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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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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초현실주의와 그로테스크를 활용한 시형식 댓글:  조회:1451  추천:0  2019-02-04
    초현실주의와 그로테스크를 활용한 시형식       -박상순     1)박상순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졸업.  91년『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데뷔.  93년 『6은 나무, 7은 돌고래』, 96년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을 발간.  96년 현대시동인상 수상.    2) 박상순 시의 작법적 특성    ① 박상순의 언어는 초현실과 무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정체불명의 화자(발화자)와 청자(수화자)을 등장시켜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을 활용한다.  우리 시에서 새로운 발성법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시적 모호성과 난해성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② 이국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초현실적이미지를 구사한다.  상상력의 비약과 이미지 사이의 충돌이 크다.    ③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편안하게 읽히는 것은 반복적 병렬과  시각적 배치를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 병렬은 이 시의 호흡을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불안하고 불길한 존재-장소-이미지를 끊임없는 반복적으로 왔다갔다하기,  그 끊임없는 미끄러짐이 바로 그의 전략이다.  반복적 병렬이나 적절한 시각적 배치는 즐거움, 슬픔, 분노, 갈망 등의 정서적 표현을  절제하도록 하며, 나아가 시적 긴장을 유발하도록 한다. 
3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줄거리 [퍼온 자료] 댓글:  조회:2416  추천:0  2019-02-0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줄거리 [퍼온 자료]   1. 모방에 관하여  우리의 주제는 작시술(作詩術)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는 예술 일반의 본질 뿐 아니라 그 종류와 기능에 관해, 좋은 시에 요구되는 플룻의 구조에 관해, 시 구성성분의 요소와 본질에 관해, 그리고 같은 탐구과정에서의 다른 예술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희곡은 물론이거니와 서사시와 극시, 그리고 많은 관현악곡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모방(模倣)의 양식이다. 동시에 이들은 모방매체, 즉 수단의 종류, 대상의 차이, 모방의 방법이라는 세 가지에 의해 구별된다. 모방매체로서의 수단은 전체적으로 리듬, 언어, 화음 등이다. 이는 단독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에 차이를 가져오는 요소를 모방의 매체, 즉 수단이라 부른다.  모방자가 모방하려는 대상은 인간의 행위인데, 이 행위자는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미덕과 악덕 사이의 경계가 모든 인간을 구분 짓는데, 모방의 대상으로서 인간은 선함에 있어 평균인 이상이거나 혹은 그 이하이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수준이다. 예술은 이러한 차이점을 인정해야 하며, 이러한 차이의 관점으로 표현된 대상에 의해 서로 분리된 예술이 나온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차이점은 비극과 희극을 구분 짓는 것이기도 한데, 후자는 오늘날의 평범한 사람보다 더 천한 인물을 만드는 것이라면 전자는 더 훌륭한 인간을 다룬다.  예술의 차이 가운데 또 하나는 각 대상의 모방방법에 있다. 모방할 때 수단과 대상이 같은 종류라면, 시인은 어떤 때는 서술체로 어떤 때는 작중인물이 되어 말할 수 있다. 또는 그런 변화 없이 계속 자신에 머물 수도 있다. 모방자가 모든 것을 실제 행하는 것처럼 극적으로 전체 이야기를 표현할 수도 있다. 이들 예술의 모방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결국 그 수단과 대상 및 방법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에 기인하는 것이다.    2. 예술(시)의 기원  시의 일반적 기원이 인간 본성의 각 부분인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모방적 창조물이며 모방에 의해 지식을 배우게 된다. 또한 모방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에 기쁨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철학자뿐 아니라 아무리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라고 해도 최상의 기쁨을 선사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모방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화음과 리듬도 역시 그렇다. 시는 각 시인의 성격 차이에 의해 두 종류로 나뉘는데, 찬가와 찬사, 그리고 풍자시가 그것이다. 비극과 희극이 실제로 나타나자 자연히 시적 취향에 따라 일부 시인들은 풍자시인 대신에 희극시인이 되었고, 다른 취향의 사람들은 서사시인 대신에 비극시인이 되었다. 이 새 예술형태가 전의 것보다 더 장엄하고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희․비극은 즉흥적인 것에 기원을 둔다.  희극은 보통 사람 이하의 악인을 모방한다. 모든 결점 때문이 아니라 특이한 결점, 추악함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우스운 것 때문에 악한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나 해를 주지 않는 과오 혹은 결함이라 규정할 수 있다. 웃음을 자아내는 가면은 고통을 주지 않는, 추하면서도 왜곡된 것이다. 서사시는 장엄한 체의 운문으로 진지한 주제를 모방한 점에서 비극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비극에서의 선악의 판단은 서사시에 있어서의 그것과 유사하다. 서사시의 모든 부분은 비극에 포함된 것이지만, 비극의 모든 부분이 서사시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3. 비극의 정의와 효과  비극은 진지함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일정한 길이의 행동을, 즐거움을 주는 장식적 요소와 어울리는 언어로 모방하는 것이다. 비극은 극적이거나 비설명적 형태로, 연민과 공포를 일으켜 주는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이룩하게 해준다. ‘기쁨을 주는 장식적 요소의 조화된 언어’라는 것은 언어에 리듬과 화음, 혹은 노래가 부가되어짐을 의미하며, ‘분리된 종류’라는 것은 어떤 작품은 운문으로만 완성되고 어떤 작품은 역으로 노래로만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1) 이야기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첫째로 장경(場景)이 전체의 몇 부분이어야 한다는 사실과, 둘째로 가락과 조사법이 그들 모방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뒤따르게 된다. 여기서 ‘조사법’(diction)이란 그저 운문의 작법을 의미하며, 가락이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더 이상 설명을 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표현된 주제 역시 행동을 통해 구현되며, 행동은 성격과 사상 양면에서 현저한 특질을 필연적으로 지녀야 하는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 어떤 특질을 그들의 행위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사물이 자연적 질서를 이룸에는 그 행위의 두 원인이 있으니 성격과 사상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결과로 그들 삶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현실의 행동이 극에서는 이야기와 구성에 의해 표현된다. 행동의 모방이 바로 플롯이다.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구성’이란 용어의 의미는, 이야기상에서 이루어지는 사건과 행위의 결합이며, 거기에서 성격이라는 것은 어떤 도덕적 특질이 행위자에 기인한다고 우리에게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사상이라는 것은 특이한 점을 증명하거나 혹은 보편적 진실을 드러내려할 때 그들이 말하는 모든 언어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극은 그 질을 결정하는 여섯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니, 구성, 성격(인물), 조사법, 사상, 장경, 그리고 멜로디가 그것이다. 이들 중 조사법과 멜로디는 모방의 수단에서, 장경은 모방의 양식에서, 나머지 셋은 모방의 대상에서 나온 것이다.  2) 여러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상의 사건을 결합하는 것, 즉 구성이다. 비극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모방이 아니라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의 모방이다. 모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행동양식을 취하며 우리 삶의 궁극목적도 어떤 종류의 활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성격이 인간의 성질을 알려주지만, 우리가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극에서 그들은 성격을 전해주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성격을 그 속에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비극의 결과이며 목적인 것은 단편적 이야기와 구성 속에 있는 행동이며, 그 결과는 어디서나 중요한 것이다. 또한 비극은 행동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인물의 성격 없이는 가능할 수 있다. 비극에서 흥미를 끄는 가장 강한 요소인, 급전(急轉)과 발견은(發見)은 구성의 일부분이다. 그 증거의 하나로, 시작 초보자들은 이야기의 구성보다 조사법과 성격에 쉽게 능하게 되는데, 거의 모든 초보 극작가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가장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비극의 생명이며 영혼인 것은 구성이고, 성격은 이차적으로 오는 것인즉, 이는 무질서하게 아름다운 색깔만 칠해 놓아, 단순하게 흑백으로 그린 초상화만큼의 기쁨도 주지 못하는 그림에 비유할 수 있다. 비극은 일차적으로 행동의 모방이며, 그것이 행위자를 모방함은 주로 행동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결국 비극의 핵심원리는 구성이고 성격은 두 번째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오는 요소는 사상, 즉 말하려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경우에 꼭 맞는 것을 말하는 힘이다. 이것은 비극의 대사에서 나타나며, 정치학과 수사학의 영역에 공통으로 속한다. 극에 있어서의 성격은 행위자의 도덕적 목적을 보여 준다. 한편 사상은 어떤 특별한 점을 밝히거나 덮어주거나, 혹은 보편적 명제를 밝힐 때 인물이 말하는 언사에서 드러난다. 네 번째 것은 조사법이다. 즉 실제 운문이나 산문이 같다고 할 수 있겠는데, 언어로 그들의 사상을 포현하는 것이다. 멜로디는 비극에서 가장 즐거움을 주는 장식적 요소이다. 장경은 흥미를 끄는 것이지만 모든 요소 중 가장 미미한 미적 요소이며, 작시술과 관계가 가장 적다.    4. 비극의 구조  비극에 있어 일차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는 단편적 이야기나 사건이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비극은 전체적이면서도 부분적으로 완전하며 또한 일정한 행동의 길이를 가진 행동의 모방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길이 그 자체는 아니다. 전체라는 것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지는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다. 끝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면서 또한 그것의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런 결과이어야 하며, 뒤에 아무 것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중간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면서 또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구성은 아무데서 시작하거나 끝나서는 안 된다. 시작과 끝은 지금 말한 것에 적절하게 어울려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살아있는 생물체이건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건 모두가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어떤 질서를 필요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크기와 질서의 문제인 것이다. 부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전체나 아름다운 생물체가 눈으로 보아 파악할 수 있는 크기여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나 구성도 적절한 길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주인공이 개연적 혹은 필연적인 일련의 과정을 거쳐 불행에서 행복으로, 혹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전도하기까지의 길이’는 이야기의 길이 제한에 있어 충분한 여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5. 비극의 특성과 시의 본질 - 문학의 허구성  행동의 모방은 하나의 전체적 행동, 완전한 전체를 표현해야 한다. 그에 부수되는 여러 사건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어느 한 사건이라도 위치를 바꾸거나 삭제하면 전체 연결과 배치가 일그러지게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집어넣거나 빼는 것이 현저한 차이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체에 필요한 부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기능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가능성을 가진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시인의 구별은 산문으로 쓰느냐 운문으로 쓰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는 일어난 일을 쓰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쓴다. 그러기에 시는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는데, 시의 서술은 본질적인 좀더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서술이라 함은 일반적인 인물이 개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서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단순히 운문 창조자라기보다는 이야기나 플롯의 창조자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의 작품에 모방적 요소가 있다 하여도 그는 시인인 것이며, 그가 모방하는 것은 바로 행동인 것이다. 단순한 구성이나 행동에서 가장 나쁜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삽화의 상호간에 어떤 개연성이나 필연성이 없을 때 그것을 구성에서 삽화적(揷話的)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연민과 공포를 일으켜주는 사건의 모방이다. 그런 사건은 돌발적이면서도 다른 것의 결과로 일어날 때 마음에 대단히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그 사건이 재발성, 즉 스스로에 의하거나 우연에 의해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경탄스런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이런 필연의 구성은 다른 어떤 것보다 훌륭한 것이다.    6. 구성의 종류와 요소 - 복합구성과 단순구성, 급전과 발견, 비극의 구성단계  구성은 단순하거나 복잡한데, 그것은 사람의 행동이 자연히 이 두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단일한 행동이란 하나의 연속적 전체를 이루고 있는 행동을 말한다. 이때 주인공의 운명변화는 급전이나 발견 없이 일어난다. 복잡한 행동이란 급전과 발견 중 어느 하나 혹은 이들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할 때 일어난다. 이것들은 모두 구성 자체의 구조에서 생겨나며, 앞 사건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이어야 한다. 필연적 관련으로 맺어지는 두 사건과 단순한 시간적 병렬의 두 사건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급전(Peripety)이란 극내에서 어떤 일이 한 상태로부터 그 반대 상태로 급격히 변화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또한 사건의 개연적 혹은 필연적 결과이다. 발견(Discovery)이란 말의 의미에서도 그렇듯이 행운이나 불운을 숙명으로 가진 인물이 무지의 상태에서 깨달음의 상태로 바뀌게 되고, 그래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적대적으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급전을 내포하는 발견은 동정심과 공포감을 일으킬 것이다. 구성의 두 부분인 급전과 발견은 이러한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파토스(pathos)인데, 우리는 그것을 파격적이고 고통스런 본성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양적인 관점 즉 개별부분으로 구분할 때 비극은 다음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사(Prologue), 삽화(Episode), 결미(Exode), 합창가요(Choral) 부분이 그것이다.    7. Catharsis - 비극의 목적, 예술적 쾌락  시인은 구성을 짜는데 있어 무엇을 택해야 하며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 비극의 목적은 어떠한 수단에 의하여 달성될 것인가. 비극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위하여 구성은 단순함을 피하여 복잡하여야 하며, 모방의 뚜렷한 기능으로 보아 동정심과 공포심을 일으켜 주는 행동을 모방한 것이어야 한다. 완전한 구성은 단일해야 하며 두 가지 일을 함께 다루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의 운명은 비참함에서 행복으로가 아니라, 반대로 행복에서 비참함으로 바뀌어야 하며, 그 반대의 원인은 어떤 결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인공에 있어서의 어떤 큰 잘못에 의하여 이끌어내져야 한다. 인물은 보통사람 이상으로 훌륭하게 기술되어야 하며 악한 존재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가장 훌륭한 비극은 말한 바처럼 단일한 구성을 가진다.  비극적 연민과 공포는 장경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고 사건의 구성과 사건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는데, 후자의 방법이 더 좋으며 훌륭한 시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구성은 실제 보지 않고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동정심으로 가득 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쾌락이란 연민과 공포로부터 야기되는 기쁨이며 시인은 그것을 모방에 의하여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사건의 원인은 사건 내부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8. 인물론 - 성격창조론  성격을 이야기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네 가지 점이 있다. 그 가운데 첫째이며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선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이 선한 것이라면 성격요소도 선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선은, 여러 형태의 인물들에 있어 비록 그가 비열한 인간이거나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 주의점은 성격이 인물에 특유하고 적절하게 꾸며져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성격을 전설상에 있었던 것과 유사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넷째로 전편을 통하여 성격을 지속적으로 통일적으로 꾸미는, 즉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필연적 혹은 개연적으로 후에까지 일관성 있고 지속적이어야 함은 성격에 있어서나 극의 구성에 있어서나 온당한 일이다. 그것은 어떤 인물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성격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이기 위함이다. 또한 사건이 연속될 때 어느 사건이든지 그것이 앞 사건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여야 하기 때문이다.    9. 구성의 구조 - 구성론 종합  발견의 종류에 관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첫 번째 것은 가장 예술적이지 못한 것인데, 시인들이 창의력 부족으로 인해 흔히 사용하는 것으로 기호나 표식에 의한 발견이다. 그런데 기호나 표식의 사용에는 훌륭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증거의 수단으로 표식을 사용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모든 게 그렇듯이 예술적이지 못하다. 다음은 발견이 시인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조작되는 경우인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것은 예술적이지 못하다. 세 번째 종류는 기억에 의한 발견으로, 이미 보았거나 들었던 어떤 것에 의해 주인공이 회상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종류는 추론에 의한 발견이다. 그밖에 상대편의 잘못된 추론에 의하여 일어나는 복잡한 발견이 있다. 발견의 가장 훌륭한 형태는 사건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구성을 설정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점에 유념해야 한다. 먼저 실제의 장면을 눈으로 보듯이 설정하여야 한다. 사물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관찰하여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적합한 방법을 고안해내게 되고 간과해버리기 쉬운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가능하면 시인은 작중인물의 몸짓까지 스스로 행동해 보아야 한다. 같은 재능을 갖고 있다면 자기가 그리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확신을 주고 감동을 던져줄 수 있다. 그리고 삽화의 삽입으로 이야기의 길이를 늘이기 전에 시인은 자기의 이야기를 우선 소묘하고 보편적 형태로 축약시켜 나아가야 한다. 예컨대 ‘오디세이’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다. 그는 해신 포세이돈에게 항시 감시를 받았으며 늘 혼자 외로웠다. 그의 집에서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이 그의 재산을 망쳐버렸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획책하였다. 그때 그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적에게 달려든다. 결국 그는 구제되고 적들은 죽는다. 이것이 ‘오디세이’의 요지이고 나머지는 삽화다.  모든 비극은 갈등의 부분과 해소의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극이 열리기 전의 사건과 극내에서의 사건 중 어떤 것은 갈등을 형성하고 그 나머지는 해소의 부분을 이룬다. 갈등이라 함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운명이 불행에서 행운으로 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기 직전까지의 부분을 말하고, 해소는 시점에서부터 끝까지의 운명의 전환이 시작되는 부분을 의미한다. 비극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복잡한 비극으로 이것은 급전과 발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둘째는 파토스를 일으켜주는 비극이고, 셋째는 성격적인 비극이다. 네 번째 구성요소는 장경이다. 시인은 앞서 말하는 바를 기억하여야 한다.    10. 사상성과 조사법 - Metaphor  사상성은 ‘수사학’에서 논의할 것이기에 그것을 전제로 한다. 사상성의 연구는 수사학에 더 밀접한 것이다. 극에서 인물의 사상은 그들이 쓰는 말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것, 증명하거나 반박하고, 감정을 일으키고, 사물을 과장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인물이 동정이나 공포심을 일으키고 중요성이나 개연성에 대한 적절한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그들의 심리과정이 실제 언사 및 행동과 확실히 일치하여야 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행동에 의한 효과는 일상에 대한 설명 없이 생겨나야 한다는 점이다. 효과는 화자가 구어를 사용하여 생겨나야 하며, 그의 언어로부터 결과된 것이어야 한다. 조사법에 관해서, 이런 제목 아래 탐구되는 주제 중 하나는, 말할 때 언어에 가해지는 어조인 것이다. 즉 명령과 기원, 단순한 진술과 억압, 질문과 대답의 차이를 나타내는 어조의 문제가 그것이다. 어쨌든 그런 문제의 이론은 웅변술이나 웅변전문가에게 속한다. 시인이 이런 것을 알든 모르든 시인으로서의 그의 예술은 그 점에 대하여 심하게 비평받는 일은 없다.  명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단순한 것 즉 무의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 가지가 합성된 것인데, 후자의 경우는 의미부분과 무의미부분으로 구성되거나 두 개의 의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합성명사는 또 세 개, 네 개 혹은 그 이상의 부분으로 구성될 수 있는데 확대된 이름의 대부분이 그렇다. 구조가 어떻든 명사는, 사물에 붙이는 일상어이거나, 외래어이거나, 은유이거나, 수식어, 신어이거나, 연장어이거나, 단축어이거나, 변형어이다. 일상어라 함은 한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을 의미하며 외래어라 함은 다른 나라에서 차용된 말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같은 말이라도 외래어일 수도 있고 일상어일 수도 있음은 명백하지만, 그것이 모든 국민에 대한 언급일 수는 없다. 은유(隱喩)는 한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이하는 것인데, 그 전환은 유(類)에서 종(種)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유에서 종으로의 은유의 예는 ‘여기에 나의 배가 서 있다’와 같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물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종에서 유로의 은유의 예는 ‘정말로 율리시즈는 일만 가지 선행을 했다’와 같은 표현이다. ‘일만’이라는 특수한 숫자가 ‘수많은’이라고 쓸 유의 자리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종에서 종으로의 은유의 예는, ‘놋쇠로 생명의 물을 퍼올리며(즉 놋쇠로 만든 칼로 베여 피를 흘리게 하며)’와 ‘불멸의 놋쇠로 베면서’(즉 놋쇠로 만든 두레박으로 물을 푸면서)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시인은 ‘벤다’는 의미로 ‘퍼올린다’를 사용하여, 두 말이 모두 무엇인가를 ‘갈라낸다’는 의미를 지니게 한다. 유추에 의한 은유는, 예컨대 네 개의 사항이 있을 때, 제2의 사항(B)이 제1의 사항(A)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가 제4의 사항(D)이 제3의 사항(C)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와 같은 때를 말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D대신에 B를, B대신에 D를 은유적으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대치된 말의 관계어를 은유에 부가함으로써 은유를 적합하게 하는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잔(B)의 디오니소스(A)에 대한 관계는 방패(D)의 아레스(C)에 대한 관계와 같다. 따라서 잔은 은유적으로 ‘디오니소스의 방패’(A+D)라 표현되고 방패는 ‘아레스의 잔’(C+B)이라고 표현될 것이다. 그런 유추의 관계에 있는 용어들 몇 가지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나 이름을 지니지 못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꼭 같은 방법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씨앗을 심는 것을 ‘뿌린다’라고 부르는데, 태양의 불꽃이 쏟아지는 것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다. 그 이름없는 동작(B)이 대상인 햇빛(A)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뿌리는 행위(D)의 씨앗(C)에 대한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시인은 ‘신이 만든 불꽃을 주위에 뿌리면서’(A+D)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적합한 은유의 또 다른 형태가 있다. 한 사물에 다른 이질적 이름을 부여하면서, 그 새로운 이름과 자연히 관련을 맺고 있는 속성 중의 하나를 새로운 의미를 얻음으로써 부정하는 것이다. 한 예로 앞에서처럼 ‘아레스의 잔’이라 부르지 않고 ‘술이 없는 잔’, 즉 빈잔이라 부르는 것이다. 신어는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시인 자신이 만들어낸 말이다. 변형어란 한 부분은 본래대로 남아 있고 또 한 부분이 시인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때를 말한다.  조사(措辭)의 완전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명석해야 하고 저속하거나 조야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어로 이루어진 조사는 가장 명확하지만, 한편 새로운 표현, 즉 외래어, 은유, 연장어 등 일상대화와는 다른 여러 가지를 사용함으로써 조사는 뚜렷하고 운문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말만을 쓰면 전체적으로 보아 수수께끼가 되거나 야만인의 언어가 된다. 수수께끼라는 것은 단어의 불가능한 조합(다시 말하면 은유적 대치물로는 관계가 되지만 사물의 실제 속성과는 관계가 되지 않는)으로 사실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외래어, 은유, 수식어 등은 말이 조야하고 평범하게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고, 한편 일상어는 필요한 명확성을 지켜준다. 조사를 가장 명석하고 비범하게 해주는 것은 연장어, 단축어 및 변형어 등이다. 이것들은 일상어와는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 용법에 변화를 가져다 줌으로써 창조적인 면모를 가지게 하여 주고, 일반적 용법에서 일상어와 많은 공통점을 지님으로써 그것을 명석하게 하여 준다. 따라서 이런 언어수법을 비난하거나 몇몇이 그를 사용하였다 하여 그 시인들을 조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시적 허용을 과대하게 사용하면 우스운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것은 이 수법에 의한 것에 국한되지 않고, 적절히 사용한다면 시어의 모든 구성요소에 이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시인이 부적절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사용했다면 은유든 외래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그 효과는 동일할 것이다. 시적 허용의 적절한 사용은 대단히 상이한 일이다. 상이점을 알기 위하여 시인은 서사시를 택하여, 일상어가 사용되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읽혀지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여야 한다. 외래어, 은유 및 다른 나머지에 관하여도 같은 방법을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우리가 말하는 바가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만 일상어를 적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어만의 사용은 그저 평범한데 비해 일상어 대신 한 마디의 외래어를 대치하는 일어의 변화를 가함으로써 시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11. 극예술과 시 - 서사시  운문으로 된 행위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모방하는 것이 시라면, 그것은 비극과 여러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이 확실하다. 1) 이야기의 구성은 희곡의 구성과 비슷하여 단일한 행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짐으로써 그 자체로서 완전한 전체를 이루어, 생물체의 유기적 통일성과 더불어 그 자신의 적절한 즐거움을 낳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 역사에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하나의 행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에 여러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인데 이 여러 사건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  2) 이 외에 서사시는 비극과 동일한 종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단순한 것이거나 복잡한 것이어야 하고, 성격적 이야기이거나 파토스적인 이야기여야 한다. 각 부분도 가요와 장경을 제외하고는 비극과 동일하여야 한다. 즉 서사시에서도 비극과 마찬가지로 급전, 발견 및 파토스의 장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비극과 비교해 볼 때 서사시에는 다른 점이 있다. 구성의 길이에 있어, 그리고 운율에 있어서 그렇다. 행동이 없거나 드러난 성격이나 사상성이 없는 곳에서 오직 요구되는 것은 뛰어난 조사법이다. 반면 성격이나 사상성이 있는 곳에서 과장적으로 수식된 조사법은 오히려 시를 애매하게 하는 수가 있다.    12. 비평에 관하여 - 허구의 진실성  시인은 미술가처럼 모방가이거나 이와 유사한 창작자이기에, 모든 경우에 있어서 다음의 세 가지 양상 중에서 어느 하나로 사물을 표현하여야 한다. 즉 과거에 있었거나 현재 있는 사물, 있다고 혹은 있었다고 말하여지거나 생각되는 사물, 또 있어야 하는 사물 등이다. 이 모든 것을 시인은 단어의 다양한 수식형태처럼 외래어나 은유를 혼합한 언어로 표현한다. 정치술이나 다른 기술에서처럼 작시술에 있어서 정당성의 규준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작시술에서 두 가지 오류, 즉 하나는 그 자체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단지 우연으로 예술과 관련을 가지는 부대적인 것을 범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시인이 사물을 올바르게 모방하려고 하다가 표현력 부족으로 실패한다면, 그의 작시술 자체가 잘못이다. 그러나, 시인이 모방함에 있어, 기법적인 오류(의술이나 기타 기술에 관한 문제)나 사물의 불가능성을 포함시키는, 어떤 부정확한 방법(예를 들면, 움직이고 있는 말을 그리는데 오른쪽 다리 두 개를 모두 앞으로 놓게 하는 것)으로 사물을 기술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에, 그의 오류가 작시술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로부터 우리는 여러 문제점에 관해 비평자의 비판을 고찰하고 해결 또는 반박해야 한다.  1) 시인이 행하는 작시술 자체에 관련하여 비평에 대하여 언급한다. 시인이 기술함에 있어 있을 수 없는 불가능사를 그렸다면 그것은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과오가 시의 목적을 이룸에 도움이 되거나 작품의 어느 부분의 효과를 훨씬 놀랍게 만든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시의 목적이 그런 것에 있어 기법적인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 없이도 퍽 쉽게 얻어질 수 있었다면, 불가능사를 그린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술은 전혀 과오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류가 그런 일에 있어 작시법과 본질적으로 관련된 것인가 혹은 단지 우연에 의해서 부대적으로 관련된 것인가 하고 묻게 될 것이다.  2) 만약 시인이 그려낸 것이 사실에 맞지 않는다고 평을 받는다면, 그것이 이상상을 그린 것이라고 답변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그려낸 것이 사실적인 것도 아니고 이상상의 적도 아니라면 그 평가는 세평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시에서 말하고 행하여진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는 실제의 말과 행동의 내적인 성질뿐 아니라, 그것을 말하고 행하는 인물, 그 상대자, 시간, 방법, 행위, 동기를 고려하여야 한다.  3) 시인이 사용한 용어를 생각해 보면 또 다른 비평들을 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불가능사라도 그것이 시에서 필요하거나, 이상형이거나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일 때에는 정당화되어야 한다. 시의 목적상 믿을 수 없는 불가능사는 믿을 수 없는 가능사보다 정당한 것이다. 불가능사는 그것이 일반적 견해에 따른 것임을 보여 주거나, 한 순간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주장함으로써 정당화되어야 한다. 하나의 개연성에 기인하여 발생되는 또 다른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모순을 우리는 논쟁에서 상대자에게 논박을 가하듯 정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시인 스스로 말한 것으로 모순을 범한 것이라든지 양식이 있는 사람이 진실이라고 확신한 바의 것을 인정하기 전에, 그가 의미하는 것이 동일한 관계가 동일한 의미로 동일한 사물에 대한 것인지 아닌지를, 즉 모순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아야 한다. 비평가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대략 다섯 가지에 기인한다. 비평에서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합리하거나, 유해한 것이거나, 모순이 있거나, 기법적인 정확성에 어긋나는 것 등이다.    13. 서사시와 비극의 비교론  더 고양된 모방 형식이 비극인가 서사시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만약 덜 비속한 것이 더 고양된 것이며 항상 더 훌륭한 관객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대중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예술은 매우 비속한 것임에 틀림없다. 비극은 서사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중요한 음악과 장경을 함께 가지고 있다. 비극 표현의 사실성은 실제 연기를 할 때뿐 아니라 읽기만 하여도 실제 공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극의 모방은 결말에 이르기 위해 그리 많은 시간적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큰 이점을 가졌다고 하겠는데, 훨씬 집중된 효과는, 시간을 길게 잡아 복잡하게 엮어나가 오히려 실망하게 되는 효과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비극이 이런 점은 물론 다른 점에서도 그 시적 효과에 있어 서사시보다 쉽게 효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더 고양된 예술 형식이라고 할 것이다. 비극과, 서사시의 일반적인 본질과 종류에 대해서, 구성 성분의 수와 성질에 대해, 성패의 원인에 대해, 비평가의 비판 그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해결에 대하여 고찰하였으므로, 이제 이 두 가지 예술에 대하여는 그만 논의하기로 하자.   
33    현대시의 단절의식 / 강영환 댓글:  조회:1183  추천:0  2019-02-04
현대시의 단절의식 / 강영환         反주지에서 찾을 수 있는 현대시에 있어서 의식의 특징을 스피어즈는 그의 저서 에서 현대시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야기한 문제점을 '단절'이라는 말로 포괄하였다.       단절은 불연속성을 말하며 시에 있어서 심상주의의 이념적 토대를 제시한 흄의, 이 연속성의 개념의 파괴는 상대적으로 현대성의 개념을 깨닫게 해 준다. 연속과 불연속, 곧 단절의 원리는 주로 19세기 생물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회의가 동기를 이루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연속된 존재라는 확신은 다윈이나 마르크스의 경우 자연주의 그리고 신의 소멸이라는 측면으로 드러난다.       1900년 생물학자들은 유전법칙의 연구에 있어서 불연속의 변주와 마주치게 되었고 그들은 멘델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플랑크의 양자이론에서도 에너지, 움직임, 물질의 본질 속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있음을 드러내었으며, 특히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는 그 후 불연속성 개념에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후 발견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제 4차원, 곧 시-공 연속체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불연속을 포함하는 새로운 유형의 연속개념인 것이다.       이런 인식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전혀 다른 새로운 전망을 낳게 하였다. 곧 시간과 공간, 에너지와 물질 그 뿐만이 아니라 일체의 인과관계, 관찰자와 대상의 관계도 매우 복잡하고 기이한 내적 관계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스피어즈는 현대문학에 나타나는 기본적 단절을 네 가지로 들고 있다.                   (1) 형이상학적 단절                   유기체의 세계와 무기체의 세계 그리고 윤리적 세계와 종교적 세계 사이에는 절대적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교량도 놓여질 수 없으며, 이 점을 통찰함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물의 진면목과 해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단절은 엘리엇의 세 가지 질서 개념인 자연과 인간과 초자연적 세계 상호간의 단절의식, 그리고 신비평가 그룹의 한사람인 테이트의 물질과 정신의 근원적인 단절의식 등으로 현대문학론 속에 수용된다.                   햇빛이 환할수록/우거진 숲 속은       방울꽃 흔적, 마치/밤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달고       빛을 기다린다                   그것이 누구의 숲인지/꽃들은 알지만       가끔씩 한 계절 머무르고/떠나가는       이름 모를 들풀들의 짧은 생에서       우리는 우리의/육십 년 인생을 보람으로 여겨야 한다                   되풀이 될 수 없는/각각의 사연들을 안고       웃음 한 번 제대로 띄워보지 못하고       빛없는 생을 살고 가는/무명의 인생일지라도                   숲 속에 말없이 피어/햇볕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노래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말라 바스라져 버린       방울꽃 두포기만큼/찬란한 생을 탐하진 않을거니까                   숲 속에/저 들풀의 환희 속에/사람들의 깨달음이 숨어있다                   먼 길/어둠이 내리기 전에/우리는 숲을 벗어나       서로의 갈 길을 가야 한다/이른 서리가 발길을 적시기 전에       서로의 갈 길을 가야 한다                   독자의 시 중에서                   방울꽃의 세계를 인간의 삶으로 변주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내고 있는 위 작품에서도 는 서로 간의 단절을 대비시켜 시적 분위기를 환기 시키고 있다. 이 시가 앞부분의 성공에 비해 대체로 실패로 보이는 것은 는 부분 이후에서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이고 고답적인 분위기로 빠지면서 형식에 치우쳐 상상력을 차단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냥 방울꽃을 상황을 제시해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마음속에 그 의미를 발견하도록 여지를 주는 것이 이 시의 진폭을 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심미적 단절                   시인의 모습을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아직도 사람들의 생각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낭만주의가 뿌려놓은 결과라 본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를 넘어서면 그것은 박물관의 유리관 속에 진열되어 있는 화석이 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스피어즈는 두 번째 단절로 심미적 단절을 내세우고 있다. 그것은 예술과 인생 사이의 단절을 의미하며 포우와 보들레르 이래 여러 상이한 문맥속에 다양하게 부각되었던 개념이다. 그러나 자연주의, 도덕주의, 속물주의에 저항하는 상징주의, 특히 퇴폐주의는 예술과 인생 사이에 있는 무서운 단절감을 환기한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삶과 현실인으로써의 삶 사이에 메꿀 수 없는 단절의 늪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리차즈도 시가 띄는 환영적인 미적 상태를 꼬집고 시를 여러 다른 인간경험의 세계와 접촉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엘리엇에 의하면 시인은 신비로운 자가 아니라 모든 다른 인간들처럼 범속한 생활을 하는 자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의, 시인은 그의 개성을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의해 강조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술을 모방의 양식이 아니라 이질적인 세계의 합금, 화학반응의 양식, 곧 형식의 문제에 국한 한다는 그의 이론은 그 자체가 일종의 심미적 단절을 시인하는 것이다. 오든에 의하면 는 것이다. 곧 시는 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 시대의 시인들의 삶에서 낭만주의의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은 예술과 삶을 동일시하면서 심미적 단절을 가져오지 못한 결과로 보여지는 것이다.                   (3) 수사학적 단절                   심미적 단절과 깊은 관련이 있는 수사학적 단절은 시를 산문과 대조적으로 인식함을 뜻한다.       산문에 비하여 시는 구조적 단절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시는 산문의 논리와는 다른 일종의 비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생략적인 스타일, 산문적 연결방식의 무시, 어떤 설명도 없는 병치적인 이미지 연결, 비합리적인 순서에 의한 낱말 배열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은 영화의 몽타쥬 기법의 영향과 꿈 및 무의식의 논리를 따르는 초현실주의에 의하여 가장 명료하게 파악된다.                   먹구름 춤       하염없더니       참을 수 없는 정열의 몸짓       하늘 밖으로 곤두박질한다       ……       지금       비는 태양이다.                   독자의 시 일부분                   비를 이나 으로 파악하는 것은 산문적인 논리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시적인 의미로 다가서면 그것은 이면의 논리에 의해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 시간적 단절                   아인슈타인의 시간과 공간의 상호 확산개념에서 추출되며 그 공개적 형식이 영화이다. 공간적 형식, 동시성에 대한 인식은 말할 것도 없이 20세기 초기 주지주의에서는 매우 중요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비가 내린다.       그칠 줄 모르고 밤에도 낮에도       쌓였던 눈물을 한꺼번에 내려놓는다       마을에도 산에도 붐비는 거리에도       비가 내린다.                   하늘은 물방울을 가득 담은 호수.       그 속에서 바람은 깃을 달고       날아온다.       유리문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은 전설의 고향 소리를 낸다                   비가 내린다. 쉬지 않고 내린다.       하늘은 언제까지 태양을       숨겨둘 모양이다.       흔들리는 문 소리에 외로움이       덜컹거린다.       우산 없이 이대로 하늘 밑에       있고 싶어라.                   가슴 귀퉁이 젖은 하루의 토막이       빗속에 서있다.                   독자의 시 전문                   시간적 단절은 한마디로 시간적 질서의 파괴이다. 시 속에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한정 지워 사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5) 그 밖의 단절                   이상 네 가지 단절 외에도 다른 범주의 단절이 있을 수 있다. 에를 들면 내부에서의 분열감을 뜻하는 [심리학적 단절] 즉 심리적 분열감 인식으로 엘리엇이 말한 에 포괄되는 의미이다. 현대 시인은 이 분열의 극복, 곧 감수성의 통합을 시도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지성과 감성, 이성과 감정의 통합을 목표로 한다.           다음으로 역사적 단절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시간적 단절의 역사적 양상을 의미하며 아무리 우리가 현대를 그럴듯하게 정의하더라도 현대인은 언제나 라는 의미로 수용된다. 여기에서 20세기 예술은 과거의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과거와의 단절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것은 최후의 주지주의자들, 곧 입센이나 쇼우, 니체 등에서 두드러진 특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의식은 역사상으로는 미래주의, 다다주의, 초현실주의 등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스피어즈에 의하면 역사적 단절인식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 반응은 첫째로 미래주의자 혹은 오늘날 티뷔에 의한 자동적 구원에 전폭적 신뢰를 표명하는 맥루헌에게서 보며, 이들은 모두 낙관적 세계관을 표명한다. 또 하나의 반응은 과거와의 단절을 소멸 혹은 전락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파국주의는 현대예술의 중심 테마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를 황무지로 파악한다든가 문명은 파괴되고 인간의 본질은 변화되고, 따라서 상실감만이 지배적 신화가 된다는 견해가 그것들이다. 현대의 가장 혁신적인 행동파 화가 로젠버그는 과거의 예술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는 불모의 시대요, 무의미의 시대요, 기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미술 비평가인 리드로 하여금 현대회화를 반항의 회화 곧 정신적이고 미적인 가치에 무관심한 야만적인 문화인이 시대문화에 반항하는 한 양식으로 보게하며, 또한 우리가 앞서 지적한 50년대 후기 주지주의로 요약되는 부조리 예술을 낳게 했다.       신이 소멸한 시대에 예술가들은 현재의 무의미성과 원시적인 의미성 사이에 어떤 대비적 주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는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에의 신념은 아직도 문학예술로 성숙한 표현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32    김상환 : 리쾨르의 은유시학 댓글:  조회:1621  추천:0  2019-02-02
리쾨르의 은유 시학(The Metaphor Poetics of Paul Ricoeur)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F.니체)       1. 은유에 대하여    1.1. 은유의 어원 metaphor=meta +phora = meta(over, beyond) +phorein(bring, carry) : 초월하여 옮기다, 변형하여 전하다.   1.2. 은유의 개념과 의미   (1) 은유는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그 의미가 轉移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2) 은유(유사성/선택의 축)는 환유(인접성/결합의 축)와 함께 언어의 한 양상이다.(R•야콥슨)   (3) 은유는 한 단어의 보편적 의미에서 새로운 의미 전환이나 그 이동을 말한다.(I•A•리챠즈) (3) 은유는 의미론적 변화이다.(P•휠라이트) (4) 은유는 시적 상상력을 구성하고, 주제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T•S•엘리엇) (5) 은유는 진실 발견 혹은 통찰력의 수단이다.(C•브룩스) (6) 은유는 하나의 패턴pattern이다. 즉, 서로 다른 것들의 심층에 놓여진 유사성 혹은 동일성을 말한다. (G•베이트슨)   (7) 詩經(比-직유, 興-은유), 文心雕龍(文已盡而意有餘, 興也.)   1.3. 은유의 기본 원리와 유형 은유의 기본 원리는 에 있다. 그러나 그 전이의 토대가 되는 것은 (유사성)이다. 은유는 기본적으로 동일성(유사성, 연접성)의 원리에 근거한다. 은유의 유형은 죽은 은유(死은유dead metaphor, 관습적 은유), 살아있는 은유(live metaphor, 창조적 은유), 置換은유(epiphora), 竝置은유(diaphora), 의미 은유(sense metaphor), 정서 은유(emotive metaphor), 장식 은유(decorative metaphor), 조명 은유(illuminative metaphor), 정령 은유(또는, 의인 은유) 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은유란 다른 것 속에서 같은 것을 직관적으로 감지하는 것을 말하며, 엘리엇이 말한 좋은 은유란 동떨어진 은유(far-fetched metaphor)를 말한다.   (1) 수사학과 은유 : 장식적 효과를 내는 여러 가지 비유적 표현법들 중의 하나.   (2) 의미론과 은유 : 다른 사물에 속하는 명칭의 전용. 의미 창출과 의미 확장의 능력.   (3) 해석학과 은유 :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은유   1.4. 은유와 시 일 포스티노Il Postino : 마리오를 시의 세계로 이끈 것은 메타포, 즉 은유이다.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묻는다."바다와 하늘과 비와 구름과... 이 세상이 다른 것의 은유란 말인가요?"이 질문에 네루다는 답변을 미루다, 결국 답을 하지 않는다. 허나 그 답변은 정작 영화 속에서 영상과 소리로 암시되고 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김광섭,〈마음〉전문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김춘수,〈나의 하느님〉전문     2. 리쾨르 은유론의 특질 : 상징과 해석, 진리/구원으로서의 은유   2.1. 리쾨르(1913-2005, Paul Ricoeur)에 대하여 데카르트, 베르그송, 마르셀, 메를로 퐁티를 잇는 철학자 폴 리쾨르는 1913년 프랑스 남동부 발랑 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이었다. 2세 때 부모가 사망하여 브르타뉴 렌느 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고 대학을 졸업하였다. 1935년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고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마르셀에게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독일군에 잡혀 스위스에서 5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당시 E.후설의 저서들을 탐독한 것이 계기가 되어 후설 연구가로도 알려졌다. 1950년 후설의《현상학의 이념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하였다. 여기서 그는 현상학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밝히고 그러한 유한성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1948 1956년 스트라스부르대학, 1956년부터는 파리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1949)에서 의지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을,《유한성과 죄악 가능성 Finitude et culpabilit  》(1960)에서 종교적인 상징에 대한 해석학을,《해석에 관하여 De l'interpr  tation》(1965)에서 정신분석학적 상징에 관한 해석학을 개진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였다. 1966년 그리스도교 좌파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낭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68년 학생혁명이 좌절되자 급진적인 학생들과 지식인들로부터 외면당하여 1970년 해임되었다. 그 뒤 시카고대학과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 동안 몰두해온 해석학의 철학적인 주제도 상징에서 텍스트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상징언어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너무 좁다고 여겨, 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1975년에《살아 있는 메타포 La m taphore vive》를, 1983 1984 1985년에 연이어서《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 cit 1,2,3》를 펴냈다. 1990년에는《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Soim me comme un autre》을, 1992년에는 대표적인 논문을 모아놓은《강좌 Lecture》를 출간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리쾨르 사상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해석의 우회로 ② 의미의 매개성 ③ 언어의 창조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인간의 의지와 악, 신화와 상징, 은유와 이야기 등의 다양한 주제와 실존주의, 현상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 비판, 분석철학 등 현대철학의 방법들을 해석학의 관점에서 종합하려는 시도의 연속이다. 이 점에서 리쾨르의 철학은 끊임없는 '해석의 모험'이라고 불려진다. 뿌리깊은 악과 바탕의 선함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이야말로 리쾨르 사상 전체를 꿰뚫는 인생관이자 세계관이다. 그의 원죄(론)은 개념이 아니라, 죄의 고백에 들어있는 더 깊고 더 충실한 그 무엇의 상징이다. 이해의 문제 또한 인식론의 문제라기 보다는 윤리의 문제에 속한다. 그런 만큼 리쾨르의 해석학은 윤리를 중시한다. 리쾨르는 해석학의 전통과 (레비스트로스의 인간학, 바르트/그레마스의 기호학과 관련한) 구조주의를 연결시키는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특히 언어(학)과 관련해서는 인식론적 전제 없이 존재에 대한 직접 서술이 가능한 언어 속에 타자의 원초적 경험이 숙명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2.2. 리쾨르 은유론의 특질 : 상징/은유/이야기 리쾨르의 은유론은 상징론의 일부이다. 그가 말하는 에는 말고도 가 있다. 이야기는 문장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며 줄거리가 있는 꾸민 말이다.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은유를 푸는 것과 비슷한 해석 행위다. 꾸민 이야기는 거대한 은유이다. 은유 이론(살아있는 은유La m taphore vive, 1975)과 이야기론(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 cit, 1983)은 서로 다른 것들을 종합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은유와 유사하게 통용된다. 말하지 않은 것(삶의 현실)은 말하지 못한 것(삶의 현실)이다. 못다한 말을 담고 있는 말이 곧 은유이다.         은유와 이야기는 상징철학 내지는 해석학에 속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수정하고, 의미론을 거쳐 존재론으로 나아간다. 즉 인식론과 존재론의 종합을 말한다. 그것은 주체의 제약이라기 보다는, 주체의 깊이를 찾는 일이다. 존재나 욕망은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되지 않으며 기술 언어가 직접 서술임에 반해, 저쪽에서 오는 가 다름아닌 상징 언어다. 존재는 거룩한 경험을 낳고, 욕망은 꿈을 낳는다. 즉, 종교현상학에서 말하는 '(거룩한) 경험의 언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욕망의 언어'가 곧 상징 언어이다. 상징은 할 말을 다 못해서 나온 게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는 말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구원은 억압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데 있다. 즉, 상징으로 된 욕망의 언어나 무의식의 언어를 풀어 해석하는 데 있다. 삶의 의미를 찾아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힘이 다름아닌 시적 상징(또는, 실존)이다. 그에게서 삶은 지성과 의지를 넘어서는 것. 논리를 넘어 존재하는 신비다. 그리고 삶은 여러 겹의 뜻을 지닌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되지 않는다.       한편, 의미 혁신은 은유의 경우 낱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문장 혹은 술부에서 발생한다. 은유가 술부에서 발생하는 것은 현실을 새롭게 그리는 상상력의 동원을 말한다. 수사학에서 특정 어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지만. 은유의 차원에서는 문장 전체가 새로운 뜻을 지닌다. 랑그 보다 말이 우선이다. 이 경우 말은 낱말이 아니라, 현실과 관련된 하나의 문장을 말한다. 말은 할 말을 하는 것이므로 구조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건이다. 은유는 날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주부와 술부가 이어지면서 발생한다. 이 점에서 은유는 낱말이 낱말을 대체하는 換喩와는 다르다. 환유는 기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은유는 말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은유는 뜻하는 사건이다. 그것이 곧 살아있는 은유이다. 살아있는 은유는 여러 겹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언어가 창조한다, 고 했을 때 은유와 상징은 곧 살아있는 은유와 상징이 된다. 은유나 상징은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은유가 명사의 문제라면 단순한 개념의 전이겠지만, 술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논리의 문제가 된다. 논리란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말법이다. 은유는 진리(판단 진리가 아니라 존재론의 진리)의 문제이다. 은유는 새로운 현실을 넘보는 언어이다. 리쾨르가 자주 말하는 은유의 힘이란 '현실'을 말한다. 은유의 해석은 창조적 상상력에서 발현된다. 은유의 넘치는 뜻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다. 은유는 은총(또는 존재) 내지 생명과 연관된다.       은유는 말이면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되어야 할 말이다. 살아있는 은유는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거룩한 존재와 분리되지 않은 경험을 담고 있다. 무의미를 극복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은유는 비유가 아니라 구원의 언어다. 분열을 통합하려는 영혼(지성, 상상, 감성 포함한 정점)의 의지가 시간 체험(현재를 중심으로 미래, 과거, 현재의 분열을 통합)을 구성한다. 언어의 역할은 무의미의 극복(의지) 내지는 구원에 있다. 언어는 할 말에서 생기고, 할 말은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의지다. 다하지 못한 할 말을 품고 있는 말이 은유다. 은유는 그 엉성함 때문에 풍요로운 언어요, 구원의 언어이다. 해석학이 언어 철학의 범주에 드는 것이라면, 리쾨르가 특별히 은유나 상징에 관심을 갖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하여 그에게 있어 은유는 거룩한 존재의 현현을 말하는 우주 상징과 욕망의 기호론이 되는 꿈(또는, 리비도)의 상징을 아우르는 차원을 말한다. 우리가 세상과 우주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면, 세상과 우주 또한 우리를 향해 말하고 싶어한다. 사람이 말로 하면서 세상은 비로소 상징이 된다. 시를 해석하면서 사람은 욕망의 문제를 풀고, 거룩한 체험에 이끌리게 된다.   (1) 리쾨르는 메타포를 계열체가 아닌 통합체의 일종으로 본다. 이는 곧 문장의 배열관계인 맥락에서 메타포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2) 살아있는 은유를 통해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철학이 가능하다. (3) 메타포는 의미의 유사성을 지니는 데 반해, 시는 소리의 유사성을 갖는다.     3. 적용과 분석의 가능성 : 김광섭 시〈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저녁에〉전문   이 시의 특이점은 대상(별)과 주체(나)에 관한 현상학적 태도와 視線에 있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의 이나 에 나타난 서정적 또는 윤리적 차원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주체가 대상을 일방적으로 바라다보는(또는,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대상이 주체를 바라보는(또는, 쳐다보는) 것도 아니다. 이는 그야말로 주체와 대상이 서로 만나는 접점에서 지상의 와 천상의 의 대비contrast가 절묘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 경우 나와 별의 대화, 아니 밤하늘 별을 향한 나의 독백이란 실상 침묵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그런 만큼 말이 배제되어 있으며, 무언의 (별/눈)빛과 침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하는 법. 시가 침묵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침묵을 동경하는 것이라면, 시는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도상에 있게 마련이다. 1연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e로서 '별'은 다른 어떤 낱말의 대체를 불허하며, 死은유dead metaphor로서 피상적인 별이 아니라, 절대적 이미지 내지 살아있는 은유와 상징으로 기능해 있다. 그것은 나의 온생명을 지속적으로 추동하고 관여하며, 새로운 현실을 넘보는 기제로 작용한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 또한 多中一("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의 특별한 인연과 만남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2연의 전반부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깊이(심연) 속에서 주체(자연)와 대상(자아)이 대조의 양상("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사라지는 것이 더 이상의 소멸과 부재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과 나의 밝음과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 함은, 소멸 보다는 離散에 가깝다. 그 기운aura이 우주에 편재해 다름아닌 생명의 홀씨로 거듭나게 된다.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나(인간)와 별(자연/사물)의 관계가 나(인간)와 너(인간)의 관계로 변모하게 된다. 그런 너와 나는 말미에 와서 깊은 반향과 생명의 울림마저 가져오게 되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하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유일의 인격적 주체와 주체 간의 만남이 갖는 가치와 은총 내지 생명의 의미가 보다 강조될 필요가 있다. 무수한 별처럼 무수한 사물과 자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의 全존재를 일깨우고 미적 쾌감을 가져다 주는 절대의 시간이 중요한 것이다. 밤의 시간(또는 정신. 시간은 은유적으로 정신) 속에서 나의 고백은 강한 호소력과 생의 秘義 마저 지닌다. 게다가 詩題 또한 '저녁'이 아니라 '저녁에'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경우 '~에'는 시간과 처소, 진행 방향의 부사어를 나타내는 격조사로 시인의 정신과 사유, 영혼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어 보다 역동성을 지닌다. 만남과 이별이 생명을 가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모티프라면, 그 만남의 순간은 별(빛)의 생생한 은유와 이미지로 영원을 향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천상(은총)의 별은 단순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진리와 언어, 사물의 범주에 포함된다. 사물의 의미와 관련하여 정신의 주된 특징이 실재reality를 알고 이해함에 있다면, 정신은 다른 사물을 아는 힘을 가진 사물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별은 사물의 힘과 창조적 생명의 핵심이다.     4. 은유, 너머의 사유   시를 이해하는 것은 은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은유는 단순한 수사의 차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과 역사, 나와 세계, 존재의 안과 밖에 대한 비산문적, 비일상적, 우회적 언급을 말한다. 시의 이해가 은유의 이해라면, 이는 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은유를 통한 자기 이해, 그것은 결코 평면적이거나 상투적인 해석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창조적 언어와 해석, 내지는 상징과 진리와 구원으로서의 은유, 살아있는 은유를 말한다. 뿐 아니라, 은유는 너머의 사유를 요한다.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환경으로서의 내재성을 요구한다. 내재성이란 초월적인 존재의 인식을 위한 한 방법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말대로라면, 이는 내재성(의 쁠랑plane)에만 내재한다. 사유의 바깥, 사유되지 않는 것에 내재한다. 이는 흡사 우리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내면의 소리/頌歌와도 같다. 존재의 대연쇄(The Great Chain of Being)에서 비롯되는 妙悟한 소리와 華嚴의 세계, 그것이 곧 은유다. (끝)         ■ 참고문헌 양명수,「은유와 구원」,『은유와 환유』, 한국기호학회 편, 1999. 정기철,『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 문예출판사, 2002. 신지영,『내재성이란 무엇인가』, 그린비, 2009. 김영철,『현대시론』, 건국대출판부, 1993. R•G•콜링우드/유원기 역,『자연이라는 개념The Idea of Nature』, 이제이북스, 2004. [출처] 김상환 : 리쾨르의 은유시학|작성자 옥토끼  
31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댓글:  조회:1146  추천:0  2019-02-01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김경린(시인/평론가) 1918-2006.  저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주변 이야기’ 중에서 (요약자/정숙)     포스터모더니즘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상반기를 휩쓸었던 모더니즘의 기본 정신과 그 방법을 알아야 하며 공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시에 과학은 어떻게 접목하는가   ♣모더니즘의 태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 중엽까지 농경사회의 단순성 환경에서 평면적으로 보려는 리얼리즘이 모든 문학. 예술 분야를 지배해 왔지만 세기말에 이르러 영국 산업혁명에 힘입어 재래의 가내 공업으로부터 대량생산을 위주로 산업화 사회를 이루게 되었고, 사물을 보는 시각도 달라져 인간의 마음속 깊이 내재해 있는 제2의 심의의 세계를 발굴하려는 상징주의가 대두되게 되었다.    20세기 과학은 더욱 발전하였고 현대의 문화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인구도 늘어나게 되었다. 인구밀도가 문제시되고 토지이용도가 높아지면서 모든 시설이 입체화됨에 따라 인간이 사물을 보는 시각도 입체성을 띠게 된 것이다.      이에 즈음하여 20세기 제2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피카소의 입체파가 1907년에 프랑스에서, 기계의 역동감을 주축으로 마리네티의 미래파가 이태리에서, 대두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20세기 상반기를 지배해 온 변형의 미학의 기조를 이루는 미학의 원리이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 표현기법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급기야 인간을 대량 살상할 수 있는 무기의 생산을 가능케 하면서 타민족을 정복하려는 정치가들의 야욕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세계1.2차 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지구는 포화 속에 불타고 사람들은 총탄과 파편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현실앞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과학문명에 의한 인간의 불안의식이 대두하면서 모더니즘은 그런 의식을 기본 바탕으로 모든 사물을 지적인 시각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경험을 질서화 하였으며 기법에 있어서도 변형의 미학을 기저에 두면서 추상성을 주축으로 문학. 예술의 세계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모더니즘의 기본 정신과 방법론이 온 지구의 지성인들에게 자극을 주는 결과가 되어 각기 스스로의 전통과 환경 토양에 따라 여러 가지 유파를 파생하게 되었다. *기성 관념의 파괴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려는 다다이즘이 1916년에 스위스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세계를 기저에 두는 초현실주의가 1924년 프랑스에서, *이미지의 입체적인 조형성을 위주로 하는 이미지즘이 1913년 영.미를 중심으로, *시적 언어의 과학적인 분석을 표방하는 러시아 포말리즘이 1915년에 대두하는 등 건축. 회화. 사진. 조각. 음악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구미에서 효시를 이루면서 전 세계로 전파되어 동양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시와 시론' 운동이 1928년에 '신영토'와 'VOU의 운동' 전후 '아레지'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이상의 '오감도' 김기림의 '기상도'가 1936년에, (동인/사화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대한 운동이 1948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더니즘이 순조롭게 서식해 왔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상반기를 송두리째 삼켜버리기라도 하듯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고 타민족을 정복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국가들(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 소련의 사회주의)등은 정치적 야욕을 국민들에게 침투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더니즘을 타락한 예술이라는 지탄으로 탄압하기도 했다. 이에 동조하여 분에 넘치는 영광을 누렸거나 항거하다 생명을 잃은 문학. 예술가도 많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전쟁중인 탓도 있지만 '신영토' 1942년 'VOU'1943년에 친미 문학 단체라며 강제 폐간 시켰다. 동경 유학시절 VOU의 회원이었던 김경린 선생님도 수시로 일본 경찰의 사찰을 받으셨다. 사조가들은 20세기를 모더니즘과 이데올로기의 투쟁사로 규정짓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현상 20세기 하반기에 들어오면서 전쟁 복구가 완료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과학은 더욱 발전되어 인공 두뇌 개발에 즈음하여 정보화 사회에 이르게 되었다.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사회 구조도 다원화와 다중화를 이루게 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현상이 노정되기 시작하였다. 1) 인공 두뇌(컴퓨터)가 인간이 하던 일을 대신 하는데서 오는 인간의 소외감(존재의식) 2) 경제 구조가 대형화되면서 커다란 관리 사회가 가져다 주눈 인간의 개성 상실. 3) 고도의 소비문화가 만연하면서 물질 문명에 대한 욕구와 이에 수반하지 못하는 정신적 불균형  에서 오는 사회악.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모던사회의 특징이라 규정 짓는다면 모더니즘 시대의 종속성이나 서열성과 다른 병렬성과 무서열성의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좀처럼 과학을 인정하지 않던 철학마저도 니체 이후 이를 인정하면서 여러 가지 학설을 낳게 되었다. 프랑스/미셀 푸코. 독일/하버마스. 미국/다니엘 벨 등 이데올로기에 대한 학설들은 하반기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광채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하반기 현상에 대한 방향제시로 자크 데리다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견지에서, 다니엘 벨은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로만 야곱슨은 기호론 견지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속출하였지만 김경린선생님은 프랑스 철학자(파리의제8대학 교수)인 프랑수아 리오타르를 가장 꼽았다. 그 이유로 프랑수아 저서(포스트모던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 1979)의 서두에 "고도로 발전한 선진사회에 있어서의 지知의 상태를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용어는 현 미국 대륙의 사회학자와 비평가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19세기말기에 시작되어 과학과 문학. 예술의 게임 규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의 또 다른 저서(포스트모던 통신 La postmoderne exqlique aux enfants 1986)에서  "포스트모던이란 모던의 내부에 있어서 제시상提示像 그 자체 속에 제시가 불가능한 것을 찾아내려는 그 무엇인가일 것이다" 불가능한 것에의 노스탈자를 공유하는 것을 용허하는 것과 같은 취미의 컨센서스의 입장에서 새로운 여러 가지 제시,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제시할 수 없는 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하게끔 하기 위하여 찾아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으로서는 찾아낼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표출하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해석이다.    ♣모더니즘의 공과 그렇다면 그동안 모더니즘의 공과에 대해서 규명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바 방법론이 도출되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모더니즘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기저로 무의식세계의 (초현실주의), 이미지의 입체적 조형성(이미지즘), 기성 관념의 연상 파괴(다다이즘), 시적 언어의 발굴(러시아 포말리즘) 등에 크나큰 공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물을 지적인 시각에서 관찰한 나머지 서정성과 휴머니즘을 배제한 데서 시의 세계를 건조하게 만들었으며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지나친 은유의 편중으로 독자로 하여금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 시의 라인을 지나치게 응축함으로써 난해성을 초래하여 독자와 커뮤니케이션에 장해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추상성에 의한 미지의 미학에 매력은 있다손 치더라도 극단의 엘리트 의식으로 흘렀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런 의식으로는 오늘의 복잡다기한 포스트모던 사회를 더 이상 모더니즘 기법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모색 의식적인 면에서는 과학문명의 발달에 의한 인간의 소외의식을 바탕으로 1)아무런 기성 관념없이 현대적인 시각에서 직시하며, 2)거기에서 얻어지는 경험을 질서화함에 있어서도 현장감을 중요시하며, 3)소재면에서도 자잘한 일상 생활에서의 이벤트. 공해로 인한 환경문제에 대한 에콜로지와 페미니즘문제. 우주개발에 수반되는 우주관에 대한 관심.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4)이미지 구성면에서도 지나친 응출성을 배제하고 이미지군에 연계 작용에 의한 매크로이미지 세계를 구축하면서 작자의 현대적인 시각에서의 메시지를 깔아보자는 것이다. 5)표출기법에 있어서도 재래의 시적인 신택스를 해체한 다음 새로운 신택스로서의 참신성을 위해 언어의 기호론에도 관심을 가지며 대화체로 발전시켜 보자는 것이다.   최근에 급속히 대두되는 시낭송과도 관련지으려는 의도도 깔려있다. 모더니즘시가 은유에 편중되어 있는 대신 직유. 은유. 환유. 제유. 등을 적절히 혼용하면서 새로운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뉴리얼리즘으로서 언어의 신선감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스위스에서 1953년에 구체시의 새로운 구문에 대한 관심과 미국에서 60년대에 대두한 (투사시/비트파운동), 70년대의(페미니즘) 80년대의(미니멀리즘)등이 세계적인 영향을 받았다. 오늘과 같은 국제사회에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출처] 알기쉬운/포스트모더니즘 시론|작성자 옥토끼  
