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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대시 또는 공허의 소명/김정란
2022년 09월 11일 14시 27분  조회:703  추천:0  작성자: 강려
세계시의 현장
 
프랑스 현대시 또는 공허의 소명/김정란
 
  양차 대전을 직접 체험한 프랑스 시인들은 인간의 야만을 목격한 충격 속에서 시를 통해 현실로 다가가기 위한 직접 통로를 열 수 있기를 원했다. 전후의 시인들은 보다 문학적인 문제로 돌아간다. 시의 언어는 어떻게 실재와 관계를 맺는가? 실재 앞에서 시적 언어란 무엇인가? 늘 관념에 덜미를 잡혀있는 언어라는 것이 과연 관념의 저주를 따돌릴 수 있는가? 시란 가능한가? 언어 자체마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새로운 말라르메라고 불릴만한 이 지성적인 시인들은 철학과 시론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이 가능성 없는 수수께끼 풀기에 도전한다. 언제나 보편의 영광에 이르려 하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개인적 해결책밖에는 써낼 수가 없는ㅡ그것도 예외적인 몇몇 명석한 시인들이나 성공하는ㅡ시도. 그러나 그것은 현대시의 한계가 아니라, 현대시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는 이미 초현실주의자들이나 레지스탕스 시인들처럼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싸울 상황이 아닌 것이다. 세계는 미분화되고 다양화되었다. 몇 개의 원칙에 따라 세계를 단순하게 재단하는 시대로부터 시인들은 멀리 와 버렸다. 따라서 시인들은 이제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세계 앞에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시를 가지고 세계의 모든 문제 앞에 마주 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관여하는 어떤 특정한 문제에 관해 매우 전문적인 방식으로 대처한다. 그들은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자신의 기량을 놀라울 정도로 완숙하게 다듬는다. 앙리 미쇼Henri Michaux와 르네 샤르René Char, 프랑시스 퐁쥬Francis Ponge의 뒤를 이어서 이브 본느프와Yves Bonnefoy와 미셀 드기Michel Deguy,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ès, 자크 루보 Jacques Roubaud 등이 언어의 실험실에서 치밀한 전략을 수립해내는 데 성공했다.
  퐁쥬와 미쇼 이후에 특히 프랑스의 젊은 시인들은 초현실주의가 삶의 차원에서 시와 범벅으로 수용했던 운명의 문제를 시의 문제로 분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요란스러운, 그러나 정작 시도 삶도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종합적 해결 방식의 실패를 지켜보면서 생겨난 반작용일 수 있다. 프랑스 현대시의 주된 전통은 1968년 5월 혁명 이후의 여러 가지 문화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랭보보다는 말라르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어쩌면 차라리 보들레르의 귀환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시인들이 궁극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심은 실존의 존재론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성과 일상성은 프랑스 시를 크게 공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시인들은 더욱더 세련된 시론을 가꾸어 가며, 시의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당장 그렇게 시의 문제에 본격적으로 덤벼들었을 때, 프랑스 현대시인들을 엄습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무력함>에 대한 자각이다. 이것은 후기산업사회 안에서 시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누가 시인을 뮤즈의 영감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는 단지 <기호의 생산자>, 그리고 <글을 쓰는 자>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문과학의 총아로 등장한 언어학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그 이론의 생산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그들의 동국인인 프랑스인들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미 보들레르가 현대시의 문을 열면서 천재적으로 자각했던, 존재와 언어의 원초적 균열이라는 문제는, 다시 한 번 더, 이번에는 철학적인 긴박감과 더불어 시인들을 강타한다.
  모든 명석한 프랑스 현대 시인들은, 그들의 경향이 덜 철학적이든, 더 철학적이든 상관없이, 모두 시 쓰기의 근원적 조건인 언어 문제에 민감하다. 말라르메적이라기보다는 랭보적인 열정에 기울어져 있는 앙드레 프레노André Frénaud 같은 <견자見者> 전통의 시인도 프랑스 현대 시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이 무력한 <언어의 문제>에 강박적인 관심을 보인다. 시인들의 직업은 최초의 공허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의 부재로부터 시작되는 경험. 언어의 부재. 말하기의 불가능성. 오르페우스는 언제나 소리 내어 에우리디케를 부르는 순간, 즉 음성화한 기호를 발음하는 순간,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호명된 에우리케는 다시 무無속으로, 캄캄한 지옥의 부재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모든 시인들은 언어가 사물의 부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인식이 프랑시스 퐁쥬로 하여금 <사물의 편>을 들게 만든 것이다. 그에게 시인의 임무란 <언어에 대한 사물의 도전의 기치를 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언어의 저주를 따돌릴 수 있는 연장으로 시인이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언어뿐이다. 이처럼 시인은 언어의 매개에 의하여 세계에 맡겨진 채, 실재를 드러낼 수 없는 언어의 무능력을 경험한다. 시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갈망에 있어서 첨예하며, 그 갈망의 실현에 있어서 무능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는 우리가 이름을 부르면서 합류하려고 하는 실재를 살해한다. 도망가는 에우리디케. 그것이 최초의 순간이다. 언어의 공허와 세계로부터의 분리. 로제 지루Roger Giroux는 이렇게 쓴다.
 
