은 光線을 본다. 年齡의 眞空에 있어서 두 번 결혼한다. 세 번 結婚하는가. 사람은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라.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쫓아서 타임머신을 타고 빠르게 따라가면 사람은 그 광선을 보는가. 사람은 광선을 본다. 달아나는 광선보다 빨리 따라가면 볼 수 있다. 연령의 진공에 있어서 즉 나이를 먹지 않는, 따라가서 본 광선에서 우리는 두 번 결혼한다. 한 번은 현실에서 결혼하고, 한 번은 그 광선에서 결혼하는 것을 본다. 세 번 결혼하는가? 현실에서 한 번 결혼하고, 광선에서 한 번 결혼하던 것을 보고, 아니 그 이전의 광선을 본다면, 그 광선이 시간이 지나면서 또 결혼을 할 것이고, 그렇다면 세 번 결혼을 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서양 학문에 의하면 광선을 따라가면 과거의 자신과 만날 수 있고, 또 과거로 돌아가서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는 독자들이 읽어 보라.) ​ ​ ​ ▣  線에關한覺書 6 數字의方位學      數字의力學   時間性(通俗思考에依한歷史性)   速度와座表와速度   +   +   +   +   etc   사람은靜力學의現像하지아니하는것과同一하는것의永遠한假說이다. 사람은사람의客觀을버리라.   主觀의體系의收斂과收斂에依한凹렌즈    第四歲    一千九百三十一年九月十二日生    陽子核으로서의陽子와陽子와의聯想과選擇   原子構造로서의一切의運算의硏究   方位와構造式과質量으로서의數字의性態性質에依한解答과解答의分類   數字를代數的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的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인것으로하는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疾患의究明과詩的인情緖의棄却處)   (數字의 一體의性態  數字의一切의性質  이것들에依한數字의語尾의活用에依한數字의消滅)   數式은光線과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는사람에依하여運算될것.   사람은별 ―― 天體 ―― 별때문에犧牲을아끼는것은無意味하다. 별과별과의引力圈과引力圈과의相殺에依한加速度函數의變化의調査를爲先作成할 것 ​ ― 1931. 10 ― ​ ​ 제목 는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적은 것이다. 여기서 광선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상징이다.   數字의 方位學 / 여기에 사용된 ‘’는 일단 방위를 나타내는 기호다. ‘’는 위쪽의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는 왼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는 오른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은 아래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다.   數字의 力學  이제 ‘’는 숫자를 나타낸다. 따라서 ‘’는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時間性(通俗思考에 依한 歷史性) 이제 ‘’은 시간성과도 관련이 있다. 시간의 흐름, 통속적으로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과도 관련이 있는 기호다.  速度와 座表와 速度 / +/+/+/+/ etc 이제 속도와 좌표와 그리고 속도의 관계 속에서 아래 기호들을 생각해 보자. 화자는 서양의 과학 혹은 수학과 관련된 속도와 좌표와 그리고 속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방위의 역학, 숫자의 역학, 그리고 시간성 즉 우리가 통속적으로 역사성이라고 말하는 그 시간성이 포함된다. ‘+’은 평면 좌표에서 오른쪽(방위의 역학)으로 4(숫자의 역학)만큼 갔다(시간성)가, 다시 왼쪽(방위의 역학)으로 4(숫자의 역학)만큼 간(시간성) 것을 나타냅니다. 서양의 학문에서는 이러한 경우,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므로, 그것은 결국 아무 방향으로도, 또 얼마만큼도 움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자리에 있었던 것과 같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4만큼 돌아온 것은, 원래 제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4+(-)=0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에서는 이러한 경우 분명히 오른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있었고, 다시 왼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서양 학문에서는 좌표 평면에서, 4+(-4)=0이라고 하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4만큼 간 행위를 처음부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행위와 동일시한다. 이것이 서양 학문이 우리 인간의 삶에 적용되었을 때의 잘못된 점이다. 나머지 +,+,+도 마찬가지다. 왼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는 ‘+’, 위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아래로 4만큼 간 ‘+’, 아래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위로 4만큼 간 ‘+’은 모두 처음의 제자리에 돌아오기 때문에 아무런 행위가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제자리에 돌아왔어도 각각 왼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일어났고, 나머지도 각각 마찬가지다. 심지어 서양의 학문에서는 ‘+’과 ‘+’과 ‘+’과 ‘+’을 모두 같은 것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원래의 위치에서 모두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etc 즉 기타 다른 것도 방위의 역학, 숫자의 역학, 그리고 시간성 속에서 서양의 학문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보다 빠른 속도로 가면 과거의 나의 모습은 볼 수 있고 젊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나로부터 출발한 광선을 쫓아간다고 해서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젊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靜力學의 現像하지 아니하는 것과 同一하는 것의 永遠한 假說이다. 사람은 사람의 客觀을 버리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4보를 걸어간 다음 뒤로 돌아서서 다시 4보를 걸었다고 하자. 이것을 서양의 학문 방식으로 수식화하면 4+(-4)=0이 된다. 그렇다면 서양식 학문에서는 제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처럼 서양 학문은, 제자리에 다시 돌아왔다고 해서, 그것을 움직이지 않은 것과 동일시하는 영원한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에 대한 객관을 버려야 한다. 사람 즉 인간의 행위는 서양 학문에서 말하는 식으로 객관화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4보 갔다가 뒤로 돌아서 4보를 간 행위를 객관화하여 서양학문에서는 4+(-4)=0 이니까 결국 제자리에 서 있었던 것과 동일하다고 객관화하여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객관화가 타당하지 않다. 사람에 있어서는 서양 학문식의 객관을 버려야 한다. 主觀의 體系의 收斂과 收斂에 依한 凹렌즈 /第四歲 /  一千九百 十一年 九月 十二日生 / 陽子核으로서의 陽子와 陽子와의 聯想과 選擇  주관의 체계의 수렴과 그리고 수렴에 의한 오목렌즈. 주관의 체계는 같은 것을 놓고도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각자의 주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 사고는 하나의 현상을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보고, 또 각각이 본 것을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오목렌즈와 같다. 오목렌즈는 다양한 광선을 받아들여 수렴시키지 않는다. 각각의 광선을 받아들이되 이를 수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광선에 따라 발산시킨다. 예를 들어 4라는 수자를 생각해 보자. 개인의 주관적 사고로 4를 바라보면 그것은 나이가 4살 이라는 의미로도 파악된다. 또 4는 일천구백삼십일 년 구월 십이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날짜에 탄생한 넷째 동생을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4는 양자 핵으로서의 양자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양자의 관계로도 연상할 수 있다. 그리고 4라는 것은 개인의 주관에 의해서 선택되어 다양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原子構造로서의 一切의 運算의 硏究 / 方位와 構造式과 質量으로서의 數字의 性態 性質에 依한 解答과 解答의 分類 서양 학문에서는, 일체를 원자 구조로서의 운산으로 연구한다. 모든 것을 원자의 집합체로 보고 연구하는 것이다. 또 방위와 그것을 구조식으로 나타내는 것을 연구한다. 질량으로서의 본성의 모습과 본성의 바탕에 대해서 숫자로 그 해답과 해답을 분류한다. 그것이 서양의 현대적 학문이다.   數字를 代數的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的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인 것으로 하는 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 疾患의 究明과 詩的인 情緖의 棄却處) 서양의 학문은 숫자를 대수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즉 숫자를 어떤 것을 대신하여 표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 연구한다. 즉 숫자를 숫자적인 것 자체로 연구하고 표시하고 사용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따라서 모든 것을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그것은 어떠한 서양 학문 이를테면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등 어디에서건 마찬가지다. 따라서 왜 서양 사람들은 1,2,3,4,5,6,7,8,9,0의 숫자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하는지 그 질환의 규명이 필요하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서양 학문은 시적인 정서의 소각처가 된 것이다.   (數字의 一體의 性態  數字의 一切의 性質  이것들에 依한 數字의 語尾의 活用에 依한 數字의 消滅) 모든 것을 태도를 숫자로 파악하는 성향, 모든 성질의 바탕을 숫자로 파악하려 하는 것들에 의해서 숫자의 어미 즉 모든 것에 숫자가 꼬리처럼 달리는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은 숫자로 수렴되어 소멸되고 만다.   數式은 光線과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는 사람에 依하여 運算될 것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초당 삼십만 킬로미터로 나아가고, 만약 사람이 이 광속보다 더 빠른 기계, 이른바 타임머신을 타고 가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시간도 되돌려서 우리는 다시 젊어질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수식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달아나는 광선과 그 광선보다 빠르게 타임머신을 타고 쫓아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 의해서 연산되어야 한다. 이제부는 숫자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운행되고 계산되어야 한다.   사람은 별 ―― 天體 ―― 별 때문에 犧牲을 아끼는 것은 無意味하다. 별과 별과의 引力圈과 引力圈과의 相殺에 依한 加速度 函數의 變化의 調査를 爲先 作成할 것 사람이 별 즉 천체 때문에 희생을 아끼는 것은 무의미하다. 서양 과학자들이 별 곧 천체는 무한히 펼쳐진 진공 상태의 우주의 공간에 떠 있는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에 대고 돼지 소 등을 잡고 이를 제물로 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즉 천체를 주관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서양의 과학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별―― 천체 ――별’을 잘 관찰해 보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서양 사람이 별에 대해서 어떻다는 확신을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에 소나 돼지를 잡고 제사지내는 것을 미신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서양 사람들의 사고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희생을 아끼는 주체’가 우리가 될 수도 있고, 서양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과 ‘――’을 이상 시인이 그냥 심심해서 썼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서양 학문의 관점에서 바라본 별과, 동양적 사고에 의해서 바라본 별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그 가치를 상쇄시키는지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숫자로 파악한 서양 학문에서 바라본 별과, 인문학적으로 바라본 동양의 별이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인간의 삶을 말살하는지를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서양의 과학적 사고와 동양의 인문학적 사고가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서로의 가치를 얼마나 상쇄시키는지를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결국 시인은 서양의 과학이 인간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 ​ ​ ▣   線에關한覺書 7 空氣構造의速度―音波에依한―速度처럼三百三十미터를模倣한다 (光線에比할때참너무도劣等하구나) 光線을즐기거라. 光線을슬퍼하거라. 光線을웃거라. 光線을울거라. 光線이사람이라면사람은거울이다. 光線을가지라. ―― 視覺의이름을가지는것은計劃의嚆矢이다. 視覺의이름을發表하라. □ 나의이름 △ 나의안해의이름 (이미오래된過去에있어서나의 AMOU ―REUSE는 이와같이聰明하도다.) 視覺의이름의通路는설치하라. 그리고그것에다最大의速度를附與하라. ―― 하늘은視覺의이름에對하여서만存在를明白히한다 (代表인나는代表인一例를들것) 蒼空, 秋天, 蒼天, 靑天, 長天, 一天, 蒼穹 (大端히갑갑한地方色이나아닐는지) 하늘은視覺의이름을發表했다. 視覺의이름은사람과같이永遠히살아야하는數字的인어떤一點이다. 視覺의이름은運動하지아니하면서運動의코오스를가질뿐이다. ―― 視覺의이름은光線을가지는光線을아니가진다. 사람은視覺의이름으로하여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날필요는없다. 視覺의이름을健忘하라. 視覺의이름을節約하라. 사람은光線보다빠르게달아나는速度를調節하고때때로過去를未來에있어서淘汰하라. ― 1931. 10 ― ​ ​ 空氣構造의 速度 ― 音波에 依한 ― 速度처럼 三百三十미터를 模倣한다 (光線에 比할 때 참 너무도 劣等하구나) 인간의 주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동양의 학문은 각 개인의 주관적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그것은 마치 대기 속에서 전파되는 음파처럼 대상을 파악하는 속도가 느리다. 반면 객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서양의 학문에서는 어떤 대상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파악하고 표시한다. 따라서 서양 학문은 마치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광선처럼 대상을 빠르게 인식한다. 예를 들어 보자. 홍길동이가 한 달에 10만원씩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장길산이도 한 달에 10만원식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그리고 성춘향이도 한 달에 10만원씩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홍길동이는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고, 장길산이는 자기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다. 그리고 성춘향이는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다.  이 경우 동양적 사고에서는 홍길동이의 저금과 장길산이의 저금과 성춘향이의 저금을 각각 다르게 본다.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과 집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과 자식을 가르치기 위한 저축을 서로 다른 가치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금의 의미가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서양의 학문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고자 한다. 홍길동이를 A라고 하고, 장길산이를 B라고 하고, 성춘향이를 C라고 한다면, 이들이 저금한 것을 각각 이렇게 파악한다. A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B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C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따라서 홍길동이 저축한 것이나 장길산이 저축한 것이나 성춘향이가 저축한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아니 서양 학문의 관심은 저축한 금액이 같다는 것에만 주로 주목한다. 이처럼 동양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은 그 주목의 대상이 다르다. 따라서 ‘공기 구조의 속도’는 동양적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개인의 주관적 인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일견 서양식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디고 느린 것으로 보인다. 마치 소리가 공기 속에서 초당 340미터 전파되듯이 느리게 파악된다.  이에 비해서 서양 학문에서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하고, 기호화하여 파악하려고 하고,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파악하는데 관심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저축은 '매달 저축액 x 일 년 중의 달의 수 x 저축한 햇수'로 파악한다. 그래서 10만 x 12달 x 5년 = 600만원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은 마치 빠른 광선처럼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에 적용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빠르다. 동양적 학문은 어쩌면 서양 학문에 비해서 너무 열등하고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光線을 즐기거라. 光線을 슬퍼하거라. 光線을 웃거라. 光線을 울거라. 서양 학문이 편리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광선을 즐겨라. 그러나 그 서양 학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서양적 사고에 대해서 슬퍼해야 한다. 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 학문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서양 학문을 제대로 알면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다양성을 말살하는지를 알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참으로 서양 학문을 슬퍼해야 할지 모른다. 光線이 사람이라면 사람은 거울이다. // 光線을 가지라. // ―― 서양 과학에서는,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우리가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 광선이 진짜 사람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거울에 불과하다. 거울에 비친 허상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을 도식화, 기호화, 추상화하여 인식하고자 하는 서양 학문에서 그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삶은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 서양 학문이 좋은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광선과 같은 허상을 가져라. 그리고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라. ―― 과연 그 광선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가. 서양 학문에서 말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 視覺의 이름을 가지는 것은 計劃의 嚆矢이다. 視覺의 이름을 發表하라. // □ 나의 이름 // △ 나의 안해의 이름 (이미 오래된 過去에 있어서 나의 AMOUREUSE는 이와 같이 聰明하도다.) ‘시각의 이름’을 가지는 것 어떤 것을 계획하는 맨 처음이다. 서양 학문은 어떤 것을 계획할 때, 그 대상을 기호화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서양 학문에 따르면 먼저 시각의 이름을 발표해야 한다. 자, 지금부터 시각의 이름을 갖자. □은 나의 이름이라 하자. △은 나의 아내의 이름이라 하자. 이미 오래 된 과거에 화자는 이처럼 총명하게 시각의 이름을 발표했었다. 이를테면 , 라는 시에서 이미 시각의 이름을 발표한 적이 있다. 視覺의 이름의 通路는 설치하라. 그리고 그것에다 最大의 速度를 附與하라. // ―― 시각의 이름으로 기호화한 것이 두루 미칠 수 있는 길은 마련해 놓아라. 그리고 그것에다 최대의 속도를 부여하라. 가장 간단히 하라는 말이다. 간단한 것은 가장 빠르게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 그러나 과연 이러한 서양식 학문이 대상을 제대로 보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하늘은 視覺의 이름에 對하여서만 存在를 明白히 한다 (代表인 나는 代表인 一例를 들 것) // 蒼空, 秋天, 蒼天, 靑天, 長天, 一天, 蒼穹 (大端히 갑갑한 地方色이나 아닐는지) 하늘은 視覺의 이름을 發表했다. 서양 학문에 따르면, 하늘은 시각의 이름에 대해서만 존재를 명백히 한다. 여기서 ‘시각의 이름’은 모든 구체적인 것들을 대표하는, 가장 간단한 기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전을 찾아보면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이다’라고 나온다. 서양식 학문에서는 이것만이 가장 객관적으로 하늘의 존재를 명백히 한다고 한다. 여기서 ‘하늘’은 모든 하늘을 대표하는 하늘이다. 그래서 화자도 모든 자신을 대표하는 화자가 하나의 예를 들고자 한다. 하늘 하면, ‘蒼空(창공)’도 있고, 秋天(추천)도 있고, 蒼天(창천)도 있고, 靑天(청천)도 있고, 長天(장천)도 있고, 一天(일천)도 있고, 蒼穹(창궁)도 있다. 이렇게 하늘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은, 서양식 학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히 갑갑한 촌스러운 것이나 아닐는지 모른다. 그래서 드디어 하늘에 대한 시각의 이름을 발표했다.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이라고. (여기서 보면 서양 학문은 바로 하나의 현상을 다양하게 인식하는 주관적 인식을 배제한다. 따라서 인간의 대상에 대한 주관적으로 인식해온 것들을 말살하는 역할을 한다.) 視覺의 이름은 사람과 같이 永遠히 살아야 하는 數字的인 어떤 一點이다. 視覺의 이름은 運動하지 아니하면서 運動의 코오스를 가질 뿐이다. // ―― 시각의 이름은,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수자적인 일점이다.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하므로 항구적으로 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다. 또 숫자적인 어떤 하나의 점과 같이 간단히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시각의 이름은 운동 즉 이동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의미가 변하지 않고, 그 의미가 고정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각의 이름은 그 자체는 이동하지 않으면서도 이동의 속성을 가진다. 그 자체의 의미는 움직이지 않으나, 그것은 다른 구체적인 것들에 두루 이동하면서 적용되어야 하는 속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넓이를 S라 하고, 밑변의 길이를 a라고 하고, 높이를 h라고 한다면, ‘S=ah/2’이다. 이 공식이 바로 시각의 이름이다.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숫자적 일점과 같이 간단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이것은 다른 구체적인 삼각형들에도 두루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동의 코스를 가진다.  ‘――’ 화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視覺의 이름은 光線을 가지는 光線을 아니 가진다. 사람은 視覺의 이름으로 하여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날 필요는 없다. 시각의 이름은 광선을 가지는 그 광선을 갖지 아니한다. 광선은 구체적인 사물만이 갖는다. 따라서 시각의 이름은 구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시각의 이름은 광선이 없는 허구적인 것이기에, 사람은 시각의 이름으로 하여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날 필요는 없다. 사람은 그 허구적인 서구 이론으로 인하여 거기에 매달려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視覺의 이름을 健忘하라. // 視覺의 이름을 節約하라. // 사람은 光線보다 빠르게 달아나는 速度를 調節하고 때때로 過去를 未來에 있어서 淘汰하라. 시각의 이름을 과감하게 잊어라. 시각의 이름을 절약하라. 사람은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나는 속도를 조절하고, 때때로 과거를 미래에 있어서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라. 여기서 시각의 이름을 과감하게 잊고, 절약하고 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시각의 이름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양의 학문에서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가변적인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불변의 영원한 진리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대기 속에서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별을 보면서 꿈을 꾸기도 하고, 달을 보면서 임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별’은 빛을 관측할 수 있는 천체 가운데 성운처럼 퍼지는 모양을 가진 천체를 제외한 모든 천체를 의미할 뿐이고, ‘달’은 지구의 위성으로서 햇빛을 반사하여 밤에 밝은 빛을 내고, 표면에 많은 분화구가 있으며 대기는 없는, 공전 주기는 27.32일, 반지름은 1,738km인 것을 가리킬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별을 보면서 미래를 꿈꾸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달을 보면서 멀리 있는 임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양식의 별과 달의 개념을 잊거나, 절약하거나, 혹은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기에서 우리 삶을 적용시켜서 바라볼 때, 인간의 다양한 정신, 감정, 문화는 이룩되는 것이다. 서양적 학문이 만능은 아닌 것이다.       4. 建築 無限 六角面體   ▣   AU MAGASIN DE NOUVEAUTES ​ 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 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 비누가通過하는血管의비눗내를透視하는사람. 地球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儀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 去勢洋襪. (그女人의이름은워어즈였다.) 貧血緬絲. 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平行四邊形對角線方向을推進하는莫大한重量. 마르세이유의봄을解纜한코티의香水의마지한東洋의가을快晴의空中에鵬遊하는Z伯號. 蛔蟲良藥이라고씌어있다. 屋上庭園. 猿猴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무아젤. 彎曲된直線을直線으로疾走하는落體公式. 時計文字盤에Ⅻ에내리워진一個의浸水된黃昏. 도아―의內部의도아―의內部의鳥籠의內部의카나리야의內部의嵌殺門戶의內部의인사. 食堂의門깐에方今到達한雌雄과같은朋友가헤어진다. 파랑잉크가엎질러진角雪糖이三輪車에積荷된다. 名啣을짓밟는軍用長靴. 街衢를疾驅하는造花金蓮.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저여자의下半은저남자의上半에恰似하다. (나는哀憐한邂逅에哀憐하는나) 四角이난케―스가걷기始作이다. (소름끼치는일이다.) 라지에―타의近傍에서昇天하는굿빠이. 바깥은雨中. 發光魚類의群集移動. - 1932. 7 -     AU MAGASIN DE NOUVEAUTES ‘MAGASIN’은 프랑스어로 상점이다. ‘NOUVEAUTES’는 새롭다, 참신하다, 신기하다는 의미다. ‘AU MAGASIN DE NOUVEAUTES’는 신기한 상점 혹은 새로운 상점이라는 정도의 의미다. 화자는 서양 영화를 본 것 같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내용이 서사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화자는 서양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그것을 시로 쓴 것 같다. 구체적으로 서양의 어느 영화인지는 필자로서 확인할 길이 없다. 서양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시인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에서는 창녀를 사고자 한다면 창녀가 있는 사창가로 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창녀가 자동차를 타고 손님이 부르는 곳으로 가는가 보다. 이것을 시인은 ‘AU MAGASIN DE NOUVEAUTES’ 즉 신기한 상점이라 말하고 있다.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 창녀는 사각형 건물의 내부에 있는, 사각형으로 된 출입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이층으로 올라 간 다음, 사각형으로 된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거실에서 다시 사각형으로 된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 방 안에는 사각형의 침대가 있다. 창녀가 들어간 집은 연립주택 형태의 이층일 것으로 보인다. 커다란 사각형의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도어 안으로 들어가서 이층으로 올라가면 다시 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그 집을 들어가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방으로 들어가면 사각형의 침대가 있다. 창녀는 어느 남자의 주문을 받고 그 사람이 사는 집의 방으로 들어갔고, 그 방안에는 최종적으로 침대가 있는 것이다. 四角이 난 圓運動의 四角이 난 圓運動의 四角이 난 圓 사각형의 침대 위에는 남자가 있다.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은 발기되어 끄덕거리는 남자의 남근이다. 발기된 남근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둥근 원의 모양이다. 그런데 남근은 원이면서도 사각이 나서, 움직이고자 하지만 굴러가지 못한다. 끄덕끄덕 하는 것은 마치 둥근 원 모양의 남근이 굴러가고자 하지만, 사각이라서 굴러가지 못하고, 들썩거리기만 하는 모습이다. 비누가 通過하는 血管의 비눗내를 透視하는 사람. 이 사람은 창녀를 보자,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기에 적당한 매력적인 여자인지, 그녀의 몸을 투시한다. 옷 속에 감춰진 그녀의 몸을 투시하여, 성욕을 해결하기에 알맞은 여자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비누가 통과하는 혈관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성욕의 때를 씻고자 하는 욕망의 움직임이다. 옷을 오래 입으면 때가 끼듯이, 성욕도 오래 참으면 때가 낀다. 때가 낀 옷을 빨아서 입으면 기분이 상쾌하듯이, 오래 묵은 성욕도 해결하면 상쾌하다. 따라서 비누가 통과하는 혈관의 비누 냄새를 투시하는 사람은, 창녀를 보면서 자신의 몸속에서 오랫동안 묵은 성욕의 때를 잘 씻어줄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남자다. 이 사람은 성욕의 묵은 때를 씻기 위해서 창녀를 부른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에도 나온다. 地球를 模型으로 만들어진 地球儀를 模型으로 만들어진 地球 옷 속에 감춰진, 남자에 의해서 투시된, 여자의 엉덩이는 잘 발달되어 있다. 이 남자의 성욕의 때를 잘 씻어 줄 것으로 보인다. ‘지구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의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는 여자의 엉덩이다. 발기된 남근은 마치 지구와 같은 둥근 여자의 엉덩이, 그 엉덩이에 있는 음부에, 마치 지구라도 뚫을 듯이 힘차게 남근을 넣고 절구질하고 싶은 것이다. 음부가 있는 엉덩이와 음부에 삽입된 남근은 마치 북극과 남극을 축으로 돌아가는 지구의와 유사하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보면서 그 엉덩이에 있는 음부에 남근을 넣고, 성교하기에 적당한지 상상하고 있다. 창녀의 엉덩이는 지구처럼 둥글게 잘 발달되어 있다. 去勢洋襪. (그 女人의 이름은 워어즈였다.) 창녀는 양말을 벗어 던진다. 서양식 버선인 양말은 스타킹이라고 해도 좋다. 벗어서 던져놓은 스타킹은 원래 신었을 때의 형상이 거세된 채로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놓인다. 그리고 그 여인의 이름은 워어즈였다. ‘워어즈’는 영어로 ‘Wars’다. ‘전쟁(戰爭)’이다. ‘전쟁’은 싸우고 다투는 것이다. 따라서 워어즈는 창녀다. 창녀는 마치 남자와 싸우고 다투듯이, 서로 끓어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씩씩거리는 여자다. 이러한 발상은 에도 나온다. 도 결국 남녀의 성교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시다. 貧血緬絲. 당신의 얼굴 빛깔도 참새다리 같습네다. 여자가 옷을 모두 벗었다. 알몸이 된 창녀의 외모를 묘사하고 있다. 핏기 없는 가는 실처럼 하늘거리는 하얀 몸매. 창녀의 얼굴 빛깔도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을 하고 있다. 백인 여자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는 말이 있다. 새 발의 피라는 말이다. 조그만 새 발에서 피가 나와야 얼마나 나오겠느냐는 말인데, 새 발의 피처럼 창녀의 얼굴에도 핏기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곧 그 창녀는 백인 여자다. 平行四邊形 對角線 方向을 推進하는 莫大한 重量. 창녀가 침대로 올라와 나란히 눕자 남자가 거대한 중량으로 달려들어 애무한다.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은 아직은 성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애무만 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직선을 직선으로 질주하는 것’이 창녀의 음부에 남근을 삽입하고 격렬하게 성교를 하는 것이라면,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을 추진하는 것은 남자가 창녀의 몸을 애무하는 것이다. 애무를 통해서 다음에 이어질 성교를 예비한다. 마르세이유의 봄을 解纜한 코티의 香水의 마지한 東洋의 가을 快晴의 空中에 鵬遊하는 Z伯號. 蛔蟲良藥이라고 씌어 있다. 남자가 여자를 애무하자, 여자는 마치 ‘제발 그러지 마세요.’ 라고 하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튼다. 마치 청춘의 배가 닻을 풀고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듯이 쾌감에 젖는다. 그녀가 쾌락에 젖어들자, 남자는 마치 코티 향수를 맞이한 것 같은, 동양의 가을 하늘처럼 쾌청한 기분으로, 공중에 붕새처럼 붕 뜬 기분으로, Z기처럼 힘차게 창녀의 음부를 향해 질주할 최고의 남자가 된다. 남자가 창녀를 향해서 성교를 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그녀에게는 회충양약이라 씌어 있다. 회충양약은 회충을 구제하기에 좋은 약이다. 성욕을 해결하고자 하는 남자에게 좋은 약이다. 회충과 같이 하얗고 기다랗게, 정액이 잘 뿜어져 나오게 하는 여자다. 이 창녀는 남자의 성욕을 해결해 주는 데는 아주 좋은 재주를 가진 여자다. 屋上 庭園. 猿猴를 흉내내이고 있는 마드무아젤. 옥상 정원은 창녀의 음모가 나 있는 음부다. 남자가 창녀의 음부를 애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표현은 에도 나온다. 여자와 입을 맞추는 애무의 첫 단계가 일층이라면, 다음으로 유방을 애무하는 단계가 이층이다. 그리고 다음 음부를 애무하는 단계가 삼층이며, 그 삼층 위에는 옥상이 있다. 옥상은 바로 여자의 음부다. 그 음부에는 마치 옥상의 정원에 자라는 풀처럼 음모가 자라고 있다. 지금 남자가 창녀의 음부를 애무하고 있다. 그러자 창녀는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다. 원숭이는 상대의 털을 골라주는 습성이 있다. 창녀가 쾌감에 못 이겨 남자의 머리를 잡고, 좌우로 자신의 몸을 흔들면서 쾌감에 빠져 있는 것을, 마치 원숭이가 상대의 머리털을 고르거나 이를 잡아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彎曲된 直線을 直線으로 疾走하는 落體 公式. 만곡된 직선은 쾌감에 젖어 몸을 활처럼 뒤로 젖히고 있는 창녀다. 원래 사람은 직선 모양이다. 그래서 직선이다. 그런데 쾌감에 젖어서 몸을 뒤로 활처럼 젖혔으니, 그 창녀는 만곡된 직선이다. 그 창녀를 직선으로 곧 곧바로 질주하는 낙체 공식이다. 여기서 ‘질주한다’는 말은 힘차게 성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질주하는 행위와 성행위는 유사하다. 숨이 가쁘고, 땀이 나고, 격렬한 행위다. 따라서 질주하는 행위는 힘차게 성행위를 하는 행위다. 낙체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몸을 떨어뜨리는 행위 곧 성교 행위다. 공식은 틀에 박힌 형식이나 방식을 말한다. 이제 창녀의 몸에 남근을 삽입하고 성행위를 하는 것은 뻔하다. 時計 文字盤에 Ⅻ에 내리워진 一個의 浸水된 黃昏. 성교가 끝나고 축 늘어진 남근을 표현한 것이다. 시계 문자반에서 12에서 아래로 바늘이 일직선으로 내리워지면, 그것은 6시를 의미하고, 오후 6시는 황혼이다. 성교가 끝나고 남근이 아래로 늘어진 모습은, 마치 시계 문자반에서 바늘이 아래를 가리키고 있는 것과 같다. 창녀의 음부에 빠졌다가 결국 죽어서 늘어진 남근은, 한 개의 물에 빠진, 그래서 황혼을 맞이한 남근이다. 도아―의 內部의 도아―의 內部의 鳥籠의 內部의 카나리야의 內部의 嵌殺門戶의 內部의 인사. 남자의 요구에 의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해 준 창녀가 떠나려고 인사를 한다. 그 인사는 ‘도아―의 내부의 도아―의 내부의 조롱의 내부의 카나리야의 내부의 감살문호의 내부의 인사’다.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서 창녀를 부른 남자에게, 창녀는 도아를 열고 들어와서, 또 도와를 열고 남자의 집으로 들어와서, 조롱과 같은 방 안에 있는 남자에게, 카나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교성으로, 계곡처럼 움푹 패인 음부로, 남근을 죽여 준, 그 음부의 내부의 인사인 것이다. 즉 성욕을 해결해 준 대가, 화대를 달라는 것이다. 食堂의 門깐에 方今 到達한 雌雄과 같은 朋友가 헤어진다. 서양의 주택 구조는 거실 한편에 식당이 있다. 지금 남자와 창녀는 거실에서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이다. 식당의 문간에는, 방금 도달한, 자웅과 같은, 붕우가 헤어진다. 남자와 여자는 자웅이지만, 그러나 성교를 마친 창녀와 남자는 이제 암컷과 수컷에서, 친구로 돌아와 헤어지고 있다. 방금까지 자웅으로 성교를 했으나, 이제는 친구처럼 헤어지는 것이다. 성욕을 해결한 남자와 성욕의 해결을 돕기 위해서 온 창녀가 이제는 일이 끝났음으로, 그저 친구들이 헤어지듯이 남녀의 감정을 모두 버리고 헤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화대를 놓고 계산만 남은 것이다. 파랑 잉크가 엎질러진 角雪糖이 三輪車에 積荷된다. 파란 잉크가 엎질러진 것처럼 색깔이 파란 달러가, 창녀가 좋아하는, 각설탕과 같이 달콤한 네모진 돈이, 삼륜차인 남자에게 부과되면서 서로 다툰다. 성욕을 해결한 남자는 덜 주려고 한다.  창녀는 많이 받으려고 한다. 서로 돈의 액수를 놓고, 자웅이 아닌 붕우처럼 옥신각신한다. 적하(積荷)는 돈이 포개지고 또 책망한다는 의미다. 남자가 달러를 얼마간 얹어 주자, 여자가 더 달라고 책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남자는 삼륜차다. 남자의 발기된 남근과 그리고 두 쪽의 고환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세 개의 원이 된다. 이러한 표현은 에 ‘삼심원(三心圓)’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남자는 그 남근과 고환으로 창녀에게 성교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삼륜차’는 성교를 한 남자다. 名啣을 짓밟는 軍用長靴. 街衢를 疾驅하는 造花金蓮. 헤어지면서 남자는 창녀의 이름을 물었을 것이다. 남자를 상대하는 기교가 좋은, 매력적인 그녀를 다음에 또 찾고 싶은 마음에서다. 군용장화와 같은 긴 부츠에 이름이 재갈 물려서 짓밟혔다. 창녀는 이름을 말하지 않고, 마치 “쳇~ 짠돌이~~” 라고 말하듯이 입을 삐죽 내밀며 굳게 다문 채, 부츠를 신은 발로는 땅을 한 번 “탁” 차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명함이 군용장화에 짓밟힌 것이다. 그 여자는 온 거리를 빠르게 말을 타고 달리듯이 질주하는 가짜 꽃이다. 그러나 걸음걸이가 예쁜 미인이다. 여기서 조화는 진짜 누구를 사랑해서 그와 사랑을 나누는 여자가 아니다. 금련(金蓮)은 걸음걸이가 예쁜 여자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면서 바쁜 듯이 급히 나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가고,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간 사람은,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 시인이,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이 누가 누군인지 잘 구분하지 못할까 봐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여자의 몸 위에서, 내려오고 올라가고, 내려오고 올라가고 한 사람, 즉 위에서 열심히 성교한 사람 즉 남자는, 이층의 계단 밑에서 집으로 올라오고 그리고 일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간 사람인 창녀가 아니고, 또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즉 처음부터 위에 있던 사람이고,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 즉 일이 끝나고도 계단을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집 안에 있던 사람은 남자이고, 그 창녀가 남자의 집에 다녀간 것이다. 여자는 이른바 서양의 콜걸(call girl)인 것이다. 저 여자의 下半은 저 남자의 上半에 恰似하다. (나는 哀憐한 邂逅에 哀憐하는 나) 四角이 난 케―스가 걷기 始作이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저 여자의 하반신은 저 남자의 상반신과 흡사하다. 저 여자의 하반신은 엉덩이가 잘 발달한 육감적인 여자라면, 저 남자는 상반신의 근육이 잘 발달된 매력적인 남성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슬프고 가련한 잠시의 만남에, 도리어 화자 자신이 슬프고 가련하다. 화자도 그런 엉덩이가 잘 발달한 여자와 한 번 해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가련하게 생각한다. 사각이 난 케이스 즉 상자가 걷기 시작한다. 여자가 자동차를 타고 떠나려고 한다. 자동차는 남자가 사는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사람을 담는 케이스와 같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자동차가, 사람이 소름을 끼칠 때 몸을 부르르 떨듯이, 자동차는 시동을 걸자 부르릉 하고 진동한다. 라지에―타의 近傍에서 昇天하는 굿빠이. / 바깥은 雨中. 發光魚類의 群集移動. 창녀가 자동차의 창문을 열고, 손으로 입을 가져갔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서 뻗으면서, 굿바이라고 인사하면서 떠난다. 자동차의 앞좌석은 라지에타 근처에 있다. 서양식 인사법이다. 키스 대신에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 그 손에 입맞춤 한 다음, 그 손을 이층에 있는 화자에게 날려 보내는 인사를 하고 있다. 손이 승천한 것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헤드라이트에서 빛을 내는 자동차들이 떼를 지어 달리고 있다. 아니, 물고기처럼 싱싱한 창녀들이, 비가 내리는 도시를,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이다.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몸을 파는 창녀의 모습. 신기한 상점이다. ‘AU MAGASIN DE NOUVEAUTES’다. ​ ​ ​   ▣   出版法 ​      Ⅰ 虛僞告發이라는罪名이나에게死刑을言渡하였다. 자취를隱匿한蒸氣속에몸을記入하고서나는아스팔트가마를睥睨하였다. | 直에 關한 典古一則 | 其父攘羊 其子直之 나는아아는것을아알며있었던典故로하여아알지못하고그만둔나에게의執行의中間에서더욱새로운것을아알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나는雪白으로曝露된骨片을주워모으기始作하였다. 「筋肉은이따가라도附着할것이니라」 剝落된膏血에對해서나는斷念하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     Ⅱ 어느警察探偵의秘密訊問室에있어서 嫌疑者로서檢擧된사나이는地圖의印刷된糞尿를排泄하고다시그것을嚥下한것에對하여警察探偵은아아는바의하나를아니가진다. 發覺當하는일은없는級數性消化作用. 사람들은이것이야말로卽妖術이라말할것이다. 「勿論너는鑛夫이니라」 參考男子의筋肉의斷面은黑曜石과같이光彩나고있다한다.      Ⅲ 號  外  磁器收縮을開始 原因極히下明하나對內經濟破綻에因한脫獄事件에關聯되는바濃厚하다고보임. 斯界의要人鳩首를모아秘密裡에硏究調査中. 開放된試驗管의열쇠는나의손바닥에全等形의運河를掘鑿하고있다. 未久에濾過된膏血과같은河水가汪洋하게흘러들어왔다.       Ⅳ 落葉이窓戶를滲透하여나의禮服의자개단추를掩護한다. 暗殺 地形明細作業의至今도完了가되지아니한이窮僻의地에不可思議한郵遞交通은벌써施行되었있다. 나는不安을絶望하였다. 日曆의反逆的으로나는方向을紛失하였다. 나의眼睛은冷却된液體를散散으로切斷하고落葉의奔忙을熱心으로幇助하고있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나의猿猴類에의進化) - 1932. 7 -   出版法 ‘출판법(出版法)’이란 무슨 의미일까? 참으로 어렵다. 이상 시인은 하나의 용어에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 사용하기에, 어느 하나의 의미만으로 제목이나 시어의 의미가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적 사고의 습성은 끊임없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의미만을 찾는데 열중한다. 그래서 의미의 혼란이 온다. 이상의 시어들은 많은 경우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낸다. 따라서 ‘출판법’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출판법’은 족보를 새롭게 출판하는 법이며, 그것은 출판된 족보에서 화자가 나오는 법이며, 하수구 속에서 하수구의 뚜껑이라는 판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방법이다. 대체로 이런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단어가 ‘출판법(出版法)’이다. 이상이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자로 간 줄을 모르고 자라다가, 어린 시절 어느 시점에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갈등했던 이상은, 족보를 새롭게 출판하기 위해서, 아니 이미 출판된 족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그 족보를 하수구에 버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족보가 하수구를 치우던 어떤 사람에게 발견되고, 중요한 문서라 경찰에 신고를 한 모양이다. 이 때 족보에 적혀 있는 대로 큰아버지가 경찰서로 불려오고, 이상은 경찰서에 따라갔다가, 혹시 자신이 버린 족보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해서 다시 하수구 속으로 들어갔다가, 하수구 뚜껑을 인부들이 닫는 바람에 갇혀서 죽을 뻔한 일을 기억하고, 그 사건을 시로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의 내용은 서사적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4개의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虛僞告發이라는 罪名이 나에게 死刑을 言渡하였다. 자취를 隱匿한 蒸氣 속에 몸을 記入하고서 나는 아스팔트 가마를 睥睨하였다. 이 문장은 이 시 전체적인 맥락에서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다. ‘허위고발’의 주체는 누구일까? 화자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일까? 일차적으로는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 큰아버지인 것으로 보인다. 큰아버지는 자신을 양자로 데려왔다는 것에 대해서 허위로 화자에게 알렸다. 화자를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한 죄명으로 인하여 화자가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자신을 족보에서 지우기로 한 것이다.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은 곧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출생의 자취를 은닉한 증기 속에 몸을 기입하고 나서 아스팔트 가마를 비예한 것이다. 자취를 은닉한 증기는, 증기처럼 감쪽같이 자신의 태어난 자취를 감춘 족보다. 그 족보 속에 어렴풋한 기록되어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아스팔트 가마 즉 ‘아스팔트의 하수구 뚜껑을 흘겨보았다.’ 하수구에 그 족보를 넣어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출판법이다. 출판된 족보라는 판에서 나오는 방법이다. 또 이 나중에 이 족보는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에 의해서 발견되고, 큰아버지가 경찰서에 불려간 뒤에도 화자는 모르는 체한다. 따라서 ‘허위고발’의 주체는 화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버렸던 족보가 궁금하여 하수구에 들어가게 되고, 하수구에 갇혀서 죽을 뻔하게 되는데, 결국 경찰서에서의 허위고발이 자신을 죽게 할 뻔한 사건을 두고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화자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라는 문장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또 족보의 자취를 감춘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갇히게 된 화자는 하수구를 나오기 위해서 하수구 속에서 하수구 뚜껑을 흘겨보게 된다. 따라서 ‘자취를 은닉한 증기 속에 몸을 기입하고서 나는 아스팔트 가마를 비예하였다.’라는 문장도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 | 直에 關한 典古一則 | / 其父攘羊 其子直之 우선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도 문제가 된다. ‘일직에 관한 전고 일 즉 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직에 관한 전고 일 즉|’으로 읽어야 할지 애매하다. 세로쓰기에서 양쪽의 ‘|’을 한일자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괄호로 읽어야 할지 분간하기 어렵다. 한일자(一)와, 괄호 개념의 한일자(―) 형태가, 고딕체 글씨에서는 구분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앞뒤의 맥락과 의미로 봐서는 괄호로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따라서 ‘직에 관한 전고 일 즉’으로 읽겠다. ‘직’에 관한, 책보다 오래된 하나는 곧 ‘기부양양(其父攘羊) 기자직지(其子直之)’다.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 아들이 이를 바로잡았다. 큰아버지가 화자를 화자 몰래 양자로 삼자, 이를 화자가 몰래 바로잡는다. 그래서 화자는 족보를 큰아버지 몰래 하수구에 넣었다. 나는 아아는 것을 아알며 있었던 典故로 하여 아알지 못하고 그만 둔 나에게의 執行의 中間에서 더욱 새로운 것을 아알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화자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사온 양자라는 것을 알며, 논어에 그 아비가 무엇을 잘못하였더라도 그 아들이 숨겨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르는 체해 온 화자에게, 이번에 족보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집행하는 중간에, 더욱 새로운 사실을 알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여기서 화자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 흥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을 더듬고 있다.) 나는 雪白으로 曝露된 骨片을 주워모으기 始作하였다. /「筋肉은 이따가라도 附着할 것이니라」/ 剝落된 膏血에 對해서 나는 斷念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화자는 흰 눈처럼 환하게 드러난 조상의 계보의 줄기를 주워 모으기 시작하였다. 골격에 붙는 살은 이따가라도 붙여볼 것이다. 족보에서 벗겨져 떨어진, 대신 돈을 받고 살이 찐 핏줄에 대해서는 화자는 단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자신을 양자로 넘긴 친아버지의 핏줄에는 자신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Ⅱ 어느 警察 探偵의 秘密 訊問室에 있어서 화자가 하수구에 버린 족보가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에 의해서 발견되어 경찰서에 신고했다. 그 족보가 하수구에 버려진 것과 관련하여 경찰관이 조사한다. 嫌疑者로서 檢擧된 사나이는 地圖의 印刷된 糞尿를 排泄하고 다시 그것을 嚥下한 것에 對하여 警察探偵은 아아는 바의 하나를 아니 가진다. / 發覺當하는 일은 없는 級數性 消化 作用.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卽妖術이라 말할 것이다. 족보를 유기한 것으로 의심되어 경찰서로 불려온 큰아버지는, 족보의 인쇄된 친아버지의 아들로서의 화자를 씻어내고, 다시 그것을 삼켜서 자기의 아들로 만든 것에 대해서, 경찰 조사관은 아는 바의 하나를 아니 가진다. 경찰 조사관은 버려진 족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단 하나 화자가 혐의자의 양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족보에는 화자가 혐의자의 아들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가 범인일 것이라는 것은 추호도 의심하지 못한다. ‘아아는’은 말을 더듬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화자가 경찰서에서 마음을 졸이면서 조사가 진행되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찰 조사관이 화자가 양자로 들어온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바로 화자가 큰아버지의 아래 층계에 기록됨으로써 족보를 유기한 범인으로 발각당하는 일이 없는, 일종의 급수성 소화 작용이다.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즉요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勿論 너는 鑛夫이니라」/ 參考 男子의 筋肉의 斷面은 黑曜石과 같이 光彩나고 있다 한다. 화자는  ‘물론 너는 광부이니라.’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하수구에서 족보를 발견한 인부를 두고 이르는 말 같다. 참고 남자 즉 족보를 발견한 남자의 근육의 단면 즉 근육을 자른 면 한쪽이 마치 흑요석처럼 검게 광채가 나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 남자의 근육에서 하수구의 흙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마치 무엇으로 자른 듯이 보이고, 흙이 묻은 부분이 검게 빛났다는 말이다. 화자가 하수구에 아무도 모르게 유기한 족보를 인부가 발견한 것을 두고, 그 인부를 마치 지하에 있는 흑요석을 캐낸 광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수구의 흙은 흑요석처럼 검고, 물기가 있는 하수구의 흙이 발이나 손에 묻으면 그 묻은 부분이 번들번들하게 광채가 난다. ​ Ⅲ 號外 / 磁器 收縮을 開始 ‘호외(號外)’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임시로 발행하는 신문이나 잡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유기된 족보 사건으로 인해서 경찰서에 ‘불려온 사람 이외의 사람’이라는 의미다. 어린 화자는 불려온 자가 아니다. 혐의자로 불려온 것은 큰아버지요, 참고인은 유기된 족보를 발견한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다. 따라서 불려온 사람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화자다. 화자가 바로 ‘호외(號外)’다. 자기 수축을 개시했다. 종이 위에 철가루가 있고 종이 아래에 자석을 가져다 댔을 경우, 철가루들이 자석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모이듯이, 여러 조사관들이 둥그렇게 모여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다. 原因 極히 下明하나 對內 經濟 破綻에 因한 脫獄事件에 關聯되는 바 濃厚하다고 보임. 斯界의 要人 鳩首를 모아 秘密裡에 硏究 調査中. 족보를 유기한 원인은 극히 밝힐 수 없으나, 가문의 경제를 파탄내고 이로 인해서 족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건과 관련이 깊다고 보임. 이 분야의 요인들이 모여, 비둘기가 머리를 맞대고 모이를 쪼듯, 머리를 맞대고 비밀리에 연구 조사중임. 開放된 試驗管의 열쇠는 나의 손바닥에 全等形의 運河를 掘鑿하고 있다. 未久에 濾過된 膏血과 같은 河水가 汪洋하게 흘러 들어왔다. 경찰서의 조사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 조사에 몰두하는 사이, 화자는 개방된 시험관 즉 시험관처럼 생긴 수직의 하수구 뚜껑 열쇠가 개방되어 있어서, 화자는 손바닥을 짚고 전등형 운하를 굴착하고 있었다. 전신으로 하수구 속을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유기한 족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간 것이다. 머지않아 여과된 기름과 피와 같은 물이 강물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흘러 들어왔다.  Ⅳ 落葉이 窓戶를 滲透하여 나의 禮服의 자개단추를 掩護한다. 낙엽이 하수구의 창호처럼 구멍이 뚫린 곳에 빨려 들어와 화자의 예복의 자개단추를 가린다. 그래서 인부들은 그 안에 화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하수구 뚜껑을 닫는다. 하수구 안이 깜깜해진다. 暗殺 깜깜한 하수구 안에 갇힌 화자, 어두운 곳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 시의 맨 앞에 나오는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드디어 화자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다.’ 地形 明細 作業의 至今도 完了가 되지 아니한 이 窮僻의 地에 不可思議한 郵遞交通은 벌써 施行 되었있다. 나는 不安을 絶望하였다. 공사가 끝나고 지형을 자세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끝나지 않은 지금, 화자는 궁벽한 하수구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누구와 논의할 사람조차 없는 가운데, 하수도 뚜껑을 두드려 자신의 의사를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화자는 불안을 절망하고 말았다. 불안하게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하수구 밖으로 나가려던 희망을 포기했다. 日曆의 反逆的으로 나는 方向을 紛失하였다. 나의 眼睛은 冷却된 液體를 散散으로 切斷하고 落葉의 奔忙을 熱心으로 幇助하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 (나의 猿猴類에의 進化) 일력을 돌이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서 화자는 방향을 분실하였다. 하수구에 들어와서 며칠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화자의 눈동자는 냉각된 액체를 이리저리 흩으면서 단절하였다. 하수구 구멍에서 화자의 눈동자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에 눈을 껌벅거렸다. 낙엽이 바쁘게 달아나는 것을, 화자도 낙엽의 패거리가 되어, 열심히 돕지 아나하면 아니 되었다. 하수구 뚜껑을 가로막는 낙엽을 열심히 치우면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화자는 하수구라는 우리에 갇혀서, 마치 우리를 탈출하고자 하는 원숭이 종류로 진화한 것이다. ​ ​ ​ ▣   且8氏의出發 ​ 龜裂이生긴莊稼泥濘의地에한대의棍棒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樹木이盛함.     以上꽂는것과盛하는것과의圓滿한融合을가리킴. 沙漠에盛한한대의珊瑚나무곁에서돛과같은사람이산葬을當하는일을當하는일은없고 심심하게산葬하는것에依하여自殺한다. 滿月은飛行機보다新鮮하게空氣속을推進하는것의新鮮이란珊瑚나무의陰鬱한性質을더以上으로增大하는것의以前의것이다.   輪不輾地  展開된地球儀를앞에두고서의設問一題.   棍棒은사람에게地面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리키는데사람은解得하는것은不可能인가.   地球를掘鑿하라    同時에   生理作用이가져오는常識을抛棄하라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는 사람은 熱心으로疾走하는 일들을停止한다. 沙漠보다도靜謐한絶望은사람을불러세우는無表情한表情의無智한한대의珊瑚나무의사람의脖頸의背方인前方에相對하는自發的인恐懼로부터이지만사람의絶望은靜謐한것을維持하는性格이다.   地球를掘鑿하라    同時에   사람의宿命的發狂은棍棒을내어미는것이어라.   *事實且8氏는自發的으로發狂하였다. 그리하여어느덧且8氏의溫室에는隱花植物이꽃을피워가지고있었다. 눈물에젖은感光紙가太陽에마주쳐서는희스무레하게光을내었다. ― 1932. 7 ―   且8氏의 出發 부부가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고상하지만, 그 아이를 낳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다. 부부가 성교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아이를 갖겠다는 고상한 뜻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부부가 서로 성적 쾌감을 즐기다 보면 아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을 이룬 부부가 낳는 아이는 남근과 고환의 씨앗인 ‘且8氏’가 되는 것이다. 龜裂이 生긴 莊稼泥濘의 地에 한대의 棍棒을 꽂음. / 한대는 한 대대로 커짐. / 樹木이 盛함. / 以上 꽂는 것과 盛하는 것과의 圓滿한 融合을 가리킴. ‘균열이 생긴 장가니녕의 지’는 찢어진, 씩씩하게 심는, 진창이라는 의미다. 여성의 음부를 묘사한 것이다. 여성의 음부에는 발기되어 딱딱해진 한대와 같고, 곤봉과 같은 남근을 꽂는다. 그리고 남근은 남근대로 커진다. 남근이 음부에 담긴다. 이상 꽂는 것과 담긴다는 것과의 원만한 융합을 가리킨다. 즉 남근과 여성의 음부가 원만하게 하나가 된다. 沙漠에 盛한 한대의 珊瑚나무 곁에서 돛과 같은 사람이 산葬을 當하는 일을 當하는 일은 없고 심심하게 산葬하는 것에 依하여 自殺한다. 사막은 물이 없다. 사막은 식물이 자라지 않고 따라서 꽃도 피지 않는 공간이다. 아직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은 상태의 여성의 음부에는 물이 없고, 임신하지 않은 상태의 여성은 꽃이 자라지 않는 사막과 같다. 한대는 남성의 발기된 남근이다. 산호나무는 발기되어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남근이다. 돛은 배의 중심에 돛대가 꽂혀 있고, 돛대에는 커다란 돛이 달려 있다. 따라서 여성이 배라면 남근은 돛대에 해당하며, 남성의 몸은 돛에 해당한다. 남근이 산채로 매장을 당하는 일을 당하는 일은 없다. 남근이 음부에 살아있어 발기된 채로 죽은 듯이 있는 일은 없다. 발기된 남근을 음부 깊숙이 넣고 그리고 아이를 잉태하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즐기다 보면, 남근은 사정을 하고 죽는 것이다. 滿月은 飛行機보다 新鮮하게 空氣 속을 推進하는 것의 新鮮이란 珊瑚나무의 陰鬱한 性質을 더 以上으로 增大하는 것의 以前의 것이다. 만월(滿月)은 보름달이다. 여성이 임신을 하여 배가 둥그렇게 부른 상태를 암유한다. 아이를 갖겠다고 남근을 여성의 음부에 담으면, 그 다음부터는 만월 즉 임신을 하겠다는 생각은 비행기보다 신선하게 공기 속을 추진한다. 임신에 대한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임신을 하겠다는 생각은, 산호나무 즉 남근의 음울한 성질 즉 남근의 줄어드는 성질을 더 이상으로 증대하는 것 이전의 것이다. 여성에 삽입하고 나면,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근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성적 욕망만 남는다. 輪不輾地  展開된 地球儀를 앞에 두고서의 設問一題. 바퀴는 땅에서 오른쪽으로 구르지 않는다. 여기서 바퀴는 둥그런 수레바퀴와 같은 여성의 엉덩이를 암유한다. ‘땅에서’ 오른쪽으로 구르지 않는다는 것은, 땅에서 떨어져서 오른쪽으로 구른다는 의미다. 즉 여성이 엉덩이를 들고 있고, 남성이 이를 향한 모습이다. 뒤에서 성교하는 자세다.  ‘윤부전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서 화자는 다음에 설명하고 있다. ‘윤부전지’라는 말은 화자의 눈앞에 펼쳐진 지구의를 앞에 두고서 설문하여 정한 하나의 제목이다. 지구의는 여성의 둥근 엉덩이와, 그 엉덩이의 중심에 남근이 꽂힌 모습과 같다. 여성의 뒤쪽에서 남성이 성교하는 자세다. 棍棒은 사람에게 地面을 떠나는 아크로바티를 가리키는데 사람은 解得하는 것은 不可能인가. 화자의 남근은 사람에게, 지면을 떠나는 아크로바티 즉 지면에서 떨어져 허공에 있는, 그래서 곡예처럼 삽입하여야 하는 음부를 가리키는데, 사람은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사람은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인가’라는 말은 스스로 깨우쳐 잘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잘 삽입이 되지 않는 상태다. 地球를 掘鑿하라 // 同時에 // 生理作用이 가져오는 常識을 抛棄하라 지구에 구멍을 뚫어라. 지구는 지구의를 닮은 여성의 둥그런 엉덩이를 의미하며, 굴착하는 행위는 힘차게 남근을 여성의 음부를 향하여, 마치 지구를 뚫듯이 힘차게 내리 꽂는 행위다. 동시에 생리 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포기해야 한다. 남녀가 교접을 하면 반드시 사정을 해야 한다는 상식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사정하지 말고 참으라는 말이다. 사정을 억제하고 참을 때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는 사람은 熱心으로 疾走하는 일들을 停止한다. 열심히 질주하여 열심히 성교에 몰두한다. 질주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나다. 성교를 열심히 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난다. 그래서 성교는 질주하는 것과 같다. 열심히 질주하고, 열심히 질주하고 또 열심히 질주하고 또 열심히 질주하는 사람은 열심히 질주하는 것을 정지한다. 열심히 성교를 하면서 사정하는 것을 멈춘다. 사정을 억제할수록 그 사람은 열심히 성교를 하는 사람이다. 사정을 향하여 질주하는 사람은 열심히 성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沙漠보다도 靜謐한 絶望은 사람을 불러세우는 無表情한 表情의 無智한 한대의 珊瑚나무의 사람의 脖頸의 背方인 前方에 相對하는 自發的인 恐懼로부터이지만 사람의 絶望은 靜謐한 것을 維持하는 性格이다. 사막은 물이 없다. 물이 나오지 않는다. 여자가 만족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보다도 정밀한 절망 즉 성적 교감의 소리를 내지 않는 데서 오는 절망은, 사람을 불러 세우는 무표정한 표정이다. 사람을 불러 세운다는 것은 질주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여자가 교성으로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성적 욕망이 사그라지는 것이다. 남근이 줄어드는 것은 첫째, 무지한 한대 즉 성적 기교에서 지혜롭지 못한 남근에서 기인하고  둘째, 산호처럼 붉은 남근을 가진 남자가 등 쪽에서 전방을 향하여 상대하는 자발적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지만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성적 교감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그대로 지켜가는 아내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地球를 掘鑿하라 // 同時에 // 사람의 宿命的 發狂은 棍棒을 내어미는 것이어라. 지구를 뚫어라. 지구의와 같은 엉덩이를 마치 지구를 굴착하듯이 힘차게 뚫어라. 동시에 사람의 숙명적 발광 즉 성적으로 흥분되어 숙명적으로 미쳐서 날뛰는 것은 곤봉 즉 발기된 딱딱한 남근을 여성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내어 미는 데에 있다. 마지막 힘차게 남근을 내어 밀었을 때, 아무리 아내가 고요함을 유지하는 성격이라 하더라도 숙명적으로 발광하게 되어 있다. * 事實 且8氏는 自發的으로 發狂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且8氏의 溫室에는 隱花植物이 꽃을 피워 가지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感光紙가 太陽에 마주쳐서는 희스무레하게 光을 내었다. 사실 남근과 고환은 스스로 발광하였다. 아이를 만들어 자손을 번식한다는 무슨 고상한 뜻에 의해서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욕망에 의해서 스스로 발광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덧 남근의 온실 즉 남근의 씨앗을 키우는  따뜻한 여성의 음부에는, 마치 포자로 번식하는 은화식물처럼 정자로 번식하는 생명이, 꽃을 피워가지고 있었다. 즉 어린 생명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가 태양에 마주쳐서는 희스무레하게 빛을 내었다. 감광지는 사진의 감광지다. 빛을 받으면 사진 속의 형상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햇빛 속에서 아이의 잉태를 알게 해주는, 불러오는 여인의 배가 감광지다. 배가 점점 불러옴에 따라서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는 쾌락으로 땀에 젖은 여인의 배라는 의미로 쓰였다. 성적 쾌락으로 땀에 젖어 아이를 잉태한 여인의 불러오는 배가, 햇빛이 비추면 약간 뿌옇게 빛을 내며, 희미하게 아이가 잉태하였음을 알게 해 준다. ​ ​ ​ ▣   대낮    ―― 어느 ESQUISSE ―― ​ ELEVATER FOR AMERICA          ○ 세마리의닭은蛇紋石의層階이다. 룸펜과毛布          ○ 삘딩이吐해내는新聞配達夫의무리. 都市計劃의暗示          ○ 둘쨋번의正午싸이렌          ○ 비누거품에씻기어가지고있는닭. 개아미집에모여서콩크리―트를먹고 있다.          ○ 男子를搬揶하는石頭          ○ 男子는石頭를白丁을싫어하드키싫어한다.          ○ 얼룩고양이와같은꼴을하고서 太陽群의틈사구니를쏘다니는詩人. 꼭끼오――. 瞬間 磁器와같은太陽이다시또한個솟아올랐다. ​ ― 1932. 7 ― ​ 이 시는 1930년대 초반, 조선의 젊은이 이상이 아메리카인의 생활을 간단히 스케치한 내용이다. 이상 시인이 아메리카에 간 것 같지는 않다. 서양식 교육을 받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던 적이 있는 이상은,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영화 혹은 잡지 등을 통하여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1930년대 초반의 조선의 젊은이가 아메리카인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농경 사회였다. 농경 사회에서 사람들은 정착하여 살아간다. 아침에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다. 새벽부터 그렇게 바쁠 것도 없고, 돈을 벌기 위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봄에 곡식의 씨앗을 땅에 뿌리면 가을에 가서 수확하는 것이 농경 사회의 생활이니, 그렇게 바쁠 것이 없다. 한가하다. 그런데 아메리카인의 생활, 산업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아메리카인의 생활은, 농경 사회에 사는 이상 시인으로서는 제법 신기했을 것이다. 그들은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이래, 꼭두새벽부터 전등불을 켜놓고 바쁘게 살아간다. 새벽부터 신문이 배달되고, 자명종이 울리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차를 타고 회사에 출근한다. 출근하는 동안에도 그날 할 일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고 메모를 한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해는 떠오른다.  대낮 /  ―― 어느 ESQUISSE ―― 제목 ‘대낮’은 전등불로 인하여 환하게 밝은, 그래서 사람들이 바쁘게 활동을 하는, 아직 날이 새지 않은 새벽이다. 전등불이 인공 태양이라면, 깜깜한 새벽은 인공 태양으로 인하여 어둠이 밀려가고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된다. 아메리카인은 깜깜한 새벽부터 돌아다닌다. 부제는 ‘어느 ESQUISSE’는 어느 스케치라는 말이다. 아메리카인의 일상 중에서 어느 한 때의 풍경을, 마치 스케치하듯이 시로 표현했다. 시의 본문에는 ‘○’을 중심으로 입곱 개로 나뉘어 있는데, 아메리카인의 생활 중에서 어느 장면, 장면들을 간단히 그린 것이다. ELEVATER FOR AMERICA 아메리카인을 위한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는 높은 건물을 올라가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높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 이외에 계단이라는 것도 있다. 계단으로도 건물을 올라갈 수 있는데, 산업화된 사회 아메리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엘리베이터를 고안했을까? 빨리 올라가기 위해서다. 따라서 엘리베이터는 바쁜 아메리카인을 위한 것이다. 세 마리의 닭은 蛇紋石의 層階이다. 룸펜과 毛布 세 마리의 닭은 무엇일까? 닭은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새다. 그렇다면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닭과 같은 세 가지는 무엇이 있을까? 물론 이 시 전체를 읽어봐야 추리가 가능하다. 미리 말하면, 실제의 닭과, 자명종 시계와, 그리고 새벽부터 움직이는 산업화된 사회 속의 사람들이다.  닭이 울면 날이 샌다. 아니 날이 샐 때 닭은 운다. 닭이 울면 우리는 날이 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이 샜으니 일어나라고 알리는 것에는 자명종도 있다. 그런데 닭도 없고, 자명종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날이 샌 것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거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날이 샜음을 알 수 있다. 잠을 자고 있는데 밖에서 많은 자동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던가,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면서 두런두런 소리를 낼 때, 우리는 잠자리에서도 날이 샜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 마리의 닭은 ‘사문석의 층계’와 같다. 층계는 똬리를 튼 뱀처럼 되어 있다. 밑에서부터 빙글빙글 돌면서 위로 올라간다. 그 층계를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 세 마리의 닭이다. 우리가 층계를 통하여 한 층 한 층 올라가듯이, 날이 새는 것도 세 마리의 닭이 차례로 울어야 한다. 신문배달부가 움직이고 ―> 자명종이 울리고 ―> (그리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 마지막으로 실제 닭이 울어야 날이 새고 태양이 떠오른다. 그래서 아메리카에서는 세 마리의 닭이 울어야 날이 샌다. 아니 날이 새기도 전에 아메리카인들은 벌써 바삐 활동한다. 룸펜과 毛布 룸펜은 부랑자다. 부랑자는 여기저기 떠돌면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랑자다. 부랑자는 거지와 유사하다. 그래서 그들은 모포를 덮고 잔다. 조선인 이상은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잔다면, 부랑자와 같은 아메리카인은 거지처럼 담요를 깔고 덮고 잔다. 산업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아메리카인의 생활은 농경 사회 조선에서 살았던 이상이 보기에 이상했을 것이다. 여기저기 도시를 떠돌면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조선에서는 거지들이 애용하는 모포를 일상으로 깔고 덮고 자는 것도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기야 원래 유목민의 후예인 아메리카인은 본질적으로 떠돌이, 마치 거지처럼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가는 부랑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동하면서 덮고 자기에 편리한 모포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농경 사회 조선 사람들은 먼 조상 때부터 농토를 중심으로 정착 생활을 해 왔다. 그래서 솜을 둔 이불과 요가 침구다. 솜을 둔 이불과 요를 들고 떠돌 수는 없다. 삘딩이 吐해 내는 新聞配達夫의 무리. 都市計劃의 暗示 날이 새기도 전부터 아메리카인은 마치 날이 샌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맨 처음에는 신문배달부의 무리들이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다. 각 가정에 신문을 배달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세 마리의 닭 중에서 날이 샜음을 알리는 첫 번째 닭이다. 이들이 배달해 주는 신문은 도시 계획을 암시한다. 신문을 보면서 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한다. 기업가는 앞으로 어떠한 제품을 생산해야 할 것인가도 생각한다. 주가가 오를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도 신문을 통하여 짐작한다. 신문은 바로 도시 계획의 암시다. 둘쨋 번의 正午 싸이렌 다음으로 새벽 6시를 알리는 사이렌 아니 자명종이 울린다. 여기서 첫째 번의 정오는 열두시다. 시계의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킨다. 둘째 번의 정오는 6시다. 큰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작은 바늘은 큰 바늘과 일직선으로 된다. 일직선으로 있는 두 개의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킨다. 12시 이후에 두 번째로 12라는 숫자를 가리켰기에 둘째 번의 정오다. 비누 거품에 씻기어 가지고 있는 닭. 개아미 집에 모여서 콩크리―트를 먹고 있다. 아침 일찍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아침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아메리카인은 닭이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서 아메리카인은 몸에 비누를 바르고 샤워를 하는가 보다. 그들은 개미집과 같은 연립주택 형태의 집단 거주지에서 산다. 그리고 우리가 밥과 국을 중심으로 아침밥을 먹는다면, 아메리카인은 빵이나 고기를 칼로 썰어서 먹는다. 마치 딱딱한 콩크리―트를 먹는 것과 같다. 男子를 搬揶하는 石頭 남자를 나가라고 희롱하는 돌머리는 괘종시계다. 돌로 된 머리로 종을 들이 받아 소리를 내면서, 남자에게 “이제 그만 출근해라. 출근해라. 어서 출근해야지~~”하면서 마치 희롱하는 듯이 놀리면서, 어서 밖으로 나가라고, 출근하라고 놀린다. 男子는 石頭를 白丁을 싫어하드키 싫어한다. 남자는 이 출근을 강요하는 시계를 마치 백정을 싫어하는 닭처럼 싫어한다. 이른 새벽 거리에 나감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닭인 아메리카인은, 괘종시계가 시각을 알리면서 밖으로 나가라, 출근하라 놀리면서 재촉하는 것을, 닭이 자신을 죽이려는 백정을 싫어하여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싫어한다. 마치 자기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처럼 여겨서, 괘종시계를 싫어한다. 얼룩고양이와 같은 꼴을 하고서 太陽群의 틈사구니를 쏘다니는 詩人. / 꼭끼오――. / 瞬間 磁器와 같은 太陽이 다시 또 한 個 솟아올랐다. 날이 새기도 전에 출근하는 아메리카인은 각종 불빛에 반사되어 희끗희끗 보이는 것이 마치 얼룩고양이다. 그러한 꼴을 하고서, 태양군 즉 전등불빛 사이를 쏘다니는 시인이다.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면서도, 마치 시인이 시상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듯이 중얼거리기도 하고. 시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메모하듯이 무엇인가 적기도 한다. 그들은 그날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중얼거리기도 하고, 또 생각난 중요한 일은 수첩에 적기도 하는 것이다. 꼭끼오―― 하고 진짜 닭이 울자, 순간 그 소리에 자석처럼 끌려 올라오듯이, 사기그릇처럼 둥글고 환한 태양이 다시 또 한 개 솟아올랐다. ​ ​ ​ 5. 烏瞰圖 (二) ▣   烏瞰圖 詩第一號 ​ 十三人의兒孩가도로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 1934. 7. 24 ―     ‘오감도(烏瞰圖)’는 제목부터 난해하다. 흔히 ‘조감도(鳥瞰圖)’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서 까마귀가 조감한 세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타당하다. 현대인의 온갖 추한 모습을 까마귀가 조감(鳥瞰)한다는 말로 보인다.  '아해(兒孩)'라는 말이 우선 눈에 띈다. 아이라고 하지 않고 왜 아해라고 했는가. 한자 지식이 풍부했던 이상은 ‘아해(兒孩)’의 파자를 생각하면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해는 兒+(子+亥)의 파자다. ‘아해’는 아이를 만드는, 돼지와 같은 축생의 씨앗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말이다. 따라서 ‘아해’는 축생과 같은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성적 욕망과 관련이 있는, 정액 속의 정자를 의미한다. ‘십삼 인의 아해’에서 13이라는 숫자는 서양에서는 불길한 숫자,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로 사용된다. 서양적 학문과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이상으로서는 당연히 이러한 서양적 사고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十三人의 兒孩가 도로를 疾走하오. /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십삼 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한다고 해 놓고서, 사람들이 그 도로가 무엇인지 모를까 봐 괄호를 해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그 도로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막다른 골목은 더 이상 앞으로 질주 할 수 없는 골목이다. 일정한 거리만큼 가다가는 막혀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골목이다. 상상해 보면, 여성의 음문에서부터 자궁에 이르는 질(膣)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第一의 兒孩가 무섭다고 그리오. ∼ 第十三의 兒孩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일의 아해로부터 제십삼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한다. 무수한 아해들이 도를 질주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질에 사정한 정액 속에 들어 있는 무수한 정자들이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무섭다고 그런다. 수많은 정자들의 여성의 질을 따라서 질주하지만 대부분 난자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되고, 한 개 혹은 두 개의 정자만이 난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는 정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十三人의 兒孩는 무서운 兒孩와 무서워하는 兒孩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 (다른 事情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런데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둘 뿐이라고 한다. 질주하여 난자에 먼저 도달한 정자는 참으로 무서운 아해다. 우리가 흔히 무슨 일을 목숨을 걸듯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일컬어 ‘무서운 사람’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정자들을 물리치고 난자에 도달한 그 하나 혹은 두 개의 정자는 참으로 무서운 아해다. 그리고 나머지 정자는 모두 죽는다. 그래서 나머지 정자들은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면서도 죽음을 무서워한다. 다른 사정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았다. 두 가지 결과밖에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그런데 이제는 그 중에서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고,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하고 해도 좋다.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고,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고 해도 좋다. 이제는 성을 생식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 무서운 아해거나 무서워하는 아해거나 구별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정자는 난자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適當하오.) /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를 疾走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길은 뚫린 길이라도 적당하다. 13인의 아해가 도로 즉 여성의 질을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남성이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잡고 자위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뚫린 길은 성기를 잡고 자위하는 손이다. 이제는 성을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위를 통해서 즐기기도 한다. 십삼 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다. 어차피 자위를 통해서 배출된 정자는 모두 질주를 하지 않으며, 그대로 죽는다. 따라서 는 성을 쾌락의 도구로 생각하는 현대인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표현한 시다. 과연 이러한 시를 두고 음란한 내용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현대인의 우울한 삶의 모습을 까마귀가 조감한 시로 볼 것인가?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다. ​ ​ ​ ▣  烏瞰圖 詩第二號 ​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 1934. 7. 25 ―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야 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이냐. 이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는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이 어떠한 상황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아버지가 조을 적에,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이상의 연보를 보면, 이상은 1910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아버지 강릉김씨 演昌(연창)과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본명은 해경(金海卿)이다. 아버지 김연창은 차남이었고, 큰아버지 김연필은 구한말 총독부 기술직에 종사한 전형적인 서울의 중인층이었다. 김연필은 소생이 없는 때여서, 이상의 탄생은 집안의 경사였다고 한다. 세 살 때 큰아버지가 이상 김해경을 양자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상의 연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는 집안의 장자로서의 대를 이어야 하는 이상의 장자의식(長子意識)이 반영된 시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조을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이제는 자손을 번식할 기력이 없고 늙었다는 말이다. 조는 상태는 활발히 활동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다. 아버지가 늙어서 이제 더 이상 자손을 번식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아들이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가문을 이어갈 자식을 낳아야 한다. 만약 큰아버지처럼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면 것은 조상에게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생각이 달랐는지 혹은 기타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개인이 자신의 삶보다는 가문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아버지가 옆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된다. 나의 아버지처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된다.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일 뿐이고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즉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서 드디어 먼 조상의 대를 잇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강요한다. 화자는 답답하다. ​ ​ ▣   烏瞰圖 詩第三號 ​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 1934. 7. 25 ―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싸움한다'의 이미를 이해해야 한다. ‘싸움한다’는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하나는 남녀가 마치 싸움하듯이 서로 껴안고 성교를 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발기가 잘 되지 않는 화자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쓴다.’는 의미다. 싸움하는 것과 성교를 하는 것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서로 껴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을 몰아쉬면서, 격렬하게 행동한다. 또 ‘싸움하는 사람’은 아내와 성교를 하는 화자, 화자의 성교 상대인 아내, 그리고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아 아내를 잘 만족시키지 못하여 애쓰는 화자, 이렇게 셋이다. 그러면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또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기력이 달려서 아내와 자주 성교를 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싸움하지 않는 형태, 즉 자위와 같은 방식으로 성욕을 해결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금홍이와 사는 이상의 생활을 상상해 보자. 금홍이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금홍이와 자주 잠자리를 할 수 없던 이상이, 낮에 자위로써 혼자 성욕을 해결하곤 했는데, 마침 그날은 금홍이와 잠자리를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낮에 자위를 한 사람이 그날 밤에 또 아내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또 성교를 할 경우 잘 되겠는가. ‘싸움하지 않는 사람’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동음 이의어를 사용하고, 띄어쓰기도 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설명을 해도 그말이 그말이라 하나도 무엇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싸움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녀가 서로 껴안고 성교를 하는 것이며, 발기가 잘 되지 않는 화자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행위다. 기본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각자 의미를 적용하여 읽어 보라.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 하였으면 그만이다   ​ ​ ▣   烏瞰圖 詩第四號  患者의容態에關한問題.  診斷 0.1   26. 10. 1931     以上   責任醫師 李   箱  ― 1934. 7. 28 ―     오늘날 서양의 발달한 문명의 밑바탕이 되는 수학과 과학에서는 모든 현상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고 기술한다. 그래서 서양 학문에서는 수학적 원리, 과학적 법칙 등을 숫자로 간명하게 기호로 표시한다.  그러나 간단한 기호로 표시하는 수학과 과학이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 문제까지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아니 도리어 인간의 다양한 인문 정신을 말살한다. 이런 내용을 다룬 대표적인 시로는 , 등이 있다. 이 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患者의 容態에 關한 問題. 이상한 숫자들 위에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라는 말이 있다. 숫자는 서양의 문명을 낳은 수학과 과학의 상징이다. 거꾸로 쓴 이 이상한 숫자들은 서양 학문의 용태와 관련된 숫자들이다. 그리고 책임 의사 이상이 진단했다. 서양 학문의 문제점을 진단한 것이다. 이상한 그림 숫자들은 거꾸로 씌어 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겉모습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거울을 본다. 몸 안에 있는 질병의 상태는 엑스레이 촬영을 통하여 본다. 이상이 살았던 1930년대 초반에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여 병을 진단하였던 것 같다. 를 보면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엑스레이 필름에 찍힌 영상은 환자의 몸 안에 있는 병의 상태를 보여 준다. 서양 학문에 내재한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엑스레이를 찍는다. 그래서 숫자들이 마치 거울에 비친 듯이 좌우가 바뀌어 있다. 인체의 내부에 병이 있을 때,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엑스레이 필름을 보면서 해부를 하고 치료한 다음, 다시 봉합한다. 서양 학문에 내재한 문제점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엑스레이 필름에 찍힌 영상을 보고 진단하고, 절개하여 병을 제거하고, 다시 봉합해야 한다. 거꾸로 된 숫자는 바로 엑스레이로 촬영한 서양 학문이다. 이 숫자들을 조망해 볼 때,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안 하얀 줄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해부한 자국이다. 그리고 가운데 점들은 그것을 다시 봉합한 바늘 자국이다. 봉합하고 나니, 숫자들이 어긋나 있다. 꿰맨 자국을 따라서 아래 부분의 숫자들이 왼쪽으로 한 칸씩 밀렸습니다. 이는 숫자로 상징되는 서양 학문이 인간의 삶을 완전히 치료하나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독자를 위해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서양 과학에 의하면 광선은 삼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 만약 인간이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그 광선을 쫓아간다면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은 젊어질 수도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실제 인간의 삶에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겠는가. 이상 시인이 보기에 서양의 과학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診斷 0.1 / 26. 10. 1931 / 以上 責任醫師 李 箱 그래서 이상 시인은 모든 것을 어떤 숫자로 도식화해서 표현하는 서양의 학문에 대해서 이 시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그림 아래에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로 결과를 0.1이라고 진단했다. 1이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면 서양의 학문은 0.1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방식대로 그 아래에 날짜를 적었다. 년, 월, 일 순서가 아닌 일, 월, 년 순서로 적었다. 그리고 책임의사 이상이 진단을 했다고 서명했다. ​ ​ ▣  烏瞰圖 詩第五號 前後左右를除하는唯一의 痕跡에있어서 翼殷不逝 目不大覩 胖矮小形의神의眼前에我前落傷한故事를有함           臟腑 라는것은 侵水된畜舍와區別될수있을것인가 ​  ― 1934. 7. 28 ―    前後左右를 除하는 唯一의 痕跡에 있어서  ‘전후좌우를 제거하는 유일의 흔적’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의 모습이다. 기독(基督)이 인류를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전후좌우의 복잡한 말보다, 기독이 두 팔을 벌리고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기독의 삶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해 준다. 翼殷不逝 目不大覩 胖矮小形의 神의 眼前에 그런데 그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날개는 크지만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게 보지 못한다. 원래 ‘翼殷不逝 目不大覩’는 의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말이다. 산목편에는 ‘翼殷不逝 目不大覩’ 라고 나오지 않고 ‘翼殷不逝 目大不覩’라고 나온다. 에서 말하는 '翼殷不逝 目大不覩'는 날개는 크지만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지만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을 해치려는 자를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大’자와 ‘不’자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날개는 크지만 날지 못하고, 눈은 멀리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장자에 나오는 구절을 변형하여 활용하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그것을 날개가 크다고 했다. 그러나 멀리 보지 못한다. 지금 십자가 아래에서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데, 그 민망한 꼴을 보고서도, 십자가에서 큰 날개를 펼친 듯 양팔을 벌리고 있는 기독은, 높이 날아서 피하지도 못한다. 눈은 멀리 바라보아 외면하지 못하고, 고래를 아래로 숙여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십자가의 기독은 그 고난을 상징하듯 갈빗대가 다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모습이다. 따라서 '胖矮小形의神(반왜소형의 신)'은 갈빗살이 빈약한 기독이다. 따라서 화자는 그리스도의 상이 새겨진 십자가 앞에서~~ 我前落傷한 故事를 有함 자신이 앞으로 넘어졌던 고사가 있다. 앞으로 넘어진 것은 여자와 성교를 하였다는 말이다. 여자가 뒤로 넘어져 밑에 있고, 남자가 그 위를 앞으로 넘어지면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이다.           臟腑라는 것은 侵水된 畜舍와 區別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위의 그림이 나온다. 그 그림 아래에 ‘장부라는 것은 물이 침투한 축사와 구별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한다. 아니 인간의 내장은 물이 침투한 축사와 구별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이 그림은 물이 침투한 축사의 모습이다. 물이 침투한 축사는 가축의 배설물과 물이 뒤범벅이 되어 매우 지저분하다. 또한 위 그림은 인간의 성적 욕망의 배설물인 정액으로 가득 찬 더러운 공간을 연상할 수 있다. 위 그림은 여성의 음부의 내부를 그린 것이다. 입구처럼 보이는 곳이 남성의 성기가 들어가는 곳이며, 그 안의 넓은 공간은 성적 욕망의 배설물인 정액이 들어와, 마치 축사와 같이 지저분하게 된 곳이다.  따라서 위 그림은 여자의 음부의 내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화자는 십자가가 달린 방에서 어떤 여자와 성교를 한 것이다. 이 시는 , , 등과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 화자는 어느 과부와 성교한다. 과부와 성교하는 과부의 집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 ​ ▣   烏瞰圖 詩第六號      鸚鵡  ※ 二匹           二匹        ※ 鸚鵡는哺乳類에屬하느니라. 내가二匹을아아는것은내가二匹을아알지못하는것이니라. 勿論나는希望할것이니라. 鸚鵡   二匹 『이小姐는紳士李箱의夫人이냐』 『그렇다』 나는거기서鸚鵡가怒한것을보았느니라. 나는붓그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鸚鵡   二匹        二匹 勿論나는追放당하였느니라. 追放당할것까지도없이自退하얏느니라. 나의體軀는中軸을喪失하고또상당히蹌踉하여그랫든지나는微微하게涕泣하얏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獸類처럼逃亡하얏느니라. 勿論그것을아아는사람은或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果然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 1934. 7. 31 ― ​ 이상은 여러 명의 여자와 동거했다. 주로 카페나 술집에 나가는 여급들과 동거했다. 서로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젊은 남녀의 짧은 동거 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도 그런 여인 중의 하나다. 금홍이와는 약 3년 정도 살았으나, 그래도 여급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사실 여급들과 동거하면서 한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이상의 생각에 그때그때 함께 사는 것이 남편이요 부인이라는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부처럼 한평생을 같이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화자가 앵무새처럼 생긴 어떤 여급과 살고 있던 중에, 또 전에 살던 다른 앵무새처럼 생긴 여급이 찾아와서, 이상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싸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상은 그 두 여자에 대해서 각각 함께 살 때는 각각을 아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鸚鵡  ※ 二匹 / 二匹 / ※ 鸚鵡는 哺乳類에 屬하느니라. 앵무새 두 필이 있다. 앵무새는 포유류에 속한다. ‘匹(필)’은 말이나 소 등의 가축을 세는 단위다. 그리고 앵무새는 포유류에 속한다는 말로 봐서, 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유류에 속하는, 앵무새와 유사한 두 여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앵무새는 겉모습이 아름답다. 외양이 화려하다. 카페나 술집에 나가는 여급은 보통 여염집 여자보다 외양이 화려하다. 따라서 앵무새 두 필은 이상이 잠시 함께 살았던, 여급 생활을 하던 여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 앵무새는 지금 살고 있는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앵무새는 지금 여자와 살고 있는 곳에 찾아온, 전에 이상과 함께 살았던 여자로 보인다. ‘앵무새 두 필, 두 필’하고 반복하는 것은 ‘왜 두 여자가 여기에 함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 같다. 내가 二匹을 아 아는 것은 내가 二匹을 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勿論 나는 希望할 것이니라. 화자가 여급 생활을 하는 한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예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가 찾아와서, 두 여자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앵무새 두 필을 아 아는 것은 사실은 화자가 두 필을 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두 여자 앞에서 당황하여 말을 더듬고 있다. 당연히 당황하였을 것이다.) 화자가 두 여자를 알고 있다. 한 여자는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여자다. 알고 있다. 한 여자는 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다.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여자가 왜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두 여자를 아는 것은 결국 두 여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두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왜 함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두 여자가 함께 있는 이유를 알기를 희망한다. 鸚鵡 二匹 / 二匹 앵무새 두 필, 앵무새 두 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왜 두 여자가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지 화자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되뇌고 있다. 『이 小姐는 紳士 李箱의 夫人이냐』 『그렇다』/ 나는 거기서 鸚鵡가 怒한 것을 보았느니라. 나는 붓그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었겠느니라. “이 소저는 신사 이상의 부인이냐?”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자가 전에 살았던 여자를 가리키면서, 화자에게 말한다. 화자는 “그렇다”고 했다. 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는 지금 함께 사는 여자를 찾아와서 이상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상이 들어오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여자가 물은 것이다. 그러자 화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부인이 아니지만 전에 함께 살고 있을 때는 그 여자도 부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화자는 거기서 앵무새가 노한 것을 보았다. 지금 함께 사는 여자가 노한 것이다. 화자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화자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붉어졌었겠느니라’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보통 붉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것이나, 그렇지 않았다는 말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에 살던 여자는 그때의 화자의 부인이고, 지금 살고 있는 여자는 지금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얼굴이 붉어질 이유가 없다. 鸚鵡 二匹 / 二匹 / 勿論 나는 追放 당하였느니라. 追放 당할 것까지도 없이 自退하얏느니라. 나의 體軀는 中軸을 喪失하고 또 상당히 蹌踉하여 그랫든지 나는 微微하게 涕泣하얏느니라. 앵무새 두 필, 두 필. 화자는 그 여자 둘이 왜 서로 자신을 놓고 서로 부인인지를 따지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전에 살던 여자는 그때의 부인이고, 지금 사는 여자는 지금의 부인인데 그것을 왜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화자는 거기서 추방당하였다. 지금 살고 있는 여자가 화자를 추방하였을 것이다. 아니 추방당할 것까지도 없이 스스로 물러나왔다. 자신을 남편으로 생각하는 두 여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서 스스로 물러나온 것이다. 화자의 몸은 중심축을 잃어버리고 또 상당히 비틀거려서 그랬던지 미미하게 흐느껴 울었다. 당황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눈물도 났다. 왜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하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가 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저기가 저기지' 그래 두 여자가 모두 여급이지. 나는 신식교육을 받은 신사 이상. 나의 아내가 여급? 너와 나는 부부가 될 수 없다? 나는 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구나. 화자는 지금 비로소 자신이 아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두 여자와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달았다. 두 여자는 앵무새와 같은 여급이고, 두 여자의 대화에서 나왔듯이 나는 신사다. 자신을 신사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사람들은 여급들과 산다는 것을 스캔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 sCANDAL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sCANDAL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화자는 스캔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스캔들에서 s자는 소문자로 작고 CANDAL은 대문자로 크다.) 스캔들은 섹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다. 스캔들은 ‘섹스에 대한 캔들’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촛불 마주하여 앉은 사람은 촛불이 비추는 자신의 주위를 환하게 생각하듯이, 여급과 사는 것을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촛불에서 멀리 있는 사람은 촛불이 비추는 자신의 주위를 어둡게 생각하듯이, 여급과 사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신사 이상이 여급과 사는 것을 SEX SCANDAL로 생각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너』『너구나』/『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 함뿍 젖어서 그래서 獸類처럼 逃亡하얏느니라. 勿論 그것을 아 아는 사람은 或은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나 果然 그럴는지 그것조차 그럴는지. 너. 너구나. 너지. 너다. 너는 아니다. 너로구나. 화자는 지금 자신이 함께 살았던 여급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다. 사실 이상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상 시인은 4~5명의 여급들과 살았다고 한다. 이상 시인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이상 시인과 여급들과 산 것을 두고, ‘가벼운 동거’ 쯤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정식 결혼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여튼, 화자는 함뿍 생각에 젖어서, 짐승의 무리처럼 도망하였다. 짐승처럼 섹스 스캔들이 될 만한 생각들을 더듬어 본 것이다. ‘獸類(수류)’는 성적 욕망만을 추구했다는 짐승과 같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의미와, 빠르다는 의미를 동시에 비유하는 말이다. ‘도망하였다’는 말은 현재의 화자의 위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과거로 생각을 되짚어 본 것이 도망하는 것이다. 물론 화자가 과거의 함께 살았던 여급들의 생각을 되짚어 본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 혹은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과연 그 여급들과 살았던 것도 그렇게 생각할는지~~~, 그것조차 사람들은 그렇게 즉 스캔들로 생각할는지~~~ 생각하고 있다. ​ ​   ▣    烏瞰圖 詩第七號 ​ 久遠謫居의地의一枝·一枝에피는顯花·特異한四月의花草·三十輪·三十輪에前後되는兩側의明鏡·萌芽와같이戱戱하는地平을向하여금시금시落魄하는滿月·淸澗의氣가운데滿身瘡痍의滿月이劓刑當하여渾淪하는·謫居의地를貫流하는一封家信·나는僅僅히遮戴하였더라·濛濛한月芽·靜謐을蓋掩하는大氣圈의遙遠·巨大한困憊가운데의一年四月의空洞·槃散顚倒하는星座와星座의千裂된死胡洞을跑逃하는巨大한風雪·降薶·血紅으로染色된岩鹽의粉碎나의腦를避雷針삼아沈下搬過되는光彩·淋漓한亡骸·나는塔配하는毒蛇와같이地平에植樹되어다시는起動할수없었더라·天亮이올때까지.  ― 1934. 8. 1 ―     이상은 1929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한다. 그러나 1933년 23세 때 폐병으로 인한 각혈로 기수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온천에 요양간다. 거기서 기생 금홍이를 만나게 된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라는 다방을 차리고 금홍이와 동거에 들어간다. 화자가 지금 떠올리는 ‘구원한 적지’는 ‘일봉가신’을 받은 시점에서 회상하고 있는, 과거에 요양차 갔던 백천온천이다. 일봉가신을 받은 것은 시를 쓰는 시점인 현재보다 과거다. 따라서 시를 쓰는 시점보다 앞서서 일봉가신을 받았고, 일봉가신으로 인하여 화자가 회상했던, 금홍이와의 만남은 더 앞선 과거다. 대체로 문장이 명사형으로 끝난다. 무엇인가 회상하거나 상상하는 대목 같다. 서술어가 제대로 표현된 것은 '나는 僅僅히 遮戴하였더라'와 '다시는 起動할 수 없었더라' 두 군데 뿐이다. 그것도 회상 시제 선어말어미 ‘―더―’가 사용되었다. 이는 현재의 시점에서 일봉가신을 받았던 시점의 상태를 회상하면서 썼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시에는 ‘적거의 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과연 ‘적거의 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이 어느 상황에서 화자에게 왔는가. 그 내용은 대체로 무엇인가. 이것을 잘 설정해야 시의 전체적 의미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이 추리해 보겠다. 화자가 서울에서 금홍이와 함께 살던 시절에, 집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지금 화자가 함께 살고 있는 여자는 과거에 백천온천에서 기생이었고, 그래서 그녀와 함께 사는 것을 반대하거나 질책하는 내용의 편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 금홍이를 만났을 당시를 회상하였고, 지금 시를 쓰는 시점에 그 편지를 받을 당시를 회상하면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복잡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기에, 이 시는 그 의미를 쉽게 알기 어렵다. 久遠謫居의 地의 一枝. 一枝에 피는 顯花 시간적으로도 오래 되었고 공간적으로 먼 유배지 백천온천지. 그리고 그 유배지에 심겨진 한 그루의 나무처럼 외롭게 심겨진 화자. 그 나뭇가지와 같은 화자의 머리에 피어나는 한 떨기의 꽃과 같은 달. 그 달과 같은, 화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명의 여자. 금홍이. 여기서 화자는 집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시점에서 과거의 유배지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꼼짝 않고 앉아서 생각하고 있는 화자는 나뭇가지다. 나뭇가지에는 한 떨기의 꽃과 같은 달이 떠오르고 있다.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는 초저녁, 머릿속에 떠오르는 달과 같은 모습의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 그 달과 같은 그 여자는 금홍이다. 금홍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화자가 금홍이를 만났던 백천온천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 때문이다. 特異한 四月의 花草 / 三十輪 / 三十輪에 前後되는 兩側의 明鏡 화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떨기 꽃, 즉 금홍이는 사월에 피어나는 화초와 같이 특이한 화초다. 삼십일에 한 번씩 찼다가는 기우는 보름달. 보름달에 전후되는 양측의 명경과 같은, 보름달보다는 다소 갸름한, 화초였다. 여기서 금홍이를 화초로 비유한 것은 금홍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 금홍이는 보름달보다는 약간 갸름한, 손거울과 같은, 아름답고도 특이한, 화초와 같은 여자였다. 萌芽와 같이 戱戱하는 地平을 向하여 금시금시 落魄하는 滿月 돋아나는 어린 싹과 같이 희희하는 지평은 곧 금홍이와 처음 만나서 즐거움이 싹트던 백천온천지다. 그 백천온천을 향하여 지금 바로 빛을 보내고 있는 보름달과 같은 금홍이를 떠올리고 있다. 淸澗의 氣 가운데 滿身瘡痍의 滿月이 劓刑當하여 渾淪하는 / 謫居의 地를 貫流하는 一封家信 / 나는 僅僅히 遮戴하였더라. 맑은 산골물의 기운 가운데에 있는 백천온천지. 만신창이의 만월처럼 기생으로서 혹은 창녀로서 온몸에 상처를 입은 동그란 얼굴의 금홍이. 비형을 당한 사람이 고통으로 소리치듯이 콧소리로 교성을 지르고 있는 혼돈의 땅, 화자가 유배와 사는 백천온천지를 꿰뚤어 보는 듯한 일봉가신. 이로하여 화자는 간신히 금홍이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청간의 기운 가운데’은 맑은 산골물의 기운이 흐르는 곳이다. 이는 백천온천지다. 만신창이의 만월이 비형을 당하여 혼륜하는 적거의 지는, 기생으로서 창녀로서 온몸에 상처를 입고, 밤마다 코를 베인 형벌을 받는 듯이, 콧소리를 내면서 교성을 지르는 혼돈의 땅이면서, 화자가 유배를 갔던 땅 백천온천지다. 화자는 일봉가신을 받고 그때의 기억을 간신히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근근히 저대하였다’는 말은 ‘근근이 이것을 머리에 이었다.’는 말인데, 간신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는 의미다. 濛濛한 月芽 / 靜謐을 蓋掩하는 大氣圈의 遙遠 / 巨大한 困憊 가운데의 一年四月의 空洞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금홍이와의 생활의 시작, 금홍이와의 생활의 고요함의 뚜껑을 덮었던 대기권의 멀고 아득함(백천온천에서의 금홍이와의 생활이 화자가 살던 서울과 멀어서, 그 소문이 서울에 있는 가족에까지 나지 않았음을 의미함). 거대한 어려움 속에서 보낸 1년 4개월의 텅 빈 골짜기의 생활.   槃散顚倒하는 星座와 星座의 千裂된 死胡洞을 / 跑逃하는 巨大한 風雪 / 降薶 / 血紅으로 染色된 岩鹽의 粉碎 남녀가 만나서는 서로 즐기다가 헤어지며 또 다른 계집의 몸 위에 넘어지는, 뭇사람들이 서로 만났다가는 헤어지는, 죽음이 드리운 골짜기. 그 골짜기를 따라 죄를 짓고 도망치듯 달아나는 거대한 눈바람 즉 교성. 남근으로 내리쳐서 구멍 즉 음부를 메우는 소리. 피처럼 붉게 염색된 발기된 남근으로 암염(巖鹽)을 분쇄하기 위해 절구질 하듯이, 음부를 내리치며 정액을 쏟아내는 곳. 환락가로서의 백천온천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의 腦를 避雷針삼아 沈下搬過되는 光彩/ 淋漓한 亡骸 화자의 뇌를 피뢰침 삼아서, 밑으로 투과되어 지하로 스며들어가고 있는, 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은 금홍이의 기억들. 여기서 화자는 기억(뇌)을 통해서 달로 비유된 금홍이에 대한 기억(광채)이 뇌리를 스쳐가는 모습을, 마치 달빛이 화자의 뇌를 피뢰침 삼아서 내려온 다음 화자의 뇌를 통과하여 지하로 스며드는 달빛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흠뻑 젖어보는, 잊었던 금홍이 모습. ‘임리’는 흠뻑 젖는다는 말이다. ‘망해’는 까마득히 잊었던 금홍이 모습을 의미한. 따라서 오랜만에 금홍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금홍이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추억에 흠뻑 젖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塔配하는 毒蛇와 같이 地平에 植樹되어 / 다시는 起動할 수 없었더라 / 天亮이 올 때까지 화자는 탑과 짝을 이루는 독사와 같이 평지에 나무로 심겨져, 다시는 일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여기서 화자는 움직일 줄 모르는 탑의 짝인,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처럼 앉아서, 금홍이와 만났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치 평지에 심겨진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이 올 때까지. ​ ​   ▣    烏瞰圖 詩第八號  解剖 第一部試驗   手術臺             一              水銀塗抹平面鏡     一              氣壓               二倍의平均氣壓              溫度               皆無    爲先痲醉된正面으로부터立體와立體를爲한立體가具備된全部를平面鏡에映像시킴. 平面鏡에水銀을現在와反對側面에塗沫移轉함. (光線侵入防止에注意하여)徐徐히痲醉를解毒함. 一軸鐵筆과 一張白紙를支給함.(試驗擔任人은被試驗人과抱擁함을絶對忌避할것) 順次手術室로부터被試驗人을解放함.翌日.平面鏡의縱軸을通過하여平面鏡을二片에切斷함. 水銀塗抹二回. ETC 아직그滿足한結果를收得치못하였음.   第二部試驗  直立한平面鏡       一             助手               數名 野外의眞空을選擇함. 爲先痲醉된上肢의尖端을鏡面에附着시킴. 平面鏡의水銀을剝落함. 平面鏡을後退시킴. (이때映像된上肢는반드시硝子를無事通過하겠다는것으로假說함) 上肢의終端까지. 다음水銀塗抹. (在來面에) 이瞬間公轉과自轉으로부터그眞空을降車시킴. 完全히二個의上肢를接受하기까지. 翌日. 硝子를前進시킴. 連하여水銀柱를在來面에塗抹함. (上肢의處分)(惑은滅形)其他. 水銀塗抹面의變更과前進後退의重複等. ETC 以下未詳  ― 1934. 8. 2 ―   시인이 아팠는가 보다. 병원에 갔는가 보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였는가 보다. ‘제일부시험’은 엑스레이 촬영하는 내용이다. ‘제이부시험’에서는 엑스레이 사진을 바탕으로 수술을 받는 장면이다. 시인이 직접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詩第八號  解剖 소제목 '해부'는 이른바 이상이 몸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는 장면을 바탕으로 이 시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第一部 試驗 ‘제일부시험, 제이부시험’에서 '시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화자가 서양식 치료 방식에 대한 신뢰를 보내지 않는 상태에서, 과연 그들이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를 시험해 본다는 의식 즉 의사의 치료행위에 대해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반영된 표현이다. 또 전체적으로 시험을 보는 장면을 연상하도록 한다.   手術臺 : 一, 水銀塗抹 平面鏡 : 一, 氣壓 : 二倍의 平均氣壓, 溫度 : 皆無  제일부 시험을 위한 준비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수술대 한 개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수술대는 엑스레이를 찍는 기계를 의미한다. 수은도말평면경이 한 개 필요하다. 여기서 수은도말경은 수은을 바른 거울이라는 뜻인데, 엑스레이 필름이다. 보통 엑스레이 찍는 기계에 넣는 필름으로서, 필름통 속에 들어 있다. 수은을 입힌 거울은 보통 거울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엑스레이 필름을 거울이라고 표현한 것은 거울에 사람의 형상이 그대로 비추듯이 엑스레이 필름에도 사람의 내부에 있는 병의 형상이 그대로 비춘다는 의미에서 거울로 표현했다. 기압은 두 배의 평균 기압을 준비한다. 두 배의 평균 기압이 있으면 숨이 막혀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엑스레이를 찍을 때 숨을 멈추는 것을 상상한다면 왜 두 배의 평균 기압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찍을 때 답답한 채로 숨을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온도는 개무하다. 전혀 없다. 웃옷을 벗고, 차가운 기계에 몸을 부착하여 찍는 것을 생각하며 쓴 것이다. 차가운 것은 온도가 없는 것이다. ‘溫’은 따뜻할 온 자다. 따뜻한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온도인데, 차가운 것 밖에 없다는 발상이다.   爲先 痲醉된 正面으로부터 立體와 立體를 爲한 立體가 具備된 全部를 平面鏡에 映像시킴 마취된 정면이란 엑스레이 기계 앞에서 마치 마취 된 듯이 정면을 향하여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을 말한다.  ‘입체와 입체를 위한 입체’에서 앞의 두 입체는 엑스레이 기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몸체, 마지막 ‘입체’는 엑스레이 기계다.  사람의 몸체와 엑스레이 기계 전부를 평면경에 영상 시킨다. 방사선은 어디에선가 나와서 사람의 몸을 통과하여, 사람이 서 있는 기계 속의 필름으로 들어가서 사람의 형상을 필름에 나타나게 한다. 따라서 사람과 기계를 모두 영상 시키는 것이다.   平面鏡에 水銀을 現在와 反對 側面에 塗沫移轉함 거울에서는 바라보고 있는 유리의 뒷면에 수은을 도말함으로써 사람의 형상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엑스레이 촬영에서도 사람의 형상이 필름에 나타나도록 하자면, 현재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필름의 반대 측면에 수은을 도말해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표현이다.   (光線 侵入 防止에 注意하여)徐徐히 痲醉를 解毒함 엑스레이 필름은 광선이 침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광선침투에 유의하면서 서서히 마취를 해독한다. 마취가 엑스레이 기계 앞에서 꼼짝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마취를 해독하는 행위는 꼼짝 않던 몸을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다. 촬영을 마치고 기계 앞에서 물러난다.   一軸鐵筆과 一張白紙를 支給함.(試驗 擔任人은 被試驗人과 抱擁함을 絶對 忌避할 것) ‘일축철필’은 쇠로 된 지팡이이다. ‘일축’은 그것을 짚고 의지하는 것이다. ‘철필(鐵筆)’은 쇠로 된 붓과 같은 것, 즉 쇠로 지팡이다. 환자들이 짚는 것이다. ‘일부시험’과 연결하여 지팡이를 철필로 표현했다. 일장백지는 한 장의 백지다. 원래는 진료기록 서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병이 심각한 환자의 입장에서 진료기록 서류의 글이 전혀 보이지 않고, 또 시험 볼 때 백지를 지급하는 것과 연결하여 표현한 것이다. 환자가 지팡이를 짚고, 진료 기록을 받아서 촬영실을 나오는 장면이다. 시험을 담당한 의사는 환자와 포옹함을 절대 꺼리고 피한다. 환자로부터 병이 옮을까봐서 부축하기를 기피한다.   順次手術室로부터 被試驗人을 解放함 순차수술실은 엑스레이 촬영실과 수술실이다. 여기서는 엑스레이 촬영실이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엑스레이 촬영실에서 촬영을 하고, 다음으로 수술실에서 수술을 순차적으로 해야 한다. 피시험인은 환자다. 환자가 촬영실에서 나온다. 힘겹게 촬영을 마치고 촬영실을 나오는 것은 해방이다.   翌日. 平面鏡의 縱軸을 通過하여 平面鏡을 二片에 切斷함 다음 날, 평면경 즉 엑스레이 사진의 세로축을 통과해서 평면경 즉 엑스레이 필름 통을 두 조각으로 절단한다. 필름 통에서 필름을 꺼내는 장면이다.   水銀塗抹 二回 엑스레이 필름을 현상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수은을 도말한 거울에는 사람의 형상이 나타난다. 엑스레이 필름에는 환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수은도말을 2회 했다는 것은 엑스레이 필름에서 다시 형상이 드러나도록, 약품을 처리하여 현상한 것으로 보인다.   ETC 아직 그 滿足한 結果를 收得치 못 하였음 기타, 아직 그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화자는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엑스레이만 찍는다고 병이 낫지 않는다. 이부 시험을 볼 수밖에 없다. 이부시험은 수술이다.   第二部 試驗,  直立한 平面鏡 一, 助手 數名  제이부 시험 즉 수술을 하기 위한 준비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직립한 평면경 한 개가 준비된다. 직립한 평면경은 세로로 세운 에스레이 필름을 말한다. 병원에 가면 벽면에 있는, 불빛이 있는 판 위에 엑스레이 필름을 걸어 놓고, 그것을 보면서 수술을 한다. 직립한 평면거울은 걸어 놓은 엑스레이 필름을 말한다. 조수 수명이 준비된다. 조수는 간호원이다. 간호원은 의사가 환자를 시험하기 위해서 준비한 조수다. 여러 명이 필요하다.   野外의 眞空을 選擇함 시험 즉 수술을 야외의 진공을 선택해 그곳에서 한다. 야외는 자신의 온 몸이 드러난 공간이다. 수술을 할 때 온 몸을 벗은 채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이다. 진공의 공간에서 시험 즉 수술을 한다. 진공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은 마취 상태와 유사하다. 옷을 벗고, 마취를 했다는 뜻이다.   爲先 痲醉된 上肢의 尖端을 鏡面에 附着시킴 우선 마취된 상지 즉 팔의 첨단 즉 뾰죽한 것을 거울면에 부착시킨다. 마취된 상지의 첨단은 수술 도구를 잡고 있는 의사의 손끝에 달린 수술 도구다. 의사의 팔을 마취된 상지로 표현한 것은 의사가 수술할 때 경직된 자세로 수술을 함을 표현한 것이다. 경직된 모습이 마치 마취된 모습과 흡사하다. 첨단을 경면에 부착시킨다는 것은 수술 도구를 엑스레이 필름에 부착시킨다는 의미다. 수술 도구의 뽀족한 끝을 환자의 몸에 부착시키지 않고, 필름에 부착시키는 것인지는 다음에 나온다.   平面鏡의 水銀을 剝落함 (수술 도구로) 평면경 즉 필름의 수은을 벗겨 낸다. 환자의 환부가 필름에 나타났고, 그 필름이 거울과 같다면, 거울 뒷면의 도말된 수은을 벗겨낸다면 환부가 거울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수술을 통하여 환부를 제거하는 것을 거울의 뒷면에 있는 수은을 벗겨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平面鏡을 後退시킴. (이때 映像된 上肢는 반드시 硝子를 無事通過하겠다는 것으로 假說함) 上肢의 終端까지 평면경 즉 필름을 환자의 몸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 때 필름이라는 평면경에 영상된 상지 즉 의사의 팔은 반드시 초자 즉 유리를 무사히 통과하겠다는 것을 가설한다. 필름 즉 거울에 영상된 의사의 팔이 거울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의사의 팔은 필름에 찍힐 것이고 결국 환자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의사의 팔이 필름 즉 거울에 비쳐서 형상으로 남아 있지 않고 무사히 통과하여야 환자의 실제 몸에 의사의 팔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소 난해한 부분이다. 팔의 종단 곧 잡고 있는 수술 도구까지 거울을 무사히 통과하여야 한다.   다음 水銀塗抹. (在來面에) 이 瞬間 公轉과 自轉으로부터 그 眞空을 降車시킴. 完全히 二個의 上肢를 接受하기까지 다음으로 박락한 필름 즉 벗겨낸 거울에 수은을 다시 입힌다. 앞에서 거울의 수은을 벗겨 냄으로써 환부를 도려낸다고 하였는데, 수은이 벗겨진 부분을 그냥 두면, 그 부분은 환자의 영상이 투과해 버린다. 그러면 환자는 구멍이 뻥 뚫린 상태의 사람이 되고 만다. 따라서 수술 후에 다시 거울 면에 수은을 도말하여야 환부를 치료한 부분이 다시 필름에 촬영되고, 결국 환자의 몸이 정상이 되기 때문이다. 재래면은 본래부터 있었던 화자의 몸이다.  이 순간 공전과 자전으로부터 그 진공을 해방시킨다. 공전과 자전은 화자가 마취된 상태다. 마취가 되면 어질어질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데, 이를 공전과 자전이라고 표현했다. ‘진공을 강차시킨다’는 것은 마취된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의미다. 차를 타면 어지럽고 멀미를 한다. 마취도 이와 유사하다. 차에서 내리면 멀미가 사라진다. 두 팔을 환자가 완전히 접수할 때까지 마취를 해독한다. 상지를 접수하는 것은, 환자가 마취가 되었을 때는 두 팔을 양쪽으로 늘어뜨리는데, 마취에서 깨어나면 늘어뜨렸던 팔을 거두는 모습을 연상하여 표현한 것이다.   翌日. 硝子를 前進시킴. 連하여 水銀柱를 在來面에 塗抹함. (上肢의 處分)(惑은 滅形) 다음날, 유리를 전진시킨다. 환자의 몸 쪽으로 유리를 전진시키면 그 거울 혹은 필름과 달리 환자의 환부가 유리에 남지 않고 투과된다. 따라서 환자는 환부의 흔적이 거울 혹은 필름에 남지 않는다. 따라서 환부가 보이지 않는 환자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된다. 환자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계속해서 체온계를 재래면 즉 환재의 본래부터 있었던 몸에 도말한다. 여기서 도말한다는 것은 환자의 몸에 부착시킨다는 의미다. 체온을 재는 장면이다. 체온을 재는 것은 팔의 처분과 혹은 팔의 사라지는 형상과 관련이 있다. 체온을 잴 때의 팔의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길게 뻗은 팔을 오므려 짧게 몸에 부착하는 모습이다.   其他. 水銀塗抹面의 變更과 前進後退의 重複 等 기타. 수술 후의 여러 가지 조처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수술 후 다시 촬영을 했고, 필름에 다른 모습이 촬영되었다. 전진과 후퇴를 중복했다. 수술 후 여러 번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기타 여러 가지 조처가 있었다.   ETC 以下 未詳 기타 이하는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 ​ ​ ▣  烏瞰圖 詩第九號   銃口 ​ 每日같이烈風이불더니드디어내허리에큼직한손이와닿는다. 恍惚한指紋골짜기로내땀내가스며드자마자쏘아라. 쏘으리로다. 나는내消化器管에묵직한銃身을느끼고내다물은입에매끈매끈한銃口를느낀다. 그리더니나는銃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銃彈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배앝었더냐. ​  ― 1934. 8. 3 ―     銃口 이 시는 남자끼리의 동성애 경험을 표현한 시다. 두 남자가 서로를 상대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면서 성적으로 만족하여 사정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제목 ‘총구’는 정액을 쏘아 방출하는 남근을 비유한 것이다. 총알을 발사하는 총구, 정액을 총알처럼 쏘는 남근, 제목의 의미를 유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每日같이 烈風이 불더니 드디어 내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는다. 매일같이 거센 바람이 불더니 드디어 화자의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았다. 여기서 ‘열풍(烈風)’은 ‘열풍(熱風)’과 다르다. 열풍(烈風)은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상대 쪽에서 화자 쪽으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누군가가 화자에게 매일같이 동성애의 유혹을 보낸 것 같다. 그러더니 드디어 화자의 허리에 큼직한 손이 닿는다. 누군가가 화자를 성적 대상으로 느꼈는가 보다. 화자보다 큰 사람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화자보다 큼직한 손, 그리고 화자의 허리를 감싸는 손, 그 손의 주인공은 화자를 마치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듯이 다정히 감싸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남성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동성애자다. 恍惚한 指紋 골짜기로 내 땀내가 스며드자마자 쏘아라. 쏘으리로다. 황홀한 지문 골짜기로 땀내가 스며들었다. 화자가 상대의 남근을 잡고 열심히 애무했다. 땀이 손에 날 만큼 애무했다. 그러자 화자도 황홀함을 느끼는 순간, “사정하라. 나도 사정할 것이다.”라고 상대가 말했다. 나는 내 消化器管에 묵직한 銃身을 느끼고 내 다물은 입에 매끈매끈한 銃口를 느낀다. 화자는 자신의 소화기관 즉 입에, 묵직한 총신(銃身) 즉 곧 사정하려는 남근을 느끼고, 자신의 다문 입에 매끈매끈한 총구 즉 상대의 사정하여 정액으로 매끈매끈해진 남근을 느낀다. 그리더니 나는 銃 쏘으드키 눈을 감으며 한 방 銃彈 대신에 나는 참 나의 입으로 무엇을 내배앝었더냐. 그러더니 화자는 총을 쏘듯이 눈을 감고, 한 방 총탄 대신에 입으로 무엇을 뱉었다. 화자는 사정을 하지 못한 것 같다. 화자가 눈을 감은 것은 상대의 정액이 입에 들어오자 불결한 생각에 눈을 감은 것 같다. “쏘아라, 쏘으리로다”라고 말한 상대방은 화자에게 총탄 대신에 무엇을 쏘았고, 화자는 그 쏘은 것을 뱉은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쏜 정액이다. ​ ​ ​ ▣   烏瞰圖 詩第十號  나비 ​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그것은幽界에絡繹되는秘密한通話口다. 어느날거울가운데의鬚髥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 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앉았다일어서드키나비도날아가리라. 이런말이決코밖으로새어나가지는않게한다   ​ ― 1934. 8. 3 ―   ​ 찢어진 壁紙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기독을 상상해 본다. 죽어가는 나비는 기독이다. 기독은 팔을 벌리고 있다. 나비의 모습이다. 기독은 갈빗대가 드러났다. 연약한 모습이다. 기독은 피를 흘리고 있다. 죽어가는 모습이다. 따라서 화자는, 어느 집의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의 상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가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을까. 1930년대, 찢어진 벽지를 바르고 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 많이 다녔을 것이다. 교회는 교회에 들어오는 헌금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 다녀야 그래도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 아닐지도 모른다. 기독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 가난한 이웃을 더욱 생각하는 종교가 기독교다. 가난한 사람은 기독 앞에서 심리적으로 평등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은 이승에서는 가난하지만 저승에서라도 천당에 태어나서 고통이 덜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기독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참고 견디게 하는 힘을 나누어 주는 존재다.  하여튼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는 십자가는 가난한 어느 사람의 집에 걸려 있는 십자가다. , , 에 나오는, 어느 젊은 과부의 집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幽界에 絡繹되는 秘密한 通話口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저승 세계에 왕래할 수 있는 비밀한 통화구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그에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미밀스런 통화구다. 따라서 ‘그것은’ 십자가의 기독이다.   어느날 거울 가운데의 鬚髥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어느 날 화자는,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 나비를 보고 있다. 거울은 실제는 아니되, 실제와 닮은 상을 보여주는 도구다. 따라서 거울에 비친 수염은 기독의 수염과 유사한 어떤 것이다. 그런데 가운데의 수염이다. 기독의 수염은 얼굴에 났고, 거울에 비친 기독의 수염을 닮은 수염은 가운데에 났다. 그렇다면 수염은 여자의 음모다.  그 음모에 붙어서 죽어가는 나비는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과 닮은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기독이 두 팔을 벌리고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은 나비의 모습과 유사하다. 나비는 화자의 힘없이 늘어진 남근이다. 고환이 양쪽에 있고, 그 고환 사이에 축 늘어진 남근은 십자가에 매달려 힘없이 늘어진 기독이다. 죽어가는 나비다.   날개 축 처어진 나비는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날개가 축 처진 나비 곧 남근은,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나비가 이슬만 먹고 살듯이, 화자의 남근은 가운데 수염 즉 음모가 수염처럼 난 여성의 성기의 입구에 어리는 체액을 먹는다. 그런데 그 체액이 가난한 이슬이다. 힘이 없어 축 처진 화자의 남근은 여성에게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한다. 여성의 음부에서는 체액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 이슬만 먹는다.   通話口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 죽으면 앉았다 일어서드키 나비도 날아가리라 벽지가 찢어진 집에 사는 사람이, 십자가를 손바닥으로 꼭 쥐면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내가 죽으면~~천당에 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마친 다음 일어서듯이, 화자도 자신의 힘없는 남근을 정액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꼭 잡고 자위를 하면, 마치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가 끝나면 일어서듯이, 화자의 늘어진 남근도 일어설 것이다. 제대로 발기될 것이다.  에 보면 여성에 대한 이상의 의식의 근원을 엿볼 수 있다. 여성도 끊임없이 성적으로 만족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은 여자와의 관계는 성적으로 얼마나 잘 만족시켜 줄 수 있는가가 여성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믿는다. 이런 이상으로서 잘 발기되지 않는 자신의 남근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상은 자신의 남근이 잘 발기가 되지 않고 힘이 없는 것은 자주 정액을 분출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름대로 힘찬 남근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자위를 할 때나 혹은 여자와 관계할 때, 정액을 분출하지 않고 한다면, 그 정액이 밖으로 나가지 않음으로써 늘 힘찬 남근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나름대로 비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런 말이 決코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게 한다 나름대로 터득한 비법을 남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 ​ ▣   烏瞰圖 詩第十一號  ​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여부딪는다. 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骸骨이다. 가지낫든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前에내팔이或움직였든들洪水를막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 1934. 8. 4 ―     이상의 언어 구사는 상식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의 시는 난해하다는 것은 늘 타당한 명제였다. 난해하다는 것은 풀이가 어렵다는 말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난해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상을 천재 시인이라고 말한다. 타당한 명제다. 그러나 왜 천재 시인인지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이 모른다고 해서 상태를 천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이 천재의 진정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유를 밝혀야 한다. 이제는 이상의 천재성은 언어 구사의 천재성, 수사적 천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상은 시에서 수사의 천재다. 그러면 이상의 수사적 문제를 이해하면 이상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기컵은 내 骸骨과 흡사하다 사기컵은 무엇인가를 비유한 것이다. 내 해골도 무엇인가를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각각 비유된 사기컵과 내 해골은 또 그 어떤 유사한 속성을 공유한다. 이 정도만 문장을 분석할 능력이 있어도 이 구절의 의미를 상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기컵의 속성은 깨지기 쉬운 것이다. 사기컵처럼 깨지기 쉬운 어떤 속성을 가진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기컵은 내 해골과 흡사하다고 했다. 먼저 내 해골이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해골, 사기컵처럼 깨지기 쉬운 내 해골은 무엇을 비유한 것인가. 이상의 시를 두루 읽어본 사람, 그리고 그 두루 읽어본 시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만이 ‘내 해골’이 무엇을 비유했는지를 알아차릴 것이다. 내 해골은 화자의 남근이다. 화자의 해골 즉 화자의 모습과 화자의 남근은 형태상 유사하다. 머리통 모양의 귀두, 목처럼 잘록한 귀두 아래, 그리고 몸통과 같은 이하 부분은 마치 사람의 상체 형상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청소년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기의 화자의 남근은 성적 민감성으로 깨지기 쉬운 속성을 가졌다. 깨진다는 것은 여자를 보면 쉽게 흥분하고, 또 여자와 접하여 쉽게 사정을 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동정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기컵으로 비유된 대상은 어떤 처녀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처녀는 사기컵처럼 깨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처녀성은 깨지기 쉬운 것이다. 결국 사기컵은 화자의 해골과 비슷하다. 처녀는 화자와 생김새도 비슷하며, 처녀는 화자의 남근처럼 깨지기 쉬운 속성도 지녔다. 이제부터 사기컵은 어느 처녀다.   내가 그 컵을 손으로 꼭 쥐었을 때 내 팔에서는 난데없는 팔 하나가 接木처럼 돋히더니 그 팔에 달린 손은 그 사기컵을 번쩍들어 마룻바닥에 메여 부딪는다 화자가 그 처녀를 손으로 꼭 쥐었을 때, 팔에서는 난데없이 팔 하나가 마치 접목하듯이 돋아났고, 그 팔에 달린 손이 처녀를 번쩍 들어서 마룻바닥에 메어 부딪게 했다.  화자가 처녀를 손으로 꼭 쥐었다. 조그만 사기컵을 손으로 꼭 쥐는 모습은, 커다란 처녀를 포옹하는 모습이다. 그러자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팔이 돋아나서 그 처녀를 번쩍 들어서 마룻바닥에 쿵 하고 눕혔다. 성적 감수성이 예민한 화자가 처녀를 포옹하는 순간,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처녀를 범하려는 순간이다.   내 팔은 그 사기컵을 死守하고 있으니 散散이 깨어진 것은 그럼 그 사기컵과 흡사한 내 骸骨이다 화자의 팔은 그 처녀를 사수하고 있으니, 화자는 처녀를 눕혀 놓은 채 꼭 껴안기만 하고 있으니, 산산이 깨어진 것은 처녀가 아니다. 그것은 처녀와 속성이 흡사한 화자의 남근이다. 화자는 처녀를 범하지 않은 채 사정했다. 화자만 깨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동정이 깨진 것이다. ​ ​ ▣   烏瞰圖 詩第十二號 ​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空中으로날라떨어진다.그것은흰비둘기의떼다.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戰爭이끝나고平和가왔다는宣傳이다.한무더기비둘기의떼가깃에묻은때를씻는다.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망이로흰비둘기의떼를때려죽이는不潔한戰爭이始作된다.空氣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묻으면흰비둘기의떼는또한번이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 1934. 8. 4 ― ​ ​   과거에, 군인들만 살아가는 병영은 남성들만의 공간이다. 젊은 군인들이 병영에서 풀려났을 때,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창녀촌인 것 같다. 병영에서 성적 욕망을 해결할 수 없었던 젊은 군인들은 휴가를 나온다던가 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창녀촌이다. 때 묻은 빨래조각이 한 뭉텅이 空中으로 날라 떨어진다. 그것은 흰 비둘기의 떼다. 때 묻은 빨래조각이 한 뭉텅이 공중으로 날아 떨어진다. 창녀촌을 찾아 성적 욕망을 해결하고자 하는 젊은 군인이 옷을 벗어서 공중에 급히 내던지며 서두르는 모습이다. 그것은 흰 비둘기 떼다. 속옷의 흰 색깔과 비둘기의 흰 색깔은 유사하다. 전시에는 군인이 병영 밖으로 나올 수 없으나 평화 시에는 병영 밖으로 휴가를 나올 수 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그래서 공중으로 날았다가 떨어지는, 급히 벗어 던지는 때 묻은 빨래조각을 흰 비둘기 떼라고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성욕을 해결하지 못한 군인들은 ‘때 묻은 빨래조각’을 벗어던지는 것일까. 이 시에는 성욕을 해결하는 것을 방망이질하여 때를 씻는 행위로 나타내고 있는데, 왜 그런 발상을 한 것일까. 참으로 궁금했고, 고민했던 대목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다. 오랫동안 풀지 못한 성욕은 늘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때가 묻은 옷은 그것을 벗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묵었던 성욕을 해결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때가 묻은 옷을 벗어 세탁을 해서 입으면 상쾌해진다. 따라서 오랫동안 묵은 성욕을 해결하는 것은 마치 빨래를 하는 것과 같다. 여자와 성교를 하는 것도 빨래 방망이질을 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다.  그래서 창녀촌에 찾아온 군인들은 급히 때가 묻은 옷을 벗어버리고, 묵은 성욕을 해결한다. 그러나 성욕은 한 번 해결한다고 해서 영원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쌓인다. 빨래도 한 번 빨아 입는다고 해서 영원히 깨끗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때가 낀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하늘 저편에 戰爭이 끝나고 平和가 왔다는 宣傳이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하늘 저편은, 손바닥만한 창녀촌 저편을 가리킨다. 병영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군인들은 병영에 나와 창녀촌을 찾는다. 창녀촌에 군인들이 몰려올 때는 병영에 평화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무더기 비둘기의 떼가 깃에 묻은 때를 씻는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에 방망이로 흰 비둘기의 떼를 때려죽이는 不潔한 戰爭이 始作된다. 일군의 군인들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성욕의 때를 씻어내고 있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은 창녀촌이다. 창녀촌의 방들은 좁다. 창녀촌에서는 방망이로 흰 비둘기 떼를 때려죽이는 불결한 전쟁, 오래 묵은 성욕의 때를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방망이는 남근의 암유다. 방망이와 같은 남근으로 묵은 성적 욕망의 때를 씻는 불결한 전쟁, 마치 때가 묻은 빨래를 하는 듯한, 요란한 전쟁이 시작된다. 마침내 창녀촌은 방망이질하는 군인들과 창녀들의 교성으로 전쟁터처럼 시끄러워 진다. 아니 서로 전쟁하듯이, 싸움하듯이 끌어안고 씩씩거린다. 空氣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으면 흰 비둘기의 떼는 또 한 번 이 손바닥만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공기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는 것은 공기가 깜깜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군인들이 또 한 번 이 손바닥만한 창녀촌을 떠나서 병영으로 들어간다. ‘또 한 번’이라는 말로 봐서, 병영이 평화로울 때마다 일군의 군인들이 창녀촌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 ​ ​ ▣   烏瞰圖 詩第十三號 ​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 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威脅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 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燭臺세움으로내방안에裝飾하여놓았다. 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怯을내이는것만같다. 나는이러한얇다란禮儀를花草盆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  ― 1934. 8. 7 ―   내 팔이 면도칼을 든 채로 끊어져 떨어졌다. 이 시에는 두 개의 팔이 나온다. 과연 이 시에 등장하는 두 개의 ‘팔’은 무엇인가? 고민스럽다. 들여다봐도 들여다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골칫거리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다. 팔은 몸에서 돋아난 것이다. 화자의 두 개의 팔은 화자의 몸에서 돋아난, 팔과 같은 것 두 개를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는 팔이고, 하나는 남근이다. 화자의 팔이, 면도칼을 든 재로 끊어져 떨어졌다. 여기서 면도칼은 두 개의 팔 중의 하나인 남근이다. 남근이 왜 면도칼이 될까. 면도칼은 무엇을 예리하게 베어서 벤 자국에 틈이 벌어지게 하며, 살을 베고 그 끝에는 피가 묻어 있다. 화자의 발기된 남근은 여체의 어느 한 부분을 예리하게 베어서 찢고 싶은 욕망, 즉 여자의 몸속에 사정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끝에 정액이 묻어 있다. 화자의 팔이 면도칼인 남근을 손에 든 채로 떨어졌다. 한참 자위를 하던 화자가 사정 후, 갑자기 팔의 동작이 멈추고, 정액이 끝에 조금 묻어 있는 남근을 손으로 잡은 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정 후에 갑자기 멈추는 팔의 동작, 그리고 갑자기 줄어드는 남근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또 자위를 한 후에 낙담하여 물끄러미 남근을 바라보는 장면이라고 해도 좋다. 왜 낙담을 하여 물끄러미 바라볼까. 남근에서 정액이 마치 칼끝에 묻은 핏방울처럼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무엇에 몹시 威脅당하는 것처럼 새파랗다.  자세히 보면, 사정을 한 남근은 무엇에 몹시 위협당하는 것처럼 새파랗다. 위협을 당하는 사람은 새파랗게 질려서 몸을 움츠린다. 붉은 남근이 색이 힘을 잃으면서 작아졌다. 아니 정액이 끝에 조금 나와 있는 남근을 보면서,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몹시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남근이 위협당한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하여 잃어버린 내 두 개 팔을 나는 燭臺세움으로 내 방안에 裝飾하여 놓았다.  이렇게 하여 잃어버린 화자의 두 개 팔, 떨어진 두 개의 팔을 화자는 촉대세움으로 화자의 방 안에 장식하여 놓았다. 마치 나란히 장식해 놓은 두 개의 촉대를 감상하듯이, 자위를 한 후, 조금밖에 정액을 쏟아내지 못한 남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장식물은 오래도록 바라보며 감상하기 위한 것이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나에게 怯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러한 얇다란 禮儀를 花草盆보다도 사랑스레 여긴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화자에게 겁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내이다’는 ‘내게 하다’의 의미, 사동의 의미다. 팔이 화자에게 겁을 내게 한다는 뜻이다. 자위한 주체는 팔이다. 팔이 자위를 함으로서 면도칼로 비유된 화자의 남근은 사정을 했고, 남근의 끝에는 핏방울과 같은 정액이 조금 묻어 있다. 자위를 한 팔은, 자위 후에 남근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에게 겁을 내게 하려는 듯이, 피와 같은 정액을 조금 묻도록 한 것이다. 마치 이제는 자위를 하지 말라는 듯이 정액을 남근 끝에 조금 남겨놓은 것이다. 나는 팔의 이러한 얇다란 예의를 화초분보다 사랑스럽게 여깁니다. ‘팔의 이러한 얇다란 예의’는 자위를 하여 사정을 한 후 남근의 끝에 정액을 조금 묻게 해 놓음으로써 화자에게 겁을 먹게 하는 예의다. 자위를 자주 하지 말라고 젊잖게 일러주는 예의다. 화자는 그것을 ‘화초를 키우는 화분과 같이, 안에 생명을 키우는 여자보다 더 사랑스럽게 여긴다. 왜 화자는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자위 후 남근에서 정액이 조금 나온 것은, 자위를 자주 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다. 따라서 자위를 한 주체인 팔은 예의가 있는 놈이다. 그런데, 화초분 즉 여자는 그렇지 않다. 상대가 끊임없이 자신을 만족시켜주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의 의식 속에서 여자는 성적으로 만족을 시켜줘야 한다는 강한 강박관념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이상의 내면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시로는, 가 대표적이며, 그 이외에도 , 등에도 나타난다.   ​ ​ ▣   烏瞰圖 詩第十四號 ​ 古城앞에풀밭이있고풀밭위에나는帽子를벗어놓았다. 城위에서나는내記憶에꽤무거운돌을매어달아서는내힘과距離껏팔매질쳤다. 抛物線을逆行하는歷史의슬픈울음소리. 문득城밑내帽子곁에한사람의乞人이장승과같이서있는것을나려다보았다. 乞人은성밑에서오히려내위에있다. 或은綜合된歷史의亡靈인가. 空中을向하야놓인내帽子의깊이는切迫한하늘을부른다. 별안간乞人은慓慓한風彩를허리굽혀한개의돌을내帽子속에치뜨려넣는다. 나는벌써氣絶하였다. 심장이頭蓋骨속으로옮겨가는地圖가보인다. 싸늘한손이내이마에닿는다. 내이마에는싸늘한손자국이烙印되어언제까지지어지지않았다.  ― 1934. 8. 7 ―     古城 앞에 풀밭이 있고 풀밭 위에 나는 帽子를 벗어 놓았다. 이 시는 화자가 어느 과부와 성교를 한 것을 회상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성은 오래되고 낡은 옛 성이다. 그 성에는 원래 누군가가 살았었다. 그러나 그 후로 주인이 없는 성, 오랫동안 비워서 낡은 성, 이는 곧 주인이 없는 과부의 음부를 표현한 것이다. 고성 앞에는 풀밭이 있었다. 풀밭은 과부 음부에 난 음모다. 그 풀밭 위에 모자를 벗어 놓았다. 발기가 되어 귀두가 드러난 남근은 마치 모자를 벗은 사람의 머리 형상이다. 城 위에서 나는 내 記憶에 꽤 무거운 돌을 매어달아서는 내 힘과 距離껏 팔매질 쳤다. 화자는 자신이 기억하기에 꽤 무거운 돌을 매달아서, 성 위에서, 힘과 거리껏 팔매질을 쳤다. 과부의 성기에 자신의 남근을 힘차게 내리 쳤다는 말이다. 꽤 무거운 돌은 아래로 무겁게 떨어진다. 팔매질 치는 행위는 힘차게 내던지는 행위이며, 무거운 돌은 아무리 팔매질 쳐도 곧바로 아래로 무겁게 떨어지게 마련이다. 힘차게 과부의 음부를 향해서 남근을 내리 던지듯이 꽂았다는 뜻이다. 抛物線을 逆行하는 歷史의 슬픈 울음소리. 포물선을 역행하는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과부의 음부를 향해서 힘차게 남근을 내리 꽂자, 과부는 마치 포물선처럼 몸을 뒤로 젖히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며 교성을 질렀을 것으로 보인다. 포물선처럼 몸을 뒤로 젖히는 행위는 화자로부터 과부가 멀어지는 동작이다. 마치 화자가 싫어서 몸을 피하는 동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포물선을 역행하여 들려오는 역사의 슬픈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 젖힌 과부의 몸을 역행하여 도리어 포물선을 타고 여자의 교성이 화자 쪽으로 들려온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는 오랫동안 남자를 접하지 못한 여자의 슬픈 울음과도 같은 환희의 교성이라 할 것이다. 문득 城 밑 내 帽子 곁에 한 사람의 乞人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나려다보았다. 乞人은 성밑에서 오히려 내 위에 있다. 문득, 여자의 음부 밑, 화자의 발기되어 귀두가 벗겨진 남근 곁에, 한 사람의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화자가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걸인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기독과 과부를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기독은 마치 제대로 먹을 것을 먹지 못한 걸인처럼 갈빗대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성에 굶주린 과부 또한 걸인이다.  그런데 그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다. 장승처럼 우뚝 서 있다. ‘장승처럼 서 있다’라는 말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장승처럼 서 있는 걸인은 과부와 관계하는 방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기독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화자의 몸 위에 있는 과부를 의미한다. 기독과 과부의 음부 밑에서 바라보는 화자의 눈에는 오히려 그들이 화자의 위에 있다. 과부가 여성 상위 체위로 위에서 있고, 화자가 아래에 있으며, 아래에 있는 화자가 바라보기에 십자가의 기독은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보면 화자는 당시 여자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여자의 경험이 없는 화자를 상대하는 과부는 자신이 직접 화자의 몸에 올라서 능동적으로 성행위를 했을 것이다. 或은 綜合된 歷史의 亡靈인가. 空中을 向하야 놓인 내 帽子의 깊이는 切迫한 하늘을 부른다. 별안간 乞人은 慓慓한 風彩를 허리굽혀 한 개의 돌을 내 帽子 속에 치뜨려 넣는다. 나는 벌써 氣絶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내놓인 화자의 모자의 깊이 즉 화자의 남근도 과부의 음부의 깊은 곳에서 절박한 하늘을 부르고 있었다. 화자의 남근도 몹시 급하게 절정에 도달하여 사정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절박한 하늘’을 부르는 것’은 몹시 급하게 절정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은 높은 것이고, 높은 것은 절정이다. ‘절정(絶頂)’은 가장 높은 꼭대기를 의미한다. 또 하늘은 하나님이다.  화자는 어느 순간 과부에게 ‘사정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성교 상항을 상상해 보자. 화자가 볼 수 있는 대상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이다. 그러나 화자가 ‘사정하고 싶다’라고 말한 실제의 대상은 과부다. 그러자 별안간 화자의 기도를 기독의 하나님이 들어주듯이, 걸인인 기독은 표표한 풍채를 굽혀서 내려다보고, 과부는 또 표표한 풍채를 굽혀서 즉 공중에서 가볍게 나부끼듯이 몸체를 굽혀서, 한 개의 돌을 화자의 모자 속에 치뜨려 넣는다. 여자가 위에서 힘차게 남근을 향하여 엉덩이를 내리쳤다. 화자는 벌써 기절하였다. 화자는 이미 사정을 하고 화자의 남근이 힘을 잃고 늘어졌다. 화자는 이것을 ‘혹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인가?’하고 생각한다. 남편이 없는 과부의 욕망, 성욕을 해결할 상대가 없는 화자의 욕망, 그리고 이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는 기독의 하나님, 타락한 종교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이다. 심장이 頭蓋骨 속으로 옮겨가는 地圖가 보인다. 싸늘한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내 이마에는 싸늘한 손자국이 烙印되어 언제까지 지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두개골 속으로 옮겨가는 지도가 보인다. 감정은 심장에 있다. 이성은 두개골 속에 있다. 성적 충동의 감정으로 과부와 관계를 맺었던 화자는 이제 점점 이성적으로 이를 생각하게 된다. 화자의 생각이 옮겨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지도다. 싸늘한 손이 화자의 이마에 닿는다. 성교가 끝나고 화자는 냉정한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생각한다. 화자의 이마에는 싸늘한 손자국이 낙인되어 언제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화자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고, 그 생각이 오랫동안 화자의 뇌리에서 마치 낙인된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기독이 있는 곳에서, 과부와의 관계 후에,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이 오랫동안 화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는지 나와 있지 않다. 추리해 보자. 사람에게 있어서 성적 욕망과 이것의 충족은 종교적 믿음보다 앞선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성에 굶주린 과부, 성적인 욕망은 있으되 이를 충족할 방법이 없었던 화자, 성적인 욕망은 종교적 믿음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들에게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시에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과부와의 첫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등장한다. ​ ​ ​ ▣   烏瞰圖 詩第十五號 ​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謨를하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 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 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속에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傳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4 내가缺席한나의꿈. 내僞造가登場하지않는내거울. 無能이라도좋은나의孤獨의渴望者다. 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自殺을勸誘하기로決心하였다. 나는그에게視野도없는窓을가리키었다. 그窓은自殺만을爲한들窓이다. 그러나내가自殺하지아니하면그가自殺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不死鳥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心臟의位置를防彈金屬으로掩蔽하고 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券銃을發射하였다. 彈丸은그의왼편가슴을貫通하였으나그의心臟은바른편에있다.        6 模型心臟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 내가遲刻한내꿈에서나는極形을받았다. 내꿈을支配하는者는내가아니다. 握手할수조차없는두사람을封鎖한巨大한罪가있다.  ― 1934. 8. 8 ―     ‘거울’은 거울인가? 이상의 시에는 거울과 관련된 몇 편의 시가 나온다. 이 있고, 이 있다. 거기에서 거울은 거울이 아니고 사진이다. 이상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 대강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은 우리 나이 셈법으로 네 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간다. 자식이 없었던 큰아버지는 이상을 양자로 맞은 것이다. 에 보면 가난했던 생부는, 총독부에 기술직으로 있어서 비교적 잘 살던 큰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고, 또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맏아들인 이상을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보낸다. 큰아버지는 그 후 어느 젊은 여자를 첩으로 맞아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이상은 어려서부터 똑똑하여 큰아버지는 이상을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상은 점점 자라면서 자신이 큰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한다. 은 점점 자라면서 큰아버지가 자신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하는 것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시다. 이상은 1910년생이다. 이 시는 1936년에 썼다. 이상의 나이 27세 때다. 그 동안 이상은 자란다. 자라면서 자신을 양자로 보낸 생부에 대한 반감, 큰아버지 집에서 대를 이어가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타의적 운명에 대한 거부감 등이 항상 이상의 가슴에 크게 자리잡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시에 이런 의식이 엿보인다.  그리고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둔다. 폐병으로 백천온천에 요양을 간 것도 이 시절이다. 고독했던 이상은 백천온천에서 금홍이를 만나고, 금홍이에게 사랑을 느낀다. 금홍이는 이상이 매우 좋아했던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상의 삶과 관련하여 이 시를 읽어 보자. 과연 이 시에서 ‘거울’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한 단어로 바꾸기 어렵다. 거울 속의 나는 거울을 보고 있는 나와 닮았다. 그러나 좌우가 바뀌어 반대로 되었다.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의 화자는 현재의 화자와 닮았다. 그러나 그 삶에 있어서는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거울은 무엇을 비추면, 무엇과 무엇이 비춘 것은 닮았으면서도 반대다. 따라서 거울은 일단 무엇을 보는 도구다. 하여튼 그런 것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이 시에서도 때에 따라서 거울의 속성을 빌어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의미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각 연 앞에 번호가 붙어 있다. 그것은 각 연이 독립된 어떤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호가 없이 연이 이어질 경우에는 전체 연이 하나의 장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의미를 구성한다. 그러나 번호를 붙였을 경우는 각 번호에 따라 장면은 각각 다르다. 시를 이해하기 전에 알아두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1 / 나는 거울 없는 室內에 있다. / 거울 속의 나는 역시 外出中이다. / 나는 至今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謨를 하는 中일까. (화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자신이 자란 큰아버지 집이 아닌, 어딘가의 실내에 있다. 화자가 집을 나온 것이다. 과거의 삶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지금 거울이 없는 실내에 있다.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집을 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어느 공간에 있다. 어린 시절의 나 역시 지금 외출중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그 어느 공간에 있는 나에게,  과거의 기억이 따라 온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과거의 기억이 무서워서 화자는 지금 떨고 있다. 아마 이렇게 끈질기게 과거의 기억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으로 봐서, 그 과거의 기억은 어디선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2 / 罪를 품고 식은 寢床에서 잤다. / 確實한 내 꿈에 나는 缺席하였고 / 義足을 담은 軍用長靴가 내꿈의 白紙를 더럽혀 놓았다. 죄를 품고 차디찬 침상에서 잤다. 잠 속에서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큰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는 꿈을 꾸었다. 과거 어린 시절, 나는 확실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살았다. 그런데 그 꿈에 나는 없었다. 나의 꿈은 큰아버지의 꿈, 이를테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큰아버지의 꿈만 거기에 있었다. 의족을 담은 군용장화 곧 진짜 아버지가 아닌, 군용장화를 신고 다니던 큰아버지가 화자를 양자로 들임으로써 화자의 꿈의 백지를 더럽혀 놓았다. 큰아버지가 나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꿈은 추하고 더럽게 생각되었다. 3 / 나는 거울 속에 있는 室內로 몰래 들어간다. / 나를 거울에서 解放하려고. /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沈鬱한 얼굴로 同時에 꼭 들어온다. / 거울 속의 나는 내게 未安한 뜻을 傳한다. / 내가 그 때문에 囹圄되어 있드키 그도 나 때문에 囹圄되어 떨고 있다. 나는 거울 속에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과거에 나는 큰아버지 집을 나와서 어느 ‘실내’로 몰래 들어간 적이 있다. 그것은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그 실내에 들어온다. 과거에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큰아버지 집을 나와서 아무도 모르는 어느 실내로 들어간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큰아버지 집에서의 기억들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동시에 꼭 그 실내에 들어왔다.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고, 새로운 삶도 시작할 수 없었다. 과거에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치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그 과거의 내가, 지금 또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하려는 지금의 나에게 편안하지 않은 뜻을 전한다. 지금의 나도 결국 큰아버지의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과거의 나처럼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안한 뜻을 전한다. 과거의 내가 미안한 뜻을 전하는 것은, 내가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과거의 나에게 갇혀 있듯이, 그도 지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나에게 갇혀서 떨고 있다. 결국 화자는 과거의 경험으로 봐서 새로운 삶을 위한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할 것이다. 4 / 내가 缺席한 나의 꿈. / 내 僞造가 登場하지 않는 내 거울. / 無能이라도 좋은 나의 孤獨의 渴望者다. /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自殺을 勸誘하기로 決心하였다. / 나는 그에게 視野도 없는 窓을 가리키었다. / 그 窓은 自殺만을 爲한 들窓이다. / 그러나 내가 自殺하지 아니하면 그가 自殺할 수 없음을 그는 내게 가르친다. / 거울 속의 나는 不死鳥에 가깝다.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내가 결석한 나의 과거의 삶. 나는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 삶을 살아야 한다. 미래에 가서 거울로 비춰보듯이 삶을 되돌아 봤을 때, 위조된 삶이 사라지고 나만의 의지로 이룩한 나의 미래를 떠올려 본다.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는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기억 속의 과거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창을 가리키었다. 그 창은 오직 과거의 기억을 잊기 위한 들창이었다. 과거를 잊기 위해 무엇인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희망을 걸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문학에 몰두하는 것 등이 거기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나에게 가르친다. 그 과거를 잊기 위한 들창에도 과거 기억 속의 자신이 등장하는 의미다. 이를테면 과거를 잊기 위한 문학 속에도 결국 자신의 과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는 불사조에 가깝다. 5 / 내 왼편 가슴 心臟의 位置를 防彈 金屬으로 掩蔽하고 /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券銃을 發射하였다. / 彈丸은 그의 왼편 가슴을 貫通하였으나 그의 心臟은 바른 편에 있다. 그래서 나는 과거 기억 속의 나를 살해하기로 하였다.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덮어서 가리고, 나는 과거 기억 속의 나의 왼편 가슴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 편에 있다. 기억이라는 거울 속에 있는 나는 현재의 나와 반대이기 때문에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를 살해할 수도 없었다.   6 / 模型心臟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 내가 遲刻한 내 꿈에서 나는 極形을 받았다. / 내 꿈을 支配하는 者는 내가 아니다. / 握手할 수조차 없는 두 사람을 封鎖한 巨大한 罪가 있다. 실제 심장이 아닌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미래의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 것이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화자는 죽음을 꿈꿔 본 것이다. 모형 심장은 실제의 심장이 아니다. 붉은 잉크는 실제의 피가 아니다. 붉은 잉크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이름을 호적에서 지울 때 사용한다. 따라서 화자는 미래에 자신이 자살할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실제의 내가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나의 꿈 즉 죽음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미래의 죽음조차 이를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내가 극형을 받는 것은, 죽어서도 나와 화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죄다. 나를 낳아준 생부의 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에게 좀 더 부유한 가정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바랐던 생부의 꿈을 봉쇄한 죄가 있다. 또 나를 통하여 대를 잇기를 바랐던 큰아버지의 소망을 봉쇄한 죄가 있다.   ​ ​   6. 易斷 ▣   火爐 ​ 房거죽에極寒이와닿았다. 極寒이房속을넘본다. 房안은견딘다. 나는讀書의뜻과함께힘이든다. 火爐를꽉쥐고집의集中을잡아땡기면유리窓이움푹해지면서極寒이혹처럼房을누른다. 참다못하여火爐는식고차겁기때문에나는適當스러운房안에서쩔쩔맨다. 어느바다에潮水가미나보다. 잘다져진房바닥에서어머니가生기고어머니는내아픈데에서火爐를떼어가지고부엌으로나가신다. 나는겨우暴動을記憶하는데내게서는억지로가지가돋는다. 두팔을벌리고유리窓을가로막으면빨래방망이가내등의더러운衣裳을뚜들긴다. 極寒을걸커미는어머니――奇跡이다. 기침藥처럼따끈따끈한火爐를한아름담아가지고내體溫위에올라서면讀書는겁이나서곤두박질을친다. ― 1936. 2 ―    ​ 이상은 1936년 2월호에 ‘易斷(역단)’이라는 큰 제목 하에 5편의 시를 발표한다. , , , , 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왜 큰 제목을 ‘역단’이라고 했을까? ‘역단’이란 ‘바꾸어서 끊는다’, ‘바꾸어도 단절된다’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시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서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시의 의미에 접근하는 것을 단절시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화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읽어야 올바로 읽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시 는 단순히 ‘화로’로 읽어서는 안 된다. 화로! 화로는 뜨거운 것이다. 안에 뜨거운 불씨를 담고 있다. ‘화로’는 그 안에 뜨거운 불씨 즉 성적 뜨거움을 담고 있는 아내를 암유한다.   房 거죽에 極寒이 와 닿았다 방 거죽 즉 아내의 성기의 표면에 극한이 와 닿았다. 방은 아내의 몸의 내부를 의미한다.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야 하고, 그 문이 바로 아내의 음문이다. 그 음문 안에는 뜨거운 화로와 같은 성적 욕망의 불씨가 있다. 극한은 지극히 추운 것을 의미하는데, 마치 추위에 오그라든 것과 같은 화자의 왜소한 남근이다. 극한인 왜소한 남근은 뜨거움의 씨앗을 속에 간직하고 있는 화로를 그리워하는 법이다. 추워서 따뜻한 곳을 그리워하기도 하며, 뜨거운 곳에 들어가면 줄어들었던 남근이 커지기도 한다. 따라서 아내의 음문의 표면에 뜨거운 곳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화자의 왜소하게 오그라든 남근이 닿았다는 뜻이다.   極寒이 房속을 넘본다. 房 안은 견딘다. 극한이 방 속을 넘본다. 몹시 차가워져서 왜소해진 화자의 남근이, 따뜻한 곳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왜소한 남근이,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방 안은 견딘다. 뜨거운 욕망을 가진 아내의 방 안은 열리지 않는다. 뜨거운 방 안에 화자의 발기되지 않은 왜소한 남근이 들어갈 수 없다.   나는 讀書의 뜻과 함께 힘이 든다 화자는 독서의 뜻과 함께 힘이 든다. 독서는 상체를 앞뒤로 움직이면서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의 남근은 위아래로 끄덕이는 뜻 즉 왕성하게 발기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지 못하여 힘이 든다. 제대로 발기가 되지 않아서 제대로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火爐를 꽉 쥐고 집의 集中을 잡아 땡기면 유리窓이 움푹해지면서 極寒이 혹처럼 房을 누른다. 뜨거운 불씨를 간직하고 있는 화로 즉 아내의 몸뚱이를  꽉 잡고, 집의 집중 즉 아내의 뜨거움이 모여 있는 가운데를 잡아당기면 즉 아내의 음문과 밀착시키면, 유리창 즉 투명하게 열려 있어 쉽게 들어갈 것 같던 음문이, 실제로 들어가려니까 유리가 가로막듯이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움푹해지면서 극한인 화자의 왜소한 남근이 혹처럼 조금 방을 누를 뿐이다. 아마 제대로 발기가 되지 않아서 삽입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내는 투명한 유리창처럼 열려 있으나, 화자는 그 가로막는 유리를 발기되지 않은 남근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참다못하여 火爐는 식고 차겁기 때문에 나는 適當스러운 房 안에서 쩔쩔맨다. 어느 바다에 潮水가 미나 보다. 아내는 화자의 남근의 차가움에 참다못하여 성적 열기가 식는다. 그러면 방 안 즉 아내의 몸속에 들어간 화자의 남근은 또 화로인 아내가 달아오르지 않고 화자와 똑같이 식어버린 아내의 몸속에서, 아내가 뜨거워지기를 바라며 쩔쩔맨다. 열심히 노력을 한다. 곧 아내는 조수가 밀듯이 화자의 남근을 음부에서 밀어내고, 화자는 어느 바닷가에 놓인 것처럼 홀로 남는다.   잘 다져진 房바닥에서 어머니가 生기고 어머니는 내 아픈 데에서 火爐를 떼어 가지고 부엌으로 나가신다. 잘 다져진 방바닥에서 어미가 생긴다. 굳건한 남근으로 아내의 음부의 내부를 잘 다질 때, 거기에서 아이도 태어나고 아내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아내는,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픈 화자에게서, 화로를 떼어가지고 즉 자신의 몸을 화자로부터 떼어가지고 부엌으로 나간다. 부엌에서 다시 뜨거운 불씨를 화로에 담기 위해서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시도하기 위해서 새로운 불씨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겨우 暴動을 記憶하는데 내게서는 억지로 가지가 돋는다 화자는 이제야 겨우 폭동을 기억한다. 화자는 이제야 겨우 폭동과 같은 격렬한 부부관계를 해야 한다고 머릿속에 떠올린다. 화자에게서는 억지로 가지가 돋는다. 화자에게는 억지로 가지 즉 왜소한 남근이 조금 살아난다.   두 팔을 벌리고 유리窓을 가로막으면 빨래방망이가 내 등의 더러운 衣裳을 뚜들긴다. 그래서 두 개의 고환이 양쪽에 있는 남근을 가지고,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나 유리창이 막는 듯이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빨래방망이가 화자의 등의 더러운 의상을 두들긴다. 아내가 손으로 화자의 등을 두드리면서 새롭게 시작해 보라고 위로한다.  여기서 아내가 화자의 등을 두드리면서 위로하는 것을 빨래방망이가 더러운 의상을 두들긴다고 말한 것은 더러운 의상을 방망이로 두드려 빨면 깨끗한 옷이 되어 다시 새 옷처럼 입을 수 있듯이, 자꾸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 보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 같다.   極寒을 걸커미는 어머니―― 奇跡이다 아내의 몸속에 들어간 화자의 오그라들어 왜소한 남근을 빗장을 걸어서 미는 어머니 즉 아내. 여기서 ‘걸커민다’는 말은 빗장을 걸고 화자를 향하여 민다는 의미다. 아내가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왜소한 남근을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빗장을 걸듯이 꼭 잡고 음부를 화자 쪽을 향하여 민다는 의미다. 아마 아내가 몸속에 들어온 왜소해진 남근을 꼭 죄어 잡고 남편 쪽으로 음부를 밀면서 노력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기적이다. 비로소 왜소하던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커졌는가 보다.   기침藥처럼 따끈따끈한 火爐를 한아름 담아가지고 내 體溫 위에 올라서면 讀書는 겁이 나서 곤두박질을 친다 화자는 따끈따끈해진 화로 즉 달아오른 아내를 한 아름 담아가지고 자신의 체온 위에 올라섰다. 따끈따끈해진 아내를 한 아름 담았다. 아내의 노력에 의해서 화자도 달아올랐다. 그리고 달아오른 화자의 체온 위에 올라섰다. 화자의 달아오른 남근으로 아내의 뜨거운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독서 즉 앞뒤로 끄덕이는 화자의 남근은 겁이 나서 곤두박질을 친다. 뜨거운 것이 겁이 나서 마치 그것을 식히려는 듯이 아내의 몸속으로 곤두박질친다. 힘차게 방을 다진다. 그러고 나면 감기 걸려 열이 날 때 먹는 기침약처럼, 뜨거운 아내는 화자의 남근의 열기를 이내 식혀 준다. 사정을 한 후 남근은 열이 내린다. 줄어든다. ​ ​ ​ ▣   아침 ​ 캄캄한空氣를마시면肺에害롭다. 肺壁에끌음이앉는다. 밤새도록나는몸살을앓는다. 밤은참많기도하더라. 실어내가기도하고실어들여오기도하고하다가잊어버리고새벽이된다. 肺에도아침이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習慣이도로와있다. 다만내侈奢한책이여러장찢겼다. 憔悴한結論위에아침햇살이仔細히적힌다. 永遠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 ― 1936. 2 ―     이 시는 ‘역단’이라는 큰 제목 아래 발표된 5편의 시 가운데 하나다. 예사로 읽으면 이상의 의도에 말려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조심해서 읽어야 할 작품이다. 보통은 이렇게 읽을 것이다. 이상 시인이 폐결핵 환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폐결핵 환자는 밤이 되면 더욱 기침이 심해지고, 그래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가 보다. 이 시도 그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독자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는 벌써 이상이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큰 제목이 역단이다. 바꾸어 끊는다. 다른 이야기처럼 바꾸어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접근을 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캄캄한 空氣를 마시면 肺에 害롭다. 肺壁에 끌음이 앉는다. 깜깜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화자의 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들의 텅빈 기운을 읽으면, 화자의 참된 마음에 해롭다. 엉터리 비평가들의 글이 화자가 참된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해가 된다는 말이다. 엉터리 비평가를 의식하면, 자신의 참된 마음을 기록하는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진실된 마음을 단절하는 그을음이 앉아서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 내가기도 하고 실어 들여오기도 하고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肺에도 아침이 켜진다.  깜깜한 밤과 같은 비평가들은 참으로 많았다. 밤에 쓴 글을 공기(空氣) 즉 온 힘을 다해 쓴 글이 텅빈 기운으로 가득찬 비평가들에게 실어 내가기도 하고, 비평가들이 화자의 시에 대해서 쓴, 내실이 없는 근거로 화자를 비평하는 글을 들여와서 읽기도 하다가, 밤인지도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참된 마음에도 비로소 아침이 켜진다. 비평가들이 왜 자신의 글을 그렇게 비평하고 있는지의 참된 마음이 드러난다. 비평가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화자의 시를 이해할 수 없어서 화자를 혹평하는 것이다.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習慣이 도로 와 있다. 다만 내 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憔悴한 結論 위에 아침 햇살이 仔細히 적힌다. 永遠히 그 코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화자는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이 도로 와 있다. 화자는 습관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시를 또 썼고, 비평가들은 화자의 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습관적으로 혹평하기만 하는 되풀이하는 버릇이 와 있다. 다만 화자의,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비평가들에게는 분수에 넘칠 만큼 좋은 책이 여러 장 찢겼다. 비평가들의 혹평에 의해서 화자의 책 몇 장이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비평가들이 화자의 글에 대해서 애태우고 근심하면서 맺은 결론만이, 아침 햇살처럼 환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상세하게 적혀 있다. 영원히 그 역겨운 냄새가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 ​ ▣   家庭 ​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減해간다. 食口야封한窓戶에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뽀족한데는鍼처럼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壽命을헐어서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門을열려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 ― 1936. 2 ―     이 시의 제목은 '家庭(가정)'이다. 가정이란 무엇인가부터 잘 생각하여야 할 것 같다. 가정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장이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상 시인은 당대 지식인이었으나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가정에 대해서 늘 고뇌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을 이 시에 대응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이상 시인은 사람들이 시를 읽고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다양한 비유적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상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시어들을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시어를 시 전체의 맥락에서 순리적으로 잘 연결하면서 생각해 보면, 시어의 의미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만 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발상에서 시어들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상의 다른 시들과도 연계시켜서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시인의 생각은 여러 시에서 유사한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발상에서 사용된 시어들이 다른 시에서도 유사한 발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상 시인의 시도, 이상 시인의 시 전체를 개괄하여 읽어 본 다음, 다시 한 작품 한 작품 읽어 볼 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 필자는 ‘가정’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해 보겠다. 가정이란 부부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대를 이어가는 곳이다. 부부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은 아니다.  몇 명의 여자들과 동거하기도 했던 이상 시인은 아이가 없었고, 그리고 그 여자들과는 헤어지고 만다. 물론 이상이 상대한 여성들은 창녀나 다름이 없는, 카페나 다방의 여급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이 그러한 여자들과 가정을 이루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자들 중에서 이상 시인과 그래도 비교적 오래 살았던 여자는 금홍이다. 백천온천에서 만나서, 서울에 와서 다방 의 마담으로 있던 금홍이와는 약 3년 정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고, 결국 나중에 헤어지게 된다. 이상의 에는 금홍이가 직접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상 시인으로서는 금홍이를 어느 정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 등에는 금홍이로 추정해도 좋을 만한 여자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만약 금홍이와의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면 금홍이가 떠나갔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1930년대 사람들의 관념으로서는 자식이 부부를 매개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자식을 잉태하고 낳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물론 아이를 잉태하는 것은, 아이를 잉태하겠다는 고상한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이상 시인은 가졌던 것 같다. 부부가 성을 즐기다 보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생각을 가졌다. 에 그러한 이상의 생각이 표현되어 있다.   문(門)을 암만 잡아다녀도 안 열리는 것은 안에 생활(生活)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문은 나의 가정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가정을 이룬 가장은 문을 통하여 가정으로 들어간다. 원만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을 통과하여야 하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은 입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문이 열린다'라는 문장에서 문은 입을 의미한다. 입이 열리고 그 열린 문을 통하여 말이 나왔을 때 우리는 말문이 열렸다고 한다.  문을 잡아당기면서 열려고 하는 것은 지금 화자가 아내와 성교를 하면서 아내를 만족시키려는 행위다. 아내가 성적으로 만족한다면 아내는 입이 열리고 성교의 쾌감을 토해 낼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내는 입이 열리지 않는다. 문은 또 하나 있다. 아래에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하문(下門)이라 한다. 음문(陰門)이라고도 한다. 문을 잡아당기는 행위는 음문을 자신 쪽으로 당기는 행위다. 그것은 곧 자신을 그 음문 쪽으로 밀착시키는 행위와 동일한 행위다. 화자가 가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기 위해서 즉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아내의 하문에 몸을 강하게 밀착시킨다. 그러나 아내의 문 즉 입은 열리지 않는다. 아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안에 생활이 모자란 까닭이다. 안은 아내의 음문의 안쪽이다. ‘생활(生活)’은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아내의 음문 안쪽으로 들어간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발기되지 못하면 아내가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제대로 발기되지 않은 남근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의 입이 열리지 않고, 만족하는 교성이 나오지 않는다. 원만한 부부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정을 이루기가 어렵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졸른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화자를 조른다. 밤이 되면, 자식이 없어서 제대로 된 가정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내가, 화자와 닮은 자식을 만들어 내는 틀인 아내가, 사나운 꾸지람으로 화자를 조른다. 아내가 자식을 잉태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아내가 잉태를 위해서 사정하기를 사납게 조를수록 화자의 남근은 마치 사나운 꾸지람을 들은 아이가 몸을 움츠리고 위축되듯이 줄어든다.   나는 우리 집 내 문패(門牌) 앞에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래서 화자는 우리 집 문패 즉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 앞에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위축되어 줄어든 남근으로 자식을 잉태하고자 하나 사정이 잘 되지 않고, 그런 속에서 사정을 하려고 하니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내 앞에서 매우 성가시다.  나의 문패가 달린 집은 내 집이다. 내 가정이기도 하고 내 아내이기도 하다. 화자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아내의 음문 앞에서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아서 괴롭다는 뜻이다.   나는 밤 속에 들어서서 제웅처럼 자꾸만  감(減)해 간다 식구(食口)야 봉(封)한 창호(窓戶)에 어데라도 한 구석 터 놓아 다고 내가 수입(收入)되어 들어가야 하지 않나 화자는 밤, 자식을 잉태하기를 바르는 아내의 몸속에 들어서서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발기되었던 남근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생명력을 잃고 자꾸만 줄어든다. 사정을 하여 자식을 잉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화자의 남근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화자는 “식구야, 봉한 창호에 어디라도 한 구석 터놓아 다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수입되어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봉한 창호는 아내의 굳게 닫힌 입(口)이다. 또한 화자의 사정을 북돋우는 교성이 나오는 입이다. 입을 문(門)이라 하지 않고 창호(窓戶)라고 하면서, 봉한 창호에 어데 한 구석일도 터놓아 달라고 말하는 것은, 입을 열어서 조그만 소리의 교성이라도 제발 내 달라는 간청이다. 그것은 화자의 사정을 북돋우는 것이 된다. 아내가 교성을 내면, 아내의 음부에 있던 화자의 남근은 아내의 교성에 의해 더욱 흥분하게 되며, 남근에서 사정을 할 수가 있다.  ‘수입되어 들어간다.’는 말은 피동적인 표현이다. 화자의 남근이 아내의 교성에 의해서 발기가 되고, 그러면 자연 쉽게 더욱 흥분되어 원만하게 사정할 수가 있다.   지붕에 서리가 내리고 뽀족한 데는 침(鍼)처럼 월광(月光)이 묻었다 우리 집이 앓나 보다 그러고 누가 힘에 겨운 도장을 찍나 보다 수명(壽命)을 헐어서 전당(典當) 잡히나 보다. 지붕에는 서리가 내린다. 사정하기 위해서 화자는 오랫동안 노력을 하였는가 보다. 아내가 집이라면 아내의 몸을 덮고 있는 화자는 지붕이다. 지붕에 서리가 내린다는 것은 화자의 몸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다. 서리는 하얀 색이다. 열심히 노력한 화자의 등에는 땀이 흥건하도록 났고, 그 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로는 것 같다. 피어오르는 김은 흰 색이다. 마치 지붕에 서리가 내리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지붕의 뾰죽한 데는 침처럼 월광이 묻었다. 지붕이 화자라면 화자의 뾰죽한 곳은 화자의 남근의 끝부분이다. 그리고 화자의 남근의 끝부분에 ‘침처럼 월광이 묻었다’는 것은 화자가 겨우 조금 사정을 했다는 것이다. 침은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끝이 뾰죽한 것이다. 화자가 겨우 아내의 몸 깊이 침처럼 조금, 월광과 같은 희미한 정액을 사정했다. 그러함으로써 밤, 아내의 몸속이 조금 밝아진 것이다. 달빛은 희미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밝다. 우리집 즉 아내가 앓는가 보다. 아내가 낮게 교성을 내는 것 같다. 앓을 때는 낮은 소리로 ‘앓는 소리’를 낸다. 아내가 마치 앓는 사람처럼 교성을 조금 냈다.  누가 힘겨운 도장을 찍는가 보다고 화자는 생각하고 있다. 누구는 화자다. 화자는 지금까지 힘겨운 도장을 찍는 행위를 한 것이다. 도장을 찍는 행위는 남근이 아내의 음부를 향해서 내리찧는 행위와 유사하다. 또 도장을 찍는 행위는 무슨 일을 마무리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가정을 이루는 행위를 끝낸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러한 행위를 ‘수명을 헐어서 전당잡히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사정하여 자식을 잉태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했는가 보다. 이러다가는 힘이 들어 얼마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수명의 일부를 헐어서 전당잡히고 가정을 이룬다는 말이다. 수명을 담보로 자식을 잉태하기 위한 사정을 하였다는 뜻이다.   나는 그 문고리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어달렸다 문을 열려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 ‘매달렸다’는 말에는 과거 시제다. 이 시에는 과거 시제는 여기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 부분은 지금까지 했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지금까지 가정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고리, 가정을 이루기 위한 도구인 남근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달린 것이다. 쇠사슬처럼 무겁게 늘어진, 잘 발기되지 않는 남근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그것은 문을 열기 위한 것이었다. 안 열리는 문을 열기 위해서였던 것이었다. 아이를 잉태하지 못함으로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가정을, 잘 이룩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 한 것이다. ​ ​   ▣   易斷 ​ 그이는白紙위에다鉛筆로한사람의運命을흐릿하게草를잡아놓았다. 이렇게홀홀한가. 돈과過去를거기다가놓아두고雜沓속으로몸을記入하여본다. 그러나거기는他人과約束된握手가있을뿐, 多幸히空欄을입어보면長廣도맞지않고안드린다. 어떤빈터전을찾아가서실컷잠자코있어본다. 배가아파들어온다. 苦로운發音을다삼켜버린까닭이다. 奸邪한文書를때려주고또멱살을잡고끌고와보면그이도돈도없어지고疲困한過去가멀거니앉아있다. 여기다座席을두어서는안된다고그사람은이로位置를파헤쳐놓는다. 비켜서는惡息에虛妄과復讐를느낀다. 그이는앉은자리에서그사람이 平生을살아보는것을보고살짝달아나버린다. ― 1936. 2 ―    이상이 4세 때 큰아버지 집에 양자로 간 것은 잘 알 것이다. 큰아버지 입장에서는 대를 잇기 위해서였다. 친아버지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난했기 때문에 이상이 잘 사는 큰아버지의 양자가 된다면, 이상이 자라는데 부족함이 없이 잘 자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큰아버지가 양자를 조건으로 얼마간의 돈을 주었던 것 같다. 돈을 주면서 만약 양자를 물리면 그 돈을 도로 내놓아야 한다는 계약서까지 쓰지 않았는가, 이 시를 통하여 추정해 본다. 이상이 양자로 간 후, 큰아버지는 어린 여자를 첩으로 들인 것 같다. 그러자 큰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첩에게서 아들을 낳는다. 물론 어려서부터 이상이 아주 총명하여, 큰아버지는 이상을 아주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새로 태어난 어린 동생과 젊은 어머니 속에서, 큰아버지는 이상에게 따뜻하게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알게 되고, 큰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상은 친아버지의 집을 찾아간 것 같다. 그러나 친아버지 역시 큰아버지와의 계약 때문에 이상을 반갑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하여튼 어린 이상은 큰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아버지를 바꾸어보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를 바꾸어 보려고 친아버지에게로 같으나, 친아버지 역시 반기지 않는다. 양자로 감으로써 아버지가 바뀌어, 큰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상은, 다시 아버지를 바꾸어 보고자 하지만, 역시 친아버지도 반기지 않아, 누구와도 단절되어 있다. 이것이 이 시의 제목 ‘역단’이다. 친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바꾸어도 단절되어 있는 이상의 외로움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는 ‘그이’와 ‘그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자신을 양자로 데려단 큰아버지를 지칭하는 것 같고, 한 사람은 자신을 양자로 넘긴 친아버지다. 그런데 ‘그이’는 누구이고, ‘그 사람’은 누구인가? 이 시는 참으로 표현과 구성이 절묘하여 ‘그이’를 큰아버지, ‘그 사람’을 친아버지로 읽어도 되고, 다시 ‘그이’를 친아버지, ‘그 사람’을 큰아버지라고 읽어도 된다. 바꾸어 읽어도 마찬가지다. 바꾸어 읽어도 어느 아버지도 화자를 반갑게 맞지 않는다. 화자는 두 아버지에게 단절되어 있다. 바꾸어 읽어도 단절되어 있다. 역단(易斷)이다. 이런 효과를 노리고 쓴 이야말로, 이상이 왜 천재 시인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이상은 표현에서 특별한 천재 시인이다. 먼저 ‘그이’를 큰아버지, ‘그 사람’을 친아버지로 읽어보자. 그이는 白紙 위에다 鉛筆로 한 사람의 運命을 흐릿하게 草를 잡아 놓았다. 이렇게 홀홀한가. ‘그이’는 화자를 양자로 데려온 큰아버지다. 큰아버지는 대를 잇기 위해서 친아버지와 백지 위에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다. 이를테면, 부자였으나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는, 가난했던 화자의 친아버지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화자를 양자로 삼는다, 다시 화자를 데려갈 경우, 주었던 돈을 도로 반환하다는 정도의 내용을 계약서로 작성한 다음,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백지’는 계약의 내용을 기록하는 종이다. 그 계약서는 화자의 운명을 돌려놓았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대수롭지 아니한가. 큰아버지는 화자의 운명을 돌려서 양자로 들였으면서도 화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화자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 돈과 過去를 거기다가 놓아두고 雜沓 속으로 몸을 記入하여 본다. 그러나 거기는 他人과 約束된 握手가 있을 뿐, 多幸히 空欄을 입어 보면 長廣도 맞지 않고 안 드린다. 그래서 화자는 큰아버지의 돈과 과거 즉 양자로 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거기 즉 큰아버지 집에 놓아두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어 이들과 잡다하게 섞이고 합하는 속 즉 친아버지 집으로 몸을 기억하여 들어가 본다. 그러나 거기 친아버지는 타인과 약속된 악수만 있을 뿐이다. 친아버지는 큰아버지의 돈을 받고 계약을 했기에 쉽게 화자를 반기지 않는다. 친아버지와 포개지기를 바라서, 친아버지의 비어 있는 울타리, 즉 자신이 양자로 가서 자신의 자리가 비어 있는 울타리, 즉 친아버지를 입어보면, 친아버지의 품을, 마치 옷을 입듯이 입어 보면, 친아버지와 화자는 길이과 넓이도 맞지 않고, 또 친아버지가 안 들인다. 화자는 친아버지가 뒤에서 화자를 꼭 안아주기를 바랐으나, 친아버지는 화자를 꼭 껴안지 않았다. 화자는 그것을 친아버지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아버지는 화자를 집으로 들이지 않는다. 어떤 빈 터전을 찾아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苦로운 發音을 다 삼켜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친아버지가 자기를 반기지 않는 것은 느낀 화자는, 어떤 빈 터전 즉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배가 고픈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괴로운 심정을 말하지 않고 삼켜버린 까닭이다. 奸邪한 文書를 때려주고 또 멱살을 잡고 끌고 와 보면 그이도 돈도 없어지고 疲困한 過去가 멀거니 앉아 있다. 양자를 요구한 문서, 어긋난 것을 요구한 문서를 때려주고, 또 그 문서를 멱살을 잡고 친아버지 집에 끌고 와 보면, 즉 양자를 요구한, 어긋난 문서를 멱살을 잡고 끌고 오듯이, 화자가 양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친아버지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없어지고, 돈도 다시 물어 주어야 하니 없어지고, 힘들게 살아가던 가난한 과거가 남아서 멀거니 앉아 있다. 여기다 座席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그 사람은 이로 位置를 파헤쳐 놓는다. 비켜서는 惡息에 虛妄과 復讐를 느낀다. 드디어 큰아버지가 찾아왔다. 큰아버지가 화자에게 말을 한다.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이 말로써 큰아버지는 화자의 위치를 파헤쳐 놓는다. 즉 큰아버지가 “여기가 네 집이 아니다.”라는 말 대신에,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여기가 네 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돈을 받고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한다. 이로써 큰아버지는 자신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불길한 자식에게 허망함을 느낀다. 지금까지 돈을 들여서 키운 것에 대한 허망함을 느낀다. 그리고 복수의 마음을 느꼈는지 화자를 때리면서 가자고 한다. 그이는 앉은 자리에서 그 사람이 平生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이를 앉아서 지켜보던 친아버지는 앉은 자리에서 큰아버지가 평생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큰아버지가 평생 화자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때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도로 갚고 데려올 처지도 못 되기 때문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이제는 ‘그이’를 친아버지, ‘그 사람’을 큰아버지로 읽어보자. 그이는 白紙 위에다 鉛筆로 한 사람의 運命을 흐릿하게 草를 잡아 놓았다. 이렇게 홀홀한가. 친아버지는 큰아버지가 말할 것을 적은 종이 위에다, 큰아버지가 부르는 대로 따라 씀으로써 한 사람의 운명의 초안을 흐릿하게 작성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정할 수 있는가.  친아버지는 부자인 큰아버지에게 아들을 양자로 보낸다. 아이의 장래의 운명을 위해서다. 물론 큰아버지 집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의 장래를 위하여 좋은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가난한 자신의 집에서 자라는 것 보다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화자를 양자로 보냈다. 물론 그 대가로 주는 적지 않은 돈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친아버지에게는 앞으로 생계를 이어갈 소중한 돈이다. 그러나 그 결정이 갑작스럽고 경솔했다는 생각을 화자는 하고 있는 것이다. 돈과 過去를 거기다가 놓아두고 雜沓 속으로 몸을 記入하여 본다. 그러나 거기는 他人과 約束된 握手가 있을 뿐, 多幸히 空欄을 입어 보면 長廣도 맞지 않고 안 드린다. 그래서 화자는 친아버지가 받은 돈과 태어나서부터 양자 가기 전까지의 과거의 삶을 거기 즉 친아버지의 집에 놓아두고, 잡다하게 섞이고 합하는 속 즉 큰아버지 집으로 몸을 문서의 기록대로 들어가 본다. 그러나 거기 큰아버지는 타인과 약속된 악수만 있을 뿐이다. 큰아버지는 조상의 대를 이어야겠다는 조상들과의 약속만이 있을 뿐, 화자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 큰아버지와 합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비어 있는 울타리, 즉 자식이 없어서 허전한 큰아버지의 품을, 마치 옷을 입듯이 입어 보면, 큰아버지와 화자는 길이도 넓이도 맞지 않고, 또 큰아버지가 안 들인다. 화자는 큰아버지가 뒤에서 화자를 꼭 안아주기를 바랐으나, 큰아버지는 화자를 꼭 껴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으로 들이지도 않는다. 큰아버지는 자신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 어떤 빈 터전을 찾아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苦로운 發音을 다 삼켜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화자는 어떤 빈 터전 즉 자신을 양자로 보내서 자리가 비어 있는 친아버지 집으로 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배가 고픈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괴로운 자신의 발음 즉 말을 친아버지에게 하지 않고 삼켜버린 까닭이다. 친아버지도 화자를 쉽게 들일 수 없다. 화자를 다시 데려오면 계약서에 의해서 돈을 다시 물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奸邪한 文書를 때려주고 또 멱살을 잡고 끌고 와 보면 그이도 돈도 없어지고 疲困한 過去가 멀거니 앉아 있다. 양자를 요구한 문서, 어긋난 것을 요구한 문서를 때려주고, 또 그 문서를 멱살을 잡고 친아버지 집에 끌고 와 보면, 즉 양자를 요구한, 어긋난 문서를 멱살을 잡고 끌고 오듯이, 화자가 양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큰아버지도 없어지고, 친아버지가 받은 돈도 없어져서, 화자에게는 피곤하게 지나가는 미래의 삶만 물끄러미 보인다. 여기다 座席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그 사람은 이로 位置를 파헤쳐 놓는다. 비켜서는 惡息에 虛妄과 復讐를 느낀다. 친아버지가 화자에게 말을 한다.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이 말로써 친아버지는 화자의 위치를 파헤쳐 놓는다. 즉 큰아버지가 “여기가 네 집이 아니다.”라는 말 대신에,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여기가 네 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돈을 받고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양자를 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한다. 이로써 친아버지는 자신이 친아버지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그리고 화자를 일으킨다. 이를 거부하는 불길한 자식에게, 즉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돈을 물어줘야 하는, 불길한 자식에게 자신이 모자랐고 망령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받은 돈을 돌려보내서 갚아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이는 앉은 자리에서 그 사람이 平生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이를 앉아서 지켜보던 큰아버지는 앉은 자리에서 친아버지가 평생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친아버지가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친아버지는 계약서대로 돈을 돌려줘야 하고, 그러면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다. 그렇다면 친아버지는 어떻게든 아이를 잘 달래서 반드시 보내올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큰아버지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뜬다. 어차피 친아버지가 잘 알아서 보낼 것이니까.       7. 危篤 ▣   禁制 ​ 내가치던개(狗)는튼튼하대서모조리실험동물로공양되고그中에서비타민E를지닌개(狗)는學究의未及과生物다운嫉妬로해서博士에게흠씬얻어맏는다. 하고싶은말을개짖듯배앝아놓던世月은숨었다. 醫科大學허전한마당에우뚝서서나는必死로禁制를앓는(患)다. 論文에出席한억울한髑髏에는千古에氏名도없는法이다. ― 1936. 10. 4 ~ 10. 9 ―       禁制 ‘禁制(금제)’는 어떤 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린다는 의미다. 내가 치던 개(狗)는 튼튼하대서 모조리 실험동물로 공양되고 화자가 기르던 개는 튼튼하다고 해서 모조리 실험동물로 공양되었다. 여기서 '개'가 무엇일까? 시어를 두 번 이상 비틀어서 사용하는 이상 시인의 시어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그것은 마치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읽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필자는 개를 이상 시인의 문학 작품 혹은 시로 보겠다. 왜 갑자기 개가 시가 되느냐 하면, 이상 시인의 시를 당시 사람들 특히 평론가들이 개 짖는 소리처럼 알아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자가 기르던 개 즉 이상 시인이 쓴 시는 튼튼하다. 튼튼하여 쉽게 쪼개지지 않는다. 즉 분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조리 실험동물로 공양되었다. 이상 시인의 시를 실험적인 시라고 일언지하에 말해버린 것이다. 소위 문학을 전공한 평론가들이 알아먹을 수 없으니 실험적인 시라고 모조리 공양해 버린 것이다. 싸잡아 잡아먹어 버린 것이다. 그 中에서 비타민E를 지닌 개(狗)는 學究의 未及과 生物다운 嫉妬로 해서 博士에게 흠씬 얻어맏는다. 화자가 기르던 개, 이상 시인이 쓴 시 중에서 비타민E를 몸속에 가지고 있는 개, 즉 영양가 있는 시들은  박사들로서는 학문적 연구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생물다운 질투 즉 박사들도 사람인지라 열등감을 느껴서, 박사님들에게 흠씬 얻어맞다. 이상의 시가 평론가들에 의해서 실컷 두들겨 맞았다. 하고 싶은 말을 개 짖듯 배앝아 놓던 世月은 숨었다. 醫科大學 허전한 마당에 우뚝 서서 나는 必死로 禁制를 앓는(患)다. 화자도 하고 싶은 말을 시로 개 짖듯이 뱉어 놓았던 세월은 이제 숨어버렸다. 개 짓듯이 시를 쓰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상 폐병을 앓게 되면서부터 글을 잘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화자는 의과대학 허전한 마당에 우뚝 서서 필사로 금제를 앓는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근심하고 있다. 제발 내 시를 두들겨 패지 말라고 근심하고 있다.  論文에 出席한 억울한 髑髏에는 千古에 氏名도 없는 法이다. 왜냐하면, 박사들의 논문에 출석한 억울한 촉루 즉 박사들의 논문에 등장하여 억울하게 두들겨 맞아 죽은 시들의 뼈다귀는 천고에 씨명도 없는 법이다. 예로부터 성과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간다는 말이다. 박사들의 논문에 의해서 자신의 시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에 대해서 화자는 근심하고 있다. 이상 시인의 시를 읽으려면 두 번 꼬아 놓은 의미를 두 번 풀어야 한다. 그것은 서정주 시인의 시와 유사하다. 왜 이상 시인과 서정주 시인이 말을 두 번 꼬았는가 하는 것은, 그들의 시가 당시의 보편적 관념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교묘하게 시어를 꼬아서 표현하는 것을 연구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서정주 시인의 를 박사님들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이상 시인의 시들을 대부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읽히기를 거부하는, 교묘하게 꼬아 놓은 시어들의 나열, 그래서 우리는 서정주, 이상 시인을 가리켜 천재라고 한다. 표현의 천재다! ​ ​ ​ ▣   絶壁 ​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香氣롭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거기墓穴을판다. 墓穴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속에나는들어가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香氣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잊어버리고再처거기墓穴을판다. 墓穴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香氣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1936. 10. 4 ~ 10. 9 ―      絶壁 절벽! 뛰어내리면 죽을 것이다. 따라서 절벽(絶壁)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또 절벽은 벽처럼 무엇과 무엇을 단절하는 역할을 한다. 절벽은 단절의 의미가 있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 香氣롭다. 香氣가 滿開한다. 나는 거기 墓穴을 판다. 보이지 않는 墓穴 속에 나는 들어가 앉는다. 나는 눕는다. 이상 시인의 라는 시를 보면, 꽃이 사진 속에 있는 나체 여자를 의미하고, 화자는 그 사진을 보면서 자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을 읽으면서 가 연상되었다. 지금 화자는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상황은 와 유사하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의 실제 여자가 화자의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 속에는 사진만 있고 실제 여자는 없다. 그러나 그 꽃이 향기롭다.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의 실제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향기롭게 피어난다. 화자에게 성적 충동이 일어서 실제의 그 여자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난다. 꽃이 만개한다. 실제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져서 참을 수가 없다. 화자는 거기에 있는 묘혈을 한다. 사진의 실제 여자의 음부에 삽입하여 성교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다.  여기서 묘혈을 판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묘혈을 파듯이 여자의 음부를 판다, 묘혈을 파는 것처럼 음부를 파고 그 안에 발기된 남근이 들어간 다음 죽는다, 자위를 통하여 거기 사진 속의 실제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을 죽이고 단절시킨다는 등의 의미를 갖는다. 지금 화자가 보고 있는 사진의 실제 여자의 음부 속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는 그 보이지 않는 실제 여자의 음부 속에 상상으로 들어가서 앉는다. 실제 여자와 성교를 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 후 사정을 한 것이다. 앉는다는 말은 선다는 말의 상대 개념이다. 발기된 남근이 선 남근이라면, 사정 후에 줄어든 남근은 앉아 있는 남근이다. 그리고 화자는 눕는다. 남근에 힘이 빠지고 늘어진다. 또 꽃이 香氣롭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香氣가 滿開한다. 나는 잊어버리고 再처 거기 墓穴을 판다. 墓穴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墓穴로 나는 꽃을 깜빡 잊어버리고 들어간다. 나는 정말 눕는다. 또 꽃이 향기롭다. 사진의 실제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이 또 일어난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 여자는 화자의 옆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보이지 않는다. 향기가 만개한다. 실제 여자와 성교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일어난다. 화자는 방금 전에 그 여자의 사진을 보면서 자위를 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또 사진 속의 실제 여자와의 성교를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다. 실제 여자의 음부, 화자의 발기된 남근이 들어갈 구덩이는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는, 실제 여자의 음부 속으로, 그 여자는 아까 그 여자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인 것으로 착각하여 들어간다. 사정 후, 이제는 정말로 남근의 기운이 완전히 빠졌다. 아아, 꽃이 또 香氣롭다. 보이지도 않는 꽃이――보이지도 않는 꽃이. 아아, 꽃이 또 향기롭다. 또 사진의 실제 여자와 성교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난다. 보이지도 않는 꽃, 보이지도 않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가, 보이지도 않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가~~여자가~~여자가, 자꾸 자위를 하게 한다. 