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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심상운 시론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5>/심 상 운
2019년 07월 26일 18시 31분  조회:1155  추천:0  작성자: 강려
* 월간 <시문학>2007년 6월호 발표 <송준영/정유준/김상미 시인의 시>
 
송준영 시인의 시-「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습득」
 
 
기차보다 한 뼘 앞에 검은 바람이 지난다 낫과 톱을 어깨에
맨 갱부의 환한 장화발이 소리도 없이 지난다 하얀 이빨이 이
빨을 마주보며 바삐바삐 떠간다 역사 안 드럼통 난로에 괴탄
이 이글거린다 플랫폼엔 급행열차가 잠시 멈춘다 이곳은 철
암, 산이 떠나가고 산보다 먼저 사람이 캐고 버린 버력만 산이
되어 어둠에 배를 깐다 무게적재함에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
이 검게검게 볼록한 이마를 내민다 금세 어둠이 꺼먼 버력에
엎친다 바람이 검은 철사 줄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괘달려 윙
윙 강철소리를 낸다 저탄장의 탄가루를 업고 간혹 분간 어려
운 칠흑 뚫은 별빛 같은 마을을 휘 몰아친다 어둠의 사타구니
속으로 돌진한다
형광등과 네온이 창백한 통리 역사엔 괴탄이 이글거리던
드럼통 난로가 없다 이빨과 눈이 유난히 빛나던 갱부들도 없
다 탄가루와 긴 쇠꼬챙이가 콱콱 내리찧으면 빨갛게 흘러내
리던 불티들도 없다 바람이 분다 멍멍한 하늘 사이 머얼건 땅
위로 바람이 분다 영화 속 같은 사람들이 파리한 형광등 대합
실에서 앉거나 서 있다 유령처럼 땅을 밟지 않고 미끄러 진다
빛깔을 분간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사이로 파리한 눈이 온다
나는 오늘 통리역에 내리다
-----------「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전문
 
1호선 지하철 분실물센터에 있는 건
하얀 차돌 두어 개와 나를 따라온
청태 사이로 비치는 오대산 맨가슴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청량선원이네 그곳엔
내가 주워온 금빛 옷을 걸친 늙은 부처 아니
법당 왼쪽에 단정히 앉아 있던
이마 말간 문수동자가 있네 아니 이 날
툇마루에 졸고 있는 하늘 한 자락과
푸른 솔잎 입에 문 물총새 한 마리 그리고
솔바람이 있네 아니 지하철분실물센터
알림판엔 깔깔 웃음 웃던 습득물이 붙어
있네 동굴 속으로 고함지르며 사라진
습득*이 붙어 있네 습득이 보이네
----------「습득」전문
 