  새 한 마리, 바다 위로 날아갈 때,
  우리가 숨 쉴 때처럼,
  이 하루의 끝에 대지의 기억을, 빛과 사랑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한 마리 새...
 
  눈들이, 손들이, 얼굴 전체가 만들어 내는 이 작품을 부수지 않고,
 
  어떻게 이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 안의 새와 언어를 죽이지 않고,
  얼굴을 붉히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어떻게 이것을 말할 것인가...
 
  모든 작품은 낯설고, 모든 말은 부재하는 것,
  시는 비웃는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이 욕망을 경계한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하나의 공간에 대한 나의 욕망을.
  이 명명하는 힘은 공허의 자질이다.
 
  시인은 <공허의 자질>을 가진 자이다! 또는 아르멩 타르피니앙Armen Tarpinian.
 
  말들의 피는 울부짖는다 소멸되는 의미의
  십자가에 매달려
  삶은 언제나 불완전한 말들 속에서 비틀거린다
  나는 밤이 어둡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앙드레 뒤 부세 André du Bouchet도 이렇게 쓴다.
 
  이 웅웅거리는 말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등잔불의 광채
  투박한 대지
  어쩌면 나에겐 참을성이 모자랐던 것일까
  머리가 벌써 어두워진다.
 
  그리고 이브 본느프와.
 
  나는 부재에서 시도된 말일 뿐,
  내가 몇 번씩 시도하더라도 부재가 그 모든 반복을 파괴하리라,
  그렇다, 말에 불과하다는 것은 곧이어 소멸하리라는 것,
  그것은 비극적인 임무, 덧없는 대관식
 
  그러나 그들의 선배들이 이 경험을 고정시키는 것으로 만족했다면, 이 젊은 시인들의 대부분은 그 경험을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시는 언어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삶>, 순간의 진실이었으므로, 그들은 시에 기대어 언어의 저주를 따돌리려고 한다. 앙드레 프레노는 『우리의 치명적인 서투름Notre inhabilité fatale』이라는 매우 랭보적인 제목의 시집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지칠 줄 모르는, 만족할 줄 모르는 으르렁거림>을 재현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드러낸다. 샤르는 너무나 아름답게 그 갈망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는 분노에 가득 찬 상승이다. 시는 황폐한 낭떠러지의 놀이이다.
 
  또는 본느프와. 그의 진지하고 무겁고 깊은 발성법:
 
  부딪칠 것,
  영원히 부딪칠 것
.
  문턱의 미혹 속에서.
  닫혀진, 문에.
  텅 빈, 문장에.
  <쇠鐵>라는 말들만을 일깨울 뿐인
  쇠 속에서.
 