30    새로운 시 쓰기의 고찰 / 예술학 석사 박연복 댓글:  조회:974  추천:0  2019-02-01
새로운 시 쓰기의 고찰    예술학 석사      박연복                                                                                                                         나는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시를 맛이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멋스럽지 않게 반응 할 것이다. 시가 무슨 음식이냐는 식일 것이다 그 도 그럴 것이 맛이라는 그 단어 자체가 시라는 단어와 쉽게 어우러지지 않기 때문에 생소하고 조급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좀더 넓고 깊고 형이상학적으로 드려다 보면 그렇게도 잘 어우리는 단어가 없을 상 싶어 이를 종종 사용해 왔다. 우리가 먹는 일상의 음식이 맛이 나지 않으면 먹으려 들지 않듯 시도 맛이 나지 않으면 읽으려 들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무서운 존재자는 독자들이기 때문에 그 시를 쓰는 작가는 그 글을 읽는 독자를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더 좋은 작품을, 독자들에겐 사랑받는 시를 쓰려고 혼신의 노력을 한다. 조리사가 한 황홀한 맛과 보기에도 아름다운 음식을 빗어내기 위해 노력하듯이 작가도 매양 그렇게 한다. 그러자면 시인은 옛 법에 따라(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모방과 모사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시적 변용과 시적 도구, 또는 새로운 기법을 연구하고 만들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려고 들 것이다. 시 쓰기는 이런 방법으로 출발 한다. 그러므로 시 쓰기에 필요한 언어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사실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상상을 초월할 수 있는 감성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그래서 시 쓰기란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 한다. 그래야만 시로써 독자들에게 그 본 뜻을 들어 내 보여주게 되며 충격적인 감동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1. 시는 그냥 써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이 그 대가를 필요로 하듯이 시 쓰기에도 그럴만한 대가를 요구받는다. 그 것은 새로움과 낯설음, 삐딱하게 보기다. 김소월의 산유화는 일제 강점기에 쓰여 졌다. 그러므로 시대적 배경과 문화가 존재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해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시가 그와 같이 형식과 내용으로 쓰여 진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를 확보 할 수 있을 것이고 읽혀질지 의문스럽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서구적인 시풍에만 의존하려는 것도 우선 경계되어야 하지만 동양적인 것, 그리고 인접하고 있는 가까운 나라의 시풍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시 쓰기가 어느 한쪽 형식과 내용으로 치우쳐 편중되는 일은 더더욱 없도록 노력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시는 삶의 거울이며 나를 또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해 내보이는 작업이다. 시들어 가는 풀잎 하나에도, 그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데도 철학이 있듯 우리가 인식 되어지는 세계는 우리를 바로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에 쓰고 싶거든 어떤 소재이던지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던지 가리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써라. 그러게 하면 당신은 새로운 삶의 행복과 글쓰기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예시를 한번 감상해보기로 하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도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은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서정주님의에서-       2. 감정의 형상화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     T.S 엘리엇은 주지주의에서 “지성을 존중하고 감성을 억제하는 노력은 자신이 한다.”라고 말했듯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을 내면으로부터 외연으로 들어내는 작업도 쉽지 않다. 사랑하고 이별하는 문제, 슬프고 기쁨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해서 정서화 하는 문제, 죽고 사는 철학적인 것과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도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등나무에 하얀 눈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는 것을 이른 아침에 보았다고 치자, 그 것을 보는 순간 누구나 똑같은 감정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일상적인 일로 보아 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막연하게 연민의 정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껴안고 즐거움과 슬픔과 괴로움을 고뇌할 것이다. 왜일까? 그것은 사물을 보는 시각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서로 자라난 환경과 문화가 달라 그 느낌의 깊이와 정도의 차이가 다른데서 오는 문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식 정도와 세계를 보고 느끼는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측면과 육체적인 결함에서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시를 쓰려는 사람은 삶 그 자체를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곧 시를 쓰는 배우려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자세다. 이럴 때만이 자기의 감정 속에 자신의 의식을 녹아내려 아름다운 이야기와 훌륭한 이미지를 내연에서 외연으로 끄집어내 감동적인 작품을 써 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경험이 곧 시라고 하는데도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 개미들을 위하여 6월은 연분홍 잠옷 속에 있는 소녀의     이마 위에서 푸른 6월은 총살되고            -전봉건의에서-         3. 동심을 가져라     어린이는 쪽빛 하늘을 바라볼 때, 그 하늘이 어떤 하늘인가 하는 물음 이전에 하늘을 자기 눈 안으로 들어 온 그림 그대로의 하늘로 본다. 여기에 어떠한 사상이나 철학을 그들은 가감하지 않는다. 이것은 동심의 그대이며 더러움이 묻지 않은 깨끗함 그대로의 심성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파란 하늘과 푸른 하늘을 구별하고 구름이 낀 하늘과 새털구름의 하늘을 구별하여 자신의 생각과 이데 오르기 을 접목 시킨다. 그들의 사고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어린이는 한 마리의 개미를 보게 되면 동화 속에 나오는 부지런한 개미를 연상 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성적 논리에서 오는 이성적 어긋남이다. 시를 쓰기를 원환다면 이런 생각보다는 티 없이 맑은 가슴과 눈을 가진 아이를 닮아야 한다. 그래야 시가 맑은 호수와 같다. 그 뿐이fi. 어린이들은 창조적인 상상력과 미래를 생각하는 원만함이 있다. 그들의 꿈이야 말로 곧 세계이자 그 세계가 시가 된다. 꿈은 곧 미래를 상징한다. 참신한 상상력은 글의 원동력이 된다. 길섶 민들레는 키가 작다고 해서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아도 제일 먼저 봄을 알리기 위해 샛노란 꽃을 피운다. 그 길고 모진 겨울을 견디고 제일 먼저 봄의 화신이 되는 것처럼 좋은 시를 쓰고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우린 작은 이 꽃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매화 잔치는 끝난 줄 알았는데     쏟아지고 있었다 동백처럼 뭉텅뭉텅 나의 하늘임이 목련 같은 실바람 곁에     아침, 꽃잎을 처음 열려는 박미 마을에 개나리가                         * 이글은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 박미: 서울 금천구 시흥3동 금천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의 옛 이름                            -박연복의에서-         4. 삐딱하게 보기     가) 패스타쉬의 기법     언어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매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상적인 사실 언어(과학언어)가 있고 다른 하나는 문학을 위한 감성이 풍부한 감성언어가 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과학언어보다는 시적언어(감성언어)를 쓴다. 그렇다고 해서 한 편의 시 속에 일상 언어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시를 쓰기 위해선 시적 요소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소설이나 수필을 쓰듯 배경과 인물, 행동의 삼요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시는 그런 논리적인 체제를 탈피하고 자유스럽게 쓰기를 원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전자와 같이 복잡하지 않다. 다만 시적 언어는 그 언어적 구조와 기능이 소설이나 수필 또는 희곡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것은 시에는 리듬(음악성)과 은유(비유), 상징, 아이러니, 원형 이미지, 등과 같은 시적 도구가 있는가 하면, 삐딱하게 보기, 낯설게 하기, 패쉬타쉬, 등의 기묘한 표현 방법도 있지만 소설이나 수필은 그렇지 않다. 앞부분에서 언급한 제 요소들은 시간과 지면 관계로 생략하고 여기선 “삐딱하게 보기”만 다루기로 하겠다. 이 기법은 꼭 그렇게 활용해야만 시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기법상의 훌륭함이며 이를 활용해 창작된 작품 자체가 맛나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 비판을 가해야 할 부분엔 이 이상 더 좋은 기법이 없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자는 것일 뿐이다. 현대 사회는 전자산업의 획기적인 발달로 그 매체를 이용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곧 언어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언어의 해체는 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다. 언어의 절대적인 논리는 객관적으로 의심받기 시작했고, 언제부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객관적 진실 찾기에서 주관적인 진실 찾기 패턴으로 돌아가기 시작 했다. 바로 언어를 삐딱하게 활용해보자는 것이다. 언어를 삐딱하게 보자는 것은 사회적 사건들을 삐뚤어지게 보자는 의미도 된다. 문학에서는 그것이 인유나 페러디, 혼성보방 등으로 변질되어갔다. 삐뚤어지게 보기와 패스 타쉬는 인유(引喩)가 그 본질이다. 인유법은 유명한 시나 문장, 어구 등을 끌어다 자신의 표현으로 대신하는 기법을 말한다.      그럼 시 한편을 보기로 한다.     그러한 실예를 나의 가친의 경우에서 보았습니다. 그가 88세를 끝으로 5년 전 지구 밖으로 떠나야 할 대, 그이 자산은 6억 정도는 되었지만 후처인 Y씨에게 모든 거슬 유산으로 주었으면 하는 의사를 비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재혼해 온지 24년은 됐고 서로가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임종할 때의 모든 일을 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들은 아버지의 유지에 다라서 그의 모든 것들이 계모에게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녀가 도밭아서 하는 모습은 사랑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움이었습     또한 그와 비슷한 예를 미국의 베스트셀러의 소설인(the bridge df madison county)에서도 보았습 니다. 사진작가인 주인공이 취재차 그 유명한 매디슨 고을 다리에 갔을 때, 그를 안내해 주었던 유부녀와의 사을 동안의 열애를 잊지 못한 나머지, 독신으로 일생을 보낸 끝에 자기의 모든 유물을 유 언 집행 대리관을 통하여 그녀에게 보내는 광경은 참으로 감동적 이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도 마음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라이야 말로 참으로 아름답다는 실예이기도 한 것입니다.                                  - 김경린의< 사라의 선물과 아버지 유산>에서-        나) 비틀어 짜기의 기법     비틀어 짜기의 기법은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논리성을 부정하므로 새로움과 낯설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언어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은 언어의 비 논리성을 시 창작에 활용한다는 것이 된다. 이는 언어의 본질 중 지시기능을 초월하지는 의미다. 즉 언어의 모순이다. 또 언어의 모순은 관념에서 일탈 해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비틀어 짜기의 기법은 최대한의 언어 모순이 일어났을 때 성공한다. 이 방법을 개그 쪽에서도 많이 활용한다. 곤 역설적이어야만 흥미를 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러니의 기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웃기는 행위란 진실을 사실적 언어만 웃길 순 없다. 그것은 반듯이 언어의 비대칭적인 관계나 비정상적인(비틀어진) 어법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된다. 이것이 언어의 비틀어 짜기다. 시의 장르에서도 이 기법을 활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가 초월이어야 한다. 언어의 초월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낸다.                                   그럼 예시를 보기로 한다.                             처 죽일 놈의 오월, 환희의실록은심장을이렇게미치게한다 잔디처럼 납작 엎드린 초록의 신들이 바람가지에 가랑가랑 매달려 어깨를 욱실욱실 쑤셔댄다 홀딱 발가벗은 태양 말고도 허였게 맑아버린 내 육신이 더 무섭다 돈이라고는 고작 천원자리 두장뿐인데 손님커녕 전화 한번 진종일 걸려들지 않는다 내일은라면을사야할일이다 지난 아이엠에프 때도 이렇진 안했다 그래도 나줏손 무렵 흐릿한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 마실 수 있는 꿀벌 똥구 만큼의 여유쯤 있었다 처 죽일 놈의 오월, 불행한실록은이렇게미쳐버리게한다 집세줄날이돌아온다 벼락 같이 주인이 달려올 터이다 콘크리트같은 내얇은주둥이를꿰매어놓을일만남았을터이다                                     박연복의에서     누구나 시를 잘 써 보려고 한다. 그러나 마음뿐이지 막상 작업에 들어가면 무엇을 쓸까 망설이다 하루해를 다 보낸다. 그것은 시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자신의 이성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편안한 마음에서 써야한다. 무엇을 쓸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쉽게 시에 다가갈 수 있을까가 더 중요 하다. 시는 삶의 경험을 쓰는 것이다. 그 삶이 거짓이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말할 때 진정한 시로서 보이는 것이다. 진실한 사건을 언어라는 기호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시적 응용과 변용이 따르는 것이며 위에서 거론한바와 같은 기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시는 일상의 활용 언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변용된 언어와 비유된 언어, 상징된 언어들을 차용한다. 시가 좋다 시가 맛이 있다, 그 시 훌륭하다고 할 때는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은 시적 도구를 잘 활용한 탓이기도 하다. 시는 언제나 가볍게 써라,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어라, 가급적 사건은 한 가지만 다뤄라, 매미의 울음소리에도 눈을 기우여라, 그리고 아무것이나 무조건 써라, 연필로 써라, 내용은 어쩌던 길게 써라, 지금은 산문의 시대다 가급적이면 그렇게 하라. 이렇게 하면 자신의 시적 진실을 새로운 시적언어로 아름다운 낯선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리라.                                                          -끝-   시인 박연복 (홈바로가기) [출처] 새로운 시 쓰기의 고찰 / 예술학 석사 박연복|작성자 옥토끼  
29    의식과 무의식 – 의식의 주인은 무의식 댓글:  조회:985  추천:0  2019-02-01
  출처 방정민(hobero338)의 블로그 | 수풀넷 원문 http://blog.naver.com/hobero338/220699340656 3. 의식과 무의식 – 의식의 주인은 무의식   인간 행동이나 성격의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무의식은 직접 알 수는 없지만 행동으로 추론될 수 있다. 무의식에 대한 임상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무의식적 욕구, 소망, 갈등의 상징적 표상인 꿈, (2) 말의 실수나 친숙한 이름 등의 망각, (3) 후최면 암시, (4) 자유연상으로부터 도출된 자료, (5) 투사법으로부터 도출된 자료, (6) 정신증적 증상의 상징적 내용. 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무의식에는 모든 경험, 기억, 억압된 재료들이 저장되어 있다. 접근할 수 없는, 즉 의식영역 밖에 있는 욕구나 동기는 의식적 조절 밖에 있다. 대부분 심리적 기능은 의식 영역 밖에 존재한다. 동기를 의식할 수 있을 때만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적 치료의 목표는 무의식적 동기를 의식화하는 것이다. 무의식적 과정들은 모든 신경증적 증상이나 행동의 근원이다. 정신분석적 치료는 증상의 의미, 행동의 원인, 건강하게 기능하는 것을 방해하는 억압된 재료들을 밝히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지적 통찰만으로 해결되지 않고, 내담자의 전이왜곡의 훈습을 통해 직면시켜야 한다.   내 안에 있는, 나도 모르는 부분, 그것이 바로 무의식이다. 의식의 쌍둥이 같은 존재이면서 의식의 구박과 박대를 받아 언제나 의식의 뒤에 숨어 있는 무의식, 그러나 그러다가도 엉뚱하게 자신의 존재를 밖으로 불쑥 드러내곤 해서 우리를 당혹케 하는 무의식, 무의식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 오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과 의사로서 배운 최면술 덕분이었다. 최면술을 걸어 의식을 빼앗아야만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 기억, 그것을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 불렀다. 의식을 잃는 경우는 최면술 외에도 최소한 세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죽는 것,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의식도, 무의식도 모두 사라지므로 논외다. 또 하나는 술이나 마약 같은 약물의 힘에 취하는 것, 그러나 이 경우에는 대개 무의식이라기보다는 환각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은 기절하는 것 혹은 잠드는 것인데, 이것이 무의식을 경험하는 기회다. 잠이 들면 꿈을 꾼다. 그런데 이 꿈은 의식의 소유자가 마음대로 내용을 선택하고 채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의 발현이라 여기고 꿈에서 나타난 상징을 해석하고자 했다. 흔히 말하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 인사 나눈 사람 이름을 잊었다가 우연히 생각해 낸다든가, 아침에 흥얼거리던 노래 곡조가 오후에 다시 생각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은 잠재의식과 연관되는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전의식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의식의 일부이며 의식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에 반해 무의식은 의식의 일부가 아니며, 의식에 의해 억압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의식에 대해 대립적이다. 프로이트는 잠재의식과 달리 무의식은 의식으로 전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의식은 의식만큼이나, 아니 의식보다 더 체계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그때까지 사람들이 자기 사고의 전부라고 생각해 왔던 의식이 사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오히려 의식의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무의식이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더구나 그는 무의식도 의식처럼 나름대로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욕구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무의식 역시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무의식은 의식에 비해 비체계적이고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또한 그렇게 때문에 무의식은 꿈이나 농담, 실언 등 우연적인 계기를 통해 그 존재의 징후를 드러내는 것이다. 무의식의 지위를 의식 이상으로 격상시키려면 무의식도 의식 못지않게 체계성을 지닌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다음 과제는 무의식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충동과 감정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는 이드(id: 라틴어로 ‘그것’이라는 뜻이다. 즉 정체불명이라는 의미이다)다. 또 하나는 도덕적, 사회적 질서가 내면화되어 있는 초자아(superego)인데, 이것은 이드를 억압하는 역할을 한다. 무의식을 이루는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다투고 대립하는 긴장관계에 있는데, 이런 상태가 마냥 지속된다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박살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를 완화하고 조절하는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해진다. 이것이 곧 자아(ego)인데, 이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에 속한다. 프로이트는 이드의 에너지가 특히 성욕에 집중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의 극단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른바 외디푸스 콤플렉스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이 바로 외디푸스 콤플렉스다. 데카르트 이래 자아의 동일성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일단 자아를 선험적으로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만 근대의 철학과 학문은 가능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그런 선험적 자아의 환상을 무참히 깨부순다. 우선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근대 철학의 출발점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나도 모르는 나, 나도 모르게 하는 나의 행동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인간 주체를 분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무의식이 의식의 수면 아래에 거대한 빙산처럼 잠겨있다는 사실은 의식을 기준으로 주체를 구성한 근대적 관점을 아예 초토화시킨다. 나도 모르는 나,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 오히려 더욱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면, 투명하고 자명한 나에 기초한 근대 철학이 설 땅은 이미 없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무의식을 정립하면서 자연히 뒤따르게 된 이 명제는 이후에 ‘그럼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구조주의자들은 그것을 ‘구조’라고 보았으며, 프로이트의 뒤를 이은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그것을 언어라고 보았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20세기 지성사에 컨 영향을 미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엄청난 반발에 시달렸다. 그것은 바로 무의식도 의식을 통해 말해질 수밖에 없다는 모순, 즉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말로 할 수밖에 없다는 무의식과 의식의 모순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4) ​                               ..................................................................................   4)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 개념은 아마 ‘무의식’일 것이다. 이 개념은 프로이트가 최초로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그 의미는 고대 그리스철학자들도 언급했다고 하고, 특히 니체가 현상학자들도 주목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너무 흔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상 그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전문가라 해도 거의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독일어의 Unbewuβte, 영어 Unconscious를 우리말로 일반적으로는 무의식(無意識)이라고 변역하는데, 프로이트 전문가라 하는 이무석 박사는 자신의 논문이나 책에서 비의식(非意識)이라고 표현한다.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Unconscious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면서 쓰거나, 아니면 한자를 모르고 쓰거나 둘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면 정말 무의식이 있냐 하는 것이다. 최근 뇌과학이 발달하고 있지만 이쪽 분야가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뇌를 완전히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튼 개념적으로만 설명하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의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무석 박사의 표현인 비의식이 맞다. 왜냐하면 한자의 ‘비’(非)와 ‘무’(無)는 비슷하게 ‘아니다’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있지만 철학적 의미는 완전 다르다. ‘비(非)’자는 단순 부정이다. 다음에 오는 단어를 단순 부정하는 단어로 쓰이기 때문에 비의식이라고 하면 의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무(無)’자는 철학적 단어로 그 의미가 상당히 복잡하다. 단순 부정이 아니라 다음에 오는 단어의 근원적 존재(자)가 된다는 의미다. 즉 무의식이라고 하면 의식의 근원적 존재가 바로 ‘무(의식)’라는 것이다. 무사상은 특히 노자의 사상에서 두드러지는데, 노자의 무는 유의 원인이 아니다. 무가 유를 생기하게 한다는 사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이고도 존재론적인 표현인데, 무가 유를 창조한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자기 안에 유가 이미 내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근거라는 것이다. 무가 유를 생산한 원인이 아니라 무의 바탕 안에 이미 유의 무늬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말한다. 즉 허공의 무가 그릇과 바퀴살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그릇과 바퀴살의 유용함은 그것이 비워있어서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릇과 바퀴살을 만든 원인은 외부에 있는 장인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존재론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은 바로 무라는 것이다. 집이 집이 되는 존재론적 근거는 그 집을 생산한 목수(집이 집이 되게 한 원인이 됨)가 아니라, 그 집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허공인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죽기 직전 무의식은 없다고 고백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의식도 제대로 모르면서 함부로 무의식을 언급하는 것은 큰 오류의 가능성을 늘 안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 또는 의식을 총 8식으로 나눈다.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말나식, 특히 아뢰야식은 심층의 근저에 도달하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무의식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오하다. 우리 수업 부재인, ‘시각경험과 이미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프로이트는 신경증의 원인을 파헤치면서 성욕의 억압이 환상으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매 맞는 아이’는 결국 왜곡된 성욕의 환상(시각 이미지)인 셈이다. 가령, 들뢰즈의 ‘시뮬라크르’처럼 진정한 자기 존재가 아닌 복제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복제물이 왜곡된 환상(이미지)-이것은 가짜임-이라 할지라도 자기 지속성과 동일성, 내지 정체성을 확립해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아는 아니므로 진리(그 아이의 정체성 내지 성적 욕구)를 알기 위해 복제물인 시뮬라크르, 즉 ‘매 맞는 아이의 환상’, 이 시각 이미지를 잘 분석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출처] [공유] 3. 의식과 무의식 – 의식의 주인은 무의식|작성자 옥토끼  
28    정민교수의 한시 이야기 댓글:  조회:1797  추천:0  2019-01-31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1) 사람들은 왜 시를 짓고 시를 읽을까? 그냥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는 말과 시에서 쓰는 표현은 어쩐지 조금 달라 보인다.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어떤 풍경이나 느낌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우리가 그냥 주고받는 표현 속에는 이런 느낌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와 문학 작품 속에서 쓰는 언어는 어떻게 다를까? 다음 예화를 통해 알아보자.   옛날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 노자의 스승은 상용이란 사람이었다. 스승은 늙고 병들어 이제 곧 숨을 거두려고 하였다. 노자는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가르쳐 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고향을 지나갈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가거라. 알겠느냐?” 노자가 대답했다. “네! 선생님! 어디에서 살더라도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수레에서 내려서 걸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나온 예의 바른 행동이다. 그래서 노자는 스승의 엉뚱해 보이는 말을 듣고 이렇게 알아들었던 것이다. 스승이 다시 말했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날 때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거라. 알겠느냐?” 노자가 바로 대답했다. “네! 선생님.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씀이시지요?” 높은 나무는 그 숲에서 가장 키가 크고 나이가 많은 나무다. 종종걸음은 걸음의 폭을 짧게 해서 어른이나 임금님 앞을 지날 적에 걷는 걸음걸이이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나갈 때 종종걸음으로 가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노자는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으로 금세 바꾸어서 알아들었다. 이번에는 스승이 입을 크게 벌렸다. “내 입속을 보거라. 내 혀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이가 있느냐?” 상용은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빨이 다 빠지고 없었다. “하나도 없습니다. 선생님!” 스승은 곧바로 제자에게 말했다. “알겠느냐?” 노자는 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겠습니다. 이빨처럼 딱딱하고 강한 것은 먼저 없어지고, 혀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 남는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자 스승은 돌아누웠다. “천하의 일을 다 말하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구나.” 이빨은 딱딱하고 굳센 것인데 먼저 없어져 버렸다. 혀는 부드럽고 약한 것인데 남아 있었다. 상용이 혀와 이빨을 차례로 보여 준 것은 부드럽게 남을 감싸고, 약한 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오랫동안 복을 받고 잘 살 수가 있고, 제 힘만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얼마 못 가서 망하고 만다는 뜻이었다.   상용이 말한 것을 정리해 보면 고향을 잊지 말고, 어른을 공경하며,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기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렇게 직접 말하면 될 것을 가지고 상용은 일부러 빙빙 돌려서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왜 상용은 직접 말하지 않고 일부러 어렵게 돌려서 이야기했을까? 사실 상용이 이 말을 직접 했다면 그것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는 싱거운 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대신에 상용은 직접 입을 벌려서 혀를 보여 주고 또 이빨을 보여 준 후, “알겠느냐?” 하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평범한 교훈을 늘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인상 깊게 심어 줄 수가 있었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라는 것은 상용의 말처럼 직접 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돌려서 말하고 감춰서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돌려서 말하고 감춰서 말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느낌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느낌과 깨달음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오래 마음 속에 남는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5-1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1)|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2)   한시에서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을까? 이제 직접 한시를 한 수 감상해 보기로 하자.   흰둥개가 앞서 가고 누렁이가 따라가는                  白犬前行黃犬隨(백견전행황견수) 들밭 풀 가에는 무덤들이 늘어섰네.                       野田草際塚纍纍(야전초제총누루) 제사 마친 할아버지는 밭두둑 길에서                     老翁祭罷田間道(노옹제파전간도) 저물녘에 손주의 부축 받고 취해서 돌아온다.          日暮醉歸扶小兒(일모취귀부소아)   - ‘제총요(祭塚謠)무덤에서 제사지내는 노래’ 전문   조선 중기의 이달이라는 시인의 작품이다. 이 시의 제목은 이다. 시 속의 광경을 먼저 살펴보자. 먼저 첫 번째 구절에는 흰 강아지와 누렁 강아지 두 마리가 나온다. 흰 강아지가 앞장서서 뛰어가고 누렁 강아지가 뒤질세라 멍멍 짖으며 그 뒤를 따라간다. 밭들이 옹기종기 펼쳐진 풀밭 가에는 무덤들이 굉장히 많다. 거기에 어떤 할아버지가 손자와 함께 개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세 번째 구절에는 ‘제사를 마쳤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할아버지는 그 풀밭 가에는 많은 무덤들 가운데 어느 한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시간은 땅거미가 밀려드는 저물녘이다. 할아버지는 술에 취하셨다. 술 취한 할아버지가 자꾸 비틀거리시니까 옆에 있던 손자가 걱정이 되는지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다. 자!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시 속의 풍경을 그림으로 떠올려 보자. 강아지 두 마리와 밭두둑이 보이고 무덤들도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손자.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지나가는가? 우리는 지금도 추석 때나 한식날이 되면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간다. 지금 할아버지와 손자는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기에는 위 시의 내용이 왠지 너무 심심하다. 할아버지가 손자와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성묘를 갔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과연 위의 시에서 시인이 말하려고 한 것은 이것이 전부일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몇 가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무얼까? 우선 왜 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와 손자만 성묘를 갔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왜 산 위도 아니고 밭두둑 가에 있는 풀밭에 무덤이 많다고 했을까? 보통 풀밭에는 무덤을 쓰지 않는데 말이다. 또 할아버지는 왜 술에 취했을까? 저물녘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무덤 옆을 떠나지 못했던 걸까? 이런 의문을 품고 이 시를 새로 읽어 보면, 앞서 와는 다른 느낌이 일어난다. 이 시는 그냥 단순히 조상의 성묘를 갔다 온 장면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와 손자가 제사를 지낸 사람을 누구였을까? 증조할아버지? 아니면 고조할아버지? 그도 아니라면 할머니였을까? 그렇지가 않다. 두 사람이 제사를 지낸 주인공을 바로 시 속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손자의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밭두둑 옆 풀밭에는 왜 그렇게 무덤이 많았던 걸까? 아마도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것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모양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양지바른 산 위에다 묻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도 전쟁 같은 천재지변을 만나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데리고 아들의 산소에 성묘하러 왔다. 무덤에 돋은 풀을 뽑고, 술을 부어 한 잔 따라 주고 나니까 죽은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차마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하루 종일 무덤 옆에 앉아서 속이 상해 술을 마셨다. 강아지를 두 마리나 데리고 간 것으로 보아, 무덤이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사정도 알 수 있다. 이 시를 지는 이달은 조선 시대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했던 시인이었다. 이런 정보를 가지고 시를 다시 읽어 보면, 좀 더 깊이 있게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에 쳐들어온 왜적에게 죽음을 당했고, 이 때 온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억울한 희생을 당했다. 한식날 할아버지는 아들이 남긴 하나뿐인 혈육인 손자를 데리고 죽은 아들의 무덤을 찾아왔다. 하루 종일 슬픔에 잠겨 있던 할아버지는 제사를 지내려고 가지고 간 술을 혼자 다 마셔서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손자는 나이가 어려서 할아버지의 슬픔을 잘 알지 못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별로 없다. 오늘따라 할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싶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올려다볼 뿐이다. 이렇게 한 편의 시를 곰곰이 따져서 읽어 보면, 처음 별생각 없이 시를 읽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았다. 시인이 이 시 속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얼까?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쟁이 가져다준 뜻하지 않은 죽음과 그 죽음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긴 깊은 상처였다. 그러나 시인 말하려고 했던 이런 의미는 꼼꼼히 따져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위의 시를 읽고서 그냥 한식날 성묘 간 일만 생각했다면 이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쓰는 말은 금세 이해할 수 있고 또 다른 생각이 필요 없다. 그러나 시에서 쓰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여 한다. 대충 겉만 보아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것이 시를 읽는 재미이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8-24.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2>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2)|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옛날부터 그림과 시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시는 모양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소리가 없는 시라는 말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림 이야기를 통해 시를 이해하는 공부를 해보기로 하자.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서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이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고 시 속에 숨겨둔 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것은 숨은그림찾기 또는 보물찾기놀이와도 비슷하다. 이 점은 화가도 마찬가지다. 화가는 풍경을 그리거나 정물화를 그린다. 이때 화가는 화면 속에 자신의 느낌을 직접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림은 사진과는 다르다. 화가는 색채나 풍경의 표정을 통해 자기 생각을 담는다. 이제부터 살펴볼 몇 가지 이야기는 그림이 시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잘 보여준다.   옛날 중국의 송나라에 휘종 황제란 분이 있었다. 그는 그림을 너무 사랑했다. 그림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훌륭한 화가였다. 휘종 황제는 자주 궁중의 화가들을 모아 놓고 그림 대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황제는 직접 그림의 제목을 정했다. 그 제목은 보통 유명한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한번은 이런 제목이 걸렸다.   꽃을 밝고 돌아가니 말발굽에서 향기가 난다.   말을 타고 꽃밭을 지나가니까 말발굽에서 꽃향기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황제는 화가들에게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한 것이다. 꽃향기는 코로 맡아서 아는 것이지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보이지도 않는 향기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화가들은 모두 고민에 빠졌다. 꽃이나 말을 그리라고 한다면 어렵지 않겠는데,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만은 도저히 그려 볼 수가 없었다. 모두들 그림에 손을 못 대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젊은 화가가 그림을 제출하였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 사람의 그림 위로 쏠렸다. 말 한 마리가 달려가는데 그 꽁무니를 나비 떼가 뒤쫓아 가는 그림이었다.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나비 떼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젊은 화가는 말을 따라가는 나비 떼로 꽃향기를 표현했다. 이런 것을 한시에서는 ‘입상진의(立象盡意)’라고 한다. 이 말은 ‘형상을 세워서 나타내려는 뜻을 전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나비 떼라는 형상으로 말밥굽에 묻은 향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을 시에서는 이미지(image)라는 말로 표현한다. 시인은 결코 직접 말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통해서 말한다.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다시 휘종 황제의 그림 대회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이번에는 이런 제목이 주어졌다.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추었다.   절을 그려야 하지만 감춰져 있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화가들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그려야 할까? 한참을 끙끙대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대부분 산을 그려 놓고, 그 숲 속 나무 사이로 절 집의 지붕이 희미하게 비치거나, 숲 위로 절의 탑이 삐죽 솟아 있는 풍경이었다. 황제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 한 화가가 그림을 제출했다. 그런데 그가 제출한 그림은 다른 화가의 것과 달랐다. 우선 화면 어디에도 절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깊은 산속 작은 오솔길에 웬 스님 한 분이 물동이를 이고서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 놓았을 뿐이었다. 황제는 그제야 흡족한 표정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이 화가에게 1등 상을 주겠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제가 설명했다. “자! 이 그림을 보아라. 내가 그리라고 한 것은 산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절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라고 했는데, 다른 화가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절의 지붕이나 탑을 그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절을 그리는 대신 물을 길으러 나온 스님을 그렸구나.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산이 너무 깊어서 절이 보이지 않는 게로구나. 그가 비록 절을 그리지 않았지만, 물을 길으러 나온 스님만 보고도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이 내가 이 그림에 1등을 주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그제야 황제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화가는 절을 그리지 않으면서 절을 그리는 방법을 알았다. 화가가 그리지 않으면서 절을 그렸다. 시인은 말하지 않고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한다. 따지고 보면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이제 위의 그림과 비슷한 한시를 한 수 감상해 보자.   약초 캐다 어느새 길을 잃었지 천 봉우리 가을 잎 덮인 속에서. 산 스님이 물을 길어 돌아가더니 숲 끝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일어난다.   율곡 이이 선생의 이란 작품이다. 단풍이 물들고 나더니 어느새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어떤 사람이 망태기를 들고 낙엽 쌓인 산속에서 약초를 캔다. 여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약초가 낙엽을 들추자 여기저기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때는 볼 수 없던 귀한 약초들도 많다. 정신없이 약초를 캐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길에서 한참이나 들어온 가을 산속이다. 낙엽은 어느새 무릎까지 쌓여 오고, 조금 전 자기가 올라온 길이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다. 약초꾼은 그만 털컹 겁이 난다. 어느새 해도 뉘엿뉘엿해졌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는데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방향을 알 수가 없다. 덮어놓고 내려가다가 낭떠러지가 나오면 어쩌나? 길을 잘못 들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어쩌지? 이러다가 밤이 되면 산짐승들이 내려올 텐데 어찌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저 건너편 숲 사이로 희끗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하도 반가워 자세히 살펴보니 웬 스님 한 분이 물동이에 물을 길어 가고 있다. 스님의 모습은 금세 숲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저리로 가면 스님이 계신 암자가 나올까? 혹시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짧은 시간에도 생각은 어지럽기만 하다. 바로 그때다. 스님이 사라진 숲 저편 너머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좀 전에 물을 길어 간 스님이 낙엽을 태워 찻물을 끓이고 있는 모양이다. 약초꾼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반가웠겠다. 마치 스님이 약초꾼의 다급한 마음을 알아서 신호탄을 쏘아 올린 듯한 느낌까지 들었을 것 같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 어서 가서 스님에게 차 한 잔을 얻어 마셔야지. 하루 종일 캔 약초로 망태기는 이미 묵직하다. 하지만 발걸음이 가벼워져서 무거운 줄도 모른다. 무릎까지 푹푹 파묻히는 숲길도 이제는 조금도 힘들지 않다. 이 시를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될까? 낙엽 쌓인 산속에 망태기를 든 약초꾼 한 사람이 먼 곳을 보며 서 있겠지. 스님의 모습은 그리면 안 된다. 다만 숲 저 편으로 실오리 같은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 위로 피어오르면 된다. 앞서 본 휘종 황제의 그림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뛰어난 화가는 그리지 않고서도 다 그린다. 훌륭한 시인은 말하지 않으면서 다 말한다. 좋은 독자는 화가가 감춰 둔 그림과 시인이 숨겨 둔 보물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찾아낸다. 그러자면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25-32.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3>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진짜 시와 가짜 시     시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물론 있다. 진짜 시와 가짜 시는 어떻게 구분할까?   겉보기에는 멋있는 것 같은데 읽고 나도 아무 느낌이 남지 않는 시는 가짜 시다.  특별히 잘 쓴 것 같지 않아도 읽고 나면 느낌이 남는 시가 진짜 시다.  시뿐 아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조선 시대에 천하에 명화로 알려진 유명한 그림이 있었다.  소나무 아래서 선비 한 사람이 뒷짐을 지고 위를 올려다보는 그림이었다.소나무도 잘 그렸지만 뒷짐 진 선비의 표정이 너무너무 생생했다. 모두들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를 그린 유명한 화가 안견이 이 그림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 그림을 구경하러 갔다. 그림 주인은 훌륭한 화가가 자기 그림을 보겠다고 직접 찾아온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림을 펼쳤다. 이제 과연 어떤 칭찬이 쏟아질까? 주인은 설레는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한참 만에 안견은 실망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잘 그리긴 했는데, 조금 아깝구려.”   주인은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사람이 높은 곳을 올려다보자면 목 뒤에 반드시 주름이 잡히게 마련이오. 그런데 고개를 젖혀 바라보는 선비의 뒷덜미에 주름이 하나도 없질 않소?”   안견은 다시 보기도 싫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버렸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이 그림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린 그림이 되고 말았다. 소나무를 그리는 솜씨도 뛰어났고, 사람의 표정도 생생했다. 다만 화가는 소나무를 올려다보는 선비의 목 뒤의 작은 주름을 놓치고 말았다. 그 결과 소나무의 푸르른 기상을 우러르는 선비의 마음까지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이런 그림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안고 밥을 떠먹이는 그림이었다. 천하의 명화로 이름이 높았다. 소문을 듣고 세종대왕께서 이 그림을 보았다. 왕은 한참 바라보더니 무엇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긴 참 잘 그렸다. 그렇지만,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자기의 입이 벌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그림 속의 노인은 입을 다물고 있구나. 아! 아깝다.”    정말 그렇다.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를 생각해 보자. 엄마는 숟가락에 밥을 떠 가지고 그 위에 반찬을 얹는다.아이의 입 가까이에 가져간다. “아! 아.” 하며 자기의 입을 벌린다. 아이는 엄마의 벌린 입을 보며 자기의 입을 벌려 음식을 받아먹는다. 그런데 그림 속의 할아버지는 입을 꽉 다문 채로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손자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화가는 다 잘 그려 놓고 조그만 실수를 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조그만 실수가 가장 큰 실수가 되고 말았다.화가는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할아버지의 입을 그리지 않았다. 이것을 놓쳤기 때문에, 손자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림에서 없어져 버렸다.   화가는 그림 속에 자기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야 한다.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사진처럼 똑같이 그린 그림도 죽은 그림이 되고 만다. 그런 그림은 가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속에 시인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이 아름다워도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살아 있는 시는 어떤 시일까? 한시를 한 수 살펴보자. 고려 때 시인 고조기가 지은 라는 작품이다.         어젯밤 송당에 비가 왔는지     베갯머리 서편에선 시냇물 소리.     새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자던 새는 둥지를 아직 떠나지 않았네.       내용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다. 간밤 잠결에 시냇물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간밤에 비라도 온 걸까? 새벽에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마당 나무 위 새둥지에 새가 아직도 그대로 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이 시의 내용은 별것이 아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마음이다. 시인은 어째서 나무 위에서 자던 새가 여태까지 둥지를 떠나지 않은 것을 말했을까? 산속 집의 아침은 먼동이 트기가 무섭게 노래하는 산새들의 합창으로 시작된다. 보통 때 같으면 새소리에 늦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밖이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시인은 처음에 “어? 오늘은 웬일로 요놈들이 이렇게 조용하지?”하고 생각했다. 그는 궁금해서 방문을 활짝 연다. 처음에는 새들이 울지 않기에 아직도 날이 새지 않은 줄 알았다. 문을 열고 보니, 새들은 포근한 제 보금자리를 나올 생각이 없다는 듯이 둥지 속에다 제 몸을 파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시인은 모든 사실을 다 알아차렸다. 그래 어젯밤에 꿈결에 시냇물 소리가 들려왔었지. 간밤에 산속에 비가 많이 왔었구나. 그 비에 시냇물이 불어났던 게로군. 숲이 온통 젖어 먹이를 찾을 수가 없으니까 저 녀석들이 둥지에 틀어박혀 있는 게로구나. 시인은 배를 깔고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둥지 속의 새를 쳐다본다. 둥지 속의 새도 말똥말똥 주인을 바라본다. 오늘 아침은 이렇게 말없이 놀자고 한다.   가만히 이 시 속의 정경을 그림으로 옮겨 보면 참 재미가 있다. 숲 속에 작은 오두막집이 있다. 오두막집의 방문을 열려 있다. 주인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본다. 숲 속 둥지에선 새가 주인을 마주 본다. 마당은 젖었다. 나무에선 아직도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 같다. 이 가운데 주인과 둥지 속의 새 사이에 오고 가는 말 없는 대화가 귀에 쟁글쟁글 들리는 것만 같다. 자연을 아끼고 생명 있는 것을 사랑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씨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도 입을 꽉 다문 할아버지의 그림은 가짜 그림일 뿐이다. 비록 덤덤하지만 그 속에 시인의 투명한 정신이 담겨 있을 때 진짜 시가 된다. 겉꾸밈만으로는 안 된다. 시 속에 참된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33-3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4> 진짜 시와 가짜 시|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다 보여 주지 않는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다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다. 한시 한 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혼자 앉아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독좌무래객 獨坐無來客) 빈 뜰엔 비 기운만 어둑하구나. (공정우기혼 空庭雨氣昏) 물고기가 흔드는지 연잎이 움직이고 (어요하엽동 魚搖荷葉動) 까치가 밟았는가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작답수초번 鵲踏樹梢飜) 거문고가 젖었어도 줄에서는 소리가 나고 (금윤현유향 琴潤絃猶響) 화로는 싸늘한데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 (로한화상존 爐寒火尙存) 진흙길이 출입을 가로막으니 (니도방출입 泥途妨出入) 하루 종일 문을 닫아걸고 있는다. (종일가관문 終日可關門)   조선 초기의 문인 서거정의 라는 작품이다. 시를 읽고 나면 아무도 찾지 않는 빈집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는 손님이 없다는 말은 아무도 나를 찾아올 리가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 좀 찾아와서 이 심심하고 적막한 위로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담겨 있다. 빈 뜰이라고 한 것은 시인의 마음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다는 뜻도 된다. 비 기운 때문에 어둑한 날씨는 우중충한 시인의 기분과 꼭 같다. 시인은 지금 마당이 보이는 마루나 사랑방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연못의 연잎이 툭 하고 흔들린다. 물고기가 연잎 줄기를 툭 건드리고 지나간 모양이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가지 위에 앉아 있던 까치가 훌쩍 날아간 것이다. 시인은 마당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는 지금 너무도 심심해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구절을 보면 갑자기 젖은 거문고와 식은 화로 이야기가 나온다. 거문고 줄을 삼실을 꼬아서 만든다. 비가 오거나 흐려서 공기 중의 습도가 높아지면 젖은 기운을 머금어 소리가 잘 나지 않는다. 시인은 날씨가 흐리니까 거문고에서 소리가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혹시나 싶어 뚱겨보니 뜻밖에 맑은 소리가 난다. 조금 추운 듯싶어 화로 가까이에 손을 가져갔다. 온기가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불씨가 다 꺼졌나 보다 싶어 뒤적여 보니 식은 재 속에 따뜻한 불씨가 아직 남아 있다. 시인은 왜 갑자기 젖은 거문고와 식은 화로 이야기를 꺼냈을까? 젖어서 소리가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소리를 간직한 거문고, 식어서 불씨가 없을 줄 알았지만 불씨를 지닌 화로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일까? 두 사물의 공통점은 겉으로는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쓸모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바로 시인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과 꼭 같다. 그는 지금 아마도 현실에서 어떤 힘든 일을 경험하고 물러나 있는 처지였던 모양이다. 세상이 자신을 버려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지만, 나는 아직 가슴속에 세상을 위해 일할 열정과 포부를 지니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끝에서 그는 나가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에 문을 닫아걸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진흙길’이 출입을 방해한다는 말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진흙탕 길에 나가 봐야 옷만 더럽히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직도 진흙탕 길처럼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그래서 마음속의 열정을 묻어 둔 채 식은 화로처럼 그렇게 문을 닫아걸고서 때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시인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아껴 두고, 연잎을 흔드는 물고기와 나뭇가지를 밟고 날아간 까치, 그리고 젖은 거문고와 식은 화로 이야기를 슬쩍 던져 놓고, 그것들을 시켜 자기가 할 말을 대신하게 한다. 시인은 시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독자는 다 알아들을 수가 있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45-4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5> 다 보여 주지 않는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연꽃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연꽃과 관련된 세 편의 한시에서 같은 사물 속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자. 곽예는 고려 때의 유명한 문장가였다. 겸손하여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벼슬하지 않은 사람과 같이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바쁜 일과 중에도 조용히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그는 비가 오면 혼자 우산을 펴 들고 맨발로 연못으로 가서 연꽃을 감상하곤 했다.   어느 날 연꽃을 보면서 이란 시를 지었다.          세 번이나 연꽃 보러 삼지를 찾아오니 (상련삼도도삼지 賞蓮三度到三池)    푸른 잎 붉은 꽃은 그때와 변함없다. (취개홍장사구시 翠盖紅粧似舊時)    다만 꽃을 바라보는 옥당의 손님만이 (유유간화옥당객 唯有看花玉堂客)    마음은 변함없어도 머리털이 희어졌네. (풍정미감빈여사 風情未減鬢如絲)        연못 이름을 삼지(三池)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곳은 작은 연못이 세 개로 나뉘어 있었던 모양이다. 세 번째로 찾아왔다고 했지만 삼지란 말과 호응을 이루기 위해서였고, 그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이곳을 찾아왔었다. 커다란 푸른 잎과 아름다운 연꽃을 보기 위해서다. 연꽃은 옛날 내가 이곳을 처음 왔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곱고 어여쁜데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나는 어느새 귀밑머리털이 희게 변해 버렸다.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연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매일 매일 바쁘게 지내다가 훌쩍 나이만 먹어 버린 것이 슬펐던 것 같다. 곽예는 연못가에 맨발로 우산을 쓰고 앉아서 연못 가득 피어난 아름다운 연꽃을 보며 이런 다짐을 했을 것이다. 높은 벼슬아치가 되면 교만해져서 거들먹거리기가 일쑤인데, 곽예는 오히려 맨발로 연꽃을 구경하면서 겸손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애썼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주돈이는 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을 지은 일이 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나왔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가 않다. 속은 비었고 겉은 곧다. 넝쿨도 치지 않고 가지도 치지 않는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 꼿꼿하고 깨끗하게 심어져 있다.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업신여겨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홀로 연꽃을 사랑한다.이후로 연꽃은 군자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글 가운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는 말이 있다. 연꽃은 연못 가운데서 피니까 가까이 가서 코를 대고 그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따금 바람결에 실려 오는 그 향기는 더욱 맑게 느껴진다.       고려 때 시인 최해도 이라는 시를 남겼다.           후추를 팔백 가마나 쌓아 두다니 (저초팔백곡 貯椒八百斛)    천년 두고 그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천재소기우 千載笑其愚)    어찌하여 푸른 옥으로 됫박을 만들어 (여하벽옥두 如何碧玉斗)    하루 종일 맑은 구슬을 담고 또 담는가. (경일량명주 竟日量明珠)       당나라 때 원재란 사람은 탐욕스런 관리였다. 그는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아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그가 죽은 뒤 창고를 뒤져보니, 후추가 무려 팔백 가마나 나왔다. 종유 기름도 오백 냥이나 나왔다. 평생을 써도 절대로 쓸 수 없는 양이었다. 그래서 나라에서 이를 몰수하였다. 첫 번째, 두 번째 구절에서는 원재의 이 탐욕스런 마음을 이야기했다.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으냐고 나무란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빗속의 연꽃을 노래한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이는 바로 세 번째, 네 번째 구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세 번째 구절에서 말한 ‘푸른 옥으로 만든 됫박(바가지)’은 바로 넓고 푸른 연잎을 말한다. 비 오는 날 연잎마다 비 구슬을 담았다가 연못에 붓고, 또 담았다가 연못에 붓고 하는 됫박질이 한창이다. 이제 연못은 연잎이 하루 종일 모아서 쏟아 놓은 맑은 구슬로 가득 차 버렸다.   비록 원재는 후추를 그렇게 욕심 사납게 쌓아 두었다가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그렇지만, 하늘이 준 맑은 구슬을 연못 속에 가득 쌓아 두고픈 시인의 욕심은 아무리 지나쳐도 나쁠 것이 없을 것 같다.그만큼 마음이 맑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이 임금이 되기 위해 고려로 돌아올 때의 일이다. 충선왕이 너무도 사랑한 여인이 있었지만 그녀를 함께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왕은 그녀에게 이별의 정표로 연꽃 한 송이를 꺾어 주고 차마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돌렸다. 왕은 도저히 그녀를 잊을 수가 없어 한참을 지낸 후 신하인 이제현을 시켜서 그녀를 찾아보게 하였다. 그녀는 왕과 헤어진 후 상심하여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고 누워 말도 제대로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녀는 겨우 일어나 울면서 이란 시 한 수를 써서 왕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떠나며 보내 주신 연꽃 한 송이 (증송연화편 贈送蓮花片)     처음엔 너무도 붉었는데, (초래적적홍 初來的的紅)     줄기를 떠난 지 며칠 못 되어 (사지금기일 辭枝今幾日)     초췌함이 제 모습과 똑같습니다. (초췌여인동 憔悴與人同)        이제현은 이 시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으나 왕에게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거짓말을 했다. “전하! 제가 그 여인을 찾아가 보니, 술집에서 젊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어서,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충선왕은 너무도 분해서 침을 뱉으며 그녀를 잊었다. 고려에 돌아온 이듬해, 왕의 생일이 되었다. 이제현은 왕에게 생일을 축하하는 술잔을 올리고 나서, 갑자기 뜰에 엎드렸다 “신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그러고는 이제현은 그때의 일을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그날 만약 내가 이 시를 보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그녀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대가 나를 사랑한 까닭에 거짓으로 말하였으니 참으로 그 충성이 간절하도다.” 임금과 신하 사이의 아름다운 미담으로『용재총화』라는 책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앞서 곽예의 시에서 연꽃은 멀리서 은은한 향기를 전해 주는 군자의 모습으로 그려졌는가 하면, 최해의 시에서는 반대로 비 구슬을 사랑하는 욕심꾸러기로 나온다. 한편 위의 시에서 연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시들어 가는 여인의 모습으로 노래되고 있다. 이처럼 같은 꽃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연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다 그렇다.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49-5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6> 연꽃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새롭게 바라보기     어떤 사물이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 낯설게 보이는 수가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보통 때와 달랐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새롭게 바라보면 다르게 보인다. 새롭게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사물과 비로소 만날 수가 있다. 시는 이런 만남을 주로 노래한다. 시인은 사물과 새롭게 만나게 해 주는 사람이다. 시를 쓸 때는 남들 보는 대로 보지 않고, 내가 본 대로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시를 통해 우리는 나와 아무 상관없던 사물과 새롭게 만난다. 새롭게 만나려면 새롭게 보아야 한다. 남들 보는 대로 보아서는 그 사물의 새로운 점이 보이지 않는다. 낯익은 사물도 새롭게 보면 낯설어진다. 매일 똑같이 보던 것인데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그 사물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지금까지 그것을 보지 못한 내가 너무 바보 같아 보인다.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는 시인이 사물과 새롭게 만나 느낀 감동을 입을 열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적은 것이다. 다음 시를 한 수 보자.   오늘 핀 꽃이 내일까지 빛나지 않는 것은 (甲日花無乙日輝 갑일화무을일휘) 한 꽃으로 두 해님을 보기가 부끄러워서다. (一花羞向兩朝煇 일화수향양조휘) 날마다 새 해님 향해 숙이는 해바라기를 말한다면 (葵傾日日如馮道 규경일일여빙도) 세상의 옳고 그름을 그 누가 따질 것인가. (誰辨千秋似是非 수변천추사시비)   고산 윤선도의 라는 작품이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꽃이다. 무궁화는 이른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다 진 꽃이 다음날 아침에 보면 어느새 나무 가득 다시 활짝 피어 있다. 그래서 피고 지고 또 피는 그 은근과 끈기의 정신을 기려서 우리나라에서는 이 꽃을 무궁화, 즉 ‘다함이 없는 꽃’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라꽃으로 정해 아끼고 사랑해 왔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나라꽃으로 사랑하는 이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꽃이 하루도 못 가서 땅에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꽃 이름도 무궁화라 하지 않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 또는 꽃의 화려함이 하루밖에 못 간다고 ‘하룻영화꽃’이라고 낮춰서 불렀다. 가진 것도 없이 뽐내는 소인배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다. 윤선도는 무궁화를 ‘일일화(一日花)’라고 불렀는데, 이 말도 하루밖에 못 가는 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하루밖에 못 가는 꽃에 대한 윤선도의 생각은 중국 사람과 아주 다르다. 무궁화는 오늘 피었다가 오늘 진다. 하나의 꽃으로 두 해님에게 인사하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보니까, 무궁화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꽃이 아니라 참으로 순수하고 충직한 마음을 지닌 꽃이 되었다. 다른 꽃들은 오늘 핀 꽃으로 내일도 모래도 글피도 새로 떠오르는 해님에게 인사한다. 시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새 해님 앞에 자태를 뽐내는 꽃들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렇지만 무궁화는 다르다. 한편, 해바라기는 언제나 태양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기 때문에 임금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나타내는 꽃으로 늘 칭찬받아 왔다. 이렇게 해바라기는 일편단심의 충성스런 마음을 상징하는 꽃이다. 그런데 위 시에서 윤선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무궁화는 한 태양만을 섬기기 위해 매일 지는데, 해바라기는 매일매일 떠오르는 다른 태양을 향해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니 오히려 지조가 없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태양을 임금이라고 생각해 보자. 윤선도가 말하려고 한 뜻을 금세 알 수 있다. 옛말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의 태양, 즉 한 분의 임금님만을 섬기기 위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무궁화는 정말로 충성스런 꽃이다. 반대로 여러 개의 태양, 즉 여러 임금에게 모두 다 아첨하는 해바라기야말로 간신배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니까 무궁화는 하루 만에 지지만 매운 정신을 지닌 꽃이 되었고, 해바라기는 지조도 없고 아첨만 잘하는 소인배를 나타내는 꽃이 되었다. 위 시에서 두 해님이라 읽은 것은 ‘양조(兩朝)’인데 두 조정, 즉 두 임금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한시에서 하나의 단어를 이렇게 두 가지 뜻으로 읽는 것을 ‘쌍관의(雙關義)’라고 말한다. 윤선도는 효종 임금을 위해 평생 충성을 바쳤던 분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를 간신배라고 비방하고 헐뜯었다. 그는 평생 20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도 귀양 가서 지은 것이다. 자신을 소인배라고 헐뜯는 조정 벼슬아치들에게 윤선도는 자신은 무궁화와 같은 사람이라고 당당히 대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해바라기 같은 너희들이 바로 간신배가 아니냐고 따졌던 것이다. 이 시가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 속에 보이는 무궁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무궁화와는 전혀 다른 꽃처럼 느껴진다. 무궁화를 이렇게 바라본 사람은 없었다. 시인은 늘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그 사물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해 준다. 어느 날 내가 그것들은 주의 깊게 살펴 대화할 수 있게 되면, 사물들은 마음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나에게 건네 오기 시작한다. 시는 사물이 나에게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75-82.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8> 새롭게 바라보기|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의미가 담긴 말       한시 속에는 어떤 단어 안에 사전에 나오는 의미 외에 다른 뜻이 담긴 말들이 많다. 하나의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반복적으로 노래되다 보니 새로운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의미를 ‘정운의(情韻義)’라고 한다. 정운의를 잘 알아 두면 시를 감상하는 데 아주 편리하다. 조선 시대 홍랑이란 기생이 함경도에 벼슬 살러 온 최경창이란 시인을 사랑했다. 