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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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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불가능 / 이준오 번역(8) 댓글:  조회:1299  추천:0  2019-02-25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   불가능1) / 이준오 번역(8)       아 - 나의 소년시절의 - 저 생활, 일년 내내 거기를 헤메고 다녔고, 초자연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절식(節食)을 하고 거지 중의 상거지보다도 더 이욕(利慾)에 초연하였고, 고향도 없고 친구도 없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 그리고 나는 이제야 겨우 그것을 깨달았다! - 내가 저 사나이들을 경멸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우리의 여자들의 정결과 건강에 기생하여 단 한 번의 애무의 기회라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던 저 사나이들을 경멸한 것은, 하기야 오늘에 와서는 여자들이 우리와 죽이 딱 맞는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 나는, 나의 모든 경멸에 있어서 옳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처럼 도망치고 있으니까!   나는 도망친다!   내 그 설명을 하리라.   어제도, 나는 이런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이 지상에도 이만큼 고약한 놈들이 수두룩하면 됐지! 나도 벌써 꽤 오랜 동안 놈들의 동아리였다! 나는 모든 놈들을 다 알고 있다. 우리들은 언제나 인식이 그러고도 서로 미워한다. 애덕(愛德)이란 것을 우리들이 알 까닭이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예절은 바르다. 우리들과 세상과의 사귐 역시 아주 잘되어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인가? 세상인가! 장사꾼이랑, 우직한 친구들이야!   - 우리는 아무것도 명예를 더럽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 하지만 선택된 자들은, 이떤 모양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인지? 한때 세상에는 엉뚱하고 기분이 좋은 그런 상대방이란 것이 있다. 이런 자들은 가짜 선량(選良)들이야. 그 까닭은 우리들이 이런 상대와 가까워지려 하는 것은, 뻔뻔스럽게 뱃장을 부리거나 아니면 굽실거려야만 되기 때문이다. 선택된 놈이란 이런 친구들 뿐이야. 그러니까 상냥한 놈들은 아니냐!   꾀죄죄한 이성이 내게로 돌아와서 -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져 없어지지만 - 나의 이 갖가지 불쾌는 자기들이 서구(西歐)에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생각에 넣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거기에 깨달음이 가는 것이다. 서구(西歐)의 늪지여! 이것은 그 빛이 바랬다던가, 그 형식이 쇠퇴하였다던가, 그 운동이 착란하였다던가, 그런 따위를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좋다! 지금 내 정신은 동양의 종언 이래로, 인간 정신이 입어 온 모든 참혹한 발전을, 결연히 한몸이 받아들이려고 소망하고 있다.-- 내 정신이 그처럼 소망하고 있다!   ---꾀죄죄한 내 이성은 이것으로 끝장이다! - 정신의 권위를 떨치고 있어서, 그것이 나에게 서구(西歐)에 있기를 소망한다. 내가 전에 소망한 것과 같은 결과를 부치기 위해선, 그 정신을 침묵케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순교자의 영광을, 예술의 광휘를, 발명가의 교만을 약탈자의 열정을 악마녀석에게 주어버렸다.2) 나는 동양으로 저 원초적이면서 영원한 예지로 돌아갔다. - 지금은 그런 일도 조잡한 안일의 꿈과 같이 생각된다.   그런데 나는 근대(近代)의 갖가지 고뇌(苦惱)를 피하는 기쁨 같은 것은 거의 생각도 못했다. 나는 코란의 절충적인 예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그러나 저 과학의 선언 아래로 그리스도교가, 인간이, '스스로를 희롱' 하며, 뻔한 것을 자기에게 증명해 보이고, 그것들 증명을 되풀이하고 즐거움으로 부풀어, 아마도 이렇게밖에 살 방도가 없다고 하는 그 자체야말로 참다운 형벌(刑罰)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조밀하게 꾸며진 어리석은 고문이다. 나의 정신적인 방황의 원천이다. 자연(自然)인들 이래 가지고는 아마 지루하겠지! 푸뤼돔 씨는 그리스도와 함께 태어났다.3)    그런 연유도, 우리들이 가득찬 안개를 가꾸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은 수분(水分)이 많은 야채와 함께 열병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곤드레 만드레다! 담배다! 무지다! 믿음이다! - 이 모든 것은 원시의 나라, 동양의 예지와 사상으로부터는 상당히 먼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독물(毒物)이 발명되어 있고, 무엇이 근대 세계(近代 世界)냐?   '교회' 사람들은 말하리라. 아, 알고 있습니다. 헌데 당신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에덴의 동산4)입니다. 동양 민족의 역사 속에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 그것은 정말이다. 내가 꿈꾸던 것이야말로 에덴동산이었다! 도대체 내 꿈에 있어서, 저 고대의 여러 민족의 순결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철학자는 말하겠지 "세계에는 연령 따위는 없습니다. 단지 그저 인류가 이동할 뿐입니다. 현재 당신은 서구(西歐)에 계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에게 필요한 동양이 아무리 오랜 것일지라도 자기 자신 동양 속에 자유로이 사시는 것입니다. - 또 즐겁게 거기에 사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젠장 철학자 제군, 당신네들도 역시 훌륭한 서구(西歐)입니다.   나의 정신이여, 정신차려라. 거칠은 구제수단 따위는 없단 말이야. 단단히 스스로를 단련하라! - 아! 과학은 우리들에게 만족할 수 있을만큼 급속히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자기 정신이 잠자고 있음에 마음 쏠린다.   만약, 지금의 이 순간부터, 나의 정신이 끊임없이 또렷하게 눈뜨고 있어 준다고 하면, 우리들은 마침내 진리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진리는 아마도 눈물 젖은 천사들로서, 우리들을 감싸줄 것이다!5)-- 만약 내 정신이 이 순간까지 잠 깨어 있어 준다면, 나는 기억에도 없는 먼 옛 시대에, 무참히 유독성의 본능에 굴복할 까닭도 없었겠지! -- 만약 내 정신이 끊임없이 똑바로 잠 깨어 있어 주었다면. 나는 예지의 한복판을 노저어 건너가고 있겠지!   오호, 순결이여! 순결이여!   나에게 순결의 환상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다! 정신을 통해서, 인간은 신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몸을 찢기우는 불운(不運)이여!   1) 이 시 속에는 환상의 감옥을 벗어났지만 그러나 방황하는 랭보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소년시절의 출범은 현존 사회에서의 탈출이었다는 것, 기독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 라는 것, 서구 사회를 부정하고 원시의 나라 동양으로 향하려 했다는 것, 이런 것을 그리다 가 결국 일체는 불가능하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순종하는 수 밖에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 다.   2) 이 대목은 서구 문명에 대한 랭보의 증오를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 서구 예술, 과학의 진 보 및 산업의 발달, 동양인의 정신적 평정을 틈타 포악을 자행하고 있는 서양인의 식민지 정 책, 이 네가지를 들고 있는 것이다.   3) 앙리 모니에(1806~1877)가 창조한 작중 인물로 존재하는 우열한 부르조와의 전형.   4) 랭보가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바로 이 '잃어버린 낙원'이었다. 자크 리비엘은 그야말로  원초의 죄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다고 설명한다.   5) 여기의 표현에는 희구(希求)를 찾아내려고 하는 논지가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부뤼셀의 사 건 후에 씌여졌음을 생각하면 그런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55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굶주림 / 이준오 번역(7) 댓글:  조회:1457  추천:0  2019-02-25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   굶주림1) / 이준오 번역(7)    내 취미가 있다면 땅이나 돌에 대한 것뿐 나는 언제나 공기나 바위나 석탄과 철을 먹는다.   내 굶주림이여, 돌아라, 굶주림이여, 소리의 풀밭을 뜯어 먹으라. 메꽃의 즐거운 독액을   깨진 조약돌, 오래된 교회의 돌들을 먹으라. 오래된 洪水의 자갈들. 회색 계곡에 심어져 있는 빵들을.   늑대가 나무 밑에서 그가 먹을 집짐승의 멋진 깃털에 침 뱉으며 낑낑대고 있었다. 그 녀석처럼 나도 소진했다.   샐러드와 과일은 따주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울타리의 거미는 제비꽃만 먹는다.   잠자게 해다오! 솔로몬의 계단에서 끓게 해다오. 거품이 녹위를 달려 세드롱에2) 뒤섞인다.    마침내, 오 행복이여, 오 이성이여, 나는 하늘에서 창공을 떼어냈다 그것은 검은색이었고3) 나는 순박한 불빛의 금빛 불티처럼 살았다.  즐거워서, 나는 가능한한 우스꽝스럽고 정신나간 표현을 했다.   재발견4)  무엇을! 영원을 그건 태양과 섞인 바다.   내 영원한 영혼이, 밤이 홀로 있고 낮이 불타는데도 너의 서원을 관찰한다.   그래서 너는 벗어난다. 인간의 기도와 평범한 충동으로 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희망은 없다. 영광도 과학과 인내 고문은 확실하다.   내일은 없다. 사틴(satin)의 잉걸불이여 너희들의 열기는 의무이다.   재발견! - 무엇을? -영원을 그건 태양과 섞인 바다.    나는 기괴한 오페라가 되었다. 나는 모든 존재자가 행복의 숙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행동은 삶이 아니라 어떤 힘을 반죽하는 방법이며, 신경질 부리기이다. 도덕은 뇌의 연약함 이다.   사람에게 마다 다른 여러 개의 삶이 있는 것 같았다. 이분은 자기가 무얼 하는지 모른다. 그이 는 천사다. 이 가족은 한배에서 나온 강아지 새끼들이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아주 소리 높여 그들이 살 수 있었던 다른 삶 중의 하나의 어떤 순간과 이야기 했다. -그래서 나는 한 마 리의 돼지를 사랑했다.5)   나는 광태에서 나온 - 사람들이 가둬 놓은 그 광태 - 궤변의 어떤 것도 잊히지 않았다. 나는  모든 걸 모두 다시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조직을 알고 있다.  내 건강은 위협받았다. 공포가 왔다. 나는 여러날 수면 속에 빠져 있었다. 일어나면 슬픈 꿈을 계속하리라. 나는 죽음의 준비를 갖추었고, 위험한 길로, 내 연약함은 나를 세계와 킴메르6) 그 어둠과 회오리의 나라의 끝으로 이끌고 같다.   마치 나를 더러운 물에서 씻어내 준 게 틀림없다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고 있는 바다 위에, 위 로의 십자가가 떠오르는 것을 나는 보았던 것이다. 나는 무지개에 의해 극도의 괴로운 벌을 받 고 있었다.7) "행복"은 나의 업보, 나의 심과 가책, 나의 고민의 씨앗이었다. 나의 삶은 언제나 너무 기대해서 향과 아름다움에는 헌신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행복! 엄청나게 부드러운 그의 이빨이 가장 침침한 도시에서 -꼭두새벽에- 나에게 예고했다.   오 계절이여 오 성곽이여! 결함없는 넋이 어디 있으랴?   나는 어떤 것도 모면 못하는 행복에 대해 대단한 연습을 했다.   골족의 수탉이8) 노래할 때마다, 그에게 인사를   아! 나는 더이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는 내 삶을 책임졌다.   그 매력이 영육을 사로잡아 노력을 흩트렸다.   오 계절이여, 오 성곽이여,   그의 도피의 시간이 오호라, 죽음의 시간이리라.   오, 계절이여, 오 성곽이여.   @   그 일이 지나갔다. 이제 나는 美에게 절할 줄을 안다.9)   1) 후기운문시 참조. 그리고 이 '굶주림'의 시 뒤에 초고가 이어지는데, 이것은  바로 앞의 부분에 해당한다.   2) 구약성서에 나오는 팔레스티나의 급류,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원하고 감람산 기슭을 흘러 사해 로 나간다.   3) '나는 하늘에서 창공을 떼어냈다. 그것은 검은색이었고'라는 기묘한 표현은 발자크의 에 유사한 표현이 있으니, 어쩌면 여기서의 암시일까. 발고흐의 의 하늘 은 거무스레한 푸른 색이지만 -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의 이미지는 아닐까?   4) 마지감 운문시 속의 참조.   5) 한 마리의 돼지는 베를렌느를 가리키고 있다   6) 킴메르는 흑해 연안 지방의 옛 이름. 고대인이 세상의 끝에 있다고 믿고 있던 황천에 가까운 변경. 의 제11가에도 읊어져 있다.   7) '십자가'와 '무지개'는 종교를 상징한다. 에서는 기독교에 의해 지옥에 떨어졌다고 쓰 고 있다.    8) '수탉이 노래할 때마다'의 수탉은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다.   9) 이 마지막 행은 초고에서는 '이제 나는 신비적인 마음의 비약에, 기이한 문체에 싫증이 나 있다' 고 씌어 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랭보가 결별하려 하고 있는 것은 문학 일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문학으 어떤 하나의 형식에 대해서라는 점이 된다. 그것은 베를렌느의 문학과 형식미의 문학을 가 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성자----린|작성시간18.11.27|조회수12 목록 댓글 0 글자크기 작게가 글자크기 크게가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   가장 높은 塔의 노래1) / 이준오 번역(6)     오라, 오라, 황홀한 시간이여.   얼마나 참았나 내 영원히 잊었네 공포와 고통도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고 위험한 갈증이 내 혈관 어둡게 하네.   오라, 오라, 황홀한 시간이여.   내 맡겨진 망각에 더러운 파리떼 기운차게 웅웅거리는데 香과 가라지를 키우고 꽃피우는 들판처럼   오라, 오라 황홀한 시간이여.   나는 사막과, 불파는 과수원, 시들은 상점, 미지근한 음료를 사랑    했다. 나는 냄새나는 거리를 기어다녔고, 눈을 감은 채, 불의 神, 태    양에 몸을 바쳤다.2)     3)        오! 주막 공동변소에도 취하는, 날벌레여,4) 서양지치 식물을 그리    워하며 한가닥 광선에 녹는 날개벌레여!   1) 최후의 운문시 속의 동명 시편 참조   2) 랭보의 태양 예찬(日神신앙)에 관해서는 초기시 와 의 와 르꽁뜨-드-릴의 을 참조할 것.   3) 이 부분에 관해 브이야느 드 라코스트는 " 속에 인용된 산문시'라고 말하고 있으나, 초고에 거의 같은 부분이 보이는 이상, 이 주장은 타당치 않다. '장군'이니 '대포'니 '마른 흙더미'니 하는 이미지는 1870년의 보불전쟁의 기억일까. 아니면 새벽 전투의 이미지에서 나온 것일까   4) 날개벌레란 랭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까.     * 일류미나씨옹(illumination): 1) 계시 2) 영감 3) 조명, 조명장식 (프랑스어)  
53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착란 2 / 이준오 번역(5) 댓글:  조회:1494  추천:0  2019-02-25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착란 2 / 이준오 번역(5)     언어의 연금술1)     나에게2) 대한, 내 광증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   나는 오래 전부터 가능한 모든 풍경을 소유할 수 있다고 자부하 고, 미술과 현대시의 명성을 가소롭게 여겨왔다.3)    나는 우스꽝스러운 그림들, 문의 윗장식, 배경, 어릿광대의 그림, 간판, 대중적인 채색삽화를 좋아했고, 낡은 문학, 교회 라틴어, 철자 없는 외설서적, 우리 조부의 소설들, 요정이야기, 동화 책들, 낡은 오 페라, 멍청한 후렴, 우직한 리듬을 좋아했다.4)    나는 十字軍을, 아직 기록되지 아니한 탐험여행을, 역사없는 공화 국을, 숨이 막히는 종교전쟁을, 풍습의 혁명을, 종족과 대륙을 뒤바 꿔 놓는 것을 꿈꾸었다. 나는 온갖 신기한 것을 다 믿고 있었다.   나는 母音의 색깔을 발명했다.- A는 검고, E는 하얗고, I는 붉고, O는 푸르고, U는 초록이다. - 나는 子音의 형태와 운동을 조절했 고, 본능적인 리듬으로 언젠가는 온갖 감각에 다다를 수 있는 시적 언어를 창조하리라 자부했다.5) 나는 번역을 보류했다.6)    그건 우선 연습이었다.7) 나는 침묵과 밤에 대해 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유의했다. 나는 현기증을 응시했다.   @   새와 양떼 그리고 마을처녀들8) 멀리 훈훈한 초록색 오후의 안개 속에서 정다운 개암나무 숲에 둘러싸인 히드 황야에서 무릎을 꿇고 내 무엇을 마셨는가? 이 어린 와즈강(江)9)에서 내 무엇을 마실 수 있었으리. 소리없는 느릎나무, 꽃 없는 잔디, 흐린 하늘이여! 내 사랑하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이 노란 호리병을 마신다.10) 땀 흘리게 하는 금빛 액체를.   나는 애매한 주막 표지판을 만들었다. -뇌우가 하늘을 믿고 왔다. 저녁에 숲의 물은 순수한 모래 위로 사라졌고 하느님의 바람은 늪지에 얼음조각을 던졌다.   울면서 나는 그 금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마실 수는 없었다.   @   여름날 새벽11) 네시엔 사랑의 단꿈이 아직도 한창이고 작은 숲 아래선 즐거운 저녁냄새가 날아가네.   저기 저 넓다란 작업장 좀 봐. 사과지기 자매의 태양을 받으며12) 벌써 속옷바람의 목수들이 움직이네.   이끼 낀 사막에서 조용히 목수들이 귀중한 미장 널을 준비하면 거기에 마을이 거짓하늘을 그리리 오, 바빌론왕(王)의 신하들인 이 매력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뷔너스여! 잠깐만 영혼이 관을 쓴 연인들을 떠나라   오 독자들의 여왕이여! 일꾼들에게 火酒를 주기를 正午 바다에서 헤엄칠 때까지 그들의 힘이 화평하도록.   @     낡은 시학(詩學)이 내 언어의 연금술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 다.   나는 단순한 환각에 익숙했다. 나는 정말 솔직히 공장 자리에서 회교사원(回敎寺院)을, 천사가 만든 북학교를, 하늘의 길 위에서 사륜마차를, 호수 속에서 살롱을 보았고, 괴물들과 불가사이한 것 을 보았다. 소희극(小喜劇)표제는 내 앞에 공포를 세워 놓을 게다.   그리고선 나는 말들의 환각으로 내 마법의 궤변13)을 설명했다.   나는 게을렀고, 심한 열에 시달렸다. 나는 짐승의 충실성을 부러 워했다-, 임보의 무구성을 표상하는 애벌레, 童貞의 잠을 표상하 는 두더지를.14)    내 성격은 까다로워졌다. 나는 일종의 연가(romance)로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1)이 시는 랭보가 을 쓰고 그 제작에 몰두하고 있을 당시의 심리를 회상하고, 그 명백한 실패를스스로 확인하며 자조한 작품이다. 자기의 과거 및 예술에 대한 절대적 비 판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2) '나'는 속의 '나'에 해당되지만, 의 '나'도 랭보로 보아 둘 다 랭보 자신이 라고 생각된다면 그의 이중성, 분열된 자아(自我)의 인격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3) 랭보는 당신의 예술이 지닌 인습적 형식과 수법에 대해 혐오하고 있었다. 1871년 드메니에 게 보낸 서한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는데, 한편 1872년겨의 장래의 인상파 화가들(물론 당시 에는 전혀 무명이었다)을 벌써 인정하고 있다. 랭보와 함께 런던에 있을때 베를렌느는 모네, 마네, 아르비니에, 르느와르, 그리고 팡탕라루트를 절찬하고 있다.   4) '우직한 리듬'은 여기서는 시의 리듬을 가리키고 있다. 샹송을 상기해도 좋다.   5) '온갖 감각에 다다를 수 있는 하나의 시적 언어'에 관해서는 1871년 5월 15일 드메니에게  보낸 이른바 속에서 '일체의 언어가 관념인 이상 보편적언어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 언어는 향기, 울림, 색깔 등 모든 것을 요약한 말이고, 영혼에서 영혼으로 얘기 하는 말이며, 사념을 갈구리로 끌어내는 생각을 말하고 있다.   6) 여기서 '번역'의 의미는 난해하지만 자기의 내적 시각과 성적체험을 말로써 표현하려고 하 는 진정한 문학적 시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7) 왜 '우선'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것도 논의가 많은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인 순서 가 아니라 문학 표현상의 혹은 형이상학적인 의미일 것이다. 1871년의 최초의 파리 체재 당시 씌어진 운문서 에 이어 랭보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시를 쓰고 있다.   8) 후기 운문서 참조   9) 랭보의 고향에 흐르는 강인데 벨기에에 그 수원(水源)이 있다.   10) 술에 취한 모습을 말함인가.   11) 후기 운문시 참조   12) 그리스 신화에서 초저녁의 별 헤스페로스의 딸들. 세계의 양쪽 끝에 살며 해라가 제우스와 결 혼했을 때 여신 계가 헤라에게 보낸 황금의 사과를 지켰다. 그녀들은 라돈이라고 부르는 용의 도움 으로 이 사과나무를 지키고 있었는데, 후일 헤라클래스가 모험에 의해 이것을 차지했다.   13) '마법의 궤변'도 '말들의 환각'도 의미가 분명치 않다. 다음 3번째 행에 '임보'의 뜻은 구약시대의  선인의 영혼이 예수의 강림가지 머물러 있는 옛 성소. 여기에는 세레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의 영 혼도 간다고 한다. 천국의 주변에 있고 불교에서 말하는 삼도(三道)내의 모래 강변 쯤 되는 곳.   14) 이 같은 애벌레나 두더지는 모름지기 랭보가 중세의 을 탐독한 소산일 것으로 추측된다.  
52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착란 1 / 이준오 번역(4) 댓글:  조회:1709  추천:0  2019-02-25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착란 1 / 이준오 번역(4)   넋나간 聖처녀   지옥의 남편1)      어떤 지옥 동료의2) 고백을 들어봅시다.  
51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지옥의 밤 / 이준오 번역(3) 댓글:  조회:1562  추천:0  2019-02-25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    지옥의 밤1) / 이준오 번역(3)     터무니 없이 독(毒) 한 모금을2) 꿀꺽 삼켰다.   - 나에게 온 충고여 세 번 축복받으라! - 나의 내장이 불탄다. 독액(毒液)이 격렬함이 내 사지를 뒤틀고 이그러뜨리고 나를 넘어 뜨린다. 갈증이 나 죽겠다. 숨이 막힌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이 게 지옥이고, 영원한 고통이다. 보라, 이 불길이 어떻게 다시 일어 나는가를! 나는 멋있게 불탄다. 가라 악마여!   나는 선(善)과 행복으로 회개를, 구원을 예감했다. 그 환영을 내가  그릴 수 있을까? 지옥의 공기는 찬송가를 허용치 않는 것을! 수많은 멋진 피조물들! 그윽한 종교 연주회, 힘과 평화, 고귀한 야심, 그런  것들이었다.   고귀한 야심!   하지만 어쩌나, 그것이 인생인데! - 저주란 얼마나 영원한 것이랴! 자기의 팔다리를 자르려는 사람이야말로 천벌을 받은 게 아니랴!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으니, 지옥에 있게 된다.3) 이게 교리문답의  실천이다. 나는 내 세례의 노예이다. 부모들이여, 당신들은 나를 불행 하게 했고, 당신들 자신도 불행하게 했다. 가엾은 천진무구한 사람이 여!4) - 지옥이라도 이방인들을 공격을 못하는 것을.   - 하지만 어쩌나! 늦으면 늦을수록 저주의 맛은 더욱 오묘한 것을. 빨리, 인간이 만든 법(法)의 이름으로, 내 허무로 떨어진 죄를!5)    조용하라, 정말 조용하라! --- 그것은 수치이고, 비난이다.   지옥의 불길이 아무것도 아닌 사탄,6) 내 노여움이 정말 어리석구나!  - 됐어! --- 나에게 불어 넣어준 오류들, 마술, 거짓향기, 하찮은 음 악들 - 그러나 내가 진리를 걸쳤고, 정의를 보고 있다는 거지. 성스럽 고 확고부동하게 판단하고, 완성의 단계에 있다는거지 -- 오만.7) - 내 머리가죽이 마른다. 연민을! 주여, 저는 겁이 납니다. 저는 목마릅 니다. 정말 목마릅니다. 오! 유년시절, 풀, 비. 돌 위의 호수8) 종탑이 열 시를 울릴 때의 청명한 탑, --- 악마는 그 시간에 종탑에 있습니다. 마리 아여! 성처녀여! --- 정말 한심스러운 나의 어리석음.   저기 저 사람들은 나에게 선행을 베풀려는 정직한 사람들이 아닌가-- 이리와줘요 --- 입이 틀어막혔나, 그 영혼들은 내 소리를 못 듣는다.  그건 환영이다. 누군들 다른 사람 생각을 하랴. 다가오지마라, 누린내가 난다, 정말이다.   환각은 헤아릴수가 없다. 이건 내가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다. 역사에  대한 신앙도 없고, 원칙도 망각되었다.9) 조용히 있겠다. 그러면 시인과 환상가들이 질투하리라. 나는 정말 가장 부유한 자이다. 바다처럼 탐욕 스러워지자.10)    오 그래! 삶의 시계가 방금 멈췄다.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신학 (神學)은 믿을 만하다, 지옥은 정말 아래에 있구나 - 하늘은 위에 있고 - 불꽃둥지 속에서의 황홀, 악몽, 수면.   들판에서는 얼마나 관찰이 헷갈리는 것이랴11) -- 페르디앙 사탄은 야 생의 씨앗과 함께 달린다12) --- 예수는 붉은 가시덤불 위로 걷는다. 그 것들은 휘지도 않는다. --- 예수는 성난 물결 위를 걸었지. 램프는 우리 들에게 그가 하얗게 서 있는 것을, 에매럴드빛 물결 곁의 갈색의 머리를 보여 주었다.13) ---   나는 온갖 신비를 다 파헤칠 작정이다. 종교적인 신비건 자연의 신비건 몽땅. 죽음, 출생, 미래, 과거, 우주발생론, 무(無) 등을, 나는 환상대가(幻 想大家)이다.14)   잘 들어보시오 ---   나는 온갖 재능을 갖고 있다! --- 여긴 아무도 없다. 저기엔 누가 있다.  난 내 보물을 털어놓고 싶지 않아요. -   흑인의 노래를 부를까요. 선녀의 춤을 출까요? 사라져 버릴까요. 반지를 찾아 철수할까요?15) 해봐요? 나는 금을, 악을 만들겠다.   그러니 나를 믿으시오. 믿음은 위로하고 인도하고 치유한다. 모두들, 이 리 오시오 - 꼬마들까지도 - 내 당신들을 위로하리니, 당신들을 위해 내 가슴을 털어놓을테니 - 멋진 가슴을,16) 가엾은 자들이여, 노동자들이여!  나에겐 기도가 필요없다. 당신들이 믿어주기만 해도 나는 행복하겠다.   - 나에 대해 생각합시다. 그래야 세상 후회가 덜 나니까요. 더 고통스럽 지 아니할 기회이다. 정말 후회스러운 것이지만, 나의 삶은 기분좋은 광태 이었다.   까짓껏! 할 수 있는 대로 찡그려봅시다.   정말 우리는 세상 밖에 있다. 소리도 안 들린다. 감촉도 사라졌다. 오! 내  성체, 나의 색소니 모직(毛織)도, 내 버드나무 숲도, 저녁, 아침, 밤, 낮도 - -- 지긋지긋하구나.17)   분노를 위한 지옥, 오만을 위한 지옥을 가져야 할텐데 - 애무의 지옥을,  여러 지옥의 연주회를.18)    지긋지긋해 죽겠다. 이건 묘지다. 나는 구데기에게 간다. 무섭고 무서워 라! 사탄이여,19) 어릿광대여, 너는 너의 매력으로 나를 분해하려는가.20)  나는 요구하고 요구한다! 쇠스랑으로 때려주기를, 한 방울의 불을.   아! 나는 생(生)으로 떠오른다! 우리들의 추함에 눈을 던진다. 이 독(毒), 수천 번 저주받은 이 키스! 나의 연약함, 세계의 잔인함! 제발, 긍휼히 여겨  주세요. 절 숨겨 주세요.   난 너무 얌전치가 못해요! - 나는 숨겨진다. 나는 숨겨지지 않는다. 불이  저주받은 자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   1) 이 작품에는 초벌 원고가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에 수록된 세번 째 단편시이다)의 초고의 이면에 적힌 것이다. 이로써 짐작하건대 이 이 씌어진 것은 브뤼셀 사건 을 일으키고 샤를르빌에 돌아온 후의 일인 모양이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랭 보는 몇 번인가 신앙생활에 되돌아가려고 하며, 스스로도 '천사와의 싸움'이라 부르고 떨어지는 수 밖에 없 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앞의 이 이교도인 자기의 무죄(무구 inncoent)를 주장하고 있는 데 대 해, 일단 세례에 의해 기독교도가 된 자기가 언제가는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있음을 노래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절망을 품고 현세의 생활을 금해가는 자존심과의 사이에 이 작품이 이상할 정도로의 긴장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2) 이 '독(毒)'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나오고 있다. 드라에에 따르면 이것은 부뤼셀의 비극 후에 랭보가 마신 '알코올의 큰 잔'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스타르키에 따르면 이 한 절은 1873년 6월이나 혹은 7월에 영국에서 씌어진 것을, 한 번 벗어났다고 믿은 베를렌과의 오탁(汚濁)의 생활에 또 다시 빠졌음 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아투치는 회의(懷疑)의 독을 의미하며, 이 독이 모든 개종의 가능성을 방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르나에판의 주석자 스잔느 베르나르는 "랭보가 반드시 기독교신앙의 독을 암시했다 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베르나르의 견해가 가장 타탕 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저편이 기독교 신앙을 노래하고 있는 점과, 초기 운 문시 속에 있는 에 "나는 철부지 어린이였다. 그런데 기독교에 숨어 더럽혀졌 다. 덕분에 나는 목구멍까지 욕지기가 솟구쳐 있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독교가 독액(毒液)을 마시는 것 과 같은 고뇌의 씨를 심는 데 반발을 하고 있는 랭보의 사고 방식의 일관성과 이 두 가지 중요한 단서가 얻어 지기 때문이다.   3)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모방한 것일까   4) '죄 없는'은 이 대목에서는 아이러니로 사용된 데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랭보가 무죄(무구)와 이교도의 사 이에서 하나의 상관관계를 발견하고 있었음을 알 필요는 없다. 랭보는 죄와 지옥과의 관념, 선과 악의 개념의, 그 바깥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고 에 "세상에는 지난 날 악에 살았고 지금도 악과 살며 더구나 어떻게도 느끼고 있지 않은 자들도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씌어져 있다.   5) 이 언저리의 서술은 로마서에 전개되는 논리와 지극히 흡사하다고 한다. 7장 9절 "나는 지난 날 율법이 없 이 살았지만, 회개했을 때 죄는 살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부분과, 하나의 탁월한 해석으로 보아도 좋다고 여겨 진다.   6) 이 '악마'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의 각주 10)11)에서 언급했듯이 베를렌으로 보는  것은 극히 개연성(蓋然性)이 많다고 보아야 한다. 초고 의 해당 부분과 비교-대조해 보면 "잠 자코 있으라, 잠자코 있으라고 말하는 거야"로 시작되는 한 연이 "그렇다면 시인들은 지옥에 떨어진다"로 끝 나고 있으며, 적어도 악마라는 것의 책임의 일부를 베를렌이 지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7) 베를렌의 시법(詩法)에 대한 빈정거림일까   8) '돌 위에 담겨진 호수'에 관해 의 속의 영상(影像)에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다.   9) 드라에는 랭보의 상실된 시의 일부가 아닐까 하고 추정하고 있다. 플레이야판의 XIX에 보인다.   10) 우리는 이 '풍요'에 관해 랭보의 '견자'적 환술(幻術)의 방법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당장의 랭보는 견자 사상의 올바름을 현실 생활면에서는 자연적으로 긍정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나 그러나 예술상의 문제로서 는 자연적으로 긍정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나 그러나 예술상의 문체로서는 아직 충분한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1) 원문을 보면 랭보가 글 쓸 때의 버릇으로 어느 쪽인가를 지우기 위해서라고 씌어있는 것이 둘 다 잘못 인쇄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알기 쉽다. 그러나 이대로라도 풀이 못할 것은  없다.   12) 드라에에 따르면 '악마의 페르디앙'이란 랭보의 고향 아르덴 주의 시골 거리인 보제 지방의 농민들이 악마를 부를 때의 호칭이라고 한다. 랭보의 시에는 간혹 이 같은 민간신앙적 요소가 나타나서 말할 수 없 는 표현 효과를 빚어내고 있다.   13) 요한복음 제 6장 제16절에서 21절까지의 내용을 바탕에 둔 것이다.   14) 몽환술(fantasmagorie)이라는 초자연 과학은 가짜 과학일 뿐이요, 요컨대 그것은 주술(마법)과 사기적 환술(幻術)이라고 볼 뿐이다. 랭보는 그 같은 마술적 유혹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15) 스잔느 베르날의 지적에 따르면 니벨룽겐의 반지를 전제한 것이 아닐까라고 한다. 바그너의 4부작 악극 의 종말에 하겐이 라인강의 물결에 몸을 던져 이 반지를 찾는 대목이 나온다. 니벨룽겐의 반지에 한정하지  않고 널리 고대 신앙에 나타난 신통력 있는 반지를 노래한 것을 풀이할 수도 있다.   16) '멋진 가슴을'에서 반역천사(마왕)의 향기의 정점을 볼 수 있다. 이 언저리의 서술에는 의 를 방불케 하는 것이 있다. "그는 우리들 모두를 알고 있어 우리들 모두를 알고 있어 우리들 모두 를 사랑해 주었다"로 되어 있는, 그 영마의 매력을.   17) 이 1행에는 어쩌면 보를레이 "어디든지 좋다. 이 세상 바깥으로"하고 노래한 것과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 지만 사실은 더 절박한 심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랭보는 에도 보이는 것처럼 항상 '진실한 생활이 없 는 ' 우리들은 이 세상에는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이 부분의 표현은 보다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 다. 즉 지옥에 떨어진 사내란 인생에 죽은 사내인 것이라고 기독교에 의해 지옥에 떨어지는 낙인이 찍힌, 현세 의 사자(使者)인 자기 자신에 초조해져 있는 것이다.   18) '분노 때문에'는 랭보가 항상 '화를 잘 내는 어린애'(베를렌은 1875년의 속에서 '만사에 대해 쉴새 없이 분노를 터뜨렸다'고 정의하고 있을 정도다)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지나친 자부심 때문에'에 관해서는  베를렌의 증언이 있다. '애무의 지옥'이라는 것은 베를렌과 랭보를 나락으로 끌고 갔던 음탕을 가리키는 것일까.   19) '사탄'은 초고에 따르면 베를렌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게도 생각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좁게 풀이하지 않 는 편이 오히려 다음 연과의 대응이 강해진다.   20) 마지막으로 마음을 덮쳐일으킬 때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녹아버리는' 상태 따위는 단순하게 거부하는 것이 다. 고뇌야말로 생활인 것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    나쁜 혈통(血統)1) / 이준오 번역(2)      내 골족(族)의 조상으로부터 나는 푸르고 흰 눈과 좁은 두개골과  싸움에 서투른 것을 물려 받았다. 나는 내 옷이 그들의 것처럼 야 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나는 내 머리털에 버터를 바르지2) 않는다.    골족(族)은3) 그 당대의 가장 바보스럽게 풀을 베는 자들이었고,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또한 우상숭배와 신(神)에 대한 사랑을 얻었다. 오 모든 악덕, 화, 음란함 - 멋있도다, 음란함이여 - 특히 거짓과 나태를 얻었다.   나는 모든 직업을 무서워한다.4) 선생과 노동자는 모두 비열한 농 부들이다. 펜을 쥔 손은 쟁기를 쥔 손이나 마찬가지다. - 손, 손을 위한 세기 - 난 결코 내 손을 갖지 않으리라. "후에는 비굴함이 지 나치게 심해진다. 거지의 정직성은 나를 화나게 한다. 죄인들은 환 관(宦官)처럼 혐오스럽다. 나, 나는 완전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 도 좋다.   하지만! 누가 내 혀를 이렇듯 불충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내 나래 를 이끌어 보호해 오게 하였는가? 살기 위해서 내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두꺼비보다도 더 게으른 채, 나는 도처에서 살았다. 내가  모르는 구라파의 가족이란 없다.5)    - 나는 인권 선언에6) 모든 걸 빚지고 있는 가족들의 소리를 내 가 축 소리처럼 듣는다. - 나는 양가(良家) 집의 아들도 다 알고 있다.                 @     프랑스 역사에 그 어떤 흔적을 남겼으면!7)    하지만 아니지, 아무것도 아니지.   내가 언제나 열등 민족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 명백한 사실이다. 나는 반항을 이해할 수 없다. 종족은 이전에는 약 탈하기 위해서만 일어섰다. 자신들이 죽이지 못한 짐승을 대하는 늑 대처럼.   나는 교회의 맏딸8)인 프랑스의 역사를 기억한다. 평민인 나도 성지 (聖地)를 여행할 수 있었더라면, 내 머리 속에 *수아브 지방의 평원에 뚫린 길들, 비잔티움의 조망, *솔림므9)의 성벽이 들어 있다. 마리아 숭배, 십자가에 못박힌 자에 대한 연민이 내 내부의 수많은 불경스러 운 마법 속에서 깨어난다. - 문둥이로서 나는 태양이 쏟아지고 있는 벽발치, 깨진 병과 쐐기풀 위에 앉아 있다. - 후에, 독일의 밤 아래 기 병(騎兵)처럼10) 야영할 수 있으면,   오! 다시 한번, 나는 붉은 임간지(林間地)에 있는 노파들과 아이들과 마녀들의 소란이 춤춘다.11)    이 땅과 기독교 정신 이전보다 더 오랜 것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과거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혼자다. 가족도 없다.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말을 하였던가, 그 리스도의 충고 속에선 나를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대변자들인 귀족 들의 가르침 속에서도,   지난 세기에12) 나는 무엇이었던가? 나는 오늘에야 내 자신을 되찾는 다. 유랑민도 없고, 잘 알 수 없는 전쟁도 없다. 열등 민족이 모든 걸 보 상했다. 흔히 말하듯, 인민을, 이성을, 국가와 과학을13)   오! 과학이여! 사람들은 모든 것을 되찾았다. 영(靈)을 위해 그리고 육 (肉)을 위해 - 임종 때 받는 성량(聖糧) - 사람들은 의술과 철학을 갖고 있다 - 늙은 여편네들의 약과 잘 정리된 민요(民謠)들을 갖고 있다. 왕자 (王子)들의 심심파적과 그들이 금한 놀이를! 지리(地理), 우주학, 역학(力 學), 화학(化學)!14) ----   과학, 새로운 고귀함! 진보, 세계는 나아간다! 왜 세계는 돌아오지 않을 까?15)    이것은 수(數)의 비전이다. 우리들은 성신(聖神)에게 나아가고 있다. 내 가 말하는 것, 이건 확실하다. 이건 신화(神話)이다. 나는 이해한다. 방언 들로밖에는 설명 못하므로 나는 침묵하고 싶다.16)     @     이교도의 피가 되살아난다! 성령(聖靈)이 가까이 있다. 내 넋에 고귀함과 자유를 주어, 예수는 왜 나를 돕지 못하나? 오오라! 복음서는 지나갔다! 복 음서! 복음서!    나는 무엇인가를 게걸스럽게 탐의하듯 신을 기다리고 있다.17) 나는 영원 히 열등 민족의 태생이다.   나는 * 아르모리크 해변가에18) 있다. 마을들이여 저녁이면 점화를 하라. 내 날이 이루어졌다. 나는 구라파를 떠났다. 바닷 공기가 내 폐를 불태우리라,  낯선 풍토(風土)가 나를 귀찮게 굴 것이다. 수영, 풀매기, 사냥, 특히 담배피 우기, 끓는 금속같이 센 술을 마시기 - 불을 돌며 내 친애하는 선조들이 행 한 것처럼.   나는 되돌아올 것이다. 강철 같은 사지와 검은 피부, 성난 눈으로, 내 가면 (假面)을 보고 사람들은 나를 강한 민족으로 판단하리라. 나는 금을 가질 것 이다. 나는 게으르고 격렬할 것이리라. 여인들은 더운 나라에서 되돌아온 잔 인한 병 약자를 보살핀다. 나는 정치 사건에 뛰어들겠다. 구원받겠다. 이에  나는 저주받았다. 나는 조국이 무섭다. 가장 좋은 것은, 몹시 취해 모래밭에 서 자는 것이다.   @     사람들은 출발하지 않는다 - 내 악덕을 짊어진 이곳의 길을 다시 가자. 철들 부렵부터 내 곁에 고통의 뿌리를 내린 악덕, 하늘에 올라가 나를 때리고, 나를 뒤엎고, 나를 끌고 가는 악덕.19)   마지막 순진함과 마지막 수줍음, 그건 이미 말했다. 세상에 내 혐오감과 내 반 역을 가지고 가지 않는 것.   가자! 행진, 무거운 짐, 사막, 권태와 분노.   누구에게 나를 찬양해 줄까? 어떤 짐승을 경배해야만 하는가? 어떤 성스런 영 상을 공격하는가? 어떤 혈기로 걸어가야 하는가?   오히려 정의를 보호해야 할 것20) -힘든 생활과 단순한 우둔함 - 메마른 주먹 으로 관 뚜껑을 들고, 앉고 숨을 끊는다. 그렇게 되면 늙음도 없고 위험도 없다. 공포는 프랑스적인 게 아니다.   - 오! 나는 완전히 버림받아 어떤 신적인 영상에게도 완전하려는 내 열망을 버 린다.    오 내 극기(克己)여, 오 내 굉장한 자애여! 하지만 이곳에서!   심오한 주여, 저는 얼마나 바보입니까!   @     아직 어렸을 때, 나는 감옥문이 언제나 그에게는 닫혀 있는 고집 센 어려운 도형 수를21) 찬양하였다. 나는 그가 머물러 성화되었을 주막과 곳간을 찾아다녔다. 찬 양하였다. 나는 그의 마음으로, 푸른 하늘과 들판의 멋진 작업을22)을 바라다 보았 다. 나는 도시에서 그의 운명을 냄새 맡았다. 그는 성자보다도 힘이 세고, 여행자보 다도 훌륭한 양식(良識)을23) 갖고 있었다. - 그러나, 그, 그만이 그의 영광과 그의 이상의 증인일 뿐이었다!   거리 위에서, 겨울 밤에, 숙소도, 옷도, 빵도 없는데, 어떤 목소리가 내 얼어붙은 가 슴을 압박하였다. "약함 혹은 강함이여, 네가 거기 있구나, 그건 강함이다. 너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르고 아무 데나 들어가고 무슨 말에든 대답한다. 네가 시체였다면 이제는 널 죽일 수 없을까"   아침에 내 눈초리는 너무 멍청하고 얼굴은 너무 빈사 상태여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아마도 날 알아 보지 못했으리라.   도시에서는 진창이 갑자기 빨갛고 꺼멓게24) 보였다. 램프가 이웃방을 돌아다닐 때 의 거울처럼, 숲속의 보석처럼! 좋은 기회다라고 나는 외쳤다. 나는 하늘에서 불꽃과 연기의 바다를 보았다.25) 왼편 오른편에서 10억 개의 뇌성처럼 불타는 모든 풍요함.   그러나 주연과 여자 동반은 내게 금지되었다. 남자 친구도, 나는 화가 난 군중 앞에 서, 사형 집행하는 기병(騎兵) 앞에 있는 나를 보았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을 불행 때문에 울면서 그리고 용서하면서26) - 쟌느 다르크처럼 - "신부(神父), 교수(敎授), 선생(先生)들이여, 당신들은 나를 재판에 넘기는 잘못을 범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 속하지 않았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나는 고문을 받으며 노래하는 종족이다.  나는 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도덕적 감각이 없다. 나는 난폭자이다. 당신들 은 잘못했다---"     그렇다 내 눈은 당신들의 불빛에 눈을 감는다.27) 나는 짐승이다. 흑인이다. 그러나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당신들은 가짜 흑인이다.28) 법관이여, 너는 흑인이다. 장군 이여, 너는 흑인이다. 황제여, 늙은 무뢰한이여,29) 너는 흑인이다. 너는 세금 붙지 아 니한 악마의 공장에서 나온 술을 마셨다 - 가장 멋진 것은 이 대륙을 떠나는 것이다. 여기선 이 한심한 자들에게 불모를 마련해 주려고 광기가 횡횡한다. 나는 *캄의30) 진 정한 어린이 왕국에 들어간다.   나는 아직 자연을 아는가? 나는 지신을 아는가? 할 말 없음. 나는 사자(死者)들을 내 뱃속에 매장한다.31) 외침, 북, 춤, 춤, 춤, 춤! 백인들의 상륙하였으므로 내가 무(無)로 떨어질 시간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굶주림, 목마름, 외침, 춤, 춤, 춤, 춤   @     백인들이 상륙한다, 대포! 세례를 받고, 옷입고, 일해야만 한다.   나는 가슴에 은총(恩寵)으로 충격을 받았다. 오! 나는 그걸 예견하지 못했다.   나는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는 나를 경쾌하게 할 것이고 회한도 줄어들 것 이다. 선(善)을 거의 버린 넋의 고통을 나는 갖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장례식의 양초처럼 강한 빛이 올라온다. 양가(良家)집 자제의 운명, 투명한 눈물로 뒤덮힌 오래 된 관. 아 정말로 주색잡기는 어리석은 짓이다. 썩은 것은 따로 던져놔야 한다. 하지만 시계는 순수한 고통의 시간만을 울리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불행을 잊고 천국에서 놀 수 있도록 어린애처럼 죽을 수 있을까.   빨리! 다른 삶도 있는가? 부(富) 속에서의 잠은 불가능하다. 부는 언제나 공적(公的) 이었다. 신성한 사랑만이 과학의 열쇠를 수여한다. 나는 자연이 오직 선의의 광경이라 는 것을 안다. 공상이여, 이성이여, 오류여, 잘 있거라.   천사들의 올바른 노래가 구호선에 올라온다. 그것은 신의 사랑이다 - 두 개의 사랑! 나는 땅의 사랑으로 죽을 수도 있고, 헌신으로 죽을 수도 있다. 나는 여러 사랑을 포기 했다. 그들의 고통이 나의 출발 때문에 증가하리라! 당신은 나를 난파자 가운데서 선택 하였다. 남아 있는 자들은 내 친구가 아닌가?   그들도 구하라.   나에게 이성이 생겼다. 세상은 선하다. 나는 삶을 축복하리라. 나는 내 형제들을 사랑 하겠다. 그것은 유년 시절의 약속이 아니다. 늙음과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희망도 아니 다. 신은 나에게 힘을 주셨으니 나는 신을 찬양한다.   권태는 이제 내 사랑이 아니다. 분노, 방랑, 광태, 나는 그것들의 모든 약동과 실패를 알고 있다. - 내 모든 짐이 벗겨진다. 미망없이 내 순결의 폭을 이해하자. 난 채찍질의  위로를 이제 요구할 수 없다. 나는 의붓아버지 노릇의 그리스도와의 결혼 때문에32) 승 선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나는 내 이성의 죄수가 아니다. 나는 말했다. 신이여! 라고 나는 구원 속의 자유를 원 한다33) 어떻게 그걸 쫓을까? 사소한 취미는 나를 떠났다. 헌신도 신의 사랑도 이제는 필요없다. 나는 섬세한 사람들의 세기를 후회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의 이성, 결멸, 사랑을 갖고 있다. 나는 양식(良識)이라는 이 천사의 계단 꼭대기에 내 자리를 잡아둔 다.   이미 확립된, 길들여진 혹은 길들여지지 않은 행복에 대해서는 아니다 --- 난 말 할 수 없다. 나는 너무 방탕하고, 너무 약하다. 생은 일을 통해 개화한다. 해묵은 진리다. 나, 나의 삶은 묵중하지가 않다. 그것은 날아가, 행동 위에 저멀리 세상의 정다운 이 지 점을 부유한다.34)   죽음을 사랑할 용기도 없는 노처녀가 되어 버렸구나!   신(神)이 나에게 옛 성자처럼 하늘의, 공중의 고요를, 기도를 허락해 준다면, 이제 우 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성자들, 강한 자들! 은둔자들! 예술가들!   계속되는 희극! 나의 순진함이 나를 울게 하리라, 삶은 모든 사람이 만드는 소극(笑劇) 이다.   @     충분하다! 이제 벌이다36) - 행진하라!   오! 폐가 불탄다. 관자놀이가 울부짖는다! 밤이 이 태양을 통해 내눈에서 굴러다닌다! 가슴 --- 사자 --   어디로 가는가? 싸움터로? 나는 약하다! 다른 사람들은 나아간다. 도구, 무기---시간! --   발포! 나에게 발포! 나는 항복한다. 겁장이들! 나는 자살한다! 나는 말(馬)의 발치에 몸을 던진다!   오오! ---   나는 - 거기에 길이 들이라.   이게 프랑스의 삶, 37) 명예의 길이리라!     1)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브릐셀 사건 전에 씌어졌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열등 종족'이라는 개념, 기독교와 이교도 간의 싸움, 서구 문명과 서구 사회의 종교에 있어서의 흑인에 대한 평가, 소년기의 고독과 견딜 수 없는 악덕에 관한 극히 개인적인 환상 체험 등이 제시되어, 결국 랭보는 이교도인 자기는 기독교적인 죄와는 관계가 없고, 따라서 무죄(무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초벌 원고가 보존되어 있다.   2) '머리에 버터를 바르는 습속'은 샤토브리앙의 저서 와 속에도 보인다.   3) 첫머리의 2연 내지 3연에 보이는 골족(Gaulois)의 습성과 생활에 대한 고의적인 모욕이야말로 이 시 의 주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 에서도 거듭 되풀이 된다. 랭보의 문학 의 한 측면인 '카인 숭배'의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다.   4) 랭보는 노동이라거나 직업이라고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을 얻는 일을 극도로 거절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5) "원죄(原罪)을 면제 당한" 랭보의 '무구'를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고 "선악의 저편에 몸을 두려고 하는"  오만으로 간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6) '인권선언' 이란 물론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직후에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제정한 선언 을 말한다. 기본적 인권(인권의 자유평등, 언론 출판의 자유, 소유권의 확립), 주권제민(主權在民)  등 근대정치 내지 시민사회의 기본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7) 앞에서의 '인권선언'에 인용된 프랑스 역사를 회고하면서 랭보는 '열등종족'이란 주제을 제시한다. 랭보는 파리코뮌에 참가하려 한 적은 없다. 여기서 중세라는 시대를 더드머 자신의 몸 속에 있는 '나 쁜 혈통'이 야만인의 피의 유전에 있다는 전제에 서서, 자기를 중세 농노나 중세 십자군의 병사로 변 생(變生)시키고 있다. 더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는 '열등 종족'이었다는 귀결에 도달하는 것이 다.   8) 교회의 맏딸: 예로부터 프랑스의 호칭의 하나.   9) 솔림므: 예루살렘,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10) 16, 17세기 칼빈파 신교도를 위해 일한 독일 기병(騎兵)을 말한다.   11) '샤바트(Sabbat)'는 구약시대에는 주의 7일째를 신에게 바쳐 안식일을 지킨 날을 말한다. 중세의 민간 전승에서는 이교도적 요소가 많아 섞여 있어, 토요일 한밤중에 악마를 중심으로 하여 모이는 마 법사 및 자녀들의 집회를 말하며, 또 어리석은 소동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여기서 랭보는 중세 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12) 현대의 세계, 즉 민주주의, 이상이 지배하는 세계, 민족주의, 과학의 승리의 세계를 말함.   13) 미슐레가 어떻게 종족의 관념이 구민의 관념 앞에 소멸되어 버렸는가를 밝혔는가를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랭보는 미슐레와 프낭이 노래한 '과학에 대한 찬가'를 그 자신도 노래하 려 했던 것이다.   14) 과학이 발달한 덕택으로 민중은 지난날에 왕후(王侯)에게만 독점되었던 과학과 철학과 그 밖의 즐 거움을 이제는 마침내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15) 갈릴레오가 말한 "그래도 세계는 돈다"를 바탕으로 한 하나의 언어적 유희이다.   16) 랭보가 여기에 제시하고 있는 과학 찬양 사상의 19세기 후반의 시대 사상이기도 했다. 이 같은 과학 및 진보의 사상은 레를렌과 랭보가 자주 교제하고 있는 런던에, 망명 중인 소수의 '코뮤나르'에 의해 고취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17) "나는 무언가를 목마르게 탐내듯 신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한 대목은 랭보의 기독교에의 회귀를 증명하 는 것으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으나, 다음의 구절을 보면 그 같은 단정은 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신을 기다리 고 있거나 그러기 때문에 영원히 열등 종족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8) '아르모리크'는 현재의 브르타뉴를 일컫는 옛 이름. 원래 가리사의 한 지방명이었다. 그리고 이 한 연은 랭보가 자신의 때를 예언한 점으로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다.   19) 해석자들은 '악덕'이 바로 남색이었다고 믿었다. 이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랭보가 어린 시절부터 이끈  악덕은 모든 형태에 대한 무죄와 악을 향한 도시에 이끌림, 수줍음 그리고 반항에 대한 그의 투쟁인 것이다.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말했던 자신의 위선과 혐오를 설명하는 투쟁이다. 그는 그것들을 자기 몸에서 제거할 수 없으며밖으로 내놓기를 원치 않는다.   20) 그러나 인간의 정의를 보호해야  하며 우둔함 속에서 제거되야 한다.   21) '고집스럽기만 했던 도형수(徒刑囚)'는 고독하고 불행했던 랭보 자신의 소년시절을 상징하고 있으나 이것은 의 주인공 쟝 발쟝 등에 관한 상기(想起)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2) '꽃처럼 피어나 있는'이라는 표현은 예컨대 의 에서 "별들과 그 밖의 것들 이 꽃피는 부드러움이--" 등에도 보이며, 랭보가 즐겨 애용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원을 방랑한 개 인적인 체험의 기억으로 보아도 좋을성 싶다.   23) 여기서 '올바른 판단력' 에 대해 어떤 평자는 '데카르트를 상기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탁견 (卓見)이다.   24) 진흙은 '붉고 또 검고'라고 느끼는 색채 감각은 랭보가 친숙해져 있는 환각 속에서의 하나의 상투 수법 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유별난 추상적-사상적 의미를 추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5) 이 부분의 표현을 부이야느 드 라코스트 등은 1871년 5월의 파리 코뮌때 일어난 화재의 정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차라리 랭보에게 자주 찾아온 화염의 환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스잔느 베르날에 따르 면, 이것들은 베를렌이 '성서의 거리'로 "화염과 진흑의 오점이 묻은 하늘의 거대한 도시" 라는 표현도 보 인다. 주24)의 '붉고 또 검고"도 포함하여 이것들은 랭보에게 집요하게 달라부튼 암유(暗喩)의 하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6) 파리 코뮌에 가담한 일단에 도정과 관심을 보내는 신문들은 사격대에 반대하는 폭동, 즉 그들에게 총 을 겨누는 군인들에게 눈을 부릅뜨려고 노력하는 폭도들을 묘사했다.   27) 물리적 광선 외에 이성 및 신앙의 빛이라거나 계몽 같은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굳이 쉽게 옮겨 보 았다.   28) '거짓 니그로'란 진짜 흑인보다도 더 검고 또 엉큼한 백인을 말하고 있다. 이디오피아에서 생활하고 있 던 1890년이 되어서도 예를 들면 그 해 2월 25일자로 가족엑데 보낸 서한 속에서 '이른바 문명국의 백인 흑인들' 등과 같은 말을 쓰고 있다. 물론 여기에 한 연에 보이는 격렬한 매도(罵倒)와 독설은 서구문명에 대 해 던져진 공격의 화살이다.   29) 이 기묘하기 짝이 없는 표현은 스잔느 베르날에 따르면 빅토르 위고의 시집 속의 에빌 나드누스의 시 "비천한 자들이여', 너희들에겐 너희들의 살갗을 하고 있는 근질거리는 황제를 긁어낼 손톱 은 없는가!'하는  표현에 출전을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한다.    30) '캄(Cham)'이란 구약성서 속의 인물인데, 대홍수에서 벗어난 노아의 차남. 전설에 따르면 그 자손이 흑 인이 되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 있는 '협잡꾼 흑인' 곁을 떠나 랭보는 원시적이며 소박하며 위선 따위가 전 혀 없는 생활을 시작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31) 원시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나는 사자(死者)들을 뱃속에 매장했다'라고 하는 것 같은 식인육(食人肉) 의 습속'이라거나, '이젠 말이 더 필요치 않다'고 하는 것 같은 서구적 이지(理智)적 형식의 결별이 따르지 않고  있지는 않다. 이 부분의 표현에 '북' '댄스'가 자주 나오는 것은 미개 종족의 상기에 의한 원형적 연상이다.   32), 33) 다같이 요한복음 제2장에 보이는 설화에서의 착상이지만, 오히려 아주 짖굳은 말로 기독교에 대해 결 정적으로 거절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혼연(婚宴)'이 이어지는데 운문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결부를 암 시했다고도 보인다.   34) '행동'에 관해 속에서 "행동"은 생활이 아니고 그것은 힘의 낭비의 하나의 수단이며 무기력 한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랭보는 보들레르가 속에서 "이제 나는 물러가려 한다. 이 나 는 행동의 몽상의 여동생은 아니었던 이 세상에 만족을 느끼며"로 노래하고 있음을 상기했던 것이 아닐까. 사색과  몽상이 없는 범속한 문명생활은 랭보로서는 죽음과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35) '이제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이라는 표현은 성자에게도 은둔자에게도 연관이 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 다. 기독교의 '유혹'에 후속하여 반항한 것이다.   36) 초고는 여기에 이어진다.   37) 신랄한 표현이다. 랭보가 '프랑스의' 라거나 '프랑스인의' 라는 형용사를 사용할 때는 항상 비방 내지 모멸하는 감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1871년에 드므니에게 보낸 서한 속에서 뮈세의 작품을 논평하며 "정말 프랑스적이라는 것은 이제는 극한까지 타기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그는그것을 정말로 싫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예'에 이르러서는 그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49    아르뛰르 랭보 <지옥의 계절> 서시(序詩) / 이준오 번역(1) 댓글:  조회:1562  추천:0  2019-02-25
아르뛰르 랭보     서시(序詩) / 이준오 번역(1)     돌이켜 생각하면 지난날, 나의 인생은 향연이었다. 잔치에는 모든 마음이 열리고 온갖 술들이 흘렀다.   어느 저녁 나는 미(美)를 내 무릎에 앉혔다.2) - 그리고 보니 못 마땅한 것임을 알았다. - 그래서 욕을 퍼부어 주었다.3)    나는 정의(正義)에 항거하여 무장을 단단히 했다.4) ---   나는 도망했다. 오 마녀여,5) 오, 불행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을 나는 너희들에게 의탁했다.   나는 내 정신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희망을 사라지게 하기에 이르렀다. 그 희망의 목을 비트는데 즐거움을 느껴, 나는 잔  인한 짐승처럼 음험하게 뛰었다.   나는 죽어가면서 그들의 총자루를 물어뜯으려고 사형집행인을 불 렀다. 나는 피와 모래에 범벅이 되어 죽기 위해 재앙을 불렀다. 불행 은 나의 신이었다. 나는 진창 속에 팍 쓰러졌다.6) 나는 죄의 바람에 몸을 말렸다. 나는 광대를 잘 속여 넘겼다.   봄은7) 나를 향해 백지처럼 무시무시한 웃음을 웃었다.   그런데, 요즘 마지막 껄떡소리를 낼 찰나에,8) 나는 옛날의 축제를 다시 열어줄 열쇠를 찾으려 했다. 그러면 아마도 욕망을 되찾을지 모른다.   자애(慈愛)가 열쇠다 -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내가 전에 꿈 을 꾸었나보다.9)    "너는 잔인한 놈으로 남으리라----" 따위의 말을, 그토록 멋진 양귀비꽃을 나에게 씌어준 악마가10) 다시 소리친다. "네, 모든 욕망 과 이기주의와 모든 너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라"   오! 내 그런 것은 실컷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탄11)이여, 정말 간청 하노니, 화를 덜 내시라! 그리고 뒤늦게 하찮은 몇 가지 비겁한 짓을 기다리며,12) 글쟁이에게서 교훈적이며 묘사적인 능력의13) 不在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나는 저주를 받은 나의 수첩(手帖)에서 보기 흉 한 몇 장을 발췌해 준다.   1) 첫머리에 놓인 이 시는 보통 나 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Delahaye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랭보는 에 실린 시편 중 에서 적어도 3편을 1873년 4월 11일 이후 1개월이 걸려서 로슈의 헛간에 서 써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랭보는 그후 다시 런던에 가서 브뤼셀의 저 격사건을 겪고 나서 다시 로슈에 돌아온 뒤 나머지 6편이 정리되었던 것이 다. 이 시편들은 1873년 4월 10일 벨기에의 푸트 인쇄소에 보내져서 얼마 후 자비 출판되지만, 전 작품의 빌미에 '1873년 4월 ~ 8월'이라고 주기(注 記)되어 있으므로, 이 기간 내에 완성을 보게 되었음은 거의 확실할 것이다. 이 에서 랭보는 극히 최근에 일어난 내부적 위기를 그려 내려고 하 기보다도 자신의 정신적 과거 및 문학적 과거에 관한 본질적 과정을 마무리 하려 했던 것이다.   2) 이 한 절은 파르나시앙이 탐구한 '미(美)'와 고전적인 '미'로 간주되는 인 습적이고 유형적인 것에 대한 반항을 나타낸 것이다. '저주받은 시인"의 출 발이다.   3) 이 도입부를 이루는 한 절은 자유롭고 희망에 넘친 청춘 시절을 회상한  것이다.    4) '정의'란 물론 사회가 인습적으로 정의로 보고 있는 '가짜의' 의사적(擬似 的)'인 정의를 말한다. '무장한'에는 파리 코뮌을 계기로 하는 세계 개혁에 소 년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5) '여자 마법사'란 요컨대 '신시대의 견자'이다.(미슐레가 한 말) 따라서 "나 는 달아났다"로 시작되는 이 한 절은 '견자(Voyant)'와 '마술도(魔術道)'에의 출발을 노래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6) 이 부분의 서술, 이른바 '견자에의 행보에서의 랭보가 타락하고 있을 때를 생각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고, 아나키스트 내지 파리 코뮌의 가담자로서의 랭보의 한 시기를 그대로 묘사했고 보아도 좋다. 및 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7) '봄'이란 후기 운문에서 열중한 1872년 봄을 회고하고 있는 듯하다. 그 시 기에 베를렌과의 동거생활이 시작되었다.   8) 브뤼셀에서의 베를렌의 저격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여러 평론가들의 견해도 대개 그렇다.   9) '자애'는 가톨릭 신학에 있어 '신앙'및 '희망'과 함께 3덕의 하나로 가톨릭계 의 평가는 그 점을 강조하고 싶어하지만 우리로서는 "꿈을 꾸고 있는데 대한  증거가 된다"고 쓴 랭보의 '부정적' 기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10)11) '악마' 친애하는 '사탄' 군도 베를렌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12)랭보가 베를렌에게 보내기로 약속하고 있는 시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13)베를렌은 실제로 묘사가 철저하게 잘된 소설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심장을  품고 있었다. 예컨대 교화(敎化)나 혹은 교훈의 재능에 대해서는 보들레르와  고티에 등 상징주의 세대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반대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 던 것이다.  
