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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1>/심 상 운
2019년 07월 12일 21시 37분  조회:261  추천:0  작성자: 강려
*월간 <시문학> 2007년 2월호 발표 <박명자/문인수/고진하 시인의 시>
 
박명자 시인의 시-「누군가 4월에는」 「九月의 끝」
 
4월의 뜨락에 조용히 나서 보면
누군가 스르르 다가와서 목과 겨드랑이를 간지럼 태운다.
지난 겨울 밤 얼어붙은 침묵의 가지 위에
누가 훅 체온보다 더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
천길 깊은 허무의 굴헝에서
누가 수액을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리는 소리.
긴 기다림의 시간 뒤에서 누가 생명의 향유를
항아리 가득 준비했나 보다.
누군가 등 뒤에 가만가만 다가 와서
<너무 오래 기다렸지?>
귀엣말로 나직이 속삭인다.
지난 겨울 몸을 망친 땅 위에
누가 <4월의 리듬>이라고 썼다가 얼른 지운다.
아침 무거운 커튼을 드르륵 열어 주고
동구 밖을 긴 망토를 이끌고 누군가 나가고 있다.
----------「누군가 4월에는」전문
 
그토록 많은 곤충들이 밤새도록
높은음자리표를 숲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물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땀으로 나의 시간을 밀고 오르면
九月의 꼬리가 피부로 만져진다.
이쯤서부터 부질없는 꿈의 껍데기를 버려야지
중얼거리며 늦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
숲에서 어떤 눈이 나의 고독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리며
서둘러 산마루에 오르자
내 몸은 어느새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다.
-------「九月의 끝」전문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근원이며 선천적인 틀이다. 그러나 공간은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데 비해 시간은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데 차이가 있다. 이것을 공간의 가역성可逆性과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고 한다. 만약 시간에도 가역성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과거의 시간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영화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면 이 세상은 또 얼마나 혼란스럽고 흥미로운 상황의 무대가 될까. 그런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의 불가역성이 우리들의 삶에 부여하고 있는 깊고 큰 의미를 알게 된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시간의 엄숙한 법칙 속에 놓여있는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박명자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은 그의 시편 속에는 무엇보다도 시간의 의미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누군가 4월에는」에서는 모더니즘적인 언어감각의 연출도 돋보이지만 그 언어감각 속에 들어있는 존재의 모습 즉 관념적 이미지에 눈길을 더 주게 된다. 이 시에는 ‘누군가(누가)’라는 어떤 존재의 모습이 들어있다. 그 ‘존재’는 독자들에게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는 단순한 연극적인 캐릭터가 될 수도 있고 시를 통한 존재자의 발견과 인식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존재의 의미가 주는 상상의 폭이 이 시의 이미지와 의미형성에 주는 변화는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지난 겨울 밤 얼어붙은 침묵의 가지 위에/누가 훅 체온보다 더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천길 깊은 허무의 굴헝에서/누가 수액을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리는 소리.//긴 기다림의 시간 뒤에서 누가 생명의 향유를/항아리 가득 준비했나 보다.//누군가 등 뒤에 가만가만 다가 와서/<너무 오래 기다렸지?>/귀엣말로 나직이 속삭인다.”라는 이 시의 중심구절에서 드러나는 대립적인 이미지 ‘허무의 굴헝’과 ‘생명의 향유’는 이 시가 단순한 계절의 시가 아닌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시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사실 속에서 새로운 대상의 인식이라는 시인의 시적 감각과 투명한 의식의 눈을 기억하게 한다. 관념의 동적인 형상을 발견하여 보여주는 그의 투명한 의식의 눈은「九月의 끝」에서는 체험적인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땀으로 나의 시간을 밀고 오르면/九月의 꼬리가 피부로 만져진다.//이쯤서부터 부질없는 꿈의 껍데기를 버려야지/중얼거리며 늦기 전에 뒤를 돌아보면/숲에서 어떤 눈이 나의 고독을 하염없이 지켜본다.//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리며/서둘러 산마루에 오르자/내 몸은 어느새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열정만으로도 행복했던 여름의 삶이 지나가고 가을의 초입 9월에 들어서면 지나간 시간의 아름다운 모습들은 점차 사라지고 냉정하고 본질적인 인식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공통적인 감성의 변화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의 체험(사실적 또는 사유적 체험)으로 녹여서 깊이 있고 감각적인 사유의 시어로 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꿈의 껍데기’를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숲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어떤 눈을 만난다. 그래서 그는 ‘한 생애를 꽃처럼 버린 사람’을 떠올린다. 그리고 산마루에 올라서서 ‘누에처럼 투명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유과정은 집착이나 경계에서 해방될 때 마음이 가벼워지고 투명해지는 도道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봄까지 살아남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이 꺼지지 않는 불덩이 하나를 간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박명자 시인의 시편 중에서 계절과 관련된 시편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나의 시간’의 의미와 한 생애의 허무를 극복하는 과정을 생각해본다.
 