임기가 끝나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홍랑은 최경창에게 시조를 한 수 지어 주며 이별하였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앞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옛날에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이별의 정표로 버들가지를 꺾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버들가지는 꺾은 가지를 땅에 심어도 다시 뿌리는 내리는 성질을 지닌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비록 이렇게 헤어지지만 훗날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간절한 바람을 담은 것이다. 다시 버들가지를 꺾는 이야기가 나오는 한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離人日日折楊柳 리인일일절양류) 천 가지 다 꺾어도 가시는 임 못 잡았다. (折盡千枝人莫留 절진천지인막류) 어여쁜 아가씨들 눈물 때문일까 (紅袖翠娥多少淚 홍수취아다소루) 안개 물결 지는 해에 근심만 가득하다. (烟波落日古今愁 연파락일고금수)   조선 시대 임제가 지은 가운데 한 수이다. 원문을 보면 첫째 구절 끝에 버들‘류(柳)’자가 있고, 둘째 구절 끝에 머무를 류(留)자가 있다. 두 글자의 소리가 같기 때문에 버드나무라는 말은 가지 말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래서 버들가지를 준 것은 다시 만나자는 다짐보다 가지 말라는 만류의 뜻이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날마다 대동강 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진다. 헤어지는 사람마다 버들가지를 꺾어 주며 가지 말라고 붙든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다 떠나가 버렸다. 평양의 아가씨들은 매일 강변에 나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한숨 쉬며 눈물을 흘린다. 강물 위에는 그녀들이 흘리는 눈물과 내쉬는 한숨 때문에 안개가 저렇게 자욱하다고 시인은 과장해서 말했다. 한시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무가 바로 버드나무이다. 버드나무는 봄날의 설렘과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희망을 나타내는 나무이다. 이런 뜻은 물론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편으로 한시에 보면 가을 부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왜 가을에 부채를 부칠까? 먼저 다음 한시를 한 수 읽어 보자.   은촛대에 가을빛은 그림 병풍에 차가운데 (銀燭秋光冷畵屛 은촉추광냉화병) 가벼운 비단 부채로 반딧불을 치는구나. (輕羅小扇撲流螢 경라소선박류형) 하늘 가 밤빛은 물처럼 싸늘한데 (天際夜色凉如水 천제야색량여수) 견우와 직녀성을 앉아서 바라본다. (坐看牽牛織女星 좌간견우직녀성)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 두목의 이란 작품이다. 가을밤이면 추워서 오싹하고 찬 기운이 느껴진다. 가을밤에 어떤 여인이 혼자 앉아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고 있다. 시속에는 ‘차갑다’와 ‘싸늘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도 그녀는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 추운 가을밤에 왜 그녀는 손에 부채를 쥐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부채로 방 안으로 날아드는 반딧불이를 치고 있다. 열어 둔 창문으로 반딧불이가 자꾸만 날아든다.반딧불이는 원래 인적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날아다닌다. 그런데 그녀의 방까지 날아들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이 그만큼 황량해졌다는 뜻이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부채를 들어 반딧불이를 내쫓는다. 이 시는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잊혀 진 궁녀의 신세를 노래한 것이다. 끝에서 그녀가 우두커니 앉아서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일 년 내내 떨어져 있다가 칠월칠석날 단 하루만 만난다. 견우와 직녀는 이 다리를 건너서 반갑게 만난다. 두 사람은 만남이 반갑고 또 헤어질 것이 슬퍼서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칠월칠석날에는 늘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 그녀는 왜 하필 많고 많은 별 중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 풀이가 가능하다. 하나는 우리도 견우와 직녀처럼 헤어져서 만나지 못하니 너무 슬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견우와 직녀는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 만날 수 있는데, 나는 영영 사랑하는 임과 다시는 만날 수가 없어 슬프다는 것이다. 아마 나중의 풀이가 더 맞을 것 같다. 시인은 그녀가 임금에게 버림받은 궁녀라는 것을 단지 그녀의 손에 부채를 쥐여 줌으로써 독자들이 눈치 챌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부터 많은 시인들이 가을 부채를 버림받은 여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버들가지를 꺾어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 가을 부채가 버림받은 여인의 의미를 나타낸다.이렇게 된 것은 그 물건이 지닌 성질 때문이다. 처음에 어떤 시인이 이것을 시로 쓰자, 그 비유가 너무나 알맞았기 때문에 그 뒤로 많은 시인들이 뒤따라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마침내 이 비유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표현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처음 가을 부채로 버림받은 여인을 비유했을 때는 매우 낯설어서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 자주 쓰여서 상징이 되면, 일반적인 부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 즉 정운의를 간직하게 된다. 겉으로 보아서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물들이 생각의 단계를 거쳐 전혀 다른 의미와 연결된다. 한시에는 이런 말들이 많다. 이 정운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시를 훨씬 더 깊이 음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83-90.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9> 의미가 담긴 말|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옛말에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지 미친 듯한 열정으로 하지 않으면 성취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유명한 서예가인 최흥효란 사람이 있었다. 젊어서 과거 시험을 보러가서 문제의 답안을 쓰다 보니 그 중에 한 글자가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의 글씨와 꼭 같게 써졌다. 평소에는 수백 번씩 연습해도 잘 써지지 않던 어려운 글자였다. 그런데 이번에 쓴 것은 오히려 왕희지보다 더 잘 쓴 것 같았다. 그는 그만 자기 글씨에 도취되어 차마 아까워서 답안지를 제출하지 못하고 그냥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우연히 같게 써진 한 글자의 글씨 앞에서 그는 자기가 과거 시험을 보고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글씨 연습을 해서 그는 뒷날 과연 이름난 서예가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징이란 화가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 이경윤도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는데 그림을 잘 그려도 천한 대접만 받았으므로 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었던 이징은 몰래 집 다락에 숨어서 그림을 그렸다. 집에서는 갑자기 아이가 없어졌기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가족들은 사흘 만에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년을 찾아냈다. 아버지는 너무도 화가 나서 볼기를 때렸다. 소년은 매를 맞고 울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찍어 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소년에게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하고 말았다. 또 조선 시대 왕실의 친척이었던 학산수란 이가 있었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는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산에 들어가 노래 공부를 할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 앞에 놓고 노래 한 곡을 연습하고 나면 모래 한 알을 주워 신발에 담았다. 또 한 곡이 끝나면 다시 모래를 한 알을 담았다. 그렇게 해서 모래가 신발에 가득 차면 그제야 산에서 내려왔다. 한번은 황해도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도적 떼를 만났다. 도적들은 그의 복장을 보고 귀한 신분인 줄 알아채고, 가진 것을 다 빼앗은 후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슬퍼져서 나무에 꽁꽁 묶인 채로 바람결을 따라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들은 도적들은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노래가 끝나자 도적들은 그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잘못을 빌었다. 그를 풀어 주고 빼앗았던 물건도 다 돌려주었다. 조선 후기에 이삼만이라는 서예가는 초서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종이를 구하기 힘든 때였기 때문에 그는 흰 베를 빨아서 그 위에 글씨를 썼다. 흰 베가 온통 까맣게 되면 이것을 빨아서 다시 썼다. 아무리 아파도 하루에 천 자씩은 꼭 썼다. 처음에 그는 부자였는데, 글씨만 쓰고 다른 일은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주 가난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글씨만 썼다. 그는 글씨를 배우려는 젊은이에게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네가 글씨를 잘 쓰려면 적어도 벼루 세 개쯤은 먹을 갈아 구멍을 내어야 할 걸세.” 그 단단한 벼루가 먹을 갈아서 구멍이 나도록 그는 글씨를 쓰고 또 썼다. 그래서 마침내 훌륭한 서예가가 되었다. 우연히 같게 써진 글자 하나 때문에 과거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았던 최흥효나 매를 맞으면서도 눈물을 찍어 새 그림을 그렸던 이징, 노래 한 곡을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을 담아 넣으며 노래 공부를 했던 학산수,여러 개의 벼루를 구멍 내 가면서 글씨 연습을 했던 이삼만, 이 네 사람은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미쳤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은 이런 끊임없는 노력과 미친 둣한 몰두 속에서 이루어진다. 노력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시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시인은 마음에 드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한다. 고려 때 강일용이란 시인이 있었다. 그는 깃이 흰 백로를 유난히 사랑했다. 백로를 가지고 정말 훌륭한 시를 한 수 짓고 싶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짧은 도롱이를 걸쳐 입고 황소를 타고 개성 시내를 벗어나 천수사란 절 옆의 시냇가로 갔다. 황소 등에 올라앉아 비를 쫄딱 맞으며 백로를 구경하곤 했다. 비가 올 때마다 나가서 백로를 관찰하였지만, 아름다운 시상(詩想)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백일 만에 갑자기 한 구절을 얻었다. 그 시구는 이러했다.   푸른 산허리를 날며 가르네. (飛割碧山腰 비할벽산요)   그는 어느 날 시내를 박차고 날아오른 백로가 유유히 산허리를 가르며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비가 와서 푸른 산허리에는 흰 안개가 자옥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시인은 흰 안개가 흰 백로가 훨훨 날아가면서 푸른 산허리에 흰 줄을 그어 놓은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이 구절을 얻고서 그는 너무도 기뻐서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오늘에야 옛사람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비로소 얻었다. 훗날 이 구절을 이어 시를 완성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한 구절이 너무도 마음에 들고, 또 이 구절을 얻은 것이 너무도 기뻤던 나머지, 그는 다른 구절을 채워 한 수의 시를 완성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위대한 예술가는 하나의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이러한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를 완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위대한 예술은 탄생한다. 옛 시인들은 한 편의 마음에 드는 시를 짓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당나라 때 시인 맹교는 좋은 시를 짓기 위해서라면 칼로 자기 눈을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살아서는 한가한 날 결코 없으리 (生應無暇日 생응무가일) 죽어야만 시를 짓지 않을 테니까. (死是不吟詩 사시불음시)   ‘괴로이 읊다(苦吟)’란 제목의 이 시처럼, 죽기 전에는 결코 시 짓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당나라 때 노연양이란 시인도 아주 재미난 시를 남겼다.   한 글자를 꼭 맞게 읊조리려고 (吟安一箇字 음안일개자) 몇 개의 수염을 배배 꼬아 끊었던가. (撚斷幾莖髭 연단기경자)   시를 지으려고 하는데 알맞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글자가 좋을까, 저 글자가 좋을까? 고민하느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염을 배배 꼬다가 도대체 몇 가닥이나 끊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생각에 골똘히 빠져서 손가락 끝에 수염 하나를 감아쥐고 배배 꼬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스스로 만족스러울 때까지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들볶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작품 하나에도 한 예술가의 일생이 담겨 있다. 시인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남기기 위해 어떤 괴로움도 다 참아 내며 견딘다. 화가는 멋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음악가는 아름다운 곡을 작곡하려고 힘든 줄도 모르고 밤을 새우며 작업에 몰두한다.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이런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 하던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들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91-9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0>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시는 그 사람과 같다   옛말에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난다. 시인이 사물과 만나면 마음속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시로 옮긴다. 이때 사물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한 마디에도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시인과 만날 수 있다. 고려 예종 때 시인 정습명이 지은 이란 작품을 보자. * 한시의 제목은 석죽화(石竹花)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해서 (世愛牧丹紅 세애목단홍) 동산에 가득히 심어서 기른다. (栽培滿園中 재배만원중) 그렇지만 황량한 들판 위에도 (誰知荒草野 수지황초야) 예쁜 꽃 피어난 줄은 아무도 모르네. (亦有好花叢 역유호화총) 그 빛깔은 시골 연못에 달빛이 스민 듯 (色透村塘月 색투촌당월) 향기는 언덕 위 바람결에 풍겨 온다. (香傳隴樹風 향전롱수풍) 땅이 후미져서 귀한 분들 오지 않아 (地偏公子少 지편공자소)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맡긴다. (嬌態屬田翁 교태속전옹)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마당 가득히 심어 놓고 그 붉은 꽃처럼 부귀하고 영화롭게 살았으면 한다. 그렇지만 패랭이꽃은 그렇지가 않다. 다섯 개의 가녀린 꽃잎을 가진 패랭이꽃은 꽃잎도 작고 빛깔은 수줍은 분홍빛이다. 아무도 이 꽃을 마당에 심어 두려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오지 않은 들판의 오솔길 옆에서 바람에 맑은 향기를 날리며 피었다가 조용히 질 뿐이다. 그렇지만 패랭이꽃도 모란꽃만큼이나 아름답다. 아니 모란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모란꽃은 짙게 화장을 하고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영화배우와 같다. 패랭이꽃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순진하고 해맑은 산골 아가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오늘도 패랭이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농사짓는 시골 농부들에게만 보여 주며 피어 있다. 하지만 시골 농부는 늘 농사일에 바빠 패랭이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분 높은 귀한 사람은 시골에 오지 않는다. 결국 패랭이꽃은 그냥 혼자 피었다가 혼자 질 뿐이다.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는 패랭이꽃과 상관이 없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어여쁜 꽃잎을 피우고, 맑은 향기를 바람결에 흩날릴 뿐이다. 정습명은 이 시를 왜 썼을까? 그는 기이한 재주와 넓은 포부를 지녔던 뜻 높은 선비였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내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자기 소개서인 셈이다. 고려 예종 임금께서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뛰어난 시인이 있었단 말이냐. 어서 가서 그를 불러오너라.” 시 속에 담긴 내용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예종은 그를 만나보고는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늘 가까이 머물게 했다. 다음 시는 역시 고려 때 시인 최해가 지은 이란 작품이다. * 한시의 제목은 현재설야(縣齋雪夜)이다. 세 해의 귀양살이 병까지 들고 보니 (三年竄逐病相仍 삼년찬축병상잉) 한 칸 집에 사는 모습 스님과 비슷하다. (一室生涯轉似僧 일실생애전사승) 눈 덮인 사방 산엔 찾아오는 사람 없고 (雪滿四山人不到 설만사산인불도) 파도 소리 속에 앉아 등불 심지 돋운다. (海濤聲裏坐挑燈 해도성리좌도등)   최해도 높은 기상과 재주를 지녔던 사람이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의 능력을 뽐내어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가 맡은 일에 큰 실수를 저질러 구석진 시골로 쫓겨나 있었다. 첫 번째 구절을 보면 그가 쫓겨나 이곳에 온 것이 벌써 삼 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에 병까지 들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가난한 스님과 같다고 했다. 하루 세 끼 끼니초자 잇기 어려운 힘든 형편을 하소연했다. 가뜩이나 살아가기 힘든데, 눈이 펑펑 내려서 춥기도 하고 밖으로 통하는 길이 다 막혀 버렸다. 군불도 때지 않은 추운 방에서 벌벌 떨고 있자니 창문 밖에서 엄청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했으니까 진짜 파도 소리는 아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소리가 마치 집채만 한 파도가 집을 덮쳐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는 잠을 못 이루며 오두마니 앉아서 등불 심지를 돋우고 있다. 예전 등불은 심지가 다 타면 다시 심지를 돋우어 주어야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등불 심지를 돋우는 것은 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는 행동이다. 눈이 펑펑 내렸다. 이 눈 속에 이곳을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등불 심지를 돋워서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한다. 등불마저 꺼져 버린다면 깜깜한 어둠 속, 집채만 한 파도 소리 속에 자신마저 휩쓸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물대는 등불 심지를 돋우는 모습에서 깊은 밤에 혹시 누군가 자신을 찾아 주지는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기다림의 심정마저 느껴진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앞서 패랭이꽃을 노래한 정습명이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습명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최해는 아무도 올 수 없는 눈 오는 밤중에도 누군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여 등불 심지를 돋우고 있다. 그는 오랜 귀양살이 끝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의 존재가 완전히 잊혀질까 봐 괴로워했던 것 같다. 결국 최해는 이렇게 불우하게 살다가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정습명과 최해의 시를 보면 이 말을 더 실감할 수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한자로는 ‘농가성진(弄假成眞)’이라고 하는데, 뜻 없이 한 말이 말한 그대로 진짜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말 속에 정령이 살아 숨 쉰다고 믿어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항상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오늘 무심히 하는 말투와 행동 속에 내가 품은 생각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99-106.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시는 그 사람과 같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치마 위에 쓴 시     한시 속에는 옛날의 유명한 시인들이 쓴 표현이나 이야기를 빌려 오는 경우가 꽤 많이 보인다. 이런 것을 ‘용사(用事)’라고 한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 자기 생각을 충분히 전달하는 아주 효과적인 표현 방법이다. 왕헌지는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의 아들이었다. 그도 역시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오흥 태수로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 마을에 양흔이란 열두 살 난 소년이 글씨를 아주 잘 썼다. 왕헌지는 양흔을 아주 아꼈다. 하루는 양흔이 보고 싶어서 그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그때 소년 양흔은 마침 새로 해 입은 비단옷을 입고 글씨 연습을 하다가 붓을 한 손에 든 채로 곤하게 낮잠이 들어 있었다. 천진스레 낮잠에 빠져 있는 소년을 보던 왕헌지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양흔의 붓을 빼앗아 들고 양흔의 새 옷 위에다 글씨를 써놓고 갔다. 이윽고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새 옷 위에 어지럽게 글씨가 써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신을 가만히 차리고 살펴보니 다름 아닌 선생님의 글씨였다. 감격한 소년은 옷 위에 써 준 선생님의 글씨를 보면서 더욱더 글씨 공부에 정진해서 훌륭한 서예가가 되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왕헌지가 양흔의 옷자락에 글씨를 써 준 것을 가지고 ‘글씨 치마’라는 말을 만들어 후세에 전했다. 스승이 제자를 아끼는 마음과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빚어 만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도 이 글씨 치마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1813년에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전라남도 강진 땅에 귀양 가 있었다. 강진의 만덕산 옆에 조그만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오로지 책 읽고 글 쓰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벌써 귀양살이도 13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서울 집에서 인편에 편지와 옷가지를 부쳐 왔다. 반가워 보자기를 열어 보니 가족들 모두 편안히 잘 있다는 안부 편지와 함께 낡아서 못 입게 된 치마 몇 벌이 들어 있었다. 아내가 시집오던 날 입었던 붉은색의 활옷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붉은빛은 이미 다 바래 버리고 노란색도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것이었다. 아내가 왜 이 낡은 치마를 나에게 보냈을까? 정약용은 이렇게 생각하다가 가위를 가져와서 빛바랜 치마를 펴고는 네모나게 잘랐다. 그것으로 공책을 만들었다. 거기에 먼저 두 아들에게 주는 훈계의 말을 적었다. 죄인이 되어 멀리까지 귀양 와 사는 동안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담아 열심히 공부하고 바른 사람이 되라는 부탁을 함께 곁들였다. 어머니가 시집오시던 날 입었던 빛바랜 치마 위에 아버지가 써주신 훈계의 말씀을 받아 들었을 때 자식들의 가슴은 얼마나 뭉클하였을까? 아들에게 보내는 당부의 글을 적고 나서도 치마 천이 조금 남았다. 그래서 다시 시집간 딸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딸을 위해 그려 준 그림과 시는 지금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림을 보면 먼저 위쪽에 매화 가지를 그렸다. 가지에는 매화꽃이 활짝 피었다. 봄날이 온 것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꾀꼬리 두 마리가 정답게 매화가지 끝에 앉아 있다. 두 마리 꾀꼬리는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며 즐겁게 봄날을 노래한다. 그 아래에 이렇게 시를 써 놓았다. 이 시의 제목은 ‘매조도에 쓴 시(梅鳥圖詩)’이다.   펄펄 나는 저 새가 (翩翩飛鳥 편편비조) 우리 집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息我庭梅 식아정매) 꽃다운 그 향기 짙기도 하여 (有烈其芳 유렬기방)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다. (惠然其來 혜연기래) 여기에 올라 깃들여 지내며 (爰止爰棲 원지원서)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樂爾家室 락이가실) 꽃이 이제 다 피었으니 (花之旣榮 화지기영) 열매도 많이 달리겠네. (有蕡其實 유분기실)   한 쌍의 꾀꼬리가 매화 향기를 찾아 내 집 마당으로 날아들었다. 그 춥던 겨울이 다 끝난 것이다. 새들은 꽃향기에 취해 나뭇가지를 떠날 줄 모른다. 즐거운 노래가 그치지 않는다. 겨우내 쓸쓸하던 마당이 갑자기 환하다. 이 시의 원문은 공자가 엮은『시경』이란 옛 시집 속에 실려 있는 시들처럼 네 글자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시경에 있는 이란 다음 시도 이와 같은 형식이다.   아내와 자식이 정답게 지내는 것이 (妻子好合 처자호합) 마치 금슬을 연주하는 것 같아도 (如鼓琴瑟 여고금슬) 형님과 아우가 화목해야만 (兄弟其翕 형제기흡) 즐겁고 기쁘다고 할 수가 있다. (和樂且湛 화락차담)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宜爾室家 의이실가) 그대의 처자식을 즐겁게 해 주어라. (樂爾妻帑 락이처탕) 이렇게 하려고 애를 쓴다면 (是究是圖 시구시도)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亶其然乎 단기연호)   위 시의 다섯 번째 구절을 보면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앞에서 본 정약용 시의 여섯 번째 구절에 나오는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라는 말과 비슷하다. 정약용은 일부러『시경』의 시와 비슷한 표현을 골라서 위 시의 내용을 자기의 시 속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다. 정약용이 딸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려 주며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치마에 그려 보내 준 그림을 보고 멀리 계신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예전에 있던 시의 표현을 슬쩍 빌려 와서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을 한시에서는 ‘용사’라고 한다. 그래서『시경』에 실려 있는 이라는 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정약용이 새에게 하고 있는 말만 듣고도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줄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것이다. 다 떨어져서 입을 수 없게 된 치마가 이렇게 해서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되었다. 이 그림과 시가 참으로 아름다운 까닭은 그 안에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모든 것이 너무나 풍족하니까 물건이 아까운 줄도 모른다. 멀쩡한 새 옷도 다 내다 버리고 학용품도 아낄 줄 모른다. 아낄 줄 아는 마음이 없이는 소중한 것도 없다. 부모가 소중하고 형제가 소중하고 가족이 소중하고 친구가 소중한 줄을 모른다. 헌 치마 조각도 이렇게 아껴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나눌 줄 알았던 옛 선인들의 거룩한 마음씨를 잊지 말아야겠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07-114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2> 치마 위에 쓴 시|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계절이 바뀌는 소리   시 속에는 시인이 일부러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분명하게 말하기 않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을 전문적인 말로는 ‘모호성’이라고 한다. 시인은 일부러 모호하게 말해서 독자가 더 많이 생각하고 더 크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번에는 계절의 변화를 노래하고 있는 한시 몇 수를 함께 읽으면서 이 모호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사물들은 끊임없이 소리를 낸다. 그런데 그 소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들린다. 다음 한시는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의 라는 작품이다.   봄비가 가늘어서 방울도 짓지 못하더니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 한밤중에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온다.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눈 녹아 남쪽 시내에 물이 불어나니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새싹들이 많이도 돋아났겠다. (草芽多少生 초아다소생)   봄비는 너무 가늘어서 마치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것처럼 사각사각 내린다. 비를 맞아도 옷이 젖는 줄을 모른다. 낮에 시인은 땅을 촉촉이 적시며 봄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아! 봄이 왔구나.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어 흥분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시인은 방안에서 가느다란 소리를 듣는다. 무엇이 내는 소리일까? 시인은 시 속에서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시인은 방 안에 앉아서 소리를 따라 생각에 잠긴다. 산속 깊은 곳에 쌓인 눈도 이제 녹기 시작하겠구나. 깊은 산속에는 지금쯤 새싹들이 언 땅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겠지. 이 밤 봄비를 맞으며 겨우내 언 몸들을 녹이고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시인은 한없이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어 이 시를 썼을 게다.   쓸쓸히 나뭇잎 지는 소리를 (蕭蕭落木聲 소소락목성)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錯認爲疎雨 착인위소우) 스님 불러 문 나가서 보라 했더니 (呼僧出門看 호승출문간) “시내 남쪽 나무에 달 걸렸네요.” (月掛溪南樹 월괘계남수)   조선 시대 시인 송강 정철의 라는 작품이다. 시인은 산속에 있는 절에 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웬일인지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을 갈수록 또랑또랑해진다. 바쁘게만 지내다가 절에 와서 한가로이 누워 있으려니까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창밖에서 아까부터 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맑고 쾌청한 날씨였는데 갑자기 웬 비가 오는 걸까? 절에서 심부름 하는 어린 사미승을 불러 비가 오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꼬마 스님은 돌아와서 빙그레 웃으며 “시내 남쪽 나무 위에 달이 걸려 있는 걸요.”라고 동문서답을 한다. 달이 떴다면 비가 올 리가 없고, 비가 온다면 달이 뜰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 순간 손님은 그것이 비 오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을 낙엽 지는 소리인 줄을 깨닫게 되었다. 어린 스님의 이 엉뚱한 대답이 이 시를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만일 “비 안와요. 낙엽 지는 소리예요.”라고 했다면 이것은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생각할 빈틈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모호성은 독자가 들어갈 빈 공간을 만들어 준다.   첫째 개가 짖어대자 (一犬吠 일견폐) 둘째 개가 짖어대네. (二犬吠 이견폐) 셋째 개도 덩달아 따라 짖으니 (三犬亦隨吠 삼견역수폐) 사람일까 범일까 바람 소릴까? (人乎虎乎風聲互 인호호호풍성호) “산 달은 촛불처럼 환히 밝고요 (童言山月正如燭 동언산월정여촉) 반 뜰에는 오동 잎새 소리뿐예요.” (半庭惟有鳴寒梧 반정유유명한오)   조선시대 시인 이경전이 아홉 살 때 지었다는 이란 시다. 달이 환한데 온 마을에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 개들이 왜 저렇게 한꺼번에 짖을까? 이 밤중에 누구 집에 도둑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산에서 범이라도 내려왔나? 아니면 가을바람 소리를 듣고 기분이 이상해진 걸까? 밖을 내다본 꼬마는 막 동산 위로 둥실 떠오른 환한 달빛을 보았다. 마지막 구절에서 ‘반 뜰(半庭)’이라고 말했다. 달이 아직 하늘 한가운데까지 솟아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담장에 걸려 마당의 절반에만 달빛이 비친 것이다. 산에 달빛이 저렇게 밝은 걸 보니 도둑이 들 리도 없고, 호랑이가 내려올 리도 없다. 바람 소리 때문도 아니다. 온 동네 개들은 저 환하게 뜬 달빛을 보고 저렇게 짖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개들은 보름달이 뜨면 달을 보고 우우거리며 소리를 지른다. 보름달빛은 동물을 들뜨게 만드는 모양이다. 온 동네 개들을 저렇게 짖게 만든 것은 바로 달빛이었다. 여기서도 시인은 분명하게 달빛을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도둑과 호랑이와 바람을 꼽아 놓고, 여기에 다시 달빛과 오동잎 소리를 더해 놓았을 뿐이다. 시인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분명하게 다 말해 버리고 나면 독자들이 생각할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는 슬쩍 빠져 버리고 독자들이 빈 칸을 채워 넣게 한다. 계절은 이렇게 소리 속에 오고 간다. 봄비 내리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낙엽 지는 소리를 따라 봄이 가고 가을이 온다. 도시의 복잡한 소음 속에서는 이런 소리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아파트에 앉아서 귀를 귀울이면 자동차의 경적 소리, 옆집의 텔레비전 소리, 아이들이 쿵쾅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티격태격 다투는 소리만 들려온다. 우리의 생활이 날이 갈수록 자연의 소리와 멀어지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깊은 밤중에만 들려오는 우주가 돌아가는 소리, 내 마음에 새싹이 터 오는 소리, 낙엽이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환한 달빛이 내 창 가득히 고여 올 수 있도록 마음의 창을 깨끗이 닦아 놓아야겠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15-124.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3> 계절이 바뀌는 소리|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자연이 주는 선물   자연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다. 자연은 말 없는 선생님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일깨워 준다. 자신을 닮으라고 한다. 예술가들은 넘치는 자연의 에너지를 받는다. 조선 후기 이덕무가 지은『이목구심서』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지리산 속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가에는 소나무가 주욱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연못 속에 비친다. 연못 속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그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이 입고 다니는 가사옷 같다. 그래서 이 물고기의 이름을 가사어라고 부른다. 물고기의 이 무늬는 연못에 비친 소나무의 그림자가 변해서 된 것이다. 이 물고기는 너무 날쌔서 잡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 물고기를 잡아서 삶아 먹으면 능히 병 없이 오래 살 수가 있다고 한다.   지리산 속에 있는 깊은 연못 속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언제나 푸른 소나무의 기상을 닮아서 삶아 먹으면 병도 없어지고 오래오래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소나무의 무늬가 물고기에 비친다. 무늬가 물고기 위에 새겨진다. 그 물고기를 먹으면 소나무처럼 오래 살 수가 있다.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지만, 옛사람들의 생각하는 방법을 알게 해 주는 글이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가죽에 있고, 사람의 줄무늬는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소나무의 그림자가 오래 쌓여서 물고기 무늬를 만들 듯이 사람도 사물에 내 마음을 주면 어느 순간 그 사물이 내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옛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예찬한 것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만 권의 책을 읽고, 먼 길을 여행 다녀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서를 많이 하고 여행을 많이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과 자연을 통해 듣고 본 것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변화시킨다. 글을 쓰면 글에서 솔바람 소리가 울려 나오고, 그림을 그리면 도화지 위에서 꽃향기와 새소리가 퍼져 나온다. 다음 시는 송시열의 이란 한시이다.   산과 구름 다 하얗고 보니 (山與雲俱白 산여운구백) 산인지 구름인지 알 수가 없다. (雲山不辯容 운산불변용) 구름이 돌아가자 산만 홀로 섰구나. (雲歸山獨立 운귀산독립) 일만 이천 봉우리 금강산이다. (一萬二千峰 일만이천봉)   겨울의 금강산은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부른다. 모두 ‘개(皆)’, 뼈 ‘골(骨)’, 흰 뼈처럼 모두 하얀 산이라는 뜻이다. 금강산에 와 보니 온통 흰 빛깔뿐이다. 산도 희고 그 위에 잠긴 구름도 희다. 산봉우리가 구름에 잠겨 있을 때는 산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날씨가 개자 구름이 걷혔다. 구름이 사라지고 나니 우뚝하게 솟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어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시인은 산과 구름이 섞여서 모습을 알아볼 수 없던 상태에서 구름을 걷어 냄으로써 홀로 우뚝하게 솟은 금강산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우리의 삶도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이다. 자질구레한 집착과 욕심, 좀 더 놀고 싶은 생각, 더 게을러지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을 활짝 걷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본마음이 환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산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자태로 그렇게 우뚝 솟아 있다. 사람들은 멀리서 그 산을 바라보면서 그 늠름한 기상을 마음속에 새기곤 한다. 늘 바라보던 그 산빛이 내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서 내가 바로 산이 된다. 산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다음 시는 고려 때 김부식의 라는 한시이다.   세속 나그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俗客不到處 속객부도처) 올라오니 생각이 해맑아진다. (登臨意思淸 등임의사청) 산의 모습은 가을이라 더욱 곱고 (山形秋更好 산형추갱호) 강 물빛은 밤인데도 오히려 밝다. (江色夜猶明 강색야유명) 해오라기 높이 날아 사라져 가고 (白鳥高飛盡 백조고비진) 외론 돛만 혼자서 가벼이 떠간다. (孤帆獨去輕 고범독거경) 달팽이 뿔 위에서 (自慙蝸角上 자참와각상) 공명(功名)을 찾아다닌 반평생이 부끄럽구나. (半世覓功命 반세멱공명)   복잡한 세속에서 바쁘게 살다가 절 집을 찾아 산에 올랐다. 높이 올라 멀리 보니 마음이 아주 맑고 편안해진다. 가을 산은 이미 낙엽이 다 떨어지고 없다. 잎이 다 지고 없는 텅 빈 가을 산인데, 내게는 그것이 봄 산의 화려함보다 더 좋게 보인다. 멀리 강물이 보인다. 강물 빛은 밤이 되자 오히려 달빛을 받아서 더 희게 느껴진다. 강물을 한밤중에도 달빛 아래서 저렇게 흘러가고 있구나. 저 아래 물가에서 흰 해오라기 푸드득 날개를 치는가 싶더니, 이 한밤에 높이 높이 솟아올라 어디론가 날아간다. 강물 위엔 배 한 척이 바쁜 세상일은 상관도 않겠다는 듯이 가볍게 강물 위를 떠내려간다. 허공 위로 훨훨 날아가 버린 해오라기, 바쁠 것 없어 유유히 떠내려가는 돛단배를 보다가 시인은 갑자기 말도 못하게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달팽이 뿔처럼 좁디좁은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겠다고 아옹다옹 다투고 싸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높이 올라 날아가 버린 것은 해오라기가 아니었다. 홀로 가볍게 떠내려간 것은 돛단배가 아니었다. 정작 날아가 버리고 사라져 버린 것은 내 안에 잔뜩 들어 있던 욕심스런 마음이었다. 속세의 나그네로 들어온 가을 산속에서 그는 비로소 새롭게 태어나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 준다. 일상에 찌들어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지리산 연못 속에 산다는 그 물고기처럼, 우리도 마음속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고 살았으면 참 좋겠다. 산을 닮고 나무를 닮고 강물을 닮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15-132.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4> 자연이 주는 선물|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울림이 있는 말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 힘 있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시콜콜히 다 말하는 것보다 아껴 두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직접 말하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더 좋다. 시 속에서 시인이 말하는 방법도 이와 같다. 다 말하지 않고 조금만 말한다. 직접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한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대신 스스로 깨닫게 한다. 멀리 함경도 안변이란 곳에 벼슬 살러 가 있던 양사언이 한양에 있던 친구 백광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오랜만에 친구의 편지를 받은 백광훈은 반가워서 편지 봉투를 서둘러 뜯었다. 그런데 편지가 좀 이상했다. 다음과 같이 딱 한 줄, 한문으로는 열두 자만 씌어 있었던 것이다.       삼천 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옛날에는 편지도 직접 사람을 보내 전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낸 편지가 받을 사람에게 도달하는 데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 먼 길에 그렇게 힘들게 보낸 편지인데, 고작 열두 글자만 썼다니 이상하다. 한참 그 편지를 읽어 보던 백광훈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사언은 이 편지에서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편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먼저 그는 삼천 리 밖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밝은 달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하다. 환한 달빛을 보고 싶은데 구름이 자꾸 방해를 한다. 그는 왜 달빛과 친하게 지낸다고 했을까? 달은 내가 있는 이곳이나 네가 있는 그곳이나 똑같이 뜰 것이다.나는 여기서 너를 생각하면서 저 달을 본다. 너는 또 내가 보고 싶어서 달을 보겠지.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만나 볼 길이 없어서 매일 저 달만 쳐다본다. 그런데 그 달마저도 구름에 가려서 보일 듯 말 듯하니 너무 안타깝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양사언은 백광훈에게 멀리서 나는 네가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길게 안부를 묻고 보고 싶다는 말을 적은 편지보다 훨씬 더 깊은 정이 느껴진다. 이 편지를 손에 들고 달을 올려다보며 친구 생각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을 백광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직접 다 말해야만 좋은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고, 속으로 고여서 넘치는 정이 있다. 다음은 조선 시대 능운이란 기생이 사랑하는 임을 그리며 지었다는 란 한시다.   달 뜨면 오시겠다 말해 놓고서 (郞云月出來 랑운월출래) 달 떠도 우리 임은 오시지 않네. (月出郞不來 월출랑불래) 아마도 우리 임 계시는 곳엔 (想應君在處 상응군재처) 산이 높아 저 달도 늦게 뜨나 봐. (山高月上遲 산고월상지)   임은 달이 뜨면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저 달이 중천에 이르도록 임은 오실 줄을 모른다. 그녀는 저녁 내내 조바심이 나서 달만 보며 마당에 나와 서 있다. 왜 안 오실까? 저 달을 못 보신 걸까? 혹시 마음이 변하신 것은 아닐까? 조바심은 점차 불안감으로 변해 자칫 그리움의 원망이 쏟아지고 말 기세다. 그러나 그녀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오지 않는 임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대신 오히려 임의 편을 들어 주기로 한다. 아마 지금 임이 계신 곳에는 산이 하도 높아서 내게는 훤히 보이는 저 달이 아직도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모양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이 내게로 오시지 않을 까닭이 없다. 설령 임이 나와의 언약을 까맣게 잊고 안 오시는 것이라 해도 나만은 이렇게 믿고 싶다. 여기에는 또 혹시 이제라도 오시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바람도 담겨 있다. 임을 향해 직접적으로 원망을 퍼붓는 것보다 은근한 표현 속에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더 큰 매력이 있음을 느낀다. 황희가 정승이 되었을 때, 공조판서로 있던 김종서는 태도가 자못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의자에 앉을 때도 삐딱하게 비스듬히 앉아 거드름을 피웠다. 하루는 황희가 하급 관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김종서 대감이 앉은 의자의 다리 한쪽이 짧은 모양이니 가져가서 고쳐 오너라.” 그 한마디에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크게 사죄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뒷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육진(六鎭)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오는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운 줄을 몰랐는데, 그때 황희 대감의 그 말씀을 듣고는 나도 몰래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었네.” 정색을 한 꾸지람보다 돌려서 말한 한마디가 거만하기 짝이 없던 김종서로 하여금 마음으로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게 했다. 다음은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이 지은 이란 작품이다.   나더러 무슨 일로 푸른 산에 사냐길래 (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웃으며 대답 않았지만 마음만은 한가롭다.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불답심자한) 복사꽃이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내려가니 (桃花流水杳然去 도화류수묘연거) 인간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이다.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산에서 사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불쑥 묻는다. “왜 이렇게 깊은 산속에서 사십니까?” 나는 싱긋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산이 좋아서 사는 사람에게 산에 사는 이유가 달리 있을 까닭이 없다. 산이 좋은 까닭을 말로 설명할 재주도 없지만, 말한다 한들 그가 알아듣기나 하겠는가?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답답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한가롭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면 강물 위에는 복사꽃이 둥둥 떠내려간다. 인간 세상에는 달리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도 그는 나더러 왜 답답하게 산속에서 혼자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웃는 것 외에는 대답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침묵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추사 김정희의 글에 이런 것이 있다.       작은 창에 햇볕이 가득하여,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한다.   책상 하나만 놓여 있는 방안으로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볕이 고마워서 말없이 오래도록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물질의 풍요로움은 비록 지금만 못했지만, 정신만을 넉넉하고 풍요로웠던 선인들의 체취가 문득 그립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33-140.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5> 울림이 있는 말|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간결한 것이 좋다   말과 글은 다르다. 말로 하면 긴데, 글로 쓰면 몇 줄 안 된다. 전화로 하면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다른 이야기도 하면서 말이 길어진다. 편지를 쓰면 그 많던 말은 다 어디로 가고 없고 몇 줄 쓰고 나면 쓸 말이 없다.글은 말을 간추려 요점만 모아 놓은 것이다. 시는 글을 다시 한 번 더 압축해 놓은 것이다. 시인은 절대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시에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자세한 설명보다 좋은 점수를 받는다. 시에서는 말을 아낄수록 여백이 더 넓어진다. 구양수는 송나라의 유명한 문장가다. 그는 글을 쓸 때 벽에 붙여 놓고 고치고 또 고쳤다.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쳤다. 글을 완성한 뒤에 보면 제목만 빼고 다 고친 경우도 있었다. 그가 처음 글쓰기를 배울 때 일이다.어떤 사람이 비문을 지어 스승에게 보여 주었다. 스승은 다 읽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잘 지었다. 그렇지만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구나. 절반으로 줄여 오너라.” 구양수는 스승의 말을 따라 처음 천 글자에 가깝던 글을 힘들게 5백 자로 줄여 가지고 갔다. “많이 좋아졌다. 다시 3백 자로 줄여 오너라.” 구양수는 다시 2백 자를 더 줄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에 천 글자로 썼던 비문을 3백 자로 줄이고 나니,처음보다 나중 글이 훨씬 더 짜임새가 있고 훌륭해진 것이다. 여기서 구양수는 문장을 짓는 방법을 크게 깨달았다. 한시에는 설명하는 말이 없이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꽤 있다. 이달의 라는 시를 보자.   한 줄 두 줄 기러기(一行二行雁 일행이행안) 만 점 천 점 산.(萬點千點山 만점천점산) 삼강 칠택 밖(三江七澤外 삼강칠택외) 동정 소상 사이.(洞庭瀟湘間 동정소상간)   도대체 무슨 말일까? 설명하는 말은 하나도 없고, 단어만 나열해 놓았다. 삼강과 칠택, 동정과 소상은 모두 중국 남쪽 지방에 있는 유명한 호수와 강물의 이름이다. 제목을 보면 김양송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림책을 보고, 그 그림의 빈 곳에 써 준 시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지금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그림이었을까? 한 줄 두 줄 기러기라고 했다. 그림 속에는 V자 모양으로 줄을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만 점 천 점 산이라고 했다. 무수히 많은 산들이 그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삼강과 칠택의 밖, 동정과 소상의 사이라고 했으니, 무수한 산과 들 사이로 많은 호수들이 있었겠다. 그림은 기러기 떼가 산 넘고 강 건너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날아가는 장면이었다. 멀리 조그만 점으로 기러기 떼를 그려 놓고 다시 그 아래에 산과 호수를 그려 놓았다. 호수가 많은 것으로 보아 중국 남쪽 지방을 그린 것 같다는 말이다. 시인의 생각을 헤아려서 설명을 보태면 이렇게 된다.   한 줄인지 두 줄인지 기러기가 날아가는데 만 점인지 천 점인지 산은 많기도 많다. 삼강과 칠택의 바깥 같기도 하고 동정호와 소상강 사이 같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을 시인은 아무 설명 없이 그냥 단어만 늘어놓았던 것이다. 말을 아낄수록 뜻이 깊어지는 것은 현대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박목월의 란 작품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다섯 도막의 짧은 시다. 그나마 두 번째와 마지막 연은 내용이 꼭 같다. 저녁 무렵 남도로 가는 길에 어떤 나그네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의 전부다. 하지만 시를 읽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 어떤 풍경이 떠오른다. 지금은 다리가 다 놓여서 나루터에서 배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나그네는 배를 타고 나루터를 건넌다. 길옆으로 푸른 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춤추는 밀밭은 마치 구름밭 같다. 그 구름밭 사이로 나그네는 마치 일렁이는 달빛처럼 흘러간다. 외줄기 밀밭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나그네가 갈 길도 끝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도 바쁠 것 없다는 듯 유유히 걸어간다. 어느덧 건너편 산 너머로 빠알간 노을 불타고 있다. 산 아래 그림같이 예쁜 마을이 보인다. 집집마다 술을 담가 놓고 지나는 나그네가 재워 달라고 하면 따뜻한 잠자리를 내주고, 밥과 술을 내오는 그런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오늘 밤은 저 마을에서 묵고 가야지. 나그네는 마음이 먼저 훈훈해 오는 것을 느끼며 발길을 그리로 옮긴다. 시인은 짧게 말했지만, 시를 따라 가며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처럼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또, 이 시에서 알지 못할 슬픔이 서려 있다. 나그네의 허전한 마음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시기에 지어졌다. 먹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술을 담그기는커녕 끼니도 잇지 못해 풀뿌리를 캐 먹으며 겨우 살아가던 힘겨운 시절이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실제의 광경이 아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인심이 넉넉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믿음이 있던 옛날을 꿈꾸듯 그려 본 것이다. 나그네가 찾아오면 재워 주고, 밥과 술을 넉넉히 먹여 보내던 사람들. 그 시절의 인정을 그리워하며 그려 본 상상 속의 풍경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인이 말을 아끼고 있는 시는 그냥 읽기만 해서는 알 수가 없다.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이런 시는 다 읽고 천천히 음미하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말이 많으면 언제나 탈이 난다. 말을 아낄 때 그 말이 가치가 있다. 시인은 말하지 않으면서, 웅변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려는 사람이다. 좋은 시는 절대로 다 말해 주지 않는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51-15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6> 간결한 것이 좋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물총새가 지은 시   시인은 시를 통해 사물과 만난다. 이전까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던 사물이 시 속으로 들어오면 문득 달라진다. 나와 사물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가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내 마음이 그대로 사물에게 전달되기도 하고, 사물들이 품은 생각이 내게로 옮겨오기도 한다. 다음은 조선 시대 시인인 이경동이 지은 란 작품이다.   피곤한 나그네는 턱을 괴고 누워서 (倦客支頤臥 권객지이와) 날이 다 새도록 시를 짓고 있다. (探詩日向中 탐시일향중) 비취새의 울음소리 한 번 들리니 (一聲聞翡翠 일성문비취) 역창의 동쪽에서 울고 있구나. (啼在驛窓東 제재역창동)   사근역은 경상남도 거창에 있던 역 이름이다. 역은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운영하던 여관이다. 암행어사가 마패를 보여 주고 마패에 새겨진 숫자만큼 말을 빌리던 곳도 이곳이다. 말은 금세 지쳐 먼 길을 못 가므로 역에서 말을 바꿔 타고 가곤 했다. 위 시에서 보이는 나그네는 전날 먼 길을 힘들게 왔던 모양이다. 해가 훤히 떴는데도 이불 속에 누워 있다. 턱을 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잠이 깨 있었다는 뜻이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는 말이다. 그는 아침부터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걸까? 그는 시를 짓고 있었다. 새벽 이불 속에서 갑자기 시상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시가 될 듯 말 듯 마무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 오는 것도 잊은 채 온통 시에 정신이 뺏겨 있다. 아예 안 될 것 같으면 훌훌 털고 일어나겠지만 금방이라도 될 듯 말 듯 하면서도 막힌 생각이 열리지 않으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바로 그때 그는 창밖에서 우는 비취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시인은 저도 몰래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쪽 창이 벌써 환히 밝았던 것이다. “날 샜다. 빨리 떠나거라. 그깟 시 때문에 낑낑대지 말고.” 비취새는 아마도 시인에게 이렇게 말한 것만 같다. 그 순간 신통하게도 시인의 시도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말았다. 비취새는 물총새다. 파랑새목 물총샛과 물총새속에 속하는 여름 철새다. 작은 몸에 큰 머리, 길쭉한 부리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비췻빛의 푸름을 지닌 아름다운 깃털 때문에 푸른 보석인 비취에 견주어졌다. 물고기 잡는 솜씨가 워낙 탁월해서 대장 어부(kingfisher)라는 영어 이름을 가졌다. 낚시꾼이란 별명도 있다. 모두 뛰어난 물고기 사냥 솜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 시는 당나라 때 육구몽이란 시인의 물총새를 노래한 작품이다.   붉은 옷깃 푸른 날개 알록달록 고운데 (紅襟翠翰兩參差 홍금취한양참치) 안개 꽃길 날아와 가는 가지 앉았다. (徑拂煙花上細枝 경불연화상세지) 봄물이 불어나 고기 잡기 쉬우니 (春水漸生魚易得 춘수점생어이득) 비바람도 싫다 않고 앉았을 때가 많구나. (不辭風雨多坐時 불사풍우다좌시)   첫 번 구절에서 ‘붉은 옷깃’을 말한 것은 이 새의 앞가슴이 주황색이기 때문이다. 물총새가 물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다. 봄이 왔고, 물이 불었다.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자꾸만 입을 뻐끔거린다. 비바람에 옷깃이 젖어도 물총새는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물고기만 나타나면 곧장 수면 위로 차고 내려 물고기를 낚아채려는 속셈이다. 다음 시는 정약용의 20수 중의 한 수이다.   흰 종이 펴고 술 취해 시를 못 짓더니 (雲牋闊展醉吟遲 운전활전취음지) 풀 나무 잔뜩 흐려 빗방울이 후두둑 (草樹陰濃雨滴時 초수음농우적시) 서까래 같은 붓을 꽉 잡고 일어나서 (起把如椽盈握筆 기파여연영악필) 멋대로 휘두르니 먹물이 뚝뚝 (沛沿揮洒墨淋漓 패연휘쇄묵림리)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不亦快哉 불역쾌재)   시를 지으려고 종이를 펼쳐 놓고 붓에 먹을 찍었다. 술에 취해서인지 생각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붓을 들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붓방아만 찧고 있다. 창밖은 소나기라도 한바탕 오려는지 잔뜩 흐렸다. 답답한 내 마음과 같다. 한순간 천둥 번개가 우르릉 꽝 하고 친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이 소나기가 퍼붓는다. 그 순간 답답하게 꽉 막혔던 내 생각도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다. 큰 붓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쓸 겨를도 없다. 마구 붓을 휘두르니 여기저기 먹물이 뚝뚝 떨어진다.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스레 뚫린다. 앞서는 물총새의 울음소리가 막혔던 생각을 뚫어 주었고, 여기서는 쏟아진 소나기가 내 생각을 열어 주었다. 시에서 이렇게 바깥 사물이 내게로 와서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시 속에서만 가능한 마술이다. 반대로 시인의 행동이 사물에게로 옮아가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박은의 라는 작품이다.   베개 베고 시를 얻어 계속 읊조리는데 (枕上得詩吟不輟 침상득시음불철) 마구간에 마른 말이 길게 따라 울음 운다 (羸驂伏櫪更長鳴 리참복력갱장명) 밤 깊어 초승달은 그림자를 만들고 (夜深纖月初生影 야심섬월초생영) 고요한 산 찬 소나무는 절로 소리를 낸다 (山靜寒松自作聲 산정한송자작송)   사실 내가 시를 읊조리는 소리와 말 울음소리, 달빛과 솔바람 소리는 아무 상관없이 동시에 일어난 우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가 낭랑하게 읊은 시 소리를 듣고 마구간에 지친 말은 갑자기 빨리 길 떠나자고 힝힝거리기 시작했고, 달빛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디밀고 있으며, 마침내 소나무까지도 소리를 내며 내 목소리에 박자를 맞추더라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이 시인의 눈과 귀를 거치고 나면 모두 시의 재료로 된다. 마구간의 말이 말을 건네 오고, 물총새가 시비를 걸어온다. 소나무도 같이 놀자고 하고, 소나기도 내 마음을 알겠다고 한다. 시 속에서는 안 되는 일이 없다. 시인은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59-166.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7> 물총새가 지은 시|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아비 그리울 때 보아라   옛 여성들은 참으로 힘든 시집살이를 했다. 무서운 시어머니와 어려운 남편을 모시면서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래서 한시에는 시집살이에 대한 한시가 적지 않다. 이번에는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노래한 작품들에서 옛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 임을 위해서 누비옷을 짓는데 (爲郞縫衲衣 위랑봉납의) 꽃 기운 때문에 나른하고 피곤해서 (花氣惱憹倦 화기뇌뇌권) 바늘을 돌려 감아 옷섶에 꽂아 두고는 (回針揷襟前 회침삽금전) 앉아서《숙향전》을 읽었답니다. (坐讀淑香傳 좌독숙향전)   이옥의 라는 작품 가운데 한 수인 이다.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아씨의 마음을 잘 그려 내었다. 명주 고운 천 안에 얇게 솜을 두어 임이 입으실 옷을 바느질한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여 임을 향한 나의 사랑을 담았다. 한참을 바느질만 하려니까 문득 졸음이 온다. 봄날, 창밖에는 예쁜 꽃들이 피어 있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와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노곤한 봄날이라 낮잠이 쏟아진다. 계속하다가는 바느질이 고르게 될 것 같지가 않다. 까딱하면 바늘로 손가락을 찌를 것만 같다. 새아씨는 잠시 바느질을 멈추기로 한다. 바늘로 실 끝을 한 번 되감아 홀쳐서 옷감을 저만치 밀려 두고《숙향전》을 꺼내서 읽어 본다. 새아씨는《숙향전》을 수도 없이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래도 읽을 때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행복을 되찾는 숙향의 이야기는 힘든 시집살이에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읽을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모두 한문으로 쓰여 있어서 일반 백성들은 무슨 말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 시에서처럼 한글로 쓰인 소설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옛날에는 소설책을 지금처럼 눈으로 읽지 않고 귀로 들었다.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연극배우처럼 여러 사람 목소리를 내면서 소설을 읽으면, 방 안에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서 바느질을 하거나 새끼를 꼬면서 그 이야기를 실감 나게 들었다. 읽다가 신바람이 나면 소설에 쓰여 있지도 않은 내용을 보태기도 했고,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훌쩍 건너뛰기도 했다. 소설책의 인기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여자가 시집갈 때 가져가는 혼수 품목 중에는 반드시 소설책이 들어 있었다. 소설책 값이 너무 비싸서 살 형편이 못 되는 집에서는 공책을 만들어 소설책을 빌려다가 붓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써서 베꼈다. 이렇게 베낀 소설책을 필사본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 많은 분량의 소설을 다 베껴 쓰고 나면 베껴 쓴 사람은 소설 끝에다 몇 마디씩 베껴 쓰게 된 이유나, 쓰면서 느낀 생각들을 몇 줄씩 써서 남겼다. 다음은《임경업전》이라는 고전 소설의 끝에 누군가가 쓴 글이다.   병오년 2월에 조씨 집안에 시집을 간 딸이 자기 동생의 결혼식을 맞아 집으로 왔다. 《임경업전》을 베껴 쓰려고 시작하였다가 미처 다 베끼지 못하고 시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 동생을 시켜서 베껴 쓰게 하고, 사촌 동생과 삼촌과 조카들도 글씨를 중간 중간에 쓰고, 늙은 아비도 아픈 중에 간신히 서너 장 베껴 썼으니, 아비 그리울 때 보아라.   아버지가 시집간 딸을 위해 소설책을 베낀 뒤에 써 준 글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딸이 시집갈 때 소설책 한 권도 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동생, 사촌 동생, 삼촌, 조카까지 동원해서 필사가 끝나 책을 매면서 아버지는 딸에게 편지를 쓰는 심정으로 위의 글을 쓰고 나서 맨 끝에 이렇게 썼다. “아비 그리울 때 보아라.”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말인가? 시집간 딸은 이 글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울었을 것이다. 이럴 때 소설책은 단순히 그냥 책이 아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애틋한 정이 담긴 사람의 정표이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든든하고 힘이 절로 솟았을 것이다. 부모는 그렇게 뒤에서 자식들의 듬직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다시 이옥의 이라는 한시 한 수를 감상해 보자.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三更起梳頭 삼경기소두) 네 시에는 시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올리죠. (五更候公姥 오경후공모) 친정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誓將歸家後 서장귀가후) 밥 안 먹고 대낮까지 잠만 잘래요. (不食眠日午 불식면일오)   옛사람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그래도 새벽 두 시에 일어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그때부터 머리를 빗고 단장을 해야지 닭이 울어 시부모님께 인사할 때 단정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 잠이 쏟아지지만, 조금만 더 자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에 친정집에 갈 일이 있어 간다면, 밥도 안 먹고 그냥 잠만 자겠다고 다짐했다. 얼마나 잠이 부족했으면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예전에는 출가외인이라고 해서 딸은 시집가면 마음대로 친정집에 올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고 싶고 형제들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 볼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금지옥엽 귀하게만 자라다가 고된 시집살이들 하자니 가족 생각이 더 간절했겠다. 다음은 이양연의 란 시이다.   자네 친정은 멀어서 오히려 좋겠네 (君家遠還好 군가원환호) 집에 가지 못해도 할 말이 있으니까. (未歸猶有說 미귀유유설) 나는 한동네로 시집와서도 (而我嫁同鄕 이아가동향) 어머니를 삼 년이나 못 뵈었다네. (慈母三年別 자모삼년별)   마을 아낙네 둘이서 주고받는 대화이다. 대화를 나누면서 두 아낙네는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 대화를 시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옛날의 여성들은 참으로 힘든 시집살이를 했다. 집안의 크고 작은 살림을 혼자 다 감당했다. 그러자니 잠이 늘 부족했고, 겨울엔 얼음을 깨고 찬물에 빨래를 하느라고 손등이 다 얼어 터졌다. 바느질을 해서 식구들 옷을 다 해 입혀야 했고, 농사일도 직접 다 챙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친정은 집안에 혼사 같은 큰일이 있을 때만 몇 년에 한 번 겨우 다녀올 수가 있었다. 그렇게 힘들고 고단할 때, 그녀들은 이야기책을 읽었다. 주인공들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행복을 찾아 가는 이야기를 읽으며, 마치 자기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기라도 한 듯 착각을 하며 행복한 상상에 젖곤 했다. 문학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꿈을 주고 희망을 주고 용기를 준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67-176.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8> 아비 그리울 때 보아라|작성자 옥토끼  
27    황지우 시론 댓글:  조회:1185  추천:0  2019-01-31
황지우 시론 ​ ※해체시란? 언어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불신에서 출발하여 기존 전통시의 형태를 파괴한 일련의 전위적 실험시이다. 해체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시의 새로운 흐름으로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들어 박남철, 황지우 등 많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 ​   '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했을 때 '우리'는 원초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러한 간주관적인 자장권을 가리킨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말하자면 '의미 공동체'이다.   의미공동체 = 일종의 역사 공동체. 역사를 공유하여 표현, 단어의 의미도 함께 공유한다.   ex) 아, 오월 → 5.18       아, 삼월 → 3.1     문학은 의사소통의 일종이며 이게 되려면 의미공동체(역사,문화 공동체)가 전제되어야 한다.   ​ 문학은 '열린 개념'이기 때문에     열린개념? - '한마디로 규정해낼 수 없다'라는 뜻이다. 즉, 공동체가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시란, 하나의 시의 개념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시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다.       시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할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텍스트와 콘텍스트로 되어있다. 우리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의 기화된 어떤 상태, 어떤 마성을 띤 뽀얀 에테르 상태의 콘텍스트를 통과한다.시적인 것은 이같은 에테르 상태를 경험하면서 겪게 되는 의식의 화학적 변화에 의해 주어진다.  나는 시를 쓸때,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것들의 관계를 나는 응시한다.     시적인 것= 시가 될 수 있는 것들.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이 시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시적인 것들이 될 수 있고 그것들의 관계를 주시한다.  시적인 것 A와 B의 관계를 중시한다.       나에게 시는 '시적인 것'의 '보기'(창조가 아니다!)에 의해 얻어진다.   시적인 것은 창조가 아니다.원래 있는 것들의  관계를 보고 시를 창조한다.    그러면 시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 그것은 모든 그때그때의 시속에 있다. … 시적인 것의 포착은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까지의 포착이기 때문이다. 내용 자체가 형식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때그때의 내용이 그때그때의 형식을 가져다 준다.   변한 내용이 형식이다. ex) 해체시.   시가 자기 표현, 즉 자기 노출로써 얻어졌던 낭만주의자들에게 시적인 것은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낀 성질로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시적인 것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속사정을 자세히 보면 시적 인 것의 개념 자체가 주관과 주관 사이에 열려 있는 공통감각, 즉 상식의 배관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나의 시적인 것이 그의 시적인것과 일치할 수 있을까?   낭만주의자들에게 시적인 것은 '주관적'인것. * 그러면 주관을 버리지 않고 소통하는 방법은?   나는 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혹은 느끼고 표현했는데 읽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나 느끼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 실패한 시들이 대개 그렇다. 하지만 나 한사람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시적인 것으로 느껴주지 않는 시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없다. 없는 이유는 그와 같은 시적인 것이 없기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비시적인 것으로 혹은 덜 시적인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시적인 것으로 느껴줄 몇몇 사람은 이 세상에 꼭 있기 때문이다. 시적인 것의 수준과 감수성에 따라 시적인 것을 느낀다. 한 개인의 피부 속에서만 필연적으로 시적인 것은 그것의 인식론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이유에서 무의미하다.   나만 이해되는 시는 무의미하다. 시란 의사소통의 일종이다. 간주관성= 완벽한 주관주의 ,극단적 객관주의 둘다 아니다. 주관과 주관사이의 공통감각. 이것을 시 쪽으로 가져오는 것.   읽히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작품은 무의미하다.   ↑황지우의 시에 대한 생각.    어느 경우든 문학은 현실에 이미 참여되어 있다.   황지우는 문학은 사회속에 참여 되어있다고 본다. 사회, 정치 이런것들의 참여. 문학은 순수해야! 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참여이며 문학은 사회성을 띠어야한다.     매스컴은 반커뮤니케이션이다. 인간의 모든것을 부끄럼 없이 말하는, 어떻게 보면 좀 무정할 정도로 정직한 의사소통의 전형적인 문학은 따라서, 진실을 알려야할 상황을 무화시키고 있는 매스컴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서 존재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것, 표현 못하게 하는 것을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그것에의 도전으로부터 얻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매스컴 = 일방적으로 전해질뿐. 표현할 수 없거나 금지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시에서, 말하는 양식의 파괴와 파괴된 이 양식을 보여주는 새로운 효과의 창출을 통해 이 침묵에 접근하고 있다. …일상의 거의 모든 프로토콜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아주 '낯설게'느끼도록 하는 효과에 나는 치중한다.   내용이 곧 형식이다, 파괴를 양식화 한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자 진단이 아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그 징후를 예시받을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쳐야한다. 그래서 독자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징후의 내적 의미를 '자발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 할 수 있게 해야한다. 바로 이것이 해방을 예시하는 방식이다.      문학은 사회의 징후를 보여줄 뿐. 혁명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시는 혁명의 도구가 아니다. 사회가 어떤 상황인지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야한다.   (* 이게 민중시들과 엇갈리는 부분!! 문학은 사회적이다! 라고 했지만..80년대의 민중시, 민중문학을 했던 사람들(박노해 등)과 엇갈리는 부분이다. 문학은 혁명의 관여가 아닌 그 조짐에 관여하는 것이다. 김남주와 박노해는 시 자체가 도구라고 생각하고 시인보다는 혁명가라는 정체성이 더 컸음. 그들은 조짐이 아니라 시는 직접적으로 혁명에 나서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 황지우가 사회적인 어떤 것들을 중요시하고 시를 썼지만 결국 민중시인들과 엇갈려 나갈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김남주의 경우 민중들만 일어세울 수 있다면 시는 바로 쓰고 없어져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음.)   [출처] 황지우 시론 정리|작성자 최고민혁 [출처] [스크랩] 황지우 시론 정리|작성자 옥토끼  