그 여자 생각을 잊기 위해서, 그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단절하기 하기 위해서 자위를 했는데도 자꾸 하고 싶다. 이러다가 화자가 죽을 것 같다. ​ ​ ​ ▣   白書 ​ 내두루마기깃에달린貞操뺏지를내어보였더니들어가도좋다고그런다. 들어가도좋다던女人이바로제게좀鮮明한貞操가있으니어떠냔다. 나더러世上에서얼마짜리貨幣노릇을하는세음이냐는뜻이다. 나는일부러다홍헝겊을흔들었더니窈窕하다던貞操가성을낸다. 그리고는七面鳥처럼쩔쩔맨다.  ― 1936. 10. 4 ~ 9 ―     白書 백서(白書)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가 국민에게 알리는 보고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화자가 고백하고자 하는 비밀은 어린 시절, 어느 과부와 처음 성교를 한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내 두루마기 깃에 달린 貞操뺏지를 내어보였더니 들어가도 좋다고 그런다. 짧은 소설 한 편 쓰겠다. 어린 나이의 화자가 어느 날, 인근에 사는, 화자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젊은 과부와 함께, 과부의 집 방에 있었다. 그런데 여자와 접촉해 본 적이 없는, 아직은 성적 감수성이 예민한 화자는 그 과부와 있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성적 욕망이 생겨서 남근이 슬그머니 발기되었고, 그것이 바지 위로 도드라져 보였다. 이를 본 과부는 ‘어, 얘좀 보게. 벌써 다 컸나? 에이, 아직은 어린데 남자 구실 제대로 하겠어?’ 라고 생각한 듯이 깔깔깔 웃었다.  정조뺏지는 아직 여자를 접한 경험이 없어서, 여자와 함께 그들만의 공간에 있을 때, 성적 욕망으로 인해 쉽게 발기된 남근이다. 쉽게 발기되는 남근은 여자의 경험이 없다는 정조를 상징하는 정조뺏지다. 화자는 두루마기 깃에 달린 정조뺏지를 내어 보였다. 발기된 남근을 바지 위로 조금 도드라지게 하여 보였다. 평소에 남근은 표피가 귀두를 감싸고 있어 마치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의 형상이다. 귀두가 사람의 머리, 귀두 아래의 잘록한 부분이 사람의 목, 그리고 그 이하가 사람의 몸통과 유사하다. 따라서 귀두를 감싸고 있는 표피는 두루마기가 된다. 아직 발기되지 않은 남근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두루마기 깃 사이로 정조뺏지를 내어보였다는 것은 표피에 둘러싸여 있던 귀두가 드러났다는 의미다. 크게 발기되어 남근의 귀두가 드러났다는 의미다. 따라서 화자의 남근이 발기된 것이다. 이상 시인의 시에서 남근의 표피가 귀두를 감싸고 있는 것을, 마치 옷을 입은 사람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시로는 이 있다. ‘에이, 아직은 남자 구실 제대로 하겠어?’라고 생각한 듯이 깔깔깔 웃는 과부의 웃음은, 화자에게는 표피를 비집고 나와 발기된 남근이 다시 표피 속으로 들어가도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 들어가도 좋다던 女人이 바로 제게 좀 鮮明한 貞操가 있으니 어떠냔다. 나더러 世上에서 얼마짜리 貨幣 노릇을 하는 세음이냐는 뜻이다. 들어가도 좋다던 여인 즉 깔깔깔 웃던 여인이, 바로 정색을 하면서, 마치 자신에게 좀 선명한 정조가 있으니 어떠냐? 하고 말하듯이, “너 여자 해 본 경험이 있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여인은 과부였고, 과부가 재가를 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선명한 정조를 가진 것이다. 그러한 여자가 “너 여자와 해 본 경험이 있니”라고 말했다는 것은 화자에게는 ‘너 나와 할 수 있겠니?’ 라고 하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어떠냐’는 말을 화자는 ‘할 수 있겠니?’로 들었을 것이다. 결국 “너 여자와 해 본 경험이 있니”라는 말을 화자는 ‘세상에서 얼마짜리 화폐 노릇을 하는 세음이냐’라는 말로 들린 것이다. 화폐는 물건 등을 살 수 있는 ‘가치’를 가진 것이다. ‘다른 여자와 해 본 경험이 있니?’ 라는 말은, 세상에서 남자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한 경험을 묻는 것이다. 나는 일부러 다홍 헝겊을 흔들었더니 窈窕하다던 貞操가 성을 낸다. 그리고는 七面鳥처럼 쩔쩔맨다. 화자는 일부러 다홍 헝겊을 흔들었다. 화자는 발기되어 붉게 물든 남근을 조금 보여주었다. ‘충분히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다, 남자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귀두를 둘러싸고 있는 표피가 두루마기라면, 다홍 헝겊은 발기된 남근의 일부에 해당한다. 피륙의 조각을 ‘헝겊’이라고 한다. 따라서 화자는 발기된 남근을 조금 꺼내어 보여준 것이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요조하던 정조 즉 조용하던, 남편을 사별하고도 재가를 하지 않은 과부가 성을 내다. 마치 성이 나서 그런 거처럼, 갑자기 화자를 잡아 넘어뜨려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서, 씩씩거리면서, 마치 화자를 두들겨 주는 것처럼, 여성 상위의 성교를 격렬하게 한다. 그리고는 칠면조처럼 얼굴색이 다양하게 변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여자가 화자를 통해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성욕을 풀고 있다. 이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 여자의 경험이 없는 남자와 남자의 경험이 있는 여자가 성교를 할 때는 남자가 능동적이지 못한가 보다. 그래서 경험이 있는 여성이 남자의 위에서 주도적으로 하는가 보다.  이 시는 와도 상황이 유사하다. ​ ​ ​ ▣   買春 ​ 記憶을맡아보는器官이炎天아래생선처럼傷해들어가기始作이다. 朝三暮四의싸이폰作用. 感情의忙殺. 나를넘어뜨릴疲勞는오는족족避해야겠지만이런때는大膽하게나서서혼자서도넉넉히雌雄보다別한것이어야겠다. 脫身. 신발을벗어버린발이虛天에서失足한다. ​ ― 1936. 10. 4 ~ 9 ―     買春 ‘매춘(賣春)’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매춘(買春)’은 돈을 주고 몸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맞나? 이상 시인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다. 뻔한 것을 뻔하게 쓰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시의 제목 ‘매춘(買春)’이 돈을 주고 몸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독자는 너무나 쉽게 시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된다. 시가 재미없을 것이다. 이 시의 제목 ‘매춘(買春)’은 젊음을 산다는 의미다. ‘춘(春)’은 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자가 몹시 아픈가 보다. 이상 시인이 병으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가 보다. 를 보면 이상 시인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이 시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아픈 화자가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몹시 아파서 곧 죽을 수도 있는 젊은 환자가, 병원에 가서 돈을 주고 수술을 한 다음, 다시 건강을 회복하려고 할 때, 병원에 돈을 내고 치료를 받는 행위는 젊음을 사는 행위다. 매춘(買春)이다. 記憶을 맡아보는 器官이 炎天 아래 생선처럼 傷해 들어가기 始作이다. 朝三暮四의 싸이폰作用. 感情의 忙殺. 수술을 하기 전에 마취를 하는 장면 같다. 기억을 맡아 보는 기관 즉 뇌가 뜨거운 햇볕 아래 생선처럼 상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뇌가 상해 들어간다는 말은 기억이 점점 가물가물해 진다는 말이다. 마취를 할 때 의식을 점점 잃어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마취는 조삼모사의 사이펀 작용이다. 하나의 사물이 세 개로 보였다가 네 개로 보였다가 하면서, 의식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마취는 감정 즉 느낌을 빠삐 죽이는 것이다. 나를 넘어뜨릴 疲勞는 오는 족족 避해야겠지만 이런 때는 大膽하게 나서서 혼자서도 넉넉히 雌雄보다 別한 것이어야겠다. 나를 넘어뜨릴 피로는 오는 족족 피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마취는 피로가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대담하게 나서서 넘어져야 한다. 승부를 가르는 경기에서는 둘이 겨루다가 내가 피곤하면 그 피곤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마취는 혼자서도 넉넉히 넘어지는 것이다. 마취할 때는 피곤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암수가 성교 후에 몰려오는 피곤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과는 이상스럽게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은 남녀가 성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脫身. 신발을 벗어버린 발이 虛天에서 失足한다. 탈신(脫身). 관계하던 일에서 몸이 빠져 나온다. 여기서 관계하는 것은 의식이고, 그 의식에서 몸이 빠져 나온다. 즉 의식을 잃고 자유로운 몸이 된다. 이것은 마취다. 신발을 벗어버린 발이 텅 빈 하늘에서 실족하여 떨어진다. 사람이 높은 다리 위나 절벽에서 자살을 할 때는 신발을 벗어놓고 뛰어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마취는 스스로 죽음과 같은 상태로 뛰어드는 것이다.   ​   ▣   生涯 ​ 내頭痛위에新婦의장갑이定礎되면서내려앉는다. 싸늘한무게때문에내頭痛이비켜설氣力도없다. 나는견디면서女王蜂처럼受動的인맵시를꾸며보인다. 나는已往이주춧돌밑에서平生이怨恨이거니와新婦의生涯를浸蝕하는내陰森한손찌거미를불개미와함께잊어버리지않는다. 그래서新婦는그날그날까무러치거나雄蜂처럼죽고죽고한다. 頭痛은永遠히비켜서는수가없다. ― 1936. 10. 4 ~ 10. 9 ―     生涯 생애(生涯)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이 살아가는 한평생, 혹은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생애(生涯)라는 말이 무엇을 암유한다고 본다면, 살아있는 물가, 솟아나는 물가 즉 체액이 솟아나는 신부의 음부를 암유한다. 여자는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던 이상은 신부에게도 늘 성적으로 만족을 못 시켜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였던 것 같다. 내 頭痛 위에 新婦의 장갑이 定礎되면서 내려앉는다. 두통(頭痛)은 머리가 아픈 증상이다. 그렇다면 이상 시인에게 있어서, 신부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두통거리는 무엇이었을까? 이상의 시 , , 등을 참고할 때, 남녀가 함께 사는 가정에서는 아내도 늘 성적으로 만족을 할 수 있어야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이 화자의 두통이다. 화자의 두통 위에 신부의 장갑이 정초되면서 내려앉는다. 아내를 성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고 고민하는, 화자의 남근 위로, 신부의 손이 주춧돌처럼 내려앉았다. 잘 발기가 되지 않는 화자의 남근을 신부가 손으로 애무를 하는 것 같다. 힘이 빠진 남근은 신부가 손으로 애무해도 신부의 손을 제대로 느껴 발기되지 않는다. 마치 장갑을 끼고 애무하는 것처럼 느낀다. 왜 신부가 화자의 남근을 애무하는 것을 두고 정초(定礎)되었다고 했을까? 주춧돌을 놓는 것은 그 위에 기둥을 세우기 위함이다. 신부가 화자의 남근을 애무하는 것은 화자의 남근을 자신의 손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신부의 손이 주춧돌이 된다. 싸늘한 무게 때문에 내 頭痛이 비켜설 氣力도 없다. 싸늘한 주춧돌의 무게 때문에 화자의 두통이 비켜설 기력도 없다. 싸늘한 주춧돌의 무게 즉 기둥처럼 남근 세우는 원동력이 되는 성적 에너지(정력, 기력)가 싸늘하게 식어 가라앉았기 때문에 화자의 두통이 비켜설 기력도 없다. 화자의 두통인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는 것을 피할 기력도 없는 것이다. 나는 견디면서 女王蜂처럼 受動的인 맵시를 꾸며 보인다. 화자는 두통거리인 발기가 되지 않는 남근을 신부가 열심히 애무하는 것을 견디면서, 여왕벌처럼 수동적인 맵시를 꾸며 보인다. 마치 여왕벌처럼 아내의 애무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수동적인 맵시를 꾸미는 것은 신부가 애무를 잘 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다는 의미다. 꾸미는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已往 이 주춧돌 밑에서 平生이 怨恨이거니와 新婦의 生涯를 浸蝕하는 내 陰森한 손찌거미를 불개미와 함께 잊어버리지 않는다. 화자는 이왕 이 주춧돌 밑에서 평생이 원한이다. 주춧돌 밑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게 하는 성적 에너지다. 따라서 화자는 늘 남근을 세울 수 있는 기력이 달리는 것이 원한이다.  그래서 신부의 생애 즉 신부의 체액이 솟아나는 음부를 침식하는 내 쓸쓸한 손찌검을 불개미와 함께 잊어버리지 않는다. 신부의 생애를 침식한다는 것은 신부의 음부를 손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의미다. 불개미는 단것을 좋아하여 단물이 있는 곳에 모여들어 그것을 먹는다. 화자도 불개미처럼 신부의 체액이 나오는 달콤한 음부를 손으로 파고들면서 애무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화자가 아내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애무하여 아내를 만족시키는 장면이다. 그래서 新婦는 그날그날 까무러치거나 雄蜂처럼 죽고죽고 한다. 頭痛은 永遠히 비켜서는 수가 없다. 그래서 신부는 그날그날 성적으로 만족하여 까무러치거나, 수펄처럼 죽고 또 죽고 한다. 수펄은 여왕벌과 교미를 마치면 죽는다고 한다. 신부는 화자의 애무에 의해서 성적으로 만족하여 까무러치거나 만족 후에 마치 죽는 것처럼 늘어져 누워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화자의 두통은 영원히 비켜서는 수가 없다. 화자의 두통거리인 발기가 되지 않는 것은 영원히 피할 수가 없다. 또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손으로 만족시켜야 한다는 골칫거리도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 ​ ▣   ​自像 ​ 여기는어느나라의데드마스크다. 데드마스크는盜賊을맞았다는소문도있다. 풀이北極에서破瓜하지않던이수염은絶望을알아차리고生殖하지않는다. 千古로蒼天이허방에빠져있는陷穽에遺言이石碑처럼은근히沈沒되어있다. 그러면이곁을生疎한손짓발짓의信號가지나가면서無事히스스로와한다. 점잖던內容이이래저래구구기시작한다. ― 1936. 10. 4 ~ 10. 9 ―    ​ 自像 이 시의 제목 ‘自像(자상)’은 ‘自畵像(자화상)’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상이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쓴 시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상 시인의 시를 읽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황당한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것은 천하에 비일비재한 일이다. 여기서 자상은 자신을 본뜬 형상이라는 의미다. 이상 시인이 자화상이라는 말을 몰라서 자상이라고 했겠는가. 물론 이상 시인은 자상을 자화상으로 읽을 어리석은 사람들을 예상하면서 썼을 것이다. 그것은 시를 쓰는 또 하나의 재미다. 서정주 시인도 그랬을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시를 거꾸로 읽는 것은, 우리 한국문학의 상식이요 비극이다. 언제 기회가 다면 서정주 시인의 시들도 읽어보고 싶다. 각설하고,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고, 자상 자신의 형상이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그 어떤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자식이라 하겠다. 또 이것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남근이라 하겠다. 자식은 아비의 형상을 닮게 되는 것이고, 자식을 낳을 화자의 남근 또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상 시인이 남근을 사람의 형상으로 묘사한 시는 여러 편이 있다. 언뜻 생각나는 것만 해도 , 등이 있다. 그냥 이상 시를 읽은 독자로서 추정해 본다. 이 시는 1936년에 쓴 시다. 1936년 유월을 전후하여 시인은 슬그머니 변동림과 결혼하게 된다. 둘이만 어디엔가 가서 결혼식을 했던 것 같고, 간단한 살림살이만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와는 다른 면에서 변동림은 이상 시인이 매우 좋아했던 여자였던 것 같다. 결혼을 하면 가정을 이루는 것이 되고, 가정이 이루어졌으면 자손을 생산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다. 그러나 이상 시인과 변동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였던 것 같다. 자식이 있었더라면 하는 가정도 해 본다. 필자는 더 이상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도 못하며, 그것을 알기 위하여 이런저런 책을 읽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 읽어볼 마음도 별로 없다. 이것저것 안다는 것이 반드시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는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다. 데드마스크는 盜賊을 맞았다는 소문도 있다. 여기 즉 화자의 남근은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다. 발기된 남근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귀두가 얼굴의 형상이요, 귀두 밑 잘록한 부분이 사람으로 치면 목에 해당하고, 그리고 그 아래가 바로 몸통의 형상이다. 그런데 발기되지 않는 화자의 남근은, 사람의 얼굴 형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분간이 안 되고, 죽은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같고, 제대로 사람의 형상도 갖추지 못한 것도 같다.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와 같다. 그 데드마사크는 도적을 맞았다는 소문도 있다. 화자의 남근이 기력을 회복했다는 말이다. 이상 시인과 변동림의 결혼은 친구들도 몰랐던가 보다. 어느 날 이상의 집에 갔더니, 거기에 변동림이 있었고, 나중에 사람들은 이상 시인이 변동림과 결혼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상 시인이 결혼하였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결혼을 하였으면 제대로 남편 구실을 할 것이고, 그러면 남근이 제 구실을 할 것이라는 발상에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풀이 北極에서 破瓜하지 않던 이 수염은 絶望을 알아차리고 生殖하지 않는다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자 한다. 그러나 성적 열기가 올라오지 않고 차갑게 식어서 발기하지 못한 남편이 아내와 성교를 한다면, 남근이 아내의 음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쓸데없이 남편의 음모와 아내의 음모만 서로 부딪힌다. 따라서 아내의 처녀막을 뚫을 수 없다. 처녀막이 터지지 않던 수염 즉 아내의 음부는 절망을 알아차리고 생식하지 않는다. 자손을 낳고자 하는 노력, 즉 성교를 포기한다. 千古로 蒼天이 허방에 빠져 있는 陷穽에 遺言이 石碑처럼 은근히 沈沒되어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푸른 하늘이 움푹 파인 곳에 빠져 있는 구덩이에, 유언이 돌비석처럼 은근하게 침몰되어 있다. 참으로 말이 어렵다. 아득한 옛날부터 아내는 아래에 눕고, 남편은 아내의 몸 위에 올라서 자손을 잉태하여 생식하는 상식이다. 따라서 푸른 하늘이 움푹 들어간 곳에 빠져 있는 함정은, 푸른 하늘을 향하여 누워 있는 아내의 음부다. 여기에다가~~ 자식을 낳으면, 아비는 그 자식에게 유언을 하고 죽는 것이다. 자식은 유언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자손은 자신을 낳아 길러 준 아비가 죽으면 석비를 세우는 것이다. 유언을 남기고 석비를 세워 줄 자식을 낳고자 하는 화자, 남근이 석비처럼 은근하게 아내의 음부에 가라앉았다. 남근이 드디어 발기되어 석비처럼 굳게 딱딱하게 되고, 아내의 음부를 향하여 은근하게 쑥욱 들어가 잠긴다. 석비는 딱딱하게 발기된 남근을 암유한다. 그러면 이 곁을 生疎한 손짓발짓의 信號가 지나가면서 無事히 스스로와 한다 그러면 이 곁을 즉 아내의 함정에 침몰한 화자의 석비 곁을 생소한, 전에는 없었던 손짓발짓의 신호가 지나간다. 모처럼 성적 쾌감에 젖은 아내가 손과 발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만족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수줍고 부끄러워한다. 성교가 끝나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조용해지면서, 너무 손짓발짓을 한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흥분하여 발광을 한 것에 대해서,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한다. 점잖던 內容이 이래저래 구구기 시작한다 ‘內容(내용)’은 안 내, 얼굴 용, 해서 아내의 함정 안에 있던 얼굴이다. 즉 발기되어 제대로 사람 형상을 갖추었던 화자의 자랑스런 남근이다. 그러나 아내와의 성교가 끝나고 아내가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면, 화자의 점잖던 내용 즉 발기되어 제대로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던 남근은, 이래저래 구기기 시작한다. 남근은 힘이 빠지고 줄어들면서 이래저래 좌우로 힘없이 흔들리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던 귀두가 구겨저 줄어들기 시작한다. 도로 데드마스크가 되고 만다.   ▣   8. 無題 一九三三. 六. 一 ​ 天秤위에서 三十年동안이나 살아온사람(어떤科學者) 三十萬個나넘는 별을 다헤어놓고만 사람(亦是) 人間七十 아니二十四年동안이나 뻔뻔히살아온 사람 (나) 나는 그날 나의自敍傳에 自筆의訃告를 揷入하였다. 以後나의肉身은 그런故鄕에있지않았다 나는 自身나의詩가 差押當하는꼴을 目睹하기는차마 어려웠기 때문에. ​ ― 1933. 7 ―   1933년 6월 1일, 이상 시인이 무슨 중대한 선언을 하는 것 같다. 무엇을 선언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를 잘 읽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시만 읽어서는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시는 애매하다. 애매한 시만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연보라도 참고해야 할지 모른다. 天秤 위에서 三十年 동안이나 살아온 사람(어떤 科學者) 三十萬 個나 넘는 별을 다 헤어 놓고 만 사람(亦是) 천칭(天秤)은 저울의 한 종류다.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 물체의 질량을 측정하는 장치다. 또 처녀자리와 전갈자리 사이에 있는 별자리를 천칭자리라고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천칭 위에서 살아온 사람과 마찬가지로, 30만 개나 넘는 별을 다 헤어 놓은 어떤 과학자. 그도 역시 대다한 과학자다. 일생동안 천칭자리 하나만을 관찰하고 연구한 과학자다. 평생 동안 한 우물을 판 사람이다. 人間七十 아니 二十四 年 동안이나 뻔뻔히 살아온 사람 (나) 나는 그날 나의 自敍傳에 自筆의 訃告를 揷入하였다.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다. 인간 칠십(人間七十)은 한 사람의 한평생이다. 한평생 동안, 아니 이 시를 쓸 당시의 시인의 나이는 24세였으니, 24년 동안, 나름대로 한평생 동안, 화자는 뻔뻔히 살아온 사람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화자의 삶은 앞의 과학자의 삶과 대조된다. 과학자가 한평생 하나의 일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이라면, 시인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뻔뻔히 살아왔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시인은 이것저것 여러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화자는 그날, 자신의 자서전에 부고를 삽입한다. 자서전? 아마 일기일 것이다. 일기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서술한 책이다. 자서전이다. 자서전에 부고를 삽입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은 죽은 삶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以後나의肉身은 그런故鄕에있지않았다 나는 自身나의詩가 差押當하는꼴을 目睹하기는차마 어려웠기 때문에. 이후 화자의 육신은 그런 고향에 있지 않았다. 육신이 이것저것 하면서 살아온 고향에 있지 않겠다. 지금까지 이것저것 하면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오로지 시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말로 보인다. 실제로 이상은 1933년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두고, 취직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신의 시가 차압당하는 꼴을 차마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압당하는 것은 강제로 빼앗기는 것이다. 남들이 자신의 시를 너무 쉽게 읽어버리는 꼴을 보기 싫다는 말이다. 시라는 것은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시를 본다. 그러나 의미가 쉽게 드러나는 시는, 한 번 본 다음에는 다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는 앞으로는 시를 쓰는 것에만 전념하여,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시를 더욱 어렵게 쓰겠다는 말로 보인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상의 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이해가 된다. 아직도 이상의 시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 아직도 이상의 시는 차압당하지 않았다. 적어도 필자의 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차압당하지 않았다.   ​ ​ ▣   꽃나무  ​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 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爲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 1933. 7 ―     ‘벌판 한 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라는 문장을 여러 번 되뇌어 보자. 그러면 어느새 벌판 한 복판에 있는 꽃나무 하나를 상상하게 된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딘가 벌판 한 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는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화자는 지금 그 꽃나무 하나를 상상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이상의 시 이 떠올랐다. 은 아메리카 여자와 남자의 나체 사진을 보면서 자위(自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시의 마지막에서 ‘우리의 하늘은 너무 푸르다. 폐쇄주의적이다’라고 말한다. 성(性)에 대해서 지나치게 폐쇄주의적인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화자는 지금 요염한 여자 나체 사진을 보고 있다.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요염한 자세의 여자 사진이다. 흔히 꽃은 여자에 비유된다. 여자에 몰려드는 남자는 벌과 나비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벌판 한 복판에 여자가 하나가 있다.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하는 것이다. 어디에 사는 여자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여자는 벌판 한복판에 있다.  벌판 한복판에 있는 꽃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듯이, 벌판 한복판에 있는 여자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여자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누구나 상대할 수 있는 창녀나 그와 유사한 부류의 여자는 벌판 한복판에 있는 꽃이다. 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근처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다. 사진 속에는 한 명의 여자만 있다. 화자는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한다. 그래서 근처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오직 사진 속의 실제 여자 하나만을 상상하면서 그 여자에만 몰두하고 있다.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熱心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사진 속의 여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여자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요염한 자세를 하고 있다. 사진의 실제 여자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남자를 유혹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요염한 자세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화자는 생각한다.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사진 속의 실제 여자는, 마치 자신이 가장 요염하다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듯이 보인다.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요염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자는 참으로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는 막 달아났소. 그래서 화자는 막 달아났다. 막 달아나는 행위는 대상으로부터 급히 멀어지는 행위다. 그리고 막  달아날 때는 손을 앞뒤로 마구 흔들어 댄다. 숨이 찬다. 화자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하면서, 그 여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남자를 간절히 원하면서 유혹하고 있는 여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손을 마구 흔들면서, 숨을 몰아쉰다. 자위를 한 것이다. 자위를 하고 사정을 하면 여자 생각에서 멀어진다. 자위를 하면 여자로 인해 일어난 욕망이 달아난다. 그래서 막 자위하는 것이 그 여자로부터 막 달아나는 것이다. 한 꽃나무를 爲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한 여자,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애절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화자는 참 이상스러운 흉내를 낸 것이다. 그 여자의 욕망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면서, 참 이상스러운 흉내만 낸 것이다. 화자는 여자 나체 사진을 보면서, 그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 것이다. ​ ​ ​ ​ ▣   이런 詩 ​ 역사를하느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가보니 危險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必是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凄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作文을하였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럼히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詩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 1933. 7 ―   이 시는 소설 에도 등장하는 금홍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1933년 시인이 스물 세 살이었을 때, 폐병으로 인한 각혈로 황해도 백천온천으로 요양을 간다. 거기에서 기생 금홍이를 만나게 되고, 이후 상경하여 라는 다방을 개업한다. 금홍이를 마담으로 앉히고, 약 3년간 동거한다. 를 보면 금홍이는 이상의 정식 부인이라기보다는 동거하면서 몸을 팔기도 하는 여자가 아닌가 싶다. 이 시도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역사를 하느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서인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가 보니 危險하기 짝이 없는 큰 길가더라.  역사는 토목건축이나 공사 따위의 커다란 일이다. 여기서는 이상이 백천온천에 폐병을 고치기 위해서 갔던 일, 혹은 요양 갔다가 기생 금홍이와 관계를 맺은 일을 암유한 것으로 보인다. 땅을 파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기생인 금홍이와 성적 관계를 맺는 행위를 암유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역사를 하다가 큰 돌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그 돌은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이 익은 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여자였다. 보통 어딘지 마음에 드는 사람은 꼭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돌을 목도들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에 버렸다. 그 큰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사람들이 그 돌을 몰래 가져가기 좋은 곳이다. 이상이 금홍이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다방 의 마담으로 앉힌 것을 두고 하는 말로 보인다. 다방이라는 곳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사람들이 금홍이에게 눈독을 들이기 쉬운 곳이다. 금홍이도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쉽게 바뀌기 좋은 곳이다. 따라서 다방은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큰길가와 다름이 없다.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으니 必是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變怪로다 간데 온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凄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作文을 하였다.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다. 소나기는 퍼붓는 것이다. 화자는 금홍이에게 퍼붓었다. 금홍이가 다른 남자와 계속 관계하는 것을 두고 금홍이와 다툰 것이다. 그렇게 퍼부었으면 반드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 가보니, 이상했다. 금홍이가 간데 온데 없었다. 금홍이가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화자는 처량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하였다. 아래와 같은 마음을 담아서 시를 썼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럼히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詩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그대 금홍이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나의 차례가 되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금홍이를 데려간 어떤 사람이 읽고,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볼 것 같아서, 그만 찢어버리고 싶었다. 괜히 자신을 비웃을 것 같았다. 아니면 미친 놈 취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 ​ ▣   普通記念 市街에 戰火가일어나기前 亦是나는 뉴―톤이 가리키는 物理學에는 퍽無智하였다. 나는 거리를 걸었고 店頭에 苹果山을보며는 每日같이 物理學에 落第하는 腦髓에피가묻은것처럼자그마하다. 계집을 信用치않는나를 계집은 絶對로 信用하려들지 않는다 나의말이계집에게 落體運動으로影響되는일이없었다. 계집은 늘내말을 눈으로들었다 내말한마디가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적이없다. 期於코 市街에는 戰火가일어났다 나는 오래 계집을 잊었었다 내가나를버렸던까닭이었다. 주제도 더러웠다 때끼인 손톱은길었다 無爲한日月을 避難所에서 이런일 저런일 우라끼에시(裏返) 裁縫에 골몰하였느니라 종이로 만든 푸른솔잎가지에 또한 종이로만든흰鶴同體한개가 서있다 쓸쓸하다 火爐가햇볕같이 밝은데는 熱帶의 봄처럼부드럽다. 그한구석에서 나는地球의 公轉一週를 紀念할줄을 다알았더라. ― 1934. 6 ―   普通 記念 보통 기념!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무엇을 기념할 때, 보통은 특별한 것을 기념한다. 특별한 누구의 생일을 기념하고, 특별한 결혼 몇 주기를 기념하고, 특별한 죽음을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보통 기념’이란다. 보통의 것을 기념한다는 말인지, 보통이 된 것을 기념한다는 것인지, 기념 자체가 보통이었다는 말인지, 하여튼 보통 기념은 보통 기념이 아닌 것 같다. 특별한 기념인 것도 같다.  언어유희를 하고 있는 이상의 시 앞에서 옥편을 펴 놓고 읽지 않는 한, 어떠한 지성도 이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이상이 드디어 여자를 알게 되었다. 여자는 어떻게 해야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지 알게 되었다. 여자를 공전 일주함으로써 여자에 대해서 지혜를 갖게 되었다. 市街에 戰火가 일어나기 前 / 亦是 나는 뉴―톤이 가리키는 物理學에는 퍽 無智하였다. 사창가에 가서 창녀와 뜨겁게 하나가 되기 전, 역시 옳다. 화자는 뉴턴이 말하는 물리학 즉 만유인력 즉 생면부지의 남녀가 그렇게 뜨겁게 하나가 될 수 있는 원리, 남녀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화자는 사창가에 가서 몸소 체험함으로써 남녀 간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이 중요함을 깨달은 것이다. 체험 후에 그 깨달음을 ‘역시 옳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거리를 걸었고 店頭에 苹果山을 보며는 每日같이 物理學에 落第하는 腦髓에 피가 묻은 것처럼 자그마하다. 화자는 거리를 걸었고, 여관 앞에 창녀들이 많은 것을 보면, 매일같이 아내와의 성교에 소질이 없는 남근이, 마치 사정을 하되 피를 흘리듯이 조금 하고 난 뒤 줄어들었다. 계집을 信用치 않는 나를 계집은 絶對로 信用하려 들지 않는다 나의 말이 계집에게 落體運動으로 影響되는 일이 없었다. 성적으로 아내를 분명하게 다스릴 줄 모르는 화자에게, 아내는 절대로 믿고 베풀려고 들지 않는다. 화자의 남근이 아내에게 성교로 이어져서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계집은 늘 내 말을 눈으로 들었다. 내 말 한 마디가 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아내는 늘 화자의 남근을 눈으로 들었다. 화자의 남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화자의 남근 한 마디, 한 마디만한 작은 남근을 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아내가 화자의 남근에 똑바로 보고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期於코 市街에는 戰火가 일어났다 나는 오래 계집을 잊었었다 내가 나를 버렸던 까닭이었다. 기어코 화자가 창녀와 샀다. 화자는 오래 아내를 잊었다. 아내의 성감대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화자가 화자를 버렸던 까닭이다. 화자는 아내가 어떻게 해야 자신을 좋아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제도 더러웠다 때 끼인 손톱은 길었다 / 無爲한 日月을 避難所에서 이런 일 저런 일 / 우라끼에시(裏返) 裁縫에 골몰하였느니라. 사창가에서 창녀를 만나기 전, 화자는 주제꼴도 더러웠다. 때가 낀 손톱도 더러웠다. 하는 일 없는 낮과 밤을, 아내와의 어려움을 피하면서, 이런 일 저런 일, 아내의 속마음을 돌이킬 방법과, 어떻게 하면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가에만 골몰하였다. 성적으로 잘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종이로 만든 푸른 솔잎가지에 또한 종이로 만든 흰 鶴同體 한 개가 서있다. 쓸쓸하다. 종이로 만든 푸른 솔잎가지에 또한 종이로 만든 흰 학과 같은 고상한 몸뚱이 한 개가 서 있다. 쓸쓸하다. 화자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아내에 대해서 마치 고상한 한 마리 학처럼, 고상한 것에서 그 이유와 방법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결국 아내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화자는 쓸쓸했다. 火爐가 햇볕같이 밝은 데는 熱帶의 봄처럼 부드럽다. 그 한 구석에서 나는 地球의 公轉一週를 紀念할 줄을 다 알았더라. 화로처럼 뜨거움을 간직한 창녀가, 햇볕같이 밝은 데 즉 뜨거움이 모여 있는 곳인 음부는, 열대의 봄처럼 뜨거우면서도 부드럽다. 그 음부의 한 구석에서, 화자는 지구의 공전일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실마리를 생각할 줄을 알았다. 화자는 창녀를 대상으로 여자에 대해서 탐구한 것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면, 지구에는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화자는 여자를 성적 단계에 따라서 다루어야 함을 터득한 것이다. 처음에는 봄처럼 부드럽게 애무를 하고, 그리하여 여자의 몸이 점점 여름처럼 뜨거워지면 그 때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행위로 절정에 도달하게 한다. 그리고 절정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이 여자는 서서히 식어간다. 이때에도 역시 애무를 통하여 여자의 쾌감의 나머지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준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는 겨울처럼 식어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지구의 공전일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화자는 창녀와의 관계 속에서 여자의 뜨거워짐과 식어감의 실마리를 생각할 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와의 관계가 보통 사람들의 부부 관계처럼 돌아왔던 것이다. ‘普通紀念(보통기념)’은 한 여자로부터의 경험이 널리 통하는 실마리가 된다는 의미다. 창녀로부터 여자 다루는 법을 터득한 화자, 이를 아내에게 적용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 ​ ​ ▣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1933. 10 ― ​ ​ 거울은 거울인가? 이상의 시에는 거울과 관련된 제목을 가진 몇 편의 시가 나온다. 과 가 대표적이다. 이상의 시는 기본적으로 제목들에서부터 상식적 접근을 거부한다. 은 수염이 아니고 음모다. 은 여자를 사는 것이 아니고, 젊음을 사는 것이다. 는 총구가 아니고 정액을 발사하는 남근이다. 은 거울이 아니고 사진이다. 는 정부에서 발표하는 글이 아니고,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글이다. 은 자화상이 아니고, 자신의 형상을 닮은 남근이다. 은 대낮이 아니라, 대낮과 같이 밝은, 전등불이 켜 있는 깜깜한 새벽이다. 은 빈 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미래’의 의미로도 쓰였다. 이상의 시는 제목에서부터 상식적 읽기를 거부하고 의심할 때, 그 시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거울은 거울이라는 상식에서 벗어나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거울은 거울이 아니다. 거울은 사진이다. 화자는 지금 어린 시절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필자는 자세히는 모른다. 그러나 대충 아는 대로 이야기하면, 우리 나이 셈법으로 네 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간다. 자식이 없었던 큰아버지는 이상을 양자로 맞은 것이다. 에 보면 가난했던 생부는 총독부에 기술직으로 있어서 비교적 잘 살던 큰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고, 또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맏아들인 이상을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보낸다. 큰아버지는 그 후 어느 젊은 여자를 첩으로 맞아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이상은 어려서부터 똑똑하여 큰아버지는 이상을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상은 점점 자라면서 자신이 큰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한다. 은 점점 자라면서 큰아버지가 자신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하는 것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시다. 이상은 1910년생이다. 이 시는 1933년에 썼다. 이상의 나이 24세 때다.  이상은 자랐다. 자신을 양자로 보낸 생부에 대한 반감, 큰아버지 집에서 대를 이어가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거부감 등이 항상 이상의 가슴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시에 이런 의식이 엿보인다. 그리고 총독부 기수직이라는 좋은 직장을 그만둔다. 폐병으로 백천온천에 요양을 간 것도 이 시절이다. 고독했던 이상은 백천온천에서 금홍이를 만나고, 금홍이에게 사랑을 느낀다. 금홍이는 이상이 매우 좋아했던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런 상황에서 화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 큰아버지가 양부라는 사실도 모른 채 지내던,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고 있다고 상황을 설정해 보자. 이 시의 제목 거울은 사진이다. 거울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게 하는 도구다. 어린 시절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도 역시 사진이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사진 속에는 소리가 없다.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의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다.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나는 현재의 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사진 속에도 나에게도 귀다 있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나의 귀는 현재의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다. 여기서 보면 현재의 화자와 어린 시절의 화자는 단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의 어린 화자는 그 때의 생각에서 말을 하고 살았다. 그리고 현재의 화자는 그 때 생각하고 말하던 화자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화자는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무엇인가 충고를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화자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나는 귀가 두 개나 있으면서도, 지금 나의 충고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당연하다. 현재의 내가 어찌 과거의 자신에게 충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화자는 현재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의 자신에게 무엇인가 충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신의 삶에 대한 부정이다.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사진 속의 나는 왼손잡이다. 지금의 나와 반대로 된 존재다. 따라서 상반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다.  여기서 악수는 평소에 잘 아는 대상을 만났을 때, 반가워서 나누는 인사다. 지금의 나와 어린 시절의 나의 삶은 서로 다른 삶을 살기에, 화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도 반갑지 않은 것이다. ‘――’은 ‘악수를 받을 줄 모른다.’는 의미에 대해서 화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에게 ‘악수를 받을 줄 모른다.’는 말이 통상적인 악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현재의 나와 어린 시절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의미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 / 거울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지금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진이기 때문에 화자는 어린 시절의 실제의 자신을 만져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진이 아니었다면 화자가 어찌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보기라도 했겠는가. 사진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다. 사진을 통하여 실제 과거의 자신을 만져볼 수 없다. 지금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만지면서, 연민이라도 보내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 잘은 모르지만 외로 된 사업에 골몰할 게요. 화자는 지금 사진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보고 있는 사진 속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생각을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그러나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늘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다. 오래 되어서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사진 속의 나는 아마 바르지 않고, 뒤바뀌게 된 삶에 대해서 골몰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보면 화자는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삶이 뒤바뀐 것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 때의 입장에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어떻게 학교를 가고, 커서 무엇이 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이 바뀐 것을 안 화자는 자신의 운명에 갈등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운명을 뒤바꾼 자들이 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뒤바뀐 삶을 자신이 살아가는 것도 옳지 않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외로 된 사업’은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삶, 자신의 운명이 바뀐 것도 모른 채 무엇인가 골몰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 또 꽤 닮았소. /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참된 나와는 반대다. 사진 속의 과거의 나의 삶은 지금 참되고 올바른 지금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또 외양은 꽤 닮았다. 그런데 나는 사진 속의 과거의 나를 근심하여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거나 네 삶이 잘못되었다고 진찰할 수 없다. 과거의 잘못된 삶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퍽 섭섭하다. 과거 자신의 삶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   紙碑 ​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작아서다리는짧고바른다리가아프니내바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夫婦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舞事한世上이病院이고꼭治療를기다리는無病이끝끝내있다. ― 1935. 9. 15 ―     1933년 이상 시인이 23세일 때, 3월 달에 이상 시인은 각혈을 한다. 폐병이 깊어진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온천에 요양을 간다. 거기서 기생 금홍이와 사귀게 되고, 상경하여 서울 통인동 집을 처분하여 금홍이와 함께 라는 다방을 개업하고 동거한다.  이 시의 제목 는 다방 를 의미한다. 다방 를 경영하던 아내 금홍이을 가리킨다. 또 지비(紙碑)는 종이로 만든 비석이다. 비석은 죽은 자에 대한 기록이다. 가문 대대로 그 죽은 자를 기억하게 해 준다. 그러나 종이비석은 오래 가지 못한다. 금홍이도 죽어서, 이상의 가문에 대대로 남아 기억될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또 ‘집’은 아내다. 아내를 ‘집의 사람’이라 한다. 보통 발음할 때, ‘지비사람’이 아내다. 따라서 금홍이는 이상의 아내이기도 하고 아내가 아니기도 하다. 하여튼 금홍이가 지비(紙碑)다. 내 키는 커서 다리는 길고 왼다리 아프고 안해 키는 작아서 다리는 짧고 바른다리가 아프니 화자의 키는 커서 다리는 길고 왼다리가 아프고 아내의 키는 작아서 다리는 짧고 바른 다리가 아프다. 단순히 키가 크고 키가 작은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많이 배워서 지식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 그래서 키가 크다. 그러다보니 다리는 길고 왼다리가 아프다. 무엇인가 부족한 화자는 남들이 우러러보지만 절룩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상은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지식이다. 지식은 많으나 현실적으로 살아갈 능력이 부족하다. 아내는 키가 작아서 다리는 짧고 바른 다리가 아프다. 아내는 배운 것이 없다. 기생 혹은 창녀 신분이다. 사람들이 낮추어 본다. 윤리적으로 내려다본다. 그래서 아내는 키가 작다. 그러다 보니 생활력은 있으나 윤리인 면이 부족하다. 오른 다리가 아프다. 화자는 바르게 세상을 살기 위해서 공부했다. 그러나 반대쪽이 부족하다. 왼다리가 아프다. 금홍이는 그릇된 길로 들어섰다. 바르게 살고자 하나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족하다. 바른다리가 아프다. 내 바른다리와 안해 왼다리와 성한 다리끼리 한 사람처럼 걸어가면 아아 이 夫婦는 부축할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화자의 바른다리 즉 지식이 성한 다리와 아내의 왼다리 즉 생활력 성한 다리가 끼리끼리 한 사람처럼 걸어간다면, 아아, 이 부부는 부축할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어버립니다. 비록 화자와 아내는 외형적으로는 정상적인 것처럼 살아가지만 각각 절름발이 인생이다. 외형적으로 정상처럼 보이기 때문에 남들이 부축할 필요가 없다.  舞事한 世上이 病院이고 꼭 治療를 기다리는 無病이 끝끝내 있다. 춤에 전념하는 세상이 병원이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마치 춤추듯이 잘 걸어갈 수 있게 해 주는 곳이 병원이다. 화자 부부에게는 치료해야 할 것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병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끝끝내 있다. 화자의 부부는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가지만 그 삶 속에는 무엇인가 아픔이 존재한다. 일상으로서는 병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무엇인가 치료를 기다리는 병이 있다. 그 치료를 기다리는 부분은 화자의 입장에서는 생활력이라든가 하는 것들일 것이고, 아내의 입장에서는 윤리적인 면이 아니겠는가. ​ ​ ​ ▣   明鏡 ​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季節에서는 얹은머리가 瀑布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薔薇처럼 착착 접힌 귀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조용한 世上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疲勞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 만적하는 대로 愁心이 平行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拒絶 右편으로 옮겨앉은 心臟일망정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러랴? 어디 觸診……하고 손이 갈 때 指紋이 指紋을 가로 막으며 섬뜩하는 遮斷 뿐이다   五月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外出하고 싶어 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던 季節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이지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表紙―― ― 1936. 5 ―    제목 은 맑은 거울이다. 아니 은 사진이다. 유리 액자 속에 든 사진은 사랑하던 그녀의 사진이다. 사진 속의 그녀의 얼굴은 마치 거울 속에 그녀가 비쳐 있는 것처럼, 밝고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거울 속의 그녀는 우리가 직접 만지고, 감정을 나누고, 대화를 할 수 없듯이, 사진 속의 떠나간 그녀도 또한 만질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고, 감정을 나눌 수도 없기에, 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 잊은 季節에서는 / 얹은머리가 瀑布처럼 내리우고 여기 한 페이지의 거울과 같은 시진이 있다. 한 페이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사진, 거울과 같이 마주보고 바라볼 수 있는 사진, 유리 액자 속에 있는 사진, 사랑했던 그녀의 사진을 화자는 보고 있다. 잊은 계절은 화자가 잊었던, 사진속의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시절이다.  그 뒤로는 얹은머리였지만 사진 속에서는 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있다. 이상이 백천온천에서 기생이었던 금홍이를 만났을 때 혹은 서울에 같이 올라와서 바로 찍은 사진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물론 그 뒤 금홍이는 이상과 같이 살면서 얹은머리를 하였을 것이다. 울어도 젖지 않고 /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 薔薇처럼 착착 접힌 / 귀 /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 조용한 世上이 맑기만 하고 / 코로는 疲勞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울어도 젖지 않는다. 화자가 울어도 사진 속의 그녀는 슬픔에 젖지 않는다. 화자가 맞대고 웃어도 사진 속의 그녀는 휘지 않는다. 화자가 웃어도 사진 속의 그녀는 그대로 있다.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깔깔깔 웃지 않는다. 사진 속의 그녀는 장미처럼 착착 접힌 귀를 하고 있다. 장미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착착 접혀 있기에 화자가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조용하며 맑은 세상이다.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사진 속의 그녀는 그녀의 체취가 나지 않는다. 실제의 그녀는 향기로운 체취로 인하여 껴안고 성교를 하고 싶은 향기를 지님으로써, 성교 후에 화자를 피로하게 하는데, 사진 속의 그녀는 피로한 향기가 나지 않는다. 만적만적하는 대로 愁心이 平行하는 / 부러 그러는 것 같은 拒絶 / 右편으로 옮겨 앉은 心臟일망정 / 없으란 법 없으니 만지작만지작하는 대로 수심이 나란히 따른다. 일부러 거절하는 것처럼, 아무리 사진 속의 그녀를 만져도 그녀가 만져지지 않는다. 비록 사진이지만, 심장이 없으란 법은 없으니, 아마 사진 속의 여자는 마치 화자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거절하는 것 같다. 설마 그러랴? 어디 觸診……하고 손이 갈 때 指紋이 指紋을 가로 막으며 / 섬뜩하는 遮斷 뿐이다 설마 사진 속의 여자가 실제로 만지는 것을 거절하겠느냐? 해서 화자는 ‘어디 촉각으로 진찰해 보자.’ 하면서 손이 여자의 얼굴로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섬뜩한 차단뿐이다.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는 것은 손가락 유리가 가로막으며 화자의 손이 여자를 만지는 것을 차단한다는 의미다. 유리의 차갑고 섬뜩한 감촉은, 화자에게 마치 사진 속의 여자를 만지는 것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五月이면 하루 한 번이고 / 열 번이고 外出하고 싶어 하더니 /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떠나간 그녀는,  오월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 했다. 기생으로 생활하던 금홍이는 자주 가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법도 있는 법. 이제는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는구나.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 맞섰던 季節을 만나련만 / 여기 있는 한 페이지 /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表紙―― 사진이 만약 두꺼운 책장 같으면 한 장 한 장 넘겨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련만, 여기 있는 한 장의 사진은 그냥 추억의 한 표지일 뿐, 그래서 떠나간 그녀와의 추억들조차 모두 떠올릴 수는 없다. ​ ​ ​   ▣   9. 遺稿 ​ ▣   肉親의章   나는 24歲. 어머니는바로이낫새에나를낳은것이다. 聖쎄바스티앙과같이아름다운동생 ․ 로오자룩셈불크의木像을닮은막내누이 ․ 어머니는우리들三人에게孕胎分娩의苦樂을말해주었다. 나는三人을代表하여――드디어―― 어머니 우린 좀더형제가있었음싶었답니다. ――드디어어머니는동생버금으로 孕胎하자六個月로서流産한顚末을告했다. 그녀석은 사내댔는데 올해는19 (어머니의한숨) 三人은서로들알지못하는兄弟의幻影을그려보았다. 이만큼이나컸지――하고形容하는어머니의팔목과주먹은瘦瘠하였다. 두번씩이나咯血을한내가冷淸을極하고있는家族을爲하여빨리안해를맞아야겠다고焦燥하는마음이었다. 나는24歲. 나도어머니가나를낳으시드키무엇인가를낳아야겠다고생각하는것이었다. ​ ― 1956 ― ​     이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이 19세 때 친어머니를 찾아갔는가 보다. 물론 이상은 4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갔지만, 그 후 어찌어찌하여 양자를 간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보다. 친어머니는 이상이 양자 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두 동생들은 이상이 자신들의 형이요, 오빠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화를 했을 것이다. 지금 이상은 24세다. 폐병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가 보다. 자신이 괴로울 때 떠올리는 것은 바로 자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상도 자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19세 때 찾아갔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24세 현재의 입장에서 19세 때 갔던 일을 떠올리며 그것을 시로 적고 있다. 제목 ‘육친(肉親)의 장(章)’은 바로 자신을 낳아주신 친어머니에게 보내는 글이다. 여기에는 현재 폐병으로 인한 괴로움, 그 괴로움 속에서 자신을 낳아주신 육친(肉親)에 대한 그리움이 잘 나타나 있다. 과 함께, 이상 시에서 가장 서정적인 시 중의 하나다.  나는 24歲. 어머니는 바로 이 낫새에 나를 낳은 것이다. 나는 지금 24세다. 친어머니는 바로 이 나이에 나를 낳으신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친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물론 그 그리움의 강한 동기는 화자의 각혈부터 비롯된다. 각혈하는 화자는 자연히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낳게 된다. 고통스러운 화자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친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고 또 안 해야 되는 현실 속에서, 그리움은 애절한 아픔으로 화자에게 밀려온다. 또 화자가 19세 때 친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친어머니는 자신이 육친인 것을 억지로 감추고 있으나, 화자가 두 번이나 각혈하자, 빨리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 할 것이라고 초조해 하는 친어머니를 떠올린다. 聖쎄바스티앙과같이 아름다운 동생 ․ 로오자룩셈불크의 木像을 닮은 막내누이 ․ 어머니는 우리들 三人에게 孕胎分娩의 苦樂을 말해 주었다. 지금은 19세 때 친어머니를 찾아가서 동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의 상황이다. 화자는 친어머니를 앞에 두고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고, 친어머니도 아들을 앞에 두고 내 아들이라고 내색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화자는, 자신이 친형이요 친오빠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동생들을 애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성세바스티앙과 같이 아름다운 남동생을 본다. 자신의 동생, 그러나 동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동생들이 어찌 예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로오자룩셈불크의 목상을 닮은 막내누이. 참으로 예쁜 여동생이다. 어머니는 우리들 삼인에게, 자신이 낳은 혈육들에게 잉태하고 분만하는 어려움과 즐거움을 말해 주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앞에 두고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 잉태 분만의 고락을 말할 때, 어찌 앞에 있는 아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겠는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는 화자 역시 그 말 속에는 자신을 낳을 때의 어려움 그리고 자신을 낳았을 때의 즐거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나는 三人을 代表하여 ――드디어―― / 어머니 우린 좀더 형제가 있었음 싶었답니다. 그래서 화자는 자식으로서 세 사람을 대표하여, ―― 드디어 ――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독자들이 못 알아들을까봐 ‘――’을 표시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화자가 어떤 상황에서 말을 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하면서 읽으라는 뜻이다. “어머니 우린 좀더 형제가 있었음 싶었답니다.” 라고 말했다. 시에서 이 부분이 굵은 글씨체로 되어 있는 것은 그저 심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제발 이 굵은 부분의 의미를 제대로 읽으라는 표시다. 일부러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모르는 듯이 이야기하는 화자는, 드디어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겉으로야 사촌으로서 남동생과 여동생 둘밖에 없으니, 형제가 더 있었으면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내면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이제 화자를 양자로 보내고 아들 하나와 딸 하나밖에 없으니, 아들을 낳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어머니를 걱정하여 하는 말이다. ――드디어 어머니는 동생 버금으로 孕胎하자 六個月로서 流産한 顚末을 告했다.// 그 녀석은 사내댔는데 올해는 19 (어머니의 한숨) 어머니는 두 여동생 다음으로 자식을 잉태하자, 육개월만에 유산하였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큰아들을 즉 화자를 양자로 보내서 아들이 없는 어머니는, 그후 두 동생을 낳았다. 이제는 두 동생 다음으로 아들을 하나 더 낳았어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두 동생 이후로 생산을 못했다. 낳아야 할 아들에 대해서 말하는 듯이, 그러나 실제로는 두 동생 앞서 났던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여동생 앞서서 아이를 잉태했는데, 잉태한 지 육개월만에 유산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앞에 두고 차마 네가 내가 난 아들이라고 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유산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드디어 어머니는 두 동생 다음으로 잉태를 했었다. 그러나 육개월만에 그 아이를 유산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사내였었는데, 올해는 19’ 하다가 얼른 말을 마치고 한숨을 쉬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머니는 유산한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자로 보낸 큰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19라고 말하는 순간 ‘아차’ 하고 말을 맺는다. 그리고 큰아들을 양자로 보낸 회한에 젖는 듯이 한숨이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녀석은 사내였었는데 올해는 19’하고 말끝을 흐리며, 어머니의 한숨이 이어진다. 화자의 나이 열아홉이다. 자식을 앞에 놓고도 그 자식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 자신을 낳아 준 친어머니를 앞에 두고도 어머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화자의 그 애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슴이 찡한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三人은 서로들 알지 못하는 兄弟의 幻影을 그려 보았다. 이만큼이나 컸지――하고 形容하는 어머니의 팔목과 주먹은 瘦瘠하였다. 두 번씩이나 咯血을 한 내가 冷淸을 極하고 있는 家族을 爲하여 빨리 안해를 맞아야겠다고 焦燥하는 마음이었다. 두 동생과 화자는 서로들 알지 못하는 형제의 환영을 그려 보았다. 두 동생은 태어나지도 못한 오빠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고, 화자는 자신이 바로 그 유산되었다고 말하는 아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두 동생은 화자가 바로 그 유산했다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두 동생은 바로 화자가 그들의 형이요 오빠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만큼 컸지’하고 자란 키를 손으로 가리켜 보이는 어머니의 팔목과 주먹은 수척하였다. ‘이만큼 컸지’하고 모습을 가리켜 보이는 손은, 두 번씩이나 각혈을 한 화자가, 자식이 없는 것을, 냉정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겨나가고 있는 가족을 위하여, 빨리 아내를 맞아 대를 이으라고, 초조해 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머니가 겉으로는 냉정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지만, 화자에게는 그 손동작 속에는 빨리 아내를 맞아 대를 이으라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24歲. 나도 어머니가 나를 낳으시드키 무엇인가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19세 때의 일을 떠올리는 나는 지금 24세다. 내가 19세 때, 어머니의 수척한 손을 보면서, 나도 어머니가 나를 낳았듯이, 무엇인가를 낳아야겠다고, 그래서 어머니의 대를 이음으로써 어머니에게 무엇인가 보답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 ​ ▣   最後 ​ 능금한알이墜落하였다 地球는부서질程度만큼傷했다 最後 이미如何한精神도發芽하지아니한다 ― 1956. 7 ―     능금 한 알이 추락하였다. 사실 능금 한 알이 추락한 것을 두고 사람마다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신의 섭리로 해석할 수도 있고, 자연의 이치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인생의 비극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적 사고, 현대 과학적 입장에서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만 설명한다.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이 힘에 의하여 지구와 능금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여 두 사물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문학의 다양한 사고는 뉴턴의 역학에 의해서 부서졌다. 그래서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 지구 위에서 능금이 추락하는 순간, 그것을 오직 만유인력으로만 파악함으로 지구의 다양한 사고와 가치들은 그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모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서양의 과학적 사고가 인류의 삶을 온통 파괴하고 있다. 인류의 삶은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서양적 사고, 현대 과학적 사고 하에서는 이미 여하한 ‘정신(精神)’도 발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서양의 과학적 사고의 한계를 지적한, 서양의 과학적 사고가 인문 정신을 말살하는 것을 비판한, 일종의 문명 비판적 시라 할 것이다. 필자가 ‘왜 이 시를 이렇게 설명하는가.’ 하고 의문이 드는 자들은 를 읽어 보라. 그 시들을 읽으면 이상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다.   ​ ​ ▣   悔恨의 章 가장無力한男子가되기위해서나는痘㾗이었다. 世上의한사람의女性조차가나를돌아보는일은없다. 나의怠惰는安心이다. 두팔을끊어버리고나의職務를避했다. 이젠나에게事務를命令하는사람은없다. 나의恐怖하는支配는어디에도發見되지아니한다. 歷史는重荷이다. 世上에對한나의辭表의書式은더욱重荷이다. 圖書館에서의召喚狀이벌써나에게는解讀되지않는다. 나는이미世上에맞지아니하는衣服이다. 封墳보다도나의義務는僅少하다. 나에게는그무엇을理解하는苦痛은完全히없어졌다. 나는아아무것도보지는아니한다. 그럼으로써만나는아아무것으로부터도보이지는아니할것이다. 비로소나는完全한卑怯者가되는일에成功한세음이었다. ― 통권139호. 1966 ― ​ ​ ​ 이상의 시 에 보면,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박사님들이, 이상의 시를 개 짖는 소리라고 하면서, 잡아먹고, 비타민E를 지닌 영양가 있는 시들은 박사님들의 생물학적 질투로 인하여, 박사님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화자는 그들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상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비평가들조차도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이상시가 어떻다고 해괴하게 말함으로써 이상은 이제 천연두에 걸리거나 눈병을 앓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이상은 비평가들을 비판하고만 있지는 않다. 이상을 해괴하게 말하는 비평가들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상 자신은 너무나 어려운 시를 썼다. 천연두를 앓는 사람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시를 썼고, 눈병을 앓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는 언어유희의 극치다. 언어유희를 잘 분류하고 정리하여 전체를 일관되게 읽을 수 없다면, 이 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신기루일 뿐이다. 悔恨의 章 제목 ‘회한의 장’은 회한을 적은 글이라는 의미다. 보통 ‘회한’하면 뉘우치고 한탄한다는 말이다. 그 회한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다. 지난날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후회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보통 회한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 보통은 그렇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여기서의 회한(悔恨)은 우선 ‘유감스럽게도 원망한다.’는 의미도 있다. 화자는 자신의 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어떻고, 자신의 시가 어떻다고 떠드는 자들에 대해서 참으로 유감스러워하고 그들을 원망한다. 따라서 회한의 대상 곧 유감스럽게 원망하는 대상은 바로 이상의 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상을 미친 자 취급한 사람들, 정신병자 취급한 사람들, 이상 시를 매도한 사람들이다. 사실 이상이 살았을 때, 이 땅에는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평론가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없었다. 물론 비평가들이 그렇게 이상을 매도하게 된 원인은 어쩌면 이상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비평가들이 알아먹을 수 없는 시를 쓴 것이 근본 원인이라면, 이상 자신이 원인 제공자다. 그렇다면 또 ‘회한’의 대상은 다시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은 1966년에 현대문학 통권139호에 발표된 시다. 유고시다. 그런데 아직도 이 시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 없고, 이 시를 읽고 깨달아서, 이 시 말고도 많은 이상 시인의 시를 제대로 읽어야 할 텐데,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없다.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로 이상을 신비화하거나 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상 시인은 저승에서도 그러한 사람에 대한 참으로 유감스럽고 원망하는 마음, 회한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장 無力한 男子가 되기 위해서 나는 痘㾗이었다. / 世上의 한 사람의 女性조차가 나를 돌아보는 일은 없다. / 나의 怠惰는 安心이다. 이상의 시를 읽은 사람들이,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이상을 미친 놈 취급한다. 정신병자 취급한다. 비평가들은 글을 통하여 이상을 신나게 두들겨 팬다. 그래서 화자는 가장 무력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 두양(痘㾗)이었다. 전염성이 강한 천연두를 앓는 사람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눈병을 앓는 사람처럼 글을 쓰지도 않고 책을 읽지도 않았다. 쓴 글을 세상을 향하여 발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자, 무기력한 남자, 힘이 없는 남자가 되었다. 아니, 화자는 가장 무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두양(痘瘍)이었다. 천연두를 앓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글을 썼으며, 눈병을 앓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의 한 사람의 여성, 화자와 같이 사는 아내조차 화자를 돌아보는 일은 없다. 화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기만 하자, 같이 사는 아내조차 화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론가들이 화자를 업신여기고, 아내가 화자를 소홀히 하는 것은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함이다. 평론가들이 화자의 작품을 업신여기는 것은, 자신들의 지적 수준이 딸린다는 것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함이다. 아니다. 화자가 게을러서 평론가들이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화자가 게을러서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시가 어떠한 시인지를 미리 알려고 하지 않았다. 화자의 게으름은 이제 결국 화자가 글을 쓰는 데에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되었다. 아내가 화자를 소홀히 하지 않고 간섭을 한다면, 화자가 도리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아내는 화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모르는 체한다. 두 팔을 끊어버리고 나의 職務를 避했다. / 이젠 나에게 事務를 命令하는 사람은 없다. / 나의 恐怖하는 支配는 어디에도 發見되지 아니한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의 두 팔을 끊어버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도 하지 않고, 책을 읽는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 힘쓰는 것을 피했다. 맡은 일을 힘써 하는 것을 피했다. 이제 화자에게 자신의 일에 힘쓰라고 명령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아내는 이제 글을 쓰라고 말하지 않다. 명(命)하지 않는다. 화자가 잡지사에 투고를 하면 이제는 좋아하지도 않는다. 령(令)하지 않는다. 화자에게는 누가 화자를 협박하고 그 협박에 화자가 두려워하는, 그래서 가르고 짝지어주는 것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이를테면, 출판사에서 화자에게 원고 청탁을 하고 언제까지 원고를 제출하라고 조르고(恐), 그 청탁에 맞추어 화자는 빨리 써야지 하면서 두려워하는 (怖), 그래서 조르는 출판사와 이에 맞추는 화자를 가르고(支), 출판사의 청탁에 맞추어 화자가 응하는(配) 것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또 아내가 화자에게 글을 쓰라고 하고(恐), 그 쓰라고 하는 것에 떨면서 마지못해 글을 쓰는(怖), 시키는 자와 따르는 자를 가르고(支), 시키는 것에 맞추어 응하는(配) 것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歷史는 重荷이다. / 世上에 對한 나의 辭表의 書式은 더욱 重荷이다. / 圖書館에서의 召喚狀이 벌써 나에게는 解讀되지 않는다. 역사는 무거운 책망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상의 시를 미친 소리라고 오랫동안 글로 적어온 것이, 오래 계속되면 그것이 이상에게는 무거운 책망이 된다. 화자가 평론가들이 알아먹을 수 없는 글을 오랫동안 써 온 것도 또한 화자에게 무거운 책망이 된다. 또 세상에 대한 화자의 사표의 형식 즉 말을 드러내는 글의 형식은 화자에게 더욱 무거운 책망이다. 화자는 보통 시인들과 다른, 자신의 말을 표현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그것이 이제는 책망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아니 평론가들이 엉뚱한 소리를 할 때, 글로 그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던, 세상에 대한 나의 말을 표하는 방식에도 결국은 화자에게 책망이 되어 돌아온다. 도서관에서의 소환장(召喚狀)이 해독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화자가 글을 쓰면, 그 글을 비평가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화자가 도서관에서 어떤 글을 쓰면, 그 글이 비평가들을 통하여 화자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데, 화자는 그 글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미리 읽어내지 못한다. 아니 출판사에서 화자에게 원고 청탁이 오면 그 청탁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이미 世上에 맞지 아니하는 衣服이다. / 封墳보다도 나의 義務는 僅少하다. / 나에게는 그 무엇을 理解하는 苦痛은 完全히 없어졌다. 나는 이미 세상에 맞지 아니하는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옷을 그들은 입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자의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에게 글 쓰는 일은 봉분보다도 간신히 적다. 글쓰기는 거의 죽었다. 글쓰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기 위해서 화자가 그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고통도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아, 아무것도 보지는 아니한다. / 그럼으로써만 나는 아, 아무것으로부터도 보이지는 아니할 것이다. / 비로소 나는 完全한 卑怯者가 되는 일에 成功한 세음이었다. 화자는 아, 마치 천연두에 걸린 사람처럼 방안에 틀어박혀, 눈병에 걸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는 아니한다. 비평가들의 자신을 뭐라고 말하건 그러한 글을 보지 아니한다. 그래서 화자는 그러한 글에 대한 반박의 글도 쓰지 아니한다. 화자는 그럼으로써만 아무것으로부터도 즉 비평가들로부터도 글에 있는 화자의 생각이 보이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 비로소 화자는, 자신에 대한 세상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맞서지 못하고 피하는 비겁자가 된 셈이다. 아니다. 화자는 비로소 세상이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6    조향(趙鄕)의 시작노트 데뻬이즈망의 미학[스크랩] 댓글:  조회:1264  추천:0  2018-06-19
이글은 (신구문화사 1961년11월)의 '시작노트'에 실려 있는 초현실주의 시인 조 향의 시작노트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글이다. 한국 현대시 이해의 중요한 길잡이가 되는 글이라고 생각 된다.  조향(趙鄕)의 시작노트 데뻬이즈망의 미학  1  요 몇 해 동안 글을 쓰지 않는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발달된 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손해가 아니냐고 날보고 말하는 사람이 흔히 있다. 그러나 손해니 이익이니 하는 그런 실리적인 사고방식 보다도 나는 나대로의 계산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첫째로, 나는 스무 장, 열 장.......씩의 나부랭이 글을 쓰기 위하 여 정력 소모하는 것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 둘째는, 이상한 걸작의식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늘 나의 머 릿속에 도사리고 앉아서, 냉큼 펜을 들지 못하게 한다. 일년에 시 너댓 편 정도 밖엔 쓰지 않는다. . 그렇다고 해서 그 너댓 편이 모조리 걸작이라는 말은 아니다. 할 수 없이 내어 놓는 수가 많다. 어떻게 했 으면 “Ulysses"와 겨룰 수 있는 소설을 한 번 쓸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만 하면서, 이론으로만 꼭꼭 메꾸어져 있 는 강의실을 드나드는 것이 나의 일과다.  그러한 나에게 장만영(張萬榮) 형이 사신(私信)까지 붙여서 청탁을 해 왔다. 나의 시법의 비방을 원고지 스무 장에 다가 통조림을 해서 공개해 달라는 것이다. 모처럼의 청탁을 아무런 뾰족한 이유도 없이 저버릴 수도 없고 해서 쓰 기로는 하는데, 사실인즉 자기 자신의 작품을 뇌까려서 다룬다는 것은 약간 쑥스러운 일의 하나에 속한다. 무슨 허 세를 부리고 뻐기는 것 같아서 나는 강의 시간에서도 나 자신의 작품을 교재로 하는 일은 별반 없다. 그저 현대시, 현대예술 전반에 걸친 이론을 꾸준히 강의할 따름이다. 그러나 내 작품에 관한 질문이 있을 때엔, 공석에서나 사석 에서나 간에 열심히 이야기해주는 친절을 나는 잊어버리지는 않고 있다.  2  낡은 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이것은 나의 「바다의 층계」라는 시다. 시에 있어서 말이라는 것을, 아직도 의미를 구성하고 전달하는 단순한 연 모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 나의 시는 대단히 이해하기 곤란할 것이다. 의 구성에 의하여 특수한 음향(운 율이 아니다) 이라든가, 예기하지 않았던 , 혹은 활자 배치에서 오는 시각적인 효과 등, 로서 의 기능의 면에다가 중점을 두는, 이른바 . 이것에 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면 위의 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 , . 이 셋째 에 모여 있는 들을 두고 한 번 생각 해 보기로 하자. 거기엔 아무런 현실적인, 일상적인 의미면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동떨어진 사건끼리가 서슴없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이와 같이 사물의 존재의 현실적인, 합리적인 관계를 박탈해버리고,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를 맺어 주는 것을 데빼이즈망 (depaysement)이라고 한다.  그 움직씨 데빼이제 (depayser)는 (혹은 환경, 습관)를 바꾼다는 뜻이다. 국적을 갈아버린다는 뜻이다. 초 현실주의 (앞으로는 ‘sur.’라고 생략해 쓰기로 한다.) 에서는 전위(轉位)라고 한다. sur.의 화가들은 데빼이제 하는 방법으로서 빠삐에. 꼬레 (papier colle 서로 관계없는 것 끼리를 한데다 갖다 붙이는 것), 이것의 발전된 것으로서 꼴라아주 (collage) 그리고 프로따쥬 (frottage) 혹은 Salvador Dali의 유명한 편집광적 기법 (methode paranoiaqure) 등을 쓴다. sur.의 선구자로서 봐지고 있는 Lautre'amont (본명은 Isidor Dur-casse) 의 의 미학이며, Dali의 라고 한 말 들을 참조해 보면 석연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들에 의해서 데빼이제 된 하나하나의 사물을 sur.에서는 오브제(oobjet)라 부른다. 오브제란 라틴 말 “...의 앞에 내던져 있는 물건”에서 온 말로서 사전에서의 뜻은 , , , 등이지만 sur.의 용어 로서는 일상적인, 합리적인 관념에서 해방시켜버린 특수한 객체를 의미한다. 주로 sur. 계통의 미술용어로 쓰이지 만, 시에서도 물론 쓸 수 있는 말이다. term(논리학 용어로서 ‘명사’라고 번역 된다. 개념을 말로써 표현한 것)의 기 묘한 결합, 합성에 의하여 어떤 특수한 , 돌발적인 이마쥬를 내려고 할 때, 거기에 쓰인 term의 하나하나는 훌륭히 오브제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를 비롯한 여러 작품은 뽀엠.오브제(poeme objet) 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레뗄이 붙은 통조림통이 아직 부엌에 있는 동안은 그 의미는 지니고 있으나, 일단 쓰레기통에 내버려져 서 그 의미와 효용성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입체파 운동의 영도자 브라끄 (Bracque)의 이 말은 오브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브제는 서양의 모더니스트 들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정원을 꾸미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주워다 놓은 괴석 (怪石), 일본 사람들의 이께바나(生花)의 원리, 동양 사람들이 즐기는 골동품 등은 모두 오브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3  이와 같이 의미의 세계를 포기한 현대시, 19세기적인 유동(流動)하는 시에 있어서의 시간성이 산산이 끊어져 버리 고, 돌발적인 신기한 이마쥬들이 단층을 이루고 있는 현대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의미도 음 악도 아니고, 순수한 이마쥬만 읽으면 그만이다. 사람에게 순수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곧 카타르시스다. “이마쥬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다.”(Reverdy) “이마쥬의 값어치는 얻어진 섬광(閃光)의 아름다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그것은 두 개의 전도체(電導體)사이의 단위차(單位差)의 함수(函數)다. ”(Adntre' Breton) 시인에 있어서 이마쥬는 절대와 본질로 통하는 유일의 통로요, 탈출구다. '절대 현실'은 곧 초현실(超現實)이다. 이렇게 따져 봤을 때, 나의 는 순수시다.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의 후예 발레리의 ‘순수시’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순수시’요 ‘절대시’다. 쟌 . 루스로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말라르메가 의 식론(意識論)에다 구한 것을 마술(魔術)에다 구하긴 했으나 그 덕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공통된 갈망을 갖고 있었 다. 곧 ‘순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의 갈망을”이라고.  상징주의자들이 갈망한 순수는 음악적(시간적)인 것이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이 갈망하는 것은 조형예술적(造形藝 術) 곧 공간적인 순수 그것이다. 두 가지의 순수가 다 현실이나 일상생활에서 떠난 동결(凍結)된 세계임에는 다름 이 없다.  나는 순수시만 쓰지는 않는다. 꼭 같은 방법으로서 현대의 사회나 세계의 상황을 그린다. 곧 나의 (어느 날의 지구의 밤) 등 일련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상황악(狀況惡)이란 곧 을 말한다. 4 자유연상(自由聯想)은 예술가나 과학자의 마음이 창조를 할 때의 자연의 과정이라는 것이 언제나 잊어버려지고 있다. 자유연상은 정신의 본도(本道), 간도(間道)를 통하여, 의식의 제한에 방해 당하는 법 없이 사고(思考)와 인상 (印象)을 모아서, 그것을 가지가지로 결합시키면서, 드디어 새로운 관계나 형(型) 이 생겨나도록까지, 심리과정을 자유스럽게 헤메도록하는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자유연상은 창조적 탐구의 과정에 없지 못 할 수단이며, 이렇게 해서 얻어진 새로운 형은 거기에 잇닿은 논리를 찾아내는 것에 의하여, 필요한 제2의 과정인 검사(檢査) 또는 시험에 들어가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자유연상은 환자가 하고, 논리를 찾아내는 것은 분석기(分析機)가 하는 것이다.  -Lawrence S. Kubie: Practical and Theoretical Aspects of psychoanalysis-  정신분석의 임상의(臨床醫)인 큐비의 이 글에서도 밝히 알 수 있다시피, 자유연상이란 예술가에겐 없지 못할 것으 로 되어 있다. 자유연상 상태란 곧 자아(ego)초자아(super ego)의 간섭이 없거나 극히 약해서 상상의 자유가 보 장되어 있는 일종의 방심상태(放心狀態)를 말한다. 벨그송 (Bergson)의 ‘순수지속(純粹持續)’의 상태와 흡사하다. 이런 방심상태에서는 무의식(無意識) 혹은 전의식(前意識)의 세계, 곧 심층심리면(深層心理面)에 잠겨 있던 것들 이 순서도 없이 곡두(환영幻影)처럼 의식면에 떠올랐다간 가뭇없이 스러지고 스러져버리곤 한다. 그런 현상을 옛 날 사람들은 영감(靈感)이라고 불렀다. 나의 시채첩(詩債帖)에는 이러한 순간적인 이마쥬의 파편들이 얼마든지 속 기(速記)되어 있다. 나의 에스키스 (esquisse)다. 그것을, 적당한 시기에 바리아송(variation, 變奏)을 주어 가면서 몽따쥬(montage)를 하면 한 편의 시가 되곤 한다. 나는 시를 이렇게 쓴다. 시인으로서의 재간은 이 몽따쥬하는 솜 씨에 결정적인 것이 있다. 현대의 영상미학의 근본이 되어 있는 몽따쥬 수법은 현대시의 수법에서 빌려간 것이다.  5  다시 나의 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낡은 의 서투른 연주가 끝났다. 막이 열린다. 고요가 있다. 어디선지 “여보세요?” 소녀의 부르는 소리. 그것은 먼 기억의 주름주름 사이에서 잠자고 있던 청각인지도 모른다. 다시 고요가 돌아와서 도사린다. 앞에서 말 한 오브제의 모꼬지. 그 가운데서도 메커닉 하고 거창한 과 연약하고 서정적인 의 결합은 엑 센트가 꽤 세다. 이렇게 거리가 서로 먼 것끼리일수록 이마쥬의 효과는 크다.  새삼스럽게 어디선지 아까번의 소녀의 부르는 소리에 응하는 소리가 있다. “왜 그러십니까?” 음향의 몽따쥬로서 바리아송을 주기 위한 수법이다. 다시 고요가 도사리고 앉는다.  다음엔 제2의 의 심포지움. 장소는 하얀 모래밭. 메커닉하고 딱딱한 와 휴먼(human)한, 보드랍고 오동통한 와 그로데스크한 의 대비에서 빚어지는 강렬한 뽀에 지! 새로운 시적 공간 구성. 그리고 여기에선 하나하나의 오브제에다 위치적인 바리아송을 추가하기 위하여 포르 마리슴 (formalisme)을 시험해 봤다. 포르마리슴은 언제나 언어단편(言語斷片) 아니면 단어문(單語文)으로 구성 되기 마련이다. 명사 종지법이 많이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엔 와 와 와 . 이 시 가운데서 가장 서정적이고 로망이 풍기는 스 탄자다. 이 스탄자 때문에 이 작품 전체에 서정적인 색깔이 유독 더 짙어 뵌다. 나는 항상 시에다가 이러한 바운딩 (bounding) 곧 ‘넘실거림’을 끼워 두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로 하고 있다. 나의 밑창에 로만티스트(romanticist) 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맨 끝 스탄자에서는 연약한, 서정적인 와 육중하고 메커닉한 가 가 지는 원거리로서 효과를 내보려고 했다. 로서 맺으면서 서정적인 여운을 남겨 놓았 다. 혜안을 가진 독자라면 여기에서도 포르마티슴이 시도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리인의 구성을 층계처럼, 원근법에 의하여 층을 지어 놓았다. 이와 같이 현대시는 여러모로 퀴즈다운 데가 많다. (단기 4291년 10월호 신문 예新文藝)  참고: 여태까지의 시란 ‘진보(進步)’만 해왔으나 20세기의 시는 ‘조화(造化)’를 했다. ‘진보’는 ‘수정(修正)’이고 ‘조 화’는 ‘혁명’이다. 진보만 알고 있던 시인이나 속중 (俗衆)들은 이 조화를 보곤 꽤들 당황했다. 특히 한국의 풍토에선 지금도 한창 당황하고 있는 중이다. 시가 조화해 나간다는 것을 이상하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뇌가 발달해 나간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벽창호 씨(壁窓戶氏)가 아니면 혼돈씨(混沌氏)다. 인간 자체가 조화의 첨단에 놓여 있지 않은가!   출처 :시의 꽃이 피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비밀의 숲    
5    시의 언어 - 에즈라 파운드[스크랩] 댓글:  조회:1367  추천:0  2018-04-02
시의 언어 - 에즈라 파운드  어느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것. 과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 것은 이미지를 둔화시킨다. 추상과 구체를 섞은 꼴이다. 그것은 자연적 대상물이 언제나 적절한 상징이라는 것을 작가가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추상화를 두려워하라. 훌륭한 산문에서 이미 행해진 것을 어줍잖은 운문으로 다시 얘기하려 하지 말라. 당신의 詩作을 행의 길이로 쪼갬으로써 당신이 훌륭한 산문의 말할 수 없이 어려운 기술의 모든 난점들을 피하려 할 때 지각있는 독자들이 속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늘 전문가가 싫증내는 것을 내일 대중이 싫증낼 것이다.  시 예술이 음악 예술보다 조금이라도 단순하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평범한 피아노 선생이 음악 예술에 쏟는 정도의 노력을 운문 예술에 쏟음 없이 전문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될 수 있는 한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아라. 그러나 그 빛을 공공연히 시인하거나 아니면 숨기려고 노력하거나 할 정도의 예의는 보일 것.  이라는 말을 당신이 어쩌다 존경하게 된 어떤 한 둣 시인의 특정한 장식적 어휘를 훔쳐 써 먹는 것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한 터어키 종군기자가 최근 언덕, 아니면 이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의 특파 기사에 그런 식의 글을 써갈기는 것을 최근 직접 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쓰지 말거나 아니면 훌륭한 장식만 쓸 것.  -----------------------  발췌 : '이미지즘', , 민음사, 1991  
4    시론(詩論) / 플라톤 / 천병희 옮김 댓글:  조회:1188  추천:0  2018-03-25
