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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모음
2022년 10월 10일 18시 07분  조회:795  추천:0  작성자: 강려
김지하 시모음
 
황톳길


타는 목마름으로
사랑
꽃그늘
벼랑
솔잎
겨울
바다
겨울 거울 3
短詩 하나
短詩 둘
短詩 넷
중심의 괴로움
푸른 옷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낯선 희망
첫 문화
말씀
노을 무렵
되먹임

가을
산책은 행동
갈꽃
마른번개의 날에
빗소리

녹두꽃
白鶴峰.1

이제 나에게 오세요
엽서
형님
애 린
이슬털기
우리 앞에 있는 분명한 희망
회귀
바람에게
가벼움
一山詩帖(일산시첩) 3
쳐라
사람 사이의 틈
겨울에
나이
저 먼 우주의
서 편
나 한때

저녁 산책

눈물
죽음
목련
무화과

김지하 시인 소개

~~~~~~~~~~~~~~~~~~~~~~~~~~~~~~~~~~~~~~~~

황톳길 / 김지하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으로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송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브르랴

대삽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면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




저 청청한 하늘
저 흰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 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뚱어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 가는
넋 속의 저 짧은
여위어 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떠나가는 새

청청한 하늘 끝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덧없는 가없는 저 눈부신 구름
아아 묶인 이 가슴

~~~~~~~~~~~~~~~~~~~~~~~~~~~~~~~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 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는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사랑 / 김지하


내가 이렇게 기대 있는 것은
누굴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기대 있는 것은
한밤중 열두 시가 지난 시간
당신도 자고 아이들도 잠든 시간
담 건너 고양이 울음도 죽은 시간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괴로운 시간
깨어 있다는 것
죽기보다 더 버리고 싶은 일
알겠어요 이 시간
내가 기대고 있는 까닭
내가 기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누구라도 좋지요
돌멩이라도 좋고
쓰레기라도 좋고
잿더미라도 좋지요
사랑하겠다는 것.

~~~~~~~~~~~~~~~~~~~~~~~~~~~~~

꽃그늘 / 김지하



이제야 그늘 속에


핀다

꽃과 그늘 사이
언젯적부터인가
그 긴장은

이제야
짧은 행간에
웬 무늬 무늬 드러나
흰 무늬들
속의 속
흐드러 진다

내 삶의


여기
청도 각북골에 와
엎드린 한 새벽에 흘러
흘러 넘치며 아롱거리는
샘물 속


그늘.

창작과비평 / 2006,가을

~~~~~~~~~~~~~~~~~~~~~~~~~~~~~~~~~

벼랑 / 김지하


북풍은 가슴을 꿰뚫고
이마 위에 눈 쌓인 시루봉이 차다

삶은 명치 끝에
노을만큼 타다 사위어가는데

온몸 저려오는 소리 있어
살아라
살아라
울부짖는다

한치 틈도 없는 벼랑에 서서
살자 살자고
누군가 부르짖는다

거리에 나서도
아는 사람 없는 빈 오후에.

시집 ; 별밭을 우러르며

~~~~~~~~~~~~~~~~~~~~~~~~~~~~~~

솔잎


엄동에도
솔잎은 얼지 않고
나무들은
뿌리만으로 겨울을 견딘다
모두 오염되고
파괴되었어도
생명은 얼지 않고
뿌리에서 오는 힘으로 넉넉히
새봄을 준비한다.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겨울


내 마음 여위어
겨울 나무 같아라

잿빛 구름 함께
까마귀도 와 앉거라

바람 소리 가깝고
번개 치리

번개 속에
숨었던 옛일 하나
비춰나리

땅속 스치는
희미한 노랫소리
그림자 하나 흔들림

거기
무서운 기별
봄 오리라.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바다 / 김지하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참으로 이제 가겠다
손짓해 부르는
저 큰 물결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망망한 바다
바다로

없는 것
아득한 바다로 가지 않고는
끝없는 무궁의 바다로 가는 꿈 없이는 없는 것
검은 산 하얀 방 저 울음소리 그칠 길
아예 여긴 없는 것

나 이제 바다로
창공만큼한
창공보다 더 큰 우주만큼한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만큼한
끝간 데 없는 것 꿈꿈 없이는
작은 벌레의
아주 작은 깨침도 있을 수 없듯
가겠다

나 이제 가겠다
숱한 저 옛 벗들이
빛 밝은 날 눈부신 물 속의 이어도
일곱 빛 영롱한 낙토의 꿈에 미쳐
가차없이 파멸해 갔듯
여지없이 파멸해 갔듯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백방포에서 가겠다
무릉계에서 가겠다
아오지 끝에서부터라도 가겠다
새빨간 동백꽃 한 잎
아직 봉오리일 때
입에 물고만 가겠다
조각배 한 척 없이도
반드시 반드시 이젠 한사코
당신과 함께 가겠다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

바다가 소리 질러
나를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의 이슬
이슬 가득 찬 한 아침에
그 아침에
문득 일어서
우리 그 날 함께 가겠다
살아서 가겠다
아아
삶이 들끓는 바다, 바다 너머
저 가없이 넓고 깊은, 떠나온 생명의 고향
저 까마득한 화엄의 바다

가지 않겠다
가지 않겠다
혼자서라면
함께가 아니라면 헤어져서라면
나는 결코 가지 않겠다

바다보다 더 큰 하늘이라도
하늘보다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라도
화엄의 바다라도
극락이라도.