26    데페이즈망 시창작 기법의 활용 방안 / 김관식 댓글:  조회:1645  추천:0  2019-01-27
◇시창작론◇    데페이즈망 시창작 기법의 활용 방안 / 김관식    1.       프롤로그    데페이즈망 기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예술기법 중의 하나이다. 1917년 프랑스 작 가인 기욤 아폴리네르에 의해 창안된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는 이후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 주의의 뿌리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에 의해 꿈과 무의식 세계가 주요 관심사 로 등장했고, 그에 의해초현실주의라는 낱말이 정의되기도 했는데, 문학에서는 『초현실주 의 선언』에서 브르통은 “순수한 정신을 자동 기술하는 것으로, 그로 인해 사람이 입으로 말 하든, 붓으로 쓰든, 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 사고의 참된 움직임이 표현된다. 사고는 이성 에 의한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심미적이거나 도덕적인 모든 관심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기록 된다.”라고 초현실주의를 용어가 명확하게 정의되었다.  초현실주의 문예사조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황폐화를 배경으로 이성과인습을 반대하 고 문명의 구속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해방과 혁명을 촉진하기 위한 문예사조로 합리주의 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잠재의식의 세계를 추구하고 표현의 혁신을 꾀한 전위적 문예사조로 쉬르레알리즘이라고 일컬어 왔다.  초현실주의의 방법으로 유머, 신비, 꿈, 광기, 초현실적 오브제, 진기한 송장그리고 자동기 술법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기법은 자동기술법이다. 자동기술법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작가가 외부 세계와 분리된 상태에서 발견되는 사고의 형체를 가능한 빨리 표현하려는 방식 을 말하는데, 그 중에서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조각난 이미지들을 조합하는데서 데페이 즈망 기법의 시초가 되었고, 자동기술법을 정교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데페이즈망 기법은 즉흥적인 조합이었던 자동기술과는 다르게 주도면밀한 사실주 의로 환각적인 장면을 창조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이 데페이즈망으로 발전되었는데 초현실주의는 엄밀하게 사실적 초현주의와 추상적 초현실주의로 대별된다면, 사실적 초현실주의에서 데페이즈망으로 발전 되고, 추상적 초현실주의는 자동기술법과 관련을 맺는다고 보겠다. 데페이즈망 기법은 현대 에 들어서까지 회화, 사진,그래픽 디자인, 건축 등 디자인 전 분야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의 많은 영역에서 데페이즈망 기법이 모티브로 쓰이고 있다.  데페이즈망 기법의 주요한 표현 방법은 주로 비관습적 은유에 의존한다. 데페이즈망 기법 은 관습적인 은유에서 벗어나 비관습적인 은유를 통해 잠재의식 속 의미를 형성하고 이미지 를 합성하여 수용자에게 전달한다.  우리나라에서 1920년대 이하윤, 임화에 의해 소개되었고, 이상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억압 된 현실에 대한 회의와 그로부터 해방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형상화하는 시가 창작되었다. 그 후 초현실주의 이론을 실천한 조향 시인에 의해, 김춘수, 김수영, 김종삼, 전봉건, 이봉래, 김구용, 김차영, 고석규, 김영태, 성찬경 등의 많은 시인드의 시에서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오늘날도 꾸준히 부분적으로 초현실주의 표현의 여러기법들에 의 해 시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초현실주의 기법 중의 하나인 데페이즈망 기법의 활용을 위해 데페이즈망 기법에 대 한 이해를 돕기위한 개념과 적용, 중국 초현실주의 시로 볼 수 있는 있는 奇幻詩를 대표하는 이하 시인의 사례, 우리나라의 이상, 조향, 성찬경, 김춘수의 적용 사례를소개하기로 한다.    2. 데페이즈망 기법의 개념   1)      데페이즈망의 의의    데페이즈망이란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표현방법 중의 하나이다 .데페이즈망은 ‘데페이즈’라 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프랑스어로 ‘사람을 타향에 보내는 것’또는 ‘다른 생활환경에 두 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본 원리는 “일상적의미와 이탈과 새로운, 혹은 낯선 의미와 느낌의 환기”이다. 데페이즈망은프랑스어로 본래 전치(轉置), 전위법으로 번역되는데, “낯설음”, “낯선 느낌”을 의미한다.  초현실주의에서의 데페이즈망은 기존의 전통적인 사실주의에서 표현하는것처럼 사물이 나 외계대상에 대해 아주 치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만,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화면에서 의 느낌은 현실적인 리얼리티가 아니라 마술 같은 기이하고 이상하며 환상적인, 현실에 없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페이즈망은 물체나 영상을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나 배경, 분위기에서 떼어내어 전혀 그 사물의 속성과는 관련성이 없는 엉뚱한 장소에 배치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 적인 충격을 주고 서로 관련 없는 두 가지이상의 사물에 본원적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며, 인간의 마음속 깊이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방법이다.  문학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주장되어온 “낯설기하기”와 유사한 기법이나 문학이 언어 표현상 낯설게 하는 반면 데페이즈망은초현실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미술적인 기법이나 문학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 문학에서는 장르별로 방법을 달 리하여 낯설게 하는데, 시에서는 시어와 일상어의 대립으로, 소설에서 이야기와 플롯 사이의 대립으로 장르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즉 시에서는 일상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 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 언어와 다른 결합규칙을 드러내는 방법으 로 낯설게 하며, 소설에서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여 주위를 환기시킴으로써 동화된지각을 방해하고 사물과 세계를 생생하게 지각하도록 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인 “낯설게 하기”와 유사하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로트레아몽의 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장편 산문시로 격렬한 반 역사상과 악마적인 잔학성을 가진 59편의 에피소드로 된 작품인데, 일관성 있는 주제가 없고 난해한 시구로 철학적 성찰을 노래하며, 자동기술법으로 현실과 환상의식과 무의식의 아름 다운 융합의 문체로 된 시)의 유명한 구절 “재봉틀과 양산(洋傘)이 해부대에서 만나듯이 아름 다운“은데페이즈망 기법의 예로 들 수 있다.  현실에서는 아주 거리가 먼 재봉틀과 우산이 제자리가 아닌 해부대 위에 있다는 것은 일상 적으로 있어야 될 곳의 사물을 우연한 곳이나 의외의 장소에옮겨 놓음으로써 당황하게 하고, 거기서 놀라움과 신비성을 갖게 하는 것이데페이즈망 표현기법의 주된 특성이라고 할 수 있 다. 서로 이전에 어떠한 관계도 없었던 오브제의 결합으로 심리적 충격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 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데페이즈망의 부조리성을설명하 였다.  데페이즈망의 기법을 알렉센드리아는 여섯 가지로 분류에 했다.  첫째, 세부의 확대다. 예) 거대한 사과, 방안을 가득 채운 장미  둘째, 보충적인 사물의 결합이다. 예) 입과 새, 입과 나무, 산과 독수리  셋째, 무생물의 생물화다. 예) 발가락을 가진 구두, 유리방을 가진 옷  넷째, 신비스러운 개방. 예) 의외의 광경 쪽으로 열리는 문  다섯째, 생물의 믈질적 변형. 예)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 해변의 바위를 나는새 여섯째, 해부학적 경이. 예) 팔목이 여자 얼굴로 된 손  르네 마그리트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 나무, 사과, 유리잔,구두 등 일상 적 사물을 ‘낯설게’함으로써 그의 특유의 초현실적 효과를 얻어냈다. 마그리트는 작품에서 신 비감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는 ‘친근하고 평범한 사물들의 결합이 좀 더 적절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미 경험한 이미지가 전혀 다르게 변했을 때 느끼는 심리적 충격과 대상의 물리적 구조가 어긋날 때 느끼는 기이한 혼란이 새로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평소 이국했던 사물들의 위치를 전환시켜 엉뚱한 다른요소들과 결합시키거나, 사물과 말 사이의 엉뚱한 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의식과 무의식이 융합되는, 분화하기 이 전의 자유로운 사고의 순간을 즐겨 표현해 왔던 마그리트에게는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이 매우 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그리트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무의식적인 꿈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데페이즈망이라는 의식적인수법을 사용한 것 이 아니며, 현실 세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부조리성이나 신비, 경이로움 등을 환기시키기 위 해 데페이즈망 표현기법이 사용되었다.  수지 개블릭은 그녀의 저서 『르네 마그리트』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사물에 대한 탐구 방 법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8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➀ 고립 : 오브제를 고유의 영역 밖으로 옮겨 기대되는 역할로부터 벗어나게하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것.  ➁ 변형 : 어떤 한 측면의 변화 또는 정한 오브제와 정상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속성의 배제 이다. 사물이 가진 가장 중요한 성질가운데 하나를 바꾸는것.  ➂ 이중 이미지 : 시각적인 말장난의 형태로 새 모양의 산이나 배 모양의 바다가 그것이다.  ➃ 크기의 변화 : 위치 또는 물질을 통한 당혹스러움의 창조.  ➄ 합성 : 두 개의 익숙한 오브제가 결합되어 제3의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오브제의 산출 이다. 가령 물고기의 상체에 사람의 하체를 결합.  ➅ 무중력 표현 : 친숙한 대상물들의 결합을 통한 당혹스러움의 창출.  ➆ 역설 : 지적인 반명제의 방법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안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는 것.  ➇ 개념적 양극성 : 밖의 풍경과 안의 풍경처럼 두 상황을 단일 관점에서 관찰하는 이미지 의 해석.    데페이즈망의 시에 적용    형태 데페이즈망의 기법에 시에 적용된 경우는 알렉산드리아나 수지개블릭의 분류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이 가능하나 주요로 시에서 활용되는 대표적인 형태는 형태의 변형, 이질적 결 합, 공간의 혼란 등 세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다    ➀ 형태의 변형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회화에서 형태를 전혀 이질적인 모습으로 변형하거나기존 물체를 왜 곡하고 과장시켜 작품세계를 표현한다. 형태의 변형은 대상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사물이 가 지고 있는 일상적인 크기에 변형을 주거나혹은 사물의 형태나 재질을 다른 대상물로 대체하 여 이질감을 지닌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형태의 변형은 일상 적으로보이는 것, 실재하고 있는 대상의 모양이나 생김새를 왜곡시켜 표현함으로써 관습적 인 사고와 경험을 파괴한다. 이는 일반적인 대상의 외적형태를 변화시켜 부조화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시각적 경험을 확장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데, 시에서는 언어의 유희적인 기 법, 다중의 의미의 활용, 유사이미지를 변형하여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여 은유, 상징하여 표 현하는 방법 등다양한 형태 변형을 시창작 방법에 적용한다. 성찬경의 「프리」에서 “純粹 한波動”→“파동의 溫床 위에/주렁주렁 맛있는 열매”→ “이마아. fancy. 그리고 환타” 등 의 변형과 시제의 「프리즘」의 글자를 변형하여 프리즘의 형태로「프리」이라 붙였다거 나 프리즘의 연속적인 이미지로 “이마아”, 그리고 영어의 형태로 변형하여 “fancy”, 다시 프 리즘의 형태로 변형 시킨 “환타” 으로형태의 변형을 시도했다.    ➁ 이질적 결합  이질적 결합 방법은 사물끼리의 결합, 인간과 동물, 또는 생물과 사물 결합등 연관성 없는 두 가지 이상의 대상을 결합시킴으로써 일반적인 대상의 속성을 변화시켜서 전혀 다른 대상 과 상황을 창조해내는 방법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나열하거나 조합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 어진 이질적 이미지의 결합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동시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대 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관습적 경험으로 얻어진 상식에 의지하며 이러한 고정관념이 뒤집 히게 될 때 관람자는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충격과 혼란을 느낀다.이질적인 대상들을 화해시 키고, 기존 형태의 것들을 혼합하여 새로운 것을창조하는 과정은 상상 속의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 낸다. 이질적인 결합을 적용한 사례를 들면 조향의 「바다의 층계」를 들 수 있다. “―여보세 요!”하고 부르고는 “, , 에 피는 들국화”로 전혀 이 질적인 사물의 이미지를 나열하고 있다.    ➂ 공간의 혼란  공간의 혼란 방법은 이미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서 초현실적인 상황이나 배경을 만들 어내는 방법이다. 이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상황을 하나로표현하면 시각적으로 혼란을 일으 키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착시현상을 노린 방법이다. 공간의 모호한 경계는 대상의 정체성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해석을 가져와 기존인식의 한계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해준다. 공간의 혼란은 대상들을 이중적인 상황으로 나타내고 서로의 의미를 중첩하거나 혼합하여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 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에서 현실 공간에서 영혼의 공간으로 넘나드는 중국 당나라 시인 李賀의 「 蘇小小墓 」는 공간의 혼란 방법을 적용한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춘수의 「처용단장 1의3」에서 “호주의 선교사 집”과 “바다”라는 공간의 혼란이 야기되는 사례에서 이러한 창작기법을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데페이즈망 기법의 적용사례-중국 당나라 이하의 시    이하의 시는 생생한 표현, 이상한 어투, 두드러진 병렬, 종종 망령이나 기괴한 생물, 요괴, 초자연 현상이 그린 초현실주의적인 환상시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색채감이 풍부 한 예리한 감각적 시 창작방법으로 일관하였고, 염세주의적인 차가운 눈으로 즐겨 유귀(幽 鬼)를 다루기 때문에 ‘유귀의재주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이 시 한편을 소개해보기로 한 다.    幽蘭露 무덤가 난초에 맺힌 이슬  如啼眼 눈물어린 그대 눈망울  無物結同心 사랑의 마음을 맺어줄 정표도 없는데  煙花不堪剪 안개처럼 가녀린 꽃 꺾을 수조차 없네  草如茵 풀밭은 깔개  松如蓋 소나무는 포장  風爲裳 바람은 나부끼는 그대의 옷자락  水爲佩 물소리는 그대의 찰랑거리는 패옥 소리  油壁車 기름 먹인 화려한 수레  夕相待 저녁 무렵 그대를 기다리네  冷翠燭 차가운 도깨비불  勞光彩 광채를 더하고  西陵下 서릉의 무덤 가에는  風吹雨 비바람만 불어온다  -李賀 「 蘇小小墓 」    *결동심(結同心) : 고대 중국에서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의 증표로 비단띠를허리에 두르 던 것.  *촉(燭): 원뜻은 촛불, 등불. 여기서는서 도깨비불.  *소소소(蘇小小) : 중국 위진남북조 시기 남조 齊나라의 유명한 기생    이 시는 이하가 18세에 지은 시로 이미 죽은 영혼을 현재로 불러내는 방식으로 현실세계의 “소소소”의 묘를 매개로 하여 그녀를 현실 세계로 불러냈는데, 1-8구는 현실 공간에서의 자 연물에 소소소의 혼이 서려 있는 영매물로대체하였다. 때문에 난초가 눈물을 머금고 흐느끼 고, 풀과 소나무, 바람, 물은 소소소의 옷과 장식물로 시적 대상에 감정이입의 단계보다 진일 보한 역동적인 진술로 전설을 과거 이야기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까지 연장선 에서 이어져 오는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현실과 환상적인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유 롭게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보인다.    데페이즈망 기법의 적용사례-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인 이상, 조향, 성찬경의시    1)      이상의 적용 사례    우리나라에서 초현실주의 대표시인으로는 이상과 조향, 성찬경을 들을 수있는데, 이들의 시를 한 편씩 소개해보기로 한다.  이상은 일제강점기의 억압된 현실에 대한 회의와 그로부터 해방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형 상화하는 시를 창작했는데, 그는 절망적인 세상을 유머로 바꾸어 놓고자 했고, 또한 우연의 기법인 데페이즈망과 자동기술법을 이용함으로써 일상적 현실로부터 탈피하여 초현실주의 세계를 지향하고자 했다.  이상의 아방가르드 경향의 초현실주의 대표시라고 할 수 있는 「오감도」는 전체적으로 긴 장·불안·갈등·싸움·공포·죽음·반전 등 자의식 과잉에 의한 현실의 해체를 그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고, 특히 「오감도 제1호」는 사람들이 서로를 두려워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역전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의 「오감도」-시제일호(詩第一號) 전문    이상의 「오감도(烏瞰圖)」는 15편 연작시로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서 연재하였는데, 독자들의 항의 투서가 빗발치면서 30회 연재를 목표로 한 것을15회안에 연재를 중단하였다. 시제부터 새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것과 같은 상태의 도면을 “조감도(鳥瞰圖)”라 하는데, 여기서 “새 조(鳥)”의한 획을 빼서 “까마귀 오(烏)”로 바꾸어 쓴 것으로 불안·공포·죽 음 등의 자의식에 의한 현실의 해체를 지향하고 있으며 주로 구체적인 현실이나 대상 없이 새 롭게 만든 시어를 사용한 것이 특징적이다.    2)      조향의 적용 사례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론 창작방법으로 삼아서 일관되게 초현실주의 시를 실천한 시인 조향의 데페이즈망 기법의 대표적인 시는 「바다의 層階」를 손꼽을 수 있다.   --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受話機)  여인(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바다의 層階」 전문    이 시는 일상적인 의미면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시어들의 결합하여 창조적인 관계를 맺어 놓아 결국에는 사물의 현실적인 존재와 합리적인 관계를 해체시켜버렸다. 또한 자유연상적 인 의식의 흐름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진술한 시 「가을과 少女의 노래」를 예로 들어보겠다.    하이얀 洋館포오취에  소박한 의자가 하나 앉아 있다.    소녀는 의자 위에서 지치어 버려  낙엽빛 팡세를 사린다  나비처럼 가느닿게 숨쉬는 슬픔과 함께……    바람이 오면  빨간 담장이 잎 잎새마디가 흐느낀다  영혼들의 한숨의 코오러쓰!    詩集의 쪽빛 타이틀에는  化石이 된 뉴우드가 뒤척이고,    사내는 해쓱한 테류우젼인 양  카아텐을 비꼬아 쥐면서  납덩이로 가라앉은 바다의 빛을 핥는다    먼 기억의 스크링처럼  그리워지는 황혼이  少女의 살결에 배어들 무렵  가을은 大理石의 체온을 기르고 있었다.  -조향의 「가을과 少女의 노래」 전문    조향은 1950년대의 초현실주의의 수용 및 전개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해왔는데, 초기 낭만주의적 초현실적인 서정시를 써왔다. 후기에서도 초현실주의시를 꾸준히 연속적으로 실 천하여왔는데, 주로 감각적 낭만성을 지향하는 시를 썼다. 그는 허무의식의 극복을 위한 방법 으로 새로운 리듬과 이미지 창조하는 것을 시인의 역할로 여기고, 시어 자체가 이미지로 사용 되는새로운 시의 세계를 실험한 ‘씨네 포엠’의 창작방법, 단어의 반복, 의미 없는문장의 나 열, 활자의 변주를 통한 ‘언어유희’ 창작 방법, 시어를 형태적으로살리려는 시도로 ‘시어’를 ‘사물’처럼 이용하기 위한 ‘포말리즘’의 창작 방법을적용한 형태시를 쓰기도 했다. 그의 시는 낭만주의 경향을 고수하면서도 초현실주의 무의식의 세계를 지향하며 회화성이 강한 낭만적 서정시로 흰색이주조를 이루는 긍정적인 허무주의 색채가 강한 이미지즘의 시이나 비현실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그려냈다.    3)      성찬경의 적용 사례    조향이 초현실주의 시의 전반적인 근본사상을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고 기법의 차원에서 수 용에 머물 기는 했으나 형식적인 면에서 해박한 지식으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는 데에 그성과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김춘수, 김수영, 김종삼, 전봉건, 이봉래, 김구용, 김차 영, 고석규, 김영태 등의시에서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가 광범위하게 확신되어 나타났다. 초 현실주의 경향의 시를 쓴 성찬경의 「프리」을 예로 들어보겠다.    음향과 빛깔과 아마 향기마저도  實은 그들이 어디 있더냐. 암흑 속엔  純粹한 波動뿐이다.  靈感이라지만 그것도 정말은  순수한 파동. 그 파동의 溫床 위에  주렁주렁 맛있는 열매는  오히려 이마아. fancy. 그리고 환타.  果汁엔 투명한 觀念이 스며  혀끝에 끈끈한가 살펴보라.  준엄한 탐험가. 태고의 무덤을 파헤치고  해골을 태양 아래 널어 말리는 메스.  千의 데스마스크를 찍어낸 손톱이여.  사로잡은 魅惑은 다이아몬드의 망치로  티끌이 뻐개져서 다시 티끌 되도록 바수어라.  그 바람에 튀는 별똥별을랑 心臟의 기름삼고  아직 화릉거리는 혼백엔 부채질하라.  회색의 室內에서 무수한 톱니바퀴가  두르르 올바르게 번개처럼 회전하면  그 機關은 물고기와 蓮꽃과  煙氣와 피아노. 아르뻬지오와  에메랄드와 刹那와 낙타. 바늘구멍과 永遠과  를 서로 혼인시키는 魔術열매의 온상.  그럴 무렵엔 리를 惱殺하는 미소를 띄우고  옆모습만 보이며 잡힐 듯이 다가서는  오, 뮤우./ 자양 많은 乳液은  내 오로지 그대 위해 바치리라.  리라를 타며 스러질 듯 아리따운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면 不可思議한 轉換이. 다섯 개의 나의 窓엔 스테인드글라스가 박히고  넘나드는 파동은 눈부시게 치장되어  꽃은 빛깔과 향기를 귀뚜라민 노래를  나빈 춤을 세계는 饗宴을 다시들 찾는다.   ―성찬경의 「프리」 전문    이 시는 음향과 빛깔과 향기의 교응을 노래한 보들레르의 「만상의 조응」의시를 환기시 킨다. 서로 아무런 필연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의 병치는 사실상지적으로 엄밀하게 계산된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프리」에서 성찬경은 기독교와 불교를 ‘물고기’와 ‘蓮꽃’의 상징으로, 소멸하는 것과 영원한 것을 ‘煙氣’와 ‘에메랄드’의 상징으로 나타낸 뒤 이들을 병치시켜 놓았 다. ‘찰나’와 ‘영원’, ‘낙타’와 ‘바늘구멍’, ‘피아노’와 ‘아르뻬지오’ 역시 대립 항을 형성하고 있는데, 성찬경은 이들을 무질서하게 배열했다. 이처럼 성찬경은 이들 대립 항들을 ‘婚姻’시켰 는데, 우리나라의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 新興文藝, 특히다다이즘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1924년 고한용이 조선 문단에소개한 다다이즘은 일본의 쓰지 준이나 다카하시 신 기치의 기질적인 반항이나 奇行이 중심을 이룬 것이었다. 이상의 「거울」에서 강한 자의식 의 강화로 식민지 현실의 제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 근대 주체 사이의분열이라 는 주제로부터 초현실주의 시가 본격화되었고, 1934년 이시우,신백수, 한천 등ㅇ의 『三四 文學』 동인들에 의해 1920년대 다다이스트들이문제삼아왔던 스타일의 문제에 천착하고 문 단의 헤게모니에 접근하고자하여 현실의 추상화로 시대의식이나 역사의식과 멀어졌는데, 이 는 이후 조직된 1940년대 만주에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한 이수형, 신동철 등의 《시현실》동인도 마찬가지였다. 《시현실》 동인들은 주로 여성의 육체에 탐닉함으로써정치․사회적 으로 나아갈 길이 杜塞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하는 등 한국의 초현실주의는 개인적 美意 識 차원에 머물고 말았다.  전후 초현실주의 대표시인은 조향을 손꼽을 수 있고, 김구용, 성찬경, 서정주 시인들도 일 부 초현실주의 시를 썼으나 현실적인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무한한 상 상력의 세계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현대의정신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시창작 방법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초현실주의 시를 쓰는 시인들의 수가 적고, 그들 활동이 미미하여 하나의 주요 흐 름으로정착하지 못했으나 오늘날까지 현대시인들이 시창작에서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무한 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기법으로 시 창작에 활용하고 있다.    4)      김춘수의 적용 사례    김춘수 시인을 잘 알다시피 언어와 대상 간의 관계를 고민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투했 던 시인이자 시이론가였는데, 그가 제시한 ‘무의미시’는 우리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 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존재의 탐구, 대상의 즉물적 제시, 현실의 실감을 허무의지로 승화 시켰던 점에서 당대는 물론한국 문학 미래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의 장편 연작시 집 『처용단장』은 초현실주의적인 데페이즈망 기법 등 다양한 시창작 기법을 적용한 시인 이다. 그의 시 「처용단장 1의3」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廻廊)의 벽(壁)에 걸린 청동시계(靑銅時計)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 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 밤의 망토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의 숭어 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에 들곤 하였다.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에는  호주(濠洲)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  주(主)님 생일(生日)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김춘수의 「처용단장 1의3」 전문    위 시는 처용설화의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린 시로 유년 시절에 호주 선교사에 집에서 겪 었던 체험과 분위기를 중심으로 진술한 시이다. 각 문장과 장면은 하나의 줄거리로 이어는 것 이 아니라 각기 다른 장면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전체 시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안정된 분위 기로 유년기의 추억으로자리 잡은 바다를 대상화시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데, 이미지 들이 병치되어 낯선 의미를 새롭게 태어나는데, 이는 시인의 유년기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이미지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다는 숭어새끼를 품고 있는 모성 본능적인 모습을 보이며, 모성으로 표현된 장면은 앞선 장면들과는 다르게 평화롭다. 이러한 지점에서 화자는 밤이주는 공포의 이미지와 잠을 자는 평화로운 행위를 병치시켜는 데페이즈망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5. 에필로그    이상에서 우리나라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물론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를 일부창작한 시인들 에 의해 데페이즈망 기법은 시창작 방법으로 다양하게 적용되어왔다. 앞으로 복잡한 현대의 물질문명의 흐름과 4차 산업 시대에서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인이 자유롭게 몽환적인 꿈을 꿀 수 있는 현실 밖의 이색공간에서의 자유로운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적합한 시창작 방법이 바로 데페이즈망의 기법이라고 볼 때 이 기법의 적용은 심리적인 내면세계의 표현에 가장 적 합한 창작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데페이즈망 기법을 이용하면,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 용해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즐거움과 흥미를 느낄 수 있고, 비현실적인 세계 를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문학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구축 할 수 있다는점에서 시창작 방법에 적용하면 새로운 시를 창출할 수 무한한 가능성으로작용 하리라 기대된다. 데페이즈망기법은 중국 당나라의 奇幻詩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초현실 적이며 주지적인 환상시를 쓴 대표적인 시인으로 왕유와 이백, 두보와 함께 중국의 “당시사 걸”로 평가받는 이하의 시에서 데페이즈망기법과 동일한 초현실주의적인 시창작 방법을 추 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전문학에서도 奇幻的인 문학양식은 많이 적용해 왔었고, 전통시가에서도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용한 시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앞으 로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하여 좋은 시가 많이 창출되었으면 하는바램과 함께 풍성한 시단 이 되기를 기대한다.    ※ 참고 문헌 ※  1. 게일, 오진경 역, 『다다와 초현실주의』, 한길아트. 2001.  2. 박희진, 「認識과 讚美」, 『영혼의 눈 육체의 눈』, 고려원, 1986.  3. 이하, 『이하시선집』, 문자향, 2003.  4. 이상, 『이상시집』, 고려문화사, 1994.  5. 조향, 『조향전집1』, 열음사, 1994.  6. 성찬경, 『!火刑遁走田』, 정음사, 1966. 7. 김춘수, 『처용단장』, 미학사, 1991.      
25    롤랑 바르트 댓글:  조회:1464  추천:0  2019-01-14
후기 롤랑 바르트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negative) 이다.” 1. “나는 ~을 좋아한다” 나는 롤랑 바르트를 좋아한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롤랑 바르트가 어떤 사람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더듬거리면서, 바르트를 치장하는 형식적인 단어 몇 가지로 그를 설명하려고 애쓰리라. 즉 나는 몇 가지의 단어를 알고는 바르트를 좋아한다고 떠벌인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금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롤랑 바르트’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리고 바르트 본인은 정작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해서 나는, 조금의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고친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문체, 특히 (이라고 번역됨. 문학과지성, 김희영 옮김)에서의 그의 글쓰기를 좋아한다. 커다란 혹은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그는 주제와 그다지 상관이 없을 듯한 사소한 일∙사물들에 집중하여 그것의 모습을 섬세한 펜터치로 묘사를 한다. 그러한 단상들은 색종이 조각들처럼 여기저기 모아지고 흩어지면서 하나의 형태/모자이크를 이룬다. 나는 그 조각들의 색깔을 보면서 감탄한다. 색종이 조각들의 틈새, 그 휴지부들 또한 내가 메우어서 형태를 완전히 하게 만들거나, 혹은 그 틈새의 빔[空虛]에 의해 주제를 확장, 또는 주제에서 벗어나게 만들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나에게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이 즐거움을, 나는 좀더 이성적으로 알고자 한다. 또한 구조주의자에서부터 기호학자, 포스트 구조주의자까지, ‘현기증 나는 전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롤랑 바르트의 정체를 밝히고 싶다. 이러한 작업은 우선적으로 롤랑 바르트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위치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롤랑 바르트를, 그의 글쓰기의 정체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위치하는 후기 바르트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잘못 끼우는 단추일까? 2. 계보적 나열 2-1. 이후(post)로서의 구조주의 후기 롤랑 바르트 혹은 후기 구조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에 대한 윤곽이 어느정도 숙지되어 있어야 하나, 구조주의가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는 거대 담론이 아닌 탓에 그 윤곽을 파악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구조주의를 그 전 단계의 사상들의 후기(post)로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이정우의 에 의하면 구조주의는 19C 이래 전개되어온 실증주의, 변증법, 주체철학(임의적 용어)과 동시에 대립하면서 등장했다. 멘느 드 비랑에서 실존주의로 이어지는 반성(反省)철학(내면의 철학)과 정면 대립함과 동시에, 경험주의적(유명론적)인 실증주의에 반하는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합리주의(실재론적)를 표방한다. 현상을 바로 그렇게 만드는 본질적인 것을 찾는 입장인 합리주의의 전통 속에 위치지울 수 있는 구조주의는 대상 이면에 법칙성이 선재(先在)한다고 가정한다 . 또한 그것은 거대 이론으로서의 변증법과는 달리, 각 영역에서 구체적 연구를 행한 후, 서로 얽히면서 복잡한 장을 형성함으로써 거대 이론의 약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주체를 이어받고 있는 헤겔,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이어진 사조(현상학, 주체철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가 갖고 있던 이분법—인식론[對象]과 반성철학[人間]의 양분 구도—과는 다른 시각으로, 즉 자연(대상)이 아닌 사람과 문화를 결정론적(과학적)으로 다루었다. 다시 말하면, 구조주의는 과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있고, 거대 이론이면서도 변증법적 무모함을 벗어나 있으며, 인간과 사회를 사유하면서도 현상학적 주체주의를 벗어났다. 그러나 68혁명을 분기점으로 구조주의가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첫째, 구조주의는 시간을 제거해버린 공간적 사유(빠롤보다 랑그를, 통시적 사고보다 공시적 사고를 선호)라는 것, 둘째, 결정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구조주의는 우연과 불연속의 문제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 셋째, 법칙화할 수 없는 몸/신체의 가변성, 역동성, 개체성, 주체성 등에 대해서 역시 설명할 수 없다는 점, 시간, 카오스, 욕망, 권력 같은 개념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구조주의자들은 자신의 사유 이후(post)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2-2.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는, 부언하자면, 이전에 과학적인 기호 세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자신들의 모습(구조주의)을 조롱하면서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반석이었던 소쉬르의 언어 이론에서 역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는데, 그는 랑그는 개별적 표현행위인 빠롤을 지탱하는 체계적 언어 양상이라고 한 반면(구조주의적 맥락), 기호는 기의와 기표로 이루어지고 이 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다고 하였다(포스트구조주의적 맥락). 이것은 곧, 의미화 과정이 불안정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기호는 두 층위(기의/시니피에와 기표/시니피앙)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적 ‘고정물’임을 의미한다. 여기에 주의를 집중시킨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미끄러지는 기의로부터 저항하는 기표의 새로운 위치 형성에 천착한다. 그들은 ‘항존하는’ 언어 구조에 의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기존의 자신들의 입장(구조주의)이 개인들의 주관적 과정을 거세시킨다고 보면서, 언어는 몰개성적 체계가 아닌, ‘사용중인’ 언어, 즉 주관적인 과정들과 항상 접합해 있다고 간주하고 ‘말하는 주체’ 혹은 ‘과정 안의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는 언어가 항상 역동적이며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용되어진다고 보는 바흐친 학파와 유사한 맥락을 갖고 있으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단지 담론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슬로건을 강조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또한, 주체는 객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투명한 언어 매체로 표현한다고 주장한 경험주의적 전통에 반기를 들고, 주체와 객체는 분리할 수 없으며 지식은 주체의 경험에 선행하는 담론들로부터 형성된다고 보는 ‘담론적 형성 discursive formation’ 이론을 내세우면서 주체는 언제나 ‘과정 중에’ 있으며, 자율적이고 통합된 정체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이러한 담론적 형성의 권력/지배에 대한 관계에 천착하면서, 담론은 모든 제도권이 사회를 지배하고 질서를 부여할 때 사용하는 매체이므로 권력과 분리될 수 없다고 역설하는 반면, 담론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루이 알뛰세는, 푸코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로서 담론을 대체하고 그것의 이론화를 제안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모두 사회 구조 속에서 일정한 입장을 취하도록 소환(호명 interpellation)하는 이데올로기의 ‘주체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라캉의 정신분석을 활용하여(좀더 정적(靜的)으로), 상상계적 단계로부터 파생된 통합된 주체성이라는 환상을 거부하고, 자아의 의식적 생활과 욕망의 무의식적 생활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영속적으로 불안정한 실체라고 정의 내린다. 3. 롤랑 바르트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로의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이다  (테리 이글턴, , 창작과비평, 1986, 171쪽) 바르트의 후기를 결정 짓는 것을 한 단어로 압축하자면 텍스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텍스트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작품과 다른 점은? 상식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텍스트’라는 용어는 ‘글’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를 나타내는데 쓰인다. 이 쓰임새는 최근의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의 유입/유행으로 인해 더욱 그 범위를 넓혔는데, 단순히 문자를 매개체로 하는 ‘글’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떤 내용/사건/의미를 갖고 있는 갖가지 표현수단들을 지칭하고자 한다; 한 영화가 갖고 있는 ‘텍스트’, 공간의 ‘텍스트’, 등등.. 반면 형식주의나 구조주의 비평가들이 말하는 텍스트는 “문학 작품의 현상적인 표면, 즉 작품 안에 나타나는 말들의 짜임으로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가리킨다.(바르트, ‘Texte’, 세계 대백과 사전)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직물을 그 뒤에 다소간의 의미(진리)가 감추어져 있는 하나의 산물, 완결된 베일로 간주해 왔다. 이제 우리는 이 직물에서 지속적인 짜임을 통해 텍스트가 만들어지며 작업하는 생성적인 개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직물, 이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 내며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이 자신을 해체한다. 우리가 신어 사용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텍스트론을 거미학(hyphologie, 그리스어 어원인 히포스[hyphos]는 직물/거미줄을 뜻한다)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 111쪽) 3-1. 거미학(Hyphologie)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를 ‘작품’과 비교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테리 이글턴이 말한 것처럼 이 둘을 가른다면, ‘작품’은 구조주의를, ‘텍스트’는 포스트구조주의를 상징할 수 있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기표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이다. '작품'은 항상 이분법적인 구조로서(상징/비상징, 정신/물질) 지금까지 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총체적이고도 단일한 의미(기의)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문학은 언어이며, 이 언어는 내용이 아닌 구조, 그 순수한 형태 체계안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며 문학을 과학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구조주의자 바르트는 점차 이런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다양한 층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르트는 크리스테바의 작업, 즉 기의가 생산되기 이전 기표들의 역동적인 유희 및 작업에 시선을 돌려 기표에 자율성을 부여한 작업에 영향을 받아, 텍스트를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기표의 무한한 의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내리게 된다. 그렇게 하여 텍스트는 더 이상 ‘작품’이 아닌 ‘언어 생산의 장’으로 변모한다.  텍스트가 더 이상 산물이나 기의의 창 창출 도구로 간주되지 않고, 의미 실천의 장, 언술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면, 이젠 글읽기가 창조적 행위로 변모된다. 바꿔 말하면 저자의 위치는 배제된다. 저자란 중세 이후에 종교개혁의 개인적 신앙, 합리주의, 실증주의와 더불어 생겨난 자본주의의 소산물이다. 이런 저자의 제국은 말라르메 이후 흔들리기 시작하며,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후 저자의 탈신성화, 언술행위가 하나의 텅 빈 과정이라고 보는 언어학, 바흐친의 상호 텍스트 개념은 우리에게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은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바르트는 에서 ,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 감정,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일 뿐이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 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저자와 독자, 글쓰기와 글읽기, 창작과 비평, 실천과 이론 등 그 이분법적인 경계를 파기하고, 즐거움의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3-2. 육체의 즐거움 “그 독자,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나는 그를 [draguer] 한다). 그때 즐김의 공간이 생겨난다. 내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이 아니라 공간이다. 욕망의 변증법, 예측불허의 즐김이 가능한 그런 공간”(, 51쪽)   글읽기의 주체는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의미 생산의 주체로서 의사 소통적/표현적/재현적 언어를 해체하고 무한한 기표들의 유희를 조작, 분산, 재분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글읽기는 곧 글쓰기를 의미하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텍스트론은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을 부각시킨다. 바르트의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 찾아 만나야 할, 구체적이고도 관능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글을 읽거나 쓴다는 것은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결합에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 이에 대해 주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독서란 그 자체로서 구조화의 행위이고, 이 구조화의 근거는 바로 육체이다. 즉 독자를 개인적이고도 개별체적인 주체로 정의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사상이 아닌 바로 육체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즐거움은, 비록 그것이 문화에 연유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선은 각 주체의 육체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체의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일련의 접촉이나 성찰을 통해서만 비로소 작품의 문화적 양상이 독자에게, 독자의 특이한 욕망 속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의미과정의 수용은 이렇듯 우리를 주조한 문화보다는 개별적인 육체의 움직임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한다.(V. Jouve, , 민음사, 1986, 100-101쪽.) “내게 즐거움을 준 텍스트를 하려 할 때마다,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 이 아닌 내 이다. 그것은 내 육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시키며 내 육체에 그것의 고통, 또는 즐거움을 적응시키는 소여(所與)이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내 즐김의 육체이다.”(, 110쪽) 육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글읽기의 체험을 바르트는 즐거움(plaisir)과 즐김(jouissance)으로 구분한다. 그는 즐거움과 즐김의 구별을 위해 정신분석학적 개념에 의존하는데, 즐거움의 텍스트는 문자를 인정하지만(즐거움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즐김의 텍스트는 작가와 더불어 가 시작된다(왜냐하면 즐김의 텍스트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에, 혹은 말해진 것 사이에 놓여 있기에). 따라서 즐김의 텍스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다만 그것을 쓰는 것만이 가능하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문화에서 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글읽기의 마음 편한 실천을 허용하여 우리를 행복감으로 채워주는 텍스트이다. 이때 주체는 모든 종류의 문화에 대해 깊은 쾌락과 자아의 놀라운 강화, 또는 그 진정한 개별성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 동의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즐김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나, 그 가치관, 언어관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자아가 회복되는 것을 원치 않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성도 가지지 아니하며, 모든 규범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변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과 즐김의 구별은 그리 엄격하지 않으며, 대립적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장애물을 치우고 더 멀리 나아가도록, 혹은 단순히 말하고 글을 쓰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194-195쪽) 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왜 나는(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소설, 전기, 역사적 작품에 한 시대, 한 인물의 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일까? 시간표, 습관, 식사, 숙소, 의복 등 이런 하찮은 세부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왜일까?” (, 101쪽) 이것은 텍스트의 전복적 양상과 관계된다. 물질적이고 감각적/세부적인 것이 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나열 속에 불쑥 끼어들 때, 그것은 하나의 틈새를 자아내며, 그리하여 텍스트를 불연속성의 공간으로, 관능적인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바르트에 의하면 문학의 전복적인 양상은 기존의 문화나 언어의 파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변형하고 재분배하는 데 있다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언어의 재분배에는 반드시 틈새가 있게 마련이며, 이 틈새가 즐거움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위반이란 파괴가 아닌 인정하고 전도하는 것이다.”(뱅상 주브, 앞의 책 89쪽) 3-3. 결어 : 필사자(scripteur) & 푼크툼(punctum) 또 하나의 필사자가 되어 여기에 롤랑 바르트를 재생산해 내었다. 롤랑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한 본 텍스트는 여기에 여러 필사자의 글들을 발췌, 조합, 재조합해 내어 변형된 일그러진 ‘나의’ 롤랑 바르트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한 시도는 얽키설키 짜집기 되어 내가 좋아하는 바르트의 주관적인 이미지에서 그다지 손상되지 않은채 재생산되었다. 물론 바르트는 내가 상상하는 대로의 바르트는 결코 아니리라. 문학사회학자로서 그리고 텍스트를 자신만의 즐거움 속에만 가두려고 하지 않고, 복수태적인 권력 담론으로서의 언어체(langue)를 해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글쓰기로 이동하는 그의 자세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바르트는 ‘바르트’가 아니다. 바르트는, 내가 ‘좋아하는’ 바르트는 내향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소한 일/사건들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찌르는 푼크툼(라틴어로 點을 가리키는 말이다)에 천착하는 가상의 혹은 역사적 인물이다. 이것이 나만의 진실이며, 나의 푼크툼이다. 나는 어쩌면 그의 앞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필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뜻하는, 글 읽는 독자로서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를 읽으면서 혹은 쓰면서 즐거움(plaisir)을 느끼는지 즐김(bliss)을 느끼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를 고전으로서, 즉 스투디움(studium, 스투디움은 문화에 속한다)으로서 받아들이는/읽는 와중에, 보이지 않는 구덩이(點)에 빠지는 나는 그가 설치해 놓은(의도하건/하지 않건 간에) 틈새/푼크툼에 걸려 혼란스러워 한다. 이 즐김(bliss)! 나는 롤랑 바르트를 좋아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1차 대전 중인 1915년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해안도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후 1년만에 해군으로 복무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와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바르트는 아홉 살 때 서적 제본소에 조촐한 일자리를 얻은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여, 젊은 시절을 가난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로 두 번이나 요양소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제 2차 대전 중에는 병역면제를 받고 1942년부터 약 5년 동안 알프스의 폐결핵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련의 기간에도 바르트는 엄청난 분량의 서적을 독파하여 요양소를 떠날 때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상당한 지식을 축적했다고 한다.    건강을 회복하여 파리로 돌아 온 후, 외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자리를 얻게 되어, 처음에는 루마니아,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어를 지도하면서, 거기서 기호학자로 유명한 그레마스(Greimas)와 친하게 되었다. 1952년에 귀국하여 친구들의 도움으로 정부로부터 어의학(lexicology)에 관한 연구비지원을 받았으나, 이 연구보다는 오히려 문학평론과 문화비판에 몰두하여, 1953년에는 『글쓰기 영도』를 출판하고, 대중문화의 이면에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수많은 기사를 투고함으로써, 1957년에는 이 원고들을 모아, 대중문화 비판서로 유명한 『신화·Mythologies』를 출판하였다.    전후의 지적 위기에 대응하여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가 헤겔과 훗설 및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도입하였으나, 바르트는 매스미디어가 매개하는 문화에 함축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 소쉬르와 옐름슬레브 등의 구조주의를 원용한다. 1964년에 낸 『기호학의 원리』에서 바르트는 구조주의를 기호의 사회학으로 발전시켰다. 바르트는 이처럼 활발한 창작활동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으나, 1965년 이후에 격렬하게 진행된 문학비평을 둘러싼 소위 신구논쟁을 통해서 그는 프랑스 사상계의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바르트는 1963년에 출판한 『라신에 대하여』를 통해서, 소르본느대학 교수로 역시 라신을 연구하고 있던 피카르(Raymond Picard)가 발표한 『라신의 생애』를 공격하였고, 이에 분개한 피카르가 『새로운 비평이냐, 새로운 사기냐』(1965)를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현상학적 실존주의 및 구조주의적 비평 경향을 대변하는 바르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출판한 『비평과 진실』에서, 바르트는 다시 소르본느의 피카르를 비롯한 모든 전통적 비평을 대학비평 혹은 랑송주의로 취급하고, 이를 실증주의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정치적 및 지적 보수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였다.    이 논쟁에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끼어 들고 저널리즘까지 가담하여 구비평과 신비평간의 열띤 논쟁이 전개되었고, 이 논쟁을 통해서 바르트는 저명인사가 되었고, 바르트가 소속된 고급연구실습학교(Ecole Practique des Hautes Etudes)는 진보적인 좌파 사상과 정치의 중심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구비평을 대표하는 사례는 20세기 초부터 존경을 받아온 랑송(Lanson)의 『문학사의 방법』이며, 랑송의 방법론이 제자들에 의하여 경직된 실증주의 비평으로 교조화되면서 랑송주의로 불리게 되었고 이를 대학비평이라고도 한다. 한편 신비평은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주로 반실증주의적인 비평경향을 총칭하는 것이다.     진보적 경향의 신비평을 대변하는 바르트가 보기에, 보수적인 실증주의 비평은 문학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외면하고, 세밀한 문헌조사에 치중함으로써 마치 문학이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고 자명한 진리인 것처럼 당연시하는 결정론적 관점을 조장하는 것이다. 어떻든 실증적 비평과 해석적 비평간의 대립을 둘러싼 신구논쟁을 통해서, 바르트는 레비스트로스, 푸코, 알뛰세, 라깡 등 걸출한 사상가들과 함께 구조주의 사상의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은 바르트는 1977년에 드디어 명성 높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80년 2월 어느 날 그 대학의 앞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어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질병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 온 것처럼, 바르트의 문학적 관심도 끊임없이 변화해왔기 때문에 그의 입장을 단정적으로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그는 한 때 실존주의자였고,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전위적인 텍스트 비평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르트는 문화현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구조주의 사상가이자 기호학자이면서도, 후기 저작인 『S/Z』와 『텍스트의 쾌락』 이후에는 과학성과 구조의 엄격성을 강조하던 종래의 관심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 복수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해석을 즐기는 쾌락주의를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학문적 관점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저작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다음과 같은 일관성이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첫째로, 바르트는 영원불변의 본질이 있다고 확신하는 본질주의를 거부한다. 본질주의에 대한 바르트의 일관된 거부감은, 인간에게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사르트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에도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는다.    둘째로, 현대사회의 지배 세력은 기존의 사회 제도와 규범이 가장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라는 신화를 유포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중세 사회가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정당화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일상적인 문화현상에 있어서 정당하고 자연스러움을 표방(the voice of the natural)하는 모든 것을 일관성 있게 비판한다.    셋째로, 바르트는 불변의 본질도 없고, 인간세계에 자연스러운 사실도 없다고 본다. 모든 사회적 및 문화적 현상은 그 나름의 역사적 기원이 있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고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며, 그 이면에는 은폐된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소쉬르의 기호학적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바르트는 이를 한 단계 더 극단화하여 이면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출전: 전경갑 외, 『문화적 인간·인간적 문화』, p.73-76)         내용요약 top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전문적인 기술이나 식견이 없었다는 게 흥미롭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아마튜어조차도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카메라 루시다」p.17]. 다소 뻔한 얘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진의 본질에 대해 명료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바라보여지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두 가지 경험만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위의 책, 같은 쪽].` `이미지는 무겁고 움직이지 않으며 완고하지만(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회는 이미지에 의지한다), `자아`는 가볍고 분열되며 흩어지고[…]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사진이란 내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다가오는 일`이다[p.19]. `사진은 주체를 객체로, 심지어는 박물관의 진열품으로도 변형시킨다`  사진에 찍힌 존재는 `죽는다`. `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다[p.22].`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맥락도 모르는 채 사르트르가 했다는 `죽은 자는 산 자들의 먹이` 라는 말을 되씹곤 한다.  죽음으로써 그에게선 무수한 역동의 가능성이 제거되었고, 산 자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를 마음껏 요리한다. 필자는 가끔 `험담`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말을 변형시켜 본다 : `여기 없는 자는 여기 있는 자의 먹이`라고. `부재(不在)`는 완벽한 피동성을 의미한다. 여기 없는 자는 여기 있는 자들이 형성하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완전히 무력하다. 그의 존재의 풍부한 울림과 떨림 같은 것은 말의 칼날에 가차없이 재단된다. 말은 말 자체의 힘과 흐름에 따라, 그를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형시킨다. 부재는 곧 죽음이다. 죽음은 곧 부재다.  `나[바르트]에게 있어서 사진가의 대표적인 기관은 눈이 아니라[…]손가락이다[p.22].` 총의 방아쇠를 당기듯 셔터를 눌러 일거에 그 사물을 지배하는 사진, 세계를 화석화시키는 무기, 이처럼 무서운 무기는 달리 없다.  그러나 사진에는 매력적인 반대면이 있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사진가는 죽음의 대행자다.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며, 사진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대상의 파국을 의미한다. 사진 밖의 대상은 사진 속에 담기는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한다. 대상이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 순간, 그 대상은 죽음을 시작하고,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다. 이렇듯 욕망의 대상은 욕망되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 욕망의 주체에 의해 잡히는 순간, 또다른 욕망을 낳으며 저만치 도망친다. 그리고 더 큰 허무와 아픔을 남긴다. 사진은 부재하는 것, 한때 존재했던 그 무언가가 던지는 아픔인 것이다. 따라서 ‘빛으로 쓴다’는 포토그래피는 ‘죽음을 기록하는’ 타나토그래피(thanatography)이다.     Roland Barthes    ロラン・バルトについて、なにかを書こうと試みたことのある人なら、経験したであろうが、彼の著作に思いを巡らせて書いた文章は、自然と彼の文体に似てきてしまう。彼の記述はそれだけ伝染性の高いものであり、一種独自のものである。1970年から80年代に多くの読者を魅了した理由のひとつは、彼のその独特の文章スタイルにある。  彼の言語学的な主張はいささか曖昧なもので、ドイツ観念論的な精緻な構造をとらない。理解しようと努力すれど、しばらくすると微妙に変化した形で提示され、あたかも理解されることを拒んでいるかのようだ。ひとつの事象を時代の文脈で追っていくときに、社会的な変化に応じてその認識が変容するのに似ている。まるで、あらゆる事象が相互作用のなかで規定され、認識される「現在」を比喩しているかのようだ。  彼の、文学的な主張を読めば読むほど、それは彼の「美学」に他ならないという事に次第に気付く。悲しいかな、論理であるようで論理ではないのである。彼に対する多くの批評・批判がどこか的外れで陳腐なものに感じてしまうのは、そういった理由によるのかも知れない。  騙されるのなら甘美な夢を伴ったものの方が良いに決まっている。しかしてバルトの書物は読み継がれていくのである。 年表 1915年 フランスのシェルブールに生まれる  1916年 父の死        幼年期をバイヨンヌで過ごす  1934年 結核発症  1935年 ソルボンヌ  1941年 結核再発(5年間のサナトリウム生活)  1948年 ブカレストにてフランス語講師  1949-50年 アレキサンドリアにてフランス語講師  1952年 国立科学研究センター研究員  1962年 高等学術研修院研究指導教授  1976年 コレージュ・ド・フランス教授  1977年 母の死  1980年 交通事故死 著作 Le Degre zero de l'ecriture, Editions du Seuil, 1953  Writing Degree Zero  『零度のエリクチュール』、みすず書房、1971年 Michelet par lui-meme, Editions du Seuil, 1954  Michelet  『ミシュレ』、みすず書房、1974年 Mythologies, Editions du Seuil, 1957  Mythologies  『神話作用』、現代思潮社、1967年 Sur Racine, Editions du Seuil, 1963  On Racine  「ラシーヌ論」 Essais critiques, Editions du Seuil, 1964  Critical Essays  『エッセ・クリティック』、晶文社、1972年 Critique et Verite, Editions du Seuil, 1966  Criticism and Truth  「批評と真実」 Systeme de la mode, Editions du Seuil, 1967  Fashion system  『モードの体系』、みすず書房、1972年 L'Empire des signes, Skira, 1970  Empire of Signs  『表徴の帝国』、新潮社、1974年 S/Z, Editions du Seuil, 1976  S/Z  沢崎浩平訳、『S/Z』、みすず書房、1973年 Sade, Fourier, Loyola, Editions du Seuil, 1971  Sade, Fourier, Loyola  『サド、フーリエ、ロヨラ』、みすず書房、1975年 Nouveaux Essais critiques, Editions du Seuil, 1972  (New Critical Essays)  花輪光訳、『新=批評的エッセー』、みすず書房、1977年 Le Plaisir du texte, Editions du Seuil, 1973  Pleasures of the Text  『テクストの快楽』、みすず書房、1977年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 Editions du Seuil, 1975  Roland Barthes  佐藤信夫訳『彼自身によるロラン・バルト』、みすず書房、1979年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Editions du Seuil, 1977  A Lover's Discourse: Frangments  三好郁朗訳『恋愛のディスクール』、みすず書房、1980年 lecon, 1978  "Inaugural Lecture"  花輪光訳、『文学の記号学』、みすず書房、1981年 Sollers ecrivain, Editions du Seuil, 1979  Writers Sollers  『作家ソレルス』、みすず書房、1986年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Gallimard et Seuil, 1980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花輪光訳、『明るい部屋』、みすず書房、1985年 Le Grain de la voix: entretiens 1962-1980, Editions du Seuil, 1981  The Grain of the Voice: Interviews, 1962-1980  「声の肌理: 1962-1980年の対談集」 Litterature et Realite (en collaboration), 1982 Essais critiques III, L'Obvie et l'Obtus, Editions du Seuil, 1982  The Responsibility of Forms. New Critical Essays on Music, Art and Representation  沢崎浩平訳、『第三の意味』、みすず書房、1984年  沢崎浩平訳、『美術論集』、みすず書房、1986年 Essais critiques IV, Le Bruissement de la langue, Editions du Seuil, 1984  The Rustle of Language  花輪光訳、『言語のざわめき』、みすず書房、1987年  沢崎浩平訳、『テクストの出口』、みすず書房、1987年 L'Adventure semiologique, Editions du Seuil, 1985  The Semiotic Challenge  花輪光訳、『記号学の冒険』、みすず書房、1988年 Incidents, 1987  沢崎浩平・萩原芳子訳、『偶景』、みすず書房、1989年 La Tour Eiffel (en collaboration avec Andre Martin), 1989  花輪光訳、『エッフェル塔』、みすず書房、1991年 Oeuvres completes tome 1, 1942-1965, Editions du Seuil, 1993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一巻」 Oeuvres completes tome 2, 1966-1973, Editions du Seuil, 1994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二巻」 Oeuvres completes tome 3, 1974-1980, Editions du Seuil, 1994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三巻」 花輪光訳、『物語の構造分析』、みすず書房、1979年 沢崎浩平訳、『旧修辞学』、みすず書房、1979年 『バルト、<味覚の生理学>を読む』、みすず書房、1985年 下澤和義訳、『小さな神話』、青土社、1996年 下澤和義訳、『小さな歴史』、青土社、1996年    参考文献 邦文 鈴村和成著、『バルト テキストの快楽』、講談社、1996年 渡辺諒著、『バルト以前/バルト以後 : 言語の臨界点への誘い』 水声社、1997年 遠藤文彦著、『ロラン・バルト : 記号と倫理』、近代文芸社、1998年 篠田浩一郎著 『ロラン・バルト : 世界の解読』、岩波書店、1989年 花輪光著 『ロラン・バルト : その言語圏とイメージ圏』、みすず書房、1985年 荒木亨著 『ロラン・バルト/日本』、木魂社、1989年 原宏之著 『〈新生〉の風景 / ロラン・バルト、 コレージュ・ド・フランス講義』、冬弓舎、2002年 出版社サイト 翻訳 G.ド・マラク, M.エバーバック著 ; 篠沢秀夫訳 『ロラン・バルト』 青土社、1974年 L.J.カルヴェ、花輪光訳 『ロラン・バルト伝』 みすず書房、1993年 R.カワード, J.エリス共著 ; 磯谷孝訳 『記号論と主体の思想 : バルト・ラカン・デリダ・クリステヴァなど』、誠信書房、1983年 スティーヴン・アンガー著 ; 千葉文夫訳 『ロラン・バルト : エクリチュールの欲望』 勁草書房、1989年 ジョナサン・カラー著 ; 富山太佳夫訳 『ロラン・バルト』 青弓社、1991年    
24    수사학, 시학, 그리고 시-조너선 컬러 댓글:  조회:1171  추천:0  2019-01-04
