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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에 되돌아보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학/ 김은중
2018년 10월 27일 18시 17분  조회:1591  추천:0  작성자: 강려

새 천년에 되돌아보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학

 

김 은 중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 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옥타비오 파스

 

 

I. 시인의 편력―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0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그의 역사적 실존 속에서 파스는 무엇보다 시인이기를 원했다. 끊임없는 편력을 통하여 수많은 주제에 대해 글을 썼고, 전체를 바라보는 형안과 자기 성찰을 통하여 역사의 한복판에서 지식인의 임무를 치열하게 수행했지만, 그는 언제나 시인이기를 원했다. 일관되게 시인이기를 바랐던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새로운 천년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희망과 부정하기 어려운 위기가 복합되어 있는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해 이제 직접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나 그가 지나왔던 사유의 행로를 더듬어가며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몇 가지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적이고 문학적인 편력에 있어서 옥타비오 파스는 ‘보편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많지 않은 시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80년대에 들어와 스페인어 문학권의 노벨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르반테스상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하고 9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경력, 그리고 멕시코의 뿌리에서 자라나 중남미의 줄기로 성장하고 세계적인 꽃을 피운 그의 문학적 편력을 살펴보면 이러한 단정은 수긍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시인에 대한 진정한 인정은 상을 수여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행사가 아니며 “소수의 좋은 독자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는 데 그는 자신의 시를 “거대한 소수의 독자에게” 바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하는 ‘보편성’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구호가 되었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말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탈근대적인 상황에서 파스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가 프랑스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재직하면서 썼던 책 『고독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의 결론 부분에서 읽을 수 있는 그의 직관적이고 과감한 선언이다. 그의 선언은 “오늘날 중남미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全) 인류와 동시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1) 전 인류와 동시대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자생적인 문화의 뿌리를 갖는 모든 민족주의는, 만일 그것이 편협한 우상화가 아니라면, 최종적으로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탐구의 대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제 한 문화적 집단이나 한 국가가 당면한 위기와 기회는 인류 전체의 위기이며 기회라는 의미다. 사라져버린 유위(有爲)의 폐허 앞에서 발레리나 엘리엇이 노래했던 문명에 대한 우울한 반성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내일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특정한 제국이나 문명이 아니라 인류 전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제 모든 문화 유형론은 보편 인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파스의 보편성에 있어서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서구의 어떤 시인보다도 동양적 세계관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The Meeting of East and West)이라는 책에서 노드롭(F. S. C. Northrop)은 현대 세계의 중요한 네 가지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 동양과 서양의 관계 증진이며, 둘째, 미국 문화와 중남미 문화의 동시적 등장이고, 셋째,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산주의적 가치의 동등한 옹호이며, 마지막으로 중세적 가치와 근대적의 가치 사이의 진정한 화해를 들고 있다. 그 중에서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진실성과 성실함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금세기에 들어와 동양적 세계관이 서구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수없이 많으며 동양과 서양의 화해적 만남은 일반적인 조류가 되고 있다.2)

1952년에 인도와 일본을 처음 방문하여 거의 일 년간 머물렀던 파스는 1962년에는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부임하여 약 6년 동안 그 곳에 살았다. 이 기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으며 개인적으로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코르시카 섬 출신의 마리-조 트라미니(Marie-Joe Trimini)를 만나 ‘님’(Nim) 나무 아래서 결혼한 일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파스는 인도가 자신에게 다른 문명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고, 무엇보다도 침묵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회상한다. 예일대학의 교수였던 마누엘 두란(Manuel Durán)이 말한 것처럼 언젠가 파스에 대한 훌륭한 전기가 쓰여진다면 그의 삶과 문학에 있어서 6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로 강조될 것이다.3) 슈펭글러가 지적한 것처럼 다른 문화에 대한 해석이 “정교한 오해의 기술”이라는 한계를 가질지라도4), 동양적 세계관에 대한 파스의 해석학적 접근 방법은 결코 이국적 취향에서 비롯된 얄팍하고 현혹적인 비전에 그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점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불교에서 우리의 전통과 다른 말을 찾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확인하려는 것이다. 서양은 그들 스스로 그리고 자신들의 지적이고 기술적인 방법으로 동양이 이미 이천 년 전에 발견한 것과 유사한 증거를 이제 막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새로운 행위는 동양적 교의에 대한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서구 역사의 편력의 결과이다. 어떤 진리도 배워지는 것이 아니며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대의 세 명의 사상가―비트겐쉬타인,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의 책에서 불교의 사상과 비교하여 그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사유는 동양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적이 없으며 그들 서로간에도 상이한 경향성을 보여주며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언어에 대한 것이었으며 모두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 결론은 모든 말은 침묵으로 용해된다는 것이다.5)

 

헨리 제임스나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보르헤스의 비평이 서구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주의 깊게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레비스트로스나 탄트리즘에 대한 파스의 언급도 전문가들 사이에 흥미 있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의 지적 명철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실례이다. 어떤 진리도 개념적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자신의 몸으로 터득해야 한다는 파스의 말은 문화적 상대성을 통한 진리로의 접근을 의미한다. 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원칙이 명철한 사고와 계몽적 지성임을 보여주는 언급이다. 많은 평자들이 파스의 글을 로고스중심주의로 해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파스의 계몽적 지성에 대한 옹호는 로고스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섣부른 신비주의나 무질서로의 퇴행을 비판하는 작업의 일환일 뿐이다. 이성의 편협성을 견제하는 힘은 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신비가 아니라 이성을 사용하는 인간의 성숙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스의 관점은 근대적 이성의 명철함과 계몽성에 대한 옹호와 더불어 그가 줄곧 개체적 성찰을 이야기하는 글 속에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두 개의 축은 명철한 비판과 개체적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II.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근대시

 

II-1. 비판 위에 세워진 근대성

 

파스의 글이 겨냥하는 곳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경험의 애매한 부분이다. 그러한 애매한 부분에 대한 누락이나 신비화로 인해서 인간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오류를 저질러왔다. 그리고 그가 인정하는 그의 문학의 뿌리는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의 역사적 배경은 근대성이므로 결국 그의 인식의 뿌리는 근대적 인간의 조명에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낭만주의는 문학 운동이었으며 동시에 도덕이고 에로티시즘이고 정치였다. 근대를 성립시킨 것은 종교에 대한 비판이었으므로 낭만주의가 표방하는 것이 종교는 아니었지만 단순한 미학이나 철학을 넘어서서 사유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투쟁하며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방법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민중들에 의하여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헤겔은 몇몇의 친구들과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 헤겔이 이해한 불란서 혁명은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신대륙 발견과 과학 혁명,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과 계몽사상 등의 근대성을 상징하는 사건들의 마지막 국면으로 비로소 인간 역사의 보편론적 인식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간 역사의 보편적 인식이란 바로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가? 인간은 군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 군주에게 신권을 부여한 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인들은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한 근대의 자유의 개념은 전근대적 종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는 전체와의 교감이라는 부분을 희생시킨 값비싼 대가였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낭만주의는 근대성의 소산이면서 근대성에 반기를 들어야 했다.

