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1)
[서론]
1. 문학의 정의 : 객관적인 정의의 불가능성 전제
1) 상상적인 글(imaginative writing) : 구분 모호
2) 언어의 특별한 사용 : "organized violence committed on ordinary speech"
★ 러시아 형식주의자--반신비적 상징주의 거부/문학텍스트 자체의 물질적 실체에 관심/예술을 신비로부터 분리시키고 문학텍스트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 둘 것을 강조/문학은 언어의 특수한 조직/독특한 방식과 장치들 존재/하나의 물질적 사실로서의 문학은 그 기능을 분석하는 것이 가능/작품은 작가의 정신의 표현이 아니다--> 내용 분석은 간과하고 문학형식의 연구에 치중: 내용은 형식의 동인일 뿐. estranging or defamiliarizing effect/규범으로부터의 일탈 언어, 일종의 언어적 폭력/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문학성이란 한 종류의 담론과 다른 종류의 담론의 ‘서로 구별되는 관계들’의 함수이지 영속적으로 주어진 속성은 아니었다. 그들은 문학을 정의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문학성을, 언어의 특별한 사용을 정의하려던 것(13). 이들처럼 본다면 모든 문학은 ‘시’로 간주된다.
3) 비실용적인 담론non-pragmatic discourse으로서의 문학 : 자기지시적인self-referential 언어
--> 결국 문학의 본질이란 없다. “일정한 공통적인 내재성 속성에 의해 판단되는 확실하고 불변적인 가치를 지닌 일군의 작품들이라는 의미의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20) “문학이란 사람들이 글에 자신을 관련시키는 어떤 방식들”(17).
--> 문학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 : “글이 문학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훌륭하여야 된다’라는 의미에서보다는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종류이어야 한다”(19).
--> “문학의 정전(canon)이나 국민문학의 의문의 여지없는 위대한 전통이라는 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별한 이유로 특수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구성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누가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했고 또 할 것인지에 상관없이 본래적으로 가치있는 문학작품이나 전통이란 없다”(21).
--> “모든 문학작품들은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그것들을 읽는 사회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 실제로 한 작품을 읽는 것은 그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기도 하다
--> “우리의 모든 기술적인 진술들은 종종 보이지 않는 가치범주들의 그물조직 속에서 움직인다....지식은 몰가치적이어야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판단이다....우리의 사실 진술들의 속을 채우고 있는 또 그 기저에 있는, 전반적으로 은폐된 가치구조야말로 ‘이데올로기’라는 말 뜻의 일부이다”(24-5).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말하고 믿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권력구조 그리고 권력관계들과 연관되는 방식들을 대략적으로 의미한다....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사회권력의 유지와 재생산에 어떤 종류의 관계를 가지는, 느끼고 평가하고 인식하고 믿는 방식들을 뜻하는 것“(25).
--> “순수하게 문학적인 비평적 판단이나 해석이란 없다”(26).
결론--> 문학은 곤충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문학을 구성하는 가치판단들이 역사적으로 가변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가치판단 자체도 사회의 이데올로기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가치판단이란 궁극적으로는 단지 개인적 취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집단들이다른 사회집단들에 대해 힘을 행사하고 또 그 힘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의거하는 전제들을 가리킨다(26).
제 1장 영문학 연구의 발흥
1. 문학은 사회 내에서 존중되는 모든 글(18세기)--> ‘창조적, 상상적 글’이라는 현대적 문학 개념(19세기)
2. 영국 산업자본주의의 공리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적대적인 인간의 창조성 개념을 의미(셸리). 하지만 사물을 물신화하고 인간관계를 시장의 교환관계로 환원하며 예술을 벌이가 안되는 장식으로 도외시 하는 속물적인 공리주의가 중산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낭만주의 문학에 담긴 에너지들은 현실적인 부르주아 정치체제들과는 잠재적으로는 모순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잔혹한 정치적 억압 하에서 낭만주의자들의 상상력에 의한 창조는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이미지라 할 수 있으며, 시적 정신의 직관적 선험적 영역은 ‘사실’에 얽매인 합리주의적 혹은 경험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생한 비판으로 기능. 다시 말해 문학은 하나의 온전한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상상력 그 자체는 하나의 정치적 힘이 된다(30). 하지만 상상력의 선험적 성격은 냉혹한 합리주의에 대한 도전인 반면 동시에 작가에게 역사에 대한 절대적 대안을 제공하여 위안을 제공하기도 한다(“역사로부터의 이탈”). --> 미학의 등장(칸트, 헤겔, 코울리지, 쉴러). 미학의 주된 작업이었던 예술이라는 불변적 객체가 존재한다거나 ‘미’ 혹은 ‘미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독립된 경험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예술이 사회적 삶으로부터 소외되는 한 산물이다(32). 후원자를 잃은 작가는 시적인 것 속에서 그 대체물을 발견하였다. 다시 말해 미학의 등장으로 인해 각 예술작품들의 역사적 차이들이 은폐되게 되었다. 이제 예술은 항상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행위와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의미들로부터 유리되었고 단독적인 물신의 위치에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관련 속에서 18세기 들어 미학이론의 핵심은 반시비적인 상징(symbol)의 문제였는데, 상징은 합리적인 비평적 탐구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으로 비합리주의의 주춧돌이기도 했다.
3. 문학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다. 문학은 사회적 권력의 문제들에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영문학연구가 발전하게 된 단 하나의 이유를 대라면 그것은 ‘종교(이데올로기)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종교를 대신하는 영문학(35쪽 고든의 언급과 아놀드 참고), 대중의 이데올로기 사업의 역할을 맡은 문학. “중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알약은 문학이라는 당의(糖衣)를 입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학과목으로서의 영문학이 처음 제도화된 것은 종합대학들에서가 아니라 공업학교들, 근로자를 위한 대학들, 순회공개강좌 등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영문학은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의 고전이었으며, 사립학교와 명문대학이라는 매력적인 문을 넘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싸구려 일반교양 교육을 제공하는 한 방식이었다(39-40). 사회계급들간의 유대, 더 큰 공감력의 함양, 민족적 긍지의 고취, 도덕적 가치들의 전달 등에 대한 강조. M. Arnold/H. James/F.R. Leavis. 이제 문학은 리비스의 저작에서 나타나듯 현대를 위한 도덕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것이다.
4. “여성들과 학교선생이 된 이류계층과 삼류계층에 속하는 남자들”에게 적합한 과목으로서의 영문학(40). 영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영국[문학]이라기보다는 [영국]문학이었다. 1차세계대전을 전후로 양 대학에서 영문학이 본격학과로 받아들여지는 전조-->일종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1932년 리비스에 의해 Scrutiny지 출범--> 엄격한 비평적 분석의 중요성, 페이지 위의 단어들에 대한 집중, 창조적 에너지를 담고있기에 중요한 문학 강조. 결국 “오늘날 모든 영문학도는 다 리비스파이다.” 영문학을 모든 학과보다 훨씬 우월한 가장 중심적인 교과목으로 간주. 영문학의 전통적 고전작가들 지도그리기도 이들의 몫. 단순한 문학적 가치들은 거부하면서 역사와 사회 전체의 성격에 관한 심층적인 판단들을 연관된 것으로서의 문학을 숙고하면서 문학작품들의 질적 차이 강조. “어떤 작품은 삶에 기여하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도 있다.” 리비스에게 중요한 것은 피폐한 산업사회의 문명의 야만성을 가져오는 기계화된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뎌내는 것. 그런 의미에서보자면 시작부터 기권했다고 볼 수 있다.
5. 엘리트주의적인『검토』. 이들의 질문과 답, 왜 문학을 읽는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러나 괴테를 읽는 수용소장과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살인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층 중산계급 출신으로서 이들 리비스 일파들의 딜레마는 기성의 문학계에 대해서는 급진적이지만 일반 대중들에 대해서는 폐쇄적이 되었다. 이들에게 문학은 어떤 의미로는 그 자체가 바로 유기체적인 사회였다. 문학이 중요했던 이유는 문학이 바로 하나의 온전한 사회 이데올로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영어다움에 대한 리비스의 신념--어떤 종류의 영어는 다른 것들보다 더 영어답다는 신념. 언어는 실제 경험의 물질적인 결들로 체워져 있지 않거나 현실적인 삶의 즙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소외되어 있거나 타락한 것이라는 신념.
6. T. S. Eliot의 등장. 그가 공격하는 것은 중산계급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전체 즉 산업자본주의의 공식적인 지배이데올로기였다. 엘리어트의 해결책은 극우적 독재주의로서 사람들 모두 비인격적(몰개성적) 질서를 위해 자신의 하찮은 인격(개성)과 견해를 희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 이 비인격적인 질서는 전통이다(54). 기독교도가 하느님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듯이 문학작품은 전통 안에 존재함으로써만 타당할 수 있다. 모든 시는 문학(literature)일 수 있지만 몇몇의 시만이 진정한 문학(Literature)이며 그것은 그 작품 안에 전통이 흐르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그는 유럽사회의 위기를 역사에 전적으로 등을 돌리고 대신 신화를 내세움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산업사회에서 언어가 김빠지고 시에 적합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는 그의 견해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닮은 점이 있다. 검토는 막바지에 다다른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태도를 보였다는 것과 대비.
7. 리비스와 실제비평, 꼼꼼한 읽기. 실제비평--순문학적인 잡담을 일축하고 텍스트를 정당하게 해부했던 하나의 방식. 문화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떼낸 시들이나 산문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문학의 위대성과 중심성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 꼼꼼한 읽기 또한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것’에의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문학작품들을 촉발시킨 맥락들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한 것이다(문학작품의 사물화reification). 리비스류의 꼼꼼한 읽기는 미국 신비평과 연결 되는데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가 리차즈(I. A. Richards)이다. 그는 이제 기능을 다해버린 종교의 역할을 시가 대신할 것을 주장. “시는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시는 혼란을 극복할 완벽한 능력이 있는 수단이다.” 정서적 언어이자 유사진술로서의 시 강조.