수사학, 시학, 그리고 시     은유는 언어와 상상력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은유는 본래부터 경박스럽거나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상으로 존중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유의 문학적 힘은 그것의 모순에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워즈워스의 시구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세대간의 관계를 새로운 견지에서 보도록 해준다. 이 시구는 아이의 관계를 후일 그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 그의 아이와 맺는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교한 명제나 심지어는 이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은유는 가장 쉽게 정당화될 수 있는 수사적인 비유법이다.   하지만 이론가들은 다른 비유어의 중요성 역시 강조해 왔다. 로만 야콥슨에게 은유와 환유는 두 가지 기본적인 언어 구조이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해 연결된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의해 연결된다. 환유는 우리가 '여왕'을 '왕관'으로 말할 때처럼 그것과 인접해 있는 것에서부터 다른 것으로 이동한다. 환유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연속성 속에서 사물을 연결시킴으로써 질서를 산출한다. 그리고 환유는 한 영역을 다른 영역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은유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주어진 영역 안에서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이동한다. 다른 이론가들은 여기에다 제유법과 아이러니를 덧붙여 '네 가지 주요 수사법'의 목록을 완성시킨다. 제유법은 전체를 부분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즉 '열 개의 손'은 '열 명의 노동자'를 뜻한다. 제유법은 한 부분의 성질로부터 전체의 성질을 추론함으로써 부분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아이러니는 현상과 실재를 병치시킨다.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일어난 것이 예측한 것과 상반되는 경우이다.(기상통보관이 소풍간 날에 비가 온다면?) 은유·환유·제유·아이러니, 이 네 가지 수사법은 역사가인 헤이든 화이트에 의해 역사적인 설명이나 그가 '플롯 짜넣기'라고 부른 것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수사법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가 경험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수사학의 구조이다. 학문으로서의 수사학이라는 근본적인 생각은, 이 네 겹의 본보기에서 잘 표출되어 있는 바, 엄청나게 다양한 담론에서도 의미가 산출되도록 만들어 주고 의미의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언어의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 조너선 컬러, , 동문선, 1999, 117-118쪽.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는 시인의 시세계詩世界·4 ──김춘수의 시론과 시·1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김춘수(1922~2004) 시인은 경남 충무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중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 창작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사상혐의로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 유치留置되었다가 결국 다시 서울로 송환되고 만다. 1946년 이후 통영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향, 김수돈 등과 동인지 『로만파魯漫派』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였다. 이후 제2시집 『늪』, 제3시집 『기旗』, 제4시집 『린인隣人』 등을 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1954년 시선집 『제1시집第一詩集』을 거쳐 1959년 『꽃의 소묘』를 출간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69년에 출간한 『타령조·기타』, 1974년에 출간한 『처용』은 문단의 큰 이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문단의 입지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물론 그 후에도 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80년대의 『처용이후』(1982)를 거쳐 90년대 말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2000년대 초의 『쉰 한 편의 비가』(2003)를 출간한 그의 시력詩歷이 이를 증명하고 남는다. 더불어 그는 시창작 이론에 대한 시론을 깊이 있게 탐색한 시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가 독자와 문단으로부터 큰 이목과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감성적 차원인 시창작과 이성적 차원인 시론의 통합을 통해서 시적 차원의 폭을 넓혀가면서, 동시에 그것을 늘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1952년 시 비평지 『시와 시론』에 「시 스타일 시론試論」을 발표하면서 차츰 그의 독자적인 시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한 결실로 탄생한 것이 예의 1958년에 출간한 『한국현대시형태론』이다. 그는 이어서 1961년에 시론집 『시론』(시작법을 겸한)을 출간하였고, 1972년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시론』(시의 이해)를 출간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의미와 무의미』를 출간했으며, 1979년에도 시론집 『시의 표정』을 출간하기도 했다. 물론 80년대 이후에도 시와 관련된 크고 작은 시론을 줄곧 피력해 왔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시는 그의 시론과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감성)와 시론(이성)이 상호 대립과 수용 과정을 통해서 정련된 시작품을 산출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그의 시론적 영향이 짙게 배어있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의 시론에는 시적 세계가 주는 영향이 짙게 배어있기 마련이다. 예의 김춘수의 시는 ‘의미의 시(비유적 이미지)→ 의미와 무의미 융합의 시(비유적 이미지+서술적 이미지)→ 무의미의 시(서술적 이미지)’라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시론도 ‘의미 시론→ 의미+무의미 시론→ 무의미 시론’이라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시와 시론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초기 시와 초기 시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중·후기시와 시론은 다음호에서 모두 탐색하기로 한다. 2. 김춘수의 초기시론인 ‘의미의 시’ 다음의 글은 김춘수 시인 스스로가 언술한 자기 시론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시작과정을 그냥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과거의 나의 시작을 다소 비판적으로 따져 보려는 것이다. 구름과 장미 1947년에 낸 나의 첫시집의 이름이 『구름과 장미』다. 이 시집명은 매우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舶來語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장미도 때로는 감각으로 오는 일이 있었지만, 양과자를 먹을 때와 같은 로서 왔지, 제상祭床에 놓인 시루떡처럼 오지 않았다. 장미를 노래하려고 한 나는 나의 생리에 대한 반항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이국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반항의 자각을 지니지 못했다. 몇 년 뒤에 그것은 관념에의 기갈과 함께 왔다.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생략…) 유추로서의 장미 나이 서른을 넘고서야 둑이 끊긴 듯 한꺼번에 관념의 무진 기갈이 휩쓸어 왔다. 그와 함께 말의 의미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비로소 청년기를 맞은 모양이다. 나의 의 시절이다. 나는 나의 관념을 담을 유추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장미다. 이국취미가 철학하는 모습을 하고 부활한 셈이다. 나의 발상은 서구 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 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 다녔다. 선험先驗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還元과 제일인第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딩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30대의 10년 가까이를 나는 그런 모양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청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하나의 사치요 허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겉도는 체험 끝에 사람은 또한 뭔가를 조금씩 깨달아 가는지도 모른다. ──『김춘수전집 2-시론』, 문장, 1984. 381~383쪽. 3. ‘장미’로써 시 텍스트 읽기 김춘수의 초기 시론의 핵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호는 다름 아닌 ‘구름’과 ‘장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상징 기호가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데에 있다. 요컨대 이항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기호이다. 왜냐하면 구름은 감각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고, 장미는 관념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자는 통시적인 전통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쉽게 대변할 수 있지만, 후자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공시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대변해 주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게 양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김춘수는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예의 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것이다. 부연하면 서술적 이미지로서의 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전자와 달리 관념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수밖에 없다. 부연하면 비유적 이미지로써의 시인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론에 의하면, 김춘수는 비유적 이미지에 봉사하는 관념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추상적인 의미의 시를 쓰게 될 것이다. 형이하의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의 의미로써 말이다. 다음의 시를 그런 차원에서 감상해 보도록 한다.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갈대 섰는 풍경」 전문 김춘수 시인은 감각을 버리고 관념에 도취하여 비유적 이미지로써 시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비유적 이미지는 추상적인 의미의 세계를 나타내준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대한 존재적 의미를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감각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이성적으로 탐색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의 세계, 지식의 세계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김춘수는 시를 통하여 인식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텍스트에서 “푸른 달빛”은 감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다보니 텍스트 내에서 시적 의미를 구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예의 부차적인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텍스트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들판이 저처럼 울고 있다”라는 비유적 이미지이다. “푸른 달빛”은 그 “들판”을 위해 주변부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쏘대던 바람”도 ‘들판’과 만나면서 비유적(유추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만다. 마지막 연에 가면 들판을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 것으로 비유하여 그 관념적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들판이 왜 그렇게 울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시인 스스로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언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불가지론’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시를 통한 의미론적 탐구는 어려운 것이다. 다만 우리는 비유된 짐승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은 인위적이고 이기적인 인간과 대립한다. 말하자면 원초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들판은 원초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新婦여, ──「꽃을 위한 서시序詩」 전문 김춘수 시에서 관념의 세계 곧 의미론의 세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시는 아마도 「꽃을 위한 서시序詩」일 것이다. 성공적이라는 표현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얘기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미학적인 시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구성에 의해 텍스트가 지향하는 의미론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구성은 이항대립적인 체계로 되어 있다. 바로 ‘나-너’의 이항대립적인 구성이다. ‘나-너’의 코드는 대립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생산해낸다. 가령 제1연에서 ‘나/너’는 “위험한 짐승인 나/ 까마득한 어둠인 너”로 대립한다. 우리는 이 대립에서 상호 결합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승의 층위와 자연(어둠)의 층위로 변별되니까 말이다. 제2연에서는 “한밤내 우는 나/ 피었다 지는 너”로 대립한다. 이 대립에서도 상호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분리된 존재라는 점이다. 결국 1,2연을 통합해 보면 나와 너는 결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나는 너를 알기를 원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된 ‘나/너’이지만, 이항대립 체계를 통하여 그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제3연과 제4연이 이항대립하게 된다. “돌 속에 있는 금金(나)/ 얼굴을 가린 신부(너)”로서 말이다. 이 대립 역시 상호 개별적으로 작용한다. ‘금’이라는 광물성의 층위와 ‘신부’라는 인간적인 층위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나-너’가 결합할 수 없는 상태인 셈이다. 이 결합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의미의 심연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 의미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해 감각을 배제하고 이러한 관념, 즉 비유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의 그 언어가 비유로 쓰일 때에는 그 의미가 언어의 배후로 숨겨지고 만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는 적어도 그런 관념의 상태를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비유적 세계가 ‘금’과 ‘신부’라는 감각적인 대상으로 수렴되고 있기에 그러하다. 물론 해석적 차원으로 보면 ‘금’은 울음의 광물화로 영원한 침묵의 존재자를 의미할 것이고, 신부는 그러한 존재, 즉 광물화된 존재를 다시 인간적 존재로 불러내려고 하는 숨겨진 얼굴을 의미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할 것이 있다. 시인이 광물성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세계로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는 살기 위해서 더 이상 의미론적 세계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는 ‘의미’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세계로 갈 것이다. 그 무의미의 세계에 대한 것은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 ──김춘수의 시론과 시·1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김춘수(1922~2004) 시인은 경남 충무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중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 창작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사상혐의로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 유치留置되었다가 결국 다시 서울로 송환되고 만다. 1946년 이후 통영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향, 김수돈 등과 동인지 『로만파魯漫派』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였다. 이후 제2시집 『늪』, 제3시집 『기旗』, 제4시집 『린인隣人』 등을 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1954년 시선집 『제1시집第一詩集』을 거쳐 1959년 『꽃의 소묘』를 출간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69년에 출간한 『타령조·기타』, 1974년에 출간한 『처용』은 문단의 큰 이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문단의 입지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물론 그 후에도 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80년대의 『처용이후』(1982)를 거쳐 90년대 말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2000년대 초의 『쉰 한 편의 비가』(2003)를 출간한 그의 시력詩歷이 이를 증명하고 남는다. 더불어 그는 시창작 이론에 대한 시론을 깊이 있게 탐색한 시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가 독자와 문단으로부터 큰 이목과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감성적 차원인 시창작과 이성적 차원인 시론의 통합을 통해서 시적 차원의 폭을 넓혀가면서, 동시에 그것을 늘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1952년 시 비평지 『시와 시론』에 「시 스타일 시론試論」을 발표하면서 차츰 그의 독자적인 시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한 결실로 탄생한 것이 예의 1958년에 출간한 『한국현대시형태론』이다. 그는 이어서 1961년에 시론집 『시론』(시작법을 겸한)을 출간하였고, 1972년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시론』(시의 이해)를 출간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의미와 무의미』를 출간했으며, 1979년에도 시론집 『시의 표정』을 출간하기도 했다. 물론 80년대 이후에도 시와 관련된 크고 작은 시론을 줄곧 피력해 왔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시는 그의 시론과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감성)와 시론(이성)이 상호 대립과 수용 과정을 통해서 정련된 시작품을 산출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그의 시론적 영향이 짙게 배어있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의 시론에는 시적 세계가 주는 영향이 짙게 배어있기 마련이다. 예의 김춘수의 시는 ‘의미의 시(비유적 이미지)→ 의미와 무의미 융합의 시(비유적 이미지+서술적 이미지)→ 무의미의 시(서술적 이미지)’라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시론도 ‘의미 시론→ 의미+무의미 시론→ 무의미 시론’이라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시와 시론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초기 시와 초기 시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중·후기시와 시론은 다음호에서 모두 탐색하기로 한다. 2. 김춘수의 초기시론인 ‘의미의 시’ 다음의 글은 김춘수 시인 스스로가 언술한 자기 시론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시작과정을 그냥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과거의 나의 시작을 다소 비판적으로 따져 보려는 것이다. 구름과 장미 1947년에 낸 나의 첫시집의 이름이 『구름과 장미』다. 이 시집명은 매우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舶來語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장미도 때로는 감각으로 오는 일이 있었지만, 양과자를 먹을 때와 같은 로서 왔지, 제상祭床에 놓인 시루떡처럼 오지 않았다. 장미를 노래하려고 한 나는 나의 생리에 대한 반항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이국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반항의 자각을 지니지 못했다. 몇 년 뒤에 그것은 관념에의 기갈과 함께 왔다.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생략…) 유추로서의 장미 나이 서른을 넘고서야 둑이 끊긴 듯 한꺼번에 관념의 무진 기갈이 휩쓸어 왔다. 그와 함께 말의 의미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비로소 청년기를 맞은 모양이다. 나의 의 시절이다. 나는 나의 관념을 담을 유추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장미다. 이국취미가 철학하는 모습을 하고 부활한 셈이다. 나의 발상은 서구 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 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 다녔다. 선험先驗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還元과 제일인第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딩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30대의 10년 가까이를 나는 그런 모양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청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하나의 사치요 허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겉도는 체험 끝에 사람은 또한 뭔가를 조금씩 깨달아 가는지도 모른다. ──『김춘수전집 2-시론』, 문장, 1984. 381~383쪽. 3. ‘장미’로써 시 텍스트 읽기 김춘수의 초기 시론의 핵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호는 다름 아닌 ‘구름’과 ‘장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상징 기호가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데에 있다. 요컨대 이항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기호이다. 왜냐하면 구름은 감각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고, 장미는 관념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자는 통시적인 전통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쉽게 대변할 수 있지만, 후자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공시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대변해 주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게 양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김춘수는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예의 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것이다. 부연하면 서술적 이미지로서의 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전자와 달리 관념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수밖에 없다. 부연하면 비유적 이미지로써의 시인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론에 의하면, 김춘수는 비유적 이미지에 봉사하는 관념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추상적인 의미의 시를 쓰게 될 것이다. 형이하의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의 의미로써 말이다. 다음의 시를 그런 차원에서 감상해 보도록 한다.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갈대 섰는 풍경」 전문 김춘수 시인은 감각을 버리고 관념에 도취하여 비유적 이미지로써 시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비유적 이미지는 추상적인 의미의 세계를 나타내준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대한 존재적 의미를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감각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이성적으로 탐색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의 세계, 지식의 세계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김춘수는 시를 통하여 인식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텍스트에서 “푸른 달빛”은 감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다보니 텍스트 내에서 시적 의미를 구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예의 부차적인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텍스트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들판이 저처럼 울고 있다”라는 비유적 이미지이다. “푸른 달빛”은 그 “들판”을 위해 주변부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쏘대던 바람”도 ‘들판’과 만나면서 비유적(유추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만다. 마지막 연에 가면 들판을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 것으로 비유하여 그 관념적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들판이 왜 그렇게 울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시인 스스로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언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불가지론’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시를 통한 의미론적 탐구는 어려운 것이다. 다만 우리는 비유된 짐승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은 인위적이고 이기적인 인간과 대립한다. 말하자면 원초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들판은 원초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新婦여, ──「꽃을 위한 서시序詩」 전문 김춘수 시에서 관념의 세계 곧 의미론의 세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시는 아마도 「꽃을 위한 서시序詩」일 것이다. 성공적이라는 표현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얘기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미학적인 시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구성에 의해 텍스트가 지향하는 의미론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구성은 이항대립적인 체계로 되어 있다. 바로 ‘나-너’의 이항대립적인 구성이다. ‘나-너’의 코드는 대립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생산해낸다. 가령 제1연에서 ‘나/너’는 “위험한 짐승인 나/ 까마득한 어둠인 너”로 대립한다. 우리는 이 대립에서 상호 결합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승의 층위와 자연(어둠)의 층위로 변별되니까 말이다. 제2연에서는 “한밤내 우는 나/ 피었다 지는 너”로 대립한다. 이 대립에서도 상호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분리된 존재라는 점이다. 결국 1,2연을 통합해 보면 나와 너는 결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나는 너를 알기를 원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된 ‘나/너’이지만, 이항대립 체계를 통하여 그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제3연과 제4연이 이항대립하게 된다. “돌 속에 있는 금金(나)/ 얼굴을 가린 신부(너)”로서 말이다. 이 대립 역시 상호 개별적으로 작용한다. ‘금’이라는 광물성의 층위와 ‘신부’라는 인간적인 층위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나-너’가 결합할 수 없는 상태인 셈이다. 이 결합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의미의 심연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 의미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해 감각을 배제하고 이러한 관념, 즉 비유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의 그 언어가 비유로 쓰일 때에는 그 의미가 언어의 배후로 숨겨지고 만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는 적어도 그런 관념의 상태를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비유적 세계가 ‘금’과 ‘신부’라는 감각적인 대상으로 수렴되고 있기에 그러하다. 물론 해석적 차원으로 보면 ‘금’은 울음의 광물화로 영원한 침묵의 존재자를 의미할 것이고, 신부는 그러한 존재, 즉 광물화된 존재를 다시 인간적 존재로 불러내려고 하는 숨겨진 얼굴을 의미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할 것이 있다. 시인이 광물성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세계로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는 살기 위해서 더 이상 의미론적 세계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는 ‘의미’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세계로 갈 것이다. 그 무의미의 세계에 대한 것은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는 시인의 시세계詩世界·5   ──김춘수의 시론과 시·2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김춘수 시인은 ‘의미의 시론’으로 시적 출발을 하였다. ‘의미의 시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의 시보다 관념적 이미지의 시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서술적 이미지보다 비유적 이미지를 주된 시적 방법론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예의 비유적 이미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의미나 관념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요컨대 의미에 봉사하는 도구적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로 구성된 비유적 이미지가 대상이 지닌 불가시적인 의미를 명료하게 모두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기호로써의 언어가 그런 한계를 지닌 만큼 비유적 이미지로 구성된 언어적 이미지 또한 그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김춘수는 이러한 한계를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그는 대상에 대한 의미론적 탐구 작업에 끝내는 회의를 가지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의미의 시’ 곧, 비유적 이미지로 시를 건축하려던 욕망을 청산하고 무의미시를 향한 시적 세계를 욕망하고 만다. 달리 표현하면 서술적 이미지로 시를 건축하려는 욕망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욕망의 과정이 단순하지는 않다. ‘의미’와 ‘무의미’ 시론이 대립·갈등하는 시적 단계(비유적 이미지+서술적 이미지)를 거쳐 독자적 단계인 ‘무의미시론(서술적 이미지)’에 안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미+무의미 시론’→‘무의미 시론’이라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본고에서는 무의미시론에 이르는 단계적 과정을 핵심적으로 언급한 다음, 이러한 시론으로써 그의 시 텍스트를 독자들과 가볍게 감상하고자 한다.       2. 김춘수의 중후기 시론인 ‘무의미시론’   다음의 글은 김춘수 시인이 자술한 무의미시에 대한 시론이다.     늦은 트레이닝   아이들이 장난을 익히듯 나는 말을 새로 익힐 생각이었다. 50년대의 말에서부터 60년대의 전반에 걸쳐 나는 의식적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데상시기時期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타령조」라고 하는 시가 두 달에 한 편 정도로 쓰여지게 되었다. 일종의 언롱言弄이다. 의미를 일부러 붙여 보기도 하고 그러고 싶을 때에 의미를 빼버리기도 하는 그런 수련이다. 이 시기의 부산물로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등이 있다.(…생략…).   묘사의 연습 끝에 나는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어느 정도 얻게 되었다. 관념공포증은 필연적으로 관념 도피에로 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사생寫生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하였다.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의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여기서 나는 시詩의 일종 순수한 상태를 만들어 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나의 의도상의 기대를 글로써 공개하기도 하고, 작품도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그 처음 나타난 결과는 실패였다.(…생략…)(→그 예로 김춘수는 「인동忍冬 잎」을 들고 있다.)   사생이라고 하지만, 있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집이면 집, 나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은 버리고, 다른 어느 부분은 과장한다.(…생략…) 풍경의, 또는 대상의 재구성이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이게 되고, 자유연상이 끼이게 된다. 논리와 자유연상이 더욱 날카롭게 개입하게 되면 대상의 형태는 부숴지고, 마침내 대상마저 소멸한다. 무의미의 시詩가 이리하여 탄생한다.   타성[無意識]은 매우 힘든 일이기는 하나 그 내용을 바꿔갈 수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을 아주 관념적으로 비유적으로 쓰던 타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즉물적으로 서술적으로 써보겠다는 의도적 노력을 거듭하다 보면, 그것이 또 하나 새로운 타성이 되어 낡은 타성을 압도할 수가 있게 된다는 그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 새로운 타성은 새로운 무의식으로 등장할 수 있다. 이것을 나는 전의식前意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60년대 후반쯤에서 나는 이 전의식을 풀어놓아 보았다. 이런 행위는 물론 내 의도, 즉 내 의식의 명령 하에서 생긴 일이다. 무의미한 자유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나면 시 한 편의 초고가 종이 위에 새겨진다. 그 다음에 내 의도(의식)가 그 초고에 개입한다. 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전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 관계에서 시는 완성된다. 그리고 나의 자유연상은 현실을 일단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비재非在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의 기수旗手가 된다.   「처용단장」 제1부는 나의 이러한 트레이닝 끝에 쓰여진 연작連作이다. 여기서 나는 인상학파印象學派의 사생寫生과 세잔느풍의 추상과 액션 페인팅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싶었으나 내 뜻대로 되어졌는지는 의문이다.(…생략…)   자각을 못 가지고 시를 쓰다 보니 남은 것은 토운 뿐이었다. 이럴 때 나에게 불어닥친 것은 걷잡을 수 없는 관념에의 기갈이라고 하는 강풍이었다. 그 기세에 한동안 휩쓸리다 보니, 나는 어느새 허무를 앓고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 허무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이 허무의 빛깔을 나는 어떻게든 똑똑히 보아야 한다. 보고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意味라고 하는 안경을 끼고는 그것이 보여지지 않았다. 나는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粉末을 어디론가 날려버려야 했다. 말에 의미가 없고 보니 거기 구멍이 하나 뚫리게 된다. 그 구멍으로 나는 요즘 허무의 빛깔이 어떤 것인가를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보일 듯 보일 듯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처용단장 제2부」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미지란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에게는 이미지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는 일정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된다. 즉 허무가 있을 뿐이다.(…생략…)   나에게 이미지가 없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 행行이나 또는 두 개나 세 개의 행行이 어울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면, 나는 그것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전연 다른 활로를 제시한다.(…생략…) 한 행이나 두 행이 어울려 이미지로 응고되려는 순간, 소리(리듬)로 그것을 처단하는 수도 있다. 소리가 또 이미지로 응고하려는 순간, 하나의 장면으로 처단하기도 한다. 연작連作에 있어서는 한 편의 시가 다른 한 편의 시에 대하여 그런 관계에 있다. 이것이 내가 본 허무의 빛깔이요 내가 만드는 무의미의 시詩다.   ──김춘수, 『김춘수전집2 시론』, 문장, 1984, pp.385~389   3. ‘무의미시론’으로써 시 텍스트 읽기   김춘수 시인이 의미의 세계, 곧 비유적인 이미지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세계 곧, 서술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첫 번째 특징은 다름 아닌 ‘데생dessin’적 시론이다. 일종의 실험 시론이라 할 수 있는 데생 시론은 완성된 시를 쓰기 전에 미리 그것을 위해 이리저리 가볍게 시를 구상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데생시론에 의해 건축된 시작품은 시인이 욕망하는 최종의 작품은 아니다. 요컨대 과정 중에 있는 작품이다.  김춘수는 그의 데생시론에서 시의 의미를 덧붙여 보기도 하고 의미를 빼보기도 하는 상반된 실험을 해보고 있다. 이것이 데생시론의 중요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직 그의 시론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단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데생시론의 대표적인 작품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다. 감상해 보도록 한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數千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     이 텍스트는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시적 이미지가 주는 인상이 감각적이고 생생하다.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해주는 시적 기법은 다름 아닌 묘사이다. 주지하다시피 묘사는 비유적 이미지보다는 서술적 이미지를 위해 존재한다. 관념을 배제하고 감각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때 감각적 이미지는 의미를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 물론 이미지가 존재하기에 거기에서도 의미지향성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다만 추상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 곧 감각으로 감지된다는 점이 변별적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비유적 이미지)인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김춘수의 시의 목적은 의미보다는 데생 그 자체, 곧 묘사 그 자체이다. 이에 따라 묘사에서 의도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데생시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에서는 묘사 자체의 서술적 이미지보다는 그 이미지가 산출해내는 의미가 전경화前景化되고 있다.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셈이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건축하는 묘사적 이미지가 이항대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의 이항대립은 의미를 산출하는 발판이 된다.   가령, “3월”은 2월(겨울, 죽음)과 4월(봄, 삶)이라는 대립항을 매개하는 매개적 이미지이다. 이에 따라 내리는 “눈”은 ‘끝남의 겨울’과 ‘시작의 ‘봄’을 매개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곧 두 대립적인 의미를 동시에 통합하는 의미작용을 한다. 그래서 산뜻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생명의 에너지를 표상한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새로 돋은 정맥”이라는 감각적 이미지도 그래서 가능해지고 있다. 그 다음에는 동양과 서양의 대립적인 항목들을 통합하는 이미지이다. 예컨대 ‘샤갈, 올리브, (숙녀), (난대성)’ 등의 서구지향성의 이미지·기후와 ‘지붕과 굴뚝, 아낙, 아궁이, 겨울(온대성)’이라는 동양지향성의 이미지·기후가 통합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로 인하여 동양의 전통서정과 서구의 (전통)정서가 신선하게 결합되는 이미지를 산출하게 만든다. 요컨대 모순의 통합적 이미지가 우리의 감각을 신선하게 자극한다. 동시에 그 자극이 곧 의미로 전환된다. 그래서 김춘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시론에 완전히 부합하지 못하는 실험용 작품이 된다. 텍스트가 의미 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실험용 텍스트를 통하여 비로소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서술적 이미지에 대한 철저한 훈련 덕분이다. 그래서 언어 자체가 이미지만을 지향하려는 시 텍스트를 산출하기에 이른다. 김춘수는 이러한 시를 일종의 순수시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런 의도로 쓴 작품이 바로 『인동忍冬 잎』이다.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인동忍冬 잎」 전문       김춘수는 묘사적 기법을 동원하여 서술적 이미지로 텍스트를 구조화하고 있다. 묘사적 기법으로 본다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의 작동 기능은 달리 나타난다. 이 텍스트에서의 이미지는 의미보다는 이미지 자체를 지향하려는 강한 성질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구성된 이미지들이 하나하나의 장면만을 연출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흰 눈’과 ‘붉은 열매’의 감각적인 대립이 어떤 의미를 지향하기보다는 하나의 장면 자체를 지향한다. ‘붉은 열매’와 ‘하얀 새’의 감각적인 대립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이미지 자체를 지향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김춘수는 이 시를 실패작으로 단언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6,7행의 “이루지 못한”, “더욱 슬프다”의 언술이 관념적인 설명으로 구성되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미지향의 언술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춘수는 사생, 곧 묘사에 대한 더욱 철저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묘사는 감각적인 대상의 재구성이다. 지금까지는 그 재구성을 할 때에 적어도 이미지와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장면들을 제시해주었고, 그리고 그 연계성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완전히 의미론적 세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장면들을 통하여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묘사 기법을 초월하고 만다. 김춘수는 감각적인 대상을 재구성할 때, 거기에 논리와 자유연상을 개입시켜 작동하게 한다. 이에 따라 대상의 형태는 부서지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각기 층위가 다른 이미지들이 상호 충돌·결합하기도 한다. 물론 충돌·결합한 그 장면이 연출하는 의미를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무의미시론이다. 그는 이렇게 논리를 초월하는 자유연상 의식을 전의식이라고 명명한다. 예의 자유연상(무의식)도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늘 현실을 지배하는 현실 의식의 간섭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연상(무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처용단장」 제1부이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처용단장 제1부」 Ⅰ의 Ⅳ     ‘무의식’과 ‘의식’이 투쟁하는 무의미시 텍스트라고 해서 그 안에 묘사적 이미지가 부재하다는 말은 아니다. 묘사적 이미지가 있지만, 그 이미지가 대상을 지시하지 않고 소멸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미지와 대상 사이에 거리가 없어지게 되고, 이미지 자체가 그 실존으로 남게 된다. 시에서 대상이 소멸했다는 것은 그 의미론적 세계가 소멸했다는 뜻이다. 결국 남은 것은 비실재하는 이미지 조합의 장면들뿐이다. 좀더 부연하면 의식이 지배하는 언어적 현실(이미지)을 소멸시켜버리고 무의식이 지배하는 언어적 현실(이미지)을 새롭게 창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을 분류해보면 그러한 사실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의식적인 언술을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의 반복적 언술,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라는 언술,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라는 언술이다. 이 언술 속에 있는 이미지는 객관적인 현실을 반영해 주고 있다. 달리 말해서 의미론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세계이다. 다음으로 무의식적인 언술을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척 내리고 있었다.”라는 언술,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라는 언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이라는 언술,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라는 언술 등이다. 물론 의미론적 파악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이 언술 속에 있는 이미지들이 실제의 현실을 해체하고 시인의 내면에 있는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를 건축하고 있는 ‘겨울비, 바다, 군함, 물새, 사나이’ 등의 이미지들은 ‘의식/무의식’, ‘현실/내면’, ‘객관/주관’의 대립적 세계를 통합하면서 자기만의 시적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김춘수는 ‘의식/무의식’의 대립적 언술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직 현실의 잔영, 다시 말해서 현실을 지시해주는 언어의 의미 잔영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김춘수는 극단적으로 무의미시론을 전개해 나간다. 그 극단은 바로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을 모두 날려버리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언급하자면 이미지까지 처단하여 그 이미지까지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이어 이미지까지 사라졌을 때, 시 텍스트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에 의하면 바로 시적 허무이다. 이런 점에서 무의미시의 절정은 허무의 세계를 최고조로 나타낸 것이 된다.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   풀 발바닥을 보여다오.   그대가 바람이라면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   ──「처용단장 제2부」 Ⅱ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을 지시해줄 이미지조차 해체되어버리고 남아있는 것이라곤 ‘소리에 가까운’ 언어의 배열뿐이다. 여기에서 ‘소리에 가깝다’라는 것은 시적 언어가 지시해줄 대상이나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빈껍데기만 현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빈껍데기의 언어를 읽으면 그냥 소리만 나게 된다. 가령, “발바닥”, “겨드랑이”는 신체언어로써 그 의미를 지시해주는 정상적인 기능을 한다. 부연하면 의미의 분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체언어인 “발바닥”, “겨드랑이”가 비신체기호인 “구름”, “풀”, “별”과 결합되면서 그 의미기능은 상실되어버리고 만다. 곧 정상적인 문법의 틀을 벗어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언어는 그 의미의 틀을 버리게 된다. “구름”, “풀”, “별”은 자연기호에 속한다. 예의 신체기호와 자연기호의 결합은 비정상적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이기에 우리의 시선을 끌 수가 있다. 그 결합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의인화된 “구름 발바닥”, “풀 발바닥”, “별 겨드랑이”는 신선한 이미지로 전경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 의미들은 모두 분말로 흩어지고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소리의 반복이다. 곧 소리의 울림뿐이다. 명사적 층위인 “구름 발바닥”, “풀 발바닥”, “별 겨드랑이”의 반복적 시행과 서술어 층위인 “보여다오”의 반복적 시행이 결합된 반복적 리듬뿐이다. 즉, 의미는 사라졌지만 반복적 리듬은 더욱 크게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반복적 구조는 그 언어가 어떠하든지 간에 의미를 발생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텅 빈 언어의 껍데기에서 ‘허무(소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의미’를 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천상적인 요소인 ‘구름, 별’과 지상적 요소인 ‘풀’, 그리고 천상과 지상을 매개해주는 ‘바람’과의 연관관계, 곧 공간적 관계를 토대로 해서 그 의미를 탐색해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반복적 시행 속에 드러난 그 공간적 의미로써 말이다. 이렇게 보면,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언어로써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적 지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존의 시적 문법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문법의 틀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 새로운 문법의 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장면을 부수고 해체하여 그것 자체를 전경화하는 일이다. 그와 동시에 반복적 어구, 어절, 시행을 구조화한 반복적 리듬을 후경화하는 일이다. 결국 그의 무의미시는 전경화, 후경화에 의하여 역설적으로 의미의 세계로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      
22    [스크랩] . 무의미 시론 댓글:  조회:1419  추천:0  2018-11-16
. 무의미 시론     내 주요문학 수업은 70년대에 이루어졌다. 감수성은 다소 있으나 지적인 소양은 부족한 시기에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모델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선배들이 다들 김춘수와 김수영을 언급하고 있어서 그들 작품을 정독해서 읽어 보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이 문단에 화제로 오르고 잡지 평문에 도배를 하다시피 해서 “무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이 시절 한참 미학관련 서적들을 보고 있어서 ‘미(美)란 무엇인가’하는 명제에 나는 빠져 있었다. ‘미(美)’가 대단히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인 반면 “무의미(無意味)”란 간단하다.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간단한 용어를 어렵게 생각한 이유는 나는 혹시라도 이 용어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노자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無)’와 불교의 ‘공(空)’과도 연결되는 관념이 아닐까 매우 어렵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춘수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해석은 기우에 불과하다.     이미지란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에게는 이미지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는 일정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된다. 즉 허무가 있을 뿐이다. 이미지 콤플렉스같은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나에게는 없다. 시를 말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미지를 수사나 기교의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은 하나의 폐단이다. ...허무는 나에게 있어 영원이라는 것의 빛깔이다.(「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시『처용단장』중에서 발췌)     김춘수가 예시로 든 시와 시론을 보면 이미지가 부르는 관념은 중요하지 않고 ‘말의 긴장된 장난’이 중요하다.  김춘수는 다시 또 말한다.     무의미 한 자유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나면 시 한 편의 초고가 종이 위에 새겨진다. 그 다음 내 의도가 그 초고에 개입한다. 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전의식(前意識)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시는 완성된다. 그리고, 나의 자유연상은 현실을 일단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비재(非在)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의 기수(旗手)가 된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여기서 비재(非在)의 세계란 김춘수가 말하는 ‘허무’를 뜻하는 것 같다. 김춘수는 왜 허무에 빠지고 관념이나 의미를 배격하게 되었을까. 시가 의미와 가치를 배격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독자는 가진다. 김춘수는 다시 자신의 시론에서 자신의 시적변용과정을 설명한다.       나의 발상은 서구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 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 다녔다. 선험(先驗)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과 제일인(第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實在)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뒹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이데아 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용어상의 혼란을 불러왔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가 실재(實在)고 현상과 사물은 비실재(非實在)였다. 실재(實在) 즉 제일원인(第一原因)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경우 종교에서는 역설과 상징을 사용한다. 그러나 역설과 상징은 ‘말할 수 없는 것’의 실체를 체득(體得)했으나 표현방법이 마땅치 않을 경우 사용하는 우회로이다. 김춘수의 표현대로라면 “도깨비와 귀신”인 실재(實在)를 지적으로는 이해했으나 수도자가 아니어서 체득할 수는 없었고 불가지론(不可知論)과 허무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김춘수는 또 반문한다.       염불을 외우는 것은 이미지를 그리는 것일까? 이미지가 구원에 연결된다는 것일까? 아니다 염불을 외우는 것은 하나의 리듬을 탄다는 것이다. 이미지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탈(脫) 이미지이고 초(超) 이미지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미지는 뜻이 그리는 상(象)이지만 리듬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뜻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이미지만으로는 시(詩)가 되지만, 리듬만으로는 주문(呪文)이 될 뿐이다. 시가 이미지로 머무는 한 시는 구원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2. 김춘수의 리듬과 주문       김춘수가 의미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구원’을 위해 택한 방법이 리듬과 주문이었다. 리듬제일주의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음악해석과  말라르메의 ‘예술지상주의’에 연결하면 그런대로 설명이 된다. 음악은 음향과 리듬이 구체적인 사물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가사가 없이 순수한 음악만으로도 감정전달이 가능하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인간의 깊은 내적세계의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이 경우 제일 좋은 길은 시를 버리고 음악을 하면 된다. 의미와 관념이 형식상으로는 없으니 순수예술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그런데 음악을 해설하는 음악평론가들은 온갖 의미와 관념으로 음악을 설명하고 있으니 음악의 내면에 의미와 관념이 없다는 주장도 따져 보아야 할 명제이다).   리듬이 아닌 주문(呪文)이라는 용어에 이르면 좀 복잡해진다. 주문에는 의미와 관념과 리듬이 같이 결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리듬은 음악으로 귀속되니까 이를 피하기 위해 주문을 말한 것 같다. 김춘수가 주문(呪文)을 얻으려고 시도했다는 시를 소개해보자.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하늘 수박은 올리브 빛이다.   바보야,   바람이 지는가 자는가 하더니   눈이 내린다 바보야,   하늘 수박은 한 여름이다 바보야,   올리브열매는 내년가을이다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이 바보야,   (시「하늘 수박」전문)     주문(呪文)이란 주술적(呪術的)인 작용을 낳게 하기 위하여 입으로 외는 글귀이다. 원시종교에서 보편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데 지금도 무속적(巫俗的) 의례에서 무녀들이 주문을 외워 초혼(招魂)과 강신(降神)을 한다. 동학과 천도교(天道敎)에서 심령(心靈)을 연마하고 한울님(하느님)에게 빌 때 외우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등도 주문이고 넓게는 기독교의 ‘주기도문’도 주문이다. 모두 강한  의미와 관념을 가지고 있고 이때의 리듬은 의미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의미와 관념을 배격하고자 하는 김춘수가 이런 의미의 주문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그는 불교의 ‘만트라’를 염두에 두었을까.  신주(神呪)·밀주(密呪)·밀언(密言) 등으로도 번역하는 ‘만트라’는 신들을 부르는 신성하고 마력적(魔力的)인 어구이다. 원래는 뜻이 있으나  중국·한국·일본에서는 산스트리트어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를 음사(音寫)하여 표현한다.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같은 만트라가 이의 대표이다. 산스크리트로는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삼가테 보디스바하)인데 마법사고로는 발음의 특정한 톤과 음정이 발하는 파(波)의 에너지가 중요하다. 진언밀교의 수도자들은 이 파(波)의 에너지가 다른 차원의 에너지와 정보와 공명해서 다른 차원(세상)의 지혜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다.   김춘수는 시(詩)란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김춘수의 다른 시나 시론과 산문을 보면 구원이 있다고 믿은 주문(呪文)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공부한 흔적은 없다. 그는 막연히 주문이란 음악적인 리듬을 근간으로 하고 종교제의에서 사용하는 형식이니까 시의 시원(始原)성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김춘수는 시론에 관한 글「자유시의 전개」에서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해 자유시와 산문시의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行)은 저마다 리듬과 의미와 이미지의 중량(重量)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 그 중량은 밸런스가 잡히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쪽에 부담이 너무 커지거나 하여 저울대가 기울게 되면 시 전체의 분위기를 깨뜨리게 된다     나는 이 말에 동감을 한다. 김춘수의 생각과 같이 시작(詩作)은 '리듬과 이미지와 의미’를 동시에 고려하여 이루어진다. 시의 중요한 세 가지 구성요소는 상호간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대도 김춘수가 의미와 이미지를 죽이고 리듬으로서 시를 바라보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김춘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꽃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 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新婦)여.   (시「꽃을 위한 서시」전문)       이데아 로서의 신부의 이미지는 릴케와 평계(平溪) 이정호의 시에서 얻은 것이다. 이 비재(非在;신부)는 끝내 시가 될 수 없는 심연(深淵)까지 나를 몰고 갔다. 그 심연을 앞에 하고는 어떤 말도 의미의 옷이 벗겨질 수 밖에 없다.  평계(平溪)의 침묵을 단지 나는 그의 게으름으로만 돌리지 못한다. 나는 이 시기에 어떤 관념은 말의 피안에 있다는 것도 눈치채게 되었다. 나는 관념공포증에 걸려들었다. 말의 피안(彼岸)에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앞에 서는 말이 하나의 물체로 얼어붙는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김춘수가 고민한 문제를 나도 겪은 적이 있다. “말의 피안”에 있는 관념, 즉 이데아나 형이상학적 실체를 드러내고자하는 사람은 말을 버려야 한다. 비트켄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하여야 한다’라는 명제를 드러낸 적이 있다. 전기 철학인 ‘언어그림이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으로 그 의미를 명확히 도출할 수 없는 명제에 관해서는 ‘그림’(이미지)으로써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침묵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선가(禪家)에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을 말한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 개인(존재)은 선택을 해야 한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해서 불가의 깨달음으로 가던지, 제한된 언어의 제약 내에서 주어진 수단을 다해서 자신이 아는 바를 표현해야 한다. 불가에서는 오도송(悟道頌)같은 형식으로 역설과 이이러니를 통해 피안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물의 제일원인을 믿는 신비주의자들은 상징으로서 이 ‘침묵의 자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우연히 ‘무한의 침묵’의 무게를 엿보았으나 근기(根氣)가 약한 나 같은 사람은 시가 무서워져서 십년동안 절필을 하게 된다. 이 선택에서 김춘수는 의미와 관념이 무서워져서 리듬으로 도망가고자 했다. 수도자들은 온 몸으로 밀고나가는 수행에서 이 세계를 감당하지만 김춘수는 말 대신 리듬으로 우회하고자 했다. 김춘수는 만년까지 지신의 신념인 무의미시론을 끌고 가지 못했다. 시에서 언어의 리듬만 가지고는 시라는 전체얼굴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의미시의 주요 근거인 리듬에 대해 더 생각해 보자. 시가 산문과 다른 점은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산문자체도 리듬이 있지만 시는 리듬의 형식이 더 도드라진다. 인류의 태초에 발생한 문학이 운문이었고 주문들이 리듬의 형식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리듬은 언어의 원초적인 속성을 지닌다. 언어의 리듬에 대하여 옥타비아 빠스의 생각을 들어보자.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단어들은 어떤 리듬의 원리에 따라 서로 모이고 흩어진다. 만일 언어라는 것이 비밀스러운 리듬에 의하여 지배되는 구(句)가 끊임없이 변전(變轉)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리듬의 재생산은 우리에게 말을 다스리는 힘을 줄것이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활과 리라』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이 세계의 운동이 리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물리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경험으로 알고있다.  하루는 밤과 낮으로 깜박이며, 일년은 四時로 깜박이며, 지구 세차운동으로 황도의 별들은 26,000년을 주기로 위치를 바꾸어 시야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결국 시간의 리듬이다. 태양과 달의 운동은 지구생명들의 활동과 휴지, 각성과 수면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바다의 썰물과 밀물은 리듬으로 해안선에 도착한다. 시간(time)의 어원이 조수(tide)라고 한다. 원시인간들이 바닷가의 물고기를 먹고 살았을 때 몸으로 부딪친 사물은 조수였다. 자연의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이 어려웠다. 인간도 자연의 리듬이다. 지구에서 목숨을 받아 꽃처럼 피었다가 어둠으로 진다. 결국 긴 시간 속에서 리듬으로 깜박이는 존재다. 긴 리듬과 짧은 리듬이 우리의 심장과 영혼을 흔들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희로애락도 리듬의 변화를 탄다. 거시세계가 아닌 미시세계에서도 원자와 분자와 아원자들이 진동한다(리듬으로 춤춘다). 사물은 춤추면서 파장을 만들어내는데 전자기파와 음파, 파도등의 물결파(리듬파)는 시공을 가득 채우면서 물질과 물질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시각 청각 촉각에 파로 전달된 에너지차이를 뇌가 인식한다. 정보의 결합은 한편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작은 이야기의 결합이 큰 이야기의 이미지와 꿈을 만들어낸다. 세계가 이런 모습이니 사물의 모사인 언어가 리듬을 갖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김춘수가 리듬에 주목한 점은 이해가 된다. 언어의 보다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고자 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듬으로 ‘언어의 피안에 있는 형이상학적 상태’가 전달되리라 생각한 것은 방향이 잘 못 된 것 같다. 김춘수가 시도한 언어의 리듬이 제사장과 사제들이 추구한 주문(呪文)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 수박」에서 드러낸 반복어귀가 주문(呪文)의 비밀리듬을 가지고 있을까. 반복어귀가 감추어진 세계의 리듬과 공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나에게는 드러난 시의 평범한 리듬이 보일 뿐,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전체성을 암시하는 리듬이 느껴지지 않는다.   과학과 경험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직관에 의해 먼저 가설과 이론이 자유롭게 세워진다. 그러나 천재의 사고실험을 거친 이론이라도 실험과 검증에 의해 입증되어야 전제아래서의 진리로 인정받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직관에 의한 사고실험의 소산이었으나 태양을 지나는 빛의 속도가 굴절됨이 실험으로서 검증되고서야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마찬가지로 김춘수의 리듬과 주문에 의한 시 이론이 성립하려면 리듬만으로 충분한 시가 있어야 한다.   음악내부에서도 리듬과 더불어 음정과 화음이 곁들여져야 음악의 형식이 완성된다. 리듬만으로 이루어진 타악기의 연주가 음악의 깊은 세계를 드러내기에는 단조롭지 않은가.       3. 이미지(Image)와 김춘수의 서술이미지     이미지(Image)란 사전적 정으로는 감각기관에 대한 직접자극으로 얻어진 정보가 아닌 상기(想起) ·상상(想像) ·사고(思考)를 통해 마음속에 떠오르는 영상(映像)을 말한다. 시에서는 상상(想像)을 통한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상(像)을 주로 언급한다. 이미지는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비유적 이미지에 수사학에 말하는 직유, 은유, 상징, 알레고리, 신화, 우화등이 포함된다. 사유(思惟)와 표현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신비평가(新批評家)들은 수사를 의미론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문학과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보았다. 수사는 사유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언어장치이다. 의미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표상이미지를 풍부하게 한다.   개별 사물은 서로에게 대립되면서 고유의 성질과 형상을 가지고 있다. 존재론적 입장에서는 사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과학은 사물을 수(數)와 양(量)으로 환원해서 사물간의 추상적 관계를 만들어 내고 인간에게 유용한 방식으로 사물을 다룬다. 시(詩)는 사물의 동일성(同一性)을 드러내어서 현실에 없는 가능성을 세계를 만들어 놓고 즐거워한다. 양자 모두 사물에 대한 인간의 투사와 제어를 목표로 한다. 모두가 기호인데 과학은 수(數)를 시는 언어(이미지)를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 두 방식 모두 사물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드러내 인간의 인식에 자유를 부여하고 현실해석력을 높인다.   예시를 들어 구체적으로 이해해보자. 흙 1kg과 물 1kg은 분명히 다른 사물이지만 1kg이라는 추상적 성질에 의해 동일한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로 물 1kg의 무게를 흙1kg으로 지탱할 수 있다는 통찰이 나오고 제방을 쌓는 건축가는 사물을 다루는 지혜를 얻는다. 피타고라스는 이러한 수의 이데아적 성질이 만물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언어의 세계에서  ‘수선화’와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존재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강가의 수선화이다’라는 은유가 두 사물이 각자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연결된 다른 존재의 속성을 드러낸다. 다른 존재의 속성이란 여자가 수선화이고 수선화가 여자인 가능성의 세계이지만 형이상학자들은 근본이 같다고 생각한다. 불가는 연기에 의해 두 사물이 서로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플로티누스는 사물의 제일원인인 일자(一者)의 다른 표현으로 보았다. 이는 피타고라스가 수(數)로 사물의 보이지 않는 통일성의 관계를 직관하고 이를 실체로 본 속성과 같다. 이름을 달리 했을 뿐 ‘사물의 보이지 않는 힘과 관계’에 대한 전체성에 대한 생각은 동서양이 그리 다르지 않다.   시인들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강가의 수선화이다’라는 A=B의 세계가 자신이 새로 창조한 세계라고 믿는다. 양자는 각자 상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존재(사물의 제일원인)의 개별적 드러냄이가. 시인은 현실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수사적 이미지의 세계로 드러냄으로서 새 방식으로 세계모습을 창조한다. 낭만주의자들이 시인의 이러한 상상력(Imagination)을 신의 창조에 비견한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이유이다.    수사적 이미지의 능력과 비유를 김춘수는 왜 포기하고 서술적 이미지에 기대고자 했을까. 다시 김춘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나는 시에서는 충분히 구체적이고 싶다. 맛있는 담배(문맥상 구체적인 현실의 비유이다)를 실컷 피우고 싶다. 관념을 말하고 싶지 않다. ... 그대로의 주어진 생을 시에서 즐기고 싶다. 관념 과잉상태인 실제의 내 생활에 어떤 환기장치, 또는 어떤 균형감각을 회복시켜주는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내가 만드는 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관념을 배제하기 위하여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자. 그 것은 일종의 묘사절대주의의 경지가 된다. 설명을 전연 배격한다. 설명은 일종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가치관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회의주의가 되기도 하고, 현상학적 망설임(판단중지, 판단유보)의 상태, 판단을 괄호안에 집어넣는 상태가 된다. (시론 「대상의 붕괴」에서 인용)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시「눈물」전문)     김춘수는 설명에서 ‘형이상학적 관념’을 배제하기 위하여 서술적 이미지를 쓴다고 하였다. 형이상학에 대한 불가지론과 회의주의자인 태도에 의해 형이상학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하겠다는 입장도 이해 할 수는 있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관념은 비유적 이미지에서만 드러나는 것일까. 서술적 이미지에서는 형이상학적 관념은 사라지는 것일까. 피안에 이르는 주문(呪文)이라 일컬어지는 반야심경의 부분을 보자.     이 모든 사물은 그 성질이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   시각의 영역도 없고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고 또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없어짐,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呪文)을 말해주니, 주문은 곧 이러하다.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공(空)이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공의 상태를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라는 서술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서술적 이미지가 관념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이상하다. 그렇다고 시에 대해서 고민한  김춘수가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의 능력을 모른 것도 아니다. 다음의 시를 예로 들어 김춘수는 시의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梅嶺花初發 매령화초발     매화고개엔 꽃이 피기 시작했으나 天山雪未開 천산설미개     천산의 눈은 아직 녹지 않았겠지 雪處疑花滿 설처의화만     눈 덮인 곳에도 아마 꽃은 만발하여 花邊似雪廻 화변사설회     꽃 주변에는 눈이 빙빙 돌겠지 因風入舞袖 인풍입무수     바람이 춤추는 무희의 소매 속으로 들어와 雜粉向妝臺 잡분향장대     온갖 분가루가 그녀의 화장대에 어지러우리 匈奴幾萬里 흉노기만리     흉노의 침입은 이미 수만리나 진군하여 春至不知來 춘지부지래     봄이 이르렀어도 봄이 왔음을 알지 못하리라     (「의미에서 무의미까지」에는 원문만 있는데 雪이 모두 雲으로 표기되었다. 대구대학교 중문학과 전영란교수의 도움을 얻어 본래대로 雪로 바꾸고 해석을 새로 했다. 매화와 눈의 대비가 봄과 흉노의 침입으로 인한 나라형편의 어려움을 은유해서 시의 구조가 명확하다. 天山은 지명인데 이 시기에는 흉노의 점령지였다 한다. 김춘수 시론전집에도 誤記로 되어있어서 눈 밝은 사람한테 흉잡힐까 아쉬웠다)     당 고종 때의 시인 노조린(盧照鄰)의 오언율시 「매화락(梅花落)」이다. 끝의 두 행을 빼고는 나머지 여섯 행이 모두 이미지로 되어있다. 요컨대 매화(梅花), 설(雪), 무수(舞袖), 분(紛) 장대(妝臺)등이 그리는 정경은 아주 화려하고 관능적이다...........이러한 이미지의 생태적 다양성및 다의성(多意性)은 산문의 진술(Statement)이 가지는 정확성과 비교할 때 매우 반 산문적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개념전달(산문의 경우처럼)과는 전연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즉 〈이미지의 생태적 다양성및 다의성(多意性)〉은 시(詩)의 것이다. 시는 이리하여 개념을 넘어선, 사물의 생성한 개성적 파악을 위하여 이미지로 말을 하여야 한다. 시는 곧 이미지라고도 말할 수 있다......이미지는 결국 그 생태면이나 기능면에서 볼 때 〈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데에도 전 우주가 필요하다(폴 클로 델)〉는 그 감각 및 상상력과 잇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인은 그 감각및 그 상상력을 보다 서정적으로 말한다. 즉, 〈낙엽 한 잎에 우주의 가을을 느낀다〉고. (시론「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데에도」에서 인용)        〈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데에도 전 우주가 필요하다〉와 〈낙엽 한 잎에 우주의 가을을 느낀다〉는 구절은 모두 작은 사물에 비유한 큰 관념과 의미(우주적인)를 전달하고 있다. 예로부터 명시의 구절이라고 알려지고 고전이 된 시다. 김춘수는 왜 시의 관념과 의미를 지우려고 했을까. 기존의 방법으로는 이런 시의 깊이를 뛰어넘을 수가 없어서 방법상으로만 새로움을 추구했던 것일까. ‘무의미 시’라는 시가 지금까지 한국시사(詩史)에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임에는 틀림없다. 김춘수는 이 주장으로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새로운 시창작 방법이라는데 누군들 호기심이 일지 않겠는가.   이 아이디어가 김춘수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미 미술계에서 다다이즘 운동이 있었고 이들의 슬로건인 ‘무의미함의 의미’에서 용어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다다에서는 ‘무의미함의 의미’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여 문맥과 문맥이 전혀 맞지 않는 글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거나 무형식으로 비현실이나 초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현실에서는 ‘무의미’일지 모르나 다른 현실에서는 ‘의미’인 상태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김춘수도 기존 시이론에서는 무의미일지는 모르나 ‘리듬과 주문’의 세계에서는 ‘의미’일지도 모르는 시를 추구함으로서 미술에서의 다다운동과 어느 정도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다다가 기존의 예술적 감수성에 반기를 들고 의도적으로 예술을 불쾌한 것으로 표현한 반면 김춘수는 음악적 감수성에 기대고 대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점에서 다다와는 다르다. 오히려 근래의 한국 ‘미래파’시인들이 변태적 성(性)과 파괴의 추함을 대상으로 삼아 무의식아래 욕망을 드러낸 수법이 다다와 비슷하다.  김춘수는 초기시에 릴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릴케는 시에 관념과 상징의 의미를 많이 사용했다. 김춘수가 릴케와 흄의 시를 대비해서 설명한 대목이 있다.       죽음은 위대하다./우리는 웃고 있는 그의 입이다./우리가 생명의 한 복판에 있다고 생각할 때,/그것은 우리의 한 복판에서/감히 울기를 한다(릴케의 시 부분)       가을 밤의 싸늘한 감촉-/밖을 나섰더니./얼굴이 붉은 농부처럼/불그레한 달이 울타리를 넘어다 보고 있었다./나는 말을 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주위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어/되회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희었다.(T.E.흄의 시 부분)       릴케의 상기 시는 ‘예지’를 작접으로 토로하고 있다.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그의 인생관적 문제성에 많이 힘입고 있는 것이다. 릴케와 같은 시를 느낄 수가 있다. 상징적인 태도라 할까? 이에 비하여 T.E.흄과 같은 시인의 시를 대할 때 시를 직접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상징성이 없는 대신 시 그것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김춘수 시론 전집1」에서 인용)       김춘수는 관념/의미를 벗어던지고 사물이 주는 직접적인 감각과 심미를 추구하고자 했다. 김춘수는 하이데거가 휠덜린의 시를 대상으로 쓴『휠덜린과 시의 본질』을 말한다. 그는 하이데거가 휠덜린의 노트에서 “모든 재보財寶중에서 가장 위험물인 언어”라는 대목을 분석한것을 인용한다.     언어를 존재를 위협하는 ‘위험물’로 보는 동시에 언어가 없으면 세계가 없는 것이 되니까 언어를  우리가 가진 재보들 중의 하나의 ‘재보’로 본다. 시작과 언어의 이상이 같은 변증법적 운동은 그것들이 지양되어 마침내 하이데거의 시의 본질인 ‘시란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 된다.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한마디로 존재자의 덧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 역시 하이데거에 있어서와 같이 존재(고향)의 빛에 대한 갈망을 내포로 지니고 있는 하나의 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연(존재자-제행무상)과 내포(존재)의 긴장이 훌륭한 시를 낳게 한다.(「김춘수 시론 전집1」에서 인용)     언어에서는 의미론과 존재론은 서로에게 의지한다. 의미는 존재가 없으면 피상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고 존재는 언어(혹은 존재자)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사물이나 명제(혹은 진리)에 대해 정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과학이나 논리철학의 태도이다. 환원이 그 방법론인데 부분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으나 사물과 상황이 관계하는 전체성은 훼손을 받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여기서 나왔다. 김춘수가 언어에 대해 고민한 대목이다. 시가 형이상학적 존재(신, 불교의 ‘空’, ‘절대정신’)을 대상으로 하면 불립문자(不立文字)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벽에 부딪힌다. 그는 또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를 들어 언어로 무엇을 설명하려고 할 때 언어는 그 대상의 진상을 놓친다고 보았다. 시인이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이 문제에서 나는 십년간 침묵을 했고 김춘수는 시를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미지(관념)을 포기하고자 했다.      “외연(존재자-제행무상)과 내포(존재)의 긴장이 훌륭한 시를 낳게 한다”라는 김춘수의 말을 생각해보자. 외연(언어)으로 내포(존재)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문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수사를 사용했다. 은유와 상징은 형이상학적 함의를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기법으로 여겨져 왔다. 바이블이나 불경에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와 ‘불성’을 드러내기 위해 비유를 사용해 왔다. 그 비유는 시인과 수도자들이 본인의 개성으로 전체성과 만나는 자리에서 항상 새롭게 이루어져 왔고 독자는 새로운 비유 속에서 드러나는 이 세계의 전체성에 감명을 받는다.  김춘수는 문학이 철학이나 과학 혹은 종교와 다른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가 부딪힌 문제는 문학의 문제가 아닌 형이상학의 문제였다. 절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수도자처럼 언어를 버리고 수도원이나 사막의 동굴로 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비유를 창조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지적인식의 한계에서 시인은 정면돌파를 해서 새로운 자리와 상황을 보여주는 일이 시인(느끼고 표현하는 앎의 사람)의 임무다. 시인의 역량이 부족하면 나같이 도망가거나 김춘수식의 우회가 등장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김춘수는 은유와 상징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서술적 이미지로 갔고 산문이 될 염려가 있기에 리듬을 중요시한 시적 전략을 세웠다.           4, 상징계에서 상상계로의 퇴행       의미와 관념(상징계)에서 주문 꿈(상상계)로의 퇴행을 한 김춘수의 시적 변용은 무엇을 의미할까. 라깡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을 통해 사회적자아를 얻는다고 한다. 상징이란 금기와 법 질서로 표상되는 언어의 세계(의식)이고 상상계란 꿈,욕망을 이루어진 언어이전의 세계(무의식)이다. 언어(현실)에 절망을 느낀 사람은 언어를 극복한 세계(초월. 형이상학)로 간다. 그러나 초월의지가 없는 사람은 유토피아(理想)를 상상계(꿈)에서 찾는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상상계에서 유토피아를 찾는다. 그는 상상의 이미지로 자신만의 제국을 세우려하고 현실(상징계)에서 얻지 못한 만족을 얻는다.  상상계의 의식에 비친 거울속의 자아는 이상회된 자신의 형상이며 자아의 ‘原象’이다. 시인들은 이상화된 세계 즉 내 아름다운 모습이 투영된 세계를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이니 ‘나르시스’의 거울에 갇힌 자이다.   시란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언어)의 세계로 떠오른 것이다. 시는 꿈처럼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언어로 구성된 세계이다. 언어는 개인의 경험이전에 선재(先在)한 문화이며 종족과 집단의 의식과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개인은 태어나서 꿈속에서 살다가 집단의 상징질서(언어)를 받아들여 문화의 지혜와 보호 속에 산다. 언어가 사물과 세계의 상징이지만(인류의 시야가 관계하고 해석한 상징이겠지만) 언어는 자연(실재계)과 분리되어 있다. 언어는 자연(실재)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진실에서 절망한다. 