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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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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행 시집해설
2019년 12월 14일 13시 33분  조회:1114  추천:0  작성자: 강려
허순행 시집해설
 
내면세계가 펼쳐놓은 감각적 기표의 별무리
 
                                                                     심상운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말
 
허순행 시인의 첫 시집『꽃잎만 붉다』에 담긴 60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시속에서 무수히 탄생하고 움직이는 무의식(無意識) 속 환상(幻想)의 이미지들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미지들은 이미지로서 감지될 뿐 어떤 의미를 붙여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허순행 시인의 시편들 중 하이퍼시(hyperpoetry)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시편들을 비롯해서 다수의 시편들의 이미지가 기의(signified)보다는 현실적 사실에서 이탈하여 행위하고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의식의 세계 속의 기표(signifiant)로 인식되었고, 그 기표의 이미지 덩이들이 시의 속살을 뜨겁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궁극을‘언어의 예술’이라고 할 때 그의 시가 차지할 자리는 더 확실해진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시를 열고 감상하는 시론(詩論)의 근거와 키(key)를 문덕수 시인의 시론「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과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1915년~1980년)의『S/Z』(1970)에서 찾아보았다.
문덕수 시인은「내면세계의 미학」에서 “외면 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의 차이를 의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식의 구조’ 와 ‘무의식의 구조’로 구분될 것이다. 외면세계의 대상에 의존했던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말하자면 의식의 구조의 산물이었지, 무의식의 구조의 산물은 아니었다. 물론 내면세계의 시라 할지라도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통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광활한 영역이 의식의 기초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아나키즘(anarchism)적 성격을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 내면세계에 관한 시론은 무의식의 영역을 1960년대 한국현대시(韓國現代詩)의 새로운 영역으로 도입(導入)하고자 한 매우 혁신적(革新的)이고 개방된 시론으로 인식되고 평가되고 있다.
1960년대의 구조주의(構造主義)에서 탈피한 롤랑 바르트는『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text,글, 책)에 대해“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들의 구조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에서‘기표들의 별무리’라는 말은 현대시는 기의(의미)에 구속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무의미시(無意味詩) 또는 기호시(記號詩)의 탄생을 선언(宣言)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의 선언 속에는 시에서 ‘진리나 실재’에 대해 기존 관념을 위압적으로 강요하는 전통언어에 대한 반발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消費者)에서 생산자(生産者)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있다. 그래서 위의 두 전위적(前衛的) 시론은 허순행의 시편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바탕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함께 허순행의 시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감지하게 하는 것은 그의 감성이 뜨겁게 흐르는 서사(敍事)와 감각적 표현이다. 그가 즐겨 활용하는 활유(活喩 personification)와 무의식 속에서 분출하는 성적(性的) 이미지의 환유(換喩)는 그의 시를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물성의 에너지가 되어 독자들에게 시적 긴장감, 감각적 충격,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활력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집 해설의 표제를‘내면세계가 펼쳐놓은 감각적 기표의 별무리’라고 명명(命名)한 근거도 거기에 있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의 시
 
허순행 시에서는 환상적이고 서사적인 이미지, 성적감각(性的感覺)의 이미지와 그것의 바탕이 되는 생명의식(生命意識)이 사물처럼 만져진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외부적인 가치관(價値觀)이나 교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관념이 아닌 실제의 감각과 무의식의 흐름에 시의 원적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서 순수한 이미지는「귀뚜라미가 울고」라는 시로 알려진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년 - 1886년)의 회화적인 선명한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시에서 신선함과 놀라움을 주는 것은 시어의 감각적 결합이다. 그의 시에서 무생물을 동물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활유는 표현의 생동감, 정서의 상승, 시적 긴장감에 큰 효과를 내고 있다.
 
이 시집의 첫 시「보름달」에서는 그의 생동하는 감각적 표현을 통한‘무의식 속의 나의 발견’을 감지하게 된다. 1연의“밤이/제 살에 묻은 달빛 뜯어내고/언덕 아래 숨었어요”에서는 밤의 활유가 일으키는 신선한 동물적 상상을 느끼게 된다. 2연의 말과 거울과 애(아이)의 이미지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 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학자)의 상상계⟶상징계의 구조로 해석의 실마리를 잡아보게 된다. “말이 입술에 닿자 그 애는 거울 뒤를 살피기 시작했어요/제 얼굴과 나누던 입맞춤도 사라졌어요”는 거울(상상)의 세계에서 언어(상징)의 세계로 이동하는 아이의 성장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3연의 “그러나 죽어서 거울 앞으로 왔어요/뼈마디 앙상한 거울이 그 여자를 들여다봐요”는 어릴 적 상상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표현으로 유추되고, 4연의 “벌거벗고 누워도/아랫도리가 춥지 않은 밤이예요”라는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행복한 의식을 감지하게 된다. 이 시에서 아이는 화자(시인)의 내면(무의식) 속의 아이로 인식된다.
 