8. 신비평. 신비평은 검토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현실 속에 세울 수 없는 것을 문학 속에 재창안해놓은 뿌리뽑히고 방어적인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였다. 독자적인 의미망으로서의 시. 작가와 독자로부터 결국 역사로부터 분리된 시. 신비평이 했던 일은 시를 주물(呪物)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신비평은 근본적으로 순전한 비합리주의, 농업운동으로서의 우익적인 ‘피와 토지’의 정치운동, 그리고 종교적 교리와 밀접히 연관된 비합리주의였다. 하지만 신비평가들은 텍스트의 심오한 신비 앞에 겸허하게 엎드린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신비평가들은 가장 튼튼하고 빈틈없는 비평적 해부의 기법들을 개발해 내었다. 신비평이 강단에 잘 받아들여진 이유. 첫째, 편리한 대중적 교육방법. 둘째, 시를 상충하는 태도들의 미묘한 균형으로, 대립하는 충돌들의 사심없는 화해로 보는 그들의 시관은 냉전의 도그마에 의해 방향을 상실한 회의주의적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 시는 정치적 비술이자 현재의 정치적 상태에 복종하게 하는 비법이었다. 자연스럽게도 신비평의 한계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였다. 신비평가들은 거의 배타적으로 시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현대 문학이론에서 시로의 이동은 특별한 중요성을 띤다. 왜냐하면 시는 모든 문학장르 중 역사로부터 차단됨이 가장 뚜렷한 장르, 감수성이 가장 순수하고 사회성이 가장 빈약한 형태로 활약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9. 신비평과 윌리엄 엠슨. 신비평이 텍스트를 합리적 담론과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분리하는 반면, 엠슨은 시를 다른 말로 합리적으로 풀이될 수 있는 일상 언어의 한 종으로서, 우리의 말하고 행동하는 평상의 방식들과 연속되어 있는 발화의 한 유형으로서 다루기를 주장한다. 엠슨에게 문학작품은 폐쇄된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인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단순히 작품 내의 언어의 일관성의 패턴을 추적하기보다는 단어들이 사회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맥락들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한 맥락들은 항상 불확정적이기 쉽다. 엠슨의 애매성은 신비평의 역설, 아이러니와는 달리 결코 최종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의 언어가 멈칫거리고 점점 사라지거나 그 자신을 넘어서서 몸짓하고 어떤 고갈되지 않는 잠재성을 지닌 의미의 맥락을 의미심장하게 시사하는 그런 지점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애매성은 독자들의 활발한 참여를 유도한다. 엠슨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애매성은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언어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들의 여지를 주는 모든 언어적 뉘앙스이다.” 리차즈를 포함한 신비평가들에게 하나의 시어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맥락적contextual이며 시의 내적 언어조직의 함수이다. 엠슨에게 독자는 담론의 모든 사회적 전후 상황들을 의미형성의 암묵적인 전제들을 작품에 불가피하게 적용한다. 엠슨의 시론은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적이고 민주적이며, 평범한 독자에게 있을 법한 공감과 기대에 호소한다. 엠슨은 한 문학텍스트의 의미들은 항상 상당한 정도 혼잡한 것이어서 최종적인 해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논의와 신비평가들의 논의를 대립시켜 놓으면 이후에 살펴 볼 구조주의자들과 탈구조주의자들의 논쟁을 앞서 보고 있는 듯하다.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②, 2000/7/15/
[제 2장 현상학/해석학/수용이론]
1. 현상학Phenomenology
훗설Husserl--대상들은 물자체things in themselves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의해 정립된 혹은 지향된 사물들로 간주될 수 있다. 사유행위와 사유대상들의 내적인 연관성과 상호의존성. 나의 의식은 세계의 수동적인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지향한다. 우리는 외부세계를 우리의 의식의 내용만으로 환원하여야 한다. 의식에 내재하지 않는 것은 엄격하게 배제하여야 한다.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정신 속에 현상하는appearances 모습으로 환원되어 순수 ‘현상’pure phenomena으로 다루어져야 한다(현상학적 환원).
훗설의 관심대상인 순수현상이란 일관성없는 개별현상들이 아니라 보편적인 본질들의 체계이다. 현상학은 상상 속에서 각 사물들에 변화를 주어 마침내 그 사물들에 있는 불변적인 속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질투심이나 붉은색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보편적 유형 즉 질투심이나 붉음 그 자체이다. 본질적이고 불변적인 것에 대한 파악이나 인식으로서의 현상학. 현상학은 ‘사물들 자체에로의 복귀’에서 알 수 있듯이 구체적인 것, 견고한 토대에로의 복귀였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을 포착함으로써 진정 신빙성있는 지식을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 지식의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애초의 조건들에 대한 질문으로서의 현상학. 현상학은 의식 자체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를 통해 현상들 자체를 드러내고자 했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추상태와 순수한 가능성들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한 현상학은 순수지각에 주어진 것이 바로 사물들의 본질이라고 주장.
리비스와 훗설의 공통점--사물들 자체에로의 복귀, 구체적인 삶에 뿌리내리지 않은 이론들의 추방. 비합리적인 의존. 구체적인 현상을 파악하는 행위 가운데 직관된 것은 보편적인 어떤 것 즉 훗설에게는 ‘형상eidos’ 리비스에게는 삶이었다. 직관에 의존하는 이 이론들은 필연적으로 권위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현상학은 한편으로는 인간주체의 중심성을 확보하였다. 세계는 내가 정립하거나 지향하는 어떤 것이다. 세계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의식의 상관물로서 파악되며 이때 나의 의식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transcendental 것이다. 19세기 과학의 실증주의적 경향에 의해 침해된 인간주체는 현상학을 통해 정통의 왕좌애 복귀하고 주체는 모든 의미의 원천이자 기원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고전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해묵은 꿈의 복원이며 일신이다. 왜냐하면 그 이데올로기는 인간으로부터 흘러나온 역사적 사회적 상황들에 인간이 선행한다는 믿음을 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인간이 애초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는 진지한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세계의 중심에 다시 인간을 세우는 가운데 심각한 역사적 문제에 허구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학적 비평--현상학의 영향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제네바 비평학파였다. 훗설이 실제대상을 괄호안에 넣었듯이 현상학적 비평에서 문학작품의 실제적인 역사적 맥락, 작가, 작품의 생산조건들, 독자들은 무시된다. 텍스트 외부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받지 않는 전적으로 내재적인 독서immanent reading를 목표로 한다. 텍스트 자체는 작가의 순수한 의식의 구현체로 환원되며 그 모든 문체적, 어의적 측면들은 작가의 정신이라는 본질에 의해 통합되는 복잡한 총체의 유기적 부분들로 파악된다. 작품 자체에 나타나는 의식의 양상들만을 참고하여 이 정신을 파악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관심의 대상은 반복되는 주제나 이미지의 패턴들에서 발견되는 정신의 심층구조들이다. 한 작가가 시간이나 공간을 경험하는 방시그 자아와 타자의 관계 혹은 물질적 대상들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 특유하게 촛점을 맞추려는 현상학. 이를 위해 완벽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추구하는 현상학적 비평은 전적으로 무비판적이고 비평가적인 비평방식이다. 현상학적 비평에서 비평은 구축행위, 즉 필연적으로 비평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선입견들이 개입되는 능동적인 작품해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비평은 텍스트의 수동적인 수용, 그 정신적 본질들을 순수하게 옮겨 적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론적/본질주의적/반역사적/형식주의적/유기체론적인 유형의 비평이며 현대의 문학이론 전체가 가진 맹점들과 편견들과 한계들의 일종의 순수한 증류물. 현대언어이론--의미는 언어에 의해 생산된다--에 대조되는 훗설의 언어관의 맹점(79).
2. 해석학Hermeneutics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미는 역사적이라는 인식을 통해 스승 훗설과 결별한 하이데거. 선험적 주체가 아니라 인간실존의 주어짐giveness 혹은 현존재Dasein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 하이데거는 실존(즉 인간적 존재방식)은 항상 세계내적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가 타인들과 관계맞고 이 관계들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만 우리는 인간주체들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세계는 합리적으로 분석되기 위하여 외부에 있는 객체, 관조적인 주체와 마주 대하고 있는 객체가 아니다. 세계는 우리가 그 밖으로 나와서 마주대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실존은 세계와의 대화이며, 말하는 것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욱더 경건한 행위이다. 인간의 지식은 항상 하이데거가 선이해pre-understanding라고 부른 것에서 출발하여 그 안에서 움직인다. 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투기projecting myself함으로써만,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인식하고 깨달음으로써만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결코 나 자신과 순수하게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항상 나 자신에 앞서 미리 미래로 투사되는 존재이다. 이것은 곧 인간존재란 역사 혹은 시간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인간실존은 시간에 의해서만 아니라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바로 인간 삶이 움직이는 차원이며 세계를 맨처음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언어가 있는 곳에서만 고유하게 인간적인 의미의 세계가 존재한다. 언어는 인간들이 참여하게 되는 그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가지고 있으며 이 언어의 실존에 참여함으로써만 인간들은 인간으로 된다. 언어는 현실이 자신을 드러내고 우리의 성찰에 자신을 맡기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진리를 담고 있다. 모든 개별적인 개인들에 선행하는 준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언어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사고는 구조주의의 이론들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 핵심적인 것은 개별 주체가 아니라 존재Being 그 자체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주체와 객체 양자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그를 존재의 신비앞에 지나치게 무릎꿇게 만든 단초를 제공한다. 농부의 찬미/자연발생적인 선이해의 격상/이성의 격하/현명한 수동성의 찬미/개성없는 집단의 삶보다 우월한 진정한 죽음에로의 실존에 대한 믿음.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이론적인 지식이 항상 실천적인 사회적 관심들의 맥락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세계를 관조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적인 사물들 즉 어떤 실천적 계획에 필요한 요소들이 상호연관된 체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결국 앎은 실천행위에 깊게 연관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실천성의 또다른 측면은 관조적인 신비주의이다. 그는 예술이 낯설게 하기라는 믿음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다(해머가 깨졌을 때 그 낯섬에서 해머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처럼). 후기의 그는 현상학적 진리가 현현할 수 있는 것은 예술에서만이다. 그에게 문학해석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문학해석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해야하는 어떤 것이다. 수동적으로 텍스트에 스스로를 개방하고 신비하게 소진함이 없는 텍스트의 존재에 우리를 맡기고 그 존재로부터 심문받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술 앞에서 굴종적인 성격을 지녀야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산업사회의 거만한 이성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노예적인 자기부정인 셈이다.
하이데거는 구체적인 역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역사는 내면적, 본래적 혹은 실존적 역사이며 이것은 사실 보다 평범하고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에 대한 대체물로 작용한다. 루카치가 언급한 것처럼 하이데거의 역사성은 실은 반역사성과 구별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훗설의 영원한 진실들과 서양의 형이상학 전통을 역사화함으로써 뒤집어보려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다른 종류의 형이상학--현존재 자체--를 내세운 것뿐이다. 그의 저작은 역사와 만나는 만큼이나 역사로부터 도피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존재의 해석학hermeneutic of Being이라 부르는데 훗설의 현상학과 구별하기 위해 ‘해석학적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해석학은 원래 성서해석의 영역에 국한했지만 19세기 그 영역이 확대되면서 텍스트해석 전체를 부르는 용어가 되었다. 슐라이허마허, 딜타이, 가다머.