[스크랩] 한비문학 2008년 2월호 세계 명시 감상_에즈라 파운드     이재관 시인 한국 한비문학 작가협회 상임이사  숭실대 명예교수            에즈라 파운드 -시문학과 미술의 만남-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27세에 소용돌이라는 미술 유파를 태동시켰고 유럽의 화가, 조각가,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다. 거칠고 난해한 그의 시를 해석하기 위해 사람들은 흔히 모더니즘의 조류를 대입하거나 그의 개인적 특징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보다 잘 해석하기 위해 미술사를 넘겨볼 필요가 있다. 에즈라 파운드 자신의 평론 또는 그에 관한 전문적 논문들이 매우 다양하고 많지만 미술사와 연관된 부분에 초점을 두어보는 이 글은 나름대로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1. 문학과 미술의 만남   아카데미즘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만국박람회나 살롱의 출품작을 심사했던 일종의 국립단체인 아카데미 데 보자르 Academie des Beaux-arts의 전통을 말한다. 이 단체의 회원 화가들은 부자들의 취향에 영합했으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추한 것을 찾아 나설 이유가 없다. 시대와 무관하게 오직 한 가지 회화가 있을 뿐이다."라고 자신들을 변명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주로 역사, 신화, 종교, 귀족, 신화의 영웅을 모델로 삼았으나, 개혁적인 화가들은 평민, 상인, 하녀 등 보통사람을 그림의 모델로 등장시켰다. 현대성 및 사실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다. 시대와 함께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로 들어서는 문턱은 높았다. 충동, 본능 등 정신분석학적 개념들과의 갈등이 불거져 미술의 전통적 법칙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화가들은 기호와 시어詩語를 빌려 본능적 인간을 표현하려 하거나 추상미술 쪽으로 진출했다. 폴 세잔은 회화를 언어나 수학 같은 것, 새 시각을 위한 실험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윤곽선, 명암, 원근법을 무시했으며 뒤이어 나비Nabis파, 야수파, 다리파 등 '색채에 의한 혁명'의 유파들이 거의 동시에 등장한다.     나비파의 피에르 보나르는 형상의 소실점을 과감히 제거하고 빛은 차가운 색으로, 그늘은 따듯한 색으로, 채색방법을 대담하게 전도시켰으며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다리파(또는 표현주의)는 “인간은 초인과 짐승 사이의 다리”라는 니체의 말에 근거하여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 양극화, 경제적 고통, 사회주의 등 혼란기의 독일에서 부르주아적 가치를 혐오하는 화가들이 공동화실을 설치하고 대중에게 다가선 것인데 다리파는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을 무시하고 격렬한 색을 사용하지만, 현실 참여적이고 심리적 과장을 한다는 점에서 야수파와 달랐다. 모딜리아니, 샤갈 등 파리에 모여든 화가들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면서 파리파를 형성했고 지중해 연안에서는 우체국 직원, 농사꾼, 인쇄공, 가정부, 세관원 등 평범하지만 재능 있는 화가들이 소박파의 기치를 걸었다. 소박파는 구상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대담한 색채혁명을 시도했으며 소박하지만 꼼꼼하고 세밀했다.     개혁파를 대별하면 ‘색채에 의한 혁명’과 ‘형태에 의한 혁명’,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를 통칭하여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부른다. 아방가르드는 군대 용어였으나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계급투쟁의 선봉을 가리켰고 기존 예술을 뒤엎는 혁명적 예술운동을 또한 아방가르드라 한다. 그 계보는 입체파, 소용돌이파, 미래파,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으로 이어졌다.     소용돌이파Vorticists는 미술의 유파지만 산업사회 및 문학적 배경이 강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주의, 프로이드 심리학, 과학혁명, 전쟁 등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다. 1910년대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는 연간 수십만 대라는 경이적인 대량생산 기록을 수립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신기계문명은 기대와 불안을 함께 안겨주었다. 소용돌이파의 잡지 창간호(1914-15)에 게재된 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소용돌이vortex는 최대의 에너지, 최대효율을 내는 지점이다. 최대효율이란 기계공학의 최대효율과 같은 뜻이다. 인간은 방향성을 갖는 지각perception의 운동체인데, 인간은 환경의 장난감일 수도 있고 환경에 대항하는 유체 역학적 통제권자가 될 수도 있다. 소용돌이파는 각자의 물감을 신뢰한다. 개념과 정서는 스스로 구현되는 것이지만 활기찬 양심과 주된 방식에 따른다. 미술은 100편의 시요, 음악은 100편의 그림, 가장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가능한 문장이다. 경험을 소용돌이에 퍼붓는다. 모든 과거, 전환점, 경쟁, 달리던 추억, 평온을 원하는 본능, 에너지가 담기지 않은 미래, 모두를. 인간 소용돌이 속에 벌어지는 미래의 설계. 과거를 미래에 쏟아 붓고 소용돌이에서 잉태시킨다. 바로 지금"     에즈라 파운드는 이 창간호에서 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로 인사말을 대신하고 있다. "타임지의 점잖음을 비웃어주자, 하하/입마개 쓴 평론가들 너무 많다/벌레들이 몸에 우글거릴 때 깨달을까/..."     소용돌이 운동은 3년간(1912~1915) 전개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으나 전후 "X 그룹"이란 명칭으로 계승되었다. 초기 가담자는 화가이며 소설가인 윈덤 루이스, 화가 윌리엄 로버츠, 에드워드 웨즈워드, 프레데릭 이첼스, 조각가 고디에-브르체스 등이다. 로버츠는 소용돌이파 10인의 에펠탑 회동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루이스 Wyndham Lewis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소용돌이 운동은 흔히 영국의 예술혁신운동, 영국의 아방가르드 또는 영국판 큐비즘이라고도 한다.     의식세계는 불완전하다. 환경, 감정, 사회적 요소가 끊임없이 감각과 판단을 왜곡시킨다. 작가가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독자(또는 관람자)들이 동일한 의미를 느끼도록 하려는 노력 자체가 종종 헛수고로 끝난다. 따라서 화가와 시인들은 추상과 무의식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현실과 의미적 일대일 대응에 지쳐버린 작가들로서는 비로소 진정한 휴식과 자유의 가능성을 전망하게 되었다. 추상의 세계에서는 의미를 규정하는 부담이 줄어들고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아내는 신선함이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는 청색(힘) 또는 노란색(감미로움)의 말을 좋아했고 자신들을 청기사라고 호칭하였다. 피터 몬드리안 등은 수학기호와 기하학적 도형을 통해 추상의 세계를 구축했다. 1910~1920년에 나타난 다다이즘, 메르츠, 초현실주의는 모두 문학에 기원을 둔 것들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운동에 많은 시인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본능, 리비도, 충동에 종속된 상상의 세계였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말, 글 또는 다른 모든 방식을 통해 사고의 실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순수한 정신적 자동성"이라고 초현실주의를 정의한다. 조르지오 키리코는 모든 사물의 외양을 "무의식의 거울"이라고 보았다. 의식세계 일변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현실감각을 파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다다이즘 예술가들은 복고주의를 규탄하고 틀에 박힌 언어를 흥분된 의성어로 변형시켰다. 갖가지 조각과 고물을 더덕더덕 붙이는 꼴라주, 아상블라주, 레디메이드가 시도되고, 그라타주(긁어내기), 환각제, 약물 등이 사용되었으며 비참한 사회의 고발에 몰두하였다.       2. 에즈라 파운드의 시 감상   앞에서 고찰한 미술사, 그리고 화가와 시인들의 정신적 교류와 혼신의 몸부림을 생각하면서 에즈라 파운드의 시를 읽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소용돌이 운동기에 쓴 시들은 그의 시집 (1917)에 실려 있다. 초기의 비판적인 시를 중심으로 가급적 짧은 작품 5편을 번역하여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서는 미국의 대표적 시인인 휘트먼에 대해 빈정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빈정거림이 아니다. 휘트먼으로 대표되는 시문학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지 고민하는 마음과 각오가 서려 있다. 은 문학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전체에 대해 도전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다. 즉, 이 시에서의 비판 대상은 자기 노래(시)라고 볼 수 있다. 는 1920년에 출간된 시집에서 뽑은 장시의 일부분이다.         계약  -A Pact     당신과 계약 한 건 합시다, 월트 휘트먼 씨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혐오했답니다. 당신은 고집쟁이 부친 슬하의 다 큰 아이 같았는데 나는 친구를 사귈 만큼 나이를 먹었어요. 나무를 자른 건 당신이었고 이제 나는 목각을 제작해야 하니 우린 한 뿌리 한 수액을 공유하는 셈입니다. 둘이 거래를 해봅시다. -----------         연극처럼  -Histrion     아직 아무도 이런 걸 감히 쓴 적이 없었지 아직 내가 알기로는, 우리 곁을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어찌 그리 위대한 척 했는지 우리 모두 홀딱 빠졌지 반성시켜야 할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그러니 나 역시 한 구석에선 단테였고 또 다른 구석에선 발라드의 왕이자 도둑인 프랑소아 빌론이었지 이런 거룩한 자들에 대해 내 이름 때문에 모독적 언행은 못했다네 하지만 순간에 지나가 불길은 꺼졌지     우리 한 복판에서 반투명구체, 용해시킨 황금인 "나"를 자라게 하면서 요상한 프로젝트를 집어넣어 스스로 그리스도 또는 존 또는 위대한 피렌체 가문인 척 했지 그 후 즉시 떠밀려 당대에 해야 할 일을 그만 두었네 정해진 형식이 투명하지 못한 것이었거든 뭐 그렇고 그래서 '영혼의 대가'들이 영원한 거지 -----------         추가적인 주의사항  -Further Instructions     내 노래야 정신 좀 차려 우리의 더 근본적인 열정을 표현해보자 안정된 직장에서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자를 부러워할 건 없다 내 노래야 너는 게을러서 끝이 안 좋을까봐 그게 두렵다 너는 길거리에 나가 모퉁이와 버스정류장을 서성대고 있다. 아무 일도 안 하려는 것인가     우리 태생이 고귀한 신분이란 것조차 노래에 담질 않는구나 그러면 끝은 안 좋을 거야     나는 어떠냐구? 반쯤 깨져 못 쓰게 됐어 너를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고 네게 입이 닳게 말했지 건방진 작은 놈! 뻔뻔스럽기는! 옷이나 걸쳐라!     그러나 너, 많은 중 제일 새로운 노래, 너는 아직 젊다 나쁜 짓을 많이 할 새가 없었지 나는 네게 용이 수놓아진 중국제 초록 코트를 입게 했지 산타마리아노벨라의 아기 그리스도 상에서 따온 진홍 실크바지를 입혔지 우리가 맛이 갔다거나 천한 신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안 되니까 -----------         새벽의 노래 (알바) -Alba     새벽녘 내 곁에 누워 있는 그녀는 계곡의 백합 젖은 잎처럼 차고 창백했다. -----------         휴 셀윈 마버리 I-2  -Hugh Selwyn Mauberly, Part I-2     시대는 다른 이미지를 요구했다 가속적으로 찌푸려지는 얼굴 같은 것 현대적 무대에 필요하다고들 하는 것 하여튼 희랍식 기품과는 다른 어떤 것   아니, 내면의 애매한 몽상은 분명 아니고 고전 미사여구들 보다는 나은 허위!   시대적 요구란 시간 손실 없이 회반죽 본을 뜨는 일 산문 영화, 아니, 확실히 그건 설화석고 또는 운문의 조각 작품 -----------         3. 아름다운 고발   현대 예술의 주류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다. 사실주의는 폭로 고발하는 것이고 표현주의는 자기 주관을 뿜어내는 과시(또는 자기고발)이다. 그런데 사실주의적 고발이든 표현주의적 자기과시든 자칫 지저분한 것이 되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궁극적 가치관이 요구된다. 작가들은 처절하게 고발하거나 자기고발을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실험에 도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고결한 미에 다가서고자 몸부림친다. 자연, 동식물, 거짓과 폭력의 현장에서 고결한 미를 찾고 작품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말이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무표정하고 허약한 자신, 오염된 자신을 먼저 꾸짖는다.     화가는 빈 공간을 의미 있게 채우기 위해 추상, 무의식, 초현실성까지 동원한다. 캔버스는 의미들이 와서 형성되거나 부서지는 장소가 된다. 거리 공간은 의미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화가는 점, 선, 색, 도형, 빛들을 의미 있는 조형미로 바꾼다.     시인은 일상 언어를 쪼개고 갈고 붙여서 의미 있는 시어로 바꾼다. 그것은 기술적 실험일 수도 있다. 많은 시인들이 언어의 유희에 빠진다. 반대로 현장고발이나 주관의 표현에만 급급한 경향도 있다. 화가들이 필사적으로 공간과 싸우는 것처럼 시인들은 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처절하게 시어를 만져야 한다.     고발하거나 고발당하는 치열함, 실험에 대한 열정, 고결한 미의 추구는 미술과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었다. 시는 예술과 문학의 꽃이고 그런 만큼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단지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이라면, 19세기 미술사의 아카데미즘과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혐오스러운 단어를 써야 진보적이라 할 것인가? 에즈라 파운드의 거친 표현의 시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의 4행 시 을 음미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보석계단의 불평  -The Jewel Stairs' Grievance     보석 박힌 계단이 이슬에 많이 젖었다, 너무 늦어 나의 외올베 양말이 젖었지 뭐요 그래서 난 크리스털 커튼을 내리고 청명한 가을을 통해 달을 바라봤지요 -----------     원작자가 이백(李白, Rihaku)임을 밝히면서 파운드는 자기가 개작한 시와 그 해설을 발표했다. 고대 라틴 시, 중국 시 등을 왕성한 열정으로 번역한 파운드는 간간히 이와 같은 개작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개작은 파운드의 경우 그의 실험정신의 일단이었다. 사실 시의 번역은 직역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시에 대한 파운드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보석이 박힌 계단이라면 아마 왕궁일 것이다. 그 곳에 불평이 있다는 것인데 외올베(가제, 紗) 스타킹은 귀부인이 신는 것이니 불평하는 사람은 귀부인일 것이다. 귀부인은 청소가 늦은 것을 탓하니 너무 일찍 현장에 온 것이다. 날씨는 쾌청하니 날씨 탓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귀부인은 아무도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는 멋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라는 이유로 이백의 이 시가 좋다고 말한다. 평생 비판적인 시를 썼던 그가. 그 많은 독설과 빈정거림, 비아냥대는 시를 썼던 사람이 재치 있게 하는 해설이니 또 한 방 맞은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본다. 만일 그가 누구를 지목해서 괴롭히려고 그런 시를 쓴 것이 아니었다면, 진정한 사랑이 복받쳐 터져 나온 비판이나 고발이었다면 말이 되지 않을까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47    [공유] [[[세계 명시 모음]]] 댓글:  조회:2001  추천:0  2019-02-05
출처 천명(天命;인생의 의미) | 영원속으로 원문 http://blog.naver.com/hanjun105300/221304113260   양치식물이 자라는 언덕  - 딜런 토마스     풀이 푸르렀던 만큼, 쾌활한 집 주변의  사과나무 가지 아래에서 내가 어렸고 편안했기 때문에,  별처럼 빛나는 골짜기 위로 밤이 올 때,  시간은 내게 인사하게 했고,  시간의 눈의 전성기 속으로 즐겁게 오르게 했다.  그리고 사륜차 사이에서 존경받으며 나는 사과 마을의 군주가 되었고,  그 전에 이미 바람에 날려 떨어진 등불의 강 아래로  보리와 데이지를 이끌어 가는  나뭇잎들과 나무들을 나는 당당하게 가지게 되었다. 집이 농가였던 만큼, 나는 생기가 넘쳤고 걱정이 없었으며  행복한 마당 주변의 헛간들 사이에선 유명했으며 노래를 불렀었기 때문에,  아직 이른 태양 속에서 단 한 번,  시간은 내가 장난치게끔 하였고, 시간의 의도된 자비 속에서 나를 매우 즐겁게 하였다.  푸르게 빛났던 나는 사냥꾼이었으며 목동이었다.  송아지들은 내 뿔에 노래했고 언덕 위의 여우들은 맑지만 냉담하게 짖어댔다.      신성한 개울의 조약돌 속에서  안식일은 천천히 지나갔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내내, 그것은 쫓겨 나갔고, 사랑스러웠다.  집 같이 높은 건초 밭, 굴뚝으로부터 나오는 선율,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장난치며,  사랑스럽고 물 같으며 풀처럼 푸른 불이었다.  그리고 밤에는 소박한 별들 아래서,  내가 잠을 잘 때, 부엉이들은 농가에서 멀어져가고,  달이 떠있는 내내, 나는 들었다. 건초가리와 함께 날아가는 쏙독새와  어둠 속으로 휙~하고 움직이는 말들이  마구간에서 신의 은총을 입는 소리를. 그리고 깨어나서는 이슬에 젖은 하얀 방랑자와도 같은 농가가  돌아온다, 수탉을 그의 어깨 위에 올린 채. 그것은 매우 빛났다.  그것은 애덤과 아가씨였다.  하늘이 다시 모였다.  그리고 해는 바로 그날 둥글어졌다.  소박한 빛의 탄생 이후에 있었으리라,  처음에 맴돌던 곳에서, 히힝 울어대는 녹색 마구간으로부터  찬송의 밭을 향해 따뜻하게 주문에 걸린  말들이 걸어 간 것은. 마음이 넉넉했던 것처럼, 새로 만들어진 구름들 아래 있는  즐거운 집 옆에 있는 여우와 꿩들 사이에서 존경 받으며 행복한,  계속에서 태어나는 태양 속에서  나는 경솔한 길을 내달렸었다.  내 희망들은 집처럼 높은 건초 밭을 달려 나아갔고,  내가 파란 하늘을 가지고 거래를 하고 있었을 때,  생기 넘치고 즐거운 아이들이 기품과는 동떨어진 그를 따라가기 전에  그의 아름다운 변화 속에서 시간은 그토록 많은 아침 노래들을 허락했지만  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양같이 하얀 날에, 시간은 내 손의 그림자 옆의 다락에 밀어닥친  제비에게 까지 나를 데려갔지만,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나 떠오르는 달빛 속에서,  나는 높은 밭들과 함께 그가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 그리고 아이가 없는 땅으로부터  영원히 달아나버리는 농가를 깨워야 되서 잠들지 않았다.  오 나는 시간의 의도된 자비 속에서 어렸고 편안했었지만,  내가 그 바다와 같이 내 사슬 안에서 노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나를 푸르른 채 죽어가게 했다.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서    -다시사시   만개한 벚꽃나무에 기대어 있을 때 해체된 말의 앞다리가 달려왔다 뒤이어 뒷다리도 달려왔다 그 뒤를 이어 하늘에서 떨어진 몸통이 네 다리 위에 올라 앉았고 머리가 없는 채로 말은 잠자코 서 있다 이윽고 짐수레를 끌고 노파가 다가와서 짐받이에 싣고 온 말의 머리를 나의 발 아래에 내려놓고 갔다 나는 말의 머리를 제자리에 붙연호고 다시 말을 보았다 그 말은 내가 소년이었을 적에 사산으로 해체된 모태에서 끌려 나온 말이었다 말은 이제야 처음으로 보는 걸 허락 받은 자와 같았다 나는 침으로 상처를 닦아 주고 손을 번쩍 들어 말의 엉덩이를 쳤다 말은 우렁차게 울고 나서 들판 끝으로 달려갔다 그때 봄 폭풍으로 한꺼번에 지던 벚꽃 꽃잎을 온몸으로 받으며 나는 벚꽃나무가 문득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화살과 노래  - H.W.롱펠로우   나는 공중에 화살을 하나 쏘았다 그것이 땅으로 떨어졌고,  나는 그 행방을 몰랐다 그것이 너무 빨리 날아서, 눈으로 그것이 날아가는 것을 좇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공중에 노래 하나를 불러 보냈다 그것이 땅으로 떨어졌고, 나는 그 행방을 몰랐다 누가 그토록 예민하고 우수한 시력이 있어, 그 노래의 날아가는 것을 좇을 수 있겠느냐   오래 오래 뒤에,한 참나무에서 나는 아직 꺾이지 않은 화살을 찾았고, 노래는 첫 구절에서 끝까지,  한 친구의 가슴 속에 들어 있음을 알았다   ​ 수선화  -윌리암 워즈워드     골짜기와 산 위에 높이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헤매다니다 나는 문득 떼지어 활짝 펴 있는 황금빛 수선화를 보았나니,   호숫가 줄지어 선 나무 아래서 미풍에 한들한들 춤을 추누나.     은하에서 반짝이며 깜빡거리는 별들처럼 총총히 연달아 서서 수선화는 샛강 기슭 가장자리에 끝없이 줄지어 서 있었나니!   흥겨워 춤추는 꽃송이들은 천 송인지 만 송인지 끝이 없구나!     그 옆에서 물살도 춤을 추지만 수선화의 흥보다야 나을 것이랴. 이토록 즐거운 무리에 어울릴 때 시인의 유쾌함은 더해지나니,   나는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 내가 정말 얻은 것을 알지 못했다.     하염없이 있거나, 시름에 잠겨 나 홀로 자리에 누워 있을 때 내 마음에 그 모습 떠오르나니, 이는 바로 고독의 축복 아니랴,   그럴 때면 내 마음은 기쁨에 넘쳐 수선화와 더불어 춤을 추노라.                                                                        추수하는 아가씨  - 윌리암  워즈워드     보아라 혼자 넓은 들에서 일하는 저 아일랜드 처녀를,   혼자 낫질하고 혼자 묶고 처량한 노래 혼자서 부르는 저 처녀를   여기에서 잠시 쉬든지 가만히 지나가라 오 들으라! 깊은 골짜기 넘쳐흐르는 저 소리를     아라비아 사막 어느 그늘에서 쉬고 있는 나그네 나이팅게일 소리 저리도 반가우리,   멀리 헤브리디즈 바다 적막을 깨뜨리는 봄철 뻐꾸기 소리 이리도 마음 설레리     저 처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말해 주는 이 없는가   저 슬픈 노래는 오래된 아득한 불행 그리고 옛날의 전쟁들   아니면 오늘 흔히 있는 것에 대한 소박한 노래인가     아직껏 있었고 또다시 있을 자연적인 상실 또는 아픔인가   무엇을 읊조리든 그 노래는 끝이 없는 듯 처녀가 낫 위에 허리 굽히고 노래하는 것을 보았네   나는 고요히 서서 들었네 그리고 나 언덕 위로 올라갔을 때   그 노래 들은 지 오랜 뒤에도 음악은 가슴 깊이 남아 있네       가여운 수잔의 환상 - 워어즈워드      우드가 모퉁이에, 해가 떠오를 때면 목청 돋우어 우는 한 마리 티티새, 지난 3년 동안 한결같았다.   가여운 수잔이 이곳을 지나다 고요한 아침에 그 노랠 들었었다. 황홀한 그 노랫소리; 무슨 번민이라도 있단 말인가?   수잔은 본다 솟아 오르는 산, 나무들의 환영을;   뭉개뭉개 떠오르는 빛나는 안개는 로드 버리를 지나 미끄러져 가고, 한 줄기 강이 치잎사이드의 골짜기를 흘러내린다.   푸른 목장을 그녀는 본다. 작은 골짜기의 한복판에서, 양동이 하나 들고 그녀가 자주 오르내렸던 그 골짜기,   그리고 비둘기장 같은 한 채의 오두막집을 본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단 하나의 집을,   이 모두를 보고 그녀의 마음은 천국에 잠긴다, 그러나 그 모두는 사라진다.   안개도 강물도 언덕도 그늘도, 시냇물은 흐르려 하지 않고, 언덕도 솟아나려 들지 않는다. 온갖 아롱진 빛이 모두 다 그녀의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바벨론 강가에서 앉아서 우리는 울었도다.  - 바이런     우리는 바벨의 물가에 앉아서 울었도다.   우리 원수들이 살육의 고함을 지르며    예루살렘의 지성소를 약탈하던 그 날을 생각하였도다.   그리고 오 예루살렘의 슬픈 딸들이여!   모두가 흩어져서 울면서 살았구나.     우리가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볼 때에   그들은 노래를 강요하였지만,    우리 승리하는 노래는 아니었도다.   우리의 오른 손, 영원히 말라버릴지어다!   원수를 위하여 우리의 고귀한 하프를 연주하기 전에     버드나무에 하프는 걸려있고   그 소리는 울리지 않는구나. 오 예루살렘아!    너의 영광이 끝나던 시간에   하지만 너는 징조를 남겼다.   나는 결코 그 부드러운 곡조를    약탈자의 노래에 맞추지 않겠노라고.       그날은 지나갔다  - 죤 키츠      그날은 지나갔다 달콤함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감미로운 목소리, 향긋한 입술, 보드라운 손, 그리고 한결 부드러운 가슴   따사로운 숨결, 상냥한 속삭임, 매혹적인 반음 빛나는 눈, 균형잡힌 자태, 그리고 곧게 뻗은 허리!   살졌도다 꽃과 그 모든 꽃봉오리의 매력들은 사라졌도다  내 눈으로부터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졌도다   목소리가, 따뜻함이, 하얀 낙원이 향기로운 커튼을 친 사랑의 아늑한 축제의 밤낮이  은밀한 환희를 위해    두터운 암흑의 씨줄을 찌는 저녁녘 일시에 자취를 감추었도다   그러나 내가 오늘 온종일 사랑의 미사책을 읽었을 때 사랑의 신은 나를 잠들게 하리라   내가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서.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 죤 키츠     너는 더럽혀지지 않은 그대로인 정적의 신부 너는 침묵과 기나긴 세월 속에 자라난 양자 너는 숲속의 역사가.   우리 시인의 노래보다 더 멋있게 꽃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이렇듯 전해 줄 수 있다니-.    네 둘레에 감도는 것은 어떤 전설인가?   죽음에 관해선가, 영원한 것인가? 그 모두에 관해선가? 템페 골짜기인가, 아카디아 언덕의 일인가? 사람들의 일인가, 신들의 일인가, 신과 인간 모두의 일인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신들일까? 도망치려는 것은 어떤 소녀일까? 이 얼마나 미친듯한 구애인가, 도망치려는 몸부림인가? 어떤 피리이며 어떤 북인가?  얼마나 미친듯한 환희인가?     귀에 들리는 선율 아름다우나 귀에 울리지 않는 선율은 더욱 아름답다. 자, 네 부드러운 피리를 계속 불어라.   육신의 귀에다 불지 말고 더욱 친밀히 영혼을 향해 소리없는 노래를 불러라.   나무 그늘에 있는 젊은이여, 네 노래는 멈추는 일이 없고 이 나무들의 잎도 떨어지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아, 너는 결코 입맞출 수 없으리라. 목표 가까이에 닿긴 해도-.   그러나 슬퍼 말아라. 너 비록 크나큰 기쁨을 얻지 못할지라도 그녀는 빛바래는 일 없으매 영원히 사랑하라,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우리라.       아아 너무나도 행복겨운 나뭇가지들이여! 잎은 지는 일 없고, 봄에 작별을 고하는 일도 없다.   또한 행복겨운 연주자여, 피곤할 줄 모르고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영원히 연주할지니   더욱 행복스런 사랑이여! 너무나 행복겨운 사랑이여! 언제나 따스하고 영원히 즐거워라.   언제까지나 불타듯 추구하고 언제까지나 젊도다. 살아있는 인간의 정열이란 끊임없이 추구하여 가슴은 슬픔이 넘치고 이마는 불타며 혀는 타올라 네 사랑에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 희생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오! 신비로운 사제여, 명주와 같은 몸에다 화환을 장식하고 하늘을 우러러 우는 송아지를 어떤 초록빛 제단으로 데려가는가?   이 거룩한 아침, 여기 모인 사람들이 남겨두고 온 것은 강변의 작은 마을이던가, 바닷가의 마을이던가?   아니면 평화로운 성채로 둘러싸인 산위의 마을이던가? 조그만 마을이여, 네 거리는 영원히 조용해질 것이리라. 그리고 황폐해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오오 아티카의 형체여! 아름다운 모습이여!  대리석 남자와 여자가 조각되어 있고 숲의 나뭇가지들과 밟혀진 갈대도 있구나.   너는 침묵의 모습, 차가운 전원이여! 우리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영원하구나.   사람이 나이들어 한 세대를 마감할 때도 너는 남아서 이렇게 말하리라. '아름다운 것은 진리요,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 이것이 너희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아는 것 전부이고, 알아야 할 것은 이 뿐이다.      부숴져라, 부숴져라, 부숴져라  - 앨프리드 테니슨      부숴져라, 부숴져라, 부숴져라,   네 차디찬 잿빛 바위에, 오 바다여!   그리고 나도 내 혀가 심중에 솟아오르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오, 어부의 아들은 좋겠구나,    누이와 고함지르며 놀고 있네!    오, 젊은 뱃사람은 좋겠구나,    포구에 배 띄우고 노래 부르네!     우아한 기선들도 갈 길을 가는구나,    언덕 아래 항구를 향해.   오, 그리워라, 사라진 손길의 감촉이여,    소리 없는 목소리여!     부숴져라, 부숴져라. 부숴져라,    네 벼랑 기슭에, 오 바다여!   하지만 가 버린 날의 다정한 행복은    내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눈물, 덧없는 눈물 - "공주"에서 - 앨프리드 로드 테니슨      눈물, 덧없는 눈물, 까닭 모를 눈물이 거룩한 절망의 바닥에서 가슴에 솟아올라 눈에 고이네.   행복한 가을 들녘 바라보며 가 버린 날들을 생각하노라니.     저승에서 벗님네들 싣고 오는 돛배  그 돛배에 반짝이는 첫 햇살처럼 새롭고 사랑하는 이들 모두 싣고 수평선 넘는 돛배   그 돛배 빨갛게 물들이는 마지막 햇살처럼 슬퍼라. 그처럼 슬프고 새로워라, 가 버린 날들은.     아, 슬프고 야릇하여라. 어둑한 여름날 동틀 녘   죽어 가는 이의 눈에 창문의 네모꼴이 차츰 흐릿해 보일 무렵 그의 귀에 들려오는  잠 덜 깬 새들의 첫 지저귐처럼.   그처럼 슬프고 야릇하여라, 가 버린 날들은.     죽은 뒤 생각나는 키스처럼 다정하고 딴 이에게만 허락된 입술에 헛되이 해보는    상상의 키스처럼 감미로워라. 사랑처럼 깊고 첫사랑처럼 깊어라. 오만가지 회한으로 미칠 것 같아   오, 삶 가운데 죽음이어라, 가 버린 날들은.     평생의 사랑  - 로버트 브라우닝                 방에서 방으로 나는 그이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을 빠짐없이 찾아 헤맨다.   내 마음이여 걱정하지 말지니, 너는 꼭 찾으리라- 이번에야말로 그이 자신을- 커텐에 남겨진 그이가 지나간 흔적이라든가 벤취에 남은 향내가 아닌 그이 자신을   지나가면서 그이가 닿기만 했을 뿐으로 허리판에 새겨진 꽃은 새로이 피고 맞은 편의 거울도 모자의 깃털에 반짝이었네.     그런데 이 하루도 점차 남은 때가 얼마 안 되고 문 저쪽에 다시 문이 이어진다.   나는 다시 그 운세를 시험해 본다- 넓은 집을 거기에서 중앙에로 먼저와 같은 결과로다, 내가 들어가면 그이는 이미 나간 뒤여라.   이렇게 꼬박 하루를 탐색에 허비한다 치고 그것이 대체 무슨 일이랴.   이제 이미 해거름의 때, 그러나 조사해야 할 방은 멀리까지 이어져 있고 찾아야 할 방, 있고 싶은 방은 끝없다.    이니스프리 호수섬 - 예이츠     나 일어나 지금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가지 얽고 진흙 발라 조그만 초가집 지어,   아홉 이랑 콩밭 일구어, 꿀벌 치면서 벌들 잉잉 우는 숲에 나 홀로 살리.     거기 평화 깃들어, 고요히 날개 펴고, 귀뚜라미 우는 아침 노을 타고 평화는 오리.   밤중조차 환하고, 낮엔 보랏빛 어리는 곳,  저녁에는 방울새 날개 소리 들리는 거기,     나 일어나 지금 가리, 밤에나 또 낮에나 호수물 찰랑이는 그윽한 소리 듣노니   맨길에서나, 회색 포장 도로에 서있는 동안에도 가슴에 사무치는 물결 소리 듣노라. ​   하늘의 융단  - 예이츠     금빛과 은빛으로 무늬를 놓은 하늘의 수놓은 옷감이라든가   밤과 낮과 어스름한 저녁 때의  푸른 옷감 검은 옷감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 밑에 깔아 드리오리다만 내 가난하여 가진 것 오직 꿈 뿐이라   그대 발 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이 밟으소서, 내 꿈을 밟고 가시는 이여!   훔쳐 온 아이- 예이츠     스루스 숲 바위산이 호수 속에 잠긴 곳에 나뭇잎 우거진 섬 하나 떠 있다.   푸드득 나래치는 왜가리들이 잠자는 물쥐들을 깨우는 그 곳   우리들 요정의 통 속엔 딸기를 가득 훔쳐 온 빨간 버찌를 가득 숨겨 두었다.     "자 아이야, 어서 오너라!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 요정과 함께 오너라.   세상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곳이니."     어두운 잿빛 모래밭 달빛 물결이 빛나는    먼 로시즈 해변에서 우리는 밤새도록 춤을 춘다.   손에 손을 잡고서 서로 마주보며   저 달이 사라져 버릴 때까지 옛 춤을 엮어낸다.     우리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끓어오르는 물거품을 쫓지만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차고 잠 속에서도 근심에 싸여 있다.     "자 아이야, 어서 오너라!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 요정과 함께 오너라.   세상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곳이니."     그렌 카 언덕 사이로 굽이치는 시냇물 쏟아지는 곳 별 하나 목욕할 수 없는 등심초 우거진 웅덩이 속에   우리는 잠자는 송어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불길한 꿈을 안겨 준다.   작은 시냇물 위에  눈물방울 떨어뜨리는 고사리들 사이 살짝 몸을 내밀고서,     "자 아이야, 어서 오너라!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 요정과 함께 오너라.   세상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곳이니."     이 아이는 우리와 함께 가고 있다. 진지한 눈을 하고서.   이제 다시는 듣지 못하리라, 따뜻한 언덕 위 송아지 우는 소리를, 난롯가 주전자의 평화로운 노래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갈색 새앙쥐가 귀리통을 돌고 도는 것을.     "사람의 아이 그가 오는구나.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서 요정과 함께 오는구나.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눈물로 가득 찬 곳이니."    쿨 호수의 백조를 보며 - 예이츠      나무들은 가을의 아름다움으로 단장하고 숲 속의 길들은 메말라 있다.   10월의 황혼녘 물은고요한 하늘을 비치고 돌 사이로 넘쳐흐르는 물 위에는 쉰 아홉 마리의 백조가 떠 있다.     내가 처음 백조의 수를 헤아린 이래 열 아홉 번째의 가을이 찾아왔다.   그땐 미처 다 헤아리기도 전에 백조들은 갑자기 날아올라   요란스런 날개 소리를 내면서 끊어진 커다란 원을 그리며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지금껏 저 찬란한 새들을 보아 왔건만 지금 나의 가슴은 쓰리다. 맨처음 이 호숫가   황혼녘에 저 영롱한 날개 소리를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던 그때 이래 모든 것은 변해 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피곤을 모른 채 짝을 지으며 차가운 물 속을   정답게 헤엄치거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들의 가슴은 늙을 줄 모르고   어디를 헤매든 정열과 정복심이 여전히 그들을 따른다.     지금 백조들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고요한 물 위에 떠 있지만   어느날 내가 눈을 뜨고 그들이 날아가 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어느 등심초 사이에 집을 짓고 어느 호숫가나 웅덩이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인가?                                                     내 나이 하나 하고 스물이었을 때  - 하우스먼     내 나이 하나 하고 스물이었을 때 어느 어진 이가 하는 말을 나는 들었다.   "돈이야 금화이건 은화이건 주어 버릴지라도 네 마음만은 결코 주어서는 안되고,   보석이야 진주건 루비건 주어 버릴지라도 네 생각만은 자유분방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내 나이 하나 하고 스물이었으니 나에겐 소용없는 말이 되었지.     내 나이 하나 하고 스물이었을 때 또 그가 하는 말을 나는 들었다.   "가슴 속으로부터 우러나는 마음은 결코 헛되어 주어지진 않는다.   그것은 많은 한숨으로 보답되고 끝없는 연민으로 팔리게 된다."     이제 내 나이 둘 하고 스물이 되니 오, 그것은 진실, 참다운 진실.    팔리지 않는 꽃  - 하우스먼     나는 땅을 갈아 도랑을 파고 잡초를 뽑고 그리고 활짝 핀 꽃을 시장에 가져 갔다.   그러나 아무도 사는 이 없어 집으로 가져왔지만 그 빛깔 너무 찬란하여 몸에 치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여기저기 꽃씨를 뿌렸나니 내가 죽어 그 아래 묻히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까마득히 잊혀지고 말았을 때 나와 같은 젊은이가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씨앗은 새가 쪼아 먹었고 어떤 것은 계절의 매움에 상처받았으나   그래도 이윽고 여기저기에 고독한 별들을 피우게 될 것이다.     바람 부는 밤의 광시곡 - 엘리어트     열두 시.  달의 종합 속에 들어있는 쭉 뻗은 거리를 따라  속삭이는 날의 주문은 기억의 심층과  그 모든 뚜렷한 관계와  그 구분과 정밀성을 용해하고,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은 저마다 숙명적인 북처럼 울리고,  어둠의 공간을 통하여 한밤은 기억을 뒤흔든다, 광인이 죽은 제라늄을 흔들듯이.     한 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고, 가로등은 중얼대고, 가로등은 말했다. "저 여자를 보라 방긋 웃는 듯이 열려 있는 문간의  불빛 아래서 그대를 향해 망설이고 있는 저 여자를,   그녀의 옷자락이 찢겨져  모래로 더렵혀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꼬리가  구부러진 핀처럼 비틀린 것도 볼 수 있다.     추억은 많은 뒤틀린 것들을 높이 밀어올려 마르게 하고, 해변의 비틀린 가지는  매끈히 벌레에 먹히고 반들반들 닳아 마치 세계가 희고 빳빳한 그 뼈대의 비밀을  내던져 버린 것 같다.   공장 마당의 부서진 용수철, 힘이 빠져 막막하게 구부러지고 꺾일 지경이 된 그 형체에 달라붙은 녹.     두시 반, 가로등이 말했다.   "보라 도랑에 납작 업디어 혀를 쑥 내밀고 한 조각의 썩을 버터를 탐식하는 저 고양이를"   그렇게 어린 아이의 손이 자동적으로 쑥 나와 부두를 따라 달리는 장난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 아이의 눈 뒤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거리에서,불켜진 덧문 사이로  들여다보려고 하는 눈들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날 오후 웅덩이 속에서 게 한 마리가, 등에 조개삿갓이 붙은 늙은 게 한 마리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막대기 끝을 움켜잡았다.     세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며, 가로등은 어둠속에서 중얼댔다. 가로등은 흥얼거렸다--   "저 달을 보라, 달은 아무런 원한도 품질 않는다, 그녀는 약한 눈을 깜박이며  구석구석에 미소를 보낸다. 그녀는 풀의 머리털을 쓰다듬는다.   달은 기억을 잃었다. 색이 바랜 천연두로 그녀의 얼굴은 금이 가고 그녀의 손은 먼지와 오 드 꼴로뉴의 냄새를 풍기는 종이 장미를 비튼다.   그녀는 다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오랜 밤의 온갖 냄새와 더불어 있도다"   추억이 밀려온다 햇빛 받지 못하는 마른 제라늄과  갈라진 틈바구니의 흙과    거리의 밤 냄새와  덧문 닫힌 방의 여자의 냄새와 복도와 담배와  술집과 캐테일 냄새 등의 추억이.     가로등은 말했다. 지금은 네 시, 여기 문 위엔 번호가 있다. 추억이라고!   열쇠를 가진 것은 그대, 작은 등불이 계단에 원을 펼쳤으니, 올라오라. 침대는 비었고,칫솔은 벽에 걸려 있다 신일랑 문간에 놓고,잠자라,그리고 내일의 삶에 대비하라      나이프의 마지막 비틀림     버언트 노오튼 I. - '4중주곡'에서 - 엘리어트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모든 시간이 끊임없이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보상할 수 없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은 하나의 추상으로서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가능성으로서 남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은 일은  한 점을 향하여, 그 점은 항상 현존한다.    발자국 소리는 기억 속에서 반향하여 우리가 걷지 않은 통로로 내려가  우리가 한 번도 열지 않은 문을 향하여  장미원薔薇園속으로 사라진다. 내 말들도  이같이 그대의 마음속에 반향反響한다.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 꽃잎에 앉은 먼지를 뒤흔드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 밖에도 메아리들이 장미원에 산다. 우리 따라가 볼까?    빨리, 그걸 찾아요, 찾아요, 모퉁이를 돌아서.  새가 말한다. 첫째문을 빠져,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우리 따라가 볼까   믿을 순 없지만 지빡새를?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아 있구나. 위엄스럽게, 눈에도 안 보이게, 죽은 잎 위에 가을 볕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대기 속에 가벼이 움직인다.    그러나 새는 노래한다, 관목 숲속에 잠긴  들리지 않는 음악에 호응하여. 보이지 않는 시선이 오고간다. 장미는 우리가 보는 꽃들의 모습이었다.    그건 영접받고 영접하는 우리의 빈객이다.  우리들이 다가서자 그들도 하나의 정형의 패턴으로  텅 빈 소로小路를 따라 변두리 황양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물마른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못은 마르고, 콘크리트는 마르고, 변두리는 갈색 햇빛이 비치자 연못은 뮬로 가득차,  연꽃이 가벼이 가벼이 솟아오르며, 수면은 광심光心에 부딪쳐 번쩍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의 등 뒤에서 염못에 비치고 있었다. 그러자 한 가닥 구름이 지나니 연못은 텅 빈다.  가라, 새가 말했다. 나뭇잎 밑에 아이들이 가득 소란하게 웃음을 지니고 숨어 있다.   가라, 가라, 가라, 새가 말한다. 인간이란  너무 벅찬 현실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니.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 끝은 언제나 현존한다.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햄릿'에서   - 쉐익스피어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 속으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물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  이를 물리쳐야 하는가, 죽는 것은 잠자는 것-  오직 그뿐, 만일 잠자는 것으로 육체가 상속받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피치 못할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심으로 바라는 바 극치로다.   죽음은 잠드는 것! 잠들면 꿈을 꾸겠지? 아, 그게 곤란해.  죽음이란 잠으로 해서 육체의 굴레를 벗어난다면   어떤 꿈들이 찾아올 것인지 그게 문제지.    이것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고, 또한 그것 때문에   이 무참한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과   권력자의 횡포와 세도가의 멸시와  변함 없는 사랑의 쓰라림과 끝없는 소송 상태,    관리들의 오만함과 참을성 있는 유력자가  천한 자로부터 받는 모욕을 한 자루의 단검으로   모두 해방시킬 수 있다면 그 누가 참겠는가.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지루한 인생고에 신음하며  진땀 빼려 하겠는가.    사후(死後)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면   나그네 한번 가서 돌아온 일 없는  미지의 나라가 의지를 흐르게 하고    그 미지의 나라로 날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겪어야 할 저 환란을 참게 하지 않는다면-.    하여 미혹은 늘 우리를 겁장이로 만들고   그래서 선명한 우리 본래의 결단은  사색의 창백한 우울증으로 해서 병들어 버리고    하늘이라도 찌를 듯 웅대했던 대망도   잡념에 사로잡혀 가던 길이 어긋나고  행동이란 이름을 잃고 말게 되는 것이다.          화살과 노래   - 롱펠로우          나는 공중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은 땅에 떨어져 간 곳이 없었다.        재빨리도 날아가는 화살의 그 자취,      누가 그 빠름을 뒤따를 수 있으랴.          나는 공중을 향해 노래를 불렀으나,      노래는 땅에 떨어져 간 곳이 없었다.        그 누가 날카롭고 강한 눈이 있어      날아가는 그 노래를 따를 것이랴.          세월이 흐른 뒤 참나무 밑둥에      그 화살은 성한 채 꽂혀 있었고,        그 노래는 처음에서 끝 구절까지      친구의 가슴 속에 숨어 있었다.     애너벨 리  - 애드가 앨런 포우          아주 오랜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아실지도 모를 한 소녀       애너벨 리가 살고 있었지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엔       소녀는 아무 다른 생각이 없었지.           바닷가 그 왕국에선       그녀도 나도 어린 아이였지만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것 때문에, 오랜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는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했네.         그녀의 고귀한 친척들은 그렇게       그녀를 내게서 빼앗아갔지.         바닷가 왕국       무덤 속에 가두기 위해.           우리의 절반도 행복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우리를 시샘한 것.         바로! 그것이 이유였지(바닷가 왕국 사람들이 모두 알지).       한밤중 구름에서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싸늘하게 하고       나의 애너벨 리를 숨지게 한 것이지.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우리보다 나이 든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훨씬 더 강하여 천상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어내지는 못했네.           달이 비추면 나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고.       별이 떠오르면 나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느끼네.         그러면서, 나는 밤새도록 내 사랑, 내 사랑      내 생명 내 신부 곁에 누워있나니.        거기 바닷가 무덤 안에      물결치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곁에.     짐승 - 휘트먼     나는 모습을 바꾸어 짐승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평온하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   나는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땀흘려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환경을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밤 늦도록 잠 못 이루지도 않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 따위를 토론하느라  나를 괴롭히지도 않는다. 불만족해 하는 자도 없고, 소유욕에 눈이 먼 자도 없다.   다른 자에게, 또는 수천년 전에 살았던 동료에게  무릎 끓는 자도 없으며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잘난 체하거나 불행해 하는 자도 없다.     나는 고뇌의 표정이 좋다 - 에밀리 딕킨슨     나는 고뇌의 표정이 좋아. 그것이 진실임을 알기에-   사람은 경련을 피하거나 고통을 흉내낼 수 없다.     눈빛이 일단 흐려지면-그것이 죽음이다. 꾸밈없는 고뇌가   이마 위에 구슬땀을 꿰는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죽음을 위해 내가 멈출 수 없어- 에밀리 디킨슨     죽음을 위해 내가 멈출 수 없어 그가 나를 위해 친절히 멈추었다.   마차는 바로 우리 자신과 불멸을 실었다.     우리는 서서히 달렸다. 그는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가 너무 정중하여   나는 일과 여가도 제쳐놓았다.     아이들이 휴식 시간에  원을 만들어 뛰노는 학교를 지났다.   응시하는 곡식 들판도 지났고 저무는 태양도 지나갔다.     아니 오히려 해가 우리를 지나갔다. 이슬이 스며들어   얇은 명주, 나의 겉옷과 명주 망사-숄로는 떨리고 차가웠다.     부푼 둔덕처럼  보이는 집 앞에 우리는 멈추었다.   지붕은 거의 볼 수 없고 박공은 땅 속에 묻혀 있었다.     그 후 수 세기가 흘렀으나 말 머리가 영원을   향한듯 짐작되던  바로 그 날보다 더 짧게 느껴진다.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 로버트 프로스트     이것이 누구의 숲인지 나는 알겠다  물론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그는 재가 여기 서서 눈이 가득 쌓이는 자기 숲을 보고 있음을 못 볼 것이다.     내 작은 말은, 근처에 농가도 없고 숲이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한 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에 서 있음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내 작은 말은 방울을 흔들어 무슨 잘못이라도 있느냐고 묻는다   다른 소리라고는 다만 스쳐가는 조용한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뿐,     아름답고 어둡고 아늑한 숲 속. 그러나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밤에 익숙헤지며  - 로버트 프로스트     나는 어느새 밤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빗속을 홀로 거닐다 빗속에 되돌아왔다. 거리 끝 불빛 없는 곳까지 거닐다 왔다.     쓸쓸한 느낌이 드는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저녁 순시를 하는 경관이 곁을 스쳐 지나쳐도 얼굴을 숙이고 모르는 채 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발소리를 죽이고 멀리서부터 들려와 다른 길거리를 통해  집들을 건너서 그 어떤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나를 부르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이별을 알리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멀리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높다란 곳에 빛나는 큰 시계가 하늘에 걸려 있어     지금 시대가 나쁘지도 또 좋지도 않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밤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창가의 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내 창가에 서 잇는 나무, 창가의 나무여  밤이 오면 창틀은 내리게 마련이지만   나와 나 사이의 커튼은 결코 치지 않으련다.     대지에서 치솟은 몽롱한 꿈의 머리 구름에 이어 크게 확대되고 있는 것   네가 소리내어 말하는 가벼운 말이 모두 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나무여, 바람에 흔들리는 네 모습을 보았다. 만일 너도 잠든 내 모습을 보았다면   내가 자유를 잃고 밀려 흘러가  거의 절망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리라.     운명의 여신이 우리 머리를 마주 보게 한 그 날 그녀의 그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네 머리는 바깥 날씨에 많이 관련되고 내 머리는 마음 속 날씨에 관련되어 있으니.     자작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 줄기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어떤 아이가 그걸 흔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흔들어서는 눈보라가 그렇게 하듯 나무들을 아주 휘어져 있게는 못한다     비가 온 뒤 개인 겨울 날 아침 나뭇가지에 얼음이 잔뜩 쌓여있는 걸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 딸그락거리고 그 얼음 에나멜이 갈라지고 금이 가면서 오색 찬란하게 빛난다   어느새 따뜻한 햇빛은 그것들을 녹여 굳어진 눈 위에 수정 비늘처럼 쏟아져 내리게 한다   그 부서진 유리더미를 쓸어 치운다면 당신은 하늘 속 천정이 허물어져 버렸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나무들은 얼음 무게에 못 이겨 말라붙은 고사리에 끝이 닿도록 휘어지지만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비록 한 번 휜 채 오래 있으면 다시 꼿꼿이 서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세월이 지나면 머리 감은 아가씨가 햇빛에 머리를 말리려고   무릎꿇고 엎드려 머리를 풀어던지듯 잎을 땅에 끌며 허리를 굽히고 있는 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얼음 사태가 나무를 휘게 했다는 사실로 나는 진실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소를 데리러 나왔던 아이가 나무들을 휘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시골 구석에 살기 때문에 야구도 못 배우고       스스로 만들어낸 장난을 할 뿐이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 노는 어떤 소년 아버지가 키우는 나무들 하나씩 타고 오르며   가지가 다 휠 때까지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 오르내리며 정복하는 소년 그리하여 그는 나무에 성급히 기어오르지 않는 법을   그래서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나무 꼭대기로 기어 오를 자세를 취하고   우리가 잔을 찰찰 넘치게 채울 때 그렇듯 조심스럽게 기어 오른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발이 먼저 닿도록 하면서 휙 하고 바람을 가르며 땅으로 뛰어 내린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도 돌아가고 싶어한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 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고의로 오해하여 내 소망을 반만 들어주면서 나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아주 데려가 버리지는 않겠지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자작나무 타듯 살아 가고 싶다 하늘을 향해, 설백의 줄기를 타고 검은 가지에 올라   나무가 더 견디지 못할 만큼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 끝을 늘어뜨려 다시 땅위에 내려오듯 살고 싶다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자작나무 흔드는 이보다 훨씬 못하게 살 수도 있으니까.      각자와 모두       저 들판의 붉은 코트 어릿광대는  그대가 산꼭대기에서 보고 있는 걸 생각지도 못하며;    저 멀리 고원목장 어린 암소의 아득한 울음소리 그대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 아니고;    교회종지기가 울리는 정오의 종소리 또한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온과 그의 군대     말을 멈춰 그 소리에 귀기울여  즐겁게 들을 거라 생각지도 않으며;    그대 인생이 그대 이웃 읊조리는 사도신경에  어떤 도움을 줄 건지 알지 못할지라도    모든 것은 각각에게 필요한 것이며  제 홀로 유익하거나 정당한 것 아무것도 없나니       나는 새벽 오리나무 가지에서 노래하는  참새 소리를 천국의 것으로 여겼도다.    저녁때 참새 둥지 채 옮겨 집에 두었는데; 녀석은 노래 부르지만 즐겁지가 않네,    강과 하늘을 가져오지 않아서 그런가봐 새는 내 귀에, 모두는 내 눈에 노래했던 거라네.      깨질 듯 아름다운 조개들 바닷가에 있어, 파도의 거품들이 금방 밀려와     그 속 진주들 화려한 광택 빛나게 하고 사나운 바다는 포효하는 굉음을 내면서    나로부터 벗어나며 인사를 하네  나는 해초와 거품을 걷어내어    바다의 보물들을 집으로 가져왔지만 초라하고 보기 싫은 하찮은 것들이 되었네    태양과 모래와 파도소리의 아름다움을 바닷가에 두고 와서 그런가봐..      연인은 그 우아한 소녀를 눈여겨 보며  처녀들의 행렬에서 뒤 처지기를 기다렸지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백설' 성가대에 계속 묶여있을 것같았네      마침내 그녀를 그의 외딴집에 데려왔는데  숲속 새를 새장 속에 넣은 것 처럼    얌전한 아내 되었지만 우아한 멋 없어지고  쾌활하고 황홀한 매력 또한 사라졌네       그래서 난 진리를 갈망한다고 말했는데  아름다움은 미숙한 어린애의 속임수며     청춘의 유희로 끝나버린다고; 또 난 말했네, 내 발 밑 땅바닥의 소나무는    화환처럼 둥근 원을 그리며 이끼 낀 돌 막대 위로 뻗어 있고      나는 제비꽃 향기를 마시네; 내 주위에 참나무와 전나무들이 둘러 서있고     솔방울과 도토리들은 땅바닥에 구르고; 빛과 신성이 가득차고 충만한 영원한 하늘은    내 머리 위 높이 솟아 있네; 나는 다시 보았고, 다시 듣게 되었다네.    출렁이는 강물과, 새벽녘 새의 노래를.    아름다움이 몰래 내 감각 속으로 파고들어 나는 그 완벽한 조화에 굴복하고 말았다네.      가을   - 라마르틴     아직 변색하지 않은 녹음에 덮인 숲이여, 잔디 위에 마구 흩어져 있는 노릇한 낙엽들이여,   아름다운 가을의 날들이여 ! 안녕 ! 자연의 슬픔은 내 괴로움과 어울려 내 눈길에 정다웁다     나는 명상에 잠겨 한적한 오솔길을 따른다. 약한 햇살로 내 발밑의 어두운 숲을 희미하게 밝혀주는   이 창백해 가는 해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보고 싶구나.     그렇다. 자연이 숨져 가는 이 가을날, 베일에 싸인 듯 몽롱한 그의 시선 속에서 나는 더 한층 매력을 느낀다.   가을은 사랑하는 친구의 이별이며 죽음으로 영원히 닫혀지려는 입술에 떠도는 미소이다.     이처럼 인생의 지평선을 떠날 준비를 갖추고, 내 오랜 생애에 품었던 희망이 이제 스러져감을 한탄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몸을 돌려 선망의 눈초리로 내가 즐겨보지 못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본다.     천지여,태양이여,계곡이여, 아름답고 다정스런 자연이여, 나는 그대들로 인해 죽음에 임해 눈물을 흘린다.   대기는 너무도 향기롭고 빛은 너무도 맑다. 숨져가는 이의 시선엔 태양은 진정 아름답고나.     나는 이제 단맛 쓴맛이 함께 뒤섞인 이 술잔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몽땅 비우련다.   내가 생명을 들이마시던 이 잔 밑바닥에 어쩌면 한 방울의 굴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어쩌면 아직도 미래가  희망이 다 없어졌던 행복을 내게 다시 돌려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군중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한 영혼 내 영혼을 이해해주고 그리고 내게 응답해줄지도 모른다.     미풍에 향내를 풍기며 꽃잎이 떨어진다. 그것은 바로 생과 태양에 대한 이별.   내가 여기 죽어가는데 숨이지는 그 순간에 슬프고도 가락진 음향처럼 내 영혼이 퍼진다.      호  수    - 라마르틴                                이렇게 항상 새로운 여울을 향해 밀리고, 돌아올 길도 없이 끝없는 어둠에 휩쓸려   넓은 세월의 바다 위에 단 하루만이라도 닻을 내려 정박할 수가 없을까?     오, 호수여 !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나 갔는데, 그이가 다시 와야 할 이 사랑스런 물가에   일찍이 그이가 앉았던 바로 그 바위 위에  보라, 이젠 이렇게 나만 홀로 와서 앉았다.     너는 지금처럼 깊숙한 바위 밑에서 울부짖었고 지금처럼 그 울퉁불퉁한 바위에 마구 부딪쳤었지.   그 날도 지금처럼 바람은 네 물결을 튕겨 사랑스런 그이의 발 위에 거품을 끼얹었었지.     호수여, 그 밤을 너는 기억하는가 우리는 말없이 노를 젖고 있었다.   위로 하늘, 아래로 물결, 그 사이엔 가락맞춰 조화롭게 물결을 헤쳐 나가는 노소리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지.     그때 갑자기 지상의 소리 같지 않은 음성이 매혹된 호수가에 메아리쳐 울렸었다.   물결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내게 지극히 사랑스런 그 음성이 이런 말들을 남겼다.     시간이여, 날음을 멈추어라. 그리고 너 행복된 시절이여, 운행을 중지하라.   우리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의 이 덧없는 희열이나마 우리 좀 맛보게 해다오.     이 세상의 많은 불행한 이들은 너를 애원하노니, 그들을 위해 어디 흘러가거라.   그들을 괴롭히는 근심들까지 그 시간과 더불어 가져가거라 그리고는 행복한 사람들을 잊어다오.     아직 몇 분 더 머물기를 바래도 소용없구나! 시간은 나를 빠져나가 자꾸 도망쳐 간다.   이 밤이 제발 느리게 지나가라 간청하지만 새벽이 와서 어둠을 흐트러 놓으리라.     그러니 우리 서로서로 사랑하며 서둘러 이 덧 없는 세월을 즐겨 보자구나.   인간에겐 항구가 없고 시간엔 기슭이 없다. 시간은 흘러가고 인간은 사라지고!     시기에 찬 시간들이여, 사랑의 행복에 함뿍 취한 이 기쁜 순간을   불행한 날들과 그렇게 똑같은 속도로 우리 한테서 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     진정 우리는 행복된 순간의 흔적조차 남길 수가 없단 말인가.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만단 말인가.   즐거움을 주었다가, 그리고 그것을 앗아간 시간이 이제 다시는 그 즐거움을 돌려줄 수 없단 말인가.     영원이여, 허무여, 과거여, 너희들의 심연이여! 너희들이 사켜 버린 그 시간은 무엇에 쓰려느냐?   우리에게서 앗아간 그 숭고한 도취를 언제 돌려주려하느냐?     오, 호수여, 말없는 동굴이여, 어두운 숲이여! 시간이 아껴두고 또다시 젊게도 해줄 수 있는   너희들, 아름다운 자연이여, 이 밤의 추억만이라도 간직해다오.     아름다운 호수여, 네 휴식 속에, 네 폭풍 속에 그리고 물 위로 불쑥 솟은 험한 바위 사이에 그 추억을 간직해다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네 물결가에 연방 부딪치는 파도 소리에   보드라운 빛으로 수면을 희게 비추는 은빛 별들 속에  그 추억을 간직해다오!     탄식하는 바람, 한숨짓는 갈대, 향기로운 대기의 가벼운 향기,   들리고, 보이고, 숨쉬는 그 모든 것이 다같이 말해주길,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라고.     모래언덕 위에서 하는 말                      - 위고     나의 인생이 햇불처럼 옴츠러 들어간 지금, 나의 임무가 끝난 지금,   애상과 나이를 먹는 동안 어느샌가 무덤 앞에 이르게 된 지금,     그리고 마치 사라진 과거의 소용돌이처럼 꿈의 날개를 펴던 저 하늘 속에서   희망에 부풀었던 과거의 시간들이 어둠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 지금,     어느 날인가 우리는 승리를 하지만 그 다음날은 모든 것이 거짓이 되고 만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지금, 슬픔을 안고 꿈에 취한 사람모양 몸을 구부린 체,     나는 바라본다. 