 

근대성과 더불어 탄생했으면서도 (근대성에) 반항하는 낭만주의는 (근대의) 비판적 이성을 비판하며 역사의 직선적 시간을 반대하고 역사 이전의 근원적 시간을 옹호하였으며, 유토피아가 내세우는 미래 시간을 비판하고 열정, 사랑 그리고 혈기의 현재적 시간을 지지하였다. 낭만주의는 비판적이며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이성으로 인식되었던 근대성에 대한 중대한 부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적 부정, 즉 근대성의 영역 안에서의 부정이었다. 오직 비판의 시대만이 그런 식의 부정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6)

 

파스는 근대성을 성립시킨 가장 핵심적 요소는 비판(crítica)이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역시 이러한 근대의 비판 개념을 무시하고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판은 주체로서의 인간을 역사의 중심에 등장시킨 것이며 비판을 통하여 인류는 비로소 근대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낭만주의가 가졌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운명을 인지하지 못한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역설적 출생증명이었다. 모르고 저지른 일에 대한 참회와 뉘우침이 아니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이 낭만주의의 운명이었다. 근대를 탄생시킨 비판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판 역시 또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인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파스의 생각이다.

 

 

II-2. 사유의 이가적(二價的) 대비극: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그렇다면 근대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는 낭만주의가 이해하는 근대적 인간 이해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근대적 자유의 획득의 대가로 상실한 전체와의 교감이란 무엇인가?

 

낭만주의는 거듭해서 근대성에 거역하기 위해서만 근대성과 동거하며 근대성에 융합한다. 그러한 거역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지만 언제나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그 두 가지 방법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이다. 내가 이해하는 아날로지란 우주를 상응의 체계로 보는 비전이며 또한 언어를 우주의 복제(doble)로 보는 비전이다. 이것은 대단히 오래된 전통으로, 문예 부흥기의 신플라톤학파에 의하여 재정비되어 16~17세기의 다양한 비의적(秘義的) 흐름에 전달되었고 18세기의 철학적이고 방탕한 분파들에 자양분을 공급한 다음 낭만주의자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에게로 이어졌다. 비록 지하에 숨어 있기는 했지만 아날로지는 초기 낭만주의 시인들에서부터 예이츠와 릴케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근대시의 주된 전통이었다. 우주적 상응의 비전과 동시에 아이러니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아날로지에 대해 적의를 품은 쌍둥이 자매이다. 아이러니는 아날로지로 엮어진 그물에 생긴 구멍이며 상응을 저지하는 예외이다. 만일 아날로지가 이것과 저것,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활짝 펼쳐진 부챗살이라면, 아이러니는 이러한 상응의 부챗살을 찢어 놓는다. 아이러니는 상응이 빚어내는 화음을 깨고 소음으로 만드는 불협화음이다. 아이러니는 예외, 불규칙함 혹은 보들레르가 말했던 것처럼 기이함(lo bizarro) 등의 여러 가지의 이름을 갖는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의 이름은 죽음―중대한 우연―이다.7)

 

파스가 파악하는 근대시는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의 이중의 원리에 의하여 규율되고 있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비판적 명철한 비판과 개체의 성찰이라는 두 개의 축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의 원리가 동양의 음양의 원리를 상기시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56년에 발표한 자신의 시론집 『활과 리라』(El arco y la lira)에서 파스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들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이다. 모든 문화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창조로 표현되기에 앞서서 리듬으로 나타나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러한 태도는 중국인들에게는 음과 양이다. 아스테카인들에게는 사박자 리듬이며 히브리인들에게는 이원적(dual) 리듬이다. 그리스인들은 우주를 대립물들의 투쟁과 결합으로 파악했다. 서구의 근대 문명은 삼박자 리듬으로 충만되어 있다”라고 말한다.8)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중심으로 언어와 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혹은 이솝의 새로운 향연』(Claude 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과 서구 기독교 문명, 인도 문명 그리고 중국 문명에 대한 비교 문명론을 논하고 있는 『결합과 해체』(Conjunciones y disyunciones)에서는 이러한 리듬의 가장 보편적 형태는 이박자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원성, 즉 이가적 사유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며 문명들을 구별짓게 하는 것은 이 기본 짝을 결합하는 방법―삼가적, 사가적, 순환 구조 등―이다.9)

 

서구의 근대성은 삼박자를 역사의 기본 리듬으로 생각했으며 이러한 삼박자의 리듬이 의지하고 있는 시간관은 묵시록적 시간관의 단선이며 직선이다. 근대성을 두 세기 이상 경험한 현시점에서 이러한 시간 개념은 오류이며 근대성의 “3박자 사관의 오류는 리듬 구조의 원초성과 가치 구조의 인위성을 혼동한데 있다.”10) 이러한 3박자 사관이 갖는 인위론적 가치 조작의 토대는 희랍과 히브리의 이박자 사관인데 이것이 음양의 이박자와 다른 것은 그들의 이가적 사유는 상대적(相對的)이고 상극적(相克的) 실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극을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실체로 이해할 때 이러한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제3의 실체가 따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체론적 이가와 인위적 삼가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서양은 존재와 비존재(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을 그었다.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태초의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낸 최초의 구분이 서양적 사유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개념 위에 ‘확실하고 분명한 관념들’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서양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 이러한 관념의 건축물은 그런 원리를 통하지 않고 존재를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를 불법적인 것으로 처단했다. (...) 서양의 형이상학이 마침내 유아론(唯我論)에 닻을 내리고 만 사실을 이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유아론을 깨기 위해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그의 시도가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견고한 변증법의 유리성은 결국 거울의 미궁임이 드러났다. 훗설은 문제를 새롭게 설정하고 “사물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훗설의 관념론 역시 유아론으로 끝났다. (...) 서양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즉 이중적 의미의 탈선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즉, 인간은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말았다. 서양은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11)