허쉬E.D. Hirsch--미국의 해석학자 허쉬는 훗설의 지향적 객체로서의 의미론을 받아들여 일종의 이상적 객체(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동일한 의미로 남아있다는 점에서)로 의미를 본다. 단지 하나의 텍스트 해석만이 가능한 것만은 아니지만 “모든 해석들은 작가의 의미가 허용하는 전형적인 가망성과 가능성들의 체계 내에서 움직여야 한다.” 의미meanings와 의의significances의 구분. 작가는 의미를 부여하고 독자는 의의를 부여한다. 문학의 의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이며 역사적 변화를 전혀 겪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사고. 의미란 작가가 의지적으로 꾀하는 어떤 것이며 일단 발생한 이후에 특정한 일단의 물질적 기호들 속에서 영원히 고정되는 유령과도 같은 무언어적인 정신행위.
비평가는 허쉬 자신이 본래적 장르intrinsic genre of a text라고 부른 것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글을 쓸 당시의 작가의 의미들을 지배했었을 일반적인 관습과 시각들을 의미한다. 허쉬에게 한 작가의 의미는 그의 소유물이며 독자에 의해 훔쳐지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사회화되어서는 안된다. 즉 여러 독자들의 공공재산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의미는 오로지 작가에게만 속하는 것이며 작가는 죽은 지 오래되어도 의미의 처분에 독점적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의미란 허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적이지도 확정적이지도 않다. 의미는 언어의 산물이며 언어는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는 어떤 유동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순수한 의도, 순수한 의미가 무엇인자를 알기는 쉽지 않다. 허쉬가 그 괴물들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미를 언어로부터 떼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결국 훗설처럼 무시간적이고 숭고하게 사심없는 형태의 지식을 제시한 것이다. 의미가 항상 역사적이라는 하이데거, 가다머 등의 주장에 대한 반대.
언어의 의미는 사회적인 것이다. 언어는 나에게 속하기 이전에 내가 속한 사회에 속한다.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 텍스트는 다른 사회적 맥락으로 이동함에 따라 다른 의미들로 이해될 수 있다. 가다머에게 이러한 유동성은 바로 작품 자체의 성격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모든 해석은 상황에 따르며 특정한 문화의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기준에 의하여 형성되고 제약되며 문학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다머가 보기에 과거의 작품의 모든 해석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 속에 존재한다. 모든 이해는 생산적이다. 그것은 항상 전과 다른 방식의 이해이며 텍스트에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고 텍스트를 전과 다르게 만든다. 현재는 과거를 통해서만 이해 가능하고 과거와 살아있는 연속체를 이룬다. 이해는 역사적 의미들과 전제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평이 그 작품이 놓여있는 지평과 융합될 때 일어난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낯선, 예술품의 세계에 들어선다. 가다머는 모든 역사의 기저에 흐르는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전통의 본질을 인정하고 우리의 암묵적인 선입견 혹은 선이해가 문학작품을 수용하는 데 해가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견은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이다. 현대의 ‘편견에 대한 편견’을 낳은 것은 완벽하게 공평무사한 지식을 꿈꾼 계몽주의였다.
우리가 가다머에게 물어볼 것은 누구의 전통인가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의 단일한 ‘주류’ 전통만이 존재하며 모든 정당한 작품들은 그 전통에 참여하고 있고 역사는 결정적인 균열, 갈등, 모순이 없는 끊임없는 연속체를 형성하며 우리(도대체 어떤 우리인가?)가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편견들은 소중히 여겨져야한다는 거대한 전제들 위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역사는 투쟁과 불연속과 배태의 장소가 아니라 연속되는 사슬, 항구적으로 흐르는 강이거나 혹은 의기투합한 자들의 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은 이성으로 논증될 수 없는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이 가다머의 주장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해석학은 이데올로기의 문제, 즉 인간역사의 끝없는 대화가 때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독백이라는 사실, 혹은 그것이 실제 대화라고는 하더라도 그 당사자들(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위치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타협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해석학은 담론행위가 자애롭지 않은 권력과 항상 결부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3. 수용이론Reception theory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 등의 콘스탄츠 수용이론학파--해석학의 발전 형태. 해석학이 과거의 작품들에 전념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수용이론은 문학에서 독자의 역할을 살피고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이론이다. 수용이론에 따르면 독자는 종이 위에 찍혀진 일련의 조직된 검은 표들에 불과한 문학작품을 구체화한다. 독자들의 활발한 참여가 없다면 문학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수용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작품들은 간극들gaps로 이루어져 있다. 독서의 과정은 항상 역동적이며 시간을 따라 펼쳐지는 복잡한 운동이다. 문학작품 자체는 일단의 도식들, 즉 독자가 현실화하여야 하는 일반적 지시들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저는 독서를 위해서는 텍스트의 역호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저가 가장 효과적인 문학작품으로 상정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습관적으로 취하게 되는 약호들과 예상들을 새로이 비판적으로 자각할 수밖에 없도록 해주는 작품이다. 우리의 인식방식을 침해하여 새로운 약호들을 가르쳐주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와 유사. 독서의 핵심은 우리를 더욱 심화된 자기의식에 이끌어주는 것이며 우리가 독서를 하면서 읽는 것은 결구 우리 자신들인 셈이다. 이러한 이저의 수용이론은 자유주의 휴머니즘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관여하는 독자는 문학작품의 변형시키는 힘에 덜 개방적이므로 부적합한 독자가 되기 쉽다고 주장한다. 문학이 가장 깊게 영향을 미치는 독자는 이미 올바른 종류의 능력과 반응을 갖추고 있으며 특정 비평기법들을 운용하고 특정 문학관습들을 알아보는 데 익숙한 독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독자들은 영향받을 필요가 가장 적은 독자라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많은 수용이론의 외면적인 개방성의 이면에는 단일한 자아와 폐쇄된 텍스트라는 교리들이 도사리고 있다.
로만 인가르덴은 각 문학작품들은 우기적 총체를 형성하며 독자가 작품의 불확정항드을 채우는 목적은 일한 조화를 완성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독자의 활동 제한. 이저는 이보다는 자유로운 독자를 상정하지만 그 또한 한계를 두는데, 그것은 독자는 텍스트를 내적으로 일관성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저가 생각하는 독서의 모델은 기본적을 기능주의적인 것으로서 부분들은 전체에 정합적으로 맞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형태심리학Gestalt(경험의 통일적 전체) psychology의 영향이 작용한 것이다. 이저는 텍스트의 불확정항들을 폐기하고 하나의 불변적인 의미로 대치하는 행위로 우리를 몰아간다. 독자는 텍스트를 해석할 뿐 아니라 텍스트와 싸우는데 텍스트의 무질서하고 다의적인 잠재성을 특정한 종류의 질서로 환원시키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이것은 결코 다원주의자의 발상이라 할 수 없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의 대조--독자는 단지 끝없는 기호들의 미끄러짐을 경험한다. 언어의 풍성함을 즐기는 독자. 독서는 실험실이라기보다는 부인의 내실과 같다. 바르트가 천착하는 모더니즘 텍스트는 독서행위가 문제삼는 자아를 종국적으로 회복시키는 가운데 독자를 그 자신에게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트에게는 독자로서의 행복이자 성적 오르가슴인 향락 속에서 독자의 안정된 문화적 정체성을 폭파시키는 것이다. 이저가 언어의 무한한 잠재력을 억제하는 엄격하도록 규범적인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했다면 바르트는 그것을 뒷면에 다름없는 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며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경험을 보여준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그는 가다머처럼 문학작품을 그 역사적 지평, 그 작품이 생산된 배경인 문화적 의미들의 맥락 속으로 두려고 하며 그런 이 지평과 역사적으로 위치지워진 독자들의 변화하는 지평간의 변천하는 관계를 참구한다. 이러한 작업의 목표는 새로운 종류의 문학사, 즉 작품이 수용되는 역사적 순간들에 의해 정의되고 해석되는 문학에 중심을 둔 문학사를 쓰고자 한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그에 따르면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내에 이저가 암시된 독자라 부른 것을 은연중에 담고 있으며 그 모든 흔적들 속에서 작품이 예상하는 수용자의 유형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에서도 소비가 생산과정 자체의 일부가 된다. 사르트르의 연구는 작가는 누굴 위해 쓰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단지 실존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제기하는 것이다. 내가 혼잣말을 할 때조차도 나의 발화는 그 발화 자체가 어떤 잠재적 청자를 예상하지 않는다면 결코 발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
스텐리 피쉬Stanley Fish--연구를 함에 있어서 어떤 객관적인 문학작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제 진정한 작가는 독자인 셈이다. 피쉬에게 독서는 텍스트가 의미하는 것을 발견하는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가 독자에게 행하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비평의 주목대상은 작품 자체 속에 발견되는 어떤 객관적인 구조가 아니라 독자의 경험의 구조라는 것이다. 무질서한 해석의 갈래를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해석의 전략들’에 호소한다. 하지만 그는 작품 자체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미가 텍스트의 언어 속에 내재하여 독자의 해석에 의해 끄집어내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생각은 객관주의적 환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이저가 이런 환상에 사로잡혔다고 주장한다(피쉬와 이저 사이의 논쟁).
하나의 문학텍스트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의미하게끔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것은 강의실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환상이기도 하다. 텍스트들은 그 어떤 실천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 실천들과 복잡한 관계르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는 우리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모양짓는 사회적 힘들의 장이며 따라서 문학작품을 외부로 탈출하려는 무한한 가능성들의 활동무대로 보는 것은 상아탑적 망상일 뿐이다.
--허쉬가 보여준 작가의 의도에 대한 강조, 피쉬가 내세운 독자의 능력에 대한 천착 등과 더불어 문학제도들 내에는 어떤 독서방법들이 일반적으로 허용되는가를 결정하는 학술제도가 존재한다. 해석 자체의 범주들, 관습들 그리고 전략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들. 따라서 문학제도와 단절한다는 것은 단순히 베케트에 대한 다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문학비평,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사회가치들이 정의되는 방식들과의 단절을 뜻한다.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③, 2000/8/5/
[제 3장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기호학Semiotics]
1. Northrop Frye의 Anatomy of Criticism
노스롭 프라이의 인식--문학에 작용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법칙들의 존재와 그 법칙들의 공식화. 이야기범주들-->희극적(봄), 낭만적(여름), 비극적(가을), 반어적(겨울). 문학 양식의 구분-->신화(주인공의 유적 우월), 로망스(급의 우월), 비극과 서사시(상위higher 모방 양식상에서 급에서는 우월하지만 환경보다 우월하지는 않음), 희극과 사실주의(하위모방, 풍자와 반어에서 열등). 가치판단의 배제, 문학사 이외의 역사 추방을 주장하는 프라이 이론의 강점은 신비평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텍스트들의 폐쇄된 생태학적 순환으로 봄으로써 문학을 역사에 종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신비평과는 달리 자체의 구조들을 모두 지닌 대체 역사를 문학에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초역사적인 문학의 양식과 신화들의 체계는 그 자체로 폐쇄적이다--> 신비평보다 더한 형식주의.