뭉게구름이 산과 계곡,   그리고 끝없이 물결짓는 바다 저 위에서 욕심장이 북풍의 부리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하늘의 바람소리가 ,암초에 부딪치는 물결소리가, 익은 곡식단을 묶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귀 기울인다. 그리고는 속삭이는 것과 말하는 것을 내 생각 깊은 마음속 에서 비교해 본다.     나는 때때로 모래언덕 위 듬성듬성 난 풀 위에 몸을 던진체, 꼼짝 않고 시간을 보낸다.   그러노라면 흉조를 띤 달이 떠올라와 꿈을 펴는 것이 보인다.     달은 높이 떠올라 가만스런 긴 빛을 던진다. 공간과 신비와 심연 위에,   광채를 발하는 달과 괴로움에 떠는 나, 우린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사라진 내 날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를 알아주는 이, 하나라도 있을까?   이 노곤한 눈동자 속에 젊은 날의 빛 한 오라기라도 남아 있는가?     모든 것이 달아난 걸까? 나는 외롭고 이젠 지쳤다. 대답없는 부름만을 하고 있구나.   바람아! 물결아! 그래 난 한가닥 입김과 같은 존재였단 말이냐?   아 슬프게도! 그래 난 한줄기 물결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냐?      사랑했던 그 어느 것도 다시 볼 수 없단 말이냐? 나의 마음속 깊숙이 저녁이 내린다.   대지야, 네 안개가 산봉우리를 가리웠구나, 그래 난 유령이고 넌 무덤이란 말인가?     인생과 사랑과 환희와 희망을 모두 살라 먹었을까? 막연히 기대를 건다. 그러다간 애원하는 마음이 되어   한줌이라도 혹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단지마다 기울여 본다.     추억이란 회한과 같은 것인가, 모든 것은 우리에게 울음만을 밀어다 주는구나!   죽음, 너 인간의 문의 검은 빗장아, 너의 감촉이 이리도 차냐!     나는 생각에 잠긴다. 씁쓰레한 바람이 일어오는걸, 물결이 붉게 주름지어 밀려오는 걸 느끼면서,   여름은 웃고, 바닷가 모래밭에는 파아란 엉겅퀴꽃이 피어나는구나.     떠나가는 집시들                      - 보들레르   어제 길을 떠났네, 미래를 점치며 불타는 눈동자를 한 부족   아이들을 등에 업지 않았으면, 혹은 축 늘어진 유방의 준비된 보물을 그들의 엄쳐흐르는 식욕에 내맡긴 체.     번들거리는 무기를 어깨에 멘 사나이들, 식구들이 옹기종기 탄 수레를 따라 걸어가네.   침울하게 미련을 갖고 이미 사라진 환상에  무거워진 눈으로 허공을 들러보며.     귀뚜라미는 감추어져 있는 모래 구멍 속에 숨어 그들의 행렬을 보며 한층 크게 노래 부르네.   대지의 신은 그들을 사랑하여 푸른 초목을 번창시키고.     그 길손들 앞에는 바위에서 샘이 솟고 사막이 꽃을 피우니,   그들을 맞기 위해 다가올 짙은 어둠의 왕국은 열려 있었네.       끝간 데 없이 늘어선 생울타리                          - 베를렌     끝간 데 없이 늘어선 생울타리 거품 인 맑은 바다 같네.   그 위로 맑은 안개, 향긋한 햇장과 내음 풍기고.     날렵한 망아지들이 와서 뛰놀며 흩어지는   부드러운 초원, 그 위로 가볍게 보이는 나무들과 풍차들.     일요일의 이 허허한 벌판 속에 다 큰 양떼들도   장난치며 놀겠다네, 저들의 흰 양모같이 부드러운.     그 위로 젖빛 하늘 속에서 방금 피리 소리 같은 종소리의   파장이 소용돌리처럼 궁글며 퍼져 나갔다.       캄캄한 깊은 잠이                 - 베를렌                                                   캄캄한 깊은 잠이 내 삶 위에 떨어지네.   잠자거라, 모든 희망아. 잠자거라, 모든 욕망아 !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선과 악의   기억마저 사라진다...... 오, 내 슬픈 이력아 !     나는 어느 지하실 허공속에서 어느 손에    흔들리는 요람. 침묵, 침묵 !       *랭보를 권총으로 쏜 사건의 초심 판결 언도를 받은 날 절망속에서 쓴 시.       감각                        - 랭보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 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 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랭보     1.서시     옛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들이 흘러다니는 하나의 축제였다.        어느날 저녁 나는 美를 내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보니 지독한 치였다- 그래서 욕을 퍼부어 주었다.      나는 정의에 항거하여 무장을 단단히 했다.   나는 도망했다. 오 마녀여, 오 불행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을 나는 너희들에게 의탁했다.    나는 내 정신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희망을 사라지게 하기에 이르렀다.      그 희망의 목을 비트는데 즐거움을 느껴,    나는 잔인한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었다.     나는 죽어가면서 그들의 총자루를 물어 뜯으려고    사형집행인을 불렀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      나는 진창 속에 팍 쓸어졌다. 나는 죄의 바람에 몸을 말렸다.    나는 광대를 잘 속여 넘겼다.     봄은 나를 향해 백치처럼 무시무시한 웃음을 웃었다.   그런데, 요즘 마지막 껄떡 소리를 낼 찰라에,      나는 옛날의 축제를 다시 열어줄 열쇠를 찾으려 했다.    그러면 아마도 욕망을 되찾을지 모른다.      자애(慈愛)가 그 열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내가 전에 꿈을 꾸었나보다.   "너는 잔인한 놈으로 남으리라....." 따위의 말을,       그토록 멋진 양귀비 꽃을 나에게 씌어준 악마가 다시 소리친다.    "네, 모든 욕망과 이기주의와    모든 너의 죄종(罪宗)을 짊어지고 죽으라"       오! 내 그런 것은 실컷 받아드렸다. 하지만, 사탄이여,    정말 간청하노니, 화를 덜 내시라!      그리고 하찮은 몇 가지 뒤늦은 비겁한 짓을 기다리며,    글쟁이에게서 교훈적이며 묘사적인 능력의 결핍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 나의 저주받은 자의 수첩에서 보기흉한 몇 장을 발췌해 준다.       *죄종(罪宗)  기독교에서 말하는 7개의 주된 죄                 교만, 탐욕, 邪淫, 질투, 탐심, 분노, 태만      나의 방랑 생활                          - 랭보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나는 하늘 아래 나아갔고, 시의 여신이여! 그대의 충복이었네, 오, 랄라! 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꿈꾸었는가!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었지. -꿈꾸는 엄지동자인지라, 운행 중에 각운들을 하나씩 떨어뜨렸지.    주막은 큰곰자리에 있었고. -하늘에선 내 별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하여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의 살랑거림에 귀기울였지,   그 멋진 구월 저녁나절에, 이슬 방울을 원기 돋구는 술처럼 이마에 느끼면서,   환상적인 그림자들 사이에서 운을 맞추고,   한발을 가슴 가까이 올린 채,  터진 구두의 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기면서!         낙엽   - 구르몽              시몬.. 나뭇잎이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은 너무나도 부드러운 빛깔,  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   낙엽은 너무나도 연약한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황혼 무렵 낙엽의 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프다. 바람이 불면 낙엽은 속삭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오라.. 우리도언젠가 낙엽이 되리라. 오라..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시몬, 나무 잎이 저버린 숲으로 가자. 이끼며 돌이며 오솔길을 덮은 낙엽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낙엽 빛깔은 상냥하고, 모습은 쓸쓸해 덧없이 낙엽은 버려져 땅 위에 딩군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저녁 나절 낙엽의 모습은 쓸쓸해 바람에 불릴 때, 낙엽은 속삭이듯 소리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서로 몸을 의지하리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 서로 몸을 의지하리 이미 밤은 깊고 바람이 몸에 차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눈  - 구르몽                     시몬, 눈은 그대 목처럼 희다. 시몬, 눈은 그대 무릎처럼 희다.   시몬, 그대 손은 눈처럼 차갑다. 시몬, 그대 마음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불꽃의 입맞춤으로 받아 녹는다. 그대 마음은 이별의 입맞춤에 녹는다.   눈은 소나무 가지 위에 쌓여서 슬프다. 그대 이마는 밤색 머리칼 아래 슬프다.   시몬, 그대 동생인 눈은 안뜰에서 잠잔다. 시몬, 그대는 나의 눈, 또한 내 사랑이다.         순박한 아내를 위한 기도 - 프란시스 잠                           주여, 내 아내감이 될 여인은 겸손하고 온화하며, 정다운 친구가 될 사람으로 해 주소서   우리 잠잘 때에는 서로 손 맞잡고 잠들도록 해 주소서   메달이 달린 은 목걸이를 그녀 가슴 사이에 보일듯 말듯 목에 걸도록 해 주소서   그녀의 살갗은 늦여름, 조는듯한 자두보다 한결 매끄럽고 상냥하며 보다 더한 금빛으로 빛나게 해 주소서   그녀의 마음 속에는 부드러운 순결이 간직되어 서로 포옹하며 말없이 미소짓도록 해 주소서   그녀는 튼튼하여 꿀벌이 잠자는 꽃을 돌보듯 내 영혼을 돌보도록 해 주소서   그리하여 내 죽는 날 그녀는 내 눈을 감기고 내 침대를 움켜 잡고 흐느낌에 가슴 메이게 하며   무릎을 꿇는 그 밖의 어떤 기도도 내게 주지 않도록 해 주소서..      식당방 - 프란시스 잠                           우리 집 식당방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  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거기엔 또 나무로 된 뻐꾹시계도 하나 있는데,  왜  그런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난 그것에 그 까닭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 부서져 버린 거겠지,  태엽 속의 그 소리도.  그냥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의 목소리처럼.      또 거기엔 밀랍 냄새와 잼 냄새, 고기 냄새와 빵 냄새  그리고 다 익은 배 냄새가 나는    오래된 찬장도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한테서 아무 것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충직한 하인이다.      우리 집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왔지만, 아무도 이 조그만 영혼들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나는 빙그레 웃는 것이다.    방문객이 우리 집에 들어오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  나  혼자인 듯 이렇게 말할 때에는  -- 안녕하신지요, 잠 씨?      애정의 숲  - 발레리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었다. 나란히 길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았다.  말도 없이......이름 모를 꽃 사이에서;     우리는 약혼자처럼 걸었다. 단둘이, 목장의 푸른 밤 속을;   그리고 나눠 먹었다 저 선경의 열매, 광인들이 좋아하는 달을.     그리고, 우리는 죽었다 이끼 위에서 단둘이 아주 머얼리, 소곤거리는 친밀한   그리고 저 하늘 높이, 무한한 빛 속에서 저 숲의 부드러운 그늘 사이에서;     우리는 울고 있었다. 오 나의 사랑스런 말없는 반려여!     클로틸드에게  - 아뽈리네르              사랑과 경멸 사이 우수가 잠든 정원에   아네모네와 노방초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곳에 우리들의 그림자도 스며든다 밤이 흩어버릴 그림자이지만   그림자를 거두는 태양도 언젠가는 그림자와 함께 사라지리라     맑은 물의 이 신기한 힘 그것은 머리털을 적시며 흐르나니   가라 네가 찾는 이 아름다운 그림자를 너는 찾아가야만 한다     시인의 죽음   - 쟝 꼭토                     나는 죽소, 프랑스여! 내가 말할 수 있게 가까이 와요,   좀더 가까이. 난 그대 때문에 죽는다오. 그대 날 욕했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었고 속였고 망하게 했지.    이젠 상관없는 일이오. 프랑스여, 나 이제 그대에게 입맞추어 야겠소.    마지막 이별의 입맞춤을. 외설스런 세느강에, 보기 싫은 포도밭에, 밑살스런 밭에, 너그러운 섬들에,   부패한 파리에, 죽이는 입상에 마지막 입맞춤을 보내야겠소. 좀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 좀 보게 해주오.    아! 이젠 나 그댈 붙잡았오. 소릴질러도 누굴 불러도 소용없지.   죽는 자의 손가락을 펼 수는 없는 것. 황홀히 나 그대 목을 조르오. 이제 난 외롭게 죽지 않으리니.       한 순간의 거울    - 폴 엘뤼아르            그것은 빛을 분산시키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외모와는 다른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방심할 여유를 앗아가버린다. 그것은 돌처럼 단단하다,   형태가 없는 돌, 움직임이 있고 시각이 있는 돌처럼,   그리고 그것의 섬광은 그 어떤 갑옷이나 그 어떤 가면도 일그러질 만큼 찬란하다.   손에 잡혀 있었던 그것은 손과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이해되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는 바람과 뒤섞이고, 하늘은 진리와   사람은 현실과 뒤섞인다.       그리고 미소를  - 폴 엘뤼아르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꿈은 깨어나듯이 충족시켜야 할 욕망과 채워야 할 배고픔이 있고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자유   - 폴 엘뤼아르                  국민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 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로움 위에 일상의 흰 빵 위에   결합된 계절 위에 나는 어늬 이름을 쓴다     누더기가 된 하늘의 옷자락 위에 태양이 곰팡 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방앗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무미한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깨어난 오솔길 위에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 있는 내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내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우리 집 강아지 위에 그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받은 불의 흐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화합한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넘어선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성냥개비 사랑 - 밤의 파리  - 프레베르                          고요한 어둠이 깔리는 시간 성냥개비 세 개에   하나씩 하나씩  불을 붙인다     첫째 개피는 너의 얼굴을 보려고 둘째 개피는 너의 두 눈을 보려고   마지막 개피는 너의 입을 보려고   그리고 송두리째 어둠은 너를 내 품에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려고.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 탄금시인(1)  - 괴테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슬픈 밤을 한 번이라도 침상에서 울며 지새운 적이 없는 자,   그는 당신을 알지 못하오니, 하늘의 권능이시여.     당신을 통하여 삶의 길을 우리는 얻었고   불쌍한 죽을 자들 타락케 하시어 고통 속에 버리셨으되,   그럼에도 저희는 죄값을 치르게 됩니다.       마왕   - 괴테                 이 늦은 밤 어둠 속, 바람 속에 말타고 가는 이 누군가? 그건 사랑하는 아이를 데리고 가는 아버지다.   아들을 팔로 꼭 껴안고,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다.     "뭣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무서워 하느냐?" "보세요, 아버지, 바로 옆에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왕관을 쓰고 옷자락을 끄는 마왕이 안 보이세요?" "아이야, 그건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란다."     "오, 귀여운 아이야, 너는 나와 함께 가자!   거기서 아주 예쁜 장남감을 많이 갖고 나와 함께 놀자.   거기에는 예쁜 꽃이 많이 피어있고 우리 엄마한테는 황금 옷이 많단다."     "아버지, 아버지,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지금 제 귀에 말하고 있어요."   "조용히 해라 내 아가야, 너의 상상이란다. 그건 슬픈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란다."      "귀여운 아이야, 자,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나의 딸들이 널 예쁘게 돌봐주게 하겠다.   나의 달들은 밤마다 즐거운 잔치를 열고 춤추고 노래하고 너를 얼러서 잠들게 해줄거다."     "아버지, 아버지, 저기에 보이지 않으세요? 마왕의 딸들이 내 곁에 와 있어요."   "보이지, 아주 잘 보인단다. 오래된 회색 빛 버드나무가 그렇게 보이는 거다."     "귀여운 아이야 나는 네가 좋단다. 네 귀여운 모습이 좋단다. 네가 싫다고 한다면 억지로 끌고 가겠다."   "아버지, 아버지, 마왕이 나를 꼭꼭 묶어요! 마왕이 나를 잡아가요!"      이제 아버지는 무서움에 질려 황급하게 말을 몬다. 신음하고 있는 불쌍한 아이를 안고서.   가까스로 집마당에 도착했으나 팔 안의 아이는 움직이지 않고 죽어 있다.       미뇽에게  - 괴테                 골짜기와 강물 위를 아주 높이, 눈부신 태양 마차는 지나간다.   아아! 태양은 그의 길을 가면서,  그대와 나의 슬픔을 불러 내나니,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언제나 아침마다 또 다시.     내겐 밤이 와도 소용이 없나니  내가 꾸는 꿈마저도  슬픈 모습으로 오기 때문이라.   나 슬픔을 느끼나니, 가슴 속에서 조용히 새롭게 솟아나는 힘과 함께.     오래 전부터 저 밑을 지나는 배를 보았나니   정박지를 찾아가는 것이라. 하지만 아아, 멈춰버린 슬픔은   마음 속에서 뜨질 않고 흘러가지 못하네.      예쁜 나들이 옷, 오랜만에  장롱에서 꺼내 입어야 하네.   오늘이 축제날이라. 아무도 모르리니   쓰디쓴 슬픔에 젖은 내 가슴  무섭게 찢끼운 것을.     남 몰래 울면서도 혈색 좋은 건강한 얼굴로   즐거운 모습 보일 수 밖에 없으니 이 슬픔이 죽어서    내마음 속에서 사라졌다고 한다면 아아, 오래전에 난 죽었어야 하기 때문이니.     장갑  - 쉴러                          사자 우리 앞에서 격투 경기를 기다리며 프란츠 왕이 앉아 있다.   주위에는 귀족들이 둘러 앉아 있고 높은 발코니에는 귀부인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둘러 앉아있다.     왕이 손가락으로 신호하자, 사자우리의 문이 열리고   육중한 발걸음으로  사자 한 마리가 밖으로 나와,   주위를  천천히 둘러 보더니,   입을 크게 한 번 벌리고, 갈기 털을 부르르 떨더니만,   그 자리에 몸을 눞혔다.     다시 왕이 신호를 하자  두 번째 우리의 문이 열리고   거기서 호랑이 한 마리가 사납게 뛰쳐 나오더니   사자가 앞에 있음을 보고 커다란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꼬리를 흔들면서 둥그렇게 한바퀴 돌더니   불타는 혀를 드러내고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사자 주위를 빙빙 돌더니만, 으렁거리면서 사자옆에 몸을 눞혔다.     왕이 또 신호를 내리자 우리문이 두 개가 열리고 표범 두 마리가 뛰쳐 나왔다.   살기찬 표범들은 호랑이에게 달겨들었다. 호랑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표범을 붙들자,   사자가 위엄있는 모습으로 일어나 울부짖었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맹수들은 살기를 품은 채  원을 그리더니  모두들 자리에 누웠다.     그 때 발코니 윗자리에서 장갑 한 짝이 아름다운 손에서 떠나   호랑이와 사자가 있는  한 가운데 떨어졌다.   쿠니쿤트 공주는 비웃는 듯이 기사 델로게스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기사님, 당신의 사랑이 열렬하고 늘 내게 맹세한 말씀이 참말이라면   저 장갑을 주워 올 수 있겠지요?"     그러자 기사는 즉시 일어나 힘찬 걸음으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맹수들 한가운데에서 겁 없이 장갑을 주워들었다.   놀람과 몸서림을 치면서 모든 기사와 귀부인들이 그걸 보았다.   태연히 장갑을 가져오는 그에게 모든 사람들은 칭송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참다운 행복을 기대하는 쿠니쿤트 공주는   부드러운 사랑의 눈동자로써 그를 맞이하였다. 기사는 공주의 얼굴에 장갑을 던지며,   "공주여, 나는 감사의 말을 바라지 않소." 기사는 그 자리에서 공주를 버렸다.     원망하지 않으리 - 하이네                      원망하지 않으리, 이 가슴 찢어져도. 가버린 사람아! 원망하지 않으리.   수많은 다이아먼드로 몸을 꾸며도 그대의 마음은 캄캄한 밤이어라.     나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노라. 그대를 꿈꾼 그 때 그대 마음의 어두움도 보았다.   그대 마음을 갉고 있는 뱀도 보았다. 연인이여, 너는 정말 불행한 사람이었다.         [사랑고백] - "아그네스여, 나 그대를 사랑하노라"   - 하이네[노래의 책]중, 북해(1825~1826)편에서    첫번째 연작시 6번      저녁이 되어 어둠이 찾아 드니  바다는 더한층 거세게 파도 쳤다.   바닷가에 앉아 하얗게 부숴지는 파도의 춤을 바라보며 내 가슴은 바다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때 그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아름다운 모습, 그대의 모습은 내 주위에서 맴돌고 어디에서나 나를 부른다. 세찬 바람속에서도,  거친 파도 속에서도, 내 가슴의 한숨 속에서도,  어디에서나...  어디에서나...   나는 가느다란 갈대를 꺾어 모래 위에 썼다.   "아그네스여, 나 그대를 사랑하노라"   하지만 심술궂은 파도가  이 달콤한 고백 위를 덮쳐가며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약한 갈대여, 먼지처럼 흩어지는 모래여, 사라지는 파도여, 난 이제 너희를 믿지 않으리!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내 마음은 더욱 날뛴다. 이제,  나 저 노르웨이의 숲에서  가장 크고 푸른 전나무를 찾아 그 뿌리채 뽑아   저 애트나의 불타오르는  샛빨간 분화구에 담갔다가   그 불이 붙은 거대한 붓으로  나 저 어두운 하늘을 바탕삼아 쓰겠노라.   "아그네스여, 나 그대를 사랑하노라"고     이렇게 하면 저녘마다 하늘에는 영겁의 필적이 타올라   뒤에 오는 후손들은 모두 즐거운 소리를 지르며    하늘에 쓰인 말을 읽으리라.     "아그네스여, 나 그대를 사랑하노라"      고독  - 릴케                 고독은 비와도 같은 것   저녁을 찾아 바다에서 오른다. 멀고 먼 외진 들녘에서 오른다.   늘상 고적하기만 한 하늘로 옮겨갔다가 하늘에서 비로소 도시에 내린다.     아침을 향해 골목골목이 몸을 일으키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육신들이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 떠나갈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같은 잠자리에서 함께 잠들어야 할 때,   낮과 밤이 뒤엉킨 시각, 비가 되어 내리면     고독은 강물과 함께 흘러간다.....      지키는 사람처럼 - 릴케               포도밭에 원두막을 짓고서 지키는 사람처럼   주여, 저는 당신 안에 있는 원두막입니다. 오오 주여, 저는 당신의 밤에 싸인 밤입니다.     포도밭, 목장, 오래 된 사과밭 봄의 계절을 건너뛸 줄 모르는 밭   대리석처럼 단단한 땅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     당신의 둥근 가지에서 향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지키고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진액에 거침없이 녹아 들어 당신의 깊은 뜻이 제 곁을 고이 타오릅니다.        방랑    - 헷세                              슬퍼하지 말아라, 멀지 않아 밤이다.   그러면 우리는 창백한 들판 너머   싸늘한 달님이 미소지으면   손과 손을 맞잡고 휴식하리니.   슬퍼하지 말아라, 멀지 않아 때가 온다.   우리는 안식하리니 우리의 십자가가   환한 길섶에 두 개 나란히 내리리라,   그리고 바람 또한 불어오고 불어가리라.     낙엽    - 헷세                        꽃마다 열매가 되려고 합니다.  아침은 저녁이 되려고 합니다.   변화하고 없어지는 것 외에는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름까지도 가을이 되어 조락을 느끼려고 합니다.   나뭇잎이여, 바람이 그대를 유혹하거든 가만히 끈기 있게 매달려 있으십시오.   그대의 유희를 계속하고 거역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내 버려 두십시오.   바람이 그대를 떨어뜨려서 집으로 불어가게 하십시오. ​   신이여, 저를 미치지 않게 하소서.   - 푸쉬킨               신이여, 저를 미치지 않게 하소서.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보따리와 지팡이가 나아요 아니, 고생스럽고 배고픈 게 차라리 더 나아요.   그것은 내가 나의 이성을 존중해서도 아니고 이성과 헤어지는 것이 기쁘지 않아서가 아니요.     나 자유로이 둔다면 그 얼마나 활개치며 어두운 숲으로 달려가리!   열병에 걸린 것처럼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그 얼마나 자유로이 멋진 꿈에 도취되어 나를 잊으리.     그리고 나의 파도소리에 귀기울이고 행복에 가득차서 빈 하늘을 바라보리니   나 그 얼마나 힘차고 자유로우리 들판을 파헤치고 숲을 휘어뜨리는 회오리처럼.     그런데 불행히도 : 미친다는 것은 페스트보다 더 두려운 일,   곧 갇히고 사슬에 묶이리니,   사람들은 창살 사이로 짐승을 찌르듯 찌르러 올 것이고,     그리고 밤에는 들을 것이다. 꾀꼬리의 울 리는 낭랑한 목소리도 아니고   빽빽한 참나무숲의 웅성거림도 아니고 울리는 것은   친구들의 외침소리, 밤의 파수꾼의 욕설, 사슬이 쩔렁이고 삐걱이는 소리뿐     ​ 시베리아 깊은 광맥속에 제까브리스트 12월 혁명이후 유형간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    - 푸쉬킨                       시베리아 깊은 광맥 속에 그대들의 드높은 자존심의 인내를 보존하소서   그대들의 비통한 노력과 높은 정신의 지향은 사라지지 않으리니.     불행의 신실한 누이, 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그 날은 오리니: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에게 닿으리니 깜깜하게 닫힌 곳 빗장을 열고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굴 속으로 나의 자유의 소리가 다다르듯이.     무거운 사슬이 풀어지고 암흑의 방은 허물어지고 - 자유는   기쁨으로 그대들을 마중나오리니 그리고 형제들은 그대들에게 검은 건네리니.      나 혼자 만나러 가는 밤   - 타골                                 사랑하는 이 만나러 나 홀로 가는 밤 새들 조용하고 바람이 불지 않네   길가의 집들도 고요히 서있어서 내 발걸음 소리만 점점 커져 부끄럽구나     발코니에 앉아서 그이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릴 제, 나뭇잎들 멈춰 있고 강물 소리도 조용하네   잠든 보초의 무릎에 놓인 칼처럼. 거칠게 뛰는 나의 가슴은    어이해야 진정될까.     사랑하는 이 오시어 내 곁에 앉으시어 내몸 떨리고 내 눈 감길 때면    밤 어두어지고 바람은 등불을 끄고 구름은 별을 가리우는구나   내 가슴의 보석은 반짝이며 빛을 발하는데 어이해야 감출 수 있을까       유적(遺謫)의 땅(The Land of Exile)    - 타고르                                어머니, 하늘에 햇빛이 어스레해졌습니다. 때가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놀아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왔습니다. 때는 토요일, 우리의 주일입니다. 일은 그만 두셔요, 어머니. 여기 창가에 오셔서 옛날 이야기의  테판타르 사막이 어디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비의 그림자가 끝에서 끝까지 햇빛을 가리웠습니다. 사나운 번개가 손톱으로 하늘을 찢습니다.   구름이 우르렁거리고 천둥이 울리면 가슴이 뛰어 어머니  품에 매달리고 싶습니다.   굵은 비가 대나무 잎을 몇 시간이나 때리고 우리 집 창문이 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고 소리를 낼 때면,    어머니, 나는 어머니와 방에 단둘이 앉아  옛날 테판타르 사막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머니, 그 사막은 어디 있는가요? 어느 바닷가, 어느 산모통이,  어느 왕의 영토인가요?   거기에는 들판을 표시하는 울타리도 없고, 해가 떨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갈 발자국 조차 없습니다. 뿐입니까?    숲 속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줍던 아주머니가 짐을 저자로 가져간  발자국도 없답니다.    모래밭에 몇 조각의 노란 잔디풀과 약빠른 늙은 새 한 쌍이 보금자리를 마련한 나무 한 그루만 있을 뿐,    테판타르 사막은 그냥 누워 있습니다.   바로 이런 흐린 날이면 임금의 어린 아들이 혼자 회색 말을 타고  사막을 지나 알지 못하는 강 건너 거인의 궁전에 갇혀 있는 공주를  찾아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먼 하늘에 비안개가 내리고 번갯불이 괴로운 병에 걸린 듯  미쳐 날뛸 때에, 옛날 이야기의 테판 타르 사막에 말을 타고 가면서,    왕자는 홀로 떨어진 가엾은 자기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외양간  쓰레질만 하고 있는 것을 잊겠습니까?-   어머니, 보셔요, 해가 지기 전에 벌써 날이 거의 어두워 갑니다.  그리고 마을길 너머에는 이미 길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목동은 벌써 목장에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도 이미 들에서  돌아와 오막살이 처마밑 자리에 앉아 거친 구름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어머니, 나는 책을 다 선반에 꽂았습니다 - 이제는 나보고 공부하라고  말씀을 하지 마셔요.   내가 자라서 아버지만큼 되면 배울 것을 모두 배우겠지요. 그렇지만 오늘만은 어머니, 옛날 이야기의 테판타르 사막이  어디 있는지 말씀해 주셔요.     거지  - 뚜르게네프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늙어빠진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눈물어린 충혈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오오, 가난은 어쩌면 이다지도 처참히  이 불행한 인간을 갉아먹는 것일까!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한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는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도 없다. 시계도 없다, 손수건마저 없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지는 기다리고 있다.......나에게 내민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 잡았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 것도 가진게 없구려" 거지는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습니다, 형제여" 하고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깨달았다....나도 이 형제에게서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 개  - 뚜르게네프                                 방 안에서 우리 둘....개와 나.  밖에는 사나운 폭풍이 무섭게 울부짖고 있다.   개는 내 앞에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개를 바라보고 있다.   개는 무슨 말인가를 나에게 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개는 벙어리라 말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개의 심정을 이해한다. 나는 알고 있다.....지금 이 순간, 개도 나도 똑같은 감정에  젖어 있다는 것을, 우리 둘 사이에는 어떠한 간격도 없다는 것을.    우리 둘은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똑같이 전율에 떠는 불꽃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불타며 빛나고 있다.   이윽고 죽음이 다가와서 이 불길을 향해  그 싸늘한 넓은 날개를 퍼덕거리리라......   그러면 끝장이다! 그렇게 되면 누가 알랴, 우리 저마다의 가슴 속에  어떤 불길이 타고 있었는가를?   그렇다! 지금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것은  동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서로 응시하고 있는 것은 동일한 두 쌍의 눈. 동물과 인간, 이 두 쌍의 어느 눈에도 동일한 생명이    서로를 의지하며 겁먹은 듯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출처] 세계 명시 모음 |작성자 은유   [출처] [[[세계 명시 모음]]]|작성자 영원속으로  
출처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중..(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 이승하 지음 (4) by 타샤                                이승하 지음 / 문학사상                   샤를 보들레르 (Charies Baudelaire, 1821~1867)       프랑스 시인, 비평가.         - 1857년에 발간된 이 시집은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누가 낸 시집보다도 유명하다... 150년이 지나도록 생명을 잃지 않고 여전히 전 세계에서 읽혀지고 논의되는 시집도 이다.   하지만 시인 자신은 생애 내내 전혀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살아서는 외설과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한 인물이었지만 죽어서는 19세기아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보들레르. 가족의 모의로 내려진 금치산자 선고와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준 혼혈 여인 잔느뒤발로 말미암아 시인은 생은 치욕의 연속이었다. 삶의 고통은 그를 아편과 대마초에 탐닉케 했고 이것은 그의 문학에 ‘인공낙원’을 제공했다. 악착같이 돈을 뜯어간 뒤발은 그에게 죽음의 한 원인이 되는 성병까지 주어 고생을 시켰다. 그러나 상징주의 시를 탄생시킨 보들레르의 사후에는 영광만이 남게 된다. P203               내 넋이여, 회상해 보라, 우리가 본 것을   그처럼 따스하고 화창한 여름날 아침에   오솔길 모퉁이 자갈 깔린 자리에 뻗은   끔찍스럽게 썩은 시체를       음탕한 여자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뜨거운 몸은 독기를 뿜어내고   썩은 냄새 진동하는 복통을   태연하고 뻔뻔스레 내벌리고 있었지       태양은 그 썩은 시체 위로 내리쬐고 있었지   마치 알맞게 구우려는 듯이   위대한 자연이 조립해 놓은 모든 것을   갑절로 자연에 되돌려주려는 듯이       하늘은 그 희한한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을 보듯이   고약한 냄새 하도 지독해   당신은 하마타면 풀 위에서 기절할 뻔했지       파리 떼가 그 썩은 복통 위에서 윙윙거리고   거기서 검은 구더기 떼 줄지어 기어나와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지   그 살아 있는 구더기 따라서                                  - 앞 5연(김인환 역)               내 마누라가 죽어서, 난 자유로워졌다!   그러니 취해 떨어지게 술을 마겨도 돼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오며는   그녀의 고함소리 내 가슴을 찢었지       임금님 못지않게 난 행복해   대기는 맑고, 하늘은 드높고....   내가 마누라에게 반했을 때도   이같은 여름이었지!       나를 미치게 하는 이 끔찍한 갈증   채워주기 위해선 필요하겠지   그녀의 무덤 채울 만큼의 술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인데       마누라를 우물 깊숙이 던져버리고   그 위에 우물가의 돌멩이를   모조리 밀어 넣기까지 했었지   되도록 잊어버리고 있은 일!                                - 앞 4연(김인환 역)                           아르튀르 랭보 (Jean-Nicolas Arthur Rimbaud, 1854~1891)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모험가.       17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세까지만 시를 쓰고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궁벼관 시골의 도서관에 가도 랭보의 시집이나 랭보에 관한 전기가 꽂혀 있다.... P221       (랭보는 여섯 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하고 어머니와 근근이 살면서 엄격하고 독선적인 어머니로 인해 가출을 거듭하는 반항적인 소년으로 자란다.   열한 살 때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등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고 라틴어 시를 탐독하면서 시 세계에 눈을 뜬다.   16세 때, 조르주 이장바르 교사를 통해 빅토르 위고의 작품과 고답파 시인들의 시집을 빌려 읽으면서 시를 쓸 결심을 굳힌다.)       랭보는 파리에서 어느 날 베를렌이란 이름을 주워듣게 된다. 10년 연상인 베를렌은 이미 그때 파리 문단에서 제법 인정을 받고 있었다. 1871년 8월에 랭보는 베를렌에게 몇 편의 시를 동봉하여 편지를 보낸다. 두 번째 편지를 보내자 “오시라, 고귀한 영혼이여. 보고싶다. 기다린다.”는 내용의 답장이 온다. 9월 10일에 랭보는 결혼한 지 1년 남짓 된 베를렌의 신접살림 집으로 찾아가 역사적인 상봉을 한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일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p223       시골서 상경한 소년이 신혼부부의 침대 한쪽을 차지하곤 그 집안의 가장과 동성애를 한다는 것(남자 역할을 랭보가, 여자 역할을 베를린이), 베를린이 10년이나 연상이면서도 랭보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사랑을 구걸했다는 것, 두 사람이 칼부림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베를린이 총으로 사랑의 끝장을 보려 했다는 것, 10대 소년이 마취제 하시시를 사용하고 술독에 빠져 산 것 등을 보면 두 사람이 온전한 정신 상태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1875년에 다시 만나 크게 다투고는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한다... P233               지금 저는 가능한 최대한 방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왜냐구요? 시인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투시자가 되려고 합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저도 선생님을 납득시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모든 감각을 착란시킴으로써 미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엄청나더라도 강해져야 하고, 시인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시인으로 인삭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장정애 역)       저는 말합니다. 견자여야 한다.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모든 감각기관에 걸친 광대무변하면서도 이치에 맞는 착란에 의해 견자가 됩니다. 사랑, 괴로움, 광기의 모든 형태, 그는 모든 독소를 스스로 찾아 자기 속에 흡수하여 그 정수만을 보려 합니다. 모든 신앙, 모든 초인적 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서운 고문, 그것에 의해 시인은 대환자, 대죄인, 위대한 저주받은 사람- 그리고 지고의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미지에 도달했으므로!(이준오 역) P245                                        -랭보가 이장바르와 폴드므니에게 썼던 편지-           랭보는 1875년 4월,슈투트가르트를 떠나 스위스를 여행한 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고, 그때부터 16년 동안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대를 떠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 1891년 2월부터 오른쪽 다리의 정맥류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게 된 랭보는 11월 10일, 전신에 암이 퍼져 임종을 맞는다. P251               기관총이 토해내는 붉은 핏빛의 침이,   종일토록 푸른 하늘을 향하여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   붉은 색, 녹색으로 장식한 부대들이 잇따라   적의 대포를 맞고 쓰러져가는 모습을 왕은 비웃고 있노라.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광기로 하여,   몇천만의 인간이 피투성이가 된 시산으로 화해버리고 있는데도,   -가혹한 열기 아래서, 여름의 풀섶 아래서, 기쁨으로 죽어간 가엾은 자들이여.   ‘자연’이여! 아! 성스러운 인간들을 창조해냈던 그대여!   어처구니없구나. 신께서 무늬 제단포와 향료와,   황금의 성찬배에 둘러싸여 빙긋거리고 있으시다니요,   찬미가의 가락에 따라 몸을 흔드시면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다니요.       게다가 눈을 뜨실 때는 전사자들의 어머니들이,   고뇌로 하여 기진맥진하게 된 속에서도,   손수건에 싸온 연보돈을, 눈물을   흘리면서, 바쳤을 때만이라구요!                                    - 전문(이준오 역)               내 갔지, 터지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양복저고리는 관념적이 되었어.   시신아, 나는 하늘밑을 가는 너의 충신.   오, 랄랄라. 내 얼마나 멋진 사랑을 꿈꾸었으리.   단벌바지엔 구멍이 났지.   꼬마 몽상가라 길에서 운율을   훑었지 내 주막은 대웅좌에있었어.   하늘의 내 별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길가에 앉아 나는 들었지.   구월의 멋진 저녁 소리를.   이마엔   이슬방울 떨어졌어, 힘나는 술같이.       환상적인 그림자 속에서 운을 밪추며   가슴 가까이 발을 대고 나도 리라 타듯   내 터진 구두의 구두끈을 잡아당겼지!                                    -
45    보들레르 『악의 꽃』문학과 지성사, 2003 댓글:  조회:1883  추천:0  2019-01-09
보들레르 『악의 꽃』문학과 지성사, 2003          독자에게    어리석음, 과오, 죄악과 인색에  정신을 얽매이고 몸은 들볶이니,  우리는 친숙한 뉘우침만 키운다,  거지들이 몸에 이를 기르듯.    우리의 죄는 끈질긴데 후회는 느슨하다 ;  우리는 참회의 값을 톡톡히 받고  가뿐하게 진창길로 되돌아온다,  비열한 눈물에 때가 말끔히 씻긴다고 믿으며.    악의 베갯머리엔   홀린 우리 넋을 슬슬 흔들어 재우니,  의지라는 우리의 귀금속도  이 능숙한 화학자 손엔 모조리 증발한다.    우리를 조종하는 줄을 쥐고 있는 건 저 !  우리는 역겨운 것에 마음이 끌려  날마다 을 향해 한 걸음씩 내려간다,  겁도 없이 악취 풍기는 어둠을 지나.    늙은 갈보의 학대받은 젖퉁이를  핥고 물어뜯는 가난한 난봉꾼처럼  남몰래 맛보는 쾌락 어디서나 훔쳐  말라빠진 귤인 양 죽어라 쥐어짠다.    우리 머릿골 속에선 수백만 기생충처럼  ..떼가 빽빽이 우글거리며 흥청대고,  숨쉬면 이 숨죽인 신음 소리 내며  보이지 않는 강물 되어 허파 속으로 흘러내린다.    강간과 독약이, 비수와 방화가  비참한 우리 운명의 초라한 캔버스를  그들의 짓궂은 구상으로 아직 수놓지 않았다면,  아! 그건 우리의 넋이 그만큼 대담하지 못하기 때문!    그러나 승냥이, 표범, 암 사냥개  원숭이, 전갈, 독수리, 뱀,  우리 악의 더러운 가축 우리에서  짖어대고 악쓰고 으르렁거리고 기어다니는 괴물들 중에서    제일 흉하고 악랄하고 추잡한 놈 있으니!  놈은 야단스런 몸짓도 큰 소리도 없지만  지구를 거뜬히 박살내고  하품 한 번으로 온 세계인들 집어삼키리 ;  그놈은 바로 !- 눈에는 무심코 흘린 눈물 고인 채  담뱃대 빨아대며 단두대를 꿈꾼다.  그대는 안다, 독자여, 이 까다로운 괴물을,  -위선자 독자여, -내 동류, -내 형제여!              축복    전능하신 하느님의 점지를 받아  이 따분한 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의 어머니는 질겁하고 신을 모독하는 마음 가득하여  측은해하는 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쥔다 :    -“아! 이 조롱거리를 기르니느  차라리 독사 한 뭉치를 몽땅 낳고 말 것을!  내 뱃속에 속죄의 씨앗을 배버린  덧없는 쾌락의 그 밤이 저주스럽다!    내 초라한 남편의 미움거리로  당신은 수많은 여자 중에 나를 골랐으니,  그리고 연애 편지 던지듯 불꽃 속에  이 오그라진 괴물을 내던질 수도 없으니.    당신의 심술로 저주받은 이 연장 위에  나를 짓누르는 당신의 증오를 퉁겨 보내고,  독 있는 새싹이 피어내지 못하게  이 역겨운 나무를 마구 비틀어놓으리!”    그녀는 이렇게 원한의 거품을 삼키며,  영원한 섭리도 알지 못하고,  저 스스로 계곡 밑에  어미의 죗값에 바쳐질 화형의 장작을 쌓는다.    허나 의 보이지 않는 보살핌 아래  이 불우한 는 햇볕에 취하고,  마시고 먹는 모든 것에서  신들의 양식과 주홍빛 신주를 찾아낸다.    그는 바람과 놀고 구름과 이야기하고  십자가의 길에 노래하며 취하니,  그의 순례의 길을 따르는 은  숲속의 새처럼 즐거운 그를 보고 눈물짓는다.    그가 사랑하려는 이들은 모두 두려워 그를 지켜보고,  아니면 그의 평온함에 대담해져,  그에게서 탄식을 끌어내려 하고,  자신들의 잔인함을 그에게 시험해본다.    그의 입에 들어갈 빵과 술에  더러운 가래와 재를 섞어놓고,  그가 만지는 것은 착한 척 내동댕이치고,  그의 발자국을 밟았다고 자신을 나무란다.    그의 아내는 광장에 나와 외쳐댄다 :  “남편이 나를 미인으로 여겨 우러러보니,  나는 고대의 우상 역을 해야겠다,  그녀들처럼 나도 몸에 금칠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향과 향유, 미르,  아첨과 고기와 술에 취하리라,  나를 찬미하는 마음에서 신에 대한 신의 경의를  웃으며 가로챌 수 있는지 보기 위하여!    그리고 이 불경한 익살극에 싫증이 나면,  그에게 내 가냘프고 질긴 손을 얹고  하르푸이아 손톱 같은 내 손톱으로  그의 심장까지 길을 뚫으리라.    떨며 딸딱거리는 새 새끼 같은  새빨간 심장을 그의 가슴에서 도려내어,  내 귀여운 짐승 물리도록 먹으라고  땅바닥에 픽 던져주리라!”    그의 눈에 빛나는 옥좌 보이는 저 을 향해  고요한 은 경건한 두 팔을 들고,  그의 맑은 정신은 번개처럼 멀리 번득여  미쳐 날뛰는 무리들을 그에게 가려준다 :    -축복받으시라, 하느님이시여, 당신이 준 괴로움은  우리의 부정을 씻어주는 신성한 약,  강한 자들을 거룩한 쾌락에 준비시켜주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순수한 정수!    나는 압니다, 거룩한 의 축복받은 서열 속에  당신께서 을 위해 한 자리 남겨두시고,  옥좌 천사, 힘의 천사, 주 천사들의  영원한 향연에 도 불러주신 것을.    나는 압니다, 고뇌야말로 유일하게 고귀한 것임을,  이승도 지옥도 이것만은 물어뜯지 못할 것임을,  또 내 신비로운 왕관을 엮기 위해선  모든 시대와 전 우주의 동원이 절대로 필요한 것임을.    허나 옛날 팔미르가 잃어버린 보석도  알려지지 않은 금속도, 바다의 진주도  설령 당신의 손으로 꾸민다 해도,  이 눈부시고 빛나는 아름아운 왕관엔 미치지 못하리 :    왜냐면, 그것은 창세기의 거룩한 광원에서 퍼낸  오로지 순수한 빛으로만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리고 인간의 눈은 제아무리 찬란하게 빛난들  흐려지고 애처로운 그 빛의 거울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알바트로스    흔히 뱃사람들이 재미 삼아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이 한가한 항해의 길동무는  깊은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를 따라간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  가엾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노처럼 옆구리에 질질 끄는구나.    날개 달린 이 나그네, 얼마나 서툴고 기가 죽었는가!  좀전만 해도 그렇게 멋있었던 것이, 어이 저리 우습고 흉한 꼴인가!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낸다!    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  그 거창한 날개도 걷는 데 방해가 될 뿐.            상승    숱한 못을 넘고, 골짜기 넘고  산을, 숲을, 구름을, 바다를 넘어  태양도 지나고, 창공도 지나,  또다시 별 나라 끝도 지나,    내 정신, 그대 민첩하게 움직여,  파도 속에서 황홀한 능숙한 헤엄꾼처럼,  말로 다할 수 없이 힘찬 쾌락을 맛보며  깊고깊은 무한을 즐겁게 누비누나    이 역한 독기로부터 멀리 달아나  높은 대기 속에 그대 몸 씻어라,  그리고 마셔라, 순수하고 신성한 술 마시듯,  맑은 공간을 채우는 저 밝은 불을.    안개 낀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권태와 끝없는 슬픔에 등을 돌리고,  고요한 빛의 들판을 향해 힘찬 날개로  날아갈 수 있는 자 행복하여라 ;    그의 생각은 종달새처럼 이른 아침  하늘을 향해 자유로이 날아올라,  -삶 위를 떠돌며 꽃들과 말없는 사물들의 언어를  힘들이지 않고 알아낸다!            교감    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이따금씩 어렴풋한 말소리 새어나오고 ;  인간이 그곳 상징의 숲을 지나가면,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    밤처럼 그리고 빛처럼 끝없이 넓고  어둡고 깊은 통합 속에  긴 메아리 멀리서 어우러지듯,  향기와 색채와 소리 서로 화답한다.    어린애 살결처럼 싱싱하고,  오보에처럼 부드럽고, 초원처럼 푸른 향기들이 있고,  -또 다른, 썩었지만 기세등등한 풍요한 향기들이 있어.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으로 확산되어,  정신과 관능의 환희를 노래한다.            저 벌거숭이 시대의 추억을 나는 좋아한다    페뷔스 신이 상像들에 금칠하기를 좋아하던  벌거숭이 시대의 추억을 나는 좋아한다.  그때엔 사내도 계집도 몸이 민첩하고,  거짓도 근심도 없이 삶을 누렸고,  다정한 하늘은 그들의 등을 어루만져  그들 몸의 귀중한 기관의 건강을 단련시켜주었다.  시벨 여신은 그때 풍성한 산물이 넘쳐  많은 아들들이 조금도 버거운 짐이 되지 않았고  어미 이리 골고루 애정 쏟듯,  검붉은 젖꼭지로 만물을 적셨다.  사내는 멋있고 건장하고 억세니,  자신을 왕이라 부르는 미녀들에 우쭐할 수 있었고 ;  티없이 깨끗하고 흠 없이 자란 과일들의  그 매끈하고 단단한 살점은 물어뜯고 싶었다!    오늘날 남녀의 벌거벗은 몸을 볼 수 있는 잘이ㅔ서  옛날 저 자연스런 위대한 모습을  이 마음속에 그려볼 때면,  공포만을 자아내는 그 끔찍한 그림 앞에  그의 넋은 음산한 오한에 휩싸이는 것을 느낀다.  오, 옷을 아쉬워하는 괴물들!  오, 꼴좋은 몸뚱이들! 오 탈을 씌워야 할 몸통들!  오, 비틀어지고, 말라빠지고, 튀어나온 배와 혹은 축 처진 가엾는 몸뚱어리들,  이 매정하고 태연하게  어렸을 때, 그의 청동 배내옷 속에 둘둘 감아둔 몸뚱어리들!  그리고 아! 그대 여인들이여, 양초처럼 창백하고,  방탕이 좀먹고, 방탕이 길러주는 그대들,  그리고 그대 어미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악덕과  다산의 온갖 추악함 끌고 다니는 처녀들이여!    정녕 우리 타락한 민족들은  옛 민족들이 모르는 미美를 가지고 있다 :  가슴의 궤양에 좀먹힌 얼굴들과  우울의 미美라고나 할 그런 것을,  그러나 늦게 온 우리 뮤즈의 발명품도  우리 병든 인종이 젊음에 바치는  깊은 흠모를 막지 못하리,  -성스러운 젊음, 순박한 모습, 다정한 이마  흐르는 물처럼 맑고 깨끗한 눈동자,  그 향기, 그 노래, 그 부드러운 열기를  하늘의 푸름처럼, 새처럼, 꽃처럼 무심코  모든 것 위에 널리 퍼트려주는 젊음에!            등대들    루벤스, 망각의 강, 나태의 정원,  그곳에서 사랑하기엔 너무 싱싱한 살 베개,  그러나 거기선 생명이 끊임없이 넘치고 용솟음친다,  하늘에 바람처럼, 바다에 밀물처럼 ;    레오나르도 다 빈치, 깊숙하고 어두운 거울,  거기서 사랑스런 천사들, 신비 가득한  다정한 미소지으며 그들의 나라 에워싼  빙하와 소나무 그늘에 나타난다.    렘브란트, 신음 소리 가득한 음산한 병원,  장식이라고는 커다란 십자가 하나,  눈물 섞인 기도가 오물에서 풍기고  겨울 햇살 한 줄기 불쑥 스친다 ;    미켈란젤로, 어렴풋한 곳,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헤라클레스 무리들과 그리스도 무리들이 어울리는 곳  억센 유령들이 꼿꼿이 일어나 땅거미 어스름 속에서  손가락 뻗쳐 저희들 수의를 찢는 모습 ;    권투 선수의 분노도 목신의 뻔뻔함도  천민들의 미美는 잘도 긁어모을 수 있었던 그대,  자존심에 부푼 마음은 넉넉하나, 허약하고 누렇게 뜬 사나이,  퓌제, 고역수들의 우울한 재앙    와토, 수많은 병사들이 나비처럼  번쩍이며 이리저리 거니는 사육제,  샹들리에가 비춰주는 산뜻하고 경쾌한 배경은  소용돌이치는 무도장에 광란을 퍼붓는다.    고야, 낯선 것들로 가득한 악몽,  마녀들 잔치 판에서 삶는 태아들이며  거울 보는 늙은 여인들과 마귀 꾀려고  양말을 바로잡는 발가숭이 아가씨들 ;    들라크루아, 악천사들 드나드는 피의 호수,  거긴 늘 푸른 전나무 숲으로 그늘지고,  우울한 하늘 아래 기이한 군악대 소리  베버의 가쁜 한숨인 양 지나간다.    이 모든 저주, 이 모독, 이 탄식들,  이 황홀, 이 외침, 이 눈물, 이 들,  그것은 수천의 미로에서 되울려오는 메아리 소리 ;  결국 죽게 될 인간의 마음에는 성스러운 아편!    그것은 수천의 보초들이 되풀이하는 부르짖음,  수천의 메가폰이 보내는 하나의 망령,  그것은 수천의 성 위에 밝혀진 하나의 등대,  깊은 숲속에서 방황하는 사냥꾼들이 부르는 소리!    왜냐면 주여, 이것은 진정  우리의 존엄을 보일 수 있는 최상의 증거,  이 뜨거운 흐느낌은 대대로 흘러흘러  당신의 영원의 강가에서 스러져갈 것이니!            병든 뮤즈    아 내 가엾은 뮤즈! 오늘 아침 무슨 일이오?  그대의 파인 두 눈은 밤의 환영들로 가득하고  그대 얼굴에 차갑고 말없는 광란과 공포가  번갈아 비치는 것이 보이오.    푸르스름한 음몽마녀와 분홍 꼬마 요정이  그들 항아리 속에 담긴 두려움과 사랑을 그대에게 쏟았는가?  악몽이 사납고 억센 주먹질로  전실의 늪 깊은 곳에 그대를 빠뜨렸는가?    바라나니, 건강의 향기풍기는  그대 가슴에 굳센 사상이 언제나 찾아들고,  그대 기독교의 피가 고동쳐 흐르기를,    노래의 아버지, 페뷔스와 추수의 영주인  위대한 牧神이 번갈아 다스리던  옛날 음절의 수많은 선율처럼.          돈에 팔리는 뮤즈    오, 내 마음의 뮤즈, 그대는 궁궐을 바라는데,  달이 그의 을 풀어놓을 때,  눈 오는 밤의 울적한 권태의 시간 동안  그대의 시퍼래진 두 발을 녹여줄 깜부기불이라도 마련해두었는가?    그래, 대리석 같은 그대 어깨를  덧문 스며드는 밤 빛으로 되살리려나?  그대 지갑 그대 궁궐처럼 텅 비었으면,  창공의 금별이라도 따올 작정인가?    그대는 날마다 저녁의 빵을 벌기 위해  성가대 아이처럼 향로 떠받들고,  믿음 가지 않는 도 불러야 하고,    아니면 속물들 마냥 웃기기 위해,  굶주린 어릿광대처럼 아양 떨고,  남모를 눈물에 젖은 웃음도 팔아야 하리.              무능한 수도사    옛날의 수도원은 그 널따란 벽을  성스러운 의 그림으로 꾸몄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신심信心을 부추기고  엄숙한 찬바람도 진정시켰다.    그리스도가 뿌린 씨가 꽃피던 그 시절엔  지금은 그 이름도 잊혀진 한둘 아닌 명수도사가  장례마당을 아틀리에 삼아  자연스럽게 을 찬미했다.    -내 넋은 하나의 무덤, 이 무능한 수도사  나는 허구헌 세월 거기서 돌아다니며 살고 있으되,  아무것도 이 흉측한 수도원의 벽을 치장하지 않는다.    오 게으름뱅이 수도사여! 언제 나는  내 서글픈 빈곤함의 생생한 광경을 그리기 위해  내 손에 일감 주고 내 눈에 즐거움 줄 수 있으랴?            원수    내 젊은 날은, 여기저기 찬란한 햇살 비추었어도,  캄캄한 뇌우雷雨에 지나지 않았고 ;  천둥과 비바람에 그토록 휩쓸리어  내 정원에 남은 건 몇 개 안 되는 새빨간 열매.    이제 나는 사상의 가을에 다가섰으니,  삽과 쇠스랑을 들어야겠다,  홍수로 무덤처럼 커다란 구멍이 파인  물에 잠긴 대지를 새로이 갈기 위해.    그러나 누가 알랴, 내가 꿈꾸는 새로운 꽃들이  갯벌처럼 씻겨진 이 흙 속에서  신비한 생명의 양식 찾아낼 수 있을지?    오 이 괴로움이여! 은 생명을 좀먹고,  이 보이지 않는 는 우리 심장을 갉아먹어  우리가 잃은 피로 자라고 튼튼해진다!            불운    이토록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려면,  시지푸스여, 그대의 용기가 필요하리!  아무리 일에만 전념한다 해도  은 길고 은 짧은 것.    유명한 무덤들에서 멀리 떨어져  외딴 묘지를 향해  내 마음은 목이 쉰 북처럼  장송곡 치며 간다.    -수많은 보석들이 잠자고 있다,  어둠과 망각 속에 파묻혀,  곡괭이도 측심기도 닫지 않는 곳에서 ;    수많은 꽃들이 아쉬움 가득,  깊은 적막 속에서,  비밀처럼 달콤한 향기 풍긴다.            전생    나는 오랫동안 널따란 회랑 아래 살았다.  바다의 태양은 수천의 불빛으로 그곳을 물들였고,  곧고 장엄한 큰 기둥들로  저녁이면 그곳이 마치 현무암 동굴 같았다.    물결은 하늘의 그림자를 바다 위에 떠돌게 하고,  그 풍부한 음악의 전능한 화음을  내 눈에 비치는 석양빛 속에  엄숙하고 신비롭게 섞어놓았다    그곳이 바로 내가 살던 곳, 고요한 쾌락 속에서,  창공과 물결과 찬란한 빛 가운데서  온통 향기 배어 있는 발가벗은 노예들에 둘러싸여,    그들은 종려 잎으로 내 이마를 식혀주었고,  그들의 유일한 일은 내 마음 괴롭히는  고통스런 비밀을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었다.            길 떠난 보헤미안들    눈동자 뜨거운 점쟁이 종족들이  어제 길을 떠났다, 새끼들  등에 들처업고, 또는 새끼들 걸신 든 아가리에  늘 마련된 보물, 축 처진 젖꼭지 내맡긴 채.    사내들은 번쩍이는 무기를 지고 걸어서 간다,  제 식구들 웅크리고 있는 마차를 따라,  사라진 환영 좇는 서글픈 미련 때문에  무거워진 눈을 하늘 쪽으로 보내며.    모래 성 안쪽에서 귀뚜라미는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목청 돋우고,  그들을 사랑하는 시벨 여신은 그들 앞에 녹음을 펼쳐,    바위에 물 솟게 하고 사막에 꽃을 피운다,  이 나그네들 앞에 열린 것은  어두운 미래의 낯익은 세계.            인간과 바다    자유로운 인간이여, 그대는 언제나 바다를 사랑하리!  바다는 그대의 거울, 그대는 그대의 넋을  끝없이 펼쳐지는 물결에 비추어본다,  그리고 그대의 정신 역시 바다 못지않게 씁쓸한 심연.    그대는 그대 모습의 한가운데 잠기기 좋아한다 ;  그대는 그것을 눈과 팔로 껴안는다, 그리고 때로  사납고 격한 이 탄식의 소리에  그대 가슴의 동요도 잊는다.    그대들은 둘 다 컴컴하고 조심스럽다 ;  인간이여, 아무도 그대 심연의 밑바닥 헤아릴 길 없고,  오 바다여, 아무도 네 은밀한 보물 알 길 없다,  그토록 악착같이 그대들은 비밀을 지킨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득한 세월을 두고  연민도 후회도 없이 서로 싸워왔다,  그렇게도 그대들은 살육과 죽음을 좋아한다,  오 영원한 투사들, 오 가차없는 형제들이여!            지옥의 동 쥐앙    동 쥐앙이 삼도내로 내려가  샤롱에게 배 삯을 치르니,  한 음울한 거지, 앙트스텐처럼 오만한 눈초리를 하고  억센 복수의 팔로 노를 잡았다.    늘어진 젖퉁이 드러내고, 옷자락은 흐트러진 채, 여자들은 어두운 하늘 아래서 몸을 비틀고,  제물로 바쳐진 한떼의 짐승들처럼,  그의 뒤에서 긴 울부짖음 소리 내고 있었다.    스가나렐은 낄낄대며 판돈을 내라 조르고,  판편 동 뤼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강가를 떠도는 모든 망령들에게  백발 덮인 제 머리를 비웃던 뻔뻔한 아들을 가리킨다.    정결하고 야윈 엘비르는 상복 속에 떨면서,  지난날 애인이던 배신한 남편 곁에서  최초의 맹세의 다정스러움이 다시 빛날  마지막 미소를 그에게 구하려 하는 듯.    갑옷 입고 똑바로 몸을 세우고 있는 큰 석상의 사나이  키를 꽉 쥐로 검은 물결 헤쳐 나간다,  그러나 이 침착한 영웅은 장검을 짚고 서서  지나간 배의 자취만 굽어보며 아무것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교만의 벌    이 활기와 힘에 넘쳐 꽃피던  저 희한한 시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  어느 날 세상에서도 이름난 어느 박사가  -믿음 없는 사람을 억지로 믿게 하고 ;  캄캄한 마음 깊숙이에서 그들을 뒤흔들고 :  아마도 순수한 만이 다닐 수 있는  박사 자신은 가본 적 없는 기이한 길을  하늘의 영광을 향해 넘어갔는데, -  너무 높이 올라간 사람처럼 겁에 질려,  악마 같은 교만심으로 우쭐해 외쳤다 :  “예수여, 아기 예수여! 나는 매우 높이 그대를 치켜올렸다!  그러나 갑옷으로 막지 않고 그대를 치려는 마음 내게 있었다면  그대의 치욕은 그대의 영광 못지 않았으리,  그리고 그대는 일개 보잘것없는 태아에 지나지 않았으리!”    그 순간 그의 이성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태양의 반짝임은 베일에 가려지고 :  온갖 혼돈이 그의 지성 속을 뒤흔들었다,  옛날에는 질서와 풍요 가득한 살아 있는 신전,  그 천장 아래서 그토록 화려함이 빛났건만.  흡사 열쇠 잃은 지하실처럼  침묵과 어둠이 그의 내부에 자리잡았다.  그때부터 그는 거리를 헤매는 짐승처럼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여름과 겨울도  분간 못하고 들판을 쏘다니고,  폐품처럼 더럽고 쓸모없고 흉측해져,  어린애들의 놀림감과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름다움    나는 아름답다, 오 인간이여! 돌의 꿈처럼,  그리고 누구나 차례차례 상처받은 내 젖가슴은  물질처럼 말없는 영원한 사랑을  시인에게 불어넣기 위해 빚어진 것.    나는 불가사의의 스핑크스처럼 창공에 군림하고 ;  눈 같은 마음을 백조의 흰 빛에 잇는다 ;  나는 선線을 흐트러뜨리는 움직임을 미워한다,  그리고 나는 아예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    가장 위풍당당한 기념비에서 빌려온 듯한  내 고상한 몸가짐 앞에서 시인들은  엄격한 추구로 일생을 탕진하리라.    왜냐면 이 온순한 애인들을 홀리기 위해,  나는 모든 것을 한결 아름답게 하는 순수 거울을 가졌기에.  그것은 나의 눈, 영원한 빛을 발하는 커다란 눈!            이상    나 같은 사람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천박한 시대가 낳은 썩어빠진 산물인  가두리 장식된 미인도도 아니고,  긴 구두 신은 발도, 캐스터네츠 낀 손가락도 아니다    병원의 수다 떠는 그 미인들의 무리는  위황병 걸린 시인 가바르니에게나 맡기련다,  그 창백한 장미들 속에선  내 붉은 이상을 닮은 꽃을 찾아낼 수 없을 터이니.    심연처럼 깊은 이 마음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대, 맥베스 부인이여, 죄악에 강한 꿋꿋한 넋,  폭풍우 속에서 꽃핀 에쉴르의 꿈이어라,    아니면 너 거대한 , 미켈란젤로의 딸,  들의 입에 길들여진 젖가슴을  야릇한 자세로 한가로이 바트는 너.            