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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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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무의미 시론
2018년 11월 16일 13시 48분  조회:1430  추천:0  작성자: 강려
. 무의미 시론
 
  내 주요문학 수업은 70년대에 이루어졌다. 감수성은 다소 있으나 지적인 소양은 부족한 시기에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모델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선배들이 다들 김춘수와 김수영을 언급하고 있어서 그들 작품을 정독해서 읽어 보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이 문단에 화제로 오르고 잡지 평문에 도배를 하다시피 해서 “무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이 시절 한참 미학관련 서적들을 보고 있어서 ‘미(美)란 무엇인가’하는 명제에 나는 빠져 있었다. ‘미(美)’가 대단히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인 반면 “무의미(無意味)”란 간단하다.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간단한 용어를 어렵게 생각한 이유는 나는 혹시라도 이 용어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노자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無)’와 불교의 ‘공(空)’과도 연결되는 관념이 아닐까 매우 어렵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춘수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해석은 기우에 불과하다.
 
  이미지란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에게는 이미지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는 일정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된다. 즉 허무가 있을 뿐이다. 이미지 콤플렉스같은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나에게는 없다. 시를 말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미지를 수사나 기교의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은 하나의 폐단이다. ...허무는 나에게 있어 영원이라는 것의 빛깔이다.(「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시『처용단장』중에서 발췌)
 
  김춘수가 예시로 든 시와 시론을 보면 이미지가 부르는 관념은 중요하지 않고 ‘말의 긴장된 장난’이 중요하다.  김춘수는 다시 또 말한다.
 
  무의미 한 자유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나면 시 한 편의 초고가 종이 위에 새겨진다. 그 다음 내 의도가 그 초고에 개입한다. 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전의식(前意識)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시는 완성된다. 그리고, 나의 자유연상은 현실을 일단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비재(非在)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의 기수(旗手)가 된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여기서 비재(非在)의 세계란 김춘수가 말하는 ‘허무’를 뜻하는 것 같다. 김춘수는 왜 허무에 빠지고 관념이나 의미를 배격하게 되었을까. 시가 의미와 가치를 배격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독자는 가진다. 김춘수는 다시 자신의 시론에서 자신의 시적변용과정을 설명한다.
 
 
  나의 발상은 서구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 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 다녔다. 선험(先驗)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과 제일인(第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實在)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뒹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이데아 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용어상의 혼란을 불러왔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가 실재(實在)고 현상과 사물은 비실재(非實在)였다. 실재(實在) 즉 제일원인(第一原因)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경우 종교에서는 역설과 상징을 사용한다. 그러나 역설과 상징은 ‘말할 수 없는 것’의 실체를 체득(體得)했으나 표현방법이 마땅치 않을 경우 사용하는 우회로이다. 김춘수의 표현대로라면 “도깨비와 귀신”인 실재(實在)를 지적으로는 이해했으나 수도자가 아니어서 체득할 수는 없었고 불가지론(不可知論)과 허무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김춘수는 또 반문한다.
 
    염불을 외우는 것은 이미지를 그리는 것일까? 이미지가 구원에 연결된다는 것일까? 아니다 염불을 외우는 것은 하나의 리듬을 탄다는 것이다. 이미지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탈(脫) 이미지이고 초(超) 이미지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미지는 뜻이 그리는 상(象)이지만 리듬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뜻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이미지만으로는 시(詩)가 되지만, 리듬만으로는 주문(呪文)이 될 뿐이다. 시가 이미지로 머무는 한 시는 구원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2. 김춘수의 리듬과 주문
 
 
  김춘수가 의미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구원’을 위해 택한 방법이 리듬과 주문이었다. 리듬제일주의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음악해석과  말라르메의 ‘예술지상주의’에 연결하면 그런대로 설명이 된다. 음악은 음향과 리듬이 구체적인 사물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가사가 없이 순수한 음악만으로도 감정전달이 가능하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인간의 깊은 내적세계의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이 경우 제일 좋은 길은 시를 버리고 음악을 하면 된다. 의미와 관념이 형식상으로는 없으니 순수예술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그런데 음악을 해설하는 음악평론가들은 온갖 의미와 관념으로 음악을 설명하고 있으니 음악의 내면에 의미와 관념이 없다는 주장도 따져 보아야 할 명제이다).
  리듬이 아닌 주문(呪文)이라는 용어에 이르면 좀 복잡해진다. 주문에는 의미와 관념과 리듬이 같이 결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리듬은 음악으로 귀속되니까 이를 피하기 위해 주문을 말한 것 같다. 김춘수가 주문(呪文)을 얻으려고 시도했다는 시를 소개해보자.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하늘 수박은 올리브 빛이다.
  바보야,
  바람이 지는가 자는가 하더니
  눈이 내린다 바보야,
  하늘 수박은 한 여름이다 바보야,
  올리브열매는 내년가을이다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이 바보야,
  (시「하늘 수박」전문)
 