시론(詩論) / 플라톤(1) / 천병희 옮김     옮긴이 서문         서양의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脚註)의 역사라고 한다, 서양의 시학과 예술론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르네상스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시와 예술에 관해 따로 책을 쓴 적이 없고 주로 과 와 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다. 시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복잡하다. 먼저 나온 두 대화편에서 그는 시인들을 칭찬하고 있으나 에서는 매우 위험한 자들이라며 가차없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하고 있다. 시인들에 대한 그의 칭찬은 모호하고 유보적인 반면 비판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이 후세에 준 영향은 영감(靈感)과 모방(模倣)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영감을 받아 작시(作詩)했다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는데, 그것은 신들이 내린 영감이 곧 남다른 지식과 신적인 권위를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에서 영감과 techne(흔히 '기술' 또는 '예술'이라고 번역됨)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비록 시인들의 작품이 가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영감을 받아 작시하는 만큼 자신의 행위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모방의 문제는 특히 제10권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거기서 플라톤은 모방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예컨대 침대 또는 침대 그 자체가 있고, 둘째로 이것을 모방하여 목수가 만든 개개의 침대가 있고, 셋째로 화가 또는 시인이 목수가 만든 침대를 모방하여 그린 침대, 즉 이데아 또는 진리로부터 세 단계나 떨어져 있는 가상의 모상(模像)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 또는 예술은 모방술(模倣術)이며 '모방술은 그 자신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을 낳는 만큼' 시인들은 당연히 이상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시 또는 예술은 유희(遊戱)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와 예술이 유희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것에 의해 대치될 수 없는 그것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도 그에 못지 않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플라톤 자신도 가끔 호메로스에 대한 존경심과 시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을 내비친다. 그리고 그의 대화편들이 고대 그리스를 넘어 성양 산문문학의 최고 걸잘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시공을 초월한 숭고한 주제들뿐만 아니라 신화(新話)와 비유 같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풀어나가는 표현 방법, 즉 시적 요소글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여기 옮긴 글은 플라톤의 제10권 앞부분이다.   시론(詩論) / 플라톤(2) / 천병희 옮김      1     "확실히"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가 건설한 국가는 여러 가지 다른 점에서도 훌륭하다고 생각되지만 시에 관해서 생각할 때면 더욱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네."  "시에 관한 무엇 말씀이죠?"라고 그는 말했다.   "시 중에서도 모방적인 것은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일쎄. 혼의 여러 부분이 따로따로 구분된 지금에 와서는 모방적인 시를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더욱 분명히 밝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네."  "무슨 말씀이시죠?"  "우리들끼리 하는 말이네만 - 왜냐하면 자네들은 나를 비극 시인들이나 그 밖애 다른 모방 시인들에게 고발하지 않을 테니까 말일세 - 모방적인 시는 어떤 것이든 청중들의 분별력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하네. 청중들이 그에 대한 해독제로서 그것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말일세."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라고 그는 말했다.  "이야기하겠네"라고 나는 말했다. "비록 어릴 때부터 호메로스에 대하여 품어온 애정과 존경심이 이야기하는 것을 방해하지만 말일세. 호메로스야말로 이들 훌륭안 비극 시인들 전부의 최초의 스승이자 지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떤 인간도 진리보다 더 존중되어서는 안 되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네."  "그야 물론 그렇게 해야죠"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들어주게나, 아니, 그보다도 대답해주게나."  "그럼 물어주십시오."  "자네는 대체 모방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나? 실은 나 자신도 모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네."  "그렇다면"이라고 그는 말했다. "저는 알고 있을 것이란 말씀이신가요?"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날카로운 눈을 가진 자들보다 눈이 무딘 자들이 먼저 보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말일세."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선생님 앞에선 무엇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엇이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선생님 자신이 보아주십시오."  "그렇다면 늘 하던 방법대로 여기서부터 우리의 고찰을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즉 우리는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개개의 사물 집단에 대하여 각각 하나의 이데아를 설정해오지 않았던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여러 가지 집단 중에서 아무것이나 자네가 좋아하는 것을 예로 들어보세, 자네가 좋다면, 예컨데 침대나 책상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  "물론이죠."  "그러나 이데아는 그 같은 가구들에 대하여 두 개밖에 없네, 하나는 침대의 이데아고 다른 하나는 책상의 이데아일세."  "네 그래요."  "그리고 우리는 보통 개개의 가구를 만드는 제작공(製作工)은 이데아를 따라서 어떤 자는 침대를, 어떤 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책상을 만들며, 다른 것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고 말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제작공 가운데 이데아 자체를 만드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말일세, 하긴 어떻게 만들 수 있겠나?"  "절대로 만들 수 없어요."  "그렇다면 자네는 다음과 같은 제작공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지 생각해보게나."  "어떤 제작공 말씀이죠?"  "개개의 제작공들이 만들고 있는 것을 전부 다 만드는 제작공 말이네."  "그는 정말 솜씨가 뒤어난 놀랄 만한 인물이군요."  "조금만 기다리게, 그러면 곧 자네는 다욱 놀랍다고 말하게 될 것이네. 왜냐하면 이 제작공은 모든 가구를 만들 뿐 아니라 땅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과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을 만들어내고, 게다가 땅과 하늘과 신들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하데스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니까 말일세."  "그는"하고 그는 말했다. "정말 놀랄 만한 소피스트로군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해보게나, 자네에겐 그와 같은 제작공이 전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되나 아니면 어떤 의미에선 그와 같은 모든 것의 제작자가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의미에선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나? 자네는 어떤 방법만 사용하면 자네 자신도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  "그것이 어떤 방법이죠?"라고 그는 말했다.  "어려운 방법이 아니네. 여러 가지 손쉬운 방법이 있네만 자네가 거울을 손에 쥐고 그것을 사방으로 돌린다면 그것에 가장 빠른 방법이네. 그러면 자네는 곧 태양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만들어낼 것이고, 곧 대지를 만들어낼 것이며 곧 자네 자신과 다른 동물들과 가구들과 식물들과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만들어낼 것이네." "허나 그것은"하고 그는 말했다. "가상(假像)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말이야. 바로 맞추었네. 그런데 나는 화가도 역시 이와 같은 제작공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은가?"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자네는 아마 그가 만드는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네. 그헣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도 역시 침대를 만드는 셈이나. 그렇지 않은가?"  "네 그도 역시 만듭니다. 그러나 그가 만드는 것은 가상에 불과하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시론(詩論) / 플라톤(3) / 천병희 옮김     2        "그런데 침대 제작공은 어떤가? 방금 자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우리가 침대 자체라고 부르고 있는 이데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침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일세."  "네 그렇게 말했지요."  "따라서 그가 만드는 것이 침대 자체가 아니라면 그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진실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어떤 사람이 목수나 다른 제작공의 제작물을 완전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마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지?"  "네 아닙니다. 적어도 이와 같은 이야기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생각되겠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제작물이 진리에 비하여 분명하지 못하다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네."  "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본보기로 하여 이 모방자가 대체 어떤 자인지 탐구해도 좋지 않을까?"  "선생님께서만 좋으시다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침대는 세 가지 종류가 있네. 그 중 하나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만든 자가 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 아니면 어떤 다른 자가 만들었을까?"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하나는 목수가 만든 것이네."  "네 그렇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화가가 만든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생각해야겠지요."  "그러니까 화가가 목수와 신, 이 셋이서 세 가지 종류의 침대를 관장(管掌)하고 있네."  "네 셋이서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런데 신은 자연 속에 하나 이상의 침대를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하나 이상을 만들어서는 안 될 어떤 필연성이 있었는지, 아무튼 침대 자체 하나만을 만들었네. 그리고 그와 같은 침대가 두 개 또는 여러 개씩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네."  "그건 어째서 그렇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 까닭은" 하고 나는 말했다. "신이 두 개를 만들었다하더라도 이 두 침대의 이데아인 단 하나의 침대가 또다시 나타나 두 침대 대신 침대 자체가 되기 때문이네."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므로 신은 이런 사실을 알고서 어떤 특정한 침대의 어떤 특정한 침대공이 되는 대신 진실로 존재하는 침대의 제작공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본연의 침대 하나만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네."  "그런 것 같군요."  "따라서 우리는 신을 침대의 본연으 창조자라고 하든지 또는 그와 비슷하게 불러도 좋겠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겠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뿐 아니라 다른 것도 모두 본성에 따라 만들었으니까 말입니다."  "목수는 무어라고 할까? 침대 제작공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네 그렇게 부를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화가도 역시 침대 제작공이나 제작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화가를 침대의 무엇이라고 부를 작정인가?"  "제 생각으로는" 하고 그는 말했다. "앞서 말한 제작자들이 만든 것을 모방하는 모방자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습니다.."  "좋았네" 라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본성으로부터 3단계 떨어져 있는 제작물의 제작자를 모방자라고 부르는 셈이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 점은 비극 작가에게도 해당될 것이네. 그도 모방자인 이상 왕(王)1)과 진리로부터 3단계 떨어져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방자들도 모두 마찬가지네."  "그런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모방자에 관하여 의견이 일치된 셈이네. 그러나 화가에 관하여 이 점을 말해주게나. 화가가 모방하려 하는 것은 자연 속에 있는 것 자체인가 아니면 제작공의 제작물인가? 자네는 어느 것이라고 생각하나?"  "제작공의 제작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제작물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나 아니면 보이든 대로 모방하나? 자네는 이 점도 밝혀야 하네."  "무슨 말씀이신가요?"라고 그는 말했다.  "이런 말이네. 침대는 자네가 옆에서 보든 정면에서 보든 그 밖의 다른 방향에서 보든 그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겠지? 그 자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겉으로만 달라 보이겠지? 그리고 다른 것들도 이 점에 있어선 마찬가지겠지?"  "네, 그렇습니다. 겉으로만 달라보일 뿐 그 자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 그 점도 고찰해보게나. 회화술(繪畵術)은 개개의 대상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 가운데 어는 것을 지향하는 것인가? 즉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상을 나타내는 대로 모방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가상의 모방인가 진실의 모방인가?"  "가상의 모방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모방술은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네. 그리고 모방술이 무엇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마 그것이 각 대상의 조그마한 부분을 다루는데다 그 부분마저 영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네. 예컨대 화가는 우리들에게 제화공(製靴工)이나 목수나 달른 제작공들을 그려 보이겠지만 그와 같은 기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네. 그러나 만일 그가 훌륭한 화가라먼 목수를 그려 적당한 거리에서 내보임으로써 어린애들이나 어리석은 자들을 속여 그것이 진짜 목수인 것처럼 믿게 할 수는 있을 것이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여보게, 우리는 이런 종류의 모든 인간들에 대하여 이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온갖 제작공의 기술을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개별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에 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네. "당신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어떤 사기꾼이나 모방자를 만나 그 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 자가 전지(全知)한 인간이라고 믿게 된 것이오. 그것이 당신이 지식과 무지와 모방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오" 라고 말일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1) 여기서 '왕'이란 말은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데아의 창조자인 신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된다. 니다. 그러나 그가 만드는 것은 가상에 불과하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시론(詩論) / 플라톤(4) / 천병희 옮김     3       "그러면" 하고 나는 말했다. "다음에는 비극과 비극의 지도자인 호메로스에 관하여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왜냐하면 우리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호메로스야말로 온갖 기술은 물론이고 덕과 악덕에 관계되는 인간의 모든 일과 신들의 일까지도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인즉, 훌륭한 시인은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하여 자기가 작시(作詩)하고 있는 일에 관하여 잘 안 연후에 작시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시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이 시인이라는 모방자들을 만나 속임을 당한 것인지, 그들의 작품을 보고도 그것이 진실로부터 3단계나 떨어져 있으며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 왜냐하면 그들이 만드는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가상에 불과하니까 말일쎄 - 아니면 과연 이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훌륭한 시인들은 대중이 보기에 훌륭하게 말했다고 생각되는 일에 관하여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인지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물론 고찰해야죠" 라고 그는 말했다.  "어떤 사람이 실물과 영상을 두 가지 다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그가 영상 제작에 몰두하여 그것을 자기의 가장 좋은 소유물로서 자기 생활의 맨 앞쪽에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그가 모방하는 사물에 관하여 진실로 알고 있다면 그는 모방보다는 그 실물에 열중하게 될 것 같네. 그리고 많은 훌륭한 것들을 자신에 대한 기념물로서 후세에 남기려 할 것이며, 칭찬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할 것 같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왜냐하면 명예란 점에서나 이익이란 점에서나 그 편이 훨씬 유리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점에 관해서는 호메로스나 다른 시인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기로 하세. 이를테면 우리는 그들에게 '시인들 중에서 어떤 자가 단지 의술(醫術)에 관한 말의 모방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술에 관하여 알고 있다고 한다면, 고금의 시인들 중에서 아스클레피오스2)처럼 사람의 병을 고쳤다고 전해지는 자가 있는가, 또는 아스클레피오스가 후예들을 남겼듯이 의술에 있어서 제자들을 남긴 자가 있는가?" 라고 묻지 않기로 하세. 그리고 다른 기술에 관해서도 묻지 않고 내버려두기로 하세. 그러나 우리는 호메로스가 이야기하려 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 즉 전쟁이나 원정(遠征)이나 국가의 통치나 인간의 교육에 관해서는 물어서 알 권리를 갖고 있네. '친애하는 호메로스여, 그대가 덕에 관해 한 발언에 있어 진리로부터 3단계 떨어져 있는 사람, 즉 우리가 그렇다고 규정한 바 있는 모방자나 영상의 제작자가 아니라 진리로부터 2단계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따라서 어떤 생활 태도가 사적 및 공적 생활에서 인간을 보다 선량하게, 또는 보다 사악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말해주시오. 리쿠르고스3) 덕택으로 스파르테가 훌륭한 제도를 갖게 되었고 그 밖에도 많은 다른 사람들 덕택으로 크고 작은 많은 나라들이 훌륭한 제도를 갖게 된 것처럼 그대 덕택으로 훌륭한 제도를 갖게 된 나라는 어느 나라지요? 어느 나라가 그대를 훌륭한 입법자로, 자신들의 은인으로 부르고 있지요? 이탈리아와 시켈리아는 크사른다스4)를 그렇게 부르고 있고 우리는 솔론5)을 그렇게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그대를 그런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이지요? 이렇게 묻는다면 호메로스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댈 수 있을까?"  "아마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찬미자들조차도 그런 일은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니까 말입니다."라고 글라우콘이 말했다.  "그러면 호메로스 시대에 있었던 어떤 전쟁이 그의 지휘와 조언으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기록은 있는가?"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무가의 일에 속하는 분이라면, 그가 밀레토스의 탈레스6)나 스퀴티스의 아나카르시스7)처럼 기술이나 다른 실무에서 많은 유용한 발명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가?"  "그런 것도 전혀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공적으로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 하더라도, 사적으로는 호메로스가 생존시에 어떤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그리하여 사제 간의 교분을 통하여 그를 존경하게 된 자들이 호메로스적 생활 태도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생활 태도를 후세 사람들에게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마치 퓌타고라스가 이 때문에 크게 존경받고 있고, 그의 후계자들이 자기들의 생활 태도를 퓌타고라스적 생활 태도라고 부름으로써 오늘날도 남달리 훌륭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말일세."  "그런 이야기는 전혀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소크라테스 님, 호메로스에 관하여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호메로스의 친구인 크레오퓔소스8)는 교양이란 점에서 육(肉)의 종족이란 자신의 이름보다 거 가소로운 존재였을 테니까요. 호메로스는 생존시에 그로부터 많은 푸대접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2)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 신의 아들로 의술의 신이다. 3) 리쿠르고스는 전설적인 스파르테의 입법자이다. 헤로도토스와 플루타프코스 등이 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4) 크시른다스는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사람으로 그가 태어난 시켈리아 섬의 카타네 시의 입법자이다. 그 밖에도 그는 칼키스 인들이 시켈리아에 건설한 여러 식민시(市), 특히 헤기온의 입법자로 알려져 있다. 5) 솔론은 기원전 640~558년경에 활동한 아테나이의 시인이자 입법자이다. 그는 재무와 저당을 무효화하여 채무 때문에 노예로 팔렸거나 추방된 자들과 농부들을 해방시켜주고, 인신 저당을 금지함으로써 앗키케 지방에 농노제를 폐지했다. 그는 또 화폐와 저울과 척도를 개혁했다. 그 밖에도 그는 여러 가지 제도상의 개혁을 단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기도 전에 그의 헌법은 전복되고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한 참주제가 성립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1~13장 및 풀루타코스의 참조. 6) 탈레스는 그리스 자연철학의 원조로 이른바 7현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기하학과 천문학을 발전시켰다고 하며 언젠가는 일식을 예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7) 아나카르시는 그리스화 한 스키티스의 현인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며 그 나라의 풍속을 연구한 다음 이를 스키티스에 소개하려 했으나 스키티스 왕에 의하여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는 7현인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발명을 했다고 하는데, 특히 도공의 녹로(轆轤)와 가지 난 닻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8) 크레오퀼로스는 일설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사위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 어로 '육의 종족'이란 뜻이다.   시론(詩論) / 플라톤(5) / 천병희 옮김     4      "그래, 정말 그런 이야기들을 하더군"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클라우콘, 자네 생각은 어떤가? 호메로스가 모방만 하는게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실제로 인간을 교율하고 보다 선량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면 많은 제자들을 얻었을 것이고 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것이 아닌가? 압데라의 프로타고라9)와 케오스의 프로디코스10)와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사적 교분을 통해서 동시대인들에게 자기들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집도 국가도 다스릴 수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불어넣어주었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지혜 덕택으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되어 그들의 제자들은 그들을 어깨에 떠메고 다닐 지경이었네. 하거늘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덕을 향하여 인간을 이끌어줄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동시대인들이 그들을 음유 시인으로 떠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오히려 황금보다도 그들에게 더 매달려 억지로라도 자신들의 집에 머물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에는 충분히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어디든지 그들이 가는 데로 따라다니지 않았을까?  "선생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호메로스를 비롯한 모든 시인들은 덕에 있어서나 그 밖에 그들이 작시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나 그 영상의 모방자에 불과할 뿐 진리와는 아무런 접촉도 가지지 못한다고 규정해도 좋지 않을까? 방금 우리가 말했듯이, 화가는 제화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단지 색채와 형태로만 판단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화공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낼 것이네."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인도 자신이 모방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어구(語句)를 통하여 개개의 기술에 어떤 색채를 입힌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네. 따라서 그의 말에 의하여 판단하는 자들에게는 제화술에 관해서든 전술에 관해서든 또는 다른 사물에 관해서든 운율과 율동과 화성만 붙여서 이야기하면 그것만으로 매우 훌륭하게 이야기한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본래가 아주 매력적인 것이니까. 자네는 시인의 작품이 음악적 색채를 벗어버리고 단순한 산문으로 이야기된다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네. 그런 예를 본 적이 있을 테니까 말이네."  "네, 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청춘의 꽃이 시들었을 때의 성숙하긴 하나 아름답지는 못한 젊은이들의 얼굴과 비슷하지 않던가?"  "매우 닮았더군요."  "자 그럼 이 점을 생각해보게나. 영상의 제작자인 모방자는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존재자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가상에 관해서만 알고 있네. 그렇지 않은가?"  "네, 그럴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 아직 반(半)밖에 이야기하지 않은 셈이니 그대로 두지 말고 충분히 고찰해보기로 하세."  "말씀을 계속하십시오."라고 그는 말했다.  "화가는 이를테면 고삐나 재갈을 그릴 수 있겠지?"  "네"  "그런데 제화공이나 놋갓장이는 그것을 만들 수 있겠지?"  "물론이죠"  "그런데 고삐와 재갈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화가는 알고 있을까? 아니 제작지인 놋갓장이오 제혁공조차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자, 즉 기수(騎手)만이 알고 있지 않을까?"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그럴까요?"  "어떤 것에 관해서는 이 세 가지 기술, 즉 사용하는 기술과 만드는 기술과 모방하는 기술이 있겠지."  "네"  "그런데 가구든 동물이든 행동이든 그 개별적인 우수성이나 아름다움이나 정당성은 오로지 사용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용을 위하여 인간 또는 자연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니까 말일세."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어떤 물건이든 그 사용자가 가장 경험이 많은 사람이므로 사용자는 제작자에게 자기가 사용하는 물건이 어떤 점에서 사용하기 좋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점에서 나쁘게 만들어졌는지보고하게 될 것이네. 예컨대 피리 취주자는 피리 제작자에게 피리를 취주할 때 자기를 도와주는 하인이나 다름없는 자기 피리에 관하여 보고하면서 어떤 피리를 만들어야 하는지 지시하게 될 것이고, 피리 제작자는 그의 지시에 따라 봉사를 하게 될 것이네."  "당연한 일이지요."  "따라서 한 사람은 지식을 갖고 좋은 피리와 나쁜 피리에 관하여 보고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보고를 믿고 피리를 제작하게 되겠지?"  "네 그렇습니다."  "따라서 바로 이 도구의 제작자는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과 접촉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도구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관하여 올바른 소신을 갖게 될 것이네. 그러나 사용자는 지식을 갖고 있네."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방자는 자기가 그리는 것이 아름답고 올바른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사용을 통하여 지식을 얻게 될 것인가 아니면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과 접촉하도록 강요되어 그로부터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지시를 받음으로써 올바른 소신을 갖게 될 것인가?"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고 있는 것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관해서 지식도 올바른 소신도 갖지 못할 것이네."  "아마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시에 의한 모방자는 자기가 작시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놀랄 만한 지혜를 갖고 있는 것이겠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그는 개개의 사물이 어떤 점에서 좋고 나쁜지 알지도 못하면서 모방을 계속할 것이네. 그는 아마도 무지한 대중에게 아름답게 보일 만한 그런 것을 모방하게 되겠지."  "그 밖에 또 무엇을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점들에 관하여 우리의 의견이 꽤 일치된 셈이네. 즉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 모방은 일종의 유희이며 진지한 것이 못 된다는 점. 그리고 비극 시인들은 단장격 운율로 작시하든 서사시 운율로 작시하든 간에 가장 진정한 의미의 모방자들이라는 점에 관해서 말일세."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9) 프로타고라스는 기원전 5세기의 직업적 소피스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아테나이에 와서 페리클레스의 친구가 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후일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라는 그의 말은 유명하다. 그는 플라톤의 에서 소크라테스의 가장 중요한 대화자로 등장하고 있다. 10) 프로디코스도 소크라테스 당시의 직업적 소피스트이다.    시론(詩論) / 플라톤(6) / 천병희 옮김   5       "제우스 신에 맹세코" 하고 나는 말했다. "모방이란 진리로부터 3단계 떨어져 있는 사물에 관계되는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방은 인간의 어느 부분에 대하여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런 말이네. 같은 크기라도 가까이서 볼 때와 멀리서 볼 때 서로 다르게 보이네."  "네, 다르게 보이지요."  "또한 같은 물건이라도 물 속에 있느냐 물 밖에 있느냐에 따라 보는 사람에게는 굽어 보이기도 하고, 곧아 보이기도 하네. 또한 색에 관한 시각의 착각으로 인하여 같은 것이라도 오목하게 보이기도 하고 볼록하게 보이기도 하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모두 분명히 우리의 혼 속에 내재하고 있네. 사실 그림자 그림은 우리 본성의 이런 약점을 노리고 갖은 마술을 다 부리는 것이네. 이 점에 있어서는 요술과 그 밖에 그와 유사한 많은 손재주도 마찬가지네."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잰다든가 센다든가 저울에 단다든가 하는 일이 그와 같은 착각에 대한 가장 훌륭한 구제책으로서 발명된 것이 아니겠는가? 얼핏 보기에 더 큰 것이나, 더 작은 것이나, 더 많은 것이나, 더 무거운 것 대신에 계산한 것이나, 잰 것이나, 저울에 단 것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도록 말일세."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측정해보고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크다든가 더 작다든가 또는 같다는가 하는 것을 명시해주지만 이 부분에게도 때로는 같은 사물이 동시에 상반되게 보이는 때가 있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혼의 동일한 부분이 같은 사물에 관하여 상반된 견해들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네. 그렇게 주장했지요. 그리고 그건 옳은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측정된 것에 반대되는 의견을 갖는 혼의 부분은 측정된 것과 일치하는 의견을 갖는 혼의 부분과 동일한 부분일 수는 없네."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립되는 부분은 우리 안에 있는 보다 열등한 부분의 하나일 것이네."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점에 관하여 동의를 구하고 싶었던 것이네. 그래서 나는 회화술(繪畵術)을 포함한 모든 모방술은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건전하지도 진실하지도 않은 일을 위하여 우리 안의 이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괴 교제하고 교우 관계를 맺는다고 말했던 것이네."  "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모방술은 그 자신이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을 낳는 것이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각에 관계되는 모방술만 그런가, 아니면 우리가 시라고 부르고 있는 청각에 관계되는 모방술도 역시 마찬가지인가?" 라고 나는 말했다.  "시도 아마 마찬가지겠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회화에서 유추하여 얻은 개연성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시의 모방술이 접촉하는 마음의 부분에 직접 접근하여 그것이 열등한 부분인지 고상한 부분인지 살펴보기로 하세."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러면 문제를 이렇게 설정해보세. 말하자면 모방술은 강요된 것이든 자발벅인 것이든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고, 행위의 결과라고 믿어지는 행복와 불행을 모방하며,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모방하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겠지?"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경우에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일치하고 있는가? 아니면 시각의 경우에 분열되어 같은 사물에 대하여 상반되는 견해를 동시에 자신 속에 가졌던 것처럼 행위에 있어서도 분열되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가? 생각건대, 여기에 관해서 새삼스럽게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왜냐하면 우리는 앞서 있었던 이야기들에서 우리의 혼이 그와 같이 동시에 일어나는 무수한 대립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충분한 합의를 보았으니 말일세."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합의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확실히 옳았네"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빠뜨렸던 것을 지금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  "그것이 어떤 것인데요?"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네" 라고 나는 말했다. "즉 훌륭한 남자는 아들이나 그 밖에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던 것을 잃는 불행을 당하더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잘 견뎌낼 것이라고 말일세."  "확실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이런 점을 고찰해보세. 그는 조금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지만 슬픔 속에서도 절도를 지키게 될 것인지 말일세."  "후자의 경우가 사실이겠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그에 관해서 이 점을 말해주게나. 자네는 그가 어느 경우에 더 완강하게 슬픔에 대항하여 싸우고 저항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즉 자기와 같은 자들이 보고 있을 때 훨씬 더 잘 견뎌낼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혼자 있게 되면, 생각건대 그는 누가 듣게 되면 부끄러워하게 될 여러 가지 말들을 거리낌없이 내뱉을 것이고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짓을 많이 행하게 될 것이네."  "예. 그렇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시론(詩論) / 플라톤(7) / 천병희 옮김     6       "그런 그에게 저항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이성과 법률이 아닐까? 그리고 슬픔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닐까?"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같은 것에 대하여 동시에 상반된 방향으로 이끌리는 셈이니 우리는 그 사람 안에 필연적으로 두 개의 부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   "네,확실히 그렇습니다."   " 그 한 부분은 법률이 인도하는 대로 기꺼이 따라가지 않을까?"   "어째서 그렇지요?"   "법률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네. '불행을 당했을 땐 되도록이면 침착하고 화를 내지 않은 것이 가장 좋은 일이야.' 라고 말일세. 왜냐하면 그런 일에 있어서는 선악이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화를 내보았자 무슨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말일네. 그리고 인간사(人間事)에는 크게 중시할 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또한 슬퍼하는 것은 그런 경우에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네."   "무엇에 방해가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일어난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는 일과 주사위를 던질 때처럼 던져진 것에 따라 이성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택하는 대로 우리의 행동을 정리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말일세. 우리는 넘어졌다고 해서 어린애처럼 다친 데를 움켜 잡고 울고불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네. 오히려 우리는 넘어져서 아픈 데를 되도록 빨리 치료하고 회복함으로써 의술에 의하여 탄식의 노래를 그치게 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항상 혼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 되네."   "확히 불행에 대해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옳을 것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부분은 이와 같은 이성의 지시에 기꺼이 따를 것이네."   "네, 분명히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에 대한 회상과 탄식으로 이끌리게 되어 아무리 회상하고 탄식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부분은 비이성적이고 게으르고 비겁하다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네, 그렇게 불러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화를 잘 내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방이 가능하지만, 현명하고 침착한 성격은 항상 자기 자신과 일치하므로 모방하기가 쉽지도 않거니와 모방된다고 하더라도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네. 특히 축제에 모인 군중이나 극장에 모인 잡다한 사람들에게는 말일세.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낯선 상태의 모방이니까 말일세."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모방적 시인이 원하는 것이 분명히 대중으로부터의 명성이라면, 그는 본래부터 혼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의 지혜도 이 부분을 즐겁게 해주도록 돼 있는 것이 아니네. 오히려 그는 화를 잘 내며 변덕스런 성격을 위하여 만들어졌네. 왜냐하면 이런 성격은 모방하기가 쉽기 때문이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를 붙들어다가 화가의 한짝으로써 그와 나란히 세워도 좋을 것이네. 왜냐하면 그는 진리에 비해 열등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나 혼의 열등한 부분과 교제하고 가장 훌륭한 부분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가를 닮았기 때문이네. 따라서 훌륭한 제도를 가져야 할 국가 안으로 우리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우리의 행동은 정당하네. 그것은 그가 혼의 열등한 부분을 일깨워서 가꾸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이성적인 부분을 손상하기 때문이네. 그것은 마치  어떤 국가에서 어떤 사람이 악당들을 권력자로 만들어 그들에게 국가를 맡기고 보다 선량한 자들은 파멸케 하는 것과도 같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방적 시인도 사물을 구별하지 못하고 같은 것을 어떤 때는 크다고 생각하고 어떤 때는 작다고 생각하는 혼의 비이성적 부분에 영합하여 진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영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개개인의 영혼 안에 나쁜 국가 제도를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 "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시론(詩論) / 플라톤(8) / 천병희 옮김     7        "그러나 우리는 시에 대하여 가장 중대한 고발은 아직 제기하지 않은 셈이네. 왜냐하면 시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선량한 사람들까지도 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네."  "시가 만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내 말을 듣고 잘 생각해보게나. 자네도 알다시피, 어떤 영웅이 비탄에 빠져 장탄식을 늘어놓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괴로워서 가슴을 치는 장면을 호메로스나 다른 비극 시인이 모방할 때면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이에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자신을 잊고 공감하면서 이끄는 대로 따라가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기분을 가장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시인일수록 훌륭한 시인이라고 진지한 태도로 칭찬하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 걱정거리가 생기게 되면, 자네도 알다시피, 그와는 반대로 침착하게 잘 견뎌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네. 그것이 남자다운 행동이고 우리가 방금 칭찬했던 것은 여자다은 행동이라는 생각에서 말일세."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칭찬은 과연 옳은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끄러워하게 될 그런 인간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대신 기뻐서 칭찬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제우스 신에 맹세코,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네, 자네가 문제를 이렇게 고찰한다면 말일세"라고 나는 말했다.  "어떻게 말씀이지요?"  "자네가 이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말일세. 본래는 식컨 울고불고 탄식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에는 억압되어 이런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부분, 바로 이 부분이 시인들로부터 만족과 쾌감을 얻는 부분이네. 한편 우리 안에 있는 본성적으로 가장 훌륭한 부분은 이성과 습관에 의하여 충분히 교욱되어 있지 못하므로 눈물이 많은 부분에 대한 감시를 늦춰버리네. 왜냐하면 그거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만의 고통이고, 또 선량한 인간으로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슬퍼할 때 그 자를 칭찬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그에게는 조금도 수치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네. 오히려 그는 거기서 얻는 쾌감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네. 왜냐하면 남의 것을 즐기면 그 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자기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말일세. 하나 연민의 정을 느끼는 부분을 남의 불행 속에서 가끄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준다면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 그것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우스꽈읏러운 것에 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네가 스스로 행한다면 부끄러워하게 될 익살을 희극 공연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듣고는 대단한 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증오하지 않는다면 자네의 행동은 연민의 정을 줄러일으켰던 장면에서 취한 행동과 똑같은 것이 될 것이네. 말하자면 이때에도 자네는 광대라는 평판이 두려워서 이성에 따라 자네의 마음 속 깊이 억제하고 있던 부분, 즉 익살을 부려보고 싶은 부분을 늧추어주었던 것이네. 그리고 자네가 거긱서 이 부분을 교만하게 만들어준다면 자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생활 속에서 희극 배우가 되는 데까지 이뜰려가게 될 것이네."  "그야 물론이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또한 애욕과 분노에 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 수반되는 욕망과 고통에 쾌락에 관해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시의 모방은 이런 것들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똑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시는 이런 것들에게 물을주어 가꾸고 있으며, 사악하고 비참하게 되는 대신 선량하고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지배해야 하는데도 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의 지배자로 만들고 있으니까 말일세."  "저로서는 선생님의 말씀에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없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따라서 클라우콘, 자네가 호메로스야말로 헬라스이 교육자이므로 모든 인간사를 정돈하고 계발하는 데 있어 이 시인의 말을 들춰 배워야 하며 자신의 생활을 이 시인을 따라 정리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호메로스의 찬미자들을 만난다면 그들도 나름대로 가장 선량한 자들이므로 사랑해주고 공손히 대해주지 않으면 안 되네. 그리고 호메로스가 가장 시인다운 시인이며 비극 작가으 제1인자라는 사실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되네. 그러나 시 가운데 국가 안으로 받아들여져도 좋은 것은 신에 대한 찬가와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찬사 뿐이라는 사실도 또한 알고 있어야만 하네, 자네가 서정시를 통해서든 서사시를 통해서든 쾌락적인 무사 여신을 받아들인다면 그 국가에는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인정되어온 법룰과 원칙 대신 쾌락과 고통이 군림하게 될 것이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시론(詩論) / 플라톤(끝) / 천병희 옮김     8       "우리는 시에 관하여, 시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가 그때 시를 국가에서 추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돌이켜 생각해보았네.  이상으로 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변명된 것으로 해두세. 이성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네. 그러나 우리는 시로부터 완고하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철학과 시는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는 사실을 시에게 말해주기로 하세. 왜냐하면 '주인을 향하여 깽깽 짖어대는 개'11)라든가, '바보들의 쓸데없는 잡담 속에서나 위대한 자'라든가, '지나치게 영리한 머리의 오합지졸'이라든가, '어떻게 하다가 결국 거지가 되고 말았는지에 관하여 세심하게 사색하는 자들'이라든가 그 밖에 다른 많은 험담들이 철학과 시 사이의 오래된 불화를 입중해주고 있으니까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세.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시나 모방이 훌륭하게 통치되고 있는 국가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증거만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들의 귀국을 환영할 것이다. 우리 자신도 시의 매력에 이끌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반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 될 것이다'라고 말일세. 그런데 여보게,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특히 호메로스를 통해서 시를 볼 때 말일세."  "네, 대단한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시도 서정시나 그 밖에 다른 운율로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한 다음 귀국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겠나?"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시인이 아니지만 시인의 친구들인 시의 애호가들에게도 시를 위하여 운율이 없는 보통말로 시는 쾌락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인간 생활에도 유익하다는 것을 입증할 기회를 주기로 하세. 그리고 우리는 호의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리고 하세. 시가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유익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이익이 됱 테니까 말일세."  "어찌 이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여보게, 그 사실이 밝혀지지 않을 경우에는 마치 누군가를 사랑하던 사람이 그 사랑이 무익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단념하고 말 듯이 우리도 괴롭더라도 시를 단념하고 말 것이네. 이와 같은 훌륭한 국가에서 교육받은 덕택에 우리도 이와 같은 시에 대하여 애정을 품게 되었으니 시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진실한 것으로 밝혀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될 것이네. 그러나 시가 자신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는 한 우리는 두 번 다시 시와 유치한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시를 들을 때마다 우리 자신을 향하여 지금 이 이야기를 주문(呪文)으로 외워야 할 것이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시를 진리와 접촉하는 진지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고, 시를 듣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국가를 염려하여 시를 경계해야 하며, 시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갖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네."  "저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친애하는 글라우콘이여"하고 나는 말했다. "인간이 선량하게 되느냐 아니면 사악하게 되느냐 하는 싸움은 중대하다네. 흔히들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하지. 그러므로 우리는 명예나 돈이나 권력이나 특히 시에 자극되어 정의나 그 밖에 다른 덕을 소홀히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것에 따라"라고 그는 말했다.  "저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동의하리라고 믿습니다."   11) 출전은 확실하지 않다. 서정시의 1절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개'란 철학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주인'이라는 말이 시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플라톤 / 천병희 옮김 (끝)   
3    [스크랩]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 / 천병희 옮김 댓글:  조회:4172  추천:0  2018-03-10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 / 천병희 옮김     옮긴이 서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공개용으로 저술된 것과 강의용으로 저술된 것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시기적으로 더 먼저, 그리고 광범위한 독자층을 위하여 대화 형식으로 저술된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그러나 키케로가 유창한 문체를 찬양한 바 있는 이 책들은 단편만 전해지고 있을 뿐 거의 다 망실되고 없다.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세운 학교 뤼케이온에서 제자들에게 강의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으로서,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이를 편찬 간행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저술들이다.  그런데 이들 저술들은 지리멸렬하고 의미가 통하지 않으며 전후가 맞지 않는 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다. 의 텍스트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를 갖추기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교정되고 보완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망실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증거로 1449b 21을 보면 희극에 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그 후로는 희극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1341b 38을 보면 '카타르시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관해서는 을 참조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에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대로 은 인류 최초의 과학자에 의하여 저술된 문예 비평에 관한 최초의 저술이란 점에서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은 물론 시(詩)의 본질과 작시(作詩)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려 했다는 의미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시도임에 틀림없다 하겠으나 아무런 전제나 배경 없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도 교육 및 축제와 관련해서 그리스 사람들의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가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점에 관해서는 굳이 다른 자료에 의하지 않더라도 자체가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서 비극과 희극은 어디서 유래했는가(1448a 30). 플롯과 성격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놓아야 하는가(1450a 15~38). 단일한 결말을 가진 플롯과 이중의 결말을 가진 플롯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훌륭한가(1453a 13). 비극은 어떻게 결말짓는 게 좋은가(1453a 24) 하는 것 등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언급하고 있다. 문체와 문법에 관한 부분(제19~22)에서는 수사학(修辭學)에 관한 여러 저술과 소피스트들, 특기 프로타고라스의 언어에 대한 고찰(1456b 15)을 상당히 참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다루고 있는 제25장에서는 주로 호메로스의 작품에 대하여 제시되었던 쟁점들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에 대한 답변을 전개하고 있다. 서사시와 비극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수한 형식의 예술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제26장에서는 자신의 견해와 상반되는 견해, 아마도 플라톤의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도 교육 문제 및 공연 문제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상이한 견해가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견해들은 직접 간접으로 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기타 중요한 문제들을 취급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견해가 아닌가 생각된다.  호메로스를 위시하여 시인들은 예로부터 자신들의 시에는 어떤 신적인 힘이 관여하고 있다고 즐겨 말해왔다.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시재(詩才)는 무사(Mousa) 여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29~32행 참조). 아르킬로코스는 영감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 핀다로스도 습득한 숙련보다 타고난 재능이 더 우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2편 및 제9편 100행 참조). 한마디로 말해서 시는 어떤 도취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플라톤도 시인과 철학자의 차이점은 전자는 자신의 행위에 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설명을 할 수가 없는 데 반하여, 후자는 자신의 행동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교육이 보급되고 문자의 해독력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독서 대상, 특히 호메로스의 교육적 가치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시의 도덕적 가치를 부정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예는 역시 플라톤이다. 그는 의 앞부분(379c~402a)에서 초보 교육을 위한 시인들, 특히 호메로스의 가치를 고찰한 다음 그의 작품 속에 내포되어 있는 도덕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미 이보다 앞서 에서 어른들은 시를 도덕적 문제에 관한 토론의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그의 주된 공격은 제10권에서 전개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예술가들은 진실재(眞實在)인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상(模像) 또는 영상(影像)을 모방하는 데 불과하므로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가 시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는 우리의 자제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고삐를 풀어줌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시들어지게 해야 할 것에다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05b~607b). 플라톤에게는 감정은 제거되어야 할 잡초과 같은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은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우선 '천재' 또는 '영감(靈感)'의 문제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이 문제에 관하여 거의 또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필시 그와 같은 견해의 타당성 여부를 논하는 것은 시인이 아닌 자기로서는 가급적 회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든, 그의 귀납적 방법이 미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든지, 또는 시가 비록 영감이나 천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하더라도 표현의 수단인 언어라는 매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시와 작시술을 논하는 것이 철학자인 자기에게는 더 합당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을 쓴 목적은 당시의 비극 경연(競演)과 관련해서 작시술에 대한 실용적인 교시를 주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즉 드라마의 구성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점은 무엇이며 피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드라마가 추구하는 효과는 무엇이며 그와 같은 목적은 어떠한 수단에 의하여 달성될 수 있는가, 극작가가 무대상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평가들이 시인에 대하여 제기하는 비난은 어떤 것이며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일종의 기술적인 교시를 주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인 측면은 후세에 와서, 시는 천재 또는 영감에 의하여 쓰여지는가 아니면 숙련 또는 작업에 의하여 쓰여지는가 하는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던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은 작시의 기술적인 측면을 극히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플라톤의 영감론(靈感論)을 은연중 반박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시인이 모방하는 것은 진실재인 이데아가 아니라 그 모상 또는 영상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견해에 관하여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공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도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진사처럼 복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하는 데, 다시 말해서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플라톤이 말하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일종의 '창작자'인 것이다.  끝으로 시는 도덕적 가치가 없는 플라톤의 견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억압될 경우 언젠가는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는 감정을 안전하게, 관례적으로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출케 하는 도덕적 기능, 즉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드라마에 부여함으로써 간접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브레히트 이후의 서사극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지만, 나 같은 위대한 환상극의 공연을 보게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적 흥미에 끌려 작품 세계에 휘말리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의 주인공은 우리보다 어느 정도 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자신과 대동소이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감정은 우리 자신의 감정이 된다. 극이 고조됨에 따라 우리의 감정도 고조된다. 그러다가 극이 끝나 흥분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게 되면 우리는 일종의 유쾌한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은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뚜렷하게 지적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문학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문예 비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덕철학적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쾌감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전개되는 활동에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정신 상태로서 활동의 선악에 따라 그에 수반되는 쾌감의 선악도 결정된다. 그런데 비극이 제공하는 특정한 쾌감은 우리의 감정을 좋은 의미에서 구제해주는 선한 활동에 수반되는 쾌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감정은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극에서 얻는 쾌감은 위험 부담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는 경험의 쾌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는 배출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의 스릴을 비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감정의 배출이 저녁마다 행해진다면 우리의 신경을 지치게 하여 오히려 역효과도 낼 수도 있을 것이나, 아테나이 인들은 1년에 한두 번씩 디오뉘소스 제전(祭典) 때에만 비극을 관람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들의 감정을 좋은 방향으로 억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의 배경과 특징을 '모방'및 '카타르시스'에 대한 해설을 겸하여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고 해설하는 것은 방대한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일이므로 다음에는 현대 독자들에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몇 가지 문제점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구성 요소를 논하면서 "비극의 제1원리, 즉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비극을 관람하거나 읽을 때면 우리의 흥미는 등장 인물의 성격에 집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작품에서 발견하고 싶어하는 것은 플롯의 구성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심리적 콤플렉스이며 우리는 때때로 무의식의 어두운 세계까지 투시하고 싶어한다. 플롯이 제일 중요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이해가 가지 않을 뿐 아니라 비지성적이라는 느낌마져 든다. 이 점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소 완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객관적인 사고방식과 확고한 이론을 생각해보라.  비극의 목적은 관객에게 다른 예술이 제공할 수 없는 특정한 쾌감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비극이 성패도 이 목적과 관련해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비극 작가는 이 목적을 어떻게 달성하는가? 그는 생활을 재현함으로써 관객에게 그들의 감정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는 스토리를 무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생활을 재현한다. 물론 어느 스토리에나 사람들이 나오고 또 그들은 인간인 이상 일정한 도덕적, 지적 자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극작가는 심리학에 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심리 묘사는 극작가에게 있어서는 스토리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 것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성격 묘사, 음악, 시, 장면, 멋진 대사 - 이런 것들은 물론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고 또 많은 다른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 예술이다.  아무리 훌륭한 색채가 있다 하더라도 밑그림이나 디자인 없이 그것만으로는 그림이 될 수 없듯이, 성격 묘사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플롯 없이 그것만으로 드라마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플롯은 비극에 필요불가결의 요소인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비극의 목적은 스토리를 무대 위에 올려놓은으로써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디. 지성적인 관객들은 플롯이 거의 없는 대화극에서도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나 비극의 진정한 효과는 면밀하게 구성된 스토리 없이는 도저히 산출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플롯이 제1위라는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에 관한 그의 이론 역시 현대 독자들을 당황하게 할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비극의 주인공는 우리와 대동소이하지만 우리보다 어딘가 뛰어난 데가 있어야 하고, 덕과 정의에 있어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명망을 누리고 있는 인물이어야 하며, 그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만 하되 그 원인이 악덕이나 사악이 아니라 어떤 과오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요구는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비극에 친숙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이론은 그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에서 귀납적인 방법으로 추출해낸 것이다. 즉 그는 입수할 수 있는 모든 비극을 읽고 난 뒤 비극의 주인공에 적합한 인간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아테나이 연극 공연의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그리스 배우들은 관객의 눈에 잘 띄기 위하여 굽이 높은 반장화를 신고, 긴 의상을 입고, 확성기가 부착된 커다란 가면을 쓰고 노천 극장에서 수천명의 관객을 상대했는데, 이러한 조건 아래서는 리얼리즘은 불가능하다. 무대의 등장 인물을 일상생활의 수준으로 낮춘다는 것은 아테나이 무대 관례와는 양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극적 효과를 산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주인공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만 한다고 주장해놓고는 범행하기 직전에 상대방이 친구 또는 친척임을 발견하고 범행을 그만두는 플롯이 가장 훌륭한 플롯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확실히 자기당착이며, 행복한 결말에 대한 감성적인 집착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서투른 극작가의 손에서는 행복한 결말이 진정한 비극적 효과를 망쳐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불행한 결말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며 꼭 감상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입센이 독일 연출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의 결말을 행복한 결말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플롯을 구성하기게 따라서는 범행 직전에 상대방이 자기 친구 또는 친척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범행을 금만두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스릴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종일관 플롯의구성에 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의 운명이 행복에서 불행을 바뀌어야 한다는 견해는 어디까지나 그렇게 되어야만 비극의 효과를 보다 훌륭하게 산출할 수 있다는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의 명백한 결점 하나는 내용상 '시학'이라기보다는 '드라마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만큼 거의 드라마에 관해서만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서사시조차 드라마와 비교하여 간단하게 논한 다음, 서사시는 비극보다 열등한 예술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서정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가 서정시를 음악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은 그가 별로 관심을 느끼지 못한 소수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누가 시론(詩論)을 쓴다면, 물론 자신의 주의력을 드라마에만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알고 있던 그리스 문학에서는 비극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당시의 비극은 코러스 속에 서정시를 포함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서사시보다 더 압축하여 더 효과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시대인들은 비극이 진지한 시의 완전한 형식이라는 그의 견해에 대부분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관해서는 너그럽게 보아 넘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결점은 이라스토텔레스가 드라마의 역사적 발전에 관하여 언급한 최초의 저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적 기원에 역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스 비극의 최초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이 디오뉘소스 신의 예찬이라든가, 영웅 또는 반신(半神)들의 무더 위에서 행해지는 의식이라든가, 디오뉘소스 신에 대한 합창 찬미라든가, 그 밖에 다른 형태의 합창 서정시 같은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 의식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비극이 공연되던 대(大)디오뉘소스 제전만 하더라도 거국적인 종교 축제이며 이른바 비극의 기능이란 것도 서사시에 나오는 옛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하는 데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와서는 3대 비극 작가의 시대에 비하여 종교적 기능이 다소 약화되었다 하더라도 비극 시인이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이야기했고 자신이 창작한 플롯으로 새로운 유형의 비극을 시도한 시인들은 거의 언제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미루어보면 비극이 여전히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종교적 기원에 역점을 두지 않은 것은 비극의 종교적 기능이 그의 시대에 와서는 많이 퇴색했거나, 또는 그 자신이 이 문제에 관하여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밖에도 문체에 대한 그의 논술이 피상적이고 불충분한 점이 많다든가, 플라톤의 시의 본질로 보고 있는 '영감'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않고 있는 등 우리의 요구에 미흡하게 느껴지는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관찰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일반화하는 귀납적 원리에 의햐여 문예 비평이 성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선행자의 도움 없이 사실상 자력으로 성취했다. 그의 교리적인 사고방식의 제한된 시야로 말미암아 그의 이론은 때로는 온당하지 않거나 혼란을 야기할 때도 있지만 서양 문예 비평사에 그의 만큼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준 책은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2) / 천병희 옮김     제1장        우리의 주제는 시학(詩學)1)이므로 나는 먼저 시의 일반적 본질과 그 여러 종류와 각 종류의 기능에 관하여 말하고, 이어서 훌륭한 시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플롯의 구성과 시의 구성 요소의 수와 성질과 그 밖에 이 연구 분야에 속하는 다른 사항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그러면 자연적 순서에 따라 기본적인 사항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서사시와 비극, 희극과 디튀람보스2) 그리고 대부분의 피리 취주와 키타라 탄주3)는 전체적으로 볼 때 모두 모방의 양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 가지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으니,그것들이 사용하는 모방의 수단이 그 종류에 있어 상이하든지, 그 대상이 상이하든지, 그 양식이 상이하여 동일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여 많은 사물을 모방 모사하고 - 어떤 이는 기술에 의하고, 어떤 이는 숙련에 의하여 - 다른 사람들은 음성을 사용하여 그렇게 하듯이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예술들도 모두 율동과 언어와 화성(和聲)을 사용하여 모방하는데 때로는 이것들을 단독으로 사용하고, 때로는 혼합하여 사용한다.  말하자면 피리의 취주나 키타라의 연주나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것들, 예컨대 목적(牧笛)4)의 취주는 화성과 율동만을 사용하고, 무용술(舞踊術)은 화성 없이 율동만으로 모방한다.5) 그것은 무용가가 동작의 율동만으로 성격과 감정과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화성 없이 언어만으로 모방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화성 없이 언어만으로 모방하는 예술이 있는데 이때 언어는 산문이 아니면 운문이며, 운문인 경우에는 상이한 운율이 혼용되기도 하고 동일한 운율만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모방에는 오늘날까지도 고유한 명칭이 없다. 우리는 소프론과 크세나르코스의 소극(笑劇)6)이나 소크라테스의 대화7)에 공통된 명칭을 붙일 수 없으며, 누가 삼절운율(三節韻律)8)이나 비가운율(悲歌韻律)9)이나 밖의 다른 운율로 이러한 것들을 모방한다 하더라도 역시 공통된 명칭은 붙일 수 없을 것이다.10)  사람들은 운율의 이름에다 '시인(詩人)'이란 말을 덧붙여 비가 시인이다, 서사 시인이다 하고 부르고 그것은 시인들이 행하는 모방의 양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이 사용하는 운율에 근거하여 붙인 공통된 명칭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의학이나 자연철학에 관한 것이라도 운문으로 쓰여졌으면 그 저자를 시인이라 부르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메로스와 엠페도클레스11) 사이에는 운율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따라서 전자는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지만 후자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철학자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카이레몬12)의 랍소디아13) 처럼 온갖 운율을 혼합하여 모방한 경우에도 우리는 그를 시인이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끝으로 위에서 말한 모든 수단 즉 율동과 노래와 운문을 모두 사용하는 예술이 있는데, 예컨대 디튀람보스와 송가(頌歌)14)와 비극과 희극이 그렇다. 이들의 차이점은 어떤 것들은 앞서 말한 수단들을 동시에 모두 사용하고, 다른 것들은 따로따로 번갈아 사용하는 데 있다. 여러 가지 예술들의 이러한 차이점을 나는 모방 수단에 있어서의 차이라고 부른다.   1) '시학'의 원어의 본래 뜻은 작시기술(作詩技術)이다. 그러나 이 말이 지니는 의미의 제한성 때문에 문맥에 따라서는 시학, 또는 시로도 번역했다.  2) 디튀람보스란 말의 어원은 확실치 않으나,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말이 아니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다. 다튀람보스에 관하여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기원전 7세기 시인 아르킬로코스인데 그는 "나는 술을 마시면 디오뉘소스 신의 노래인 디튀람보스를 지휘할 수 있다"고 했다. 기타 문헌들에 의하더라도 디튀람보스는 일정한 문학적 형식을 갖추기 이전에는 디오뉘소스 신에 대한 합창가였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3)피리는 보통 디튀람보스에 사용되고 키타라(현악기 일종)는 송가(頌歌)에서 사용되었는데 이 두 악기는 연극 공연에도 사용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이란 말의 의미인데 일단 가사 없는 음악과 가사 있는 음악으로 구분해놓고 보면 그 뜻이 명백해질 것이다. 기원전 582년부터 가사 없는 피리 경연 대회가 퓌토 경기의 일부분이 되기는 했지만, 가사 없는 음악은 무용을 동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플라톤도 가사 없는 음악은 막연한 감정을 표현할 뿐 성격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짐승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4) 목적(牧笛)은 피리와 유사하나 피리에 비해 원시적인 악기로 주로 목자(牧者)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5) 그리스의 음악과 무용은 현대의 음악이나 발레보다 훨씬 더 모방적이었다고 한다.  6) 소극(笑劇)은 원래 '흉내내는 극'이란 뜻인데 차차 일상행활의 여러 가지 면모를 그리는 드라마적 소묘를 의미하게 되었다. 7)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고 이를 같이 문답해 나가는 동안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는 대화 방식으로 철학을 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새로운 문학 형식을 낳게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때로는 드라마 형식으로 때로는 서술체로 진행되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이다.  8) 삼절운율이란 단장(短長格) 삼절운율을 말하는데 단장격 운각(韻脚)을 중복한 것을 다시 세 번 반복한 운율이다. 9) 비가운율은 기원전 7세기 에페소스 시(市)의 칼리노스가 창안한 운율로서 장단단격 운각을 여섯 번 반복한 육절운율과 장단단격 운각을 두 번 반복한 오절운율이다. 이 운율은 주로 비가(elegy)에서 사용된 까닭에 비가운율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가란 원래 비탄의 노래라는 뜻이었으나 일찍부터 시인들은 개인적 감정이나 훈계, 기타 여러 가지 주제(기쁜일이나 슬픈 일)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운율을 사용했다  10) 고대 그리스에는 오늘날과 같은 '문학'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11) 엠페도클레스는 기원전 5세기 초 시켈리아의 자연철학자이다. 그의 저술은 육절운율로 된 과 퓌타고라스의 이론, 특히 윤회설을 증명한 중에서 약 450행이 남아 있다.  12) 카이레몬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아테나이의 시인이다. 그의 작품 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운율을 혼용했다는 것밖에는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이 시의 소재가 된 켄타우로스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켄타우로스 족은 익시온과 네펠레(구름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족으로서 목과 머리와 가슴은 사람이고 나머지 부분은 말이었다. 이들은 텟살리아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라피타이 족의 왕 페이리토오스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고 가서 신부 힙포다메이아와 다른 여인들을 납치하려다가 싸움이 벌어져 졌기 때문에 펠리온 산에 있던 소굴에서 쫒겨나게 된다. 13) 랍소디아란 랍소도스가 음송하는 시를 말한다. 랍소도스는 원래 여러 노래를 하나로 꿰메는 사람'이란 뜻이지만 자작시를 음송하는 방랑 시인이란 뜻도 있다. 후기에 와서는 대체로 호메로스의 시를 음송함으로써 이를 후세에 전한 자들에 대한 명칭이 되었다. 14) 송가는 그리스의 신들, 특히 아폴론 신에 대한 의식적인 성격을 띤 찬미가로서 원래는 합창가였으나 차차 키타라 반주에 맞추어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테르판드로스가 쓴 송시의 재목 몇 개와 약간의 단편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3) / 천병희 옮김     제2장       모방자1)는 행동하는2)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善人)이거나 악인이다. 인간의 성격이 거의 언제나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덕과 부덕3)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또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이거나, 또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다. 그것은 화가들의 경우도 같다. 왜냐하면 폴뤼그노토스는 우리들 이상의 선인을, 파우손은 우리들 이하의 악인을, 디오뉘시오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을 그렸기 때문이다.4)  앞서 말한 여러 가지 모방도 각각 이러한 차이점을 가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상이한 대상을 이와 같이 상이한 방법으로 모방함으로써 각 모방이 상이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무용이나 피리의 취주나 키타라의 탄주에 있어서도 이러한 차이는 가능하며, 산문이나 음악의 반주가 없는 운문에 있어서도 이러한 차이는 가능하다. 예컨대 호메로스는 우리들 이상의 선인을, 클레오폰은 우리와 동등한 인간을, 그리고 맨처음으로 파로디아를 쓴 타소스의 헤게몬과 의 작가 니코카레스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을 그렸던 것이다.5) 디튀람보스와 송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에 있어서도, ----와 아르가스가 쓴-----6) 그리고 티모테오스와 필록세노스가 쓴7)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등장 인물들을 상이하게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과 희극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     1) '모방자'라는 말은 여기서는 시인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무용가나 배우를 의미하는 때도 있다. 소포클레스 이전까지만 해도 시인 자신이 주연 배우요, 연줄가요, 코러스를 위한 무용의 안무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말을 이렇게 애매하게 사용한 것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갈 것이다. 2) '행동하다'의 원어는 단순히 무엇을 행하는 것을 뜻한다기보다는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는 영어의 'act'처럼 '출연'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우에 따라 모방의 대상인 '행동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모방의 수단인 배우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3) 덕과 부덕의 원어(arete)와 (kakia)는 원래 사물이 그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반드시 어떤 도덕적인 가치 기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4) 폴리그노토스(Polygnotos)와 디오뉘시오스(Dionysios)와 파우손(Pauson)은 모두 기원전 5세기 그리스 화가들이다. 성격 화가로 유명한 폴뤼그노토스의 그림에는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했고. 셋 중에 가장 후기에 속하는 파우손의 그림에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5) 클레오폰은 일상생활에서 취재한 일종의 서사시를 썼다고 하는데 이 책 22장에 그의 문장이 저속하다는 말이 나온다. 헤게몬은 타소스 섬에서 태어나 기원전 5세기 후반의 아테나이에서 활동한 작가로서 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문체로 서사시의 파로디아(parody)를 썼다고 한다. 파로디아란 고의적인 과장이나 어울리지 않는 의상, 이러한 수법을 사용한 시를 말한다. 보잘것없는 사물을 장중한 시어체로 그리는 것 역시 파로디아의 특징이다. 니코카레스는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희극 작가로 생각된다. 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어원적으로 보아(deilos는 '겁이 많다'는 뜻), 어떤 겁쟁이를 주제로 한 서사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6) --- 부분은 원전이 완전이 파손된 부분이다. 앞에 있는 ----는 시인의 이름이고 뒤에 있는 ----는 송가의 제목으로 생각된다. 아르가스는 파로디아 스타일의 송가를 썼다고 한다. 7) 필록세노스와 티모테오스(제1장 주2 참조)는 둘 다 퀴클롭스 족의 한 명인 폴뤼페모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디튀람보스를 썼는데 전자는 이를 풍자적으로 취급한 증거가 있으므로 후자는 이를 진지하게 취급하여 폴뤼페모스를 이상화한 것으로 추측해도 좋을 것이다. 퀴클롭스 족은 시켈리아 섬에 거주하는 거한(巨漢)들로 전해지고 있다. 제 9권 이하 참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4) / 천병희 옮김     제3장       이들 여러 가지 모방의 세 번째 차이는 각종 대상을 모방하는 양식에 있다. 동일한 수단으로 동일한 대상을 모방한다하더라도, 시인은  1> 호메로스가 한 것처럼 때로는 서술체로, 때로는 작중 인물이 되어 말할 수도 있고2> 그러한 변화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체로만 말할 수도 있고 3> 모방자1)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실연(實演)하게 할 수도 있다.2)  이와 같이 모방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수단과 대상과 양식이라는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소포클레스의 모방은 선인을 모방한다는 점에서는 호메로스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등장 인물들을 실제로 행동하는 자로서 모방한다는 점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작품들3)이 드라마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러한 작품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도리스 인들4)은 자기들이 비극과 희극을 창안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희극은 메가라 인5)들이 창안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리스 본토에 사는 메가라 인들은 메가라가 민주정체가 되었을 때6) 그곳에서 희극이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있고, 시켈리아 섬에 이주한 메가라 인들은 그곳 출신인 에피카르모스7)가 키오니데스나 마그네스8)보다 훨씬 이전 사람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기들이 희극을 창안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의 도리스 인들 중에는 비극도 자기들이 창안해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9)) 그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komoidia(희극)와 drama(드라마)란 말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의 말인즉 자기들은 도시 주변의 촌락을 kome라고 하는데 아테나이 인들은 demos라 하며 komoidoi(희극배우)란 말은 이들이 음주유락(飮酒遊樂 komazein)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인기를 잃고 도시에서 쫓겨나 주변 촌락을 순회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또 자기들은 행동하는 것을 dran이라고 하는데 아테나이 인들은 prattein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모방의 차이점의 수와 성질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1) '모방자'란 여기서 배우를 가리킨다. '모방자'란 말의 또 다른 뜻에 관해서는 제2장 주1)참조.  2) 이 구절은 중에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구두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의미상의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역자는 1 Bywater의 해석을 택하여, 번역했는데 사실 모방의 방식에 대한 이러한 분류는 플라톤(392d~394d 참조)의 분류와 일치하는 것같이 보인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와 신화 가운데 일부는 전적으로 모방에 의존하고 - 자네 말처럼 비극과 희극이 여기에 속하네 - 일부는 시인 자신의 서술에 의존하네. 자네는 그 가장 좋은 예를 디튀람보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네. 다른 일부는 서사시와 기타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양자의 혼합에 의존하네" 시인은 (1)(a)호메로스처럼 작중 인물이 되어 말하거나 (b)그러한 변화 없이 서술체로만 말하거나 (2)모방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실연하게 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두 번째 해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크게 보아 두 가지 해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3) 비극과 희극을 말한다.  4) 도리스 인들은 북방으로부터 그리스로 남하한 종족 가운데 맨 마지막 종족이다(기원전 100~1000년경) 이들은 주로 엘리스, 라케다이몬, 아르고스, 코린토스, 메가라 등지에 정착했다. 5) 메가라 인들 역시 도리스 족으로 기원전 730~550년 사이에 여러 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시켈리아 섬에 건설한 식민지는 메가라 휘블라이아 라고 불렀다.  6) 기원전 600년경 참주(僭主) 테아게네스가 추방되었을 때를 말한다. 7) 에피카르모스와 포르미스는 '신(新) 희극'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평범한 인간들의 여러 가지 성격 유형을 묘사한 풍속 희극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관해서는 본서 제5장에 언급되고 있다. 에피카르모스는 기원전 5세기가 시작되 이전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8) 키오니데스와 마그네스는 기원전 5세기 전반에 활동했다. 9) 특히 시키온 인들이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5) / 천병희 옮김     제4장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 원인1)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의 모습처럼 실물을 볼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도 매우 정확하게 그려놓았을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  그럴 것이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 비록 그들의 배움의 능력이 적다하더라도 - 최상의 즐거음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건 사람을 그린 것이로구나' 하는 식으로 각 사물이 무엇인가를 추지(推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실물을 전에 본 적이 없는 경우에는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기교라든가 색채라든가 그 밖에 그와 유사한 원인에 의하여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방한다는 것과 화성과 율동에 대한 감각은(운율은 율동의 일종임이 명백하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바 인간은 이와 같은 본성에서 출발하여 이를 점진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즉흥적인 것으로부터 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한 행동과 고상한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반면 저속한 시인들은 비렬한 자들의 행동을 모방했는데, 전자가 찬가(讚歌 hymnos)와 찬사(讚辭 enkomion)2)를 쓴 것처럼 후자는 처음에는 풍자시를 썼다.  호메로스 이전의 시인들이 쓴 풍자시는 한 편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예를 들 수 없겠으나 그런 시를 쓴 시인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호메로스 이후부터는 많은 예를 들 수 있는데, 예컨데 호메로스 자신의 3)와 다른 시인들이 쓴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있다. 이를 풍자시 있어서는 단장격 시행(短長格詩行 iambeion)이 적합한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 운율이 오늘날에도 iambeion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로부터 유래한 것인데, 그 까닭은 이 운율로 서로 iambizein(풍자-욕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옛 시인들 가운데 일부는 영웅시의 작가가 되고 일부는 단장격시의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고상한 대상을 모방함에 있어서도 탁월한 시인이지만(그는 훌륭하게 작시했다는 점에서나 모방이 드라마적이란 점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인신공격이 아니라 우스꽝스런 것을 드라마화함으로써 맨 처음으로 희극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의 가 희극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와 가 비극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비극과 회극이 등장하게 되자 시인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이 두 가지 경향 가운데 한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어떤 시인들은 단장격 시 대신 희극의 작가가 되었고, 어떤 시인들은 서사시 대신 비극의 작가가 되었다. 그것은 새로 등장한 형식이 옛 형식보다 더 위대하고 존경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극이 그 구성 요소4)에 있어서 충분히 발전한 것인지 아닌지를 비극 자체의 테두리 내에서, 그리고 극장과 관련하에 고찰하는 것은 다른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아무튼 비극은 처음에 즉흥적인 것으로부터 발생했다. 희극도 마찬가지였다. 비극은 디튀람보스의 선창자(先唱者)로부터 유래했고,5) 희극은 아직도 많은 도시에 관습으로 남아있는 남근찬가(男根讚歌)의 선창자로부터 유래했다.6)  그 후 비극은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계속 개량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많은 변화를 거쳐 본연의 형식을 갖추게 된 뒤에야 비로소 비극의 발전은 정지되었다.  1)배우의 수를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린 것은 아이스퀼로스가 처음인데, 그는 또한 코로스(choros)의 역할을 줄이고 대화가 드라마의 중심이 되게 했다. 2)소포클레스는 배우의 수를 세 명으로 늘리고 무대 배경을 도입했다. 3)비극은 또한 그 길이7)가 길어졌다. 비극은 사튀로스 극8)으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짧은 스토리와 우스꽝스러운 조사(措辭)를 버리고 위엄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후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리고 그 운율도 장단젹(長短格)에서 단장격으로 바뀌었다.  처음에 장단적 사절운율9)이 사용되었던 것은 당시의 비극에는 사튀로스 극의 요소와 무용적 요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가 도입되자 자연은 스스로 이에 적합한 운율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단장격 운율10)은 대화에 가장 적합한 운율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우리는 대화할 때 대개 단장격 운율을 사용하는 데 비해 육절운율11)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믈며, 그것은 보통 어조를 이탈하였을 경우에 한한다는 사실 들 수 있다. 4)그 밖에 또 한 가지 변화는 삽화(揷畵 epeisodiion)12)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장식물13)과 그것이 첨가되게 된 경위를 일일이 설명한다는 것은 너무나 방대한 일이므로 이미 설명한 것으로 해두자.   1) '두 가지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1) 모방에 대한 쾌감과 (2) 타인에 의하여 모방된 것에 대하여 느끼는 쾌감이고, 다른 한가지는 (1) 모방에 대한 쾌감(여기서는 모방에 대한 쾌감 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하여 모방된 것에 대하여 느끼는 쾌감도 포함된다)과 (2) 화성과 율돌에 대한 본능이다.  2) '찬가'는 신을 찬미하는 노래이고 '찬사'는 인간을 찬양하는 노래다. 이 말의 본래 뜻이 '술잔치에서의 노래'란 점으로 미루어보아 원래는 연희 주인에 대한 찬사를 의미하던 것이 차츰 찬사 일반을 가리키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성격의 시에 처음으로 이 이름을 붙인 사람은 시모니데스라고 한다. 3) 마르기테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떤 돈 많은 바보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적 서사시인데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 작(作)이라고 하나 작가와 시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4) 비극의 구성 요소에 관해서는 제6장 참조 5) 비극의 기원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어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이 디튀람보스에서, 그것도 디오뉘소스 신의 종자(從者)들인 사튀로스로 분장한 자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사튀로스 극(劇)을 곁들인 디튀람보스에서 유래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릭 그들은 '염소의 노래'란 말이 '염소의 발을 가진 사튀로스로 분장한 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의미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비극에 관한 최초의 문헌들에 나타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 디튀람보스를 부르는 자들이 담쟁이덩굴로 만든 관을 썼다는 기록은 있어도 사튀로스로 분장하고 춤추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점 (2) 박퀼리데스 이전에는 디튀람보스에서 드라마적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 (3) 디튀람보스의 코로스는 원형인데 반해 비극적 코로스는 직사각형이라는 점 (4) 사튀로스 극이 비극 4부작의 1부가 되기(이는 강제 규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전에도 사튀로스적 요소가 없는 비극의 경연이 있었다는 점 (5) 비극에 관한 최고의 문헌에 의하더라도 비극은 디튀람보스만큼 디오뉘소스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를 보이지 않았고 당시의 사건도 영웅적인 요소가 있으면 비극의 소재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점 (6) 적어도 고전기(古典期)에는 디튀람보스와 비극, 또는 비극 코로스의 구별이 엄연했다는 점. (7) 염소의 노래(tragoidia)란 말이 '염소의 발을 가진 사튀로스로 분장한 자들이 부르는 노래'란 뜻이 아니고(사튀로스 극에 나오는 사튀로스는 일부는 사람이고 일부는 말이었지 염소는 아니었다). '상(償)으로 내놓은 염소를 얻기 위하여 다투어 부르는 노래'란 뜻이거나(최초로 독립된 배우와 프롤로고스와 대화를 도입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테스피스는 상으로 염소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한다), 또는 '제물로 바친 염소를 둘러싸고 부르는 노래'라는 뜻일 수 있다는 점을(이른바 비극이 비장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러한 견해에서 유래했다) 들어 디튀람보스와 사튀로스 극과 비극은 모두 독자적인 발전 과정을 거쳐온 것으로 보고 있다. 비극이 일종의 종교의식인 디튀람보스에서 유래했다 하더라도 비극으로서의 형태를 갖추는 데는 기원전 6세기 초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에 있는 여러 도시, 특히 코린토스와 사퀴온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디오뉘소스 전설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영웅 전설을 소재로 한 장엄한 또는 비극적 합창 서정시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뒤 기원전 6세기 말에 테스피스가 아테나이에서 이러한 종류의 비극적 합창 서정시를 부르는 코로스를 대사를 외우는 배우와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그 초기 형태를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비극은 그 뒤 디튀람보스와 사튀로스 극과 더불어 대디오뉘소스 제전(아테나이에서 거행된 여러 가지 디오뉘소스 제전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큰 제전으로 3월 말에 개최되었다)의 일부가 됨으로써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6)komoidia란 말이 komos(야단법석을 떠는 술잔치로서 이러한 술잔치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주로 디오뉘소스 제전 때 벌어졌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komo(도시 주변의 촌락)란 말에서 유래했다는 도리스 인들의 주장(제3장 참조)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찬성의 뜻도 반대의 뜻도 표방하고 있지 않으나 komos에서 유래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희극이 남근찬가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희극이 남근찬가의 선창자에게서 유래했다는 설은 역사적 근거가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에는 에피카르모스의 코로스 없는 희극과 코로스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테나이의 '고(古) 희극'의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전자는 에피카르모스 이후 차차 쇠퇴하여 소극으로 변질되었고, 후자는 기원전 486넌 아테나이에서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7) '길이'의 원어의 본래의 뜻은 '크기'인데 여기서는 물리적인 '길이'와 함개 '웅대함'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8) 사튀로스 극은 형식에 있어서는 비극과 유사하지만, 소재에 있어서는 전설 가운데 그로테스크한 부분을 택하거나 또는 전설을 그로테스크하게 취급하는 드라마를 말한다. 이 드라마의 코로스가 디오뉘소스 신의 종자들인 사튀로스로 분장한 까닭에 사튀로스 극이라고 불린다. 이들의 대사와 제스처는 흔히 음란했다고 하며 이들은 또한 시킨니스라고 하는 격렬한 춤을 추었다고 한다. 고전기에는 비극 4부작의 제4부를 이루고 있었지만 후기에 가서는 비극 경연 전체를 통하여 단 한 편만이 공연되었다고 한다. 플리우스나 프라티나스가 사튀로스 극을 찬양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말은 그가 처음으로 사튀로스 극을 디오뉘소스 제전에 소개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3대 비극 작가들은 모드 사튀로스 극을 썼는데 지금 온전하게 남아 있는것은 에우리피데스의 뿐이다. 9) 사절운율(장단격 사절운율)이란 장단젹 운각을 중복한 것을 네 번 반복한 운율을 말하는데 이 운율은 격렬한 흥분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운율이다.  10) 단장격 운율(단장격 삼절운율)은 그리스 비극의 대사에 쓰이는 운율이다. 11) 육절운율은 영웅시 운율 또는 서사시 운율이라고도 불린다. 호메로스의 와 의 시행들은 모두 이 운율로 되어 있다.  12) 삽화란 코로스의 노래와 노래 사이에 삽인된 대화 부분을 말한다. '삽화의 수가 많아졌다'는 말은 근대극의 경우라면 막(幕) 또는 장(場)의 수가 많아졌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13) 의상이나 가면 따위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6) / 천병희 옮김     제5장      희극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1) 보통 이하의 악인의 모방이다. 이때 보통 이하의 악인이라 함은 모든 종류의 약(惡)2)과 관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종류, 즉 우스꽝스런 것과 관련해서 그런 것인데 우스꽝스런 것은 추악3)의 일종이다. 우스꽝스런 것은 남에게 고통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일종의 실수 또는 기형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우스꽝스런 가면은 추악하고 비뚤어졌지만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  비극의 여러 가지 발전 관정과 그 창안자들이 잘 기억되고 있는 반면 희극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희극이 초기에는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정관이 희극 시인에게 코로스를 공적으로 제공한 것은 후기의 일이고 처음에는 시인 자신이 자담(自擔)했다.4) 이른바 희극 시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에 관한 기록이 시작된 것은 희극이 이미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난 뒤부터였다. 누가 희극에 가면5)이나 프롤로그를 도입하고 배우의 수6)를 늘렸는가 하는 것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희극의 플롯을 구성하는 것7)은 시켈리아에서 유래된 것인데, 그것은 에피카르모스의 포르미스8)가  ----9) 아테나이의 시인들 중에는 크라테스10)가 최초로 인신공격의 형식을 버리고 보편적인 스토리, 즉 플롯을 구성하기 시작했다.11) 서사시는 장중한 운율12)로 고상한 대상을 모방한다는 점에서는 비극과 일치하지만, 1) 한 가지 운율만을 사용하며 서술체라는 점에서는 비극과 상이하다. 2) 양자는 길이13)에 있어서도 상이하다.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이 일 회전하는 동안14)이나 이를 초과하지 않는 시간15)안에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서사시는 시간적으로 제한이 없다. 이것이 양자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비극에도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시간적 제한이 없었다. 3) 양자는 또한 구성 요소에 있어서도 상이한데 어떤 것은 양자에게 공통되고, 어떤 것은 비극에만 고유하다.16) 따라서 어떤 비극이 좋고 어떤 비극이 나쁜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서사시에 관해서도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사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는 비극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가 서사시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1) 제2장 앞부분 참조  2) '악'의 원어(kakia)는 제2장 주3)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원래는 사물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나 사악(邪惡)이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3) '추악'의 원어는 도덕적인 의미와 심미적인 의미가 다 함께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 인에게 '추악'은 곧 '악'과 같은 뜻이다.  4) 희극이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된 뒤에는, 경연에 참가하고 싶은 시인은 집정관에게 코로스의 비용을 요청했다. 그러면 집정관은 부유한 시민에게 공적으로 명하여 코로스 훈련과 장비에 드는 비용을 대게 했다. 그 비용을 부담하는 시민은 choregos라 불린다. 많은 시인이 경합할 경우 그 선발 기준이 어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희극이 국가의 공인을 받기 전에는 사비(私費)로 공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구절은 문맥상으로 보든 문헌에 따르든 시인 자신이 그 비용을 자담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실제로 비용을 누가 어떻게 조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5) 가면이 도입되기 전에는 희극에서 포도주 찌꺼기를 얼굴에 칠했다고 한다. 비극의 가면은 테스피스가 발명해낸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말은 테스피스가 가면을 발명해냈다는 뜻이 아니라 개량했다는 뜻일 것이다.  6) 대부분의 앗테케 희극에는 세 명의 배우가 츨연한다. 그러나 와 의 어떤 부분에는 네 명 또는 다섯 명의 배우가 필요하다. 에피카르모스도 세 명의 배우를 사용했다고 한다. 7) '희극의 플롯을 구성했다' 함은 인신공격의 형식을 버리고 일반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를 취급했다는 뜻이다.  8) 에피카르모스와 포르미스에 관해서는 제3장 주7)을 보라 9) ---부분은 완전이 파손된 부분인데 문맥상으로 보아 '그곳 출신이었으니까'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0) 크라테스는 기원전 450년경부터 430년까지 할동했는데 그 당시에는 크라티노스가 가장 저명한 희곡 작가였다고 한다. 11)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견해가 현존 희극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초기 작품은 인신공격으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만 하더라도 소크라테스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 일색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클레온이 민중선동가의 대명사이듯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의 대명사에 불과하며 이나 는 단순한 인신공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뚜렷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12) 서사시는 육절운율만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비극은 삼절운율과 사절운율 등을 사용하며 심지어는 서사시의 운율인 육절운율도 사용할 수 있다.(제26장 후반부 참조) 13) '길이'란 말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물리적인 의미의 길이, 즉 행수를 뜻할 수 있고(나 는 1만 수천 행에 달하는 데 비해, 비극은 대체로 1천행을 크게 초과하지 않는다) (2) 비극의 공연 또는 서사시의 낭송에 필요한 시간을 뜻할 수 있고(그리스 고전을 주로 책을 통해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첫 번째 가능성을 생각하기 쉬우나 보통 직접 보고 듣던 그리스 인들에게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먼저 머리에 떠오를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사건의 경과 기간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비극에도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시간적 제한이 없었다'는 말을 비극도 공연하는 데 서사시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거나, 서사시는 무제한 오래 계속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일 것이다. 가장 오래 된 비극들은 비교적 짧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제4장에서 초기 비극은 짦았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길이'란 말이 사건의 경과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까닭은 그것이 비극과 서사시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더 명확하게 지적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 는 모두 사건의 경과 기간이 수주일 이상씩이다. 그리고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비극에 있어서도 사건의 경과 기간은 제한되어 있지 않다. 의 사건만 하더라더 단 하루에 일어날 수 없으며, 도 상당한 기간의 경과를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14)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태양이 지상에 떠 있는 시간, 즉 12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그리스 극은 보통 동틀 녘에 시작하며 또 실제로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모든 작품에서 드라마 내의 사건을 위하여 12시간이면 충분하다. 15)은 날이 어두워진 뒤에 끝나고 은 동트기 전에 시작하며 는 밤에 일어난다.  16) 제6장 및 제26장 참조, 비극의 여섯 가지 구성 요소 가운데 플롯, 성격, 조사, 사상은 서사시에도 공통되나 장경(場景)과 노래는 비극에서만 불 수 있는 것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7) / 천병희 옮김     제6장       육절운율에 의한 모방과 희극에 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1) 먼저 비극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로 하자.  