*습득은 당나라 때 사람. 국청사 풍간 선사가 주워 키웠다. 한산과 늘 같이 한암 깊은 굴에서 지냈고 절에서 허드렛일하여 밥을 얻었고 미친 짓 하면서도 선도리에 맞았고 시를 잘 했다. 태주사자가 한암으로 찾아가 옷과 약을 주니 ‘도적놈아 조적놈아 물러가라’하며 웃으면서 한암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이 오랜 시간 쌓아놓은 학문, 예술, 종교, 철학, 도덕, 등 온갖 인공적인 것들의 총체가 문화이고, 그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진보상태가 문명이다. 인간은 그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문명은 야만의 반대이고 자연과는 대립적 개념이 된다. 문명은 인간에게 안전과 편함과 행복을 제공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제한하고 억압하여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 반작용으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근원적으로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욕망이 잠재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친환경 건강법이니, 친자연의 주택이라는 것들도 모두 인간의 행복이 인공적인 문명으로만 충족될 수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송준영의 시편들은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성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철암 지나 통리에 내리다」에서는 철암과 통리라는 지역적 경계가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철암에는 검은 석탄더미라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낫과 톱을 어깨에 맨 갱부의 환한 장화발이 소리도 없이 지난다 하얀 이빨이 이빨을 마주보며 바삐바삐 떠간다 역사 안 드럼통 난로에 괴탄이 이글거린다>는 비록 가난하지만 인간적인 정과 삶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한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석탄도시에는 <산이 떠나가고 산보다 먼저 사람이 캐고 버린 버력만 산이 되어 어둠에 배를 깐다 무게적재함에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검게검게 볼록한 이마를 내민다>라는 표현 그대로 점차 인공화 되어가는 자연의 삭막한 풍경이 노출된다. 하지만 이 철암에는 근대화 이전의 <별빛 같은 마을>이 있다. 통리에 오면 그 <별빛 같은 마을>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그뿐 아니라 <형광등과 네온이 창백한 통리 역사엔 괴탄이 이글거리던 드럼통 난로가 없다 이빨과 눈이 유난히 빛나던 갱부들도 없다 탄가루와 긴 쇠꼬챙이가 콱콱 내리찧으면 빨갛게 흘러내리던 불티들도 없다> 그곳에는 <영화 속 같은 사람들이 파리한 형광등 대합실에서 앉거나 서 있다 유령처럼 땅을 밟지 않고 미끄러진다>.
그는 철암과 통리의 대조적인 풍경을 통해서 문명에 의해 자연성을 상실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비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면 철암을 지나 통리에 도달한 현대인이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시인은 그 해답을「습득」에서 암시하고 있다. 이 시에서 습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닌 분실이후에 생기는 행위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실낙원의 현대인에게 복락원의 꿈을 회복하는 방법이 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지하철 1호선 분실물센터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의 본성을 습득하게 된다는 이 시의 공간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시인은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의 지하철을 가상현실의 무대로 삼아서 <1호선 지하철 분실물센터에 있는 건/하얀 차돌 두어 개와 나를 따라온/청태 사이로 비치는 오대산 맨가슴 그리고/가부좌를 틀고 있는 청량선원이네 그곳엔/내가 주워온 금빛 옷을 걸친 늙은 부처 아니/법당 왼쪽에 단정히 앉아 있던/이마 말간 문수동자가 있네 아니 이 날/툇마루에 졸고 있는 하늘 한 자락과/푸른 솔잎 입에 문 물총새 한 마리 그리고/솔바람이 있네>라고, 현대인들이 분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러면서 끝내는 그 진면목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아니 지하철분실물센터/알림판엔 깔깔 웃음 웃던 습득물이 붙어/있네 동굴 속으로 고함지르며 사라진/습득*이 붙어 있네 습득이 보이네>라고.
이 시는 이 끝 장면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자연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도시선都市禪으로서 독자들에게 한 순간이지만 흙탕물 같은 자신의 내면을 맑게 투시하는 의식의 힘을 찾게 하는 것이다. 이때 선禪은 그들의 본성을 밝히는 불빛이 된다. 그는 그런 방법으로 선과 시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하고, 선의 감각을 현대시에 접목시키려 한다. 이 시의 언어에서 풍기는 선미禪味가 그것이다. 사실 선은 스님들의 선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잡한 도시의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서 엉뚱하게도 당나라 때의 선승 습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송준영 시인의 의도적 방법-현대시와 선의 융합-은 깊은 의미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문명과 자연의 새로운 만남을 일깨워주는 언어의 포퍼먼스라고 말할 수 있다.
 
* 송준영: 199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
 
정유준 시인의 시- 「목공소에서」 「살구나무는」
 
작업이 끝났다. 먼지 속에서 목을 늘어뜨린 알전구가 도구들을 흔든다.
이가 두 개 빠진 기계톱은 열기를 식힌다. 대패는 누워 있다. 결이 선
명한 대패밥, 잘게 썰린 톱밥의 가벼움, 보드라움을 만져본다. 나무의
혼들이 걸어나온다. 여린 잎들의 친근함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줄기의
비틀림, 바구미의 가느다란 길까지도 읽을 수 있다. 허공 속으로 나뭇
잎이 떨어진다. 바람이 분다. 나이테가 무수히 생겨난다. 먼지 속 한
켠에 웅숭그리고 있는 나무들이 오늘밤도 저마다의 꿈을 꾼다.
--------------------「목공소에서」전문
 
살구나무는 간지럽다. 세월의 더께, 무딘 껍질을 기어오르는 노린재 더
듬이에도, 나폴거리는 배추나비 날갯짓에도 몸을 뒤틀고 싶다. 혼곤히
갈라지는 햇살사이로 곤두박질치고 싶다. 늙은 수양버들들은 쿨렁거리
고 까치는 식욕을 돋구고 우체부가 지나가는 한낮이 반짝거린다. 개미
들이 발목을 스멀거리는 아우성의 봄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구나무
꽃불을 치쳐든다.
------------------------ 「살구나무는」전문
 