  주문(呪文)이란 주술적(呪術的)인 작용을 낳게 하기 위하여 입으로 외는 글귀이다. 원시종교에서 보편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데 지금도 무속적(巫俗的) 의례에서 무녀들이 주문을 외워 초혼(招魂)과 강신(降神)을 한다. 동학과 천도교(天道敎)에서 심령(心靈)을 연마하고 한울님(하느님)에게 빌 때 외우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등도 주문이고 넓게는 기독교의 ‘주기도문’도 주문이다. 모두 강한  의미와 관념을 가지고 있고 이때의 리듬은 의미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의미와 관념을 배격하고자 하는 김춘수가 이런 의미의 주문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그는 불교의 ‘만트라’를 염두에 두었을까.  신주(神呪)·밀주(密呪)·밀언(密言) 등으로도 번역하는 ‘만트라’는 신들을 부르는 신성하고 마력적(魔力的)인 어구이다. 원래는 뜻이 있으나  중국·한국·일본에서는 산스트리트어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를 음사(音寫)하여 표현한다.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같은 만트라가 이의 대표이다. 산스크리트로는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삼가테 보디스바하)인데 마법사고로는 발음의 특정한 톤과 음정이 발하는 파(波)의 에너지가 중요하다. 진언밀교의 수도자들은 이 파(波)의 에너지가 다른 차원의 에너지와 정보와 공명해서 다른 차원(세상)의 지혜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다.
  김춘수는 시(詩)란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김춘수의 다른 시나 시론과 산문을 보면 구원이 있다고 믿은 주문(呪文)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공부한 흔적은 없다. 그는 막연히 주문이란 음악적인 리듬을 근간으로 하고 종교제의에서 사용하는 형식이니까 시의 시원(始原)성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김춘수는 시론에 관한 글「자유시의 전개」에서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해 자유시와 산문시의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行)은 저마다 리듬과 의미와 이미지의 중량(重量)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 그 중량은 밸런스가 잡히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쪽에 부담이 너무 커지거나 하여 저울대가 기울게 되면 시 전체의 분위기를 깨뜨리게 된다
 
  나는 이 말에 동감을 한다. 김춘수의 생각과 같이 시작(詩作)은 '리듬과 이미지와 의미’를 동시에 고려하여 이루어진다. 시의 중요한 세 가지 구성요소는 상호간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대도 김춘수가 의미와 이미지를 죽이고 리듬으로서 시를 바라보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김춘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꽃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 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新婦)여.
  (시「꽃을 위한 서시」전문)
 
 
  이데아 로서의 신부의 이미지는 릴케와 평계(平溪) 이정호의 시에서 얻은 것이다. 이 비재(非在;신부)는 끝내 시가 될 수 없는 심연(深淵)까지 나를 몰고 갔다. 그 심연을 앞에 하고는 어떤 말도 의미의 옷이 벗겨질 수 밖에 없다.  평계(平溪)의 침묵을 단지 나는 그의 게으름으로만 돌리지 못한다. 나는 이 시기에 어떤 관념은 말의 피안에 있다는 것도 눈치채게 되었다. 나는 관념공포증에 걸려들었다. 말의 피안(彼岸)에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앞에 서는 말이 하나의 물체로 얼어붙는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김춘수가 고민한 문제를 나도 겪은 적이 있다. “말의 피안”에 있는 관념, 즉 이데아나 형이상학적 실체를 드러내고자하는 사람은 말을 버려야 한다. 비트켄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하여야 한다’라는 명제를 드러낸 적이 있다. 전기 철학인 ‘언어그림이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으로 그 의미를 명확히 도출할 수 없는 명제에 관해서는 ‘그림’(이미지)으로써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침묵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선가(禪家)에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을 말한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 개인(존재)은 선택을 해야 한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해서 불가의 깨달음으로 가던지, 제한된 언어의 제약 내에서 주어진 수단을 다해서 자신이 아는 바를 표현해야 한다. 불가에서는 오도송(悟道頌)같은 형식으로 역설과 이이러니를 통해 피안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물의 제일원인을 믿는 신비주의자들은 상징으로서 이 ‘침묵의 자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우연히 ‘무한의 침묵’의 무게를 엿보았으나 근기(根氣)가 약한 나 같은 사람은 시가 무서워져서 십년동안 절필을 하게 된다. 이 선택에서 김춘수는 의미와 관념이 무서워져서 리듬으로 도망가고자 했다. 수도자들은 온 몸으로 밀고나가는 수행에서 이 세계를 감당하지만 김춘수는 말 대신 리듬으로 우회하고자 했다. 김춘수는 만년까지 지신의 신념인 무의미시론을 끌고 가지 못했다. 시에서 언어의 리듬만 가지고는 시라는 전체얼굴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의미시의 주요 근거인 리듬에 대해 더 생각해 보자. 시가 산문과 다른 점은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산문자체도 리듬이 있지만 시는 리듬의 형식이 더 도드라진다. 인류의 태초에 발생한 문학이 운문이었고 주문들이 리듬의 형식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리듬은 언어의 원초적인 속성을 지닌다. 언어의 리듬에 대하여 옥타비아 빠스의 생각을 들어보자.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단어들은 어떤 리듬의 원리에 따라 서로 모이고 흩어진다. 만일 언어라는 것이 비밀스러운 리듬에 의하여 지배되는 구(句)가 끊임없이 변전(變轉)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리듬의 재생산은 우리에게 말을 다스리는 힘을 줄것이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활과 리라』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이 세계의 운동이 리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물리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경험으로 알고있다.  하루는 밤과 낮으로 깜박이며, 일년은 四時로 깜박이며, 지구 세차운동으로 황도의 별들은 26,000년을 주기로 위치를 바꾸어 시야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결국 시간의 리듬이다. 태양과 달의 운동은 지구생명들의 활동과 휴지, 각성과 수면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바다의 썰물과 밀물은 리듬으로 해안선에 도착한다. 시간(time)의 어원이 조수(tide)라고 한다. 원시인간들이 바닷가의 물고기를 먹고 살았을 때 몸으로 부딪친 사물은 조수였다. 자연의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이 어려웠다. 인간도 자연의 리듬이다. 지구에서 목숨을 받아 꽃처럼 피었다가 어둠으로 진다. 결국 긴 시간 속에서 리듬으로 깜박이는 존재다. 긴 리듬과 짧은 리듬이 우리의 심장과 영혼을 흔들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희로애락도 리듬의 변화를 탄다. 거시세계가 아닌 미시세계에서도 원자와 분자와 아원자들이 진동한다(리듬으로 춤춘다). 사물은 춤추면서 파장을 만들어내는데 전자기파와 음파, 파도등의 물결파(리듬파)는 시공을 가득 채우면서 물질과 물질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시각 청각 촉각에 파로 전달된 에너지차이를 뇌가 인식한다. 정보의 결합은 한편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작은 이야기의 결합이 큰 이야기의 이미지와 꿈을 만들어낸다. 세계가 이런 모습이니 사물의 모사인 언어가 리듬을 갖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김춘수가 리듬에 주목한 점은 이해가 된다. 언어의 보다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고자 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듬으로 ‘언어의 피안에 있는 형이상학적 상태’가 전달되리라 생각한 것은 방향이 잘 못 된 것 같다. 김춘수가 시도한 언어의 리듬이 제사장과 사제들이 추구한 주문(呪文)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 수박」에서 드러낸 반복어귀가 주문(呪文)의 비밀리듬을 가지고 있을까. 반복어귀가 감추어진 세계의 리듬과 공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나에게는 드러난 시의 평범한 리듬이 보일 뿐,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전체성을 암시하는 리듬이 느껴지지 않는다.
  과학과 경험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직관에 의해 먼저 가설과 이론이 자유롭게 세워진다. 그러나 천재의 사고실험을 거친 이론이라도 실험과 검증에 의해 입증되어야 전제아래서의 진리로 인정받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직관에 의한 사고실험의 소산이었으나 태양을 지나는 빛의 속도가 굴절됨이 실험으로서 검증되고서야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마찬가지로 김춘수의 리듬과 주문에 의한 시 이론이 성립하려면 리듬만으로 충분한 시가 있어야 한다.
  음악내부에서도 리듬과 더불어 음정과 화음이 곁들여져야 음악의 형식이 완성된다. 리듬만으로 이루어진 타악기의 연주가 음악의 깊은 세계를 드러내기에는 단조롭지 않은가. 
 
