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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 작품세계[스크랩]
2018년 10월 21일 18시 49분  조회:1541  추천:0  작성자: 강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작자 :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 김붕구 옮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율격 : 내재율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상징적. 직관적. 탐미적. 신비적. 감각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어조 : 사물의 이면 세계를 직관적으로 보고 느끼는 듯한 어조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심상 : 상징적. 감각적. 공감각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표현 : 감정이 절제됨. 시어가 매우 함축적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구성 :
    1연   인생의 상징으로서의 자연(상징으로 가득찬 자연)
    2연   삶의 깊이와 넓이, 다양성(색과 향과 소리의 상응)
    3연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여러 가지 감각의 뒤섞임)
    4연   통일적 인식의 추구(모든 감각의 통일성)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제재 : 자연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상응과 통일적 인식의 추구. 우주의 여러 차원에 걸친 상응(교감)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출전 : <악의 꽃>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목적(木笛) : 나무피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기승(氣勝) : 억척스럽고 굳세어서 좀처럼 남에게 굴하지 아니함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앙양(昻揚) : 높이 쳐들어서 드러냄. 높이고 북돋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용연향(龍涎香) : 고래로부터 채취하는 송진 비슷한 향료. 사향과 비슷한 향기가 있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사향(麝香) : 사향노루, 사향고양이 등의 수컷의 배꼽과 불두덩을 싸고 있는 향낭을 쪼개어 말린 향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안식향(安息香) : 때죽나무과에 딸린 갈잎큰키나무. 그 나무의 진에서 나는 향은 훈향료,  방부제, 소독제 등으로 쓰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훈향(薰香) : 태워서 향기를 내는 향료, 훈훈한 향기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자연은 하나의 사원(寺院)이니 : 자연은 인간의 온갖 상징을 만들어 내는 사원이니, 인간의 모든 상징 행위란 자연에 대한 교감으로부터 나온다는 시인의 상징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인간의 정신 세계와 교섭을 갖게 되는 물질적인 장소로 온갖 상징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이 사원에서 자연의 실체와 만나게 된다. 자연을 인생의 깨우침을 얻는 곳으로 인식한 표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기둥들 : 나무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혼돈한 말 : 잎가지의 살랑거리는 소리로 신탁을 내리던 그리스의 떡갈나무들을 연상시킨다. 시인이란 바로 이 숨은 뜻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언어의 통역가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상징의 숲 : 자연은 인생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다양하게 표상하고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어둠처럼 광명(光明)처럼 광활하며 : 속인(俗人)에게는 어둠처럼 컴컴하지만, 시인에게는 광명처럼 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통일 : 마지막 종합으로서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시키는 것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향(香)과 색(色)과 음향이 서로 응답한다. : 후각과 시각과 청각은 각기 다른 감각이 아니라 상징의 숲 속에서는 대등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상징주의가 많은 성과를 이끌어낸 '공감각 표현'과 유사한 표현이다. 이상 야릇한 것은 내 귀가 그 빛깔을 분별하고 내 눈이 소리를 듣는 일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어린이 살처럼 -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 향기, 즉 후각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후각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는 인간의 감각 사이의 상호 작용을 말하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 곧, 인생의 긍극적 측면을 가리킨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정신과 육감의 앙양(昻揚)을 노래하는 - 확산력 지닌 향기도 있다. : 정신과 육감의 공존 대립은 보들레르적 시의 원천이며 두 원동력에서 똑같이 만족을 얻는다. 썩은 냄새와 용연향, 사향은 육감을 앙양하고 싱싱한, 아늑한 초록의 향기들과 안식향, 훈향은 정신을 앙양하며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는 어느 쪽에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썩고 풍성하고 기승스러운 것 : 자연의 추한 모습. 