*박명자(朴明子) : 1973년 <현대문학>에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이 천료되어서 등단. 시집 「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빛의 시내」「시간의 흔적을 지우다」 등
 
문인수 시인의 시- 「대숲」「창포」
 
시퍼렇게 털 세운 대숲 한 덩어리가 크다.
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사실 전국 어디에나 붙박인 유적 같은 것이다.
그들은 왜 마을 뒤, 산 아래에다 대숲 우거지게 했을까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
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 놓았을까. 날 풀어놓고
싶어 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
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
잘디잘게 씹히거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신생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무넘이 무넘이 시퍼렇게 넘어가곤 한다.
--------「대숲」전문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 들은 척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롬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 소래네/ 닥실이/ 봉산댁/ 새촌네/ 분네/ 개야네/
느미/ 꼭지/ 뒷뫼댁/ 부리티네/ 내동댁/ 흠실이/ 모금골댁/
등골댁/소독골네/ 갈갯댁/ 순이/ 봉계댁 우거진 한 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창포」전문
 
 
조선 선비들은 사군자四君子를 마음의 표상으로 삼고 살아 왔다. 그 중에 무욕無慾 하면서도 춥고 매서운 겨울을 이기는 꿋꿋한 대나무의 기상은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대나무는 선비들이 즐겨 그렸던 묵화나 산수화의 대상이 되었고, 대숲의 정경은 그림 속에서 운치를 드러냈다. 그것은 오늘 날에도 계속 이어지는 한국화의 전통이다. 그러나 상징과 사실은 크게 다르다. 상징은 사물이 아닌 하나의 관념이기 때문에 실제의 자연과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상징은 생명의 기운이 말라붙은 관념의 뼈대로 존재하게 된다. 대나무 숲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대숲이 얼마나 여러 가지 느낌으로 다가 오는지 체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대낮에도 하늘을 가린 울창한 대숲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하루 종일 어둡고 우중충하다. 그리고 사방 천지가 대나무뿐일 때 대나무가 주는 압박에 공포감도 생긴다. 거기에는 운치니 기상이니 하는 말들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과 관념의 차이다. 예술의 미적가치는 생동감에서 우러나온다.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 그려낼 때 거기에 생동하는 기운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 인상파印象派 그림이 오늘날까지 색이 바라지 않는 것도 빛에 대한 그들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관념의 벽을 허물어버린 과학적 사고의 화풍 때문이다. 문인수 시인의「대숲」은 인상파의 그림처럼 생동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의「대숲」에는 어떤 관념에도 감염되지 않은 싱싱한 사물성의 감각이 살아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대숲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시라는 형식도 의식하지 않은 듯 아주 자연스럽게 글로 풀어놓고 있다. 그래서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 놓았을까. 날 풀어놓고/싶어 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잘디잘게 씹히거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신생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는 구절들이 제각각 살아서 숨을 쉬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 시의 문장과 문장이 인과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서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래서 이 시가 주는 의미는 불분명해지고, 그 분명하지 않은 의미(무의미)는 이 시의 생명 감각이 되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어떤 관념이나 논리적인 사유를 시 속에 담기 위해서 비유나 상징적인 어법을 사용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시의 언어가 사물과 분리되어서 관념화 되었을 때의 감각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감지感知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줄 때의 감각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문인수 시인의 이런 언어감각은 「창포」에서 더 친근하고 예민하게 드러난다. 우포늪에 우거진 창포들의 모습을 “노리실댁/ 소래네/ 닥실이/ 봉산댁/ 새촌네/ 분네/ 개야네/느미/꼭지/ 뒷뫼댁/ 부리티네/ 내동댁/ 흠실이/ 모금골댁/등골댁/소독골네/ 갈갯댁/ 순이/ 봉계댁 우거진 한 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라고 우리나라 여인네들의 이름과 연결 지어서 보여준 것이 그것이다. 그 여인네들은 논밭에서 평생을 흙과 함께 살다간 농투성이 여인네들이다. 그 여인네들의 꿈과 삶, 질긴 생명력은 박경리의 소설「토지」속에 잘 담겨있다. 들병이란 1930년대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들에서 사내들에게 술과 몸을 파는 여인네의 별명이다. 시인은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창포 잎에다 붙이고 있다. 그 이름들은 언제 들어도 정겹고 눈물 나는 이 땅의 여인네들의 이름이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이름들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그 이름들의 이미지와 창포의 이미지를 겹쳐 보여주는 것으로 어떤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 의미를 자기의 지식과 정서와 감각에 맞추어서 상상하고 음미하게 된다. 여기에도 어떤 관념의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의 화면같이 장면이동을 하는 끝 구절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멀리 가버린다 창포,/긴 허리가 아름답다.”라는 영상이 깔끔한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문인수 시인의 이미지 조형 기법이 현대적인 디지털 감각과도 연결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의 냉정하고 사실적인 이미지의 기법이 탈-관념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그의 시를 거듭 읽는다.
 