 

근대성의 실체론적 이가와 인위적 삼가에 대해서 낭만주의는 생성론적 이가를 옹호했다. 파스에 의하면 서구가 새로이 시작하는 방법은 바로 생성적 이가에 대한 재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가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를 뜻하며, 생성적이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의 역동적이며 상대적(相待的) 관계를 뜻한다. 아날로지는 총체를 규율하는 원리이며 아이러니는 개체로서의 근대적 인간을 규율하는 원리이다. 이러한 사유의 이가적 대비극은 대비극에 놓이는 개념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대비극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즉, 상대(對)적이고 상극(克)적이냐 아니면 상대(待)적이고 상보(補)적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파스는 이런 생성적이고 역동적인 이가적 원리에 대해서 대단히 일찍 깨달았다. 십자가의 성 요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1942)에서 발표한 「고독의 시와 참여의 시」(Poesía de soledad y poesía de comunión)라는 글에서부터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결합과 해체』에서는 언어의 원리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술어들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립성 혹은 유사성이다. 지나친 대립성은 관계를 형성하는 술어들 중의 하나를 제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지나친 유사성 역시 관계를 망가뜨린다. 그러므로 술어들 사이의 관계는 과장된 유사성이나 과장된 대립성에 의해서 언제나 위협받고 있다. 술어를 구성하는 것 중의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우세하면 양자 사이의 관계에 불균형―억압 혹은 이완―을 초래하게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양자 사이의 완벽한 동등함은 중립 상태를 유발하고 결국은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이상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술어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는 첫째, 양자 사이의 미세한 힘의 불균형을 필요로 하며 둘째, 서로간에 상대적인 자율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가 승화(문화)의 원천이며 자발성(창조)을 가지고 문화를 개간해 가는 가능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한된 상대적 자율성이 곧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술어 사이의 관계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움직임과 정지 사이의 역동성이 문화에 생명력을 부여하며 생명에 형태를 부여한다.12)

 

이러한 이가적 대비극은 근대적 비판과 비판에 의하여 추방당한 종교적 총체성에도 적용된다. 비판은 총체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총체성을 달리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아이러니와 아날로지의 관계가 보여주듯이 비판 속에는 총체성이 들어 있고, 총체라는 개념은 비판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생-존 페르스의 『아나바시스』에서 불란서의 모더니즘을 발견하고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영, 미의 모더니즘을 발견한 (양자의 모더니즘은 중남미의 모데르니스모와 다르며 이와 구분하기 위해서는 전위주의라고 함이 더 적당하다) 파스는 종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던 총체적 비전을 ‘기독교적’ 신의 개념이 탈색된 자연의 신성에서 찾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가치가 기독교적인 사회에서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파스가 인식한 자연은 자연스러움, 즉 “스스로 그러함”이다. “스스로 그러한 실재”, 즉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우리를 받쳐주며 살찌우는 동시에 삼켜버리는 실재란 그것을 담으려는 상징적 체계보다 더 풍요롭고, 더 역동적이며, 더 생생한 무엇이다. “스스로 그러함”이 가지는 풍요롭고 거의 공격성에 가까운 자발성을 인간의 관념적 완고함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의 가장 매혹적인 특성인 자연스러움을 훼손시킨다. 만질 수 없는 스스로 그러한 생생한 실재를 대하는 인간의 본래적인 반응은 놀라움이며, 놀라움은 그러한 실재를 신성화시키고 매혹 혹은 공포의 감정이 인간으로 하여금 실재와의 합일의 상태를 부추기는 것이다. 이러한 예찬의 행위의 뿌리는 사랑이며 사랑이란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고 동시에 자신을 잊고 “타자” 속에 존재를 용해시키고 합일하려는 열망이다. 파스는 22살의 젊은 나이에 쓴 시 「인간의 뿌리」(Raíz del hombre)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모든 목소리들이 불타오르고

입술들이 재가 된다.

가장 높은 꽃봉오리에

밤이 멈추어 있다.

 

이제 아무도 너의 이름을 모른다.

비밀스러운 너의 기운이

부동의 바다 같은

정지된 밤과

별을 찬란하게 성숙시킨다.

 

사랑하는 이여, 모든 것은 입을 다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이글거리는 목소리 앞에.

사랑하는 이여, 모든 것은 고요하다. 이름도 없이,

말을 벗어버린 밤 속의 그대여.13)

 

 

파스가 노래하는 사랑에는 개체적 존속을 부추기는 본능(Eros)과 죽음의 본능(Tanatos), 즉 영혼의 중력이 이끄는 상실의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모순적 인간을 구성하는 양면이며 이것 역시 아이러니와 아날로지의 이가적 사유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II-3. 인간의 본성과 글의 본성

 

예술과 문학, 정치와 사회 그리고 기타의 주제들에 대해 쓰여진 30여권이 넘는 파스의 평론집들과 수많은 시작품들은 상반된 영역을 관통하여 서로의 힘을 견제하는 거대한 자력장(磁力場)을 형성한다. 그 자력장의 한 극은 명철한 근대적 비판에 의해서 형성되는 기호들의 단절적 형상이며 다른 한 극은 망아적(忘我的) 참여이다. 이 말을 쉽게 하자면 한 극은 비평이요, 다른 한 극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시의 뿌리를 낭만주의에 두고 있는 파스가 파악하고 있는 근대시는 언어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언어에 대한 비판은 곧 바로 현실에 대한 가장 과격하고 통렬한 형태의 비판이 된다. 근대시는 시이며 동시에 시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것이다.