우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2) 비극의 본질을 정의해보자.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3)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4)를 행한다.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란 말은 율동과 화성을 가진 언어 또는 노래를 의미하고,'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는 말은 어떤 부분은 운문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어떤 부분은 노래에 의해서 진횅됨을 의미한다.  배우가 스토리를 실연(實演)하기 때문에, 첫째 장경(場景, 또는 배우의 분장)5)이 불가피하게 비극의 일부분이 될 것이고, 다음은 노래와 조사(措辭)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모방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사란 다름 아니라 운문의 작성을 의미하며,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고, 행동은 행동자6)에 의하여 행해지는 바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의 원인은 자연히 두 가지인데 사상과 성격이 그것이며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성공과 실패도 이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행동의 모방은 플롯이다.  나는 플롯이란 말을 이러한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플롯은 스토리 내에서 행해진 것, 즉 사건의 결합을 의미한다. 한편 성격은 행동자를 일정한 성질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바를 의미하며, 사상은 행동자들이 무엇을 증명하거나 또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때 그들의 언사에 나타나는 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여섯 가지 요소에 의하여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과 성격과 조사와 사상과 장경과 노래가 곧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는 모방의 수단에 속하고, 한 가지는 모방의 양식에 속하고, 세 가지는 모방의 대상에 속한다.7)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실상 모든 시인들이 이러한 요소들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드라마는 장경, 성격, 풀롯, 조사, 노래,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인간이 성질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행-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 있어서의 행동은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이 행동을 위하며 드라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 행동 없는 비극은 불가능하겠지만 성격 없는 비극은 가능할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작가8)들의 비극에는 성격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시인들에게 공통된 결합이다. 그것은 화가들 중에서 제욱시스를 폴뤼그노토스9)와 비교할 때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왜냐하면 폴뤼그노토스는 우수한 성격 화가인데 비해 제욱시스의 그림에는 아무런 성격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시인이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그리고 조사와 사상에 있어서 훌륭하게 손질된 일련의 대사를 차례차례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비극의 진정한 효과를 산출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점에서는 다소 미비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플롯, 즉 사건의 결합을 구비한 비극이 훨씬 더 훌륭한 효과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매혹하는 것은 급전(急轉)과 발견10)인데 이것들은 플롯에 속하는 부분이다. 또 한가지 증거로 작시의 초심자들이 사건의 결합보다 조사와 성격 묘사에서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초기 시인들11) 거의 전부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이와 유사한 예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라도 아무렇게나 칠한 것은 흑백의 초상화만큼도 쾌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12)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며 비극이 행동자를 모방하는 것도 주로 행동을 모방하기 위해서이다. 제3은 사상이다. 사상이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말과 적당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사에 관한 한 이 능력은 정치학과 수사학의 연구 분야에 속한다. 왜냐하면 옛날 시인들은 등장 인물들로 하여금 정치가와 같이 말하게 했고, 오늘날의 시인들은 수사학자와 같이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13) 사상을 성격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성격은 행동자가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기피하는지가 분명치 않을 때 그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준다.14) 따라서 말하는 사람이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기피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말은 성격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런데 사상은 무엇을 증명 또는 논박하거나 보편적인 명제(命題)를 말할 때 그 언사 속에 나타난다. 여러 가지 언어적 요소 가운데 제4의 것은 조사다. 조사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15) 언어로 사상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역할은 운문에 있어서나 산문에 있어서나 동일하다. 나머지 두 개 가운데 노래는 비극의 쾌감을 산출하는 양념16)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장경은 우리를 매혹하기는 하나 예술성이 가장 적으며 작시술과는 가장 인연이 먼 것이다. 비극의 효과는 공연이나 배우 없이도 산출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장경의 준비에 관한 한 의상계17)의 기술이 시인의 기술보다 더 유력하다.   1) 육절운동에 의한 모방, 즉 서사시에 관해서는 제23,24,26장에서 거론되고 있으나 희극에 관한 논술은 없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비극의 정의가 전개되는 제6장은 의 핵심으로 앞서 나온 장들은 비극의 정의를 위한 기초가 되는 장들이고, 뒤에 나올 장들은 이를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3) 원의는 '양념을 친'이란 뜻이다. 4) 카타르시스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보아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정화'를 의미한다는 윤리적 견해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 견해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금세기에 들어와서도 여러 학자들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나 카타르시스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비극 그 자체의 본질에 관한 연구에 비하여 퇴조하고 있는 편이다. 5) 장경의 원어가 배우의 분장만 의미하는지, 또는 무대상의 장면과 광경도 포함하는지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영역에서는 spectacl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문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분명히 분장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의 무대에서는 장경이라고 해보았자 배우의 분장 외에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제14장 첫부분에서는 눈에 띄는 무대상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같이 보인다. 비극 배우들은 배역에 맞는 가면을 썼고, 긴 의상을 입었으며(적어도 아이스퀼로스 시대부터는 그랬다.) 굽이 높은 반장화를 신었다. 무대 배경은 소포클레스가 도입했다고 한다(제4장 중간 부분 참조) 6) '행동자'란 여기서는 배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제2장 주2 참조) 7) 두 가지안 조사와 노래를, 한 가지란 장경을, 세 가지란 플롯, 성격, 사상을 말한다. 8) '현대 작가'란 에우리피데스 이후의 작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9) 폴뤼그노토스에 관해서는 제2장 주4 참조. 제욱시스에 관해서는 제25장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기원전 5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남부 이탈리아의 헤라클레이아 출신 화가이다.그는 이상적인 여성미(女性美)를 그려 사람들을 경탄케 했다고 한다. 10) 급전과 발전에 관해서는 제11장과 16장에 설명이 나온다. 11) 아이스퀼로스 이전 시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12) 드라마에 있어섯의 플롯과 성격을 그림에 있어서의 밑그림과 색채에 비교하고 있다. 그림의 경우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밑그림이 잘못되면 훌륭한 그림이 될 수 없듯이, 드라마에 있어서도 성격 묘사와 조사가 아무리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플롯이 잘못 구성되면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13) 정치학은 국가가 생기면서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수사학은 비교적 후기에 생긴 학문 분야이다. 14) 의도는 등장 인물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 가장 잘 나타난다. 예컨대 복수를 택하느냐 안전을 택하느냐 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때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의도를 통하여 등장 인물의 성격을 알면 그가 이때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그 의도를 예측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격'은 의도를 분명하게 해준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무엇을 택할 것인지가 명백한 경우에는 의도는 성격을 나타내지 못한다. 예컨대 맛없는 음식을 택하느냐 맛있는 음식을 택하느냐 하는 경우가 그렇다. 15) 조사에 관한 언급은 '조사란 운문의 작성을 의미한다'는 말뿐이다. 조사의 원어는 대부분의 영역본에는 'diction'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루카스는 '말을 이해힐 수 있도록 결합시키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고 말하고 있다. 16) 양념이란 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17) 의상계의 원어는 주석이나 문헌에 의하면 가면과 의상이 그의 주요, 또는 유일한 업무 분야였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8) / 천병희 옮김     제7장       비극의 여러 가지 구성 요소를 분석해보았으니 이번에는 플롯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이것이 비극의 최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극이 완결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왜냐하면 전체 중에는 아무런 크기를 가지지 않은 전체1)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체는 시초와 중간과 종말을 가지고 있다.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롯을 훌륭하게 구성하려면 아무 데서나 시작하거나 끝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생물이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이든 간에 그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너무 작은 생물은 아름다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지각은 순간적이므로2) 분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또 너무 큰 생물, 이를테면 길이가 수백 척이나 되는 생물도 아름다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대상은 단번에 관찰할 수 없고, 그 통일성과 전체성이 시계(視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사물이나 생물이 일정한 크기를 가져야 하고 그 크기는 쉽게 통관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어야 하듯이 플롯도 일정한 길이를 가져야 하는데 그 길이는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  길이의 제한은 경연3)과 관람에 관계되는 한, 작시술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1백 개의 비극을 경연해야 할 경우에는,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와 같이 물시계로 시간을 재야 할 것이다.4) 그러나 사물의 성질 자체에 기인하는 제한에 관하여 말한다면, 전체를 쉽게 통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스토리가 길면 길수록 그 크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대체로 말해서 주인공의 운명이 일련의 개인적 또는 필연적 경로를 거쳐 불행에서 행복으로 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뀔 수 있는 길이라면 스토리 크기의 한계로서 충분할 것이다.5)   1) 너무 작아서 구분이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전체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266a 10 참조. 2) 따라서 여러 부분들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례 감각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3) 다른 디오뉘소스 제전에서 개최된 비극 경연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대디오늬소스 제전에서 개최된 비극 경연에는 세 사람의 시인이 참가했고, 하루에 한 시인의 4부작(보통 비극 3편과 사튀로스 극 1편으로 된)이 공연되었다. 4)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극의 '크기'니 '길이'니 하는 말은 제5장에서 비극과 서사시를 비교해서 말할 때 사용한 '길이'란 말과는 의미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9) / 천병희 옮김   제8장         플롯의 통일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한 사람을 취급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사건이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그 중에는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행동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통일된 행동을 이룰 수 없는 것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스전(傳)1)이나 테세우스전2)이나 이와 유사한 시를 쓴 시인들은 모두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헤라클레스가 한 사람이니까 스토리도 당연히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다른 점에 있어서도 뛰어나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숙련에 의했든 친분에 의했든 바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는 를 쓸 때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을 모두 취급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딧세우스가 파르낫소스 산에서 부상당한 일이라든지,3) 출전 소집을 받았을 때 광증(狂症)을 가장한 사건은4)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통일성 있는 행동을 주제로 하여 를 구성했던 것이다. 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 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5)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1) 헤라클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 영웅으로 그에 관한 전설은 서로 상관이 없는  세 가지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일생을 소재로 한 시는 자연히 통일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생애를 소재로 하여 쓰를 쓴 사람은 키나톤(기원전 8세기). 페에산드로스(기원전 7세기 또는 6세기), 파뉘아시스(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숙부(?)로서 기원전 460년 경에 죽었다) 등이 있다. 2) 테세우스 역시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 영웅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크레테의 왕녀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미궁에 갇혀 있던 반인반우(伴人半牛)의 식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는 또한 아테나이의 전설적 건설자이기 때문에 어테나이 인들은 애국심에서 다른 데 속하는 전설도 그에게 귀속시키는 예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관한 시도 자연히 통일을 이루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생애를 시의 소재로 택한 시인으로는 조퓌로스(기원전 6세기), 디필로스(기원전 5세기) 등이 있다. 3) 오딧세우스가 파르낫소스에 사는 외조부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멧돼지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 엄니에 부상당했다는 이야기는 제 19권(394행 이하 및 405행 이하 참조)에 잠깐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가 이 사건을 취급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그가 에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그가 가진 원전에는 이 사건이 빠져 있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제16장에서 당시의 부상에서 생긴 흉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히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부분을 단순한 에피소드로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오딧세우스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두고 트러이아 전쟁에 출전하고 싶지 않아서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의 친구이자 에우보이아 왕 나우폴리오스의 아들인 팔라메데스가 데리러 왔을 떼 소와 나귀를 함께 쟁기에 매고 밭을 갈며 밭이랑에다 씨앗 대신 소금을 뿌리면서 광증을 가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에는 나오지 않고 에 나온다. 5) 하나의 이야기라 해서 반드시 '전체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0) / 천병희 옮김     제9장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사실들로부터 명백한 것은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음 운문을 쓰느냐 아니면 산문을 쓰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헤레도토스의 작품은 운문으로 고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율이 있든 없든 그것은 역시 일종의 역사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1)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다시 말해 이러이러한 성질의 인간은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시가 등장 인물들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고 시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개별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이를테면 알키비아테스는 무엇을 행했는가 또는 무엇을 당했는가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희극의 경우에는 이는 이미 명확해진 사실이다. 왜냐하며 희극에 있어서는 개연적 사건에 의하여 플롯이 구성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맞는 임의의 이름이 등장 인물들에게 붙여지기 때문이다.2) 이것은 풍자 시인들이 특정한 개인에 대하여 시를 쓰던 것과는 다른 수법이다. 그러나 비극의 경우는 기존 인명3)에 집착하고 있다. 그 까닭은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일어나니 않은 것의 가능성은 아직 믿지 않지만 일어난 것은 가능성이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비극에 있어서도 유명한 이름은 한 둘 정도고 나머지는모두 가상적인 이름뿐인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유명한 이름이라고는 아예 하나도 나오지 않는 작품들도 있다. 예컨대 아가톤4)의 의 경우가 그렇다. 이 작품에서는 사건도, 등장 인물의 이름도 모두 시인의 창작이다. 그렇다고 쾌감이 덜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극의 소재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꼭 여기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와 같은 집착은 가소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유명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아는 사람은 소수뿐이고,5) 아는 사람이 소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사실들로부터 명백한 것은 시인6)은 모방하기 때문에 시인이요, 또 그가 모방하는 것은 행동인 이상 시인은 운율보다도 플롯의 창작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하여 시를 쓴다 하더라도 그는 시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에도 개연성과 가능성의 법칙에 합치되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이상 그는 이들 사건의 창직자7)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플롯8)과 행동 중에서 최악의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나는 여러가지 삽화들이 상호간에 개연적 또는 필연적인 관계도 없이 잇달아 일어날 때 이를 삽화적 플롯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졸렬한 시인들은 자신들의 무능으로 인해 구성하고, 우수한 시인들은 배우에 대한 고려에서9)에서 구성한다. 경연을 위하여 작품을 쓰다 보면 우수한 시인들을 종종 무리하게 플롯을 연장하여 사건의 전후 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0)  그런데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다. 이러한 사건은 불의에, 그리고 상호간의 인과 관계 속에서 일어날 때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 사건은 이와 같이 발생할 때 저절로 또는 우연히 발생할 때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의도에 의하여 일어난 것 같이 보일 때 가장 놀랍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르고스에 있는 미튀스11)의 조상(彫像)이 그 조상을 국경하고 있던 미튀스의 살해자 위에 떨어져 그를 죽게 한 사건이 그 한 예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단순한 우연지사로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플롯은 필연적으로 다른 플롯보다 훌륭하게 마련이다.   1) '철학적'이란 말 대신 '학문적'이란 말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개별적인 사실로부터 보편적인 진리를 귀납하기 때문이다. 연대기 편찬자와는 달리 시인은 인생을 알고 보편적인 원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시인은 우리에게 인간성으 변함없는 여러 가지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시적 진실이 현실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딱 잘라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단순한 연대기의 단계를 넘어서서 여러 가지 사건 사이의 복잡한 내면 관계를 규명한다고 할 때 우리는 과연 역사가 단순히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데 그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문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에서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가 시의 플롯만큼 뚜렷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2) 이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이론은 실재 인물들 많이 취급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여기서는 가상적 인물을 통하여 당시의 여러 가지 성격 유형을 묘사하던 '신(新)희극'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신희극의 경우에는 먼저 플롯을 구성한 다음에 그 플롯에 맞는 임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이것은 비극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극의 등장 인물들은 실재 인물들로 생각되긴 하지만 그들은 모두 유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7장에서 비극 작가는 등장 인물의 이름과 삽화를 삽임하기 전에 먼저 수미일관한 플롯의 윤곽을 잡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3) '기존 인명'의 원뜻은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인데 여기에는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전설적 인명과 좁은 의미의 역사적 인명이 모두 포함된다. 4) 아가톤은 3대 비극 작가의 계승자들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시인이다. 그는 기원전 416년에 레이나이아 제전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는데 이 우승을 축하하기 위하여 그의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가 바로 플라톤의 의 배경이다. 그는 비극 사상 처음으로 코로스로 하여금 플롯의 내용과 관계가 없는 막간가(幕間歌)를 부르게 했고(제18장 참조). 처음으로 가상적인 사건과 가상적인 등장 인물로 꾸며진 비극을 소개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40행이 못된다. 에 관해서는 이 작룸의 사건과 등장 인물이 모두 시인의 창작이라는 점만 알려져 있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작품은 후기 아테나이의 비극을 중기 및 신희극 사이에 교량적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5)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그리스 인들은 초보적인 교육만 받아도 시와 친숙해 질 수 있었고, 또 디오뉘소스 제전과  레이나이아 제전 때면 디오뉘소스 극장이 으례 만원을 이루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비극과 친숙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유명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아는 사람은 소수 밖에 없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그리고 비극 시인과 희극 시인의 임무를 비교한 안티파네스의 유명한 단편 에도 비극의 플롯은 청중들에게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작품이 보다 그리 오래 전에 나온 것이 아니란 점을 생각한다면 그 동안 사정이 완전히 달라졋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6) 이 구절에 나오는 '시인'이란 말과 '창작자'란 말의 원어는 같다. 문맥에 따라 '시인' 또는 '창작자'라고 번역하였다. 7) 역사상 많은 사건들 중에는 시인(여기서는 형태적 의미의 역사가도 포함된다)이 그 전후 관계와 인과 관계를 밝힘으로써 스토리를 '창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설명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8) '단순한 플롯'에 관해서는 다음 장 참조 9)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만 하더라도 시인보다는 배우(또는 심판관)의 비중이 더 컸던 것 같다. 아리스토렐레스 1403b 33 참조. 10) 시인들은 경연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하여 예술가로서의 양심을 외면하면서까지 배우들이 요구하는 발언이나 쟁점 같은 것을 무리하게 작품 속에 집어넣는 사례가 비일비배했다. 11) 플루타르코스의 에 따르면 미튀스는 기원전 4백년 경에 아르고스에서 당쟁으로 인하여 피살되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1) / 천병희 옮김     제10장        플롯에는 단순한 것도 있고 복잡한 것도 있다. 그것은 플롯이 모방하는 행동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이 앞서 규정한 바와 같이,1) 연속성2)과 통일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하더라도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가 급전이나 발견3) 없이 이루어질 때 나는 이를 단순한 행동이라고 부르고,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가 급전이나 별견, 또는 이 양자를 다 수반하여 이루어질 때 복잡한 행동이라고 부른다. 급전이나 발견은 플롯의 구성 자체로부터 발생해야만 하므로 선행 사건(先行事件)의 필연적 또는 개인적 결과라야 한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과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 제7장 및 제8장 참조 2) '연속성을 가진다' 함은 플롯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건, 즉 삽화적 사건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같다. 3) 급전과 발전에 관해서는 다음 장 참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2) / 천병희 옮김     제11장       급전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1) 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변화는 앞서 말했듯이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2)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자(使者)는 오디이푸스를 기쁘게 해주고 그를 모친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줄 목적으로 왔지만, 그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또한 3)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륑케우스는 처형되기 위해서 끌려가고 타나오스는 그를 처형하기 위해서 데리고 가던 도중 이에 선행했던 사건의 결과로 후자는 죽고 전자는 구출된다.  발견이란 그 말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무지(無知)의 상태에서 지(知)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등장 인물들이 행운의 숙명을 지녔느냐 불행의 숙명을 지녔느냐에 따라 우호 관계를 맺기도 되고 적대 관계를 맺게도 된다.4) 그런데 발견은 에 있어서와 같이 급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한 것이다. 물론 이와는 다른 종류의 발견도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우연한 사물5)에 관해서도 앞서 말한 바가 어떤 의미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아니했는지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플롯 및 행동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발견은 처음에 말한 발견이다. 이와 같은 발견은 급전과 결합될 때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비극이 이와 같은 행동의 모방임은 이미 규정한 바 있다 - 그리고 불행해지느냐 행복해지느냐 하는 것도 발견과 급전에 의해 야기된 사태의 변화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발견은 인간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한쪽의 신분이 이미 알려져 있는 경우에는 한쪽에서만 상대방의 신분을 발견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양쪽이 모두 상대방의 신분을 별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이피게네이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오레스테스에게 발견되지만 오레스테스가 이피게네이나에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다른 발견이 필요했던 것이다.6)  플롯의 두 부분, 즉 급전과 발견은 이상과 같은 사항에 관한 것이다. 제3의 부분은 파토스8)다. 파토스란 무대 위헤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 또는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을 말한다. 이 가운데 나머지 두 부분, 즉 급전과 발견에 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1) 제7장 마지막 부분에 있는 '불행에서 행복으로 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뀔 수 ---'라는 구절을 말한다. 2) 소포클레스의 911~1805행 참조 오디푸스는 자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아폴론 신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코린토스를 떠난다. 그는 코린토스 왕 폴뤼보스와 왕비 메로페가 자신의 양친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유랑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어떤 삼거리에서 마차를 탄 일행과 마주쳐 서로 길을 비켜라 못 비킨다 하여 하며 언쟁을 하다가, 마차에 타고 있던 노인에게 채찍질을 당하여 격분하여 노인을 때려 죽인다. 그런데 그 노인은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다. 그 뒤 오디푸스는 테바이에 가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그 공으로 테바이의 왕이 되고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그리고 라이오스가 살해될 때 도망쳐 온 라이오스의 시종은 테바이의 신왕(新王)이 라이오스임을 알고 테바이를 떠난다. 그리하여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실부(實父)를 죽이고 생모와 결혼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까지 낳고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여기까지가 의 전제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코린토스에서 한 사자(使者)가 와서 폴뤼보스 왕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코린토스 시민들이 오이디푸스를 새왕으로 모시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오이디푸스는 아폴론 신의 예언 가운데 전반부는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후반부는 실현이 가능하다면서 두려움을 표시한다. 그러나 사자는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볼뤼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가 그의 친부모가 아님을 밝힌다. 그러나 도리어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모든 진상이 밝여짐으로써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맹인(盲人)이 되어 유랑의 길을 떠나고 이오카스테는 목매어 죽는다. 3) 는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인기 작가 테오덱테스(기원전 4세기)의 작품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륑 케우스의 전설은 다름과 같다. 이집트 왕 아이귑토스와 다나오스는 형제 간으로 전자는 50명의 아들을 후자는 50명의 딸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귑토스의 아들은 다나오스의 딸들과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이를 완강히 반대하는 다나오스와 그의 딸들은 친족들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하여 아르고스로 달아난다, 그러자 아이귑토스의 아들들은 결혼하기 위하여 아르고스로 뒤쫓아간다. 그리하여 다나오스는 마지못해 결혼을 승낙하게 되지만 첫날밤에 삳대자를 모두 자살(刺殺)하도록 딸들에게 명한다, 다른 딸들은 모두 부명(父命)에 따르나 휘페름네스트라만은 상대자인 륕케우스를 죽이지 않고 도망시킨다. 이 비밀 결혼에서 두 사람 사이에 아바스라는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 아들이 발각됨에 따라 모든 비밀이 드러나게 되어 륑케우스도 체포된다. 그리하여 륑케우스가 처형되려는 순간 다나오스의 잔인무도한 처사에 분격한 아르고스 시민들은 륑케우스를 구출하고 다나오스를 죽인다. 4) 이온은 자기를 죽이려 하던 여인이 자기 어머니임을 발견한다, 에우리피데스의 참조 아이기스토스는 오레스테스가 죽었다는 길보(吉報)를 전해준 자기 바로 오레스테스 자신임을 발견한다, 소포클레스의 참조. 5)  에 나오는 목걸이처럼 발견의 근거가 되는 표지(標識)를 말한다. 6)  에우리피데스의 720행 이하 참조 이피게네니아는 트로이와 전쟁 때 그리스 군의 총수였던 아가멤논의 딸이다. 그리스 군이 출범하기 위하여 아울리스 항에 집결했을 때 아가멤논은 잘못하여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을 죽였기 때문에 여신의 노여움을 산다. 그래서 아가멤논은 여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하여 딸 이피게네이나를 여신께 제물로 바친다. 그러나 여신은 이피게네이가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 그녀를 납치하여 타우리케로 데리고 가 그곳에 있는 여신의 신전에서 사제(司祭)가 되게 한다. 이피게네이아의 임무는 이곳에 표류해오는 이방인들을 여신께 재물로 바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레스테스와 그의 친구 퓔라데스가 아폴론 신의 신탁에 따라 이곳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女神像)을 훔치러 왔다가 체포되어, 제몰로 바쳐지기 위하여 이피게네이아 앞으로 끌려간다. 그녀는 자기를 제물로 바쳤던 그리스 인들을 마음속으로 늘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두 청년을 보자 왠지 고향 생각이 나서 그들의 고향을 묻게 된다. 두 청년이 그리스 인임을알게 된 이피게네이나는 고향의 안부를 묻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통하여 고향에 있는 동생 오레스테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 가운데 퓔라데스가 가기로 결정된다. 그녀는 도중에 파선(破船)되어 편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에 대비하여 편지의 내용을 읽어준다. 그리하여 오레스테스는 그녀가 자기 누이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어서 오레스테스는 자기가 그녀의 아우임을 밝히게 되는데, 그 방법이 약간 인위적이다. 그는 자기가 오레스테스임을 믿게 하기 위하여 그녀가 '황금 양 모피 이야기'를 수놓은 적이 있다는 사실과 펠롭스의 오래된 창이 그녀의 침실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6장에서 이피게네이아가 오레스테스에게 발견되는 방법은 훌륭하지만 오레스테스가 이피게네이아에게 발견되는 방법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7) 파토스에 관해서는 제13장 및 제14장에 언급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3) / 천병희 옮김     제12장1)       비극의 구성 요소로서 사용되어야 할 여러 부분에 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다.2) 그러나 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비극은 프롤로고스(Prologos)와 삽화(epeisodion)와 엑소도스(exodos)와 코로스의 노래로 구분되며, 코로스의 노래는 다시 등장가(登場歌 parodos)와 정립가(停立歌 stasimon)로 구분된다.3) 이 두가지는 모든 비극에 공통된 것이나 본무대(本舞臺)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애탄가(哀歎歌 kommos)4)는 소수의 비극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프폴로고스는 코로스의 등장가에 선행하는 비극의 전체5)부분이고, 삽화는 코로스의 전체 노래와 노래 사이에 삽입된 비극의 전체 부분이다. 엑소도스는 코로스의 마지막 노래 다음에 오는 비극의 전체 부분이다. 코로스의 노래 가운데 등장가는 코로스의 최초의 발언 전체이고, 정립가는 단단장격 운각과 장단격 운각이 사용되지 않는코로스의 노래이고,6) 애탄가는 코로스와 배우가 합창으로 부르는 비탄의 노래이다. 비극의 구성 요소로서 사용되어야 할 여러 부분에 관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바 있고, 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비극은 이상과 같은 여러 부분으로 구분된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제6장에서 먼저 비극의 본질을 정의하고 이어서 비극의 질적 또는 내적 구성 요소를 구분한 다음, 제7장부터 제14장까지 계속해서 플롯에 관해서 논술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논지상 본론에서 이탈한 감이 없지 않으나, 이미 의 맨 첫 구절과 맨 마지막 구절에서 비극의 질적 요소와 양적 요소의 구분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걸 보면 비극의 양적 부분에 관해서도 설명하려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 위치가 좀 납득하기 어려울 뿐인데, 아마 비극의 질적 구성 요소를 구분한 제6장 다음에 있었더라면 논리상 합당한 위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로 하인시우스(7세기) 같은 사람은 본장은 제6장 뒤로 보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 2) 제6장을 말한다. 3) '프롤로고스'는 드라마의 주제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드라마의 맨 처음에 나오는 독백 또는 대화 부분이다. 테스피스의 창안이란 걸 보면 아주 초기에 속하는 작품에서도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프롤로고스라는 용어는 적어도 아리스토파네스 시대에는 통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아리스토파네스 1119행 참조. 그러나 소수이긴 하나 코로스의 등장가와 더불어 시작되는 비극도 있다. 아이스퀼로스의 및 이 그 예다.  '삽화'는 근대극의 막이나 장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원래 코로스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인 개량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코로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으며 대화 부분은 부차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차츰 개량되어 배우의 역할이 중심이 되고 코로스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삽화란 배우가 연출하는 장면과 대화를 말한다. 삽화란 말은 원래 코로스에게 무엇을 알리기 위하여 배우가 무대 위에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등장가'는 코로스가 자신들의 위치인 오케스트라를 향해 걸어가면서 부르는 노래다.  '정립가'는 코로스가 오케스트라 위에서 부르는 노래인데 원래는 선행 삽화에 대하여 느낀 바를 읊었다. 그러나 아가톤 이후부터는 플롯의 내용과 무관한 막간가(幕間歌)로 변질되었다.(제18 참조)  엑소도스는 원래 코로스가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날 때 부르는 합창가였다. 그러나 시인들 대부분 코로스의 지휘자와 배우 간의 대화로 이를 대신했으므로, 엑소도스는 최후의 정립가 댜음에 오는 모든 장면과 대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4) '본무대'란 코로스의 자리인 오케스트라에 대하여 배우가 공연하는 무대를 말한다. 그리고 본무대 위에서 부르는 노래란 배우가 부르는 노래(여기에는 애탄가와 서정적 독창가가 포함된다)를 말한다.  '애탄가'로 번역한 kommos는 가슴을 치며 애통해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코로스와 배우(보통 한 사람이나 때에 따라서는 두 사람)간의 서정적 대화에 대한 전문 용어이다. kommos는 대부분이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가이므로 나중에 모든 애도가에 대하여 kommos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5) '전체'란 말이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 '다른 부분에 의하여 중단되지 않는' '그 자체로 하나의 통일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는'이란 뜻이 되겠으나 단순히 강조의 의미로도 쓰이고 있는 것 같다. 6) 이 말은 현존 작품에는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많은 작품에서 단단장격 및 장단적 운각을 사용하고 있는 정립가의 행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기원전 4세기의 비극에는 적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18장 마지막 부분에 3대 비극 작가 이후 코로스의 사용법이 많이 변했다는 말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4) / 천병희 옮김     제13장     방금 논의한 것에 이어서 우리는 1) 플롯을 구성함에 있어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 2)어떻게 해야 비극의 효과가 산출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1)  가장 휼륭한 비극이 되려면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하지 않으면 안된다.2)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종류의 모방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세 가지 플롯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  1) 유덕한 자가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포의 감정도 연민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불쾌감만 자아내기 때문이다.  2) 약한 자가 불행하다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비비극적(非悲劇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극의 필요조건을 하나도 구비하고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도 없고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3) 극악한 자가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플롯으 구성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은 있을지 모르나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유사한 자가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된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남은 것은 이들3)이 중간에 있는 인물이다. 덕과 정의에 있어 탁월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4) 때문에 불행을 당한 인물이 곧 그러한 인물인데, 그는 오이디푸스나 튀에스테스5)나 이와 동등한 가문의 저명인ㄷ물들처럼 튼 명망과 번영을 누리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어야 한다.  따라서 훌륭한 플롯은 단일한 결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중의 결말을 가져서는 안 된다6). 주인공의 운명은 불해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7). 그러나 그 원인은 비행에 있어서는 안 되고 중대한 과실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우리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인물이거나. 혹은 그보다 훌륭한 인물이어야야지 그보다 열둥한 인룸이라서는 안 된다. 사실이 또한 이를 증명하고 있다. 초기에 시인들은 암 스토리나 닥치는 대로 취급했으나 오늘날 가장 훌륭한 비극들은 몇몇 가문의 스토리에서 취재하고 있다. 예컨대 알크메온8)이나, 오이디푸스나, 오레스테스9)나 멜레아그로스10)나, 튀에스테스나, 텔레포스11)나 기타 무서운 일을 당했거나 저지른 인물들을 비극의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보아 가장 훌륭한 비극은 이와 같은 플롯을 가진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가 그의 비극에서 이러한 원칙을 따르고, 그의 비국이 대부분 불행한 결말로 끝난다고 해서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올바른 원칙이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증거로, 그러한 비극은 무대상에서 그리고 경연 때 잘하기만 하면 가장 비극적이라는 인상을 주며, 또 에우리피데스는 다른 점에서는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12) 시인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시인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처럼 이중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성인과 악인의 운명을 반대 방향으로 결말짓는 플롯13)의 구성을 제1위로 간주하지만 이러한 플롯의 구성은 역시 제2위이다. 이러한 플롯의 구성이 제1위로 간주되는 것은 관중위 약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인들은 관중에 추종하여 관중이 원하는 대로 작품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쾌감은 비극적 쾌감이 아니라 희극적 쾌감이다. 희극에 있어서는 오레스테스와 아이기스토스14)같이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전해지고 있는 사람들도 종국에 가서는 친구가 되어 퇴장한고 살인자나 피살자는 산 사람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15)     1) 이 두 가지 문제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플롯을 구성하고자 함은 비극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함이고, 또 비극의 효과를 산출하고자 함은 비극의 궁극 목적인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2) 제10장 참조 3) '이들'이란 유덕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킨다. 4) 여기서 '과실'이라고 번역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의견이 구구하다. 일부 학자들은 도덕 및 성격적인 결함을 의미하거나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또 일부 학자들은 그와 같은 도덕적인 의미 없이 단순히 판단 착오나 실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루카스(D.W, Lucas)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후자의 견해가 타당함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이 말이 성격적인 결함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둘째. 의 이 부분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성격이 아니라 플롯이며, 또 제15장에서 성격 문제를 취급하고 있으나 어떤 결함이나 결점에 관한 언급이 없고, 셋째.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자주 인용하는 을 예로 들더라도, 오이디푸스의 불행은 어떤 성격적인 결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 부모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과실에 기인하며, 넷째. 제14장에서 비극에 가장 적합하다고 추천하고 있는 상황도 오이디푸스의 그것과 같은 과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훌륭한 비극은 소수의 가문에서 취재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러한 가문만이 비극적 과실의 공식에 맞기 때문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만약 성격적 및 도덕적 결함이 문제라면 굳이 소수의 가문에 국한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14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가지 플롯에서 보면 이 말은 상대방의 신분을 모르고 있다는 그런 종류의 과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5) 튀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와 더불어 펠롭스의 아들이었다. 형제는 아버지 사후(死後) 번갈아 뮈케네를 통치하기로 약속하나 튀에스테스의 차례가 되자 아트레우스는 약속을 어기고 주권을 앙도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튀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의 처 아에로페를 유혹하여 주권의 상징은 황금 양 모피를 훔치다가 아트레우스에 의하여 뮈케네에서 추방된다, 아트레우스는 후일 그를 다시 불러들인 다음, 그의 자식들을 죽여 그 고기로 그를 대접한다. 튀에스테스는 이 사실을 알고 질겁하고 달아나면서 아트레우스 가(家)를 저주한다, 그는 자기 딸 펠로피아와 교합하여 아이기스토스라는 아들을 얻게 되는데, 아이기스토스는 후일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트로이아로 원정가고 없을 때 그의 처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유혹하여 그가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둘이 공모하여 그를 살해한다. 그러나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후일 누이 엘렉트라의 도움으로 아이기스토스와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소포클레스도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극을 썼는데 단편만 남아 있다.  6) '단일한 결말'이란 주인공의 운명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는 것을 말하고, '이중의 결말'이란 악한 자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선한 자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결말이 '단일'이냐 '이중'이냐 하는 문제는 플롯이 '단순'하냐 '복잡'하냐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7) 비극의 주인공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해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운명이 이렇게 바뀌어야만 비극의 효과를 훌륭하게 산출할 수 있다는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는 제14장에서 오히려 범행 직전에 상대방이 자기 친구 또는 친척임을 발견하고는 범행을 그만두는 플롯을 가장 훌륭한 플롯이라고 칭찬하면서 의 예를 들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머리말 참조. 8) 알크메온은 암피아라오스와 에리퓔레의 아들이다. 암피아라오스는 예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테바이를 공격한 7인' 가운데 아드라스토스만 살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출전을 거부하지만 그의 처(妻) 에리퓔레는 폴뤼네이케스의 목걸이에 매수되어 남편의 출정을 강요한다. 그래서 암피아라오스는 마지못해 떠나면서 자기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어머니를 죽일 것과, 다시 테바이를 칠 것을 아들 알크메온에게 명령한다. 그 뒤 알크메온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테바이에서 전사한 7인의 아들들과 같이 테바이를 치고 돌아와서 어머니를 죽인다. 그리고 에리퀼레의 목걸이는 그 뒤에도 수많은 불행의 원인이 된다. 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작품을 쓴 시인으로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가톤 등이 있다. 9) 오레스테스에 관해서는 본장 주5 참조. 10) 멜레아그로스는 칼뮈돈 왕 오이네우스와 알타이아의 아들로 그가 태어나던 날 운명의 여신들이 나타나 화덕에서 타고 있는 장작개비가 다 타고 나면 아이는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들은 어머니는 타고 있는 장작개비를 난로 속에서 끄집어내어 불을 끈 다음 조심스럽게 감추어둔다. 후일 멜레아그로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오이네우스가 아르케미스 여신에게 재물 바치기를 소홀히 하여 여신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큰 멧돼지 한 마리를 보내 칼뮈돈을 쑥대밭으로 만들게 한다. 이에 멜레아그로스는 많은 영웅들을 모아 그 멧돼지를 잡게 되는데, 멧돼지의 목을 찌른 것은 그였지만 맨 먼저 부상을 입힌 것은 아칼란테라는 처녀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평소부터 그녀를 연모하던 멜레아그로스는 멧돼지의 머리를 그녀에게 준다. 그러나 그의 외삼촌들이 불공평한 처사라며 이를 도로 빼앗으려 하자 그는 외삼촌들을 죽인다. 자기 오라비들이 자기 아들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알타이나는 감추어 두었던 장작개비를 불 속에 던진다. 그것이 다 타고 나자 멜레아그로스는 죽고 그녀도 자살한다. 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비극을 쓴 시인으로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프뤼니코스 등이 있다.    11) 텔레포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로 뮈시아의 왕이다. 그는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로 가던 도중에 뮈시아에 상륙했을 때 아킬레우스와 싸우다가 부상당한다. 그 후 그는 부상을 입힌 자가 상처를 낫게 해 줄 것이라는 신탁에 따라 아울리스 왕으로 아킬레우스를 찾아간다. 그러나 신탁이 말한 부상을 입한 자란 아킬레우스 자신이 아니라, 그의 창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는 아킬레우스의 창에 슨 녹으로 상처를 고치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퀼로스가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2)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결점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a)그의 작품 에서 주인공 메데이나는 자기 자식들을 의식적으로 죽인다. 제14장 참조. b)메데이아가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에게 추방 명령을 받고 난처하게 되었을 때 선행 사건과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이 아테나이의 왕 아이게우스가 나타나 그녀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 제25장 참조. c)에서 사건의 해결이 플롯 자체에 기인하지 않고 기계 장치에 의존한다. 제15장 참조. d)그의 코로스의 노래는 소포클레스의 그것에 비해 플롯과 연관성이 적다. 제18장 참조. e)그의 작품 에서 주인공 이피게네이아의 성격이 일관성이 없다. 제15장 참조. f)그의 작품 에서 플롯이 요구하지도 않는데 멜라닙페의 성격이 쓸데없이 비열하다. 제15장 참조. g)그의 작품 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멜라닙페의 성격이 여자로서는 너무 지적이다. 제15장 참조. h)그의 작품 에서 오레스테스의 신분이 플롯 자체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발견되지 않고 본인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밝혀진다. 제16장 참조. 13) 본장 주6 참조 14) 본장 주3 참조 15) 현존 희극에서는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5) / 천병희 옮김   제 14장      공포와 연민의 감정은 장경(場景)1)에 의하여 환기될 수도 있고 사건의 구성 자체에 의하여 환기될 수도 있는데 후자가 더 훌륭한 방법이며 더 훌륭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경과를 듣기만 해도 그 사건에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단순히 듣기만 해도 느끼게 되는 감정인 것이다. 장경에 의하여 이와 같은 효과를 산출하는 것은 비예술적이며 많은 비용이 든다. 공포를 환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기괴한 것을 보여줄 목적으로 장경을 이용하는 자들은 비극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왜냐하면 비극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쾌감을 구할 것이 아니라 비극에 고유한 쾌감만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극의 쾌감은 연민과 공포에서 오는 쾌감인 바 시인은 이러한 쾌감을 모방에 의하여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시인이 모방하는 사건에는 이러한 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어떤 종류의 사건이 무섭다는, 또는 가엾다는 인상을 주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와 같은 사건에 있어서 당사자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또는 그 어느 것도 아닌 사이일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들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을 때는 피해자의 고통을 제외하고는 그 행동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나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 점은 당사자들이 친구도 적도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비극적 사건이 친근자(親近者)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예컨대 살인이나 기타 이와 유사한 행위를 형제가 형제에게,2) 혹은 아들이 아버지에게,3) 혹은 어머니가 아들에게4) 혹은 아들이 어머니에게5) 행하거나 기도한다면 이와 같은 상황이아말로 시인이 추구해야 할 상황이다.  따라서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오레스테스에게 피살된다든가6) 에리퀼레가 알크메온에게 피살되는7) 것과 같은 전래의 스토리는 그대로 보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전래의 소재를 올바로 취급하는 방법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올바로 취급한다' 함은 무엇을 뜻하는지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보기로 하자.  무서운 행위는 옛 시인들의 작품에서 불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의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행하여질 수 있다. 예컨대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로 하여금 자기 자식들을 죽이게 하는 경우가 그렇다.8)  또 자기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지 알지 못하고 행한 뒤에 나중에 가서야 친근 관계를 발견할 수도 있다.9) 예컨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의 경우가 그렇다. 여기에서는 무서운 행위가 드라마 밖에 있다. 그러나 비극 자체에 있을 수도 있다. 예컨대 아스튀마다스10)의 작품에 나오는 알크메온이나, 11) 나오는 텔레고노스의 행위가 그렇다. 제2의 가능성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고 무서운 행위를 저지르려 하다가, 실행에 옮기기 전에 상대방이 누구인지 발견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 밖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행위는 필연적으로 실행되든지, 실행되지 않든지, 알고 하든지, 모르고 하든지, 그 중 어느 것이기 때문이다.12) 이상의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 최악의 것은 알고 행하려 하다가 실행하지 않은 경우이다. 그것은 불쾌감만 자아내며, 또 아무런 고통도 없기 때문에 비극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13)에서 아이몬이 크레온을 죽이려 하다가 실행하지 않은 것과 같은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그와같이 행동하는 인물을 그린 작품은 없다. 그 다음 가는 것14)은 알고 행하려 하던 행위를 실행하는 경우다. 이보다 나은 것은 모르고 행했다가 행한 뒤에야 발견하는 경우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불쾌감을 자아낼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발견은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것은 마지막 경우이다. 이를테면 15)에서 메로페가 아들을 죽이려다가 아들임을 발견하고 죽이지 않는다든가, 16)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그녀의 적에게 넘겨주려다가 어머니임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18) 소수의 가문만이 비극의 소재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시인들이 소재를 구하다가 이러한 종류의 사건을 자신들의 플롯 속에 구현하게 된 것은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19) 그러므로 시인들은 아직도 이와 같은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 가문을 소재로 하지 않을 수 없다. 플롯의 구성과 플롯이 이러한 종류의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해선 이상으로 충분히 이야기했다.     1) 제18장을 읽어 보면 극적 효과를 장면이나 분장에 의존한 작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이스퀼로스의 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임부들이 유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다른 작품 에서도 소의 머리를 한 이오와 오케아노스의 날개 달린 말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이스퀼로스만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케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1대 1로 싸우다가 둘 다 죽는다. 3) 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한다. 4) 알타이아는 아들 멜레아그로스를 죽인다. 제13장 주 10 참조 5) 아이스퀼로스는 과 소포클레스 및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오레스테스는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다. 6) 제13장 주5 참조 7) 제13장 주8 참조 8) 에우리피데스의 1236행 이하 참조 메데이나는 콜키스의 공주인데 황금 양 모피를 구하기 위하여 그곳을 찾아온 이아손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고국과 부모형제를 배반하고 그를 따라 그의 고국인 이올코스로 달아난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자 남편을 위하여 그의 숙부 펠리아스를 죽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추방되어 코린토스로 도망쳐 그곳에서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여기까지가 에우리피데스의 작 의 전제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린토스 왕 크레온이 이아손에게 메데이아와 헤어지고 자기 딸과 결혼하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원래 야심이 많은데다 메데이아에게 싫증이 난 이아손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메데이아의 복수가 겁이 난 크레온은 그녀와 그녀의 두 자식에게 추방 명령까지 내린다. 배은망덕한 남편의 처사에 격분한 메데이아는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술과 간계(奸計)를 써서 코린토스의 공주를 죽인 다음 자기 자식들을 의식적으로 죽인다. 9) 오이디푸스는 어떤 삼거리에서 라이오스와 만나 서로 길을 비키라고 시비하다가 자기 아버지인 줄 모르고 그를 죽인다. 이 무서운 살부 행위는 비극 의 전제 부분에 속하며 비극 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10) 아스튀다마스는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다작(多作)의 비극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에서 알크메온은 에리퀼레를 어머니인 줄 모르고 살해한다. 11) 텔레고노스는 오뒷세우스와 키르케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아버지를 찾아 이카케에 갔다가 아버지인 줄 모르고 그를 살해한다. 이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는 는 현존하지 않으나 소포클레스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12)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방이 누구인 알고 행하려 하다가 실행하지 않은 제4의 가능성을 빠뜨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확실히 비극적인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13) 소포클레스의 1231행 이하 참조 오이디푸스의 아들 폴뤼네이케스는 형 또는 아우닝 에테오클레스에게서 왕위를 돌려받기 위하여 6인의 장수를 데릭 테바이로 진격했다가 에테오클레스와의 1대 1 싸움에서 둘 다 전사한다. 그러자 새로 왕이 된 크레온은 테바이를 위하여 싸우다 죽은 에케오클레스는 후하게 장사지내되 테바이를 치러 왔다가 죽은 폴뤼네이케스의 시체는 땅에 뭊디 말고 들에 그냥 내버려두라는 포고를 내린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혈육의 정에 끌려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들에 버려진 오라비 폴퓌네이케스의 시체를 몰래 묻어준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크레온은 그녀를 생매장 형에 처한다. 그러나 평소 그녀를 연모하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그녀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심한다. 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은 크레온은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안티고네가 생매장된 곳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하이몬은 아버지를 보자 격분하여 칼을 빼들고 덤벼든다. 크레온은 놀라 도망치고 하이몬은 그 칼로 자기 가슴을 찔러 이미 목매어 죽은 안티고네의 발 아래에 쓰러진다. 14) 최악의 것 다음 가는 것, 즉 그 다음으로 나쁜 것이란 뜻이다. 15) 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 반역자 폴뤼폰테스는 멧세네 왕 크레스폰테스를 살해하고 왕비 메로페를 빼앗는다. 왕이 살해될 때 두 아들도 같이 살해되고 막내아들 아이귑토스만 어머니의 도움으로 외조부인 아르카디아 왕 큅셀로스에게 도망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폴뤼폰테스는 이 아이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고 사방으로 수배케 한다. 많은 세월이 흘러간 뒤 이미 성인이 된 아이귑토스는 복수하기 위해서 멧세네로 돌아와 일단 적을 안심시킬 목적으로 자기는 아이큅토스를 잘 아는데 곧 잡아 바치겠다고 장담한다. 이 말을 듣고 놀란 메로페는 아이귑토스에게 주의들 주기 위하여 노복(老僕) 한 명을 아르키디아로 보내는데, 그곳은 그곳대로 아이큅토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야단들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메로페는 아이귑토스를 잡아 바치겠다고 장담한 그 젊은이가 아이귑토스를 이미 죽인 것으로 단정하고 복수하기 위하여 노복을 데리고 밤에 그 젊은이의 침실로 잠입한다. 그를 죽이려고 메로페가 도끼를 쳐드는 순간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본 노복은 그가 바로 아이큅토스 자신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어서 그들은 힘을 모아 소기의 복수를 단행한다. 16) 제11장 주6 참조 17) 에 관해서는 작가도 작품 내용도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헬레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남편 아타마스로부터 이혼당한 네펠레는 자기 두 자녀 프릭소스와 헬레를 황금 털을 가진 날개 달린 양(羊)에 태워 콜키스로 보내는데 헬레는 도중에 바닷물에 떨어져 죽고 - 그래서 이 해협을 헬레스폰토스('헬레의 바다'란 뜻)라고 부른다.  - 프릭소스는 무사히 도착한다. 이 양은 그 뒤 제우스 신에게 바쳐졌는데 이 양의 양피가 저 유명한 '황금 양 모피'이다. 그러나 이 전설은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18) 제13장 참조 19) 일반적으로 경험이 이론에 앞서듯이 비극 시인들도 작시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 의하여 비극의 효과를 산출하기에 적합한 소재를 구하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만일 그들이 작시 이론에 의하여 작품을 썼더라면 자신들이 원하는 플롯을 무엇이나 창안해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6) / 천병희 옮김     제15장       성격에 있어서는 추구해야 할 점이 네 가지가 있다. 그 중 첫째는 성격이 선량해야 한다는 것이다.1) 앞서 말했듯이2) 등장 인물의 말과 행동이 어떤 의도를 명시할 경우 그는 성격을 가지는데 이때 의도가 선량하면 성격도 선량할 것이다. 선량한 성격은 모든 종류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와 노예도 - 비록 전자는 열등한 존재이고 후자는 전혀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 선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격은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여자도 용감할 수 있다.3) 그러나 용감하거나 똑똑한 것은 여자의 성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셋째는 작품 속에 나오는 성격이 전래의 스토리에 나오는 그 원형(原型)과 유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방금 규정한 바 있는, 성격이 선량하고 적합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넷째는 성격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일관성이 없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면 그는 시종일관 일관성이 없어야 한다.  를롯이 요구하지도 않는 비열한 성격의 예는 4)의 메넬라오스에게나 볼 수 있고, 맞지 않고 부적합한 성격의 예는 5)나오는 오뒷세우스의 통곡과 멜라닙페6)의 변론에서 볼 수 있으며, 일관성 없는 성격의 예는 7)에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이피게네이아는 나중의 이피게네이아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성격에 있어서도 사건의 구성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필연적인 것 혹은 개연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할 때 그것은 그의 성격의 필연적인 혹은 개연적 결과라야 하며, 두 사건이 이어서 일어날 때는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라야 한다. 따라서 사건의 해결도 플롯 자체에 의하여 이루어져야지, 8)나 9)에서 그리스 군의 출범이 저지당했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계 장치10)에 의존해서는 안 됨이 명백하다. 기계 장치는 드라마 밖의 사건, 즉 인간이 알 수 없는 과거의 사건이나 예언 또는 고지(告知)할 필요가 있는 미래의 사건에 한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11)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신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비극 내의 사건에는 사소한 불합리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소포클레스의 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비극 밖에 있어야 한다.12)  비극은 보통 이상의 인간의 모방이므로 우리는 훌륭한 초상 화가들을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훌륭한 초상 화가들은 실물의 고유한 형상을 재현함에 있어 실물과 유사하게 그리되 실물보다 더 아름답게 그린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성미가 급한 사람이나 성미가 느린 사람이나 이와 유사한 성격상의 특징을 가진 인물로 그리되 선량한 인물로 그려야 한다. 우리는 그 예를 아가톤13)과 호메로스가 그린 아킬레우스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상과 같은 여러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밖에도 작시술에 직접 관련되는 범위 내에서의 무대 효과14)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점에 있어서도 종종 과오를 범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관해서는 이미 간행된 바 있는 저술15)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1) 비극이 소기(所期)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선량한 성격이 반드시 필요하다. '등장 인물의 말과 행동이 어떤 의도를 명시하는 경우 그는 성격을 가지게 마련이므로' 성격은 곧 의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만일 주인공이 나쁜 의도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그 결과 불행해진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연민이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불쾌감만 자아낼 것이다. 그래서 제13장에서도 비극의 주인공은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은 원래 종교 의식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에 나오는 이아고같은 악당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엄숙한 예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제6장 참조 3) 루카스의 견해 4)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한 지 6일째 되던 날 아르고스 시민들은 모친 살해범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를 돌로 쳐 죽이기로 결정한다.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두 남매는 마침 트로이아 원정에서 돌아온 숙부 메넬라오스가 자신들의 행위를 변명해주리라 믿고 그에게 구원을 청한다. 그러나 가련할 정도로 비겁해진 메넬라오스가 그들의 요청을 외면한다. 5) 는 티모테오스(제1장 주2 참조)의 디튀람보스인데 이 시에서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전우들이 괴물 스퀼라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보고 통곡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오뒷세우스 같은 영웅이 통곡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과 그러한 오뒷세우스는 우리가 전설을 통하여 알고 있는 오뒷세우스와 다르다는 점이다. 스퀼라는 멧시나 해협의 동굴에 사는 괴물인데 지나가는 선원들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호메로스는 제12권 85행 이하에서 오뒷세우스의 배가 이 해협을 통고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6) 현재 단편만이 남아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의 주인공 메라닙페는 탯살리아 왕 아이올로스의 딸로 해신(海神) 포세이돈과 교합하여 쌍둥이를 낳게 되자 이들을 외양간에 감추어두고 쇠젖을 먹여 기른다. 이 사실을 안 아이올로스가 쌍둥이를 내다버리게 하고 그녀를 감금하려 하지 그녀는 쌍둥이는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아니라 소가 낳은 아이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교묘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성격이 여자답지 않게 지적이란 점이다. 7) 에우리피데스의 1211행 이하 및 1306행 이하 참조. 트로이 원정군이 아울리스 항에서 순풍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아가멤논은 아르케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을 쏘아 죽이고 나서 여신 자신도 더 훌륭하게 쏘아 맞힐 수는 없을 것이라고 호언한다. 이에 노한 여신은 역풍을 보내 그리스 군이 출범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예언자 칼카스에게 묻자 그는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기 전에는 여신의 노여움을 풀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가멤논은 중의에 따라 마지못해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킨다는 핑계로 이피게니아를 그곳으로 데려오게 한다. 그곳에 도착하여 내막을 알게 된 이피게네이아는 제발 살려 달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하다가 갑자기 심기일전하여 조국을 위하여 제물이 되기를 자원한다. 8) 에우리피데스의 1317행 참조 메데이아는 배은망덕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마술의 드레스로 먼저 자기 남편과 결혼하게 될 코린토스의 공주를 죽인 다음 이어서 자기 자식들을 죽인다. 이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남편이 그녀를 잡으려고 하나 그녀는 이미 마술로 불러낸 태양신 헬리오스의 수레를 타고 공중에 떠 있다. 9)  제2권 110~206 참조,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의 포위를 풀고 귀국하려 할 때 아테네의 신이 나타나 오뒷세우스를 통해서 그들의 출범을 제시한다. 10) '기계 장치'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구구하나 사람이나 신이 공중에 떠 있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기중기인 듯하다. 이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는 기계 장치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에우리피데스 이후부터는 많이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무대에서 사용된 기계 장치 또는 장치는 여러 종이 있는데, geranos는 아이스퀼로스가 고안해냈다고 하는 장치로 배우를 무대 위로 들어올리는 데 사용되었다고 하며, theologeion은 무대의 지붕으로 신이 등장할 때 사용되었다고 하며, ekkyklema는 집이나 신전(神殿) 내부를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조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에우리피데스 이후의 시인들은 사건의 해결을 플롯의 구성에 의존하지 않고 신에게 맡기는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자연히 기계 장치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계 장치를 타고 나타나는 신을 테우스 막스 아키나라고 부른다. 11) 예를 들면 에우리피네스의 의 첫머리에는 헤르메스 신이, 그리고 끝 부분에는 아테네 여신이 나타나 인간이 알 수 없는 일을 알려준다.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첫머리에도 아테네 여신이 나타나 인간으로는 알 수 없는 미래사를 알려준다. 12) 제14장 주9 참조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죽음에 대하여 백방으로 조사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조사를 게을리 한다. 그리고 자기가 노상에서 죽인 노인이 라이오스가 아닐까 하고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살인 사건은 드라마가 시작되기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독자나 관객은 이 불합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13) 아가톤이 어떤 작품에서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다루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4) 장경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동작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5)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권으로 된 대화편 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7) / 천병희 옮김     제16장       발견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1) 발견의 종류에 관하여 말한다면 1) 맨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가장 비예술적인 것으로서 시인들이 창의(創意)의 부족으로 인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인데, 그것은 표지(標識)에 의한 발견이다. 이들 표지 가운데 일부는 '땅에서 태어난  자들이 지니고 있는 창 끝'2)이나 카르키노스3)의 4)에 나오는 '별'5)과 같이 선천적인 것이고 다른 일부는 후천적인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은 흉터와 같이 신체에 있는 표지이고 어떤 것은 목걸이6)이나 또는 7)에서 발견의 근거가 된 조각배처럼 외적인 것이다. 이러한 표지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우열이 있다. 예컨대 오뒷세우스는 똑같은 흉터에 의하여 유모에게도 발견되고,8) 돼지치기에게도 발견되지만9) 그 방법이 서로 다르다. 남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지를 사용하는 발견이나 이와 유사한 발견은 모두 비예술적이다. 이에 비해 10)에서와 같이 급전의 장면에 이루어지는 발견은 훌륭하다,  2) 그 다음은 시인에 의하여 조작된 발견인데, 그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예술적이다. 예컨대 에서 오레스테스는 자기가 오레스테스임을 밝힌다. 이피게네이아는 편지에 의하여 발견되지만 오레스테스는 플롯이 아니라 시인이 요구하는 바를 스스로 말한다.11) 따라서 이것은 처음에 말한 결점과 대동소이하다. 왜냐하면 오레스테스는 어떤 표지를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2) 소포클레스의 13)에 나오는 '베틀북 소리'도 역시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3) 세 번째 것은 기억에 의한 발견인데, 그것은 무엇을 보자 지난 일이 회상되어 이로 인하여 발견되는 경우다. 예컨대 디카이오게네스14)의 에서 주인공은 초상화를 보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또 15)에서 오뒷세우스는 키타라의 탄주를 듣고 지난 일이 생각나 눈물을 흘린다.16)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발견된다.  4) 네 번째 것은 추리에 의한 발견이다. 예컨대 17)에서 '나를 닮은 사람이 왔다 갔다, 나를 닮은 사람은 오레스테스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레스테스가 왔다갔음에 틀림없다'고 추리한다. 소피스트 폴뤼이도스가 에 관하여 제안한 것18)도 이 경우에 속한다. 왜냐하면 오레스테스가 '누이는 제물이 되었다. 나도 누이와 같이 제물이 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또 테오덱테스19)에서 '아들을 찾으로 왔다가 내가 죽는구나'라고 추리한 것이다. 에서 여인들이 어떤 장소를 보고 전에도 그곳에서 버림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자신들의 운명을 추리한 것은 모두 발견의 근거가 되었다.20)  5) 또 상대방의 오류 추리에 의한 복잡한 발견도 있다. 추리는 그 예를 21)에서 볼 수 있다. 오뒷세우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활에 대해서 자기는 그 활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활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 추리이다.  6) 모든 발견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소포클레스의 이나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처럼 사건 자체로부터 유발되는 발견인데, 이 경우에는 사건의 자연스런 진행에 위하여 경악이 야기된다. 왜냐하면 이피게네이아가 집으로 편지를 보내려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발견만이 조작된 표지나 목걸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다음가는 것은 추리에 의한 발견이다.   1) 제11장 참조 2) 튀로스 왕 아게노르의 아들 카드모스는 부명(父命)에 따라 유괴 당한 누이 에우로페를 찾아나섰다가 아폴론 신의 신탁에 따라 누이 찾기를 그만두고 카드메이아(후일 테바이 성)을 건설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서 군신(軍神) 아레스의 용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 그가 아테네 여신의 지시에 따라 그 용의 이빨들을 땅에 뿌리자 땅에서 무장한 전사들이 나온다. 카드모스가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자, 그들은 서로 죽이기 시작하는데 마지막에는 5명만 남게 된다. 이 5명의 Spartoi(뿌려진 자들이란 뜻)들이 카드모스를 도와 카드메이아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후일 테바이의 귀족이 된다. 이들의 몸에는 창끝 모양의 사마귀가 있었다고 한다.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크레온은 이 사마귀를 보고 아이몬과 안티고네의 자식을 알아본다. 3) 카르키노스는 기원전 4세기의 비극 시인이다. 4) 튀에스테스에 관해서는 제13장 참조 5) 탄탈로스는 신들의 전지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아들 펠롭스를 죽여 그 고기로 신들을 대접한다. 다른 신들은 미리 알고 먹지 않지만 납치된 딸 페르세포네 때문에 깊은 수심에 잠겨 있던 여신 테메테르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어깨 부분을 먹는다. 그뒤 펠롭스는 원상복귀 되고 어깨 부분은 상아로 대치된다. 이 일이 있은 후로부터 펠롭스의 자손들은 어깨에 별 모양의 흰 반점이 있었다고 한다. 6) 현존 비극 가운데 목걸리에 의하여 발견되는 예는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뿐이다. 7) 살모네우스의 딸 튀로는 해신 포세이돈과 교합하여 필리아스와 넬레우스 라는 쌍둥이을 낳게 되나 계노 시데로의 학대 때문에 쌍둥이를 조각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낸다. 현재 단편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는 어머니가 이 배를 보고 자식들을 알아본다. 8)  제19권 386~475 참조 오뒷세우스는 다년간의 유랑 끝에 거지로 변장하고 고향에 돌아온다. 당시에는 하인을 시켜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풍속이 있었는데 마침 오뒷세우스의 발을 씻어주게 된 하녀는 오뒷세우스의 어릴 때의 유모였다. 유모는 그의 발을 씻다가 그가 옛날 파르낫소스 산에서 사냥하다가 멧돼지에게 부상당한 흉터를 보고 그가 주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른바 란 의 이 부분을 말한다. 9)  제21권 205~225행 참조 오뒷세우스는 거지로 변장하고 자기 집에 머무는 동안 자기 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온갖 횡포를 부리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을 죽이자면 몇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옛날부터 집에거 가축을 치던 하인들을 찾아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 증거로 다리의 흉터를 보여준다. 10) 본장 주8 참조 11) 에우리피데스의 727행 이하 및 800행 이하 참조. 그리고 제11장 주6참조 12) 과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 기준은 엄격한 감이 없지 않다. 사실 오레스케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방법은 그러한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어쩌면 그 이상 더 훌륭한 것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는 이피게네이아에게 그들의 고향집에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실을 말한다. 그런데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같은 방법은 남을 믿게 하기 위하여 표지를 제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비난하고 있다. 13) 소포클레스의 는 단편만이 남아 있는데 그 소재가 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 트라제의 왕 테레우스는 아테나이의 전설적인 왕 판디온의 딸 프로크네와 결혼하나 처제 필로멜레를 연모하게 된다. 그 뒤 그는 처제를 유혹하여 폭행한 다음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그녀의 혀를 자르고 감금한다. 그러나 필로멜레는 자신의 불행을 베로 짜서 프로크네에게 보낸다. 그래서 이 사실을 할게 딘 프로크네는 필로멜레를 찾아낸 다음 그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자기와 테레우스 사이에서 난 아들 이튀스를 죽여 그 고기로 남편을 대접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테레우스가 두 자매를 죽이려 하자 제우스 신은 테레우스는 오디새가 되어 두 자매를 쫓게 하고, 필멜레는 제비가, 프로크네는 꾀꼬리가 되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게 했다. '베틀북 소리'란 직물을 짤 때 베틀의 북에서 나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로멜라가 프로크네에게 알리기 위하여 자신의 불행을 그려 넣은 직물을 비유해서 이른 말이다. 14) 다카이오게네스는 기원전 5세기 후반의 비극 시인인데 그의 작품 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테우크로스의 이야기에서 취재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형 아이아스와 함께 그를 살라미스에서 추방한다. 그래서 그는 퀴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그곳에 살라미스를 세우고 살다가 아버지의 사후에 변장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의 초상화를 보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신분이 밝혀졌다. 15) 란 오뒷세우스가 알키노오스 왕에게 자신의 지난 일을 이야기해주는, 의 제8권부터 제12권까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따라서 '알키노오스에게 해준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16)  제8권 521행 이하 참조 오뒷세우는 가인(歌人) 데모도코스가 자신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행한 일들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린 까닭에 신분이 밝혀진다. 17) 아이스퀼로스의 166~234행 참조 이 작품은 오레스테스가 누이 엘렉트라의 도움으로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간부(姦夫) 아이기토스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고향인 아르고스에 잠입한 뒤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자신의 머리털를 잘라 바친다. 이때 누이 엘렉트라가 시녀들을 데리고 제주를 바치려 오자 그는 몸을 숨긴다. 오레스테스의 머리털를 본 엘렉트라는 그것이 자기 머리털과 같은 빛깔임을 발견하고는 오레스테스가 돌아온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리고 실제로 오레스테스가 나타나자 그녀는 자신의 추리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증거를 요구한다. 18) 폴뤼이도스에 관해서는 의 다른 곳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폴뤼이돗의 제안이란 에서 오레스테스가 제물이 되려는 순간 그로 하여금 '누이는 제물이 되었다. 나도 누이와 같이 제물이 되려고 하는구나'라고 부르짖게 하면 일찍이 우울리스에서 제물이 된 적이 있는 이피게네이아는 그가 자기의 오라비임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19) 테오덱테스에 관해서는 제11장 주3 참조 20) 와 에 관해서는 달리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문맥으로 보아 이 두 경우 다 무의식 중에 큰 소리로 자신의 운명을 추리한 것이 발견의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1) 도 작가와 내용을 알 수 없으나 트로이아 원정에서 귀국한 오뒷세우스가 사자(使者)로 가장하여 자기 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속이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8) / 천병희 옮김   제17장      시인은 플롯을 구성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1) 되도록이면 실제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아야 한다. 그렇게하면 시인은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모순된 점을 관과하는 일이 가장 적을 것이다. 카르키노스1)에 대한 비난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암피아라오스가  신전에서 돌아오는 장면이 문제의 장면인데2) 이 장면은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실제로 보지 않았더라면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무대 위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관객들은 이 사건의 모순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2) 또한 시인은 되록이면 작중 인물의 제스처로 스토리을 실연(實演)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재능이 같은 경우에는 표현되어야 할 감정을 실제로 느끼는 쪽이 더 설득력있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격정과 분노는 이러한 감정을 실제로 느끼는 사람에 의하여 가장 절실하게 그려진다. 그러므로 작시술(作詩術)은 남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나 광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전자는 쉽사리 필요한 기분이 될 수 있고, 후자는 정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3)  3) 스토리에 관하여 말하자면, 기존의 것이든 시인 자신의 창작이든 간에 먼저 대체적인 윤곽을 잡은 다음 삽화를 삽입하여 늘여야 한다. 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대체적인 윤곽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처녀가 제물로 바쳐졌다가 그녀를 제물로 바친 사람들로부터 감쪽같이 납치되어 이국(異國)으로 옮겨진다. 그곳에는 이방인들을 여신에게 제물로 자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 의식을 주관하는 여사제가 된다. 후일 여사제의 오라비가 이곳에 오게 된다. 그러나 신탁4)이 모종의 이유에서 그를 그곳에 가게 한 사실과 그가 간 목적은 플롯 밖에 있다.5) 그는 도착하자마자 체포되고 제물이 되려는 순간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그 방법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나6) 또는 폴뤼이도스가 제안한 것처럼7) '그러니까 나도 누이처럼 제물이 될 운명이었구나'라는 있음직한 부르짖음에 의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신분을 밝힘으로써 구원받는다.  그 다음에 등장 인물들에게 적절한 이름을 붙이고 삽화를 삽입해야 한다. 이때 유의해야 할 점은 삽화들이 오레스테스가 광증으로 인하여 체포되는 삽화8)나 세정(洗淨)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삽화9)처럼 플롯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삽화가 짧으나 서사시는 삽화에 의하여 길어진다. 의 줄거리는 길지 않다. 어떤 사람이 다년간 이역(異域)에 나가 있다. 그는 늘 해신(海神) 포세이돈의 감시를 받고 있고 고독하다. 그런가 하면 고향에서는 아내의 구혼자들이 그의 재산을 탕진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 모의하고 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와 사진의 신분을 밝히고 적에게 덤벼든다. 그는 구원받고 적은 살해된다. 이것이 골자고 나머지는 삽화다.   1) 카르키노스에 관해서는 제16장 주3 참조 2) 암피아라오스에 관해서는 제13장 주8 참조 암피아라오스의 전설에서 취재한 카르키노스의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문맥으로 보아 카르키노스는 읽을 때 눈에 뜨지 않으나 무대 위에서는 눈에 띄는 그러한 종류와 과오를 범했던 것 같다. 3) '광기 있는 사람'이란 단순히 격정적인 사람이란 뜻인 것 같다. '쉽사리 필요한 기분이 될 수 있다'함은 작가가 감정이입의 능력을 통하여 여러 가지 역(役)에 쉽사리 적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상에서 벗어난다'함은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정상적인 심적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 양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대조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천재가 광기와 통하듯이 일맥상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에우리피데스의 에 나오는 신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를 죽이지만 그 뒤부터 늘 복수의 여신들의 추격을 받는다. 복수의 여신들 중 일부는 아테네 여신의 주재 아래 아테나이의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열린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고 추격을 그만두지만, 다른 일부는 계속해서 그를 추격한다. 그래서 오레스테스는 아폴론 신에게 구원을 청한다. 그래서 아폴론 신은 그에게 타우리케로 가서 그곳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女神像)을 가져오면 모든 불행으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내린다. 5) '플롯 밖에 있다'함은 플롯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은 아니라는 뜻이다. 즉 오레스테스는 다른 사명을 띠고도 그곳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6) 제11장 주6 참조 7) 제12장 주18 참조 8) 
2    시 창작 이론 모음 [스크랩] 댓글:  조회:3120  추천:0  2018-02-20
