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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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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론과 창작이 동행하는 시대의 예술가   김철교(시인, 평론가)   1. 예술가의 ‘지금-여기(now & here)’     예술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예술작품에 얼비치는 색깔을 갖게 된다. 이러한 예술관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나 큰 틀의 색채는 바뀌지 않는다. 주변환경에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고유한 신체적, 정신적, 지식적 환경 등을 모두 포함한다. 큰 틀이 바뀌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고유한 육체적 DNA를 가지고 있듯이, 정신적 DNA에 해당하는 내재된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다만 학습과 의지에 따라, 페르소나가 형성될 수 있지만 말이다.     페르소나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의미하며, 융(Carl Gustav Jung)에 의하면,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을 반영한다. 누구나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에 따라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특히 경계해야 할 그림자같은 성격이다. 시류 혹은 소속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형성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으면 기교에 의존하게 되어 작품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되고 예술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다. 복잡한 신체구조가 모두 일사분란하게 자기의 역할을 다하면서 질서정연한 우주를 이루고 있다. 태어날 때 창조주의 완벽한 설계도라 할 수 있는 DNA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다만 성장과정에서 부딪히는 환경과 학습에 의해 인테리어가 갖추어지고, 끊임없이 리모델링되고 있다.     육체적 DNA에 상응하는 정신적 DNA는 무의식이라 하겠다. 우리는 무의식의 역동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DNA는 각각의 신체 및 정신적 기능들을 조화롭게 다독이면서 인간을 완전한 통일체로 운행시킨다. 인간세상은, 각 개인의 신체조직은 물론 개인들이 모여 이루고 있는 사회조직도, 모든 개체들이 각기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근본 원리다.     이성과 감성, 각종 욕망들이 얽히고설키면서도 조화로운 인류의 삶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예술은 어느 한 분야나 역할만 강조하면 전체적인 화합을 깨뜨리게 마련이다. 최근 나름대로 각 예술분야들이 세분화되어 있으나 본래의 목적, 즉 인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는 이웃예술과 손잡고 나가는 종합화가 필연적이며, 이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문학은 언어를 통해 자기 예술혼을 드러낸다. 미술은 시각으로, 음악은 청각으로 즉시 받아들이지만, 문학은 일단 언어로 뇌에 접수되어 재해석한 후에 수용된다. 문자가 생기기 전에는 그림과 음악이 우리 삶을 지배했고 문학은 음악과 뒤섞여 있었다. 문학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주문과 기도의 형태로 존재했으나 형태를 잡고 널리 유포된 것은 종이와 인쇄술이 발명된 후의 일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사포의 서정시,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등이 BC 5세기경에 터를 잡았다. 이후 철학, 역사, 소설 등이 등장하여 문학이 장르별로 세분화되었다.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하이퍼미디어 시대가 도래하여 장르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 더욱이 첨단과학기술의 영향에 힘입어 장르 구분이 무색해지며 예술은 물론 모든 분야가 융·복합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하이퍼미디어 시대에는 “한 작품 안에서 서로 다른 매체가 융합하고 분열하며 경쟁하는 상호매체성”을 특징으로 하면서, 수용자(독자나 관객 등)에게 기울었던 무게가 점차 예술가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디지털 예술에서 예술가의 권력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다. 예술가는 프로그래머로서 혹은 프로젝트의 지휘자로서 수용자의 연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 수용자는 “작품을 ‘즐기는’ 것이며, 여기에 상호작용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이것은 순수하게 유희의 성격이지 ‘생산’이나 ‘창작’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 유현주, 『텍스트,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미디어 :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예학』, 문학동네, 2017, 17~19쪽).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예술가는 더욱 이론과 창작 모든 분야에 정통해야 한다. 현대는 창작과 이론이 분리된 시대에 살고 있으나 예술이 완전해지려면 창작과 이론이 함께 가야한다. 예술작품에는 치밀한 논리적 구성과 함께 감각과 지각과 영감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변 예술인 미술, 음악, 문학에서 상호영향을 얻는 것은 물론, 철학을 비롯한 주변 모든 학문과 교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2.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조화     창작과 이론의 공존, 인접예술 및 학문과의 교류가 원활하기 위해서는 맨 먼저, 예술의 본령인 감성,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이성, 즉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가 필요하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두 신(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갈등과 조화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리스 정신의 총화로 보았다.(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김남우 역, 열린책들, 2014, 참조) 아폴론 신은 이성과 지혜를 상징한다.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것은 균형 잡힌 아름다운 형상들을 지칭한다. 즉, 조형예술의 원리다.     디오니소스는 술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인간들에게 도취와 광란을 통해 삶의 고통을 망각하게 도와준다. 디오니소스적 힘은 음악에서 나온다.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음악은 개별화된 인간들을 보편적 쾌감과 도취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폴로적인 것의 주요 개념 중에 하나인 ‘개별화의 원리’로 무장한 소크라테스적 도덕이 비극을 무력화시켰다고 보았다. 디오니소스적 도취로 인해 적대적이었던 자연과 인간은 화해하고, 노예는 자유민이 되며, 인간은 보다 화합하는 공동체로 융화된다는 것이다.     아폴론은 윤리의 신으로 절제를 중요시하지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을 지주로 하고 있는 그리스문화의 주춧돌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그리스 비극에서 읽은 것이다. 비극은 합창단으로부터 나오며, 민중 가운데에서 선정된 합창단은 무대 위에서 연기자들이 신들의 이야기를 공연할 때, 신이 된 것 같은 합일의 경지를 경험한다. 또한 합창단은 무대 위의 인물들과 관객을 관조하는 또 다른 관객이 되기도 한다. 관객들은 합창단에 의해 비극적 서사의 고통이 한층 강화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엄한 합창에 의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예술의 역할이 바로 이런 합창단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고, 관객에게 고통을 극복하고 위로를 받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 음악정신에서 탄생했고, 신화적 정신이 투영되었을 때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의식(이성)의 빗장을 풀고 인간의 무의식(신화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집단무의식에는 인류가 오랫동안 경험한 것들이 축적되어 있고, 신화는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니체는 음악의 역할을 서사가 담당하고 신화가 극에서 사라지면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어렵다고 보았다.     아리스토델레스가『시학』에서 비극이 관객에게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주장한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있던 긴장과 불안 등 심적 부조화가 정돈되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에서도 자유연상과 꿈의 분석 등을 활용하여, 마음속에 쌓인 억압된 감정 등 무의식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 치유를 모색하고 있는데 그 역할을 예술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 예술가는 자기의 무의식을 작품에 투영하고, 관객들은 그 작품을 통해 유사한 경험을 함으로써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그리스 비극의 근원적 힘이 부활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바그너의 음악극(Musikdrama)에는 독일과 북유럽의 신화가 사용되었다. 또한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통해서 그리스 비극의 정신이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를 발견한 것이다.   3. 이성으로 정제된 서정     시에 있어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가장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이성으로 정제된 서정시’라 할 것이다. 예술사조의 큰 흐름을 보면 항상 이성과 감성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단지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느냐가 관심사였지만 대부분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균형을 이룰 때 예술적 가치를 높여주고 우리 인간에게 호소력이 컸다. 그 중에 특히 산문은 이성에, 시는 감성에 더 무게의 중심이 있었다.  아무리 산문이라 해도, 그것이 예술을 지향한다면, 서정성이 어느 정도 물들여 있어야 호소하는 힘이 크다. 모든 예술에 있어서 서정성은 주춧돌이 되고 있다. 더구나 시는 무엇보다도 서정성이 가장 핵심으로 여겨져 왔다.       서정시는 인간의 삶을 반영하기도 하고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먼저 제시하기도 한다. 서정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와 아울러 거기 담긴 언어와 정서의 아름다움     은 상처받은 인간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승화     의 기능도 함유한다.(이숭원, 「시와 서정」, 『현대시론』, 서정시학, 2014, 49쪽).     물론 과유불급이라고 서정성이 넘치다보면 값싼 감정의 늪에 허우적대는 경우가 적지 않고 시인 개인의 독특한 향기가 실리기 어렵다. 가장 이상적인 서정시는 이성으로 정제된 감성에 의해 써진 시라고 할 것이다.         서정은 서정이되, 인간의 심성을 고양하고 삶의 확충에 기여하는 서정, 그러면서     도 기존의 틀에 박힌 서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현하는 서정,      그런 자질을 함유한 시가 뛰어난 시라는 점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숭원, 앞의 책, 58쪽).     서정시를 거부하는 시도도 적지 않았지만 서정을 벗어나서는 시의 가치가 빛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음식물을 먹듯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예술, 그 중에서도 감성을 다독여주는 서정시에 둥지를 틀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복잡하고 삭막해져가는 현대에서 피폐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예술치료가 융성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예술은 감성을 다독여 깊은 무의식에 접근하도록 돕고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서정을 배제하는 정신도, 서정을 극복하고자하는 시도도, 서정에 바탕을 두고 있     었으며 이때마다 시와 비시의 경계가 새롭게 확장되며 시의 영역 또한 확대되었     다. (김현자,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서정의 본질과 의미」, 『한국시학연구』 16, 2006. 8쪽)     예술가는 익숙한 것에 반감을 갖는 경향이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있다. 새로운 예술사조는 항상 감성과 이성, 주관과 객관, 형식과 자유, 통제와 해체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생성 소멸되어 왔다. 그럼에도 예술에서 차지하는 서정성,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무게가 전혀 줄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의식에 기대고 있는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은 감성에 근거하지만 이성으로 정제되지 아니하면 정돈된 작품이 될 수 없다.   4.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     서정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많은 예술 중에 특히 음악-미술-시가 한데 어우러져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 밭을 풍성하게 가꾸어 왔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론도 결국 신화(처용)를 매개로 하여 미술(세잔, 피카소, 폴록: 추상미술, 소위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인 요소)과 음악(모차르트: 절대음악,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기능을 아우르는 방법의 하나였다. 김철교,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한국시학연구』제 49호, 97~118쪽.    칸딘스키와 끌레는 음악과 미술의 융합을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시도하였고, 피카소와 호안 미로는 시와 미술을, 바그너와 클림트는 시와 미술과 음악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1) 모든 학문의 총화로서의 예술     과학과 철학도 예술의 영역에 끌어들이는 것이 현대예술의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술전시장은 음향이미지와 빛의 이미지, 색의 이미지들이 통합되고, 여기에 아서 단토의 철학적인 것이 가미되지 않으면, 즉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는 해명이 없으면 예술로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찌그러진 깡통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면 폐기물이지만, 전시장에 전시되어 철학의 옷을 입으면 예술이 된다.     “철학이 이성적인 시각에서 개념을 통해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인 반면에, 예술은 감성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주영, 『예술론 특강』, 미술문화, 2007, 9쪽).  미술에 철학이 가미되어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은 이성과 감성의 통합으로 예술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줄다리기가 팽팽할수록 시를 읽는 기쁨과 맛이 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는 모든 학문의 총합이 예술을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성과 감성을 오가며 많은 실험을 해보았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해체를 논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통합되어 질서를 세우고 구원(해방, 자유)을 향해 나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것을 ‘모던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던낭만주의는 이성과 감성의 통합과 추상성을 큰 특징으로 할 것이다. 추상성은 예술가나 수용자 모두에게 무한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추상예술은, 모든 수용자들에게 각기 다른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구원(해방)을 준다. 모든 수용자는 무의식에 침전된 경험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추상성이 지나쳐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은 낙서와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낙서와 추상의 차이는 예술성을 담보하는 통일적 이미지가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낙서도 예술이 될 수 있다. 화장실에 있을 때는 낙서이지만 시집(詩集)으로 들어오거나 전시회장 액자 속에 넣어 걸면 예술이 되기도 한다. 변기가 화장실에 있는 것과 전시장 진열대에 있는 것의 의미가 다름을 듀샹이 잘 보여주었다. 허접쓰레기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나 수용자에게 통일된 예술적 이미지를 안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일상성을 벗어난 예술적 추상성일 것이다.   (2)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의 융·복합     앞에서 누누이 언급한 바와 같이, 미술가는 형상이미지를 통해, 음악가는 음향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언어이미지, 즉 은유와 상징을 통해 무의식을 다룬다. 따라서 보다 무의식에 가까이 다가가서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무의식에 침전된 찌꺼기들을 다루어 치유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이미지들이 함께 작동해야 할 것이다.     문자나 소리언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술과 음악 등 다른 예술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기존의 언어 질서나 체계로는 정확히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세계, 재현되지 못하는 세계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 시는 기존 언어의 한계 위에 서서,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며 불러보는 안타까운 기다림”( 김유중, 「김춘수 시 의 정신분석적 이해」, 『국제한인문학』 16집, 2015, 국제한인문학회, 125~126쪽.)을 머금고 있다. 언어의 한계로 인해 속이 타는 예술가는 미술이나 음악에서 차용한 은유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여기서 ‘어느 정도’라 함은, 시인은 색깔이나 음향의 이미지조차도 언어로 은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절대음악의 경우는 물론이려니와 표제음악의 경우에도 수용자들이 주제와 대상과 예술가의 이미지를 알지 못하여도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시가 언어의 의미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즐길 수는 없는가? 우리 수용자가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된 가곡을 듣고도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다. 김춘수가 자신의 무의미시론을 말하면서, 염불에서 리듬만 남는 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시를 절대음악에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추상미술의 경우에도 주제와 대상과 예술가의 이미지를 모르더라도 훌륭하게 수용자들은 자신이 창조하는 이미지로 즐길 수 있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 점화된 시기는 낭만주의다. 이 시기에 선포된 예술통합이념은 바그너의 종합예술품 개념을 거쳐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빛을 본다. 바그너에 의하면 종합예술품은 여러 다른 예술을 새로운 유형의 예술작품으로 용해시키는 것이다.    바그너가 생각하고 있던 종합예술이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②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神話)이어야 한다. ③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④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는 뜻깊은 선율을 낳기 위해서는 두운(頭韻)을 써야 한다. 관현악은 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합창과 같은 몫을 하며, 이야기의 일반 인간적(一般人間的)인 것을 표현하여, 과거를 회상케 하며 또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한다. ⑤ 일반적인 사상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사부정적(意思否定的)인 염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독일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구제의 이데아’를 그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⑥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해야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의 음악을 독립적인 장르로 보지 않고,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의 후기 작품은 오페라(가극)이 아닌 악극(musikdrama)으로 불리게 되었다. 음악을 중심으로 한 오페라와 달리 연극적인 요소를 더 강조한 새로운 장르를 최초로 탄생시킨 것이다.”(금난새,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생각의 나무, 2008, 203~205쪽)    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문자표현의 한계와 딜레마를 통합적인 악극의 개념으로 극복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언어와 음이 갖는 음성적, 음향적 측면뿐만 아니라 시각적, 조형적 요소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매체융합의 역사적 물결은 20세기 초 프랑스와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고조된다. (고위공, 『문학과 미술의 만남』, 미술문화, 2004, 55쪽).        바그너(Richard Wagner)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영향은 음악을 미학적인 표준으로 만들었다. (······) 음악은 극       의 본질을 표현하는 도구로 인식되고, 무대는 음악화되었다. (······) 바그너는 예       술의 분리가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의 분권화와 개인적 이기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며, 온전한 인간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을 위해 종합예술이 모든 예술장르       를 다시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 우선 ‘순수한 인간적’ 예술의 형태인       무용예술, 음악예술, 언어예술에 (······) 세 개의 미술적 장르를 더한다. ‘건축예       술, 조형예술, 회화예술’이 그것이다. (······) 이상의 여섯 예술 장르는 역사상 그       리스 비극에서만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상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미래의 예술작품’ - 바그너의 종합예술론과 그 영향에 대한 연구」, 『한국연극학 24호』, 2004, 181~186쪽).     시인으로써 회화와 음악을 잘 활용한 사람은 표현주의 시인 트라클(Georg Trakl 1887-1914)이라 할 수 있다. “특이한 시어조음 및 배열, 무엇보다 잦은 색체은유의 사용은 당시 발아하기 시작한 초기 표현주의 추상미술과 맥을 같이한다. 그 어느 현대시인보다 강한 음악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 추상이란 문자, 형상, 음의 통합으로 전개된다. 반세기 전 바그너가 선포한 종합예술품 이념이 구현된 셈이다. 추상은 표현주의 회화와 서정시를 묶어주는 중요한 고리가 된다. 칸딘스키와 트라클이 추상예술의 추구라는 표현주의 이념의 실현에 있어 공통됨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색체와 언어 또는 음향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고위공, 앞의 책, 66~72쪽).   (3) 문학(시)-음악-미술의 상호의존성   1) 시와 음악     시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시와 음악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견해, 둘째, 타협이 불가능하여 어느 하나는 다른 것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 셋째, 서로 상승효과를 가져온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가사와 음악의 변증법적 관계를 주장하는 뤼베(Nicolas Ruwet, 1933~2001)의 견해에 따르면, 시에 곡이 붙여진 가곡의 경우, 시는 음악과 연합하여 보다 폭넓은 전체를 이루면서 그 의미 또한 시너지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최인령, 「시와 음악의 관련성을 바라보는 인지주의의 관점 – 말라르메의 시와 라벨의 음악 분석」, 『프랑스문화예술연구』19집, 2007, 411~415쪽).     음악의 최근 경향은 미술처럼 철학화되어 가고 있다.  “‘음악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단지 진실해야 할 뿐이다’라고 한 리게티(G. Ligeti, 1923~2006)의 언급은 20세기 작곡가들의 음악관을 함축적으로, 명료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전상직,『음악의 원리』, 음악춘추, 2017, 18쪽).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음악과 미술의 영역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부작용의 하나가 수용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학도 이러한 예술적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숱한 실험들이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1990년대부터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다. 여전히 실험은 계속되고 있고 확실한 흐름을 형성하기에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예견컨대, 시문학의 경우에도 이성과 감성이 손을 잡고, 신과 인간이 화해하며,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조화를 표방하면서, 다양한 과학기법을 활용하는 예술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2) 시와 미술     문학과 미술, 특히 미술과 시는 깊은 우정을 쌓아왔다. 본고에서는 화가의 이론을 시에 실험한 아폴리네르, 화가이면서 시인인 피카소를 예로 들고 싶다. 특히, 석학들의 글을 다소 많이 인용한 것은 어설픈 해설보다 전문가들의 생생한 주장을 듣고자 함이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20세기 초의 예술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예술가’의 한사람이다. 특히 입체파 화가들과 교제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피카소에게 브라크를 소개하고 당시 낯선 예술운동이었던 입체파 화가들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 그의 시도 입체파 미술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아폴리네르는 “입체파 회화에서 시간을 지속적으로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가 보기에 입체파 화가들은 한 사물의 여러 면을 하나의 화폭에 그려 넣음으로써 시간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기욤 아폴리네르,『알코올』, 황현산 역, 열린책들, 2010, 31~35쪽.)  아폴리네르의 입체주의 기법의 시는 『알콜』의 첫 번째 시 가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입체주의적 기법의 시, 합성적 또는 ‘동시주의적’ 기      법의 시이다. 감각과 기억이, 꿈과 현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아무런 원근법      적 질서도 없이,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논리적 관계도 없이 동일한 평면상에 병      치되어 있다. 이는 마치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가 보여주는 바와 같은 자연의 질      서와는 다른 질서를 갖추고 있는 이질적인 여러 마티에르들의 병치 또는 편재의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같은 파격적인 이미지 나열의 수법은 아폴리네르의 두       번째 시집이며 마지막 시집인 『상형시집(Calligrammes, 1918)』에 이르러서는      물체의 형태를 인쇄술의 배열에 의해서 재현하는 좀더 파격적인 실험으로 발전      다. ‘브라크와 막스 자코브 / 새벽 같은 잿빛 눈의 드랭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시구가 나오는 같은 시편은 『상형시집』의 특징       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     월간미술, 2002, 63~65쪽).     여기 제시된 그림은 아폴리네르의 시 전문이다. 시어와 시행을 평면적으로 쓰지 않고 비둘기와 분수의 형태를 입체적으로 표현한 파격적인 실험시다.       비수에 찔린 비둘기와 분수   비수에 찔린 다정스런 형상들 꽃핀 사랑하는 입술들 미아 마레이 이예트 로리  애니 그리고 그대 마리 너희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 아가씨들이여 눈물짓고 기도하는 분수 곁에서 저 비둘기는 넋을 잃고 있다 옛날의 모든 추억이 오 전쟁터로 떠난 내 친구들이여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대들의 시선이 잠자는 물속으로 우울하게 사라진다 브라크와 막스 자코브 새벽 같은 잿빛 눈의 드랭은 어디 있는가 레날 빌리 달리즈는 어디 있는가? 그 이름들이 우울하게 울린다 교회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리듯 참전한 크렘니츠는 어디 있는가 아마 그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내 영혼은 추억으로 가득하다 분수가 내 고통 위로 눈물짓는다 북쪽 전쟁터로 떠난 이들이 싸우고 있다 땅거미가 내린다 오 핏빛 바다여 월계수 장미 전쟁의 꽃이 피 흘리는 정원     피카소의 시선집 『피카소 시집』이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다. 미카엘이 쓴 서문에 의하면, “대단한 열정으로 시 쓰기에 전념했던 그는 1935년에서 1936년까지 거의 매일 시를 썼고 오늘날까지 피카소가 마지막 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1959년에 이르기까지 몇 번 펜을 놓았을 뿐 꾸준하게 시 쓰기를 계속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피카소는 한계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시를 썼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동기술법으로 써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부분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글쓰기를 진행해 나갔고 언어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크나큰 자유를 누렸다. 피카소는 예술 속의 모든 장벽을 거부한다. ‘단어로 그림을 쓸 수 있고 시에 느낌을 그려 낼 수도 있으니 어쨌거나 모든 예술은 하나다.’ 피카소는 텍스트의 공간성을 강조한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아 텍스트의 각 페이지들은 시각적으로 구성하였다. 그의 시 어디에서나 그림과 관련된 어휘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 피카소에게 글쓰기는 임시로 가져본 직업이나 취미가 아니라 열정을 다 비친 하나의 활동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지음, 『피카소 시집』, 서승석 허지은 역, 문학세계사, 2009,9~16쪽).    3) 음악과 미술: 간딘스키, 끌레     음악과 미술의 관계는 화가들이 음악을 자신의 그림에 투영시키려는 노력이 중심이 되었다. 물론 음악가들도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림에서 음악을 듣고, 음악 속에서 그림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특히, 간딘스키와 끌레는 음악에 정통한 화가들이다.       미술사조는 구체적 영역, 즉 비례와 균형에 바탕을 둔 실사(實寫)에서 점차 벗어     나 쇼펜하우어가 적시한 대로 ‘음악의 상태’, 곧 추상의 영역으로 옮겨왔다. 드디     어 ‘그림으로부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구체적 표현 대상이     나 의미가 배제된 순수한 시각적, 청각적 형태는 각기 눈과 귀라는 상이한 경로     를 통해 지각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뇌와 가슴 속에서 공통된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추상미술에 있어서의 음악적 속성에 관하여는 이미 칸딘스키     (W.Kandinsky, 1866-1944)가 그의 저서 과 를 통해 화폭에 담긴 형태들의 크기, 색채, 위치, 방향성, 운동성 등을 음     악적 관점에서 논한 바 있다. (전상직, 앞의 책, 33쪽).     칸딘스키는 렘브란트 그림에서 명암이 주는 강력한 화음을 발견했으며, 바그너의 음악에서 예술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음악의 힘이 반영된 회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색을 음악과 연관시킴으로써 화가에 의해 구현된 음악은 우리에게 그림을 감상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음악을 ‘눈으로’, 그림을 ‘귀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클레는 회화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라는 글로 ‘문화적 리듬’을 언급하면서 음악에서의 장단 구조를 풍경화에서의 리듬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그의 회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칸딘스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클레는 들로네의 색상 대비에서 영향을 받아 이를 리듬으로 표현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김광우, 앞의 책, 22~25쪽).     이러한 미술-음악-문학의 다양한 만남과 조화는 결국 예술이란 장르의 세분화가 큰 의미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시-소설- 희곡 등의 구분도 예술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시로 쓰고, 시에 서사가 있고, 희곡에 시와 그림과 음악이 융·복합되면 예술적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다.   5. 요약과 제언     예술가는 내적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주변 예술과 사회 정치 경제에서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이고, 예술적 감각으로 소화시켜 새로운 작품을 생산함으로써  ‘낯설게 하기’의 전도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웃 예술에서 혹시 얻을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훔쳐보고, 특히 문학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 영역을 무한히 넓혀갈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은 이성적 측면이 강한 아폴론적인 미술과 감성적 측면이 강한 디오니소스적인 음악, 그리고 대사를 이루고 있는 시(詩)가 조화를 이루어 치유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이 셋이 합쳐질 때 극의 효과, 치유의 효과,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 셋을 아우를 수 있는 시극(poetic drama)을 통해서, 예술이 수용자들에게 다가가 효과적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시극은 단지 언어이미지, 음향이미지, 색채이미지의 결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스토리텔링이 가미되어 있다.     현대를 ‘영상의 시대’라 일컬을 만큼 이러한 효과를 영상예술에서 비교적 잘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영상은 나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남의 이야기를 관조하는 측면이 강하고, 시극은 내가 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치 니체가 칭송해 마지않은 그리스 비극의 합창단원처럼, 함께 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릴 수 있겠다.(*)  
62    수퍼비니언스의 원리 / 문 덕 수 댓글:  조회:1263  추천:0  2019-01-17
수퍼비니언스의 원리                                                             문 덕 수     [1]   시 「침묵」(ꡔ현대문학ꡕ, 1955. 10), 「화석(化石)」(ꡔ현대문학ꡕ, 1956. 3), 「바람 속에서」(ꡔ현대문학ꡕ, 1956. 6) 등은 나의 작품활동의 효시이다. 이전에도 물론 동인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선보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약 반세기 동안, 나름대로 한눈 팔지 않고 땀을 흘려 온 셈이다. 시집은 ꡔ새벽바다ꡕ(성문각, 1975) 등 모두 열댓 권 되고, 논저로는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시문학사, 1981), ꡔ시론ꡕ(시문학사, 2002) 등이 있다. 시도 쓰고, 연구도 하고, 논문도 써 왔지만, 시에 대한 의문은 눈덩어리처럼 더 불어났다. 내 나이도 80 밑자리인데, 인제는 문제 속에서 허덕이기보다는 한두 가지라도 풀어서 분명한 형식으로 가닥을 잡아 놓아야 하겠다. ꡔ오늘의 시작법ꡕ(시문학사, 1986) 같은 저서도, 내가 무슨 시 쓰기의 스승이라는 입장에서보다 시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풀고 싶은 욕망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의 복잡한 의문의 실타래는 최근에 와서 한두 가닥으로 가시화되었다. 우리는 광복 직후부터 문학의 좌우 대립, 순수 대 참여의 논쟁, 모더니즘 대 민중주의의 대립에 이어, 1970년대부터 분열의 폭은 극에까지 이른 ‘형식주의 대 역사주의 갈등’에 직면했다. 이러한 논쟁, 대립, 갈등의 혼란을 다원주의 특징으로 간주하여 예삿일로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적대적 극한상의 경우에는 밑바닥에 잠재된 어떤 일관된 근원 탐색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를 쓰면서 토픽을 만들어 서로 논전하고 대립하고 갈등하더라도(이는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 어떤 ‘원칙’에 서서 시를 쓰고 시론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스포츠에서 양측이 지켜야 할 경기규칙과 같은 것이다. 나는 그 원칙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명제화해 본다.         이 명제는 시에서의 ‘수퍼비니언스(supervenience)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시건 모더니즘시건 즉 어떤 형태의 시건, 모든 시는 ‘누가, 누구에게, 왜,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라는 8가지 조건으로 총체적 상황(total situation)을 구성한다. 나는 이것을 시(시쓰기, 시론)의 팔하원칙(八何原則)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인이란 무엇인가(메이커인가, 에이젠트인가, 정치가인가), 독자란 무엇인가(수용자인가, 해석자인가, 창조자인가), 동기는 무엇인가(개인적, 사회적 등), 무엇을 쓸 것인가(재료, 주제, 내용 등),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운율, 수사, 방법), 언제 썼는가(시기, 시대적 의미), 어디서 썼는가(지리적, 자연적인 환경이나 장소), 어떤 매재로 썼는가(언어, 기호, 기타 매재) 등의, 이른바 시에 관한 모든 문제가 이 팔하원칙에 내재된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명제(‘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팔하원칙에 다 관련되지만, 특히 ‘무엇’과 ‘어떻게’에 집중적으로 관련된다. ‘무엇’이란 시의 재료, 주제, 내용 등을 말하고, ‘어떻게’는 시쓰기의 모든 방법을 총칭한다. 오늘날 시단에서 시의 양극화 현상을 보여주는 역사주의 대 형식주의는 ‘무엇/ 어떻게’의 관계된다.     [2]   1950년에 경남 통영에서 처음으로 청마와 지용을 만났다. 청마는 역사주의가이고 지용은 모더니스트(즉 형식주의자)다. 나는 이 때 역사주의와 형식주의를 처음 만난 셈이다. 그 후, 나는 역사주의와 형식주의에 줄곧 시달려 왔다. 이러한 고뇌와 갈등은 이 땅에서 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의 공통적 숙명인지도 모른다. 8.15 직후의 좌우대립,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 수립, 6.25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분단과 통일 과제― 이러한 역사 현실은 시인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고 시보다는 역사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시와 정치를 뒤섞어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순수와 참여, 전통과 이데올로기,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대립을 가져왔고 이 과정 전체를 역사주의 대 형식주의의 갈등 구조로 개괄할 수 있다. 1930년대에 그처럼 열렬했던 형식주의자 김기림(金起林) 씨는 광복 직후 시집 ꡔ새노래ꡕ(아문각, 1947)를 전후해서 역사주의로 방향을 돌렸지만 거기에서도 버림을 받았다. 역사주의자 임화(林和)는 역사주의에 의해 처형되었고, 김춘수(金春洙)는 형식주의에 순교했으며, 김수영(金洙暎)은 역사주의에 휩쓸렸다가 예술을 버려야 했다.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 나는 이때 예수교도임을 자랑한다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내 벗을 죽임으로써 괴롭혔을 때 나는 우정을 적에 대한 잔인으로 고치었다. 적이 드디어 내 벗의 한 사람을 죽였을 때 나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적이 우리들의 모두를 노리었을 때 나는 곧 섬멸의 수학을 배웠다.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 사랑스런 것! 너의 이름은 나의 적이다. ― 임화 「적․1」에서   이 시는 관념시 또는 역사주의시다. 첫째로 적과 우리라는 적대관계가 텍스트 밖의 정치현실과 연결되어 있고, 둘째로 “사랑, 미움, 잔인”과 같은 관념만이 거리낌 없이 토로되어 있으며, 셋째로 그러한 관념을 실어 운반해주는 물리적 이미지가 없다. 역사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나 “나는 이때 기독교도임을 자랑한다”는 대목엔 약간의 역설이 내재하나 ‘시’일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엄격하게 따지면 이런 대목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물리성에 실려 운반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임화는 앞서 제시한 명제, 즉 ‘수퍼비니언스의 원리’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 다음에는 이와는 대립되는 형식주의 시를 보기로 한다.   산골에서 자란 물도 돌베람빡 낭떨어지에서 겁이 났다.   눈덩이 옆에서 졸다가 꽃나무 알로 우정 돌아   가재가 기는 골짝 죄그만 하늘이 갑갑했다   갑자기 호숩어질랴니 마음 조일 밖에 ― 정지용, 「폭포」의 1~4연에서   이 시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산에 관련된 작품의 이미지도… 매우 청결하고 투명하고 신선하다. 그 속에 어떤 이데올로기나 휴머니즘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와 현실에 관련된 사상, 휴머니즘적인 일체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다”고.(졸저,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 p.111) 1930년대의 극단적인 ‘사물시’라고 할 수 있고, 임화의 「적」과는 대극에 놓인다. 정지용의 「폭포」를 사물시로 간주하더라도 그 사물이 어떤 관념을 운반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즉 관념(이데올로기나 휴머니즘 등)은 결여되어 있다. 청정 무욕의 철학을 암시한다는 것은 독자의 해석일 따름이고, 독자의 해석도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운반된 관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시에서의 관념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과 물체와의 공존을 전제한 것이다. 정지용의 시에서 관념이 없고 물체만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순수성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가면 그 물체가 가지는 의미마저 거세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시의 궁극적 형태를 ‘순수시’라고 하더라도 순수성이 그러한 시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3]   수퍼비니언스의 원리를 기호화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념, 물리적 존재, 실려 운반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관념은 생각하고 믿고 의지(意志)하는 모든 사고(思考), 개념, 사상, 이데올로기를 의미하지만, ‘사랑한다, 그리워한다, 미워한다, 슬프다, 아프다’와 같은 감정도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물리적 존재’의 의미는 자연과학의 개념을 빌려와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언어가 가지는 지향성(志向性) 특히 외재적 지향성과 물리성(物理性)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려 운반된다’는 말은 관념이 물리적인 존재에 부수(附隨)된다, 또는 관념이 물리적인 것에 붙어서 따라간다는 뜻이다. 종래의 비유나 상징도 이 범주에 속하나 더욱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무엇인가를 느끼고 상상하고 생각하여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 ‘무엇’이란 자기가 과거에 체험하고 인식한 물체인 경우도 있고, 어떤 사건(사태)인 경우도 있고, 어떤 관념(자본주의, 공산주의, 인권, 이성, 존재, 고독 등)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무엇’이란 시인의 의식이 그것으로 향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 무엇으로 향하고 있음을 지향성(志向性, intetionality)이라고 말한다. 시쓰기도 일종의 지향적 행위다. “길바닥에 마른 풀잎이 떨어져 있다”(문덕수, 「마른 풀잎」에서)에서는 ‘풀잎’으로 지향하고 있으며, “많은/ 태양이/ 죄그만 공처럼/ 바다 끝에서 튀어오른다”(문덕수, 「새벽바다」에서)에서는 ‘태양’을 지향하고 있다. 시에서 시인의 의식이 풀잎이나 태양으로 지향한다는 것은 결국 풀잎이나 태양을 표상(表象)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시에서 어떤 관념을 지향한다면 그 관념은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언어의 ‘물리성’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물리성’이란 무엇일까. 언어가 어떤 물체를 지향하여 그 물체를 표상할 수 있음은, 그 언어에 ‘물리성’(物理性)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즘에서는 사물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그 때의 사물 이미지도 언어의 외재적 특징과 더불어 그 물리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이미지스트들은 물론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시라고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잉크를 묻힌 글자꼴’에 지나지 않고, 글자 그 자체에 무슨 물체에의 지향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체에의 지향성은 인간이 읽고 해석하여, 시텍스트 바깥에 있는 물체와 연결을 시켜주는, 다시 말하면 해석에 의하여 물리적 지향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시텍스트 자체는 본래적 지향성을 가지지 않고 의사적 지향성(擬似的 志向性, as-if intentonality)을 갖는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언어가 가지는 물리성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일찍이 비트겐슈타인(L.J.J. Wittgenstein)이 말한 대로,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그 사용법이나 용도, 또는 기능을 통해서 물리성을 인식할 수 있다. “유리상자 속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유행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은 마네킹은”(문덕수, 「마네킹에서」에서)에서의 ‘마네킹’의 물리성은, 백화점 같은 진열장에 세워놓고 유행복이나 장신구를 입혀 사고 싶은 욕망을 유발하는 인체 모형이라는 용도나 기능에서 알 수 있다. “라이터, TV, 휴대전화, 종이” 등의 물리성도 그 용도나 기능을 생각해 보면 그 물리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물체의 물리성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탈관념의 물리성, 또는 날 것의 무리성이 중시되어야 한다. 1910년대 무렵 일어난 ‘이미지즘’은 “명확한 이미지”, “정확한 사물의 언어” 등을 강조했다.(졸저,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 p.47) 이미지즘에서 강조한 이미지는 ‘언어 이미지’이다.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고 했지만, 이미지스트들은 언어가 가지는 외재적 특징이나 물리성에 대한 이해도 없이 이런 어구를 막연히 사용했다. 특히 “정확한 사물”이라고도 했는데, “정확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미계열의 모더니즘을 다 안 것처럼 이 땅에 소개․도입되었다. 시의 언어에는 외재적 특징과 물리성이 있다. 그러한 외재적 특징과 물리성은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는 이미지즘의 모호한 개념을 어떤 관점에서든 분명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벽이 걸어온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온다 머리가 없는 인형이 걸어온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노트르담 사원의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가 밤 한 시를 친다 ― 김춘수, 「벽이」에서   “벽”, “홰나무”, “인형” 등은 물체어이지만, “벽이 걸어온다”나 “늙은 홰나무가 걸어온다”는 대목은 현실에서는 전혀 그 실현이 가능하지 않는 물체이다. “향수병이 몸을 옴츠리더니 벽을 민다”(김춘수, 「향수병」에서)도 그렇다. 벽, 홰나무, 인형 등의 언어가 가지는 왜재적 특징이나 물리성은 이 시에서는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이 박탈되어 무의식 세계나 관념세계에서의 실현 가능성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김춘수는 시집 ꡔ꽃의 소묘ꡕ(1959) 무렵부터 무의미시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물체어의 외재적 특징이나 물리성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이 없을 경우, 이처럼 이미지들을 “명확한 이미지”나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남향 영창을 열고/ 볕을 쪼이고 앉다”(김윤성 「신록」에서)와 같은 시구의 외재적 특징과 물리성은 현실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갖는다. “봄 바다는/ 유난히 반짝이다”(박명용, 「보길도․2」에서)도 그렇다. 이 경우 시의 언어 이미지와, 시텍스트 바깥의 사물로서의 물리적 실현 가능성이 부합할 때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수퍼비니언스의 원리에서, 물리적 존재나, 그것에 실려 운반되어야 할 관념은 가급적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이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무의식 속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전제로 한 무의미시의 이미지는 수퍼비니언스의 명제에서 는 멀어지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수퍼비니언스의 원리는 이미지즘의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해 준다.     [4]     이 명제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형식주의는 역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역사주의는 형식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시사하며, 이것이 오늘의 한국시의 위기를 처방할 한 방안이 되지 않을까. 둘째, 현실에서의 물리적 실현 가능성이 없는 형식주의나, 물리성이 없는 관념위주의 역사주의 시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해 준다. 이런 점에서 실험적 언어주의나 극단적 관념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셋째, 이 명제는 시사적(詩史的) 기준 설정에도 기여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 명제는 내 나름으로 정립한 명제일 따름이다. 이 원리와 더불어 시의 대상을 1, 2, 3과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성을 사상(捨象)하고 조직할 수 있는 ‘집합적 결합’도 최근에 정립한 나의 시의 한 방법임을 밝혀 둔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겠다.     문덕수   * 靑馬 柳致環 선생의 추천으로 ꡔ현대문학ꡕ지를 통해 등단(1955) * 제 12차 세계시인대회 집행위원장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역임, 명예회장,  * 홍익대 교수(명예교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역임,  *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현) *수상 :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문화훈장, 예술원상 * 저서 :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 ꡔ現實과 휴머니즘文學ꡕ, ꡔ文學一般의 理解ꡕ, ꡔ시론ꡕ,           ꡔ금붕어와 文化ꡕ, ꡔ世界文藝大辭典ꡕ』(편저) * 시집 : ꡔ線.空間ꡕ, ꡔ새벽바다ꡕ, ꡔ다리놓기ꡕ, ꡔ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ꡕ, ꡔ사라지는 것들과의                       만남ꡕ, ꡔ꽃잎 세기ꡕ 등 다수     
61    우리 시단에 드리운 초현실주의의 그늘 / 김철교 댓글:  조회:1281  추천:0  2019-01-16
퍼온 글임 ^^ 우리 시단에 드리운 초현실주의의 그늘   김철교     1. 현대사회를 들여다보는 한 방법   요즘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은 초현실주의라는 깃발을 들지 않더라고 여러 가지 초현실주의 기법들을 활용하여 시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한 수단으로서의 초현실주의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특히 초현실주의가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자유와 부정성, 현실 개념의 확대, 표현 영역의 확장, 인습타파에 의한 시어와 상상력의 확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의 진보를 초래하였다.”(고명수, 「초현실주의와 한국 현대시」, 『문학사상』 제34권 제9호, 2005, 241-248쪽.) 21세기에 들어와서 사회가 분노와 광기가 여기저기서 화산처럼 분출하고 그 파편들이 사회를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우려한다. 이러한 정신병리적 현상을 예술이 민감하게 담아내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소위 미래파라고 지칭되고 있는 황병승, 김경주, 최치언 등의 작품 속에서도 그런 징후들을 강하게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제기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는 아도르노(T. Adorno)의 예술론의 시각을 담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술은 현실의 어둠과 고통을 표현함으로써 자율성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우선 본고에서는 맨 먼저 초현실주의 기법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우리나라 시사(詩史)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한 시인들의 족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 시인들 중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시와 극을 쓰고 있다고 밝힌바 있는 최치언(『극작수업III』, 재단법인 국립극단, 2013, 17쪽.)의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수록 된 시들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고통들을 드러내기 위해 초현실주의 기법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2. 시에 활용되고 있는 초현실주의 기법들   초현실주의자들은 “창조적인 활동을 훼방하는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함으로써, 논리적인 이성, 기존의 윤리, 사회·역사적인 관례와 규범 및 미리 이루어지는 예견과 의도 등에 의한 통제와 제약을 거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 모두는 자동기술, 꿈의 세계 — 반은 의식적이고 반은 무의식적인 세계 — 및 심오한 마음의 상태에 대한 제약없는 표현 등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수용하였다.”(고봉준 외, 『문예사조』, 시학, 2007, 212쪽.) 초현실주의자들이 작품을 쓸 때 사용하는 주요 기법에는 자동기술, 무의식의 탐색, 데페이즈망(depaysement), 블랙 유머, 콜라주 등이 있다. 자동기술은 초현실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자동기술법은 무의식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완전히 수동적으로 듣고 받아쓰는 것이다.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사회적 규약의 통제아래 놓이기 때문에 구속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해방은 말의 올무를 벗어나야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자동기술을 통해 정신의 해방을 추구한 것이다. 자동기술법은,「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정의를 내렸던 것처럼,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통제가 사라진 상태에서, 감춰진 욕망을 일깨우고 인간으로 하여금 인습에서 벗어나 현실을 다르게 인식하게 만든다.(오생근, 『초현실주의 시와 문학의 혁명』, 문학과 지성사, 2010, 63쪽.) 초현실주의자들은 즐겨 사용하는 자동기술법을 통해 무의식을 탐색해 나간다. “예술가들에게 구원처럼 눈에 띤 것이 ‘무의식을 외부로 표현’하여 ‘진실’을 보는 눈을 확장시키고 자본주의와 과학주의에 획일적으로 물든 정신의 병리성을 직면·치료하는 ‘정신분석’이다. (······) 무의식을 언어로 표현하고 성찰하게 도와 치유하는 정신분석과, 무의식을 선·형·색·소리·단어로 드러내 감상자의 정신에 충격·쾌감·각성을 주는 예술 활동 사이에는 은유적 유사성이 있다. 그래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적 표현활동이 무의식에 감춰진 문제들을 은유적으로 드러내 인류를 병리상태에서 구원하는 활동이라는 새로운 의미와 활력을 지닌다고 본다.”(이창재, 「예술작품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 프로이드의 꿈 작업과 초현실주의의 창조 기법을 중심으로」, 『라깡과 현대정신분석』, 2008 여름호, 35-62쪽.) 초현실주의의 또 다른 핵심기법은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다. 관습적 사고에 충격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미술에 흔히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낯익은 물체를 원래 있던 장소에서 떼어내 뜻밖의 장소에 위치시키거나, 현실에서 양립 불가능한 사물을 한 그림에 나란히 위치시켜 ‘이상한 만남’을 만들거나,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사물을 혼합시키는 방법이다.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하면 무의식을 활성화시켜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자각되는 초현실성을 구현할 수 있게 된다. 블랙 유머는 잔혹한 현실 속으로 휩쓸리지 않기 위해,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경직된 사회 관습과 질서를 희화하는 반항의 한 형태이다. 현실의 일상적인 모든 관계를 뒤집어엎고, 인간사회에 편만한 모순들을 고발하며, 죽음과 시간마저 조롱한다. 콜라주 기법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작품들의 여러 일화들, 이야기들을 무작위로 조합하여 기존의 의미와 확장된 의미가 중첩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려 한다. 콜라주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관습적인 시선에는 엉뚱하고 파괴적이고 아이러니컬하게 보이지만, 역으로 현실에 나타난 모습들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3. 한국시단에서의 초현실주의 흐름   장이지는 2000년 이후 등단한 시인은 거의 초현실주의 기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 초현실주의에 대해 논의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초현실주의 시나 초현실주의 시인이 너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장이지,『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파』, 보고사, 2011.) 서준섭에 의하면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대략 세 가지 형태의 초현실주의 시 내지 시정신이 단속적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을 선구자로 하여 이승훈, 이성복의 시로 이어지는 전통이 그 첫 번째 흐름이라면, 다른 하나의 흐름은 『동천』을 전후한 시기의 서정주의 시에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이후의 정현종과 『산정묘지』의 조정권의 시로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다. 그 중간에 『대설남』의 김지하와 『게 눈 속의 연꽃』의 황지우가 위치하고 있다.”(서준섭, 「한국현대시와 초현실주의」, 『文藝中央』, 중앙일보사, 1993년 2월호, 423-437쪽.) 고명수는 앞의 글에서 이상, 삼사문학 동인(이시우, 신백수, 정병호, 한천), 조향, 김수영, 전봉건, 김종삼, 김차영, 이봉래, 성찬경, 김구용, 고석규, 김영태, 김춘수, 이승훈, 이성복, 함기석, 김혜순, 성귀수, 박서원, 이수명 등 최근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에게까지 초현실주의 시인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21세기 우리 시의 미래』(실천문학사, 2008)에서 1998년 이후 등단하여 한권 이상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 49명의 자선(自選) 시편들을 모아 5개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그중에 소위 미래파라고 명명된 그룹의 시인들은 김경주, 김근, 이근화, 황병승, 김언, 최치언, 김행숙, 유형진 등이다. 그런데 이들은 미래파라고 지칭하기보다는 오히려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 속한 시인들의 작품은, 유성호가 권말 해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합리적 해독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도적으로 소통 자체를 불편하게 하면서 파편화된 의식과,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시단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한 사례들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요약하면, 이상과 조향을 필두로 삼사문학 동인들을 초현실주의 시인들로 분류하는데 일치를 보고 있으며, 이승훈, 이성복 등의 작품에서도 초현실주의 기법들을 활용한 자취를 많이 찾아내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하여 등단한 시인들 중에서는 최치언, 김경주, 황병승 시인들이 초현실주의 흐름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최치언의 시에 나타난 초현실주의 기법   최치언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밝히고 있는 『극작수업 III』(재단법인 국립극단, 2013)의 시창작과 관련된 부분에서,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 의해 두 종류로 분류되는데, 언어를 깎듯 조합하면서 시를 만들어 가는 시인과, 언어를 결이 흘러가는 대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데, 자신은 후자에 가까운 시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술에 있어서 영감이란 세상이 감춘 비밀과 의미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선택받은 촉수이며, 무속인에게 신이 내리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동기술적인 기법을 선호하며, 작품을 쓸 때 의식적 언어 조합보다 무의식의 흐름에 내 맡긴다고 한다. 최치언은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와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라는 시집 제목에서부터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 기법을 연상케 한다. ‘설탕’과 ‘치료’, ‘선물’과 ‘피’의 조합이 당돌하고, ‘피를 요구한다’는 서술은 생경한 느낌을 준다. 전혀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모여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시집 제목뿐만 아니라,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실린 시의 제목들, 「몰래몰래 흘러들어와 잠든 얼굴에 손톱이 돋던 날」, 「내 상처는 0킬로그램」, 「슬픈 검지」, 「아비규환 로맨스」 등에도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현실에서 도저히 양립 불가능한 것을 함께 위치시키는 만남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최치언은 시인이면서 극작가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시 뿐만 아니라 그의 희곡들도 역시 무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부조리극이 대부분이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전체가 하나의 부조리극으로 볼 수 있으며, 등장인물은 폭력적 지배자 혹은 아버지, 피해를 입고 있는 어머니와 그 자식들이다. 