~~~~~~~~~~~~~~~~~~~~~~~~~~

겨울 거울 3 / 김지하


대흥사 동백은
날 위해 피었는가

대흥사 동백 위해
내 가슴속 피멍 여기 피었는가

모든 것 다 잃었는데
사슬 소리는 여전히 거느리고

피안교 건너는 내게
동백이 오네

붉은 붉은 꽃 사슬 두른
동백숲이 내게 오네


맵디매운
동백꽃 떨기들
피안교 너머 내게로 밀려오네.


모로 누운 돌부처 / 나남

~~~~~~~~~~~~~~~~~~~~~~~~~~~~~~~~~~~~~~

短詩 하나


끊으려면 잇는 법
아주 잊히기 위해
이리 우뚝 선다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이 사람이라
오늘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한다.


短詩 둘


내 가슴에 달이 들어
내 가난한 가슴에
보름달이 들어
고층 아파트 사이사이를
산책 가는 내 가슴에
가을달이 들어.


短詩 넷


진종일 바람 불고
바람 속에 꽃 피고
꽃 속에 내 그리움 피어
세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데
내 어쩌다 먼 산 바라
여기에 굳어 돌이 되었나.


花 開 / 실천문학사

~~~~~~~~~~~~~~~~~~~~~~~~~~~~




아파트 사이사이
빈 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 틈 때문

사람은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김지하 서정시 100선 / 꽃과그늘

~~~~~~~~~~~~~~~~~~~~~~~~~~~~~~~~~~~~~~~

중심의 괴로움


봄에
가만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시집:중심의 괴로움 / 솔 시인선 / 1994.8

~~~~~~~~~~~~~~~~~~~~~~~~~~~~~~~~~~

푸른 옷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 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 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든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워지지만 않는다면.

~~~~~~~~~~~~~~~~~~~~~~~~~~~~~~~~~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아직은 따스한 토담에 기대
모두 토해버리고 울다 일어나
무너진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무것도 없는
댓잎 하나 쓰적일 바람도 없는
이렇게 비어 있고
이렇게 메말라 있고
미칠 것만 같은 미칠 것만 같은
서로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 불켠 방의 초라한 술자리 초라한 벗들

날이 새면
너는 진부령 넘어
강릉으로 오징어잡이, 나는 또
몸을 피해 광산으로 가야 할 마지막
저 술자리

서로 싸우지 않고는 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낯선 마을의 캄캄한 이 시대의 한밤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아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

낯선 희망


내리는 비를 타고
한없이 내려라

증발의 날을
기다림도 없이

내려라
내림 속에 떠오르는

첫 무지개

태양도 없이 떠오르는
비 오는 날의
낯선
낯선 희망.

花開 / 실천문학사

~~~~~~~~~~~~~~~~~~~~~~~~~~~~~~~~~

첫 문화


말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아파트 사이
공터에 나가

입에
손을 모은다
속삭인다

'꽃이 피었다아---'

'꽃이 피었다아---'

한겨울에
석 달 만에

'난초 피었다아---'

소리는
하얀 입김이 되어

푸른 하늘에
뜬다

사방으로 흩어진다

'피었다아---!'

첫 문화다.