밤이/제 살에 묻은 달빛 뜯어내고/언덕 아래 숨었어요//말이 입술에 닿자 그 애는 거울 뒤를 살피기 시작했어요/제 얼굴과 나누던 입맞춤도 사라졌어요/온갖 물상을 꺼내 손가락에 옮기고 제왕처럼 호령하던 졸병들 내다버렸어요/퍼즐 속에서 꺼낸 말이 그 애를 끌고 다녀요/조각 하나하나를 끼워 맞춰 입술 단정히 하고 높은 시렁 위에 올려놓은 말들이 그 애를 거느리기 시작했어요/종자처럼 말의 시중을 들었어요/어여쁜 그 애는//그러나 죽어서 거울 앞으로 왔어요/뼈마디 앙상한 거울이 그 여자를 들여다봐요/평생을 끌고 다녔던 그림자 받아들고 강물이 강물을 건너가요/보름달이 따라와서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를 쏟아요//벌거벗고 누워도 /아랫도리가 춥지 않은 밤이예요//-「보름달」전문
 
「꽃샘바람」은 이른 봄날 쌀쌀한 꽃샘바람을 여자로 비유해서 신선하고 놀라운 상상으로 독자들을 자극하면서 생명감이 출렁이는 소설적(小說的) 서사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언덕으로 올라간 여자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주정꾼을 만나자 사내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중략)여자의 얼굴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밤새도록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판을 적셨다”의 역동, 환상, 성적 이미지는 읽을수록 맛을 낸다. 호흡이 길고 사건이 중첩되는 장편 서사시의 가능성을 예지(豫知)하게 한다.
 
여자가 왔다// 머리는 갈기처럼 풀어졌고 메마른 얼굴에 버짐이 허옇게 피어있다 마을로 들어선 여자는 아이들이 노는 양지쪽에 끼어 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아이들이 까르르까르르 웃었고 이제 막 얼굴을 내민 꽃다지가 마른 숨을 토해냈다// 해가 설핏하게 기울자 여자는 갑자기 아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 흔들었다 놀라서 울어대는 아이의 목도리를 잡아채 멀리 던지고는 개울물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앙상한 맨발에 핏물이 돌았고 깔깔깔 웃어대는 귓볼이 붉었다 개울물에 비친 그 여자의 속살도 붉었다// (중략)다음 날, 산수유나무에서 그 여자의 혼백이 노랗게 피어났다//-「꽃샘바람」처음과 끝부분
 
「열사흘 달」도 생명의식을 바탕으로 한 무의식 속의 성적 이미지 속에 여자애들과 사내애들을 등장시켜 짧은 서사구조로 갈무리하면서 시적 감각을 뿜어내고 있다. “여자애들이 먼저 속옷을 벗는다 달빛은 그 애들의 맨몸을 뚫고 들어가 달덩이 하나 만들고 은색 실타래를 풀어 허기진 가슴을 채운다”.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에서 해방되어서 시인이 만들어 놓은 열사흘 달밤의 서사적 환상의 공간 속에 들어가서 놀고 느끼면 된다. 예술의 끝이 천진한 놀이라고 할 때 이 시의 자리는 확실해진다.
 
은사시나무 잎새들이 허연 정액을 쏟아낸다// 이런 밤,/ 여자애들이 먼저 속옷을 벗는다 달빛은 그 애들의 맨몸을 뚫고 들어가 달덩이 하나 만들고 은색 실타래를 풀어 허기진 가슴을 채운다 하얗게 날선 어둠이 젖어들기 시작하면 골목에선 웃자란 신음이 번지고 쓰레기더미 속에선 버려진 울음이 아기로 태어나기도 한다 사내애들은 휘파람을 불고 여자애들은 깔깔거리고 어둠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달빛이 더 높게 제 몸을 걸러내고 있다/ 소금밭보다도 더 낮게 몸을 웅크린 밤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이 귀를 털어내고 음모처럼 드리워진 어둠이 어둠을 껴안은 채 어둠 속으로 든다// 중천을 지나 서쪽 보리암 마당을 지나던 달이 땅바닥에 누운 제 몸에 입술을 대 본다 얕게 오르내리는 숨소리가 둥글다//-「열사흘 달」전문
 