중심 개념들은 폭력, 분노, 죽음, 피, 검은 섹스 등으로 엽기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으며, 블랙 유머도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검은 측면을 적나라하게 표출함으로써 현대사회를 고발하고 그 가운데 위안을 찾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부분)     이 시에서 좌측과 우측의 양립하는 두 세계의 대립 국면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죽음을 통해 현실의 참상을 드러내고, 체제나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육체와 내면을 얼마나 잔혹하게 파괴하는가를 보여준다. 좌측은 연필의 힘, 의사당의 순결 등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 위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듣지마라, 보지마라고 강요하고 있다. 좌측의 말에 우리는 순진해졌고 그래서 결국 선한 꿈을 꾸지 못하게 된다. 우측에 있는 우리는 귀도 눈도 없이 계속 걸었고 또 우리끼리 싸우다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좌측이 준 선물은 피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측이 모두 죽고 좌측이 우측을 모두 차지한 것이다. 어쩌면 좌측의 기만과 환상에 현대에 사는 우리는 모두 희생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귀를 도려내어 들을 수 없고, 눈알을 파내어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계속 듣고 보려고 한다. 시인은 현실의식 속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싸움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 비둘기가 지구에서 가장 먼 은하계를 통과할 쯤 턱주가리가 한 자쯤 튀어나온 누런 이빨의 신들이 둥글게 웃으며 엄마와 나, 여동생을 마중 나왔다. 나는, ___엄마, 저 바보 같은 놈들은 누구죠? 여동생, ___졸라, 힙합처럼 생겼네. 엄마, ___너희들의 아버지란다. 짠짜라짜. ___닥쳐! (「날아라 짠짜라짜」 부분)   시인은 용트림하는 무의식을 그대로 시로 토해냄으로써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을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신적인 위치에 있다. 아버지는 혈육의 아버지의 이미지 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해오고 있는 무자비한 폭군의 이미지다. 의식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우리 무의식에서는 자유롭게 활성화될 수 있는 것이다. 블랙 유머의 형식을 빌려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면, 폭력스러운 면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저항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를 찔렀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누군가를 사정없이 찔렀다 광장의 후미진 골목에서 나는 그 누군가를 만났다 그의 안경알은 분수대의 햇살처럼 튀어 올랐다   나는 중얼거린다? 비둘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엄마는 그네에 앉아 자꾸 아득한 허공으로 발을 차셨다 나는 그 발길에 차이면서 “엄마, 제가 죽여 드릴게요. 다 죽여 드릴게요.”   튀어 올랐던 햇살이 그 누군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오른손으로 그는 내 멱살을 움켜잡았고 아무도 보지 못했으므로 나의 왼손에 들려 있던 과도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불쑥 통과해 버렸다   엄마는 허공에 발목만 남겨 놓고 지상으로 내려와 검은 아스팔트 위를 한들한들 걷는다 나의 중얼거림은 끝이 없고 “엄마, 제가 죽였어요. 다 죽였어요.”   콸콸 쏟아지는 붉은 피. 나는 누군가를 들쳐 업고 시립 매립지로 간다 이곳에선 죽은 이들과 죽어갈 이들이 나와 함께 묻혀 있다   나는 중얼거린다, 끊임없이   “죽일 수 있을 때 까지 다 죽이고 죽을 수 있을 때 까지 죽겠어요.”   정오는 조용히 부패하기 시작한다. (「매장된 아이」 전문)     정오가 조용히 부패할 때 증오와 복수심에 휩싸인 아이가 누군가를 살해한다. “엄마에게 상처의 주체였고 엄마의 삶에 폭력을 휘두르던 배후의 누군가를 살해한다. (······) ‘죽일 수 있을 때까지 다 죽이고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죽겠어요.’라고 말하는 행위가 섬뜩한 충격을 주면서도 짙은 연민을 느끼게 하는 건 엄마와 아이가 받았을 핍박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 결국 시인에게 현대라는 시공간은 어른들(당신들)에 의해 살해되는 아이들, 살해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고 모든 것이 은밀하게 베일 속으로 사라지는 비밀의 세계다.”(함기석 권말해설, 「통념과 금기를 파괴하는 위반의 시학」, 143쪽.) 소위 지배자들, 권력자들, 탐욕자들에 의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의 역사는, 가까이는 일제시대, 김일성에 의한 6·25 전쟁, 전두환정권에 의한 광주민주화운동, 구원파에 의한 세월호 사건으로 그 흐름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최치언은 전두환 정권의 만행인 광주민주화운동을 가까이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작품을 통해 권위에 대한 반항 혹은 전복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부정과 반항의 욕망이 시라는 형식을 빌어서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지고 있는 것이다. 위에 제시된 「매장된 아이」를 비롯하여 이 시집에는 죽음, 피, 검은 성적 이미지 들이 가득하다. 때로는 부조리극 혹은 블랙 유머를, 때로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면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무의식의 자동기술이라는 수단을 빌려 그대로 전면에 표출하고 있다.   봄나물 같은 여자아이들이 나팔랑거리며 줄넘기를 하고 있다   아가미로 호흡을 하며 나는 수족관 속을 거닌다 (······) 지느러미로 물을 쓸면서, 나는 수족관의 벽에 코를 짓찧는다   아, 저 사과 같은 여자아이들 속에 조용히 부푼 성기를 빠닷 세운 흑인 하나만 있다면 흑인의 성기를 여자아이들이 난간처럼 붙잡고 어디로든 내달린다면, 나는 좋겠는데 내 코가 수족관 유리벽을 불쑥 통과하고 물은 허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햇살이 조금 더 필요한 봄날 오후에 (「일생에 단 한 번」중에서)     ‘나는 수족관 속을 걷고’, ‘내 코가 수족관 유리벽을 통과하고’, ‘물은 허공에 떠다닌다’. 전형적인 자동기술법을 통해 전개시키고 있는 시적(詩的) 현장이다. 이 작품에서는 ‘부푼 성기를 빠닷 세운 흑인’이 등장하는데 현실의 추악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어 등장하는 ‘여자 아이들’은 ‘봄나물’이나 ‘사과’에 대비되는 순결함을 지녔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함께 제시되면서, 특히 검은 성적 이미지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드(id)에는 두 가지 본능이 있는데 하나는 성적 본능인 에로스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드는 슈퍼에고 통제아래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있다. 이 시에서는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지배적인 이미지로 활성화되고 있다. 맑고 밝은 섹스보다는 어둡고 침침한 흑인의 성기로 대변되는 소위 검은 섹스가 지배자의 이미지와 연합하여 우리에게 폭군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히 최치언의 시집에서는 이러한 암울한 세계가 질펀하게 널려 있다. 「나는 너로부터 왔다」에서는 부친을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들먹이며 억눌려 있는 내적 고통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다. 우리의 짓눌린 무의식을 표면위로 끌어 올리고 있다.     (······) ---붙타는 집에서 식사를 했어요. 어미와 내 뻐드렁니처럼 귀엽게 소풍가고 싶 다던 오빠들이 아비의 집에 불을 질렀거든요. 식은 음식은 주인을 몰라본다던 어미가 고깃덩어리를 씹었는데 아비의 금니가 박혀 있 는 거예요. 그건 금니가 아니라 어미의 탐욕이었죠. 어미는 킁킁킁 웃으며 난 너희들의 털을 뽑 고 새 스웨터를 입혀줄 거다. 팔팔 끓는 물을 준비하고 발을 물지 않는 노란 장화와 귀가 없는 우산도 준비할 거라고 넋 빠진 소리를 해댔죠. (······) ---불타는 집은 더럽게 더웠죠. 우린 옷을 벗고 서로 몸을 비비며 춤을 췄어요. 흐물거리던 오빠들의 자지가 구렁이처럼 어미의 입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어요. 오빠들은 킁킁킁 떨며 어미의 입에서 자지를 빼들곤 내 보지 속에 정액을 퉤퉤 뱉어댔죠. 어차피, 그곳은 더럽게 더웠으니까요. 어때, 꼴리나요. (「나는 너로부터 왔다」중에서)     이 시는 본문 배열도 난장(亂場)을 연상케하여 자동기술법에 의해 써진 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종의 광기를 느낄 수 있는 시다. 이러한 기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실험한 기법이다. 우리 인간 무의식의 세계에는 억눌려 있는 검은 성적 광기가 의식의 수준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슈퍼에고가 있기에 이 사회가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슈퍼에고의 억눌림에 의해 현대 정신병이 만연되고 있다고 해서, 이를 백일하에 노출한다면 이 세계는 동물의 아비규환 사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기야 차라리 동물처럼 생존본능을 마구 휘두르며 살면서 적자생존하는 사회도 꼭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가져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최치언의 시들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눈길을 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5. 보다 정제된 초현실주의의 필요성   최치언의 두 권의 시집에 담긴 대부분의 시들이 여러 가지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분석대상으로 한『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담긴 시들의 경우 억압된 분노와 공포스러운 혐오감을 섞어 놓은 성(sex)과 죽음, 비참한 현실과 현대 사회의 폭력에 억눌려 있는 무의식이 활보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해방을 꿈꾸며 항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담기 시 40편 중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시가 16편, ‘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시가 10편이 된다. 이들 중에 4편에서 ‘죽음’과 ‘피’가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22편의 시에서 ‘죽음’ 혹은 ‘피’가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도 흑인의 성기를 비롯한 검은 섹스의 이미지와 폭력에 관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현대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펼쳐지는 온갖 추행과 사회의 검은 모습들이 가득 차있는 시집이라고 하겠다. 최치언의 시들은 그의 희곡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부조리극 혹은 블랙 유머를, 때로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면서, 현대 사회의 단면을 엽기 드라마처럼 그대로 노출하면서 저항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치언의 작품에서도 소위 미래파 시인들에게서 지적되고 있는 가독성의 문제와 완결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현승은 소위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파괴가 재미가 되면서 오랜 시간을 통해 구출된 시의 전통 전체가 간단히 저울 위로 올라갔다. 시가 알아들을 수 없는 장광설로 독자를 잃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시장에서 들려오는 시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현승, 「현대시와 미래파」, 『현대시론』, 서정시학, 2014, 404쪽). 또한 홍용희는 황병승의 시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시의 형식적 길이는 여기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무한대로 늘려도 무방하다. 어차피 청자를 배려하지 않는 자폐적인 발화이기 때문에 시상의 형식과 전개 역시 화자의 자의적인 의지에 따라 전개하면 그만이다.”고 지적하고 있는데(홍용희, 「내국 망명주의자의 화법과 언어」, 『한국대표시집 50권』, 2013, 386쪽), 이 또한 최치언의 시에도 해당하는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동호가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지적하고 있듯이 최치언의 시들에서도 “혼란스러운 감정의 토사물들이 얼크러져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최동호, 「극서정시의 기원과 소통」, 『유심』, 51호, 2011. 2-12쪽). 소통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시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아무리 자동기술법에 의존한 무의식의 표출이라 하더라도, 일단 작품의 형태로 제시될 때는 의식의 검열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본다면, 보다 정제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끝)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   김철교*     I. 들어가는 말 II. 시와 미술에 있어서의 이미지 1. 시와 미술의 상호관련성 2. 시화 회화의 결합방식 3. 시와 미술의 이미지 4. 이미지 해석의 다양성 III. 나오는 말       I. 들어가는 말   현대예술은, 특히 세계 2차 대전이후 과학기술이 깊숙이 스며들어, 앞으로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 어떤 것은 클래식으로 자리를 잡고, 어떤 것은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키이란(Matthew Kieran)은 『예술과 그 가치(Revealing Art)』에서 좋은 예술작품이란,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풍부하게 해주는,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반면 나쁜 작품은 경험의 확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없고, 단선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작품들이다.   모든 예술이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바로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 내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 때문이기도 하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술에만 그치는 현상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보다 낳은 편리성의 발견, 새로운 아름다움의 추구, 다양한 사상의 부침 등 전반적인 가치관의 변화 양상이 바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각지에서 혁신적인 미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르네상스 이래 전개되어 온 전통적인 미(美)의 개념을 초월하여, 사실적이고 표피적인 것 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현대 예술과 예술론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예술 장르들 간의 경계 붕괴 내지는 융·복합에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모든 예술에 과학기술이 접목되면서 경계허물기 혹은 상호협력과 보완이 가속화되고 있다.   화가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베토벤을 위대한 예술가의 표본으로 보았으며, 베토벤의 에서 영감을 얻어 를 그렸다. 베토벤은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시 에서 영감을 얻어 을 작곡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미술관의 대형 벽화 는 시와 음악, 조형을 통합한 총체적인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클림트의 열망을 구현한 작품이다.   문학과 음악, 특히 시와 음악은 시 자체가 운율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엘리엇은 음악연구가 시에 기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는 바로 베토벤의 라는 표제가 붙은 음악과 연결되어 있다. 소설에 있어서도 헉슬리는 에서 대위법이라는 음악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대위법이란 음악에서 2개 이상의 선율들을 결합하는 기법을 말하듯이, 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이다.   “모든 예술이 서로 가까워지도록 한 장소에 모으고, 한 예술에서 다른 예술로 옮겨가는 변화를 추구해야만 한다.······잭슨 폭록과 추상표현주의······화가들에게서······마침내 주제와 의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회화만이 아니라 문학도 주제를 벗어던지고, ‘단어가 논리에서 해방될’ 경우에만 비로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이 융·복합을 모색하고 있는 요즘, 미술 분야에서는 활발하게 음악, 영상, 사진, 회화, 조각, 스토리텔링 등이 함께 협력하여 등장함으로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음악-미술-문학에서 각각의 이론과 방법론들이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상호의 영역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김춘수의 ‘무의미시’이론은 미술과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서술적 이미지’는 미술의 ‘미니멀리즘’과 비견되며, 무의미시이론을 적용하여 쓴 시들은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처럼 시문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이론과 기법의 개발을 위해서 이웃 예술이론과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도 예술 융·복합의 긍정적인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융·복합문제와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본고에서는 음향예술인 음악을 제외하고, 언어예술의 하나인 시와 형상예술에 속하는 회화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특히, 예술 융·복합의 시대에 시문학과 미술의 상호관계를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한다.   II. 시와 미술에 있어서의 이미지   1. 시와 미술의 상호관련성   문학과 미술의 상호관련은 내용(주제), 형식, 수용 등 여러 방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첫째, 작품의 제재나 주제 측면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 예술의 공통된 소재를 제공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불후의 명화는 후세의 많은 시인들에게 시를 쓰는 동기가 된다. 작가들은 인접 예술의 작품에서 얼마든지 창작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상상력이란 모든 예술에 공통된 창조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둘째, 표현방식과 매체사용에서의 관계이다. 모방(미메시스)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시학원리는 고대 이후 두 예술의 공통성을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25장에서 시인과 화가를 함께 모방하는 작가로 소개한 이후 두 예술가는 매우 가까운 사이에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호라티우스 『시학』에서도 ‘시는 그림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 매체사용의 이질성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예술작품의 해석과 수용의 문제이다.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은 추구하는 목표, 기능, 영향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예술작품의 수용자(독자 및 관객 등)들은 모든 예술작품이 제공하고 있는 이미지들에 대한 해석과 수용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으나, 예술이라는 큰 틀에 함께 묶일 수 있는 것이다.   시와 그림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소식(蘇軾, 1037-1101)은 당나라 왕유(王維, 701-761)의 시와 회화를 칭찬하면서 ‘왕유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하였다. 북송(960-1127) 화가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시는 무형의 그림이고 그림은 유형의 시이다”라는 말이 있다. 남송(1127-1279)시대의 오룡한(吳龍翰)은 ‘그려내기 어려운 정경을 그려낼 때에는 시로써 보완하며, 읊조리기 어려운 시를 읊을 때는 그림으로써 보완한다.(畵難畵之景, 以詩湊成; 吟難吟之詩, 以畵補足)’라고 하여 시와 회화의 결합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의 시와 그림에 대한 입장을 받아들여, 고려에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시화일치는 사대부 문인들의 삼절의 추구와 맞물려 장려되었다. 이인로(1152-1220)는 “시와 그림이 묘한 곳에서 서로 도와주는 것이 한결같다 하여 옛 사람이 그림을 소리없는 시라 이르고, 시를 운율이 있는 그림이라 일렀다”고 하였다. 사대부 문인화가로 시를 잘 짓고 그림에 뛰어난 인물은 강희안(1419-1464)이다. 동생 강희맹은 시화일치의 경지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인물로 왕유를 거론하면서, 그의 형 강희안을 왕유와 비견하고 있다. 이러한 시화일치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백악그룹,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연암그룹, 그리고 19세기 당대 최대의 삼절로 이름 높았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으로 그 흐름을 이어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학, 음악, 무용처럼 뮤즈 여신의 보호를 받는 뮤즈 예술과 회화나 조각처럼 기술, 즉 손재주를 필요로 하는 미술을 구분하였다. 미술이 문학과 음악의 버금가는 위치로 올라서게 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회화가 시와 수사학보다 우월하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시인이자 문학이론가인 시드니(Philip Sidney, 1554-86)는 「시의 옹호: Apology for a Poetry」에서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그림과 같은 시’를 이상적으로 대표한 화가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그림으로 그려진 시’라고 칭찬했는데, 이는 글(성경)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76년 레싱(G.E. Lessing, 1729-81)에 따르면, 문학은 시간의 영속을 특징으로 하고,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은 공간에 의존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회화의 대상은 형, 색채, 선 등의 ‘공간적 병존’으로 파악되지만, 문학은 ‘시간적 순서’, 즉 ‘행위’의 진행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한 레싱은 회화우위 가치관을 반박하면서, 창조적 상상력은 회화와 시 모두에 해당하지만, 화가보다는 시인의 환상적 재능에 더 높은 무한성을 부여하고 있다. 괴테(J.W. von Goethe, 1749-1832) 역시 『시와 진실, 1833』에서 레싱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미술가는 미에 의해서만 만족되는 외형의 의미를 위해 작업하나, 언어예술가는 추(醜)와도 함께 하는 상상력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더 광범위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괴테도 문학과 미술은 “매체조건, 대상, 예술법칙과 영향형식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한편, 낭만주의 예술론에 있어서 예술의 통합은 ‘공감각’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 서로 다른 감각의 연상과 교환 작용인 ‘공감각’은 예술이 함께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낭만주의 예술의 공감각적 표현기법은 바그너(R. Wagner, 1813-1883)의 ‘총체예술작품(Gesammtkunstwerk)’의 이념으로 발전한다. ‘총체예술작품’은 바그너가 1849년 「미래의 예술작품」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사용한 말로서, 음악, 춤, 시, 시각예술, 무대기술을 종합한 개념이다. 슐레겔(A.W. Schlegel, 1767-1845)은 낭만주의자들의 기관지 『아테네움 Athenäum, 1798』에서 시, 음악, 회화의 내면의 친밀성을 주장한다. 이처럼 낭만주의에서 추구된 예술의 통합화 경향은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 등으로 계승된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67)의 「교감(Correspondances)」과 랭보(A. Rimbaud)의 「모음들(Voyelles)」은 공감각을 잘 활용한 작품이다.   2. 시와 회화의 결합 방식   시와 회화의 결합방식에는 (1)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 (2) 그림을 제재나 대상으로 하여 시를 짓는 방법, (3) 그림과 문자가 한 화면에 공존하며 상호보완하는 문자도(文字圖), 구체시, 문인화 등이 있다.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적지 않았다. 글을 얼마나 그림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가를 연구했던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의 말레이(J.E. Millais)는 테니슨의 시 「마리아나(Mariana, 1830)」를 그림(Mariana, 1851, Oil on Mahogani, 59.7x49.5,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으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를 그림(Ophelia, 1851-52, 76.2x112.8Cm, Oil on canvas,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다. 이중섭도 백석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갤러리 서림에서는 1987년부터 매년 우리나라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한국중견화가들이 그림으로 그려서 전시하고 있다.   그림을 대상으로 시를 짓는(이를 형상시라고 한다) 방법은, 시인이 그림을 감상하고 시적 감흥을 얻어 시를 쓰는 것이다.   아킬레스의 방패무늬 제작과정을 서술한 호머의 『일리아드』(18번째노래)가 형상문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조각가 로뎅의 비서였던 릴케는, 화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경험을 살려,『형상시집』과 『신시집』을 통해 조형예술의 소재들을 시에 활용하였다. 여기에 실린 소네트「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는 조각작품인 ‘밀레의 토르소’를 보고 지은 시로, “독자는 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시인의 형상적 관조의 배후에 깃든 심오한 내면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중섭, 샤갈, 고흐, 뭉크, 피카소, 김정희 등의 작품 및 작가의 삶을 주제로 쓴 형상시가 적지 않다. 특히, 『시집 이중섭』(문학과비평사, 1987)은 화가 이중섭의 삶과 그림을 주제로, 시인들이 쓴 시와 ‘시인의 말’, ‘해설’ 등을 묶어 한권으로 엮은 것이다.   문자도(文字圖)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 유교덕목을 중국의 옛 이야기들과 연관시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글자 속에는 잉어, 죽순, 할미새, 용, 파랑새, 거북이, 복숭아꽃, 봉황, 충절비 등 글씨의미와 관련된 그림들이 글자마다 포함되어 있다. 글씨의 의미를 그림이 보완해줌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구체시의 사례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비롯하여, 고대 중국이나 인도의 전통회화 및 서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말라르메 「주사위던지기(Un Coup de Des, 1897)」, 아폴리네르 「칼리그람(Xalligrammes, 1913-6)」 등의 시에서는 종이 위에 자유로이 시행을 배열, 알파벳을 사용한 그림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말라르메나 아폴리네르의 작품은 시각적, 언어적 표현이 하나로 합쳐지는 이중예술품이라 하겠다.   문인화에서는 시와 그림이 함께 존재한다. 시와 회화는 창작방법만 다를 뿐 작가 정신의 반영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똑같은 그림이 그려졌어도 각기 다른 시를 써 넣으면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또 그림 안에 시를 쓰는 경우, 시를 쓰는 위치는 화면 구성에 영향을 주며, 시를 쓴 형식, 공간의 크고 작음, 글씨체도 영향을 미친다.   조선 초기부터 중국 문인화의 시화일치사상(詩畵一致思想)이 유입되어, 우리나라 사대부들에게 문인화의 기법적(技法的) 토대를 제공해 주었고, 외적인 기교보다 내적인 사상이나 철학 등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문인화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문인화에서는 시의 의미와 글씨의 미적 이미지 그리고 그림의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글씨도 그림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그림의 주제는 시의 주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3. 시와 미술의 이미지   시와 미술이 같은 울타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지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마음속에 그리는 그림을 뜻하는 이미지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이 의미하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하여, 내용을 보다 잘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모든 예술은 이미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미지의 어원을 보면, 거울에 비친 상이라는 뜻의 모상(模像: eidolon)이다. 플라톤은 현상계가 진리의 세계(이데아)를 모방한 모상이라고 보았다. 이는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로 나눌 수 있다. 에이콘은 원본(이데아)을 곧바로 묘사한 것으로 유사관계(resemblance)를 말하며, 실재와 닮은꼴로 실재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판타스마는 복사물을 다시 복사한 것, 즉 시뮬라크르(simulacre) 관계를 말하며, 실재를 부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시뮬라크르가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미학적 담론에는 이미지(image)와 상상력(imagination)이 핵심으로 등장한다. 드브레(R. Debray, 1940-)의 견해에 의하면 이미지는 마술(magic)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술이란 무의식적인 꿈과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술에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냄이다. 마술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가시적인 것의 배후에 들어있는 비가시적인 것의 기호이며,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 머물고 저장된 장소인 것이다.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란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을 지칭한다고 여겨지지만, 개인무의식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이래 서구 예술론을 지배해 온 ‘실재의 재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모방론’의 관점에서든 그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18세기의 낭만주의적 ‘감정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표현론’의 관점에서든, 예술은 이미지를 매개체로 한 의미작용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이미지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통해 서구 예술사에서 문학과 미술이 가장 근접한 정신 활동으로 인정된 것은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예술이 공통적으로 무의식적인 정신 활동에 기반을 둔 이미지의 생산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예술작품은 대상을 보고 그리되 대상과는 무관한 창조된 가상객체(virtual object)요 창조된 이미지이다. 가상(假象)이란 주관적으로는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현상을 말한다. 수용자(독자 및 관객)들마다 다른 이미지로 받아드리며 또 받아드리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비평가도 해석을 내리는 데 고심하여, 의문스러운 곳은 그 의미를 부연하는 것이 고작인 난해함도 하나의 시적 요소다. 때로는 독자에게 그 중 한 행의 의미조차 분명히 알 수 없는 정도여서, 그것은 명암화법적인 회화 속 형식의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이 창조한 이미지라는 것이 추상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와 수용자가 받아드리는 이미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또 다른 창조’라 할 수 있다.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과 무의식을 참조하여, 자신의 이미지로 변환하여 수용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의사소통수단이 된다.   4. 이미지 해석의 다양성   이미지의 생산 못지않게 해석도 중요하다. 특히 예술의 가치 평가는 수용자들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미술, 음악의 공통분모로서의 언어는 ‘의미하는 언어’가 아니라 제2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해석’이다.   예술 혹은 예술가는 나무에 있어서 큰 줄기와 같다. 예술가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 등 제반 환경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과 지정의(知情意)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모든 자양분을 흡수하여 큰 줄기를 통과해 잎, 꽃, 열매라는 작품을 생산한다. 예술가는 자기를 포함하여 자기를 둘러싼 모든 역사적, 현재적 환경에 대한 예술가 자신의 해석을 작품에 투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산된 예술작품을 소비하는 수용자들은, 생산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주어진 역사적, 현재적 환경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수용한다. 이처럼 예술작품의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해석이라는 단계가 존재한다. 그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면서, 수용자들이 해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것은 바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세계 인구의 수만큼이나 많은 해석의 가능성과 다중의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이미지의 특성이다. 개개 언어나 문장, 그림의 색조나 명암 등이 생산하는 개별 이미지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이미지(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도 중요하다.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심리적 역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독자반응이론에서 ‘독자가 텍스트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시각과 일치한다. 생산자(예술가)가 생산한 제품(예술작품)의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거쳐 자신의 이미지로 치환한 후 수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이미지 – 수용자의 해석 – 수용자 이미지로 치환 – 수용자의 수용 단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수용자는 어떻게 예술적 이미지를 해석할까? 이를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스투디움(studium)이란 우리가 지식과 교양에 따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영역으로, 양식화될 수 있고 전형적인 정보로 되돌려질 수 있는 부분이다.······감상자는 이와 같은 평균적 정보로 환원될 수 있는 영역을 인지하고 이를 감상하게 된다는 말이다.······그런가하면 어떤 그림과 시진의 경우,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작품이 구성하는 시각장의 어느 영역에서 갑자기 감상자의 눈을 찔러오는 부분도 있다. 롤랑 바르트는 바로 이것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지칭했다. 어원상으로 이 푼크툼은 평균적 교양과 상식으로 이해되는 스투디움의 영역을 깨뜨리며 마치 화살처럼 감상자를 찌르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감상자의 시선이 작품에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푼크툼 때문이다.······좋은 시들은 인식의 스투디움을 깨뜨리며 인지 충격을 안겨주는 푼크툼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소위 사물을 새롭게 보게 하고 기존의 인식을 뒤흔드는 효과 역시 시적 푼크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두 가지 층위, 곧 정보적 층위와 상징적 층위에서 읽혀지는 두 의미는 이 이미지를 제작한 예술가에 의해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바르트가 제3의 의미라 부른 이미지의 세 번째 층위는 그만큼 자명하지도 않고 포착하기도 어렵다. 묘사는 불가능하고 헤아리기만 가능하며 지적(知的) 인식이 아닌 사적(私的)인 파악을 통해서만 포착된다.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언어가 어찌할 수 없는 이미지의 요소를 푼크툼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3의 의미는 주로 수용자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주제를 간추리고자 시를 읽는 것은 지나치게 비경제적 행동이다. 시에는 리듬과 이미지 그리고 비유와 상징 등, 그림의 경우 회화적 중심에 비견될 만한 다채로운 요소들이 있다. 시를 읽으면서 이런 요소들을 놓치고 테마적 중심에만 현혹되는 것은 시인이 애써 여러 요소를 활용해 구성해 놓은 텍스트를 다시 평범한 전언으로 풀어 놓는 것과 같다.” 그림도 주제 못지않게 색과 선과 면의 어울림 등 기법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처럼, 시에서도 각종 언어적 장치(리듬, 이미지, 비유 등)들이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주목해야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수용자들은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제3의 의미, 즉 푼크툼까지 천착해야 한다.   물론 생산자인 예술가도 푼크툼까지 헤아려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랭보가 말하는 투시자(voyant)가 되어야 한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모든 인습적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려 영원한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가 투시자인 것이다. 예술가나 수용자 모두 라깡이 말하는, 현상이라는 커튼 뒤에 있는 실재(the real)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부단히 예술작품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읽고 보고 사색해야 한다.   III. 나오는 말   예술의 생산과 수용 그리고 이를 중개하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면, 그림과 시는 단지 표피적인 표현매체만 다를 뿐이지 동일한 것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등 추상예술에 있어서는 표피적인 것 마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추상에 의해 다른 영역에 속해 있던 문학과 미술, 나아가 음악은 하나의 차원으로 총괄된다. 예술적 언어가 생산하는 추상은 생산자가 똑같은 이미지를 생산해서 내놓아도 수용자가 푼크툼 영역까지 확장하여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피카소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칸딘스키와 클레는 미술과 음악이 통합될 수 있음을 보였다. 바그너는 음악, 시, 미술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예술, 특히 미술과 음악과 시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그림에서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시에서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며 상상력의 지원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호안 미로는 회화와 시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으며, 그의 그림의 총합은 새로운 종류의 언어를 구성하는 시각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호안 미로가 그린 그림 (1968, 캔버스에 유채, 목탄, 259.5 x 173.5 Cm)는 ‘그림으로 시를 쓴 것’이다. 이 그림에서 수용자들은 나름대로 시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한국 시단에서 ‘독해가 불가능한 시’의 경우보다는 오히려 호안 미로의 라는 그림이 훨씬 수용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시(詩)가 아닐까? ‘시는 반드시 언어로만 창작해야 하는가?’, ‘시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매체의 이합집산은 20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형태로 진전되고 있다. 특히 지난 수십 년간 컴퓨터를 위시한 신매체의 등장은 말, 형상, 음의 융·복합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오늘날 다매체 예술에서는 장르나 형식의 독자성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다원적이고 총체적인 텍스트에서는 읽기, 보기, 듣기 등 개별 지각방식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융·복합을 통해 예술적 효과가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는 수상 작품을 보면 이러한 예술 장르의 통합적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수상자인 믹스라이스(조지은, 양철모)는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식되어는 식물들의 '이주' 과정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제 '이주'된 아시아 근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추적”하고 있는데, 특히 에서 음악, 사진, 벽화, 영상,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져 주제를 부각시키는데 통합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다만,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단순한 사실의 소개에 머물고 있어 아쉬움이 남았고, 시적 형상화 작업이 좀 더 이루어졌으면 전체적인 예술적 효과가 증대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예술의 다양화, 융·복합화가 진전됨에 따라, 앞으로 시와 음악과 미술 등이 서로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을 연구하는 통합학회 내지는 예술단체가 구성되어, 예술 특히 시문학의 품을 더 넓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예술을 아우를 수 있는 ‘시극의 활성화’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시극의 경우, 단순히 대화와 지문을 시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무대 및 의상 디자인 등 미술영역과, 음악과 무용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관객에게 좋은 작품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 쓰기와 관련하여, 호안 미로가 ‘그림으로 시를 썼다’고 말한 바와 같이, ‘시를 문자언어로만 창작해야한다.’는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시는 문자로 써야만 한다.’고 고집하더라도 다른 매체(영상, 음악, 미술 등) 등과의 융·복합을 통해 더 수용자에게 다가갈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서 단토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라오콘: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 윤도중 역, ㈜ 나남, 2008. 고위공, 『문학과 미술의 만남』, 미술문화, 2004. 곽희,『임천고치』, 신영주 역, 문자향, 2003. 괴테, 『시와 진실』, 최은희 역, 동서문화사, 2007.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오늘의 작가상 2016」. 권혁웅,「이미지, 사유의 체계-문학연구 방법론으로서의 이미지」,『한국시학연구』제47호, 2016. 김광우,『칸딘스키와 클레』, 미술문화, 2015. 김남시,「말에는 없고 이미지에만 있는 것: 언어화되지 않는 이미지에 대한 이론들」,『한국 시학회 제38차 전국학술대회 자료집』, 2016.10.22. 김명철,「백석 시와 이중섭 그림에 나타난 대이상향의 세계」,『비평문학』43, 2012. 김연주,「시중유화 화중유시 – 시와 회화의 관계를 중심으로」,『미학예술학연구』 제14호, 한국미학예술학회, 2001. 김영진,『이중섭을 훔치다』, 미다스북스, 2011. 김춘수, 『意味와 無意味』, 문학과지성사, 1976. 드브레,『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역, 시각과 언어, 1994. 로이스 타이슨, 『비평이론의 모든 것』, 윤동구 역, 앨피, 2012. 롤랑 바르트,『이미지와 글쓰기–롤랑 바르트의 이미지론』, 김인식 역, 세계사, 2011. 릴케,『두이노의 비가 외 (릴케 전집 2)』, 김재혁 역, 책세상, 2000. 매튜 키이란,『예술과 그 가치』, 이해완 역, 북코리아, 2011. 보들레르,『악의 꽃』, 윤영애 역, 문학과 지성사, 2011. 볼프강 올리히,『예술이란 무엇인가』, 조이한 김정근 역, 휴머니스트, 2013.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호안 미로 특별展』, ㈜디커뮤니케이션, 2016. 수잔 K. 랭거,『예술이란 무엇인가』, 박용숙 역, 문예출판사, 2009. 신혜경 김진수, 「이미지 측면에서 본 문학과 미술의 관계」,『경기대학교 논문집』제44집 제1호, 2000. 아르튀르 랭보, 『랭보 시선』, 곽민석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13. 아서 단토,『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 김광우 역, 미술문화, 2012. 여지선,『문학, 그림을 품다』, 푸른사상, 2013. 이부영, 『분석심리학탐구, 제1부작, 그림자』, 한길사, 2004. 이창용,『비교문학의 이론』, 일지사, 1990. 조강석, 「시와 회화」, 『현대시론』, 최동호 외 편저, 서정시학, 2014. 주영중, 「김춘수와 오규원의 이미지 시론 비교연구」, 『한국시학연구』 제48호, 2016. 최숙인,「문학과 미술의 상호조명」,『비교문학』24, 한국비교문학회, 1999. 파울 클레,『현대미술을 찾아서』, 박순철 역, 열화당, 2014. 피카소, 『피카소 시집』, 서승석 허지은 역, 문학세계사, 2013. 한국경제, 2017.1.4. 호라티우스,『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13. 호메로스,『일리아스/오디세이아』, 이상훈 역, 동서문화사, 2009.    
59    문학의 역사는 가능한가?(데이비드 퍼킨스) 댓글:  조회:1316  추천:0  2019-01-04
문학사는 역사와 다르다. 문학사가 다루는 작품들은 역사의 일부로서의 그들의 의미와 다르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학사는 비평이기도 하다. 문학사의 목적은 단순히 과거를 재구성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사는 문학작품을 조명한다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사는 한 작품이 어떻게, 또 어째서 그 형태와 주제를 갖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를 추구하고 그리하여 독자들이 적응하는 것을 도와주기를 희구한다. 문학사는 문학의 이해에 봉사한다. 문학사의 기능은 부분적으로 읽기에 대한 충격에 있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설명하고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서 문학사를 쓰는 것이다. - 데이비드 퍼킨스, "Is Literature History Possible?"(유종호, , 민음사, 2011, 24쪽에서 재인용)
58    [스크랩] 김백겸 <기호의 고고학> 시집 서평- 이선 댓글:  조회:1204  추천:0  2018-12-28
신화적 서사, 강렬한 엑스터시의 예언서  ― 김백겸의 시세계 ―                                                                                        이 선(시인)       1. 3박자, 트라이앵글 시 구조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상징’과 ‘직관’의 숲속을 산책하다가, 젖가슴과 배꼽을 드러낸 원색의 아름다운 아프리카 여인을 만났다. 그 눈은 하늘로부터‘예언서’를 받아 읽는 수도승처럼 경건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김백겸의 시집 『기호의 고고학』은, 고갱의 그림「세 명의 타히티인」속에 나오는 세 사람의 남자와 여자처럼 원색의 그림을 그린다. 직선적이고 원시적 생명성을 느끼게 하는 ‘그녀’는 대담하게 옷을 벗어던졌다. 시도 옷을 벗었다. 고갱의 그림에 김백겸의 시를 대입해 보자. 뒤돌아보는 왼쪽과 오른쪽, 두 여인 사이에서, 남자는 벌거벗은 등을 보이며 무심하게 앞쪽을 바라보고 있다.(어깨를 조금 웅크린 채 걸어가는 현대문명.)   왼쪽 여인은 한쪽 어깨를 드러낸 빨간 드레스를 입고, 황홀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본다. 갸름한 얼굴과 입술이 섹시하고 관능적이다.(오, 김백겸이 반한 아름다운 고대 잉카문명과 아즈테문명, 그리스문화.)   오른쪽 여자는 하얀색 라바라바 치마만 걸친 채, 수줍게 젖꼭지를 드러내고 있다. 젖가슴을 감싼, 경건한 두 손은 꽃다발을 들고 있다. 강렬한 검은 눈은, 남자와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려 아래쪽으로 시선을 응시한다. 강한 턱선이 의지적이다.(종교의식- 그리스신화와 중세 기독교, 샤머니즘.)                                      고갱       3부로 된 김백겸의 시의 구조를 살펴보자.   고갱의 그림 속 세 사람은 배경까지 세 명의 인물이 균등하게 클로즈업되어 있다. 김백겸의 시도 고갱의 그림처럼 원근법을 무시한 채 과감하고 삭제된 선은‘고대문명’과‘종교’와‘현대문명’을 한 직선으로 트라이앵글 구조로 연결한다.   그의 시집에서 3부로 나눈 배치를 주목하여 보자.‘3’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3은 분류되지 않는 ‘트라이앵글’구조다. 한국의 노래처럼 3박자는 균형이다. 산만하지 않고 통합적이다. ‘고대, 중세, 현대’가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클로업되고 문명비평 되었다. 사람(문명)과 자연(원시)과 신, 감성과 상상력과 재해석, 이, 강렬하고 원색적으로 자기주장을 한다. 신화와 시인 개인의 서정까지 삽입하여 ‘인물’과‘배경’과 ‘정서’3 구조로 3등분하여 배합하고 있다.     2. 신화적 서사, 강렬한 엑스터시의 예언서      미술의 구성요법처럼 그리스신화와 성경, 불경, 샤머니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교용어와 경전에 기록된 사건들이 시의 행간을 구성하고 있다. 김백겸의 시는 거대 신화적 구조와 패턴을 가지고 있다. 또한 현대문명에서 직관적으로 문명신화를 만들어서 대담하게 철학적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시인의 시는 신화적 서사와 강렬한 예언적 엑스터시를 담고 있다.‘신화적 구조’와 ‘시적 상상력’, ‘철학적 직관’이 박학다식한 시인의 지식을 증언한다.       유전자정보의 집합인 게놈은 뱀 두 마리가 서로 몸 을 꼬아서 올라간 쌍두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고대 수메르’의 印章에는 교접하는 쌍두사의 형 상인 뱀신‘닝기쉬즈다’가 있습니다   헤르메스가 사용한 쌍두사의 ‘카두케우스’ 지팡이 와 모세의 권능을 수행한 청동 뱀의 지팡이도 있군요   아즈텍의 깃털달린 뱀 신‘케찰코아틀’은 위대한 쌍둥이로도 불렸고 죽음을 통해 부활하는 힘의 기원 이었습니다   생명나무가 있던 에덴동산에는 고대의 뱀이 있어서 이브에게 선악의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아마존의 샤먼들은 지금도 엑스타시에 젖은 채 환 상 속의 뱀으로부터 식물과 약초의 지혜를 전수받는 다고 합니다     딴뜨라 행자인 요기들은 호흡으로 미저골 아래 잠 자는 뱀의 기운 ‘쿤달리니’를 일깨워 머리를 들게 합 니다   불의 요가와 꿈의 요가와 빛의 요가가 이‘생명의 나무’인 척추를 거꾸로 올라가는 기술입니다   태양과 달의 기운으로 일곱 개의 차크라를 각성시 킨 쿤달리니는 요기의 정수리에서‘천 개의 꽃잎으로 피어난 연꽃’을 각성시켜 요기의 영혼을 불사에 이르 게 합니다   (중략)  그들은 환각식물이나 엑스타시의 힘으로 유전자에 숨어있는 생명의 프로그램을 엿본 해커였을까요                 ―「생명나무와 뱀」부분     위의 시는 강렬한 엑스터시를 보여주며 신성시되거나 금기시되는‘뱀’을 조명하고 있다. 「생명나무와 뱀」은 뱀을 거대 문명집단으로 나눠서 연대기를 세워 시대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로 이어지는 ‘뱀 문화사’를 읽는 것 같다. 뱀이 주는 흥미와 무서움이 관능을 자극한다. 김백겸 시의 한 특징은 라는 시 구조를 지닌다. 영웅서사시처럼, 거대 역사를 한 줄로 짧게 해석적 시각으로 요약한다. 문명숭배의 ‘대상’인‘뱀’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관심을 받는 영적 존재이다.   3. 기호의 고고학-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신약전서 요한복음 1장 1절에는‘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구절이 있다. 말씀이 하나님이라면, 말씀은 창조자요, 알파와 오메가다. 기존에 존재하던‘식물’에 자기 이름을 붙이고 인간은 창조자 행세를 한다. 기존에 존재하는 말을 찾아서 정렬하고 시인은‘시’창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는 문장처럼 말씀과 사물이 한 몸이었던 행복한 시대의 말이 있었 다   에덴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던져진 말들은 흙으로 돌 아가야 하는 아담의 몸처럼 썩고 부서지는 낙엽의 운 명이 되었다   말들이 인간의 의식에서 태어났으나 대양으로 흐르 는 시간의 강에 뜬 물살의 거품이었다   말들은 심연으로부터 솟구친 바위 같은 세계 풍경 에 걸리며 인간의식에 굴곡과 무늬를 만들어 냈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회교사원처럼   사각형과 원이 중첩된 티벳만다라처럼   말과 말이 결승문자처럼 얽힌 만화경이 문명이었다   말의 역사 속에서 상징의 피라미드, 은유의 크레타 미궁, 이미지의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졌다가 무너졌다     인간의 생각들이 말의 요람에서 태어나 말들의 무 덤에서 죽었다   제도와 법률과 화폐와 인간이 프로그램한 모든 도 구들이 부장품처럼 묻혔다   인류의 의식은 흙의 잠속에서 도서관의 책들과 박 물관의 미아라 같은 말의 꿈을 꾼다   죽은 생각들이 진시황의 병마총처럼 묻혀 드라큐라 의 수혈 같은 재생의 시간을 갈구한다   나는 독자들을 비경秘境으로 안내하는 헤르메스처럼 지도와 랜턴을 준비해서 캄캄한 흙의 시간으로 내려가 문명의 모든 기억을 들여다 본다      ―「기호의 고고학」전문     김백겸은 도식을 세우고, 태초부터 존재한 ‘말’에 집중한다.       말의 역사 속에서 상징의 피라미드, 은유의 크레타미    궁,     이미지의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졌다가 무너졌다(2연 4-5행)       인류의 의식은 흙의 잠속에서 도서관의 책들과 박    물관의 미이라 같은 말의 꿈을 꾼다     죽은 생각들이 진시황의 병마총처럼 묻혀 드라큐라    의 수혈 같은 재생의 시간을 갈구한다(3연 5-8행)     문명의 역사는‘말’로부터 시작하고,‘시’의 역사는‘문자’로부터 시작하였다. 시인은 ‘박물관의 미이라’인 죽은 지식에 ‘수혈’을 하여 생명을‘재생’시킨다. 고고학자와 사학자가 가치없다고 판단하여 버려지고, 잊혀진‘문명의 모든 기억을 들여다 본다’( 본 시의 끝행). 헌 ‘사물’에 ‘상징, 은유, 이미지’의 옷을 입혀 새 생명을 낳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침묵은 ‘금’이라고 정의한 시대에도 ‘말’을 늘어놓는‘시의 향연’을 자축하며 축배를 든다. 또한 시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4. 우주와 자연숭배의 불교적 자기 구원관     아래 시를 읽으면 니이체의 가 연상된다. 누군가는 ‘호메로스’나 분노하는‘하나님’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영웅의 대 나 를 읽는 것 같은 힘을 느낄 것이다. 스스로 침묵의 언어인‘문자’로 외치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화살이 신호로 날아가면 비구들은 모두 화살을 쏘 아라   전생을 향해 화살이 날아가면 전생이 죽어야하고 후생을 향해 화살이 날아가면 후생이 죽어야 하고 부처 를 향해 화살이 날아가면 부처가 죽어야 하느니   향전響箭이 날아가는데도 머뭇거리고 발심發心을 못 하는 자는 그 손목을 자르리라   용맹 정진한 비구가 드디어 갑옷 입고 칼을 찬 아라 한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내 마음의 힘에 대하여 경전들이 말했네   육도의 윤회가 내 마음을 진흙탕으로 밀어 넣을 수 도 없고   삼세의 열반이 내 마음을 연꽃처럼 피어나게 할 수 도 없다고   들꽃처럼 피었다가 뱀허물처럼 몸을 바꾸는 세계의 변신이 불멸하는 내 마음이라고   마음은 침묵의 노래를 부르고 초끈 에너지들은 춤 추네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는 비로자나불이 패션모 델처럼 걸어가네     나는 벤치에 앉아 별빛이 바위처럼 굳어가는 침묵 의 소리를 듣네   내 심장의 눈이 메두사처럼 빛나고 사물들은 이집 트 무덤의 벽화처럼 영원 속의 순간에 갇혀있네   9월의 저녁, 내 머리칼이 실뱀처럼 울부짖는 기운 을 느끼면서 나는 어두운 힘의 한가운데 밤의 수행자 처럼 앉아 있네     하늘에는 천억 개의 은하성단이 그린 도솔천의 세 상이 떠 있고 지상에는 가로등이 밝힌 인간의 문명이 꽃밭처럼 펼쳐있네     ―「선禪의 궁수는 화살을 쏘지 않는다」전문     김백겸 시집은 3부로 나누어 각각의 시를 편집하였다. 그러나 라는 이름을 붙인‘장시’라고 새로이 분류하고자 한다. 로 우렁차게 외치는, 시인이 말하고 싶은 인생의 근원적 본질적인 질문은 무엇일까? 질문하며 곧 자신이 대답하고 있다.   그 근원에는‘내 마음의 힘에 대하여 경전들이 말했네’(2연 1행)라고 시인이 고백하듯이, 경전에 철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 그리스신화, 잉카력까지 동원하여 얻은 결론은 위의 시‘2연’에 압축되어 있다. 니이체의‘초인주의’의 영웅이 되어 얻은 결론은‘세계의 변신이 불멸하는 내 마음’이라고 노래하며, 자아의 세계화를 구원관으로 제시하고 있다.‘육도의 윤회’도‘영웅’을 더럽게 패배로 이끌 수 없고,‘삼세의 열반’도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는 비로자나불’은 이 영웅의 ‘중심’이며 ‘진리’다. ‘내 머리칼이 실뱀처럼 울부짖는 기운을 느끼’는 삼손의 마력의 힘을 지닌 영웅은‘하늘에는 천억 개의 은하성단’과 ‘지상에는 가로등이 밝힌 인간의 문명이 꽃밭처럼 펼쳐졌네’라고 노래하며 꿈과 현실을 이성으로 직관한다. ‘구운몽’의 일장춘몽처럼 고대에서 현대까지,    ‘오십억년의 긴  잠을 잤습니다’    ‘심십 억년의 긴 꿈을 꾸었습니다’(「검은 에너지의 열두 폭 병풍」중에서)     고정관념은 화살을 쏘아 모두 죽여 버리고, 다시 태어난 인‘초인’의 방대한 예언서를 구도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5. 감각적 미의식과 서정성     「고양이 눈 속의 고양이」일부를 살펴보자.     ‘너와 나는 그렇게 작별했지/ 이상한 연인의 비상한 감정으로 헤어졌지/ 저녁이 오자 캄캄해진 숲/ 길들이 모두 어둠에 지워져 함정이 된 숲’   ‘검은 구름 사이로 저녁 흰 달이 고양이 눈처럼 나를/ 바라보자 나는 알아차렸네/ 고양이 눈 속에서 나는 고양이였음을/ 고양이는 내가 죽으면 다음 세상으로 안내할 영혼/의 친구였음을’     강한 근육과 힘을 자랑하는‘권력자’의 모습, 그러나 그 내면에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책임지고 보호하는 자의‘배려’와‘약함’이라는‘서정성’이 숨어 있다. 김백겸의 시는 솔직하고 강하며 세밀하다. 원시적 영감과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영웅’이 숨어 있다. 독자의 구원의 조건으로‘얼마나 김백겸의 시를 읽어내는가?’를 과제로 제시한다.     6, 김백겸 시의 과제     김백겸의 신작시집『기호의 고고학』은, 3부로 나누어진 각각 다른 시지만, 장시처럼 한 연결고리로 읽힌다. 과 라는 코드로 거꾸로 읽는 영웅 대 서사시다.  시인의 시에는 와 가 공존한다. 고정관념이 옷을 벗는다. 재해석된 철학은 대담하고 가식이 없다.  김백겸의 시는 외국어로 번역되었을 때 한국의 어느 시인의 시보다도 큰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객관화된 언어표현과 역사를 관통하는 직관의 눈, 철학적 재해석이 있는 사유는, 의성어와 의태어라는 신비의 언어의 숲에 가려졌던 서정시의 그림자를 벗겨내었다.     고대 캄브리아기와 창세기.   잉카문명과 아즈텍문명,   그리스신화의 여신 가이아와 무령왕.   노아의 홍수와 여미지 식물원.   UFO, 에로스, 파라다이스, 현대문명.    무령왕릉, 여미지식물원, 고인돌.   김백겸 시의 확장된 지식공간은‘역사서, 인류고고학, 문명종교학, 비교종교학’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방대한 지식의 양과 명쾌한 직관과 철학적 해석은, 독자의 오래된 질문에 시원한 해답을 제시할 것이다.    김백겸의 시는 칼릴 지브란의 철학시처럼 신화적 확장된 스케일을 가지고 있다. 문장은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객관화되었다. 고대문명과 현대문명에 대한 철학적 해석으로 유일성을 획득하고 있다. 상상력과 감성적 서정성을 가지고 있다. 그 문장은 일기장을 훔쳐본 것처럼 솔직하고 고백적이다. 박학다식한 주의주장은 프로이드가 주장한 방어기제를 충분히 예술로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시의 조건은 아래와 같다.   첫째, 외국어로 번역하였을 때 객관화되어야 한다.   둘째, 상상력의 수평이동과 수직이동이 있으며, 감성적 서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철학이 있어야 한다.   넷째, 새로운 표현과 디자인, 시창작 방법론을 주장하며‘자기 이름을 붙인 상표’로 재탄생해야 한다.   다섯째, 신화적 스케일과 재해석된 현대문명 해석이 필요하다.   여섯째, 예술의 3대 요소인 유일성, 창의성, 철학성이 있어야 한다.   일곱째, 번역으로 반감된 ‘언어의 감각적 미의식’을 배제하더라도 작품성이 빼어나야 한다.   전 세계인이 모두 한국어를 사랑하고 모국어처럼 말하는 그날까지, 한국 시인의‘세계화’를 향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시는 그 나라의 정신이며 생명이다. 문화는 경쟁력을 가진 국력이다. 한국어의 아름다운 운율을 살린 의성어, 의태어, 음보율은 외국어로 번역할 때 그 효과를 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디자인, 내용, 철학으로 노벨상에 도전해야 한다. 김백겸의 시에서 노벨상을 향한 스케일과 내용, 철학, 표현과 시원한 자유를 발견하였다. *  
57    시 읽기의 방법 / 이은봉 댓글:  조회:1396  추천:0  2018-11-13
  시 읽기의 방법     이은봉     1-1. 화자가 누구인가-서정시의 화자는 창작의 순간에 끊임없이 수정되고, 조정되고, 가공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허구화되기 마련이다. 1-2. 그렇다고 하더라도 서정시의 화자는 기본적으로 ‘나’이다. ‘나’이지만 이때의 나는 시인일 수도 있고, 배역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시의 화자가 시인인가, 배역인가를 묻는 것은 중요하다. 1-3. 화자가 시인이라면 주관적(진술적) 화자인가, 객관적(묘사적) 화자인가. 1-4. 배역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탈을 쓰고 있는가. 아이인가, 어른인가. 남자(소년)인가, 여자(소녀)인가. 배역의 직업이 드러나 있는가, 없는가. 2-1. 화자의 위치―화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서서 말하고 있는가. 시의 안에 있는가, 시의 밖에 있는가. 수평적인 위치에 있는가, 수직적인 위치에 있는가. 3. 화자의 성격  3-1. 주관적 화자인가(일인칭 진술적 화자인가), 객관적 화자인가(3인칭 묘사적 화자인가). (낭만주의 시에는 일인칭 주관적(진술적) 화자가 많고, 리얼리즘시에는 3인칭 객관적(묘사적) 화자가 많다.)  3-2. 온순한 화자인가, 사나운 화자인가. 여성 화자인가, 남성 화자인가. 어른 화자인가, 아이 화자인가. 소년 화자인가, 소녀 화자인가. 기타 등등. 4. 청자-따로 청자가 있는가, 없는가.(대부분의 시는 청자가 따로 없다. 물론 편지 형식의 시는 수신자로서 청자가 있는 경우도 있다.) 5. 어조-독백조(혼잣말)-엿들어지는 독백(이는 시의 제시형식이 지니는 기본적인 특징이다.) 6. 시점-일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주관적 시점인가, 객관적 시점인가)         일인칭 주관적 고백자/진술자/해석자/의미부여자/낭만자 시점인가, 3인칭 객관적 관찰자/묘사자/진술자/해석자/의미부여자/사실기록자 시점인가. 7. 구조-대상의 실제  7-1. 나인가, 너인가, 그인가, 神인가.  7-2. 나-나 구조인가,  7-3. 나-너 구조인가,  7-4. 나-그 구조인가,  7-5. 나-神 구조인가.  7-6. 내가 나에게 말하는가, 너에게 말하는가, 그에게 말하는가, 절대자에게 말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8. 대상의 성격  8-1. 긍정적 대상인가, 부정적 대상인가. 연민의 대상인가, 비판의 대상인가. 사랑의 대상인가, 미움의 대상인가.  8-2. 구체(구상)적인 이미지(풍경)인가, 추상적인 관념인가. 객관적인 장면인가, 주관적인 상념인가. 가시적인 이미지인가, 비가시적인 의미인가.  8-3. 모든 이미지는 그 자체로 유의미성을 갖는다. 이미지들이 만드는 풍경이나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풍경이나 장면의 선택은 곧 세계관의 선택이다. 9. 대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  9-1. 일치, 연민, 애정의 태도를 보여주는가, 미움, 갈등, 고뇌의 태도를 보여주는가. 조화의 태도를 보여주는가, 갈등(대립)의 태도를 보여주는가. 서정적 태도를 보여주는가, 극적 태도를 보여주는가. 조화(사랑)의 태도를 보여주는가, 파도스적 태도를 보여주는가. 10. 정서의 특질  10-1. 조화의 정서인가, 대립(갈등)의 정서인가. 서정적 정서인가, 극적(파토스적) 정서인가. 긍정(칭찬)의 정서인가, 부정(비판)의 정서인가.  10-2. 공적 정서인가, 사적 정서인가. 11. 구성  11-1. 無聯詩인가, 有聯詩인가? 單聯詩인가, 多聯詩인가? 연이 있는 시인가, 없는 시인가.  11-2. 연이 있다면 연의 기본 형식은 무엇인가. AAB형식인가, ABB형식인가, AABA형식인가, ABAB형식인가, ABBA형식인가, ABCA형식인가.  11-3. 부연과 나열의 시인가 응축과 압축의 시인가.  11-4. 모두 몇 연이고, 몇 행인가. 연과 행의 배열은 알맞은가. 12. 문장  12-1. 모두 몇 문장인가. 문장의 길이는 알맞은가. 어떤 한 문장이 너무 길어 다른 문장과 호응을 이루지 못하는 문장은 없는가.  12-2. 행의 수와 문장의 수가 이루는 관계는 알맞은가.  12-3. 짧고 경쾌한 문장을 쓰는가, 길고 지루한 문장을 쓰는가,  12-4. 근대의 속도감 있는 문장인가, 전근대의 느리고 치렁치렁한 문장인가. 13. 형상의 특성  13-1. 진술의 문장인가, 묘사의 문장인가. 진술 위주의 형상인가, 묘사 위주의 형상인가.  13-2. 이미지 위주의 형상인가, 이야기 위주의 형상인가, 정서 위주의 형상인가, 의미(지성) 위주의 형상인가. 14. 수사  14-1. 특별히 사용된 수사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수사는 이 시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가.  14-2. 수사의 이미지는 물, 불, 공기, 흙 중 무엇인가? 수사의 이미지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원관념)은 무엇인가. 15. 핵심 이미지  15-1. 이 시의 씨앗은 무엇인가, 중심 모티프는 무엇인가. 핵심 표현은 무엇인가.  15-2. 시의 씨앗, 시의 종자가 제대로 발현되었는가. 어쨌는가.  