 
 3. 이미지(Image)와 김춘수의 서술이미지
 
  이미지(Image)란 사전적 정으로는 감각기관에 대한 직접자극으로 얻어진 정보가 아닌 상기(想起) ·상상(想像) ·사고(思考)를 통해 마음속에 떠오르는 영상(映像)을 말한다. 시에서는 상상(想像)을 통한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상(像)을 주로 언급한다. 이미지는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비유적 이미지에 수사학에 말하는 직유, 은유, 상징, 알레고리, 신화, 우화등이 포함된다. 사유(思惟)와 표현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신비평가(新批評家)들은 수사를 의미론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문학과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보았다. 수사는 사유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언어장치이다. 의미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표상이미지를 풍부하게 한다.
  개별 사물은 서로에게 대립되면서 고유의 성질과 형상을 가지고 있다. 존재론적 입장에서는 사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과학은 사물을 수(數)와 양(量)으로 환원해서 사물간의 추상적 관계를 만들어 내고 인간에게 유용한 방식으로 사물을 다룬다. 시(詩)는 사물의 동일성(同一性)을 드러내어서 현실에 없는 가능성을 세계를 만들어 놓고 즐거워한다. 양자 모두 사물에 대한 인간의 투사와 제어를 목표로 한다. 모두가 기호인데 과학은 수(數)를 시는 언어(이미지)를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 두 방식 모두 사물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드러내 인간의 인식에 자유를 부여하고 현실해석력을 높인다.
  예시를 들어 구체적으로 이해해보자. 흙 1kg과 물 1kg은 분명히 다른 사물이지만 1kg이라는 추상적 성질에 의해 동일한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로 물 1kg의 무게를 흙1kg으로 지탱할 수 있다는 통찰이 나오고 제방을 쌓는 건축가는 사물을 다루는 지혜를 얻는다. 피타고라스는 이러한 수의 이데아적 성질이 만물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언어의 세계에서  ‘수선화’와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존재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강가의 수선화이다’라는 은유가 두 사물이 각자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연결된 다른 존재의 속성을 드러낸다. 다른 존재의 속성이란 여자가 수선화이고 수선화가 여자인 가능성의 세계이지만 형이상학자들은 근본이 같다고 생각한다. 불가는 연기에 의해 두 사물이 서로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플로티누스는 사물의 제일원인인 일자(一者)의 다른 표현으로 보았다. 이는 피타고라스가 수(數)로 사물의 보이지 않는 통일성의 관계를 직관하고 이를 실체로 본 속성과 같다. 이름을 달리 했을 뿐 ‘사물의 보이지 않는 힘과 관계’에 대한 전체성에 대한 생각은 동서양이 그리 다르지 않다.
  시인들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강가의 수선화이다’라는 A=B의 세계가 자신이 새로 창조한 세계라고 믿는다. 양자는 각자 상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존재(사물의 제일원인)의 개별적 드러냄이가. 시인은 현실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수사적 이미지의 세계로 드러냄으로서 새 방식으로 세계모습을 창조한다. 낭만주의자들이 시인의 이러한 상상력(Imagination)을 신의 창조에 비견한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이유이다. 
  수사적 이미지의 능력과 비유를 김춘수는 왜 포기하고 서술적 이미지에 기대고자 했을까. 다시 김춘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나는 시에서는 충분히 구체적이고 싶다. 맛있는 담배(문맥상 구체적인 현실의 비유이다)를 실컷 피우고 싶다. 관념을 말하고 싶지 않다. ... 그대로의 주어진 생을 시에서 즐기고 싶다. 관념 과잉상태인 실제의 내 생활에 어떤 환기장치, 또는 어떤 균형감각을 회복시켜주는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내가 만드는 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관념을 배제하기 위하여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자. 그 것은 일종의 묘사절대주의의 경지가 된다. 설명을 전연 배격한다. 설명은 일종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가치관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회의주의가 되기도 하고, 현상학적 망설임(판단중지, 판단유보)의 상태, 판단을 괄호안에 집어넣는 상태가 된다. (시론 「대상의 붕괴」에서 인용)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시「눈물」전문)
 