곧, 인생의 부정적 측면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정신과 감각들이 하나된 감격 : 인생의 여러 요소를 포용하여 통일적으로 인식한 데 따른 감격을 가리킨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상응이란 물질 세계와 영혼의 세계가 소리와 메아리처럼 서로 화답한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물질계(자연)가 우리에게 마련해 두는 상징을 통하여 우리는 영혼계에 접근할 수 있는데 우리의 모든 감각은 자연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하여 서로 합쳐서 협력한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신전이 마련해 주는 상징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을 맡아 보는 것이 바로 시인이다.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사이는 서로 상응하고 시인은 만상이 숨기고 있는 뜻을 해독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럴 때 사물은 곧 상징이며, 시인은 친근한 시선으로 그것을 지켜본다. 즉 물질과 영혼, 인간과 자연, 자연의 상징을 통한 인간(시인)과 영혼의 세계가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시인은 상징의 숲을 거쳐 미의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을 토대로 감상하면 작품의 의미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보들레르는 외부의 세계와 인간 사이에, 혹은 자연 세계와 정신 세계 사이에는 상응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시인이다. 이 시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자연은 '모호한 말'들을 흘러 내보내는 '사원(寺院)'처럼 나타나며, 사원이라는 상징의 숲에서 인간은 관찰하면서 동시에 관찰당하는 것을 느끼면서, 향기와 색깔과 소리가 서로 응답하는 신비의 체험을 한다. 이질적인 감각들이 상호 침투하여 섞이며 또한 동시적으로 체험되고 모든 사물들이 상호적인 유추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에서 시인은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대상 뒤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판독한다. 보들레르가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주의 시인들의 선구자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시는 <악의 꽃>의 제1부, "우울한 이상"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보들레르 시의 이론과 미학의 기초를 확립시킨 작품이다. 이 시에서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는 서로 교감을 나눈다. 정신 세계에 접근하게 해 주는 상징들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물질 세계이며, 물질 세계를 포착하는 우리의 모든 감각들은 서로 뒤섞여 자연의 신비를 밝혀 내는 데 협력한다. 이 세상의 일체는 상형 문자이고, 시인이란 다름 아닌 번역자이며 암호 해독자이다. 상상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현실의 대상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주어서 다른 세계, 즉 관념의 세계와 이 현실의 대상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내부로부터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구상된 예술은 일종의 마법적 기능을 지니는데 현실과 그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세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말과 사물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모해야 한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 세계와 관념 세계를 접합시키는 자이며, 이것이 바로 '상응(相應)' 이론이다. 이 상응은 상징적 외관과 정신적 실재를 마술적으로 하나의 감각 기호로 결합시킨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보들레르의 작품 세계
보들레르는 당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고유의 영역을 발견하고 고수하여 현대시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의 시적 특징은 다음 4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미학, 미감각의 선구적 현대성의 시이다. 그의 시집은 모든 미학을 포용하는, 그 방면의 무진장의 보고(寶庫)인데, 특히 미감각과 심미 의식의 예리함과 참신함, 그리고 시대를 앞서는 선구적 현대성은 놀라운 일이다.
둘째, 다의성 및 모순·대립의 포용과 통일의 시이다. 보들레르의 이원성은 신의 전락(轉落)에서 비롯된 근원적, 보편적 현상이다. 즉 완전무결한 유일자인 아버지로부터 그 불완전한 반신(半神)으로서의 개체 남녀가 태어난 것부터가 전락의 시초며, 보편적 모순과 대립의 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합쳐짐으로써 하나의 유일체가 될 수 있는 모순이다. 즉, 통일의 모순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그는 사회, 삶, 자연 만물, 미학에 이르기까지 모순, 대립을 당연한 것으로 포용된다.
셋째, 시의 탁마(琢磨)와 언어의 힘이다. 극히 예외적인 몇 편을 빼고는 그의 시작(詩作)과 발표 사이에 대개 몇 해 이상의 기간이 격해 있는데, 이는 완벽한 탁마를 위해서였다.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어구 속에 선택된 시어의 힘과 그것이 담는 이미지의 약동이 합쳐져, 당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긴 생명을 지닌 시가 만들어졌다.
