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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댓글:  조회:3104  추천:0  2018-03-25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1)        1 상징주의의 정신        이상주의, 정신주의          1891년 말라르메는 상징의 신비란 "영혼의 어떤 상태를 보여주기 위하여 조금씩 조금씩 어떤 대상을 환기시키거나, 아니면 반대로 한 대상을 선택하여 일련의 해석 과정을 거쳐서 영혼의 어떤 상태를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글자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빚어내는 데에 몰두한다 함은 정신주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지향을 요약하는 말이다. 상징주의는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에 대한 항의인 것이다. 물질주의는 졸라의 자연주의나 고답파적 사실주의로 드러나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에 반대하며 반물질주의와 반자연주의로, 즉 관념과 이상이라는 정신 우선주의로 기울었다.   자연이라는 개념도 상징주의에서는 정신적 조화의 문제와 상관되는 것이었다. 조화를 언어의 세계 속에 구현하는 것, 즉 시 속에 내적이고 우주적인 질서를 다시 빚어냄으로써, 언어와 자아와 우주가 하나로 포용되는 상태, 그것이 상징주의의이상이었다. 고답파의 무관심에 가까운 "무심"자체는상징주의에서는 무용한 것이었다. 내적 상태에 몰두하였지만 그것은  개인의 차원 너머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것이었다. 초월을 위하여 "탈인성화" 가 요구되었으므로 낭만주의와도 구별된다.                낭만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주관적, 개인적 자아에 두고서 그 자아의 본질을 감성과 심정을 통해 파악하고자 하고 상징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인간까지를 포괄하는 우주 자신에게로 환원시키고 그 우주의 본질을 감각과 이념을 통해 파악하고자 한다. (김기봉, 2000; 113)          이상이라는 것은 막연한 동경이 아니었으며, 감각이나 감정 속의 안주가 아니라 스스로를 우주적 질서 속에 합일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와는 달랐다. 더구나 자연주의에서의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었다.    상징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 자연주의 담론이 제시하는 생경하고 거친 현실로 축소될 수 없다는"( Marchal,1993;8)) 저항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상징은 현실의 것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칠고 절망적인 현실(ici-bas) '저 너머(au-dela)의 현실을 환기하는 것이 상징의 중요한 존재의미였다.                 이제 현실의 것은 적이 되고, 철학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저 너머 세상은 모두 기꺼이 수용되었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들이기 때문이다.(Marchal,1993;8).          상징주의는 따라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동반하고 필요로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와 헤겔과 니체의 철학은 상징주의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 외에도, 기존의 진리에 의문을 표시하고 새로운 가치의 기준을 만들려 하였다는 태도 자체에서도 상징주의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와 아울러 신비와 신비주의는 상징주의 미학의 이성적 모습이자 '가장 세련된 형태'로서 '유행 현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 문학은 영혼, 정신, 이데아, 본질이란 개념에 집착한다. 또한 자연주의 소설에 드러나는 것과 같은 생경하고 과장된 현실보다는 신화와 전설에서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2)        1 상징주의의 정신          문학의 자율성          자연주의에서 처럼 문학과 과학이 접목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주의는 언어 외적인 모든 범주들을 떨쳐내고자 한다. 이는 고답파의 예술지상주의를 계승한  측면이다. 언어는 스스로 자율성을 확보하기에 주력한다. 문학과 언어 자체를 되찾고자 한다. 샤를르 모리스는 1891년 상징주의의 차별성을 다음처럼 강조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문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생리학이나 지리학이나 역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되면 문학에 어떤 특이한 혼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구가 가져다주는 혼동이다(중략) 사람들은 도덕이 도덕론자를 유인했던 논리적 결론을 시인들에게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란 '아름다움'외에 다른 본질적이고 자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Huret, 1984;94)       도구와 목적의 혼동이 자연주의의 부정적인 면의 원인이 되었거나 그것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언어의 자율성과 미적 독립을 위하여 문학 외적인 목표는 모두 문학에서 배제해야 한다. 문학은 언어 자체만으로써 내적인 긴밀한 구성을, 즉 건축물처럼 '미리 계획된' 구성의 완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은 원래 에드가 포우를 계승한 보들레르의 지향이었다. 이러한 지향은 말라르메로, 발레리로, 다시 이어진다.     문학은 문학 자체로 존재의 근거를 지닌다. 아름다움은 진실되거나 선한 것과 구별된다. 이러한 신념은 고답파에 이어 상징주의가 문학에 가져다준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다. 이미 도래한 문학의 상업주의 시대에, 문학의 시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는 문학이 이제 모순되게도 절대적으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시집은 자비로 출판되었고, 스스로에게 비상업적인 가치를 부여하였다. 말라르메는 말한다.         어쩌면 팔리면 안 될 것을 거래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더구나 그것이 팔리지 않을 때에는.       ( :Mallarme; 1974;378 )        팔리지 않는 문학이란 다시 말해 정신의 목적에 봉사하기를 희망하는 문학이었다. 어떤 목적이나 종속을 거부하였던 문학, 다시 말해 대중과의 유리遊離라는 위험까지 자청하였던 문학은 1857년 세기말까지 "이상과 절대에 목마른, 대부분은 신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거의 신앙을 대신"(Marchal, 1993;10)해주고자 하였다. '문학의 사제''문학이라는 종교'라는 수식어들은 이러한 현상에서 나온 말이다. (계속)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3)        1 상징주의의 정신              비교주의, 난해성           사실주의 시대에 소설은 대량 인쇄권을 얻어 거대한 대중이라는 문학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상징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내밀한 시 속에서 "정신의 마지막 피난처를 찾았으며, 입문자들만 다가갈 수 있는 비교주의(秘敎主義)의 성역을 찾고자" 하였다.(Marchal, 1993;10) 비교주의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지 않은 종교의 태도를 말하므로, 상징주의는 일종의 정신적 귀족주의에 닿아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문인들이 신비주의 결사에 가입했다는 연구와 자료들이 있다. 상징주의 주변에 탄생한 데카당스도 반(反)대중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상징주의자들은 일종의 '선민의식'(Marchal, 1983;10)을 지니고 비교주의에 탐닉하며 새로운 시 언어에 대한 탐색에 나선다. 그들은 고대어를 차용하거나 신조어를 만들기도 하며, 신문이나 연재소설의 일상어와 구별되는 순수한 언어의 탐구에 전념한다. 기존의 구문 구성법을 해체하거나 그것에 대한 새로운 시도 등으로도 이어지는 이러한 자세는 상징주의 문학에 필연적으로 난해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논리적 근거 하에 시작하여,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난해함은 그들에게는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 난해성은 "독자의 준비 부족이나, 시인의 준비 부족에서 온다."(Mallarme, 1974;869)고 상징주의자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구문 구성법과 단어 선택 등의 난해함, 거기에 더해지는 상징 자체의 난해함, 반대중주의, 비교주의, 이 모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새로운 상아탑이었고, 결국 비난와 오해를 동반하며 상징주의 쇠퇴의 중요 요인이 되기까지 이른다.     이러한 언어추구의 양상 외에도 우리는 보들레르의 댄디즘과 에서 상징주의가 일반 대중과 유리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댄디즘(dandysme)'은 19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일종의 문학적 태도로서, 타협하지 않는 예외적 삶의 양식을 통해 사회적 권위를 얻으려는 태도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보들레르는 댄디즘과 나르시즘을 연관지어 보았다. 그에게 댄디즘은 "정신주의와 극기주의에 닿아있는" 것으로, 영혼의 초월적이고 순수한 체험을 위한 것이었다. 알코올과 아시슈(hasghisch 인도 삼에서 뽑은 마약')라는 인위적 방법으로 실현된 창조의 상태인 '인공낙원'을 그가 그리는 것도 이러한 체험과 상통한다. 그것은 시적 창조의 원동력인 상상력과 인공 공간을 벼리는 일이어서,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갔다.         이러한 자세는 귀족주의보다는 고립주의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언어탐색과 난해성, 비교주의 등은 예술과 정신의 독자성 추구에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질주의와 이성론과 엄정한 객관적 묘사나 무감동에 맞서서 정신의 '불확실한 영역' '미지의 영역' '불확정성'을 찾는다는 것은, 굳어버린 토대를 지우고 정신의 자율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일이었다.     상징세계는 그리하여 냉엄한 질서에 맞서서 유동성과 환상이 빚어낼 새로운 조화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존 예술에 대한 부정은 그러므로 생성과 삶을 위한 움직임이었으며, 환상은 환상을 위한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상징주의의 이상은 일탈이나 격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 현실, 현상, 사실의 세계를 끊임없이 초월하여 '영혼의 상태'와 이상, 관념,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징주의가 설혹 현실과 사실의 세계를 떠나고 벗어날지는 모르되, 현상의 세계 자체까지 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징주의는(----) 반드시 현상을 통해서 관념과 본질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고, 또 포착된 관념과 본질이 현상 그것에 여일하게 실려서 현상 및 존재와 관념 및 본질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결함 내지 통일을 이루기를 꿈꾼다.(김기봉, 2000;110-111)              상징주의가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내재성과 독자성은 이렇듯 고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의 조화를 위한 것이었고, 궁극적 통합을 향해있었다. 통합이란 현상에서 출발하여, 현상과 이상의 모순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초월이란 허황한 구름잡기도, 세상 모두를 버리는 일도 아니었다.(계속)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3)        2 상징주의의 미학              상징주의는 그러므로 도피 자체를 위한 이상 추구가 아니었다.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현실의 대안으로 이상과 절대적 관념과 형이상학을 미학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것, '지고의 미(beaute superieure)'를 표현하고 창조하는 것이 상징주의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 결과 "모든 인식 대상은 하나의 상징 현상이요 상징적 존재"(김기봉, 2002-32)이게 된다. 즉 현상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상징체계로서, 그것이 감추고 있는 본질적 실체에 다가서는 것이 상징주의 철학의 요체였다.     말라르메에 의하면 대상들의 현재의 외양 자체는 현실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숨기고 있는 것이며 ,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하고자 한다. 현상은 관념을 표현하고 있거나 함축하고서 그것을 끝없이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에게 이 세계는 상징들의 거대한 덩어리, 상징의 숲으로서,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고 읽고 그것을 체험한다. 현상은 끊임 없는 해독을 요구하는 본질의 전언자(傳言者)인 것이다. '이 세상(ici-bas)'이 아니라 '저 세상(la-bas)'을 현상에 대한 관념 속에 불러일으킨다. 시인에게는 상징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관념'이 예술로 형상화하지 못한다면, 철학이나 사상에 머물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주의는 언어 자체의 미학이었다. 일반 언어가 아니라 환기력 있는 언어의 추구였다. 문학은 사실적 산문을 넘어서서 상징적, 함축적, 암시적일 수 있는 힘, 순수한 환기력을 빚어내고 간직하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언어의 이러한 힘을 위하여 상징주의는 언어에서 굳어버린 관습을 지우고자 한다. 굳어진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이러한 언어탐구의 과정을 시인들은 연금술(hermetisme)에 비유하였다. 그것은 언어의 금과 은을 만드는 방법이었으며, 하나의 의식(儀式)이었다. 현자의 돌이나 지모(地母)나 절대의 언어는 동일한 신성성(神聖性)을 목표로 하였다.     상징의 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감각의 정화작업과 동시에 언어의 정화가 요구되었다. 본질적 관념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는 언어의 새로운 사용법이, 그 세계의 자연스런 유로(流露)를 위해서는 암시의 기법이, 암시를 위해서는 음악의 기법이 필요하였다.           교감       새로운 질서의 공간을 빚어내고 읽어내기 위해서는 감각의 정비가 필요하다. 감수성을 신선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낡은 감각들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부정, 즉 어떤 논리적 필요와 근거 하에 기존의 감각체계를 뒤흔들고 지우는 행위를 랭보는 " 모든 감각들의 오래고도 광범위하며 논리 있는 착란(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이라고 설파한다.     이는 감각의 틀을 단순히 새 것으로 바꾸자는 차원이 아니었다. 랭보는 스승이었던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인은 착란에 의하여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시인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세계를 촉지하고, 그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낡은 시선으로는 볼 수 없고 예언자의 통찰력을 가져야한다고 하였다.     이 '보는 힘', 즉 정신의 참되고 아름다운 새 질서를 완성하는 능력의 소유자를 랭보는 견자(見者voyant)라 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감각의 오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착란을 통하여 견자가 되는 것, - 이는 마치 무병(巫病)을 앓고 난 뒤에 신통력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견자-시인은 스스로 자신의 제어력을 벗어나고 자신을 버린 상태에 도달한다. 이때 그는 "나는 타자다"라고  말한다.나는 죽은 것이다. 말을 하는 자는 나의 넋이 아니라 다른 자의 넋이다.      이토록 무의식의 바닥으로까지 내려가 만나고자 하였던 감각과 인식의 또 다른 차원을 보들레르는 일찍이 랭보보다 앞서, 이라는 시에서 열어주었다. 랭보가 말하는 '모든 감각들의 착란'이란 보들레르에게서는 감각과 감각의 경계선이 없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청각과 시각이 통합되는 것, 즉 색깔이 있는 청각(audition coloree)'등으로, 감각들이 섞이며 새로운 감각으로 변하여 또 다른 '영혼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감각과 정신이 해방되어 맞는 낯선 상태 즉 '미지(未知)'에 대한 추구를 말해준다. 그곳의 "가장 새로운, 보장된 높은 자유(mallarme 1974;363)을 위하여 무구(無垢)한 감각과 시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감수성과 시선이 없으면 언어는 세계를 창조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까지 불러일으키는 증상." 다시 말해 '공감각(共感覺)'은 여컨대 질서를 다시 빚어내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이다. 이 교감(交感)은 감각과 감각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감의 세계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섞인다. 그리하여 자아조차 버린다. 나는 나를 벗어나 나를 바라본다. 자아가 아니라 타자-자아인 상태에서 " 자신의 생각이 발현하는 것에 동참"한다고 랭보는 말한다(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자아의 바깥에서 자아의 발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행복한 격리에 대해 말라르메 또한 말한다. "나는 비인칭(impersonnel)이 되었다." "내가 알던 스테판느가 더 이상 아니며", 우주적 합일을 향하여 가는 나의 능력(une aptitude)일 뿐이다"라고 (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 논리와 언어의 우주적 합일을 위하여 그는 개인의 감성을 버리고자 한다. 그것을 시인은 '탈인성화(脫人性化)라고 한다. 일체의 감성적 여건으로부터 비인칭화 됨으로써 거짓된 감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상상의 모순을 극복할 논리를 수용한다.     말라르메와 랭보는 결국 같은 곳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탈인성화나 자아의 의도적 의기를 통하여 그들은 정신과 언어의 격을 바꾸고자 하였다. (계속)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5)        2 상징주의의 미학              암시와 모호성              '암시(suggestion)'의 기법은 문학, 음악, 미술, 춤, 연극 등, 상징주의의 모든 작품에서 필요로 하는 기법이다. 상징주의자들은 대상을 묘사할 때 객관적인 언어로 윤곽있게 선명하게 그리는 일을 대상을 죽이는 일이라고 보았다. 말라르메는 "오직 암시만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대상을 명시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일이다. 시의 기쁨이란 조금씩 점쳐보는 데 있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의 꿈이다.(Mallarme, 1974;869)           조금씩 점쳐본다는, 상징이 주는 기쁨의 여지는 지시적 언어로써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꿈이나 수수께끼를 풀어가듯이 대상에 대한 관념을 예감하며 대상의 양상들을 따라가는 것이 언어가 주는 기쁨이다. 대상을 '통째로 취한다'는 것은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기존 언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모든 생성을 전적으로 막는 일이다.              고답파 시인들은 사물들을 통째로 취여서 그것을 제시한다. 따라서 신비감이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쁨이란 조금씩 풀어 나가는데 있는 것이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의 꿈이다.(Mallarme, 1974;869)           "신비야말로 상징을 이루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비가 없으면 생성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신비야말로 생성의 영역이다. 사물을 명명하는 것은 상징의 목적에 반하는 일, 즉 신비로운 상상작용이나 유추작용, 환기작용을 막는 일이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꿈과 언어가 주는 기쁨을 가로막는다.     배를렌이 음악이 그려내는 모호한 영역에 집착하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음악에서의 '뉘앙스'를 시에 이식시키고자 한다. 베를렌의 모호함에 대한 추구는 랭보의 '감각들의 논리 있는 착란'이 겨낭하는 바와도 통한다. 모두 다 대상에 대한 굳어있는 의식 지우기에서 출발하여, 열린 감각과 질서를 향하겠다는 의지를 따른다. '회색 노래'란 서정적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지향이었다.              또 그대는 오해를 할 수 없도록        말을 선택하려하지 말 것.        '미묘함'이 '선명함'에 뒤섞이는        회색 노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으니.              그것은 너울 뒤의 아름다운 두 눈,        정오의 이글거리는 태양빛,        미지근한 가을 하늘에        밝은 별들의 푸른 뒤엉킴이어라!              왜냐면 우리는 '뉘앙스'를 아직도 원하기 때문(---)                                                                       암시기법은 그 특성상 미술에 손쉽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 미술에서 암시는 신비와 거의 동의어였다. 암시의 기법은 신비의 해석이라는 작업에 함께 참여하도록 감상자를 더 쉽게 청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상상과 무의식이 개입되는 감상 - 이로써 감상자는 적극적인 해석자가 된다.              르동은 암시적인 기법이란 사유를 자극하면서, 그것이 조명하고 예찬하려는 꿈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숭고한 조형 요소들을 결합시켜 빛을 발산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모호한 형식을 통해 '감상자'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유도했다(장티, 2002;92~93)              암시는 그러므로 단순한 하나의 기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표현기법에, 그리고 사실주의 허상에 맞서는 일이다. 말라르메에 의하면 '완전히 허구적인 공간'을 빚어내는 일, 즉 기존 공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태양광선 아래 사물을 새롭게 보았던 방식과도 어쩌면 상통한다. 빛이 인상주의자들에게 해주었던 역할을 상징주의자들은 암시의 기법에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감각과 언어의 쇄신과 병행하는 것, 새로운 사물읽기와 같이 가는 것이었다. 암시법은 다르게 보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제부터 상징주의는 한 마디로 다르게 보는 법이었다.              (----) 새로운 시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상징주의자들의 덕분이다. 인상주의가 회화를 재현의 틀에서 분리시킴으로써 현대회화를 고안해내었듯이. 언어의 상징기능에 우위를 두면서 동시에, 말을 부호만이 아닌 또 다른 무엇, 완전한 권리를 가졌으며 향후로 확고부동해질 어떤 예술, 즉 시의 - 화가에게 색채 같고 음악가에게 소리같은 - 특수 재료로 만들면서, 우리에게 다르게 읽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상징주의이다.(Marchal, 1993;30)           인상주의 회화에서 빛의 발견과 같은 의미를지닐 정도로, 상징주의에서 중요한 발견은 서술이나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 암시와 상징을 통해 제시하는 방법이었다. 단지 정확하거나 사실적인 기술 또는 함축적이거나 웅변적이기만한 기능에 머물러서는 이제 시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지시어와 지시대상과의 자의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본질을 향하고 다른 우주를 창조해내야 한다. 창조가 이루어지는 때에야말로 '문자 속의 신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 순수한 '허구'가 실현되며, 글쓰기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기본적으로는 세계라고 하는 상징 현상을 해독해내는 '번역자'이면서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특이한 상징적 기능을 지닌 언어를 빚어내는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 (김기봉, 2000;40) 시인의 소명이란 상징을 읽어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들을 통해 본질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계속)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6)        2 상징주의의 미학           음악           베를렌이 이라는 시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음악은 상징주의 시의 바탕을 만드는데 언어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말라르메는 "음악에서 우리의 자산을 되찾아오는 것"이 문학이라는 예술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음악은 현악기나 목관악기의 소리 등, 음악의 기초 재료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마치 기악편성이나 교향악과 같은 것이다.     이 밖에도 음악은 상징주의 언어에서 여러 의미를 지닌다. 음악은 암시의 기법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의 신비를 빚어내는 일에 조력자 역활을 한다. 또한 음악은 시에 우연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역동적 움직임을 주도하기도 한다.     음악은 나아가 마치 글쓰기의 직접적 도구나 재료인 것처럼 사용된다. 말라르메의 작품 에는 문자들이 악보의 음표들인 듯 배열되어 있다. 소리의 강약처럼 문자들이 크게 작게, 여러 다른 활자들로써 배치된다. 음악에서 휴지나 중지가 있듯이 백지와 텍스트 전체를 주도하기도 한다. 그가 를 악보처럼 생각하고 썼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새롭게 창조될 상징들의 조화로운 세계. 즉 언어가 빚어낼 '새로운 환경'을 위해 이처럼 음악의 도입은 필수적이었다. 상징주의 시에서 처럼 철저하게 음악을 사용한 문학은 없다. 음악에 문학을 근접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상징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음악을 이라는 시에 이미 차용하고 있다. 그의 라는 시는 언어와 음악과 춤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융해를 보여준다. 이들은 단지 언어의 기교 차원만이 아니라 시의 원론에 음악을 사용하였고, 음악의 구체적인 사용법들을 보여준다. 음악의 모방 차원을 이미 넘어, 말라르메는 '시는 더할 나위 없는 음악'이라고까지 하였다.      음악을 더욱 현실적으로 언어에 적용한 예는 베를렌에서 찾을 수 있다. 베를렌은 "여전히 그리고 언제고 음악을!"이라고 에서 외쳤다. 그는 음악을 시 속에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거창한 야망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 사용은 소박하지만 능란하다. 리듬의 도입은 그의 시에서 아주 자연스러워서 음악과 시의 리듬은 구별할 수 없도록 거의 하나가 되어있다. 이것이 그의 서정시를 완성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그의 시에서는 언어와 감정과 음악이 완전히는 분리되지 않는다.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끝)        3 상징주의의 언어           말라르메가 "시를 만드는 것은 생각들이 아니다. 그것은 말들로써 이뤄지는 것이다"라고 르동에게 설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은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나. 여기서 시인은 문학은 문학 외적인 것을 분리하고, 상징주의는 결국 언어탐구라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 언어는 마침내 그것 자체로 '살아 있는 존재'여야 한다고 하였다. 언어가 살아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언어은 죽은 언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학어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말라르메는 언어를 두 개의 층위로 구분한다.              우리 시대의 떨쳐버릴 수 없는 욕구 중 하나는 한편으로는 날 것 혹은 직접적인 상태와,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인 상태로, 마치 서로 다른 기능을 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말의 이중적 상태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22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 / 칼 하인츠 보러 최문규 댓글:  조회:1877  추천:0  2018-03-25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 칼 하인츠 보러   최문규   I. 현대성과 심미성 (……) 보들레르가 현대성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하버마스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들레르의 글에서 그 점을 읽을 수 있다. “현대성은 지나가는 것, 일시적인 것, 우연적인 것으로서 이것이 예술의 절반이며, 또다른 예술의 절반은 바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예술가에게는 현대성이 있었으며, 이전 시대에도 유지되었던 아름다운 그림의 대부분을 보면 거기에 서술된 것은 바로 그 시대적 의상을 입고 있다.”(보들레르) 현대성에 대한 보들레르의 정의는 무엇을 꾀하는 것일까? 분명한 점은 바로 ‘일시적인 것’이라는 특성을 취하는 매시대의 현대 예술에서 소위 전통적인 본질인 영원성을 구원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보들레르는 현대적인 현재의 조건하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의 에피파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된 문장의 의도는 분명 그 글의 서두에 나오는 문장을 통해 부연 설명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현대성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점은 지나가는 것에서도 유행이 예술적인 것을 취하게 되는 것, 그것을 유행으로부터 획득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끌어들이는 것이다.”(보들레르) ‘영원한 것’이 기능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것’이 포기될 수 없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일시적인 것’은 단지 기능으로 남을 뿐이다. 이러한 ‘일시적인 것’의 순수한 기능 특성은 보들레르의 텍스트에서 두 차례나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 하나는 『현대적 삶의 화가』의 첫번째 장이며, 거기서 ‘시대’ ‘유행’ ‘도덕’ ‘열정’의 의미를 지닌 ‘상대적인 요소’로서 일시적인 것은 미의 ‘불변하는 요소’, 즉 ‘영원한 것’을 향유하도록 만든다고 언급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제4장이며, 거기서 미의 ‘영원한 것’은 ‘일시적인 것’ 없이는 ‘아무 쓸모도 없는 추상적인 미의 공허함’에 빠진다고 언급되고 있다. 보들레르의 에세이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따라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열정이며, 그 아름다움은 고대의 전형적인 모범에서 연역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현재 시간에서 생산된다. 이것은(하버마스 혹은 야우스가 생각하는 것처럼―옮긴이) 현대 혹은 묵시적인 미래에 대한 이론적 명제가 보들레르의 텍스트에 담겨 있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오히려 바로 고대의 고유한 ‘비밀스런 미’에 도달하는 일이 현대에서도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들레르는 일시성과 영원성이라는 두 가지 양극적인 요소의 이중성 속에서 그 비밀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즉 기능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 예술적 요소―이 두 가지 간과될 수 없는 패러다임이 ‘영원한 것’으로 남게 되는데―의 법칙에서 말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실상을 야우스는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으며, 하버마스는 그러한 야우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오랜 전통 속에서 고대 혹은 고전적인 것이 지니고 있던 그 위치를 바로 영원한 것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것의 정반대인 영원한 것이 보들레르에게서는 지나간 과거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야우스, 『도전으로서의 문학사』) 역사철학적인 관심사에서 보들레르를 읽고 있는 야우스는 ‘미에 대한 이성적이고도 역사적인 이론’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과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이론을 서로 대립시키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잘못 유도된 해석이다. 따라서 야우스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을 역사철학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처럼 여기서도 보들레르의 순수미학적인 이론, 즉 현대의 일시성과 우발성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의 이론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즉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의 보들레르의 이론을 현재를 열정적으로 경험하는 역사적인 이론이라고 뒤집어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 또한 보들레르의 ‘미학적 프로젝트’를 약화시키고 있는 야우스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목적은 소위 지배적인 ‘현재의 이론’을 구성하는 데 있다. 이것은 고대의 패러다임과 궁극적으로 결별하려 했던 보들레르의 ‘자기 정립’이라는 타탕성 있는 관점을 헤겔 식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즉 하버마스는 미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념을 오로지 ‘시대 성찰’이라는 범주에서만 유도해내고 있을 뿐 그 본래의 정반대적인 근본 특징, 즉 ‘비밀로 가득 찬 것’ ‘극도로 어렵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을 간직하려 했던 보들레르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현대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것을 꾀하고 있다. 즉 일시적인 순간은 미래적인 현재의 진정한 과거로서 확인될 것이라는 점이다”.(하버마스) 그러나 보들레르는 현대로부터 그 본래의 비밀스런 미를 끌어내려는 심미적인 충동에 주된 관심사를 갖고 있었다. 즉 보들레르의 텍스트는 ‘시대’의 모티브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매우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심미적인 충동에 일방적으로 ‘역사이론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하버마스의 시각은 조심스럽게 파악되어야 한다. 미의 두 가지 특성에 대해서 보들레르는 미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각각의 현재’에 해당된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의 모든 화가에게 현대는 이미 주어져 있었다. 이전 시대에도 유지되었던 아름다운 그림의 대부분을 보면 거기에 서술된 것은 바로 그 시대적 의상을 입고 있다.”(보들레르) 이제 분명한 점은 시대성과 영원성의 활성화에 대한 보들레르의 변증법적 형상은 결코 ‘현재’의 이론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술의 이론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보들레르는 일시적인 것 혹은 현재의 모습 속에서 예술의 영원성을 구출하고자 했다. 특히 현재의 모습이 예술의 영원성을 가능케 할 경우 그것은 더욱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와 관련된 일시성의 주장은 아름다운 것에 명상적으로 집중하는 일을 위해 단지 기능적으로만 주어지고 있을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적인 차원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예술의 이중성은 인간의 분열에서 나온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는 부분을 예술의 영혼으로서, 변화하는 요소를 예술의 육체로서 파악하게 된다.”(보들레르) 아름다움을 ‘행복의 약속’이라고 목적론적으로 정의하였던 스탕달을 보들레르가 비판하였다는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특히 미의 ‘귀족주의적인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들레르는 ‘행복의 변화하는 이상’을 기준으로 삼았던 사유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미적 현대의 개념을 내세운 보들레르가 무엇을 목표로 삼았는지를 더이상 간과할 수 없다. 즉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 유일한 토대는 역사적으로 파악된 ‘현재’라는 지시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름아닌 ‘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무한성’이라는 개념과 ‘전율’이라는 범주와 밀접한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역사철학적인 매개는 진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롱기노스의 『장엄함에 관하여』를 끌어들였던 쿠르티우스(Curtius)에 대한 야우스의 비판 또한 잘못된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현대성은 바로 롱기노스의 글에서 이론적으로 최초로 주어졌던 장엄함의 상상력을 통해서 조명되며, 현대적인 미에 대한 보들레르의 생각이 바로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와 야우스는 이러한 점을 오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역사철학적인 진보 도식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야우스는 한편으로 비초월적인 시대성을 지닌 스탕달 및 청년 독일파의 낭만주의 성향과 다른 한편으로 시대적인 것을 수수께끼처럼 경험했던 보들레르 사이에 놓여 있는 미묘한 차이점을 매끈하게 무화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아무런 차이점을 제시하지 못한 채 단지 하나의 역사적인 단계, 즉 그 자체 이미 동일한 모양의 역사적인 단계만을 형성해내고 있다. 이러한 분석 시각이 바로 게르비누스(Gervinus) 이후의 문학사에서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 즉 심미성의 결핍인 것이다. 여기서 발전된 심미적 이론의 전망에 대해 하버마스가 못마땅해할 것이라는 점은 시간을 지양시킨 바 있던 셸링의 동일성 철학을 비판하였던 그의 초기 글에서 이미 읽어낼 수 있다. 반역사적인 셸링을 명백하게 비판하며 실러, 헤겔, 마르크스, 청년 독일파에 의존하여 역사적인 주장을 제시하는 하버마스는 보들레르에 의해 상상화된 미와 관련하여 그 미를 은밀히 목적론적으로 파악하려는 필연적인 결단 상태에 빠지고 만다. 즉 하버마스는 예술을 유물론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보들레르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낙관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을 내세운 니체 이후의 ‘심미적 이론’을 마침내 비판할 수 있는 토대로서 하버마스는 보들레르의 이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하버마스는 니체의 눈으로 보들레르를 읽지 못하고 오히려 헤겔에 의해 변질된 눈으로 보들레르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니체의 시각으로 보들레르를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니체를 현대성의 프로젝트가 본궤도에서 이탈하도록 만든 본래의 죄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니체를 역사철학과 예술의 보편주의적 철학을 심미적 이론으로 대체시키려 했던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II. 시간의 지양:미학적 범주의 형상화로서의 「마주친 여자에게」 마주친 여자에게 귀 따가운 길거리가 내 둘레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상복 차림의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여자 하나가, 장중한 비통의 얼굴로 지나갔다, 화사로운 한 손으로 꽃무늬 장식의 옷단을 치켜들고 흔들어대면서; 조각상과도 같은 종아리로 날쌔고도 고상하게. 실성한 사람처럼 움찔해진 나는 마시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이 싹트는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에서 사람 호리는 상냥함과 사람 말려 죽이는 즐거움을. 한 가닥 번개…… 그러고는 밤!―그 눈매로 나를 별안간 되살려놓고는 도망치는 미녀여, 이젠 저승에서밖엔 너를 다시는 못 보겠지? 머나먼 딴 곳에서! 너무 늦어! 어쩌면 영영! 네가 가는 곳 내가 모르고, 내가 가는 곳 네가 모르니, 오, 내가 사랑했을 너, 오, 그걸 알고 있던 너! 이 시에서는 미와 존재라는 범주와 관계하여 잃어버린 시대를 강조하는 독특한 감정이 표출되고 있다고 발터 벤야민은 밝힌 바 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이 시에서 영원한 이별은 도취의 순간과 일치하고 있다.” 벤야민은 그 순간을 ‘충격의 이미지’ ‘파국의 이미지’라고 명명하고 있다. 벤야민 특유의 ‘충격’ 개념이 지닌 문제점과 그러한 논의에 깔려 있는 사회심리학적인 근거를 재차 상술할 필요 없이 우리는 그 순간이라는 시간의 동인이 어떻게 전이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충격이란 무엇일까? 『악의 꽃들』에 실려 있는 「우울과 이상」이라는 연작시에서 엿볼 수 있는 화자의 상황과 비교해볼 때 우선 지각하는 자의 상황이 확인될 수 있다. 끊임없는 움직임―이것은 이미 시간적인 요소를 지시하는 것인데―에 의해 사로잡힌 이는 예기치 않게 그 어떤 것을 지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여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구분되는 지각이다. 즉 그 지각 자체가 속해 있는 범속한 장면 내에서 그녀는 범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엄하다. 또한 설혹 스쳐 지나가는 여인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느 만남과는 다르게 움직이는데, 즉 조각상처럼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그녀는―간접 증거로 작용하는 여타 다른 의미들을 제외하고 오로지 시간 자체의 메타포에 집중한다면―사라지는 것의 정반대, 즉 영원성을 대변한다. 슬픔에 젖어 있는 여성 모습의 상징화 내지는 알레고리화는 다각적이며 또한 심리분석적이고도 정치학적인 차원에서는 다양한 의미를 띨 수 있다. 예컨대 그 여인의 모습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이마고가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견해나 혹은 공화국에 대한 영웅적인 이념 내지는 자유 이념이 알레고리로 표현되어 있다는 등의 견해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 시간 양식에 관한 질문과 관계해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인 점은 시간의 지각에 엄격하게 제한된 추론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인 고통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슬픔이 제2제정 시대에서 잃어버린 자유를 뜻한다고 해석될 경우, 공화국에 대한 상은 그러한 해석을 포함하게 되며 결국은 믿을 만한 해석이 되지 못한다. 그럴 경우, 그것은 이전 시대에 대한 체념적인 시각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정치적이고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의도가 무엇을 내세울지라도 그러한 해석과 상이하게 대치되는 점이 나타나게 되는데, 즉 보들레르 텍스트에서는 역사적인 시대가 아니라 시간 단계로서 파악되는 시간의 느낌에 대한 성찰 양식이 우선적인 위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악의 꽃들』 전체의 구조 요소인 시간의 의미론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슬픔에 젖어 있는 여인과 재빨리 사라진 여인이라는 두 가지 확인될 수 있는 범주를 디테일하게 기술하는 보들레르의 수법을 염두에 두면, 이 시와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2) 간의 연관성이 형성된다. 그중 산문시 「군중Les Foules」에는 소네트 「마주친 여자에게」의 상황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 고독한 산책자로서의 시인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그 산책자는 ‘군중 속에서의 남자’와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다수’에 대한 그의 일면적인 사회적 경험과도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군중 개념의 정반대인 고립(solitude)을 경험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군중 속에서 ‘혼자’인 셈이다. 이와 같은 혼자 있는 존재 상태로 인해 시인은 다른 이들과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도취’를 경험한다. 군중 내에서의 고독은 ‘방황하는’ 영혼에 대한 매력을 결코 상실하지 않으며, 그러한 고독은 비밀(mysterie)과도 같다. 여기서 고독의 발견자는 아닐지라도 고독을 이론화하였던 루소와의 구분이 불가피하며, 항상 보들레르는 고독에 대한 루소의 확신에 대해 의심을 품은 바 있다. 그 차이점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측면, 즉 보들레르는 ‘자연’이라는 매개물로 정의된 루소의 고독을 단호하게 배제하였다는 사실에서 읽어낼 수 있다. 스위스 숲을 거닐던 고독한 산책자인 루소는 파리에 있는 메닐몽탕 언덕에서의 과거 체험을 상기한다. 여기서 고독한 루소의 명상이 나타나는데, 그러한 내향화된 고독 속에서 명상하는 루소는 곧 자신을 모든 사물의 주인으로 해석한다. “고독 속에서의 명상, 자연 탐구, 세계 관찰을 통해 고독한 사람은 자신을 부단하게 사물의 주인으로 만들게 되며 달콤한 불안감으로 모든 사물의 목적과 자신의 모든 느낌의 원천을 탐지하게 된다.”(루소, 「세번째 산책」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이와는 반대로 보들레르의 ‘고독’ 개념은 도시적인 삶 그리고 자아가 대면하게 되는 사물의 지각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그는 루소의 자연관 및 고독에 대해서 늘 성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우울』의 또다른 산문시 「고독La Solitude」에서 보들레르는 루소보다는 오히려 라 브뤼예르(La Bruy뢳e)와 파스칼(Pascal)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이전 시기의 자기 도취(루소)와―17세기의 두 사상가가 언급했던―‘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차가운 에토스를 서로 대비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가 라 브뤼예르나 파스칼 같은 현대 이전의 보수적인 모랄리스트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보들레르는 ‘고독’에 대한 사유를 성찰적이고도 주관적인 차원에서 혁신시켰던 루소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가능한 한 루소의 사유를 넘어서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루소 극복은 다름아닌 ‘고독’을 상상력의 생산지로 파악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파리의 화려한 거리라는 외적인 세계와 다수의 군중은 단순히 다채로운 사회적인 현상 자체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풍속극의 무대, 즉 희극(Kom쉊ie)으로 향유되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군중」에서 볼 수 있듯이 ‘미지의 것’으로서 파악된 ‘무한성’의 차원이 열리고 있으며, 이것이 보들레르 미학의 핵심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을 배회자로 파악하는 이론적인 구상은 하나의 정신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그 정신 상태는 수동적으로 현상과 마주치는 상태가 아니라 현상을 스스로 생산해내는 상태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적인 지각 범주는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 물론 개인적인 문제 해결 차원에서 1860년 처음으로 출간된 「마주친 여자에게」가 반드시 ‘미지의 것(사람)’이라는 범주에 완전한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 읽혀질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 점이 입증되고 있다. 더욱이 「군중」에서 언급된 다음과 같은 정신 상태는 「마주친 여자에게」와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들이 사랑이라고 가리키는 것은 매우 무의미하고, 제한적이며 미약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 형용할 수 없는 향연, 그 신성한 영혼의 매음은 다르다. 시적이며 또한 연민의 정을 내보이는 이 영혼의 매음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것, 지나가는 미지의 것에 자신을 바친다.” 미지의 지나가는 여인과 마주친 사람의 시선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시각은 수정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향연’이 다름아닌 ‘예기치 않은 미지의 것’을 시적으로 창작하는 이의 ‘향연’(시인의 글쓰기 상태―옮긴이)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충격 개념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방식도 문제의 핵심, 즉 보들레르 텍스트는 미지의 것을 능동적이고도 미학적으로 구성해내는 텍스트라는 점을 놓치게 된다. 「마주친 여자에게」서 화자의 반응을 묘사하는 구절(“실성한 사람처럼 움찔해진 나는 마시고 있었다,/회오리바람이 싹트는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에서/사람 호리는 상냥함과 사람 말려 죽이는 즐거움을”)도 개념적인 차원에서는 바로 「군중」에서 아이러니컬하게 묘사된 시인의 도취된 정신 상태와 부합하고 있다. 따라서 지나간 미지의 여인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인 것이다. 그렇다면 향연에 젖은 시인은 무엇을 감지하고 있는 것일까? 어두운 슬픔의 고통에 잠긴 고상한 여인은 일종의 정신적 자극으로서 멜랑콜리한 기호의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고독한 배회자로서의 시인이 갖고 있는 비밀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보들레르 미학의 핵심 개념인 ‘무한성’의 두 가지 요소가 주어지며, 그것들은 ‘애매함’의 범주와 부합된다. 경우에 따라서 그 수수께끼와 같은 여인은 슬픈 모습으로 인해 어느 미망인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조건하에서만 의미가 있다. 즉 그것이 보들레르 미학의 상징적인 문맥에서 읽혀질 때, 다시 말하면 묘사된 파리의 사회적 현상을 사회학적이고도 사회심리학적인 차원에서 당시 1850년대에 대한 지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현실을 멜랑콜리하게 구조화하는 기호의 창살로 읽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국 여인이라는 기호를 중심으로 지나간 미지의 여인, 『파리의 우울』에 실려 있는 「미망인들Les Veuves」의 여인, 그리고 슬픔에 젖어 있는 안드로마케(『악의 꽃들』 중 대표적인 시 「백조」에 나오는 신화적 미망인―옮긴이)는 서로 결합되어 있다. 특히 「미망인들」에서는 귀족다운 기품을 통해 자신의 주변 환경의 저속성과 대조를 이루는 어느 미망인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그녀는 키가 크고 장엄하게 보이는 여인이었다. 지난날의 귀족 미인들의 초상화 콜렉션에서도 그녀와 비교될 정도의 여인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자태는 너무나 고상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미망인의 모습에는 무엇보다도 배회자로서의 시인이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는 특성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녀는 완전히 혼자(absolute solitude)이고 거만한 듯한 냉엄한 스토이즘적 자세(une fierte de sto뷵ienne)를 보이며 또한 고통스런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설혹 시선을 주고받는 테마가 결코 연출되지 않았을지라도, 또한 에로틱한 함축 의미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을지라도, 어쨌든 미지의 미망인과 미지의 지나간 여인 간의 친화성은 이 시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이다. 즉 두 여인은 다름아닌 미학적이고도 정신적인 색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두 여인의 모습에는 다가가기 어려운 현상의 품위가 강조되고 있으며, 특히 중요한 점은 미망인은 멜랑콜리에 젖어 있는 시인의 내적인 상태를 장식해주는 중심 기호라는 것이다. 그녀는 희망을 포기한 이들, 그럼에도 “그들 내부에서는 아직도 천둥의 마지막 탄식 소리가 노호하고 근심 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사람들의 파렴치한 시선으로부터 멀리 물러나 있는” 패배자들을 대변해준다.(「미망인들」) 이미 지나간 감정의 순간이 아직도 시간적으로 여전히 현존해 있다는 것은 바로 ‘노호하는’ 상태로 표시되어 있다. 「미망인들」에서 사용된 ‘천둥(orage)’이라는 단어가 「마주친 여자에게」에서 사용된 ‘회오리바람이 싹트는(ouragan)’이라는 단어와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마침내 우연처럼 두 여인간의 은밀한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미망인들」에는 시선 교환이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결국 시인의 의도적인 시선 포착에 관한 언급으로 변화되고 있다. 또한 「미망인들」에서는 미망인이 그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그녀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 「마주친 여자에게」와는 달리 그 산문시에서는 수수께끼가 풀려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현상의 구조를 완성시키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수수께끼’이다. 특히 멜랑콜리에 젖어 있는 시인을 표현하는 핵심 코드 기호인 ‘고독한 번뇌(Douleurs solitaires)’에서 그러한 수수께끼가 발견될 때 더욱 그렇다. 이러한 특징은 ‘미망인’이라는 형상에 바로 슬픔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마고가 서술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며, 다시 말하면 그것은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시인의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인 셈이다. 이처럼 시인의 특성은 관찰된 대상에 함축되어 있다. 슬픔에 젖어 있는 고독한 여인은 결국 사회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보들레르 미학의 범주인 것이다. 산문시에 나타나는 미지의 것이라는 범주와 슬픔이라는 범주는 결국 소네트 「마주친 여자에게」에서의 여성 모습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녀를 지각하는 시인도 마찬가지로 심미적인 지각 단위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주친 여자에게」의 장면에서 그려진 것은 단순히 즉흥시에서 엿볼 수 있는 어떤 개인들간의 조우가 아니라 보들레르 미학을 세련되게 구성하고 있는 두 범주간의 조우인 것이다.[출처]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작성자 최진연 [출처]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작성자 옥토끼
21    시, 어떻게 쓸까 -문학강의 [ 퍼온 글 임] 댓글:  조회:1732  추천:0  2018-03-25
누가 쓰셨는지  지금 작자를 모르겠네요.                                           1. 글쓰기는 말걸기이다(듣기가 읽기인 것처럼)   누구에겐가 말을 건다는 것은 첫 마디를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몇 마디가 뒤엉켜 버리면 끝장이다. 내 후배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꺼내는 친구가 있다. ■저어, 있잖아요, 제가,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요, 선배에게도 전에 한 번 말씀을 드린 사항인데■■■ 그래서 그 후배가 다가오면 나는 이렇게 쐐기부터 박는다. ■너, 결론부터 말해.■ 글도 마찬가지다. 모든 글쓰기는 첫 문장 쓰기이다. 나는 후배 기자들에게, 기사의 첫 문장은 ■호객 행위■라고 말한다.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필름도 도입부를 매우 중시한다. 리모콘이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CF 제작자들은 강박증이 생겼다. 첫 장면에 승부를 걸어라. 처음 몇 초 안에, 시청자를 붙잡지 못하면, 채널을 바꾸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첫 문장이다! 이 지면을 통해, 글 잘 쓰는 비결을 하나 공개한다. 내가 잘 아는(이름 석 자 가운데 한 자만 대도 독자들 대부분이 알 수 있는) 시인은 시를 한 편 완성하고 나면, 첫 문장을 백 번 이상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다시 읽어 본다. 첫 문장이 흡족해야 시를 발표하는 것이다. 거듭 반복한다. 첫 문장에 목숨을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시(쓰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절실한 것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창과 학생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도 시(쓰기)가 자신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 명쾌하게 정돈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에 일고여덟은 ■나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서■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까운 이들과 좋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상대적으로 글쓰기와는 무관한 젊은이들에게 두 번째 질문(꿈이 있다면,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해 보라)을 던졌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출판사에 다니는 젊은 편집자들과 술을 마시다가 꿈을 물어 보았더니, 몇몇은 당혹스러워했고, 몇몇은 ■있는데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한둘은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했다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없는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내 지론을 강요했다간 싸움이 날 판이었다. 나는 ■우리는 꿈꾼 것만을 이룰 수 있다■는 무하마드 유누스(〈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의 저자. 방글라데시의 대안 운동가)의 잠언을 들려 주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시는 왜 필요한가? 나는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나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쓰기)가 필요하다. 시(쓰기)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단독자가 아니다. 완전한 포로다. 나는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없다. 나는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쓰기)를 필요로 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는 시간만큼, 나는 이 우주 안에서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악기이기를 지향하면서도 나의 시는 아직, 수시로 무기이다(이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지면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마지 않는, 한 문장의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쁘게 가난을 선택할 수 있게 하소서■이다. 산업 문명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탈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도시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기생의 존재■가 도시를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생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쌀 한 톨을 일궈내는 데도 삼라만상이 참여해야 한다). 야생조차도 인간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과학적 보고서가 있는 터에, 함부로 도시의 바깥을 상정하는 것도 유아적으로 보인다. 시를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한 뼘씩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아직도■ 있다면, 감히 한 권의 책을 권한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권진욱 옮김, 한문화). 이 책을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당신은 이미 이전의 당신이 아니다. 미국의 글쓰기 지도 전문가인 나탈리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꿈에 대해서 5분 동안 써 보십시오■.   2. 문제는 감각이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축구 경기를 보다 보면, 간혹 ■감각적인 플레이■라는 멘트가 나온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선수■라는 표현도 자주 접한다. 최상의 기량이라는 찬사다. 지난 해 6월, 월드컵 축구대회 대 폴란드 전에서 황선홍 선수가 이을용 선수의 패스를 받아 성공시킨 골 같은 경우 말이다. 황선홍은 골대를 보지 않고 슛을 날렸다. 스포츠에서는 ■감각적■이라는 수사가 극찬이지만, 시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시에서 감각적이라는 평가 앞에는 대개 ■지나치게■라는 부사가 붙는다. 감각이 승한 시는 깊이가 없다는 전통적인 잣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비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나치면 그르치는 것이 어디 감각뿐이랴. 상상력에서부터 이미지, 리듬, 관념어, 주제의식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가운데 지나침이 허용되는 것은 없다. 나는 감각적인 시를 옹호하는 편이다. 감각없는 축구 선수가 드리블이 좋지 않듯이, 감각적 형상화가 서툰 시는 생생하지 않다. 감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가벼운 감각이 가벼울 따름이다. 감각에는 깊이가 없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감각은 몸과 마음의 경계이다. 감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있는 가교이다. 시인은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시와 교감한다. 실존은 감각의 실존이다. 감각의 실존 가운데 가장 앞서 가 있거나 높이 있는 것, 그러니까 감각의 극단이 시이다(■잠수함 속의 토끼■라는 비유가 있다). 감각의 제국 안에서 제왕은 단연 시각이다.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감각은 시각이 대부분이다(80퍼센트).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간다(혹은 비켜선다). 보통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쓰기는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이다. ■북쪽은 고향/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다시 풀릴 때/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시인 이용악(1914-1971)의 초기 시 〈북쪽〉 전문이다. 시 속에서 국경 근처 고향을 그리워하는, 국경 너머 팔려간 여인을 염려하는 시인의 눈은 마음의 눈이다. 그 마음의 눈은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는 지경까지 꿰뚫어보는 놀라운 시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처럼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존재다. 그러나 시각이 감각의 전부는 아니다. 시각은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다. 이용악 시대의 시각과 21세기 후기 산업 시대의 시각은 크게 달라져 있다. 시각은 대량 소비 시대, 대중 문화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광고와 매체를 통해 인간의 눈을 포섭해, 인간을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시각 패권주의■ 시대이다. 시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시는 저 왜곡돼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소비자의 눈을 인간의 눈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주로 시각에 의한, 시각을 위한 인지와 소통은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배제하거나 왜곡한다. 시각 과잉은 인간을 인간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정현종의 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던, 그리하여 그 섬에 가고 싶어하던 시대는 행복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을 시각 과잉으로부터 ■구원■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시각 패권주의에 희생당하고 있는 나머지 다른 감각을 복원하는 것이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은 시각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라야 활발해진다. 깊은 어둠 속에 누워 있어 보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들리는가. 제대로 맛을 낸 음식을 음미하는 미식가의 얼굴을 보라, 미식가는 눈을 감고 ■음~■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손가락도 촉감에 충실하고자 할 때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발표하는 시들에는 소리와 향기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이 같은 변화를 시각 패권주의에 대한 시의 저항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차창룡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 〈나무 물고기〉에는 ■똥은 꽃처럼 향기로워■(〈트리베니 가트에서 누는 똥〉)라는 놀라운 대목이 나온다. 이 시는 꽃을 똥의 차원으로 추락시킨다. (아름다운) 꽃이 상승이라면 (추한) 똥은 하강의 이미지인데, 이 상승과 하강을 똥의 형상(하강하면서도 결국은 상승을 의미하는 생김새)으로 일치시켰다가, 급기야 똥의 냄새를 꽃의 향기로 격상시킨다. 아, 얼마나 통쾌한가. 시각 패권주의의 대표적인 아이콘인 꽃에서 똥의 향기를 ■맡는■ 시인의 감각이라니. 황선홍의 월드컵 첫 골에 못지 않은 ■감각적인 시■이다.     3 . 짧은 글을 읽어라   봄이여 눈을 감아라/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 병상일지 전문 5> 전문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시집이 많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시집을 받아 볼 높은 위치에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시사주간지에서 오랫동안 문학 담당 기자를 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보도 자료■로 보내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 동료, 선후배 시인들이 ■부채의식■ 때문에 보내는 시집들도 제법 있다. 시인들은 시집 받는 것을 ■빚■으로 여긴다. 그래서 새 시집을 펴낸 시인들은 그동안 시집을 보내온 시인들의 명단을 놓고 한 나절 넘게 주소를 쓴다. 그동안 밀린 ■시집 빚■을 갚는 것이다.   보름달은 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 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전문 우편으로 시집을 많이 받다 보니, 몇 가지 요령이 생겼다. 출판사와 시집 장정을 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시집 맨 처음에 실린 시를 먼저 보게 된다. 그러고 나서 시집 맨 뒤에 자리잡고 있는 시를 본다. 그 다음에 눈여겨보는 시가 짧은 시들이다. 시집 맨 처음과 맨 나중에 위치하는 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시인은 거의 없다. 첫번째 실린 시는 시집 전체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고(서시 분위기가 많이 난다), 마지막 시는 이른바 ■앞으로의 계획■쯤에 해당한다. 이렇게 두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짧은 시들을 골라 읽는다. 그러니까 서너 편 정도 일별하면 시집의 높낮이를 웬만큼 측정할 수 있다. 왜 짧은 시인가? 짧은 시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짧은 시에는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되어 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 장악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파스칼이었던가? ■시간이 없어서 짧게 쓰지 못했다■라고 말한 이가. 흔히 장시를 쓰는 데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줄 알고 있는데, 모든 장시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쓰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 하이쿠를 쓰는 시인들은 수도승 못지 않은 삶을 살았다. 두 행짜리 하이쿠를 쓰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4행짜리 게송을 읊은 선승들은 또 어떻고). ■봄이여 눈을 감아라/꽃보다/우울한 것은 없다.■() ■보름달은/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두 편 다 3행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짧은 시이다. 앞의 것은 김초혜 시인이 계간 2002년 겨울호에 발표한 작품이고, 뒤의 것은 최종수 시인의 첫시집 에 실린 시이다. 짧은 시는 비수라기보다는 번개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번개와 천둥이라고 하지 않고, 천둥과 번개라고 말한다. 번개와 천둥은 사실 동시에 발생하는데, 빛보다는 소리를 더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짧은 시는 번개다. 번갯불에 벼락을 맞기도 하지만, 한참 뒤에야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를 보자. 봄은 꽃의 계절인데, 봄으로 하여금 꽃을 보지 말라고 한다. 생명의 한 절정인 꽃에서 ■우울■을 보았기 때문이다. 절정인 꽃은 곧 시들게 마련. 만개한 꽃 속에서 꽃의 죽음을 본 것이다. 짧은 시는 이처럼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온갖 고정관념(선입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뒤흔드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꽃, 기쁨)에서 죽음(우울)을 발견하는 눈! 시의 위력은 그 눈에서 나온다. 은 또 어떤가. 달을 빛의 양(동그란 정도)으로만 규정하고, 어둠을 빛으로 물리쳐야 할 악으로만 이해해 오던 우리에게 시인은 아주 새로운 견해를 제출한다. 어둠을 깨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어둠과 함께 하는 벗 또한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어둠은 빛의 반대 진영에 있는 악이 아니라, 빛과 더불어 존재하는 동반자로 거듭난다. 어둠의 입장이 되어 보자. 자신에게 위압적인 큰 빛(보름달)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작은 빛(초승달)이 훨씬 더 애틋하지 않을까. 보름달이 혁명이라면 초승달은 연민(공감)의, 혹은 연대의 은유이리라. 짧은 시를 많이 읽자. 짧은 시는 서너 번 읽으면 외어진다. 그렇게 외운 시는 삶의 여러 국면,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접점을 가지면, 시의 의미가 부풀어오른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라고 말해 보라. 큰 것, 힘센 것만을 추구하는 선배가 있다면 어둠과 벗이 되어 주는 초승달 이야기를 꺼내 보라. 좋은 시는 짧은 시이고, 짧은 시는 우리들 구체적인 삶의 안쪽에 들어와 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이메일을 띄울 때, 외우고 있는 짧은 시를 전송해 보자. 보내는 이나 받는 이의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스파크가 일어날 것이다.                    4. 은유, 그 아슬아슬한 거리   지중해가 맑은 이유가 그 청년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년 전,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 나왔을 때, 주인공 마리오에 대한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말라터진 바게뜨 빵을 연상시켰던 마리오는 너무 섬약하고 또 너무 순수했다. 그가 지중해의 청정함을 지키는 정수기처럼 보였다. 마리오가, 잠시 섬에 체류하게 된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전속 우체부■가 되면서 시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네루다를 영웅화했다면, 네루다가 떠난 이후,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보낸 별이 반짝이는 소리까지 담은 ■녹음 편지■는 전통적인 시(활자)의 시대를 마감하는 징후로 보였다. 시위 현장에서 마리오가 스러져가는 장면은, 네루다 혹은 시의 시대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몇몇 장면만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네루다가 거두절미하고 ■메타포■라고 답하는 대목이다. 메타포, 은유. 그렇다. 은유가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은유를 빼 놓고서는 시를 쓸 수도, 읽어내기도 쉽지가 않다. 은유는 시와 시쓰기, 시읽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동력(전달 장치)이다. 직유를 거쳐 은유를 웬만큼 구사/해독할 수 있다면, 그는 괜찮은 시인/독자이다. 직유는 주종 관계이다.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라고 쓸 때(결코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바람은 그가 달리는 상태를 구체화하는 보조 역할에 머문다. 하지만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라는 표현에서는 약간 달라진다. ■그■와 ■바람■ 사이도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비■와 ■쇠못■ 사이처럼 스파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비와 쇠못 사이는 매우 먼 거리다. 일상적 차원에서 비와 쇠못은 거의 무관한 관계이다. ■비둘기는 평화다■와 같은 상징은 아예 주종 관계에서 종이 사라진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쓰이는 순간, 비둘기 고유의 정체성은 지워져 버린다. 상징은 상징에 동원되는 수단을 지워 버리는, 매우 폭력적인 비유법이다.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울 때, 비둘기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징이 종교와 신화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징은 권력의 도구이다. 직유에서 주종 관계가 희박해질 때, 나는 그것이 바로 은유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직유가 술어(동사)를 거부할 때, 예컨대 ■비가 쇠못처럼 달렸다■가 아니고, ■비는 쇠못이다■로 변화할 때, 직유는 은유로 한 차원 승격한다. 그래서 나는 비유법을 자주 은유법이라고 이해한다. ■그대는 꽃이다■라고 쓸 때, 그대는 꽃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대가 꽃을, 또는 꽃이 그대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다. 은유의 차원에서 그대와 꽃은 그대도 아니고, 꽃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은유의 위력이다. 내가 지지하는 은유는 다원주의에 바탕한 은유이다. 즉 하나의 절대적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모든 존재와 의미가 각자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은유이다. 직유가 수직의 상상력이라면, 은유는 수평의 상상력이다. 직유(혹은 상징)가 과거의 세계관이라면, 은유는 미래의 세계관이다. 공존, 상생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직유도 그렇지만 은유의 생명력은 비유되는 두 이미지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앞에서 예로 든 문장을 다시 불러와 보자.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 혹은 ■그는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그■의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는 것은 바람이 갖고 있는 모호성 때문이다. 여기서 바람은 주어를 도와 주지도 못하고 동사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참신하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직유는 구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상투성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 혹은 ■비는 쇠못이었다■라는 표현이 위의 경우보다 조금 산뜻한 까닭은 쇠못이 갖고 있는 구체성 덕분이다. 은유를 ■A는 B이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A와 B의 사이가 너무 가까울 때 상투성으로 전락하고, A와 B 사이가 너무 멀면 난해함으로 빠진다. 네루다와 마리오 사이의 대화를 흉내낸다면, 시란 저 A와 B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이다. 그리고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 A와 B를 결합시키는 비결은 (전에도 말했지만) 평소의 관찰력과 상상력에서 나온다. A와 B를 난데없이 연결시켜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직관력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관찰과 상상의 누적이 없다면 은유의 직관은 불가능하다. 사족 같은데, 한 마디만 덧붙여야겠다(은유를 말하고 있으니까).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에 바늘을 찔러야, 풍선은 강렬하게 터진다.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 그것이 관찰과 상상의 상태이다. 그것이 깨어 있는 정신이다. 그렇게 깨어 있다면, 바늘(직관)은 얼마든지 있다. 불지 않은 풍선은 풍선이 아니다. 탄생 이전이거나 죽음 이후다 [출처] 시, 어떻게 쓸까 -문학강의 |작성자 최진연    
20    타이슨 <비평이론의 모든 것> 요약 [퍼온 글임] 댓글:  조회:4439  추천:0  2018-03-25
제1장 비평이론 요약   - 각 비평이론이 Text에서 분석해내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정신분석비평: 텍스트가 등장인물 또는 저자의 무의식, 즉 억압된 심리적 상처와 두려움, 죄의식이 따르는 욕망, 해소되지 않은 갈등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   마르크스주의비평: 사회경제체제가 어떻게 인간경험의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특히, Text가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텍스트가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계급차별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여성주의비평: 텍스트가 가부장적 규범과 가치들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 가부장적 규범과 가치들의 기반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신비평: 해당 텍스트가 위대한 문학작품인가? 말하자면 텍스트 안에는 보편적인 의의를 갖는 주제와유기적인 통일성이 모두 존재하는가?   독자반응비평: 독자의 읽기 경험이 텍스트를 창조해나가는 과정을 밝히려고 한다. 즉, 독자들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 내는가? 그리고 독자들이 만들어 내는 의미와 텍스트 사이의 관련성은 무엇인가?   구조주의비평: 우리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사용하는 기본적인 구조체계(예를 들어 원형, 양식, 서사 등에 관한 구조)는 무엇인가?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텍스트의 문법을,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이 갖는 기능을 보여주는 일종의 공식처럼 나타내기도 한다.   해체비평: 텍스트의 자기모순을, 어떤 주제아래, 해소하지 않고 분해하면, 텍스트 안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들과 관련하여 무엇을 알게 되는가?   신역사주의비평: 텍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해석에 관여하는가? 특히 해당 텍스트를 낳은 문화안에서 유력하게 작용하는 담론(특정한 이데올로기들과 결부된 언어사용방식)들의 순환과정에서 텍스트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문화비평: 특별히 ‘노동계급’의 문화적 생산물(대중소설이나 영화같은 것)에 주목하고, 그것과 ‘고급’문화생산물(이를테면 정전이 된 문학작품)을 비교한다. 이때 텍스트가 수행하는 문화적 작업은 무엇인가? 즉, 텍스트가 어떻게 사회경제적 권력구조를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이데올로기들을 전달하고 변형시키는가?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 텍스트가 어떻게 레즈비언, 게이, 퀴어 섹슈얼리티를 재현하는가? 그러한 재현이 이성애주의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특히 퀴어 이론의 경우 섹슈얼리티(성적지향성)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갖는 부당성을 텍스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가? cf: 젠더: 여성성, 남성성(여자답다, 남자답다). 섹슈얼리티(성적지향성)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 텍스트가 어떻게 인종 및 인종적 차이를 재현하는가? 그러한 재현이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탈식민주의비평: 텍스트가 문화적 차이(인종, 계급, 성과 젠더, 성적지향, 종교, 문화적 신념, 관습 등이 결합하여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들)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그러한 재현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비평이론은 문학작품을 해석한다는 자체 목적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인간 경험 일반을 이해하는 지평까지도 확장시킨다.   오늘날 대부분의 비평이론가들은 어떤 비평이론이든 역사적 현실 속에서 생산되며, 따라서 정치적 함의를 갖기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특정 비평작업이 정치적 현실에 눈 감다고 해서 정치와 무관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구조를 보호하게 될 뿐이다.   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독법은 개인이나 가족에 혼란을 가져오는 파행적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비정치적’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재현되는 파행적 사랑을, 현대 미국문화의 산물(자본주의, 가부장제, 기타 이데올로기들이 한데 맞물려 작용한 데 따른 산물)로 고찰했다면, 이는 명백히 ‘정치적’인 정신분석학적 독법이다.   해체론을 구사하여 텍스트의 의미가 결정불가능하다는 점, 다시 말해 의미가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히는 작업은 ‘비정치적’이다. 그러나 해체비평은 의 텍스트 내부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상의 모순, 곧 숨겨진 정치성을 들추어내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평가는 하나의 이론만으로 문학작품을 해석할 수도 있고, 단일 작품을 두세개 혹은 그 이상의 이론들을 활용하여 분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해당 이론과 관련된 다른 이론들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 제2장 정신분석비평     -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형식은 저자, 독자, 또는 사회전체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적 동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영화, 음악 등 모든 예술을 정신분석학적 도구들로 해석할 수 있다.   -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문학작품을 읽고자할 때, 어떤 정신분석학 개념이 텍스트안에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작품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1) 텍스트 안에서 주요 등장인물을 움직이게 하는 무의식적 동기는 무엇인가? 이로써 밝혀지는 핵심문제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2) 문학작품속에서 오이디푸스적 역학관계 또는 가족 역학관계가 존재하는가? 등장인물(성인)의 행동양식을 그 사람이 어렸을 때 가족안에서 겪은 경험(작품안에서 언급된 경험)과 연관시킬 수 있는가? (3) 인간존재와 죽음 혹은 성욕 사이의 심리적 관계에 대해 작품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 (4) 꿈의 상징들을 통해, 화자는 무의식, 즉 죄의식이 따르는 욕망, 억압된 상처와 두려움, 해소되지 않은 갈등 등을, 작품 속 등장인물, 배경, 사건 등에 어떻게 투사하는가? (5) 문학작품은 저자의 심리에 관해 무엇을 시사하는가?   1. 무의식의 기원   (1) 정신분석학적 사유의 중심개념은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억압을 통해 아주 어릴 때 생겨나는데, 우리가 상처와 두려움, 욕망, 갈등 등, 알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억압하여 보관하는 창고가 무의식이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담기만하는 저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역동적인 실체이다.   (2) 정신분석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어린시절 집안에서의 경험들로 시작되는 심리학적 이력(즉, 오이디푸스적 역학관계, 가족역학관계 등)의 직접적인 결과로 형성된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다.   (가족역학관계 사례) 우리는 상처와 두려움, 욕망, 갈등의 진짜 원인들을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방법을 찾게 되기까지, 고통스러운 경험과 감정들에 매달린다. 예를 들면, 오래전에 죽은 알콜중독자 아버지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사랑에 아직도 목말라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냉담한 알콜중독자를 배우자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고, 그 배우자를 대상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재연할 수도 있으며, ‘이번만큼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내가 그 배우자로부터 원하는 관심을 얻는데 성공한다면, 둘 중 하나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하나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로, 그 사람은 자기가 정말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내게 결코 납득시킬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자기의 사랑을 내게 납득시켰을 때, 그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는 경우다. 나를 배려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겪은 고통을 다시 체험하려는 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실 아버지가 살아있고 자식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 만큼 심리적으로 거듭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어린 시절 내내 받은 정신적 상처들을 계속 치유해 나가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오이디푸적 역학관계 사례)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고 어머니와 아직도 (무의식 안에서) 경쟁중인 여성은, 이미 여자친구가 많거나 아내가 있는 남성에게 매력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다른 여성에 대한 그 남성의 애착을 바탕으로 본인의 어머니와 경쟁하여 ‘이번만큼은’ 이기겠다는 다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도 남자를 차지하지 못할 수 있으며, 설령 차지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넘어온 남성에게 흥미를 잃는 것이 보통이다. 그 남성의 매력은 그가 다른 누군가에 매달린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물리치고 아버지의 애정을 얻는데 성공했다고 느끼는 여성 또한 이미 아내가 있거나 여자친구가 많은 남성에게 끌릴 수 있다. 왜냐면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은’ 죄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은데 대해 자신을 벌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스스로를 그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발휘할 수 없는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남성의 경우, 오이디푸스적 애착이 해소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양상은,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른바 ‘착한여자/나쁜여자’라는 구분이 수반되는 것이다.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얻으려고 아버지와 아직도 (무의식) 경쟁중이라면, 나는 여성들을 어머니같은 여자(착한여자) 아니면 어머니같지 않은 여자(나쁜여자)로 분류하고 후자와만 성관계를 즐김으로써 죄의식을 달래려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쁜여자란 그 자체로 간악하고 추잡하기에 어머니를 연상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나쁜여자를 유혹했다면 그녀를 버려야만 한다. 결혼할 만한 자격이 없는 여성, 즉 어머니와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여성에게 자신이 끝없이 매달리는 것을 용납할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착한여자를 유혹한 뒤에는 두가지 일이 일어난다. 먼저 나의 영원한 맹세를 받을 자격이 없는 다른 나쁜여자들처럼 그녀 또한 나쁜여자로 치부하고, 그 다음에는 내가 그녀를 더럽힌데(어머니를 더럽힌 것처럼)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나머지 이를 피하고자 그녀를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 방어, 불안, 핵심문제들   - 방어란 억압된 것들을 억압된 채로 유지시킴으로써, 우리가 알게 되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알지 못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방어기제는 선택적 지각, 선택적 기억, 부인, 회피, 전치, 투사, 퇴행 등이 있다.   선택적 지각: 감당할 수 있을 법한 것만 보고 듣게 한다. 선택적 기억: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완전히 망각토록 한다. 부인: 문제가 사라졌거나 불쾌한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게끔 만든다. 회피: 억압된 경험 또는 감정을 일깨움으로써 불안감을 가져올 법한 인물 또는 상황을 떨어져 있도록 한다. 전치: 상처, 분노 등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보다는 덜 위협적인 인물 또는 대상에 그런 감정들을 풀어버리도록 한다. 퇴행: 일시적으로 이전의 심리상태로 귀환하는 것이다. 퇴행은 억압된 경험과 감 정들을 인정하고 대처할 능동적 역전의 기회를 동반하기 때문에 유용한 치 료수단이 될 수 있다. - 방어기재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이때가 바로 ‘불안’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불안은 다음과 같은 우리의 핵심문제들을 드러낸다. 즉,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는데 대한 두려움, 낮은 자부심, 오이디푸스적 고착(오이디푸스적 콤플렉스) 등이다. 예를 들면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은 각별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친밀한 관계가 상기시키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3) 죽음충동과 성욕충동   - 프로이트는 죽음을 ‘생물학적 충동’으로 보았으며, 이를 죽음충동 또는 타나토스라고 명명했다. 프로이드는 인간존재에게는 죽음의 충동이 있으며,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스스로 삶에서 격리되려는 욕망(자살)은 죽음작업이 갖는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우리가 폭력영화, 자연재해, 각종 살인 및 사고 등 죽음과 죽음작업을 재현하는 매체에 매혹되는 것은 자신과 무관한 인물이나 사건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투사시키는 것이다.   - 성욕도 ‘생물학적 충동’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충동을 에로스라 명명했고 이를 죽음충동인 타나토스와 대립시켰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성욕이 우리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며, 어린이조차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의 단계를 거치는 성적존재로 이를 통해 우리 정체성이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 - 성적행동은 문화의 산물이다. 성욕에 대한 사회적 원칙은 초자아의 상당부분을 구성한다. 초자아는 우리 본능과 성적에너지인 리비도를 비축해두는 이드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이드는 주로 사회적 관습에 따라 금지되는 욕망들로 이루어진다. 자아는 외부세계를 경험하는 의식상의 자기로서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심판 역할을 담당한다.   (4) 꿈의 상징   - 꿈은 억압된 상처와 두려움, 죄의식이 따르는 욕망, 해소되지 못한 갈등 등을 안전하게 내보내는 출구가 된다. 꿈은 위장된 형태로 주어지는데, 이는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까지만 꿈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꿈에서 표현되는 무의식의 메시지, 즉 꿈의 근원적인 의미나 잠재내용은, 우리가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전치와 압축의 과정을 거쳐 왜곡된다.   6. 라캉의 정신분석학   - 라캉에 의하면, 유아는 생후 몇 달 동안 자신과 주변 환경을 모두 일정한 형체가 없는 파편화된 덩어리로 받아들인다. - 생후 6개월에서 8개월 사이에서 거울단계가 찾아온다. 이 단계에서 거울이나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을 통해, 형체없는 파편화된 덩어리가 아닌 온전한 전체로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감각을 발달시킨다. 이 거울단계에서 상상계(imaginary order)가 시작된다.   - 상상계는 유아가 말대신 이미지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이다. 자신의 주변세계에 대한 완벽한 제어는 아이에게 대단한 만족감과 힘을 가져다준다. 어머니는 내가 원하는 전부이며, 나는 어머니가 원하는 전부이다. 유아에게는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욕망’인 동시에, ‘어머니를 향한 자신의 욕망’이 중요한 시기로, 아이가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 아이의 언어습득은 상징계(symbolic order)로의 진입을 뜻한다. 상징계로의 진입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는 경험을 수반하며, 가장 중대한 분리는 그동안 상상계 안에서 친밀한 결합을 유지해왔던 어머니와의 분리다.   - 어머니와의 분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상실의 경험으로 일생동안 우리를 따라다닌다. 우리는 더 이상 불가능한 어머니와의 결합을 대신할 만한 크고 작은 것들(배우자, 돈, 종교, 권력, 명예 등)을 찾아 나서는 작업을 무의식적으로 계속하며, 이같은 삶을 보내게 될 영역이 상징계이다. 이런 것들을 얻게 되더라도 완벽한 충족감은 지속시킬 수 없다. 어머니와의 결합 같은 완전함과 풍요로움은 우리가 상징계에 진입하는 순간, 다시말해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 의식적 경험의 세계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잃어버린 욕망의 대상을 라캉은 소문자 타자(대상a)라고 부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에서 화자는 어린 시절 이후 먹어 본적이 없던 마들렌이라는 과자를 우연히 다시 맛보고는 유년기로 되돌아가는 듯 한 즐거움을 경험한다. 이때 화자에게 마들렌은 대상a라고 할 수 있다.   에서 개츠비에게는 데이지가 사는 곳의 부두 끝자락에서 반짝이는 초록색 불빛이 대상a일 것이다. 개츠비에게 초록색 불빛은 데이지를 향 한 희망뿐만 아니라 순수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지속시켜 준 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잃어버린 욕망의 대상, 즉 대상a가 어머니와의 결합이라는 언어 이전 단계에 대한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결합의 환상을 상기시키는 사건 또는 시기는 유년기 이후에도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상실과 결여의 경험과 더불어 도래한 상징계는 우리의 정신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었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무의식의 욕망은 언제나 잃어버린 욕망의 대상, 즉 언어를 갖기 전에 경험한 어머니에 대한 환상을 추구한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의 작동양상은 일종의 상실 또는 결여를 암시하는 두 가 지 언어작용과 닮아 있다. 바로 은유(metaphor: ‘내 사랑’은 붉은 ‘장미’다.)와 환유(metonymy: ‘왕관’을 썼다면 당연히 올바르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이다. 은유와 환유는 일종의 상실 또는 결여를 함의한다. 즉, 은유와 환유는 모두 실제 로 말하고자 하는 대상(내사랑, 왕)을 제쳐두고 그 자리에 대체물(장미, 왕관)을 가져온다.   은유는 서로 비슷하지 않은 대상들을 한데 묶는다는 점에서 무의식적 작용인 압축과 흡사하다. 