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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가스통 바슐라르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적 상상력[스크랩]
2018년 02월 20일 16시 53분  조회:2058  추천:0  작성자: 강려
가스통 바슐라르 
바슐라르 [Bachelard, Gaston, 1884.6.27~1962.10.16]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활동분야  철학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 《부정(否定)의 철학》(1940)  


글 올린 이 / 이충이

  
  
  
본문 
  
구조주의(構造主義)의 선구자이며 시론(詩論) ·이미지론(論)으로도 유명하다. 1927년 《근사적 인식(近似的認識)에 관한 시론》으로 학위를 취득한 후 디종대학의 강사·교수를 거쳐 1940년 소르본(파리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동 대학 부속인 과학사 ·기술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4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20세기 초두, 약 4분의 1세기에 걸친 ‘물리학의 혁명’을 목격하면서 과학을 그 동적(動的)인 변화발전의 위상(位相)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이 변혁기의 과학활동에 맞는 의미를 종래의 철학이나 일상적 인식 또는 과학자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데에서 ‘과학의 철학’의 위치를 구하였다. 초기의 대표적인 저작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은 상대성이론의 비(非)뉴턴 역학적(力學的)인 성격이나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비결정론(非決定論)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통하여 현대과학에서의 인식의 양식(樣式)을 ‘비(非)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서 제시한 것인데, 이러한 파악이 《부정(否定)의 철학》(1940)에서 ‘비(非)의 철학’으로서 결실되었다. 

이상의 저작에서 과학이 초래하는 새로운 인식에 대하여 개방된 정신, 나아가서는 과학의 발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같은 자세를 볼 수 있다면 《과학적 정신의 형성》(1938)의 목표는, 그것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해’의 정신분석에 의한 배제였다. 이러한 방향은 앞서 말한 과학의 진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근저(根底)에서 교착되면서 시와 이미지의 자유분방한 역동성(力動性) 자체를 구하는 ‘4원소(元素)’에 매개된 심층심리의 분석으로 발전하였다. 이 양자를 끊임없이 ‘상보적(相補的)’으로 전개시킨 바슐라르의 사상적인 영위는 프랑스의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현대적인 의미 확립에 기여한 동시에 J.피아제와 L.알튀세르 또는 G.캉길램을 통하여 M.푸코에게로 다채로운 영향을 끼쳤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과학철학자이자 시인이며 문학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에 관한 연구서로, 바슐라르 사후 26년 만인 1988년, 딸 수잔 바슐라르의 손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보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이 근본적으로 불 물 공기 흙 네 가지 원소로 분류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른바 4원소설을 펼쳤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과 마찬가지로 불의 이미지를 고찰하고 있는 책으로, 문학 상상력에 관한 바슐라르의 기나긴 연구 도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미 있는 저작이다. 
  

1. 촛불의 미학 
  
“촛불은 혼자 탄다. 불꽃은 혼자이고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이고, 
또 그것은 혼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외로운 불꽃이여, 나는 홀로 있다. 불꽃은 소리를 내고, 불꽃은 투덜거린다. 불꽃은 괴로운 존재이다. ” 

“산다는 것은 생성하는 것,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미래를 획득하면서 진행하는 창조의 과제이다. 따라서 그는 과거조차도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닌, ‘하나의 항구적인 이마주’, 도달해야 할 하나의 미래로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하여, 상상력과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삶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소재로 하면서 빛을 얻기 위해 항상 위를 향해 타고 있는 촛불의 불꽃과 같다.” 

"결국 인생의 여러 가지 경험들, 이리저리 찢겨지고 갈래갈래 조각난 경험들을 숙고해 보건대 내가 참으로 실존의 책상에 임하는 것은 차라리 백지 앞에서, 나의 램프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어 책상 위에 펼쳐진 흰 페이지 앞에서이다. 
그렇다. 내가 최대한의 실존, 팽팽한 실존, 앞을 향해서, 보다 앞을 향하여, 
또 그 위를 향하여 긴장되어 있는 실존을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실존의 책상에서이다." 
--------------------------------------- 