「꽃잎만 붉다」에서는 4월의 이미지를 종아리에서 기어나 온 뱀 한 마리, 돌단풍의 붉은 혓바닥, 남자애의 허벅지를 적시는 붉은 물 등 시인의 내면적 생명의식이 무의식의 욕망으로 드러내는 기표의 무리들과 만나게 된다. 그 기표의 무리들은 외부세계의 어떤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시인 자신의 내부의식이며, 의미로 환원되기 어려운 감성의 환유(metonymy) 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의식은 인간의 숨은 욕망의 노출(露出)이라는 면에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길이 하루 종일 나를 끌고 다니다가 나무의자에 내려놓았을 때, 종아리에서 뱀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돌단풍이 붉은 혓바닥을 내밀어 목덜미를 애무하고 벚꽃은 흔들리며 흔들리며 땅 위에 눕고 己巳年에 태어난 나의 욕망은 제 다리에서 생겨난 돌단풍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등 뒤에 바짝 붙어 몸을 비벼대는 남자애의 아랫도리 사이로 붉은 물이 쏟아져서 허벅지를 적셔도 좋을 일// 낮잠을 깬 4월,/ 나무 그늘 아래로 천천히 멀어지는/ 낙타 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한데/ 도랑물 따라 떠내려가는/ 꽃잎만 붉다//-「꽃잎만 붉다」전문
 
이외에도 「그네」「장마」「사랑은」「빈집」에서 보여주는 선명한 사물성의 감각적 이미지의 시들은 허순행 시인을 서사적이며 역동적인 이미지즘(imagism)의 시인으로 평가하게 하는 근거가 될 것 같다.
 
나. 하이퍼(hyper) 구조의 시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인과적(因果的)인 시의 구조가 배제되고 이미지의 비순차(非順次)와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는 하이퍼 구조의 시편들은 독자들의 생각을 상상의 네트워크(network)로 퍼져나가게 함으로써 새로운 연결구조의 맛에 젖어들게 한다. 그러나 저자(著者)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이미지만으로 끝나는 하이퍼 시의 구조에서 당황하기도 한다. 허순행의 시에서 다선구조는 내면세계의 연상공간(聯想空間)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그의 무의식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세계이기도 하다.
 
「동백꽃」에서는 1연의 붉은 노을, 2연의 사내를 더듬는 형수, 3연의 동굴이 바다를 건너가는 이미지, 4연의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기억, 5연의 바람을 등에 지고 혼자 걸어가는 사막의 이미지, 5연의 흔적을 지우는 어둠, 6연의 여자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등의 단절적(斷絶的)인 이미지가 다선구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하이펴 시에서는 연을 단위라고도 한다) 이 다선구조는 시를 의미에서 벗어나서 감각과 감성으로 읽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동굴, 사막, 어둠 등이 의미하는 것은 독자의 유추와 상상과 시적 분위기에 맡기게 된다. 2연의“형수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더듬어요/빗줄기가 쏟아지는데/치마 속에서 빨갛게 눈뜨는 비린내”의 성적인 감흥(感興)은 빨갛게 피는 동백꽃에 대한 감각적 상상의 이미지를 통해 뿜어내는 시인의 내면의식의 발현(發現)으로 인식된다.
 
가지마다 붉은 노을 매달았어요//형수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더듬어요/빗줄기가 쏟아지는데/치마 속에서 빨갛게 눈뜨는 비린내//숨어있던 동굴이 어둠을 밀어내고/씻지도 않은 몸으로 바다를 건너가요//젖은 머리칼에서/허기진 기억들 흘러내려요//사막이 바람을 등에 지고 혼자 걸어가요/그림자도 없이 어둠은 흔적을 지워요//여자 몸에서/젖은 핏방울 뚝뚝 떨어져요//-「동백꽃」전문
 