넷째, 짜여진 건축물과 같은 시이다. (악의 꽃0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의 독립된 시편들은 하나의 건축물처럼 구성되어 있다. 한 작품으로서 서사시 속에 흡수되는 동시에, 거꾸로 그 전체 구조에서 새로운 뜻을 부여받으며, 언의 역점(力點)들이 이동되어 심화되는 유래 드문 현상을 일으킨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 4. 9 파리~1867. 8. 31 파리. 프랑스의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프랑스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외설과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했고, 죽은 지 오래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중의 마음 속에서 타락과 악덕의 존재로 동일시되는 보들레르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듯 여겨질 만큼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현대 문명에 가까이 접근한 시인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부자연스러운 꾸밈을 거부하고, 대부분 내성적인 시 속에서 종교적 믿음 없이 신을 추구하는 탐구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생명의 모든 징후(한 송이 꽃의 빛깔, 창녀의 찡그린 얼굴)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그는 현대 세계의 인간 조건에 호소하고 있으며, 주제 선택의 제약을 거부하고 상징의 시적 힘을 강력히 주장한 점에서도 역시 현대적이다.
젊은시절
보들레르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나이 많은 홀아비로서 1819년에 지참금이 없는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통해 사치와 안정을 얻기 원했던 이 여자는 그 꿈을 단념하고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결혼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들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어머니는 타고난 열정적 기질로 외아들에게 헌신적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상당한 연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고, 상당히 우수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4~5세밖에 안 된 아들에게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쌓은 미적 취향이 나중에 보들레르가 19세기의 가장 주목받는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 요인이 되었다.
1827년 2월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죽자 어머니는 1828년 11월에 자크 오피크라는 군인과 재혼했는데, 재혼할 당시 이미 계급 높은 장교였던 오피크는 그후 장군까지 승진했고, 외국 대사와 상원의원을 지냈다. 오피크는 의붓아들이 규율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에, 1832년 그를 리옹에 있는 왕립 중학교의 기숙 학생으로 들여보냈다. 학교 생활은 엄격한 군대식 일과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곳에서 그는 행복했던 듯하며 몇 개의 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문학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1836년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 그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학교에 명예를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소망을 실현하는 대신 걸핏하면 규율을 어기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선생들이 보기에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허세'를 부리고 엉뚱한 역설의 재능을 개발하는 조숙하고 타락한 비행 청소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자신이 천성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1839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뒤, 그는 의붓아버지가 마련해준 외교관 자리를 마다하고, 글을 써서 살아갈 작정이라고 발표하여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자유, 즉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라탱 구역의 대학생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다. 미래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1840년까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가 아편과 대마초를 탐닉하고, 훗날 죽음의 원인이 된 성병에 걸린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인도로 보냈다. 그는 아들을 적어도 2년 동안 인도에 머물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는 6월 9일에 출항했지만, 항해가 따분해지자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다른 승객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면서 즐거워했고, 배가 풍랑을 만난 뒤(이때 보들레르는 놀랄 만큼 용감하게 행동했음) 수리하기 위해 모리셔스 섬에 입항하자 더이상 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의 설득으로 레위니옹 섬까지 갔지만, 거기서 다시 고국으로 가는 다음 배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1842년 2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항해와 모리셔스 섬에서 3주일 동안 머문 경험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그는 이때 얻은 이미지를 시에서 끌어내곤 했다. 그는 동양에 대한 이 유일한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을 간직했으며, 이런 동경은 그의 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항해를 떠날 때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소년이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상상력에는 불이 붙었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1842년 4월에 성년이 되어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타고난 낭비벽을 만끽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좋은 옷을 사들이고 생루이 섬의 로죙 호텔에 있는 아파트를 값비싼 가구로 꾸미느라 무분별하게 돈을 썼으며, 그당시의 전형적인 '멋쟁이'(당디) 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이나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을 큰 재산으로 생각했고, 사기꾼과 고리대금업자의 먹이가 되어 이후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빚더미에 올라앉을 준비를 했다. 그가 괴짜이고 허풍쟁이이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이 난 곳은 로죙 호텔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어했다는 점에서는 그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대다수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1844년 보들레르는 장차 그에게 수많은 불행을 가져다줄 혼혈 여인 잔 뒤발과 관계를 맺었다. 한때 그는 잔을 열렬히 사랑했고, 잔의 잔인함과 배신 및 어리석음에 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떤 면으로는 여전히 잔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잔은 그의 첫번째 연시 〈검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는데, 이 시들은 프랑스어로 된 성애시(性愛詩)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시간 여유가 충분하고 걱정거리가 없었던 이 초기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이루게 될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썼다. 