내가 굶주린 사자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면 그 사자는 현실에 서 나를 못살게 구는 인물들(직장상사 혹은 내가 빚을 지고 있는 사람 등)이 하 나로 합쳐져 나타난 대상일 것이다. 환유는 인물/사물을 서로 연관되어 있는 다른 인물/사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전치와 흡사하다. 내가 직장 상사에게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라면 나는 애꿎게 내 자식들에게 화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은유와 환유에서 공통적으로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을 뒤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선다. 우리가 언어들 습득하는 순간, 즉 상징계로 진입하는 순간, 어머 니에 대한 환상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잃어버린 대상은 결코 다시 찾을 수 없다. 더 이상 자기 충족 및 제어의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계에서는 지켜야할 규칙과 따라야할 규제만이 존재할 뿐이다.   - 라캉은 상징계가 어머니의 욕망/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교체되는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상징계의 어머니(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갖는 어머니, 즉 대문자 어머니)는 아버지(보편성을 갖는 아버지 즉 대문자 아버지)의 소유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회규칙과 금지사항을 인식하고 이로서 사회적으로 길들여지는데, 규칙과 금지사항을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존재가 대문자 아버지, 즉 권력자로서의 남성이기 때문이다.   - 언어를 갖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세계에 대한 욕망이 억압된다 해서, 이로서 무의식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자기충족 및 제어의 환상과 더불어 어머니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믿음이 존재했던 세계, 즉 상상계가 억압되는 것은 아니다. 상징계가 의식의 전면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상상계는 의식의 배후에 계속 존재한다.   - 라캉에 의하면, 상징계와 상상계 모두 실재(the Real)를 제어하려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실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의미형성체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실재는 존재의 어떤 해석 불가능한 차원이다.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통째로 윤색하는 일종의 커튼과도 같다면 실재는 바로 그 커튼 뒤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커튼 뒤를 볼 수 없다. 그곳에 실재가 있다는 생각에 때때로 밀려드는 불안감을 제외하면 우리는 실재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라캉은 이러한 경험을 실재의 외상(truama of the Real)이라고 부른다. 실재의 외상은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줄 뿐이다. 즉, 사회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아래 숨겨진 현실이란 우리의 능력으로 이해할수도 설명할수도 제어할수도 없는 종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7. 고전적 정신분석학과 문학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형식은 저자나 독자안에서 또는 사회전체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의 산물이다.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문학작품을 읽고자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어떤 정신분석학 개념이 텍스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작품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아서 밀러의 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으면, 윌리 노먼의 과거 회상 장면에서 퇴행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원인은 윌리 자신과 그의 아들이 업계에서 성공하지 못한데 따른 정신적 외상에 있다. 윌리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형에게서 버림받은 이후로 계속 자신을 괴롭혀 온 엄청난 불안감을 달래려고 성공을 바랐던 것이기 때문이다. 윌리는 否認과 회피로써 심리적 불안감을 억압하고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회 부적응과 직장에서의 실패를 견디는데 자신의 삶을 모두 소진시켰다. 또한 은 가족 내 심리적 역학 관계를 탐구한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 가족안에서 해소되지 않은 갈등이 어떻게 일터에서 발산되고 또한 자녀들에게 대물림되는지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줄거리) 늙고, 피로에 지친 주인공의 뇌리에 쉴새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장면을 현실과 교착시켜 무대에 표현하는 극작술은 독창적이다. 주인공 윌리 로만은 원래 전원생활과 노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생하지 않고 성공하겠다는 심산으로 세일즈맨이 되었다. 30년간 오직 세일즈맨으로 살아오면서 자기 직업을 자랑으로 삼고 성실하게 일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두 아들 비프와 해피에게도 그의 신조를 불어넣으며 그들의 성공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타락해 버렸고 그 자신도 오랜 세월 근무한 회사에서 몰인정하게 해고당한다. 궁지에 몰린 그는 장남에게(비프) 보험금을 남겨 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 주려고 매일 다투어 온 비프와 화해하던 날 밤에 자동차를 과속으로 달려 자살한다. 윌리 로먼의 장례식날 아내 린다는 집의 할부금 불입도 끝나고 모든 것이 해결된 지금, 이 집에는 아무도 살 사람이 없다고 그의 무덤을 향해 울부짖으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8.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독법   에서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이 서사를 전개시키는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읽으면, 여주인공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파행적 사랑을 다룬 한편의 심리극이다.   톰과 데이지의 결혼생활은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다. 톰의 상습적인 외도는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톰은 데이지를 비롯한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정서적 친밀감보다는 자기만족의 욕구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톰에게 데이지는 사회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존재이며, 톰은 육감적이고 생기넘치는 머틀 윌슨을 소유함으로써 자신만의 사내다움을 강화시키려한다. 데이지는 톰과 결혼할 무렵에는 톰을 사랑하지 않았으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도하고 있는 톰을 미워하기보다 오히려 톰에게 잔뜩 매달리게 된다. 친밀감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남성과 사랑에 빠진 여성은 본인도 친밀감을 두려워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친밀감을 두려워하는 여성에게는,친밀감에 대한 욕망이 없는 남성처럼 안도감을 주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톰과 데이지가 공통적으로 겪는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은 낮은 자부심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부의 크기만큼이나 톰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면, 돈과 권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그토록 열중하지 않을 것이다. 데이지도 외도하는 남성에게 푹 빠졌다는 사실은 데이지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더 나은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게다가 데이지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가식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자아를 강화하려는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개츠비와 데이지의 관계에서도 데이지는 톰에게 그렇듯이 개츠비에게도 친밀감을 바라지 않는다. 데이지가 필요로 하는 것은 톰 덕분에 누리고 있는 지금과 같은 사회적 위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뉴욕의 호텔 방에서 톰이 개츠비의 사회적 출신과 배경을 폭로하자 데이지는 개츠비를 향한 마음을 즉각 거두어들인다. 개츠비가 데이지에 대한 친밀감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개츠비의 궁극적인 목표는 데이지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능하고 별 볼일 없는 농사꾼인 부모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목표 그 자체라기보다, 부와 사회적 지위 획득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실마리에 불과하다. “그녀는 그가 난생처음으로 알게된 우아한 여자였다.”“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은처럼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빛을 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완벽한 여성으로 이상화하는 것은 개츠비가 친밀감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현실에서는 이상형과는 친밀감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 정신분석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개츠비와 데이지의 낭만적 사랑은 해소되지 않은 모든 심리적 갈등이 극적 형식으로 가장되어 연출되고 또 반복되는 무대가 된다.   ----------------------------------------------------------- 제3장 마르크스주의 비평   -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의 목표는 예술, 교육, 법 등 ‘문화적 생산물’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확인하고, 그러한 문화적 생산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체제를 그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지지하거나 약화시키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문학은 시간을 초월한 어떤 미학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수동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쓰인 시공간의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조건이 낳은 생산물이다. - 정신분석 비평가가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족갈등과 정신적 상처를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가족내 문제가 어떤 면에서 사회경제체제 및 그것이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들의 생산물인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1.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들   - 경제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은 모든 유무형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 이면에 작용하는 동기이다.따라서 경제는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현실이라는 상부구조를 조건짓는 토대가 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경제권력의 분배와 역학관계’라는 측면에서 모든 인간활동을 설명한다.   -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경제적 계급의 차이는 종교, 인종, 민족, 젠더의 차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양상으로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부르주아지(가진자들)가 모든 자원을 지배하는 반면,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못가진자들)는 육체노동에 종사하여 부자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면서 열악한 조건에 살아가면서도 이러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난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이다.   2. 이데올로기의 역할   -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신념체계이며, 모든 신념체계는 문화적 조건화(Cultural conditioning)의 산물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지기 마련인데,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서 여겨지지 않으며,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러운 세계인식으로 생각된다.   3. 인간의 가치와 상품의 가치   - 마르크스주의의 관심은 자본주의가 인간가치에 끼치는 악영향에 관한 것으로 사람과 상품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가치는 인간적인 것과는 무관하며 오직 그 상품과 시장에서의 관계로만 결정된다. 상품의 가치는 사용가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 또는 사회적가치(교환가치기호: sign exchange value)에 달렸다. 자기만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인간관계를 이용하는 경우, 인간존재를 상품화하는 것이다. ‘상품화’는 사람이나 물건을 교환가치 또는 교환가치기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연애상대를 고를 때, 상대방이 자기에게 얼마나 돈을 쓸 것인가 즉, 상대의 교환가치를 따진다거나, 혹은 상대방이 친구들에게 얼마나 근사한 사람으로 비칠 것인지 즉, 상대의 교환가치기호를 생각하고 고른다면, 이는 연애상대를 상품화하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시장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가 생존해 나가려면 소비지상주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교환가치기호 획득을 우리가 주변 세상과 관계하는 주요방식이라도 되는 양 부추긴다. 자본주의 최대관심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소비재를 구매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팔 시장과 상품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공급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확산시킨다. 제국주의는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다른 국가를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제국주의 정부는 피지배민중들의 의식을 식민화하여 민중들로 하여금 제국주의 세력이 원하는 방식대로 상황을 인식하게끔 만들려고 한다. 피지배 민중들은 점령자들보다 정신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점령자들과 같은 새로운 지도자들의 인도와 보호 아래 있어야만 자신들의 모든 것이 개선될 수 있다고 그들 스스로 믿게끔 만드는 것이다.   -------------------------------------------------------- 제4장 여성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은 문학이 어떻게 여성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억압을 강화하거나 반대로 약화시키는지 점검하는 방법론이다. 중요한 것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어떤 양상으로 텍스트 곳곳에 만연해 있으며, 우리의 인지나 동의없이 어떻게 우리를 길들이는지를 인식하는데 있다.   - 여성주의 전제들   (1)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의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억압받는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억압을 지속시키는 주요 수단이다. (2)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어느 영역에서나 여성은 타자이다. 여성은 물건으로 취급 되고 하잖은 존재가 되어 주변으로 밀려난다. (3) 모든 서구문명에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전래동화를 포함한 위대한 서구 문학 정전의 형성조차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4) 생물학이 성(남성 또는 여성)을 결정한다면, 문화는 젠더(남성적 또는 여성적)를 결정한다. 남성적인 행동이나 여성적인 행동에서 연상되는 모든 특징은 타고나 는 것이 아니라 학습된 것이다.   - 여성주의 이론을 활용하여 문학작품에 접근하는 방법   (1) 문학작품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강화하는 경우 텍스트가 가부장적 의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약화하는 경우 테스트가 여성주의적 의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동시에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의 경우 이데올로기들의 대립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문학작품이 어떻게 여성성과 남성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등장인물의 행동이 젠더에 관한 전통적 시각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면 그러한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아얘 관점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은가?   전통적 성역할 = 가부장적 성역할   가부장적이란 전통적 성역할을 조장함으로써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려는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통적 성역할에 따르면 남성은 합리적, 강인하고, 무언가 보호하고 결정하는 존재이지만, 여성은 비합리적, 감정적, 연약하여 보호가 필요한 순종적인 존재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남성이 독점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데 활용되어 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오래도록 여성의 몫이었던 열등한 위치는 생물학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생산된 것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가부장적 성역할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신데렐라 역할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정학대를 견디고, 자신을 구해줄 남성을 묵 묵히 기다리며, 결혼이야말로 올바른 행실에 뒤따르는 가장 바람직한 보상이라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여성성을 순종성과 같은 것으로 보게끔 한다. 남성의 경우 자신의 여성이 행복한 상황을 책임지고 만들어야 할 구원자로서 남성에게 요구되는 근사한 왕자님 역할 역시 남성에게 해롭기는 마찬가지다. 남성은 지칠 줄 모르는 특급 부양자여야 한다는 믿음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 제5장 신비평   1. 내재적·객관적 비평으로서의 신비평   - 신비평이론가들은 꼼꼼한 읽기가 텍스트의 가치를 결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입장이다. 신비평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 자체에서 찾아낸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례를 바탕으로 자신의 해석을 입증하는 작업이다. 신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문학작품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자율적인(자기충족적인) 예술작품이다.   - 텍스트 안에서 만들어진 맥락과 텍스트가 제공하는 언어만이 해석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비평행위를 내재적 비평이라고 했다. 신비평을 제외한 모든 비평은 외재적 비평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문학 텍스트 해석에 필요한 도구들을 텍스트 밖에서 찾는다는 의미이다.   - 신비평가가 문학 텍스트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텍스트의 유기적 통일성을 가장 잘 규명할 수 있는 단일한 최고의 해석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텍스트의 형식요소들과 그 요소들이 생산하는 의미는 어떻게 작동하면서 텍스트의 주제 또는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뒷받침하게 되는가?   2. 문학적언어와 유기적 통일성   - 작품이 지닌 유기적 통일성(organic unity)은 신비평이론가들이 문학작품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하나의 작품이 유기적 통일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 안의 모든 형식요소들이 함께 작동함으로써 텍스트의 주제를 확립시킨다는 말이다. - 유기적 통일성을 갖춘 텍스트는, 삶의 복잡성을 재현하려는 문학작품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복잡성’과 인간존재가 추구하는 ‘질서’를 동시에 갖추게 된다. 텍스트의 복잡성은 다양하면서도 종종 상충되는 의미들로 만들어진다. 이런 의미들은 역설, 아이러니,애매성, 긴장 등의 네 가지 언어적 장치들을 통해 생겨난다. 이렇게 생산된 의미의 다양성과 상충성은 해당 텍스트의 주제에 이바지해야 한다. 주제의 확인이 신비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는 텍스트의 구성요소들과주제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면밀히 검증하는 독법으로서, 텍스트의 유기적통일성이 어떻게 구축되는지 살피는 것이다.   (1) 역설(paradox): 자기모순적인 내용처럼 보이지만 사물이 존재하는 실제방식을 나타내는 진술. 예) ‘참으로 살기 위해서는 참으로 죽어야 한다.’ (2) 아이러니(irony): 어떤 진술이나 사건이 그것이 발생하는 맥락 속에서 오히려 존재근거를 상실하는 경우. 예를 들면, 등장인물이 이혼을 비난하지만, 그 비난은 이혼을 통해 더 많은 부를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적용되는 경우. (3) 애매성(ambiguity): 하나의 낱말이나 이미지 또는 사건이 둘 이상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경우. 예를 들면, 어떤 작품에서 나무가 고통, 인내, 재생 등을 암시할 수 있다. (4) 긴장(tension): 텍스트안에서 서로 대립되는 성향들. 역설, 아이러니, 애매성 사이에서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 역설, 아이러니, 애매성, 긴장같은 언어적 장치들에 덧붙여 자주 쓰이는 비유적언어(figurative language)인 이미지, 상징, 은유, 직유는 다음과 같다. 비유적언어란 순전히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다른 의미 또는 그 이상의 여러 의미를 갖는 언어를 말한다. (0) 이미지(image):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어떤 정서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구름은 흐린 날씨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비애감을 환기시키는데 사용할 수도 있다. (1) 상징(symbol):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이미지이다. 예를 들면, 봄은 재생 또는 젊음의 상징이다. (2) 은유(metaphor): 상징은 단어의 의미와 비유적 의미를 포괄하는데 반해, 은유는 비유 한가지 의미만을 갖는다. 예를 들면, 내 남동생은 보석이다. (3) 직유(simile): 은유만큼 직접적이거나 단호하지 않는 비유다. 예를 들면, 내 남동생은 보석같다. 내 남동생은 보석처럼 고귀하다. ---------------------------------------- 제6장 독자반응비평   - 독자반응비평이론가들의 공통된 믿음 (1) 문학작품이해에 독자의 역할을 빠뜨려서는 안된다. (2) 독자는 문학텍스트안에서 능동적으로 의미를 찾아내고 만들어 낸다. 따라서 같은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독자들에 따라 상이한 독법이 나올 수 있고, 같은 독자가 같은 텍스트를 여러번 읽는 경우에도 각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 독자반응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반응과정에서 텍스트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따라, 상호거래적 독자반응이론, 영향(감정)문체론, 주관적 독자반응이론, 심리적 독자반응이론, 사회적 독자반응이론으로 구분.   1. 상호거래적 독자반응이론: 텍스트와 독자사이의 거래를 분석하는 방법론.   - 로젠블랫에 의하면, 텍스트가 의미를 생산하려면 “텍스트와 독자 양쪽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텍스트는 읽는 내내 그리고 읽기가 완료된 후에도, 독자가 발전된 해석이나 완결된 해석을 위해 앞으로 되돌아가 텍스트의 일부 혹은 전체를 다시 읽게 되는 경우 청사진으로 작용한다.   볼프강 이저에 의하면, 모든 텍스트는 확정적의미와 불확정적의미를 전달한다. 확정적 의미란 활자화된 말들로 확실히 명시되어 있는 사실들을 가리킨다. 불확정적 의미는 독자에게 자기만의 해석을 창조하도록 허락하거나 유도하는 일종의 텍스트 내부의 틈새를 말한다. 작품 속 어느 시점에서 확정적 의미인줄로만 알았던 부분이 뒤에 가서 보니 불확정적으로 보이게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읽기행위를 통해 독자가 의미를 구성해나가는 과정은 텍스트에 의해 미리 구조화되어 있다. 바꾸어말하면, 텍스트 해석에 수반되는 여러 과정들을 거치면서 텍스트 자체가 직접 독자를 이끌어 간다.   2. 영향(감정) 문체론(affective stylistics)   - 영향문체론은 행, 구, 낱말 단위로 텍스트를 꼼꼼히 점검함으로써, 텍스트가 읽기 과정에서 어떻게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가 말하는 것에서 독자가 최종 결론을 이끌어 냄으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가 행하는 것을, 독자가 읽기 과정에서 경험함으로써 구성된다는 것이다. 텍스트는 독자가 하나하나의 낱말과 구절을 읽어나가는 내내 영향을 끼친다.   3. 주관적 독자반응이론   주관적 독자반응이론은 “독자들의 반응이 곧 텍스트”라고 주장함으로써, 텍스트 상의 단서를 필요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호거래적독자반응이론이나 영향문체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블라이히(David Bleich)에 의하면, 독자들의 해석이 만들어낸 의미를 초월한 문학 텍스트란 없으며, 비평가의 분석대상이 되는 텍스트는 문학작품이 아니라 독자들에 의해 기록된 반응이다. 문학텍스트는 실제대상과 상징적 대상으로 구분된다. 실제대상은 인쇄된 지면이다. 이렇게 인쇄된 지면 또는 언어 그 자체를 누군가 읽을 때 독자의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상징적대상이다. 유일한 텍스트란 상징적 대상, 즉 독자마음속에 존재하는 텍스트이며, 이같은 텍스트만이 주관적 독자반응이론 비평가들의 분석대상이 된다. 4. 심리적 독자반응이론   노먼 홀랜드(Norman Holland): 정신분석학 개념을 사용하여 독자들의 심리적 반응을 분석. 문학텍스트를 접할 때 나타내는 심리적 반응은 일상생활 속 사건들에 대한 심리적 반응과 동일하다. 방어기제는 텍스트를 싫어하거나 오독하도록, 아예 읽는 것 자체를 그만두도록 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는 과정이 해석이다. 텍스트가 우리의 심리적 평정을 위협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우리는 평정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도록 어떤 식으로든 그 텍스트를 해석해야만 한다. 홀랜드의 해석에 대한 정의는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일어나고 되풀이되는 세가지 단계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방어단계, 방어기제를 안정시킨 뒤, 심리적 평정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해석하는 환상단계, 방어와 환상으로부터 심리적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앞의 두 단계를 마무리 해석하는 변형단계를 거치게 되는 세가지 해석의 단계가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일어나게 된다. 홀랜드에 의하면 독자들의 해석의 목적은 저자와의 감정융합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5. 사회적 독자반응 이론   사회적 독자반응이론에서는 개별독자의 순수한 주관적 반응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문학에 대한 개별적인 주관적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가 속한 해석공동체의 산물이다.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 적용하는 해석전략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들이다. 해석공동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해 나간다. 독자들은 의식적 무의식으로 동시에 하나 이상의 해석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다른 해석공동체로 여러차례 옮길 수도 있다. 모든 독자는 텍스트를 대할 때마다 자신이 속하는 해석공동체에서 작동하는 특정 해석전략들에 따라 해석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피시의 주장이다. 우리의 모든 문학적 해석은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가져오는 해석전략들의 결과물이다.       ----------------------------------------------- 제7장 구조주의 비평   1. 구조언어학과 구조주의 문학   - 구조주의에서 쓰이는 용어는 대부분 구조언어학에서 나온 것이다. 쇠쉬르는 언어를 제각각 변화해 온 역사를 지닌 개별 낱말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주어진 어떤 시점에서 사용되는 낱말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구조체계로 파악한다.   - 언어를 지배하는 구조와, 그 구조의 표면현상들인 무수한 개별 발화들을 구별하 고자, 소쉬르는 언어의 구조를 랑그(langue), 말할 때 생겨나는 개별 발화들을 파롤(parole)이라고 명명했다. 구조주의자들에게는 랑그가 연구대상이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개별 문학작품들을 구조화하는 랑그, 그리고 전체적인 문학체계를 구조화하는 랑그를 탐색한다.   - 구조주의는 개별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주어진 텍스트가 좋은 문학작품인지 아닌지를 가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표면현상의 영역이자 파롤의 영역이다. 구조주의는 문학텍스트를 랑그, 즉 텍스트들로 하여금 ‘의미를 갖게끔 만드는 구조’를 탐색한다. 그 구조는 ‘문법’이라고 명명되기도 한다.   구조주의 문학연구는 구체적으로 세가지 분야에 주목한다. (1) 문학장르 구조 (2) 서사작동양상 구조 (3)문학 해석 구조가 그것이다.   2. 구조주의문학의 세가지 분야   (1) 문학장르의 구조 :   -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의 신화이론(원형비평): 신화를 구조화하는 네가지 서사양식(희극/로맨스/비극/아이러니와 풍자)은 뮈토스(mythos: 신화체계)를 통해 구조원리가 드러난다. - 프라이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두가지 방식(이상세계/현실세계)에 따라 자신의 서사적 상상력을 담아낸다. 이상세계는 풍요로움과 충족감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여름 뮈토스’라고 명명하고 ‘로맨스’장르와 결합시킨다. 로맨스는 용감하고 고결한 영웅과 아름다운 처녀가 악당의 위협을 이겨내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다. 현실세계는 불확실성과 실패로 이루어진 세계로 ‘겨울 뮈토스’라고 명명하고 ‘아이러니와 풍자’라는 이중장르와 결합시킨다. 아이러니는 비극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세계이자, 주인공이 수수께끼와도 같은 삶의 복잡한 양상들로 말미암아 패배를 경험하는 세계이다. 풍자는 희극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세계이자, 인간의 어리석음, 과도함, 부조화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비극은 이상세계에서 현실세계로 이행을 수반하는 ‘가을 뮈토스’이다. 즉 여름뮈토스에서 겨울뮈토스로 이행하는 과정이 비극이다. 비극에서 영웅은 로맨스에 등장하는 영웅처럼 우월한 존재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현실세계로 추락해 상실과 패배를 경험한다. 희극은 현실세계에서 이상세계로 이행을 수반하는 ‘봄의 뮈토스’이다. 즉 겨울뮈토스에서 여름뮈토스로 이행하는 과정이 희극이다. 희극의 결말은 주인공이 냉혹하고 골치 아픈 현실세계를 떠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고 인정넘치는 공간으로 이행해 가면서 마무리된다.   - 원형이란 반복되는 어떤 이미지나 인물유형, 플롯공식, 행동양식 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하나의 원형은 신화, 문학, 종교 등의 역사속에서 다양한 판본으로 나타난다. 다양한 판본이란 동일한 구조를 갖는 수없이 다양한 표면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원형비평의 목적은 서구문학전통의 근간이 되는구조원리(원형)를 탐색하는 것이 된다.   (2) 서사의 작동 양상 구조: 서사(학)의 구조   - 구조주의적 서사분석은 문학텍스트들의 내적 ‘작동’을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 검토함으로써, 텍스트의 서사작용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구조를 발견하려는 작업이다. - 그레마스, 토도로프, 주네트는 서사를 구조화하는 어떤 공식을 발견한 뒤, 그 공식을 활용하여 문학의 의미, 그리고 그것과 인간 삶 사이의 관계에 관한 광범위한 질문들을 던지고자 했다. - 서사를 구조화하는 공식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공식은 어떤 점에서 서사 일반에 관한 하나의 양식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양식은 인간의 경험 또는 인간의식 구조와 관련하여 무엇을 시사하는가?   (3) 문학해석의 구조   - 조너선 컬러(Jonathan Culler)에 의하면 문학텍스트의 창작과 해석을 모두 지배하는 구조체계는 규칙(rule)과 약호(code)의 체계이다. 이 체계는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면화한 것으로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서구문학전통의 일부를 구성하며, 개인의 ‘문학능력(literary competence)’은 그 체계를 얼마나 내면화했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 그 체계의 주요 구성요소는 거리두기(distance), 몰개성의 관습(impersonality), 자연화(naturalization), 의미화의 규칙(signification), 은유의 일관성에 관한 규칙, 주제의 통일성에 관한 규칙 등이다. 거리두기와 몰개성의 관습: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이 편지나 신문이 아닌 시나 소설의 일부임을 알게 되는 순간, 허구의 세계에 진입했음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이 자기자신과 허구사이의 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거리는 개인의 실제경험에 관한 사실을 읽는 중임을 인지하고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는 일종의 몰개성을 동반한다. 자연화: 일상적인 글에서는 보기 힘든 문학적 형식이 주는 낯섦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변형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 자기는 잘 익을 과일이야”라는 문장을 읽을 때, 우리는 화자가 과일 한 조각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자의 말이 은유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화 규칙: 문학작품에는 어떤 중요한 문제에 관한 의미있는 태도가 표명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문학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주목하게 된다. 은유의 일관성에 관한 규칙: 은유의 두가지 요소(원관념: tenor와 보조관념: vehicle)가 작품 맥락안에서 일관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원칙. 예를 들면 늙고 가난한 미국 원주민 떠돌이에 관한 이야기에서 창백한 겨울 해질녘 모습은 죽음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을 것이나, 새로운 희망찬 삶을 알리는 편안한 잠에 대한 은유로는 적절치 못하다. 주제의 통일성에 관한 규칙: 문학작품이 통일되고 일관된 주제 또는 내용을 갖고 있으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3. 구조주의 비평가가 던질 만한 질문들   - 어떤 문학 텍스트가 위대한 문학작품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구조주의자들의 관심사가 아니며,문학적 의미를 생산하는 토대인 구조체계에 초점을 맞춘다. 1) 특정한 구조주의적 이론체계(프라이 이론 등)를 활용하여 텍스트를 장르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가? 2) 특정한 구조주의적 이론체계(그레마스 이론 등)를 활용하여 텍스트의 서사가 작동하는 양상을 분석해 보자. 해당 텍스트의 문법과 다른 유사한 텍스트의 문법 사이의 관련성을 추측해 볼 수 있는가? 해당 텍스트의 문법과 그 텍스트가 생산된 문화 사이의 관련성을 추측해 볼 수 있는가? 3) 컬러의 ‘문학능력’이론에 따라 텍스트를 분석할 때,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내면화해야 할 해석의 규칙이나 약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 제8장 해체 비평   - 1960년대 후반 자크 데리다에 의해 촉발된 해체론(deconstruction)은 1970년대 후반 문학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체론을 통해, 언어 안에 내재해 있어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지를 수월하게 알 수 있다.   1. 언어를 해체하기   - 해체론의 입장에서 보면, 언어는 모호하고 안정되지 않았으며, 신뢰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 해체론에서 바라보는 언어는 기표들과 기의들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언어는 오직 기표들의 사슬로 구성된다. 해체론에 따르면 내가 발화하는 기표는 내 머릿속 기표들의 사슬이며, 그 기표는 내 발화를 접한 사람의 머릿속 기표들의 사슬을 환기시킨다. - 우리가 알 수 있는 의미는 기표들의 놀이가 남기고 간 흔적(trace)뿐이다. 이 흔적은 우리가 낱말을 정의하는 바탕이기도 한 차이(differene)로 이루어진다. 붉은색이라는 낱말은 붉은 색이 아닌 모든 색의 기표의 흔적을 동반한다. 왜내면 우리는 다른 기표들과의 대조 속에서 그 낱말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의 색깔이 같다고 생각하면 붉은색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또한, 기표들로 이루어지는 언어의 놀이는 의미를 끊임없이 연기하거나(deferral) 지연시킨다. - 데리다는 언어가 겉으로는 안정된 의미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정된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하든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언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해체론은 언어를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또는 신념 및 가치체계)인 것으로 본다. 구조주의에서는 우리가 양 극단 곧 이항대립을 설정하여 경험을 개념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선이라는 낱말을 이해하고자 할 때 이를 악이라는 낱말과 대립시킨다. 데리다는 이러한 이항대립들이 어떤 위계질서로 구축되었다고 한다. 대립 쌍 가운데 어느 한쪽은 언제나 특권을 가지거나 다른 한쪽에 대해 우위를 갖도록 상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생산물(소설,영화, 수업, 재판 등) 안에서 작동하는 이항대립을 찾아내고 그 대립 쌍 가운데 어느 쪽에 특권이 부여되는지 확인하면, 그러한 문화적 생산물들로 조장되는 이데올로기와 관련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2. 세계를 해체하기   - 문화의 이데올로기들이 전달되는 경로가 언어라고 한다면,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경로 역시 언어이다. 해체론에 따르면 언어는 우리의 ‘존재근거’가 된다. 우리 존재를 살피고 고찰하는데 나름의 언어를 갖는데 그 나름의 언어를 해체론에서 담론(discourse)이라고 한다. ‘불변의 중심개념’은 언어의 불안정성 때문에 존재하지 않고 무한의 담론만이 존재한다. 세계관이 언어로 구성된다는 이론은 서구철학을 탈중심화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3. 인간성을 해체하기   - 언어는 이데올로기들이 경쟁하는 불안정하고 불분명한 각축장이므로, 우리 자신도 이데올로기들이 힘을 겨루는 장이 된다. 사람들은 하나의 안정된 정체성에 대한 자아상을 갖는데, 이는 문화와 공모하여 만들어낸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 또한 스스로를 안정되고 일관된 것으로 인식하려들지만, 실제로는 매우 불안정하고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란 말은 우리가 하나의 단일한 자아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매순간 수없이 갈등하는 믿음, 욕망, 두려움, 불안, 의도 등으로 구성되는 복합적이고 파편화된 존재다.   4. 문학을 해체하기   - 해체론을 요약하면 1) 해체론에서 언어는 표현 가능한 의미를 끊임없이 흩뿌린다는 점에서 모호하고 불안정한 동시에 역동적이다. 2) 해체론에서 인간존재는 중심도, 안정적인 의미도, 고정된 태도도 갖지 않는다.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경로가 언어인데, 언어는 모호하고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해체론에서 인간의 정체성이란 자기 자신이 발명하고 스스로 자기 것이라고 믿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4) 문학의 구성요소가 언어인 이상, 문학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모호하고 불안정한 동시에 역동적인 무엇이다. 어떠한 해석도 최종 해석이 될 수 없다. 저자가 텍스트를 구성할 때 자신을 둘러싼 문화적 환경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독자 역시 각자의 읽기 경험을 구성할 때 자신을 둘러싼 문화적 환경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학텍스트와 비평텍스트 모두 해체가 가능하다.   - 문학텍스트 해체의 목표는 1) 텍스트의 결정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2) 텍스트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복잡한 작동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 텍스트의 결정불가능성은 텍스트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고, 복수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의미들의 상호 모순으로까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 해체비평가는 핵심주제와 관련하여 텍스트 안에서 모순관계를 이루는 의미를 탐색하며, 특히 텍스트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자기모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를 통해 텍스트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찾아내고 그 한계를 이해하려 한다.   5. 해체비평가가 던질만한 질문들   언어의 불안정성과 의미의 결정불가능성을 보여 주고자 할 때, 텍스트가 생산하는 갖가지 모순된 해석들, 그리고 어떤 문제들에 대해 텍스트가 답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답을 내놓지 않는 다양한 양상들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텍스트가 부추기는 것으로 보이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텍스트에 나타나는 모순의 증거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어떤 식으로 증명하는가?     ---------------------------------------- 제9장 신역사주의와 문화비평   1. 신역사주의와 문학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 지배적인 문학 연구 방법론이었던 전통적 역사주의 비평은, 그 대상을 저자의 삶에 관한 연구 또는 작품이 집필된 역사상의 시기에 대한 연구로 한정시킴으로써, 저자가 작품을 집필하게 된 의도를 찾아내거나, 작품이 구현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신비평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역사와 관련된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신비평의 입장이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이란 시간을 초월한 역사 바깥의 영역에 존재하는 자율적(자기 충족적)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신역사주의는, 문학 텍스트를 주변화하는 전통적 역사주의와, 시간을 초월한 역사 바깥의 영역에 문학텍스트를 위치시키고 신성시하는 신비평을 거부했다.   - 신역사주의 비평가들은 문학텍스트를 일종의 문화적 가공물로 본다. 문학텍스트 는 그것이 생산된 문화내부를 순환하던 담론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동시에 그 담론들을 형성해 온 것이다. - 담론은 특정 시공간에서 특정 문화적 조건에 따라 형성되는 사회적 언어로서 인 간경험에 대한 특정한 이해방식을 표현한다. 신역사주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권력이 갖는 복잡한 문화적 역동성을 단독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 신역사주의의 핵심요소   1)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해석의 문제이지,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역사 서술은 서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문학비평가들이 서사를 분석할 때 활용하는 도구를 사용하여 역사서술을 분석할 수 있다. 2) 역사는 선형적이지 않고(역사는 원인 ‘가’에서 결과 ‘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진보적이지도 않다.(인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3) 모든 권력은 물질적 재화의 교환, 인간존재의 교환, 문화가 생산하는 다양한 담론들이 낳은 개념들의 교환을 통해 그 문화 안에서 순환한다. 4) 단일한 시대정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역사를 총체적으로(전체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역사에 대한 분석이란 역사의 전체상 가운데 일부만을 설명하는데 그치므로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5) 개인의 정체성은 역사적 사건, 텍스트, 문화적 가공물 등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낳은 문화에 의해 형성되는 동시에 그 문화를 형성한다. 6) 모든 역사분석에는 주관성이 개입된다. 역사가는 역사 해석에 관한 나름의 입장이 바로 자기 자신의 문화적 경험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 문학텍스트를 해석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첫째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문화적 가공물, 이데올로기도 그것을 둘러싼 다른 무수한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가공물, 이데올리기와 관련짓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우리의 문화적 경험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므로 우리 분석에는 진정한 객관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분석은 항상 불완전하고 부분적이며 우리의 관점은 언제나주관적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해야한다.   신역사주의와 문화비평에 따르면, 문학텍스트는 그 문학텍스트를 탄생시킨 문화와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또 그러한 문화들을 형성시키는 온갖 담론들의 순환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신역사주의와 문화비평은 해당 문학텍스트가 그 담론들의 형성에 어떻게 개입되는지, 어째서 담론들의 순환은 곧 정치적 사회적 지적 경제적 권력의 순환인지, 우리가 점하는 문화적 위치는 문학/비문학텍스트 해석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3. 문화비평   - 문화비평이론가들은 문화란 특정한 생산물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며, 고정된 정의 가 아닌 살아 있는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하나의 문화란 저마다 변화하고 발달하 며 상호작용하는 개별문화들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문화의 생산과정을 분석해보면, 그것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전달하고 변형시킴 으로써 어떻게 문화적 작업을 수행하는지 찾아낼 수 있다.   - 문화비평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신역사주의와 이론적 전제들을 공 유한다. 1) 문화비평은 정치적 지향을 드러내는 편이며 억압받는 집단을 지지한다. 2) 그렇기 때문에 문화비평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를 비롯한 정치성이 강한 이론들을 활용하여 분석작업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3) 좁은 의미의 문화비평은 특히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는다.   4. 문화비평과 문학   문화비평을 어떻게 문학작품에 적용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문화비평은 정전화된 문학작품들이 대중적 형식으로 각색된 사례들을 분석함으로 써, 대중적 판본들이 원작의 이데올로기적 내용들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 확인하 고자 한다. 이를테면 어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다고 할 때, 그 영화가 원작 소설보 다 인간의 본질을 더욱 비극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원작 소설이 전해 주지 못하는 인간 조건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영화가 제시하는가? 영화가 원작소설의 서사에 나타나는 모호함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문화비평이 염두에 두는 또 다른 부분은, 어떤 매체의 생산물이든지간에 연예산 업에서 의도한 대로, 시청자나 관객이 그 결과물을 수용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문화비평 이론가들의 작업은 검토 대상이 대중문화이든 고급문화이든 특정한 문화적 생산물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과정 에서 어떤 변화를 겪는지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제10장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   1. 레즈비언 비평   레즈비언 비평가들은 여성주의 비평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억압들을 다루되, 가부장적 남성의 특권이 조장한 억압뿐만 아니라, 이성애자의 특권이 조장한 억압까지 다룬다. 레즈비언의 정체성은 자신의 감정을 건강히 유지시켜주고,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도록 도와주는 주요 원동력을 다른 여성에게서 찾음으로 구성된다. 즉 레지비언은 여성정체화한 여성(woman-identified woman)인 것이다. 레즈비언 비평가들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은, 레즈비언 문학전통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한 전통과 연결시킬 수 있는 작가와 작품은 무엇인지, 레즈비언 특유의 글쓰기 방식이란 무엇인지, 레즈비언 작가들의 성적/감정적 지향이 그들의 문학적 표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레즈비언이 쓴 문학작품 또는 레즈비언이 등장하는 문학작품에서, 레즈비언이나 ‘남성같은’ 여성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특정 텍스트에 나타나는 성정치(sexual politics)를 분석한다.   2. 게이 비평   게이 비평가들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게이 감수성(gay sensibility)이다. 게이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타자,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예술과 음악에 반응하고 또 이를 창조하는 방식, 문학을 해석하고 창조하는 방식, 감정을 체험하고 바라보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게이비평가와 레즈비언비평가는 문학 텍스트를 접근하는 방식이 상당히 유사하다. 게이 시학의 구성요소 또는 게이 특유의 글쓰기 방식을 규정하고, 게이의 문학전통을 규명하고, 그러한 전통에 어떤 작가와 작품이 속하는지 결정하려한다. 또한 게이 비평가는 게이 감수성이 어떻게 문학적 표현에 영향을 미치는지 검토하고, 이성애적 텍스트가 어떤 식으로 동성성애적 차원을 담아낼 수 있는지 연구한다. 게이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과소평가되거나 왜곡되고 숨겨졌던 작품을 재발견하려 한다. 더 나아가 게이 비평가는 특정 텍스트 안에서 작동하는 성정치를 밝히려 한다.   3. 퀴어 비평   퀴어라는 말은 비이성애자들이 모두 속할 수 있는 집단적 정체성을 제시할 포괄적 용어로서 채택되었다. 퀴어 이론에 따르면 섹슈얼리티(성적 지향성)의 범주는 동성애/이성애와 같은 단순한 대립으로 정의될 수 없다. 특정행동이나 감각, 또는 신체유형 등에 대한 선호여부로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정의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는 살아가는 동안 여러차례 달라질 수 있다. 퀴어이론은 섹슈얼리티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넓은 의미의 퀴어비평은 비이성애자의 관점에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모든 문학비평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퀴어비평은 텍스트가 성적범주 등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드러내는 비평이다. 즉, 텍스트안에서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범주가 무너지고 겹쳐짐에 따라 인간 섹슈얼리티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재현하는 데 실패하는 다양한 양상들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라고 할 수 있다.   4.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이 공유하는 몇가지 특징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이 활용하는 텍스트상의 증거들도 비슷한 것이 많다. 동성성애적 이미지 양식이나 같은 성별을 지닌 등장인물들 사이의 성애적 만남처럼 텍스트 안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단서들 말고도, 동성성애적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 미묘한 단서들이 텍스트 안에 여럿 존재할 수 있다. 미묘한 단서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 (1) 동성사회적 유대(homosocial bonding): 같은 성별을 지닌 등장인물들 사이의 강한 정서적 유대를 묘사함으로써, 미묘하면서도 명백히 동성성애적일 수 있 는 어떤 동성사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2) 게이 또는 레즈비언 기호: 두가지 형식이 있는데 첫 번째 형식은 이성애중심 문화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해 떠올리는 정형화된 특징들, 곧 고정관념들 로 구성된다. 두 번째 형식은 게이 또는 레즈비언 하위문화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된 암호화된 기호들로 구성된다. 우리의 목표는 그러한 기호들이 텍스트 안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하여 퀴어적 해석을 가능케 하는 잠재력을 창출해 내는지 분석하는데 있다. (3) 같은 성별을 지닌 분신들(Same Sex ‘doubles’): 서로 외모가 닮았거나 행동 방식이 비슷하거나 아주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는 같은 성별의 등장인물들로 구성된다. 게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가 특히 중시하는 부분이 성적 유사성이 라는 점에서, 서로에게 일종의 거울이미지로 기능하는 같은 성별의 인물들도 게이 레즈비언 기호로서 작동될 수 있다. (4) 관습을 거스르는(위반적) 섹슈얼리티(Transgressive sexuality): 위반적 섹슈 얼리티에 주목함으로써 전통적 이성애 규범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온 갖 종류의 위반적 섹슈얼리티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 위반적 섹슈얼리티: 게이가 여자와 외도, 레즈비언이 남자와 외도, 이성애 주의자가 동성과 외도.   5.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가가 던질 만한 질문들   (1) 특정한 게이, 레즈비언, 퀴어 문학작품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의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작품의 주제나 등장인물 묘사같은 것으로 드러나는가? (2) 특정한 게이, 레즈비언, 퀴어 문학작품이 지니는 시학(문학적 장치 및 전략)은 무엇인가? (3) 작품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성애혐오를 담고 있는가? 작품이 이성애중심적 가치를 비판하는가? 아니면 찬양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는가? (4) 문학텍스트가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별개의 범주로 딱 잘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섹슈얼리티의 양상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가? 이 질문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해체론적 관점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유일하게 퀴어 비평에 대한 좁은 의미의 이론적 정의에 대한 질문이다.   ------------------------------ 제11장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     1.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가들은 미국 흑인들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만드는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문학텍스트로 약화되거나 반대로 강화되는지를 분석.   2. 비판적 인종이론의 기본원리: 비판적 인종이론은 인종문제를 비롯한 인간관계전 반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1) 일상적 인종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라는 말이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인 종차별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서를 극도 로 피폐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온갖 종류의 인종차별이 유색인들 에게 날마다 가해진다. 특히 인종적 소수자들의 능력을 항상 과소평가할 때 이다. (2) 이해일치: 인종차별주의는 백인에게 상당한 이득이 된다. 같은 일을 하는 백 인노동자보다 임금을 낮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흑인노동자를 착취하는 백인상 류층의 재정적 이해관계속에 인종차별주의가 가동되고 있다. (3)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인종: 초창기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인과 유대인, 아일랜 드인은 백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어떤 개인을 흑인으로 규정하는 데는 몇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든지 간에 조상 가운에 흑인 한사람만 있으면 된다. (4) 차별적 인종화: 지배사회가 변화하는 요구에 발맞춰 그때그때 다른 방식으로 각기 다른 소수인종 집단들을 인종적 특성이란 것에 따라 정의한다. 일자리 를 놓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백인들의 경쟁상대가 될 것 같으면 그때마다 그들에게 폭력적이며 게으른 성향이 있다는 고정관념이 덧씌워졌다. (5) 상호교차성: 한 개인의 복잡한 정체성은 인종, 계급, 성, 성적 지향, 정치적 지향, 개인사 등이 상호교차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억압을 당하는 요인이 하 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경우에 차별과 마주하게 되는지 인식하는데 종종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6) 유색인의 목소리: 소수인종에 속한 작가나 사상가들이 백인작가나 사상가들 보다는 인종 및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집필하고 발언할 때 좀 더 유리한 위치 를 점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소수 인종에 속한 작가나 사상가들 이 인종차별주의의 피해 당사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을 ‘유색인의 목소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유색인의 목소리’는 생물 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며, 인종적 억압의 경험이 인종 및 인종차별주의에 관하여 말하고 글을 쓰는 능력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인종 이상주의: 교육, 인종차별적 발언을 예방하는 규정, 소수자 집단에 대한 매체의 긍정적 재현 등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인종차별적 태도를 변화시킴으로 인종 평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 인종 현실주의: 미국에서는 인종평등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인종평등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며, 모든 형식의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만이 필요하다는 입장.   3.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과 작품   시학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학적 전통은 다른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구술성이고, 둘째는 민속모티브이다. 구술성: 언어의 발화와 관련된 특성은 독자들에게 실제 인간의 육성을 듣는듯한 느낌을 선사함으로 문학작품에 직접성과 현장감을 불어넣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에서 구술성을 구현하는 방법은 주로 흑인 토착영어를 사용하거나 흑인들의 발화에 깃든 리듬을 모방하는 것이다. 민속모티프를 활용하면 광범위한 인물 유형과 민속활동을 작품에 등장시킬 수 있으며, 이는 이들의 과거가 현재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4. 아프리카계 미국인 비평가가 던질 만한 질문들   (1) 아프리카인의 유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와 경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 등에 담긴 특징들에 대해 문학작품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는가 (2)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작품 특유의 인종정치(인종억압 또는 해방과 연관된 이데올로기적 의제)는 어떤 것인가? 이를테면 해당 작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잘못된 역사적 재현을 바로잡는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와 경험, 성취를 예찬하는가? 인종차별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영향을 다루는가? 아니면 백인 작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3)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작품 특유의 시학(문학적 장치 및 전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4) 해당 작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5) 문학작품이 이해일치,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인종, 백인의 특권 등과 같은 비판적 인종이론의 개념들을 어떻게 구체적인 실례로서 보여 주는가? (6) 백인작가들이 작품 속에서 백인등장인물에 대한 긍정적인 상을 구축하려할 때, 아프리카적 존재 즉 흑인 등장인물, 흑인에 관한 이야기, 흑인의 어법 묘사, 아프리카나 흑인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 등을 어떻게 동원하는가?                 ------------------------------------------------------------ 제12장 탈식민주의 비평   1. 탈식민 (postcolonial)이란, 일반적으로 한 국가에 대한 다른 국가의 식민지 지배가 종식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적 생산물을 분석할 때, 분석대상을 신민지배가 종식된 뒤에 나온 텍스트로만 한정하지 않으며, 식민통치의 억압과 처음 맞닥뜨리게 된 시기 이후에 쓰인 작품이라면, 발표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관심을 갖는다. 탈식민주의 비평 이론체계는, 식민주의 및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다루되, 이데올로기가 ① 피식민지인들로 하여금 식민통치 세력의 가치들을 내면화하도록 압박해 온 양상과 ② 압제자들에 맞선 피식민지인들의 저항을 어떻게 촉진시켜왔는지를 분석한다.   2. 탈식민주의 관련 논쟁들   (1) 백인정착식민지(캐나다와 호주같은 제2세계)의 문학이 탈식민주의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가? 유색인토착민을 진압하고 땅과 천연자원을 빼앗아간 백인정착민들은 영국을 모국으로 여겼으며, 유색토착민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포함될 수 없다는 주장과, 백인식민주체(백인정착민)들도 침략식민지의 유색인 식민주체들과 마찬가지로 이중의식(식민주체는 식민주의자들의 문화와, 자신이 속한 토착문화라는 상호적대적인 두 문화 사이에서 분열되는 느낌)을 경험했기 때문에,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 (2) 오늘날의 식민화는 다국적기업들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약소국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복속시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수단이 달라진 것이다. (3) 경제적 지배의 직접적 결과로 나타나는 문화제국주의 문제로, 문화제국주의는 한쪽의 문화를 다른 한쪽의 문화가 ‘접수’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4) 탈식민주의 주요 관심대상은 열등한 지위에 놓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 즉 하위주체(하층민)인데, 정작 이를 다루는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은 대부분 유럽식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知的 엘리트로 학계의 지배계급에 속하고 있다. (5) 문학교육과 문학비평을 장악하고 있는 문화적 유럽중심주의가 탈식민주의 문학을, 유럽의 기준과 규범에 맞추어 해석하는, 즉 ‘식민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   2. 탈식민주의 비평과 문학의 공통적인 주제   (1) 토착민과 식민지 지배자들의 첫 대면과 토착문화의 붕괴 (2) 현지안내인을 동반하고 낯선 미개척지를 관통해 가는 외부 유럽인들의 여정 (3) 식민지지배자들이 토착민들을 열등한 존재로 대하는 타자화와 억압적 식민통치의 모든 것 (4) 식민지지배자들의 생활/문화를 모방함으로써 인정받으려는 피식민지인들의 시도 (5) 망명(피식민지인들이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거나 영국에서 방황하는 외국인이 되는 경험). (6) 독립이후의 활력과 뒤이은 환멸 (7) 개인과 집단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투쟁과 소외, 고향이 아닌듯한 낯섦(문화적 고향 또는 소속감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 이중의식, 혼종성(둘 이상의 문화가 뒤섞인 잡종임을 체험하는 것)등과 관련된 주제들 (8) 식민지 지배이전의 과거와 연속성 확보 및 정치적 미래   3. 탈식민주의 비평가가 던질 만한 질문들: 탈식민주의이론을 활용하여 문학작품에 접근하는 방법들.   (1) 문학텍스트가 식민지지배의 여러 양상(정치적, 문화적 억압 등)들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2) 텍스트가 탈식민주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 즉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 사이의 관계나 이중의식 및 혼종성에 관한 쟁점들과 관련하여 무엇을 드러내는가? (3) 텍스트가 반식민주의 저항을 북돋우거나 억누르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동력과 관련하여 무엇을 드러내는가? (4) 텍스트가 정전화된 식민주의적 작품의 인물, 주제, 假定 등에 어떻게 대응하고 또 어떤 견해를 보이는가? 정전화된 텍스트(유럽의 역사적, 허구적 기록)에 대한 기존 해석을, 탈식민주의적 텍스트가 어떻게 재구성, 폭로, 전복시키는가? (5)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여러 국가들에서 나온 다양한 문학작품들 사이에 유의미한 유사성이 존재하는가? (6) 서구 정전에 속하는 문학텍스트는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재현함으로써 혹은 식민통치를 받는 토착민들을 어떻게 부당하게 침묵시킴으로써,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기반을 약화 혹은 강화시키는가?   - 한마디로, 탈식민주의 이론의 궁극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의 정체성(심리상태)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함으로써,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출처] 타이슨 <비평이론의 모든 것> 요약|작성자 옥토끼  
19    시 창작 실무이론 / 글 쓴이 박용찬 댓글:  조회:1859  추천:0  2018-03-16
시 창작 실무이론 / 글 쓴이 박용찬     1. 시를 쓰고서 2~3개의 문제점을 발견하여 고치도록 노력을 합니다   2. 시는 절대적인 1인칭이다 시는 절대적인 1인칭입니다 시를 쓰고자 할 때에는 주체의식이 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내, 너의, 뭐 이런 종류의 시어들) 불필요 합니다 (예) 내 향기 담아 어디로 가는지 묻지를 마라 에서 내 향기 담아 는 없어도 좋은 불필요한 말이다   3. 시의 속성을 먼저 알고 써야합니다   4. 시는 설명을 하려고 하지 말고 물처럼 흘러가도록 써야합니다 (예) 고즈넉이 내려앉고 에서 고 부드러운 미풍 산골여인 가슴 마냥 설레고 에서 고 “고" 자가 많이 들어가는 이유는 설명이 필요해서 그런 것입니다   □ 연 나누기 – 연을 나눌 때 상투적으로 연을 나누지 말고 - 연을 나누어서 좋은지 아니면 단열시가 좋은지를 스스로 파악해서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면 연을 눔   □ 시의 대상 – 시는 독자를 대상으로 써야 합니다 - 독자를 의식한 후에 써야 합니다   시압축 조병화 선생님 시는 짧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시는 가급적이면 압축하는 것이 좋습니다 - 시의 생명은 함축입니다 ․  시의 힘은 넣은 것이 아니라 빼는 것에 있습니다 ․ 시가 길어질수록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 표현의 욕심을 버리고 가급적이면 짧게 써서 독자에게 즐거움을 줘야 함   - 시는 문학의 한 장르이고 문학은 예술의 한 장르입니다 - 시는 가장 경제적인 장르입니다   □ 시적 호흡 – 시의 호흡은 짧은 것, 긴 것이 있는데 - 시의 속성상 짧은 것이 많으며 - 시의 호흡이 긴 산문시에서는 길게 써보는 연습이 필요함   □ 시의 목적 – 시의 목적은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 시는 시입니다 시는 시로써 즐거움, 쾌감을 주어야 하고 - 지식이나 목적을 위주로 쓰지 않아야 합니다 한용운 선생님은 항일적인 글을 많이 쓰신 분입니다 "조국이 통일되면 내 시를 안 읽어도 좋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미래를 미리 짐작하신 분입니다   - 민중 문학하는 사람들도 - 결국엔 서정시를 쓰고 있고 서정시가 시의 생명입니다     - 현대시를 씁시다 김소월, 윤동주, 김영랑, 서정주님은 세월이 흘러도 시가 남고 사랑 받고 있습니다   - 시의 객관성이 있어야합니다   - 현대시는 은유의 시입니다 그리움이란 시를 쓸데에 그리움이란 단어를 직접 쓰지 말고 대상을 통해서 말해줍니다 - 독자들이 그리움을 생각할 수 있도록 여운을 남기는 것이 필요함 (예) 모란이 피기까지에서 모란이 대상이 되었듯이 직접표현이 아닌 간접으로 대상으로 표현한다   - 수식어 사용을 절제합니다 (예) 별이 되는 그리움 갈 곳을 잃어 휭 한 밤바람에 에서 '휭' 이란 시어 ⇒ 수식어를 절제해야 합니다 ⇒ 너무 아름답고 효과적인 장식을 하지 맙시다   □ 시의 부호 - 미숙할수록 의문형을 많이 사용합니다 의문형은 극히 절제합시다 - 의문부호나 일반 부호사용은 시에게 무거운 언어입니다  - - 모든 부호(감탄사나.! 쉼표, 생략법..... 등등.. 물음표 ?)는 될 수 있는 대로 부호사용은 금합 니다 - 요즘은 한문 쓰고 ( ) 부호도 안 쓰고 있습니다 - 대신 주해를 달아 줍니다 - 감탄사는 시를 천박하게 합니다. 함부로 사용하지 맙시다   □ 시 낭송 - 제목과 이름을 꼭 먼저 낭송한다    □ 유사음에 대하여 - 유사 음 반복을 피합니다 - 반복법은 시를 악화시킵니다 (예) 나비가 나른다 춤추며 나른다  ⇒ "나" 자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 의성어 의태어도 가장 불완전한 언어입니다  (예) 추적추적, 살랑살랑, 너울너울 모양을 모 ⇒ 모양을 흉내내거나 모양을 흉내내거나 소리내는 언어 가급적이면 시속에 함부로 넣지 않도록 합니다   □ 관념시 - 관념시를 쓸 때에는 생각이 많이 필요합니다 - 쉽게 풀어서 써야하며  - 사유성 관념성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너무 잘 쓰려고 하면 경직되므로 힘들지 않게 편하고 쉽게 쓰도록 노력합니다 - 시는 인격이므로 마음가짐 그대로 쓰며 자연스러움이 중요합니다   □ 시 제목 - 시의 제목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 아픈 사연이란 제목과 사연이란 제목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독자들이 독자들이 읽을 때 아픈 사연 하면 벌써 아픈 사연이구나 하고 짐작하여 호기심이 떨어집니다 사 ⇒ 그러나 사연이란 제목을 쓰면 무슨 사연일까 궁금해합니다. 그러므로 시 제목 결정할 때 중 요하게 생각해서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 그러나 이토록 사연, 고구마, 바다 등 이런 명사만 사용하게 되면 시집을 낼 때에 제목이 너 무 경직되어 있어서 부드럽지 못하니까 시집 낼 때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길게도 써 봅니다 - 시인이 시를 쓸 때에는 뱀처럼 차갑고 불처럼 뜨겁게 써야 합니다 이성은 차갑고 감성은 뜨겁게 이 두 가지가 잘 교류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 이성적이거나 감성적으로 치우치면 안 됨   □ 감정이입 - 시는 대상이 있어야 함 - 대상에 내 마음을 넣어 마음을 표현한 시를 감정이입이라 함  (예) 선인장 꽃이란 시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선인장꽃 ⇒ 선인장꽃이 바로 내가 되는것, 선인장을 보며 단순하게 아프다 라고 끝나서는 안되고 상상력 이 필요합니다 - 철두철미하게 창조하고 자기언어로 표현해 봅니다 상투성에서 벗어나고 탈피해야 합니다 엉뚱함도 아주 중요함 -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의 일종이란 생각으로 미적 감각을 때려 부스는 작업도 필요함   □ 비 시적 시어  (예) 산림 속 호수 깊이에 몽땅 푸른 이파리 이란 ⇒ 몽땅 이란 시어   내 맘 한 올 오날 햇살아래 세워 놓았나니 이란 ⇒ 오날이란 시어 이란   그 다음날도 햇발 햇발처럼   길 우에  ⇒ 길 우에 란 시어   - - 이처럼 깡패성 시어나 표기법에 맞지 않는 사투리, 은어를 사용할 때에는 언어에 통달한 사 람이여야 가능합니다   - 시적 허용이란 말이 있습니다 시에선 그것이 용납되는데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통달한 사람이 가능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시로 언어를 때려부숨이 용납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그런 시어사용을 금합니다   □ 시속의 한자사용에 대하여 - 현대시는 한자 사용을 안 합니다  (예) 4월의 斷想 朴素姸 - 이름이나 제목 등 한자 사용을 금하고 꼭 써야할 경우엔 가로 안에 씀 - 한자도 무언의 무거운 언어입니다 무거운 느낌을 주는 한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 요즘 원고 청탁 시 한자 쓰지 말고 한글로 쓰라는 부탁을 많이 하는 추세입니다   □ 시를 쓸 때 - 던지는 시가 아닌 가슴에 들어오는 시를 써야합니다 - 감동적인 시가 가슴에 들어오는 시입니다 - 던지는 시란 (예) 항일시, 민중시, 사실주의적인 시를 말하는데 이런 시가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  최남선, 이광수님은 20 대에 대한민국 현대 문학의 장을 연 분들입니다 우리는 어 -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시를 쓸 것인가 나가야 할 방향을 설정해야 함   시는 설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시는 지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시는 시입니다 시는 완성이 없습니다 시는 첨가하는 것이 아니요 빼는 것이 힘입니다     거짓없는 시가 좋습니다 무거운 소재를 가볍게 가벼운 소재를 무겁게 써 봅니다 시의 공간성 시의 공간성도 좋은 것입니다     (예) 하늘에 걸어 말리 우니 저 높은 기 저 높은 기암절벽도 벙어리가 되어 섰구나 여기서 하늘과 기암절벽 사이 공간성 확보가 좋습니다   □ 표기법에 대하여 - 표기법 정말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 원고 심사 시 아무리 시 잘 써도 표기법 오류가 있으면 무조건 버립니다 - 시는 숫자, 번호, 점하나 잘 신경 써야 합니다 - 구조주의 적인 면에서 잘 생각해서 써야 합니다  (예) 콘센트에 플러그를 꼿는 순간  ⇒ ⇒ 꽂는 순간이 맞습니다.   □ 시는 절대적인 1인칭입니다 (예) 내 인생의 가해자라는 판결을 내린다  ⇒ 내.... 여기에서 '내'를 빼면 너와 나와 우리가 됩니다 더 큰 세계로 더 큰 세계로 나 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라는 말을 '내'라는 말을 안 써도 시는 1인칭이므로 독자가 다 압니다   □ 주체의식의 시 - 시는 꼭 주체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 테마가 있는 시이지만 - 주체의식은 조심해서 써야합니다 - 좋은 시는 삶의 뿌리를 내리는 시입니다   □ 시어 함축 - 꼭 있어야 하는 시어 넣고 –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면 그 시어는 뺍니다 시는 방심하면 안 됩니다 (예) 하얀 백지 위에 머무는 까만 점 하나 ⇒ 어차피 까만 백지, 파란 백지는 없으니 하얀 백지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 없는 시어 사용을 금합니다 - 또한 이별, 사랑, 고독, 그리움 등 많이 사용하는 시어인데 이런 시어들은 간접적인 표현을 합 니다   - - 이별을 대신할 다른 시어가 무엇이 있을까? 하고 한시간이고 두시간 고민하고 생각하여 여운 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 한자어 사용 - 고유어가 좋으냐 아니면 한자어가 좋으냐를 잘 생각해서 사용합니다 (예) 화폭에 채색된 사랑 ⇒ 채색 대신..... 물든 사랑으로 써도 됩니다 ⇒ 이것저것 넣었다 빼보고 더 좋고 어울리는 시어로 사용함   □ 존대어 - 존대를 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합니다 한용운 선생님은 존대어를 많이 썼습니다 (예) 흔적을 지우기 시작합니다 ⇒ 시작합니다를 시작한다로 써 봅니다 느낌이 많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 나도 아파 울었습니다 나도 아파 울었다 ⇒ 존대를 사용하므로 훨씬 애절한 느낌을 더해줍니다 그러므로 존대를 쓸 것인지 아닌지 그 시의 성격을 잘 파악해서 결정함   □ 시 세계 - 시 세계는 항상 현재형입니다 - 아무리 과거의 일 이라고 하더라도 현재로 써야합니다 김소월 선생님이 현재형의 시가 많습니다   □ 시 모방은 금물 - 시는 인격입니다 - 내 시가 모자라도 자기 스타일이 있어야 합니다 - 시의 악덕은 모방 즉 닮는 것입니다 - 남의 시 절대 흉내내지 말아야 합니다 - 철저하게 내 시를 쓰고 멋있다고 따라하지 맙시다   - - 노래 가사가 시에 들어가면 지적 분위기 시적 소제의 모사성에 협의 받습니다 - - 그러나 자기는 전혀 모방한 것이 아닌데 한국적인 정서에 의해 혹 다른 시랑 같다는 협의를 받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괜찮습니다   □ 반복법 - 반복법은 시의 내용을 약화시킵니다 (예) 한 꺼풀에는 눈물을 한 꺼풀에는 외로움을 ⇒ 보통 사람들이 반복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 시의 내용을 약화시킵니다 - 반복법에 성공한 사람은 딱 한사람 있습니다 (예) 박두진 시인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 띄어쓰기 - 본명은 붙여씁니다 - 필명은 띄어씁니다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   □ 제목 정할 때 - 제목도 여운이 있어야 합니다 - 제목을 보고 포괄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 제목과 시를 너무 구체화하지 않도록 합시다 - 시에 항상 여운을 남기는 것 중요합니다 (예) 편운 조병화님의 시비 제막식에 다녀오며 이런 제목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제목을 만 이 제목을 만약 시비란 제목이나 시비 앞에서라고 한다면 어떨까? 독자들이 읽 독자들이 읽을 때 무슨 시비일까 하고 궁금해하지 않을까요 제목을 제목을 구체적으로 다 쓰면 아! 조병화님의 시비 제막식이구나 하고 호기심이 덜합니다    □ 의미확대 편운 조병화님의 시비 제막식에 다녀오며 에서 (예) 님이시여 한 조각 구름 타고 가시는 가 했는데 온 하늘 머리 온 하늘 머리에 이고 편운이라 하셨군요 당신의 구름 한 조각으로 천지를 감싸니 사랑이 큰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님이시여란 시어와 당신의이란 시어가 있으므로 독자들이 읽기에 조병화 선생님을 말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당신이란 시어를 빼면 의미가 확대됩니다   혹 조병 혹 조병화 선생님을 놓고 쓴 시라고 하더라도 의미를 확대하는 방향의 시를 써야 합니다  (예) 물 위에 함부로 휩쓸리는 나뭇잎이거나 종이배처럼 지구는 돌든지 멈추든지 ⇒ 여기에서 종이배처럼 직유법 (~처럼, ~같이 ~인양 등등 )을 써서 구체화하려고 하는데 구체화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 그냥 종이배로 끝나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처럼 삭제)  (예) 지구는 돌든지 멈추든지 ⇒ 지구가 도니까 멈춘다는 것을 생각하는데 여기에서 지구는 돌든지 말든지 라고 하면 어떨까요? 훨씬 느낌이 다르지요 이렇게 깊은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고 시어를 선택합니다    □ 비유법 - 비유법 중에서 직유법이 가장 하치입니다 전에부터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 현대시는 은유의 시입니다   □ 시속의 비어 - 비어를 쓸 것인가 안 쓸 것인가 논란이 많습니다 황금찬 선생님은 미학 주의자입니다 시는 아름답게 써야 한다고 늘 말씀하지시죠 - 그러나 시엔 구조 속에 비어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조 속에서 시적 승화되면 비어가 안됩니다 시적 타당성, 예술의 타당성이 있을 때 비어 사용은 괜찮습니다  (예) 춘향전 작품은 구조 속에서 시적 승화된 작품입니다 ⇒ 시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 시가 좋다 나쁘다 판단할 때에 분석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와 직접 연관되어 좋다 또는 나쁘다 판단이 납니 다 - 시는 분석주의가 아닙니다   □ 시의 스케일 - 시도 스케일이 크게 써야합니다 - 때려 부수는 글 써 봅시다 - 시인은 누구나 자기 마음의 결이 있지만 - 시에는 자기 파괴 미의 시가 있습니다 - 얽매이지 말고 자기 시 쓰는 스타일을 파괴해 봅시다   □ 마음의 눈 - 대상에 관하여 내면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예) 하얀 그리움 눈처럼 쌓여진 거리   그리움을 무엇으로 그릴까 내면의 세계 내면의 세계에 눈을 떠야 합니다 대상을 마음의 눈으로 봅니다 대상을 통해서 내 놓을 수 있는 시가 되도록 합시다 - 가장 천박한 시는 자기의 푸념이나 넑두리 늘어놓은 시입니다 시는 푸념이나 넑두리가 아닌 절실함을 써야합니다     오늘 정리를 하며 올리면서 제게도 공부가 됩니다 본인의 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보면서 타인의 시까지 함께 살펴보니 참 유익합니다   우리가 배운 2~3 가지 정도만 기억하고 실제적인 시 쓸 때에 적용하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적용이 힘든 것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배워야 합니다   □ 사실주의 문학 - 민중문학,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을 사실주의문학이라 함 - 민중문학의 반대는 순수문학이 아니라 반 민중문학입니다   □ 상징의 종류 - 두 개의 상징이 있는데 1. 객관적인 상징:  (예) 비둘기...평화의 상징입니다 (예) 색깔이 주는 이미지 어둠, 검정...어둠 빨강...정열, 회색...슬픔, 초록...희망 이렇게 색이 이렇게 색이 주는 이미지상징도 있습니다   2. 개인적인 상징: (예) 김현승 시인님의 시속에서 까마귀가 자주 나오는데 그 까마귀는 절대고독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상징에는 객관적인 상징과 시인의 개인적인 상징이 있습니다   □ 은유 – 현대시는 은유의 시다 라고 합니다 - 은유라 하면 알면서도 확실하게 어떤 것인지 말을 잘 못할 때가 있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 볼펜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볼펜이 우는구나 뭘 은유 하는가? 볼펜이 운다고 할 때 (인간의 상실) 볼펜은.......운다 (예) 산에는 꽃이 피는데 가을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는데 여기서 잠재의식 속에서 꽃은 무엇일까?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은유입니다   ※ 은유란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비유가 은유입니다    (예) 내마음은 호수요 어떤 사물을 그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다른 사물로 나타내는 낱말 (예) 미련퉁이를 곰으로 키다리를 전봇대로 일컫는 것을 은유라 합니다    □ 모더니즘 - 요즘 시는 모더니즘 시라고 합니다 - 모더니즘 아닌 시가 없습니다   ※ 모더니즘이란 새로운 취미나 유행을 좇는 경향. 로 새로운 기계문명과 도시적 감각을 중시하고, 지성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현대문 학의 한 경향.    □ 난해한 시 - 시는 어렵게 의미 있게 쓰려고 하면 안됩니다 신경림 시인님은 시인이 쓰고 시인도 모르는 시 쓰고 잘난 척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 시속의 아라비아 숫자  (예) 7월의 뜨거운 7월의 뜨거운.... 가급적 아라비아 숫자보다 한글로 쓰 한글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시엔 그러나 시엔 절대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급적)  (예) 7월의 뜨거운 여기에서 계절에 못을 박았습니다 7월의...... 그냥 여름으로 쓰면 더 포괄적입니다 가급적 시적 느낌을 테두리 두르지 맙시다   □ 시어 - 우리나라 어휘수가 풍부하지 않습니다 - 한글사전 시어가 부족합니다 한자가 .........7: 고유어가.......3 결론은 시인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합니다     -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적극적인 자세로 -          표준말 맞춤법에 못 박지 말고 엉뚱하게 만들어 봅시다 그것이 시인의 자세입니다     - 시적 수련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 의문형 많이 사용합니다 ․  명령어 사용 많이 합니다   □ 교훈적인 시 - 조선시대 시는 가르쳐 주는 시였으나 - 시는 가르쳐 주는 분야가 아닙니다 - 교훈적인 시를 쓰기엔 시가 아깝습니다 조선시대 많이 써먹은 것이니 이젠 있는 그대로 시 써 봅시다 혹 가르쳐 주더라도 직접 표현이 아닌 간접 표현을 합시다    (예) 개들의 싸움을 보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길을 가다가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질문했습니다 할아버지 개들이 뭐라고 하면서 싸워요? 할아버지 말씀하시길.....!! 사람만도 못한 개놈아 하면서 싸운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이렇게 문학을 합니다   □ 시 제목 - 제목은 시의 얼굴입니다  (예)고향이란 제목이 있을 경우 정감을 줄 수 있는 다른 제목으로 써 봅니다   □ 시 흐름 - 시적 흐름의 변형 - 명사로 흘러가다가 뒤에 어투를 바꾸어 봅니다 - 지루하게 한가지 기법으로 쓰지 말고 - 여러 가지 기법으로 써 봅니다 - 시는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가 최선을 다해 쓸 뿐이지 타인의 시와 비교해서 보다 좋은 시 쓰려고 하지 맙시다   □ 표기법과 시어 - 사전 따라 하지 맙시다 - 혹 표기법이 장맛비가 맞아도 (예) 장맛비 // 장맛비 보다 장마비가 훨씬 부드럽고 좋으니 시어를 장마비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시엔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 시적 진술 - 솔직한 진술도 좋은데 대상을 통해서 은유 합니다 - 21세기 시는 은유의 시입니다 - 공부 할 때는 실패를 자행해 봅시다 - 졸렬한 성공보다 위대한 실패가 좋습니다 - 실패해도 고급스럽게 실패합시다 - 거대한 것을 압축해보고 - 아무것도 아닌 것을 거대함으로 표현해 봅시다   □ 시인의 독서법 - 시인은 지식을 쌓아 놓은 것이 아니다 - 머리에 저장말고 가슴에 저장합시다 - 시인의 가슴엔 화학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 남들은 a 할 때에 c가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 화학작용: 심리의 화학작용, 영혼의 화학작용   □ 소재주의 - 빤한 것 쓰지 말고 연습을 합시다 - 시는 소재주의가 아닌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예) 오늘은 오늘인걸 오늘은 오늘이다 -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은 과감하게 삭제합니다 (예) 개미에 대하여 쓰고 싶을 때 곤충도감 보고 쓰지 말고 직접 부딪쳐 보고 써야 합니다 소재주의 버리는데 너무 버리지 말고 약간씩만 적용합니다   □ 시 쓸 때 주의할 점 - 시 쓸 때에 실명을 안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유인즉 : 그 사람에게 못 박혀 버리니까 - 몇 시인지 - 계절 - 몇 월인지 이런 것은 구체적으로 쓰지 않는다   □ 너무 많이 쓴 시어는 피합니다 - 흔한 시어는 버리고 개발합시다 잉태, 고독, 사랑, 그리움, 사연, 눈물, 등등... - ~~처럼 ~~인양 등 직유법도 진보 하다는 소리들을 수 있습니다. - 흔한 것 같지만 흔하지 않는 것을 사용합니다   □ 장황하게 쓰지 않는다 - 늘어놓지 않고 뼈만 앙상한 시를 써봅시다 (예) 두 동생과 조카, 남편이   □ 정치, 경제, 사회에서 사라질 것 쓰지 맙시다 - 시의 생명은 시간성입니다 - 몇 년이면 없어지는 것 쓰지 말고 일과성, 소모성은 피합니다 - 한번 지나가 버리는 것에 대하여 쓰지 맙시다 (예) 로또의 빈 껍질 ⇒ 세월이 지나면 모르는 것 ( 롯또 복권 같은 종류)   □ 시적 흐름 - 말투를 달리 해 보는 것 아주 좋습니다 - 죽었더이다: 약간의 높임말로 시적 흐름의 변조 (예) 내동댕이쳐진 편육 껍데기에서 삭아 내린 삭아내린 자존심이 걸어나온다. 죽었더이다   □ 한자어 - 한 행에 한자어 3번 이상 들어가면 무거운 느낌 듭니다 - 이성적인 시일수록 관념어에 매달리지 말고 좀더 부드럽게 풀어서 써야 함   -옮겨온 것입니다 -
18    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이정우 댓글:  조회:1979  추천:0  2018-02-21
