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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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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정신 분석 ㅡ 가스통 바슐라르
2018년 12월 24일 21시 19분  조회:2426  추천:0  작성자: 강려
퍼온 자료임 ^^


불의 정신 분석 ㅡ 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精神分析 들어가는 말
 
序論 
 
 
내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아서는 안 된다. 
--폴 엘뤼아르 
 
우리는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믿어버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만 말하면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들의 최초의 선택에 의해서, 대상은 우리가 거기에 지정하는 것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밝히므로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자기의 思考를 기본적인 것이라고 믿는 일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정신의 미숙성을 고백하는 일이 된다. 
 
이따금 우리는 선택된 하나의 대상 앞에서 말할 수 없이 놀랄 때가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가설과 몽상을 축적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식으로서의 외관을 지닌 신념을 형성한다. 하지만 근원이라는 것은 불순하며, 최초의 증명이 기본적인 진리는 아니다. 
 
사실 인간이 우선 직접적인 대상과 절연하였을 때, 또한 최초의 관찰에서 나온 여러 가지 사고를 중지시키고 금지할 때에만 과학적 객관성이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객관성도 정당하게 확인될 때에는 대상과의 최초의 관계를 부정한다. 
 
그것은 모든 것, 즉 감각•상식, 가장 보편적인 語法, 또는 語原까지도 비판할 것이며, 노래하거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나온 말이 사고에 부딪히는 일은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고는 놀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로니를 행사하게 만든다. 이러한 짖궂은 경계심이 없이 우리는 결코 진실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나, 우리와 동등한 자, 우리의 형제들을 심문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공감이 그 방법의 기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을 살지 않고, 우리의 기쁨이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승화되지 않는, 이 惰性的世界 앞에서 우리는 모든 감정의 노출(expansion)을 멈추어야 하며, 우리의 인격(personne)을 억제해야 한다. 
 
詩와 과학의 軸은 처음부터 逆으로 되어 있다. 철학이 바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시와 과학을 서로 보충하는 일이고, 그것을 두 개로 기초된 反對命題로서 병합하는 일이다. 따라서 외향성인 詩 정신에다 과묵한 과학정신을 대립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과학정신에 있어서는 예정된 反感이 건전한 경계가 된다. 
 
우리는 객관적 태도가,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일이 없는 하나의 문제와 최초의 매력이 가장 강직한 여러 정신까지도 변형한 그 위치에서 몽상이 사고를 대신하고, 시가 여러 定理를 감추는 시적 요람으로 항상 이끌어갈 만큼 결정적인 문제를 연구하려고 한다. 
 
이것은 불에 대한 신념에서 제기된 심리학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는 내가 불의 정신분석에 대해서 말하는 아무런 망설임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적으로 심리학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불의 현상이 순수한 영혼에게 던져주는 최초의 이 문제로부터 진실로 현대 과학은 완전히 외면해 왔다. 化學책 속에 나오는 불에 관한 章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점 감소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化學책은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그 속에서 불이나 불꽃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찾으려 해도 이미 헛일일 것이다. 
 
<불은 이미 과학의 대상은 아니다.> 불은 확실히 직접적인 대상이다. 다른 諸現象을 밀어 제치고, 하나의 本源的인 선택으로서 자기를 미는 對象인 불은 이미 과학적인 연구에 대해서 어떠한 전망도 열어주지 못한다. 
 
그런데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이 현상의 가치의 폭등을 더듬어 여러 세기 동안 과학의 연구분야에 군림해 온 하나의 문제가 한 번도 해결된 적이 없는데, 왜 갑자기 分割되고 문제시되지 않았는가를 연구할 경우에는, 불은 우리에게 있어서 교훈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교양 있는 사람들 뿐아니라, 뛰어난 과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내가 여러 번 지적한 바와 같이 <불이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아주 낡고 공상적인 철학적 여러 이론의 무의식적 반복에 지나지 않은 모호한, 혹은 중복된 반복적인 대답이 나올 뿐이다. 
 
그 이유는 그 문제가 인간의 직관과 과학적 실험이 섞인 불순한 客觀帶라고 할 수 있는 지점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도 다른 여러 현상보다도, 더 불의 여러 직관이 특히 중대한 결함을 짊어진 상태임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직관은 실험과 측정만을 필요로 해야 할 하나의 문제 속에 직접적인 확신을 끌어들인다. 
 
이미 전에 쓴 책(譯註1) 속에서 나는 熱現象과 관련해서 과학적 객관화의 명확히 규정된 축을 기술하고자 한 적이 있다. 나는 여기서 실험작업을 과학적인 과정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기하학과 대수학이 어떻게 점차적으로 그 추상적인 형식과 원리를 기여시키는가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어떤 특수한 實在, 충분히 규정되어 있는 실재의 인식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당연히 동반되리라고 생각되는 二重의 전망을 예증하기 위해 찾아내려고 하는 것의 逆의 軸, 즉 이미 객관화된 축이 아니고 주관성의 축이다. 만일 우리가 주관과 객관의 事實的媒介關係에 대해서 정당하다면,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과 思想家를 더 뚜렷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 구별은 언제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하여간 우리가 여기서 연구하려는 것은 생각하는 사람인데, 불이 고독을 인식하는 것처럼 빛을 내며 탈 때, 고독의 한 가운데서, 사람은 그의 난로가에서 생각에 잠기고 있다. 그때 우리는 과학적 인식에 있어서는 최초의 인상의 共感的同意를 마음에 두지 않는, 몽상의 여러 가지 위험을 나타내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찰자를 관찰하는 일은 쉬운 일이며, 따라서 이 가치가 부여된 관찰을 통해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을 응시할 때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이 催眠에 걸린 관찰로부터 여러 가지 원리를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것은 여지없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아낸 이 가벼운 최면상태야 말로 정신분석적인 조사를 개시하는 데 아주 어울리는 것이다. 
 
괴로와하는 영혼이 그 추억과 고통을 동시에 말하기 위해서는 겨울의 하룻밤, 집 주위의 바람으로 빨갛게 타는 불만으로도 족하다. 
 
겨울의 따뜻한 잿속 
낮은 소리에 매혹되어 
묻힌 불과 닮은 이 마음 
꺼지려하며 노래하네. 
--뚤레 
 
 
그런데 이 책은 한 줄 한 줄 써나갈 경우에는 쉽지만, 그것을 잘 구성된 하나의 체계로서 만들기에는 실제로 불가능한 것 같다. 인간의 여러 가지 오류를 하나의 계획서로서 써나간다는 것은 바라기 어려운 시도일 것이다. 
 
특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과제는 역사적인 전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몽상의 오래된 여러 조건이 현대의 과학교육에 의해서 제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도 자기의 전문분야를 떠나면 원시적인 가치평정으로 역행한다. 
 
그러므로 科學史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역행하는 하나의 사상을 역사의 지침에 따라 기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노력의 일부를, 몽상이, 체계적인 사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여러 가지 실험에 의해서 획득되어진 것에까지도 항거하여, 여러 번 原始의 주제를 되찾아 언제나 원시의 혼으로서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불의 우상숭배를 묘사하던 아주 멀고 먼 과거의 시대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흥미깊게 여기고 있는 것은 이 우상숭배의 은연한 殘像을 확인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용하는 기록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가까울수록 그것은 우리의 명제를 더 강력하게 뒷받침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심리적 진화에 대한 하나의 저항의 흔적이기도 한 영속적인 기록이다. 즉, 소년 속의 노인, 노인 속의 소년, 기술자 속에 잠긴 연금술사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몽상이 무력한 것인 것처럼 과거가 무명의 것이라면 우리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즉, 정신을 그 안락한 환상에서 눈뜨게 하여 최초의 明證이 주는 나르시시즘(Narcissisme)에서 해방하고, 정신의 단순한 소유와는 다른 확보를, 단순한 정열이나 열광과도 다른 확신적인 여러 힘을 주는, 한 마디로 말하면 정신의 불꽃 같은 것은 결코 아닌 여러 가지 증거를 주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 충분하게 이미 말했기 때문에 불의 여러 가지 현상의 인식과 관련된 주관적 확신의 <정신분석>의 의미를 더 요약해 말하면, 불의 정신분석의 의미를 독자에게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음에 우리는 개개의 論旨에 의해서 우리의 一般的命題를 명확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머리말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고찰을 덧붙이고 싶다. 나의 독자가 이 저서를 읽어도 독자의 지식은 별로 증가되지 않을 것을 안다. 이 점은 아마도 우리의 실패가 아니고 우리가 선택한 방법의 단순한 報償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접할 때 우리는 진리를 등지게 되며, 우리가 <내적>인 실험을 할 때는 반드시 객관적 실험과는 모순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책에서 우리가 내면을 털어놓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열거하자. 우리의 저작은 그 때문에 우리가 모든 객관적 연구의 기초로서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는 저 특수한 정신분석의 한 예로서 제시될 것이다. 
 
그것은 《과학정신의 형성》이라는 최근의 책에서 제창된 일반적 여러 명제의 例證的인 설명이다. 과학정신의 교육법은 귀납을 왜곡하는 유혹이 어떠한 것인가가 명백해지는 경우에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간단히 불을 취급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물•공기•대지•소금•술•피 등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가치를 주는 객관적 연구를 일반성이 없는 주제로 이끌고 이 실체는, 분명히 불만큼 두 가지 뜻을 가진 것도 아니고, 주관적이나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외관상의 특징이 검토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가치의 외관상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실체론적인 여러 경험보다 훨씬 理性的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직접적은 아니며, 따라서 훨씬 덜 情感的인 여러 가지 명증의 근원으로 정신분석을 가지고 오는 것은, 더욱더 곤란한 일이지만 동시에 더 풍부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동조자를 더 잘 찾아낼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그들을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과 같은 관점에서 전체•체계•요소•진화•발전 등의 여러 개념의 연구에 따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이 이러한 여러 개념의 근원은, 異質로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그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예 가운데서 사람들은 과학자나 철학자에 의해서 다소 안이하게 받아들여진 여러 가지 이론에서 이따금 아주 순진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검토되지 않은 이 확신은 어느 것이나 정신이 논증적 노력 속에서 쌓아올려져야만 하는 진리의 빛을 흐뜨리는, 어지러운 섬광과도 같은 것이다. 
 
각자가 이 검토되지 않은 확신을 스스로 없애는 데 집중하여야 한다. 각자가 이 측근의 여러 경험과의 접촉에 의해서 형성되는 정신적 관습의 硬直으로부터 피할 줄을 알아야 한다. 각자는 최초의 직관에 대한 그 恐怖症(phobies)보다 더 주의깊게, 그 <愛好症(philies)>, 그 자기만족을 분쇄해야만 한다. 
 
이를 요약하면, 우리가 독자에게 자신을 억제하는 자가 되는 것, 즉 자신을 조소하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다면 독자를 가르치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의 노력은 보상될 것이다. 이러한 자기 비평의 아이로니 없이는, 어떠한 진보도 객관적 인식에 있어서는 있을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17세기와 18세기의 오래된 과학서적의 끝없는 독서 편력 속에 쌓은 여러 기록의 극히 조그만 부분만을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조그만 저서는 단순한 拙著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어리석음을 쓰는 것이 문제이지 한 권의 책을 쓰는 일은 사실 지극히 쉬운 일일 것이다. 
 
<原註> 
1. 《植物問題의 進化에 관한 硏究》. 
 
 
제 1장 불과 尊重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 
 
 
불과 열은 가장 변화가 심한 영역 속에서 여러 가지 설명방법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시드는 일이 없는 여러 가지 추억과 단순하고도 결정적인 개인적 경험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불을 이리하여 모든 것을 설명할 수가 있는 특권적 현상이 된다. 
 
마치 천천히 변하는 모든 것이 다 생명에 의해서 설명되듯 신속하게 변하는 것은 모두 불에 의해서 설명이 된다. 불은 招生命ultra vivant이다. 불은 內在的이고 또한 보편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산다. 그것은 하늘에 산다. 그것은 실체substance의 內部에서 솟아 하나의 사랑처럼 모습을 나타낸다. 
 
그것은 질료matiere 속으로 내려가 원한이나 복수처럼 잠재하고 포함된다. 모든 여러 가지 현상 가운데서 그것은 실로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치부여, 즉 선과 악을 동시에 단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로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낙원에서 빛나고 지옥에서 탄다. 그것은 감미로움이며 고통이기도 하다. 
 
그것은 타는 불이며 默示의 불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명하게 난로 가까이 앉은 어린이에 있어서는 기쁨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가 너무나 불 근처에서 그 불꽃과 희롱하려고 할 때는 어떠한 불복종성도 징벌될 것이다. 그것은 安樂이며 尊重이다. 그것은 守護와 威脅, 正과 邪의 神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것은 보편적인 설명원리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최초의 가치부여 없이는 가장 명백한 여러 모순을 수용하는 견해에 대한 저 관용도, 가장 칭찬하는 형용사를 확인하지 않고 축적하는 그 열광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18세기 말에 한 의사에 의하여 씌어진 다음 페이지 속에는 얼마나 많은 자비와 무의미함이 있는 것일까 
 
<내가 이 불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의미는, 마치 인간의 체액을 음식물과 마찬가지로 불에 넣어 태우지도 않고, 오직 타는 강렬한 활기로 솟는 反自然的인 열도 아닌, 온순하고 풍부한 향기인 불이다. 그리고 그 약한 불은 혈액의 수분과 聯關을 가지고 있는 일정한 수분을 지니고 있으므로 異質의 체액에도, 양분이 되는 즙액에도 동등하게 침투하고, 그것을 분리하고 거기에 유동성을 주고, 그 각 부분을 거칠음•젊음을 씻고 마침내 그것을 그것이 우리의 자연에 적응하는 정도의 온화함과 精妙함에 이르게 한다>(原註1) 
 
이 페이지는 객관적인 의미를 수용할 수 있는 논거나 형용사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얼마나 납득이 되는 일인가! 그것은 의사의 설득력과 약의 침투력을 全體化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느껴진다. 불은 무엇보다도 침투적인 藥劑이므로 의사는 불을 피움으로써 비로소 가장 설득력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페이지를 다시 읽을 때 지우기 어려운 聯想을 마음껏 전개시보면 어렸을 때 나의 베개맡에 와서는 멋진 학자 같은 말을 토하고, 불안스러운 듯 마음쓰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저 금시계를 가진 과묵하고 친절한 의사가 언제나 생각난다. 가난한 우리 집의 어느 겨울날 아침의 일이다. 불은 난로 속에서 타고 있다. 
 
톨루(tolu)시럽을 가져오고 나는 숟가락을 핥는다. 발삼제(balsamique)의 따뜻함과 데린 약의 뜨거운 香으로 넘치던 그날들은 어데로 갔을까! 
 
 
내가 병이 들었을 때 아버지는 나의 방에다 불을 피웠다. 그는 불을 지피기 위한 잔개비 위에 장작을 똑바로 세우고 장작을 잘 구성하여, 그 사이에 한 웅큼의 나뭇조각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불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남에게 시킨 일이 없는 그 역할에서 아버지와 맞설 만한 자기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19살이 될 때까지 불을 피운 일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난로의 주인이 된 것은 나 혼자서 생활할 때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에게 배운 <불을 피우는 법>은 지금도 나의 자랑거리의 하나이다. 나는 아침에 불을 피우는 일을 게을리하기보다는 철학의 강의를 게을리하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학문연구에 언제고 바쁜 한 사람의 경애할 만한 저자 <뒤카를라>의 작품 속에서 나에게는 거의 개인적인 여러 가지 추억에 넘친 다음의 페이지를 읽을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공감(原註2)을 느낀다. 
 
<내가 다른 사람의 집에 가거나 집에서 누구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이따금 다음과 같은 방법을 즐긴다. 불이 약해진다. 그러면 거기 있는 사람들이 연기 속에서 오랫동안 만족스러운 얼굴로 불을 만지작거리지만 역시 헛수고로 끝난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잔개비나 炭에 의지한다. 하지만 그것도 쉽사리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들이 수없이 검게 탄 장작을 뒤집은 후에 나는 화젓가락을 잘 써서 인내심과 대담성의 행운을 필요로 하는 멋진 기술로 성공한다. 나는 의대의 한 學部가 포기한 절망적인 환자에 대해 신앙요법으로 치료시키듯 마술을 잠시 해본 정도였다. 대개의 경우 같이 있던 사람들은 내가 무엇에 손댔는지를 알지 못했다. 
 
나는 별로 일하는 모습도 하지 않고 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명령하고 있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데 불꽃은 살아 장작에 붙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들은 내가 무엇인지 화약 같은 것을 집어넣었다고 나를 비난했다. 결국에는 내가 공기의 흐름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충만된 열, 放熱, 복사열까지, 또는 地熱, 傳導速度, 열의 연속에까지 문제삼아 조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뒤카를라는 그 뛰어난 재능과 불에 대한 지식이 <열의 연속> 뒤에 따르는 等比級數로서 기술된 그 야심적인 이론적 지식체계를 동시에 확대하면서 계속하고 있다. 이 수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뒤카롤라의 <객관적> 사고의 최초의 원리는 극히 명석하고 그 정신분석은 직접적이요, 타고난 찌꺼기는 찌꺼기에 맞대야 한다. 그러면 불꽃은 우리의 난로를 화려하게 할 것이다. 
 
 
아마 독자는 여기서 우리가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에 있어서 추종하기를 제안하는 방법의 한 예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험적•과학적 인식의 기초로써 무의식적 여러 가치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객관적•사회적 인식으로부터 주관적•개인적 인식으로 향하는 逆의 빛을 제시해야 한다. 과학적 실험 속에 유년기의 경험의 흔적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과학정신의 무의식>에 대해서, 하나의 明證의 이질적인 성격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특수한 한 현상의 연구에 대해 말할 수 없이 잡다한 영역 속에 형성되어 온 여러 가지 신뢰성이 집중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하나는 불이 아마도 <자연적 존재>이기보다는 차라리 <사회적 존재>임이 충분히 착안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착안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원시사회에 있어서의 불의 역할에 관한 여러 가지 고찰을 전개할 필요는 없고 불을 유지하는 기술적인 곤란성을 역설할 필요도 없다. 
 
敎化된 정신의 고조와 교양을 검토하는 일도, 심리학을 능동적인 것으로 하기만 하면 족하다. 사실 불의 존중은 가르침에 의한 숭배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존중은 아니다. 우리에게 촛불의 불꽃에서 손가락을 멀리하는 반사운동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는 어떠한 의식적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보적인 심리학 책 속에서 반사운동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사람들은 도리어 놀랄 것이다. 
 
반사운동은 거기서는 반사운동 내의 일종의 끊임없는 가장 조잡한 감각 내에서의 하나의 인식에 대한 간섭 같은 예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회적인 여러 가지 금지가 첫 번째 문제점이다.> 자연적 경험은 <예기치 않은>고로 하나의 객관적 인식을 기초하기 위한, 너무 애매한 물질적 증거를 가지고 오도록 하는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火傷, 즉 자연적 제지(inhibition)는 사회의 여러 가지 금지를 확증하는 일로, 어린이의 눈에는 아버지의 지식에 대한 그만큼 더 큰 가치를 부여할 뿐이다. 그러므로 불의 유년기의 근본에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간섭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는 사회적인 것이 거의 언제나 지배적인 간섭이 된다. 아마도 그것은 만일 刺傷과 화상을 비교한다면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둘 다 反射運動을 일으킨다. 그런데 왜 刺痛은 불처럼 존중과 畏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刺痛에 관계되는 사회의 여러 가지 금지가 불과 관계되는 여러 가지 금지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 한데 불꽃에 나타나는 존중의 참된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즉, 만일 어린이가 불에 손을 대면 아버지는 그 손가락이 불에 접근 못하도록 매를 가한다. 
 
불은 화상을 입히지 않고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이 불이 불꽃이건, 열화이건 램프이건 난로이건 양친의 조심은 마찬가지이다. 불은 그러므로 처음에는 <일반적 금지>의 대상인 것이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사회적 금지가 불에 대한 우리의 최초의 일반적 인식이다. 불에 대해서 우리가 최초로 의식하는 것은 불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자라남에 따라서 여러 가지 금지는 內面化된다. 경고를 위한 회초리는 야단치는 소리로 대치되고, 그 소리는 화재의 위험에 대한 이야기나 天上의 불에 관한 전설로 대치된다. 이리하여 자연현상은 급속하게 소박한 인식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회적이고 복합적이며 혼란한 인식 속에 구성된다. 
 
따라서 여러 가지 制止란 무엇보다도 우선 사회적 금지이고 보면 불의 개인적 인식의 문제는 <교묘한 불복종>의 문제가 될 것이다. 어린이란 아버지가 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해보고 싶은 법이다. 그래서 그 작은 프로메테우스와 마찬가지로 성냥을 훔친다. 그리고 나서 들로 나아가 동료들과 골짜기의 우묵한 곳에다 학교를 빠져 나온 후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비밀의 불을 피운다. 
 
도시의 어린이는 세계의 돌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을 거의 모를 것이다. 그는 수풀의 구운 나무 열매 맛도, 붉은 장작개비 위에서 익는 달팽이 맛도 맛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내가 종종 그 작용을 느낀 저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콤플렉스는 그 자체로서는 매우 진부하나, 불의 아버지와 전설이 항상 만나는 재미를 이해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와 고전적 정신분석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급하게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불을 둘러싼 몽상의 성적 구성요소는 특별히 강렬하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서 그것을 명시할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콤플렉스가 어떻게 서로 관계하는가에 대해서는 뒤에 보기로 하고, 지금은 무의식적인 신뢰의 여러 가지 뉘앙스를 여러 가지 定式으로 나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따금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의 장점의 하나는, 우리가 원시적인 본능적 기능을 갖는 영역보다는 깊지 않은 영역을 검증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영역이 명확한 사고에 대해서, 그리고 과학적 사고에 대해서 규정적인 작용을 갖는 것은 그것이 매개적이기 때문이다. 아는 일과 만드는 일은 그것을 반드시 힘의 의지와 연관을 지우지 않고라도,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가 특징 지을 수 있는 욕구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참된 <지성에의 의지>가 있다. 프래그머티즘과 베르그송주의가 그렇게 한 것처럼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절대적으로 유용성의 원리에 종속시킬 때, 우리는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과소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의 이름 아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인 우리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 <알고자 하는> 모든 경향을 일괄해서 제안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상을 조작하고 자기의 객관적 인식을 정확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양친이나 스승 속에서 찬미해온 지적 수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보다 강력한 본능을 구사하여 최고권을 획득하는 것이 당연히 훨씬 방대한 사람들에게 호소될 것이다. 가령 순수한 지성이라는 것이 예외적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종의 진화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포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지적생활에 있어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原註> 
1. 테종카드(A. Roy-Desjoncades)의 《自然의 法則》. 
2. 뒤카를라(Ducarla)의 《완전한 불》
 
제 2장 불과 夢想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 
 
현대 정신병리학은 방화범의 심리학을 규명했다. 그것은 그들의 경향들 가운데서 性的인 특징을 밝혀 주었다. 한편 그것은 불을 지른 건초더미, 불꽃은 지붕, 잘 경작된 평야의 무한한 광활 속에 검은 하늘의 소용돌이처럼 휘감기는 거대한 배후의 광경에 의해서 心理가 입게 될 중대한 외상을 밝혀내었다. 
 
거의 언제나 들에 있어서의 放火는 영혼의 표지이다. 화재 속에 불을 나르는 사람처럼 이 패배의 사나이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들의 고독한 꿈의 감염을 전달한다. 어느 화재의 광경은 한 방화범의 화재를 일으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화범을 낳는다. 불은 잿속보다 더욱 확실하게 영혼 속에 깃든다. 방화범은 범죄자 중에서도 가장 음험하다. 
 
생틸리의 수용소에서도 아주 독특한 방화범은 너무 개성적이고 매우 친절한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단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난로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정신병리학의 외측에서 고전적 정신분석은 오랫동안 불에 관한 여러 가지 꿈을 연구해 왔다. 불의 꿈은 가장 생생하고 가장 연연한 꿈속에서도 性的인 해석이 가장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리 깊지 않고 보다 지성화된 심층의 정신을 분석하는 일에 머무르고 싶으므로 우리는 꿈의 연구를 몽상의 연구로 바꾸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작은 책에서 우리가 연구해야 할 문제는 불 앞에서의 몽상인 것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이 몽상은 언제나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에 의해서 꿈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꿈은 길을 서두르지 않기 때문에 그 방향을 망각하고 직선적으로 나간다. 
 
몽상은 放射狀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그 중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광선을 비춘다. 그리고 불 앞에서의 몽상, 그 행복을 의식하는 달콤한 몽상이란 가장 자연스럽게 집중된 몽상이다. 그것은 그 대상 또는 그 구실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곳에 가장 집착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누구나가 그로부터 떠날 수 없는 듯한 매력을 거기에 부여하고 있는 그 정치성과 그 等質性은 거기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멋지게 성격지워지므로 우리는 난로 속에서 타는 장작불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모른 체한다. 이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굵은 장작이 조그만 불꽃이 되어 타오르는 고요하고 정연한 지배의 불이다. 그것은 단조롭고 빛나는, 진실로 전체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말하며, 날며, 노래한다. 
 
난로 속에 갇힌 불은 아마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몽상의 최초의 주제이며 휴식의 상징이며, 휴식에의 초대였을 것이다. 타오르는 장작 불 앞에서 몽상 없이는 휴식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견으로는 불 앞에서의 몽상의 결여는 불의 참된 인간적인, 그리고 최초의 효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분명히 불은 따스함을 주고 활력을 되찾아준다. 그러나 이 활력의 회복은 꽤나 오래도록 바라보는 데서만 잘 의식화된다.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머리를 손안에 묻었을 때 불의 기분 좋음을 알 수 있다. 이 자세는 먼 곳에서 온다. 불 근처에 있는 어린이는 자연히 그런 자세를 취한다. 그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만은 아니다. 
 
그것은 감시나 관찰의 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지극히 특수한 주의와 통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간에 다른 觀想을 위해서 이용되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다. 불 근처에서는 앉아 있어야 한다. 졸지 않고 몸을 쉬어야 한다. 특수한 대상의 몽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정신의 功利主義的 형성을 믿는 사람은 이처럼 쉽게 얻어지는 관념론적 이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불에 대해서 품고 있는 흥미를 특징지우기 위해서 불이 지니는 여러 가지 효능을 들어서 우리에게 반대할 것이다. 즉 불은 열을 줄뿐만 아니라 살을 태우기도 한다. 마치 복잡한 난로나 농가의 난로가 몽상을 방해라도 하는 듯이! 
 
냄비걸이에 매달려 검게 그을린 세 개의 다리가 달린 냄비가 뜨거운 잿속에 놓여 있다. 뺨을 부풀리면서 강철로 된 공기통 속에 바람을 보내면 죽어가던 불이 살아난다. 모든 것이 동시에 익는다. 돼지를 위한 감자도, 가족을 위한 아주 맛좋은 감자도, 나를 위해서는 신선한 계란이 잿속에서 익고 있다. 
 
불의 강약은 모래시계로 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란은 한 방울의 물, 때로는 한 방울의 침이 껍데기 위에서 수증기로 증발할 때 익는 것이다. 나는 데니 빠벵이 그의 냄비를 지키는 데, 나의 할머니와 똑같은 방법을 취하는 것에 대해서 최근에 그것을 읽고 매우 놀랐다. 계란을 먹기 전에 나는 빵죽을 강요당했다. 
 
어렸을 때 어느날 매우 화가 나서 성급했던 나는 큰 숟가락에 국을 떠서 냄비걸이에다 던진 적이 있다. <냄비걸이야 먹어라! 냄비걸이야 먹어라!> 그러나 내가 점잖은 날에는 언제나 와플 굽는 틀을 가져왔다. 그것은 장방형의 쇠로 글라디올러스의 자웅처럼 붉은 덤불 속의 불을 죽였다. 
 
그리고 이윽고 나의 에프론 속에 넣어둔 와플을 입술에 있을 때보다도 손에 쥘 때가 더 뜨거웠다. 그때 나는 불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황금, 그 향기를 익은 와플이 나의 이빨 아래서 소리를 내는 동안은 그 소리까지도 먹는 것이다. 언제나 이와 같이 디저트와 같은 일종의 사치의 기쁨에 의해서 불은 그 인간성을 나타낸다. 불은 사물을 태울 뿐만 아니라 소리를 지르게도 한다. 
 
그것은 빵이나 과자를 갈색으로 태운다. 그것은 인간의 축제를 물질화한다. 제아무리 시대를 소급해 보아도 美食學의 가치는 영양가보다 우선한다. 즉 인간이 그 정신을 발견한 것은 기쁨 속에서지 고통 속에서는 아니다. 잉여의 정복은 필요의 정복보다 더 큰 마음의 흥분을 준다. 인간은 욕망을 창조하는 것이며 결코 필요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로가에서의 몽상은 철학적인 축을 가지고 있다. 불은 그것을 관상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신속한 생성의 한 예이며, 또 완벽한 생성의 한 예이다. 흐르는 물만큼 단조롭지도 않고, 추상적도 아니고, 숲 속에서 매일 우리가 보는 새의 새끼보다 잘 자라며, 변해가는 불은 시간을 변화시키고, 끓어오르는 욕망의 全生命을 그 종말로, 그 피안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욕망의 암시인 것이다. 
 