  김춘수는 설명에서 ‘형이상학적 관념’을 배제하기 위하여 서술적 이미지를 쓴다고 하였다. 형이상학에 대한 불가지론과 회의주의자인 태도에 의해 형이상학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하겠다는 입장도 이해 할 수는 있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관념은 비유적 이미지에서만 드러나는 것일까. 서술적 이미지에서는 형이상학적 관념은 사라지는 것일까. 피안에 이르는 주문(呪文)이라 일컬어지는 반야심경의 부분을 보자.
 
  이 모든 사물은 그 성질이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
  시각의 영역도 없고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고 또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없어짐,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呪文)을 말해주니, 주문은 곧 이러하다.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공(空)이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공의 상태를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라는 서술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서술적 이미지가 관념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이상하다. 그렇다고 시에 대해서 고민한  김춘수가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의 능력을 모른 것도 아니다. 다음의 시를 예로 들어 김춘수는 시의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梅嶺花初發 매령화초발     매화고개엔 꽃이 피기 시작했으나
天山雪未開 천산설미개     천산의 눈은 아직 녹지 않았겠지
雪處疑花滿 설처의화만     눈 덮인 곳에도 아마 꽃은 만발하여
花邊似雪廻 화변사설회     꽃 주변에는 눈이 빙빙 돌겠지
因風入舞袖 인풍입무수     바람이 춤추는 무희의 소매 속으로 들어와
雜粉向妝臺 잡분향장대     온갖 분가루가 그녀의 화장대에 어지러우리
匈奴幾萬里 흉노기만리     흉노의 침입은 이미 수만리나 진군하여
春至不知來 춘지부지래     봄이 이르렀어도 봄이 왔음을 알지 못하리라
 
  (「의미에서 무의미까지」에는 원문만 있는데 雪이 모두 雲으로 표기되었다. 대구대학교 중문학과 전영란교수의 도움을 얻어 본래대로 雪로 바꾸고 해석을 새로 했다. 매화와 눈의 대비가 봄과 흉노의 침입으로 인한 나라형편의 어려움을 은유해서 시의 구조가 명확하다. 天山은 지명인데 이 시기에는 흉노의 점령지였다 한다. 김춘수 시론전집에도 誤記로 되어있어서 눈 밝은 사람한테 흉잡힐까 아쉬웠다)
 
  당 고종 때의 시인 노조린(盧照鄰)의 오언율시 「매화락(梅花落)」이다. 끝의 두 행을 빼고는 나머지 여섯 행이 모두 이미지로 되어있다. 요컨대 매화(梅花), 설(雪), 무수(舞袖), 분(紛) 장대(妝臺)등이 그리는 정경은 아주 화려하고 관능적이다...........이러한 이미지의 생태적 다양성및 다의성(多意性)은 산문의 진술(Statement)이 가지는 정확성과 비교할 때 매우 반 산문적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개념전달(산문의 경우처럼)과는 전연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즉 〈이미지의 생태적 다양성및 다의성(多意性)〉은 시(詩)의 것이다. 시는 이리하여 개념을 넘어선, 사물의 생성한 개성적 파악을 위하여 이미지로 말을 하여야 한다. 시는 곧 이미지라고도 말할 수 있다......이미지는 결국 그 생태면이나 기능면에서 볼 때 〈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데에도 전 우주가 필요하다(폴 클로 델)〉는 그 감각 및 상상력과 잇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인은 그 감각및 그 상상력을 보다 서정적으로 말한다. 즉, 〈낙엽 한 잎에 우주의 가을을 느낀다〉고.
(시론「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데에도」에서 인용) 
 
 
  〈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데에도 전 우주가 필요하다〉와 〈낙엽 한 잎에 우주의 가을을 느낀다〉는 구절은 모두 작은 사물에 비유한 큰 관념과 의미(우주적인)를 전달하고 있다. 예로부터 명시의 구절이라고 알려지고 고전이 된 시다. 김춘수는 왜 시의 관념과 의미를 지우려고 했을까. 기존의 방법으로는 이런 시의 깊이를 뛰어넘을 수가 없어서 방법상으로만 새로움을 추구했던 것일까. ‘무의미 시’라는 시가 지금까지 한국시사(詩史)에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임에는 틀림없다. 김춘수는 이 주장으로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새로운 시창작 방법이라는데 누군들 호기심이 일지 않겠는가.
  이 아이디어가 김춘수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미 미술계에서 다다이즘 운동이 있었고 이들의 슬로건인 ‘무의미함의 의미’에서 용어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다다에서는 ‘무의미함의 의미’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여 문맥과 문맥이 전혀 맞지 않는 글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거나 무형식으로 비현실이나 초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현실에서는 ‘무의미’일지 모르나 다른 현실에서는 ‘의미’인 상태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김춘수도 기존 시이론에서는 무의미일지는 모르나 ‘리듬과 주문’의 세계에서는 ‘의미’일지도 모르는 시를 추구함으로서 미술에서의 다다운동과 어느 정도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다다가 기존의 예술적 감수성에 반기를 들고 의도적으로 예술을 불쾌한 것으로 표현한 반면 김춘수는 음악적 감수성에 기대고 대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점에서 다다와는 다르다. 오히려 근래의 한국 ‘미래파’시인들이 변태적 성(性)과 파괴의 추함을 대상으로 삼아 무의식아래 욕망을 드러낸 수법이 다다와 비슷하다.  김춘수는 초기시에 릴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릴케는 시에 관념과 상징의 의미를 많이 사용했다. 김춘수가 릴케와 흄의 시를 대비해서 설명한 대목이 있다.
 