*문인수(文寅洙): 1985년 <심상>에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함. 시집 「늪이 늪에 젖듯」「세상의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뿔」「동강의 높은 새」등
 
 
 
 
고진하 시인의 시-「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라이락」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마천루 숲속, 아크릴에 새겨진
‘조류연구소’란 입간판 아래
검은 점이 또렷이 빛나는 눈부신 황금빛 관冠을 뽐내며
쏘는 듯 노려보는 후투티 눈빛이
이상한 광채를 뿜는다.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
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
새어나오다니.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
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
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
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
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
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
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오, 그렇다면
나도 이제 허울 좋은 이 조류연구소 주인처럼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피와 살과
푸들푸들 떨리는 내장을 송두리째 긁어내고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를 가득 채운, 잘 길 들여진 행복에
더 이상 소금 뿌리지 않아도 될 것인가. 때때로
까마득한 마천루 위에서 상한 죽지를 퍼덕이며 날아 내리는
풋내 나는 주검들마저 완벽하게 포장하는 그의,
그의 도제徒弟로 입문하기만 하면
과연 나도 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껍질만으로도 눈부신
--------「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전문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을 토해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
천 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 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디
향낭香囊을
움켜지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라이락」전문
 
시인들은 한때 문명을 예찬하고 인류의 밝은 미래를 전망한 적이 있다. 모더니즘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모더니즘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성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장밋빛 청사진을 펼쳤다. 그러나 그 장밋빛 그림은 점점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공해나 생태계의 문제들이 인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관적인 징후와 예상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적인 세계, 즉 남성, 과학, 인간 등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여성, 신화, 자연을 찾아내어서 이성적인 것과 대면시킴으로써 기존의 이성적인 것에 새로운 시선을 던지게 하였다. 그것이 질서와 규칙을 넘어서거나, 어긋나는 현상을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다. 요즘 보통으로 쓰이는 퓨전(fusion)이라는 말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이다. 고진하 시인의「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시 속에 문명과 자연이라는 대립적인 이미지가 중심화두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들이 빚어내는 묘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문명과 자연의 이미지는 마천루의 숲 속에서 퍼덕거리며 날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박제剝製가 된 새 후투티를 상징하는 복합적인 요소가 된다. 시인은 후투티의 인공 눈알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놀라면서 그것을 “캄캄한 무덤들 사이에서/새어나오는 섬뜩한 인광燐光 같은//푸른 광채, 인공의 눈알에서 저런, 저런 광채가/새어나오다니./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후투티, 하얀 고사목 뾰족한 가지 끝에/실처럼 가는 다리를 꽁꽁 묶인 채, 그러나/당당한 비상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저 자그마한 새에 끌리는/떨칠 수 없는 이 매혹감은 무엇인가. 잿빛 공기 속에/딱딱하게, 아니 부드럽게 펼쳐진/화려한 깃털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친밀감은.”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시인의 감수성은 독자들에게 문명에 의해서 파괴된 자연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자연의 혼魂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현대의 도시문명을 동화 속 마법魔法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어둠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박제가 된 새의 “잘 길들여진 행복”이라는 구절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일깨우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문명비판적인 시인의 의식을 짚어보게 한다.「라이락」은「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와 같이 사실적인 체험의 진술이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밝고 단조로운 이미지가 생동감을 준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인공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서 자연의 감각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천수관세음보살이라는 불교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불교적인 사유보다는 직감을 통한 사물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시인은 라이락 꽃이 주는 값으로 환산 할 수 없는 무량의 공덕을 어떤 보살의 공덕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찬탄하고 있는데, 그 관념이 허황되지 않아서 공감을 준다.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을 토해내는/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천수관음보살을 떠 올렸다.”는 구절이 사물성의 감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관념시와는 다른 선사물先事物 후관념後觀念의 인식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는 또 맑고 향기로운 시인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라이락의 공덕을 찬탄하는 그 마음이 불도의 경지에 이른 마음임을 알게 한다. 나는 이 시의 빛과 향기기 오래 내 마음에 남기를 바라면서 거듭 음미한다.
 
* 고진하(高鎭河): 1987년 <세계의 문학>에 「폐가」등을 발표하며 등단함. 시집 「지금 남은 골짜기엔」「트란체스코의 새들」「얼음 수도원」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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