몽상이 진실로 매혹적이 되고, 극적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불은 인간의 운명을 확대한다. 그것은 조그만 것을 큰 것으로, 난로를 화산으로, 하나의 장작의 생명을 하나의 세계의 생명에 연결시킨다. 매혹된 자는 <장작더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 그에게 있어서 파멸이란 하나의 변화 이상의 것, 즉 바로 還生인 것이다. 
 
이 지극히 특수하면서도 일반적인 몽상은 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삶의 본능과 죽음에 대한 본능을 서로 연결하는 하나의 참된 콤플렉스를 이끌어낸다. 이것을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라고 불러두자 사람들은 조르즈 상드(George Sand)의 기발한 작품 속에서 그 전개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르 상드(Auro re Sand)라는 이름에 의해서 망각으로부터 구제받은 젊은 날의 작품이다. 아마 이 《몽상가의 이야기》는 이탈리아로의 최초의 여행 전에, 최초의 大噴火 전에, 결혼 후에, 첫 사랑 이전에 씌어졌을 것이다. 하여튼 그것은 기술되어졌다기보다는 상상되어진 대분화의 특징을 띠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예이다. 예를 들면, 대지의 아들인 태양이 융해된 산의 분화구로부터 하늘로 던져졌다고 꿈꾸는 장 폴에 있어서도 똑같이 전형적인 일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몽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꿈보다도 훨씬 校是的이기 때문에 조르즈 상드를 추종해 보자. 
 
새벽의 반짝이는 바다에 불이 물드는 시칠리아를 보기 위해서, 나그네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 에트나의 언덕길을 올라간다. 그는 안에서 잠시동안 잘려고 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작나무 불 앞에서 꿈꾼다. 
 
그는 물론 <지팡이를 짚고, 희고 푸른 불꽃이 만개되어 수많은 변화의 흔들림과 함께 사라지는 붉은 불더미에 묻혀 있는 불꽃에 눈을 돌리는> 상태로 가만히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에트나가 噴火할 적마다 생기는 그 화염의 희롱과 용암의 응결된 영상이다.>하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왜 나는 이 극도로 무서운 경탄할 만한 광경을 상상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왜 사람들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광경에 감동하는 것일까? 한데 그 <확대하는 몽상>의 축, 그 자체가 우리에게 더 잘 나타나기라도 하는 듯 작자는 계속한다. 
 
[왜 나는 이 타오르는 자자나무에 감탄하는 한 마리의 개미눈을 갖지 않았을까? 맹목적인 기쁨과 말할 수 없는 열광 속에서 그 흰 빛을 띤 작은 자벌레 나방이가 떼를 지어 거기에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장중함을 갖춘 화산이 그대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대화재의 광경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 눈부신 빛은 타오르는 숲 전체의 전망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처럼 그들을 도취시키고 오만하게 한다.] 사랑과 죽음과 불은 같은 순간에 연결된다. 하루살이는 불꽃 속에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교훈을 준다. 그 완벽하고도 흔적이 없는 죽음은 우리가 누구나 피안을 향해서 떠난다는 보장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잃는다. 
 
불의 교훈은 분명하다. [농간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또는 폭력에 의해서 모든 것을 손에 넣은 후에 너는 모든 것을 양도해야 하며 몸을 망쳐버려야 한다.] (다눈치오의 《죽음의 명상》) 지오노가 《진실로 풍부한 것》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래된 종족들에 있어서는, 예를 들면 동인도의 인디안이나, 또는 멕시코의 원주민이나, 그 철학과 그 종교적인 잔인성이 머리를 텅비게 할 정도로 빈형을 일으키는 나머지, 머리가 이미 단순한 지적인 球體에 불과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지적 충동이라는 적어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들 지성화된 자들, 지적 형성의 여러 본능에 사로잡힌 자들만이 <화덕의 문을 열고 불의 신비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라고 지오노는 계속해서 말한다. 
 
조르즈 상드가 우리에게 이해시키려는 점도 여기에 있다. 몽상이 집중되기가 무섭게 화산의 요정은 나타난다. 그는 <폭풍에 실려오는 눈뭉치를 타고서 푸르고도 붉은 잿더미 속에서> 춤춘다. 그 시작이 전통적으로 엠페도클레스에서 기원하는 사각형의 기념비 저쪽으로 그는 몽상자를 동반한다. 
 
[오라, 나의 왕이여. 금강석과 청옥이 반짝이며 비처럼 쏟아지며 흰 불꽃과 파란 유황으로 된 나의 왕관을 쓰라.] 그러나 의식의 준비를 한 몽상자는 대답한다. [나는 여기에 있다. 타오르는 용암의 흐름 속에 나를 감싸다오. 사랑하는 남자가 그의 애인을 껴안듯, 너의 불의 팔속에 나를 껴안아다오. 나는 붉은 외투를 입었다. 나는 너의 색깔로 몸을 장식했다. 
 
너도 또한 너의 자줏빛으로 타오르는 옷을 입어라. 너의 두 옆구리를 이 번쩍이는 신성한 옷으로 덮어라. 에트나여, 오라. 에트나여, 너의 현무암의 문턱을 깨뜨려라. 그리고 타르와 유황을 내뿜어라. 그리고 돌과 금과 불을 토하라!] 불의 내부에서는 죽음은 이미 죽음이 아니다. [죽음은 네가 나를 싣고 가는 천상의 영역 속에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의 연약한 육체는 불에 의해서 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너를 구성하고 있는 그 미묘한 요소와 결합함에 틀림이 없다.] 또한 < 자! 인간생활에 이별을 고하자. 그리고 환상의 세계로 나와 함께 가자.>하고 精靈은 몽상가에게 그 붉은 외투의 일부를 던지면서 말한다. 
 
이와 같이 해서 난로가에서의 몽상은 불꽃이 자작나무 긴 가지와 얽힐 때, 화산이나 시체를 태우는 불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연기 속에 흩어지는 한 조각의 지푸라기만 있으면 우리가 스스로의 숙명을 알기에 족하리라! 
 
불의 관상은 우리를 철학적 사고의 근원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그 이상 더 잘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지극히 예외적이고 희귀한 현상인 화재가 우주의 구성요소로서 포착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사고의 하나의 요소이며 몽상에 있어서 특히 선출된 요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의 심리학적 콤플렉스가 인식되었을 때, 어떤 종류의 시적인 작품은 보다 잘, 보다 종합적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사실 하나의 시적 작품은 콤플렉스에 의지하는 이외에는 그 통일성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콤플렉스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 뿌리에서 떨어져나가 작품은 이미 무의식과 서로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은 생기 없고, 조잡스러우며, 허위의 것으로 보일 것이다. 반대로 휠덜린의 《엠페도클레스》와 같은 미완의, 그리고 몇 번의 고쳐 읽음과 수많은 되풀이로 되어 있는 작품에 있어서도, 그것이 엠페도클레스에 뿌리 박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의해서 어떤 통일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히페리온이 자연의 생활과 더 밀접하게 섞여 있는 생활을 선택할 때 엠페도클레스는 화산의 순수한 요소 속에 자신을 용해하는 하나의 죽음을 선택했다. 이 두 개의 해결책은 피에르 베르토씨가 적절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최초의 외관보다 더 근접해 있는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베르테르적인 여러 요소를 제거하고, 자기 희생에 의해서 자기의 힘을 바치고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지 않는 히페리온이다. 
 
즉, 그야말로 <성숙된 남자이며, 고대 신화의 영웅이며 자기를 깨닫고 자기를 확신한 남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은 자기의 예지의 힘을 증명하는 신앙의 개조이다.>(原註1) 불꽃 속에서 죽는 것은 가장 고독하지 않은 죽음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거기서 전우주가 사색가와 더불어 無로 돌아가는 진실로 우주적인 죽음이다. 화형은 신화의 과정이다. 
 
 
결코 죽지 않는 것만이 좋다. 
그리고 다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함께 죽는 것만이 
죽음을 면한다. 
--다눈치오 
 
이따금 영혼이 엠페도클레스의 콤플렉스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고 있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무한히 벌겋게 달은 숯불 앞에서이다. 희망 없는 사랑의 내적인 화염에 몸을 태우는 다눈치오의 포스카리나는 유리 만드는 도가니에 매혹된 사색 속에서 화형을 원한다(原註2). [아! 모습을 찢어 삼켜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하고 파멸의 생각에 도취된 그 여자의 마음은 신음한다. 
 
한순간에 이 불은 포도의 어린 가지와 작음 묶음의 보릿단과 마찬가지로 나를 다 핥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열려진 분화구 입구로 접근했다. 그것을 통해서 여름의 대낮보다도 훨씬 빛나는 화염이 흙 단지에 감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속에서는 아직 型을 이루지 않은 금속이 녹아 있다. 많은 열기를 차단하는 벽의 주위와 그 배후에 위치한 일군들은 그것들을 쇠로 된 흙 통으로 건져 입으로 부는 입김으로 型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정말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화형의 외침소리가 하나의 근원적인 시적 주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 생활 속에서는 이미 어떠한 실제상의 관찰과는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빅토르 위고에서 앙리 드 레니에 이르기까지, 헤라클레스의 火葬壇上의 죽음을 하나의 자연적 상징인 것처럼 우리에게 인간의 운명을 그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객관적 인식에 관한 한 순수하게 인위적인 것이며, 따라서 무의식의 몽상에 있어서는 의연히 깊고 실재적이며 활동적인 것이다. 꿈은 진실의 체험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다. 
 
<原 註> 
1. 피에르 베르토(Pierre Bertaux)의 《휠덜린》 
2. 다눈치오(DAnnunzio)의 《불》 
 
 
제 3장 精神分析과 先史 
--노발리스 콤플렉스 
 
정신분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설과 신화의 연구를 시도해 왔다.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연구에 대해서 불의 정복을 둘러싼 전설을 풀기 위한 충분하고 풍부한 설명의 소재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아직도 완전하게 체계화하지 못한 것은 --융이 그 점에 대해서 크게 공헌했지만,--그것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발견을 기초지우려는 과학적 설명, 객관적 설명의 연구이다. 이 章에서 우리는 융의 관찰을 다시 체계지워 완전한 것으로 함으로써 합리적 설명의 약점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선사의 여러 가지 발견에 아주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근대의 과학적 설명에 대해서 비판해야 한다. 이 과학적 설명은 回歸的證明에서 이익을 끄집어 내기를 주장하고 그러기 위해서 원시의 여러 가지 발견의 <심리학적> 여러 조건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메마르고 간략한 합리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의식적인 것 아래 무의식적인 것을, 객관적 증명 아래 주관적 가치를, 실험 아래 몽상을 구하는 간접적이고 또한 제 2차적 정신분석학이 등장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사람은 우선 꿈꾼 것만을 연구할 수가 있다. 과학은 실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보다는 몽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많은 실험을 필요로 하는 것은 꿈의 안개를 흩어 버리기 위한 것이 될 것이다. 특히 객관적인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동일물질에서 작용하는 똑같은 행위는, 원시인과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에 맞설 정도의 서로 다른 心性에 있어서는 동일한 주관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원시인에 있어서 사고란 집중된 몽상이고 교육을 받은 사람에 있어서의 몽상이라는 온화한 사고이다. 움직이는 방향은 두 경우에 있어 서로 반대된다. 예를 들면 원시인은 마른 두 쪽의 나무를 비벼댐으로 불이 생겼다는 것이 합리주의적 설명의 중심사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 그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느냐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응용되는 <객관적인>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대개는 이 최초의 발견의 심리학을 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밝히려고 애쓰고 있는 극히 소수의 저자들 가운데도 그 대부분은 숲속의 불이 여름에 가지와 가지의 <마찰>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고발하고자 하는 회귀적 합리주의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소박한 관찰의 여러 가지 조건을 재생시키지 않고, 하나의 이미 알고 있는 과학에서 출발하여 이 推論에 의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 
 
현재도 사람들은 숲속의 불에 대해서 별다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할 때는, 그 분명하지 않은 것의 원인은 마찰작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현상은 자연의 양상 그대로 관찰되어진 적은 결코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이 관찰되어졌을지라도 다만 단순한 현상에 접근했을 때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찰작용은 아닐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의 <충격>으로 나무에 불이 일어나게 된 마찰과 마찬가지로, 오래 준비된 점진적인 현상을 암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결론에 이른다. 즉, 불을 낳기 위해서 원시인에 의해서 이용되는 마찰에 기초를 둔 실천의 어떠한 것도 하나의 자연현상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시사된 적은 없는 것이다. 
 
이 난점을 실레겔(schlegel)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해결을 하지는 않았으나 합리적인 표현으로 제기된 문제가 원시인의 심리적 가능성에 적응하지 않음을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原註1) [문화라는 대건축물 전체의 초석인 불을 단순히 발견하는 일도, 프로메테우스의 우화가 그것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 거친 단계에서부터 고려하여 그것이 극복할 수 없이 곤란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불만큼 일반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몇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대지에서 불을 본 일도 없이 황야를 헤메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을 뿜고 있는 화산, 벼락에 의해서 타오르는 숲이 인간에게 인정받았다고 하자. 
 
즉, 거칠고 불순한 계절과 마주보며 헐벗은 채로 참아온 사람이 거기서 몸을 녹이기 위해서 바로 달려간 것일까? 차라리 도망간 것이 아닐까? 불의 광경은 길들여진 생활에 의해서 거기서 익숙해진 동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동물에겐 공포를 준다. 자연이 제공한 불의 고마운 효용을 경험한 후에 인간은 어떻게 불을 보유한 것일까? 
 
한 번 꺼져 버리면 인간은 어떻게 하여 그것을 다시 붙일 수 있었을까? 만일 마른 두 쪽의 나무가 처음으로 원시인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어떠한 경험이 그것을 재빠르게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마찰시켜서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일까?] 
 
 
반대로 만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설명이 원시의 정신에 의한 발견의 이유를 명백하게 하는 데 불충분하다면, 보기에 제아무리 대담한 정신분석적인 설명도 결국은 진실의 심리학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첫째로 마찰은 바로 性的인 경험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고전적인 정신분석에 의해서 모아진 심리학적 기록에 눈을 돌리면 이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둘째로 만일 열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인상의 특수한 정신분석의 여러 가지 보고를 잘 체계화하려고 하면, 마찰에 의해서 불을 낳는 <개관적> 시도가 아주 내적인 경험에 의해서 나타나게 됨을 확신할 수 있다. 
 
불의 현상과 그 재생산 사이의 回路가 가장 짧아지는 것은 이 방향에 있어서이다. 사람은 불의 객관적인 재생산에 있어서의 최초의 과학적 가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知的 철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늠름한 熱愛者이며 신들의 질투는 복수에 몸을 태우는 자의 복수이다. 
 
이 정신분적인 고찰을 정식화해 버리면 바로 많은 전설과 관습을 쉽게 설명할 수가 있다. 합리적 설명의 무의식 속에 흔입되어 있는 표현이 새로운 빛 속에서 해명될 것이다. 인류의 기원의 연구에 지극히 날카로운 심리학적 직관을 가지고 온 막스 뮐러는 심오한 언어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정신분석적인 직관 가까이 그것을 식별함이 없이 지나간다(原註2). 
 
[불에 대해서는 말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여기에 그 첫 번째의 것이 있다. [불은 나무 두 조각의 자식이다.] 어째서 <자식>일까? 이 발생론적 견해에 현혹되어 있는 것은 누구인가? 원시인인가 아니면 막스 뮐러인가. 이와 같은 영상은 어느 쪽에서 더 명석해질 것인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명백한 것일까, 아니면 주관적인 것일까? 그것을 밝히는 경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조각의 나무를 비벼댄다는 객관적 경험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육체를 불과 함께 태워버리는 더 강하고 애정이 깃든 비범의 내밀한 경험인가. 불이 나무의 자식임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족하다. 
 
비밀로 남은 사랑의 과실인 이 불순한 불이 거의 그 발단에 있어서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새겨내고 있는데 놀랄 것인가? 막스 뮐러의 표현은 이 점에 대해서 잘 밝히고 있다. 원시의 불에 대해서 말하는 제 2의 사항은 <태어나기가 무섭게 불은 왜 그 부모, 즉 자기를 낳게 한 두 개의 나뭇조각을 태워버리는가?>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처럼 묘하고 완전하게 표시된 젓은 없었다. 
 
만일 당신에게 불이 결여될 경우 그 <타는 듯한> 좌절감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그 불이 당신의 내부에 멈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불을 낳는다면 이번에는 스핑크스가 당신을 태워버릴 것이다. 사랑이란 옮기며 전달되는 불에 지나지 않고, 불이란 농락해야만 할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막스 뮐러는 당연하게도 프로이트 시대의 심리학적 혁명이 가지고 온 새로운 지식을 이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몇 개의 모순이 그의 언어학적 명제 속에까지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원시인이 불을 思惟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였을 때, 무엇이 일어나야만 했던가?] 그는 불이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서 탕진자이거나 조명자라고 거기에 이름을 부여할 수가 있다. 
 
여기서 막스 뮐러의 <개관적> 설명에 한한 경우, 사람들은 원시에 있어서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닿기 전에 항상 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을 이름 붙이는 것은, 결국 시각적인 여러 가지 속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막스 뮐러의 말에 의하면 <인간을 사로잡는 것은 특히 불의 재빠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민감한(le vif) 것, 날렵한(l´ag¬ile) 것, 아그니(Ag¬nis, 불(ig¬nis>이라고 불리워진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간접적이고 불규칙한 일련의 현상에 의한 이 호칭은 당연히 아주 인위적으로 보일 것이다. 한데 반대로 정신분석적 설명은 모든 것을 다시 세운다. 그렇다. 불은 아그니(Ag¬nis)이고 아질(Ag¬ile)이다. 
 
그러나 원시적이고 신속한 것, 그것이야말로 태어나게 되는 현상 이전의 <인간적> 원인이고, 더 내밀한 애무를 모방하여 도랑 속에 절굿공이를 처박는 손이다. 불은 나무의 자식이기 이전에 인간의 자식이다. 
 
 
先史의 인간의 심리학을 밝히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방법은 아직도 존재해 있는 미개인을 연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궁극에 있어 더 완전하게 적합한 것처럼 느껴지는 <원초성>이라는 것에 대한 다른 여러 가지 예가 존재한다. 사실 적절한 객관적 태도를 취하는 일의 곤란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새로운> 현상을 고찰함으로써 족하다. 
 
현상의 <未知>의 측면은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그 객관화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지>라는 것에 대응하는 것은 무지가 아니고 오류이며, 그 오류는 주관적 결함에 의해서 그 짐이 과중해진 오류이다. 
 
<원시성>의 심리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본질적으로 새로운 과학적 인식을 고찰하고 다음에 유효한 과학적 발견의 방법에 무지하고 잘못 되어진 비과학적인 정신의 여러 가지 반발을 추구해 나가기만 하면 족하다. 
 
18세기에 있어서의 電氣의 과학은 이 점에 있어 우리에게 심리학적 고찰의 끝없는 광맥이 될 것이다. 특히 <전기불>은 정신분석적 관심을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현상의 위치에까지 내려진 보통 불보다 아마도 훨씬 <성적인 불>이다. 
 
그것은 신비적이기 때문에 명백하게 성적이다. 우리가 명료하게 제 1의 적인 성적 특성을 지적한 마찰의 관념에 관해서 우리는 불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이 전기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자연학과 역학에 관한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해서 국왕의 허가를 받은 기술자이며, 또 변호사인> 샤를르 바비코는 1753년에 《원소적 불의 광경 또는 실험적 전기론》이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 속에는 마찰에 의해서 불이 생기는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章에서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정신분석적 명제의 하나의 (換位命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찰이 전기의 원인인 점에서 라비코는 마찰의 문제에 관해서 <兩性의 전기이론>의 전개를 시도한다. 
 
[기분 좋은 마찰은 우리가 精液이라고 부르는 精氣的物質을 포함한 물질의 통과와 탈출을 막는 공기의 정기로 된 부분을 전개한다. 이 전기를 일으키는 마찰은 우리의 내부에서 희박해지고 불의 精氣가 마찰된 장소에 축적됨에 따라 어느 감각, 즉 불의 정기의 끝의 섬세함에 의해 간지러움을 일으킨다. 
 
이때 그 液은 분위기 속에 축적된 불의 정기의 경쾌함에 못 견디어 그 자리를 떠나, 또한 하나의 분위기에 지나지 않는 子宮속에 퍼붓는다. 膣은 이 자궁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는 종합적 貯水槽로 통하는 관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性器 안에는 성감부분이 있다. 이 부분과 여성과의 연결은 남성의 성감부분과 남성의 관계와 같다. 
 
이 부분도 비슷한 희박한 기능, 간지러움, 감각 등을 받는다. 이 同一部分도 또 마찰작용에 참여한다. 불의 정기의 첨단은 여성의 성기 안에서 더욱더 감각적이 된다........여성의 성기는 卵巢 속에 있는 조그만 人間球體를 보관하는 것이다. 이 조그만 구체는 타성적이고 생기가 없는 전기를 일으키는 물질이다. 
 
즉, 그것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초나 또는 생명의 불꽃을 받고자 대기하는 알, 과일의 씨, 종자식물의 씨 같은 것이다. 결국 그것은 불의 정기를 기다리는 불쏘시개나 성냥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이미 독자의 인내심을 지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넓은 범위에 걸쳐 그 수도 무수한 같은 원본이 실로 명확하게 우리에게 <純粹力學>에 열중하려는 그 정신의 밀도 있는 기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신뢰의 중심이 결코 객관적 실험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찰되어 타오르는 전기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고 생식행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다. 
 
마찰에 무의식의 성적인 倍振動이 결여될 때, 그 배진동이 윤기 없는 단단한 영혼 속에서 활홀케 하는 공명을 일으키지 않을 때, 마찰작용은 순수한 역학적인 장소로 돌아가 그 설명력을 상실한다. 이 관점에서 아마도 熱動力學理論이 맞부딪친 오랜 저항을 精神分析的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적인 표상에 있어서는 매우 명석하고 사실, 실증적인 정신에 있어서는 매우 만족할 만한 이 이론도 前科學的精神에 있어서는 깊이가 없는, 즉 무의식의 충족이 없다고 이해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일련의 서간형식으로 와트슨(G. Watson)에게 보낸 《전기의 원인에 대한 試論》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자기의 환멸을 표명하고 있다. [나는 불이 마찰에 의해서 생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이론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나에게는 물이 펌프에 의해서 생긴다는 주장과 똑같아 보인다.] 
드 샤틀레 부인으로 말하면 그녀는 이 명제 속에서 조금 계몽되는 점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불은 하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가장 맹렬한 불이 외관상은 가장 냉정한 육체가 부딪침으로써 순간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야말로 의심없이 대자연의 최대의 기적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와 같이 근대 에네르기론이 가르치는 바에 기초를 두고, 부싯돌의 粒子의 충돌이 그 灼熱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즉시 이해하는 과학정신에 있어서는 자명한 것의 하나인 사실도, 드 샤틀레 부인 같은 前科學的인 정신에 있어서는 불가해한 대상이 된다. 그녀는 실체론적 설명, <심오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심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감추는 것이고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그것을 생각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만일 독자가 완고한 공리주의로부터 자기를 해방하고 선사의 인간은 불행과 필요성에 싫건 좋건 얽매어 있다고 상상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명제는 그다지 대담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여행자가 우리에게 미개인의 무관심성을 가볍게 말한다. 우리는 그 점에도 불구하고 동굴에서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 관한 생활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소름이 끼친다. 
 
아마도 우리의 조상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에 민감하지 않았기에 더욱 기쁨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고 자신의 행복을 더 의식했을 것이다. 육체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뜨거운 기분 좋은 행복이 원초적인 경험에 가치를 부여했는지 모른다. 
 
마른나무의 오목한 곳에 몽둥이를 넣어 그것이 타도록 하려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노동은 그 몽상이 아주 성적인 하나의 存在者에 있어서는 매우 감미로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이 노래하는 것을 배운 것도 아마 이 우아한 노동 속에서일 것이다. 하여튼 그것은 분명히 율동적인 노동이고 일하는 자의 율동에 <대답하고> 그에게 기분 좋은 여러 가지의 메아리를 가지고 오는 노동이다. 
 
마찰하는 팔, 서로 부딪치는 나무, 노래하는 소리, 모든 것이 같은 조화, 같은 율동적인 機能亢進 속에 통일되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희망, 그 <가치>가 알려져 있는 하나의 목적에 집중한다. 사람은 마찰하는 일에 관계하기가 무섭게, 감미로운 객관적인 따뜻함을 경험하는 동시에 기분 좋은 행동의 뜨거운 인상을 가질 것이다. 
 
리듬은 서로가 서로를 昻揚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유도하고 자기유도에 의해서 지속된다. 만일 우리가 진동하는 것에만 <시간적 실제성>을 주라고 우리에게 충고하는 핀하이로 도스 산토스씨의 리듬분석의 심리학적 여러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율동적인 노동 속에 발생하는 활력에 넘치는 다이나미즘, 조화있는 심리작용의 가치를 이해할 것이다. 
 
향연에 가담하는 것은 바로 존재 전체이다. 원시인들이 처음에 그 자신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 자기 의식을 되찾는 것은 고통 속에서보다는 향연 속에서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방법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이따금 더 敎示的이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마찰에 의해서 불을 일으키는 원시적인 방법을 <이해하는> 그 신선학과 그 공감에 도취되기 위해서는, 이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르지니와 생각에 잠긴 폴은 그의 친구에게 조금 자란 캐비지야자의 꼭대기에 있는 <가시가 있는 새싹>을 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도끼로도 찍기가 힘든데 폴은 칼도 갖고 있지 않다. 폴은 나무뿌리를 태워버리고자 하나 부싯돌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이 섬은 바위로 덮여 있으면서도 부싯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서 버려져 있음을 나타내는 이 생각과 새로운 생각에 넘치는 간결한 문장에 유의한다. 이 문장은 정신분석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결심, 즉 흑인들의 방법에 의지하는 필요를 나타내고 있다. 이 방법은 그 적용에 앞서 의외로 놀랄만한 간단한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原註3). 
 
[돌의 뾰족한 모서리로 그는 잘 마른 하나의 나뭇가지에 구멍을 뚫고 그 가지를 그의 두 다리 밑에 꽉 누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돌의 예리한 날이 된 부분으로 똑같이 메마른 質이 다른 나뭇가지의 끝을 뾰족하게 하여, 그 끝을 그가 발로 밟고 있는 나무의 조그만 구멍에 처박고, 초콜렛에 거품을 일게 하기 위해서 젓는 棒을 돌리듯 그 봉을 두 손 사이에 끼고 재빨리 돌렸다. 
 
그러자 바로 가지가 서로 닿는 곳에서 연기와 불씨가 나타났다. 그는 마른 잎과 잔가지를 모아 캐비지야자의 나무뿌리 아래서 불을 피웠다. 이윽고 그 나무는 큰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또 그 불은 새싹을 쌓고 있는 목질의 가시가 많은 긴 잎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비르지니와 그는 새싹의 일부를 날로 먹고 나머지를 잿속에 묻어 구워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것이나 맛이 있다고 느꼈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다른 성질>의 두 조각의 나무를 권한 점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시적 심성에 있어서 이 차이는 성적인 차원이다. 
 
《아르카디아 기행》 속에서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는 전혀 아무런 이유 없이 송악(liere)과 월계수(laurier)를 열거할 것이다. 마찰봉과 초콜렛에 거품을 일게 하는 얼레봉의 비교가 이 과학적인 주장에 눌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언제나 읽고 있던 놀레수도사의 <물리학> 속에서 되찾게 된다. 
 
이 꿈과 독서의 혼돈은 그것만으로도 이성화의 징후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이 작가는 자기의 이야기의 부조리를 눈치챈 것 같지 않다. 도취시키는 공상이 그를 싣고 가고 그의 무의식은 서로 사랑하는 감미로운 신뢰 속에서 고통 없이 커지는 태초의 불의 기쁨을 되찾는다. 
 
마찰운동이 충분히 기분 좋게 계속되는 것이라면 활발한 마찰운동의 <리듬의 조화>가 <황홀감>을 일으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간단할 것이다. 심한 가속도가 가라앉고, 다른 리듬이 준비되고, 일하는 자의 얼굴에 미소와 편안함이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기쁨은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특수한 감정의 힘의 표시이다. 어느 주부들의 지나치게 섬세한 마음씀 속에서도 그 충분한 설명을 찾아낼 수 없는 마찰, 닦고, 갈고, 윤을 내는 일의 기쁨도 이처럼 설명되는 것이다. 발자크가 《고브섹크》 속에서 노처녀들의 <차디찬 실내>가 가장 윤기로 둘러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청결함은 불결의 하나의 형식이다. 
 