「소나기」에서도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가 선명하다. 1연의 문을 두드리는 밤비 소리, 2연의 말안장에 앉아 채찍을 흔드는 사내, 3연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유월의 장미꽃, 4연의 사내의 꿈과 고시원의 1인용 침대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통해서 시 속에 극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그 효과는 인과적 연결에서는 드러낼 수 없는 시의 감각과 의미를 함축한다. 이 시에서 사막횡단의 꿈을 가진 사내와 유월의 장미꽃, 말안장에 앉아 세차게 채찍을 흔드는 사내와 그의 뒷그림자에 매달려 하루를 사는 여자, 밤마다 낙타를 끌고 사막으로 가는 사내와 1인용 침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미의 유추(類推)는 독자의 몫이 되어 독자가 의미의 생산자(生産者)가 되는 것이다. 주제의 다양성은 다선구조의 시가 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밤이 놀라 깬다/쏴하고 쏟아지는 비/시원한 바람 한 줄기 흐르고 베란다 문 열려 있어/순식간에 방안 젖어든다//말안장에 앉아 세차게 채찍을 흔드는 사내/빗줄기를 뚫고 서쪽으로 사라진 다음/여자들은 그의 뒷그림자에 매달려 하루를 산다/산을 넘어가는 저녁이 여자들 눈 속 들여다보다가/마음 적막해져서 어둠 속으로 드는데//유월이 장미꽃을 피워 울타리를 넘어 간다/햇살은 나무 그늘 아래 숨었다가 스커트가 짧은 허벅지에 붙어/스마트폰을 따라가고/엉덩이에서 튀어나온 말이 옷을 벗은 채 그 뒤를 따라 간다/그 애들의 시한은 200일/여름이 가기도 전에 기념잔치를 끝낸 사진이 울지도 않고 돌아서 간다//사막횡단이 꿈인 사내는/밤마다 낙타를 끌고 사막으로 간다/책상 위로 수북이 쌓이는 모래바람/1인용 침대가 고시원에 누워서 너덜너덜 늙어간다//-「소나기」전문
 
「석류」에도 하이퍼(hyper)시의 다선구조의 기법이 보인다. 1연의 한강다리에서 벌어지는 사내의 아랫도리 퍼포먼스(performance), 2연의 세헤라자데의 혀에서 돋아나는 붉은 꼬리, 3연의 간통 혐의의 여자 자하라의 검붉은 피, 4연의 한 낮의 태양의 흔적이 남은 석류의 붉은 속살 등의 이미지가 불연속적(不連續的)인 관계로 이어지면서 시인의 무의식(無意識)의 흐름을 엿보게 한다. 석류의 붉은 빛에서 연상되는 다채로운 성적(性的)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통일된 의미보다는 각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개별적인 가상현실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의미가 흥미를 끈다. 그리고 이미지들의 집합에서 발생하는 시의 총체적 효과에 관심을 갖게 한다.
 
보름달은 황갈색으로 변했고 *세헤라자데의 말이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때때로 혀에선 붉은 꼬리가 돋아나기도 한다 바람소리를 엿들은 왕들은 눈먼 소문을 찌르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별빛이 일곱 번이나 죽고도 살아난 바람을 나무에 매단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낮달이 환하게 눈을 뜨고 천 년 밖으로 도망갔던 발자국들이 검은 눈물을 훔쳐 달아나는데/밤새도록 모래바람이 불던 여자의 입술에서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들린다//*자하라가 건넨 테이프에서 늑대들이 기어나왔다 충혈된 음모가 말 속에서 똬리를 틀었다 컴컴하고 빠르게 자라난 혀끝에서 거짓말은 돌덩어리처럼 단단해지고 단단해진 거짓말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사내들은 사방에 눈알을 매달아놓고 돌아갔다 눈처럼 하얀 여자가 저녁노을을 끌어다가 제 주검을 덮었지만//-「석류」2,3연
*세헤라자데 :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실처럼 이야기를 풀어가는 여자, 아내에게 배신당한 왕에게 천일 동안 이야기를 들려준다.*자하라 : 간통 혐의를 씌워 아내를 돌로 쳐 죽이는 남자들을 고발한 영화 (더 스토닝)에 나오는 여자주인공
 
「살모사 또는 말(言)에 대한」에서도 하이퍼 시의 구조가 인식된다. 1연의 그 애의 거미줄에 걸린 말, 2연의 살모사를 묻던 10살 아이가 말의 포식자가 된 것, 3연의 사전 속의 살모사 4연의 바람 든 무를 버리려다가 보름달을 버렸다는 엉뚱한 생각 등이 각각 하이퍼 시의단위(unit)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인과적 논리의 시와 비교할 때, 이 시는 입체적인 시의 공간을 형성한 극적인 영상의 시로 읽히게 된다. 그 공간 속에는 엄마, 아이, 살모사, 보름달, 거미줄 등의 생동하는 이미지가 있다. 이 시에서 말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이미지 속에 암시(暗示)되어 있다.
 