자연(실재)이란 언어로 드러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꿈이며 환상이며 동시에 상징이다. 동물은 언어(꿈과 환상)가 없기에 우울증이나 자살이 없다고 한다. 인간만이 자연(실재)을 언어로 왜곡해서 보기에 언어는 축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하다.   김춘수는 언어의 의미와 관념(상징질서)를 버리고 초월하는 대신 리듬과 주문이 있는 상상계로 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정신에서 이상세계란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바다가 왼 종일   생쥐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 따끔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늑골사이 늑골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번   생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 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시「처용단장」제 1부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중 부분)    「처용단장」을 김춘수의 시의식이 최고로 반영된 작품으로 친다. 그가 주장한 무의미시론이 잘 반영되었는지는 판단을 유보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도 의미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처용단장」이라는 제목부터가 이미 신화적 상징을 차용하고 있다. 신화적 상징의 제목과 본문에서 유년이 본 사물이미지의 간격을 긴 시간으로 벌려놓고 이미 독자에게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김춘수 식이라면 “처용”이라는 상징인물과  “바다” “생쥐” “느릅나무” “거머리” “베꼬니아” “개동백” “눈”은 의미관계가 없는 ‘넌센스’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구조에 ‘무의미’라 없다. 무작위로 떠 있는 하늘의 별을 보고도 마음에 형태를 그리고 “사자자리”와 “황소자리”같은 형상이미지를 붙이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신화가 된 이 정신구조물은 아직도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정말로 ‘무의미’를  노렸다면 제목을 “처용단장”같은 신화이미지를 차용하지 않고 ‘크레인’나 ‘자동차’를 붙였어야 했다. 그래도 독자는 또 의미를 창출한다. 상상력이 좋은 전문독자는 “김춘수의 ‘자동차’시에 나타난 유년의 바다이미지와 기계문명과의 대상관계이론을 통한 시의식 분석”같은 제목의 논문을 쓸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비약해보니 시란 참 재미있는 물건이다. 의미 시와 무의미 시가 자리를 바꾸고 창조와 해석이 뒤섞여서 저마다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시가 꿈이며 환상이기 때문이다. 꿈의 해몽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는가. 김춘수도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소회를 밝힌 대목이 있다.     이미지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피안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즉 사물의 의미를 탐색하는 태도다. 이미지를 순수하게 사용하는 것은 사물을 그 자체로서 보고 즐기는 태도다. 이 두 개의 태도가 나에게 있어서는 석연치가 않다. 혼합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의식한다. 이러한 자의식은 시작에 있어 나를 몹시 괴롭히고 있다. 이러한 자의식이 없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의 시는 비유가 되는 일이 많다. 부분적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이른바 택처와 스트랙처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끝내 휴먼한 것을 떠나지 못한 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이 휴먼한 것을 벗어나고 싶은 이를테면 해방돠고 싶은 원망은 늘 나에게 있다. 말하자면 꿈과 같은 상태-라고 해도 정확한 기술은 못된다-즉, 꿈에서 현실적인 의미를 공제해 버린 그런 상태에 대한 원망이 있다. 시가 완전히 난센스가 되어 버린 그러한 상태-초현실주의 어떤 시에서 그런 상태를 본 일이 있다.  (「김춘수 시론 전집1」에서 인용)     휴먼(인간)의 의식이란 의미와 가치를 사물에 투영해서 자신의 자의식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의식을 말한 것 같다. 인간의 정신과 의식은 뇌 속에 있으면서도 뇌 속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과 의식은 발생학적으로는 인간이 외부환경에 적응해서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졌다. 정신은 개인의 외부에 일어나는 사건과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 감각을 수용하는 동시에 경험과 기억을 환경에 투사한다. 이 과정에서 정신의 ‘지향성’이 발생한다. 지향성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다. 이 때 인간의 마음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물(욕망과 관계가 있다)이 의미로 다가온다. 이 정신의 ‘지향성’은 매우 강력해서 지금 여기의 현실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수, 이데아 , 형이상학)까지 지향한다.   정신의 지향성이 인간의 내면으로 향할 경우 현실에고를 벗어난 다른 정신차원의 자신(Self)를 경험하기도 한다. 김춘수가 추구한 무의미는 현실에고가 지향하는 ‘의미’를 벗어나서 무의식세계의 꿈이나 초현실세계의 이미지가 주는 ‘새로움’이나 ‘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인간에게 즐거움이나 호기심 또는 “원망”을 유발한다면 무의미 일 수가 없다.   무신론인 과학자에게(「만들어진 신」을 쓴 리차드.도킨스가 생각난다)에게 신(神)이란 김춘수가 말하는 넌센스(무의미)이지만 독실한 신자에게는 최고의 의미이다. 그의 종교적 욕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건대 김춘수가 추구한 시세계에 대한 용어인 "무의미“는 용어를 잘못 선택했다. 그의 시론을 읽어보면 시의 언어기능과 형이상학적 관념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무의미 시작(詩作)이라는「처용단장」을 주의 깊게읽어보면 그의 시에 대한 욕망과 열정이 느껴진다. 이토록 시에 대한 집착을 보인 시들이 ‘무의미’ 시라니? 내게는 다른 형태의 의미(초현실세계에 대한 '원망'으로서의 의미)를 추구한 시들로 판단된다.        5. 김춘수의 ‘하나님’과 형이상학     하나님은 언제나 꼭두새벽에   나를 부르신다.   달은 서천을 가고 있고   많은 별들이 아직도   어둠의 가슴을 우비고 있다.   저 쪽에서 하나님은 또 한번   나를 부르신다.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 가까이   가끔 천리향이   홀로 눈뜨고 있는 것을 본다.   (시「잠자는 처용」전문 )     김춘수는 「잠자는 처용」은 이 시와는 직접 관계가 없으며 시적 트릭을 생각하고 붙였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시가 무의미시가 되지는 않는다. 나(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언어의식에 비추어 다시 의미를 부여한다. 나(독자)는 다시 해석한다. “잠자는 처용”은 시인자신의 투사이며 시에서는 “천리향“의 이미지로 들어났구나. "하나님”이라는 형이상항적 실체는 화자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데 화자는 “잠자는 처용”처럼 현실세계에서 갇혀있다는 얘기네. 그의 무의식속의 영혼(Self)은 “천리향(千里香)”처럼 눈을 떠서 하나님의 소명을 보고 있다는 얘기네.   형이상학이나 구원에 대해 그토록 고민을 많이 했으면서도 김춘수가 시에 표현한 ‘하나님’이나 예수의 위치는 다소 명확하지 않다. 시집 『남천』에서 ‘예수를 위한 여섯 편의 소묘’라는 소 제목하에 예수에 관한 시 「마약」「아만드 꽃」「요보라의 쑥」「세 째번 마리아」「가나에서의 혼인」「겟세마네에서」를 선보이고 있다. 김춘수는 기독교나 예수에 경도되었으면서도 현실적로는 교회를 가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원은 제도권의 교회나 종교 이데올로기에 있지 않다고 본 것 같다. 그의 수필을 보면 말과 행동을 같이 한 예수의 양심과 십자가에 박혀서도 고통을 인내한 초인적인 모습이 김춘수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성서의 기록에는 자기의 육체에 박히는 못의 그 아픔 때문에 예수가 의식을 잃었다고는 되어 있지 않다. 그는 까무라치지 않았고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리도록 까지 하느님을 찬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인적인 능력이라고 하겠는데, 이 장면을 상상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비유로 보이기도 하고, 다른 목적을 위한 허구로 보이기도 한다. (시론『왜 나는 시인인가』)       예수의 목에는 「유대의 왕」이라고 쓰인 호패가 차여져 있다. 골고다 언덕의 좁은 꼬부라진 길바닥은 당나귀의 분뇨로 범벅이 돼 있다. 경사진 오르막도 있다. 피와 땀이 온 몸을 짓이기고 흙먼지가 눈을 뜨지 못하게 한다. 짊어진 십자가는 무게가 75kg이나 된다. 힘에 부대껴 쓰러지면 그 때마다 누군가가 침을 뱉고 돌을 던진다. 이윽고 느린 박자로 해가 기운다. 멀리 골란 고원을 저녁 이내가 스쳐간다. 이내는 땅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발이 없으니까.(시「계단을 위한 바리에떼」부분)     예수가 숨이 끊어질 때 천둥은 치지 않고 느티나무 큰 가지도 부러지지 않았다. 골고다 언덕에는 느티나무가 없다, 해는 너무 달아서 흰 빛을 내고 있다. 예루살렘의 하늘에 그날 밤 늦도록 무지개가 서지도 않았다. 다란 갈릴리 호숫가의 뜨거운 햇살이 작은 풀꽃(아만드 꽃이라고 했던가,) 몇 포기 서쪽을 바라고 시들게 했다. 그 움푹 파인 언저리 너무 고요하다. (시「의자를 위한 바리에떼」부분)     인간의 감정은 감정이입(Empathy)의 능력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우리는 고문 받는 자의 아픔을 보고 내 아픔이 아닌데도 같은 종류의 아픔을 느낀다. 상상이니까 강도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의 심정은 개인의 과거경험과 연결되어 동일한 심정을 느끼게 한다. 영화를 보고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같이 공감하는 능력은 인간이 가상세계를 현실같이 느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최근에 거울 신경 세포(mirror neuron) 가 뇌 안에서 발견되어서 과학자의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감정이입의 과학적인 구조와 설명이 가능해 졌다. 김춘수는 신약성경의 스토리가 이성에 반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상징이나 우화로서 진실이기를 바란다. 이런 바람과 감정이입이 위 시편들을 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앙과 종교는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인간의 실존에 필연이면서도 종교만큼 많은 논란을 볼러 오는 주제도 없다. 내 견해로는 종교에서의 구원은 단순히 제도권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믿는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영지주의(Gnosis)는 고대 그리스어로 ‘앎, 깨달음,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의 뜻인데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實在)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의 도움(예수와 같은 신성의 지식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에 의해 물질의 악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인 ‘그노시스’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노시스는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이 모든 물질과 육체에 깃들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구원을 13세기 독일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는 모든 사물 속에서 신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심정은 마음 속에, 그리고 온갖 노력 속에, 그리고 사랑 속에 신을 항상 현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춘수가 신비한 인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구원을 얻었다는 기록과 증거는 없다. 그는 기독교의 상징과 예수의 고난에는 매력을 느끼고 작품을 남겼으나 이는 자신의 육체적 한계상황을 초극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사로서 그렸을 뿐, 구원에 대한 갈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잠자는 처용」에서 든 “천리향(千里香)”의 이미지로 암시되는 정도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적 이미지를 추구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감을 얻고 무의식 중에 그 영감을 시로 옮기기도 한다.  사물=신이라는 범신론적인 깨달음이 아름다운 시로 나타나 기독교적인 좁은 울타리의 해석이 아닌 확장된 신의 이미지가 나타난  시가 다음 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인도의 “브라만”이나 불교의 “공(空)”으로 바꾸어도 이 시는 뜻이 훼손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신비주의 생각을 이 시는 온전히 반영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줄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시「나의 하나님」전문)      시인이란 언어에 대한 고민과 깨달음 앞에 선 자일까? 수도자나 비의를 추구하는 자는 오히려 시적 표현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석가가 일생동안 말한 불법의 설명도 모두 은유와 알레고리 상징을 통한 시적 비유였다. 예수가 ‘하늘나라’를 설명하는 방법도 모두 비유였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의 구체적인 은유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을 입체적으로 향상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도 ‘하나님’이라는 일자(一者)를 새로운 비유로 독자에게 제시해서 지금까지 없던 시적세계를 만들어 냈지 않은가.         6.새로운 문화환경과 미래시      시란 고대에 노래였다 그런데 지금은 노래는 사라지고 회화적 이미지를 위주로 하는 그림이 되었다. 회화는 이미지와 비유하자면 색채와 빛깔의 음악으로 이루어진다. 시도 음악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음악성이 높을수록 시의 본질이나 고대원형에 더 가깝다. 사람의 뇌는 좌반구가 언어를 다루고 우반구가 노래와 음악을 담당한다고 한다. 시란 그러므로 좌.우 뇌를 동시에 사용해서 만들어내는 복잡한 정신활동이다. 김춘수가 관념과 의미를 포기하고자 한 것은 적극적인 해석으로는 ‘시의 음악’에 복귀하고자 하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리스시인들이 수금을 타며 시적영감에 불타서 시를 노래하는 시대가 아니다. 의식은 더욱 복잡해지고 사물에 대한 정보와 해석은 고도의 추상을 요구한다. 추상의 정점에 수학과 시가 서있다. 수학의 방정식은 날로 다차원의 세계인식을 그려내고 있다(예를 들어 세계를 ‘초끈 이론’으로 해석하는 수학공간은 11차원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시가 확장된 세계해석모델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마도 더 복잡한 언어적 은유와 상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정신의 긴장이 싫어서 고대의 리듬이나 음악으로 시를 한정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문화에서는 일종의 퇴행이다. 이를 음표와 화음이 많은 클래식을 해석하기 싫은 청중이 동요나 민요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비약적인 해석일까. 음악은 시에 필요하다. 그러나 음악과 시적상징의 의미가 다차원적으로 융합하는 시가  확장된 세계해석에 필요한(정서상의 단순한 위로나 언어의 기호놀이가 아닌) 시의 미래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 작품에서 의미를 전하는 산문적 요소를 없애고 순수하게 감동을 일으키는 정서적 요소만으로 쓴 시 소위 발레리의 ‘순수시’라는 것도 실험에 그쳤다. 김춘수가 실험한 “무의미”는 보다 큰 ‘의미’의 시에 포함되며 시는 통합예술로 진화하는 중이다. 그의 실험이 시란 무언인가의 반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는 무의미하지는 않다. 나도 이글을 쓰면서 시의 양상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의 형식이 무엇이던 간에 시의 원형 포에지(Poesie)는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문화환경에서 나타날 미래시의 형식과 내용이 나는 궁굼하다.         김춘수 시인 年譜(연보)                                                                ▲1922년 11월 25일 경남 통영 출생 ▲1940년 일본 니혼(日本)대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42년 일왕과 총독정치를 비방해 퇴학 ▲1946∼51년 통영중, 마산중·고 교사 ▲1960∼78년 경북대 문리대 교수 ▲1979∼81년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88년 방송심의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 ▲시집:‘애가’(46) ‘구름과 장미’(48), ‘늪’(50), ‘기(旗)’(51), ‘인인(燐人)’(53), ‘꽃의 소묘’·‘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59), ‘타령조 기타’(69), ‘꽃의 소묘’(77), ‘남천(南天)’(77), ‘비에 젖은 달’(80), ‘김춘수 시전집’(집문당·86), ‘라틴점묘 기타(其他)’(88), ‘처용단장’(91), ‘서서 잠자는 숲’(93), ‘김춘수 시전집’(민음사·94), ‘호(壺)’(96), ‘들림, 도스토예프스키’(97), ‘의자와 계단’(99), ‘거울 속의 천사’(2001), ‘쉰한 편의 비가’(2002), 시론집 및 산문:‘한국 현대시 형태론’(58), ‘시론’(61), ‘시의 표정’(79), 수상집 ‘오지 않는 저녁’(79), ‘시의 이해와 작법’(89), ‘시의 위상’(91), 산문집 ‘여자라고 하는 이름의 바다’(93), 장편소설 ‘꽃과 여우’(97)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58), 자유아세아문학상(59), 문화의달 은관문화훈장(92), 제5회 대산문학상(97), 제12회 인촌상(98),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2004)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전임 主幹)   [출처] 前現 주간들의 詩와 아포리즘【65】김백겸 전임 主幹의 詩와 아포리즘【47】수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자 했던 김춘수 시인【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8년 6월호(2018, June) ㅡ통호 제110호ㅡ|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21    후기 현대와 파편적 글쓰기 /윤호병 댓글:  조회:1139  추천:0  2018-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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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테리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 댓글:  조회:1265  추천:0  2018-11-05
테리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1)   [서론] 1. 문학의 정의 : 객관적인 정의의 불가능성 전제 1) 상상적인 글(imaginative writing) : 구분 모호 2) 언어의 특별한 사용 : "organized violence committed on ordinary speech" ★ 러시아 형식주의자--반신비적 상징주의 거부/문학텍스트 자체의 물질적 실체에 관심/예술을 신비로부터 분리시키고 문학텍스트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 둘 것을 강조/문학은 언어의 특수한 조직/독특한 방식과 장치들 존재/하나의 물질적 사실로서의 문학은 그 기능을 분석하는 것이 가능/작품은 작가의 정신의 표현이 아니다--> 내용 분석은 간과하고 문학형식의 연구에 치중: 내용은 형식의 동인일 뿐. estranging or defamiliarizing effect/규범으로부터의 일탈 언어, 일종의 언어적 폭력/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문학성이란 한 종류의 담론과 다른 종류의 담론의 ‘서로 구별되는 관계들’의 함수이지 영속적으로 주어진 속성은 아니었다. 그들은 문학을 정의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문학성을, 언어의 특별한 사용을 정의하려던 것(13). 이들처럼 본다면 모든 문학은 ‘시’로 간주된다. 3) 비실용적인 담론non-pragmatic discourse으로서의 문학 : 자기지시적인self-referential 언어   --> 결국 문학의 본질이란 없다. “일정한 공통적인 내재성 속성에 의해 판단되는 확실하고 불변적인 가치를 지닌 일군의 작품들이라는 의미의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20) “문학이란 사람들이 글에 자신을 관련시키는 어떤 방식들”(17). --> 문학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 : “글이 문학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훌륭하여야 된다’라는 의미에서보다는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종류이어야 한다”(19). --> “문학의 정전(canon)이나 국민문학의 의문의 여지없는 위대한 전통이라는 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별한 이유로 특수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구성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누가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했고 또 할 것인지에 상관없이 본래적으로 가치있는 문학작품이나 전통이란 없다”(21). --> “모든 문학작품들은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그것들을 읽는 사회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 실제로 한 작품을 읽는 것은 그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기도 하다 --> “우리의 모든 기술적인 진술들은 종종 보이지 않는 가치범주들의 그물조직 속에서 움직인다....지식은 몰가치적이어야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판단이다....우리의 사실 진술들의 속을 채우고 있는 또 그 기저에 있는, 전반적으로 은폐된 가치구조야말로 ‘이데올로기’라는 말 뜻의 일부이다”(24-5).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말하고 믿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권력구조 그리고 권력관계들과 연관되는 방식들을 대략적으로 의미한다....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사회권력의 유지와 재생산에 어떤 종류의 관계를 가지는, 느끼고 평가하고 인식하고 믿는 방식들을 뜻하는 것“(25). --> “순수하게 문학적인 비평적 판단이나 해석이란 없다”(26).   결론--> 문학은 곤충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문학을 구성하는 가치판단들이 역사적으로 가변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가치판단 자체도 사회의 이데올로기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가치판단이란 궁극적으로는 단지 개인적 취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집단들이다른 사회집단들에 대해 힘을 행사하고 또 그 힘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의거하는 전제들을 가리킨다(26).     제 1장 영문학 연구의 발흥   1. 문학은 사회 내에서 존중되는 모든 글(18세기)--> ‘창조적, 상상적 글’이라는 현대적 문학 개념(19세기)   2. 영국 산업자본주의의 공리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적대적인 인간의 창조성 개념을 의미(셸리). 하지만 사물을 물신화하고 인간관계를 시장의 교환관계로 환원하며 예술을 벌이가 안되는 장식으로 도외시 하는 속물적인 공리주의가 중산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낭만주의 문학에 담긴 에너지들은 현실적인 부르주아 정치체제들과는 잠재적으로는 모순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잔혹한 정치적 억압 하에서 낭만주의자들의 상상력에 의한 창조는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이미지라 할 수 있으며, 시적 정신의 직관적 선험적 영역은 ‘사실’에 얽매인 합리주의적 혹은 경험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생한 비판으로 기능. 다시 말해 문학은 하나의 온전한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상상력 그 자체는 하나의 정치적 힘이 된다(30). 하지만 상상력의 선험적 성격은 냉혹한 합리주의에 대한 도전인 반면 동시에 작가에게 역사에 대한 절대적 대안을 제공하여 위안을 제공하기도 한다(“역사로부터의 이탈”). --> 미학의 등장(칸트, 헤겔, 코울리지, 쉴러). 미학의 주된 작업이었던 예술이라는 불변적 객체가 존재한다거나 ‘미’ 혹은 ‘미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독립된 경험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예술이 사회적 삶으로부터 소외되는 한 산물이다(32). 후원자를 잃은 작가는 시적인 것 속에서 그 대체물을 발견하였다. 다시 말해 미학의 등장으로 인해 각 예술작품들의 역사적 차이들이 은폐되게 되었다. 이제 예술은 항상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행위와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의미들로부터 유리되었고 단독적인 물신의 위치에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관련 속에서 18세기 들어 미학이론의 핵심은 반시비적인 상징(symbol)의 문제였는데, 상징은 합리적인 비평적 탐구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으로 비합리주의의 주춧돌이기도 했다.   3. 문학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다. 문학은 사회적 권력의 문제들에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영문학연구가 발전하게 된 단 하나의 이유를 대라면 그것은 ‘종교(이데올로기)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종교를 대신하는 영문학(35쪽 고든의 언급과 아놀드 참고), 대중의 이데올로기 사업의 역할을 맡은 문학. “중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알약은 문학이라는 당의(糖衣)를 입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학과목으로서의 영문학이 처음 제도화된 것은 종합대학들에서가 아니라 공업학교들, 근로자를 위한 대학들, 순회공개강좌 등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영문학은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의 고전이었으며, 사립학교와 명문대학이라는 매력적인 문을 넘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싸구려 일반교양 교육을 제공하는 한 방식이었다(39-40). 사회계급들간의 유대, 더 큰 공감력의 함양, 민족적 긍지의 고취, 도덕적 가치들의 전달 등에 대한 강조. M. Arnold/H. James/F.R. Leavis. 이제 문학은 리비스의 저작에서 나타나듯 현대를 위한 도덕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것이다.   4. “여성들과 학교선생이 된 이류계층과 삼류계층에 속하는 남자들”에게 적합한 과목으로서의 영문학(40). 영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영국[문학]이라기보다는 [영국]문학이었다. 1차세계대전을 전후로 양 대학에서 영문학이 본격학과로 받아들여지는 전조-->일종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1932년 리비스에 의해 Scrutiny지 출범--> 엄격한 비평적 분석의 중요성, 페이지 위의 단어들에 대한 집중, 창조적 에너지를 담고있기에 중요한 문학 강조. 결국 “오늘날 모든 영문학도는 다 리비스파이다.” 영문학을 모든 학과보다 훨씬 우월한 가장 중심적인 교과목으로 간주. 영문학의 전통적 고전작가들 지도그리기도 이들의 몫. 단순한 문학적 가치들은 거부하면서 역사와 사회 전체의 성격에 관한 심층적인 판단들을 연관된 것으로서의 문학을 숙고하면서 문학작품들의 질적 차이 강조. “어떤 작품은 삶에 기여하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도 있다.” 리비스에게 중요한 것은 피폐한 산업사회의 문명의 야만성을 가져오는 기계화된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뎌내는 것. 그런 의미에서보자면 시작부터 기권했다고 볼 수 있다.   5. 엘리트주의적인『검토』. 이들의 질문과 답, 왜 문학을 읽는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러나 괴테를 읽는 수용소장과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살인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층 중산계급 출신으로서 이들 리비스 일파들의 딜레마는 기성의 문학계에 대해서는 급진적이지만 일반 대중들에 대해서는 폐쇄적이 되었다. 이들에게 문학은 어떤 의미로는 그 자체가 바로 유기체적인 사회였다. 문학이 중요했던 이유는 문학이 바로 하나의 온전한 사회 이데올로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영어다움에 대한 리비스의 신념--어떤 종류의 영어는 다른 것들보다 더 영어답다는 신념. 언어는 실제 경험의 물질적인 결들로 체워져 있지 않거나 현실적인 삶의 즙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소외되어 있거나 타락한 것이라는 신념.     6. T. S. Eliot의 등장. 그가 공격하는 것은 중산계급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전체 즉 산업자본주의의 공식적인 지배이데올로기였다. 엘리어트의 해결책은 극우적 독재주의로서 사람들 모두 비인격적(몰개성적) 질서를 위해 자신의 하찮은 인격(개성)과 견해를 희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 이 비인격적인 질서는 전통이다(54). 기독교도가 하느님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듯이 문학작품은 전통 안에 존재함으로써만 타당할 수 있다. 모든 시는 문학(literature)일 수 있지만 몇몇의 시만이 진정한 문학(Literature)이며 그것은 그 작품 안에 전통이 흐르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그는 유럽사회의 위기를 역사에 전적으로 등을 돌리고 대신 신화를 내세움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산업사회에서 언어가 김빠지고 시에 적합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는 그의 견해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닮은 점이 있다. 검토는 막바지에 다다른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태도를 보였다는 것과 대비.   7. 리비스와 실제비평, 꼼꼼한 읽기. 실제비평--순문학적인 잡담을 일축하고 텍스트를 정당하게 해부했던 하나의 방식. 문화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떼낸 시들이나 산문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문학의 위대성과 중심성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 꼼꼼한 읽기 또한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것’에의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문학작품들을 촉발시킨 맥락들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한 것이다(문학작품의 사물화reification). 리비스류의 꼼꼼한 읽기는 미국 신비평과 연결 되는데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가 리차즈(I. A. Richards)이다. 그는 이제 기능을 다해버린 종교의 역할을 시가 대신할 것을 주장. “시는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시는 혼란을 극복할 완벽한 능력이 있는 수단이다.” 정서적 언어이자 유사진술로서의 시 강조.   8. 신비평. 신비평은 검토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현실 속에 세울 수 없는 것을 문학 속에 재창안해놓은 뿌리뽑히고 방어적인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였다. 독자적인 의미망으로서의 시. 작가와 독자로부터 결국 역사로부터 분리된 시. 신비평이 했던 일은 시를 주물(呪物)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신비평은 근본적으로 순전한 비합리주의, 농업운동으로서의 우익적인 ‘피와 토지’의 정치운동, 그리고 종교적 교리와 밀접히 연관된 비합리주의였다. 하지만 신비평가들은 텍스트의 심오한 신비 앞에 겸허하게 엎드린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신비평가들은 가장 튼튼하고 빈틈없는 비평적 해부의 기법들을 개발해 내었다. 신비평이 강단에 잘 받아들여진 이유. 첫째, 편리한 대중적 교육방법. 둘째, 시를 상충하는 태도들의 미묘한 균형으로, 대립하는 충돌들의 사심없는 화해로 보는 그들의 시관은 냉전의 도그마에 의해 방향을 상실한 회의주의적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 시는 정치적 비술이자 현재의 정치적 상태에 복종하게 하는 비법이었다. 자연스럽게도 신비평의 한계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였다. 신비평가들은 거의 배타적으로 시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현대 문학이론에서 시로의 이동은 특별한 중요성을 띤다. 왜냐하면 시는 모든 문학장르 중 역사로부터 차단됨이 가장 뚜렷한 장르, 감수성이 가장 순수하고 사회성이 가장 빈약한 형태로 활약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9. 신비평과 윌리엄 엠슨. 신비평이 텍스트를 합리적 담론과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분리하는 반면, 엠슨은 시를 다른 말로 합리적으로 풀이될 수 있는 일상 언어의 한 종으로서, 우리의 말하고 행동하는 평상의 방식들과 연속되어 있는 발화의 한 유형으로서 다루기를 주장한다. 엠슨에게 문학작품은 폐쇄된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인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단순히 작품 내의 언어의 일관성의 패턴을 추적하기보다는 단어들이 사회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맥락들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한 맥락들은 항상 불확정적이기 쉽다. 엠슨의 애매성은 신비평의 역설, 아이러니와는 달리 결코 최종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의 언어가 멈칫거리고 점점 사라지거나 그 자신을 넘어서서 몸짓하고 어떤 고갈되지 않는 잠재성을 지닌 의미의 맥락을 의미심장하게 시사하는 그런 지점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애매성은 독자들의 활발한 참여를 유도한다. 엠슨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애매성은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언어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들의 여지를 주는 모든 언어적 뉘앙스이다.” 리차즈를 포함한 신비평가들에게 하나의 시어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맥락적contextual이며 시의 내적 언어조직의 함수이다. 엠슨에게 독자는 담론의 모든 사회적 전후 상황들을 의미형성의 암묵적인 전제들을 작품에 불가피하게 적용한다. 엠슨의 시론은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적이고 민주적이며, 평범한 독자에게 있을 법한 공감과 기대에 호소한다. 엠슨은 한 문학텍스트의 의미들은 항상 상당한 정도 혼잡한 것이어서 최종적인 해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논의와 신비평가들의 논의를 대립시켜 놓으면 이후에 살펴 볼 구조주의자들과 탈구조주의자들의 논쟁을 앞서 보고 있는 듯하다.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②, 2000/7/15/   [제 2장 현상학/해석학/수용이론]   1. 현상학Phenomenology   훗설Husserl--대상들은 물자체things in themselves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의해 정립된 혹은 지향된 사물들로 간주될 수 있다. 사유행위와 사유대상들의 내적인 연관성과 상호의존성. 나의 의식은 세계의 수동적인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지향한다. 우리는 외부세계를 우리의 의식의 내용만으로 환원하여야 한다. 의식에 내재하지 않는 것은 엄격하게 배제하여야 한다.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정신 속에 현상하는appearances 모습으로 환원되어 순수 ‘현상’pure phenomena으로 다루어져야 한다(현상학적 환원). 훗설의 관심대상인 순수현상이란 일관성없는 개별현상들이 아니라 보편적인 본질들의 체계이다. 현상학은 상상 속에서 각 사물들에 변화를 주어 마침내 그 사물들에 있는 불변적인 속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질투심이나 붉은색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보편적 유형 즉 질투심이나 붉음 그 자체이다. 본질적이고 불변적인 것에 대한 파악이나 인식으로서의 현상학. 현상학은 ‘사물들 자체에로의 복귀’에서 알 수 있듯이 구체적인 것, 견고한 토대에로의 복귀였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을 포착함으로써 진정 신빙성있는 지식을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 지식의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애초의 조건들에 대한 질문으로서의 현상학. 현상학은 의식 자체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를 통해 현상들 자체를 드러내고자 했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추상태와 순수한 가능성들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한 현상학은 순수지각에 주어진 것이 바로 사물들의 본질이라고 주장. 리비스와 훗설의 공통점--사물들 자체에로의 복귀, 구체적인 삶에 뿌리내리지 않은 이론들의 추방. 비합리적인 의존. 구체적인 현상을 파악하는 행위 가운데 직관된 것은 보편적인 어떤 것 즉 훗설에게는 ‘형상eidos’ 리비스에게는 삶이었다. 직관에 의존하는 이 이론들은 필연적으로 권위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현상학은 한편으로는 인간주체의 중심성을 확보하였다. 세계는 내가 정립하거나 지향하는 어떤 것이다. 세계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의식의 상관물로서 파악되며 이때 나의 의식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transcendental 것이다. 19세기 과학의 실증주의적 경향에 의해 침해된 인간주체는 현상학을 통해 정통의 왕좌애 복귀하고 주체는 모든 의미의 원천이자 기원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고전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해묵은 꿈의 복원이며 일신이다. 왜냐하면 그 이데올로기는 인간으로부터 흘러나온 역사적 사회적 상황들에 인간이 선행한다는 믿음을 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인간이 애초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는 진지한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세계의 중심에 다시 인간을 세우는 가운데 심각한 역사적 문제에 허구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학적 비평--현상학의 영향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제네바 비평학파였다. 훗설이 실제대상을 괄호안에 넣었듯이 현상학적 비평에서 문학작품의 실제적인 역사적 맥락, 작가, 작품의 생산조건들, 독자들은 무시된다. 텍스트 외부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받지 않는 전적으로 내재적인 독서immanent reading를 목표로 한다. 텍스트 자체는 작가의 순수한 의식의 구현체로 환원되며 그 모든 문체적, 어의적 측면들은 작가의 정신이라는 본질에 의해 통합되는 복잡한 총체의 유기적 부분들로 파악된다. 작품 자체에 나타나는 의식의 양상들만을 참고하여 이 정신을 파악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관심의 대상은 반복되는 주제나 이미지의 패턴들에서 발견되는 정신의 심층구조들이다. 한 작가가 시간이나 공간을 경험하는 방시그 자아와 타자의 관계 혹은 물질적 대상들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 특유하게 촛점을 맞추려는 현상학. 이를 위해 완벽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추구하는 현상학적 비평은 전적으로 무비판적이고 비평가적인 비평방식이다. 현상학적 비평에서 비평은 구축행위, 즉 필연적으로 비평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선입견들이 개입되는 능동적인 작품해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비평은 텍스트의 수동적인 수용, 그 정신적 본질들을 순수하게 옮겨 적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론적/본질주의적/반역사적/형식주의적/유기체론적인 유형의 비평이며 현대의 문학이론 전체가 가진 맹점들과 편견들과 한계들의 일종의 순수한 증류물. 현대언어이론--의미는 언어에 의해 생산된다--에 대조되는 훗설의 언어관의 맹점(79). 2. 해석학Hermeneutics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미는 역사적이라는 인식을 통해 스승 훗설과 결별한 하이데거. 선험적 주체가 아니라 인간실존의 주어짐giveness 혹은 현존재Dasein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 하이데거는 실존(즉 인간적 존재방식)은 항상 세계내적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가 타인들과 관계맞고 이 관계들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만 우리는 인간주체들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세계는 합리적으로 분석되기 위하여 외부에 있는 객체, 관조적인 주체와 마주 대하고 있는 객체가 아니다. 세계는 우리가 그 밖으로 나와서 마주대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실존은 세계와의 대화이며, 말하는 것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욱더 경건한 행위이다. 인간의 지식은 항상 하이데거가 선이해pre-understanding라고 부른 것에서 출발하여 그 안에서 움직인다. 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투기projecting myself함으로써만,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인식하고 깨달음으로써만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결코 나 자신과 순수하게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항상 나 자신에 앞서 미리 미래로 투사되는 존재이다. 이것은 곧 인간존재란 역사 혹은 시간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인간실존은 시간에 의해서만 아니라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바로 인간 삶이 움직이는 차원이며 세계를 맨처음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언어가 있는 곳에서만 고유하게 인간적인 의미의 세계가 존재한다. 언어는 인간들이 참여하게 되는 그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가지고 있으며 이 언어의 실존에 참여함으로써만 인간들은 인간으로 된다. 언어는 현실이 자신을 드러내고 우리의 성찰에 자신을 맡기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진리를 담고 있다. 모든 개별적인 개인들에 선행하는 준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언어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사고는 구조주의의 이론들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 핵심적인 것은 개별 주체가 아니라 존재Being 그 자체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주체와 객체 양자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그를 존재의 신비앞에 지나치게 무릎꿇게 만든 단초를 제공한다. 농부의 찬미/자연발생적인 선이해의 격상/이성의 격하/현명한 수동성의 찬미/개성없는 집단의 삶보다 우월한 진정한 죽음에로의 실존에 대한 믿음.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이론적인 지식이 항상 실천적인 사회적 관심들의 맥락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세계를 관조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적인 사물들 즉 어떤 실천적 계획에 필요한 요소들이 상호연관된 체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결국 앎은 실천행위에 깊게 연관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실천성의 또다른 측면은 관조적인 신비주의이다. 그는 예술이 낯설게 하기라는 믿음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다(해머가 깨졌을 때 그 낯섬에서 해머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처럼). 후기의 그는 현상학적 진리가 현현할 수 있는 것은 예술에서만이다. 그에게 문학해석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문학해석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해야하는 어떤 것이다. 수동적으로 텍스트에 스스로를 개방하고 신비하게 소진함이 없는 텍스트의 존재에 우리를 맡기고 그 존재로부터 심문받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술 앞에서 굴종적인 성격을 지녀야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산업사회의 거만한 이성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노예적인 자기부정인 셈이다. 하이데거는 구체적인 역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역사는 내면적, 본래적 혹은 실존적 역사이며 이것은 사실 보다 평범하고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에 대한 대체물로 작용한다. 루카치가 언급한 것처럼 하이데거의 역사성은 실은 반역사성과 구별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훗설의 영원한 진실들과 서양의 형이상학 전통을 역사화함으로써 뒤집어보려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다른 종류의 형이상학--현존재 자체--를 내세운 것뿐이다. 그의 저작은 역사와 만나는 만큼이나 역사로부터 도피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존재의 해석학hermeneutic of Being이라 부르는데 훗설의 현상학과 구별하기 위해 ‘해석학적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해석학은 원래 성서해석의 영역에 국한했지만 19세기 그 영역이 확대되면서 텍스트해석 전체를 부르는 용어가 되었다. 슐라이허마허, 딜타이, 가다머. 허쉬E.D. Hirsch--미국의 해석학자 허쉬는 훗설의 지향적 객체로서의 의미론을 받아들여 일종의 이상적 객체(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동일한 의미로 남아있다는 점에서)로 의미를 본다. 단지 하나의 텍스트 해석만이 가능한 것만은 아니지만 “모든 해석들은 작가의 의미가 허용하는 전형적인 가망성과 가능성들의 체계 내에서 움직여야 한다.” 의미meanings와 의의significances의 구분. 작가는 의미를 부여하고 독자는 의의를 부여한다. 문학의 의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이며 역사적 변화를 전혀 겪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사고. 의미란 작가가 의지적으로 꾀하는 어떤 것이며 일단 발생한 이후에 특정한 일단의 물질적 기호들 속에서 영원히 고정되는 유령과도 같은 무언어적인 정신행위. 비평가는 허쉬 자신이 본래적 장르intrinsic genre of a text라고 부른 것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글을 쓸 당시의 작가의 의미들을 지배했었을 일반적인 관습과 시각들을 의미한다. 허쉬에게 한 작가의 의미는 그의 소유물이며 독자에 의해 훔쳐지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사회화되어서는 안된다. 즉 여러 독자들의 공공재산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의미는 오로지 작가에게만 속하는 것이며 작가는 죽은 지 오래되어도 의미의 처분에 독점적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의미란 허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적이지도 확정적이지도 않다. 의미는 언어의 산물이며 언어는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는 어떤 유동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순수한 의도, 순수한 의미가 무엇인자를 알기는 쉽지 않다. 허쉬가 그 괴물들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미를 언어로부터 떼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결국 훗설처럼 무시간적이고 숭고하게 사심없는 형태의 지식을 제시한 것이다. 의미가 항상 역사적이라는 하이데거, 가다머 등의 주장에 대한 반대. 언어의 의미는 사회적인 것이다. 언어는 나에게 속하기 이전에 내가 속한 사회에 속한다.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 텍스트는 다른 사회적 맥락으로 이동함에 따라 다른 의미들로 이해될 수 있다. 가다머에게 이러한 유동성은 바로 작품 자체의 성격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모든 해석은 상황에 따르며 특정한 문화의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기준에 의하여 형성되고 제약되며 문학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다머가 보기에 과거의 작품의 모든 해석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 속에 존재한다. 모든 이해는 생산적이다. 그것은 항상 전과 다른 방식의 이해이며 텍스트에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고 텍스트를 전과 다르게 만든다. 현재는 과거를 통해서만 이해 가능하고 과거와 살아있는 연속체를 이룬다. 이해는 역사적 의미들과 전제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평이 그 작품이 놓여있는 지평과 융합될 때 일어난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낯선, 예술품의 세계에 들어선다. 가다머는 모든 역사의 기저에 흐르는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전통의 본질을 인정하고 우리의 암묵적인 선입견 혹은 선이해가 문학작품을 수용하는 데 해가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견은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이다. 현대의 ‘편견에 대한 편견’을 낳은 것은 완벽하게 공평무사한 지식을 꿈꾼 계몽주의였다. 우리가 가다머에게 물어볼 것은 누구의 전통인가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의 단일한 ‘주류’ 전통만이 존재하며 모든 정당한 작품들은 그 전통에 참여하고 있고 역사는 결정적인 균열, 갈등, 모순이 없는 끊임없는 연속체를 형성하며 우리(도대체 어떤 우리인가?)가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편견들은 소중히 여겨져야한다는 거대한 전제들 위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역사는 투쟁과 불연속과 배태의 장소가 아니라 연속되는 사슬, 항구적으로 흐르는 강이거나 혹은 의기투합한 자들의 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은 이성으로 논증될 수 없는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이 가다머의 주장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해석학은 이데올로기의 문제, 즉 인간역사의 끝없는 대화가 때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독백이라는 사실, 혹은 그것이 실제 대화라고는 하더라도 그 당사자들(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위치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타협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해석학은 담론행위가 자애롭지 않은 권력과 항상 결부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3. 수용이론Reception theory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 등의 콘스탄츠 수용이론학파--해석학의 발전 형태. 해석학이 과거의 작품들에 전념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수용이론은 문학에서 독자의 역할을 살피고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이론이다. 수용이론에 따르면 독자는 종이 위에 찍혀진 일련의 조직된 검은 표들에 불과한 문학작품을 구체화한다. 독자들의 활발한 참여가 없다면 문학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수용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작품들은 간극들gaps로 이루어져 있다. 독서의 과정은 항상 역동적이며 시간을 따라 펼쳐지는 복잡한 운동이다. 문학작품 자체는 일단의 도식들, 즉 독자가 현실화하여야 하는 일반적 지시들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저는 독서를 위해서는 텍스트의 역호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저가 가장 효과적인 문학작품으로 상정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습관적으로 취하게 되는 약호들과 예상들을 새로이 비판적으로 자각할 수밖에 없도록 해주는 작품이다. 우리의 인식방식을 침해하여 새로운 약호들을 가르쳐주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와 유사. 독서의 핵심은 우리를 더욱 심화된 자기의식에 이끌어주는 것이며 우리가 독서를 하면서 읽는 것은 결구 우리 자신들인 셈이다. 이러한 이저의 수용이론은 자유주의 휴머니즘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관여하는 독자는 문학작품의 변형시키는 힘에 덜 개방적이므로 부적합한 독자가 되기 쉽다고 주장한다. 문학이 가장 깊게 영향을 미치는 독자는 이미 올바른 종류의 능력과 반응을 갖추고 있으며 특정 비평기법들을 운용하고 특정 문학관습들을 알아보는 데 익숙한 독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독자들은 영향받을 필요가 가장 적은 독자라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많은 수용이론의 외면적인 개방성의 이면에는 단일한 자아와 폐쇄된 텍스트라는 교리들이 도사리고 있다. 로만 인가르덴은 각 문학작품들은 우기적 총체를 형성하며 독자가 작품의 불확정항드을 채우는 목적은 일한 조화를 완성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독자의 활동 제한. 이저는 이보다는 자유로운 독자를 상정하지만 그 또한 한계를 두는데, 그것은 독자는 텍스트를 내적으로 일관성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저가 생각하는 독서의 모델은 기본적을 기능주의적인 것으로서 부분들은 전체에 정합적으로 맞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형태심리학Gestalt(경험의 통일적 전체) psychology의 영향이 작용한 것이다. 이저는 텍스트의 불확정항들을 폐기하고 하나의 불변적인 의미로 대치하는 행위로 우리를 몰아간다. 독자는 텍스트를 해석할 뿐 아니라 텍스트와 싸우는데 텍스트의 무질서하고 다의적인 잠재성을 특정한 종류의 질서로 환원시키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이것은 결코 다원주의자의 발상이라 할 수 없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의 대조--독자는 단지 끝없는 기호들의 미끄러짐을 경험한다. 언어의 풍성함을 즐기는 독자. 독서는 실험실이라기보다는 부인의 내실과 같다. 바르트가 천착하는 모더니즘 텍스트는 독서행위가 문제삼는 자아를 종국적으로 회복시키는 가운데 독자를 그 자신에게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트에게는 독자로서의 행복이자 성적 오르가슴인 향락 속에서 독자의 안정된 문화적 정체성을 폭파시키는 것이다. 이저가 언어의 무한한 잠재력을 억제하는 엄격하도록 규범적인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했다면 바르트는 그것을 뒷면에 다름없는 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며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경험을 보여준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그는 가다머처럼 문학작품을 그 역사적 지평, 그 작품이 생산된 배경인 문화적 의미들의 맥락 속으로 두려고 하며 그런 이 지평과 역사적으로 위치지워진 독자들의 변화하는 지평간의 변천하는 관계를 참구한다. 이러한 작업의 목표는 새로운 종류의 문학사, 즉 작품이 수용되는 역사적 순간들에 의해 정의되고 해석되는 문학에 중심을 둔 문학사를 쓰고자 한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그에 따르면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내에 이저가 암시된 독자라 부른 것을 은연중에 담고 있으며 그 모든 흔적들 속에서 작품이 예상하는 수용자의 유형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에서도 소비가 생산과정 자체의 일부가 된다. 사르트르의 연구는 작가는 누굴 위해 쓰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단지 실존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제기하는 것이다. 내가 혼잣말을 할 때조차도 나의 발화는 그 발화 자체가 어떤 잠재적 청자를 예상하지 않는다면 결코 발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 스텐리 피쉬Stanley Fish--연구를 함에 있어서 어떤 객관적인 문학작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제 진정한 작가는 독자인 셈이다. 피쉬에게 독서는 텍스트가 의미하는 것을 발견하는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가 독자에게 행하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비평의 주목대상은 작품 자체 속에 발견되는 어떤 객관적인 구조가 아니라 독자의 경험의 구조라는 것이다. 무질서한 해석의 갈래를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해석의 전략들’에 호소한다. 하지만 그는 작품 자체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미가 텍스트의 언어 속에 내재하여 독자의 해석에 의해 끄집어내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생각은 객관주의적 환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이저가 이런 환상에 사로잡혔다고 주장한다(피쉬와 이저 사이의 논쟁). 하나의 문학텍스트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의미하게끔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것은 강의실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환상이기도 하다. 텍스트들은 그 어떤 실천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 실천들과 복잡한 관계르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는 우리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모양짓는 사회적 힘들의 장이며 따라서 문학작품을 외부로 탈출하려는 무한한 가능성들의 활동무대로 보는 것은 상아탑적 망상일 뿐이다.   --허쉬가 보여준 작가의 의도에 대한 강조, 피쉬가 내세운 독자의 능력에 대한 천착 등과 더불어 문학제도들 내에는 어떤 독서방법들이 일반적으로 허용되는가를 결정하는 학술제도가 존재한다. 해석 자체의 범주들, 관습들 그리고 전략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들. 따라서 문학제도와 단절한다는 것은 단순히 베케트에 대한 다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문학비평,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사회가치들이 정의되는 방식들과의 단절을 뜻한다.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③, 2000/8/5/   [제 3장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기호학Semiotics]   1. Northrop Frye의 Anatomy of Criticism   노스롭 프라이의 인식--문학에 작용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법칙들의 존재와 그 법칙들의 공식화. 이야기범주들-->희극적(봄), 낭만적(여름), 비극적(가을), 반어적(겨울). 문학 양식의 구분-->신화(주인공의 유적 우월), 로망스(급의 우월), 비극과 서사시(상위higher 모방 양식상에서 급에서는 우월하지만 환경보다 우월하지는 않음), 희극과 사실주의(하위모방, 풍자와 반어에서 열등). 가치판단의 배제, 문학사 이외의 역사 추방을 주장하는 프라이 이론의 강점은 신비평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텍스트들의 폐쇄된 생태학적 순환으로 봄으로써 문학을 역사에 종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신비평과는 달리 자체의 구조들을 모두 지닌 대체 역사를 문학에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초역사적인 문학의 양식과 신화들의 체계는 그 자체로 폐쇄적이다--> 신비평보다 더한 형식주의. 프라이는 문학이 외부로부터는 완전히 절연된 자율적인 언어구조이자 삶과 현실을 언어적 관계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는 내면을 향한 밀봉된 영역이라고 본다. 프라이에 따르면 문학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온 일종의 집단적인 유토피아 꿈꾸기이자 근원적인 인간 욕망들에 대한 표현이다. 따라서 문학을 개별적인 작가들의 자기 표현이 아니다. 작가들은 단지 문학이라는 보편적인 체계의 기능들에 불과하다. 프라이가 유토피아적 근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역사 자체에 대한 혐오때문이다. 문학에서만이 우리는 지시적 언어의 천박한 피상성을 떨치고 영혼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다. 프라이에게 실제 역사는 굴레요 결정론이며 문학은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처럼 보인다. 프라이의 인식이 지닌 강점은 극단적인 미학주의를 효율적으로 분류하는 과학성에 교묘하게 결합시켰고 문학을 현대사회에 대한 가상의 대안으로 하는 반면에 바로 그 현대사회의 용어로 문학비평의 신분을 고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학을 종교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자유롭고 계급없는 문명사회를 희망하는 프라이는 아놀드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전통 안에 있다. 프라이의 저작은 일정부분 구조주의적이다.   2. 구조주의Structuralism   구조주의의 방법적 원칙들--“모든 것을 언어학의 용어로 다시 한번 생각하려는 시도”(프레드릭 제임슨). 구조주의는 구조들, 특히 그것들의 활동이 보여주는 일반법칙들을 탐구하며, 어떤 체계의 개별 단위들이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을 지닌다(120쪽의 예). 러시아 형식주의처럼 이야기의 실제 내용은 괄호로 묶고 전적으로 형식에만 집중. 구조주의 방법을 더 살펴보면, 첫째, 이야기의 문학적 위대성 여부는 구조주의에 문제 되지 않는다--> 대상의 문화적 가치에 무관심 페르디낭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 영향--기호들의 체계로서의 언어/ 공시적synchronical 연구/ signifier-signified의 자의적 관계/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관계 사이의 자의성/ 각 기호는 체계 내의 다른 기호와의 구별을 통해서만 유의미/ “언어체계에 있어서는 구별만이 존재한다.”/ Parole(개별발화)보다는 langue(사람들의 대화를 가능케 한 기호의 객관적 구조)에 관심/ 지시대상들은 일단 괄안에 묶어둬야 한다고 생각.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러시아 형식주의자. 프라하 언어학파의 중심인물. 러시아 형식주의와 현대 구조주의의 연관 마련. 그는 시적인 것the poectic은 언어가 자기자신과 자의식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라 생각. 따라서 언어의 시적 기능은 기호들의 감각성을 증진시키고 기호를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적 특질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에서 기호는 그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평상적인 관계가 파괴되며 기호는 그 자체로 가치대상으로서 독립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야콥슨의 의사소통의 6요소, 은유와 환유의 구분 등의 이론-> 124-5쪽 참고) 시적기능은 선택의 축으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시킨다.(The poectic function projects the principle of equivalence from the axis of selection to the axis of combination.) 야콥슨을 중심으로 한 프라하 언어학파는 시작품들은 그 안에서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들이 일련의 복합적 관계에 의해 통제되는 기능적 구조로 파악. 그러므로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지 외부현실의 반영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라는 형식주의자들의 개념에 의해서 문학작품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라하 학파의 활동을 통해 구조주의라는 용어는 기호학이라는 용어와 대체로 동일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연구방법으로서의 구조주의와 특정한 연구분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기호학.   퍼스C. S. Peirce의 기호 분류--1) 상형적(the iconic) 기호-> 그 지시대상과 유사성을 지닌 기호(예. 인물사진). 2) 연상적(the indexical) 기호-> 그 대상을 연상시키는 기호(연기와 불, 발자국과 동물). 3) 상징적(the synbolic) 기호-> 지시대상과 자의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연결된 기호.   유리 로뜨만Yury Lotman--시적 텍스트란 의미가 문맥에 따라서만 성립하며 유사성과 대립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양한 체계로 상정. 텍스트 내의 차이와 유사성은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인식 가능. 시적 텍스트는 다른 어떤 담화보다도 많은 정보를 담고있는, 의미가 포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정보을 담지 못한 것은 열등한 것, 왜냐하면 정보가 곧 미이기 때문이다. 로뜨만에게 시적 텍스트란 ‘체계들의 체계’이자 관계들의 관계이다. 시적 텍스트는 여러개의 체계들을 함께 압축하고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담론형식이다. 하지만 그는 시나 문학이 내재적인 언어적 특질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텍스트는 그 텍스트가 관계맺고 있는 더 폭넓은 의미체계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규정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의 기대범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좀도 그는 인정했다. 결국 기호학은 구조언어학에 의해 변형된 문학비평이고 대부분의 전통비평보다 형식과 언어의 풍부함에 대해 더 민감한 비평인 것이다.   구조주의의 영향을 통해 설화학narratology의 탄생--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의 신화연구. 그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이질적인 산화들의 배후에는 환원가능한 일정한 보편적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는 이것이 토템신앙의 체계나 가족제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구조주의가 낳은 한 결과는 개별 주체에서 중심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후 설화학에서는 프롭Vladimir Propp의 신화분석과 그레마스Greimas의 actant 개념과 사각모형도, 제라드 쥬네Gerard Genette의 분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행해진다.   구조주의의 영향--문학에 대한 탈신비화. 문학작품은 다른 언어적 산물들과 마찬가지의 언어적 구조물에 불가하며 그 구조는 다른 과학적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분류, 분석가능하다고 인식. 의미는 사적 경험도 아니고 신의 암시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유된 의미작용체계의 산물일 뿐이다. 개인에 선행하는 언어는 개인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언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확산. 결국 내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함수이며 언어에는 불변의 것이란 없으며 이제 더이상 현실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 언어가 반영할 뿐인 사물들의 고정된 질서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실은 언어에 의해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구조주의는 개인을 무시하고 문학의 신비에 임상학적 접근을 행하고 또 상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존문학계의 분노를 샀다. 구조주의는 현실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서로 불연속적이라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믿음에 대한 현대의 상속자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무자비할 정도로 비역사적이다.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괄호 안에 묶는다.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더 잘 조명하기 위하여 물질세계를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전통비평은 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이상은 아니라고 본 반면, 구조주의는 작품을 보편적 정신을 향하여 난 창문으로 만들었다. 텍스트 자체의 물질성, 그 세부적인 언어 과정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의 모든 표면 양상들은 본질, 즉 작품의 모든 면을 채우고 있는 하나의 중심 의미로 환원가능하며 이 본질도 작가의 정신이나 성령이 아니고 심층구조라는 것이다. 결국 전통비평이 정신적인 엘리트집단을 이루었다면 구조주의자들은 평범한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비적 지식으로 무장된 과학적 엘리트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현실 대상을 괄호 묶는 순간 구조주의는 인간 주체마저도 괄호쳐버린 것이다. 구조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운동이다. 작품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도 개별주체의 표현도 아니다. 이 양자는 모두 배제되며 남는 것은 규칙들의 체계뿐이다. 이제 새로운 주체는 체계 자체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개인의 모든 속성인 자율성, 자기교정능력,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를 반휴머니스트라하는 것의 의미는 구조주의작들이 어린아이들의 사탕을 빼앗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개인의 경험 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신화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구조주의의 난점들--소쉬르는 빠롤을 사회적 가치와 의도의 영역 안에서 서로 다른 화자와 청자들을 묶어주는 필연적으로 사회적이고 대화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야말로 개별적인 것으로 보았다. 소쉬르는 언어에서 사회성이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 즉 구체적인 사회적 개인이 실제 말하고 쓰고 듣고 읽는 언어적 생산이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성을 박탈하고 있다. 또한 소쉬르의 언어관은 고전 부르주아 모델과 마찬가지로 개별화자와 언어체계 전체 사이에 아무런 중간항이나 매개항을 상정하지 않고 있다. 한 인간의 복합성, 중층결정성도 간과한다. 에밀 방브니스트가 언급하듯이 구조주의로부터의 전환은 부분적으로 언어에서 담론discourse으로의 변환이다. 주체없는 기호들의 사슬인 언어는 객관적으로 바라본 말이나 글이다. 담론은 발화로서 파악된 언어를 뜻하며 말하고 쓰는 주체를 포함하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독자난 청자를 포괄하는 것이다.   소쉬르 언어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평가들 중 하나인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랑그에서 빠롤로 관심의 전환. 그는 언어는 본래 대화적인dialogic 것으로 간주.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조건 속에서 변화, 수정하는 능동적인 언어구성요소로 파악되는 언어. 바흐찐에게 기호는 주어진 구조 속의 중립적 요소가 아니라 투쟁과 모순의 중심점. 언어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이자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매체이다. 왜냐하면 기호없이는 아무런 가치나 사유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의 상대적 자율성, 언어가 사회적 이해관계의 반영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존중하지만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언어란 없으며 이 사회관계는 다시 더 큰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체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단어들은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것이다. 단어들은 항상 특정한 인간 주체가 다른 인간 주체에게 하는 말이며, 이 실제적 맥락이 그 의미를 만들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흐찐의 언어이론은 유물론적 언어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인간의식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능동적, 물질적, 기호적 상호교류 하는 과정이지 이 관계들로부터 절연된 내적 영역만은 아닌 것이다. 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는 표현도 반영도 추상적 체계도 아니고 사회적 갈등과 대화를 통해서 기호라는 물질적 존재가 의미로 변화되는 물질적 생산수단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저한 반구조주의적 시각 -->오스틴J. L. Austen의 언어행위이론--모든 언어는 수행적performative 언어이다.   구조주의는 휴머니즘의 오류를 모면하기는 했어도 그 결과 인간 주체를 완전히 사상하는 덫에 결려들고 말았다. 구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독자는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약호들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독자는 국적, 계급, 성, 인종적 특성 등 모든 문화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 존재, 비범한 독자(super-reader)인 것이다. 구조주의는 종교를 대체하려는 문학이론이 그 자리에 과학을 옮겨놓은 것이다. 하지만 가장 엄격하게 객관적인 분석에서도 해석의 요소 주관성의 요소를 뿌리뽑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구조주의에서 상정하는 이상적인 독자란 정채적인 개념이다. 그 개념은 능력에 대한 모든 판단이 문화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모든 독서는 어떤 능력이 부적정한 것인가를 가려내는 문학외적인 전제들이 작용을 포함한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to be continued.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④, 2000/8/19/   [제 4장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1. 데리다Jacques Derrida‘s 해체주의(Deconstruction)   --씨니피앙과 대상의 분리(구조주의)에서 씨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탈구조주의)로 : 의미는 기호안에 직접 존재하지 않는다. 한 기호의 의미는 그 기호가 아닌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기호의 의미는 어느 면에서 보자면 항상 그 기호에 부재한다. 언어의 시간적 과정이라는 특성때문에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순수하거나 완전히 의미있는 기호란 없다. 그렇다면 의미는 자기자신과 전혀 동일하지 않는 것이다. 의미는 분절의 과정의 결과이며 가른 기호들과 구별되는 한에서 자기자신일 수 있는 기호들의 소산이다. --사용되는 문맥이 항상 다르기 때문에 기호는 절대적으로 동일할 수 없고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상호변화하고 순환하며 어떤 요소도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없고 모든 것이 다른 요소들과 뒤얽히면서 동시에 흔적도 남겨지는 끝없이 뻗어가는 거미줄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이제 기호안에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드러나지 못한다. --음성중심적/말씀-이성(logos)중심적 서양철학(선존재하는 궁극적 본질/존재/진리/말씀에 대한 믿음)에 대한 회의. --데리다는 의미의 전위계질서를 건설할 수 있는 약속의 기초, 제1원리나 반박할 수 없는 토대에 의존하는 모든 사상체계를 ‘형이상학적’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항대립관계에 의존하는 제1원리는 언제나 해체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구조주의가 텍스트를 대입쌍으로 나누고 그들의 작용논리를 보여주는 데 만족했다면, 해체주의는 그 대립관계들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전도시키거나 무너뜨리며 다양한 디테일들을 텍스트에서 추방하려고 하는 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해체주의 비평의 전술은 어떻게 텍스트가 자신의 지배적인 논리체계를 혼란시키게 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텍스트구조의 범주나 전통적인 비평적 접근의 범주들 안에 손쉽게 포괄될 수 없는 의미의 부단한명멸, 누출, 확산이 존재하는데, 데리다는 이를 방산(산포/dissemination)이라 한다. 데리다에게 모든 언어는 정확한 의미를 초과하는 잉여의미를 드러내며 항상 그 잉여의미를 가두려는 의미를 넘어서거나 벗어나려한다. --해체주의는 문학적/비문학적이라는 대립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글(Writing)이라는 개념의 출현은 구조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구조는 언제나 하나의 중심, 고정된 원리, 위미의 위계질서와 확고한 토대를 가정하는데 글의 끝없는 구별(differing), 늦춤(deferring)이 의문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이런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탈구조주의의 사유방식은 푸코(Michel Foucault), 라깡(Jacques Lacan),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등의 작업으로 대표된다.   2. 바르트Roland Barthes :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   --언어, 특히 기호가 항상 역사적인고 문화적인 관습의 문제라는 소쉬르의 통찰이 바르트의 일간된 주제. 그는 건강한 기호는 항상 자신의 자의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기호, 자신을 ‘자연적인 것’으로 속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기호이다(중심/권위의 배제). --그는 문학에서 그와 같은 자연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사실주의 이데올로기하고 보았다. 