어느 정신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초과학적인 이론 속에서 아주 몽상 속에 있는 고독한 사랑의 상태를 넘어서 육체적인 상호간의 사랑의 단계에 이르는 마찰의 <價値附與作用>을 주저함이 없이 강조한다. 그의 저작이 수없이 판을 거듭한 J•B•로비네는 176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빛을 주기 위해서 닦여진 돌은 자기 속에서 무엇을 구하는가를 이해한다. 
 
고로 그 빛은 겸양의 표시이다......나는 광석이 선행의 으뜸가는 그리고 최대의 보수인 달콤한 충족을 享有함이 없이는, 스스로의 미덕에 의해서 우리에게 그처럼 많은 좋은 일을 해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는 매우 부조리한 의견이라도 깊이 뿌리박은 심리적 원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때로는 로비네는 <과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글을 멈춘다. 정신분석가라면 <자신을 배반하는 것이 두려워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긴장은 이미 아주 명백하다. 긴장이야말로 해명되어져야만 하는 심리적 실재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여러 가지 결과에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과학사가 하는 것처럼 그것을 묵살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다. 
 
요약하면 우리는 구스타프 칼 융이 한 것처럼 일체의 원시적인 활동 속에 리비도의 구성요소를 체계적으로 탐구하기를 제안한다. 실제 리비도가 승화되는 것은 예술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행위적 인간의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어떤 사람이 인간을 손과 언어로써 규정지을 때,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잘 그것을 표명할 것이다. 
 
그러나 <도움이 되는> 동작이 <좋은> 동작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손은 목소리가 노래하는 기관인 것처럼 애무하는 기관이다. 처음 애무와 노동은 서로 연결된 것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노동은 상대적으로 기분 좋은 노동이다. 어느 여행자는 우리에게 두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노동에 종사함으로써 비로소 물건을 연마해서 형성하는 미개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완성시키는 도구가 부드러우면 부드러울수록 그 연마하는 일은 더욱 아름답고 섬세한 것이 된다. 좀 역설 같지만 우리는 새겨진 돌의 나이를, 애무를 받은 돌의 나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난폭한 사람은 부싯돌을 부숴버린다. 그는 그것을 잘 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부싯돌을 잘 쓰는 사람은 부싯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여성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을 사랑한다. 
 
우리가 잘 닦은 부싯돌의 날을 응시할 때, 말할 수 없이 멋지게 생긴 그 잘리는 면은 힘의 <환원>에 의해서 억제되고 함축이 있는 방향지워진 힘에 의해서, 즉 <정신분석된> 힘에 의해서 얻어졌다는 생각을 누를 수가 없다. 
 
닦여진 돌과 더불어 우리는 간헐적인 애무로부터 계속적인 애무로, 기분 좋게 감싸는 율동적이고 매혹적인 운동으로 옮겨간다. 모든 경우에 이처럼 힘차게 일하는 사람은 추억과 희망의 양자에 의해서 힘을 얻는다. 고로 우리는 그의 몽상의 비밀을 감정의 여러 가지 힘의 영역에서 구해야만 한다. 
 
 
축제의 신호는 언제나 마찰에 의한 불의 생산과 연결된다. 중세에는 매우 유명하고 미개한 부족들에 거의 보급되어 있는 불의 축제 속에서도 때로는 그 始原의 관습에의 回歸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불의 <탄생>이 그 숭배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A•모오리에 의하면 게르마니아 지방에서는 노스포이에르 또는 노드픠르라는 두 개의 나무쪽을 비빔으로써 불을 붙이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샤토브리앙은 나체쯔 지방에서 행해지는 <불의 의식>에 관한 기술을 길게 하고 있다. 그 축제의 전날 밤 1년 동안 계속 타던 불은 꺼지도록 내버려둔다. 
 
새벽이 되기 전에 사제는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우면서 두 개의 나무쪽을 천천히 마찰시킨다. 새해의 태양이 나타나면 사제는 그 운동의 속도를 빨리 한다. [대사제가 성스러운 외침을 지르는 순간 불은 마찰에 의해 열기 띤 나무에 붙는다. 유황을 칠한 불씨가 불을 받는다. 주술사가 갈대굴레에 불을 옳긴다. 그러자 불꽃은 그 굴레를 둘러싸고 나선형으로 타오른다. 
 
참나무 껍질이 제단 위에서 불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불이 마을 집들의 꺼진 화로에 새로운 불씨를 준다.](原註4) 이와 같이 하여 나체쯔 지방에 있어서의 태양신 숭배의 제사를 겸한 이 의식은 특히 불의 <播種>의식이다. 그 불씨는 씨로서의 완전한 힘을 갖기 위해서, 불을 일으키는 마찰도구에서 태어난 그 최초의 강렬함으로써 잡아야 한다. 여기서 마찰하는 방법은 자연의 방법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인간이 거기에 자기의 독자적인 자연을 통해서 도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 번 더 되풀이하자. 진실로 불은 천계로부터 훔쳐오기 전에 우리의 내부에서 발견된 것이다. 
 
프레이저는 마찰에 의해서 점화된 祝火에 매우 많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 벨르텐 제사의 스코틀랜드의 불은 <神불> 혹은 <淨火>에 의해 불태워진다(原註5). [두 개의 나무쪽을 심하게 비벼댐으로써 불이 생겨나며, 불씨가 흩어지면 그 틈을 타서 참나무 고목에서 자라는 매우 잘 타는 버섯의 일종을 거기에 댄다. 
 
이 불은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것처럼 보이고 여러 가지 공덕이 나타난다.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나 가축을 위해 마귀를 제거하는 힘이며, 염병에 대한 최량의 약이라고 믿는다.] 프레이저가 <하늘에서 이 神불이 직접 내려온다>고 말했을 때 그는 도대체 어떠한 출현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부터 프레이저의 모든 설명체계가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프레이저는 실제로 그의 설명의 모티브를 유용성에 둔다. 그러기 때문에 祝火로부터 아마밭•밀밭•보리밭들을 풍부하게 하는 재가 나오는 것이다. 
 
이 최초의 입증은 탄산염과 또 다른 화학비료의 효용을 간단히 믿고 있는 오늘날의 독자를 그릇되게 하는 일종의 무의식의 이성화를 도입한다. 그러나 깊고 모호한 가치로 빠지는 것을 더 가까이서 보자. 신불에서 얻은 이 재는 수확을 가져오게 될 대지에 기여할 뿐아니라 동물을 살찌게 하는 사료에도 혼합된다. 
 
또 때로는 그것은 가축을 늘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결국 그 습관의 심리학적 원리가 명백해진다. 동물이 살찌건 전답이 비옥해지건 명백한 유용성 저쪽에는 더 내밀의 꿈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시없는 性的인 형식을 취한 다산성의 꿈인 것이다. 축화의 재는 동물과 전답들을 수태시킨다. 
 
<그런 까닭에> 이 재들은 여성들을 수태시킨다. 객관적 귀납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는 것은 불꽃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다. <유용성>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은 기분 좋음이라는 설명에 양보해야 되며, 합리적 설명은 정신분석적인 설명에 양보해야 된다는 것을 거듭 말해둔다. 
 
우리들은 그러기를 제안하지만 그 중점이 기분 좋은 가치에 놓일 때 설사 불이 후에 <유용>할지라도 그것은 그 준비 속에서 이미 <기분 좋다>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나중보다는 그 전이 더 감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만일 미개인이 축화, 즉 始原의 불은 모든 종류의 효력을 갖고 힘과 건강을 준다고 믿더라도, 그것은 그 불이 번쩍이고 그의 여러 가지 욕망을 충족하려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사는 인간의 행복, 그 內密의 그리고 거의 이겨낼 수 없는 힘을 그가 체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더 밀고 나가서 그 모든 세부에 있어서 프레이저의 설명을 역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이저의 경우 축화는 식물의, 특히 숲속 식물의 신성한 죽음과 관계가 있는 제사로 되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식물의 신성이 미개의 영혼 가운데서 이다지도 큰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나무의 최초의 <인간적> 기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모의 보잘것없는 과일인가? 아니면 그것은 불이 아닌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생긴다. 즉, 프레이저가 믿고 있듯 그들은 나무를 예배하고자 불을 일으키는가, 또는 보다 깊은 애니미즘적인 설명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불을 숭배하고자 나무를 태우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이 후자의 해석이 프레이저의 해석에서는 설명되지 않은 채로 있는 <불의 축제>에 관한 세부에 대해서 많은 빛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옛날부터의 관습으로 이따금 젊은 남녀가 함께 또는 그 마을에서 막 결혼한 남자에 의해 祝火의 불을 붙이도록 권하는 것일까? 
 
프레이저가 우리에게 <그 해에 풍작을 구하고 또는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 또는 몸이 아픈 것을 막기 위해 잿더미> 위를 뛰어넘는 젊은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 열거한 세 개의 동기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명백하게 압도적인 무엇은 없는 것일까? 왜 갓 결혼한 마을의 새색시가 불 위를 뛰어넘어야 하는가? 왜 아일랜드에서는 <젊은 아가씨가 앞뒤로 세 번씩 불 위를 뛰어넘으면 바로 결혼하고 행복해지고 자식 복을 받는 것일까?> 왜 어떤 젊은이들은 <세례 요한 축제의 불은 자기들을 불태우지 않는다고 믿는 것일까?> 
 
아주 다른 신뢰성을 기초잡기 위해서 그들은 개관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내밀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브라질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몸을 태우는 일 없이 입 속에 불을 넣는 것일까?> 도대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무모한 일을 하도록 하는 근본적 경험은 무엇일까? 왜 아일랜드 사람들은 <새끼를 낳지 않는 가축을 내몰아, 夏至 때 불 밑을 지나가게 하는가?> 
 
게다가 레크(Lech)계곡의 다음과 같은 전설도 역시 명확하다. [젊은 남자와 아가씨가 함께 夏至 때 불을 뛰어넘는 순간 불에 타지 않는다면 그 아가씨는 일 년 이내에는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즉, 불꽃이 그녀에 닿지 않아 잉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 몸을 태움이 없이 불과 희롱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프레이저는 이 후자의 실례에 대해서 <에스토니아 사람들 사이에서 하지 때 축제를 특징짓는 것처럼 보이는 저 방종한 광경>을 연결할 수 있는지 어떤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에게 되는대로 참조를 늘어놓은 책에서 이 불의 향연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는 북부 인도에 있어서의 불의 축제, <음탕하지는 않지만 방종한 노래와 춤이 동반된> 축제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우리에게 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 최후의 평은 설명방법의 어떤 단절을 나타낸다. 우리는 프레이저의 이론 속에서 해덥을 얻지 못하지만 그러나 불의 원초적 性化作用이라는 사고방식에 의해서 해명되는 문제를 많이 들 수가 있다. 사회학적 설명의 불충분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카알 융의 리비도를 병행해서 읽는 것이 좋다. 
 
<겨우살이의 문제>와 같이 극도로 명확한 점에 관해서도 정신분석가의 통찰은 결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또 사람들은 융의 책 속에서 마찰과 원초적인 불의 성적인 성격에 관한 우리의 이론을 지지하는 많은 논증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들 여러 논증을 체계화하고, 거기에 깊이는 없어도 객관적 인식과 가까운 심성의 고뇌에서 끄집어낸 여러 가지 기록을 덧붙인 데 지나지 않는다. 
 
《불의 기원에 관한 신화》라는 제목이 붙은 프레이저의 특수한 책은 페이지마다 정신분석이 실제에 있어서 불필요한 정도로 명백한 성적 흔적을 암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시도하는 우리의 목적은 근대의 心性을 연구하는 데 있으므로 우리는 프레이저에 의해 연구된 미개의 심성을 상세히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로 우리는 사회학자의 해석을 정신분석적 의미로 정정하는 필요성을 나타내고자 두세 개의 예를 들기로 한다. 
 
이따금 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의 특성인 붉은 표지를 꼬리에 단 또 한 마리의 조그만 새이다. 어떤 오스트레일리아의 부족에 있어서는 그 전설이 매우 불쾌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는 차라리 그 새가 불을 훔치는 데 성공한 것은 그것이 유쾌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는지도 모른다. 
 
[귀머거리의 殺母蛇가 옛날에 불을 독점했었다. 그는 자기 몸속에 그 불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새나 모두 그것을 훔치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조그만 매가 갑자기 날아와 아주 재미있는 광대놀이를 하자, 그 살모사는 그 찡그린 얼굴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어 웃고 말았다. 이때에 불은 그에게서 도망쳐 마침내 共有의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왕왕 불의 전설은 방종한 사랑의 전설이었다. 불은 무수한 농담과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불은 <도적>맞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창조적인 모든 동물에 대해서 산재해 있다. 불을 훔치는 것은 대부분 새, 즉 굴뚝새•울새•벌새 등 조그만 동물들이다. 때로는 그것은 꼬리 끝으로 불을 나르는 토끼•오소리, 또는 여우일 때도 있다. 
 
다른 곳에서는 여자들이 서로 때리고 싸우는 일도 있는데 <마침내 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전투용의 굵고 짧은 몽둥이를 부러뜨린다. 그러자 여기에서 불이 생겨난다.> 불은 또 <나무에서 두 개의 몽둥이를 잘라 그것을 서로 심하게 비벼댐으로써 자기의 분노를 위로하는 노파에 의해서 생겨난다.> 
 
수없이 불의 창조는 심한 힘에 연결되어 있다. 즉, 불은 내적인 분노가 타오르는 손에 의해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하나의 객관적 발견의 근원으로서 감정성을 강하게 띤 심리상태에 언제나 부딪친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때 우리는 몇 종류의 불을, 즉 온화한 불, 음험한 불, 반역적인 불, 난폭한 불이라는 구별을 지어 그것을 욕망과 정열의 기초 심리학에 따라서 특징지을 수가 있다. 
 
어느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은 어떤 토템 신앙의 동물인 유로(Euro)와 같은 동물이 그 몸 속에 불을 넣고 다닌다는 것을 되새기고 있다. 한 남자가 그것을 죽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 동물이 불을 만드는가, 또는 그것이 어디서 오는가를 알기 위해서 몸을 주의 깊게 조사했다. 그리고 매우 긴 수놈의 생식기를 뜯어내어 그것을 둘로 잘라 거기에 붉은 불이 있는 것을 알아내었다.] 
 
만일 어느 세대나 그것을 믿을만한 내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와 같은 전설이 어떻게 계승되었을까? 
 
다른 부족에 있어서는 [남자들은 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여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숲속으로 사냥을 나간 사이에 여자들은 자기들이 음식물을 익혀서 자기들끼리 먹었다. 여자들이 자기의 식사를 마쳤을 때 그녀들은 멀리서 남자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불에 대해서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빨리 불씨가 남아 있는 재를 긁어모아 남자들이 그것을 볼 수가 없도록 자기들의 음부에 감추었다. 남자들이 돌아와 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나 여자들은 불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연구할 경우 사람들은 <실재론적인 설명의 전면적 불가능성>을, 그리고 바로 그때 반대로 정신분석적 설명이 직접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에 있어서는 <실재적인 불>, <객관적인 불>을 많은 신화가 말하고 있듯이, 몸의 내부에 감출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명료한 사실일 것이다. 
 
또 사람들이 이처럼 쉽게 거짓말을 하고 어떠한 명백한 증거에도 거역하여 가장 내적인 욕구를 부정하면서 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의 평면에 있어서라는 것도 동등하게 옳을 것이다. 
 
남미의 신화에서는 어떤 영웅이 불을 얻고자, 한 여자를 추적한다. [그는 그녀를 달려가서 붙잡았다. 그는 그녀에게 만일 네가 나에게 불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면 너를 약탈하겠다고 말했다. 몇 마디의 구실을 붙인 후에 여자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여자는 땅에 누워 두 발을 벌리고 배 위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불덩어리가 본래 달려 있는 수로를 통해 大地로 굴러 나왔다. 그것은 오늘날 알고 있는 불은 아니다. 그것은 타고 있지도 않았고 물건을 익히지도 못했다. 
 
그러한 특성은 여자가 그것을 놓았던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지제코는 그것을 본래의 상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태울 수 있는 나무껍질•과일•붉은 후추의 열매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들과 여자의 불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불을 만든 것이다.] 
 
이 例는 우리에게 <비유에서 실재로> 옮겨가는 명석한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이 이동은 실재론적 설명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서 비유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주 반대로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이론의 착상과 일치하여 주관적 기원의 비유로부터 객관적 실재로 가는 것이다. 
 
사랑의 불과 후추의 불이 결합하여 마침내 마른 풀을 태우는 것이다. 불의 발견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不條理性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그 실재론적인 설명의 부족함에 대해 놀라지 않고서는 프레이저의 풍부하고 매혹적인 그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연구되어 있는 전설의 수는 아마 1천 개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다만 성과 연결된 것은 2,3개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로 말하면 그 바닥에 있는 감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객관적 설명을 주기 위한 목적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불의 기원에 관한 하와이의 신화는 많은 같은 형의 오스트레일리아 신화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종류의 새의 특정한 색깔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곳에서는 토끼에 의한 불의 도난은 그 꼬리의 짙은 갈색 또는 흑색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객관적 細部에 사로잡혀 있는 이와 같은 설명은 감정적 관심의 원초성을 고려에 넣지 않게 된다. 
 
원초의 현상학이란 감정의 현상학이다. 그것은 몽상에 의해서 투사되어 있는 환상으로부터 객관적 존재를, 욕망으로부터 이미지를, 신체적 경험으로부터 물질적 경험을, 사랑으로부터 불을 창조한 것이다. 
 
 
다소 원초성의 영속적인 경험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낭만파의 사람들은 그것을 추호도 의심함이 없이 성적인 가치를 부여받은 불의 주제를 재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폰 슈베르트(G.H. von Schubert)는 불의 정신분석에 의해서만 해명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原註6). 
 
[우정이 우리에게 사랑을 길러주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몸을 서로 비빔으로써 향수(열기)가 태어나고 사랑(불꽃)이 솟는다.] 향수란 보금자리의 따뜻한 추억이며, <안에 넘치는 따스함calidum innatum>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지는 사랑의 추억이라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보금자리나 잠자리에서의 詩想은 다른 어떠한 근원도 갖고 있지 않다. 수풀 근처의 보금자리 속에서 얻어진 어떠한 객관적인 인상도 보금자리의 쾌적함, 감미로움, 따뜻함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이 수많은 형용사의 풍부함을 그토록까지 풍부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연의 따뜻함을 마치 2배로 하는 것 같은 인간에 의해 따뜻해진 인간의 추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자기들의 조그만 보금자리에 대해서 말하는 연인들을 마음에 그릴 수 없을 것이다. 보드랍고, 따뜻한 느낌은 이와 같이 행복의 의식의 근원에 있는 것이다. 더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행복의 의식의 기원이라 말할 수 있다. 
 
노발리스의 시상은 모든 것은 우리가 만일 거기에 불의 정신분석을 가하려 한다면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詩란 <원초성>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다. 노발리스에 있어서 이야기란 언제고 다시 우주발생론이다. 
 
그것은 태어나는 영혼과 세계와의 공시적인 존재인다. 이야기란 <자유의 시대이며, 자연의 원시상태이며, 우주에 선행되는 시대>(原註7)라고 그는 말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데서 우리는 그의 명백한 양극성 속에 불과 사랑을 낳으려 하는 <마찰의 신>을 본다. 
 
즉, <비단 이불에 누워 있는 아르크루르왕의 아름다운 딸은 거대한 유황을 결정으로부터 솜씨 있게 조각된 옥좌에 기대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의 시녀들이 우유빛과 붉은 색이 혼합된 듯 보이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날씬한 손발을 열심히 주무르고 있다.> 
 
<그러자 시녀들의 손이 닿는 곳은 어디나 영혼을 뻗는 듯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 온 궁전이 이상하게도 번쩍였다.> 
이 빛은 내부의 빛이다. 애무당한 것은 행복으로 빛난다. 애무란 상징화된 마찰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장면은 계속된다. 
<그 용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당신의 방패를 만지게 해주세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자 그는 동의는 했으나, 
 
<그의 갑옷과 투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생생한 힘이 그의 온 몸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두 눈은 빛나고 심장이 투구 아래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아름다운 프라이아는 쾌활하게 보이고 그녀에게서 스며 나오는 빛은 더욱더 광채를 띠었다.> 
 
<[왕폐하 출두!]하고 한 마리의 멋진 새가 외쳤다.> 
 
만일 이 새야말로 <不死鳥>로, 이 불사조는 순간 가라앉은 욕망처럼 잿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라고 덧붙인다면, 우리는 이 정경이 불과 사랑의 이중의 原初性에 의해서 특징지워짐을 충분히 알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불을 붙이는 것이라면 우리가 불을 붙일 때 그것은 우리가 사랑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너무나 기뻐서 황홀해진 에로스가 잠자는 프라이아에게 접근했을 때 갑자기 무시무시한 음향이 울려나왔다. 한 줄기의 강한 불이 왕녀에게서 나와 칼 쪽으로 달려갔다.> 정확한 정신분석적 영상이라면 노발리스로 하여금 <칼에서 왕녀로>라고 말하게 했을 것이다. 
 
하여튼 <에로스는 그의 칼을 버리고 왕녀에게로 달려가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에 불의 입맞춤을 했다>(原註8) 
 
만일 우리가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원시의 불의 직관을 깎아낸다면 모든 시상과 모든 꿈은 동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노발리스의 경우는 거기에서 특정한 콤플렉스의 형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특징적이다.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는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침전물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명칭 앞에는 型이 없는 흐린 溶液管이 있다. 명칭 뒤에는 結晶을 액체 밑에서 볼 수 있다. 노발리스 콤플렉스는 이때 마찰에 의해서, 즉 서로 나누는 열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불을 향한 추진력을 종합까지 한다. 이 추진력은 그 원초성에 있어서 불의 先史的인 정복을 재구성할 것이다. 
 
노발리스 콤플렉스는 항상 빛의 순수하게 시각적인 지식을 능가하고 있는 내부의 열의 의식에 의해 특정지워진다. 그것은 열감각의 충족과 열을 내는 행복성의 깊은 의식 위에 기초한다. 열은 하나의 재산이며 하나의 소유이다. 
 
그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며, 당연히 서로 접하고, 서로 녹기에 어울리는, 융화되고, 선택된 것에만 주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희롱하고 웃는다. 다만 열만이 침투한다. 실레겔의 편지 속에서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데 [당신은 나의 얘기 속에 빛과 그늘의 희롱에 대한 나의 반감과 명확하고도 뜨겁고 또한 침투적인 에테르(Ether)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침투하는> 것, 사물의 <내부>까지, 존재의 내부에까지 뚫고 들어가려는 이 희망은 내부의 심오한 열에, 직관에 하나의 牽引作用을 한다. 눈이 닿지 않는 곳과 손이 닿지 않는 곳, 거기에 열은 넌지시 스며든다. 내부에서의 이 교감, 이 열의 공감은 노발리스의 작품 속에서 산의 따뜻함과 동굴과 광산에서의 下降에 있어서 그 상징을 되찾을 것이다. 
 
열이 확산되고 균등해지고 꿈의 윤곽처럼 몽롱해지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노디에(Nodier)가 지극히 절실하게 인정한 것처럼 지옥에의 타락의 어떠한 기술도 꿈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原註9). 노발리스는 다른 것들이 하늘의 차디차고 찬란한 확산을 꿈꾸듯 대지의 뜨거운 내부를 꿈꾸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광부는 <거꾸로 선 점성학자>인 것이다. 노발리스는 빛의 放射에서보다는 차라리 집중된 열 속에서 산다. 얼마나 많이 그는 <무명의 深淵家>로서 명상을 한 것인가! 그는 광산의 기사였기 때문에 광물의 시인은 아니다. 그는 시인이기는 했으나 땅속의 부름소리에 복종하기 위해서, <내적으로 넘치는 따뜻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기사가 된 것이다. 
 
그가 말하듯 광부는 <신의 선물을 받고 세계와 그 비참성의 저쪽으로 쾌활하게 자기를 昻揚시키는> 태세를 갖춘 심오한 영웅이다. 광부는 대지를 노래한다. [그야말로 대지와 맺고 다정스럽게 정을 나누고 새 부인을 그리워하는 뜨거운 생각으로 대지를 휩쓴다.] 대지는 어린이의 무의식의 마음속, 어머니 가슴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어머니의 유방이다. 
 
그 똑같은 열이 암석과 광부의 마음에 생기를 준다. [사람들은, 광부는 그를 대지를 파고 나가도록 하는 대지의 내적인 불을 그의 혈맥 속에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中心에는 싹이 있다. 즉, 중심에는 낳도록 하는 불이 있다. 싹튼 것은 타고, 타는 것은 싹트는 것이다. [나는 불속에서 자란 꽃이 필요하다. 
 
亞鉛이여! 하고 왕(原註10)은 외쳤다. 꽃을 달라......꽃 지배인이 群臣 속에서 나와 불꽃이 가득 든 분을 가지고 와 찬란하게 빛나는 種粉을 그속에 뿌렸다. 이윽고 꽃들이 솟아나왔다......] 
 
아마도 실증적인 정신의 소유자라면 여기서 <꽃의 제조술적>인 해석을 전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실증주의자는 우리에게 亞鉛에서의 반짝이는 불꽃이 공중에 그 산화물의 흰, 눈부실 정도의 엷은 조각이 분출하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그는 산화작용의 공식을 쓸 것이다. 그러나 이 <객관적> 해석은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현상의 화학적 원인을 발견하면서도 우리를 결코 영상의 중심에 노발리스적 콤플렉스의 핵심에 동반하지는 않는다. 이 해석은 시인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종류의 이미지가 우위를 차지하는가에 대한 분류에 대해서는 우리를 기만하기라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해석에 따르면 노발리스와 같은 시인에 있어서는 느끼는 욕구가 보는 욕구를 압도하고 있는 것, 그리고 괴테의 빛에 앞서, 존재의 모든 자질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모호하고 부드러운 열이 놓여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도 없이 노발리스의 작품 속에서는 더 완화된 면도 있다. 이따금 사랑은 폰 슈베르트의 의미 그 자체에 있어서의 향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열의 특성은 사라짐이 없이 멈추어 있다. 당신들은 그래도 노발리스는 <조그만 파란 꽃>의 시인이고, 파멸의 극에서 죽음의 그늘 속에 빠지는 일이 없는 추억의 담보로서 던져진 망각된 시인이라고 반대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의 심층에까지 내려가 시인과 함께 원초의 꿈을 찾아보라. 그러면 당신은 명확하게 조그만 파란 꽃은 붉다는 진리를 볼 것이다. 
 
<原 註> 
1. 오귀스트 기요므 실레겔(Auguste-Guillaume de Schlegel)의 《프랑스語 作品集》 
2. 막스 뮐러(F.Max Muller)의 《宗敎의 起源과 發展》 
3.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Bernardin de Saint-pierre)의 《自然硏究》 34章 
4.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美國紀行》 P.123-124 
5. 프레이저(J.G, Frazer)의 《金葉枝 제 3권 p.474 
6. 알베르 베겡(Albert Beguin)에 의한 引用 《낭만적 혼과 꿈》 제 2권 p.191 
7. 노발리스(Novalis)의 《헨리 오프터딩겐》 p.241, p.191의 註 
8. 노발리스의 前揭書 p.237 
9. 노디에(Charles Nodier)의 《스마라Smarra》 중 제 2의 序文 참조 
10. 노발리스의 《헨리 오크터딩겐》 p.227 
 
제 4장 性化된 불 
 
만일 불의 정복이 본원적으로 性的 <정복>이라면, 불은 매우 오랫동안 아주 강렬하게 성적인 것으로 존속해 왔음에 대해서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에는 불에 관한 객관적 연구를 극도로 막는 가치부여작용의 주제가 있다. 
 
따라서 다음 章에서 불의 化學을 취급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의 필요성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가 나타내고자 하는 성적인 가치부여작용은 감추어져 있을 경우도 있고, 또는 나타나 있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신분석에 대해서 가장 거역하는 것은 은밀하고 난해한 여러 가지 가치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장 활동적이기도 하다. 명백한, 혹은 알려진 여러 가치라는 것은 순식간에 축소되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무의식의 <저항>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이 저항이 지극히 미약하여 우리가 그 뚜렷한 과오를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고, 독자가 웃으면서 스스로 還元한다는 실례에서 시작하자. 
 
로비네의 의견(原註1)으로는 원소적인 불은 동류의 것을 <재생산>할 수가 있다. 이것은 보통의 경우는 주의를 끄는 일없이 할 수 있는 다 낡은 <가치 없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로비네는 거기에 강한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불의 원소는 특수한 싹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불은 <낳는> 어떠한 힘도 그러한 것처럼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不姙에 사로잡힌다. 새로운 불의 축제, 불을 바꾸는 불 등의 축제와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서 어떠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듯한데, 그때부터 로비네는 몽상 속에서 불의 發生論적 필연성을 재발견한다. 
 
만일 불이 자기의 자연의 생명에 몸 맡겨져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것이 양육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동물이나 식물처럼 나이가 들면 죽어 버린다. 
 