프라이는 문학이 외부로부터는 완전히 절연된 자율적인 언어구조이자 삶과 현실을 언어적 관계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는 내면을 향한 밀봉된 영역이라고 본다. 프라이에 따르면 문학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온 일종의 집단적인 유토피아 꿈꾸기이자 근원적인 인간 욕망들에 대한 표현이다. 따라서 문학을 개별적인 작가들의 자기 표현이 아니다. 작가들은 단지 문학이라는 보편적인 체계의 기능들에 불과하다. 프라이가 유토피아적 근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역사 자체에 대한 혐오때문이다. 문학에서만이 우리는 지시적 언어의 천박한 피상성을 떨치고 영혼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다. 프라이에게 실제 역사는 굴레요 결정론이며 문학은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처럼 보인다.
프라이의 인식이 지닌 강점은 극단적인 미학주의를 효율적으로 분류하는 과학성에 교묘하게 결합시켰고 문학을 현대사회에 대한 가상의 대안으로 하는 반면에 바로 그 현대사회의 용어로 문학비평의 신분을 고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학을 종교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자유롭고 계급없는 문명사회를 희망하는 프라이는 아놀드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전통 안에 있다. 프라이의 저작은 일정부분 구조주의적이다.
2. 구조주의Structuralism
구조주의의 방법적 원칙들--“모든 것을 언어학의 용어로 다시 한번 생각하려는 시도”(프레드릭 제임슨). 구조주의는 구조들, 특히 그것들의 활동이 보여주는 일반법칙들을 탐구하며, 어떤 체계의 개별 단위들이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을 지닌다(120쪽의 예). 러시아 형식주의처럼 이야기의 실제 내용은 괄호로 묶고 전적으로 형식에만 집중. 구조주의 방법을 더 살펴보면, 첫째, 이야기의 문학적 위대성 여부는 구조주의에 문제 되지 않는다--> 대상의 문화적 가치에 무관심
페르디낭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 영향--기호들의 체계로서의 언어/ 공시적synchronical 연구/ signifier-signified의 자의적 관계/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관계 사이의 자의성/ 각 기호는 체계 내의 다른 기호와의 구별을 통해서만 유의미/ “언어체계에 있어서는 구별만이 존재한다.”/ Parole(개별발화)보다는 langue(사람들의 대화를 가능케 한 기호의 객관적 구조)에 관심/ 지시대상들은 일단 괄안에 묶어둬야 한다고 생각.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러시아 형식주의자. 프라하 언어학파의 중심인물. 러시아 형식주의와 현대 구조주의의 연관 마련. 그는 시적인 것the poectic은 언어가 자기자신과 자의식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라 생각. 따라서 언어의 시적 기능은 기호들의 감각성을 증진시키고 기호를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적 특질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에서 기호는 그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평상적인 관계가 파괴되며 기호는 그 자체로 가치대상으로서 독립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야콥슨의 의사소통의 6요소, 은유와 환유의 구분 등의 이론-> 124-5쪽 참고) 시적기능은 선택의 축으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시킨다.(The poectic function projects the principle of equivalence from the axis of selection to the axis of combination.) 야콥슨을 중심으로 한 프라하 언어학파는 시작품들은 그 안에서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들이 일련의 복합적 관계에 의해 통제되는 기능적 구조로 파악. 그러므로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지 외부현실의 반영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라는 형식주의자들의 개념에 의해서 문학작품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라하 학파의 활동을 통해 구조주의라는 용어는 기호학이라는 용어와 대체로 동일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연구방법으로서의 구조주의와 특정한 연구분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기호학.
퍼스C. S. Peirce의 기호 분류--1) 상형적(the iconic) 기호-> 그 지시대상과 유사성을 지닌 기호(예. 인물사진). 2) 연상적(the indexical) 기호-> 그 대상을 연상시키는 기호(연기와 불, 발자국과 동물). 3) 상징적(the synbolic) 기호-> 지시대상과 자의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연결된 기호.
유리 로뜨만Yury Lotman--시적 텍스트란 의미가 문맥에 따라서만 성립하며 유사성과 대립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양한 체계로 상정. 텍스트 내의 차이와 유사성은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인식 가능. 시적 텍스트는 다른 어떤 담화보다도 많은 정보를 담고있는, 의미가 포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정보을 담지 못한 것은 열등한 것, 왜냐하면 정보가 곧 미이기 때문이다. 로뜨만에게 시적 텍스트란 ‘체계들의 체계’이자 관계들의 관계이다. 시적 텍스트는 여러개의 체계들을 함께 압축하고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담론형식이다. 하지만 그는 시나 문학이 내재적인 언어적 특질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텍스트는 그 텍스트가 관계맺고 있는 더 폭넓은 의미체계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규정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의 기대범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좀도 그는 인정했다. 결국 기호학은 구조언어학에 의해 변형된 문학비평이고 대부분의 전통비평보다 형식과 언어의 풍부함에 대해 더 민감한 비평인 것이다.
구조주의의 영향을 통해 설화학narratology의 탄생--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의 신화연구. 그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이질적인 산화들의 배후에는 환원가능한 일정한 보편적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는 이것이 토템신앙의 체계나 가족제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구조주의가 낳은 한 결과는 개별 주체에서 중심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후 설화학에서는 프롭Vladimir Propp의 신화분석과 그레마스Greimas의 actant 개념과 사각모형도, 제라드 쥬네Gerard Genette의 분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행해진다.
구조주의의 영향--문학에 대한 탈신비화. 문학작품은 다른 언어적 산물들과 마찬가지의 언어적 구조물에 불가하며 그 구조는 다른 과학적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분류, 분석가능하다고 인식. 의미는 사적 경험도 아니고 신의 암시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유된 의미작용체계의 산물일 뿐이다. 개인에 선행하는 언어는 개인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언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확산. 결국 내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함수이며 언어에는 불변의 것이란 없으며 이제 더이상 현실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 언어가 반영할 뿐인 사물들의 고정된 질서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실은 언어에 의해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구조주의는 개인을 무시하고 문학의 신비에 임상학적 접근을 행하고 또 상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존문학계의 분노를 샀다. 구조주의는 현실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서로 불연속적이라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믿음에 대한 현대의 상속자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무자비할 정도로 비역사적이다.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괄호 안에 묶는다.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더 잘 조명하기 위하여 물질세계를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전통비평은 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이상은 아니라고 본 반면, 구조주의는 작품을 보편적 정신을 향하여 난 창문으로 만들었다. 텍스트 자체의 물질성, 그 세부적인 언어 과정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의 모든 표면 양상들은 본질, 즉 작품의 모든 면을 채우고 있는 하나의 중심 의미로 환원가능하며 이 본질도 작가의 정신이나 성령이 아니고 심층구조라는 것이다. 결국 전통비평이 정신적인 엘리트집단을 이루었다면 구조주의자들은 평범한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비적 지식으로 무장된 과학적 엘리트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현실 대상을 괄호 묶는 순간 구조주의는 인간 주체마저도 괄호쳐버린 것이다. 구조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운동이다. 작품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도 개별주체의 표현도 아니다. 이 양자는 모두 배제되며 남는 것은 규칙들의 체계뿐이다. 이제 새로운 주체는 체계 자체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개인의 모든 속성인 자율성, 자기교정능력,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를 반휴머니스트라하는 것의 의미는 구조주의작들이 어린아이들의 사탕을 빼앗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개인의 경험 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신화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구조주의의 난점들--소쉬르는 빠롤을 사회적 가치와 의도의 영역 안에서 서로 다른 화자와 청자들을 묶어주는 필연적으로 사회적이고 대화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야말로 개별적인 것으로 보았다. 소쉬르는 언어에서 사회성이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 즉 구체적인 사회적 개인이 실제 말하고 쓰고 듣고 읽는 언어적 생산이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성을 박탈하고 있다. 또한 소쉬르의 언어관은 고전 부르주아 모델과 마찬가지로 개별화자와 언어체계 전체 사이에 아무런 중간항이나 매개항을 상정하지 않고 있다. 한 인간의 복합성, 중층결정성도 간과한다. 에밀 방브니스트가 언급하듯이 구조주의로부터의 전환은 부분적으로 언어에서 담론discourse으로의 변환이다. 주체없는 기호들의 사슬인 언어는 객관적으로 바라본 말이나 글이다. 담론은 발화로서 파악된 언어를 뜻하며 말하고 쓰는 주체를 포함하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독자난 청자를 포괄하는 것이다.
소쉬르 언어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평가들 중 하나인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랑그에서 빠롤로 관심의 전환. 그는 언어는 본래 대화적인dialogic 것으로 간주.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조건 속에서 변화, 수정하는 능동적인 언어구성요소로 파악되는 언어. 바흐찐에게 기호는 주어진 구조 속의 중립적 요소가 아니라 투쟁과 모순의 중심점. 언어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이자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매체이다. 왜냐하면 기호없이는 아무런 가치나 사유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의 상대적 자율성, 언어가 사회적 이해관계의 반영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존중하지만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언어란 없으며 이 사회관계는 다시 더 큰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체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단어들은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것이다. 단어들은 항상 특정한 인간 주체가 다른 인간 주체에게 하는 말이며, 이 실제적 맥락이 그 의미를 만들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흐찐의 언어이론은 유물론적 언어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인간의식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능동적, 물질적, 기호적 상호교류 하는 과정이지 이 관계들로부터 절연된 내적 영역만은 아닌 것이다. 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는 표현도 반영도 추상적 체계도 아니고 사회적 갈등과 대화를 통해서 기호라는 물질적 존재가 의미로 변화되는 물질적 생산수단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저한 반구조주의적 시각 -->오스틴J. L. Austen의 언어행위이론--모든 언어는 수행적performative 언어이다.
구조주의는 휴머니즘의 오류를 모면하기는 했어도 그 결과 인간 주체를 완전히 사상하는 덫에 결려들고 말았다. 구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독자는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약호들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독자는 국적, 계급, 성, 인종적 특성 등 모든 문화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 존재, 비범한 독자(super-reader)인 것이다. 구조주의는 종교를 대체하려는 문학이론이 그 자리에 과학을 옮겨놓은 것이다. 하지만 가장 엄격하게 객관적인 분석에서도 해석의 요소 주관성의 요소를 뿌리뽑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구조주의에서 상정하는 이상적인 독자란 정채적인 개념이다. 그 개념은 능력에 대한 모든 판단이 문화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모든 독서는 어떤 능력이 부적정한 것인가를 가려내는 문학외적인 전제들이 작용을 포함한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to be continued.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④, 2000/8/19/
[제 4장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1. 데리다Jacques Derrida‘s 해체주의(Deconstruction)
--씨니피앙과 대상의 분리(구조주의)에서 씨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탈구조주의)로 : 의미는 기호안에 직접 존재하지 않는다. 한 기호의 의미는 그 기호가 아닌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기호의 의미는 어느 면에서 보자면 항상 그 기호에 부재한다. 언어의 시간적 과정이라는 특성때문에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순수하거나 완전히 의미있는 기호란 없다. 그렇다면 의미는 자기자신과 전혀 동일하지 않는 것이다. 의미는 분절의 과정의 결과이며 가른 기호들과 구별되는 한에서 자기자신일 수 있는 기호들의 소산이다.