  검은, 언어 속에서.
 
  시인들은 언어를 탐험하고, 실험하고, 언어에게 질문을 던지고, 언어의 모든 의미와 모든 비밀을 언어에서 뽑아내려고 한다. 그들은 임의적이며, 애매하며, 다의적이며, 불안정한 언어들을 붙잡고 싸운다. 그들은 그렇게 변증법적으로 <산다>. 그 어떤 시인들의 시들보다도 이브 본느프와의 시들은 이 싸움을 깊이, 그리고 찬란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시도는 전시대의 프랑스의 어느 시들보다도 더욱더 진지하며, 더욱더 성공적으로 시와 존재론을 통합하고 있다. 이들의 시적 태도의 근간이 이미 보들레르와 말라르메를 거쳐 마련된 것이라고는 해도, 이들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존재론적인 치열성과 극단적인 명석함을 프랑스 시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다. 엄격한 이론적인 연습에 의하여 정화된, 언어가 부서진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불리기 시작한 <노래>(<비명>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력함을 스스로 시인한 자가 부르는 겸손한 노래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찬란한가.
  피콩은 이 시인들의 시가 그렇게 <불연속성의 충격적인 힘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시인들의 시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건축>과 <논리적인 연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전통적인 작시법을 포기하고 간결한 호흡의 시를 쓰는 자코테같은 시인들보다는, 비교적 전통적 작시법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본느프와 같은 시인들에게서 더욱더 잘 나타나는데, 이러한 특징은 많은 프랑스 현대시인들이 시 한편 한편의 개별적 완성도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시집 한 권, 또는 일생을 두고 발표하는 시집 여려 권을 통해서 하나의 일관성 있는 세계 이해 방식이나 철학을, 아니면 적어도 자신의 시 세계의 굵은 선을 보이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시인들은 이제 <집> 또는 <성>을 짓지, <방>을 짓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소품 제작에는 별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것은 노래 가사를 쓰는 작사가들의 일이지, 시인들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 프랑스 현대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 무척 혼란스러워진다.
  예를 들어서 장 그로장Jean Grosjean의 작품들은 한 편 한 편 읽으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그가 발표하는 연속적인 시들은 일련의 대화이기 때문에 그 어떤 단편도 우리에게 그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 대화 속에서 시인은 상징들과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사용하여 강자들과 약자들을, 신과 인간을 대치시켜 놓고 있다. 각각의 말은 앞서의 말에 대답하며, 하나의 대답을 찾고, 비난하거나 정당화한다. 즉 그것은 지속되는, 매순간 자기 자신으로부터 태어나는 자신의 시적 정합성 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심각하며 감동적인 웅변, 그러나 중간 중간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피콩의 표현을 따르자면 <타원형>의 웅변. 성서의
어조가 단어의 놀라운 가벼움에 결합되어 있다.
  카이로 태생의 유태인인 에드몽 자베스 역시 성서로부터 자양을 공급받고 있다. 모리스 블랑쇼에 의하면, 이 시인은 “행위와 시적 요구, 그리고 뿌리 깊은, 유태인이라는 자신의 소속에 대한 성찰”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 구조보다 더 놀라운 점은, 그의 시작품의 전체적인 <건축>이다. 『질문의 책Le Livre des questions』은 3부작으로, 그 뒤를 이어서 『야엘Yael』, 『엘리아Elya』와 『아엘리Aely』가 이어진다. 그의 작품 안에는 이야기, 대화, 자서전, 인용, 시, 책에 대한 성찰 등의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가 들어있다. 잡다한 삶에 대한 성찰과 같은 잡다한 글쓰기? 그가 속해 있는 몇 개의 복잡한 세계를 통합하는 것처럼 장르들을 통합하는 글쓰기? 그리고 그 모든 다양한 갈래들이 궁극적으로 특별한, 계시적인 언어인 <시>라는 <책>의 큰 형태 속에 모여들어 종합을 이루는? 왜냐하면 『책으로의 귀환Le Retour au livre』을 쓴 이 시인에게 결국 모든 글쓰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계시>를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자기 자신에게 언어를 계시한다는 것이다.> 다음 시를 읽어 보면, 근원으로부터 뿌리 뽑혀 떠도는 그가 얼마나 통합에 대한 근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근심의 절박성이 그의 시 전체를 하나의 <건축물>로 만들게 했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느 주에 있는 바뇌Bagneux의 공동묘지에는 우리 어머니가 쉬고 계신다. 오래된 도시 카이로의 모래로 이루어진 공동묘지에는 우리 아버지가 쉬고 계신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죽은 도시 밀라노에는 내 누이가 묻혀 있다. 내 형이 묻혀 있는 로마에서는 그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그림자가 땅을 파냈다. 네 개의 무덤. 세 개의 나라. 죽음은 국경선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하나의 가족. 두 개의 대륙. 네 개의 도시. 하나의 언어. 공허의 언어라는 하나의 고뇌. 한데 모이는 네 개의 시선. 네 개의 실존. 하나의 비명소리.
네 번, 백 번, 만 번 외쳐지는 하나의 비명소리.
- 그러면 무덤이 없는 사람은 어쩌지? 라고 랩 아젤이 물었다.
- 우주의 모든 그림자들의 비명소리란다. 라고 유켈이 대답했다.
(어머니, 나는 삶의 첫 번째 부름에 대답해요, 처음으로 발음된 사랑의 말에 대답해요, 그러면 세계는 당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요)
 