    죽음은 위대하다./우리는 웃고 있는 그의 입이다./우리가 생명의 한 복판에 있다고 생각할 때,/그것은 우리의 한 복판에서/감히 울기를 한다(릴케의 시 부분)
 
 
  가을 밤의 싸늘한 감촉-/밖을 나섰더니./얼굴이 붉은 농부처럼/불그레한 달이 울타리를 넘어다 보고 있었다./나는 말을 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주위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어/되회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희었다.(T.E.흄의 시 부분)
 
 
  릴케의 상기 시는 ‘예지’를 작접으로 토로하고 있다.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그의 인생관적 문제성에 많이 힘입고 있는 것이다. 릴케와 같은 시를 느낄 수가 있다. 상징적인 태도라 할까? 이에 비하여 T.E.흄과 같은 시인의 시를 대할 때 시를 직접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상징성이 없는 대신 시 그것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김춘수 시론 전집1」에서 인용)
 
 
  김춘수는 관념/의미를 벗어던지고 사물이 주는 직접적인 감각과 심미를 추구하고자 했다. 김춘수는 하이데거가 휠덜린의 시를 대상으로 쓴『휠덜린과 시의 본질』을 말한다. 그는 하이데거가 휠덜린의 노트에서 “모든 재보財寶중에서 가장 위험물인 언어”라는 대목을 분석한것을 인용한다.
 
  언어를 존재를 위협하는 ‘위험물’로 보는 동시에 언어가 없으면 세계가 없는 것이 되니까 언어를  우리가 가진 재보들 중의 하나의 ‘재보’로 본다. 시작과 언어의 이상이 같은 변증법적 운동은 그것들이 지양되어 마침내 하이데거의 시의 본질인 ‘시란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 된다.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한마디로 존재자의 덧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 역시 하이데거에 있어서와 같이 존재(고향)의 빛에 대한 갈망을 내포로 지니고 있는 하나의 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연(존재자-제행무상)과 내포(존재)의 긴장이 훌륭한 시를 낳게 한다.(「김춘수 시론 전집1」에서 인용)
 
  언어에서는 의미론과 존재론은 서로에게 의지한다. 의미는 존재가 없으면 피상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고 존재는 언어(혹은 존재자)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사물이나 명제(혹은 진리)에 대해 정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과학이나 논리철학의 태도이다. 환원이 그 방법론인데 부분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으나 사물과 상황이 관계하는 전체성은 훼손을 받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여기서 나왔다. 김춘수가 언어에 대해 고민한 대목이다. 시가 형이상학적 존재(신, 불교의 ‘空’, ‘절대정신’)을 대상으로 하면 불립문자(不立文字)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벽에 부딪힌다. 그는 또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를 들어 언어로 무엇을 설명하려고 할 때 언어는 그 대상의 진상을 놓친다고 보았다. 시인이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이 문제에서 나는 십년간 침묵을 했고 김춘수는 시를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미지(관념)을 포기하고자 했다. 
 
  “외연(존재자-제행무상)과 내포(존재)의 긴장이 훌륭한 시를 낳게 한다”라는 김춘수의 말을 생각해보자. 외연(언어)으로 내포(존재)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문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수사를 사용했다. 은유와 상징은 형이상학적 함의를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기법으로 여겨져 왔다. 바이블이나 불경에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와 ‘불성’을 드러내기 위해 비유를 사용해 왔다. 그 비유는 시인과 수도자들이 본인의 개성으로 전체성과 만나는 자리에서 항상 새롭게 이루어져 왔고 독자는 새로운 비유 속에서 드러나는 이 세계의 전체성에 감명을 받는다.  김춘수는 문학이 철학이나 과학 혹은 종교와 다른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가 부딪힌 문제는 문학의 문제가 아닌 형이상학의 문제였다. 절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수도자처럼 언어를 버리고 수도원이나 사막의 동굴로 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비유를 창조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지적인식의 한계에서 시인은 정면돌파를 해서 새로운 자리와 상황을 보여주는 일이 시인(느끼고 표현하는 앎의 사람)의 임무다. 시인의 역량이 부족하면 나같이 도망가거나 김춘수식의 우회가 등장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김춘수는 은유와 상징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서술적 이미지로 갔고 산문이 될 염려가 있기에 리듬을 중요시한 시적 전략을 세웠다. 
 
 
  