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 이정우 들뢰즈는 푸코, 데리다와 더불어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들뢰즈는 철학사에 대한 방대하고도 독창적인 독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 틀을 만들어나갔다.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사 이해와는 상반되는 독해를 내놓음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에 대한 니체와 베르그송, 현상학과 하이데거에 대한 구조주의와 푸코 등,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사 독해를 통해서 철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실은 『차이와 반복』(1968)과 『의미의 논리』(1969)에 나타나 있다.  1969년 전투적인 정신의학자이자 정치적 투사이기도 한 펠렉스 가타리와 만나 들뢰즈는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다. 이른바 ‘욕망의 형이상학’이라 불리는 활기찬 사유를 『안티오이디푸스』(1972)에서 전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에는 그 속편이라고 할 『천의 고원』에서 이른바 ‘노마디즘’이라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제시했다. 들뢰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여러 뛰어난 연구들을 남기기도 했다.  본질철학과 주체철학의 극복: 리좀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상은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펼쳐져 있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시키는 것,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여러 존재들이 복잡하게 접속되면서, ‘그리고’를 만들어가면서 외적으로 부과되는 억압적 코드들로부터 탈주하는 장(場)이다. 들뢰즈는 책 자체도 이런 리좀적 성격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곧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이다.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기초 개념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매우 독창적인 개념들을 풍부하게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사유를 만들어나갔다. 이 개념들은 매우 난해하며, 때문에 꼼꼼한 이해를 요한다. 이제 개념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이들의 세계를 알아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é)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분절화는 잘라(分)-붙임(節)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잘라-붙임이기에 분절은 늘 이중분절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homogène)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이 따로 구분되어 존재하게 될 때 ‘층화(層化=stratification)’가 성립한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그러나 경계선들이 무너지고 다질적(多質的=hétérogène)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사물들은 ‘탈기관체(脫器管體)’를 향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혼화면(混和面)’에 존재하게 된다. 층들이 혼효면을 향해 해체되기 시작하면 ‘탈층화(脫層化=déstratification)’가 이루어진다.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되고,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 기능할 때 ‘영토성(territorialité)’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되고, 동시에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가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한다.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다.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déterritorialisation)’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영토화는 다시 탈영토화에 의해 누수된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différentiation)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이 들뢰즈가 생각하는 세계인 것이다.  기계(machine) ― ‘기계(機械)’는 ‘메카닉(mécanique)’과 구분된다. 메카닉은 일상어에서의 기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sôma’에 해당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가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그러나 매우 복잡하게 큰 기계가 배치/다양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배치와 다양체  배치(agencement) ― 사물들 ― 들뢰즈/가타리적 의미에서의 ‘기계들’ ― 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일정한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기계’)도,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과 언표들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고 듣고 사유하고, ... 하는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리고 뒤에 다시 반복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경기규칙들 등을 비롯한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반복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 매우 독특한 의미에서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 가 ‘배치’이다.  배치 개념은 맥락에 따라 ‘다양체(多樣體)’로 부를 수도 있다. 다양체(multiplicité) ― 배치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수학적-자연과학적인 보다 복잡한 맥락을 함축한다.(뒤에서 다시 설명된다) 다양체는 개체도, 개체들의 단순한 집합도, 유기적 전체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다양체는 질적으로 상이한 존재들이 접속, 일탈, 통합, 분지(分枝), ...를 통해 역동적으로 형성하는 장(場)이다. 다양체는 항구적 존재도 일시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되기도 하지만 늘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때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예컨대 ‘야구 경기’라는 다양체). 전통 존재론(개체들, 유기적 전체, 추상적 존재들, ...)으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들, 그러나 우리 삶의 도처에서 얼마든지 발견되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개념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된 존재론, 그것이 ‘다양체’의 존재론이다. 프랑스어 ‘multiplicité’는 ‘복수성(multiplicity)’과 ‘다양체(manifold)’로 분화시켜 번역할 수 있다.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이는 곧 탈기관체(body without organs) 개념의 도입과 맞물린다. 다음 구절이 탈기관체 개념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 말할 때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 말할 때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존재의 일의성  들뢰즈의 이러한 사유는 보다 깊은 곳에서는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는 들뢰즈 사유의 핵심인 차이의 존재론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차이 자체’에 대한 파악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들뢰즈는 여기에서 ‘재현의 사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존재의 일의성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일의적] 존재는 오로지 차이에 속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로부터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재와 존재자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존재론의 기본 문제들 중 하나이다. 이 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세 가지의 핵심 개념이 제시되었다: 다의성, 일의성, 유비. 들뢰즈의 논의는 이 중세철학의 개념들에 뿌리 두고 있다.  존재의 다의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를 통해 확립되었다: “존재는 여러 가지로 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언표는 존재론적 표현으로 바꾸어 말해 “존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언표가 개의 존재방식, 물의 존재방식, 神의 존재방식, ...이 다 다르다는 평범한 관찰 결과를 언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언표는 최상위 유들의 불연속성, 통약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 불연속성은 곧 범주들의 존재방식을 뜻한다. 존재는 하나의 이름으로 말해지지만, 그 이름은 그것이 결코 하나로 용해시킬 수 없는 다의성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들뢰즈는 범주의 사유, 즉 유와 종의 사유가 곧 동일성의 사유임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사물들은 그들의 공통점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낸다. 달리 말해 차이는 동일성에 종속된다. 즉 하나의 유가 유지됨으로써만 종차(種差)를 통해 대립하는 술어들이 그 유를 잔여(殘餘) 없이 나누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큰 장르, 즉 최상위 유들이 곧 범주들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범주들은 ‘존재’의 하위 개념들로서 포섭되는가. 아니다. 이들은 통약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가 이들을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범주들은 전적으로 불연속을 형성할 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의 개념을 통해서 이들 사이에 보다 높은 연계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는 다의성과 일의성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부활한다. 중세 시대에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는 난항을 겪는다. 신은 ‘존재’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 전자와 같이 일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신의 위상에 관련해 거대한 추문이 발생한다. 반면 후자처럼 다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우주의 통일성은 무너진다. 아퀴나스의 해결책은 두 입장을 아슬아슬하게 봉합한다. 존재는 다의적이지만 통약 가능하다. 즉 존재는 유비적이다.  들뢰즈는 유비의 사유가 한편으로 존재를 공통의 유로 놓지 못하고(즉 존재의 보편성을 단지 의사 동일성으로만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엇이 개체들의 개별성을 구성하는지를 말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자는 초월철학에 대한 비판이고, 후자는 일반적/추상적 사유의 비판이다. 그래서 유비의 사유는 진정한 보편도 또 진정한 개별성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유사성의 그물 안에서의 일반성이 아니라 존재자들 사이에서의 개별화하는 차이들의 놀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일의성의 입장이 이런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일의성의 테마는 둔스 스코투스와 더불어 서구 철학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존재는 그것이 존재인 한에서 일의적이다. 즉 존재는 형이상학적으로 일의적이다. 달리 말해, ‘존재’라는 말에 관련해 제시된 의미들 사이에는 어떤 범주적 차이도 없다. 존재는 그것이 말해지는 모든 것의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에 있어 말해지는 것이다. 범주의 차이, 종과 유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순수한 존재론, 즉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이런 존재론을 스피노자와 니체에게서도 발견한다.  존재자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존재가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유비적 사유에서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외부적 시선읕 통해서, 즉 범주들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일의적 사유에서의 차이는 각 존재들 내부에서 즉 역능(potentia=puissance)에 의해서, 강도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능의 정도들로서의 차이이며, 유와 종의 위계(이런 위계는 ‘포르퓌리오스의 나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에 입각한 차이(즉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이 된다.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일의적인 존재의 표현들이며, 그들의 차이는 역능의 정도에서의 차이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도 동일성은 남아 있다. 실체의 동일성이 그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의 동일성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순수하게 양태적인 우주, 또는 차생적인(différentiel) 우주일 것이다. 이것은 곧 표면의 사유, 사건의 사유이다.1) 그러나 존재가 완벽하게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개별자들은 역능의 상이한 표현이 되며, 사물들에 대한 파악은 질적 본질(존재의 유비)에서 양화 가능한 역능(존재의 일의성)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곧 한 사물의 ‘임(esse)’에서 ‘할 수 있음(posse)’에로의 옮겨감을 말하며, 이로부터 여러 실천철학적 함의들이 전개된다.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로부터 들뢰즈가 ‘일자’의 철학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바디우는 들뢰즈의 사유는 일자의 사유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일자의 바다의 물방울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바디우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을 바로 들뢰즈의 사유가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univocitas’에서의 ‘uni’를 차이들을 보듬는 일자로 보는 한에서이다. 이것은 들뢰즈 사유에 대한 근본적인 오독을 함축한다. 이런 유의 일자의 철학은 오히려 존재의 다의성을 함축한다. 일자와 다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일자의 철학과 일의성의 철학을 혼동하고 있다. 일의성의 철학은 오히려 일자를 제거하는 것, ‘n - 1’로 만드는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사유를 일자의 사유로 보는 것은 들뢰즈에게서 일의성과 차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적 동일성마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그리고’밖에는 없다. 즉 남는 것은 “존재, 일자, 또는 전체로 규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의 바깥에서의” 관계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유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런 관계들의 ‘배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역능은 배치 안에서 구체성을 획득하며, 때문에 철학사 연구에서 얻어낸 역능 개념과 역사 연구에서 얻어낸 배치 개념이 하나로 융합되며 들뢰즈(와 가타리) 사유의 원숙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체는 외적 多도, 라이프니츠-베르그송적 연속성을 함축하는 일즉다(一卽多)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고’로 이어진 사물들의 ‘패치워크’이다.(‘그리고’는 단순한 외적 접속 이상의 접속의 경우들까지 포괄한다) 더구나 이 다양체는 영토화/탈영토화 운동을 통해 변해간다. 이 다양체는 곧 ‘배치’이다. 그리고 무한한 다양체들/배치들의 그 어디에도 굵직한 선들은 그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똑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 같으면 다 같고 다르면 다 다르다. 이것이 존재의 일의성의 의미이다.  들뢰즈와 현대 철학  들뢰즈가 남긴 사유의 진동은 거대한 것이어서, 오늘날의 철학은 들뢰즈 사유의 자장(磁場)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21세기 전반을 내내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의 사유는 우선 철학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동안 타성에 빠졌던 철학을 새로운 활력 있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기반한 그의 사유는 새로운 형태의 유물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철학사에 대한 계속적인 새로운 독해와 정교한 유물론의 전개가 이어질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남긴 ‘노마디즘’의 사유는 오늘날 네그리와 하트의 유명한 저작인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현대의 핵심적인 정치철학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노마디즘과 꼬뮤니즘의 관계를 규명해 나가면서 21세기의 실천철학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사유는 특히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들뢰즈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모색하려는 인물들도 있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맞서 수학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나, 들뢰즈가 강하게 논박한 인물인 헤겔과 라캉을 기반으로 반(反)들뢰즈적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지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의 대결이 오늘날 철학적 사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출처 부산남구문인협회  http://cafe.daum.net/yes56do/FH4t/298?q=
아름답게 미친 천재, 이미지로 조합하면 見者?  - A. 랭보 퍼온 글임 0. 들어가며 아르튀르 랭보(Arthur Jean Nicolas Rimbaud·1854~1891). 짧은 37년간의 생애를 지상에 머물다간 천재. 소년의 나이에 시작해서 4년 후에 중단되는 창작활동. 나머지 생애 동안의 문학적으로 완벽한 침묵, 근동지역과 중앙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니며 다 양한 직업에 종사했던 것, 시작한 지 2년만에 원래의 출발점뿐만 아니라 이후 이루어질 문학적 전통마저 돌파해 버리고 오늘날까지도 현대시의 원조로 남아 있는 언어의 연금술사. 그 짧은 창작기간 동안의 광적인 발전 속도는 내재된 천재적 광기의 폭발이었으리. 이것이 랭보의 간략하게 뭉뚱그린 객관적 프로필이다.   랭보의 작품을 가장 잘 나타내는 핵심어는 ‘폭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正格 시구로 시작해서 탈격 자유시구로 넘어가며 거기에서 「일루미네이션」과 「지옥에서 보낸 한 철」같은 불규칙적 리듬을 가진 산문시들로 이르게 된다. 랭보의 시는 무엇보다 보들레르의 이론적인 구상들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랭보의 시는 철저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테마들은 서로 간에 간혹 막연하게 연관될 뿐, 과도할 정보로 많은 단절들을 드러낸 채 대개는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이러한 시작법의 핵심은 테마와는 거의 상관없이 끓어오르는 흥분이다. 1. 방향상실 1920년 리비에르(J. Riviere)는 랭보의 시에 대해 “그의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다” 라고 논평했다. 랭보의 비실재적 혼돈은 조여드는 현실로부터의 구출 시도였다. 랭보의 시들은 가혹한 타격으로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극도로 마술적인 음률을 자아내는 언어로 이루어진 만큼, 더욱 더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랭보는 때로는 초지상적인 축복 속에서 거닐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황홀경에 빠져 빛을 바라면서 저 너머의 세계로부터 도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협화적인 작품은 랭보에 대한 지극히 모순적인 평가를 초래하기도 한다. 2. 견자의 편지-공허한 초월, 비규범성의 추구, 불협화음의 리듬 시의 목표는 ‘미지의 것에 도달함’이며, 달리 표현하자면 ‘불가시적인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보들레르로부터 나온 것이며, 공허한 초월을 의미한다. 랭보는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는 인식하여야 할 목표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기한다. 그러므로 비일상성, 그리고 비현실성, 전혀 다른 것 등으로 표기되기는 하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랭보의 시들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그의 시들의 현실을 넘어서는 폭발적인 돌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폭발적인 욕구 자체의 방출이며, 그 결과 현실을 탈형상화시켜서 비실재적이긴 하지만 진정한 초월의 표지라고는 할 수 없는 형상들에 도달하게 된다.   랭보의 견자의 개념에 대해 언급한 편지에서 “시인은 미지의 것에 도달한다. 비록 자기 자신이 환영들을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시인들은 그것을 직관하였다.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꾼들이 나타나서 그 자신이 좌초해버린 저 지평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시인 존재는 미지의 곳으로 탈주하여 거기에서 좌절하게 되는 강력한 상상력을 무기로 세계 폭발에 참여하는 일꾼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3. 전통과의 단절 랭보의 시들은 당대와 19세기 초기의 작가들의 영향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선배들의 영향이 아닌 랭보 자신의 목소리 또한 뚜렷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전래의 문학적 자산을 랭보는 과도하게 가열하거나 혹은 과도하게 냉각시킴으로써 완전히 다른 실체로 변형시켜 버렸다. 그러니까 빗대어 말하자면, 그에게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니, 원형 불변의 법칙, 만유 인력의 원리 등등의 아주 기본적인 물리학의 원칙들이 지극히 무의미한 셈이다.   랭보의 특성은 그가 읽은 작품에 가하는 강력한 변형, 그리고 전통과의 단절을 원하면서 전통에 대한 증오를 강화시키는 그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자와 시대로부터의 과격한 분리가 철저하게 시행되어 과거로부터 분리라는 결과가 초래된다. 그 원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사적인 것이다. 진정한 연속의식의 소멸, 그리고 그 대신으로 나타난 역사중의와 박물관적인 수집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과거는 19세기의 몇몇 정신적 지도자들에게 반대 방향의 힘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과거를 청산토록 했다. 그의 시구들은 고대가 희화화 되어 언급된다. 신화는 비천한 것과의 결합에 의해 고유의 품위를 상실하고 만다. 4. 현대성과 도회시 현대성에 대한 랭보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물질적인 진보와 과학적인 계몽이란 점에서는 현대성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취한다. 반면 현대성의 가혹함과 암흑성이 차갑고 어두운 시를 쓰도록 요구하는 새로운 경험을 주는 범주에 있어서만큼은 현대성을 수용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입장에서 랭보의 도회시가 생겨난다. 일를테면 「일루미네이션」 이 그 좋은 본보기 작품이다. 자극적인 상상력에 의해 창작된 형상들의 시공을 초월한 혼돈은 대도시적인 현대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 주술적으로 작용하는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개념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으나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는 있는 직관의 표지이다. 5. 기독교 유산의 강요에 대한 저항, 「지옥에서 보낸 한철」 랭보의 시들은 기독교에의 반란을 시도하긴 하지만 결국 기독교 유산의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에서 오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랭보의 저항은 자신이 맞서고 있는 바로 그 힘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마는 역설적인 것으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에는 그러한 자각이 표현되어 있다.   “이교도의 피가 끊어오른다, 복음은 지나가 버리고, 나는 유럽을 떠나 떠돌며, 풀을 뜯고, 사냥하며, 끓어오르는 금속처럼 독한 즙을 마시리라, 구원받은 자여.” “나는 열망으로 신을 기다리노라……. 나는 결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고통 속에서 노래했던 그런 종족에 속했을 뿐” “나는 지옥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 유산에 의한 강요를 지옥이라고 하고 있고, 그 해명할 수 없는 정신적 실존의 긴장 앞에 항복한다. 모든 것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갔던 시인은 그 미지 세계의 정체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없었고, 그 자신이 폭파시켜 버렸던 세계 앞에 침묵하면서, 내면의 죽음을 감내한다. 그에게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은 기독교 유산이었다. 기독교 유산은 초현실적인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다른 모든 지상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협소하게 보였다. 모든 현실과 상상 속에 불을 붙여 폭파시킴으로써 랭보는 기독교마저 찢어놓았던 것이다. 6. 인공적 자아-탈인간화 랭보의 시들에서 말을 하는 자아는 「악의 꽃」의 자아와는 달리, 작가의 인격으로 해석될 수 없다. 랭보의 자아는 앞에서 언급했던 조작적인 자기 변신, 요컨대 그의 시들의 형상 내용들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바로 상상적 문체의 산물이다. 이 자아는 어떤 가면도 쓸 수 있으며, 모든 존재 방식, 시대와 민족들로 확대될 수도 있다.   랭보는 자신의 정신적 운명을 현대성의 초개인적 상황으로부터 해석한다. “정신의 투쟁은 사나이들의 살육전처럼 잔인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더 깊이 빠져들어감으로써 더 먼 곳을 보며,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부드러움 속에서도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몰락자가 되어야 할 시인의 운명을 옹호한다. 시인은 “이 기이한 고통이 불안정을 초래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자만심을 느껴야 한다.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그래 인간의 갈채로부터, 저속한 추구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날아서…….” 이것은 단순한 강령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 자체가 탈인간화 된다.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고 독백하면서, 청자들의 이목을 붙잡아 둘 한 마디 말도 없이, 시는 그것을 담아줄 어떠한 그릇도 존재하지 않는, 더군다나 상상적으로 구성된 자아조차도 그 주체가 없는 진술 앞에서 비켜가버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7. 극한으로의 몰입 상상의 아득한 영역으로 밀치고 나아가려는 의지가 점차적으로 랭보 시의 주체 자리에 들어선다. ‘미지의 영역’으로 강제적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그는 보들레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늘빛 심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패배의 심연이며 아울러 “바다와 전설들이 서로 만나는 불의 샘”인 저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아득한 곳을 묘사하여 가까운 곳을 부각시키는 이러한 기법은 랭보의 전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역동적인 도식이다. 그것은 점점 더 빨라져서 때로는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이루어 지기도 한다. 흥분은 열광에 도달한다.    “나는 탑과 탑을 밧줄로, 창과 창을 화환으로, 별과 별을 황금의 사슬로 엮었다네, 그래 이제 나는 춤추노라.” 이것은 보들레르의 「일곱 늙은이들」의 마지막 시구에서 이미 보았던 바와 같이 목적 없는 자들의 혼란스런 춤이다. 광막함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파괴된다. 파괴되어 흩어지는 맨 마지막 지점에 랭보의 눈물겨운 영혼이 울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상처 없는영혼이 어딘들 있으랴! 8. 취한 배 「취한 배」는 랭보의 시 중 가장 알려진 작품이다. 시 속에 나타나는 이국의 바다와 지방은 그가 가보지 않은 곳이다. 시는 그 어떠한 실제 사실들과도 연관을 맺지 않는다. 강력하게 작용하는 상상력은 드넓게 소용돌이치며 확장되는 비실재적 공간들의 열광에 찬 환영을 만들어낸다.   사건의 진행자는 한 척의 배이다.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명백한 사실은 사건의 경과와 동시에 시의 주체의 진행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형상 내용들에는 매우 격렬한 힘이 부여되어 있어서 배와 인간 사이의 상징적인 동일화의 전체의 운동성을 고려할 때만 가능하다.   ‘취한 배’는 유례없는 팽창 활동이다. 일시적인 머뭇거림들이 삽입되어 있긴 하지만, 그 이후에 팽창은 다시 격렬하게 진행되며, 몇군데에서는 혼돈의 폭발에 다다른다. 폭발은 문장 구성에서가 아니라 관념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관념들 자체는 시연에서 시연에 걸쳐서뿐 아니라, 시행에서 시행에 걸쳐, 심지어 한 시행 안에서 요원한 것과 거친 것, 아니 거침과 요원함 위에 쌓아올리는 상상력의 홍염들이다. 9. 파괴된 현실성 그의 작품은 현실에 대한 태도와 ‘미지의 것’은 그 공허함 때문에 오히려 현실에 충격을 가하는-보들레르의 경우보다 더욱 강력한-긴장의 극이다. 현실은 그 불충분성으로 인해 공허한 초월과 대비되어 경험되기 때문에, 초월을 향한 열정은 현실성에 대한 무목적적인 파괴로 향하게 된다. 이러한 파괴된 현실성은 이제 현실 전체의 불충분성과 아울러 ‘미지의 것’으로의 도달 불가능성에 대한 혼돈의 표지가 된다.   랭보 시에 나타나는 구체적 세계의 원소들에는 물과 바람이 포함된다. 이 원소들은 초기 시들에서는 통제되어 있었으나 나중에는 노호와 폭풍우, 대홍수의 무시무시한 힘이 되어 솟아오르고, 이 좌중에서 시간과 공간의 질서들은 파괴되며, “평원, 황야, 수평선은 뇌우의 붉은 옷이 되는 것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대상들과 사물들을 총괄해보면 그가 얼마나 불안정하게 더 넓고, 더 높고, 더 깊게 팔다리를 뻗으며, 어느 곳에서도 멈추지 않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10. 추화 추는 랭보가 그의 시구에 내포된 현실의 잔재물에 각인시킨 정신의 집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미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에는 형상에서는 아니면 언어의 가락에 있어서든 정말 ‘아름다운’ 구절들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이것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추한’ 구절들과 인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와 추는 대립적인 가치들이 아니라 자극의 변이체들이다. 이들 사이의 객관적 차이는 진실과 허위의 차이처럼 제거된다. 미와 추의 밀접한 접근은 모든 요소들을 좌우하는 대비의 역동성을 산출한다. 이러한 대비의 역동성은 그러나 추 자체로부터도 산출될 수 있다. 11. 감각의 초현실성 직관 가능한 형상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으며, 언어에 내재한 은유의 근원적인 힘들로 인해 예전부터 시의 특권이었던 무한 자유를 넘나든다. ‘거리의 두 번 구운 과자’, ‘자신의 배위에 서 있는 왕’, ‘하늘빛의 콧물’. 이러한 형상들은 현실 자체에 존재하는 특성들을 때로는 더욱 예리하게 드러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그 기본 방향은 현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의 역동성에 있다. 이는 형상 경계들을 혼란시키고 극단적인 것들을 강제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현실성 자체를 감각적으로 자극받고 자극하는 미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12. 전제적 상상력 전제적 상상력은 인지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무제한의 창조적인 자유로서 작용한다. 자신의 내용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창출하려는 주체의 명령에 따라 현실 세계는 조각이 난다. 전제적 상상력은 공간의 질서를 전도시킨다. 예를 들면, 마차들은 하늘 위에서 달린다. 호수의 바닥에 살롱이 있고, 드높은 산정에서 대양이 출렁거린다. 철도 레일이 호텔을 통해서, 호텔 위로 달린다. 그러나 상상력은 또한  인간과 사물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도 전도시킨다.   “법무관이 그의 시계줄에 결려 있다”. 상상력은 가장 연관이 먼 것, 구체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강제로 결합시킨다. “아침 우유의 중얼거림, 지난 세기 밤의 중얼거림 때문에 죽도록 슬픔에 잠기다.”. 상상력은 실제 사실에 부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욱 더 낯설게 만드는 비실재적인 색채들을 창안한다. 랭보는 불온한 세상을 이렇듯 행복을 살다 그렇게 불행하게 간 것이다. 13. 일루미네이션 제목부터가 ‘염색’과 ‘조명’을 암시하는 등 특기할 만큼 다의적이다. 작품의 내용 해석이 불가능하다. 수수께끼같은 형상들과 사건들이 지나간다. 어조는 도취와 냉혹한 단절, 단조롭게 제기되는 반복과 근거없는 말의 연결들로 교차되어 나타난다. 「일루미네이션」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시이다. 이 시는 이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환각적인 자기 방출의 뇌우이며, 기껏해야 위험에 대한 사랑의 진원지인 위험에 대한 저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게다가 이 시는 자아가 없는 텍스트이다. 왜냐하면 몇몇 작품에서 등장하는 자아는 견자의 편지에서 구상되었던 바의 저 인공적이고 낯선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절대화한 현대적 상상력의 최초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14. 혼효의 기법 랭보는 이제 형식 언어마저도 그의 해체적인 상상력에 부합시킨다. 그래서 그는 형식 언어를 그의 산문시와 매우 유사한 비대칭적 시구 형태로 바꾸어버린다. 이로써 랭보는 형식의 차원에서도 보들레르를 넘어서는 힘찬 걸음을 내딛는다. 은빛 그리고 구리빛 마차들 강철의 그리고 은빛의 뱃머리가 거품을 때리고, 가시덤불의 그루터기를 일으켜 세운다. 황야의 강들, 그리고 거대한 썰물의 흔적이 선회하면서 동쪽을 향하여, 숲의 기둥을 향하여, 부두의 방파제를 향하여 줄지어 지나간다. 그 모서리에 빛의 소용돌이가 부딪친다. -「바다풍경」, 전문 이 시에는 두 가지 영역이 등장한다. 바다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 그러나 이 두 영역은 하나가 다른 하나 속에 뒤섞여 나타나고, 모든 일상적 구분이 제거됨으로써 서로 교차되고 잇다. 바다 풍경은 또한 동시에 육지 풍경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이 시는 개별적인 단어군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동사들이 두 영역을 한꺼번에 지칭함으로써, 이러한 추측 가능한 발상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은유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은유가 아니라 상이한 사물들의 절대적인 동일시이다. 더 나아가서 텍스트는 바다가 아니라 거품과 썰물에 대해서, 배가 아니라 뱃머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체 대신에 부분들을 지칭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었던 방식이기도 하다.   이 기법은 랭보에게서 더욱 확연하게 들어난다. 거의 언제나 사물의 부분들만을 지칭하면서 그는 파괴를 끌어들이고, 이것은 다시 사물적인 질서 전체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사물적인 질서 전체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차분하고 간결한 짧은 시는 프랑스에서 자유시구의 결정적인 일보 전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탈현실화와 감각적 비실재성의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현대적인 혼효기법을 보여주는 첫번째 범례이다. 15. 추상시 「일루미네이션」의 전제적인 상상력은 부조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대홍수 이후」를 그 예로 들어 보자. 클로버밭의 토끼 한 마리가 거미줄을 통하여 그의 기도를 무지개에게 말한다. 마님은 피아노를 알프스 산에 세워 놓는다……. 상상력은 ‘술 던 깬 아침’에서와 같이 현란한 이미지 조작들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추상이라는 핵심어로 의도했던 것이다. 이 핵심어는 선과 움직임이 탈사물화한(추상적인) 직조물이 되어 형상들 위에 위치하고 잇는 랭보의 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물들은 순수한 움직임과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단순화 된다. 이 모든 것은 이미 비실재적이지만, 종결부의 절멸에 의해 그것은 더욱 더 비실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랭보는 털끝만큼의 열정도 없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세계 속에서 움직인다. 그는 자신의 초기시들을 낯섦으로 몰아넣었던 저항적인 탈주를 포기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낯섦 그 안에 스스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16. 독백시 1871년 이래로 랭보의 시는 점차로 독백이 된다. 문장들은 서로 간에 더욱 밀착되고, 에피세트들은 더욱 과감하게 생략되며, 기이한 단어군들은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의 독백적인 모호함은 되는 대로 쏟아낸 배설물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따른 예술성의 산물이며, ‘미지’를 향한 채울 수 없는 열정으로 인해 기지의 것을 파헤지고 낯설게 만드는 방식만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시의 산물이다.   랭보는 후기의 한 글에서 회고하며 “나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기록했고, 소용돌이를 움켜쥐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몇 페이지 뒤에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서로 배치되는 이 두 입장 사이에서 랭보의 모호한 시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아직 진술되지 않은 것의 모호함, 그리고 더 이상 진술할 수 없는 것의 모호함, 이 둘은 침묵의 경계선에 인접하고 있다. 천재가 천재임이 확인되기 전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17. 동역학과 언어마술 랭보 시의 긴장의 직조물은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의 에너지로부터 성립된다. 이때 음악과의 유사성은 그 음향 형상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강도로 진행되는 음조, 상승과 하강의 절대운동, 집적과 방출의 교체라는 점에 있다. 여기에서부터 모호하고, 마치 허공에 말을 건네는 듯한 랭보 시의 고유한 매력이 시작된다.   그러한 동역학의 진행 방식은 산문시 「신비주의자」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활기찬 움직임, 그후 텍스트의 중간 지점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상승, 여기서부터는 진동하다가 정지되면서 침강하는 폭넓은 만곡선, 그러다가 앞의 문장과 분리된 ‘저 밑에서’라는 짧은 말의 만곡선을 갑작스럽게 급강하시킴으로써 종착점에 도달한다. ‘내용’이 아니라 이러한 움직임들이 시의 본질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매력이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랭보는 ‘말의 연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모든 자음들의 형상과 운동에 염두를 두었고, 언어에 내재된 리듬을 사용하여 조만간에 모든 의미와 연결될 수 있는 시적인 시원어를 창안하려고 생각했다.”   랭보의 마지막 작품에 들어있는 이러한 문장들은 그 어떤 극복된 단계를 암시하려고 하지만, 그가 이 마지막 작품 속에서도 언어 마술적인 창작 방식을 다양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시 편편들마다 그것을 소리내어 읽게 되면 모음들의 음영, 자음들 사이의 친화력이 얼마나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게 된다. 그것은 음향 자체의 의지가 너무도 지배적이 되어서 시구나 문장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부조리하나마 그 어떤 의미만을 가지게 되는 경우에도 더욱 명백하게 입증된다. 0. 나오며 랭보의 위대함은 ‘미지의 것’ 앞에서 좌절한 고로, ‘미지의 것’에 대신하여 불러내었던 혼돈을 불가사의한 완벽의 언어로 전이시키는데 있다. 이른바 예술적 승화로 현실과의 불화를 극복한 것이다. 그는 보들레르처럼 용기 있게 미래를 예지하면서 그 자신이 천명했던 바대로, 또한 그의 세기의 운명이었던 ‘처절한 정신의 투쟁’을 수행했다.   세계와 자아를 동시에 탈형상화시키는 그의 시가 스스로를 파괴시키기 시작하는 경계에 도달했을 때, 이제 19살의 랭보는 지조 있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침묵 또한 시인 존재로서의 행위이다. 종래의 시 안에서의 극단적인 자유는 이제 시로부터의 자유가 되었다. 랭보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는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되었던 많은 후대인들은 요컨대 침묵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도 있었을 터이다. [출처] 꽃물논술모둠 카페에서 http://www.zoglo.net/blog/update_form/jingli/347124  
16    데리다 읽기 -해체이론을 중심으로[스크랩] 댓글:  조회:2252  추천:0  2018-02-19
데리다 읽기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1. 머리말  쟈끄 데리다를 읽는 사람들은 데리다식의 글 읽기에 황당할 것이고 매우 당혹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우리가 기존의-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것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우리가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지를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그렇지 않게 만드는 것이 의식의 변화를 초래한다면 ‘데리다적 읽기’는 우리의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진보라고 아니 적어도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조소이자 의식의 보수성을 따끔하게 꼬집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데리다의 사유 방식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사고를 뒤엎고 새로운 사고로 삶을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작은 혁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혁명이라는 것이 행동의 변화이고, 사고의 변화가 행동을 낳는다면 데리다적 사고는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적 사고는 흔히 ‘해체’라고 일컬어진다. 해체라고 하는 이 난해한 용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의 사고는 좀 더 진보적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데리다는 이러한 용어들도, 우리의 사고의 변화에 대한 바람도 모두 해체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2. 형이상학 해체   1)후설 해체  현상작용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이 말은 독일어로는 ‘Vorstellung, Präsentation, Gegenwärtigung’이다. 독일어로 ‘vorstellen’은 복합어로 ‘vor’는 ‘앞에’라는 뜻이고, ‘stellen’은 ‘자리에 놓인다, 위치시킨다’는 말이다. 이 ‘Vorstellung’은 서구철학에서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용어였다. 서구전통철학은 이를 표상1)으로, 데카르트나 로크는 관념(ideas)으로, 밀은 표상과 개념 작용(conception)으로, 흄은 지각(perception)으로 번역했다. 따라서 이 말은 인식, 관념, 개념, 상상력, 현전, 재현(표상), 사상 등등 여러 가지 뜻으로 통용된다. 후설은 『논리적 고찰』 44장에서는 이 용어를 13가지 뜻으로 풀이했다. 데리다는 초기의 후설은 언어에서와 마찬가지로 표상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전제한다고 본다. 즉 지각을 통한 최초의 현전작용과, 그리고 이미지 기억 혹은 표지로서의 기호 혹은 기표는 지각을 통한 직접적인 현전작용이 아니라, 현전작용을 반복하는 표상작용(Vergengenwärtigung)이라 했으며, 이를 다시 기억에 의한 정립적(setenze) 표상과 상상적 표상(phantasievorstellung)으로 구분시켰다. 이것도 모자라, 후설은 『논리적 고찰』에서 현전과(Vorstellung)과 현전작용의 내용(Verstellungsinhalt)을 다시 구별했다.2)    데리다는 우선 후설의 현상학적 직관주의를 비판한다. 후설은 표현적 지향과 지시를 엄밀히 구별한다. 지시되는 것은 나에게 완전히 제시되지 않는다. 예컨대 누군가가 나에게 비가 오려 한다던가 어떤 결론이 어떤 전제로부터 논증된다던가 하는 것을 지적할 의도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의도하는 바가 나에게 명백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의도가 나에게 명백함이 없이도 그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의 말은 다만 나로 하여금 그가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게 해줄 뿐이다. 지시는 개개의 사물들의 지칭과 함께 괄호 쳐 짐으로써, 표현의 장에는 이상적인 의미들과 이상적인 단어 유형들만이 남아있게 된다. 현상학적으로 연구되는 바, 말과 의미에 의한 효과적 의사소통이란 없다. 현상학적 환원 안에서 영혼이 지시적으로 자신에게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함의 방법일 뿐이다. 그러한 독백에 있어 영혼은 자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현전하므로 지시적 기호란 불필요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상상적 대화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3) 후설이 말하듯, 상상이나 허구는 현상학의 생명을 이루는 요소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에게 현상학이 추구하는 본질 직관이 하나의 원초적 부여작용이며 그 자체로서 지각과 유사하고 상상과는 유사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감추어서는 안 된다.4) 이것이 후설 스스로 『이념들Ⅰ』에서 현상학의 ‘원리중의 원리’라고 스스로 명명하고 있는 것으로 직관주의의 원리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가장 철저하고 가장 비판적으로 복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설은 우리의 인식의 원천이 근본적으로 직관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식은 우리의 직관에 그렇게 주어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현된 의미가 그 어떤 대상과 관계를 가지게 될 때, 그 관계를 완수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직관’이다.5)    후설에게 있어서는 인식기능이 의지기능 및 정서기능보다 더 우선적이다. 모든 표현들이 다소 모호하고 흔들리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모두 객관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주관적 표현들마저 객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모든 주관적 표현을 객관적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후설의 주장은 결국 모든 주관적 표현작용은 객관적 이상성을 대신할 뿐 그 자신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데리다는 모든 의사소통적 언어표현이 의미의 동일성을 가진다는 주장, 그리고 대상이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직관이야말로 인식의 원천이라는 주장, 나아가서 이처럼 존재를 현전으로서 사유하고 있는 점 등등을 현상학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감염되어 있는 징후들로 파악한 것이다.    2)니체 해체  니체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진리에는 은폐-유희(Schleier-Spiel) 즉 여성들이 취하듯이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것(혹은 그 반대) 그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진리는 없다는 점이 진리가 된다. 또한 여성은 진리의 비진리성에 대한 명칭이다. 여성은 몰락적으로 역사하는데, 남성에 대해서,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여성은 스스로 굴복하면서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며, 이러한 양의성에 전념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뱉어 버리고 진리로 확정된 사태를 팽개쳐 버린다. 여성은 주고 헌신함으로써 여성이고, 남성은 취하고 소유함으로써 남성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여성은 반대로 나타난다. 여성이 주고 헌신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그녀의 소유 주권을 가상화하고 자기 소유를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남성들의 지배권을 삼켜버린다. 이 ‘위하여(für)' 때문에 여성은 모든 남녀 대립이 바뀌는 유보 상황을 형성한다. 장소와 가면을 끊임없이 바꾸는 일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교체 놀이에서 여성은 소유 주권을 보상받게 되는 바, 그래서 여성은 소유하는 자 즉 남성이 되고 남성은 소유를 잃어 굴종하여 여성으로 되는 이 교체놀이는 결국 여성은 남성이, 남성은 여성이 되지만 각각 부분적으로 스스로 겉치레적인 다른 편의 역할을 하는 데 이르게 되어 확정되는 것이 없다.6)    여성들은 단지 변화무쌍하고 이중적인 기반의 양식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묘사될 수도 있다 함은 여성들이 지닌 내적인 다양함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니체는 여성과 여성의 작용을 서술하기 위해서 풍자, 조소, 조롱, 재치 등과 같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Éperons이 배 밑에 감추어져 있는 칼 혹은 항구에 돌출된 바위를 뜻하고, stiletto가 아주 예리한 단도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문체는 어떤 남성적인 무기이다. 문체가 남성이라면 씌어진 글은 여성이어야 한다. 문체의 다양화는 남녀의 대립을 없앤다. 다양화함은 여성 명사이다. 또한 글은 말해진 언어의 고정된 의미를 해소시키듯, 여성은 문체의 다양화로 작용한다.7) 데리다는 문체의 다양함을 니체의 위대한 양식으로 여긴다. 이로부터 텍스트의 다양함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변증법과 연결시키고 있다. 주고받는다든가 혹은 소유하고 소유되는 대립은 더 이상 두 지점에 배치되지 않는다. 그 여성 혹은 그 남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에서 볼 때 여성에게는 그 작용이 여성의 작용 이상이라는 점, 또한 남성에게는 그 역할이 남성의 그것 이상이라는 점이 허용된다. 그러나 동시에 두 개의 것이 각각 자신임도 타당하다. 이런 종류의 무결정성, 개방성은 실상 변증법적 사유로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데리다는 또한 이미 언급한 소유의 바뀜 관계를 ‘자기화 과정’이라고도 부르고, 우선 변증법은 다소간 도식적인 모델에 묶여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변증법은 존재론적 결정 가능성과 동치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교체 관계에서는 제멋대로의 구조들이 생겨나는데, 이 구조들은 단계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모든 변증법이나 모든 존재론적 결정성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어떤 변증법적 사유모델이 있는 이러한 변화들에 대해서 일정한 방향, 의미부여 등 목적론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데리다는 바로 이것을 논박하고 있는데 이 과정이 우연하고 잠정적인 결정/규정으로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 또한 전통적인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언어해체   1)소쉬르 해체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철학적 글쓰기 속에 있는 글쓰기의 평가 절하를 기록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글을 쓴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자들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글로 쓰고 있는 철학은 글쓰기를 기껏해야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사상과 무관하며 최악의 경우 그 사상에 방해가 되는 하나의 표현방식으로 취급하고 있다.8) 글쓰기는 외면적이며 물리적이고 비초월적이다. 글쓰기에 의해 제기되는 위협은 단순한 표현방법이어야만 하는 작업내용이 진술한다고 추정되는 의미에 영향을 끼치거나 오염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철학은 글쓰기를 초월하는 것으로 스스로 정의하며, 언어 기능의 일부를 글쓰기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말하기의 단순한 인위적 대체물이라고 글쓰기를 배제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플라톤 등의 비난은 글쓰기를 말하기의 표현중의 하나로 취급하며 말하기로 하여금 의미와 직접적이고도 자연적인 관계를 갖게 하는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가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 즉 스스로 존재한다고 즉 기반이라고 여겨지는 사상, 진리, 이성, 논리, 말씀이란 의미의 질서를 향한 철학의 방향성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9) 데리다가 규정하는 문제점은 철학적 담론에서의 말하기와 글쓰기의 관계뿐만 아니라 경쟁하고 있는 철학들이 로고스 중심주의의 변형들이라는 주장을 포함하게 된다.10)  『그라마톨로지』 속에서 데리다가 소쉬르를 읽는 부분에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더욱 검토되고 있다. 구조주의와 기호학을 발흥시킨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는 한편으로는 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다른 한편으로는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명확한 긍정과 피할 수 없는 연루상태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 질 수 있다. 따라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담론이 스스로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라고 정의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사상을 표현하거나 전달하는데 도움이 될 때에만 소음은 언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기호의 본질 즉 기호의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 것과 기호가 기호로서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중심 질문이 되는 것이다. 그는 기호가 자의적이고 관습적이며 각자 본질적 특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기호와 구별시켜주는 차이에 의해서 정의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언어는 차이의체계라고 여겨지며, 이는 구조주의와 기호학이 의존하여 온 구분 체계의 발전으로 인도된다. 이는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langue)와 그 체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발언행위(parole), 어느 주어진 시대의 체계로서의 동시적 언어 연구와 상이한 역사적 시대의 요소 사이의 통시적 관계 연구, 체계 내에 있는 두 종류의 차이 즉 동시적 패러다임 관계와 통시적 패러다임 관계, 그리고 기호의 두 구성요소 즉 기의(signifie)와 기표(signifiant) 사이의 구분을 뜻한다. 이러한 기본적 구분체계가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관계 체계를 명확하게 만들면서 언어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학적이며 기호학적인 작업계획을 함께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소리 자체는 체계에 속해 있을 수 없다고 소쉬르는 주장한다. 소리는 발언 행위 속에서 체계 단위의 표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언어체계속에는 어떤한 실증적 용어도 없이 차이만 있을 뿐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다소 극단적인 공식화이다. 공통적인 견해는 의심할 여지없이 언어가 단어 즉 실증적인 실재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단어들이 합쳐져서 체계를 형성하게 되며, 이에 따라 서로의 관계가 있게 된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에 대한 소쉬르의 분석은 그와 반대로 기호가 차이 체계의 산물이라는 결론으로 유도되고 있다. 실제로 기호는 실증적인 실재물이 전혀 아니며 그저 차이의 결과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데리다가 설명하는 것처럼, 체계가 차이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발언 행위 속에서나 체계 속에서 현재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실증적인 실재물에 언어 이론이 기반을 두려는 시도를 훼손하게되기 때문이다. 언어 체계 속에 차이만 있을 뿐이라면,   차이들의 유희는 실제로 어떤 순간에, 어떤 의미에서도 어떤 단일한 요소가 그 자체로 현전하거나, 스스로 만을 참조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종합과 참조를 전제로 합니다. 말해진 담론의 영역이건 씌여진 담론의 영역이건 간에 어떤 요소도 그 역시 단순히 현전하지 않는 또 다른 요소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기호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연쇄적 맞물림은 각 ‘요소’가 -그것이 음소이건 문자소이건 간에- 그 자신 속에 있는 연쇄망 혹은 체계의 다른 요소들의 흔적에 의거해 구성되게 합니다. 이러한 연쇄적 맞물림과 망의 구조가 텍스트이며 한 텍스트는 또 다른 텍스트의 변형 속에서만 산출됩니다. 개별적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체계 내에서도 그 어떤것도 단순히 현전하거나 부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흔적들의 차이와 흔적들만이 도처에 있습니다.11) 라고 데리다는 기록하고 있다. 어떤 실증적 용어도 없는 기호와 체계의 자의적 본질은 흔적일 수도 있는 실재물 이전에 있던 흔적만 있는 일종의 무한 참조 구조인 ‘제도화된 흔적’이라는 역설적 개념을 제시해 주고 있다.12)  그리고 소쉬르의 논리전개 속에는 로고스중심주의의 확인이 있다. 소쉬르가 시작하고 있는 기호 개념 자체가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의 구분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기표는 기의에 접근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따라서 자신이 전달하는 개념이나 의미에 종속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와 구별하기 위해서, 물질적 변화가 언제 의미 있는지 말하기 위해서, 언어학은 기의가 출발점이 되며 기의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추정하여야만 한다. 소쉬르는 로고스중심주의적 개념을 확인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분석을 로고스 중심주의 안에서 기술하고 있다. 데리다는 이러한 일이 소쉬르가 글쓰기를 언급하고 있을 때 발생한다고 한다. 소쉬르는 글쓰기를 제 2의 파생적인 지위로 추방해 버리고 있다. 소리를 언어체계에서 특별히 배제하면서 언어단위의 형식적 특성을 주장할  때에도 소쉬르는 언어분석의 대상은 문자단어와 음성단어의 조합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고 음성단어만이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글쓰기는 단순히 말하기를 표현하는 방법 즉 언어를 공부할 때 고려될 필요가 없는 기술적 도구 또는 외부장식인 것이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말하기의 기생적이며 불완전한 표현이라고 글쓰기를 취급함으로써 말하기를 특권화한다는 것은 언어의 특정 양상이나 기능 작용의 양상을 배제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거리, 부재, 오해, 무성의와 모호함이 글쓰기의 특성이라면, 글쓰기를 말하기와 구분지음으로써 말하기와 연관되어 있는 이상을 기준으로 채택하는 의사소통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단어들은 의미를 갖고 있으며 듣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소쉬르의 논의를 특징짓는 도덕적 열정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 걸려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글쓰기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언어를 ‘변장시키며’ 때때로 말하기의 역할을 ‘찬탈하기’조차 한다. ‘글쓰기의 독재’는 강력하며 교활하여서, 자연스러운 말하기 형태의 부패나 감염이 있게 된다. 글쓰기의 형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언어학자는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기의 표현이라고 추정되고 있는 글쓰기는 자신이 봉사하고 있는 체계의 순수성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2)루소 해체  말하기와 글쓰기의 관계는 루소가 글쓰기에 적용했던 용어를 사용해서 ‘보충(supplement)’의 논리라고 명명하고 있는 하나의 구조를 제공해주고 있다. 언어는 말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글쓰기는 말하기에 대한 보충으로 사용될 따름이라고 루소는 규정한다. 보충은 본질적이지 않은 임시증대분이며, 자체로 완성적인 어떤 것에 추가된 것이지만, 보충은 완성되기 위해서 즉 그 자체 완성된 것이라고 추정되어오던 것 속에 있는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추가된 것이다. 이러한 ‘보충’의 두 가지 다른 의미는 강력한 논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두 의미 모두에 있어서 보충은 외부적인 것 즉 추가되거나 대체되는 것의 ‘본질적’ 성격에 이질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루소는 글쓰기를 말하기에 추가되는 즉 언어의 본성에 이질적인 기교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말하기가 자체충족적이며 자연적인 충만의 상태가 아닐 경우에만 즉 글쓰기가 보충해 줄 수 있는 결여나 부재가 말하기 속에 이미 있을 경우에만 글쓰기는 말하기에 첨부될 수 있는 것이다. 루소는 현존의 파괴와 말하기의 질병이라고 글쓰기를 비난하면서도 글쓰기의 부재를 통해서 말하기에 상실되어 있던 현존을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글쓰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아주 전통적인 입장을 제시한다.13)    오직 부재와 오해 등 대개 글쓰기의 속성이라고 서술되는 특성에 의해 말하기가 이미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글쓰기는  보상 즉 말하기의 보충이 될 수 있다. 데리다는 루소의 논리전개에 대해 원천적이며 자연스러운 언어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코 원상보전되어 있지 않고 글쓰기에 의해 결코 만져질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언제나 하나의 글쓰기였다는 단 한 가지 조건하에서만 글쓰기는 이차적이며 파생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에 있는 이러한 ‘위험한 보충’14)에 관해 데리다는 다양한 외부 보충은 정확히 보충되고 있는 것 속에 있는 부족 즉 원초적인 부족이 언제나 있기 때문에 보충을 하기 위해서 요청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글쓰기는 말하기의 보충이지만, 말하기도 이미 보충이다. 『에밀』에서 루소는 어린이들은 말하기를 자신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신속하게 학습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행동하고 그저 혀만 움직여서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깨닫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한 보충’이란 연결 맥락을 따라가면 루소의 작품이라고 범주를 한정지을 수 있다고 믿는 바를 넘어서거나 그 후면에 있는 이러한 ‘피와 살’로 된 창조물의 실제 인생이라고 명명하는 것 속에는 글쓰기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결코 없었으며, 차이의 연쇄적 관계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을 보충과 대체적 의미작용 외에 다른 어떤 것이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정 지속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이러한 보충의 편재성은 ‘현존’과 그들의 ‘부재’ 또는 실제 사건과 허구적 사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과 역사적 현실의 결과는 내부에서 발생하며, 보충작용이나 차이에 의해 이러한 구조 특유의 결정과정으로서 가능해진다. ‘현존’은 일종의 부재의 형태이며, 실제 역사적 사건은 수많은 이론가들이 보여주려고 노력해 왔던 것처럼 허구의 특별한 형태인 것이다. 『글쓰기와 차이』에서 데리다는 말한다. 현존은 원칙이 아니라 재구성 된 것이다.  4.해체전략   1) 차연적 사유  데리다 철학의 기저는 한 마디로 말해서 차연(différance)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는 『해체』의 「차연」에서 알파벳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인은 첫 알파벳 a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a는 차이(différence)에 관한 본인의 글에서 필연적으로 암시되어왔다; 또한 문자에 대한 논문이나, 그리고 범위가 각기 다른 본인의 글에서도 매우 결정적인 지점에서 차이(différence)와 엇갈려 나타나기도 했다. 이 때마다 철자법칙을 준수하는 많은 독자들에 의해 디페랑스(différance)의 a는 디페랑스(différence)의 엄청난 오자로 간주되면서, 글에 관한 본인의 글 속의 글, 즉 미궁과 같은 본인의 글에서 이미 필요에 의해 a가 뜻하는 바가 암시되어왔다.15) 라고 말하며 차연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연이라는 말이 가진 뜻과 의미는 무엇일까? 데리다는 왜 a라는 철자의 차이를 들고 새로운 철자로 자신의 논의를 이끌어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글쓰기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등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한다.    그러면 ‘차연(différance)’은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이미 앞에서도 암시된 바이지만 차연이라는 이 생경한 조어는 문자 그대로 ‘차이(différence)’와 ‘연기(délai)'의 두 가지 개념이 동시적으로 복합된 관념을 지칭하고 있다. 프랑스어에서 différe라는 동사 자체가 이미 ’차이나다‘와 ’연기하다‘의 두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의하고 있는데, 그런 동사의 양가적 의미를 명사화시킨 단어는 없었다. 그래서 데리다는 양가적 의미를 지닌 동사 différe의 명사화를 가리키기 위해 일반적으로 ‘차연’이라고 번역되는 'la différance'를 만들었다. 그런데 차연의 différance와 차이의 différence는 불어의 발음상에는 아무런 변별적 차이가 없고, 다지 글자상에서 a/e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16)    단적으로 말하면 차연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있는 낱말도 개념도 아니다. 차연이라는 말을 구태여 분류하자면 데리다는 그것을 ‘다발(le faisceau)'과 같은 성질을 지닌다고 규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차연은 철자법상 하나의 변칙인데, 그런 변칙의 원인을 논리적 단계를 밟아 하나씩 하나씩 따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반적 체계에 속하는 성빌을 지니고 있고, 둘째로 그것은 여러 가지 실이나 의미의 줄을 다시 출발시키고 다른 것들과으 매듭을 맺게 하는 짜깁기나 교차나 얽힘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묶음‘이나 ’다발‘의 뉘앙스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다발‘으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차연에서 ’a/e‘의 모음의 변별은 무슨 의미를 표시하는가. 이미 지적되었듯이 발음상 아무런 차이가 없기에, 다르게 적히고 다르게 보이지만, 발음만으로 전혀 구분이 안된다. 데리다는 무덤과 같은 ’a'를 피라미드에 비유하고 있다.    피라미드는 새로운 내세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하여 생명을 잠시 유예시키거나 연기시킨 죽음의 무덤, 사왕(死王)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 무덤은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피라미드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있는 곳이고, 동시에 죽음이 삶의 유예로 삶이 죽음의 연기로서 죽음 다음에 삶이 대기하고 있는 차연의 생각을 신화로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차연이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에서 이해되어질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데리다는 ‘a/e'의 문자적 변별이 소리로서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것은 차연이 음성중심주의의 세계관에서 차이의 형식적 개념과 구분될 수 없음을 상징하고 있다고 암시한다.17) 데리다는 그런 음운론적 배경을 지닌 차연을 어떤 순간에도 현존적이거나 표명될 수 있는 것만을, 하나의 현재로서 현재의 진리 속에 현존하고 있는 존재자 만을, 현재의 현존이나 현재의 진리만을 사람들이 개진할 수 있을 뿐, 차현은 결코 현재(현존)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고 서술한다.18)    지금까지 차연의 문자가 지니는 특성을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차연의 성질 그 자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차연은 유예·위임·연기·이송·우회·지연·유보 등에 의하여 지연시키는 데 있는 움직임(능동적이면서 수동적인)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차연은 내가 보류시키고자 하는 현전의 가능성의 원초적이며 공유된 통일성에 의해 선행되지 않는다. 현전을 지연시키는 것은 역으로 그로부터 현전이 그 표상·기호·흔적 속에서 알려지고 실현되는 것이다.19) 둘째로 차연의 움직임은 그것이 개별자들(Différents)을 생산하며 분화의 구조를 낳게 하는만큼 우리의 언어를 특징짓는 개념들의 모든 이항 대립 (예컨대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본다면 감성적/지성적/, 직관/의미, 자연/문화 등과 같은)의 공통된 근원이다. 공통된 근원으로서 차연은 또한 이러한 대립들이 알려지는 동일자(le même)의 요소이기도 하다.20) 셋째로 차연은 소쉬르로부터 생겨난 언어학과 그것을 모델로 삼았던 구조주의적 과학들이 모든 의미와 구조의 조건임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었던 차이(différence)들과 차별성(diacricité)의 생산이기도 하다. 넷째로 차연은 잠정적으로 차이, 혹은 존재-존재론적 차이의 이러한 전개를 명명할 것21)이다.22)  차연은 공간적 개념인 차이(différence)와 시간적 개념인 연기(délai)의 결합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적인 현재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은 결국 차이가 낳은 부산물이요, 다른 것에 연기된 관계 속에서 정립된다는 것이다. 그 다른 것이 또 다른 것에 연기된 그런 관계가 바로 ‘흔적’이다. 현재가 현존적이라면, 그 흔적들은 부재적인 것일까? 그러나 흔적은 현존적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흔적은 무(無)가 아니다. 흔적은 양자택일(현존/부재)의 논리를 넘어서 있다. 대기로서의 차연은 시간적으로 차연이 흔적들의 연쇄성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함을 말한다. 즉 대기로서의 차연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이른바 의미라는 것이 그 자체에서 절대적으로 성립할 수도 없고, 그 자체에서 자기 영역을 통괄하고 통어할 수 있는 독립성을 지닐 수가 없음을 가르쳐 준다. 그런 점에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차연은 한 시점이나 한 곳에서 요약될 수 없고 통일 될 수 없다. 교차점과 같은 차연은 그 자체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말해 온 하나의 ‘개념(le concept)’이 아니다. 데리다는 오히려 차연이 하나의 ‘반개념(le contre-concept)’이라고 규정한다. 구조주의는 통시적․역사적 성격을 등한히 하고, 공시적․구조적 성격을 가까이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이러한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차연은 시간적 흔적의 연기나 유예, 저장, 반송 등과 같은 관계의 흐름을 역동적으로 파악한다.23)    차연은 흔적의 구조요, 흔적의 힘이기에, 그것이 선험성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선험은 아니다. 흔적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환영과 같은 것이기에 그런 환영으로서의 차연은 동의어가 아닌 무수한 반개념적인 대체개념들에 의하여 문맥의 필요에 따라 달라진다. 차연의 대체적 반개념들을 보면, 유보(la reśerve)-간격(l'espacement)-소모(la dépense)-원흔적(l'archi-trace)-원문자(l'archi-écriture)-지움(l'effancement)-대기(la temporisation)-연기(le délai)-어긋남(l'écart)-보충대리(le supplément)-파르마콘(치료제/독약, le parmakon)-파르마코스(희생양, le parmakos)-코라(la chora)-산종(산포, 흩뿌림,la dissémination)-처녀막과 파열(hymen)-이중회합(기)(la séance)-표시(la marque)-시작과 흠(l'entame)-고막(le tympan)-주름(le pli)-이전의 중용(le milieu antérieur)-중간태(la voix moyenne)등이 있다.24)    흔적을 있다고 보면 그것은 ‘기념비’이고, 없다고 보면 그것은 ‘신기루’이다. 흔적은 흔적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지운다. 흔적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다. 그래서 흔적은 생명믈 기록속에 새겨두면서도 또한 피라미드처럼 죽음의 집이다. 그래서 흔적과 차연은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주장처럼, ‘차연은 있 X다’라고 기술할 수밖에 없다. 2) 데리다의 은유   언어의 형성과정을 교환가치체계의 경제서으로 파악한 소쉬르의 통찰을 차용했던 데리다는 은유의 속성을 고리(高利)로 인한 ‘원금의 완전탕진’으로 규정한다. 지나치게 높은 이자 지불로 인한 원금의 완전 탕진과 이자가 원금에 가산됨으로 인한 원금의 무한 증식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뜻으로 파악했다. ‘원금의 완전탕진’ 즉 의미의 완전부재를 무한 의미로 간주해온 서양철학은 빈혈을 앓고 있는 신화라는 것이다.25) 백색신화26)   ①은유와 명사중심주의  ‘명사중심주의’라 할 때의 이 ‘명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정의(다른 사물에 속하는 명칭의 전용)에 나오는 그 명사이다. 명사중심주의의 명사는 원래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이 아니라 어떤 한 사물에 속하는 이름이며, 그래서 그 사물의 ‘고유한’ 명칭이다. 이 고유 명칭은 그러므로 다른 사물로부터 차용된 명칭에 불과한 은유적 명칭과 대비된다. 이때 고유 명칭(단순 명칭)은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지칭하며, 논리적 일의성을 띠는 것으로 전제된다. 논리적 일의성을 띤다는 것은 그 의미가 언제나 자기 동일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고유 명칭은 명료하고 비오류적이다. 반면 차용된 명칭으로서의 은유는 다의적이고 때로 통제 불가능한 의미 산종(산포, 흩뿌림la dissémination)27) 가능성 안으로 떨어질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론은 고유명칭 이론과 그 이론을 떠받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체의 기본적 전제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아리스토테레스가 ‘좋은’은유와 ‘나쁜’은유를 구분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은유란 ‘다른 사물’로부터 차용된 명칭을 수단으로 해서 원래 지시하고자 하는 사물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리적 명칭으로서의 은유가 그 우회적 거리를 성공적으로 지나서 원래 의도되었던 의미를 명확히 지시하는 경우, 그 은유는 ‘좋은’은유라 한다. 좋은 은유란 의미의 성곡적인 자기 귀환이다. 반면 ‘나쁜’은유란 그런 의미의 자기 귀환이 실패하는 경우에 해당하거나 의도되지 않은 효과에 의하여 의미의 재현전이 방해되는 경우에 해당한다.28) 데리다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구분의 기저는 현전의 존재론이자 로고스중심주의의 이념이다. 따라서 은유론은 형이상학의 반복에 불과하며, 특히 형이상학에 의하여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진리 개념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계기이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적 은유 개념을 명사중심주의로 재구성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기호개념을 해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상응한다. 형이상학적 기호 개념의 해체는 두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되며, 이 기표와 기의의 이분법은 여타 형이상학적 사유를 조직하는 대립적 이분법(예를들어 정신/물질, 내면/외면, 동일성/차이성 등등) 전체를 대신하고 또 반복한다. 둘째, 형이상학적 기호 개념은 기의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운동 속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표의 물질성을 환원하고 배제하는 운동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형이상학적 사유 일반이 형성되는 과정, 즉 감성․우연성․특수성 등등을 배제하는 운동(가령 피타고라스의 정화, 데카르트의 회의, 헤겔의 변증법적 지양, 후설의 선험적 환원 등등)일반을 회집하고 반복한다. 형이상학의 본성에 내재하는 이 운동은 기호개념 안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이 정의하는 은유의 개념 안에서 재발견된다.    감성적 대상으로부터 차용된 말로서의 은유는 의미의 직접적 현전을 대리한다. 의미의 현전을 대리하는 대신 은유는 의미를 일단 형이하학적 영역에 머물러 있게 하여야 한다. 초감성적 의미에 대하여 이것은 일종의 소외이다. 은유에 담길 때 의미는 자기의 고향이 아닌 타향에, 자기의 집이 아닌 타인의 집에 있다. 은유란 초감성적인 것에 감성적인 복장과 집을 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대와 전세의 처지는 임시적인 것이다. 철학에서 은유적으로 지시된 의미는 궁극적으로 다시 자신의 집으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운동 속에 놓여 있다. 그 복귀가 철학적 은유 개념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다. 하지만 이것은 ‘형이상학’이 함축하는 ‘상’의 운동의 재반복에 불과하다. 이 운동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의 상승적 이행이며, 이 상승적 이행이란 감성적인 것이 관념적인 것으로 승화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철학 안에서 은유적 운동의 궤적은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감성적 언어의 관념적 이상화(idéalisation)이자 의미(혹은 진리)의 자기 재점유(réappropriation)과정이다.29)    ②은유와 태양중심주의  철학적 은유의 추동성이 이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한에서, 그 은유적 성격을 서술할 때 우리가 돌아가게 마련인 은유는 ‘집’의 은유이다. 철학이 현전의 존재론과 로고스중심주의에 의하여 지배되는 한에서, 의미가 은유적 표현에 내맡겨진다는 것은, 그 의미가 임대된 집(은유)에서부터 다시 자신이 원래 속하던 집(고유 명칭)으로 돌아가기위한 여정에 놓인다는 것을 말한다. 일단 문제는 그 자기 복귀의 운동이 철학적 사유 자체의 본성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적’ 추동성임을 탈구성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귀가 언제나 성공적일 수만은 없다. 의미가 은유에 내맡겨질 때부터 살게 되는 이방의 삶과 실낙원(혹은 소외)의 역사는 오히려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은유라는 수레, 의미를 태우고 있는 이 전차에는 처음부터 브레이크가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은유를 통하여 철학 혹은 로고스의 울타리를 논리적으로 상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점을 증명한 때부터이다. 즉 은유라는 배는 고유의 항구에 정박할 수 있는 닻이 없다. 은유의 추동성이 일으키는 파동은 현전의 땅이 보이는 지점에서 다시 집안과 휴식을 방해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태양중심주의’에서 ‘태양’은 빛의 원천이다. 이 빛은 명료성/애매성, 밝음/어둠,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생명/죽음 등등의 다양한 표현을 파생시키면서 거의 모든 철학적 은유들과 결합된다. 그래서 태양은 진리를 말하는 모든 철학적 은유의 원천인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서 이 태양을 통한 진리 은유는 모든 '은유들 중의 은유'인 것처럼 보인다.30) 은유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비가시적이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나게하고 현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하게 하고, 아직 드러날 수 없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은유이다. 아직 고유 명칭이 부재하는 의미를 가시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은유이다. 그런데 모든 나타남과 사라짐을 빛 속에서이다. 가장 자연스런 나타남과 사라짐은 일출과 일몰이며, 빛의 나타남과 사라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양 혹은 빛의 은유는 모든 은유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특권적인 은유이다. 진리를 말하는 철학적 은유는 많은 경울 태양의 은유에 속하거나 태양의 은유로 향한다. 그런 한에서 철학적 은유는 향일성(向日性) 식물이다.    그러나 태양은 무엇보다 철학이 통제할 수 없는 마지막 감성적 요소를 말한다. 로고스는 어떤 방식으로도 태양과 빛의 은유를 배제하거나 말소할 수 없다. 그것은 빛의 은유가 철학에서 모든 은유적 운동이 수렴되는 중심인 동시에 나아가서 철학 자체의 개념31)들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이론(theoria)'라는 말 자체가 ’본다(theorein)'라는 감성적 행위에서 전융되어 굳어진 말인 것처럼, 철학의 초보적인 개념들은 많은 경우 빛의 은유로부터 태어났거나 빛의 은유로부터 자명성(自明性)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은유적 세계와 구분된 거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자마자 자신의 몸뚱이가 다른 비유적 언어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광합성을 통해서 형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은유와 마찬가지로 철학은 향일성 식물이다. 바로 그것이 탈구성된 철학의 정체이다. 따라서 철학의 순수 개념과 은유 사이의 경계는 사라진다. 사라진다기보다는 철학의 내면 여기저기를 지난다. 철학의 몸뚱어리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은유의 흔적은 어원적 탐구와 계보학적 연대기 구성을 통해서도 여전히 말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탐구와 재구성에 개입하는 어떠한 분류의 범주도 그것이 분류하고 재현전화 시키는 은유적 전용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소 불가능한 은유의 흔적은 분명히 어떤 역사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역사성은 단지 잊혀진, 그래서 로고스가 회상을 통해서 재현전화 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시간이 아니다. 그 역사성은 오히려 철학의 자기 의식과 정체성 자체를 조건짓는 어떤 구조적 시간에 해당한다. 나아가서 철학의 자기 의식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특정한 역사 개념 자체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다만 철학이 이 점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로고스 내면의 은유의 흔적과 이 흔적이 함축하는 역사성은 로고스의 무의식이다.32)    데리다는 은유로 철학 개념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생산된, 철학이 말하는 진리의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스런 음모를 꾸민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사적 양식으로 되어 있는 철학은 은유, 환유 등의 비유 장치들이 언어에 만연해 있어 진리의 전달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데리다는 이것을 은유는 항상 자체 내에서 죽음을 운반하고 이 죽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철학의 죽음이라고 하였다.33)   5. 맺음말  지금까지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개론적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데리다 철학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후설에 대한 데리다적 철학을 살펴보았고 데리다 철학에 기저가 될 수 있었으나 역시 전통적 서구철학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니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데리다 철학의 본격적 면모를 알 수 있었던 소시르와 루소의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철학을 알아 보았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데리다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었던 두 가지의 개념들 즉, 차연적 사유와 은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고의 획일성,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던 모든 중심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던 기회가 되었으리라 본다. 데리다의 이 모든 작업이 형이상학 주체에 대한 비판이고 특히 그것이 경직되어있던 일반 사고의 변화를 초래한다면 그래서 더 이상 데리다적 사유에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데리다가 의도한 바가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J. 데리다, 박성찬 편역,『입장들』, 솔, 1992     ―   , 김보현 편역,『해체』, 문예출판사, 1996     ―   , 김성도 역,『그라마톨로지』, 민음사, 1996     ―   , 김다은·황순희 공역, 『에쁘롱; 니체의 문체들』, 동문선, 1998     ―   , 허정아 역,『시네퐁주』, 민음사, 1998     ―   , 남수인 역,『글쓰기와 차이』, 동문선, 2001 J. 레웰린, 서우석·김세중 역, 『데리다의 해체주의』, 문학과 지성사, 1988 H. 키멜레, 박상선 편, 『데리다/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서광사, 1996 양운덕, 「데리다의 해체이론」,『사회평론』제 92권 7호, 1992 이성원 엮음,『데리다 읽기』, 문학과지성사, 1997 조너던 킬러, 이만식 역, 『해체비평』, 현대미학사, 1998 김형효,『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1993 이광래,「데리다의 해체실험과 철학적 단두대」,『한국논단』제 63권, 1994 배의용,「데리다와 형이상학 해체」, 『철학』제 43권, 1995 한상철,「데리다의 기호시학」,『철학』제 45권, 1995 허재영,「자크 데리다: 해체적 독해와 지배담론 허물기」,『철학의 탈주』,새길, 1995   각주 설명   1) 마음 또는 의식(意識)에 현전(現前)하는 것을 뜻하는 철학 ·심리학용어. 관념 일반을 나타내는 idea(영)의 역어(譯語)로 사용되는 수도 있으나 대개는 representation(영),  Vorstellung(독)의 역어로 사용된다. 영어와 프랑스어의 어원(語源)인 라틴어 repraesentatio는 ‘다시(re) 현전케 하는 것(praesentatio)’을 의미하고, 독일어의 Vorstellung은 ‘앞에(vor) 세우는 것(stellung)’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표상이란 말은 적어도 근세 이후의 용법에서는 인간의식의 대상정립작용(對象定立作用) ․반성작용과 관계가 있는 대상의 측면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일체를 인간의식 안에 가두어 생각하려고 하는 근세 R.데카르트 이후의 의식내재주의적(意識內在主義的) ․주체주의적(主體主義的) 철학은 I.칸트를 이어받아 세계의 일체를 인간의식의 표상으로 해소시키는 A.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철학에서 하나의 정점(頂點)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근세의 인간중심적 주체주의철학 또는 형이상학은 바로 근세 서유럽의 합리주의적 기술문명을 낳게 한 근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체의 사물을 인간의식에의 반사(反射)나 반성(反省)의 양상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다는 기본적 약점과 문제성에 대한 반성이 현대철학의 최대 문제의 하나로서 다각도로 다루어진다.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2)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해체』, 문예출판사, 1996, p25. 3) 여기에서 데리다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혼란이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상상(력)은 중성화시키는 기능이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미지는 중성화를 돕는 중요한 보조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이 가지는 중성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결과, 후설은 모든 실제적 통화도 허구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혼자만의 독백이 갖는 비통화적인 비지시적인 순수표현이 있다고 간주한다. 여기에서 데리다의 날렵한 반론이 개입된다. 후설이 허구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표상과 위조적이라고 간주한 실제적 경험에 관한 의식이야말로 후설이 찾는 이상성이라른 것이다. 주체의 이상성이 주체가 지니는 감각적 경험적 개별성을 버리는 것이라면 언어로 표상되는 주체야말로 주체의 이상성이다. -자끄 데리다, 앞의 책, p 26 4) 존 레웰린, 서우석․김세중 역, 『데리다의 해체주의』, 문학과 지성사, 1988, p39 5) 김용복, 「철학과 문학의 이음새-데리다의 후설 의미론 읽기」,『인문사회과학논문집』제 25권, 1996, p12 6)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한쪽은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강하고, 한쪽은 수동적이고 수용적이며 약하다는 남녀간의 전통적인 대립 관계는 아니다. 이것이 보여지고 있는 것은 예술가에서이다. 니체는 예술가를 “남성적인 어머니(männliche Mutter)”로 부르고 있다. -H. 키멜레, 박상선 편역, 『데리다/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서광사, 1996, p74 7) H.키멜레, 암의 책,  p74 8) 한 예로 헤겔을 들 수 있는데 데리다에 의하면 헤겔의 기호론은 말해진 언어를 문자적 기호보다 우위에 놓고 있다. 씌어진 글은 단지 말해진 언어의 보충으로서 후자를 대신할 뿐이라는 것이다. 말해진 언어는 씌어진 글보다 정신에 가까이 있는데, 그것은 말해진 언어의 경우 어떤 자연적인 기저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기의 파장운동은 영혼의 ‘내적인 떨림’을 직접 재현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헤겔이 초기 저술에서부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요한 복음을 애호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H. 키멜레, 앞의 책, p60. 9) 데리다는 서구철학이 비이성에 대한 이성, 차이에 대한 동일성, 부재에 대한 현전을 진리의 근거로 주장해 왔다고 본다. 그런데 이처럼 동일성이 차이와의 관계에서 차이를 배체함으로써만 동일성이 될 수 있다면 동일성 자체는 그 속에 차이에 대한 배제, 억압을 지니고 있는 폭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성, 동일성, 현전에 대비되는 비이성, 차이 부재라는 그것의 타자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데리다는 서구철학의 근저가 되는 본질/현상의 이원적 대립구조에서 권력의 전략을 탐지한다. 여기에서 본질을 현상에 대해 우선적인 것, 근거로 보고 현상을 본질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본질에 특권을 부여하고 그 특권의 그 대립항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이러한 대립구조는 가지적것/감각적인 것, 안/밖, 선/악, 진리/허위, 천상/지상, 자연/문화, 말하기/글쓰기, 자본/노동, 남성/여성, 백인/흑인 등의 이항적 대립의 짝을 만든다. 각 대립항의 한 측면은 원천적인 것이고 다른 측면은 이차적이고 파생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양운덕, 「데리다의 해체이론」,『사회평론』제 92권 7호, 1992, p190 10) 로고스중심주의는 헤겔에게서 잘 설명될 수 있다. 헤겔은 『예나 시절의 시도적 체계』와 『시도적 체계Ⅱ』에서 데리다는 에테르에 대한 헤겔의 이론을 찾았는데 이것은 데리다가 말한 서구철학의 음성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를 직접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에테르는 저항 없는 질료로서 거의 정신-질료이다. 말해진 언어가 자연적 기저 없이 존재하듯이 여기서는 어떤 것이 그렇게 기저 없이도 있을 수 있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긴 스스로-듣고- 말함(Sich-hören-sprechen)이 여기서 완전히 실현되고 있다. ‘지상의 체계’에서 유한한 질료가 생기기 이전에-이러한 유한 질료에서는 이념이 어떤 자연적 기저에 묶여 있는 바-절대 정신 혹은 신은 스스로 자신과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직접 스스로 들었다.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사람에게 음파를 전해주는 공기를 통과하는 과정없이 절대자의 말은 동시에 스스로를-듣는-것(Sich-selbst-hören)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체계 속에 있는 모든 유한적 중개 현상에 깔려 있는 운동의 순수한 형식이다. 스스로-듣고-말함은 로고스의 구조 즉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H. 키멜레, 앞의 책,p62 11) 자끄 데리다, 박성찬 편역,『입장들』, 솔, 1992, p49~50 12) 조너던 킬러, 이만식 역, 『해체비평』, 현대미학사, 1998, p110~111 13) 조너던 킬러, 앞의 책, p115 14) 예를 들어 루소는 교육을 자연에 대한 보충이라고 논하고 있다. 자연은 원칙적으로 완성되어 있는데 교육은 외부 추가가가 되는 것이다. 또한 루소는 자위행위를 위험한 보충이라고 말한다. 글쓰기의 경우처럼 이는 정상적인 성에대한 그릇된 추가, 글쓰기가 말하기에 첨부되어 있는 것처럼 첨부된 실천이나 기교인 것이다. 15)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18 16)따라서 불어로 차연, 디페랑스(différance)는 차이 디페랑스(différence)와 똑같이 발음되기 때문에, 눈으로는 식별되지만, 소리로는 e와 다른 소리를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소리가 없는, 그래서 들리지 않는 a를 e에 대한 실수로 간주하고 무심히 지나가려 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a를 지닌 차연(différance)에 의해 이미 사전에 기술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이 차연 속에 갇혀 있다.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19 17) 김형효, 『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1993, p208 18) 차연은 현전인 동시에 부재라는 기묘한 활동이다. 그것은 현재 작용하는 동시에 숨어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지우는 동시에 언젠가는 일체를 나타내려는 운동이다. -이광래,「데리다의 해체실험과 철학적 단두대」,『한국논단』제 63권, 1994, p222 19) 그런 점에서 그런 연기하는 운동보다 더 이전에 근원적인 자기 일치의 그런 통일이 선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 즉 차연의 연기보다 더 앞선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하고 위임하고 우회하는 차연의 운동이 모든 현존보다 선행한다. -김형효, 앞의 책, p209 20) 우리의 모든 언어활동이 구조주의적 발상에 따라 양가적인데, 그런 양가적 발상, 이분법의 논리를 가능케 하는 기본이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는 나에게 있어 타자다. 너는 타자나 이타자이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는 동일자라는 생각을 데리다는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그런 사고는 말소리중심주의의 소산이다. 데리다에 의해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기 동일성을 지닌 동일자가 아니고 나는 타인인 너의 타자에 지나지 않는다. 너의 타자로서의 내가 바로 데리다가 말한 le même이다. 그래서 과 은 데리다의 철학논리에서 같은 뜻이 전혀 아니다. 이런 사고논리를 위의 인용에 대입하면 같은 것은 이미 그 자체 다른 것을 전제하고 있고, 같은 것은 곧 (타자의 타자)이기에 같은 것이 대립된 두 가지를 동시에 포괄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포괄하지만 같은 것이 어떤 실체나 존재나 기저나 현존이 아님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같은 것은 단지 다른 것의 다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형효, 앞의 책, p209~210  21) 차연에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렇게 씀으로써 시작되는 몇가지 노선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노선들은 느슨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묶음’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차연은 엄격하게 말해서 단어도 개념도 아니며, 단지 잠정적인 그래픽 흔적이다. - H.키멜레, 앞의 책, p88~89 22) 자끄 데리다, 박성창 편역, 앞의 책, p31~34 요약정리. 23) 김형효, 앞의 책, p219~220 24) 김형효, 앞의 책, p227 25)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9 26) 형이상학을 가능케 한 이 우화는 자체적으로 스스로를 삭제하지만, 양피지 위에 눈에 보이지 않게 계획되어 백색 잉크로 기록되어, 여전히 우리를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71 27) 하나의 텍스트 속에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잠재된 의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포를 다의미적 개념이라고 명확하게 못을 박기는 어렵다. 겉으로 보면 산포와 다의성은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다의성은 한 단어에 그 의미가 아무리 다양하게 복수적이라 하더라도, 그 한 단어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해독된다는 생각과 연결되지만 종자를 흩뿌리는 산포는 하나의 정의나 또는 다원적 정의로 모여지지 않는다. -허재영,『철학의 탈주』,「자크 데리다: 해체적 독해와 지배담론 허물기」,새길, 1995, p146 28) 김상환,「데리다와 은유」,『데리다 읽기』(이성원 엮음), 문학과지성사, 1997, p126 29) 김상환, 앞의 책, p129. 30) 주체를 규정한 현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던 것은 바로 태양이었다. 이것은 플라톤의 동굴과 대조되는 진리, 로고스, 이성이다. 화폐통화체계에서 금이 최고의 가치가 되듯, 철학(은유)체계에서는 태양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자끄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22 31) 철학이 은유를 정의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개념들, 그 밖에 철학을 떠받치는 진리·형상·이성 등등의 개념들을 말한다. 32) 김상환, 앞의 책, p131~132 33) 김형효, 앞의 책, p246~248 [출처] 데리다 읽기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 외 1편|작성자 옥토끼  
15    들뢰즈 핵심철학 리좀[스크랩] 댓글:  조회:2628  추천:0  2018-02-14