56    텍스트를 위한 해체 전략 / 정신재(문학평론가) [스크랩] 댓글:  조회:1529  추천:0  2018-11-13
  ♧시 창작 특강    텍스트를 위한 해체 전략 / 정신재(문학평론가)      1. 해체 전략    소쉬르는 문자보다 말이 더 기호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말이나 글 모두가 일종의 글쓰기 즉, '본원적 글쓰기'라고 말함으로써 말과 글의 서열제도를 없애버렸다. 나아가 해체주의자들에 의하면 '기호'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고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도 일시적인 '유보된' 상태일 뿐1)이다.  데리다는 텍스트가 가지는 본질에 접근하기 위하여 '차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차이'라는 단어와는[e]와 [a] 차이지만,'차연'이라는 단어에는 시간적으로는 자연, 공간적으로는 거리, 의미상으로는 '흩뿌림'이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텍스트의 흔적을 찾아나가는 놀이의 방식이 내포되어 있다.    이외에도 그는 '백색 신화'를 제시하였다. 서양의 철학이 전개해 온 것은 존재나 세계의 편협함만을 일구어 온 것이기 때문에 '백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중심이나'있음'을 전제로 하는 체계적인 구조를 요구하는데, 이것 역시 텍스트의 본질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없음'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는 에서 無와 有를 편협하게 바라보지 않는 태도와도 유사함이 있다.  老子는 '道라고 말할수 있는 것은 道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있음'이나 '중심'은 사람들이 세계를 편협하게 바라볼 공산이 크게 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도 언어란 결코 명료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언어를 통하여 독자가 분명한 진실이나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언어의 그러한 속성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글쓰기를 통하여 '유희'를 해야 한다2)고 보았다.  따라서 해체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필자 역시 오태석의 희곡[초분]을 여러번 읽고 나서야 그 스토리를 겨우 감지할수 있었으며, 이추림의 시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분석을 못하는 부분이 많다.  해체적 작법은 텍스트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기존의 해석을 편협하다고 보고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추림 시인이 그의 시에서 난해한 어휘를 많이 사용한 것은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 보려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본문에서 새로운 글쓰기 전략을 시도하려 한다.      -------------  1)김성곤 편,(서울:민음사,1988),16쪽  2)상게서, 17쪽.       2. 발상 차원의 5단계    일본의 이또게이찌는 시작단계를 "발상 차원의 8단계'로 정리하였다.  나무를 대상으로 한 '발상 차원의 8단계는 다음과 같다.    1단계: 나무를 나무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2단계: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3단계: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단계: 나무의 잎사귀가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5단계: 나무 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6단계: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사상을 본다.  7단계: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8단계: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의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3)    나도 시 습작을 하면서 이 방법을 많이 사용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단계는 어느 수준에 이르면 시가 너무 도식화되고, 발상이 참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박진환교수가 이또게이찌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정리해 놓은 '발상 차원의 5단계'를 시 창작에 적용해 보기도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단계:상식의 단계, 둘째단계:감각의 단계, 셋째 단계:변용의 단계  넷째 단계: 정신적 단계, 다섯째 단계: 창조적 단계    독자의 이해를 돕기위하여 이 방법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 1단계는 상식의 단계로서, 누구나 볼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런 항용의 보편성을 발상으로 하는 단계라 할수 있다.    **제 2단계는 감각이 동원되는 단계로서,대상을 감각으로 해석하거나 마주하게 되면 감각적 체험이 개입하게 되고, 체험이 개입하게 되면 상상력이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상상력이 작용하면 감각상호간의 호소력으로 자극하게 되고 그리하여 대상 사물은 단순히 주어진 그대로에서 경험이나 지식같은 것들이 끼어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변별력이 요구되고, 변별력이 요구되면 판단이 곁들이게 돼 해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해바라기가 누런 금니를 드러낸 채 햇살 앞에서 배시시 웃고 있다'는  시각 이미지와 의인화가 동원된 구절이다.    **제 3단계인 변용의 단계는 주어진 사물이나 대상을 본디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낸다는 점에서 시적 단계라고 할수 있다.    우리는 현대시를 정의할 때 변용의 미학이라고 한다.잘 알다시피변용은 용모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곧 본디의 것을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었다는 뜻인데, 변용의 시적의미는 바뀐모습이 그대로 있지 않고 바꿈으로써 새로움으로 태어나게 한다는데 있다. 흔히 우리는 낯설게 만들기라는 말을 자주 듣고 또 쓴다. 다름 아닌 현대시를 두고 하는 말인데 현대시는 낯설게 만들어진 것이란 뜻이다. 낯설게 만들지 않으면 기성. 기존의 것과 똑같게 되므로 새로움으로 태어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새로움으로 태어나 새로운 감동을 체험하는 시가 되기 위해서는 낯설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시법이다.      갈대 서걱이는 甕岩 다리의 녹슨 수문을 지나  불행했던 나의 유년시절의 산성 물안개빛  공중조차 못 머무는 잔못(釘)공장의 불바람  몇 모금 연거푸 빨아대는  파이프 담배 연길  甫吉道 출신의 張교수와 옛 구름 섞어 깊이 마신다.      무섭기만 하던  옹이 갉는 꽃집의 추운 대팻밥 무심히 쌓이는  소름 끼치던  대못 박는 소리      무한으로 열린 상징같은 죽음과 삶이 맞닿아 있는  동행  하는 동행자의 步速이 빨라지는  牛浦里의 울적하고 멍멍한 석양      많게도 연착한 향수  茁浦꽃집 앞에서의 되돌리는 남은 출발은  가늠조차 안 가는 어머님의 아련한 뒷모습  내 평생 벗을 수 없는 핏빛 한 벌뿐인 속옷이네    -이추림,[茁浦 꽃집] 전문        점령군대가 진주한  주둔한 사령관의 계산법대로라면  점령당한 지역의 모든 여자는 폭거당하는 집 밖의 여왕벌    원숭이의 더운 가슴털로 불 끓는 총구를 커버한  샛길 없는 무심한 大路  대중요법조차 백방이 무효인  지금은 숨는 비밀의 넓은 정원    장군의 정액속에서 장군의 모형  뚜쟁이의 정액속에서 뚜쟁이의 모형이 관찰되나  등대 없는 섬의 절망하는 뒷골목에  신호용 랜턴이라도 하나 걸어 둬야 하겠느니    지독한 악평의 뒤 끝에 당황하는 동시통역자 같은  그녀의 다시 펴는 바쁜 旗  쪽발이적의 우리네 누님들에 비하면  너희들은 격식 갖추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행복한 신부다    -이추림, [將軍과 뚜쟁이- 베트남전쟁 중 여자 베트콩의 회상]      이추림의 시를 접하면 그 백과사전적인 다양한 어휘의 나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한때 잊고 지냈던 유교문화의 어휘, 보들레르적 열정을 지닌 핏빛 사랑이야기, 월남전, 세계사적 사건, 향토적 어휘, 현대 과학용어 등이 복합적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하나의 거울이 아닌 여러개의 복합적인 거울들이 산재해있고, 그 밑바닥에는 보들레르적 열정과 전락의 기쁨이 있다.곧 현존하는 것 속에서 기존의 도덕규범이나 인습의 틀과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한 여인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야만이 미적이라는 통념이 얼마나 구태의연한 인습의 틀이었는가를 알게 되는 것도 하나의 소득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울을 들춰내면 새로운 모습의 여인이 나타나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인간성을 가진 여인이겠지'하고 다른 구절을 보면 거기에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여성이 살포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줄포 꽃집].[眼壓].[그녀의 後聞] 등에서 도망간 친어머니.보들레르적 여인. 베트콩 여인 등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여인 이미지에는 전락의 기쁨이 있다. 전락의 결과는 세상 사람들의 인습에 의해 악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전락으로 가는 과정에서의 유희는 미적 가치가 있다. 악마들 속에서의 진실과 미는 역경을 딛고 미의 궤적을 추리해 나가는 고귀한 여정이 될 수도 있다.    이추림은 을 적어도 여섯번이나 정독하였다. 서정주 시인이 [대낮].[문둥이]등에서 인간의 가슴에 뛰노는 순수한 육정과 관능미를 있는 그대로 그려냄으로써 일제 식민지 현실에서의 명랑성을 추구했다면, 이추림 시인은 도시 메카니즘의 삭막함을 그대로 나열하면서 미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도시의 산술 속에서 생명을 가지고 움트는 미적 자유가 놓여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추림이 추구하는 변용의 미학이다.  이와 같이 시인은 현실에서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변용의 기술을 나름대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  3)박진환, (서울:조선문학사, 1999), 14,15쪽  4) 상게서 61,62쪽         5단계는 창조적인 단계로서, 사물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의 결합,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통합과 같은 두 요소의 합성을 통해 시를 성립시키는 포괄적 형상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풀어 줍니다.    -김현승,[절대신앙] 전문      우리 두 마음은 하나이므로  나는 가야 하지만, 또한 한 몸을  두쪽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늘 이어놓네  마치 금이 공기처럼 얄팍하게 늘어나듯이    -던,[슬퍼하지 말아라]      김현승의 작품은 '불꽃'과 '눈송이'라는 상대적인 것을 결합시킴으로써 시가 텐션으로 표현한 것이며, 던의 작품은 '금'과 '공기'를 동원하여 두 존재를 폭력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박진환교수가 발상 차원의 5단계에서 소개하는 기법은 비유나 알레고리를 동원하여 자연을 의인화시켜 표현하는 전통적 표현 기법이나 컨시트나 전경화를 이용한 두 사물의 폭력적 결합이나 펀 등의 방법이었다. 이러한 발상의 5단계는 요즘 많이 일반화되어 그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해체적 방법을 권하고 싶다. 포스트모던 시가 나온 이후로는 시 창작 표현 기법이 매우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심지어 이전의 시 작품을 패러디하여 새롭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이전의 시구를 혼성모방하여 전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초심자가 반드시 5단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5단계에서도 변용의 단계를 먼저 사용할 수도 있고, 정신적 단계를 먼저 사용할 수도 있다.  어쩌면 위의 5단계보다 그것을 뒤섞어서 창작에 응용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해체 시에서 두 존재사이의 텐션이나 폭력적 결합을 통하여 훨씬 더 다양한 의미를 얻어낼 수 있고, 기존의 시구를 비틀어짜기하여 전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행과 행, 사물과 사물을 비틀어 짠 것 같은 인상이 드는 작품이 독자의 마음에 존재의 본질을 일깨우는데 더 큰역할을 할수도 있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에서 '無線想像'의 기법은 두 사물 사이에 거리감이 클수록 그 사이에서 더 많은 의미를 추출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의 무의식에는 현실적인 것과 몽상적인 것이 얼마나 많이 뒤섞여 있는가,그리고 그 무의식은 우리의 정신세계에 놓여 있는 진실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시를 창작할 때에는 발상의 단계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은 아니다. 사물을 보고 영감이 떠오르면 위의 창작 방법을 생각나는 대로 동원하여 걸작이 되도록 다듬어 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예로 든 창작 방법을 반드시 순서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발상의 5단계를 흐트려 놓고 하나씩 주워 담는 것도 그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곧 해체적 방법을 동원하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새로운 세계를 몽상하다 보면, 낯설게 쓰기도 되는 것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도 될것이다. 현대의 시인은 이와같이 흐트려 놓은 것에 대해서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현대 사회는 탈경계를 추구하면서 존재의 본질을 모색한다.시인이 해체의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독자는 현실의 규범과 논리에 얽매여 논리적인 놀이를 할 것이고, 이를 통해서 권력이나 규범의 노예가 된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를 몽상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시인들은 하나의 시에서 경계를 만들어 놓고 탈경계를 시도하기도 하고, 기존의 책을 허물어 뜨리고 텍스트를 향한 해체를 시도하고 기호의 놀이를 지속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해체적 글쓰기가 기존의 편협한 관념을 해체하고 존재의 본질을 향하면서 다양한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매우 필요 적절한 기법이라고 본다.    ♧시 창작 강의      - 시인정신 2003 여름호에 실린 시 창작 특강을 3부분으로 나누어  옮겼습니다.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라라^.~*  
55    조향 자료 댓글:  조회:1455  추천:0  2018-11-06
문자 반복법,   나뭇가지를 간질이고 가는 상냥한 푸른 바람 소리도 들리고 거기에 섞어 드는 소녀의 한숨 소리 계절의 시시덕거리는 소리가소리가소리가. 나는 사람들과 화안한 웃음들 이 살고 있는 세계가 무던히도 그립다. · · · 내 머리 위로 지나간 검은 直線 위엔 세삐아의 밤이 타악 자빠져 있는데 그 밑창에 가서 비둘기들은 목을 뽑아 거머테테한 臨終을 마련하고 · · · 있다. 참 많기도 한 세삐아 빛 밤밤밤밤. 밤의 꾸부러진 지평선엔 · · · · · 바아미리온이 곱게 탄다. 그럼. 너는 아무도 없는 밤의 低邊에서. 메키시코 의 사막 지대. 너와 나와 사보텐 꽃과. 행복한가? 그럼요.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 밑에서 이렇게 당신이 내 곁에 누어 있고. 그럼요! 비쥬! 너는 박꽃처 럼 웃는다. 特號 活字를 위하여. 오오. 오오. 디엔· 푸우. 首相들의 悲壯한 연 설. 電波. 파아란 電波가 地球에 마구 휘감긴다. 가이가 計器는 파업한다. 애인들은 바닷가에 있다. 엘시노아의 파도 소리 지층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나는 아아라한 고대처럼 잠자고 있다. 있어야 한다. 나는 영원을 산다. 개 울 물소리. ― 「녹색의 地層」 일부       아래 시는 「바다의 層階」 전문이다. 이 시에는 부호 ‘ · ’가 외국어 방점처럼 등장한다. 필자는 컴퓨터 위에 방점을 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하였음을 밝힌다. 컴퓨터 세대도 아닌데 조향 시인은 시의 ‘시각 디자인’에 일찍 눈을 뜬 것 같다.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 여보세요?   · · · · · 폰폰따리아 · · · · 마주르카 · · · 디이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 · · ·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 조향, 「바다의 層階」 전문   위의 시에서 ‘방점 위치’를 주목하여 보자. 많은 평자들이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조향의 초현실주의 대표시다.그러나 본 장에서는  시로 분류한다. 방점은 통통 튀는 음악성을 시에 부여한다. 문자 배치와 이질적 이미지의 배열은 시각적으로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조향의 「바다의 層階」 는 ‘경쾌한 전화소리-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문자 위 방점 있음)-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 랑데부우- 기중기의 허리 - 푸른 바다의 층계’ 등 더 복잡하고 많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단어들은 모두 ‘- 가볍다’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무거운 이미지의 ‘푸른 바다’와 ‘기중기’까지도 ‘푸른 바다의 층계’라고 시각 디자인된 감각적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독자는 바다 위에 층계를 그리며, 바다로 내려가는 여인을 상상한다. 시의 중심어들이 모두 가벼움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 무거운 ‘기중기’도 ‘기중기의 허리’라고 하여 가벼움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오늘에 부르는 너의 이름은 -回想의 노래   3연 1행 ‘밤마다 듣는 빗소리 초록 초로록’ 청각 이미지를 색깔 이미지로 치환함. 공감각적 이미지의 하이퍼시     체조 - 어느 女學校에서   까만 부루우라로 발끈 자른 눈[설원]빛 토실한 허벅지 허벅지 허벅지 허벅지…!   2연 1-2행 감각적 표현,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에로티시즘 이미지다.           2장 5연 ‘바다에서 바람이 오더니 내 넥타이를 만져 보곤 가 버린다/ 바람은 검은 망토를 입고 있구나/ 나는 너를 보내러 왔다 항구로 왔다.//― 「RON VIYAGE!」 부분   김춘수 시의 영향? 동인으로서 서로 시어를 소통하며 나누었다. 김춘수 시 검은 망토의 부분 찾아서 넣을 것. 부산에서 동인활동     비행기는 은으로 칠한 “나이프”다 하늘에 그어 놓은 숱한 “피규어” 끝에 회색 그림자가 장 미의 睡眠 위에 사뿐 포개진다. 구름은 OBLATE 휘날리는 “나프킨” 되어 食卓에 와 앉는다.   이질적인 언어의 결합으로 된 낯설게하기의 성공적인 문장이다.   현재 필자는 하이퍼시 동인으로 하이퍼시를 쓰고 있다. 이선 첫 퍼포먼스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과 두 번째 시집 『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에서 다수의 하이퍼시를 발표하였다. 또한 문화원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면서 을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결론   하이퍼시의 모듈 개념은 똑 같은 크기의 상자를 포개어 책꽂이를 만들거나, 똑같은 플라스틱 상자를 만들어 도시락에 넣는 반찬통과 같은 개념이다. 작은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뭉쳐서 시 제목을 완결하는 원리다. 모듈과 리좀의 구조는 기존의 관념시, 서정시와 차별화된다. 서정시는 주의주장이 강하다. 독자에게 지시적이고 명령적이다. 관념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퍼시는 제한적이거나 명령적이지 않다. 영화 기법을 차용하여 상황을 ‘보여주기’만 하고 개입하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상황으로 느낀다. 상황을 제시만 하고 시적 화자는 개입하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서정시와 차별성을 보여준다. 비논리성과 분리성의 연결이다. 필자는 다른 논문에서 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주장하였다. 필자는 와 상상력의 비약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주장한다. 또한 하이퍼시는 미술의 추상화 기법과 같다. 불특정한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날아다닌다. 도안이나 디자인처럼 감각적 미의식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단절되거나 이질적 이미지들이 결합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한 영상감각을 가지고 미술의 구성기법처럼 색깔 이미지가 선명한 것도 필자의 하이퍼 시의 특징이다. 동인지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조향은 초현실주의적 하이퍼시에서 무의미 시를 주장하였지만, 의미화도 동시에 추구하였다. 이질적 문장들의 결합, 각 행의 분절, 즉 단절을 지향하였다. 전위, 이질적 이미지 결합, 폭력적 언어결합-고정관념을 벗은 시어, 이미         연구 범위?? 조향의 시는 전반기 서정시는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 거의 없다. 후반기 작품 중에서도 말기로 갈수록 점점 작품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6.25사변이 일어나던 해에 동인을 결성하였으나 전쟁 발발로 동인이 해체되었다. 그후1952년 부산에서 
54    [스크랩]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상운 댓글:  조회:1480  추천:0  2018-11-06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 상 운            1. 인지의 본질과 인지과정      관념의 개념을 정리하고 탈관념이라는 새로운 단어의 성립이 가능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인지認知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인지의 본질 및 인식하는 정신과 외부 현실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논의해왔다. 원시불교에서는 인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것을 감각기관인 근根(6근), 대상세계인 경境(6경), 식별작용인 식識(6식)의 세 범주로 분류하고, 그것을 인간의 존재문제로까지 확대․심화하였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지認知를 인식 혹은 인식행위와 관련된 과정으로 본다. 인지는 인식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정신과정을 포함하는데, 인식은 감정이나 의지와는 구별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지는 감정과 의지를 제외한 지각·재인再認·상상·추론推論 등 지식을 구성하는 모든 의식적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지의 본질은 지각과 판단이며 판단을 통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고 그 대상을 어떤 한 개념 또는 몇 가지 개념으로 특징짓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의미형성의 전단계가 된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몸에서 제일 먼저 발생하는 것은 감각기관 6근根(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을 통과(감지)하는 6식識(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작용이다. 이 감지작용은 지각知覺의 초기과정이다. 이 여섯 감각기관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을 6경境이라고 한다. 그런데 6식識 중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은 다섯 감각기관을 총괄하고 모든 감각을 식별하는 식識이다. 이 의식意識에는 인식認識하는 것과 인식認識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契機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의식意識 속에 주관과 객관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다섯 가지의 식識이 모두 장애를 일으켜도 이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에 의해서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식識의 작용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다는 데서 일반적인 인지와 구별된다. 그리고 이 여섯 번째의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존재의 본질을 투시하는 내적 행위를 하는데, 그것을 직관이라고 한다. 이 6식과 함께 인지과정을 정리하면 ①감지(6식의 초기작용)→②인지(의식의 분별작용)→③의미형성(의미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과정을 거쳐서 그 주위에 있는 것들과의 연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순수인지는 ②항까지를 말한다.), ①감지(의식작용)→②직관의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직관直觀(intuition)은 선禪의 핵심이 되는 불교의 독특한 사유방법이지만 서양 철학에서도 중요한 사유의 방법으로 인정한다. 칸트(Kant, Immanuel)는 관찰에 근거하지는 않는 모든 사실인식의 원천을 직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직관은 다른 원천에 의해 얻지 못하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필연적 진리와 도덕원리들의 인식은 종종 직관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술은 다른 진리로부터 추론되거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공리公理처럼 다른 명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진술들은 직관을 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리와 규칙은 명백한 직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직관은 과학이나 일상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단편적인 '추상적' 인식과 달리 상호 연관되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의미한다.  직관을 통해서 보는 상像을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 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의 하나다. 직관상을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을 감고 있거나 상像의 배경 구실을 하는 표면만을 보면서도 마치 실제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제거된 후 곧바로 선명하게 떠오를 수도 있고 몇 분, 몇 날 또는 몇 년이 지난 후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직관상과 그것이 나타내는 원래의 대상은 색깔, 모양, 외관상의 크기, 공간상의 위치, 세밀성 및 다른 많은 특징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고, 대상이 거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재생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직관상의 성격·원인·의미에 대해 거의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직관상은 현대시에서 관념을 뛰어넘는 방법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꿈의 현상과는 다른 생생한 생명의 감각을 담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관념과 탈관념의 개념 정리    국어사전에서 관념觀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 되어 있다. 관념(觀念)[명사] 1.(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 2.《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김 3. 심리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내용의 총칭. 철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형상의 총칭. 선악의 관념, 죽음에 대한 관념 같은 것.  1번 항의‘ (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라는 풀이는 관념이 인식과 사유와 판단을 통해 “(어떤)의미”를 표시하는 인간의 의식내용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3번 항의 “대상을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 (선악의 관념, 죽음의 관념 따위)”에서도 관념은 “의미”를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이라는 것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관념은 대상에 대한 감지와 인지의 과정이 끝난 뒤에 일어나는 사유와 지식에 의한 의식의 현상이라고 풀이 된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바닥이 차다.” “굶어서 배가 고프다” “그는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는 관념이 아닌 사실인식(감각)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는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다. 현상에 대한 느낌, 현상에 대한 사실적인 인식은 그 속에 배경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사랑은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등은  관념이다. 그 말 속에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지식과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어 중에서 가장 관념적인 말들은 속담이나 잠언이나 명언들이다. 언어는 사물에 대한 인식기호다. 따라서 언어를 형성하는 기의와 기표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 조건만으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의 내용을 모두 “관념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주의적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다음은 “탈관념脫觀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3. 현대시에서의 관념과 탈관념의 문제    이상으로 인지의 본질과 과정, 관념과 탈관념에 대한 개념정리를 마치고,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가 성립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실제 작품의 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관념과 탈관념의 철학적 심리학적 탐구는 계속 천착되어야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분야의 연구 성과에 의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시에서 관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모더니즘의 시에서 관념은 시의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배경이 되어서 주제를 드러내고 독자들을 설득하고 시인이 의도한 형이상의 세계로 유인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를 포함한 전통적 서정시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의 현대시에서 관념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관념이 없는 시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시인들은 관념을 거부하는 시운동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고정관념들이 안고 있는 인생론이나 과거 지향적 향수, 누적되어 있는 때 묻은 지식은 거부의 대상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와 의식 속에 고약같이 끈끈하게 붙어있는 관념들을 지우고 직관直觀을 통해서 대상과 직접적인 내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로 탐색의 눈을 돌리기도 하고, 사물성의 이미지를 시의 목표로 삼기도 하고, 언어의 허구에서 벗어나 실상의 모습을 보고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의 출발점을 관념이 침범할 수 없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 지점인 대상의 인지영역에 두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탈관념을 지향하는 시는 언어유희의 무의미 시, 초현실주의 시, 순수 이미지의 사물시를 비롯하여 21세기 아방가르드의 맨 앞에 서 있는 디지털리즘의 시 등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런 탈관념의 실험은 김춘수 시인이 시도한 무의미시의 원천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가 내세운 무의미시에서 언어의 의미를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긍정과 부정의 충돌을 통한 의미 없애기, 정서나 의미가 묻어나지 않는 언어의 사용, 순수한 단순 이미지의 창출 등 언어유희의 방법을 동원한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너를 위하여 피 흘린 그 사람은 가고 없다   가을 벽공에 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 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 흙으로 갔다   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 유리같이 차다   가버린 그를 위하여 돌의 볼에 볼을 대고 누가 울 것인가    -----김춘수 전문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 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 전문   두 편 모두 김춘수 시인의 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시를 시의 의미면에서 비교할 때 전혀 영역을 달리하는 시로 분류된다. 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의 시인데 반해 는 김춘수 시인 한 사람 외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의 시다. 그 이유는 의 내용 “가을 벽공에/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흙으로 갔다//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유리같이 차다”는 이미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체험을 통하여 인식한 지식들이 굳어져서 만들어낸 “죽음의 의미”가 들어 있고 그것이 공감을 주고 있는데 반해 의 시의 내용,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개인 체험과 인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관념)도 형성되지 않는다. 또 이 시의 자연현상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눈은/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사실) 외에 어떤 배경의미도 없다. 그래서 무의미의 시는 어떤 의미(관념의 틀)가 형성이 되기 이전의 인지단계의 시라고 판단된다. 이런 인지단계의 시는 관념의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 속에 들어있는 감각이나 사실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 수없는 자유로운 상상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유희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는다. 유희는 예술의 전단계로서 자기만족에 충실한 예술정신의 원천이다. 의미(관념)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김춘수 시인은 순수 언어를 도구로 하여 언어예술의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이렇게 시의 예술성을 지향한 탈관념의 무의미시는 1950년대 조향 시인의 시가 더 적극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되는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 를 읽어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             ------조향 일부   주어와 서술어가 없는 이 구절은 통사적인 면에서 문장구조가 불완전하다. 따라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의미가 모호하다. 그리고 시행의 독특한 나열은 형태면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이질적인 사물의 대립적 배치로 언어충돌을 일으킨다. 바닷가 모래밭과 수화기受話器는 자연과 물질문명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연상하게 하고 수화기受話器는 여인의 허벅지와 이미지의 조화를 이룬다. 끝부분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는 또 어떤 상상력을 불러일으킬까. 어떤 성적性的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 시는 그런 것들을 모두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래서 관념(의미)의 틀로부터 해방된 언어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 그림으로 남는 시가 된 것이다. 다음은 문덕수 시인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을 읽어보자.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치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전문    이 시도 어떤 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의 이미지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그 언어는 사고(사유) 이전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 이 시는 객관적인 눈으로 빨간 저녁노을이 반쯤 담긴 유리컵, 그 유리컵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표정과 위치, 한 사나이의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금방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긴장감 속으로 시의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그 하나의 풍경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충실한 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생동하는 모습에서 사물성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도시와 인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바람직한 행위다. 하지만 그 작업은 이 시가 시도하고 있는 탈관념의 언어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서 있는 한 사나이,/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세 유리컵/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그 금 밖으로 밀려나/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는 시인의 지각작용이 포착한 생동하는 사물성과 한 순간에 집중된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탈관념과 디지털리즘 시를 주장하고 있는 오진현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 화 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 !“하고 바로 눈 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 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 서 내 앞에 선다.            ----------오진현 전문   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낳는다. 그것이 시의 생명력이다. 만약 하나의 시점으로만 해석되고 감상되는 시가 있다면 그 시는 가장 불행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도 보는 이의 지식과 취향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탈관념을 주장하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시 속에는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라는 관념의 틀에 갇혀 살다가 그 관념의 틀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고 감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직관의 장면을 견성見性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런 견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자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언어와 사물(대상)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인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사물과 사고思考의 표현기호다. 그런데 그 기호가 역전현상을 일으켜 오히려 사물과 사고를 지배한다. 따라서 “국어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언어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 즉 고정관념의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화자는 “나무”와 “꽃”이라는 언어의 기호에서 해방된 기쁨을 감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언어와 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고思考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시는 그런  배경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탈관념의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언어(기표․기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그가 말하는 탈관념의 첫 걸음이 된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진현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접사)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지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관념)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전문    자신의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의 지각작용은 직관이다. 그래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관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주관적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이다. 그 직관상 속에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 에너지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들어갈 틈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는 그 의식의 내면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어(염사)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기술과도 구별된다. 다만 마음의 눈이 마음에 비친 의식의 영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리즘의 시인은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준호 시인의 시에서도 탈관념의 한 장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꽃잎을 짓밟고 간다. 문득 저승에서 뻐꾸기 세 번 울고 간다. 너는 뭐니 너는 뭐니. 노란 파도가 노란 파도를 따라간다. 비이슬에 젖은 철조망, 메뚜기의 눈이 등대처 럼 설레고 간다.                    ----------------양준호 전문   양준호 시인은 고정된 사고思考로부터의 탈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향시인의 초현실주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시에서는 꽃잎을 짓밟고 가는 어느 날 한 찰나의 의식이 담겨있다. 그 의식에는 “간다”라는 동사가 이끄는 네 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네 개의 문장은 논리적(객관적)인 의미의 연결이 안 된다. 따라서 어떤 의미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네 개의 문장이 담고 있는 영상은 그의 무의식의 내면에서 포착한 영상 같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만 그의 무의식의 속으로 들어가 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다음은 송시월 시인의 시 를 읽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간다                     --------송시월의 전문   이 시는 오진현의 같이 비 그친 날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낸 시다. “그려낸”이 아닌“찍어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눈에 들어 온 풍경이 언어의 구문 조직상 순차적 연결로 되어 있지만 “물웅덩이,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멧새 한 마리가”가 눈에 포착되는 순간은 동시적同時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영상이 이렇게 질서화 된 것은 직관을 통한 의식의 작용이 선택하여 만들어 냈다는 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인정한 것이다. 우리들의 눈은 물리적인 면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빛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일시점單一視點이 아닌 다시점多視點의 시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의식(마음)은 외부의 것을 기억의 그릇에 선택적으로 담는다. 그것을 마음의 눈이라고 한다. 이 선택적인 시각視角 즉 마음의 눈에 관해서 영국의 수필가 가드너는 라는 수필을 통해서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깐 이 시는 송시월 시인의 마음의 눈이 카메라가 되어서, 비 그친 후 물웅덩이에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지나가는 동動․정靜의 한 순간을 찍어낸 사진 즉 인식의 그림이 된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리즘이 주장하는 탈관념이며 직관을 통한 염사 또는 접사의 기법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의 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사물과 직접 만남, 즉 인간과 사물(물에 비친 영상)과의 내통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이솔 시인의 을 읽어보자.   욕조 가득 비누거품이 부풀고 있다 거품 속에 색들이 팔딱거린다 거울 속에서 허물이 흘러내린다 구석구석 비누거품을 벗겨낸다 동그랗게 굴러가는 색깔들   텃밭에서 갓따온 가지빛깔 처음 우러나온 치자빛깔 옥수수 수염색깔 샘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모래빛깔 청심환을 싸고있는 금박지 씨가 환히 비치는 청포도빛깔   바구니 가득한 캔디 눈에 담기는 색깔부터 입 속에 넣는다 달콤하다가 시다가 씁쓰레 하기도 캔디맛인지, 색깔맛인지 욕조 가득 넘치는 맛과 색 맛으로 빛으로 춤춘다 ------이 솔 전문   이 시는 비누거품의 빛과 맛의 세계로 독자들의 감각을 끌어들인다. 그 빛과 맛은 시인이 감지하고 상상한 사물성의 세계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과 사물의 순수한 교감交感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시인과 사물의 직접적인 내통과 상상은 독자들에게 관념이전의 순수한 사물성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 세계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세계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자기소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과 상상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   이제까지 일반적인 관념(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무의미의 시(김춘수), 초현실주의의 시(조향, 양준호), 사물성의 감각과 이미지 중심의 사물시(문덕수, 이솔), 디지털리즘의 시(오진현, 송시월)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서 창작된 탈관념 시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탈관념의 시는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 형성의 이전, 감지와 인식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어떤 의미도 형성되기 이전의 감지와 인식의 단계는 관념시와 탈관념 시의 경계가 된다. 따라서 관념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인간의 의식 활동 전체(생각)를 관념이라고 모호模糊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면(관념의 지나친 확대는 거대한 고정관념의 형성이다), 한국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는 가능하고 그런 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들은 언어의 관념에 시달려온 우리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고 사물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감각과 정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끝으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대상을 보는 눈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하는 가장 기본적 관점觀點의 자세를 산문체로 풀어쓴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글을 줄인다.   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못 하나, 우리의 눈. 풍경들은 시시각각時時刻刻 새롭게 변화하고 치장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스스로 환히 보여주고 있데, 이미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계곡의 숲길이나 꽃나무들, 묵은 생각이 그려내어 벌려놓는 화판 위의 그림.   이젠 그 관념觀念의 안경을 깨뜨려 버려라, 우리의 눈. 순간순간 펼쳐 보이는 풍경의 색깔이나 모양, 변화의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눈부신 육체와 혼魂을 찾아내어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면서 교감交感하라, 순백과 눈 맞춰라, 우리의 눈. 뇌세포 속에 푸른 반점으로 남아 있는 몇 만 년 전의 원시기억原始記憶까지 모두 지울 수 없나, 우리의 눈. 먼지 묻고 얼룩이진 유리창을 계속 깨뜨려라, 들어오는 밝은 빛을 굴절시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형상形象들을 계속 깨뜨리고 또 깨뜨려라, 우리의 눈.   오오, 아무 배경背景 없는 순수인식純粹認識, 그 한가운데서 투명하게 빛날 새 눈을 위해.                              --------심상운 전문                 출처 :시의 꽃이 피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비밀의 숲    
53    시쓰기에 창의력 접목하기/ 박정원 댓글:  조회:1363  추천:0  2018-11-06
 시쓰기에 창의력 접목하기     가. 창의적인 아이디어         ○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       ○ 생각의 시각화       ○ 풍부한 생각       ○ 새로운 조합       ○ 관련성 찾는 노력       ○ 상황의 이면보기       ○ 다른 영역 살피기       ○ 새롭고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     나. "무엇을" 생각해야 되나를 "어떻게" 로 바꿔라.   스크랩 원문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52    [스크랩]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댓글:  조회:1498  추천:0  2018-11-06
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박영호 (문학평론가, 협성대 교수)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현대문학』 05년 1월호)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창작과 비평』 04년 겨울호) *조용미, 「도룡뇽 수를 놓다」(『문예중앙』 04년 겨울호) *정진영, 「이상한 상자」(『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작가세계』 04년 겨울호)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시작』 04년 겨울호) *이길원, 「개 4 ―항변」(『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Ⅰ. 시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위주로 파악할 때 효용론적 관점은 성립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목적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가의 여부와 독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시가 독자에게 미친 영향은 다시 ‘교시적 측면’과 ‘쾌락적 측면’으로 분류된다. “시는 유용하고 즐거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라는 아놀드(M.Arnold)의 진술이나,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시는 흥을 일으키고, 인정을 살피게 하며, 무리 짓게 하고, 원망하게 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게 하고, 멀게는 임금을 섬기게 하며, 조수초목(鳥獸草木)의 많은 이름을 알게도 한다” 라는 구절은 모두 시의 교시적 기능에 대한 설명이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문학의 본질은 ‘미’의 추구에 있으며, 이때의 ‘미’는 세속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윤리 도덕과는 일차적으로 단절된 비목적적 차원의 체험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보다 앞서 예술활동이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숭고한 지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무목적의 목적성’을 주장하였던 칸트의 견해는 시의 쾌락적 기능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시의 기능을 구체화하는 방법에 있다. 필자는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로 대별된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진술보다는 이미지 위주로 시를 형상화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이미지보다는 진술에 의존한다. 어떤 방법을 활용하든 중요한 것은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쾌감을 제공해주거나 반성을 통한 신생(新生)의 의지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절에 출간된 잡지에 수록된 작품들을 일별(一瞥)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하여 그런 관점에서 작품을 선별하였다. Ⅱ. 시인이 자신이 정서를 구체화할 때 대상과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보여주기’라고 한다면, 시인이 시적 화자가 되어 직접 진술하는 방식을 ‘말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여주기’는 시인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고 대상을 이미지로 승화시켜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으로 ‘묘사’에 의존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쉬가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또는 “시는 사실 자체를 말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모두 이미지를 통한 간접적인 발화방식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가능한 한 진술을 배제하고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을 보기로 하자.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새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 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 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서린 긴장을 견디지 못한 야생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 오리들은 일제히 물을 차는 자욱한 깃 소리가 되어 눈부신 하늘에 퍼진다.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수면 아래로 반쯤 몸을 숨긴 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오리의 긴장된 모습은 둘째 연까지 지속된다. 견고한 긴장은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순간 물을 차고 비상하여 하늘로 퍼지는 셋째 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원경(遠景)에서 근경(近景)으로 좁혀오며 점차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오리가 비상하기까지의 과정을 조금씩 조금씩 근접해오고 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에 비례하여 밀도는 조밀해진다. 그래서 독자 역시 점차 숨이 막혀온다. 끝 부분에 이르면 결빙된 얼음이 깨져나가는 듯한 숨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시인의 의도이다. 무엇을 말하고자함이었을까? 수면 위로 드러난 오리의 형체는 비록 평온해 보여도 수면 아래서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물갈퀴를 젓고 있다는 감추어진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림과 동시에 비상하는 오리처럼 격발(擊發) 직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하고 우리 삶을 응시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을까? 그 어떠한 의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 할 때 작품이 갖는 의미는 오히려 반감된다는 사실이다. 낡은 의미로 덧칠하여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오독(誤讀)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범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허만하 시인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시인은 진술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오직 정경만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의미들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 행간과 행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 원경에서 근경으로 집약해오는 시적 기법 그리고 이들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일촉측발과도 같은 긴장감, 이런 것들만으로도 훌륭한 시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였다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고 시인이 말한 울타리 싸리 역시 변한 것은 아니다. 더 붉어 보였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시인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내가 퇴락해갈 뿐. 그렇듯이 산다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러한 큰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확인하고, 천천히 수용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인식한 사실을 작품 어느 곳에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자신이 인식하기까지의 치열함과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가슴 시린 숙연함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상반된 이미지로 대립의 각을 세우고 이를 다시 통합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나가는 동안 자신의 정의(情意)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으로부터 생성되는 서늘한 자장(磁場)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허만하 시인과 최하림 시인의 작품은 진술보다는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그림을 보는 듯한, 그도 아니면 몇 장면의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거듭 읽다보면 묘사 뒤에 숨겨져 있는 많은 의미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고 있는 가도 그만큼 중요하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좋은 시로 평가되는 것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는 모두 다 좋은 시가 되어야 한다.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리듬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이별의 정한으로 형상화되기 때문에 좋은 시로 평가받는 것이다.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의도를 감춤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의미가 여실하게 전달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 일관된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정반대로 파악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같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인들은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비유와 대비 등과 같은 시적 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슬쩍 흘려놓는다. 다음에 인용한 두 편은 묘사에 의존하면서도 상반된 이미지를 대비시키거나 시적 대상에 자신의 정서를 응축시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인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지율(知律), 계율을 안다 거짓되고 그릇되게 행함을 막는 율법을 안다는 이 말, 참으로 무서운 말 아닌가 내가 아는 한 비구니의 법명이 지율이다 천 명의 성인이 나온, 천 가지 연꽃이 핀 것 같은 천성산(千聖山) 아래 내원사에서 조용히 수도하며 지냈던 눈매가 그윽하고 맑고 단단한 사람 그가 깊은 산 속 깨끗하고 차가운 물에만 산다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산다는 꼬리치레도롱뇽을 살리려고 생명을 내놓았다 형상이 있거나 없는 모든 것을 화엄이라 한다는데 산정에 펼쳐진 늦가을 화엄벌은 흰 눈이 덮인 듯 억새의 물결로 장엄해 관통 터널 공사도 도롱뇽 소송도 다 잊고 사람들 탄성을 지른다 이 화엄벌의 늪에 지율의 친구 도롱뇽이 산다 갈색 등에 노란 점무늬가 별처럼 펼쳐져 있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꼬리치레도롱뇽은 겨울잠에 들었나 화엄늪의 화엄세계가 바로 너의 우주인데 팔색조야 황조롱이야 청딱따구리야 삼광조야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지율(知律), 어둑해져가는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롱뇽 수를 놓고 있다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뭇생명을 살리려 하고 있다 ―조용미, 「도롱뇽 수를 놓다」 경부고속철 노선이 천성산을 관통하는 것에 반대하여 석 달 넘게 단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지율 스님에 시인은 자신의 의도를 투사하고 있다. 