거녀    이 힘찬 기운에 넘쳐  날마다 괴물 같은 아이를 배던 그 시절  나는 젊은 거녀 곁에 살았으면 좋았으리,  여왕 발 밑에서 사는 음탕한 고양이처럼.    그녀의 몸이 그 넋과 더불어 피어나  끔찍한 희롱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고 ;  그녀의 가슴 검은 열정 품고 있는지  그녀의 눈에 서린 젖은 안개로 짐작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으리.    그녀의 웅대한 형체 위로 한가로이 노닐며 ;  그녀의 거대한 무릎을 비탈인 양 기어오르고,  또 때로는 여름날 몸에 해로운 뙤약볕에 지쳐    그녀가 들판을 가로질러 드러누울 때,  나는 그 젖가슴 그늘에서 한가로이 잘 수 있었더라면 좋았으리,  평화로운 마을이 산기슭에 잠들 듯이.            가면  -르네상스식 우의寓意적 조상彫像  조각가 에르네스트 크리스토프에게    저 플로렌스식 멋 풍기는 보물을 들여다보자 ;  근육 발달한 저 몸뚱이의 요동 속에  멋진 자매, 과 이 넘친다.  진정 기적 같은 작품인 이 여인,  기막히게 튼튼하고 사랑스럽게 가냘파  호사스런 잠자리에 군림하고  대주교 아니면 군주의 여가를 즐겁게 해주기에 제격이네.    -그리고 또 보라, 저 미묘하고 육감적인 미소를,  거기엔 이 절정을 이룬다 ;  저 앙큼하고 번민하는 조롱하는 듯한 눈길 ;  망사에 둘러싸인 저 교태 넘치는 얼굴,  그 모습 하나하나 우리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  이 나를 부르고, 이 내게 왕관을 씌운다!”  보라, 그토록 위엄 타고난 저 인물에  상냥함이 얼마나 자극적인 매력을 주고 있는가를!  자, 우리 다가가 저 미녀의 주위를 돌아보자.    오 예술의 모독이여! 오 불길한 기만이여!  신성한 육체의 여인, 행복을 약속하더니,  위쪽이 머리 두 개 달린 괴물로 끝나 있다니!    천만의 말씀! 그것은 한 개의 가면, 유혹적인 겉 장식일 뿐,  찌푸린 묘한 매력으로 빛나는 이 얼굴은.  그러나 보라, 여기 끔찍하게 오그라든  진짜 얼굴을, 거짓 얼굴 뒤로  뒤로 젖힌 진정한 얼굴을.  가련한 절세의 미인이여! 그대 눈물의  찬란한 강물이 근심 많은 내 가슴속에 흘러든다 ;  그대의 거짓이 나를 취하게 하고, 내 넋은  로 솟아나는 그대 눈의 물결에 목을 축인다!    -헌데 어찌하여 그녀는 울고 있는가? 정복된 인류를  제 발 아래 무릎 꿇게 할 만한 완벽한 미인,  무슨 수수께끼 같은 병이 튼튼한 그녀 옆구리를 갉아 먹는단 말인가?    -그녀는 하염없이 울고 있다, 인생을 살아왔기에!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기에! 하지만 그녀가 특히 한탄하는 건,  그녀의 무릎까지 떨게 하는 건,  아, 슬프다! 내일도 살아야 하기에!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우리들처럼!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    그대 무한한 하늘에서 왔는가, 구렁에서 솟았는가,  오 이여! 악마 같으면서도 숭고한 그대 눈길은  선과 악을 뒤섞어 쏟아부으니,  그대를 가히 술에 비길 만하다.    그대는 눈 속에 석양과 여명을 담고 ;  폭풍우 내리는 저녁처럼 향기를 뿌린다 ;  그대 입맞춤은 미약, 그대 입은 술 단지,  영웅은 무력하게 하고, 어린애는 대담하게 만든다.    그대 캄캄한 구렁에서 솟았는가, 별에서 내려왔는가?  홀린 은 개처럼 그대 속치마에 따라 붙는다 ;  그대는 닥치는 대로 기쁨과 재난을 흩뿌리고,  모든 것을 지배하되,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여, 그대는 죽은 자들을 비웃으며 그 위로 걸어간다 ;  그대의 보석 중 도 매력이 못하지 않고,  그대의 가장 비싼 패물 중 이  그대의 거만한 배 위에서 요염하게 춤춘다.    현혹된 하루살이가 그대 촛불에 날아가  탁탁 타면서 말한다, “이 횃불에 축복을!” 하고  정부의 몸에 기대고 헐떡이는 사나이는  흡사 제 무덤 어루만지는 빈사의 병자.    그대 하늘에서 왔건, 지옥에서 왔건 무슨 상관이랴?  오 「아름다움」이여! 끔찍하되 숫된 거대한 괴물이여!  그대의 눈, 미소, 그리고 그대의 발이  내가 갈망하나 만나보지 못한 을 열어줄 수만 있다면    로부터 왔건 에게서 왔건 무슨 상관이랴? 이건 이건, 무슨 상관이랴? -빌로드 같은 눈을 가진 요정이여,  운율이여, 향기여, 빛이여, 오 내 유일한 여왕이여! -  세계를 덜 추악하게 하고, 시간의 무게를 덜어만 준다면!            이국 향기    어느 다사로운 가을 저녁 두 눈을 감고  훈훈한 그대 젖가슴 내음 맡으면,  단조로운 태양 볕 눈부신  행복한 해안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게으르게 하는 섬나라,  거기서 자연은 키운다,  진귀한 나무들과 맛있는 과일들,  날씬한 체구에 활기 찬 사나이들은,  순진한 눈빛에 놀라운 여인들을.    그대 내음을 따라 매혹적인 고장으로 안내되어,  나는 본다, 바다의 파도에 흔들려 아직도 몹시 지쳐 있는  돛과 돛대 가득한 어느 항구를,    그 동안 타마린의 초록색 향기는  대기 속을 감돌매 내 콧구멍을 부풀게 하고,  내 마음속에서 수부들의 노래와 뒤섞이누나.            머리타래    오 목덜미까지 곱슬곱슬한 머리털!  오 곱슬한 머릿결! 오 게으름 가득한 향내여!  황홀함이여! 오늘 밤 이 어두운 규방을  그대 머리 속에 잠자는 추억으로 채우기 위해  손수건처럼 공중에 그대 머리칼을 흔들고 싶어라!    나른한 아시아, 타오르는 아프리카,  거의 사라져버린 이곳에 없는 아득한 전 세계가 고스란히  그대 깊은 곳에 살아 있구나, 향기로운 숲이여!  다른 사람들이 음악에 따라 노를 젓듯,  내 마음은, 오 사랑하는 님이여! 그대 내음 따라 헤엄친다.    나는 가련다, 저 곳으로, 생기 찬 나무와 남자가  작열하는 풍토 아래 오래도록 몽롱해 있는 곳,  거센 머리채여, 나를 데려갈 물결이 되어다오!  칠흑의 바다여, 그대는 눈부신 꿈을 품고 있다,  돛과 사공과 불꽃과 돛대의 꿈을 :    거기 우렁찬 항구에서 내 넋은 가득  들이마신다, 향기와 소리와 색깔을 ;  거기서 황금빛 물결 위로 미끄러지는 배들은  거대한 두 팔 벌려 껴안는다,  영원한 열기 흔들리는 순수 하늘의 영광을.    나는 담그련다, 도취를 갈망하는 내 머리를  다른 바다 숨기고 있는 이 검은머리 바다 속에 ;  그러면 애무 같은 배의 흔들림이 어루만지는  내 예민한 정신은 되찾으리,  향기로운 여가의 끝없는 자장가를, 오 풍요한 게으름이여!    펼쳐진 어둠의 정자 같은 푸른 머리여,  그대 내게 무한한 둥근 하늘의 푸름을 돌려주고,  비틀어 꼬여 내린 그대 머리타래의 솜털로 뒤덮인 기슭에서  나는 타는 듯이 취한다, 야자수 기름, 사향,  그리고 역청 뒤섞인 향기에.    오랫동안! 영원히! 내 손은 그대 묵직한 갈기 속에  루비와 진주와 사파이어를 뿌리리라,  내 욕망에 그대 귀를 절대 막지 않도록!  그대는 내가 꿈꾸는 오아시스, 또 추억의 술을  오래오래 들이마시는 표주박이 아니던가?            나 그대를 밤의 궁륭처럼 열렬히 사랑하오    나 그대를 밤의 궁륭처럼 열렬히 사랑하오,  오 슬픔의 꽃병이여, 오 말없는 키 큰 여인이여,  내 사랑은,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가 내게서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그리고 내 밤을 장식하는 그대가  비웃듯이, 푸른 무한으로부터 내 팔을 가르는 공간을  더욱 멀게 하면 멀게 할수록 그만큼 더 깊어만 가오    나는 공격을 위해 전진하고 돌격을 위해 기어오르오,  시체를 향해 달라붙는 구더기처럼,  그리고 무자비하고 매정한 짐승이여!  그대의 냉담함조차 귀여워하오, 그럴수록 내게는 더 아름답기에!            넌 전 우주를 네 규방에 끌어넣겠구나    넌 전 우주를 네 규방에 끌어넣겠구나,  더러운 계집이여! 권태로 네 넋은 잔인해지는구나.  그런 괴상한 놀이에 네 이빨을 단련시키자면,  날마다 염통 하나씩 네 이빨에 넣어주어야 하겠구나.  네 두 눈은 진열장처럼, 축제에 타오르는 등화대처럼  번뜩이며 빌려온 위력을 함부로 행사한다,  제 아름다움의 법칙 알지도 못하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눈멀고 귀먹은 기계여!  사람들 피를 빠는 유익한 연장이여,  어찌 너는 부끄럼을 모르는가, 그리고 어찌  네 매력이 퇴색하고 있음을 거울에 비춰보지 못하는가?  깊은 뜻을 감추고 있는 위대한 자연이  너를 가지고, 오 계집이여, 오 죄악의 여왕이여,  -천한 짐승 너를 가지고-하나의 전체를 빚어낼 때,  아무리 죄악에 능숙하다 자부하는 너라 해도,  그 엄청난 죄악에 질겁하여 뒷걸음질친 적은 없었던가?    오 더러운 위대함이여! 숭고한 치욕이여!            그러나 흡족하지 않았다    밤처럼 컴컴한 괴상한 여신이여,  사향과 하바나 향기 섞인 내음 풍기는  아프리카 마술사의 작품, 대초원의 파우스트,  흑단의 옆구리 가진 마녀, 캄캄한 한밤의 아이여,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콩스탕스 술, 아편, 그리고 밤의 술보다  사랑이 으스대는 네 입의 선약,  내 욕망이 너를 향해 떼지어 갈 때,  네 눈은 내 권태가 목을 축이는 물웅덩이.    네 넋의 창 같은 그 검은 커다란 두 눈으로,  오 잔인한 악마여! 내게 그토록 불꽃을 쏟지 말아라 ;  삼도내를 따라 흘러흘러 가도 너를 아홉 번이나 껴안을 수 없으니,    아 슬프구나! 방자한 메제르 여신이여,  네 용기를 꺾고 너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네 잠자리의 지옥에서 내가 프로세르핀이 될 수는 없구나!            물결치는 진줏빛 옷을 입고    물결치는 진줏빛 옷을 입고,  걸을 때도 그녀는 춤을 추는 듯,  신성한 요술쟁이의 막대기 끝에서  박자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기다란 뱀처럼.    인간의 고뇌에는 아랑곳 않는  사막의 우중충한 모래와 창공처럼,  바다 물결이 파도치며 얽히듯,  그녀는 무심코 몸을 펼친다.    반들반들한 두 눈은 매혹적인 광석,  그리고 야릇한 상징적인 그 천성 속에  순결한 천사를 고대 스핑크스에 섞어놓은 듯,    모든 것이 금과 강철, 빛과 금광석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차가운 위엄이  쓸모없는 별처럼 영원히 빛을 발한다.            춤추는 뱀    나는 보고 싶다, 태평한 님이여,  그토록 아름다운 그대 몸에서  하늘거리는 천처럼  살갗이 빛나는 것을!    짙은 그대 머리칼에서  풍기는 짭짤한 내음  푸른색과 갈색의 물결 위에서  넘실대는 냄새나는 바다,    거기 아침 바람에 잠깬  한 척의 배처럼,  내 꿈꾸는 넋은 떠날 준비를 한다,  어느 먼 하늘을 향해.    달콤함도 쓰라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대의 두 눈은  금과 쇳가루 섞인  차가운 두 알의 보석.    박자 맞추어 걸어가는 그대를 보면,  초연한 미인이여,  막대기 끝에서 춤추는  한 마리 뱀 같아.    게으름의 무게에 짓눌린  앳된 그대 머리는  흐물흐물 좌우로 흔들거린다,  코끼리 새끼처럼,    또 몸을 구부리고 드러누우면,  가느다란 배처럼  좌우로 흔들리다 물 속에  활대를 잠근다.    와르르 녹아내린 빙하로  불어난 물결처럼,  그대 이빨 가장자리에  침이 솟아오르면,    나는 씁쓸하고 기분 북돋우는  보헤미아의 술을 마시는 듯,  내 마음에 별들을 뿌려주는  흐르는 하늘을 마시는 듯!            시체    기억해보라, 님이여, 우리가 보았던 것을,  그토록 화창하고 아름답던 여름 아침 :  오솔길 모퉁이 조약돌 깔린 자리 위에  드러누워 있던 끔찍한 시체,    음탕한 계집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독기를 뿜어내며 불타오르고,  태평하고 파렴치하게, 썩은  냄새 가득 풍기는 배때기를 벌리고 있었다.    태양은 이 썩은 시체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알맞게 굽기라도 하려는 듯,  위대한 「자연」이 한데 합쳐놓은 것을  백 갑절로 모두 되돌려주려는 듯,    하늘은 이 눈부신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꽃이라도 바라보듯,  고양한 냄새 어찌나 지독하던지 당신은  풀 위에서 기절할 뻔했었지.  그 썩은 배때기 위로 파리떼는 윙윙거리고,  거기서 검은 구더기떼 기어나와,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살아 있는 누더기를 타고.    그 모든 것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밀려나갔다 하고,  그 모든 것이 반짝반짝 솟아나오고 있었다 ;  시체는 희미한 바람에 부풀어올라,  아직도 살아서 불어나는 듯했다.    그리고 세상은 기이한 음악 소리를 내고 있었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또는 장단 맞춰 까불리는 키 속에서  흔들리고 나뒹구는 곡식알처럼.    형상은 지워지고, 이제 한갓 사라진 꿈,  잊혀진 화포 위에  화가가 기억을 더듬어 완성하는  서서히 그려지는 하나의 소묘.    바위 뒤에서 초조한 암캐 한 마리  성난 눈으로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놓쳐버림 살점을 해골로부터  다시 뜯어낼 순간을 노리며.    -허나 언제인가는 당신도 닮게 되겠지,  이 오물, 이 지독한 부패물을,  내 눈의 별이여, 내 마음의 태양이여,  내 천사, 내 정열인 당신도!    그렇다! 당신도 그렇게 되겠지, 오 매력의 여왕이여,  종부성사 끝나고  당신도 만발한 꽃들과 풀 아래  해골 사이에서 곰팡이 슬 즈음이면.    그때엔, 오 나의 미녀여, 말하오,  당신을 핥으며 파먹을 구더기에게,  썩어문드러져도 내 사랑의 형태와 거룩한 본질을  내가 간직하고 있었다고!            심연에서 외친다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  나는 그대의 연민을 비오,  내가 빠져 있는 어두운 구렁의 밑바닥에서.  그곳은 납빛 지평선이 둘러싸고 있는 어두운 세상,  공포와 모독이 어둠 속에서 헤엄을 친다 ;    열기 없는 태양이 여섯 달 그 위에 뜨고,  나머지 여섯 달은 어둠이 땅을 덮어 ;  이곳은 극지보다 더한 불모의 세계,  -짐승도 없고, 냇물도, 풀밭도, 숲도 없는!    얼어붙은 태양의 차가운 냉혹함,  옛날 의 세계 같은 끝없는 이 어둠,  아, 이보다 더한 공포는 세상에도 없소.    미련한 잠에 빠질 수 있는  천한 짐승의 팔자가 나는 부럽소.  시간을 감는 실꾸리가 그토록 더디구려!            흡혈귀    슬픈 내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든 너 ;  악마의 무리처럼 억세고  화사하고 광기 서린 넌    창피 당한 내 정신으로  잠자리 삼고, 집을 삼는다 ;  -끔찍한 너에게 나는 얽매어 있다,  사슬에 매인 도형수처럼,    노름판을 못 떠나는 노름꾼처럼,  술병을 못 떼는 술꾼처럼,  구더기에 먹히는 시체처럼,  -저주받은, 저주받은 계집이여!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날쌘 칼에 빌기도 했고,  내 비겁함 도와달라고  더러운 독약에 하소연도 해보았다.    그런데, 아! 독약과 칼날은  나를 깔보며 이렇게 말했다 :  “넌 저주받은 노예 처지에서  구해줄 가치도 없다,    바보야! -설령 우리의 노력이  그녀의 지배에서 너를 구해준다 해도,  네 입맞춤은 네 흡혈귀의 시체를  되살려낼걸!”            끔찍한 유대 계집 곁에 있었던 어느 날 밤    어느 날 밤, 끔찍하게 생긴 유대 계집 곁에,  시체 곁에 또 하나의 시체 있듯이 나란히 누워,  그 돈에 팔린 몸뚱이 곁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 욕망이 포기한 저 서글픈 미녀를.    나는 눈앞에 그려보았다, 그녀의 타고난 위엄을,  힘과 우아함을 갖춘 그녀 시선을,  그녀 머리카락은 향내 나는 투구,  생각만 해도 사랑이 내게 되살아난다.    고상한 그대 몸에 열렬히 입맞추고,  싱싱한 그대 발끝에서부터 검은 머리칼까지  깊은 애무의 보물을 펼쳤으리,    만일 어느 날 저녁,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로 인해,  오 잔인한 계집들의 여왕이여! 그대  차가운 눈동자의 광채를 흐리게 할 수만 있다면.            사후의 회한    검은 미녀여, 새까만 대리석으로 만든  무덤 속 깊은 곳에 그대가 잠들어,  잠자리와 집이라곤 비에 젖은  땅속과 움푹 파인 구덩이뿐일 때 ;    무덤 돌이 그대 겁먹은 가슴 짓누르고  달콤한 나태에 젖은 그대 옆구리 짓눌러,  그대 심장 뛰지도 바라지도 못하게 하고,  두 발로 쾌락 찾아 뛰어다니지 못하게 할 때,    내 끝없는 몽상을 들어줄 무덤은  (무덤은 언제나 시인을 이해할 것이니)  잠 달아난 그 긴긴 밤 동안    그대에게 말하리 : “어설픈 유녀遊女여, 망령들이 한탄하는 까닭을  넌 알지 못했거니, 그게 이제 무슨 소용이랴?”  -그리고 구더기는 회한처럼 그대 살갗을 파먹으리.            고양이    오너라, 내 예쁜 나비야, 사랑에 빠진 내 가슴 위로 ;  발톱일랑 감추고,  금속과 마노 섞인 아름다운 네 눈 속에  나를 푹 잠기게 하렴.    내 손가락이 네 머리와 유연한 등을  한가로이 어루만지며  내 손이 전기 일으키는 네 몸을  만져보며 즐거움에 취해들 때,    나는 마음속에서 내 아내를 본다, 그녀 눈매는  사랑스런 짐승, 네 눈처럼  그윽하고 차가와 투창처럼 꿰뚫고,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미묘한 기운, 위험한 향기  그녀 갈색 몸 주위에 감돈다.            결투    두 전사가 마주 달려들었다 ; 그들의 무기는  불꽃과 피를 공중에 튀겼다.  이 놀이, 이 요란한 칼부림 소리는  신음하는 사랑의 포로가 된 젊음의 소동.    칼은 부러졌다! 우리의 젊음처럼,  님이여! 그러나 이빨과 날카로운 손톱이  이내 배신한 장검과 단검에 복수한다.  -오 사랑의 상처로 곪은 가슴의 분노여!    살쾡이와 표범이 넘나드는 골짜기에  우리 병사들은 짓궂게 맞붙어 뒹굴고,  그들의 살가죽은 메마른 가시덤불을 꽃피게 하리.    -이 심연, 그건 지옥, 우리 친구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 거기서 뒹굴자, 미련도 없이, 매정한 여장부여,  우리 증오의 뜨거운 불꽃 영원히 타오르게!            발코니    추억의 샘이여, 애인 중의 애인이여,  오 그대, 내 모든 기쁨! 오 그대, 내 모든 의무!  그대 회상해보오, 애무의 아름다움을,  난로의 다사로움, 저녁의 매혹을,  추억의 샘이여, 애인 중의 애인이여!    이글대는 숯불로 밝혀진 저녁,  발코니에 깃든 장밋빛 너울 자욱한 저녁.  아 다사로왔던 그대 가슴! 고왔던 그대 마음!  우린 자주 불멸의 것들을 얘기했었지,  이글대는 숯불로 밝혀진 저녁.    다사로운 저녁 태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공간은 얼마나 그윽한가! 마음은 굳건하고!  연인 중의 여황, 그대에게 몸 기대면,  그대의 피 냄새를 맡는 듯했지,  다사로운 저녁 태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밤은 칸막이 벽처럼 깊어만 갔고,  내 눈은 어둠 속에서 그대 눈동자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대 숨결을 마셨지, 오 그 달콤함! 오 그 독기여!  그대 발은 내 다정한 손 안에서 잠이 들었다.  밤은 칸막이 벽처럼 깊어만 갔고.    나는 알고 있다, 행복한 순간들 되살리는 법을,  그리고 나는 본다, 그대 무릎 속에 숨겨진 내 과거를,  따스한 그대 몸과 그토록 포근한 그대 마음 아닌 다른 곳에서  그대 번민하는 아름다움 찾아본들 무슨 소용이랴?  나는 알고 있다, 행복한 순간들 되살리는 법을!    그 맹세, 그 향기, 그 끝없는 입맞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서 다시 살아날 것인가,  깊은 바다 속에서 멱감고  다시 젊어진 태양이 하늘에 떠오르듯?  -오 맹세! 오 향기! 오 끝없는 입맞춤이여!            홀린 사내    태양은 검은 베일에 가려졌다. 그처럼,  오 내 생명의 달이여! 그대도 어둠으로 푹 둘러싸이렴 ;  네 멋대로 자고, 담배 피우고, 입 다물고, 우울한 채 있으려므나,  그리고 끝 모를 에 온통 잠기렴 ;    나 그처럼 그대를 사랑한다! 허나 오늘 그대가 원한다면,  어둠에서 벗어나는 가리어 있던 별처럼  이 법석대는 곳에서 으스대고 싶다면,  그것도 좋아! 매혹적인 단도여, 그대 칼집에서 나오렴!    샹들리에 불빛으로 그대 눈동자에 불을 밝혀라!  촌뜨기들 눈 속에 욕망의 불을 지피렴!  그대의 모든 것이 내게는 즐거움, 병적인 것도 발랄한 것도 ;    그대 원하는 대로 되렴, 검은 밤이든, 붉은 여명이든 ;  떨리는 내 온몸에서 이렇게 외치지 않는 세포 하나도 없으니,  오 내 사랑 마왕이여, 나 그대를 끝없이 사랑하오!            환영    1. 어둠  이 이미 나를 유배 보낸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굴 속 ;  장밋빛 즐거운 햇살 한 줄기 들지 않고 ;  침울한 여주인 과 홀로 사는    나는, 아! 조롱하는 의 강요로  어둠의 화포 위에 그림 그리는 화가라고나 할까 ;  거기서 나는 음산한 식욕 가진 요리사,  내가 내 심장을 끓여 먹는다.    거기 때로 아름답고 찬란한 유령 나타나  번쩍이며 몸을 뻗치고 펼쳐 보인다.  꿈꾸는 듯한 동양적인 자태로.    그녀 온전히 몸 드러내면,  나는 알아본다, 날 찾아온 미녀를 :  그것은 ! 어둡고 동시에 빛을 발하는 여인.    2. 향기  독자여, 그대는 취해 서서히 음미해가며  맡아보았는가,  성당 가득한 훈향을,  또는 주머니에 깊이 밴 사향 냄새를?    현재 속에 되살아난 과거가 우리를  취하게 한다, 깊고 마술 같은 매혹으로!  그처럼 애인도 사랑하는 육체에서  추억의 절묘한 꽃을 꺾는다.    살아 있는 향주머니, 규방의 향로,  그녀의 탄력 있고 묵직한 머리칼에서  야생의 사향 냄새 피어오르고,    순수한 젊음 흠뻑 밴  모슬린, 혹은 빌로드 옷에서  모피 냄새 풍겨나왔다.    3. 그림들  아무리 칭송받는 화가의 작품이라도,  무한한 자연에서 떼내어  아름다운 그림틀을 붙여야만, 뭔지 모를  신기하고 매혹적인 운치가 살아나듯이,    그처럼 보석과 가구, 금속과 금박은  보기 드문 그녀의 아름다움에 꼭 어울리었다 ;  아무것도 그녀의 완벽한 광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이 그녀에게 장식틀이 되어 보였다.    때로 그녀는 모든 것이 자신을  사랑하려 한다고 생각했을까,  관능에 젖어 제 알몸을    명주와 린네르 속옷의 입맞춤 속에 잠그고,  느리게 또는 갑자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원숭이 같은 앳된 교태를 보였다.    4. 초상화  과 은 모조리 재로 만든다.  우리를 위해 타오른 불길을  그처럼 뜨겁고 다정하던 그 커다란 눈,  내 가슴 적신 그 입술,    향유처럼 힘찬 그 입맞춤,  햇빛보다 더 뜨거운 그 격정,  그중 무엇이 남아 있는가? 오 두렵다, 내 넋이여!  남은 건 오직 퇴색한 삼색의 소묘 하나뿐,    그것도 나처럼 고독 속에 스러져가고,  몹쓸 늙은이 은  날마다 그 거친 말개로 문지른다……    과 의 검은 말살자여,  너는 내 기억 속에서 절대로 죽이지 못하리라,  내 기쁨, 내 영광이던 그 여인을!      그대에게 이 시구를 바치노라    그대에게 이 시구를 바치노라, 내 이름  다행히 먼 후세에 전해져  저녁 사람들을 꿈에 잠기게 한다면,  거친 북풍에 실려가는 배여,    그대 기억이 희미한 전설처럼,  팀파논처럼, 독자들 귀를 지치게 울리고,  우정 어린 신비한 사슬고리로  내 고고한 시편에 매달리듯 길이 남아 있도록 ;    저주받은 그대, 저 깊은 나락에서  높은 하늘까지 나말고 누가 대답해줄까!  -오 그대, 흔적 곧 지워지는 망령처럼,    그대를 가혹하다 여길 어리석은 인간들을  가벼운 발걸음과 싸늘한 시선으로 밟고 간다,  흑옥 같은 눈동자의 상像, 의연한 대천사여!            언제나 이대로    그대는 말했었지, “저 벌거벗은 검은 바위 위로 바닷물 치솟듯  그 야릇한 슬픔 어디서 당신에게 밀려오는가?” 라고.  -우리 마음이 일단 수확을 끝내고 나면,  산다는 것은 고통, 그건 누구나 다 아는 비밀.    그것은 극히 명백한 고통, 신비할 것도 없고,  그대 기쁨처럼 누구에게나 드러나는 것,  그러니 그만 묻지 마오, 오 캐기 좋아하는 미인이여!  그대 목소리 달콤해도 입을 다물어주오!    입을 다물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언제나 기쁨에 찬 여인이여!  천진한 웃음 짓는 입이여! 보다 이 더  그 정교한 줄로 우리를 자주 옭아맨다.    제발 내 마음 미망에 취해  아름다운 꿈에 파묻히듯 그대 눈 속에 파묻혀,  그대 눈썹 그늘 속에 오래 잠들게 해주오!            그녀는 고스란히    가 높은 내 방으로  오늘 아침 날 찾아와,  내 흠집 잡아내려 애쓰며,  하는 말이, “정말 알고 싶구나,    그녀의 매력 만들어주는  갖가지 아름다운 것 중에,  매혹적인 그녀의 몸을 이루는  검거나 붉은 것 중에,    무엇이 제일 좋은가?” -오 내 넋이여!  너는 이 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  “그녀 속에는 모든 것이 향기,  어느 것도 고를 수 없다.    모든 것이 나를 황홀케 하니, 나는 모른다,  무엇에 내가 끌리는지,  그녀는 처럼 눈부시고  처럼 위안을 준다 ;    또 그녀 아름다운 몸에 온통 감도는  조화 너무도 오묘하여,  그 숱한 화으믈 적어내기에는  서툰 분석으로 불가능하다.    오 신비한 변모여,  내 모든 감각이 하나로 녹아든다!  그녀 숨결은 음악이 되고  그녀 목소리는 향기를 풍긴다!”            오늘 저녁 무엇을 말하려는가    오늘 저녁 무엇을 말하려는가, 외로운 가엾은 넋이여,  무엇을 말하려나, 내 마음, 일찍 시든 마음이여,  더없이 아름답고 착하고 사랑스런 여인에게?  그 거룩한 눈길에 너는 갑자기 피어났었지.    -우리 자랑스레 그녀를 찬미하여 노래부르자 :  아무것도 그녀 위엄 속에 숨겨진 다정함만 못하다 ;  맑은 그녀 살결은 천사의 향기 지녀  그녀 눈동자는 우리에게 광명의 옷을 입힌다.    밤중이든 고독 속에서이든  거리에 있든 군중 속에 있든  그녀 환영은 공중에서 횃불처럼 춤춘다.    때로 그 환영 내게 말하기를 : “나는 아름답다, 나는 명하노니,  나에 대한 사랑을 위해 그대 오직 만을 사랑하라,  나의 그리고             살아 있는 횃불    빛 가득한 그 두 , 그들이 내 앞을 걸어간다,  박식한 에게서 아마 자력을 받았으리라 ;  그들은 걸어간다, 거룩한 형제들은, 내 형제들은,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그들 불꽃을 내 눈 속에 흔들면서.    온갖 함정, 온갖 중죄에서 날 구해,  그들은 의 길로 내 발걸음 이끌어준다 ;  그들은 내 하인, 나는 그들의 노예 ;  내 존재는 온통 이 살아 있는 횃불을 따른다.    매혹적인 두 이여, 너희는 한낮에 타오르는  촛불의 신비한 빛으로 빛난다 ; 햇빛이  붉게 비추어도 그 엄청난 불꽃은 끄지 못한다 ;    촛불은 을 기리고, 너희는 을 노래한다 ;  내 넋의 소생을 노래하며 걸어간다,  어떤 햇빛도 그 불꽃 사그라뜨리지 못할 별이여!            공덕    기쁨이 넘치는 여, 그대는 아는가 고뇌를,  수치심을, 회한을, 흐느낌을, 권태를,  그리고 종이 구기듯 가슴을 짓누르는  저 무서운 밤들의 막연한 공포를?  기쁨이 넘치는 여, 그대는 아는가 고뇌를    그지없이 착한 여, 그대는 아는가 증오를,  의 악마가 지옥의 나팔 불고  우리의 능력을 멋대로 지배할 때,  어둠 속에서 불끈 쥐는 주먹을, 원한의 눈물을?  그지없이 착한 여, 그대는 아는가 증오를?    건강이 넘치는 여, 그대는 아는가 을,  우중충한 양로원 높은 담을 따라  가느다란 햇볕 찾아 입술을 떨며,  유형자처럼 발을 질질 끌고 가는 사람들을?  건강이 넘치는 여, 그대는 아는가 을?    아름다움 넘치는 여, 그대는 아는가 주름살을,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그리고 우리의 탐욕스런 눈이  오래 세월 빠져 있던 두 눈 속에서 헌신을 꺼리는  숨은 낌새 읽어내는 그 무서운 고통을?  아름다움 넘치는 여, 그대는 아는가 주름살을?    행복과 기쁨과 빛이 넘치는 여,  죽어가는 왕이라면 매혹적인  그대 몸에서 발산되는 건강을 구했으리,  그러나 천사여, 그대에게 내가 구하는 것은 오직 그대 기도뿐,  행복과 기쁨과 빛이 넘치는 여!            고백    한 번, 단 한 번, 사랑스럽고 다정한 사람,  당신의 미끈한 팔이  내 팔에 기대었다 (내 넋의 어두운 밑바닥에서  이 추억은 바래지 않는다) ;    늦은 밤이었다 ; 새 메달처럼 보름달은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엄숙한 밤은 잠든 파리 위로 강물처럼  흥건히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집들을 따라 대문 아래로  고양이들은 살금살금 빠져나와,  귀를 쫑긋 세우고, 또는 정다운 그림자처럼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문득 창백한 달빛 아래 피어난  거리낌없는 친밀감 속에서  쾌활한 소리만 울리는 소리나는  풍요한 악기, 당신의 입에서    빛나는 아침 화려한 군악 소리 울리듯,  밝고 즐거운 당신 입에서  흐느끼는 가락, 기이한 가락이  비틀거리며 새어나왔다.    가족들조차 부끄러워 사람들 눈을 피해  남몰래 오랫동안 굴 속에  숨겨두었던 허약하고, 흉측하고, 어둡고,  불결한 계집애처럼.    가엾은 천사여, 당신은 목청껏 노래불렀다 :  “이승에는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고  아무리 애써 꾸며본들 언제나  사람의 이기심은 드러나는 법 ;    미인 역을 하기도 고된 일,  그것은 억지 웃음 지으며  흥겨워하는 경박하고 쌀쌀한 무희가 부리는  진부한 재주 같은 것 ;    사람들 마음 위에 집을 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 ;  사랑도 아름다움도 모두 부서져버린다,  마침내 이 에게 되돌려주려고 채롱 속에  그것을 던져줄 때까지는!”    나는 때로 회상했다, 그 황홀한 달을,  그 적막, 그 번민을,  그리고 가슴속 고해실에서 속삭인  그 무서운 고백을.            영혼의 새벽    방탕아의 방에 희뿌연 새벽이  마음을 괴롭히는 과 함께 비쳐들면,  신비한 응징자에 휘둘려  졸던 짐승 속에서 천사가 깨어난다.    다가갈 수 없는 은  아직 꿈속에서 고통받는 기진한 사나이 앞에  심연의 매혹으로 열리며 파고든다.  이처럼, 다정한 이여, 맑고 순수한 이여,    어리석은 향연의 연기 나는 잔해 위로  한결 또렷한 당신의 매혹적인 장밋빛 추억은  크게 뜬 내 두 눈 앞에 쉴새없이 나풀거린다.    햇빛은 이제 촛불을 흐려놓았다 ;  이처럼 언제나 승리에 찬 그대 모습은,  찬란한 넋이여, 불멸의 태양을 닮았구려!            저녁의 조화    이제 바야흐로 줄기 위에 떨며  꽃송이 하나하나 향로처럼 향기를 뿜고 ;  소리와 향기 저녁 하늘 속에 감돈다 ;  우울한 왈츠, 나른한 어지러움!    꽃송이 하나하나 향로처럼 향기를 뿜고 ;  바이올린은 상처받은 마음인 양 떤다 ;  우울한 왈츠, 나른한 어지러움!  하늘은 큰 제단처럼 슬프고 아름답다    바이올린은 상처받은 마음인 양 떨고,  어둡고 끝없는 허무를 미워하는 애틋한 이 마음!  하늘은 큰 제단처럼 슬프고 아름답고 ;  태양은 얼어붙은 제 피 속에 빠진다.    어둡고 끝없는 허무를 미워하는 애틋한 이 마음,  빛나는 과거의 온갖 흔적을 긁어모은다!  태양은 얼어붙은 제 피 속에 빠지고……  당신의 추억은 내 맘속에 성체합처럼 빛난다!            향수병    어떤 물질이라도 뚫고 스며나오는 강한  향기가 있다, 그것은 유리라도 뚫으리라.  에서 건너온 작은 함, 오만상 찌푸리고  삐걱거리는 자물쇠 열면,    또는 버려둔 집에서 세월의 지독한 냄새 가득 밴  먼지 수북한 더러운 옷장 열면,  더러 옛 추억 간직한 오래된 향수병 눈에 띄는데,  되돌아온 넋 거기서 생생하게 떠오른다.    서글픈 번데기처럼 온갖 생각들 거기 잠들어,  무거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떨고 있다가,  날개 펴고 힘껏 날아오른다,  창공의 빛으로 물들고 장밋빛으로 칠해지고 금박으로 장식되어.    이제 취한 추억이 흐린 대기 속에서  나폴거린다, 눈을 감는다 ; 이  쓰러진 넋을 쥐어 잡고 두 손으로 밀어낸다,  인간의 악취로 어두어진 구렁 쪽으로 ;    그리고 천 년 된 깊은 구렁 가로 넘어뜨린다,  거기서 제 수의 찢는 냄새나는 나사로처럼,  썩고 매혹적이고 음산한 옛사랑의  유령 같은 송장이 잠깨어 꿈틀거린다.    그처럼 나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해묵은 향수병처럼 늙고, 먼지가 끼고, 더럽고,  천하고, 끈적거리고, 금이 가  음산한 옷장 구속에 내던져졌을 때,    나는 네 관이 되리, 사랑스런 악취여!  네 힘과 독기의 증인이 되리,  천사가 마련해준 사랑하는 독약이여! 나를  좀먹는 액체, 오 내 마음의 이자 이여!            독    술은 아무리 누추한 오두막이라 해도  기적같이 호화롭게 옷 입히고,  붉은 안개의 금빛 속에 한둘 아닌  동화 같은 회랑을 솟아나게 한다,  흐린 하늘에 노을지는 태양처럼.    아편을 끝없는 것을 더욱 넓히고,  무한을 더욱 늘이며,  시간을 키우고 쾌락을 더욱 파고들어,  우울하고 서글픈 쾌락으로  내 넋을 채운다, 넘치도록 가득.    그러나 그 모든 것도 그대 눈에서 흘러내리는  독만 못하다, 그대 초록색 눈,  내 넋이 떨며 거꾸로 비춰보는 호수……  내 꿈 떼지어 가  그 호수의 쓰디쓴 심연에서 갈증을 푼다.    그 모든 것도 나를 깨무는 그대 침의  무서운 위력만 못하다, 그대 침은  내 넋을 후회 없이 망각 속에 잠그고,  현기증을 실어,  죽음을 강가로 내 쇠잔한 넋을 굴리어 간다!            흐린 하늘    당신의 시선은 안개로 덮인 듯 ;  신비한 당신 눈은(푸른빛일까, 잿빛일까, 아니면 초록빛일까?)  다정하다가는 꿈꾸는 듯하고, 그러다가 매정해지며,  무심하고 파리한 하늘을 비추고 있다.    당신은 생각나게 한다. 저 따스하고 안개 낀 하얀 날들을,  홀린 마음을 눈물로 녹이는 날들을,  가슴을 쥐어짜는 알 수 없는 아픔에 흔들려  너무 곤두선 신경이 잠자는 정신을 비웃을 때에.    때로 당신은 안개 자욱한 계절,  태양이 비춰주는 저 아름다운 지평선 같다……  안개 낀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살이 불태우는  젖은 풍경처럼 당신은 얼마나 찬란한가!    오 위험한 여인이여, 오 매혹적인 기후여!  나는 또한 당신의 눈雪과 서리마저 사랑하여,  얼음보다 칼보다 더 날카로운 쾌락을  혹독한 겨울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고양이    1  내 머리 속을 걸어다닌다, 예쁜 고양이  제 방안 거닐 듯,  힘세고 온순하고 매혹적인 잘 생긴 고양이,  야웅 하고 우는 소리 들릴까말까,    그토록 그 울림 부드럽고 은근하지만 ;  차분할 때나 으르릉거릴 때나  그 목소리 언제나 풍요하고 그윽하다.  바로 그게 그의 매력, 그의 비밀.    내 마음 가장 어두운 맡바닥까지  구슬처럼 스미는 그 목소리,  조화로운 시구처럼 나를 채우고,  미약처럼 나를 즐겁게 한다.    그 목소리는 지독한 고통도 가라앉히고  갖가지 황홀을 간직하고 있어 ;  긴긴 사연을 말할 때도  한마디의 말도 필요가 없다.    그렇다, 이 완벽한 악기, 내 마음 파고들어,  이보다 더 완전하게  내 마음으 가장 잘 울리는 줄을  노래하게 할 활이 이밖에 없다,    네 목소리밖엔, 신비한 고양이여,  천사 같은 고양이, 신기한 고양이여,  네 속에선, 천사처럼,  모든 것이 미묘하고 조화롭구나!    2  금빛과 갈색이 섞인 그의 털에서  풍기는 냄새 그토록 달콤해,  어느 날 저녁 한 번, 꼭 한 번  어루만졌는데, 그 냄새 내 몸에 배어들었다.    이거야말로 이곳을 지켜주는 수호신 ;  제 왕국에 있는 모든 것을  판결하고 다스리고 영감을 준다 ;  그것은 요정일까, 신일까?    사랑하는 내 고양이 쪽으로  자석에 끌리듯 끌린 내 눈이,  순순히 내 몸으로 돌아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나는 그만 깜짝 놀란다,  창백한 눈동자의 빛나는 불,  밝은 신호등, 살아 있는 오팔,  지그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눈.            아름다운 배    네게 들려주고 싶다, 오 나른한 매혹의 여인아!  네 젊음을 꾸며주는 갖가지 아름다움을 ;  어린 티와 성숙함이 한데 어우러진  네 아름다움 네게 그려보이고 싶다    네 폭넓은 치맛자락 펄럭이며 갈 때,  넌 흡사 난바다로 떠나는 아름다운 배,  돛 달고 떠간다,  감미롭고 나른하고 느린 리듬을 타고.    포동포동 굵은 목, 통통한 어깨 위에서  네 머리는 야릇한 매혹 풍기며 건들거린다 ;  조용조용,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위풍당당한 아이, 너는 네 길을 간다.    네게 들려주고 싶다, 오 나른한 매혹이여!  네 젊음을 꾸며주는 갖가지 아름다움을 ;  어린 티와 성숙함이 한데 어우러진  네 아름다움 네게 그려보이고 싶다.    물결무늬 옷을 밀고 불쑥 내민 네 젖가슴,  당당한 네 젖가슴은 아름다운 찬장,  볼록하고 환한 그 널판은  방패처럼 번갯불을 맞부딪는다.    장밋빛 젖꼭지로 무장한 도전적인 방패여!  달콤한 비밀을 감춘 찬장, 술, 향료, 음료,  갖가지 맛좋은 것 가득 차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 열광시킬 찬장이여!    네 폭넓은 치맛바람에 펄럭이며 갈 때,  넌 흡사 난바다로 떠나는 아름다운 배,  돛 달고 떠간다,  감미롭고 나른하고 느린 리듬을 타고    당당한 네 다리는 밀어내는 치맛자락 밑에서  컴컴한 욕정 돋우고 부추긴다,  깊숙한 단지 속에 검은 미약을  휘젓는 두 마녀처럼.    어린 장사는 우습게 알 만도 한 네 팔은  번득이는 왕뱀의 강한 적수,  가슴에 애인의 모습을 새기려는 듯,  단단하게 껴안도록 만들어진 것.    포동포동 굵은 목, 통통한 어깨 위에서  네 머리는 야릇한 매혹 풍기며 건들거린다 ;  조용조용,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위풍당당한 아이, 너는 네 길을 간다.            여행에의 초대    아이야, 누이야,  꿈꾸어보렴  거기 가서 함께 살 감미로움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으리,  그대 닮은 그 고장에서!  그곳 흐린 하늘에  젖은 태양이  내 마음엔 그토록 신비로운  매력을 지녀,  눈을 통해 반짝이는  변덕스런 그대 눈 같아.    거기엔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와 고요, 그리고 쾌락뿐.    세월에 닦여  반들거리는 가구가  우리 방을 장식하리 :  진귀한 꽃들  향긋한 냄새,  용연향의 어렴풋한 냄새와 어울리고,  호화로운 천장,  깊은 거울,  동양의 찬란함,  모든 것이 거기선  넋에 은밀히  정다운 제 고장 말 들려주리.    거기엔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와 고요, 그리고 쾌락뿐.    보라, 저 운하 위에  잠자는 배들을,  떠도는 것이 그들의 기질 :  그대의 아무리 사소한 욕망도  가득 채우기 위해  그들은 세상 끝으로부터 온다.  -저무는 태양은  옷 입힌다, 들과  운하와 도시를 온통  보랏빛과 금빛으로 ;  세상은 잠든다,  뜨거운 빛 속에서.  거기엔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와 고요, 그리고 쾌락뿐.            돌이킬 수 없는 일    저 오래된 지겨운 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까?  그것은 살아 움직이고 꿈틀대며  우리를 먹으며 살아간다, 송장 파먹는 구더기처럼,  떡갈나무의 송충이처럼.  저 끈덕진 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까?    무슨 미약, 무슨 술, 무슨 탕약으로  이 오래된 원수 달랠 수 있을까?  창녀처럼 욕심 많고 우리 몸 파괴하고  개미처럼 끈덕진 이 원수를  무슨 미약, 무슨 술, 무슨 탕약으로?    말하오, 아름다운 마녀여, 오! 그대 알거든 말하오,  부상병이 짓밟고  말발굽이 짓이긴 죽어가는 병사처럼  고통에 허덕이는 이 마음에게  말하오, 아름다운 마녀여, 오! 그대 알거든 말하오.    늑대가 이미 냄새를 맡고  까마귀가 감시하는 이 빈사자에게  말하오, 기진한 이 병사에게! 십자가도 무덤도 없이  이대로 절망해야 하는지를 ;  늑대가 이미 냄새를 맡은 이 가엾은 빈사자에게!    진흙처럼 컴컴한 하늘을 가치 밝힐 수 있을까?  아침도 없고 저녁도 없고,  별도, 음산한 번개도 없이 송진보다 더 짙은  저 어둠을 찢어버릴 수 있을까?  진흙처럼 컴컴한 하늘을 가히 밝힐 수 있을까?    유리창에 반짝이는 의 불은  숨이 끊겨 영원히 꺼져버렸다!  달도 불빛도 없이 험한 길 찾는 순교자는  어디서 묵을 곳을 찾아내랴!  유리창 불을 가 모두 꺼버렸으니!    귀여운 마녀여, 그대는 천벌받은 자를 사랑하는가?  말하라, 용서받지 못할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우리 심장을 독살로 겨누고 있는  저 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귀여운 마녀여, 그대는 천벌받은 자를 사랑하는가?    은 고약한 이빨로 쏠아먹는다,  가여운 기념비 우리의 넋을  그리고 자주, 흰개미처럼, 먹어 들어간다,  건물의 기반에서부터  은 고약한 이빨로 쏠아먹는다!    -나는 언젠가 보았다, 어느 신통치 않은 극장 안에서  오케스트라 우렁차게 울려퍼질 때,  선녀 하나 나타나 지옥처럼 캄캄한 하늘에  신기한 새벽의 불을 켜는 것을 ;  나는 언젠가 보았다, 어느 신통치 않은 극장에서    빛과 금과 망사로만 싸인 사람 하나  거대한 를 때렵눕히는 것을 ;  그러나 한번도 황홀이라곤 찾아온 적 없는 내 가슴은  헛되이 기다리는 극장,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망사 날개 돋친 그 을!              정담    그대는 맑은 장밋빛 아름다운 가을 하늘!  그러나 슬픔은 바닷물처럼 내게 밀려와,  썰물 때는 실쭉한 내 입술에  씁쓸한 진흙 같은 쓰라린 추억을 남긴다    -허탈한 내 가슴 그대의 손이 쓸어주어도 헛일 ;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손이 찾는 건 이미  여자의 잔혹한 이빨과 손톱으로 헐린 곳,  내 가슴 찾지 마오, 짐승들이 이미 먹어치웠으니.    내 가슴은 군중들에게 짓밟혀 망가진 궁전 ;  사람들 거기서 술 취하고 서로 죽이고 머리채 낚아챈다!  -어떤 향기 감돈다, 당신의 벌거벗은 앞가슴 주위에서! ……    오 이요, 넋에 가하는 가혹한 벌이여, 그대는 그것을 원하겠지!  축제처럼 환히 빛나는 불 같은 그대 눈으로  모조리 태워버려라, 짐승들이 먹다 남긴 이 찌꺼기 조각들!            가을의 노래    1  머지않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  안녕,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찬란한 빛이여!  내겐 벌써 들린다, 음산한 소리 울리며  안마당 돌바닥 위에 떨어지는 장작 소리.    분노, 미움, 떨림과 두려움, 그리고 강요된 고역,  이 모든 겨울이 이제 내 존재 속에 들어오면,  내 가슴은 지옥 같은 극지의 태양처럼  얼어붙은 붉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리.    나는 듣는다, 몸을 떨며, 장작개비 떨어지는 소리 하나하나 ;  교수대 세우는 소리도 이보다 더 음산하지 않으리.  내 정신은 지칠 줄 모르고 쳐대는 육중한 망치질에  허물어지고 마는 탑과도 같아.    이 단조로운 울림 소리에 흔들려  나는 어디선가 급히 관에 못박히는 소리 듣는 것 같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어제만 해도 여름, 그러나 이제 가을!  저 신비한 소리는 출발을 알리는 신호처럼 울린다.    2  사랑하오, 그대 갸름한 눈에 감도는 푸르스름한 빛을,  다정한 미녀여,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씁쓸하오,  그 무엇도, 당신의 사랑도, 규방도, 난롯불도  내겐 바다 위에 빛나는 태양만 못하오.    그러나 사랑해주오, 다정한 님이여! 어머니가 되어주오,  은혜 모르는 사람, 심술궂은 사람일지라도 ;  애인이여, 또는 누이인 님이여, 찬란한 가을의,  아니면 지는 태양의 짧은 감미로움이나마 되어주오.    그것은 잠시 동안의 노고! 무덤은 기다린다, 굶주린 무덤음!  아! 제발 내 이마 그대 무릎에 파묻고,  작열하던 하얀 여름을 아쉬워하며,  만추의 노란 다사로운 빛을 맛보게 해주오!              어느 마돈나에게    -스페인 취향의 봉헌물    내 사랑 여, 나 그대 위해 세우리,  내 슬픔 깊은 곳에 지하의 제단을,  그리고 내 마음 가장 어두운 구석에,  속세의 욕망과 조롱하는 시선에서 멀리  하늘빛과 금빛으로 온통 칠해진 둥지를 파고  그곳에 눈부신 그대의 을 세우리.  수정의 운韻으로 정성 들여 뒤덮은  순금의 그물, 다듬은 내 로  그대 머리 위에 커다란 왕관을 만들어주리 ;  그리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여, 내 로  그대에게 외투를 재단해주리라, 의심으로 안감을 넣고  딱딱하고 묵직하고 야만스럽게,  초소처럼 그대 매력을 거기에 가두리라 ;  아닌 내 모두 모아 수를 놓아서!  그대의 은 떨며 물결치는 나의 ,  봉우리에서 흔들거리고 계곡에서 휴식하며  장밋빛 하얀 그대 온몸을 입맞춤으로 덮으리,  내 으로 신성한 그대 발밑에 밟힐  고운 비단 그대에게 만들어주리,  그것은 푹신하게 그대 발 조여주고,  정확한 거푸집처럼 그대의 발 모양을 간직하리라,  만일 내 정성 어린 온갖 기술에도  그대의 위해 은빛 을 새기지 못한다면,  내 창자 물어뜯을 을 그대 짓밟고 비웃도록  그대 발꿈치 아래 갖다놓으리,  속죄로 넘치는 승리의 여왕이여,  증오와 침으로 뒤덮인 이 괴물을.  그대는 보리라, 나의 모든 이 꽃으로 뒤덮인  의 제단 앞에 늘어선 처럼,  파랗게 칠한 천장을 별 모양으로 비추면서  불타는 눈으로 언제나 그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  그리고 내 모든 것 다해 그대를 사랑하고 숭배하기에,  모든 것이 과 , 그리고 과 이되니,  백설이 덮인 봉우리, 그대를 향해  끊임없이 폭풍우 실은 은 되어 올라가리.    마침내 그대 의 역할을 완수하고,  또 사랑을 잔인함으로 뒤섞기 위해,  오 어두운 쾌락이여! 한 많은 사형집행관 나는  일곱 가지 로  일곱 자루 날이 잘 선 을 만들어  가차없는 요술쟁이처럼 그대 사랑 깊은 곳을 과녁 삼아  팔딱이는 그대 에 모두 꽂으리라,  흐느끼는 그대 에, 피 흐르는 그대 에!            오후의 노래    짓궂은 네 눈썹이  기이하게 보이지만  천사 같지는 않다,  매혹적인 눈을 가진 마녀여,    오 변덕스런 여인이여,  내 끔찍한 정열이여!  우상 섬기는 제관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난 너를 열렬히 사랑한다.    사막과 숲의 향기가  뻣뻣한 네 머리채에 풍기고,  네 머리는 비밀과  수수께끼 같은 모습.    향로 주위처럼  네 살결엔 향기 감돌고 ;  저녁처럼 사람을 홀리누나,  어둡고 뜨거운 요정이여.    아! 제아무리 강한 미약도  네 나태함과 견줄 수 없으리,  넌 죽은 자 되살려내는  애무를 알고 있다!    네 날씬한 허리는  등과 젖가슴을 원하는 듯하고,  나른한 네 자태는  방석마저 반하게 하누나.    때때로 알 수 없는 네 광란을  잠재우기 위해  넌 진지하게 아낌없이  깨물음과 입맞춤을 퍼붓는다.    갈색머리 여인이여,  넌 쌀쌀한 비웃음으로 내 마음 찢어놓고,  달빛 같은 다정한 시선을  내 가슴에 던지는구나.    네 비단 구두 밑에  네 귀여운 명주 발 아래,  나는 놓으리라, 내 큰 기쁨을,  내 재능과 내 운명을.    빛이며 색채인 너,  너로 인해 치유된 내 넋을!  어두운 내 마음의 시베리아 벌판에  폭발하는 정열이여!            시지나    상상해보라, 근사한 차림을 한 가  숲을 가로지르고 가시덤불 헤치고 가는 모습을,  머리칼과 가슴은 바람에 맡기고 몰이꾼의 환성에 취한  그 늠름함, 최상의 기사들도 무색하리!    당신은 보았는가, 살육을 즐기는 테루아뉴를,  맨발의 민중을 선동해 돌격하게 하고,  뺨과 눈은 불타오르고, 제 맡은 역도 충실하게,  주먹에 검을 쥐고 궁궐의 계단을 오르는 그녀를?    시지나 또한 그런 모습이다! 허나 다정한 이 여장부는  살육을 즐기는 만큼 따뜻한 마음도 지녀 ;  그녀의 용맹은 화약과 북소리에 끓어올라도    애원하는 자 앞에서는 무기를 내려놓을 줄 알고,  정열의 불꽃이 휩쓴 그녀 가슴은  그럴만한 사람에겐 언제나 눈물의 저수지 같다.              나의 프란시스카를 찬양하도다    새 현악기로 그대를 노래하리,  오 고독한 내 마음속에  즐겁게 하늘대는 어린 나무여.    그대 꽃다발을 몸에 감으렴,  온갖 죄악 씻어주는  사랑스런 여인이여!    축복받은 처럼  자력 감도는  그대의 입맞춤으로 목마름을 끄리라.    궂은 정열의 폭풍이  모든 길 위로 휘몰아칠 때,  그대는 나타났다, 여신이여,    고통스런 파선을 당했을 때  발견한 구원의 별처럼……  이 마음 그대 제단에 바치리!    덕으로 넘치는 연못이여,  영원한 청춘의 샘이여,  다문 입술 열어주렴!    그대는 추한 것을 불사르고  거친 것은 고르고  약한 것은 굳히었다!    굶주릴 땐 나의 안식처,  어둠 속에선 나의 등불,  항상 바른 길로 이끌어다오.    내게 힘을 북돋워다오  향긋한 향기 풍기는  다사로운 목욕이여!    내 허리 둘레에서 빛나라,  오 성수에 적신  순수한 갑옷이여.    보석 박힌 잔,  짭짤한 빵, 맛좋은 음식,  오 신의 술, 프란시스카여!            식민지 태생의 한 백인 부인에게    태양이 애무하는 향기로운 나라에서  나는 만났다, 게으름이 비오듯이 사람들 눈 위로 내리는  종려나무와 새빨갛게 물든 나무 그늘 아래서  알려지지 않은 매력 지닌 식민지 태생의 한 백인 부인을.    얼굴 빛은 연하고 따뜻한 이 매혹적인 갈색의 여인,  목은 고상하게 교태부린 모습이고 ;  걸을 땐 사냥꾼처럼 훤칠하게 날씬하다,  미소 짓는 모습 잔잔하고 눈빛은 자신만만하다.    부인, 당신이 만일 진정한 영광의 나라,  센 강변이나 루아르 강변에 간다면,  고풍스런 저택에 알맞은 이여,    당신은 그늘진 은신처에 깊숙이 들어앉아  그 커다란 두 눈으로 시인을 검둥이들보다 더 온순하게 만들고,  시인의 가슴속에 수많은 소네트를 싹트게 하리.              슬프고 방황하여  말해봐요, 아가트여, 그대 마음 때때로 날아가는지,  이 더러운 도시의 검은 대양에서 멀리 떠나,  처녀성처럼 푸르고 맑고 또 깊은  찬란하게 빛나는 또 하나의 대양을 향해!  말해봐요, 아가트여, 그대 마음 때때로 날아가는지?    바다, 망막한 바다는 우리네 노고를 달랜다!  요란한 바람의 거대한 풍금에 맞추어  노래하는 쉰 목소리의 여가수 바다에게 어떤 악마가  자장가라는 숭고한 재주를 부여했는가?  바다, 망막한 바다는 우리네 노고를 달랜다!    날 실어가렴, 수레여! 날 데려가렴, 돛단배여!  멀리! 멀리! 여긴 우리 눈물로 만들어진 진창!  -진정 아가트의 슬픈 마음이 때때로 외치는가?  “뉘우침과 죄악과 고통에서 멀리  날 실어가렴, 수레여! 날 데려가렴 돛단배여!“ 라고    향기로운 낙원이여, 넌 멀기도 하다.  맑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사랑과 기쁨뿐인 그곳,  거기선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고,  순수한 쾌락 속에 마음이 잠기는 곳!  향기로운 낙원이여, 넌 멀기도 하다!    그러나 앳된 사랑의 푸른 낙원은,  달음박질과 노래와 입맞춤과 꽃다발은,  저녁이면 숲속에서 술잔과 함께  언덕 저쪽에서 떨며 울리는 바이올린은,  -그러나 앳된 사랑의 푸른 낙원은,    은밀한 기쁨 가득한 순결한 낙원은,  이미 인도나 중국보다 더 멀어졌는가?  흐느끼는 부르짖음으로 그걸 되불러와  은방울 같은 목소리로 되살릴 수는 없는가,  은밀한 기쁨 가득한 순결한 낙원을?            유령    야수의 눈을 가진 천사들처럼  나는 그대 규방으로 되돌아와  밤의 어둠을 타고  소리 없이 그대를 향해 스며들어가리,    그리고 갈색머리의 여인이여, 그대에게 주리,  달빛처럼 차가운 입맞춤을,  웅덩이 주변을 기어다니는  뱀의 애무를.    희뿌연 아침이 오면,  그대는 보게 되리, 내 자리 빈 것을,  그곳은 저녀까지 싸늘하리.    남들이 애정으로 그러하듯,  나는 공포로 군림하고 싶어라,  그대의 생명과 그대 젊음 위에.            가을의 소네트    수정처럼 맑은 그대의 눈이 내게 묻기를 :  “야릇한 님이여, 당신에게 내가 무슨 매력 있나요?”  -그저 귀엽게 입 다물고 있어다오! 내 마음은,  태곳적 짐승의 순박함 빼놓고는 모든 것이 성나게 하는 내 마음은,    그대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내 마음의 끔찍한 비밀을,  또 불꽃으로 씌어진 그 슬픈 전설도,  부드러운 손으로 날 흔들어 오래오래 잠들게 하는 요람이여,  나는 정열을 증오하고, 정신은 날 아프게 한다!    우린 그저 조용히 사랑하자구나, 이  제 집에 몰래 숨어 운며의 활을 당긴다,  그 낡은 무기고 속의 무기를 난 알고 있다 :    죄악, 공포, 광기를! -오 파리한 데이지꽃이여!  그대 또한 나처럼 가을의 태양이 아니던가?  오 그토록 새하얀, 그토록 차가운 나의 데이지꽃이여!            달의 슬픔    오늘 밤 달은 더욱 느긋하게 꿈에 잠긴다 ;  겹겹이 쌓아놓은 보료 위에서 잠들기 전에  가벼운 손길로 무심히 제 젖가슴 주변을  어루만지는 미인처럼,    부드러운 눈사태 같은 비단결에 등을 기대고,  죽어가듯 오랫동안 멍하게 몸을 맡긴 채  창공을 향해 피어오르는  하얀 허깨비들을 둘러본다.    때때로 한가로운 나태함에 지쳐,  남 몰래 이 지구 위로 눈물 흘려보내면,  잠과는 원수인 경건한 시인은    이 파리한 달의 눈물 손바닥에 옴폭 받아,  오팔 조각처럼 무지갯빛 아롱진 이 눈물을  태양의 눈이 못 미치는 먼 곳 가슴속에 간직한다.            고양이들    열렬한 애인들도 근엄한 학자들도  중년이 되면 하나같이 좋아한다,  집안의 자랑거리, 힘세고 다정한 고양이들을,  그들처럼 추위타며 움직이기 싫어하는 고양이들을.    학문과 쾌락의 친구 고양이들은  어둠의 정적과 공포를 찾아다닌다 ;  는 그것들을 상여말로 부렸겠지,  그것들이 자존심 굽히고 시중을 들 수만 있다면.    생각에 잠겨 의젓한 자태를 취할 때는  깊은 고독 속에 누워 있는 거대한 스핑크스를 닮아,  끝없는 꿈속에 잠들어 있는 듯 ;    풍만한 허리에는 마법의 불꽃 가득해,  고운 모래알 같은 금 조각들이  그 신비한 눈동자에 어렴풋이 별을 뿌린다.            올빼미들    검은 주목나무 아래 몸을 숨기고,  올빼미들이 줄지어 앉아서,  이방의 신들처럼 붉은 눈으로  쏘아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    비낀 태양 밀어내고  어둠이 깔릴  저 우수의 시간까지  꼼짝 않고 저렇게들 있으리라.    저들의 몸가짐이 현자를 가르치리,  이 세상에서 두려운 것은  법석과 움직임이라고,    지나가는 그림자에 취한 사람은  자리를 옮기고 싶어한 것에 대해  언제고 벌을 받는다고.              파이프    나는 어느 작가의 파이프지요 ;  아비시니아나 카프라리아 여자 같이  새까만 내 얼굴 유심히 들여다보면 알게 되죠,  우리 주인님이 굉장한 골초란 걸.    주인님이 괴로움에 잔뜩 휩싸일 때면,  나는 마구 연기를 뿜어대죠,  일터에서 돌아오는 농부 위해  저녁 준비하는 초가집처럼.    불붙은 내 입에서 솟아오르는  움직이는 파란 그물 속에다  그의 넋을 얼싸안고 달래주지요.    그리고 강한 향기 마구 감돌게 하여  그의 마음 홀리고  지친 그의 머리 식혀주죠.              음악    음악은 흔히 나를 바다처럼 사로잡는다!  창백한 내 별을 향해,  안개의 지붕 아래, 또는 망막한 창공 아래  나는 돛을 올린다 ;    돛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허파는 부풀어,  나는 기어오른다, 밤이 내게 가려준  겹겹 물결의 등을 ;    나는 느낀다, 요동치는 배의 온갖 격정이  내 안에서 진동함을 ;  순풍과 태풍, 그리고 그 진동이    끝없는 심연 위에서  나를 어른다, 때로는 평온하고 잔잔한 바다,  그것은 내 절망의 커다란 거울!            무덤    어느 어둡고 갑갑한 밤에  한 착한 기독교인이 자비심으로  어느 오래된 폐허 뒤에  으스대던 그대 몸 묻어준다면,    청초한 별들이  무거워진 눈꺼풀 감고,  거미가 그곳에 줄을 치고,  독사가 새끼 칠 시각    일년 내내 그대는 듣게 되리,  벌받은 그대 머리 위에서  늑대들 구슬픈 울음 소리,    그리고 굶주린 마녀들 울부짖음을,  음탕한 늙은이들 희롱도,  음흉한 야바위꾼들의 음모도.            환상적인 판화    이 별난 유령, 걸친 것이라곤  해골 이마 위에 괴기하게 올려놓은  사육제 냄새 나는 끔찍한 왕관 하나.  그는 박차도 채찍도 없이 말을 숨가쁘게 휘몰아간다,  이 황량한 늙다리 말도 그처럼 하나의 귀신,  간질병 걸린 듯이 콧구멍에서 거품을 내뿜는다.  그것들은 둘 다 허공을 가로질러 질주하며,  무모한 발굽으로 무한한 공간을 짓밟는다.  기사는 그의 말이 짓뭉개는 이름 없는 궁중 위로  번득이는 칼을 휘두르며 두루 돌아다닌다,  제 궁궐 검열하는 왕자처럼,  지평도 없이 아득한 차가운 묘지,  거기 희뿌연 햇빛 받으며  고금의 역사 속의 온갖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쾌활한 사자死者    달팽이 우글대는 기름진 땅에  내 손수 깊은 구?!--"  
44    (산문) 놀이 / 이낙봉 댓글:  조회:1464  추천:0  2018-12-28
놀이   이낙봉   세계의 안쪽이 있다면 세계의 바깥쪽도 있을 것이다. 세계의 안쪽에 내가 살고 있다면 세계의 바깥쪽에 당신이 살고 있을 것이다. 세계의 안쪽이 나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한다면 세계의 바깥은 날 그냥 방목할 것이다. 맑은 유리창은 세계의 안쪽과 바깥쪽의 경계에 있다.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유리창이 나와 당신의 소통을 방해하고 있다. 내가 왼손을 들면 당신도 따라서 왼손을 들 것이다. 내가 밥을 먹으면 당신도 밥을 것을 것이고 내가 울거나 웃으면 당신도 울거나 웃을 것이다. 내가 잠을 자면 당신도 잠을 잘 것이고 꿈을 꾸면 당신도 꿈을 꿀 것이다. 그러나 교감이 문제다. 유리창이 나와 당신의 호흡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당신과 내가 놀이를 즐기려면 당신이 유리창을 열거나 내가 유리창을 깨해야 한다. 과연 누가 할 것인가?   영화 인셉션(Inception-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을 본다. 논리적 판단이나 이성적 판단은 필요 없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 타인의 꿈속에 침투하여 생각을 훔칠 수도 있고 타인의 꿈속에서 그의 무의식을 이용하여 생각을 바꾸게 할 수도 있다. 꿈속의 꿈. 또 그 꿈속의 꿈. 다시 그 꿈속의 꿈으로 자꾸만 들어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꿈을 공유한다. 그럼 이것이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결국 나는 영화 끝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놀이에 인셉션 당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사실 영화를 분석하고 따질 필요는 없다. 그냥 보고 즐기면 된다. 붉은 악마가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쳤고, 가수 인순이가 놀라운 가창력으로 ‘거위의 꿈’을 노래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김연아도 환상의 꿈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런데… 꿈은 결국 깨는 것 아닌가? 강호순의 꿈은? 빙어의 꿈은? 꿈은 스스로 꿈을 꾸는 자가 완성하는가? 놀이는 스스로 노는 자가 완성하는가?   여자는 국선변호인 남자는 교통사고 피의자, 둘은 언젠가 스치듯 술잔을 나눈 사이, 남자는 개를 안고 운전 하는데 그놈이 오줌을 싸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고 여자에게 말한다, 흐흐,   여자의 꿈 속에서 보양음식점 주차장을 찾는데 자동차가 갑자기 자전거로 바뀐다, 자전거 주위로 골목의 개들이 미친 듯이 쫓아온다, 얼굴은 토끼를 닮았고 아가리는 뱀처럼 쩍 벌어진 개가 발목을 문다, 막대기를 집어 아가리에 넣었더니 와작와작 깨물어 먹는다, 내 다리를 문 놈,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소주 한 병씩 먹이겠다고 다짐한다, 흐흐흐,   내 꿈 속의 꿈 속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다, 어떤 남자가 곁에 오더니 형님은 4번 타자라고 말한다, 바닥은 토사물이 홍건하다, 엉덩이 큰 여자가 대걸레 대신 치마로 토사물을 닦아낸다, 남자가 사실 형님은 4번 타자가 아니라고 소리치며 도망간다, 흐흐흐흐, -졸시 ‘꿈’ 전문   네 번째 시집 ‘미안해 서정아’ 수록 시 모두에 원제목 대신 주민등록번호 앞 번호를 제목으로 바꾼다. 시의 탄생일인 초고를 축하한다. 주된 의도는 처음부터 독자가 제목으로부터 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뻔한 시에 뻔한 제목. 식상한 일이지만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았으나 놀기로 한다. 3년 전 일이다. 그때도 시원했는데 지금도 시원하다.   시란 무엇인가? 골치 아프게 시가 무엇인지 시의 형식과 내용을 어떻게 할지.생각하지 말고 시쓰기를 하자? 전통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기승전결을 바탕으로 하고 내용에 충실해 공감을 얻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뒤샹은 화단의 기존 형식에 염증을 느껴 사물로 말하기를 시도한다. 예술이란 우리 삶의 여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흔적(레디메이드)이라고 주장한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보는 물건들에 작가의 고민에 의해 새로운 제목과 관점을 부여하면 그것 또한 작품이라고 새로운 형태의 미술세계를 창조한다. 그의 전위적인 생각은 앤디워홀과 백남준이 그 뒤를 이어간다. 그들 뿐 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미술 외 다른 예술분야와 일상생활에 널리 퍼져 계속 확대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시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자. 마음가는대로 거리낌 없이 놀자.   신작시 4편 근작시 6편 합이 10편. 발표를 한 시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신작시와 근작시를 구분하는 것 같은데 나는 아무렇게나 그냥 10편을 고른다. 조금 부담스러운 분량이지만 골라서 대충 분류한다. 나는 신작시가 근작시고 근작시가 신작시이므로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발표한 시 중에서 근작시 6편을 고르려고 했으나 포기했다. 발표한 시를 또 발표하는 것 같아 싫었다.) 시 10편의 사족으로 산문을 마무리 하자. 요즈음 시와 내가 놀고 있는 종목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이다. 대중가요 가사다. 그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즐겁다. 어차피 내가 하는 게임은 전통적인 방식의 게임이 아니므로 내가 룰을 만들고 내가 즐기면 된다. 그러다 재미없으면 또 새로운 룰을 만들어 즐기면 되는 것이다. 계속 룰을 만든는 것도 썩 괜찮은 놀이다.                 개   이낙봉   g는 양갈보(주한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와 똥갈보(내국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가 한 동네에서 공존하는 소도시의 변두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같이 노는 친구들은 니나놋집 자식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모두 그렇고 그렇듯이 철모르고 건강하고 즐겁게 커간다. 발정기가 시작될 즈음엔 양갈보가 모여 사는 골목으로 이사를 간다. 양갈보의 방에는 포르노 잡지가 있고 미군 병사들은 술을 마시거나 대마초를 피운다. 양갈보는 g가 발정기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이면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뒷물을 한다. 낄낄대며 양갈보의 알몸을 엿볼 때 첫 욕망의 대상이 뻔질나게 집으로 놀러온다. g는 모르는 건지 어리석은 건지 발정기가 시작되었음에도 암내를 따라가지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비의 암내에 이끌려 무작정 시를 쓴다. 비의 암내에 이끌려 무작정 쓰는 시는 건방지고 허황되고 환각을 요구한다. 그런 환각을 위하여 아티반(신경안정제)을 복용하고 술을 마신다. 환각 속에서 깨어나면 세상이 도니까 나도 같이 돌아야 돌지 않는다는 자기 합리화 속에서, 착각을 하고 착각은 또 다른 착각의 욕망을 증폭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악순환 속에 빠져 익사 직전까지 갔을 때 만난 환상의 새. 환상의 새는 불타는 욕망에 기름을 붓고 잡힐 듯 말 듯 주위를 맴돌다가 날아나고 맴돌다가 날아난다. 그렇게 활활 타오는 욕망의 끝은?   이런 글쓰기는 사건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엮어나가야 흥미로운데 난 이런 글쓰기가 지겹고, 아무튼 g는 잡종이다. 잡종은 잡종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다. 잡종은 잡종을 선택하고 또 선택하여 조금씩 조금씩 진화한다. 진화하면서 자칭 순수혈통이라고 자랑하는(사실 순수혈통인 척하는) 무리 속에 섞여 별종으로 살아간다. 간혹 순수혈통 중에는 뛰어난 시각과 후각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먹이를 단숨에 끝장내는 우두머리가 있다(사실 가짜 우두머리가 대부분이다). 가짜건 진짜건 우두머리 주변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무언가 얻어먹겠다고 독한 암내를 풍기며 덤벼든다. 그러나 사기의 자질을 가진 무리들은 교미가 끝나고 얼마간 허기가 채워지면 미련 없이 떠나거나 곁에서 뻔한 사기를 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잡종은 다르다. 잡종은 잡종이기에 잡종끼리 끊임없이 교접하여 돌연변이를 만든다. 돌연변이는 눈에 잘 보이기 종속이어서 자짓하면 말라죽어버린다. 말라죽더라도 잡종을 선택하는 것은 또 다른 돌연변이의 탄생을 위해서다. 돌연변이가 돌연변이를 낳고 낳아 돌연변이는 명맥을 이어간다. 태생적으로 g는 잡종을 선택한다. 돌연변이를 선택한다.   등 낮추고 꼬리 내린/ 개, 침 흘리는/ 개, 막다른 골목의/ 개, 쓰레기통 옆에서 비 맞는/ 개, 발정한 성기 덜렁대는/ 개, // 황홀하게 부서지는 아카시아/ 꽃잎 따먹던 시절의 개,/ 배고파도 굶고/ 졸려도 자지 못하는 개, // 버석버석 말라가는/ 개, 사랑하고 싶은/ 개, 새끼 낳고 싶은/ 개, 이빨 감추고 사는/ 개, 비루먹으며 끝까지 살아남을/ 개, -졸시 전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가 장마철 습기처럼 눅눅하다. 이런 글쓰기는 변죽을 울리는 짓이지만 변죽이면 어떻고 팥죽이면 어떤가. 어차피 언어는 본질을 모르고 변죽을 울리는 화려한 북채인 것을. 욕망은 초조하고 불안하고 허망한 것. 욕망은 계속 부패하는 거대한 똥덩어리. 거대한 똥덩어리는 작은 똥막대기 하나로는 깨끗이 치울 수 없는 일. 잡종 g는 환상의 새에 이끌려 활활 타오르는 욕망의 끝 천길 낭떠러지에 다다른다. 돌아설 수도 없고 한발 내딛으면 허공. 10년을 쪼그리고 앉아 망설이고 망설이다 죽어도 좋다 뛰어내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허공에서 배설을 만난다. 배설할 대상은 많고 배설은 욕망보다 똥덩어리가 작다. g는 배설을 위하여 끝까지 간 욕망을 이용한다. 긴장 풀어진 첫 욕망의 배설(s), 건방지고 건조한 욕망의 배설(k), 바람의 축축한 욕망의 배설(m), 지금까지 계속 괴롭히는 끈끈한 욕망의 배설(j)을 철저히 기만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단 한번의 술의 배설(c)까지 시도한다.(괄호 속 알파벳은 개인적인 암호) 그러나 어느 배설이건 배설 후 죽음의 냄새가 스며들고, 스며든 죽음의 냄새는 곰팡이처럼 번식한다. 욕망의 찌꺼기까지 말끔히 태워 버려야 죽음의 냄새를 지울 수 있다. 그렇게 태워 버리면 배설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의 재속에 숨어있는 불씨까지 말끔히 죽인 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재속에 숨어 있는 불씨.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불씨.   너는 아는가? 일회용배설, 똥막대기가 개의 좋은 장난감인 것을.   낡은 의자 위에 늙은 개가 앉아있다, 출입문 유리창이 조금 깨져있다, 끼어든 사람과 푹 빠진 사람이 격렬하게 섹스를 한다, 의자 위의 늙은 개가 출입문 쪽으로 뛰어내린다, 라고 생각나는 갈겨쓴다, //목욕탕에서 본 노인, 배와 엉덩이와 허벅지가 쭈글쭈글한 노인, 정욕에 좋다는 약탕에 누워있는 노인, 젊은 사내보다 길어 보이는 중심을 담금질 하는 노인이 부럽다, 라고 싱겁게 생각나는 대로 쓴다, //첫 연을 낡은 의자 위의 늙은 개, 끼어든 사람과 푹 빠진 사람의 격렬한 섹스, 낡은 의자와 늙은 개와 끼어든 사람과 푹 빠진 사람의 새벽이라고 또 생각나는 대로 지금 막 고쳐 써본다, -졸시 전문       * 198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집 ‘내 아랫도리를 환히 밝히는 달. 돌속의 바다. 다시 하얀 방. 미안해 서정아.  