물론 여러 가지 불은 각기 개별적인 지울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原註2) [보통불•전기불•성냥불•화산의 불•번갯불은 동일의 火性的인 質料를 바꾼다고 생각되는 우연의 사건보다도 더 내적인 원리에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한 본질적•내재적인 자리를 지니고 있다.] 
 
이미 그 내부에 있어서, 그 생명에 있어서 포착되고 이윽고 그 생식력에 의해서 포착될, 저 실체의 직관이 작용하고 있는 보게 될 것이다. 로비네는 계속한다. [각기 천둥이 火性적 존재의 새로운 생산의 결과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화성적 존재로 말하면 그것을 배양하는 다량의 수증기에 의해서 급속히 증대하면서 바람에 의해서 모아져 대기층 사이로 여기저기 운반된다. 미국에 있어서 매우 수많은 새로운 분화구도 낡은 분화구의 새로운 噴火와 마찬가지로 지하의 불의 受胎와 다산성의 표현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다산성이란 비유가 아니고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성적인 의미로 잡아야 한다. 
 
천둥에서 태어난 이 화성적 존재는 하나의 번개가 됨으로써 관찰에서 도피한다. 그러나 로비네는 마음 내키는 대로 섬세한 관찰을 하기를 구한다(原註3). 
 
[한 장의 종이 위에서 부싯돌을 치면 불꽃이 떨어져 검은 조그만 반점을 찍는 바로 그곳을, 성능이 좋은 현미경으로 조사하던 후크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거기에 둥글고 번쩍이는 원자를 보았다. 그것은 조그만 幼蟲이었다.] 
 
불꽃이 되고 또 명멸하는 불의 생활은 개미를 먹는 짐승의 생활을 상기하지 않는 것일까? [조그만 사건에도 개미는 꿈틀거리며 그 땅속의 거주지에서 흔들거리며 나오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燐에 의한 약간의 충격으로 火性의 極微動物이 모여 반짝거리며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은 생명만이 색채의 명백한 개별성에 대해서 <깊고 또한 내적인> 근거를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스펙트럼의 일곱 무지개 색을 설명키 위해서 로비네는 <화성의 극미동물의 생활에 있어서의 일곱 개의 세대 또는 시기>를 제안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프리즘을 지나갈 때 이 동물은 제각기의 힘과 나이에 따라 굴절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처럼 각기 그 고유의 색을 띠게 된 것이다.] 꺼지려고 하는 불이 붉게 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꺼져가는 불은 불어 일으키고자 하는 자에 있어서는 불은 빛이 되어 <다 꺼져가는> 단단한 불과, 어느 연금술사가 아주 묘하게 말한 것처럼 <밭에서 양귀비의 빛나는 붉은 색>으로 기울어지는 젊은 불 사이에는 매우 명확한 구별이 있다. 
 
꺼져가려고 하는 불에 대고 부는 사람은 힘이 빠진다. 그는 그 자신의 힘을 불에 전달하고자 하는 넘치는 듯한 熱意를 이미 느끼지 않는다. 만일 그가 로비네와 같은 실재론자라면 그는 자신의 실망과 無力을 <실재화>시킬 것이다. 
 
그는 자신의 초조를 하나의 幻影으로 삼을 것이다. 이리하여 변덕장이의 특징은 사물 속에 자리잡는다. 우리들 가운데서 쇠퇴하거나 용솟음치는 것은 현실 속에서 질식되거나 또는 분투하거나 그 어느 것인 생의 표지가 된다. 이와 같은 시적인 교류가 객관적 인식에 있어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오류의 요인이 된다. 
 
게다가 우리가 자주 지적한 바와 같이 한 번 詩化되고 그 주관적 의미에 도달한 이 직관이 별 곤란없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로비네에 의해 주어진 型으로는 매우 우스운 것이지만, 그 직관을 막연하고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함으로써 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색채의 생기 있는 형상이 때로는 심하게 타고 때로는 시들어버리는 영혼적인 여러 가지 힘을 간직한다면, 또 그들이 대상에서 瞳孔으로 나가는 軸 위에서가 아니고 욕망과 사랑을 투사하는 정열적인 눈초리의 축 위에서 창조된다고 한다면, 그것들은 그때에 애정의 미묘한 뉘앙스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쓸 수가 있는 것이다(原註4). [한 줄기의 빛은 굴절하여 색채가 아주 다른 것이 될 수가 있다. 더구나 광선이 생명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거기서 만나는 영혼도 역시 굴절하여 영혼적인 색채를 띤다. 이 순간에 자기가 사랑한 것의 눈초리를 생각지 않는 자가 있을까?] 
 
잘 생각해보면 노발리스라면 몽롱하고 그 에테르성의 形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영상을 로비네는 강조하고 묵직하게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데 무의식 속에는 이 두 개의 영상은 같은 종류의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객관적인 改作詩文은 노발리스의 내적인 몽상의 찬란한 모습을 더욱 과장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시적인 혼의 소유자들에게는 당돌하게 보이는 이 비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재성의 對蹠點에 위치하는 이 두 몽상가를 교차로, 정신분석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철학을 낳은 동시에 시를 낳게 하는 욕구가 섞여 있는 저 여러 형식의 하나의 예를 우리에게 준다. 
 
가령 시가 아름다워도 철학은 졸렬할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불의 애니미즘論的, 성적인 직관의 그릇된 해석의 例證을 주었으므로 우리는 아마 영원의 진리로서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불은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의 불이라는 이 확언의 무익함을 더욱 잘 이해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불과 생명을 연결하려는 이 허위의 명증을 고발코자 한다. 
 
이 동화의 근원에는 胚種과 마찬가지로 불꽃은 큰 결과를 낳는 하나의 조그만 원인이 된다는 인상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火性적인 힘에 관한 신화의 강한 가치부여작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배종과 불꽃의 방정식을 나타내는 데서 시작하자. 그리고 서로 연결된 명제의 換位作用에 의해서 배종이 불꽃이 되고 불꽃이 배종에 되는 데서부터 설명하자 전자는 후자 없이는 되지 않는다. 
 
두 개의 직관이 그와 같은 것으로서 연결될 때 정신은 하나의 비유에서 또 하나의 비유로 움직이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때 정신은 <思惟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객관적인 인식의 정신분석은 바로 이 변화하기 쉬운 轉移에 빛을 던지는 일에 있다. 우리의 견해로는 이 전이가 아무 것에도 기초를 두지 않고 서로 의존하고만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서로 나란히 놓기만 해도 충분하다. 
 
여기에 우리가 비난하고 있는 안이한 同化의 하나의 예가 있다(原註5). [대량의 목탄에 더 약한 빛, 꺼져가는 불꽃에 의해서 불이 붙는다고 하자......두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은 당신이 관솔불에 의해서 일제히 태우는 그 맹렬한 불과 아주 똑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다음에는 생식행위의 이야기이지만, 제아무리 사치스런 사나이도 생식을 위해서는 매우 풍부한 불을 조달한다. 
 
그러므로 교환행위에 있어서 그의 불은 훨씬 강한 사나이의 불과 마찬가지로 강하다.] 이러한 비교는 혼란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만족시킬 수가 있다. 사실 여러 가지 현상의 이해를 조장하기는커녕 그것은 과학적 교양에 대해서 참된 장해를 형성한다. 1771년의 어느 날인가 한 의사가 지상의 부의 원천이며 생식력이기도 한, 어느 불에 기초를 둔 인간의 受胎理論을 길게 진술하고 있다(原註6). 
 
[精液의 射出 후에 나타나는 해이는 적어도 그 순간 우리가 격렬하게 타는 듯한 활동적인 액체의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精囊에 들어 있는 부드럽고 감지할 수 있는 液의 약간의 상실을 비난할 것인가? 생체의 유기조직에 있어 그 액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체는 이 體液(humeur)의 도주를 바로 알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대답은 <아니오>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정의 분량밖에 갖고 있지 않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저 불의 질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따라서 육체•수액•정액•유동체 등을 상실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불을, 정액의 불을 잃는 것이야말로 큰 희생이다. 그리고 이 희생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불의 未檢討의 가치가 얼마나 쉽사리 기초잡아지는가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류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일 때문에 무의식에 의해서 가치가 부여된 여러 가지 성적 직관을 더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는 著者들은 때로는 열과 특별히 연결되어 있는 주제에 기반을 둔 性理論을 명확하게 전개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어서 정액과 불의 직관 사이에 존재하는 시원적인 혼동을 밝히고 있다. 피에르 장 파브르박사는 1636년에 남자와 여자의 출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논제를 전개하고 있다. [정액은 어느 부분이나 하나이고, 마찬가지이며, 그리고 동일질의 것이면서 자궁에 들어가면 분할되어 하나는 오른쪽으로, 또 하나는 왼쪽으로 갈라진다. 정액의 분할이라는 이 유일한 사실이 모습만이 아니고 하나는 남성 또 하나는 여성이라는 性의 차이를 낳게 한다. 
 
보다 열기에 차 있고 활력에 넘치는 신체의 부분인 것처럼 보이는 오른쪽으로 가서 정액의 힘과 강렬한 열등을 보유하게 될 정액 쪽에서 남자가 출생한다. 그리고 인체보다 차디찬 부분인 왼쪽으로 끌리는 또 한쪽은 거기서 정액의 강한 힘이 줄어들고 왜소화해 버리는 차디찬 물질을 받을 것이다. 그 결과 거기에서 시원에 있어서는 남자였던 여자가 태어날 것이다.](原註7) 
 
더 앞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는 어떠한 것이든간에 어떠한 <객관적> 경험과 조금도 관계를 갖지 않는 이와 같은 주장의 완전한 무근거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외적인> 관찰로는 이 주장의 구실조차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착란이 만일 불에 부여된 <주관적> 현상의, 약간 품이 나쁜 가치부여작용에서 유래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파브르는 불에 의해서 힘•용기•열정•생식력이라는 모든 특성을 더 실체화하고 있다. [차고, 습기찬 체질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없고 더 겁쟁이고 용기가 적다. 그 이유는 힘과 용기와 행동은 불과 공기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과 공기는 어느 것이나 활동적 원소와 남성적 원소라 불리운다. 이에 대해서 다른 원소, 즉 물과 대지는 수동적•여성적 원소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매우 기묘한 所論을 많이 축적함으로써 우리는 말할 수 없이 무의미한 비유를 충분히 <실재화하는> 하나의 정신상태를 예증하고자 해온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정신은 여러 번 구조를 바꾸어 왔기 때문에 그것은 의미의 다양한 轉移에 익숙해져 그것이 그 자신의 표현의 희생이 되는 일은 것의 없다. 
 
모든 과학적 개념은 再規定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생활에 있어서는 始源의 어원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절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先史의 심성은 말할 것도 없이 무의식은 사물에서 말을 분리하지 않는다. 만일 불로 가득찬 한 사나이를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이 그 남자의 내부에서 <타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요한 때는 이 불은 음료수에 의해서 유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안의 느낌은 언제나 강심제에서 생긴다. 모든 강심제도 무의식에 대해서는 하나의 催淫劑인 것이다. 파브르는 <뜨겁고, 메마른 체질로 지향하기 알맞는 음식물을 취하기만 하면 여성의 연약한 열기도 그 약함에 있어 내부에 간직해 온 부분을 외부로 내놓을 수 있을 정도까지는 강해지는 것이 가능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성이란 스스로의 내부에 남성적 원소를 감추고 있기 때문에 잠재적 남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의 원리란 남성적인 활동성이며, 그리고 팽창작용과 같은 모든 물리적인 활동성이야말로 생명의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 이외에 더 좋은 표현법이 있을까? 남성이란 열에 의해서 팽창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이미지를 정신분석하기는 쉬울 것이다. 
 
우리는 또 열•음식물•생식작용이 뒤섞인 여러 가지 관념의 막연한 연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남자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더운 화성의 좋은 음식물을 섭취하려고 할 것이다.] 
 
불은 물리학적인 여러 가지 특성과 마찬가지로 윤리상의 여러 가지 특성도 지배한다. 남성의 거친 행동은 그 뜨거운 체질에서 생긴다. [이 점에는 관상가들은 탁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냘픈 체질로, 머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눈은 빛나고, 머리털은 갈색이나 혹색이고, 키는 중간 정도이며, 몸은 네모지고 깡마른 남자를 볼 때, 그 남자가 신중하고 총명하며, 게다가 기지와 예민함에 넘쳐 있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키가 크고 뚱뚱한 남자는 습기가 많고 변덕장이이다. 이러한 남자의 경우에는 지혜와 현명함의 표지인 예민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퍼져 있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지혜와 현명함이 생기는 불은 이처럼 크고 넓적한 신체에 있어서는 방황과 확산으로 결코 힘세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방황하고 확산되어 있는 것이 힘세고 힘에 넘쳐 있는 것이 되어본 적이 없다. 힘은 긴밀하고도 응결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알다시피 화력은 그것이 위축되고 수축될 때 가장 강한 것이 된다. 火砲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불은 모든 富가 그러하듯 집중을 꿈꾼다. 꿈꾸는 자는 그것을 지키는데 보다 편리한 조그만 공간에 불을 가둬둔다. 
 
모든 형의 몽상도 우리를 집중된 명상으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큰 것에 대한 작은 것의, 뚜렷한 것에 대한 감추어진 것의 설욕이다. 이러한 종류의 몽상을 품기 위해서 全科學的 정신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같은 부조화의 이미지, 즉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와 大砲의 영상을 집중시킨다. 
 
거의 습관적인 규칙으로서 오랫동안 反芻해 왔던 정신이 마침내 그것을 과학적인 사고로 이끄는 과정을 되찾게 되는 것은 조그만 것과 집중된 것의 몽상에 있어서이며 커다란 몽상에 있어서는 아니다. 하여튼 어떠한 다른 원리의 思考 이상으로 불의 사고는 집중된 힘으로 향하는, 이 몽상의 언덕길을 오른다. 그것은 對象의 세계에 있어서는 과묵한 사람의 마음에 간직된 사람의 몽상과 같은 것이 된다. 
 
불이 모든 정액의 원리라는 것은 전과학적 정신에 있어서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외부의 약간의 외관만으로도 그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라세페드 백작에 있어서는(原註8), <식물의 種粉 은 매우 불을 부르기 쉬운 물질이고 말불버섯이라고도 불리는 식물이 충만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유황이다.> 
 
그것은 물질의 객관적 화학의 최소의 노력마저도 반박해 온 표면과 색채 
의 화학의 肯定이다. 
 
때때로 불은 개체성의 형상적 원리이다. 1723년에 《코스모폴리트》의 속편으로서 발표된 《철학서간》을 쓴 한 연금술사는 우리에게 불은 소위 신체가 아니고 여성의 물질에 생기를 주는 남성적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적 물질이란 물을 말한다. 元素的인 물은 <차고, 습기 있고, 물때가 끼고, 불순하고, 어둡고,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창조작용에 있어서는 여성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 무수한 불꽃을 여러 남성에 비유할 수 있는 불도 마찬가지로 특정한 개개인의 생식에 고유한 모든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다......우리는 이 불을 形相이라고 부른다면, 물을 質料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중 어느 것도 혼돈 속에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原註9). 저자는 우리를 <創世記>로 보낸다. 여기서는 어렴풋한 형상이기는 하지만, 로비네의 <정밀한> 영상에 의해서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된 그 직관이 재확인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류라는 것을 무의식 속에 덮어둠에 따라, 즉 그 명확한 윤곽을 잃음에 따라서 더욱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철학적 비유의 온화하고 안전한 땅을 찾기 위해서는 이 길을 다시금 더듬기만 하면 충분하다. 불이 하나의 <원소>라고 되풀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견해로는 성적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물체를 그 생성작용에 있어서와 <생식작용>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며 불에 의해서 <원소화>되는 물과 대지에 대해서, 유황에 의해서 <胚胎>하는 물질에 대해서 말한 연금술적 영감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소>의 명확한 윤곽이, 또는 이 <원소화>의 여러 가지 경과의 상세한 기술이 없는 한 원시의 영상의 신비와 함에서 이중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에 우리의 마음을 활기로 채우는 불과, 세계에 생기를 주는 불을 똑같은 하나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지극히 강하고 원시적인 감정 속에서 사물과 교감하므로 적당한 비판도 무장해제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정확>한 비판에서 완강하게 도망치려 하고 또 각기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시원적인 결함을 무겁게 짊어지거나 애인의 꿈과 같은 소박성도 스스로 노출하는 하나의 일반원리로 충족코자 하는 <원소의 철학>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만 할 것인가? 
 
 
우리는 전번 저서(原註10) 속에서 모든 연금술이 끝없는 성적 몽상에 의해서, 富와 젊음의 몽상에 의해서, 힘의 몽상에 의해서, 일관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성적인 몽상>이란 <난로가의 몽상>에 지나지 않음을 나타내고 싶다. 연금술이란 <난로가의 몽상>의 성적인 여러 가지 특징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실재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이란 객관적인 여러 가지 형상의 <記述>이기는커녕 사물의 핵심에 인간의 사랑을 <새겨넣는> 시도이다. 
 
우선 처음에는 이 정신분석적인 특징에 가면을 씌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연금술이 재빨리 추상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연금술사는 <닫혀진 불>로, 즉 화덕 속에 갇힌 불로 일을 한다. 불꽃에 의해서 아낌없이 생겨나 비약하고 자유로운 몽상에까지 높이려는 영상은 그때보다 정밀한 더 집중된 꿈 때문에 분해되고 색이 바래버린다. 
그렇다면 지하의 실험실에서 그 화덕에 몸을 기대고 있는 연금술사를 보자. 
 
연금사들에 의해서 사용되는 몇 개의 화덕과 증류기가 부정할 바도 없이 성기의 형을 본땄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지적되어 왔다. <연금술사파의 侍從醫>인 니콜라스 드 록크는 1655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原註11). [ 秘藥을 조제하여 조합할 때처럼 표백하고, 용해하고, 농축하기 위해서 연금술사들은 동물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씨를 만들어 내기 위해 유방과 고환의 모습을 닮은 용기를 사용한다.] 
 
의심할 바 없이 여러 가지 연금 용기와 인체의 여러 부분과의 이상적인 유사성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널리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사성이 아주 명백하고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은 아마도 성의 측면에서일 것이다. 성적인 증류기 속에 갇혀진 불은 그 근원에 있어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불은 그때에 자신의 모든 효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연금술에 있어서의 불의 기법, 즉 그 철학은 매우 선명한 성적인 細目에 의해서 지배되어 온 것이다. 17세기 말엽에 어느 익명의 저자가 쓰고 있듯이(原註12) <불에는 세 종류가 있다.> 그것은 <자연의 불과 비자연의 불과 반자연의 불이다. 자연의 불은 남성적인 불이고 중요한 작용력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연금술사는 노력을 아끼지 말고 모든 자신의 지식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금속 속에서는 매우 활동이 둔하고 매우 강하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줄기찬 노력 없이는 그것을 활동으로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비자연적인 불은 여성의 불로 육체를 부양하고 자연의 벌거숭이에 그 날개를 덮는 보편적인 용해제이며, 그것을 얻는 일은 자연의 불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이 여성의 불은 흰 연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기 때문에 연금술사가 게으름을 피울 때는, 흔히 그것은 하얀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그것은 물리학적 승화작용을 통해서는 포착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육체와 광채로써 그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반자연적인 불은 화합물을 부패시키고 대자연이 엄밀하게 연결시킨 것을 풀어 해체시키는 힘을 다른 어느 것보다도 강하게 갖고 있다.> 
 
여기에 부착된 여성 표시에 쥘르 르나르의 표현을 빌면 <바람의 변덕스런 여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베일에 덮인 어떠한 유령도, 무의식이 성화작용(sexualisation)의 기본원리에 의해서 여성인 것이 아닐까? 즉, 감추어진 것은 다 여성적이 것이 아닐까? 계곡에 출몰하는 흰 여인이 깊은 밤에 연금술사를 방문한다. 
 
그것은 모호한 영상처럼 아름답고, 꿈처럼 변하기 쉽고, 사랑과도 닮아 찰나적이다. 잠시 동안 그녀는 자고 있는 남자를 그의 애무로 감싼다. 너무나 갑작스런 깊은 한숨에 그녀는 갑자기 모습을 감춘다......그래서 화학자는 하나의 반작용을 놓쳐 버린다. 
 
열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의 분별은 정말로 명백하게 상호보충적이다. 사물에 관한 여성원리는 표면과 외피의 원리이며, 무릎이며, 대피소며, 빛을 발산하는 따뜻함이다. 남성원리는 중심원리이며 불꽃과 의지와 마찬가지로 활기에 넘치는 당돌한 힘의 중심이다. 
 
여성의 열은 외측으로부터 사물에 도전하고 남성의 열은 내측에서 본질적인 존재의 마음에서 사물에 도전한다. 연금술사의 몽상의 깊은 의미란 이와 같은 것이다. 또 연금술사의 불의 이 성화작용과 정액 중의 활동적인 남성의 불에 부여되어 있는 우울한 가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연금술이 남자의, 독신남자, 부인이 없는 남자, 남성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의 교류를 금지당한 선도자의 과학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금술은 여성적 몽상의 영향을 직접 받은 일은 없다. 따라서 그 불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욕구불만에 의해서 매우 편파적인 것이 된다. 
 
고독한 남자의 명상의 대상이 이 내면의 남자다운 불은 가장 강렬한 불이라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물체를 개봉할> 수 있는 것은 이 불이다. 18세기의 초기에 쓴 한 익명의 저자는 물질 속에 갇혀 있는 불의 이 가치부여작용에 대해서 아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秘術은 대자연을 모방하며 불에 의해서 물체를 밀어 열지만, 그것은 갇힌 불꽃의 불에서 생기는 大火災보다는 훨씬 치열한 불을 사용해서이다.] 지나친 불은 超人을 예시한다. 반대로 오직 주체적인 힘의 회복의 요구로서 상상되어지는 그 부조리한 형을 한 초인은 거의 과도의 불에 지나지 않는다. 
 
물체의 이 <열림ouverture>, 내부로부터의 물체의 이 전체적인 소유는 때로는 명백하게 성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어떤 연금술사들이 말하듯 <불의 회초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연금술사에 관한 어느 책 속에 넘쳐 있는 똑같은 표현과 소식은 이 소유의 의미에 대해서 약간의 의혹도 남기지 않는다. 
 
불이 애매한 기능밖에 다하지 않을 때 성적인 영상이 이처럼 명백하게 남는다는 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사실 직접적인 상징작용의 혼란상태의 영역 속에 이 영상이 끈질기게 존속한다는 것은 불에 대한 여러 관념의 성적인 기원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금술에 관한 책 가운데 불과 대지의 <결혼>에 관한 긴 이야기를 읽으면 족할 것이다. 우리는 이 <결혼>을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가 있다. 즉, 하나는 모든 化學史家들이 언제나 하는 것처럼 質料的 의미작용에서, 또 하나는 문학비평가들이 하는 것처럼 詩的 의미작용에 있어서, 또 하나는 여기서 우리가 시도하려고 하는 그 시원적이며 무의식적 의미작용에 있어서이다. 이 세 가지 설명법을 잘 표현한 연금술사의 싯귀를 인용해 보기로 하자. 
 
 
만일 네가 고체를 녹일 수가 있다면 
그 용질을 증발시켜 
그 휘발물을 분말로 굳혀 보라. 
너의 고통은 크게 위로받을 것이다. 
 
용해액을 증류함으로써 계속 승화되는 녹아버린 대지의 현상을 예증하는 화학적인 실례를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때에 <정신의 날개를 잘라낸다>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승화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순수한 소금, 즉 <대지가 혼합된 하늘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하늘과 대지의 질료적인 결혼을 실현한 것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장중한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우라노게(Uranogee)> 또는 <대지화한 하늘>을 갖는다. 
 
노발리스는 똑같은 주제를 사랑스런 꿈의 세계로 옮겨놓고 있다(原註13). [우리들의 사랑이 언제고 불꽃의 날개가 되어 소년과 죽음이 가까이 오기 전에 우리들을 하늘의 고향으로 데려가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막연한 동경은 그 대립물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노발리스 속에서 파브르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위 틈에서 커다란 쇠방패를 든 페루세우스를 보고 그것을 분명히 안 것이다. 가위는 자연스레 방패를 향해서 날아간다. 파브르는 페루세우스에게 그 가위로 그 정령의 날개를 자르고, 그리고 방패로 자매들을 불멸로 되게 하도록 그 큰일을 성취해 주도록 부탁했다......그때는 길쌈할 亞麻는 이미 없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영혼까지도 상실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만이 앞으로 지배할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 없는 것에 형태를 만들어 주어 사용할 것이다. 내적인 것이 모습을 나타내고 외적인 것은 모습을 감춘다.] 
 
고전적 취미 이외에는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바가 없는 약간 변모된 詩 속에 잠겨 있는 이 페이지 속에는 불에 관한 성적 명상의 깊은 흔적이 있다. 욕망의 배후에는 불꽃이 접해 있어야 한다. 불은 꺼지고 운명은 다해져야만 한다. 
 
이 일 때문에 연금술사와 시인은 빛의 타는 활동을 억누르고 가라앉힌다. 그들은 대지에서 하늘을, 승화물에서 재를,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을 분리한다. 그리고 행복한 시간이 지나면, 전기석(Tourmaline)은, 부드러운 전기석은 <흩어진 재를 알뜰히 모은다.> 
 
<性火된 불>은 뛰어난 모든 상징을 연결하는 굴레이다. 그것은 물질과 정신, 악덕과 미덕을 연결한다. 그것은 물질주의적인 인식을 이념화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념적인 인식을 물질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매력이 없지는 않으나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사용법 속에서, 즉 유물론자와 관념론자에게 대항해서 끊임없이 인정하고 정신분석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양위성의 원리이다. 
 
<나는 잘 조작하고 있다>고 연금술사가 말하면 <아니 너는 꿈꾸고 있는 것이다>하고 말하고, <나는 꿈꾸고 있다>고 노발리스가 말하면 <아니, 너는 묘하게 조작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깊은 兩位性의 조건이야말로 불이 우리의 안과 밖에 있고, 보이지 않는 동시에 눈부신 것으로, 정신인 동시에 연기인 것이다. 
 
 
 
만일 불이 그처럼 인간을 오류에 빠뜨리고 兩意的인 것이라면 객관적 인식의 어떠한 정신분석도 불에 관한 여러 가지 직관의 정신분석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불은 인간정신을 <반영하는> 최초의 대상이고, <최초의 현상>이라는 것을 믿기는 어렵지 않다. 先史의 인간에 있어서 모든 현상 가운데 불만이 알고자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불은 사랑하고자 하는 희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불의 정복이 인간을 동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했다는 것은 여러 번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소박한 정신, 그 시, 과학을 동반한 정신은 불을 둘러싼 명상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을 것이다. <공작의 인간homo faber>은 표면적 인간이고, 그 정신의 약간의 친근한 대상 위에, 약간의 조잡한 기하학적 도형이 고정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天空은 어떠한 중심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손을 합장하는 그 몸짓의 실재화에 지나지 않는다. 난로 앞에서 <꿈꾸는 사람>은 반대로 속이 있는 사람이고 생성하는 사람이다. 또한 아마도 불은 꿈꾸는 사람에게 생성의 과정에 있는 하나의 깊이 있는 과목을 교수한다고 하면 한층 더 잘된 것일까, 즉 불꽃은 타오르는 가지의 마음에서 생겨난다. 
 
막스 셀러가 그것에 주석을 달지 않고, 따라서 의심할 바 없이 그 명백하고 소박한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 인용한 로비네의 다음과 같은 직관은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原註14). [즉 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이 그 존재를 짊어지고 있는 불꽃이 미치는 범위에 있음에 불과하다.] 만일 내밀의 형성적인 불, 우리의 여러 관념과 여러 가지 꿈의 요인으로써 파악되는 불, 胚腫으로서 생각되어지는 불이라는 사고방식이 없었더라면 객관적이고, 철저하고, 파괴적인 불꽃이 로댕의 깊은 직관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직관을 생각하는 일로 우리는 로댕이 심오한 조각가라는 것, 그리고 그가 그의 기법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법으로 생명처럼 또는 불꽃처럼 안에서 밖으로 향해서 생생한 표현을 밀어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들을 알면 우리는 불을 취급하고 있는 여러 작품이 제아무리 쉽게 성적인 것이 되어도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다눈치오는 우리에게 유리공장의 용광로 속에 <용해로의 연장을, 불의 노예이며, 또한 그 제국 아래 있는 빛나는 화병>을 관상하는 스테리오를 그려 보인다. [이윽고 이 아름답고 약한 제조품은 그 아버지를 저버리고, 영구히 그와 이별한다. 
 
그것은 냉철함에서 깨어나 차가운 보석이 되고 세계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경영하기 시작하고, 향락을 구하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여러 가지 위험에 부딪치고 빛의 다채로운 번쩍임에 몸을 맡겨 꽃이나 취하게 하는 술을 인수한다.](原註15) 이와 같이 하여 <불의 예술들의 탁월한 지위>는 그 작품이 가장 깊은 인간적 특징과 소박한 사랑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것에 유래한다. 
 