이 시집은 레즈비언에 관한 시, 반항과 퇴폐에 관한 시,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이때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어 그림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데, 이런 지식은 장차 그의 예술 비평에 탁월함과 독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가 2년 만에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자 그의 가족은 1844년초에 그의 나머지 재산을 신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고, 그는 매달 들어오는 신탁수익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자유를 끝장내는 이런 조치에 어머니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보들레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의 가족은 보들레르의 사정도 잘 알지 못한 채, 그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가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 막았다. 아직도 빚더미에 짓눌려 있는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허용된 연간수입 75파운드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었으므로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빌려야 했다. 상황이 이처럼 갑자기 변하자 그의 사치스럽고 무사태평한 생활도 막을 내렸다. 그의 운명은 제한된 수입에 얽매인 채 궁핍과 고난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고 싶은 아들의 소망을 막으려고 애쓰는 부모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사춘기에 겪었던 조울증이 되살아났고, 그가 '우울'이라고 부른 기분이 더 자주 그를 덮치게 되었다. 위대한 우울의 시 가운데 첫번째 작품을 쓴 것도 바로 이무렵이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동정심을 키우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의 혁명적 이상주의에 매혹된 그는 1848년 2월혁명에 가담했고, 이 혁명은 성공하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그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로 결심하고 직업작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1845년 파리 현대 미술전에 대한 평론이었다. 이 예술비평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이미 현대 예술의 방향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의 예술비평인 〈1846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46〉은 미학적 비평의 이정표이다. 이 평론에서 그는 단순히 전시회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그림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명암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화음을 가지며 자연의 색깔에는 음악적인 가락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나중에 확립하게 될 자연과 예술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1845, 1846년에는 몇 편의 시가 아방가르드 잡지들에 발표되었고, 그는 이런 잡지에 논설과 평론도 기고했다. 1847년 그는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자전적 작품 〈허풍선이 La Fanfarlo〉를 발표했다. 훨씬 오래 전에 쓰기 시작한 이 작품은 자신이 로죙 호텔에서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을 때의 인간 됨됨이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보들레르가 1848년 6월혁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뒤 1849년 12월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그가 왜 1849년 12월에 디종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1850년에는 여느 때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파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개심한 증거를 보일 때까지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극하여 정규적인 직업을 갖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도 얼마 동안은 열심히 일했지만 이것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그는 어머니의 엄격함 때문에 더욱 용기를 잃었다. 그는 많은 논설을 구상했지만 1편도 쓰지 못했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많았지만 1편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는 위대한 창조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그의 본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잃어버리고 원숙기의 개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포의 번역과 〈악의 꽃〉
그의 원숙기는 그가 1852년초에 에드거 앨런 포의 글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장 포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포에 대해 쓴 첫번째 평론(이 글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씌어진 포에 대한 첫번째 평론임)은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지 3·4월호에 발표되었고, 그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한 여러 편의 글을 평론지에 실었다. 그중 하나인 〈까마귀 The Raven〉는 그가 번역한 유일한 시였다. 1852~65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기담(奇談)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6년에, 〈새로운 기담 Nouvelles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7년에, 〈아서 고던 핌의 모험 Aventures d'Arthur Gordon Pym〉은 1858년에, 〈외레카 Eureka〉는 1864년에, 그리고 〈괴기담 Histoires grotesques et serieuses〉은 1865년에 나왔다. 처음 두 작품에는 포를 해설한 긴 서문이 딸려 있다.
이 책들은 번역서로서 프랑스 산문의 고전이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영국에서 망명자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포한테서 자신과 똑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가 추구하고 있던 결론에 이미 독자적으로 도달한 사람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포를 통하여 자신의 미학 이론과 시의 이상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852년 4월에 보들레르는 잔 뒤발을 떠났다(실제로는 끝내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나 그는 여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여자를 찾다가 여배우 마리 도브룅에게 접근했다. 마리가 그를 거부하자 유명한 미인이며 일찍이 화가의 모델이었던 아폴로니 아글라에 사바티에에게 구애했다. 사바티에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친구로서 보들레르와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사바티에는 그의 〈하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1854년 그는 다시 마리 도브룅과 관계를 맺었고,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어 〈초록빛 눈의 비너스〉 연작을 썼다. 이 두 연작에 포함된 시는 대부분 그의 예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작품들이다.