시 창작 이론 모음   1. 시를 쓸 때 습득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          시창작 리론 모음 A. 습득해야 할 것,  1)  시를 언어에서 출발하지 말고 '시적인 것'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황지우    2)  상상에 의한 의미의 확장조차도 기반은 '사실적 관찰'에서 출발해야한다    3) 대중성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되 건강해야 한다. 대중성이란 말로 대중에게    영합하거나 병든 미적 관념과 가치관에 편승하지 말아야 한다.    4)  상투성의 탈출 - 슬픔을 슬픔으로 노래하지 않는 것.    5) 시의 서사의 은닉(이야기의 감축) - 수사적 책략으로 이야기의 결핍을 추구하는     서사양식. 이야기의 추방(생략, 압축, 절단)과 변환을 수반.    6)  시는 생략함으로써 유혹한다. 시는 정보의 과소 공급을 통해서 오히려 많은 것      을 이야기하는 언술 형식이다.    7)  '에둘러 가기'를 포기할 때, 시는 궁핍이 되고 그 존재의 광휘와 넉넉한 까다로       움을 상실한다.    8)  시는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좁게는 작품 차원에서, 넓게는 역사의 큰 문맥까      지 전체성을 지향하고 완결성을 향해 나아간다.    9)  시가 보편을 추구하면 추상에 떨어진다. 추상은 시의 지옥이다. 시가 어떤 보편      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구체성과 특수성의 힘을 통해서다.    10)  이미지의 구체성 - 몽롱하지 않음 (시의 한 방법으로서의 '애매성'은 이미지의      모호한 표현을 말함이 아니고 상상에 의한 의미의 확장 가능성을 말함이다.)    11) 시어는 추상어 보다 '구체어'를, 보편어 보다 '특수어'를 쓴다.    12)  시인의 주장은 추상적 구호 없이도 아주 절절히 한 이미지를 통해 전달된다.    13) 시인의 관념보다 구체를 더 지향한다.    14)  추상성 - 큰 고민 없이 어떤 '느낌'만으로 시를 채우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       다 (진정성의 결여)    15)  시는 나의 감정의 서술이 아니고 독자의 감정의 획득이다.    16) 잘된 시 좋은 시는 그것이 시인 자신의 감동에 머물지 않고 그 글을 읽는 사람     에게도 똑 같은 정서적 반응으로 자리하게 된다.    17) 시의 질을 따지는 비평적 장치들 - 시적 진술의 평면성 극복 여부, 간접 화법     의 정도와 효과, 이미지 배치법, 어사 선택의 연마도, 비유/상징 운용의 기술 수     준, 긴장/갈등의 상승적 해소와 종말    18) 시의 육체를 구성하는 세가지 == 1) 묘사와 비유로부터 발생하는 이미지 = 2)      서사의 실제적 이야기 = 3) 리듬과 어조에서 태어나는 감정 - 이은봉    19)  서정시와 음량은 늘 '아직도 작은 목소리'이다  20)  문학이 문학적 진술의 모호성이라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서 '       신비적 사유양식'을 채택하는 일과 '신비주의' 그 자체에 빠져드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니다 .       - 역설적 어법을 통한 신비주의        - 은유적 신비주의    21)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라도 그 노래가 이미 불리워진 노래의 변조에 지나지 않      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문학은 일차적으로 창조적 배반과 전복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22)  작가는 그것의 전범을 왜곡하고 비틀어 새로운 글쓰기의 모형을 만들어 내야       진정한 작가의 가능성을 찾게 될 것이다.    23)  '관습적 사유에 대한 반란으로서의 시'    24)  줄광대는 몸무게가 쏠리는 반대쪽으로 부채를 펼친다. - 시인의 부채는?    25)  좋은 시인은 그의 내면적 상처를 반성,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      할아는 사람이다 - 대부분 시인들은 자기의 감성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      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벗지 못      한다    26)  나의 이야기로만 그치는 것과 나의 이야기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구      별된다.    27)  '전형화'의 문제    28)  어두운 시대, 시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상징이다. 소수인의 독점물일지라도 일      정한 긴장과 자기통제 아래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문학은 암울한 시대 상황과      싸우는 유일한 부드러움이요 무기다 29)  '모더니스트'들이 사상적 빈약의 상태에서 육체의 세련미를 추구하느라 모호한      수사학적 유에 집착해 왔다면 '사실주의 자'들은 언어의 의미망에 대한 필요       이상의 집착과 문학적 상상력의 빈곤에 의한 상투성에 매몰되어 왔다.    30) 시의 언어는 생리적으로 체험이나 사물의 구체를 겨냥한다.    31)  담고자하는 내용에 압도되어 언어의 힘이 과소 평가되다 보면 일종의 '스토리      텔링'이 되기 쉽다. 짜임새도 있으며 건강한 주제 의식도 살아 있는데 전체적       으로 건조하고 말과 말 사이에 탄력이 붙지 않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이다. -       선취된 관념에 구속됨    32) 서정시는 이야기 내용 또는 교설적인 측면을 가능한 한 제한해야 하는 양식이       다.    33)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수사력으로 대상이 가벼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런 은유의 세계를 버리고 되도록 평이한 표현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34) 자신이 사용하는 말에 자신의 체중이 실리고 있는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35) 모름지기 시란 그 핵이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낌'에 있는 탓이다. 36) 민족문학의 시적 흐름이 성급한 '개념적 진술'로부터 이와 같이 완벽한 '형상화'     쪽으로 기운 것은 대단한 진화라고 불 수 있다.    37)  '80년대 민중시의 구조 중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스토리 위주'의 시적 진술이      지닌 장점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38) 자기가 겪은 체험을 그대로 시로 옮기려는 '익숙한 것'에의 유혹에서 탈피하여     체험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시작의 확보와 함께 시를 읽는 재미와 긴장을 적극     적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39)  적절한 의성, 의태어 - 정물화처럼 되버릴 가능성이 있었던 시를 동적으로 살       려 놓기도 한다.    40)  악보가 부여되지 않은 언어는 또 그것 나름의 울림을 갖는다 - 음악성 고려.    41)  서정적 주인공의 등장과 감춤.    42)  어떤 서정적 주인공을 등장시킬 것인가를 고려.   43)  민영의 초기 시 - 말을 아끼며 체험적인 이미지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절제      되고 압축된 생략적 구도의 행간에 여백의 공간 또는 침묵의 공간이 펼쳐져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단시에서 볼 수 있는 호홉의 짧음과 이차원적      구도의 평면성에 의해 어떤 감상주의적 한계가 지적될 수있다.      (압축된 복합성이 없는 단순성의 경계)    44)  '시대와의 불화'는 시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독자와의 불화'는 시인의      창조적 노력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    45)  이즈음 젊은 시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현학성와 난해취미 그리고 요설이나     수다스러움이 없어서 좋다.    46)  장중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장중하기 힘든 법이건만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      서 이슬처럼 맑은 울림, 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없는'둥근소리'여야 한다. 길고 긴 여운을 지닌 소리여야 한다.-박노해   47)  형상과 의미 혹은 상상력과 논리 사이의 끊임없는 존재론적 긴장감    48) '도구적 접근'으로 부터 '미학적 접근'으로    49) 문학이라는게 '상처보여주기'를 그 근본 업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0) 대칭 또는 역설적인 삶을 받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시 또한 대칭적이거나 역설적      이다. 51) 습작 시절에는 '무엇을 하는가'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52)  에 대한 도식의 위혐 : 전형에서의 해방이 곧 인간 해방의 다의성으로       이어지는 데는 훨씬 더 민중적인 생동감을 얻을 수 있다 - 고은의 '만인보'    53)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실험' '해체' 따위의 꼬리표를 달고 나타나는 형식      파괴의 작업이 얼마만큼 독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라기 보      다는, 그 작업이 얼마만큼 작가의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혹시 겉멋부림은      아닌가라는 의문이다.    54) (그리고) 다음엔 그 작품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삶이 우리의 현실 속의 삶      과 어떠한 관계를맺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55) '낮설게 하기'라는 문학적 기법은 이상의 이유들로 해서 문학사적 보편성을 획     득하고 있는데,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이끎으로서     인간과 세계와의 발전적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다.    56)  시인은 참말로 '최초로 생각하고 최초로 보고 느끼는 사람'이어야 한다.    57)  신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쉽게 떠오른 생각이나 글자들을 지워 버리는 것      이다. 그들은 백지 위를 너무 쉽게 달려간다.    58)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 작품은 필경 삶을 어떤 수준에서 '새롭게 해주는' 품격      을 지향해야 하며, 모든 문체와 기법은 이를 위해 은밀히 봉사를 해야 한다.  58)  시를 짓는 사람은 언제나 '개념과 감각의 상투형을 파괴'하려고 대담하게 모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59) 시란 말하고싶은 것을 다 말하지 않는 데에서, 즉 '말과 침묵 사이'에서 균형     된 어떤 탱탱한 긴장을 받기 때문이다.    60)  는, 그러나 일상의 표피적 묘사와 도시적 소품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는 '우리 시대의 위기 구조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언제나 동반돼야 한다. - 아니다 때로는 '일상에서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      한 아름다움'이 시인에 의해서 발견되고 노래될 때도 그 시는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61)  시가 의미를 가지는 또 하나의 가치는 그것이 우리의 '반성적 사유'를 자극한      다는 것이다.    62)  좋은 시인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표현할 때 조차도 심미적 거      리를 유지하며, 대상이 존재 의의를 보다 명징하게 간파하여 절제된 묘사에      이르도록 한다. 63) 시인은 언어의 도취를 위해 시를 쓰지 않고 그 언어의 도취를 깨우기 위해 시     를 쓴다. 그래서, 타락한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그 세계를 지탱하     는 타락한 언어에 대한 싸움이다. (관념화된 언어와의 싸움)    64)  문제는 경험을 어떻게 사실에 부합되게 재현하는가가 아니라, 진실로 그 경험      이 무엇인가에 대한 시적 해명이며, 그 경험의 세계를 존재의 밝음 속으로 이      끌어오는 것이다.    65)  풍자는 독자의 의식을 충격하며 그 이데올로기적 미망을 깨고 현실에 대한 재     인식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청자(聽者) 중심적인 문학적 계몽주의의 변종이다.    66)  (끊임없이 경계에 위치하며 그 경계를 지워 나가는 운동) - 이러한 운동이 그     의 시를 '도취적 내면적 담론'에 머물지 않게하며, 그의 시들을 살아있게 한다.    67)  모든 시적 언어는 논리적 언어로 요약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시적 언     어가 된다. 68) 시라는 장르가 초월의 형식이라는 미학적 명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초월은     대지의 삶에 대한 관심과 결코 불리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의 구조와 지리학     에 대한 관심을 절연한 초월은 소박한 낭만주의 충동을 넘어서지 못한다.    69) 시는 부정을 목표로 하는 부정이 아니라,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건강한 힘'이다.    70)  (시인의 태도) 부정적 사유의 힘은, 그 쉬지 않는 운동의 에너르기와 자기 갱      신에 의해서 유지된다.    71)  시는 현실의 변화를 예감할 뿐만 아니라 그 변화에 참여하며, 나아가 그 변화      의 의미를 집요하게 질문하는 문학 형식이다.    72) 시에 있어서 미적 구조의 진정한 성취는 시적 언어의 육화(肉化)를 얻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보기 시의 경우) 시 언어의 현실감의 증대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태도가 '직설적이고 과잉된 수식어를      통해 개진됨'으로써 그 정서적 역동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73)  시에서 삶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궁극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어휘를 통해서가 아니라 시 언어의 형태적, 통사적 구조를 통해서이다.     '준엄한 정의'를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정서적인 충격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인 것이다.    74)  경험 자체는 시가 아니며 종교적, 철학적 통찰 역시 그 자체로는 시가 아니     다. 시의 의미의 층위들은 그러한 세계관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의 만남을 계기로 화학적으로 침전된다. 시인은 흩어진 경험의 조각 가운데 선    택적으로, 어떤 것을 독특하고 중요한 것으로 부각시킨다. 경험은 정밀하게 관찰    되고 현재화된다. 시는 일상적인 경험의 변역이 아니라, 경험의 의미를 실현하는    움직임이다. 시인은 그 '경험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경험의 진    정한 주체가 된다.    75)  시의 '어조'는 작품의 외적인 경험 현실의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시인의 세계관에 부과된 장식이 아니라, 바로 세계와 교섭하는 방식 그 자체인      것이다.    76)  (자본주의적 모순 하에서) 시인들에게는 두 가지 싸움 방식이 부여되어 있다.    하나는 화려한 자본주의적 이미지들 안에 은폐된 추악하고 어두운 죽음의 이미    지를 투시적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행복의 신화를 깨뜨리는    대항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할 만하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언어 양식들의    어법과 표현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그것들의 비꼼을 통해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77) 페러디란 무엇인가? 모든 글쓰기는 모방의 글쓰기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낯선     것이 되려는 글쓰기이다. 글쓰기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페러디의 욕망이기도 하   다. 문학 행위는 현실에 대한 일차원적 반영의 행위가 아니라. 앞선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모방과 베끼기의 행위이면서, 그 모방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점   유하려는 행위이다.    78)  (80년대에 대한 90년대의 문학의 변화) 그것은 객관적 인식에 대한 주관적 인     식의 우위, 웅변에 대한 독백의 우위, 집단적 전범에 대한 개인적인 개성의 우     위, 모방론에 대한 표현론의 우위, 당위적 진리에 대한 일상적 진실의 우위, 재     현적 진실에 대한 시적 탐구의 우위 등으로 거칠게 요약될 수 있을 뿐이다.    79)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을 때 효과성      을 띤다.    80)  형용사나 부사어가 한 행에서 반복되면 천박한 느낌을 준다.    82)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 작품은 필경 삶을 어떤 수준에서 새롭게 해주는 품격을     지향해야 하며, 모든 문체와 기법은 이를 위해 은밀한 봉사를 해야 한다.    83) 시를 짓는 사람은 언제나 개념과 감각의 상투형을 파괴하려고 대담하게 모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84)  서사와 서정의 개념은 헤겔이 정의한 대로, 자기 노출의 주관성의 표현이 서      정으로 드러나는 것이요, 세상의 객관성을 움켜잡으려는 충동에서 서사가 나      온다고 말할 수 있다.    85)  시인에게 있어 세상은 맑고 투명한 감각으로 그 미세한 생명의 숨소리조차 놓      치지 않고 품어 안아야 할 삶의 현장이지, 싸움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86) 삼라만상을 시인 자신의 주관성 표출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고 그것들의 빛나     는 개별성을 그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87)  시는 그 의식을 녹이고 삭여 예술성 짙게 형상화되어야지 생경한 구호 나열의      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88)  시의 '어조'는 작품의 외적인 경험 현실의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시인의 세계관에 부과된 장식이 아니라, 바로 세계와 교섭하는 방식 그 자체       인 것이다.    89)  유행에 편승하여 임시적이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유희정신'을 버리고 인      간 존재와 삶에대한 근원적인 문제들을 오랫동안 속으로 묵혀서 오래 남는 시      를 쓸 수 있는 시정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90) 요즈음 우리 시 일부에 유행하는 장광설, 비틀림, 무잡함에 일격을 가해 신선     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91)  그의 시에 특징적인 것은 그 어느 경우에나 시인 개인의 사적 주석 또는 감상      적 개인에 의해 사물과 인생 그것의 본래적 역동성이 훼손되는 것을 시인이      극력 피하고 있다.    92) 산문적 인식과 시적 인식의 차이 또는 산문적 표현 방식과 시적 표현 방식의       차이    93)  시가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최대의 이윤'이      아닌 '최고의 가치'와 '최고의 신실'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94)  도식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 요즘 우리 시단에서 너 나할것 없이 발표하      는 소위 생태시를 보고 있자면 지난 시대에 민중시가 보여줬던 단순성과 도식      성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저버릴 수가 없다.    95) 시인들이여 좀더 복잡해지기를, 시인들이여 인간은 물론 이 세계가 얼마나 다     층적이고 잡스러운 것인가를 새삼 인식하기를, 시인들이여 그 유행 휘하에서     과감히 벗어나기를, 시인들이여 노래하는 대상이 추상적 존재가 되거나 도그마    가 되지 않기를...    96)  이번에 출간된 ooo의 시집을 보며 그가 왜 이렇게 바깥으로만 격하게 소리를     지르며 그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차분하게 내면화시키거나 좀더 입체적으로 바     라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97)  무엇보다도 시가 난해하지 않고 문장의 수식이 절제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작     품을 대할 수 있다. 너무 언어가 화려해지고, 절실성보다 파격성에 매달리는     이 시대의 문화적 혹은 문학적 풍토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시는 조금 진부한      듯하나 오히려 그것이 돋보인다.    98)  그러나 나는 그가 좀 더 말을 아끼며 조용하게 그의 시세계를 다듬어 나갔으      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99)  친숙함은 인식의 장애다.    100)  다시 말해서 두드러지게 노골적인 야유나 풍자를 통한 비관, 폭로속에 진정      한 전복적인 힘이 '깃들어' 있으려면 그 작품의 시적 진정성, 슬픔과도 같은      큰 긍정이 그것을 깊은 데로부터 지탱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      으면 그것은 천박한 욕설에 불과)    101)  '쉬운시'란 지시적이고 관습적인 전달성의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쉬운시란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표현의 묘'를 지니고 우리에      게 다가온 '감동'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102)  시의 공화국 안에서 시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다 가짜다. 철학적 언사에      대한 강의를 쫓아다니는 자들, 제도권과의 유희를 벌이는 자들, 시 속에 종교      적 언사를 흩뿌리는 자들, 시가 궁극적으로 말해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 자들,      무엇 무엇이 시적 전통이라고 외치는 자들은 모두 자기 죽음을 지키려는 자들      이다. 시 공화국은 오직 '구체적 외부'만을 가질 뿐이다.    103) 진부한 일상성에 발목이 잡혀있는 의사시는 버리자 - 인식이 없는 이런 시들      은 요즘 우리의 시정신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104)  즐거리의 최소한 합리성의 참견을 물리치기 힘든 소설과는 달리, 시는 그 자       체로 완결되어 있는 비합리적 총체성을 오롯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5)  창작 주체의 최대의 적은 보편성에 머무는 것이다.    106)  시인은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강하게 진술.    107)  아이러니의 제공 원인은 객관적 상황일 것. 독자가 미처 몰랐던 아이러니를       깨달을 것, 아이러니의 개인성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108)  대상을 옳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투적인 선입주를 버려야      한다. 상투적 선입주는 언제나 어제 본 그대로, 더구나 남들이 승인하는 그대      로만 보기 때문에 다수의 동의를 얻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날카롭고      창조적인 눈을 봉쇄하고 사물을 획일화 된 무덤속에 가두게 된다. 대상을 옳      게 표 현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109)  누보 로망은 이전 소설들이 기초하고 잇던 사실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복시켰      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주의는 하나의 작품을 하나의 근거에 기초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는 미지라는 현실에 동의하며 불안한 세계를 보     여주는 것이다.--- 누보 로망은 세계와 인간의 충돌을 작품 안에서 처리한다.    사실주의는 주인공의 어려움과 갈등을 논리적으로 작품 내에서 설명한다. 하지    만 누보 로망은 책 자체가 설명이다. 누보 로망은 편안한 문학이 아니고 불편하    게 만드는 문학이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다. 사실주의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화    해 불가능한 것으로 그린다. 누보 로망은 그것을 함께 보여준다. 이런 충돌이 우    리가 쓰는 작품내에서 일어난다. 충돌이야말로 우리 일상이다. 언제나 두 가지    양극의 욕구가 충돌하고 있다. --- 누보 로망을 읽으면 독자는 능동적으로 깨    어 있다. 책이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발자크의 작    품이 주던 안정성, 사실성은 현대 문학에서 사라진다. 하나의 작품은 여러 가지    불가능한 요소들이 충돌하는 불안정한 장이라는 충돌을 받는다.    (알랭 로브 - 그리에)    110)  노자는 말했다. 사람들은 진흙을 빚어 꽃항아리를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쓰     이는 부분은 꽃항아리 속의 비어있는 부분이다. -- 정작 중요한 것은 비어있     는 부분일 터인데 능청이 지나쳐 여행담이 너무 수다스럽거나 여행자가 얻은    각종 지식과 풍물들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아 무거워지는 대목들은 최근 우리    문학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취약점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비어있는 부    분이 핵심이라지만 항아리의 모양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야 상품(上品)이다    111)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호악    (好惡)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優劣)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시가(詩歌)    언어(言語)의 규율을 무시하고 목청만 잔뜩 높이게 되면 그것 은 한 때 대학가   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어 듣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는 결코 관념의 놀이   터이어서는 안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속세무민의 연금술   사에 자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는 없다     B.  글을 쓸 때 피해야 할 것    1)  관념의 덩어리를 날것 그대로 내뱉는 조야함의 탈피 2) 기교주의, 거친 일상적 내용, 짙은 현실주의 (위의 것들은 시의 감동을 줄인다)  3) 간접적이고 상징적이고 때로는 비틀어지고 알쏭달쏭한 표현만이 시라는 관념은          세기말적인 것에 불과하다. 4)  진부한 이미지의 오용 4)  삶에 대한 해석이 없다. 모든 것들은 단편적인 풍경이며 시인의 몇몇 나날들이     조합된 꼴라주일 뿐이다. 5)  시가 시적 자아의 삶에 기호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사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     고 공적언술로 이전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개인적 감상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는 작품. 6)  젊음의 고뇟길에서도 늘 거울앞에 서서 자신만을 응시하더니, 그 고뇟길에서     돌아온 나이에도 여전히 거울 앞에 앉아서 자기 얼굴만 들여다보며 자기 얘기    만을 써내는 그런 시인들이 의외로 많다.   7) 비유와 상징의 상투성 또한 시인에게는 치명적이다. 잘못된 비유와 상징은 예상    치 못했던 '사막의 집'을 만들기 때문이다.  8)  메시지가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상투적인 산문성. 9)  저마다 자신의 개별적인 느낌들을 누가 무어라고 하건 말건 마구 써대는 시    10)  이 시인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모호함이다. 그러고 그 모    호함은 자기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느낌이나 생각들을 좀 더 깊은 타자들과의 관    계라는 객관적 심연 속에서 우려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10) (-등)의 비유가 작품의 의도를 직접 노출함으로써 시적 암시력을 잃고 말았다. 11)  사상과 실천의 심화과정 없이 주관적으로 머릿속의 관념만으로 씌어지는 것이     문학일 수 없다.  12)  지당한 사유를 반복하는 것이 가져다 주는 지루함. 13) 주제상의 육중함에 비해 그것을 지탱하는 형상적풍요가 모자라게 느껴지는경  14) 이슬방울 맺힌 청청한 풀잎의 그 식물적 생명성은 간 데 없고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 어쩌고 하는 비유의 뻣뻣한 잔해만 남아 공연히 폼을 잡는다.    15) '관습적 사유'로 인해 엄청난 감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을 감동 없이 써내는 것     도 문학에서는 유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16)  갈등의 드라마가 없으면 단순성을 면치 못한다  17)  그것은 막연하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시 이전의 어떤 감정일 뿐이다. 다시금      삶의 구체적인 지형도 속에서 그 한 단면의 구체적인 드라마와 연결되어서 이      쪽 저쪽으로 뻗어나가는 긴 이야기의 한 단편으로 정확하게 그것은 자리 잡아       야 한다.  18)  아마추어 시들이 실패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꾸 설명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독자들의 인식 단계를 무시한 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상징과      비유의 세계를 구축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19)  죽은 관용구를 시적 변형없이 그대로 나열하는 나태.   20) '상상력'이라는 부분을 핑계삼아 문맥의 부정확을 방기하는 것은 초보의 단계      에 그쳐야 한다.  21)  언제부터인가 감각적인 낱말의 무분별한 나열이 시의 재치 같은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재치가 일방적으로 해롭다는 뜻이 아     니라, 깊이 있는 통찰력과 분명한 관점으로 탄탄한 구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     태에서의 언어감각은 한대의 패션으로 끝날 우려가 있다는 사실이다.    22)  근시안적인 시인의 기능주의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23) 거기에는 생활의 객관적인 인식이 배제되어 있고 시를 쓰는 사람의 막연한 정      서적 체험이 모호한 관념적인 언어를 통하여 나타나 있을 뿐이다.     2.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표현  어떤 시들을 보면 시가 막연하고 모호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는 시로서 이미 실패한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시어들이 구체적 표현을 하지 못하고 아주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들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좋은 시란 어떤 대상이든 그것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명제로 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쉽게 감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묘사하거나 암시해야 합니다. 시는 더구나 주관성이 강하기때문에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면 누구의 감동도 끌어낼 수 없다. 자기 혼자만이 아는 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정주는 (저는 서정주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땄습니다.  그래서 인용할 때 서정주님을 많이 합니다. 양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한 언어조직으로 짜내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실감한 대로를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상상시킬까?'하는 것이다. 상상을 시키지 않고서는 우리가 실감한 어떤 시의 감동도 독자에게 전할 길이 없다.  시인이 가령 어떤 의젓한 남자를 보고 감동했다고 하자 그 의젓함으로  '기가 막히게 세계 제일로 씩씩하고 늠름하고, 엄숙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어쩌고 추상적으로 설명해 봤자, 독자는 '어떻게' 생겼는가를 상상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구약성경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의젓하고 씩씩한 남자의 코를 표현하길,  '다마스커스로 향한 레바논의 수루(戍樓)와 같이....'라고 쓴다면  '아, 그래 적의 땅 다마스커스를 향해서 용감히 우뚝 솟아 있는 레바논의 수로 같이 용감한 느낌을 주는 오똑 솟은 코로구나'  하고 그 느낌을 주니, 어떤 모양임을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는 늘 독자에게 작자의 실감을 상상시킬 수 있는-' 어떻게 생겼는가?'하는 궁금증에 대답하는  구체적인 영상의 조직을 보족하는 것들로만 쓰여져야 한다.  추상이란 원래가 어디에서나 구상을 보족하기 위해서 쓰여져 온 것이다.  시에 있어서도 그 임무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추상관념을 주로 해서 시라고 써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끔 보지만, 이 것은 나무 없는 그늘을 말하려는 어리석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말 그대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말처럼  '천사를 그리려다 짐승을 그린다'는 우는 범하지 않아야겠지요.  시를 쓸 때도 추상어나 일반어보다는 구상어와 특수어를 써서 구체적인 표현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곽재구님의 을 한 번 읽어보실까요?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해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 연분홍 사랑 좀 봐.  어때요? 우리가 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단어들로만 구성되었지요?  이 시를 두고 조태일님은 "위에 인용된 시의 언어들을 살펴보면 우리들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구상어들이 대부분이다.  물살, 발가락, 고사리순, 머리카락, 허벅지, 산, 눈물들은 이미 경험에 의해서 친밀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머리로 생각하기 앞서 우리들의 가슴으로, 몸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정호승님의 을 한 번 읽어보실까요?  부활절날 밤  겸손히 무릎을 꿇고  사람의 발 보다  개미의 발을 씻긴다  연탄재가 버려진  달빛 아래 저 골목길  개미가 걸어간 길이  사람이 걸어간 길보다  더 아름답다.  시를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려면 묘사를 잘 해야합니다.  즉 시적 대상을 그림을 그리듯 인상적이고 특징적인 세밀한 부분들을 잘 그려냄으로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시가 좀 어려운 것 같지만 제가 볼 때는 여기서 개미는 열심히 일이나 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근로자들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달동네 풍경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질 것입니다.  이어서 이성복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물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어떤 사람들은 무덤 속의 어머니를 뜻한다고 하나, 저는 대지(大地)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의견이 맞던지 어머니의 무덤이나 땅으로 어머니를 대치해놓고 보면 참 구체적인 언어로 그림을 그리듯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비 오는 숲 속을 생각해보십시오.하나 하나 그 장면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향집이 생각나는 최하림님의 을 읽어 보자 나 물 속처럼 깊이 흘러 어두운 산 밑에 이르면  마을의 밤들 어느새 다가와 등불을 켠다  그러면 나 옛날의 집으로 가 잡초를 뽑고  마당을 손질하고 어지러이 널린 농구들을  정리한 다음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날파리들이 날아들고 먼 나무들이 서성거리고  기억의 풍경이 딱따구리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맞는다  밤이 과거와 현재로 부유스럽게 흘러간다  뒤꼍의 우물도 물이 차오르는 소리  밤내 들린다 나는 눈 꼭 감고     3.  대상에 대한 표현 - 표현은 정확하게 1 * 표현은 정확하게  먼저 고려시대 쌍벽을 이루던 두 문장가 김부식과 정지 상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실까요?  알기 쉽게 풀어놓은 시와 한자음을 달아놓습니다.  하루는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가 좋아서 이 구절을 내게 달라고 했으나 정지상이 거절했습니다,  그 후 김부식이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시인 즉,  "절에서는 불경소리 그치고 琳宮梵語罷(림궁범어파)  하늘은 유리처럼 맑다" 天色淨琉璃(천색정유리)  하루는 김부식이 봄이 되어 그 봄을 맞는 시를 지었습니다.  "버들빛 천 줄기 푸르고 柳色千絲綠(류색천사록)  복숭아꽃 만 점 붉구나." 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참 멋있는 시이지요?  그런데 느닺없이 정지상의 귀신이 나와서 김 부식의 뺨을 때리면서 "버들의 천줄기 누가 세어 보았으며,  복숭아꽃 만 점을 누가 헤아려보았느냐" 하면서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 柳色絲絲綠(류색사사록)  점점이 복숭아꽃 붉다."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두 시가 다 내용이 같을 뿐만 아니라 단 한 글자씩만 바꾸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하겠지만,  그만큼 시를 쓰는 글자에 중요성입니다.  시어를 쓸 때는 그만큼 표현의 정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적당히 그냥 생각나는 말로 써버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시어를 고를 때부터 지극 정성을 드리라는 말이겠지요.  좀 설명이 길지만 이 두 표현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정지상이 김부식의 따귀를 때리며 고쳐 쓴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점점이 복숭아꽃 붉다"는 구절은  내용 면에서 김부식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시는 의미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표현이 아니며,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언어표현도 아니라  정서적 울림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기에 두 시의 의미는 서로 비슷하지맘 가슴에 파고드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김부식이 표현한 '천 줄기'와 '만 점'은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사물을 관찰하고 그 것을 언어로 가시화하는 시인의 태도가 안일하고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푸르른 버드나무와 붉은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두리뭉실 '천 줄기'와 '만 점'이라는 언어를 선택했지만  이 언어들에는 필연성, 즉 꼭 그 언어이어야만 하는 유일성이 없다.  즉 시인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적당하게 이 언어들을 씀으로써 시어의 생명인 정서적 울림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정지상이 쓴 '줄줄이'와 '점점이'는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버드나무와 복숭아꽃의 특징을 감각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한번 상상해 보라.  '천 줄기'라는 언어보다 '줄줄이'라는 의태어가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할 것이다.  또한 '줄줄이' '점점이'라는 의태어가 빚어내는 음악적인 효과까지 함께 곁들여져 버드나무의 무성한  푸르름과 복숭아꽃의 붉은 빛이 더욱 깊고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비교해 볼 때, 정지상이 선택한 언어들이 대상을 표현하고 그것들을 살려내는데 성공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시어들이 빚어 낸 정확한 표현 때문인 것이다."  여러분께서 조태일의 말 그대로 생동감이 무성한 푸르름이나 붉은 꽃의 색깔이 더욱 깊고 황홀한 것까지  느껴지는가는 모르겠습니다. 또 꼭 그의 의견에 동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시어의 선택이 정확해야한다는 그의 의견만은 너무도 확실한 이야기이어서 길어도 옮겨보았습니다.     4.  대상에 대한 표현 - 표현이 정확한 시 몇 편  서정주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좀 어려운 시인 것 같아도 시를 다루는 문학평론가라면 다 한 번씩은 다루었다 할 정도로 유명한 시이며  서정주가 23세 때 쓴 시인 것을 알면서 읽기 바랍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이며 나는 왔다.  이 시를 읽어보면 시어가 아닌 일상적 언어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심하여 시어로 사용하였기에 그 정확한 표현은 감동과 함께 시를 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현들을 빼고 다른 언어로 대치하면 바로 시의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독창적 언어체계입니다.  (팔할, 죄인, 천치, 혓바닥, 수캐 등은 이렇게 시 밖에서 볼 때는 일상에서나 흔히 쓰는 언어임을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시 김현승님의 를 올립니다.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시기 위해서 시의 부분을 싣지 않고 전문을 실으니 강의가  그 때문에 좀 길어지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은 모르나,  플라타나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을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 하는 어느 날.  플라타나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참고로 위의 시에 나타나는 플라타나스의 모습은 그냥 단순한 나무의 차원이 아니고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 되었음을 인식하시고 읽으시면 더욱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 시 한 편 더 읽겠습니다.  이제무님의 입니다.  아들아 무덤은 왜 둥그런지 아느냐  무덤 둘레에 핀 꽃들  밤에 피는 무덤 위 달꽃이  오래된 약속인 양 둥그렇게  웃고 있는지 아느냐 넌  둥그런 웃음 방싯방싯 아가야  마을에서 직선으로 달려오는 길들도  이 곳에 이르러서는 한결  유순해지는 것을 보아라  둥그런 무덤 안에 한나절쯤 갇혀  생의 겸허한 페이지를 읽고  우리는 저 직선의 마을 길  삐뚤삐뚤 걸어가자꾸나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날카롭게 달려오다가 논둑 냉이꽃  치마폭에 폭 빠지는 것 보며  *시인은 죽음과 슬픔 등 여러가지 어두운 무덤에서 어두운 시의 씨앗을 얻은 것이 아니라  무덤의 봉분, 밤에 떠오르는 보름달, 산을 오르는 꼬부랑 길 등 곡선의 부드러움.  포용, 원만함, 겸허한 마음 등을 깨닫고 직선의 마을 길과 대비시키며 그의 시를 완성시켜 나갑니다.     5.  대상에 대한 표현 - 낯설게하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여러가지 문예비평이론 중에서 "낯설게하기"이론을 윤석산 교수님의 글을 옮깁니다.  문예비평이론은 너무 어려워서 외울 필요는 없구요.  그냥 한 번 읽어보시기만 하시고 필요하신 분은 잘 기록해두시기 바랍니다.  [낯설게 만들기와 이미지 및 은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초기에 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차츰 시선을 산문 쪽으로 옮기면서 문학의 일반적 특성에 관심을 둔다.  슈클로프스키는 [기법으로서의 예술](1917)에서 시의 모든 요소와 기법은 시인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독자의 습관적 수용에 충격을 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서  '낯설게 만들기(defamiliarization)' 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보 전달을 위주로 하는 산문에서 은유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 반면에 시에서는  미적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해 낯설게 만드는 것이 목적 이라면서 와  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시의 운율도 실상 무미건조한 생활 언어의 억양을 일그러뜨려  습관화된 청각을 자극하는 수단이라면서,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은 대상을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의미론적 전환(semantic shift)'이 근본적인 목적이며 존재 이유라는 견해를 편다.  그의 이런 관점은, 예술은 우리가 모르거나 친숙하지 않은 사실을 알기 쉽게 해준다는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또는 낯선 정신 세계를 단번에 도달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정신의 경제적 전략임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서,  '낯익음', '친숙성'은 '자동화(automatization)'로 이어져 탈언어화(脫言語化) 다시 말해 기호화(記號化)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테크닉은 사물을 '낯설게'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며,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 시켜야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슈클로프스키는 이 기법이 실험적인 작가들의 유희가 아니라 문학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원칙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주의 소설가인 톨스토이를 예로 든다.  그는 {전쟁과 평화} 에서 오페라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무대장치를 '페인트칠한 마분지 조각들'로 묘사하고,  {부활}의 미사 장면에서 성병(聖餠)을 '조그만 빵 조각'이라고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한 걸 지적한다.  그리고, ≪홀스토머≫(Xolstomer, 말이 화자인 일인칭 화법으로 씌어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에서  말의 주인과 그 친구들의 변덕과 위선을 말(馬)의 시각에서 보고 이야기함으로서,  인간의 위선성을 새롭게 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바흐친은 '톨스토이는 낯설게 된 사물에 넋을 잃지 않았다'면서,  '사물을 낯설게 만든 것은 사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사물을 끊어 정말로 필요한 것-어떤 도덕적 가치-을 훨씬 더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제시하기 위해'라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 돌을 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낯설게 된 사물을 배경으로 삼아  도덕적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가 이런 비판을 한 것은 슈클로프스키는 사물의 새로운 지각만 강조하고 그를 통해  표현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제거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야콥슨도 회화를 예로 들면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편다.  그는 그림 같은 시각 예술에서 사실감의 표현은 상당히 자연스럽고 용이한 것으로 생각하나,  삼차의 실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으로서, 인위적 방법을 채택하며,  그 그림의 박진성은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관습적 언어'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관습적 방식이 계속되면, 마침내 '추상화'가 되고,  한문과 같은 '표의문자'로 바뀌어 핍진성(verisimilitude)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이그려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대상의 왜곡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강하게 지각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야콥슨이 내린 시적 자질(poetic quality)에 대한 정의는 슈클로프스키의 낯설게 만들기와 거의 유사하다.  그는 시가 를 깨뜨림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강화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가 있다면, 슈클로프스키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논의한 반면에,  야콥슨은 와 간의 관계로 설명하여,  현실에 대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사는 언제나 '사실' 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전시대의 문체에 반발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예 사조를 사실의 왜곡이니 진실의 파괴라며 부정한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대의 문학이 부정되는 것은 과거 낯설었던 것들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 어떤 문체 또는 어떤 비유가 더 사실적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형식주의자들이 이질적인 수법을 동원하는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사실을 표현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어느 쪽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낯설은 것과 친숙한 것 가운데  어느 한쪽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이 개념을 받아들여 희곡에서 '소외(疏外)의 기법'을 사용한다.  '소외의 기법'은 종래 연극의 경우 관객을 작품 속으로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반면에,  작품이 진행되는 도중에 이것이 연극임을 강조하여 몰입과 동화를 막으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사건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따져보도록 유도하기 위한 기법을 말한다     6. 시의 첫행을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고비  시에 있어서 첫머리는 독자와 만나는 첫번째 고비이다. 첫머리에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없다면 그 작품을 도대체 누가 읽어줄 것인가. 더구나 시는 20행 내외, 길어야 50행 정도이다. 그런만큼 시 독자는 인내심이 없다.  소설이라면 어느 정도 읽어나간 다음에 그 작품에 대한 판별이 서기 시작하지만 시의 경우는 그야말로 짧은 한순간의 눈길로 그 작품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많은 시인들은 그 첫머리를 특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온갖 테크닉을 개발하게 마련이다. 아래는 그 첫머리를 유형별로 분석해 본 것이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러한 기초사항을 눈여겨 봄으로써 자기만의 독특한 첫머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 시간을 나타내는 시의 첫행은 매우 일반적이다. 특정한 시간대는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흔히 4계절이나 하루 중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첫행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계절 가운데는 봄이, 하루 중에는 밤이 첫행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런 류의 첫행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복잡하거나 충격적인 어귀를 쓰게 마련이다. 덧붙이자면 단순한 시간대는 피하는 게 현명하다.  ① 봄이에요. 노랗게 목 메이는―이태수  한밤입니다. 자연의 밤―권달웅  ② 이즈막엔―한기팔  어느 새벽―조창환  기인 밤입니다―박용래  ③ 6월 16일은―김영태  ①은 봄이나 밤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표현법에 변화를 가한 예라고 하겠다. 앞은 도치의 방법으로, 뒤는 점층의 방법으로 상투성을 벗어나고 있다. ②는 불특정한 시간대를 설정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상상적인 해독이 가능하도록 한 예이다. ③은 오히려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유인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 시의 첫행에서 시간을 제시하는 경우보다 공간을 설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빈도수를 보여준다. 자연 공간 중에서도 산이나 강이 압도적이다. 들과 골짜기, 바닷가, 또는 뜰과 나뭇가지 등등 대체로 시의 모티브가 작품 내부의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다.  ① 어딘가에서―윤강로  ②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이근배  ③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 만큼한 먹오디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서정주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서는―김종털  ①은 시간의 제시 방법에서 본 바와 같이 불특정한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시의 융통성을 살린 예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첫머리는 다음의 두번째 행이 더 극적이어야 하는 부담을 준다. 또 한 시인이 여러 차례 반복 사용할 수 없다. ②는 시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제재(題材)로서 특수한 공간을 설정한 예가 된다. 허나 이 역시 자주 쓰면 상투적이고 도식적일 위험이 있다. ③은 시적 감흥을 위해서 약점을 무릅쓰고 구체적인 사항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고 있는 예다.  ○. 시간과 공간이 첫 행에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경우는 훨씬 효과적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그만큼 압축되고 간결한 어휘의 구사가 요구되지만 표현상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① 지금 어드메쯤―조병화  ② 12월의 北滿 눈도 안 오고―유치환  ③ 겨울에도 비가 오는 城北洞 기슭―이명수  ④ 나이 스물을 넘어 내 오른  산길은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강희근  ①은 불특정한 시·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막연하고 애매한 기대감을 환기시킨다. ②와 ③은 보다 구체적이다. ②는 ‘북만주’ ③은 ‘성북동 기슭’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 등장함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또한 ‘눈도 안 오고’와 ‘겨울에도 비가 오는’이라는 관형어절이 특별한 정황을 암시함으로써 갈등을 예고한다. ④는 시간과 공간, 주인공이 한데 어우러진 한 대목을 도입부의 첫머리로 삼고 있어 특이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① 그윽히―허영자  귀여운―김경희  ② 그늘―김현승  누님―서정주  어머니―신석정·양명문  촛불―-황금찬  ①은 부사, 형용사 ②는 명사로 된 첫행의 예들이다. ①은 다음 행에서 어떤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의 출현이 예견되는 표현이다. 우리말의 부사나 형용사는 대체로 시의 첫행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다. 다음에 수식해야 할 어구가 예견된다는 것은 그만큼 상식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②는 다시 ‘누님·어머니’와 같은 인간 즉 유정물(有情物)과 ‘그늘·촛불’과 같은 무정물(無情物)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만, ‘누님·어머니’와 같은 경우는 호격조사가 생략되므로 오히려 청각적인 기능이 강화되고, ‘그늘·촛불’과 같은 경우는 회화적인 시적 구성이 예견된다.  ○.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를 중심으로 수식된다.  ①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김소월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이은상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노천명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이병기  이번 예는 한 단어의 예 가운데 ‘누님/어머니’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한 변형이라고 하겠다. ‘이름/조국’과 같은 추상명사를 의인화시킴으로써 상상력의 변주가 가능해진다.  ○. 시의 첫행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① 이쯤에서 그만 下直하고 싶다―박목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김춘수  이번 예는 앞의 예들보다는 좀더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첫행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문장의 주어가 1인칭 즉 ‘나’로 되어 있거나 생략된 예들이다. 박목월과 유치환의 경우는 하직과 죽음이라는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박목월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관조하는 듯한 겸양에 찬 어법을, 유치환은 의지적인 어법을 사용함으로써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춘수는 나와 짐승을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② 풀이 눕는다―김수영  관이 내렸다―박목월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장만영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황동규  소 한 마리를 잡기로 하였다―송정란  ○. ②의 예는 하나의 문장으로 첫행이 이루어졌으되, 그 주어가 명사어로 된 예들이다. 김수영의 예는 그 주어가 사물이고, 장만영과 황동규는 그 주어를 인간으로 하고 있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김수영의 ‘풀’은 민족 또는 민중을 상징하고 박목월의 ‘관’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송정란은 소를 통해 시를 상징화하고 있다. 장만영은 ‘길손’이라는 불특정한 주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황동규는 ‘전봉준’이라는 역사상의 인물을 주어로 등장시키고 있다. 최근의 시에 가까울수록 특정한 시간·장소·인물이 시에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대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독자적인 개성이 요구됨에 따라 보다 사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③ 가난이야 한낱 襤褸에 지나지 않는다―서정주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生 뒤에 온다―정현종  ○. ③의 예들은 3인칭의 주어가 추상 명사로 된 것들이다. ‘가난/사랑/목숨/산다는 것’ 등등에 대한 정의(定義)에 가까운 수사법이 이러한 예들의 근간을 이룬다. 정현종의 경우 두 개의 문장으로서 첫행을 이루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시의 발생기에는 그 첫행이 비교적 간결한 경향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두 개 및 두 개 이상의 복합 문장이 병치되거나 또는 병렬문의 형태로 길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 시의 첫머리를 산문형으로 시작한다  ①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 꽃나무를熱心으로 꽃을피워가지고섰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한꽃나무를爲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숭내를내었소―이상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백석  ○. 이밖에도 시의 첫행에 있어서 ‘사랑이 오라 하면·먼후일 당신이 찾으시면·눈 감으면·이 비 그치면’ 등 가정법이 사용되고 있다. 한때 여류 시인들에 의하여 애용되는 것 같았지만 최근에는 관념의 심화에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다.  70년대에 들어, 우리 시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의 하나가 시에 대한 다양한 모색이다. 그 중에서도 강우식은 4행시를 보여주었고 그에 반해 산문시, 연작시가 시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가 산문시와 연작시의 형태를 보여주었다면, 박제천의 『장자시』는 연작시이자 띄어쓰기를 무시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했다. 그와 더불어 단위 작품에도 산문시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정진규·박제천 등 60년대 시인들이 자주 쓰는 산문형 흐름은 요즘의 신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져서 내용의 심화를 이루게 된다.       7.  창작강의]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 안도현(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인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현대시인 아이칭의 에 나오는 제일 첫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어를 다는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시인은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표연히 흩어지거나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일체의 것을 고정시켜 선명하게, 마치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또렷하게 독자의 면전에 드러나게” 하는 시의 기교를 함께 강조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중국 시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경융합론’을 펼친 왕부지의 시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류워이 지음, 이장우 옮김, )고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도 문장이란 “굳세면서도 막힘이 없고, 시원스럽게 통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살찌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조화와 통합의 문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시적인 언어를 “내적인 경험, 감정 및 사고들이 마치 외적 세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사건들인 것처럼 표현된 언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말, 진실/기교, 내용/형식, 정/경, 강함/부드러움, 내적 경험/외적 표현 등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좋은 시가 태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시인의 재능/노력도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들의 고뇌의 집적이며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일상속 느낌 그냥 흘리지말고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까? 시작법에 관한 현역 시인들의 조언을 몇 가지 경청해 보자.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시인이 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 강은교 시인다운 비결이라 하겠다.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라고 한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그 또한 자신감을 강조한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부터 찾을 것이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도 괜찮은 일이며,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오히려 시를 쓸 자격이 있다고 등을 두드린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늘 보게 되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시인의 눈에 붙잡히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최영철, 전문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어떡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숨기고픈 얘기서 출발   실제로 장옥관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소재는 대단히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벚꽃 아래로 지나가는 개, 자신이 누는 오줌, 포도를 껍질째 먹는 일, 아스팔트에서 본 죽은 새, 옛 애인에게서 걸려온 보험 들어 달라는 전화……. 그러나 이것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면 경이로운 존재의 실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인도하는 노란 안내선을 보며 놀랍게도 밑창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걷는 길의 등뼈를 발견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길을 핥는다는 통찰을 통해 시적 발상이 어떻게 발화하는지 보여주는 시다.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장옥관, 전문   8.. 시창작을 위한 일곱 가지 방법 첫째 장식없는 시를 써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시적 공간만으로 전해 지는 것,  그것이 시의 매력이다.  시를 쓸때는 기성시인의 풍을 따르지 말고  남이 하지 않는 얘기를 하라.  주위의 모든 것은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시의 자료가 되는 느낌들을 많이 가지고 있게 되면  시를 쓰는 어느 날 그것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 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임을 기억하라  시는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단단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구체적 언어를 이끌어 내 준다.  단지 감상만 갖고서는 시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시는 감상을 넘어서야 나올 수 있다.  시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개인을 넘어서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시만 계속해서 쓰면 '나'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쓰라.  단, 시를 쓰는 일이란 끊임없이 누군 가를 격려하는 일임도 기억해야 한다.  (예)'따셋째 시가 처음뜻함' / 강은교  웅덩이 건너편 모개가/웅덩이 쪽 모래를 손짓하는 새/ 아침별이  저녁별을 손짓하는 새/햇빛 한 올이 제 동무 햇빛을 부르러 간 새  셋째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고  자신을,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내가 정말로 시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지 말고 신념을 갖고 시를 쓰라.  나의 시를 내가 맏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으며  나의 시에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누가 감동해 주겠는가.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라.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이렇게 충고한다.  '세상의 하고 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은 시를 쓰려고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는가?'라고.  우리는 신념을 갖고 시를 쓰되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네 번째, 시의 힘에 대하여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다.  미국의 자연 사상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한물간 사람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일몰과 일출을 보는 습관을 가지라.'  그는 자연에서 생의 전율을느끼라고 충고한다.  우리의삶에서 가장 전율을 많이주는 것은 무엇일까?  연애가 주는 스파크, 음악 등이 아니겠는가.  허나 살다가 보면 이때의 전율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시는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면 전율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한다.  표현과 기교는 차차로 연습할 수 있지만  감동과 전율은 연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에게 감동이 혹은 전율이 스무살때처럼 순수하게 올 수 있을까?  그 순수한 전율을 맛보기 위해서는 시인의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 번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에 대해서  원래 '노마드(Nomade)' 란 정착을 싫어하는 유목민에서 나온 말이다.  이말은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예술의 힘, 시의 힘은 바로 이 노마드의 힘이 아닐까?  우리의 정신은 이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있는 국화빵의 틀에 이미 찍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을 깨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흔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틀을 깨는 과정에서  술(알콜)의 힘을 빌어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술을 도구로 하여 얻어지는상태가 과연 진짜 자유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자유를 빙자한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술의 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려져 있지 않은  순백의 캔버스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만 술을 마셔야 하지 않을까.  여섯 번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읽히자  우리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야 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으로 긴장을 살려나가자.  감상적인 시는 분위기로밖에 남지 않으며  '시 자체'와 '시적인 것'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시적은 것은 시의알맹이가 아니다.  시적인 것에만 너무 붙들려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시가 긴장하여 이데올로기의 자유를 성취하는 순간  깜짝 놀랄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정신을 지니자.  몸의 자유가 뭐 그리 중요한가?  또한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도 익히자.  예를 들어 T.S. 엘리어트 의 황무지라는 시는  우리에게 침묵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시다.  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의미있는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시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데,  만약 설명하려다 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보다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할 것이다.  말라르메는 말했다.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 이 짧은 두 행의 사이에는  시인 자신이 말로 설명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보이는가?  그러나 침묵의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  우리는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워야 한다.  시를 쓸때도 다른 모든 세상일처럼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며  더욱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형상화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일곱 번째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  시를 쓰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긴 하겠지만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되지 않을까?     9.  시와 사진 구분하기       어떤 대상이 작자의 가슴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그 모습 그대로 내 놓았을 때는 사진이 되고 그 대상이 작자의 가슴속에서 녹아내려 제2 제3의 다른 모습이 되어 나왔을 때는 시가 된다.    그런데 시와 사진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 놓고는 시라고 생각하는 이가 이 외로 너무 만은것 같다.    다시 말해 사진을 찍어 놓고는 자신이 사진사인데 시인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의 글을 점검해 보았을 때 나는 사진사 였구나 또는 시인이였구나 하고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출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웃는다. 는 사진이지만    바위가 웃는다. 는 시가되고    아기가 젖을 먹는다. 는 사진이지만    귀신이 젖을 먹는다. 는 시가되고    천을 오려 옷을 만든다는 .는 사진이지만    구름을 오려 옷을 만든다 .는 시가된다 이와 같이 사진을 녹여서 시로 만드는 연습 해 보기로하자.        예문1.산행을 갈때     (사진을 녹여서)            →(시로 만들기)     나는 산속으로 걸어간다 →산이 내품으로 걸어 들어온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청춘가를 부르는 개울물     상큼한 풀냄새               →파란 풀냄새     시원한 공기                  →굴맛나는 공기     후련해라                      →간이 녹아 내린다       예문2. 꽃을 보았을 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저꽃 너무 예뻐            →저꽃은 우리아기 얼굴      무슨 말을 할것 같애    →오셨어요 인사하는 꽃      이 아름다운 향기        →내 마음을 녹이는 향기      한들 거리는 꽃           →꿈을 꾸고 있는 꽃      보드레 한 꽃잎           →아기의 살결 같은 꽃잎        예문3. 한접시 송편을 보고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잘 만들었네               →하얀 반달떡      예쁜떡                      →딸아이 눈동자 같은 떡      참기름을 바른떡        →마음을 바른떡      참말로 맛있다           →분홍색 맛이나는 떡      말랑말랑한떡            →엄마의 젖가슴 같은 떡            예문4. 물고기를 보았을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펄떡펄떡 뛴다          →뱃살빼기 운동을 한다       고기입이 크다          →산봉우리를 삼킬만한 입       물결을갈라치는지느러미→지느러미로 풍금을 친다       민첩한 몸짓              →자진모리 가락으로 돌아가는 몸짓        서로 부딪친다          →신호등을 무시한 보행사고          예문5. 첫눈 내리는날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깨끗한 눈송이          →아기의 마음 같은 눈송이        너무너무 하얀눈       →이빨같이 하얀 눈        눈속으로 걷는길       →추억속으로 것는길        눈이오면 즐거워       →눈 위에서 피는 마음꽃       내가 만든 눈사람      →꿈을 꾸고 있는 눈사람     이상의 예문으로 사진사와 - 시인의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되지만 아직도 어떤사물이 자신의 가슴속에 들어와 그 모습 그대로 내놓고도 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 같아서 다시 복습으로 예문을 제시해 보도록 한다.          예문6. 구름을 보았을 때         (사진을 녹여 )           →(시로 만들기)         뭉개구름                   →포도송이로 익어가는 구름         흰구름                      →하얀 옷을 입고 가는 구름         조개구름                   →손에 손잡고 가는 유치원 구름         새털구름                   →털옷을 입은 구름         검은 구름                  →상복을 입은 구름           예문7. 책을 보았을때          (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두꺼운 책                 →뚱뚱한 책          얇은 책                    →깡마른 책          그림 책                    →색깔들이 모여 사는책          국어책                     →우리말이 모여사는 세계          영어책                     →꼬부랑말이 모여 사는 세계             예문8. 바위를 보았을 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검은 바위                →검은 옷을 입은 바위           흰 바위                   →흰 옷을 입은 바위           짐승바위                 →하늘 짐승이 내려와 바위가 되었네           둑 바위                   →냇물을 가로막은 바위           거북바위                 →바다로 가다가 바위가 된 거북이              예문9. 촛불을 보았을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반짝이는 촛불        →눈을 깜빡이는 촛불            혼자 있는 촛불       →혼자만의 세상            작은 촛불              →유치원 또래의 촛불            외로운 촛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촛불            촛농이 떨어지는 촛불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촛불              예문10.시장엘 갔을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분주한 거리          →삶의 교차로             복잡한 거리          →콩나물시루 같은 사람들             떠드는 소리들       →삶의 음악             외침소리              →삶의 호소             엿장수 웃음          →엿장수 얼굴에 핀 삶의 꽃     필자는 지금 쏟아져 나오는 만은 책들 중에 사진과 시를 구분하지 못하고 쓴 시들이 더 많음을  볼때 시를 너무 가볍게 보는 풍토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흔히들 한권의 책을 보아도 시 한두편 건지기가 어렵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닐까 싶다 그 첫 단계가 시와 사진 구분부터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10.  김철진 시인의 시 창작을 위한 10가지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배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인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 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 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너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11. 좋은 글의 이론적 조건  1) 독창성 - 소재, 시각, 표현이 보편성과 조화된 개성을 가져야 한다.  좋은 글의 절반은 글감이므로 참신한 소재를 선택함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잡을 수 있다. ( 방망이 깎던 노인 ) -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개성적 통찰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각의 독창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는 현상적 인식에서 본질적 인식을 전환, 관습적 인식에서 개성적 인식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물론 초보자의 경우 자기가 살아온 지역 과 인연이 닿는 사물을 먼저 소재로 삼는 것은 그리 허물은 아니다.  표현에 있어서의 독창성을 얻기 위해서는 참신하고 개성적인 표현을 얻어야 한다.  2) 충실성 - 충실성을 위해서는 소재와 주제가 명료해야 한다. - 독자 의 입장이 되어 읽을 거리가 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 소재를 마련 하는 데에는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며 주제를 마련하는 데에는 깊은 사 고가 필요하다. 결국 내용의 충실성은 성실한 독서와 끈질긴 사색에의 노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3) 진실성과 성실성 -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이를 허위와 가식 없이 표출해야 한다. 허위와 가식은 설득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초보자는 흔히 자신의 미숙함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교양이나 지식, 감정을 과장하려 하거나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 자신에게 맞지 않는 거창한 소재와 주제를 온갖 화려한 수식어와 난해한 개념어들로 포장하려는 것은 금물이다. 글이란 갈고 닦아야 예 술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해변시인학교 - 황금찬 시인 )  * 글쓰기는 수공업이다. - 안톤 슈낙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 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다사로운 햇살이 떨어져 을 때,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을 혼자 있게 될 때"  4) 명료성 - 평이하게 쓴다. 간결하게 쓴다. 의미의 모호성을 피한다.  예문 (1) 어젯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 성 선생님은 호랑이다.  (3) 내가 좋아하는 선배의 친구는 나를 싫어하고 있다.  (4)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범인을 쫓아갔다.  (5) 철수는 그날 아침 영수에게 어젯밤의 꿈이 불길하여 아무 래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날 밤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바로 그였다.  (6) 막연한 표현을 피해야 한다. -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부적절한 비유와 상징은 글의 명료성을 해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객관성을 중시하는 설명이나 논증의 글에서는 비유와 상징의 구사에 더욱 주의하여야 한다. ( 논술의 경우에 매우 중요함 )  5) 정확성 - (1) 논리에 맞는 문장을 써야한다 : 적절한 어휘를 써야한다. 내용에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한다.  (2) 어법에 맞는 문장을 써야 한다 : 문법, 표준어  6) 경제성 - (1) 동의 반복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 동의 반복은 글을 산만하고 지루하게 만든다.  예문 - ①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 하나 씻어낸다.  ② 인격은 세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데, 첫째 단계 인 무율의 단계를 거치고, 둘째 단계인 타율의 단계를 거치고, 셋째 단계인 자율의 단계를 거쳐 비로소 완성된다.  ③ 친구나 벗을 사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정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친하다고 한두 번쯤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는 생각과 의식은 버 려야 한다. 친할수록 정확하고 어김없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2) 불필요한 수식어나 완곡어법은 피해야 한다.  - 빙빙 돌리지 말고 핵심적인 내용을 짧고 분명하게 써야 한다.  *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말이다.  7) 정직성 - 인용할 때는 그 빌려온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 직접인용 : 그대로 빌리는 경우, 간접인용 : 요지만 빌리 는 경우. 명인과 암인 ) - 표절의 비도덕성, 인용은 할 수 있는 것이다.  8) 글쓰는 상황의 고려 - 글쓰는 상황에 어울리는 성격의 글을 써야 한다. 즉, 글의 목적과 독자의 성격에 맞아야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12. 내 생각 글로 쓰기 - 10. 시 쓰기 - 3    시 창작은 사물이나 사건의 벌어지는 형태나 동작을 보고 감각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비유하여 주제를 감추고 이미지화하여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표현하는 작업이다. 흔히 감각이라는 말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려 사물에서 받는 인상이나 느낌을 말한다.  감각은 시를 쓰는 사람이 관찰을 통하여 많은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동기를 유발시킨다. 사물이나 사건의 형태와 동작을 비유한 시를 중심으로 창작의 실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전봉건의「피아노」전문    이 작품은 감각적인 이미지로 표현된 작품이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여인의 손가락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가락의 움직이는 모습을 물고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는 시구에서마치 그 피아노의 선율이 들리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청각적 표현을「물고기가 쏟아진다」로 나타내어 소리를 시각화하였다. 여기에「신선한 물고기」라는 표현을 통해 생동감을 주고 있다.  「나」는 바다의 모습 중 가장 신나게 일고 있는 파도를 집어든다. 이것이 칼날로 보이는 것만큼 화자가 느끼는 감동의 힘이 강렬하다. 이 시는 연상에 의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 이미지는「피아노 선율에서 물고기로 다시 바다에서 파도로 그리고 칼날」로 연결된다.   대나무 잎사귀가 칼질한다.   해가 지도록 칼질한다 달이 지도록 칼질한다 날마다 낮이 다 하도록 칼질하고 밤마다 밤이 다 새도록 칼질하다가 십년 이십년 백년 칼질하다가 대나무는 죽는다.   그렇다 대나무가 죽은 뒤 이 세상의 가장 마르고 주름진 손 하나가 와서 죽은 대나무의 뼈 단단하고 시퍼런 두 뼘만큼을 들고 바람 속을 간다. 그렇다 그 뒤 물빛보다 맑은 피리소리가 땅 끝에 선다 곧 바로 선다.   - 전봉건의「피리」전문    이 시에서 성장 과정과 멈춤 과정을 두고 이야기 한다고 본다. 성장이라 함은 대나무가 자라며 그 잎에 칼바람 세우고 살아가는 현실과, 멈춤을 통해 대나무가 죽은 그 이후의 다른 형태로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꿈으로써 나타나는 피리라는 사물을 강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드러내지 않지만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시를 통해 그렇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지라 본다. 피리소리 물빛보다 맑게 울리기 위한 그 인고의 과정을 통해 소리가 소리로써의 音을 간직하기까지의 삶이 바로 서 있는 詩라고 볼 수 있다.   여태껏 시치미 따고 초록빛 몸뚱어리로 살면서 언제 삼켜두었는지 짙은 분홍빛 꽃잎을 여러 겹 겨워냈구나, 가슴을 열고 하늘 맑은 물에 묽게 녹아내는 가을 인사말 어렸을 적 바라보던 부러운 옷 색깔을  들길 따라 입은 꽃  - 졸시「과꽃」전문     봄부터 무슨 색깔을 한 꽃을 피울지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초록빛을 띤 잎 새와 가지만 싱싱하게 자랄 뿐이었다. 들길 가에 홀로 나름대로 꿈에 취했는데 그 빛이 짙은 분홍빛으로 겨워내듯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어릴 적에 잘사는 집 아이들이 입은 옷이 입고 싶어 부러워했던 그 색깔로 갈아입은 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어둠이 걷히고 가슴이 탁 트인 기분으로 아무에게나 인사를 거는 여유로운 마음은 가을이 다되도록 피어있다.    커피 한 잔에서 나오는 따뜻한 김이 엮어내는 공간으로 나의 기다림이 들어앉아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낮아지는 그 공간이 비좁아질 때 나의 체온은 식고 있었다. 마주하고자 했던 상대가 없이 한 자리를 지키면서 얼마나 참을성 있게 지내온 건지 얼마나 아량 있게 대해온 건지 혼자 만지작거리며 측정해보는 내 마음의 깊이가 이렇게 얕았던가 보다. 내 삶의 테두리가 이렇게 좁았던가보다. 쓰디쓴 커피는 식어서 나를 앉힐 공간 하나 없이 나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 졸시「커피 한 잔」전문    어느 겨울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기다리면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다보았다. 높이 올라 넓은 공간을 만들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식어 좁아져가는 걸 느꼈다. 마주하고자했던 상대도 오지 않고 나를 앉힐 공간 하나 없이 떠밀려나오는 심정을 그렸다.  그동안 지내왔던 상대에게 참을성 있게 대했는지, 아량 있게 대했는지 생활의 모습을 그려보며, 내 마음의 깊이와 내 삶의 테두리가 얕고 좁은 것을 반성하고 있다. 거피 한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시의 소재가 되고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상상력에 대한 공감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감각을 통한 상상력일 것이다. 창작은 상상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따라 성공여부가 가려질 수 있다. 상상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날이 서서 예리해지지만 사용하지 않고 묵혀두면 녹이 슬어 제대로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시간이 나면 쓰고 시간이 없으면 못 쓰는 활동 자세는 시인의 사명을 버리는 것이다. 항상 관찰하여 시상을 떠올리고 올바른 잣대로 냉철하게 비판하는 날을 세워야 한다   13.  논리적인 글쓰기를 위해 다음 여섯 가지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1. 글을 쓰는 능력은 사고하는 능력이다.  창의적,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면 참신한 아이디어나  설득력을 가진 글을 쓸 수 없다.  좋은 글을 쓰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습관과 훈련이 필요하다.  여기서 생각이란 밖에서 주어진 문제를 당연히 받아 들이고 답하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주장이든 그것을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여 그 문제의 답을 찾으려는 태도다.  또 자신의 주장을 제시할 때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내놓고  다른 사람이 나의 주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그 문제에 답을 하려는 태도다.  2. 글쓰기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이다.  읽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글은 무의미하다.  독자가 글을 읽을 때 글의 흐름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항상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써야 한다.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습관이  읽기 쉽고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다.  3. 논리적인 글을 쓰려면 글을 쓰기 전에 글의 구조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글의 구조란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의 연관 관계다.  자신의 글이나 다른 사람의 글을 요약하는 연습이 논리적인 글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4.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  좋은 글을 단순히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적은 양의 글을 꼼꼼히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읽는 게 중요하다.  또 읽으면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 있다면 사전이나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거나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문의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5.글을 쓰고 난 뒤에 그 글을 반복해 읽으면서 고치는 습관이 필요하다.  좋은 글은 반복된 수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주장과 근거가 참신성과 설득력을 가지는지, 문장과 문장 또는 단락과 단락 간의  연결이 자연스러운지, 문장이 문장으로서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긴 문장을 자주 사용하는지,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는지, 구어 표현이나 주관적인 감상 또는 다짐의 표현을 사용하는지, 무관한 접속사를 자주 사용하는지,  한 문장에서 한 가지 생각만을 정확하게 전달하는지, 반복되거나 중복된 내용이 있는지,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수정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글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 도움을 줄 수 있다.  6. 관심과 정성을 가지는 태도가 중요하다.  자신이나 타인의 생각과 글에 쏟는 관심,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세우고 수정하는데  쏟는 정성으로부터 참신하고 논리적인 생각과 글이 나올 수 있다.  -김준성, 서울대 글쓰기교실 선임연구원     14.  시 창작 강의 (2)   -2. 詩를 많이 읽어 보자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독자로서의 시읽기가 아니라 시에의 올바른 접근을 위한 정독(精讀)을 말합니다. 하루에 몇 권의 시집을 독파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 무르녹은 의미와 시어에 유의하면서 음미해보는 것이 시와의 만남을 더욱 가깝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읽기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하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① 시를 정독하라 시는 의미의 전덜이 아니라, 시 속에 함축된 의미의 암시나 상징. 그리고 의미의 변용을 통해서 정서적, 감각적인 미적 감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시인의 시를 통해서 시인의 미적 감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책을 읽고 간접적인 체험으로 지식과 인격을 느끼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식으로 지식을 넓혀나가는데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정독은 시를 이해하는데는 가장 효과적이며 적절한 방법입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 속에 감춰진 함축적 의미의 발견이나,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감명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② 감명을 받았거나 감동을 준 부분은 다시 읽고 재해석을 해보라   시집 한 권을 읽다보면(시집 한 권에는 60~70편의 시가 수록됨) 그 중에 유독 몇 편은 친근감이 가고 감동을 받는 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일은 내가 직접 쓴 것 같은 것이거나 내가 간직한 시적 상상력, 또는 체험 속에 곰삭은 어떤 의지가 유사하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이 유사성은 시와의 친숙한 정감을 불러 일으켜서 시인이 그런 체험을 어떤 방법으로 해서 시창작을 성공시키고 있느냐하는 관심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시가 마치 스스로 쓴 듯이 뜯어보고 분석해보며 음미하는 일이 계속되면 스스로 자신이 시작과정을 재구성해 본 것과 같이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상상력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 그리고 표현하는 방법 등이 부족함을 절감하면서도 이렇게 쓰는 것이 감동을 주는 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나도 시를 쓸 수 있겠구나하는 잠재력이 이미 발산되고 있다는 사릴에 놀랄 것입니다. ③ 마음에 새겨지는 시의 행(行)이나 연(聯)은 그냥 음미로 그칠 것이 아니라, 노트에 옮겨 써보는 일도 중요하다.   물론 외워버리면 더욱 좋겠지만 이때 옮겨 적는 과정에서 문득 새로운 무엇을 발견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옮겨 적는 일이 많아지면 자신이 생각했던 시어(詩語)들을 동원하여 바꾸어 본다든지, 몇 마디를 생략해 본다든지, 또는 새로운 이미지(image)를 첨가해주는 일 등은 시창작 연습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한편 이런 것들이 모작(模作)이건, 창작(創作)이건 간에 시 쓰는 행위가 될 것이며 이 행위야말로 바로 시 쓰기의 경험으로 연결되는 시적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시편들도 그냥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항상 필요합니다. 어떤 형태의 해석이든 자신의 의식으로 접근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1-3. 모든 것들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시는 어쩌면 많은 사유에서 탄생되는지도 모릅니다. 많이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곧 사유하고 사색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력이 동반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일상생활에서부터 차원 높은 우주관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은 사유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유 속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인생관이 있으며 일생동안 기필코 성취되어야 할 목표인 꿈과 희망도 있습니다. 시 쓰기에서 많은 사유가 필요한 점도 시인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많이 사유한다는 것은 많은 상상력을 빚어낸다는 뜻입니다. 이 상상력도 진실된 인생의 고민이 담겨져야 합니다. 상상은 결국 나 자신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에 놓입니다. 정서는 모든 사상(事象)에 부딪혀을 때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을 말합니다.   심리적으로는 자극이 되는 대상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감정으로서 또는 신체적인 변화가 뚜렸한 것으로서 일정한 상태로 지속되다가 끝나거나 다른 정신상태로 옮겨가는 의식의 과정을 말합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애오욕(愛惡慾)의 칠정(七情)이 우리의 오관(五官-눈, 귀, 코, 혀, 피부. 우리 몸에서 감각을 일으키는 다섯 개의 기관)을 통하여 경험하는 정신적인 산물이 됩니다. 이러한 정서의 올바른 비축을 위한 사유는 창조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르테면 '겨울나무'를 응시하면서 시적인 사유로 발전하려면 그 추운 겨울을 인내하면서 새봄의 루르름을 꿈꾸는 희망으로 바꾸어보는 사유, 즉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과 미래의 유추로 연관짓는 사유가 필요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잠시 조병화 시인의 말을 들어 봅시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내면의 고독과 싸워 왔다. 그 생(生), 애(愛), 사(死) 그 존재와 생존, 그 순수허무와 그 순수고독과 싸워 왔다. 항거와 슨응, 그걸 살아오고 있는거다. 그게 나의 시이며 시론이며 존재 양상인 거다. 인간은 누구나 한정된 자기 수명을 살다 가는 거다. 그 한정된 시간을 견디고 살다간, 또 다른 세계로 이사를 가야하는 거다.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죽음이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이 나의 테마이며 나의 작업인 거다 때문에 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나를 철학하기 위해서 오로지 사색해 왔을 뿐이다. 나를 세우기 위한 철학, 그 발견과 창작의 철학 속에서 시를 배회했고 시의 이치를 찾았고 그것으로써 시를 써 왔다. 이와같이 어떤 사물이건 관념이건 간에 모든 것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보는 사유, 이러한 사유야말로 시를 쓰기 위한 사유가 아닐까 싶다     15.  시 창작 강의(3)   -4. 시 쓰는 연습을 많이 해 보자  처음부터 시라는 틀에 얽매이지 말고 아주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그냥 메모하는 식으로 써야 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일에 대하여 감동했던 것이나 마음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일들부터 자신의 생각으로만 하나씩 적어 봅니다.  어떤 형식에는 구애받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문체나 형식이 일기문이 되거나 편지글이 되거나 상관 없이 글로 옮겨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전번 시간에도 말한 바와같이 다른 사람의 시를 읽고 난 후에 내 생각을 가미하여 모방해보려는 의지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부딪치는 어려운 점은 언어의 부족입니다.(이 언어문제는 다음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물론 언어뿐만 아니라 표현반법이 여러모로 서툴지만 읽고 생각한 자신의 진실을 글로 적어봄으로써 자기 세계가 열리고 시 쓰기에 대한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옛날 선배 시인들은 시인이 되기 위하여 습작 원고지 3만장 정도를 휴지가 되도록 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의 쓰라린 습작기를 거쳤던 것입니다.  시 쓰기에는 유형(有形)적인 소재이거나 무형(無形)적인 소재이거나 간에 많이 느껴본 습성이 중요하지만 이 느낌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는 느낌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느낌이란 많은 형태의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이 느낌이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 미적인 감정과 미적인 언어의 조화로 한 편의 시 작품이 창작되는 것입니다.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 앞에서 하는 속임없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구약성서의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야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말처럼 어떤 소재에서 느낀 솔직하고 진지한 나의 진실이 글로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시입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어떻습니까. 어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히 갈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밤 하늘에 뜬 구름 사이로 흘러가듯 떠 있는 달의 모습은 얼마나 고적하고 유유합니까. 이런 달의 형상이 작품 속에서 나그네와 연관됨으로써 다른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며 나그네의 구체적인 모습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옛말에 시이도지(詩爾志)란 말이 있습니다. 시를 쓰거나 읊조리는 것은 자기의 지닌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종호 교수는 정규 문과 대학생 조차도 우리 근대시의 고전인 (박목월, 조지후, 박두진 3인 시집)을 읽어본 경우가 희소하다고 개탄하면서 우리 문학 교육의 현실을 말하고 있어서 위의 [나그네]같은 작품은 겨우 교과서에 수록된 것을 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시 쓰기에는 이런 일도 있구나하는 도움이 될까해서입니다.  고려 때 문신인 정지상과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는 서로 시적(詩敵)이었습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의 사령관이었던 김부식은 정지상이 이 난에 관련되었다하여, 평소에 시 쓰기에 있어서 숙적이었던 정지상을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 뒤 어느 봄날 김부식은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습니다. 봄의 정경을 잘 표현한 아름다운 시입니다.  버들은 일천 가지로 푸르고(楊柳千絲綠-양류천사록)  복숭아는 일만 송이로 붉구나(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그런데 문득 공중에서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서 김부식의 빰을 갈기며 호령했습니다.  "이놈아, 버드나무가 일천 가지인지, 복숭아가 일만 송이인지 네가 세어 보았느냐? 왜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복숭아는 송이송이 붉다(楊柳絲絲綠-양류사사록,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라고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나중에 김부식은 어느 절간 화장실에서 정지상의 귀신에게 불알을 잡아당겨 죽었다는 일화가 라는 책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참 절묘한 표현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드나무 가지의 표현이 일천 개보다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표현이 더욱 좋다는 것입니다. 복숭아꽃의 일만 송이보다는 점점이 그러니까 송이송이 이것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시 쓰기의 연습에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정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언어를 매체로 해서 표현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국 많이 읽어보고 많이 생각하며 많이 써보는 것만이  '나도 시를 쓸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길일 것입니다.     16.  시 창작 강의 5   인간은 누구나 감수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때가 있다. 막연하나마 어떤 정신적인 동경이나 갈망이 솟구쳐서 이를 표현해 보려는 의욕이 일어나서 종이에 낙서를 하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데 이러한 표현 욕구는 시를 쓰는 목적이나 그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습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씌어진 시란 다분히 자기 본위의 일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앞날의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청춘의 감성은 대체로 자기자신의 내부적인 세계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인 세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불안감의 표시로 봐야하며 이러한 표현의 욕구는 언젠가는 새롭게 발견되어질 미(美)의 세계에 대한 예술적 탐구정신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시인으로서 살아간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시적인 표현 욕구는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 속에 깊이 잠재한 내외적 세계의 조화로서 표현의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은 사회적 불안이나 내 자신의 불안 등 여러 형태의 모순들이 보다 안정되고 보다 차원 높은 세계의 강망이나 희구, 또는 향수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시를 쓰는 즐거움의 뒤안에는 이러한 욕구나 동경에 대한 충족감이 깃들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적어도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로 창조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참된 보람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요즘 시인들의 시창작 경향을 살펴보면 대체로 현실의 비합리성에 따른 위기의식의 극복과 절박한 갈증의 해소가 시적인 동기로 나타나는 예가 많은데 이는 시창작을 통해서 화해나 조화를 모색하고 정신세계의 안온을 위한 기원의 의지를 추구하려는 시의 목적의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방지원 시인의 작품 [해뜰 무렵]도 이러한 인식이 깊게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밤새 불을 밝히던 고깃배가  놀란 물살을 바쁘게 가르고  느린 듯 빠르게  그 찬란한 불덩이를 들어올릴 때  바다 한가운데 검게 앉은 그 사람도  바닷가의 사람들도 모두 한마음이었을까  연한 살점 태워 하늘에 올리는 소지(燒紙)  오존층까지 오르고  그 불덩이가 세상을 돌아  노을이 될 때  우리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남기를 바란다.   과연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시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리하여 자기의 정갈한 세계를 구축하고 시를 쓰는데서 지적인 만족을 획득하는 또다른 희열을 느낄 수 가 있를 것입니다.  매슈 아놀드의 말대로 ‘시는 인생 비평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3. 시인과 현대 사회   현대 사회는 대단히 복잡다단한 사회입니다. 살아가는 일마저 다양한 형태이지만 물질문명의 팽창으로 어쩌면 정신의 활폐화가 극도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아가는 시인들은 남다른 능력을 가졌거나 탁월한 그 무엇을 소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시인을 예언자나 초자연적인 느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행각한 적 있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C. D 루이스는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의 많은 예언자들은 시인이었으며 그리스의 사람들은 시인들이 시를 쓸 때에는 어떤 신(神)에게 홀렸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접신(接神)의 경지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고도로 발달된 과하문명이나 자본주의의 자유경쟁이라는 생활방식에서 시는 그 가치가 축소되고 그 기능이 감소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척박한 사회일수록 시의 가치성과 기능을 더욱 공고히 해야한다는 역설적인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문덕수 시인의 시론을 들어 봅시다. 그것은 마치 일반적으로 종교와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그만큼 우주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영역이 넓어져 가고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이 더욱 증대되어 가고 있는 현상과 같다고 하겠다. 현대는 산문의 시대, 곧 소설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시의 기능이 점점 중요시되어 가고 있고 시인의 존재 이유가 더욱 절실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시인은 복합적이면서 다원화된 현대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보면서 어떻게 그 기능을 살릴 수 있을까하는 문제들을 심각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마치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인격이 전락하여 인간관계는 바로 물질적 관계로 변형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고 사회의 분열현상마저 초래되고 있는 서글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들의 혹독한 아픔이며 비극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격의 파괴나 인간의 소외, 도덕의 소멸 등으로 현대인들은 불안하고 또한 고뇌의 원인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현대 사회가 고뇌의 늪으로 빠질수록 우리는 일찍이 예감할 구 없던 새로운 인류의 공동운명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자연의 파괴나 전쟁의 위험, 빈부의 차이,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 더욱 큰 고뇌를 인류 전체의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먹구름 홀연히 천지를 덮는다  지구 저쪽에서 날아온 조전(弔電)  펼친다, 펼치면서 꿈꾼다  먹구름 속 유영하던 꿈  깨진 꿈 껍질이 풀풀한 지상에는  오오, 누군가 온몸으로 오열하는  거기, 그곳에는 찌그러진 언어 몇 개만  막숨을 몰아 쉬고  이제 피와 눈물과 마지막으로 섞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먹구름은 저승쪽으로만 몰려가고  무방비의 이 지상에서  가녀린 기원마저  시름시름 무너지고 있다  --그래, 우리 살아남을 수 있겠나.   이 시는 졸시 [不在中 . 12]의 전문입니다. 참으로 암담한 지구상의 존재들을 나름대로 고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현대 문명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이를 조화와 예지로서 화해의 가교 역할과 함께 비판적이면서도 통합하는 기능을 보유하지 않으면 언될 것입니다     17.  시창작 강의 6   ㅁ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 이제 2008년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잡다한 일상사를 정리하고 내년에는 반드시 무엇인가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시도 많이 쓰시고 이곳 ‘창작방’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럼 전번에 이어서 운율에 대해서 좀더 알아 봅시다. ③ 음수율(syllabig system)   이 음수율은 각 시행의 음절수(音節數)를 일정하게 맞추는 운율입니다. 