모두가 격의 없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 그것이 곧 ‘화엄의 세계’이다. 그런 화엄이 깨지는 것은 우리 삶의 근거지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인은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다고 토로한다. 그렇지만 천성산 아래 속세는 어떠한가? 억새의 물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고 탄성을 지른다. 이들 속세의 사람과 한낱 도룡뇽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는 지율 스님은 명백하게 대비된다. 시인의 의도는 분명하다. 순간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모든 것을 잊고 마는 우리의 천박함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뭇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룡뇽 수를 놓고 있을 지율 스님의 거룩함을 대비시켜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다. 필자가 위 작품을 눈여겨보았던 것은 시인의 의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법 때문이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을 한편 더 읽어보기로 하자. 내 안에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바느질함이 열렸다 사개 물려놓은 한쪽 귀퉁이가 밤새 울컥이며 삐걱거리더니 그 닫혀 있던 뚜껑이 털썩, 한숨 내려놓듯 열린 것이다 가득 붉은빛이다 내 안에서 들썩이던 바람을 꾹꾹 눌러 박음질 해둔 붉은 솔기들이 보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내 속으로 들어와 촘촘히 박혀 망설임으로 새겨진 무늬들 그 붉은 날들을 내 안 깊숙이 넣어두고 오랫동안 재워 두었던 밤들 어쩌자고 그대로 넣어두려 했던 것일까 나를 비집고 나온 솔기들이 저렇듯 곱고 생생한데 아직 그대로 있는 마음 이제는 열어 두기로 한다 ―정진영, 「이상한 상자」 시를 읽고 상상을 한번 해보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나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왜 나는 할말이 없었겠는가. 망설이다 고작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침묵은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에서 상처로 남아있다. 상처를 달래며 보낸 밤들 그 끝에서 결국 상처는 곪아터지듯 내 가슴에서 붉은 빛으로 터져나왔다. 막상 터져나오자 곱고 생생하다. 하여 이제는 내 마음을 열어두기로 했다. 앞에 인용했던 조용미 시인은 ‘지율’과 ‘사람’ 그리고 정진영 시인은 ‘바느질 함’과 ‘비집고 나온 솔기’라는 상반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시어를 대립시켜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묘사와 진술을 혼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율 스님의 단식과 바느질함으로부터 비집고 나온 솔기를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시를 읽는 일이 시인이 행간과 행간 사이 그리고 함축을 통해 숨겨놓은 사실을 찾아가며 시인과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면, 두 작품은 바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묘사에 의존하는 ‘보여주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시인이 직접 시적 화자로 개입하여 자신의 의도를 진술하는 ‘말하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새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地球를 끌어안 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와 말간 내 두 손바닥을 대비시켜 삶에 대하여 강건한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위의 시는 주지하듯 묘사보다는 시인의 심회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진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레슬링 선수와 자신의 대비는 지속되는데, 작품 중반부와 후반부에 이르면 귀가 짓뭉개지도록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레슬링 선수의 비애와 내 것 아닌 다른 사람의 절망에는 귀기울여 본 적 없는 나의 이기심에 대한 반성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다짐이 울림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준열한 반성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대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삶을 반성하고 새로이 강건한 삶의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지천명 넘어서면 먼 강 아스라한 적벽의 시간들이 아름다워질 때 있을 것이다. 억새밭 거기 상처투성이 아픈 급물살들이 풀어놓은 여울 곳에 이름없는 시인의 불우한 노래 한 편 홀로 숨어살 수 있어서 어진 농부 가난한 땅으로 돌아가 착한 시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고향이나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큰 죄라도 진 것처럼 부끄러울 때 많이 있다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 장차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걱정이라며 남한강 건너 논밭 바라보는 그의 눈 바로 보지 못하는 나 또한 대죄인인 것이다. 시를 써서 세상을 속인 죄 얼마나 큰줄 아냐고 저 강물이 나에게 단호히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 홍일선 시인의 창작 모티프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의 삶이다.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면서 농사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농촌과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주변 사람이 하나 둘씩 떠나도 자신만은 고향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고 근심한다. 그러나 이경희씨가 정작 근심하는 것은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다 자신도 결국 고향을 떠나야할지 모른다는 불길함이다. 그래서 그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그를 통해 시인은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세상을 바로 알리고, 때로는 어긋난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을 감당하여야 할 책무를 지닌 시를, 오히려 자신은 세상을 속이는 데 활용했던 것은 아닌가 뒤돌아보고 있다. 그런 그를 향하여 강물은 세상을 속인 죄가 고향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이경희씨의 근심보다 더 큰 죄라고 호통치고 있다. 박후기 시인의 작품과 홍일선 시인의 두 작품 모두 묘사보다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시의 본질이 함축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길고 긴 여운이라고 한정한다면, 두 작품은 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한편 결연한 의지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지도 제 잘못은 압니다 제가 화분을 쓰러뜨리자 주인님은 신문지 말아 툭툭 치며 주의를 주었지요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그 후 화분 근처에선 발걸음도 무거웠지요 제가 어디 화분을 그곳에 둔 주인님을 탓하더이까 귀 닫고 남의 탓이라 하지도 않지요 개 주제인 제가 보기에도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이길원, 「개 4 ―항변」 작품의 화자는 ‘개’이다. ‘개’가 ‘인간’인 주인을 일깨워주고 있다. 미물인 개조차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물론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주인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라는 구절에서 보듯 사람은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고, 자신의 잘못을 세상 탓으로, 다른 사람 탓으로 회피하려 한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 역시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작품 전체가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시인의 말하고자 했던 위와 같은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의인화(擬人化)된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이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박후기, 홍일선 시인의 작품은 모두 진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종결하고 있다. 세 시인이 보여준 각오와 다짐이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자기 반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공자(孔子)는 『시경(詩經)』에 수록된 삼백 편에 일관하는 정신을 ‘사무사(思無邪)’라 하였다. 사무사란 무엇인가? 세속의 욕망으로 인하여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내는 정화작용을 의미한다. 시를 읽는 행위를 처음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교시적 기능은 성립된다. 박후기, 홍일선, 이길원 세 시인의 작품은 시가 교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Ⅲ. 감기는 일종의 경고이다. 그래서 지친 심신을 안정하고 휴식하는 일 이외에는 특효약이 없다. 마음으로부터 온화한 정서를 생성시켜 주는 한편 세속의 잡다한 욕망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는 점에서 시를 읽는 일 또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읽고 난 다음에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 주는 작품일수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성찰과 다짐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이다. 보여주는 시이거나 말하는 시이거나 작품을 감기가 주는 경고로 인식한다면 갈등과 분쟁도 사라지지 않을까. 겨울이 쓰러지는 끝자락을 보았다. 겨울과 봄의 접점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경계 허물기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주경림 (시인) *유자효, 「새」(『시와사상』 04년 겨울호) *박승미, 「마음 心 둘」(『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황상순, 「흔적 1」(『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성우, 「접시」(『현대시학』 05년 1월호) *이영식, 「이별연습」(『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1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 3차원이란 지구상에서 전후, 좌우, 위 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이동이 가능한 세계를 말한다. 시의 세계에서 시인은 3차원의 세계에 몸을 두지만 상상력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4차원의 세계로 넘나들 수 있다. 4차원의 세계에서는 3차원의 현실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첨가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세상 만물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세상은 시간 따로 공간 따로 편을 갈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4차원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독자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권해서든 시인의 타임머신을 타고 ‘시’라는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 편의 시는 그 공간에서 하나의 우주와 맞먹게 되어 시인이 먼지 한 톨을 들어도 우주가 몽땅 따라 들리며 티끌 한 개를 놓아도 우주가 모조리 함께 놓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그 공간에서는 시를 따라 자연과 독자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일체 경계가 없어 죽음과 삶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다. 경계를 허물고 희노애락의 감정의 소통이 자유로운 시의 세계를 엿보기는 즐겁지만 이 땅에 시인으로 살아 남아야 하는 현실과 꿈의 부조리가 만만치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가 암울할수록 상상력의 변주를 더욱 화려하게 펼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시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언어라는 날개를 달고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상을 엿보기로 한다. 2 산불이 났다 불의 바다 속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는 나무 위를 맴돌며 애타게 울부짖었다 그 곳에는 새의 둥지가 있었다 화염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새의 안타까운 날개짓은 속도를 더해갔다 마치 그 불을 끄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둥지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새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갓 부화한 둥지 속의 새끼들은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덩이가 되었다 폼페이에는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감싸안은 닭의 화석이 있다 ―유자효, 「새」 유자효 시인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비극상을 현재의 시간으로 재생시키고 있다. 그러나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본 닭의 화석에서 그는 죽음이나 절망, 슬픔처럼 어두운 모습이 아닌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보고 있다. 뜨겁게 잿빛이 된 돌멩이 하나에서 그 사랑의 유효함을 전달하고자 한다. 「새」에서 어미의 사랑은 목숨을 초월해 화석이라는 형태로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갓 부화한 새끼들은 날갯짓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안타까운 운명이었지만 어미와 새끼들은 한 몸으로 오롯이 작은 불덩이가 되어 행복한(?) 산화를 했다. 그들 또한 화산재를 뒤집어쓴 인간 화석과 함께 ‘최후의 폼페이인’인 셈이다. 유자효 시인은 섣불리 연민을 표시하거나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동영상의 화면을 보여주듯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언어를 조종하는 감독으로서의 시인의 연출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을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 소심 한 촉이 꽃을 피웠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 그 모습이 여름내 더위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달래 주더니 지는 모습이 어찌 그리 다소곳한지 한 잎 또 한 잎 꽃이 질 때마다 차마 그 꽃잎 주워 버리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다 지고 난 다음 조용히 다가가 보니 떨어진 그대로 마음 심 자가 분명했다 그 마음을 이 마음속에 깊이 깊이 뿌리 내리기로 했다. ―박승미, 「마음 心 둘」 「마음 心 둘」에서 시인은 조용히 꽃을 피워낸 소심 한 촉이 피었다 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한 소심 한 촉의 고고하고 청아한 모습을 보고 있다. 수란치마는 궁중 나인들이 예식때 입던 수놓은 치마로 그 화려함 때문에 소심 한 촉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긴 수란치마를 가지런히 펴 놓고 앉았을 때의 모습은 입고 서 있을 때의 화려함과는 사뭇 다르다. 입체적인 모습이 평면으로 깔리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함보다는 주위의 분위기까지 우아하게 고양시킨다. 소심 한 촉이 주위를 은은하게 물들이면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하여 가야금 가락의 맑고 청아한 음색의 청각적인 효과가 그대로 ‘조용히’라는 시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또한 다 지고 난 꽃잎에게 ‘조용히’ 다가가 마음 심(心)자를 얻는다. 악보가 없었던 과거에 가야금을 배울 때는 ‘구전심수’(口傳心受: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 했듯이 떨어진 꽃잎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속에 받기로 한다. ‘그 마음’인 소심 한 촉은 이제 ‘이 마음속’인 시인에게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다. 심장의 모양을 본땄다는 표의문자인 한자어 마음 心자가 펼쳐 보여주는 시적 변용은 따스함이나 부드러움 같은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뿌듯하게 차오르게 해준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새들이 모여 파드득 파드득 잎을 피우는 집 먼 데 있는 새도 몇 번의 날개짓이면 금새 날아드는 집 집 없는 새도 지나가다 얼핏 깃드는 집 그 집 앞에서 누군가 발을 멈추고 쭈빗쭈빗 귓문을 연다 그의 꼬불랑한 귓속 길이 물 오른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온다 어떤 새소리 한가락 파릇하니 새잎을 틔운다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 째구르르 깃털을 편다 입술이 벙긋 열리고 실핏줄이 팔딱 뛰고 아랫가지에서 윗가지로 올라앉는 높은 음의 가지 윗가지에서 아랫가지로 내려앉는 낮은 음의 가지 이 가지 저 가지 마음대로 옮겨앉는 마음의 가지 아아아 파릇하니 파릇한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 그리움이라는 새들이 한참 지저귀다 뚝! 그치기도 하는 집 파릇하니 파란 나무집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 이나명 시인은 사소한 주변의 풍경이나 일상의 사물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는 시적 대상에게 시끄럽거나 과장되지 않게 조용히 다가가 미세한 것들에서부터 고유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낸다. 그 의미를 새롭게 엮어 보여줌으로써 잠시 분잡한 현실을 잊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해준다. 「파릇하니 파란 집」 역시 나무와 새, 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출발을 한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그 집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자신이 먼저 귓문을 열어 깊숙하고 은밀한 마음 속 길을 꺼내는 것이다. 새소리같은 아름다운 새잎을 그 집의 나뭇가지에 내밀하게 틔우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인 것이다. 이 가지 저 가지에 마구 피워내고 싶은 잎사귀, 즉 ‘그리움’으로 마구 지저귀고 싶은 언어의 잎사귀인 것이다.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이라는 심정적인 표현처럼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 한 켠마다 남아 있는 그 모든 ‘그리움의 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나명 시인은 감각적인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청각과 시각을 골고루 자극함으로써 높은 시적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황상순, 「흔적 1」 황상순 시인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주검이 거두어진 자리에 남은 흰 페인트의 윤곽을 지켜본다.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었을 그 자리에 이제 “그의 윤곽”만이 남아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사내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면서 ‘탈피’라는 화두를 넌지시 끄집어낸다. 시인의 응시는 목숨을 빼앗아간 비극적인 장소에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는 대신 역설적으로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라는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있다. 실재와 부재 사이에 ‘탈피’를 끼워넣은,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고층빌딩에서 반사된 ‘날을 세운 빛들이” 사내의 비상을 재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거리 횡단보도나 유리창 가득한 빌딩들은 전형적인 현대도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판에 박힌듯 숨막히는 공간일 수 있다. 이미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내(혹은 여자)는 숨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사내의 죽음이 자의적인 것이든 타의적인 것이든, 죽음은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현실에 남겨진 흔적은 고통스러웠던 육체의 핏자국뿐이다. 그의 영혼은 ‘비에 젖은 옷’처럼 남루했던 삶에서 탈피하여 어디에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탈피’란 허물을 벗는 일, 또한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워짐을 이르는 말이다. 시인은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을까 라며, 자유롭고 일탈된 사유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극한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들이” 죽음으로 상징되는 ‘차량’ 위에 일렁거리는 환상을 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접시가 깨진다 하나 둘 쏟아지기 시작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치며 깨지고 무릎을 치며 깨진다 밥알 퉁기며 깨지고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며 깨진다 속 깊이 쌓여 있던 접시들이 와그르르,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깨진다 어휴 놀래라, 귀를 막건 인상을 찡그리건 말건 신나게 깨진다 엉덩이 들었다놓으며 경쾌하게 깨진다 키득키득 입속에서 나와 쉴 새 없이 깨지는 접시! 침 튀기며 나온 접시들이 손뼉을 치며 깨지고 어쩜 좋아, 발을 구르며 깨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야 후련한 접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 ―박성우, 「접시」 한 편의 시를 잘 읽어서 시가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알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어떤 관념이나 의미없이 ‘접시가 깨진다’의 문장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가 될 때까지 말과 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이미지의 변주에 집중하게 된다. 언뜻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도 하지만 ‘접시’를 통해 박성우 시인이 말하고 싶은 간절한 그 무엇이 궁금해진다. 접시가 깨진다는 것은 일종의 파괴 행위로 기존의 틀이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탈의 욕망에서 오는 야릇한 즐거움과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입속에서 나와 쉴새없이 깨지는 접시!”에 이르면 접시가 시적 화자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눈치채게 된다. 접시는 시인의 말도 되고 마음도 되는지라 결국 자신의 내면의 그 어떤 것을 털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깨뜨리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지금 있는 기존의 형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일종의 구도 행위(?)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접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온전히 비웠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테이블을 치며/ 무릎을 치며/ 밥알을 퉁기며/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엉덩이를 들었다 놓으며/ 발을 구르”는 접시들. 아무튼 독자들은 지면을 뚫고 나오는 접시 깨지는 소리의 소란함을 통해 억압된 것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발산 작용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 것이다. 중랑천 둔치 노부부 한 쌍 자전거와 한판 벌이고 계시다 할미는 페달 위에 안다리걸기를 시도하고 삼천리호 외궁둥이 샅바를 잡은 할배는 엉중겅중 두꺼비씨름 중이시다 뒤에서 밀면 몇 바퀴 구르다가, 기우뚱 곧추세워 놓으면 또다시 넘어질 듯, 비틀 그렇게 밀고 넘어지고 에돌아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 돌아보면 풋꿈인 듯 눈에 밟혀오는데 아이들 MTB자전거는 꼬리 물고 내달린다 목 길게 빼고 구경하던 해바라기 할배 등뒤에서 고개 꺾고 하품할 때쯤 웅크렸던 할미의 어깨가 펴지고 은빛 바큇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할배가 슬며시 꽁지를 놓은 줄도 모른 채 차르르― 자전거도로 위로 날아가는 할미새 이제 되었네그려, 혼자라도 넘어지지 말고 싱싱 나가시게 서툰 씨름판 곁에 맘 졸이던 호박덩굴 이파리 세워 갈채를 보내는데 샅바 놓으시고 뒷짐진 할배의 빈손 그늘, 너무 깊다. ―이영식, 「이별연습」 평생 해로한 부부가 죽음을 동시에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영식 시인은 죽음을 앞둔 노부부의 심리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고 있다.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이지만 이제 둘 중 누군가는 혼자 남아 자전거 타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평생 할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할머니는 아직도 자전거 타기가 서툴다. 뒤에서 밀어줘도 기우뚱거리고 곧추세워 놓아도 비틀거린다. 그러한 할머니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할아버지는 자전거와 의 싸움에서 쉽게 삽바를 놓지 못한다. 자전거 타기는 바로 삶을 살아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두꺼비 씨름처럼 굼뜨고 하품이 날 지경이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홀로 탈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다. 마침내 웅크렸던 할머니의 어깨가 펴지고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이제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고 싱싱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 홀로 설 수 있게 된 할머니를 보며 할아버지는 ‘이별연습’이 끝났음을 알고 샅바를 놓는다. 지루한 씨름이 끝나고 홀가분하게 빈손이 되었지만, 삶과 죽음에 드리워진 그늘은 할아버지에게 “너무 깊다.” 이영식 시인은 이미 「낮달」에서 영정사진을 찍는 노인들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잘 그려낸 바 있듯이 「이별연습」에서도 노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아마 허장성세(虛張聲勢) 없이 사소한 일상에서도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천착해내는 시인의 성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3 유자효 시인은 최후의 폼페이인이 된 「새」의 화석에서 2천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어미의 사랑이라는 보석을 찾아냈고, 박승미 시인의 「마음 心 둘」에서는 표의문자인 ‘心’자의 이미지 변주를 통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서정시의 정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나명 시인은 독특한 감성으로 새소리와 새잎이 피어나는 「파릇하니 파란 집」 한 채를 선사했다. 「흔적 1」에서 황상순 시인이 주검이라는 탈피를 통해 비상하는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깨뜨리기라는 파괴 행위를 통해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영식 시인은 노부부의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 「이별연습」으로 죽음과 삶의 깊은 그늘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평생을 견지한 시작(詩作) 태도로 ‘내 글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않겠다는 ‘어불영인 수사불휴’(語不營人 雖死不休)의 뜻을 되새겨보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스크랩 원문 : 빛고운 창가      
51    즐거운 시니피앙과 슬픈 시니피에의 간극 / 강희안 댓글:  조회:1564  추천:0  2018-11-06
즐거운 시니피앙과 슬픈 시니피에의 간극 ― 애지문학회 사화집, 『날개가 필요하다』(종려나무, 2009)에 대하여 강희안 1. 혼질적 기호의 파장을 찾아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인 소쉬르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서 변하지 않고 본질적이며 사회적인 언어 체계를 랑그, 혼질적이고 비본질적인 언어 체계를 파롤이라고 불렀다. 랑그와 파롤은 서로 상반되지만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기표(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signifie, 시니피에)의 관계를 지녔다는 특징을 지닌다.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개별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파롤,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라고 한다. 랑그란 추상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사회에서 공인된 언어를 말한다. 즉 이 말은 여러 가지 상황에도 절대 변화하지 않고 언어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본질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이와는 상대적인 관점의 파롤은 현실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개인이 사용하는 구체적인 언어를 지칭한다. 랑그와 파롤의 관계는 기표와 기의로 설명할 수 있는데, 낱말들의 음성을 나타내는 기표와 낱말들의 개별적인 뜻을 나타내는 기의의 결합으로 개개의 낱말들이 자의적인 차이를 나타낸다는 말과 동일하다. 언어학에서 자의적이라는 것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우연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시의 언어에서는 상상력을 통해 누가 그 간극을 다변화하는가에 따라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라는 매체의 특성이 기존의 언어 관념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정서를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애지문학회에서 낸 사화집의 시편들은 서로 유사한 랑그로써 세계와 언어의 자의식을 각기 다른 파롤의 모습으로 구현하고 있어 이채롭다. 2. 개인적 랑그, 사회 파열의 자의식 랑그와 파롤의 개념을 처음 창안한 소쉬르는 언어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랑그밖에 없다고 단정했는데, 그것은 파롤이 상황에 따라 쓰이는 느낌, 또는 뉘앙스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공적 언어인 랑그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독창적인 개성을 강조하는 시적 언어인 경우에는 파롤이 분석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음성 이미지인 시니피앙과 의미 구성체인 시니피에의 개념을 착안한다. 언어는 표층적인 음운 구조와 그 이면의 의미 구조를 동시에 지니며, 이 두 구조는 불가분의 행복한 결합 관계라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 이론에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보탠 자크 라캉은 기호 표지인 시니피앙이 단순한 음성 이미지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욕망을 배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음성 이미지인 시니피앙 이 본질인 시니피에를 견인한다는 이론이다. 라캉의 언어철학은 현대 시인들의 언어 의식과 세계 인식에 강력한 파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언어적 관념은 이 글에서 다루는 애지문학회 시인들에게서도 주류를 형성할 만큼 강력한 인자로 작동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그 앞에선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다 몸 속 깊은 시한부 목숨을 족집게로 끄집어내어 벼랑 끝에 매달아 놓는 기술이 그에게 있다 중병 같은 긴 세월을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다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병력을 컴퓨터 자판에 두드리면 네모 번듯한 운세가 슬픈 바코드로 떠오른다 아무 이유 없이 궁합이 맞지 않듯 아무런 인과관계 없는 죽음도 허다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전봇대의 전단지처럼 생사의 모호한 경계를 사람들이 참새처럼 몸을 떨고 있다 수만 볼트의 전깃줄에 꿈적도 하지 않는 참새 한 마리, 발바닥이 간지러운지 끊임없이 발 바꾸기를 한다 벼랑 끝에서 당당한 맨발은 없다 오늘도 그는 시한부 선고 중이다 ― 김연종, 「돌팔이 의사 생존법」 전문 김연종은 근작시에서도 보여지듯 능청을 떨면서 세태를 꼬집는 알레고리를 자유자재롭게 구사하는 시인이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임상체험에서 얻은 시적 모티프를 재미있고 맛깔스럽게 알레고리화 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인용시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작품으로서 자본을 위해서 목숨값을 흥정하는 의사의 권력을 풍자하고 있다. 화자는 시의 도입부에서 ‘돌팔이 의사’(기표) 앞에선 “모두가 시한부 인생”(기의)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병자들의 유약한 특성을 이용하여 “몸 속 깊은 시한부 목숨을 족집게로 끄집어내어 벼랑 끝에 매달아 놓는 기술이 그에게 있다”는 기표를 통해 권력의 위악성이란 어처구니없는 기의를 드러낸다. 나아가 그가 “중병 같은 긴 세월을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시의 화자는 무엇보다도 비상동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삶의 이율배반적 허위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권력에 방기된 병약한 인간들은 “아무런 인과관계 없는 죽음도 허다”하게 발생하는 기의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해 갔을까 일방적으로 당신의 몸에 드리워진 한 개로 압축된 목, 구멍이란 뚫려진 통로다 두 눈으로 들어와서 하나의 입으로 뱉어지는 눈곱 같은 질문 두 귀로 밀려와서 하나의 입으로 쏟아지는 귀지 같은 상념 두 코로 달려들어 하나의 입으로 들어오는 꼬딱지 같은 먹이 한 개의 입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항문으로 이어지는  길고도 막막한 구멍 하나 하나의 구멍으로 요약된 항문은 독설이다 배설의 통로 쪽으로만 열려 있는 후끈한 염문이다 ― 김혁분, 「구멍에 대한 담론」 부분 김혁분은 풍요로운 이미지보다는 사유 쪽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 장기를 지닌 시인이다. 인용시에서도 사람의 ‘입’이라는 구멍에 대한 사유의 기표가 ‘항문’이라는 기의로 환치되는 구조적 역설을 보여준다. 시의 화자는 “일방적으로 당신의 몸에 드리워진/한 개로 압축된 목”을 제시하면서 “구멍이란 뚫려진 통로다”라는 전제를 내세운다. “두 눈”이나 “두 귀”, “두 코”로 들어와서 “하나의 입”으로 배출하는 일이란 “질문”이나 “상념”이나 “먹이”라는 기의를 얻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삶이란 기실 “한 개의 입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항문으로/이어지는/길고도 막막한 구멍 하나”로 요약된다는 전언이리라. 따라서 화자는 “하나의 구멍으로 요약된 항문은 독설”이며 “배설의 통로 쪽으로만 열려 있는 후끈한 염문”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입으로는 향기로운 척하지만 뒤가 구린 인간의 생,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채 “후끈한 염문”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독설”로써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인간들의 비애가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부분이다. 따라서 인용시는 하나의 ‘입’이란 기표는 결국 ‘항문’의 기의와 동일하다는 역설적인 감각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정위된다. 새벽잠이 점점 없어져 갈 때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 항문의 괄약근만은 아니다 아래로 새는 것쯤은 냄새만 조금 참는다면야 잠깐의 꿉꿉함도 견딘다면야 은근슬쩍 뒤처리도 염려 없으니 불안함 한 덩이쯤 탈 없으나 침 발라 넘긴 손가락 끝 검은 때가 제법 묻을 때 무성자음을 잃고 ㄹ, ㄴ 따위가 예사로울 때 꽤나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 입의 괄약근이다 ― 박현, 「괄약근에 대하여」 부분 박현의 시는 젊은 시인답게 현대적인 다양한 소재를 차용하여 도발적인 상상력의 진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주로 ‘악어가방’을 통한 문명비판, 자본주의적인 위악성 풍자, 나아가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도저한 언어의 저돌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용시 「괄약근에 대하여」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편에 속한다. 여기서의 ‘괄약근’(기표)은 ‘입’(기의)과 동일화의 범주로 포섭하여 무리 없이 형상화한다. 항문의 괄약근으로 새는 것쯤은 “냄새만 조금 참는다”거나 “잠깐의 꿉꿉함도 견딘”다면야 “불안함 한 덩이쯤”은 별 문제 없겠다고 단언한다. 곧이어 화자는 그 다음 연에서 기표를 뒤집는 아이러니한 상상력을 선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침 발라 넘긴 손가락 끝/검은 때가 제법 묻을 때/무성자음을 잃고 ㄹ, ㄴ 따위가 예사로울 때/꽤나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입의 괄약근”이라는 실존적인 진실의 발견이다. 따라서 화자는 ‘항문의 괄약근’이란 기표와는 다르게 ‘입’이란 기표는 “힘주어 꼭 다물지 않으”면 “빠지지도 녹슬지도 않는 미늘”로 남아 “염치 모르는 생채기”(기의)를 남긴다는 쓰디쓴 전언을 남긴다. 마지막 연의 “견뎌 낸 시간이/치욕이 되지 않기 위해선/괄약근 관리에 힘쓸 일”이란 진술이 설득력을 배가하는 이유도 바로 그 까닭이다. 허, 그란디그란디 이 말은 꼭 해야쓰겄소 쌀 무시 달걀 마늘 밀가리 동동주 되야지괴기값, 게다가 우마차비(費)에 동네 또랑에서 멱 감는 돈꺼정 나라에서 직접 관리허겄다고 했담서요 와따매 요것은, 항꾸네 생산해서 항꾸네 나눠 묵자 식(式) 이데올로기를 가진, 저 웃녘 추운 나라 어떤 독재자가 실패허고 확 조져분 이론이여라 전하, 통촉허씨요야 이바구 끌텅을 파다본께, 동네 의원(醫院) 갈 때 나라에서 주는 보조비부텀 주택청 토지청 파발청 저수지청 등등 나라에서 운영허는 각종 청(廳), 말 안 듣는 신문청 방송청을 돈 많은 상단(商團)으로 팔아분다는 전하의 야리꾸리헌 경제구상꺼정, 헐 말쌈이 오살나게 많아분디 오늘은 진짜로 그만허것소 나도 목구녕이 포도청이요, 말은 요로코롬 촉새거치 했지만 공마당에 촛불 쓰로 갈라, 포대기채 걷어 가불까 싶은께 데불고가지 못허고 하루씩 돌아감시롱 각시 대신 애새끼 볼라, 눈구녕 뛩그랗게 까제낀 욱엣놈 눈치 살필라, 허벌나게 바뿌요야 금메, 하루하루가 살강 욱에 요년허니 영거져 있는 밥그럭 신세당께요 ― 양해열, 「옹색지(壅塞誌)」 부분 양해열의 시는 80년대 김지하의 「五賊」이란 시를 방불케 하는 풍자의 구조(기표)로서 시대의 환부(기의)를 통렬하게 짚어내는 특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전통적 형태로써 현대적 리얼리즘 시의 계보를 잇고 있어 주목할 만한 신인이다. 그의 걸쭉한 입담은 가히 판소리를 차용한 김지하의 담시(譚詩)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의 시는 재치를 앞세워 불합리한 세태의 문제를 해학적 어조로써 꼬집어 낸다. 남도 사투리의 자유자재로운 운용은 결국 서민들의 애환을 담지하는 특장을 지니는 바 시의 질박한 서민들의 애환을 자연스럽게 표백하는 특질까지 함유한다. 권력이나 자본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거대 리얼리즘이 퇴조하는 우리 시단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긴요한 신인을 얻었다. 상기 인용시에서도 시의 화자는 현실에 산재한 불합리한 모순의 문제를 질박한 남도사투리의 어조로써 유장하게 끌고 나간다. 인용 부분은 현 이명박 정부가 자가당착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제, 즉 공영화와 민영화 문제가 뒤바뀐 현실에 대해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능청스런 해학을 동반하고 있어 흥미롭게 다가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육덕진 그의 입담(기표)에 잘근잘근 씹히는 권력의 허구(기의)를 목도하는 쾌감에 동참한 듯하다. 낚시에 걸린 학꽁치가 날고 있다 팔 할이 시퍼런 멍 자국이다 살 속에 탱탱한 가시 박아 넣느라고 파도와 사투를 벌인 등짝 물고기들은 가시의 힘으로 수심을 이긴다 바다에도 새우처럼 둥근 중심이 있어 파도의 등으로 굽이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벗어놓은 신발 한 짝을 냉큼 업어 달아나는 파도, 서로 기대본 적 없는 파도의 등을 낮달이 등(燈) 되어 준다. ― 윤영숙, 「파도, 등 푸른」 부분 윤영숙은 서슬 푸른 독기의 기표로써 시의 이미지의 파장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이를 다시 기의로 응집해 내는 저력이 돋보인다. 예를 들면 생명의 힘이란 정서를 “수액 당겨 꽃 피워내는 아귀 같은 힘”(「아이리스 벽화」)이라거나 “물관의 중심이 비틀려 옹이 박혔을 것”(「겹 겹」)이라는 언표로 일갈하는 대목 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시의 화자는 시의 도입부에서 “갈기 휘날리며 밀어붙이던 파도에도/뼈가 있고, 등이 있어 뛰고/휘어지고 굽다가 거꾸러”진다고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다. 나아가 “아버지가 골진 등짝으로 나를 키웠듯/파도는 거꾸러지는 등의 힘으로/등 푸른 생선을 키우고/등대 허리 꼿꼿이 잡아 세”운다고 은유화하고 있다. 더구나 ‘학꽁치’의 이미지를 빌려 “파도와 사투를 벌인 등짝”에 박힌 푸른 멍의 이미지를 초점화하면서 “물고기들은 가시의 힘으로 수심을 이긴다”고 부연한다. 나아가 시의 화자는 “바다에도 새우처럼 둥근 중심이 있어/파도의 등으로 굽이치고 있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 파도의 등”과 “낮달이 등(燈)”을 pun의 고리로 엮어 동일화하기 위한 은유 전략이리라. 인용시는 ‘파도의 등’(기표1)에서 출발하여 ‘아버지의 등’(기표2), ‘학꽁치의 등’(기표3), 그리고 ‘낮달의 등(燈)’(기표4)으로 이어지면서 둥근 중심을 세워 고통과 맞서는 도약의 에너지(기의)를 분출하고 있는 환유적인 고리가 예사롭지 않다. 휴일 봄날 고객의 판매대금을 수기계산 한다 잔돈에 커피까지 대접하며 전표함에 두었는데 퇴근시간 다 되어 뱀 한 마리 튀어 나왔다 어디에 있었나? 저 뱀 모두들 놀라 손사래를 치는데 전표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뱀이 대가리 들고 내게 오더니 마치 내 잘못을 질책이라도 하듯 뒤통수를 깨물었다 아차, 내 수기계산이 잘못되었다고 발버둥치는 나, 툭툭 터지는 봄꽃들 얼른 지갑을 털어 대납했음에도 오랜 시간 물고 늘어지던 긴 그림자 ― 이광구, 「뱀」 부분 이광구의 시에는 소소한 일상에서 겪는 삶의 비애가 잔잔한 수채화 물감 번지듯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근작 시편들에서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그는 섬세하고도 따뜻한 마음결을 지닌 시인이 분명하다. 인용시에서도 시의 화자는 ‘뱀’이라는 기표를 실제의 뱀과는 무관하게 삶의 어떤 ‘비가시적인 힘’의 상징으로 차용하여 기의와 기표의 간극을 드러낸다. 화자는 “휴일 봄날”에 “고객의 판매대금을 수기계산” 하다가 퇴근 무렵이 되어서 “뱀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고 진술한다. 그 뱀은 양심이어도 좋고, 상사의 의심에 어린 눈초리여도 좋고 그 무엇이어도 무방한 상징이다. 그만큼 ‘뱀’이라는 기표는 우리의 도처에 산재하는 권력이어도 좋고, 자본에 휩쓸리는 소시민들의 일상이라는 기의여도 상관없다. 그만큼 상징의 장력이 크다는 것은 시의 파롤의 힘을 배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따뜻한 시가 갈수록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쉰 번을 구기면 구멍이 뚫려 귀에 그 구멍을 대고 하늘 소리 들으라 한 걸까 활자도 지워지고 얼굴도 지워졌다 드디어 밑을 닦을 수 있는 한 장의 부드러운 밑씻개가 되었다 똥의 말을 말없이 받아주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다 ― 정준영, 「주름」 부분 정준영의 시는 현미경적 관찰을 토대로 하여 일상의 소재를 아주 감각적으로 새롭게 재구하는 특질을 내보이고 있다. 인용시에서도 그러한 그의 역량이 충분하게 발휘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힌다. 사소한 일상에서의 위대한 발견이라는 시의 명제에 충실한 시편들이다. 예를 들어 “쉰 번을 구기면 구멍이 뚫려/귀에 그 구멍을 대고/하늘 소리 들으라 한 걸까”라는 구절에서도 그의 섬세한 상상적 감수성의 역량이 여실히 발현되어 있다. “활자도 지워지고/얼굴도 지워”져야 “밑을 닦을 수 있”는 “한 장의 부드러운 밑씻개”가 되는 종이의 기표를 통해 그와는 너무도 먼 간극에 있는 인간이 늙는다는 것의 궁극이란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기의를 꺼내들고 있다. 환언하면 화자가 “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다”(랑그)는 것이 부드러운 영혼(파롤)을 얻는 과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가편이라 여겨진다. 힘 빼기 연습이다 네트 가까이에 떨어지는 공을 되받아 쳐야 되는 그 순간 모았던 힘을 건듯 놓기 위한 몇 겹의 쇠사슬로 서로를 동여매고도 믿기지 않아 발 동동 굴렀던 내, 사랑도 그랬다 가끔은 힘을 놓는 것이 가장 강한 고리였을 힘껏 공을 멀리 보내거나 수비의 조건 훤히 드러나는 공격보다 정교한, 힘 살짝 놓기를 몸에 새기는 중이다 ― 조영심, 「헤어핀 레슨」 부분 조영심은 은유와 상징을 표현 기제로 삼으면서도 자재롭게 인간사의 진실을 크로즈업해 내는 특질을 지닌 시인이다. 상기 인용시에서도 그는 배드민턴 기술 중의 하나인 ‘헤어핀 레슨’이란 특성을 통해 사랑의 역설을 드러낸다. ‘강한 것(기표)은 약한 것보다 못하다(기의)’라는 이 공식은 이 시를 지배하는 조건인 바 인간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긴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시의 화자는 “머리핀을 꽂는 이 손놀림의 작전”은 “허허실실(虛虛實實)”과 동일한 맥락을 형성하여 가끔은 “힘을 놓는 것이 가장 강한 고리”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화자는 “수비의 조건 훤히 드러나는 공격보다 정교한, 힘 살짝 놓기를/몸에 새기는 중”인 것이다. 기존의 고정 관념을 뒤집는 역설은 무엇보다도 기표와 기의의 거리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더구나 기존의 이성의 법칙이란 결국 감성의 법칙과는 상대적 관점을 유지한다는 사실의 환기에 기여하는 기제로 차용한 것이다. 그의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필력이 더더욱 날개를 펼치기를 기대해 본다. 생면부지의 꽃과 ‘꽃’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분명 질펀한 교합이었으리 ‘꽃’은 아마 꽃의 대문을 열기 위해 꽃의 가슴을 두드리기 위해 수없는 까치발로 담장 안을 기웃거렸으리 망설임의 그림자 부산했으리 보란 듯, 꽃대() 위에 망울(^^)을 달아 기어이 꽃을 유혹하고 마는 저 욕정의 이모티콘들 ― 최명률, 「오래된 소통」 부분 최명률의 시는 격정적인 언어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중심인데, 인용시는 그 틈서리에서 약간은 비껴서 있는 문명비판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의 기표와 기의가 동일한 언표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냥 ‘꽃’과 작은따옴표(‘’)가 있는 ‘꽃’을 분리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작은따옴표가 있는 꽃은 ‘조화’(造花)라는 기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조화로 상정된 “‘꽃’은 아마 꽃의 대문을 열기 위해/꽃의 가슴을 두드리기 위해/수없는 까치발로 담장 안을 기웃거렸”을 것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화자는 “보란 듯, 꽃대() 위에 망울(^^)을 달아/기어이 꽃을 유혹하고 마는/저 욕정의 이모티콘들”이라고 비판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작적인 문명적인 인터넷 기호(기의)를 통해 아주 감각적인 꽃의 이미지(기표)를 현상해 내고 있어 흥미를 유발한다. 3. 어긋난 파롤, 자아 교응의 불문율 소쉬르가 주장한 랑그가 실제적으로 시에 표현된 언어라고 한다면 파롤은 텍스트 생산자인 시인의 무의식층에 자리한 시의식에 비유된다. 그러니까 매번 다르게 문맥적인 구조에 의해 굴절되는 언어의 모습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랑그란 머릿속에 저장된 말, 즉 관습적으로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유한한 사회적 언어를 말한다면, 파롤은 실제로 쓰이는 말로서 무한하며 개별성을 지닌다는 특질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의미를 창출이라는 잉여의 부분을 내장하기 때문에 창조적이므로 시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이다. 한문에서의 ‘어’(語, 랑그)가 “이인상어일어(二人相語曰語)”라고 하여 유한한 사회적 언어로서의 소언(小言)이라면, ‘언’(言, 파롤)은 “자언일언(自言曰言)”이라고 해서 개인의 언어를 지칭한다. 무한한 개인적 언어로서의 대어(大言)를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이 두 가지 계열층을 형성한 언어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기표’로 표현되지만 이차적으로는 시인의 특수한 언어 구조에 의해 재창조된 ‘또 다른 기의’가 내장되기 마련이다. 거개의 시인들은 그 간극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것을 다시 조화롭게 동일성의 원리로써 포섭한다. 이는 전통적인 시 형식의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인데, 애지문학회 시인들 중에서 서정시의 기본 원리에 충실한 시편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쉿, 바람이 가만히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 사그락 달이 문 닫는 소리 나뭇잎 솔솔솔 몸 씻는 소리 꽃잎이 사르륵 몸 사려 숨죽이는 소리 조근조근 치밀하게 덮치는 그림자의 심장소리 천지가 혼절하는 어둠 속 소리 ― 강서완, 「그믐」 부분 강서완의 시는 이미지로 말하는 방식을 터득한 방법론으로서 기의와 기표의 간극을 넓혀 놓는다. ‘그믐밤’의 특성을 의인화하여 시각의 이미지를 청각의 이미지로 변주하는 감각적인 이미지 시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람이 가만히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의 원래 기의는 가족 중에 늦게 귀가한 가장이 식구들이 깰까봐 조심해서 들어오는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의미한다. “사그락 달이 문 닫는 소리” 또한 조심스레 문을 닫는 상황을 암시한다. 나아가 “나뭇잎 솔솔솔 몸 씻는 소리”는 나뭇잎 소리의 특성을 생동감 있게 활용하여 자기 전에 몸을 씻는 행위를 연상하게 해준다. “꽃잎이 사르륵 몸 사려 숨죽이는 소리”는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드는 장면이고 “조근조근 치밀하게 덮치는 그림자의 심장소리”에서는 그림자가 포개지는 성적 메타포를 끌어들여 “천지가 혼절하는 어둠 속/소리”라는 생명의 격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시각적 현상을 묘사하지 않고 청각적 이미지로 들려주기 때문에 더 생동감 있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강서완 시인만의 개성적 자질이다. 따라서 2부분에서 “눈 감지 마라//눈 감으면 어둠이다”라는 평범한 표현이 ‘달’이라는 생명의 원형성과 맞물리면서 싱그러운 생명 감각으로 전이되는 경이감을 맛볼 수 있다. 오늘따라 밭이 호미를 튕겨내며 까탈을 부리고 있다 햇살이 짐승의 발톱처럼 파고드는 오후 군대만 생각하면 오줌을 누고 싶다는 아이의 빨갛게 익은 목덜미가 아! 털이 빠져 반질거리던 그 소의 목덜미 같아 등에 멍에를 얹고 나서면 들판이 부스스 일어서고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빛 속으로 느릿느릿 사라지던 아버지 풀을 매고 돌아서 보니 이랑이 하얗게 말라 간다 감자 너머 고추 너머 고구마 너머 저 멍에고랑에는 무슨 씨앗을 넣어야 할까? 굵고 거친 씨앗들을 촘촘히 넣어본다 ― 김종옥, 「멍에고랑」 부분 김종옥 시인은 평범한 일상적 현상을 아주 재치 있게 시로 버무려 낼 줄 아는 섬세한 미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용시도 그러한 감각이 돋보이는 시에 속한다. 화자가 밝힌 ‘멍에고랑’이란 “자갈들이 불거져 있”고 “곡식보다 풀이 더 성”하다가는 “나무들이 느닷없이 들어서”는 곳이다. 시의 화자는 ‘멍에고랑’의 기표에서 출발하여 “아이의 빨갛게 익은 목덜미”란 기표와 “털이 빠져 반질거리던 그 소의 목덜미”라는 기의를 결합한다. ‘아이’에게 ‘군대’란 잊히지 않은 “빨갛게 익은 목덜미”의 기표라면 ‘소’의 ‘목덜미’는 멍에로 인해 털이 다 빠진 기의에 속하는 셈이다. 나아가 화자는 소에게 ‘멍에’를 얹는 ‘아버지’에게는 자식이라는 멍에의 기의가 얹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더구나 화자는 하얗게 말라가는 “저 멍에고랑에는 무슨 씨앗을 넣어야 할까?”라는 의문점을 제기한다. 거기에는 ‘아이’와 ‘소’의 기표가 ‘아버지’의 등에 짊어진 기의, 즉 ‘자식’이란 멍에로 미끄러지는 환유의 고리가 연쇄되어 있다. 이 같은 투사의 축을 전제로 화자는 척박한 ‘멍에고랑’에는 “굵고 거친 씨앗들”이 제격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이끌어 내는 특질을 선보인다.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에 봄이 오네요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 깊은 잠을 털어내면 모란 꽃살문 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 달그락 달그락 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려요 시들어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네요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요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 지그시 웃네요 묻고 싶어져요 울고 있는 바리공주가 보이는지 이곳은 거친 바다예요 ― 김지유, 「모란꽃살문」 부분 김지유의 시는 알레고리보다는 싱그러운 서정 감각이 돋보이는 시적 체질을 지닌 듯하다. 「들숨으로 오는 저녁」의 비극적 세계인식에 초점을 두는 시보다 인용시 같은 서정적 시편들이 그의 시적 자질을 보증한다. 인용시는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기표)을 통해 “봄이 오”는 상황(기의)을 예민한 서정의 결로써 포착해낸다. 예를 들어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깊은 잠을 털어내면/모란 꽃살문 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라는 구절에서 감수성 예민한 화자의 언어 감촉이 체감된다. 나아가 화자가 “달그락 달그락/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리는 감성의 결이 결국 “시들어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는 상황으로 전이하는 감각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따라서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오는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지그시 웃”는 장면으로까지 포착해 내는 섬세한 상상력의 운용도 돋보인다. 다시 말해서 ‘모란꽃살문’이란 기표에서 출발하여 ‘햇봄의 햇살’과 화자인 ‘나’, 그리고 ‘옛사람’의 이미지가 하나의 조화로운 기의로 엮어내고 있는 방식이 유연하다. 밤 한 시 엘리베이터를 타니 花― 덮치는 술내 벚꽃처럼 나부낀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와 나 어긋난 길 허덕이다 부딪힌 순간 뺨에 닿았던 술내 花― 그 남자의 입김이다 이럴 수가 나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렸단 말인가 빈자리 가득 술내 펄펄하니 방금 내렸나 보다 어디로 떠났을까 22층 버튼을 누르는 사이 삼십 년이 팔짱을 낀다 어디선가 캐럴이 울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 강정이, 「크리스마스 이브」 전문 강정이의 시에는 생의 연륜에 걸맞게 생을 긍정적이면서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넉넉한 시선이 감지된다. 시의 화자가 밤 한 시에 엘리베이터를 타니 “花― 덮치는 술내”(기표)를 맡는다. 그때는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의 날이었다고 발화하면서 과거의 그와의 인연(기의)을 떠올린다. “그와 나 어긋난 길 허덕이다 부딪힌/순간 뺨에 닿았던 술내”가 “花―”하며 꽃향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 “그 남자의 입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렸”다는 간극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직 사랑을 시작도 못했는데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라는 전언이다. 그는 화자에게 “텅 빈 바닷가 검게 웅크린/물수리 같던 남자”였고, “먼 하늘 바라볼 땐 지바고 같던 남자”였으며, “라라의 머플러를 선물하던 남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화자의 기표는 아직도 길을 헤매고 있고 그라는 기의는 부재한 지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화자가 사는 “22층 버튼을 누르는 사이”에 그와 헤어진 “삼십 년이 팔짱”을 끼는 것이다. 이때 “어디선가 캐럴이 울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花―”하며 꽃잎으로 달려온다. 다시 말해서 기의와 기표가 어긋나면서 겹치는 슬프도록 황홀한 지점인 것이다.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88년 묵은 고목이 쓰러졌다 8자 좋은,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열광하는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밤하늘에 폭죽이 어머니 머릿속 핏줄 터지듯 팡, 팡, 팡 화려하게 피고 지던 날, 팔자에 없던 응급실 침대에 버려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다시는 온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식도 하룻밤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 김정원, 「풍」 부분 김정원의 시는 ‘8’자 라는 pun(말우롱)의 효과를 활용하여 긍정적인 기호의 자질과 부정적인 기호의 자질을 병치하여 어머니의 팔자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의 화자는 공교롭게도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88년 묵은 고목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레가 치고/태풍이 불고/화산이 폭발하고/낡은 우뇌관이 동파하자/가지가 단박에 망가졌다”고 어머니의 풍 맞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기표의 반대편에서는 “8자 좋은,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열광하는/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는 긍정적 상황을 보여주면서 “어머니 머릿속 핏줄 터지”는 부정적 상황과 은근슬쩍 겹쳐 놓는다. 여기가 바로 기의와 기표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때 어머니는 “팡, 팡, 팡 화려하게 피고 지던 날, 팔자에 없던/응급실 침대에 버려”진 것이다. 따라서 화자는 어머니는 알고 있다고 단언한다.  “다시는 온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뿐더러 “자식도 하룻밤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운에 싸인 운명적 현존을 직감한다. 화자는 여기서 ‘8자’의 구획을 통해 늘 이율배반적으로 현존하는 인간의 운명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나무꽃 사랑이 있습니다. 별자리를 닮은 비밀입니다. 바람이 부는 꽃길은 대나무꽃의 향기입니다. 당신의 향기입니다. 대나무꽃이 피는 날 당신과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 김원재, 「대나무꽃 사랑」 전문 상기 인용시는 스님의 시답게 아주 평이한 기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화자가 현시하는 기의는 자못 그윽한 깊이가 있다. 시적 화자는 첫 연에서 “대나무꽃 사랑이 있”(기표)다는 전제로 마지막 연의 “대나무꽃이 피는 날/당신과 만나기를 기원”(기의)한다는 미래지향적 언술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대나무꽃 사랑’은 “별자리를 닮은 비밀”과 역학관계를 맺으면서 우주적 진실과 조우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꽃길은/대나무꽃의 향기”이자 “당신의 향기”이고, “비가 내리는 숲길은/대나무꽃의 눈물”이자 “당신의 눈물”이다. 나아가 “눈이 숨 쉬는 꽃길은/대나무꽃의 꽃잎”이자 “당신의 꽃잎”이고, “달이 수줍은 숲길은/대나무꽃의 미소”이자 “당신의 미소”라는 상동성을 바탕으로 서정적 자기동일성의 세계를 현현해낸다. 그런 ‘자아’(대나무꽃)라는 기표가 ‘타자’(당신)라는 기의와 한 몸으로 동화될 때가 “대나무꽃이 피는 날”이자 “당신과 만나”는 날이라는 간극 없는 행복한 세계의 구현체, 즉 자타불이라는 미래지향적 낙원의식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다인실 병실에서는 아무도 커튼을 치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 환자도 보호자도 가끔 커튼을 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막 들어온 신참이다 경계는 놓음으로써 순수해진다 아플 때 순수해지는 어느 순간, 환한 믿음이 그림자를 밀어내고 병실에서는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구차한, 얄팍한 벽을 걷어내는 오, 오랜만에 우리 식구들 모였구나 ― 김현식, 「순수」 전문 김현식의 시는 광포한 세상에 내던져진 병약한 이들을 긍휼하게 여기는 비애의 페이소스가 짙게 깔려 있다. 그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죽음의 문제라든가 배고픔 등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도 그 배면에 죽음의 그림자(기표)보다는 그것을 끌어안는 연민의 정서(기의)가 아름답게 무늬지어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화자가 경영하는 “다인실 병실”에서는 여기에서는 “신참”을 제외하면 누구나 “커튼을 치고 지내는 사람”도 없다. 진폐증에 걸린 “늙수그레한 아저씨”라든가 그의 “소박한 아내” 등은 자기의 문제보다도 타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이에 반해 폐암 환자는 제 잘못을 시인하면서 얇은 미소를 짓는 시한부 인생을 산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는 “경계는 놓음으로써 순수해진다”라는 잠언적인 경구를 이끌어내는 특장을 선보인다. 이것은 “아플 때 순수해지”지고, “구차한, 얄팍한 벽을 걷어”낼 때만이 타자조차 “우리 식구들”로 여길 수 있다는 화자의 따뜻하면서도 순수한 믿음이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인식이다. 나무들은 알고 있다. 생이 끝날 때까지, 세상의 물길을 유랑하는 물고기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때는 또 얼마나 몸부림을 쳐야 하는지도. 그것이 나무들이 잎을 피워 그 느낌 알 때까지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손맛을 보는 이유다. 포기하지 않고 산상구어(山上求魚)를 하는 저들은 결코 얕잡아봐선 안 된다. 같은 볏과인 갈대들이 산에 오면 달리 억새가 되겠는가. ― 최용훈, 「나무學―연목구어(緣木求魚)」 부분 최용훈의 시에는 ‘나무’란 기표를 중심으로 인간사의 잠언적 경구나 보편적인 우주의 질서를 현현하는 기의가 주류를 이루는 시편들이다. 인용시도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고사성어(랑그)를 활용하여 생명의 질서(파롤)로 의미를 확장하는 기교를 전면에 내세운다. 여기서의 ‘나뭇잎’이란 기표는 ‘물고기’란 기의와 동일화되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몸부림이나 “세상의 물길을 유랑”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매재로 차용된다. 나아가 “나무들이 잎을 피워/그 느낌 알 때까지/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손맛을 보는 이유”라고 단언하는 소인은 마지막 연에 화두처럼 던져져 있다. 즉 화자에 의하면 “같은 볏과인 갈대들이/산에 오면 달리 억새가 되겠는가”라는 모든 생명체의 생태학적 형질은 환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오묘한 자연사 진리의 발견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다채로운 언어의 무늬 바야흐로 시대는 문명의 첨단을 구가하며 실제 현실보다도 더 강력한 허구적 이미지가 압도하는 후기산업사회의 길목으로 접어든 지 오래되었다. 현대 시인들은 그간 텍스트의 객체에서 주체로 부상한 독자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새로운 인식과 상상력의 전환이 불가피하게 된 셈이다. 새로운 문화의 향유층인 젊은 독자의 새로운 감수성과 세계관, 언어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따라잡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감수성으로 시적 비전을 창출할 것인가?’의 문제가 난제로 등장하였다.―이번 사화집을 읽으면서도 느낀 사실이지만―전반적인 추세로 볼 때 애지문학회 시인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그만그만한 스케일로 완성도 위주의 시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각기 조금씩 상이한 목소리로써 아름다운, 혹은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특성이 과연 기존의 관습적인 형식이나 관념에서 자유로웠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깊이 고민하고 숙고해 봐야 할 대목이라 여겨진다. 후기산업사회의 환경의 특징에 주목해 볼 때, 오늘날의 독자들은 원하는 문화 정보를 스스로 생산하고 만들어 나가기도 하는 역동성을 겸비한 존재다. 시인들이 교조적인 자세로 일방적인 관념을 표백하는 시적 메커니즘은 더 이상 효용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이 현대시의 현주소인 셈이다. 고객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오가면서 서로 소통하고 문화의 중심 마니아층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언어 관념을 비틀면서 전통적인 문화의 틀에 균열을 가하기도 하거나, 시대 도착적인 문화적 관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이제 시인이 아닌 독자가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시인들의 텍스트에 간섭을 하는 후기산업사회인 것이다. 독자의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하고 그들의 기호에 맞는 도전적인 상상력을 창출해 나갈 때 시대감각에 걸맞는 유니크한 시인으로 대접 받는 시대로 돌변했다는 사실이다. 따뜻한 눈길로 애지문학회 시인들을 바라보며 신인에 걸맞는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파격에 이르는 시를 기대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50    문학비평론[ 스크랩] 댓글:  조회:1572  추천:0  2018-11-05