그것들은 한 아버지의 작품이다. 불에 의해서 창조된 형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폴 발레리가 멋지게 말한 것처럼 <애무하기 위해서> 형성된 것이다(原註16). 
 
그러나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은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불이야말로 현상의 제일요인이다>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외관을 변화시키는 세계에 직면함이 없이 현상의 세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원적으로는 불에 의한 변화만이 깊고, 충격적이고, 재빠르고, 영묘하고, 결정적인 변화인 것이다. 낮과 밤의 교차, 빛과 그늘의 상호작용은 대상의 단조로운 인식에 대해서 산란해지지 않는 외면에 끌리는 모습이다. 그것들의 교체 사실은 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들의 인과관계의 성격을 무효로 하고 있다. 만일 낮이 아버지로 밤의 원인이라면 밤은 어머니로 낮의 원인이 되며, 운동 그 자체는 거의 아무런 반성도 낳지 않을 것이다. 
 
인간정신은 물리의 수업처럼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과일도 흐르는 시냇물도 소박한 정신에는 어떠한 불가해한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원시인은 개울을 생각지 않고 관조한다. 
 
잠들려고 하는 한 목동이 
물의 흐름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다음 것에는 실체적인 변화가 있다. 즉, 불이 핥은 것은 사람의 입속에서 별다른 맛이 있다. 불은 닦아낸 것에 불멸의 빛을 준다. 불이 애무하고 아까와하고 사랑한 것은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서 순진한 것을 잃어버린다. 俗語로 타버리다(flambe), 상실하다(perdu) 등 성적인 의미를 포함한 야비한 말 대신에 쓰인다. 
 
불에 의해서 모든 것이 변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변하기를 원할 때에 불을 부른다. 최초의 현상, 그것은 무위의 시간에 그 생명과 그 빛남 속에서 관조된 불의 현상일 뿐아니라 불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이다. 불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이야말로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감각적인 것이다. 가장 잘 지켜야 할 것은 이 현상이다. 그것을 솟게 하거나 가라앉혀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의 실존을 찍어내는 사랑의 순간과 닮은 하나의 실체를 표시하는 불의 찰나의 온도를 포착해야만 한다. 
 
발레리가 《불의 여러 예술》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찌꺼기를 허용치 않고> 도중에서 쉬지 않고 이것저것 생각에 잠기거나 힘내거나 낙담하거나 하는 기분의 변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는 인간과 형식과의 극한의 순간이 가장 극적인 상황 밑에 연기된다. 여기서 사람이 가장 믿는 불은 동시에 최대의 적이다. 
 
그것은 아주 까다로운 자기 편으로 그 열이 사람들이 바라듯, 소재에 대해서 멋지게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키기가 어려운 몇 개의 물리적 또는 화학적인 常數에 의해서 엄밀하게 억제되고, 위협받고, 규정되어야 한다. 어떠한 광증도 치명적인 것이 되고 작품은 엉망이 된다. 
 
만일 불이 약해지거나 또는 맹렬해질 때에는 이러한 변동을 일으키는 자는 재난을 겪는다. 불을 통한 이 현상이 모든 현상 가운데 가장 감각적이지만, 물체의 깊은 곳에 특징지워져 있는 이 현상에 k나의 명칭이 주어져야 한다. 
 
인간의 주의를 끌만한 제 1의 현상은 <焦性現象>이다. 우리는 지금 선사의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비밀리에 이해된 이 초성현상이 어떻게 하여 몇 세기 동안 과학자들의 노력을 배반해 왔는가를 보려고 한다. 
 
<原 註> 
1. 로비네(Robinet)의 《자연에 대해서》 4권 p.217 
2. 로비네 前揭書 p.219 
3. 로비네 前揭書 p.234 
4. 노발리스의《일기Journal intime》 p.106 
5. 드마롱(De Malon)의 《人間의 피의 보존》 p. 146 
6. 장 피에르 다비드(Jean pierre mortelle David)의 《영양섭취론》 
7. 장 피에르 파브르(Jean-pierre Fabre)의《 化學的 秘義槪要》 p. 374 
8. 라세페드 백작의 《人工的 내지 자연의 電氣에 대한 試論》 2권 p. 169 
9. 《우주와 화학광선》 p. 7 
10. 바실라르의 《科學精神의 形成》 
11. 니콜라스 드 로크(Nicolas de Locques)의 《자연철학개론》 2권 
12. 《암흑 그 자체에서 나오는 빛》 
13. 노발리스의 《핸리 오프터딩엔》 p. 186 
14. 막스 셀러( Max Scheler)의 《自然과 共感의 형성》 
15. 다눈치오(D′A nnunzio)의 《불Le Feu》 p. 325 
16. 폴 발레리(Paul Valery)의 《예술에 관한 단편》 
17. 폴 발레리 前揭書 
 
 
제 5장 불의 化學 
---虛僞問題의 歷史 
 
이 章에서 우리는 연구분야를 바꾸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은 불에 의해서 태어난 여러 가지 현상, 즉 焦性現象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여러 가지 노력을 연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이 문제는 결코 과학사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과학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앞의 여러 장에서 그 작용을 나타낸 가치부여작용에 의해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궁극에 있어서 불에 관한 여러 가지 직관이 과학의 영역에 끼친 혼란의 역사만을 취급해야 한다. 
 
불에 관한 이들 여러 가지 직관은 그것이 심리학에 의해서 명백하면 명백할수록 극복하기 어려운 <인식론적인 장애>가 된다. 고로, 다소 왜곡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계속되고 있는 정신분석을 역시 취급하고 있다. 
 
시인과 몽상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 정신분석은 지난 세기의 화학자와 생물학자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유와 몽상의 <연속성>을 가려내고 사유와 꿈의 결합 속에서 변형되고 패배되는 것은 언제나 사유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작품 속에서 제안한 것처럼 과학정신을 정신분석하는 것, 그것은 몽상을 <계속시키기>는커녕 그것을 멈추게 하고 분쇄하고 제압하는 논증적 사유에 매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의 문제가 역사적인 진술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증거로써 증거를 삼고 있다. 그레고리(J. C. Gregory)시는 헤라클레이스토스에서 라보아지에 이르는 연소이론에 관해서 명석하고 지적인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여러 가지 관념을 20세기의 <과학>을 말하는데 50페이지이면 충분하다는 식의 빠른 속도로 써나가고 있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이 여러 가지 이름을 라보아지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그릇된 것으로서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할지라도 무엇인지 석연치 않은 것이 이 학설의 <지적인> 성격에 대해서 생겨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설은 시인할 만하다든가, 그것들은 적당한 수정만 가하면 과학적인 인식의 다른 여러 계단을 설명할 수가 있고 어느 시기에 철학에 적응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반론을 펴도 헛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학설의 부동성과 영속성을 그것들의 객관적 설명으로서의 가치를 제거함으로써만은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로서 남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야만 한다. 
 
그때에 우리는 무의식의 여러 가치에 관련되게 될 것이다. 몇 개의 설명원리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들 무의식의 가치이다. 공손하게 비난함으로써 정신분석자가 과학자에게 말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동기를 고백시키도록 해야 한다. 
 
불은 아마도 화학자들의 마음을 가장 많이 빼앗은 현상일 것이다. 오랫동안 불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대우주의 중심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믿어져 왔다. 
 
1720년경 씌어진 책 속에서 보에라에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原註1). [ 만일 당신이 <불의 특성>에 대한 설명에서 잘못을 저지른다면 당신의 오류는 물리학의 모든 분야에까지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모든 자연적인 생산활동 속에서 불이 언제나 그 중요한 動因이기 때문이다.] 
 
반세기 후에 셀레는 한편 <불에 관한 탐구가 제시하고 있는 무수한 혼란>을 상기하며(原註2) <그 참된 특성에 대해서 보다 많은 지식을 마침내 얻지 못하고 흘러간 몇 세기를 들여다볼 때 언짢은 느낌을 갖는다>라고 말하고, 또 한편 <어떤 사람들이 불의 특성과 현상을 모든 난점이 배제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쉽게 설명할 때 그들은 절대적으로 반대의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반론을 그들에 대해서 할 수 있는가? 열은 원소적인 불이며 삽시간에 그것은 실제의 불이 되는가 하면, 다른쪽으로서는 빛이 가장 순수한 불로 하나의 원소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거기에서 그것은 이미 지구 전체에 퍼져 있고 그리고 원소적인 불의 추진력은 그 직접적인 운동을 지구에 전달하는가 하면, 다른쪽에서는 빛은 사람들이 <아시둠빵끄(acidum pinque)>(譯註1)를 사용하며 포착할 수가 있고, 이 가정된 酸의 확대에 의해서 해방된 하나의 원소라고 말하고 있다. 
 
셀레에 의해서 이처럼 묘하게 지적되어 있는 이 동요는 애매성르로부터 완전한 무지로 기울어지면 문제사항 그 자체를 문제해결로서 쉽게 생각하는 무지의 변증법의 커다란 징조이다. 불이 자기의 신비를 구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우주원인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때에 모든 것이 설명된다. 
 
전과학적인 정신이 몽매하면 할수록 선택하는 문제는 큰 것이 된다. 그 정신은 이 큰 문제에 대해서는 한 권의 책까지도 필요할 것이다. 샤틀레 후작 부인의 책은 139페이지에 이르며 그 주제는 불에 관한 것이 된다. 
 
따라서 전과학적인 시대에 있어서 연구주제를 한정하기는 어렵다. 다른 어떠한 현상보다도 불에 대해서는 애니미즘론적인 생각과 실체론적 생각이 구별하기 어렵게 혼합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급할 경우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개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그 혼란한 형태로써 연구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 분석을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조금씩 그 오류를 구별하는 것을 가능케 한 화학적인 여러 관념의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불은 전기가 이룬 것 같은 스스로의 과학을 아직 되찾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전과학적인 정신속에 화학과 생물학에 동시에 의존하는 복합적인 현상으로서 머물러 왔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왕복운동에서부터 생명에서 실체로, 교대로 이동하는 설명 방법의 양의성에 대응하는 전체화의 측면이라는 것을 불의 개념 속에 확보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은 그때 우리가 《과학정신의 형성》이라는 우리의 책 속에서 주장한 여러 명제의 예증으로써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불은 그것을 둘러싸고 전개되어 왔던 소박한 여러 관념을 통해서 둘 다 과학적 사고를 방해하는 <실체론적 장애obstacle substantialiste>와 <애니미즘론적 장애obstacle animiste>의 예를 든다. 
 
우리는 첫째로 실체론적인 주장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제시되고 있은 예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카스텔 신부는 <불의 실재론>을 의심하지는 않는다(原註3). [繪畵의 검은색은 대부분 불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불은 항상 그 강렬한 인상을 받은 육체성 속에 부식성의 타는 듯한 그 무엇을 남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참된 불로 되어 있어 여러 가지 석회 속에, 회 속에, 목탄 속에, 연기 속에 멈추어 있는 火性의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색깔을 띤 물질 중에는 불의 저 <실체성의 영속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불에게 부채를 진 것은 언제까지나 계속 타야 하기 때문에 부식하기 쉽다는 것 가운데서 실체론적 사고의 작용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실체론에 대한 주장이 어떠한 증거나 영상으로부터도 진실로 해방된 순수성 속에 나타날 때가 있다. 따라서 뒤칼라는 다음과 같이 썼다(原註4). [화성의 분자는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뜨거워진다. 즉, 화성의 분자는 그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 작용은 원료가 없어졌을 때야 비로소 더 계속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실체론적 歸屬化에 유사어의 반복적 성격은 여기서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잠들게 하는 아편의 최면 효과에 대한 몰리에르의 농담 때문에 18세기 말에 중요한 한 저자가 열의 열효력은 열을 가하는 특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수많은 정신에 있어서 불은 어느 것이나 그 영토의 한계를 지을 수 없는 하나의 가치를 갖고 있다. 보에라아베는 불에 관해서는 어떠한 억설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주저없이 말한다. [불의 여러 원소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물체에서도 가장 단단한 금속에나 토리첼리의 진공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原註5) 철학자와 화학자, 몽상가와 교양인, 그 어느쪽의 경우에도 동등하게 불은 매우 쉽게 실체화되며 그들은, 불을 물질로 충만된 공간이나 진공에도 아주 동등하게 연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근대 물리학은 진공이 수천 개의 복사열의 방사선에 의해서 횡단되어 있음을 승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방사선이 진공공간의 하나의 분량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빛이 흔들리는 기압계의 진공 속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과학정신은 여기에서 토리첼리의 진공은 잠재하는 불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결론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불의 실체와는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성격과 쉽게 일치한다. 즉, 불은 그 분산된 형상으로는 예리하고 신속할 수 있고, 집중된 형상으로는 깊고 지속적인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 가장 다양한 여러 가지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실체의 집중작용>을 응용하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다. 
 
18세기 말에 자주 인용되는 저자인, 카라에 있어서는 이러하다(原註6). [밀짚과 종이 속에는 연소성분이 거의 없지만 이에 반해서 석탄 속에는 풍부하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짚과 종이는 불에 닿으면 바로 타오르지만, 석탄은 불붙는 데 시간이 걸린다. 효력에 있어서의 이 차이는 밀짚과 종이의 연소성분이 석탄보다 훨씬 희소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처럼 집중되어 있지 않고 더 확산되어 있으며, 따라서 더 쉽게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이리하여 삽시간에 불을 일으키는 한 장의 종이의 실험과 같이 아무 의미도 없는 실험이 연소의 실체집중작용의 강도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최초의 경험의 <細部>를 설명코자 하는 이 욕구를 강조해야만 한다. 
 
면밀한 설명을 하려고 하는 이 욕구는 아무것도 내버려두지 않고 구체적인 경험의 모든 양상에 대해서 유의하기를 주장하는 비과학적 정신에 있어서는 지극히 상징적인 것이다. 불의 <민첩함>은 이처럼 허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즉, 바로 이 민첩함이야말로 우리의 소년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상상력을 그처럼 뒤흔든 것이다. 밀짚불은 무의식에 있어서 여전히 하나의 특징적인 불이다. 
 
지성의 힘을 별로 느끼게 하지 않는 前科學的인 정신의 소유자인 마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실체론적인 직관과 최초의 경험과의 연결은 등등하며 직접적이다. 그는 <불에 관한 물리학적 연구>의 개설에 지나지 않는 어느 작은 책자 안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原註7). 
 
[왜 화성의 유체는 인화성의 물질에만 달라붙어 있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이들 물질에 포화되어 있는 그 작은 球體와 연소 사이의 특수한 친화력에 의해서이다. 이 引力作用은 지극히 명확하다. 
 
吹管을 통하여 공기를 보냄으로써 우리가 可燃性의 물질로부터 그것을 태워버리는 화염을 분리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화염이 아무런 저항 없이는 거기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곧 버려진 공간을 다시 잡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라가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애니미즘론적 영상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개들은 언제나 도망치는 그 사냥물로 다시 돌아온다>고 덧붙였을는지도 모른다. 
 
이 일상적인 경험은 불이 그 원료에 딱 달라붙을 때의 접착도와 같은 것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불의 <저항>의 주관적인 측정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끈기 있게 불이 타고 있는 촛불을 끄려고 하거나 더 강하게 타고 있는 펀치(punch)를 끄려고 하는 것만으로 족할 것이다. 
 
그것은 불에 닿으려고 할 때에 타성적 대상이 나타내는 저 저항만큼 그렇게 노출된 저항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런데 그만큼 그것은 어린이가 불에 관한 애니미즘의 이론을 채택하는 데 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어떠한 환경에 있어서도 불은 그 심술궂은 의지를 나타낸다. 불은 붙이기도 어렵고 끄기도 어렵다. 그 실체는 변화하기 쉽다. 그러므로 불이란 하나의 인격이다. 
 
물론 불의 그 재빠름과 그 끈기는 과학적 인식에 의해서 완전히 환원되고 해명되는 2차적인 성격이다. 건전한 추상이라면 그것들을 시야에 멈추어 두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적 추상은 무의식을 고친다. 그것이 일단 우리의 교양의 토대를 형성하면 그것은 경험의 모든 세부에 흩어져 있는 여러 가지 이의신청을 처리하게 된다. 
 
우리의 무의식이 불에 대해서 형성하는 의견 가운데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이 <자급자족하는> 관념일 것이다. 근대정신에 있어서는 불에 양식을 준다는 것은 그것을 유지한다는 것과 같은 말로 쓰여진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말이 우리에게 떠오를 때는 오래된 영상이 이따금 정신에 다시 나타난다. 
 
불의 <양식>이 그 말의 최근의 의미를 보유하는 몇 개의 原書를 쌓아올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17세기에 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상기한다(原註8). [이집트인들은 불의 탄생과 성장을 경험하는 모든 것을 탐식하는 영혼을 빼앗긴 탐욕의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음껏 먹고 배가 가득찬 후에도 또 먹고 먹을 것이 없어져 버리면 자기 자신까지도 먹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열과 운동의 두 가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양식과 호흡하기 위한 공기 없이는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즈네르는 그의 책 전부가 이 영감에 따르면서 전개된다.
 
그는 불의 화학 속에 소화작용의 모든 특징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다른 많은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 연기는 불의 배설물이다. 같은 시대에 또 한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原註9).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의 불 앞에 희생물을 바칠 때 <이 세상의 주인인 불이여! 이 음식을 잡수십시오>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재단 위에 음식을 바치는 것이다.] 
 
18세기가 되자, 보에라아베는 또 <불의 양식>은 어떻게 이해되어져야만 하는가를 오랜 연구를 통하여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양식을 좁은 의미에서 <불의 양식>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물질은 실제에 있어서 불에 있어서의 음식물로서 도움이 되고 그 작용을 통해서 그것들은 元素的인 불, 그 자체의 물질로 전환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불의 본성을 다하기 위해서 스스로 본래의 본성을 버린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깊이 검토할 만한 하나의 사실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原註10). 이것이야말로 보에라아베가 자기가 환원코자 하는 애니미즘론적인 직관에 대한 매우 미약한 저항을 나타내는 몇 페이지 속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은 시간을 들여서 공격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편견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어느 면에서 보아도 보에라아베는 실체론적인 편견을 강화함으로써 비로소 애니미즘론적인 편견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의 학설 속에는 <불의 양식>은 <불의 물체>로 전환되고 있다. 동화작용에 의해서 양식은 불이 되는 것이다. 이 물체의 동화작용은 화학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화학이란 여러 물체가 어떻게 결합되고, 혼합되며 병렬되는가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변화할 수 있는 3개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화학은 하나의 물체가 어떻게 해서 또 하나의 다른 물체에 <동화하는>에 대해서는 연구할 수 없다. 화학을 다소 <먹는 것>이라는 개념에서 배운 이 <동화작용>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보다 애매한 것에 의해서 애매한 것에 빛을 던지는 것이 된다. 그것은 차라리 객관적 해명에 소화작용의 내적인 경험에서 얻어진 허위의 지식을 부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불의 양식>에 무의식적인 가치부여작용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가를, 그리고 하나의 전과학적인 무의식 속에 있는 <팡타그뤼엘 콤플렉스>라고 불리우는 것은 정신분석하는 일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사실 타는 물건은 어느 것이나 <화성의 양식(Pubulum ignis)>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의 前科學的인 원리이다. 이리하여 중세와 과학 이전 시대의 우주론에 있어서 가장 공통된 개념의 하나는 별에 대한 음식물에 관한 것이다. 
 
특히 별에 대해서 음식을 바친다는 것은 이따금 대지의 發散作用의 일이다. 발산물은 彗星의 양식이 되고 혜성은 태양의 양식이 된다. 물질적인 여러 현상을 설명할 경우에 소화작용의 신화가 갖는 그 힘과 그 영속성을 잘 나타내기 위해서 별로 멀지 않은 시대로부터 골라낸 약간의 原本만을 조사해 보자. 로비네는 1766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原註11). 
 
[아주 당연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져 왔다. 번쩍이는 球體는 그것이 불투명한 구체로부터 빠져나오는 發散物을 언제나 먹는다는 것, 그리고 불투명한 구체의 자연의 양식은 번쩍이는 구체가 끊임없이 거기에 보내고 있는 화성 미립자의 흐르는 묶음이라는 것, 
 
거기에서 나날이 퍼지고 점차로 검은빛을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태양의 흑점은 태양이 자기에게 끄는 입자의 거친 증기의 集積에 지나지 않고, 그리고 그 양은 증가되고 있다는 것, 또 우리가 그 표면에서 솟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저 구름연기는 사실은 반대로 그 표면을 향해서 돌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태양은 너무나 다량의 질이 다른 물질을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데카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포용되고 덮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침투될 것이며 그때 태양은 불이 꺼지고, 말하자면 태양의 생명 그 자체의 빛의 상태로부터 태양에 관해서 말하면 바로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불투명의 상태로 옮아가면서 죽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거머리가 피를 너무 빨아먹어서 죽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보다시피 소화의 직관이 지배적이다. 로비네에 있어서는 태양왕은 너무 먹기 때문에 즉는 것이다. 
 
불로 별을 양육한다는 이 원리는 또한 18세기의 사상가들에게도 공통되는 관념, 즉 <모든 별은 미세한 불로 이루어진 똑같은 하늘의 물체로부터 창조된다(原註12)라는 관념이 받아들여질 때 지극히 명백한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미세한 하늘의 불로부터 형성되는 별들과, 자연 그대로의 대지의 불에서 형성되는 금속성의 유황 사이에 하나의 근원적인 유사성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대지의 여러 현상과 하늘의 여러 현상을 통일하고 하나의 보편적인 세계관을 손에 넣었다고 믿고 있다. 
 
이리하여 낡은 여러 관념이 여러 시대를 일관하여 살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최초의 소박성을 받아들이면서 다소 학문적인 몽상 속에 되돌아온다. 예를 들면 17세기의 한 저자는 고대의 견해와 당시의 견해를 간단하게 통일한다(原註13). 
 
[별은 밤에 자기의 기운을 되찾기 위해서 낮 동안 증기를 끌어 잡아당긴다는 이유에 의해서 에우리피데스가 밤을 <황금의 별들의 유모어>라고 부를 것이다.] 
 
소화작용의 신화 없었다면 그 자체가 대우주이며 밤과 낮이 될 적마다 그때의 양식을 먹고서 잠드는 저 <대존재>의 胃의 꿈틀거림과 같은 리듬이 없었다면 수많은 과학 이전의 시적 직관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불의 직관과 같은 감정성을 잔뜩 짊어진 하나의 직관이 새로운 여러 현상을 설명하려고 할 때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는 것은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아주 흥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前科學的 사고가 전기현상을 설명코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생길 것이다. 
 
사람들이 한 번 실체론적인 직관의 유혹에 몸을 맡기고 만족할 때 전류한 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망젱 修士는 아주 쉽게 이것을 납득한다(原註14). 
 
[천둥이 그 전기의 물질을 태양의 작용에 의해서 끌려진 역청과 유황으로부터 끄집어내어짐으로써 전기의 물질이 발견되는 것은 첫째로 유리나 피치와 같은 역청 모양의 모든 물체 속에 있어서이다.] 
 
그렇다면 유리가 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유리를 유황과 피치의 범주에 넣는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드 망젱수사에 있어서는 <유리를 마찰하여 폭파할 때 풍기는 유황의 냄새는 역청과 기름이 유리 안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유력한 증거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나 전과학적인 정신 속에 작용하는 낡은 어원, 즉 부식성의 유황염은 <유리의 기름>이라고 한 어원을 상기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실체론적 직관과 매우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내재성과 내밀성의 직관은 다음 예에서는 실로 잘 규정된 과학적 여러 현상을 설명할 작정이며, 그것은 놀랄 수밖에 없는 순진성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신은, 불을 넣어둘 수 있는 용기 속에 가두어 두는 것처럼 불을, 특히 기름•역청•고무•송진 속에 넣어두는 것이다.] 
 
하나의 <용기 속에 갇힌 물체의 특성의 비유가 한 번 받아들여지자, 그 양식은 여러 가지 영상으로 충만될 것이다. 만일 전기불이 <스스로 전기를 일으키는 물체의 조직을 충만하고 있는 불의 조그만 덩어리 속에 잠길 수가 있다면 만일 그것이 감추어진 내밀의 내적인 불을 감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작은 주머니를 끌어낼 수가 있고 이번에는 자기와 함께 결합할 수가 있다면, 그때 해방되고, 흔들리고, 짓눌리고, 분산되고, 다시 연결되어 몹시 휘저어진 불의 미립자는 화합물을 분리시키고, 깨뜨리고, 태우고, 파괴해 버리는 작용•힘•속도•가속도•난폭성을 전기불에 전달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송진과 같은 그 자체가 전기적인 물질은 자기의 조그만 용기 속에 불을 간직해 두어야 한다. 즉, 그것들은 전달에 의해서는 전기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있는 것은 영상에 넘치고 지나친 무게 때문에 괴롭혀진다. 
 
불량한 전도체 물질의 성격에 대한 <긴 설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결국은 특질이라는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거부하게 되더라도 이 설명은 몹시 미묘한 것이다. 결론의 필연성도 명백하지 않다. 이 결론은 실제에 있어서 동의어를 축적하는 일로서, 족할 때는 그처럼 보드랍고 열려진 몽상을 단순히 중단하기 위해서만 기재된 것처럼 보인다. 
 
전기를 띤 인체로부터 발하는 전기불꽃이 브랜디를 태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인정한다면 그야말로 놀랄 것이다. 전기불이 그때에는 정말 불이 된다. 빙클러는 <그와 같은 이상한 일>을 역설하고 있다. 이 놀라움은 그들이 빛나고 타게 하는 저 뜨거운 <불>이 어찌하여 인체 속에 침투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빙클러와 같은 정확하고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도 실체론적인 공리를 의심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허위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이 철학적 비판의 결여에서이다(原註15). 
 
[하나의 유체는 만일 그것이 불의 미립자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어떤 것에도 불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불은 인체로부터 발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미리 불이 인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추론이 우리가 앞의 여러 장에서 폭로한 매력에 대해서 아무 의심없이 몸을 맡기는 전과학적 정신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받아들여지는가를 더 이상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단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이 불이 인체의 바깥에 있는 알코홀을 태우는데 인체 안에 있는 조직은 태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재론적 직관의 이 논리적인 모순에도 불구하고 역시 <불의 실재성>은 결국 환원되는 일이 없다. 불의 실재론은 가장 타파하기 어려운 여러 직관의 하나이다. 
 
열과 불을 <실재화하는 작용>은 그것이 식물체와 같은 특수한 물체에 관해 작동할 때도 꽤 놀랄만한 것이 된다. 실재론의 매혹은 기묘한 신앙과 실천을 자극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해 베이컨에서 지적할 수 있는 매우 많은 예의 하나가 있다. 
 
[만일 우리가 뽕나무에 두세 개의 구멍을 뚫고 테레빈나무•유향나무•癒瘡木gayac•노간주나무와 같은 熱性의 나무로 만든 말뚝을 끼워두면 질이 좋은 뽕나무 열매를 얻을 수도 있고, 나무는 더 많은 열매가 열린다는 몇 가지 보고를 믿는다면, 그 원인은 나무가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樹液과 열을 양성하고 활기를 주어 더 짙은 것으로 만드는 외부에서 오는 열 때문일는지 모른다.] 
 
<더운> 물체의 효력에 대한 이 신앙은 어떤 정신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미약해지고 비유로 혹은 상징으로 옮겨가는 것이 보통이다. 월계수의 왕관이 그 최초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이 해서이다. 그것은 지금은 녹색의 종이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다음에 드는 예에 있어서는 왕관의 그 충분한 가치가 부여된다(原註16). [고대인이 대지의 모든 정복자들의 대관용으로 태양신에게 바친 저 나무의 가지들은 서로 사자의 뼈와 마찬가지로 불을 만든다.] 실존론적인 결론에는 거의 멀지 않다. 
 
[월계수는 머리의 종기를 낫게 하고 얼굴의 멍든 자리를 제거한다.] 왕관 아래의 이마는 얼마나 빛이 날까! 모든 가치가 비유되는 오늘날에 있어서 월계수의 관은 상처입은 긍지를 위로하는 정도이다. 
 