들뢰즈 핵심철학 리좀   제1강 텍스트와 층화 I   『천의 고원』은 개념적 꼴라주이다. 상이한 담론공간에서 형성된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개념들이 모여들어 장대 하고 현란한 지적 꼴라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꼴라주 안에서 각 개념들은 본래의 의미에서 ‘탈영토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개념들과 ‘접속’됨으로써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개념들은 일방향적으로 즉 연역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거울로서 비추어 주고 있으며, 하나의 개념 안에는 다른 모든 개념들이 접혀 있다. 각 개념들은 각 ‘관점’에 따라 일정 부분을 밝게 비추어 주지만, 다른 부분들은 숨긴다.   각 개념들은 『천의 고원』 전체를 ‘표현’한다. 개념들은 서로를 입체적으로 참조하며, 따라서 각 개념들의 의미는 책을 전부 읽었을 때에만 온전히 드러난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순환논리 앞에 서 있게 된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할 수 없다. 전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하기에. 카프카의 저작들이 그렇듯이, 이 책은 재독(再讀)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독, 삼독, …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미증유의 새로운 사유 지평이 눈앞에서 활짝 열림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계는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 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생성되어 가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 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하는 것, 고착화된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서론’에 해당하며, 서론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 서론 역시 (『천의 고원』 자체를 포함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리좀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존의 책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리좀-책 개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리좀’ 개념의 포괄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책은 리좀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로서 작동하고 있다.  리좀의 일차적인 의미가 생성하는 관계, 차이 자체의 생성에 있다면, 그러한 사유를 통해 (고중세적 본질주의를 포함해) 근대적 주체철학을 극복하는데 있다면, 리좀을 이야기하는 주체들, 『천의 고원』의 주체들=저자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떠올린다면, 저자들이 자기 언급적 논의로부터, 저자들로서의 자신들의 주체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논의는 ‘저자의 죽음’, 그러나 사실상 복수적 저자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둘이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 각각이 여럿이었기에, 그것에는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왜 우리의 이름들을 남겨놓았는가? 관례상, 그저 관례상으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없도록. 우리 자신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을, 또는 사유하게 하는 것을 지각할 수 없도록. […]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하지 않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자의 죽음’은 ‘주체의 죽음’의 한 측면이다. 주체의 죽음은 존재론/인식론의 맥락 이전에 윤리학적 맥락에서 등장 했다. ‘선험적 주체’(칸트) 개념은 세계를, 적어도 현상세계를 인간(의 의식)의 종합 및 구성을 기다리는 대상으로, 더 정확하게는 인식질료로 만들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런 식의 정립에 입각해 유럽적 주체는 비유럽 지역들을 그 눈길 아래에서 대상화/객체화했다. 그래서 선험적 주체의 죽음은 유럽 제국주의라는 주체의 죽음이다.   (따라서 탈주체주의 사유가 처음으로 사상사적 의미를 획득했던 것이 바로 인류학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남성 주체는 여성 주체를, 성인 주체는 아동 주체를, …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 주체에게서 지배와 정복이 생겨난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주체의 죽음은 근대적/선험적 주체와 그 결과들에 대한 반성을 실마리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주체의 죽음은 주-객 분리와 ‘主體(Sujet)’=‘人間(Homme)’의 지배라는 근대 철학의 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다.   저자-임은 주체-임의 한 방식이고, 그래서 주체의 죽음은 저자의 죽음도 함축한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은 주체의 소멸이 아니라 변형을 뜻한다. 큰 주체의 죽음은 동시에 작은 주체들의 탄생이기도 하다. 저자의 죽음은 복수-저자 들의 탄생이다. “나”로부터의 탈주. “나”라고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경지로의 탈주. “나”로부터의 탈주는 전개체적-비인칭적 장에서 사유하기, 즉 의식적/인칭적 주체로 마름질되기 이전의 비인칭적 개체화들, 나아가 현실적 개체로 고착화되기 이전의 비개체적 특이성들의 장에서 사유하기이다.   “비인칭적 개체화들,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세계, 이 세계는 누군가(ON)의 세계, 또는 ‘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일상적 진부함의 세계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디오뉘소스의 마지막 얼굴이자 또한 재현/표상에서 탈주하고 시뮬라크르들을 도래시키는 심층(深層)과 층-허(層-虛)의 참된 본성이기도 한 조우(遭遇)들과 공명(共鳴)들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곧 ‘만인(萬人)-되기’의 세계이다. 『천의 고원』에서 우리는 개념들의 꼴라주를 가로지르며 만인이 되고, 또 조우들=만남들과 공명들=함께-울림들을 만끽한다. 모든 이들의 ‘책’이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책을 한 사람의 주체에게 귀속시킬 때, 우리는 물질들의 이런 노동, 그것들의 관계들이 띠는 외부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지질학적 운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선한 신을 꾸며내었듯이 말이다.   모든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에도 분절화(分節化)의 선들과 절편성(切片性)의 선들, 층(層)들, 영토성(領土性)들이 있다. 그리고 또한 탈주선(脫走線)들과 탈영토화(脫領土化) · 탈층화(脫層化)의 운동들이 있다.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 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글쓰기의 새로운 윤리에 대면하고 있다: 책의 내부성을 극복하라. 현대적 글쓰기의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이 과제를 우리는 들뢰즈와 데리다에게서 공히 발견할 수 있다.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 (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 텍스트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영혼 앞에 현존하는 의미, 진리의 담지자, 저자의 영혼이 외화(外化)된 표지, 영혼의 시뮬라크르로서의 책, 데리다는 책의 이런 개념의 외부에서 “담론적인 것이 비담론적인 것에 연계되고, 언어적 ‘기층(基層)’이 […] 전언어적 ‘기층’과 서로 섞이는” 짜기(texere)의 차원, 텍스트의 차원을 발견해낸다.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의 저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마치 복잡한 지질학적 운동의 저자=창조주로서 선량한 신=조물주를 상정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이 때 모든 것은 ‘신의 심판’, ‘신의 판단’이 된다)   책은 저자의 영혼이 외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외부성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외부성 들로서 “분절화의 선들과 절편성의 선들, 층들, 영토성들”, 그리고 “탈주선들과 탈영토화 · 탈층화의 운동들”을 언급 한다. 책은 구조의 측면에서 여러 선들, 층들, 영토(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에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의 측면 에서 탈주선, 탈영토화, 탈층화의 운동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책 개념을 논하는 서론의 형식을 빌어 자신들의 주요 개념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 우선 이 개념들을 정리해 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e)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articulation’은 잘라(分)-붙임(節)이다.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 무규정적 전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불연속적인 파편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럿을 내포하는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 즉 분절된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 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 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 ― ‘기계들’ ― 이 층을 형성하게 되는 운동은 ‘층화(層化=stratification)’이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구분되어 존재 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 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年齡層)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층의 형성은 사물들 위에 가해지는 어떤 기호체제/코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기호체제/코드가 무너질 때, 층들의 경계선들이 와해되고 다질적(多質的)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층화되어 있던 부분들=기관들은 ‘탈기관(脫器管)’ 상태를 향하게 되고 ‘혼효(混淆)’ 상태를 향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혼효 상태가 일차적이다. 즉 들뢰즈/가타리에게는 혼효 상태, 氣의 흐름이 “본래적인” 것이다. 거기에 초월적 기호체제/코드가 개입할 때 층들이 형성된다) 층들이 혼효 상태를 향해 해체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탈층화(脫層化)’의 운동이 발생함을 뜻한다.   * ‘기계(機械)’는 일상어에서의 기계 ‘메카닉’과 구분된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물체’에 해당 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이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   제3강 기계, 배치, 디아그람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될 때, 즉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코드화) 존재할 때 ‘영토성’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됨으로써,   즉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에 따라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언표적 배치와 기계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 한다. 그러나 여전히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으며,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고 해야 한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떤 영토화도 탈영토화 의 흐름을 단절시킬 수는 없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   * 탈코드화 ― 영토화는 코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계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한 어떤 코드가 작동할 때 기계들은 일정한 영토화를 겪게 된다.   예컨대 도시의 ‘플랜’이라는 코드화가 작동하면 도시를 구성하는 기계들은 그 코드에 맞추어 영토화된다. 그러나 기계들의 본질은 욕망이기에(‘기계적 배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이다), 애초에 영토화는 탈영토화로 흐르는 욕망 위에 불안하게 형성되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교통질서라는 코드가 비현실적으로 무리하게 작동할 때 영토성은 와해되고 갖가지 탈영토화 행태들이 등장 하게 되며, 기계적 배치를 누를 힘을 상실한 코드는 탈코드화할 수밖에 없다.   법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뜻한다. 들뢰즈/가타리의 논의에서 기계적 배치와 (탈)영토성이 일차적인 논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관계를 장기와 바둑의 비교를 통해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개념 규정들을 토대로 배치와 다양체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간다.   배치(agencement)   ― 사물들=‘기계들’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를 형성하며, 서로 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배치(配置)’(또는 다양체, 또는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단일한 하나의 ‘기계’)도 아니며, 또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의 영토성)과 언표들(의 코드)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 층화의 방향과 탈층화의 방향을 오가는 ―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그렇다고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기, 듣기, 사유하기, 대화하기, … 등의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강의’라는 이 배치는 다른 시간에 다시 반복되기도 하고, 또 장소를 바꾸어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또 다른 기계들 및 코드들을 통해서 반복되기도 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그리고 경기 규칙들을 비롯한 여러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야구 경기’라는 배치는 우주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에 반복되기도 하고, 같은 시간의 다른 장소 들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기계들과 코드들을 바꾸어 가면서 반복되기도 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그럼에도 강의, 야구 경기, … 등 너무나도 일상적인 존재,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 하는 바로 이것들이 ‘배치’이다.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들을,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들을 그러나 전혀 새로운 눈길로, 참신한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바로 이런 것이 사유의 의미이고 사유의 기쁨이 아닌가. 사유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 디아그람(diagramme) ―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디아그람’이라 부른다. 이 디아그람은 이질적인 두 배치를 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이어주고 있는 제 3의 차원이다.   여기에서 복잡하다 함은 그것이 사물과 사물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배치와 배치 사이의 관계, 더구나 (성격을 달리 하는) 기계 차원과 언표 차원의 관계임을 뜻하며, 역동적이라 함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소멸하고 또 (존속하다가) 반복되는 존재임을 뜻한다(야구 경기가 열릴 때 디아그람이 작동하다가 경기가 끝나면 사라지며, 경기가 열릴 때면 다시 나타나 반복된다. 그리고 새롭게 변해 갈 수도 있다   ― 예컨대 야구장이 달라지기도 하고 규칙이 바뀌기도 한다). 때문에 이 말을 ‘도표’나 영어식 발음인 ‘다이어그램’ 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치 못한, 아니 차라리 정반대 의미로의 번역이다. 디아-그람은 프로-그람과 대조된다. ‘pro’의 목적론적 뉘앙스와 ‘dia’의 생성론적 뉘앙스를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 개념, 그리고 디아그람 개념은 푸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를 디아그람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기계적 배치는 ‘비담론적[신체적] 실천’이고 언표적 배치는 ‘담론적 실천’이다. 푸코는 병원, 수용소, 법원, 감옥, …을 비롯한 기계적 배치들과 정신병리학, 정신의학, 형법학, 범죄학…을 비롯한 언표적 배치들 사이에 존재하는 디아그람들을 그 다원성과 역사성에 입각해 빼어나게 분석해 주었다.   인용된 구절   ―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 에서 알 수 있듯이,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과 ‘추상기계’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   (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 ― 분절선 들과 절편선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일탈해 가는 탈주선들 ― 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은 배치 개념의 핵심을 담고 있다. 배치라는 개념이 비교적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개념이라면, 다양체 개념은 길고 복잡한 의미맥락을 가진 난해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길다”고 한 것은 이 개념이 가우스-리만-베르그송-구조주의 등을 거치면서 제련(製鍊)된 개념임을 뜻하며, “복잡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자연철학적-윤리학/정치학적-미학적…인 여러 맥락을 동시에 압축하고 있는 개념임을 뜻한다. 일단 현재의 맥락에서만 잠정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여럿은 주로 어떤 주체/주어에 귀속된다. “be attributed to”라는 표현은 최소한 세 가지를 의미한다.   1) 서술. 언어적 측면에서 술어는 주어에 서술된다.(attribute=predicate) 2) 귀속. “맛있다”가 ‘자장면’에 붙을 때(서술될 때), “맛있다”라는 성질은 ‘자장면’이라는 실체에 귀속된다(아리스토              텔레스가 표현했듯이 “부대한다”). 3) 표현. 귀속된/서술된 것은 귀속/서술의 대상을 표현한다. “맛있다”는 ‘자장면’을 표현한다.   여럿은 이런 식의 용법으로, 즉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되어 이해될 때 수적 복수성, 외적 복수성, 현실적 복수성의 역할을 맡는다. “그 날 온 사람들은 열명이다.” 열명이라는 복수성은 사람들이라는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된 양적인 여럿이자,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외적이고 현실적인 복수성이다. 이렇게 여럿=다자는 귀속됨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이해된다.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다자”, 즉 일자의 쌍으로서의 다자(일자의 나눔을 통해 형성되고, 다시 합해짐으로써 일자 에로 歸一하는 그런 다자)가 아니라 순수 다자=여럿으로서의 여럿, 그리고 “~은 여럿이다”에서처럼 무엇인가에 귀속되는 여럿이 아니라 “여럿은 ~이다/한다”에서처럼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것은 ‘무엇’, 어떤 “것”, 어떤 실체, 주체, 주어이다. 그렇다면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어떤 집합체를 뜻하는가? 그러나 하나의 집합은, 그것의 요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의” 집합이며 여럿이 아니라 통일된 하나이다.   여럿이 완전히 봉합될 때, 하나의 통일성, 동일성을 가진 무엇일 때 그것은 여럿이 아니다. 여럿은 어떤 형태로든 불연속, 열림, (그리고 질적 측면들을 감안할 때) 이질성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이라 한 것은 어떤 하나(개체이든 집합체이든)가 아닌 진정한 여럿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주어로서, 어떤 ‘실체’ ― 기존의 실체 개념과는 판이한 어떤 실체 ― 로서, ‘무엇’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실사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전통적인 실체 개념으로 포착되기 힘든 어떤 것, 주어의 역할을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여럿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배치와 다양체가 바로 그것이다. 배치와 다양체의 이 성격을 간파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천의 고원』의 문을 열게 된다.   *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은 기계들이다. 또 예술의 기법, ‘사조’, 구성방식, 전시의 관례… 등은 코드들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 기법… 등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이 말 자체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술’은 이 모든 것의 집합인가?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이란 바로 하나의 배치이다. 예술가, 예술작품, …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 그것은 바로 배치인 것이다. 제5강 탈기관체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 ‘절편성’이다. 분절화는 잘라-붙임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책의 외부성에 대한 논의를 계기로 배치/다양체 개념을 잠정적으로나마 규정해 보았다. 다양체는 앞으로도 보다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배치는 극히 상식적인 무엇이다. 야구경기, 전시, 전쟁, 강의, 결혼식, 선거, 식사, 시위, … 이 모든 것, 바로 우리가 삶에서 영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배치이다.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배치들, 사건들에 보다 적절하고 참신한 존재론을 부여하기. 그리고 그런 존재론으로 파악된 삶으로부터 윤리학적-정치학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요컨대 배치의 존재론을 수립하고 그에 근거해 (예컨대 ‘되기’ 개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이끌어내기, 이것이 『천의 고원』의 목적이다.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와 혼효면(plan de consistance) ― 이제 논의의 물꼬를 돌려 보자.   지금까지 배치가 무엇인지 논했다. 이제 배치가 변해 가는 방향, 즉 영토화/탈영토화, 코드화/탈코드화, 층화/탈층화의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가? 라는 가치론적 논의를 언급할 때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뒤로 미루고, 지금은 가장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지평에서 논하자. 이 경우 탈기관체 개념과 혼효면 개념이 핵심적이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 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인용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 ― 방향성 ― 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 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 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 층들과 탈기관체의 구분을 비롯해 『천의 고원』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원적 구분을 기존의 이분법 ― 대립(opposition) ― 으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 이해이다.   예컨대 다음을 참조. “예를 들어 『천의 고원』이라 해도 형식적으로 보면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이항대립을 사용합니다. 유목성과 정주성, 무리와 군중, 분자적과 몰적, 마이너리트와 머조리티, 전쟁기계와 국가장치, 평활(平滑)공간과 조리(條理)공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 제각각 한쪽 편이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철학을 전도하는 것은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속적인 것이 이항대립 내의 근저에 놓여지는 형태로 다른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362쪽)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분은 ‘이분법’이나 ‘대립’이 아니다. 즉 ‘동일성에 사로잡힌 차이’(『차이와 반복』에서 논의된 ‘유기적 재현’의 구도), 하나=전체의 양분으로서의 대립이 아니다. 문제는 정도이며, 예컨대 하나의 배치는 그 것보다 더 유목적인 것에 비해서 더 정주적인 것이고 더 정주적인 것에 비해서는 유목적이다.   가라타니가 들뢰즈/가타리의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런 사고야말로 들뢰즈-가타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구절은 이미 헤겔-맑스의 관계를 놓고서 알튀세 시대에 논의된 내용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미 이 단계를 훨씬 넘어 그 후에 등장한 구조주의의 한계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담론사의 시계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즉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즉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그래서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는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는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 (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corps sans organes’ 개념을 가져왔다. 1947년 11월 28일 아르토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했다. 신의 심판은 신의 판단이다. 예컨대 신은 “허파는 방광 위에 있다”고 판단/심판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 몸에서 허파는 방광 위에 있게 되었다.   神/造物主는 세계의 ‘소당연(所當然)’의 근거이다. 그래서 현실의 소당연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심판/판단을 끝장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기관체의 추구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는가?”라는 인식적 맥락보다는 세계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분절체계, 부분들=기관들의 분절체계에 대한 전쟁의 선포이다.   대학은 기관들의 유기적 집합체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선 ‘인문대학’, ‘자연대학’, … 등을 선택해야 하고, ‘물리학과’, ‘생물학과’, …를 선택해야 하고, 다시 ‘광학 전공’, ‘역학 전공’, … 등을 선택해야 한다. 허파냐 심장, 비장, …이냐, 오른쪽 허파냐 왼쪽 허파냐, 어느 허파꽈리냐, … 프락탈 구조처럼 끝없이 기관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더 세분화된 기관들에까지 이어진다.   세상은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체이고, 우리는 늘 그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 하고 ‘이름’을 할당받아야 한다. 어디에 가나 기관들이 포진해 있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강압적으로 선택 당한다.(“너는 법과대학 가서 판검사가 되어야 해!”) 사실상 우리는 이미 자연에 의해 선택 당해서 이 세계에 ‘인간’이라는 이 종(種)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원숭이, 호랑이, 족제비, …도 아니고, 새나 물고기도 아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이것은 ‘신의 심판’이다.   그래서 신의 심판을 끝장내는 것은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 즉 주어진 존재방식, 주어진 존재형식들에 저항 하는 것, 새로운 존재방식, 존재형식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인식적 맥락에서 “세계는 왜 꼭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으로, “~인가?”에서 “~이 될 수 있는가?”로 전환된다. 존재론은 저항의 담론, 투쟁의 담론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닌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 ‘현실적인 것(l'actuel)’은 개체들과 성질들(“S is P”!), 그리고 사회적 분절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현실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적인 것을 찾는다. 만일 존재론의 핵심이 현실의 가능 근거를 찾아 그 근거로부터 현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면, 이들의 사유는 ‘잠재성의 사유’ 또는 ‘잠재적인 것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잠재성은 곧 특이성들과 강도들 ― “전개체적-비인칭적 특이성들과 비외연적인 강도들” ― 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이 점에서 『차이와 반복』의 4장과 5장이 들뢰즈/가타리 사유의 핵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기관들의 분절체계이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은 현실적 분절체계가 아닌 다른 분절체계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분절체계가 전혀 없는 상황은 하나의 극한이며, 현실성 없는 추상적 꿈으로 그친다. 때문에 현실의 분절체계가 억압을 가져오는 한에서 새로운 삶에로의 운동은 항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탈기관체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유기체가 적인 것이다. 탈기관체는 기관들에가 아니라 유기체라 불리는 이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여기에서 모든 형태의 분절체계들을 보듬고 있는, 즉 그 위에서 이런/저런 분절체계가 성립하는(더 정확히 말해, 그것“이” 이런/저런 분절체계들로 분절되는) 바탕을 생각하게 되며, 이 바탕은 현실적인 것 아래의 잠재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탈기관체는 잠재성 차원을 개념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강도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공간이 아니며 공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산출된 강도들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강도적인(intense), 형식화되지 않은, 층화되지 않은, 강도-높은(intensive) 모체[코라], 강도=0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기체의 외연(外延)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층들의 형성 이전의 알[卵]”이다.   * 여기에서 0[零]은 비움, 소멸의 의미로서의 제로가 아니라 차라리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서의 0, 즉 출발점 으로서의 0이다. 바로 뒤에 나오듯이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수한 양태들로 표현되는 출발점 ― “미분화된”이라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출발점이 아니라 특정한 양태가 아니라 모든 양태들을 포용하고 있는 출발점 ― 이라는 점에서 강도=0이다.   * 이 때의 알=卵은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실제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잠재성, 탈기관체의 탁월한 예가 수정란이라는 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물론’은 편협한 유물론이 아니라 차라리 氣 일원론인 것이다. 그러나 氣에 무수한 종류들이 있듯이, 탈기관체에도 무수한 종류들이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추상적 일원론으로 귀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일의성’ 문제) 탈기관체가 ‘극한’으로 이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기계적 배치가 코드에 의해 영토화되어 있는 현실성 아래에서 잠재성을 들여다보며, 그 충만한 氣로 배치를 탈영토화해 나간다. 그래서 탈기관체는 ‘욕망의 내재장(內在場)’이며 “욕망에 고유한 혼효면”이다.   탈기관체는 어떤 정해진 무엇이 아니다. ‘탈(脫)’의 운동을 통해서 혼효면 쪽으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더 고착화되어 층화의 [수많은 층위들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한다. 층화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신의 심판/판단에 굴복하는 것이며, 혼효면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실험’으로 열린 길을 걷게 된다.   제7강 글쓰기의 양화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 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세 가지가 구분된다.   실체적 속성들 : 강도=0(remissio)의 탈기관체들. 예컨대 물질-속성은 무한한 물질적 양태들로 변양되는 물질적-측면에서의-실체이다. 무한 양태들을 머금고 있는(특정한 양태들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으로 休止 상태에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속성이 강도=0으로서의 탈기관체이다. 위도(latitudo): 강도=0에서 특정한 강도로 변양된 결과들. 산출된 강도들. 특히 감응들.(위도와 ‘경도=longitudo’를 그리는 것이 카르토그라피이다)   실체 :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한, 모든 탈기관체들의 집합. “그 탈기관체”. ‘혼화면(Omnitudo)’.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속성들은 소통 불가능하며 평행을 달릴 뿐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혼화면’은 모든 속성들의 ‘혼화(混化)’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궁극 실체를 ‘물질’로 말하는 한에서 이 혼화면은 결국 물질이라는 내재면(內在面) ―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없는 면 ― 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의 물질-속성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을 녹아 넣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식이나 정신, 영혼, 마음 등을 부정하는 거친 유물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혼화면, 물질, 내재면은 차라리 氣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해 보인다. 또 하나, 탈기관체 개념이 차이들을 어떤 용광로에 녹여버리는 일자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수성-일반성’의 사유를 ‘단독성-보편성’의 사유로, 즉 보편성의 지평 위에서 무한히 새로운 방식의 차이 창출을 실천하는 사유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구절은 매우 미묘한 구절이다. “내재성의 장 즉 혼효면은 구성되어야 한다. […] 한 조각 한 조각씩. 문제는 차라리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가, 그러려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괴물과도 같은 교차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혼효면은 모든 탈기관체들의 총체이며,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에 처해 있는 […] 순수한 내재성의 다양체로서 […]”(MP, 195) 탈기관체는 분명 혼효면을 지향하지만 혼효면의 존재가 아프리오리하게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나 지젝처럼 들뢰즈를 ‘일자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곤란한 이유들 중 하나) 한 조각 한 조각씩 더 포용적인 탈기관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불연속들, 빗나간 탈기관체-되기, …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함’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이지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니다.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의 투쟁은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 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실재에서의 탈주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논리학적 대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했거니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념적 구분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개념적 구분일 뿐이다. 개념적 구분이 현실에 적용될 때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 …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려 없는 가치론적 실체화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예수쟁이’가 예수의 적이고, 좌익 소아병자가 맑스의 적이듯이, 속류 노마디즘이 노마디즘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중함(prudence)’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층화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조잡하게 탈층화해서는 탈기관체에, 그것의 혼효면에 도달할 수 없다.”(MP, 199)  그래서 혼효면 ― 차라리 혼화면 ― 을 지향하는 탈기관체와 대책 없는 탈층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탈기관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분보다 더 중요한 구분, 즉 제 3의 탈기관체가 있다. 그것은 암적인 탈기관체이다.   유기체에서 암은 기존의 유기화를 탈층화하면서 혼효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창조적인/충만한 탈기관체가 아니라 파괴적이 탈기관체만을 낳으며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표화의 차원에서는 독재자의 등장과 파시즘의 출렁임은 창조적인 탈기표적 운동이 아니라 암적인 기표화를 낳는다.   주체화의 경우에도 역시 기존의 주체화를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기존의 주체화가 보존하는 안일함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탈주체화들이 곳곳에서 난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화폐의 암적인 탈기관체(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무수한 형태의 암적인 탈기관체들이 형성될 수 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지 못하고 공허한 탈기관체로 갈 때, 남는 것은 자기파괴뿐이다. 나아가 창조적인 탈기관체와 암적인 탈기관체를 혼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파괴한다.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의 탈기관체는 무엇일까? 관련되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각각에 고유한 농도에 따라, (그것들의 선별을 보장해 부는) ‘혼화면’에의 수렴 가능성에 따라, 여러 개[의 탈기관체]가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들이다.   글쓰기를 양화하라.   한 권의 책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책은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배치인 한에서 그것은 단지 그 자체,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표인지 기의인지 묻지 않을 것이며, 이해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무엇과 접속해 강도들을 이행하게 또는 이행하지 않게 만드는지, 어떤 다양체들 내에서 자체의 다양체를 도입하고 변신시키는지, 어떤 탈기관체들과 더불어 자체의 탈기관체를 [혼화면 에로] 수렴하게 만드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은 바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주체에 대한 비판에 이어 대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책의 대상은 책이 그것을 재현/표상하고자 하는 대상 이다. 이 경우 책은 대상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책을 바깥에 입각해, 외부성에 입각해 이해할 때 책은 자체가 하나의 배치일 뿐이며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이 무엇을 재현/표상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파기한다. (이것은 책과 세계의 관계를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책과 세계가 어떻게 내재적 지평에서 관계 맺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책의 기표나 기의를 묻고자 하지 않으며, 해석학자들처럼 그 책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 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제8강 혼효면, 혼화면, 기계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혼효면/혼화면(plan de consistance)이란 무엇인가? ‘조직화의 도안’ 즉 조직화의 면은 근대 생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은 일정한 도안/면에 입각해 이해되었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 구조, 기능은 수미일관한 정합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가의 일관된 도안/면(‘플랜’)에 입각해 기하학적 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형상을 질료에 구현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델에 입각해 작업했다. 구부러진 길들은 ‘당나귀의 길들’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데카르트적 마천루들’은 거대한 조직화의 도안/면을 보여준다. 조직화면은 기계들 위에, 그것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고착화된 코드이다. 기계들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이 초월적 코드에 입각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다. 그러나 혼효면/혼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면일 뿐(plat)”이다. 평평하든 복잡하게 굴곡져 있든 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은 없다. 모든 것은 면 자체-내에서, 즉 면의 내재성에 입각해 성립한다. 기계들을 미리 조감(鳥瞰)하고 있는 청사진은 없다. 관계들에 입각해‘사이들’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윤리이다. 혼효면/혼화면은 곧 내재면이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그 자체 하나의 작은 기계라면, 그것 ― 그 또한 측정 가능한 이 문학 기계 ― 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등과, 그리고 이것들을 낳는 추상기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인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제기되는 유일한 물음은 문학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해 나갈 수 있는가, 또 (잘 작동하기 위해서) 나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기계,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기계, … (누군가가 문학에 의해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문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란 ‘물질’=氣가 物로 화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에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사실상 기계적 배치이다. 그리고 이 배치는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청소기는 전기 코드를 통해 거대한 전력 기계들과 접속해 작동한다. 책은 책상, 연필, 스탠드, … 등과 접속해 공부-기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잔과 접속해 받침대-기계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인공적인 기계들만이 아니라 식물들, 동물들, 인간들을 모두 포함하는 커다란 외연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다양한 접속을 이루면서 연속적으로 변이(變移)해 가는 기계, 가장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기계는 아마 사람의 몸일 것이다. 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면서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이보다 훨씬 큰 기계들도 존재한다. 무수히 다양한 기계들의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울-기계, 더 나아가 한국-기계도 있다. 이런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들’을 형성한다. 이질적인 기계들로 이루어지는 배치,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층화의 방향과 탈기관체의 방향을 오가는 기계 즉 기계적 배치가 세계를 구성한다. * 따라서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날카로운 불연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물질은 ‘연속적 변이’를 겪는 무한히 유연하고 잠재적인 氣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퓔룸(phylum)’이라 부른다. 기계적 퓔룸은 특이성들과 강도들(또는 표현의 특질들)을 나른다. 이 퓔룸이 (추상기계에 의해) 어떤 역동적 구조 즉 디아그람을 통해 구체화될 때 기계적 배치가 형성된다. 추상기계는 특정한 시공간에 구체화된 기계적 배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비물체적인(그러나 구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적 기계이다.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밥을 차릴 때 우리는 상과 그릇들을 놓는다. 좀더 추상적으로 생각하자. 식사-기계는 경우에 따라 다른 기계들(갖가지 상들, 그릇들, 수저들, 요리들, …)과 다른 코드들(“한 상 가득히 차려내는” 전통 상, ‘코스’로 먹는 서구식 상, …)을 작동시키지만 늘 식사-추상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기계들과 다른 코드들을 작동시키지만, 서대문 형무소, 정신병원, (러시아 아가씨들을 가두는) 방, … 등은 모두 감금-추상기계를 사용한다. 여러 형태의 공들(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과 심판들, 관중들, 다르게 생긴 경기장들, 다른 코드들(‘룰들’), … 가동시킴에도 모든 경기들은 어떤 반복되는 추상기계 즉 경기-추상기계를 가동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추상기계, 배치, 다양체가 맥락에 따라 차이를 드러냄에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냐 철학이냐, …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문학기계, … 등 다양한 추상기계들을 어떻게 접속시키고 어떤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실재와 그 허위적인 반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제9강 책의 두 가지 유형   ※ 『천개의 고원』 텍스트 읽기  - 서론: 리좀 부분 (p.14~20)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 단위들, 수렴의 CsO 단위들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또는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의미를 만들며 주체의 산물인(이런 것들이 책의 지층들이다), 아름다운 내부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 즉 가 둘이 되는 것이다. 책의 법칙은 어떻게 자연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세계와 책, 자연과 예술 사이의 나눔을 주재하니 말이다. 하나가 둘이 된다. 이 공식을 만날 때마다, 설사 그것 이 모택동에 의해 전략적으로 언표된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파악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반성되고 최고로 늙고 더없이 피로한 사유 앞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 자체는 축처럼 곧게 뻗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기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원 모양으로 수없이 갈라져 나간다. 정신은 자연보다 늦게 온다. 심지어 자연적 실재로서의 책조차도 축을 따라 곧게 뻗어 있고, 주위에는 잎사귀들이 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실재로서의 책은, 그것이 의 이미지로 이해 되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둘이 되는 하나 그리고 넷이 되는 둘… 이라는 법칙을 끊임없이 펼쳐간다.   이항 논리는 뿌리-나무의 정신적 실재이다. 언어학 같은 “선진적인” 학문조차도 이 뿌리-나무를 기본적인 이미지로 갖고 있는데, 이 이미지는 언어학을 고전적인 사유에 병합시킨다(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적으로 진행되는 촘스키의 통합체적 나무가 그러하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이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 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측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를 크게 호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원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이분법의 이항 논리를 대체한 것일 뿐이다. 주축뿌리가 이분법적 뿌리보다 다양체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축뿌리가 대상 안에서 작동한다면 이분법적 뿌리는 주체 안에서 작동한다. 이항 논리와 일대일 대응 관계는 여전히 정신분석(슈레버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망상의 나무), 언어학, 구조주의, 나아가 정보이론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 된다.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재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그 가 더 포괄적인 비밀스런 통일성 또는 더 광범위한 총체성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보상하는 건 아닌지.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꺾꽂이처럼).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포개 쓰기가 함축하는 이 보완적 차원 속에서 통일성은 정신적 노동을 계속해 나간다.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계열들을 증식시키거나 다양체를 커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방법들은 어떤 방향에서는, 예컨대 선형적(線型的)인 방향에서는 완전히 타당하다. 한편 총체화의 통일성은 다른 차원에서, 원환이나 순환의 차원에서 훨씬 더 확고하게 확증된다.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시키고 만다. 여기서 통일성을 유산시키는 자들은 정말이지 천사를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천사가 지닐 만한 우월한 통일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언어들은 정당하게도 “다양한 뿌리를 두고 있다”고들 하는데, 적절한 말이다. 조이스의 언어가 단어들, 나아가 언어 자체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그것이 문장이나 텍스트, 또는 지식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 낼 때뿐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바꿔 말하면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 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 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 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이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하다.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제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호 체제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 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되며 기름 자국처럼 번져 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계통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 된다.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리좀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의 원리를 제시한다.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촘스키가 구사하는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하나의 점 S에서 출발해 이분법에 따라 진행한다. 리좀에서는 그와 반대로 각각의 특질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학적 특질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언어학적 특질은 전형적인 수목형의 사유를 보여준다. ‘homme’는 생명체/무생명체에서 생명체, 척추동물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 …로 이어지는 스무고개 놀이를 통해서 그 언어학적 특질을 부여받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특질(trait)은 촘스키적 특질(하나의 사물이 ‘유기적 재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아니고 일상적 의미에서의 ‘성질들’도 아니다. 성질들이 관찰에 관련되는 형용사적 특징들이라면, 특질들은 감응과 강도에 관련되는 동사적 특징들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즉 존재(esse)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할 수 있는가” 즉 능력(posse)의 문제이다.   짐을 끄는 말과 소 사이의 거리는 짐말과 경주용 말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독문학자와 하이데거 사이의 거리는 하이데거와 콰인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물이 분류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관조 속에 드러내는 성질들도, 내면적 감정들도 아니다. 행동/행위와 과정에서, 강도로, 감응 으로 드러내는 특질들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리좀에서는 각종의 기호학적 고리들이, 상이한 기호체제들만이 아니라 상이한 지위의 사태들까지도 작동시킴으로써, 매우 다양한 코드화에 접속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쉬르에서 연원하는, 기표 중심의 ‘기호론’ 보다 퍼스에서 연원하는 ‘기호학’을 선호한다.)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들은 사실상 기계적 배치들 내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때문에 기호체제들과 그 대상들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의 경우, 그것이 명료한 것에만 논의를 국한시키고 랑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자 할 때조차도, 여전히 배치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적 권력의 유형들을 함축하는 어떤 담론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촘스키가 말하는 문법성,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인 S는 통사론적 표식 기구이기 이전에 이미 권력의 표식 기구이다 ―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 통합체와 동사 통합체 (첫 번째 二分, …)로 나누어라. 우리는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차라리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고, 하나의 랑그를 의미론적이고 화용론적인 내용들에,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들에,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 정치에 연결시키는 추상기계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비난한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하나의 기호학적 고리는 다양한 언어학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지각적, 모방적, 신체언어적, 인식적 행위들을 얽는 덩이줄기와도 같다. 따라서 자체로서의 랑그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방언들, 사투리들, 속어들, 특수언어들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화자-청자의 이상(理想) 같은 것은 없으며, 등질적인 언어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인라이히의 공식화에 따르면, 랑그는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어(母語)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지배적인 한 랑그에 의해 권력의 장악이 있을 뿐이다.   랑그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의 주위에서 안정된다. 그것은 구근(球根)을 이룬다. 그것은 줄기들과 지하수들을 통해서, 계곡물들을 따라, 또는 철로들을 따라 진화하며, 기름자국들처럼 번져간다. 우리는 언제라도 내적인 구조적 분해를 통해 랑그를 변화시킬 수 있으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뿌리들에 대한 탐구와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늘 계통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적인 방법이 아니다. 반면 리좀적인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로 그리고 다른 등록부들(registres)로 탈중심화함으로써만 분석할 수 있다. 하나의 랑그는 무능력해질 때에만 자체의 차원에 폐쇄되는 것이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또는 그 중 하나를 가로지르는, 그래서 기표(작용)적인 단절들에 대항. 하나의 리좀은 임의의 어떤 곳에서 끊어지고 꺾어질 수 있으며, 그것의 이런저런 선들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선들에 따라 수선하기도 한다. 이는 개미들에서조차 확인된다. 개미들은 동물-리좀을 형성한다. 그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기도 하며, 또한 끝없이 복구되기도 한다. 모든 리좀들은 자체의 절편선들을 내포하며, 이 선들을 따라 층화, 영토화, 조직화, 기표화, 귀속, … 등을 겪는다. 그러나 리좀들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며, 이 선들을 따라 끝없이 탈주한다. 절편선들이 하나의 탈주선에서 파열할 때마다 리좀에는 도약이 발생하지만, 탈주선은 리좀의 부분을 이룬다. 이 선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초적인 형식으로조차도, 이원론 또는 이항 분할에 근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탈주선을 긋지만, 늘 그 위에서 다시금 전체를 재층화하는 조직화들을, 하나의 기표에 권력을 재부여하는 구조들을, 하나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들을 되찾을 위험에 처하곤 한다. 집단들과 개인들은 오로지 응결되기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들을 내포한다. 그렇다, 개밀속도 리좀이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다시 시작되어야 할 어떤 선별의 산물일 뿐이다.   탈영토화의 운동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상대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양란(洋蘭)은 하나의 이미지, 말벌의 트레이싱을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이 이미지에 스스로를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그 자체 양란의 생식 기구의 한 부품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며, 꽃가루를 실어 나름으로써 양란을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말벌과 양란은 둘이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물론 양란이 기표적 방식으로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해냄으로써 말벌을 흉내 낸다고(미메시스, 의태적 모방, 속임수 등)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층들의 층위에서만 참이다. 즉 흉내는 두 층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성립하며, 양란에서의 식물적 조직화가 말벌에서의 동물적 조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좀에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 흉내/모방 이상의 그 어떤 것, 즉 코드의 포획, 코드의 잉여가치, 원자가의 증가, 진정한 되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양란-되기, 이 되기들 각각은 한 항의 탈영토화와 다른 한 항의 재영토화를 함축하며, 두 되기는 탈영토화를 계속 더 멀리 밀고나가는 강도들의 순환을 따라 서로를 이끌어내고 또 서로 교대한다. 흉내내기나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다. 두 이질적 계열들이 공통의 리좀으로 구성된 탈주선에서 파열되고 있는 것이다. 레미 쇼뱅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화의 도식들이 수목형 모델 및 혈통 모델 같은 낡은 형식들을 버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하나의 비루스는 생식세포들에 접속해 스스로를 하나의 복합종의 세포유전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전혀 다른 어떤 종의 세포들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그럴 때면 이전 숙주에서 유래한 ‘유전정보들’을 옮기기도 한다. 진화의 도식들은 보다 덜 분화된 것에서 보다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즉 수목형의 혈통 모델들을 따라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리좀을 따라 이질적인 것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이미 분화된 하나의 선에서 다른 하나의 선으로 건너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의 원리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의 논리이다.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 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은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 굴은 동물 리좀이다. 쥐 굴에서는 이동 통로로서의 도주선과 저장이나 서식을 위한 지층들이 때때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끝- 원문 출처 한국문화의 원류카페에서 퍼옴  
14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 / 사공일 댓글:  조회:2003  추천:0  2018-02-13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 / 사공일       들뢰즈는 자신의 사유를 강화하기 위해 많은 개념어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의 사유를 따라잡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또한 분열증적인 글쓰기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상당히 난삽하기도 하다. 그의 글쓰기는 이성에 의해 구조화되고 질서화된 의식이 표출되는 논리적인 문체적 특징을 벗어난다. 이는 현대 문명의 이기 속에서 사유와 감각의 분열을 일으키는 인간의 원자적 특성들을 표현하는 현대시와 유사한 점이 있다.   현대시라는 말의 이면에는 기존에 것에 대한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현대시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논리적인 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는 대신 인간의 순수하고 원초적이고 광기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비춰내려고 한다. 시인은 이런 무의식을 자신의 작품에 드러낸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시인의 욕망의 언어는 무의식의 시학일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가 진단하는 글쓰기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발현과는 다르다. 들뢰즈에게 글쓰기는 무의식과 의식의 교차로서 체험한 경험의 재료에 표현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완전한, 언제나 형성적이기에 중간에 있는, 그리고 어떤 체험 가능한 혹은 체험한 경험의 재료를 넘어서는 생성 혹은 되기의 문제가 된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여성이 되거나 동물이 되거나 아이가 된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에서 시인은 프로이트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는 여성과 아이, 혹은 동물이 되고,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시인은 국가철학적인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아이와 동물이 된다.   시인은 또한 여행가가 되어야 한다. 시인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지도를 그린다. 상상 속의 여행지든 실제적인 여행지든 그곳을 통과하면서 시인은 자연과 삶과 합일을 이루는 새로운 생성을 활성화하면서 지도를 그린다. 이런 여정은 들뢰즈가 말하는 지도의 의미를 갖는다. 지도는 단순히 길의 형상을 그대로 그린 것도 아니고, 지표면의 형상을 정확히 재현한 것도 아니다. 시인은 지도그리기에서 길의 형상과 지표면의 형상을 정확하게 재현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즉 체험 가능한 혹은 체험한 것들을 그대로 나타내는 재현의 권력에서 탈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재현은 창조적 가능성을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지도그리기는 창조적 가능성이 잠재된 생산적인 글쓰기여야 하고, 시인은 전형화된 형식과 표현에 탈주선을 그려야 한다. 이는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이 실재화되는 경우이다.   글쓰기의 창조적인 탈주선은 우리의 지도를 구성하기도 하고, 시 창작에서 시인이 타자가 되듯이 자신을 구성하게 한다. 시인의 글쓰기는 다양한 출입구가 그려진 지도이자 리좀이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나면서, 수목적인 나무와 달리 자신의 어떤 지점과 다른 지점을 연결 접속한다. 리좀은 단어와 단어, 어구와 어구, 행과 행을 연결하면서 아주 상이한 기호체제들뿐만 아니라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지도이자 리좀적인 글쓰기는 전통적인 문체의 접근과는 다르다. 들뢰즈는 문체를 언어의 연속적인 변이 과정으로 접근한다. 그에게 있어 문체는 변이 속에 언어를 배치하는 과정이고, 변조이며, 통사론의 질료이다. 언어의 연속적인 변이의 과정 속에서 문체는 개인적인 심리학적 창조물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배치이다. 들뢰즈가 문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바는 보편적인 형식의 언어 속에서 문체라는 형식의 변이선을 가동함으로써 새로운 표현 형식, 새로운 언어들을 창안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이미지와 리듬을 강조하는 시의 언어이자 시의 문체가 아니겠는가!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에서 김혜영은 여성이라는 언표행위의 배치 속에서 금기화된 성담론을 여성적 언어로 전통적이고 남성적인 성담론을 해체하고 희화화한다. 더불어《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황병승은 선형적인 서사성을 해체하여 들뢰즈의 분열적인 글쓰기와 같은 리좀적인 서사구조를 통해 제도적인 통사적/의미적 틀을 무너뜨린다. 이 작품들은 이런 면에서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을 구체화한다고 볼 수 있다.     1) 프로이트 욕망, 삐딱하게 보기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중첩을 통한 분석은 새로운 이야기 꾸미기가 될 수 있다. 들뢰즈의 프로이트 욕망에 대한 비판은, 모든 욕망이 본질적으로 성욕에만 집중된다는 것, 모든 욕망이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 아버지는 법과 질서, 문화, 문명을 대변하는 자이고, 아버지에 의한 일차적인 욕망의 억압은 하나의 상징계로서 문명화된 모든 인간적 질서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과 같이 세 가지로 압축된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성욕, 어머니에 대한 욕망, 절대적인 상징적 아버지에 집중한다. “당신의 숨소리 날 삼켜보실래요?”(“동백섬”), “허벅지의 3분의 2지점에서 가로선이 잘리고 두 팔은 다 드러나지요 뭉클하게 처진 젖가슴 균형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배치되어 있네요”(“토르소”), “야릇하게 꼬물거리는 여배우 입술을 쳐다보는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슬그머니 내 허벅지에 손을 갖다 대었어”(“오랜만에 쓰는 근육들”), “전쟁이 시작되었네 사춘기 꼬마가 침대에 두 손이 묶여 있네 수음하는 아이의 떨리는 눈동자 목사 아빠가 저녁 식가를 금지하네 하얗게 질려가는 아이들 [중략] 아빠, 귀걸이가 필요하지 않아요 난 엄마가 아니예요”(“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 다락방에 앉은 바둑판 엄마의 잠옷 밑으로 손을 넣는 사자”(“별자리”), “눈이 파란 꼬마가 누나에게 묻네 사랑하면 물어뜯는 거야? 목덜미를 깨무는 아빠는 죽지 않는 거지?”(“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아버지는 얼룩, 보이지 않는 시선”(“별자리”). 이 시들을 프로이트적으로 분석하면 욕망과 무의식으로 수렴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억압된 욕망은 사라지거나 해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억압된 욕망은 무의식 깊은 곳에 남는다. 깊숙한 무의식에 처소하는 욕망은 꿈이나 환상 등과 같은 변형된 형태로 재현되거나, 문학이나 예술에서처럼 암묵적 혹은 암시적 형태로 재현되거나, 법에서 금기하는 부정적 형태로 나타난다.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없게 된 욕망은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드러낼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다양한 표상들로 재현된다. 이런 결과로 삶은 무의식이 펼쳐지는 하나의 극장이 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작품도 무의식의 극장이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이 하나의 절대적 상징계이기에 억압된 욕망의 무의식이 하얀 종이 위에서 춤을 춘다는 대응은 얼마나 작위적인 등가식인가?   프로이트의 이러한 정신분석은 들뢰즈가 제기하는 네 가지 기호체제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네 가지 기호체제 중에서 전제적인 기표적 기호체제를 의미한다. 정신분석에서 남근(혹은 전제 군주)이라는 기표는 다른 기표들이 잠정적이나마 기의를 갖도록 고정시키는 기표가 되어 특권적인 중심의 역할을 한다. 이런 식으로 들뢰즈는 기표적인 기호체제의 중심에 전제 군주의 기표가 있다고 한다. 그 기표는 전제 군주처럼 모든 기표의 자리를 할당하고 그것의 의미를 주거나 박탈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기표는 전제적 기표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표에 수렴될 뿐이고, 그 무서운 권력의 중심점에 아버지가 현존한다. 아버지는 푸코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시선이자 권력이다. 그의 시선은 푸코의 일망 감시체제와 마찬가지로 규율과 훈육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낸다. 그는 주체를 구성하는 대타자이자 주체를 공포에 떨게 하는 절대적이고 폭군적인 초자아다. 다양한 의미적 접근은 거부되고 오직 하나의 의미, 다시 말해 기표는 오직 본질적으로 하나의 중심적인 기표, 특권적인 기표로 환원된다. 아버지의 기표로. 이러한 기표적인 기호체제를 들뢰즈는 편집증적인 체제라고도 하고, 전제 군주적인 체제라고도 한다.   황병승은 “아빠”에서 이러한 중심적인 기표인 아버지의 기표를 탈영토화한다. “[중략] 아빠 하고 부르면/ 우선 배가 고프고/ 아빠하고 부르면/ 아빠는 없고/ 아빠라는 믿음으로/ 개 돼지를 잡아먹는/ 먼 나라의 아빠 숭배자들처럼/ 먹어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아빠를 … [중략] ”(《트랙과 들판의 별》 77). 아버지의 의미가 위계적인 상징적 질서의 중심점에 있다면, 아빠의 의미는 그 질서를 탈영토하여 친밀감을 나타낸다. 하지만 친밀한 아빠조차도 “아빠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 채 아버지의 상징성을 흔적으로 간직한다. 이중적인 의미로서 “아빠”는 절대적인 폭군과 동일한 아버지라기보다는 분열된 주체의 다양한 양태를 대변하는 표상일 뿐이다. 이렇게 시인은 중심적인 기표인 아버지를 탈주하여 다채로운 분열적 기표들을 생산한다. 이러한 분열적인 주체로의 탈주는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 개념을 암시한다.   들뢰즈의 욕망은 존재자체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을 갈구하지만, 그 대상은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프로이트의 욕망이 아니다. 그의 욕망은 다양한 접속을 통해 신체가 작동하는 것이다. 신체와의 접속을 통해 욕망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그래서 그것은 성적 욕망으로만 치환되지 않는다. 접속하는 항(혹은 상황)이 달라지면 다양한 욕망이 생산된다. 황병승의 “멀고 춥고 무섭다”에서 분열된 주체인 음악가 ㄱ, 음악가 ㅁ, 음악가 ㅂ 처럼. 들뢰즈는 욕망과 기계를 하나로 연결한다. 절단하고 접속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기계이다. 가령 입-기계는 절단하고 접속되는 방식에 따라 말하는 기계, 먹는 기계, 사랑하는 기계가 된다. 다른 접속에서 다른 욕망이 생산된다. 욕망과 기계가 혼합된 욕망하는 기계는 무한한 잠재적 공간 속에서 접속에 따라 긍정적인(혹은 부정적인)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욕망하는 기계는 그것이 무엇과 접속하는 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며 분열된다. 그 결과 기계화된 욕망의 본성이 이웃항에 달라지기도 한다. 즉 어떤 기계를 둘러싼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욕망의 본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욕망은 고정된 어떤 본성을 갖지 않고, 관계에 따라, 접속되는 이웃항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김혜영이 프로이트를 활용해 법과 무의식의 해방을 욕망하듯, 황병승이 분열된 주체를 통해 동일화된 주체의 해방을 욕망하듯, 욕망은 그 배치에 따라 다양하게 꿈틀거리며 분열된다.     2) 기호이야기     들뢰즈는 기호체제를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 탈기표적인 정염적 체제, 전기표적인 원시적 체제, 반기표적인 유목적 체제와 같이 네 가지로 분류한다. 프로이트의 욕망에 근거한 남근적 혹은 전제적 기표는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이고, 이에 대조적인 기호체제가 탈기표적인 정염적 체제이다.   기표적인 체제는 전제적인 특징을 갖는다. 기표들이 중심적인 기표로 환원하는 것은 전제 군주 체제에서 쉽게 드러난다. 전제 군주의 말 혹은 기호는 신하와 사제들에 의해 무한히 해석된다. 하지만 전제 군주는 그 해석들을 하나의 의미로 통합할 수 있다. 전제 군주는 의미화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는 기표가 기의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갖는다. 비록 기표가 무한히 미끄러지더라도 전제 군주의 생각에 부합되지 않는 기의는 소용이 없다. 오직 전제 군주의 말 혹은 기호가 법이자 신의 계시가 된다.   탈기표적인 체제는 기표적인 의미화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체계다. 이는 기표적인 권력에 익숙하게 길들어져서, 그 권력에 복종하던 것을 중단하기에 배신의 체제라고 불린다. 탈기표적인 체제는 탈주선에 의해 시작되는 체제이고, 지배적인 의미작용과 확립된 질서 세계를 거부하고 배신하는 체제이다. 비록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탈영토화하지만, 자기-동일화적인 주체화 과정에서 기호들은 해석되고 재영토화된다. 기독교의 교리를 자기 본의로 해석하여 사리사욕에 열중하는 사람들과 같이, 탈기표적인 체제에서는 자기 주체적으로 기호를 해석하기에 다양한 해석이 생산되지만 부정적인 결과를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이 두 기호체제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혼합된다. 오직 기표-기의가 일대일로 대응하는 의미만을 추구할 수 없거니와 기표의 계속적인 미끄러짐을 통해 무한한 의미작용 또한 가능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끊임없이 간섭하고, 서로에 대해 되작용하고, 서로를 각자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속성은 김혜영의 “기호이야기”에 잘 드러난다. “당신이란 상상 속의 기호를 혼자/ 사랑했지요. [중략] 만 년이 지난 뒤/ 무의식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죠. 당신이란/ 기호가 꽃으로 피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당신이 흡혈귀처럼 내 피를 빨아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십오 년이 지난 가을이었죠./ 당신만 피를 빠는 줄 알았는데 난 당신의/ 다리에 붙어서 이(邇)처럼 당신의 살갗에/ 혀를 갖다 대곤 했죠. 당신이란 기호는/ 중세의 흑기사처럼 남도를 따라 가다가/ 해가 떠오르는 새벽에 입맞춤을 했지요./ 당신이란 기호를 기다리며 붉은 와인을/ 식탁에 놓고 멍하니 바라보곤 했지요./ 밤마다 낡은 옷장 문을 열고 내려와/ 이부자리에 나란히 눕는 당신이란 기호는/ 거대한 박쥐가 되어 천장으로 올라갔지요./ [중략] 얄밉기도/ 하지만 당신이란 기호가 오래 오래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지요. 혼자 찬밥을 먹는/ 중세의 겨울 저녁을 견딜 수 없을 거야./ 당신이란 기호를 그리워하는 또 하나의 기호.”(“기호이야기”)   시 속에서 “당신”은 하나의 기호이다. 시인이 “당신이라는 기호”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라는 기호는 시인이 체험하거나 상상한 수많은 경험들과 사유들이 농축되어 있기에, “당신”은 기표적인 의미화로 해독될 수 없다. 여기서 “당신”은 탈기표적인 체제의 흐름을 갖는다. 즉 “당신”은 기표 차원보다는 시인의 상상과 사유 속에서 형성되어 있는 기의 차원의 기호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이것을 기호이야기라고 명명하고 있다. 기호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기호이야기라고 한 것은 “당신”의 의미가 단순한 사랑 이야기의 연인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적인 속성을 가짐을 의미한다. 또한 시인이 그리워하는 “당신”은 “꽃”, “흡혈귀”, “이”, “흑기사”, “박쥐” 등의 질료로 표상된다. 이러한 질료들을 통해 “당신”은 미움과 애정이 점철되기도 하고 사랑이 가득차기고 하면서 강밀한 주파수와 공명을 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점에서 “기호이야기”는 일대일 대응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탈기표적 속성이 강하지만, 추상화된 사랑과 그리움의 관례적인 의미를 완전히 탈주할 수 없기에 기표적인 의미화 속성을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는다. 안정적으로 구축된 1몰(mole)의 원자 혹은 분자 속에 6.02×1023 전자의 인력․척력과 주파수․공명처럼, “기호이야기”는 예속화된 해석을 거부하는 사랑과 그리움의 이야기지만 사랑과 그리움의 의미를 충만하게 가득 채우면서 재영토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파수의 떨림과 공명이 충만한 언어적 표현은 황병승의 “문친킨”에서 두드러진다. “문친킨”은 들뢰즈가 강조하는 언어를 더듬거리게 하는 방식을 잘 드러낸다. “[중략] 문친킨 문친킨/ 스위트 워러의 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말을 자주 중얼거린다/ 배고플 때/ 외롭거나/ 답답할 때/ 잠이 오지 않는 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일 때/ 뒤죽박죽으로 출렁거릴 때/ 담배를 뻑뻑 피우며/ 문친킨 문친킨 … 하고 말이다 [중략]”(“문친킨”). 문친킨이 “무슨 뜻이든”, 문친킨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로 대응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리듬 같이 떨림과 공명을 주는 “문친킨”이라는 기호는 의미의 탈영토화 뿐만 아니라 통사적 구조의 탈영토화를 구현한다. 동시에 “시적 언어의 원시적 에너지, 혹은 마법적인 신비를 보유한다”(《트랙과 들판의 별》 210). 이는 감각과 사건이 일치하여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자 제도화된 언어를 탈주하는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하나의 기호는 김혜영의 “토르소”에서 풍경과 중첩되기도 한다. “[중략] 뭉클하게 처진 젖가슴/ 균형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배치되어 있네요/ 사막의 능선을 닮은 허리와 엉덩이의 구조/ 어때요? 난 뮤즈예요/ 사막에 드문드문 나 있는 잡초처럼 검게 처리된 음모/ 흑백 사진 안에 내 얼굴은 없어요/ 심장이 멎을 듯 떨리던 입술, 화면을 사로잡는/ 시선이 없어도 당신을 소유할 수 있지요/ [중략] 드디어 1분, 당신은 카메라 셔터를 닫는군요/ 시간은 잠시 어항 속에 넣어두었죠/ 선인장이 꽃을 피웠군요/ 사막에는 오래 전에 죽은 소의 머리뼈가 누워 있군요/ 난 뮤즈에요. 얼굴이 없는”(“토르소”). 이 시에서 신체는 사막의 풍경으로 탈영토화하고, 사막은 신체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살바도르 달리의 회화 “메 웨스트의 얼굴”에서 얼굴이 풍경을 이루듯이, 이 시에서 신체는 사막이라는 풍경을 이룬다.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로 이 시를 해석한다면, 이 모델의 신체는 성적 대상일 뿐이다. 미적인 성이 저급한 포르노 사진으로 포획되는 것과 같이. 그 결과 이 신체의 풍경은 욕망을 성욕으로만 수렴하는 권력의 기호가 된다. 하지만 이 신체가 티치아노 회화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처럼 부드럽고 격조 있는 시선을 가진 누드모델의 고운 신체라면, 그것은 미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세잔의 풍경화처럼 자연적인 풍경화로 탈영토화하는 신체가 될 것이다. 이 또한 탈기표적인 체제와 기표적인 체제가 적절하게 만나는 경우이다. 기호와 풍경이 중첩되는 다른 경우는 황병승의 “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이다”이다. “[중략] 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이다/ 그녀는 금방 사랑받고 금방 잊혀진다/ 어둠 속, 한 여자가 울고 두번째 여자가 울고 세번/째 여자가 뛰쳐 나간다/ 기침 끝없는 기침처럼 거울을 사이에 두고 두 여자/가 서로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이다”). 여기서 자아의 얼굴과 거울에 재현된 얼굴은 일치하지 않는다. 분열된 주체의 흐름처럼 다양한 재현된 얼굴을 거울은 반사시킬 것이다. 기표가 기의를 미끄러지듯이. 들뢰즈는 얼굴-언어 개념을 통해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를 왕(혹은 군주)의 얼굴과 상응시킨다. 성난 왕의 얼굴은 절대적 기표를 의미하고, 이 얼굴은 하나의 풍경으로서 권력적 기표를 나타낸다. 왕의 얼굴-언어는 전제적인 권력적 풍경을 표상한다. 이러한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를 배신하는 기호체제가 탈기표적 기호체제이고, 이 체제에서 얼굴은 성난 왕의 얼굴을 돌아선다. 즉 돌아선 얼굴은 탈기표적 기호체제와 상응한다. 이 시에서는 돌아선 배신의 얼굴이 아니라, 동일화된 재현을 거부하며 근원적인 자아와 마주보면서 침을 뱉는 얼굴이다.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을 거부하는 배신의 형태로서. 이러한 얼굴 이미지는 분열된 주체를 묘사하는 풍경으로서 배치와 사건에 의해 리좀적인 흐름을 추구하는 욕망하는 기계의 생성적인 주체 이미지를 대변한다.     3) 되기 혹은 생성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을 사유하려 했던 사람들이었고, 고체적인 안정성을 추구하던 사람들과 반대로 액체적인 유동성을 잡아타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고정화된 존재가 아니라 유연한 되기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사이에 벌어지는,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되는 변화를 주목하고, 그러한 변화의 내재성을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탈영토화되고 변이하는 삶을 촉발하는 것이다. 되기는 이렇게 자기 동일적인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것이 되는 것이고, 어떤 확고한 것에 뿌리박거나 확실한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되기는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근거에서 벗어나 탈영토화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뿌리와 수목이 아니라 리좀을, 정착이 아니라 유목을, 경직된 위계질서적인 홈 패인 공간보다는 수평적이고 유연한 매끄러운 공간을, 관성이나 중력에서 벗어나는 편위를 선호하고 강조하는 것은 되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생성을 사유하고 생성적 삶을 산다는 것은 영속성과 항속성, 불변, 기초, 근본 등과 같은 초월적인 중심적 단어들과 별리하는 것이고, 변이와 창조, 새로운 것의 탐색과 실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되기는 이렇게 하나의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의 문턱 넘기이다. 되기는 권력적이고 수직적인 남성성에 대치되는 여성, 아이, 동물과 혼합된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가 있다. 여성-되기는 김혜영의 “becoming”에서 잘 드러난다. “[중략] 소녀 때부터 달마다 반복되는 일/ 우주 하나가 몸 안에 태어나/ 그믐달 지는 밤 스르르 죽었나 보다/ 분홍색 나일론 팬티를 사다주신 아버지/ 붉은 꽃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날/ 두개골을 쪼개고 지나가는 두통/ 사춘기를 통과하는 소녀의 호기심/ 남자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척추를 지그시 누르는/ 묵직한 억압은 어디서 올까?/ 인형의 시체가 가득한 쓰레기통/ 아이를 기다리는 둥근 방의 울음/ 늙지 않는 소녀가 복제되는 천국/ 소녀의 속눈썹 파르르 떨리고/ 소년의 뒷모습이 뇌리에 박힌다/ 인형처럼 아이를 낳는 시대/ 불법 복제된 첫사랑의 멜로디/ 왼쪽 눈에 새까만 음표로 떠다닌다”(“becoming”). 이 시는 소녀가 사춘기를 통과하며 호기심 어린 육체적 사랑을 통해 여성이 되는 과정을 성적인 측면에서 다룬 것이다. 차이나는 것만 되돌아온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소녀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자아로 탄생한다. 고정적이고 초월적인 주체를 부정하는 들뢰즈와 같이, 주체는 다양한 사건과 배치를 통해 유동적인 흐름을 타는 자아로 변형되거나 생성된다. 이 시의 소녀는 비록 사랑과 성이 일치하지 않는 시대에 대한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남성 중심적 성을 거부하고 그것에 대한 해방을 실현하기에 능동적인 자아의 생성을 추구한다. 즉 억압적인 위계질서를 거부하면서 다양한 잠재적 가능성이 실재화되는 하나의 능동적 여성-되기를 구체화한다. 동물-되기는 “현무, 강서대묘 널방 안벽 벽화”에서 잘 표출된다. “죽어서도/ 한 몸이 되고 싶었을까/ 사향이 풍기는 거북의 뒷다리 사이로/ 뱀이 머리를 쑥 밀어 넣는다/ 젖무덤 같은 거북의 등짝을 휘감고/ 앞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반원을 그린 후/ 고개를 뒤로 젖힌 거북의 입술과/ 뱀의 입술이 마주 선다/ [중략] 죽은 연인의 입술에/ 봄바람 후우 불어/ 북방 아득한 곳에 태어나/ 하늘무덤 별자리로 회귀하는 현무/ 죽어서도/ 한 몸이 되어 살았을까”(“현무, 강서대묘 널방 안벽 벽화”). 시인은 시를 쓰면서 동물이 된다. 현무는 암수가 한 몸이고 뱀이 몸과 다리에 칭칭 감겨 있고 다리가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무는 암수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양과 음의 조화. 시인은 현무가 암수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동물-되기를 통해, 상수(constant)와 항상적인 관계만을 부각시키며 척도와 규범으로 현재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남성적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욕망한다. 이는 또한 프로이트의 권력적인 무의식으로부터의 탈주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김혜영과 유사하게 황병승은 제도권적인 기성세계의 고착화된 사상을 거부하고 비판하면서, 동물과 아이 되기를 자신의 시에 표현한다. “[중략] 죽어도 좋아,/ 주먹을 내려다보는 소년/ 사라지는 달콤함의 시간들/ … 너의 티셔츠에선 언제나/ 검은 줄무늬 고양이 냄새가 나”(“고양이와 자라는 소년”). “당신이 내지르던 그 야단스런 음계들이 뭘 의미하는지/ 꿈에서조차 나는 알고 싶지 않는데, 나는 두드린다!/ 어린이날이라고/ 당신은 나를 피아노 앞에 주저앉히고/ 나는 더 세고 강하게!/ 두드려도 괴롭고/ 두드리지 않아도 괴롭고/ 당신은 그저 즐거워, 한다 어린이날 기념 독주회라고/ 우리 아이는요 금세 피아노의 주인이 됩니다 보세요/ 곧 알게 되겠지만,/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어린이날기념좌절어린이독주회”). 전자는 동물-되기, 후자는 아이-되기가 드러난다. 이 시들은 기성세대 권력의 무의식적 환영과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작가의 탈주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 속에 은폐된 환영이나 환상이 해방되어 유희하는 가장 대표적인 시가 김혜영의 “파라다이스”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삐거덕거리는 강의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햄릿의 집(Hamlet House)으로 달려갔다/ 햄릿을 읊조리던 청춘들이 막걸리를 마셨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유령처럼/ 미리내 골짜기에 홀러 다녔다/ 회색빛 우울이 번지던 군사정권 시절/ 오필리어처럼 자살을 꿈꾸기도 했다/ 불꽃이 피어올랐다 예순 살의 소녀와 소년들/ 워즈워드, 바이런, 셀리가 지은 책은 숲에서/ 블록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끝이 없는 길에서/ 만난 우리들은 서로 꼬옥 안아주었다/ 리어왕 복장을 한 교수가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셰익스피어의 외설스러운 말장난을 흉내 내었다/ 구멍을 파는 자여, 무덤을 파는 자여/ 촘스키의 통사론을 열강하시는 교수의 입술에서/ 하얀 꽃이 뛰어나왔다 어깨에 묻은 분필 가루/ 그는 나뭇가지를 칠판에 그렸다 학생들은 노트에/ 그린 나뭇가지를 연애편지에 그려 넣었다/ 폭풍의 언덕으로 질주하던 소녀와 소년들의 머리에/ 희끗희끗 풀잎이 돋아났다 환하게 열린 봄바다/ 고도를 기다리는 과거와 미래의 청춘들/ 효원 광장에 앉아 베게트와 버지니아 울프와/ 플래스가 쌓은 블록으로 푸른 숲을 만든다/ 긴 복도와 콰이강의 다리/ 미리내 계곡 너머 별이 춤추는 파라다이스”(“파라다이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클로디우스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고 분열적으로 변한다. 오필리어는 햄릿의 배신으로 인해 미쳐 버린다. 환영이나 환상에 지배된 두 인물은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우리는 무의식의 환영과 환상에 지배되어 늘 비극을 맞이해야만 하나? 시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꽃이 피어오른다. 환영과 환상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만든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소녀와 소년은 낭만주의 시인인 워즈워드, 바이런, 셀리의 작품들을 읽는다. 하지만 전형화 돼버린 낭만주의 시에는 답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다. 서로 간 우정의 접속만을 확인한다. 또한 촘스키의 통사론 강의를 들지만 생성문법의 위계질서적인 나뭇가지를 리좀적인 사랑의 나뭇가지로 변형시킨다. 축제는 계속된다. 축제가 열리는 봄의 공간은 탈영토화의 공간이자 접속의 공간이며, 보이지 않는 권력에 무의식이 억압될 필요가 없는 순수 매끄러운 공간이다. 국가장치의 수목적인 특성을 갖는 홈 패인 공간에서 해방된 소녀와 소년은 전쟁기계의 유목적인 매끄러운 공간을 표현했던 작가인 베게트, 버지니아 울프, 플래스의 작품들을 읽는다. 이들 작가가 됨으로써 해방의 공간 파라다이스로 향한다. 이 공간은 보링거의 추상적 선이 부각되는 고딕건축처럼 촉감적이고 유목적인 공간이자 매끄러운 접속의 공간이 된다. 이로써 축제의 공간은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이 잠재된 긍정의 공간이 된다.   생성적 공간은 물론 수목적인 홈 패인 공간이 아니라 유연한 매끄러운 공간이다. 이 공간은 황병승이 표현하는 공간인 길과 광장이다. 길과 광장은 국가철학으로 재단할 수 없고, 유목적 사유가 유희하는 곳이다. 이런 유목적 사유는 특히 황병승의 “트랙과 들판의 별”에 구체화된다.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 그러니 모든 길과 광장은 더러워져도 좋으리/ 술병과 전단지와 색종이 토사물로 뒤덮여도 좋으리/ 창가의 먼지 쌓인 석고상은 녹아버려라/ 거추장스러운 외투와 속옷은 강물에 던져버려라/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 배척된 채로/ 배척된 채로”(“트랙과 들판의 별”). 여기서 시인은 초월적인 국가철학을 의미하는 석고상, 외투, 속옷을 던져 버리고자 한다. 배척된 채로 현존할 지라도, 유목적 사유가 가능한 트랙과 들판에서 소수자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그 삶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재단되는 패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접속과 연대를 통해 창조적인 생성이 발현하는 희망을 암시한다.     새로운 사유를 구현하는 시는 새로운 사유의 감각을 촉발하고 우리의 감각과 정서를 변용시키며, 우리가 새로운 사유의 리듬에 적절하게 감응하게 만든다. 프로이트를 자기 변용화한 김혜영의 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응을 촉발시키는 강밀함과 공명을 준다. 프로이트로부터의 탈주를 갈망하는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재현으로서의 프로이트가 아니라 들뢰즈가 강조하는 생성으로서의 프로이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내해 준다. 마찬가지로 황병승도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사건과 사건의 리좀적인 접속을 실현하고, 서정적인 측면과 서사적인 측면의 혼종 교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 꾸미기를 구현하며, 리듬적인 언어의 더듬거리기를 통해 통사적 구조를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언어를 창안한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들뢰즈의 생성적인 창조적 시학을 구체화하는 시도가 아닐까!       저자: 사공일- 부경대학교 국제지역연구소 연구교수(영문학 박사) 주요작품들 번역-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음악, 회화, 그리고 일반예술》(2006)과 주디스 슈클라의《일상의 악덕》(2011) 저서-《들뢰즈와 창조성의 정치학》(2008) 논문- 〈들뢰지와 연극: 언어와 몸짓의 변이〉,〈질 들뢰지의 재현, 잠재태, 그리고 연극의 정치학〉, 〈핀터의 The Dumb Waiter : 푸코의 권력의 전략〉, 〈들뢰즈 관점에서 본 푸코의 권력 이미지〉등 10여 편 [출처]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 / 사공일|작성자 옥토끼  
13    이선 시 읽기[ 한국] 댓글:  조회:1802  추천:0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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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소재)를 공깃돌 놀리듯 가지고 놀기 / 시골풍경   소재를 첫눈으로 했을때          ~ 잠재의식으로 가지고 놀기 ~   1.하늘에서 내려온 첫눈들이 지상이 이렇게 아름다워요 라며 호들갑을 떤다 2.나뭇가지마다 꽃으로피어 서로 더 예쁘다며 자랑이다 3.첫눈들이 지상풍경을 사진에 담아 하늘 식구들에게 전송하고 있다 4.하늘에서 먼길 오느라 배고프다며 도시락을 열고 밥을 먹고 있다 5.첫눈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지상 백일장 글짓기를 하고있다         ~ 5감각(육체)으로 가지고 놀기 ~   1.(눈)ㅡ바람에 떠 밀리면서도 산새에 짓밣히면서도 토끼발에 체이면서도 박수를 치고있는 첫눈 2.(귀)ㅡ쫑알 쫑알 깔깔 하하 헤헤 첫눈들의 수다 좀 보아 3.(코)ㅡ눈송이들의 화장품 냄새가 날아와 내 코를 마구 간질이고 있어요 4.(입)ㅡ첫눈 냄새와 웃음 소리를 비벼 먹는 이맛 좀 봐요 5.(촉감)ㅡ알몸으로 눈위에 엎어진다 첫사랑 그여자의 피부인가 차갑던 내몸이    잉걸불처럼 달아 오르네             ~ 아이러니 (엉뚱한이미지)로 가지고 놀기   1.나무껍질 속으로 숨은 눈송이가 겨우네 싹이틀어 내년여름에 반딪불이 되는    꿈을꾸고잇다  2.꽃이되어 헤헤 웃다가 햇빛이 뜨거워 울더니 고드럼 형제가 되어 나란히 메달려 있디 3.회오리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올라간 눈들이 오늘밤 하늘에 별로 떠있다 4.하늘에 달빛을 켜놓고 허수아비 위에 않은눈이 바람을 불러와 팽그러러 땐스를 추고있고 그림자도 덩달아 똑같이 추고있다 5.밤사이 출산한 첫눈들의 영혼이 오늘 저 하늘에 구름으로 떠있다     원문 주소 다음카페  
11    시로 쓰는 시작론 묶음 / 오남구 댓글:  조회:1590  추천:0  2017-12-07
시로 쓰는 시작론 묶음 / 오남구   고정관념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1     고정관념의 대표 선수  신神은 시인 앞에 오면  한 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   부서진 이미지의 조각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2     아스팔트 위에서  유리, 산산이 깨어진  아침 햇살이 찬란하다.  아니, 아침의 풍경들이  산산이 깨뜨려진다.  수많은 유리조각 하나 하나마다  온전하고 현란한  하늘이 들어가 있다.  -꽤 오랫동안  유리 조각들을 들여다보고  부서진 유리의 이미지 조각들을  창틀에다 짜맞추어 본다.  실제로 셀로판지를  구겼다 접었다 쫙 펴듯이 한다.  그 때마다 비쳐서  움직이는 사물의 모습  유리를 통해서 투시된  구겨서 버리는 내면,  -두 개의 생각이 반복하여  쫓기고 쫓는다.   감각 여행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3     자-,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편안히 호흡을 고른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신 후에  아랫배에 지그시 힘을 모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쉰다  1초, 2초, 3초,…  이제 감각여행을 떠난다. 태양!  태양을 마음에 그린다  태양을 향해서 몸이 둥둥 떠간다  경비행기 속도로 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생각한다  1초, 2초, 3초,…  태양! 태양이다  느껴 본다. …뜨겁다 …탄다 …눈을 뜬다   우주 유영遊泳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4     지구 밖의 한 점에서 보자  지구의 자전에 따라서  낮에 서 있던 나무가  밤에는 쳐박히는 모습이 된다  어둠 속에 산발한 잎들  느낌을 움직여 보자  “자, 나무를 눈 앞에 떠 올리시오!”  “빙글 움직인다, 밤!”  “빙글 움직인다, 낮!”   직관지直觀知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5     “꽃을 하나하나 분해하시오!”  “눈을 맞추시오!”  되도록 자세하게 분해하며  부분부분을 보도록 한다.  “쓰레기통에 버리시오!”  해서 모두 쓰레기를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꽃은 없게 되고  눈맞춘 느낌만 있게 되고,  그 후 그 느낌을 그대로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이  꽃잎이며 수술이며 자유로이  마음 속에 그래서 핀  마음의 꽃.    의식의 불빛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6     낮에는 건물의 분명한 외형  선명히 강한 느낌을 나타내다가  밤이 되면 모든 윤곽은 사라지고  다만 의식의 불빛이 빛난다.  이 때 내부가 환희처럼  드러나 보인다.  내부가 환히 드러나 본질이 보인다.  빛에 의해 형상이 보이던 꽃  모습이 몽롱히 사라지면  형체가 없는 무형한 꽃  생명의 본질이 움직인다.   탈관념脫觀念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7     살포시 눈을 감으면 좋다  마음 속으로 눈 앞에  깨끗하고 가장 아름다운 공을  상상해서 그린다  공을 튀기어 본다  공이 점점 높이 튀어 오르도록 한다  그래서 천장도 뚫고 올라가서  하늘 높이 튀어 오른다  이렇게 튀는 상상을 반복해서  파란 하늘까지  튀어 오르게 하여  별로서 박힐 때까지 계속한다  이런 일을 반복한다  심상이 관념의 벽인 천장도 뚫고 나서  중력의 아무런 관계 없이  눈을 떠 본다. 컵이며 휴지며  모든 사물이 뜬다.   마음에 비치는 언어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8     눈을 감고 있는  명상하는 배경이  수묵화처럼 펼친다  조선의 여인이 앉아 있듯, 달 기울고  싸락눈 북새치고  외로운 개가 깨어 짖는다  그토록 시간이 가고  푸르도록 바라본 세월이었을까  가끔은 눈물도 찍어 내는  그 자신을  애틋이 직관하기도 한다.   마음이 물을 보면 물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9 마음은 원래 비어 형상이 없고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들 만상萬象이 있게 된다 마음이 물을 보면 물이 되고 바람을 보면 바람이 된다 내 손에 꽃을 들고 있을 때 마음이 화병이면 꽃이 된다 꽃은 마음의 질서이다 몸을 이루고 있는 성품이 작용하는 느낌이다 질서는 성품이 투사된 느낌이다.   시인의 화두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10     ‘꽃!’하고 오직 집중이다.  스님이 화두를 가지고  혜안慧眼을 열어가듯  눈을 감고 있노라면  마음 속에서 거품이 올라오듯  잠재해 있던 느낌  꽃들이 떠오른다.  끝내는 아무 생각도 없이  맑게 되어 어느덧 그  마음도 맑아 투명하다.   우주는 생명체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11     육신에 마음이 있듯  나와 우주는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우주에도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이 신이다. 그러니  곧 내 마음이 신이요  신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신도 흐트러진다.  