노발리스가 불꽃의 수직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단장을 모두 정리해 보면, 대우주 안에서 직립하고 있는 모든 것, 수직인 모든 것은 하나의 불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動)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즉 위로 올라가는 모든 것은 불꽃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의 환위명제는 다소 그 강도를 약하게 할 뿐 아주 명백하다. <촛불의 불꽃 속에서는 모든 자연의 힘이 활동하고 있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그 자체를 구성한다. 노발리스는 이것을 역으로 <불꽃의 동물적 본성>이라고 쓰고 있다. 불꽃은 어떤 점에 있어서 벌거벗은 그대로의 동물성이며 일종의 극단적인 동물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대식가이다. 이와 같은 아포리즘들이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 흩어져 있는 단장(斷章)이 되고 있다는 것은 신념의 직접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이 깊은 몽환 상태를 체험하여 성찰하기보다는 오히려 몽상하는 것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는 몽상의 진실이다. 

  각각의 생명계는 그때 특수한 불꽃의 한 타입이 된다. 메테르링크가 번역한 일부분 가운데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나무는 꽃 피는 불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말하는 불꽃, 동물은 떠돌아다니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 노발리스, <사이스의 사도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꽃의 배설물로 표현되어 있는 특이한 페이지를 참조할 것. 우리들은 타고 있는 존재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사이스의 사도들, 제 2권, p. 216). [동서시편]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 미완성의 것으로,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동화된다.> 

------------------------------------- 

<과학의 결함을 시로 메우고 시의 결함을 과학으로 메워야 한다. - 진정한 존재의 탐구> 

<촛불은 처음부터 저 혼자서 타며 스스로 연료를 마련하기 때문에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고독하게 같은 불꽃으로 탄다. > 

<일반적으로 불은 다른 것과 융합하려고 하는 데 반해 촛불은 결코 합치려고 하지 않는다.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것, 이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 그 자체이다.> 

<속으로 애태우면서 절망과 체념을 되씹는 남녀의 마음이나 짝사랑의 그리움은 혼자 조용히 타는 것 - 촛불의 이미지> 

<몽상을 불러일으키는 이 세상 모든 사물 사이에서 불꽃은 가장 커다란 영상 요인 - 불꽃 앞에서 꿈 꿀 때, 사람이 상상한 것에 견주어 본다면 사람이 인지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즉 불꽃의 몽상가는 잠재적 시인이다. 꿈꾸는 것은 행복한 것.> 

<사람은 몽상 속에서 자신을 잃는다. 불꽃은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싸우면서 세세하고 연약한 것으로 그곳에 있고, 한편 몽상가는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채 다른 쪽으로 꿈꾸기 위해 떠나간다. 크게, 너무나 크게 꿈꾸면서, 세계에 대하여 꿈꾸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속을 명석하게 들여다보지만 그 래도 꿈을 꾼다.>  

<참다운 존재를 찾기 위해 노력할 것, 생각할 것, 언제나 생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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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불꽃이여, 나는 홀로 있다.> 

<혼자서 타고 혼자서 꿈꾸는 것 - 타고 있으면서 아무 말 없이 혼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여자, 줄 수 있는 것은 단지 고독밖에 없는, 별로 말을 하지 않는 남자> 

<고독은 사랑할 수 있고 또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에게 있어서 그 무슨 장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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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 
부서져 내리는 모래보다 가벼운 불꽃은 마치 시간 자체가 항상 무언인가 해야 할 것처럼 그 형태를 쌓고 있다.> 




2.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뿌리는 언제나 하나의 발견이다. 뿌리란 못 보는 만큼 더욱 꿈꾸게 되는 법. 실제 발견된 뿌리는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ː뿌리는 바윗덩어리이자 머릿단이고 자유자재로 구부러지는 필라멘트 같으면서도 단단한 목재가 아닌가? 