조선시대의 산수화山水畵의 자연풍경은 진경眞景도 있지만 거의 추상적인 가상현실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연과 인간의 정신이 하나가 되는 세계를 추구하면서 산수화를 그리고 감상했던 것이다. 따라서 산수화는 자연을 그린 풍경화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는 그림이기 때문에 독특한 맛과 향기와 정신적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과학적인 사실성을 중시한 서양의 인상파 풍경화와 동양의 산수화의 다른 점이다. 그림 속의 안개 낀 골짜기와 높은 봉우리들은 보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주고 상상의 세계를 펼치게 하면서 궁극적이며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이와 같이 산수화는 현실적인 자연의 미美와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의 높고 깊은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현대 한국화의 거장 운보 김기창 화백의 <바보 산수화>도 사실성과 일상으로부터 일탈된 천진한 동심의 세계가 관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의 그림은 현대인들의 정신을 정화하는 일종의 예술적 아이콘(ic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유준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편들이 동물적인 욕망의 언어들이 넘쳐나고 자연이 소멸되어가는 현대의 과도한 인간주의人間主義의 문명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나무의 명상」속에 담겨있는 그의 식물성의 명상언어들은 시대적인 현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의 언어이지만, 그 시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정화작용은 조선 시대의 산수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들의 소외감과 고독감은 정신적으로 연대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에 원인이 있다. 그 연대성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물론 사물과 인간(나)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 확대 된다. 따라서 연대성의 상실은 자아自我와 타자他者의 단절이며 열린 세상과의 단절이다. 정유준의 시편은 이런 단절의식을 연대의식으로 회복시키고, 자아自我와 타자他者의 융합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명상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만나고 그 내밀한 만남의 순간을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느끼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내고 있다.「목공소에서」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과 따스함, 겸허한 마음이 일을 끝낸 목공소 안의 풍경을 깊이 있고 정겹게 그려내고 있다. 시인과 나무의 친근함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죽은 나무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어서 죽은 나무와 시인이 결코 다른 세계로 분리되지 않고 한 세계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는 <결이 선명한 대패밥, 잘게 썰린 톱밥의 가벼움, 보드라움을 만져본다. 나무의/ 혼들이 걸어 나온다. 여린 잎들의 친근함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줄기의/ 비틀림, 바구미의 가느다란 길까지도 읽을 수 있다. 허공 속으로 나뭇/잎이 떨어진다. 바람이 분다. 나이테가 무수히 생겨난다.>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잘게 썰린 톱밥의 가볍고 보드라운 감각, 목공소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나무들의 혼, 허공 속으로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나무들의 생전 모습, 먼지 속 한 켠에 웅숭그리고 있는 나무들의 꿈....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포착하여 새로운 생명체로 살려놓는다. 이런 그의 언어는 사물과 한 몸이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들어가는 경이로움을 독자에게 느끼게 하고, 시인과 함께 그런 경험을 하게 한다.
「살구나무는」에서는 사물과의 융합이 더 생기를 띠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가 아닌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살구나무는 간지럽다. 세월의 더께, 무딘 껍질을 기어오르는 노린재더/듬이에도, 나풀거리는 배추나비 날개짓에도 몸을 뒤틀고 싶다. 혼곤히/ 갈라지는 햇살 사이로 곤두박질치고 싶다. 늙은 수양버들은 쿨렁거리/고 까치는 식욕을 돋구고 우체부가 지나가는 한낮이 반짝거린다. 개미/들이 발목을 스멀거리는 아우성의 봄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구나무/ 꽃불을 치켜든다.>에서 감지되는 무아無我의 경지는 시인과 살구나무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시인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전혀 찾을 수 없고, 오로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만 감지되는 그 세계. 그래서 시인의 마음과 살구나무는 한 몸이 되어버리고 환한 봄날의 한 때와도 한 몸이 되는 그 세계는 도道의 경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신적 경험의 세계는 독자들의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관념이나 지식과는 별개의 세계다. 마치 산수화 속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상상에 빠지게 하는 그 세계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아이콘(icon)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정유준(鄭有俊): 1998년 <문학창조>에 등단. 시집 「사람이 그립다」「풀꽃도 그냥 피지 않는다」「나무의 명상」「물의 시편」
 
 
김상미 시인의 시- 「죽지 않는 책」「하얀 늑대
 
 
이따금 사람들은 책 밑에서 토론을 한다. 나무 그늘 밑에서 토론을 하듯.
그럴 때 책 속의 언어들은 바람처럼 우리들 내부로 시원하게 불어오기도 하고
태풍처럼 비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삶이 책 속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은 제 자신을 얘기하듯 책을 읽고
읽은 책들로 은밀한 자신만의 정원을 꾸민다.
이따금 나는 그들의 정원에 초대되어
햇빛이 아닌 다른 빛에 열광하는 꽃과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그들만의 비탄을 탐색한다.
아직도 그들 속에 숨쉬는 자연의 일부인 그들을 훔쳐본다.
그들에게 책은 큰 평화이기도 하고 가장 큰 불안이기도 하고
끝끝내 이기고 싶은 敵이기도 하지만
책읽기란 맨 얼굴로 산소를 들이 마실 때처럼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
운명을 씹듯이 책을 씹으며 자꾸만 작아지는 사람들.
그들의 타는 입술은 무덤 같아
혀 밑에 파묻힌 죽은 자들의 얼굴을 보는 듯하지만
책에 대한 경의는 책에 빠진 그 사람만의 행복.
때로는 행복한 책 한권 때문에
임종을 앞 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내 속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부싯돌처럼 서로 비비며 불꽃을 만들어 내는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방 저 방에서 불이 켜지는 책.
그들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는 책.
죽지 않기 위해 자꾸만 창백해지는 책!
--------「죽지 않는 책」전문
 