10    가장 기본적인 수필창작 형태 / 이관희 댓글:  조회:1689  추천:0  2017-10-15
  가장 기본적인 창작 형태       이관희 (시인 문학평론가 창작에세이 이론창안)         【 눈雪 위의 글씨 】   윤오영   어느 날 들에 나갔더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는 목필木筆을 들고 종일 들판으로 돌아다니며 마음 내키는 대로 눈 위에다 낙서落書를 하고 돌아왔다. 내 글씨는 옥판玉板의 전자篆字 같이 아름다웠다.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 검은 흙만이 슬프게도 드러나 있었다. 내 글씨도 남아 있지 아니했다. 또 열흘 뒤에 가 봤더니 새싹들이 파릇파릇 아름답게 돋아나고 있었다.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기뻐했다.   (필자주 : 본서는 55편의 작품에 대한 55가지의 창작양식을 분석, 강의하고 있다. 55편 모두 동일한 분석 항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 작품 「눈 위의 글씨」 와 같은 상세 강의는 본 작품에서만 행하고 있다. 나머지54편에 대한 상세 강의가 필요 할 시는 「눈 위의 글씨」 편을 참고 하도록 편집 되었다.)   ∥창작 분석∥   1. 소재의 형상적 발견 1) 창작문학의 소재 발견과 일반산문문학(에세이)의 소재 발견은 다르다 문예 창작법의 첫 번째 단계는 소재의 발견에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야 말로 실제 문예 창작법의 ABC 중에서도 A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예창작은 소재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작문학의 소재 발견과 일반산문문학의 소재 발견은 다르다. 문학에는 두 가지 직능의 문학이 있다. 하나는 창작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다. 시,소설, 희곡, 동화, 그리고 창작문예수필은 창작문학이다. 그러나 에세이는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다. 창작문학은 현실이 아닌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문학이다. 그러나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은 상상력의 세계가 아닌 ‘이미 있는 현실의 것’에 관해서 토의하는 형식의 문학이다. 창작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해야 된다. 왜냐하면 문예창작이란 상상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창작)일반산문문학(본고에서는 그 대표적 형식인 에세이를 예로 들것이다. 이하 동일)을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개념적으로 발견해야 된다. 에세이는 형상적 존재 창작에 목적이 있는 문학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에 관한 개념적 논의에 목적이 있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작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해야 되고, 에세이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개념적으로 발견해야 된다는 말은 마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밭에다 팥을 심어 놓고 콩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없고, 콩을 심어 놓고 팥이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없다. 창작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원고지에 형상을 심어야 되고,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는 개념(논리)을 심어야 된다.   2) 소재의 상상적 발견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재를 상상적으로 발견해야 된다. 왜냐하면 문학의 형상은 상상적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문학의 소재는 삼라만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라만상이 그대로 다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적으로 발견된 것만이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문학적으로 발견 된 일이 없는 소재의 나열이 잡문, 신변잡기가 된다. 소재의 ‘문학적 발견’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문학적 발견이란 자연 상태의 소재를 예술작품으로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고, 소재를 예술작품으로 발견한다는 뜻은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로 발견한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본질상 작가가 상상한 상상력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예창작의 실제는 한 마디로 [이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저것]이라는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이것]이라는 소재는 현실이며, 사실이며, 자연 상태의 것이다. 자연 상태의 사실은 그것이 아무리 예술적으로 생긴 것이라 해도 창작물은 아니다. 창작물이란 상상력의 산물이어야 창작물이 될 수 있다. 설사 어떤 예술작품이 사실보다도 못한 조잡한 작품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것이 예술이고 작품이지 사실이 그보다 낫다고 해서 사실을 예술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현실의 사실이나 자연 상태의 어떤 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있고,기가 막힌 것이라 해도 그것 자체에 반해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의 훌륭함을 뛰어 넘어 그보다 더 나은 상상력의 세계를 볼 줄 알아야 된다. 만약에 어떤 작가가 금강산에 가서 ‘야아, 기가 막히네!’라고 감탄만 하다가 온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금강산에 관해서 아무 글도 쓸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쓴다고 해도 ‘야아, 금강산에 가 봤더니 입이 딱 벌어져서 할 말이 없더라.’는 식의 글 이상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 작가는 호랑이한테 잡혀 가도 정신만은 예술적으로 똑바로 차려야 되는 사람이다. 금강산이 아무리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하더라도 작가는 거기에 넋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상상력의 금강산을 볼 줄 알아야 된다. 작가가 [이것]이라는 소재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저것]이라는 창작의 세계가 다름 아닌 현실보다 더 아름다운 ‘상상력의 금강산’인 것이다. 문학이란 본질상 상상력의 세계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이 사실부터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해해야만 된다. 작가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은 작가란 상상력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작가는 아침에 눈을 뜰 때도 현실이 아닌 상상력의 세계에서 눈을 떠야 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도 상상력의 세계에서 잠이 들어야 된다. 그리고 꿈속에서도 상상해야 된다. 작가의 책상머리에는 ‘상상하라’는 한 마디가 좌우명으로 평생 붙어 있어야 된다.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상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재의 형상적 발견이란 첫째로 [이것]이라는 사실의 소재를 [저것]이라는 상상력의 세계로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윤오영의 「눈 위의 글씨」에서,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소재를 상상적으로 발견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곳의 ‘생각했다’는 상상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소재의 상상적 발견이다.   3) 소재의 형상적 발견* 소재를 상상적으로 발견한다는 것과 개념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소재를 상상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의 소재를 상상적인 시각에서 보고 상상적 형상으로 발견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소재를 개념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이 아닌 현실적 문제(개념)로 발견한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은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문학이 아니고, ‘이미 있는 사실의 것’을 가지고 사실적인 토의를 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에세이가 그 대표적인 형식이다. 그러면 소재를 상상적 형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 하는가? 상상적 형상이란 형상적 존재 혹은 사물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문예창작이란 존재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의 존재는 상상적으로만 존재 할 수 있는 형상적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문예창작이란 형상적 존재를 창작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창작 작품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세계다. 이 때 독립된 세계란 현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의 세계라는 뜻이다. 하나의 문학작품이 진정으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라면 그 세계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들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란 존재하는 것들의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그 대답은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현대문학 이론에서 말하고 있는 창작개념인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새로운 존재의 창조라는 말이 바로 이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몰톤 · 조연현) 이때의 새로운 존재란 말 할 것도 없이 현실의 존재가 아닌 상상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재를 문학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현실의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인 예술작품의 대상으로 발견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소재를 예술작품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첫 번째로는 자연 상태의 소재를 자연 상태가 아닌 상상력의 세계로 발견한다는 뜻이고, 두 번째로는 상상력의 세계로 발견한다는 뜻은 상상적 형상으로 발견한다는 뜻이고,세 번째로는 상상적 형상으로 발견한다는 뜻은 형상적 존재로 발견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창작수필 작가가 산문수필 작품이나 에세이 작품을 쓰고자 한다면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해야 할 필요는 없다. 소재를 개념적으로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비평문 형식의 에세이를 쓰려고 하면서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전개가 필요한 비평문에 은유와 같은 비개념적인 형상적 표현이 다량으로 표출된다면 그 글은 개념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 작가가 처음부터 어떤 소재를 가지고 창작 작품을 쓰기로 작정하였다면 반드시 소재를 형상적 존재로 발견해야만 된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다.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심어야 되고, 에세이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개념’을 심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작 작품이 될성부른 소재는 그 떡잎이 되는 소재의 발견에서부터 예술적이고, 상상적인 형상적 존재로 발견하게 되고, 에세이 작품이 될성부른 소재는 그 떡잎이 되는 소재의 발견에서부터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대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에세이는 ‘무엇’에 관한 ‘생각을 짓는 문학’이고, 창작문학은 ‘무엇’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형상화하는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에세이는 작가가 무엇에 관하여 생각한 것을 진술하는 문학이고, 창작문학은 작가가 상상한 존재ㆍ사물을 형상화하는 문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화라는 말의 본질적인 뜻은 형상적 존재를 형상화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다. 에세이는 형상적 존재를 형상화하는 문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세이 작품을 써 놓고 형상화 운운하는 것은 광의적 의미로는 형상적이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 의미에서는 잘못된 논리인 것이다. 에세이는 그 주제를 형상적으로 구현하기는 하지만 어떤 형상적 존재를 창작하지는 않는 문학양식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에세이를 읽는 목적은 어떤 문제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고, 반대로 창작문학을 읽는 목적은 작가의 생각이나 의견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상상한 상상력의 세계를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다. 그러므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야 말로 문학 창작법의 ABC 중에서도 A에 해당하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창작문예수필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이 말을 문학의 ABC 중에서도 A의 원리와 원칙으로 삼아 책상머리에 걸어둔다면 틀림없이 훌륭한 창작 작가가 될 것이다. 윤오영의 「눈 위의 글씨」의 소재는 제목 그대로 ‘눈 위에 쓴 글씨’다. 그런데 작가는 ‘눈 위에 쓴 글씨’라는 소재를 봄에 돋아나는 ‘새싹’이라는 존재론적 형상으로, 즉 형상적 대상으로 발견하고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라는 ‘눈 위의 글씨’를 [저것]이라는 봄에 돋아난 ‘새싹’으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재의 형상적 발견이다.   2. 창조적 창작발상 1) 창작문예수필의 창작발상과 에세이의 작품발상은 다르다 문예 창작법의 두 번째 단계는 창조적 창작발상에 있다. 이 항목에서도 먼저 분명하게 인식해야 될 것은 창작문예수필의 소재 발견과 에세이의 소재 발견이 다른 것처럼 창작발상도 창작문예수필의 창작발상과 에세이의 집필발상이 다르다는 점이다. 에세이의 집필발상은 개념적인 발상이 되어야 한다. 가을 달밤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고교한 달빛과,툭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감상에 흠뻑 빠져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에세이 작품을 쓰겠다고 한다면 한 줄의 생각도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달밤에 관한 에세이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달밤의 감상에 잠길 것이 아니라 달밤에 관한 개념적 생각에 빠져 들어가야 된다. 반대로 달밤에 관한 개념적 생각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이 달밤을 소재로 창작 작품을 쓰겠다고 한다면 이 역시 한 줄의 작품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창작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달밤에 관한 개념적 생각을 파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 달밤을 상상적이고 형상적인 달밤으로 발견하는 일부터 해야 되고, 거기서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창작발상을 길어내서 그것을 형상화하는 구상작업을 해야 되는 것이다.   2) 창조적 창작발상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소재를 상상적이고, 형상적으로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그 소재로부터 아무 창조적 창작발상을 얻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게 된다면 혹 산문수필 작품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창작 작품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창작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재로부터 창조적 창작발상을 발견, 이끌어 내야지만 된다. 창작발상이란 창작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밭에 콩씨도 팥씨도 심은 일이 없는데 김만 열심히 맨다고 콩이 나겠는가, 팥이 나겠는가? 창작수문예필의 창조적 창작발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적인 창작발상은 소재에 대한 창조적 비유(은유 · 상징)의 발견을 의미한다. 필자가 지금 창작발상에 관한 말을 하면서 창작문예수필의 ‘기본적인 창작발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즉 지금 논의하고 있는 창작발상은 ‘기본적’인 논의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소재에 대한 창조적 비유의 발견이란 [이것]이라는 소재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무엇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라는 직유적 관계나 혹은 ‘[이것]은 [저것]이다’, 라는 은유적 관계의 발견을 의미한다. 이를 T.S.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 이론으로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눈 위에 쓴 글씨’라는 소재에 대한 비유가 무엇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된다. *객관적 상관물 :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것을 나타내 주는 어떤 사물, 정황, 혹은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여 표현하는 창작기법.(「현대시론」 박진환) 윤오영의 「눈 위의 글씨」에서는 봄에 돋아 난 ‘새싹’을 지난겨울 ‘눈 위에 썼던 글씨’의 은유(창작발상)로 발견하고 있다. 창작문예수필의 문학 이론적 해석은 ‘산문의 시’ 문학이라는 것이다. ‘산문의 시’ 문학이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시적 발상이란 무엇인가? 시적 발상의 실제가 무엇이든 그것은 시적 대상이라는 원관념에 대한 존재론적 보조관념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 마음은 호수요’의 ‘호수’라는 은유 발견이 그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구조는 소재의 문학화 곧 구성작업과 그 소재에 대한 비유 발견이라는 2중적 구조 창작에 있다. 이 문제는 아래 구성 항목에서 자세하게 논하게 될 것이다. 본 항목에서 논하고 있는 소재에 대한 창조적 비유 발견이란 다름 아닌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개념인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 발견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필자가 발굴해 내고 있는 창작문예수필의 공통적인 창작양식은 소재에 대한 은유나 상징 창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의 경우 봄에 돋아 난 ‘새싹’을 지난겨울에 ‘눈 위에 쓴 글씨’가 새싹으로 돋아난 것으로 보는 은유 창작이 그것이다. 작가들은 많은 경우 소재의 발견과 창작발상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작법상으로는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소재의 문학적 발견이란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창작발상에까지 이르게 되어야 진정한 문학적 발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작발상이 없이 ‘야, 그것 참 멋있는 얘기가 되겠는데’라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문예창작이란 창작발상의 형상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창작발상이 없는 글은 창작문학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창작문학과 에세이 문학이 갈라지는 첫 번째 지점은 소재의 발견에 있고, 두 번째 지점은 창작발상에 있다. 작가가 소재로부터 얻는 창작발상이 형상적이고 창조적인 것이면 창작 작품을 쓰게 될 것이고, 개념적이고 토의적인 발상을 얻게 된다면 에세이 작품을 쓰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비유 발견’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 일 뿐이라는 점이다. 창작양식은 삼라만상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작품의 제재가 되고 있는 소재에 대한 비유적 등가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이라는 사실이다.   3. 주제의 형상적 파악 문예 창작법의 세 번째 단계는 주제 파악에 있다. 주제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못하면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이 되고 말 것이다. 작가가 소재와 창작발상을 어떻게 발견하고 인식 하느냐에 따라서 창작 작품을 쓸 수도 있고, 에세이 작품을 쓸 수도 있듯이 주제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서도 창작 작품을 쓸 수도 있고 에세이 작품을 쓸 수도 있다. 창작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주제도 형상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주제의 형상적 파악’은 소재의 형상적 발견과 창조적 창작발상만큼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시 말하면 설사 주제를 개념적이고 토의적으로 파악하였다 하더라도 작가가 소재와 창작발상을 창조적이고 형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매우 창작적인 산문수필 작품을 쓰거나 혹은 창작 작품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소재의 형상적 인식과 창조적 창작발상이 그만큼 창작의 절대 조건이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작가가 처음부터 창작 작품을 쓰기로 의도하였다면 주제도 자연히 형상적이고 창조적으로 파악하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를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면 ‘새봄을 맞이하는 기쁨’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제를 형상적으로 파악한다면 ‘새봄을 맞이하는 기쁨을 지난겨울 눈 위에 쓴 글씨가 새싹으로 돋아났다고 보는 경이로움으로’ 형상화화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다.   4. 창작 대상의 발견 문예 창작법의 네 번째 단계는 창작대상의 발견에 있다. 창작대상이란 작가가 형상화하고자 하는 형상적 존재를 의미한다. 형상적 존재는 좁은 의미에서는 작품 속의 인물이나 사물이다. 그러나 인물과 사물을 포함한 작품 자체로 보는 시각도 가져야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문학예술 작품이 창작하는 형상은 그 존재 양상이 반드시 현실적 사물과 같은 모양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예술이 창작하는 형상은 본질적으로 비유적 형상으로서의 존재다. 따라서 많은 경우 은유적 존재로서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시와 창작문예수필 작품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는 가공의 인물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항목에서 말하는 창작대상의 발견이라는 말을 질문형식으로 표현한다면, ‘이 작품은 이 같은 소재와 창작발상을 가지고 무엇을 창작(형상화)하고 있는가.’라는 말이 된다.(필자주 : ‘형상화’라는 말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공부를 진행하자. 「형상화의 바른 뜻」을 다시 보라.) 창작대상의 발견과 창작발상은 본질상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작법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창작발상은 ‘아, 이거다’하는 막연한 느낌 가운데서‘어떤 확실한 것’으로 떠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즉 분명히 무엇인가를 보기는 보았는데 마치 안개 속에서 본 것처럼, 그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명치 않은 막연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같은 창작발상을 가지고 창작구상을 계속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차츰 그 윤곽이 분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이 같은 구상과정을 통해서 분명한 모습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창작대상이다. 창작대상이 분명한 형상적 존재로 발견되지 못한 상태, 즉 막연하게 ‘이것이다’라는 창작발상 상태에서 글을 쓴다면 혹 산문수필 작품은 될 수는 있겠지만 창작 작품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창작이란 형상적 존재를 형상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작양식은 삼라만상만큼 다양하다. 창작문예수필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양식의 문학이다. 그 기본 창작개념은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 창작’이다. 실제 작품창작에서는 크게 세 가지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소재에 대한 비유(은유 · 상징)창작, 두 번째는 시적 정서의 산문적 형상화, 세 번째는 서사(소설 · 동화 · 희곡) 구성법 등이 기본 창작양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 작품은 눈 위에 쓴 글씨가 봄이 되자 새싹으로 돋아났다고 보는 은유를 창작하고 있다. 즉 [이것]이라는 소재인 ‘눈 위에 쓴 글씨’를 가지고 ‘새싹’이라는 [저것]으로 만들어 내는 은유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은유란 두 이질적인 대상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동질성에 근거한다. 은유 창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적 창작론에서부터 문예창작법의 중요 창작 요건으로 여겨져 왔다. 현대 시작법에서는 은유 창작이 없는 시창작이란 생각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시작법의 중심 작법으로 여긴다.   5. 창조적 구성 작업 1) 소재의 문학화 창작문예수필은 무엇을 어떻게 창작하는 문학인가? 창작문학이란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시는 창조적 언어(시어)의 상상력 세계를 만들어 내고, 소설은 허구적 이야기(인물 · 서사)의 상상력 세계를 만들어 낸다. 창작문예수필은 시어도, 허구적 이야기도 아닌 사물의 마음의 이야기, 즉 사물과 교감의 상상력 세계를 창작하는 문학이다.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는 그 대표적인 창작양식은 ‘소재에 대한 은유 창작’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 창작’이 그것이다. 문학 창작법의 다섯 번째 단계는 구성작업에 있다. 구성이란 ‘문학적으로 발견한 소재와 창작발상을 어떻게 작품화(상상력의 세계화)할 것이냐’의 문제다. 소재의 작품화란 문학화를 의미하고 문학화란 곧 상상력 세계화를 의미한다. 문학을 하고자 하는 문학도에게 ‘작품화’,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라는 말의 뜻을 문학 이론적으로 바로 이해하는 일은 초등학생이 한글을 깨우치고,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 일만큼 절대로 중요한 기초 작법이론이다. 구성작업이란 다름 아닌 소재의 작품화, 즉 상상력 세계화 작업을 의미한다. 창작문예수필이 에세이로부터 진화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어려웠던 난제는 작품의 제재로 사용하고 있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상상력화 방법론에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창작문예수필의 전신인 에세이 문학은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현실적 토의를 하는 형식의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세이 집필 개념은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몽테뉴 「essai」의 서문)’이라는 사실의 소재를 작품의 제재로 삼아 그 소재에 관해서 ‘현실적인 토의’를 하는 형식의 ‘생각을 짓는’ 데에 있다. 상상력화, 즉 창작화 시키지 않은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다. 따라서 에세이 작품 속의 ‘나’와 ‘나의 세계’는 곧 작가 자신과 작가 자신의 사실적 세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에세이문학의 창작성은 ‘창작적인 변화(몰톤 · 조연현)’, 즉 ‘창작적인 표현’, 혹은 ‘창작적인 구현’ 이상이 될 필요도 없고,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에세이(산문수필) 작품은 아무리 풍부한 상상적인 형상적 문장법으로 제작된 작품이라도 여전히 소재의 문학화, 소재의 상상력 세계화가 안 된 일반산문문학 작품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세이 작품 속의 ‘나’와 ‘나에 관한 이야기나 생각’은 모두 사실의 세계인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문학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력의 세계, 즉 비현실의 세계다. 그러므로 문학화*란 소재의 비현실화를 의미하게 된다.   소재가 아직 소재인 상태로 있을 때, 그것은 조잡함을 면치 못한다. 조잡하다는 것은 비현실화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뜻이다.(「문학에의 초대」 齊藤勇저 이철범역 경서출판사 53쪽)   창작문예수필은 에세이문학이 아니다. 시, 소설 같은 창작문학이다. 그러므로 소재를 문학화, 즉 상상력 세계화 시켜야 된다. 창작문예수필이 ‘사실의 소재’를 작품 속에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는 점에서는 에세이 문학과 같다. 그러나 소재를 상상력화 시킨다는 점에서는 에세이 문학과 완전히 다른 창작문학이 된다. 다시 말하면 창작문예수필은 사실의 소재를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시키는 창작문학인 것이다. 사실의 소재를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시킨다는 것은 ‘사실의 세계’를 ‘상상력 세계’로 만든다는 뜻이다. 소재의 출처는 주관적 경험에 있다. 그러므로 소재가 소재 상태로 있는 동안은 주관적 경험의 현실적 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이 문학화가 된 후에는 더 이상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이 아닌 객관적 세계인 창작된 세계의 일이 되는 것이다.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 즉 사실의 소재가 구성작업을 거쳐서 문학화(상상력화) 된 후에는 더 이상 사실의 세계와 1:1의 관계가 아닌 개연성(蓋然性 probability )의 세계, 즉 상상력의 세계의 이야기가 된다는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에서부터 시작 된 가장 오래된 창작론이다.(참고 : 「문학이론의 역사적 전개」 이상섭) 현대에 와서는 포스터의 구성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론이다.(참고 : 「소설의 양상」 E.M.Forster) 그러므로 구성된 창작문예수필 작품 속의 ‘나’와 ‘나의 이야기’들은 더 이상 작가 자신과 작가 자신의 사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창작문예수필 작품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특별히 이 점에 관한 명확한 이론적 이해를 해야만 된다. 창작수필을 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에세이 작품(혹은 기존의 수필)을 쓸 때와 같이 작품 속의 ‘나’와 작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인식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 위에서 지적한 ‘비현실化’ 작업이 덜 된 조잡한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의 소재를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창작문학화 시키는 본질적인 방법이 창조적 구성작업이다. 위에서 말한 창작의 네 가지 단계는 구상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구상 단계에서는 아직 한 줄의 작품도 만든 것이 없다. 물론 많은 메모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원고지를 펴 놓고 본격적인 집필단계에 들어 간 것은 아니다. 실제 집필단계는 구성작업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수필을 가리켜서 처음부터 ‘여기의 문학’이니 ‘서자문학’이니 혹평하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신변잡기’에 ‘그것도 문학이라고 하고 있느냐’라고 노골적으로 조롱을 하게 된 문학 이론적 원인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작품화(문학화), 상상력화 즉 구성작업이 안 된 글을 써 놓고 창작문학이라고 우겨 온 데에 있다. 작품화*란 한 마디로 문학화를 의미하고, 문학화란 소재의 비현실화를 의미하고, 소재의 비현실화란 사실의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본질상 상상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왜 상상력의 세계 일 수밖에 없는가? 인간은 신적 창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적 창조란 사실적 창조다. 곧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창세기1장3절)’는 성경의 창조론 같은 사실적 창조는 신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다. 문학적 창조란 신적 창조가 아닌 인간이 상상력 속에서 할 수 있는 창조를 의미한다. 즉 사실적 창조가 아닌 상상력의 세계에서의 상상적 창조인 것이다. 창작문예수필도 기존의 수필과 다름없이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문학 양식이라는 점에서는 똑 같은데 사실의 소재가 어떻게 작품화,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답이 구성작업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문예창작 방법론의 핵심은 구성법(플롯)에 있다.   호메로스는 플롯을 만들었기 때문에 시인이고, 엠페도클레스는 그 철학사상을 단지 운문으로 서술한 까닭에 시인이 될 수 없다.(「문학이론의 역사적 전개」 이상섭 23쪽)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시작된 창작 방법론의 첫 번째 개념이다. 즉 플롯을 만들었다면 창작문학이고, 그렇지 않으면 창작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의 소재를 작품화,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시키는 그 구성(플롯)*이라는 것은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은 필연성과 개연성(蓋然性)을 중요하게 여기고, 포스터의 구성론은 인과율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필연성, 개연성, 인과율은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동질성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포스터의 구성론에 의하면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는 것은 구성이 안 된 시간적 순서에 의한 사실적 진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성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냐? ‘왕비가 죽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는데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구성이라고 E.M 포스터는 말하고 있다.(「소설의 양상」 E.M 포스터 94쪽) ‘왕비가 죽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는데 왕이 죽은 슬픔 때문에 왕비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왜 구성인가? 그것은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는 시간적 순서가 깨어져 왕비의 죽음이 서두에 나서고 있고, 그 왕비의 죽음과 왕의 죽음 사이에 인과율이 개입되어 인과율에 의한 사건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첫 째로, 구성이란 사실의 소재의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 버린다는 것이다. 시간적 순서에 의하면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중요한 구성요소는 시간적 순서를 깨트린 대신에 사건과 사건 사이를 인과율로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그 결과 시간적 진술에서는 ‘왕의 죽음’이 서두에 나섰는데 시간적 순서가 깨어지고 대신 인과율이 그 자리에 들어서자 ‘왕비가 죽었다.’가 서두에 나서고, 그 원인(인과율)이 왕의 죽음에 있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적 서술에 의한 ‘옛날식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은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었느냐’를 물으며 이야기를 듣고, 현대식 구성된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왜 그렇게 되었느냐’를 물으며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포스터의 구성론이다. 창작문예수필작품 속의 제재는 기존의 수필작품 속의 사실의 소재로서의 제재와 다르다. 기존의 수필작품 속의 제재는 구성이 안 된, 있었던 사실의 시간적 순서에 의한 진술, 즉 사실의 소재의 모사(模寫)적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작품 속의 제재는 구성작업을 통하여 문학화, 즉 시간적 순서가 깨어진 자리에 인과율과 필연성이 개입하는 구성작업을 통하여 개연성이 성립된, 더 이상 사실의 소재의 사실성과 관계가 없는 상상력 세계화, 곧 소재의 비현실화가 이루어진 창작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 다음 문장 속에서 창조적 구성법을 찾아 볼 수 있다.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 검은 흙만이 슬프게도 드러나 있었다. 내 글씨도 남아 있지 아니했다. 또 열흘 뒤에 가 봤더니 새싹들이 파릇파릇 아름답게 돋아나고 있었다.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눈과 함께 녹아서 없어진 ‘글씨가 새싹으로 돋아났다’는 발상이 창조적 상상력의 구성이다. 이곳의 ‘생각했다’ 는 ‘상상했다’이다. 만약에 작가가 이 같은 창조적 상상력에 의한 구성을 하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평범한 사실적 진술에 그친 ‘산문수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열흘 뒤에 가 봤더니 온 들판에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나서 지난겨울 눈 위에 썼던 글씨는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2)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구조 시와 소설은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즉 사실의 소재를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의 절대 창작조건은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시나 소설처럼 소재를 작품 밖에서 허구화하여, 허구화한 그곳에서부터 창작을 시작할 것이라면 차라리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쓸 일이지 굳이 수필이라는 이름의 문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수필이 수필인 까닭은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문학이라는 점에 있다. 이 한 가지 수필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수필문학이 존재하는 한 영구히 변할 수 없는 수필의 태생적 본질이다. 소재를 작품 밖에서 허구화 하여 그곳에서부터 창작 작업을 시작하는 일과 소재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아서 문학화 하는 일은 전혀 다른 양상의 창작행위이다. 이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시와 소설이 작품 밖에서 소재를 허구화하는 일은 화가가 꽃이라는 사실의 소재를 보고 그림을 그릴 때 그것이 화판 위에 색깔과 선으로 표현되기 이전에 먼저 화가의 뇌리 속에서 눈앞의 실제 꽃과는 다른 새로운 꽃으로 변용(變容)된 그것(예술작품화)이 화판 위에 표현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창작문예수필이 사실의 소재를 작품 속에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아 문학화 하는 작업은 조각가가 돌덩이라는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아서 새로운 창조적 형상으로 깎고 다듬어 내는 창작행위와 같다고 비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화가의 소재인 실제 꽃은 직접 작품 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작품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작품 밖에서 허구화(變容)된 그것이 화판 위에 표현되고, 조각가의 돌덩이는 그것 자체가 작품 속으로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사용되어 작품화 되어가는 것이다. 조각가가 돌덩이라는 사실의 소재(제재)를 직접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아 작품화하듯 창작문예수필 작가도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아 작품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작문예수필의 구성*은 엄밀하게 해부하면 크게 두 가지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첫 번째 구조는 사실의 소재 자체의 구성작업이고, 두 번째 구조는 그 사실의 소재에 대한 존재론적 비유(은유ㆍ상징) 창작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 같은 창작문예수필만의 독특한 창작 구조를 다음과 같이 잘 보여주고 있다. (1) 이 작품의 소재부분, 즉 작품의 제재가 된 [이것]이라는 소재부분은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① ‘어느 날 들에 나갔더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는 목필木筆을 들고 종일 들판으로 돌아다니며 마음 내키는 대로 눈 위에다 낙서落書를 하고 돌아왔다. 내 글씨는 옥판玉板의 전자篆字 같이 아름다웠다.’ ②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 검은 흙만이 슬프게도 드러나 있었다. 내 글씨도 남아 있지 아니했다. 또 열흘 뒤에 가 봤더니 새싹들이 파릇파릇 아름답게 돋아나고 있었다.’ ①번은 최초 소재부분으로 작품의 발단 부분에 해당한다. ②번은 최초 소재가 발전된 부분으로 작품의 전개 부분에 해당한다. (2) 이 작품의 [저것]이라는 소재에 대한 은유적 창작 세계는 다음 문장에 있다.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뻐했다.’ 이 부분이 작품의 제재로 삼고 있는 소재에 대한 존재론적 비유 창작이 되는 까닭은 ‘눈 위에 쓴 글씨’라는 소재가 ‘새싹’이라는 은유적 창조물로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눈 위에 쓴 글씨’가 ‘새싹’으로 돋아나고 있는 창조적 구성 방법이 다름 아닌 ‘생각했다’에 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의 ‘생각했다’가 그것이다. 이곳의 ‘생각했다’는 ‘상상했다’는 뜻이다. 문예창작의 본질적 발상법은 상상력에 있다. 상상하는 것이 곧 창작하는 것이다. 문예작품의 구성작업이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상상적 구성작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 건물의 설계도 같은 것이 아니다. 실제 건물의 설계도는 실제 건물을 짓기 위한 설계도다. 그러나 문예작품의 구성작업은 실제 건물이 아닌 상상력의 세계를 짓기 위한 설계 작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예작품을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과정을 구상작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작품구상*을 한다는 뜻은 사실의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로 만들기 위해서 상상적으로 이리 저리 얽어 짠다는 뜻인 것이다. 얽어 짜는 작업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의 배열(配列)이라고 말하고 이를 플롯이라고 한다.   3) 창작문예수필의 대표적인 두 가지 서술 양식 지금까지 발견되고 있는 창작문예수필의 서술 양식*은 크게 두 가지로 발견되고 있다. 그 첫째는 서사(사건 · 이야기)적 서술 양식이고, 두 번째는 서정적 서술 양식이다. 서사란 사람의 행위에 근본을 두고 있는 이야기 세계이고, 서정이란 사람의 감정에 근본을 두고 있는 이야기 세계다. 행위는 성격에 근거를 두고 있고, 감정은 마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소설은 성격적인 이야기 세계라 할 수 있고, 시는 감정적인 이야기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창작문예수필은 서사적 이야기 세계와 서정적 이야기 세계 모두를 다룰 수 있는 복합, 융합, 접목 양식의 문학이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의 본질은 소설적 허구의 서사 이야기 세계가 아닌 시적 서정의 이야기 세계다. 이를‘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라 한다. 따라서 소설적 행위 사건도 정서로 풀어내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봄이 되자 돋아난 ‘새싹’(원관념)을 지난겨울 ‘눈 위에 썼던 글씨’(보조관념)로 보는 은유적 창작발상을 형상화하고 있는 서정적 서술 양식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4) 창작문예수필의 문장 창작문예수필은 본질상 서사문학이 아닌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문학이다. 그렇다고 창작문예수필은 서사를 창작(구성적 창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아 구성작업을 통한 서사창작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허구적 서사와 구분 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창작문예수필이 소설적 허구서사를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은 또한 아니다. 소설적 허구서사 창작을 위해서는 액자수법 등의 문학적 장치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 소설 창작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굴되고 있는 창작문예수필의 서사 창작은 서사도 서정으로 풀어내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적 서사는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시적 서정은 이야기를 압축하여 말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장이 응축, 함축적인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아주 짧은 길이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야기(사건) 전개의 호흡이 짧고, 밀도는 긴박하다. 창작문예수필은 대개 원고지 10장 안팎 길이의 문학양식이다. 시 보다는 길지만 소설보다는 훨씬 짧은 문학이다.따라서 창작문예수필의 문장은 호흡이 짧고 밀도가 함축적인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 소설적인 완만함과 산만함의 문장세계가 아닌 것이다.   5) 세부 구성 작가는 ‘눈 위에 쓴 글씨’를 ‘새싹’의 이미지로(반대로 ‘새싹’을 ‘눈 위에 썼던 글씨’의 이미지로 보게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형상화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발단은 ‘어느 날 들에 나갔더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이다. ‘들에 눈이 하얗게 덮여있는’ 사건(서정적 이야기)이 다음 전개문장의 행동을 이끌어 내는 원인(발단)이 되고 있다. 작중 화자 ‘나’는 ‘들에 눈이 하얗게 덮여있는’ 정서적 사건에 이끌려서 목필을 들고 나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눈 위에다 낙서落書를 하고’ 돌아온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전개부분이다.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는 사건(정서ㆍ이야기)의 위기 부분이다. ‘내 글씨도 남아 있지 아니했다.’는 사건(정서)의 절정부분이다. ‘새싹들이 파릇파릇 아름답게 돋아나고 있었다.’는 사건(정서)의 전환점이다.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 한 것’은 사건(정서)의 반전이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창조적 발견이다. ‘기뻐했다.’가 이 작품의 대단원이다. 창작문예수필의 문학 이론적 해석은 ‘산문의 시’라는 것이다. 산문의 시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봄에 돋아난 새싹(원관념)을 지난겨울 눈 위에 쓴 글씨(보조관념)가 새싹이 되어 돋아난 것으로 보는 시적 발상을 운문 형식이 아닌 산문형식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6. 서두문장, 종결문장, 집필, 퇴고 창작문예수필 작법의 여섯 번째 단계는 서두 찾기다.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창작문예수필은 시나 소설과는 다른 창작문예수필만의 독특한 창작구조를 가지고 있는 문학이다. 따라서 소재의 발견, 창작발상, 구성법 모두가 시, 소설과는 다른 창작문예수필만의 독특한 창작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창작문예수필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이 탄생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창작문예수필이라는 새로운 장르 문학이 탄생해야 하였겠는가? 이상에서 말한 여러 창작 조건들이 모두 준비되었다면 곧 작품 집필을 시작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준비가 되었어도 아직 한 가지 더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서두와 종결 문장 찾기라는 것이다.   1)서두 문장 찾기 짚신짝도 제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문예 창작이란 잃어버린 짚신짝 찾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형상화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창작의 숙제다. 그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짚신짝 찾기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서두 찾기야 말로 짚신짝 중의 짚신짝이라고 할 수 있다. 서두가 그 작품에 딱 들어가 맞는 짝이 아니면 제 짝을 찾은 짚신 한 켤레 같은 작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억지로 짝을 맞춘 신발 한 켤레는 곧 독자의 눈에 띄어 졸작 비평을 면치 못하게 된다. 따라서 창작수필 작가가 작품구성을 하는 일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총력을 기울여야 할 일이 다름 아닌 서두 찾기인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서두는 작품의 전개 내용과 딱 들어가 맞는 짚신짝이 되어야 한다. 내용과 서두가 딱 들어가 맞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첫 번째는 서두가 전체 작품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서두가 전체 작품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작품의 서두는 사건(이야기)의 문을 열어 주기도 하고, 사건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는 2중 역할을 수행하기에 딱 알맞는 부분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필수 조건을 더한다면 작품의 서두는 독자를 단번에 작품 안으로 끌어 들일 수 있는 흥미를 유발해야 된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의 서두는 ‘어느 날 들에 나갔더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이다. 이 서두 문장은 작품의 문을 열어주고 있는 역할과 함께 다음 문장, ‘나는 목필木筆을 들고 종일 들판으로 돌아다니며’의 사건으로 작품을 밀어내서 전개 부분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목필木筆을 들고 ··· 눈 위에다 낙서落書를’한 행위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의 사건으로 발전하여 전개되어 가고 있다.   2) 종결 문장 찾기 지금까지 발굴되고 있는 창작문예수필 작품들의 종결문장은 작품의 제재로 삼은 소재에 대한 은유의 완성이 되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양식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 작품의 경우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그것이다. 새싹은 지난겨울 눈 위에 썼던 글씨의 은유다. 따라서 창작문예수필의 종결문장은 창작발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통상적인 작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창작발상은 소재에 대한 시적 발상이 그 기본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3) 집필 소재의 형상적 발견, 창작발상, 창조적 구성법 등 작품 구상단계를 거쳐서 어디서부터 작품 집필을 시작해서 어디서 끝은 내야 할지 그 가장 알맞는 서두와 종결문장까지 찾아내게 되었다면 곧 집필에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초고는 가능한 앉은 자리에서 완성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집필태도는 작가에 따라 다 다르기 마련이다.그러므로 ‘앉은 자리에서 집필’은 작법은 아니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의 특성으로 알아둔다면 창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시는 단 한마디의 시어만 착상된 상태에서 더 이상 글이 안 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일반적인 창작과정이다. 소설의 경우는 쓰다 말다 쓰다 말다 하는 일을 수 없이 되풀이 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 편의 작품이 완성된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의 경우는 이 같은 시창작과정과도 다르고 소설과도 다르다. 그 이유는 창작수필의 창작세계는 ‘때에 맞는 말 한마디’, 혹은 ‘제 철 꽃’과 같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벚꽃은 봄에 펴야 어울리고, 코스모스는 가을에 펴야 어울린다. 남들 다 웃은 다음에 똑 같은 농담을 또 던진다면 썰렁해 질 것이다. 말은 때에 맞추어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언어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이자 본질적인 기능일 것이다. 나오라고 소리 쳐야 할 때에 들어가라고 소리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문학은 언어를 재료로 한 예술이다. 그 가운데서 창작문예수필은 소재의 발견에서부터 인생의 어떤 특정 때(경우)에 가장 알맞는 소재를 발견하여, 그 소재에 가장 알맞는 비유를 찾아내서 형상화 하는 문학이다. 꽃이 제철을 놓치면 꽃으로서의 운치를 잃게 되는 것과 같이 말도 때와 경우를 놓치면 소용에 닿을 수 없다. 제철 꽃과 같은 문학이므로 자연히 그 집필방식도 꽃들이 때를 맞추어 다투어 피어나듯 앉은 자리에서 집필을 끝내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집필에 관한 이 같은 필자의 생각은 이론이 아니므로 참고만 삼고, 각자의 집필 방식대로 하면 될 것이다. ‘때에 맞는 말과 같은 문학’이라든지 ‘제철 꽃과 같은 문학’이라는 말은 모두 다 창작문예수필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특징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들일 뿐이다. 참고삼아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창작문예수필은 비빔밥과 같은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빔밥은 비비기 시작한 이상 앉은 자리에서 비벼서 먹어야 되는 음식이다. 비비다 말고 두었다가 다시 먹으면 맛이 변해서 먹을 수 없다. 또 비빔밥은 아무리 여러 가지 나물과 재료를 동원한다 해도 한 그릇 안에서 비벼서 먹게 되어 있는 음식이다. 정식 코스 음식처럼 한 가지 음식이 나오면 먹고 기다렸다가 다음 코스가 나오면 또 그것을 먹고 하는 식의 요리가 아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작가 윤오영이 이 작품을 머릿속에서 구상한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집필은 앉은자리에서 끝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4) 퇴고 퇴고는 시나 소설 등의 퇴고 과정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초고가 완성되면 서랍 속에 넣어 놓고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적어도 2,3주가 지난 후, 처음 초고를 쓸 때의 분위기와 감정, 생각 등을 잊어버릴만할 때 까지 덮어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다시 열어 보면 고쳐야 할 부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즉 퇴고는 객관적인 눈이 준비 되었을 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같은 과정을 작품에 만족 할 때까지 몇 번이든 되풀이 하는 것이 좋다.   7. 이 작품에서 배울 작법상의 힌트는 무엇인가? ‘수필을 몰라도 시는 쓸 수 있지만 시를 모르고는 수필을 쓸 수 없다’는 윤오영의 말뜻이 무엇이었는가를 확인하게 된다. 윤오영의 이 말은 창작문예수필의 창작이론의 핵심이다. 필자는 윤오영 선생이 수필문학에 남긴 업적은 이 한마디 말만으로도 영구히 기억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8. 창작에 적용하기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은 소재에 대한 비유적 형상 발견에 있다. 이 작품의 경우 봄에 돋아난 새싹을 겨울에 눈 위에 썼던 글씨로 보는 은유가 그것이다. 이 같은 창작방식을 자신의 작품창작에 적용하는 것이 창작문예수필 작법의 시작이다.   9. 참고 할 점 1) 그러나 소재에 대한 비유적 형상 발견이라는 것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창작양식은 삼라만상만큼 다양한 것이다. 그러나 1백층 건물도 기초공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예술본능* 문학의 기원을 인간의 예술본능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문학론의 기초이론이다. ‘자기표현본능설’, ‘모방충돌설’, ‘유희본능설’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능에는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요건들을 갖추고 있는 예술본능이 있다는 것이 ‘자기표현본능설’, ‘유희본능설’, ‘모방충돌설’의 근거인 것이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그 실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발굴 해 내고 있는 창작문예수필 작가들 중에서 대표적인 작가는 윤오영과 피천득이다. 그런데 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인가. 그토록 뛰어난 창작양식을 보여 주고 있는 윤오영과 피천득이 현대문학의 창작론의 중심이자 핵심론인 플롯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수필은 소설과 달리 플롯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며.(「수필문학입문」 윤오영 230쪽)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수필」 피천득)   이처럼 창작론의 핵심인 플롯론을 부정하고 있는 윤오영과 피천득이 정작 자신의 작품에서는 어느 누구의 작품보다도 뛰어난 창조적 구성법을 만들어 내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 대답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첫 번째 대답이 바로 예술본능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필자는 문학 이론은 작품 자체에 있음을 늘 강조하여 오고 있다. 작가는 그 자신도 이론적으로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는 창작 논리를 자신의 작품 속에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는 마치 복중의 어린 아이와 같다고 비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태중의 아이가 어떤 과학적 원리로 잉태되어 배속에서 자라고 있는지 그 이론적 원리는 모르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스런 아이를 분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도 마찬가지다. 예술이 예술 일 수 있는 본질적인 원인은 인간의 예술본능에 있다는 것이 ‘모방충돌설’, ‘유희본능설’, ‘자기표현본능설’인 것이다. 흔히 ‘너는 그림에 소양이 있으니 장차 화가가 되라’ 든지, ‘음악적 소질이 풍부하니 음악가가 되라’는 등의 말이 바로 이 같은 예술본능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이 같은 예술본능을 일깨워서 과학적 훈련을 거쳐서 계발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창작문예수필이 어떻게 창작수필론 자체가 없는 기존의 잡문 쓰기(홍매의 ‘붓 가는 대로’) 속에서 창작의 꽃을 피워 낼 수 있었느냐에 대한 원천적인 대답도 이 같은 인간의 예술본능에 그 대답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두 번째 대답은 말 할 것도 없이 후천적 창작훈련에 의한 것임이 분명 할 것이다. 후천적 창작훈련은 문학과 회화, 음악 등 창작예술로부터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 분명한 증거가 창작문예수필 작품으로 발견되고 있는 상당수의 작품이 선배 시인, 소설가, 미술가, 음악가 등 창작예술을 하는 작가들에 의해서 창작된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윤오영과 피천득이 명문화하여 플롯을 부정하므로 기존의 수필의 ‘신변잡기’화에 결과적으로 앞장 선 셈이 된 것은 수필문학의 큰 두 선배의 문학 족적에 남겨진 오점으로 지적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을 공부하고자 하는 창작문학 지망생은 기존의 수필의 이론 아닌 이론들은 깨끗이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문예창작의 본질적 방법은 창조적(상상적) 구성작업에 있다. 글 쓰는 일에 구성이 필요 없다는 주장은 마치 빌딩을 세우는 데 무슨 설계도가 필요하냐는 억지 주장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창작문예수필 지망생이 ‘창조적 구성’이라는 실제 창작법을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빼어난 창작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윤오영의 수필문학론에는 ‘수필을 모르고 시는 쓸 수 있어도 시를 모르고는 수필을 쓸 수 없다.’(「수필문학입문」 윤오영 태학사 194쪽)는 말 외에는 구체적인 창작론이 없다.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에 비유될 것이다.’(상동 175쪽)의 곶감론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아직 이론 전개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수필에 관한 교양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오영은 오히려 ‘다만 나는 수필에서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보다는 무드의 문학이라고 한다’(동상 245)라고 하여 수필을 형상화(사물 · 존재 · 이미지)의 문학이 아닌 무드(정서 · 감정의 유로)의 문학으로 봄으로써 현대문학의 창작론을 19세기 낭만주의론으로 퇴보시키고 있다. 더구나 ‘수필은 소설과 같이 플롯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며’(동상230)라고 하여 플롯을 부정하므로 수필을 창작론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고 말았다.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플롯론은 창작론의 중심 방법론이다. 플롯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혹 철학서나 역사서(사실적 기록)일 수는 있어도 창작문학은 될 수 없다. 창작이란 곧 플롯(구성)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10. 이 작품이 창작문학이라는 문학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1) 이 작품은 봄에 돋아나는 새싹을 겨울에 눈 위에 쓴 글씨가 녹아서 새싹으로 돋아나는 것이라고 보는 시적 발상, 곧 창조적 발상을 산문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곧 ‘산문의 시’ 문학이다. 2) 산문문학으로서 갖춰야 할 창작 작업의 조건은 구성작업(플롯)에 있다. 이 작품은 위에서 살펴 본대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발견, 대단원까지 구성작업의 여섯 단계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11. 이 작품의 창작양상을 [가장 기본적인 창작 형태]라고 한 까닭이 무엇인지 파악 되었는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개념은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 창작’이다. 이 작품은 그 같은 기본 창작개념을 구체적인 작법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12. 창작 팁(Tip · 비결). ‘문예창작이라는 말은 존재론적 '형상화'를 의미한다.’   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나 현상은 (중략)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형상적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런 형상, 이런 형상화를 통해서 말한다.(「현대시 작법」 오규원 문학과 지성사 50쪽)   창작문학이란 존재(사물 · 형상)를 만들어 내는(형상화) 문학이라는 뜻이다. 문예창작이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면 그 방법은 반드시 존재론적 형상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론적 형상화 작업이란 정서나 관념도 사물화 하여 형상적 존재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작문학 작품 속에는 반드시 작가에 의해서 형상화(창작) 된 존재론적인 어떤 구체적 사물이나 존재 혹은 세계가 있어야 된다.   * 글은 쓰는 것이고, 작품은 만드는(창조) 것이다. * 창작은 형상을 만들어 내는 일(형상화)이고, 일반산문문학(에세이)은 개념(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9    좋은 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댓글:  조회:1449  추천:0  2017-08-18
좋은 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2.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3.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4.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5.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6.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7.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 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8.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10.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시와 산문이 다른 점은 시가 지니고 있는 함축성 때문이다. 시는 평면적인 글을 의미전환 시키거나 이미지화해서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해준다. 시에서 다양한 수사법(은유, 상징, 역설, 알레고리, 아이러니 등)을 사용하는 것도 평면적인 글을 입체적이고 함축적인 글로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이나 사회의 어떤 현상과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해석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동화-assimilation) 자아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려는 것(투사-projection)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동화는 세계(사물)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이를 다른 말로 세계의 자아화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사물)에 이입시켜서 자아를 세계와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요약해서 자아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동화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아에 중점이 주어지는데 반해, 투사는 이와 반대로 자아를 대상에 상상적으로 감정이입 시켜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 세계(사물)에 중점이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것은 서정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다.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박남희  어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오래된 먼지도 나오고  시간을 측량할 수 없는 체온의 흔적과  오래 씹다가 다시 싸둔  눅눅한 껌도 나온다  어쩌다, 오래 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를 뒤지면  달도 나오고 별도 나온다  옛날이야기가 줄줄이 끌려나온다  심심할 때 어머니를 훌러덩 뒤집어보면  온갖 잡동사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뒤집힌 어머니의 안쪽이 뜯어져  저녁 햇빛에  너덜너덜 환하게 웃고있다     팽이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2.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좋은 시는 시인이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미 너무나도 낯익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어서 낯익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기계적이고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이처럼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것들을 일깨워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재창조해내는 자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의 하나인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대상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바라보고 이것을 자신의 표현법으로 낯설고 새롭게 표현해 내는데서 생겨난다.  이처럼 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표현법으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주체나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유로운 상상력이나 사유(생각)를 통해서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재해석해서 새롭게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문학사를 더듬어 볼 때, 실험시나 해체시가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시적 ‘새로움’에 대한 시인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빠져나오려면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분열된 몽고의 부족을 결집하여 중국과 유럽을 정복한 징기스칸이 만약에 유목민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런 큰 역사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유목을 뜻하는 노마드(nomad/nomade)는 들뢰즈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목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서 어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일컫는 말로 정착되면서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은 시를 쓸 때도 필요하다. 좋은 시를 쓰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부수고 자아와 사물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은 자유로운 정신에서 나오고,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좋은 시의 원천이 된다  둥근 발작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거리에서 이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3.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좋은 시는 우선 허황되지가 않다. 집도 토대가 튼튼해야 좋은 집이 될 수 있듯이, 시도 체험의 구체성이나 진정성 위에 서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관념이나 허황된 상상만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관념도 시의 소재가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객관적인 상관물로 사물화하지 못하면 독해가 불가능한 난해시나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시 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이 나타나 있는 시라 할지라도 현실과의 연관성이 아주 없거나 너무 희박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 객관적으로 독해가 불가능한 시가 종종 보이는 것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체험이나 기억에 의존한 시를 쓰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좋은 시는 체험과 기억과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의 경험이나 감동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켜줄 수 있는 시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시의 내용이나 주제가 현실과 일정한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표현이나 상상력, 시적 사유 등이 현실과 연결되어있으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어 있거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깨워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가 좋은 시이다. 우리가 좋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 안에 잠들어있던 생각이나 상상력이 새로운 충격으로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좋은 시 속에 들어있는 신선한 감각의 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땡볕 허수경  소나무는 제 사투리로 말하고  콩밭 콩꽃 제 사투리로 흔드는 대궁이  김 매는 울 엄니 무슨 사투리로 일하나  김 매는 울 올케 사투리로 몸을 터는 흙덩이  울 엄니 지고 가는 소쿠리에  출렁 출렁 사투리 넌출  울 올케 사투리 정갈함이란  갈천 조약돌 이빨 같아야    물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간통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4.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시를 쓰다보면 처음과 끝의 발상이나 주제가 다르고 형식적인 통일성도 없이 산만하게 시가 써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과오는 초보자일수록 더욱 자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도 자신만의 시작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시에 대한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처음 읽을 때는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꼼꼼히 읽어보면 낯선 표현 속에서 일정한 시적 문맥과 흐름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시들은 시 속에 텐션(긴장)이 들어있어서 시를 읽는 맛이 새로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중적 구조를 지닌 다층시와 독해 불가능한 난해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결여되고 내용과 형식의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는 난해시라기보다는 미숙한 시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를 쓴 자신도 설명 불가능한 난해시도 역시 시적 숙련도가 덜된 시에 포함된다.  요즘의 젊은 시인들의 시가 난해시나 환상시, 해체시의 포즈를 취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난해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지식들이 인터넷으로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유독 시만이 소통불가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좋은 시는 익숙함과 새로움, 경험과 상상력, 자유로움과 질서, 모호성과 선명성, 자아와 세계가 서로 소통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이다  아름다운 수작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풍향계 이덕규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  초고속 후폭풍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흉터 속의 새 유홍준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 때  새가 날아와서 갇혔다  꺼내 줄까 새야  꺼내 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5.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시만큼 언어적 수사에 민감한 장르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에서 언어적 수사는 옷과 같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보이듯이, 시 또한 수사적 표현에 따라 느낌이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화려한 옷이 모든 사람의 몸에 맞는 것이 아니듯이 불필요한 장식적인 수사법이 때로는 그 시를 망칠 때가 있다. 시에서는 화려한 수사법보다는 오히려 명징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시에서 명징한 이미지는 그 시의 구심점이 되어서 단순한 주제를 중의적으로 전경화 시켜준다. 대부분의 좋은 시에는 명징한 중심 이미지가 존재한다. 좋은 시는 그러한 중심 이미지를 구심점으로 체험과 상상력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키고 확장시켜나간다. 이미지는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간접화시켜서 보여줌으로써 설명에 갇히기 쉬운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시의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산문적 진술은 화자가 대부분의 상황을 직접 진술하기 때문에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이 없다. 하지만 시는 생략과 침묵과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러한 시적 긴장감은 시적 화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행간 사이에 무수히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해준다. 고급 독자는 시인이 설명하지 않고 행간 사이에 감추어놓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시의 묘미를 느낀다. 압축과 생략이 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섬 함민복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꽃 먼저 와서 류인서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6.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시의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나 아스팔트길 같은 것이 아니다. 시의 길은 오히려 꾸불꾸불한 시골길이나 출렁이는 물길과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한눈에 빤히 보이거나 쉽게 측량되지 않는다. 현대화된 길은 이미 계획된 설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이지만 시골길이나 물길은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시의 길 역시 자연에 가까운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시는 친자연적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계획된 논리를 바탕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씌어진 시는 너무 논리적이어서 풍부한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빤한 알레고리 시에 머물거나, 머리로 쓴 작위적인 시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논리적인 시는 새로움과 놀라움이 없다. 물길은 늘 요동하면서 수시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도 물길과 같다. 인간의 마음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마음은 물길보다도 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는 계산된 논리를 버리고 시상을 자유로운 연상에 맡겨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자연 속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숨어있다. 시를 쓰는 작업은 이러한 숨어있는 상상력을 캐내어 자아와 타자 사이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이를 중심적인 주제나 이미지로 응집시켜나가는 것이다. 상상력이 깊고 넓은 시는 바다와 같은 심호함이 있다. 작은 냇물은 가뭄에 말라서 없어지지만 바다는 죽지 않는다. 바다 속에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시작법을 위한 기도 박현수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거리 문태준  오늘 풀뱀이 배를 스쳐 여린 풀잎을 눕힌 자리같이  거위가 울며 울며 우리로 되돌아가는 저 저녁의 깊이와 같이  거위를 따라 걷다 문득 뒤돌아볼 때 내가 좀 전에 서 있었던 곳까지  한 계절 전 눈보라 올 때 한 채의 상여가 산 밑까지 밀고 간 들길같이  그보다 더 오래 전, 죽은 지 사흘 된 숙부의 종아리가 장맛비처럼 아직 물렁물렁할 때  누구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거리 距離  이동식 화장실에서 이대흠  사각의 공간에 구더기들은  활자처럼 꼬물거린다  화장실은  작고 촘촘한 글씨로 가득 찬  불경 같다  살아 꿈틀대는 말씀들을  나는 본다.  7.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 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은 자신만의 모습과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간에 자신만의 존재방식이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시는 시인이 창조해낸 새로운 언어적 피조물이다. 이는 1930년대 박용철로부터 현대에 이르고 있는 유기체시론의 맥락에서 시를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에이브람스가 말한 문학의 효용론과 존재론의 범주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교훈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격동기나 시대적 전형기와 같은 불안정한 상황 속의 시들은 교훈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종교시와 연시(연애시), 행사시 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런 시들은 시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시가 사용되기 때문에 문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비본질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시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시간적 흐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문학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론적인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존재론적인 시란 어떤 관념이나 생각도 배제하고 오직 시 자체의 존재성만 추구한 김춘수류의 무의미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의미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문학 외적인 목적성에 치우친 시는 순수한 의미의 존재론적인 시라고 말할 수 없다. 문학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다. 물론 문학 속에도 종교나 철학이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문학은 문학성이 주가 되어야 한다. 문학의 본령은 아름다움과 새로움에 있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아름다움은 형태적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언어적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시 속에 창조된 새로운 언어적 공간을 통해서 시적인 전율을 느낀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낯선 아름다움이다. 현대시의 낯선 아름다움은 감각으로 느끼기 보다는 직관으로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그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유추해내는 직관의 힘이야말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  시학 매클리시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비등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  존재해야 한다  (부분인용)    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8.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자연은 생명의 터전이고 원천이다. 모든 것은 자연 속에서 순환하고 생멸한다. 그러면서 자연 속에 있는 것들은 서로 닮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자연의 여러 사물들이 둥근 것이나, 부서져서 다른 것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나, 아름답고 싶어 하는 것이나,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몸에도 둥근 것이 있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처럼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닮아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자연을 등장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과의 친연성(親緣性)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시 역시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시는 비유적 언어를 생명으로 하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비유의 원천인 자연을 배제하고는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근원이며 시적 소재의 보고이다. 시를 쓰는 초보자들이 종종 남의 시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 속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말의 광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면 인간이 보인다. 이와 반대로 인간을 보면 자연이 보인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보든, 그 반대이든 그것은 시인의 몫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표절이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창조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울음이 타는 가을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시인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아내는 자이다. 그것은 시인이 창조적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보인다. 이런 것을 어떤 시인은 발견의 눈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관의 눈이나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각자 다 다르지만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은 대상을 새롭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 숨어있는 것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해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창조의 눈과 언어가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대상을 새롭게 보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한 개체의 내면뿐만 아니라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순간의 언어로 일체화시켜서 표현해내는 자이다. 이렇듯 시를 쓰는 행위는 사진 찍기와는 달라서 시를 쓰는 과정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이나 생각까지도 구체적인 이미지나 묘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순간적인 발견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시상(詩想)은 기독교에서 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에피파니(epiphany), 즉 현현’(顯現)개념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에피파니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의 옷을 벗고 사물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견의 시학에 맥락이 닿아있다.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시학적 의미의 에피파니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시인이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시의 신이 열린 시인의 마음 문을 통해서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렇듯 시는 이미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이 시인의 언어적 에피파니를 통해서 구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나면서 못 만나는 유안진  꽃은 소리 없이 피고  바람은 모습 없이 불어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소리 안에 갇힐 수 없는 음성이  소리로 안 들린다고  모습 안에 갇힐 수 없는 모습이  모습으로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한다  별이기도 눈물이기도 한잔의 생수이기도 하는 온갖 모습인 줄 몰라,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이기도 아기 옹아리 소리이기도 하는 온갖 소리인 줄 몰  라,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데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내일과 내년이  있는 줄은 알면서  모습은 귀로 들으려 하고  소리는 눈으로 만나려다가  늘 어긋나고 만다  아무리 마주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신神을 닮았어도 모품(模品)은 이렇다  지평선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달북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10.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흔히 문체라고 하면 소설의 문체를 떠올리지만 시에서도 엄연히 문체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7?5조의 운율을 보여주는 김소월의 시나, 평북 방언을 중심으로 정감어린 산문시적 회고체의 시형을 보여주는 백석의 시는 물론, 서정적 울림이 큰 반복적인 운율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정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문태준이나, 주로 개인적인 의식 세계를 분열적이고 도착적인 어법으로 유니크하게 보여주는 황병승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은 그들 나름의 문체가 있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의 문체들을 유형화시켜서 종류별로 나누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문체는 언어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의 문체는 산문의 문체와는 달리 시 문맥의 일차적인 의미에 기여하기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의미나 상상력을 다층적이고 창조적으로 도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문체는 시인의 어법이나 운율만으로는 그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시의 문체는 상상력과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것이 서정적 공간인지, 아니면 분열적이거나 해체적 공간인지, 환상적 공간인지, 현실적 공간인지는 시인의 문체와 상상력의 유기적 결합의 양상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문체는 시인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정한 윤곽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의 문체는 한 가지로 고정되어서는 안된다.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스타일(문체)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지만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떤 시인의 스타일이 관습화되면 더 이상 그것은 톡특한 스타일이 될 수 없다는 경계의 말로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문체를 고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해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우리가 유의할 점은 개성과 보편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시적 개성을 강조하다보면 보편성이 약해져서 자칫 난해 시에 빠질 우려가 있고, 반대로 보편성에 치우치다보면 통속성과 대중성에 영합하는 몰개성적인 시가 되기 쉽다. 시적 언어는 산문적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산문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별처럼 빛난다. 그곳은 시인 각자의 상상적 공간이다. 산문이 낮의 공간에 적합한 것이라면 시는 밤의 공간에 더 어울린다. 밤은 그 속에 무궁무진한 빛을 숨기고 있다. 밤하늘에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주위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묽다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사산(死産)된 두 마음 황병승  땅속에 거꾸로 처박힌 광대처럼  열 두 살,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 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다  시간은 좀도둑처럼 죽어가고  딸꾹 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  서른 여섯 살의 악마가 다가와 열두 살의 나를 지목할 때까지  (딸꾹거리며)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딸꾹, 딸꾹거리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 땅속의 자식아!  흙 속에 처박힌 열두 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설명시, 논증시 유형의 시쓰기 (문광영문창6)[ 스크랩 ]     사람에게 영혼(靈魂)과 육체(肉體)가 있듯이 시(詩)의 구조(構造)에도 형식상의 구조와 내용상의 구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커피를 좋아하시지요?   저는 아침 커피로 시작하여 온종일 커피를 마시며 삽니다. 맑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느끼며, 바이올린 곡이나 첼로 한 곡 곁들여 틀어 놓고 커피 한두 모금 마시며 원고를 쓰거나 책을 봅니다.   커피를 마시려면 먼저 커피 잔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커피잔의 모양, 색깔에 아주 민감합니다. 집에서 마실 때에는 연한 챠콜색의 울퉁불퉁한 머그잔을 씁니다. 깡통 찌그러진 것처럼 아주 제멋대로 생긴 놈인데, 커피를 마시면서 자유분망한 상상에 빠지도록 해줍니다. 문협 사무실에서는 프러시안 블루의 큰 커피잔을 사용합니다. 바다를 연상하며 커피를 마신답니다. 여기 커피 잔의 선택은 시의 형식에 해당합니다.  다음으로는  커피의 내용물을  조제하는 일입니다. ‘다비도프’라는 인스탄트 커피를 마실 것인가, 케냐AA 원두커피를 내려 마실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저는 프림이나 설탕을 넣어 마시지 않습니다. 우유를 섞어 넣은 라테커피를 선호하는 편이지요. 바로 시의 내용상의 구조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커피 맛을 내는 데는 원두의 분쇄도나 우유의 온도, 비율 등이 중요하듯, 좋은 시(詩)가 되기 위해서는 시(詩)의 내용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쓸 때에 어떤 방식, 어떤 형태의 시들을 쓰시나요? 시 창작을 하려면 일정 방식의 틀을 놓고 이를 변형시켜 나가고 발전, 비약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초보자들에게는 기본적인 형태의 시 쓰기를 알아두고, 이를 응용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동백이 활짝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참, 순간의 착상, 상상력이 대단하지요?  시는 순간의 예술이란 걸 보여줍니다. 나아가 시가 꼭 길어야 될 필   요는 없는 것이지요. 짧아도 장치만  잘하면 얼마든지 형상화에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반부(4행)는 묘   사시로서 외면풍경의 ‘보여주기’로 이루어지지만, 후반부(3행)는 화자 내면풍경의  ‘진술’로 서로 다른 방식이   겹쳐서 이루어진 시입니다.      전 시간에는 경험시에 이어 묘사시, 사물시, 이미지시 중심의 시 쓰기를 공부했지요. 경험시는 시인이나 화자   가 시적 언술에 참여하여 특수한 인간경험의 극적인 세계와 그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묘사시는 시인이   나 화자의 관념보다 대상의 구체성에 비중을 두는 유형이었습니다.    오늘의 강의는 시의 내용과 형식 가운데 형식상의 그릇, 시의 내용을 어떤 형태의 그릇에 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지난 시간에 이어 설명시와 논증시라는 유형을 놓고 창작 논의를 펼쳐가려고 합니다.                                                   설명시, 논증시 유형의 시 쓰기                                                                       1. 설명시 유형의 시 구성          1) ‘설명문’과 ‘설명시’ 의 차이   ○ ‘설명문’의 개념과 ‘설명시’ 형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혼돈해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설명문은 일반적 문장 형식으로, 정보(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이해력을 요구하는 글이라 한다면, 설명시는 내용상에서는 시적 상상이 들어가고 그 표현의 문장 형식, 곧 기술상의, 언술(utterance)상의 문맥적 형태를 말한다.   ○ ‘설명문’은 어떤 사건에 대해 발생 원인과 경과를, 어떤 기계의 구조와 원리, 성능이나 취급 방법 따위를, 사전적 개념이나 해설을, 자세히 해명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설명법(exposition)이 사물에 관해서 “무엇이냐”, “어떤 뜻이냐” “어떤 성질이냐”에 대해 그 답으로, 알기 쉽게 풀이하는 문장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설명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활용되는 기술 방식에는 정의법, 비교․대조법, 분류법, 분석법, 인용과 예시법이 있다.   설명의 기술방법에서 설명시와 연관되는 것이 '정의'의 형식이다. 정의는 'A(주어)는 B(서술어)이다'가 아닌가. 바로  피정의항과 정의항으로 이루어지는 바, 여기에서  피정의항이 주어가 되고, 정의항은 서술어가 되는 셈이다.                 2) 주어 + 서술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설명시의 예   ○ 맥로그린(MacLauglin)이, 말하듯이 말하는 이가 선택한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시적 관념을 서술하고자 할 때 이 방식을 쓴다. 이때 시적 설명은 ‘주어 +서술어’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 소위 소재이며, 서술어에 해당하는 것이 그 소재에 대한 시인의 관념이다.   ○ 이때 소재에는 특수한 것으로 ‘장소’, ‘사건’, ‘대상’, ‘인물’ 혹은 자신의 특성을 들 수 있고, 일반적인 것으로는 ‘관념’이나 ‘진리’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아래의 시는 ‘고드름’이란 소재가 채택된 시이다.                           고드름                                                                      박정원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의 아끼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고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소리 *   결국엔 물이었다 한잔 먹지 않겠는가                                  전문(《시문학》2006년 4월호)       ○ 먼저, 시 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자. 1연은     고드름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 고드름은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 고드름은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 고드름은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 고드름은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         와 같이, 고드름에 대한 시인의 시적 관념, 곧 의미부여된 화자 자신의 내면적 상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고드름’이 갖고 있는 속성, 성질, 모양 등에 몰입하여 ‘오기’, ‘휘초리’, ‘송곳’, ‘회한’, ‘절규’로 치환시켜 나간다. 그러다가 2,3,4연부터는 현실 상황을 제시하는 부가적 묘사와 진술로서, 고드름의 지닌 물의 속성, 허무의 결구 처리를 보여준다.   ○ 그러니까, 박정원의 은 절간에 거꾸로 매달린 고드름에 대해 남다른 사유를 시로 형상화한 것, ‘고드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보인다. 고드름에 대한 상상력, 고드름과 같은 하찮은 사물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존재 의미, 삶과의 비유 등 소재에 대한 다양한 시적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 어찌 보면 시는 삶의 세계에 대한 남다른 해석이다. 이때 시의 힘은 의미부여의 상상력에서 온다. 곧 ‘고드름’이라는 외면풍경의 소재에 대해 ‘시안’에 의해 반응된 작가의 내면풍경이 얼마나 새롭고, 의미가 깊고, 통찰을 보여주는가에 달려 있다.   ○ 독자는 시인이 제시한 작품의 ‘상상력의 등가성’이란 자장(磁場) 속에서 의미를 탐색해 간다. 물론 이때 시인의 연이나 행간의 설정은 중요하며, 독자는 유능한 독자, 슈퍼 리더가 되어 경험을 되살려 의미를 확장해나가도록 장치해야 한다. 곧 위에서 보듯, 시인은 고드름에 대한 시적 설명에서 다 말하지 않는다. 행간의 빈자리를 독자로 하여금 읽어나가면서 ‘빈자리 메꾸기’를, 곧 의미 있게 채워가도록 배려한다. 그것이 노련미이다.   ○ 위에서 독자들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의 고드름,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드름,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로서의 고드름,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의 고드름,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의 고드름,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에서 삶의 아우라를 읽게 된다. 그러나 결국 고드름은 물의 변신일 수 밖에 없다. 시인이 적은 것처럼, 절 마당 노스님이 아끼는 동백꽃잎처럼 ‘투욱’ 지고 나면 고드름은 낙숫물에 불과한 것이고, 그 거리라는 시․ 공간의 차이도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 밖에 안 되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 대개 설명시에서는 소재, 곧 사물에 대한 정신의 해석적 의미로 깨달음이나 통찰, 새로운 의미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놓는 것들이 많다. ‘고드름’에서의 절규는 이승의 속세에 사는 우리들의 평상심이다. 타자를 향한 회초리나 송곳 같은 마음은 결국 복수의 화살로 자신에게 꽂히는 법, 문제는 우리의 삶이란 무명(無明)의 혼돈 속에서 내 탓임을 알고 물이 지닌 섭리대로 돌아가는 유연성이다. 갈증을 아는 고드름의 원천인 물, 그 낫숫물 소리가 떨어지는 수직적 삶의 깨달음이 감동을 주지 않는가.       3) 설명시 유형의 시 쓰기 방법                  (이승훈 , 시작법, 문학과 비평사, PP.70-74참조)       (1) 특수한 소재( 장소, 사건, 사물)를 시적 설명 : 유치환의   ○ 시적 언술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 시인이나 시 속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직접 독자에게 알려주는 방법이다. 대체로 그것은 시인이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설명하거나 논증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유형의 시는 설명시와 논증시의 범주에 든다.   ○ 설명시는 시인이나 화자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논증시의 경우에 그러한 서술의 논리적 타당성이 드러난다. 설명시는 화자의 주장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설명시는 주어(S)+서술어(P.V)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때 주어에 해당되는 것이 소재이며, 서술어에 해당하는 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관념이다. 특수한 대상을 소재로 한 설명시 유치환의 을 살펴보자.                     깃발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깃발                                    깃발은   - 소리없는 아우성 (P.V1)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깃발                             깃발은  - 노스탈쟈의 손수건 (P.V2)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깃발                        깃발은   - 순정 ( P.V3)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깃발                             깃발은   - 애수 (P.V3)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깃발                           깃발은  -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P.V4)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다 아시다시피 이 시의 소재는 “깃발”이다. 언어적 형식으로는 “깃발”이 주어에 해당된다. 시인은 이 “깃발”을 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시의 언어적 형식이 계속 ‘주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서술내용이 일상적인 차원을 벗어나고 있다.   ○ 위의 시구조를 보면 “주어(S)는 서술어(p.v)” 형식이 반복되는 구성 양식으로 드러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무엇이고, 무엇이며, 무엇이다’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상을 설명을 하는 방식은 특이하다. ‘깃발’이라는 대상을 일상적이거나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 필자가 1학년 학생들에게 시를 써오라고 숙제를 낸 적이 있다. 물론 사전에 설명시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 여학생은 완벽한 설명시 형태의 시를 써왔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개                                         고유미   긴 밤 그 적막한 터널 속을 걸어와 늘어선 회색빛 빌딩 사이를 휘휘 도는 소리 없는 몸짓입니다.     하늘 위를 촉촉히 적셔놓고 창공 속에 피어 오른 꿈에 보았던 그 소녀의 미소입니다.     이내 깨어나지 않은 내 창에 내려앉은 해맑은 눈빛입니다.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가슴에 단 하얀 설레임입니다.       ○ 김소월의 , 이상의 , 는 모두 설명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어+서술어 형식은 설명 방식의 하나인 ‘정의’(definition)에 해당한다. 곧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와 같은 국어사전식의 정의에서, 피정의항은 '인간', 정의항은 '이성적 동물'로 나눠지는 바, 이 때 피정의항이 주어에 해당하고 정의항이 술어에 해당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비유체계에서 ‘A는 B다’ 식으로 시인들이 매우 즐겨 쓰는 방식이어서 설명시적 언술은 확장과 응용, 변이의 형태로 다양하게 도출된다.   ○ 다음의 짧은 시도 설명시 형태가 확장, 발동된 것으로 봐야 한다.           성선설                                                     함민복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2) 일반적 관념이나 진리의 시적 설명 : 김현승의     ○ 일반적인 관념이나 진리를 소재로 하는 시를 보기로 하자.       견고한 고독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히 마른 흰 얼굴                                                                           견고한 고독은   - 흰 얼굴 (P.V1)     그늘에 빗지지 않고 어느 햇빛에도 기대지 않는 또 하나의 손발                                                                견고한 고독은 -단하나의 손발 (P.V2)     거대한 신들의 정의 앞엔 이 가는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제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견고한  고독은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피와 살                                                                                             견고한 고독은  - 피와 살 (P.V3)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도 더 휘지 못한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견고한 고독은 - 굳은 열매 (P.V4)       쌉슬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제 생명에 마지막 남은 맛                                      견고한 고독 은-제 생명에 마지막 남은 맛 (P.V5)                                      ○ 소재는 ‘견고한 고독’이 관념이다. 다시 말하면 고독의 견고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주어는 ‘견고한 고독’이며 주어에 대한 서술은 3연을 빼고 각 연을 형성한다. 서술어(p.v)를 형성하는 각 연의 중심낱말은 1연: 흰 얼굴. 2연: 단 하나의 손발. 4연: 피와 살. 5연: 굳은 열매. 6연 : 제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등이다.   ○ 주어 +서술어 형식의 진술은 곧 'A는 B다‘의 형식이기에 하나의 비유체계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김동명의 “내 마음은 호수요”처럼, 원관념이 보조관념으로 ’의미론적 이동‘(sementic movement)을 하는 셈이다.    ○ 주어 +서술어의 결합방식에서 문득 피천득의 을 들 수 있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이 하나의 수필이란 ‘정의놀이’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3) 주어 + 서술어 시 형식에서의 구상과 추상의 문제     ○ 시의 제목(주어, 소재)이 추상일 때 본분은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내용이 추상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가? 한 마디로 여기에서는 상반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 또 본분에서도 추상 일변도라든가, 구상 일변도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곧 시(詩)의 내용상의 구조를 이루는 요소로는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을 들 수 있는데, 이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을 시에서 어떻게 배합하여 표현하느냐에 따라 시의 내용 구조는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① 구상(具象) + 추상(抽象)           ☞ 산은 꿈이다. ② 추상(抽象) + 구상(具象)           ☞ 시(詩)는 꽃이다. ③ 구상(具象) + 구상(具象)           ☞ 물은 물이다. ④ 추상(抽象) + 추상(抽象)           ☞ 마음은 무(無)다.     ○ 이러한 시의 내용상의 구조들은 일반적으로 시의 내용 전체에 걸쳐 사용되지만, 부분적으로는 시의 제목과 내용, 한 행, 한 연의 내부에서도 서로가 긴밀하게 작용하며 나타난다.   대개 환기력을 위하여 시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①과 ②의 내용 구조처럼 추상은 구상과 어울리고, 구상은 추상과 어울리게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 그러니까 추상어 ③ 구상(具象) + 구상(具象) 이나, ④ 추상(抽象) + 추상(抽象) 의 형태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에서 다룬 시들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고드름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구상어 + 추상어)      깃발은 소리없는 아우성           (구상어 + 추상어)       견고한 고독은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히 마른 흰 얼굴         (추상어 + 구상어)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추상어 + 구상어)         2. 논증시 유형의 시 구성       1) ‘논증’과 ‘논증시’ 의 차이   ○ ‘논증’(論證, argument)은 자신의 관념이나 주장을 설득시키고 동조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명제로 설정되어야 한다. 명제(命題, proposition) 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나 판단을 서술한 문장을 뜻한다. 주어진 명제는 하나의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이 공감을 얻으려면 충분한 뒷받침이 필요하게 된다. ○ 논증시에서의 화자는 전지적 시점이거나 보고자로서의 관찰자 시점이 된다.   ○ 명제의 유형으로는 사실명제, 가치명제, 당위명제가 있다. 사실명제는 ‘한글은 훌륭한 문자이다’처럼 어떤 사실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것, 가치명제는 ‘진달래는 아름답다’처럼 제도, 사물, 사상에 대해 판단한 것, 당위명제는 ‘세월호 법안은 통과되어야 한다.’처럼 정책이나 어떤 시사적 대상에 대한 당위성을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명제를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크게 연역적 방법, 귀납적 방법, 유추적 방법이 있다.   ○ 따라서 논증은 명제로써 자신의 주장(사상, 판단)이나 관념을 드러내는 서술로, 그 서술상의 인과율과 같은 논리적 뒷받침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 논증이란 그런 점에서 설명과는 다른 서술양식이다. 설명이 단순히 대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논증시에서는 서술방법이 어느 정도 논리적 형식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 그러니까 논증시는 어떤 사실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인과율에 논리를 따른다. 그러니까 시에서는 어디까지나 시적인과율로 나타난다. 시적 인과율이란 일상적으로 수용되는 자연법칙을 낯설게 만들면서 시적 공간을 빚는다. 형식의 측면에서는 원인→결과 혹은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 여기에서 시적 인과율 혹은 시적 논리란, 비록 언어형식 또는 언어구조라는 면에서는 일상적 논리의 틀을 따르지만 그 내용은 상상력의 세계로 드러나는 그러한 논리를 말한다.     2) 사실명제의 논증시 : 의 경우   ○ 시적 인과율에 따라 구성된 논증시로 서정주의 를 보자.   연               원인                           결과   1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2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4         간 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       국화가 피었다           에겐 잠이 오지 않았다     ○ 이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실명제이다. 원인이 되는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고, 천둥이 쳤고,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에게는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을에 국화가 피었다는 명제이다. 국화가 피었다는 상상적 사실에 대한 시인의 판단에 시 속에서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 시적 인과율 혹은 시적 논리란, 비록 언어형식 또는 언어구조라는 면에서는 일상적 논리의 틀을 따르지만 그 내용은 상상력의 세계로 드러나는 논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가치명제의 논증시 : 의 경우   ○ 가치명제를 노래하면서 유추에 의해 이루어지는 논증시로 김춘수의 을 들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명명이전의 세계를 노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명명이후의 세계를 노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1,2연을 미루어 판단하는 유추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꽃 : 이름 = 나 : 이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나 : 이름 = 우리 : 이름       ○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물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가치 판단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국화가 핀다는 사실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었음에 비해, 이 시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가치판단이 가치명제로 노래된다. 이 시의 논리에 따르면 ‘이름 부르는 것’, 곧 명명행위와 관계된다. 이 시가 암시하는 가치판단은 ‘언어에 대해 명명될 때 사물은 존재한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꽃’은 이 시에서 사물의 세계를 표상한다. 연애시로도 읽히는 이 시는 사물 존재라는 것의 의미를 찾는 일종의 철학시로 보아야 깊은 해석을 내릴 수 있다.   ○ 이렇듯 논증시의 내용은 시인이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명제로 드러나는데, 이때 명제는 일상적 합리적 차원을 벗어난 상상의 내용으로 일상적으로 수용하는 자연법칙을 낯설게 만들어 내는 시적 의미를 지닌다.       3) 조건절(가정법)과 종속절의 논리에 의한 시   ○ 초등교과서의 시 이나 박용재의 도 하나의 조건절(가정법)과 종속절에 의한 논증시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박용재   사랑하지 않으면 산도 계곡도 물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싱그런 가슴도 팽팽한 엉덩이도 애인들의 이빨도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네가 아끼던 자동응답기도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죽음의 예감도 보이지 않는다       3박 4일간 시골에 간다던 사람 그렇게 지구의 하오를 산책하러 갔던 사람     그대의 자동응답기는 앵무새처럼 3박 4일만을 되풀이하고 있구나.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목소리도 쓴 웃음도 지리산의 몸도 눈물도 너의 우연한 죽음도 보이지 않는다.  