43    심보르스카 시모음 (2) 댓글:  조회:4014  추천:1  2017-09-15
심보르스카 시 (2)   동굴 / 쉼보르스카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습기만 흐를 뿐. 이곳은 어둡고, 춥다.   불이 꺼지고 나니 더욱 어둡고, 춥다. 아무것도 없었다-황토에 그려진 들소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들소는 머리를 구부린 채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문장은 밑줄을 쳐서 강조할 만하다, 일반적인 의미의 '무(無)'를 신봉하는 이단(異端). 그들은 결코 회개할 줄 모른다. 다르다는 것을 자랑스레 여기므로.   아무것도 없었다-우리들이 떠나고 난 뒤에는. 우리들은 이곳에 왔었고, 자신의 심장을 먹어 치웠고, 스스로의 피를 마셨다.   아무것도 없었다. 미처 다 끝마치지 못한 우리들의 춤 말고는. 화염 속에서 불타오르던 너의 첫벗째 허벅지, 팔과 목, 그리고 얼굴. 미세한 파스칼*로 진동하는 생명을 잉태했던 나의 첫번째 복근(腹筋).   적막-하지만 소리보다 한발 늦었다. 소리는 적막보다 부지런한 천성을 지녔으므로. 적막-언젠가 네 목구멍 속에 걸려 있던 피리 소리와 북소리. 야생 동물의 비명 소리, 웃음소리와 더불어 동굴은 이곳에 적막을 단단히 아로새겨놓았다.   적막-하지만 감겨진 눈꺼풀처럼 암흑에 휩싸인 어둠이 먼저다. 어둠-하지만  싸늘하게 식은 살과 뼈가 먼저다. 싸늘함 하지만 죽음이 먼저다.   땅에서, 아니면 하늘에서? 어쩌면 일곱번째 하늘*에서? 너는 이 공허한 폐허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으리라. 여기에 무엇이 있었을까 자못 궁금해 하면서.   *파스칼; 압력의 단위. 1 파스칼은 1 제곱미터의 넓이에 1뉴 턴의 힘이 가해질 때의 압력을 의미하며. 기호는 pa를 쓴다. *일곱번째 하늘; 유대교에서는 하늘을 일곱으로 나누고, 일곱번째 하늘을 신과 천사들이 사는 가장 높은 하늘이라 믿는다.   애물단지 / 쉼보르스카   그는 행복을 원했었다. 그는 진실을 원했었다. 그는 영원을 원했었다. 자, 그를 봐라!   현실과 꿈을 간신히 구별해낸다. 자신이 누구인지 가까스로 깨닫는다. 어류의 지느러미 같은 손으로 부싯돌을 부딪쳐 힙겹게 봉화(烽火)를 피워 올린다. 쉽사리 증오에 휩싸이는 존재.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기에도 미욱한 존재. 눈으론 그저 보기만 하고, 귀로는 그저 듣기만 한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어투는 조건문, 이성을 사용해서 이성을 비난해보지만,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둔감한 살집 외에도 그의 머릿속은 자유와 박식함. 그리고 존재로 가득 차 있으니 자, 그를 봐라!   눈에 보이는 엄연한 실체이기에 변방의 별빛 가운데 하나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나름대로 생기 있고 꽤나 능동적인 그는 쓸모없는 수정(水晶)이 무력하게 퇴화하는 걸 지켜보며 짐짓 놀란다. 떼를 지어 다녀야만 했던 그 옛날,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이제 그는 진정으로 독립적인 개체. 자, 그를 봐라!   지금 이 순간이 비록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이대로 지속되기를. 깜빡이는 저 작은 은하수 아래서 끊임없이 빛을 발하기를! 미약하나마 이미 세상에 존재하기에 앞으로 무엇으로 탈바꿈할는지 희미한 윤곽이나마 드러낼 수 있기를. 그는 고집이 무척 세다. 코걸이를 걸고 있는, 토가*를 걸친 스웨터를 입고 있는 그가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쨋건 그는 애물단지. 측은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 실재(實在)하는 인간.   *토가; 고대 로마에서 시민이 입던 겉옷, 남자가 14세가 되면 성년의 표시로 착용했다.   만일의 경우 / 쉼보르스카   일어날 수도 있었어. 일어났어야만 했어. 일어났었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너무 가까이, 아니면 너무 멀리서. 일어났었어. 너에게, 혹은 너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에게.   너는 살아남았지. 맨 처음이었기 때문에. 너는 살아남았지. 제일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혼자였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왼쪽으로 갔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갔기 때문에. 비가 왔기 때문에. 그늘이 드리웠기 때문에. 날씨가 화창했기 때문에.   운 좋게도 거기 숲이 있었어. 운 좋게도 거기 나무가 없었어. 운 좋게도 철로, 갈고리, 대들보, 브레이크, 문설주, 갈림길, 일 밀리미터, 일 초가 있었어. 운 좋게도 지푸라기*가 물 위에 떠다니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손발을 움직여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었어. 우연의 일치에 좌우되는 불과 한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 안에서, 일촉즉발의 오차 내에서.   그래서 넌 지금 여기에 있는 거니? 가까스로 열린 찰나의 순간에? 그물에 뚫린 단 하나의 구멍, 그리로 슬그머니 빠져나가버렸니? 난 놀랄 수도, 침묵할 수도 없어. 자, 귀 기울여봐. 네 심장이 내 안에서 얼마나 빠르게 두근거리는지.   *지푸라기; 원문에는 '면도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 폴란드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은 면도날이라도 잡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 쉼보르스카   마침내 마법이 풀린다. 비록 강력한 힘이 작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해도. 8월의 밤, 너는 알지 못하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별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너는 알지 못하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예정된 섭리인지, 아닌지. 너는 알지 못하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을 보며 소원을 빌어야 할지, 운명을 점쳐야 할지. 운명을 점친다고? 제대로 의사소통도 안 되는 별똥 별 따위로? 지금이 21세기가 아니라 고리타분한 선사 시대란 말인가? 저 수많은 섬광 중에 과연 어떤 빗줄기가 호언장담할 수 있으려나: 불꽃이라고, 나는 불꽃이라고, 별똥별의 꼬리에서 생성된, 진짜 불꽃이라고. 왔다가 순순히 사라지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불꽃 그 자체라고. 내일자 신문을 향해 곤두박질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엔진이 고장 난, 바로 내 옆의 다른 불꽃이라고.   실수 / 쉼보르스카   미술관에 전화벨이 울린다. 밤 열두 시, 텅 빈 전시장 안에 벨 소리가 요란하다. 만약 누군가가 깜빡 잠들어 있었다면, 놀라서 곧바로 깨어났을 것이다. 이곳엔 불면증에 시달리는 예언자들과 달빛에 안색이 창백해진 고색창연한 왕들뿐. 그들은 조용히 숨죽인 채 만물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겉으로만 부지런한 척하는 고리대금업자의 아내는 벽난로 위에 놓인 전화기가 쩌렁쩌렁 울려대는데도 손에 든 부채를 내려놓을 생각조차 않는다. 다른 이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반응에 익숙해져버렸기에. 토가를 걸치거나 혹은 알몸인 그들은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듯 오만한 태도로 한밤중의 경적을 무심히 흘려보내고 만다. 맹세컨대 이것은 왕실의 가령(家令)이 전화를 받기 위해 액자에서 뚜벅뚜벅 걸어 내려오는 것보다 더 우습고 황당한 일이다. (하긴 그의 귀를 두드리는 건 고요한 적막뿐인데 무얼 기대할 수 있으랴.) 더 황당한 건 도시의 저편, 어딘가에 자신이 잘못된 번호를 돌렸는지도 모르는 채 꽤나 오랫동안 수화기를 관자놀이에 갖다 대고 있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살아 있다. 그래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양로원에서 / 쉼보르스카   그녀의 이름은 야브윈스카, 누구를 말하는지 아마 다들 아실 거예요. 우리들 사이에서 거의 여왕 폐하로 통하는 거만한 그녀. 목에는 항상 화려한 스카프를 두르고, 머리를 곱슬곱슬 말아 올린 그녀. 아들 셋을 먼저 천국에 보냈고, 거기서 그들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그녀 말입니다.   "그 애들이 전쟁에 나가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거야. 겨울엔 큰 아들과 살고 여름은 둘째와 보냈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확신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우리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죽음을 당하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우리의 아이들에 관해 꼬치꼬치 묻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셋째 아들이 자신을 집으로 초대했으리라는 사실을 말이죠 "막내는 분명 새하얀 백조나 비둘기가 끄는 눈부신 황금마차를 타고 나를 찾아왔을 게야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모두가 잊지 못하도록"   우리의 야브윈스카 여사가 해묵은 신세타령을 시작하면 그녀를 돌보는 간호원, 마니아*는 가끔씩 무기력한 미소로 응수하곤 합니다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임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이야기죠.   토요일, 일요일과 여름휴가 때는 우리에게도 쉴 권리가 있으니까요.   *마니아Mania는 폴랜드에서 다소 촌스럽다고 여겨지는 다소 구식의 여자 이름이다. 오늘날에는 아기에게 '마니아'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폴랜드 사람들은 하녀 혹은 유모의 전형적인 이름으로 생각한다.   광고 / 쉼보르스카   나는 진정제입니다. 주로 집에서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무실에서도 효력이 있습니다. 시험을 치르거나 재판에서 증언할 때도 힘이 됩니다. 깨진 컵 조각을 조심스럽게 붙이는 것을 돕기도 합니다. 단지 나를 입에 넣고 혓바닥 아래서 살살 녹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나를 꿀꺽 삼키기만 하면 됩니다. 오직 물과 함께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압니다, 불행을 요리하는 방법. 나쁜 소식을 견뎌내는 방법. 불의를 최소화하는 방법. 미망인 얼굴에 잘 어울리는 장례식용 모자를 고르는 방법까지도. 무엇을 망설이고 있나요? 화학 약품의 자비로운 효능을 한번 믿어보시라니까요.   당신들은 아직 젊습니다. 삶을 새롭게 가꾸고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끊임없이 참고 견디는 거라고 누가 말했던가요?   당신들의 나락(奈落)을 주저 없이 내게 맡겨주십시오. 네 번이나 추락에서 건져 올려지고 나면 당신들은 틀림없이 고마워할 것입니다.   나에게 영혼을 파십시오. 다른 장사치들은 오지 않을 테니.   다른 악마는 더 이상 없습니다.   발견 / 쉼보르스카   나는 위대한 발견을 믿는다. 그 발견을 이루어낼 사람을 믿는다. 그 발견을 이루어낼 사람의 두려움을 믿는다.   그의 얼굴에 깃든 창백한 기운과 거친 호흡, 입술 위에 맺힌 식은땀을 믿는다.   기록을 태우는 것, 재가 될 때까지 태우는 것,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활활 태우는 것을 믿는다.   숫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 그것들이 유감없이 산산조각 분해될 것을 믿는다.   서두르기 좋아하는 인간의 성향과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움직일 줄 아는 치밀함과, 그들의 강요되지 않은 자유 의지를 믿는다.   석판이 부서지고, 액체가 쏟아지고, 광신이 꺼지리라는 것을 믿는다.   단언컨대, 반드시 성공하리라. 결단코 늦지 않으리라. 증인들이 배석하지 않아도 사건은 전개되리라.   확신컨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리라. 아내도, 벽도, 심지어 밀고하기 좋아하는 저 수다스러운 새들조차도.   불미스러운 일에 개입하지 않은 깨끗한 손을 믿는다. 엉망진창이 된 경력을 믿는다. 어러 해 동안 소진한 각고의 노력을 믿는다. 무덤까지 안고 갈 비밀을 믿는다.   이 말들은 모두 규범의 영역 저 너머를 배회하고 있으니,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근거를 바라지 않는다. 내 믿음은 강하고, 맹목적이며, 원칙을 초월한 것이기에.   귀환 / 쉼보르스카   그가 돌아왔다. 아무 말도 없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든다. 담뇨 아래로 머리를 파묻고, 무릎을 끌어당긴다. 나이는 마흔 살 가량,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아니다. 일곱 겹의 살갗 너머 어머니 뱃속, 어둠의 안식처에서 지금 이 순간, 그는 존재한다. 내일은 은하계 전체를 비행하는 데 필요한 인체의 항상성*에 대해 강의할 예정.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그맣게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항상성; 외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체내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   공룡의 뼈 / 쉼보르스카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는 여기서 균형이 맞지 않는 잘못된 비례의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차곡차곡 쌓인 이 공룡의 뼈에서.   그리운 벗이여, 왼쪽에는 무한대를 향해 뻗은 꼬리가 있고, 오른쪽에는 반대편을 향하는 목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자연은 결코 오류를 범하거나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농담을 즐길 뿐. 이 우스꽝스러운 작은 머리통에 주목해주십시오.   신사 숙녀 여러분, 이런 조그만 머리로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이 머리통의 주인은 멸종하고 만 것이죠.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보잘것없는 뇌의 사이즈에 비해, 식욕은 지나치게 왕성하군요. 이런 작은 뇌 속에는 현명한 판단력보다는 어리석은 몽상이 으레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법. 오직 하나뿐인 태양처럼.   탁월하신 위원회여, 이 얼마나 솜씨 좋은 손인가요. 이 얼마나 언변이 풍부한 입인가요. 이 얼마나 명석한 두뇌인가요.   위대하신 판관이여, 지금은 퇴화되어버린 꼬리가 자라던 바로 그 자리에 너무 많아 버거운 의무감만 남아 있군요.   추적 / 쉼보르스카   적막이 나를 맞으리라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혹시라도? 시끌벅적한 소동도, 팡파르도, 박수갈채도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비상사태를 알리는 정적도, 아니 비상사태 자체도 없으리란 걸 나는 안다.   마른 잎사귀조차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은빛 궁전과 아름다운 정원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마라. 존경스러운 연장자와 정의로운 법률, 유리구슬에 비친 예언자의 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달빛 속을 이렇게 헤매고 다니는 건 잃어버린 반지와 리본 따위를 찾기 위해서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언제나 그들이 한발 앞서 모든 것을 가져가버렸다.   증거가 될 만한 건 아무거도 남기지 않았으니. 죽음도, 나무토막도, 과일 껍질도, 아스파라거스도, 찌꺼기도, 대패질하고 남은 부스러기도, 깨진 유리 파켠도, 먹다 남은 고깃덩이도, 쓰레기 조각도.   내가 몸을 숙이는 건 단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을 줍기 위해서일 뿐. 하지만 그 돌에는 아무런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내게 신호나 단서를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흔적을 지우는 기술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적절한 타이밍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그들의 놀라운 재능에 대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들이 뿌리나 꼬리, 하늘로 날아오르느나 잔뜩 부푼 드레스 자락은 인간의 손에는 절대로 잡히지 않는 신성한 것임을. 그들의 머리카락은 단 한번도 머리에서 이탈하여 내 손아귀에 들어온 적이 없다.   내 궁리를 보란 듯이 비웃는 교활하고 영리한 생각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늘 꼭 한 발자국씩 내가 미처 쫓아가지 못할 만큼만 앞서 간다. 선명하게 찍힌 그 흔적들은 원시적인 본능이 얼마 어리석은 지 조롱하듯 보여준다.   그들은 현존하지 않으며, 과거에도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나는 스스로에게 열심히 그 사실을 반복해서 주입시켜야만 한다. 그들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는 어리석은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러면 발아래에서 느닷없이 풀쩍 솟구쳐 오르는 건 과연 뭐지? 금세 내 발에 밟혀버렸기에 미처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도망치려 버둥거리는 것. 스스로를 침묵의 연장이라 여기는 것. 그것은 비로 그림자-어느 틈에 목표물에 가까이 다가섰다고 착각할 만큼 터무니없이 커져버린 나 자신.   분실물 보관소에서의 연설 / 쉼보르스카   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에 몇몇 여신을 잃어버렸다. 또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에 많은 신들을 놓쳐버렸다. 나의 별 몇개가 영원히 꺼져버렸다. 하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의 섬이 하나 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심지어 어디에 발톱을 놓아두었는지도 통 모르겠다. 누가 내 거죽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지, 내 껍데기 안에서 살아 숨쉬는 건 무엇인지. 내가 육지로 기어 나왔을 때, 형제들은 다 죽었고. 단지 내 뼈 가운데 일부만 내 안에서 기념일을 맞고 있다. 나는 허물을 벗고 세상에 나와 부질없이 척추와 다리를 혹사하고 말았다. 그러곤 여러 차례 감각을 상실했다. 오래전에 이 모든 것에 대해 세번째 눈을 감았고, 지느러미를 움직였고, 나뭇가지를 뒤흔들었다.   사라지고, 소멸되고, 바람결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다, 내가 이렇게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니. 나는 한없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다. 어제 전차 안에서 우산을 잃어버린 평범한 인간의 형체는 그저 잠시 동안 빌려온 허물에 불과할 뿐   경이로움 /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거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혹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 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 왜 하필 옆 자리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렁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작은 별 아래서 / 쉼보르스카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잘려진 나무여, 탁자의 네 귀퉁이를 받들고 있는 다리에 대해.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 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 달라. 영혼이여, 내 안에 자주 깃들지 못한다고 나를 질타하지 마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가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거대한 숫자 / 쉼보르스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60억의 사람들. 내 상상력은 늘 그랬듯이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거대한 숫자는 감당하지 못하고, 사소하고, 개별적인 것에 감동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얼굴들만 닥치는 대로 비추곤 한다. 그럴 때 뒷줄에 있는 나머지 얼굴들은 모조리 생략되고 만다. 기억 속에서도, 회한 속에서도 그들은 영원 속으로 도태되고 만다. 저 위대한 단테조차도 그들의 소멸을 멈출 순 없다. 모든 뮤즈*가 함께 어울려 내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는다 해도 존재를 상실한 그들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Non omnis moriar* -시기상조에 불과한 근심 걱정. 정녕 내가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으로 충분한지 단 한순간도 충분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지금은 더욱더 그러한데. 뽀족한 수가 없기에 끊임없이 버리면서 선택한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버렸으니 그만큼 복잡하고, 그만큼 성가시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읗 상실한 대가는 고작 시 한 구절과 한숨뿐. 천둥과 같은 우렁찬 부름에 나는 꺼져가는 속삭임으로 간신히 대답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침묵 속에서 견뎌야만 했는지, 굳이 말하지 않으리라. 고향 산기슭에서 찍찍대는 생쥐 한 마리, 인생이란 결국 그 생쥐가 모래 위에 발톱으로 끼적거린 몇 개의 희미한 흔적과도 같은 것.   나의 꿈들-꿈속의 인구 밀도는 생각보다 낮은 편이다. 사람들의 무리나 시끌벅적한 소동보다는 텅 빈 고독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아주 가끔씩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들를 때도 있다. 그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문고리를 돌린다. 메아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빈집에 울려 퍼지고, 현관을 넘어 계곡으로 흩어져간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닌 듯 아주 조용하고 또 은밀하게.   무엇 때문에 이 공간이 내 안에까지 비집고 들어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뮤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정령. *Non omnis moriar: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레이스(B.C. 65~8)의 발라드에서 인용한 구절로                           "내 전부가 죽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   롯의 부인*/ 쉼보르스카   아마도 호기심 때문에 뒤를 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호기심 말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은그릇에 미련이 남아서. 샌들의 가죽 끈을 고쳐 매다가 나도 몰래 그만. 내 남편, 롯의 완고한 뒤통수를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어서. 내가 죽는다 해도 남편은 절대로 동요하지 않을 거라는 감격스러운 확신 때문에. 과격하지 않은 가벼운 반항심이 솟구쳐 올라. 추격자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적막 속에서 문득 신이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샘솟았기에. 우리의 두 딸이 언덕 꼭대기에서 사라져버렸으므로. 문득 스스로 늙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리를 확인하고 싶어서. 방랑의 덧없음과 쏟아지는 졸음 탓에. 대지 위에 꾸러미를 내려놓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걷고 있는 오솔길에 갑자기 뱀이 나타났기에. 거미와 들쥐와 어린 독수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기에. 유익하지도, 해롭지도 않은 그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거대한 패닉 상태에 빠져 꿈틀대고, 튀어 오르는 걸 바라보면서. 갑작스러운 외로움 때문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몰래 도망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소리치고 싶고,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혹은 돌풍이 불어와 내 머리를 헝클고, 내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던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이 소돔의 성벽에서 우리를 지켜보면서. 계속해서 청천벽력처럼 요란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것만 같았기에. 아마도 분노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을지도. 어쩌면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파멸을 안겨주기 위해서. 아무튼 위에서 열거한 구구한 모든 이유 때문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단지 내 발밑에서 나로 하여금 발길을 돌리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쓴 성난 돌멩이 하나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내 눈앞에서 돌연히 끊겨버린 오솔길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성벽의 가장자리에서 뒷발을 세우고 아장아장 걷고 있는 한 마리 햄스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살금살금 기어갔다. 폴쩍 날아올랐다. 어둠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기 전까지. 어둠 속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돌덩이들과 죽은 새들이 무참히 추락하기 전까지. 숨을 쉴 수 없었기에. 나는 빙글빙글 돌고, 또 돌았다. 누군가가 이 광경을 봤다면 아마도 내가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아마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엇을지도. 어쩌면 내 얼굴은 도시를 향하고 있었을지도.   *롯의 부인: 이 시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죄악에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로 한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에게 이 사실을 예고하면서, 도망쳐서 생명을 보존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일렀으나, 롯의 아내는 그만 뒤를 돌아봐 결국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햄스터: 비단결쥣과의 하나. 의학 실험용으로 많이 쓰인다.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 / 쉼보르스카   시골 길에 죽은 딱정벌레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 세 쌍의 다리를 배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은 채. 죽음의 혼란 대신 청결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이 광경이 내포하는 위험도는 지극히 적당한 수준. 갯보리와 박하 사이의 지정된 구역을 정확히 준수하고 있다. 슬픔이 끼어들 여지는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다.   우리의 평화를 유지시켜주기 위해, 동물들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만 숨을 거둔다. 우리들이 믿고 싶어 하는 대로, 감각이나 이승에 대한 미련을 훌훌 떨쳐버린 채. 우리들이 짐작한 대로, 저승보다는 덜 비극적인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난다. 그들의 온순한 영혼은 절대로 어둠 속에서 우리를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거리를 유지할 줄 안다. 그들은 배려가 뭔지를 안다.   여기 길 위에 죽은 딱정벌레 한마리가 있다. 그 누구도 애도하지 않는 가운데, 태양 아래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저 한번 쳐다봐주는 것도 딱정벌레에겐 커다란 추모일 수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지극히 태평스러워 보인다. 중요하고 심각한 일은 모조리 우리, 인간들을 위해 예정되어 있다. 삶은 오로지 우리들의 것이며, 언제나 당연한 듯 선행권(先行權)을 요구하는 죽음 또한 오로지 우리들의 전유물이다.   실험 / 쉼보르스카   우리를 울리고, 웃기기 위해서 배우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열연한 본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특별 보너스로 머리를 이용한 흥미로운 실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어딘가에 고착되어 있던 머리가 지금은 완벽하게 절단되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본체에서 깨끗하게 분리되었음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목의 뒷부순에 주렁주렁 매달린 튜브는 기계에 연결되어 체내의 혈액 순환을 유지시켜줍니다. 네, 머리는 잘 지내는 중입니다.   고통의 징후도, 충격의 흔적도 없습니다. 다만 손전등의 불빛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불안한 듯 눈으로 쫓고 있을 뿐,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귀를 쫑긋 세웁니다.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은 코는 돼지 비계 냄새와 비실재(非實在)의 무취(無臭)를 예민하게 구분해냅니다. 입은 생리 현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침을 흘립니다.   강아지의 충성스러운 머리, 강아지의 상냥한 머리는 부드럽게 쓰다듣어주기라도 하면 아직도 제가 몸에 귀속된 신체의 일부인 양 착각하면서 바보처럼 눈을 찡긋거립니다. 등뼈를 살짝 어루만져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머리를 조아리던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에.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만약 이런 게 인생이라면, 머리는 그저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히 행복했을 테니까요.   미소 / 쉼보르스카   세상은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 거물급 정치인들은 늘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어야만 한다. 미소는 사기가 꺾이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이므로. 혹 사업이 꼬이고, 골치 아픈 시합과 불확실한 결과 탓에 속이 상할지라도 하얗고 가지런한 그들의 치아를 바라보노라면 언제나 위안이 된다.   회담장에 들어설 때나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설 때 그들은 항상 찡그리지 않고 온화한 표정을 지어야만 한다. 활기 넘치 자태와 명랑한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누군가를 환영하고, 또 누군가와 작별하며 구경꾼들과 카메라 렌즈를 위해 늘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야 한다.   치과 의술은 외교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빛나는 미래를 보장해준다. 매력적인 송곳니와 조화로운 앞니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일상적인 슬픔을 얼굴에 맘 놓고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이 시대가 편아하고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몽상가들은 말한다. "인류의 형제애가 지구를 웃음의 천국으로 바꾸어놓는다"고. 하지만 난 회의적이다. 제발 부탁이다. 더 이상 거물급 정치인들이 억지로 미소 지을 필요가 없도록 그들을 가만히 좀 내버려주자. 안면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도록. 봄 또는 여름이 와서 진정 기쁠 때 그저 가끔씩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을 수 있도록. 그러나 인간은 본래 천성적으로 슬픈 존재. 나는 그 존재를 기다리며 벌써부터 기쁨에 젖는다.   여인의 초상 / 쉼보르스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게 스스로 변해야 한다. 이것은 쉽고, 불가능하고, 어렵고, 그래서 더더욱 해볼 만한 일이다. 필요하다면 그녀의 눈동자는 때로는 짙푸르게, 때로는 잿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리라. 검은빛을 띠다가도 때로는 명랑하게, 때로는 이유 없이 눈물을 머금으리라.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단 한 사람, 혹은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가 되어 그와 함께 곤히 잠자리에 들리라. 그를 위해 네 명이거나, 한 명도 아니거나, 아니면 단 한 명의 아이를 낳아주리라. 순진무구하지만, 가장 적절한 충고를 하게 되리라.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리라. 목 위에 머리가 없지만,* 곧 갖게 되리라. 야스퍼스*와 여성지를 동시에 읽게 되리라. 나사를 어디에 조여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근사한 다리를 만들어 세우리라. 항상 그래왔듯 젊은 모습으로, 갈수로 더 젊은 모습으로 남아 있으리라. 양손에는 날개가 부러진 참새와, 길고도 머나먼 여행을 위한 약간의 여비와, 고기를 토막 내는 식칼과, 붕대와, 한 잔의 보드카를 들고, 어디를 향해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는지, 피곤하지도 않은지, 많이 고단하건, 조금 고단하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에 대한 사랑 때문이건, 아니면 아집 때문이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혹은 신의 가호 덕분이건.   *목 위에 머리가 없지만; 폴란드 속담에 "남자는 집안의 머리이고 여자는 목이다"라는 말이 있다. 목이 움직여야 머리도 움직일 수 있듯이 집안의 우두머리이자 가장은 남자지만 그 가장을 좌지우지하는 건 여자라는 뜻에서 비롯된 속담이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사회철학자로 칸트, 키르케고르, 니체 등의 영향을 받아 실존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서 을 썼다. 그는 실증주의 철학을 내세우는 과학에 대한 과신(過信)을 경고하고, 근원적인 불안에 노출된 인간의 비합리성을 포착하여 본래적인 인간 존재으 양태를 전개하는 실존 철학을 시대 구원의 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쓰지 않은 시에 대한 검열 / 쉼보르스카   시의 첫머리에서 이 여류 시인은 지구가 작다고 성급하게 단정 짓는 반면, 하늘은 극단적으로 거대하게 묘사하고 있다. 잠시 인용해보자: "하늘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별들이 있다."   하늘에 관한 표현에서 우리는 시인의 무력감이 발견된다. 저자는 저 끔찍한 무한대의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 수많은 행성들이 무기력한 휴면 상태로 그녀에게 충돌한다. 머지않아 그녀의 지성, 부연 설명하자면 '그다지 견고하지 못한' 지성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기 시작하리라: 태양 아래서, 햇살이 비치는 이 세상 곳곳에서, 우리는 결국 혼자가 아닐까?   이것은 확률의 법칙을 철저히 무시하는 발상, 오늘날 보편적으로 공인 받은 가설을 완전히 뒤집는 행위. 언제든 인간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는 명확한 증거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아, 도대체 시라는 건 왜 이 모양인지. 마침내 우리의 여류 시인은 지구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지구는 "목격자 없이도 열심히 돌아가는 행성"이며, "우주가 탄생시킨 공상 과학 소설"이다. '안드로메다'나 '카시오피아' 행성도 파스칼(1623~1662)의 절망에는 대적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인간의 배타적이고 고독한 본질은 점점 악화되어, 일종의 허무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리석은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타 등등---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공허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길을 밝혀주소서---"   시인은 인생이 마치 고갈되지 않은 재고품이라도 되는 듯 함부로 낭비되는 것에 대해 일종의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고집스러운 견해에 따르면 항상 양쪽 모두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전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타인들 위에 "주인으로 군림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도덕적인 성향이 작품 속에서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도들은 조금난 덜 노련한 펜으로 씌여졌다면, 아마도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리라.   애석하긴 하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시인은 "태양 아래서, 햇살 비치는 이 세상 곳곳에서, 우리는 과연 혼자일까, 아닐까?"와 같은 본질적으로 설득력이 결여된 명제를 고상한 미사여구와 일상적인 언어가 뒤섞여버린 자신의 무심하고 태평한 문체 속에 억지로 쑤셔 넣어버렸다. 그러니 과연 누가 이 작품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확신컨대 이 작품을 납들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정답이다.   경고 / 쉼보르스카   우주 공간에 갈 때는 어릿광대를 데려가지 말 것, 이것이 내 충고다.   열네 개의 죽은 혹성들과 몇 개의 별, 그리고 두 개의 혜성을 지나 마침내 세번째 행성을 향해 길을 떠날 때쯤이면 어릿광대들은 유머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 테니까.   우주는 말 그대로 우주다. 다시 말해 '완전하다'는 뜻. 어릿광대들은 바로 그 점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그 무엇도 어릿광대들을 기쁘게 하지는 못하리라. 시간으로도-너무나 아득하니까. 아름다움으로도-일말의 빈틈도 없으므로. 위엄으로도-유쾌한 분위기로 되돌리면서 너무나 힘이 들기에. 모두가 경탄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은 하품을 할 것이다.   네번째 행성으로 향하는 길은 더욱더 끔찍하리라. 경직된 미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잠, 망가진 균형, 쓸데없는 잡담, 까마귀는 부리에 치즈를 물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에는 파리가 앉았다. 원숭이는 사우나를 하고 있다--- -그래, 인생이란 다 이런 거지, 뭐   그들은 속박과 구속을 원한다. 무한한 시간보다는 목요일을 선택한다. 그들은 원시적이다. 광활한 음악의 세계보다는 조율 안 된 음 하나를 선택한다. 그들은 이론과 실제의 틈바구니, 원인과 결과의 사이에 존재할 때 가장 행복하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완벽하게 결합된 우주 공간.   서른번째 행성에 도착했을 때, (이곳이 허허벌판 황무지라는 건 안 봐도 뻔하다는 생각에) 그들은 조종석에서 내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요" "손가락을 다쳤어요" 기타 등등 온갖 자질구레한 핑계를 늘어놓으며.   아, 얼마나 수치스럽고, 난처한 일인가. 우주 공간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비용을 탕진하고 말았다.   양파 / 쉼보르스카   양파는 뭔가 다르다. 양파에겐 '속'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양파다움에 가장 충실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완전한 양파 그 자체이다. 껍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순수하게 양파스럽다. 그러므로 양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용감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우리는 피부 속 어딘가에 감히 끄집어낼 수 없는 야생 구역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내부,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옥,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을. 하지만 양파 안에는 오직 양파만 있을 뿐 비비꼬인 내장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양파는 언제나 한결같다. 안으로 들어가도 늘 그대로다.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한 꺼풀, 또 한 꺼풀 벗길 때마다 좀더 작아진 똑같은 얼굴이 나타날 뿐, 세번째도 양파, 네번째도 양파. 차례차례 허물을 벗어도 일관성은 유지된다. 중심을 향해 전개되는 구심성(求心性)의 아름다운 푸가. 메아리는 화성(和聲) 안에서 절묘하게 포개어졌다.   내가 아는 양파는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둥근 배. 영광스런 후광을 제 스스로 온몸에 칭칭 두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건 지방과 정맥과 신경과 점액과, 그리고 은밀한 속성뿐이다. 양파가 가진 저 완전무결한 우둔함과 무지함은 우리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자살한 사람의 방 / 쉼보르스카   당신들은 틀림없이 그 방이 비어 있었으리라 단정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등받이가 튼튼한 의자 세 개. 어둠을 밝히기에 딱 알맞은 전등 하나. 지갑과 신문이 놓인 책상이 있었습니다. 근심 걱정 없는 자애로운 부처, 고뇌와 비탄에 잠긴 예수. 행운의 상징인 일곱 마리 코끼리, 그리고 설합 속에 수첩 한 개가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거기에 우리들의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까?   책과 그림과 음반들이 없었다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거기엔 검은 손이 연주하는 위로의 트럼펫 선율이 있었습니다. 진심 어린 꽃송이를 들고 서 있는 사스키아*가 있었습니다. 신성의 불꽃이 뿜어내는 환희가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제 5장에서 힘겨운 고난을 마치고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책장 안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 있고, 아름답게 무두질한 표지 위에는 금박으로 새겨진 도덕군자들의 이름이 자랑스레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정치가들이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문이 있으니 출입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창문이 있으니 내부의 정경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이 방은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듯 텅 비어 있었습니다.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한 안경이 창턱에 놓여 있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파리 한 마리가 윙윙대며 그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편지가 적어도 뭔가를 밝혀줄 거라 기대하고 있군요. 하지만 감히 한마디 하리다. 애초에 편지 따위는 없었습니다. 한때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우리들은 유리컵에 기대어 세워놓은 텅 빈 봉투 속으로 들어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사스키아Saskia ;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아내. 렘브란트는 자신의 아내를 소재로 한 몇편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이 시의 소재가 된 '화장대의 사스키아'(1641)이다. 사스키아가 손에 꽃을 들고 있는 이 그림은 독일 드레스덴의 알테 마이스터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오디세우스Odysseus;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군의 대장이었다. 라틴어로는 '율리시스'라고 불림.   자아비판에 대한 찬사 / 쉼보르스카   대머리 독수리에게는 스스로를 비판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검은 표범에게는 양심의 가책이란 말이 낯설기만 하다. 피라니아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데 일말의 의혹도 품지 않는다. 방울뱀은 무조건 자기를 추겨세운다.   스스로를 냉철하게 평가할 줄 아는 자칼*은 존재하지 않는다. 메뚜기, 악어, 선모충 그리고 쇠파리도 마찬가지. 생긴 대로 살아가며 그것으로 만족한다.   범고래의 심장은 수백 근의 무게를 자랑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가볍기 짝이 없다.   태양계의 세번째 행성에 있는 순수한 양심보다 더 동물적인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쟈칼; 여우와 이리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육식 동물로 유럽 동남부, 아프리카 북부, 아시아 등지에 서식하는 갯과의 들짐승   인생이란------기다림 / 쉼보르스카   인생이란------기다림. 리허설을 생략한 공연. 사이즈 없는 몸. 사고(思考)가 거세된 머리.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이 배역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역할은 나만을 위한 것이며,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   무엇에 관한 연극인지는 막이 오르고, 무대 위에 올라가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인생의 절정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늘 엉망진창이다. 주어진 극의 템포를 나는 힘겹게 쫓아가는 중 즉흥 연기를 혐오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맞는 즉석 연기를 해야 한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사물의 낯설음과 부딪쳐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내 삶의 방식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려 있다. 내 본능은 어설픈 풋내기의 솜씨. 긴장 탓이라고 스스로 위로해보지만, 그럴수록 더 큰 모멸감이 되돌아 올뿐. 정상 참작을 위한 증거들이 내게는 오히려 잔인하게만 느껴진다.   한번 내뱉은 말과 행동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법. 밤하늘의 별들을 미처 다 헤아리지도 못했다. 서두르고 덤벙대다가 잘못 잠근 외투의 단추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우연이 빚어낸 안타까운 결과.   어느 수요일 하루만이라도 미리 연습할 수 있다면, 어느 목요일 하루만이라도 다시 한번 되풀이할 수 있다면! 하지만 금요일 되면 벌써 새로운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어김없이 나를 찾는다. 그러곤 묻는다-자, 모든 게 이상 없죠? (잔뜩 쉬어터진 거친 목소리로 막 뒤에서 헛기침으로 미리 귀띔을 해주는 일조차 없이.)   지금 이 상황을 임시로 마련된 무대 위의 간단한 오디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정교한 무대 장치 아래 서서 모든 사물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배치되었는지르 똑똑히 보고 있다. 구석구석 놓여 있는 소품들이 정확성과 견고함은 가히 충격적이다. 무대를 회전시키는 장치는 벌써 오래전부터 작동 중이다. 저 멀리서 성운(星雲)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 이것은 틀림없는 개막 공연이다. 이 순간 내가 시도하는 모든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저지른 나의 행동, 나의 말, 나의 동작으로 영원히 굳어져버린다   스틱스 강변에서 / 쉼보르스카   자, 개별적인 영혼들이여, 여기는 스틱스 강*이다. 그래 맞다, 여기는 스틱스 강이다. 뭣 때문에 그렇게들 놀라서 쩔쩔 매느냐? 머지않아 확성기를 통해 카론*의 굵은 저움이 들려오면, 속세의 숲에서 놀라 달아았던 님프의 보이지 않은 손이 너희를 안식처로 데려갈 것이다. (대부분의 님프들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정식 계약을 맺고 이곳에서 일하는 중이다.) 강력한 콘크리트와 강철로 만든 견고한 방파제 너머로 켸케묵은 썩은 나룻배 대신 모터가 장착된 수백 개의 보트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인류의 과잉 번식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무너졌으니, 친애하는 영혼이여,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는지. 쓰레기 더미처럼 빽빽하게 솟은 고층 빌딩은 강변의 아름다운 정경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승객들에게 효율적인 운행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숙박 시설과 창고, 각종 사무실과 여행사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중. 친애하는 영혼이여, 여기 위대한 신들 가운데 하나인 헤르메스*가 있다. 그는 최소한 몇 년 앞서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운다. 어느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어느 지역에서 독재가 시작될지 철저하게 예측해서 배에 오를 승객들의 자리를 미리미리 배정한다. 스틱스 강을 건너는 운임은 무료, 단지 고풍스러운 고대 문명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 때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는 요금함이 형식적으로 놓여 있을 뿐; "이곳에 주화 또는 동전을 넣지 마시오." 자, 거기 있는 영혼이여. 시그마* 16구역에 정박한 타우 30에 승선하라. 비록 배가 만원이어서 숨 막히게 더울지라도 당신을 위한 공간은 어딘가에 반드시 있으리라. 필연이 요구하는 대로 컴퓨터가 당신의 자리를 정확히 마련해놓았을 테니. 타르타로스*에서도 마찬가지. 넘쳐나는 예약 탓에 몸을 펴기 힘들 정도로 비좁고 갑갑하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옷자락은 형편없이 구겨지리라. 내 작은 유리병 안에는 레테의 강에서 퍼온 마지막 반 방울의 물이 담겨있다. 영혼이여, 명심하라. 저승에 대해 끊임없이 의구심을 갖고 확인을 해야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가질 수 있는 법이니라.   *스틱스 강; 그리스 신화에서 레테,  아케론과 함께 저승으로 흐르는 세 개의 강 중 하나이다.              사자(死者)는 사공인 카론의 배를 타고 이 강을 건너 황천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카론Caron; 저승으로 가는 스틱스 강의 나룻배를 젓는 사공 *헤르메스Herme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 신들의 사자(死者)이며 상업, 웅변, 발명, 도둑 따위의 수호신 *시그마: 그리스 문자의 열여덟 번째 자모, 영어의 s에 해당한다. *타르타로스; 그리스 문자의 열아홉 번째 자모, 영어의 t에 해당한다.   유토피아 /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명백하게 설명되어 있는 섬.   이곳에서는 탄탄한 증거의 토대를 딛고 서 있을 수 있다.   모든 길은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다.   덤불은 정답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이곳에는 혼돈에서 영원히 해방된 나뭇가지로 뒤덮인 '논리적인 가설의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우물가에는 곧고 탄탄한 '이해의 나무'가 '옳아! 이제 알겠어!'를 연방 외치는 중.   그 안쪽으로 '명백한 타당성의 계곡'이 드넓게 펼쳐진 푸른 숲이 있다.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싹트기 시작하면 바람이 불어와 사방으로 흩어놓는다.   메아리는 부른 사람 없어도 저절로 응답하면서 세상의 비밀에 대해 기꺼이 속삭인다.   오른 쪽에는 '의미'가 보관된 동굴.   왼쪽에는 '심오한 깨달음'의 호수 바닥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진실'이 수면 위로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의 언덕에 오르면 꼭대기에서 '사물의 본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매력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다만 해변에서 희미한 발자국이 발견될 뿐. 그것들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바다에 몸을 던져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는 것뿐이라는 듯.   삶이란 워낙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니.   무대 공포증 / 쉼보르카     시인, 그리고 작가. 흔히들 말한다. 시인은 작가가 아니라고, 그러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시인은 '시'를 작가는 '산문'을 쓴다?   산문 속에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으며, 그 속에는 물론 '시'도 포함된다. 하지만 '시'는 단지 '시'여야만 한다.   '시'의 탄생을 널리 알리는 플랭카드에는 화려한 아르 누보풍으로 장식된 'ㅅ'자가 날개를 단 고풍스러운 라이어* 줄에 보란 듯이 멋지게 매달려 있다. 자, 나는 무대에 들어설 때 평범하게 뚜벅뚜벅 걷기보다는 사뿐사뿐 날아서 입장해야 마땅하리라.   어설프게 천사의 자태를 흉내내려면 밑바닥에 무거운 가죽 밑창을 댄 낡은 장화를 신고 쿵쾅대며 뒤뚱뒤뚱 걷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벼운 맨발이 나으리라.   드레스 자락을 좀더 늘어뜨릴 걸 그랬나. 가방이 아니라 기다란 소맷자락에서 시를 꺼내는 건 어떨까. 성대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흥겨운 퍼레이드를 앞세우고, 웅장한 종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건 어떨가. 뎅-그-렁. 뎅-그-렁.   저기, 무대 위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다리를 가진 매우 정적인 탁자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작은 탁자 위에는 조용히 연기를 내뿜는 조그만 촛대 하나.   무대에 마련된 광경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촛불 아래서 '시'를 낭독해야만 할 듯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전깃불 아래서 탁, 탁, 탁 자판을 두드리며 게계적으로 써내려간 '시'를.   이것이 과연 '시'일까, 아닐까, 만약 '시'라면 세부적인 장르는 무엇일까. 괜스리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과연 '시' 속에 '산문'이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아닐까. 산문 속에서 나의 '시'는 어떤 평가를 받으려나.   그러나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보라색 술이 달린 진홍빛 커튼을 드리운 이 어두컴컴한 무대에서만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음에야.   *라이어; 고대 그리스의 악기로 일곱 줄로 된 수금.   과잉 / 쉼보르스카     새로운 별이 발견됐다. 그렇다고 하늘이 더 밝아졌다거나 부족했던 뭔가가 채워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거대하지만 동시에 까마득히 멀리 있는 별. 우리 육안에는 조그만 점으로 보일 만큼 멀고도 먼, 때로는 저보다 훨씬 작은 다른 별들보다 더 조그맣게 보이는 별. 만일 우리에게 놀라움을 음미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런 일쯤 아무것도 아니란 걸 깨닫게 되련만,   별의 나이, 별의 무게, 별의 위치, 이 모든 사실이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도 남을 만큼 위대하고 심오한 것이라 해도, 하늘과 가깝게 지내는 동료들이 모두 모여 축배의 포도주 한 잔 들이켜기에 충분할 만큼 중대하고 획기적인 가치를 지녔다 해도, 지금 이 순간 천문학자와 그의 아내, 친척들과 친구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그저 '별'일 뿐. 그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주로 지구와 관련된 잡담을 나누며 지구에서 생산된 땅콩을 으적으적 씹어 먹을 따름이다.   별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까이 있는 우리의 여인들을 위해 축배를 들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별은 언제나 좌충우돌, 계획성도 일관성도 없다. 날씨와 유행, 경기의 결과, 정책의 변화나 가계의 소득, 가치의 위기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선동적인 과업이나 중공업 발전에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회담용 탁자의 번쩍이는 광택 속에 투영되는 일도 없다. 별은 우리가 열심히 헤아리는 인생의 무수한 날들보다 더 많고, 아득하다.   얼마나 많은 별들 아래서 사람들이 태어나는지, 찰나와도 같은 짧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또 얼마나 많은 별들 아래서 사람들이 죽어가는지, 대체 이런 질문들이 다 무슨 소용이람.   새로운 별들이 출현했다. -그 별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좀 가르쳐줘. -저 멀리 회색빛 구름이 보이지? 뭉게구름의 들쭉날쭉한 가장자리와 그보다 왼쪽에 있는 아카시아 가지, 그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잖아. -아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나.   고고학 / 쉼보르스카   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여. 내 분야에서 진보는 이미 이루워졌다. 네가 나를 '고고학'이라 불르기 시작한 지 벌써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으므로.   내게는 더 이상 화석의 신들이 필요치 않다. 판독하기 쉬운 글씨들이 새겨져 있는 폐허도 마찬가지.   네가 가진 것 중 아무거나 좋으니 내게 보여다오. 그러면 네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아맞히리라. 무언가의 안쪽, 깊숙한 바닥도 좋고, 아니면 꼭대기, 맨 윗부분도 좋다. 엔진의 파편, 브라운관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 전선의 부스러기, 산산조각 난 손가락뼈. 그보다 더 작은 일부분, 아니 더욱 더 미세한 단서여도 상관없다.   네가 살던 시대에는 미처 개발되지 않았던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소와 성분들 속에서 곤히 잠자고 있던 기억의 자취를 모두 일깨우리라. 핏자국은 영원히 남는 법. 거짓은 명백하게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 번호는 사방에 메아리 치고 있다. 모든 의혹과 의도들은 공개적으로 밝혀지리라.   너는 아마 믿을 수 없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침묵 속에 닫혀버린 네 목구멍 속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음을. 먼 옛날 네가 바라보았던 풍경을 네 안구에서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네가 인생에서 죽음 말고 또 무엇을 기다려왔는지 시시콜콜 파헤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네게 남겨진 것 중에 아무것도 아닌 '무(無)'를 내게 보여다오. 나는 그 '무'를 가지고 숲과, 도로와, 비행장을 만들고, 비열함과 다정함을 되살리고, 무너진 집을 다시 복구할 테니까.   나에게 너의 시를 보여다오. 그러면 네게 말해주리라. 어째서 더 일찍도, 더 늦게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너의 시가 탄생했는지를.   저런, 아니야, 너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문자들이 잔뜩 써 있는 이 우스운 종이 쪼가리를 어서 치우렴. 내게 필요한 건 땅 위에 쌓아 올려진 네 둥그런 흙무덤과 옛날,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공기 속을 유영하던 뭔가를 태우는 냄새, 오직 그것뿐.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 쉼보르스카   우리는 그것을 모래알갱이라 알고 있지만 그 자신에게는 알갱이도 모래도 아니다. 모래 알갱이는 보편적이건, 개별적이건, 일시적이건, 지속적이건, 그릇된 것이건, 적절한 것이건, 이름 없이 지내는 익명의 상태에 익숙하다.   우리가 쳐다보고, 손을 대도 아무렇지 않다. 시선이나 감촉을 느끼지 못하기에. 창틀 위로 떨어졌다 함은 우리들의 문제일 뿐, 모래 알갱이에겐 전혀 특별한 모험이 아니다. 어디로 떨어지건 마찬가지. 별써 착륙했는지, 하강 중인지 분간조차 못하기에.   창밖에는 아름다운 호숫가 풍경, 그러나 풍경은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서 풍경은 아무런 색깔도, 형태도, 소리도, 향기도, 고통도 감지하지 못한다.   호수 바닥에는 바닥이 없고, 호수 기슭에는 기슭이 없다. 호수에 고인 물은 축축하지도, 건조하지도 않다. 자신이 물결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파도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바위를 향해 한 번도, 여러 번도 아닌 게 그렇게 휘몰아친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하늘 아닌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 하늘에서 태양은 지지 않고, 다만 스러질 뿐. 무심하게 흐르는 구름 뒤로 태양이 숨지 않고, 몸을 가리면 그저 바람이라는 이유로 공기 속을 유영하는 바람이 구름을 이리저리 휘몰고 다닐 뿐.   일 초가 지나고, 두번째 일 초, 세번째 일 초,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만 삼 초일 뿐.   급한 전갈을 지닌 사자(使者)처럼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비유일 뿐. 상상이 빚어낸 가공의 인물이 급한 듯 서두른다. 인간의 것이 아닌 어떤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과장 없이 죽음에 관하여 / 쉼보르스카   죽음은 농담을 모른다. 별이나 다리에 대해서도. 직조 기술, 채광, 곡식의 경작법이나 조선술, 빵 굽는 비법에 관해서도 알지 못한다.   내일을 설계하는 우리의 대화 속에 화제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신의 마지막 말을 느닷없이 끼어넣는다.   자신의 본업과 직결된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 무덤을 파는 일도, 관을 짜는 것도, 모든 작업에 으레 수반되는 뒷정리조차도.   오로지 '죽이는 순간'에만 열중한 나머지 매사를 서투르게 처리하고 만다. 체계적인 계획이나 훈련도 없이, 이제 막 뭔가를 습득한 미숙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처럼.   대개는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지만, 실패 또한 얼마나 많았는지. 헛된 발길질과 또다시 반복되는 시도!   때로는 공중의  파리를 잡기에도 힘이 부치고, 몇 마리의 애벌레들과 기어가지 시합에서 패배하는 경우도 있다.   구근(球根)과 꼬투리, 더듬이, 지느러미, 호흡기, 짝짓기를 위한 깃털, 겨울나기에 필요한 털가죽, 죽음이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이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죽음에 업무가 잔뜩 밀렸음을 경고하고 있다.   적개심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전쟁이나 테러를 동원한 우리의 지원 사격도 아직까진 턱없이 부족하다.   심장은 알 속에서 힘차게 고동친다. 갓난아기의 골격은 나날이 성장한다.   씨앗은 두개의 떡잎으로 싹을 틔우고, 때로는 지평선에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로 무럭무럭 자라난다.   스스로가 전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전혀 전능하지 않다는 살아 있는 증거.   어차피 삶에서는 단 한순간의 불멸도 기대할 수 없다.   죽음은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뒤늦게 찾아드는 법.   보이지 않는 문의 손잡이를 움켜잡고 헛되이 흔든다. 정해진 시간 안에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려 발버둥 쳐도 피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법이련만.   우리 조상들의 짧은 생애 / 쉼보르스카   서른 살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노년기는 단지 돌이나 나무의 특권일 뿐. 유년기는 새끼 늑대가 무럭무럭 자라듯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삶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최대한 서둘러야만 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첫눈이 내리기 전에.   열세 살에 자식을 낳은 엄마들, 갈대숲에서 새 둥지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열네 살의 사냥꾼들. 어부들을 휘하에 거느린 스무 살의 우두머리들. 그들은 막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벌써 사라졌버렸다. 불멸은 종말 속에 너무도 빨리 융화되었으니, 마녀들은 몇 개 안 남은 쓸만한 이빨을 갈면서 저주 섞인 가래침을 내뱉었다. 아버지의 눈앞에서 아들은 남자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텅 빈 동공 속에서 손자가 태어났다.   애초부터 나이 따위를 헤아릴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다만 그물과 냄비와 헛간과 도끼의 숫자를 세었을 뿐. 밤하늘의 보잘것없는 별들에겐 그처럼 관대하기만 하던 세월이 그들에겐 빈손을 불쑥 내밀었다가는 그것마저 아깝다는 듯 금세 거둬들이고 말았다. 한 발자국 가까이, 두 발자국 가까이 어둠 속에서 샘솟았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빛나는 강물을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미뤄진 질문도, 때늦은 계시도 없었다. 단지 타이밍을 정확히 맞춘 생의 체험만이 있었을 뿐. 지혜는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나기 전에 분명히 알아야만 했다. 모든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에 똑똑히 들어야만 했다.   선과 악- 그들은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실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악이 승리하면, 선은 자취를 감춘다는 걸, 선이 모습을 드러내면, 악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는 걸. 그러므로 기쁨 곁에는 언제나 공포가 따르고, 절망에는 고요한 희망의 그림자가 깃들기 마련이란 걸. 인생이란 아무리 긴 듯해도, 언제나 짧은 법.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기엔 너무나도 짧은 법.   2 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 쉼보르스카   우리의 20세기는 이전의 다른 세기들보다 훨씬 발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입증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모든 연도에 일련번호가 매겨졌다. 흔들리는 걸음걸이, 숨가쁜 호흡.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이미 너무도 많이 일어났다. 또한 기대했던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20세기는 행복을 향해서, 따뜻한 봄을 향해서 전진할 예정이었다.   공포는 골짜기 너머, 산 너머, 멀리멀리 내동댕이칠 예정이었다. 진실은 거짓보다 한발 앞서 목표 지점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몇 가지 비극이 우리를 엄습했다. 전쟁과 굶주림. 그와 유사한 다른 재앙들----   무방비 상태의 무력한 사람들을 존중할 예정이었다. 혹은 그에 준하는 다른 가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생을 즐기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결코 실현되지 못할 임무를 떠맡은 것과 매한가지.   어리석다는 건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다. 지혜롭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희망, 그것은 더 이상 저 풋풋한 어린 소녀도, 그와 비슷한 그 무엇도 아니리니, 애석하기 짝이 없구나. 바야흐로 신은 인간이 선하면서,  동시에 강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수긍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선함과 강함은 여전히 공존하지 못한다. 선한 인간은 독하지 못하고, 독한 인간은 선하지 않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시대의 아이들 / 쉼보르스카     우리들은 시대의 아이들, 바야흐로 시대는 정치적.   너와, 우리와, 너희의 모든 일들, 낮과 밤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이 모든 것이 정치적.   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의 유전자에는 정치적인 과거가, 우리의 피부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우리의 눈동자에는 정치적인 양상이 담겨 있다.   무엇에 대해 말하건, 늘 반론이 돌아오고, 무엇에 대해 침묵하건, 늘 웅변으로 돌변하며, 마지막엔 걸국 정치적인 내용으로 귀결되어진다.   원초적인 밀림을 지날 때도 우리는 정치적인 토대 위에서 정치적인 발걸음을 옮긴다.   비정치적인 시 역시 사실은 정적일 따름이니 하늘 저편에는 휘영청 달이 밝건만, 그 아래 사물들은 달빛에 물들지 않았다. 여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죽느냐 사느냐. 이 물음은 과연 무슨 뜻일까? 어디 한번 대답해봐요, 내 사랑. 결국 여기에도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다.   반드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더라도 모든 사물은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받았다. '석유'나 '단백질 식품' 또는 '가공 원료'로 존재할지언정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정치적이다.   아니면 '회담 탁자'여도 무방하리라. 몇 달씩 모여 탁자 모양에 대해 다투고: 그 주변에 둘러앉아 삶과 죽음에 대해 심각한 협상을 나누는 둥그렇거나 혹은 네모난 '회담 탁자'   그동안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동물들은 죽었고, 집들은 불탔고, 들판은 폐허가 되었다. 좀처럼 정치적이지 않았던 아득한 태고의 그 어떤 시대처럼.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 쉼보르스카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조그만 실험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라 밝은 대낮 한 개의 커다란 불빛 아래서, 어두운 밤, 수억만 개의 불빛 아래서.   어쩌면 우리들은 실험용으로 제작된 특별한 세대인지도 몰라. 유리병 속에서 또 다른 유리병으로 옮겨지고. 삼각 플라스크에 담겨져 이리저리 뒤섞이고, 눈보다 더 정교한 그 무엇에 의해 면밀히 관찰되고, 그러다가 결국엔 각각 핀셋으로 접혀서 들어 올려질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영 딴판일지도 몰라. 아무런 간섭도, 훼방도 없을지 몰라. 모든 변화는 정해진 계획에 따라 스스로 생겨나고, 스스로 움직일 지도 몰라. 그래프의 눈금은 미리 예측한 지그재그의 윤곽을 천천히, 정확하게 아로새겨 나갈지도 몰라.   지금까지 그래왔듯 우리에겐 흥미로운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라. 감시용 모니터를 작동시키는 일은 좀처럼 없을지도 몰라. 단지 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그것도 큰 규모일 경우에만, 혹은 지구의 동토(凍土) 위로 미확인 비행 물체가 출현했을 때만, 아니면 A지점에서 B지점까지 대규모의 민족 이동이 발견된 상황에만.   어떠면 정반대일지도 몰라. 그것에선 사람들이 자질구레한 사건들에 관심을 보일지도 몰라. 자, 보라구! 거대한 화면 속에서 어린 소녀가 소매에 단추를 달기 위해 열심히 바느질을 하고 있잖아. 마침내 경보가 울리면 직원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겠지. 박동하는 조그만 심장을 가냘픈 몸 속에 품고 있는 저 사랑스러운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손에 들고서도 얼마나 의연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지. 누군가가 기쁨에 넘쳐서 소리칠 거야. "자, 어서 가서 보스에게 전하시오. 와서 직접 보시라고!"   공짜는 없다 / 쉼보르스카   공짜는 없다. 모든 것은 다 빌려온 것이다. 내 목소리는 내 귀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자. 여기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되어 있다. 심장은 반납 예정이고, 간도 돌려주기로 되어 있다. 물론 개별적인 손가락과 발가락도 마찬가지.   계약서를 찢어버리기엔 이미 늦었다. 내가 진 빚들은 전부 깨끗이 청산될 예정. 내 털을 깍고, 내 가죽을 벗겨서라도.   나는 채무자들로 북적대는 세상 속을 조용히 걸어 다닌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날개에 대한 부채를 갚으라는 압박에 시달리는 중. 또 다른 이들은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나뭇잎 하나하나마다 셈을 치르는 중.   우리 안의 세포 조직은 송두리채 채권자의 손으로 넘어가버렸다. 솜털 하나, 줄기 하나도 영원히 간직할 순 없는 법.   