우리는 모든 이 소박한 신뢰를 용서해 주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날 그것들을 그 비유적인 해석에 의해서만 갖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여러 가지 심리적인 현실성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비유라는 것은 완전히 <비실재화되고>, <비구상화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추상적인 하나의 규정 속에는 몇 개의 구체적인 것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은 이 <비실재화작용>을 재생하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불을 둘러싼 여러 가지 오류에 관한 정당한 척도를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 오류가 다른 모든 오류에 비해서 아마 더 구체적인 확언으로도 질문되지 않는 內密의 여러 가지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특수한 연구대상이 될만한 몇 개의 지극히 특수한 성질은 이처럼 내면의 불에 照合함으써도 설명된다. 예를 들면 <같은 종자라도 다른 식물에 비해서 이 불을 그 자신 속에 훨씬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는 식물 속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그 이상한 활력>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기 때문에 미모사는 다른 어떠한 식물, 어떠한 자연물보다도 훨씬 많은 불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물체가 미모사에 닿으면 미모사는 왜 자기의 생명이 다른 물체에게 그 불의 대부분을 양도해야만 하며, 그 때문에 멍들고 그것을 둘러싼 공기로부터 새로운 불을 끄집어냄으로써 자기의 활력을 재생할 수 있는 여유를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 잎과 가지가 시들어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미모사가 시들어 버릴 때까지 발하는 이 내부의 불은 정신분석자에게 있어서는 다른 명칭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객관적>인 인식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반발력을 잃은 미모사와 자기의 <불>을 다 써버린 미모사의 비교를 <객관적으로> 근거지을 수 잇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은 특별히 객관적인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닌 모든 과학상의 신뢰를 추구해야만 한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불은 생명의 원리라는 것이 증명의 그림자도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퍽 오래 전부터이다. 이 견해는 그것이 <특수한 사례>의 어느 것에도 적용되지 않는 단 하나의 보류를 첨가한다면, <일반적이고>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그 적용이 정확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어리석은 것이 된다. 이리하여 한 산부인과 의사는 태아의 성장과 양수의 유용성에 대한 오랜 연구 끝에 물, 즉 세 개의 물질세계에 대한 모든 영양원에 운반역할을 하는 이 액체는 불에 의해서 생기를 얻는 것이 틀림없다고 공언하게 된다. 
 
그의 論考의 마지막에서 불과 물의 자연적 변증법의 좋은 예를 볼 수 있다(原註17). [생장작용이란 <불>이 자기의 억제자인 물과 자기를 연결하려고 하는 하나의 탐욕스러운 일이다.] 불이 <생기를 주려고 하는> 불의 실체론적인 직관이 매우 매혹적이라서, 여기에 <자극된> 이 저자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너무나도 단순하게, 너무나도 명백하게 기반을 두고 있는 하나의 과학이론을 <더 깊은 데까지> 밀고 간다. 
 
즉, <우리는 증기로 환원된 물은 그 새로운 상태에 있어서 같은 양의 공기보다도 가볍게 되기 때문에 대기 속으로 상승한다는 부조리한 견해를 또다시 바라지는 않을 것인가?> 다비드에 의하면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는 아주 빈약한 역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을 끌어올리고 상승시키는 것은 반대로 바로 불, 즉 생기를 주는 것, 결코 <無爲>로 보내는 일이 없는 그 유동체라는 것이 명백한 것이다. [불은 아마도 조물주로부터 모든 에네르기를 받은, 그리고 《聖書》가 다음과 같은 말로써 표현한, 즉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로 나타낸 활동의 원리, 그 두 번째 원인인 것이다.] 羊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한 산부인과 의사를 싣고 가는 상상의 날개는 이와 같은 것이다. 
 
<물질>로서의 불은 분명히 최대의 가치를 부여받은 것 중에 있으므로 따라서 객관적 판단을 가장 변형시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그 가치부여작용은 황금의 경우와 같다. 황금은 금속의 돌연변이에 대한 그 발생작용적 가치와 前科學的인 藥劑法에 있어서의, 치료적인 가치를 분리해 버리면, 단순한 시장가치를 잦고 잇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따금 연금술는 금이 원소적인 불에 직관된다는 것 때문에 하나의 가치를 부여한다. 즉, <금의 정수는 불 그 자체이다.> 또 일반적으로는 가치부여작용에 참된 프로티우스(protius : 자유롭게 변하는 신)인 불은 가장 형이상학적인 원리적 가치로부터 가장 명백한 공리적 가치로 옮겨간다. 
 
그것은 자연의 모든 작용을 집하고 있는 참으로 근원적인 활동원리이다. 18세기의 한 연금술사는 이렇게 책에 썼다(原註18). [불은 이익 없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과오를 범하지도 않으며, 물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연이다.] 
 
어느 낭만파는 열정 이외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여기에 지적해 두자. 최소의 참여만으로 충족한다. 즉, 불은 자기의 힘을 시위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만 하면 된다. [불은 질에 있어서 가장 위이면서 양에 있어서는 항상 최소이다.] 
 
극소량의 이 작용은 지극히 징후적이다. 그것이 아무런 객관적인 예증도 없이 야기된다고 할지라도, 그 예는 여기에도 있지만, 그것은 고찰 중에 있는 그 극소량의 힘의 의지에 의해서 찬양받기 때문이다. 누구나 모든 화학작용을 응집하여 한 줌의 화약에 증오를, 맹렬하고 끝없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작은 선물로 하기를 바랄 것이다. 
 
불은 전과학적인 정신속에 이런 종류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어떤 우주론적 꿈속에서 불의 한 분자만 있으면 세계를 충분히 태워버릴 수가 있을 것이다. 
 
안이한 영상을 비판하는 한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原註19). [우리는 어떤 용해제의 부식성과 작용을 몸속에 침투시켜 그 각 부분을 분리하는 날카로운 말뚝이라고 가정하고 있었던, 저 분자의 미세함과 形에 의해서 설명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저자는 몇 페이지인가 앞에서, 불은 <모든 것에 생기를 주고 모든 것이 그 존재의 덕을 보는 원소이며, 그것은 生과 死, 존재와 無의 원리로서 스스로 작용하며 자기 내부에 작용하는 힘을 갖고 있다>라고 썼다. 
 
보다시피 비판정신은 불의 내밀한 힘 앞에서 시드는 것처럼도 보이고, 불에 의한 설명은 사물의 존재와 무를 정할 수 있는 동시에 모든 빈약한 기계론적 설명의 가치를 절하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나,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불에 의한 설명은 풍부한 설명이다. 객관적 인식의 정진분석은 끊임없이 내적인 깊이와 풍부함에의 희구를 고발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공상적인 원자론의 순진성을 비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非感覺的인 불의 힘에 매달리는 것이, 어떤 용해작용의 부식성의 경우가 언제나 그런 것처럼, 객관적 검증의 어떠한 가능성도 밀어내는 데 대해서 공상적 원자론은 <객관적> 토의에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불과 생명의 방정시기 바라켈수스의 체계의 토대를 구성한다. 파라켈수스에 있어서는 불이란 생명이고 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생명의 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수은이 파라켈수스 계열의 사람들 눈에는 가치 있는 것으로서 비친다. 왜냐하면 보에라아베도 표명한 것처럼(原州20) 그것은 지극히 완전한 불과 하늘에 감추어진 생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을 고치거나 아이를 얻기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이 감추어진 불이다. 니콜라스 드 로크(Nicolas de locques)는 그가 불에 대해서 부여하는 모든 가치를 불의 내밀성에다 기반을 두고 있다(原註21). 불은 <내부나 외부의 어느 면에도 있다. 외부의 불은 부패적이고 기계적이며 파괴적이다. 
 
내부의 불은 정액적이고 생식적이고 성숙적이다.> 불의 본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그 근원까지, 그것이 자기의 힘을 모으고 자기를 집중시키는 그 저장의 근원, 즉 광물 속에까지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에 파라켈수스파의 방법의 가장 좋은 증명이 있다. 
 
[생명을 낳은 이 하늘의 불은 식물과 금속보다 더욱 자기를 위해서 소모하는 동물 속에서는 몹시 활동적이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자가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구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이 동물이나 식물 속에 존재하는 생명의 불에 의해서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그것을 이 불이 보다 고정적이고, 보다 타기가 어렵고 그것이 작용함에 있어서 보다 평정하고, 보다 온순한 금속 속에서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갈레노스파는 이 성스러운 불이 단순히 하나의 불꽃에 불과하여 셀러드를 만들기 위해 木草를 남겨 두었다.] 
 
요약해 보면, 그들은 불의 보편적인 帝國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성급한 변증법적인 결론에 이른다. 불이 동물 속에서 <소모>되는 것이 광물 속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은 감추어지고, 안에 간직되고, 실체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전능한 것이 된다. 과묵한 사랑이 성실한 사랑으로 간주되는 것은 같은 의미에 있어서이다. 
 
숨겨진 여러 가지 힘을 긍정하는 신뢰적인 이 힘은 타오르는 난로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쾌적함이라는 외적인 경험에서만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소화작용이라는 매우 내적인 확실성이 뜨거운 수프의 그 활력을 회복시키는 맛이, 알코홀을 포함한 강심제에 의한, 건강에 좋은 것이 가미되어져야 한다. 
 
충족된 인간을 정신분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실재론적 명증의 심리학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감정적 요소를 빼놓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실재론적 化學이 소화작용의 신화에 힘입고 있음을 완전히 기술했다. 
 
우리는 앞에서 열의 감각과 거기에 부여되어 온 그릇된 객관적인 여러 가지 推論에 관해서 무수한 引用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감각은 이따금 건강과 병의 자각적 원리가 된다. 
 
가벼운 고통의 감각에 관해서는 開業醫의 책에서 특히 <열>, <염증>, 胃를 태우는 갈증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어느 저자나 자기의 체계와의 관련에 있어서 이 열을 설명하도록 의무화해놓은 것처럼 느끼고 있다. 
 
그 이유는 활력적인 열의 기본원리에 저촉되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체계는 그 모든 가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고로 엣케는 바퀴가 마찰에 의해서 불이 붙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소화작용의 불을 胃의 반추운동에 관한 그의 이론에 비추어 설명한다. 그래서 <그러한 消化에 필요한 열을 낳는 것은 밥통에 의한 식물의 붕괴의 운동이 된다. 
 
엣케는 과학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이 새의 밥통에서 생기는 것을 본다>(原註22)와 같은 해부학자를 신뢰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는 눈에 띄는 장소에서 노출되어 그 때문에 춤추면서 불꽃을 토하는 인간의 영상이 무의식의 마음에 드는 영상임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음식을 그 <열>과, 그 <차디참>과, 그 <건조열>과, 그 <습기열> 및 그 <冷却力>에 따라 분류하게 한 모든 비유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양가의 과학적 연구가 최초의 변하기 쉬운 무의미한 인상 속에서 형성되는 여러 가지 편견에 의해서 왜곡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어느 기본적인 철학적 직관에 대해서 하나의 전신감각적 始原을 응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는 행복한 소화작용에서 결과하는 이 내적인, 휘감기고 지켜지고 소유된 열이 사람들을 물질의 내부 또는 연금술사들이 말하듯 금속의 腹部에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불의 존재를 무의식 속에 요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질의 내재적인 이 불의 이론은 그 때문에 하나의 언어가 창조되어야 하는 어느 특수한 유물론에 도달한다. 특수하다는 것은 이 唯物論이 유물론과 애니미즘 사이의 매개체적인 중요한 철학적 뉘앙스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熱生設>은 영혼의 물질화에 또는 물질의 생기화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과 생명 사이에 길을 터놓은 하나의 형식이다. 그것은 소화작용에 의한 물질적 同化의 생명 없는 곳에 생명을 주는 은밀한 의식이다. 
 
만일 우리가 이 소화작용의 신화에 의지하는 일에 동의한다면 水銀은 <나는 나의 내부에서는 불 그자체인 것이다. 불은 나에게는 살이다. 그러므로 불은 나의 목숨이다>라고 말하게 하는(原註23) 《코스모폴리트(Cosmpolite)》의 이 말의 의미와 힘을 우리는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연금술사는 보다 훌륭한 상상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결국 똑같은 문제로 귀착되는 표현으로써 <불은 각기 사물의 중심에서 작용하는 원소이다>(原註24)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의미가 얼마나 빨리 이러한 표현에 주어진 것일까! 결국 하나의 물질이 내부를, 즉 중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腹部를 갖고 있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비유적이다. 
 
하나의 특질, 하나의 성향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결국 식욕을 말하는 것이 된다. 연금술사가 그렇게 하듯이 내부란 불멸의 불-원리(feu-principe)를 간직하고 있는 난로라는 것을 덧붙이는 것은 소화작용의 확실성에 집중된 비유의 전환을 더 명백하게 할 것이다. 
 
열을 그것이 구현하는 물질에서 <이탈>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아주 변화될 수 있는 어떠한 경우에도 잠기거나 숨을 수 없는 에네르기로 바꾸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다대한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불의 내재화는 그 효력을 높이며, 그것은 한편 다시 없는 절대적 여러 모순을 준비한다. 우리의 견해로는 우리가 여기서 취급하고 있는 것은 <객관적>인 특성이 아니고 차라리 심리학적 가치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인간은 아마도 자연의 자기에의 異議를 신청하기로 시도한 최초의 자연의 대상일 것이다. 
 
인간의 활동이 惑星의 표면을 바꾸는 도상에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 짧은 논문에서는 불을 둘러싼 여러 가지 모순과 소유만을 고찰하자. 이 內在化 덕분에 사람들은 결국 <不燃性의 불>을 말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에 걸쳐 유황을 가공한 후 요하임 폴레만(原註25)은 이러한 글을 썼다. [이 유황은 이전에는 표면이 타오르는 불이고 찬란한 빛이었으나 지금 그것은 이미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이고 또한 불연성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예전에 그것이 可燃性의 것을 모두 태워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그것은 그 힘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病을 태워버린다. 또 연소 전의 유황은 번쩍이는 광채를 표피에서 발산하는데, 이제는 이미 죽음의 음산한 바닥이 영혼의 집착에 지나지 않는 병, 또는 암흑의 영혼에 있어서 밖에는 빛나지 않는다......그리고 불은 이 암흑의 영혼을 인간이 건강할 때, 그때의 쾌활한 정신으로 변하게 한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글을 읽을 때 이것이 어느 면에서 애매해지는가를 자문해야 된다. 그런데 폴레만의 이와 같은 글로 말하면 분명히 객관적인 측면에서는 애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화학과 의학에 능통한 과학정신이라면 위에 든 경험에 하나의 명칭을 부여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기술임을 실감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관적인 측면에서는 정신분석의 적절한 용어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어졌을 때, 특히 소유감정의 큼플렉스와 내밀의 불의 인상적 콤플렉스가 격리되었을 때는 그의 책속에서 이 부분은 명확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 글이 주관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객관적 集力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증거이다. 설명의 축이 주관이나 객관의 어느 측면에 있는가 하는 이 측정은 우리에게는 지식의 정신분석에 필요한 최초의 진단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하나의 인식에 있어서 인간의 여러 가지 믿음의 총화가 명백하게 언급되고 가르쳐지고 증명될 수 있는 인식의 총화를 초월한다면 그때에 정신분석은 불가결의 것이 될 것이다. 과학자의 심리학은 분명히 규율적인 하나의 심리학에 기울어져야 한다. 
 
즉, 과학자는 <자기의 인식을 개인화한다>는 것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상관적으로 그는 <자기의 여러 가지 신념을 사회화하는> 일에 힘써야만 한다. 
 
 
열의 생리적 인상이 前科學的인 인식 속에서 점점 익어갔다는 가장 좋은 증거는 내적인 열이 역대의 어떠한 실험자도 구별코자 하지 않는 <여러 종류의 열>을 규정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합에 응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체는 연금술사들이 실재화하려고 애쓰는 <불의 첨단>을 상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原註26). [철학자는 생체 중의 열의 차이에 의해서 열을 구별하고 그것을 세 종류나 네 종류로 나눈다. 
 
즉, 胃의 그것과 비슷한 消化熱, 자궁의 그것과 비슷한 生殖熱, 정액이 낳는 그것과 비슷한 凝固熱, 그리고 유방의 그와 같은 분비열 등과 같은 형식이다. 胃의 열은 위속에서 소화할 때 깃들게 하고, 자궁 속에서 어린이가 생기도록 부양하고, 신장•간장•유방 속에서 성숙할 때 농밀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다채로운 주관적인 뉘앙스를 띤 내적 열의 감각은 실재론적애니미즘론적 장해에 의해서 속박된 과학의 경우가 그러하듯 돌연히 <형용사의 과학>으로 변화된다. 
 
인체에 대한 이 조합은 과학정신이 완전히 전개되어도 여전히 오랫동안 존속할 것이다. 사람들이 최초로 온도계를 만들려고 할 때, 그들이 거기에 표시를 하기 위해 생각한 정점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체의 온도였다. 
 
현재도 우리는 체온을 물리적 현상과의 비교에 있어서 규정할 때, 현대의학이 행하는 객관적 전도를 너무나 많이 보고 있다. 일반적인 지식은 매우 정확한 실험에 있어서까지도 역으로 원근법 속에서 작용한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한 의사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생명을 양성하는 이 따뜻한 약은 그것이 그 확산에 있어서나 종합에 있어서 어떠한 局所化로 받지 않고 생명의 전체적 실재화로서 고찰되었을 때 더욱더 징후적인 것이 된다. 
 
은밀한 생명이란 바로 확산된 열이다. 감추어진 불, 보이지 않는 불, 불꽃이 없는 불이라는 관념에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에 과학적 몽상의 무한한 활동분야가 열리는 것이다. 火星原理로부터 그 명증의 특성이 떨어져 나간 이상, 불은 이미 노란 불꽃, 붉은 석탄이 아닌 이상은, 즉 불이 눈에 보이자 보는 것이 된 이상, 그것은 가장 변화에 넘치는 특성을 가장 다채로운 수식어를 받을 수 잇는 것이다. <硝酸eau-forte>을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동과 철을 부식할 것이다. 그 숨은 불, 그 열이 없는 불은 금속을 마치 완전밤죄처럼 흔적없이 태워버린다. 이리하여 무의식적인 몽상을 짊어진 이 <단순하고도 숨겨져 있는> 작용은 무의식의 규칙에 따라서 형용사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르면 모를수록 더 그 이름을 붙이려고 한다. 초산의 불을 성격지우려고 트레비산은 말하기를(原註21), <이 감추어진 불은 미세하고, 흐리고, 소극적이고, 연속적이고, 포함적이며, 공기와 같고, 명석하고, 순수하며, 폐쇄되어 있고, 피유동적이고, 변질하기 쉽고, 침투적이고, 예리한 것이라고 한다.> 
 
누구의 눈에도 이러한 형용사는 하나의 감정, 아마도 파괴욕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할 것이다. 
 
액체에 의한 연소는 모든 정신을 놀라게 한다. 나는 乳酸에 의해서 코르크마개가 시커멓게 탄 것을 목격하고 놀란 학생들을 얼마나 여러 번 보았던가. 나의 괴로운 권고에도 불구하고, 또는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괴로운 권고 대문에 젊은 실험자들의 작업복은 특별히 酸을 띠는 것이다. 
 
우리는 思考에 의해서 더욱더 酸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정신분석적으로는 파괴의지가 酸에서 볼 수 있는 파괴적 특성의 係數의 작용을 하고 있다. 사실 힘을 사유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특히 그 남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남용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힘의 의식은 명석한 것이 되지 않는 것이다. 
 
17세기 말 한 이탈리아의 익명의 저자는 이 열의 내밀의 힘을 칭찬하며 말한다. 그것은 겨울에 있어서까지도 보통 때의 불과 마찬가지로 강하게 타며, 모든 대자연을 파괴하고 그것을 無로 돌린다고 누구나가 믿는 그러한 효과를 발휘하는 硝酸학과 그와 닮은 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한 오래된 저자의 이 지극히 특수한 니힐리즘을 우리가 다음에 인용하는 신문기사와 그 논평(1937년 4월 4일 로마)과를 비교한다는 것은 아마도 흥미 있는 일일 것이다. 가브리엘 다눈치오는 다음과 같이 수수께끼라는 말로 끝나는 편지를 보내고 있다. 
 
[앞으로 나는 나이 먹고 병들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내 생애의 끝을 위해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라구즈인들(譯註2)을 공략함으로써 죽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자리에 누워서 조용하게 죽는 것을 경멸하는 나는 인생의 최후를 마치는 공부를 해야겠다.] 
 
신문은 이 연구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한다. [시인은 임종의 때가 박두한 것을 느꼈기 때문에 즉시로 죽음을 가져오고 그 신체조직을 일시에 파괴하는 약물 속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액체라는 방식을 발견한 것은 다름아닌 시인 자신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이 하여 우리의 과학적•철학적 몽상은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힘을 솟게 한다. 그것은 죽음 속이나 생명 속에서도 동등하게 절대성을 탐구한다. 우리는 언제고 세상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죽음의 본능은 언제고 제아무리 활력에 넘치는 생명에도 자신을 내밀기 때문에, 그때는 깨끗이 사라지고 흔적도 없이 멸망한다. 
 
우리의 생명의 불은 조화에 의해서 존재 속에 무를 가져오게 될 불꽃도 없고, 재도 없는, 초인간적 조화에 의해서 멸망하자, 불이 그 자신을 탕진할 때, 힘이 내 자신을 반환하게 될 때, 존재는 그 멸망의 순간에 합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파멸의 강렬함이 실존의 최후의 증거가 되고, 그 가장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의 직관과 같은 근원에 있는 이 모순이 끝없는 가치의 변형을 조장한다. 
 
10 
前科學的인 사고가 중요한 경험적 성격인 사라져버린 잠재하는 불이라는 개념을 되찾았을 때, 그것은 이상한 적응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후 그것은 용연히 계통적으로 자기에게 모순되는 권리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무의식의 법칙 속에 지나지 않는 모순이 전과학적인 인식 속에 침투한다. 
 
즉시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공언하고 있는 한 저자 가운데 조잡한 形으로 존재하는 이 모순을 조사해 보자. 드 사틀레 부인과 마찬가지로 레니에의 경우에도 불은 팽창작용의 원리이다. 팽창작용에 의해서 불은 객관적으로 측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니에가 불은 <수축시키고> <속으로 넣는 힘>이라고 상상하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原註28). 그는 말하기를 어떠한 신체라도 그 원리적인 응집력은 불의 힘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만일 그것이 없다면 신체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왜냐하면 불은 어느 화합물 속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이전에 차지하고 있었던 공간보다도 더 무한히 작은 공간에 몸을 오므리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외관상의 학식도, 그것을 물리치려고 하는 한 저자에 의해서 1787년에 제기된 이 이론도 그 근원은 훨씬 멀리 있는 것이다. 연금술사들은 이미 열은 이질적인 물질을 나누고 동질의 것을 융화하는 하나의 물질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인용하고 있는 저자들은 서로 아무런 접촉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관련된 것은 서로 대립하는 것을 강하게 화해시키는 주관적으로 자연스러운 이 직관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모순을 그것이 기하학적 특성에 관계하기 때문에 다른 형태로서 포착해 왔다. 그것이 특히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더 막연한 질과 연결되어 있는 더 은밀한 모순을 고려해 넣으려고 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기하학적 모순이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불의 물리학>보다는 <불의 심리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납득할 것이다. 
 
우리는 모순이라는 것이 무의식에 있어서는 허용한계를 넘어서는 것, 실은 하나의 욕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그 모순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모순을 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간단히 독창성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독창성이란 무의식의 유력한 하나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독창성에의 이 욕구가 객관적 지식에 대해서 작용되었을 때, 그것은 소설 작가가 당치도 않은 수많은 특이성을 가진 한 주인공을 만들어 내어 제멋대로의 일을 거듭하는 멋대로의 작중인물을 그리고, 그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현상의 세부를 <과대>평가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실재화>하고, 우발적인 사건의 <인과>를 더듬는 것이다. 
 
이리하여 니콜라스 드 로크(原註29)에 있어서는 <이 하늘의 열이 생명을 만드는 불은 메마른 물질 속에 연결되고, 둔해지고, 습기찬 물질 속에서 몹시 부풀고, 더운 물질 속에서는 매우 활동적이 되고, 차디찬 물 속에서는 응고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에게 있어서는 불은 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불은 생생한 물질 속에서 응고한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 불의 그 가치를 보존시키려고 하는 모순이 더욱더 중복된다. 
 
그런데 문인들에 의해서 과학자로 평해진 한 저자를 더 가까이 연구해 보자. 샤틀레 후작부인의 책을 다루어보자. 첫 페이지를 넘기기가 무섭게 독자는 드라마의 한 가운데로 던져진다. 불이란 얼마나 신비롭고도 친근한 것인가! [불은 어떠한 순간에도 비록 그것이 우리의 내부에 있더라도 우리의 정신에 의한 포착으로부터 도망친다.] 
 
따라서 있는 것은 그 기능의 작용이 그 불의 <외관>에 끊임없이 반대하게 될 불의 <내밀성>이다. 
 
사람은 언제나 그 외관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샤틀레 부인은 빛과 열은 불의 <양태>와 <특성>이 아니라고 언명한다. 이 형이상학적인 구별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무차별하게 18세기의 실험가들에게 부여하려고 하는, 저 前實證的 정신과는 멀리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 샤틀레 부인은 빛나는 것을 뜨거운 것에서 분리하기 위해서 일련의 실험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녀는 달빛이 열을 가져오는 일이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 렌즈의 초점에 집중될 때에서 그것은 결코 태우는 일은 없다. 달은 차나 이 약간의 반성만 있다면 <열은 원소적인 불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이와 같은 기묘한 명제를 정당화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샤틀레 부인은 그 소론의 4페이지에서 하나의 모순에 의해서 깊은 독창적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녀가 말하듯이 <일반인은 저속한 귀로> 자연을 본다. 
 
불이 높이 상승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두세 개의 초보적인 실험이나 소박한 관찰만 하면 족하다. 이러한 간단한 관찰은 바로 형이상학적인 여러 원리에 이른다. 
 
[그러므로 불은 거기에 굴복하는 일이 없는 중력의 끊임없는 적대자이다. 이리하여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이 신체에 대한 불 쪽에서의 작용과 신체의 무게와 그 여러 부분의 응집력을 통해서 불의 작용에 대립하는 신체 쪽에서의 반작용이 되는 팽창작용과 수축작용의 끊임없는 진동 속에 있는 것이다. 
 
불이 무겁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으로 결국은 불을 창조주의 원동력의 하나로 쓰고 있는 특성을, 가장 본질적인 특성을 자연에서 빼앗는 것이 된다.] 실험과 결론과의 사이의 불균형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하여튼 보편적인 중력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반대법칙이 쉽게 발견된다면, 그 용이함은 우리에게는 무의식의 활동의 심한 징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무의식은 극도로 불성실한 토론 속에서 분명히 양자택일에 기반을 둔, 논리적이고 명석한 변증법과는 매우 다른, 말하자면 둔중한 변증법의 요인이 된다. 무의식은 하나의 불규칙한 세부로부터 일반법칙을 궁지로 몰아넣을 구실을 끄집어낸다. 즉 무의식의 물리학은 언제나 예외의 물리학이다. 
 
<原 註> 
1. 보에라이베(Boerhaave)의 《化學槪要》 
2. 샤틀르 기요므 셀레의 《공기와 불에 관한 화학적 시론》 
3. 카스텔(R. P. Caste)의 《색깔의 光學》 
4. 뒤칼라의 《불의 구성》 
5. 보에라아베의 《化學槪要》 
6. 카라(Carra)의 《빛•불•열•전기의 성질에 관한 시론》 
7. 마라(Marat)의 《새로운 실험 결과 검증된 빛, 전기불에 관한 발견》 
8. 브레즈 비즈네트(Blaise Vigenere)의 《불과 소금의 論考》 
9. 주르댕 기벨레(Jourdain Guibelet)의 《세 가지 철학적 서설》 
10. 보에라아베의 前揭書 
11. 로비네의 前揭書 
12. 요아힘 폴레만(Joachim poleman)의 《철학적인 표피로 본 의학상의 새로운 광선》 
13. 기벨레의 前揭書 
14. 아베 드 망겡(Abbe de Mangin)의 《전기에 관한 흥미있고 새로운 문제》 
15. 빙크러(Winckler)의 《자연에 대한 시론》 
16. 장 바피스 파이올(Jean-Baptiste Fayol)의 《天上의 조화》 
17. 다비드의 前揭書 
18. 《哲學書簡Letter philosophique》 
19. 레니에(Reynier)의 《불과 그 중요한 효과 몇 가지》 
20. 보에라아베의 前揭書 
21. 니콜라스 드 로크(Nicolas de Loques)의 《혼합된 육제조직에 관한 자연철학의 기초》 
22. 엣케(Hecquet)의 《消化와 胃의 병에 대해서》 
23. 《코스모폴리트Cosmopolite》 
24. 《철학서간Letter philosophique》 
25. 요하힘 플레만의 前揭書 
26. 로크의 前揭書 
27. 크로세 드 라 우메리(Crosset de la Heaumerie)의 《古代哲學의 비밀》 
28. 레니에의 前揭書 
29. 로크의 前揭書 
<譯 註> 
1. 가공의 것이니 연금술사들은 불에서 발생하는 成分으로 간주하고 있다. 
2. Roguse ; 시칠리아의 도시 
 
제 6장 알코홀-타는 물 
--펀치--호프만 콤플렉스 自然燃燒 
 
가장 명료한 현상학적 모순의 하나는 인간 思考의 마술적 활동의 승리인 알코홀의 발견에 의해서 초래된 브랜디(eau-de vie), 즉 그것은 불의 물이다. 그것은 언어를 태우며, 조그마한 불꽃으로 타는 물이다. 
 