3. 공간의 시학 

"잘 말함은 잘 삶의 한 요소이다.” 
“집을 인간의 영혼에 대한 분석도구로 생각함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우리들이 집 안에 있다면, 마찬가지로 집 또한 우리들 안에 있다. 비어 있는 서랍은 상상     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생각할 수만 있는 법이다.> 

<반향의 다양성은 존재 차원에서 울림의 통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 속에 있다고 해도 조개껍질 속 같은 원초의 아득함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현상학자의 기본적인 작업이다.> 

<이젠 다락방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다락방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같은 책, 123쪽) 

<권태의 중심들이, 고독의 중심들이, 몽상의 중심들이 한데 모여, 우리들이 태어난 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추억들보다 더 지속적인 꿈의 집을 형성한다.> 

<지하실과 연결된 층계는 우리에게 언제나 내려가는 것으로 상상된다. 위층의 침실로 가는 층계를 우리들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지붕 밑 다락방으로 가는 층계는 항상 올라가는 층계이다.> 

<램프는 결코 바깥에서 불을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틈을 통해 바깥으로 새나올 수 있을 뿐인 갇힌 불빛인 것이다> 

“때로 집은 커지고 늘어나기도 한다. 그런 집에서 살려면, 한결 더 유연한 몽상이, 한결 덜 명확히 그려진 몽상이 필요하다.” 

<공간, 위대한 공간은 존재의 친구이다.> (책 속에서, 가스통 바슐라르) 

<내가 있는 공간, 나는 바로 그것이니. (책 속에서, 노엘 아르노의 인용)> 
<갑자기 방 하나가 나의 내부에서 거의 만져지기라도 할 듯이, 램프와 더불어 나와 대면하여 나타났다. 이미 나는 그 안에서 구석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덧문들이 나를 느끼고, 스스로를 닫았다. 
(책 속에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 없는 나의 生"에서 인용)> 

<내 내부에는 다시 그 공허가 펼쳐져 있었고, 나는 사막 속의 사막이었다... 
나는 더 이상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책 속에서 - 앙리 보스코, "히야신스"에서 인용)> 

<존재는 보이는게 아니다. 
아마 그것은 들리는 것일 것이다. 
존재는 그려지는게 아니다. 
그것은 無와 경계선으로 인접하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존재의 중심에 다가서면서 
그것을 확고한 것으로 발견하고 되발견할 것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들이 확정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 존재라면,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속으로 '되들어 감'으로써, 

나선의 중심을 향해 감으로써, 
우리들 자신에 더 가까이 있게 된다고 결코 확신할 수 없다. 
흔히, 바로 존재의 중심에서 존재는 방황하는 것이다. 
때로, 자신의 밖에 있으면서 존재는 확고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또한 때로 그것은, 외부에 갇혀 있기도 한다.> 

<시적 상상력의 현상학은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 존재를 표면 - 같은 것의 영역과 
다른 것의 영역을 분리하는 표면 - 의 존재로서 탐구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예민화된 표면 지대에서는 존재하기에 앞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제 자신에게는 말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존재의 표면에서는, 
존재가 스스로 나타나기를 바라고 스스로 숨기를 바라는 그 영역에서는, 
열림과 닫힘의 움직임은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자주 역전되며 
또한 너무나 주저로움으로 차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을 반쯤 열려 있는 존재이다 - 라는 표현으로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4. 몽상의 시학 

5. 불의 시학의 단편들 

가스통 바슐라르가 임종 직전까지 몰두했던 불에 관한 연구서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는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도 같은 것이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과학철학자이자 시인이며 문학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에 관한 연구서로, 바슐라르 사후 26년 만인 1988년, 딸 수잔 바슐라르의 손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보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이 근본적으로 불 물 공기 흙 네 가지 원소로 분류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른바 4원소설을 펼쳤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과 마찬가지로 불의 이미지를 고찰하고 있는 책으로, 문학 상상력에 관한 바슐라르의 기나긴 연구 도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미 있는 저작이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이 출간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딸이자 이 책(프랑스어본)의 편집자인 수잔 바슐라르가 책머리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우선 바슐라르는 불에 관한 두 저서(『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존재의 양극에서 체험되는 상반된 불의 이미지, 즉 아니마의 불과 아니무스의 불을 고찰하고자 했다. 제1부에서는 아니무스의 불을, 제2부에서는 아니마의 불을 연구하려는 것이 최초의 구상이었다. 그런데 집필하는 중에 또다른 아이디어들이 생각났고 그때마다 그것을 집필 계획에 포함시켰다. 바슐라르의 그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과 끝없는 몽상 덕분에 책은 점점 방대해져갔다. 수잔 바슐라르는 이런 아버지를 "영원한 학생"에 비유했다. 
영원한 학생이었던 아버지는 배우기를 좋아했다. 우리는 그의 저서에서 그가 유년 시절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유년 시절을 그리워했다는 표시도, 순진함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표시도 아니다. 그것은 유년 시절의 능력, 즉 몽상적이고 자유로운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경탄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배우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수잔 바슐라르, 「책머리에」 