--사용되는 문맥이 항상 다르기 때문에 기호는 절대적으로 동일할 수 없고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상호변화하고 순환하며 어떤 요소도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없고 모든 것이 다른 요소들과 뒤얽히면서 동시에 흔적도 남겨지는 끝없이 뻗어가는 거미줄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이제 기호안에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드러나지 못한다.
--음성중심적/말씀-이성(logos)중심적 서양철학(선존재하는 궁극적 본질/존재/진리/말씀에 대한 믿음)에 대한 회의.
--데리다는 의미의 전위계질서를 건설할 수 있는 약속의 기초, 제1원리나 반박할 수 없는 토대에 의존하는 모든 사상체계를 ‘형이상학적’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항대립관계에 의존하는 제1원리는 언제나 해체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구조주의가 텍스트를 대입쌍으로 나누고 그들의 작용논리를 보여주는 데 만족했다면, 해체주의는 그 대립관계들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전도시키거나 무너뜨리며 다양한 디테일들을 텍스트에서 추방하려고 하는 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해체주의 비평의 전술은 어떻게 텍스트가 자신의 지배적인 논리체계를 혼란시키게 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텍스트구조의 범주나 전통적인 비평적 접근의 범주들 안에 손쉽게 포괄될 수 없는 의미의 부단한명멸, 누출, 확산이 존재하는데, 데리다는 이를 방산(산포/dissemination)이라 한다. 데리다에게 모든 언어는 정확한 의미를 초과하는 잉여의미를 드러내며 항상 그 잉여의미를 가두려는 의미를 넘어서거나 벗어나려한다.
--해체주의는 문학적/비문학적이라는 대립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글(Writing)이라는 개념의 출현은 구조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구조는 언제나 하나의 중심, 고정된 원리, 위미의 위계질서와 확고한 토대를 가정하는데 글의 끝없는 구별(differing), 늦춤(deferring)이 의문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이런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탈구조주의의 사유방식은 푸코(Michel Foucault), 라깡(Jacques Lacan),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등의 작업으로 대표된다.
2. 바르트Roland Barthes :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
--언어, 특히 기호가 항상 역사적인고 문화적인 관습의 문제라는 소쉬르의 통찰이 바르트의 일간된 주제. 그는 건강한 기호는 항상 자신의 자의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기호, 자신을 ‘자연적인 것’으로 속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기호이다(중심/권위의 배제).
--그는 문학에서 그와 같은 자연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사실주의 이데올로기하고 보았다. 사실주의문학은 언어의 본성이 사회적으로 상대적이고 만들어진 것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재현, 표현, 반영의 이데올로기에서 단어는 사상이나 대상과 본질적으로 올바르고 논박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간주된다. 단어는 대상을 관찰하거나 사고를 표현하는 유일의 적절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어, 곧 언어가 전달하는 것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본질적 삶의 재현 이데올로기’). 이와 같은 재현으로서의 기호관은 기호의 생산적 성격을 부인한다. 우리가 세계의 의미를 표시할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세계를 소유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그 안에 사는 가변적인 의미작용의 구조들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S/Z』: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의 분기점. readerly/writerly texts. Writerly text: 생산자로서의 독자. 주로 모더니즘 텍스트들. 문학은 비평의 탐구대상이라기보다는 비평이 활동할 자유로운 공간. 문학적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학은 이제 간텍스트적이다. “작가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일정한 의미들이 존재하는 완결된 실재--> 하나의 중심, 본질이나 의미로 결코 고정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다원적인 씨니피앙들의 활동으로서의 텍스트. 텍스트란 구조라기보다는 끝없는 구조와의 과정이라고 보고 이 구조화를 행하는 것이 비평이라고 간주.
--탈구조주의에서 비평과 창조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없다. 그 둘은 모두 글 자체로 수렴될 뿐이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지식인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대신에 언어 자체를 사회문제의 대안으로 상정하면서 등장(역사에서 언어로의 도피). 고전적인 문학시대에서처럼 특정한 주제에 대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글쓰기가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고 정열인 글쓰기로서의 ‘자동사적 글쓰기’. 바르트 또한 모든 이론, 이데올로기, 한정된 의미, 사회참여를 본래부터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글쓰기가 그들 모두에 대한 대안이 된다. 후기 바르트에게 독서는 인식이 아니라 관능적인 유희가 되었다.
--편재하는 권력은 문학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중심이 없다. 그러므로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어 보였다. 역설적으로 어디에서건 사회적, 정치적 삶에 대한 개입이 가능해 지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글턴이 제기하는 것처럼 제3세계의 주체들에게도 그러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따로 마련해야할 듯).
--탈구조주의는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들은 완전히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해체하고자 했던 것은 진리, 현실, 의미, 지식 등의 고전적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주된 관심.
--미국의 해체주의 : Paul de Man, J. Hillis Miller, Geoffrey Hartman, Harold Bloom 등. 특히 드망은 문학언어가 부단히 자신의 의미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밝히고자 노력. 그가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은유적인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정말로 글자 그대로라고 믿을 수는 없다.
--예일학파의 비평가들에게 문학비평은 의미의 환상성, 진리의 불가능함, 모든 담화의 기만적인 간계를 밝히는, 텍스트의 내적공간으로의 불안한 모험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이것은 신비평의 형식주의의 강화된 재등장에 불과한 면도 있다. 신비평에서 시는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시 외부의 현실에 관한 담론인데 바햐, 해체주의자들에게 문학은 언어가 마치 술집에서의 귀찮은 주정꾼처럼 자신의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대상에 대한 지시행위의 몰락이며 의사소통의 공동묘지이다. 신비평은 문학텍스트를 점점 더 이데올로기적이 되어가는 세계안에서 교조적인 믿음을 다행스럽게도 유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해체주의는 사회현실을 억압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미정성의 거미줄로 보았다. 문학은 이제 물질적 역사에 대한 은둔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역사를 식민지화 하고, 기근, 혁명 등 모든 것을 미정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역사를 자신의 모습에 맞추어 재기술한다.
--과거의 문학이론들에 있어서 파악하기 힘들고 덧없으며 애매모호한 것은 경험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언어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놀랍게도 담론으로서의 언어를 문제삼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실천 속에 언어가 불가피하게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의미는 존재하고 진리, 현실, 확실성 같은 문제들이 회복가능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영미의 해체주의는 이런 현실의 갈등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폐쇄된 비평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해체주의는 권력게임이며 정통적인 학술경쟁의 전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해체주의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실천이다. 즉, 어떤 특정한 사유체계와 정치구조 및 사회제도의 전체계가 힘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논리를 밝히고 해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의 확정적인 진리, 의미, 동일성, 역사적 연속성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다 넓고 깊은 역사, 즉 언어, 무의식, 사회제도와 실천의 결과로 보고자 한다.
--담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한다거나 모든 의미와 동일성이 사라지는 차이와 구별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에 대한 세평은 부당한 면이 있다. 탈구조주의가 단순히 무정부주의나 쾌락주의라고만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제 3장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기호학Semiotics]
1. Northrop Frye의 Anatomy of Criticism
노스롭 프라이의 인식--문학에 작용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법칙들의 존재와 그 법칙들의 공식화. 이야기범주들-->희극적(봄), 낭만적(여름), 비극적(가을), 반어적(겨울). 문학 양식의 구분-->신화(주인공의 유적 우월), 로망스(급의 우월), 비극과 서사시(상위higher 모방 양식상에서 급에서는 우월하지만 환경보다 우월하지는 않음), 희극과 사실주의(하위모방, 풍자와 반어에서 열등). 가치판단의 배제, 문학사 이외의 역사 추방을 주장하는 프라이 이론의 강점은 신비평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텍스트들의 폐쇄된 생태학적 순환으로 봄으로써 문학을 역사에 종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신비평과는 달리 자체의 구조들을 모두 지닌 대체 역사를 문학에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초역사적인 문학의 양식과 신화들의 체계는 그 자체로 폐쇄적이다--> 신비평보다 더한 형식주의.
프라이는 문학이 외부로부터는 완전히 절연된 자율적인 언어구조이자 삶과 현실을 언어적 관계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는 내면을 향한 밀봉된 영역이라고 본다. 프라이에 따르면 문학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온 일종의 집단적인 유토피아 꿈꾸기이자 근원적인 인간 욕망들에 대한 표현이다. 따라서 문학을 개별적인 작가들의 자기 표현이 아니다. 작가들은 단지 문학이라는 보편적인 체계의 기능들에 불과하다. 프라이가 유토피아적 근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역사 자체에 대한 혐오때문이다. 문학에서만이 우리는 지시적 언어의 천박한 피상성을 떨치고 영혼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다. 프라이에게 실제 역사는 굴레요 결정론이며 문학은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처럼 보인다.
프라이의 인식이 지닌 강점은 극단적인 미학주의를 효율적으로 분류하는 과학성에 교묘하게 결합시켰고 문학을 현대사회에 대한 가상의 대안으로 하는 반면에 바로 그 현대사회의 용어로 문학비평의 신분을 고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학을 종교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자유롭고 계급없는 문명사회를 희망하는 프라이는 아놀드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전통 안에 있다. 프라이의 저작은 일정부분 구조주의적이다.
2. 구조주의Structuralism
구조주의의 방법적 원칙들--“모든 것을 언어학의 용어로 다시 한번 생각하려는 시도”(프레드릭 제임슨). 구조주의는 구조들, 특히 그것들의 활동이 보여주는 일반법칙들을 탐구하며, 어떤 체계의 개별 단위들이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을 지닌다(120쪽의 예). 러시아 형식주의처럼 이야기의 실제 내용은 괄호로 묶고 전적으로 형식에만 집중. 구조주의 방법을 더 살펴보면, 첫째, 이야기의 문학적 위대성 여부는 구조주의에 문제 되지 않는다--> 대상의 문화적 가치에 무관심 124-5쪽 참고)시적기능은 선택의 축으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시킨다.(The poectic function projects the principle of equivalence from the axis of selection to the axis of combination.) 야콥슨을 중심으로 한 프라하 언어학파는 시작품들은 그 안에서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들이 일련의 복합적 관계에 의해 통제되는 기능적 구조로 파악. 그러므로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지 외부현실의 반영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라는 형식주의자들의 개념에 의해서 문학작품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라하 학파의 활동을 통해 구조주의라는 용어는 기호학이라는 용어와 대체로 동일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연구방법으로서의 구조주의와 특정한 연구분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기호학.