명부의 기록은 모두 다 정확하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는 빈털터리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남겨질 예정이다.   나는 기억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이 복잡한 청구서를 스스로 펼쳐 보게 되었는지.   이 거래에 반대한 지금 거절 증서를 우리는 '영혼'이라 부른다. 이것은 명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유일한 항목이기도 하다.   슬랩스틱 코미디 / 쉼보르스카   만일 천사가 있다면, 절망으로 끝난 희망에 대한 우리의 소설을 그들이 과연 읽고 싶어 할는지 의심스럽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시를 외면할 것 같아서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의 연극 속에 등장하는 비명과 경련은-짐작컨대- 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리라.   천사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비번을 맞은 천사들, 그러니까 비인간적인 그 존재들은 우리를 보면서 무성영화 시대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떠올리리라.   옷깃을 갈기갈기 쥐어뜯고, 고통으로 이를 갈며, 탄식하고 울부짖는 자들보다는 -적어도 내 생각으론-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푸라기 대신 가발을 움켜잡거나 배고파서 자신의 구두끈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저 불쌍한 사내를 훨씬 선호하리라.   허리에서 위쪽으로는 뜨거운 가슴과 열정, 하지만 그 아래 바짓가랑이 속에는 겁먹은 생쥐 한 마리. 오, 그래, 그들은 틀림없이 손뼉 치며 환호하리라.   끊임없이 계속되던 무모한 추적은 도망자들을 피해 도망가는 탈주로 뒤바뀐다. 터널의 끝에서 기다리는 한 줄기 빛은 호랑이의 눈동자임이 밝혀진다. 백 가지 재앙은 백 가지 자기 심연 위를 구르는 백 가지 익살스러운 재주넘기로 탈바꿈한다.   만일 천사가 존재한다면 -부디 바라건대-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하리라. 공포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 완벽한 적막 속에 자행되기에 차마 '살려달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그 아슬아슬한 쾌락의 본질을.   용기 내어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그들은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신나게 박수를 치리라.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절대로 슬퍼서가 아니다. 그저 너무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사건들에 관한 해석 제1안 / 쉼보르스카     만일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면, 우리는 아마도 오랫동안 망설였으리라.   우리에게 제공된 육체는 어딘가 불편하고, 제대로 맞지 않아 그만 흉하게 망가져버렸다.   허기를 달래라고 제공된 음식들은 도리어 우리를 메스껍게 했다. 수동적으로 세습된 각종 성향들과 분비샘의 횡포는 우리를 질리게 만들었다.   우리를 에워싸기로 한 세상은 끊임없이 썩어 들어갔다. 그 속에서 원인에 대한 결과가 격노하여 함성을 질렀다.   우리에겐 개개인의 운명을 감시하라는 사명이 주워졌지만 무한한 슬픔과 공포 때문에 다수가 거부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야기되었다. 죽은 아기를 낳기 위해 출산의 고통을 감내할 필요가 있을까, 만일 결코 뭍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뱃사람이 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들은 죽음에 동의했다. 그러나 모든 유형에 다 찬성한 것은 아니다. 사랑이 우리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사랑만 그렇다.   바다가 시시각각 변하듯 예술 또한 유한한 것이라고 음악의 신 뮤즈는 우리에게 조심스레 경고했다.   모두가 이웃 나라의 간섭이 없는 조국을 원하며 전쟁과 전쟁 사이 휴전 기간 동안에 태어나기를 갈망했다. 우리 중 아무도 권력을 장악하거나 혹은 그것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 혹은 타인의 헛된 환상으로 인해 희생양이 되기를 바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행렬이나 군중 속으로, 아니 한술 더 떠,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부족들 속으로 뛰어들기를 원하는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역사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순 없었으리라.   바로 그때 너무 일찍 빛을 발한 몇 개의 별들이 느닷없이 소멸되고, 식어버렸다. 결정을 내리기엔 최적이 시간이다.   수많은 불길한 징조 속에서 마침내 후보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몇은 탐험가 또는 의사가 되려 했고, 몇몇은 인정받지 못하는 고독한 철학자를 원했다. 이름 없는 정원사를 꿈꾸는 사람도, 예술가나 음악가 지망생도 있었다. -더 이상 다른 신청자는 없었지만 아무튼 모두가 자신의 바람을 이루지는 못했다.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금방 되돌아와야 하고, 또 반드시 돌아와야 할 짧은 여행을 제안 받았다.   영원성이 철저히 제거된. 유한한 세월 속으로의 여행, 단조롭고 한결같은, 동시에 시간의 순환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의 여행, 어쩌면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문득 우리는 의구심을 느꼈다.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다고 해서, 과연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한발 앞서 내리는 결정을 과연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망각 속에 던져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만일 선택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저 아래, 저곳에서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우리는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이미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무모한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연약한 갑초가 바위틈에 달라붙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도 결코 자신을 바위에서 떼어놓지 못할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서,   조그만 동물 하나가 굴속에서 열심히 구멍을 파고 있었다.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활기와 희망을 품고서.   순간 우리 스스로가 소심하고, 보잘것없고, 우습기 짝이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저 세상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참을성이 부족한 이들이 제일 먼저 떠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첫번째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래, 그것은 틀림없는 생생한 불꽃이었다.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현실의 강기슭에서 활활 불을 피웠다.   그들 중 몇몇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귀향길에 올랐다. 그러나 끝내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과연 그들의 손에는 저 세상에서 쟁취한 뭔가가 들려 있었을까? 정말로 그랬을까?   이것은 커다란 행운 / 쉼보르스카   이것은 커다란 행운 우리 스스로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눈군가가 아주 긴 세월 동안, 적어도 이 세상보다는 더 오래된 까마득한 옛날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 항구히 존재해야만 하리.   한계투성이에다 말썽을 일으키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육신 따위는 훌쩍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하리.   연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보다 선명한 영상을 위해셔, 결정적인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재촉하고, 옭아매는 시간의 한계쯤은 당당히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하리.   자,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세부적인 사랑이나 자질구레한 시간들과는 영원히 작별의 인사를 나누시오,   요일을 계산하고 따져보는 것쯤은 얼마든지 무의미한 행동으로 치부할 수 있어야 하리.   우체통에 편지를 던져 넣는 일 정도는 젊은 날의 어리석은 객기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하리.   '잔디를 밟지 마시오'라는 표지판 따위는 정신 나간 소리쯤으로 무시할 수 있어야 하리.   순간 / 쉼보르스카   초록빛으로 물든 언덕길을 오른다. 출발, 그 풀밭 위 작은 꽃들, 그림책 삽화에서 본 듯한 풍경, 안개 낀 하늘엔 어느새 푸른 기운이 감돌고 저 멀리 또 다른 봉우리가 적막 속에 펼쳐진다.   고생계(古生界)도 중생계(中生界)도 애초에 없었던 듯 스스로를 향해 포효하는 바위도, 심연의 융기도 없었던 듯, 번쩍이는 섬광 속엔 낮의 숨결을 찾을 길 없다.   뜨거운 열병 속에서도 얼음장 같은 오한 속에서도 아직 평원은 여기까지 떠밀려오지 않은 듯,   바다가 소용돌이치고 해안선이 산산조각 나는 것도 오로지 딴 세상에서나 벌어지는, 낯선 일인 듯.   현지 시각 9시 30분, 모든 것은 약속대로 정중하게 그 자리에 놓여 있다. 골짜기의 시냇물은 시냇물의 모습으로 한결같이. 오솔길은 오솔길의 모양으로 언제나 그렇게. 숲은 숲의 형상을 갖추고 영원히 그 자리에. 언덕 위를 나는 새들은 언덕 위를 나는 새의 역할에 충실하게.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 이곳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긴 찰나의 순간. 지속되기를 모두가 그토록 염원했던 지상의 무수한 시간 중 하나.   무리 속에서 / 쉼보르스카   나는 바로 이러이러한 사람. 그것은 모든 우연이 그러하듯 이해할 수 없는 우연.   다른 이들이 내 조상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둥지에서 날아올랐을 수도. 다른 그루터기에서 다른 껍데기를 쓰고 기어 나왔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자연의 옷장에는 꽤나 많은 옷들이 걸려 있다. 거미, 갈매기, 들뒤의 의상. 모든 것이 맞춘 것처럼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닳아서 해질 때 까지 각자 주어진 의상을 열심히 입는다.   나 역시 스스로 선택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지금보다는 훨씬 덜 개별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었기에. 물고기 떼나 개미집, 윙윙대는 벌 떼의 일부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속의 한 조각으로.   지금보다는 훨씬 덜 행복한 존재가 될 수도 있었기에. 누군가의 모피를 위해, 혹은 명절 음식용으로 사육될 수도 있었기에. 유리 상자 속에 갇혀 그 안에서 헤엄쳐 다니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었기에.   시시각각 다가오는 불길 속에 속수무책 대지에 뿌리박은 한 그루의 나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휩쓸려 무자비하게 짓밟혀진 풀잎.   누군가에게는 찬란하게 보일 수도 있는 어두운 별빛 속을 돌아다니는 수상쩍은 사람이 될 수도 있었기에.   만일 내가 사람들에게 단지 공포의 대상이거나 혐오감. 혹은 동정심이나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면?   지금 내가 속한 종족이 아닌 전혀 다른 종족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앞길이 막막하게 막혀버렸다면?   지금껏 운명은 내게 자애로웠다.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들은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자꾸만 뭔가가 견주고 싶어 하는 내 열망이 거세당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이것은 내가 완전히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름 / 쉼보르스카   구름을 묘사하려면 급히 서둘러야만 하지. 순식간에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형상으로 변하기에.   구름의 속성이란 모양, 색조, 자세, 배열을 한순간도 되풀이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기억할 의무가 없기에 사뿐히 현실을 지나치고,   아무것도 증언한 필요 없기에 곧바로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네.   구름과 비교해보면 인생이란 그래도 확고하고 안정적인 것. 상당히 지속적이고, 꽤 영원하네.   구름 곁에서는 바윗덩이조차도 의지할 수 있는 형제처럼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네. 그에 비하면 구름은 마치 변덕스러운 먼 사촌 누이 같네.   인류여, 원한다면 계속해서 존재하라. 그 다음엔 차례차례 죽는 일만 남았으니. 구름에겐 이 모든 것이 조금도 낯설거나 이상스럽지 않다네.   너의 전 생애와 아직은 못다한 나의 생애 너머에서, 구름은 예전처럼 우아하게 행진을 계속하네.   구름에겐 우리와 함께 사라질 의무가 없다네. 흘러가는 동안 눈에 띄어야 할 필요도 없다네.   /최성은 역.   수화기 / 쉼보르스카   잠에서 깨어나는 꿈을 꾼다,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기에.   죽은이가 내게 전화한다고 굳게 믿는 꿈을 꾼다.   수화기를 들기 위해 손을 내미는 꿈을 꾼다.   그런데 늘 사용하던 그 수화기가 아니다. 갑자기 무거워졌다. 마치 어떤 것에 꽉 매여 있거나 어딘가에 깊숙이 파묻혔거나 무언가가 뿌리를 꽁꽁 묶어놓은 것처럼. 수화기를 들어 올리려면 지구 전체를 끌어당겨야만 하리라.   쓸데없는 일에 힘을 쓰며 쩔쩔매는 꿈을 꾼다.   적막이 찾아오는 꿈을 꾼다. 전화벨 소리가 잠잠해졌기에   스르르 잠들었다가 또다시 벌떡 깨는 꿈을 꾼다.   가장 이상한 세 단어 / 쉼보르스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無)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식물들의 침묵 / 쉼보르스카   나와 너희들 사이의 일방적인 낮익힘은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구나.   나는 잎이 뭔지, 꽃잎과 이삭, 솔방울 줄기가 어떤 모양인지. 사월이나 십이월에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잘 알고 있어.   너희는 내 관심따위엔 아무런 반응이 없지만 나는 부러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채 너희들 중 몇몇을 정성껏 들여다보곤 하지.   단풍, 우엉, 우산이끼. 겨우살이, 히스, 향나무, 물망초, 너희는 나한데 이름으로 불리지만, 너희에게 나는 아무 이름도 없어.   우리는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거란다. 동승한 사람들끼리는 의례 이야기를 나누는 법. 최소한 날씨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거나 스쳐 지나가는 역들에 대해서 떠들곤 하지.   우리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화제가 부족하진 않을 거야. 우리를 지탱해주는 건 같은 별이고, 같은 법칙에 따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니까. 자신만의 방법으로 뭔가를 이해하려 한다는 점. 우리가 모르는 것들조차도 서로 많이 닮았으니까.   뭐든 물어봐도 좋아. 최대한 열심히 설명해줄께. 내 두 눈으로 무얼 보고 있는지. 어째서 내 심장이 고동치는지. 왜 내 육신은 대지에 뿌리박혀 있지 않은지.   그러나 하지도 않은 질문엔 대답할 도리가 없잖니. 게다가 너희에게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의미라면 더더욱 그렇지.   덤불, 관목, 잔디, 골풀- 내가 너희를 향해 속삭이는 건 전부 혼잣말이구나. 너희는 좀처럼 귀 기울이려 하지 않으니.   꼭 필요한 줄 알면서도 불가능한 게 바로 너희들과의 대화. 황망한 삶에서 시급한 줄 알면서도 기약 없이 미루다 끝내 실현되지 못하는.   어린 여자아이가 식탁보를 잡아당긴다 / 쉼보르스카   여자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 지 일 년 남짓 되었다. 모든 것이 미리 조정되고, 통제되어질 수 없는 이 세상에.   오늘 시도하는 실험은 제 스스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사물들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이 밀고, 당기고, 들어 올리고, 자리를 옮기는 일을 도와주어야만 한다.   물론 모든 사물이 현재 위치에서 이탈하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장롱과 찬장, 단단한 벽과 탁자는 꿈쩍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고집 센 탁자 위에 깔린 식탁보는 -만일 끝 자락이 제대로만 손에 잡힌다면- 여행을 떠나려는 의지를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다.   식탁보 위에는 유리잔, 접시들, 우유병, 숟가락, 사발이 이리저리 놓여 있어 흔들고픈 욕망을 일렁이게 만든다.   그것들이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비틀거릴 때 과연 어떤 움직임을 택할지 너무나 궁금하다. 천장에서 정처 없이 헤매 다닐까? 등잔 근처를 빙글빙글 비행할까? 창턱을 껑충 뛰어넘어 나무를 향해 날아갈지도?   위대한 과학자 뉴턴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봐요, 뉴턴 선생님, 하늘에서 내려다보다가 손이나 흔들어주시죠.   이 실험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꼭 그렇게 되리라.   추억 한토막 / 쉼보르스카   한창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우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았네.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소녀, 아, 무척이나 아름다웠네. 그녀의 자태가 눈부시게 황홀했기에 우리는 무심히 휴가를 즐길 수만은 없었다네.   바시아는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고, 크리스티나는 반사적으로 남편의 손을 꼭 잡았네. 순간 나는 생각했지: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하리라. -당분간 여기 오지마 며칠 동안 내내 비가 올 거래.   과부인 아그네슈카만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그 사랑스러운 소녀를 반겼다네.   웅덩이 / 쉼보르스카   어린 시절 두려움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언제나 웅덩이를 피해 가곤 했다. 소나기가 내리고 난 뒤 새로 생긴 것일수록 더욱 조심했다. 겉보기에는 서로 비슷비슷하지만 개중에는 한없이 깊은 것도 있으니까.   한 걸음 내닫는 순간 몸 전체가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 도약하는 순간, 바닥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 좀더 깊숙이 밑바닥으로 수면에 비추어진 구름 저편까지 아니 그보다 더 멀리.   시간이 지나면 웅덩이는 마르고, 내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나는 어딘가에서 영원히 덫에 걸려버렸다. 공간 속으로 끄집어내지 못한 비명 소리와 더불어.   먼 훗날에야 깨달았다. 세상의 법칙 속에는 항상 운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아슬아슬 불운이 덮쳐올 듯해도 꼭 실제로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첫사랑 / 쉼보르스카   사람들은 말한다. 첫사랑이 가장 소중하다고. 매우 낭만적이긴 하지만 내 경우는 아니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가 없어지고, 어떤 일이 일어났다 사라져버렸지만.   자질구례한 추억의 물건들을 만져보거나 리본도 아닌 노끈으로 아무렇게나 묶인 편지 뭉치를 열어볼 때도, 내 손은 결코 떨리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단 한번의 만남 차가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나눈 몇 마디 의례적인 대화.   다른 사랑들은 지금껏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숨 쉬고 있다. 그러나 내 첫 사랑은 호흡이 가빠 숨을 내쉴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그게 바로 내 첫사랑. 감히 다른 사랑이 못하는 걸 할 수 있으니- 기억조차 나지 않고, 꿈에도 깃들지 않는 그 사랑은 나를 죽음에 익숙하게 만들어버린다.   영혼에 관한 몇 마디 / 쉼보르스카   우리는 아주 가끔씩만 영혼을 소유하게 된다. 끊임없이, 영원히 그것을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일 년 그리고 또 일 년, 영혼이 없이도 시간은 그렇게 잘만 흘러간다.   어린 시절 이따금씩 찾아드는 공포나 환희의 순간에 영혼은 우리의 몸속에 둥지를 틀고 꽤 오랫동안 깃들곤 했다. 때때로 우리가 늙었다는 섬뜩한 자각이 들 때도 그러하다.   가구를 움직이거나 커다란 짐을 운반할 때 신발 끈을 꽉 동여매고 먼 거리를 걷거나 기타 등등 힘든 일을 할 때는 절대로 우리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설문지에 답을 적거나 고기를 썰 때도 대개는 상관하지 않는다.   수천 가지 우리의 대화 속에 겨우 한 번쯤 참견할까 말까, 그것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원체 과묵하고 점잖으니까.   우리의 육신이 쑤시고 아파오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근무를 교대해버린다.   어찌나 까다롭고 유별난지 우리가 군중 속에 섞여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 하찮은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거는 우리들의 암투와 떠들썩한 음모는 영혼을 메스껍게 한다.   기쁨과 슬픔 영혼에게 이 둘은 결코 상반된 감정이 아니다. 둘이 온전히 결합하는 일치의 순간에만 우리 곁에 머무른다.   우리가 그 무엇에도 확신을 느끼지 못할 때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는 순간에만 영혼의 현존을 기대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물 가운데 추가 달린 벽시계와 거울을 선호한다.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제 임무를 수행하므로.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갈 건지 아무 말도 않으면서 누군가가 물어봐주기를 학수고대한다.   보아하니 영혼이 우리에게 그러한 것처럼 우리 또한 영혼에게 꼭 필요한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이른 시간 / 쉼보르스카   나 아직 잠들어 있다. 그동안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창문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어둠은 회색빛으로 바랜다. 방이 흐릿한 공간 너머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창백하고 불안정한 광선들이 저편을 요청한다.   모든 일들이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진행한다. 이것은 엄연한 의식이므로. 천장과 벽 사이의 평명에 빛이 스며들면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어떤 것이, 오른 쪽으로부터 왼쪽으로, 형상의 선명한 분리가 시작된다.   사물과 사물 사이 비좁은 간격에서 먼동이 터오고, 유리컵과 문고리에서 첫번째 섬광이 반짝 빛난다. 모두가 단지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명확히 존재하는 것들이다. 어제 어디론가 밀려났던 그것,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그것이 지금은 확고한 틀 안에 담겨져 있다. 아직 세부적인 항목들만 시각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뿐.   그러나 주의, 또 주의! 여러 가지 징후에 따르면 색깔은 반드시 되돌아오는 법. 심지어 가장 사소한 존재들조차 자신의 고유한 빛깔과 그림자의 음영을 회복하는 법.   드물지만 이따금 날 놀라게 하는 그것은 꼭 필요한 일. 일상적으로 나는 '때늦은 증인'의 역할을 연기하며 늦은 잠에서 깨어난다. 이미 기적이 일어나고 난 뒤에. 이미 일과가 확정되고 난 뒤에. 새벽이 아침으로 멋지게 탈바꿈하고 난 뒤에.   통계에 관한 기고문 / 쉼보르스타   백 명의 사람들 가운데   모든 것을 아주 잘 하는 사람 -쉰둘   매 순간 확신이 없는 사람 -나머지 전부 다   비록 오래가진 못할지라도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 -최대한 많이 잡아 마흔아홉   달리 행동하는 법을 몰라 늘 착하기만 한 사람 -넷, 아니, 어쩌면 다섯   시기심 없이 순수하게 찬사를 보낼 줄 아는 사람 -열여덟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일흔 일곱   진심으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 -최대한 스물 하고 몇 명   혼자 있을 땐 전혀 위협적이지 않지만 군중 속에서는 사나워지는 사람 -틀림없이 절반 이상   주변의 강압에 의해 잔인하게 돌변한 사람 -이 경우는 근사치조차 모르는 편이 나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치는 사람보다 단지 몇 명 더 많을 뿐   인생에서 몇 가지 물건들 말고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는 사람 -마흔 (내가 틀렸길 간절히 바라지만)   불빛도 없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여든 셋 (지금이건, 나중이건)   연민을 느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아흔아홉   죽게 마련인 사람 -백 명 중에 백 명 모두 이 수치는 지금껏 한번도 바뀐 적이 없음.   9월 11일자 사진 / 쉼보르스카   그들은 불타는 계단에서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몇 명에서 조금 더 많거나 아니면 적거나.   사진은 그들을 어떤 생에서 멈춰 세웠다. 대지를 향하고 있는 미지의 상공에서 그들의 현재를 온전히 포착했다.   현재로선 모든 것이 무사하다. 각자의 얼굴도 그대로고, 몸속에서 빙글빙글 순환 중인 피도 그대로다.   머리카락이 엉클어지고, 주머니에서 열쇠와 동전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기까지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제 막 열린 어떤 공간의 가장자리. 공기가 유영하고 있는 한정된 구역 내에서.   내가 지금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뿐. 그들의 수직 비행에 대해 구구절절 묘사하거나, 아니면 마지막 문장을 보태지 않고 과감히 끝을 맺는 것.   목록 / 쉼보르스카   질문 목록을 만들어보았다. 솔직히 답변을 기대하진 않았다. 대답을 듣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거나, 아니면 그 대답을 이해할 여력이 내게는 부족하므로.   질문 목록은 매우 길며, 중요한 사안과 덜 중요한 사안을 포함하고 있다. 당신들을 따분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에 몇 가지만 발표하겠다.   무엇이 진실이었는가. 행성, 혹은 행성의 대체 공간에 마련된 이 공연장에서, 입장권과 퇴장권을 한꺼번에 요구하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내 비록 생생하게 현존하는 다른 세상들과 비교할 수 있을 때를 놓쳐버렸지만 아무튼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 현실 속의 이세상은 어떠한가.   내일자 신문에는 무엇이 씌어 있을까.   전쟁은 언제 끝나며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까.   네게서 훔쳐간-내가 잃어버렸던 소중한 반지는 누구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을까.   존재하면서 동시에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위한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이 열 명의 사람들은 또 어떤가- 우리는 정말로 아는 사이였을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M이 내게 애써 말하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옳은 것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옳지 않은 것을 선택했을까. 더 이상 혼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내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잠들기 직전에 끼적였던 몇몇 질문들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글씨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때로 나는 의심을 품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타당한 기호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질문들 또한 언젠가는 나를 버리고 홀연히 사라지리라.   모든 것 / 쉼보르스카   "모든 것"- 이것은 뻔뻔스럽고 주제넘기 짝이 없는 낱말이다. 따옴표 안에 집어넣고, 매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마치 빼먹은 건 하나도 없다는 듯, 집중하고, 아우르고, 수용하고 포함하는 척 그럴듯하게 연기를 하고 있다. 그저 순간적인 폭풍의 끝자락에 불과할 뿐이면서.   부재 / 쉼보르스카   내 어머니가 즈둔스카 볼라 출신의 B모 씨와 결혼할 가능성은 절대로 희박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면-그건 내가 아닐 것이다. 그 애는 사람 이름이나 얼굴, 혹은 처음 듣는 멜로디를 외우는데 나보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척 보기만 해도 새의 품종을 알아맞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어 점수는 형편없지만 물리나 화학에서 뛰어난 점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내 작품들보다 훨씬 흥미로운 시를 남몰래 끼적거릴지도 모른다.   같은 시각, 내 아버지가 자코파네 출신의 R 모 씨와 결혼할 가능성은 절대로 희박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면-그건 내가 아닐 것이다. 그 애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일에 훨씬 고집스러울지도 모른다. 두려움 없이 깊은 물에 첨벙 뛰어들지도 모른다. 여론의 동요에 쉽게 흔들릴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지만,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적은 거의 없고, 주로 마당이나 운동장에서 사내아이들과 공을 차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두 아이는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짝 친구는 절대로 아닐 테고, 혈연관계도 아닐 테니, 단체 사진에서는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리라.   "이봐요, 여학생들, 이쪽에 서보세요." -사진사가 외친다- "저기 작은 학생은 앞으로, 거기 키 큰 학생은 뒷줄로. 내가 신호를 하면 다들 예쁘게 웃으세요. 자, 마지막으로 인원수를 점검해보죠. 모두 다 있는 거죠?"   "네 아저씨, 모두 다 있어요."   ABC / 쉼보르스카   이제 절대로 알 수 없으리라. 나에 대해서 A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B는 결국 나를 용서했는지. 어찌하여 C는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했는지. D의 침묵에 E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 F가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는지. (혹시라도 기대를 했었다면) 모든 걸 잘 알면서도 G는 왜 모른 척했는지. H는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I가 덧붙이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 어떤 의미라도 남겼는지. J와 K, 그리고 나머지 알파벳에게.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 쉼보르스카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서늘하겠습니다. 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와 사야가 흐려지겠습니다. 도로는 미끄럽겠습니다.   한낮에는 북쪽에서 다가오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곳에 따라 점차 날씨가 개는 곳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강한 돌풍이 불어와 천둥 번개가 칠 수도 있겠습니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기압은 오르겠습니다.   내일은 대체로 날씨가 맑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 계신 분들에겐 우산이 유용하겠으니 외출 시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노교수 / 쉼보르스카   그에게 물었다. 그 시절에 대해서. 순진하고, 성급하고 어리석고, 미처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우리들이 아직 젊은이었던 시절.   그 시절에서 남은 게 조금은 있죠, 젊음만 빼고요.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여전히 알고 있냐고. 인류에게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 그건 아마 착각중에서도 가장 큰 착각일걸요.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미래에 대해서, 여전히 앞날이 훤히 보이느냐고.   그러기엔 역사책을 너무 많이 읽었네요.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사진에 관해서. 액자 속에 있는, 책상 위에 있는.   예전엔 있었지만, 다들 떠나버렸어요. 남동생, 사촌, 제수씨, 아내, 아내의 무릎 위에 앉은 딸, 딸의 품에 안긴 고양이.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벚나무. 그 벚나무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때로는 행복하냐고.   아직도 일을 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벗에 대해서. 아직 친구가 있느냐고.   자기들도 벌써 전(前) 조교를 갖게 된 과거에 내 전 조교였던 몇몇 친구들. 살림을 맡아주는 루드밀라 부인, 아주 가까운 친구 하나는 멀리 해외에 나가 있고, 도서관에 근무하는 두 명의 연인들, 미소가 아름답죠. 우리 집 맞은편에 사는 어린 그제쉬,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기분은 어떤지, 건강은 괜찮은지.   커피와 보드카 담배를 삼가고, 상념이든 물건이든, 무거운 건 절대 짊어지고 다니지 말라더군요. 그럴 때면 못 들은 척할 수밖에요.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정원에 대해서. 그 정원에 놓인 벤치에 대해서.   날씨가 화창한 저녁이면 하늘을 보곤 해요. 얼마나 볼거리가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니까요. -그가 대답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로마 제국의제 16대 황제. 로마의 5명의 현명한 황제 중 마지막 황제였으며, '철인황제(哲人皇帝)라고 불렸다.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저서로는 을 남겼다. 그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은 데다가 페스트까지 성행하는 바람에 쇠퇴하게 된다.   관망(觀望) / 쉼보르스카   타인처럼 스쳐갔다. 어떤 말도, 몸짓도 없이, 그녀는 가게로 향하고, 그는 자동차로 걸어갔다.   어쩌면 당황해서, 어쩌면 경황이 없어서, 아니면 짧은 시간, 서로를 영원토록 사랑했음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하긴 그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보장도 없다. 멀리서는 그랬지만, 가까이서는 전혀 아닐 수도.   나는 창가에서 그들을 봤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틀릴 확률은 매우 높다.   그녀는 유리문 안쪽으로 사라졌고, 그는 운전석에 올라 서둘러 출발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설사 일어났다 한들 또 어떠리.   내가 본 장면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단지 한순간뿐이었으니 지금 나는 덧없는 시구 속에서 독자 여러분을 설득하려 애쓰고 있는 중. 그것은 슬픈 일이었노라고.   사건에 휘말린 어느 개의 독백 / 쉼보르스카   개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나는 선택된 개였다. 혈관에는 늑대의 피가 흐르고, 그럴듯한 족보도 있었다. 자연의 향기를 듬뿍 마시며, 고산 지대에서 살았다. 햇빛이 쨍쨍할 땐 풀밭에서, 비가 오면 전나무 숲에서, 눈이 내릴 땐 동토(凍土)에서 지냈다.   번듯한 집도 있고, 시중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게 먹이를 공급하고. 씻기고. 빗질하고, 우아하게 산책을 시켜 주었다. 그것은 친밀감의 차원이 아닌 존경의 표시였다. 내가 누구의 개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몸에 이가 들끓는 하찮은 잡종들도 주인을 가질 순 있다. 하지만 주의하시라-함부로 비교해서는 안 되는 법. 내 주인은 정말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하려한 무리들이 늘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두려움과 찬탄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는 다들 질투 섞인 비웃음만 보냈다. 왜냐면 풀쩍 뛰어올라 주인을 맞이할 권리는 나한테만 주어졌기에. 바짓부리를 이빨로 잡아끌며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그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는 것도 내게만 허락된 일이었기에. 그가 쓰다듬거나 귀를 잡아당기는 대상은 오직 나뿐이었기에. 단지 나만이 그의 곁에 앉아 자는 척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나를 향해 몸을 숙인 채 뭔가를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 혼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으므로.   주인은 다른 이들에게는 종종 화를 내고 사납게 굴었다. 그들과 다투고, 소리를 지르고, 초초한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는 오직 나만 좋아한다고, 절대로,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물론 내게 주어진 의무 조항도 있었다. 기다리기, 그리고 믿음을 가지기. 주인은 잠깐 나타났다가 오랫동안 사라지기 일쑤였으므로. 골짜기 너머에서 무엇이 그를 붙잡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일 때문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고양이나 기타 쓸데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들과 티격태격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변화무쌍한 것, 내 것 또한 갑자기 변했다. 어느 날 봄이 찾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었다. 알 수 없는 야단법석이 온 집안을 휩쓸었다. 상자와 트렁크, 궤짝이 자동차에 실렸다. 산 밑으로 내려가는 요란한 바퀴 소리도 잠시. 모퉁이 저편에서 잠잠해졌다.   발코니에서 부서진 가구와 넝마 조각들이 불태워졌다. 노란 상의와 검은 마크가 내겨진 완장들. 무수히 많은 낡은 상자들과 그 속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온 깃발들도 함께.   난장판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에 털끝이 쭈뼛 섰다. 마치 내가 주인 없는 개라도 되는 듯. 문간에서 당장 빗자루를 들고 쫓아버려야 할 귀찮은 떠돌이라도 되는 듯.   은도금을 한 내 목걸이를 누군가가 낚아채갔다. 며칠 전부터 텅 비어 있던 내 밥그릇을 누군가가 걷어찼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일행 중 하나가 길 떠나기 직전 운전석에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심지어 과녁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내가 꽤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간 걸 보면. 버릇없는 파리가 귓가에서 윙윙대는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죽어갔다. 나, 내 주인의 충성스런 개는.   시인의 끔찍한 악몽 / 쉼보르스카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겉으로는 우리가 사는 이곳과 똑같아 보이네요. 발밑의 토양, 물과 불, 공기, 수평과 수직, 삼각형과 원, 왼쪽과 오른쪽, 견딜 만한 날씨, 그럴싸한 풍경 그리고 언어를 부여받은 몇몇 존재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지구상의 그것과는 다르네요.   문장을 지배하는 건 비조건문. 명칭들은 사물들과 매우 정교하게 밀착되어 있어 함부로 덧붙이거나, 생략하거나, 변형시키거나, 위치를 바꿀 순 없어요.   시간은 시계 속의 개념대로 기능하는 것. 과거형과 현재형은 모두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죠. 회상에는 지나버린 일 초가 할당되고, 예측에는 이제 막 시작될 이초가 배당됩니다.   단어는 꼭 필요한 만큼만, 한 마디도 넘치는 법이 없으니, 다시 말해 시도 없고, 철학도, 종교도 없다는 뜻 이곳에는 그런 종류의 유희는 허용되지 않으니까요.   사색을 필요로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네요.   뭔가를 찾는다면, 그건 분명 옆에 있는 것. 뭔가를 묻는다면, 그건 분명 해답이 명확한 것.   놀라움의 근거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늘낄 줄만 안다면, 그들은 분명 매우 놀랄 텐데요.   '불안'이라는 단어가 그들에겐 사뭇 외설적으로 느껴지기에 사전을 뒤적일 용기조차 갖지 못하는군요.   아무리 짙은 어둠이 깔려 있어도 세상은 밝게만 표현되는군요. 모든게 헐값에 나누어졌지만, 계산대 앞에서 거스름돈을 요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감정 가운데 남은 건 오로지 만족감뿐. 괄호 속 부연 설명은 전혀 없네요. 마침표가 늘 따라붙는 인생. 그리고 은하수의 부르릉, 엔진 소리.   인정하세요, 시인에게 있어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서둘러 잠에서 깨어난다 해도 조금도 나아지는 건 없네요.   그리스 조각상 / 쉼보르스카   인간들과 다른 원소들의 도움으로 시간은 비교적 원활하게 조각상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먼저 코를 도려내고, 나중에는 은밀한 부위를, 계속해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삭제해나갔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깨를 차례로 없애더니,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허벅지, 등과 허리, 머리와 엉덩이를 제거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은 조각조각 잘게 부서져 돌멩이가 되고,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됐다.   만약 살아 있는 누군가가 이렇게 죽어간다면 매번 일격을 가할 때마다 많은 피를 흘렸으리라.   하지만 대리석 조각상들은 하얗게 무너져 내린다. 게다가 완벽하게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   앞서 언급한 그 조각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건 토르소뿐이다. 몸뚱이는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며 애써 숨을 참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머지 부위들이 잃어버린 모든 매력과 권위를 자신에게로 되돌려놓아야 하기에.   토르소는 성공했다. 마침내 성공했다. 성공을 거두며, 황홀경에 빠진다. 황홀경에 빠지며, 존재를 지속한다-   이 시점에서 시간은 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일찌감치 하던 일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나중으로 미루었기에.   사실상 모든 시에는 / 쉼보르스카   사실상 모든 시에는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1)   한 구절이면 충분하나니 그것이 현재형이든 과거형, 혹은 미래형이든.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바스락거리고, 반짝거리고, 흩날리고, 흘러가는 것들이 단어에 실려 온다면 움직이는 그림자를 가진 가상의 불변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한 마디면 충분하나니 누군가의 옆에 있는 누군가에 관해서. 혹은 뭔가의 옆에 있는 누군가에 관해서 2)   고양이를 가진 알라에 관해서 혹은 고양이를 가지지 못한 알라에 관해서 3)   혹은 또 다른 알라들에 관해서 또 다른 고양이들과 고양이가 아닌 다른 것들에 관해서 바람결에 책장이 넘겨진 또 다른 초등학교 교과서들에 관해서: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작가에 의해 시선이 도달하는 반경 내에 일시적인 산과 가변적인 골짜기가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4)   마침 기회가 주어졌기에 겉으로만 영원하고 안정적인 하늘에 대해서 넌지시 이야기할 수 있다면: 5)   한창 펜을 움직이고 있는 손끝에서 누군가의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뭔가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6)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추측이나 어림짐작으로 그랬건, 아님 중요한 이유든, 하찮은 이유든 간에, 흰 종이 위에 검은 펜으로 물음표가 적혀 있다면, 그리고 대답으로- 달랑 이렇게 적혀 있다면, 콜론 :     1) '순간'은 쉼보르스카가 2002년에 발표한 열번 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그동안 자신이 썼던 시의 여러 대목을 빌어다가 패러디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2) 1872년에 발표한 시집 에는 "무(無)의 의미는"으로 시작하는 제목이 없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나는 지금 네 옆에 서 있게 되었다. / 이렇게 되기까 무엇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음을 / 뼈저리게 느끼는 바이다." 이 부분을 응용하여 재구성하였다. 3) 폴란드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첫 페이지, 첫 문장이 바로 "알라는 고양이를 가지고 있다"이다 즉 폴란드인이 국어 책에서 제일 먼저 배우고, 제일 먼저 기억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4)2002년에 발표한 시집 에 수록된 표제작 '순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 / 이곳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건 찰나의 순간" 이 구절을 응용하여 재구성한 대목이다. 5) 1993년에 발표한 시집 에 수록된 '하늘'이라는 시에서 쉼보르스카는 하늘이 "부서지기 쉽고, 유동적이며, 바위처럼 단단한 / 휘발성으로 변했다가. 또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 구절을 응용하여 쓴 것이다. 6) 1967년에 발표한 에 수록된 "쓰는 즐거움"이라는 시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쓴 구절이다. / 번역 최성은   쉼보르스카의 시편들 중 국내에 번역 출간된 시들은 거의 망라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구할 수 있는 번역 시선집은 과 두권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한 쉼보르스카 그녀의 흔적을 보기위해 폴란드의 유서 깊은 고도(古都)인 '크라쿠프'와 그녀가 자주 은거했던 휴양지 '자고파네'를 여행했으나 일정도 빡빡했고 폴란드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필자로서는 잘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다. 혹시 내 생에 또 한번의 기회가 오길 기대한다,  끝.  / 김민홍
42    심보르스카 시모음 (1) 댓글:  조회:4500  추천:0  2017-09-15
감사 / 쉼보르스카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다른 누군가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안도를 느낀다.   내가 그 선한 양의 무리 속에서 늑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그들과 함께하면 평화롭고, 그들과 함께하면 자유롭다. 그것은 사랑이 가져다줄 수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창문과 대문을 서성이며 그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마치 해시계처럼 무한한 인내심으로 항상 너그럽게 그들을 이해한다. 사랑이 결코 이해 못하는 것을. 언제나 관대하게 용서한다. 사랑이 결코 용서 못하는 것을.   첫 만남부터 편지를 주고받을 때까지 영원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단지 며칠이나 몇 주일만 기다리면 된다.   그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음악회에 가도 끝까지 집중할 수 있고, 대성당을 구경할 때도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주위의 모든 풍경도 또렷하게 잘 보인다.   일곱 개의 산과 일곱 개의 강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그것은 이미 지도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바로 그 산과 강일 뿐, 그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만일 내가 삼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서정적이지도 수사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지평선, 실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그들의 덕택이다.   그들 자신도 모른다. 맨주먹 안에 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는지.   "난 그들에게 아무런 빚도 없어." 아마도 사랑은 이렇게 말할 게다, 이 공개된 질문에 대해서.   시집 『끝과 시작』 문학과 지성사.   나에게 던진 질문 /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을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 시집『끝과 시작』(문학과지성사, 2007)   단어를 찾아서 / 쉼보르스카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피로 흥건하게 물든 고문실 벽처럼 네 안에 무덤들이 똬리를 틀지언정, 나는 정확하게, 문명하게 기술하고 싶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고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온 힘을 대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 없다.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뜻밖의 만남 / 쉼보르스카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공손히 대하며, 오랜만에 만나서 아주 기쁘다고 말한다.   우리의 호랑이들은 우유를 마신다. 우리의 매들은 걸어다닌다. 우리의 상어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댄다. 우리의 늑대들은 훤히 열려진 철책 앞에서 하품을 한다.   우리의 독뱀들은 번개를 맞아도 전율하고, 원숭이는 영감(靈感)때문에, 공작새는 깃털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떤다. 박쥐들이 우리의 머리 위로 멀리 날아가버린 건 또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던가.   문장을 잇다 말고 우리는 자꾸만 침묵에 빠진다. 무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 인간들은 대화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밤 / 쉼보르스카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거기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도대체 이사악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신부님께 교리 문답이라도 청해야겠다. 공을 차서 이웃집 유리창이라도 깨뜨렸나? 울타리를 넘다가 새 바지에 구멍이라도 냈나? 연필을 훔쳤나? 암탉을 놀라게 했나? 시험칠 때 친구에게 답을 슬쩍 가르쳐주었나?     어른들이여, 바보 같은 꿈이나 꾸며 무기력하게 잠에 빠져들어라. 나 아침까지 뜬눈으로 이 밤을 지새우리니, 고요한 암흑이 내게 맞서 팽팽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브라함의 고뇌처럼 어두운 이 밤.   성서에 나오는 신의 눈동자가 먼 옛날 이사악을 주목했듯이 지금 이 순간 뜷어져라 나를 응시하고 있다. 과연 어디에 이 몸을 숨길 수 있을까? 신이 마음만 먹으면 죽은 사람도 소생시킨다는 건 이미 해묵은 옛날이야기 이 공포의 극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는 것뿐.   머지않아 창가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연기처럼 피어올라 방 안 곳곳에서 새처럼, 바람처럼 퍼드덕대리라. 하지만 현실 속에는 그처럼 커다란 날개짓을 하는 새도, 그처럼 기나긴 여운을 남기는 바람도, 존재하지 않는 법.   신은 정말 우연히 나를 선택한 것인 양 그럴듯하게 꾸며대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결국엔 비밀스러운 작당을 위해 아버지를 부엌으로 슬그머니 데려가 귓가에 대고 거대한 뿔 나팔을 불어대겠지.   내일 먼동이 틀 무렵 아버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떠나리라. 나는 떠나리라. 내 증오는 더욱더 깊어만 가리니 이제 나는 인간의 선함도, 그들의 사랑도 믿지 않으리라. 나는 11월의 낙엽보다 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 결코 믿음을 주지 말 것. 믿음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니. 함부로 사랑하지 말 것. 기계적으로 박동하는 심장을 그저 가슴속에 품고 다닐 것.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오래전에 이미 그리되기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니.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나를 뒤흔드는 건 심장이 아니라 말라틀어진 화석에 불과할 테니.   구름 위 발코니에서 신은 유유히 기다리고 있다. 가련한 번제물을 태우게 될 장작이 보기 좋게 골고루 잘 타고 있는지 편안하게 지켜보면서 나는 반드시 죽으리라. 나를 구원하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견디기 힘든 악몽이 나를 괴롭히던 그날 밤부터 견디기 힘든 고독이 날 괴롭히던 그날 밤부터 신은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의 확실한 의미'에서  '애매모호한 비유'를 향해.   가장 이상한 세 단어 / 쉼보르스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無)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박물관 / 쉼보르스카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삼백 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 홍조 띤 빰은 어디 있나요?        칼은 있는데- 분노는 어디 있나요?        어두운 해질 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간데 없네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 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어요.        진열장 위에는 콧수염을 늘어뜨린 채        곰팡내 풀풀 풍기는 옛날 파수꾼이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어요.          쇠붙이와 점토, 새의 깃털이        모진 시간을 견디고 소리 없이 승리를 거두었어요.        고대 이집트 말괄량이 소녀가 쓰던 머리핀만이        킬킬대며 웃고 있을 뿐.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 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나는 어떨까요, 믿어주세요, 아직도 살아 있답니다.        나와 내 드레스의 경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요.        이 드레스는 얼마나 고집이 센지!        마치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를 열망하듯 말이죠.    연극에서 받은 감상 / 쉼보르스카         내게 있어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6막,       연극의 제일 마지막 장면,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대목.       그들은 구겨진 가발과 의상을 다시 펴서 매무새를 고치고,       가슴에 꽂힌 칼을 뽑아내고,       목을 졸라맨 올가미를 벗어던지고,       살아 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가지런히 정렬한 뒤,       청중을 향해 미소 띤 얼굴을 돌린다.         혼자, 혹은 무리를 이뤄 절을 한다.       창백한 손을 상처 입은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무릎을 굽혀 공손하게 인사하는 자살한 여인들.       정중하게 절을 하는 잘려나간 머리들.         둘이 함께 절을 한다:       분노는 화해를 향해 부드럽게 손 내밀고,       희생자는 고문관을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모반을 꿈꾸는 반역자는 폭군의 곁을 너그럽게 지나친다.         영원은 황금빛 구두 굽 아래서 무참히 짓밟히고,       교훈은 차양 넓은 모자를 휘두르는 바람에 여기저기 흩어져버리고 만다.       시간 관계상 미처 복구하지 못한 다른 사항들은 어느 틈에 내일 새롭게 시작할 채비를 한다.         자, 이제는 초반에 일찌감치 죽은 자들이 일렬종대로 입장할 차례.       그들은 3막과4막, 그리고 장면의 중간 중간에 이미 숨을 거두었다.       흔적도 없이 죽음을 당했던 이들의 기적적인 생환,         의상도 벗지 않고,       립스틱도 지우지 않은 채.       무대 뒤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을 그들을 생각하니       비극의 기나긴 사설(辭說)보다 저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내려왔던 막이 다시 올라가기 직전,       바닥과 막 사이의 좁은 틈 사이로 보이는 기묘한 광경:       여기 서둘러 꽃다발을 집어 올리는 손과       떨어진 칼을 부지런히 줍는 나머지 다른 손이 있다.       이제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눈에 띄지 않는, 또 하나의 등장인물.       진정 내 목을 메게 하는 건 바로 그 사람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 / 쉽보르스카       시골 길에 죽은 딱정벌레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     세 쌍의 다리를 배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은 채,     죽음의 혼란 대신 청결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이 광경이 내포하는 위험도는 지극히 적당한 수준,     갯보리와 박하 사이의 지정된 구역을 정확히 준수하고 있다.     슬픔이 끼어들 여지는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다.       우리의 평화를 유지시켜주기 위해,     동물들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만 숨을 거둔다.     우리들이 믿고 싶어 하는 대로, 감각이나 이승에 대한 미련을 훌훌 떨쳐버린 채,     우리들이 짐작한 대로, 저승보다는 덜 비극적인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난다.     그들의 온순한 영혼은 절대로 어둠 속에서 우리를 겁주지 않는다.     그들은 거리를 유지할 줄 안다.     그들은 배려가 뭔지를 안다.       여기 길 위에 죽은 딱정벌레 한 마리가 있다.     그저 한 번 쳐다봐주는 것도 딱정벌레에겐 커다란 추모일 수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지극히 태평스러워 보인다.     중요하고 심각한 일은 모조리 우리, 인간들을 위해 예정되어 있다.     삶은 오로지 우리들의 것이며,     언제나 당연한 듯 선행권(先行權)을 요구하는 죽음 또한 오로지 우리들만의 전유물이다.        히틀러의 첫번째 사진 / 쉼보르스카         앙증맞은 유아복을 입은 요 갓난아이는 과연 누구?       히틀러 부부의 아들, 꼬맹이 아돌프.       법학 박사가 될까나, 아니면 비엔나 오페라의 테너 가수가 될까나?       요건 누구의 고사리 손? 요 귀와 눈, 코의 임자는 누구?       우유를 먹여 빵빵해진 이 조그만 배는 또 누구 거지? 아직은 알 수 없네.       인쇄공인지, 의사인지, 점원인지, 신부님인지.       요 우스꽝스러운 조그만 발이 결국엔 어디로 향할까나, 과연 어느 곳으로?       정원으로, 학교로, 사무실로.       아니면 시장 딸과 결혼하기 위해 결혼식장으로 가려나?       아기 천사, 금지옥엽, 재롱둥이, 애물단지,       일 년 전 그가 세상에 나왔을 때       하늘과 땅에는 온갖 징조 가득했지.       봄의 햇살, 창틀에 핀 제라늄.       뜰에서 들려오던 아코디언 소리,       분홍빛 종이로 포장된 행운의 점괘,       태어나기 직전 어머니가 꾸었던 운명적인 태몽까지,       꿈속에서 비둘기를 보는 건 즐거운 소식,       그 비둘기를 잡는 건 오랫동안 기다리던 손님이 온다는 반가운 기별,       똑똑---- 누구세요? 아돌프의 조그만 심장이 우리들의 귓가를 두드리는군요.         장난감 젖꼭지, 기저귀, 턱받이, 딸랑이,       건장한 사내아이, 신에게 기도하자, 부정 타지 말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부모를 닮았고, 바구니 속 졸린 눈을 가진 새끼 고양이를 닮았고,       가족 앨범 속의 모든 다른 애들과 꼭 닮은 귀여운 아가,       쉿 아가야, 지금은 울면 안 돼,       사진사 아저씨가 검은 천 아래서 찰칵 하고 사진을 찍을 거야.         클리게르 사진관, 그라벤 거리, 브라우나우.       부라우나우는 작지만 멋진 도시.       건실한 회사들과 선량한 이웃들이 있고,       효모로 반죽한 맛있는 케이크와 회색빛 빨래 비누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         개의 불길한 울음소리도, 운명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이곳에서 역사 선생님은 옷깃을 느슨히 풀고       공책을 쌓아놓은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번역; 최성은                                          한국 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및 같은 대학원 동유럽어문학과 졸업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 폴란드 문학박사 학위 받음                                        바르샤바 대학교 한국문학과 교수 역임. 현재 한국외국어대 폴란드어과 교수.                                        2012년 폴란드 정부가 수여하는 십자 기사 훈장 받음                                        저서; 외 다수.                                        번역; , 등 다수                                               황선미의 김영하의 를 비롯, 김소월, 윤동주, 서정주 3인 시선집을 폴란드어로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참수(斬首) / 쉼보르스카       '데콜타쥬 decolletage'의 어원은  '데콜로 decollo'.     라틴어로 '데콜로'는 '목을 자른다'는 뜻     스크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사형 집행에 딱 맞는 슈미즈 드레스를 입고 단두대에 올랐다.     목 부분이 길게 파인 그 슈미즈는     목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선명한 붉은 색.       바로 그 순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튜더는     자신의 한적하고 호화로운 방에서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창가에 서 있었다.     턱 바로 아래까지 의기양양하게 단추를 채우고서.     빳빳하게 풀을 먹은 깃 가장자리엔 화려한 주름 장식.       두 여자는 동시에 이렇게 생각했다.     "신이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정의가 언제나 내 편에 머물기를----"     "산다는 것은 결국 난관에 부딪히는 것."     "어떤 곳에서는 제빵사의 딸을 '부엉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이것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벌써 다 끝났다."     "아무 것도 없는 이곳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드레스의 차이점-그렇다, 그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자.     나머지 세부적인 항목들은     절대로 동요되지 않는 법이니.   바벨탑에서 / 쉼보르스카   "지금 몇 시야?" "그래요, 난 행복해요. 단지 목에 걸 수 있는 조그만 종이 필요할 뿐예요. 당신이 곤히 잠든 사이 당신의 머리 위에서 딸랑딸랑 울릴 수 있게." "그러니까 천둥소리를 못 들었단 말이지? 바람이 온통 벽을 뒤흔들고, 탑은 대문의 경첩을 삐걱대면서 커다란 사자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구."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때 나는 어깨에 단추가 달린 평범한 회색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걸요." "그 순간 수많은 폭발과 함께 하늘이 갈라져버렸어." "나는 분명 그곳에 들어갔었다구요. 기억 안 나요? 당신은 분명 혼자가 아니었잖아요." "그때 난 갑자기 내 시력보다도 더 오래된 듯한 색깔들을 봤어." "당신이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다니 정말 유감이네요." "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건 아마 꿈이었을 거야." "당신 왜 자구 거짓말하는 거예요? 왜 날 보면서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거죠?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하나요?" "오, 그래. 난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후회는 없어요. 다만 그 문제에 대해서 좀더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아직도 그 남자를 생각하나?" "그렇지만 난 울고 있지 않다구요." "하고 싶은 말 . 이게 다야?" "당신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거야." "적어도 당신은 솔직하군." "걱정하지 말아요. 이 도시를 곧 떠날 테니까." "염려 마, 내가 여기서 떠날게."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손을 가졌군요." "그건 이미 아주 오래된 옛일이야." "걱정 말아요, 달링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세요." "지금이 몇 신지 모르겠군. 하긴 시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사실상 모든 시에는 / 쉼보르스카   사실상 모든 시에는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1)   한 구절이면 충분하나니 그것이 현재형이든. 과거형, 혹은 미래형이든.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바스락거리고, 반짝거리고, 흩날리고, 흘러가는 것들이 단어에 실려 온다면. 움직이는 그림자를 가진 가상의 불변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한 마디면 충분하나니 누군가의 옆에 있는 누군가에 관해서. 혹은 뭔가의 옆에 있는 누군가에 관해서.2)   고양이를 가진 알라에 관해서. 혹은 고양이를 가지지 못한 알라에 관해서.3) 혹은 또 다른 알라들에 관해서 또 다른 고양이들과 고양이가 아닌 다른 것들에 관해서 바람결에 책장이 넘겨진 또 다른 초등학교 교과서들에 관해서;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작가에 의해 시선이 도달하는 반경 내에 일시적인 산과 가변적인 골짜기가 거리매김할 수 있다면.4)   마침 기회가 주어졌기에 겉으로만 영원하고 안정적인 하늘에 대해서 넌지시 이야기할 수 있다면:5)   한창 펜을 움직이고 있는 손끝에서 누군가의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뭔가가 모습을 드러낸다면:6)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추측이나 어림짐작으로 그랬건. 아님 중요한 이유든. 하찮은 이유든 간에. 흰 종이 위에 검은 펜으로 물음표가 적혀 있다면. 그리고 대답으로- 달랑 이렇게 적혀 있다면 콜론:   1) '순간'은 쉼보르스카가 2002년에 발표한 열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그동안  자신이 썼던 시의 여러 대목을 빌어다가 패러디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2) 1972년 발표한 시집 에는 "무(無)의 의미는"으로 시작되는 제목이 없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나는 지금 네 옆에 서 있게 되었다./이렇게 되기까지 무엇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음을/뼈저리게 느끼는 바이다." 이부분을 재구성하였다. 3)폴란드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첫 페이지. 첫 문장이 바로 "알라는 고양이를 가지고 있다."이다. 즉, 폴란드인이 제일 먼저 배우고, 제일 먼저 기억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4)2002년에 발표한 시집 에 수록된 표제작 '순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이곳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건 찰나" 이 구절을 응용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5)1993년 발표한 시집 에 수록된 '하늘'이라는 시에서 쉼보르스카는 하늘이 "부서지기 쉽고, 유동적이며, 바위처럼 단단한,/휘발성으로 변했다가, 또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는"것이라고 썼다. 이 구절을 응용하여 쓴 것이다. 6)1967 년에 발표한 에 수록된 '쓰는 즐거움'이라는 시에서 모디프를 가져와 쓴 구절이다   이력서 쓰기 / 쉼보르스카   무엇이 필요한가? 신청서를 쓰고, 이력서를 첨부해야지.   살아온 세월에 상관없이 이력서는 짧아야 하는 법.   간결함과 적절한 경력 발췌는 이력서의 의무 조항, 풍경은 주소로 대체하고, 불완전한 기억은 확고한 날짜로 탈바꿈시킬 것.   결혼으로 맺어진 경우만 사랑으로 취급하고 그 안에서 태어난 아이만 자식으로 인정할 것.   네가 누구를 아느냐보다, 누가 널 아느냐가 더 중요한 법. 여행은 오직 해외여행만 기입할 것. 가입 동기는 생략하고, 무슨 협회 소속인지만 적을 것. 업적은 제외하고, 표창 받은 사실만 기록할 것.   이렇게 쓰는 거야. 마치 자기 자신과 단 한번도 대화한 적 없고, 언제나 한 발자국 떨여져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해왔던 것처럼.   개와 고양이, 새, 추억의 기념품들, 친구. 그리고 꿈에 대해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지.   가치보다는 가격이,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중요하고, 내가 행세한 '너'라는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네 신발의 치수가 더 중요한 법이야. 게다가 한쪽 귀가 잘 보이도록 찍은 선명한 증명사진은 필수. 그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보다는 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더 중요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 이런, 서류 분쇄기가 덜그덕거리는 소리잖아.   죽은 자들과의 모의 / 쉼보르스카   당신이 어떤 환경에 처했을 때 주로 죽은 사람들이 꿈에 나타납니까? 잠들기전에 종종 그들을 생각하나요? 누구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죠? 매번 같은 사람인가요? 이름은? 성은? 묘지명은? 사망 날짜는?   그들은 주로 무엇에 관해 이야기합니까? 오래된 우정? 혈연관계? 아니면 조국에 대해서? 그들이 어디서 왔다고 밝히던가요? 그들 배후에 누가 있는지. 당신 말고 또 누구의 꿈에 모습을 드러내는지 말하던가요?   그들의 얼굴은 사진과 똑같았습니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들도 늙었습니까? 그들은 건강해 보였나요, 아니면 안색이 창백했나요? 살해당한 자들은 예전의 치명적인 상처를 깨끗이 회복했나요? 누가 자기들을 죽였는지 여전히 기억하던가요?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었습니까? 그 물건들을 쭉 적어보세요. 그것들은 썩었나요? 녹슬었나요? 불에 탔나요? 부서졌나요? 어떤 기색이 눈빛에 담겨 있었나요? 애원, 아니면 위협? 구체적으로 적어보세요. 당신은 그들과 단지 날씨에 관한 이야기만 했습니까? 그들이 난처한 질문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신중하게 입을 다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은근슬쩍 꿈의 주제를 바꾼다든지 때맞춰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건 어떤가요?   고문 / 쉼보르스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육신은 고통을 느낀다. 먹고, 숨쉬고, 잠을 자야 한다. 육신은 얇은 살가죽을 가졌고, 바로 그 아래로 찰랑찰랑 피가 흐른다. 꽤 많은 이빨과 손톱. 뼈는 부서지기 쉽고, 관절은 잘 늘어난다. 고문을 하려면 이 모든 것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떨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로마 건국 이전이나 이후, 예수 탄생 이전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또한 마찬가지. 