이런 와중에 건강이 나빠진 바슐라르는 결국 제2부를 포기하고 제1부를 쓰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피닉스에 관한 '피닉스의 시학'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래서 '불의 시학' 원고는 미완성인 채로 제쳐두고, '피닉스의 시학'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슐라르는 이 책 역시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딸 수잔 바슐라르가 애초에 구상한 '불의 시학' 서론과 '피닉스의 시학' 서론 그리고 '불의 시학' 제1부에 해당하는 원고를 분류·정리·편집하여 바슐라르 사후 26년이 지난 1988년 『불의 시학의 단편들』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피닉스의 시학' 원고는 서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분실되었으므로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어 아쉽지만, 가스통 바슐라르가 임종 직전까지 몰두했던 불의 테마에 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으니, 독자들로서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불을 품은 신화적 존재들의 시적 이미지론 
이 책은 서론과 '피닉스' '프로메테우스' '엠페도클레스'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슐라르는 고대 전설과 신화 속 존재들이 가진 불의 이미지에 대한 몽상에서 출발, 상승의 의지를 가진 인간존재의 정신현상을 탐구한다. 

피닉스… 영원히 죽지 않는 새, 삶과 죽음의 변증법에서 시적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피닉스에 관한 장. 바슐라르는 유년 시절 어느 햇빛 찬란한 여름날 강가에서 물 속으로 뛰어드는 불새, 피닉스를 보았다. 불을 최초로 체험한 이 순간, 그는 세계관이 뒤흔들렸다고 고백한다. 이 장은 특히 피닉스가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우주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피닉스)는 유일하다. 그는 독특하다. 그는 삶과 죽음의 마술적 순간들의 스승이며, 둥지와 장작더미의 중대한 이미지들의 기묘한 통합이다. 그는 자신의 장작더미가 불타오르는 최후의 순간에 최고의 영광에 도달한다." 

프로메테우스… '인간에게 불을 주기 위해 하늘의 불을 훔친 영웅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주시하는 장. 바슐라르는 불의 유용성을 넘어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초인간성 그리고 그것의 절대적 승화를 보여준다. "시적인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들은 항상 인간의 본성을 한층 더 높여주는 정신적 행위를 가리킨다. 정신현상의 미학, 다시 말해 정신의 삶을 견고하게 하고 활기차게 해주는 정신적 행위가 프로메테우스의 기호 아래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엠페도클레스… 에트나 산 위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관한 명상. 그의 죽음은 단순히 철학사의 잡보기사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실로 삶과 죽음을 숙고하고 불을 꿈꾸는 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불에 뛰어들어 죽음을 선택하는 의지의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소멸의 미학에 관한 장. "우리가 존재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철학에 대립하여, 죽음 안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철학자가 있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질 때, 엠페도클레스는 처음으로 자유롭다. 이러한 결정의 순간들은 시간의 시학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는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도 같은 것이다. 