영시(英詩)에서는 음보(音步-metre)가 있고 한시(漢詩)에서는 다섯 글자로 맞추는 오언(五言)과 일곱 글자로 맞추는 칠언(七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형시인 시조나 가사, 기타의 신문학 초기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3 . 4조나 4 . 4조, 또는 7 . 5조 등으로 구성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조선조 중기의 문인이었던 양사언의 시조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렇게 시조처럼 일정한 글자수를 맞추는 형식인데 지금 현대시에서는 별로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소월의 [먼 후일]이라는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글자수의 배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시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시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그리고 한시에서는 전형적으로 이러한 오언이나 칠언절구를 갖추고 있습니다. 참고로 만해 한용운의 [차영호화상(次映湖和尙)]이란 작품을 봅시다. 내용은 “시와 술로 시름하는 나입니다만 / 당신도 문장으로 늙으시네요 / 눈보라와 더불어 부쳐온 글월  / 속절없이 설레이네 오가는 두 정”이지만 우리는 오언절구라는 운율에 유념하여야 하겠습니다.   詩酒人多病 文章客亦老(시주인다병 문장역객로)   風雪來書字 兩情亂不少(풍설래서자 양정난불소)   역시 칠언절구도 마찬가지 입니다. 김삿갓의 시 [무제(無題)]를 보면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사각송반죽일기 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주인막도무안색 오애청산도수래) 라고 하여 일곱 글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김삿갓이 방랑을 하다가 어느 집에서 쉬어가게 되는데 주인이 너무 가난하여 죽 한 그릇으로 대접을 하면서 어쩔줄 몰라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합니다. “네 다리 소반에 놓인 죽 한 그릇 속에 하늘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떠 있구나. 주인은 도리가 아니라고 쩔쩔 매지 마시오. 나 본래 청산과 물이 비치는 것을 무척 사랑한다오” 쯤으로 알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3-1-2. 내재율(內在律)   지금까지 외형율, 그러니까 외적으로 나타나는 운율을 살폈지만 지금부터는 안으로 내재되어 확인되는 않지만 현대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재율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내재율은 한 마디로 시의 호흡이나 템포(tempo-속도, 박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형시에서의 외형율처럼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있기는 있으나 분명히 지적할 수 없는 속으로만 생명처럼 존재하는 시인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의 저변을 흐르는 언어의 억양과 색조가 빚어내는 어떤 리듬입니다. 바로 현대시에서 언어가 갖는 속성이나 기능을 종합한 무형의 리듬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 내재율은 일정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시를 쓰거나 읽으면서 스스로 체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가령 윤동주의 [서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처럼 시의 외형상의 리듬은 보이지 않지만 속살로 흐르는 시인 특유의 맥박과 호흡니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시에서 필요로 하는 내재율입니다. 다시 산문시의 형태를 갖춘 나의 졸시 [사랑법 . 9-시인의 사랑]이란 작품을 읽어 봅시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솔바람곁에 뿌리는 라일락 향기로 그대는    내게 다가 왔다. 어느 후미진 언덕배기에서 안개 속 잡풀의 흔들림을    보거나 마알간 냇물이 흰구름을 안고 치억들을 어루만지거나 아니 서   해 바닷가 갈매기 울음을 듣거나 그대 눈빛은 항상 내 가슴 깊이 안   기어 촉촉하다. 더러는 연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무지개였다가 별안간    이슬 한 모금 삼킨 주홍빛 꽃잎이었다가 스스로 앵두 입술 지그시 깨   물고 사유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순한 바람이었다가 아아 그대여, 이   제 진실로 그대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한 마디 ‘사랑해’ 그 화음이 해뜰   녘이거나 저물녘이거나 늘 함께 푸른 강물로 젖어 있다. 멀고 가까움   이 이제 지워진 그 시인의 사랑 그리고 사랑법.   이런 작품을 언뜻 보면 산문처럼 생각되지만 산문시의 형태로 표현되어서 명심해서 읽어보면 시의 맥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는 외형율보다 내재율을 중시한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비록 자유시(현대시)라 할지라도 김소월과 김영랑 등 자연파 시인들은 음악성을 강조하는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는 점도 어찌보면 시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8.  시의 이해  심상과 운율은 시를 가장 시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이들에 대한 연구를 미학적 입장에서만 전개하면 내적 비평의 한 방법이 된다.  1. 심상(이미지)  (1) 심상의 의미  심상은 체험을 감각적으로 언어화한 것을 말한다. 이 때 감각적이라는 말은 심상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중요하다. 감각은 심상적 표현의 구별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보다 “나는 그녀를 붉디붉게 사랑했다.”가 더 심상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붉디붉게’라는 표현이 감각의 일종인 시각으로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심상의 종류  심상은 체험을 감각적으로 언어화한 것이기 때문에 심상의 종류도 감각의 종류와 같다. 보통 감각의 모든 것은 얼굴에 모여 있는데(우리가 매일처럼 다듬고 씻고 하는 이 얼굴이 감각의 집결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허망하기도 하다. ^^;) 눈, 코, 귀, 그리고 입 속의 혀, 땀구멍까지 각각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으로 연결된다. 이들은 각각으로 제시될 때도 있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가 함께 제시되거나, 혹은 원래 가진 감각이 이동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 복합 감각: 각각의 제재에 각각의 감각이 붙은 표현. 감각이 결합되었다는 뜻으로 복합감각적 표현이라고 한다.  2) 공감각: 하나의 제재가 원래 가진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이동하는 표현.  (예시)  ①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②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③들을 때는 우레더니 보니 눈이로다.  (해설) ①은 ‘우는 줄’과 ‘달이 뜬 초가 삼간’이라는 각각의 제재에 청각과 시각이 각각 결합해 있다. 따라서 복합 감각적 심상이다. ②는 ‘태양’이라는 하나의 제재가 원래 가진 시각이 ‘울림’이라는 청각으로 이동해 있다. 따라서 공감각적 표현이다. ③은 폭포의 소리와 모습을 보고 ‘우레’라는 청각과, ‘눈’이라는 시각을 결합했다. 폭포 소리라는 제재에 청각이 결합하고 폭포의 모습이라는 제재에 시각이 결합했으므로 복합감각적 표현이다.  (3) 심상의 제시 방법  1) 심상의 제시 방법  심상의 종류는 감각의 종류만큼 많지만 심상의 제시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가른다. ‘묘사’와 ‘비유’가 그것이다. 이 때 비유는 상징을 포괄하는 것으로 광의의 비유를 의미한다. 묘사든 비유(상징)든 감각을 구체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런 구체화된 감각은 독자의 감성을 환기하여 감동의 깊이를 더해준다.  2) 비유적 심상의 효과  비유는 감동의 깊이에 감동의 폭을 넓힌다는 또 하나의 기능을 가진다. 비유를 하게 되면 감각이 구체화될 뿐 아니라, 함축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여러 다양한 경험을 가진 개인들이 공감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한국 민중이 가장 즐겨 보는 보편적인 점술서 [토정비결]은 가장 예언이 잘 적중하는 명저로 꼽힌다. 그런데 이 [토정비결]을 보면 천 가지가 안 되는 경우의 수에 모든 사람의 길흉화복이 맞추어지도록 되어 있다. 40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천 가지도 안 되는 경우의 수에 맞춘 것이 토정비결인데 적중률이 높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해마다 이 점술서를 사 본다. 그 비법은 간단하다. 즉 모든 서술이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기에 여러 경험이 다양하게 해석되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목에 꽃이 필 괘’라는 비유적 표현은 뭔가 희망이라고는 없는 상황에서 좋은 일을 맞이한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비유적 표현이 감동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문제) 다음 시의 표현상의 특징을 잘 못 말한 것은  (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나)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먼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①(가)는 시각적 심상으로 외로움을 구체화하고 있다.  ②(나)에는 공감각적 표현이 있다.  ③(나)에는 역설적 표현이 있다.  ④(나)가 (가)보다 묘사적이다.  ⑤(가)의 ‘달빛’은 외로움과 상통한다.  (해설)  (가)는 묘사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하고 (나)는 비유적(은유적)으로 청각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따라서 잘못된 설명은 ④이다.  (4) 심상의 해석 요령  1) 일반론적 해석 - 토정비결의 수준  한 편의 시를 독자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교과서적 해석에 따르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시를 시험 문제에 낼 수 있나 없나를 묻는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전자의 입장에 서면 시를 절대로 시험 문제에 낼 수가 없고 후자의 입장에 서면 시험 문제에 낼 수가 있다. 이 경우 후자가 맞다. 시의 해석은 교과서적 해석을 따라야 한다. (참고서적 해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  흔히 시가 창작되어 작가의 손을 떠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독자의 몫이라 하여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구절이나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해서 자기 것으로 여기면 그만이지 시 해석의 일반론을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 해석의 일반론을 따르다가 보면 시 해석이 딱딱해지고 어려워져서 결국 시에 대한 진정한 감상에 이르지 못한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이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의 주된 태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가령, 비유적 표현의 집산지라고 할 수 있는, 그래서 시와 그 궤를 같이 하는 우리의 명저 [토정비결]의 한 구절을 보자. '고목에 꽃이 필 괘'라는 구절을 보고 일반론적 해석을 전제하지 않고 그냥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기분이 나쁜 상태라고 하여,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 사람이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다. 이 때 일반론적 해석의 진실은 무엇인가? 하나하나 살펴보자. 가령 '고목'은 꽃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도저히 꽃이 필 조건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목은 꽃이 피기에 적합하지 않은, 혹은 꽃이 절대로 필 수가 없는 부정적 조건이 될 것인데 여기에 꽃이 피었으니 예상 외로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일반론적 의미를 가진다.  이 일반론적 해석을 유도하고 가르치려는 것이 교과서적 해석이다. 이른 일반론적 토대를 무시하고 독자의 기분에 따라 시를 마음대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시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시에 대한 모독이다.  일반론적 해석으로도 충분히 풀 수 있는 다음 문제를 보자. 즉, 토정비결을 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풀어 보고 시의 이미지를 해석하는 요령을 알아 보자.  (문제) 보기 시에서 시행의 함축적 의미가 다른 하나는? (1999 수능 기출)  < 보 기>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①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②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③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④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⑤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해설)  점을 보러 갔는데 ‘하늘도 다 끝나가는 운세요’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 뜻에서 ①은 그 의미가 부정적이다. 나머지를 점괘 식으로 해석해 보라. ‘꽃이 빨갛게 필 괘,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움작거릴 괘,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올 괘(더구나 이 시행이 꽃이 빨갛게 필 괘라는 구절과 함께 쓰였다. ), 바람결 따라 꽃성이 (찬란히) 타오를 괘’ 어느 것 하나 부정적인 이미지는 없다. 모두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여기에다가 시적 화자가 눈이 온 툰트라 동토에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고려해 보라. 정답은 ①이다.  대부분 수능 출제 시들은 이렇듯 일반론적 해석, 한국 민중의 민족적 정감에 바탕을 둔 토정비결식 해석을 넘어서지 않는다. 토정비결식 해석으로 단박 풀리는 문제 하나를 더 보고 가자.  (문제) 는 ㈎의 시를 해석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 시( 박목월의 [이별가]와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지문으로 출제됨.) 의 시어 중, 이와 유사한 해석 방법을 적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은? (1997 수능 기출 응용)  문학적 상징에는 인류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상징과 특수한 문화권에만 적용되는 상징이 있다. 이 시에 나타난 ‘길’이나 ‘가을’ 같은 것은 동서양에서 모두 자주 다루어지는 문화 소재이지만, ‘미타찰(彌撱刹)’은 불교의 전통과 관련하여 동양권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 시어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 시를 잘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① 강기슭 ② 뱃머리 ③ 흰옷자라기 ④ 골짜기 ⑤ 낙엽  (해설)  박목월의 시 [이별가]는 시에 나타나 있듯이 ‘저승’으로 간 ‘너’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다. ‘저승’에 간 ‘너’는 ‘흰옷자라기’만 펄럭거린다. 우리 민족 문화 전통에서 ‘흰 옷’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서양이 ‘검정 옷’임에 반해. 이것이 민족적 전통이다. 그러니 답은 ③이다. 일반적인 시의 해석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시 해석은 토정비결 수준이라고 해석하면 딱 맞다.  과연 시의 이미지가 일상적인 해석의 수준, 토정비결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가? 조금 어렵다고 판단되는 다음 문제를 풀어 보자.  (가) 자야곡(子夜曲)  이육사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문제)  (가)의 흐름으로 보아 긴밀하게 연결되는 이미지끼리 묶인 것은?  ① 빛 - 꽃불 - 연기 ② 빛 - 파이프 - 무덤 (1.2점)  ③ 고향 - 자랑 - 소금 ④ 노랑나비 - 연기 - 그림자  ⑤ 연기 - 발자취 소리 - 이끼  (해설) 이육사가 지은 자야곡이다. ‘자야’란 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 밤중을 가리킨다. 한 밤중에 일어나 지은 곡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한 밤중에 무슨 내용의 시를 지었을까? 일단 문면을 보니 ‘고향’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만 봐도 한 밤중에 일어나 고향 생각이 절실해서 지은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화자가 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그것은 파이프 담뱃불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담뱃불은 ‘꽃불’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이제 상황은 대충 요약된다. 호랑나비 한 마리 오지 않는 무덤일 뿐인 현재의 고향에서 시적 화자는, 파이프 담뱃불을 보면서 ‘수만호 빛’이었던 과거의 고향을 아스라히 떠올리고 있다. 파이프 담뱃불은 회상의 매개체로 수만호 빛이었던 과거의 고향을 연상시킨다. 담뱃불=꽃불이므로 이미지 연결은 ‘꽃불’- ‘빛’으로 이어진다. 파이프에 현재 꽃불이 붙어 있으니 연기도 물론 날 것이고 그것은 고향에 대한 아스라한 추억 정도의 상징 의미를 가질 것이다. 따라서 정답은 ①이다.  시는 이렇게 일반론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에서도 충분히 풀 수 있다. 일상적 시어와 시적 언어는 거의 다르지 않고 다만 전체 시의 맥락 속에서 몇 가지 사항들을 유의하면 쉽게 풀어질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이렇게 쉽고도 상식적인 입장에서 풀 수 있는 시 문제를 참고서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보니까 그것을 음미하고 즐길 줄 모르고 암기해 버리고 마는 데서 발생한다. 일반론적 상식에 입각해도 충분히 풀어갈 수 있는 다음 문제도 풀어 보자.  (가)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 리  돌아서서 육십 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 년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문제)  (가)의 셋째 연에 보이는 정서와 가장 유사한 것은? ( 1994 1차 수능 기출)  ①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②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③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④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⑤ 아카시아 어린 잎사귀가 피어나는 산모롱으로  나는 혼자서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혼자였었다.  (해설)  (가)의 셋째 연에는 시적 자아의 어떤 행위가 나타나 있다. 그 밑의 시의 내용을 보면 ‘산수 갑산’에 돌아갈 수 없지만 십오 년 정분을 못잊는다는 시적 자아다. 그가 온 길을 돌아서서 다시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15년 정분을 못잊는 미련 때문에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불귀, 즉 다시 못 돌아가는 곳 아니냐. 그러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 시적 자아의 정서가 나타난 것이 (가)의 셋째 연의 정서이다. 미련과 결행 사이에 갈등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는 구절이 답이 될 것이다.  ①은 청산에 살고 싶다고 했으니 소망의 정서가 드러난다. ②는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시적 화자의 편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③은 탄식의 고개인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서 ‘한 번 가면 못 온다’고 하여 넘어갈까 넘어가지 말까를 망설이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④눈 속 깊이에서 피어나는 꽃맹아리를 보고 목숨의 의지를 다지는 정서이고 ⑤는 혼자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그리움의 정서를 형상화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정답은 ③이다.  시의 이미지가 지닌 함축적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 문제를 풀어보는 것도 시 문제에 대한 자신감을 길러 주는 데 기여하리라.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 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를 일일께며.  (문제)  밑줄 친 부분의 지시 대상이 나머지 넷과 다른 하나는?(1994 2차 수능 기출)  ① 유일한 사람 ② 머슴 ③ 나 ④ 끄나풀 ⑤ 정한 몸알  (해설) 심호흡도 필요 없다. 그냥 단순히 대입해 보라. ‘정한 몸알’인 ‘그’를 위해 ‘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유일한 사람, 머슴, 끄나풀’이다. 정답은 ③이다.  2) 개성적 해석과 유추적 사고  그렇다면 독자 나름대로 해석해서 가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일반론적 해석을 자신의 경우로 적용해 보는 것이다. 가령, 수학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학생이 수학 시험을 치르기 전에 이 구절을 보고 '의외로 운 좋게 수학 시험을 잘 치르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노처녀라면 결혼 운이 생기겠구나로 해석하는 것이고 할머니라면 늦아들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요컨대 독자 나름의 시 해석에 대한 다양성은 일반론적 해석을 전제하고 난 뒤의 이야기이지 일반론의 단계에서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과서적 해석을 참고서적 해석과는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 주길 바란다. 가령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는 구절의 경우, 참고서는 무조건 '가난한 노래의 씨'는 독립의 의지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그 뒤에 나오는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부르는 '결실의 노래'가 독립일 때, 유추적으로 미루어 해석된 결과일 뿐이다. 가령 '결실의 노래'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를 의미한다면 '눈 내리는 벌판'은 이별이 된 부정적 상황으로 유추되며, '노래의 씨를 뿌리는 행위'는 재회의 희망을 심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것을 꼭 독립의 의지라고 외울 필요까지는 없다. 참고서가 제시하는 이런 따위 수준까지 다 외우는 데서 시가 죽는 것이다. 시를 살려 정말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론적 해석을 전제로 그것을 자신의 경우로 유추하여 해석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시 해석 행위는 고차적 언어 능력인 추리 상상력을 기르는 일이기도 하며 합리적인 상상력을 기르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이런 유추적 사고와 관련 있는 내용의 시 문제를 풀어 보자.  [다] 서시(序詩)  윤동주(尹東柱)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문제 1)  밑줄 친 부분의 시적 의미가 형상화된 시행을 다음에서 찾으면? (1995 기출)  ①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②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③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④ 흐르는 구름/머언 원뢰(遠雷)  ⑤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문제 2)  (가)시(김소월 [진달래꽃])의 (나)시의 화자가 대화를 나눈다고 할 때, 작품에서 드러나는 태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1999 수능 기출)  ① ㈏ : 당신은 너무 소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면 절대 가지 말라고 임을 붙잡든지, 아니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미련을 남기지 않고 헤어지든지 했을 것입니다.  ② ㈎ : 떠나는 임에게 꽃을 뿌린다는 것도 소중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프면서도 그것을 안으로 삭이며 인내하는 것이 우리 여인들의 전통적인 정서가 아니던가요?  ③ ㈏ : 그런 태도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어차피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굳은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야 합니다.  ④ ㈎ : 임이 떠난다는 현실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미련이 많이 남습니다. 모든 상황을 하나의 감정만으로 정리하기 힘든 게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요? 제가 했던 말은 그런 심정의 표현이지요.  ⑤ ㈏ : 사실,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우리들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가 많지요 그럴 경우 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곤 합니다.  (문제 3)  를 참조할 때, ‘청산 별곡’의 화자와 ‘어부사시사’의 화자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은? (2000 수능 기출)  갑: 차라리 강으로 달려가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낼지언정, 어찌 희고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쓰겠는가?  을: 강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강물이 흐르면 내 발을 씻으리라.  ① (가)의 화자가 '을'이라면,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가)의 화자가 '갑'이라면, 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나)의 화자가 '을'이라면,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④ (나)의 화자가 '갑'이라면, 현실에 적응하여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⑤ (가)와 (나)의 화자가 '갑'이라면,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설) 1. 먼저 밑줄 친 부분의 시적 의미를 알아 보자. 시적 화자는 한 점 부끄럼 없게 살기를 바라온 사람이다. 그래서 따라서 자신(잎새)에게 불어오는 조그만 부끄럼(바람)에도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내적 단련을 거쳐 순결한 삶을 유지하고자 애썼다는 것인데, 이런 구절과 관련 있는 것을 찾으면 된다. 먼저 ①.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는단다. 바위처럼 강한 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형상화한다. ②는 바위를 깎는 대상들이다. 바위에게 닥친 외적 시련이다. ③은 자기 채찍질이다. 내적 단련과 관련이 깊다. ④는 바위가 지향하는 세계다. 거리낌 없음이나, 먼 곳을 지향하는 심리가 드러나 있다. ⑤ 역시 강력하고 의지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정답은 ③이다.  2. 두 시적 자아가 대화를 나눈다고 할 때 알맞은 것을 고르는 문제는 전체적으로 시를 감상하고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그러나 대조라는 것은 두 대상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고라는 것을 전제해 두면 각각의 상황을 대조적으로 해석해 내어서 응용하는 문제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진달래꽃]의 경우, 이별의 상황이라는 부정적 상황에서 ‘가는 님’을 붙잡지 않고 있다. 이별을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있지 않다. [꽃]의 경우, 꽃이 피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이라는 부정적 상황에서 어떻게 하든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진달래꽃]이 소극적이라면, [꽃]은 매우 적극적이라는 것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문제를 풀어 보자. 정답은 ⑤  3. 청산별곡의 화자는 현실이 너무 괴로워 ‘청산을 택했지만, 현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삶의 고독과 비애를 느끼는 존재이다. 반면 어부사시사의 화자는 세속의 반대항인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 여유를 즐기며 살아가고자 하고 있다. 에서 ‘갑’은 죽을지언정 현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삶의 자세를 보여 주고, ‘을’은 현실의 변화에 알맞게 대처하며 유유자적 살아가는 사람으로 볼 수 있으므로 ③이 답이 될 수 있다. 답③  2. 운율  (1)음악성(운율)  1)반복  운율은 반복에서 온다. 음절수가 반복되면 음수율이 되고 음보(발음 등장성으로 끊은 음의 걸음걸이)가 반복되면 음보율이 된다. 특정 위치에서 음운이 반복되면 음위율(두운, 요운, 각운)이 된다. 수미쌍관의 구조도 일종의 음악성과 관련이 있다. 반복의 기본틀에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것이 수미 쌍관이기 때문이다.  (문제1)  을 처럼 고쳐썼을 때, 고쳐 쓰기를 통해 얻은 시적 효과를 가장 적절하게 평한 것은? (1999 수능 기출)     ♥ 시는 율어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시는 모방의 기술이다.   (필립 시드니)    ♥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이다. (워즈워드)    ♥ 시는 정에 감응하여 말소리로 나타낸 것이다.  (이규보의 )    ♥ 시는 감흥을 주고, 볼 수 있게 하고, 사귀게 하고, 원망하게 하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공자)    ♥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맥리쉬)     시의 특성 ♠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 ♠ 내면화된 세계의 주관적이고 은밀한 토로(吐露)이다. ♠ 언어가 지니는 '소리(운율)'를 많이 활용한다. ♠ '시적자아(서정적 자아)'라는 대리인에 의해 전달된다.     시의 여러 요소 ♠ 4대 요소    ㉠ 의미적 요소(생각) : 시에 담긴 시인의 뜻과 생각 → '주제'    ㉡ 음악적 요소(운율) : 반복되는 소리의 질서에 의해 창출되는 운율감 → '운율'    ㉢ 회화적 요소(심상) : 대상의 묘 사나 비유에 의해 떠오르는 구체적인 모습 → '형상'    ㉣ 정서적 요소(감정) : 시어에 의해 환기되는 심리 및 감정 반응 → '정서' ♠ 형식적 요소    ㉠ 시어(詩語) : 시에 쓰이는 언어로, 함축적 의미를 중시하는 압축된 형태의 언어이다.    ㉡ 행(行) : 시에서의 한 줄을 가리킨다.    ㉢ 연(聯) : 시적 사고와 내용 전개의 단위로 하나 이상의 행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 운율(韻律) :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소리의 규칙적인 리듬이다.     시의 언어 ♠ 시어의 특성    ㉠ 시는 언어 예술이다. : 시는 언어의 의미와 소리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언어 예술이다.    ㉡ 언어의 외연적 의미보다 내포적 의미를 중시한다.                      *외연적 의미(지시적 의미) → 언어의 과학적 쓰임으로, 사전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인 의미.             *내포적 의미(함축적 의미) → 언어의 정서적 쓰임으로, 암시적이고 간접적이며 주관적인 의미.    ㉢ 사이비(似而非) 진술 : 과학적 진실이나 상식에 어긋나면서도 시적 진실을 표현하는 진술 방식으로,                                              '가진술(假陳述)'이라고도 하며, 시어의 중요한 속성이다.          예> 사람이 술을 마신다.(과학적 진술) → 술이 사람을 마신다. (가진술)    ㉣ 시적 자유(시적 허용) : 문법 파괴, 신조어 구사, 고어와 사투리의 사용 등 규범 문법의 제약에서                                              벗어난 표현이 시에서는 허용됨.          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십니까?)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범하진)    ㉤ 다의성(多意性) : 하나의 시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성질을 말하며, '모호성'이라고도 하며,                                           이는 시어의 함축적 기능에 연유한다. ♠ 시어의 기능    ㉠ 음악적 효과(운율)를 줌.    ㉡ 이미지(심상)를 이루어 냄.    ㉢ 시의 어조를 만들어 냄.    ㉣ 시의 분위기(정조)를 형성함.    ㉤ 함축적 의미를 지님.    ㉥ 특수한 기법(반어, 역설, 풍자 등)에 의해 시적 긴장을 가져옴      운율의 개념          ⇒ 운율이란, 소리의 일정한 규칙적 질서로,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가락(리듬감)을 말한다. ㈀ 운(韻) : 동일하거나 유사한 자음이나 모음이 일정한 위치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                 두운, 요운, 각운 등 한시의 압운법이 대표적이다. ㈁ 율(율격)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글자의 수 등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                     영시의 강약률, 한시의 성조율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시가의 율격 기준은 시간적 등장성(等長性)에 기초한 음보율(音步律)이 중심을 이룬다.        운율의 요소 ♠ 동일 음운의 반복 : 특정한 음(음운)을 반복하여 사용함.    ㈀ 자음 반복            예> 갈래 갈래 갈린 길 / 길이라도 (김소월의 "길") → 자음 'ㄱ'의 반복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 자음 'ㄹ'의 반복    ㈁ 모음 반복            예> 오늘 하루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ㅗ'의 반복 ♠ 동일 음절수의 반복(음수율)      예> 한시, 시조, 가사, 창가 등이 대표적임.            산 너머 / 남촌에는 / 누가 살길래 //            해마다 / 봄 바람이 / 남으로 오네.//  (김동환의 ) → 7.5조의 음수율 ♠ 일정한 음보의 반복(음보율) : 3음보, 4음보가 대표적임      예>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동지 섣달 / 꽃 본 듯이 / 날좀 보소//            아리 아리랑 / 쓰리 쓰리랑 /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 날 / 넘겨주소.//       (민요 ) → 3음보 ♠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 : 같거나 비슷한 문장의 짜임을 반복하여 사용함.      예①> 물새알은 / 물새알이라서 / 날개 죽지 하얀 / 물새가 된다.               산새알은 / 산새알이라서 / 머리꼭지에 빨간 댕기를 드린 / 산새가 된다.      예②>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a                            a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b                            a ♠ 의성어 · 의태어의 사용     예> 살랑살랑 물결 이는 냇가에 서면 / 가슴 안 여린 모래톱으로 / 그리움 사르르 밀려 들오고.        운율의 종류 ♠ 외형률 : 시의 표면에 겉으로 드러난 운율(정형률)    ㈀ 음위율 → 일정한 위치에 같은 음을 배치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한시 · 영시 등의 두운, 요운, 각운    ㈁ 음성률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적 반복으로 생기는 운율.              예> 영시와 한시에는 두드러지나, 우리 시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 음수율 → 글자의 수를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3(4) · 4조,  7 · 5조 등.    ㈃ 음보율 → 일정한 음보(音步. 발음 시간의 길이가 같은 말의 단위)를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우리나라 전통 시가(시조, 가사, 민요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3음보, 4음보 등. ♠ 내재율 : 의미와 융화되어 내밀하게 흐르는 정서적이고 개성적인 운율.                 일정한 규칙없이 배열된 시어 속의 리듬으로, 시를 읽어가는 동안에 독자의 마음 속에서 느껴            지는 것으로, 행이나 연, 문체, 또는 작품 전체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는 주관적인 운율을 말한다.        운율의 효과 ♠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소리의 규칙적 질서에 의해 즐거움과 함께 깊은 인상을 준다. ♠ 일상 생활의 말에 대한 무감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한다. ♠ 시의 의미와 연결되어서 독특한 어조를 이루어 낸다.         25.  제1강  박석구의 시작법 1.      시의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대상과 현상을 만납니다. 이런 대상과 현상의 모든 것을 세계라고 합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가집니다.  그럼, 대상과 현상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어떻게 한 편의 시로 표현해야 하는 걸까요? 이런 막연한 질문에 시인도 독자도 당황하는 때가 많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것들은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양하고, 그 방법을 구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존 시인들의 작품을 수없이 읽고, 외우고, 자기의 작품을 끊임없이 쓰고, 지우다 보면 표현 방법이 저절로 터득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고, 그것은 지도 없이 세계여행을 떠나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시를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정리하여 옮겨 보기로 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부끄럽지만 나의 시작 과정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해답일 뿐, 정답은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듯이 시를 쓰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인용한 모든 시는 나의 시 중에서 가려 뽑았습니다. 나의 시작 과정을 밝히는 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인용한 시들은 나의 삶 속에서 캐낸 평범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를 도구로 한 것들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가슴에 남은 이야기들을 시로 바꾸어 보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일지 모릅니다.  평범한 것이 아름답고, 쉬운 것이 옳다는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시는 쉬워져야 합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라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달나라나 별나라의 신기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의 이야기가 드러나야 됩니다. 이 글은 시를 전문으로 쓰는 시인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시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삶 이야기를 시로 바꾸어 보는 연습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를 쓰는 과정을 함께 가 보자는 생각에서 정한 것입니다. 평범한 마음으로 평범한 대상들을 가슴에 담아 시로 바꾸어 보자는 것입니다.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여행 준비  시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이론을 조금은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여행 준비. 이 장에서는 시의 개념, 표현 방법, 대상인식 등에 관한 것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1. 시의 개념  예술은 어떤 대상(사물과 현상)에 대한 인식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중, 언어를 도구로 하는 것이 문학, 문학 중에서 운율을 강조하는 것이 운문, 운문의 대표적인 형태가 시입니다. 다시 정리하여 보면, 시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운율 있는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상은 시의 소재, 즉 글감을 말합니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떤 대상이 당신에게 감흥을 주었다면, 그것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시를 읽으면서 시의 여행을 준비해 봅시다.  하루에 한 번쯤은 혼자 걸어라.  세상 이야기들 그대로 놓아 두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와라.  말이 되지 말고, 소가 되어  나에게 속삭이며 혼자 걸어라.  괴로움이 나를 따라 오거든  내가 나에게 술도 한잔 받아 주고  나를 다독이며 혼자 걸어라.  나무도 만나고, 바람도 만나면  마음은 어느 사이 푸른 들판  잊었던 꽃들이 피어나고  고향 내음새 되살아나  내 가슴을 울리는 나의 콧노래  하루에 한번쯤은  이렇게 나를 만나며 살아가거라.  - 하루에 한 번쯤은-  시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먹고사는 것, 혼자가 되어 한 번 걸어 보십시오. 발은 걸으라고 조물주가 만들어 준 것.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남이 아니라 당신 자신과 함께 걸어 보십시오. 가슴에 엉켰던 것이 녹아 내리고,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새롭게 눈을 떠 당신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멀리 보이던 것들이 가까이 보이고, 가까이 보이던 것들이 멀리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만나는 모든 것들을 가슴속에 그대로 담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대상과도 말없는 말로 가슴을 열 수가 있습니다.  풀과 나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 보십시오. 들판의 풍경들을 가슴 속에 그려 보십시오. 하늘을 향해 외쳐 보십시오. 당신 자신과 해가 지도록 얘기를 나누어 보십시오. 거기에 상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진실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당신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는 동안, 당신에게 감흥을 준 모든 사물과 현상, 즉 대상이 시의 소재입니다.  인식은 대상에 대한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말합니다. 이것이 시의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시에서의 언어를 시어라고 하는데, 이 시어들의 어울림이 운율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동은 우리의 가슴에 크나큰 즐거움을 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크나큰 즐거움일 수도 있고, 잔잔한 미소를 자아내는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슬픔일 수 있고, 눈가에 맺히는 몇 방울의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울부짖게 하는 함성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까요?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진실이란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는 사랑, 미움, 아픔, 기쁨, 슬픔을 거짓없이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 속에서 빚어지는 고독, 그리움, 방황, 울분 등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왜, 우리는 진실을 표현하려 하는 걸까요? 말을 바꿔 보면, 왜, 우리는 밤을 새워 시를 쓰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시를 읽는 걸까요?  시를 쓰는 이유는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며, 시를 읽는 이유는 자신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표현과 감동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신적 즐거움과 영혼의 정화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맑고, 밝고, 풍요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에서의 웃음은 기쁨을 밝히는 것, 울음은 슬픔을 걸러 내는 것, 외침은 분노를 털어 내는 것. 결국, 웃음도, 울음도, 외침도 마음을 정화시키는 정신적 배설작용입니다.  좋은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좋은 그림을 보면 마음이 고요해 지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그윽해 진다고 말합니다. 결국 모든 예술은 우리의 삶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들입니다.  시를 쓰는 일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시는 삶을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시는 삶의 충분 조건일 뿐이지, 필요 조건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삶을 위해 시가 필요한 것이지, 시를 위해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돌에다 이름을 새기기 위해  사는 것이 정말 아닙니다.  삶의 목적은 삶  죽어 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삶. 3 -  우리는 지나치게 목적을 중시하고, 과정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과정, 그 자체입니다. 삶이 다른 목적을 가질 때, 그 삶은 진실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삶을 엮어 가는 수단으로써의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진실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까요? 아닙니다. 그 진실을 실감나게 표현했을 때,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2. 표현 방법  표현 방법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인식한 내용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묘사와 진술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묘사는 대상의 현상이나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말하고, 진술은 그것들을 묘사하지 않고, 직접 상대방에게 들려주듯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시는 이 두 방법이 알맞게 어우러져 그 모습을 드러내야 됩니다.  묘사의 종류에는 서경적 묘사, 심상적 묘사, 서사적 묘사로 나눌 수 있고, 진술은 독백적 진술, 권유적 진술, 해석적 진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경적 묘사는 보고, 느낀 것을 직접 그려내는 묘사이고, 심상적 묘사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고, 서사적 묘사는 사건이나 현상을 시간의 연속을 통해 그려내는 것입니다.  독백적 진술은 인식 주체의 독백, 고백, 반성, 회고, 기원 등을 진술하는 것이며, 권유적 진술은 동조, 참여, 각성을 청하는 인식의 주체의 주장을 내세운 진술이며, 해석적 진술은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이해, 해석, 비판, 판단을 드러낸 진술입니다.  너무 말이 많아 미안합니다. 시를 쓰는 일은 나누는 작업이 아니라 모으는 작업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묘사와 진술의 종류를 아는 것은 시의 틀을 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설명했습니다.  시에서의 묘사와 진술은 시적 자아에 의해 드러납니다. 시적 자아란 시 속에서의 인식 주체를 말합니다. 인식 주체는 1인칭인 '나'입니다. 소설에 빗대어 본다면 서술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시에서 주인공일 수도 있고, 대상에 대한 관찰자일 수도 있고, 대상에 대한 전지적 제삼자일 수도 있습니다.  햇빛 부스러지는 아침  금낭화 속에서 기어 나오는  일곱 점박이 무당벌레  하, 요놈이, 어젯밤  산을 그렇게 울리었구나.  -산 29 -  1연이 묘사이고, 2연이 진술입니다. 1연은 한 폭의 그림을 떠오르게 하고, 2연은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시적 자아를 통해 상대방에게 들려주듯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묘사와 진술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분하는 것은 묘사가 중심이 되었는가, 진술이 중심이 되었는가를 판단하는 것뿐입니다.  * 만나는 대상에서 느끼는 것을 가슴속에 그려봅시다. 만나는 대상에 대해 생각한 것을 가슴에 대고 속삭여 봅시다. 이 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대상 인식이라고 합니다. 인식한 대상을 그려보는 것이 묘사의 시작이고, 인식한 대상에 대해 속삭여 보는 것이 진술의 시작입니다.  구태여 길게 묘사하고, 길게 진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줄의 문장이 오히려 좋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대상을 본 후, 곧 바로 느끼고, 곧 바로 생각하는 직관, 대상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인식의 첫걸음입니다.     26.  제2강  박석구 시작법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3. 대상 인식  대상인식은 대상에 대한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말합니다. 묘사와 진술에 앞서, 우리는 먼저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먼저 익혀야 합니다. 그것은 대상을 인식한 후에야 묘사와 진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인식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집니다. 언어로 느끼고 생각하면서,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식한 내용을 묘사와 진술이라는 표현 방법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상 인식은 그대로 보기, 빗대어 보기, 상상하여 보기 등의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그대로 보기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말하고, 빗대어 보기는 그대로 본 것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상상하여 보기는 그대로 보기나 빗대어 보기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사건이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인식한 것이 묘사와 진술에 의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① 호숫가에 연꽃이 피었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보기입니다. 대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아무 꾸밈없이 옮겨 본 것입니다. 다음은 빗대어 보기. 빗대어 보기의 열쇠는 질문.  연꽃이 무엇같이 피었습니까? 아니면, 연꽃이 무엇처럼 피었습니까?  ② 호숫가에 연꽃이 부처님 오신 날의 줄등처럼 피었습니다.  글의 소재인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본 것입니다. 즉 '연꽃'이 무리를 지어 핀 것을 '줄등'에 빗대어 본 것입니다. 다음은 상상하여 보기. 대상을 빗대어 놓으면 상상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상상하여 보기의 열쇠도 질문. '왜? 어떻게?' 등의 여러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해답일 뿐입니다. 상황에 따라 질문이 달라질 수 있고, 질문도, 답도 시인에 따라 다양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피었습니까? 어떻게 피었습니까?  여기에서 '왜'는 이유, '어떻게'는 상황을 말합니다.  ③ 호숫가에 연꽃이 당신이 오시는 길 밝으라고, 부처님 오신 날의 줄등처럼 여기 저기 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꽃은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의 가슴속에 피어나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상하기입니다. 여기까지가 대상인식입니다. 이 인식된 내용을 조금만 다듬으면, 시가 될 수 있습니다.  호숫가에 연꽃이 피었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길 밝으라고  부처님 오시는 날의 줄등처럼  온 동네를 환하게 밝혀 놓고  여름이 다 가도록 피었습니다.  1행은 그대로 보기, 3행은 빗대어 보기, 2행, 4행, 5행은 상상하여 보기입니다. 상상하여 보기 중, 2행은 '왜', 4행과 5행은 '어떻게'에 해당합니다.  대상인식 과정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그대로 보기는 씨앗, 빗대어 보기는 싹과 잎, 상상하여 보기는 꽃, 완성된 시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감흥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해도 당신이 감흥을 받지 않았다면, 그대로 보기나 빗대어 보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흥은 순간적이며 직관적입니다. 순간적이며 직관적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곧바로 느끼거나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감흥은 그대로 보기와 빗대어 보기 단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씨가 싹이 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햇볕과 공기와 습도가 알맞게 어우러지지 않으면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 알맞게 어우러지는 순간에 감흥이 이루어집니다.  햇볕과 공기와 습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상을 볼 수 있는 당신만의 눈을 가지게 하는 경험입니다. 이때의 눈을 심미안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눈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대상을 보고 쓴 시가 시인에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심미안을 기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질문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하면 그것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 줄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쌓여 경험이 되고, 이 경험이 대상을 보는 당신만의 눈을 새롭게 해 줍니다. 이 눈이 당신만의 심미안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들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들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파랗게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대로 보기. 주어진 상황을 인식하여 간단하게 옮겨 본 것입니다.  '파랗게 물들어 가는 들판'이 무엇과 같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빗대어 보는 방법이라고 했지요?  '한 장의 파란 화선지'  다음은 상상하여 보기입니다.  *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분별력이 생기면서부터 만나는 대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집니다. 이 호기심이 상상의 시작입니다. 이 호기심은 만나는 대상에 대한 많은 의문을 낳습니다.  의심이 아닙니다. 의심은 죄악을 낳지만, 의문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머리 속에 물음표가 들어가면 의심이 되지만, 가슴속에 들어가면 의문이 됩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이 상상입니다. 그 의문이 꼬리를 물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나타납니다.  상상하여 보기 방법은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와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가 있습니다.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는 대상에 대한 질문을 통해 얻은 답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고,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는 인식한 대상에 경험 속의 상황이나 사물을 결합하여 상상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를 해 봅시다.  '들판이 화선지라면,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려면 당신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붓.'  당신은 붓이 되었습니다. 붓이 되었으면, 그림을 그려야 되겠지요?  '붓으로 무엇을 그리겠습니까?'  '고향.'  이것이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 그런데 모든 질문과 답은 당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험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똑같은 해를 보고 살면서도 햇빛을 받고 사는 사람이 있고, 햇볕을 쬐고 사는 사람이 있고, 햇살을 맞고 사는 사람이 있듯이 경험은 그에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과 답도 이 경험에 따라 달라져서 상상의 세계도 시인에 따라 다르게 펼쳐집니다.  이젠 인식한 내용을 정리하여 줄거리를 엮어 봅시다. 줄거리를 엮을 때, 서경문, 서사문, 기행문, 반성문, 고백문, 회고문, 기도문, 서간문, 권유문, 광고문, 설명문, 논설문 등등의 틀을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글의 형식을 빌리든, 소설의 구성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참고로 하여 정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3요소에 그대로 맞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줄거리를 만들어야 시의 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선, 소설의 구성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짧은 이야기를 엮어 봅시다.  여기에서 인물이란 행동의 주체인 나, 시적 자아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물이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배경은 시 속에 주어진 시대적,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건은 시적 자아나 행동의 주체가 되는 사물이나 대상의 느낌, 생각, 행동,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 요소를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의 틀을 쉽게 짤 수 있습니다. 시를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에 나타난 인물, 사건, 배경을 알아낼 수 있다면 감상이 쉬어진다는 말입니다.  위의 인식한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리는 묘사와 진술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정리 과정에서도 퇴고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들판이 한 장의 파란 화선지와 같은데, 나는 붓이 되어 거기에 고향을 그리고 싶다.  인물은 '나', 배경은 '들판', 사건은 '고향을 그리고 싶다'로 보면 됩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①들판은 한 장의 파란 화선지  ②나는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리고 싶다.  다듬어 봅시다.  ① 들판은 한 장의 파란 화선지  시어에 변화를 주어 다시 정리해 봅시다.  들판은 파랗게 번져 오는 화선지 한 장  형용사 '파란'을 '파랗게 번져 오는'으로 고쳐 생동감을 주었습니다. 시구가 길어지면 행을 나누는 것이 좋겠지요?  들판은 파랗게 번져오는  한 장의 화선지  ②나는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리고 싶다.  이것도 생동감이 있게 바꿔 봅시다. 생동감을 주기 위해서는 형용사 '그리고 싶다'를 동사의 현재형 '그린다'로 바꾸면 됩니다. 이것도 행을 나누어 정리해 봅시다.  나,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린다.  모으면 하나의 짧은 시가 됩니다.  들판은 파랗게 번져오는  한 장의 화선지  나,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린다.  시행의 균형이 맞지 않은 것 같지요? 그것은 1연 1행의 글자수가 다른 행에 비해 많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어 보면, 1행은 3음보, 2행은 2음보의 운율로 이루어져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1행을 줄여야겠지요? 무엇을 줄일까요? '들판'이란 시어를 줄이는 것이 좋겠지요? 대신 제목은 '들판'이라고 하면 그 의미가 그대로 살아 남습니다.  들판  파랗게 번져오는  화선지 한 장  나,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린다.  1연은 대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본 서경적 묘사이고, 2연은 당신의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입니다.  * 하나 더 상상해 봅시다. 앞에서는 질문을 통한 방법으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았습니다. 이젠 경험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펼쳐 봅시다.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는 그대로 본 것이나 빗대어 본 것에 당신의 경험 속의 이야기나 풍경, 또는 소재 등을 결합하여 줄거리를 엮어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험이란 당신의 체험일 수도 있고, 책에서 읽은 것일 수도 있고, 남에게 들은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한 폭의 그림이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방법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쓰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두 방법은 상호보완적입니다.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도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와 마찬가지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질문에 의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귀여운 꼬마가 그림에 그리고 있습니다. 하얀 종이 위에 풍경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습니다. 하늘과 해가 그려지고, 산이 그려지고, 나무가 그려졌습니다. 이젠 그 그림에 색칠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의 날개를 펴 봅시다. 시적 자아는 아빠. 당신이 귀여운 꼬마의 아빠가 되어 보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은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이것에 당신의 경험을 결합해 봅시다.  눈을 감아 봅시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경험한 것을 떠올린다는 말. 그대로 본 대상 속에 지난 날의 이야기나 풍경, 소재를 옮겨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  눈을 감았습니까? 그럼, 어린 날의 언덕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논, 밭, 언덕, 나무, 날고 있는 새들이 보이지요. 그 중에 무엇을 불러오겠습니까? 새.  됐습니다. 그 중 한 마리만 불러와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날려 보십시오.  정리해 봅시다.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여기까지가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 이제 중심 소재가 된 '새'를 구체화해 봅시다. 구체화도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질문을 해 봅시다.  새는 어떤 새일까요?  학.  어떤 학입니까?  종이학.  종이학은 누가 접었습니까?  아내.  '새'를 '아내가 접어놓은 학'으로 구체화하였지요? 정리해 봅시다.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날고 있다.  행을 나누어 정리해 봅시다.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날고 있구나.  그런데 무엇인가 빠진 것 같아 허전하지요?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을 그렸을 뿐,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어에는 음악성. 회화성, 의미성이 함께 드러나야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어의 3요소라고 합니다. 음악성은 운율, 회화성은 심상(이미지), 의미성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생각, 곧 주제를 말합니다. 이 시는 의미성이 약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겨야겠지요? 이것이 퇴고입니다. 시어를 고르고, 운율을 맞추고. 이미지의 적절성을 검토하고, 주제가 잘 드러났는가를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모든 열쇠는 질문이라 했습니다. 꼬마는 지금 색칠을 하고 있지요? 그림을 다 그렸습니까, 그리지 못했습니까? 시를 읽어보면, 아직도 다 그리지 못했지요? 아직도 색칠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다 그리지 않았는데'를 첨가하여 당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면 어떨까요?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날고 있구나.  아직도 다  그리지 않았는데.  1연은 마음으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린 심상적 묘사, 2연은 안타까운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입니다.  이처럼 상상의 세계는 당신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제목은 '들판'이라고 해도 좋고 '풍경'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생각해 보니, '풍경'이 어울릴 것 같군요.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 꼬마의 '그림'은 '희망'입니다. 자기 앞에 펼쳐진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내가 '접어놓은 학'은 '동경'입니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언제나 한 발 앞서 가는 마음이지요. 그러나 아이의 삶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학을 접을 수 있는 아내의 마음도 아름답고, 그것을 지켜보는 당신의 마음도 역시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삶들이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우리가 숨쉬는 세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삶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당신이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발명이 아닙니다. 이미 조물주가 마련해 준 것을 찾아내는 것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마음들이 빚어 놓은 상상의 세계에서 울고, 웃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픈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처럼 상상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대상 인식이 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시상이 엮어지고, 묘사와 진술, 즉 표현 방법이 결정되고, 어느 정도의 형상화가 이루어지며, 시적 자아의 위치와 태도, 어조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느낌과 생각)이 시의 전체분위기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인식은 시의 주춧돌이고, 시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상 인식, 즉 그대로 보기, 빗대어 보기, 상상하여 보기 중,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빗대어 보기입니다. 빗대어 보기는 나무의 잎처럼 무성하고, 다양하여 상상하여 보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시를 형상화하는 방법을 알게 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것은 뒷장에 싣겠습니다. 당신의 필요에 따라 읽으셔도 좋고,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이론은 시를 쓰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이론에서 벗어나야 시다운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자유를 구속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시에 대한 이론도 시의 자유를 위해 있어야 합니다.     27.  제3강 박석구 시인의 시작법  2. 여행 연습. 1  지금부터 우리는 그대로 보기와 빗대어 보기를 바탕으로 하여 한 편의 이야기를 엮어 보거나,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보거나, 한 묶음의 생각을 털어놓는 연습을 해 봅시다. 이것이 상상하여 보기, 시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꽃을 피우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짧은 시를 써 봅시다.  이제, 상상력이라는 카메라 하나 짊어지고, 무지개 빛 마음이 머무는 곳에 렌즈를 대고 사진을 찍어 봅시다. 무지개 빛 마음이란 아름다운 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에는 수많은 삶의 빛깔들이 굴절되어 있습니다. 삶의 기쁨,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아픔, 분노 등 모든 빛깔들이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개 빛 마음은 슬픔을 슬픔으로, 기쁨을 기쁨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마음입니다.  렌즈는 대상을 보는 당신의 눈, 즉 심미안을 말합니다. 필름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굴절되는 대로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마음의 굴절은 그대로 보기, 빗대어 보기, 상상하여 보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인식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의 굴절을 이루게 하는 직관입니다. 직관은 대상에 대해 순간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직관이 시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트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다시 더욱 살진 씨앗으로 돌아갑니다. 이 씨앗도 잘 정리하면 짧고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직관의 주체, 즉 인식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꽃이 웃고 있다면, 누구를 보고 웃을까요? 새가 울고 있다면, 누구를 보고 울까요? 바로 당신입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누구에게 불어오는 걸까요? 바로 당신입니다. 모든 인식의 주체는 바로 당신입니다. 이때의 당신이 시적 자아입니다.  걸음을 옮깁시다, 그러나 서두르지 말고. 지금부터 당신은 만나는 대상에 대해 순간적으로 느끼고, 생각한 바를 정리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것입니다. 시의 씨앗, 즉 직관을 모아 보자는 것입니다.  * 길  길을 걸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당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보기입니다. 즉 대상인식입니다. 인식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정리한다는 것은 당신의 행위, 느낌, 생각을 간추린다는 말입니다. 될 수 있으면 짧게, 순서에 맞게 한 편의 이야기, 한 폭의 그림, 한 묶음의 생각으로 정리해 봅시다. 기본은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시에서의 그림이나 생각도 결국에는 문자에 의한 표현이므로, 줄거리를 만들어 정리해 보자는 것입니다.  앞에서 줄거리를 엮을 때는 서경문, 서사문, 기행문, 반성문, 고백문, 회고문, 기도문, 서간문, 권유문, 광고문, 설명문, 논설문 등등의 틀을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줄거리를 엮어 정리해 봅시다.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도 없어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여기까지가 인식 내용 정리입니다. 서사문의 틀을 빌렸지요? 앞에서 줄거리를 엮기 위해서는 소설의 구성 3요소를 빌리자고 하였습니다.  '길'이 배경이고, '나'는 인물이고, 나머지의 느낌과 생각, '걷고 있는데' '기분이 좋았다'를 사건이라고 생각합시다.  시도 결국에는 삶의 이야기라 했습니다. 이것은 압축되어 소설과 모습을 달리하지만, 시의 내용을 유추해 보면, 거기에는 한 편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당신은 불안하실 겁니다.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느냐고. 그러나 이런 것도 한 편의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해 봅시다.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생략해 봅시다. 이것이 압축입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다.  이것을 재정리라고 이름을 붙여 봅시다. 시에서 퇴고란 모든 제작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재정리도 퇴고의 한 방법입니다. 재정리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시의 틀이 저절로 짜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다듬어서 행을 구분하여 봅시다. 이것이 구성입니다.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연과 행을 구분하여 시의 틀을 짜는 것입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다.  어디인가 어울리지 않고 흥이 나지 않지요? 그것은 행과 행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운율이 고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낭송하기에 좋지 않다는 말이지요.  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유치한 것 같지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모든 예술은 당신이 바로, 유치하다고 생각한데에서 출발했으니까. 유치하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하면, 거짓이 없다는 말과 통할 수 있으니까. 예술의 시작은 우리가 흔히, 천하게 이르는 말, '째'가 '멋'으로 변하여 발전한 것입니다.  행의 균형을 맞추어 운율을 골라 봅시다.  길을 걸었네.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네  '걷고 있는데'를 '걸었네'로 압축했습니다. 이렇게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고, 줄일 것은 줄이는 것, 이것이 퇴고입니다. 퇴고는 시에 따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는 마음으로 여러 번 낭송해 보면, 곧 고칠 수 있습니다. 아니, 당신의 입으로 직접 낭송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면 마음도 함께 따라 읽을 테니까.  그래도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쉬움이 남지요? 아직 완결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길을 계속 걸으십시오. 이것이 시의 여행. 혼자 걷는 동안, 만나는 대상과 가슴에 밀려오는 생각들이 다음에 이어질 시어와 시구를 마련해 줍니다.  당신은 지금, 길을 걷고 있습니다. 가슴에 안겨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들이 노래를 부르지요? 풀꽃들이 웃지요? 그대로 듣고, 그대로 보며 걸으십시오. 그러다 보면, 새도, 풀꽃도, 당신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무아지경.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입니다. 기분이 너무 좋지요?  방금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새들의 노래를 듣고, 풀꽃들의 웃음을 보며 걸으니, 나마저 사라져 너무 좋았다.  이것을 앞 시구의 운율에 맞춰 다듬어 봅시다.  새들의 노래  풀꽃들의 웃음  나마저 사라져  너무 좋았네.  앞의 시구와 이어 봅시다.  길을 걸었네.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네.  새들의 노래  풀꽃들의 웃음  나마저 사라져  너무 좋았네.  1연과 3연의 '너무'가 동어 반복이지요? 3연의 '너무'를 '더욱'으로 바꿔 옮기면 어떨까요?  길을 걸었네.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네.  새들의 노래  풀꽃들의 웃음  나마저 사라져  더욱 좋았네.  '그대로 보기'를 바탕으로 하여 한 편의 시를 완성했습니다. 표현기교는 영탄법. '너무 좋았네' '더욱 좋았네.'는 시적 자아의 즐거운 마음을 감탄조로 드러낸 것입니다. 표현 방법은 1연과 3연은 당신의 마음을 당신에게 털어놓은 독백적 진술, 2연은 서경적 묘사입니다.  어떻습니까? 짧지만 그런 대로 운율이 맞아 흥이 나지 않습니까? 흥이 나지 않으면 자꾸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다듬어져 운율에 맞을 테니까.  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하나의 이야기도 다듬으면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시는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 아닙니다. 들판에 있는 누구나 딸 수 있는 과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는 평범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일 뿐입니다.  위에서, 시의 형식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시의 형식은 행과 연을 말합니다.  행은 시인의 호흡에 따라 나누어진 시에서의 한 줄, 연은 리듬에 따라, 의미(내용)에 따라, 이미지(심상) 변화에 따라 나누는 시에서의 단락을 말합니다.  형식에 맞추었으면, 다음은 운율을 골라야 합니다. 운율은 시에서의 운과 율을 말합니다. 운은 정해진 위치에 같은 소리나 비슷한 소리가 나는 시어를 배치하는 소리의 규칙성을 말하고, 율은 시어들끼리 어울리는 가락의 규칙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에서는 운보다 율이 중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말의 율(가락)에는 음수율과 음보율이 중심이 됩니다. 음수율은 시어들의 규칙적인 글자수의 어울림을 말하는데 3·4조, 4·4조, 7·5조가 우리나라의 시에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음보율은 시를 낭송할 때, 끊어 읽는 반복적인 가락의 어울림으로 2음보, 3음보, 4음보가 있습니다. 이것을 규칙적으로 지키는 것 외형률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낭송하기가 좋으면 운율이 고른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우리의 정서에 맞는 가락을 익히게 되고, 나름대로의 가락을 가지게 됩니다. 거기에 맞으면 운율이 맞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재율이라고 합니다.  다시 연습을 시작합시다.  * 봄  봄이 왔습니다. 개나리꽃이 웃고 있습니다. 어디에선가 뻐꾸기가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것이 그대로 보기. 당신이 당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당신은 지금, 웃겠습니까, 울겠습니까?  빨리 대답해 보십시오. 시간이 걸리면 빗나갑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당신의 심정을 그대로 털어놓았습니다. 이젠, 당신이 처한 상황에 당신의 대답을 섞어 정리해 봅시다.  봄이 와서 개나리는 웃고 있고, 뻐꾸기는 울고 있어서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동어 반복이나 의미의 중복을 피하는 것이 생략의 기본. 생략할 수 있는 것을 생략하여 봅시다.  개나리는 웃고, 뻐꾸기는 울고 있어서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겠다.  다시 한 번, 다듬어서 정리하여 행을 구분해 봅시다.  개나리는 웃고  뻐꾸기는 울고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봄의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개나리는 웃고, 뻐꾸기는 울까요? 그 원인은 당신 가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웃고 싶은 맘과 울고 싶은 맘이 함께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개나리는 웃게 했고, 뻐꾸기는 울게 했습니다. 이것이 감정이입,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인식하는 대상에 옮겨 놓는 것을 말합니다.  표현 방법은 1, 2행은 봄의 풍경을 요약적으로 그려낸 서경적 묘사, 3, 4행은 당신의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입니다.  표현기교는 의인법과 대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의인법은 대상 속에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생동감을 주는 비유법, 대조법은 상반된 시구를 대비시켜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강조법입니다.  *이른 아침  이른 아침, 당신은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슬에 몸이 점점 젖어옵니다. 그런데 새들이 자꾸만 울어댑니다.  그렇다면, 새들에게 한 마디 해야겠지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몸이 더 젖기 전에 어서 말해 보십시오.  새들아, 울지 말아라. 벌써, 이슬에 몸이 흠뻑 젖었단다.  행만 구분하면, 시가 됩니다.  새들아, 울지 말아라.  벌써, 이슬에  몸이 흠뻑 젖었단다.  표현기교는 의인법과 돈호법. 돈호법은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을 불러 정서적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표현 기교입니다. 표현 방법은 동조, 참여, 각성을 청하는 권유적 진술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 어젯밤 꿈에 슬픈 꿈을 꾼 모양이군요? 이슬에 몸이 젖고 새소리에 맘이 젖는 걸 보니.  *부엉이  달밤의 숲 속. 부엉이 한 마리가 눈을 부릅뜨고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림 속의 풍경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다음은 상상하기. 상상하기의 열쇠는 질문이지요?  지금, 부엉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부엉이가 되어 '부엉'하고 울어 보십시오. 귀신들마저 천리 밖으로 도망을 칠 테니까. 이제 알았지요, 부엉이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유가 숲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정리해 봅시다.  달밤에 부엉이가 눈을 부릅뜨고 숲을 지키고 있다.  '달밤'이 배경이고 '부엉이'가 인물이고 '눈을 부릅뜨고 숲을 지키고 있다'가 사건입니다. 시의 형식에 맞추면 금방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옮겨 봅시다.  달밤에 부엉이가  혼자서 눈을 부릅뜨고  숲을 지키고 있다.  낭송해 봅시다.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지요? 운율이 고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어를 골라야겠지요?  달이 뜨는 밤에는  부엉이 혼자서  숲을 지킨다.  서경적 묘사와 해석적 진술이 하나로 어우러졌지요? 서경적 묘사란 어떤 풍경을 눈에 보이게 그려 놓는 것을 말합니다. 해석적 진술은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이해, 해석, 비판, 판단을 드러낸 진술입니다. 묘사와 진술은 이처럼 하나로 녹아 어우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 정말, 지금 부엉이는 숲을 지키고 있을까요? 그런데 부엉이를 지켜보고 있는 당신은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습니까?     28.  제4강 박석구 시인의 시 작법  *오줌  연잎 위에 이슬이 고여 빛을 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호숫가에서 본 풍경입니다.자, 한 번 물어 봅시다. 당신이 당신에게  '이슬이 무엇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까?'  '구슬처럼.'  다시 한 번 물어 봅시다.  만약, 연잎 위에 오줌이 고인다면, 구슬처럼 빛을 낼까요, 빛을 내지 않을까요?  대답해 보십시오. 모르겠으면, 아무도 모르게 당신이 연잎 위에 오줌을 직접 싸 보십시오. 대답이 생각났다면, 인식하기가 끝났습니다. 다음은 정리하기.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정리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 이것도 압축입니다.  오줌도 연잎 위에 고이니, 구슬처럼 빛을 내는구나.  '오줌'을 인물, '연잎'을 배경, '구슬처럼 빛을 내는구나'를 사건이라고 생각합시다. '오줌'을 인물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각의 전환입니다. 생각의 전환이야말로 직관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 이것이 상상의 뇌관입니다.  다듬어 봅시다. 매듭을 만들어야겠지요? 매듭을 만든다는 것은 행과 연을 구분하는 것.  오줌도  연잎 위에 고이니  구슬처럼 빛을 내는구나.  서경적 묘사와 해석적 진술이 알맞게 어우러진 시가 되었습니다. 가슴에서 야릇한 웃음이 배어 나오지요? 이것은 풍유법, 대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비꼬아 보는 표현기교입니다.  '오줌'은 보조 관념, 원관념은 뒤에 숨었습니다. 무엇이 숨었을까요? 그리고 '연잎'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연잎'은 '좋은 자리, 높은 자리, 힘있는 자리, 그래서 모두가 앉고 싶은 자리'가 아닐까요? '구슬'은 '가치 있는 것'. 그렇다면, '오줌'은 '사이비' 곧 '빛 좋은 개살구'가 되겠군요. 시어의 속에 숨겨진 의미, 이것이 상징적 의미입니다.  * 단풍  단풍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가을이면, 어디서나 만나는 풍경이지요?  단풍은 어젯밤 무엇을 했기에 저렇게 타오를까요?  화내지 않을 정도로 은근하게 단풍에게 물어 보십시오. 무엇을 상상했기에 은근하게 물어야 되는 걸까요? 짙은 사랑 이야기 하나, 상상했지요? 이젠, 당신의 질문을 다듬어 옮겨 보십시오. 단풍에게 직접 묻는 형식으로 바꾸어 행만 구분하면, 멋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젯밤 너는  무엇을 했기에  지금도 그렇게  타고 있느냐.  이런 때는 단풍나무의 대답은 당신의 가슴에 묻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독자가 당신의 가슴속을 훔쳐보려 할 테니까.  이것이 여운입니다. 질문만 던져 놓고 답을 하지 않는 것.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 스스로 찾게 하여 독자의 가슴속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방법입니다.  여운을 남기는 방법에는 위와 같이 질문만 하고 대답하지 않는 방법과 시구의 한 부분을 생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방법을 문답법, 시구의 한 부분을 생략하여 여운을 남기는 방법을 생략법이라고 합니다.  표현방법은 대상에 대한 판단을 숨겨 놓은 해석적 진술입니다.  * 잔치  똥 위에서 파리 떼가 윙윙거립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풍경입니다. 이처럼 시의 소재는 어느 곳에든지 널려 있습니다. 질문을 해야겠지요?  지금, 파리들은 똥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상상하여 대답해 보십시오.  잔치.  내용을 정리해 옮겨 봅시다.  똥 위에서 파리들이 온종일 잔치를 벌이고 있구나.  조금만 손질하여 행만 구분하면,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짧은 시, 그러나 너무도 긴 시.  똥 위의 파리 떼들  온종일 잔치를  벌이고 있구나.  '똥'은 무엇을 의미하고, '파리'는 무엇을 나타냅니까? '똥'은 '부정적인 것', '파리'는 '부정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파리 떼들에게 습격을 받을지 모르니까?  뭔가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물려주지 않습니까? 가끔은 이렇게 욕을 하며 사는 것이 삶이 아닙니까? 욕도 멋지게 하면 시가 될 수 있습니다.  표현 방법은 눈에 비친 풍경을 빗대어 드러낸 서경적 묘사와 대상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 해석적 진술이 어우러졌습니다. 표현기교는 풍유법과 영탄법입니다. 풍유는 원관념(어떤 대상이나 의미)을 완전히 뒤에 숨기고, 보조관념(다른 대상)만으로 숨겨진 본래의 의미(어떤 대상이나 의미)를 암시하는 비유입니다. 특징은 비판성, 교훈성, 풍자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대상을 비꼬아 놓았지요? 이것이 풍자성입니다.  이런 것이 시냐고요? 그렇습니다. 이런 것도 시입니다. 시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것은 특별한 것처럼 행동하는 시인들일 뿐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느껴지는 것, 생각되는 것을 다듬어서 옮기면, 그것이 시입니다. 그리고 시는 특별해지고자 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마음, 우리의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 휘파람  바람이 불어옵니다.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나무가 흔들립니다. 휘파람 소리가 납니다.  지금, 휘파람을 부는 것은 나무입니까? 바람입니까?  답을 알았다면, 인식하기가 끝납니다. 정리해 봅시다. 정리할 때는 소설의 구성 3요소를 인물, 사건, 배경을 가슴에 새기며 정리해야 합니다.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나무들이 몸을 흔들며 휘파람을 분다.  문장 성분의 위치를 바꿔 시의 옷을 입혀 봅시다. 문장 성분의 위치를 바꾸는 것, 이것도 퇴고의 한 방법입니다.  바람이 부니  나무들이 휘파람을 분다.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표현기교는 의인법, 표현방법은 서경적 묘사와 해석적 진술이 하나로 어우러졌습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나무는 휘파람을 붑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불안하지요? 휘파람과 먹구름은 서로 상대적인 시어입니다. 휘파람은 긍정적 의미로, 먹구름은 부정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두 시어 중, 어느 시어가 전체의 분위기에 영향을 줄까요? 먹구름이지요? 왜, 그럴까요? 마음속으로 소리나지 않게 읊어 보십시오. 그러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 전체에 영향을 주는 시어가 긍정적으로 쓰였느냐, 부정적으로 쓰였느냐에 따라 그 시의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시를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어의 쓰임이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희망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나무처럼 휘파람을 부는 놈이 있으면, 그놈에게 쑥떡이나 하나 먹여줍시다.  표현기교는 의인법과 도치법, 표현방법은 독백적 진술입니다. 의인법은 대상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비유법, 도치법은 문장 성분의 순서를 바꾸어 시적 여운을 남기는 강조법입니다.  의인법을 잘 활용하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깁니다. 모든 대상을 의인화해 보십시오. 거기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당신의 가슴에 안겨 와 다정히 속삭일 것입니다.  그리고 도치법도 잘 활용하면, 멋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평범한 문장이라도 문장 순서만 바꾸면, 멋진 시구를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그럼, '꽃이 피려고 하는데, 비가 오는구나.'를 '비가 오는구나, 꽃이 피려하는데'로 바꾸어 읽어봅시다. 느낌이 다르지요? 이것이 도치법이 주는 잔잔한 감동입니다.  * 허수아비. 1  바람이 붑니다. 허수아비가 논 가운데 홀로 서서 흔들립니다. 새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닙니다.  가을 들판의 풍경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허수아비는 논 가운데 홀로 서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전환이라고 했습니다. 허수아비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은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머리 속이 아니라 가슴속에 있습니다. 답이 생각났으면, 정리하여 봅시다.  바람이 부는데, 허수아비 혼자서 새떼들을 쫓고 있다.  다듬어 봅시다.  바람이 부는데  허수아비 혼자서  새떼를 쫓고 있네.  * 지금쯤 허수아비는 들판에서 땀을 펄펄 흘리고 있을 겁니다. 그놈 덕에 우리가 배부르게 먹고사는 것이 아닐까요?  표현기교는 의인법, 표현방법은 서경적 묘사와 해석적 진술의 조화. 시어를 한번 되씹어 볼까요? 되씹어 본다는 것은 시어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는 것. '허수아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허수아비가 아닌 다른 무엇을 나타내는 걸까요? 이것이 상징적 의미입니다. 겉에 드러난 시어의 의미 속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는 것, 이것이 시의 감칠맛입니다.  * 생각해 봅시다. 지금도 자기의 일터에서 땀을 펄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슬픈 이야기지만, 바로 그분들이 허수아비가 아닐까요?  * 그림자  당신은 깡말랐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그림자도 깡말랐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당신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자, 상상의 날개를 펴 당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겨울이 와 옷을 껴입으면, 당신의 그림자는 어떻게 될까요?  당신의 대답을 당신의 질문과 섞어 정리해 옮겨 봅시다. 현재시제의 문장으로 다듬어야 현장감이 있겠지요?  겨울이 와 옷을 껴입었는데도, 내 그림자는 나처럼 여전히 깡말랐다.  다시 다듬어 형식에 맞추어 봅시다.  겨울이 와  옷을 껴입었는데도  내 그림자는  여전히 깡말랐구나.  당신의 그림자는 어떤 빛깔입니까? 부처님과 예수님의 그림자는 금빛. 이젠 알겠지요, 당신 그림자의 빛깔을? 검은빛이나 회색빛이겠지요? 그렇다면 '그림자'가 머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깡마른 당신의 그림자'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당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 아닐까요?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에 속아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한, 우리들의 어릿광대 같은 몸짓이 그림자가 아닐까요?  동물원에 갇혀 사는 호랑이에게 가 물어 보십시오, 가죽을 남기기 위해 죽겠느냐고. 그래서 우리도 이름을 남기기 위해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야 하느냐고.           시어(詩語)  1   [Ⅰ]:시어(詩語) '詩는 문학의 정수(精髓)'니, '詩는 문학의 꽃'이니 하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하고 듣습니다.  그 까닭은 시가 가장 짧은 형태 안에 앞으로 우리가 함께 공부해 나갈 '시(詩)의 요소(要素)'인 언어·운율[리듬]·이미지·비유·상징 등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 공부를 하거나 '시 짓기'를 하거나 할 때, 우리가 진실로 알아야 할 것들은 시의 기원이나 시의 정의나 시론이나 시의 분류가 아니라 바로 이제부터 공부할 시의 요소들이지요. 이 시의 요소들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시 공부입니다.  그럼 제6강에서는 시에 씌어지는 언어인 시어(詩語)부터 우리 공부를 시작해 볼까요?  1. 시어(詩語)란 무엇인가?  그럼 시의 요소 중의 하나인 이 시어란 무엇일까요?  골치부터 아퍼 오지요?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쉽게 쉽게 넘어갈 테니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시어란 '시에 쓰이는 언어', '시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럼 '시에 쓰이는 언어가 따로 있단 말인가?'라고 의아해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활하면서 주고받는 대화에서 쓰는 말들을 시에서 쓰면 그것이 시어가 되는 것이지요. 뭐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그런데 소위 유식한 분들은 거창하게 '시는 고도의 언어 예술'이므로 '시어란 시에 동원되는 특별한 낱말과 어귀'란 뜻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들과 구별되어 사용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이래서야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감히 시 근처에나 갈 수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시의 독자들이 자꾸 줄어들지요.  그리고 요즘 보세요. 어떤 시인들이 이렇게 어렵게 시어를 의식하면서 시를 짓고 있나요? 요즘 시인들은 어떤 시어든지 자기의 시상(詩想)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언어라고 생각되면 그 시어를 가져다 쓰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지저분한 부분이나 거슬리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긴 합니다만 제 시 제가 그리 쓰겠다는 데 누가 뭐랄 수 있겠습니까?  하긴 옛날에는 동서양 구분 없이 시어에는 일반적인 언어와는 달리 어떤 우아함이나 고상함, 또는 장중함 같은 느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시에 쓰이는 언어인 시어에서 고어(古語)나 아어(雅語) 등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때로는 별도의 성구(成句) 등도 즐겨 사용해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 영국의 T.그레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보통의 언어가 필요에 의해서 특수화되면서 거리가 생겼다. 이것이 바로 시어인데 라틴어의 완곡한 표현체인 고어체를 고쳐 놓은 것이다.'라고 한 데서도 입증되고 있지요.  그러나 워즈워드는 그의 '서정시집'의 서문에서 시의 감동적인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언어들은 시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요. 결국 워즈워드에 의하면 산문의 언어와 시의 언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럼 우리가 시와 산문을 읽으면서 그 언어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공부할 기회가 오겠지만 우선 여기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비유나 상징 등으로 인하여 시어가 지니게 되는 언어의 특수한 기능 때문이라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아직은 더 깊이 들어가면 시에 대해서 情이 뚝 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2. 시어(詩語)의 함축적(含蓄的) 의미(意味)에 대하여  제목만 봐도 한자가 많아 한글 세대들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지요?  그럼 이야기나 한 자루 하며 좀 쉬어 갑시다.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김 삿갓 난고 김병연의 시 한 수 볼까요?  月白雪白天地白 (월백설백천지백)  [달도 희고 눈도 희니 천지가 희고]  山深水深客愁深 (산심수심객수심)  [산도 깊고 물도 깊어 객수도 깊구나]  이 얼마나 간결하게 쉬운 글자들로만 시를 지었으면서도 달빛 희게 부서지는 깊은 산 속에서 눈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나그네의 심정을 이리 잘 표현했을까요?  이런 것이 시입니다.  유식한 한학자들이 딱딱하고 어려운 한자들로만 지은 어려운 한시들보다야 이 시가 얼마나 쉽게 우리의 가슴을 때립니까? 그럼 한 수 더 살펴볼까요?     시어(詩語)(2)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四十家中五十食(사십가중오십식)  [망할 놈의 집에서 쉰 밥을 주는구나]  人間豈有七十事(인간개유칠십사)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것가]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삼십식)  [내 집에 돌아가 선 밥 먹음만 못하구나]  이 시는 김 삿갓이 한문 숫자풀이를 이용하여 함경도 어느 부잣집에서 냉대 받은 나그네의 심정을 완곡하게 풍자적으로 읊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십수(二十樹)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스무나무를, 삼십객(三十客)의 삼십(三十)은 '서른'이니 '서러운'의 뜻으로 써서 삼십객(三十客)은 '서러운 나그네'를, 사십가(四十家)의 사십(四十)은 '마흔'이니 '망할'의 뜻으로 써서 사십가(四十家)는 '망할 (놈의) 집'의 뜻을, 오십식(五十食)의 오십(五十)은 '쉰'(상한)이니 오십식(五十食)은 '쉰 밥'을, 칠십사(七十事)의 칠십(七十)은 '일흔'이니 '이런'의 뜻으로 써서 칠십사(七十事)는 '이런 일'의 뜻을, 삼십식(三十食)에서는 삼십(三十)의 '서른'을 '미숙한, 선'의 뜻으로 써서 삼십식(三十食)은 '설익은 밥', 즉 '선 밥'의 뜻으로 노래한 시이지요. 그 기지와 풍자가 놀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한문 숫자인 '二十, 三十, 四十, 五十, 七十, 三十'은 모두 그 숫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 이외에 또 하나의 다른 뜻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지요.  이런 것을 두고 시어의 이중성이라 하는데, 하나의 시어가 두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시어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둘 또는 셋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시어와 산문의 언어가 다르게 느껴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럼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에서 그것도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서 화담, 박연 폭포와 더불어 송도 삼절로 불리고 있는 황진이의 시조를 살펴볼까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이 시조에서 '벽계수(碧溪水)'는 '푸른 계곡 물'인 동시에 왕실 종친이었던 '벽계수'를, '명월(明月)'은 '밝은 달'과 황진이 자신의 기생 이름인 '명월'을 동시에 뜻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여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시어가 지니는 이러한 이중성은 바로 시어에 함축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시에서 '푸른 계곡 물'과 '밝은 달'의 의미는 사전에 나오는 뜻풀이로서 이런 것을 '사전적 의미'라 하고, '벽계수'와 '명월'처럼 이 시 속에서만 중의적으로 그 뜻을 지니는 시어의 의미를 '함축적 의미'라고 하지요.  내 설명이 어렵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내 실력이 이 정도뿐이니 다른 방법이 없군요.  그럼 하나만 더 살펴볼까요?  '장미'가 시어로 씌어졌다고 할 때, 그것이 '관상용 식물인 장미과의 낙엽 관목'을 나타내는 시어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사전적 의미'로 쓰인 것이요, 만일 '사랑하는 이에 대한 나의 정열적 사랑'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함축적 의미'로 쓰인 것이지요.  이제 시어의 '함축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기로 합시다.  3. 시인(詩人)과 시어(詩語)  이제 시인과 시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에 사용된 언어는 모두 시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구요?  같은 대상을 두고 두 사람이 시라고 썼는데 한 사람의 작품은 시가 되고 한 사람의 작품은 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시냐 아니냐의 가름은 두 사람이 사용한 시어의 차이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어를 썼다 하더라도 그 시어가 적확하게 제자리를 잡아 앉았느냐도 문제가 되고 그 대상을 표현하는데 그 시어가 최선의 시어였느냐 아니냐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시인 개인의 시적 역량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시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기존의 언어 관념을 뛰어넘어서 독자로 하여금 폭넓은 상상력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한 편의 시 속에서 그 시의 내용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면서 시어 하나 하나가 표현하려는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 또는 이미지를 확대시켜 우리에게 간명하게 전달해 줄 수 있어야만 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시어로 시를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순전히 시인의 몫이지요.  그래서 시인에게 시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여러분도 잘 아시는 김수영의 '풀'을 한 번 볼까요?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가 나오기까지 풀은 세상에 흔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일 뿐이었지요. 그러나 1960년대 말 김수영 시인에 의해서 억압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서서 불의에 맞서 항거하는 '민중(民衆)', '민초(民草)'의 상징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풀'은 김수영 시인의 '풀'로 태어나 모두의 '풀'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 사용된 '풀'이 바로 시어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춘수 시인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김춘수 시인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듯이 시인은 시어의 의미를 확대 재발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나의 애송시를 찾아 그 시에 나오는 시어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비유의 효과  비유는 우리가 외출할 때 아름답게 화장을 하듯 글을 아름답게 꾸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닦아서 인간 자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계 기구의 활용법을 잘 알아야 그것들을 이용하기 쉽듯이 비유의 진정한 힘과 효과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비유는 무엇입니까?  아마 오늘까지 강의를 들으셔서, 쉽게 설명하긴 어렵더라도 마음 속으로는 이 것이다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 상황,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  즉 추상적이고 불투명한 관념까지를 가장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지름길 입니다.  이제 우리가 학문적으로 다루니까 그렇지 시가 아니고도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도 얼마나 많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눈이 작은 사람보다 간재미 같은 눈, 단추구멍 같은 눈이라 한다던지,  꾀꼬리의 목소리라 하는 것, 바람처럼 사라지다라는 영화제목, 아마 말의 종류만큼 많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도 비유라는 말이 있는데 그 구절 말고도 수많은 비유로 사람들을 알으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뿐 아니고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그렇다하니,  비유는 우리에게 보다 알아먹기 좋게 하는 표현의 방법이라 할 수 있겠 습니다.  