花 開 / 실천문학사

~~~~~~~~~~~~~~~~~~~~~~~~~~~~~~

말씀


하늘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틈 산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 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시선집 ; 마지막 살의 그리움 / 미래사

~~~~~~~~~~~~~~~~~~~~~~~~~~~~~~~~~~~~~~~~~~~~~

노을 무렵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행길 저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하는 내 속에
담배 피우며 신문 읽고 있는
내 속에 노을 무렵에
되똥거리는 빛나는 재잘거리는
닭,참새,붉은 구름,사철나무 스쳐
지나는 바람,머언 거리의 노랫소리
노랫소리 속에
나와 함께 공받기 하는 아이들 속에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우리 집에 문득
불켜질 때 나는 다시 혼자다
오늘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자.

~~~~~~~~~~~~~~~~~~~~~~~~~~~~~~~~~~~~~~~~

되먹임


내 목숨은
아득타
별로부터 오셨으니

내 목숨은
가까이 흙으로부터 풀 나무 벌레와 새들 물고기들
내 이웃들로부터 오셨으니

죽고 싶어도
죽기 어려운 것

우주가 날 이끌고 있어
튕기고 이끌고 또 튕기고

살고 또 살아
갚아야 하리니
이 은혜를 갚아야

쪼그려 앉아 흙 위에 돌팍으로 쓴다
가슴팍에 깊이깊이 새기며 쓴다

'되먹임!'

花開 / 실천문학사 141

~~~~~~~~~~~~~~~~~~~~~~~~~~~~~~~




내일 새벽
나의 죽음 뒤에
아마도
별이 뜰 것이다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 뜰 것이다

우주의 비밀이다
살아서는
내 몸 속에 빛나던,
아름답던,

나를 이제껏
살게 했던

그 별이 처음으로
우주에 뜰 것이다
숨어 있던 별,

아마도
내일 새벽
나의 죽음 위에
비밀을 열 것이다

다시 산다면
나는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로

항상 떠
내내 비췰 것이다.

~~~~~~~~~~~~~~~~~~~~~~~~~~~~

가을


낙엽철
햇빛 속에서

머리를 긁어 올린다
흰 비듬이
우수수 쏟아진다

가슴에 꽂힌
모진 눈빛들 칼끝 같은 말들
다 쏟아진다

푸른 하늘

제주 어디쯤
검은 돌 틈 흰 갈꽃에 가 있는
내 마음 그물 새

가을.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산책은 행동


겨울 나무를 사랑한다면
봄은 기적 같으리

고독한 사람이
물 밑을 보리

이리저리 흩날리는
가랑잎에 훨훨훨
노을 불이 붙는다

산책은
행동.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갈꽃


싸늘한 듯 살가운
가을풀 냄새
이리
돌아오는 옛 마을

코끝에
또 가슴속에
갈꽃 하나 흔들려


지금
거리에서 버티고
모멸에도 미소짓고

술 취한 밤
파김치 발길이
집 찾아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은

갈꽃 하나
내 아내

마음의


이 가을
숨쉬는 일 모두 다

아아 귀향!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

~~~~~~~~~~~~~~~~~~~~~~~~~~~~~~~~~~~

마른번개의 날에


사람 없는 곳 골라 앉아
사람을 기다린다

예전엔 그렇지도 않더니
요즘엔 세월 흐르는 소리 들린다

흰 영산강으로 달을 베먹고
비녀산 위에서
별을 훔치던 때는 언제

사람 물결에 실려
자유를 외치던 때는 그 언제

천지가 내 집이나
머리 둘 곳마저 이제 없는 이 가슴
가슴속에 바람 한 오리 휘돌아
기인 하늘 저쪽에
마른번개가 한 번
또 한 번.

~~~~~~~~~~~~~~~~~~~~~~~~~~~~~

빗소리


눈감고
빗소리 듣네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돌아 다시 하늘로
비 솟는 소리
듣네

귀 열리어
삼라만상
숨쉬는 소리 듣네

추위를 끌고 오는
초겨울의 저 비
산성비에 시드는
먼 숲속 나무들 저 한숨 소리

내 마음속 파초잎에
귀 열리어

모든 생명들
신음 소리 듣네
신음 소리들 모여
하늘로 비 솟는 소리
굿치는 소리 영산 소리 듣네

사람아
사람아
외쳐 부르는 소리
듣네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춤추며 하소하나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온갖 것 소리지른다

흙도 사금파리도
상추잎도 소리지른다

닫힌 몸 속에서
누군가 소리지른다

외침의 침묵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시집 ; 花開 / 실천문학사.2002.6