제1부 문학비평론의 방법과 실제 제1장 역사 전기적 비평 1. 역사 전기적 비평이론의 역사와 체계 (1) 역사, 전기적 비평이란 문학작품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 작품과 작가와의 연계성을 중시하는 비평방법이다. 이 비평의 기본적 원리는 생뜨 뵈브와 떼느로부터 유래되었다. (2) 생뜨 뵈브는 "나에게 문학-문학작품-은 인간과 그의 성품으로부터 전혀 독립된 것도 아니며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문학작품을 즐길 수 있지만 그것이 작가 자신을 아는 일과 무관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나는 서슴없이 '그 나무에 그 열매'라고 말하고 싶다" (3) 생뜨 뵈브는 "내가 확립하고 싶은 것은 문학의 박물학이다"라고 했다. (4) 떼느는 문학연구에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도입하였고, 문학 속에서 인과의 결정론적 과정을 찾고자 했다. (5) 떼느의 문학론 3요소 : 종족, 시대, 환경 2. 역사, 전기적 비평의 방법  (1) 원전(text)비평 : 원전의 확정이란 문학작품에 대한 분석과 가치평가작업 이전에 우리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 작품이 과연 진본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①문서적 증거 ②기본 텍스트의 결정 ③상이점들의 대조 조사 ④판본의 족보 ⑤결정본  (2) 역사 전기적 비평 - 작가의 전기 연구, - 평판과 영향, - 문학사(문화), - 문학적 전통과 관례 *톨스토이 : "예술을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쾌락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간생활의 일조건으로 생각해야 한다." *랑송 : 문학연구는 집단의 대표자로서의 개인을 드러내기가 힘들다고 난점을 제시. (3) 다음중 역사, 전기적 비평과 관련이 없는 것은?(정답은 ③번) ①서지학 ②윌리엄 고드윈 ③피아티고르스키 ④보즈웰 제2장 마르크스주의 비평 1.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론의 역사와 체계 (1) 에드먼드 윌슨은 "문학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 서서 해석하는 것"이라 정의 (2) 30년대 소련에서 정립된 미학적 원리중 '나로드노스트'란 [민중성]을 말한다. (3)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문학사는 '여러 계급들 사이의 투쟁의 역사가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한사람은 '플레하노프'이다. (4) '예술은 계급투쟁의 도구'라고 하여 북한 김정일이 그 노선을 답습하게 한 이론가는 '주다노프'이다. 2. 19세기 비평 이론 (1)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떼느가 내세운 문학의 3대 요소에 경제적 요소를 새로 추가하였다. 마르크스는 훌륭한 예술이란 그 사회적 관례를 초월한다고 보았으며 그가 발자크의 예술을 존경한 것도 그 사회적 한계를 뛰어 넘은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인간은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2) 메슈 아놀드로부터 문학과 비평이 도덕적, 지적, 사회적인 면에 대해서 중요시하는 것을 많이 배웠다. (3) 문학작품은 그것을 생산한 환경이나 문화나 문명을 떠나서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4) 문학작품 속에 있는 관념은 형식 및 기교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5) 생명력 있는 모든 문학작품은 그것을 나오게 한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개개의 독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매우 도덕적이다. (6) 문학작품은 사회의 두 방면 즉 특정한 물질적 요인이나 힘을 혹은 전통 즉 집단의 정신적, 문화적 경향을 반영 할 수 있다. (7) 비평은 문학작품에 대해서 초연한 심미적 관조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8) 과거와 현재의 문학에 책임을 다하려 한다. (9) 엥겔스의 견해(①리얼리즘이란 전형적 상황에서 전형적인 인물의 진실된 재현을 의미한다. ②문학에서 작가의 견해는 숨겨지면 숨겨질수록 작품을 위해 서는 더 낫다. ③마가렛 하크니스의 [도시의 소녀]를 전형성의 이론으로 비판한다.) 3. 20세기 비평이론 (1) 에드먼드 윌슨 - 현대문학의 상징주의적 경향을 역사적 비평의 안목으로 비판 (2) 사르트르 -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 (3) 크리스토퍼 코드웰 - 문학형식의 사회적 관련을 밝힘. (4) 레이먼드 윌리엄스 - 소설형식을 사회적 관계 아래로 보면서 리얼리즘 소설을 주창 (5) 루카치 - 변증법적 유물론의 미학을 서구적 문제의식으로 심화 (6) 골드만 - 사회구조와 소설구조의 상응관계를 밝힘 (7) 아놀드 하이저 - 예술의 창조와 수용을 사회적 연관 속에 파악하면서도 예술의 독자성을 존중 (8) 루카치가 분류한 소설의 유형 네 가지 : ①추상적 관념론의 소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②환멸의 낭만주의 소설 - 곤자로프의 [오블로 모프] ③종합을 시도한 교양소설 -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④삶의 사회적 형식을 초월하려는 소설 - 톨스토이의 소설들 (9) 루카치는 문학이란 객관적 현실을 전체적 관련 아래 파악하고 다룬다. (10) 골드만의 발생론적 구조주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한다. (11) 골드만은 주인공과 사회 사이의 이러한 '대립'과 '연대성'의 동시적 관계, 즉 일종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여기서 말하는 19세기 소설의 구조라는 것이다. (12) 아도르노 - 대중예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의 발전은 상업화에 의한 예술의 저급화를 낳을 뿐이다. 제3장 구조주의 비평 (1) 구조주의 비평은 현대언어학 이론의 모형을 적용하여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비평가들의 활동을 지칭한다. 구조주의는 어떤 체계의 개별 단위들이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을 가진다 (2)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모형에 따라 구조주의 기반을 확립시킨다. (3) 야콥슨은 구조주의 이론을 시학에서 적용하였는데 언어의 시적 기능은 '기호들의 감각성을 증진시키고 기호를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물질적 특질에 주의를 모은다'는 것이다. (4) 구조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인류학의 바탕에 구조언어학을 가져다 놓았는데 주요 저서로는 [친족의 기본구조], [신화의 구조족 연구], [슬픈열대], [야만적 사유], [신화학] 등이 있다. ①레비스트로스는 '숙,질의 관계'라는 용어를 발전 ②친족체계는 분명 '하나의 언어'로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③신화체계를 분석하여 신화소라는 '관계들의 꾸러미'를 찾아 낸다. ④'관계들의 꾸러미'는 오이디푸스신화를 예증하였다. (5) 블라디미르 프롭은 러시아 민담 속에서 연합적인 수평구조를 발견한다. 프롭의 저서로는 [민담의 형태학], [민담의 역사적 기원], [러시아 영웅서사시] (6) 그레마스의 [구조주의 의미론] (7) 제라르 주네트의 [이야기 담론] (8) 구조주의 비평의 한계 : ①비평이 하나의 가치 평가 행위라면 구조주의 방법은 비평이라고 명명하기에 곤란하다. ②비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③반휴머니스트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④구조주의 비평에서 상정하는 기본구조란 거의 엄청날 정도로 추상적이고 공허해서 문학의 질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특수한 것들을 소홀히 다룬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9) 구조의 기본 속성 중 '구조를 지배하는 법칙들이 전체성 내에서 자체의 체계를 이루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질을 '변이성'이라 한다. 제4장 형식주의 비평 1. 형식주의 비평이론의 역사와 체계 (1) 형식주의 비평은 18세기 칸트와 19세기 코울리지에 와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 ①칸트는 [심미적 판단력 비판]에서 예술은 한 특별한 종류의 인식을 자극할 수 있으며 이 상징적인 기능을 가진 인식은 논리적 추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인식과는 상응하지만, 그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는 형식주의적 개념을 고취했다. ②코울리지는 독일의 선험철학을 익힌 후 [문학적 평전] 속에서 이를 문예이론으로 응용함. (2) 쉬클로프스키는 "오늘날, 낡은 예술은 이미 죽었으나, 새로운 예술은 태어나지 않고 잇다. ......새로운 예술형식의 창조만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치유할 수 있고 사물을 되살릴 수 있으며 비관론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3) 비역사적 비평의 선구자 엘리어트의 [전통과 개인적 재능]이 주장한 세 가지 : ①문예전통과 그 속에 함축된 문학사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정된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새로운 작품의 출현에 따라 항구적으로 재 정리 되고 있다. ②예술가의 체험은 실제적인 체험이냐 상상된 체험이냐에 구애됨이 없이 모두 그의 작품 속에 최종적으로 응집 된다. ③예술가의 정서와 개성은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예술작품 속으로 사라진다. (4) 리처즈는 [문예비평의 원리]와 [실제비평]에서 '문학을 가장 완벽한 양식의 발언', '해석과 판단의 근거를 엄밀한 텍스트 분석의 방법에 의존' , '문예작품의 언어적 측면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 등의 기여를 했다. (5) 신비평운동은 크로우 랜섬에 의해 비로소 '신비평'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6) 의도의 오류(意圖의 誤謬)는 작품창작에 임하는 작가의 창작의도가 곧 그 작품의 의미와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론으로 역사주의 비평이 추구하는 창작의도연구를 직접 공박하는 이론이다, 윔저트와 비어즐리에 의해서 제안된 용어이다. (7) 감동의 오류(感動의 誤謬)는 문예작품의 의미나 가치를 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정서적 반응의 강렬성에서 찾으려는 것이 오류임을 지적한 이론. 이것 역시 윔저트와 비어즐리의 공동 논문에서 거론된 것으로 문학작품의 가치를 그 독자에게 생긴 영향이나 효과에다 두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8) 모호성이란 용어는 작품에 쓰인 하나의 어휘가 둘 또는 그 이상의 거리가 먼 내용을 함께 의미하거나 또는 서로 다른 태도나 감정을 나타나게 되는 경우를 지칭한다. (9) 아이러니는 표면적인 언어의 의미와 내면적인 의미에 차이가 생기는 경우를 말하고, 패러독스는 표면상으로 볼 때 자기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진술처럼 받아들여지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말의 의미가 올바로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10) 러시아 형식주의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기법은 '낯설게 하기'이다. (11)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 자체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밝히는 일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지만 그 길이가 긴 작품(소설류)을 다루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 자체의 여러 요건들에 주목한다. (12) 형식주의 비평은 역사적 안목이 짧고, 문학사를 너무 무시한다. (13) 이러한 형식주의 비평의 한계는 서구의 형식주의적 방법을 받아들여 작품 분석을 하고자 했던 우리 나라 최초의 형식론자 김동인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제5장 탈구조주의의 비평 (1) 롤랑 바르트 - 다원적 텍스트 : ①바르트의 [기호학의 요소들]에서 구조주의적 방법이 인류문화의 모든 기호체계를 설명 할 수 있다고 믿었다. ②바르트의 [저자와의 죽음]에서 그의 탈구조주의 시기를 가장 잘 대표해 주고 있다. 저자란 모든 형이상학적 신분이 제거된 채 인용과 반복과 메아리와 지시소리들의 무한한 저장소인 언어가 교차하고 재 교차하는 위치로 축소된다. ③[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바르트는 독자의 자유분방한 방종을 탐색하고 있다. ④바르트의 [S/Z]에서 밝힌 다섯 개의 약호들 : 해석학적 약호, 기호소적 약호, 상징적 약호, 행동적 약호, 문화적 약호 (2) 줄리아 크리스테바 - 언어와 혁명 : ①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에서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들이 '이질성'과 '비이성'에 끊임없이 위협 당하는 과정을 탐색하고 있다. ②크리스테바는 '일반적인 것'과 '시적인 것' 사이의 복합적인 심리적 분석을 보여준다. (3) 자크 라캉 - 언어와 무의식 : ①라캉은 인간이 주된 이 언어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취하는 기존의 '지시어' 체계 속에서 들어간다고 한다. ②라캉은 소쉬르의 언어 속에서 프로이드의 이론을 재 진술한다. 즉 무의식은 해석되어져야만 하는 상징적 이미지 속에 그 의미를 숨긴다. 꿈의 이미지는 '압축'과 '자리바꿈'을 겪는다. '압축'이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잠재적 꿈의 내용을 하나의 복합적 이미지로 축약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③이 첫 번째 과정을 '은유'라 하고 두 번째 과정을 '환유'라 부른다. ④'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되어 있다'라고 선언하여 언어와 무의식의 문제를 정신분석학의 정면에 부각시켰다. ⑤단어와 단어 사이의 인접적 연결을 환유적 관계로 보았고, 이것을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인 전치현상과 동일시했다. ⑥'시니피앙 밑으로 시니피에 미끄러지기' 혹은 '시니피에 위로 시니피앙 미끄러지기' (4) 자크 데리다 - 해체이론 : ①데리다는 [구조, 기호, 그리고 인문학의 언술]이라는 논문에서 새로운 비평이론을 주장 ②센터에 대한 욕망을 데리다는 자신의 고전적 저서인 [문법학에 대하여]에서 '말중심주의'(음성중심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③데리다는 말/글 같은 대립개념 사이의 불안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보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기호의 의미가 끊임없이 연기됨으로써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과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차연'을 사용하였다. ④기표를 의미로부터 분리하였고, 언어에 대한 구조주의적 사유방법에 대한 회의에서부터 출발하였으며 신이나 이데아, 실체 등과 같은 초월적인 의미를 허구로 간주한다. (5) 미국의 해체이론 : ①폴드만의 [눈멂과 통찰], [책읽기의 알레고리]. 폴드만의 견해(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은유적인 것에 불과하고, 은유는 본질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없을 수밖에 없으며, 일련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들로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하다. 문학은 자신을 스스로 해체하는 존재이다) ②헤이든 화이트의 [언술의 회귀선] ③해롤드 블룸의 [오독의 지도] ④제프리 하트만의 [형식주의를 넘어서], [책읽기의 운면], [광야에서의 비평] ⑤힐리스 밀러의 [픽션과 반복] ⑥제럴드 그레프의 [스스로에 대항하는 문학] ⑦바바라 존슨의 [비평의 차이] ⑧제프리 멜만의 [혁명과 반복] (6) 미셸 푸코의 저서들 [광기와 문명], [진료소의 탄생], [사물의 질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푸코는 '글쓰기'란 곧 복합적인 힘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텍스트'란 곧 이 복합적인 힘들이 권력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7) 푸코의 기장 탁월한 제자는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사이드는 푸코의 니체적인 탈구조주의 사상에 이끌리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로 하여금 언술의 이론을 현실의 사회적, 정치적 투쟁과 연관시키도록 허용해 주기 때문이다. 사이드는 저서 [세계, 텍스트, 비평가]에서 텍스트의 '세속성'을 탐구한다. 제6장 정신분석 비평 (1) 심리비평과 연관된 최초의 저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는 비극의 고전적 정의를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의 정서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2) 그 후 롱기누스의 [숭엄론], 흄의 [비극론]으로 전개된다. (3) 프로이드의 심리학 용어 : 무의식, 자아, 초자아, 리비도 ①무의식(id)은 개인의 본능적 에너지를 저장하고 있으며 쾌감의 원칙에 따라 괴로운 것과 불쾌한 것을 회피하고, 비도덕적, 비논리적 성격을 갖고, 우리의 조상들이 경험한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억압된 관념을 내포하는 것으로 정의 ②자아(ego)는 주로 의식적이고 외게에 적용하며 현실의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에 적응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자아는 논리적이고 도덕적 성격을 갖는다. ③초자아(super ego)는 일종의 양심적 자아로서 무의식의 맹목적인 충동과 비사회적 충동울 감시하고 억제한다. ④리비도(libido) = 성적 에너지 (4) 어네스트 존즈의 [햄릿과 오이디푸스] 제7장 신화, 원형비평 (1)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인간에게는 시대를 초월하여 영적인 통일성이 있다고 보고, 원시인의 관습, 전통, 주술, 원시신앙, 토속신앙, 전설 등을 광범하게 연구하였다. [황금가지]는 세계 각 민족의 신화와 종교제식을 비교, 연구하여 신화 및 의식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양식상의 공통성을 발견함으로써 오늘날의 신화비평을 가능하게 한 저서이다. (2) 노드롭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에서 네 가지 문학장르의 원형 : ①봄의 미토스 : 희극(comedy) - 새벽, 출생의 단계 ②여름의 미토스 : 로만스 - 결정, 결혼 혹은 승리의 단계 ③가을의 미토스 : 비극 - 황혼, 죽음의 단계 ④겨울의 미토스 : 아이러니와 풍자 - 어둠, 해체의 단계 (3) 서정주의 [화사]는 악마의 시다 (4) 이육사의 [광야]는 창세기적인 시다. (5) 예시적 이미저리, 악마의 이미저리, 유추적 이미저리에 관한 이론을 이상과 김소월의 시 비교분석에 적용시킨 경우도 있다. (6) 패배에서 승리로, 좌절에서 회복으로, 후퇴에서 전진으로, 정지에서 운동으로, 하강에서 상승으로 가는 원형적 패턴을 이른바 '재생'의 패턴이라고 본 보드킨의 이론을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 적용시킨 경우도 있다. 제8장 독자중심비평 1. 주관적 퍼스펙티브 : 움베르또 에꼬의 [독자의 역할]은 텍스트를 '열린'텍스트와 '닫힌'텍스트로 나누고, 전자는 의미의 생산에 독자의 협력을 유도하는 반면, 후자는 독자의 반응을 미리 결정한다고 주장. 2. 제랄드 프린스의 '청자' : 청자는 독자와도 구별해야 하고 실질적 독자와 이상적 독자와도 구별되야 한다. 3. 현상학 (1) 후설은 의식 속에 나타나는 사물들, 즉 현상에서 그것들의 보편적, 본질적 성질을 발견한다고 한다. (2) 하이데거는 인간실존의 특징은 그 현존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의식은 세계의 사물을 투사하고 세계내 존재의 본성 자체에 의해 세계에 종속된다. (3) 한스-게오르그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문학 작품은 이미 결정되어 깔끔하게 포장된 의미의 꾸러미로 세상에 뛰어들지는 않는 다고 주장한다. 의미는 해석자의 역사적 상황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수용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4. 볼프강 이저의 '가상적 독자' (1) 가상적 독자는 텍스트가 자체적으로 창조하여 일정한 방식으로 읽도록 미리 정해 주는 '반응유도 구조의 망'에 따르게 되는 독자 (2) 실제적 독자는 독서과정에서 어떤 정신적 이미지를 얻게 되지만 그 이미지들은 반드시 독자의 '기존 경험의 총합'에 의해 채색되기 마련이다. 5.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의 '기대의 지평' : 어떤 주어진 시기의 문학 텍스트를 평가하기 위해 독자들이 사용하는 기준을 '기대의 지평'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최초의 기대의 지평은 그 작품이 등장하던 때 어떻게 평가, 해석되었나를 알려줄 뿐이지 작품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수립하지는 못한다. 6. 스탠리 피쉬의 '독자의 경험' : 피쉬는 '영향론적 문체론'이라는 독자중심이론을 전개한다. 자신의 문장독서법이 교양 있는 독자의 자연스런 반응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 7. 미셸 리파떼르의 '문학적 능력' : 리파떼르는 [시의 기호학]에서 능력있는 독자는 표면적 의미를 심어서 나아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8. 조나산 컬러의 독서관습 9. 노먼 홀랜드와 데이비드 블레이치의 '독자심리' 제9장 문화연구 제10장 페미니즘 비평 1. 성의 차이에 대한 주요 쟁점 다섯 가지 : ①생물학 ②경험 ③언술 ④무의식 ⑤사회, 경제적 조건 2. 케이트 밀레트는 [성의 정치]에서 여자들 압박의 원인을 묘사하면서 '가부장제'란 용어를 사용한다. 3. 이론의 정립에 부정적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맥을 같이 한다. *버밍헴 현대문학연구소는 학제간 연구가 가장 큰 특징이다. 제 II 부 한국 근대 문학 비평사 제1장 애국계몽주의 문학론 1. 신채호의 민족주의 문학론 (1) 단재의 다양한 문필활동과 구국운동 : ①민족주의 의식을 확고하게 정립하였다는 점 ②급진적인 투쟁방법인 아나키즘에 기울어 종국에는 민중혁명론을 전개 ③문학을 급진 사회개혁을 위한 효용론적 관점 ④민족주의 문학론 ⑤신채호의 사상확립과 주권회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의 바탕에 영향을 미친 두 인물로는 중국의 양계초와 아니키즘의 원조인 크로포트킨과 바쿠닌을 들 수 있다. (2) 단재의 사관의 변천과정 : ①단재 사학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회사상으로는 자강사상과 신국민사상, 민중혁명론, 반존화주의 및 낭가 사상의 회복 등이다. ②단재의 역사 연구 제1기(1905-1910년 국권상실 때까지의 언론인시기)-주요작품 : 이태리 건국 3걸전,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평론(근금 국문소설자의 주의, 천희당 시화, 소설가의 추세) ③제2기(1910-1923년 실증성과 교조성이 혼재되던 시기)-주요작품 : 꿈하늘, 일목대왕의 철퇴, 평론(문예계 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④제3기(1923-1936년 근대사학 이론을 수용하는 시기)-주요작품 : 용과 용의 대격전, 평론(낭객의 신년만필) (3) 문학관의 변모 양상과 민족주의 문학론의 전통확립 : ①단재의 문학관은 크게 공리적 효용론과 사실주의적 문학론과 민족주의 문학론 등이다. ②단재는 초기의 역사 전기 소설을 쓸 때에만 해도 준비론에 가까운 영웅대망론을 통해 식민지 청산을 꿈꾸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자유, 평등개념의 확립을 통해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근대적 민주주의, 공화주의를 꿈꾼 것으로 확인 된다. ③그의 역사관과 문학관의 바탕에는 항상 민족의식이 자리잡고 있으며 오로지 주권회복을 통해서 매진하는 주체적 역사인식 태도는 민족주의 문학론의 한 전통을 형성하였다. ④이러한 그의 문학관이 문학부정론으로까지 발전 ⑤타협론과 준비론이 아닌 민중혁명론만이 유일한 대안임을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밝힘.(아나키즘이 용해되어 있다, 민중사관을 보여준다, 1928년에 발표된 급진적 투쟁론이 반영된 작품이다) (4) 단재의 문학론의 한계 : ①사회적 효용성을 지니지 않는 문학을 아예 배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 ②식민지적 현실의 부조리한 면을 비유, 상징하기 위해 너무 환상적이고 공허한 이야기로 전개하여 문학형식의 퇴행현상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③문장자체가 논설체나 사담체를 취하고 있고, 사실묘사 자체가 직설적인 진술에 의존하고 있음에 따라 허구에 바탕을 둔 심미적 예술성을 획득하는데는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④사상적 연계성의 일관성에 허점이 드러난다.(유교적 보수주의에서 급진적 민중혁명론으로의 전환이 급속히 진행) 2.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론 (1) 춘원의 예술관과 여기론 : ①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민중계몽 차원에서 민족주의 예술관을 주창 - 민족개조론으로 변질 ②인도주의 예술관 - 톨스토이 영향 ③민중예술 지향 ④춘원의 공리적 예술관은 소설을 쓰는 창작 행위 자체를 여기(餘技)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2) 톨스토이와 안창호의 영향 : ①톨스토이가 이광수에게 공리주의적 문학을 가르쳐 준 스승이라면 안창호는 계몽운동의 실천과 조직단체의 결성과 도덕적 수양과 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침을 주었다. (3) 시대상황과 춘원의 문학론의 변모 양상 : ①춘원의 최초의 문학론의 입장을 드러낸 글은 1916년 에 연재한 [문학이란 하오]이다. ②이 글에서 춘원은 초기의 문학론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서구의 정의 문학론, 사실주의 문학론, 공리적 효용성의 문학론, 낭만주의 문학론 등이 혼재된 양상을 보인다. ③춘원은 [문사와 수양], [예술과 인생], [여의 작가적 태도]에서 도덕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공리주의적 문학론을 전개한다. ④계급문학의 반동으로서의 중용적인 문학론 전개 즉, [중용과 철저], [양주동씨의 철저와 중용을 읽고]라는 글로 프로문학 진영을 비판하고 상적(常的) 문학론을 제기 (4) 춘원 문학론의 한계 : ①정의 문학론, 사실주의, 공리주의 문학론 등의 혼용으로 일관성 없는 논리 ②공리주의 문학론도 공허하고 이상적인 계몽성을 지향하는 한계 ③중용적인 문학론인 상적 문학론도 결국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과오를 범한다. 제2장 프로문학론의 태동과 그 전개과정 1. 프로문학의 성립과정과 카프의 결성 (1) 초기 프로문학론의 전개과정 : ①앙리 바르뷰스, 로망 롤랑, 아나톨 프랑스 같은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인간해방과 무산계급을 위한 문학운동을 '클라르테운동'이라 한다. ②팔봉 김기진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활의식인데 이 생활의식은 궁극에 가서 미의식의 분열과 연결 현존하는 두 대립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것을 긍정하고, 기교와 유희적인 예술에 기우는데 반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사회악에 대해 부정하며, 투쟁적이라고 주장했다. 김기진은 조선에 프로문학운동을 가장 먼저 소개한 이다. ③회월 박영희는 종래의 문학이 '자연주의 문학'이며 프로문학은 신이상주의라 하여 인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현상태는 문예가 우리의 생활을 창조한다는 것보다는 우리의 생활이 우리의 문예를 창조한다는 것'이라 하였다. ④일본 초기 프로문학운동의 중심은 [씨뿌리는 사람]이라는 잡지였다. (2) 카프의 결성 : ①와 라는 두 단체는 프로문학을 토대로 한다는 공통기반아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카프(KAPF)>을 결성 2. 내용, 형식논쟁의 전개과정 (1) 김기진은 프로문학의 계급적, 이념적 지향성이라는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김기진은 박영희의 단편 [철야], [지옥순례]에 대하여 혹평을 하여 시작된 논쟁이다. : ①소설은 한 개의 건축이며 그 건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설에 걸맞는 묘사와 실감이 부과되어야 한다. ②프로문학도 엄연히 하나의 문학예술인 이상, 문학이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묘사와 실감, 즉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과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논지 ③박영희는 문학의 계급성과 당파성만을 강조하고 있다.④ (2) 이에 대해 박영희는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 : ①작품에서 계급성과 이념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따지지 않고 그것이 어떤 작품이든지 묘사와 실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예술지상주의적. 초계급적, 개인주의적인 비평태도이다. ②형식에 우선하는 내용과 프로문예 비평가가 지녀야 할 계급성이라는 논지로 반박 3. 목적의식적 방향전환론을 둘러싼 논쟁 (1) 비평사적 의의와 논쟁의 배경 : ①목적의식적 방향전환논쟁이 우리 비평사에서 제기된 것은 내용, 형식 논쟁에서 박영희의 입장을 받아들여지면서 카프는 문학의 이념적 중요성과 문학가들의 투쟁적 자세를 더욱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2) 박영희의 목적의식론 (3) 일본 유학생 그룹인 제3전선파의 목적의식론 (4) [낙동강]을 둘러싼 논쟁 (5) 목적의식론에서 대중화론으로 4. 예술대중화론의 전개와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 (1) 김기진의 대중소설론 (2) 김기진과 임화의 논쟁 (3)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 제3장 1920년대 중반의 계급문학론, 국민문학론, 절충주의 문학론 1. 계급문학 시비론 등과 프로문학측의 대응 (1) 민족문학 진영 :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나도향, 박종화, 김석송 (2) 프로문학 진영 : 김팔봉, 박영희 (3) 춘원 이광수는 [계급을 초월한 예술이라야]에서 계급문학은 비평만 있지 실제 작품은 별로 큰 소득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면서 계급을 초월한 예술의 존재를 믿는다고 강조 (4) 김동인은 계급문학을 제재 차원에서 파악하여 비판 (5) 김기진은 [피투성이된 프로혼의 표백]에서 프로문학이 다루는 것은 단순히 제재 차원이 아니라 부르주아 중심의 근대자본주의사회가 가져오는 빈부의 격차에 의한 계급모순의 발생과 계급분화에 의한 상부구조의 문제점임을 지적 - 마르크시즘에 근거한 논리 (6) 회월 박영희는 무산계급문학을 세우기 위해 형식의 고전적 전통을 파괴할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형식보다는 절규에, 묘사보다도 사실표현에, 미보다는 역에, 타협보다는 불만에, 과정보다도 진리에 나아갈 것도 한 가지 각오해야' 할 것임을 주장. (7) 염상섭은 계급문학의 출발을 필연적 또는 내면적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외면적 요인과 시류에 영합하려는 천박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공격. 2.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운동과 한계 (1) 육당 최남선 : ①민족주의 문학론은 초기에는 육당 최남선이 주장한 국민문학론에서 출발 ②육당은 신체시 운동, 창가도입 등을 통해 신시운동에 앞장섰으나, 민족문화의 전통에 대한 관심과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식을 되찾자는 시조부흥운동을 전개한다. ③육당은 '조선심', '조선아'의 발견에 관심을 가졌다. ④당대 사회현실과의 연계에 대한 의식은 빈약했다. (2) 김기진의 시조부흥운동 비판 : ①'조선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프로문학운동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재래의 부르주아문인들이 내세우는, 시기 적응한 방향전환 내지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②최남선이 내세우는 '향토성'이니, '민족성'이니, '게성'이니 하는 것이 주관적으로 인식되고 독립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이요, 대비적으로 평가되는 것이라는 사실의 지적 (3) 김동환의 시조부흥운동 비판 : ①시조는 일대감옥이요, 사문학, 부패문학의 잠드려우는 묘지이다. ②김기진이 계급문학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문학의 당대 사회현실과의 역사적 조응과 결부지어 시조부흥운동을 공격했다면, 시를 전공한 김동환은 시의 형식과 내용 측면을 꼼꼼하게 분석하여 한마디로 시조부흥운동을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임을 통박하고 있다. 3. 절충주의 문학론 (1) 양주동의 절충주의 문학론 : ①양주동은 유심과 유물의 이원론을 받아들이고, 바람직한 문예비평가의 태도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 모두를 겸유하는 것이어야 한다. ②프로문예 비평가들을 세 가지 점에서 통렬하게 비판-내용 편중주의를 지적, -예술상 엄밀한 의미로 보아 인도주의, 사회주의 등등은 '주의'가 아니라는 것, -문예의 포스타화를 주장하고 예술적 형식조건을 전혀 방기한다고 경고 제4장 농민문학론 1. 농민문학론의 대두와 그 배경 (1) 카프 성원으로 농민문학문제를 제일 처음 거론했던 사람은 팔봉 김기진이다. (2) 프로문학 진영이 농민문학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가장 주된 요인은 1930년 11월 소비에트 러시아의 하리코프시에서 열린 '프롤레타리아혁명 작가 제2회 대회'였다. 2. 농민문학론의 전개 양상 (1) 안함광의 [농민문학문제에 대한 일고찰] : ①조선혁명의 성격이 더 이상 농민문학운동을 무시하여서는 안된다. ②노농계급의 동맹에서와 같이 농민문학에 대한 노동자문학의 헤게모니를 관찰할 것 ③농민문학은 빈농계급을 대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주입시키는 것 (2) 백철은 [농민문학문제]라는 글로 안함광의 논지에 대해 비판 제5장 주지주의 비평과 예술비평 1. 주지주의 비평 (1) 서구의 주지주의 이론에의 탐닉(흄, 엘리어트, 리처즈, 루이스) : 최재서는 기하학적 예술의 인간과 자연의 단절성을 인식함을 통해 절대성을 추구하는 흄이나 비평에 있어서 개성 몰각을 통한 비교와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엘리어트, 심리학적 분석으로서 비평의 과학성을 내세운 리드와 리처즈 등의 서구의 주지주의 경향의 비평가들에 영향을 받아 비평에 있어서 과학적 가치판단의 태도와 모랄에 바탕을 둔 윤리성의 문제에 집착하는 새로운 비평적 태도를 보인다. (2) 현대적 위기에 대한 인식과 지성의 옹호 : 최재서는 현대사회 자체의 특질을 과도기적 혼돈성이라고 요약하고 현대비평의 방법은 이러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3) 비행동적 행동 역설 : 최재서는 리처즈의 견해에 입각하여 지성의 비행동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4) 최재서 문학론의 변모 양상 : ①최재서의 문학론은 '지성론 - 모랄론 - 휴머니즘론'으로 변모 ②지성은 '취미'나 '교양'으로 바뀌고, 모랄은 개성을 통하여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단정. ③'휴머니즘'을 주창한 최재서의 이론적 배후에는 아놀드, 배빗, 스팬더, 리쳐즈 등이 있다. (5) 실천비평으로서의 풍자문학론과 리얼리즘론 (6) 최재서 비평론의 한계 : ①군국주의의 식민지적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예술검열제도에 부합되는 창작활동과 비평적 인식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제에 친체제적이라는 점에서 반역사적, 반민족적 태도라고 비판될 수 있다. ②그의 비평적 방법과 인식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서구적인 관계로 우리의 식민지적 현실에 적용하기에 과연 적합한가 하는 문제 ③모랄론을 강조하면서 지성론에서 내세우는 '전통'이란 개념은 살며시 숨겨 버리고, 전통적인 모랄의 결여만을 지적허는 것은 모순이다. ④개성의 존중을 강조하면서도 결국 돌아온 것이 아주 보편적인 사조인 '휴머니즘론'이란 점은 아이러니이다. ⑤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주장하는 좌파 이론가들을 센티멘털리스트로 몰아세운 점도 그의 이론의 한계와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2. 예술비평 (1) 김환태의 인상비평 (2) 김문집의 유미주의 비평 제6장 1930년대 후반의 비평의 흐름과 임화의 리얼리즘 비평론 1. 1930년대 후반의 비평의 흐름 모더니즘 작가로 분류되는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등이 1930년대 말로 갈수록 리얼리즘 문학으로 접근해 가거나(이태준의 경우), 사회적인 문제를 이론 속에 도입하거나(김기림의 경우), 동양적 고전의 세계로 나아간 것(정지용의 경우)은 적어도 작가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려 하지 않는 한 당연한 결과이다. 여기서 리얼리즘론의 대표적인 비평가는 임화, 김남천, 안함광 등이다. 2. 임화의 리얼리즘 비평론 (1) 임화는 가장 먼저 반영론에 입각한 리얼리즘론을 전개한 인물이었고, 조선적 현실에 부합하는 민족문학이라는 문학이념과 리얼리즘론을 기초하였다는 데 그의 독보성이 있다. (2) 임화는 리얼리즘론을 체계화하기에 앞서 당시 리얼리즘론의 두 가지 편향을 지적 : ①문학으로부터 세계관을 거세하고 일상생활의 비속한 표면을 기어다니는 리얼리즘-즉, 포복하는 리얼리즘(관조적 리얼리즘)이라는 객관주의로 편향된 리얼리즘론 ②사물의 본질을 현상으로서 표현되는 객관적 사물 속에서 현상을 통하여 찾는 대신 작가의 주관 속에서 만들어 내려는 다시 말해 정신을 가지고 현실을 규정하는 전도된 방법인 주관주의가 그것. (3) 임화가 소설론을 발표하게된 몇 가지 이유 : ①세계사적 보편성 ②리얼리즘론과 장편소설의 이론 내적 연관성 ③소련의 이론적 영향 제7장 1930년대 후반의 여타 프로문학론 1. 김남천의 문학론 (1) 리얼리즘론 : ①자기고발의 문제에서부터 문학론을 출발시킨다.(고발문학론) ②창작방법의 기본방향을 크게 리얼리즘과 아이디얼리즘으로 나눈다. (2) 장편소설론 : ①김남천의 후반 소설론의 핵심은 세태소설이다.(관찰문학론) (3) 카프 해산 후 김남천은 고발문학론, 모랄론, 세태소설론 등을 전개한 문학이론가이다. 2. 안함광의 문학론 (1) 리얼리즘론 : ①안함광의 리얼리즘론은 대부분 예술적 주체와 관련한 문제에 국한된다. (2) 안함광의 소설론은 그의 혁명적 로맨티시즘론에 기초하여 픽션론으로 구체화되는바, 한마디로 말해 그에게 있어 성격이란 정통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에서 말하는 긍정적 주인공에 해당되며, 그를 통한 픽션의 논리는 혁명적 낭만주의의 소설적 구체화이다. (3) 안함광은 1930년대 초 동반자문학논쟁, 농민문학논쟁으,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의식의 능동성'을 구현하는 것을 리얼리즘론의 중심적 문제로 제기했다. 제8장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 (1) 문학건설본부(문건)-조선문학가동맹(문맹)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이들이 내세운 민족문학론은 1970년대 남한 민족문학론의 원형이다. (2)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동맹)-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북문예총)의 흐름으로 이들의 민족문학론은 북한 문학이념의 모태가 된다. (3) 조선문필가협회(문협)와 조선청년문학가협회(청문협)의 흐름으로 이들의 문학론은 1950년대 이후 우리 비평계를 지배해 온 순수문학론과 예술지상주의 문학론의 출발점을 이룬다. (4) 문건과 동맹의 문학이념 : ①임화,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 등을 중심으로 한 문건과 윤기정, 한효, 권환 등이 주축이 된 동맹의 대립은 민족문학론 대 프롤레타리아 문학론의 대립이다. ②문건의 문학이념으로 민족문학을 내세우면서 민중연대성의 구현과 전략적 문예통전의 결성을 주장한 데 반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를 강조한 동맹은 당파성의 관철과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반한 전위조직의 결성을 요구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문학이념으로 제시. (5) 문맹의 민족문학론 : ①두 단체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하여 '민주주의 민족문학'을 문맹의 문학이념으로 채택. ②진보적 리얼리즘론은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창작방법상에 반영한 결과물이다. (6) 민족문학논쟁을 거치면서 북한은 프로문학의 헤게모니에 기초한 민족문학의 건설에 매진한다. 고상한 리얼리즘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                 -시적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중심으로-                                              김석환(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  1.머리말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문화 운동 전체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문화의 한 부분이자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에서 역시 모더니즘 사조는 크게 일어났는데 영미주지주의와 대륙의 아방가르드 운동, 즉 미래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을 종합적으로 일컫는다. 그런데 한국 현대시에 그러한 사조가 유입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부터이며 영미주지주의 계열에 정지용, 초현실주의 계열의 이상 등을 당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후 전후 후반기 동인을 필두로 해서 다시 일기 시작했으며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으로 변화되면서 더욱 다양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물론 한국 현대시의 현주소를 논하는 자리에서 모더니즘만으로 그 다양한 양상을 모두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한국 현대 시단엔 이전에 풍미하던 리얼리즘적 경향이 쇠퇴하고 모더니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그 이전까지 민주화 및 노동자 또는 소외계층들의 권익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일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만은 아니지만 1990년대 이후 컴퓨터를 추동력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의 물결이 밀려 온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변화는 현실의 반영 또는 재현에 유용한 리얼리즘 시의 흐름을 약화시키고 모더니즘의 강세를 가져왔다. 따라서 한국 시단에 강하게 일어난 모더니즘의 조류를 살펴보는 것은 요즈음 시문학의 전체 흐름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본고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의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시는 언어를 소재로 하는 예술로서 하나의 구조체인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된 구조체, 즉 2차적 구조체이기 때문에 그 구조의 특성을 살피는 것은 곧 시적 특성을 살피는 일이다. 따라서 시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에 사용된 언어가 어떻게 시적 구조를 구축하는가 또는 탈구축을 하며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특히 모더니즘은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그러한 고찰의 타당성 또는 필요성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구체적으로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따라서 실제로 시에서 각 요소들, 즉 시어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임의성이 있으므로 구축과 탈구축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그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살피는 것이 곧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피는 일로서 의미가 있으며 그것 역시 각각의 시들이 갖는 특징을 고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2. 구조의 탈구축과 의미의 확장   시인 이상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으로서 연작시 「오감도」를 연재하여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 '초현실주의'는 유럽에서 일어난 아방가르드 운동을 종합하여 최종 매듭을 지은 사조로서 무의식의 세계가 진정한 현실이라 여기며 이에 대한 탐색을 주요한 시적 과제로 삼았다. 다음의 시 역시 연작시의 한 편으로서 이른바 자동기술법으로 인간의 정신 심층에 내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謀를하려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 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이상, 「烏瞰圖 -시제15호」일부   화자인 '나'는 거울이 없는 실내에서 거울 속에 있을 또 다른 '나'를 생각하고 있다. 거울은 이상적 자아가 존재하는 무의식적 공간을, 그리고 실내는 의식적 공간인 현실을 상징한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나'는 이미 실내에 나와 있기 때문에 ‘外出中’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기 이전에 거울 속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다른 '나'가 있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왜냐 하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거울 속의 욕망하는  '나'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謀’를 하는 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室內에 있을 뿐만 아니라 거울 속에도 존재하는데 그 두 명의 '나'는 화합이 되지 않고 균열을 보이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무의식에서 생각하는 '나'는 일치하지 않고 분열된 상태이다.      거울 속의 '나'와 일치하지 않은 '나'는 ‘罪를 품고’ 침상에서 잠을 자며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나'는 ‘缺席’하여 부재중이고 '義足을 담은 軍用長靴'가 '내 꿈의 白紙를 더럽혀 놓'은 것만을 확인한다. '軍用長靴'는 곧 거울 밖에 있다가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의 공간인 '꿈의 白紙'로 들어간 '나'를 대신하는데, 욕망하는 '나'는 그곳에 없어 만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解放하려고’ 한다. 즉 분열된 채 존재하는 두 얼굴의 '나'가 부조화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와 미안한 뜻을 전하는데 서로 분열된 채 거울 속과 실내에 ‘囹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얼굴의 '나'는 서로 만나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거울'과 등가치인 '꿈'의 공간은 생각하는 '나'만 있을 뿐 현실 속의 나, 즉 '내 위조'는 결석하여 늘 부재중이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 즉 '자아의 이상'은 현실 속으로 진입하면서 현실을 규제하는 법과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의 개입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서로 일치 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아예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자살할 수 있는 통로인 '들창'을 가리키는데 그 들창을 통과한다는 것은 곧 자살이다. 들창 밖으로 나와 현실에 진입하는 순간 '나'는 다른 모습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현실에 '나'가 존재하는 한 살아 있으니 '불사조'에 가깝다. 이 역시 '생각하는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언제나 분열된 채 무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일상적 층위에서 보면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상황을 형상화하는 역설적 어법이 독자들에게 낯설음을 주지만 내적 논리로서 시적 구조를 구축하여 무의식의 세계와 그 흐름을 보여 준다.      한편 정지용 시인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영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시인들의 시들을 한국에 번역하여 소개하였으며, 동지사대학 졸업 논문에서 영국의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의 한 사람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연구하였다. 그렇게 일찍 영미모더니즘 시를 접한 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이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보여 줌으로써 회화성이 강한 시를 발표하며 한국 현대시단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영미 모더니즘은 아폴론적 경향이 강하여 디오니소스적인 유럽의 아방가르드 계열의 시에 비하여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의미에 통합함으로써 구조의 견고성을 보인다. 그런데 다음 시는 그가 후기에 쓴 것으로서 한밤중의 산골 풍경을 회화적으로 그리면서 내면 깊이 잠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대 함끠 한나잘 벗어나온 그머흔 골작이 이제 바람이 차지하는다 앞남ㄱ의 곱은 가지에 걸리어 파람부는가 하니 창을 바로 치놋다 밤 이윽고 화로ㅅ불 아쉽어 지고 촉불도 치위타는양 눈썹 아사리느니 나의 눈동자 한밤에 푸르러 누은 나를 지키는다 푼푼한 그대 말씨 나를 이내 잠들이고 옮기셨는다 조찰한 벼개로 그대 예시니 내사 나의 슬기와 외롬을 새로 고를 밖에!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고 성긴 눈이 별도 없는 것이에 날리어라                                                                      -정지용,「溫井」전문   화자인 나는 그대와 함께 한나절 동안 걸어 먼 골짜기를 벗어나 산방에 도착한다. 가지를 스치며 창을 치는 바람은 그곳에 도착한 화자의 심리적 변화를 암시한다. 밤이 이슥하여 화롯불이 아쉽게 식어 가고 촛불도 점점 희미해지며 어둠이 더욱 깊어지자 화자의 시선은 '누은 나'에게로 향한다. 그대도 ‘나’를 잠들이고 잠자리로 돌아가 홀로 남게 되자 '나의 슬기와 외롬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은 그곳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요 사방이 어둠에 가려진 한 밤인데 그대마저 곁에서 떠나 홀로 있기 때문이다. 즉 타자들의 욕망을 좇아 살던 현실이 차단되자 시인은 그 동안 소외된 채 '외롬'에 처해 있던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찾는다.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은 소외되었다가 솟아오르는 그  욕망의 상징이다.   그렇게 화자는 비로소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는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확인하는데 이는 곧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라깡에 의하면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환상을 통해 형성되는데 소외된 욕망의 주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환상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타자의 욕망을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빼앗긴 나의 고유한 욕망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 시에서 타자는 타자의 욕망이 얽힌 현실로부터 차단된 산골의 밤에 자신을 성찰하며 고유한 욕망을 찾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8. pp.79-80 참조)  한편 별도 없는 어둠 속에서 '성긴 눈발'이 내리는 것은 그러한 자유를 얻은 시인의 내면을 암시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3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나의 하나님」 전문   '하나님'은 '늙은 비애',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리디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 등의 다양한 이미지에 비유되면서 시적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구체화 또는 확장된다. 특히 비유적 이미지들이 ‘늙은/ 어리디어린, 생물/ 무생물, 밝음/ 어두움, 구체/ 추상’ 등으로 대립되면서 일상적 논리를 벗어나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미를 지연시키고 그 폭을 확장시킴으로써 모호성이 극대화되어 그 통일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시적 전체성을 유추하기가 불가능한 탈구축 양상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체험으로써 그 실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오히려 효율적이다.       사과나무의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고 뚝 뚝 뚝 떨어지고 있고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움직이게 하는 어항에는 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비에 젖는 섣달의 산다화가 있고 부러진 못이 되어 길바닥을 뒹구는 사랑도 있다.                                                      -김춘수, 「시 3」 전문  사과나무의 사과알이 땅이 아니라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어항에 크나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 등은 일상적 논리를 벗어난다. 그리고 ‘사과알, 금붕어, 산다화, 부러진 못, 사랑’ 등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이어지면서 낯설음과 시적 긴장감을 더해 준다. 그런 이미지에 의해 형성되는 시적 상황은 제목인 '시'와 비유적 관계를 맺으면서 '시'의 의미를 지연시키며 확장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이미지의 전개와 그들 사이의 충돌과 논리를 벗어난 묘사와 진술로 탈구축의 양상을 보이며 '시'의 의미는 일상어로 규명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한 것임을 암시할 뿐이다. 즉 시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다만 존재하면서 독자들과 대화를 요구하며 무한한 상상과 다의적인 해석을 유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 「나의 본적」 전문     ‘나의 본적’을 비유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것들의 유사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즉 나의 본적은 ‘마른 잎, 거대한 계곡, 나무 잎새, 맑은 거울, 독수리, 고장, 교회당 모퉁이, 인류의 짚신, 맨발’ 등과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는 계속 지연되고 수정된다. 그러는 중에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나의 본적'의 의미를 확장하며 그 모호성을 증대시킨다. 그리하여 나의 본적이 상징하는 인간 존재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암시한다.    曲馬團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地域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緯度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一生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少女의  指紋                                                       -박용래, 「코스모스」 전문   한편 시 「코스모스」에서 1연은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공간인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긴 꽃대 위에 핀 ‘코스모스’와 아슬아슬 곡예를 하고 마술을 부리는 ‘곡마단’이 비유적 관계를 맺게 한다. 이어서 코스모스 꽃은 하얀 눈이 덮인 ‘아라스카의 햇빛’과 그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와 다시 비유적 관계를 맺고 다시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과 그 ‘소녀의/ 지문’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지구의 북극에 가까운 '아라스카의 햇살', '위도', '지역', '소녀', '지문' 등으로 점점 축소 또는 확대되며 이어지는 공간적 이미지의 비약적인 변화와 서술어의 생략에 의한 여백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질적인 이미지의 충돌과 생략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면서 코스모스의 시적 의미를 무한히 확장할 뿐 어느 의미로 한정하기에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시는 어느 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그것으로부터 경험된 의미를 독자적인 언어적 상징체계를 구축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적 자아는 그것을 현실을 판단하는 의식이나 초자아에 의해 인정되지 아니한 욕망을 교묘한 수단으로 엄폐하면서 나타낸다.(김형효,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2008. p.327 참조) 따라서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며 상징계로 진입할 때 타자들의 욕망이나 상징계를 지배하는 법에 의해 억압을 받아 왜곡된다. 그것은 언어의 양면인 기의와 기표가 일치하지 않고 떠도는 원인이 되는데 어떤 기표로 의미나 욕망이 드러나지만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욕망이 남아 있어 또 다른 기표가 요구된다. 그래서 시에서 하나의 기의에 다양한 기표, 그 역으로 하나의 기표에 다양한 기의가 나타난다. 따라서 독자들은 다양한 기표의 연쇄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동시적으로 고찰하여 그 기의, 즉 시인의 욕망 또는 시적 의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의 실재(reality)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시를 구축하는 기표, 즉 다양한 이미지들은 다만 그 실재의 흐릿한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재’란 없으면서도 있는 것으로서 그 일부가 기표로 상징계에 나타나는 순간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3. 구조의 구축과 시적 의미의 집중   영미모더니즘의 시의 구조는 산업혁명의 근원지인 당대 영국의 사회적 구조와 상동성을 갖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신흥 자본가들이 부상하고 물신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혼탁해지던 유럽에서 선구적으로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은 대륙의 여러 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영국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되 전통을 존중하며 질서를 세우고 사회적 통합을 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부응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더니즘 시는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선택하여 배열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향해 집중시키고 구조의 전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이론가이자 시인인 엘리엇(T.S. Eliot)의 「황무지」는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그 시에는 성서, 신화, 오페라의 대사, 일상적인 군중들의 말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배열되어 텍스트를 구축하면서 산업혁명으로 혼란해지는 시대상을 비판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그 '이질적인 요소들의 통합'은 영미모더니즘 시의 구조적 특징의 핵심이며 한국 현대시단에서도 영미모더니즘 시의 영향을 받은 시들은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꽃이 열매의 上部에서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    나는 發散한 形象을 求하였으나  그것은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伊太利語로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叛亂性일까  동무여 이네 나는 바로 보마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明晣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孔子의 生活難」 전문   꽃이 지고 열매가 맺는 게 자연의 순리이지만 그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다는 것은 결과와 원인이 전도된  모순이다. 