퍼스C. S. Peirce의 기호 분류--1) 상형적(the iconic) 기호-> 그 지시대상과 유사성을 지닌 기호(예. 인물사진). 2) 연상적(the indexical) 기호-> 그 대상을 연상시키는 기호(연기와 불, 발자국과 동물). 3) 상징적(the synbolic) 기호-> 지시대상과 자의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연결된 기호.
유리 로뜨만Yury Lotman--시적 텍스트란 의미가 문맥에 따라서만 성립하며 유사성과 대립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양한 체계로 상정. 텍스트 내의 차이와 유사성은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인식 가능. 시적 텍스트는 다른 어떤 담화보다도 많은 정보를 담고있는, 의미가 포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정보을 담지 못한 것은 열등한 것, 왜냐하면 정보가 곧 미이기 때문이다. 로뜨만에게 시적 텍스트란 ‘체계들의 체계’이자 관계들의 관계이다. 시적 텍스트는 여러개의 체계들을 함께 압축하고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담론형식이다. 하지만 그는 시나 문학이 내재적인 언어적 특질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텍스트는 그 텍스트가 관계맺고 있는 더 폭넓은 의미체계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규정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의 기대범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좀도 그는 인정했다. 결국 기호학은 구조언어학에 의해 변형된 문학비평이고 대부분의 전통비평보다 형식과 언어의 풍부함에 대해 더 민감한 비평인 것이다.
구조주의의 영향을 통해 설화학narratology의 탄생--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의 신화연구. 그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이질적인 산화들의 배후에는 환원가능한 일정한 보편적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는 이것이 토템신앙의 체계나 가족제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가능하다고 보았다.이와 같은 과정에서 구조주의가 낳은 한 결과는 개별 주체에서 중심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후 설화학에서는 프롭Vladimir Propp의 신화분석과 그레마스Greimas의 actant 개념과 사각모형도, 제라드 쥬네Gerard Genette의 분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행해진다.
구조주의의 영향--문학에 대한 탈신비화. 문학작품은 다른 언어적 산물들과 마찬가지의 언어적 구조물에 불가하며 그 구조는 다른 과학적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분류, 분석가능하다고 인식. 의미는 사적 경험도 아니고 신의 암시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유된 의미작용체계의 산물일 뿐이다. 개인에 선행하는 언어는 개인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언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확산. 결국 내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함수이며 언어에는 불변의 것이란 없으며 이제 더이상 현실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 언어가 반영할 뿐인 사물들의 고정된 질서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실은 언어에 의해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구조주의는 개인을 무시하고 문학의 신비에 임상학적 접근을 행하고 또 상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존문학계의 분노를 샀다. 구조주의는 현실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서로 불연속적이라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믿음에 대한 현대의 상속자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무자비할 정도로 비역사적이다.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괄호 안에 묶는다.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더 잘 조명하기 위하여 물질세계를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전통비평은 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이상은 아니라고 본 반면, 구조주의는 작품을 보편적 정신을 향하여 난 창문으로 만들었다. 텍스트 자체의 물질성, 그 세부적인 언어 과정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의 모든 표면 양상들은 본질, 즉 작품의 모든 면을 채우고 있는 하나의 중심 의미로 환원가능하며 이 본질도 작가의 정신이나 성령이 아니고 심층구조라는 것이다. 결국 전통비평이 정신적인 엘리트집단을 이루었다면 구조주의자들은 평범한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비적 지식으로 무장된 과학적 엘리트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현실 대상을 괄호 묶는 순간 구조주의는 인간 주체마저도 괄호쳐버린 것이다. 구조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운동이다. 작품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도 개별주체의 표현도 아니다. 이 양자는 모두 배제되며 남는 것은 규칙들의 체계뿐이다. 이제 새로운 주체는 체계 자체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개인의 모든 속성인 자율성, 자기교정능력,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를 반휴머니스트라하는 것의 의미는 구조주의작들이 어린아이들의 사탕을 빼앗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개인의 경험 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신화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구조주의의 난점들--소쉬르는 빠롤을 사회적 가치와 의도의 영역 안에서 서로 다른 화자와 청자들을 묶어주는 필연적으로 사회적이고 대화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야말로 개별적인 것으로 보았다. 소쉬르는 언어에서 사회성이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 즉 구체적인 사회적 개인이 실제 말하고 쓰고 듣고 읽는 언어적 생산이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성을 박탈하고 있다. 또한 소쉬르의 언어관은 고전 부르주아 모델과 마찬가지로 개별화자와 언어체계 전체 사이에 아무런 중간항이나 매개항을 상정하지 않고 있다. 한 인간의 복합성, 중층결정성도 간과한다. 에밀 방브니스트가 언급하듯이 구조주의로부터의 전환은 부분적으로 언어에서 담론discourse으로의 변환이다. 주체없는 기호들의 사슬인 언어는 객관적으로 바라본 말이나 글이다. 담론은 발화로서 파악된 언어를 뜻하며 말하고 쓰는 주체를 포함하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독자난 청자를 포괄하는 것이다.
소쉬르 언어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평가들 중 하나인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랑그에서 빠롤로 관심의 전환. 그는 언어는 본래 대화적인dialogic 것으로 간주.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조건 속에서 변화, 수정하는 능동적인 언어구성요소로 파악되는 언어. 바흐찐에게 기호는 주어진 구조 속의 중립적 요소가 아니라 투쟁과 모순의 중심점. 언어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이자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매체이다. 왜냐하면 기호없이는 아무런 가치나 사유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의 상대적 자율성, 언어가 사회적 이해관계의 반영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존중하지만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언어란 없으며 이 사회관계는 다시 더 큰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체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단어들은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것이다. 단어들은 항상 특정한 인간 주체가 다른 인간 주체에게 하는 말이며, 이 실제적 맥락이 그 의미를 만들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흐찐의 언어이론은 유물론적 언어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인간의식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능동적, 물질적, 기호적 상호교류 하는 과정이지 이 관계들로부터 절연된 내적 영역만은 아닌 것이다. 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는 표현도 반영도 추상적 체계도 아니고 사회적 갈등과 대화를 통해서 기호라는 물질적 존재가 의미로 변화되는 물질적 생산수단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저한 반구조주의적 시각 -->오스틴J. L. Austen의 언어행위이론--모든 언어는 수행적performative 언어이다.
구조주의는 휴머니즘의 오류를 모면하기는 했어도 그 결과 인간 주체를 완전히 사상하는 덫에 결려들고 말았다. 구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독자는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약호들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독자는 국적, 계급, 성, 인종적 특성 등 모든 문화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 존재, 비범한 독자(super-reader)인 것이다. 구조주의는 종교를 대체하려는 문학이론이 그 자리에 과학을 옮겨놓은 것이다. 하지만 가장 엄격하게 객관적인 분석에서도 해석의 요소 주관성의 요소를 뿌리뽑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구조주의에서 상정하는 이상적인 독자란 정채적인 개념이다. 그 개념은 능력에 대한 모든 판단이 문화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모든 독서는 어떤 능력이 부적정한 것인가를 가려내는 문학외적인 전제들이 작용을 포함한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to be continued.
[제 4장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1. 데리다Jacques Derrida‘s 해체주의(Deconstruction)
--씨니피앙과 대상의 분리(구조주의)에서 씨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탈구조주의)로 : 의미는 기호안에 직접 존재하지 않는다. 한 기호의 의미는 그 기호가 아닌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기호의 의미는 어느 면에서 보자면 항상 그 기호에 부재한다. 언어의 시간적 과정이라는 특성때문에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순수하거나 완전히 의미있는 기호란 없다. 그렇다면 의미는 자기자신과 전혀 동일하지 않는 것이다. 의미는 분절의 과정의 결과이며 가른 기호들과 구별되는 한에서 자기자신일 수 있는 기호들의 소산이다.
--사용되는 문맥이 항상 다르기 때문에 기호는 절대적으로 동일할 수 없고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상호변화하고 순환하며 어떤 요소도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없고 모든 것이 다른 요소들과 뒤얽히면서 동시에 흔적도 남겨지는 끝없이 뻗어가는 거미줄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이제 기호안에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드러나지 못한다.
--음성중심적/말씀-이성(logos)중심적 서양철학(선존재하는 궁극적 본질/존재/진리/말씀에 대한 믿음)에 대한 회의.
--데리다는 의미의 전위계질서를 건설할 수 있는 약속의 기초, 제1원리나 반박할 수 없는 토대에 의존하는 모든 사상체계를 ‘형이상학적’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항대립관계에 의존하는 제1원리는 언제나 해체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구조주의가 텍스트를 대입쌍으로 나누고 그들의 작용논리를 보여주는 데 만족했다면, 해체주의는 그 대립관계들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전도시키거나 무너뜨리며 다양한 디테일들을 텍스트에서 추방하려고 하는 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해체주의 비평의 전술은 어떻게 텍스트가 자신의 지배적인 논리체계를 혼란시키게 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텍스트구조의 범주나 전통적인 비평적 접근의 범주들 안에 손쉽게 포괄될 수 없는 의미의 부단한명멸, 누출, 확산이 존재하는데, 데리다는 이를 방산(산포/dissemination)이라 한다. 데리다에게 모든 언어는 정확한 의미를 초과하는 잉여의미를 드러내며 항상 그 잉여의미를 가두려는 의미를 넘어서거나 벗어나려한다.
--해체주의는 문학적/비문학적이라는 대립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글(Writing)이라는 개념의 출현은 구조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구조는 언제나 하나의 중심, 고정된 원리, 위미의 위계질서와 확고한 토대를 가정하는데 글의 끝없는 구별(differing), 늦춤(deferring)이 의문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이런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탈구조주의의 사유방식은 푸코(Michel Foucault), 라깡(Jacques Lacan),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등의 작업으로 대표된다.
2. 바르트Roland Barthes :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
--언어, 특히 기호가 항상 역사적인고 문화적인 관습의 문제라는 소쉬르의 통찰이 바르트의 일간된 주제. 그는 건강한 기호는 항상 자신의 자의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기호, 자신을 ‘자연적인 것’으로 속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기호이다(중심/권위의 배제).