~~~~~~~~~~~~~~~~~~~~~~~~~~~~~~~~~~~~~~~

녹두꽃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육시(戮屍) 지난날, 중죄(重罪)로 죽은 사람의 목을 벰,
또는 그 형벌.

~~~~~~~~~~~~~~~~~~~~~~~~~~~~

白鶴峰.1


멀리서 보는
白鶴峰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와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


이제야 알겠구나
흰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제14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계간 ; 시와시학 2002 여름호

~~~~~~~~~~~~~~~~~~~~~~~~~~~~~~~~




기다림밖엔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끝없는 끝들이여
말없는 가없는 모습도 없는
수렁 깊이 두 발을 묻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외쳐 부르는 이 기나긴 소리의 끝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죽기 전엔 디뎌보마
죽기 전엔

꿈없는 네 하얀 살결에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
바람도 소리도 빛도 없는 세월이여 기다림밖엔
남김 없는 죽음이 죽음에서 일어서는
외침의 칼날을 기다림밖엔
끝없는 끝들이여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죽기 전엔 기어이
결별의 글 한 줄은 써두고 가마

~~~~~~~~~~~~~~~~~~~~~~~~~~~~~~~~~~~~

이제 나에게 오세요


이제 나에게 오세요
문 열어놨습니다
한 스무 평쯤 될까요
한 서른 평쯤 될까요
라이타 여기 있고
술잔 저기 있습니다
저기 있고 여기 있는 그이
이 세상에 사는,아직도 살아 있는
전화로 가끔은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그래요
전화하시면 돼요
아니 하지 마세요
하지 않는 동안 생각하세요
그 긴 시간
고통받았던 그 긴 시간
그리고 내 시간.

시선집 / 마지막 살의 그리움 / 미래사

~~~~~~~~~~~~~~~~~~~~~~~~~~~~~~~~~~~~~~~

말씀


하늘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틈 산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 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시선집 / 마지막 살의 그리움 / 미래사

~~~~~~~~~~~~~~~~~~~~~~~~~~~~~~~~~~~~~~~~~

엽서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시선집 ; 마지막 살의 그리움 / 미래사

~~~~~~~~~~~~~~~~~~~~~~~~~~~~~~~~~~~~~~

형님


희고 고운 실빗살
청포닢에 보실거릴 땐 오시구려
마누라 몰래 한바탕
비받이 양푼갓에 한바탕 벌려놓고
도도리장단 좋아 헛맹세랑 우라질 것
보릿대춤이나 춥시다요
시름 지친 잔주름살 환히 펴고요 형님
있는 놈만 논답디까
사람은 매한가지
도동동당동
우라질 것 놉시다요
지지리도 못생긴 가난뱅이 끼리끼리.

시집 : 황토.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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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린


외롭다.
이말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가는 빗살
빗살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다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남 날들 스쳐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건넬이
이세상엔 이미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줄수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짐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소리 한자락
이리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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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털기


~~술은 시가 되어 훨훨 나는데
여기 미인의 넋, 꽃이 있다
오늘은 마침 이 둘이 쌍쌍하니
귀인과 함께 하늘에 오름과 같도다~~ (이규보)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흰 바람은 불어라
푸른 배추포기들 춤추고
붉은 능금들 딸랑거리고
하늘 올라라
떠올라라
두견꽃 죽어간 날
누가 태어났나
바람이 불어 눈뜰 수 없이
티끌은 일어 어둡던 그날
술집 술상 밑에서 꽃받침에서
누가 태어났나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흰 치마는 흩날려라
검은 삼단머리 드날려
분홍 옷고름 휘날려
올라라
푸른 하늘 저 높이 높이
죽어도 죽지 않는
혼 중의 혼
뜨거운 한여름에 태어난 혼
버선코에 낮달을 걸고
눈뜰 수 없이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빛나는 해 이마에 이고
떠올라라
하늘 올라
두견꽃 죽어간 날
누가 태어났나
바람이 불어 눈뜰 수 없이
티끌은 일어 어둡던 그날
술집 술상 밑에서 꽃받침에서
누가 태어났나
가라 가라
눈부시게 흰
극락 가라 요령 소리 따라
일수도 빚도 잊고
전세도 적금도 잊고
늙은 어머니 어린 동생 모두 다 잊고
설움 한 무더기 원한 한 삼태기
술도 노래도 주먹질 칼부림도 잊고
모두 뒤에 버리고
어화 넘자 어허야
달구 소리 따라가라
죽어도 죽지 않는
혼 중의 혼
뜨거운 한여름에 태어난 혼
눈뜰 수 없이
눈부시게 흰 바람은 불어와
푸른 배추포기들 춤추고
붉은 능금들 딸랑거리고
떠올라라
애린의 혼
푸른 하늘 높이 올라
두견꽃 죽어간 날
누가 태어났나
눈부시게 흰 눈부시게 흰
극락 가라
술 취해 우는 내
비나리 따라
어서 가라
어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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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 있는 분명한 희망