그런 현실을 두고 '너'는 제 자리에서 상승과 하강 운동을 반복하며 줄을 돌리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는 것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표인 '發散한 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모순된 현실과 싸워야 하는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렵다'. 같은 대상을 두고 한국에서는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 하는 것처럼 그 지시체 또는 기의와 기표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표를 통하여 정확한 기의를 알 수 없듯이 사물의 가시적인 형상으로 그들의 관계와 진정한 의미의 실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적 관계, 그 수량과 한도를 바로 보겠다고 한다. 알고 보면 사물은 우매하여 형상 뒤에 숨은 본질, 그 명절성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보는 인간이 우매하여 형상을 보며 그 뒤에 숨은 실재를  명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위의 시에는 서로 이질적인 상황 또는 이미지들이 병치적으로 나열되면서 긴장감을 주고 시적 의미를 확장시키며 그 해석을 어렵게 하는데 그것은 이 시가 갖는 독특한 미학이다. 이 시는 언어의 불확실성과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어야 하는 소외를 암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경향은 모더니즘 시의 한 경향이다.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박용래, 「下棺」 전문     이 시는 미메시스(mimesis)적 차원에서 보면 이미지들이 환유적으로 배열되면서 추수가 끝나고 살얼음이 어는 초겨울의 들판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시는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한 구조물로서 그 풍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이 내포한 이차적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이미지들이 다른 것 또는 전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시 전체를 구축하는가를 파악하여야 한다. '볏가리가 걷힌 논두렁'은 벼들의 한 해 살이가 끝난 죽음의 현장이요 '남은 발자국'은 죽은 이가 남긴 흔적이다. 그리고 '수레바퀴에 끼인 살얼음'은 유동성이 있는 물이 고체화 된 부동의 물이며 우렁 껍질도 죽은 우렁이가 남긴 것이다. '바닥에 지는 햇무리'는 하루가 저물어 가는 저녁 무렵의 햇살로서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기 위해 지평선 위를 날아가는 철새인 기러기떼 역시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이승의 세계로 떠나가는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 계열체들로서 주검을 매장하는 절차인 '하관'과 은유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죽음의 의미에 집중되며 시 전체를 구축한다.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한 귀퉁이  나도향  한하운 씨가  꿈속의 나라에서    뜬구름 위에선  꽃들이 만발한 한 귀퉁이에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스타프 말러가  말을 주고받다가  부서지다가  영롱한 날빛으로 바꾸어지다가                                                      -김종삼, 「꿈속의 나라」 전문   '꿈 속의 나라'에서 공간을 지시하는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꿈 속의 나라, 뜬 구름 위' 등이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는데 모두 지상과 다른 비현실적 공간이다. 그곳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나도향, 한하운, 지그문트 프로이드, 구스타프 말러' 등 국내외의 소설가, 시인, 심리학자, 작가 등이다. 작가와 시인은 상상력을 중시하며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쓴 이들이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한 정신분석학자인데 무의식은 꿈을 꾸는 정신적 영역이며 초현실의 세계이다. 따라서 인물들과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공간들은 모두 비현실성을 내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곳은 또한 말을 주고받는 세계, 즉 현실이 아니라 '영롱한 날빛'이 존재하는 비현실적 또는 상상의 세계로서 무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음 시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를 선구적으로 발표하며 한국 시단에 새로운 충격을 주던 황지우 시인의 실험적인 의도를 강하게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와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 「심인」전문   이 시는 화자인 '나'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서 신문의 광고난에 실린 '심인' 광고문을 보고 있는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그 광고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서로 다른 이들이 가출한 이들을 찾고 있다. 가족들이 애타게 가출한 가족을 찾고 있는 광고문의 내용과 그것을 읽으며 똥을 누는 상황이 대조를 이루며 시대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서로 우연히 인접하여 실려 있을 뿐 각각 다른 사정을 갖고 있는 광고문이 그대로 시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패러디의 일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크게 부상한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최근에 이런 광고문뿐이 아니라 만화, 영화, 유행가, 음악 등 문학의 주변 예술 또는 대중예술이 시와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 현상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한 상호텍스트성이 주요한 미학으로 부상한 것은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에 나온 것들을 직조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모든 텍스트는 이전 또는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들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원텍스트인 샤갈의 그림을 패러디 하고 있다. 그림의 분위기를 차용하고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을 새롭게 변용하여 눈이 내리는 샤갈의 마을 사람들이 꾸는 부활의 꿈과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3월에 눈이 오는데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욕망의 피가 활발하게 돌아 정맥이 돋는다. 하늘에서 내려 온 축복의 메시지인 눈은 겨울이 가고 봄이 곧 시작됨을 알리며 사나이의 가슴에 겨우내 억압되어 있던 욕망의 피를 새로 활발하게 돌게 한다. 그리고 지붕과 굴뚝을 덮으며 사나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새 봄을 맞으려는  욕망을 더욱 익히고 다듬을 것을 권한다.   샤갈 마을 사람들의 욕망의 실체인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아낙들도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며 생명이 새롭게 부활하는 봄을 기다리게 한다. 이처럼 샤갈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인물들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변용되며 집중적으로 겨우내 억압된 욕망의 실현을 암시한다. 샤갈의 그림을 페러디 한 이 시는 그림과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데 김춘수 시인은 이 외에도 화가 이중섭의 생애나 그림 또는 토스토에프스키의 소설 등 다양한 원텍스트를 패러디 한 시들이 많다.   한편 하이퍼(hyper)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심상운 시인의 다음 시에 서로 이질적인 네 가지 국면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새로운 화면으로 전환하기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와 구조적 유사성을 엿보게 한다.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촉촉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심상운, 「헤드라이트」 전문   위의 시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국면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어둠/ 빛’의 대립상이 내재된 계열체들이다. 첫째로 화자인 나는 감자밭 이랑에서 감자의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리고 그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고?’ 질문을 하며 그 ‘붉은 피’는 ‘우주의 꽃빛 파일’이라고 한다. 다음 국면은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화자는 그녀가 자신이 헌혈한 피가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검정고양이가 '헛간을 빠져 나와 번개 속을 뛰어 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를 궁금해 한다. 그녀가 헌혈한 피와 '헛간'에서 나온 검정고양이는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무의식 속에 내재된 욕망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국면에서 화자는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리는데 이 역시 위의 두 가지 국면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이상의 국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또는 상황이 이질적이다. 이는 화면의 전환이 자유롭고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과 상통하는데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비약적인 상상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이질적인 세 국면 속에는 모두 닫힌 공간에 내재되어 있던 '어둠'의 계열체들이 빛의 계열체가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감자가 묻힌 흙속, 그녀의 혈관, 고양이가 머물러 있는 헛간, 화자가 머물러 있는 승용차는 모두 그 무의식적 공간을 상징한다. 이처럼 세 국면은 표층적으로 보면 이질적이지만 구조적 상동성(homology)을 갖고 모두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욕망들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시인의 비약적인 상상은 그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이동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것들이 빛이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통하여 욕망이 현실,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부르르 떠는', ‘깜짝 놀라면' 등은 욕망이 질서와 규칙으로 얽힌 현실로 진입하는 순간 받아야 하는 억압의 무게와 그로 인한 고통을 보여 주는 징후들이다. 또는 그것을 이기고 현실로 진입한 주체가 느끼는 경이감과 환희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시인은 그녀의 '붉은 피'를 '우주의 꽃빛 파일'에 비유한 것에서 보듯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어둠이 암시하는 욕망이 오히려 빛의 세계인 현실을 움직이고 조정하는 힘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선 시인의 다음 시는 디카시이자 하이퍼 시의 일종으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차용하여 시의 일부로 배열하고 그 원텍스트를 패러디하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그림: 프리다 칼로의 보름달을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다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 먹은 죄로, 나는 노새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휘핑크림 바른 라임 파이(Lime pie),  혀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한 조각 이름 노새사슴 몸통은, 사냥꾼들의 표적 목에 꽂힌 화살 허리에 박힌 화살 나는 신음소리를 뱉지 않고, 꿀꺽 삼킨다 달빛 커텐, 내 꿈을 가리는 밤 내 뿔은 1cm씩, 나의 별을 향해 그리움을 키운다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 새 뿔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이선, 「프리다 칼로 2-자화상․다친 사슴」전문   보름달을 삼켜 앞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라임나무를 훔쳐 먹은 죄로 ‘노새사슴’이 된 나는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 별은 '디에고 리베라'와 동일시되며, 그 이름은 '라임 파이'에 비유된다. 따라서 ‘보름달, 라임나무, 별, 디에고 리베라, 라임 파이’ 등은 모두 노새사슴의 몸통 안에 저장된 욕망의 대상을 대신하는 계열체적 기표들이다. 욕망의 기의는 다양한 기표들에 의해 드러나면서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고 확장한다. 그런데 노새사슴의 몸통은 타자들의 상징인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어 목과 허리에 화살이 박힌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으며 별을 향해 1cm씩 그리움의 뿔을 키우고 오히려 상처와 고통을 화구로 삼아 이상세계인 푸른 바다와 클리토리아 해변을 그린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을 내던지고 새 뿔 왕관을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려 그 욕망의 대상에 이르고자 한다.    화자인 노새사슴이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그리며, 다시 뿔을 키우고 낡은 뿔을 가는 것은 욕망의 끝없는 분출을 암시한다. 시인은 이처럼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제시하고 이를 패러디하며 자신의 '자화상'이라 밝힌 노새사슴을 통하여 타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이상세계를 향하려는 강한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산물인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에 시를 덧붙이는 디카시가 새로운 장르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시는 그의 일종이다. 또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원용하여 쓴 '하이퍼 시'라고 볼 수 있는데 화가의 그림 사진이 시텍스트의 일부가 됨으로써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디카시들이 흔히 자연풍경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는 데 비하여 화가의 그림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고 있다. 아무튼 이 시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시의 소재와 기법이 더욱 확대되고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유카 초목의 꽃들은 단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 유카 나방이는 그런 꽃들 중의 하나에서 그 꽃가루를 꺼내 반죽해 조그만 덩어리로 만든다. 그런 다음 나방이는 다시 또 한 유카 꽃을 찾아가, 그 암술을 찢어 열고 배추들 사이에 제 알들을 낳고서, 고깔 모양으로 생긴 암술의 터진 틈을 그 꽃가루 반죽덩어리를 메워넣어 막는다. 제 일생 중 단 한 번 유카 나방이는 이 복잡한 일을 행한다.”(칼 구스타프 융,『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서 인용)  1. 현대 문명적으로 해석하자면, 이것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유카 나방이의 필요가 유카 꽃을 발명한다.  2. 이것은 저 유구한 문제의 또 한 변형판이다.  심(心)이 먼저인가 물(物)이 먼저인가,  심(心)이 있으매 물(物)이 있나 물(物)이 있으며 심(心)이 있나.  사실은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이다.  유카 나방이/ 유카 꽃의 관계는 빛/ 그림자, 양/ 음, 생명-력(力)/ 생명-형태, 영(靈) /혼(魂), 마음/ 육체, 이성/ 정서, 의미/ 이미지 등등의 관계와 같다.  3. 내가 왜 이런 것을 시(詩)라고 쓰냐 하면,  내가 한 마리의 유카 나방이-융을 받아들이는,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는, 한 송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저 물(物)만이 아닌 심(心)이 보태진 유카 꽃,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 된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의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최승자, 「유카 나방이」   1연에서는 ‘유카  꽃’과 ‘유카 나방이’와의 미묘한 상생 관계를 밝힌 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 있는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2연에서는 그러한 생태를 현대문명적으로 해석하고 3연에서는 ‘유카 나방이/유카 꽃’의 관계를 ‘심(心)과 물(物)의 관계’에 비교하며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러 이항 대립상에 비교하며 그 자연 속의 상생 원리가 철학, 사상, 예술에까지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4연에서는 그것을 자신의 시 쓰기와 관련시키고 있는데 자신은 '유카 나방이 -융을 받아들이는,/ 유카 꽃'이요,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화자는 '물(物)에 심(心)이 보태진'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의식시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생태를 밝힌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고, 심(心)과 물(物)과의 관계에 비교해 보고, 다시 시 쓰기와 관련시키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사실을 밝히는 학문적인 문장에 시인의 해석과 비유적 상상력이 더함으로써 시가 되는 것이다. 즉 유카나방과 유카꽃이 서로 ‘자웅동체의 유카꽃’을 이루는 상생 원리로써 시 쓰기의 과정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주와 삶의 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학술적 문장을 도입하여 패러디하고 연에 번호까지 부여하면서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관계에 다양한 논리적 관계를 병치하여 비유적 관계를 맺어 시를 완성한 이 메타시는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그러한 시의 구조 안에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전체성을 갖는다.   4. 결론   이상에서 한국 모더니즘 시에 나타난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상 시인의 「오감도- 시제15호」와김춘수 시인의 「나의 하나님」등의 경우에 다양한 이미지들이 하나의 의미에 집중되지 않은 채 구조의 탈구축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들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방가르드 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한 시들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유도하고 대상이 내포한 의미를 확장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반면에 김수영 시인의 이나 박용래 시인의 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텍스트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유지하며 견고하게 구조가 구축된 시들이 있다. 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영미모더니즘 시와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박용래, 김춘수, 김종삼 등의 시인의 경우를 보면 위의 두 가지 경향을 갖고 있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패러디를 한 시 또는 하이퍼 시 등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에서도 그 구조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시들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구축 또는 탈구축,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추상적인 기준으로 시의 특성을 구분한다는 것은 자칫 그 구체적 특성과 시적 효과를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나라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모더니즘과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특성이나 문예사조 또는 소재나 기법의 특성으로 시의 예술성과 가치를 논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시란 굳어버린 일상어의 어법으로 다 보여주지 못하는, 오히려 그 아래 가려져 억압받는 인간의 진정한 욕망이나 대상이 갖고 있는 의미의 실재를 보여 주기 위해 언어로 구축한 2차적 상징체계요 예술이다. 시인은 죽어서나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는 그 실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어법을 창조하여 언어의 그물을 엮는다. 시는 예술이기 때문에 창의성과 개성이 필수적 요소이지만 궁극적으로 미적 감동을 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요소들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소재나 기법이 새롭다 하더라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실재에 가까이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눈길을 일시적으로 끌기 위한 화려한 포장지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의 죽음을 논하기에 앞서 고급스런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독자들의 얇은 감성을 자극하고, 요설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낭비시키는 시들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깊이 가려져 있는 그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시, 그곳으로 가는 데 꼭 필요한 이미지 또는 문장으로 쓴 고급스런 시만이 문화 창달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며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것이다. 
48    [스크랩] 쓰는 법 /문덕수 댓글:  조회:1768  추천:0  2018-10-28
쓰는 법 /문덕수 1. 詩란 무엇인가?  1) 詩의 첫 모습  -시의 맨 처음 모습; 우리 조상들이 농사를 짓기 이전, 곧 원시 시대에서 그들이 짐승을 발견하거나, 짐승을 추격하거나, 또 짐승과 싸워 이길 때 부르짖는 소리는 시의 최초의 모습  -천지 자연에게 소원을 호소하고 , 그 소원을 들어 준다는 확신에서 종교적 풍습, 또는 추수 감사절 같은 의식이 발생(고구려의 동맹, 예 나라의 무천 ,부여-영고의 제천 의식)  이러한 의식에는 춤(동작), 음악(노래), 시(말)의 세 가지가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서, 이 중에서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발달함에 따라 동작, 노래, 말이 서로 떨어져 나가 문학, 곧 시가 독립하게 된 것이다.  -말이 기쁨의 부르짖는 소리라면, 시도 마찬가지로 기쁨의 부르짖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이다' 라고 말하고, 모방한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흔히 시는 감정이나 의지를 나타낸다고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나 의지 이전에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국면이 있음을 덮어 둘 수 없다.  - 詩의 어원  * 포위트리(poetry): , 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 詩: 한자로 와 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  2) 최초의 시인  -호머(Hommer): 기원전 10세기, 장님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튼: 서사시 을 쓸 때에는 장님이 되어 있었다.  -원시사회의 공동 생활체에서 노동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시인의 특별한 기능이 강조되어짐  3) 민요와 민중  -시의 한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민요의 지은이는 모든 민중이요, 따라서 민중 전체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요 특히 노동요에서 실제로 그것이 불리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개작되어 가는 흥미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4) 현대와 시인  -현대의 영국시인 루이스는 히브리의 많은 예언자들이 시인이었다. 시인의 영감이란 어떤 영혼이 외계로부터 시인의 마음 속으로 불어넣어진 것을 말한다.  -우리말에 신명 들다, 신명 난다는 말이 있다.  시인은 바로 신명 들린 사람, 귀신에게 홀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예를 무당에서 들 수 있다. 무당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그 중개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어쨋든 신을 불러내어 인간과 관계를 맺어 주고, 신의 말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구실을 맡아 하는 사람이 무당인데, 시인이란 바로 이러한 무당의 존재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무가(굿을 할 때 부르는 노래)는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쓴 기록은 그대로 시임을 알 수 있다.( 시편)  -흔히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성서, 불경, 시경 등을 읽기를 권유한다. 고대의 신화와 더불어 이러한 경서는 문학의 원천이므로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다.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시의 예언적, 또는 문명사적 가능과 시의 존재 이유가 더욱 증대되어 가고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도 눈감고 넘겨서는 안 될 줄 안다.  * 현대가 시를 요구하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  (1) 현대 사회의 분열현상을 들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인 콩트는 실증주의에 의거하여 를 세웠는데 그 체제는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이다. 갈라져 나가고 있는 각 분야는 서로의 연관성을 잃고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같이 토막토막 갈라져 나가고 있는 문명 사회를 전면적으로 살피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통합해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것이 문학, 즉 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분열되어 가는 현대 문명사회를 전면적으로 관찰, 파악하고, 그것을 어떤 근원에서 서로의 관련성과 질서를 찾고 통합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문학, 특히 현대시에 맡겨진 매우 중요한 구실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즉 현대 문명을 그 근원에서 떠받드는 튼 일을 맡고 잇다. 이것이 현대시의 문명사적 역할의 하나일 것이다.  (2) 현대인간은 마치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바뀌어 가고 있고, 현대 사회는 그러한 부속품으로 조직된 메카니즘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의 기능으로 유형화되면 그 기능은 그대로 물질적 가치로 계산될 수 밖에 없고, 모든 인간 관계는 물질적 관계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사람의 전인적인 인격을 파괴하게 되고,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참된 인간 관계의 모럴도 없어지게 된 것이다. 시가 인간 생명과 영혼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사회가 메카니즘으로 바뀌고 있고 인간이 물질주의의 한 원소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은 시 자체의 위기이면서 , 시의 기능과 존재 이유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반증한 것이라고 하겠다.  (3) 현대를 일컬어 단절의 시대라고 말한다.  단절의 현상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인종 차별, 종교 분쟁, 개인간의 반목과 불화,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 등  단절이란 고립, 고독, 소외를 가져오고, 나아가서는 이것이 현대인의 불안, 고뇌,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현대의 시가 단절의 시대를 극복하여 연속의 시대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노력을 떠맡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시는 이쪽과 저쪽, 이 언덕과 저 언덕, 너와 나-모든 단절의 깊은 물위에 다리를 놓는 일을 하고 있다.  -새로운 공동 운명에 직면: 핵전쟁의 위험, 인구의 폭발적 증가, 국제적 분쟁, 여러 가지 공해, 식량 문제, 빈부의 차이, 인종문제,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  * 현대시가 현대 문명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 따라서 현대시의 예언적 기능만이 아니라, 비판적, 통합적 기능까지 더욱 증대되었다는 점  5) 현대시와 국어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언어란 국어이다./시인은 국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우리의 현대시는 우리가 쓰는 국어의 예술이므로, 민족 문화의 바탕이 되는 국어를 갈고 닦아서 아름다운 겨레의 언어로 창조할 책임을 현대 시인은 떠맡고 있는 것이다./시를 언어의 예술이라는 깨달음에서 국어의 순화가 아름다움을 중시하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 시문학파에서 부터 라고 하겠다.(정지용/ 김영랑 / 신석정 등의 시인이 의식적으로 시작을 통하여 국어 순화에 힘씀..이러한 국어순화의 노력은 서정주에게로 계승...정지용의 추천을 받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들에게로 계승됨)  ............................................................................................................................................................................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처마 끝 곱게 느리운 주렴에 半月이 숨어/아른아른 봄 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라르란 구슬빛 바탕에/자지빛 호장을 받힌 호랑저고리/호랑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니 밝도소이다./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열 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초마 끝에 곱게 감춘 雲鞋(혜) 唐鞋/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胡蝶/호접인양 사푸시 춤을 추라 蛾眉를 숙이고...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삶아 /눈 감고 거문곳 줄을 골라 보리니  ........................................................................................................................................................................................................................ : 자주 빛 호랑 저고리와 열 두 폭 긴치마를 차려 입고, 운혜와 당혜(唐鞋)를 신은 이 도전적 미인도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이 고전적 미인도와 국어의 조화는 국어 순화의 한 방향을 안내한다. 국어의 순화란 단지 아름답고 부드럽고 섬세한 말을 골라서 쓴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연, 새로운 풍속, 새로운 세계의 인식과 그 순화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순화, 다시 말하면 현대의 풍속순화와 관련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詩想 은 어떻게 잡는가?  1)시의 종자  -철이 덜 든 어린아이 때, 먼 낯선 곳으로 난생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해외로 유학을 간다고 가정해 보자. 어머니의 손등이나 손수건은 하나의 충격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이미지가 마음 속에서 언제나 지워지지 않고 갈수록 절실해질 때, 그것이 시상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시의 종자라고 할 수 있다.  -예시문: 박 목월의 시 를 읽고 시의 종자가 어떤 것인지 찾아보자  답: 청운사(마음의 자연지도/내 영혼의 자연-지은이의 서러운 이미지에 떠오르는 절),자하산, 느름나무 속잎 피는 열 두 굽이, 청 노루-네 이미지가 중심/꿈속의 한 자연을 연상케 함 -가장 중요한 이미지 :청운사/ 자하 의 청운사와 청 노루-조국을 강탈한 일제에 의하여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서럽고도 열렬한 그리움으로 창조된 세계는 지은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근거요, 삶의 구원이 될 수 있는 자연이기도 하다.  -마음 속에서 거의 완전한 상상의 지도를 그려놓고, 그 이미지를 언어로 다시 그려낸 작품이다.  -마음 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것을 거의 완전한 하나의 세계, 또는 하나의 형태로 성숙할 때까지 창조 활동을 계속한다는 오랜 상상 속의 창작 과정을 거치는 지극히 중요한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 떠오른 하나의 이미지는 하찮은 충격일 수도 있고, 약간의 파문과 같은 사소한 느낌일 수도 있고, 일상의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일 수도 있고, 꽃이 피고 지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신비스러운 느낌일 수도 있으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시의 종자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먼저 시의 종자를 붙잡는 일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혹은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훗날 어떤 계기에 다시 생각해 내고서는 새로운 경험을 덧붙여 서서히 가꾸고 풍부하게 하면서 키우는 것이다.  2) 詩想의 성장과정  -사냥을 하여 먹고 살던 원시 시대의 시인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자연이나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 생각하기도 하고 공상에 잠기기도 하는 고독이 많았다.  -너는 왜 시인이 되었느냐? 는 물음에 고독하기 때문에 또는 어리석고 약하기 때문 에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흔히 있다. 시인이 다른 보통 사람들 속에 끼이지 못한다든지,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다든지, 매우 외로운 처지에 있다든지 하는 것은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많이 있는 일이다. 어쨌든 이러한 처지에 있거나, 적어도 사물이나 인생을 관찰하는 동안만이라도 이러한 처지로 돌아가야 하는 시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거나 약하거나 보통 사람의 그것과 비슷하거나 하면, 그런 사람은 시와 소설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시상을 잡고 그것을 더욱 가꾸고 풍부하게 하고 키우는 능력은 바로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시인은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는 , 곧 시인의 재질의 특수성을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시: 김 남조의 아가에게 )  3) 이미지의 상호관계  -맨 처음에 붙잡은 시의 종자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를 흔히 우리는 착상이라고 말한다.  착상은 이제 겨우 시상을 붙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착상, 곧 하나의 이미지는 종자이므로, 심고 북돋우고 비료를 주고 손질을 하면서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의 종자도 그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시에서는 착상된 첫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과거에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이미지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여러 가지 이미지가 어떤 공통점이나 유사점을 찾아 서로 관련을 맺고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비로소 한 편의 시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 시의 종자를 어떻게 붙잡고 어떻게 키워 나가는가?  1) 먼저 시의 종자를 잡아야 한다.  -시의 종자는 하나의 느낌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인상일 수도 있고, 하나의 관념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일상의 생활 경험에서 이러한 종자를 붙잡아야 한다. 이러한 종자는 갑작스러운 우레 소리를 듣거나. 불시의 폭발로 인하여 번쩍하는 섬광을 보거나,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친구가 돌연히 찾아올 때와 같이, 어떤 충격이나 놀라움을 준다. 이것을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 곧 靈感이라고도 하다. 그러한 종자는 갑자기 왔다가는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과 같으므로, 반드시 노우트에 적어두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그것을 한 편의 실 형상화하려고 서둘지 말고 한동안 마음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다. 물론 당장에 쓸 수 있는 즉흥시라는 것도 있기는 있다.  2) 마음속에 넣어 둔 시의 종자는 일주일, 한 달, 길면 일 년-이렇게 무의식 속에 묻혀서 잠잘 수 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 이를테면 여러 가지 생활 체험과 우연 혹은 의식적으로 결부되어 싹이 트고 줄기를 뻗어 성장하게 된다. 많은 생활 체험이 퇴토의 종자에 거름이 되고 , 물이 되고, 햇빛과 기온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처음 시의 종자를 붙잡을 때와 같은 어떤 충격이나, 놀라움을 줄 수가 있다. 말하자면, 시의 종자를 가지고 왔던 맨 처음의 영감이 한동안 혹은 꽤 오랫동안 사라져 있다가 새로운 생활 체험과 결부되는 순간, 그 맨 처음의 영감에 불이 붙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종의 흥분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영감이란 충격적인 계시나 암시와 같은 거인데, 그것이 상상력과 어울려 시의 맨 처음 종자를 성장시켜 서서히 시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영감과 상상력은 불과 같아서 한 동안 뜨겁게 타오르다가는 이내 꺼지는 성질이 있으므로, 이것을 계속시켜 나간다는 것은 다소 힘드는 일이다.  3) 이렇게 해서 성장한 이미지는 서로 연결되고 구성되어 한 편의 시의 형태로 자리를 잡는다. 이 때 우리는 처음 단순한 메모에 지나지 않았던 시의 종자는 비로소 한 편의 어느 정도 완성된 시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은 곧 언어에 의한 표현을 요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정신을 집중시킨 표현의 단계, 오랫동안의 산고를 일단 마무리 짓는 탄생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마치 만삭을 맞은 산모가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시의 탄생은 그보다 더욱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고통도 크고 기쁨도 크다.  4) 이렇게 해서 탄생된 한 편의 시는 다시 깍고 보태고 다듬는 단계로 들어간다. 한 편의 시가 탄생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후일 그러한 흥분이 사라지고 냉정한 객관적 태고로 돌아가서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듯이 보면 어떤 결함이나 어색한 점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깍고 보태고 다듬는 퇴고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3. 제목은 어떻게 정하는가?  1) 제목의 중요성  -시의 제목은 그 작품의 주제와 일치하거나 주제를 암시하는 것이 가장 좋다.  (예; 단테의 신곡, 엘리어트의 황무지 등)  ㅇ 작품의 주인공을 제목으로 삼은 것(예; 일리어드, 오디세이)  ㅇ 작품의 중요 제목으로 삼은 것(예; 진달래꽃, 청노루 등)  -시를 쓰는 과정에서 시인이 제목을 정하는 방식에는 대충 다음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제목을 미리 정해 놓고 작품을 쓰는 경우  둘째; 작품을 써가는 도중이나 완성해 놓고 나중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  셋째; 제목이 없이 그저 일련 번호를 매겨서 구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당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라는 제목을 붙이는 경우  -명사, 명사형, 체언구 등의 제목이 있다(편지/생명의 서/내 너를 내우 노니 등)  2) 제목을 정해 놓고 쓰는 경우  -시인 김용호: 시가 먼저 생기느냐, 제목이 먼저 생기느냐 하면, 물론 시가 창조된 이후에 제목이 있어야 할 것은 순서상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상에 있어서 어떤 분은 제목부터 먼저 생각해 가지고 시작한 분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이를 낳기 전에 이름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말 전도하고 할 것입니다. 곧 시를 먼저 다 지어 놓고 그 다음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바른 순서라고 우길 수는 없다. 시인에 따라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은 집을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일에도 비유하여 나는 이러이러한 모양,이러이러한 용도의 물건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먼저하고 그 다음에 집을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제목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제목은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좋은 제목은 주제와 일치하거나 주제를 암시한 것이므로 이 경우에 제목을 미리 정하는 일은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쓰는 경우라고 하겠다.  -시는 내용을 어떻게 형상화하는가, 곧 그 내용을 어떠한 이미지로 만들고, 어떠한 형태로 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3) 제목을 나중에 붙이는 경우  -시를 다 써 놓은 다음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의 내용이나 주제에 적합한 제목, 또는 시의 내용의 한 단어나 어구를 찾아서 붙이는 일이요, 또 하나는 내용이나 주제에 적합한 제목이 필요 없는 경우이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에는 무제 또는 실제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하고 따위와 같이 작품 번호를 붙이기도 한다.(예; 김 춘수의 꽃밭에든 거북)  4. 行은 어떻게 가르는가?  1) 시행의 중요성  -시의 행은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시의 운율과 밀 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시에서는 시행을 line하고 하는데 한 라인은 반드시 음의 강약, 약 강을 단위로 하여 음보의 일정한 수로써 구성된다. 시행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정형시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시행이 얼마나 중요시되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시조는 3장 곧 3행으로 되어있다. 초장 중장 종장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각각 행을 이루어, 시조는 모두 3행으로 정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시행구분의 실제(1)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시행 구분은 기초가 되기 때문에 시행을 구분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음에는 높낮이 외에 강약, 장단 등이 있다. 영시는 이 중에서 강약을 기준으로 운율의 단위를 결정한다.  -7.5조의 정형시의 예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면은  어스러한/ 등불에/ 밤이 오면은  외로움에/ 아품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 몸도 예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만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지난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쳤습니다.  그런 우리 님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워 두었던  옛 이야기 뿐만은 남았습니다.  나날이 짙어 가는 옛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렸습니다.  -김소월, 전문  이 시는 7.5조의 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7.5조는 개화기 때 일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는 하나, 우리나라 전통적 운율인 3음보격도 7.5조로 된 것이 있다.한 행이 7.5조로 되어있고, 한 연이 4행씩 모두 4연으로 되어 있다. 한 시행은 7.5조보다 모자라서는 안 되고, 7.5도 보다 자수가 초과해도 안 된다. 그런데, 이 7.5조는 3(4),4(3),5(2.3 또는 3.2)-로 되어 있다.  한 행이 4.3.5의 음수로 된 3박자, 3음보격의 행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박자나 음보의 단을 이루는 음수(자수)는 같지 않다. 특히 마지막 박자 또는 음보는 5음절로 되어있다. 어쨌든 정형시의 경우, 그 운율 형식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2음보격, 3음보격의 시행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3)시행구분의 실제(2)  -리듬이 시행을 구분하는 요인  -김춘추는 시의 행을 또는 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리듬의 한 단위가 곧 의미의 한 단위라고 할 수 있다.  4) 시의 첫 행  -시의 첫 행은 그 시의 출발이요, 시작이라는 점에서 시인 각자가 자기 체질에 맞도록 익히는 방법밖엔 없을 것 같다.  -유치환, 깃발의 첫 행인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라는 첫 행은 가장 중요한 이미지요 , 만약 작자가 이 대목을 붙잡지 못했다면 이 시는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시의 첫 행은 맨 처음 착상된 이미지거나, 그 시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의 한 토막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보오 에서 시의 첫 행은 대체로 그 다음에 시상을 전개할 전제적 구실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첫 행은 마치 3단논법 중의 연역법의 대전제와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5) 산문시의 시행  -산문시(Prose in poem)에서는 센텐스가 있기는 하나, 자유시나 정형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행 구분이 없음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산문시가 다른 시(정형시, 자유시)와의 겉으로 드러난 차이는 행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연구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산문이란 집중된 정신활동이 아니라 분산된 정신 활동에서 이루어진 글이라는 뜻이 된다. 현대 영국의 문예 비평가인 리이드는 시를 정신의 응축활동이라고 하고, 산문을 정신의 분산 활동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산문이라는 어원적인 뜻이 바로 리이드가 말한 본질적인 의미와 일치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영어의 프로즈(Prose)는 똑바로 가는, 솔직한 꾸밈이 없는 이라는 어원적인 뜻이 있다.  -산문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규칙적인 운율이 있는 문장인 운문과 반대되는 뜻으로서, 규칙적,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운율이 없거나, 운율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안으로 은폐되어 버린 산문율을 가진 문장이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시와 반대되는 뜻으로서, 있는 대로의 사실을 토의하는 문학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였던 몰톤은 시를 창작 문학이라 하여 서정시, 서사시, 극시를 , 산문을 토의문학이라고 하여 역사, 웅변, 철학을 여기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하나 산문시는 산문이 아니라 시라는 점을 도의시해서는 안 될 줄 안다.  -絶頂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기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 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 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정 지 용, 에서  한라산 백록담의 敍景, 다시 말하면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산문시인데, 여기서는 리듬에서 거의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센텐스와 센텐스 사이의 의미의 단절이나 비약이 심하지 않고, 따라서 의미의 소통도 매우 자연스럽다. 이것이 산문시의 특징이 될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산문시를 행 구분을 하여 자유시로 바꾼다면, 아마도 김이나 맥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느껴질 것이다.  -산문시는 산문체로 씌어졌을 때, 곧 산문체로 조직되었을 때, 시로서의 凝縮感(응축감), 집중감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로서의 보다 효과적인 통일감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5. 詩와 素材는 어떻게 다른가?  1)시와 소재  -시를 처음 써보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시를 웬만큼 서본 경험이 있는 시인도 소재나 제재를 시라고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의외에도 많다.  깊은 山谷  외딴 草家  사뭇 외롭다.  -김 태오, 제1연  이것은 소재, 다시 말하면 작자의 감정이 약간 반영된 소재를 헹가름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자기의 시집에 수록하고 잇는 걸 보면 작자는 일단 시라고 생각한 것 같다. 김춘수 시인은 이 대목에 대하여 山谷이니 草家니 하는 심상들이 상식적이고 따분하여 통속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기 때문에 시로서 지금의 우리에게 호소해 오는 힘이 거의 없다, 상상의 힘이 약했던 결과라 할 것이다.  -김춘수, 에서  여기서 필자가 소재라고 하는 것이, 바로 , 따위와 같이 경험한 사물을 단순히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소재의 나열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이것을 다시 상상력의 용광로 속으로 넣어서 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가. 세계의 民主主義의 씨를 뿌리고  세계의 民主主義 꽃에 물을 주는  民主主義園丁  나. 순이야. 영이야 .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는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느린  차 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빰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서 정 주, 전문  앞에 인용한 정치 구호 같은 似而非詩와 비교하면, 가 어떠한 것인가를 담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은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죽음의 문이 굳게 잠긴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상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등은 광복을 맞이하여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감격과 기쁨울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가 광복에 대한 우릴 민족의 그지없는 감격과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 소재와 언어  -소재의 素는 염색하지 않는 흰 비단을 의미한다. 시의 소재란 시를 구성하는 재료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를 언어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어의 예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쓴 최초의 시인은 정지용이며, 그러한 사실을 되풀이하여 강조한 시인이 김기림 이었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는 말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시를 구성하는 재료는 언어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시를 만드는 재료를 나무. 돌. 산. 냇물. 꽃등의 사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시의 재료는 그러한 사물을 가리키거나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런데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어는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노만파 시인인 워즈워드가 일상어를 시어로 쓰기를 주장했고, 1930년대의 김 기림이 또한 일상어를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일상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테면 책상의 재료(소재)는 목재이지마는, 목재가 그대로 책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목재를 적당한 길이로 자르기도 하고, 대패로 반들 밤들하고 매끄럽게 깍고 다듬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 잇고 맞추어 설계한 대로의 형태로 구성해야 한다. 여기서, 목재 하나하나를 자르고 깍고 다듬는 단계와 그것을 잇고 맞추어 전재의 형태로 구성하는 두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의 소재인 언어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하겠다. 일상어를 소재로 하지만 그 일상어를 깎고 다듬어야 하며, 그렇게 한 소재를 다시 의도한 대로의 형태로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물아  쉬임없이 끝없이 흘러가는 물아  너는 무슨 뜻이 있어  그와 같이 흐르는가.  이상하게도 나로 하여금  애를 태운다.  끝 모르는 지경으로 나의 혼을  꾀이어간다. -오 상 순,   여울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정 지 용, 제 5,6연  A와 B를 비교해 보면 언어를 갈고 닦은 수준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3) 소재의 시대적 변천  -소재는 시대에 따라 또는 시인 개인의 기호에 따라 늘 바뀌고 있는 것이다. 는 것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소재의 종류라고나 할까, 소재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바뀐다는 뜻이 있고 , 둘째는 소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도 있다. 전자는 어떤 한 시대에는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시가 많이 쓰이었는데, 다른 시대에는 사회의 사건이나 여러 가지 사회 현상을 소재로 한 시가 많이 쓰인다는 뜻이다. 후자는 같은 소재가 시대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인의 관심을 끌고는 있으나 그것에 대한 해석, 또는 의미의 발견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갑오경장(1894)~1910사이의 창가, 신체시-계화 계몽과 관계-조국의 자주 독립, 신문명의 예찬, 미신의 타파와 새 교육의 장려  *1918년 김 억의 시,1919년 주요한의시-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담은 서정시를 쓰기 시작함  -봄날에 달을 잡으러/두른 그림자를 밟으며 갔더니/바람만 언덕에 풀을 스치고/달은 물을 건너가고요.  봄날에 달을 잡으러/금 물결 헤치고 저어 갔더니/돌 씻는 물소리만 적적하고/달은 들 넘어 재 넘어 기울고요/........................주요한,   *1930년 전후부터와 의 노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김기림 등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나 감정대신에 지성을, 음악성 대신에 회화성을 도입하기 시작한 모더니즘 시 운동은 도시와 문명에서 소재를 가져오게 되었다.(김광균-와사등: 방향을 잃은 도시인의 비애를 읊은 시)  *1940년 전후-청록파-자연친화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박두진(1945년 해발표), 조지훈, 박목월등의 세 시인은 문장(1939)지를 통해 정지용의 추천을 받고 시단에 데뷔-자연을 소재로, 조 지훈의 고전적 불교적인 정서, 박목월의 토속적. 민요적 율조, 박두진의 기독교적 희구와 이상형의 동경  4) 소재의 해석  시대가 바뀌면 소재도 따라서 바뀌게 되지만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소재들이 얼마든지 있다. 옛부터 시의 제재가 많이 되어온 하늘.해.달.산.강.바다.꽃.바람등은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시의 소재가 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인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소재를 해석하는 내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같은 소재를 얼마든지 되풀이하여 계속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오, 보아라,푸른 하늘가를/읽어 버린 고운 노래의/나직한 가락처럼/흰 구름 둥실 떠 흘러감을!//오랜 여행의 途上에서/방랑의 온갖 슬픔과 기쁨/맛보지 못한 어떠한 가슴도/구름을 이해하진 못하리라.//태양 모양 바다와 바람 모양으로/희고 정처 없는 것이 나는 좋아라./그것들은 집 없는 것이 나는 좋아라./그것들은 집 없는 사람에게는 /누이이며 天使이기에.  -헤르만 헤세,전문  6. 이미지는 어떻게 만드는가  1) 想像의 기능  -사람은 누구나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 특히 시인은 강력한 상상력(imagination)이 없으면 아무것도 슬 수 없다. 상상력은 시를 쓰는 시인의 가장 중요한 무기이다. 상상은 과거에 보고 듣고 겪었던 사물의 이미지를 마음 속에서 다시 생각해 내는 일이다.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은 감각적 模象 또는 인상인데, 이것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임즈는 재생적 상상(reproductive imagination)이라고 하여, 생산적 상상(productive imagination)과 구별하고 있다. 곧 재생적 상상이란 지난날에 겪었던 이미지가 변화 없이 그대로 다시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생산적 상상은 지난날에 겪었던 이미지들에서 선택된 여러 가지 요소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의 통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상상이라고 할 때에는 주로 후자를 두고 이르는 것이다.  -상상의 주된 기능은 과거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통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두 가지 과정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다.  첫째,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결합하는 단계, 곧 다르거나 관계가 먼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거기서 어떤 유사점을 찾아 결합하는 단계이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觀念 聯想이란 바로 이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상을 연합적 상상(associative imagination)이라고 이른다. 둘째, 이와같이 이미지들을 결합함으로써 그 모습과 의미가 바뀌어 새로운 이미지들의 단계를 우리는 창조적 상상(creative imagin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상이 이미지를 결합해서 새로운 이미지의 통일체를 창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계적을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상상력에는 시인의 情緖와 思想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고래가 이제 횡단한 뒤  海峽이 天幕처럼 퍼덕이오 정 지용, 의 1연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김현승, 전문  에서는 고래,해협,천막의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해협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사물들의 밖에서 되도록 그 사물 속으로 뛰어들지 않으려는 객관적 태도를 보여 주고 있으나, 그러나 이 시인만이 보는 마음의 눈에 의하여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해협의 이미지가 창도되어 있다. 