사실주의문학은 언어의 본성이 사회적으로 상대적이고 만들어진 것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재현, 표현, 반영의 이데올로기에서 단어는 사상이나 대상과 본질적으로 올바르고 논박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간주된다. 단어는 대상을 관찰하거나 사고를 표현하는 유일의 적절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어, 곧 언어가 전달하는 것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본질적 삶의 재현 이데올로기’). 이와 같은 재현으로서의 기호관은 기호의 생산적 성격을 부인한다. 우리가 세계의 의미를 표시할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세계를 소유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그 안에 사는 가변적인 의미작용의 구조들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S/Z』: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의 분기점. readerly/writerly texts. Writerly text: 생산자로서의 독자. 주로 모더니즘 텍스트들. 문학은 비평의 탐구대상이라기보다는 비평이 활동할 자유로운 공간. 문학적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학은 이제 간텍스트적이다. “작가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일정한 의미들이 존재하는 완결된 실재--> 하나의 중심, 본질이나 의미로 결코 고정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다원적인 씨니피앙들의 활동으로서의 텍스트. 텍스트란 구조라기보다는 끝없는 구조와의 과정이라고 보고 이 구조화를 행하는 것이 비평이라고 간주. --탈구조주의에서 비평과 창조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없다. 그 둘은 모두 글 자체로 수렴될 뿐이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지식인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대신에 언어 자체를 사회문제의 대안으로 상정하면서 등장(역사에서 언어로의 도피). 고전적인 문학시대에서처럼 특정한 주제에 대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글쓰기가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고 정열인 글쓰기로서의 ‘자동사적 글쓰기’. 바르트 또한 모든 이론, 이데올로기, 한정된 의미, 사회참여를 본래부터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글쓰기가 그들 모두에 대한 대안이 된다. 후기 바르트에게 독서는 인식이 아니라 관능적인 유희가 되었다. --편재하는 권력은 문학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중심이 없다. 그러므로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어 보였다. 역설적으로 어디에서건 사회적, 정치적 삶에 대한 개입이 가능해 지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글턴이 제기하는 것처럼 제3세계의 주체들에게도 그러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따로 마련해야할 듯). --탈구조주의는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들은 완전히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해체하고자 했던 것은 진리, 현실, 의미, 지식 등의 고전적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주된 관심. --미국의 해체주의 : Paul de Man, J. Hillis Miller, Geoffrey Hartman, Harold Bloom 등. 특히 드망은 문학언어가 부단히 자신의 의미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밝히고자 노력. 그가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은유적인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정말로 글자 그대로라고 믿을 수는 없다. --예일학파의 비평가들에게 문학비평은 의미의 환상성, 진리의 불가능함, 모든 담화의 기만적인 간계를 밝히는, 텍스트의 내적공간으로의 불안한 모험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이것은 신비평의 형식주의의 강화된 재등장에 불과한 면도 있다. 신비평에서 시는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시 외부의 현실에 관한 담론인데 바햐, 해체주의자들에게 문학은 언어가 마치 술집에서의 귀찮은 주정꾼처럼 자신의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대상에 대한 지시행위의 몰락이며 의사소통의 공동묘지이다. 신비평은 문학텍스트를 점점 더 이데올로기적이 되어가는 세계안에서 교조적인 믿음을 다행스럽게도 유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해체주의는 사회현실을 억압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미정성의 거미줄로 보았다. 문학은 이제 물질적 역사에 대한 은둔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역사를 식민지화 하고, 기근, 혁명 등 모든 것을 미정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역사를 자신의 모습에 맞추어 재기술한다. --과거의 문학이론들에 있어서 파악하기 힘들고 덧없으며 애매모호한 것은 경험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언어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놀랍게도 담론으로서의 언어를 문제삼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실천 속에 언어가 불가피하게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의미는 존재하고 진리, 현실, 확실성 같은 문제들이 회복가능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영미의 해체주의는 이런 현실의 갈등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폐쇄된 비평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해체주의는 권력게임이며 정통적인 학술경쟁의 전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해체주의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실천이다. 즉, 어떤 특정한 사유체계와 정치구조 및 사회제도의 전체계가 힘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논리를 밝히고 해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의 확정적인 진리, 의미, 동일성, 역사적 연속성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다 넓고 깊은 역사, 즉 언어, 무의식, 사회제도와 실천의 결과로 보고자 한다. --담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한다거나 모든 의미와 동일성이 사라지는 차이와 구별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에 대한 세평은 부당한 면이 있다. 탈구조주의가 단순히 무정부주의나 쾌락주의라고만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제 3장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기호학Semiotics]   1. Northrop Frye의 Anatomy of Criticism   노스롭 프라이의 인식--문학에 작용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법칙들의 존재와 그 법칙들의 공식화. 이야기범주들-->희극적(봄), 낭만적(여름), 비극적(가을), 반어적(겨울). 문학 양식의 구분-->신화(주인공의 유적 우월), 로망스(급의 우월), 비극과 서사시(상위higher 모방 양식상에서 급에서는 우월하지만 환경보다 우월하지는 않음), 희극과 사실주의(하위모방, 풍자와 반어에서 열등). 가치판단의 배제, 문학사 이외의 역사 추방을 주장하는 프라이 이론의 강점은 신비평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텍스트들의 폐쇄된 생태학적 순환으로 봄으로써 문학을 역사에 종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신비평과는 달리 자체의 구조들을 모두 지닌 대체 역사를 문학에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초역사적인 문학의 양식과 신화들의 체계는 그 자체로 폐쇄적이다--> 신비평보다 더한 형식주의. 프라이는 문학이 외부로부터는 완전히 절연된 자율적인 언어구조이자 삶과 현실을 언어적 관계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는 내면을 향한 밀봉된 영역이라고 본다. 프라이에 따르면 문학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온 일종의 집단적인 유토피아 꿈꾸기이자 근원적인 인간 욕망들에 대한 표현이다. 따라서 문학을 개별적인 작가들의 자기 표현이 아니다. 작가들은 단지 문학이라는 보편적인 체계의 기능들에 불과하다. 프라이가 유토피아적 근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역사 자체에 대한 혐오때문이다. 문학에서만이 우리는 지시적 언어의 천박한 피상성을 떨치고 영혼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다. 프라이에게 실제 역사는 굴레요 결정론이며 문학은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처럼 보인다. 프라이의 인식이 지닌 강점은 극단적인 미학주의를 효율적으로 분류하는 과학성에 교묘하게 결합시켰고 문학을 현대사회에 대한 가상의 대안으로 하는 반면에 바로 그 현대사회의 용어로 문학비평의 신분을 고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학을 종교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자유롭고 계급없는 문명사회를 희망하는 프라이는 아놀드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전통 안에 있다. 프라이의 저작은 일정부분 구조주의적이다.   2. 구조주의Structuralism   구조주의의 방법적 원칙들--“모든 것을 언어학의 용어로 다시 한번 생각하려는 시도”(프레드릭 제임슨). 구조주의는 구조들, 특히 그것들의 활동이 보여주는 일반법칙들을 탐구하며, 어떤 체계의 개별 단위들이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을 지닌다(120쪽의 예). 러시아 형식주의처럼 이야기의 실제 내용은 괄호로 묶고 전적으로 형식에만 집중. 구조주의 방법을 더 살펴보면, 첫째, 이야기의 문학적 위대성 여부는 구조주의에 문제 되지 않는다--> 대상의 문화적 가치에 무관심 124-5쪽 참고)시적기능은 선택의 축으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시킨다.(The poectic function projects the principle of equivalence from the axis of selection to the axis of combination.) 야콥슨을 중심으로 한 프라하 언어학파는 시작품들은 그 안에서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들이 일련의 복합적 관계에 의해 통제되는 기능적 구조로 파악. 그러므로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지 외부현실의 반영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라는 형식주의자들의 개념에 의해서 문학작품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라하 학파의 활동을 통해 구조주의라는 용어는 기호학이라는 용어와 대체로 동일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연구방법으로서의 구조주의와 특정한 연구분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기호학.   퍼스C. S. Peirce의 기호 분류--1) 상형적(the iconic) 기호-> 그 지시대상과 유사성을 지닌 기호(예. 인물사진). 2) 연상적(the indexical) 기호-> 그 대상을 연상시키는 기호(연기와 불, 발자국과 동물). 3) 상징적(the synbolic) 기호-> 지시대상과 자의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연결된 기호.   유리 로뜨만Yury Lotman--시적 텍스트란 의미가 문맥에 따라서만 성립하며 유사성과 대립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양한 체계로 상정. 텍스트 내의 차이와 유사성은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인식 가능. 시적 텍스트는 다른 어떤 담화보다도 많은 정보를 담고있는, 의미가 포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정보을 담지 못한 것은 열등한 것, 왜냐하면 정보가 곧 미이기 때문이다. 로뜨만에게 시적 텍스트란 ‘체계들의 체계’이자 관계들의 관계이다. 시적 텍스트는 여러개의 체계들을 함께 압축하고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담론형식이다. 하지만 그는 시나 문학이 내재적인 언어적 특질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텍스트는 그 텍스트가 관계맺고 있는 더 폭넓은 의미체계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규정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의 기대범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좀도 그는 인정했다. 결국 기호학은 구조언어학에 의해 변형된 문학비평이고 대부분의 전통비평보다 형식과 언어의 풍부함에 대해 더 민감한 비평인 것이다.   구조주의의 영향을 통해 설화학narratology의 탄생--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의 신화연구. 그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이질적인 산화들의 배후에는 환원가능한 일정한 보편적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는 이것이 토템신앙의 체계나 가족제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가능하다고 보았다.이와 같은 과정에서 구조주의가 낳은 한 결과는 개별 주체에서 중심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후 설화학에서는 프롭Vladimir Propp의 신화분석과 그레마스Greimas의 actant 개념과 사각모형도, 제라드 쥬네Gerard Genette의 분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행해진다.   구조주의의 영향--문학에 대한 탈신비화. 문학작품은 다른 언어적 산물들과 마찬가지의 언어적 구조물에 불가하며 그 구조는 다른 과학적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분류, 분석가능하다고 인식. 의미는 사적 경험도 아니고 신의 암시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유된 의미작용체계의 산물일 뿐이다. 개인에 선행하는 언어는 개인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언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확산. 결국 내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함수이며 언어에는 불변의 것이란 없으며 이제 더이상 현실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 언어가 반영할 뿐인 사물들의 고정된 질서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실은 언어에 의해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구조주의는 개인을 무시하고 문학의 신비에 임상학적 접근을 행하고 또 상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존문학계의 분노를 샀다. 구조주의는 현실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서로 불연속적이라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믿음에 대한 현대의 상속자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무자비할 정도로 비역사적이다.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괄호 안에 묶는다.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더 잘 조명하기 위하여 물질세계를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전통비평은 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이상은 아니라고 본 반면, 구조주의는 작품을 보편적 정신을 향하여 난 창문으로 만들었다. 텍스트 자체의 물질성, 그 세부적인 언어 과정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의 모든 표면 양상들은 본질, 즉 작품의 모든 면을 채우고 있는 하나의 중심 의미로 환원가능하며 이 본질도 작가의 정신이나 성령이 아니고 심층구조라는 것이다. 결국 전통비평이 정신적인 엘리트집단을 이루었다면 구조주의자들은 평범한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비적 지식으로 무장된 과학적 엘리트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현실 대상을 괄호 묶는 순간 구조주의는 인간 주체마저도 괄호쳐버린 것이다. 구조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운동이다. 작품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도 개별주체의 표현도 아니다. 이 양자는 모두 배제되며 남는 것은 규칙들의 체계뿐이다. 이제 새로운 주체는 체계 자체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개인의 모든 속성인 자율성, 자기교정능력,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를 반휴머니스트라하는 것의 의미는 구조주의작들이 어린아이들의 사탕을 빼앗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개인의 경험 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신화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구조주의의 난점들--소쉬르는 빠롤을 사회적 가치와 의도의 영역 안에서 서로 다른 화자와 청자들을 묶어주는 필연적으로 사회적이고 대화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야말로 개별적인 것으로 보았다. 소쉬르는 언어에서 사회성이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 즉 구체적인 사회적 개인이 실제 말하고 쓰고 듣고 읽는 언어적 생산이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성을 박탈하고 있다. 또한 소쉬르의 언어관은 고전 부르주아 모델과 마찬가지로 개별화자와 언어체계 전체 사이에 아무런 중간항이나 매개항을 상정하지 않고 있다. 한 인간의 복합성, 중층결정성도 간과한다. 에밀 방브니스트가 언급하듯이 구조주의로부터의 전환은 부분적으로 언어에서 담론discourse으로의 변환이다. 주체없는 기호들의 사슬인 언어는 객관적으로 바라본 말이나 글이다. 담론은 발화로서 파악된 언어를 뜻하며 말하고 쓰는 주체를 포함하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독자난 청자를 포괄하는 것이다.   소쉬르 언어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평가들 중 하나인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랑그에서 빠롤로 관심의 전환. 그는 언어는 본래 대화적인dialogic 것으로 간주.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조건 속에서 변화, 수정하는 능동적인 언어구성요소로 파악되는 언어. 바흐찐에게 기호는 주어진 구조 속의 중립적 요소가 아니라 투쟁과 모순의 중심점. 언어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이자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매체이다. 왜냐하면 기호없이는 아무런 가치나 사유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의 상대적 자율성, 언어가 사회적 이해관계의 반영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존중하지만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언어란 없으며 이 사회관계는 다시 더 큰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체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단어들은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것이다. 단어들은 항상 특정한 인간 주체가 다른 인간 주체에게 하는 말이며, 이 실제적 맥락이 그 의미를 만들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흐찐의 언어이론은 유물론적 언어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인간의식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능동적, 물질적, 기호적 상호교류 하는 과정이지 이 관계들로부터 절연된 내적 영역만은 아닌 것이다. 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는 표현도 반영도 추상적 체계도 아니고 사회적 갈등과 대화를 통해서 기호라는 물질적 존재가 의미로 변화되는 물질적 생산수단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저한 반구조주의적 시각 -->오스틴J. L. Austen의 언어행위이론--모든 언어는 수행적performative 언어이다.   구조주의는 휴머니즘의 오류를 모면하기는 했어도 그 결과 인간 주체를 완전히 사상하는 덫에 결려들고 말았다. 구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독자는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약호들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독자는 국적, 계급, 성, 인종적 특성 등 모든 문화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 존재, 비범한 독자(super-reader)인 것이다. 구조주의는 종교를 대체하려는 문학이론이 그 자리에 과학을 옮겨놓은 것이다. 하지만 가장 엄격하게 객관적인 분석에서도 해석의 요소 주관성의 요소를 뿌리뽑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구조주의에서 상정하는 이상적인 독자란 정채적인 개념이다. 그 개념은 능력에 대한 모든 판단이 문화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모든 독서는 어떤 능력이 부적정한 것인가를 가려내는 문학외적인 전제들이 작용을 포함한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to be continued.   [제 4장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1. 데리다Jacques Derrida‘s 해체주의(Deconstruction)   --씨니피앙과 대상의 분리(구조주의)에서 씨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탈구조주의)로 : 의미는 기호안에 직접 존재하지 않는다. 한 기호의 의미는 그 기호가 아닌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기호의 의미는 어느 면에서 보자면 항상 그 기호에 부재한다. 언어의 시간적 과정이라는 특성때문에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순수하거나 완전히 의미있는 기호란 없다. 그렇다면 의미는 자기자신과 전혀 동일하지 않는 것이다. 의미는 분절의 과정의 결과이며 가른 기호들과 구별되는 한에서 자기자신일 수 있는 기호들의 소산이다. --사용되는 문맥이 항상 다르기 때문에 기호는 절대적으로 동일할 수 없고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상호변화하고 순환하며 어떤 요소도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없고 모든 것이 다른 요소들과 뒤얽히면서 동시에 흔적도 남겨지는 끝없이 뻗어가는 거미줄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이제 기호안에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드러나지 못한다. --음성중심적/말씀-이성(logos)중심적 서양철학(선존재하는 궁극적 본질/존재/진리/말씀에 대한 믿음)에 대한 회의. --데리다는 의미의 전위계질서를 건설할 수 있는 약속의 기초, 제1원리나 반박할 수 없는 토대에 의존하는 모든 사상체계를 ‘형이상학적’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항대립관계에 의존하는 제1원리는 언제나 해체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구조주의가 텍스트를 대입쌍으로 나누고 그들의 작용논리를 보여주는 데 만족했다면, 해체주의는 그 대립관계들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전도시키거나 무너뜨리며 다양한 디테일들을 텍스트에서 추방하려고 하는 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해체주의 비평의 전술은 어떻게 텍스트가 자신의 지배적인 논리체계를 혼란시키게 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텍스트구조의 범주나 전통적인 비평적 접근의 범주들 안에 손쉽게 포괄될 수 없는 의미의 부단한명멸, 누출, 확산이 존재하는데, 데리다는 이를 방산(산포/dissemination)이라 한다. 데리다에게 모든 언어는 정확한 의미를 초과하는 잉여의미를 드러내며 항상 그 잉여의미를 가두려는 의미를 넘어서거나 벗어나려한다. --해체주의는 문학적/비문학적이라는 대립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글(Writing)이라는 개념의 출현은 구조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구조는 언제나 하나의 중심, 고정된 원리, 위미의 위계질서와 확고한 토대를 가정하는데 글의 끝없는 구별(differing), 늦춤(deferring)이 의문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이런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탈구조주의의 사유방식은 푸코(Michel Foucault), 라깡(Jacques Lacan),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등의 작업으로 대표된다.   2. 바르트Roland Barthes :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   --언어, 특히 기호가 항상 역사적인고 문화적인 관습의 문제라는 소쉬르의 통찰이 바르트의 일간된 주제. 그는 건강한 기호는 항상 자신의 자의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기호, 자신을 ‘자연적인 것’으로 속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기호이다(중심/권위의 배제). --그는 문학에서 그와 같은 자연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사실주의 이데올로기하고 보았다. 사실주의문학은 언어의 본성이 사회적으로 상대적이고 만들어진 것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재현, 표현, 반영의 이데올로기에서 단어는 사상이나 대상과 본질적으로 올바르고 논박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간주된다. 단어는 대상을 관찰하거나 사고를 표현하는 유일의 적절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어, 곧 언어가 전달하는 것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본질적 삶의 재현 이데올로기’). 이와 같은 재현으로서의 기호관은 기호의 생산적 성격을 부인한다. 우리가 세계의 의미를 표시할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세계를 소유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그 안에 사는 가변적인 의미작용의 구조들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S/Z』: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의 분기점. readerly/writerly texts. Writerly text: 생산자로서의 독자. 주로 모더니즘 텍스트들. 문학은 비평의 탐구대상이라기보다는 비평이 활동할 자유로운 공간. 문학적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학은 이제 간텍스트적이다. “작가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일정한 의미들이 존재하는 완결된 실재--> 하나의 중심, 본질이나 의미로 결코 고정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다원적인 씨니피앙들의 활동으로서의 텍스트. 텍스트란 구조라기보다는 끝없는 구조와의 과정이라고 보고 이 구조화를 행하는 것이 비평이라고 간주. --탈구조주의에서 비평과 창조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없다. 그 둘은 모두 글 자체로 수렴될 뿐이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지식인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대신에 언어 자체를 사회문제의 대안으로 상정하면서 등장(역사에서 언어로의 도피). 고전적인 문학시대에서처럼 특정한 주제에 대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글쓰기가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고 정열인 글쓰기로서의 ‘자동사적 글쓰기’. 바르트 또한 모든 이론, 이데올로기, 한정된 의미, 사회참여를 본래부터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글쓰기가 그들 모두에 대한 대안이 된다. 후기 바르트에게 독서는 인식이 아니라 관능적인 유희가 되었다. --편재하는 권력은 문학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중심이 없다. 그러므로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어 보였다. 역설적으로 어디에서건 사회적, 정치적 삶에 대한 개입이 가능해 지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글턴이 제기하는 것처럼 제3세계의 주체들에게도 그러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따로 마련해야할 듯). --탈구조주의는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들은 완전히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해체하고자 했던 것은 진리, 현실, 의미, 지식 등의 고전적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주된 관심. --미국의 해체주의 : Paul de Man, J. Hillis Miller, Geoffrey Hartman, Harold Bloom 등. 특히 드망은 문학언어가 부단히 자신의 의미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밝히고자 노력. 그가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은유적인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정말로 글자 그대로라고 믿을 수는 없다. --예일학파의 비평가들에게 문학비평은 의미의 환상성, 진리의 불가능함, 모든 담화의 기만적인 간계를 밝히는, 텍스트의 내적공간으로의 불안한 모험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이것은 신비평의 형식주의의 강화된 재등장에 불과한 면도 있다. 신비평에서 시는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시 외부의 현실에 관한 담론인데 바햐, 해체주의자들에게 문학은 언어가 마치 술집에서의 귀찮은 주정꾼처럼 자신의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대상에 대한 지시행위의 몰락이며 의사소통의 공동묘지이다. 신비평은 문학텍스트를 점점 더 이데올로기적이 되어가는 세계안에서 교조적인 믿음을 다행스럽게도 유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해체주의는 사회현실을 억압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미정성의 거미줄로 보았다. 문학은 이제 물질적 역사에 대한 은둔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역사를 식민지화 하고, 기근, 혁명 등 모든 것을 미정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역사를 자신의 모습에 맞추어 재기술한다. --과거의 문학이론들에 있어서 파악하기 힘들고 덧없으며 애매모호한 것은 경험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언어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놀랍게도 담론으로서의 언어를 문제삼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실천 속에 언어가 불가피하게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의미는 존재하고 진리, 현실, 확실성 같은 문제들이 회복가능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영미의 해체주의는 이런 현실의 갈등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폐쇄된 비평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해체주의는 권력게임이며 정통적인 학술경쟁의 전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해체주의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실천이다. 즉, 어떤 특정한 사유체계와 정치구조 및 사회제도의 전체계가 힘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논리를 밝히고 해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의 확정적인 진리, 의미, 동일성, 역사적 연속성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다 넓고 깊은 역사, 즉 언어, 무의식, 사회제도와 실천의 결과로 보고자 한다. --담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한다거나 모든 의미와 동일성이 사라지는 차이와 구별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에 대한 세평은 부당한 면이 있다. 탈구조주의가 단순히 무정부주의나 쾌락주의라고만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제 5장 정신분석학Post-structuralism]   1. 데리다Jacques Derrida‘s 해체주의(Deconstruction)   --“인간사회의 궁극적 동기는 경제적인 것이다.”(프로이트). 프로이트에게 노동의 필요성은 곧 사람들이 쾌락과 만족을 얻으려는 경향을 어떤 경우 억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원리(reality principle)를 통한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의 억압. 그러나 욕망충족의 보류는 신경증을 유발할 수도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신경증을 앓는 동물(neurotic animal). 충족불가능한 욕망을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욕망을 ‘승화시키는’ 것. 프로이트에게 승화는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좀 더 가치있는 사회적 목적으로 전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문명은 승화의 결과물이다. 노동의 필요성과 그 결과에 대한 고찰--마르크스,심리적 생활에 대해 노동이 함축하는 의미 고찰--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저작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만든 요소들을 억압함으로써만 현재의 자신이 된다는 모순 혹은 역설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은 모두 ‘너무 일찍’ 태어난다, 부모의 보호가 없다면 인간의 생존은 불가능할 것(-->부모의 생물학적 차원의 보호 필요). 하지만 인간은 이 과정에서 생물학적 차원의 필수적 행동들이 쾌락을 유발한다는 사실도 동시에 알게 된다. 모유 수유하는 아이의 입이 성감대로 발전. 생물학적 본능으로서의 성욕이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구순기(oral stage, 대상 흡수)-->항문기(anal stage, 능동성과 수동성의 대조, 가학적)-->남근기(phalic stage, 생식기에 집중된 리비도). 이 과정에서 리비도적 욕구의 점진적 조직화가 발생. 유년기의 아이는 리비도적 에너지가 복잡하게 변하는 하나의 장. 자기성애(auto-eroticism). 아이는 자기의 신체에서 성적 기쁨을 얻지만 자기 몸을 완전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자기애(narcissism--자신의 몸, 자아 전체가 리비도의 대상이 되거나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이렇게 무정부적이고 가학적이며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게 쾌락을 추구하는 아이는 쾌락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이 과정을 넘어 아이가 사회에 존속하기 위해 거치게 되는 필연적 과정이 외디푸스 콤플렉스. 아버지의 등장, 거세 위협, 현실원리에 적응, 아버지를 통한 무의식적 보상심리의 작동(아버지는 미래의 내 모습이다!). 결국 남자아이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상징적인 남성의 역할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함으로써 그는 성의 분화를 달성한 주체가 되지만 이 과정에서 억압된 그의 욕망은 무의식의 영역에 갇히게 된다. --여자아이는 거세당했기 때문에 열등하다는 환멸 속에서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유혹하는 계획하지만 이 기획은 성공할 수 없고 결국 마지못해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여성을 성적 역할을 떠맡는다. 그리고는 선망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남근을 아기로 무의식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우리를 현재의 남녀로 구성하는 것이며,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가족에서 사회로,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도록 하는 기제가 된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친 주체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찢긴 분열된 주체이며 무의식은 언제나 돌아와 의식을 괴롭힐 수 있게 된다. 꿈, 과실(parapraxes), 말실수, 잘못된 기억, 서투른 실수, 오독, 농담, 물건 둔 장소의 망각 등을 통해. 욕망은 무의식으로부터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 하며 자아는 욕망을 방어하려고 한다. 이런 내적 갈등의 결과가 바로 신경증이며, 이 신경증의 핵심이 바로 외디푸스 콤플렉스이다. 무의식의 부분적 통제 불가능--> 신경증,정신병, 무의식의 완전한 포로-->정신병. 팔이 마비되는 신경증 환자, 자신의 팔이 코끼리의 팔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정신병 환자. 정신분석학은 이 같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이론이자 치료를 위한 실천. --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의 평가는 보수적이고 비관적. 그는 인간이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그 욕구를 좌절시킬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에 지배를 받는다고 보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인류가 자아가 스스로에게 펼치는 원초적인 자기학대, 즉 죽음에의 욕구에 사로잡힌 채 시들어가는 것으로 파악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 즉 자아가 손상받을 수 없는 생명 이전의 축복스런 상태로의 회귀라는 것이다. 생의 본능(Eros)이나 성적 에너지는 역사를 이루어온 힘이지만 죽음의 본능(Thanatos)이나 죽음에의 욕구와 비극적인 모순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관점이 대부분 인습적이고 권위적이라해도 프로이트는 사유재산제도와 국가를 철폐하거나 적어도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현대사회가 억압성에 있어서 폭군과 같이 되어버렸다고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사회의 많은 성원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서 그들을 반란으로 이끄는 문명은 지속해서 존재할 가망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는 사실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고 프로이트는 단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19세기적 낡은 과학관념이나 남녀차별주의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의학적 실천으로서 정신분석학이 개인을 멋대로 규정하고 그들을 정상성이라는 임의적 정의에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억압적 사회통제의 한 형태라는 점이다. 하지만 정상성에 관한한 정신병 치료 전반에는 적용될 수 있겠으나 프로이트를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는 성적 도착이나 이성애도 실은 자연적이거나 자명한 사실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성으로 환원해버렸다’라는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도 정당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성적인 욕구와 자기보존이라는 자아의 본능과 같은 성적이 아닌 힘이 항상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사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도 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을 발달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계 속에서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그는 인간의 주체적 형성에 관한 유물론적 이론을 마련해 준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이론은 비사회적 모델이 아니다. --여성해방론자들에게 유용한 프로이트 이론가는 자크 라깡(Jacques Lacan)이다. 그는 주체라는 문제, 사회 속에서 인간의 위치, 인간과 언어 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프로이트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전 유아기를 라깡은 ‘상상적 단계’(imaginary stage)라 불렀다. 자아의 중심이 없는 단계,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때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소원한’ 이미지이자 ‘틀린’ 자아이다. 라깡은 이 거울단계를 통해 우리가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처음부터 스스로를 오인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성장하면서 아이는 대상과의 상상적 동일시를 계속하고 이 방법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결국 라깡에 따르면 자아(ego)란 우리가 동일시 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서 단일한 자아(selfhood)라는 허상을 지탱하는 자기애적 과정에 다름아니다. --상상적 단계에는 아이와 타인이라는 두 항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이때 타인은 보통 어머니이며,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외부 현실을 대표한다. 이 과정을 지나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아이는 ‘상징적 단계’(Symbolic stage)로 나아가게 된다. 라깡의 독창성은 이러한 과정을 언어라는 관점에서 재고찰했다는 점에 있다.상상적 단계에서 거울을 보는 아이(씨니피앙)는 자신과 거울 속의 이미지(씨니피에)와의 일체감을 느낀다. 즉, 상상적 단계에서는 씨니피앙과 씨니피에 사이,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생기지 않은 것이다. 반면,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아이는 탈구조주의의 불안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남근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 아이에게 성적인 차이 배제(아이는 부모의 연인이 될 수 없다), 부재(아이는 과거에 어머니의 신체와 맺고 있던 유대를 포기해야 한다)에 의해 규정된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상징적 질서로의 전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라깡이 욕망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한 씨니피앙에서 다른 씨니피앙으로의 잠재적으로 무한한 운동이다. 모든 욕망은 결핍에서 생겨나는데 욕망은 결핍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언어는 이러한 결핍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여기서 결핍이란 기호가 지시하는 실제 대상의 부재, 단어가 다른 대상들의 부재나 배제에 의해서만 의미를 띠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국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욕망의 포로가 된다는 의미인데, 라깡은 ‘존재를 비게 하여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 언어라고 언급한다. 이처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항상 의미작용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즉 상징적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과 분리되는 것을 뜻하는데 라깡은 이 영역을 ‘실재계’(the real)라 부른다. 특히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분리되어 있다. 인간이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은 다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소중한 대상을 다시 획득할 수는 없다. 대신에 그 대용물로 충당하고자 하는데 라깡은 이 대용물을 ‘소문자 a’(object little a)라 부른다. 그러나 어떤 대용물도 상상적 단계의 그 (허구적이지만) 완전한 자기정체성과 자기완성을 경험할 수 없다. 무한한 갈망에 종지부를 찍을 초월적 의미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적 실재가 존재한다해도 그것은 라깡이 초월적 씨니피앙이라 부른 남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초월적 실재 또한 대상이나 실재는 아니고 현실적인 남근도 아니다. 다만 차이를 나타내는 공허한 표시, 즉 상상적 단계로부터 사람들을 분리하고 상징적 질서 속의 이미 정해진 장소에 사람들을 밀어넣는 것에 대한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조직되었다고 본 라깡. 무의식에 대해 라깡은 ‘씨니피에가 씨니피앙 밑으로 미끌어져 간 것’으로, 또는 의미가 끊임없이 희미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거의 해독하지 못할 정도일 뿐 아니라 궁극적인 비밀을 결코 해석할 수 없는 이상한 모더니즘 텍스트라고 말한다. 라깡이론에 따르면 모든 담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말실수인 셈이며, 만약 언어사용 과정이 라깡이 말하는 것처럼 불안정하고 모호하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의미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게 된다. 결국 ‘나’라고 말할 대 그 ‘나’는 항상 종잡을 수 없는 주체를 대신하는 것이며, 이 주체는 언어가 이루는 어떠한 그물도 항상 빠져나간다. 이것은 내가 동시에 ‘의미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사항을 문학적 언술행위와 연관지어 보면, 흥미있는 유사점이 있다. 리얼리즘 소설은 언술행위, 무엇이 어떻게 말해지는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해지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무엇이 말해지는가 즉 언술내용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도록 독자를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텍스트가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완전히 은폐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더니즘 텍스트는 ‘언술하는 행위’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실제 내용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 모더니즘 텍스트는 스스로를 자명한 것으로 행사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구성 장치를 드러내려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더니즘 텍스트는 작품이 부분적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을 구성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가 비판적으로 반성해서 이것이 완전히 다르게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고무하고자 한다. 브레히트의 예가 가장 훌륭한 본보기일 것이다. --주체에 대한 라깡의 영향은 알튀세(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주체를 호명하는 이데올로기.’ 알튀세가 한 일은 라깡의 상상적 단계라는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다시 사고한 것. 거울상과 아이의 관계=개인이 사회와 맺는 관계(상상적 동일시).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이데올로기 투쟁이 일어날 충분한 공간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복종시키는 억압적인 힘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하는 혐의가 있다는 것이 이글턴의 해석. 라깡은 무의식이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며, 정확하게는 ‘사회’에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무의식이 종잡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정확하게는 결코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하고 복잡하게 얽힌 일종의 그물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라깡의 생각이다. 언어, 무의식, 부모,상징적 질서는 정확하게 동의어는 아니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라깡은 이것은 때때로 ‘타자’(the Other)라 불렀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예술에 대한 의견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예술을 신경증에 비교한 것인데, 이는 부당한 견해이다.프로이트가 의도한 바는 신경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예술가도 현실을 버리고 환상을 택하도록 만드는 강렬한 본능적 욕구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환상가와는 달리 예술가는 자신의 백일몽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조작하고 다듬고 순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문학작품을 반영이 아니라 일종의 생산으로 보도록 해주었다. 꿈처럼 작품도 언어나 다른 문학텍스트,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 등의 원자료를 취해서 기법을 통해 이것을 생산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기법이 보통 ‘문학형식’이라 일컬어지는 다양한 장치들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꿈이라는 텍스트에서 ‘징후적인’ 지점들에 주목하는데, 이 징후적인 지점이란 꿈을 형성하고 있는 ‘잠재내용’이나 ‘무의식적 욕구’에 대한 특별히 유용한 접근양식을 마련해줄 수 있는 왜곡,애매성, 부재, 생략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문학비평도 유사한 일을 할 수 있다. 이야기 중에 나타나는 둘러댄 부분, 이중성, 강조점, 중복되거나 빠뜨린 언어 등에 주목함으로써 문학비평은 이차적 수정의 층들을 조사해서 잠재텍스트의 어떤 부분을 밝혀낼 수 있다. 다시 말해 문학비평은 텍스트에 직접 씌어진 내용뿐 아니라 내용이 나타나는 방식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상이한 경향의 미국 비평가 둘, 버크(Kenneth Burke), 해롤드 블룸(Harold Bloom). 버크는 프로이트, 맑스, 언어학이론을 절충하고 섞어 문학작품을 상징적 행위로 파악하는 견해를 제시했고, 블룸은 프로이트론을 원용하여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견지에서 문학사를 다시 썼다. 자식이 부모의 영향을 받듯이 시인은 이전 시대의 ‘강력한’ 시인의 그늘에 묻혀 불안스레 살아가는 것이고 특정 시는 이전의 시를 체계적으로 다시 써서 ‘영향의 불안’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선 시대의 시인의 내부로 들어가 그 시를 개작하고 바꾸고 다시 만드는 시도를 통해 앞선 시인의 힘을 제거하려 시도하는 시인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시는 다른 시들을 다시 쓴 것으로 그리고 다른 시들을 고의로 ‘틀리게 읽거나’ ‘틀리게 파악’한 것, 또는 시인이 자신의 상상적 독창성을 발휘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압도해오는 세력을 받아넘기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는 것. 블룸은 모든 시인은 뒤처진 존재이고 전통에서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사람인데 위대한 시인이란 자신의 뒤처짐을 인정하고 전시대 시인이 발휘하는 영향력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본다. 블룸은 현대에서 창조적 상상력을 옹호하는 예언적 대변자인데 문학사를 거장들의 영웅적인 투쟁이나 대단한 심리적 드라마로 파악하고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 중에 나타나는 위대한 시인의 ‘표현의지’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의 시적 ‘목소리’와 천재성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 정치이론과 정신분석학의 만남. 크리스테바는 라깡의 상상적인 것 대신에 ‘기호적’(the semiotic)이라는 단계를 상징적 단계와 대립시킨다. 기호적인 것이란 우리들이 언어 내부에서 감지할 수 있고, 외디푸스 콤플렉스 전단계에 속하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힘들의 패턴이나 활동을 의미한다. 전단계의 아이는 아직 언어에 접해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은 맥동(pulsions)이나 충동의 흐름이 아이의 신체 속을 흘러다닌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 운율에 찬 패턴은 아직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언어의 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적 질서로 들어가는 단계에서 이 ‘기호적 과정’이 억압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억압은 전면적인 것은 아니다. 어조, 운율, 언어의 구체적 물질적 속성에서부터 모순, 무의미성, 혼란, 침묵, 부재 등 기호적인 것이 언어 내부에 일종의 추진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호적인 것은 언어의 타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기호적인 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인 것이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다면 기호적인 것은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전 단계에서 생겨난 것이라 어머니와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기호적인 것은 여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셈이다. --크리스테바는 바로 이 기호적인 것이 상징적 질서를 붕괴시킬 수단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기호적인 것은 모든 고정되고 초월적인 의미작용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기호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엄격한 구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현대사회를 지탱해온 모든 이원적 대립을 해체시키려고 한다. 기호적인 것은 상징적 질서에 대한 대안도 아니고 정상적 담론 대신에 사용할 수 있는 언어도 아니다. 기호적인 것은 상징적 질서의 내적 한도나 경계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여성적인 것 또한 그러한 경계에 위차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것은 다른 성과 마찬가지로 상징적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또한 그 주변부로 밀려나고 남성적 힘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존재하고 낭만적으로 이상화된 사회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희생당한 추방자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여성적인 것은 사회 내에서 사회와 대립되는 세력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운동이라는 형태로 뚜렷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위험할 정도로 형식주의적이고 쉽게 희화화될 수 있다 말하자면 말라르메를 읽어서 부르주아 국가를 붕괴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통일된 주체의 분해가 그 자체로 혁명적인 몸짓은 아닌 것이다. 부르주아 개인주의는 통일된 주체라는 주물에 의지해 번창한다는 사실을 크리스테바는 올바르게 인식은 했지만 그녀의 저작은 주체가 부서지고 모순 속에 빠지는 지점에서 멈춰버리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브레히트에게 있어 예술을 통한 기존 정체성의 분해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인간주체를 만드는 일과 분리할 수 없다. 새로운 주체는 내적인 파편화뿐 아니라 사회적 결속도 알 필요가 있고 리비도적 언어의 만족과 아울러 정치적 부정에 대해 싸워나가는 일의 만족 또한 경험할 것이다.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기본적 동기체계를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파악하는데 이것은 철학적으로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영문학과 관련하여 도덕적 진지함을 논하는 켐브리지 청교도들과 죠지 엘리엇을 기분전환감이라 여기는 옥스퍼드 기사들 사이에 적절한 쾌락이론이 자리잡을 공간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프로이트 이론은 심리적 역학관계를 일반적으로 분석하는 과학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또한 인간의 만족과 복지를 좌절시키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참여하는 과학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주의는 변혁적 실천에 봉사하는 이론이며 그런 한에서 근본적인 것을 질문하는 급진적 정치학에 비견할 만하다. 좀 더 중요한 사실은 독자가 문학작품에서 얻는 쾌락과 불쾌함을 충분히 이해하면 행복과 불행이라는 다소 긴박한 문제에 대해서도 조심스럽지만 의미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신분석학적 이론으로부터 “많은 성원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서 반항하도록 이끌고...지속할 가망이나 가치가 없는 문명”의 특성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5장 끝)
19    파레르곤parergon, 이미지 시학 / 임 봄 , 문학평론가 댓글:  조회:1122  추천:0  2018-11-03
파레르곤parergon, 이미지 시학  -『고래와 수증기』를 통해 본 김경주의 시세계                                                                     임 봄,  문확평론가           시의 특권이자 기쁨은 낯선 이미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힘이 개념에 저항하며 포괄적 세계를 구성한다는 데 있다. 엘리아데는 “이미지들은 모두 無明으로부터 깨달음으로의 이행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소위 ‘미래파’라고 지칭되는 젊은 시들의 경우 단어와 기호 등 다양한 이종교배 형식으로 파장이 깊고 넓고 복잡해졌으며 예전에 비해 특별한 메시지를 담지 않으려는 경향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무정형의 시들은 독자에게 어떤 과제를 부여하는 느낌도 든다. 현대시 독법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것은 이런 힌트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다. 그 힌트들은 대부분 이미지로 주어지고 상징계와 상상계를 마음대로 넘나들며 때론 모호하게 때론 도발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시뮬라시옹이 난무하는 현대의 이미지즘은 젊은 시인들의 시 속에서 기이하게 분절된 이미지로 낯설지만 나름대로의 새로운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현대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무엇을 내포하고 어떤 형식을 구성하며 흐르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경주 시인을 지칭할 때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단어는 ‘천재’다. 특히 『기담』에서 보여준 다양한 시적 실험들과 그 실험을 통해 생산된 다양하고 현란한 이미지들은 많은 시인과 평론가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일명 ‘프랑켄슈타인어’라는 말이 붙기도 했으며 ‘괴물’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런 화려한 명성에 비한다면 시인이 이번에 발표한 『고래와 수증기』는 단순하고 평범해 보인다. 첫 번째 시집에서 보여준 낭만적 언어들의 퍼포먼스나 장르의 문법을 넘나드는 현란한 시적 실험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고 있으며 뜻을 최대한 되살린 시적 언어들이 각 행마다 깊고 확장된 이미지들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동안 다양하게 모색됐던 그의 시적 실험들이 어느 정도 완성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어서 반갑다. 김경주의 시에는 언어가 갖는 실재들이 기호화하며 때론 전체적인 문맥을 벗어난 독립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때론 각각의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전체 속으로 녹아들며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   ‘파레르곤’, 처음과 끝이 사라진 이미지들     김경주의 시에서 언어와 기호들로 이뤄진 각각의 이미지들은 시의 전체적인 의미로 볼 때 의미의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이미지들은 시를 하나로 꿰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생성해낸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뒤흔들지만 그렇다고 비결정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작품을 발생시킨다.     데리다는 그의 저서 『호화 속의 진리』 에서 하나의 작품이나 원작에 영향을 미치며 서고 간의 경계를 없애는 존재를 ‘파레르곤’이라 정의한다. 파레르곤은 미술작품의 경우 액자가 작품에 영향을 미치거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사전에 제작했던 다양한 소품들이 원작에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김경주의 시에서 하나의 작품을 위해 만들어지는 각각의 이미지들 역시 전체적인 시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고 나중에는 전체적인 의미 속에서 개개의 이미지를 소멸시키고 있다. 낯설지 않은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이미지들은 시 전체적인 메시지나 형식에서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파레르곤으로 기능한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시를 완성하는 파레르곤 현상들은 김경주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이다.     순록들 내 입술 위를 걸어간다   혀로 발아래 얼음을 핥으며 간다     얼음 밑에 거꾸로 떠오른   누군가의 희멀건 발바닥을 핥는다     순록은 내 입술을 뜯어 먹는다 차가운 나무뿌리를,   얼어 죽은 새끼 순록의 뿔에서 돋아난   푸른 잎사귀들을 뜯어 먹는다     수염고래 한 마리가   내 입술 위로 올라온 적도 있다   귀가 뜨거워지면 얼음이 녹아내리므로   순록은 가만히 퍼덕이는 고래를 핥았다   내 입술에 쌓인 나뭇잎 아래서 순록은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순록은 내 입술 위에 앉아   수평선이 혀에 얼어붙을 때까지   서러운 혼잣말을 한다     나는 눈들의 지느러미에서 태어났어요   나는 설국(雪國)으로 끌려가서 비관주의자들의   부드러운 암각(暗角)이 되기도 했어요   속눈썹을 얼음 위로   하나씩 떨어뜨리며   되돌아오는 길을 표시했지요     행렬 속에서 길을 잃고   얼음 위에 서서 잠들어버린 순록은,   봄이 되면 내 입술 위의 따뜻한 얼음이 된다   살얼음 아래로 녹아내려 내 입술이 된다     내 입술 위의 벼랑 끝에서   순록들은 아슬아슬하다      - 「내 입술 위 순록들」 전문     김경주의 시에서 이미지들은 서로를 연결하며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만들어낸다. 느리게 음미할수록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들은 현실이나 기존의 규범들로부터 끊임없이 탈주를 감행하며 독자들에게 낯선 세계를 부여한다. 시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신선하고 새롭다. “입술”과 “순록”은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단어다. 그러나 타자와의 소통을 꾀하는 입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눈 덮인 북극지방에 사는 순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시적자아를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표면으로부터 멀지 않은 심연에서 파견돼 의미 없이 분절된 낱말들은 표면 위에서 스스로 직조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파레르곤적인 이미지들은 때로 단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주어와 서술어를 가진 하나의 문장이 될 수도 있다. 기호가 될 수도 있고, 행간의 침묵이 될 수도 있다. 입술과 순록은 본연의 이미지에서 탈주하고 서로 접속을 꾀하면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선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어쩌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숙명을 보는 것도 같다.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힌 시인은 자신의 분신이자 입술의 분신인 순록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시적기법으로 아름답고 슬픈 동화 같은 시 한편을 선보이고 있다.     좁고 어두운 입술의 안쪽과 광활한 입술의 바깥쪽이 얼음으로 차단되면서 말을 잃어버린 자아는 세계와의 단절을 겪는다. 그에게 있어 “수염고래”는 감춰둔 이드(ID)로 세상 속에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면 “귀가 뜨거워지”고 그로인해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세상과의 단절이자 자신을 가두는 존재인 얼음은 녹이기 힘든 존재이자 녹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다. 고립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김경주는 이런 숙명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입술이 순록을 낳고 순록이 다시 입술이 되는 무한순환을 통해 처음과 끝을 상실한 각각의 이미지들은 김경주에게 있어 윤회의 삶을 성찰하는 자세이며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순록이 뱉어내는 서러운 독백은 시인의 독백이며 때론 모호한 이미지로 시를 쓰는 미래파 시인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들개는 백치일 때   춤을 춘다     바다 위   빈 전화박스 하나   떠다닌다     절벽에 표류된   등반가   품에서 지도를 꺼낸다   협곡을 후 불어   밀어내고 있다     날아가는 협곡들     바위가 부었다   조용히   연필을 깎는다     지우개는 면도 중이다     햇볕이 서서 졸다가   발밑에서 잠들었다     먹물로 그리는   폭우는 하얗다      -「백치」 전문     행이나 연들은 완성된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며 투명해진다. “들개는 백치일 때/ 춤을 춘다” “바다 위/ 빈 전화박스 하나/ 떠다닌다” “날아가는 협곡들” “먹물로 그리는/ 폭우는 하얗다”라는 이미지들은 나름대로 선명한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백치’라는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향해 마치 짧은 영화필름을 돌리듯이 전개되며 서로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모든 필름이 상영된 후 남겨진 이미지들은 ‘백치’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쏠리면서 점차 페이드아웃(fade-out) 된다. 여기서 각각의 이미지가 내포하는 의미들을 하나하나 쫓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희미한 기의들을 따라가고 그 이미지들이 연결되면서 최종적으로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만 떠올리면 된다. 그 이미지는 본연의 이미지와 연결된 것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시인마다 갖고 있는 무늬이자 세상을 읽는 시인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김경주의 파레르곤 방식의 이미지들은 시인이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세계로부터 탈주를 감행하며 자신만의 시적세계를 구축해내는 도구, 주체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시인의 독특한 사유 방식인 셈이다.   ​   감각의 노마드과 탈주의 상상력     찬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처럼 새 떼가   날아오른다     새 떼의 종아리에 능선이 걸려 있다   새 떼의 종아리에 찔레꽃이 피어 있다     새 떼가 내 몸을 통과할 때까지     구름은 살냄새를 흘린다   그것도 지나가는 새 떼의 일이라고 믿으니     구름이 내려와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      -「새 떼를 쓸다」 전문     노마드는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체의 방식은 철학적 개념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까지도 두루 포괄하고 있다. 노마드는 단순한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땅으로 바꾸는 것,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꿔가는 창조적인 행위이며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노마드는 김경주 시의 기저에 깔려 있는 자유로운 사유의 여행이다.     일반적으로 ‘새’는 ‘자유’의 상징이다. 새와 자유는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이다. 현실과 이상의 이 기묘한 조합은 새라는 상징물과 탈주를 도모하는 시인의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새로움을 시도하는 탈주, 그리고 그 지점에 시인의 상상력이 접속했을 때 새는 비로소 자유와 비상을 꿈꾸는 제3의 존재로 재탄생 한다.   ‘A=∞’를 만들어내는 이런 이미지 공식은 현대 시단에 쏟아지는 시들에서 많이 접하게 되는 것으로 김경주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러나 김경주가 생산해 내는 이미지들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평범한 단어들을 조합해 낯설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과 그 이미지에 오래 머물수록 더 깊은 의미의 울림을 음미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것들은 편안하고 낯익었던 세계에 독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특정한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비상하는 ‘새’는 시인의 시작詩作을 위한 도구적 방식으로 이번 시집에는 유독 이런 새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김경주의 ‘새’는 시인의 본질이 노마드에 닿아있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시를 통해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새 떼’로 표현되면서 자유를 갈구하는 간절함은 어느새 역동성을 갖는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상상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존재다. 모든 시의 기저에는 자유가 있으며 자유가 사라진 문학은 상상하기 어렵다. 감각은 예리하게 벼려있는 날선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길들여진 감각은 이미 죽은 감각이다. 야생에서 먹이를 찾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본능적인 행위다. 이런 본능에서 살아있는 감각이 사유된다. 김경주의 시 쓰기는 이런 야생의 살아있는 번득임에서 비롯되고 본능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그래서 낯설지만 신선하다.     새 떼가 날아오르는 것을 “찬 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로 비유하는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미지 역시 이런 자유의 기저 아래서만 사유될 수 있다. 한꺼번에 날아오른 새 떼를 좇으며 시인은 자유를 갈구하는 욕망을 표출해낸다. 새 떼는 시인의 시적 발화지점이기 때문이다. “새 떼”의 “종아리에”는 “능선”도 걸려있고 “찔레꽃”도 피어있다.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만드는 시적인 영감들이 “내 몸을 통과” 할 때까지 시인은 오랜 기다림을 갖는다. 이곳에 시적화자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 시인은 시가 제 발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존재다. 시가 스스로 찾아오는 일, 오랜 기다림을 거치면서도 시마가 찾아기를 기다리는 건 어쩌면 시인의 숙명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가 있을 거라 믿으며 새의 날개를 좇고 죽어 떨어진 새를 쓸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시가 찾아올 거라 믿는 믿음 때문이다.     시를 갈구하는 시인은 자다가도 “혀에 하얀 새 떼가/ 돋아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이 날숨으론/ 말語에게 돌아갈 수 없다”(「詩作-干涉」)고 탄식하기도 한다. 시는 시인에게 있어 “두 눈이 없이 태어나/ 평생 서로를 몰라보는 쌍둥이”이고 “한 눈씩 나누어 가지고 태어나/ 평생 서로의 몸을 그리워할 쌍둥이”(사시斜視-시인의 피3)인 것이다.   ​   미시세계를 꿈꾸는 시어들     거시적 환경에 익숙한 우리는 미시적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진 않다. 미시적 세계에서 ‘이것’은 ‘저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또한 ‘저것’은 ‘이것’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두 개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나는 뉴튼의 법칙이 적용되는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거시세계’와 원자처럼 아주 작은 단위로 내려갔을 때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다.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이 서로 연결되고 쌓여 겉으로 드러난 세상이 거시세계라면 미시세계는 거시세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나 또는 허공처럼 형상이 없는 것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우리는 대부분 지구에서 허용하는 법칙, 즉 개념에 익숙해져 있지만 개념을 벗어나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더 많은 신비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만일 이런 과학의 양자역학을 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면 그것은 큰 행운이다. 시는 가장 함축적인 문장으로 가장 거대한 담론을 지향하는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 김경주가 이전에 비해 한 단계 올라섰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동안의 시 쓰기가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가’라는 점에 천착하는 과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나’ 하는 점에 천착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새 떼에 걸려,     문장은 기척을 내기도 한다     내 얼굴에서 내려야 하는데   얼굴을 놓쳐버린 뺨처럼     문장은 행진곡을 못 듣고   횃불로 들어가   날을 지새운다   기척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내 난동과   잘 지내야 하는데     꿈속의 새가   내 배게위에 침을 흘린다   침으로 기울고 있는   내 얼굴처럼     문장은 나의 타향살이다     기척도 없이   나를 떠난다      -「기척도 없이」전문     김경주는 이번 시집에서는 가장 최소한의 언어로 시 본래의 원형을 찾아가고 최소한의 문장과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여백 속에서 한층 확장된 의미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각각의 행은 ‘주어+서술어’로 만들어진 문장이 대부분이며 가장 긴 문장도 ‘주어+목적어+서술어’를 넘지 않는다.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연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런 시적기법의 가장 큰 효과는 호흡을 그곳에서 멈추게 해 의미를 오래 되새김질 하도록 만든다는데 있다. 그가 적절하게 배치하는 쉼표나 마침표들은 이런 여백에 더 강한 울림으로 작용한다.     「13월의 월령체」에서는 1월부터 12월까지를 숲·그림자·햇볕·진눈깨비·속주머니·헬멧·밤·빵·집·악어포클레인·동물원·동전·달·새로 형상화해 그려내는데 문장마다 마침표를 찍어 각각의 달마다 갖고 있는 이미지들이 다름을 단적으로 표현해내고 다른 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효과적 장치를 하고 있다. 다음 시를 살펴보면 하나의 행이 단어 하나로 이뤄진 시가 어떤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지 더 잘 확인할 수 있다.     문장들   통성명   하지 않아   출생신고   하러 온   이미지들     -중략-     공원의 침들   좋아   발 없이 굴러간   비눗방울   좋아   아무도 모르는 방   세만   놓지      -「시인의 피 4」 부분     “문장들” “통성명” “출생신고” “비눗방울” “좋아” 등은 이 자체로 하나의 행이다. 긴 문장에 삽입돼 요소로 전락한 단어들과는 달리 이 자체만으로 확장된 의미를 갖는다. 문장들은 단순한 문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장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출생신고 역시 그 외에 부가적으로 존재하는 많은 사연들로 의미를 확장시킨다. 언어의 미시적 효과를 톡톡히 얻은 결과라 할 수 있다. 독자가 자발적으로 이미지를 구사하도록 만드는 것은 단어가 주는 여백에 있으며 미시적 요소들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이다. 김경주의 시에는 이런 미시적 세계가 주는 울림으로 더 큰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더 큰 시적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시인의 노력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끊임없이 탈주를 감행하고, 끊임없이 접속을 꾀하고, 끊임없이 낯선 이미지로 구축된 새로운 고원을 탈환해 내는 김경주는 이번 시집에서 언어들의 미시적 접근을 통해 시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여백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세계를 담아내는 그의 행보는 향후 그가 보여줄 시들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    ========================================== ======================================================  임 봄, 문학평론가  ​ 1970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문학석사. 2009년 계간 《애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계간 《시와 사상》 평론부문 당선.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작가회의 회원.   