--그는 문학에서 그와 같은 자연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사실주의 이데올로기하고 보았다. 사실주의문학은 언어의 본성이 사회적으로 상대적이고 만들어진 것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재현, 표현, 반영의 이데올로기에서 단어는 사상이나 대상과 본질적으로 올바르고 논박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간주된다. 단어는 대상을 관찰하거나 사고를 표현하는 유일의 적절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어, 곧 언어가 전달하는 것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본질적 삶의 재현 이데올로기’). 이와 같은 재현으로서의 기호관은 기호의 생산적 성격을 부인한다. 우리가 세계의 의미를 표시할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세계를 소유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그 안에 사는 가변적인 의미작용의 구조들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S/Z』: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의 분기점. readerly/writerly texts. Writerly text: 생산자로서의 독자. 주로 모더니즘 텍스트들. 문학은 비평의 탐구대상이라기보다는 비평이 활동할 자유로운 공간. 문학적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학은 이제 간텍스트적이다. “작가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일정한 의미들이 존재하는 완결된 실재--> 하나의 중심, 본질이나 의미로 결코 고정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다원적인 씨니피앙들의 활동으로서의 텍스트. 텍스트란 구조라기보다는 끝없는 구조와의 과정이라고 보고 이 구조화를 행하는 것이 비평이라고 간주.
--탈구조주의에서 비평과 창조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없다. 그 둘은 모두 글 자체로 수렴될 뿐이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지식인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대신에 언어 자체를 사회문제의 대안으로 상정하면서 등장(역사에서 언어로의 도피). 고전적인 문학시대에서처럼 특정한 주제에 대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글쓰기가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고 정열인 글쓰기로서의 ‘자동사적 글쓰기’. 바르트 또한 모든 이론, 이데올로기, 한정된 의미, 사회참여를 본래부터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글쓰기가 그들 모두에 대한 대안이 된다. 후기 바르트에게 독서는 인식이 아니라 관능적인 유희가 되었다.
--편재하는 권력은 문학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중심이 없다. 그러므로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어 보였다. 역설적으로 어디에서건 사회적, 정치적 삶에 대한 개입이 가능해 지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글턴이 제기하는 것처럼 제3세계의 주체들에게도 그러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따로 마련해야할 듯).
--탈구조주의는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들은 완전히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해체하고자 했던 것은 진리, 현실, 의미, 지식 등의 고전적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주된 관심.
--미국의 해체주의 : Paul de Man, J. Hillis Miller, Geoffrey Hartman, Harold Bloom 등. 특히 드망은 문학언어가 부단히 자신의 의미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밝히고자 노력. 그가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은유적인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정말로 글자 그대로라고 믿을 수는 없다.
--예일학파의 비평가들에게 문학비평은 의미의 환상성, 진리의 불가능함, 모든 담화의 기만적인 간계를 밝히는, 텍스트의 내적공간으로의 불안한 모험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이것은 신비평의 형식주의의 강화된 재등장에 불과한 면도 있다. 신비평에서 시는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시 외부의 현실에 관한 담론인데 바햐, 해체주의자들에게 문학은 언어가 마치 술집에서의 귀찮은 주정꾼처럼 자신의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대상에 대한 지시행위의 몰락이며 의사소통의 공동묘지이다. 신비평은 문학텍스트를 점점 더 이데올로기적이 되어가는 세계안에서 교조적인 믿음을 다행스럽게도 유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해체주의는 사회현실을 억압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미정성의 거미줄로 보았다. 문학은 이제 물질적 역사에 대한 은둔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역사를 식민지화 하고, 기근, 혁명 등 모든 것을 미정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역사를 자신의 모습에 맞추어 재기술한다.
--과거의 문학이론들에 있어서 파악하기 힘들고 덧없으며 애매모호한 것은 경험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언어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놀랍게도 담론으로서의 언어를 문제삼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실천 속에 언어가 불가피하게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의미는 존재하고 진리, 현실, 확실성 같은 문제들이 회복가능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영미의 해체주의는 이런 현실의 갈등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폐쇄된 비평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해체주의는 권력게임이며 정통적인 학술경쟁의 전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해체주의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실천이다. 즉, 어떤 특정한 사유체계와 정치구조 및 사회제도의 전체계가 힘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논리를 밝히고 해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의 확정적인 진리, 의미, 동일성, 역사적 연속성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다 넓고 깊은 역사, 즉 언어, 무의식, 사회제도와 실천의 결과로 보고자 한다.
--담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한다거나 모든 의미와 동일성이 사라지는 차이와 구별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에 대한 세평은 부당한 면이 있다. 탈구조주의가 단순히 무정부주의나 쾌락주의라고만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제 5장 정신분석학Post-structuralism]
1. 데리다Jacques Derrida‘s 해체주의(Deconstruction)
--“인간사회의 궁극적 동기는 경제적인 것이다.”(프로이트). 프로이트에게 노동의 필요성은 곧 사람들이 쾌락과 만족을 얻으려는 경향을 어떤 경우 억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원리(reality principle)를 통한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의 억압. 그러나 욕망충족의 보류는 신경증을 유발할 수도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신경증을 앓는 동물(neurotic animal). 충족불가능한 욕망을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욕망을 ‘승화시키는’ 것. 프로이트에게 승화는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좀 더 가치있는 사회적 목적으로 전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문명은 승화의 결과물이다. 노동의 필요성과 그 결과에 대한 고찰--마르크스,심리적 생활에 대해 노동이 함축하는 의미 고찰--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저작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만든 요소들을 억압함으로써만 현재의 자신이 된다는 모순 혹은 역설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은 모두 ‘너무 일찍’ 태어난다, 부모의 보호가 없다면 인간의 생존은 불가능할 것(-->부모의 생물학적 차원의 보호 필요). 하지만 인간은 이 과정에서 생물학적 차원의 필수적 행동들이 쾌락을 유발한다는 사실도 동시에 알게 된다. 모유 수유하는 아이의 입이 성감대로 발전. 생물학적 본능으로서의 성욕이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구순기(oral stage, 대상 흡수)-->항문기(anal stage, 능동성과 수동성의 대조, 가학적)-->남근기(phalic stage, 생식기에 집중된 리비도). 이 과정에서 리비도적 욕구의 점진적 조직화가 발생. 유년기의 아이는 리비도적 에너지가 복잡하게 변하는 하나의 장. 자기성애(auto-eroticism). 아이는 자기의 신체에서 성적 기쁨을 얻지만 자기 몸을 완전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자기애(narcissism--자신의 몸, 자아 전체가 리비도의 대상이 되거나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이렇게 무정부적이고 가학적이며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게 쾌락을 추구하는 아이는 쾌락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이 과정을 넘어 아이가 사회에 존속하기 위해 거치게 되는 필연적 과정이 외디푸스 콤플렉스. 아버지의 등장, 거세 위협, 현실원리에 적응, 아버지를 통한 무의식적 보상심리의 작동(아버지는 미래의 내 모습이다!). 결국 남자아이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상징적인 남성의 역할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함으로써 그는 성의 분화를 달성한 주체가 되지만 이 과정에서 억압된 그의 욕망은 무의식의 영역에 갇히게 된다.
--여자아이는 거세당했기 때문에 열등하다는 환멸 속에서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유혹하는 계획하지만 이 기획은 성공할 수 없고 결국 마지못해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여성을 성적 역할을 떠맡는다. 그리고는 선망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남근을 아기로 무의식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우리를 현재의 남녀로 구성하는 것이며,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가족에서 사회로,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도록 하는 기제가 된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친 주체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찢긴 분열된 주체이며 무의식은 언제나 돌아와 의식을 괴롭힐 수 있게 된다. 꿈, 과실(parapraxes), 말실수, 잘못된 기억, 서투른 실수, 오독, 농담, 물건 둔 장소의 망각 등을 통해. 욕망은 무의식으로부터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 하며 자아는 욕망을 방어하려고 한다. 이런 내적 갈등의 결과가 바로 신경증이며, 이 신경증의 핵심이 바로 외디푸스 콤플렉스이다. 무의식의 부분적 통제 불가능--> 신경증,정신병, 무의식의 완전한 포로-->정신병. 팔이 마비되는 신경증 환자, 자신의 팔이 코끼리의 팔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정신병 환자. 정신분석학은 이 같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이론이자 치료를 위한 실천.
--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의 평가는 보수적이고 비관적. 그는 인간이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그 욕구를 좌절시킬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에 지배를 받는다고 보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인류가 자아가 스스로에게 펼치는 원초적인 자기학대, 즉 죽음에의 욕구에 사로잡힌 채 시들어가는 것으로 파악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 즉 자아가 손상받을 수 없는 생명 이전의 축복스런 상태로의 회귀라는 것이다. 생의 본능(Eros)이나 성적 에너지는 역사를 이루어온 힘이지만 죽음의 본능(Thanatos)이나 죽음에의 욕구와 비극적인 모순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관점이 대부분 인습적이고 권위적이라해도 프로이트는 사유재산제도와 국가를 철폐하거나 적어도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현대사회가 억압성에 있어서 폭군과 같이 되어버렸다고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사회의 많은 성원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서 그들을 반란으로 이끄는 문명은 지속해서 존재할 가망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는 사실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고 프로이트는 단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19세기적 낡은 과학관념이나 남녀차별주의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의학적 실천으로서 정신분석학이 개인을 멋대로 규정하고 그들을 정상성이라는 임의적 정의에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억압적 사회통제의 한 형태라는 점이다. 하지만 정상성에 관한한 정신병 치료 전반에는 적용될 수 있겠으나 프로이트를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는 성적 도착이나 이성애도 실은 자연적이거나 자명한 사실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성으로 환원해버렸다’라는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도 정당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성적인 욕구와 자기보존이라는 자아의 본능과 같은 성적이 아닌 힘이 항상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사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도 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을 발달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계 속에서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그는 인간의 주체적 형성에 관한 유물론적 이론을 마련해 준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이론은 비사회적 모델이 아니다.
--여성해방론자들에게 유용한 프로이트 이론가는 자크 라깡(Jacques Lacan)이다. 그는 주체라는 문제, 사회 속에서 인간의 위치, 인간과 언어 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프로이트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전 유아기를 라깡은 ‘상상적 단계’(imaginary stage)라 불렀다. 자아의 중심이 없는 단계,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때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소원한’ 이미지이자 ‘틀린’ 자아이다. 라깡은 이 거울단계를 통해 우리가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처음부터 스스로를 오인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성장하면서 아이는 대상과의 상상적 동일시를 계속하고 이 방법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결국 라깡에 따르면 자아(ego)란 우리가 동일시 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서 단일한 자아(selfhood)라는 허상을 지탱하는 자기애적 과정에 다름아니다.