1974년에 옥타비오 파스는 『흙의 자식들』(Los hijos del limo)과 『문법적 원숭이』(El mono gramático)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른 두 권의 책을 거의 동시에 출간하였다. 『흙의 자식들』은 스페인어로 출간되기 이전에 영어 번역본이 먼저 나왔고, 『문법적 원숭이』는 불어로 먼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흙의 자식들』은 서구의 시와 정치 그리고 그것이 겨냥하고 있는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문법적 원숭이』는 힌두교 문명의 신성에 대한 글이다. 전자는 비평적 담론이며, 후자는 산문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매우 피상적인 것이며 이 두 책은 깊숙한 상응의 관계에 있다. 양자의 저술을 자극한 근간은 언어와 의사소통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변증법적 투쟁이다. 즉 한쪽 극에는 자의적이지만 연상 관계에 있는 기호들의 불연속적인 표상으로서의 언어가 있고, 또 다른 한 극에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수행하는 의사소통이 있다. 그리고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로부터 글(시)이(가) 탄생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호들이 또 하나의 기호인 인간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의문부호이며 동시에 하나의 기호인 인간이 기호들―언어―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의문부호이다.14)

 

글의 본성에 관한 파스의 위의 언급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기호들의 순환―기호/인간에서 기호들/언어로의 방향 전환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하는―이며 이러한 순환의 중심축으로서의 의문부호(의미한다는 것)이다. 파스가 보는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의 관계의 역사”이다. 기호/인간에서 기호들/언어로, 그리고 다시 기호들/언어에서 기호/인간으로의 순환이 인간의 역사라는 것인데, 여기서 사유는 말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유가 말보다 먼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유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소쉬르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란 자의적이고 서로간에 연상 관계에 있는 기호들의 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언어를 사물의 세계(자연)와 의사소통시키는 것이 인간이라는 기호가 던지는 질문이다. 자연에는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적어도 인간이 자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식의 의미는 없다는 말이다. 파스에게 있어 이러한 글의 본성을 규율하는 원리는 곧 인간의 본성을 규율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프톨로메우스에게 바치는 시 「親交」(Hermandad)에서 파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찰나를 사는 인간이고

밤은 거대하다.

하지만 나는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거기 별들이 글을 쓴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건

나 역시 글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풀어쓴다.15)

 

 

 

II-4. 근대적 자아의 편력

 

플로베르는 “예술가가 만드는 모든 것은 진실하다”고 말했는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혹은 문화적 영웅으로서의 인간에 있었다. 데카르트 이래로 적어도 서구의 전통에 있어서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이성적 자아였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이 역사의 주체로 들어서면서 아날로지적 우주관은 단절되었다. 이러한 단절은 말과 사물 사이에 존재했던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제 말은 사물들의 진정한 실재를 표상하지 않으며 사물들은 투명성을 잃어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중세의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알레고리의 형식은 빛을 잃고 근대 세계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근대 소설의 효시로 꼽는 이유도 말과 사물의 의사불통이 가져온 선택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의 말을 들어보자.

 

사물과 말 사이의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양자 택일이었다. 돈키호테가 미치지 않았다면 세상이 미친 것이며, 돈키호테의 언어가 잠꼬대라면 그는 세상에서 추방되어야만 한다. (...) 근대 세계는 두 번 째의 해결을 택했고 그 결과 돈키호테는 광기에서 회복되어 시골 양반 알론소 키하노의 현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둔다. 세상이 비실재를 표상하는 언어의 전형인 돈키호테를 추방했을 때 우리가 상상력, 시, 신성한 언어, 다른 세상의 목소리로 부르던 것들도 함께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비일관성, 소외, 광기 등의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16)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적 주체의 등장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상응을 단절시킨 것인데, 이러한 단절은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의 상응도 무너뜨렸다. 파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밀도 있게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시와 종교는 같은 샘에서 솟아 나왔으며 그것들의 기능은 인간을 변화시켜 본래면목을 보게 하는 것이다. 파스의 말은 달리 설명하면, 시적 증언은 우리에게 이 세계 안에 있는 다른 세계 즉, 이 세계이면서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감각들은, 그들의 기능을 잃지 않고, 상상력의 조력자가 되어 우리에게 말하여지지 않은 것을 듣게 하고 느낄 수 없는 것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파스는 “인간의 본래적 행위는 시이며 종교들은 시적 언어의 법전화이다. 거의 모든 위대한 종교적 텍스트들―베다, 성경 혹은 코란―에는 본래 말의 계시가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서구의 모든 문학 작품의 위대한 법전이라는 윌리암 블레이크의 언급과 인생의 말년에 『위대한 법전(Great Code)』이라는 책을 쓴 노드롭 프라이의 의도에서도 공감대를 찾을 수 있다. 블레이크가 그랬던 것처럼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도는 종교를, 더 정확하게는 종교적 신성함을 시적인 관점에서 끌어안는 것이다. 시의 관점에서 바라본 신성함의 경험을 파스는 다시 이렇게 설명한다.

 

신성(神聖)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은총이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를 열어제치는 것으로 변화한다.17)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다. 이때 “타자성”이란 유한하며 변화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타자화될 때 비로소 인간은 실현되고 충족된다. 타자화될 때 나와 타자가 분리되기 이전의 본래적 존재를 회복하는 것이다. “본래 일체 중생이 부처였는데 망상에 사로잡혀 그를 잊었으니 딱하다. 내가 방편을 써서 그들로 하여금 본래 부처임을 알게 하리라”는 석가모니의 사자후와 동일한 맥락이다. 그런데 여기서 파스가 강조하는 것은 망상으로 중생됨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태어남의 원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됨의 원초적 조건, 즉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타자화의 욕구는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합일을 향한 열망과 개체적 소유의 욕구, 존속 본능과 상실 본능 사이의 불균형 상태에서 유발되며 이는 창조적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무한성의 신 앞에서 결핍으로 인식되는데 바로 이 결핍이 예술적 창조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멕시코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비평을 겸하고 있는 후안 가르시아 폰세는 이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에 두 개의 기본적인 흐름이 나란히 존재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평행하는 두 개의 흐름 안에서 시인은 작품을 창조하고 자신을 세워 나가며 그것을 운명으로 시인한다. 하나의 흐름은 인간의 삶에서 타락과 은총의 부재를 아는 것인데 이러한 인식은 뿌리 뽑힘의 감정, 세상에서 떨어져 나옴 그리고 본래의 순진함을 상실한데서 오는 소외의 느낌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은, 파스가 이러한 타락의 인식에 맞서는 자세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되는 것인데, 예술적 창조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소외되어 있는 세계를 언어의 힘을 빌어 세계를 재구성하고 재 정렬하여 우리와 화해시키는 것이다. 후자의 흐름은 전자에서 비롯되는데 왜냐하면 타락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파스는 결코 기독교적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어디에도 잃어버린 신앙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지 않고 그러한 신앙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 타락이란 본래 가지고 있었으나 빼앗겨버린 재능이 말소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총은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에서 본래 부재한 것이다. 인간은 혼자이며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조건의 최종적 본질이기 때문이다.18)

 