8    시(詩) 창작에 도움되는 창작기법 댓글:  조회:1631  추천:1  2017-08-09
 시(詩) 창작에 도움되는 창작기법   1. 식물이나 동물들에 늘 관심을 갖고 메모, 관찰하는 습관을 지녀라.   (꽃, 나무, 풀, 조류, 곤충류, 어패류 등....多識於鳥獸草木之名)   모란꽃 / 박강남 봄바람 서둘러 지나간 / 간이역 같은 어머니의 텃밭에 / 장다리꽃 파꽃 쑥갓이 무성터니 귓불 빨갛던 꽃봉오리 / 오월 미풍에 환하게 웃었다.// 붉디붉게 목숨 불사룬 / 신라 여왕 우아한 그 웃음에 / 어머니댁은 궁정되고 구름 떠가는 드맑은 하늘 따라 / 아욱도 제 키를 쭈-욱 뽑는다.     2. 자연과 늘 친화하고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접근하라.   (안개, 봄비, 꽃샘, 폭풍, 빗소리, 구름, 동서남북풍, 강바람, 산바람, 신바람, 솔바람 등)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 / 눈 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고 / 엿듣고 있다. 푹 삭힌 홍어 맛에 콧등이 쏴 하듯이 추위 속 가지마다 봄비에 눈물 맺혀 꽃망울 곤지 찍고서 필듯 말듯 웃었다. - 이흥우,「꽃샘 추위에도 봄은 웃는다」   3. 시어의 선택에 늘 골몰하라, 선택을 엄격히 하여 참신성을 고조시켜라.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시어사전이나 우리 고유어 사전을 비치해 놓고 창작시에는 순수한 우리말을 많이 활용하라(제목은 범위를 좁혀라(구체화): 꽃→유채꽃, 여우→불여우) 시인은 언어의 조련사, 함축적 시어들을 많이 활용해야 시다운 시다. (나무 전지→미적 가치)   * 시의 3요소 : 음악적 요소(운율), 회화적 요소(심상,이미지),의미적 요소(주제,함축적 의미)   덥고 긴 날 / 조운 북방한계선에서/ 碧松 찌는 듯 무더운 날이 / 길기도 무던 길다 까마귀 노을타고 북쪽으로 넘어가고 고냥 앉은 채로 / 으긋이 배겨 보자 흰구름 바람결에 자유로이 흘러가니 끝내는 제가 못 견디어 / 그만 지고 마누나. 제발 좀 놓아들 다오 지긋한 이념에서   4. 때때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大人 赤子之心, 사람심기, 입치, 귀치)   5. 늘 고독을 벗 삼아라(고독은 진정한 자아발견의 찬스이며, 문예 창작 최고의 창작 환경이다.)   김형석 / 고독이라는 병 ---정신인은 그와는 반대다.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 되는 것도, 훌륭한 사상이 쳬계를 가지는 것도, 위대 한 학문이 주어지는 것도 모두가 이러한 정신인의 고독한 창조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한 사람들을 교도소에 가둔다는 일은, 자연인에게는 무서운 처벌이 되나 정신인에게는 오히려 훌륭한 자기 완성의 도장이 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발상의 전환(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위해 늘 무엇이든 뒤집어서 생각하라.   넌센스, 알레고리(우의,풍유,풍자)의 미학, 패러독스(역설:소리 없는 아우성 등)에 접근하는 길이다. - 17 - 현대시는 낭송을 하거나 읽기 위한 시가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상상하고 공감을 느끼도록 이끈다. 때로는 뜻밖의 아이디어 진술, 엉뚱한 제목, 엉뚱한 발상, 시상 등은 시의 참신성을 더해 줄 것이다. 내용에 따른 상상력은 독자와 평론가의 몫이다.   바람만 가득히 찬 공은 / 다만 / 모나기를 거부한 존재 그렇기에 속없이 / 이리 둥글 저리 둥글/떠돌이의 넋으로 구르다가 / 발길에 차이는 존재 하지만, / 네 넋에 단 하나뿐인 / 바람기마저 없다면 / 네 생명은 끝이다. -진의하, 전문   7. 모든 사물을 생명체로 보고 감각적 교감을 나눠라. (만물에 눈,코,귀,입 다 있다. 나무가 걸어다닌다. 돌에서 피를 뽑아내니 신음 소리가 진동한다 등) 개성적 안목의 관찰로 특징을 터득하는 습관을 갖는다.   가을 이미지 / 이우종 잘 익은 가을볕이 / 창을 톡톡 두드리네 못 죽을 그리움에 / 갈잎이 굴러가네 때 묻은 기억들이 / 악수를 청해 오고 빈 방을 서성대다 / 절반쯤 문을 열자 하늘도 / 구름 사이로 / 엉덩이를 들썩이네. 남산이 / 발꿈치 들고 / 알몸으로 안겨 오네.   8. 사물에 이름표를 붙여줘라(새로운 의미 부여로 참신한 글이 되도록 노력하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9.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어떤 사물을 대할 때, 어떤 생각을 할 때, 현실적․사회적 문제의식→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평범 속에 진실이 발견되는 진솔한 글   도루묵 / 변인숙 은어라 불러주면 비늘조차 황홀하다 도루묵 불러내면 그 맛조차 텁텁하고 얄궂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사가.   10. 농축된 체험을 돌려써라(진실성과도 연관, 자기만 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보면 독자들의 입맛을 돋울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진실성을 제일로 꼽는다. 진실한 글은 자기만의 체험에서 우러나왔기에 억지로 꾸밈이 없다. 문학기행에 의한 체험은 작문의 좋은 창의력을 제공해 준다.)   공원 벤치 풍경 / 이종철 자작나무 그늘 아래 추억이 머물던 곳 한 여름 매미 소리 그늘 속에 듣던 노인 찬바람 일렁이니 가을도 떠날 채비 백발도 낙엽지니 남녘 딸네 가시었나 낙엽은 가기 싫은지 벤치 위를 뒹군다. 가을비 심술궂게도 정든 노심 쓸어간다.   11. 늘 떠오르는 시상을 메모해 두는 습관을 지녀라.(베갯머리에도 필기도구 준비)   사랑(思郞)이 거즛말이 님 날 사랑 거즛말이 꿈에 와 뵈단 말이 긔 더욱 거즛말이 날 갓치 잠 아니 오면 어늬 꿈에 뵈리오. - 김상용(1561-1637)   - 18 -   12. 설명하려 들지 말고 사물의 특징으로 간접적으로 돌려 표현하라.(메타포-은유와 상징) 돌려쓰기(비유)의 기법을 시도해야 품격도 높아지고 문학성도 가미된다. 음식도 맛이 있어야 하는데, 적절한 수사법 활용은 한층 글의 맛을 더해 준다. (거짓말로 참말하기-유안진) * ~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최남선), * 청산리(靑山裡) 벽계수(碧溪水)야~ (황진이)   13. 형상화, 구상화, 구체화시켜라 --추상적 관념적 대상을, 즉 안 보이는 대상을 보이는 것처럼 구 상화․형상화시켜 표현하라 (방긋 웃는 아침 소망, 나뭇가지에 걸린 보름달 등)추상적 관념을 구체화 (형상화)시켜야 이미지가 형성된다.------(詩中有畵, 畵中有詩) * 나뭇가지가 흔들거린다. → 나뭇가지가 하늘을 빗질하고 있다. * 추억이 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벤취 위엔 소녀들이 남기고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김광균)   14.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글을 쓰라.   글은 누구나 공감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감수성의 동일화(원형상징)를 이끌어 내도록 써야 한다   분수도 모르고 하늘로 치솟는 물줄기 아래로 흐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음을 뒤늦게 / 깨달아 얻는 / 곤두박질의 저 미학(美學). - 조흥원, 「분수」전문   위의 글은 ‘분수’라는 제재의 발음이 지니고 있는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재치 있게‘날뛰는 군상들’을 꼬집는 글이다. 이러한 글들은 대개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온 깨달음에 의해 창작된 것이기에 경구적 의미나 금언 ‧ 격언 등의 공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좋은 기법이다   15. 시는 고심 끝에 고쳐서 내보내고 명시를 많이 읽어보라.   그리움/ 안영희 시장 길 / 접어들면 / 우체통 하나 있지 // 괜스레 / 울먹이는 / 마음 하나 집어넣고 // 뒤돌아 / 뒤돌아서면 / 따라오는 그리움   인생사 / 대우 문틈에 우는 바람 / 달래고 잠재운 건 // 들보나 기둥 아닌 / 문풍지 한 장인 걸 // 인생사 / 꿈의 무게도 / 이런 것이 아니던가.   16. 자신의 창작물을 늘 가까이 읽어 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을 두어라.(스승이나 벗, 부부 등)    
7    【시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몇 가지 방법】 / 고재종 댓글:  조회:1518  추천:0  2017-06-28
【시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몇 가지 방법】  / 고재종 범속한 사물과 일상 속에서 생의 의미를 들여다보고자 갈망하는 이들이야말로 시인이다. 그들은 이 겨울 산야에서도상고대며 설화며 인동초며 동백꽃 등 갖가지 꽃들이 風光 속에서 눈부시게 명멸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만히 시를기원한다. 세상의 외진 한 귀퉁이를 여리게나마 밝히는 등불 같은 시도 기원한다. 그것들은 시인의 삶의 절절한 체험속에서만 탄생한다. 그러나 아무리 절절한 삶의 체험이라도 그것이 상상력을 통한 시적 체험으로 올라서지 않는 한우리는 그러한 시들에서 삶의 의미와 꿈은커녕 일상의 지루한 설명만 듣게 되는 것이다.  우선 다음 상상력의 기본을 잘 구사한 시 두 편을 보자.  (0) 재로 지어진 옷 - 나희덕  흰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제 마음 몇 배의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흰 재로 지어진 옷 한 벌을 남몰래 가진 사람은 비를 건너가면서도 마른 발자국을 남긴다.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건너가는 나비의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사실 얼마나 격렬한 삶의 욕망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퉁겨내면서 비를 맞으며 비를 맞지 않으며 가는 나비! 그 나비는 제 마음 몇 배의 돌을굴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사람과 같다.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무거운 슬픔을 물리치는 힘도 고요히 간직한사람이다. 한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인 것처럼 그 사람도 이미 흰 재로 지어진옷 한 벌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결국 재 혹은 흰 재인데, 이건 삶의 허무나 혹은어떤 큰 지혜를 가르키는 바, 그런 걸 소유한 사람은 역시 남보다 몇 배의 무거운 돌멩이를 굴리면서도 나비처럼 고요하고 가볍게 한 세상을 건널 수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빗속의 나비날개와 흰 재와 그것을 무욕의 사람과 연결시키는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0)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도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이 시는 강가에서 북을 치며 판소리가락을 내뽑는 사람의 모습을 일단 표현한 것인데, 그 소리꾼은 지리산으로, 북은중천의 보름달로, 터져 나오는 노래는 섬진강 긴 자락으로, 그 노래의 한은 시뻘건 저녁놀로, 북채는 폭발하는 매화향기로, 그리고 선혈의 난타는 뚝뚝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로 상상을 한 시로 가히 우주적이다. 상상력의 전범을 보여준 시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 모두 상상력을 잘 구사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시적 전략을 생각해 보자.  1. 발견, 그 새로운 눈  발견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발명과 달리 고작해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수많은 삶의 편린들속에서 시가 될 수 있는 특정한 편린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뒤샹이란 화가가 있다. 그는 한 전시회에서 수세식 변기를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겨 놓고는 그것을 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숱한 입방아를 찧었다. 더러는 예술을 모독한 것이라고, 어찌 변기를 이 신성한 예술 전시의 공간으로 끌어들였느냐면서 당장 철거하라고 발광을 했다. 더러는 천재적인 예술가의 등장으로 예술의 영역이 한없이 확장될 것이라고 조심스런 전망을 내리기도 했다. 더러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은 결코 선을 긋듯이 명확한 것이 아니며, 다만 예술이란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면 모든 것이 예술임을 피력하기도 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음 시를 보자.  (1)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 - 황지우  길중은 밤늦게 돌아온 숙자  에게 핀잔을 주는데, 숙자는  하루종일 고생한 수고도 몰  라주는 남편이 야속해 화가  났다. 혜옥은 조카 창연이  은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명  섭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모는 명섭과  은미의 초라한 생활이 안쓰  러워…  어느 날 나는 친구집엘 놀러  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  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친  구 누나의 벌어진 가랑이를  보자 나는 자지가 꼴렸다. 그  래서 나는…  (2) 掌篇 - 김종삼  작년 1월 7일  나는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추운 새벽이었다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두 딸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부여에서 왔다고 한다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둘, 열아홉  함께 가며 주고받은 몇 마디였다  시체실 불이 켜져 있었다  관리실에서 성명들을 확인하였다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  시 (1)은 (하오 9시 45분)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이 시의 전반부는 신문의 TV프로 안내에있는 프로그램 소개문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공중변소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질 낙서이다. 시인은 이두 가지 글을 빌려와 나열해놓았을 뿐 시인 자신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종류의 글이어떤 시적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 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인은 앞의 글과 뒤의 글이 같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결국 저질연속극을 신랄하게 야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소재 자체는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견적 상상력이라는 엄격한 시선이 이 시를 관장하고 있고, 또한 그 밑에 시대상황 혹은 시대정신에 대한 주제의식이 치열하게깔려 있어 시로서 성공한 것이다. 사실 이 시는 어떤 의미에서 시의 폭력이다. 시인과 독자가 맺은 약속의 공간을 과감하게 일탈해버린 시라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면책은 오로지 시적 진실로서만 가능하다.  시 (2)는 매우 드라이한 시이다. 형 종문에 대한 병문안을 가다가 추운 새벽 골목길에서 만난 허술한 차림의 사람을 만나 병원까지 가다가 들은 이야기를 시적 주체의 그 어떠한 반응도 생략한 채 간략하게 기록했을 뿐인 시이다. 그러나 그 시적 내용은 천둥벼락이라도 쳐서 무너져 내릴 듯한 것이다. 꽃다운 나이에 공장에 다니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두 딸을 찾아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 내용의 참담함을 시적 주체가 아무리 긴절한 언어로 표현한다 해도 미치지 못할 것임을 시인은 잘알기에 오히려 간략한 사실기록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더구나 끝의 두 행, 곧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그 아비의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잘드러내고 있는데 어쩌면 이 시는 바로 위 두 행 때문에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시도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상의 체험을 시로 옮긴 것인데 바로 시의 끝 두 행의 예리한 발견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사실 발견적 상상력은 소재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의 문학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일정한前理解을 갖게 마련이다. 전이해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전이해란 일종의 선입견으로,동시대의 삶의 상황과, 시와 시인에 대한 기대 그리고 언어지식, 자신의 인생관 등등이 얼크러져 있는 인식의 배경이다. 한편의 시를 읽을 때 그 시에 대한 전이해가 중요한 해석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전이해가 그대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작품 속의 구체적 사실들의 의미를 전이해를 통하여 해명하지만, 그 부분들은 다시 이해의 틀을 수정한다. 즉, 전체의 의미는 부분들의 의미를 밝혀주지만 그 부분들의 의미는다시 전체의 의미를 변환시킨다. 그러므로 독자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이해에 아무런 변화를 요구할 수 없는 시는 새로움이 없는 시다.  2. 관찰, 갈망으로 들여다보기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정말 그럴까. 별이 떨어지는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그 바람을 언제라도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갑작스런 유성의 낙하 앞에서 간절하게 그 바람을 간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언제라도 기원할 수 있는 그 갈망, 그 열망이야말로 희망을 현실로 바꾸는 원동력이다. 그 갈망이있을 때에야 늘 범속한 사물과 일상 속에서도 생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관찰해낼 수 있는 것이다.  (4) 공터 - 최승호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쌓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  공터는 말이 없다 .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5) 둑 - 김춘수  봄이 와 범부채꽃이 핀다.  그 언저리 조금씩 그늘이 깔린다.  알리지 말라,  어떤 새가 귀가 없다.  바람은 눈치도 멀었다. 되돌아와서  한번 다시 흔들어 준다.  범부채꽃이 만든  (아무도 못 달래는)  돌아앉은 오목한 그늘 한 뼘.  점점점 땅을 우빈다.  시 (4)의 대상은 ‘공터’이다. 아무도 없는 여름 한낮 그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앉아 시인은 적요와 적멸이 아니라, 동그란 세모와도 같은 역설적인 텅 빈 충만을 지켜보고 있다. 고요의 지배 아래 공터에는“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풀씨들을 던져 꽃을 피우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또 거기에는 밝은 날 지나가는 도마뱀과 스쳐가는 새발자국과 빗방울과 그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이 있다. 그러나 공터는 이 존재하는 것의 고통스런 생로병사에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저 흙을 베풀고 “무심히 바라볼뿐”이다. 그리고 이 공터에는 어떤 흔적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그 흔적은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로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다. 고요 아닌 그 어떤 것도 공터를 지배하지 못하고 고요만이왕인 것이다.  이 시에 내재된 기본적인 상상력은 유추이다. 하나의 대상을 구축함으로써 넌지시 다른, 정작 말하고자하는 또 다른 대상을 환기시키는 상상력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 곧 공터를, 고요가 지배하는 공터를 통해 시인이 건네고자 하는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터라는 대상의 즉물적인 세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구체적인 단서는 ‘늙고 시듦’에서찾을 수 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인생의 四苦를 의미한다. 더욱이 이 시 전체 흐름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항대립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현저히 불교적인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텅 빈 충만’이라는 역설적인 세계인식이 도처에서 드러나며, 따라서 이 시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인간적 세계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인 것이다. 이 세상살이를 한 차원 높은 ‘빗방울’을 내리는 하늘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지독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세상에서 삶의 진정한 주인이란 오히려 적요와 적멸뿐이라는 것이다. 色卽是空이라는 인식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 삶의 흔적인 생의 자취란 잠깐 남기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의 발자국이자 조만간 작은 모래알로 지워져버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유추적 상상력보다 더욱 선명한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관찰로서의 상상력이다. 그 관찰은 보이지 않는 ‘고요’를 보게 할뿐만 아니라 ‘붐비는 바람, 잠드는 바람’도 보게 한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이란 관찰은 얼마나 정교하고 놀라운가.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 또렷이 형상화함으로써 시인은 이 세계의 놀라운 추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 (5)에서는 시적 주체가 사라진다. 시적 대상에 반응하는 시적 주체의 마음이나 감정이나 생각이 전혀없다. 그리고 오로지 이 시에는 눈, 관찰의 눈, 투명한 관찰의 눈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 관찰의 투명한 눈 속에 시적 주체가 들어가 있다. 우리의 모든 서정시에 공식처럼 얘기되는 주관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봄이 오는 날 시인은 둑에 피는 범부채꽃을 본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그 언저리에 깔리는 그늘이다. 이 그늘은 존재의 비애를 표상한다. 그러기에 이른 봄 속의 해질 무렵이고, 새도 귀가 없는 새이고, 바람도 눈치없는 바람이다. 이 바람이 흔드는 것은 범부채꽃이 아니라그늘이고, 땅을 후비는 그늘 한 뼘이다. 이 그늘 한 뼘이 세상이고 그의 내면이라면 결국 모든 존재는 비애의 존재이고 그 비애는 시시각각으로 점점점 더 우리를 후빈다.  다음 시에서 관찰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살펴보라.  작약꽃이 한창인 아파트 단지의  화단을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어린 후박나무를 지나 향나무를  지나 목단을 넘고 화단 가장자리의  쥐똥나무를 넘어 밖으로 가더니  다시 속으로 들어와  한창인 작약꽃을 빙글빙글 돌더니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혼자 훌쩍 날아올라 넘더니  비칠대는 온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날아넘은 허공을 뒤돌아본다  뒤돌아보며 몸을 부풀린다  ―(6)오규원의 「나비」  관찰만 예리하게 잘 하여도 시의 절반은 이룬 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관찰은 시적 묘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묘사가 없는 시가 있을 수 없듯이 관찰이 없는 묘사 또한 있을 수 없다. 위의 시는 순전히 관찰만으로 막막한 아파트 단지의 생명성과 존재의 비의를 환하게 드러내주는 수일한 시이다.  3. 연상, 사랑에 관한 단상  사랑은 시와 흡사하다. 사랑이 시와 흡사한 것은 양자가 모두 논리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이남자가 누구의 남자인가는 아랑곳없이 마음의 길이 언제나 그에게 향하고, 그에게 맞닿아 있듯, 남들이보기에는 하잘 것 없는 왜소한 존재임에도 바닥 모를 깊이로 몰두한 채 시의 길도 달리고 있는 것이다.콩깍지가 씌어도 몇 겹으로 덧씌웠는지 알 수 없을 만치 혼미한 가운데 연인들과 시는 앞 다투어 마음의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을 때, 이 주체할 수 없는, 나 아닌 또 다른 존재를 향한 갈망 또한 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시 역시 다른 존재를 향한 짙은 그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는 망망한 밤하늘의 한점 불빛이다. 반짝반짝 또 다른 살아 있는 정신에게 보내는 간절한 신호인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섬을 넘어서서 마침내 따수운 손길을 부여잡고자 하는 갈망에 찬 몸짓이 시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곤혹스러운,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예전엔 느껴 본 적도 없던 이 독특한 감정이야말로시와 다르지 않다. 무어라고 딱히 명명할 수 없는, 망명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느낌, 사랑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표현한 순간 그저 범속한 사랑이 되어버리는 절망감, 공동변소와도 같은 그런 통속적인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결코 자신만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표현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 사랑이라는 범속한 단어 그 근처에서 기미라도 알아차리게 만드는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을 전해줄 언어를 모색하는 지난한 과정, 이것이 시쓰기의 심부에닿아있는 작업인 것이다.  오직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완벽한 주관성, 자신의 세계를 방기할 정도로 타자에 몰두하는 전적인 沒我. 그 어떤 언어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절망과 모색 등이야말로 시와 사랑의 교차지점이다.이들 특성은 견고한 세계의 질서를 모두 자신의 열망 안으로 끌어들이며, 외적 대상 자체로부터 사유를시작하는 바탕을 이루며, 직접적인 제시 대신 함축적인 은폐를 기도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독특한갈망들을 연상은 너끈히 감당한다. 연상이야말로 의미를 은폐하고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유효한 방법이며 모든 세계를 한 곳으로 끌어 모으는 힘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모든 존재하는 대상들을 그 남자와 연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7) 산수유 - 정진규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이 바로 咫尺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거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떼들, 꿀벌떼들, 우리집 뜨락에 어제오늘 가득하다잔치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滿開의 산수 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랗게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 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往復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 그래, 무 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망을 갖게 되지 光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도 유효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까맣게 웅크려 있던 사랑아, 다시 노오랗 게 사랑을 採蜜하고 싶은 사람아, 그건 아직도 유효해!  꿀벌떼들이 찾아온다. 서울 한복판에 벌떼들이 뜨락의 만개한 산수유를 찾아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얼마나 정보가 정확하기에 아파트숲과 소음과 시멘트와 먼지 속을 뚫고 꿀벌들이 찾아왔을까. 그 꿀벌 떼들의 꽃숭어리 잔치에 시인도 하루종일 두근거리고 잉잉거리고 노랗게 취한다. 그걸 지켜보다가 시인은결국 사전을 뒤적인 끝에 ‘왕복’이라는 단어를 찾아낸다. 산수유와 벌떼들, 그 둘을 하나로 이어주는단어, 왕복! “그래, 왕복이다” 우리들의 사랑도 왕복인 것이다.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하는 것이다.그런 사랑을 하게 되면 자연히 사람도 특수 통신망인 광케이블을 갖게 되어서 네 속을 드나드는 것이다.특수 통신망 광케이블이라는, 시에는, 더구나 사랑시에는 너무나 비시적인 언어로 충분한 낯설게 하기를감행하면서 시를 고양시켜 나간다. 이 시의 절정은 ‘염장 미역’이란 비유다. 자신의 내면에 빼빼 마르고 까맣게 졸아든 채로 웅크려 있는 염장 미역 같은 사랑이 사랑의 물을 만나면 바가지 가득 부풀다가,마침내 바호밥나무처럼 무성하게 자라 어린 왕자의 별을 휘감게 되는 것이다. 산수유 꽃숭어리와 벌떼들로부터 연상해낸 사랑은 마지막 행에 이르러 ‘노오랗게 사랑을 채밀하고 싶은 사람아’라는 호소력 있는호명으로 모든 대상을 하나로 결합하며 시적 화자 자신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다분히 김수영을 연상시키는 “아직도 유효해!”의 ‘!’로 시를 끝맺고 있다. 더더욱 이 시가 감동적인 것인 시적 화자의 나이가60살 가까이 된, 이젠 사랑보다는 생을 관조해야될 나이에 이런 연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살아온 삶의 허망함처럼 “아직도 유효해!”라고 외치는 그 사랑도 필경 허무로 끝날지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랑은 그만큼 생을 맹목적이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8) 明鏡 - 박형준  강나루 가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소매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여인들이 버드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여인들은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를 꺾었다  배에 올라탄 남정네들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둥글게 구부려 정표로 주었다  배가 떠날 시간이었다  내려서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야 했다  책갈피에 버드나무 잎이 끼여 있었다  저녁 무렵 잠깐 잠이 든 사이였다  꿈속에서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꿈속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그 책은 이승에서 내가 평생 써야 할 시였다  이 슬프면서 아름다운 우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저녁 무렵 잠깐 잠든 사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해가 질 무렵이었다. 꿈속에서 한권의 책을 손에 쥐고 읽고 있었다. 그런 그 앞에선 버드나무 아래서 여인들이 울고 있고, 배가 막 떠나려 하고 있고, 배에 올라탄 남정네들에게 여인들은 사랑의정표로 버드나무 가지를 둥글게 구부려 주고, 그 버드나무잎이 그의 책갈피에도 끼여 있지만, 배에서 내려서도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야만 하는 슬픔이다. 어쩌면 인생은 덧없는 꿈이라는 상투적인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여기서 배는 인생이고, 그 인생 속에서 우리는 사랑과 이별을 할 수밖에 없고, 그중 이별은 강을 건너는 행위 곧 이승과 저승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을 뒤로하고 오연하게 앞으로 나아감으로 성취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시라고 말하는,저승까지 가져갈 것이 시라면, 뒤집어서 이승에서도 평생 써야할 시는 그 책갈피에 낀 버드나무잎같이 생생한 사랑과 이별의 변주인 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꿈속에서 본 이별의 광경을 통해 시인이 끝내 써야할 시가 무엇인가를 조용히 연상케 하는 시인 것이다. 이제 다음 시를 보자.  먼저 그대가 땅 끝에 가자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 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 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놀빛/ 물려놓는 바다의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 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아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앞섬들 따 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 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숲 뻐꾸기 운다/ 그대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막이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것이 이 땅의 끝/ 벼랑에 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보는데/ 실루엣 을 단단하게 잠근 그대는이 땅 끝에 와서/ 어떤 맨처음을 궁리하는가 보다, 참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직 어려서, 마구 젊기만 해서/ 이렇게 후욱 비린내나는 끝의 비루를/ 속 수한 것들의 무책을 모르겠구나/ 모르겠는 것이겠구나―(9)이문재의 「해남길, 저녁」  이문재의 시는 적어도 가식이 없다. 자신이 직면한 고통에 솔직하게 대면하고 있다. 그는 사랑의 끝이 땅끝과 마찬가지로 벼랑의 투신처럼 자명하기를 바란다. 망연자실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얼마나 너절한 것인지. 인연이란 얼마나 질긴 것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일 수밖에없는 것이다. 아직 어린 그대가 끝의 비루를 알지 못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땅끝에서 손쉽게건져 올린 사랑의 끝을 생각하는 이 시는 풍부한 묘사와 함께 한자 성어를 적절하게 분리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드러냄은 미화될 여지조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화될 성질의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고 그런 불륜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의 끝은 비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이유가 되어 버릴 때도 불륜이 비루일 수 있는가.  4. 투사, 삶의 본질에로의 날카로운 진입  시적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을 바라보는 서정적 주체가 있다. 주체는 반드시 주체의 관점을 통해서 대상을바라본다. 그 관점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그 주관은 삶의 본질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주관이자, 어떤 객관적인 언술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향해 비약하는 주관이다. 그 주관은 일체의 과정을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획득된 것이며 순간적으로 지각된 느낌을 명징하게 드러냄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라서 그 어떤 논증적인 결론에 뒤지지 않는 심정적인 깨우침을 안겨준다. 그리고 독자는 이 당연한주관성을 엿봄으로써 공감을 느끼거나 부적절함에 대한 반감을 토로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에 개입한다. 무엇보다 이 내밀하고 주관적인 관점이 우리에게 건네는 공감이야말로 시의 아름다움이 갖는 본질적인 표딱지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 주관을 가능케 하는 힘을 투사라고 한다. 이 투사는 또 직관력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  (10) 墨畵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1) 自尊 - 이시영  화창한 가을날  벌판 끝에 밝고 환한 나무 한 그루  우뚝 솟아 있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  시 (10)은 회화적이다. 이는 첫 행과 두 번째 행을 통해 누구의 눈에라도 확연히 그 풍경을 지각할 수 있다. 저물 무렵, 아마도 깡마른 손임에 분명한 할머니 손이 물먹고 있는 소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는외딴집 울타리 속의 풍경. 제목이 묵화이듯이 어떤 묵화를 바라보고 썼거나, 거꾸로 풍경과 人事의 여러자잘한 가지를 생략해버리고 고단위의 긴장과 절제의 방법으로 여백과 농담의 미가 충만한 묵화의 세계를지향했거나 상관없다. 이 시는 묘사적 풍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3행으로 넘어가면서 직바로 본질로 진입해 가는 시인의 날카로운 주관적 투사, 곧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적막하다고,” 말해버림으로 물먹는 소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지는 단순하고도 객관적인 풍경이 소와할머니 사이에 지극한 교감으로 바뀌고, 또 단순하고 객관적인 풍경이 생의 비애, 존재의 고통의 면모를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투사로서의 상상력은 한 존재가 맞닥뜨린 생에 대한 자각과 그에 반응하는 섬세한 존재의 울림을 고스란히 확인케 함으로써 우리를 천박하고 저열한 우리의 그저 놓여진 일상을 새롭게 충전하는 것이다.  시 (11)도 이 점에선 시 (10)에 한 점도 뒤지지 않는 시이다. 오히려 시 (10)이 3행부터의 투사적 진술이우리를 깨우치긴 하지만 존재와 풍경이 감추고 있는 아득한 비의를 약간은 깨버린 듯한 인상을 주는 데비해 시 (11)은 그렇지 않다. 이 시에서도 너무도 확연한 그림 하나를 볼 수 있다. 화창한 가을날이면 하늘은 높고 햇살은 순금빛으로 쏟아지고 대기는 맑다 못해 푸르른 날일 것이다. 그런 날 벌판 끝에 그 햇살을 받고 나무는 역시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도 좋겠고 투명한 갈색으로 빛나는 느티나무도 좋겠다. 얼마나 밝고 환할 것인가. 그것이 우뚝 솟아 있다. 황금나무다. 세계수다. 은행나무라면 땅에서 하늘로 팔 벌린 상태일 것이고 느티나무라면 둥그렇게 마을을 감싸는 모습일 것이다.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나모두 지상과 하늘을 매개하는 영매이다. 어쨌든 그것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늑하고 정정하고 성성하고 밝고 환할 것인가. 여기까지는 객관적 풍경의 언어적 그림이다. 이에 덧붙여 연을 달리한 마지막 한 줄이투사적 진술을 감행한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라고. 객관적 사실은 모든 새들은 그곳에서 날수도 있고 날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밝고 환한 나무에서 새가 날지 않고 어디서 날겠는가. 새는자유, 순수, 평화 등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 새는 인간의 비상의 꿈을 하늘로 치솟음으로 상징해준다.그러나 들판의 새는 대개 옆으로 난다. 여기 밝고 환한 나무에서 나는 새도 그 나무에서 솟는 새이기도해야 하지만 그 나무를 가로질러 나는 새이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나무의 수직과 새의 수평이 이루어지는 것을 상상치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시는 이런 모든 췌사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풍경에 대한 언어의 선연한 그림과 이에 날카로운 투사적 상상력을 보탬으로 존재의 비의를 한층 더 깊게 만드는,말을 침묵에 가깝게 줄임으로 되레 수많은 말을 가능케 하는 시의 진경이 여기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12)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13) 직관 - 고재종  간밤 뒤란에서  뚝 뚜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 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 본다  그중 한그루 톡,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오르며 눈 털어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광규의 시는 밑바닥에 깔린 첨예한 시대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의 투사적 직관력이 시에 얼마나큰 힘을 부여하고 있는가를 수일하게 짐작할 수 있다. 투사력이라 해도 좋고 직관력이라 해도 좋은 이 상상력은 무릇 시인치고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지만 이걸 얼마나 잘 갈고 닦느냐에 따라 좋은 시를 쓸 수있는가 없는가 판가름이 난다. 필자의 「직관」이라는 시도 함께 살펴보기 바란다.  5. 유추, 빗대어 말하기  시란 다른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자신의 질서로 바라보는 것이다. 시는 타자를 자신의 질서 안에재편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혹은 자신의 질서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시적 관계 양상을 유추라고 명명할 수 있다.  유추는 두 대상을 나란히 마주 세움으로써 시작된다. 물론 그 한편에는 항상 인간의 삶이 있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는 여우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시커먼 돼지 역시 탐욕스런 인간의 상징적 대체물이다. 이 두 상징이 얼마나 엄밀히 조응하는가에 따라 유추의 효과는 그 빛을 발한다.  일반적으로 유추를 통해 획득되는 시적 인식은 계몽적이거나 풍자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유추의 대상을통해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라고 말하고 싶거나, 삶이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 잔뜩 조롱하고 싶은 것이다.그러나 유추가 삶 전체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열려 있지만은 않다. 시가 문제 삼는 삶은 특정한 삶이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추상으로서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어떠한 삶을 풍자하거나 외경스러워하는지를 무엇보다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14) 느티나무 여자 - 안도현  평생 동안 쌔빠지게 땅에 머리를 처박고 사느라  자기 자신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을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두 팔과 두 다리로 허공을 헤집다가  자기 자신을 다 써버렸다  그래도 햇빛이며 바람이며 새들이 놀다 갈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고, 괜찮다고,  애써 성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어 보이는  허리가 가슴둘레보다 굵으며  관광버스 타고 내장산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저 다소곳한 늙은 여자  저 늙은 여자도  딱 한 번 뒤집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땅에 박힌 머리채를 송두리째 들어올린 뒤에,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  (15) 오징어 3 - 최승호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 릇이 있다  시 (14)는 태풍이 지나간 뒤 쓰러진 느티나무의 모습에서 모든 유혹을 물리친 채 온갖 고생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온 농촌여성의 내면에 깃든 광포한 욕망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가을 날,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같은 구절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또스러진 느티나무를 여자에 비유하며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때가 있었나 보다”처럼 표현한 구절은 얼마나 짓궂은 유머를 담고 있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이라고 한대목에서 이 시인의 경우바른 성실함이 물씬 묻어난다. 비유가 극명하게 드러난 시이지만 사실 비유조차도 유추적 상상력을 통한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인 것이다.  시 (15)는 3행으로 이루어진 시다. 이 짧은 시의 대상은 ‘오징어 부부’이다.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을표현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부둥켜안고 목을 조르는 버릇’은 결코 사랑의 자연스런 방식이라고 볼 수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표현은 오징어의 여러 개의 긴 발의 형상에서 취한 상상력인데, 그러나 이러한부부는 그 오징어 부부만이 아니라는 현실 때문에 표현의 성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류의 사랑은 많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은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목을 조르고 있지는 않았던가.교묘하게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고 억압하고, 풍부한 인간적 감성을 마모시키지나 않았던가. 결국그 오징어 부부는 우리들 사랑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뒤덮인 인간이며 그 사랑의 방식은 우리들이 항용 지니고 있던 버릇이었던 것이다.  안도현과 최승호의 시는 모두 인간적인 세계가 아닌 자연의 세계 혹은 우화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한데 이런 유추는 현실과의 접촉면이 현저히 차단된 채 자연 세계의 환멸과 동경만을 가능케 할뿐이다.어떻게 한 편의 우화를 통해 삶의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고작해야 즉자적인 찬탄과 모멸이라는양극단의 감정적 대응만이 가능할 뿐이다.  (16) 개밥풀 - 이동순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 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럼을 푸는 일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 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자유를 소중히 간직하 더니/ 어느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 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 는 숨죽이고 있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 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있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 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이 시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시의 화자는 분리되어 있다. 전반부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개밥풀이란 수생식물의 생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면 관찰자의 관찰에 응답이라도 하듯, 개밥풀 자신의 목소리로 한 떼의 여리고 작은 이파리들의 헌신을 노래한다. 여름에서 가을로, 다시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변화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몸을 부리며, 마침내 어떻게, 그리고 왜 논바닥에 말라붙는지를 노래한다.물론 이 개밥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유추의 원형질은 민중이다. 김수영의 풀보다 더욱 미천하고 더욱낮은 대상에까지 천착하여 형상화함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이름 없는 무지렁이 민중들과 그들 민중의 삶구석구석에 연결된 자그마한 살아 잇는 모든 것이 얼마나 견고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그들은 단지 헌신과 희생의 속성만이 연결될 뿐만 아니라 자잘한 생태적 순환들까지도 완벽하게 일체가됨으로써 자연의 순환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긴밀한 유대와 삶의 동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운다’는 말이 있다. 이 간명한 명제야말로 시적 상상력을 튼실하게 받치고 있는 또 다른 한 축인 것이다. 느티나무, 오징어, 개밥풀 등 이 모든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들로부터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만 또 다른 하나의 존재에 불과한 인간들이 삶의 철학과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그러나 이제 우리는 위의 명제를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삶을 배운다’라고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6. 전복, 뒤집어보기 꿰뚫어보기  헤겔은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아리송한 말을 『법철학』에서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헤겔의 상속인들이 좌파와 유파로 갈리게 되는 헤겔 사유에 내재한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좌파들은 이 말의 앞부분에 방점을 찍고, 우파들은 이 말의뒷부분에 방점을 찍는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란 곧 인간의 사유가 언제라도 현실로 전화될수 있다는 것으로 철학의 실천적 의미를 극대화한 주장이다. 이성적 사유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이론적 실천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이 주장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단순히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반면에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란 명제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자체로 이성적 사유의 결론이라는 주장으로 현실을 정당화할 논거를 마련해주고 있다. 실제 헤겔은 반동적인 독일의 정치적 현실을 이상화함으로써 진보의 반대편에 서고, 그 결과 한동안 파산선고를 받은 채사상사의 변경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눈여겨보면, 헤겔의 보수적 선회는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것, 곧 존재하는 것이 이성적 사유의 결과일 수 없음은 명확하다. 현실은 오히려 지극히 비이성적인 탐욕의 결과이거나, 반이성적인 폭력으로 은폐된 허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적 삶에 파묻혀 사는 우리는 안타깝게도이 허위와 위선에 더 이상 분노하지 못한다. 그 분노가 우리의 현실적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것을 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는 잠언에 몸을 떨지만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진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자각에 몸을 비켜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다르다. 시인은 진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 고통에 기꺼이 온몸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비록 그 진리가 영원히 자유와는 무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온몸으로 예감하면서도 시인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저항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존재해야 할 것들을즉각적으로 이끌어내며 또 표출한다. 그 표출이 불러일으킬 고통이 실핏줄 구석구석을 터질 듯이 메워 갈지라도 기꺼이 그 고통 아래에 목을 늘어뜨린다. 이 또한 상상력의 일종이다. 현상을 통해 현상의 이면에숨죽이며 떨고 있는 본질을 드러내는 사유의 힘, 그것이 꿰뚫어보는 상상력이며 뒤집어보는 상상력이며,일체의 허위를 전복하는 상상력인 것이다.  (17) 받들어 꽃 - 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이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서 피어난 과꽃  한 송이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18) 北魚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열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시 (17)은 전복적 상상력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중 아파트 어귀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과 마주친다. 아이들은 우리가 항용 마주치는 아이들이 그러하듯 시끌벅적하게서로 한껏 총질을 해대며 ‘죽어, 죽어!’를 외치고 있었을 터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섬뜩하고 짠하다. 아이들의 노는 방식이 섬뜩하고, 왜 아이들이 이렇게 놀고 있을까 하는 원인에 대한 탐구는 분단된 내 조국의 아픈 상채기 하나를 만지는 듯해 서글프다. 그러나 그저 그렇겠거니,어른들이 그렇게들 살고 있으니 아이들이라고 무어 다를 것이 있겠어 하고 외면해버릴 우리와 달리 시인은 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는 아이들을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받들어 총’이 아니라 ‘받들어 꽃’이라고, 죽음의 놀이가 아니라 작은 생명에 대한 지극한 외경의 의식을 행하기를 요구하고 있는것이다. 폭력에 대한 굴종 대신 생명에의 축복으로 아이들 놀이가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을 부드럽게 주장한 것이다.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왜곡과 은폐의 더께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빛나는 삶의 진정성을일구어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복적 상상력의 탁월한 기능이다.  시 (18)은 참 재미있는 시이다. 식료품가게 꼬챙이에 꿰어진 채 널브러져 있는 북어를 직접 들여다보고있는 듯이 형상화하고 있다. 더욱 세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다가 ‘가슴속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꿈꾸는 가운데 교묘하게 북어가 사람으로 대체되어 있다. 헤엄쳐 가기를 원하는 것은 북어가 아니라 사람인것이다. 그 순간 느닷없이 커다란 입을 벌린 북어들이 큰소리로 ‘너도 북어지!라고 귀가 먹먹하도록 계속 부르짖는 눈부신 전복으로 시를 끝맺고 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라 찌부러진 요즈음의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19) 銀山鐵壁 -오세영  까치 한 마리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하늘을  엿보고 있다.  銀山鐵壁.  어떻게 깨뜨리고 오를 것인가.  문 열어라, 하늘아.  바위도 벼락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대궁을 밀어 올린다  문 열어라, 하늘아.  은산철벽이다. 은산철벽이라 함은 禪家에서 禪僧들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서 오는 막막함이다. 온 산이 온통 흰 눈으로 덮이고 얼음으로 짜 올려져 철벽을 이룬 상태인 바, 세상의 分別智 정도로는 도대체 그걸깨뜨릴 수 없다. 한마디로 백색 절망의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 속의 까치 한 마리, 곧 선승은 홀로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있다. 백천간두에 처해있는 것이다. 한 발만 까딱 잘못 재겨 디뎌도 수천 수만 리 허공으로 추락해버릴 그 자리. 그 한계상황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야 하는데, 그 하늘조차새파랗게 얼어붙어 있다. 은산철벽을 먼저 깨트려야 되는데, 그래야 그나마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로 오를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상황은 여전히 암담하다. 전후좌우를 헤아려보고, 차가운 이성과 불같은 감정을 동원해보고, 피투성이의 몸부림을 해봐도 눈에 보이고 귀로 열리는 것은 추호도 없다.  안 된다. 안 된다. 그렇다면 에라이 모르겠다. “문 열어라, 하늘아,” 호통칠 수밖에 없다. 분별지 같은걸로 어림없는 세계. 직관력 아니고는 어림짐작할 수도 없는 세계. 결국 선승으로서는 일대 전쟁을 감행할 수밖에 없이 하늘하고 상대를 하는 것이다. 이모저모 따질 것 없이 곧바로 하늘하고 맞붙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문을 여는가.  결국 “바위도 벼락 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대궁을 밀어 올린다.”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은산철벽 속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수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서만 비로소 난초 꽃, 곧 삶의 극적인 진실이 열리는것이다. 그것도 “문열어라, 하늘아”라고 다시 한번 호통치는 그 용기로 인해서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고통에 처했을 때 마지막 뚝심으로 돌아서서 그 몰아대는 자를 악착같이 물어버리는 대전복이 청천벽력처럼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진실의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하늘에다 대고도 호통칠 수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 그러기에 시형식도 여러 진술이나 묘사를 생략하고 간명한 막대기 같은 언명만 필요하다. 이런저런 군더더기 없이 팽팽한 긴장과 절제의 언어만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불립문자의 세계를 말하기 때문에 여타의 모든 말들은 언어도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뒤틀린 현실을 전복하고자 할 때 전복적 상상력은 비판적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유효한 무기가 된다. 따라서 이것은 앞의 발견적 상상력과 함께 리얼리스트들의 중심적인 상상력을 형성한다.  7. 종합, 상상력의 유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시적 상상력의 개진 방식들은 사실 추상화되어 있다. 한 편의 시는 모름지기 단 하나의 주도적인 상상력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섬세한 발견과 관찰, 날카롭게 대상의 본질을길어 올리는 투사와 유추, 분리된 것을 결합하는 연상과 현실을 부정의 눈으로 확인하는 전복의 상상력들은 사실 한 편의 시에 긴밀하게 습합되고 용해된 채, 하나의 시적 세계를 튼실하게 엮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편의상 이런 분리는 상상력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이점들을 갖는다. 더욱이 상상력들은 동일한 깊이로 시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상상력이 전면에 배치된 채 여타의 상상력들은 후경에서 마치 삼각형의 꼭지점을 위한 밑변과 옆변을 형성하는 것처럼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시들을 보면 이러한 결합의양상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20)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이 시에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사용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의 모티브로 존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경험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시를 쓴 80년대는 영화가 시작되기에 앞서 줄곧 애국가를 틀어주었다. 어쩌면 김남주의 말대로 세금고지서와 징병통지서 밖에 가져다 주지 않는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강요하기라도하는 듯 틀어주던 애국가였다. 그런데 이 일상적 경험은 사실 발견적 상상력에 속한다. 영화 속의 한 화면을 그대로 시적 경험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시의 중심적인 시상에는 이 발견에 대한, 시적 인식으로서의 투사가 중핵을 이루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날아오르는 새들이 ‘어디론가 날아간다’는 객관적 사실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주관적인 인식으로 슬그머니 환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명백히주관적인 의식의 투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투사가 가능하며 이는 과연 충분한 공감을 자아내는가? 이 시가 1981년에 발표되었음을 생각해 보라. 광주항쟁을 겪었고, 군사독재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던그때, 시인을 비롯한 깨어있는 모두가 시의 이면에 그 아픔의 흔적과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고통 안에서 심지어 그 고통의 현실과 무관한 새들조차 이 한반도의 남쪽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끼룩거리면서” “낄낄대면서”로 투사된 채. 이러한 웃음 역시 남겨 두고 떠나는 세상에 대한빈정거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없는 모멸을 남긴 채 새들이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떼어 매고” 앞 화면에서 비추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뜨는 것이다. 그런데 이 투사는 시의 후반부에서 짝을 이루는 유추로 정교하게 반복된다. 우리 역시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다시 말해 빈정거리면서,야유를 퍼부으면서 썩어빠진 세상을 떠나 깨어있는 우리들끼리라도 “우리들의 대열을 이루며” “이 세상 밖”의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들은 날아갈 수 있으나 우리들은 날아가지 못한다. 그 부푼 꿈이 애국가가 끝나자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그냥 앉는 것이 아니라 어쩌지 못한채 주저앉는다. 영화관의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 현대사의 고통의 심부에, 썩은 세상에 주저앉는 것이다. 한마디로 의식에서의 꿈이 애국가가 끝나는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만 전복이 되는 것이다.전복적 상상력인 것이다. 뜬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결코 낄낄거리거나 깔쭉대지 못한 채 고통과 눈물로 우리들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한편의 시에는 발견과 투사, 유추와 전복이 다채롭게 융합되어 있다. 이제 다음의 시를 보라.  (21) 성모성월․1 - 이성복  그날 꽃들은 부끄러운 가슴과 눈물겨운 뿌리를 쓰다듬으며 피어오르고 봄은 달아나는 애 인처럼 꽃 속에묻혀 자꾸 죽고 싶어했다 봄은 아랫도리를 가리지 않은 아이처럼 길가에 방뇨했고 후후, 뜨거운 입김을뿜으며 음료수 가게로 달려갔다 아름다운 오월 건조한 고기 압의 땅에서 우리는 자꾸 죽고 싶었다 그날사마리아 여인들과 함께 미사를 볼 때 버드나 무 꽃가루가 창을 넘어 들어왔고 우리는 자꾸 죽고 싶었다,죽을 생각은 없이 천주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늙은 양들의 기도는 간절했고 우리는 자꾸 죽고 싶었다 흰 나룻배보다 긴 꽃잎 속에 몸을 감고, 눈부시고 목메어 고개 흔들며 아무도 밟지 않은땅을 가고 싶었다 아름다운 오월 버드나무 꽃가루가 눈을 덮을 때 미사는 끝났고 붉은 제 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사랑의 어머니,  당신의 이름을 힘겹게 부를 때마다  임종의 괴로움을 홀로 누리시는 어머니,  불러주소서  그 눈짓, 그 음성으로  죄의 한 아이를…  이 시는 ‘성모성월’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아마도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성모성월은 5월일 터이다. 5월은 우리에게, 적어도 80년 5월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대면해야 했던 이들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존재한다. 이는 현대사의 질곡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상처로도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시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자 하는 시적 대응이다.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어우러져 있다. 앞의 길게 이어지는 진술과 뒤의 기도문의 형식을 빈 간구로. 그런데 진술은 이성복 특유의 자유로운 연상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욱이 그 연상 안에서 이루어지는다양한 수사들은 특정한 상상력의 유형으로 묶어두기에는 지나치게 분방하다. 예컨대 첫 번째 문장의‘봄’과 ‘꽃들’은 유추의 틀 안에서 이후에 연결되는 ‘우리는’과 동류의 ‘사람들’로 읽어야 한다.그리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죽고 싶었다’는 고통에 찬 정서의 토로로 묶여 있다. 따라서 유추일 뿐만아니라 시적화자의 정서를 통해 모든 대상을 전일적으로 인식하는 투사 역시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투사는 “붉은 제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는 묘사로 완결된다. ‘죽고 싶다’는 자괴감이 고스란히 신의 제단에도 전달되었고, 그 전달은 계시를 내리는 대신 고통의 몸짓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절망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이어지는 기도는 산문적인 진술 전체에 가름하는 집약적인 제시일 뿐만 아니라 산문적인 진술의 진전이기도 하다. 고통에 찬 기도에 스스로의 괴로움으로 화답하는 ‘사랑의 어머니’는 인간과 신의 세계를 간구와 긍휼의 세계로 서로 연결하며, 죄로부터의 구원을 단서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러주소서”란 소명에의 간구야말로 단순한 죄씻음에 그치지 않고, 참담한 시대에도 의연히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자존을 향한 갈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후반부의 기도문은 특정한 상상력으로 명명하기 힘들만큼 내면의 심경이 그대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역시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새로운모색에 전율하는 전복의 상상력이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22) 昇天 - 이수익  내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 올라야만 한다  소리로써 마침내 소리를 이기려고  歌人은  심산유곡 폭포수 아래서 날마다  목청에 핏물 어리도록 발성을 연습하지만  열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쉽게 그의 목소리를 덮쳐  계곡을 가득 물소리 하나로만 채워버린다  그래도 그는 날이면 날마다  산에 올라  제 목소리가 물소리를 뛰어넘기를 수없이 기도하지만,  한번도 자세를 흐뜨리지 않는 폭포는  준엄한 스승처럼 곧추 앉아  수직의 말씀만 내리실 뿐이다  끝내  절망의 유복자를 안고 下山한 그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마을과 마을을 흘러 다니면서  소리의 昇天을 이루지 못한 제 恨을 토해 냈을 때  그 핏빛 소리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소리꾼이라 하더라  시 (22)도 관찰과 유추와 투사와 전복적 상상력이 종합적으로 융해되어 있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 시를 읽고, 나아가 시를 쓰는 일은 사실 시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시라는 작은 세계의 커다란 진실을 들추어보는 하나의 조촐하고 소박한 매개가 될 따름이다. 무엇보다도이러한 틀을 통한 시읽기와 시쓰기가 아니라 이러한 틀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시정신일 터이다. 이런 시적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것이다’라는 김수영의 거친 갈파에서 확인되는 시정신이더욱 소중한 것이다.* 
6    시에 대한 명 어록 댓글:  조회:2191  추천:0  2017-05-05
.. 늙은 사람 한 가지 즐거운 것은 붓가는 대로 마음껏 써 버리는 일. 어려운 韻字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늙지도 않네. 흥이 나면 당장에 글로 옮긴다. 나는 본래 조선사람 즐겨 조선의 詩를 지으리. 그대들은 그대들 법 따르면 되지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자 누구인가. 까다롭고 번거로운 그대들의 格과 律을 먼 곳의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나. ―정약용 「老人一快事」 붓놓자 풍우가 놀라고 시편이 완성되자 귀신이 우는구나 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杜甫 시 3백수에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악함이 없다. ―공자 『논어』 爲政篇 그대들은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사람에게 감흥을 돋우게 하고 모든 사물을 보게 하며, 대중과 더불어 어울리고 화락하게 하며, 또 은근한 정치를 비판하게 하는 것이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시에서 배울 수 있으며, 또한 시로써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공자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공자 고시(古詩)는 충후(忠厚)를 주로 했다. 시라는 것은 언어만 가지고 구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깊이 그 의도를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기평(譏評)할 때에는 그 소위(所爲)의 악을 얘기하지 아니하고 그 벼슬의 존비와 차안의 미려를 들어 백성의 반응을 주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소식 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 ―白居易 시란 말의 뜻을 나타내고 노래란 말을 가락에 맞춘 것이다. 소리는 길게 억양을 붙이는 것이고 가락은 소리가 고르게 된 것이다.―유협 『문심조룡』 시는 의(意)가 주가 되므로 의를 잡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 것은 그 음이다. 의도 또한 기(氣)를 위주로 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의의 깊고 옅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天性)에 딸린 것이어서 배워서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떨어지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의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句)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 없다. 하나 거기에 심후한 의가 함축되어 있지 아니하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다시 씹어보면 맛이 없어져 버린다. ―이규보 시에는 마땅치 못한 아홉 가지 체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하여 체득한 것이다. 시 한 편 속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한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 실은 것, 옛사람의 뜻을 몰래 취해 쓰는 것은 도둑질을 잘한다고 해도 옳지 않은데 도둑질이 서투르면 이것은 서툰 도둑질이 잘 잡히는 것, 강운으로 압운하여 근거가 없으며 이것은 쇠를 당기나 이기지 못하는 것, 재주는 헤아리지 않고 지나치게 압운하면 이것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험벽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하게 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것, 말이 순편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사람에게 쓰기를 강요하는 것은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 일상용어를 많이 쓰는 것은 촌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공자나 맹자를 범하기 좋아하는 것은 존귀함을 함부로 범하는 것, 글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잡초가 밭에 가득한 것이다. 이 마땅하지 못한 체격을 면할 수 있게 되면 함께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규보 시문은 기를 위주로 삼는다. 기는 성(性)에서 발하고 의(意)는 기에 의지하며,말은 정(情)에서 나오므로 정이 곧 의이다. 그러나 신기한 뜻은 말을 만들기 어려우므로, 서두르면 더욱 생소하고 조잡해지는 것이다. ―최자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이인로 『破閑集』 시는 함축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희미한 글, 숨은 말로서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은 것은 또한 시의 큰 병통이다. ―서거정 『東人詩話』 시가 교화를 위한 것이라는 뜻은 본래 온유 돈후한 시정신으로써 성정을 다스려서 풍화(風化)를 이루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여 세상의 도리를 평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남구만 시는 성정의 허령(虛靈)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유몽인 시는 성정을 나타내는 것이다.―이의현 시는 원리와는 관계 없는 별종의 취향을 갖고 있다. 오직 천기(天機)를 농(弄)하여서 심원한 조화 속을 파악하여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시가 된다. ―허균 시란 사람의 천성과 정서를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심덕잠 지금 우리 나라의 시와 문장은 고유의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워서 쓴 것이다. 가령 아주 흡사해진다 해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김만중 무릇 시에 있어서는 자득(自得)이 귀하다.―이수광 시란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 속에 있으면 지(志)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정(情)이 마음 속에 움직일 때, 시인은 그것을 말로써 표현한다. ―신위 시는 교화(敎化)하는 것이니 힘써 그 뜻을 전달해야 한다. ―이익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단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정약용 『목민심서』 시는 대개 정신과 기백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정약용 시에는 신비한 정신의 경지가 있는데 이것은 무형 중에 우거(寓居)하면서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에, 우연히 만나면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는 찾아보려고 해도 얻을 수 없다. ―신광수 보기 좋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모아놓고 시라고 하는 것이야 비천한 잡배의 장난에 불과하다. 시는 선언이다. 만천하의 현재 뿐 아니라 진미래제(盡未來際)까지의 중생에게 보내는 편지요, 선언이요, 유언이다. ―李光洙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李光洙 시인이 창작한 제2의 자연이 시다.―조지훈 시는 신(神)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韻文)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充溢)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 시가 있다. ―I.S.투르게네프 『루진』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F.Q.호라티우스 『詩法』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보들레르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쫓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보들레르 시는 진리가 그 목적이 아니다. 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보들레르 시를 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건 낚시질하고 똑 같네. 아무 소용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 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좋은 수확이 되는 법이거든. ―E.크라이더 『지붕밑의 무리들』 시는 넘쳐 흐르는 정감의 힘찬 발로이다.―워즈워드 시는 체험이다.―R.M.릴케 시는 악마의 술이다.―A.아우구스티누스 시란 것은 걸작이든가, 아니면 전연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J.W.괴에테 위대한 시는 가장 귀중한 국가의 보석이다.―L.베에토벤 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프리뉴스2世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한다. ―머클리쉬 시는 단지 그 자체를 위해 쓰여진다.―E.A.포우 시는 예술 속의 여왕이다. ―스프랏트 시는 마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 ―R.M.릴케 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은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나이 젊어서 이미 남아 돌아갈 만큼 가지고 있지 않아서는 안된다. 시는 정말로 경험인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에머슨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P.B.셸리』 감옥에서는 시는 폭동이 된다. 병원의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다. 시는 단순히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건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보들레르 『로만파 藝術』 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선 안된다.……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에로 통해야 한다. ―F.실러 시란 가장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M.아놀드 시적(詩的)이 아닌 한,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A.지이드 『私錢쟁이』 시는 모든 예술의 장녀(長女)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양친이다. ―콩그레브 만약 사람이 마력적인 시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대는 아름다운 생(生)을 알게 된다.―J.아이헨돌프 도덕적인 시라든가 부도덕적인 시라든가에 대해서 말할 것은 아니다. 시는 잘 씌어져 있는가 아니면 시원찮게 씌어져 있는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시는 힘찬 감정의, 위세 좋은 충일(充溢)이다. 그 원천은 조용히 회상된 감동이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별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써질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근본적인 언어 방법이다. 그것에 의해 시인은 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그의 직각적 매카니즘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다. ―M.무어 시는 오직 인간의 능력을 발양(發揚)하기 위해서 우주를 비감성화시킨 것이다. ―T.S.엘리어트 『超現實主義 簡略事典』 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고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T.S.엘리어트 『傳統과 個人의 才能』 시의 세계로 들어 온 철학 이론은 붕괴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진리이건 우리가 오류를 범했건 그런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의미하는 그 진리가 영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T.S.엘리어트 『評論選集』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데 있다. ―T.S.엘리어트 『詩의 효용과 批評의 효용』 시란 무엇은 사실이다 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해 주는 것이다. ―T.S.엘리어트 시는 미에 있어서의 참된 집이다. ―킬피란 우리의 일상 생활의 정서 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만이 단지 근본적인 차이일 뿐이다. ―I.A.리차아드 시는 우리들이 익숙해서 믿어버리고 있고 손쉽게 가깝고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뒤바뀌어진 것으로서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이렇다고 긍정한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M.하인거 『횔더린과 詩의 本質』 시는 법칙이나 교훈에 의해 완성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감각과 신중함에 의해 완성될 수 있다. ―J.키이츠 아무리 시시한 시인이 쓴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로 그를 이해한다면 좋은 시를 얼핏 읽어버림으로써 받은 인상보다야 훨씬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나. 내가 시를 읽고 싶지 않을 때, 시에 지쳤을 때, 나는 항상 자신에게다 그 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타이르는 바일세. 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단히 아름다운 감정이 내 마음 속에서 진행 중일 것이라고 타이르기도 하네. 그래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내가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 그 훌륭한 감정을 꺼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네. ―J.러셀 『사랑이 있는 기나긴 對話』 시는 보통의 이성의 한계를 지닌 신성한 본능이며 비범한 영감이다. ―스펜서 시는 시인의 노고와 연구의 결과이며 열매이다.―B.존슨 시의 으뜸가는 목적은 즐거움이다. ―J.드라이든 한 편의 시는 그 자체의 전제(前提)를 훌륭하게 증명해 놓은 것이다. ―S.H.스펜더 『시를 위한 시』 18살 때 나는 시라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환희를 전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살 때, 시는 연극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나는 가끔 시를 갱도(坑道)속 함정에 빠져서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출해 줄 다른 갱부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성자여야 합니다. ―P.토인비 『J.콕토와의 인터뷰』 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리고 나서 매장시키는 지상의 역설이다. ―K.샌드버그 시의 본질은 동작이다. 이 동작은 내적 완전을 나타내고 이 내적 완전이 참으로 인간적이고 또 진실이기 때문에 참으로 시적인 성격은 위대한 격정의 자유로운 움직임 가운데 나타난다. ―네싱 시적 형식은 본질이 무엇이든 시가 문학의 특수한 형식으로서 쾌락을 주는 근원은 변화에 의한 반복성에 있다. ―R.E.앨링턴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싯귀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 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 ―클로델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있다. ―스카르보로 『중국격언집』 만약 시가, 위대한 그 무엇이 아니면 안된다면,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현대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간에, 작자의 정신의 내부에 있는 산 그 무엇과, 그것이 전달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시로써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신체는 어디 있든간에, 그 혼은, 이곳에, 그리고 현재 있어야 하는 것이다. ―A.C.브래드레 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라면 우리들은 간단히 가질 수가 있다) 시는 경험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많은 도시를, 많은 사람들을, 많은 사물들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동물, 새의 날으는 모습, 아침에 피는 꽃의 상태 등을, 알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지의 토지에 있는 도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애당초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이별, 기억도 확실치 않은 먼 어린 시절, 자기도 알지 못하였던 즐거움이며, 마음먹고 아버지 어머니가 주는 것을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들에 공상의 힘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람 각자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던 밤의 일, 분만하는 부인의 애끊는 절규. 어린애 침대에서 잠도 자질 못하고 창백하게, 그리고 잠들어버리는 부인들의 추억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땐, 들창을 열어 놓은 채, 계속적인 시끄러움이 들리는 방에서,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있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이 있을 땐 잊어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기억이 또 한번 떠 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피가 되어 명확히 이름지울 수도 없게끔 되어버리든가, 이미 우리들 자신과 구별할 수도 없게끔 되어버릴 때 ―그야말로 어느 순간 시의 최초의 한마디가, 기억의 한가운데 나타나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시의 기능은 세계의 슬픔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A.E.하우스만 시적 진실 ―‘개인적,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며, 기능적인 것’ ―워즈워드 시는, ……인간의 마음의 제일 먼저의 활동이다. 인간은 일반적인 개념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기 전에 상상상의 관념을 만든다. 명증한 마음으로 생각하기 전에 혼란한 머리로 파악한다. 명확하게 발음하기 전에 노래부른다. 산문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운문으로 이야기한다. 전문어를 쓰기 전에 은유를 쓴다. 말을 은유풍으로 쓴다는 것은 우리들이 ‘자연발생적’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그에 있어서 자연인 것이다. ―G.B.비코 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T.E.흄 시의 중요한 목적은 정밀하고 명확한 표현에 있다. ―T.E.흄 사랑받지 못한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빛나고 씨를 가진 꽃만이 불꽃으로 반사한다. ―A.L.테니슨 시는 상징주의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감동시킨다는 이론을 만약 사람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현대시의 양식 속에 어떠한 변화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선조들의 방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을 위하여 자연묘사를, 도덕을 위하여 도덕율을, 그리고 테니슨의 경우 시의 중심이 되는 불꽃을 거의 다 깨버린 일화나, 과학적 의견에의 고려 등을 버리는 것이다. ―오든 시란 현존시에 붙어다니는 한낱 장식물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일시적인 감격이나 감동에 그치는 바도 아니다. 더구나 한낱 열중에 빠지는 바도 아니며 오락물로 떨어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시는 역사를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하이데거 산문시란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음악적이고 영혼의 서정적 동요, 환상의 파동, 의식의 경련에 응답하기 위해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칠은 시적 산문이다. ―C.보들레르 ―『파리의 우울』(Spleen de Paris) ‘시―인스피레이션’의 공식을 믿는 시적 사고는 허망한 하나의 옛이야기가 되어도 좋다. 지적(知的)으로 확신되는 사상에만 정적(情的) 신앙을 주려는 폐습이 일부 사람들에게 굳게 뿌리 박혀 있다. 과학이 증대하여 힘과 그것은 장차 일반화하여 갈 것이다. ―L.A.리처즈 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P.B.셀리 『詩歌擁護論』 시란 진리며 단순성이다. 그것은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 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J.콕토 『暗殺로서의 美術』 시란 그 시를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상의 심볼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 ―W.C.