그것은 硝酸(eau-forte)처럼 용해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 불의 교차이다. 알코홀은 또 가슴속에 열을 주는 <즉효>의 양식이다. 알코올에 비하면 육체까지도 <완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알코올은 명백하게 실체론적인 가치부여작용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또 소량으로 그 작용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농축작용에서는 가장 정선된 맑은 수프를 능가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소유욕의 방식, 즉 少量이며 큰 힘을 소유하는 방식에 따르고 있다. 
 
브랜디는 졸리운 눈앞에서 타거나 胃의 우묵한 곳으로부터 온 몸을 따뜻하게 하지만, 그 점으로 보아도 그것이 내적인 경험과 객관적인 실험과의 收斂의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이중의 現象學은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이 실험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제거해야만 할 <콤플렉스>를 준비한다. 
 
이 콤플렉스 가운데서도 매우 특수하고 게다가 매우 강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소위 순환이라는 것을 닫는 것이다. 불꽃이 알코올 위를 달리고, 불이 그 증거와 표지를 가져오고, 원시의 불의 물이 빛나며 타는 화염에 의해서 화려하게 장식될 때, 우리는 그것을 마셔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물질 가운데서 브랜디만이 거의 불의 質料와 동등하다. 
 
나의 어린 시절, 겨울의 큰 축제에는 큰 횃불이 만들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아버지는 커다란 접시에다가 포도에서 짠 마크 브랜디를 붓고, 그 가운데에다 설탕단지에서 가장 큰 설탕덩어리를 골라 넣어둔다. 성냥불이 설탕 끝에 닿기가 무섭게 파란 화염이 소리를 내면소 퍼진 알코올 위로 내려간다. 
 
그때 어머니는 매달린 촛대의 불을 끈다. 그때야말로 정말 신비적이며 장중한 의식의 순간이었다. 낯익은 얼굴들, 그러나 그 창백함 때문에 갑자기 알지 못하게 된 얼굴이 둥근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다. 이따금 설탕의 피라밋이 무너지기 직전에 소리를 내며, 약간 노란색이 푸르고 긴 화염 끝에서 튄다. 
 
만일 불꽃이 흔들거리면 나의 부친은 부젓가락으로 화톳불을 뒤적거린다. 그러면 부젓가락은 악마의 연장처럼 거대한 불꽃을 일으킨다. 그때 우리는 다음과 <이론화>할 수 있다. 
 
화염을 끄는 일이 늦어지면 화톳불은 너무 달아오르고, 너무 빨리 끄면 불이 줄어들어 <농축>되므로, 유행성감기에 대한 화톳불의 효능이 감소되게 된다. 그때 어떤 사람은 최후의 한 방울까지 타버리는 화톳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어떤 자는 술의 釀造元이 불을 낼 때 럼주통이 마치 <화약통처럼 폭발한> 일과 그 폭발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예외적인 현상의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 것이다. 최후로 그 뜨거운 진수가 된 브류로(brulou)가 나의 컵 속에 담겨진 것이다. 그러기에 비즈네르가 제아무리 조심하여 화톳불을 <매우 유쾌하고 예외적인 조그만 실험>으로서 말한다 해도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보에라아베가 <이 실험 중에서 나에게 가장 유쾌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 그릇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성냥으로 긴 화염이 이 똑같은 그릇 속에 있는 알코올에 인화하는 일이다>라고 쓸 때, 나는 그의 말을 사실상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유동적인 불이며 존재의 표면에서 흥겨워하며 자신의 물체와 희롱하는 불이며, 자신의 물체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불이다. 
 
그것은 사람에 의해서 익숙해진 여우불이며 단란한 가족 가운데 있는 악마의 불이다. 이러한 광경 뒤에 그것을 좀 맛보는 일은 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추억을 남기는 법이다. 
 
깜박거리는 눈에서 활력을 되찾은 胃는 물질화되면 될수록 더 견고한 것이 되는 보들레르적 交感(correspondance baudelairien-ne)이 확립되는 것이다. 브류로를 마시는 자에 있어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 자의 경험이 얼마나 빈약하고 차고 <애매>한 것으로 느껴질까? 
 
기쁨에 넘친 어느 날 새벽, 설탕에 담근 이 불꽃 속에서 태어나는 이 뜨거운 알코올의 개인적 경험을 갖지 못한 자는 펀치의 낭만적 가치를 거의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저 <환상적 시들>을 연구하기 위한 진단 방법이 결여될 것이다. 
 
예를 들면 호프만의 작품인 《환상가》에서 더 특이한 점은 불의 현상이 그 작품 속에서 의미하고 있는 중요성이다. 불꽃의 詩想이 그의 작품 전체에 일관되어 있다. 
 
특히 <펀치 콤플렉스>는 거기서 매우 현저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호프만 콤플렉스>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은 펀치가 이야기를 위한 구실이고 축제날 밤의 단순한 부속물인 점에 만족할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의 하나인 《안토니아의 노래》에서는 <우정의 펀치로 가득찬 단지가 불꽃을 뿜는 둥근 탁자를 둘러싸는> 겨울의 한밤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환상에의 초대는 이야기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이 초대는 이야기와는 일체가 되지 않는다. 그토록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처럼 불의 표지 밑에 놓인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지만 다른 장소에 있어서는 그 표지는 이야기에 통합되어 있다. 
 
포스포러스와 백합꽃의 사랑은 불의 시상을 명백하게 한다(세 번째 밤의 詩). [너의 모든 존재 속에서 기분좋은 더위를 간직한 욕망은 이윽고 사라져 너의 마음을 날카롭게 괴롭히고 상처입힐 것이다. 
 
지금 내가 너에게 던지고 있는 이 불꽃이 붙이는 지상의 기쁨도 실은 희망없는 괴로움이며, 이윽고 또 이질적인 형으로 다시 싹트기 위해서 시들어가는 운명이다. 이 불꽃이야말로 사상이다. ---아! 하고 백합은 시들며 한숨을 쉰다. 
 
지금 내 몸을 태우고 있는 이 격정만으로 나는 당신 곁으로 갈 수가 없을까?] 같은 이야기 속에서 학생 알세므는 가련한 베로니크로 되돌려주는 마술이 이루어질 때 <솥 속에서 타는 酒精의 엷은 불꽃을 제하고는 이미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 뒷부분에서 불도마뱀의 린트호르스트는 펀치의 잔으로부터 들락날락한다. 즉, 불꽃이 차례차례 그것을 마셔버리거나 나타내거나 하는 것이다. 마술사와 불도마뱀의 싸움은 불꽃 하나의 싸움이고, 뱀들은 펀치가 들어 있는 수우프 그릇에서 나온다. 
 
격노와 술주정, 이성과 향락은 항상 그들의 상호간섭 속에 나타난다. 이따금 이야기 속에는 <이해>하기 위해 그 학생에게 말을 거는 한 好人 부르조아가 나타난다. [어째서 저 저주받은 펀치가 저렇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그처럼 많은 광태를 부렸는가. 폴레만 교수는 다음날 아침 방안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방에는 아직 깨어진 술병이 흩어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그 불행한 가발이 처음 모습으로 완전히 풀려진 채 산만한 펀치의 大海에 떠 있다.] 
 
이리하여 이 성화된 설명, 부르조아적 설명, 술주정의 고백에 의한 설명이 나타나면 몽상적인 영상을 억제하게 된다. 따라서 이야기는 이성과 꿈 사이에 주관적 경험과 그 원인에 있어서는 그럴싸하지만 동시에 그 결과에 있어서는 비실재적이고 객관적인 像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다. 
 
슈세씨는 《호프만에 있어서 경탄할만한 구원》이라는 연구 속에서 알코올의 경험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호프만의 경우에 그는 펀치의 불꽃 외에는 결코 불도마뱀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우리에게는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결론을 끄집어내지 않았다. 만일 한편으로 호프만이 불도마뱀을 보는 것은 겨울날 밤, 유령들이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려고 인간의 축제에 올 때, 불꽃을 올리는 펀치 속에서라면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분명히 불의 악마들이 호프만적 몽상 속에서 근원적인 역할을 한다고 친다면, 그때 영감의 샘은 알코올의 역설적인 불꽃이고, 그리고 호프만적 구조의 전체 骨組는 이 빛 속에서 명백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고로 슈세씨의 아주 지적이고 치밀한 연구도 우리에게는 설명의 중요한 요소를 스스로 단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독창저긴 문학의 진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너무 서둘러서 이성의 구조로 향할 것은 못 된다. 무의식도 또한 독창성의 하나의 요인이다. 
 
특히 알코올적 무의식은 하나의 깊은 실재성이다. 알코올은 단순한 심적 잠재성을 자극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고 한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알코올이 그것들의 잠재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기를 표현하고자 애쓰는 자에게 자기를 합치시키는 것이다. 분명히 알코올은 언어활동의 하나의 요인이다. 그것은 어휘를 풍부하게 하고 문장론을 자유롭게 한다. 실제에 있어서 불의 문제로 되돌아오면 정신병리학은 알코올에 의한 착란증상 속에서 불의 꿈이 왕왕 일어나는 것을 인정했다. 
 
즉 정신병리학은 난쟁이들의 환각이 알코올의 자극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나타냈다. 그런데 세밀화로 향하는 몽상은 깊이와 안전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몽상이야말로 이성적 사유를 더 잘 준비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박쿠스는 훌륭한 신이다. 이성을 당황케 함으로써 그는 윤리의 경직을 막고 이성의 창조성을 끄집어낸다. 
 
12월 31일 歲暮의 밤에 펀치의 창백한 불꽃을 둘러싸고 시인과 네 친구가 한때 <서로 죽은 것처럼 서로 방문키로> 정한다. 이미 매우 호프만적인 영향에서 씌어진 장 폴의 다음과 같은 한 구절도 지극히 상징적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얼굴에서 피를 짜낸 죽음의 손과도 같았다. 입술에서는 핏기가 사라지고 손은 희게 축 늘어져 있다. 그 방은 지하묘소였다. 달빛 속에서 음산한 바람이 구름을 찢고 채찍질하고 있다. 그리고 구름이 여기저기 찢기는 곳에는 별 저쪽까지 퍼진 어둠이 보였다. 
 
모든 것은 침묵에 잠겼다. 사라져 가는 세월은 괴로워하며 임종의 숨을 거두어 과거라는 분묘의 나락에 떨어지려는 것처럼 보였다. 
 
오! 시간의 천사여! 인간의 한숨과 눈물을 가르친 그대여, 그것을 망각 저쪽으로 가지고 가거나 넌지시 감추어 다오. 누가 그 수많은 생각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原註1) 이쪽 또는 저쪽으로 몽상을 전진하기에는 얼마나 간단한 것인가! 축제날이 된다. 
 
시인은 유쾌한 친구들과 더불어 술잔은 손에 든다. 그러나 화톳불에서 나오는 창백한 약한 빛은 아주 혈기왕성한 노래에까지 침통한 곡조를 띤다. 갑자기 하루살이 같은 불의 비관주의가 닥쳐와 몽상을 변화시켜 버린다. 
 
죽어가려고 하는 불꽃은 여행을 떠나려는 해를 상징하고 비탄의 근원인 시간은 마음속에 무겁게 드리워진다. 예를 들면 장 폴의 펀치가 노발리스의 마술적 관념론(ide-alisme magique)에 비해 그 이상으로 질료적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夢想的 觀念論(idealisme fantasmgorique)은 단순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론해도 그 구실이 독자의 무의식 속에서 바로 만족할 만한 발전을 보고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견해로는 이것은 많은 가치가 부여되어 있는 대상의 관조가 그 발전의 감각적 경험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이고 불가피한 수많은 몽상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영혼이 깊지 않을수록 보다 작위에 넘치는 반향을 발하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주제는 언제나 울려퍼질 것이다. 오네디는 《불꽃의 첫째 밤》에서 노래하고 있다. 
 
방 가운데, 쇠화로 주위에 
그 크기는 지옥의 솥과 맞먹는 것, 
그 속에서 아름다운 펀치, 프리즘의 불꽃이 되어, 
유황의 호수와도 닮아, 그 파도를 갑갑하게 꿈틀거린다. 
 
그리고 암흑의 아틀리에에 단 하나의 빛인 
펀치의 불꽃들, 영혼의 신기루. 
그을린 이마를 가진 머리 머리 머리...... 
그 대관식의 아주 순수한 오시안니즘. 
 
이 시는 잘 된 것은 아니지만, 화톳불에 관한 모든 전설을 포함하고 있으며, 시의 졸렬함 속에도 소박한 인상에 조예가 깊은 사상이 든 호프만 콤플렉스를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시인에 있어서 유황과 인은 불꽃의 프리즘의 잉태이다. 
 
지옥은 이 불순한 축제 속에 현존한다. 만일 불꽃 앞에서의 몽상의 <가치>가 이 싯귀에 결여된다면, 그 시적인 <가치>는 읽을만한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독자의 무의식은 시인의 무의식의 불충분성을 메꾼다. 오네디의 싯귀는 펀치의 불꽃의 <오시안니즘>에 의해서만 견디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낭만적인 <청년 프랑스 난만파들>이 <펀치그릇>의 주위에 모였던 시대(原註2), 방탕가적 생활이 헨리 무르그처럼 표현하면 <열정의 화톳불>에 의해 광택되었던 시대 저네의 환기가 된다. 
 
이 시대는 이미 명확하게 지나가버린 것이다. 화톳불과 펀치는 오늘날 그 심리적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금주주의가 그 노기에 찬 비난에 의해서 이와 같은 경험을 금지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상적인 문학적 구조의 심리학적 의미를 이해코자 한다면, 구체적이고 치밀한 그 토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직접적인 여러 가지 주제를 다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일반적인 고찰 속에 너무 빨리 침전시키지 말고 그 정밀한 세부 속에서 하나씩 파악하는 도리밖에 없다. 
 
만일 우리의 이 저작이 하나의 유용성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 시적 자질의 분류를 준비할 객관적 주제의 분류를 암시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종합적 학설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물리학의 四元素說과 四體質說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주 명료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불의 표지 아래, 꿈꾸는 혼과 물의 표지 아래, 공기의 표지, 대지의 표지 아래 꿈꾸는 영혼들은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특히 물과 불른 몽상까지도 여전히 적대적이며 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불꽃의 노래를 듣는 자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몽상의 이 물리학 또는 화학은 극도로 일반화하여 발전시키면 쉽사리 시적 자질의 네 개의 가치에 도달할 것이다. 사실 몽상의 네 개의 가치는 탄소의 화학적인 네 가치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고 생산적이다. 
 
몽상은 네 개의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그것은 무한의 진실된 시인, 진지한 시인, 자기의 본원적인 언어에 충실하고 모든 감각을 구사하기를 바라는 감각적 절충주의의 부조화의 반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시인, 그 시인의 비밀을 열기 위해서는 한 마디의 말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너의 환상이 무엇인가 나에게 말해다오. 그것은 地神인가, 불도마뱀인가, 물의 요정인가 아니면 공기의 요정인가?] 그런데 알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이 모든 공상적인 존재는 특이한 물질로 형성되어 있고 거기에서 양식을 얻고 있다. 땅처럼 凝縮된 지신은 바위틈에서 산다. 
 
모든 것이 미친 듯한 불도마뱀은 스스로의 불꽃 속에 몸을 태운다. 물로 되어 있는 물의 요정은 소리없이 늪 위를 미끄러져가 자신의 그림자를 먹는다. 최소의 물체가 무거운 짐이 되고 알코올의 마지막 한 방울에도 겁을 먹고 <그 원소를 더럽히는>(호프만) 흡연자에게는 화를 내는 공기의 요정은 쉽사리 창공으로 올라가 자신의 식욕부진(anorexie)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적 영감의 이러한 분류를 인간의 몸 속에서 중요한 물질적 원소를 찾아내기를 주장하는 다소 유물론적인 가설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문제는 물질이 아니고 방향이다. 즉, 중요한 것은 실체적인 근거가 아니고 경향이며, 선양이다. 
 
그런데 심리적인 여러 가지 경향은 방향짓는 것, 그것은 원시적인 영상이다. 즉, 관심이 없는 것에의 관심, 즉 <대상에의 관심>을 갑자기 불러일으키는 모든 광경과 인상이다. 모든 상상력이 집중된 것은 이 가치가 부여된 영상에 대해서이다. 
 
바로 이와 같이 하여 상상력은 하나의 좁은 문을 통해서 아르망 쁘띠장의 말을 빌면 <우리를 초월하고 우리를 세계에 향하게> 하는 것이다. 아르망 쁘띠장은 놀랄만큼 명확한 분석으로 상상력의 전체적 <變換>(原註3)은 여러 가지 영상의 덩어리를 좋아하는 하나의 영상의 언어로 미리 이행시킴으로써 말하자면 준비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상상력의 집중작용을 이해한다면, 호프만과 에드가 포우처럼 외관상으로는 같은 두 개의 정신이 무엇 때문에 긍극에 있어서 몹시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인간의 기술이 아닌 그들의 초인적인 천재적인 일에 있어서 강력한 알코올의 힘을 입고 잇는 것이다. 
 
그러나 호프만의 알코올 중독은 에드가 포우의 알코올 중독과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호프만의 알코올은 타오르는 알코올이고 그것은 불의 매우 질적이고 남성적인 표지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 포우의 아로올은 침잠하고 망각과 죽음을 가져오는 알코올이다. 
 
그것은 물의 양적이고 여성적인 표지에 의해서 특정지워진다. 에드가 포우의 진수는 잠든 물에, 죽음의 물에 <앗셔家>를 비치는 연못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마취시키는 듯한 몽롱한 안개가 넓은 골짜기에 톡톡 보드랍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해지는 석양의 파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한편 그에게 있어서 <호수는 잠들려는 의식을 즐기는 듯하고--잠든 숲의 
 
미녀--산과 거리들은 어떠한 기슭도 없는 바다로 영원히 떨어져 가고 있다.> <귀신이 사는> 음울한 늪지가, 처참한 상정호수며 연못가 <말할 수 없는 불신의 장소, 우수의 벽지>인 거기서 그는 <과거의 상복을 입은 기억, 그것들이 표류자 근처를 지나갈 때 놀라서 한숨짓는 수의를 입은 모습(환상의 고향)을 되찾는다. 
 
그가 화산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화산의 강물 가튼 흐름을 보기 위해서이다. <나의 마음은 용암의 흐름을 닮아 불처럼 타고 있다>이다. 이리하여 그의 상상력에 집중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원소는 물이나 또는 죽어서 흐름을 잃은 대지이다. 
 
그것은 불이 아니다. 마리 보나파르트 부인의 멋진 작품을 읽으면 이것이 정신분석적으로 더 납득이 갈 것이다(原註4). 거기서는 불의 상징은 대립하는 원소로 물을 부르기 위한 것 이외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것, 즉 불꽃의 상징은 거기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는 조잡한 성적 영상으로서 반발적인 양태로만 작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벽난로의 상징주의는 여기서는 刺客이 노리는 자를 쫓아가다 유폐된 차디찬 膣의 상징주의로서 나타난다. 에드가 포우는 바로 <난로(고향)을 갖지 않는 자>이며 피에로이며 죽음의 잠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잠자는 어머니의 환상에 겁을 먹는 어린아이였다. 
 
알코올만이 그를 따뜻하게 해주고 기분좋게 쾌활하게 할 수 있다! 포우는 인간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펀치의 주위를 유쾌한 동료와 손을 잡고 춤추는 일은 없다. 불의 사랑 속에서 형성되는 콤플렉스의 어떠한 것도 그에게 활기를 주고 그를 흥분시키지는 않았다. 물만이 그에게 그의 지평선, 그의 무한과, 그의 고통의 끝없는 깊이를 준다. 
 
그리고 돛과 빛의 시상이 우리 내부에 밤의 신음소리를 울림으로써 우리를 떨리게 하는 막연한 공포의 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아주 다른 또 하나의 책을 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시적 정신이 즐기는 영상의 유혹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것이 모든 가능성을 확대하고, 조그만 것을 모델로 하여 큰 것을, 다채로운 것을 모델로 일반적인 것을, 순간의 힘을 모델로 잠재적 힘을, 화톳불을 모델로 지옥을 생각하는 것을 보아왔다. 
 
이번에는 우리는 前科學的 정신이 그 시원적인 추진력에 있어서는 거의 같은 작용, 그것도 무의식에 의해서 과대평가된 방법으로 잠재적인 힘을 확대코자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알코올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무시무시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려지기 때문에 우리가 묘사되어 있는 현상 속에 관찰자의 <교화적인 의지>를 읽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이리하여 19세기의 反알코올 운동이 진화론적 명제에 기반을 두고 음주자에게 인종적 결함의 全責任을 전가하며 발전한 데 대해 우리는 18세기에 있어서의 금주주의가 당시 지배적이었던 실체론적 명제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는 것을 보려고 한다. 
 
타인을 비난하는 의지는 언제나 가까이 있는 무기를 든다. 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상투적인 설교는 그만두고라도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객관적 인식의 입구에서 실재론적 또는 애니미즘론적인 장해의 소극적 저항의 한 예를 제시코자 한다. 
 
알코올은 눈에 띠게 可燃的이라 주정음료에 빠지는 사람은 불붙기 쉬운 물질이 <침투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간단히 상상될 것이다. 우리는 알코올의 동화작용이 알코올을 변용하는가 어떤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물질상의 점유와 마찬가지로 문화를 지배하는 아르파공(Harpagon) 콤플렉스는 자기들이 흡수하는 것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귀중한 물질은 전부 주의깊게 저장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즉, 지방은 지방질을 공급하고, 인산염은 뼈를 만들고, 피는 피를 보충하고, 알코올은 알코올을 준다. 
 
특히 무의식은 가연성과 마찬가지로 특질적이고 영묘한 하나의 특징이 완전히 사라지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알코올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알코올처럼 탈 수가 있다. 
 
실체론적 신뢰는 매우 강하므로 더 다양한 설명법에 의해서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실>이 18세기를 통해서 대중의 조그만 신뢰에 자기를 밀어넣을 것이다. 
 
당시 평판이 높았던 저자인 소케(Socquet)에 의해서 1801년에 출판된 熱素論 가운데 정리되어 있는 약간의 예는 모두 계몽시대의 것에 차용된 것임을 지적해 두기로 한다. 
 
[우리는 코펜하겐의 공식기록 중에 1692년에 영양섭취라고는 거의 주정음료를 무절제하게 사용하던 하층계급의 한 부인이. 어느 날 아침 손가락의 마지막 관절과 두개골을 제회하고는 완전히 타버렸다는 사실을 읽었다.] 
 
[1763년경 런던의 《등록연감》 18권 78페이지는 1년 반 동안 매일 1파인트의 럼주 또는 브랜디를 마시던 알코올 중독자인 50세의 한 부인의 예를 보고하고 있다. 
 
그녀는 침대커버나 그밖의 일상용품이 거의 상하지 않았는데도 난로와 침대 사이에서 재가 되어 발견되었다. 이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그 후의 지적은 직관이란 어떠한 방법으로 자기의 마음에 드는 가연체를 가려낼 줄 아는 아주 내적이고 물질적인 연소작용을 규정함으로써 만족한다는 것을 매우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체계백과사전》(인간의 병리해부학의 장)에서 주정음료를 끊임없이 남용하여 몇 시간 사이에 마찬가지로 타버린 50세 정도의 한 부인의 이야기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인용하고 있는 빅크 다쥴은 그것을 부인하기는커녕 같은 예가 그밖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보증까지 하고 있다. 
 
런던 학사원의 회보도 똑같은 놀랄만한 현상을 제공하고 있다. [한 60세의 부인이 어느 날 아침 들은 바에 의하면 전날 밤에 다량의 주정음료를 마신 후 재로 발견되었다. 소지품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였으며, 게다가 난로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이 사실은 한패의 목격자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르카는 《자연발생적 연소에 대한 보고서》속에서 이러한 종류의 燒死의 몇 가지 예를 들고 있다.] 또 다른 예가 피에르 에메 레르의 《燒死에 대한 試驗》속에 나타나 있다. 장 앙리 코우장은 《새벽 별에 새로운 빛이 깃든다》라는 제목 아래 암스테르담에서 인쇄된 책 속에 있는 <보나 스포르자 여왕시대의다 한 신사가 火酒를 마신 결과 불꽃을 토하고 타버렸다>는 말이 있다. 
 
 
[독일의 연감 속에서도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북부지방에 있어서는 이따금 불꽃이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의 위 속에서 솟는다>고 그 집필자는 말한다.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은 예의상 삼가지만 17년 전에 크르란드의 세 신사가 서로 다투어 독한 술을 마신 결과 두 사람은 자신의 위 속에서 나오는 불꽃에 의해서 타서 질식해 죽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전기현상의 大家로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저자의 한 사람인 잘라베르는 1749년에 인체에 의한 전기불의 산출을 설명하기 위해서 똑같은 <사실>을 근거로 삼았다. 류우머티즘에 걸린 한 여인은 매일 오랜 시간에 걸쳐서 樟腦를 포함한 주정으로 자기의 몸을 비볐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재가 되어버렸다. 
 
물론 하늘로부터의 불이나 보통의 불이 이 갑작스러운 사건에 역할을 했다고 의심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은 마찰에 의해서 자극되어 장뇌를 포함한 주정의 아주 미묘한 입자와 섞인 신체의 가장 섬세한 유황부분은 쉽사리 불을 일으킨다는 사실로밖에 돌릴 수 없을 것이다(原註5). 
 
또 한 사람의 다른 저자인 모르티머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原註6). [나는 무조건 주정음료를 마시는 버릇이 있거나 장뇌가 든 주정으로 마사지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몸에 전기를 지니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견에 찬성한다.] 
 
<자연발생적 연소>를 입에 댈 정도로 육체 속에 알코올의 물질적 집중작용이 매우 강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가 자기를 연소하는 데는 성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뒤퐁의 적수였다. 퐁끄레 수도사는 1766년에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명의 원리로서 열은 동물로서의 활동을 개시시키고, 그것을 유지케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의 단계까지 높아지면 이상한 초조를 일으킨다. 우리는 강한 술의 습관적 과음에 의해서 그 몸속에 마음껏 주정이 침투된 주정뱅이가, 갑자기 혼자서 불을 잡고 이 자연발생적 연소에 의해서 타버렸다는 그러한 예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일까?] 
 
이리하여 알코올 중독에 의한 연소는 열이 이상하게 집중하는 특별한 경우에 불과한 것이다. 
 
몇 명의 저자는 마침내는 연소에 대해서 말하는 데까지 간다. 《맛과 냄새의 화학》의 저자인 한 알코올 蒸溜技士는 알코올의 위험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原註7). [알코올은 근육도, 신경도, 임파액도, 혈액조차도, 용서하지 않고 그 극한의 단계까지 가서 그 정도를 지나친 사람들을 경이적이며 순간적인 연소에 의해서 파멸시킬 정도로까지 열을 부른다.] 
 
19세기가 되면 알코올 중독의 끔직한 징벌인 이 자연연소는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것은 점점 주정군의 붉은 얼굴에 대한 비유가 된다. 즉, 성냥으로 불을 붙일 수 있는 주정군의 붉은 코에 대한 즉흥적인 농담의 말에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나 이 농담이 무엇인가는 금방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전과학적인 사고가 언제까지나 언어활동 속에 방황하고 있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문학 속에도 방황하고 있다. 발자크는 신중한 한 노인의 입을 통해서 여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촌 퐁스》속에서 생굴을 팔며 살고 있는 사랑스러운 시보 부인은 별로 정확한 말투는 아니나 다음과 말하고 있다(原註8). [잘 아시는 저분은 남편을 잘못 만났지요. 남편은 무엇이든지 마시고는 마침내 자연발생적인 渗透로 죽었으니까요.] 
 
이와 반대로 에밀 졸라도 그 가장 <과학적>인 책의 하나인 《파스칼 박사》속에서 인간의 자연연소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있다(原註9). [이미 5프랑짜리 동전 정도의 크기로 난 옷의 구멍 사이로 드러난 넓적다리에서부터 조그만 파란 불꽃이 나며 붉은 빛을 띠었다. 
 
처음 페리시테는 속옷이나 하의나 팬티가 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는 나체의 몸을 본 것이다. 거기에서, 타오르고 있는 알코올 단지의 표면에 불꽃이 핥는 것처럼 조그만 파란 불꽃이 약하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그 불꽃은 관솔불보다 거의 높지도 않고 고요하고 잔잔하여 약간의 공기의 진동에도 흔들릴 정도로 불안정했다.] 아주 명백한 일이지만 졸라가 사실의 영역으로 옮기고자 한 것은 잔을 앞에 둔 퐁스의 몽상, 즉 퐁스의 호프만 콤플렉스이다. 
 
페이지가 지남에 따라서 우리는 앞 페이지에서 특징지워진 실재론적 직관이 아주 순수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페리시테는 숙부가 火酒가 침투한 해면처럼 거기서 불을 취한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몸은 몇 년 사이에 더 강하고 더 인화성이 있는 화주로 충만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타오를 것이다.] 
 