늑대 한 마리를 그렸다
크고 무시무시하고 털이 무성한
그러자 스무 마리의 늑대 사냥개들이 나타나
둥그렇게 늑대를 둘러쌌다
20대 1의 팽팽한 살기殺氣가
먹고 먹히기 직전의 생명체에서 살인적인 에너지를 뽑아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늑대를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들
그럼에도 침착할 정도로 도저한 늑대의 자신감!
오른쪽과 왼쪽, 뒤쪽과 앞쪽,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는
핏빛 외마디 비명소리들!
픽픽 내팽개쳐지는 개, 개, 개들의 시체
20대 1의 피비릴내 나는 압도적 승리!
그 앞에 홀로 포효하는
불굴의 전시
나는 그를 색칠했다
굽힐 줄 모르는 순백의 혈통
작렬하듯 단숨에 내 영혼을 휘저어 놓고
우아하게 흰 목털을 곤두세우며 웃는
거대한 야성!
이제 지구 위에서 영원히 사라진
하얀 늑대 한 마리
--------「하얀 늑대」전문
 
 
독서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반자연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죽지 않는 책」에서 시인의 갈등과 고민은 인공과 자연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햇빛이 아닌 다른 빛에 열광하는 꽃과 나무 사이로/어렴풋이 보이는 그들만의 비탄을 탐색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작게 만드는 책을 운명적인 현실로 받아들이고, 임종을 앞 둔 인간에게도 책은 죽지 않는 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죽지 않는 그만의 책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것이 <부싯돌처럼 서로 비비며 불꽃을 만들어 내는 책./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방 저 방에서 불이 켜지는 책.>이다. 현실과 상상의 결합이 빚어내는 사유의 공간이 깊이 있게,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상상은 가상현실 속에서 더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실존적 모습 때문이다. 예술에서 리얼리티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드는 이들은 이미지의 사실성을 무시하고, 실재하는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때때로 예술 그 자체가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외면한다.
「하얀 늑대」는 순수한 심리적 이미지의 시다. 시인은 어느 날 하얀 늑대의 그림을 그리면서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늑대 한 마리를 그렸다/크고 무시무시하고 털이 무성한//그러자 스무 마리의 늑대 사냥개들이 나타나/둥그렇게 늑대를 둘러쌌다//20대 1의 팽팽한 살기殺氣가/먹고 먹히기 직전의 생명체에서 살인적인 에너지를 뽑아냈다/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늑대를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들/그럼에도 침착할 정도로 도저한 늑대의 자신감!> 이 늑대와 사냥개들의 혈투는 악과 선의 경계가 없는 순수한 본능적인 싸움이다. 시인은 그 본능적인 싸움의 장면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잠재된 야성野性의 일부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야성은 문명 속에 파묻혀버린 자연의 에너지다. 그러나 인간의 DNA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 야성은 언제 분출될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 그는 그런 인간 심리의 내면적인 강렬한 의식을 가상현실의 ‘늑대 이미지’로 구체화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 생생한 가상현실의 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이 경계 허물기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현대시가 나아갈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인간의 심리적인 현상을 이미지로 구현하고 그것을 실상의 세계와 동일하게 처리하는 ‘디지털 시’의 가상현실과 같다. 디지털 시대의 이런 문학현상을 이인화는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조선일보 2007,4,9) 김상미의「하얀 늑대」는 그런 가상세계의 이미지와 함께 시의 끝부분 <작렬하듯 단숨에 내 영혼을 휘저어 놓고/우아하게 흰 목털을 곤두세우며 웃는/거대한 야성!>에서는 195,60년대의 미국 서부영화의 낭만적인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서부 영화는 한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 수십 명의 악당을 상대로 싸우는 보안관의 우직하고 늠름한 모습을 그려내어서 정의를 지키는 영웅의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당시 명배우 <하이 눈 High Noon〉의 게리쿠퍼, <역마차>의 존 웨인,〈셰인 Shane〉의 아란 낫 등은 서정적이며 남성적인 이미지로 1960년대 전후戰後의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도 용기, 자기희생, 책임감, 정의심 등 인간성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웠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심어주었다. 이런 서부영화의 정의, 평화, 사랑, 등 멋진 주제는 1970년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황야의 무법자> 등에서 잔인한 총잡이의 이미지로 인해 큰 상처를 입고 사라졌지만, 당시 스크린 속 배우들의 모습은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뇌리腦裏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하얀 늑대」를 읽으면서 195,60년대의 미국 서부영화의 배우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미지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미지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된다. 따라서 21세기의 시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무한한 상상의 공간에서 피어나는 언어의 꽃이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 김상미: 1990년 <작가 세계>여름호로 등단. 시집 <모자는 인긴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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