포의 작품 번역가로 또한 예술비평가로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시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1855년 6월 보수적 낭만주의의 요새인 〈르뷔 데 되 몽드 Revue des Deux Mondes〉지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제출한 18편의 시를 발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보들레르가 이 시들을 고른 이유는 그 표현 방식과 주제가 독창적이고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들이 발표되자 그는 악명을 얻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857년 봄에 다시 9편의 시가 〈르뷔 프랑세즈 La Revue Francaise〉지에 실렸고 〈아르티스트 L'Artiste〉지에도 3편이 실렸다. 그리고 6월에는 〈악의 꽃〉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시집 때문에 보들레르와 그의 친구인 출판업자 풀레 말라시스 및 인쇄업자들은 외설과 신성모독죄로 모두 기소당했다. 이 유명한 재판에서 그들은 유죄 선고를 받고 벌금을 물었으며, 6편의 시가 발표 금지되었다. 이 조치는 1949년에야 겨우 해제되었다. 몇몇 독자들은 보들레르의 의도와 완전한 예술성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몇 세대 동안 〈악의 꽃〉은 여전히 타락과 불건전 및 외설의 표본으로 남아 있었다. 보들레르는 1861년 〈악의 꽃〉을 대폭 증보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금지된 시는 삭제했다. 이 금지된 시들은 1866년 벨기에에서 출판된 〈유실물 Les Epaves〉이라는 시집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개정판을 더 증보한 제3판을 준비하고 있던 1866년에 보들레르는 온 몸이 마비되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친구인 샤를 아슬리노가 출판했지만, 그것은 아마 보들레르가 구상했던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시집에 넣으려고 계획하지 않았던 몇 편의 시와 1866년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에 처음 발표되었던 6편의 〈새로운 악의 꽃〉도 포함되어 있다.
말년
그가 큰 기대를 걸었던 〈악의 꽃〉이 실패한 것은 보들레르에게 쓰라린 충격이었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갈수록 커지는 좌절감과 환멸 및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사바티에와의 정신적 사랑은 슬프게 끝나버렸고, 1861년 마지막으로 헤어진 잔 뒤발은 여전히 그에게 부담과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이 시기에 씌어졌지만, 책의 형태로 출판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정기간행물에 발표되었다. 〈1859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59〉은 〈르뷔 프랑세즈〉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파리에서 공연된 탄호이저 Richard Wagner et Tannhauser a Paris〉는 〈르뷔 외로펜 La Revue Europeene〉(1861)에, 〈현대 생활을 그리는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데생 화가인 콩스탕탱 기)는 〈피가로 Le Figaro〉(1863)에, 그리고 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을 엮기 위해 쓰고 있던 산문시들은 여러 신문에 나뉘어 발표되었다. 이 마지막 산문시는 보들레르가 유독 아꼈고 오랫동안 손질해온 작품이었다. 그는 마지막 쓰러지기 직전에도 여전히 이 시를 다듬고 있었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에서 착상을 얻었지만, 주제는 같은 시기에 쓴 그의 운문시 주제와 같고, 작품의 분위기는 나이들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보들레르의 만성적인 염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산문시들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근대 도시 파리에 대한 그의 감정,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낙오자들과 버림받은 부랑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악의 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1860년 풀레 말라시스는 대마초와 아편의 효과에 대한 보들레르의 연구 논문 2편을 〈인공 천국 Les Paradis artificiel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1861년에는 〈악의 꽃〉 개정판을 냈다. 1862년 그는 파산을 선고받았다. 보들레르는 그의 출판업자의 실패에 말려들었고, 경제 사정은 절망적일 만큼 어려워졌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리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작품들의 판권을 팔기 위해 1864년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한 건의 출판계약도 맺지 못했다. 특히 미학이론을 규정한 평론집을 출판하고 싶어했는데, 이 책의 출판계약에 실패하자 그는 몹시 낙담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평론도 시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의 시를 충분히 음미하려면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시는 모두 그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결정체이며, 평론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원리에 대한 명상이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창조적 예술가라면 결국 모두 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평론을 통해 자신의 시를 해설하고, 자신의 미학을 연장하여 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벨기에의 나무르에 머물고 있던 1866년 2월 보들레르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67년 8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슬리노와 시인인 테오도르 드 방빌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보들레르는 인정받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글은 대부분 출판되지 않았으며, 이전에 출판된 것들도 절판되었다. 그러나 시인들 사이에서는 곧 의견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미래 상징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미 그의 추종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그는 19세기 프랑스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숭배자들은 그가 서유럽 전역의 감수성과 사고방식 및 글 쓰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의 미학이론이 형성된 시기는 시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상징주의 운동은 바로 이 이론에서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n. Starkie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상징주의운동(象徵主義運動, Symbolist movement)
19세기말 일군의 프랑스 시인들이 시작한 문학 및 예술 운동.