  4, 상징계에서 상상계로의 퇴행
 
 
  의미와 관념(상징계)에서 주문 꿈(상상계)로의 퇴행을 한 김춘수의 시적 변용은 무엇을 의미할까. 라깡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을 통해 사회적자아를 얻는다고 한다. 상징이란 금기와 법 질서로 표상되는 언어의 세계(의식)이고 상상계란 꿈,욕망을 이루어진 언어이전의 세계(무의식)이다. 언어(현실)에 절망을 느낀 사람은 언어를 극복한 세계(초월. 형이상학)로 간다. 그러나 초월의지가 없는 사람은 유토피아(理想)를 상상계(꿈)에서 찾는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상상계에서 유토피아를 찾는다. 그는 상상의 이미지로 자신만의 제국을 세우려하고 현실(상징계)에서 얻지 못한 만족을 얻는다.  상상계의 의식에 비친 거울속의 자아는 이상회된 자신의 형상이며 자아의 ‘原象’이다. 시인들은 이상화된 세계 즉 내 아름다운 모습이 투영된 세계를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이니 ‘나르시스’의 거울에 갇힌 자이다.
  시란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언어)의 세계로 떠오른 것이다. 시는 꿈처럼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언어로 구성된 세계이다. 언어는 개인의 경험이전에 선재(先在)한 문화이며 종족과 집단의 의식과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개인은 태어나서 꿈속에서 살다가 집단의 상징질서(언어)를 받아들여 문화의 지혜와 보호 속에 산다. 언어가 사물과 세계의 상징이지만(인류의 시야가 관계하고 해석한 상징이겠지만) 언어는 자연(실재계)과 분리되어 있다. 언어는 자연(실재)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진실에서 절망한다. 자연(실재)이란 언어로 드러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꿈이며 환상이며 동시에 상징이다. 동물은 언어(꿈과 환상)가 없기에 우울증이나 자살이 없다고 한다. 인간만이 자연(실재)을 언어로 왜곡해서 보기에 언어는 축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하다.
  김춘수는 언어의 의미와 관념(상징질서)를 버리고 초월하는 대신 리듬과 주문이 있는 상상계로 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정신에서 이상세계란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바다가 왼 종일
  생쥐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 따끔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늑골사이 늑골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번
  생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 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시「처용단장」제 1부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중 부분)
 
 「처용단장」을 김춘수의 시의식이 최고로 반영된 작품으로 친다. 그가 주장한 무의미시론이 잘 반영되었는지는 판단을 유보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도 의미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처용단장」이라는 제목부터가 이미 신화적 상징을 차용하고 있다. 신화적 상징의 제목과 본문에서 유년이 본 사물이미지의 간격을 긴 시간으로 벌려놓고 이미 독자에게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김춘수 식이라면 “처용”이라는 상징인물과  “바다” “생쥐” “느릅나무” “거머리” “베꼬니아” “개동백” “눈”은 의미관계가 없는 ‘넌센스’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구조에 ‘무의미’라 없다. 무작위로 떠 있는 하늘의 별을 보고도 마음에 형태를 그리고 “사자자리”와 “황소자리”같은 형상이미지를 붙이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신화가 된 이 정신구조물은 아직도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정말로 ‘무의미’를  노렸다면 제목을 “처용단장”같은 신화이미지를 차용하지 않고 ‘크레인’나 ‘자동차’를 붙였어야 했다. 그래도 독자는 또 의미를 창출한다. 상상력이 좋은 전문독자는 “김춘수의 ‘자동차’시에 나타난 유년의 바다이미지와 기계문명과의 대상관계이론을 통한 시의식 분석”같은 제목의 논문을 쓸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비약해보니 시란 참 재미있는 물건이다. 의미 시와 무의미 시가 자리를 바꾸고 창조와 해석이 뒤섞여서 저마다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시가 꿈이며 환상이기 때문이다. 꿈의 해몽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는가. 김춘수도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소회를 밝힌 대목이 있다.
 
  이미지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피안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즉 사물의 의미를 탐색하는 태도다. 이미지를 순수하게 사용하는 것은 사물을 그 자체로서 보고 즐기는 태도다. 이 두 개의 태도가 나에게 있어서는 석연치가 않다. 혼합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의식한다. 이러한 자의식은 시작에 있어 나를 몹시 괴롭히고 있다. 이러한 자의식이 없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의 시는 비유가 되는 일이 많다. 부분적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이른바 택처와 스트랙처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끝내 휴먼한 것을 떠나지 못한 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이 휴먼한 것을 벗어나고 싶은 이를테면 해방돠고 싶은 원망은 늘 나에게 있다. 말하자면 꿈과 같은 상태-라고 해도 정확한 기술은 못된다-즉, 꿈에서 현실적인 의미를 공제해 버린 그런 상태에 대한 원망이 있다. 시가 완전히 난센스가 되어 버린 그러한 상태-초현실주의 어떤 시에서 그런 상태를 본 일이 있다. 
(「김춘수 시론 전집1」에서 인용)
 
  휴먼(인간)의 의식이란 의미와 가치를 사물에 투영해서 자신의 자의식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의식을 말한 것 같다. 인간의 정신과 의식은 뇌 속에 있으면서도 뇌 속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과 의식은 발생학적으로는 인간이 외부환경에 적응해서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졌다. 정신은 개인의 외부에 일어나는 사건과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 감각을 수용하는 동시에 경험과 기억을 환경에 투사한다. 이 과정에서 정신의 ‘지향성’이 발생한다. 지향성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다. 이 때 인간의 마음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물(욕망과 관계가 있다)이 의미로 다가온다. 이 정신의 ‘지향성’은 매우 강력해서 지금 여기의 현실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수, 이데아 , 형이상학)까지 지향한다.
  정신의 지향성이 인간의 내면으로 향할 경우 현실에고를 벗어난 다른 정신차원의 자신(Self)를 경험하기도 한다. 김춘수가 추구한 무의미는 현실에고가 지향하는 ‘의미’를 벗어나서 무의식세계의 꿈이나 초현실세계의 이미지가 주는 ‘새로움’이나 ‘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인간에게 즐거움이나 호기심 또는 “원망”을 유발한다면 무의미 일 수가 없다.
  무신론인 과학자에게(「만들어진 신」을 쓴 리차드.도킨스가 생각난다)에게 신(神)이란 김춘수가 말하는 넌센스(무의미)이지만 독실한 신자에게는 최고의 의미이다. 그의 종교적 욕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건대 김춘수가 추구한 시세계에 대한 용어인 "무의미“는 용어를 잘못 선택했다. 그의 시론을 읽어보면 시의 언어기능과 형이상학적 관념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무의미 시작(詩作)이라는「처용단장」을 주의 깊게읽어보면 그의 시에 대한 욕망과 열정이 느껴진다. 이토록 시에 대한 집착을 보인 시들이 ‘무의미’ 시라니? 내게는 다른 형태의 의미(초현실세계에 대한 '원망'으로서의 의미)를 추구한 시들로 판단된다.
 