파스는 종교적 신성(함)을 언어적 창조를 통하여 껴안으려 한다. 파스가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언어의 전능함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최종적 본질을 철저히 수긍하기 때문이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노자 도덕경 1장을 인용할 만큼 실재의 스스로 그러함과 언어의 한계성을 잘 알고 있다. 언어와 생생한 실재(道)의 관계에 대한 파스의 인식은 이중적이다. 한 쪽 극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고 다른 한 쪽 극에는 오로지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실재가 있는 것이다. 고로 언어에 대한 파스의 관심은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말을 낚는 그물은 말로 만들어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파스에게 언어는 초월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나 이 때의 초월은 “이데아적이거나 하늘나라에로의 초월이 아니라 거꾸로 현상에로의 복귀를 뜻한다.”19) 그의 시 「수사학」(Retórica)을 읽어보자.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 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이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20)

 

 

흐르는 물이란 道이며 도는 길이고 길은 어디론가 흐른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하지 않던가(上善若水)! 위의 시가 암시하는 것은 ‘수사학’이란 의미의 투명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말의 쓰임의 상선(上善)이다. 의미의 투명성이란 현상의 총체로서의 도에로 끊임없이 돌아오는(흐르는) 것이며, 현상의 총체란 말이 가지는 본래적 다의성(多意性)이다. 이때 시인은 무엇인가?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말도 괴로워한다. 인간처럼 말도 착취당하고 분규에 휘말리고 거짓과 중상모략에 시달린다. 시인은 괴로워하는 말을 해방시키는 것이며 말에게 본래의 순수와 신뢰와 천진함을 되돌려주는 사람이다. 파스가 「시」(La poesía)라는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인은 “허상의 가면을 벗기고 가장 예민한 부위에 창을 꽂아 분출하게 하는 것”이다.21) 이러한 시인의 작업은 상처 입은 언어에 향유를 발라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료는 역설적으로 일상의 언어를 부수는 과격한 파괴를 뜻하기도 한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뒤집어엎어라,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라(비명을 질러봐, 더러운 년들아),

두들겨 패라,

입에 단물을 마구 들이 부어라,

풍선처럼 부풀려서 터뜨려버려라,

피와 골수를 마셔버려라,

말라비틀어지게 해,

거세해버려라,

짓밟아버려, 멋진 수탉처럼,

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

털을 벗겨버려라,

창자를 꺼내버려, 투우처럼,

숫소처럼, 질질 끌고가라,

가르쳐준대로 해, 시인아,

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22)

 

 

언어에 갖는 파스의 관심은 취향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절되기도 하는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전적으로 참여시키는 동기에 의해 선택하는 결단의 문제이다. 언어에 생긴 상처는 인간에게도 세상에게도 피를 흘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반응은 온전한 인격의 결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 앞에 선 시인의 결단은 무엇인가? 시인의 결단은 죽음 다음에 오는 언어의 부활이다. 그리고 언어의 부활은 생생한 실재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사명과 결단은 말과 생생한 실재 사이의 미세한 불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언어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통하여 총체를 포착하려고 시도하지 않지만 총체의 포착은 언어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주체와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가능해진다.

 

 

III. 탈근대적 근대시

 

파스는 1956년에 그의 시론집이라 할 수 있는 『활과 리라』 초판을 출간하였는데 11년이 지난 1967년에 초판을 개정 증보하여 이판을 출간한다. 초판과 이판 사이에 생긴 중요한 변화는 언어에 대한 파스의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초판에서 파스는 앞서 말한 문화적 영웅으로서의 시인의 창조성을 강조했다. 파스는 시는 자유로운 창조 행위이므로 창조적 마음이 없으면 시도 없고, 시적 창조는 단지 인간의 자유의 실천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자유의 개진이며 선언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구조주의의 영향과 인도에서의 경험이었다.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의 지적을 살펴보자.

 

이제 파스에게 동양은 서구의 동양학 전문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얻은 직관이나 현혹적 비전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이 말은 파스가 이제 더 이상 서양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예전보다 더 서양적이다. 그러나 동양은 이제 서양 사람으로서의 그의 비전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동양 문화를 통해서 그는 서구 세계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23)

 

개정판에서 파스는 시인의 영웅적 역할 대신에 구조주의와 동양적 경험의 영향을 받아 언어의 새로운 역할을 강조한다. “말하는 것과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대화는 순전한 말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마치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척하는 걸 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모두들 언어의 가장 특이한 점을 모르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란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이다”24)는 노발리스의 언급에 파스도 동의한다. 그는 “시는 무엇을 지칭하는가?”(¿Qué nombra la poesía?)라는 글에서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시는 외부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 말의 지시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 이렇게 시의 의미가 시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면 시에 있어서 의미의 문제가 명백해진다. 다시 말해, 시의 의미는 말이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이 지시하는 다른 말이다.”25) 앙드레 브르통에 대한 언급에서는 “진실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즉 영감을 받은 사람은 단지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그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언어이다”라고 말한다.26) 시인은 말을 부리고 조종하는 자가 아니라 말에 봉사하는 자이다. 창조적 행위의 소관은 시인의 손에서 언어로 자리를 옮겨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는 “시는 시인의 희생의 대가로 완수된다”고 말한다. 근대에 들어와 역사의 중심을 차지한 이성적 주체가 이제 언어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후퇴는 전근대적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는가? 또 이것이 시인에게만 국한된 상황이라면 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제 풀에 꺾이고 근대시는 근대성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일 이것이 시인이 언어 앞에 백기를 든 것이 아니라면 이제 시인은 어떻게 세계의 중심에 서서 세계를 움직여나가는 동인(動因)이 될 것인가?

파스가 구조주의와 동양적 세계관에서 새롭게 인식한 것은 침묵과 사변(contemplación)의 개념이다. 근대적 자아의 개념에 근본적인 회전을 가져온 것이 바로 이 침묵의 개념이었다. 근대적 자아 개념에 대해서는 초현실주의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이미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특히 불란서 주재 멕시코 대사관에 말단 외교관으로 머무는 동안 그는 벵자멩 페레(Benjamin Peret)의 작품에서 자아와 세계,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사이의 오래된 대립을 해소하는 방법―초현실주의 시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힌 문제이지만, 그들은 자동 기술법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려고 한 점에서 페레와는 다르다―을 발견한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글에서 파스는 그가 페레의 책에서 발견한 “숭고한 자아”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햇빛에 반사된 폭포수처럼 수많은 영롱한 물방울로 흩어지는 자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임을 발견한다.