  수학 교수인 자크 루보Jacques Roubaud의 텍스트도 산문과 시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전략을 구사한다. 그의 작품은 로브그리예나 미셸 뷔토르의 작품처럼 구조주의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동 기술적으로 전적인 자발성에 던져져 있지도 않고, 절대적인 책의 구성을 보이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시인은 작품이 여러 가지 방식의 독서를 버티어낼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든다. 예를 들어서 그의 『∑』를 위해서는 네 가지의 독서 방법이 제안된다. 하나는 텍스트들의 집합으로 읽기, 다른 하나는 수학 기호들의 체계들 따라서, 세 번째는 바둑 놀이가 진행되는 방식에 따라서(361개의 텍스트들은 바둑의 180개의 흰 돌과 181개의 검은 돌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네 번째는 하나 하나의 텍스트들을 따로 읽는 것. 그러나 결국 시인 자신이 수립해 놓은 프로그램은 중요하지 않다. 독자 각자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읽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립 자코테에게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또 다른 통일성의 개념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 진정한 통일성이란 순간적인 결정화 속에서 나타나는 시의 통일성이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 시인은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Paysages avec figures absentes』이라는 산문집도 출간한 바 있고, 레오파르디와 무질과 릴케의 번역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언어는 침묵, 파괴할 수 없는 어떤 것, 또한 시인이 체험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것에까지 이른다. 말수 적은, 오랫동안 억제되어 온 깊은 언어가 향수에 어린 가을의 흐릿한 색채 속에서 떨고 있다. 엄숙하면서도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 빛 쪽으로 성큼 나가지 못하는, 어두움 쪽에서 빛을 향해 서서 망설이는 위기에 가득 찬 릴케적 분위기. 겸손한 실재. 그러나 내면의 깊이 안에서 절묘한 광채를 부여받고 있는, <승격된> 실재. 그의 시에서는 아주 좋은 의미에서의 상징주의자들의 메아리가 느껴진다. 소박하다는 점에서는 프랑시스 잠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시는 가능할까? 이 모든 진지한 노력들은 표피적이고 가벼운 후기산업주의 문화적 풍경 안에서 어떤 매우 전문적인 게토의 자기 위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진지함은 그 자체로 인류의 자산이다. 그것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김정란
1976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 외 평론집 『비어있는 중심-미완의 시학』 외
현 상지대 문화켄텐츠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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