회화와 연극으로 확대되었고, 20세기 유럽과 미국 문학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지극히 상징적인 언어를 암시적으로 사용해 개인의 정서적 체험을 표현하고자 했다.
상징주의 문학
주요 상징파 시인으로는 프랑스의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쥘 라포르그, 앙리 드 레니에, 르네 길, 귀스타브 칸, 벨기에의 에밀 베르하렌과 조르주 로덴바흐, 그리스 태생인 장 모레아스, 미국 태생인 프랜시스 비엘레 그리팽과 스튜어트 메릴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상징주의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지만, 상징주의의 원칙을 소설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였고, 희곡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벨기에 태생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였다. 20세기 프랑스의 시인인 폴 발레리와 폴 클로델은 상징파 시인들의 직계 후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프랑스 시의 기법과 주제는 고답파 시의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에 뚜렷이 드러나 있듯이 완고한 관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런 관습에 대항하여 일부 프랑스 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상징파 시인들은 인간의 내면생활과 경험의 덧없고 순간적인 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시를 설명적인 기능과 형식적인 미사여구에서 해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 생활에 대한 감각적 인상과 형언할 수 없는 직관을 환기하고자 했으며,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시인의 정신 상태를 전하고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난해하고 혼란된 통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전달하려 했다.
베를렌이나 랭보 같은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사상, 특히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수록된 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감각들간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여러 예술의 종합이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시의 음악성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상징주의자들은 조심스럽게 선택한 낱말들의 고유한 화성과 음조 및 색채를 섬세하게 다루어서 시의 주제를 전개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시의 표현 수단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주의자들의 노력은 예술이 다른 어떤 표현 수단이나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또한 물질 세계의 유형성과 개별성 밑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놓여 있다는 유심론적인 확신에 일부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 또 하나의 현실의 본질은 예술 작품을 낳는 데 이바지하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과 예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을 통해 가장 잘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를렌의 〈무언가 Romances sans paroles〉(1874)와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L'Apres-midi d'un faune〉(1876) 같은 걸작들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프랑스의 진보적 시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장 모아레스는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 Le Figaro〉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사실주의 연극과 자연주의 소설 및 고답파 시의 묘사적인 경향을 비난하고, 보들레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퇴폐'(decadent)라는 용어를 '상징파'와 '상징주의'라는 용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1880년대말에는 상징주의를 지지하는 평론지와 잡지가 수없이 생겨나, 상징파 작가들은 이 운동에 적대적인 비평가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논쟁에 자유롭게 참여했다. 말라르메는 상징파 시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여담 Divagations〉(1897)은 지금도 이 운동의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설서이다. 고정된 운율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시의 운율을 얻기 위해, 많은 상징파 시인들은 산문시를 쓰고 자유시(vers libre)를 사용했다. 자유시는 이제 현대시의 기본 형식이 되었다.