 

이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서구의 시는 자아란 허상이며 감각과 사유 그리고 욕망의 덩어리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발견한다.27)

 

파스가 바라보는 인간은 자기 초월의 욕망으로 고통받는 존재이다. 인간의 숙명은 부정과 긍정의 팽팽한 긴장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를 긍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아의 부정은 개체의 소멸이 아니라 개체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존재로서 설정된 자아 개념을 버리고 열린 개체로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우주 속에서 주체와 객체가 교차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파스가 초현실주의를 통하여 배운 것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28) 시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은 손이기도 하다.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29)

 

수동성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완전히 수동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수동성의 상태에는 실상 극도의 능동적 의지가 필요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많은 의지를 필요로 하지만 의지의 절반은 의지를 가라앉히는데 사용해야한다. 시는 계획적이고 의지적인 의식 행위의 산물이며 동시에 잠재 의식 혹은 전의식 혹은 무의식의 과정의 산물이다. 시인의 수동성은 적극적 수동성이며 결단을 통한 수동성이다. 결단을 통해서 자신을 비우고 언어가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장 자리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30) 그래서 시인은 욕망을 버리고 말(言)의 길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길을 가는 사람은 시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움직임에 동인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풍경은 늘 제자리에 있지만 시인이 길을 감으로써 늘 바뀌어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은 둥그니까 시인이 서 있는 자리는 언제나 중심이다. 그러나 시인은 늘 길의 중간에 있다. 그가 가는 길의 목표가 어디든지 간에 그는 늘 새로운 풍경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는 십자로에 있지 않다.

길을 선택하는 것은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의 중간에 있다.

나를 어디로 데려 가는 걸까?

(...)

나는 중간에 있다,

새장 속에 갇혀,

이미지에 붙잡혀.

시작은 멀어지고

끝은 사라진다.

 

끝도 시작도 없다.

나는 멈추어 있다,

끝나려는 것도 시작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발도 머리도 없다.

나는 내 속에서 맴돈다

내가 만나는 것은

똑같은 이름들,

똑같은 얼굴들일 뿐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한다.31)

 

 

파스가 말하는 시인이란 형식의 완고함과 이미지의 추상성을 등(等)거리에 두고 마음을 놓은 자이다. 마음을 놓은 자는 방관자가 아니라 우주 만물에 이끌림을 느끼는 자이다. ‘언제나 길의 중간에 있음’은 절망이며 동시에 희망이다. 왜냐하면 길의 끝에 도달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길이 품고 있는 모든 가능성에의 열림을 동시에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시인의 마음을 군자의 마음에 비유해도 좋을까? 군자는 (어떤 집단에) 조화되지만 그렇다고 같아지지는 않는다(君子和而不同). 군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세상을 소요하며 이따금씩 몇 마디 말들을 두런거린다. 그는 혼자서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가 되며 시는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시는 부정과 긍정의 팽팽한 양극의 긴장을 한 순간 둥근 화해의 원으로 닫아놓는 것이다. 파스가 일본의 단가와 하이쿠에서 확인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시적 경이로움과 일상의 단조로움의 교차이다. 일상의 단조로움은 시적 비상을 늘상 지상으로 추락시키지만 시인의 편력은 천천히 대지에 뿌리를 내린다. 실상 시를 통한 언어의 초월은 세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시간의 부챗살이 접히고

이미지가 그림자를 거두어드릴 때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부유(浮遊)한다

죽음에 둘러싸여서, 기지개를 켜는

을씨년스러운 밤의 위협 속에,

가면을 쓴 끈질긴 죽음의

뜻 모르는 소음의 위협 속에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스며든다,

움켜진 주먹처럼, 안으로

안으로 익어 들어가 마침내

자신을 마시고 흘러내리는 과즙처럼

불투명한 순간은 둥그렇게 닫히고

안으로 성숙하고, 뿌리를 내려,

내 안에서 자라나, 나를 온통 점령하고,

나는 무성한 잎새들의 두런거림에 쫓겨난다,

나의 사유는 그 나무에서 노래하는 새일 뿐이다,

나무의 은빛 수액이 나의 핏줄을 타고 돈다,

정신의 나무, 무르익은 시간의 과일들.32)

 

 

시는 무르익은 시간의 파편이다. 우주는 파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사는 생성하는 실재를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주는 낱알로 흩어진다. 그 중 하나의 세상이 땅에 떨어져 씨앗으로 싹트고 말들이 고동친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의 맥박을 듣는다. 모래 시계의 수수께끼를 듣는다.” 우주의 영원한 시간과 파편 속에 숨쉬는 생생한 순간이 수렴되는 공간으로서의 시는 언어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두 개의 극단이 역동적 균형을 유지하는 본래적 자연의 속성이다.

 

 

모든 것은 門이다

모든 것은 다리(橋)이다

지금 우리는 피안으로 걸어간다

기호들의 강이

흘러가는 천체들의 강을 바라본다

그들은 포옹하고 헤어지고 다시 껴안는다

그들은 서로 격정의 언어로 말한다

그들의 투쟁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창조이며 파괴이다

밤이 열린다

거대한 손

기호들의 성좌

세기들 세대들 시대들

글 노래하는 침묵

누군가 말하는 음절들

누군가 듣는 말들

투명한 石柱들의 回廊

울림들 부르는 소리들 표적들 미로들

순간이 깜박인다 그리고 말한다 무언가를

듣는다 눈을 떴다 감는다

물결이 일어서고

무언가를 예비한다33)

 

 

파스에 의하면 글은 변화하는 공간이며 끊임없이 관계의 망을 짜는 기호들의 총체이다. 관계의 망을 짜고 풀고 다시 짜는 역동적 작업에서 예비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침묵이다. 말 뒤에 오는 침묵이다. 수많은 고통스러운 편력 뒤에 오는 잔잔한 미소 같은 침묵이다. 말은 침묵을 향해 열리고 의미는 무의미를 향해 열린다. 시는 끊임없이 타자성을 향해 열려 가는 길이며 이러한 타자성과의 만남을 통하여 존재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인데 여기서 파스가 발견한 것은 시의 목표는 곧 길이라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인도 시도 언제나 길 중간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길의 중간이라는 뜻은 시는 말과 침묵의 수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詩)는 말(言)이며 도량(寺)이다.