바슐라르는 우리 존재를 불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긴장 속에서 항상 생동하고 있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며 빛나거나 어두워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불의 솟구침을 포착하고 불에 참여하면서 존재 자체가 불처럼 용솟음친다고 이야기한다. 바슐라르는 불의 역동성과 끝없이 상승하려는 존재의 의지를 동일하게 이해하고, 발레리, 엘리엇, 횔덜린, 니체 등 시인들의 저작들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고찰한다. 바로 여기서 몽상과 상상력이 응축된 절정의 언어미학이 탄생했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비록 완성되지 못한 저작이나, 바슐라르가 구축하고자 한 언어미학을 음미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철학자-시인의 몽상으로 탄생한 새로운 언어와 행복하게 조우하고 높이를 향해 치닫는 몽상에 빠질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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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서 밤, 밤에서 낮 사이, 우리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피닉스는 몇 살인가? 
인생의 만년에 불사조적 망상들은 노령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은 추억을 태우며 죽는다. 
그렇지만 추억을 태우면서 추억을 더욱 사랑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체험한 사랑의 영원함을 
누릴 만한 자격을 얻는다" 


6. 꿈꿀 권리 - 미술평론 에세이 

-창조적인 화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초적인 삶의 존재들을 바라보고, 드러내 준다.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목은 '모네, 샤갈, 바로끼에, 칠리다, 꼬르티, 마르쿠시스, 플로꽁을 통해 펼쳐 나가는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미술론'이다. 내가 본 부제목 가운데 단연 가장 긴 부제목이다. 부제목을 이렇게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의 작품을 통해 펼치는 바슐라르의 철학적 몽상,' 목차는 다음과 같다. 수련, 또는 여름 새벽의 놀라움 / 샤갈의 '성서(聖書) 서설 / 빛의 근원 / 원소에 자극 받은 화가 / 시몽 세갈 / 조각가 앙리 드 바로끼에 / 철(鐵)의 우주 / 어떤 물질의 몽상 / 마르쿠시스 작품에 있어서의 점과 시선 / 물질과 손 / 풍경의 역학(力學) 서설 / 알베르 플로꽁의 '끌에 관한 시론' / 환영의 성(城). 

미술 작품을 놓고 펼쳐지는 바슐라르 특유의 '몽상'에 동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행히도 몽상의 레훠런스, 그러니까 미술 작품 사진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샤갈과 모네 이외의 작가 이름이 생소한 독자들도 안심할 수 있다. 클로드 모네의 그림 '수련'을 주제로 하는 첫 장의 시작부분은 다음과 같다. 

<수련은 여름꽃이다. 그것은 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이 깊은 정원사는 그 꽃이 연못에 피는 것을 보고서 오렌지나무를 온실에서 내놓는다. 그리고 9월이 되어 수련이 지면, 그것은 춥고 긴 겨울을 알리는 전조가 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의 상당 수가 사실상 아포리즘에 가깝다. 바슐라르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마치 '자동 기술'해놓은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문학 작품, 예술, 신화, 종교, 철학, 심리학, 자연과학 등의 분야에 걸친 바슐라르의 식견이 문장 곳곳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바슐라르의 몽상을 따라가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포인트는 그런 식견 또는 지식에 있지 않다. 표현 또는 그냥 문장에 있다. 다음은 '풍경의 역학 서설'의 한 부분. (pp.118.) 

<평야는 멀어져 간다. 그것은 겹겹이 쌓인 평행선 아래로 지평선을 데려가, 해체시켜 버리는 멀어짐의 운동이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끝난다. 한 줄의 선, 하나의 하늘, 그리고는 무(無)다.> 

<저 멀리 더 이상 손질할 대지도 없다. 모든 것이 여기서 스러져 버린다. 그러나 이쪽에는 경작된 들판이 바둑판 무늬, 지주들에 의해 개가된 밭이랑, 그리고 구획, 경계, 밭두렁이라는 모든 토지의 탈취를 거부하는 경작지가 있다. 판화가는 경작자와 마찬자리로 하나하나 울타리 안의 땅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는 도구의 합치를 즐긴다. 쟁기는 흙덩어리에 대한 끌이 아니겠는가. >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 책을 보면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미술 작품을 보는 바슐라르의 눈은 그의 앎에 바탕을 두고 있다. 덕분에(?) 앎의 깊이가 깊지 못한 (나 같은) 독자들로서는 바슐라르의 앎을 막연하게 가늠하며 읽을 도리밖에 없다. 다행히 번역자 이가림 선생의 주석이 그러한 가늠을 돕는다. (물론 충분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원소(元素)에 자극 받은 화가'의 첫 부분. (p71.) 