불교의 초기 경전 가운데 그 형식의 대부분이 시적 형식을 취한 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 번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성경도 비유문학이라 할 정도로 비유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곁에 있어 쉽게 접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일일이 예를 들지 않으니 여러분께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위의 비유는 무엇일까요?  어떠한 집착이나 망상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창조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비유를 통해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아주 장황스러운 설교조의 말보다 휠씬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 것은 비유를 통해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그 뜻을 함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에 가면 목사님들의 설교도 그렇구요.  티비에 나오는 유명 강사들의 강의도 마찬가지인데요.  모두 다 좋은 비유를 통해 청중들이 쉽게 알아먹게 하려고 애 쓰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지요.  그렇듯 시 역시 시인의 통찰력과 인지력, 그리고 시인의 정신이 생동하는 언어로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비유는 시 세계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면서 독자들을 시인의 세계 속으로 흡인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의 힘  시인이 의도하는대로 비유가 시 속에서 강력히 힘을 발휘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한 기능과 에너지가 최대한 살아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좋은 비유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집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비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드러내줍니다.  비유에 의해 사물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확대 심화시켜 나감으로 우리의 인습과  고정관념의 무지와 타성에서 벗어나게 한다고까지 말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시가 지니는 리얼리티(사실성)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둘째)  좋은 비유는 시인의 독창적이고 구체적인 인식을 쉽게 가시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권대웅님의 을 한 번 읽어보시지요.  술취한 아버지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어딜 그렇게 올라 가세요.  낙엽 긁어 모으며 바람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계곡  녹슨 세월의 송전탑  숨은 아들 대답하지 않는데  되돌아오는 메아리만 가슴을 태우는 山  자꾸 뭐하러 올라가세요  그게 아니다 애야 그런게 아니라고  붉은 손 흔들어 길 막는 너도밤나무  온통 아픈 울음 가득 토해내도  아버지 넘어지며 자꾸 넘어지며.....  아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비유이지요.  술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얼굴로 가을 산을 비유했습니다.  왜 이 시가 좋은 시가 되냐하면요.  우리는 보통 가을 산이라하는 시를 쓰거나 내용에 가을 산이 들어가게 되면, 불타오르는 산, 불꽃 같은 산, 열정, 열애 등  을 금방 떠 올리거나 그렇게 표현하기 쉽지만은 이 시인의 독창적인 눈으로는  아주 색다른 비유로 아버지의 술 취한 얼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 것도 술에 취해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 울면서도 자꾸만 넘어지는 아버지의 슬픈 초상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시면서 아들이 아무리 붙잡아도 자꾸만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는 세월의 산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늙어가시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지 않습 니까?  셋째)  좋은 비유는 풍부한 시적 의미를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비유는 어떤 모양일까요? 그 것은 하나의 점이나 선일까요?  평면이나 어떤 도면 같은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비유는 입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다양해집니다.  우리는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비유를 잘 아십니다.  보이지는 않고 코끼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코를 만진 사람,  다리를 만진 사람, 꼬리나 배를 만진 사람의 코끼리에 대한 설명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듯이  독자들이 그 시를 읽는 상황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시가 일단 발표되면 이젠 독자의 몫이 된다고 늘 강조하는 것은  나의 해석과 다른 사람의 해석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성복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이방)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살같 밑으로 大地(대지)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좀 어려운 시이네요.그러나 분석해보지요.  여기서 원관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입니다.  그 원관념에 대한 보조 관념이 '짐승', '별', '정적'.'꽃씨',  '정적', '죽음','순간','머나먼 곳','내 손가락 끝' 등 여러가지이지요.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우리가 짐작해 볼 수 밖에 없지만  이 시에서는 당신이란 원관념에 대해 다양한 보조관념으로 전이시키면서 '당신'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결합하는 보조관념의 대상들까 지도 하나의 의미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좋은 비유는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지 않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지요.  시를 읽어서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 시라면 그 것은 죽은 시 아니겠어요?  요즘은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실험적인 경향이 있어 현재의 시경향을 해체시켜버리려는 의도도 있고요.  감동보다는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효용론에 입각한 주장도 있지만 저는 일단 시는 감동을 주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좋은 비유로 쓴 시는 마치 수문을 열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 우리의 감동이, 정서가 밀려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대흠의 이라는 시의 전문을 읽겠습니다.  다섯째)  좋은 비유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성원근님의 전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밤에  눈물이 많았던 누군가  목선을 타고  바다로 간 것일까?  풀잎마다 가득  바람을 먹고 있는  돛자락들.  이 시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겨봅니다  "우리가 '이슬'이라는 대상을 생각할 때 맑고 투명한 것,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위 시에서는 이 '이슬' 에서 '돛자락'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돛'은 바람을 받아 배를 가게하기 위하여 돛대에 높게 펼쳐 매단 넓은 천인데,  이슬을 돛자락에 비유함으로 예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광활하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이슬에서 발견하게 된다.  마치 푸른 바다의 한 가운데서 펄럭이는 흰 돛자락인 양 '이슬'이 한없이 크고 넓게 느껴지기 조차 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좋은 비유는 시적 대상을 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내는 힘이 있습니다.  역시 시를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동주님의 전문입니다.  고정희, 김남주 시인의 고향인 해남이 고향이신  이동주님의 시로 해남 대흥사 입구에 시비로 서있습니다.  다음에 해남 대흥사에 가시는 분들은 주차장 앞에 이 시  비를 보시면 강의를 받던 기억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레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달빛 아래에서 열심히 강강술래를 돌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르지요?  그들을 여울에 몰린 은어떼로 비유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발상입니까?  달빛에 비추인 가녀린 팔목들을 여린 삐비꽃의 하얀 속살로 비유한 것이라던지,  강강술래의 원을 하늘에 떠 있는 달무리로 비유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비유들은  훨씬 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특질을 선명하게 드러내줍니다.  또한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나 '열두발 상모가 돈다'나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등의 비유는 춤을 추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듯 할 뿐만 아니라  그 춤의 역동성을 잘 나타내주어 독자로 하여금 절정감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좋은 비유가 얼마나 시를 살려주는가 위의 여러 예들로 잘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대로 옮겨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런 비유를 독창적인 것으로 창조해 표현 한다면 여러분들도 분명 좋은 시를 쓰시게 될 것입니다.  좋은 비유와 죽은 비유에 대해서는 대충 이해하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시가 아니고도  우리가 보통 잘 쓰는 죽은 비유를 몇 개 더 들어볼테니 여러분도 더 찾아보시고,  이런류의 죽은 비유를 시에 사용하시면 안되겠습니다.  -사랑의 불꽃, 교통 전쟁, 입시 지옥, 증권 파동, 무거운 침묵, 달콤한 말, 자연의 숨결 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이런 은유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고 처음엔 아주 멋진 표현이며 살아있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듯 은유는 언어를 새로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언어의 창조자가 되겠 지요.     죽은 비유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지요.  우리는 이 죽은 비유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개와 같은 인생", "세월은 유수와 같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네", " 쏜살 같은 세월"," 샛별 같은 "눈동자". "앵두 같은 입술", "백옥 같은 살결". "목석 같은  사내", "여자는 여우",남자는 늑대", "여자는 갈대""쟁반 같은 달", "사랑은 불꽃" "토끼 같은 아이들", 등은 이미 죽은 비유입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이미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습관화되고 상투화되었기 때문에  사물과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보여주지 못합니다.  시에서는 이런 자동화된 비유, 죽은 비유를 멀리하고 배척하는 것이 좋습니다.  박두진의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靜寂(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湖心(호심)아  조태일님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위 시에 나타나 있는 '꽃'의 모습을 보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름다움, 정열, 사랑, 황홀 등 자동적,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던 꽃의 모습이 아니다.  시인의 눈에 의하여 발견된 '속삭임', '울음', '핏방울', '정적', '호심' 등의 비유는  우리가 예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꽃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이 때 솟아나는 정서적 충격과 황홀한 경이감이 우리들의 삶의 지평을 확대 시키고 타성에 빠진 우리들의 시각을 깨뜨리게 한다."  그러면 이런 결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것은 당연히 시인이 관습적이고 자동화된 죽은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살아 있는 비유를 사용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박인환님의 을 싣습니다. 좋은 시 올리는 것들은 모두 전문(全文)입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랴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를 닮은  한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홍윤숙님의 를 읽겠습니다.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서 눈처럼 하얗게 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쯤 눈 쌓이고, 쌓인 눈 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달 열흘 숨겨운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늙어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밭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이미경님의   유달산 외곽도로 따라 갔더니  잎 지는 나무들 서 있었네  아침 안개 속에 서 있었네  나 상수리 나무 옆에 섰네  딸이여 안녕  당신도 안녕  깃털처럼 드디어 무게도 버리고  상수리 나무 한 잎으로  바스러지고 싶었네  유달산 외곽도로  외길 따라 갔더니  바다 있었네  비단 치마폭 바람에 살랑이듯  그렇게 있었네  나 목선 옆에 누웠네  효부도  현모양처도  그리고 매력을 꿈꾸던  내 여성도  신발 옆에 나란히 나란히  벗어놓고 가라앉고 싶었네  머리도 가지런히 눕고 싶었네     시와 비유(比喩)-비유법을 알면 시를 절반은 쓴것  아마, 학창 시절에 배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고등학교에서 배울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드립니다.  비유법을 알면 시를 절반은 쓰신겁니다.  우선 김준오님의 『詩論』에서 비유에 관한 것들을 찾아보기로 하지요.  국내에 시론이 아주 많이 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사에서 나온 『시론』이 제일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1)동일성의 원리  시인들은 어떤 묘사를 위해서만 이미지를 사용하진 않습니다.  비교에 의해서 관념들을 표현하고 전달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 비교가 비유적 언어, 즉 비유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룩스와 와렌의 이론이 아니고도, 비유가 일종의 비교인 이유는 반드시 이질적 두 사물의 결합 양식이기 때문이지요.  수사적 용어를 사용하면 원관념(元觀念)과 보조관념의 결합을 말하는데요.  지난 시간에 이미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란 용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지칭하는 용어가 다르거든요. 원관념을 주지(主旨),  본의(本義), 취의(趣意), 주상(主想), tener, primary meaning,으로  보조관념은 매체(媒體),유의(喩意), vihicle,secondary meaning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원관념은 비유(되는)이미지 또는 의미제이고 보조관념은 비유하는 이미지 곧 재료제입니다.  이 때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의 매개어로 결합되거나  (이와 같은 비유를 직유라 합니다), 의 형태로 결합됩니다.  다시말하면 비유의 근거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연 속성에 있습니다.  즉 두 사물의 동일성에 의하여 비유가 성립됩니다.  이쯤 이론 무장이 되셨으니 이제부터 하는 강의는 더욱 알아먹기 쉬우실 것입니다.  2)비유(比喩)는 시 창작의 원리  시인은 비유를 통해서 시인이 발견하고 창조한 의미나 진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시적 공간에 형성해놓기 때문에 비유는 수사적 기교나 장식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시 창작의 원리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비유는 시인의 상상력과 직관에서 나옵니다. 스파크처럼 빛나는 불꽃입니다.  이 비유의 빛이 사물에 가 닿을 때 사물은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들에게 경이감과 충격을 주게 됩니다.  조태일님 같은 분들은 비유를 모르는 시인은 결코 참다운 시인이 아니며,  비유 없는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래서 시인을 판단할 때는 그가 사용한 비유의 힘과 그 독창성에 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 비유의 종류 비유에는 우선 직유,은유, 환유, 제유, 의인화, 풍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는 비유적 이미지를 설명할 때 이미 말씀드  렸습니다만, 여기에선 보다 세밀하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1)직유  직유는 말 그대로 직접적인 비유를 말합니다. 특별히 유사하지  않은 사물들을 ~같이,~처럼,~듯,~보다 등의 연결단어를 통하  여 직접 비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유의 특성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표면에 그대로 드러남으  로서 원관념의 구체성을 얻게 합니다. '목소리'라는 원관념과  '은방울'이라는 보조관념이 위에 열거한 연결단어에 의해  "은방울 같은 목소리"라는 직유의 모습을 띄우면서 '목소리'가  은방울과 같은 소리를 낸다는 구체성을 얻습니다.  여기에서 보조관념은 자기의 특질이나 속성을 그대로 지니  면서 원관념의 의미나 특징, 성격, 모습 등을 구체적으로 표현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직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얼마간의 유사  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유의 형태가 단순하기 때  문에 독자로 하여금 고도의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독자의 상상력을 더욱 많이 요구해야 좋은 시인 것으로 볼때  직유는 은유에 뒤떨어진 비유의 방법입니다.  또한 지난 시간 연속 말씀 드렸지만, 죽은 비유는 결코 써서는  안되며, 참신성이 있고 신선한 비유를 써야 합니다.  고미경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언제부턴가  내 몸의 깊은 안 쪽에는  허리선이 버선볼 같은 강 하나 살고 있네  그 강물 속 맑기가  가을 햇빛 같아야만,  그 강물 속내가  어린 것에게 젖물린 어미 같아야만,  그대 전체!  나에게 살포시 보여주는데  강물의 한 끝을 닦아오는 사이  허리선이 버선볼 같은 강둑에는  들꽃들 하나 둘 찾아와 서로 사랑하더니,  철철이 아기꽃들이 태어나더니,  강물은  들꽃 향기로  들꽃 그림자로 흐르네.  위의 시에서 직유의 표현을 한 번 지적해보십시오.  원관념은 '강'이 되겠구요, 보조 관념은 '버선볼'  이 되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강물'을 원관념 '가을 햇빛'과  '어린 것에게 젖물린 어미'를 보조관념으로 보는  직유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인의 시각은 결코 흔하지 않은  개성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가벼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시를 쓸 때 이렇듯 개성적인 시각으로 사물들을  포착하고 그 것들의 동일성을 발견해냄으로서 살아있는  좋은 비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2)은유  최문자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시적 미학  은 새로운 인식과 시적 사유에서 탄생한다. 시가 사실을  사실대로 사진 찍듯 찍어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시가  만물의 존재와 본질을 건설하는 일이나, 철저히 사회적인  것을 철저히 개인적으로 읽는 따위의 현란한 우리 문학 풍  토에서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즉 시가 어떤 사실을 그대로 복사하듯 표현한다는 것은  다분히 비창조적이고 다만 개인적인 푸념이나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비시라는 것  입니다.  은유도 그 구조가 직유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되어  있으나, 직유의 ~처럼, ~같은,~ 듯이 와 같은 매개어가 없  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런 매개어가 없기 때문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하여도 비유는 숨은 형태로 나타  나며, 여기에서 나타나는 의미도 또한 직유와 다릅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서로 충돌하듯 결합하고 이 때 일어  나는 상호작용은 물리적 반응이 아닌 화학적 반응을 함으  로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유란 말을 메타포(metaphor)란 영어로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의미의 전이(轉移) 즉 의미의 자리  옮김이란 뜻이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는 뜻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은유를 가리켜 "어떤 사물에다 전혀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metaphor가 meta(초월)와 phora(옮김)에서 나온 것을 보면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러한 은유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는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사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이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시인의 직관과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보면 은유에 대해" 이 것만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라고 말 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김광섭님의 전문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白鳥(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이 시에서 마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 가시적이고 구체적  인 수단을 통해 구상화 하였습니다. 아주 흔한 은유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물은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낙엽 한 장이 떨어지거나 물방개 한 마리만 지나가도 작은  파문이 입니다. 여기에 바람이 불거나 돌을 던지면 아주  커다란 파문이 일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물은 늘 제 원상을  회복하려는 성질이 또한 있게 마련입니다. 그 표면이 잔잔  하고 고요해지려는 것이 물의 특성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구요. 우리가 '세파'  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인생을 물결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온갖 일에 흔들리기 쉬운 마음도 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해지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조태일님의 해설을 들어보겠습니다.  " 위 시에 나타나는 은유는 원관념인 '마음'과 보조관념인  '물결'이 각기 이질적인 대상이지만 앞에서 살펴본 유사성  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음과 물결이 서로  충동하듯 결합함으로써 이 두 대상을 각기 떼어놓고 보았  을 때와는 다른 긴장감과 탄력성은 물론이거니와 불투명하  고 모호한 '마음'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며 관념에서 벗  어나 투명한 육체성까지 형성하게 된다"  오늘 은유에 대해서 공부를 하셔서 아시겠지만, 조태일님  의 말도 다 시인의 직관과 상상력에 밑바탕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은유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어서 시를 살아나게 함을  잘 알아두셔야 합니다.  좋은 시는 얼마나 좋은 은유로 구성되어 있는 시인가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기 시 몇 편을 소개해드리니, 그 시들의 은유가 어떻게  살아있는가 여러분들 스스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고은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죽은 그대 이 세상에 두고 사는 일이  내 일입니다.  어느 날은 그릇 깨어지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고욤나무 열매 떨어지면서  내가 사는 일입니다.  죽은 그대 섬겨서  나와 함께 긴 겨우살이 사는 일이  내 일입니다.  어제 눈이 내렸습니다.  그대를 내 가슴에 두고 먼 데까지 부르니  그대가 열두어 살 단발머리로 달려왔습니다.  그대와 함께 살며  어제와 오늘 눈이 내립니다.  이것이 내 일입니다.  아니 여러 사람의 일입니다.  죽은 그대라는 그리움 하나가 나라입니다.  다음은 강은교님의 입니다.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배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다음엔 『문예연구』2001, 가을호에 실린 조말선(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내 낯바닥에 내가 방사하는 눈물 내 길바닥에 내가 방료하  는 열두 시 내 손바닥에 내가 방목하는 손금 나는 또 다시  내 눈물 속으로 돌아간다 누가 전원을 내려주기만 한다면  이 엘리베이터가 허공에서 멈출텐데 매 분 매 초 절정일텐데  나는 또 다시 내 손금 속으로 돌아간다 내 심장에 내가 투석  하는 혈액 돌아오고 돌아오는 현관 내 혓바닥에 내가 굴린 말  마지막으로 허형만 교수님의 를 올립니다.  슬픔 하나가 향로 속에서 더는 타지 않기 위해 차라리  무너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일곱 시간 만에 도착했다는  문상객이 머리와 외투에 덮인 하이얀 시간의 비늘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말년에 무일푼이셨던 아버지는 슬픔 하나 유산으로 남  기셨다 빛났던 날들 눈처럼 쌓였다가 서서히 얼어붙으니  그래 머쟎아 녹아 흐르리라 흘러흘러 저승 바다 넘치면  끝내 이승의 내 발목을 적시리라       제목 : 수사법 총정리   비유법(比喩法)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를 곧바로 말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성질을 가진 다른 현상이나 사실을 끌어대어 표현하는 법.  1. 직유법(直喩法)   등의 말이 뒤따르거나, 따위의 말을 앞에 놓아 또는 하는 식의 비유.  ·꽃 같이 아름다운 소녀  ·보름달 같은 얼굴  ·유수(流水) 같은 세월  ·푸른 하늘이 홑이불처럼 이 골목을 덮어……  ·먹물을 끼얹은 듯 검은 하늘에……  ·묵은 역사처럼 밤이 내리면, 나의 밤은 가라앉은 잠수함     처럼 고요하다.  · 인생은 배우와 같다.  · 물 퍼붓듯 쏟아지는 비……  ·소마냥 느린 걸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다.  ·정자의 얼굴이 달덩이같이 피었다.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      꽃 : 비유의 대상 - '보조 관념'     미인 : 말하려는 사실. '원관념'     꽃과 미인에는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 '아름다움'  * - (×)    2. 은유법(隱喩法)   가 아니라, 와 같이 비유하는 말과 비유되는 말을 동일한 것으로 단언하듯 표현하는 법.  ·인생은 나그네다.  ·소년은 나라의 꽃이다.(소년〓꽃)  ·호수는 커다란 비취, 물 담은 하늘  ·내 마음은 호수.  ·간디는 인도 국민에게 빛을 준 큰 별이었다.  ·백설의 피부, 밤의 장막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계절의 여왕 오월의 여신(女神)이여 !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라.  3. 의인법(擬人法) 사람 아닌 동물이나 자연을 사람인 듯 표현하는 법  ·매미가 하품을 한다.    ·굽어보는 달님  ·성난 파도                ·오월 햇빛 아래 얼굴을 붉히고 다소곳이 머리 숙인 다     알리아꽃  ·부끄러움을 가득 안은 아카시아꽃  ·갈가에서 가는 목들을 갸우뚱거리며 웃는 코스모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나팔꽃이 방긋 웃고 있다.  ·꽃이 방긋 웃고, 버들이 손짓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4. 활유법(活喩法) 생명 없는 것을 생명이 있는 것처럼 비유하는 법.  ·소리 지르며 달리는 냇물  ·숨이 차 헐떡이면서 비단길을 기어오르는 증기 기관차  ·청산(靑山)이 훨훨 깃을 친다.  ·파도가 울부짖는다.  ·들이 가슴을 열었다.        5. 의태법(擬態法)     사물의 모양과 짓을 그대로 시늉하여 표현하는 법.    의태어(擬態語)를 쓴다. 〓 시자법(示姿法)      ·말랑말랑한 손      ·매끈매끈한 살결      ·아기가 아장아장 걷는다.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해는 뉘엿뉘엿 지고……      ·확 풍겨 오는 향기……      ·토실토실한 손등      ·노루가 껑충껑충 뛰어 달아난다.  6. 의성법(擬聲法)     자연계의 소리, 인간 또는 동물의 소리를 그대로 본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법.     ·학교 종이 땡땡 친다.     ·멍멍 개야 짖지 말고, 꼬꼬 닭아 울지 마라.     ·찌르릉찌르릉 비켜나세요.     ·"만세! 만세! 대한 민국 만세!"     ·뻐꾹새 뻐꾹, 까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흐흐히 히애애, 도깨비가 나타날 것만 같다.     ·바람이 윙윙 부는 밤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우지끈뚝딱하고 났다.  7. 풍유법(諷喩法)   원관념을 완전히 숨기고, 비유하는 보조 관념만 나타내되, 교훈적·풍자적이어야 한다.    속담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엉뚱한 말 속에 참뜻을 담아 본뜻을 추측하게 한다. 〓우유법(寓喩法)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 못나 보인다고 업신여기면 안된다.    ·산에 가야 범을 잡는다.               → 큰일을 하려면 어려움을 무릅써야 한다.    ·게으른 선비 책장 넘기기                    → 일엔 뜻이 없고 분량만 재려 한다.     ·꿀 먹은 벙어리요, 침 먹은 지네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 이야기 전체가 풍유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   8. 대유법(代喩法)   (1) 제유법(提喩法) : 한 부분을 가지고 그 사물 전체를                    나타내는 법                ·빵만으론 살 수 없다 : 빵 → 식량, 식생활        ·사육신 :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 개, 하위지, 유성원        ·무슨 약주 드셨습니까? : 약주 → 모든 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들 → 조국  (2) 환유법(換喩法)    하나의 사물을 다른 명칭을 들어   비유하는 법        ·별 → 장군          ·강태공 → 낚시꾼        ·태극기(한국)가 일장기(일본)를 눌렀다.        ·무궁화 삼천리 → 대한 민국        ·바지 저고리 → 촌사람        ·밤 손님 → 도둑        ·상아탑 → 대학교  9. 중의법(重義法)     한 말에 두 가지 이상의 뜻을 포함시켜 표현하는 법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왜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 벽계수 → 시냇물, 사람 이름          명월 → 달, 황진이  10. 상징법(象徵法)     비유이면서도 좀처럼 원관념을 찾아내기 힘든 표현. 추상적인 것(무형)을 구체적 사물(유형)로 암시하는 법    ·십자가 → 희생    ·비둘기 → 평화    ·낙락장송 → 절개  ·매화 → 우국 지사  * 은유법은 원관념, 보조 관념이 다 표현되지만, 상징법은  보조 관념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미인을 표현하는 데도 여러 방법이 있다.  ·그녀는 꽃 같이 아름답다.  (직유)  ·순이는 한떨기 백합꽃이다. (은유)  ·그녀가 들어오니, 방 안이 꽃밭이 된다. (상징)   강조법(强調法) 문장의 인상을 강하게 만드는 표현법. 감정보다는 의미상의 강조가 주가 되는 방식이다.  1. 과장법(誇張法)    실제보다 훨씬 크게 또는 작게 표현하는 법.    ·하늘에 닿은 수풀     ·밴댕이만한 소갈머리    ·간이 콩알 만해졌다.   ·눈물의 홍수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  ·쥐꼬리만한 월급    ·하루를 천추(千秋)같이 기다린다.(一日如三秋)                                         (직유, 과장)    ·백발 삼천 척       ·주먹만한 대추(직유, 과장)    ·바늘 귀만한 소견(직유, 과장)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만큼이나 힘들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    ·하늘을 찌르는 높은 산    ·노도(怒濤) 같은 진격    * 말만한 개(과장) ― 늑대만한 개(보통 표현)  2. 영탄법(嘆法)    기쁨, 슬픔, 놀라움, 무서움 따위의 감정을 높이는 방법.    감탄사, 감탄형 어미를 주로 쓰지만, 때로는 의문형을 쓰기도 한다.    ·아 ! 아름다운 하늘이여 !    ·오, 이거 얼마만인가 ?    ·어즈버, 태평 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    ·슬프다, 붓을 놓고 통곡하고 싶구나 !    ·어이할꺼나,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    ·저주받은 인생이여 !    ·그리움마저 얼어붙은 가슴인가?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  3. 반복법(反復法)    같거나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법.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멀고 먼 나라        ·깊고 깊은 바다  ·자자 손손           ·우불탕 구불탕한 길  ·솟아라, 고운 해야 솟아라.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정 도령님아.  ·쉬어 가자, 벗이여, 쉬어서 가자.  ·눈물로 적시고 또 적시어도.          4. 점층법(漸層法)    어구(語句)의 의미를 점차로 강하게, 크게, 깊게, 높게 함으로써 그 뜻이나 가락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방법.     ·내 이웃에서 시작하여 내 마을, 내 고장, 내 나라, 아니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한다.     ·가족은 사회에, 국가에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열 사람을 당한다. 열은 백을 당하고, 백은 천을 당하며, 천은 만        을 당하리라.  5. 점강법(漸降法)    뜻을 점차로 여리게, 작게, 얕게, 낮게 벌여 나가는 법.      ·책보만한 해가 손바닥만해졌다.      ·만 원이 안 되면 천 원이라도, 천 원이 안 되면 백 원, 그것도 안 되면 십 원도 좋다.  6. 대조법(對照法)    서로 상반되는 사물을 맞세워 그 중 하나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법. 한 구절의 말뿐 아니라, 한 작품 전체에도 쓰일 수 있다.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      ·앉아 주고, 서서 받는다.      ·얕은 내도 깊게 건너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퍼러니 꽃빛이        불붙는 듯하도다.      * 선(善)과 악(惡), 미(美)와 추(醜), 충(忠)과 간(奸)                                     → 작품 전체  7. 미화법(美化法)    좀 과장되게, 아름답게 표현하는 법.      ·이슬은 가을 예술의 주옥편(珠玉篇)이다.      ·화장실(化粧室) ← 변소      ·거리의 천사 ← 거지      ·부처님 가운데 토막 ← 착한 사람      ·양상 군자(梁上君子) ← 도둑      ·꽃마음 ← 아름다운 마음  8. 열거법(列擧法)  비슷한 말귀나 내용적으로 관계 있는 말귀를 늘어놓는 법.           ·유적(遺蹟)의 도시, 역사의 도시, 명승의 도시……     ·푸른 하늘과 바다와 들과 산.     ·이것들은 그가 자라난 흙과, 하늘과, 기후를 말하지   않는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9. 억양법(抑揚法)    우선 누르고 추켜 주거나, 추켜 세운 후 눌러 버리는 법        ·얼굴은 곱지만, 마음씨가 고약하다.       ·그는 마음은 좋지만, 행실이 나쁘다.       ·그는 좀 모자라지만, 사람은 착하다.       * 일종의 대조법(對照法)이라 할 수 있다.  10. 현재법(現在法)     과거나 미래형으로 쓸 말을 현재형으로 나타내는 법.       ·검찰, 깡패 소탕에 나서다.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 일어나다.       ·이 도령은 춘향 앞에 섰다. 춘향은 얼굴을 붉히고         돌아선다.       ·머리 딴 계집애가 이리저리 옮아 다니며 주물렀다.          그리고는 깩깩 소리를 지르며 엄살을 한다.……비위          가 거슬려 돌아누웠다.  11. 비교법(比較法)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나 개념의 비슷한 것을 비교시키는 법.      ·여름 바다도 좋지만, 가을 단풍이 더 좋다.      ·달이 쟁반보다도 크다.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같은 말의 되풀이는 반복법, 비슷한 말을 늘어놓으면   열거법, 앞 말의 꼬리를 따면 연쇄법, 정반대의 뜻을 가     진 말을 맞세우면 대조법, 비슷한 것을 비교시키면 비교     법이 된다.  12. 연쇄법(連鎖法)     앞 말의 꼬리를 따서 그 다음 말의 머리에 놓아 표현하는법     ·고향, 고향은 가을의 동화를 들려 준다.     ·고인(故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어도 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어떨꼬.  13. 명령법(命令法)     격한 감정으로 명령하는 법. 일부러 명령하는 형식으로 나타내는 법이다.    ·꼭 이기고 돌아오라 ! 조국의 명예를 걸고 건투하라 !    ·젊은이여, 기회는 한번뿐, 놓치지 말라.    ·힘차게 약동하라.  14. 돈강법(頓降法)     절정에서 갑자기 속도를 뚝 떨어지게 하는 법,      ·단편소설의 대단원 처리  변화법(變化法)     단조로운 문장에 변화를 주어 주의를 높이려는 법.  1. 도치법(倒置法)     문법상, 논리상으로 순서를 바꿔 놓는 법.     ·가자, 나를 부르는 고향으로.     ·그는 머뭇거렸다, 처음으로.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바보야, 넌 !"     ·"뭐라 하느냐, 남의 앞에서……"  2. 인용법(引用法)    남의 말이나 격언, 명언을 따다가 인용하는 법.  (1) 직접 인용(明引法)     따옴표 등의 표시로 선명히 인용이 드러나는 법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이 있다.      ·선생님께서 "숙제를 게을리하는 학생에게는 꼭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니 어찌 나아가 구하지 않        을 것이랴.  (2) 간접 인용(暗引法)       따옴표 등이 없이 문장 속에 숨어 있게 표현하는 법.       ·아버지께서는 늘 게으른 사람은 꼭 고생을 하게           마련이라고 말씀하신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더니, 네 뒷집에서 일어난         일을 몰라?      * 인용법에는 반드시 "     " 또는 '    ' 또는 …라         고, …하고, …고 등의 조사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3. 설의법(設疑法)    서술로 해도 좋은 것을 의문형으로 나타내는 법.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치의 국토라도 외적에게 빼앗길 수 있겠는가?      ·이래도 거리에 사람이 없다 하겠느냐?      ·저런 사람도 애국자라 할 수 있겠는가?  4. 대구법(對句法)    가락이 비슷한 글귀를 짝지어 나란히 놓아 흥취를 높이려는 법.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지혜 있는 자는 생각하고, 의로운 자는 행하고 어진자는 지킨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려라.     * 대조법은 뜻이나 내용이 대조(반대)를 이루는 데 반해 대구법은 내용은 같건 말건 가락이 비슷한 점만을       노리는 것이다.  5. 경구법(警句法)     기발한 글귀를 씀으로써 자극을 주는 법. 이가발한 말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 속담, 격언 등은 이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방귀 뀐 놈이 성 낸다(賊反荷杖)      ·아이 자라 어른 된다.                (아이라고 너무 욱박지르지 말라)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모름을 모른다고 함이 참으로 앎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    * 의미상으로는 경구법에 해당하는 것이 표현 양식으로     는 풍유법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6. 반어법(反語法)    표면의 말과는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법.    ·너 오늘 또 칭찬 받을 일을 했더구나.                            ← 꾸중 들을 짓을 하다    ·그놈 참 얄밉게도 생겼다. ← 예쁘다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했으니, 판정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 공정치 못했다.    ·과연 날씨가 좋군요. ← 눈보라 치는 날    ·어쩌면 마음씨도 그리 비단결 같은지(심술꾼에게)    ·나 말이야, 미칠 정도로 행복해서 그래. ← 비참함    ·무식한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 다 알고 있다.    * 반어법에는 풍자가 있다.      ·그 우람하신 허리 하며, 굉장한 미인이시던걸.      ·무식한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7. 역설법(逆說法)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어긋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속에 진리가 담겨 있게 표현하는 법.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만세 불렀다. ← 모든 게 실패로 끝났다.    ·손님 들었다. ← 도둑 들었다.  8. 문답법(問答法)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형식.    ·그러면 학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앞으로 사회에 나아갈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왜 왔는가?  이야기 하기 위해 왔다.  9. 비약법(飛躍法)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던 글을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바꾸거나, 하던 이야기를 갑자기 중단하는 법,  ·보기도 싫다는 듯이 돌아 앉아서 빈정대고 고집만 부리    던 아버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며,     "여보 ! 손님이 오셨는데 밖에 세워 두는 법이 어디 있소? 건넌방으로 모시고, 고구마나 삶아요."(비약)  ·인생이란 따지고 보면 다 그런 걸세. 이제 그만 가세."                                                (중단)  10. 생략법(省略法)     어떤 말이 없어도 뜻의 내용이 오히려 간결해져서 함축과 여운을 지니게 하는 법.    '……'로 된 것도 생략법의 일종이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졌다고……  ·나래에 가을을 싣고 맴돌다 문득 고향.                     ('생각이 난다'를 줄임)  ·"아버지, 나 돈.('좀 줘요'를 줄임)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더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여러분에게                           이승하(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1) 한 작품에 많은 사연을 담지 말것.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서든 이미지든 하나여야 하고, 다른 모티프들은 그것이 뿜는 자장(磁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때 시는 통일성을 얻는다.  2) 비유와 상징을 아낄 것. 비유는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오롯한 품위를 갖는다. 상징은 시인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숨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긴 시를 경계할 것. 시의 참된 맛은 행간에 있다. 행간에는 침묵의 언어와 정서의 긴장이 깃들여 있다. 긴 시는 행간을 매립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4)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할 것. 불투명한 관념이나 감정을 시 비슷한 문법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5) 정서의 결을 잘 다듬을 것. 몇 번의 침전과정을 거친 그리움이라면 슬픔 따위가 개운하게 세척된 상태라야 한다. 물기가 없이 잘 마른 상태라면 더욱 좋다.  6) 구문이 거추장스러운 것, 관형구나 부사구가 무거운 것은 금기다.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기 어렵다. 관형어나 부사어가 상쾌하게 오려진 문장은 조촐하고 산뜻하다.  7) 시로 삶의 각성이나 잠언적인 의도를 노출시키지 말것. 시는 철학이 아니라 미학이다.  [시안] 2002년 봄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둔다. 시를 쓰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일들을 찬찬하게 지적해주었다. 두고 읽을만 하다.  다음은
1    조 향의 초현실주의 문학의 이론과 기법/김 석 댓글:  조회:1176  추천:0  2018-01-28
조 향의 초현실주 문학의 이론과 기법       김 석(시인, 퇴계학회 회원)     1. 들어가는 말   1959년 고 3의 가을 한 날이었다. 학교 교문을 나서는데 길바닥에 책들을 펼쳐 팔고 있었다. 그때 나는 두 권의 단행본과 『向學』이란 잡지 한 권을 샀다. 집에 돌아와 향학의 책장을 넘기다가 박스 안에 사진과 함께 『초현실주의』의 문학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동아대학 조 향 교수님을 접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 지원서를 냈다. 어찌 생각하면 이것은 문학적 運命이라 할 수 있겠지만 수직적 질서인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던 나에게는 수평이란 反의 논리를 알게 한 동기면서 攝理였다.   유학에서는 걸어가는 존재로 사람을 보기 때문에 이것을 天命이라 한다. 천명이란 하늘과 땅의 허점을 깁는 사람의 중요성을 말한다.내 대학 졸업 앨범에는 영남 7개 대학 국어국문학과 학술발표회의 광경이 실렸고, 단상에는 『이상론』을 발표했던 내 모습이 보였다. 그 때 경북대학에 계셨던 김춘수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나의 발표에 대한 평을 하셨던 조 향 선생님은 자료 정리에 미숙함은 좀 있지만 대학생으로서 이상의 시에 대한 연구발표는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란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다.   5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동대신동 조 향 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던 일본서적과 일본 화집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선생님은 혹 사모님과 의견충돌이라도 있을 경우는 월급의 태반을 책을 사는데 써버린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대학3학년 가을 강의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시를 쓸 때의 기교에 대해 말했다. 시에서 언어와 언어의 낯설게 하기, 또 언어의 충돌이 가져오는 시적 효과에 대해 말했다. 그 때였다. 한 학우의 “선생님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차가 급정거할 경우 사람과 사람의 충돌도 언어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의였다. 화가 난 선생님은 하던 강의를 그만두고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질문했던 학생과 나, 그리고 몇 급우들이 당시 문리대학장으로 있었던 선생님을 찾아가 사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때부터 우리들은 선생님의 문학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국문학과의 선후배 중심으로『오후문학』동인회를 결성하였고, 창간호에『ohooism(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본뜬 시 기법의 논리)』을 선포하기도 했다. 졸업 후 나는 신앙의 문제로 인해 선생님이 주관,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 사이의 ‘세븐’다방이었던가『일요문학』의 모임에 옵서버로 가끔 참석했었다. 한 날 三四문학의 창간 멤버의 한 사람이었던 이시우 선생(우리나라 최초의 초현실주의 이론인 ‘絶緣하는 論理’를 1935년 三 四문학 3호에 발표)도 뵌 적이 있다. 이후 우리들은 소한진, 김용태, 송상욱, 김 석, 최휘웅 등이 중심이 되어『시와 의식』을 시작하였고, 선생님의 문하생들 중심으로 부산에서『계간 시 문예』『남부문학』등을 이어 발간했다. 이 문학운동에 참여였던 하현식, 최휘웅 그리고 필자는 시문학사의 도움으로 1975년 합동시집『절대공간』을 상재하기에 이르렀다.   절대공간에 수록된 내 시들은 대략 몽환의 세계를 동시동존으로 병치시킨 기교를 활용했다. 책이 발간되고 상경했던 나는 서대문 한 지하다방에서 문덕수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시집의 발간과 Sur문학운동으로 문단의 현실에 맞섬과 적응하기가 어려움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마침 76년 늦가을, 부산여자대학의 문학 강연 차 오신 조연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나는 초현실주의 문학을 이해해주셨던 신동집 선생님의 추천으로 77, 7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다. 그 때 정릉에 사셨던 조연현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조 선생님은 내가 조 향 선생의 제자임을 알았기 때문에 “일단 문단에 들어와서 잡아먹고 나가면 되지 않느냐.”는 말씀이었다. 생각하니 그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 시절이 그립고 참으로 고마운 스승들이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70년 초 조향 선생님이 학교재단과 불화사건으로 서울로 상경하였고, 나도 80년 서울사리가 시작되었다. 상경 후 선생님과는 주로 서린호텔 다방에서 몇 차례 만나 뵈었다. 1982년 늦은 봄이었던가, 송상욱 시인과 무교동 한 초밥 집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대접한 것이 이승에서 선생님과 마지막 만남이었다. 또 광화문을 함께 걸은 때도 있었는데 선생님이 광화문에 세운 충무공 동상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장군의 갑옷과 칼이 저렇게 무겁고 커서 싸움이나 하겠느냐는, 이것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치장 일변도의 동상에 대한 비판의 말씀처럼 들렸다. 아마 선생님은 동상의 가치를 오브제의 관점에서 보고 하신 말씀하신 것 같았다.   나는 근래 쓴 민족서사시『광화문』에서 충무공의 의상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 이렇게 썼다. 충무공은 우리민족에게 용장이나 맹장으로만이 아닌 智將으로 또 물때와 물터를 알았던 민족의 神將이라는 입장에서 보았으리라는, 이후 나는 서울사리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선생님이 한 날 가족과 설악산을 등반하다가 홀연 세상을 뜨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혼자서 찾아갔던 한양대 영안실에는 조봉제 선생님과 아드님, 그리고 선생님의 문학을 깊이 이해했던 젖은 눈으로 따님이 검은 복장으로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영정사진 앞에는 평소 애연가이셨던 선생의 명복을 빌며 누가 놓아둔 것이었을까, 반쯤 타 들어간 담배연기가 내가 올렸던 두서 향불에 섞여 영정사진 앞을 스쳐 올라감을 보았다.     2. 본론- 초현실주의 문학의 주요 기법들   나의 대학시절이었던 1960년대 초반 우리의 문단과 시의 풍토는 전후 민족주의 정서가 중심이 된 다양한 기법의 시들의 發芽와 정착기였다. 또 주요 문학잡지로는 사상계와 현대문학과 자유문학이었다. 正音社, 을유문화사의 문학전집, 그리고 신구문화사에서 발행된 전후세계문학이었다. 나는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正音, 乙酉문학전집과 신구문화사에서 갓 나온 전후세계문학을 중심으로 책을 사 모아 읽는 일이 나의 하루하루였다.   또 조 향 선생님의 시 창작, 소설 창작 이론 등 나는 당시 리얼리즘의 우리 문학풍토에서 새로운 시의 기법과 창작이론에 호기심으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선생님은 강의 때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super_ego, ego, id), 특히 합리적 이론이나 이성에 눌려 있는 용광로처럼 본능에서 유발된 에너지로 libido라는 미개척 지평에 대한 트리스탄 짜라, 앙드레 브르통, 의식의 흐름을 다루었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이 상 등 낯선 문학의 매력과 경이로움이었다. 또 당시의 아방가르드 예술과 문예사조의 소개였다.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와 에른스트, 미로 그리고 뒤샹이 뉴욕의 한『안티팡당』전에서 변기통을 『샘』이라 이름 붙인 레디메이드의 전위예술의 강의들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초현실주의의 문학론을 도입 정착시기에 매진하셨던 선생님의 공과와 주요 Sur 주요 기법에 대하여, 점서占筮였던 주역을 자연철학으로 정립시킨 공자의 『述而不作』이란 말씀을 인용, 모서리에 선 마음으로 소개하려 한다.   가. 초현실주의 정의   ①. 쉬르레알리즘 : 남성명사   마음의 순수한 자연현상으로서, 순수한 자동현상에 의하여 사람이 입으로 말하든지, 필기에 의하든지, 또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하든지,思考의 참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理性』에 의하여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는 윤리적인 관심을 완전히 떠나서 행해지는 사고의 記述이다.   ②, 百科辭典 : 철학,   超現實主義는 여태까지 돌보지 않았던 어떤 종류의 *聯想形式의 훌륭한 實在에 대한 신뢰에다 근거를 두며, 또한 꿈의 全能과 *思考의 비타산적인 활동에 대한 信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다른 모든 ‘마음의 mechanism’을 결정적으로 破壞하고 그 대신 인생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 ‘절대적 쉬르레알리즘’을 실천해보인 사람들은 아라공, 보아파르, 브르통, 카리브, 데스노스, 나빌, 엘뤼아르, 제라르, 수포, 페레, 비트락 등이다.   *,연상 작용: 자유연상의 형식을 가르치는 말 *. 사고의 비타산적 활동 : 이성의 간섭에서 벗어난 proust가 말한 순수의식으로 투명한 순간.   초현실주의 제1차 선언 ; 1924년 파리.   1919년 앙드레 브르통이 루이 아라공, 필립 수포와 함께 『문학』지를 창간하고 1921년 『다다』운동에 가담하면서 주위에 모여든 젊은 작가들과 함께 최면상태와 심적 자동현상에 대한 실험을 계속한다. 1924년 파리에서 본문 70면에 달하는 짧은 글로 된 『초현실주의 제1차 선언』을 한다, 특징은 문학선언의 배경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절대적인 힘을 입고 있다. 또 마음의 순수한 자동현상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 Sur운동은 시를 통한 물질문명의 부르조아적 사고에서 정신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여러 조건의 폐지를 위한 선행조건이었다. 그 해 브르통은『초현실주의 혁명』을 창간한다.   *. 1차 선언의 주요 立言들   ①. 만약 인간이 어떤 명철함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유년시절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상상력이여, 내가 특히 네게서 사랑하는 것은 네가 용서를 모른다는 바로 그 점이다.   ②. 오직 상상력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내게 가르쳐주고, 상상력을 통하여 그 可恐할 금지사항을 조금씩 취소시킬 수 있다   ③. 광인의 비밀, 나는 이 비밀을 캐내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 광인이야말로 지나치게 양심적이요, 정직한 사람이다. 그들의 순결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내 순결밖에 없다.   ④. 우리들은 아직도 논리의 지배하에 살고 있다. 저 절대적 합리주의는 우리들의 경험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는 사실만을 취급하기를 허락한다.   ⑤. 프로이트가 그의 비평을 꿈과 결부시킨 것은 정신활동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꿈이 오늘날까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한 시인이 매일 밤 취침 시간에 생 풀 루가 그의 카마레 城 문에 『시인 집필 중』이라는 팻말을 달아놓았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⑥.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 날로 可恐해지는 욕망의 줄을 무정부 상태에서 유지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 달린 문제다. 시가 이 사실을 인간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시는 우리가 견디고 있는 비참에 대한 보상을 내포하고 있다.   ⑦. 필기에 의한 초현실적 작문의 방법은 되도록 정신을 집중하기에 적합한 장소(조향 선생님은 馬上, 寢牀, 廁上이라 했다.)에 위치를 정한 다음 필기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갖고 오도록 하라. 되도록 가장 수동적이며 자극적인 상태에 자신을 위치시켜라. 또 ‘문학은 모든 것에 통하는 가장 서글픈 길’ 중의 하나임을 잘 명심하라.   ⑧. 주제를 미리 생각하지 말고 빨리 쓰도록 하라. 기억에 남지 않도록 또는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 나지 않도록 빨리 쓰라. 첫 구절은 저절로 씌어 질 것이다. 객관화하려는 우리 의식과 다른 동떨어진 구절들이 시시각각으로 떠오를 것은 明若觀火한 일이다.   ⑨. ‘이성적인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통하여 자기가 갈 수 있는 곳에 도달화게 되는 사람들의 순수한 초현실적인 즐거움을 나는 믿고 있다.   ⑩. 내가 생각하고 있는 쉬르레알리즘이란 우리들의 절대적인 非順應主義를 요구하고 있다. 또 우리들이 이 지상에서 도달하고자 염원하는 완전한 해방의 상태만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초현실주의 제2차 선언 ; 1929년 파리.   2차 선언서에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브르통은 1924 ~ 29년 사이 초현실주의 운동을 회고하고, 비판했다. 주로 Sur 운동에 참여했다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제명당한 인물들의 죄상을 열거했다. 今後 Sur의 운동은 문학, 미술, 정치에 있어서 어떠한 타협도 배제하며 ‘그 본래의 엄격성’을 지켜야 된다는 새로운 결의를 다짐했다.   초현실주의의 정치적 태도는 브르통이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던 공산당 이론과 1935년에 절연을 선언한다. 이후 브르통은 공산주의 혁명이론(트로츠키 등) 그 자체는 찬성하지만 구체적인 계급투쟁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2차 선언의 주요 立言들   ①. 꿈과 현실이라는 외면상 지극히 모순된 이 두 가지 상태가 이를테면, 어떤 종류의 절대적인 현실성, 초현실성 안에 있어서 앞으로 해결을 보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을 정복하기 위해 나는 정진한다.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전달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높은 곳과 낮은 곳, 이러한 것들이 서로 모순된 것으로 느껴지지 않게끔 되는 이를테면, 정신의 어떠한 점(至高點, 화엄경의理事無碍法界나 제8 아라야식,Sur와 선과의 만남 가능)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②. ‘가족, 조국, 종교’라는 관념을 없애기 위해 지금 모든 것이 사용되고 또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져야 할 것이다.   ③. Sur의 사상은 우리들의 심리적인 힘을 전적으로 회복시키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 방법이란 내부로의 현기증 나는 하강, 감춰진 곳의 조직적인 조명, 그런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점진적인 어둠, 그 금지된 야외지역에서의 영원한 산보로.   ④. 나는 Sur가 그 본질에 있어서 명백한 反共産主義이며 반혁명적인 방향을 취하는 정치운동이라고 말하는 지극히 위험한 비난에 대하여 초현실주의를 변호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⑤. ‘고전적으로’ 생각되어 온 것이 선이라고 인정된다면, 모든 악을 확실히 갈망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의 울음소리’로 밖에 선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⑥. Sur는 어떤 특수한 감정의 노예가 된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를 불멸한 것의 속으로 집어던지는 무엇인가, ‘그 자신보다도 더 강한 것’에 붙들리고 마는 그 이상적인 순간을 인공적으로 재현하기를 무엇보다도 원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 계속 원하게 될 것이다.   ⑦. Sur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상당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본래의 목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Sur, 속에서 구출할 부분과 역할은 앞으로 올 사람들의 순수성과 분노에 달려 있다.   ⑧. 인간은 모든 금지사항을 무시하고 사람들과 사물이 갖는 야수성에 대해서 Sur는 사회적으로 마르크시즘의 공식을 단호한 어조로 적용했었지만 프로이트적 사상비판을 소홀히 할 의사는 없다.   초현실주의 제3차 선언 : 1942년 뉴욕   브르통은 1915년 징집된 1차 대전 중 포병연대를 거쳐 신경정신병학부에 배속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브르통이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임상의학 의사로 복귀한 때이기도 하다. 이 미국에서의 ‘3차 선언’의 발표와 더불어 Sur 운동은 끝이 난다.   3차 선언의 주요 立言들   ①. 나의 내면에는 지나친 ‘北部 기질’이 있어서 아무리 해도 나는 전면적으로 동의하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이러한 ‘北部 기질’은 내 스스로 생각해도 화강암의 자연적인 요새와 또 화강암과 같은 안개를 동시에 갖춘 것으로 보인다.   ②. 어떠한 순응주의도 거부한다는 것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며,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은 Sur가 처한 지나친 순응주의를 겨냥하는 의미도 된다.   ③. 진실이란 남몰래 웃을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 결코 그 정체를 붙잡을 수 없다는 저 엄연한 역사적 과정을 고려해 넣고서 나는 항시 계속 될 수 있고, 또 그 지렛대 역할을 하는 소수파를 위해서 내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는 것이다.   ④. 인간은 이 우주의 중심도 아니며 조준점도 아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고양이와 개를 기르고 있듯이, 우리도 이 자연에서 고양이나 개가 차지한 만큼의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살고 있는데, 우리 자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나. 초현실주의 주요 기법들   ①. 고敲가 아닌 퇴推가 되어야 하는 이유.   선생님이 대학시절 강의 때면 힘써 주장하시던 것 중 하나가 퇴고推敲라는 말이다. 당나라 시인 가도와 한유 사이에 있었던 중국의 문헌 상소잡기의 일화다. 이 일화는 시의 구성에서 단어 하나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말이다. 시인 가도는鳥宿池邊樹 僧(推)敲月下門에서 ‘두드리다 는 敲’와 ‘밀다 는 推’ 중에서 어느 쪽이 좋은지 결정이 어려웠다. 마침 길을 지나가던 韓退之가 가도에게 推보다는 敲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推敲라는 말이 생겼다. 이 일화에 대한 조 향 선생의 말씀은 敲보다 推(僧推月下門)가 더 옳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敲는 상식적인데 반해 推는 동태가 클뿐더러 敲의‘두드리다’와보다는 ‘밀다’는 말이 더 원거리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상식으로는 늦은 달밤의 절간의 문은 가볍게 두드려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쓴 시라야 공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절간의 문을 ‘밀겠다. 밀었다’는 말씀을 했다, ‘왜 밀어야만 하는가.’라는 결론을 강조하면서 우리들에게‘퇴’의 시법으로 이미지를 선택, 시행의 배열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선생님은 Sur가 말하는 시는 관념이나 상식을 제거하고 언어의 폭력적 결합이어야 한다는 중요성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②. 단절Dēpaysement미학의 논리 선언   하나의 물체나 단어를 본래 있어야 할 위치에서 전혀 다르고 엉뚱한 곳으로 옮겨놓는 것을 데뻬이즈망Dēpaysement이라 한다. 즉 하나의 물체나 단어가 제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롭고 놀라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이미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實在를 서로 접근시키는 데서 생성된다. 접근된 두 실재의 관계가 서로 관련이 멀어진 것일수록 이미지는 한층 강렬한 것이 되고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띄게 될 것이다. Sur에서 잠재의식의 무한지평으로 이미지는 순수한 창조이다.(브르통은 삐에르 로베르디의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란 말에 대하여, 정신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렇게 초현실주의는 ‘근거리연상과 順聯想’을 배제하고, ‘원거리연상과 逆聯想’을 취하는 시적 기교를 쓴다. Dēpaysement의 대표적인 예로 Lautrēamont의 말도로르의 노래 중“재봉틀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갑자기 만나는 것처럼 아름답다”를 든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비합리성과 불가사의를 이용해서 의식적인 사고과정을 분리시키고 기존의 절대관념으로 수직적 언어(종교, 이성,사상, 계급 등)와 상식이라는 규칙적인 수평언어에 대해 금기시된 ‘테러와 에로티시즘’의 예술적 가능성을 개척함으로써 잠재의식 활동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여기서 초현실주의는 조형예술의 언어도 시적 언어로 정립시켰다. Sur운동은 ‘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두었으며, 시를 볼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형예술을 이용하였다. 의식의 방심상태의 기법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한 앙드레 브르통과 필립 수포오가 합작으로 쓴 『磁場』(1920)이란 시다.   물방울들의 포로가 된 우리들은 오로지 不滅의 동물일 뿐이다. 우리는 소리 없이 도시를 달리는데 魔法에 걸려 있는 傳單들도 우리에게 닿질 않는다. 유리처럼 깨어지기 쉬운 이 크나큰 정열은 무엇에 쓰는 것이며, 이 말라붙은 죽음의 跳躍은 또 무엇에 쓰는 것이냐,우리는 이제 죽은 天體 이외에는 모른다. 우리의 입은 버림받은 海岸보다 더욱 말라 있고, 우리의 눈은 목적 없이 희망 없이 뒹군다.훌륭한 정거장들도 이제는 우릴 만류하지 못할 것이다. 이 단조로운 分秒를 살기 위해서는, 이 걸레조각처럼 찢어진 世紀를 살기 위해서는......아무래도 숨을 틀어막는 수박에, 옛날에는 歲暮의 태양들을 사랑하였고, 또 어린 시절이ㅡ 그 격렬한 江流처럼 우리들의 시선이 달리던 그 좁은 벌판을 사랑하였다. 어리석은 동물들과 낮 익은 초목으로 代替해 버린 그 옛날의 숲에는 다만 反映의 그림자가 있을 뿐 그 빛깔을 식별할 수 없는 어느 날에 우리들은 고요의 벽을 찾아내었다. 벽은 기념비보다 더 굳센 것이었다. 이제 우릴 존경하는 것은 背恩의 죽음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는데, 아무도 이제는 말문을 열 수 없다. 五官이 모두 마비되었으니 장님들이 우리보다 더욱 나은 자였다. 『雅屍體, 1』(조 향 譯, 아성출판사)   ③. 자유연상과 자동기술법   자유연상이란 프로이트가 환자의 발작(환자가 울고 웃으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두서가 없이 지껄이는 것.)이 멈추는 직후의 안정을 갖게 된 것에서 힌트를 얻어 사용했던 정신병 환자의 심리치료요법이었다. 환자의 마음의 고착상태나 콤플렉스를 풀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하는 좋은 효과를 가졌다. 자유연상의 방법은 심리의 이동과정에서 한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옮아가는 데는 그 사이에 ‘어떤 관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사이를 잇는 많은 연상의 사슬이 무의식이라는 것을 프로이트는 알게 되었다. 지금은 자유연상법이 탐구적 영역 전반과정은 물론 정신치료의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는 대신 그것을 자유롭게 ‘문자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성을 괄호 안에 넣어 그 기능(인간은 이성과 종교에 의해서 오랫동안 정신이 사육되어 왔고, 광적인 개념에 빠져 있었다. 이 모든 감각을 착란함으로써 인간성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브르통)을 중지시킨 다음 저절로 용출하는 의식의 흐름에 記述을 맡기는 것이 자동기술법이다. 이성이 잠깐 비켜선 경우의 ‘의식의 흐름’ 속에 전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 섞여서 溶出된다. 의식의 세계는 연속의 논리에 지탱되어 있으나 무의식의 세계는 단절의 논리에 지탱되어 있다. 무의식의 상태는 일종의 magma의 상태요, chaos의 상태이다. 그 운동방법은 물에 뜬 꽃가루처럼 Brown운동(병치와 수평이동, 꿈, 환상, 동심, 영감에 의한 빙산처럼 생의 심층 등)의 법칙에 따른다. 그것은 비논리적, 반의미적 충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여기서 논리는 즉 이성의 세계인 의미의 세계를 말한다. 브르통의 다음 작품은 사랑의 원리(욕망은 세계 유일의 원동력, 광적인 사랑)를 언어의 질서로 置換시켜 사랑의 계시적인 힘을 끝없이 탐구한다.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자유로운 결합』의 몇 부분이다.     나의 아내에겐 장작불 같은 머리카락이 여름 하늘의 마른번개 같은 생각들이 모래시계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범에 물린 수달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高光度 행성의 화관과 꽃 리본 같은 입술이 白土 위에 남겨진 흰쥐의 족적 같은 이빨이 불투명 유리와 황갈색 瑚珀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비수에 찔린 祭物의 혀가 눈을 깜박이는 인형의 혀가 전무후무한 보석의 혀가 있다   (중략)   나의 아내에겐 오래된 봉봉사탕과 해초 같은 性器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거울의 性器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눈물 그렁그렁한 눈이 보라색 갑옷과 磁針 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겐 대초원의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겐 감옥 속의 마실 것 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언제나 도끼에 패인 장작 같은 눈이 물과 같은 공기 대지의 불과 같은 차원의 눈이 있다   『시적 모험, 20세기 프랑스 시선』(언어의 세계출판사)   나는 1983년 동대문에 있었던 이화여대 정신과 병동에서 정신병자를 치료하기 위한 psychology drama를 보기 위해 이대 정신과 의사였던 이근후박사의 초대를 받았다. 관람객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담당 의사들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이박사의 말이었다.정신병자들의 공통의 말은 “나는 미치지 않았다”는 말이라 했다. 남자환자가 무대에 오를 때는 상대역은 주로 간호사였고, 여자환자가 무대에 오를 때는 인턴이나 레지던트의 젊은 남자의사들이었다. 그리고 무대 위의 장면은 모니터를 통해서 해당의사들이 그것을 관찰한다고 했다. 다음의 시는 청량리 뇌병원에서 실시한 글에서 한 정신병 아이의 시이다.     누나는 나를 미쳤대요   강유익   .빨간 잉크를/ 음료수로 마셨더니/ 누나를 나를 미쳤대요 .파아란 하늘에 떠 있는/ 조각구름을/ 나라고 했더니/ 누나를 나를 미쳤대요 면도날로 이슬을 도려내어/ 내 님이라고 했더니/ 누나는 나를 미쳤대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내 어머니래서/ 누나를 나를 미쳤대요 .아직도 나는/ 황혼 빛에 갇혀서/ 비를 뿌리는 비둘기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래서 누나는 나를 미쳤대요 .호수의 썩은 물을/ 빼 버리는 동안/ 나는 그림자가 되어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 청량리 뇌병원에서 실시한 글에서 한 정신병 아이의 시이다.    『초현실주의 문학』(예술 시리즈 2. 오브제 P84)   *. 우리들이 광인에게 가하는 비판과 또 그들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교정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가 표시하는 깊은 초탈은 유효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망상을 충분히 음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Sur 1차 선언 중에서)   ④. 검은 해학black humour   *. 諧謔이란 정신이 외부의 응시(관조)에 耽溺하고, 동시에 해학이 그 주관적이고 내성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대상(객체)과 그 현실의 형태가 객관적으로 그대로 노출되었을 때 매료를 당한다.   *. 유머는 외관과 절연함으로써 새로운 미학을 발견되고, 객관적인 유머는 우연의 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유머는 사회적 편견을 따르지 않고 절망의 가면을 보며, 자기의 침몰을 방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 공포는 어떠한 병리학적인 자기만족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식물의 성장에 있어서의 비료의 역할, 숨이 막힐 듯한 지독한 냄새가 나서 어렵지만 그러나 식물에 아주 유용한 그런 비료의 역할을 할 것이다. 심리적 긴장의 해방이라는 점을 가장 예각적으로 고찰한 사람은 프로이트다. 그는 Libido(심리적 에너지지) 절약이라는 원리에 의하여 골계, 기지, 해학을 설명하고 있다.   *. 해학諧謔은 자기가 현실의 여러 조건에 깔려서 분쇄粉碎될 것을 알면서도 그 분쇄되는 자기를 객관화해 보고 웃을 수 있는 인간의 태도이다.   *. 해학이란 해방적인 것일뿐더러 지고한 것이다.(프로이드)   *. 우연이란 해학의 스승이다.(에른스트)   *. 웃음이란 경직상태에 대한 반동이다.(한스 르샤르‘Dada’에서)   *. 해학이란 기쁨이 없는 모든 것을 신파연극다운 무익한 것이라 느끼는 때의 그 느낌을 말한다. 감춰진 음험한 생명에 항상 완전히 포착되는 일이 없는 것은 유머뿐이다. (바쉐)   어떤 사람이 정신병원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한 정신병자가 나타나서 그에게로 돌진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심각한 상황)등골이 오싹해진 그 사람은 죽을힘을 다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광인의 발걸음은 빠른 편이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점차 좁아졌다. 그는 그만 체념하고 걸음을 멈췄다.(가장 심각한 상황) 그 사람을 따라 잡은 광인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면서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자 이젠 나를 쫓아올 차례야.(위기 곧 심각한 상황의 돌연한 해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심리적인 긴장을 惹起시키는 상황이 갑자기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웃기는 현상엔 작건 크건 간에 비현실적인 장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유머는 기지와 골계 등과 같은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지니고 있을뿐더러 어떤 숭고하고 고귀한 것, 지적활동에 의한 쾌락의 획득을 가능하게 한다.(검은 해학의 보기)   (초현실주의 문학, 예술 시리즈 3. 오브제 P7〜8)   ⑤. 네 가지 수평사고의 光輝   *. 생각놀이 -- 공상놀이-- 自由想像-- 自由聯想   *. 轉換的, 變換的인 여러 각도와 관점을 찾음.   *. 수직적 사고의 강한 통제와 구속에서 벗어남.   *. hunch(육감, 예감)를 소중히 여기고 활용한다, 명석성은 우매성과 인접해 있다.   *. 서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물체를 병치하는 것, 혹은 난폭함 등 돌연히 놀라게 하는 방법으로, 두 개의 물체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시가 주장할 수 있는 최고의 작업이다. 이것은 시의 행과 행, 연과 연의 독자적이면서 또 동시동존이란 단절의 기교에서 이루어진다.   ⑥. 나비의 변증법   장주가 말하는 萬物齊同이란 즉 사물을 수평으로 가지런히 놓고 바라보는 사상이다. 제물론은 人籟, 地籟, 天籟를 알아야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세 소리를 바로 아는 사람이 장주의 표현을 빌면 眞人이다.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을 쉰다고 했다. 발뒤꿈치로 숨을 쉬는 것이 또한 시인이다. 제물론은 장주가 시인과 진인을 천뢰의 소리를 아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비유하여 쓴 글이다.   莊周 ⟶나비⟶ 物化의 세계(물리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변화)   현실⟶ 꿈 ⟶ 초현실의 세계   (정)⟶ (반)⟶ (합)(꿈에 장주와 나비가 하나가 됨, 초현실주의)   장주의 물화의 세계인 吾喪我의 경지를 초현실주의자들은 ‘至高點’이라 했다. 지고점이란 생과 사,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전달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聖과 俗이란 높낮이가 모순으로 지각되는 것을 그만두는(상호대립으로 認知되기를 멈추는) 정신의 한 점이다. 지고점이란 신이 거기에서 세계를 창조한 최초의 점을 말한다. 조향 선생님은 제물론의 吾喪我와 胡蝶夢을 인용하여, 의식과 꿈의 병렬상태에서의 시적공간이 至高點임을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브르통은 서구에서는 종교, 국가, 이성이란 이름 아래 사육당하는 인간의 탈출의 방법으로 자유와 해방이란 Sur운동을 전개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주가 보는 정신적 자유로의 호접몽의 세계와 다른 것이다. 사유체계에서 동양은 일원론의 휴머니즘인데 비하여 서구사상은 이원론 아래서의 휴머니즘이었다. 노장사상을 배경으로 시를 쓸 때는 초월의 문제가 대두되지만, Sur의 시 창작방법은 反합리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동양에서는 서양의 기독교처럼 인격의 개념으로 신은 없었다. 동양의 신은 무위자연이 곧 신이었다. 禪에서 말하는 心卽是佛, 양명학의 心卽理, 천도교가 말하는 人乃天은 철저한 사람중심의 휴머니즘이다. 예컨대 “사람이 중요하다”고 할 때 동양은 天과 地인 시간과 공간에 버티어 선 人으로 사람이 天地의 허점을 깁는 뜻으로 사람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사람의 중요성은 먼저 인격신이란 절대개념으로 정립된 사람의 중요성을 말했다. 서구의 계몽주의나 正反合의 헤겔의 변증철학에서 反은 신이나 이성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Sur의 탄생과 전개도 이런 서구적 체재의 억누름으로부터 놓임을 위한 투쟁에서 출발한 정신운동이었다. 여기서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노장사상의 세례를 입어 선종이 되었다. 그래서 禪을 추구하는 선시나 偈頌의 형식과 내용(화엄경의 이사무애법계로 眞空妙有, 노장의 無爲自然, 주역의 寂然不動 感而遂通, 유학의 知晝夜之道의 死生觀 우리의 태극기의 원리가 되고 있는 0,1,2의 세계와 3,4,5,6의 세계)이 절연의 논리는 같으면서도 기교의 방법에서Sur의 시적 기법과 다른 점이다.   ⑦. 오브제objet론   불어에는 우리말의 ‘물건’에 해당하는 말이 objet와 chose의 두 말이 있다. chose는 사람의 생활에서 필요한 물건을 말한다. 그러나objet는 chose에서 그 물건으로 실용성(쓰임이나 그것이 놓여 있어야 할 곳)을 빼앗거나 또는 chose가 있어야 할 본래의 위치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진 즉 데빼이즈한 물건을 말한다. 즉 chose를 Dēpayser하거나 실용성을 박탈하면 objet가 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지개의 경우다. ‘짐의 운반’이란 실용성에서 해방되고 백화점에서 장식용으로 전시된 지게는 objet인 것이다. Sur의 시는Dēpayser된 말 즉 오브제로 구성된다. 이처럼 Sur의 시는 의미나 실용성에서 단절(해방)된 오브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 단절의 논리는 프로이드나 융이 말하는 무의식에 지배되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Sur의 시는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나 경이, 그로테스크의 영상, 해학 등의 새로운 시적인 이미지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단어가 지닌 일상의 의미를 해방(단절)시킴을 의미한다.   ⑧. 오브제의 類別(見者voyant의 미학)   *. 자연의 오브제 : 광물, 식물, 동물계 등에는 그 자체로 놀라운 구조며 모양을 가진 것이 많다. 예컨대 괴이하게 구부러진 水石이나 육상선수들의 질주를 고속으로 촬영하는 장면이나 큰개미핥기, 악어나 하이에나 등 육식동물들의 모습 등   *. 미개인의 오브제 : 에스키모나 오세아니아 사람 등이 주술적 종교에 사용하는 도구나, 색채 등 원시예술이 큐비즘 등 조형예술에 끼친 영향이 크다.   *. 수학적 오브제 : 수학의 원리에 따라서 구성된 입체적 모형을 말한다.   *. 발견된 오브제 : 기이하게 생긴 해안이나 강가에 밀려 온 표류 물건, 고속도로에 버려진 비닐 봉투 등, 때와 장소에 따라 우리는 오브제를 발견할 수 있다.   *. 災害의 오브제 : 분화, 화재, 돌풍 등 재해가 지나간 뒤의 모습들이다. 인공재해로 인한 것일수록 怪奇한 美를 더한다.   *. 움직이는 오브제 : 자동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물체를 말한다. 바람개비, 水車, 풍차, 자동인형, 로봇 등   *. 상징기능의 오브제 : 초현실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브르통에게서 그 자격을 인정받아야 했다. 그는 그에게 접근해오는 사람들에게 행동강령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꿈의 강령까지 부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상징기능의 오브제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오브제라고 불리는 것의 근간을 이루는 말이다.   특징은 Machine한 일상적 효용성이 액살縊殺되고, 환상과 무의식적 행위에 의하여 야기惹起되는 표현이다. 이것이 형상화되는 경우는 치환이나 은유의 과정과 흡사하여 인간의 숨겨진 욕망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르네 마그리트의 말이다. “나는 색채의 실질적인 외관이 사라지고 시적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색채를 배열하는 과학이 바로 繪畫라 생각한다. 내 그림에는 테마라는 것이 없다. 상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내 그림에서 나오는 시는 알 수 없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진 것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들은 이처럼 모두 ‘시 영역의 확장’을 시도했다.   *. 레드메이드의 오브제 ; 뉴욕의 제1회 「안티팡당 전」의 심시위원이었던 뒤샹은 자기의 작품 『샘』(砂器便器)을 출품하면서 위생기구를 만드는 한 상회 이름으로 僞名 출품했다. 이 작품은 심사위원에 의해서 거부당했지만 1950년 말 뉴욕의 유명 화랑인『시드니 제니스』의 Dada 초대전에는 변기통 안에 제라늄을 채워 커다란 회장 입구의 문짝 위에 걸렸다. 누구나 전람회에 드나드는 사람이면 그 밑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셀 뒤샹의 말이다. “나는 예술이 예술가 자신에게보다도 관객에게 아편의 병처럼 욕망을 일으키는 수단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ready-made를 불순화해서 지키려고 했다.” 가령 석탄 삽을 선택하면 그것은 내버려진 죽음의 세계에서 끄집어내어져 예술작품으로 ‘산 세계’에 놓이게 된다. 이런 시인의 관조가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효용성을 대표하는 것이 곧 이름(名稱)이다.이름과 효용성에서 해방된 물체는 순수하다. 吾喪我의 세계다.   물건이 사람이 만든 체계 바깥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감이 거꾸로 인간의식의 체계 바깥에 있는 자기의 발견을 재촉한다.여기서 물건과 인간은 동시적인 동질의 존재로서 서로 교류가 가능하게 되며, 인간은 자기 무의식의 카오스 속으로 출발하게 된다. ready-m ade의 오브제, 그것은 객체의 세계에 대한 제멋대로의 주체화이다. 브르통은 꿈속에서 가진 비합리적인 冊子며 환상 속에서 뜻밖에 떠오르는 부조리(사르트르가 ‘구토’에서 주인공 로깡뗑이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벤치 밑의 마로니에 뿌리의 벌거숭이를 보면서 사물의 실용성이나 효용성이 박탈한 상태를 통해서 본 ‘마로니에 뿌리라는 意味體(말)와 被意味體(말이 의미하는 실체나 존재)와의 乖離現象이다. 여기서 그는 ‘말은 존재에 씌어진 베일’이라 했다.’이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 우리들은 무섭고 음탕한 벌거숭이 덩어리를 보게 된다. 이것을 사르트르는 嘔吐라 했다.)한 물체 등이 객관적으로 실현될 것을 몽상한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⑨. 아시체雅屍體 놀이   아시체 놀이는 1925년 파리의 사또오 街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탄생했다. 누구나 협력하여 예비적 노력을 바랄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몇 명의 참가자에게 한 문장 또는 한 데쌍을 만들게 하는 종이놀이다. 이 놀이에서『雅屍體』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 이 경우 참여한 각 사람들은 앞의 협력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보기: 깃이 난 증기가 열쇠로 잠가진 새를 유혹한다. 세네갈의 굴 조개가三色의 빵을 먹을 것이다. ) 아시체 놀이는 1930년까지 지속된다. 그 뒤 약 20년이 지나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이 몰두했던 問答詩(다른 쪽 가운데의 한쪽)의 명칭이 되었다.   마치 눈가림한 사람이 숲 속에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 부딪히는 것처럼, 指導도 방향도 없이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에로, 의식이 흐르는 대로 생각을 맡겨두고 쓰는 일이다. 동양식으로는 東問西答式 시의 놀이이다. 이런 면에서 선시나 偈頌과 맥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는 억눌림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위한 ‘정신적 사냥’으로 동문서답식 시의 기교인데 반하여 동양은 법통을 잇기 위한 ‘진리파지’의 큰 주제 아래 그 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래 보기의 시는 조향 선생님이 서울의 某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실험했던 단어와 단어 사이, 시행과 시행 사이에 의식의 단층을 만들었던 합작 시로 『아시체』의 한 시 놀이다.   B__태양을 향한 한 마리 山羊의 갈망은?   J__프로이드가 씹어 먹는 날개란 말야,   K__그 사람은 언제 떠났지?   S__철도 연변의 들국화야,   J__여름 얼굴 위에 흐르는 지렁이는?   K__고양이 생일이었어,   B__연못 옆에 있는 것은 뭐지?   J__전등 속에 든 베레모 같은데,(이하 생략)   다. Sur 미학의 立言들   필자는 대학시절 은사였던 조향 선생님의 강의 내용 중에서 내 뇌리에 남아 있는 말씀들을 더듬어서 찾고, 출간된 선생님의『시어론』등 저서에서 초현실주 사상과 시의 기법의 아포리즘, 즉 立言들을 소개하려 한다.   ☀. 초현실주의의 창조적 영감은 明晳한 몽유상태에서 번득이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 사이를 언제든지 자유로이 왕래하는 것이다.   ☀. 데빼이즈망의 미학은 꿈에 있어서는 電位이고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세계의 논리이다. 이 단절의 미학의 대표적인 예는 “미싱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갑자기 만나는 것처럼 아름답다.”는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에 나오는 시구이다.   ☀. 시인의 두뇌는 말의 은행이다. 훌륭한 시어란 그것이 명쾌함과 동시에 비속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시를 보는 것은 곧‘이미지(내부시각)를 보는 것이다. image는 심상, 영상, 형상 등으로 번역된다. 미래파의’無線想像‘ 입체파의 ’同時同存性‘ Dada的 連續性 초현실주의의 『미싱과 박쥐우산의 미학』으로 심미적 자동기술법에 의해 정리 완성되는 현대시는 회화적이고 음향적이다. 혹은 이미지의 線이 가지는 선명한 조형성이다.   ☀. 상상이란 內發的 직관성에 의한 심상의 자유롭고 독자적인 결합작용이다.   내발적 직관성의 통로가 id 세계의 발로이다. id의 세계는 잠재의식의 1치적 과정이라 일컬어지는 영역이다. 이 무의식의 영역에 있어서는 관념은 흐트러져 있고, 논리적인 통일이 없다. 어떤 정서는 다른 정서와 바꿔 놔주기 쉬우며, 서로 대립해 있는 것이 배타적으로 되어 있지 않고, 모순되지를 않고 병행되어 있다. 좌우간 전체적으로 혼돈된 상태인 것이다. 이 영역의 지상명령은 쾌락을 얻는 일이다.   ☀. 상이성이 원거리이면 원거리일수록 비유표현의 효과는 높아만 가는 것이다. 브르통의 말이다. 한줄기의 특수한 광체가 발휘되는 곳은 어떤 점에 있어서는 우연적인 두 단어가 접근되는 점에서 생긴다. 이것은 두 전도체 사이에서 생긴 電位差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 하얀 일천오백육십칠, 두꺼운 200,000의 논리(언어도 문장의 요소로 단어(시니피에)보다 언어의 기호로서의 기능(시니피앙)을 높이 평가하면서언어의 사용은 대상을 예상하지 않는 것이다.)   *. “재봉틀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갑자기 만나는 것과 같이 아름답다.” 로트레아몽   #, Freud은 박쥐우산은 남성성기의 상징이요, 재봉틀은 복잡한 기계장치라는 점에서나 여성이 언제나 쓰는 기계라는 점에서 여성 성기를 상징한다. 해부대는 침대의 상징이다.   #. Breton은 박쥐우산은 남성명사, 재봉틀은 여성명사다. 라틴어에서 온 불어의 성 구별에 의한 단어들의 분류는 sex와 관련된 것이 많다고 한다. 박쥐우산이 남자를 나타내고 재봉틀은 여자를 나타내며 해부대는 살기 위해서나 죽기 위해서 공통으로 있어야 하는 침대를 상징했다.   #. Max Ernst는 어떤 기성의 실재(박쥐우산)가 이것과는 동떨어져 있고, 그와 못지않게 부조리한 다른 하나의 실재(재봉틀)와 함께 전혀 엉뚱한 장소(해부대)에 돌연히 병치되었을 경우, 이들 실재는 그런 식으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본체(일상성)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절대성(오브제)을 획득한다. 박쥐우산과 재봉틀이 사랑의 행위를 시작하는 것이다.   ☀. 시의 언어는 처음부터 사물과 사물과의 새로운 관계를 인식하는 언어인 것이다. 아이러니는 언제나 고급 시의 특징이다. 여기서 아이러니라고 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며, 서로의 보충을 위한 돌출한 충동을 말하는 것이다.   ☀. 무의식의 세계는 현실적 분별지가 통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은유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이다.   “창문에 의하여 둘로 단절된 한 사내가 있다.”브르통의 말이다. 어느 날 밤 잠들기 전에 그 중 한 마디도 바꿔칠 수 없을 정도로 또박또박 발음된, 그러나 온갖 잡음으로 뒤섞여 멍멍하기도 한 대단히 이상스러운 말을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내 의식이 인정하는 바에 따르자면, 이 말은 당시 내가 관계하고 있었던 갖가지 외적 사건과 결된 것이 아니었고,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며, 창에 부딪치듯이 강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애매한 것이라곤 없었다.   “창문에 의해서 둘로 단절된 한 남자가 있다.”는 이미지의 뒤를 따라 끊임없이 일련의 문구가 잇달아 태어났다. 이 구절에는 애매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 속에는 몸의 중심선과 수직으로 교차하는 창에 의해서 몸 한가운데가 절단된 체 걷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창문이 그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이동하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진귀한 타입의 이미지와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방법을 이용하여 필립 수포와 공동으로 『磁場』을 펴냈다.   ☀. 인간 정신이 자연 상태인 무의식의 세계는 자연발생적으로 異論理로 가득 차 있다. 이런 無爲自然的인 은유의 세계는 의식의 참여를 거부한 채 자연용출 상태에다 맡겨서 기술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이라 한다. 『표주박에서 당나귀가 튀어나오는詩語의 發想法,』이나 『대나무 속에서 옥동자가 나오는 詩語의 發想法』이 다 초현실주의 발상법이고, 이런 관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시작법이 禪詩(불교의 유식철학이 말하는 제8아라야식과 통한다. 이 의식은 진공묘유의 원리 위에 존재하는 마음의 본성이다. 제8아라야식은 그 성질이 본래 無覆無記性이다. 무부는 아라야식 자체는 번뇌가 없다는 것이다. 번뇌는 청정한 마음과 지혜로움을 어둡게 덮어버리고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부장覆藏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와도 그 맥에 닿고 함께 할 수 있다.   라. 작은 제자가 본 큰 스승님의 문학관   인간과 문화의 진보를 두고 볼 때 앞선 사람의 태도와 신념은 참으로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다. 『봄이 오니 꽃(花)이 피는 것은 사실이지만, 꽃(華)이 피니 봄이 온다는 것 또한 진실이요, 사실이다.』나는 민족의 서사시 광화문을 쓰면서 花(物, 몬)가 華(문화)가 되는化(변화)의 중요성을 장자의 소요유의 곤鯤이 붕鵬이 되는 物化의 비유를 들어 내 나라의 역사와 현실을 썼다. 조 향 선생님은 이 땅의 초현실주의 문학의 활로와 정착을 위해 거름이 된 사람이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꽃방석을 하나 내드려야 한다.『꽃이 피어 봄이 오는』초현실주의 시와 시론에서『花⟷華⟶化』의 역할을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강의 중 선생님이 자주 쓰셨던 용어들이다. 推敲, 낭만주의가 아닌 魯漫派, Surrealism, Dark_side와 서치라이트, 검은색의 이미지(조향 소설, 구관조 참조), 순수지속, 콜라주, 몽타주, 낯설게 하기, 폭력적 결합, 의식의 흐름(필자가 동인지‘시외 의식’의 이름을 지을 때 참조했음), 아방가르드, 해체, 밤의 산보로, 오브제, Dada, 입체파, 미래파, 모더니즘 등이다.   *.派 : 1960년대 우리나라의 문학풍토에 대한 선생님 나름대로 진단에서 낭만주의를 ‘Roman派’라는 가차문자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이 ‘ism'을 派라는 말로 협소하게 사용했던 것이 선생님의 문학관이었고, 당시의 우리문단이 극복되어야 했던 ’派‘의 문학풍토와 현실이었다. 이로부터 한 탈출구를 선생님은 초현실주의 문학에 두고 힘을 쏟은 것이다. 이것이 1950년대 부산에 정부가 피난해 있을 때도 선생님이 문단의 중심세력에서 이탈해 있었던 주요 원인이다. 물결이나 물갈래(派)는 강물이나 바다의 한 요소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즉 이런 선생님의 문학관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문단풍토의 이해와 더불어, 또 선생님의 문학운동의 한계를 드러낸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ism : 선생님은 Sur라는 말과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많이 썼다. 『주의』라는 ism을 주역 대성괘大成卦에서는 천수송天水訟이라 한다. 訟은 공공을 위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또 하늘에서 내리는 비라는 뜻이다. 청명, 곡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만물을 살리지만, 겨울에 내리는 비는 만물을 더욱 시들어 죽게 하는 것이다. 즉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좋은 것이지만 그 비에 묶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ism도 마찬가지다. ism이 Dogma라는 이데올로기에 묶이면 옴쭉달싹을 못하고 죽는다는 뜻이다. 문학도 문학운동도 마찬가지다. 초현실주의 2차 선언에 보면 브르통의 초현실주의문학의 옹호를 위하여 동참했던 시인들에 대한 ‘단죄’ 이론이 많이 보인다.       *.searchlight ; 빛을 따라 숨겨진 부분이 밝혀지는 서치라이트는 무의식의 세계를 조명하는데 좋은 기법이라 했다. 무의식이란 집으로 말할 때는 곳간이나 지하실로 비유할 수 있는 삶의 Dark side이다. 나만의 의식을 가지고 id의 세계를 조명하라는 말이었다. 선생님이 오브제와 더불어 자주 사용했던 서치라이트라는 이 용어는 내가 시를 쓸 때나 天이란 우주관, 人이란 인생관, 사물이란 자연관으로 대상을 바라보는데 객관화하는 곡척曲尺이 되고 있다.   *. Collage : ‘풀로 붙이다.’ 그러나 그냥 오리거나 잘라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림이나 갖가지 사진 등에서 그 한 부분씩을 잘라내어,한 장의 종이 위에다 그것들을 ‘遠距離聯想的인 배치로써 붙이는 방법’이다. 이것을 Sur에서는 콜라주 수법의 시라고 한다. 시에 있어서 꼴라주 방법은 잡다하고 서로 엉뚱한 관계에 있는 글자의 크기나 형태가 다른 신문 표제나 광고 문안 등에서 떼어온 말들이 데뻬이즈망의 記述에 의해 한 군데 모아 배치하여 된 시작품이다. 세련과 정제된 문학작품에 비해 콜라주 수법의 시는 시 단어들 자체의 의미 외에 또 다른 해학적 의미가 첨가되는 것이다.   *. Montage : 영화에서 주제와 연관된 필름을 모아 하나의 연속물로 결합시키는 방법인 몽타주를 사용,『씨네 포엠』을 시도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이 기법은 지금도 현대시의 중요 기법의 하나가 되고 있다. 즉 울림으로의 언어를 시 기법에 도입한, 시니피에(의미)보다 시니피앙(울림, 청각영상)의 시를 쓰는데 눈을 뜨게 한 기법이기도 하다.   *. 入眠時 幻覺 ; 幻視, 幻聽, 幻味, 幻臭, 幻觸(運動幻覺, 平行幻覺), 體感幻覺, 半睡眠時 思考에서의 의식이 잠시 피해 있는 상태로 방심상태다. 이것을 브르통은 의식이 ( )에 넣은 상태라고 말했다.   3. 나가는 말   처음 합리주의라는 수직적 사고에 억눌리고 함몰되어 있었던 무의식을 발굴, 해방과 자유를 부여했던 시(문예 전반 운동)를 중심으로 출발했던 Sur의 영향과 사고의 발상법은 지금은 일상생활의 바닥인 의식주에까지 침투되었다.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말한 마로니에 뿌리처럼 뻗어 있다. 이런 초현실주의 사유의 지평이 시문학에 끼친 성과와 평가를 요약해 둔다.   ①.Sur의 정신   이성을 괄호 (이성은 종교보다도 더 어두운 이념이나 개념이란 감옥을 만들었다.)에 넣는 反合理主義며, 反美學의 문예운동이었다. (진리는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적 인식에서 창조된다. 시인들은 사제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빗나간 태초의 말씀을 재발견, 재건하는 것이다. Sur 운동은 이런 시인들의 상상력으로부터 나오는 문학예술의 영역을 잠재의식으로 확대했다.) 즉 가장 세련되게 가다듬고 앞뒤가 맞도록 면밀한 구성을 해야 할 시(문학예술)에 광기, 꿈, 불가사의, 무의식이라 감추고 억눌렀던 것을 시의 지평으로 열었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한 낭만주의와 다른 측면에서 사랑과 여성적인 것을 다루었고, 혹은 架空의 실체에서 찾아내려 했다.   ②. 누보로망과 쉬르의 관계   자동기술법이 inspiration(초감각적 지각)을 환기시기에 적합함으로 전후소설의 수법으로 도입되었다. Sur와 누보로망은 일상의 합리적 사고라는 그늘에 가려 있었던 상실된 오브제를 재발견했고, 나아가 오브제의 권리를 회복하고 찾는데 공헌을 했다.   ③. Sur와 한국 현대시와 관계   1920~30년대 우리나라의 문학은 일본을 통한 간접 移植으로 출발이었다, 1930년대에 이 상의 Dada, Sur적 발상의 실험 시들이 등장했다. 이 상은『이상한 可逆反應』등을 통하여 시어를 무의식적 본능세계에 두고 그가 전공한 건축과 수학 등의 용어를 활용하여 시의 세계를 나타내려 했다. Sur는 30년대 우리나라 시의 주류였던 주지주의보다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고 영향을 주었다. 30년대 중반 三四문학과 1950년의 『후반기 동인』이었던 박인환, 김경린, 김규동, 이봉래, 조 향 등에 이르러 Sur의 시와 문학론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 일에 『시와 이론』으로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내 대학시절 은사였던 조 향 시인이다.   ④. 현대시의 열린 기법으로 Sur의 영향   ㈀. 잠재의식(libido)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 합리적이라는 논리적 사고 방식에서 인간의 사고를 해방(꿈에나 볼 수 있는 경이로운 이미지와 메타포의 다양한 측면 기술 개발)시켰다. 인간의 의식을 superego, ego, id의 세 단층으로 구분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도입, 인간의 내면구조를 확대 조명했다.우리의 의식세계(superego, ego)를 프로이트는 氷山一角이라 했다. 또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id)에서 용출되는 창조적 힘을 시를 쓰는데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 一元論的 감성의 세계에서 多元的인 상상의 세계로 시상을 열었다. 즉 언어의 두께랄까, 사상의 단층을 확대(난해성 문제 대두)시켰다.   ㈄. 생경한 외래어 사용과 전문용어, 신기한 어휘를 사용한 어두운 면도 나타내었다.   ***. 필자가 시인으로 살면서 생각하고 느낀 몇 매듭의 蛇足이다. 언어의 절제로 숭고미를 다루는 시의 최대공약수는 시의 형식과 내용의 균형과 조화로움이다. 따라서 시인은 그가 속한 시대가 평화로운 때는 비싼 문화의 장식품이지만 어려운 때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시의 진보를 위해서는 내용 위주의 시나 내용을 배제하고 언어미학에 충실하며 새로운 시도의 시 기교도 필요한 것이다. 또 이 일이 일상 언어의 메너리즘이나 통속성을『절제와 울림』으로 보완하고 止揚해서 시가 正과 反 혹은 所以然과所當然으로 존재되어야 할 이유이다.   한 문화인류학자는 시와 신화와 종교는 한 뿌리의 가지들이라 했다. 시의 진보를 위해서는, 종교가 있어야 함으로 핵심인 心卽是佛,無無無(비유컨대 어머니의 마음처럼, 없애려고 하여도 없앨 수 없는 없음으로 있는 것 )니, 十字架卽復活이란 모순형용으로 진리를把持하는 것처럼 止揚(aufheben)의 단계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지양의 단계가 헤겔이 말한 定立 ⤄ 反定立 ⟺ 綜合이라는 진보를 위한 삶의 변증법이요, 문화에서 작용과 반작용이 있어야 함으로의 효용이다. 미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과정적 존재’로 사람과 사물, 신을 규명하고 인식하려 했다. 그는 止揚을 통한 통섭과 진보의 관점에서 동서양의 문화와 정신지평의 만남을 이해하려고 했다. 이것이 동양의 인본주의인 유학이 말하는 ‘人 ⟶大 ⟶天 ⟶夫’로 사람의 진보 과정이다.     ☀. 사람~~~~~~~~물(구절양장 비유)~~~~~~~~~~渡(到)彼岸   (몰두해야 뜨는(乘) 이치) 길(신발의 중요성)   事法界 理法界(色卽空) 理事無碍法界(석가 苦)   人 大→天(天命) 夫(一以貫之)(공자 難)   예수 그리스도(救世主) 그리스도 예수(예수 苦難)     물속에 머리를 넣고, 즉 몰두沒頭한 다음에야 ‘붕’ 떠서 헤엄쳐가는 어려움의 이치를 말한 것이 동양시상의 뿌리인 주역이다. 이 머리를 넣어야 뜨는 삶의 이치를 말한 것이 주역의 64 대성괘大成卦의 셋째 괘인 수뢰준水雷屯이다. 이 괘의 형상(格物, 六爻)은 땅속에서 싹이 나오는데 너무 힘들어 뿌리가 구부러진 형상으로 모습이다. 그래서 수뢰준의 괘를 삶의 탄생과 죽음을 나타낸 괘라 말한다. 공자는 이 삶의 구부러짐과 펴짐으로 과정을 難 ‘三萬歲而一成純’이라 했고, 석가는‘應無所住而生其心’의 苦라 했다. 그리고 예수는 苦難(하나님 형상으로 存在)이라 했으며, 우리 사상의 큰 축인 원효는 화엄경을 요약하여 ‘一道出生死 一切無碍人’의 10자로 말했다. 유학은 한 번뿐인 사람의 삶은 天命을 위한 계획이어야 한다 했다. 천명이란 우리가 철학이나 종교, 과학이나 예술에 집중하는 것이다.이 지식이나 정신의 활로를 위해 正이나 反 등 여러 면으로 우리는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지평 또한 원효가 말하는 死生觀으로 삶과 죽음이 하루와 오늘의 낮과 밤의 관계(문학이나 예술의 경우 Eros와 Thanatos의 보완관계)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임의로 골라 본 조 향 선생님의 주요 작품이다.   ☀. 조 향 선생의 시 소개     EPISODE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이윽고 총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 아이!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리를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   (개정 증보판 現代文學粹, 自由莊(1952)     바다의 層階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   디이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립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신구문화사 1961)   *, 두 개의 단어는 초현실적이라 불리는 활동에서 동시적으로 발생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보급시키려고 한 저 기계적인 기술방법에 의해서 창조된 초현실주의의 분위기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아주 적합한 것이다.(Sur 1차 선언 중에서)     검은 ceremony   將軍의 銅像이 소피보는 달밤에 장미는 하얗게 웃었다. 웃음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감기면서 가로수 가지에 걸리더니 Giacometti의 『손』을 抽象한다. 너는 히아신드처럼 웃으면서 물방울 같은 노래를 연해 게워낸다.   恐怖는 通路의 에피소우드. 소리개의 하품은 하얀 미학이다. 五色의 에어 쇼우 속에 무성해 가는 原始林. 나나니벌. 구나방들.   『글쎄올시다』   지평선은 너의 허릴 자르면서 지나가고, 내 안엔 불타는 너의 지평선이 있다. 畵室에선 극성스러운 노랑의 퍼레이드. 검은 ceremony는 로우터리에서 그려지는 오늘의 星座. 모가지 없는 立像들이 하얀 태양 아래서 시커먼 會談을 열고 있는데, 地球의 발목엔 무성해가는 라플레시아.   지금, 世代는 악취의 황혼이다.   까마귀가 어둠을 울부짖고, 검은 계절이 한창 펄럭인다.   (1978년 전환 1집)     밤   그 옆구리를 시꺼먼 구멍에서 콸콸콸 검붉은 피가 쏟아진다.   하수도 에서는 문드러진 내장에 파란 불이 켜지고,   (1959년 자유문학)         不毛의 에레지(合作詩)     A------오늘도   무수히 落下하는 에나멜의 꿈과   B------高層建物 위에 구름처럼 나부끼는 旗幟와의 사이를   C------불안을 안고 轉落하는 현대의 행렬이여 아아멘!   A------함부로   歪曲된 이념을 찢어버리며   B------무너진 禮拜堂의 층층대에서서 오후의 바다를 본다   C------아이스크림과 소녀와의 추억은 내 최후의 抛物線을   그리고,   A------오오   샹데리아 밑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우리들의 리리크!   B------dome의 하늘에 拍手처럼 흩어지는 무수한 訃告여!   C------강아지를 몰고 나는 오후의 散步路에 선다.   *A : 김경린 B : 이봉래 C : 조 향   (대학국어 현대문학, 자유장 1958)   *. 이 시는 아시체놀이처럼 자기가 쓴 것을 접어서 남에게 뵈지 않게 한 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했기 때문에 행과 행 사이의 단층, 단절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반아시체 문답 시이다.     遺稿 시   나비는 비행기가 장난으로 떨어지는 시늉으로 나뭇잎 새처럼 할랑거리듯이 그렇게 도회의 하늘을 날고 있었다. 좀 앉아서 쉬었으면 싶은 모양인데도 좀체 앉질 않고, 자리만 물색하다가 날아가려 한다. 앉을 곳이 아무래도 마땅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더니 문득 허수룩한 지붕 밑 벽에 가서 사뿐 앉는다. 앉았다간 다시 날아가선 몇 번이고 그 망설이는 시늉을 한 끝에 앉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비는 다시 훌쩍 날아가더니, 이번엔 높이 높이 치솟더니 서쪽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괴변이 생긴 것이다. 그 나비가 앉았던 자리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에서 수없이 끊임없이 개미 같은 것이 자꾸 쏟아져서 도시의 가로에 차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개미 같은 게 아니고, 개미만큼씩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蟻人들이 물에만 닿으면 무럭무럭 순식간에 커져서 보통의 사람만큼씩 커지는 것이다.   (轉換, 제 5집, 1984)     *. 참고문헌   1. 조향전집 1 詩 (열음사) 2. 조향전집 2 시론. 산문 (열음사) 3. 아시체雅屍體. 1, 2, 3 (부산 아성출판사) 4. 파트라지 迷宮에서 쉬르의 廻廊으로 (조향, 시문학 1982, 1월호) 5. 다다. 쉬르레알리즘 선언 (송재영 譯, 문학과 지성사) 6. 한국 모더니즘 시 연구 (문덕수, 시문학사) 7. 시적 모험, 20세기 프랑스 시 선집 (언어의 세계사) 8. 옥타비오 파스전집 1, 활과 리라 (솔 출판사) 9. 초현실주의 시와 시론 (차영한, 한국문연) 10. 일본 현대시인론(김광림, 국학자료원) 11. 초현실주의 미술 (열화당) 12. 뭉크, 에른스트, 미로, 달리, 마그리트, 칸딘스키 (集英社, 일본 화집)   * 트라미지 : 13세기에 씌어 진 『잡박한 문체』의 글을 말한다. 쉬르의 기법에 그 맥이 닿는다. *. 글 속에 인용부호가 들어갈 부분이 더러 있지만, 필자가 들어가는 말에서 述而不作이란 말을 썼고, 인용된 문장들의 표현에 더러刪定을 가해야 했기 때문에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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