술병 속에 갇혀 있던 때를 기억해라
술병 밖에서 술병 속을 추억하던 때를 기억해라
술병 속에 있을 때는 술병 밖을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술병 밖에서는 술병 속에 들어 있던 행복한 때를 추억한다
한마디로 말하자
마찬가지 얘기다
술병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술병 재벌의 매체 조작에 의해서만 술병은 이 지상에 있을 뿐이다
술병의 존재를 거절해라
우리는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마시고 있을 뿐이다
절망에도 술병이 있는가
만약 절망에 병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절망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아주 커다랗게
아주 환하게
아주 분명하게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시전집 / 도서출판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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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로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하나 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둥걸 속
애틋했던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은 가데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 가데..

~~~~~~~~~~~~~~~~~~~~~~~~~~~~~~~~~

바람에게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 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 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바랄 것은
몹시도 시장한 중에
눈 밝혀 찾아 먹는 밥 한 그릇
배부르면 배 두드려
대중없이 부르는 밥노래 한 가락뿐

춘란 뽑혀
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
못생긴 여뀌닢여뀌 잎으로 잔뜩
비틀어져 내 다시 났으니
바람아
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
새 햇살로 흔들려라.

~~~~~~~~~~~~~~~~~~~~~~

가벼움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물을 이고
물의 진양조의 무게 아래 숨지는
나비 같은 가벼움
나비 같은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물살을 이고
퍼부어 내리는 비의 쌔하얀
파성을 이고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이마 위에
총창이 그어댄 주름살의 나비 같은
익살을 이고
불꽃이 타는 그 이마 위에
물살이 흐르고 옆으로
옆으로 흐르는 물살만이 자유롭고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퍼부어 내리는 비의 쌔하얀
공포를 이고
숨져간 그날의 너의
나비 같은 가벼움.


김지하 서정시100선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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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山詩帖(일산시첩) 3


외로울 땐
풀잎 하나도 정답다

하늘 가득 스모그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대지


참새 지저귀고
아직도 꽃이 피고

하늘엔
흰 구름도 흐른다

아파트에 쭈그려 앉아
허공 한쪽 볼 수 있으니

내 삶
아직은
괜찮다

고마워
눈물난다.

~~~~~~~~~~~~~~~~~~~~~~~~~~~~

쳐라


노을이여
나를 쳐라
내 마음을 쳐라
불타는 노을이여

새벽에나 겨우겨우 길 찾아나서는
둔한 내 마음을
잠든 내 삶을 쳐라

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
산란한 내 마음
더욱 더 산란하게 쳐라

산란하여
아으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게 쳐라

일어서 아무 때 아무 곳이든
뚜벅뚜벅 진흙길 나서게 쳐라

쳐라 쳐라
힘차게 쳐라
사그라드는 애잔한 끝만 남은
덧없는 노을이여
노을이여
쳐라 쳐라.

~~~~~~~~~~~~~~~~~~~~~~~~~~~

사람 사이의 틈


아파트 사이사이
빈틈으로
꽃샘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사람은 틈
새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시집 ; 중심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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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마음 산란하여
문을 여니

흰눈 가득한데
푸른 대가 겨울 견디네

사나운 짐승도 상처 받으면
굴속에 내내 웅크리는 법

아아
아직 한참 멀었다

마음만 열고
문은 닫아라

~~~~~~~~~~~~~~~~~~~~

나이


바람은 풍덩풍덩 불고
햇볕은 사뭇 초봄인데
매지리 못가에 앉으니
괴로움도 기쁨도 자취 없고
파문 자취만 물 위에 남는다
이울어진 함석집 한 귀퉁이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나는 항상 구경꾼
나는 항상 여행자
내 속에서도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

저 먼 우주의


저 먼 우주의 어느 곳엔가
나의 병을 앓고 있는 별이 있다

하룻밤 거친 꿈을 두고 온
오대산 서대 어딘가 이름 모를
꽃잎이 나의 병을 앓고 있다

시정에 숨어 숨 고르고 있을
기이한 나의 친구
밤마다 병든 나를 꿈꾸고

옛날에 옷깃 스친 어느 떠돌이가
내 안에서 굿을 친다

여인 하나
내 이름 쓴 등롱에 불 밝히고 있다

나는 혼자인 것이냐
홀로 앓는 것이냐

창틈으로 웬 바람이 기어들어
내 살갗을 간지른다.