--상상적 단계에는 아이와 타인이라는 두 항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이때 타인은 보통 어머니이며,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외부 현실을 대표한다. 이 과정을 지나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아이는 ‘상징적 단계’(Symbolic stage)로 나아가게 된다. 라깡의 독창성은 이러한 과정을 언어라는 관점에서 재고찰했다는 점에 있다.상상적 단계에서 거울을 보는 아이(씨니피앙)는 자신과 거울 속의 이미지(씨니피에)와의 일체감을 느낀다. 즉, 상상적 단계에서는 씨니피앙과 씨니피에 사이,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생기지 않은 것이다. 반면,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아이는 탈구조주의의 불안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남근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 아이에게 성적인 차이 배제(아이는 부모의 연인이 될 수 없다), 부재(아이는 과거에 어머니의 신체와 맺고 있던 유대를 포기해야 한다)에 의해 규정된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상징적 질서로의 전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라깡이 욕망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한 씨니피앙에서 다른 씨니피앙으로의 잠재적으로 무한한 운동이다. 모든 욕망은 결핍에서 생겨나는데 욕망은 결핍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언어는 이러한 결핍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여기서 결핍이란 기호가 지시하는 실제 대상의 부재, 단어가 다른 대상들의 부재나 배제에 의해서만 의미를 띠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국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욕망의 포로가 된다는 의미인데, 라깡은 ‘존재를 비게 하여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 언어라고 언급한다. 이처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항상 의미작용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즉 상징적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과 분리되는 것을 뜻하는데 라깡은 이 영역을 ‘실재계’(the real)라 부른다. 특히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분리되어 있다. 인간이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은 다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소중한 대상을 다시 획득할 수는 없다. 대신에 그 대용물로 충당하고자 하는데 라깡은 이 대용물을 ‘소문자 a’(object little a)라 부른다. 그러나 어떤 대용물도 상상적 단계의 그 (허구적이지만) 완전한 자기정체성과 자기완성을 경험할 수 없다. 무한한 갈망에 종지부를 찍을 초월적 의미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적 실재가 존재한다해도 그것은 라깡이 초월적 씨니피앙이라 부른 남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초월적 실재 또한 대상이나 실재는 아니고 현실적인 남근도 아니다. 다만 차이를 나타내는 공허한 표시, 즉 상상적 단계로부터 사람들을 분리하고 상징적 질서 속의 이미 정해진 장소에 사람들을 밀어넣는 것에 대한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조직되었다고 본 라깡. 무의식에 대해 라깡은 ‘씨니피에가 씨니피앙 밑으로 미끌어져 간 것’으로, 또는 의미가 끊임없이 희미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거의 해독하지 못할 정도일 뿐 아니라 궁극적인 비밀을 결코 해석할 수 없는 이상한 모더니즘 텍스트라고 말한다. 라깡이론에 따르면 모든 담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말실수인 셈이며, 만약 언어사용 과정이 라깡이 말하는 것처럼 불안정하고 모호하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의미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게 된다. 결국 ‘나’라고 말할 대 그 ‘나’는 항상 종잡을 수 없는 주체를 대신하는 것이며, 이 주체는 언어가 이루는 어떠한 그물도 항상 빠져나간다. 이것은 내가 동시에 ‘의미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사항을 문학적 언술행위와 연관지어 보면, 흥미있는 유사점이 있다. 리얼리즘 소설은 언술행위, 무엇이 어떻게 말해지는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해지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무엇이 말해지는가 즉 언술내용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도록 독자를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텍스트가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완전히 은폐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더니즘 텍스트는 ‘언술하는 행위’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실제 내용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 모더니즘 텍스트는 스스로를 자명한 것으로 행사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구성 장치를 드러내려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더니즘 텍스트는 작품이 부분적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을 구성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가 비판적으로 반성해서 이것이 완전히 다르게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고무하고자 한다. 브레히트의 예가 가장 훌륭한 본보기일 것이다.
--주체에 대한 라깡의 영향은 알튀세(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주체를 호명하는 이데올로기.’ 알튀세가 한 일은 라깡의 상상적 단계라는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다시 사고한 것. 거울상과 아이의 관계=개인이 사회와 맺는 관계(상상적 동일시).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이데올로기 투쟁이 일어날 충분한 공간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복종시키는 억압적인 힘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하는 혐의가 있다는 것이 이글턴의 해석. 라깡은 무의식이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며, 정확하게는 ‘사회’에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무의식이 종잡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정확하게는 결코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하고 복잡하게 얽힌 일종의 그물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라깡의 생각이다. 언어, 무의식, 부모,상징적 질서는 정확하게 동의어는 아니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라깡은 이것은 때때로 ‘타자’(the Other)라 불렀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예술에 대한 의견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예술을 신경증에 비교한 것인데, 이는 부당한 견해이다.프로이트가 의도한 바는 신경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예술가도 현실을 버리고 환상을 택하도록 만드는 강렬한 본능적 욕구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환상가와는 달리 예술가는 자신의 백일몽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조작하고 다듬고 순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문학작품을 반영이 아니라 일종의 생산으로 보도록 해주었다. 꿈처럼 작품도 언어나 다른 문학텍스트,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 등의 원자료를 취해서 기법을 통해 이것을 생산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기법이 보통 ‘문학형식’이라 일컬어지는 다양한 장치들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꿈이라는 텍스트에서 ‘징후적인’ 지점들에 주목하는데, 이 징후적인 지점이란 꿈을 형성하고 있는 ‘잠재내용’이나 ‘무의식적 욕구’에 대한 특별히 유용한 접근양식을 마련해줄 수 있는 왜곡,애매성, 부재, 생략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문학비평도 유사한 일을 할 수 있다. 이야기 중에 나타나는 둘러댄 부분, 이중성, 강조점, 중복되거나 빠뜨린 언어 등에 주목함으로써 문학비평은 이차적 수정의 층들을 조사해서 잠재텍스트의 어떤 부분을 밝혀낼 수 있다. 다시 말해 문학비평은 텍스트에 직접 씌어진 내용뿐 아니라 내용이 나타나는 방식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상이한 경향의 미국 비평가 둘, 버크(Kenneth Burke), 해롤드 블룸(Harold Bloom). 버크는 프로이트, 맑스, 언어학이론을 절충하고 섞어 문학작품을 상징적 행위로 파악하는 견해를 제시했고, 블룸은 프로이트론을 원용하여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견지에서 문학사를 다시 썼다. 자식이 부모의 영향을 받듯이 시인은 이전 시대의 ‘강력한’ 시인의 그늘에 묻혀 불안스레 살아가는 것이고 특정 시는 이전의 시를 체계적으로 다시 써서 ‘영향의 불안’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선 시대의 시인의 내부로 들어가 그 시를 개작하고 바꾸고 다시 만드는 시도를 통해 앞선 시인의 힘을 제거하려 시도하는 시인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시는 다른 시들을 다시 쓴 것으로 그리고 다른 시들을 고의로 ‘틀리게 읽거나’ ‘틀리게 파악’한 것, 또는 시인이 자신의 상상적 독창성을 발휘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압도해오는 세력을 받아넘기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는 것. 블룸은 모든 시인은 뒤처진 존재이고 전통에서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사람인데 위대한 시인이란 자신의 뒤처짐을 인정하고 전시대 시인이 발휘하는 영향력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본다. 블룸은 현대에서 창조적 상상력을 옹호하는 예언적 대변자인데 문학사를 거장들의 영웅적인 투쟁이나 대단한 심리적 드라마로 파악하고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 중에 나타나는 위대한 시인의 ‘표현의지’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의 시적 ‘목소리’와 천재성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 정치이론과 정신분석학의 만남. 크리스테바는 라깡의 상상적인 것 대신에 ‘기호적’(the semiotic)이라는 단계를 상징적 단계와 대립시킨다. 기호적인 것이란 우리들이 언어 내부에서 감지할 수 있고, 외디푸스 콤플렉스 전단계에 속하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힘들의 패턴이나 활동을 의미한다. 전단계의 아이는 아직 언어에 접해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은 맥동(pulsions)이나 충동의 흐름이 아이의 신체 속을 흘러다닌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 운율에 찬 패턴은 아직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언어의 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적 질서로 들어가는 단계에서 이 ‘기호적 과정’이 억압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억압은 전면적인 것은 아니다. 어조, 운율, 언어의 구체적 물질적 속성에서부터 모순, 무의미성, 혼란, 침묵, 부재 등 기호적인 것이 언어 내부에 일종의 추진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호적인 것은 언어의 타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기호적인 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인 것이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다면 기호적인 것은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전 단계에서 생겨난 것이라 어머니와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기호적인 것은 여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셈이다.
--크리스테바는 바로 이 기호적인 것이 상징적 질서를 붕괴시킬 수단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기호적인 것은 모든 고정되고 초월적인 의미작용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기호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엄격한 구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현대사회를 지탱해온 모든 이원적 대립을 해체시키려고 한다. 기호적인 것은 상징적 질서에 대한 대안도 아니고 정상적 담론 대신에 사용할 수 있는 언어도 아니다. 기호적인 것은 상징적 질서의 내적 한도나 경계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여성적인 것 또한 그러한 경계에 위차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것은 다른 성과 마찬가지로 상징적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또한 그 주변부로 밀려나고 남성적 힘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존재하고 낭만적으로 이상화된 사회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희생당한 추방자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여성적인 것은 사회 내에서 사회와 대립되는 세력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운동이라는 형태로 뚜렷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위험할 정도로 형식주의적이고 쉽게 희화화될 수 있다 말하자면 말라르메를 읽어서 부르주아 국가를 붕괴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통일된 주체의 분해가 그 자체로 혁명적인 몸짓은 아닌 것이다. 부르주아 개인주의는 통일된 주체라는 주물에 의지해 번창한다는 사실을 크리스테바는 올바르게 인식은 했지만 그녀의 저작은 주체가 부서지고 모순 속에 빠지는 지점에서 멈춰버리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브레히트에게 있어 예술을 통한 기존 정체성의 분해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인간주체를 만드는 일과 분리할 수 없다. 새로운 주체는 내적인 파편화뿐 아니라 사회적 결속도 알 필요가 있고 리비도적 언어의 만족과 아울러 정치적 부정에 대해 싸워나가는 일의 만족 또한 경험할 것이다.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기본적 동기체계를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파악하는데 이것은 철학적으로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영문학과 관련하여 도덕적 진지함을 논하는 켐브리지 청교도들과 죠지 엘리엇을 기분전환감이라 여기는 옥스퍼드 기사들 사이에 적절한 쾌락이론이 자리잡을 공간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프로이트 이론은 심리적 역학관계를 일반적으로 분석하는 과학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또한 인간의 만족과 복지를 좌절시키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참여하는 과학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주의는 변혁적 실천에 봉사하는 이론이며 그런 한에서 근본적인 것을 질문하는 급진적 정치학에 비견할 만하다. 좀 더 중요한 사실은 독자가 문학작품에서 얻는 쾌락과 불쾌함을 충분히 이해하면 행복과 불행이라는 다소 긴박한 문제에 대해서도 조심스럽지만 의미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신분석학적 이론으로부터 “많은 성원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서 반항하도록 이끌고...지속할 가망이나 가치가 없는 문명”의 특성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5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