글은 글이 쫓아낸 의미의 탐색이다. 탐색의 끝에서 의미는 소산하고 글자 그대로 무차별하고 무분별한 실재가 우리 앞에 드러난다. 이러한 실재 앞에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글의 이중의 움직임 즉, 의미를 향한 길과 의미의 소산이 남을 뿐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글은 쓰여지면서 지워지고 부서진다. 끝은 없고 모든 것은 영원히 다시 시작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결코 말을 끝마치지 못할 것을 끝없이 말하는 것이며 언제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의미의 탐색은 의미 저 편에서 의미를 해체하고 의미를 부수는 실재의 등장으로 끝난다. 시는 출현의 장소이며 동시에 사라짐의 장소이다.

 

 

말하는 것: 행위하는 것

 

로만 야콥슨에게

 

1.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사이에,

침묵하는 것과 꿈꾸는 것 사이에,

꿈꾸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 사이에,

시.

그렇다와 아니다 사이를

미끄러져 간다:

시가 말하는 것은

내가 침묵하는 것이고,

시가 침묵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며,

시가 꿈꾸는 것은

내가 잊은 것이다.

시는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하는 것이다.

시가 행위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시는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듣는다.

그것이 실재이다.

그리고 “그건 실재야”라고

내가 말하자마자

사라진다.

그래서 더 실재일까?

 

 

2.

만질 수 있는 관념,

만질 수 없는

말:

시는

있음과

없음 사이를

오고 간다.

그것들의 비추임을 짜고

다시 푼다.

시는

종이 위에 눈(目)을 뿌리고,

눈에는 말(言)을 뿌린다.

눈들은 말하고,

말들은 바라보며,

시선들은 사유한다.

생각을

듣고,

말하는 것을

보고,

관념의 몸을

만진다.

눈들은

눈을 감고,

말들은 열린다.34)

 

 

 

근대성에 대한 파스의 비판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로의 낭만적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근대성의 편력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이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근대성의 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자기 성찰과 인간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성찰과 문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근대성이 세운 명철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관조적 자기 비판을 수행하는데서 완성된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의 작품에서 시와 담론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상호 삼투한다. 이성적 담론이 적절한 방법으로 질서의 세계에 거주하는 길을 탐색하도록 조언해준다면, 시적 느낌은 이러한 질서의 세계를 투명하게 한다. 비판의 기능은 객관적 실재에 도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내세운 모든 그릇된 시도들을 경계하는데 있으며 동시에 신비주의적 이상주의에 의탁하는 것 또한 거부한다. 탈근대적 비판은 ‘있음’(여기서의 있음이란 존재론적 유(有)가 아니라 관계의 양상이다)과 ‘없음’(없음 또한 존재론적 무(無)가 아니라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빔(虛)이다) 사이에 위태롭고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를 유지하는 중용론적 자세이다. 이러한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격리되고 고립된 자아가 아니고 역사의 미궁 속에서 길을 잃은 미아도 아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전체의 부분임을 깨닫는 것이며 우주의 숨결을 느끼는 맥박임을 깨닫는다. 또는 파스가 말한 것처럼 “무지(des-conocimiento) 즉, 존재가 무인 것을 알면서 의미를 존재 속에 용해시키는 순간”35)임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IV. 문명화된 공존의 새 천년을 위하여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이곳 저곳을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뿌리는 견고하게 대지에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36) 파스는 글쓰기를 유혹하는 두 개의 힘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하나는 당대적(當代的)이고 현장적(現場的)인 가치를 내세우는 역사이며, 또 다른 하나는 초월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는 진리다. 역사와 진리가 상대방을 배타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도 문명도 한꺼번에 절름발이가 된다.

 

 

역사와 진리를 소통시키는 다리인

시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않는다.

시는

움직이면서 제자리에 있고

제자리에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37)

 

 

왜곡된 세상을 곧게 하고자 시도했던 근대의 비판이 또 다른 왜곡을 초래하는 것을 역사의 한복판에서 지켜보았던 파스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완전무결함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고 말했다.38)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겸손함이란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만 매달려왔던 근대인들에게 또 다시 가치의 문제를 일깨워주는 자기 성찰의 씨앗이다.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며 “비어 있음으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깨달음이다.39)

시간의 경계는 다분히 자의적인 설정에 불과하지만 유한한 생명을 갖는 인간에게 새로운 시간의 경계는 희망과 불안의 양면성을 내포한다. 새로운 천년의 경계에서 근대성에 대한 검증은 근대적 인간과 문명에 대한 총체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화해, 종교간의 화해, 삶과 지식의 화해 등은 새로운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1998년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옥타비오 파스는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에 대해서 밀도 있는 사유를 진행시켰다. 그는 평생에 걸친 편력의 과정을 통해 상관적 세계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주체성이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화해하는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 속에서 근대적 인간과 근대적 문명의 근원적 형성 원리를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옥타비오 파스는 생성적 이원론의 시각에서 세계를 파악한다. 전통과 전통에 대한 비판, 자아와 타자, 동양과 서양, 이성과 감성 등은 세계를 구성하는 이가적(二價的) 구성 요소들이다. 이가적 요소들은, 그것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생명을 유지하는 미세한 불균형의 원리 속에서 서로 길항한다. 다시 말해 생성적 세계는 두 힘 사이에 작용하는 미세한 불균형 상태를 유지하면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인정한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며 언어의 존재 조건이다. 그가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논의에 접근하는 방법론 역시 동일한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파스에게 역사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생명의 원리를 성찰하는 시험의 장소이다. 그래서 그는 너와 나를 가르는 모든 인칭대명사가 사라지고 인간의 문화가 우주의 생성 원리에 순응할 때 역사는 완성된다고 말한다. 존재가 동일성과 고유성을 고집하지 않고(無自性), 역사가 배타적인 단일한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을 때(不自生)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다만 그는 언제나 정체성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넘나들며 정체성의 영토화된 사고와 행동을 탈영토함으로써 끊임없는 생성적 현실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새로운 시간의 경계선 앞에서 우리가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 문헌

 

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 통나무, 1986)

______, 『아름다움과 추함』 (서울: 통나무, 1987)

______, 『절차탁마대기만성』 (서울: 통나무, 1987)

노자, 『도덕경 (서울: 통나무, 1989)

마테이 칼리네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서울: 시각과 언어, 1994)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서울: 솔, 1998)

Duran, Manuel, "La huella del Oriente en la poesía de Octavio Paz", en Octavio Paz, Edición de Pere Gimferrer (Madrid: Taurus)

García Ponce, Juan, "La poesía de Octavio Paz", en Aproximación a Octavio Paz, Edición de Angel Flores (México, Joaquín Mortiz, 1974)

Novalis, Fragmentos (México: Juan Pablo Editor, 1984)