브라이언트』 즉흥시는 진정 재지(才知)의 시금석(試金石)이다. ―J.B.P.몰리에르 서정시는 감정이 흘러 넘치는 청춘의 생명의 표현.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 없는 힘이며 열렬한 신앙의 발로다.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연과 사랑과 신 등으로 작자의 모양이 십분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제1인칭의 시라고 해도 좋다. ―에론네스트보배 서사시의 흥미는 작자가 아니고 그 시 속의 사건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르스는 개인적으로는 실제인물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을 만큼 아무래도 좋은 인물이다. 다만 호메르스의 시 속 영웅들에 흥미를 느낄 따름이다. 이에 비하여 같은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만나의 시를 읽을 때는 시 속의 영웅들은 무엇이던가 관계할 바 없고 다만 시인 그 자신에 일체의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서정시의 주관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테 시는 음악과 맞추어 만든 수사적인 작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단테 뮤직과 포에지의 길은 서로 교차한다. ―뽈 발레리 포에지는 말의 전능으로 베일을 벗긴다. 포에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문제는 날마다 그의 마음과 눈에 부딪치는 것을 그가 보고 느끼는 것처럼 그가 생각하도록 각도와 속도를 맞추어 그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쟝.꼭또 시는 우주에 담긴 비밀의 광선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잊어버린 천국을 소생케 한다. ―D.E.시트웰 시는 애련 속에서만 존재한다. ―W.H.오든 진실로 시라고 할만한 것은 서정시를 제쳐놓고는 없다. ―E.A.포우 의식의 사고와 시적 표현의 기초는 구체적 직관 그 자체이다. ―S.길버트 시의 안에 사상은 과실의 영양가와 같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뽈 발레리 시는 운문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 ―필립 시드니 현대시는 하나의 신앙 위에 서 있다. 곧 숨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되려면 믿어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R.M.알베레스 산문;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시;최상의 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워즈워드 시는 본질적으로 무슨 악마적인 것이 있다. ―괴테 시는 시 이외의 무슨 목적을 가질 수 없다. 도덕이라든지 과학과 결부시킬 수 없다. 시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문학적 특질, 즉 초자연과 아이러니 속에 있다. ―보들레르 시는 말의 의미를 이마쥬들의 분위기로 둘러싸이게 하면서 그 의미의 가지를 치게 한다. ―바슐라르 시는 진정한 의지의 범미주의적(汎美主義的) 활동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의지를 표현한다. ―바슐라르 서정적인 시는 돌진한다. 그러나 유연하고 물결치는 움직임으로이다. 모든 갑작스럽거나 끊어지는 것은 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는 그런 움직임을 비극이나 관습적인 성격의 소설 쪽으로 돌린다. ―보들레르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도 벌써 흐를 정도로 시를 갖게 될 게 아닌가. 시는 정말로는 체험인 것이다. ―R.M릴케 시란 꿈과 같은 것이기는 하나 현실은 아니다. 말장난이기는 하나 진지한 행위는 아니다. 시란 해로운 까닭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힘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말보다 해롭지 않은 것이 어디 또 있으랴. ―하이데거 온갖 예술은 감각적 매개물에 의한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하나 시의 매개물인 말은 사실 관념이다. ―R.S.브리제스 다정한 시여! 예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여! 우리 안에 창조의 힘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신성(神性)으로 접근시키는 그대여! 어릴때 내가 그대에게 바치던 사랑은 수많은 환멸도 꺾질 못했다! 전쟁까지도 시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커지게 하였으니, 이제부터 별 박힌 내 머리와 하늘이 서로 혼동되기에 이른 것은 전쟁과 시의 덕분이다. ―아뽈리네르 우리는 남들과 논쟁할 때는 수사학으로써 논쟁하지만 스스로 논쟁할 때는 시로써 한다. 자기를 지지한 혹은 지지할 거라는 군중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자신만만한 음성을 지닌 웅변가들과는 달리 우리는 불확실성 가운데서 노래한다. 따라서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의 존재 가운데서도 우리가 고독하다는 인식때문에 우리의 리듬은 떨린다. ―에이츠 시의 의미란 그 텐션, 즉 시에서 발견되는 모든 외연(外延)extension) 과 내포(內包)intension를 완전히 조직한 총체이다. ―알렌 테이트 시가란 마치 화가가 색채로 하는 것을 언어로 하는 예술로서 상상력에 의하여 환상을 분출하는 방법에 의하여 산출하는 예술이다. ―토마스 머코올리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을 발견이다. 예기치 않는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S.존슨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준다. ―W.세익스피어 시는 생의 진술이며 표출이다. 그것은 체험을 표시하고 생의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제2의 세계, 꿈은 최고의 시인이다. ―워즈워드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따라서, 형식적이고 의식적 성격을 갖춘다. 시가 가지는 언어의 용법은 회화의 용어와는 달리 의식적이며 화려한 꾸밈새가 있다. 시가 회화의 용어나 리듬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마련인 규범을 미리 전제하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W.A.오오든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M.하이데거 『詩論』 시의 용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W.B.예이츠 시는 언어를 향한 일제사격이다.―앙리 미쇼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M.하이데거 시는 언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행위와 시는 언제나 인간보다 크다. ―T.E.흄 시는 극점에 달한 언어다. ―말라르메 시는 절조 있는 언어로서 절규․눈물․애무․입맞춤․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현하려는 것이다. ―뽈 발레리 시인에게 있어서 낱낱의 단어가 그 원료다. 단어는 극히 여러가지 모양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것들의 뜻은 시의 구성에 따라 처음으로 똑똑해진다. 이와같이 단어가 콤포지션의 가능성에 따라서 변모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형성된 예술 형태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는 어세(語勢)도 그 효과도 다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프도프킨 시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사막의 생활이다. ―메르디트 시란 우리에게 다소 정서적 반응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는 언어이다. ―E.A.로빈슨 시에선 해조(諧調)가 미리 공허한 형식을 결정하고 말이 위로 와서 위치를 잡는다. 말과 경험 사이의 응화(應和)와 불응화 그리고 결국에 응화가 해조를 확보하여 주의력을 거기에 모은다. 물러섬이 없는 움직임이 듣는 사람과 시인을 함께 끌고 간다. ―알랭 시는 미의 음악적 창조다.―E.A.포우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에르 정서가 있고 운율이 있는 언어로 인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또 예술적 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오든 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체계화시켜 반복한다. 이것이 운율이다. ―r.브리지스 시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구성체다.―브룩스 시는 우연을 기피한다. 시에 나타나는 클라스․성격․직분 등의 개성은 반드시 어떠한 클라스를 대표한다. ―코울리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이다.―웰렉․워렌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엘리어트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W.H.허드슨 예술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작게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확대 시킨다. ―E.M.포스터 아직 탄생하지 않은 어느 특별한 일절 또는 일련의 배후에서, 하나의 힘과 같이 집중되어, 넓게 전개되는 의식의 총체. ―보트킨 열정적인 시란 것은, 우리들의 본성의 도덕적 지적 부분과 동시에 감각적 부분―지식에의 욕망, 행위의 의지, 감각의 힘을 방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완전한 것이 되려면, 우리들의 신체의 다른 여러 부분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즈리트 시는 조잡한 요소로(물을 타고 섞어서) 연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엑기스(精)이며,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이미지의 시는 수정 조각과 같은 것이어서―우리들의 동물감각엔 너무나도 차고 투명한 것이다. ―허버트 리드 가장 위험한 것은, 순수한 물의 성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이, 정말로의 순수한 시라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하여서도 강연을 할 수 없는 것이다.―불순하며, 메칠알콜이 들어간 거칠은 시에 대해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월터 로리 시적 논리가 시의 결말을 맺는 것은, 일반적으론, 기분의 변화라든가, 위상의 전환을 통하여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그것이 시적 논리이다. 즉 논술이나 명증에 의하여 위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단계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는 그러한 위상의 변화이며, 이해할 수 있는 추이인 동시에 그 진행은 앞의 단계를 무효로 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W.P.카 오로지 이미지는 시의 극치이며 생명이다. ―드라이든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평생에 한번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진실한 이미지 뿐이다. ―W.블레이크 만약 지각(知覺)의 문을 맑게 한다면 모든 것은 그대로 즉 무한감(無限感)을 가진 것같이 보일 것이다. ―W.블레이크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그것은 어느 경험을 생각케 하며 그 문체에 의하여 그러한 경험에의 어느 종류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은 어느 하나를 배우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희열이든가 절망이든가 어떠한 감정이든간에 그것을 아는 것이 강한 만족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챨스 윌리암즈 이미지의 생산은 무의식의 어두침침한 속에서의 정신의 일반적 행위에 속한다. ―E.S.달라스 나에게 있어서 지각은 처음에 명료한 일정한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어느 음악적인 무우드(기분)가 우선한 다음에 시적 사상이 나에게 다가온다. ―쉴러 이미지의 발생, 진전, 설정은, 예를 들면 태양의 광선이 자연히 그에게 도달하여 ―그의 위에 빛나고 다음엔 냉정히 더구나 장려하게 기울어 가라앉아가며 그를 호화스러운 황혼 속에 혼자 남기는 현상에 흡사하다. ―J.키츠 우리들은 정신의 영역을 3중의 층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러한 경우 지질학의 ‘단층’에 비교할 수 있는 어느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지층은 비연속적이며 서로 불규칙한 단층을 나타나게 된다. 그와 매한가지로 자아의 감각적 의식은 본능적 충동과 직접 교섭을 갖게 되며, 그 ‘끓는 가마솥’에서 어떠한 원형적 형태 즉 예술작업의 기초가 되는 말, 이미지, 음 등의 본능적 짜임을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다. ―H.리드 나의 경우 시에 있어서는 많은 이미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의 중심이 많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만든다’라는 말은 적당치 않은 말이지만, 나는 나의 이미지에 내 내부에서 정서의 여러 가지 배색을 물들여 놓고 그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적 비평적인 힘을 적용하여 그것이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한다. 그리곤 그 제2의 이미지를 제1의 그것과 모순시켜, 그 둘에서 난 제3의 이미지에서 제4의 모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어진 형식적인 제한의 범위 내에서 서로 모순시킨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속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종자를 가지고 있다. 즉 나의 변증적 방법(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은 중심의 종자에서 성장하는 많은 이미지의 끊임없는 건설과 파괴며, 그 중심의 종자도 그 자신으로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나의 시의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나와,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이미지의 건설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어쩔 수 없는 충돌에서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충돌에서)―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극을 주는 중심 즉, 충돌의 모태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나는 시라는 순간적 평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딜런 토마스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자신으론 시인의 특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독자적인 본능의 증거가 되는 것은 훌륭한 정열, 또는 그 정열로 잠깨워진 일련의 사상 혹은 이미지 여하에 따라 시 그 자체가 변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때 뿐이다. ―코울리지 추상적 관념에 대립하는 감각적 이미지를 너무나 주장하는 나머지…… 결과는 회화에 의한 시로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때로는 그림이 전부가 되어버려, 일반적 경험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존재와 의미와를 분리시키는 잘못의 제일보였던 것이다. ―로버트 히리아 상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시적 몽상이라는 몽상의 절대를 인식한다. ―바슐라르 실제로 물질적 상상력은 문화적 이미지와 실체를 합체시키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삶을 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상상력 그 자신은 기억의 작용이므로 기억이 시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진실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어느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스펜서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를 추구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내 방법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감동 ―감각적으로 생생한, 사랑스러운, 다채로운 여러가지의 감동 ―을 기민한 상상력의 에너지로서 받았던 것이다. ―괴테 이성이라는 것은, 기지(旣知)의 사물을 질서있게 정리하는 작용이며 상상력이라는 것은 사물의 개개, 혹은 전체로서의 가치를 지각하는 작용이다. ―C.V코노리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善)의 훌륭한 방편이다. ―셸리 상상력이라는 것은 죽어 가는 정열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 두는 불사의 신을 말하는 것이다. ―J.키츠 모든 것에 앞서서 훨씬 중요한 것은 은유를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천부의 은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러면 자연 은유가 될 것이다. ―J.M.머리 은유는 현실을 살피며 경험을 질서짓게 하는 정신의 본질적이며 또한 필요한 행위와 같이 생각된다. ―J.M.머리 어떠한 번역이나, 은유나, 우의라도 극단적인 비유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은유를 바다나 파도에서 시작하여 불꽃이나 재로 끝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모순이기 때문에. ―벤 존슨 은유를 깊이 추구하려면 건전한 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J.M.머리 상징파의 상징은 언제나 자기만이 아는, 특별한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인이 독단적으로 쓰고 있는 ―즉, 그러한 관념의 일종의 투영인 것이다. ―에드문드 윌슨 상징주의의 상징의 실체는 제재에서 분리한 은유였었다.―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어느 한 점을 넘으면 색채와 음은 그 자신을 위하여 즐거워할 수가 없을 뿐더러 이미지의 내용을 억측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에드몬드 윌슨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랜 대형 메달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매자락에 닳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 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A.맥클리쉬 『詩法』 나의 시의 장부(帳簿)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의…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시도 없이 나는 무(無)앞에 있다. ―R.끄노오 『詩法을 위하여』  
5    수필에 관한 인터넷 자료 모음[모셔온 향기 ] 댓글:  조회:2873  추천:0  2016-03-19
수필에 관한 인터넷 자료모음   2010.  6. 5. 먼저 수필은 시의 정신으로써 창작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작자의 주관적인 직관력과 사색적인 인생 철학에서 이루지는 것과 같이 수필도 작자의 주관적인 인생 철학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산문적인 작품이 것이다.  수필은 하나의 산문시적인 정신으로써 창작되어야 할 것이며, 줄이면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적인 아이디어가 없는 작품은 문학도 음악도 회화도 될 수 없을 것이고, 하나의 예술적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김광섭의 '수필 문학 소고'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우리는 시를 쓰려 한다. 소설을 지어 보려고 한다. 혹은 희곡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그 어느 것에나 함부로 달려 들려는 무뢰한은 아니다. 동일한 작자이면서도 그 태도가 서로 다르다. 시는 심령이나 감각의 전율된 상태에서, 희곡과 소설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이 무심히 생활 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 된 형식이다.   피천득의 '수필'에는 이런 글귀들이 있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을 갖지 아니한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김시헌의 「수필문학」제 2 집 책 머리에 이런 글귀가 있다.  수필은 호젓하면서도 군색하지 않고 멋이 있으면서도 방탕하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우둔하지 않다. 수필은 건강하지만 파격을 좋아하고, 야유스럽지만 악의가 없고, 날카롭지만 따갑지 않다. 수필은 길이가 짧지만 소설이 담겼고, 리듬은 없지만 시가있다. 수필은 부담 없이 걷는 산책과 같고, 장바구니 든 아낙네 같다. 그 속에는 꿈을 돌아보는 낭만이 있고, 회의를 극복한 철학이 있고, 생사를 초월한 우주가 있다.   이상의 수필론에서 수필의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 인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특히 영문학상 수필의 위치가 얼마나 높은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다. 우리 한국 문단에도 빛나고 높은 품위의 수필 문학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구원과 절제와 동반의 언어     정 태 헌 (수필가) 1. 들어가기   수필에 대한 의견은 수필을 쓰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수필의 상식적인 면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수필문학의 본질과 보편성을 상실한 글이 이즘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김광섭은 그의 ‘수필문학 소고’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오늘까지의 위대한 수필문학이 그 어느 것이 비록 객관적 사실을 취급한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닥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히 짜내는 심경적이 아니요 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수필은 시에 가깝다. 그러나 시 그것은 아니다.” 라고 수필을 정의 내린 바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김광섭의 정의에서 일부 사람들이 자구 해석에 급급하여 수필 문학의 성격을 호도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러 독자들 중 수필문학에 대한 인식을 잘못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 장르의 글을 쓰는 어떤 이가 ‘그까짓 수필 하루에 열 편은 너끈히 쓸 수가 있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수필의 본질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목젖 너머로 꾹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 자신의 장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부끄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허튼 수필들을 많이 보아왔으면 저런 말까지 할까 하고요. 이런 말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수필가들은 작금의 수필 현실을 직시하고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끊임없이 반성적 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장의 분칠로 독자를 속이려는 글은 금방 들통이 나고 말며, 자신을 과시하는 글은 역겨움을 주고, 바탕이 문체보다 승하면 거칠고 문체가 바탕보다 승하면 필요 이상의 치장이 값싼 사치로 전락하질 않던가요. 즉 내용이 형식에 비해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뜻이지요. 이런 글을 만나면 책장을 덮는 독자들이 어찌 필자뿐이겠습니까.    수필은 원고지 15매 내외의 짧은 글입니다. 그러기에 고도의 문학성과 철학성이 요구됩니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모든 종류의 노력이 아니던가요. 또한 앎의 바탕을 찾아 가는 과정이 철학입니다. 소재에 대한 개성적 해석이나 독창적인 의미화도 넓은 의미에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재를 수직적으로 파고 내려가면 의미가 발견되며. 소재의 뼛속까지 내려가다 보면 그곳에 철학이 있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삶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철학을 하기 전에 미리 살아 움직여야 하고 살기 위해서 일정한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활동에 대한 이해와 반성으로부터 출발한 학문이 철학이 아니던가요. 즉 철학은 인간의 삶을 전제로 하는 학문이기에 인간 삶의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에 철학이 없다는 것은 잡문에 불과하다는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모든 장르의 고갱이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물론 상상이나 정서, 정경이나 이미지만으로도 좋은 글을 빚어낼 수는 있지만, 문학적 공감을 얻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않던가요.   하여 좋은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문학성과 철학성이 두루 갖추어져야 한다고 여깁니다. 철학을 담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는 항상 대상을 바라보면서 참된 인식을 얻고자 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하겠지요. 대상의 본질에 대해 깊이 궁리하고 다양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에 논리적 오류나 정서적 편견은 없는가 등을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습관화될 때 얻어지는 수필의 철학성은 통찰력을 통해 형상화됩니다. 삶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한 깊은 시각과 다채로운 경험이 필요하겠지요. 경험만으로는 깊은 맛이 나지 않습니다. 경험이 사유의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체험이 되며, 이 체험에 의미를 부여하면 통찰력이 생겨납니다. 통찰력이란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힘, 즉 생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아니던가요. 그래서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사유와 관조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신변잡사를 늘어놓거나 주관적인 감정만을 토로한 글은 생활의 기록일 뿐 문학수필로 대접받기는 곤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필은 평범한 일들의 기록이 아니라 음악에 있어 편곡처럼 자기화하여 육화된 글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커피에 설탕을 가미하여 잘 저어야 제 맛을 내는 것처럼 문학성 속에 철학성을 잘 휘저어놓아야 용해되어 글 속에 어우러질 것입니다. 2.    가을 호에 게재된 30여 편의 수필을 읽다 보니 끝가지 읽히는 글이 있는가 하면 첫 단락을 읽다가 그만 둔 글도 있고, 처음과 끝만 읽고 책장을 덮게 되는 수필도 있었습니다. 끝까지 읽히는 글은 무언가 독자를 잡아끄는 힘이 있었지만, 중간에 읽기를 멈추게 하는 글은 그런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를 잡아끄는 힘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 할 수는 없지만 진실과 문학성에 바탕을 둔 공감과 울림이 있는 경우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필 한편이 독자에게 생생한 울림과 공감을 주기란 녹록치 않습니다. 공감 있는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글 속에 울림의 요소를 은밀하게 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발효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 소재를 쓰다 보면 독자에게 울림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실험적인 수필을 쓴다 하여 공허하고 허튼 글을 내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독자들은 한 작가의 발효된 삶에서 진실을 보고 싶어 합니다.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작가와 독자와의 사이에 공감의 통로, 즉 교감의 길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좋은 글이란 급조하거나 포장한 글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난 진국이어야 합니다. 자잘한 일상만을 쓰는 게 아니라 인간의 뼛속과 영혼의 고처(高處)까지 방문하여 우려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독자에게 감동을 주어 우리들의 몸 속에 맑은 개울을 흐르게 하고 환한 길을 내어주지 않겠습니까. 다음에서 다루고자 하는 세 작가의 문학적 자세와 태도를 살펴보면 참 치열하고 진지합니다. 이들이 수필가로서 독자들에게 수필을 통한 삶의 공감을 주기 위해, 또 작품쓰기의 충실함, 즉 좋은 글을 빚어내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필자는 이들의 문학적 태도와 글 쓰는 자세를 통해 그들의 문학적 열정을 편안한 마음으로 한번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구원의 언어    박영덕의 ‘절반은 구속 절반은 구원’은 마흔 셋이 되던 해, 문학 세미나에서 후배가 찍어준 사진 한 장을 소재로 쓴 글입니다. 문학이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곱씹어 의미를 반추하며 치열한 글쓰기를 속으로 회다짐하고 있습니다. 문학을 하는 일은 취미가 아닌 운명의 굴레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며 작가입니다. 어쩌면 글쓰기는 스스로를 구속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작업인지도 모릅니다. 구속한다는 것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올곧은 자세이고, 구원이라는 것은 삶의 치열하고 결곡한 정신적 자세일 터입니다. 박영덕의 문학 정신을 통해서 수필쓰기의 한 전형을 읽습니다. 치열성이 없는 글쓰기란 특히 수필에서는 잡문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필은 아무렇게나 쓰는 잡문이 아니라 치열한 고뇌와 문학적인 미적과정을 통해 형상화되어야 합니다. 형상화란 무엇입니까.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형상화 이전의 글이 신변잡기면 형상화 이후의 글이라야 비로소 문학 작품입니다.   ‘절반은 구속 절반은 구원’은 박영덕의 문학적 명제가 배어있으며 그의 생의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글입니다. 박영덕에게 문학은 일상적 삶의 구속이면서 구원의 손길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구속은 구원을 낳게 될 것입니다. 흔히 문학 작품을 통해서 불멸의 글 한 편, 그 글을 통해 영생의 기쁨, 하고 말하는 분들이 있지만 박영덕에게는 그보다 구원이 더 중요한 명제인 듯싶습니다. 영생과 불멸이라는 말은 실은 끔찍한 말들이 아닙니까. 그것은 인간이 지닌 탐욕과 사유의 놀이가 빚어낸 그로테스크한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생전에 구원이라는 심적 해방감만으로도 문학은 그 얼마나 은혜로움이겠습니까. 박영덕의 문학적 자세는 구원을 위해서 구속까지 마다하지 않겠다는 진지한 문학적 태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글입니다.   이 글이 소재로 삼은 것은 앞모습과 뒷모습이 함께 찍힌 사진 한 장입니다. 소재를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진지함과 철학적 사유가 묻어납니다. 그 사진은 그 무렵 마흔앓이를 심하게 하는 도중에 찍힌 사진이어서 남달랐을 것입니다. 앞모습은 현재의 모습이지만 뒷모습은 과거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을 함께 담곤 하지요. 박영덕은 그 사진을 보며 어느 쪽에 더 눈길이 쏠렸을까요. 아마 뒷모습이었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현재의 구속된 모습보다는 미래의 구원된 모습을 바랐을 테니까요. 또한 인간의 본질적 모습은 뒷모습에 더 진지하게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박영덕은 한때 마흔 살이 되면 괜찮은 인생이 펼쳐지리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기대로 어서 마흔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세월에 대한 믿음으로 40대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강물과 같은 평화를 가져다주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꿈꾸었던 40대는 실망이었습니다. 어찌 박영덕에게만 그랬겠습니까. 40대의 나이를 불혹이라 하건만 그건 공자와 같은 경지에 이른 자에게 적용되는 말이지 생에 대한 방황과 고통이 가장 심한 때가 아니던가요.   기실 40대는 갈등의 세월이지요. 올라온 생만큼 다시 내려가야 하는 분기점이기도 하고요. 삶에 대한 회의가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하며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시기이기도 하지요. 박영덕은 해야 할 일들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지고 미래에 대한 설계보다는 과거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어찌 그리움만 있었겠습니까. 앞날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이 삶을 뒷걸음치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생은 갈수록 경직돼 가고 타인과 부대끼기를 거부하는 완고함으로 자기 성 쌓기에 급급하게 되었겠지요. 박영덕은 그래서 50이 되기를 또 바랐습니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또 50대에 걸면서 말입니다.    이런 세대별 생의 부침과 매듭을 겪으면서 박영덕은 생의 중심점을 문학에 깊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흔에 들어선 그녀에게 글쓰기는 절반은 구속으로 다가왔고 절반은 구원으로 다가왔다고 말합니다. 문학이 박영덕에게 운명인지 숙명인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구원이 될 거라는 믿음은 확실합니다. 문학의 치열성 때문에 고통을 겪고 생의 무늬닦기와 성찰을 위해서 무두질을 하다 보니 구속감을 느꼈을 것이고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한 삶의 활력을 문학에서 찾으려고 하니 문학은 자연 삶의 구원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한데 삶의 망루에서 내려다보니 영혼은 생기를 잃고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또 다른 자각이자 생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지금까지의 시간은 거울 속의 모습처럼 웃는 모습이라면 나머지 뒷모습은 잘 닦이고 빗질된 아름다운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은 생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함께 문학에 대한 견고한 의지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박영덕 문학의 내공과 철학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박영덕이 문학 동네에 발목을 디민 때는 사십대였다고 술회를 합니다. 기대와 실망을 지닌 40대는 그래도 박영덕의 삶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행복한 때라 여겨집니다. 문학을 숙명처럼 만난 때였기 때문입니다. 삶의 길목에서 가슴을 움켜잡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난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것이 설령 고통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시기가 지내놓고 보면 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산 때가 됩니다. 결국 지내놓고 보면 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안고가야 한다는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40대는 예배 같은 시간이었고 정화하는 기도의 때가 될 수 있습니다. 박영덕에게 40대는 구속이자 구원이었지만 문학의 힘은 40대에서 시작되었으니 60대가 돼서 망루에서 내려다본다면 박영덕에게 문학의 꽃은 찬란하게 다가오리라 여깁니다.   박영덕에게 문학이 구속뿐이었다면 후배의 말처럼 절필했을 것이지만 구원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박영덕 문학의 열매는 갈수록 올곧고 단단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기계론적 세계관과 학습에 의해 상식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건너뛰었을 때 박영덕의 문학은 더욱 완숙되어 절정을 이룰 것입니다. 나아가 박영덕의 구원의 문학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독자를 위해서도 유효하리라 여깁니다. 문학은 현실의 제약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내일의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구원의 기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절제의 언어  ‘파도의 언어’를 읽고 김상희가 단단하며 만만치 않은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희는 수필적인 언어는 아끼며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굳게 믿으며 여백과 함축의 아름다움을 수필의 미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당연하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또한 주변의 미세한 소리나 감각, 현상이나 사물에도 소홀히 지나치지 않고 소라고동처럼 눈과 귀를 열어놓고 사물과 현상을 받아들여 걸러내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미덥습니다. 단단한 작가정신과 치열한 수필정신으로 무장한 작가입니다.   김상희의 ‘파도의 언어’는 작가 자신의 수필론이자 수필을 쓰는 사람들을 향한 조용한 외침입니다. 여운은 독자를 위한 배려이고 함축은 문학적 형상화를 위한 장치입니다. 산들바람이 무풍지대의 파도를 일으켜 먼 항해를 거쳐 동해의 남단 외진 바닷가에 도달해 ‘차알삭’하는 마지막 속삭임으로 남듯이 여백과 함축미를 지닌 수필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지만 글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하찮은 소재가 한 편의 글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파도의 언어’를 통해 구현해 놓고 있습니다. 즉 문학 작품을 통해 원초적 이미지를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변용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는 역동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삶과 자연의 현상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작가의 모습은 잡사만을 쓰려는 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소재의 본질을 파고 내려가서 영혼과 만나려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가 엿보입니다. 소재는 늘 가시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김상희는 형체가 없는 바람에게도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람의 존재를 다른 사물을 통해서 보려는 소재 탐색의 진지함도 엿보입니다. 나뭇잎에서, 깃발에서, 눈송이의 원무에서도 소재의 변형된 모습을 보려는 작가의 소재잡기는 집요합니다. 또한 소재의 변형된 이면을 보려는 시선도 날카롭습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수필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사물만을 소재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김상희의 또 다른 작가적 힘이 엿보입니다.   문학은 인간의 가치 있는 체험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문학은 인간계과 자연계 등 모든 것이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지만, 작가의 주관적인 경험만으로는 문학작품으로 연결짓기에는 무리입니다. 소재를 통해 다른 이면을 유추하기도 하고 숨은 그림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통해 바닷새도, 달도, 외로움도, 포용도, 양보도 그려내야 합니다. 또한 바람을 통해 평화도, 공포도, 강인한 의지도, 아름다운 사랑도, 공포와 참상까지 보아야 합니다. 탐욕도, 천진무구도, 고운 마음씨도 읽어내야 합니다. 소재의 겉모습, 즉 작가의 가슴에서 발효되지 못하고 날것 그대로 밋밋하게 써지는 수필을 작가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한 주제에 대해 진지한 탐구를 착수하기 전에 그 주제를 비켜 바라보거나, 그것과 먼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광범위한 관점에서 뒤틀어보거나 꼼꼼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도에서 인 바람이 수많은 과정을 겪고 동해 바닷가에 도착해서 토해낸 말은 그저 ‘차알삭’ 한 마디뿐이어야 한다는 표현 속엔 언어의 절제와 내용의 함축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체험이 응축되고 미세한 감정과 예지가 융합된 가장 소중한 달관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파도는 한 마디 화두를 던지고 물러나는 여운을 독자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치밀하고 치열하며 융화된 언어로 발효된 체험을 절제의 언어로 표현해야 독자에게 울림을 주고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글이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많은 수필가들에게 쉽게 언어를 부리지 말기를 에둘러 말하고 있습니다. 김상희는 수필의 언어를 체득한 작가로 제 멋에 겨워 아무렇게나 써내고 발표하는 일부 수필가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고 겸손하게 말입니다. 김상희의 다른 글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반의 언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의 작가 이정숙은 문학을 생의 도반으로 여깁니다. 문학 때문에 현실적 삶에서 욕심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으며 산통을 겪지만 이도 은혜라 여기고 운명처럼 받아들이겠다는 다부진 작가정신입니다. 다른 것은 대충하더라도 글쓰기만은 치열하게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삶의 갈증이 풀릴 것 같다고 여기면서요. 오랜만에 비가 오고 유리창을 말끔히 닦아내듯이 문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의 창을 응시합니다. 일상에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찾아보지만 언제나 그날이 그날인 것이 불만입니다. 소시민적인 닳아 가는 삶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불꽃이 튀는 정열적 삶을 꿈꾸어보지만 언제나 방황으로 끝이나 불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야무지게 살고 있는데 자신은 언제나 그 자리라고 자신을 탓하기도 합니다. 욕심뿐 주변에서 밀려나 변방을 떠돌고 있는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어찌 이정숙의 삶뿐이겠습니까. 대부분의 삶이 그렇고 조금 다른 삶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대동소이합니다. 이정숙의 이런 생각은 자의식이 강하고 문학에의 욕심이 불러온 치열한 실존적 인식 때문입니다.   갈수록 생활에 자신감을 잃게 되자 이는 체계성 없는 생활과 게으름 때문에 쉬 기존의 안주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기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활력을 일상보다는 문학에서 찾고자 합니다. 일상은 생존을 위한 일이고 문학은 스스로를 구원해 주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말 욕심내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하나만 선택한다면 단연 글쓰기라고 여깁니다.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며 스스로를 닦달하는 것은 역시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처럼 문학이 턱하니 안겨들지를 않습니다. 이는 여지없는 문학에의 짝사랑입니다. 작가는 이것이 그 동안의 글쓰기가 겉핥기였다고 스스로를 질책하게 됩니다. 글쓰기에 대한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도 쉽게 오아시스만 찾으려는 안이한 태도 때문이라 여깁니다. 노력을 하지 않고 능력 밖의 욕심을 부린 때문이라고 자신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작가가 자신 있게 내세울 일이라고는 개떡 찌는 일인데 단순한 이 일도 10년이 넘어서야 어느 정도 터득하지 않았던가요. 개떡 찌는 일도 이럴진대 고도의 정신작업인 문학은 얼마나 많은 고뇌와 문장 수련이 있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작가의 체험이 문학적 형식이나 방법에 따라 재구성되어 작품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점을요. 그래서 글 욕심 이전에 글을 쓰기 위한 바탕을 마련하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늘 밖에서 서성거리는 글감을 안으로 끌어들여 발효시켜 보려 합니다. 글쓰기가 녹록치 않음을 깨달은 겁니다. 아니 쉽게 글을 써 내놓을 수도 있으련만 작가는 수필에 치열성을 지니고자 합니다. 수필을 끌어안고 평생의 도반으로 여기며 문학을 운명처럼 주어진 숙제로 여기며 살려 합니다. 문학에의 길이 고통일지언정 은혜라 여기며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삶에 태클 거는 일도 참 많을 텐데 문학에 대한 태도가 참 열정적이고 진지합니다.    어찌 보면 수필쓰기는 생존에 비하면 사치이며 잉여일 수도 있습니다. 글보다 밥이 수필집보다 몸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밥과 몸이 수필쓰기의 토대가 되듯이 이제 이정숙의 글쓰기는 삶의 든든한 토대가 될 것입니다. 일상의 삶 위에 문학적 삶을 지향하려는 작가의 눈물겨운 고뇌와 다짐이 앞으로 그의 문학의 성을 밀도 있고 견고하게 쌓아 가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시련의 문턱을 건너면 문학이 고통과 구속에서 벗어나 삶의 활력과 재미를 주는 유쾌한 작업이라 여기게 될 날이 분명 오리라 믿습니다. 그때 가서는 그에게 문학은 유미적이고 자유로움으로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3. 나가기     위 세 작가의 글이 필자의 눈길을 끈 이유는 글쓰기의 진지한 자세와 어려움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분 다 여류들로서 수필쓰기의 고뇌와 자세를 쓴 글들이어서 꼼꼼히 몇 번씩 읽어보았습니다. 글의 미학적 구조나 내용과 문장에 앞서 견고한 글을 쓰기 위한 세 작가들의 내적 고뇌와 그 문학이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박영덕의 ‘절반은 구속 절반은 구원’, 김상희의 ‘파도의 언어’, 이정숙의 ‘내가 하고 싶은 것’ 세 편은 글쓰기가 자유롭고 유쾌한 삶의 구속이 되기도 하고 구원이 되기도 하지만 치열한 글쓰기를 통해 수필을 생의 도반으로 여기며 평생의 반려로 삼겠다는 다부진 작가 정신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들의 말처럼 수필은 작가에게 구속과 구원도 되고, 절제의 미덕을 가르치는 도구도 되며, 생의 도반으로 동반자가 되기도 합니다. 어찌 이들뿐이겠습니까. 많은 수필가들이 밥이 되지도 못하는 수필쓰기에 날밤을 바치는 것도 바로 이점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수필가들의 폭발적 증가로 내 멋과 맛에 쓴 글을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내보내 그야말로 문학작품인 수필은 쓰러지고 허명뿐인 수필가란 이름만 남기는 사람들이 많은 이 때, 이러한 견고한 문학정신은 귀하디귀한 문학적 자세들임에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세 분 여류의 짱짱하고 단단한 문학적 삶과 문학에의 치열한 정신은 독자들에게 수필의 격을 높여줄 것이며 이들이 써 낸 글들은 분명 수필의 문학성을 충분히 갖추리라 믿습니다. 세 분 여류의 문학적 정신과 자세에 경의를 표하며 앞날의 문운이 창대하기를 바라며 다음 글을 기대해 봅니다. 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다. 수필문학은 항간에 그것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란 그릇된 이해와 인식을 가져 왔다. 그것은 수필을 사전적 의미에만 국한하여 ‘붓 가는 대로’의 정도로만 이해하여 왔거나 또는 ‘어떤 주의가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 글’ 이라든지 ‘그때그때 본대로 들은 대로 붓 가는 대로 적어낸 글’이라고 하는 사전적 의미에 매달려 왔던 것이 사실이다. 수필 어원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최초 문헌으로 중국 남송 때의 홍매에 의해 정의된 용재수필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이 용재수필에서 ‘나는 게으른 버릇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으나, 그때그때 혹은 뜻한 바 있으면 곧 기록하였다. 앞뒤의 차례를 가려 갖추지도 않고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수필이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양에서 에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자기 작품에 붙인 이는 프랑스의 몽테뉴다.(Les Essais : 수상록 1580) 그 후 2년 뒤 영국의 베이컨에 의해 에세이가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필의 개념을 사전적 의미에서만 국한하여 해석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광섭은 그의 ‘수필문학 소고’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오늘까지의 위대한 수필문학이 그 어느 것이 비록 객관적 사실을 취급한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닥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히 짜아 내는 심경적이 아니요 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수필은 시에 가깝다. 그러나 시 그것은 아니다.’ 라고 수필을 정의 내린 바 있다. 바로 이러한 김광섭의 정의에서 일부 사람들이 자구 해석에 급급하여 수필 문학의 성격을 호도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철의 말(문학개론 p353) 대로 ‘수필은 산문으로 씌어진 문학이며 그것이 아무리 무형식이고 개인적이라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우성(對偶性)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이 수의수제(隨意隨題), 또는 자조(自照)의 문학이니 하는 바와 같이 자유로운 산책이거나 그때그때 뜻한바 있으면 앞뒤의 차례를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바로 메모하여 놓은 것 정도로 정의 할 수 있을 것인가는 다시 한번 음미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상렬은 (수필 창작과 읽기)이러한 수필의 개념상 해석의 호도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수필이 문학임에 틀림이 없다면 그것이 어찌 붓 가는대로 씌어질수 있을 것인가? 또 실제로 붓 가는 대로 씌어진 글을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천래의 영감을 지닌 작가라 할지라도 그저 붓 가는 대로 쓴 것이 한편의 완벽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어불성설이다. 김광섭교수나 김진섭교수 그리고 피천득의 수필에 대한 정의를 수필문학이 여타의 장르와 달리 자연스러움과 진실성을 요구한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형식적 제약을 무시한 글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견해가 수필문학의 정의인 듯 오해를 불러온 것은 진정한 수필의 개념 파악도 없이 표피적 해석에 그쳤던 논자들이나 작가들의 잘못된 인식의 탓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결국 수필문학은 평범 속에서 비범함, 그리고 평이함 속에 어려움, 자연스러운 가운데 세련됨, 거침없는 듯 하면서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문학이라 할 것이다. 필자도 이 말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향금 횡행하고 있는 신변잡기식의 글이나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난무하고 있는 작금의 수필문단의 공해성에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 따라서 수필을 쓰고자 하는 작가는 우선 이러한 신변잡기식의 공해에서 탈피하여 근원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원형을 탐색하고 천착해야만 할 것이며 보다 진솔한 자기성찰과 고뇌에 찬 직관과 깊은 관조가 있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에게 감동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손가락 끝에서 부려지는 기교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쓰는 글이어야 할 것이며 어느 누가 읽어도 은은한 감동으로 여울져 오는 글이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 편의 수필은 그 속에 작가 자신의 인생관이 담긴 비평정신이 깃들어야 할 것이며 작가자신 해박한 지식과 넉넉한 정서와 문학적 감성, 그리고 사상이 깃들어야 할 것이다. 흔히들 범람하고 있는 자신의 신변 잡기성 자랑거리의 나열과 넋두리의 나열, 입심 좋은 사람들의 푸닥거리의 장이 되어서는 더욱이 안 될 것이며 음담패설이나 상대방의 약점이나 잘못됨을 물고 늘어지는 독설과 아집의 사설장이 되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수필들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신변잡기적이라고 비하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독자는 한편의 수필이 작가 자신의 현실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상의 의미화 과정과 내적 승화를 통해 완성된 작품을 읽음으로써 작가 자신의 주장과 공명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필 개론 (隨筆槪論) [1]. 수필의 본질 1. 수필의 정의 수필은 인생이나 자연에 대하여 느낀 바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부담 없이 산문으로 쓰는 글이다. 2. 수필의 어원 (1) 중국에서의 어원 : 남송시대의 홍 매(洪邁; 1123∼1202년)가 '수필(隨筆)'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 그의 저술'용재수필(容齋隨筆)'의 서문에서, 저술 제목에 '수필'이란 말은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습성이 게을러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뜻하는 바를 따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썼기 때문에 수필이 라고 한다." (2) 서양에서의 어원 ①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수필이라는 용어는 영어 '에세이(essay)'를 번역해서 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essay'는 'assay'에서 비롯된 말인데, 'assay'는 '시금(試金)하다', '시험하다'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또 이 'assay'는 프랑스 어'essai'에서 왔으며, 'essai'는 '계량하다','음미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 'exigere'에 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② 이러한 뜻의 '에세이'라는 용어를 실제 작품에 처음 쓴 사람은 몽테뉴다. 몽테뉴는 1580년 'Les Essais(수상록)'라는 수필집을 출판하였다. 현재 사용하는 에세이라는 용어는 몽테뉴로부터 비롯된다. 3. 수필의 역사 (1) 서구 ① 근대 이전 : 고대에는 플라톤의 '대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등에서 수필 형식을 찾을 수 있으며, 본격적인 수필은 16세기에 들어와 몽테뉴의 '수상록(隨想錄 Les Essais)'에서 시작되어서 베이컨으로 이어진다. ② 근대 : 18세기에 영국의 수필가 차알스 램의 '엘리아 수필'과 해즐리트의 '탁상담화(卓上談話 : Tavle Talk)'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2) 우리 나라 ① 고려 시대 : 이제현(李霽賢;1287∼1367)의'역옹패설(轢翁稗設)',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백운소설(白雲小說)' 중의 일부에서 수필 형식의 글을 찾을 수 있다. ② 조선 시대 : 조선 시대에는 수필 형식의 글이 문집속에 잡설(雜說), 만필(漫筆)등의 용어로 많이 쓰여졌는데, 문헌상 '수필'이란 용어가 보이는 것은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속에 '일신수필(일신수필)'이란 말이 들어 있는 것이 최초이다. 4. 수필의 특성 (1) 자유로운 형식 : 형식이 다양하다는 뜻이며,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수필은 무형식의 자유로운 산문이다. 이것은 수필의 특성을 말할 때에 누구나 가장 먼저 말하는 것으로, 수필은 구성상의 제약이 없이 자유롭게 쓰여지는 산문임을 뜻한다. 수필은 일기체, 서간체나 담화체로도 쓰이며, 그 밖에 갖가지 산문으로 쓰여진다. 내용면에서도 인간이나 자연에 관한 어느 것 한 가지만을 다루는 수도 있고, 여러가지를 생각나는 대로 토막토막 다루는 수도 있다. 수필 작품에 '단상(斷想)','편편상(片片想)','수상(隨想)'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 것은 수필 문학의 이런 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2) 다양한 소재 : 인생이나 자연 등 소재를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다. 수필 문학은 그 소재가 대단히 광범위하다. 수필은 그 작자가 인생이나 사회, 역사, 자연 등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느낀 것, 생각한 것을 무엇이나 다 그때 그때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자유자재로 서술하는 것이므로, 그 소재는 대단히 다양하다. (3) 개성적 고백적인 글 : 글쓴이의 개성과 적나라한 심성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문학이다. 수필의 내용은 다분히 주관적, 주정적이고, 독백에 가까운 것이 많다. 수필의 대부분은 작자 자신의 생활이나 체험, 생각한 것이나 느낀 것을 붓 가는 대로 솔직하게 서술한 글이다. 따라서,주관적, 주정적이고 독백에 가까운 것이 많으며, 이로 인해서 수필 작품에는 작자 자신의 인생관이라든가 사상이나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수필을 가리켜 '개성의 문학'이라고도 말하는 것은, 이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수필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아무리 그 길이가 짧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매우 심오한 것, 광범위한 것이 많다. (4) 심미적 철학적인 글 : 흔히 글쓴이의 심미적 안목과 철학적 사색의 깊이가 드러나는 글이다. 현대에 와서는 어떤 문학 양식이든지, 그 제재에 구속을 받는 일이란 거의 없다. 삼라 만상이 다 문학의 제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재가 다른 문학 양식에서는 기법과 융합되어 함축적어어야 하지만, 수필의 제재는 생생하고 단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수필이라는 이름 아래 과학론, 철학론, 종교론 등을 피력할 수도 있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을 고백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수필의 제재는 무한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모든 제재가 그 자체로 수필이 될 수는 없고, 거기에는 지은이의 투철한 통찰력, 달관에 의한 독특한 기법 그리고 문장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5) 유우머 위트 비판 의식이 요구되는 글 : 때론 글쓴이의 유우머와 위트와 비판 의식이 나타난다. 유우머, 위트, 비판 정신, 이런 것들은 다른 문학 양식에서도 나타나지만, 어떤 사건의 구성이 없는 수필에서는 특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유우머나 위트는 수필의 평면성, 건조성을 구제해 주는 요소이며, 비평 정신은 수필의 아름다운 정서에 지적 작용을 더해 주는 요소이다. (6) 간결한 산문의 문학 : 수필은 간결한 것이 특색이며 산문으로 씌어진다. 수필은 비교적 길이가 짧은 산문이다. 근래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수필 작품의 길이는 2백 자 원고지로 5매 정도에서 10여매 정도인 것이 많다. 산문 문학의 다른 쟝르에 속하는 작품들, 예컨데 소설 작품이 2백 자 원고지로 짧게는 몇십 매에서 길게는 몇천 매에 이르는 것을 보면, 수필은 대단히 짧게 씌여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7) 비전문성의 문학 : 생활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오늘날 문학의 여러 쟝르 가운데서 수필 문학은 가장 대중적이다. 근래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필 자굼의 예를 다시 들어 보면, 전문적인 문학인의 것보다 비전문적인 필자들의 것이 훨씬 더 많으며, 독자들 또한 어떤 특수한 분야나 계층의 사람들이 아닌 대중이다. '수필'하면 대개는 누구나 쓸 수 있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5.수필의 요건 (1) 수필은 자연 발생적이고 지속적인 관찰력을 필요로 한다. (2) 사색과 명상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사색의 체계이다. (3) 가치 감각과 느낌, 공감력을 가져야 한다. (4) 개성의 발로이되, 겸허하고 품위 있는 개성의 반영이다. (5) 수필은 문학성을 지녀야 한다. [2] 수필의 내용 1. 수필의 내용 (1) 일상 생활, 자연 및 사회 현상에 관한 관찰과 생각, 느낌 등. (2) 독자는 위의 것들에 관한 정보(지식)와 교훈, 정서를 얻는다. (3) 수필의 내용에는 감동과 해학이 따른다. 2. 수필의 소재 (1)체험(體驗) : 생활해 가면서 특별히 겪은 일. 예) 여행, 사랑, 직업, 학업 등. (2)관찰(觀察) : 무엇에 대하여 유심히 살핀 일이나 대상. 예)사회, 자연, 환경 등. (3)독서(讀書) : 책을 읽고 느낀 내용이나 방법. 예) 독서론, 독후감(독서 감상문) 등. (4)사고(思考) : 인생이나 가치관에 대하여 생각해 낸 일. 예)죽음, 인생, 종교 등. [3] 수필의 갈래 1. 수필 문학의 분류 한 마디로 수필 문학이라고는 해도,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로 세분해서 말하게 된다.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옛 한문 수필 작품에 있어 기(記), 록(錄),문(聞), 화(話)등,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의 말이 쓰인 것도, 이를테면 수필 작품을 세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흔히 경수필(輕隨筆:informal essay 또는 miscellany)과 중수필(重隨筆:formal essay)로 구분하였다. 2. 수필의 종류 (1) 태도상의 종류 ① 경수필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미셀러니(miscellany). 감성적, 주관적 성격을 지니되, 일정한'주제보다 사색이 주가 되 는 서정적 수필이다. 비정격 또는 비격식 수필이라고도 한다. 예) 정비석의 '들국화' 등. ② 중수필 포멀 에세이, 에세이, 지성적, 객관적성격을 지니되, 직감적, 통찰력이 주가 되는 비평적인 글로서, 논리적, 지적인 문장이다. 정격 또는 격식수필이라고도 한다. 예) 조연현의 '천재와 건강' 등. (2) 내용상의 종류 ① 사색적 수필(思索的隨筆) : 인생의 철학적 문제를 다룬 글이나 감상문 따위. ② 비평적 수필(批評的隨筆) : 작가에 관한 글이나,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소감을 밝힌 글. ③ 기술적 수필(記述的隨筆) : 주관을 배제하고 실제의 사실만을 기록한 글. ④ 담화 수필(譚話隨筆) : 시정(市井)의 잡다한 이야기나 글쓴이의 관념 따위를 다룬 글. ⑤ 개인적 수필(個人的隨筆) : 글쓴이 자신의 성격이나 개성, 신변 잡기 등을 다룬 글. ⑥ 연단적 수필(演壇的隨筆) : 실제의 연설 초고는 아니나, 연설적, 웅변적인 글. ⑦ 성격 소묘 수필(性格素描隨筆) : 주로 성격의 분석 묘사에 역점을 둔 글. ⑧ 사설 수필(社說隨筆) : 개인의 주관이나 의견이긴 하지만, 사회의 여론을 유도하는 내용의 글. [4] 수필의 구성 1. 수필의 구성 (1) 3단 구성 : 서두(도입, 起)+본문(전개,敍)+결말(結)[중수필의 경우] (2) 4단 구성 : 기(起)+승(承)+전(轉)+결(結)[중수필의 경우] (3) 자유구성 : 자유로운 구성[경수필의 경우] 2 수필의 짜임 (1) 직렬적(直列的)인 짜임 'A→B→C →주제'와 같이 수필의 각 부분인 A,B,C 등이 인과(因果)나 시간적 순서, 공간적 순서 등의 유기적인 관계에 놓이는 짜임이다. 이 짜임의 전형은 '서두 본문 결말'로 짜이는 3단 구성인데, 가운데 부분인 '본문'은 또 몇 부분으로 분화되기도 한다. (2) 병렬적(竝列的)인 짜임 'A+B+C →주제'와 같이 수필의 각 부분인 A,B,C 등이 서로 유기적 관계가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주제에 봉사하는 짜임이다. 이 짜임은 연시조의 짜임과 같은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리를 바꾸어 놓아도 주제에 봉사하는 기능은 마찬가지가 된다. (3) 혼합적(混合的)인 짜임 'A→B+C→D →주제'나 'A→B+C→D→E + F→G 주제'와 같이 직렬적인 짜임과 병렬적인 짜임이 한 편의 수필에 섞여 있는 짜임이다. 이 짜임은 전체적으로는 직렬 구성이나 일부는 병렬 구성으로 된 경우와 전체적으로는 병렬 구성이면서 그 부분 하나하나는 직렬 구성으로 된 경우 등이 있다. [5] 수필의 진술 방식 진술 방식의 면에서 보면, 수필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분된다. 즉, 교훈적(敎訓的) 수필, 희곡적(戱曲的) 수필, 서정적(抒情的) 수필, 서사적(敍事的) 수필로 나눌 수 있다. 1. 진술 방식에 의한 수필의 종류 (1) 교훈적 수필 필자의 오랜 체험이나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수필. 수필로서는 그 내용이라든가 문체가 다 같이 중후하며, 필자 자신의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신념과 삶의 태도 등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수필 문학에 있어서의 교훈적인 경향은 이른바 교훈주의를 생각하게 한다. 즉, 문학 예술은 독자에게 쾌락보다는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창작된다고 보는 일종의 공리설(功利設)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시나 소설에서처럼 수필에 있어서도 이런 교훈적인 경향에 있어서는 자칫 예술성을 소홀히 하게 되는 예가 많다. 소(牛)의 덕성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우리 인간들이 본받을 것을 권장한 이 광수의 '우덕송(牛德頌)'. 일제 치하라는 30년대의 암담한 시점에서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우고 있는 심 훈(沈熏)의 '대한의 영웅' 나무의 덕성을 찬양하면서 인간이 그것을 배울 것을 강조한 이 양하(李敭河)의 '나무' 혼란한 사회에서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는 태도를 제시한 이 희승(李熙昇)의 '지조(志操)' 등. (2) 희곡적 수필 필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체험한 어떤 사건을 생각나는 대로 서술하되, 그 사건의 내용 자체에 극적인 요소들이 있어서, 대화나 작품의 내용 전개가 다분히 희곡적으로 이루어지는 수필. 사건의 전개가 소설에서처럼 유기적, 통일적인 진행을 이룬다. 그리고,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문장에 있어 극적 현제의 시제가 흔히 쓰인다. 즉, 현제 시제를 사용한다. 필자가 어떤 곤란을 겪게 될 때나 슬픈 일을 겪게 될 때,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보여 주는 점에서 각별한 흥미를 끈다. 자신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기이했던 탓으로, 어떤 낯 모르는 여인에게 자칫 불량배로 오해받을 뻔한 수모를 당한 체험담을 쓴 계 용묵(桂鎔默)의 '구두'. 낯선 산에서 길을 잃고 죽을 뻔한 조난의 체험을 쓴 이 숭녕(李崇寧)의 오봉산 등산기 '너절하게 죽는구나'. 김 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 등. (3) 서정적 수필 일상 생활이나 자연에서 느끼고 있는 감상을 솔직하게 주정적,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수필. 문장은 흔히 서정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서정의 내용은 정서, 즉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 욕(欲) 이라고도 설명된다. 교훈적 수필에 공리성이 강하다면, 서정적 수필에는 예술성이 강하다. 그것은 작자의 의도가 자기의 정서적 경험을 독자에게 전달해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으므로 표현에서 주로 기교에 유의하는 것과도 관련된다. 이 효석의 '청포도(靑葡萄)의 사상(思想)', '화초(花草)', 이 양하의 '신록 예찬(新綠禮讚)', 김 진섭의 '백설부(白雪賦)', 이병기의 '백련(白蓮), '난초(蘭草)' 등. (4) 서사적 수필 인간 세계나 자연계의 어떤 사실에 대하여 대체로 필자의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수필.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 또는 현실에 가까운 것인가, 서술이 얼마나 정확한가 하는 문제가 따르게 된다. 이런 작품을 쓰려면 평소의 날카로운 관찰, 세심한 조사,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유명한 작품으로 최 남선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覲參記)' '심춘순례(尋春巡禮)' 이 광수의 '금강산 유기(金剛山遊記)', 이 병기의 '낙화암을 찾는 길에'. 김 동인의 '대동강', 노 천명의 '묘향산 기행기' 등이 있다. 이 밖에 필자 자신의 학문에 대해 다양하게 술회하고 있는 양 주동의 '연북록(硏北錄)', 옛날의 선비들에 대해서 뛰어나게 묘사한 이 희승의 '딸깍발이'등이 서사적 수필로 분류된다. [참고] 김광섭(金珖燮) - 「수필 문학 소고(小考)」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고,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위대한 수필 문학이, 그 어느 것이나 비록 객관적 사실을 다룬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딪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하게 짜내는 것이라기보다,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수필은 시에 가깝다.. 그러나 시 그것은 아니다. 시나 소설이나 희곡은 동일한 작자에 의해 씌어졌다 하더라도, 그 태도가 각각 서로 다르다. 시는 심령이나 감각의 전율된 상태에서 비롯되며, 소설과 희곡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을 바탕으로 한다. 무심히 생활 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을 때, 수필은 제작되는 것이다. 제작이라고 하나, 의식적 동기에서가 아니요, 결과적 현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논리적 의도에서 제작된 일은 없다. 수필은 써 보려는 데서 시작되어 자연스럽게 씌어진 글이다. 시나, 소설이나, 희곡은 글을 써 보고자 하는 한가로운 마음으로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의식적으로 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試筆)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필은 수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가 운율적, 정서적이요, 희곡이 조직적, 활동적이라면,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형식에서 보면, 수필에는 시나 소설이나 희곡에서 보는 바와 같은 어떤 완성된 형식이 없다. 단편 소설을 제작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에드거 앨런 포나 안톤 체흡이나 혹은 모파상에게 잠시라도 사숙하여야 하겠고, 시나 희곡을 지으려면 괴테나 셰익스피어나 혹은 입센등을 통해 그 완성된 형식을 한번 살펴볼 아량쯤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필에 있어서 그 형식을 구하거나 참고하려고 찰스 램이나 해즐리트를 찾을 필요성까지는 없을 것같다. 가장 아름다운 수필을 찾아 우리의 문학적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점은 찬(讚)하여 마지아니할 바이나, 그 형식의 섭취에 구속될 바는 없는 것이다.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듯이 붓을 잡아야 한다. 한가로운 기분을 지니면서도 진실된 마음으로 한 편의 문장을 쓸 때,그것은 곧 수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다. 이것은 수필의 운명이요, 또한 성격이다. 한 시대나 한 세기의 시, 소설, 희곡은 내용이나 형식으로 보아, 개괄적으로 몇 가지의 주류로 나누어 논할 수 있다. 그것은 이들 문학 형태가 모두 시대 사조나 사회 의식에 연결되어 발전, 쇠퇴하는 특징을 가진 까닭이다. 하지만 수필은 생활 단면에 부딪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렇게 커다란 조류를 따르지 않는다. 가을 밤 무심히 잡은 펜으로 가지가지의 아름다운 서정을 느끼는 대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사소하나마 매력 있는 제목을 붙잡고 시종이 없을 드한 기분으로 표현, 향락할 수도 있겠고, 야시의 풍경에서도 흥미진진한 글 한 구절은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필은 참고서를 구하거나 지식의 정돈을 요할 바는 아니지만, 어딘가 탁마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수필은 잡다한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다다러하도,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 이천성스런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속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수필은 그저 무미 건조한 생활적, 심경적 기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유머와 위트가 수필의 속성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솜씨 좋게 짜여서 섬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위대한 문학으로서의 수필에는 유머와 위트가 수필의 속성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솜씨 좋게 짜여서 섬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위대한 문학으로서의 수필에는 유머와 위트가 혼연히 숨어 있어서, 더욱 우리를 매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결국 사람에게서 생겨서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소설이나 희곡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수필보다 우월하며 향상성이 많다거나, 혹은 수필이라는 산만하여 보이는 어의에서 오는 선입견때문에, 그것이 발전성이 적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어떤 사회이건 그것이 인간의 사회요 인간으로 구성되는 이상, 수필은 전인격적 표현의 문학으로 어느 사회에나 존재할 것이다. 수필은 개성적 심경과 기분에 싸여서, 어떠한 대상이나 또는 문제를 간단하게 단편적으로 그리면서도, 진지하게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 그 내용이 정치 경제로 향하든지 사회 문제나 생활 개선으로 향하든지, 그것은 평론의 논리성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평론이 가질 수 없는 깊은 영역을 포괄한다. 그리고 수필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완성을 기다리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그 자체로서의 완결된 형태를 지닐 수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 인간에 있다면, 자연스럽게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문학 형식은 수필을 두고 달리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수필의 맛은,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문제나 어떠한 대상에 작자의 기분이 부딪쳐서 표현되는 인간미에 있다. 인간의 생활이란, 요컨대 수필의 심경에서 성숙된다. 다시 말하면, 생활은 시와 산문의 조화를 통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학으로 볼 때 곧 수필이 된다. 그러므로 수필의 성격은 인간의 성격이라 하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바로 잡아야 할 수필의 개념 (鄭木日) 수필의 개념과 성격에 대한 정의(定義)로 고정 관념화 돼온 것들이 있다. '여기(餘技)의 문학', '붓가는 대로 쓰는 글', '산만과 무질서, 무형식의 글', '40대의 문학'등이다. 그러나, 현대에도 수필에 대한 이같은 개념들이 타당성을 갖고 있는가, 재점검해 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수필의 개념들은 30년대에 정립된 것으로,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여기(餘技) 삼아 수필을 써 왔던 때에 이뤄졌다. 당시엔 본격적 문학의 대상이 아니라, 여유가 있으면 쓰는 '붓가는 대로 써지는 글' 쯤으로 가볍게 인식하였던 게 사실이다. 문학평론가 조연현(趙演鉉)씨가 수필은 '비전문 문학'이다 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문단에 수필가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신춘문예, 종합 문예지들이 문단 데뷔 종목에 '수필'을 포함시켜 전문 수필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 시점(時點)은 우리 수필문학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종전까지 '주변문학', '아웃사이드 문학' '비전문 문학' '여기의 문학'으로 수필을 경시해 오던 문단의 인식변화를 보여준 것으로 대등한 문학 장르로서 공인하는 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현대의 다양한 삶의 양식, 고학력화 속에서 생산자인 작가와 소비자인 독자로 나눠졌던 엄격한 구별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문 직업인들과 독자들도 자신의 삶을 기록하거나 작품화하여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애매해지면서 생활 속의 문학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추세 속에서 픽션보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 논픽션인 「수필」이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게 되었다. 수필이 대중적인 문학, 삶의 문학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현대인들의 자의식이 높아진 점, 시와 소설의 중간 위치에서 양 장르의 장점을 취하면서 대중들의 구미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시의 압축, 비유, 절제, 리듬을 살리면서 소설의 사실, 설명, 묘사, 구성법을 활용하고 시의 난해성과 의사 전달력의 취약성, 소설의 읽기의 시간 부족에서 벗어나 적당한 독서물로써 '수필'이 대중 속에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수필문학은 「여기(餘技)의 문학」 「주변문학」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삶과 직결된 문학 장르로서 자리 매김과 함께 미래문학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수필의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향상이 따르지 못한 점, 수필문학을 본격적 문학으로 보지 않는 문단의 사시적 시각을 바로 잡지 못한 데 대해서는 수필문단은 진지한 성찰과 각성이 필요하다.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 투철한 작가 정신, 치열한 창작열, 전문성 등과 함께, 고정 관념화 돼 온 수필의 개념 및 정의에 대해 과감한 수정과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첫째, 수필은 「여기의 문학」이 아니다. 수필은 '여기의 문학'이라 했던 것은 농경시대의 사고(思考)이며, 당시 시, 소설, 평론을 썼던 문인들이 본업 외 시간이 날 때, 여기로 수필을 써 왔기에 어느새 '수필=여기의 문학'으로 굳어진 것이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수필가가 배출되기 시작했고 오늘의 수필가들은 '여기'로 수필을 쓰고 있지 않다. 시와 소설이 치열한 삶과 다양하고 복잡다난한 시대상, 사회상을 수용하는데 비해, 수필이 다소 느긋하게 한 걸음 물러서 인생을 바라보는 면도 없지 않으나 종전처럼 '여기의 문학'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수필도 시와 소설처럼 치열성, 실험성, 본격성, 전문성, 개성, 참신성을 추구해 나가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여기(餘技)의 문학'으로 안주한다면 생존이 불가능해진다. 무한경쟁과 무한 변화 속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현대에서 「여기」로 멈춰 있는 것은 생존 이유를 상실하는 것과 다름없다. 시대상과 삶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수필은 더욱 치열성, 전문성, 본격성, 개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글'(김광섭 「수필문학 소고」) 이라는 개념은 수정돼야 한다. 이와 같은 개념은 '隨筆'이란 어원의 해석에서 나온 말이 굳어진 것이다. 수필을 '여기의 문학'으로 알던 농경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물론 수필의 형식상 자유스러움을 말하는 부분이 있지만, '마음대로 쓴 글' '아무렇지 않게 쓴 글' 로 인식되어 수필을 폄훼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다.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오랜 인생수련과 습작을 통해 고도의 구성과 표현 기법과 질서를 획득하여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써 내려가는 경지의 글을 말한다. 그럼에도 누구나 쉽게 마음 내키는 대로 쓰면 수필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인식하여, 수필을 경시하는 풍조를 불러왔다. 수필은 소설, 희곡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이다.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은 산만, 중복, 과장이 있기 쉽다. 수필은 짧은 글이기 때문에 보다 치밀, 함축, 사색을 요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수필은 '산만과 무질서, 무형식의 글'(김진섭「수필의 문학적 영역」)이 아니다. 시와 소설은 허구(픽션)의 세계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논픽션)의 세계이다. 진실을 생명으로 삼는다. 작가가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쓰기 때문에, 상상력과 허구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시, 소설에 비해. 더욱 적나라하고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명쾌하고 절서 정연하기는 쉬워도 '산만하고 무질서하다'는 말에는 설득력이 없다. 본격 수필 시대에 '산만과 무질서'를 수용할 수필가가 있을지 의문이며, 이는 농경시대 '여기(餘技)의 문학'이라고 인식할 때의 개념인 것이다. '무형식의 글'이라는 개념도 수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시, 소설, 희곡에 비해 엄격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스런 표현 형식을 갖는다는 것이지, '무형식'은 아닌 것이다. 수상, 일기문, 서간문, 기행문, 칼럼 등 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글들이 많아서, 일일이 형식을 정해 엄격히 적용시키기보다는 작가에게 창의성과 자유성을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수상, 일기문, 서간문, 기행문 등이 '무형식의 글'은 아니다. 형식과 구성이 있으되, 엄격한 형식의 틀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넷째, 수필은 '40대의 문학이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피천득씨는 「수필」이란 글에서 '수필은 서른 여섯 고개를 넘어선 중년 여인의 글'이라고 했다. 또한 수필을 가르켜 '40대의 문학'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수필이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형상화하는 문학임을 들어, 다양한 체험과 인생적 경지를 담기 위해선 40대가 돼야만 비로소 좋은 수필을 낳을 수 있는 연령이 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해석에 수긍하면서도,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 없어야 하며 '40'로 한정하여 고정관념화 해선 안될 것이다. 10대의 순수, 20대의 감수성, 30대의 정열은 수필의 소중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또 수필에 대한 개념으로 '청자연적'이 있다. 피천득씨가 자신의 수필론을 전개한 '수필'에서 수필을 '청자연적'에 비유하였다. 수필을 도자기예술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청자연적'에 비유한 것은 기능과 깨달음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에서 피워 올린 꽃으로 생각한 까닭에서다. 수필의 참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한 빛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피천득씨의 수필관(隨筆觀)이다. 수필 '토기 항아리', '유리 그릇'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다양성을 해치는 요소가 된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라는 말은 수필의 고귀함과 높은 경지의 문학임을 일깨워 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청자연적'은 피천득씨의 추구 목표이자, 개성으로 보아야 한다. 수필을 쓰는 모든 사람이 '청자연적'을 수필쓰기의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다. 자신의 체험을 통한 발견과 깨달음을 최대한의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최상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작업이 수필쓰기의 방법이 돼야 한다.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바르지 못한 수필의 개념들을 깨트려야 한다. 낡은 틀을 벗어 던져야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다. 수필사기론(隨筆四忌論)    권대근(수필학박사,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 1. 글을 쓴다는 것에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예술성이란 의미의 각색이다. 작가의 인식이 녹아 있는 메시지의 미적 조형성이 결국 본격적인 수필의 격을 결정짓는 축이다. 이것은 단순한 직관이나 관찰로는 수필이 일상성을 못 벗어난다는 의미다. 문학성은 제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작가가 얼마나 개성을 참신하게 탄력적으로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작가의 지적 치열성도 요구된다. 의미를 논리적으로 정돈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객관적 지식이 배제된 감성이 주된 역할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좋은 수필을 쓰는 사람은 거의 계속 좋은 수필을 쓴다. 왜 그렇까. 이들은 잘 피하기 때문이다. 폭풍이 불면 고개를 숙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재앙을 잘 피해 나가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본격수필 쓰기도 마찬가지라 본다. 무엇보다도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인식 활동이 수필가에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본고는 ‘본격수필유사기本格隨筆有四忌’, 즉 본격수필은 네 가지를 기피한다는 관점에서 집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詐欺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기’란 남보다 먼저 보고, 남보다 깊이 보고, 남이 드러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삶, 그리고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빚어지는 ‘사기’다. 자의적인 뜻의 속임수가 아니라 예술의 창의적 속성을 강조한 말이라 하겠다. 필자는 감히 “수필도 사기四忌다”라고 말하고 싶다. 수필은 본질적 속성상 네 가지를 기피한다는 점에서 분명 사기四忌다. 그 첫째가 ‘格弱’이고, 둘째가 ‘理短’이며, 셋째가 ‘才浮’이고, 넷째가 ‘意雜’이다. 이름하여 ‘본격수필유사기本格隨筆有四忌’란 본격수필론이다.      첫 번째로 피해야 할 ‘격약格弱’이란 수필은 품위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의미다. 수필에 있어서 품위는 작가의 인격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김광섭은 에서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격’은 품격을 말한다. 수필은 작가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품위를 잃으면 결정적인 타격이 된다. 