~~~~~~~~~~~~~~~~~~~~~~~~~~~~~

서 편


내 마음에
불길 꺼지고

밤낮
흰 달 뜬다

차가운 자리
노을마저 스러져

무서운 꿈마다
꽃 피어난다

지난날 회한도
이제는 즐거움

아파트 사이
봉숭아 한 잎에도

하늘 든다

님아
이젠 오소서


검은 삶에
붉은 살 돋우시라

나 지금
서편으로 가는데.

시집 ; 꽃과그늘 / 실천문학사.

~~~~~~~~~~~~~~~~~~~~~~~~~~~~~~

나 한때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해 스치는 세포마다
말들 태어나
온 우주가 노래 노래부르고

잎새는 새들 속에
또 물방울 속에
가없는 시간의 무늬 그리며
나 태어난다고
끊임없이 노래부르고 노래부른다

지금도
신실하고 웅숭스런
무궁한 나의 삶

내 귓속에
내 핏줄 속에 울리는
우주의 시간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잊었는가
잎새가 나를 먹이고
물방울이 나를 키우고
새들이 나를 기르는 것

잊었는가

오늘도
잎새 속에서

뚫어져라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는 것.


김지하서정시 100선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




공허하므로 움직인다

시장해서

너를 사랑했노라

땅 위의 풀과 벌레
거리의 이웃들
해와 달 별과 구름 모두 다
모두 다 죽어가는 이 한낮

내 속에
텅 빈 속에
바람처럼 움트는
왠 첫사랑 우주 사랑

그 새붉음을
본다

공허하므로
공허함으로 움직인다.

~~~~~~~~~~~~~~~~~~~~~~~

저녁 산책


숙인 머리에
종소리 떨어지고

새들이 와 우짖는다

숙인 머리에
바람이 와 소스라치고

가슴 펴라
가슴 펴라 악쓰고

숙인 머리에
별 뜬다

오늘밤은 무슨 꿈을 꾸랴
먼 하늘엔 새빨간
노을 쏟아지고.


시집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





그것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네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님이 화안이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김지하 서정시 100선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1999.

~~~~~~~~~~~~~~~~~~~~~~~~~~~~~~~~~~~~~

눈물


가만 있으면
몸에
물이 솟는다

흰 물은 눈이 되어
하늘에 걸린다

울며 걷던
철둑길도 비치고
어둑한 감옥
붉은 탄식

나 죽은 뒤에 남을
자식들 고된
인생도 비친다

슬픈 것은

먹고 또 먹고
죽이고 또 죽여
지구를 깡그리 부수고 있는
지금 여기


시커먼 몰골

눈에 자욱히
눈물 되어 비치는 것.

~~~~~~~~~~~~~~~~~~~~~~~~~~~~~

죽음


빛 밝은 삼월 아침
상여 소리 지나는데

황매꽃 지고
꽃상여 지나는데

산란하던 마음
이리 차분해

황토 한줌
황산 어디쯤 산이면 어디쯤
눈부실 황토 한줌

종이꽃 하나
내 목숨.

~~~~~~~~~~~~~~~~~~~~~~~

목련


눈을 뜨면 시커먼 나무등걸
죽음 함께 눈감으면
눈부신 목련
내 몸 어딘가에서 아련히
새살 돋아오는 아픔
눈부신 눈부신 저 목련.


김지하 서정시 100선 / 꽃과 그늘 / 실천문학사.

~~~~~~~~~~~~~~~~~~~~~~~~~~~~~~~~~~

무화과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다스려 주며
이것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무화과 나무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개굴창을 날쌔게 가로지른다.

~~~~~~~~~~~~~~~~~~~~~~~~~~~~~~~

김지하 시인 소개

김지하 (김영일)
출생 : 1941년 2월 4일
출신지 : 전라남도 목포
직업 : 시인,대학교수
학력 : 서울대학교
데뷔 : 1969년 시인 '황톳길' 등단
경력 : 2006년 제주대학교 명예박사
2006년 명지대학교 교양학부 석좌교수
수상 : 2006년 제10회 만해대상
2005년 제10회 시와 시학상 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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