시 분야에서 극단적인 상징주의 운동은 1890년경 절정에 이르렀다가 1900년 무렵부터 갑자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뚜렷한 초점도 없이 분위기만 느껴지는 상징파 시의 수사적 표현은 결국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가식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고, 상징파 시인들이 한때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퇴폐'라는 용어는 단순히 세기말의 퇴폐적인 풍조와 부자연스러운 겉치레를 비웃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상징주의 작품들은 20세기에 대부분의 영국 문학과 미국 문학에 강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실험적 기법은 현대시의 기법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상징주의 이론은 W.B. 예이츠와 T.S. 엘리엇의 시,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가 대표하는 현대소설로 열매를 맺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낱말의 음악적 조화와 이미지 유형이 줄거리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주의 소설로 성공한 몇몇 작품 가운데 하나는 J.K. 위스망스의 〈역행 A rebours〉(1884)이다. 이 책은 권태에 빠진 한 귀족이 퇴폐적인 미학을 추구하여 놀라운 임기응변의 재주로 다양한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20세기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이 상징주의 운동을 개관한 책 〈악셀의 성 Axel's Castle〉(1931)은 현대 문학 분석의 고전이며 상징주의 운동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문학에 있어서의 상징주의는 1910년대에 백대진· 김억 등이 발표한 글에서 비롯되었다. 백대진은 〈20세기 초두 구주 제 대문학가를 추억함〉(신문학, 1916. 6)에서 레니에·보들레르·모레아스 등의 상징파 시인들을 소개했고, 〈최근의 태서문단〉(태서문예신보, 1918. 11. 30)에서 말라르메 계열의 지적 상징주의를 소개했다. 반면 김억은 〈요구와 회한〉(신문계, 1916. 9)·〈프랑스 시단〉(태서문예신보, 1918. 12)에서 베를렌 계열의 감상적 상징주의를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는 〈태서문예신보〉 6호에 베를렌의 시 〈거리에 내리는 비〉·〈검은 끝없는 잠은〉·〈아름다운 밤〉 등과 11호에 베를렌의 〈작시론 作詩論〉을 번역해서 실었고, 상징주의 시가 곧 자유시임을 보여주는 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펴냈다. 그러나 베를렌의 영향을 받은 그는 내면의식의 섬세한 음영(陰影)이나 외부세계와 자아와의 교감이라는 상징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간과하고, 기분의 시학으로서만 이해했다는 점에서 한국 상징주의 시의 오류와 한계를 드러냈다. 이어 1920년대 후반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에 이르러 감각과 사상이 결합된 한국적 상징주의 시로 발전했다. 1950년대 이후 상징주의 시는 김춘수의 존재론적 순수시, 전봉건의 언어의 마술적 암시성, '현대시'동인들의 내면의식의 추구라는 형태로 변모했다.
상징주의 연극
극작가들도 역시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 특히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았다. 말라르메는 1870년대에 〈데르니에르 모드 La Derniere Mode〉지에 연극평을 쓰면서, 그 당시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사실주의극에 반대하고 인간과 우주의 숨은 신비를 재현하는 시적인 연극을 제창했다. 연극은 시인-극작가가 자신의 시적 언어가 지닌 암시적인 힘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조응을 드러내는 신성한 의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라르메는 주장했다. 상징파 극작가들은 본능적이거나 직관적으로 알아낸 존재의 심오한 진실을 언어로는 직접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상징과 신화 및 분위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요한 상징파 극작가는 벨기에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와 프랑스의 빌리에 드 릴 아당, 폴 클로델이다.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역시 상징주의 신념의 영향을 받았다.
상징파 연극의 유명한 보기로는 릴 아당의 〈악셀 Axel〉(1884 초연, 1890 결정판),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 et Melisande〉(1892), 알프레드 자리의 풍자적인 작품 〈위비 왕 Ubu roi〉(1896) 등이 있다.
1890년에 프랑스의 시인 폴 포르는 '예술 극장'을 세우고, 고대와 현대의 시를 낭독하는 한편 상징파 연극을 상연했다. 1892년 포르가 은퇴하자, 오렐리앵 마리 뤼녜 포가 자신의 외브르 극장에서 20세기까지 상징파 연극을 계속 상연했다. 상징파 연극은 통합된 하나의 운동으로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환상과 분위기 및 기분에 의존하고, 사실주의 전통과 분명하게 단절한 것이 20세기 극작가들과 연극 공연에 영향을 미쳤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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