고문은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땅덩이만 줄었을 뿐, 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마치 벽 하나 사이에 둔 듯 가까이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인구만 증가했을 뿐 해묵은 규칙 위반이 발생하면, 현실적이면서 타성에 젖은, 일시적이며서 대수롭지 않은, 새로운 과오가 다시금 되풀이된다. 그에 대한 책임으로 육신은 비명을 지른다. 이 무고한 비명 소리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음역과 음계를 준수하며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재하리라.   예식과 절차, 춤의 포즈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 쥐는 손동작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육신은 몸부림치고, 뒤틀리고, 찢겨져 나간다. 기진맥진 쓰러져, 무릎을 웅크리고, 멍들고, 붓고, 침 흘리고, 피를 쏟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강물의 흐름과 숲의 형태, 해변, 사막과 빙하를 제외하고는. 낯익은 풍경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작은 영혼이 배회한다. 사라졌다 되돌아오고, 다가왔다 멀어진다. 스스로에게 낯설고, 좀처럼 잡히지 않는 존재. 스스로 알다가도 모르는 불확실한 존재. 육신이 존재하는 한, 존재하고 또 존재하는 한, 영혼이 머무를 곳은 어디에도 없다.   시인의 끔찍한 악몽 / 쉼보르스카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겉으로는 우리가 사는 이곳과 똑같아 보이네요. 발밑의 토양, 물과 불, 공기, 수평과 수직, 삼각형과 원, 왼쪽과 오른쪽. 견딜 만한 날씨, 그러싸한 풍경 그리고 언어를 부여받은 몇몇의 존재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지구상의 그것과 다르네요.   문장을 지배하는 건 비조건문. 명칭들은 사물들과 매우 정교하게 밀착되어 있어 함부로 덧붙이거나, 생략하거나, 변형시키거나, 위치를 바꿀 순 없어요.   시간은 시계 속의 개념대로 기능하는 것. 과거형과 현재형은 모두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죠. 회상에는 지나버린 일 초가 할당되고, 예측에는 이제 막 시작될 이 초가 배당됩니다.   단어는 꼭 필요한 만큼만, 한 마디도 넘치는 법이 없으니, 다시 말해 시도 없고, 철학도 종교도 없다는 뜻. 이곳에선 그런 종류의 유희는 허용되지 않으니까요.   사색을 필요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네요.   뭔가를 찾는다면, 그건 분명 옆에 있는 것. 뭔가를 묻는다면, 그건 분명 대답이 명확한 것.   놀라움의 근거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낄 줄만 안다면, 그들은 분명 매우 놀랄 텐데요.   '불안'이란 단어가 그들에겐 사뭇 외설적으로 느껴지기에 사전을 뒤적일 용기조차 갖지 못하는군요.   아무리 짙은 어둠이 깔려 있어도 세상은 밝게만 표현되는군요. 모두에게 헐값에 나누어졌지만, 계산대 앞에서 거스름돈을 요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감정 가운데 남은 건 오로지 만족감뿐, 괄호 속 부연 설명은 전혀 없네요. 마침표가 늘 따라붙는 인생, 그리고 은하수의 부르릉, 엔진 소리.   인정하세요, 시인에게 있어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서둘러 잠에서 깨어난다 해도 조금도 나아지는 건 없네요.   맹인들의 호의 / 쉼보르스카   시인이 맹인들 앞에서 시를 낭독한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목소리가 떨린다. 손도 떨린다.   여기서는 문장 하나하나가 어둠 속의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처럼 느껴진다. 빛이나 색조의 도움 없이 홀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의 시에서 별빛은 위험한 모험이다. 먼동, 무지개, 구름, 네온사인, 달빛. 여태껏 수면 위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던 물고기와 높은 창공을 소리 없이 날던 매도 마찬가지.   계속해서 읽는다-그만 두기엔 너무 늦었기에- 초록빛 풀밭 위를 달려가는 노란 점퍼의 사내아이. 눈으로 개수를 헤아릴 수 있는 골짜기의 붉은 지붕들. 운동선수의 유니폼에서 꿈틀거리는 등번호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벌거벗은 낯선 여인에 대해서.   침묵하고 싶다-이미 불가능한 일이지만- 교회 지붕 꼭대기에 올라앉은 모든 성인(聖人)들, 열차의 창가에서 벌어지는 작별의 몸짓, 현미경의 렌즈와 반지의 광채, 화면과 거울, 그리고 여러 얼굴들이 담겨진 사진첩에 대해서. 하지만 맹인들의 호의는 정말로 대단하다. 그들은 한없는 이해심과 포옹력을 가졌다. 귀 기울이고, 미소 짓고, 박수를 보낸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군가가 다가와서는 거꾸로 든 책을 불쑥 내밀며 자신에겐 보이지도 않는 저자의 서명을 요청한다.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 쉼보르스카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서늘하겠습니다. 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와 시야가 흐려지겠습니다. 도로는 미끄럽겠습니다.   한낮에는 북쪽에서 다가오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곳에 따라 점차 날씨가 개는 곳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강한 돌풍이 불어와 천둥 번개가 칠 수도 있겠습니다.   한밤중에는 전국에 걸쳐 화창한 날씨를 보이겠습니다만, 남동부 지방에서는 곳에 따라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기압은 오르겠습니다.   내일은 대체로 날씨가 맑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 계신 분들에겐 우산이 유용하겠으니 외출 시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어릿광대 / 쉼보르스카   먼저 우리의 사랑이 저물고 나면 백 년, 이백 년, 세월이 흐르고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함께하리라.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한 몸에 받는 남녀 희극 배우가 극장에서 너와 나의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다.   중간 중간 간주를 곁들인 소규모 광대극, 가벼운 춤과 폭소가 어우러진 적당히 드라마틱한 내용, 이어지는 박수갈채.   이 장면에서 너는 어쩔 수 없이 조롱거리가 되리라. 우스꽝스러운 넥타이를 매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쩔쩔매는 네꼴을 보면서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리겠지.   웃음거리가 된, 내 머리통, 그리고 내 심장과 왕관, 터져버린 어리석은 심장과 바닥에 떨어진 왕관.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리라. 공연장엔 환호성과 웃음이 가득, 일곱 개의 강과 일곱 개의 산을 사이에 둔 채 끊임없이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리니.   마치 현실의 고통이나 불행 따윈 우리에게 거의 없었다는 듯 말로써 서로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안기리니.   마침내 둘이 정중하게 머리 숙여 절하고 나면 광대극은 막을 내리리라. 눈물이 맺히도록, 배꼽이 빠지도록 웃던 관객들은 잠자리에 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은 또다시 멋들어진 삶을 살아가리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에 길들여가면서. 사나운 호랑이조차 고분고분 꼬리를 내리고, 그들의 손 위에 놓인 음식을 얌전히 핥아먹으리니.   우리는 영원히 이러이러한 존재. 작은 종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우스꽝스러운 광대 모자를 쓰고, 그 종소리의 원초적인 울림에 열심히 귀를 기울리는.   사소한 공지 사항 / 쉼보르스카   어디에 가면 연민의 감정을 되찾을 수 있는지, 비록 그것이 심장의 헛된 상상이 빚어낸 인공적인 감상에 불과할지라도 일단 출처를 알고 계신 분은 누구든지 알려주세요! 제발 좀 알려주세요! 온 힘을 다해 노래 부르며 이성을 잃은 듯 덩실덩실 춤을 추십시오,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은 여윈 자작나무 아래서 왁자지껄, 힘겨게 놀아보는 거예요.   침묵하는 법을 가르쳐드립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로 다 가능합니다. 별이 총총 수놓인 하늘과 북경 사람의 각진 아래턱과 메꾸기의 뜀박질과 갓난아이의 손톱과 플랑크톤과 눈송이를 골똘히 응시할 수 있는 비법을 특별한 훈련을 통해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되돌려드립니다. 자, 조심조심! 기회가 왔어요! 풀잎이 목덜미를 간지럼 태우던 일 년 전의 바로 그 잔디밭에 벌렁 드러누어 가만히 기다리세요. 바람이 춤을 춥니다. (작년 이맘때 그대들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던 바로 그 장본인이죠) 자, 아직도 꿈에 흠뻑 도취된 다양한 매물들이 여기 있습니다.   양로원애서 숨진 노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애도해줄 사람을 구합니다 신청서를 작석하거나 증명서을 제출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 제출된 서류는 전부 파기될 예정이고, 수령 확인증은 발급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남편이 남발한 헛된 약속에 나는 아무런 책임도 없음을 밝힙니다. 내 남편은 사기꾼, 사람들이 득실대는 이 세상의 온갖 빛깔과 떠들썩한 소음. 창가의 노래 한 곡조, 벽 너머 짖어대는 강아지 한 마리로 당신들을 참 잘도 속여 넘겼죠, "어둠 속에서도, 적막 가운데서도 결코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게는 그 서약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낮'의 미망인인 '밤'으로부터.   루드비카 바드쥔스카* 부인을 애도하는 일 분간의 묵념 / 쉼보르스카   당신은 떠났습니다. 타오르는 불꽃과 연기가 자욱한 그곳으로! "그곳에 네 명의 아이들이 있으니 가서 그 애들을 데려올께요!"   어떻게 그처럼 과감하게 모든 걸 떨쳐낼 수 있었을까요? 스스로에 대한 집착과 낮과 밤의 질서와 내년에 내릴 눈과 사과의 붉은 빛깔과 아무리 곱씹어도 늘 부족하기만 한 사랑에 대한 끈끈한 미련을.   작별 인사 따위는 하지도, 받지도 않고 모르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달려갔으니, 다들 보세요, 무릎까지 넘실대는 불꽃, 미친 듯이 이글거리는 붉은 기운을 헤치고서 아이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왔답니다.   그녀는 차표를 끊고, 잠시 여행을 다녀오려 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도 쓰려 했고,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창문을 활짝 열고 맑은 공기를 마시거나, 숲 속의 오솔길도 타박타박 걸어보려 했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호수의 물결이 넘실대는 광경도 바라보고 싶어했습니다.   때로는 죽은 이를 위한 일 분간의 묵념이 늦은 밤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나는 구름과 새들의 비상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산 증인입니다. 귓가에는 잔디가 무럭무럭 자라는 소리가 생생히 들립니다. 종이에 인쇄된 수백만 개의 글자들을 열심히 읽었고, 망원경으로 저 신비로운 별들을 관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태껏 누군가가 그렇게 간절히 구조를 요청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어떤 이가 진정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나뭇잎과 드레스와 시에 대한 구구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타인들에 의해 평가되고 검증된, 꼭 그만큼뿐. 스스로도 사뭇 낯설기만 한 심장이 명하는 대로 나는 이 사실을 당신들에게 꼭 말하고 싶습니다.   *루드비카 바브쥔스카(Ludwika Wawrzynska. 1908~1955) 폴란드의 초등학교 교사. 1955년 2월 8일 바르샤바의 한 초등학교 목조 건물에서 불이 났는데, 어린이들이 그 안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 네 명의 어린이들을 구해냈다. 심한 화상을 입은 바브쥔스카는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며칠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명예 회복 / 쉽보르스카   상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인간의 가장 오랜 권리에 의거, 내 생애 처음으로 죽은자들을 불러본다. 그들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들의 발걸음에 열심히 귀 기울인다. 누가 죽었는지, 죽은 게 확실한지,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지금은 두 손에 자신의 두개골을 들고, 이렇게 말해야 할 시간. "가여운 요릭* 네 천진함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네 맹목적인 믿음과 순진무구함, 어떻게든 되리라는 낙천적인 기대감, 검증된 사실과 그렇지 못한 진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던 평정심은 어디에?"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배신하리라는 사실을. 이름 따윈 아무런 값어치도 없음을. 무성한 잡풀과 목메어 울어대는 까마귀, 휘날리는 눈보라만이 익명의 무덤에서 떠나간 이들을 비웃고 조롱하게 되리라는 걸. "요릭이여, 그들은 위선적인 증인에 불과했다."   죽은 자의 불멸은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만 유효한 법. 결국엔 순간적이고, 유한한 가치일 뿐이다. 누군가가 스스로의 불멸을 상실하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오늘 나는 불멸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은 내어줄 수도 빼앗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름과 함께 스러져갈 운명이라면 감히 '배신자'란 호칭을 누구에게 붙일 수 있겠는가.   죽은 자 위에 군림하는 우리의 권리는 흔들리지 않는 엄정한 중립을 요구한다. 캄캄한 밤에 판결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도록. 판사가 제복을 벗어던진 채 알몸이 되지 않도록.   대지가 꿈틀댄다-이제 그들은 대지의 일부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한 줌의 흙이 되어, 한 웅큼의 흙더미가 되어 조용히 무덤에서 일어선다. 은폐한 암흑을 헤집고 나와 옛 이름을 되찾고, 민족의 기억 속으로, 그 옛날 영광의 월계관과 환호 속으로 당당히 복귀한다.   단어를 마음껏 호령하던 내 절대 권력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눈물의 골짜기로 추락해버린 낱말들 따위는 죽은 자의 부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산화된 마그네슘만이 광채 되어 번득이는 빛바랜 사진처럼 공허하고 부질없는 묘사만 남았을 뿐. 나, 시시포스는 일찌감치 '시(詩)의 지옥'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이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날카롭게 날이 선 채로, 전리품을 늘어놓은 유리 진열장과 아늑한 보금자리에 난 창문들과 분홍빛 색안경과 유리로 만든 뇌와 심장에 무참하게 생채기를 내기 위해서.   *요릭 ; 섹스피어의 희곡 5막 1장에서 햄릿이 공동묘지에서 무덤을 파고 있는 두 명의 어릿광대와 대화를 나누다가, 임금의 어릿광대였던 재담꾼 요릭의 두개골을 보고 비탄에 잠겨 심복인 호레이쇼에게 말하는 대목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아틀란티스* / 쉼보르스카   그들은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섬에서 혹은 섬이 아닌 곳에서. 대양 혹은 대양이 아닌 것이 그들을 집어삼켰거나 혹은 집어삼키지 않았거나.   누군가를 사랑한 누군가가 있었던가? 누군가와 싸우던 누군가가 있었던가? 모든 일이 일어났거나 혹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났거나. 거기에서 혹은 거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곱 개의 도시가 있었다는데 정말로 확실한가? 영원히 존재하길 바랐다는데 증거는 어디 있는가?   그들은 화약을 발명하지 않았다. 그래, 아니다. 그들은 화약을 발명했었다. 그래, 그렇다.   있었다고 추정되는 사람들, 불확실한 사람들.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공기나 불이나 물이나 흙에서는 전혀 추출되지 않은 사람들.   물속에서도 빗방울 속에서도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   사뭇 심각한 척 훈계나 늘어놓는 가식적인 포즈 따윈 취할 수 없었던 사람들.   유성이 떨어졌다. 아니, 유성이 아니었다. 화산이 폭팔했다. 아니, 화산이 아니었다. 누군가 뭔가를 애타게 불렀다. 아니, 누구도 그 무엇도 부르지 않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아틀란티스에서.   원숭이 / 쉼보르스카   인류가 아직 천국에서 추방되기 전 마지막으로 에덴동산 구석구석을 훑어보던 원숭이의 눈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천사들조차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예기치 못한 슬픔에 허덕였다네. 결국 원숭이는 다소곳이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이 지구상에 자신의 위대한 종족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네. 때론 생기발랄, 때론 진지하며, 동그랗게 말린 꼬리를 뽐내는 우리의 원숭이. 원숭이는 신생대 전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라치아Gracya'*를 쓸 때, 꼭 'y'자를 고집한다네. 오래전, 존엄한 은빛 광채를 지닌 풍성한 갈기로 인해 이집트에서 사람들로부터 대대적인 숭배를 받을 때 원숭이는 슬픔에 잠겨 근엄하게 침묵을 지키며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열심히 귀 기울렸다네: 흠, 영생을 원하는군--- 원숭이는 붉으스름한 엉덩이를 흔들면서 멀리멀리 떠나갔다네. 권고도 금지도 아니라는 그런 의미로.   유럽에서 그들의 영혼은 거세되었네. 하지만 두 팔은 무심결에 남겨두었지. 어느 수도사가 거룩한 성인(聖人)의 팔에다 홀쭉하고 가느다란 원숭이의 손을 그려넣었네. 거룩한 성인은 마치 도토리를 움켜쥐려는 듯 양손을 내밀어 자비를 구걸하고 있네.   전함은 왕궁으로 원숭이를 데려왔다네. 잣난아기처럼 따뜻한 체온을 지닌 채, 늙은이처럼 온몸을 벌벌 떠는 원숭이는 황금으로 만든 쇠사슬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네. 고관대작들이 입는 앵무새처럼 알록달록 맵시 좋은 연미복을 입고서, 카산드라*, 대체 무엇이 우습단 말이지? 중국에서 원숭이는 식용으로 사용된다네. 접시에 담겨진 원숭이는 구워진 표정 또는 삶겨진 표정을 짓고 있다네. 모조품 장신구에다 억지로 끼워 맞춘 진짜 다이아몬드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태로. 원숭이의 뇌는 미묘한 맛을 내겠지. 비록 그들의 뇌가 화약을 발명하지 못했기에 뭔가 부족한 듯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동화 속에서는 늘 외롭고 우유부단한 원숭이. 거울의 내부를 찡그린 얼굴로 채웠던 원숭이가 스스로를 조롱하며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네. 비록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에 관해서라면 모든 걸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난한 친척 여동생처럼.   *폴란드어로 '그라치아Gracja'는 '우아함, 고상함, 매력'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영어로는 'grace'이다. 중세 폴란드어에서는 이 단어를 쓸 때 'j' 대신 'y'를 썼다.   *카산드라Kassandra: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자.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라이모스와 헤카베의 딸이다. 트로이 전쟁을 미리 예견하였으나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트로이에서의 한순간 / 쉼보르스카   어린 계집애들, 비쩍 마른 데다가 언젠가는 두 뺨의 주근깨가 말끔히 사라진다는 걸 도무지 믿지 못하는.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의 눈꺼풀 위를 사뿐사뿐 돌아다니는.   깜짝 놀랄 만큼 엄마 혹은 아빠를 쏙 빼닮은 그 아이들이   식사를 하다가 책을 읽다가 혹은 거울 앞에서 트로이로 납치되어 간다.   어린 계집애들은 커다란 탈의실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아름다운 헬레나로 탈바꿈한다.   드레스 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온갖 탄성을 뒤로 한 채 왕실의 계단을 사뿐사뿐 오른다.   스스로가 공기처럼 가볍다고 느낀다. 안다, 아름다움이 곧 안식이며, 말투가 입술의 효용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영감을 받은 무심함 속에서 몸짓들은 스스로의 외양을 조각한다는 것을.   사절단을 거부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그들의 아리따운 얼굴이 포위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새하얀 목덜미 위로 자랑스레 우뚝 솟아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검은 머리의 남자들, 친구의 오빠들, 미술 선생님, 모두가 이 전쟁에서 전사하리라.   어린 계집애들은 웃음의 탑 꼭대기에서 끔찍한 대참사를 태연히 내려다본다.   어린 계집애들은 위선적이 감정에 도취되어 두 손을 꼭 움켜쥔다.   어린 계집애들은 한창 유행하는 탄식의 귀걸이를 주렁주렁 달고서, 작은 왕관을 쓴 채 불타는 도시의 폐허를 배경으로 무심히 서 있다.   창백한 얼굴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으며, 승리에 한껏 도취한 자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실컷 즐기고 있다. 그들이 슬퍼하는 건 오직 한 가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자, 이제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트로이의 어린 계집애들.   그림자 / 쉼보르스카   내 그림자는 여왕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어릿광대와 같다. 여왕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 어릿광대는 벽을 향해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바보처럼 천장에 머리를 쿵 부딪친다.   이차원의 세상에서는 무엇으로도 그림자에게 고통을 가할 수 없다. 어쩌면 어릿광대에겐 내 왕궁이 불편할지도. 그래서 다른 역할을 원할 수도 있으리라.   여왕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면 어릿광대는 곧장 바닥을 향해 뛰어내린다. 모든 동작과 역할을 여왕과 분담했지만 공평하게 반반씩 나누진 못했다.   저 단순무지한 숙맥은 스스로의 의지로 광장된 몸짓과 허풍, 뻔뻔함을 택했다. 왕관과 지팡이, 왕실의 가운, 내게는 이 모든것들을 지탱할 힘이 없으니.   아, 앞으론 어깨를 움직일 때도 한결 가뿐하겠구나. 아, 앞으론 고개를 돌릴 때도 한결 홀가분하겠구나. 왕이여, 우리가 작별 인사를 나눌 때도, 왕이여, 우리가 기차역에 서 있을 때도.   왕이여, 언제나 이 시간이 되면 우리의 어릿광대는 철로 위에 길게 드러눕는다.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수 없다.   가까스로 기억을 떠올린들 불확실한 뿐. 머리를 잘못 맞춘 여신의 조각상처럼.   사모코브*에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모른다.   파리의 정경은 루브르에서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까지 가물가물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생마르텡*의 가로수 길. 그곳의 계단은 갈수록 페이드 아웃*   내 기억 속에서 '다리의 도시' 상트테르부르크는 고작 다리 한 개와 반쯤 남은 또 다른 다리의 영상. 가여운 움살라*에는 무너진 대성당의 잔해.   소피아*에는 얼굴 없이 몸통만 남은 가여운 무희가 있다.   눈동자 없는 그의 얼굴 따로, 동공 없는 그의 눈동자도 따로, 고양이 동공도 따로.   새롭게 재건된 협곡 위에서 카프카스*의 독수리가 날고 있다. 태양의 황금빛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바위는 엉터리 모조품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   헤아릴 수도, 저장할 수도 없는 풍경들 미세한 섬유질이나 모래알. 물방울의 개별적인 세밀함은 더한 법.   나는 나뭇잎의 뚜렷한 윤곽 하나 뇌리에 새기지 못한다.   한 번의 눈짓에 담긴 작별을 내포한 환영의 인사   넘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한 한 번의 고갯짓.   *사모코브;불가리아에 있는 도시 *생마르텡;파리 시내에 있는 운하 *페이드 아웃(fade out);영화나 T.V.에서 화면이 차차 어두워져서 캄캄해지는 것. 방송이나 녹음에서는 소리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뜻함.                             *움살라;스페인 스톡홀름 북쪽에 있는 도시 *소피아;불가리아 수도 *카프카스;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지역. 영어로는 코카서스caucasus라고 불린다.   무제 / 쉼보르스카   그들은 철저하게 홀로 남겨졌다. 한마디 말도 없이 철저한 사랑의 부제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기적뿐. 드높은 구름 위에서 바야흐로 천둥이 울리고,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놀라운 기적뿐. 이백만 종의 그리스 신화가 출판되었지만, 그와 그녀를 위한 구원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가 제발 문가에라도 서 있어줬으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저 잠시라도 나타나줬으면, 기쁜 소식도 좋고, 나쁜 소식도 좋으니, 어디에서 왔건, 어디로 가건 아무 상관 없으니, 미소를 남겨주건, 공포를 불러일으키건 개의치 않을 테니.   하지만 예상을 뒤엎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스스로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일'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버렸다. 부르주아의 연극에서처럼 이별은 아마도 끝까지 지속되겠지. 멀쩡한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기적은 절대로 없으리라.   만질 수 없는 벽을 뒤로 한 채 서로를 불쌍히 여기면서 지극히 상식적인 영상 외에는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 앞에 하염없이 서 있다.   두 사람의 모습 말고는 아무 것도 투영되지 않는다. 질료(質料)*는 항상 경계를 풀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넓고도, 깊고도, 높기에 땅 위에서, 하늘에서, 사방 구석에서 타고난 운명을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든 노루 한 마리가 단숨에 우니베르숨*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에.   *질료; 형식 또는 형태를 갖춤으로써 비로소 일정한 사물을 이루는 소재(素材). 예를 들어 건축물의 경우 구조는 형태,  제목은 질료에 해당한다. *우니베르숨Universum; 라틴어로 '온세상'이란 의미   금혼식 / 쉼보르스카   언젠가 그들은 완전히 별개의 존재였고, 물과 불처럼 확연하게 구별됐었다. 서로의 다른 점을 맹렬히 공격하고픈 열망을 간직한 채 뺏기고 빼앗기를 반복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그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서,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네것이 내 것이 되었다. 한때 찬란히 작렬하던 번개가 자취를 감추고 난 후 서로의 품 안에서 투명한 공기가 될 때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해답이 주어졌다. 어느 고요한 밤, 어둠 속에서,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성별의 구분 따위는 점차 희미해지고, 비밀은 전부 불에 타버렸다. 흰 바탕 위에서 모든 빛깔이 자유롭게 섞이듯 공통된 성향 안에서 상반되는 기질들이 어우러졌다.   둘 중에 누가 두 배가 되고, 누가 사라져버렸는가? 두 사람의 몫의 미소로 웃음 짓는 것은 누구인가? 누구의 목소리가 두 개의 음성으로 갈라졌는가? 둘 중에 누가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가? 숟가락을 입가에 가져가는 건 누구의 의지인가?   누가 누구의 살가죽을 벗겼는가? 누가 살아있고, 누가 죽었는가? 서로의 손금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누구의 손인가?   오랜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쌍둥이가 태어난다. 서로를 향한 친밀감, 그것은 가장 위대한 어머니. 둘 중 누구도 자신의 쌍둥이 아이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누구 누구인지 가까스로 기억해낸다   금혼식 날에, 이 기쁜 날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창가에 앉은 비둘기를 바라보고 있다.   야스오*의 강제 기아 수용소 / 쉼보르스카   어서 써. 써보란 말이야. 평범한 용지 위에 보통 잉크로: 그들에겐 식량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모두 굶어 죽었다고. 모두라고?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데? 이곳은 거대한 초원이잖아. 한 사람당 얼마나 많은 풀잎과 잔디를 먹어 치웠을까? 어디 이렇게 써봐: 난 아무 것도 모른다고. 역사는 유골을 어떻게든 제로(0)의 상태로 결산하려 애쓰고 있다. 천 명에다 한 명이 더 죽어도, 여전히 천 명이라고 말한다. 그 한 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어딘가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상상으로 임신한 태아, 텅 빈 요람. 한번도 펼쳐진 적 없는 철자법 교본. 저 혼자 웃다가, 소리 지르다가, 팽창하는 공기. 공허의 늪을 향해 내달리는 계단. 가지런히 정렬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미지의 공간.   우리는 육체가 되어버린 초원 위에 서 있다. 초원은 마치 매수당한 증인처럼 침묵을 고수한다. 태양 아래서 눈부시게 선명한 푸른 빛깔로. 숲 저편에 질겅질겅 씹을 수 있는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에서 꿀꺽꿀꺽 들이킬 수 있는 수액이 뚝뚝 떨어진다. 눈이 멀지만 않는다면 일상의 풍경들은 매일매일 어김없이 배급되리라. 저 산 너머 영양 만점 도톰한 날개를 가진 새의 그림자가 비친다. 새들은 텅 빈 주둥이를 크게 벌린 채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다. 낫처럼 생긴 초승달이 밤하늘에 슬며시 나타나 꿈속에 등장한 호밀빵을 쓱싹쓱싹 베어낸다. 이콘*에 등장하는 성인(聖人)의 검은 두 팔은 텅 빈 잔을 손에 든 채 허공을 휘젓고 있다. 가시 돋친 철조망의 날카로운 꼬챙이 위에는 인간의 육신이 꼬치 요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들은 대지와 함게 노래를 부른다. 전쟁이 어떻게 그들의 심장을 꿰뚫었는지에 관한 아름다운 노래를 자. 어디 한번 써보시지. 이곳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운지. 그래, 알았어.   *야스오jasto: 폴란드 남부 카르파티 산맥 근처에 있는 도시로 이곳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 거주 지역인 게토Getto가 있었으나 전쟁 막바지에 독일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콘: 동방 정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성인들을 그린 초상화. 폴란드는 카톨릭 국가이지만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이콘을 허용했으며, 특히 제일의 카톨릭 성지인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 마리아상'이 유명하다.   우화 / 쉼보르스카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부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유리병을 낚아 올렸어요. 그병에는 종이 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답니다:   "사람들이여, 나좀 구해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대양이 나를 파도에 싣고서 무인도에 갖다 버렸답니다. 모래사장에 나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서둘러 주세요. 나 여기 있을께요."   "이 쪽지에는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틀림없이 이미 늦었을 거야. 유리병이 얼 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녔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첫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적혀 있질 않군. 대양이 한둘도 아니고, 어디를 말하는 지 통 알 수 없잖아."   두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라는 섬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불현듯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편적인 진실이란 원래 다 그런 법.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발라드 / 쉼보르스카   이 노래는 살해당했다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어떤 여인에 관한 발라드.   건전한 의도로 씌어졌고, 한 자 한 자 종이 위에 정성껏 기록되었다.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 창가에서, 혹은 희미한 등불 아래서, 그 일은 벌어졌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문이 굳게 닫히고, 살인자가 계단을 막 뛰어 내려가는 순간, 그녀는 뜬금없이 적막에 놀라 깨어난 생명체처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마치 반지에서 빠져나온 보석처럼 견고하고, 단단한 시선으로 천천히 구석구석을 살핀다.   허공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마룻바닥 위를 삐걱대는 판자 위를, 침착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다.   범행 후에 남겨진 모든 흔적들을 아궁이에 넣고 활활 태운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서랍 밑바닥에 들어 있던 구두끈까지 모조리.   그녀는 목을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총에 맞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이 그녀를 잠시 엄습했을 뿐.   그녀는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사소한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심지어는 쥐를 보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를 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모방하고 가장할 수 있는, 우습고도 하찮은 일들은 이렇게나 많다.   다들 일어나기에 그녀도 일어난 것이다.   다를 걸어다니기에 그녀도 걷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매일매일 조금씩 자라는 머리카락을 빗질하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포도주를 마시며 / 쉼보르스카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러곤 내게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나는 그 아름다움이 마치 내 것인 양 당연히 받아들인다. 별을 꿀꺽 삼켰으니 행복하기 그지없다.   그의 눈에 비친 누군가의 잔영에서 내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한다. 나는 춤을 춘다, 춤을 춘다. 느닷없는 날개짓에 온몸을 전율하면서.   탁자는 탁자, 포도주는 포도주다. 술잔은---- 술잔은 뭐더라? 술잔은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나는--- 몽상적인 환영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추상적이고, 뼛속까지 비현실적이다.   하고 싶은 말을 그에에 전부 털어놓는다. 수과(瘦果)*의 별자리를 타고나서 사랑에 목숨을 거는 개미들에 관해서. 맹세하노니, 붉은 포도주가 흩뿌려진 새하얀 장미가 노래를 부른다.   웃음을 터뜨리며 조심스레 머리를 숙인다. 위대한 발명품을 재차 확인하고 점검하듯이. 나는 춤을 춘다, 춤을 춘다. 내 외양을 벗어내고, 내 존재를 풀어준 피부 거죽이 경악할 정도로 아름답게.   갈비뼈로 빚어낸 이브, 거품으로 만들어진 비너스, 주피터의 머리에서 나온 미네르바가 나보다 오히려 더 사실적이다.   그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 틈을 타 나는 벽에 비친 내 그림자를 찾아 헤맨다.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그림을 떼어낸 자리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쇠못 한 개.   *수과(瘦果) ; 민들레나 메밀 들 건조과 식물의 열매로, 겉으로는 씨처럼 보이지만 속에 또 하나의씨를 갖고 있다.   루벤스의 여인들 / 쉼보르스카   힘이 아주 센 여자 거인들, 암컷 무리. 덜컹대며 굴러가는 커다란 술통처럼 온전히 벌거벗은 여인들. 그 여인들이 무참히 짓밟힌 침대 위에 보금자리를 틀고, 먼동이 틀 때까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다. 동공은 근육 저 깊은 곳으로 자취를 감췄다. 누액(漏腋)이 샘솟는 분비샘을 통해 누룩이 서서히 스며들어간다. 온몸의 혈관 속으로.   바로크의 딸들, 케이크 반죽이 반죽 통 안에서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욕조에선 수증기가 솟아오르고, 와인은 붉게 빛난다. 뭉게구름이 만들어낸 살진 새끼 돼지가 하늘 위를 질주한다. 관능의 신호를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오, 코끼리처럼 풍만하고 거대한 여인들이여. 알몸이 되었을 때 오히려 두 배로 팽창한 여인들이여. 격렬한 체위에서 오히려 세 배로 부픈 여인들이여. 오, 기름진 사랑의 양식이여!   그 여인들에겐 말라비틀어진 여동생들이 있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그 애들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화폭에서 비쩍 마른 소녀들이 거위처럼 가지런히 열을 지어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을.   전형적인 추방자의 모습. 밖으로 튀어나온 갈비뼈, 왜소한 참새를 쏙 빼닮은 손과 발. 소녀들은 견갑골을 움직여 낼갯짓을 해보려 애쓴다.   13세기라면 그 애들에게 황금빛 후광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슬프도다, 17세기는 말라깽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태양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한없이 비대해져간다. 하늘을 온통 점령해버린 건 오동통한 천사들과 포동포동 살이 오른 신들. 턱수염을 기른 포이보스,* 그가 땀에 젖은 준마들 타고, 뜨겁게 타오르는 침실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다.   *포이보스;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의 신 아폴론을 부르는 이름.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 쉼보르스카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물고기가 물고기를 낚는다. 물고기가 날카로운 물고기로 물고기의 내장을 도려낸다. 물고기가 물고기를 만들어내고, 물고기가 물고기 안에서 산다. 물고기가 무리 지어 다니는 물고기 떼를 피해 도망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물고기가 물고기를 사랑한다. 너의 눈동자는 이른바 천상의 물고기처럼 황홀하게 빛난다. 나는 너와 함께 공동의 해협을 유유히 헤엄치고 싶다. 물고기 떼 가운데 가장아름다운 한 쌍의 물고기가 되어!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물고기가 물고기를 상상하고, 물고기가 물고기를 창조한다. 물고기가 물고기에게 좀더 천천히 헤엄을 치자고 부탁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나는 최소한 나무 물고기, 바위 물고기와는 구별되는 개별적인 물고기, 독립적인 물고기이다. 매 순간 나는 은빛 비늘을 가진 아주 작은 물고기들에 대해 기록한다. 어쩌면 그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어둠일 수도 있다. 눈을 깜빡하는 바로 그 찰나에 번쩍하고, 빛을 발하는 순간의 암흑.   *헤라클레이토스 Heracloeitos ;기원전 6세기경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사람은 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몸을 담글 수는 없다. 두번째 강물은 이미 전혀 다른 물이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쉼보르스카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명언에서 착안하여 이 시를 썼다.   쓰는 즐거움 / 쉼보르스카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숲을 가로질러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노루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자신의 입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투사지 위에 씌어진 옹달샘, 그곳에서 이미 씌어진 물을 마시러? 왜 노루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을까? 무슨 소리라도 들렸나? 현실에서 빌려온 네 다리를 딛고서 내 손끝 아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고요"-이 단어가 종이 위에서 버스럭대면서 "숲"이라는 낱말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놓는다.   하얀 종이 위에서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혹시라도 잘못 연결될 수도 있고, 나중에는 구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문장들.   잉크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꽤 많은 여분의 사냥꾼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어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사슴을 포위하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사냥꾼들은 이것이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걸 잊은 듯하다. 여기에선 흑백이 분명한, 전혀 다른 법체계가 지배하고 있다. 눈 깜빡할 순간이 내가 원하는 만큼 길게 지속될 수도 있고, 총알이 유영하는 찰나적 순간이 미소한 영겁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명령만 내리면 이곳에선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 허락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함부로 떨어지지 않을 테고, 말발굽 아래 풀잎이 짓이겨지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 이곳은 바로 그런 세상. 내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하는 곳. 신호의 연결 고리를 동여매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내 명령에 따라 존재가 무한히 지속되기도 하는 곳.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풍경 / 쉼보르스카   이것은 나이 지긋한 거장이 만들어낸 풍경. 나무는 유화 물감 아래 굳건히 뿌리를 내렸고. 오솔길은 목적지까지 정확히 뻗어 있다. 잎사귀가 위풍당당 서명을 대신한다. 지금은 틀림없는 오후 다섯 시. 오월은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억류되었다. 그러므로 나 또한 망설이며,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섰다. 내 그리운 이여, 나는 물푸레나무 아래 서 있는 순박한 시골 처녀이기 때문이다.   내가 널 두고 얼마나 멀리까지 떠나왔는지 봐라. 내가 걸친 새하얀 모자와 노란색 치마를 들여다보고, 그림 밖으로 뛰쳐나기지 못하게 얼마나 단단히 바구니를 움켜잡고 있는지도 살펴봐라. 낯선 운명을 어떻게 꿋꿋이 견디어 냈는지. 삶의 비밀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났는지 샅샅이 감상하라.   설사 네가 부른다 해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으리니. 만약 들었다 해도 몸을 돌려 되돌아가진 않으리니. 정녕 있을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될 그 행위를 저질렀다 해도 이제 네 얼굴은 내게 한없이 낯설게만 여겨지리라.   나는 10킬로미터의 반경 내에서 세상을 알고 있다. 나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약초와 주문을 알고 있다. 신神은 여전히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변함없이 기도를 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맞지 않게 해달라고. 전쟁은 형벌이고, 평화는 포상이다. 수치스러운 꿈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다. 자두 속에 씨가 박혀 있듯 내 안에는 당연히 영혼이 깃들어 있다.   나는 심장의 유희를 알지 못한다. 내 아이의 아버지, 그 사람의 나체를 알지 못한다. 구약 성서의 위대한 시편을 읽으며, 그 뒤에 잉크 자국으로 얼룩진 무수한 습작 노트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런 의심따윈 단 한번도 품어본 적 없다. 내가 하고픈 말들은 늘 문장 속에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다. 내 사전엔 절망이란 없다. 왜냐하면 그건 내 몫이 아니니까. 내게 맡겨진 임무는 오로지 '스스로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일뿐'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을 네가 가로막는다 해도, 네 두 눈을 네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해도, 절망의 가장자리를 따라 아슬아슬 너를 지나치리라.   우리 집은 오른 쪽에 있고, 나는 근처 지리를 구석구석 꿰뚫고 있다. 집으로 향하는 층층다리와 안으로 통하는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안다. 그 안에는 미처 화폭에 담기지 못한 또 다른 삶이 펼쳐지고 있다. 안락의자 위로 뛰어 오르는 고양이. 주석으로 만든 주전자에 빛을 드리우는 태양. 테이블 너머, 뼈만 앙상히 남은 한 남자가 앉아 시계를 고치는 중.   사진첩 / 심보르스카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굴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야전 병원의 들것 위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조차도 네가 아닌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 살았던 그 누군가라면 또 모를까.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만틸라; 스페인이나 멕시코 등지에서 머리와 어깨를 덮는 여성용 대형 스카프. *보스; 히로나뮈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 네델란드 출신의 대표적인 플랑드르 화가. 20세기 초현실주의의 선구로 평가받는 보스의 작품들은 '광기와 부조리로 가득 찬 지옥도'라 일컬어지고 있다. 다양하게 변모되고 합성된 기괴한 동물들과 식물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어두운 해학은 당신의 종교적 배경과 관련된 상징 체계와 연관을 맺고 있다. 대표작으로 등이 있다. *은판 사진; 은판銀板에 찍는 초창기 사진술을 말함.    웃음 / 쉼보르스카   언젠가 바로 나였던 그 소녀. 나는 물론 그 애를 안다. 소녀의 짧은 생애를 담고 있는 몇 장의 사진을 나는 갖고 있다. 몇 줄의 시구를 쓸 수 있을 만큼 유쾌한 연민도 느끼고 있다. 몇몇 사건들 또한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있는 이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꼭 끌어안을 수 있게, 오로지 한 가지 추억만 회상하련다. 작고 못생긴 소녀의 어린 시절 풋사랑을.   이야기를 들려주마. 소녀가 어떻게 그 대학생을 사랑했는지. 소녀는 그가 자신을 쳐다봐주기를 원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마. 그를 만나기 위해 어떻게 달려갔는지. 멀쩡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오, 무슨 일이야. 한마디라도 물어봐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조그만 계집아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만일 팔자가 좋아 오래오래 살 수만 있다면 결국엔 절망조차 득이 된다는 사실을.   소녀에게 과자라도 사 먹으라며 돈 몇 푼 쥐어줄 수 있었을 텐데. 소녀에게 영화라도 보러 가라며 돈 몇 푼 쥐어줄 수 있었을 텐데. 얼른 물러가지 못하겠니, 내겐 시간이 없다구.   이미 불은 모두 꺼져버렷다는 걸 너도 알잖아. 아마 넌 이해하겠지, 벌써 오래전에 문은 닫혀버렸다는걸. 문고리를 잡아당기지 마. 웃음을 터뜨리던 그 남자. 나를 끌어안던 그 남자. 그는 먼 옛날, 너의 그 대학생이 아냐.   네가 왔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게 제일 좋을걸. 난 네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구.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인걸. 언제쯤 타인의 비밀을 누설하면 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그렇게 우리를 쳐다보지 말라구. 마치 죽은 자의 눈처럼 비정상적으로 크게 부릅뜬 그런 눈으로.   기차역 / 쉼보르스카   내가 N시(市)에 가지 않은 그 일은 정확히 시간 맞춰 일어났다.   발송되지 않은 편지가 내게 미리 예고를 해주었고,   예정된 시각에 너는 가까스로 역에 오지 않을 수 있었다.   기차가 3번 플래홈으로 들어왔고,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나의 부재(不在)는 인파 속에 섞여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황망함 속에서 별빛 여인들이 서둘러 나를 대신했다.   그중 한 여인을 향해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이 달려갔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것도 당장에.   내 것이 아닌 트렁크가 분실되었을 때, 두 사람은 우리의 입맞춤이 아닌 낯선 입맞춤을 서로 나누었다.   N시의 기차역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라'는 시험에 훌륭하게 통과했다.   전체는 있어야 할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고, 세부적인 사항들은 지정된 철로를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는 미처 약속되지 못한 만남조차 정확한 타이밍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철저하게 우리의 현존이 미치는 범위 밖에서. 있음 직한 개연성을 상실한 파라다이스에서.   어딘가 다른 곳에서 어딘가 다른 곳에서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이 낱말 조각들이 실은 얼마나 커다란 울림을 가지고 있는지.   살아 있는 자 / 쉼보르스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자를 포옹하는 것, 감싸 안는 것.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건 오직 심장의 박동뿐. 우리의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거미들이 그를 보자마자 혐오감에 줄행랑을 쳤기에 게걸스러운 거미들에게 통째로 잡아먹히는 일은 없으리라.   그의 머리가 집행 유예를 받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어깨에 기대어 쉴 수 있는 특권을 허락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천 가지도 넘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의 숨소리에 열심히 귀 기울리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중세의 기적극*은 야유와 조롱 속에 막을 내렸다. 범죄는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여성들의 전유물인 공포에 대한 상속권은 박탈당했다.   오로지 손톱들만 살아남아 반짝이다가, 점점 닳아 소멸될 뿐.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이 손톱이 막대한 재산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겨진 은화 한 닢이란 사실을.   우리를 보면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조차 그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목덜미 위에 돋아난 천 개의 눈을 부릅뜬 공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미처 알지 못한다.   그 모습은 가까스로 이 세상을 향해 두발을 내디딘 듯 힘겹게만 보인다. 우리 모두가 그랬듯. 우리의 모습 그대로.   뺨 위에는 속눈썹이 애원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쇄골 사이에는 회한에 젖은 땀방울이 시냇물처럼 고여 있다.   지금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 그는 조용히 잠들어 있다. 시효가 만료된 죽음과의 포옹 속에서 그는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다.   *기적극; 예수나 성도에 의한 기적을 소재로 한 중세의 종교극.   태어난 자 / 심보르스카   그러니까 이 여인이 그의 어머니다. 작은 키의 여인. 회색빛 눈동자를 지닌 생명의 근원,   몇 년 전 그를 태우고 물가로 떠내려온 조각배.   그는 그 조각배에서 탈출했다. 세상으로, 영원이 아닌 이곳으로.   나와 함께 불꽃을 뛰어넘은 그 남자를 출산한 여인.   그녀는 완제품이 아닌 미완성의 그를 선택한 유일한 여인이다.   내겐 이미 친숙한 그의 살갗을 가져다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뼈대에다 동여맨 장본인이다. 철저하게 혼자의 힘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짙은 회색빛 눈동자를 그녀는 스스로 고안하고, 만들어냈다.   그 여자, 그 남자의 알파. 그는 왜 내게 그녀를 보여주었을까.   그 남자은 그렇게 태어났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언젠가는 죽게 될 나와 마찬가지로.   진짜 여인의 아들. 육신의 깊은곳에서 막 허물을 벗고 나온 신참내기. 오메가를 향한 방랑자.   매 순간 사방에서 자신의 부재(不在)를 위협당하는 존재.   그의 머리 그것은 시간에 순응하는 벽을 향해 사정없이 부딪쳤다.   그의 행동 그것은 보편적인 평판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도피였다.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이미 그 길의 절반을 지나왔다는 걸.   그러나 그는 내게 그 사실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분이 내 어머니야" 오직 이 한마디만 했을 뿐.   인구조사 / 쉼보르스카   언젠가 트로이 대제국이 우뚝 서 있던 그 언덕에서 일곱 개의 도시가 발굴되었다. 한 편의 서사시를 노래하려면 도시 하나면 충분치 않을까. 나머지 여섯 개는 필요치 않다. 그것들이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육보격의 시는 완전히 붕괴되어버렸다. 갈라진 틈바구니에서 허구가 아닌 논픽션의 벽돌이 삐죽 튀어나온다. 무성 영화처럼 고요한 침묵 속에서 와르르 벽이 무너져내린다. 대들보가 붕괴되고, 솨시슬이 끊어진다. 마지막 한 방울의 수분까지 남김 없이 말라버린 녹슨 주전자.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부적, 과수원의 씨앗들. 우주비행사가 달에서 가져온 화석처럼 직접 손으로 만져야만 확인 가능한 두개골들.   태고의 흔적들이 퇴적물처럼 우리 옆에 빼곡히 쌓여간다. 공급 과잉으로 넘쳐날 지경. 무지막지한 지역 주민들이 원주민의 역사 속으로 난폭하게 쳐들어왔다. 고기 자르는 기다란 칼을 양손에 든 유목민들. 헥토르의 용맹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무명용사들. 수천 명의 개별적인 얼굴들. 매 순간 처음이고 마지막인 그 얼굴들. 제각기 범상치 않은 한 쌍의 눈을 가진 얼굴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동안은 한결 편했다. 공간도 훨씬 넓었고, 추모의 감정도 훨씬 풍부했다.   과연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인구 밀도가 유달리 낮았던 어떤 시대를 골라 거기에 전부 파묻어줄까? 아니면 그들의 금세공 기술을 인정하고 한껏 칭찬해줄까? 최후의 심판은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우리, 삼백만 명의 판사들 앞에는 각자 해결해야 할 사적인 문제들이 산재해 있기에. 말주변이라곤 전혀 없는 군중들과 무수한 가차역들, 야외 경기장의 특별관람석, 다양한 행진과 시위들. 이국땅의 수많은 거리들, 계단과 벽들. 무수한 기차역들, 야회경기장의 특별관람석, 다양한 행진과 시위들. 이국땅의 수많은 거리들, 계단과 벽들. 우리들은 백화점에서 새로운 물 주전자를 구입하면서 그렇게 영원히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호메로스*는 현재 통계청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퇴근 후 집에 가서 그가 뭘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메로스Homeros : 고대 그리스의 시인으로 영웅 서사시인 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작품의 탄생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나 대체로 기원전 9~8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두 서사시는 고대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로서 문학의 고전이라 불리고 있으며,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중세와 근세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피에타* / 쉼보르스카   영웅이 탄생한 작은 마을에서 동상을 바라보며, 그 커다란 규모에 찬사를 보내라. 텅 빈 박물관 문간에서 훠이훠이 암탉 두 마리를 쫓아내라.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라. 문을 두드려라. 삐걱대는 대문을 밀어젖혀라. 어머니늘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말끔히 벗어 넘긴 머리에, 밝은 시선을 던지리라. 폴란드에서 왔노라고 당당히 말하라. 어머니께 인사하라, 분명하게, 큰소리로 안부를 물어라. 그렇다, 그녀는 그를 매우 사랑했다. 그렇다, 그는 늘 그대로였다. 그렇다, 그날 그녀는 감옥을 둘러싼 담벼락 옆에 서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총격 소리를 들었다. 녹음기와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하라. 그렇다, 그녀는 언젠가 그 기계들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의 마지막 편지를 읽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오래된 자장가를 불렀다. 한번은 영화를 찍다가 눈부시게 빛나는 조명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렇다, 기억은 여전히 그녀를 감동시킨다. 그렇다, 그녀는 약간의 피로를 느낀다. 그렇다, 하지만 곧 사라질 것이다. 일어나라, 감사의 인사를 전하라, 작별하라. 복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여행객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곳을 떠나라.   *피에타 Pieta: 예수의 유해를 무릎에 안고 비탄에 잠긴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 또는 상(像)   1960년대의 영화 / 심보르스카 저기 서 있는 성인(成人) 남자, 땅을 딛고 선 인간. 10만 개의 신경 세포. 300그램의 십장과 그 안에 담겨진 5리터 가량의 혈액. 무려 3백만 년 동안 끊임없이 생성되어져온 개체.   초기에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어린 소년은 아주머니 무릎 위에 머리를 포겠다. 그 어린 소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릎은 또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린 소년은 이미 너무 커버렸다. 아, 그는 더 이상 어린 소년이 아니다. 이 거울들은 잔인한 데다가, 아스팔트처럼 매끄럽기까지 하다. 어제 그는 고양이를 차로 치어 죽였다. 그래, 그건 꽤 괞찮은 아이디어였어. 이 시대의 끔삑한 지옥으로부터 고양이를 해방시켰으니 자동차에 타고 있던 소녀가 속눈썹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본다. 이건 아니야, 그녀는 그가 원하던 무릎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바란 건 모래사장에 길게 누워 마음껏 숨을 쉬는 것. 그는 세상과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못했다. 자신이 손잡이가 부서진 주전자 같다고 여겼다. 귀퉁이가 깨진 것도 모른 채 여전히 물을 길어 나르는 가엾은 주전자--- 이것은 사뭇 경이로운 일이다. 고난을 무릅쓰고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누군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집은 이제 다 지어졌다. 문고리엔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졌고, 나무에는 어린 가지가 접목되었다. 이제 곧 서커스단이 공연을 시작하리라. 이 '완벽한 전체'는 현재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싶다. '조각'과 '부분'이 결합되어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졌음은 까맣게 잊은 듯. sunt lacrimae renum(이것은 존재가 흘린 눈물)* 마치 접착제처럼 끈적끈절하고, 견고한 액체. 이 모든 것들은 단지 부수적인 배경일 뿐, 언제나 본질에서 한 발짝 비껴나 있다. 그의 내면에는 극심한 어둠이 있고, 어둠의 한가운데에 예의 그 어린 소년이 있다.   무엇이든 그에게 해주소서, 유머의 신이여. 어떻게든 그에게 웃음을 주소서, 유머의 신이여.   *sunt lacrimae renum(이것은 존재가 흘린 눈물); 기원전 1세기에 활약했던 고대 로마의 서정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남긴 위대한 서사시에 나오는 "사물 또한 눈물을 흘린다"는 구절을 인용한 것. 베르기리우스는 애국적인 정서와 종교적 경건함, 풍부한 교양, 완벽한 시적 기교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특히 단테가 에서 그를 안내자로 삼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병원에서 작성한 보고서 / 쉼보르스카   누가 그를 만나러 갈까. 우리는 성냥개비로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내가 당첨됐네요. 나는 식탁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병원의 면회 시간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문안 인사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는 오히려 제 손을 뒤로 뺐습니다. 뼈다귀를 감추고, 절대로 내놓지 않으려는 굶주린 강아지처럼.   그는 죽는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듯 했습니다.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에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합성 사진 속의 인물들처럼 우리의 시선은 스치고, 엇갈렸습니다.   그는 그만 가달라고도, 곁에 있어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식탁에 함께 앉았던 사람들 중 그 누구의 안부도 묻지 않았습니다. 볼레크, 너에 대해서도 톨레크, 너에 대해서도, 롤레크, 너에 대해서도*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네요. 죽는 자는 누구이고, 애도하는 자는 누구인가요? 나는 유리컵에 꽂힌 세 송이의 제비꽃에 관해, 현대 의약품의 놀라운 효력에 관해 찬사를 늘어 놓았습니다. 태양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다가 불을 껐습니다.   아래로 뛰어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와락 열어젖힐 수 있는 문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아직도 너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또 얼마나 기쁜 일인지.   병원 냄새는 내게 구토를 불러일으킵니다.   *볼레크Bolek, 톨레크Tolek, 롤레크Lolek는 우리나라의 철수, 민수, 영수처럼 폴랜드에서 흔한 남자 이름이다.   철새들의 귀환 / 쉼보르스카   그해 봄, 철새들은 또다시 너무 일찍 돌아왔다. 이성(理性)이여 기뻐하라, 본능 또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음에. 본능이 꾸벅꾸벅 졸며 방심하는 사이, 철새들은 눈 속에 추락하여 어이없이 죽음을 맞는다. 정교한 인후(咽喉)와 예술적인 발톱, 건실한 연골과 진지한 물갈퀴, 심장의 배수구와 창자의 미로, 갈비뼈 사이의 가지런한 통로와 열을 지어 곧게 뻗은 근사한 척추, 공예품 박물관에나 어울릴 듯 멋들어진 깃털, 참을성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부리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지극히 황당한 죽음을 맞는다.   이것은 애도의 노래가 아니라, 단지 분노의 표현일 뿐. 눈부시게 깨끗한 순백의 천사, 구약 성서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 땀구멍을 지닌 나는 연(鳶), 공중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개별적이어서 우리 손에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무한한 존재,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극처럼 근육과 근육의 시간과 장소의 일치속에 긴밀하게 이어져 있고, 힘찬 날갯짓으로 환호를 보내는 경이로운 생물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한다. 그러곤 자신만의 고풍스럽고, 소박한 태로로 미수(未遂)로 그치고 만 무기력한 시도를 바라보듯, 아무렇지도 않은 담담한 얼굴로 비둘기의 최후를 응시한다.   안경원숭이* / 쉼보르스카   나는 안경원숭이, 안경원숭이의 아들. 안경원숭이의 손자이며, 안경원숭이의 증손자. 두 개의 커다란 동공과 그 밖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 결합된 조그만 피조물. 계속되는 진화와 끊임없는 변형으로부터 나는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죠. 내 고기가 기막힌 맛을 내는 것도 아니고, 내 모피 가지고는 털목돌리 한 개를 만들기도 부족하니까요. 내 침샘이 다른 동물들처럼 행운의 부적으로 쓰이는 것도 아니고, 내 창자로 음악회에 사용할 현악기의 줄을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나는 안경원숭이, 인간의 손가락 위에 산 채로 덩그러니 앉아 있습니다.   친애하는 주인님, 안녕하세요. 내게서 아무것도 빼앗아갈 필요가 없으니 그 대가로 무엇을 주실 건가요? 주인님의 너그러운 아량으로 어떤 보상을 베푸실 건가요? 나는 돈으로 살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존재. 당신의 미소를 똑같이 흉내 낸 대가로 얼마나 많은 상금을 하사하실 건가요? 관대하신 주인님, 너그러우신 주인님,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가치 없는 죽음은 없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증언해줄까요? 행여 당신들이 해줄 건가요?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이 모든 사실들은 별이 총총한 이 밤이 지나면 금세 잊혀져버릴 것을.   가죽이 통째로 벗겨진다든지, 뼈가 뽑히거나 깃털이 갈기갈기 찢기는 끔찍한 불행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던 우리들 중 몇몇 원숭이만이 가시와 비늘과 송곳니와 뿔을 감히 동경할 수 있었답니다. 단백질의 착상으로 만들어진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소망할 수 있었답니다. 친애하는 주인님, 우리는 당신의 꿈입니다. 일시적이나마 당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백일몽입니다.   나는 안경원숭이,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다 안경원숭이. 다른 짐승들의 절반밖에 안 되는 조그만 몸집을 가진 피조물.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무엇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완벽한 존재. 먼 옛날 나는 너무나 가벼워서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를 사뿐히 뛰어오를 수도 있었고, 하늘 위로 튕겨져 감상적인 돌멩이 때문에 한 번, 또 한 번, 자꾸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안경원숭이.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답니다. 안경원숭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본질적인 당위성에 대해서.   *안경원숭이; 동인도 제도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원숭이류의 동물. 안경을 쓴 것처럼 동그랗고 큰 눈이 특징이다.   일요일에 심장에게 / 쉼보르스카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보채지도, 소란을 피우지 않아서. 타고난 성실성과 부지런함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아첨도 요구하지 않아서.   너는 1분에 70번의 공로를 세우고 있구나. 내 모든 수축과 이완은 바다 한가운데로 조각배를 밀어내듯 세상의 주위를 맴돌고 있구나.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한 번, 또 한 번, 나를 전체에서 분리시켜주어서. 심지어 꿈에서조차 따로 끄집어내주어서.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내가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해주어서. 비록 오늘은 일요일, 안식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날이지만, 내 갈비뼈 바로 아래쪽에선 휴일을 코앞에 둔 분주하고, 일상적인 움직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곡예사 / 쉼보르스카   공중그네에서 공중그네로. 묵소리가 멈춘 뒤 갑자기 찾아든 죽음과도 같은 적막 속에서, 느닷없이 놀란 공기를 헤집고 관통하면서, 또다시 추락의 타이밍을 비껴난 육신의 무게보다 한 템포 더 빠르게.   그는 솔로였다. 아니 솔로보다 더 작고, 부족한 존재였다. 절름발이였기에, 날개를 잃어버렸기에. 이 모든 결핍은 더욱더 크나큰 장애가 되어 마침내 그는 깃털 하나 없이 적나라한 시선 속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풀쩍,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힘겹지만 가볍게, 끈질긴 민첩함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영감 속에서, 너는 아느냐, 비행의 순간을 낚아채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숨죽이고 기다려야 했는지. 너는 아느냐, 자신이 지닌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머리에서 발끝까지 얼마나 치밀한 전략을 세워야만 했는지. 너는 아느냐,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느냐. 그가 얼마나 절묘하게 자신의 체형을 짜 맞추고 조립했는지를 흔들리는 세상을 손아귀에 포착하기 위해 그는 계획에 맞춰 새로이 제작된 양팔을 앞으로 곧게 뻗었다.   바로 그 순간, 벌써 화살처럼 저만치 달아나버린 그 짧은 찰나에 그의 두 팔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고 위대했다.   다산을 기원하는 구석기 시대의  페티시즘* / 쉼보르스카   위대한 어머니는 얼굴이 없다. 무엇 때문에 위대한 어머니에게 얼굴이 필요하겠는가. 얼굴은 충실하고, 정숙하게 몸의 일부로 머무르질 못한다. 얼굴은 몸에게 훼방을 일삼는 신성치 못한 존재다. 육신의 장엄한 일치와 조화를 방해할 뿐. 위대한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얼굴은 한가운데 눈먼 배꼽이 새겨진 볼록한 배와 다름 아니다.   위대한 어머니는 발이 없다. 위대한 어머니에게 무엇 때문에 발이 필요하겠는가. 대체 어디를 헤매고 다닌단 말인가. 세상의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느닷없이 끼어들 일이 뭐가 있겠는가. 위대한 어머니는 이미 자신이 원하던 그곳으로 떠났다. 거기서 살갗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 열심히 보초를 서고 있다.   그래, 저기 저 너머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는가? 뭐, 아무래도 좋다. 그곳은 풍요와 축복의 땅인가? 그렇다면 더욱 좋다. 아이들이 어딘가를 향해 분주히 달려가고 있다. 고개 들어 뭔가를 바라보고 있는가? 훌륭하다! 그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터무니없을 만큼 온전하게,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들이 등을 돌려도 여전히, 변함없이 존재한다 세상으로선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는 간신히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 가슴 위에 가지런히 포개어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두 개의 가느다란 손. 이 손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생(生)을 축복해야 한단 말인가. 무슨 이유로 넘치게 축복 받은 자들에게 또다시 은총을 베풀어야 한단 말인가. 이 손이 맡은 역할은 오직 하나.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한 무슨 일이 생겨도, 설사 아무런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자신에게 허락된 본분을 지키며, 지그재그로 엇갈린 본연의 자세를 고스란히 유지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아름다운 자태에 마지막 미소를 보태는 것.   *페티시즘 ; 일종의 물신 숭배로 나무나 돌 따위에 마력이 있다고 믿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원시 종교의 한 형태.