내 말이 그 애의 거미줄에 걸렸다 끈끈하다/넘어가는 저녁노을이 목덜미에서 뜨겁다// “살모사를 알아? 엄마 ”/10살이 되던 조그만 입으로 종알거린 말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던 이후로 그 애는 포식자가 되었다 길고 차가운 포박 팽팽하다 밧줄은 두껍고 내 몸은 터질 듯하다 부풀어 오르는 말// 사전 속에는 굵은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 살모사 (살무사) : 몸빛은 엷은 회색이고 몸통의 측면에 암회색 얼룩무늬가 있으며 몸길이는 70㎝쯤 까치 살무사, 남도살무사, 독사, 殺母蛇 깔깔거리며 웃는 그 애의 입 속에서 속살이 꽉 찬 독사 한 마리가 기어 나온다 시린 바람이 내 몸을 휘감는다// 바람 든 무를 버리려다가 문득 중천에 걸린 보름달을 버렸다//-「살모사 또는 말(言)에 대한」전문
 
이 밖에도「우두커니 앉아 있는 날들은 」에서 보여주는 시간을 매개로 하여 나열하는 이미지의 다선구조, 아들과 아빠의 갈등과 화해를 희곡적(戱曲的)인 대화로 구성한 「내 몸을 떠난 별이 천년을 건너와서 네 발등에 닿는 다면」, 연의 순서를 바꾸어도 시가 구성되고 긴장감을 주는 「보이스피칭」등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으로 생각된다.
 
다. 서사적 구조와 가족의 이미지
 
허순행의 시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서사적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가족의 이미지다. 그의 시에서 강렬한 시적 생명력을 제공하고 있는 딸의 이미지, 갈등을 조성하면서도 끈끈한 연민의 끈으로 서로를 묶고 있는 아빠(남편)와 아들과 엄마의 이미지는 우주공간속의 암흑의 물질(dark matter)같이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기억 속에서 전쟁은」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의 기억이 서사의 구조 속에 생생한 이미지로 담겨있다. 그 기억은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의 이미지로 남아 60이 넘은 나이에도 꿈속에서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진땀을 흘리게 한다. 이 시속에는 얼굴이 까만 병사를 흠모하는 사촌언니,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머리칼을 자른 딸애가 등장하여 입체적(立體的)인 서사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아이들이 차올린 허공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가요 날개를 반짝이며 전투기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이불 속으로 숨어야 했어요 -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 이불 속은 가마솥처럼 뜨거웠어요 땀으로 범벅이 된 어둠 속에서 소리에 어두운 귀가 소리를 먼저 들어요//개들이 어슬렁거려요 주둥이에 핏물을 묻힌 채 시궁창을 뒤지기도 해요 사촌언니는 다락으로 숨어들어 얼굴이 까만 병사들을 흠모했어요 벼슬이 붉은 수탉이 뒤뚱거리며 허공을 쪼았어요 연두색 저고리에 엄마가 남기고 간 눈물 자국을 아이는 오래 오래 만져보았어요//-「기억 속에서 전쟁은」2,3연
 
「서쪽에서 달이 뜬 까닭은」에는 제삿날 죽은 남편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1연의 죽어서도 질투심이 남아서 탕국을 아내의 발등에 쏟아버리고 가는 남편과 그 남편을 연민하는 아내의 마음, 2연의 시인의 무의식 속에 등장하는 피부가 검은 사내애와 붉은 뱃속에서 우는 아이의 이미지, 3연의 울고 있니? 하고 묻는 죽은 남편과 검은 달덩이의 이미지, 4연의 비명을 지르는 아내와 떠오르는 달의 이미지가 무의식의 단절적 구조 속에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죽어서 학생이 된 그는/죽어서도 질투할 힘이 남아 있어/김이 오르는 탕국을 아내의 발등에 쏟아버리고/갔다는데/마음까지 멈춘 그가 흰 달덩이 하나를/서쪽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까//그 애의 책상은 15쪽에 머물러 있다 글자들은 목소리를 숨겼고 피부가 검은 사내애들은 암막 커튼을 쳤다 운동장을 저벅저벅 걸었던 그 애들도 커튼 안으로 들면 옷을 벗었다 숫자는 넘어가지 않았다 수억 년 전에 사라진 꼬리뼈가 날을 세우고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들이 코 밑에서 가랑이를 벌리고/붉은 뱃속에서 아이가 숨죽여 울고//울고 있니?/학생이 된 그가 누군가에게 묻고 사라지는 밤/창문이 열리고 검은 달덩이 하나가 문 밖으로 던져졌을 때/모든 집들이 등뼈가 휘도록 제 몸을 껴안았다/신음이 빠르게 연골을 빠져나가 그의 등짝을 때렸다//아내가 놀라 비명을 질렀고/아이는 면사포처럼 하얀 제 몸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그리고 달이 떠올랐다//-「서쪽에서 달이 뜬 까닭은」전문
 