 
   5. 김춘수의 ‘하나님’과 형이상학
 
  하나님은 언제나 꼭두새벽에
  나를 부르신다.
  달은 서천을 가고 있고
  많은 별들이 아직도
  어둠의 가슴을 우비고 있다.
  저 쪽에서 하나님은 또 한번
  나를 부르신다.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 가까이
  가끔 천리향이
  홀로 눈뜨고 있는 것을 본다.
  (시「잠자는 처용」전문 )
 
  김춘수는 「잠자는 처용」은 이 시와는 직접 관계가 없으며 시적 트릭을 생각하고 붙였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시가 무의미시가 되지는 않는다. 나(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언어의식에 비추어 다시 의미를 부여한다. 나(독자)는 다시 해석한다. “잠자는 처용”은 시인자신의 투사이며 시에서는 “천리향“의 이미지로 들어났구나. "하나님”이라는 형이상항적 실체는 화자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데 화자는 “잠자는 처용”처럼 현실세계에서 갇혀있다는 얘기네. 그의 무의식속의 영혼(Self)은 “천리향(千里香)”처럼 눈을 떠서 하나님의 소명을 보고 있다는 얘기네.
  형이상학이나 구원에 대해 그토록 고민을 많이 했으면서도 김춘수가 시에 표현한 ‘하나님’이나 예수의 위치는 다소 명확하지 않다. 시집 『남천』에서 ‘예수를 위한 여섯 편의 소묘’라는 소 제목하에 예수에 관한 시 「마약」「아만드 꽃」「요보라의 쑥」「세 째번 마리아」「가나에서의 혼인」「겟세마네에서」를 선보이고 있다. 김춘수는 기독교나 예수에 경도되었으면서도 현실적로는 교회를 가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원은 제도권의 교회나 종교 이데올로기에 있지 않다고 본 것 같다. 그의 수필을 보면 말과 행동을 같이 한 예수의 양심과 십자가에 박혀서도 고통을 인내한 초인적인 모습이 김춘수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성서의 기록에는 자기의 육체에 박히는 못의 그 아픔 때문에 예수가 의식을 잃었다고는 되어 있지 않다. 그는 까무라치지 않았고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리도록 까지 하느님을 찬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인적인 능력이라고 하겠는데, 이 장면을 상상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비유로 보이기도 하고, 다른 목적을 위한 허구로 보이기도 한다. (시론『왜 나는 시인인가』)
 
 
  예수의 목에는 「유대의 왕」이라고 쓰인 호패가 차여져 있다. 골고다 언덕의 좁은 꼬부라진 길바닥은 당나귀의 분뇨로 범벅이 돼 있다. 경사진 오르막도 있다. 피와 땀이 온 몸을 짓이기고 흙먼지가 눈을 뜨지 못하게 한다. 짊어진 십자가는 무게가 75kg이나 된다. 힘에 부대껴 쓰러지면 그 때마다 누군가가 침을 뱉고 돌을 던진다. 이윽고 느린 박자로 해가 기운다. 멀리 골란 고원을 저녁 이내가 스쳐간다. 이내는 땅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발이 없으니까.(시「계단을 위한 바리에떼」부분)
 
  예수가 숨이 끊어질 때 천둥은 치지 않고 느티나무 큰 가지도 부러지지 않았다. 골고다 언덕에는 느티나무가 없다, 해는 너무 달아서 흰 빛을 내고 있다. 예루살렘의 하늘에 그날 밤 늦도록 무지개가 서지도 않았다. 다란 갈릴리 호숫가의 뜨거운 햇살이 작은 풀꽃(아만드 꽃이라고 했던가,) 몇 포기 서쪽을 바라고 시들게 했다. 그 움푹 파인 언저리 너무 고요하다. (시「의자를 위한 바리에떼」부분)
 
  인간의 감정은 감정이입(Empathy)의 능력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우리는 고문 받는 자의 아픔을 보고 내 아픔이 아닌데도 같은 종류의 아픔을 느낀다. 상상이니까 강도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의 심정은 개인의 과거경험과 연결되어 동일한 심정을 느끼게 한다. 영화를 보고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같이 공감하는 능력은 인간이 가상세계를 현실같이 느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최근에 거울 신경 세포(mirror neuron) 가 뇌 안에서 발견되어서 과학자의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감정이입의 과학적인 구조와 설명이 가능해 졌다. 김춘수는 신약성경의 스토리가 이성에 반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상징이나 우화로서 진실이기를 바란다. 이런 바람과 감정이입이 위 시편들을 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앙과 종교는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인간의 실존에 필연이면서도 종교만큼 많은 논란을 볼러 오는 주제도 없다. 내 견해로는 종교에서의 구원은 단순히 제도권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믿는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영지주의(Gnosis)는 고대 그리스어로 ‘앎, 깨달음,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의 뜻인데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實在)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의 도움(예수와 같은 신성의 지식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에 의해 물질의 악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인 ‘그노시스’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노시스는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이 모든 물질과 육체에 깃들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구원을 13세기 독일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는 모든 사물 속에서 신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심정은 마음 속에, 그리고 온갖 노력 속에, 그리고 사랑 속에 신을 항상 현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춘수가 신비한 인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구원을 얻었다는 기록과 증거는 없다. 그는 기독교의 상징과 예수의 고난에는 매력을 느끼고 작품을 남겼으나 이는 자신의 육체적 한계상황을 초극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사로서 그렸을 뿐, 구원에 대한 갈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잠자는 처용」에서 든 “천리향(千里香)”의 이미지로 암시되는 정도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적 이미지를 추구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감을 얻고 무의식 중에 그 영감을 시로 옮기기도 한다.  사물=신이라는 범신론적인 깨달음이 아름다운 시로 나타나 기독교적인 좁은 울타리의 해석이 아닌 확장된 신의 이미지가 나타난  시가 다음 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인도의 “브라만”이나 불교의 “공(空)”으로 바꾸어도 이 시는 뜻이
훼손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신비주의 생각을 이 시는 온전히 반영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줄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시「나의 하나님」전문) 
 