따라서 수필은 필자의 자질이 중요시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나 소설의 경우에는 생산적 상상을 통하여 허구적 언어로써 집을 짓기 때문에 작가의 인격적인 문제와 직접적인 상관성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지만, 수필의 경우는 생산적 상상으로 허구적 언어의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심적 나상, 즉 마음의 옷을 벗는 것처럼 작가 자신의 신변잡사라든지 미묘한 심리 세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수필의 소재나 제재 등의 취사 선택에 따라서 작자에게는 치명적인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비구니가 사는 절에 반바지를 입고 경내를 거닐다 연세 지긋한 여승으로부터 혼이 난 적이 있다. 품위를 지키지 못한 탓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고궁의 뜰을 거닐기 위해서는 우선 의상부터가 우아해야 하고, 걸음걸이는 덤비거나 허둥대는 법이 없이 여유 있고 맵씨있게 걸어서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만일 요새 젊은이들처럼 배꼽이 드러나 보이는 배꼽티를 입고 흔들거리거나 건들거리면서, 또는 껍을 씹기도 하고 뱉아 가면서, 그렇게 히히덕거리면서 고궁의 뜰을 내달리는 식으로 수필을 쓴다면, 우성 품위를 잃기 때문에 독자로부터 외면당할 뿐 아니라 그 천박스러움이 작가의 인격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또 품위 있는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품위 있는 글을 많이 읽어서 고상하고 품위 있는 인품을 길러가면서 품위를 잃지 않는 글을 쓰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시법에 '격약 불로' 格弱不老란 말이 있다. 수필은 품격이 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윤오영은 내용이 저속한 글을 속문이라 하고, 문장이 좋지 않아 표현이 졸렬한 글을 악문이라 했다. 속문과 악문이 결합된 수필을 맹수필이라 부르면 어떨까? 수필의 시대에 수필로서의 격을 갖추지 않은 맹수필류의 글이 넘치는 것은 아마도 수필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인 듯싶다. 수필이 대중화되는 추세에 따라 수필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은 좋으나 격이 낮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수필의 격이 낮아지는 요인은 수필가에게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쓰는 사람보다 편집자, 독자, 비평가에게 더 책임이 크지 않을까. 특히 비평가의 책임이 막중하다 할 것이다. 수필의 격을 냉정하게 재단해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리라 본다.      두 번째로 피해야 할, ‘이단’理短이란 이치가 짧은 걸 수필은 기피한다는 의미다. 이는 수필가에게는 지성이 요구된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비평가인 알베레스는 수필을 가르켜 “지성을 바탕에 깐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고 했다. 이 말은 백번 타당한 말이다. 짤막한 이 말에 ‘지성’과 ‘정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지적 욕망이 있다. 수필이란 마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에 내적인 지, 정, 의가 외적인 진, 미, 선 또는 의, 인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을 통찰하고 달관하는 경지나 여과되거나 뱔효된 정서로서 얻어지는 멋스러움이나 맛스러움이라든지, 재기 발랄한 유머와 위트, 날카롭게 찌르는 풍자 등 지성이 세련되게 번득여야 한다. 짧은 산문 속에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든지 그 무슨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흐뭇한 유머나 재치있는 위트라든지, 날카로운 지성적 통찰력과 찌르는 듯한 풍자, 또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페이소스 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중국의 시법에 있는 '이단 불심'理短不深이란 이치가 짧으면, 그 뜻이 깊지 못하니, 내용이 없는 부실한 글이 됨을 이르는 말이다. 사상과 철학 즉 정신적인 요소가 결여되면 결국 잡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수필은 신변을 수필적 소재로 하여 쓰되, 반드시 문학적 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수필가의 개성적 시각이 없는 흔해빠진 일상사가 나열된 수필이 아직도 문학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는 현실은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의 시법에 나와 있는 두 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볼 때, 수필은 지식의 나열이나 사상의 조술에 진의가 있는 것도 아니요, 글로 씌어진 지식의 축적은 더더군다나 아닌 것이다. 또한 단순한 생활의 기록이거나 신변의 잡사를 보고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수필은 존재 의미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세 번째로 피해야 할, ‘의잡意雜’은 집필 의도가 잡스러우면 안 된다는 뜻이다. 문학 장르는 모두 정서적인 감화를 목적으로 해서 쓰여지는 글이다. 수필은 자기의 박식을 선진하는 글도 아니요, 지나치게 아는 체 하면서 자기를 선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 글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목적이나 상업적인 목적으로 수필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깊은 우물에서 시원한 샘물이 길어 올리듯, 깊은 생각에서 수필다운 수필이 탄생된다. 생각이 깊지 못하고 천박하면 아무리  많은 글을 써낸다 하여도 질 좋은 비단 같은 언어가 짜여져 나올 리 만무하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깊이깊이 얘기하는 그 떨림과 울림을 수필에서 맛볼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이제는 연지 찍고 분 발랐다고 해서 무조건 미인이 아니듯이, 화려하게 치장을 했다고 해서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수필이 피해야 할 ‘재부才浮’란 재주를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훌륭한 수필가는 글재주꾼을 말함이 아니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문과 지志를 겸비해야 한다.  문이 없는 지는 거칠고, 지가 없는 문은 황홀할 따름이다. 요즈음도 이상 야릇한 제재, 특이한 제재를 찾아 헤매며 고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이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있게 하는 올바른 처방이 되지 못한다. 제재란 물론 주제에 기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가 빈약한 상태에서의 제재 편중주의는 재사의 문인, 장색적 수필가를 낳게 한다고 지적한 황송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알멩이 없는 상태에서 제재를 선택하여 기묘하게 다듬어 놓은 것은 글재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주를 부리면 안 된다는 말과 관련하여 수필 창작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허구’의 수용 문제다. 어떤 이는 수필에 허구가 절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건 소설이지 수필이 아니라고까지 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지나친 억지라는 걸 알 수 있다. 수필가는 소설가가 즐겨 쓰는 그런 허구를 차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수필을 쓰는 사람은 사실을 바탕으로 수필을 쓰기 마련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소설가처럼 그렇게 허구를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수필에는 허구가 절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도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것은 거짓이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수필가가 거짓말을 쓸 수도 없고 또 써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도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허구는 거짓인가 하는 문제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fact'와 'reality'는 엄연히 그 성격이 다르다. 허구가 사실은 아니기는 해도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수필이란 사실을 얘기하기 위해서 창작하는 것도 아니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다. 수필이란 사실이건 허구이건 삶의 진실을 창작하거나 읽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작가가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쓰되 그 사실 이상의 어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거짓이 아닌 허구적 방법을 차용할 수도 있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부분적 수용론이다. 이러한 경우, 분명히 허구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허구는 소설가가 즐겨 다루는 그런 허구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처음부터 상상의 집을 지어나가지만, 수필가는 사실적인 이야기를 쓰되 질서화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차용하는 허구임으로 문학의 본질상 이 점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문학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 사실에 근거하거나 허구를 차용할 수 있는데, 소설은 주로 허구를 차용하고 수필은 사실에 근거할 따름이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여러 요건이 요구되는데, 수필은 특히 사실을 근거로 진실을 추구하는 게 특징이라는 것이다.    3.       독자들은 이 논고를 통하여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네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수필에도 나름의 작법이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면서도 그 붓을 끌고 가는 주제의식, 즉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지시에 의해서 쓰여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수필을 가리켜 이야기에 앞선 사색이라고도 하고, 철학적 깊이에까지 이르는 관조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가 짧아서는 안 된다는 말과 통한다. 그러면서도 문장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의도’가 잡스러워서 안 된다는 것과 통한다. 수필이 문학의 장르인 이상 문학 일반론을 무시할 수 없다. ‘재주’를 부려서 되는 글이 아니다.   아무튼 수필은 삶의 이삭줍기다. 한 알의 보리나 밀을 가지고 천하 대소사나 우주의 진리를 애기할 수 있는 수필은 우리들 인생의 길동무다. 그 길동무는 고아하고 담박하여 품위를 잃지 않는다. 이는 수필이 ‘품격’을 유지해야 된다는 의미다. 사소한 신변잡사 가운데 파생되는 기억의 부스러기 하나를 보면서 열 가지 백 가지, 우주 천주의 섭리를 말하기도 하는 그것은 완성을 지향하는 미완의 글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 길동무의 발걸음은 끝이 없다. 어쩌면 수필이라는 인생의 길동무는 성속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살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삶의 질을 높여주며, 그렇게 높아진 삶을 우리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광주수필문학회 문학강좌 수필의 어휘 그리고 문장   강사 김수봉 1. 들어가기    가, 문학은 인간정신의 자기전개가 형태를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형태를 얻는’ 이란 문장으로 표현해서란 말이다.    나, 나는 지금도 한편의 수필을 쓰다가 어휘 한두 개에 막혀 날밤을 꼬박     샌  일이 많다.       -어떻게 하면 좋은 문장을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적확한 어휘를 찾아낼까.       -어떻게 하면 나만의 색깔을 내는 문체를 써 볼까.    다, 이런 고심은 때때로 원고지 앞에 앉는 두려움까지를 불러오지만 ‘내가 어 려움을 겪고, 써낸 글이 독자에겐 쉬운 글로 다가간다.’ 라는 철칙 앞에 다시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이제껏 수필을 써온 나는 ‘불행한 문인은 면했구나.’라고 위안을 얻는다.    다. 김광섭 씨는 ‘수필문학 소고’에서 ‘수필을 써 보지 못한 채 문필을 마친 사람은 불행하다.’ 고 하였다.    라, 지금부터 수필의 어휘와 문장에 대한 나의 소견을 말 해 볼까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소견은 어디까지나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것에다 나의 경험을 보탠 것이기에 편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언어의 의미    가.  언어의 의미는 청각영상으로부터 이루어진 개념영상이라 할 수 있다.    나. 의미에는 중심적 의미(기본적, 핵심적)와 주변적 의미(상징, 비유 등의 다른 의미)로 나뉘며, 단어들의 의미관계는 동의관계,이의관계,유의관계,반의관계,당대관계, 하의관계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런 것을 ‘낱말밭’ 또는 언어의 자장(磁場)이라고도 한다. 때문에 이런 관계의 구분은 아주 섬세하게 가려서 구사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 어휘란 일정한 범위에 사용되는 말의 총체이지만 가려쓰기에 소홀해서, 비슷하니까  그냥 써버리거나 남들이 쓰니까 따라 써 버린다면 범문(凡文)이거나 악문이 되기 쉽다.    ;그는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방증(傍證)→반증(反證)이라도 하듯 난잡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마크 트웨인’은 ‘비슷한 말과 정확한 말은 반딧불과 번갯불만큼이나 다르다.’고 했고, ‘문학은 상투어를 극복하는 노력이라야 한다.’라고 했으며 ‘최일남’은 ‘말은 말임자를 만나야 제값을 받는다.’ 고 했다. 3. 어휘와 어법    가. 사람은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듣고, 보고. 읽어서 습득된 말로 생활하며 언어활동을 한다. 그러나 그런 언어는 어법에 맞지 않는 말들이 허다하다. 그런 언어는 생활의 언어는 될지언정 문학 언어는 되지 않는다.    나. 한때 ‘언문일치’라는 말이 강조되어 말하듯 글을 쓰면 된다고 여긴 적이 있었고, 지난 날 한문 투의 문장이 너무 심했던 것을 반성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말하는 그대로를 글로 옮긴다고, 요즘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꼬부린 말들을 그대로 써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평범한 일상에서는 재미있고 신선한 느낌마저 든다고 할지 모르나 문학적 문장은 아니다.    다. 글을 쓰는. 특히 수필을 짓는 우리에겐 모국어를 바르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소명이 있다. 그래서 정확, 적절, 적확한 어휘구사가 요구되며 이것이 후학들을 위한 우리의 책무이기도 하다.    라, 물론 어법이라는 게 불변의 절대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고 언중(言衆)이 요구하면 바뀌는 것 또한 어법이다. 그러나 지금의 어법은 현재로선 최선의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문장이 어렵거나 어법에 어긋나면 의미전달에  많은 오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4.어휘는 글의 자본(資本)    가. 우리는 남의 글을 읽으면서 쉽게 따라가 버리는 일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그 표현의 적절성을 곱씹어 봐야 한다. 사전을 펼치고 확인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 나는 수시로 어휘를 수집하여 노트해가는 습벽이 있다. 책을 읽다가. 신문을 보다가 , 방송을 듣다가 좋은 말, 몰랐던 말은 곧 메모를 해 놓고, 사전을 펼쳐 확인을 한다. 고유어, 옛말, 한자어, 외래어, 속어, 비어, 사투리, 심지어 시골 노파나 푸성귀 파는 아낙들에게서도 좋은 말을 많이 배운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어휘노트가 30 권쯤은 된다. 요즘 KBS TV에서 월요일 저녁 7시에 방송되는 우리말 달인 프로를 보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 풍부한 어휘는 문필가의 자본이다. (문장연구가 장 하늘)     * 정확, 적절치 못한 어휘 혼용 사례       -생명/목숨. 저희나라/우리나라, 버스 값/버스 삯, 아는 척(체)/알은 체(척),        쉬파리/쇠파리       -옥편/자전(대용어), 정종/청주(대용어), 트렌지코트/버바리코트. 스테이폴러/호지키츠,        크리넥스/스카치테이프, 귀걸이(제구)/귀고리(장식품), 경신(기록)/갱신(고침)       -전기세(료), 전화세(료), 수도세(료) 재산세, 면허세, 자동차세     *호응 어      -쌀(곡물)-사다(팔다). 책- 사다. 옷감-뜬다(끊다). 연탄-떼다(들이다),정육-사다(뜨다)       술(물)- 들다(마시다). 담배-태우다(피우다) 5.문장의 요건    가. 수필을 통합문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수필은 문학 전 장르의 요소를 아우른다고 볼수 있다. 시적이며 소설적이며 극적(희곡)인 요소에 동요, 동화적 요소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수필을 읽는 독자에게는 가슴으로 읽는 기쁨(정서적 감동)과 두뇌로 읽는 보람(지적인 소득)을 함께 주어야 한다.    다. 수필은 첫째도 문장, 둘째도 문장이라고 강조한 수필가가 있듯 위의 요소들을 만족 시키는 첫발이 곧 문장이다.    * 이응백은 좋은 조건의 글로      1).충실한 내용일 것      2).독창적일 것      3).정성이 담길 것      4).정확한 어휘가 구사될 것      5).표현이 경제성일 것      6).논지의 일관성      7).구성의 치밀성을 들었고.    * 수필이론가들은 수필의 덕목을      1).독자를 향해 자랑하지 말 것      2).독자를 향해 교훈하지 말 것      3).스스로 도취하지 말 것      4).전부를 알아도 그 반만 이야기할 것 등을 강조 하였으며 이는 문장이 갖춰야 할 요건으로 요약된다.    * 덧붙이면 좋은 문장의 5대 요체는      1).분명하게.      2).정확하게.      3).간결하게.      4).정중하게.      5).쉬운 말로 평이하게 라 할 수 있다.    라. 생각을 대신하는 것이 말이요, 말을 옮겨 쓰는 것이 글이다. 고로 글은 말맛이 나게 써야 하고, 말맛은 글이 쉬워야 나오며 그 말맛은 독자의 생각을 뻗어가게 한다.    * 선배 수필가 윤오영 선생은      1).간결성을 문단의장(文斷意長) 즉 문장은 짧게 의미는 길게 써야 한다. 그러나 효과를 감쇄시키는 절약은 오히려 결손이라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고수의 문장일수록 간결하다.)      2).평이성으로는 의현사명(義玄詞明) 즉 속뜻은 깊어도 말은 알기 쉬워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쉽게 하려다 평범에 빠지는 것을 염려했다.      3).정밀성은 지리멸렬하고 산만하지 않게, 선명하고 구체적 실감으로 강한 무드가 배게 할 것      4).솔직성은 수식이나 과장 변명을 늘어놓지 말 것을 강조 했다.      * 또한 선생의 저서‘수필문학 입문’에서 문장의 ‘탈’을 무려 15가지로 지적 했는데 몇 가지만 소개하면 수식이 많은 것. 인용이 많은 것. 구체성이 결여 된 것. 박학을 자랑하는 것. 다 아는 것을 혼자만 아는 체 하는 것 들이다.      -‘김태길’은 ‘미사여구. 예화. 인용구 등을 많이 써서 문장을 현란하게 함은 일종의 교란 전술이며 사이비 행위다.’ 라고 했고.      -‘한비야’(걸어서 지구 밖으로 행진하자. 저자)는 ’미사여구 없애는 작업시간이 길면 길수록 독자들의 시간을 덜 빼앗는다.‘ 라고 했다.      - 이 모두가 쉬운 문장의 중요성을 같은 맥락에서 강조한 것이다.      - 고로 수필쓰기는 나 자신만을 위한 ‘배설의 언어’가 아니라 모든 독자를 위한 ‘소통의 언어’이므로 항상 새로움을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한다. 6. 거친 문장 모호한 문장    가. 거친 문장 모호한 문장은 독자에게 혼란을 겪게 하여 자신의 작품을 멀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신문기사 제목): 시급한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시급한 걸 이제야 통과? 중요한걸 심사숙고하지 않고. 졸속으로 서둘러 통과?)        -(어떤 소설): 박 사장은 그에게 남겨 두었던 술을 권했다.(그에게 보관했던 술인지?  본인이 남겨 두었던 것인지?)        -(어떤 수필): 풋고추에 고추장 쿡 찍어 막걸리 한잔을 ...( 풋고추에 고추장을 찍은 것인지? 고추장에 풋고추를 찍은 것인지?)        -(어느 책 제목):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자신의 문화유산인지?  남의 문화유산도 있다는 것인지?)=우리문화유산,~내가 답사한 문화유산        -(가사 말):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시)를 넣었을 때-- 아는 사람 있나요?.          (시)를 뺄 때=모르는 사람 없이 다 안다.(역설법)        -(어느 수필):총성이 멎고, 한참 후에 나는 동굴 밖을 나섰다.(동굴 밖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인지? 동굴 속에서 나갔다는 것인지?)=밖으로 나섰다.        -(어느 병원 선전 현수막): 불임 전문병원( 임신을 못하게 하는 병원인지?        -(어느 초등학교 정문 현수막): 학교 폭력은 우리가!( 하자는 것인지?   없애자는 것인지?        -(충장로 어느 방법초소 명): 법질서 단속 초소( 법을 지키는 사람을 단속하는 것인지? 법질서 문란자를 단속하는 것인지?)        -(동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내가 살던 고향은        -칸트의 명제= 너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번역판 ‘순수이성 비판’) 7. 쉽게 쓰기의 어려움    가. ‘욕이선난(欲易先難)’이란 말이 있다. 서예의 운필지침에 ‘말로서 쉽게 하고자 하면  먼저 어려움을 겪으라.’는 말이 어찌 서예에만 국한하겠는가. 글쓰기는 물론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다.    나. 쉬운 문장을 쓰기위한 필수 적 요건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이 먼저 철저히 이해하는 일이다. 독자에게 자기가 쓴 글의 뜻을 이해하도록 노력해달라고 요구하는 작가는 이미 실패한 글쟁이다.    다. 독자들에게 이해를 위한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작가의 문장이 바로 쉬운 글이다.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대중의 언어’로 나타내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한다.    다. 그러나 실제로 쉬운 글을 써서 독자들의 호감을 사는 문장가 자신은 하루 종일 반 페이지도 못 쓰는 날이 많다.    라. ‘쇼펜하우어’는 “평범한 표현 속에 비범한 내용을 담으라.” 했으니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재미있게, 재미있는 것을 깊게라는 원칙을 신조로 삼을 일이다.     *쉬운 글의 요소 셋은      1).비유법을 쓴다.      2).구체적 경험이나 실례를 든다.      3).인용법을 짤막하게 쓴다. 한자라도 덜 써도 효과가 같으면 줄이는 게 글이다.     * 내가 나름대로 좋은 문장이라고 노트해 뒀던 몇 문장을 골라 함께 보면서 어휘와 문장에 대한 소견을 마무리 한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絃)을 가만가만 흔들어 준다.(최명희)      -동짓달 마른 바람이 베 폭 찢는 소리로 날카롭게 가른다.(최명희)      -나이 든 사람들에게 보다 잘 맞는 것은 유머와 웃음이다. 스스로가 덧없는 저녁구름의 유희 같은 존재인 것처럼(헷세) 8. 수필의 기술(記述) 단계    가. 한편의 수필을 쓸 때는 힌트-구상-소재-자료수집-틀 짜기(가장 고심해야 함)단계를 거쳐야 한다. 즉 무엇부터 시작할까? 무슨 얘기를 깔고 갈까? 어떻게 마무리 할까 이다. 비유를 하자면 주부가 식단을 짜는 것과 같다.    나. 수필이 다른 문학에 비해 자유롭다보니 몇 개의 틀로 정해질 수 없으며 소재와 주제에 맞는 그때그때의 적합성을 찾아야 한다.    다. 가장 일반적인 기술 순서는 서두쓰기, 본문쓰기, 결미쓰기 이다. 글 쓰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다 아는 것이긴 하지만 참고삼아 간단히 열거 해 보기로 한다.      1). 서두쓰기         서두의 한 두 문장은 독자가 수필을 대하고 30초 정도 걸리는데 이 시간에 독자의 발목을 잡지 못하면 실패한 글이 된다. 밥은 먹어야 배가 부르고 수필은 읽어줘야 가치를 발휘한다.     * 서두 쓰기에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예를 들면       - 관련 화제나 배경을 제시한다. (오랜만에 해변마을에서 하룻밤을...)       - 자주 쓰는 용어를 미리 정의하여 제시한다. (목욕탕이란... / 승려의... 신문의... /경종의... 등 개념상 오해의 소지를 미리막음)       - 짧고 참신한 경구나 명구를 인용한다. ( 너 자신을 알라, 고사 성어, 속담 등)       - 구체적 사건이나 일화를 실감나게 소개한다. (꽝!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의식을 잃고 말았다.)= 현장묘사       - 설문을 던져 주의를 집중시킨다. (눈보라치는 겨울 바다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 ~~어떨까?. 누군가 ~~라고 했던가. 등)       - 글의 주제를 분명하게 미리 정의 또는 암시한다. (논설, 사설, 두괄식, 연역법)      2). 본문 쓰기         - 주제에 초점이 맞는 내용(앞문장의 풀이. 연유, 시점 등으로 뒷받침 )         - 화제의 내용과 범위에 맞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도 그 본질에서 유추 해석이 나올 수 있도록)         - 단락의 전개가 긴밀하고 합리적일 것 (유기적 관련)         - 개성 있는 사고와 새로운 인식의 독창성을 지닐 것 (특수체험,지식정보를 줄 것.)         * 이성계의 파자 점(破字占 ‘問’字) :이성계 에게는 왼쪽 오른쪽이 모두‘君’字 이니 장차 王이 된다. 진짜 거지에게는 문(門)에 입(口)을 매단 꼴이니 천상 거지이다.)         - 문장의 형식이 다양하고 리듬감, 정중동의 변화를 줄 것(문체 바꾸기.서술, 명령,  청유문/비유, 강조. 비약법/~다. --명사형 종결)      3). 결말쓰기         - 서두의 말을 반복하거나 되살린다. (시에서 수미 상관, 기승전결,--진달래꽃)         - 인용을 할 것(명언, 속담, 고사,--윤오영의 ‘마고자’-귤화위지의 고사)         - 정경묘사로 암시하며 끝맺기 식( 희망적. 절망적.)         - 요망하거나 전망하면서 (~하면 좋겠다. ~하기를 기대한다. ~해야 한다.)       *경고: 자신만 순수하고, 고고한 척 하면서 세상을 개탄하는 식은 독자의 반발을 사게 됨) 9. 마무리    나는 한편의 수필 원고를 써 놓고 숙성의 시간을 오래 가진다. 읽고 또 일고, 아침에 읽어보고 저녁에 읽어보고, 눈으로 읽고 소리 내어 읽고, 취중에도 읽어보고 술 깬 후에도  읽어 본다. 여러 날 잊었다가 문득 꺼내어 읽어보기도 한다. 한 스무 번쯤은 읽는다. 물처럼 흘러야 할 문장의 흐름이 막힘이 없는가 해서이다. 마무리 할 때의 유의사항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진권의 ‘수필쓰기의 이론’ 중에서)   가. 글 전체를 살필 때      1) 주제를 구현하는데 불완전하거나 결여된 내용은 없는가.      2) 주제에 어긋나거나 무관한 내용은 없는가.      3) 글의 각 부문(문단)의 이음새는 유연한가.      4) 냉정을 잃어 갑자기 흥분하거나 감상에 빠진 데는 없는가.      5)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는 미심적은 내용은 없는가.      6) 제자랑(가족포함)으로 받아들여질 곳은 없는가.   나. 문단단위로 살필 때      1) 소주제를 구현하는데 불완전하거나 결여된 내용은 없는가.      2) 소주제에 어긋나거나 무관한 내옹은 없는가.      3) 문장들의 이음새는 유연한가.      4) 문장은 정확하고 분명한가.      5) 단어는 정확하고 알맞은가.      6) 심상은 선명하고 표현은 참신항가.      7)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정확하고 오․탈자는 없는가. 한국 수필계의 현황과 문제점 해결 1 영상매체의 발전과, 사이버 시대의 도래는 21세기 이전부터 문학 전반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 공적(共敵)으로 거론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수필계는 오히려 놀라운 변화를 거듭해온 것이 사실이다. 1971년에 한국수필가협회가 창립되고 이듬해엔 회원지《수필문예》(75년에 한국수필로 개칭)가 창간되었다. 1972년에 수필 월간지《수필문학》(관동출판사)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1977년에 잡지의 운영과 수필의 발전을 위한 수필문학진흥회가 만들어지던 때에 비하면 20종에 가까운 수필지(월간, 격월간, 계간지)와 3,000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수필가, 많은 그룹의 출현은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꼭  긍정적 발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장르보다 수필계는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신춘문예는 전통적으로 신인 등단의 중요한 관문이지만, 주요 일간지에서 수필은 여전히 제외되고, 오랜 전통의 종합문예지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표적 문학단체의 하나인 한국작가회의에도 수필가는 없다.   이런 현상은 수필을 본격적인 문학으로 보지 않는다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들어 낸 것이다. 한국 수필계에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없다. 그리고 사실은 외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벨 문학상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문학상에서 수필은 아예 후보 명단에 오르지도 않는다.   그런데 외국의 사례도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태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2천6백 여 명의 수필가가 엄연히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되고 기타 많은 수필가가 활동하고 있다. 이런 양적인 위세가 무조건 수필의 위상을 높여줄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한국수필을 바로 파악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로 문화단체 등에서 차별대우를  받기도 하는데 이것은 먼저 수필가 자신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성취해야 한다.   2 1) 수필 장르에 대한 바른 인식 수필은 진화했다. 1930년대부터 김진섭 김동석 김용준 이양하 이태준 등의작품들이 수필을 독립적인 문학 장르로 인식시키게 되었고 그것이 광복 후로 이어졌지만 지금의 수필은 달라졌다.  수필을 이름대로 해석한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란 인식에서는 거의 모든 수필가들이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식의 변화와 실천은 다르다.  소수는 새로 진화된 수필을 쓰고 있지만 예술성을 위한 기법에 충실하지 못한 수필이 많은 편이어서 수필에 대한 외부의 인식 변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문학은 언어로써 상상을 통하여 사상과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한 예술이다” 이것이 문학의 기본 개념인데 시나 소설은 그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형태지만 수필은 그렇지 않다. 상상이 아닌 실제적 경험적 소재를 거짓 없이 다루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은 이 조건에서도 문학성을 잃을 위험이 크다.    그러나 지금의 진화된 수필은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김태길의「대열(隊列)」에는 그의 꿈 얘기가 나온다.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엇갈리며 행진하고 최루탄과 돌이 난무하는 광경이 나타난다. 이것은 작자가 실제로 꾼 꿈이니까 실제적 경험적 사실이고 남들이 흔히 말하는 ‘신변잡기’의 소재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독재정권시대에 지식인이 갈 길과 우리 민족의 갈 길 그리고 그 역사적 시기에 대한 구체적 증언이 압축되어 있다.  이런 작품은 그 소재만으로도 신변적 위험이 따르기 쉽다.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이렇게 정면도전하는 장르다. 그런데 그것은 독자가 상상을 통해서 도달해야 한다. 이 밖에도 적지 않은 수필들이 은유법등을 구사하며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심오한 사상과 정열을 담아 나간다.  이렇게 일상적 신변 소재로 출발하면서도 넓은 상상의 세계를 담아 나가고 영원한 인생 문제를 논하는 수필들은 확실히 과거와 달리 진화된 수필이며 이것이 한국의 현대수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수필들이 많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 그것은 오래도록 가지에 매달려 서리를 맞은 홍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미숙한 떫은 감만 씹어 보고 감나무를 말하는 것과 같은 무지함이다.  이런 점에서 수필가 자신들부터 떫은 감은 팔지 말아야 하고 외부에서도 시대에 뒤떨어진 지식으로 현대수필을 평가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2)  늦은 나이에 출발하는 신인들 떫은 감 문제는 수필가들의 전문가적 의식의 문제이며 그것은 수필가들의 등단 시기 및 등단 동기와도 관계가 있다. 시, 소설 등 다른 장르에도 젊은 지망자가 적다지만 수필에는 문학소년, 소녀였던 사람들이 퇴직 후에, 또는 자녀를 다 성장시킨 후에 등단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전문성 없이 나이 든 수필가가 많다. 수필은 ‘36살 이후의 문학’이고 인생의 경륜이 쌓여야 쓸 수 있는 것이라 하지만 어떤 장르이든 이런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유물이 된 과거 수필의 인식일 뿐이고 이런 인식대로라면 수필은 뒤늦게 시작하는 문학이 되고 따라서 전문성은 애초부터 바라기도 어렵게 되며 젊은 독자들과 감각도 맞지 않는다.   늦은 나이에 출발한 수필가들이라면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해도 생리적 감수성이 젊은이들보다 둔하고 세속의 때도 많이 묻어 있어서 중고품 자동차처럼 기능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흔히 늦은 출발을 제2의 인생이라고 미화하지만 그것은 제1의 인생만큼 도전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철저한 전문의식이 따르기 어렵다. 제2인생은 ‘남은 여생’이라는 인식이 다분히 깔려 있다.  수필이 30대 후반이나 넘은 사람들에게 적당한 문학이고 퇴직자와 자녀를 다 키운 아줌마들의 문학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는 이상 젊고 유능한 신인들의 배출로 수필문단의 발전을 기대하기에 현실은 어둡다. 대학의 문예창작과에서도 수필 지망생이 줄고 대학원에서도 수필전공이 없어서 우수한 작가와 평론가 배출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결국 이것은 어떤 제도의 모순 때문도 아니며 오직 수필가들 자신의 인생관의 문제다. 수필가라는 이름의 형식적 명예에만 안주하고 고객도 없는 떫은 감 장사에 만족하든지 아니면 철저한 전문가의 의식을 갖고 홍시를 파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다.    3) 한 우물 파기 한 우물을 파야 사막에서도 샘을 만나고 깊이 파야 더 맑고 시원한 지하수를 만난다. 얕은 우물은 자칫 지상의 탁류가 스며들어 있기 쉽다. 전문성이란 한 우물 파기다.  문학은 일생 동안 최선을 다 해도 완성이 있을 수 없는 분야다. 그런데 등단한지 몇 해 되지도 않아서 수필가이며 시인임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한 우물도 다 파기 전에 다른 우물을 파는 사람이다. 수필가로서 아직 갈 길이 먼데 문예지를 통해서 시인도 되고 소설가도 되고 또 평론가의 자격증을 얻는 사람이 있다. 자격증의 남발도 문제지만 이것은 전문가집단이어야 할 한국수필계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행위다.  물론 두 가지 이상에서 우수성을 나타내는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시 수필 소설 평론은 모두 다른 전문성과 타고난 재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런 재능을 모두 갖춘 문인이 있더라도 그것을 누구나 모방할 수는 없다.  모든 문학의 장르는 전문분야다. 그래서 시인이나 소설가도 수필에 대해서는 대개 무지하며 쓰더라도 기법도 모르고 재능미달 사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혹시 시인이나 소설가가 수필집을 내서 잘 팔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것은 자기 전문분야의 인기도 때문이지 수필도 역시 시인이나 소설가가 써야 잘 쓴다는 주장은 무지의 소치다.  4) 완벽한 문장력과 예술성 수필이 전문분야이고 예술분야인 이상 수필가는 이에 맞는 문장력을 갖춰야 한다. 수필은 일반 산문이 아니다. 인문이나 사회과학 논문도 아닌 예술의 문장이다. 그러므로 표현에 차이가 있어야 한다. 우선 어법에 맞는 정확성이 기본 조건이며 다음으로 감동적인 의미 전달을 위한 다양한 기법이 따라야 한다. 사실만 전하는 것이 아닌 이상 수필이라는 짧은 장르 형식에 맞는 문장을 갖춰야 하고 자기 개성에 맞는 문체를 지녀야 한다.  한국의 수필가들이 대개 등단시기가 늦는 것은 유감이지만 늦었더라도 전문성을 갖추려면 창작의 기초가 되는 문장 수업부터 해야 한다. 시나 소설은 그 형태가 허구나 이미지의 창출을 통해서 만들어져야 하므로 문학성이 따른다. 이와 달리 수필은 실제적 경험적 사실의 거짓 없는 표현이 기본적 형식이므로 문학성이 처음부터 배제되기 쉽다. 따라서 우선 기본적으로 문장의 표현력으로 문학성을 획득해야 된다. 모든 예술분야가 다 그렇듯이 대가가 되었더라도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정진은 숙명이며 이를 위해서는 항상 어린 학생처럼 많이 쓰고 많이 배워야 한다. 인생말년에 잠시 여기로 쓴다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문장력과 함께 예술성은 다양한 기법을 요구한다. 예술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주제를 만들고 상상의 세계를 통해서 감동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5) 평론가들의 외면과 비평의 수용문제 이것은 매우 절실한 문제다. 미술계의 거장이라는 피카소나 유명 화가들도 평론가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평론가가 그렇게 별난 그림에다 이유를 달아 주었기 때문에 유명해지고 미술사에 남고 거액의 값이 붙은 것이다.  수필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수필이 곧 재미없는 신변잡기라는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고 떫은 감이 너무 많아서 홍시를 먹어 보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비평의 수용문제 때문이다. 자기 발전을 위한 정직한 비평을 받아들일 풍토가 되어 있지 않은 이상 평론가들은 수필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되고, 따라서 수필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 못한 이가 어디서 황당한 수필 강의를 하고 있어도 개선될 여지가 없다.  대부분의 수필잡지에는 지난호의 작품 평란이 있다. 평자의 입장에서는 다룰만한 작품이 적다하고, 수필가들은 덮어놓고 좋은 평을 기대하기도 한다. 평자들은 수필의 핵심적인 문제와 도움 될 방향제시, 그리고 개선이론을 전개하고 나서 서너 작품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화려한 이론전개보다 실제 필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많은 작품을 대상으로 하면 좋겠다는 요구가 있다. 그러자면 필자들도, 객관적인 시선과 이론에 따라 평한 지적을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책을 출판할 때 지도교수가 써주는 발문, 축사와 비평은 성격이 다르다. 편집인들중에 자기가족 감싸기가 지나쳐서 손이 안으로 굽는 식의 평론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체 수필가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6)동인지와 문호 개방 한국 수필의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각 문예지들의 폐쇄성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수필 전문지들은 본질적으로 동인지다. 등단으로 기성문인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그 문예지에나 통하는 그 동네의 등단일 뿐이다.  수필계는 유난히 그룹과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타 동호인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문예지나 그룹 출신이더라도 출중한 작가의 작품을 게재하고 수상자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한다. 3 수필가들뿐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새로움을 발견하려는 노력과 그 결과로 얻어지는 감동적인 삶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1930년대에 김광섭(金珖燮) 선생이 「수필문학소고」에서 감동적인 삶을 “탁마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함은 그 어느 분야에서나 공통될 것이다”한 말을 오늘에도 적용하여 글쓰기에 임해야 할 것이다.  삶이란 긴 여정이고, 사람은 오직 그 자신이 하나하나의 주인인 독립된 개체들이다. 수필은 삶과 체험을 형상화한 짧은 글이어서 영상시대에 그나마 좁은 입지를 차지할 수 있는 희망을 갖고 있어 다른 장르에서 부러워하는 추세이다. 진지하고 값진 체험과 사색, 관조 등 기본도 갖추지 않은 채 안일한 자세로 쓴 글이라면 짧은 수필도 외면당할 것이다. 좋은 수필을 쓰고 싶은 것은 수필가 누구나의 열망이리라. 수필가 개개인에게 치열한 문학정신과 전문성이 요구된다. 아직도 수필의 문학성이나 위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얼마나 열의 있고 진실된 삶을 살며 의미 있는 생활을 하는지, 그런 생활에서 얻은 좋은 경험이 수필의 바탕이 되어야 하고, 경험을 탁월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필력을 갖춰야 하리라.  누구나 발랄하고 미래지향적인 글을 쓸 수야 없겠지만, 나이든 수필가들도 허무하고 체념에 찬 상념보다는 인생을 오래 산 사람만이 발견하는 참신한 시각과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글로 노인의 글이라고 외면당하지 않아야 한다.  현대문명의 눈부신 발달로 급변하는 세태에 시대에 앞서가는 대처능력이 부족한 수필가가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신함과 함께 도전정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도 갖춘 이들이 많아야 한다. 문학작품은 시대나 환경의 변화를 넘어서는 원칙적 진실을 가지고 있는 글이 오래간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시효가 있는 진지한 경험을 소재로 하되, 표현하는 언어를 마지막 단계까지 걸러낸 것을 사용해야 한다.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형태의 글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퓨전수필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적인 그림을 연마하여 아주 잘 그리는 화가가 추상을 시도하듯이 기본적인 필력과 양식이 갖춰진 사람들이라야 성공한 경우를 본다. 문장력을 갖추지 못하고 기초가 부족한 사람이 시도하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또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사회수필이 요구된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이것 역시 사회 전반적인 지식이 깊고 안목이 넓어 중후한 문장으로 쓰지 않으면 일간지의 논설보다 못한 글이 되기 쉽고 뒷북을 치는 수가 많음에 유의해야 한다. 소재를 장기적인 것으로 해서 공감을 살 수도 있으나 문학성과 결부시키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수필의 위상을 높이려고 소리 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의 뛰어난 작품이 많아져서 아직도 수필이 정식으로 문학 대접을 못 받는다든가, 수필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구호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한국수필가협회 제15회 해외심포지엄 발표 원고입니다.)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 최승범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 딴은 그동안 몇몇 잡지사의 수필 청탁에도 응해왔고, 내 나름의 몇 권 수필집을 내놓기도 하였다. 또한 대학에서는 의 강의를 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붓을 움직이자니 자신이 없다. 나의 두번째 수필집 『여운의 낙서』(1973)를 엮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후기를 덧붙인 바 있었다. 수필의 정체·본령을 파고 들면 들수록 확연한 모가 잡히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수필에 대한 매력만은 잊을 수가 없다. 수필을 쓰고 싶은 일이나 수필을 알고 싶은 일이 매한가지다. 내 삶을 갈아(耕)가는 한, 수필(隨筆)하는 일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이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이지만, 수필에 대한 생각은 그제나 이제나 나아진 것이 없다. 오직, 그 동안 수필의 매력에 이끌려 오면서 생각한 바 몇 가지를 들어 이 글을 이어보고자 한다. 먼저 수필이란 무엇인가를 잠시 살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제 ‘수필이 문학이다’엔 누구나 이의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신문학’의 출발 이후, 특히 30년대 초반만 해도 문학인 간에 있어서조차 수필의 문학성을 놓고 회의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다음 임화(林和)의 글(『文學과 論理』, 1940)로도 짐작할 수 있다. 몇 해 전 어느 문예잡지의 좌담회에서 수필에 관한 이야기를 교환한 일이 있었다. 자세히 기억치는 못하나 이야기의 초점은 아마 수필도 과연 다른 문학, 이를테면 소설과 같이 하나의 독립한 장르로써 취급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었던 듯싶다. 그때 이런 제목이 골라진 것은 수필이 차차 성황해가므로 문학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쓰는 데다가 다분의 정력을 경주해서 족한지 아니한지 하는 문제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로부터 벌써 5~6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즈음에 와서는 잡지에는 물론 신문에까지 수필이 여간 많이 실리는 것이 아니다. 임화가 이 이야기를 『문학과 논리』라는 그의 평론집에 수록하기 전 글로 쓴 것이 1938년이니까, 이로부터 5~6년 전이라면 30년대 초반이 된다. 오늘날과 같이 수필이 하나의 독립한 문학 양식으로써 자리를 차지하기까지에는 이무렵 김기림(金起林, 『수필을 위하여』, 1933)·김광섭(金珖燮, 『수필문학 소고』, 1934)·김진섭(金晋燮 『수필의 문학적 영역』, 1934) 등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이론과 실제 작품으로 우리의 수필문학 정립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수필의 문학적인 특성에 관하여 많은 논자들의 이야기가 있어 왔다. 나도 졸저 『한국수필문학연구』(1980)에서 다음 6가지를 들어 말한 바 있다. ①형식의 자유성 ②개성의 노출성 ③유우머와 위트성 ④문체와 품위성 ⑤제재의 다양성 ⑥주제의 암시성 등이 곧 그것이다. 여기서는 딱딱한 이야기를 피하고, 한 편의 수필로 수필의 이모저모를 말한 피천득(皮千得)의 「수필」에서 몇 가지를 들어 보고자 한다. ⑴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의 서두다. 이 서두의 멋지고도 은유적인 표현은 수필의 문학적인 한 특성을 말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특성을 말해줌에 있어서도 수필적인 표현으로 하였다. 청자 연적의 저 은은하고도 귀품스러운 빛깔, 난초의 잎이 지닌 선(線)과 꽃이 지닌 방향(芳香), 학이 앉았을 때의 모양이나 비상할 때의 모습, 여인의 호리호리 청초하고 날렵한 몸맵시, 이 모두가 얼마나한 멋인가. 시적(詩的)인가. 수필은 이러한 시적인 멋을 풍겨주는 산문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⑵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수필과 시, 수필과 평론, 수필과 연구논문 등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황홀 찬란하게 번쩍거리는 비단에 시를 비길 수 있다면, 수필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비단’이라는 것이다. 흑백을 가리는 게 평론이라면, 수필은 그렇듯 싹독싹독 잘라 말하지 않아도 읽는 사람이 분간하고 ‘미소’를 띠게 한다는 것이다. 또 연구논문이란 새로운 주장이 나오면 퇴락하여 추해지기 쉬우나, 수필은 사람들의 마음에 한 번 젖으면 언제나 그 빛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연구논문을 소설로 바꾸어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⑶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또는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 때의 무우드(氣分)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의 제재는 우리의 눈에 와 닿는 무엇이거나 다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그 개성적인 독특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토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필은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라고도 볼 수 있을지니, 무엇을 그 속에 담던 그것은 오로지 필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다.(김진섭) 수필의 대상은 사유(思惟)의 전영야(全領野)인 것이다.(김동리) 위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어느 면, 문학평론의 대상은 문학이어야 하듯, 시를 쓰려면 시적인 것을, 소설을 쓰려면 소설적인 것을, 희곡을 쓰려면 희곡적인 것을 제재로 선택해야 하는 괴로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수필을 쓰기 위하여 수필적인 제재를 따로 찾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무엇을 제재로 하여 말하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의 심경이 전인생 위에 확충되어 있기만 하면, 그 말한 것은 반드시 문학적인 가치를 가져오기 마련인 것이다. 다시 『문학과 논리』에서의 인용이지만, 임화는 수필의 문학적인 가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참말 좋은 수필이란 일상의 지지한 사소사(些少事)를 사상의 높이에까지 고양하고 마치 거목의 하나하나의 잎사귀가 강하고 신선한 생명의 표적이듯이 일상사가 모두 작가가 가진 높은 사상, 순량(純良)한 모랄리티의 충만한 표현으로써의 가치를 품어야 한다. 여기서도 강조된 것은 수필에 있어서의 제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제재에 대한 작가의 안목이나 사상이라는 것이다. ⑷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된다. 쉑스피어는 햄레트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촬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수필의 가장 근본적인 특색의 하나를 말하였다. 수필은 한 마디로 말하여 ‘자기표백(自己表白)의 문학’ ‘personal-note’ ‘필자의 심적(心的) 나상(裸像)’이라고 한 것도 이 점을 단적으로 들어 말한 것이다. 서구에 있어서 수필의 원조라 일컬음을 받는 몽테뉴도 그의 『수필집』의 서문에서, 내가 그리는 것은 내 자신이다. 나의 결점까지도 나의 수필에서 읽혀질 것이다. 내 자신이 이 수필집의 내용이다. 고까지 말하였다. 일본의 한 영문학자도 수필의 이 특색을 강조하여, 수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건은 필자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인격적인 색채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데에 있다. 그 본질에서 말할 때, 기술(記述)도 아니며 설명도 아니요 논의(論議)도 아니다. 보도를 주안으로 하는 신문 기사가 비인격적(In-personol)으로 기자 그 사람의 개인적 주관적인 노오트를 피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수필은 극단적으로 작자의 자아(自我)를 확대하고 과장하여 씌어진 것으로, 그 흥미는 전혀 personol-note인 점에 있다. 고 하였다. 모두 같은 맥락의 이야기들이다. ⑸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이는 수필의 형식이 지닌 특성을 암시한 것이라고 본다. 흔히 수필의 형식을 말하여,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다.(金珖燮) ‘붓이 가는 대로’의 형식으로써 산문화한 것이 수필의 일반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고정된 형식에 맞추어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장 자유롭게, 시나 소설과 같은 특별한 형식의 제한이 없이, 붓이 가는 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韓黑鷗) 고 하였다. 물론 수필의 형식은 이러한 것이다라고 제시할 수 있는 하나의 본보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의 연적에 똑같이 생긴 꽃잎들을 정연히 놓아가는 일이란 어떠한 형식만을 그대로 좇는 일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기계적으로 되풀이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로 한 편의 수필을 이룰 수 있다면, 똑같이 생긴 꽃잎들을 정연히 놓아가는 일 을 수필의 형식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그러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정연히 꽃잎틀을 놓아가다가, 그 중의 꽃잎 하나를 약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일 정연한 균형 속에 있는 꼬부라진 꽃잎이면서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 에 수필의 멋은 있다는 이야기다. 굳이 수필의 형식을 들라면, 이 멋을 부릴 수 있는 ‘파격’일 수밖에 없다. 이 ‘파격’은 파격을 짓는 사람, 또 파격을 짓는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필의 형식이라면 일정한 것이 없는 ‘불구격투(不拘格套)’의 자유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상 피천득의 「수필」에서 수필이 지녀야 할, 문학적인 특성의 몇 가지를 들어 보았다. 자못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의 「수필」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수필이란, 문학의 다른 양식과 달리 어떠해야 하고 어떻게 있어야 하리라는 것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수필을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는 이 생각으로부터 각자가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다. 사실 문학이란 이론만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학 뿐이랴. 미술도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론에 밝다고 꼭 좋은 작품은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흔히 무슨무슨 작법(作法)같은 것을 흔히 말하고, 그러한 것에 관한 책들도 내놓고 있다. 나도 졸저 『수필 ABC』(1965)에서 ‘수필 쓰는 법’의 한 장(章)을 마련하여 다음 몇 가지를 들어 말한 바 있다. ①자기의 렌즈를 갖자 ②일단의 구상은 필요하다. ③서두에서부터 관심을 이끌도록 하자 ④’누에가 실을 뽑듯’ 그렇게 써 나가자 ⑤품위있는 글이 되도록 하자 ⑥길이는 되도록 3천자 내외로 하자 는 것들이었다. 이제 보면, 여기저기서 줏어다가 열거한 것도 같고, 또 꼭 수필만이랴 다른 문학에도 마찬가지의 이야기지 않겠느냐는 항변도 있지만, 그때 내 나름으로는,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수필을 써 나가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이러한 여섯 가지를 들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도 수필을 쓰고자 한 사람이면 이만한 유의점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예문을 들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 ⑴ 나는 이 바위 앞에서 바위의 내력을 상상해 본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 나온 이 바위는 비록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은 아직도 사나운 의욕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라고 . 그보다도 처음 놓여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풍우상설(風雨霜雪)에 낡아가는 그 자세가 그지없이 높이 보였다. 바위도 놓여진 자리에 따라 사상이 한결같지 않다. 이 각박한 불모(不毛)의 미가 또한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이는 조지훈(趙芝薰)의 「돌의 미학」 중 한 대문이다. 누구나 ‘바위’에서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훈의 ‘렌즈’에 비친 바위다. 지훈의 ‘렌즈’는 지훈의 눈이요 안목(眼目)이다. 스위스 조각가 쟈코메티는, 눈에 보이는 대로를 그린다. 고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나 조각은 사진기의 렌즈에 비친 어떠한 풍경도 어떠한 사람도 아니었다. 쟈코메티의 눈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풍경이요 사람이 그의 작품에는 담겨지고 조소되었다. 「돌의 미학」은 지훈의 안목이 아니고는 쓰여질 수 없는 수필이다. 지훈은 또 다른 한 편의 글에서, 아안(雅眼)으로 속(俗)을 관(觀)하면 속도 아가 되고, 속안(俗眼)으로 아를 관하면 아도 곧 속이다. 이 말을 한 바 있다.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이 ‘아안’이 필요하다. 아안은 누구에게나 일조일석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부단한 ‘눈의 훈련’을 통해서 비로소 가질 수 있는 ‘렌즈’인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구,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설흔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다. 는 말도 그만한 세상살이·사람살이에서 ‘눈의 훈련’을 거쳐온 사람만이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서 좋을 것이다. 알렉산더 스미스의 말, 수필을 쓰는 사람은 천하가 다 아는 바람둥이, 무슨 일이고 못할 게 없다. 민감한 귀와 눈, 흔히 있는 사물에서 무한한 암시를 식별하는 능력, 생각에 잠기는 명상적인 기질, 이 모든 것만 있으면, 수필가로서 수필 쓰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에서 수필가의 요건으로 든 ‘귀와 눈’ ’능력’ ’기질’이란 것도 따져보면 ‘눈의 훈련’을 통해 가질 수 있는 높은 ‘안목’을 이야기한 것이 된다. 수필을 쓰고자 하면, 평소 사물에 대한 높고도 우아한 자기 안목부터 부단히 닦아 지녀야 할 것이다. ⑵ 붓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 수필이라고들 하지만, 막상 수필을 많이 써 본 분이면 이런 안이한 수필작법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듯이 그대로 써 내려가면 된다는 말도 수긍이 안 간다. 글자로 표현된다는 것은 작품을 뜻하는 것이다. 작품이란 소재와 주제가 겸비되어야 하고 또 매끈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수필도 하나의 작품일진대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생각나는 대로 말하듯이 붓가는 대로 써버릴 수는 없다. 물론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인 작품으로 승화될 수는 없다. 낙서가 아니면 붓장난의 소산일 뿐이다. 이는 장덕순(張德順)의 수필론 「힘들게 써서 쉽게 읽혀져야」의 서두 부분이다. 흔히, 수필의 글자 풀이, ‘따를 隋, 붓 筆에서 붓가는 대로 쓰여진 글’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갖기가 쉽다. 수필을 쓴 사람의 입장에서는, ‘붓가는 대로 마음 내킨 대로 쓴 글인데’의 겸사로 수필을 말할 수 있을지라도(사실 수필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의 의도는 그러한 것이었다), 문학인 수필을 놓고의 이러한 생각은 금물이다. 수필의 형식이 자유롭다고 해서 막연히 붓을 들고 원고지 앞에 잠깐 써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수필을 위해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작가에 따라서는 대충의 구상만으로 원고지를 메꾸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대충의 구상만으로 붓을 잡았고, 써나가는 동안에 그 구상을 다져 갔다고도 한다. 그런가하면 도스토엡스키는 『죄와 벌』의 구상에 3년이 걸리고 몇 권의 노오트가 필요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길이에 있어서는 소설에 비할 바 없는 짧은 길이의 수필이래도 무엇을 내용으로 어떻게 엮어나갈 것인가, 주제·제재·줄거리의 구상은 필요하다.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의 ‘균형’과 ‘파격’을 생각하는 것도 구상에 포함되는 일이다. 수필의 초보자인 경우, 이러한 구상은 더욱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⑶ 문장의 첫 귀절이라면, 글을 쓰는 이는 누구든지 경험한 일이겠지만 글에 있어서 최초의 1귀 같이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1귀, 이것을 얻기 위해서 말하자면 모든 문장가의 노심초사는 자고로 퍽 큰 듯 보이고 그만큼 이 1귀는 문장의 가치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문장을 있게 만드는데 흰 원고지의 유혹도 확실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어데서 졸연히 때늦이 솟아 나왔는지 모르는 이최초의 1장 같이 문장인에게 창조의 정력을 일시에 제공하므로 해서 팔면치구(八面馳驅)를 하게 하는 요소도 없을 것이니, 백 사람의 문장가를 붙들고 물어본다면 그 중에 여든은 가로되 이 최초의 1장이 얼마나 고난에 찬 최대최시(最大最始)의 문장적 위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의 모든 준비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임을 말하리라. 이는 김진섭의 「문장의 도」의 한 대문이다. 여기 ‘문장’을 수필로 바꾸어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수필이 짧은 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서두의 몇 줄은 독자의 흥미와 긴장을 이끌기 위해서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계용묵(桂鎔默)은 그의 수필 「침묵의 변」에서, 이 서두 1행 때문에 살이 깎인다. 8·15 이후 내가 들었던 붓을 놓고 침묵을 지키기 거의 이태이거니와 구상까지 다 되어 있는 것도 이 서두를 내지 못해 머리 속에서 그대로 썩어 나는 게 4,5개나 된다. 고 했다. 이는 물론 소설의 경우이지만 서두가 중요하다고 하여 지나치게 거의 집착하다 보면, 이처럼 아예 글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여, 이태준(李泰俊)은 서두를 쓰는 요령으로, ‘①너무 덤비지 말 것이다 ②너무 긴장하지 말 것이다 ③기(奇)히 하려 하지 말고 평범하려 하면 된다’의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다. 한 편 수필의 구상이 이루어졌으면, 주제나 제재, 또는 줄거리를 암시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그 서두를 시작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줄거리에서 서두를 이끌어 내고자 할 때에는 인물·시간·배경에 관한 말로 첫줄을 시작하는 것도 쉽게 풀어나가는 방법의 하나가 되겠다. ⑷ ‘최선의 책이란 그것을 읽는 사람이 나도 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책이다.’ 이것은 빠스깔의 말이다. 사실 그렇다.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다면 나도 쓸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책, 그것이 정말 잘 쓴 책이다. 얘기도 그렇다. 정말 훌륭한 이야기란 쉬운 말로 쉽게 하면서 그 속에 교훈과 생명이 배어 있는 말이다. 들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 자신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대학에서 강의를 해보면 그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완전히 내 것이 된 지식일수록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내가 아직 소화하지 못한 지식일수록 어려운 말로 어렵게 얘기하게 된다. 쉬운 말로 할 수 없으니까 어려운 말로 캄프라쥬하는 것이다. 문장의 호흡도 얘기의 호흡과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병욱(安秉煜)의 『문장도』에서 옮긴 것이다. 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써야 하고, 읽는 사람은 쉽게 느끼고 젖을 수 있어야 한다.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라고 한 피천득의 인용은 알렉산더 스미스의 『On the writing of essays』에 있는 말이다. 누에가 토사구(吐絲口)로부터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드는 광경을 보면 지극히 수월스럽다. 이만한 ‘자연적인 유로(流路)’를 위해서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공정이 필요하다. 누에가 섶에 오르자면 넉 잠을 자고 다섯 돌을 맞는 탈바꿈이 있어야 한다. 한 편의 수필을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쓰자면 먼저 아는 것이 많아야 할 것이다. 수필가에게 폭넓은 견문과 박학다식, 그리고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것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⑸ 꽃가게 앞에서 고전(古典)과 양장(洋裝)이 가지런히 발을 멈춘다. 소담한 꽃묶음을 한 아름씩 안으며 맑고 아름답기가 첫애기를 기르는 산모와 같다. 이는 이동주(李東柱)의 「꽃」의 서두다. 정갈한 표현의 멋을 느끼게 한다. 비유가 시적이다. ‘고전’과 ‘양장’은 한복을 입은 여인과 양장 차림의 여인을 일컬음이다. 「꽃」의 중간에는, 사람도 그늘에 살면 생선처럼 상하기 마련인데 제마다 어둔 방, 이 한묶음 꽃을 고작 은촛대에 불을 켜듯 환히 밝히면 때로 후기(嗅氣)와 음습(陰濕)을 가시는 분향(焚香)일 수도 있는 일. 의 일절도 있다. 앞의 두 여인의 신분과 이들이 꽃묶음을 사든 까닭도 암시되어 있다. 「꽃」의 하반부(轉)에 가면, 취안(醉眼)으로 꽃을 대한 사나이란 죽순밭을 어질르는 악동(惡童)과 같이 심사가 사나와 화즙(花汁)으로 마구 문질러야 몸이 풀린다고. 의 구절이 있다. 이어서 이른바 홍등가에서 들을 수 있는 대화가 나오고, 비린 외어(外語)가 어색지 않다. 하룻밤 청춘이 박리로 팔리는데, 흥정에 따라 에누리가 있고 악착같은 거간이 붙는다. 정희와 희순이는 간간 나들이를 한다. 때로 꽃가게 앞에서 가지런히 발을 멈춘다. 로, 「꽃」의 결말이 맺어진다. 사람살이에 있어서도 그늘진 곳의 추한 이야긴데, 「꽃」을 읽으면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없다. 조촐하고 정갈한 글발은 오히려 멋까지를 느끼게 한다. 수필은 읽어서 멋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멋은 글발에 배어 있는 유모어나 위트로 드러난다. 수필 쓰는 이는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읽는이에게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하고 삼박한 재치를 안겨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할 일이다. 다음은 수필의 길이에 관한 문제다. 나는 『수필 ABC』에서 ‘길이는 되도록 3천자 내외로 하자’고 한 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수필을 써보고자 하는 초보자를 위해서 한 말이었다. 수필의 길이는 참치부제하다. 마해송(馬海松)의 「편편상(片片想)」과 같은 원고지 한두장의 짧은 길이의 것일 수도 있고, 이은상(李殷相)의 「무상(無常)」이나 김태길(金泰吉)의 「흐르지 않는 세월」처럼 한 권의 책이 되는 길이의 것일 수도있다. 수필을 쓰고자 할 때 이상 몇 가지를 유의하였으면 싶다는 것으로 들어 보았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글이란 이론만으로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직접 써보면서 스스로 글 쓰는 법을 터득하는 길이 상책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점에서, 수필 쓰는 법이 뭐네눠네 하는 너절한 이야기보다도 『후산시화(後山詩話)』에 나오는 구양수(歐陽脩)의 말, -간다(看多-多讀) -고다(做多-多作) -상량다(商量多-多思) 로 이 글의 결말을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구양수는 문장에 익숙해지는 요령으로 이 3가지를 들었지만, 수필도 먼저 문장이 되어야 하느니만큼, 이 3가지는 바로 수필에 익숙해지는 요령으로 보아 다를 것이 없겠다.◑ ◇최승범 문학박사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예총 전북지부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蘭緣記』, 『韓國隨筆文學硏究』, 『바람처럼 구름처럼』 , 『무얼 생각하시는가』, 『풍미산책』, 『거울』, 『蘭 앞에서』, 『3분읽고 2분생각하고』, 『朝鮮陶工을 생각한다』 등이 있다. 정운시조상, 현대시인상, 학농시가상, 가람시조문학상, 황산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좋은 수필을 쓰는 법   1. 좋은 수필의 요건 우리는 일상생활에 많은 수필을 읽게된다. 그러나 마음에 감동을 받기가 어렵다.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이 될까? 우선 좋은 글이 되게 하려면 다음의 내용을 잊지 말자. 1. 글의 주제와 내용에 있어서 (1) 글의 내용이 충실해야 한다. (2) 주제가 선명해야 한다. (3)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4)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 (5) 철학이 있어야 한다. (6) 감동이 있어야 한다. 2. 글의 짜임새는 (1) 논지(論旨)의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2) 내용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2) 문장이나 단락이 연결성이 있어야 한다. 3. 글의 표현은 (1) 표현이 정확하고 명료해야 한다. (2) 표현이 쉽고 간결해야 한다. (3) 수사적 표현이 있어야 한다. 2. 단어와 문장 구조 문장에 있어서 구조와 단어는 똑바르게 써야한다. 단어가 잘못 사용되면 엉뚱한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그럼으로 문장에 알맞은 단어를 선택해야한다. 1. 단어의 선택 (1) 단어의 표현 효과는 이렇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㰠† 구체어 : 대상이나 행동을 지시하는 단어 㰠Œ 추상어 : 관념적인 내용을 나타내는 단어 㰠† 일반어 : 보다 포괄적인 범주의 상위 개념어 㰠Œ 특수어 : 보다 한정된 범주의 하위 개념어 㰠† 지시적 의미 : *사회적으로 공인된 객관적 의미 → 객관적 전달의 효과 㰠Œ 함축적 의미 : *지시적 의미에서 연상되는 의미 → 느낌·인상·정서의 효과적 표현 (2) 단어의 선택 과정 지식적 의미 이해 → 문맥적 고려 → 함축적 의미 고려 2. 문장 구조의 선택 (1) 문장 구조의 표현 효과 ① 홑문장 : 강렬한 인상, 간결성, 명료성 ② 이어진 문장 ㆍ 대등하게 이어진 문장 : 평행 구조 㰠† 유사구조 : 균형감 㰠‰ 대립구조 : 차이점 강조 㰠Œ 점층구조 : 점층적 강조효과 ㆍ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 : 종속구조 → 글의 논리적 전개에 효과적이다. ③ 안은문장 : 포유(包有) 구조 두 단위의 생각을 일원화하는 간결성의 효과와 구체화의 효과가 있다. 3. 문장쓰기 자기의 생각을 어떻게 문장으로 표현해야 상대방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려운 단어나 추상적인 생각으로 문장을 쓰지 말아야한다. 1. 문장의 개념 : 하나의 완결된 생각의 표현단위. 주어와 서술어를 포함한 두 개 이상의 성분으로 이루어진다. 2. 좋은 문장의 요건 (1) 평이성 : 쉬운 말, 부드러운 말투를 쓰며, 관념이나 추상어, 상투어는 피한다. (2) 간결성 : 말을 절약, 문장을 짧게 하며, 한 문장에는 한 가지 내용만을 쓴다. (3) 정확성 : 어법, 문법을 지키며 모호성을 띠지 않도록 주의한다. 4. 단락쓰기 단어의 모임이 문장이다. 문장은 연결성이 있어야하고 전달하려는 내용이 같아야한다. 그러면 단락들의 문장은 다음을 잊지 말자. 1. 단락의 개념 : 하나 이상의 문장이 모여서 통일된 하나의 생각을 나타내는 글의 단위로 되어야한다. 2. 단락의 구조 : 작은 주제문 + 뒷받침 문장 (1) 작은 주제문은 일반적이며 추상적인 진술 (2) 뒷받침 문장들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진술 ① 추상적 진술 : 개념적, 원리적, 요약적 ② 구체적 진술 : 특수적, 분석적, 묘사적 3. 단락 구성의 원리는 통일성, 완결성,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1) 통일성 : 단일 주제에 수렴되어야 한다. (2) 완결성 : 주제를 충분히 뒷받침해야 한다. (3) 일관성 : 뒷받침 내용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한다. 5. 주제 설정 글에는 어떤 주제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글의 중심은 재미가 있고, 쉽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1. 주제 : 한 편의 글을 통하여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생각을 정한다. 2. 주제 설정 기준 (1) 범위는 되도록 한정한다. (작은 것) (2)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또 잘 알고 있는 것을 고른다. (쉬운 것) (3) 독자가 관심과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을 고른다. (재미있는 것) 3. 주제설정 과정 가 주제- 범위가 넓고 막연한 범주의 주제 참주제 - 가 주제에서 범위가 한정된 주제 주제문 - 참주제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진술한 문장 6. 재료의 수집과 선택 1. 재료 : 주제를 뒷받침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글감 2. 재료의 요건 (1) 주제를 뒷받침할 것 (2) 확실할 것 (3) 풍부하고 다양할 것 (4) 관심거리일 것 3. 재료의 정리 (1) 내용이나 성격이 비슷한 것끼리 묶는다. (2) 중요도, 시대 순 등의 기준에 따라 배열한다. (3) 편견에 치우치지 않도록 배열한다. 7. 글의 구성 1. 구성 (1) 개념 : 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선택한 글의 전개 방식에 따라 수집· 정리한 제재를 알맞게 배열하여 글의 뼈대를 짜는 것 (2) 기능 : 글의 설계도 구실을 하며, 글의 단계성, 일관성, 응집성을 유지하게 한다. (3) 구성의 방법 ① 자연적 구성 : 시간적 순서나 공간적 질서에 따라 제재를 배열하는 방법 ② 논리적 구성 : 제재 자체의 자연적 질서를 무시하고 필자의 의도에 따라 논리적으로 제재를 배열하는 방법 → 단계식 구성, 포괄식 구성, 병렬식 구성, 점층식 구성, 인과적 구성 2. 개요작성 (1) 개요 : 구성을 그대로 정리하여 놓은 것 (2) 개요의 종류 ① 화제의 개요 : 줄거리의 각 항목을 핵심적인 어구로 간결하게 표현한 개요 ② 문장의 개요 : 줄거리의 각 항목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개요 8. 분석과 묘사 1. 분석 : 하나의 관념이나 사물을 구성요소로 나누어 가는 과정 (1) 분석의 과정 : 대상 식별→기준결정→이유진술→목적명시→항목배열→항목정리→내용제시→분석의 마무리 (2) 종류 ① 대상에 따라 ㉠ 물리적 분석 : 공간적 분해 가능 경우 ㉡ 개념적 분석 : 내용 분석의 방법 ② 작용에 따라 ㉠ 기능적 분석 : 작용에의 답 형식 ㉡ 연대기적 분석 : 사건의 계기적인 단계 구명 ㉢ 인과적 분석 : 원인과 결과 구명 2. 묘사 : 대상의 감각적 인상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언어로써 그려내는 지적 작용 (1) 묘사의 유의점 : 치밀한 사건 관찰·지배적 인상을 중심으로 의미 있는 것만을 묘사·일정한 순서에 따른 전개 (2) 관점 ① 고정 관점 : 고정시켜 관찰한 묘사 ② 동적 관점 : 시점 이동의 관찰 묘사 ③ 얼개 형상의 방법 : 대상이 방대하거나 상상적인 공간에까지 확장되는 경우에 채택 (3) 종류 ① 객관적 묘사 → 정확하게 표상 ② 주관적 묘사 → 분위기, 감정, 인상 창조 9. 분류와 예시와 정의 1. 분류 : 대상이나 생각을 비슷한 특성에 근거하여 기준을 정해 부분으로 나누는 지적 작용 ◎ 분류의 유의점 : 단일한 기준 설정․일관된 기준 적용․기준간의 상호 배타성․하위 항목의 충실성․하위항목에 대한 동일성․분류정도에 대한 진실성 2. 예시 : 특수진술이나 특수 사항으로 예를 제시함으로써 유형, 계층 부류 등 일반적인 원리나 법칙, 진술을 구체화하는 지적 작용 ◎ 예시의 유의점 : 사례의 구체성․일반적 진술과의 관련성․거례(擧例) 의도의 명확성 3. 정의 : 어떤 대상 또는 사물의 범위를 규정짓거나 그 사물의 본질을 진술하는 지적 작용 ◎ 정의의 유의점 : 피정의항과 정의항의 대등성․정의항 개념의 명확성․용어의 반복 사용 회피 10. 비교와 대조와 유추 1. 비교와 대조 : 둘 또는 그 이상의 대상들을 견주어 공통점을 밝혀 내는 지적 작용이 비교, 그 차이점을 밝혀내는 지적 작용이 대조이다. (1) 기능 ① 공통점 - 사물을 다른 사물에 견주는 것 ② 차이점 - 비교 : 언어적, 형태적 유사성 대조 : 종류, 특성, 정도면의 차이 (2) 유의점 ① 동일 범주 내 사물간의 대비 ② 필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기준 설정 ③ 시간, 공간, 가치의 연속성에서 배열될 기준 설정 2. 유추 : 생소한 개념이나 복잡한 주제를 단순한 개념이나 주제와 비교해 나가는 지적 작용 ◎ 유의점 ①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이어야 함 ② 알기 쉽고 친밀한 사물과의 비교 ③ 두 사물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야 함 11. 서사의 과정과 인과 1. 서사 : 행동이나 상태가 진행되어 가는 움직임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표현하는 진술방식 (1) 목적 : 대상의 행동이나 상황의 변화 양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려 독자에게 뚜렷하게 재생되도록 하는 것 (2) 유의점 ① 시간, 움직임의 단계 구분, 이동관계의 명확성 ②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시간의 흐름을 뒤바꾸지 말 것 2. 과정 : 결과에 이르게 된 일련의 행동, 변화, 기능, 단계, 작용 등에 초점을 맞춘 전개방식 (1) 목적 : 관계와 절차에 초점을 둠으로써 주제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드러내 주는 데 있다. (2) 유의점 ① 각각의 단계와 절차의 주제에의 집중 ② 움직임을 나누는 단계의 기준이 균일해야 하며, 각 단계의 이동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3. 인과 : 원인이 되는 힘과 결과적 현상에 관계된 사고유형 (1) 목적 : 구조적 인식을 위해 행동, 사물의 인과 관계를 드러낸다. (2) 유의점 : 필연적인 인과관계․체계적 순서․인과관계의 유기적 연결․진술의 동일성 12. 표현 기법 1. 표현기법(수사법) 선택의 원칙 (1) 조화의 원칙 : 문장에 균형, 정제, 해조의 미를 주도록 표현법의 효과를 고려하여 구사한다. (2) 구상의 원칙 :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막연한 것에 형태를 부여하여 생생하면서도 뚜렷한 인상을 주도록 한다. (3) 증의의 원칙 :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의 뜻을 덧붙임으로서 내용에 음영을 주어 풍부하게 하고 암시를 줌으로써 상상의 여지를 남기도록 한다. 2. 표현 기법의 종류 (1) 비유법 : 표현하려는 사물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서 그 자체의 성질, 모양 등을 뚜렷하고 선명하게 하여, 공감의 폭을 넓이고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기법. 은유·직유·의인화·활유·대유·성유·시자·풍유·중의 등 (2) 강조법 : 표현하는 내용보다 강렬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취해지는 기법. 과장·영탄·반복·열거·점층·점강·억양·대조·미화·연쇄·비교 등 (3) 변화법 : 문장이 단조롭고 평범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표현 방법에 변화를 주는 기법. 대구·설의·도치·인용·방어·역설·문답·돈호 등 13. 단계별 쓰기 1. 서두쓰기 (1) 서두의 성격 : 독자의 주의를 끌어 들이고, 글의 내용을 함시하여 주제의 방향을 제시 (2) 서두쓰기의 방법 ① 글의 내용, 방법 등을 밝힘 ② 글의 주제나 관련 화제를 직접 제시 ③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 인용, 예화, 경험 ④ 대상의 뜻을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 2. 본문쓰기 (1) 본문의 성격 :몇 개의 제재에 의해 서두의 주제가 보다 명확해지는 글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 (2) 본문쓰기의 방법 ① 개요에 의거하여 전개한다. ② 단락의 소주제문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③ 접속 어구에 유의하여 단락과 단락의 현결을 매끄럽게 한다. 3. 결말쓰기 (1) 결말의 성격 : 서두와 유사항 성격으로 서두 본문에서 전개해온 내용은 요약·정리함으로써 주제를 명확히 하는 부분 (2) 결말쓰기의 방법 ① 본문을 요약하고 보충한다. ② 남은 과제나 전망을 제시한다. ③ 암시하거나 여운을 남긴다.(서사적인 글) 14. 고쳐 쓰기 1. 개념 : 일단 만들어진 초고에 첨삭을 가하고 문맥을 가다듬어, 처음 설정한 주제가 일관되면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글로 만드는 글쓰기의 마지막 과정 2. 퇴고의 원칙 (1) 삭제의 원칙 : 불필요한 부분, 지나친 부분 조심하고 과장이 심한 부분들을 삭제한다. → 표현의 긴장 효과 (2) 부가의 원칙 : 미비한 부분, 빠뜨린 부분을 첨가·보충한다. → 표현의 상세화 효과 (3) 재구성의 원칙 : 글의 순서를 바꾸어 표현의 효과를 높인다. → 논리적 완결성의 효과 3. 퇴고의 단계 : 전체의 글의 퇴고 → 단락 수준의 퇴고 → 문장수준의 퇴고 → 단어수준의 퇴고 글을 쓴다는 것   김태길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整理)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姿勢)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有言無言)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約束)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充實)하게 실천(實踐)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整頓)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方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반성(反省)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想念)을 어떤 형식으로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現在)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過去)와 현재를 기록(記錄)하고 장래(將來)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里程標)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作業)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感情)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妙方)이기도 하다. 만일 분노(憤怒)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중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 그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客觀的)인 사실(事實)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餘裕)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整頓)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나 간섭(干涉)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被害)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商品)이나 매명(賣名)을 위한 수단(手段)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친한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豫想)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低俗)한 이해(利害)와는 관계(關係)가 없는 풍류가(風流家)들의 예술(藝術)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高尙)한 취미(趣味)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眞實)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內面)을 속임 없이 솔직(率直)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感動)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滿足)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稱讚)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發表)해도 손색(遜色)이 없겠다.” 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稱讚)과 격려를 듣고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原稿用紙)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雜誌社)에 보내기로 용기(勇氣)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想像)하지 못하면서, 활자(活字)의 매력(魅力)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雜誌)나 신문(新聞)은 항상(恒常) 필자(筆者)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記者)들의 수첩에 등록(登錄)된다. 조만간(早晩間) 청탁(請託)서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訪問)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自進投稿者)로부터 청탁(請託)을 받는 신분(身分)으로의 변화(變化)는 결코 불쾌(不快)한 체험(體驗)이 아니다. 감사(監謝)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受諾)하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원고(原稿)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漸次)로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自我)가 안으로 정돈(整頓)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情熱)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記錄)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壓力)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質)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決心)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 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人事)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請託)을 전문(專門)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 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債務者)의 위치(位置)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經驗)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心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趣味)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苦役)으로 전락(轉落)한다.   글이란, 체험(體驗)과 사색(思索)의 기록(記錄)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時間)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餘裕)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 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一旦) 붓을 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誠實)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一部)의 사실을 전체(全體)의 사실처럼 과장(誇張)해서도 안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人氣)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境遇)에서 흔히 발견(發見)된다. 자극(刺戟)을 갈망(渴望)하는 독자나 신기(神奇)한 것을 환영(歡迎)하는 독자의 심리(心理)에 영합(迎合)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墮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罪惡)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衒學)의 허세(虛勢)로써 자신을 과시(誇示)하는 일이다. 현학적(衒學的) 표현(表現)은 사상(思想)의 유치(幼稚)함을 입증(立證)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虛榮)스러움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稱讚)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表明)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自我)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成長)시키는 일이다.   김태길 : 학술원 회장 역임. 서울대 명예교수. *수필집 ≪꽃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삶과 그 보람≫≪삶이란 무엇인가≫≪흐르지 않는 세월≫≪무심 선생과의 대화≫≪일상 속의 철학≫≪체험과 사색 Ⅰ.Ⅱ≫≪초대≫등.
4    사전의 모든것 외 신화사전 댓글:  조회:3104  추천:0  201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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