18    [스크랩] 시의 구조-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중심으로 댓글:  조회:1516  추천:0  2018-10-25
시의 구조-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중심으로      구조주의 사상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살펴본다면 소쉬르의 언어학에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이 관계의 그물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여기서 나와 세계 자체의 본질은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중요한 것은 관계일 뿐이다. 하나의 기호가 기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며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듯이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대상과 대상들이 어우러지는 관계만이 중요하다. 우리는 세계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관계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세계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문학에 적용한다면 언어에는 개별적인 언어인 빠롤과 달리 공통의 문법을 지닌 랑그가 존재하듯이, 하나의 작품에 있어서도 공통으로 존재하는 구조의 문법이 있다. 이러한 구조의 문법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처럼 글쓰기가 언어를 갈고 닥아 영혼을 보둥켜안는 고귀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구조주의처럼 기분 나쁜 문학이론은 없다. 우리가 온밤을 꼬박 새워 쓰는 소설이나 수필 같은 산문에 무슨 철근과 골조를 쌓아 올라가는 콘크리트 건물 같은 구조가 있단 말인가? 서론, 본론, 결론이나 기승전결이 있는 산문의 경우 구태여 구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구성의 틀이 존재한다고 하자. 그러면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시의 경우에도 시를 시답게 만드는 단어와 단어, 또는 행과 행 사이의 어떤 구성의 틀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떤 이론이 ‘주의(ism)’ 라는 이름의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그러한 이론 속에 끼여 맞추려는 무리한 확장을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모든 이론의 역사이다.        야콥슨 (1896∼1982) - 러시아 형식주의자 중 한 사람인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러시아 출신으로 형식주의와 현대의 구조주의 사이에 중요한 연결고리를 마련하였다. 야콥슨은 1915년에 창설된 형식주의자의 집단인 모스코 언어학파의 지도자였다. 1920년엔 프라하로 이민 가서 체코 구조주의의 주요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뒤 다시 나치스를 피하여 1939년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거쳐 미국으로 귀화하였다. 그 후 모스크바와 프라하에서 언어학회를 결성하고 프라하학파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프라하대학교를 비롯하여 1967년 하버드대학교 및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연구 분야는 일반언어학·시학·운율학·슬라브언어학·언어심리학·정보이론 등 여러 방면에 걸치는데, 그는 언어학과 인접과학과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주요저서로 《음성분석 서설―판별적 특징과 그 관련량(關聯量) Preliminaries to Speech Analysis》(1952, Morris Halle, G. Fant 공저), 저작집 《Selected Writings》(7권, 1962∼), "1942~43년 뉴욕에서의 강의록" 《Six Lectures on Sound and Meaning》(1976발간, 프랑스 Les Editions de Minuit 사 편집) 등이 있다.     일찍이 러시아 형식주의 운동에 관여하고 10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 천재적 언어학자는 사실상 구조주의의 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소쉬르의 언어학이 갖고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일찍이 간파하고 레비 스트로스나 자크 라캉 같은 학자들과 교류하며 구조주의라는 20세기 최고 흥행의 지적 흐름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러시아 형식주의 운동 초기에 일상 언어와는 달리 시적인 언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시란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  일상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시적 언어는 언어 자체로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이른바 러시아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의 개념을 계승한 것이다.    1958년 발표한 이란 논문에서 야콥슨은 언어의 기능을 여섯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언어 활동을 요소는 대체로 ①말하는 이, ②말 듣는 이, ③쓰여진 말 자체, ④말이 관계를 맺고 있는 관련상황, ⑤말이 쓰여진 분위기 내지 경로, ⑥ 사용되는 언어의 종류를 들 수 있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대상 ④                     l 발신자 ① - 전언 ③(message)- 수신자 ②                     l                경로 ⑤ / 언어 ⑥      이 여섯 가지 요소 중 어느 요소가 강조되느냐에 따라 언어의 기능이 여섯 가지로 분화된다. ① 정보적 기능, ② 표출적 기능, ③명령적 기능, ④친교적 기능, ⑤ 관어적 기능, ⑥ 미학적 기능(시적 언어는 여기에 속한다.)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젊은 사람이 쓰는 스마트폰을 보고 “저것이 새로 나온 삼성의 갤럭시 폰이야.”라고 말했다면 그는 4)의 대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정보적 기능) 발신자의 언어가 수신자로 하여금 “커피 좀 타와.”라고 어떤 행위를 하도록 요구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명령적 기능이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지난 번 쓴 글 참 좋았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어떤 기능에 속할까? 그러한 말을 지난 번 쓴 글(대상)에 대한 정보나 사실을 판단하는 정보적 기능으로 판단하고 기분이 우쭐해지면 곤란하다. 그것은 “오늘 날씨 참 좋죠?”라는 말처럼 상대(발신자)가 나(수신자)에게 친밀감을 표시하는 언어의 친교적 기능에 속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요즘 안색이 좋아 보입니다.”라거나 “미스 김. 요즘 많이 예뻐진 것 같아.”같은 말들도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친밀감을 표시하는 언어의 친교적 기능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표출적 기능이란 언어를 통해서 발신자의 감정상태를 나타내는, 알 수 있는 언어를 말한다. 기분 나쁜 일을 보고 “쯧쯧...”하고 혀를 찬다든지 초조하여 자꾸만 “에헤~”하고 말을 끈다든지 하는 경우의 말이 이 경우에 속한다.    그런데 야콥슨은 시의 언어는 언어의 6가지 요소 중 전언 자체(메시지)에 초점을 둔 언어라는 것이다. 여기서 메시지는 시의 내용이 아니다.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이다. 시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언어가 자기자신과 일종의 자의식적인 관계에 놓임에 있다는 생각이다. 언어의 시적 기능은 기호들의 감각성을 증진시키고 기호를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적 특질에 주의를 모은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에서 기호는 그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즉 기호와 지시 대상 사이의 평상적인 관계는 깨지며 기호는 그 자체 가치대상으로서의 어떤 독립성을 허락받는다. 따라서 시적 언어는 어떤 상황에서 발신자가 왜 무엇을 말하는냐가 아닌, 단어들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유사성과 인접성    야콥슨은 같은 논문에서 시적 기능은 선택의 축에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한다라는 시의 구조에 관한 유명한 말을 하였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우선 그는 소쉬르가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 구조를 분석한 선택의 축과 결합의 축이라는 개념을 빌어 왔다. 철수는 빵을 먹는다란 하나의 문장이 있다고 하자.   (철수)는 (빵)을 먹는다. 영희+ 과자+ 먹는다. 엄마+ 밥 + 먹는다.      이러한 문장에서 철수나 빵 대신에 다른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선택의 축이라고 한다. 소쉬르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 행위는 이러한 선택의 ( )안에 다른 단어를 바꾸어 끼여 넣은 행위이다. 그런데 아무거나 바꾸어 끼어 넣는 것이 아니라 원래 관념과 유사한 것들(유사성에 의해서)을 끼여 넣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위의 예에서 철수 대신에 가족이라는 테두리 중의 영희나 엄마 등의 다른 사람을 끼여 넣을 수도 있고 빵 대신에 유사한 다른 먹을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빵 대신에 유사성이 없는 나무나 바위를 선택할 수는 없다. 또한 철수, 빵, 먹는다는 각각의 단어는 철수는 빵을 먹는다로 결합하여 하나의 문장(결합의 축)을 만든다. 이처럼 철수와 빵이 선택되면 빵이랑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는(인접성에 따라) 먹는다는 단어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야콥슨은 전통적인 수사법에서 은유는 유사성에 따른 선택이고 환유는 인접성의 원리에 따른다고 말한다. 잘 알다시피 은유는 수사법에서 하나의 관념을 다른 관념으로 대체시키는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나 노년은 인생의 황혼이다.‘라는 문장에서 호수는 마음의 은유이고 황혼은 노년의 은유이다. 이처럼 은유는 A=B로 표현할 수 있는 등가의 원리가 작용한다. 야콥슨은 이처럼 시란 단어와 단어가 결합될 때 등가의 원리에 따라 결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환유는 어떠한가? 환유란 하나의 단어가 즉각적이고도 자연스럽게 다른 단어를 연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인접성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나이프하면 포크가 생각나고 청와대하면 대통령이나 권력이 연상되며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은 중이나 죄수가 연상되는 것과 같다. 또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거나 특정한 기표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도 환유적 작용이다. 예를 들면 치마는 여자를 뜻하고, 펜은 글이나 지식을, 십자가는 기독교를 뜻한다. 이처럼 환유는 어떤 사물을 그와 관련 있는 다른 사물을 빌어 나타내거나, 기호로써 나타내는 것을 대신한다. 야콥슨은 주로 산문의 경우 환유가 많이 쓰인다고 주장한다. 산문이란 문장을 계속적으로 부가해 가는 글쓰기 방식인데 작가는 자기도 모르게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환유적 방식(인접성의 원리)에 의해 결합해 간다는 것이다.    야콥슨은 1920년대 러시아 형식주의 운동에 관여하면서부터 필생에 거쳐 시만이 갖고 있는 구조를 밝히려는데 애를 쓰다가 40년 만에 겨우 하나 건졌다. 시는 선택의 축에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시에 있어서는 유사성이 인접성에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단어들은 일상대화에서처럼 단지 그들이 담고 있는 의미 때문에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성, 대립, 병립 등의 패턴과 소리, 의미, 리듬과 함축에 의해 생겨난 패턴에 따라 결합한다. 어떤 문학형식들, 예를 들면 사실주의 산문은 연상작용에 의해 기호들을 결합하는 환유적인 경향이 있고,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시 같은 다른 형식들은 고도로 은유적이라는 것이다.                                                                                                 - 로만 야콥슨과 모리스 홀의 공저 중에서    야콥슨은 시는 기표들이 등가의 원리에 따라 병렬로 늘어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라고 부른다. 그는 이러한 평행성의 원리가 기표뿐만 아니라 소리나 리듬에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 시에서 나타난 운율의 반복현상을 고찰한 홉킨슨의 논문을 인용하여 홉킨슨이 파악한 압운이나 각운 등이 시에서 반복되는 병행성은 시에서 쓰이는 단어뿐만 아니라 소리나 리듬 또한 등가의 원리(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기능의 반복, 즉 평행성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드디어 확고부동한 시의 구조를 밝혀냈다고 흥분한 야콥슨은 1962년 레비 스트로스와 공동으로 보들레르의 이란 시를 구조주의적 관점으로 분석한다. 이 논문은 프랑스 비평계에 을 불릴 정도로 화제를 일으켰지만 도대체 전문가들이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석이 비평으로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는 비판을 받는다.     평가 및 비판    로만 야콥슨의 최대 공적은 그가 최초로 언어의 기능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언어를 메시지를 매개로 한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소통으로 파악한 그의 이론은 오늘날 문학비평뿐만 아니라 매스 미디어에서 상품 광고에까지 여러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그리고 은유와 환유의 연구를 통하여 그것이 단순한 수사법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 구조의 본질적인 측면에 속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구조주의라는 사상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언어학 분야의 지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론은 너무 무리하게 이론을 적용한 것이 아닐까? 시는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등가성의 원리가 투사한 것이라는 그의 시론은 시를 지나치게 은유적인 것으로만 보는 문제점이 있다. 환유에 의한 시는 시가 아니가? 또한 음악성이 배제된 산문시는 시가 아니란 말인가? 그의 은유와 환유 이론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은유와 환유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표현에서 마음과 호수는 은유이지만 이런 은유는 너무나 많이 쓰여 이제는 은유로서의 가치를 잃고 환유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은유라도 상투적으로 많이 쓰이면 오히려 인접성에 따른 환유적인 것으로 되어 버린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결국 어떠한 가치라는 것은 불변의 것이 아니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사회적, 역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를 등가성의 원리로 병렬한 것 이라는 그의 이론에 따라 모든 기표들을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병렬했다고 해도 어떤 것은 시가 되고 어떤 것은 시가 안 되는 것을 그의 이론은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시가 되고 시가 안 되는 것은 시의 내부(구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외부에 존재하는, 시를 읽는 독자의 가치판단인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글마루문학회 | 글쓴이 : nicos| 원글보기  
17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스크랩] 댓글:  조회:1417  추천:0  2018-10-24
  [출처]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바르트의 이런 말, "문학은 더 이상 세계의 재현과 모방인 미메시스(Mimesis)도, 세계의 인지 수단인 마테시스(Mathesis)도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언어의 불가능한 모험인 세미오시스(Semiosis), 즉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롤랑 바르트 평전 R. Barthes par lui-meme, p123)라고. 그리고 이 구분은 그의 문학 편력을 요약하는 것으로, 미메시스는 브레히트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신화에 관심을 가졌던 제1기, 마테시스는 소쉬르의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적 기호학적인 모험의 제2기, 세미오시스는 데리다나 솔레르스, 크리스테바 등 후기구조주의자의 보호체계하에 텍스트에 관심을 가졌던 제3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런 저런 얕은 배움들, 주워삼킨 옅은 지식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정화시켜버린 무지의 확증이란, 어찌나 폭력적인지. 언제나 늘, 어찌나 늘, 얕은 앎과 옅은 이해는 보잘 것 없다. 그리고 텍스트는 그 마저도 거부하려 한다. 마치 손아귀에 틀어 잡히면 죽어버릴 것 처럼, 끊임없이 탈주하려는. 늘 탈주 중의 텍스트. 지드였던가. 자신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엔 그 모든 걸 버려버리라고 했던게. 어쨋건 일이 귀찮아져버렸다. 늦바람 마냥 갈증이라니. 바르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년 프랑스 북쪽 셰르부르 출생. 1980년 사망. 그보다 열살 많은 사르트르(1905~1980)와 같은 해에 죽었으며, 그보다 열한살 어린 절친했던 미셸 푸코(1926 ~ 1984)보다는 4년 전에 죽은. 그의 생과 죽음의 해를 굳이 상기하는 이유라는 것은, 같은 해의 사르트르의 죽음 때문에 그의 죽음이 묻혔던 이유와 비슷하게 롤랑 바르트의 입지 같은 것 때문이다. 칼베Calvet는 이렇게 얘기한다. "바르트가 이론가가 아니라면, 타자의 이론을 이용할 줄 아는 에세이스트도 아닌 하나의 시선, 목소리, 스타일이다."     텍스트의 즐거움,La Plaiser du texte. 롤랑 바르트 1973년 作. (참고로, 뒤이어 읽을 사진에 관한 책인 '밝은 방'은 1980년 作). 동문선東文選에서 번역, 발간한 책에는 '저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는 그의 후기 작업들,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텍스트의 즐거움' 등이 실려있다.     1. 텍스트,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oeuvre)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texte)이다. 작품은 항상 상징적인것/비상징적인건, 정신/물질 등의 이분법적인 구조로서, 지금까지 해석 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항상 그 마지막에 시니피에, 총체적이고 단일한 의미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선조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의미를 이루고 있는 그 다양한 층과 이탈을 포착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바르트는 크리스테바 작업의 도움을 받아 텍스트라는 개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 의사소통, 재현의 산물이라면(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현상텍스트), 텍스트는 언술행위, 상징화, 생산성(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발생텍스트)의 영역이다. 작품과 텍스트, 현상 텍스트와 발생 텍스트의 구별은 시간적 상황이나 현대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를 작업하는 과정 속에서 체험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은 소비의 대상이나,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에서 구해내어 유희, 작업, 생산, 실천을 수용하게 한다.     이런 텍스트론에 따라,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은 텍스트 안에서 저자의 자리를 배제하고 독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선지자적인 글이다. 바흐친의 상호텍스트 개념도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인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의미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비우기 위해서이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들을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글을 쓰는 '나'가 종이 위에 씌어진 '나'에 불과하듯, 독자도 글을 읽는 어떤 사람에 불과하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 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 (저자의 죽음.p.33)   1) (현실이란 주체와는 무관한 완전히 외적인 세계, 사물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실재는 주체의 구조화에 있어 현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이 관계와 마찬가지로) 작품은 보여지는 것이나, 텍스트는 증명되는 것이며, 작품은 손 안에 쥐어지지만, 텍스트는 언어 안에서 유지된다.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2) 텍스트는 정확히 Doxa(일반 견해)의 경계 뒤편에 위치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언제나 Paradox적인(반론적인), ㅡ 일반견해 밖에 있는 ㅡ 것이다.   3) 작품은 하나의 기의(signifie)로 닫혀진다. 텍스트는 기의의 무한한 후퇴를 실천한다. 텍스트는 지연시킨다. 그것의 영역은 기표(signifiant)이다. 작품의 경우 평범하게 상징적인 것이나(그 상징성은 곧 고갈되어 정지된다),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의 전적으로 상징적인 속성 안에서 구상되고 인지되고 수용되는 작품 곧 텍스트이다. 이렇게 해서 텍스트는 언어로 회수된다.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나 탈중심적인 것이며, 닫힌 것이 아니다.(구조란 중심도 끝도 없는 체계이다)   4) 텍스트는 복수태(pluriel)이다. (여러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환원불가능한 복수태를 구현한다는 뜻이다. 텍스트의 복수태는 그 내용의 모호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짜고 있는(어원적으로 텍스트는 직물) 기표들의 입체적인 복수태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다. 텍스트는 그것의 차이(그 개별성이 아니라)에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5) 텍스트의 은유는 망(reseau)의 은유이다. 즉 텍스트가 확장된다면, 그것은 체계나 배합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텍스트를 쓰는 나는 종이 위에 씌어진 나일 뿐이다.   6)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로부터 구해내(만약 작품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유희, 노동, 생산, 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연주자는 일종의 공저자로서, 악보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악보를 완성하는 자이다. 텍스트도 이런 새로운 종류의 악보와 아주 유사하다.   7) 텍스트는 즐김에, 다시말해 분리가 없는 즐거움에 연결된다.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보다 우세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언어들이 자유롭게 순환하는(circuler. 이 단어의 순환적인 의미를 간직하면서) 바로 그 공간이다.     2. 즐거움, ("텍스트의 즐거움"을 중심으로)(즐거움과 즐김 사이의 구별은 바르트가 말하듯이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어에서 즐거움plaisir이란 육체적, 도덕적으로 쾌적한 상태를 가리키며, 즐김jouissance은 동사 즐기다jouir에서 나온 말로 보다 내밀한, 그리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관통하는 보다 지속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문화와 단절되지 않은 즐거움 및, 문화와 단절된 즐김, 자아의 강화에 연관된 즐거움과 자아의 상실을 유도하는 즐김의 구별)      균열(Clivage), 즐거움의 텍스트는 만족시켜 주고, 채워 주고, 행복감을 주고, 문화로부터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편안한 독서의 실천과 연결된다. 즐김의 텍스트는 상실의 상태로 몰고 가서 마음을 불편케 하고(어쩌면 권태감마저도 느끼게 하고),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나 그 취향, 가치관, 추억의 견고함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독자가 언어와 맺고 있는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그런데 자신의 영역 안에서 이 두 개의 텍스트를, 자신의 손 안에 즐거움과 즐김의 고삐를 붙잡고 있는 주체는 요컨데 시대착오적인 주체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순되게도 동시에 모든 문화의 심오한 쾌락주의('삶의 기술'이라는 포장하에 독자의 마음 속에 편안하게 스며드는, 요컨대 과거의 책들이 공유했던 것)와, 그 문화의 파괴에 참여하기 때문이다.그는 자아의 강화를 즐기며(이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또 그 상실을 추구한다(이것이 그의 즐김이다). 이 주체는 이중으로 균열된, 이중으로 변태적인 주체이다.  p.61_62.     다만 하나의 "살아 있는 모순"(contradiction vivante), 즉 텍스트를 통해 자아의 강화와 동시에 그 붕기를 즐기는 균열된 주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p.68     차이가 살며시 갈등을 대체하기를. .. 갈등이란 다만 차이의 도덕적인 상태일 뿐이다.  p.62.     텍스트의 즐거움, 즐거움의 텍스트. 이 표현은 동시에 즐거움(만족감)과 즐김(소멸)을 의미하는 프랑스어가 없어서 애매하기만 하다. 따라서 "즐거움"은 때로 여기서 즐김으로 확대되기도 하고(아무 예고도 없이), 때로는 즐김에 대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애매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텍스트의 지나침이나, 혹은 텍스트 안에서 모든 기능이나(사회적인) 기능화(구조적인)를 초과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즐거움"을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즐김에 고유한 충격, 진동, 상실로부터 행복감, 충족, 편안함(문화가 자유롭게 스며들 때 느끼는 포만의 감정)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모든 즐거움의 단순한 일부인 어떤 특정한 즐거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67     여기서 언급한 체계들이 우리를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것을 멈추게 하려면, 그 중 하나 속에 사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는,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 속에서 무얼 하고 있지? 라고 말하든가.  p.77     텍스트는 그 소비에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 생산 속에서 탈장소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화법도 허구도 아니며, 시스템은 그 안에서 넘쳐흘러 해체된다(이 넘침, 이 벗어남이 곧 시니피앙스이다).  p.77     프루스트는 내가 호출하는 것이 아닌 그냥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권위서"가 아닌, 단지 순환적인 추억이다. 이것이 바로 상호 텍스트(inter - texte)이다. 그것이 프루스트이든 신문이든 텔레비전 화면이든간에 무한한 텍스트를 벗어난 삶의 불가능성. 책은 의미를 만들고 의미는 삶을 만든다.  p.84     즐김의 비사회적인 성격은 사회성의 갑작스러운 상실이다. 그렇지만 어떤 결과도 주체(주관성), 인간, 고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완전히 상실된다. 내밀함의 극단적인 단계, 영화관의 암흑.  p.87     모든 과거의 언어는 즉각적으로 연루되며, 모든 언어는 그것이 반복되기만 하면 옛것이 된다. 그런데 권력 언어(권력의 보호하에 생산되고 전파되는 언어)란 규정상 반복 언어이며, 모든 공식적인 언어 제도는 되새기는 기계들이다. 학교며 스포츠며 광고며 대중 작품이며 유행가며 뉴스며, 이 모든 것들은 항상 똑같은 구조, 똑같은 의미, 대개는 똑같은 말만을 반복한다. 상투성은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형상, 정치적 사실이다. 이와 대립하여 새로움은 바로 즐김이다(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성인에게서 새것은 항상 오르가슴의 필수조건이다"). (중략) 한편에는 대중의 진부함(언어의 반복과 관련된) ㅡ 반드시 탈즐거움적인 것은 아니지만 탈즐김의 진부함 ㅡ 다른 한편에는 새로움을 향한 격앙(주변적인, 탈중심적인), 담론의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격렬한 열광이 있다. (중략) 그런데 규칙은 남용이며, 예외는 즐김이다.     그렇지만 이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주장할 수도 있다. 즉 반복자체가 즐김을 야기한다라는. 거기에는 많은 민속학적 사례가 있다. 집요한 리듬들. 주술(呪術)의 음악, 연도문, 제의, 불교의 염불 등. 과도한 반복은 상실로, 기의의 부재로 몰고 간다. 하지만 반복이 관능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적이어야 하며, 문자 그대로 반복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는 이런 공공연한(과도한) 반복은 탈중심적인/괴팍한 것이 되며, 음악의 몇몇 주변적인 영역으로 밀려 나간다. 대중 문화의 조잡한 형태는 수치스러운 반복이다. 그것은 내용, 이데올로기적인 도식, 모순의 삭제마저도 반복한다. 그러나 그 겉모습은 다양하다. 언제나 새 책, 새 방송 프로그램, 새 영화, 삼면 기사,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의미.     요컨데 말이란 두 개의 대립되는 조건, 둘 다 과도한 조건에서만 관능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반복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새로움으로 넘쳐흘러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되든가 하면 말이다.  p.88_89         그리고 무언가 자명해지면, 나는 그것을 버린다. 이것이 바로 즐김이다.  p.91     모든 이야기는 오이디푸스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기원을 찾기 위한, 혹은 법칙과의 갈등을 말하며 증오와 연민의 변증법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중략) 사람들이 그 결말을 모르는 극적 이야기에 비해,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에서는 즐거움은 사라지지만 즐김은 증가된다(오늘날 대중문화에서는 "극적" 이야기의 소비는 많으나, 즐김은 거의 없다).  p.95     "모든 이데올로기적 행위는 구성상 완결된 언표의 형태로 제시된다." 크리스테바의 이 명제를 반대로 돌려 말한다면, 모든 완결된 언표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98     텍스트의 즐김은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쁜 철이른 것이다. 그것은 제때에 오지 않으며, 어떤 성숙 과정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단번에 미쳐 날뛴다. 이 격앙은 오늘날의 회화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것으로, 그 격앙이 이해되는 순간 상실의 원칙은 무용해지며,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모든 것은 첫번째 시각에서 행해지며 즐겨진다.  p.100     낡지 않을 것은 아미엘의 철학이 아닌, 바로 그 날씨일 텐데.  p.101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로 텍스트의 분리에 대항하여 행해진 권리 주장이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자기 이름의 특수성을 통해 말하는 것은 즐거움의 편재성, 즐김의 아토피(atopie)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즐김의 관계가 삶의 즐김과 텍스트의 즐김이, 가장 개인적인 방법으로 엮어지고 짜여지는 한 권의 책(텍스트)에 대한 상념, 그리하여 동일한 건망증이 삶의 모험과 텍스트의 독서를 사로잡는 그런 책에 대한 상념.  p.107     "우리는 아마도 변전의 절대적인 흐름을 인지할 만큼 그렇게 정교하지 못한지도 모른다. 영속적인 것은 단지 사물을 요약하거나 평범한 도식으로만 몰고 가는 우리의 조잡한 기관 덕분에 존재한다. 그런데 그 무엇도 그런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는 매순간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움직임의 그 정교함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형태를 긍정하는 것이다."(니체)   텍스트 또한 우리의 조잡한 기관에 의해 명명된(일시적으로) 바로 그 나무일 것이다. 우리는 정교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p.108     시니피앙스(Signifiance)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으로 생산되는 한에 있어서의 의미이다.  p.109     (왜냐하면 즐김은 거기서 말해짐 없이 그 자신의 마멸의 전율을 전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시 텍스트, 즐거움, 즐김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누가 해석하는지 물을 권리가 없다. 정념으로 존재하는 것은(하나의 존재가 아닌 과정이나 변전으로서) 힘의 의지의 형태인, 바로 해석(interpretation)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니체) 그리하여 주체는 아마도 환상이 아닌 허구로서 회귀할 것이다. 하나의 즐거움은 자신을 개별체로 상상하는 방식으로, 최종적인 가장 진귀한 허구, 즉 정체성의 허구를 고안하는 방식으로 도출된다. 그러나 이 허구는 더 이상 통합의 환상이 아닌, 반대로 우리의 복수성을 등장하게 하는 사회의 연극이다. 우리의 즐거움은 개별체적인(individuel) 것이지 개인적인(personnel) 것은 아니다.     내게 즐거움을 준 텍스트를 "분석"하려 할 때마다,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 "주관성"이 아닌 내 "개별체"이다. 그것은 내 육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시켜 내 육체에 그것의 고통, 또는 즐거움을 적응시키는 소여이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내 즐김의 육체이다. 이 즐김의 육체는 또한 내 역사적 주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즐거움(문화적인)과 즐김(비문화적인)의 그 모순된 유희를 조정하고, 또 내가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태어나서 현재로서는 잘못 위치한 주체로서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바로 전기적, 역사적, 사회적, 신경증적인 요소들의 아주 섬세한 배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시대착오적인 주체가 표류한다.  p.109_110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중략) 이 직물,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 내며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이 자신을 해체한다.  p.111     즐거움의 유보(suspension)의 힘에 대해서는 아무리 말해도 충분치 않다. 그것은 진정한 에포케(epoche - 그리스어 어원은 정지라는 뜻으로,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에게서는 모든 판단의 유보를 뜻한다. 후엘 에트문트 후설은 세상의 현실에 관한 모든 판단의 유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이렇게 지칭하였다)요. 모든 공인된(스스로 공인한) 가치들을 멀리서 응결시키는 제동장치이다. 즐거움은 중성이다(악마적인 것에서도 가장 변태적인 형태). 또는 적어도 즐거움이 유보하는 것은 기의의 가치, 그 (거창한) 대의명분이다. (중략)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로 그것이다. 기표의 화려한 위치로 이동한 가치.  p.112     기의를 저 멀리 추방하고, 말하자면 내 귀에 배우의 익명의 육체만을 내던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알갱이로 만들고, 탁탁 튀고, 어루만지고, 줄로 썰고, 자른다. 그것은 즐긴다.  p.114     3. 권력, (강의講議를 중심으로)     그러나 이제 우리는 권력이 또한 이데올로기적 대상이며, 우리가 단번에 권력을 알아채지 못하는 곳, 즉 제도나 교육 속으로 슬며시 스며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교환의 가장 미세한 메커니즘 속에서도 권력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에 대항하는 모든 해방적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현존합니다. 저는 과실을 유발하고, 그 때문에 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죄의식을 유발하는 담론은 모두 권력 담론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파괴하기 위한 혁명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금방 다시 살아나 새로운 상태에서 싹틉니다. 이런 끈질김과 편재성의 이유는 바로 권력이 정치적, 역사적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 역사에 관계된 통사회적 조직의 기생충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태고적부터 권력이 기재된 이 대상이 바로 언어(langage),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의 필연적 표현인 언어체(langue)입니다.     언어가 법규라면 langue는 그 약호(code)입니다. 우리는 언어체 안에 있는 권력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langue는 분류이며, 모든 분류는 억압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선 하나의 행위를 발화하기 이전에 자신을 주어로 설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 행위는 나를 수식해주는 말에 불과하게 됩니다. 즉 내가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의 결과이자 연속일 뿐입니다. 말한다는 것은, 하물며 담론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해서 말하듯이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속되기 위한 것입니다.     langue를 구성하는 기호는 그것이 인지되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반복되는 한에서만 존재합니다. 기호는 맹종적이고, 군생적입니다. 각각의 기호 안에는 상투적인 것(stereotype)이라는 괴물이 잠자고 있습니다.   **langue에는 필연적으로 예속과 권력이 뒤섞여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권력에서 벗어나는 힘뿐만 아니라, 특히 그 누구도 굴종시키지 않는 힘을 자유라 부른다면, 자유는 언어 밖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언어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그것은 유폐된 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불가능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langue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일, langue를 속이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구원의 속임수, 이 도피, 이 놀라운 술책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영속적인 혁명의 그 찬란함 속에 탈권력의 언어체를 이해하게 해주며, 나로서는 이것을 문학이라 부릅니다.     문학에서 제가 겨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텍스트, 다시 말하면 작품을 구성하는 기표들의 짜임입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란 langue가 드러남 그 자체이며, 또 langue가 공격당해서 길을 잃어야만 하는 곳은 바로 langue 내부이기 때문입니다. langue를 도구로 삼는 메시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langue를 무대로 삼는 단어들의 유희에 의해서. 그러므로 저는 문학, 글쓰기, 텍스트를 별차이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문학 안에 존재하는 자유의 힘은 작가가 언어에 행사하는 이동(deplacement) 작업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고집한다는 것(s'enteter)은 문학의 비환원성 ㅡ 즉 문학 안에서 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철학, 과학, 심리학의 그 전형적 담론들에 저항하면서 살아남는다는 ㅡ을 긍정하고, 마치 문학이 비교할 수 없는 불멸의 것인 양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가(실천의 주체로서)는 다른 모든 담론의 교차로에서 학설의 순수성에 비해 저속한(trivial, 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인 trivialis는 세 개의 길이 나 있는 교차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창녀를 가리킵니다) 입장에서 망을 보는 사람의 고집스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고집한다는 것은 요컨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표류의, 기다림의 힘을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동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군생적인 권력이 당신이 쓴 것을 이용하고 예속하려 할 때, 그것을 엄숙하게 버리는(abjurer. 그렇다고 당신이 생각한 것마저 버리는 것은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행동을 하기 이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권력과 그 문화로의 병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치 그런 위험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 그렇지만 행동을 한 후에는 우리가 얼마만큼 권력에 의해 이용당했는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의 진솔함이나 절박함이 예속되었거나 조작되었다면, 절대적으로 그것을 엄숙하게 버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75)     고집하며 동시에 이동한다는 것은, 요컨대 유희 방법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언어의 무정부상태라는 그 불가능한 지평에서 ㅡ 즉 langue가 그 자체의 권력, 그 자체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바로 거기에서 ㅡ 연극과 관계된 그 무엇을 발견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문학의 그 기호학적 힘은, 기호를 파괴하기보다는 기호를 유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전장치와 걸쇠장치가 폭파된 언어의 기관실 안에 기호를 집어넣는 것, 간단히 말해 예속적인 langue의 한복판에다 사물의 진정한 동철자의어(heteronymie, 철자는 같지만 발음이나 뜻이 다른 단어)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로의 규칙적인 몰입은 기호학으로 하여금 차이 위에서 작업하게 하며, 그리하여 기호학이 교조적인 학설이 되는 것을, 기호학이 굳어지는(prendre) 것 ㅡ 보편적 담론이 아닌데도 보편적 담론으로 자신을 간주하는 ㅡ 을 막아 줍니다. 또 텍스트 위에 놓인 기호학적 시선은 문학을 둘러싸며 압박하는 저 군생적인 말로부터 문학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의존하는 신화, 즉 순수 창조의 신화를 거부하게 해줍니다. 어쩌면 기호란, 더 많이 실망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호학은 틀(grille)이 아닙니다. 기호학은 실재를 명료하게 만드는 어떤 일반적인 투명성을 부여하면서, 실재를 직접적으로 포착하게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호학은 실재를 여기저기서 때때로 들어올리려고 하며, 실재를 들어올리는 이런 효과가 틀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바로 기호학이 틀이 되고자 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들어올리조 못합니다. 기호가 다른 모든 담론에 대해 그렇듯이 모든 연구를 도와 주는 일종의 회전의자, 오늘날의 앎의 조커(joker)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호학은 해석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파헤친다기(via di levare)보다는 채색하는(via di porre) 것입니다. 그것이 선호하는 대상은 상상계의 텍스트로서, 이야기, 그림, 초상화, 표현, 개인어, 정념, 사실임직한 것의 외관 아래 진실의 불확실성을 연출하는 구조들입니다. 그 조작 과정 내내 하나의 채색된 베일이나, 혹은 허구처럼 기호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 가능한, 혹은 그렇게 기대되는 것을 저는 기꺼이 "기호학"이라 부릅니다.     교수가 자신의 여행 방향을 결정해야 할 순간에 매해마다 돌아가야 하는 곳은 바로 팡타즘입니다. 그 팡타즘이 말해진 것이든 말해지지 않은 것이든간에,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는 곳, 우리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언제나 죽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만이 팡타즘을 가지며, 아들만이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  놀라웁게도 롤랑 바르트는 20세기가 거쳤던 거의 모든 사유에 직접적으로 발을 걸치고 있다. 대부분의 이해에 놀라운 매듭을 연결짓는 시선, 스타일, 목소리. 재밌지. 기호는 상징으로 '굳어버린' 그 자체라 생각했는데, 거기서 탈주하기 위한 숱한 무엇들이라니. 혹은, 구조는 이미 중심도 끝도 없는 체계라니. ㅡ 모든 중심, 혹은 모든 끝의 연속이라는 것과의 시각 차. 굳어가는 모든, 또 권력의 지독한 편재 안에서, 자유로의 반항같은 것. (늘, 모두 그렇다시피, 그랬다시피) 모든 이미 죽은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러기위해 치뤄야할 불가능의 대가, 혹은 유희. 즐거움, 즐김. 삶 자체, 실천으로서의 글쓰기. 읽기. 텍스트의 즐거움, 그리고 즐김.      +       저자의 죽음, The Death of Author, 롤랑 바르트의 이 유명한 아티클은 이 텍스트에서 pp.27~35에 실려있다. 끊임없이 언급되는 이 아티클을 다시금 살핀다. 첫 문제제기는, 발자크의 소설 에서 여자로 가장한 한 거세된 자에 대해 말하며, "그녀의 갑작스런 두려움, 그녀의 이유 없는 변덕, 그녀의 본능적인 불안, 그녀의 까닭 모를 대담함, 그녀의 허세, 그녀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감수성, 그것은 분명 여자였다." 그리고 바르트는 이 문장에서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왜냐하면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이기 때문(p.27)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이 아닌 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 다시 말해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p.30) 앞서의 언술과 같이, 저자author, 마찬가지 저자에게 권위authority를 부여하는 기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모든 기원을 끊임없이 문제시하는 언어 외에는 다른 어떤 기원도 가지지 아니한다."(p.32) 과거, 저자, 기원의 부재(무無라기 보다는 부재)는 이제 그 각각의 현전에서 의미가 된다. 요는,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진다."(p.31)     "글쓰기의 복수태 안에서 모든 것은 풀어 나가야(disentangled)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deciphered)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p.33) 다시 말하자면, 애초에 저자, 혹은 기원, 숨겨진 의미라는 것이 있어서, 저자의 은유를 뒤집어서 그 밑에 있는 암호를 해독하거나, 풀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 구조는 연속적이므로, 바닥이 없고, 그러므로 "글쓰기의 공간은 답사하는 것이지 꿰뚫는 것이 아니다."(p.34) 정리하자면, 앞서 발자크의 문장에서의 문제제기에서, "아무도 그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 그 근원이며 목소리는 글쓰기의 진정한 장소가 아니다. 그 진정한 장소는 바로 글읽기이다."(p.34)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독자의 탄생이 나타난다. 독자는, 저자와 달리, "역사도 전기도 심리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p.35)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독자의 탄생이 나타난다.         아, 정리 잘했군. 더하여 이 아티클에서, 위에도 옮겼던.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이 아닌 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 다시 말해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p.30, 번역 김희영)라는 문장의 영역英譯 부분을 옮기면, "I is nothing other than the instance saying I : language knows a 'subject', not a 'person, and this subject, empty outside of the very enunciation which defines it, suffices to make language 'hold together', suffices, that is to say, to exhaust it." 주어라고 번역된 subject는, 작금의 주체의 의미를 환원시킨다. subject는 주변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문맥 상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띠는 것이다. 주체 역시, 더는 절대적 정체성의 self가 아니라, 이와 같다. 지하철에선 승객, 술집에선 꽐라, 등등등, 뉘앙스도 각개 달라지겠지. [출처]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작성자 정기석    
16    롤랑 바르트,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gt; 댓글:  조회:890  추천:0  2018-10-24
즐거움과 즐김    쾌락, 요컨대  그것은  오랫동안  억압되어온  철학의 주체다. 처음엔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다음엔  합리주의에  의해서,  그  다음엔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바르트가 보기에  현대  지식인들의  언어는  일체의 즐김을  배제하는  식의  교훈적  요구에  너무 쉽게  복종하고  있다.     그가  즐거움의  개념을  자신의  영역  안에  다분히  '전략적으로' 도입하여  '탈억압'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즐거움plaisir' 과   '즐김iouissance' 은  바르트의  정신  세계  전체를  횡단하는  근원적인  개념인데, 특히  이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묘사를 제공하는 항목은  '균열Clivage' '말하기Dire' '즐거움 Plaisir ' 등이다.    가령  '균열'이라는 항목에서  바르트는 자아, 즉  주체의  정신과  관련하여  즐거움의  텍스트와 즐김의  텍스트를   구별하였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독자를  만족시켜주고,  채워주고,  행복감을 주는  독서,  문화로부터  와서  문화와  단절되지  않는  편안한  독서의  실천과  연결된다. 이때  독자는  자아의  강화를  느끼게  된다.    즐김의  텍스트는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를  흔들리게  하며, 심지어는  독자가  언어와  맺고  있는  관계마저  금이 가게  한다.  이때  독자는  자아의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자아를  채울  때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비워낼  때도  즐거움을  느낀다. 이  후자의  즐거움,  즉  변태적  즐거움,  이것이  바로  즐김의  내용이다.   참고문헌 롤랑 바르트대담집, 유기환 옮김, , 강출판사, 1998.   '말하기'라는  항목에서  바르트는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  즐거움과   즐김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인데  반해, 즐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이다.    비평이  항상  즐거움의  텍스트만  다루며  즐김의  텍스트를  결코  다루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플로베르,  푸루스트,  스탕달,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고전적인  텍스트는  비평가에게  언제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감당할  수 없는  텍스트,  불가능한  텍스트가  시작되는  것은  즐김의  작가  및  그  독자에  의해서다. 이런  텍스트는  비평  밖에  존재한다.  우리는  즐김의  텍스트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며,  다만  그것 '안에서'  그것의  방식대로  말하거나,   아니면  미친  듯이  그것을  표절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한편  바르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물리적으로  분명하게  구분짓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즐거움이란  작은  즐김에  불과한   걸까?  즐김이란  지극한  즐거움에  불과한  걸까?'   즐거움은  약화된,  안정된,  이를테면  일련의  타협  과정을  통해  굴절된  즐김에  지나지  않는  걸까? 즐김은  가공되지  않는  즉각적인  즐거움일까?'   요컨대  그  경계선상에서  즐거움은  때로  즐김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때로  즐김에  대립되기도  한다.       롤랑  바르트,      바르트는  ' 줄거움'이란  항목에서  다시  즐거움과  즐김의  비교를 시도하는데, 즐거움의  텍스트는  고전,  문화,  지성,  행복감,  자제력,  안정감,  등의  개념과  결부된다. 그것은  자아의  놀라운  강화,  포근한  무의식을  낳는다.  이런  즐거움은  물론  말해질 수  있으며, 바로 거기서부터  비평이  나온다.     즐김의  텍스트는  조각난  즐거움,  조각난  언어,  조각난  문화다.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궁극  목적  밖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변태적이다. 심지어  그것은  즐거움의  목적조차  추구하지  않는데,  그  결과  그것은  독자를  한없이 지루하게 할  수도  있다.     목적지는  없는  즐김을  정의하는  것은  그러므로  극단적인  이동,  극단적   공허,  극단적  예측 불능이다.  즐김의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한다는  것,  즉  그것의  의미를  고정시킨다는  것은 이처럼  처음부터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즐거움의  텍스트,  즐김의  텍스트를  종합 정리하자면, 즐거움이란  자아의  강화에  연결되는  것으로서,  문화,  지식,  안락의  가치를  지니는  고전  작품의 독서  영역이 이에  해당된다.   즐김은  자아의  상실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이미지와  상상력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의 차원에서  우리를  뒤흔드는  텍스트들,   현대의  전위적인  텍스트들의  독서영역이  이에  해당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읽을  수  없는'  전위적인  텍스트들은  오직  즐김의 방법에  의해서만 '읽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우연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문  단  하나에서  독자는  충격과 진동을  느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즐김의   텍스트에는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고전적  작품의  작가와  독자가  고정된  기의를  가지고  숨박꼭질을  하는  독자라면, 전위적  텍스트의  작가와  독자는  기의의  불확정성  혹은  기표의  물질성을  가지고  무한히 유희하는  자들이라고.....     롤랑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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