허순행의 시에서 딸의 이미지는 왕성한 생명력과 연결된다.「딸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서 시인은 그 생명력을 “아주 간혹은 붉은 혓바닥을 가진 뱀이 그 애의 말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거미가 식탁 위를 빠르게 기어 다녔다 장미가 내 얼굴에 실뿌리를 내리고 해를 끌고 다니던 어둠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컹컹 짖었다”라는 감각적 사물 이미지로 만들어서 독자들이 실제같이 느끼고 감지하게 한다.
 
딸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 지구가 공전하는 소리도 들렸다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는 소리에 흡수되고 그런 밤에는 그 애의 푸른 이마에서 용암이 솟구쳤다 새빨간 핏물이 흘러넘쳐 바위덩어리를 태웠다 돌들이 숯덩이처럼 투명해졌다/ 아주 간혹은 붉은 혓바닥을 가진 뱀이 그 애의 말 속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거미가 식탁 위를 빠르게 기어 다녔다 장미가 내 얼굴에 실뿌리를 내리고 해를 끌고 다니던 어둠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컹컹 짖었다//-「딸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2연
 
이와 함께 사망 1주기에 딸과 아내 곁으로 온 남편 혼령의 독백을 환청으로 듣고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보면서 그림자로 보이는 혼령에게 말을 하는 아내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그려진「1週忌, 사진」이 가족애(家族愛)를 담은 서사적 구성의 시로 감동을 주고 있다.
 
아내와 함께 달빛이 하얗게 누워 있네 맞은 편 방에서 딸애도 얕게 코를 골고 있네 어둠은 물에 젖은 무명옷처럼 축축하네 비에 젖어 돌아오면 딸애는 늘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네 밤새도록 그 애의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주며 아내는 어둠 속을 헤매고 다녔네/ 얼굴 가만히 만져보네 그녀가 몸을 뒤척이네 당신은 긴장하고 그녀가 잠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가네 개울물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검은 물속을 걸어나와 어둠으로 앉아 있네 어둠 속에서 그녀 어둠 더 깊어지고 당신은 그림자도 없이 방안을 서성거리네/-「1週忌, 사진」1연 앞부분
 
3. 나가는 말
 
허순행 시인의 첫 시집『꽃잎만 붉다』의 시편들을 읽고 나서 필자는 외부의 가치관이나 공리적 교훈성에 전혀 물들지 않은 그의 무의식 속에서 빛의 굴절에 작용하는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현실과 환상의 교직(交織)에 작용을 하는 이미지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해야 할지 막연했다. 그래서 무의식의 자유로운 연상 작용의 시적활용을 말한 문덕수 시인의「내면세계의 미학」과‘이상적 텍스트의 언어들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는 기표들의 별무리’라는 롤랑바르트의 탈구조주의 이론에 대입하여 문제를 풀어보았다. 이런 접근이 허순행의 시를 이해하는 바른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매우 유용한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함께 허순행의 시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감지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장기(長技)라고 평가할 수 있는 서사적 구성과 이미지의 감각적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서사능력(敍事能力)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와 어울려서 장편의 판타지 시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의 단선구조의 시와 하이퍼의 다선구조의 시가 섞여있다. 그 시편들의 내부에는 그의 시에서 강렬한 시적 생명력을 제공하고 있는 무의식 속의 가족애가 들어있다. 그의 의식은 외부세계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내부세계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성으로 인해 21세기에 빛을 받는 동양의 노장철학(老莊哲學)과 연결되는 끈이 되기도 한다. 인용된 시편들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시편들이다. 더 좋은 시편들이 선택되지 못하였음을 부기하면서, 허순행 시인의 시적 성취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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