<모든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화가는 제작에 임하기 전에 저 심사숙고하는 몽상, 사물의 본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몽상을 알고 있다. 사실 화가는 한 우주의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탄생에 자신의 전존재를 내맡기지 않고는 빛에 대한 세계의 계시를 아주 가까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회화만큼 직접적으로 창조적이고 예술은 없다. 위대한 화가의 예술적 위력에 대해 생각해볼 때 색채는 하나의 창조하는 힘이다. 
그는 색채가 물질에 작용하고 또 그것이 물질의 참다운 활력이라는 것, 그리고 색채가 물질과 빛 사이의 항구적인 힘의 교환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원초적인 몽상의 필연성에 의해 화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여러 원소들, 즉 불, 물, 하늘의 공기, 지상의 실체가 갖는 놀라운 물질성에 결합되도록 하는 커다란 우주적인 꿈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 

한편 클로드 모네는 1883년에 파리 북쪽의 마을 지베르니에 집을 빌려 정착했다. 그리고 1900년에 그 집을 사들인 뒤, 정원을 꽃밭으로 가꾸고 연못을 파 근처의 에프트강 줄기에서 물이 직접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1906년부터 그는 수련의 연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모네의 '수련'하면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대형 작품들은(파리 오랑쥬리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이 시기의 모네는 개인적으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소용돌이는 물론이거니와, 1911년에 두 번째 아내를 잃었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아들까지 잃었다. 더구나 모네 자신의 시력에 이상이 생기고 있었다. 
그러한 모네는 오랜 친구이자 저명한 정치인인 클레망소의 물심양면의 도움과 격려로, 오래 전부터 구상하던 수련 또는 연못 풍경 연작에 착수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지베르니 저택의 정원 한쪽에 폭 12미터, 길이 20미터의 대규모 화실을 세우고 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모네의 수련 연작의 특징은 역시 수면에 비치는 세계와 수면 위에 떠 있는 사물(수련) 사이에 어떤 구분 또는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요컨대 화폭 전체가 빛의 반영 그 자체가 된다. 경계가 없는 빛의 잔치! 

최근 몇 년 사이에 미술 작품을 '알기 쉽게' 해설하는 내용의 책이 제법 자주 출간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일진대, 알면 알수록 더욱 잘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도 쉽게 알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책과 함께 바로 이 책과 같은, 그러니까 깊고 내밀하며 유일무이한 사색의 자취를 담은 책도 꾸준히 출간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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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성서>의 序說 
               
                                            I 
  모든 사물에 빛과 찬란함을 투영시키는 현대의 눈, 한 화가의 눈은 이 책의 각 페이지마다에서 전설적인 역사의 어둠의 밑바닥을 바라본다. 이 살아있는 눈은 과거 속에서도 가장 위대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삶의 존재들을 발견하고, 바라보며, 드러내 준다. 생물들이 꿋꿋한 나무줄기와 같이 태어나 성장하고, 인간이 그대로 초인간적 존재였었던 저 확고부동한 위대한 시대를, 우리들에게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 마르크 샤갈, 우주의 창조자로서 붉은색과 황토색, 짙은 청색과 엷은 청색을 배합할 줄 아는 이 화가는 낙원시대의 색깔들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샤갈이 성서를 읽는다. 그러면 그의 독서는 곧바로 한줄기의 빛이 된다. 그의 화필, 그의 연필 아래서 <성서>는-자연스럽게, 아주 간단명료하게-한 권의 그림책이 되고, 한 권의 초상화집이 된다. 그리하여 여기에 인류의 가장 위대한 한 가족의 초상이 모아지게 되는 것이다. 

  독자로서의 내 고독 속에서 그 '성스러운 책'에 대해 깊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 목소리가 너무 강하게 울려서 나는 언제나 선지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곤 하는 것이다. 모든 선지자가 내게 있어서는 예언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 이 아름다운 화집의 삽화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오래된 책을 읽는다. 나는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듣는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갈, 그 見者가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샤갈은 나의 귀에 빛을 비춰 준 것이다. 