그리고 인해의 어떤 의미나 사상은 배제되어 있다.  반대로 에서는 이미지에 대한 사상적 추구가 더욱 치열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단지 불꽃과 눈송이의의 연결이지만 불꽃은 신의 뜨거운 사랑을, 눈송이는 믿음이 식은 약한 신앙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신앙이라는 정신적 가치, 또는 의미를 깨달아서 그러한 정신적 가치가 들어 있는 대상을 표현한 것이다. 곧, 사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러한 상상을 해석적 상성(interpretative imagination)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우리는 이상에서 연합적 상상, 창조적 상상, 해석적 상상을 대충 알게 되었다. 연합적 상상은 관념이나 이미지들을 어떤 유사점에 의하여 결합하는 것이고, 창조적 상상은 그러한 결합에 의하여 이미지의 전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해석적 상상은 정신적 가치나 의미를 깨달아 그것이 들어있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비평가인 윈체스터가 분류한 것이다.  상상 또는 상상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시론이나 시 짓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리처즈는 상상력의 여섯 가지의 의미를 들고 있으나 그 중 세가지만 들면, 첫째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 둘째는 직유나 은유와 같은 비유를 만들어 내는 것, 셋째는 통합적,마술적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 중에는 비유 없는 것도 있으나, 대체로 대부분의 이미지는 은유 또는 직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리처즈는 상상력의 여섯 가지 의미 중에서 여섯째의 통합적,마술적 상상력을 가장 중요시한다.  2) 시상과 이미지  앞에서 상상력은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 바 있다.  상상력(imagination)과 이미지(image)는 그 어원도 같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 상상과 공상(fancy)과의 다름이 실제의 작품에 있어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 지를 살펴보자.  오후 두 시  머언 바다의 잔디밭에서  바람은 갑자기 잠을 깨어서는  휘파람을 불며 불며  검은 조수의 떼를 몰아가지고  항구로 돌어옵니다.  -김 기림, 에서  빛이 잠드는  따 위에  라일락 우거질 때,  하늘엔 무엇이 피나,  아무 것도 피지 않네  산을 헐어  뚫은 길,  바다로 이을 제,  하늘엔 무엇을 띄우나,  아무런 길도 겐 보이지 않네  바람이 수러대는  아름다운 깃발들  높은 성을 에워쌀 제,  하늘엔 무슨 소리 들리나,  겐 아직 빈 터와 같네.  -김 현승, 전문  우리는 우선 이 두 편을 비교하여 그 이미지의 차이를 살펴보자. 그리고 이 차이를 깨닫는다는것은 자기의 시짓기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을 따라 자기의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김 기림의 작품부터 살펴보자. 이 작품은 6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다. 먼 바다의 바람이 검은 조수를 몰아 항구로 불어오는 광경을 그림과 같이 단순히 쾌적하게 묘사한 것이다.  심원한 감정, 어떤 인생의 의미,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상상력이 아니라 팬시로 만든 이미지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현승의 시는 그렇지 않다. 감각적인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육체와 영혼 곧 지상과 턴사의 상반 대립되는 이미지들의 통합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김현승 시인의 시는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시임을 알 수 있다.  3) 이미지, 그 순수성과 관념성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경험한 사물들은 어떤 관념, 어떤 사상으로 기억 속에 남기보다 감각적 이미지로 더 많이 남는다. 논리나 관념은 잊어버리기 쉬우나 이미지는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갑자기 친구의 이름을 잊어버려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서 무척 당황할 때가 있고, 그릐 얼굴의 이미지는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나 이름은 더 오르지 않아서 애를 먹는 일을 흔히 경험한다. 좋은 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시, 절실한 감동을 주는 시도 생생한 사상이나 논리보다 그러한 이미지로 구성된 시일 것이다.  시에 있어서 이미지, 특히 시각적 이미지가 중요시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부터 하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즘 운도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파운드는 수많은 작품을 쓰는 것보다 일생동안 단 하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좋다.(It is better to present one IMAGE in a lifetime than to produce voluminous works)라는 유명한 말을 한 바 있다.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선창으로  눈썹까지 부풀어 오른 수평이 엿보고  하늘이 한폭 나려 앉아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정지용, 의 제 1.2연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 광균, 에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팰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의 첫 3행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중의 1연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의 제1연  우리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이러한 이미지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이미지를 만든는 일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미지는 상상력이 만들어 낸 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미지란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가장 쉽고 일반적인 대답은 , 라고 말할 수 있다.만이 시의 절대적 요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시는 비유 있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고 또 그렇게 구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소월의 시에는 비유 없는 이미지들이 있다. (예:진달레 꽃, 엄마야 누나야)  현대에 와서 시를 사물시(physical poetry)와 관념시(Platonic poetry)로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사물시라는 것은 사상이나 어떤 의지를 배재하고 사물의 이미지를 중시한 시인데, 이미지즘 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반대로 관념시라는 것은 사물의 이미지보다 어떤 관념 서세계를 드러내어 독자로 설득 시키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인생이나 세계를 어떤 고난으로 파악하여 표현한 시가 관념시이다. 의지의 시라고도 하는데 노만주의 시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구별은 현대 미국의 신비평가인 랜슴이 처음 말한 것인데 이후 시론의 주요한 술어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제가 현대시의 주요한 경향으로 논의된 바 있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 끊임없이 /열마리씩/스무마리씩/신선한 물고기가/튀는 빛의 꼬리를 몰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가장 신나게 시퍼런/파도의 칼날 하나를/집어 들었다.  전 봉건, 전문  이 시는 사물 이미지로 구성된 사물시라고 할 수 있다.  교회당/십자가에 못박힌/ 음산한/겨울/-마침내는 눈이 내린다/바람이 햝고 간/감기 든 골목에/코 먹은/저음./-나직이 기침하는 우수의 숲  조 영서,  이 시도 역시 사물이미지로 구서오딘 사물시다. 제 1연은 눈이 내리는 음산한 겨울 날씨를, 제2연은 싸늘한 겨울 바람이 골목을 휩쓸고 간 광경를 각각 묘사한 것이다.  이상 말한 작품등은 모두 사물이요, 이미지즘 계열의 작품이다. 흄이 말한 공상에 의하여 창조된 순수 이미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에서  논개의 애국 순절이라는 관념 세계를 읊은 것이다. 관념시는 사상과 더불어 격렬한 감정, 어떤 의지, 병적인 감상 등을 표현 하나 그 사상에서 벗어나서 그 사상을 다시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 밤이 다하기 전에/이 무한한 벽을 뚫어야 하는 囚人/또는/허무를 데굴대는 쇠똥구리.  -유치환, 전문  관념시로서 성공한 작품인 것 같다. 이 시는 벽 속에 갇힌 죄수나 허무 속에 데굴대는 시똥구리와 같은 자아의 존재 상황이라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 인생과 관련된 관념시이다.  4) 形而上詩의 이미지  사물시나 관념시는 보는 관점 특히 형이상시의 입장에서 보면 각각 한 쪽으로 치우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랜슴 같은 이는 바람직한 제 3의 타입으로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를 내세운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네 마음은/네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있다./마치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나의 피를 뿌리고/살을 찢던/네 이빨과 네 칼날도/ 내 마음의 아득한 품속에서/어린아이와 같이 잠들고 만다./마치 진흙 속에 묻히는 납덩이와도 같이./............이하중략......  이 시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사상을 감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상을 감각화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7. 비유는 어떻게 만드는가  1) 비유의 발생  비유(Figure of speech)는 詩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지만, 시만이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담화나 산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교통전쟁, 입시지옥, 등은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찌 뿌린 날씨라는 말도 예사로 쓰고 있다. 책상다리, 시계 바늘, 싸늘한 목소리 등과 더불어 시적 비유로서는 죽은 비유, 곧 死比喩(Dead Metaphor)라고 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이나 산문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다. 언어는 음성, 의미, 대상의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표현의욕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비유를 쓰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감정을 아주 압축하여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시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 봉에 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 청청하리라」라는 시조도 알고 있다. 까마귀, 백로, 소나무 등이 상징하는 의미는 조선조 사회의 윤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상징이 가능한 것이다. 까마귀를 「逆臣」,백로를 「忠臣」, 소나무를 「節槪」로 보는 상징은 그러한 윤리의 반영이다.  일상적인 언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전달하지만, 비유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은 우리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한 가지 일이며, 이것은 천재의 표시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은유는 천재의 표시이다.  2) 성공한 비유와 실패한 비유  비유를 흔히 기교의 한 가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수사법 전체를 기교하고 보는 이가 있으므로 비유를 기교라고 본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정신이나 상상력이 거으 고려되지 않는 기교는 손재주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비유를 기교라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이건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비유, 참신하고 발랄하고 매력 있는 비유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연면 4천년의 역사를 꿰뚫어 흐르는 「민족혼」위에 터를 닦으라.  불같이 뜨겁고 샘같이 정한 「동포애」의 갸륵한 마음씨로 주춧돌을 놓으라.  독립 자주의 굵고 둥글고 미끈한 대리석 기둥을 화려하게 다듬어 세우라.  이 시는 그 나름대로의 건축적인 뼈대는 가지고 있다.  는 것이다. 민족혼 위에 터를 닦으라, 불같이 뜨겁고 샘같이 정한 동포애, 독립 자주의 굵고 둥글고 미끈한 대리석 기둥을 등은 모두 비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상을 자극하는 것도 별로 없고, 미적 쾌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비유들은 결코 성공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유란 원래 설명을 줄이고 압축하여 새로운 의미로 전환시키는 데서 매력과 생명감을 느낄 수 있는 데, 여기서는 비유자체가 너무도 논리적이어서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제목이 인데 이 주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 같다. 민족혼, 동포애, 독립 자주 등의 관념어를 겉으로 드러내지 말고 생략하거나, 은밀화해야만 비유로서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옛 시인들은 은유, 직유, 같은 비유를 전혀 몰라도 그들의 작품에서 뛰어난 비유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黃眞伊의 「동짓 달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라는 시조도 그런 보기의 하나이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 밤새 울었다.  -서 정 주, 전문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비유는 「꽃처럼 붉은 울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교를 일부러 부려서 만든 조각의 티가 조금도 없는 깨끗한 이미지이다. 天刑의 병이라고 할 수 있는 문둥이의 자기 운명에 대한 처절하고 도 참혹한 슬픔의 울음임을 알 수 있다. 성공한 비유의 일례이다. 언어나 언어로 이루어지는 비유는 사물이나 세계의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직유와 은유  비유는 언어 자체가 가지는 본질적 기능이다. 언어는 그 수나 그 의미에 있어서 한계가 있으나, 비유에 의하여 무한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  직유(Simile)나 은유(Metaphor)등의 비유를 성립시키는 근거라고 할까, 조건이라 할까 그런  것을 좀 살펴보자.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나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비유에는 두 가지 사물, 두 가지의 의미의 비교가 있어야 한다. 에서 보는 바와 같이, , 이라는 두 개의 사물이 연결되어 비유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구약 성서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천지 창조, 에덴 동산,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에덴에서의 추방, 이러한 신화도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으로서의 비유와 상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모든 비유는 두 가지의 다른 사물, 다른 의미의 비교에서 성립된다. 이질적이며 상반되는 두 사물 사이에서 어떤 유사점이 발견되어 그 유사점을 근거로 연결되어야 비유가 효과적으로 성립된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 논개 >  이런 경우에는 비유가 되는지, 얼른 대답하기가 어렵다. 비유가 된다면 직유인데, 강낭콩 꽃과 물결, 양귀비꽃과 마음의 단순한 비교하고도 할 수 있고, 직유라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우리가 직유라고 할 때에는 「처럼」「듯이」「같이」등의 연결어로 본의와 유의가 연결되어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보다도」와 같은 차이 보조사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등은 형식적으로는 직유의 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직유가 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둘째, 비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본의와 유의는 「이질적」인 것이라야 한다. 이질적이라 함은 종류의 차원을 달리 한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 생물과 무생물,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밝음과 어둠, 슬픔과 기쁨 등, 서로 다른 종류거나 모순 상반되거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갈대가 아니다」라는 부정이 전제되어 이 비유는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와 같이 이질적인 두 개의 사물에서 어떤 유사성 또는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가령「내 사랑은 빨간 빨간 장미꽃 같다」라는 유명한 시구에서 「사랑」과 「장미꽃」과의 유사성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님이 입고 있는 의상, 또는 님의 얼굴이 장미꽃과 같다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경우에는, 님에 대하여 느끼는 아름다움의 정서와, 장미꽃에서 느끼는 아름다운 정서-말하자면 정서의 유사성을 기초로 연결된 직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비유 구조의 요소는 (1) 본의(本義) (2) 유의(喩義) (3) 이질성(異質性 (4) 유사성(類似性)의 네 가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네 요소가 어떻게 결합되고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보아서, 직유.은유.상징 등으로 크게 구별 된다.  백악관 앞/ 휑한 거리에/호머의 싯귀 같은 낙엽이/ 바람 따라 휘몰려 가는 거리./그들의 몸집같이/세계 제일 큰 로마식 건물이며/돔식 국회 의사당/그 돔처럼 뚱뚱한 경비원이 지키는/상하양원은 비어 있고/ 관광객 코리아의 발자국 소리가/ 한 동안 복도를 울린다.  -김 규 화, 에서  이 시에서는 직유가 네 군데 있다. 이 중에서 「그 돔처럼 뚱뚱한 경비원」이라는 직유를 분석해 보자 등의로 분석되는데, 보는 바와 같이 비유 구조의 네 요소가 다 겉으로 드러나 있다. 직유의 경우에는 대체로 네 요소가 다 표면으로 드러난다.  다음에는 은유를 분석해 보자.  는의 두 요소는 표면에 드러나 있으나, 이질성과 유사성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해석에 의해서 그것을 찾아 낼 수 는 있으나, 어쨌든 안으로 숨겨져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Symbol)의 경우에는 「유의」만이 표면에 드러나고, 본의.이질성.유사성 등은 모두 숨어 버린다. 흔히 비둘기는 평화를, 여우는 교활성을, 십자가는 죽음과 같은 희생을, 까마귀는 음흉성을 각각 상징한다고 말한다. 이 경우, 표명에 드러나는 것은 들뿐인데, 이것들은 모두 유의이다.  4) 의인법, 제유, 환유  의인법(Personification)은 앞에서 설명한 은유의 특별한 한 종류이다. 보통 활유(活 )라고도 말한다. 수사학자들 중에는 일찍이 은유를 나누어,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어 표현하는 은유와, 반대로 생명이 있는 것을 무생물로 만드는 은유의 둘로 구별하고 있다. 이를테면 로마시대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가 그렇게 나누고 있다. 이 경우 앞에 것이 이른바 의인법이다.  창유리에 등을 비비는 노오란 안개  창유리에 주둥이를 비비는 노오란 연기  밤엔 나무도 잠이 든다.  -T.S. 엘리어트, 에서  잠든 나무의 고른 숨결소리  자거라 자거라 하고 자장가를 부른다.  -이 형기, 에서  안개와 연기, 그리고 나무를 의인화 또는 생명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의인법은 위로는 신에서부터 아래로는 나무나 돌에 이르기까지 다 가능하다. 의인법은 감정적 오류라고도 하고 , 감정이입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것이다. 감정적 오류는 감정이 없는 무생물에 감정이 있는 것처럼 인식한 다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말하는 것 같고, 감정이 없는 예술 작품이나 자연의 대상에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정신을 투영하여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생명을 생명 없는 사물로 만들어 표현하는 은유는 의인법과 반대적인 것이다. 이것을 어떤 이는 결정법(結晶法)이라고도 말한다. 「사람은 갈대다」도 일종의 결정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愛憐에 물들지 않고  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 치 환,   흔히 의지를 드러낸 시라고도 말한다. 그 의지란 인간적인 생명, 모든 감정, 모든 생각, 모든 소리, 다시 말하면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버리거나 없애거나 잊어버리고 「바위」같은 비정적인 사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존재, 곧 실존을 초월하여 사물 자체의 존재, 즉자 존재(卽自 存在)가 되고자 의지한 것이다.  이 작품이 암흑 시대인 일제식민지 시대에 씌여진 작품임을 생각할 때, 오히려 현실과의 단절을 의지하는 작자의 처절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의 종류가 몇 가지나 되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으나 자세하게 나누면 약 250가지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비유를 인접의 비유(Figures of contiguity)와 유사의 비유(Figures of similarity)로 나눌 수 있다. 유사성이란 본의와 유의의 유사성을 말한다. 본의와 유의의 관련성을 가진 비유를 인접의 비유라고 하고 인접의 비유의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제유와 환유이다. 제유에 있어서는 유의가 나타내는 의미나 사물이 전체의 한 부분인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부분이(유의) 그것의 전체(본의)를 나타내는 것을 제유라고 한다. 따라서 제유는 본의와 유의와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 혹은 유(類)와 속(屬)의 이른바 양적 관계이다. 미국 대통령을 백악관, 임금을 왕관, 또는 금관, 한국의 대통령을 청와대, 미국이나 미국정부를 워싱턴, 일본이나 일본 정부를 토오쿄오 라고 부르는 것도 환유이다.  8. 상징과 알레고리는 어떻게 만드는가  1) 象徵  비유의 방법을 설명할 때 상징(Symbol)도 은유나 직유와 마찬가지로 본의와 유의가 있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다만 상지의 경우, 비유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곧 본의, 유의, 유사성, 이질성 중에서 오직 유의만이 겉으로 드러나고 나머지는 모두 숨어 버린다는 것도 설명하였다. 이를테면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고 볼 때, 비둘기라는 유의만이 겉으로 드러나고, 나머지는 모두 숨어버리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노만파 시인인 워즈워드의 와 같은 시에서 무지개를 상징으로 본다면 그 의미(본의)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워즈워드 자신도 무지개는 무엇을 상징한다고 미리 마음속에서 정해 놓고 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영국의 상징주의 시인이라고 하면, 예이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이츠는 시의 상징 외에 회화의 상징을 들고 있다. 시의 상징에서는 정서 상징과 지성상징으로 나누어서 보고 잇는 것 같다. 정서를 환기하는 것은 음조, 색채, 형식 등이 서로 음악적인 관련을 가질 때 정서를 환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얀 달은 하얀 물결 뒤로 지고  시간은 아 나와 더불어 지는 구나!  로버트 번즈의 시로서, 이른바 정서 상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수의 정서를 환기하는데, 햐얀 이라는 수식이 특히 그러한 역할을 다하는 것 같이 보인다. 하얀 달, 하얀 물결, 그리고 시간이 와의 관계는 지성으로서는 그 정서를 음미할 수 있다. 이 대목은 따라서 은유적이라기 보다 상징적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상징주의의 두 경향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사상을 사상 그대로, 감정을 감정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가장 서투른 방법이다. 는 표현은 시가 되지 않으나, 는 표현은 시가 된다. 는 것은 사랑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이다. 구체적 이미지는 마치 이미지즘 시처럼 거기서 사상이나 감정을 배제한 순수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 그것은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환기한다. T.S 엘리어트는 그것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말한다.  가령  3) 풍유  이제 우리는 풍유, 곧 흔히 알레고리(Allegory)라고 하는 비유법을 살펴봅시다. 현대 시에서는 옛날 시만큼 알레고리를 많이 쓰고 있지는 않지만, 많이 씀으로써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레고리는 직유, 은유, 상징등과 마찬가지로 원래 나타내고자 한 뜻과,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비유로 끌어들인 뜻-곧 본의와 유의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감장새 작다 하고 大鵬아 웃지 마라./ 구만 리 長天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一般飛鳥이니 네오 긔오 다르랴. -李 澤-  감장새와 대붕을 등장시켜 사람을 함부로 깔보고 멸시해서는 안 되는 뜻(본의)을 나타내고 있다. 풍유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이와 같이 동물, 식물 등을 의인화한 이야기, 곧 일종의 우언(寓言)이라고 하겠다. 이솝의 우화, 신약성서의 탕아의 비유(마태 13장~9절) 등은 모두 이러한 우언이다. 그런데 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우화는 알레고리와 구별하기도 하고 , 알레고리 속에 포함시켜서 보는 경우도 잇다. 굳이 구별 한다면, 우화는 거의 동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유의를 이루고, 교훈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으나, 알레고리는 사람도 등장할 수 있으며, 반드시 교훈적인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현대시에서는 알레고리가 직유, 은유 만큼 즐겨 쓰이지는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오늘의 문학작품은 그 시인, 그 작가의 개인의 사상 감정이나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생각, 둘째는 감각적으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현상만이 진실한 세계라는 생각-이 두가지 이유 때문인 것같다. 그리이스 로마의 신화, 성서의 많은 비유담이 모두 알레고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살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신소설인 안국선의 , 조지 오웰의 등도 모두 알레고리 소설이다. 흔히 우리는 현실의 부조리를 들먹거리고 현실 비판이니 참여 문학이니 하는 말을 쓰고 있다. 부조리라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려고 할 때 노골적으로 또는 직설적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동물이나 식물을 의인화한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현실의 보조리한 어떤 단면을 암시할 수 있다.  ㅡ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알레고리는 결코 죽은 비유법이 아니라,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과 방법을 열어 주는 중용한 분야임을 알게 될 것이다.  9.감정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1) 感情과 情緖  우리는 흔히 知, 情, 意라는 말을 쓰는데, 감정은 이 중의 정(情)에 해당하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미묘하고 복잡하고, 다양해서 일일이 다 들 수는 없으나, 우리가 느끼는 심정의 모든 움직임은 다 감정이라 할 수 있다. 감정은 주관성과 개별성을 가지고 있음이 그 두드러진 특징이다.  감정이라는 말의 영어(Feeling) 나 독일어(Gefuhl)는, 는 뚯의 동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또 프랑스어의 감정도 추위나 더위를 느낀다는 듯의 동사에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감정이 일어나는 원인은 사물과의 접촉, 곧 본다든지, 듣는다든지, 맡는다든지, 만진다든지 하는 감각적 자극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이러한 감각적 자극에서 형성되는 자기의 기분, 자기의 느낌, 자기의 심정 등이 감정이다. 그러나 사물의 자극을 깨닫거나 인식하느 感性이나 知覺과는 다른 것이다. 시에서는 감정이라는 말과 정서(Emotion)라는 말이 섞이어 쓰이고 있다. 근래에는 정서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기도 한다. 정서란 감정 주에서 격렬하고 육체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情動이라는 말을 대신해서 쓰고 있다. 아이들이 운덩에서 우승을 했거나, 상을 탔거나 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깡충깡충뛰면서 기뻐한다. 그 때의 기쁨도 몸짓을 동반한 정서다. 정서란 일시적 현상이긴 하나, 이와 같이 몸짓을 동반한 격렬한 감정인 것이다.  내 마음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혀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김영랑, 전문  감정 중에는 情操(Sentiment)라는 것이 있다. 학문, 도덕, 종교와 같은 일정한 문화 가치를 가진 사물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통합된 것을 가리키거나,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변함이 없고 계속적인 것이면 그것도 정조라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계속적인 애정은 정조이다. 또 우리는 시에서 어버이의 사랑을 읊은 시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시에 표현된 감정도 정조이다. 부부의 사랑도 계속적이며 변함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도 정조이다. 백제 가요인 는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남편의 신변을 염려하는 심정을 읊은 것인데, 여기에 표현된 애정도 일종의 정조이다.  당신은 신앙이 있습니까? / 사나이의 영혼이 북극성처럼 빛났다.  당신의 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전도사가 다시 물었다. / 사나이는 묵묵히 돌아서서  어머니가 묻힌 청산을 가리켰다. -임병호, 전문-  이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읊은 거이다. 돌아가신 후에도 신앙처럼 변함이 없는 이 애정은 분명히 정조하고 할 수 있다.  2) 감정과 센티멘탈리즘  19세기 영국의 노만파 시인인 워즈워드는 시를 정의하여, 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감정이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19세기 노만주의 시인들은 지성이나 시의 형태보다도 특히 감정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러니까 노만주의 시는 힘차고 풍부한 감정을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이 없이 자연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주정주의(主情主義)의 태도하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감정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에서 특히 감정이 중시된 시대는 1919년 전후의 일, 특히 장미촌 ,폐허, 백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그 자체의 역사적 의의는 크나 이 운동의 실패로 인한 실망, 좌절, 불안, 근심, 울분, 허무, 고독등의 시대적 분위기, 일본을 거쳐 들어온 유럽의 세기말의 사조, 당시의 시인들이 대부분 20대의 젊은 나이라는 점-이러한 조건 때문에 당시의 시들이 감정 표현을 위주로 노만주의적 경향으로 달린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현실을 잃은 감정의 무한한 세계가 도달할 수 있는 종착지는 바로 이러한 센티멘탈리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3) 지성과 감정  감정의 과잉에서 마침내 센티멘탈리즘으로 빠진 노만주의 시에 대한 비판이 1930년 전후부터 불길처럼 일어 나기 시작했다. 모더니스트로 자처한 시인은 시와 이론의 양면에 걸쳐 1920년 대의 센티멘찰리즘의 시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우리 나라의 시사(詩史)를 지성 중시의 모더니즘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몫을 떠맡았던 것이다. 1935년 지에 발표한 김기림의 이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또한 시를 감정에 맡겨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감정은 늘 혼돈하려고 하고 비만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감저으이 비만이 다시 말하면 감상이다. 시를 이러한 비대증에서 건져내서 그것에게 스파르타 인과 같은 건강한 육체를 부여하는 것이 오늘의 시인의 임무다.  이와 같이 모더니스트는 노만주의, 특히 감상적 노만주의를 배척하고, 지성을 내세우면서 시의 명랑성과 건강성 및 회화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김 기림이 배척한 것은 물론 노만주의만이 아니다. 노만주의와 관계가 있는 모든 사조, 이를테면 휴머니즘, 톨스토이적인 인도주의, 무의식의 세계와 꿈의 세계를 기록하는 초현실주의, 영감, 시의 애매성, 자연만을 읊고 문명과 도시를 외면한 시-이러한 것들을 모두 배척한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의 이론적 업적으로는 (1) 시에서 감정보다는 지성을 중시한 점 (2) 시의 음악성이나 시간성보다는 이미지의 조형을 중시하여, 시의 명랑성, 회화성, 건강성을 회복하려고 한 점, (3) 시의 방법이나 기교등에 무관심했던 종래의 태도를 비판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주장한 점 (4) 자연이나 개인의 감정마을 읊던 종래의 태도에서 도시와 문명으로 눈을 돌리게 한 점, (5) 현실을 등진 상상의 무한한 비상에 제동을 걸고 정확하고 한정된 이미자를 창조하는 상상력을 곧 지적 상상력을 내세운 점 등이다.  (A) 바다는 다만 / 어둠에 반란하는/ 영원한 불평가다.  바다는 자꾸만/ 헌 이빨로 밤을 깨문다.  (B) 보라빛 구름으로 선으로 두른/ 회색의 칸바스를 등지고/  구겨진 빨래처럼/ 바다는/ 산맥의 첨단에 걸려 퍼덕인다.   1920년대의 황석우, 박종화, 이상화, 박영희 등의 노만파 시인들의 작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만파 시인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어둠, 눈물, 꿈, 한숨, 죽음, 허무 등의 감정을 볼 수 없다. 감정의 노출보다는 그러한 감정을 되도록 제거하고, 대상을 그림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센티멘텔리즘을 거부하고 건강하고 밝은 명랑성을 통제하고 계획된 이미지로 그려낸 것이라고 하겠다.  4) 지성의 기능  흔히 지성(Intellect, Intellegence) 이라고 하면 인틸렉트아 인텔리전스는 구별할 수도 있다. 사고 나 사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지성이란 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이 속에는 사고 나 사색도 포함될 수 있고, 비판이나 판단 작용도 포함될 수 있다. 이미 모더니스트의 시에서 본 바와 같이, 지성은 감정과 상상력을 통제하고,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방향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과 상상력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지성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생각된다.  10. 기법은 어떻게 향상되는가  1) 기법의 다양성  이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머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시에 사상이 없다는 뜻이요, 손재주란 이른바 기법(Technique)에만 능숙함을 이르는 말이다. 시의 기법은 삶과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그런 근원에서 의식적으로 확립된 것이라야 할 것이다.  리듬, 이미지, 시어, 시의 구조 은유, 직유, 상징, 알레고리 등의 비유-이 모두가 기법이라면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기법을 익히는 과정으로서 (1)정형시에서 자유시로 나아가는 과정 (2) 언어에 대한 감각의 훈련 (3) 시의 발상 차원의 단계 (4) 객관적 상관물 (5)중층 묘사 (6) 자동 기술법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2)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시를 처음 써보는 사람은 을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정형시에서 자유시의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희곡에서 먼저 그 구조와 구성의 엄밀성을 배워 두는 일은 시작의 기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먼저 정형시를 익혀야 할 이유를 좀 알아보기로 하자. 시조를 먼저 써보라는 것은 반드시 시조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조가 가지고 있는 정형적 구조를 익혀, 그 형식적 규제를 터득하는 것이 자유시의 전제적 토대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김 상옥, 전문-  이것을 숫자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3 4 4 4 (4음보)  3 4 4 4 (4음보)  3 5 4 3 (4음보)  이것은 기준이 되는 자수율이고, 실제의 작품은 이 기준에서 다소 오르내리고 있다.  시조 짓기에 있어서 종장 초구 3자는 반드시 , 그 다음의 5자는 되도록 지키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자수율의 통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시의 형식적 구조의 체득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 절구는 起, 承 , 轉, 結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시상의 전개과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기는 시작이요, 승은 그것을 이어받아서 부연(敷衍)전개하고, 전은 전개된 시상을 한 번 크게 전환시키며, 결은 끝 맺는 것이다. 시조의 시상 형성 과정도 대체로 이와 같으나 종장은 전결을 포함한다. 정형시부터 먼저 써보고 그 다음에 자유시로 넘어가는 것이 바른 순서인데, 이러한 순서를 밟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율격의 묘미를 터득하게 된다. 율격이라는 것은 음수의 제한이 있다. 리듬의 제한 속에 들어감으로써 사상 감정과 리듬의 조화 , 사상 감정이 리듬에 미치는 영향, 반대로 리듬이 사상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러한 두 요소의 구조적 관계를 유기적으로 터득하게 된다.  둘째, 의 묘미를 터득하게 된다. 압축과 생략은 산문과는 다른 시의 본질적 측면인데, 이런 측면은 은유나 상징과 같은 비유에서도 가능하지만, 율격에서 받는 형식적 통제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사상 감정이 풍부하더라도 리듬을 지키려고 하면 부득불 감정이라는 것은 형식적 통제를 받을 때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셋째, 운율의 묘미를 체득함으로써 비로소 그 다음 단계인 자유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의 밝음을 알 수 있다. 리듬의 구속, 제한 , 통제의 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시의 내재율을 깨닫게 되는 터전이 된다. 자유시를 써 보면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행을 끊고, 행을 모아서 연을 만드는 형식적 구속이 따르는 것이다. 내재율의 적절한 조화도 요구된다. 자유시라고 해서 리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시는 형식적 구속과 그것에 저항하는 정신과의 갈등에서 창작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3) 언어에 대한 감각  시는 언어의 예술이며, 시인은 언어의 직공(職工)이다. 시인은 언어를 매만져 시를 만드는 사람이다. 마치 요술사(妖術師)와 같이, 언어를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언어에 대한 감각적 훈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어떤 언어가 부드럽고 아름답고 어떤 언어가 거칠고 투밖하고 아름답지 못한가, 어떤 언어가 감각적이고 생채가 있고 어떤 언어가 관념적이며 어두운가, 하는 것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언어는 의미와 음성과 이미지의 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세 요소로 이루어진 복합체는 실제로 천차 만별의 미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언어는 흔히 살아 있다고 한다. 빛깔, 음상, 무늬, 감촉, 무게, 리듬...이러한 여러 가지의 미묘한 감각을 식별할 줄을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언어 감각에 대한 훈련이 모자란다는 증거이다.  언어는 의미, 음성, 이미지의 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 요소로 이루어진 언어도, 그 언어를 쓰는 사람, 그 언어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지역적 배경, 역사적 배경 등에 따라서 그 의미와 어감도 다양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위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같이  詩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싶다.  -김 영 랑, 전문  언어감각이 얼마나 셈세하고 세련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시다. 맑고 고운 정서와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감각, 미묘한 음악성 등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음성적 어감은 절묘하다고 하겠다.  4) 발상차원의 단계  일본의 현역 시인인 이토오케이이치의 말에 의하면 자기의 작시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하여는 에서부터 단계에까지 나아가기 위하여, 시의 발상의 차원을 높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보는 차례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1)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2)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 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5) 나무 속에 승화(昇華)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 관계에서 생기는 사상을 본다.  (7)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8) 나무를 매체(媒體)로 하여 나무의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 차례는 이토오 케이이치 시인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나무를 보는 차원이 한 단계 한 단계 차례대로 상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에서 (4)까지는 나무를 눈에 비치는 그대로를 보고 있을 따름이다.(객관적 관망)  그러나 (5)와 (6)은 단지 그것뿐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고 한다. (7)과 (8)은 그것을 더욱 깊이 추구하고 있다.  5) 객관적 상관물  시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어려운 말이 될는지 모르나, 여기서 엘리어트가 말하는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앞에서 일본시인 이토오 케이이치가 말한 발상의 과정을 예로 들었거니와, 그 중의 마지막 단계인 (8)의 는 것은 , 바로 나무가 상징성을 띠거나, 엘리어트가 말한 객관적 상관물이 되어야 가능한 단계이다. 곧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암시하여 놓음으로써 독자가 그 수수께끼를 서서히 풀어나가듯 점차적으로 의도했던 세계로 들어가는 데서 시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엘리어트가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란 자기가 의도한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직접 표현할 수 없다고 보아 추상적인 관념이 많은 관계로 그대로 드러낸다면 시가 될 수 없다.이러한 추상 관념을 서서히 환기할 수 있는 다른 구체적, 감각적 사물이나 사건을 가져와야 한다. 서 정주의 에서는 해방된 겨레의 환희와 희망이라는 추상관념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 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암시한 것이다. 이것이 엘리어트가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이요 말라메르가 말한 바와 같이 서서히 대상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6) 중층 묘사의 방법  객관적 상관물과 더불어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서, 중층 묘사(Multipul description) 라는 것이 있다. 증층 묘사는 우리 현대시에 있어서 가장 결여되어 있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우리 현대시의 중요한 방향이라는 점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감각과 사사이 통합된 시가 발전되어야 하겠고--김 현승의 시가 대체로 이 방향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그러자면 자연히 객관적 상관물과 더불어 중층 묘사의 방법이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중층 묘사란 한 가지 대상이나 사상에 대한 구체적 표현(감각적 표현)과 추상적 표현(사상적 표현)을 교차시켜 서술하는 방법이다. 말하자면, 감각적 레벨에서 묘사하고 , 다시 그것을 추상적 레벨에서 관념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한 가지 대상이나 사상이 이미지와 관념 작용이 교차되어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있었을 법한 것은 한 抽象이다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  영구한 가능으로 남는,  있었을 법한 것과 있은 것은  한 끝을 지향한다. 그런데 그 끝은 언제나 현재한다.  발자취들이 기억 안에 反響한다.  우리가 통하지 않는 복도를 내려가  우리가 통 열지 않은 문을 향하여  장미원 속으로.  -엘리어트, 에서  는 추상 표현이다.  이러한 관념만으로 일관되어 있다면 산문이지 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반복되어 입체적 표현을 보여 주고 잇다. 추상과 구체가 교차된 중층 묘사를 하고 있다.  7) 가동기술법  초현실주의의 방법은 자동 기술법(Automatisme)만이 아니지만, 자동 기술법은 초현실주의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이다.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고안해낸 방법이다. 심리주의 소설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 의식의 흐름과 거의 비슷한 자도 기술법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방법을 응용하여 정신병 환자에게서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 들으려고 시도한 데서 고안해 낸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의 이미지가 아니라, 무의식의 이미지, 꿈의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음성의 회상이 나무에 머물었는데  나의 육체는 나의 사상을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부딪힌 돌멩이가 정오를 알렸다.  -필립 수포, 의 전문  이러한 시는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심층의식 속에서의 우연한 접촉 또는 폭력적인 강제 결합에 의한 이미지의 무리들을 느낄 수는 있다.  11 詩壇에는 어떻게 데뷔하는가  1) -의 관문  제한된 일정한 편수의 작품을 신문사의 문화부에 보내면 거기서 위촉한 심사 위원에게 심사를 맡긴다. 당선이 확정되면 기성 시인으로 인정을 받는다.  천 편이상이 넘는 시에서 당선자 한 두 사람을 고르므로 당선 확률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를 통과하는 일  -각 문학지마다 심사 위원이 내정되어 있어서 투고자들이 심사 위원을 미리 알고 있다.  심사 위원은 투고자의 작품을 보고 재능이 있고,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개별적으로 만나거나 서신으로 지도하는 일이 가능하다. 지도를 할 수있고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추천제 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추천제는 2회 내지 3회를 거쳐야 되는데 그 기간은 1년에서 2년 정도는 걸린다. 그 동안에 투고자는 수십 편 내지 백여 편을 써서 보내야 하므로 추천제란 일종의 훈련 기간을 가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2) 동인 활동이나 시집 간행으로서도 가능하다.  -기성시인의 충고나 지도를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일단 시집을 내거나 동인지를 통해서 문단에 ㅣ나오면 그대의 자기 역량이 그대로 고정되어 버리는 일이 많다. 끊임없이 자기 성장은 자기 역량과 작품의 성과에 관해서 항상 자기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특히 선배나 동료의 비판이나 충고를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떠한 경향의 시, 어떤 방법의 시를 쓰는 것이 좋을까  이 문제는 우리 시의 몇 가지 방향을 앞에서 예시하였다.  곧 (1) 전통적 서정주의 (2) 이미지즘 또는 사물시 (3) 노만주의 경향의 관념시 (4)메시지나 사상 전달을 위주로 한 현실적의적 관념시, (5) 심리주의(초현실주의) 시, (6) 형이상시-이러한 방향들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향을 개별적인 측면이나 통합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여 자기의 좌표를 성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부록- 읽어야 할 주요 詩작품  1.빗소리-주요한 / 2. 님의 침묵-한용운 / 3.복종-한용운/ 4.사의 예찬-박종화/ 5.산유화-김소월  6.초혼-김소월 / 7.봄은 고양이로다-이장희/ 8.백록담-정지용/ 9.비로봉-정지용/ 10.구성동-정지용  11.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12.내 마음을 아실 이-김영랑/ 13.성북동 비둘기-김광섭  14.마음-김광섭/ 15.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16.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신석정/ 17.광야-  이육사/ 18.절정-이육사/ 19.오감도-이상/ 20.거울-이상 / 21.꽃나무-이상/ 22.깃발-유치환/ 23.울릉도-유치  환/ 24청춘-유치환/25.생명의 서-유치환/26.국화 옆에서-서정주/27.귀촉도-서정주/28.동천-서정주/29.설야  -김광균/30.추일서정-김광균/31.뎃상-김광균/32.눈물-김현승/33.가을의 기도-김현승/34.프라타나스-김현  승/ 35향현-박두진/36.해-박두진/37.고풍의상-조지훈/38.승무-조지훈/39.봉황수-조지훈/40.나그네-박목월  /41.청노루-박목월/42.또 다른 고향-윤동주/43.십자가-윤동주/44.초토의 시11,12-구상/45.백련-구상/46.귀  향-김춘수/47.꽃-김춘수/48.향수와-김춘수/49.부재-김춘수/50.목숨-신동집/51.얼굴-신동집/52.악수-신동  집/ 53.송신-신동집  이 내용은 문 덕수 저; 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가을그날 |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47    단계적인 시 창작 훈련[ 스크랩] 댓글:  조회:1455  추천:0  2018-10-27
단계적인 시 창작 훈련                                            이형기님의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 참고     우선 나무를 바라보는 시각을 9단계로 나누어 적어보자.   1.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본다. 2. 나무의 종류와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들이 움직이는 모양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5. 나무 속에 승화되어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양과 생명력이 상관관계를 본다. 7. 나무의 생명력이 뜻하는 그 의미와 사상을 읽어본다. 8. 나무를 통해 나무 그늘에 쉬고간 사람들을 본다. 9.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것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실제 나무에 관한 시를 써보자. 1단계에서 4단계까지는 나무의 외형을 관찰하는 단계이다.   나무는 미세한 바람의 요구에도 잎새를 흔들어 고이 간직한 금빛 비늘을 나누어준다.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을 형상화하여 표현함.   5단계에서 7단계까지는 나무의 내면을 바라보는 단계이다.   겨울 바람은 눈비를 몰고 와 소나무의 옷자락을 거머쥐고 거칠게 흔들어 보지만 푸른 눈매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눈 들어 겨우내 하늘만 쳐다본다   ※소나무의 지조를 형상화하여 표현함.   8단계에서 9단계까지는 나무를 매개로 해서 다른 세계를 보는 단계이다. 가장 고차원적인 단계로서 상상력이 가장 풍부한 사람이 쓸 수 있는 경지이다.   겨울 나무     품팔이하는 엄마의 늦은 귀가,   오누이는 밤새 산짐승 소리를 들으며, 문풍지 찢어진 틈새에서 우는 낮선 바람 소리 들으며 자정이 넘어서까지 오돌오돌 떨고 있다   눈 내리고 세찬 바람 부는 두메 산골 오막살이에서   ※ 세찬 눈보라에 밤새 떨고 있는 겨울 나무를 형상화함.   우리는 시를 쓸 때 사물의 외형적인 단계에서 끝맺지 말고, 내면적인 단계, 나아가서는 그 사물을 통해 다른 세계까지 볼 수 있는 단계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상상력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시를 쓰는 노력을 성실히 수행 하여 풍부한 상상력을 자아내고 그 산물로 훌륭한 한 편의 시를 창작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   ※ 단계를 구분하여 적은 시는 순수한 개인 창작물로 예를 든 것이다.     소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라       문학의 소재 발견이나 창작에 있어서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등 5감각(感覺) 기능을 잘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보는 것은 글을 쓰고 싶은 동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기능을 한다. 숱한 소재들 중에서 어떤 것을 제재(題材)로 선택할 것인가? 이는 사람마다의 안목과 경지에 따라 달라지며,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여행지에서 유적이나 풍경을 함께 접했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안목과 시각에 따라 보석처럼 빛나는 제재를 얻을수도 있고, 그냥 스쳐버릴 수고 있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사물이나 사건을 보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 문학을 하는 것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다름없다. 18세기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각되는 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앞면만, 어떤 사람은 측면만, 어떤 사람은 뒷면만 볼 수 있다. 어떤 사태나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일부분만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볼 수 있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될 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의 삶을 통한 총체적 경험과 지식 정보를 투과해서 인식하는 행위이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본다고 할 때, 한쪽에서 보는 한, 4면을 보지 못하고 항상 3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꺼번에 어떤 사물에서 얻어지는 측면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에서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고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한 바퀴 돌아야 하며, 공중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피라미드들 그냥 거대한 입방체의 구조물로만 보아선 안된다.   도대체 망망한 사구(沙丘) 위에, 인간의 힘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을 왜, 무엇 때문에, 세워 놓았으며 그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불가사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의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이집트를 누비고 지나가다가 사막의 하늘을 찌르고 있는 피라미드와 마주쳤을 때, 그들은 멍하니 숨을 죽여 바라보았다. 알렉산더 시대에 그리스의 성현들이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할 때, 피라미드를 그 첫째로 꼽았다. 피라미드가 불가사의한 것은 이 구조물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에 있다. 피라미드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였지만, 정확히 그 용도와 위치 선정, 건축 방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할 때 데리고 간 과학자와 전문가들에게 이집트의 국토 조사를 위임했을 때 그들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경도를 재었다. 하류 이집트의 지도를 완성했을 때 이 중심 경선이 나일강 하구에 의해 형성된, 사실상 하류 이집트 전역을 이루고 있는 델타 지역을 정확하게 이분하고 있다는 우연의 일치에 놀랐다. 그리고 피라미드에서 직각으로 대각선을 그으면 그 안에 델타 지역이 완전히 들어간다는 사실에는 더욱 놀랐다. 또한 연구 끝에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단지 이집트의 중심 경선으로서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중심 경선으로 적합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피라미드는 정확히 세계지도의 중앙분할선 위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대피라미드의 위치에서 기인한다. 피라미드를 통과하는 세로 선을 그으면 그 동편에 있는 육지의 면적은 서편의 육지 면적과 동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피라미드의 경도는 자연히 지구를 통틀어서 제로 선이 된다. 지구에서 대피라미드가 접하고 있는 위치는 ‘특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치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피라미드의 네 사면(斜面)이 나침반의 네 방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물이 세계의 중심선에 놓여야 한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는 힘으로써 상상을 강요한다. 인간은 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매달린다. 사막 한 가운데 마주치는 고대 인류가 세운 가장 거대한 구조물인 이 피라미드는 풀리지 않는 영원한 물음표로 탐구와 명상의 화두를 던져 준다. 피라미드는 이 불가사의성으로 인류가 피운 고대 문명의 꽃이 되고, 명상의 한 복판에서 삼각뿔의 위용을 조금도 변색시키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나일강만은 알고 있을 테지만 어쩌면 인류가 만들어 낸 것 중에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가 있다면, 이는 곧 신비성의 획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막 가운데서 조우하는 피라미드는 기하학적 단순성을 취하고 있지만, 쉴새없이 불어닥치는 모래 바람에 견딜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견고한 구조체인 것만 분명하다. 이것이 무덤으로 ‘영혼의 집’으로 건축된 것인지, 아니면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능과 영화를 보여주기 위한 기념물로 지어진 것인지 단정할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이 구조물은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영원성의 꽃으로 당시의 모든 역량과 총체성을 다 기울여 완성시켰다는 점이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수많은 재화가 투입되었다. 거기에다 모든 지혜와 경험이 보태어졌다. 사막의 한 가운데 덩그랗게 하늘 높이 치솟은 피라미드를 보면서, 한 시대의 총력을 다 끌어 모아 저것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될 절대적인 의미나 가치가 있었던가, 생각해야 한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되었을가. 생사(生死)와 물질과 정신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와 믿음을 포용한 신앙적인 힘을 터득한 소치였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의 한가운데엔 언제나 ‘인간’이란 화두가 있다. 피라미드를 보면서 그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 앞에 서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삶과 죽음은 무엇이며, 사후의 세계란 또한 무엇인가. 인간으로 풀 수 없는 영원한 물음 앞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모든 힘을 기울인 끝에 건립해 놓은 것이 바로 피라미드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피라미드는 불가사의한 의문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피라미드의 외형만을 보지 않고, 신비속에 가려져 있는 불가사의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나무』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상의 가시영역의 것일 뿐, 지하의 불가시영역의 뿌리는 보지 못한다. 또한 나무의 보이는 모습과 접촉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이를테면 햇빛, 바람, 비, 세월, 새, 나무의 일생을 연상해서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 닿아있는 세계까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보는 것은 눈을 통한 ‘가시영역’에만 국한돼 있다. 