Octavio Paz, Edición de Pere Gimferrer (Madrid: Taurus, 1982)

Paz, Octavio, El laberinto de la soledad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 2ª ed., 1959)

____________, Claude 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 (México: Joaquín Mortiz, 2ª ed., 1969)

____________, Conjunciones y disyunciones, (México: Joaquín Mortiz, 1969)

____________, Las peras del olmo (Barcelona: Seix Barral, 1971)

____________, El siglo y el garabato (México: Joaquín Mortiz, 1973)

____________, Los hijos del limo (Barcelona: Seix Barral, 2ª ed., 1974)

____________, Corriente alterna (México: Siglo XXI, 8ª ed., 1975)

____________, La otra voz (Barcelona: Seix Barral, 1990)

____________, Obras poética (1935~1988) (Barcelona: Seix Barral, 1990)

Rodriguez Monegal, Emir, "Relectura de El arco y la lira", en Revista Iberoamericana, Vol XXXVII, Núm. 74 (Pittsburgh: Universidad de Pittsburgh, 1971)

Schärer-Nussberger, Maya, Octavio Paz: Trayectorias y visiones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 1989)

 

 

======================================================================================

 

 

태양의 돌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순간 하나만이

이 밤을 되찾고, 꿈 하나에 대항하며

모아 놓은 이미지들을 꿈꾸며,

꿈에 대항하며 모질게 조각된,

이 밤의 허무, 글자글자마다

일어선 맥박을 뽑아 버린 순간만이,

한편 바깥에선 시간이 풀려져

내 영혼의 문들을 부순다

잔혹한 시간표를 지닌 세계,

다만 순간 하나 한편 도시들,

이름들, 맛들, 살아 있는 것이,

내 눈먼 이마에서 허물어진다,

한편 밤의 괴로움

내사고는 고개를 수그리고 내 해골,

이제 내 피는 좀더 천천히 걸어간다

이제 내 치아는 느슨해지고 내 눈은

흐려지고 하루들과 연도들

그 텅빈 공포들이 쌓여간다,

한편 시간은 그의 부채를 접는다

이제 그 이미지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순간이 가라앉아 떠돈다

죽음에 둘러싸여, 밤과

그 음산한 하품에 위협 받고,

질기고 가면 쓴 죽음의

아우성에 위협 받고 있다

순간이 가라앉아 흡수된다,

주먹만한 크기로 닫힌다, 자신의 내부를

향해 익어가는 과실 하나처럼

자신에 입맞추며 흩어진다

이제 내부를 향해 무르익는다, 뿌리를 내린다,

나의 내부에서 성장한다, 모두가 나를 차지 한다

몽롱할 정도로 무성한 잎새들이 나를 몰아낸다,

나의 사고들은 다만 그 새들이다,

그의 수은이 내 혈관들, 정신의 나무,

시간의 맛난 열매들을 순환한다,

 

 

오! 살아가기 위한 삶과 이미 살고 있는 삶,

하나의 큰 파도로 바뀌어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물러나는 시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라져가는 다른 순간에서

말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초석과 돌멩이의 오후

눈에 보이지 않는 칼들로 무장한 오후를 마주보며

해독할 수 없는 붉은 문자 하나가

나의 피부에 글을 쓰고 그 상처들은

하나의 불꽃옷처럼 나를 덮는다,

나는 자신을 소멸함이 없이 불탄다, 나는 물을 찾는다,

이제 네 눈망울에는 물이 없다, 돌이 있다,

이제 네 가슴, 네복부, 네허리는

돌로 되어 있다, 네 입에선 먼지맛이 난다,

네 입에선 썩어 버린 시간맛이 난다,

네 육체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이다,

 

 

반복되는 거울들의 회랑

목마른 자의 눈동자,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랑,

이제 너는 무작정 내 손을 잡아끌고

저 끝이 가물가물한 통로로

원의 중심부를 향해 데려가서 버티고 서 있다

횃불 속에서 얼어붙은 하나의 광휘처럼,

껍질을 벗기는, 매혹적인 빛처럼

사악한 자를 위한 교수대처럼,

채찍처럼 탄력 있고 달과 짝을 이룬

하나의 무기처럼 화사하게,

이제 날을 세운 네 단어들이 내 가슴을

파내고 나를 황폐하게 하고 텅비게 한다,

하나씩 하나씩 너는 내게서 기억들을 뽑아낸다,

나는 내 이름을 잊었다, 내친구들은

돼지들 사이에서 꿀꿀대거나 벼랑에 걸친

태양에 잡아먹혀 썩어간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길다란 상처 하나뿐,

이미 아무도 거닐지 않는 동굴 하나,

창문들 없는 현재, 사고가

돌아와, 되풀이되고, 반사된다

이제 그 동일한 투명 속에서 사라진다,

눈 하나에 의해 옮겨진 의식

밞음으로 넘쳐흐를 때까지 돌아봄을

서로 마주보는 의식:

나는 네 지독한 비늘을 보았다.

멜루시나, 동틀녘에 녹색으로 빛나는,

너는 시이트 사이에 동그라미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이제 너는 깨어나 한 마리 새처럼 부르짖었다

이제 끝없이, 부숴진 창백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아무것도 네게는 남지 않았다 네 외침만이,

이제 세기들의 말에 나는 발견한다

기침을 해대며 흐릿한 시선으로, 오래 묵은

사진들을 뒤섞으며:

아무도 없다, 너는 아무도 아니다,

잿더미 하나와 빗자루 하나,

이빠진 나이프 하나와 깃털하나,

몇몇 뼈다귀들이 매달린 가죽 하나,

이미 말라 버린 꽃송이 하나, 시꺼먼 구멍 하나

이제 구멍 바닥에는 천년 전에 질식해 버린

한 여자아이의 두 눈이 있다,

한 우물에 묻혀 있는 시선들,

태초부터 우리를 보는 시선들,

늙은 어머니의 어린 시선

덩치 큰 아들에게서 보는 한 젊은 아버지,

고만한 여자아이의 어머니 시선

몸집 큰 아버지에게서 보는 한 어린 아들,

삶의 바닥으로부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이제 죽음의 함정들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 눈 속에 떨어짐이 진정한 삶에로의 회귀인가?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 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 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 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일이 없다.

우리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

 

감촉

 

 

 

 

내 두 손은 네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 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무수한 육체들을 벗긴다

 

네 두 손은

 

네 몸에서 또 다른 육체를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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