                                    II 

  형상의 창조자, 한 사람의 천재적인 화가에게 있어서, 낙원을 그리는 임무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무슨 특권일까! 아! 바라볼 줄 알고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눈에는 모든 것이 낙원인 것이다. 샤갈은 세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를 바라볼 줄 알고, 특히 세계를 드러내 보여줄 줄 알기 때문이다. 낙원이란 아름다운 색깔들의 세계이다. 하나의 새로운 색깔을 발명하는 것이 화가에게 있어서는 낙우너의 기쁨인 것이다! 이와같은 기쁨 속에서 화가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즉, 창조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화가마다에 자신의 낙원이 있다. 그리고 색깔을 조화시키는 것을 체득하게 된 사람은 확실히 한 세계의 화합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낙원에 대한 모든 몽상가의 원초적 몽상에 있어서, 아름다운 색깔들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화해시킨다. 모든 존재들은 아름답기 때문에 순수하다. 모든 것은 함께 사는 것이다. 물고기들이 공중에서 헤엄치고, 날개 달린 당나귀가 새의 길동무가 되며, 우주의 청색이 모든 피조물들을 가볍게 만든다. 조금 꿈꾸어 보라. 땅 위에서 꺾여 창공 속으로 운반되어 
은방울꽃에 온 몸이 향기로와, 하늘에서 그토록 잘 꿈꾼 나머지 머리 속에 한 마리 비둘기를 떠오르게 하는 초록색 당나귀처럼. 

  이와같이 낙원은 일종의 고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말로써 표현하는 데는 숱한 詩작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샤갈의 단 한 점의 데상이 이 모든 위력을 응축시켜 버린다. 단 한 장의 그림이 끝없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색깔이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회화야말로 언어의 원천이며 시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낙원의 그림 앞에서 꿈꾸는 사람은 讚歌의 합창을 듣는 것이다. 형태와 색깔의 결혼식은 번식력이 강한 결합이다. 모든 존재들은 신의 손에서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생하고 풍부하게 화가의 화필에서 태어난다. <창세기>의 최초의 동물들은 신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어록집의 낱말들이다. 예술가는 천지창조의 추진력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예술가가 '창조한다'는 동사를 끊임없이 활용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는 창조에 얽힌 모든 행복을 자기 것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창조하는 예술가를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인가. 왜냐하면 샤갈은 빨리 창조하기 떄문이다. 빨리 창조한다는 것은 생생하게 창조하기 위한 커다란 비결인 것이다. 생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생명은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초벌그림이란 결코 있을 수 없고, 언제나 불꽃뿐이다. 샤갈이 그리는 존재들은 모두 최초의 불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정경에 있어서, 샤갈은 발랄함의 화가인 것이다. 그의 낙원은 실증나지 않는다. 새들의 비상과 더불어 무수한 눈뜸이 하늘에 울려퍼진다. 대기 전체에 날개가 돋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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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보여지기를 꿈꾸고 있다. 그리고 보는 자에 의해 사물은 다시 탄생한다 > 


7. 불의 정신분석 

8. 물과 꿈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구장장한 "반지 시리즈"에 비해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고 스토리라인도 반지에 비해 평면적, 
무엇보다 물과 배, 마지막 물에 의한 죽음과 정화라는 극의 이미지 자체가 
딱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물이 아름다운 충실한 죽음의 물질이기 때문이다. 
물만이 아름다움을 보호하면서 잠잘 수 있으며, 
또 미의 반영을 보호하면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 



9. 공기와 꿈 

10. 물과 불 

"호프만의 술은 불타는 술이다. 그것은 매우 질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불이 지니고 있는 아주 남성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포의 술은 낮게 가라앉게 만들며, 망각과 죽음을 가져오는 술이다. 그것은 매우 양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의 아주 여성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에드커 포의 천재성은 어셔 가 저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연못 속의 잠자고 있는 물, 죽은 물에 연관되어 있다." (물과 불) 

11. 불의 정신분석 
12 부정의 시학 
13. 순간의 시학 
14. 어록 
<표현이 존재를 창조한다>

[출처] 시와 산문 그리고 시와 록색

http://cafe.daum.net/kpoetry/CU9q/11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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