보다시피 살아 있는 인간이 예전에 흡수한 몇 잔의 표준 주정을 상실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우리는 더욱 기분 좋게 영양물의 동화작용이 아낀 물질의 정성들인 농축작용이며 식욕의 축적작용이라는 것을 상상할 것이다. 
 
이튿날 파스칼 박사가 마퀴아르 아저씨를 진찰하러 오자, 그때 볼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자세히 서술해온 전과학적인 사건의 이야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한 주먹 정도의 재뿐이었다. 
 
졸라는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 [그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뼈도 이빨도 손톱도 없었다. 문에서부터 흘러 들어오는 바람이 당장이라도 불어버릴 듯한 회색 먼지더미 외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에 불에 의한 神聖化의 비밀의 희구가 모습을 나타낸다. 졸라는 전체적 焚死의 내밀적인 욕구의 유혹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설가는 아주 명백하게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가 그의 무의식 속에 작용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고로 마퀴아르 아저씨는 <취한 왕자로서 스스로 타오르고 자기 몸을 다 소진해 버리며, 마치 세례 요한축제의 불처럼 자신에게 불을 지른다. 왕자답게 죽는 것이다.] 졸라는 열렬한 受難劇처럼 자기 자신에게 붙은 불, 세례 요한축제의 불을 어디서 본 것일까? 
 
객관적 비유의 의미가 전도되었다는 것과, 내부에서 살아 있는 육체를 태울 수 잇는 강렬한 불꽃의 영감을 볼 수 있는 것은 가장 내밀의 무의식 속이라는 것을 이것이 고백하는 것 이외에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일까? 
 
모든 것이 상상력의 소산인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는 한 과학자에 불과하다>고 말한 <자연주의> 과학자의 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특히 중요한 것이다. 
 
졸라는 그의 소박한 그 자체의 몽상에 의해서 과학의 영상을 <구축>하고 있으며, 그의 유전의 이론은 인체 속의 알코올에 의해 사로잡힌 연소의 <집중작용>과 더불어 의심할 바 없이 보잘것없는 실체론적, 또는 실재론적 학문으로 하나의 소재 속에 자신을 새겨온, 과거라는 똑바른 직관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이리하여 단편작가•의사•물리학자•소설가와 같은 모든 몽상가들은 똑같은 영상을 말하고 같은 사상에 이른다. 호프만 콤플렉스는 그들을 원초의 영상으로 유년시대의 추억으로 옮겨놓는다. 그들은 그 자질에 따라 그 고요한 <환영>에 따라 관상하는 대상의 주관적 또는 객관적 측면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다. 
 
화톳불에서 나오는 파란 불꽃으로부터 그들은 불의 인간 또는 물질의 흐름을 끄집어낸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가치부여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 줄기의 불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온갖 정열을 기울인다. 그들은 그들을 경탄시키고 따라서 그들을 골탕먹이는 하나의 광경과 <통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심정을 퍼붓는 것이다. 
 
<原 註> 
1. 《낭만적인 영혼과 꿈》 알베르 베기에 의한 註와 引用 
2. 고티에의 《젊은 프랑스--펀치그릇》 
3. A. 쁘띠장의 《상상과 실현》 이 책의 여러 곳에 있음. 
4. 마리 보나파르트의 《포우論》 이 책의 여러 곳에 있음. 
5. 잘라베르의 《電氣의 諸推測과 원인 및 효과의 硏究》 
6. 마르티느의 《熱에 관한 論文》 
7. 作者不明 《맛과 냄새 化學》 
8. 발자크의 《사촌 퐁스》 
9. 에밀 졸라의 《파스칼박사》 
 
 
제 7장 理念化된 불의 純粹性 
 
막스 셀러는 고전적 정신분석에 의해서 발전시키고 있는 듯한, <昇華>의 이념 속에는 지나침이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진화론적 설명의 기초에 있는 效用學說과 같은 착상에 따르고 있다. 
 
[자연주의적 정신과학은 항상 核과 껍질이 공존한다. 신성한 것을 갈망하는 자들이 자기 자신과 타인을 향해서 영적이며 숭고한 것에 대한 자기의 사랑의 모든 열기에 고백하기 위해서, 그처럼 희귀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언어의 단어에다가, 순수한 관능적인 사랑의 영역 속에다, 영상이 유사하거나 비교 같은 것에 의지해야 하는 것을 볼 때, 자연주의자들은 반드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눌려 죽고 은폐되고 때로는 미묘하게 순화된 성적인 욕망을 문제시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原註1) 
 
이 철두철미한 문장 속에서 막스 셀러는 푸른 하늘에서 사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근본으로부터 그 양식을 주장하는 이론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시적 상황, 특히 낭만적 승화가 여러 가지로 정열의 생활과 접촉을 갖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바로 그 정열에 항거하는 영혼 속에 또 하나의 다른 승화작용을, 고전적 정신분석에 의해서 고찰된 유일한 것인 <연속적 승화작용subli-mation continue>과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가 <변증법적 승화작용sublimation dialectique>이라고 부르는 것을 찾게 될 것이다. 
 
이 변증법적 승화작용에 대해서 심리적 에네르기는 같은 성질이며 한정되고 그 정상적인 생물학적 기능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반론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의 긍정에 있어서의 전환은, 본래의 성적 활동에 있어서는 어떤 고유의 결여나 동요를 남긴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론적 직관은 우리에게는 정열에 관한 고전적 정신분석을 통해서 기초로 삼은 <神經症例>를 쌓아올림으로써 획득되어진다고 느껴진다. 
 
사실 우리에게 관한 한에 있어서는 <객관적 인식>의 작용에 정신분석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억압>이 하나의 정상의 작용이며 유용한 작용이며 더 정학하게 말해서, 향락적인 작용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억압이 없는 어떠한 과학사상도 있을 수 없다. 
 
억압은 집중적이고 반사적이고 지성적인 사유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이론이 정연한 사상일지라도 확고하고 명백한 여러 가지의 체계 위에 이룩되어야 한다. 문화의 기쁨 속에는 <엄격한 기쁨>이 있다. 또한 기초가 단단한 억압이 역학적이고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은 그 억압이 기쁜 것에 한할 때이다. 
 
그러므로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용성과 기분좋은 지위를 역전하기를 제안하고 필요성에 대한 기분좋은 주권을 주장한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참된 유사치료는 억압된 여러 개념을 해방하는 데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 억압에 대한 의식적 억압을, 즉 자기교정에의 부단의 의지로 대치하는 것에 귀착한다. 
 
이 전환은 객관적•이성적 오류를 수정할 때에 매우 명료한 것이 된다.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을 받기 전에는 하나의 과학적 오류는 어떠한 환원에도 저항하고 예를 들면 실재론적 철학에 따라, 실체론적 방식에 입각하여 현상의 고유성을 어디까지나 해명하고자 한다.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을 받은 후에는 오류는 있는 그대로 승인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안이한 논쟁의 대상으로서 머무를 것이다. <객관적> 오류를 고백한다면 얼마나 심오한 기쁨을 느낄 것인가? 잘못을 저지른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정신적 통찰력에 대해서 가장 멋진 경의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교양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 되고 그것을 집중된 빛으로 비추는 것이다. 그것은 또 그것을 객관화하고 공언하고 가르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때에 순수한 정신적 기쁨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객관적 인식이 <주관적인 것의> 객관적 인식이 되고, 우리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보편적인 인간성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에 관한 연구가 공정하게 정신분석된 후에, 우리가 윤리의 여러 규칙을 심리학적 여러 법칙에 통합할 때에, 이 기쁨은 훨씬 더 강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 갑자기 우리를 비추는 것이다. 우연의 정열은 의지적인 정열이 된다. 사랑은 혈연의 연결이 된다. 불은 가족적 즐거움의 중심이 된다. 이 규칙화, 이 사회화, 이 이성화는 이따금 이 새로운 말의 무게에 의해서 정열의 냉각을 나타낸다고 생각되어진다. 
 
그것들은 원시적 본능에 의해서 아직 열기를 띠고 있는 혼란된 자발적인 사랑의 신봉자들에게서 당장에 조소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지성화하는 것에 있어서는 순화만이 이상한 달콤함이 있고 순수성의 의식은 한 가닥의 이상한 빛을 아낌없이 퍼붓는다. 
 
순화만이 하나의 깊은 사랑의 성실성을 파괴함이 없이 변증법화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능하게 한다. <순화된 사랑>만이 애정을 깊게 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그것들을 <개별화하고> 독창형에서 성격으로 옮겨가는 것을 가능케 한다. 노발리스는 말한다(原註2). [잘 알지 못하는 여성은 미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지의 것을 바라는 것 이외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길한 것이다.] 다른 어떤 것에 있어서보다도 사랑의 정열에 있어서는 정절에의 교구가 모험에의 욕구를 억압한다. 
 
그런데 우리는 명백하게 체계적인 억압 속에 그 기쁨을 찾는 변증법적 승화작용의 이 명제를 여기에 길게 전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일반적 관념을 지적함으로써 족하다. 
 
우리는 이 작은 책에서 우리가 연구코자 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더듬는 기회에 작품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게다가 이 특수한 연구가 그처럼 쉽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불의 인식의 바로 <심리적 구조>의 참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의 책은 그때에 대상에 의해서 야기된 정신생활에 대한 그 명상의 기본적인 영향을 나타내기 위해서 시도된 주관과 대상의 사이를 매개하는 일련의 연구 전체의 견본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만일 불의 심리학적 문제가 그렇게도 간단하게 변증법적 승화의 해석에 적합하다면, 우리가 이미 여러 번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불의 여러 특성이 많은 모순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승화작용의 두 개의 중심의 동질적인 점에 대해서 그 가능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두 개가 다 불로 돌려져 있는 순수성과 비순수성의 변증법을 연구하자. 
 
만일 우리가 性化된 불에 대해서 말한 것을 상기하기만 한다면 불이 때로는 악과 죄악의 표지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성적 충동에 대한 모든 투쟁은 따라서 불에 대한 투쟁으로 상징될 것이다. 
 
顯在的이건 또는 함축적이건 불의 악마적 성격이 얼굴을 내미는 텍스트를 내세우는 것은 간단한 일일 것이다. 지옥에 대한 문학적 묘사나 또는 화염의 혀를 가진 악마를 표상하고 있는 판화와 그림은 지극히 명료한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하나의 극단으로 옮겨 불이 어떻게 해서 순수성의 상징이 되었는가를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현상적인 여러 특성에까지 하강해야 한다. 
 
결국 이 일은 우리가 모든 관념을 객관적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는 이 책 속에서 선택된 방법에 대한 대상이다. 우리는 여기서는 불에 의한 순화의 신학적 문제를 내세워 제기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매우 오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 문제의 핵은 비유와 실재와의 <접촉>에 있다는 것만을 지적해 두자. 최후의 심판에서 세계를 불태우는 불꽃, 지옥에서 타는 불, 그것은 대지의 불과 같은 것이 아닐까? 같거나 다르거나 그 원소의 수는 매우 많다. 왜냐하면 지옥의 불이 우리의 불과 같은 성질의 물질적인 불이라는 것이 신앙의 조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다양성은 불의 근원적인 영상을 둘러싼 비유의 찬란한 대화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형제인 불>을 숭배하는 신학적 이성이 짜내는 이 찬란한 꽃들은 어느 것이나 인내심이 강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적 내지 논리적 영상의 <객관적>인 근거를 규정하는 것을 우리의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불이 <일체를 정화>한다고 주장하는 원리의 <감각적 토대>를 탐구하는 데 한정시켜야만 한다. 
 
불의 가치부여작용의 가장 중요한 근거의 하나는 아마도 그 <방취력>일 것이다. 하여튼 이것은 정화작용의 가장 직접적인 근거의 하나이다. 냄새는 가장 위선적이고 긴요한 현존에 의해서 자기를 부여하는 원시적이고 오만한 물질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내부로 침투한다. 
 
<불은 모든 것을 정화>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구토를 일으키는 냄새를 제거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기분좋은 것이 <유용성을 능가>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프레이저의 해석을 따를 수가 없다. 
 
그는 불에 데운 음식물은 어느 부족의 사나이들에게 보다 많은 힘을 주고, 즉 요리를 위한 불의 비밀을 손에 넣은 그 부족은 음식물을 더 잘 소화하게 되고, 따라서 더욱 강해지고, 자기들의 지배를 인접의 부족들에게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보다 순조롭게 소화되고 동화하는 데서 기인한다. 이 실재적이며 물질화된 힘 이전에 더 좋은 존재의 내부의 행복의 의식에 의해서 의식적 즐거움을 낳게 되는 상상된 힘이 놓여야 한다. 불에 놓은 고기는 무엇보다도 먼저 부패의 극복을 상징한다. 
 
그것은 발효음료와 더불어 향연의 원리, 다시 말하면 원시사회의 원리이다. 불은 그 방취작용에 의해서 가장 신비롭고 가장 비규정적인, 따라서 가장 충격적인 하나의 가치를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체의 힘>이라는 관념의 현상학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감각적인 가치인 것이다. 원시성의 심리학은 취각의 심리작용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불에 의한 순화원리의 제 2의 근거, 즉 훨씬 더 박식한 근거이지만 따라서 심리학적으로 별로 유효하지 않는 이 근거는 불이 물질을 분리하고 물질적 불순성을 소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의 심판을 견디어내는 것이 동질성을, 따라서 순수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광석의 제련과 鍛鍊은 일체가 같은 가치부여로 향하려는 일련의 비유를 제공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련과 단련은 여전히 예외적인 경험, 과학적 경험에 머문다. 그리고 이 경험은 희소현상에 정통하고 있는 독서에 열중하는 사람의 몽상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만 언제나 원초의 영상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몽상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물론 끝으로 이 융화하는 불 속에, 밭을 정화하는 불, 들의 불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 정화는 깊은 심원처럼 정당하게 인정된다. 이 불은 잡초를 태울 뿐아니라 대지를 비옥하게 한다. 
 
우리 농민들의 혼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비르길리우스의 《경작지》의 의견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따금 황야에 불을 지르고, 가벼운 짚을 타오르는 불꽃에 던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불은 대지에 비밀의 효력과 더 자양이 풍부한 액체를 보내며, 대지를 정화하고, 그 과잉의 습질을 마르게 하고, 새로운 식물의 뿌리에 수액을 주는 지하의 氣孔과 수로를 열거나 땅을 굳고 하고, 너무 벌어진 수로를 막고 엄청난 비와 태양이 타는 듯한 광선과 얼어붙는 듯한 보레 ; 北風(原註3)의 엄청난 탄식의 그 입구를 막기 때문이다.] 
 
언제나 모순되어 있는 수많은 설명은 질문할 수 없는 하나의 원초적인 가치를 되찾고 있다. 그러나 그 가치부여작용은 여기서는 애매모호한 것이다. 그것은 악의 억압과 선의 산출의 사상을 재통일하고 있다. 그것은 객관적 순화의 정밀한 변증법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데 아주 적합한 것이다. 
 
다음으로 불이 순수하다고 하는 영역을 고찰해 보자. 이 영역은 색채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진동을 대신하는 극한의, 즉 불꽃의 첨단에 있는 것 같다. 그때 불은 비물질화되고 비실재화되며, 정신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불이 관념의 순화를 늦추는 것은, 불이 재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재는 이따금 바로 배설물처럼 생각되어진다. 이리하여 피에르 파브르는 인류의 초기시대에 있어서(原註4), 
 
연금술은 <그 자연의 불의 힘 때문에 매우 강력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현재 잇는 것보다도 훨씬 오래 지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자연의 불은 자신을 내던질 수 없고 자신을 무수한 객체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매우 방대한 양의 배설물에 사로잡힘으로써 매우 약해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여기에서 불을 쇄신하고 순수한 불인, 근원의 불로 복귀할 필요성을 느낀다. 
 
작가들은 힘을 다해서 그 부의 불순성을 감지하고 불의 찌꺼기를 내놓으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생각한다. <혈액의 정상적인 불>은 하나의 커다란 순수성이며 혈액 속에는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이 생생한 불이 체류한다. 그리고 불은 일상 부패하는 최후의 것이다. 
 
불이 부패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후 얼마 지나 비로소 그러한 것이다.>(原註5)라고 말한다. 그러나 열은 혈액의 불에 있어서 불순함의 낙인이 된다. 그것은 불순한 유황의 특성이다. 
 
그래서 열이 <호흡기관을, 그것도 주로 혀와 입술을 검게 태워버리는 것에>에 대해 놀랄 필요는 없다(原註6). 여기에서 하나의 소박한 비유가 정신에 대해서 갖는 강한 설득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대 이 비유는 불이 비유와 같은 하나의 본질적인 주제에 대해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작가는 순수한 불과 불순한 불의 구별이 여지없이 명중한 것처럼 언급하면서 열에 관한 자기의 이론을 차차로 이끌어낸다. [자연 속에는 두 종류의 불이 있다. 하나는 매우 순수한 유황으로 되어 있으며, 酒精의 그것과 번개의 그것처럼, 흙과 같은 모든 거친 부분에서도 분리되어 있다. 
 
또 하나는 흙과 소금으로 혼합되었기 때문에 거칠고 불순한 유황으로 되어 있다. 나무와 역청질의 물질로 만들어진 불처럼 그러하다. 그것이 타오르는 난로는 우리에게 이 차이를 명확히 밝혀준 것 같다. 
 
왜냐하면 먼젓번 불은 그 속에서 불이 떨어뜨린 어떠한 눈에 보이는 물질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연소해 버리는 데 비해, 나중 불은 연소됨에 따라 수많은 열을 내고 연통 속에 대량의 그을음과 불필요한 흙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 비속한 관찰을 하면 우리의 의사는 <불순한 불>에 의해 지배되는 열의 어떤 혈액의 불순성을 기술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다른 의사는 말한다. <혀를 건조상태와 그을음으로 충만시키는 것은 타오르는 불이며> 그것이 열을 유해하게 만든다. 
 
불의 순수성과 불순성의 현상학이 가장 요소적인 현상형태에서 구축되고 있는 것을 거기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로서 이러한 형태를 몇 개 든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벌써 전에 독자의 인내심을 극한에까지 밀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성급함은 그 자신에 있어서 하나의 표시이다. 즉, 우리는 가치의 영역이 하나의 폐쇄된 영역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최초의 경험적인 의미를 마음에 두지 않고 가치판단을 하고 싶다. 
 
그러나 많은 가치는 다만 객관적 경험의 특권적 지위를 영속시킬 뿐이며, 그 결과 사실과 가치의 품기 어려운 혼란이 생기는 것은 명확한 것 같다.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이 가려내야 할 것은 바로 이 혼동이다. 상상력이 비이성적인 물질주의적 요소를 <침전>시켰을 때 그것은 새로운 과학적 실험의 구축을 향해서 더 자유롭게 되어갈 것이다. 
 
그런데 불의 참된 이념화는 불과 빛의 현상학적 변증법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변증법적 승화에서 찾는 모든 감각적인 변증법과 마찬가지로 빛에 의한 이념화는 현상적 모순을 기초로 한다. 이따금 불은 끊임없이 빛날 때가 있다. 
 
그때의 그 가치는 순수 그 자체이다. 릴케에 있어서 <사랑받는다는 것은 불꽃 속에서 타버리는 것을 뜻한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불명의 빛에 의해서 빛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랑한다는 것은 회의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이며, 마음의 명증 속에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에서 빛으로의 이 이념화는 우리가 그 원리를 현상으로 가능한 한 접근해서 파악하려고 할 때 바로 노발리스의 초월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노발리스는 <빛은 火性현상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다. 빛은 하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순수성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빛이 해야 할 것도 나눌 것도, 결합할 것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그곳을 빛은 지나간다. 
 
나누어지지도 않고 결합되어지지도 않는 것이야말로 단순하고 순수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한한 공간 속에서 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눈을 기다리며 그것은 영혼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신적 영감의 기초인 것이다. 
 
노발리스가 내부의 불에서 하늘의 불로 옮겨가는 것을 기술할 때 아마 아무도 그만큼 자연현상으로부터 많은 착상을 끄집어낸 자는 없었을 것이다. 지상의 사랑의 최초의 불꽃에 의해서 살아온 자들은 순수한 빛의 선양 속에서 시든다. 
 
자기 순화의 이와 같은 방법은 가스통 데리크Gaston Derycke에 의해서 낭만적 경험(原註7)이라는 그의 논문 속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노발리스를 인용한다. [분명히 나는 이 생활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 강력한 修正策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은 변용하여 불꽃이 된다. 그러면 그 불꽃은 차차로 내 속의 지상적인 것을 다 태워버린다.] 
 
우리가 그 깊이를 충분히 검토한 노발리스의 칼로리즘calorisme은 승화되어 빛나는 환상이 된다. 그것은 그의 경우 일종의 질료적 필연이었다. 사람들은 이 일류미니즘(illuminisme-天啓論) 이외에 노발리스의 사랑에 있어서 가능한 한 다른 어떤 이념화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스베에덴보리의 그것과 같이, 보다 잘 통합된 일류미니즘을 고찰하고 이 생활의 배후의 원시의 빛 속에서 보다 신중한 지상적 생활을 되찾는 일이 가능한가 어떠한가를 자문한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스베에덴보리의 불은 재를 남길 것인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책 속에서 제시해 온 모든 정립의 상호적 명제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우리로서는 이러한 문제가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를 매혹하는 여러 가지 영상의 객관적 연구와 몽상의 심리학 연구를 합친다는 것은 흥미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原 註> 
1. 막스 셀러의 《공감의 자연과 형성》 
2. 노발리서의 《내적 일기》 
3. 비르질르의 《지리책》 
4. 피에르 장 파브르의 前揭書 
5. 드 말롱의 《인간혈액의 관찰》 
6. 드 페장송의 《열에 관한 새로운 논설》 
7. 《남극기행》 1937년 5월호 
 
結論 
 
만일 지금의 이 일이 몽상의 물리학 또는 몽상의 화학의 기초로서 몽상의 개관적 여러 가지 조건을 규정하는 방법에 관한 개요로서 유의되어졌다면, 그것은 용어의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개관적 문학비평에 대해서 새로운 방법을 제공할 것이다. 
 
그것은 비유란 로케트처럼 공중에서 폭발하고 그 무의식을 내놓기 위해서 나는 단순한 관념화가 아니고, 반대로 비유란 시적인 정신이 순수하고, 또 단순히 비유의 수사법이 되어버릴 정도로 서로 부르고, 여러 감각보다 훨씬 정연하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이때 시인들은 바로 하나의 꽃의 花式圖가 그 꽃의 작용의 의미와 대칭성을 결정하듯 그의 비유적인 정연의 의미와는 대칭성을 가르치는 하나의 도표를 낳게 될 것이다. 이 기하학적인 합목적성을 갖지 않은 <실재의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적 영상의 일정한 종합 없이는 시적인 개화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명제 속에 시적 자유를 제한하고, 시인의 참조에 대해서 하나의 논리를, 또는 같은 말이지만 하나의 실재를 강요하는 의지를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시적 작품의 실재론과 내재적 논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갑작스러운 충격 후의 표출이다. 이따금 우리가 절대적이고, 부조화하며 분해적이라고 생각해 온 어떤 진실된 성질의 영상이 동반되어 하나의 멋진 영상으로 용해될 때가 있다. 
 
쉬르레알리즘Surrealisme의 말할 수 없이 기묘한 모자이크는 갑자기 의미의 연속성을 밝힌다. 번쩍이는 미약한 빛이 하나의 깊은 빛을 내놓는다. 아이러니에 넘치는 번쩍이는 눈초리가 갑자기 흐르는 듯한 온화함을 지닌다. 고백의 불에 대한 눈물이다. 상상력의 결정적인 작용이라는 한 마리의 괴물에게서 새끼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詩的 花式圖>는 단순한 意匠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를 실재론에서 해방할 수가 있고 우리에게 꿈꾸기를 허용하는 시도나 애매성을 통합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있는 과제가 그 모든 곤란과 가치를 인수하는 것은 이 점에 있어서이다. 우리는 통일성의 의미에서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다는 것은 어떠한 시의 특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더 잘 만들 수 없고, 바로 정립된 다양성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변증법을, 잠들고 잇는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음향으로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망 쁘띠장은 매우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고의 변증법의 동요는 영상을 동반하건 동반하지 않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상상력을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여튼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특히 비유와 비유에 대한 비유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반사적 표현의 비약을 깨뜨리고 친근한 영상을 정신분석해야만 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왜 쁘띠장이 상상력은 정신분석을 포함해서 심리학의 여러 규정으로부터 탈피해서 토착적이고, 자기발생적인 영역을 구축한다고 기술했는가에 대해서 이해될 것이다. 우리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 상상력은 의지나 생명의 비약보다도 더 심적 생산의 참된 원천이다. 심적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몽상에 의해서 창조되어 잇는 것이다. 
 
우리의 몽상에 의해서 우리가 창조되고 한정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의 궁극의 한계를 그려내는 것이 바로 몽상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불꽃처럼 정신의 정점에서 작용하며 우리가 그 변이의 에네르기의 비밀을 구해야만 하는 것은 비유의 비유에 대한 영역과, 즉 꿈을 뜨리스탄 짜라가 본 것처럼 경험에 새로운 형식을 주고, 그리고 그때의 몽상이 미리 변형된 형식을 변형하는 다다이스트의 영역에서처럼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심없이 스스로의 무정부성에 의해서 현혹되어 있지만, 그러나 타인을 유혹하는 일에 익숙해진 시원적 추진력이 분열하는 곳에 자신을 놓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가장 이기적인 기쁨 속에는 利他性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적 花式圖는 구조의 통일성이라는 소박하고 이기적인 이념과 절연하고, 여러 가지 <힘의 비구조화>를 야기시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생명의 문제이다. 과거를 잊지 않고서 어떻게 미래를 손에 넣을 수 있겠는가? 냉철하게 돌변함이 없이 어떻게 정열의 빛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만일 영상이 자신을 <비구성화하는> 비유만을 통해서 심리적으로 활동적인 것이 된다고 한다면 만일 그것이 가장 정성들인 변형에 의해서만, 즉 비유의 비유라는 영역에 있어서만 진실로 새로운 심리작용을 만든다고 한다면, 그때의 불의 영상의 장대한 시적 생산을 이해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영상의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서 불이 가장 <변증법화>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다만 그것만이 <주관>이며 <객관>인 것이다. 애니미즘의 밑으로 내려갈 때, 사람은 언제나 칼로리즘을 발견한다. 내가 살아 있다고, 직접적으로 생존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내가 뜨겁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열은 물체의 풍부함과 영속성의 초고의 표지이다. 
 
그것만이 생명의 강함, 존재의 강렬함에 직접적 의미를 부여한다. 내적인 불의 강도에 비하면 우리가 지각하는 다른 강도는 느리고, 타성적이고, 정기적이고, 숙명이 없다. 그것은 구체적인 성장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약속을 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꽃 속과 초월을 상징하는 빛 속에서는 활동적이 될 때가 없다. 
 
우리가 상세히 보아온 것처럼 내적인 불은 주체와 객체의 이 근원적인 변증법의 복사인 것처럼, 그 모든 특성에 있어서도 변증법적이 된다. 그것은 비상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모순되기 위해서는 타오르기만 하면 된다. 
 
어느 감정이 불의 색조에까지 오르기가 무섭게, 그것이 자신의 폭력에 의해서, 불의 형이상학에 몸을 맡기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그것이 대립물의 총체를 짊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이때 연인들은 순수한 동시에 격정적이고, 유일한 자인 동시에 보편적이고, 극적인 동시에 충실하고, 순간적인 동시에 영원적이 것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유혹 앞에서 비엘레그리펭의 빠시페는 증얼거린다. 
 
뜨거운 입김이 나를 불태우고, 
거대한 전율이 나를 차갑게 한다. 
 
이러한 변증법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불타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그대로 냉철하게 되는 것이며, 연연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다. 끝없이 격렬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활동적인 인간의 신랄한 법칙은 그와 같은 것이다. 
 
이 애매모호함만이 정열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콤플렉스>는 결국 비통한 콤플렉스이며 신경증이 되는 동시에 시가 되는 콤플렉스, 즉 거꾸로 뒤집을 수 있는 콤플렉스인 것이다. 사람은 불의 활동 속에서나, 그 표지 속에서나, 불꽃 속에서나, 잿속에서 천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너의 눈에 비추이는 숲속에서 
불이 타고 그것이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재의 천국을 보아라. 
--폴 엘뤼아르 
 
불을 손에 넣든가, 자기를 불에 맡기든가, 꺼내버리든가, 그 속에 사라지든가 아니면, 프로케테우스 콤플렉스나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에 따르거나, 모든 가치를 변경하고 모든 가치의 부조화를 나타내기도 하는 심리학적 교환은 이와 같은 것이다. 
 
불은 칼 융의 극히 적절한 의미에 있어서 <풍부한 고풍의 콤플렉스>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하는 것을, 그리고 몽상에 대해서 참된 자유와 창조적 심리작용으로서의 참된 기능을 주는 생생한 변증법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특수한 정신분석은 그 비통한 애매모호성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찌 이 이상 더 잘 증명할 수 있는 것인가? 
 
1937년 12월 11일 
 
가스똥 바슐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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