그리고 가시영역의 대상물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수필을 쓰는 법을 깨닫는 일이다. 새를 보면서 단순히 보이는 외양만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하늘, 구름, 자유, 방향, 바람, 새의 삶, 이런 불가시영역의 것까지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꽃의 외양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볼 수 있다. 꽃의 보이지 않는 세계, 꽃씨가 새싹을 튀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햇빛, 물, 바람, 나비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꽃이 져야 할 때와 의미까지를 보아야 한다. ‘본다’는 것은 충동, 발견, 관찰, 탐구와 관련이 돼 있다. ‘본다’는 행위가 오감과 닿아있을 뿐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다음 동시, 시 한편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어떻게 형상화하였는가를 살펴본다.   꽃씨 속에는 !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답답할 땐 귀 대고 / 바다 소리를 듣노라/ 네 목소리 듣는다 격정의 성난 파도/ 어떻게 잠 재웠나 피가 맺혀 뼈가 된 /빠알간 산호초 비늘 고운 물고기떼/ 헤일 길 없는 네 가슴 속 그 세상이 꾸는 꿈은 / 미주알 고주알까지 알고 싶어 슬픈 날엔 / 귀 대고 듣는다   ‘꽃씨’라는 소재에서 외형적으로 보는 것은, 꽃씨의 모양(생김새)이지만, 이 보이는 것과 접촉해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은 ‘파아란 잎’ ‘빠알간 꽃’ ‘노오란 나비떼’가 있다. 글쓰는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또한 ‘소라 껍질’이란 소재는 그냥 외형적으로는 한낱 조가비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바다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성난 파도, 천길 물속, 헤아릴 길 없는 네 가슴속을 응시하고 들을 줄 아는 눈과 귀를 가져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소재를 발견하였다고 하여, 단번에 글이 씌어지지 않는다. 이 소재를 면밀히 관찰하여 속속들이 알고나서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오랜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소재와 친근해지지 않으면 그 소재가 지닌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예컨대, 어떤 집에 할아버지가 정성껏 기르던 난초에 꽃이 피었을 때, 할아버지에게선 1년만에 감격과 전율을 느끼는 큰 일이 되겠지만, 무관심했던 다른 가족들은 감격하지 않는다. 미지의 별 하나를 찾기 위해 밤마다 망원경으로 우주공간을 탐색했던 천문학자가 드디어 새로운 별을 찾아냈을 때, 충격과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처럼 관심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좋은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곧 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 소재와 대화를 나누고 정을 들여야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사회학자, 법률학자, 의사, 생물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는 각각 자신의 학문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려 할 것이다. 보는 법과 시각을 달리한다. 사람마다 다른 시각과 안목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새로움과 개성이 빛을 말한다. 보는 법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과 이치를 깨닫는 일이며 글을 쓰는 법을 깨치는 것이 된다. 가시영역의 것만 보지 않고 불가시 영역의 것을 보는 법, 가청영역의 것만 듣지 않고, 불가청영역의 것도 듣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보는 법’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만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 *바깥만 보지 않고 내부를 본다. *시(時), 공(空)을 초월해 본다. *정면에서만 보지 않고 거꾸로 본다. *일시적으로 보지 않고 오랫동안 본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본다. *형식만 보지 않고 내용을 본다.   사물을 보는 눈썰미가 있어야 하며 새로운 발견과 해석과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후고 프리드리히,『현대시의 구조, 보들레르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제5장 20세기의 유럽 시〉요약 정리   석사4차 정원희        언어 마술과 암시    20세기의 시 이론들중에서 시가 끼친 영향에는 언제나 암시의 개념이 제기된다. 베르그송은《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1889)에서 암시의 개념을 자신의 예술론의 필수적인 요소로 만들었다.암시란 지적으로 통제되는 시가 마술적인 정신의 힘과 빛을 방출하는 순간을 말한다. 암시적인 방출은 주로 언어의 감각적인 힘들인 리듬, 음향, 조성(調性)으로부터 온다. 이것은 의미론에 있어서 상위 음향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즉, 한 낱말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거나 아니면 낱말들의 비정상적인 결합에 의해 생기는 의미와 더불어 작용한다. 언어 마술적-암시적 창작은 말에 전권을 부여한다. 이러한 창작에 있어서는 세계가 아니라 말이 유일하게 실재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시인들은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포에게서 비롯된 원리, 시는 의미에 앞서는 음향의 힘을 바탕으로 기획되어야 하며 그 후에야 의미를 부가해야 한다는 원리는 계속해서 유효하다.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다. 작가는 그의 텍스트를 아직 모를 뿐이다.”라고 벤은 말한바 있다. 벤의 시는 말의 주도권, 무의미한 내용조차도 시로 만들 수 있는 음향의 우월성이라는 원리를 인식시켜 준다. 벤의 시《쇼팽》은 음향으로 쓴 전기다. 그 내용은 사건의 경과, 성찰, 내적 독백들로 구성된 암시적 파편들이며 파편적 문장으로 진술되어 있다. 진행은 생-죽음의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그 역순의 길을 간다. 그러나 냉정한 사실적 진술을 관통하는 것은 떨림이다. 이 떨림은 파편과 조각들에 의해 생명을 얻는 만큼 그것들을 소재로 지치도록 연주하여 그 시를 결코 잊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은 전래의 시의 모티프들에 대한 단념이 시의 본질을 파괴하지 않고 얼마만큼 광범위하게 실행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산문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시는 하나의 새롭고 명상적인 음향이 된다.    라몬 히메네스의 후기 시 중에 최면술적인 효과를 가진 시들이 있다. 그것은 개개의 시구들이 후렴과 같이 반복되는 데서, 그리고 어떤 특정한 대답을 염두하지 않은 의문형으로 쓰어진 데서 알 수 있다. 반복과 대답 없는 질문은 진술된 것을 가능한 경쾌하게 만들고 가볍게 만들어 시의 본래적인 지배자인 음향마술로 넘어가게 한다. 말들이나 단순한 음향들의 자극을 토대로 한 시 창작은 랭보의 종결부분과 같이 무수한 현상을 낳는다. 미쇼의 시구에서“기침 속에서, 쓰라림 속에서, 황홀경 속에서”라는 언어는 결합욕구 때문에 해석 불가능한 의미를 산출하지만 귀에 날카롭게 파고든다.엘리엇의  종결부에서 갑자기 무의미한 'DA'가 울려 퍼지고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불교 명제의 단편들을 생겨나게 한다. 이 단편들 사이에 전혀 이질적인 것이 끼워 넣어지고 마지막에는 산스크리트들로 된 하나의 그룹으로 모이게 된다. 이것은 언어를 음향력으로 간주하는 시에서만 가능한 음악적 방식이다.      폴 발레리       언어의 고유한 힘과 시의 관계에 대해서 발레리가 가장 철저하게 사색했을 것이다. 종종 표현되는 그의 생각들 중 하나는 종래의 마술의 주문과 주술 문구들이 그것으로부터 제작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제작될 언어의 시원층(始原層)으로 시가 진입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시는 변화무쌍한 의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변화무쌍한 음향효과들 사이의 결합을 끈질기게 시도하여 수학공식과 같은 필연성을 가지는 하나의 결합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한 시에서 상(喪)을 치르는 것이'의미'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어떤 순수의미라 할지라도 혼자만으로는 시의 전체성을 대표할 수 없다.그러므로 발레리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도록 시를 쓴다.   참고자료.      폴 발레리   나의 침묵의 아이들인 발걸음은, 고요함으로 얼어붙은 각성의 침실을 향하여 성스럽고도 느리게 나아간다.   그 누구의 발걸음도 닿지 않은 신성한 그늘, 내 발걸음이 선택한 이곳은 부드럽다 벌거벗은 내 발걸음이 닿는 이 모든 곳은, 신들 그대들이 준 선물일지니   만일, 내 발걸음이 네 입술에 닿는다면, 너는 부드러운 입술을 열고 기다릴 것이니, 내 사유들의 짐승들은 입맞춤의 발걸음으로 네 입술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부드럽고 거칠게 상냥한 발걸음으로 서둘러 나아가노니, 나는 너를 기다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오직 그 발걸음들이었다.    폴 발레리   몸을 숙이고 있구나, 키 큰 플라타너스여, 스키티아의 젊은이처럼 하얀, 벌거벗은 네 몸을 보여주고 있구나. 하지만 네 순결함은 사로잡혀 있으니 네 자리의 힘에 네 발은 붙잡혀 있구나.   우수수 소리내는 그림자여, 너를 휩쓸어간 바로 그 하늘이 네 안에 그윽히 가라앉아 있구나. 검은 어머니가 구속하고 있구나, 진흙이 내리누르는 이 갓난 순결한 발을.   떠도는 네 이마를 바람은 거부하고, 부드러운 어두운땅은, 오, 플라타너스여, 한 걸음도 네 그림자가 감탄하도록 놔두지 않는구나.     수액이 뿜어주는 빛나는 계단까지 밖에 네 이마는 다다를 수 없으니, 너는 자랄 수는 있지만, 순결한 나무여, 영원한 정지의 매듭을 끊을 수는 없으리라. ...    폴 발레리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은 반짝이고 은 지식이로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간소한 사원, 정적의 더미, 눈에 보이는 저장고, 솟구쳐오르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하많은 잠을 네 속에 간직한 ,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과일이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마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至日)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항상 미래에 오는 공허함 영혼 속에 울리는 가혹하고 음울하며 반향도 드높은 저수조를! 그대는 아는가, 녹음의 가짜 포로여, 이 여윈 철책을 먹어드는 만(灣)이여, 내 감겨진 눈 위에 반짝이는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나태한 종말로 나를 끌어넣으며 무슨 이마가 이 백골의 땅에 육체를 끌어당기는가를? 여기서 하나의 번득임이 나의 부재자들을 생각한다.   닫히고, 신성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찬, 빛에 바쳐진 대지의 단편, 불꽃들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 이토록 많은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를 잠잔다!   찬란한 암케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삶은 부재에 취해있어 가이없고, 고초는 감미로우며, 정신은 맑도다.   감춰진 사자(死者)들은 바야흐로 이 대지 속에 있고, 대지는 사자들을 덥혀주며 그들의 신비를 말리운다. 저 하늘 높은 곳의 정오, 적연부동의 정오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에 합치한다……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어디있는가 사자들의 그 친밀한 언어들은, 고유한 기술은, 특이한 혼은? 눈물이 솟아나던 곳에서 애벌레가 기어간다.   간지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접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뿐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작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또한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바라는가 육체의 눈에 파도와 황금이 만들어내는, 이 거짓의 색체도 없을 덧없는 꿈을? 그대 노려하려나 그대 한줄기 연기로 화할 때에도 가려므나! 일체는 사라진다! 내 존재는 구멍 나고, 성스런 초조도 역시 사라진다!     깡마르고 금빛 도금한 검푸른 불멸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만드는, 끔찍하게 월계관 쓴 위안부여, 아름다운 거짓말 겸 경건한 책략이여! 뉘라서 모르리, 어느 누가 부인하지 않으리, 이 텅빈 두 대골과 이 영원한 홍소(哄笑)를 땅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민 없는 머리들이여, 가래삽으로 퍼올린 하많은 흙의 무게 아래 흙이 되어 우리네 발걸음을 혼동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지 않도다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도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킬레스여   아니, 아니야!……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 준다……오 엄청난 힘이여! 파도 속에 달려가 싱그럽게 용솟음치세!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大海)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석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를 바다엔 배 산에는 말 허리에 그림자를 감고 난간에서 꿈구는 그녀 녹색 몸, 녹색 머리카락, 싸늘한 은빛 눈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집시의 달 아래, 세상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네.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새벽길을 여는 그늘 물고기와 함께 거대한 서리별이 다가오네. 무화가 가지는 바람을 문지르고.   도둑고양이인 저 산은 사나온 용설란 털을 세우네, 그러나 누가 올 것인가? 어디로 해서… 그녀는 난간에 서 있네 녹색 몸 녹색 머리카락 쓰디쓴 바다가 꿈꾸면서   전 바꾸고 싶어요, 대부님. 제 말과 당신의 짐을 제 안장과 당신의 거울을   제 칼과 당신의 모포를 대부님, 카부라의 재를 넘어 피 흘리며 저 여기에 왔어요 이보게나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말고 하지만 난 이미 내가 아니고 내 짐은 이미 내 짐이 아닐세 대부님, 전 제 침대에서 품위 있게 죽고 싶어요. 이왕이면 네덜란드산 시트가 덮인 철제 침대에서 말예요. 가슴에서 목까지 난 제 상처가 보이지 않나요? 삼백 송이의 검붉은 장미가 네 하얀 셔츠에 피어 있구나 그대의 허리께에서 피가 스며 나와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난 이미 내가 아니고 내 집은 이니 내 집이 아닐세 오르게 해줘요! 저 높은 난간까지 만이라도 올라가게 내버려둬요. 녹색 난간까지만 놔둬요. 물소리가 울려 퍼지는 달의 난간들.   두 명의 대부가 이미 가파른 난간을 오르고 있네. 핏자국을 남기면서 눈물 자국을 남기면서 지붕에는 작은 양철 등(燈)이 떨고 있었네. 천 개의 수정 탬버린이 새벽을 깨우네.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들. 두 명의 대부가 올라갔네. 간 바람이 입 속에 쓸개, 박하, 알바아카의 묘한 냄새를 남겨놓네. 대부여! 말씀해주세요. 어디에 있나요?   그녀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렸는지! 그녀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릴 것인지! 싱싱한 얼굴 검은 머리칼이 이 녹색 난간에서!   저수지 표면에 집시 처녀가 서성거렸네. 녹색 몸, 녹색 머리칼 싸늘한 은빛 눈 달의 고드름은 그녀를 수면 위에 떠받들고 있네. 밤이 조그마한 광장처럼 가까이 다가왔네. 술 취한 민병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네.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들. 바다엔 배. 산에는 말.  
45    보들레르 작품세계[스크랩] 댓글:  조회:1555  추천:0  2018-10-21
 요점 정리  작자 :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 김붕구 옮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상징적. 직관적. 탐미적. 신비적. 감각적  어조 : 사물의 이면 세계를 직관적으로 보고 느끼는 듯한 어조  심상 : 상징적. 감각적. 공감각적  표현 : 감정이 절제됨. 시어가 매우 함축적임  구성 :     1연   인생의 상징으로서의 자연(상징으로 가득찬 자연)     2연   삶의 깊이와 넓이, 다양성(색과 향과 소리의 상응)     3연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여러 가지 감각의 뒤섞임)     4연   통일적 인식의 추구(모든 감각의 통일성)  제재 : 자연  주제 : 상응과 통일적 인식의 추구. 우주의 여러 차원에 걸친 상응(교감)들  출전 :  내용 연구  목적(木笛) : 나무피리  기승(氣勝) : 억척스럽고 굳세어서 좀처럼 남에게 굴하지 아니함  앙양(昻揚) : 높이 쳐들어서 드러냄. 높이고 북돋움  용연향(龍涎香) : 고래로부터 채취하는 송진 비슷한 향료. 사향과 비슷한 향기가 있음.  사향(麝香) : 사향노루, 사향고양이 등의 수컷의 배꼽과 불두덩을 싸고 있는 향낭을 쪼개어 말린 향료  안식향(安息香) : 때죽나무과에 딸린 갈잎큰키나무. 그 나무의 진에서 나는 향은 훈향료,  방부제, 소독제 등으로 쓰임  훈향(薰香) : 태워서 향기를 내는 향료, 훈훈한 향기  자연은 하나의 사원(寺院)이니 : 자연은 인간의 온갖 상징을 만들어 내는 사원이니, 인간의 모든 상징 행위란 자연에 대한 교감으로부터 나온다는 시인의 상징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인간의 정신 세계와 교섭을 갖게 되는 물질적인 장소로 온갖 상징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이 사원에서 자연의 실체와 만나게 된다. 자연을 인생의 깨우침을 얻는 곳으로 인식한 표현.  기둥들 : 나무들  혼돈한 말 : 잎가지의 살랑거리는 소리로 신탁을 내리던 그리스의 떡갈나무들을 연상시킨다. 시인이란 바로 이 숨은 뜻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언어의 통역가이다.  상징의 숲 : 자연은 인생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다양하게 표상하고 있다.  어둠처럼 광명(光明)처럼 광활하며 : 속인(俗人)에게는 어둠처럼 컴컴하지만, 시인에게는 광명처럼 깊은 것으로 나타난다.  통일 : 마지막 종합으로서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시키는 것  향(香)과 색(色)과 음향이 서로 응답한다. : 후각과 시각과 청각은 각기 다른 감각이 아니라 상징의 숲 속에서는 대등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상징주의가 많은 성과를 이끌어낸 '공감각 표현'과 유사한 표현이다. 이상 야릇한 것은 내 귀가 그 빛깔을 분별하고 내 눈이 소리를 듣는 일이다.  어린이 살처럼 -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 향기, 즉 후각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후각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는 인간의 감각 사이의 상호 작용을 말하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 곧, 인생의 긍극적 측면을 가리킨다.  정신과 육감의 앙양(昻揚)을 노래하는 - 확산력 지닌 향기도 있다. : 정신과 육감의 공존 대립은 보들레르적 시의 원천이며 두 원동력에서 똑같이 만족을 얻는다. 썩은 냄새와 용연향, 사향은 육감을 앙양하고 싱싱한, 아늑한 초록의 향기들과 안식향, 훈향은 정신을 앙양하며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는 어느 쪽에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썩고 풍성하고 기승스러운 것 : 자연의 추한 모습. 곧, 인생의 부정적 측면  정신과 감각들이 하나된 감격 : 인생의 여러 요소를 포용하여 통일적으로 인식한 데 따른 감격을 가리킨다.  이해와 감상  상응이란 물질 세계와 영혼의 세계가 소리와 메아리처럼 서로 화답한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물질계(자연)가 우리에게 마련해 두는 상징을 통하여 우리는 영혼계에 접근할 수 있는데 우리의 모든 감각은 자연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하여 서로 합쳐서 협력한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신전이 마련해 주는 상징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을 맡아 보는 것이 바로 시인이다.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사이는 서로 상응하고 시인은 만상이 숨기고 있는 뜻을 해독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럴 때 사물은 곧 상징이며, 시인은 친근한 시선으로 그것을 지켜본다. 즉 물질과 영혼, 인간과 자연, 자연의 상징을 통한 인간(시인)과 영혼의 세계가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시인은 상징의 숲을 거쳐 미의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을 토대로 감상하면 작품의 의미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보들레르는 외부의 세계와 인간 사이에, 혹은 자연 세계와 정신 세계 사이에는 상응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시인이다. 이 시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자연은 '모호한 말'들을 흘러 내보내는 '사원(寺院)'처럼 나타나며, 사원이라는 상징의 숲에서 인간은 관찰하면서 동시에 관찰당하는 것을 느끼면서, 향기와 색깔과 소리가 서로 응답하는 신비의 체험을 한다. 이질적인 감각들이 상호 침투하여 섞이며 또한 동시적으로 체험되고 모든 사물들이 상호적인 유추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에서 시인은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대상 뒤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판독한다. 보들레르가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주의 시인들의 선구자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시는 의 제1부, "우울한 이상"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보들레르 시의 이론과 미학의 기초를 확립시킨 작품이다. 이 시에서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는 서로 교감을 나눈다. 정신 세계에 접근하게 해 주는 상징들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물질 세계이며, 물질 세계를 포착하는 우리의 모든 감각들은 서로 뒤섞여 자연의 신비를 밝혀 내는 데 협력한다. 이 세상의 일체는 상형 문자이고, 시인이란 다름 아닌 번역자이며 암호 해독자이다. 상상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현실의 대상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주어서 다른 세계, 즉 관념의 세계와 이 현실의 대상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내부로부터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구상된 예술은 일종의 마법적 기능을 지니는데 현실과 그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세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말과 사물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모해야 한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 세계와 관념 세계를 접합시키는 자이며, 이것이 바로 '상응(相應)' 이론이다. 이 상응은 상징적 외관과 정신적 실재를 마술적으로 하나의 감각 기호로 결합시킨다.  심화 자료  보들레르의 작품 세계 보들레르는 당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고유의 영역을 발견하고 고수하여 현대시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의 시적 특징은 다음 4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미학, 미감각의 선구적 현대성의 시이다. 그의 시집은 모든 미학을 포용하는, 그 방면의 무진장의 보고(寶庫)인데, 특히 미감각과 심미 의식의 예리함과 참신함, 그리고 시대를 앞서는 선구적 현대성은 놀라운 일이다. 둘째, 다의성 및 모순·대립의 포용과 통일의 시이다. 보들레르의 이원성은 신의 전락(轉落)에서 비롯된 근원적, 보편적 현상이다. 즉 완전무결한 유일자인 아버지로부터 그 불완전한 반신(半神)으로서의 개체 남녀가 태어난 것부터가 전락의 시초며, 보편적 모순과 대립의 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합쳐짐으로써 하나의 유일체가 될 수 있는 모순이다. 즉, 통일의 모순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그는 사회, 삶, 자연 만물, 미학에 이르기까지 모순, 대립을 당연한 것으로 포용된다. 셋째, 시의 탁마(琢磨)와 언어의 힘이다. 극히 예외적인 몇 편을 빼고는 그의 시작(詩作)과 발표 사이에 대개 몇 해 이상의 기간이 격해 있는데, 이는 완벽한 탁마를 위해서였다.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어구 속에 선택된 시어의 힘과 그것이 담는 이미지의 약동이 합쳐져, 당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긴 생명을 지닌 시가 만들어졌다. 넷째, 짜여진 건축물과 같은 시이다. (악의 꽃0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의 독립된 시편들은 하나의 건축물처럼 구성되어 있다. 한 작품으로서 서사시 속에 흡수되는 동시에, 거꾸로 그 전체 구조에서 새로운 뜻을 부여받으며, 언의 역점(力點)들이 이동되어 심화되는 유래 드문 현상을 일으킨다.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 4. 9 파리~1867. 8. 31 파리. 프랑스의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프랑스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외설과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했고, 죽은 지 오래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중의 마음 속에서 타락과 악덕의 존재로 동일시되는 보들레르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듯 여겨질 만큼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현대 문명에 가까이 접근한 시인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부자연스러운 꾸밈을 거부하고, 대부분 내성적인 시 속에서 종교적 믿음 없이 신을 추구하는 탐구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생명의 모든 징후(한 송이 꽃의 빛깔, 창녀의 찡그린 얼굴)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그는 현대 세계의 인간 조건에 호소하고 있으며, 주제 선택의 제약을 거부하고 상징의 시적 힘을 강력히 주장한 점에서도 역시 현대적이다. 젊은시절 보들레르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나이 많은 홀아비로서 1819년에 지참금이 없는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통해 사치와 안정을 얻기 원했던 이 여자는 그 꿈을 단념하고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결혼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들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어머니는 타고난 열정적 기질로 외아들에게 헌신적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상당한 연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고, 상당히 우수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4~5세밖에 안 된 아들에게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쌓은 미적 취향이 나중에 보들레르가 19세기의 가장 주목받는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 요인이 되었다. 1827년 2월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죽자 어머니는 1828년 11월에 자크 오피크라는 군인과 재혼했는데, 재혼할 당시 이미 계급 높은 장교였던 오피크는 그후 장군까지 승진했고, 외국 대사와 상원의원을 지냈다. 오피크는 의붓아들이 규율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에, 1832년 그를 리옹에 있는 왕립 중학교의 기숙 학생으로 들여보냈다. 학교 생활은 엄격한 군대식 일과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곳에서 그는 행복했던 듯하며 몇 개의 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문학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1836년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 그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학교에 명예를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소망을 실현하는 대신 걸핏하면 규율을 어기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선생들이 보기에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허세'를 부리고 엉뚱한 역설의 재능을 개발하는 조숙하고 타락한 비행 청소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자신이 천성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1839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뒤, 그는 의붓아버지가 마련해준 외교관 자리를 마다하고, 글을 써서 살아갈 작정이라고 발표하여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자유, 즉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라탱 구역의 대학생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다. 미래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1840년까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가 아편과 대마초를 탐닉하고, 훗날 죽음의 원인이 된 성병에 걸린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인도로 보냈다. 그는 아들을 적어도 2년 동안 인도에 머물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는 6월 9일에 출항했지만, 항해가 따분해지자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다른 승객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면서 즐거워했고, 배가 풍랑을 만난 뒤(이때 보들레르는 놀랄 만큼 용감하게 행동했음) 수리하기 위해 모리셔스 섬에 입항하자 더이상 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의 설득으로 레위니옹 섬까지 갔지만, 거기서 다시 고국으로 가는 다음 배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1842년 2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항해와 모리셔스 섬에서 3주일 동안 머문 경험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그는 이때 얻은 이미지를 시에서 끌어내곤 했다. 그는 동양에 대한 이 유일한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을 간직했으며, 이런 동경은 그의 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항해를 떠날 때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소년이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상상력에는 불이 붙었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1842년 4월에 성년이 되어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타고난 낭비벽을 만끽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좋은 옷을 사들이고 생루이 섬의 로죙 호텔에 있는 아파트를 값비싼 가구로 꾸미느라 무분별하게 돈을 썼으며, 그당시의 전형적인 '멋쟁이'(당디) 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이나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을 큰 재산으로 생각했고, 사기꾼과 고리대금업자의 먹이가 되어 이후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빚더미에 올라앉을 준비를 했다. 그가 괴짜이고 허풍쟁이이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이 난 곳은 로죙 호텔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어했다는 점에서는 그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대다수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1844년 보들레르는 장차 그에게 수많은 불행을 가져다줄 혼혈 여인 잔 뒤발과 관계를 맺었다. 한때 그는 잔을 열렬히 사랑했고, 잔의 잔인함과 배신 및 어리석음에 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떤 면으로는 여전히 잔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잔은 그의 첫번째 연시 〈검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는데, 이 시들은 프랑스어로 된 성애시(性愛詩)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시간 여유가 충분하고 걱정거리가 없었던 이 초기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이루게 될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썼다. 이 시집은 레즈비언에 관한 시, 반항과 퇴폐에 관한 시,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이때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어 그림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데, 이런 지식은 장차 그의 예술 비평에 탁월함과 독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가 2년 만에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자 그의 가족은 1844년초에 그의 나머지 재산을 신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고, 그는 매달 들어오는 신탁수익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자유를 끝장내는 이런 조치에 어머니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보들레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의 가족은 보들레르의 사정도 잘 알지 못한 채, 그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가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 막았다. 아직도 빚더미에 짓눌려 있는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허용된 연간수입 75파운드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었으므로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빌려야 했다. 상황이 이처럼 갑자기 변하자 그의 사치스럽고 무사태평한 생활도 막을 내렸다. 그의 운명은 제한된 수입에 얽매인 채 궁핍과 고난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고 싶은 아들의 소망을 막으려고 애쓰는 부모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사춘기에 겪었던 조울증이 되살아났고, 그가 '우울'이라고 부른 기분이 더 자주 그를 덮치게 되었다. 위대한 우울의 시 가운데 첫번째 작품을 쓴 것도 바로 이무렵이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동정심을 키우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의 혁명적 이상주의에 매혹된 그는 1848년 2월혁명에 가담했고, 이 혁명은 성공하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그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로 결심하고 직업작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1845년 파리 현대 미술전에 대한 평론이었다. 이 예술비평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이미 현대 예술의 방향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의 예술비평인 〈1846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46〉은 미학적 비평의 이정표이다. 이 평론에서 그는 단순히 전시회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그림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명암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화음을 가지며 자연의 색깔에는 음악적인 가락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나중에 확립하게 될 자연과 예술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1845, 1846년에는 몇 편의 시가 아방가르드 잡지들에 발표되었고, 그는 이런 잡지에 논설과 평론도 기고했다. 1847년 그는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자전적 작품 〈허풍선이 La Fanfarlo〉를 발표했다. 훨씬 오래 전에 쓰기 시작한 이 작품은 자신이 로죙 호텔에서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을 때의 인간 됨됨이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보들레르가 1848년 6월혁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뒤 1849년 12월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그가 왜 1849년 12월에 디종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1850년에는 여느 때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파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개심한 증거를 보일 때까지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극하여 정규적인 직업을 갖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도 얼마 동안은 열심히 일했지만 이것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그는 어머니의 엄격함 때문에 더욱 용기를 잃었다. 그는 많은 논설을 구상했지만 1편도 쓰지 못했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많았지만 1편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는 위대한 창조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그의 본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잃어버리고 원숙기의 개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포의 번역과 〈악의 꽃〉 그의 원숙기는 그가 1852년초에 에드거 앨런 포의 글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장 포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포에 대해 쓴 첫번째 평론(이 글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씌어진 포에 대한 첫번째 평론임)은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지 3·4월호에 발표되었고, 그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한 여러 편의 글을 평론지에 실었다. 그중 하나인 〈까마귀 The Raven〉는 그가 번역한 유일한 시였다. 1852~65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기담(奇談)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6년에, 〈새로운 기담 Nouvelles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7년에, 〈아서 고던 핌의 모험 Aventures d'Arthur Gordon Pym〉은 1858년에, 〈외레카 Eureka〉는 1864년에, 그리고 〈괴기담 Histoires grotesques et serieuses〉은 1865년에 나왔다. 처음 두 작품에는 포를 해설한 긴 서문이 딸려 있다. 이 책들은 번역서로서 프랑스 산문의 고전이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영국에서 망명자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포한테서 자신과 똑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가 추구하고 있던 결론에 이미 독자적으로 도달한 사람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포를 통하여 자신의 미학 이론과 시의 이상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852년 4월에 보들레르는 잔 뒤발을 떠났다(실제로는 끝내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나 그는 여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여자를 찾다가 여배우 마리 도브룅에게 접근했다. 마리가 그를 거부하자 유명한 미인이며 일찍이 화가의 모델이었던 아폴로니 아글라에 사바티에에게 구애했다. 사바티에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친구로서 보들레르와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사바티에는 그의 〈하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1854년 그는 다시 마리 도브룅과 관계를 맺었고,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어 〈초록빛 눈의 비너스〉 연작을 썼다. 이 두 연작에 포함된 시는 대부분 그의 예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작품들이다. 포의 작품 번역가로 또한 예술비평가로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시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1855년 6월 보수적 낭만주의의 요새인 〈르뷔 데 되 몽드 Revue des Deux Mondes〉지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제출한 18편의 시를 발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보들레르가 이 시들을 고른 이유는 그 표현 방식과 주제가 독창적이고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들이 발표되자 그는 악명을 얻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857년 봄에 다시 9편의 시가 〈르뷔 프랑세즈 La Revue Francaise〉지에 실렸고 〈아르티스트 L'Artiste〉지에도 3편이 실렸다. 그리고 6월에는 〈악의 꽃〉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시집 때문에 보들레르와 그의 친구인 출판업자 풀레 말라시스 및 인쇄업자들은 외설과 신성모독죄로 모두 기소당했다. 이 유명한 재판에서 그들은 유죄 선고를 받고 벌금을 물었으며, 6편의 시가 발표 금지되었다. 이 조치는 1949년에야 겨우 해제되었다. 몇몇 독자들은 보들레르의 의도와 완전한 예술성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몇 세대 동안 〈악의 꽃〉은 여전히 타락과 불건전 및 외설의 표본으로 남아 있었다. 보들레르는 1861년 〈악의 꽃〉을 대폭 증보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금지된 시는 삭제했다. 이 금지된 시들은 1866년 벨기에에서 출판된 〈유실물 Les Epaves〉이라는 시집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개정판을 더 증보한 제3판을 준비하고 있던 1866년에 보들레르는 온 몸이 마비되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친구인 샤를 아슬리노가 출판했지만, 그것은 아마 보들레르가 구상했던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시집에 넣으려고 계획하지 않았던 몇 편의 시와 1866년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에 처음 발표되었던 6편의 〈새로운 악의 꽃〉도 포함되어 있다. 말년 그가 큰 기대를 걸었던 〈악의 꽃〉이 실패한 것은 보들레르에게 쓰라린 충격이었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갈수록 커지는 좌절감과 환멸 및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사바티에와의 정신적 사랑은 슬프게 끝나버렸고, 1861년 마지막으로 헤어진 잔 뒤발은 여전히 그에게 부담과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이 시기에 씌어졌지만, 책의 형태로 출판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정기간행물에 발표되었다. 〈1859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59〉은 〈르뷔 프랑세즈〉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파리에서 공연된 탄호이저 Richard Wagner et Tannhauser a Paris〉는 〈르뷔 외로펜 La Revue Europeene〉(1861)에, 〈현대 생활을 그리는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데생 화가인 콩스탕탱 기)는 〈피가로 Le Figaro〉(1863)에, 그리고 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을 엮기 위해 쓰고 있던 산문시들은 여러 신문에 나뉘어 발표되었다. 이 마지막 산문시는 보들레르가 유독 아꼈고 오랫동안 손질해온 작품이었다. 그는 마지막 쓰러지기 직전에도 여전히 이 시를 다듬고 있었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에서 착상을 얻었지만, 주제는 같은 시기에 쓴 그의 운문시 주제와 같고, 작품의 분위기는 나이들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보들레르의 만성적인 염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산문시들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근대 도시 파리에 대한 그의 감정,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낙오자들과 버림받은 부랑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악의 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1860년 풀레 말라시스는 대마초와 아편의 효과에 대한 보들레르의 연구 논문 2편을 〈인공 천국 Les Paradis artificiel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1861년에는 〈악의 꽃〉 개정판을 냈다. 1862년 그는 파산을 선고받았다. 보들레르는 그의 출판업자의 실패에 말려들었고, 경제 사정은 절망적일 만큼 어려워졌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리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작품들의 판권을 팔기 위해 1864년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한 건의 출판계약도 맺지 못했다. 특히 미학이론을 규정한 평론집을 출판하고 싶어했는데, 이 책의 출판계약에 실패하자 그는 몹시 낙담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평론도 시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의 시를 충분히 음미하려면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시는 모두 그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결정체이며, 평론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원리에 대한 명상이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창조적 예술가라면 결국 모두 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평론을 통해 자신의 시를 해설하고, 자신의 미학을 연장하여 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벨기에의 나무르에 머물고 있던 1866년 2월 보들레르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67년 8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슬리노와 시인인 테오도르 드 방빌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보들레르는 인정받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글은 대부분 출판되지 않았으며, 이전에 출판된 것들도 절판되었다. 그러나 시인들 사이에서는 곧 의견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미래 상징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미 그의 추종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그는 19세기 프랑스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숭배자들은 그가 서유럽 전역의 감수성과 사고방식 및 글 쓰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의 미학이론이 형성된 시기는 시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상징주의 운동은 바로 이 이론에서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n. Starkie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상징주의운동(象徵主義運動, Symbolist movement) 19세기말 일군의 프랑스 시인들이 시작한 문학 및 예술 운동. 회화와 연극으로 확대되었고, 20세기 유럽과 미국 문학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지극히 상징적인 언어를 암시적으로 사용해 개인의 정서적 체험을 표현하고자 했다. 상징주의 문학 주요 상징파 시인으로는 프랑스의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쥘 라포르그, 앙리 드 레니에, 르네 길, 귀스타브 칸, 벨기에의 에밀 베르하렌과 조르주 로덴바흐, 그리스 태생인 장 모레아스, 미국 태생인 프랜시스 비엘레 그리팽과 스튜어트 메릴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상징주의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지만, 상징주의의 원칙을 소설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였고, 희곡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벨기에 태생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였다. 20세기 프랑스의 시인인 폴 발레리와 폴 클로델은 상징파 시인들의 직계 후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프랑스 시의 기법과 주제는 고답파 시의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에 뚜렷이 드러나 있듯이 완고한 관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런 관습에 대항하여 일부 프랑스 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상징파 시인들은 인간의 내면생활과 경험의 덧없고 순간적인 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시를 설명적인 기능과 형식적인 미사여구에서 해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 생활에 대한 감각적 인상과 형언할 수 없는 직관을 환기하고자 했으며,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시인의 정신 상태를 전하고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난해하고 혼란된 통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전달하려 했다. 베를렌이나 랭보 같은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사상, 특히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수록된 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감각들간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여러 예술의 종합이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시의 음악성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상징주의자들은 조심스럽게 선택한 낱말들의 고유한 화성과 음조 및 색채를 섬세하게 다루어서 시의 주제를 전개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시의 표현 수단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주의자들의 노력은 예술이 다른 어떤 표현 수단이나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또한 물질 세계의 유형성과 개별성 밑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놓여 있다는 유심론적인 확신에 일부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 또 하나의 현실의 본질은 예술 작품을 낳는 데 이바지하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과 예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을 통해 가장 잘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를렌의 〈무언가 Romances sans paroles〉(1874)와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L'Apres-midi d'un faune〉(1876) 같은 걸작들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프랑스의 진보적 시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장 모아레스는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 Le Figaro〉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사실주의 연극과 자연주의 소설 및 고답파 시의 묘사적인 경향을 비난하고, 보들레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퇴폐'(decadent)라는 용어를 '상징파'와 '상징주의'라는 용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1880년대말에는 상징주의를 지지하는 평론지와 잡지가 수없이 생겨나, 상징파 작가들은 이 운동에 적대적인 비평가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논쟁에 자유롭게 참여했다. 말라르메는 상징파 시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여담 Divagations〉(1897)은 지금도 이 운동의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설서이다. 고정된 운율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시의 운율을 얻기 위해, 많은 상징파 시인들은 산문시를 쓰고 자유시(vers libre)를 사용했다. 자유시는 이제 현대시의 기본 형식이 되었다. 시 분야에서 극단적인 상징주의 운동은 1890년경 절정에 이르렀다가 1900년 무렵부터 갑자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뚜렷한 초점도 없이 분위기만 느껴지는 상징파 시의 수사적 표현은 결국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가식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고, 상징파 시인들이 한때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퇴폐'라는 용어는 단순히 세기말의 퇴폐적인 풍조와 부자연스러운 겉치레를 비웃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상징주의 작품들은 20세기에 대부분의 영국 문학과 미국 문학에 강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실험적 기법은 현대시의 기법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상징주의 이론은 W.B. 예이츠와 T.S. 엘리엇의 시,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가 대표하는 현대소설로 열매를 맺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낱말의 음악적 조화와 이미지 유형이 줄거리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주의 소설로 성공한 몇몇 작품 가운데 하나는 J.K. 위스망스의 〈역행 A rebours〉(1884)이다. 이 책은 권태에 빠진 한 귀족이 퇴폐적인 미학을 추구하여 놀라운 임기응변의 재주로 다양한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20세기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이 상징주의 운동을 개관한 책 〈악셀의 성 Axel's Castle〉(1931)은 현대 문학 분석의 고전이며 상징주의 운동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문학에 있어서의 상징주의는 1910년대에 백대진· 김억 등이 발표한 글에서 비롯되었다. 백대진은 〈20세기 초두 구주 제 대문학가를 추억함〉(신문학, 1916. 6)에서 레니에·보들레르·모레아스 등의 상징파 시인들을 소개했고, 〈최근의 태서문단〉(태서문예신보, 1918. 11. 30)에서 말라르메 계열의 지적 상징주의를 소개했다. 반면 김억은 〈요구와 회한〉(신문계, 1916. 9)·〈프랑스 시단〉(태서문예신보, 1918. 12)에서 베를렌 계열의 감상적 상징주의를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는 〈태서문예신보〉 6호에 베를렌의 시 〈거리에 내리는 비〉·〈검은 끝없는 잠은〉·〈아름다운 밤〉 등과 11호에 베를렌의 〈작시론 作詩論〉을 번역해서 실었고, 상징주의 시가 곧 자유시임을 보여주는 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펴냈다. 그러나 베를렌의 영향을 받은 그는 내면의식의 섬세한 음영(陰影)이나 외부세계와 자아와의 교감이라는 상징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간과하고, 기분의 시학으로서만 이해했다는 점에서 한국 상징주의 시의 오류와 한계를 드러냈다. 이어 1920년대 후반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에 이르러 감각과 사상이 결합된 한국적 상징주의 시로 발전했다. 1950년대 이후 상징주의 시는 김춘수의 존재론적 순수시, 전봉건의 언어의 마술적 암시성, '현대시'동인들의 내면의식의 추구라는 형태로 변모했다. 상징주의 연극 극작가들도 역시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 특히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았다. 말라르메는 1870년대에 〈데르니에르 모드 La Derniere Mode〉지에 연극평을 쓰면서, 그 당시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사실주의극에 반대하고 인간과 우주의 숨은 신비를 재현하는 시적인 연극을 제창했다. 연극은 시인-극작가가 자신의 시적 언어가 지닌 암시적인 힘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조응을 드러내는 신성한 의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라르메는 주장했다. 상징파 극작가들은 본능적이거나 직관적으로 알아낸 존재의 심오한 진실을 언어로는 직접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상징과 신화 및 분위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요한 상징파 극작가는 벨기에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와 프랑스의 빌리에 드 릴 아당, 폴 클로델이다.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역시 상징주의 신념의 영향을 받았다. 상징파 연극의 유명한 보기로는 릴 아당의 〈악셀 Axel〉(1884 초연, 1890 결정판),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 et Melisande〉(1892), 알프레드 자리의 풍자적인 작품 〈위비 왕 Ubu roi〉(1896) 등이 있다. 1890년에 프랑스의 시인 폴 포르는 '예술 극장'을 세우고, 고대와 현대의 시를 낭독하는 한편 상징파 연극을 상연했다. 1892년 포르가 은퇴하자, 오렐리앵 마리 뤼녜 포가 자신의 외브르 극장에서 20세기까지 상징파 연극을 계속 상연했다. 상징파 연극은 통합된 하나의 운동으로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환상과 분위기 및 기분에 의존하고, 사실주의 전통과 분명하게 단절한 것이 20세기 극작가들과 연극 공연에 영향을 미쳤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현대시 창작시론』 - 1. 샤를 보들레르, 예술의 현대성―추(醜)의 미학 발제: 김민지   1) 보들레르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상징주의의 문을 연 현대시인. -상징주의, 현대 도시시의 시초. 현대적 예술의 징후를 가장 먼저 포착한 예술가. -『악의 꽃』에는 생의 모순이 잘 드러나 있고, 시적 주체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징후를 관찰하고 꿈꾸고 좌절하는 ‘현대성의 감내자’이다. 현대성의 필연적 산물인 불안, 무출구성, 유토피아 앞에서의 좌절 등 자신의 내면에 투영된 생의 모든 국면들에게로 진입하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상징: 인간은 물질세계의 상징을 통과해야만 정신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상형문자이며, 시인은 암호 해독자 또는 번역자가 된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세계(상징적 외관)와 관념세계(정신적 실재)를 하나의 기호로 결합시키는 자이다. -상상력, 예술가의 첫 번째 자질. 모든 창조를 분해하여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어떤 규칙에 따라 다시 수집하고 배열한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의 시에 등장하는 파리는 ‘실재하는 도시’가 아닌, ‘의도적으로 구성한 상상적 도시’이다. 현실 모사가 아닌 현실 변형.   2) 추의 미학   -그로테스크(grotesque)의 시학. -단순한 ‘더러움의 미’가 아닌, ‘기괴함과 더러움의 공존하는 불협화의 미’. -보들레르는 ‘미’에도 악마가 뒤섞여 있다고 보았다. ‘악마성’과 ‘숭고함’, 선과 악, 하늘과 지옥, 순간과 영원. -『악의 꽃』 역시 ‘악’과 ‘꽃’의 대비처럼, 현대성의 불협화음을 담아낸 텍스트.   3) 현대성(Modernity)   -도시가 보여주는 새로운 시대의 징후. ‘더러운 수도’와 ‘창녀’, ‘쾌락’ 등과 같은 ‘도시의 매력’ -보들레르가 평론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처음 사용 -『1846년의 살롱』에서 보들레르는 현대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관건이 되는 바는 유행으로부터 당대적인 것 안에 포함할 수 있는 시적인 것을 추출해내고, 변해가는 것에서 영원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현대성은 예술의 절반을 구성하는 일시적이며 스쳐가는 우연적인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 화가에게도 각자의 현대성이 있었다.” “그들이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게 보이는 것은 의복과 머리 모양, 동작과 시선 그리고 미소마저도(각 시대는 나름의 자세와 시선과 미소를 갖고 있다) 생명력이라는 온전한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시적이며 흘러가는 요소의 변화가 매우 빈번하다고 해서, 독자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도외시할 순 없다.” -한편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두고, “현대성이란 식기 세트 혹은 광학 기구에 붙어 있는 상표와 같다”며 “자기 작품에 상표를 찍는 것이 보들레르의 분명한 의도였다”고 언급한다. 이 상표는 영속성을 가지면서도 신속히 낡은 것이 되는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예술의 이중성과 ‘미(美)’의 개념과 연결.. -‘미’는 모든 발생 가능한 현상들처럼, 영원하며 순간적이고, 절대적이며 독특한 이중성을 지닌다. -보들레르는 ‘미’를 범속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낯설게 하기’의 전략으로 ‘기괴한 것’, ‘경악스러운 것’의 ‘미’로써 도발한다. 이러한 시도로 그는 당시의 고답파와 사실주의, 자연주의가 추구하는 ‘미’는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 조화롭고 평화로운 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미의식을 보여주었다. (찰나의 아름다움 + 절대의 미 → 덧없음의 쾌락, 우울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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