  시인이란 언어에 대한 고민과 깨달음 앞에 선 자일까? 수도자나 비의를 추구하는 자는 오히려 시적 표현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석가가 일생동안 말한 불법의 설명도 모두 은유와 알레고리 상징을 통한 시적 비유였다. 예수가 ‘하늘나라’를 설명하는 방법도 모두 비유였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의 구체적인 은유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을 입체적으로 향상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도 ‘하나님’이라는 일자(一者)를 새로운 비유로 독자에게 제시해서 지금까지 없던 시적세계를 만들어 냈지 않은가.
   
 
  6.새로운 문화환경과 미래시
  
  시란 고대에 노래였다 그런데 지금은 노래는 사라지고 회화적 이미지를 위주로 하는 그림이 되었다. 회화는 이미지와 비유하자면 색채와 빛깔의 음악으로 이루어진다. 시도 음악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음악성이 높을수록 시의 본질이나 고대원형에 더 가깝다. 사람의 뇌는 좌반구가 언어를 다루고 우반구가 노래와 음악을 담당한다고 한다. 시란 그러므로 좌.우 뇌를 동시에 사용해서 만들어내는 복잡한 정신활동이다. 김춘수가 관념과 의미를 포기하고자 한 것은 적극적인 해석으로는 ‘시의 음악’에 복귀하고자 하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리스시인들이 수금을 타며 시적영감에 불타서 시를 노래하는 시대가 아니다. 의식은 더욱 복잡해지고 사물에 대한 정보와 해석은 고도의 추상을 요구한다. 추상의 정점에 수학과 시가 서있다. 수학의 방정식은 날로 다차원의 세계인식을 그려내고 있다(예를 들어 세계를 ‘초끈 이론’으로 해석하는 수학공간은 11차원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시가 확장된 세계해석모델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마도 더 복잡한 언어적 은유와 상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정신의 긴장이 싫어서 고대의 리듬이나 음악으로 시를 한정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문화에서는 일종의 퇴행이다. 이를 음표와 화음이 많은 클래식을 해석하기 싫은 청중이 동요나 민요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비약적인 해석일까. 음악은 시에 필요하다. 그러나 음악과 시적상징의 의미가 다차원적으로 융합하는 시가  확장된 세계해석에 필요한(정서상의 단순한 위로나 언어의 기호놀이가 아닌) 시의 미래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 작품에서 의미를 전하는 산문적 요소를 없애고 순수하게 감동을 일으키는 정서적 요소만으로 쓴 시 소위 발레리의 ‘순수시’라는 것도 실험에 그쳤다. 김춘수가 실험한 “무의미”는 보다 큰 ‘의미’의 시에 포함되며 시는 통합예술로 진화하는 중이다. 그의 실험이 시란 무언인가의 반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는 무의미하지는 않다. 나도 이글을 쓰면서 시의 양상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의 형식이 무엇이던 간에 시의 원형 포에지(Poesie)는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문화환경에서 나타날 미래시의 형식과 내용이 나는 궁굼하다.  
 
 
 
김춘수 시인 年譜(연보)                                                           
 
 
▲1922년 11월 25일 경남 통영 출생
▲1940년 일본 니혼(日本)대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42년 일왕과 총독정치를 비방해 퇴학 ▲1946∼51년 통영중, 마산중·고 교사
▲1960∼78년 경북대 문리대 교수
▲1979∼81년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88년 방송심의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
▲시집:‘애가’(46) ‘구름과 장미’(48), ‘늪’(50), ‘기(旗)’(51), ‘인인(燐人)’(53), ‘꽃의 소묘’·‘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59), ‘타령조 기타’(69), ‘꽃의 소묘’(77), ‘남천(南天)’(77), ‘비에 젖은 달’(80), ‘김춘수 시전집’(집문당·86), ‘라틴점묘 기타(其他)’(88), ‘처용단장’(91), ‘서서 잠자는 숲’(93), ‘김춘수 시전집’(민음사·94), ‘호(壺)’(96), ‘들림, 도스토예프스키’(97), ‘의자와 계단’(99), ‘거울 속의 천사’(2001), ‘쉰한 편의 비가’(2002), 시론집 및 산문:‘한국 현대시 형태론’(58), ‘시론’(61), ‘시의 표정’(79), 수상집 ‘오지 않는 저녁’(79), ‘시의 이해와 작법’(89), ‘시의 위상’(91), 산문집 ‘여자라고 하는 이름의 바다’(93), 장편소설 ‘꽃과 여우’(97)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58), 자유아세아문학상(59), 문화의달 은관문화훈장(92), 제5회 대산문학상(97), 제12회 인촌상(98),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2004)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전임 主幹)  
[출처] 前現 주간들의 詩와 아포리즘【65】김백겸 전임 主幹의 詩와 아포리즘【47】수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자 했던 김춘수 시인【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8년 6월호(2018, June) ㅡ통호 제110호ㅡ|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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