41    황무지 / T.S. 엘리엇 (황동규[한국] 번역) 댓글:  조회:4873  추천:0  2017-08-24
황무지 / T.S. 엘리엇    (황동규 번역)   "한번은 쿠바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이 제사(題詞)는 1세기 로마 황제의 궁정시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의 48장  에서 인용한 것으로, 술 취한 김에 주인 트리말키오가 신기한 이야기를 해서 술친구들을 압도하려고 하는 장이다. 희랍신화에서 무녀는 앞날을 점치는 힘을 지닌 여자이다. 그녀는 아폴로신에게서 손안에 든 먼지만큼(30행 참조) 많은 햇수의 수명을 허용받았으나 그만큼 젊은도 달라는 청을 잊고 안 했기 때문에 늙어 메말라 들어 조롱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죽음보다도 못한 죽은 상태의 황무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보다 나은 예술가"는 단테가 (연옥편) 26장에서 12세기 이탈리아 시인 다니엘을 찬양한 문구. 혼란 상태에 있던 의 초고를 에즈라 파운드가 약 절반의 길이로 고쳐 준데 대한 감사의 찬사.   1 죽은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르베르거 호(湖)***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이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죽은 자의 매장: 영국 정교의 매장 성사에서 나온 것임.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가사(假死) 상태를 오히려 원하는 현대의 주민들에게 모든 것을 일깨우는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일 수 밖에 없다. 시인 초서(1343~1400)의 에서는 4월에 주민들이 성지순례를 떠나지만 황무지의 주민들은 8~18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쾌락의 관광 여행을 떠난다. ***슈타른베르거 호: 뮌헨 근처에 있는 호수. 휴양지로 유명. *호프가르텐 공원: 뮌헨에 있는 공원.   어려서 사촌 태공 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으로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내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 더미뿐*** 그곳엔 해가 쪼아 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마리 라마슈 백작부인의 가  8~18행의 기조를 이루고 있음은 밝혀진 사실이지만 여기서 마리를 특정인으로 볼 필요는 없다. 8~18행은 휴양지에서 상류사회 사람들이 하는 의미 없는 대화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구약 2장 1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엘리엇 원주. *** 6장 6절 "너의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참조  * 12장 5절 노년의 적막을 말하는 곳.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참조. 엘리엇 원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고향으로 불어요 아일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일 년 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지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어요." - 하지만 히아신스 정원에서 밤늦게 한 아름 꽃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32장 2절 "'의로운 왕'은 광풍이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참조. 여기서 '의로운 왕'은 예수를 예언한 것으로 풀이됨. **이 시 앞의 제사(題詞)의 주 참조. *** 바그너의 오페라 1막 5~8절. 배사공의 아리아. 엘리엇의 원주 *히아신스꽃은 풍요제에서 부활한 신의 상징이다.   빛의 핵심인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유명한 천리안 소소수트리스 부인은** 독감에 걸렸다. 하지만 영특한 카드*** 한 벌을 가지고 유럽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자로 알려져 있다. 이것 보세요, 그네가 말했다. 여기 당신 패가 있어요, 익사한 페니키아 수부*로군요. (보세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어요)**   *3막 24절 . 이졸데의 배가 오나 살펴보던 목동이 죽어가는 트리스탄에게 하는 말, 엘리엇 원주. **올더스 헉슬리(1894~1963)의 소설 27장에 가짜 점쟁이 마담 세소스트리스가 등장 이집트식 이름 '독감에 걸렸다'는 부분에 아이러니를 줌. ***점쟁이들이 사용하는 타로 카드는 모두 일흔여덟 장으로 되어 있으며 풍요제와 민화에 기원을 갖고 있다. 엘리엇의 원주에 의하면, 자신은 타로 카드의 정확한 구성을 잘 모르며 편의에 맞추어 변형시키기도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영특한 카드"에서 "요새는 조심해야죠"까지 나오는 상징들은 1)의식의 타락. 2)원형적 상징물 해석의 모호함. 3)정신 구조를 파헤치기 위한 열쇠가 되는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풍요신의 한 전형, 여름의 죽음을 상징하기 위해 매해 그를 본뜬 상을 바다에 던진다. **세익스피어의 1막 2장. 에서 인용. 익사한 자의 눈이 진주로 변했다고 함으로써 놀라운 바다의 변화력을 보여 주고 있다.   이건 벨라도나,* 암석의 여인 수상한 여인이예요. 이건 지팡이 셋 짚은 사나이** 이건 바퀴*** 이건 눈 하나밖에 없는 상인* 그리고 아무것도 안 그린 이 패는 그가 짊어지고 가는 무엇인데 내가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살당한 사내의 패**가 안 보이는군요. 몰에 빠져 죽는 걸 조심하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군요. 또 오세요. 에퀴톤 부인을 만나시거든 천궁도를 직접 갖고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요새는 조심해야죠.   현실감 없는 도시,***   *이탈리어로 미인. 마리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다빈치가 그린 암석의 마돈나를 생각하라)벨라도라라는 이름을 지닌 눈 화장품을 연상하기고 하다. 그리고 수상한 여인이 되어 3부의 여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타로 카드에 나오는 인물. 엘리엇은 그를 멋대로 어부왕과 연결시켰다고 원주에서 밝히고 있다. ***운명의 바퀴 *프로필이기 때문에 하나만 보인다. 3부의 상인 유제니데스와 연결. **타로 카드에 나오는 인물 T자형의 십자가에 한쪽 다리로 매달려 있음. 식물의 재생을 위해 살해당하는 신을 상징함. ***보들레르의 시 참조.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때의 사람들이 런던 교* 위로 흘러갔다.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음이 망쳤다고 나는 생각도 못 했다** 이따금 짧은 한숨들을 내쉬며 각자 발치만 내려보면서 언덕을 넘어 킹 윌리엄 가***를 내려가 성(聖) 메리 올노스 성당이* 죽은 소리로 드디어 아홉 시를 알리는 곳으로 거기서 나는 낯익은 자를 만나 소리쳐서 그를 세웠다. "스테슨** 자네 밀라에 해전*** 때 나와 같은 배에 탔었지!   *템스 강에 놓인 다리. 런던 주택가에서 상업 중심지로 가려면 건너는 다리. **단테의 3장 55~57행 참조.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았던 사람의 무리 보들레르를 논하는 자리에서 엘리엇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상태보다는 차라리 악한 것이 낫다도 말함. 다음 2행 역시 단테의 3장 55~57행 참조. *킹 윌리엄 가에 있는 성당 이름 건축가 렌이 설계한 성당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한다고 엘리엇은 원주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오전 9시는 런던 교를 건너는 군중들의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아마도 흔한 사업가의 이름. ***1차 포에나 전쟁(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해전 1차 세계대전처럼 포에니 전쟁도 경제적 문제로 발생한 것이다.   작년 뜰에 심은 시체에 싹이 트기 시작했나?"* 올해엔 꽃이 필까? 혹시 때아닌 서리가 묘상(錨床)을 망쳤나? 오 오 개를 멀리하게, 비록 놈이 인간의 친구이긴 해도** 그렇잖으면 놈이 발톱으로 시체를 다시 파헤칠 걸세!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고대 풍요제에서는 신의 형상들을 뜰에 묻었다. 그 풍요제가 정원 가꾸기로 바뀌었다. **엘리엇 원주에 의하면 존 웹스터(1580~1633)의 비극 5막 4장에서 코르넬리아의 조가(弔歌). 무덤 없는 자들의 비정한 시체들을 위한 노래. "하지만 인간의 적인 늑대들을 조심하시오. 발톱으로 다시 파헤치리니"에서 '늑대'를 '개'로 '인간의 적'을 '인간의 친구'로 바꿈. 이 이미지는 풍요제의 궁극적 속화를 보여 주기도 한다. 즉 신이 뒤뜰에 묻혔다가 개가 파내는 물건들로까지 된 상태. *** 엘리엇의 원주. 보들레르의 서시 의 마지막 행. 보들레르처럼 엘리엇도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어 적극적으로 시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는 뜻도 있고, 독자까지 공모자로 만드려는 뜻도 있다.   2 체스 놀이* / T.S. 엘리엇      그네가 앉아 있는 의자는 눈부신 옥좌처럼** 대리석 위에서 빛나고, 거울이 열매 연 포도 넝쿨 아로새긴 받침대 사이에 걸려 있다 넝쿨 뒤에서 금빛 큐피트가 몰래 내다 보았다 (큐피트 또 하나는 날개로 눈을 가리고) 거울은 가지 일곱 개인 촛대에서 타는 불길을 두 배로 반사해서 테이블 위로 쏟았고, 비단 갑들로부터 잔뜩 쏟아 놓은 그네의 보석들이 그 빛을 받았다 마개 뽑힌 상아병과 색 유리병에는 이상한 합성향료들이 연고(軟膏) 분 혹은 액체로 숨어서 감각을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익사시켰다 향내는 창에서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자극받아 위로 올라가 길게 늘어진 촛불들을 살찌게 하고   *이 제목은 토머스 미들턴(1570~1627)의 극 와 를 연상시킨다. 특히 후자 2막 2장에서의 체스 놀이는 며느리가 겁탈당하는 동안 보호자인 시어머니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능욕당한 필로멜라의 이야기가 이 테마를 다시 강조해 준다. 이 마당에서 전개되는 두 개의 장면 모두 무의미한 성의 아야기임에 유의하자. **엘리엇의 원주. 섹스피어의 2막 2장 190행. "그네가 앉아 있는 거룻배는 눈부신 옥좌처럼 물 위에 빛났다."   연기를 우물반자(格天井)* 속으로 불어넣어 격자무늬를 설레게 했다. 동박(銅箔)을 뿌린 커다란 바다나무는 색 대리석에 둘러싸여 초록빛 주황색으로 타고 그 슬픈 불빛 속에서 조각된 돌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 고풍의 벽난로 위에는 마치 숲 풍경이 내다보이는 창처럼** 저 무지한 왕에게 그처럼 무참히 능욕당한 필로멜라***의 변신 그림이 걸려 있다 나이팅게일은 맑은 목청으로 온 황야를 채우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 짓을 계속한다. 그 울음은 더러운 귀에 "쩍 쩍"* 소리로 들릴 뿐,   *베르길리우스의 1권 726 참조.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아이네이스를 위해 잔치하는 장면 부정한 카르타고 이야기는 3부 끝머리에 나온다. **엘리엇의 원주. 밀턴의 4권 140행 사탄의 눈으로 보는 에덴동산 묘사 ***오비디우스(BC.43~AD.17)의 6권 참조. 엘리엇의 원주. 오비디우스는 희랍신화의 필로멜라가 형부 테레우스 왕에 의해 능욕당하고 혀가 잘려 결국 나이팅게일로 변한 것을 노래하고 있다. *나이팅게일의 소리는 성교를 암시하는 말로도 쓰임. 비극적 신화가 전한 이야기로 변화된 상황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음.   그 밖에 시간의 시든 꽁초들이 벽에 그려져 있고, 노려보는 초상들은 몸을 기울여 자기들이 에워싼  방을 숙연케 했다. 층계에 신발 끄는 소리, 난로 빛을 받아, 빗질한 그네의 머리는 불의 점들처럼 흩어져 달아올라 말(言)이 되려다간 무서울 만치 조용해지곤 했다.   "오늘밤 제 신경이 이상해요. 정말 그래요. 가지 말아요. 얘기를 들려주세요. 왜 안 하죠. 하세요. 뭘 생각하세요? 무슨 생각? 무슨?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 통 알 수 없어요. 생각해 봐요."   나는 죽은 자들이 자기 뼈를 잃은 쥐들의 골목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   "저게 무슨 소리죠?" 문 밑을 지나는 바람 소리.** "지금 저건 무슨 소리죠? 바람이 무얼 하고 있죠?"   *3장 193행 참조. 엘리엇 원주. **웹스터의 극 3막 2장 162행 참조. 죽은 사람으로 생각한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은 의사가 다른 의사에게 하는 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것도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죠? 아무것도 보지 못하죠 아무것도 기억 못 하죠?"   나는 기억하지 그의 눈이 진주로 변한 것을* "당신 살았어요, 죽었어요?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나요?" 그러나 오오오오 저 세익스피이이어식 래그 재즈 -** 그것 참 우우아하고 그것 참 지(知)적이이야 "저는 지금 무얼 해야 할까요? 무얼 해야 할까요?" "지금 그대로 거리로 뛰쳐나가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거리를 헤매겠어요. 내일은 무얼 해야 할까요? 도대체 무얼 해야 할까요?" 열 시에 온수(溫水).   *세익스피어의 1막 2장. 에서 인용. 익사한 자의 눈이 진주로 변했다고 함으로써 놀라운 바다의 변화력을 보여 주고 있다. **'오오오오'는 세익스피어의 오델로나 리어왕의 부르짖음 표시로 'O'를 네 번씩 반복하였음. 래그 재즈는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유행한 것으로 싱커페이션(당긴음)이 툭색이다. 세익스피어의 스펠링이 변한 것은 이 싱커페이션 흉내이다. 만일 비가 오면, 네 시에 세단 차. 그러곤 체스나 한판 두지. 경계하는 눈을 하고 문에 노크나 기다리며.*   릴의 남편이 제대했을 때 내가 말했지 --** 노골적으로 말했단 말이야.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이제 앨버트가 돌아오니 몸치장 좀 해. 이 해 박으라고 준 돈 어떻게 했느냐고 물을 거야. 돈 줄 때 내가 거기 있었는 걸. 죄다 뽑고 참한 걸로 해 넣으라고, 릴. 하고 앨버트가 분명히 말했는걸, 차마 볼 수 없다고. 나도 차마 볼 수 없다고 했지. 가엾은 앨버트를 생각해 봐. 4년 동안이나 군대에 있었으니 하고 싶을 거야. 네가 재미를 주지 않으면 다른 여자들이 주겠지. 오오 그런 여자들이 있을까, 릴이 말했어. 그럴걸, 하고 대답해 줬지. 그렇다면 고맙다고 하며 노려볼 여자를 알게 되겠군, 하고   *능욕당한 필로멜라의 이야기가 이 테마를 다시 강조해 준다. 이 마당에서 전개되는 두 개의 장면 모두 무의미한 성의 아야기임에 유의하자 **여기서부터 둘째 마당 마지막까지는 술집에서 두 여자가 혹은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하는 대화 내지는 말로 되어 있다. ***바텐더가 묻 닫을 시간임을 알리는 말.   릴이 말했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그게 싫다면 좋을 대로 해봐, 하고 말했지. 네가 못하면 다른 년들이 할 거야. 혹시 앨버트가 널 버리더라도 내가 귀띔 한 안 탓은 아냐. 그처럼 늙다리로 보이는 게 부끄럽지도 않니? 하고 말했지. (개는 아직 서른한 살인걸.) 할 수 없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릴이 말했어. 애를 떼기 위해 먹은 환약 때문인걸. (개는 벌써 애가 다섯, 마지막 조지를 낳을 땐 죽다 살았지.) 약제사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그 뒤론 전과 같지 않아. 넌 정말 바보야, 하고 쏘아 줬지. 그래 앨버트가 널 가만두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애를 원치 않는다면 결혼은 왜 했어?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앨버트가 돌아온 일요일 따뜻한 햄 요리를 하곤 나를 불러 제대로 맛보게 했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빌 안녕, 루 또 보자, 메이 안녕, 안녕. 탁탁, 안녕, 안녕, 안녕, 부인님들, 안녕, 아름다운 부인님들, 안녕 안녕*   *오필리어가 물에 빠져 죽기 전에 하는 인사말. 4막 5장 참조.    3. 불의 설교* / T.S. 엘리엇     강의 천막이 찢어졌다,**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쥐며 가라앉는다. 바람은 소리 없이 갈색 땅을 가로 지른다. 님프들이 떠나갔다.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 내 노래 끝낼 때까지*** 강물 위엔 빈 병도, 샌드위치 쌌던 종이도 명주 손수건도, 마분지 상자도 담배꽁초도 그 밖의 다른 여름밤의 증거품 아무것도 없다. 님프들의 친구들, 빈둥거리는 중역 자제들도 떠나갔다, 주소를 남기지 않고.   *물이 정화시키는 힘과 익사시키는 힘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처럼 불도 정화시키는 힘과 태워 없애는 힘을 동시에 갖고 있다. 는 부처가 인간을 파괴하고 재생을 막는 정욕의 불에 대해 설교한 것이다. 현대적인 설교 장소는 탬스 강변, 즉 런던이다. **시각이 주는 이미지만을 생각한다면 천막처럼 위를 덮고 있던 나뭇잎이 가을에 졌다는 뜻임. 그러나 구약성경에 의하면 유목민인 유대인들이 천막을 성소로 사용했으므로 성소가 무너졌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또는 일반적으로 여자의 순결이 깨졌음을 뜻할 수도 있다. ***에드먼드 스펜서(1552~1599)의 의 후렴, 결혼을 축하하는 장소도 템스 강임. 그러나 쓰레기가 널린 오늘날의 템스 강과는 다르다. 래먼 호숫가에 앉아 나는 울었노라*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 내 노래 끝낼 때까지.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 내 크게도 길게도 말하지 않으리니. 그러나 등 뒤의 일진냉풍 속에서 나는 듣는다** 뼈들이 덜컹대는 소리와 입이 찢어지도록 낄낄거리는 소리를.   어느 겨울 저녁 가스 공장 뒤를 돌아 음산한 운하에서 낚시질을 하며*** 형왕의 난파*와 그에 앞서 죽은 부왕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쥐 한마리가 흙투성이 배를 끌면서 강둑 풀밭을 슬며시 기어갔다. *구약 137편 1절 "우리가 바빌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고 울었노라." 참조. 래먼 호는 제네바 호의 프랑스식 이름. 이곳에서 엘리엇은 의 많은 부분을 썼다. 한편 래먼이 첩이나 창녀라는 말로도 쓰이므로 욕정과의 관계도 있다. **마빌의 의 1절 "하나 등 뒤로 나는 항상 듣는다 시간의 날개 달린 전차가 가까이 달려오는 소리를." 엘리엇 원주. ***물고기를 잡는 것은 영원과 구원을 찾는 일임(어부왕 참조) 그러나 이 행위는 이제 속화되어 버렸음. *1막 2장. 페르디난도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장면, "둑 위에 앉아 부왕의 난파를 슬퍼했노라" 참조. 엘리엇 원주. 흰 시체들이 발가벗고 낮고 습기 찬 땅속에 뼈들은 조그맣고 낮고 메마른 다락에 버려져서 해마다 쥐의 발에만 차여 덜그덕거렸다. 하나 등 위에서 나는 때로 듣는다. 클랙슨 소리와 엔진 소리를, 그 소리는 스위니를 샘물 속에 있는 포터 부인에게 데려가리라.* 오 달빛이 포터 부인과 그네의 딸 위로 쏟아진다. 그들은 소다수에 발을 씻는다.** 그리고 오 둥근 천장 속에서 합창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여!** *엘리엇 원주. 존데이(1574~1840)의 극 "갑자기 귀를 기울이면 들으리/나팔 소리와 사냥감 쫓는 소리/그것은 악타이온을 샘물 속에 있는 다이애나에게 데려가리라/거기서 모두를 그네의 벌거벗은 살을 보리라." 다이애나가 목욕하는 것을 본 악타이온은 사슴으로 변해 동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위의 희랍신화와는 달리 현대의 악타이온 스위니 씨는 다른 운명을 맞는다. **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레일리아의 병사들 간에 유행한 노래. 원주에서 엘리엇은 출처가 선명하지 않음을 술회하고 있다. ***엘리엇의 원주. 베를렌(1844~1896)의 시 의 마지막 행 부상당한 암포르타스(어부왕)에게 내린 저주를 기사 파르시팔이 벗겨 주기 전 발을 씻는 예식에서 소년들이 합창함. 바그너 작곡의 참조. 투윗 투윗 투윗 져 져 져 져 져 져 참 난폭하게 욕보았네 테류.*   현실감 없는 도시 겨울 낮의 갈색 안개 속에서 스미르나 상인** 유게니데스 씨는 수염도 깎지 않고 포겟엔 보험료 운임 포함 가격의 건포도 일람 증서를 가득 넣고 속된 불어로 나에게는 캐논 스트리트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주말을 메트로폴 호텔*에서 보내자고 청했다.   보랏빛 시간, 눈과 등이 책상에서 일어나고 인간의 내연기관이 택시처럼 털털대며 기다릴 때. *테류는 필로멜라를 능욕한 테레우스의 호격. **스미르나는 터키 서부에 있는 항구. 이곳 상인들은 고대의 신비한 의식을 퍼뜨렸다. 오늘날의 의식은 메트로폴 호텔에서 보내는 주말로 되었다. ***유럽 대륙과 거래하는 상인들이 자주 가던 호텔 *영국 남안 브라이튼 시에 있는 호텔. "주말을 메트로폴에서"라는 말은 당시 성적인 낌새가 많은 말이었다. 비록 눈 멀고 남녀 양성 사이에서 털털대는 시든 여자 젖을 지닌 늙은 남자인 나 티레지아스*는 볼 수 있노라. 보랏빛 시간, 귀로를 재촉하고 뱃사람을 바다로부터 집에 데려오는 시간** 차(茶)시간에 돌아온 타이피스트가 조반 설거지를 하고 스토브를 켜고 깡통 음식을 늘어놓는 것을. 창밖으로 마지막 햇살을 받으며 마르고 있는 그네의 콤비네이션 속옷이 위태롭게 널려 있다. (밤엔 그네의 침대가 되는) 긴 의자 위엔 양말 짝들, 슬리퍼, 하의, 코르셋이 쌓여 있다. 시든 젖이 달린 늙은 남자 나 티레지아스는 이 장면을 보고 나머지는 예언했다 - *희랍신화에 나오는 남녀 양성의 인물, 헤라에 의해 눈이 멀었으나 제우스에 의해 예언하는 힘을 얻게 되었다. 엘리엇의 원주는 다음과 같다. "티레지아스는 단순한 방관자이고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타의 모든 인물들을 통합하고 있다. 마치 외눈박이 건포도 상인이 페니키아 수부로 융합되고 다시 그 수부가 나폴리 왕자 테르디난도와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모든 여자는 한 여자이고 남여 양성은 티레지아스 속에서 만난다. 티레지아스가 '관찰하는 것'이 사실상 이 시의 내용이다." **희랍의 여류 시인 사포(B.C. 612?~?)의 시행과 꼭 같지는 않으나 나는 해 질 무렵에 돌아오는 '근해 어부' 또는 '평저 어선'의 어부를 생각했다. 엘리엇 원주. 나 또한 놀러 올 손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 여드름투성이의 청년이 도착한다. 군소 가옥 중개소 사원, 당돌한 눈초리, 하류 출신이지만 브래드퍼드 백만장자의* 머리맡에 놓인 실크 모자처럼 뻔뻔스러움을 지닌 젊은이.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지루하고 노곤해 하니 호기라고 짐작하고 그는 그네를 애무하려 든다. 원치 않지만 내버려 둔다. 얼굴 붉히며 결심한 그는 단숨에 달려든다. 더듬는 두 손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는다. 잘난 체하는 그는 반응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네의 무관심을 환영으로 여긴다. (나 티레지아스는 바로 이 긴 의자 혹은 침대 위에서 행해진 모든 것을 이미 겪었노라. 나는 티베 시의 성벽** 밑에 앉기도 했고 가장 비천한 죽은 자들 사이를 걷기도 했느니라.) 그는 생색내는 마지막 키스를 해주고 더듬으며 층계를 내려간다. 불 꺼진 층계를--- *요크셔에 있는 모직 도시. 1차 세계대전 후 많은 갑부가 생겨났다. **고대 희랍 도시. 티레지아스는 이 도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살며 예언했다.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이 있었다. 그네는 돌아서서 잠시 거울을 들여다본다. 애인 떠난 것조차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어렴풋한 생각이 지나간다. '흥 이제 일을 다 치뤘으니 좋아,' 사랑스런 여자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혼자서 방을 거닐 때는 무심한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고 축음기에 판을 하나 건다.   "이 음악이 물결을 타고 내 곁으로 기어 와"** 스트랜드 가(街)의 술집 옆에서 달콤한 만돌린의 흐느끼는 소리와 생선 다루는 노동자들이 쉬며 안에서 *골드스미스(1730~1774)의 소설 중의 노래. 여주인공 올리비아는 과거에 유혹받은 장소에 와서 노래를 부른다. "사랑스런 여자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므로 남자가 배반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을 때 어떤 마술이 그네의 슬픔을 덜어 주랴." 그리고 '죽는 길'이 있음을 노래한다. 현대의 올리비어는 축음기를 튼다. ** 1막 2장의 페르디난도의 말. "둑 위에 앉아 부왕의 난파를 슬퍼했노라" 다음에 이어지는 구. ***런던 교 부근에 있는 거리 이름. 떠들어 대며 지껄이는 소리를 그곳에는 마그누스 마르티르 성당의 벽이* 이오니아풍(風)의 흰빛 금빛 형언할 수 없는 화려함을 지니고 있다.   강은 땀 흘린다* 기름과 타르로 거룻배들은 썰물을 타고 흘러간다. 붉은 돛들이 활짝 육중한 돛대 위에서 바람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이 부분의 몇 행은 "달콤한 음악"과 일하고 쉬는 "생선 다루는 노동자" 그리고 성당 내부의 찬란함이 진정한 가치의 세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노동과 휴식이 모두 절실하고 종교적 의미와의 관련 아래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 템스 강 처녀들의 노래는 여기서 시작된다. 192행, 즉 전차와 먼지 뒤짚어쓴 나무들"부터 "아무 기대도 없는"까지 그들은 교대로 이야기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두 번 반복되는 "웨이얼랄라---" 바그너의 후렴에 의해 대조된다. 이 후렴은 바그너의 오페라 의 4부 3막 1장에서 라인 강의 처녀들이 부르는 것으로, 라인 강의 황금이 도난당한 후 라인강의 아름다움이 사라졌으나 곧 그것을 다시 찾을 것을 기대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거룻배들은 떠 있는 통나무들을 헤치고 개 섬(島)*을 지나 그리니치 하구로 내려간다. 웨이얼랄라 레이어 윌랄라 레이얼랄라   엘리자베스 여왕과 레스터 백작** 역풍에 젓는 노 고물은 붉은빛 금빛 물들인 조개껍질 힘차게 치는 물결은 양편 기슭을 잔무늬로 꾸미고 남서풍은 하류로 가지고 갔다. 노래하는 종소리를. *개 섬(島)은 런던 중심가로부터 약간 하류에 있는 반도. 첫 마디의 '개'의 모티프를 상기시킨다. 그리니치는 개 섬 건너편의 강변. **엘리자베스 여왕(세익스피어 시대)과 레스터 백작은 서로 연애하는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프로드의 7권 349쪽 참조.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템스 강 뱃놀이를 즐겼으며, 그리니치 하구 근처에 있는 그리니치 저택에서 여왕이 레스터를 접견하기도 했다. 하얀 탑들을. 웨이얼랄라 레이어 윌랄라 레이얼랄라   "전차(電車)와 머지 뒤집어쓴 나무들 하이베리가 저를 낳고 리치몬드와 큐가 저를 망쳤어요* 리치몬드에서 저는 좁은 카누 바닥에 누어 두 무릎을 추겨올렸어요"   "저의 발은 무어게이트에,** 마음은 발밑에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는 울었습니다. 그는 '새 출발을 약속했으나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무엇을 원망해야 할까요?"   "마게이트*** 모래밭. 저는 하찮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 다녔어요. *엘리엇의 원주. 단테의 5장 33행 "저 라피아를 기억해 주세요/시에나가 저를 낳고 마렘마가 저를 망쳤어요>"에 대한 풍자적 개작. 하이베리는 런던 교외의 저택가. 리치몬드와 큐는 보트장과 호텔로 유명한 템스 강변의 지명. **동부 런던의 빈민가 ***템스 강 하구의 해변 휴양지. 더러운 두 손의 찢긴 손톱. 제 집안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 아무 기대도 없는" 랄라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건지시나이다.   탄다.   *엘리엇의 원주. 성 아우구스티누의 3부 1장.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한 가마의 사악한 사랑이 내 귓전에서 온통 끓어 대는 곳으로" **엘리엇 원주에 의하면 부처의 에 근거한 것이다. 는 그 중요성으로 볼 때 5장 7절에 나오는 예수의 산상 수훈에 맞먹는다. 헨릴 클라크 워런의 (하버드 도양 총서 1896)의 부분은, "모든 것은 불탄다. 형태도 타고눈으로 받은 인상에 의해서 생기며 그것 또한 탄다." ***에서 부처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즉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 금욕주의자들을 이 마당의 극점으로 나란히 놓은 것은 의도적인 배려였음을 엘리엇은 원주에서 밝히고 있다   4 수사(水死)* / T.S. 엘리엇   페기키아 사람 플레바스는 죽은 지 2주일 갈매기 울음소리도 깊은 바다 물결도 이익도 손실도 잊었다 바다 밑의 조류가 소근대며 그의 뼈를 추렸다, 솟구쳤다 가라앉을 때 그는 노년과 청년의 고뇌들을 다시 겪었다. 소용돌이로 들어가면서 이교도이건 유태인이건** 오 그대 키를 잡고 바람 부는 쪽으로 내다보는 자여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한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   *첫째 마디에서 소소트리스 부인이 예언한 페니키아 수부의 익사가 이루어진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다.    5. 천둥이 한 말*/ T.S. 엘리엇    땀 젖은 얼굴들을**  붉게 비춘 햇불이 있은 이래 동산에 서리처럼 하얀 침묵이 있은 이래 돌 많은 곳의 고뇌가 있은 이래 아우성 소리와  울음소리 옥(獄)과 궁궐(宮闕) 먼 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 사이로 오르고   *비를 기다리는 황무지에 비를 몰아오는 천둥의 소리이다. 이 마디의 첫 부분은 세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즉 2장 13~31절에 기록된 에마우스로 가는 여행(두 제자가 예수가 부활한 날 에마우스로 간다. 도중에 한 사람이 끼어들지만 저녁 식사 때까지 그가 부활한 예수임을 모른다)과 제시 웨스턴(1850~1928)의 저서에 나오는 위험 성당에의 접근, 그리고 현재 동부 유럽의 피폐상. 엘리엇 원주. ** 다음 몇 행은 예수의 체포와 재판,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언덕에 대한 암시를 갖고 있으며, 예수가 처형당한 금요일부터 부활한 일요일. 즉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것은 어부왕이 죽은 후 황무지에 내린 절망과 연결된다.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 틈에서는 멈출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 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 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속엔 정적마저 없다 금 간 흙벽집들 문에서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비웃으며 으르렁댈 뿐 만일 물이 있고 바위가 없다면 만일 바위가 있고 물도 있다면 물 샘물 바위 사이에 물 웅덩이 다만 물소리라도 있다면 매미 소리도 아니고 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로록 또로록 하지만 물이 없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 세어 보면 당신과 나 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도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요?   *물방을 듣는 소리 흉내를 잘 내는 새. **엘리엇의 원주. "다음 몇 행은 남극 탐험대의 이야기에 자극을 얻어 쓴 것이다. 어느 탐험인지는 잊었으나 아마 어니스트 헨리 세클턴의 탐험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탐험대원들이 극도로 피로했을 때 실제 그들의 수효보다 '한 사람이 더 있다'는 환상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또한 이 부분은 엠마우스로 가는 여행을 상기시켜 준다. 공중 높이 들리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어머니의 비탄 같은 흐느낌 소리 평평한 지평선에 마냥 둘러싸인 갈라진 땅 위를 비틀거리며 끝없는 벌판 위로 떼 지어 오는 저 두건 쓴 무리는 누구인가 저 산 너머 보랏빛 하늘 속에 깨어지고 다시 세워졌다가 또 터지는 저 도시는 무엇인가 무너지는 탑들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비엔나 런던 현실감 없는   한 여인이 자기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팽팽히 당겨** 그 현(絃) 위에 가냘픈 곡조를 타고, *이 연은 헤르만 헤세의 참조. "유럽의 반 부분, 적어도 동구의 반이 혼돈으로 가는 중이다. 성스러운 망사에 취햐여 절벽 끝을 따라달리며 취해서 노래 부른다. 마치 찬송을 부르듯이 마치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도스토예프스키의 )가 노래한 것처럼. 이 노래를 듣고 기분 상한 부르주아들은 조소하지만, 성자와 예언자는 눈물을 흘리며 듣는다." 엘리엇 원주. **엘리엇에 의하면 이 연에 사용된 몇몇 세부 사항은 15세기 폴란드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슈(1450~1516)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성배 전설의 중세판들에 의하면 위험 성당은 기사의 용기를 시험하기 위하여 악귀의 영상들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어린애 얼굴을 한 박쥐들이 보랏빛 황혼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개 치며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시커먼 벽을 기어 내려갔다 공중엔 탑들이 거꾸로 서 있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종을 울린다. 시간을 알렸던 종소리 그리고 빈 물통과 마른 우물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들.   산속의 이 황페한 골짜기 희미한 달빛 속에서 풀들이 노래하고 있다 무너진 무덤들 너머 성당 주위에서, 단지 빈 성당이 있을 뿐, 단지 바람의 집이 있을 뿐* 성당엔 창이 없고 문은 삐걱거린다 마른 뼈들이 사람을 해칠 수는 없지. 단지 지붕마루에 수탉 한 마리가 올라 꼬꾜 꼬꾜 꼬꾜 꼬꾜** 번쩍하는 번개 속에서. 그러자 비를 몰아오는 일진(一陣)의 습풍(濕風).   갠지스 강은 바닥이 나고 맥없는 잎들은 비를 기다렸다. 먹구름은                                                       *이 아무것도 없다는 환상은 기사에 대한 마지막 시험이다.                                                            **닭 울음소리는 유령과 악령들이 떠나감을 나타내 준다. 멀리 희말라야 산봉 너머 모였다. 밀림은 말없이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천둥이 말했다 다* 다타(주라): 우리는 무엇을 주었던가? 친구여, 내 가슴을 흔드는 피 한 시대의 사려분별로도 취소할 수 없는 한 순간의 굴복, 그 엄청난 대담,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해 왔다. 그것은 죽은 자의 약전에서도 자비스러운 거미가 덮은 죽은 자의 추억에서도** 혹은 텅 빈 방에서 바싹 마른 변호사가 개봉하는 유언장 속에도 찾을 수 없다. 다 *5의 1 에 실린 설화. 신들과 인간 그리고 악귀들이 차례로 자기들의 부친인 프라야파디에게 물었다. "저희에게 말하소서." 그들에게 프라야파티는 각각 한 음절의 '다'로 답했다. 각 무리들은 그것을 각기 다른 말로 해석했다. 즉 '다타(주라).'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자제하라)'로. 설화는 "이것이 신의 소리인 천둥이 다다다 할 때 말하는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웹스터의 5막 4장. "그들은 재혼하리라. 벌레가 너의 수의를 좀슬기도 전에, 거미가 너의 비명에 얇은 그물을 치기도 전에." 엘리엇 원주. 다야드밤(공감하라):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 번 돌아가는 소리. 각자 자기 감방에서 우리는 그 열쇠를 생각한다.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옥을 확인한다. 다만 해 질 녘에는 영묘한 속삭임이 들려와 잠시 몰락한 코리올라누스**를 생각나게 한다. 다 담야타(자제하라): 보트는 경쾌히 응했다, 돛과 노에 익숙한 사람의 손에. 바다는 평온했다. 그대의 마음도 경쾌히 응했으리라 부름을 받았을 때, 통제하는 손에   *33장 46행 우고리노는 아이들과 함게 탑에 갇혀 굶어죽은 일을 회상한다. "그때 그 아래서 그 무서운 탑의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었지요." 엘리엇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공감하라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암시하고 있다. 엘리엇의 주는 F.H. 브래들리(1846~1924)의 346쪽에서 계속된다. "외부에서 받는 내 감각도 내 생각이나 감정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내 경험은 밖으로 닫힌 원, 나 자신으 원 안에 속한다. 그리고 모든 요소가 흡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원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원에 대해 불투명하다. ---- 요컨대 영혼에 나타나는 하나의 존재로 간주될 때 전 세계는 각자에게 그 영혼에게만 특이하고 개인적인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참조. 의무보다도 자만심에 의해 행동한 코리올라누스는 자신의 감방에 갇힌 인간의 전형이다. 자부심을 상하게 했다고 해서 그는 자기가 태어난 도시를 향해 적을 지휘했다. 순종하여 침로를 바꾸며.   나는 기슭에 앉아 낚시질했다* 등 뒤엔 메마른 들판.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바로잡아 볼까? 런던 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하는 불길 속에 몸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될 것인가* - 오 제비여 제비여 황폐한 탑 속에 든 아키텐 왕자**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 왔다. 분부대로 합죠***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웨스턴의 에서 참조. **영국 민요의 후렴 ***26장 148핼 참조. 자진해서 고통 받는 프로방스 시인. 아르노 다니엘의 이야기에 붙인 단테의 표현, 재생을 찾는 사람에게 희망적인 단편의 하나. *작자 미상의 라틴어 시 로부터 인용. 그곳에서 시인은 자기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여 언제 봄이 와서 제비처럼 목소리를 줄 것인지 묻고 있다. 제비는 필로멜라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다. **프랑스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1808~1855)의 소네트 로부터 인용. ***토머스 키드(1557~1595)의 극 은 부제가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이다. 아들이 암살되자 히에로니모는 미치게 된다. 극중에서 궁정의 오락을 위해 극을 쓰라는 요청을 받고 그는 대답한다. "분부대로 합죠" 그리곤 그 짧은 극 속에 아들을 암살한 자들이 죽도록 만든다. 그 극중극은 < 황무지>처럼 여러 나라 말로 되어 있다.   다타, 다야드밤, 담야타 산티 산티 산티* *우파니샤드의 형식적인 결어로 쓰이는 산스크리트어 '이해를 초월한 평화'의 뜻.       작가 연보 1888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다. 1906~09년   하버드 대학 프랑스 상징주의와 라포르그에 친숙해지다 1909~10년    하버드 대학 대학원 시작(詩作)을 시작하다. 착수. 1910~11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 완성. 1911~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유학이 중단됨, 옥스퍼드에 거주.                      풍자적 단시들 완성 출판.  1915년 7월    비비안 헤이우드와 결혼. 1915~16년     런던에서 교직 생활. 서평, 브래들리에 관한 논문 완성. 1917~20년     로이드은행에 취직. 평론 발표 1921~25년     런던 특파원(1921~22) 프랑스의 런던 특파원(1922~23) 편집장(192                   2년 10월) 츨판 및 다이얼상(1922) 수상. (1909~1925) 출판. 1926~27년     세네카에 대한 논문 1927~31년      영국 정교로 개종. 영국 시민권 획득(1927년) 1932년           출간                                          1932~34년      완성 1935년           출간 1939년           출간 1947년           아내의 죽음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 1950년          출간 1957년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 1965년           별세. 모더니즘과 새로운 시의 탄생 / 황동규      1  개인의 기호에 관계없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시 한 편만을 고르라면 가 뽑힐 공산이 크다. 이 작품은 1922년 출판되자 곧 '새로운 시'의 보통명사가 되었고, 그 새로운 시에 '모더니즘'이라는 팻말이 붙은 후에는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리고 다른 모든 문화 현상과 마찬가지로 명성의 오르내림을 겪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한창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헤게모니를 상당히 빼앗긴 지금에 와서도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매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오히려 최초의 뛰어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이 생길 정도인 것이다.  엘리엇을 이해하는 데는 모더니즘을 20세기 전반의 문학 조류의 하나로 보는 입장과 더불어 또 하나의 입장, 즉 서구 문학이 칸트 이래로 추구해 온 하나의 목표, 즉 예술 작품은 어떤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정점에 가 있다는 입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 생각의 흐름 속에 괴테를 비롯해 플로베르, 보들레르, 조이스, 토마스 만 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이 지니고 있는 이중성이 여기에 있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낭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상징주의까지도 모더니즘을 만드는 초석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의 흐름을 큰 사이에서 보려는 사람은 모더니즘의 시작을 중세 말 프로방스 지바의 트루바두르(음유시인) 전통에까지 밟아 오르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기독교적인 구원마저 포기할 수 있다는 대담한 삶의 태도는 모더니즘의 핵심 가운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모더니즘의 창시자라 부를 수도 있는 에즈라 파운드(1885~1972)가 트루바두르 시의 전문가였다는 사실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2  엘리엇은 처음부터 '모더니스트'였다. 하버드 대학을 다닐 때 교지에 발표한 '낭만주의적'인 시들을 빼고 그가 전문 잡지에 최초로 발표한 는 그 작품 발표를 주선했던 에즈라 파운드로부터 "최초의 현대적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 찬사는 지금에 와서도 유효하다. 이 작품은 영국이 19세기에 개발해서 고도의 경지에 오르게 한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독백을 듣고 있는 청자가 모호해서(여기에 등장하는 '너'를 내적 자아(inner self)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내적 독백'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요절한 프랑스 시인 라포르그(1860~1887)의 자조적인 내적 독백의 영향이 엿보이지만, 그 스케일이나 담고 있는 20세기 삶의 조명 같은 것을 고려한다면 는 최초의 뚜렷한 '내적 고백'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한 중년 사내의 내적 독백을 통해 기력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이 그려진다. 그것은 종교와 공동체 의식이 제거된 삶의 실체이며 제사(題詞)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지옥의 삶이다. 그러나 그 삶은 18세기의 유행한 의영웅시(擬英雄詩 mock-heroic)의 어조로 노래 되어서, 독백의 간절함과 의영웅시의 비꼼 사이의 긴장이 작품을 끝까지 이끌고 간다.  그리고 그 '지옥'의 삶은 또 얼마나 잘 그려져 있는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등을 창유리에 비비는 노란 안개, 주둥이를 창유리에 비비는 노란 안개, 저녁의 구석구석에 혀를 넣고 핥다가 하수도에 고인 물웅덩이에서 머뭇대다가 굴뚝에서 떨어지는 검댕을 등으로 받고, 테라스를 빠져나가, 별안간 한 번 살짝 뛰고는 때가 녹녹한 시월 밤임을 알고 한 번 집 둘레를 돌고, 잠이 들었다                   -에서    지금 그려지고 있는 것은 시월 저녁이다. 장소가 런던이든, 보스턴이든, 우리나라의 가을 저녁과는 달리 습기 많고 안개 많은 저녁이다. 우선 그런 저녁을 안개로 대표하는 환유의 수사법을 쓰고 있으며 안개는 또 고양이로 대치하는 은유 수사법을 쓰고 있다. 이처럼 두 수사법에 동시에 사용되어 효과를 얻는 경우는 그리 쉽지 않다. 물론 이런 수사법을 동원하여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무기력한 삶이고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처절한 모습이다.  그러나 자신을 게에 비유하는 중간의 환상적이고 자조적인 상상("차라리 나는 소리 없는 바다 바닥을 허둥대며 거너는---")이 마지막에 가서는 인어들이 등장하는 환상적이 낭만적인 상상으로 바뀌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독백을 통해 자신의 삶의 구조를 계속 추적한 끝에 얻은 자신의 실체가 결국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이 그런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엘리엇은 도시의 시인이다. 은 도시에 살고 있는 한없이 순하고 고통받는 인간들이 풍경이다. 이 시의 중심을 이루는 셋쩨 토막의 주된 배경은 프랑스 작가 샤를루이 필리프(1874~1909)의 의 착한 매춘부 여주인공의 삶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사실이 이 시의 이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하튼 감상에 빠지기를 언제나 거부하는 엘리엇은 마지막 토막에 가서 스토아적인 인내 혹은 자동적인 삶의 고집을 보여 주며 시를 끝낸다.  는 처음 읽을 때 역자를 사랑 노래로 착각하게 한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남녀의 헤어짐을 노래하고 있고, 그것을 보는 시인(여기서 '그'와 '나'는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이     그들이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요! 단지 제스처 하나 포즈 하나 잃었을까요.                       -에서    라고 지극히 비낭만적으로 생각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물론 비낭만에도 아픔은 있어서 "때로 이런 상념들이 아직/심산한 밤이나 낮의 휴식을 숨막히게 해요."가 뒤를 잇기는 하지만.  위의 세 편은 를 읽기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훌륭한 시들이다. 도입에 '현대시'의 출발의 모습을 그 어느 시보다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들인 것이다.   3  의 발표와 더불어 엘리엇은 좋든 나쁘든 세계의 '현대시'를 지배해 왔다. 시뿐 아니라 그의 평론은 신비평(New Criticism)을 생기게 했고, 1960년대 중반까지 그의 이론은 대학가의 문학론을 압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비낭만적이고 지성 일변도적인 자세는 시와 비평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그리고 예술의 거의 모든 영역의 평가에까지 스며들었던 것이다.  이제 세계적으로 그의 영향이 재평가되는 추세 속에서 우리는 그의 시작품이 앞으로 생명력을 계속 지닐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대학 생활을 할 때 너무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그의 예술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한 일이 있는 역자는 질문을 할 때마다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유혹을 받아 왔다. 그 유혹은 엘리엇의 새로운 자리매김이 진행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엘리엇은 계속 살아 있는 실체였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의 시는 그의 시론의 연습곡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낭만주의와 그처럼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으며, 그가 아무리 객관적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시는 예술가적 주체의 고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이번에 들을 새로 손볼 때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엘리엇의 시에서 요구하는 것은 기지와 균형과 아이러니이다. 그것은 소위 자연 발생적인 감정과 관련이 적은 것이며 세련된 정신이 문화 속에서 빚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전통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전통이야말로 시의 소재가 되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은 그다음 시인의 전통이 되는 것이다. 전통이 중요한 과제가 될 때 그 전통의 정통성이 문제괸다. 엘리엇은 정통을 희랍, 라틴, 이탈리아 르네상스, 프랑스, 영국에 이어지는 서유럽 문화의 흐름에서 찾았다. 엘리엇의 비평은 그 '정통'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기록으로 보아야 하며, 설사 그 투쟁이 윌리엄 불레이크과 D.H. 로렌스에 대한 평가를 잘못 내리게 했다 하더라도, 존 던과 제라드 홉킨스에 정당한 빛을 주었다는 사실로 회복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그가 시에 기여한 업적은 우선 과도한 감정을 배제할 때 시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감동을 주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T.E. 흄이나 에즈라 파운드의 견고한 이미지들을 프랑스 상징파들의 유연한 이미지와 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프랑스 시인 쥘 라포르그의 회화체의 틀을 통해 이룩되지만 라포로그의 회화체 틀을 통해 이룩되지만 라포르그가 가지고 있지 못한 '다성성(多聲性)'이 가세된다.  다음으로 그가 새롭게 시에 도입한 것은 '콜라쥬' 수법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상(像)과 상의 연결을 위한 언어를 제거하고 그것들을 그대로 병치시키는 방법을 시도했다. 그의 시 읽기의 어려움은 대부분 여기서 나오지만 상과 상의 연결 부분에서 시인의 개인적 감정인자 약점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효과적인 수법인 것이다. 병치된 상들이 직접 독자에게 강렬한 힘을 발휘할 때 시인은 음험하게 숨어 그 힘의 모든 효과에 대하여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엇은 좀 더 복잡한 인간이다. 그는 스스로 제 작품에 주를 붙임으로써 위의 효과에 제한을 가하기도 했고, 1920년대 말의 일반적인 민주주의 조류와는 달리 자기는 "문학에 있어서 고전주의자. 정치에 있어서는 왕당파, 종교에 있어서는 영국 정교 내지 카톨릭"이라고 술회함으로써 인간적인 자신에에 제한을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극도로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되 자기를 묶는 행위. 이것이야말로 서구의 지성이 이룩한 하나의 완성이며, 그것이 20세기의 심연 앞에서 행해졌을 때 20세기의 한 완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4  에 대한 간단한 길잡이를 제시해 보자. 이 작품은 정신적 메마름, 인간의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 생산이 없는 성(性), 그리고 재생이 거부된 죽음에 대한 시이다. 엘리엇 자신이 이 작품의 테마와 구조에 대해 원주(原註)에서 실마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제시 웨스턴이 지은 에서 제목과 구성과 많은 상징을 얻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프레이저(1854~1941)의 가운데 식물 신화와 풍요 의식을 다루는 부분에서 많은 것을 얻었음을 밝히고 있다.  웨스턴은 당시 인류학자들이 조사한 자료를 근거로 해서 이들 신화와 의식이 기독교, 특히 성배 전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추궁했다. 그네는 어부왕 이야기에서 풍요 신화의 원형을 발견했다. 어부왕의 죽음, 병 혹은 성 불능이 그의 나라에 가뭄과 황폐를 가져오고 사람과 짐승에게는 생식력 불모를 가져온다. 이 상징적인 '황무지'는 순결한 기사가 그 땅의 한복판에 있는 위험 성당에 가서 여성 남성의 풍요 상징인 성배와 창에 대해 의식(儀式)적인 질문을 함으로써만 재생을 얻을 수 있다. 이 질문을 함으로써 왕을 낫게 하고 그 땅에 풍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원초적인 성배 신화와 풍요제(대체로 신이 죽었다가 재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와의 관계는 식물이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소생하는 계절의 순환적인 진행에 대한 인간의 공통적인 반응을 보여 준다. 기독교는 이 공통적인 반응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상당히 적극적으로 받으들인 흔적을 보여 준다. 원시 기독교도들이 물고기 상징으로 자신들을 나타낸 것은 어부왕과 관련이 있으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 자체도 풍요제와 연관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죽음을 통한 재생은 뿐 아니라 엘리엇의 여러 다른 시와 시극(詩劇)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다. 에서는 그 모티프가 동서양의 다양한 신화 내지는 종교적 자료를 사용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다채로운 즐거움도 주지만 동시에 이 작품을 어렵게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엘리엇의 시는 뒤에 숨어 있는 전거를 잘 모르더라도 섬세한 독자라면 전체를 '느낄 수'있을 만큼 적절하면서도 충격적인 다채로운 속도의 흐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작품을 하나의 긴 서정시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 황무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진정한 재생을 가져오지 않고 공허한 추억으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휴양지에서 지껄이는 사람들은 진정한 새로운 삶을 원치 않는다. 재생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재생을 요구하므로 또한 잔인하다. 특히 이 부분은 콜라쥬 수법을 사용해서 효과를 보고 있다.  갑자기 구약성경의 에스겔적인 음성으로 문명의 메마름과 희망 없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는 낭만적인 정열과 실패한 사랑의 추억이 담긴 노랫소리로 바뀐다.  다음에 고대의 종교의식이 점치는 행위로 바뀐 황무지의 상황으로 바뀐다. 타로 카드의 원초적인 상징들이 속화되어 나타난다(시적으로는 이 속화된 상징들이 뒤에 가서 발견되는 효과를 지니고 있지만)  그리고 현대 문명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상이 나타난다. 보들레르의 파리, 현대 런던, 단테의 지옥 및 연옥, 이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다. 그리고 나서 화자는 저 위대한 부활 제식을 기괴한 정원 가꾸기로 바꾼다. 그러고는 보들레르의 시구를 따다가 독자들도 같은 상황에 있음을, 공모자임을 자각하도록 한다.  : 권태로운 유한부인이 화장대 앞에 앉아 있다. 실내 장식과 향수(香水)와 화려함이 감각을 마비시킨다.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 혹은 독백(따옴표 부분은 여자의 말이고 나머지 부분은 그네의 남편 혹은 애인의 말 없는 대답이라고 보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과 세익스피어를 재즈로 바꾸기까지 이르는 패러디는 문화의 타락을 암시해 주고 삶의 무의미감을 고조시켜 준다.   이들을 기다리는 무서운 '노크'는 술집 바텐더가 문 닫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카운터에 치는 노크로 바뀐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앞서의 상류층 인물에서 하류층 인물로 바뀐다. 그들이 주고받는 생(生)과 성(性)이야말로 생식이 없는 황무지의 생과 성이다.  : 템스 강의 가을 장면이다. 이 장면은 문학의 유명한 작품의 부분들을 아이러니컬하게 인용하거나 왜곡함으로써, 그리고 과거의 고상한 제식 행위를 현대의 사소하고 음탕한 행위와 일치시킴으로써 괴기한 장면이 된다. 잠시 지중해에 풍요 의식을 퍼뜨린 스미르나 상인의 현대판을 보여 주고 나서 현대의 성(性)이 지닌 무서운 무의미의 사실적인 현장에 들어간다.  템스 강에서 유혹당한 이야기가 엘리자베스 여왕 때의 사랑과 비교되며 바그너, 세익스피어, 단테 들의 작품이 주는 메아리들과 함께 황무지의 성이 지닌 무의미와 저속함을 더 파고든다. 그리고 서양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동양의 부처의 정욕을 버리라는 호소로 끝맺는다.  : 자명한 것 같은 이 짧은 마디는 두 가지 상반되는 해석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재생이 없는 수사(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현대적 상황)를 암시한다는 해석과, 재생에 앞선 희생적 죽음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있다. 두번째 설명을 따르는 비평가가 더 많지만, 이 마디에 나오는 죽음에는 이상한 고요함이 뒤따르고 있어 딱 결정하기 힘든 문제이다.  : 주에서 밝힌 세 가지 테마가 나타나고 예수가 죽임당한 풍요신과 관련이 맺어지나 아직 부활은 없다. 바위만 있는 풍경이 점점 열을 더해 가자 서양 문명이 낳은 위대한 도시들이 모두 악몽으로 바뀌는 비전에까지 이른다. 그러자 곧 황무지 한가운데 있는 위험 성당으로 장면이 바뀐다. 그 성당은 비어 있고 버림받는 것 같으며 지금까지 그곳을 찾아온 고행이 헛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갑자기 닭이 울고 번개가 치며 풍요를 약속하는 비가 내린다. 천둥은 동양의 지혜의 틀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주라, 공감하라, 자제하라.' 그러나 우리는 적절히 주기에는 너무 신중하고 적절히 공감하기에는 너무 자신들에게 갇혀 있고 자제하기에는 자제를 당하도록 되어 있다. 구원은 아직 문제를 안고 있고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지탱해 보는' 상태를 보여 줄 뿐이다.    
40    워즈워드 시모음 댓글:  조회:4044  추천:0  2017-08-23
워즈워드 시모음   초원의 빛 / 워즈워드  한 때엔 그리도 찬란한 빛으로서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돌이킬 길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서러워하지 않으며  뒤에 남아서 굳세리라  존재의 영원함을  티없이 가슴에 품어서  인간의 고뇌를  사색으로 달래어서  죽음도 안광에 철하고  명철한 믿음으로 세월 속에 남으리라    우리는 너무 세속에 묻혀있다 / 윌리엄 워즈워드  우리는 너무 세속에 묻혀 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벌고 쓰는일에 우리 힘을  헛되이 소모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도 보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 마저 저버렸으니  이 비열한 흥정이여!  달빛에 젖가슴을 드러낸 바다  늘 울부짖다  시들은 꽃포기 처럼 잠잠해지는 바람  이 모든 것과 우리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아무것도 우리를 감동 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이여!  차라리 사라진 옛믿음으로 자라는  이교도나 되어  이 아름다운 풀밭에 서서  나를 슬프게 하지 않을 풍경을 바라보고  바다에서 솟아나는 프로테우스를 보고,  트라이튼의 뿔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수선화  ─윌리엄 위즈워드  골짜기와 언덕 위로 높이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헤매이다가  나는 보았네  호숫가 나무 아래  미풍이 하늘거리는  한 무리의 황금빛 수선화를  은하수에서 빛나며  반짝거리는 별처럼  물가를 따라  끝없이 줄지어 피어 있는 수선화  수 많은 꽃송이가  즐겁게 춤추며 고개를 흔드는 것을  주위의 물결도 춤을 추었으나  기쁨의 춤은 수선화를 다르지 못 했으니!  이렇게 흥겨운 꽃밭을 벗하여  어찌 시인이 흥겹지 않으랴!  나는 지켜보고 또 지켜 보았지만  그 풍경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미처 몰랐으니  가끔 홀로 생각에 잠겨  내 자리에 누으면  고독의 축복인 마음에 눈에  홀연 번뜩이는 수선화  그때 내 가슴은 기쁨에 차고  수선화와 더불어 춤을 추네   나는 구름처럼 외롭게 방황했네  ─윌리엄 워즈워드  계곡과 언덕 위로 높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외롭게 방황하다  문득 나는 한 무리를 보았네.  수많은 황금빛 수선화들  호숫가 나무 아래서 미풍에 나부끼며 춤추는 것을.  그들은 은하수에서 빛나고 반짝이는  별들처럼 이어지고,  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는 선 속에 펼쳐져 있었네  나는 한 눈에 보았네. 수천 송이 수선화가  머리를 흔들며 흥겹게 춤추는 것을.  물결도 그들 옆에서 춤추었지만 꽃들은  환희 속에서 활기 넘친 몸짓을 했네  시인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네,  그토록 명랑한 무리속에서  나는 바라보고 -- 바라보았지만 -- 거의 생각할 수 없었네  그 광경이 얼마나 값진 것을 내게 가져다 주었는지를.  공허속에서 또는 우수에 젖은 심상속에서  종종 나의 긴 소파에 누워 있을 때면,  고독의 행복속에 있는 내부의 눈에  수선화들이 문득 떠오르곤 하네.  그러면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고,  그 수선화들과 함께 춤추고 있네.    외로운 처녀  ─윌리엄 워즈워드  비둘기강 가 외진 곳에서  그녀는 살았습니다  칭찬해주는 사람도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는 처녀였습니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이끼 낀 바위 틈에  피어난 오랑캐처럼  하늘에서 반짝이며  홀로 빛나는 샛별처럼  그렇게 아름다웠답니다  하지만 그녀 이름없이 살다 죽었을 때  그 일 아는 사람 몇몇 일 뿐  이제 그녀는 무덤 속에 누웠으니  아, 크나큰 내 이 허무함이여!    내 가슴 설레이고 / 워즈워드  하늘의 무지개 바라보면  내 가슴 설레이고  어릴 때에도  어른된 지금에도  늙어서도 그러하려니.  아니면 목숨은 죽은 것!  어린애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여생, 자연의 경건(敬虔)속에  어울려 살고파.    3 월 / 윌리엄 워즈워드      -브러더즈-워터 기슭의 다리      위에서 쉬는 사이에     수탉이 꼬꼬댄다. 시내가 흐른다. 새들이 지저귀고 호수가 빛나고 푸른 들이 별 속에 잠들어 있다. 늙은이도 어린 것도 장정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고개조차 들지 않고 마소가 풀을 뜯는다. 마흔 마리가 도무지 하나 같구나!   패배한 군사처럼 눈은 물러가고 산 꼭대기에서나 겨우 지탱을 한다 이따금 고함치는 소 모는 젊은이 산 속에는 기쁨 샘 속에는 생기 조각구름 떠가고 온통 푸른 하늘 비는 멀리 가버렸구나!   무지개 / 윌리엄 워즈워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이느니, 나 어린 사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외진 곳에서 / 윌리엄 워즈워드   비둘기 江가의 외진 곳에서   그녀는 살았습니다. 지켜 주는 사람도   사랑해 주는  이도 없는 처녀였지요.   눈길이 안 닿는 이끼 낀 바위틈에   피어 있는 한떨기 오랑캐꽃! 샛별이 홀로 빛날 때처럼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웠지요.   이름없이 살다가 죽었을 때   그것을 안 사람은 있는 둥 마는 둥, 이제 그녀는 무덤 속에 누웠으니 아! 크나큰 이 내 허전함이여!   선 잠이 내 혼을 / 윌리엄 워즈워드     선잠이 내 혼을 봉해 놓았었다. 나는 삶의 두려움을 몰랐다. 그녀는 초연한 사람인 듯 싶었다. 이승이 세월의 손길에.   이제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가운도 없다. 듣도 보도 못한다. 바위와 돌멩이와 나무와 더불어 하루하루 땅덩이의 궤도를 돌고 있을 뿐. 그녀는 기쁨의 환영幻影 / 윌리엄 워즈워드     처음으로 내 눈에 비쳤을 때 그녀는 기쁨의 환영이었다. 순간을 치장하기 위해 온 귀여운 그림자였다. 눈은 초저녁 별처럼 아름다왔고 검은 머리채 또한 초저녁 같았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것은 오월의 상쾌한 새벽에서 나온 것 출몰하고 놀래주고 매복하는 춤추는 몰골, 즐거운 모습.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니 선녀이면서 여인! 살림살이 거동이 거침없이 가볍고 구김살 없는 처녀의 발걸음 달콤한 추억과 달콤한 희망이 함께 어울린 얼굴, 사람됨의 나날의 양식인 덧없는 슬픔과 하찮은 농간 치켜줌과 꾸지람과 사랑과 입맞춤, 눈물과 미소에 알맞게 환하고 착한 여인이었다.   이제 나는 차분한 눈으로 그녀 몸매의 고통을 본다. 깊은 생각을 숨쉬는 존재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길손 단단한 이성理性, 온전한 의지意志 끈기와 빛나는 눈, 기운과 솜씨를 두르 갖춘 일러주고 달래주고 호령하는 빼어나게 태어난 흠없는 여인 일변 눈부신 천사의 빛을 두른 선녀였다.   낯 모르는 사람 속을 / 윌리엄 워즈워드     바다를 건너서 여러 나라   모르는 사람 속을 여행했었네 내 나라 영국이여!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지 그때 비로소 그것을 알았네   그 우울한 꿈은 지나갔네   두 번 다시 그대 바닷가를 떠나지 않으려나   내 더욱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   그대의 산 속에서   사랑의 기쁨을 알았노라 내 그리던 여인도   그대의 화로 곁에서 물레를 돌렸느니.   아침이 보여 주고 밤이 숨겼던   루시가 놀던 집 루시가 둘러 본 마지막 푸른 들판   모든 것이 그대로 그대의 것이어니.   가을걷이 하는 처녀 / 윌리엄 워즈워드     보라!  들판에서 홀로 가을걷이하며 노래하는 저 고원의 처녀를. 일어서라, 아니면 슬며시 지나가라. 홀로 베고 다발로 묶으며 구슬픈 노래를 부른다. 귀 기울려라!  깊은 골짜기엔 온통 노래소리가 있구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그늘진 오아시스를 찾아 쉬는 길손에게 어떤 나이팅게일도 이렇듯 반가운 노래른 들려 주지 못했으리. 아득히 먼 헤브리디이즈 섬들 사이 바다의 정적을 깨뜨리며 봄에 우는 뻐구기도 이렇듯 떨리는 목소리는 들려 주지 못했으리.   무엇을 노래하는지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으려나? 구성진 노래는 아마도 이득히 먼 서러운 옛일이나 옛싸움을 읊은 것이리. 아니면 한결 귀에 익은 오늘날의 이 일 저 일 옛날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피치 못할 슬픔과 이별과 아픔이리.   노랫말이 무엇이든 그 처녀는 끝이 없는 듯 노래했으니 나는 들었네, 허리 굽혀 낫질하는 그녀의 노래를 --- 꼼짝않고 잠잠히 귀 기울리다 내 등성이를 올라 갔으니 그 노래소리 이미 들리지 않았으나 내 가슴에 그것은 남아 있었느니.   노고지리에게 / 윌리엄 워즈워드     하늘의 떠돌이 시인!  하늘의 순례자여! 너는 시름 많은 대지를 업신여기느냐? 아니면 두 나래 솟아 오를 때도 가슴과 눈은 보금자리와 함께 이슬 젖은 땅 위에 있느냐? 떨리는 나래를 진정하고 저 노래 그친 채 멋대로 내려와 앉는 그 보금자리!   바라뵈는 끝까지, 그리고 그 너머로 솟아 오르라, 담보 큰 새야! 사랑이 부채질하는 노래는 -너와 네 어린 것 사이엔  끝 모르는 연줄이 있다- 평원의 가슴을 서서이 설레게 한다. 땅 위의 봄과는 상관없이 노래하니 자랑스런 특권이리.   그늘진 숲속일랑 나이팅게일에나 맡겨라. 네 몫은 눈부신 빛의 은밀한 구석 거기서 너는 세상에 내려 쏟는다. 보다 거룩한 본능으로 화성의 홍수를, 솟아 오르나 헤매지 않는 너는 지혜의 왕자 천국과 고향의 엇갈림일진저.   뻐꾸기에 부쳐 / 윌리엄 워즈워드     오, 유쾌한 새, 손님이여! 예 듣고 지금 또 들으니 내 마음 기쁘다 오, 뻐꾸기여! 내 너를 라 부르랴, 헤매이는 소리랴 부르랴?   풀밭에 누워서 거푸 우는 네 소릴 듣는다. 멀고도 가까운 듯 이산 저산 옮아 가는구나.   골짜기에겐 한갖 햇빛과 꽃 얘기로 들릴 테지만 너는 네게 실어다 준다. 꿈 많은 시절의 얘기를.   정말이지 잘 왔구나 봄의 귀염둥이여! 상기도 너는 내게 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하나의 목소리요, 수수께끼.   학창시절에 귀 기울렸던 바로 그 소리 숲속과 나무와 하늘을 몇 번이고 바라보게 했던 바로 그 울음소리.   너를 찾으로 숲속과 풀밭을 얼마나 헤매었던가 너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소망이요 사랑이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들판에 누워 네 소리에 귀 기울린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라치면 황금빛 옛 시절이 돌아 온다.   오, 축복받은 새여! 우리가 발 디딘 이 땅이 다시 꿈같은 선경처럼 보이는구나 네게 어울리는 집인 양!   가엾은 스잔의 낮꿈 / 윌리엄 워즈워드         웃드거리 모퉁이에서 햇볕이 들면 내걸린 찌빠귀가 목청높이 운다. 벌써 석삼년째, 가엾은 스잔이 이곳을 지나다 아침의 고요 속에 새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황홀한 가락, 그런데 어찌된 까닭일까? 불현듯 그녀는 본다. 솟구치는 산을 나무들의 모습을 로드베리를 흘러 가는 짙은 안개를 치입사이드 골짜기로 흐르는 강물을.   또한 그녀는 본다. 우유통을 들고 오갔던 골짜기 그 골짜기 한복판의 푸른 목장을, 그녀가 정 부쳤던 단 한 채 비둘기집 같은 외딴 채 오두막을.   지켜 보던 그녀 마음은 천국에라도 간 듯, 하지만 안개도 강물도 산도 그늘도 온통 사라진다. 강물은 흐르려 하지 않고 산도 솟구치려 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의 눈은 온통 생기를 잃어버렸다!   루시 그레이 / 윌리엄 워즈워드     루시 그레이 얘기는 가끔 들었다. 광야를 건너 가다가 우연히 동 틀 무렵 그 외로운 아이를 보게 되었다.   말벗도 배필도 아지 못한 채 그녀는 넓은 황무지에서 살았다. 人家의 문가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꽃나무처럼.   아직도 볼 수가 있다. 뛰노는 새끼 사슴과 풀밭에서 뛰는 산토끼를 그러나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루시 그레이의 어여쁜 얼굴은.       이 말에 아버지는 낫을 들고 나뭇단의 새끼를 잘랐다. 그는 제 일에 열을 내었고 루시는 초롱불을 손에 들었다.   사슴보다도 더 신이 났다. 장난치는 그녀의 발걸음이 채이는 눈가루를 날려 연기처럼 오르게 했다.   불시에 눈보라가 불어 닥쳤다. 많은 산을 오르내리며 그녀는 헤매었으나 읍에는 이르지 못했다.   처참해진 부모들은 밤새 고함치며 멀리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인도해 줄 소리도 뵈는 것도 없었다.   새벽녘에 그들은 서 있었다. 황야를 굽어 보는 등성이에 자기 집 대문 가까이에 나무 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느껴 울었다. 집으로 향하면서 소리쳤다. 바로 그 때 어머니는 눈 속에 난 루시의 발자국을 보았다.   두 사람은 가파른 산마루를 작은 발자국 쫓아 내려 갔다. 흥이 난 산사나무 울타리를 지나 길고 긴 돌담을 따라.   이어 활짝 트인 들판을 가로 질렀다. 발자국은 여전하였다. 두 사람은 별일없이 따라 가서 나무 다리에 닿았다.   눈 덮인 둑에서부터 하나 하나 발자국을 따라 갔다. 다리의 널빤지 한 복판에서 자국은 이제 끊겨져 있었다!   그녀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지금껏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외진 광야에서 어여쁜 루시 그레이를 볼 수 있다고.   가파르건 순탄하건 가리지 않고 그녀는 길을 간다. 뒤도 돌아 보자 않고 일변 그녀의 노래소리는 바람 속에 한숨 지으며.   다리 위에서 / 윌리엄 워즈워드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이렇듯 뿌듯이 장엄한 정경을 그냥 지나치는 이는 바보이리 런던은 지금 아침의 아름다움을 의상처럼 입고 있구나 말없이 벌거벗은 채 배도 탑신도 둥근 지붕도 극장도 사원도 들판과 하늘에 드러나 있고 온통 내없는 대기 속에 눈부시게 번쩍이는구나 태양도 이 보다 더 아름답게 골짜기와 바위와 등성이를 아침의 눈부심 속에 담근 적이 없으리. 내 이처럼 깊은 고요를 보도 느끼지도 못했으니 강은 유연히 제뜻대로 흐르고 집들도 잠들어 있는 듯 아 ! 크낙한 도시의 심장도 잠자코 누워 있구나.
39    프레베르 시모음 댓글:  조회:2882  추천:0  2017-08-20
프레베르 1900~1977 뇌이쉬르센 출생. 파리에서 자랐으며, 1930년까지는  초현실주의 작가 그룹에 속하는 시인으로서 활약하였는데,1925~29년에 초현실주의 작가 로베르 데스노스, 이브  탕기, 루이 아라공, 앙드레 브르통 등과  활동을 같이  하  면서 오랜 전통의 구전시를 초현실주의 풍의 '노래시'라  는 형식으로 만들어서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그 관심을 영화로 돌려 《악마는 밤에 온다》 《말  석 관람객들》 등의 명작 시나리오를 썼다. 초기의 시에는 쉬르레알리슴의 흔적이 엿보이는데, 샹송풍의 후기 작  품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열(愚劣)과 불안의 시대에 대항  하는 통렬한 풍자와 소박한 인간애가 평이하고 친근감 있는 그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파롤 Paroles》  (1948) 《스펙터클》  (1951)  등은 그와 같은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대표작이다. J.  코스마가 작곡한 샹송 《낙  엽》의 작사자  이기도 하다.   주요저서:《파롤 Paroles》《스펙터클》   쟈크프레베르 시모음   고양이와 새 /쟈크프레베르  온 마을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상처 입은 새의 노래를 듣네  마을에 한 마리뿐인 새  마을에 한 마리 뿐인 고양이  고양이가 새를 반이나 먹어 치워 버렸다네  새는 노래를 그치고  고양이는 가르랑거리지도  콧등을 핥지도 않는다네  마을 사람들은 새에게  훌륭한 장례식을 치르고  고양이도 초대받아  지푸라기 작은 관 뒤를 따라가네  죽은 새가 누워 있는 관을 멘  작은 소녀는 눈물을 그칠 줄 모르네  고양이가 소녀에게 말했네  이런 일로 네가 그토록 가슴 아플 줄 알았다면  새를 통째로 다 먹어 치워 버릴 걸  그런 다음 얘기해 줄 걸  새가 훨훨 날아가는 걸 봤다고  세상 끝까지 훨훨 날아가더라고  너무도 먼 그곳으로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러면 네 슬픔도 덜어줄 수 있었을 걸  그저 섭섭하고 아쉽기만 했을 걸  어떤 일이든 반쪽만 하다 그만두면 안된다니깐    나는 이런 사람 / 쟈크 프레베르  나는 이런 사람  이렇게 태어났지  웃고 싶으면  큰 소리로 웃고  날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매번 다르다 해도  그게 어디 내 탓인가  나는 이런 사람  이렇게 태어났지  하지만 넌 더 이상 무엇을 바라나  나는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태어났지  내 발뒤꿈치가 아주 높이 솟았다 해도  내 가슴이 너무도 거칠다 해도  내 두 눈이 이다지 퀭하다 해도  네가 그걸 어쩌겠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이런 사람  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좋은 걸  네가 그걸 어쩌겠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인데  그래 난 누군가를 사랑했었지  누군가 날 사랑했었지  어린아이들이 서로 사랑하듯이  오직 사랑밖에는 할 줄 모르듯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듯이...  왜 내게 묻는 거지  난 너를 즐겁게 하려고  이렇게 있고  바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아름다운 계절 / 쟈크 프레베르     빈 속에 길 일고 얼어붙은 채 외롭게 무일푼의 열여섯 살 소녀가 꼼짝않고 서 있는 콩코르드 광장 정오 팔월 십오일   너를 위해 내사랑아 / 쟈크 프레베르   나는 새 시장에 가보았지 그래 나는 새를 샀지 너를 위해 내 사랑아 나는 꽃시장에 가보았지 그래 나는 꽃을 샀지 너를 위해 내 사랑아 나는 고철 시장에 가보았지 그래 나는 쇠사슬을 샀지 무거운 쇠사슬을 너를 위해 내 사랑아 그리고 나는 노예 시장에 가보았지 그래 나는 너를 찾아 헤맸지만 너를 찾지 못했지 내 사랑아   하느님 아버지 1) / 쟈크 프레베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땅위에 남아 있으리다 땅은 때때로 이토록 아름다우니 뉴욕의 신비도 있고 파리의 신비도 있어 삼위일체의 신비에 못지 아니하니 우르크2)의 작은 운하며 중국의 거대한 만리장성이며 모를레의 강이며 캉브레의 박하 사탕3)도 있고 태평양과 튈르리 공원의 두 분수도, 귀여운 아이들과 못된 신민도 세상의 모든 신기한 것들과 함께 여기 그냥 땅위에 널려 있어, 그토록 제가 신기한 존재란 점이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지만 옷 벗은 처녀가 감히 제 몸 못 보이듯 저의 그 신기함을 알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 흔한 끔찍한 불행은 그의 용병들과 그의 고문자들과 이 세상 나으리들로 그득하고 나으리들은 그들의 신부, 그들의 배신자. 그들의 용병들과 더불어 그득하고4) 사철도 있고 해(年)도 있고 어어쁜 처녀들도 늙은 병신들도 있고 대포의 무쇠 강철 속에서 썩어가는 가난의 지푸라기도 있습니다. 5)     1) 와 직역할 수 있는 이 라틴어 제목은 < 주기도문>을 뜻한다. 2) 우르크 운하 프랑스의 우르크  강은 마마른느 강와 합류하도록 되어 있으나      80Km에 달하는 아름다운 우르크 운하와 연결되어 센 강과도 만난다. 3) 프랑스의 강 이름인 모를레와 지명인 캉브레는 말운의 효과를 위하여 선택된 듯.     물론 시인이 사랑하는 가난한 고향 브르타뉴에 있는 모를레 강은 개인적인 애착과     무관하지 않다. 캉브레의 박하 사탕은 동시에 못난이의 바보짓이라는 뜻도 겸하고     있다. 4) 나으리maitres, 신부pretre, 배신자traitre 그리고 용병reitre은 다 같이 마지막 음절     이 같고, 실제로 프레베르에 있어서는 세상의 소박한 인간 본연의 행복을 파괴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시인의 반기독교적인 태도, 즉 자연인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5) 반전주의자인 프레베르는 전쟁 무기의 차고 단단한 질감과, 자연물이며 부서지기 쉽고     인간적인 지푸라기(농사꾼, 가난한 사람들)의 감각을 대비시키고 있다.     센가 / 쟈크 프레베르     저녁 열시 반 센 가街 어느 길모퉁이에 한 남자가 비틀거린다---- 모자를 쓰고 바바리 코트를 입은 한 젊은 남자가 어떤 여자가가 그를 흔든다---- 그녀가 그를 흔들며 그에게 말을 한다 그는 머리를 흔든다 그의 모자는 뒤집혀 씌어져 있고 여자의  모자는 뒤로 넘어지려 한다 그들은 둘 다 몹시 창백하다 남자는 분명 가버리고 싶어한다---- 사라져버리고---- 죽어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자는 미치도록 살고 싶다 그의 목소리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안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탄식---- 명령---- 절규---- 목소리는 그토록 욕망에 차고 또한 슬프고 또한 생명에 넘치니---- 겨울 묘지의 묘석 위에서 떨고 있는 병든 갓난아기---- 어느 생명의 외침 문틈에 끼인 손가락---- 하나의 노래 하나의 문절文節 쉬임없이 대답도 없이---- 되풀이되고---- 남자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의 눈이 돌아간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팔로 몸짓을 하고 말이 되살아나고 센 가 길모퉁이에서 여자는 계속한다 지칠 줄도 모르고---- 불안한 그의 질문을 계속한다 치료할 길 없는 상처 피에르 사실을 말해 봐---- 어리석고 거창한 질문 피에르는 무엇을 대답할지 모른다 그는 정신이 없다 피에르란 이름의 청년은---- 그는 웃음을 지으며 건네주고 싶다 그는 거듭 말한다 이것 봐 진정해 정신이 돌았어 그러나 제대로 말한 것 같지 않다 저의 입이 어찌하여 웃음으로 뒤틀렸는지 그는 보지 못한다 그는 알 수가 없다 숨이 막힌다 세상이 그의 위에 내려앉아 목을 조인다 그는 저의 맹서에 사로잡인 포로---- 빚을 갚으라고 조른다---- 그의 앞에는---- 계산하는 기계---- 연애 편지를 쓰는 기계 괴로워하는 기계가 그를 붙잡는다---- 그에게 매달린다---- 피에르 사실을 말해 봐.   열등생 / 쟈크 프레베르   그는 머리로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것에게는 그렇다고 하고 그는 선생에게는 아니라고 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선생이 질문을 한다 별의별 질문을 한다 문득 그는 폭소를 터트린다 그는 모두를 지워버린다 숫자도 단어도 날짜도 이름도 문장도 함정도 교사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우등생 아이들의 야유도 모른다는 듯 모든 색깔의 분필을 들고 불행의 흑판에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   귀향 / 쟈크 프레베르     어느 브르통1)이 온작 못된 짓을 다한 후 고향에 돌아왔다네 그는 두아른네 공장 앞을 거닐었지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고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 그는 몹시도 슬펐지. 크레프2)를 먹으러 크레프집에 들어갔지 그러나 먹을 수가 없었지 그 무언가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지 그는 값을 내고 밖으로 나왔지 담배불을 붙였지 그러나 피울 수가 없었지. 무엇인가 그 무엇인가 안 좋은 것이 그 무엇인가 머릿속에 들어 있어 점점 더 슬펐지 문득 생각이 떠올랐지. 어렸을 때 누군가 말했었지 그래서 여러 해 동안 그는 감히 어떤 일도 못해봤지 길도 못 건너고 바다로 떠나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못했지. 그는 생각났지. 모든 예언을 한 것은 그레지야르 아저씨였지 누구에게나 재수 없던 그레지야르 아저씨 그 못된 치였지! 그래 브르통은 생각했지 보지라르 가街3)에서 일하는 여동생을, 전쟁에서 죽은 형을, 그가 본 모든 것을 생각했지 그가 한 모든 것을. 슬픔이 가슴을 조여 다시 한번 담뱃불을 붙여보려 했지 그러나 피우고 싶은 생각이 안 나 그래 그레지야르 아저씨에게 가 볼 결심. 그는 찾아가서 문을 열었지 아저씨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는 아저씨를 알아봤지 그래 그에게 말했지 그리곤 그의 목을 비틀었지 그래 그는 캥페르4)의 단두대에서 끝장을 보았지 두 다스의 크레프를 먹은 뒤에 담배 한 가치를 피우고 난 뒤에     1)브르통; 이 말은 프랑스의 브르타뉴 출신의사람을 칭하는 말. 16세기        이후에야 프랑스와 합병된 이 지방은 수도권에서 소외되어 가난하        고 풍토와 습속이 특이하다. 시인은 고향인 이 지방에 유별난 애착        을 갖는 것 같다. 이 시는 물론 신문의 일반 기사와 같은 특유한 분        위기를 담고 있다. 2)크레프; 밀가루와 달걀 노른자위를 섞어 부티는 일종의 전. 설탕, 치즈,        럼주 등을 치고 말아서 먹는 간식의 일종이다. 3)보지라르 가: 파리의 제6구에 있는 좁고 기나긴 거리 이름으로 시인이          소년 시절을 보낸 서민가 4)캥페르; 브르타뉴의 도시명 로 이름난 곳.   나의 집에 / 쟈크 프레베르   나의 집에 당신은 오시겠습니다 사실 이건 나의 집도 아니랍니다 누구의 집인지 나도 모릅니다 어느 날 나는 그냥 들어왔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얀 벽에 붉은 고추들이 걸려 있을 뿐 나는 오랫동안 이집에 있었지만 아무도 찾는 이 없었지만 언제나 언제나 나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 말해 이렇다 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침이면 때때로 짐승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 당나귀처럼 짖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즐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발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발이란 것은 참으로 영리한 것이어서 당신이 멀리멀리 가고 싶을 때에는 당신을 멀리멀리 데려다주고 당신이 나가고 싶지 않으실 때는 그 곁에 남아서 친구해 준답니다   음악이 있으면 춤을 춥니다 발 없이 춤추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이처럼 바보 같은 말을 하려면 때로는 사람들처럼 바보같이 되어야겠지요 그들의 발처럼 바보 같고 팽송처럼 명랑해야 되겠지요 팽송은 사실 명랑하지도 않답니다 제가 즐거울 때 팽송은 그냥 즐거워할 따름. 제가 슬플 때 팽송은 슬프고, 혹은 즐겁지도 슬프지도 아니하고 팽송이 도대체 뭘 알기나 한답니까 사실 그놈은 진짜 그런 이름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새를 그렇게 불렀을 뿐 팽송 팽송 팽송 팽송   이름이란 그토록 이상한 것이지요 마르탱 위고 빅토르는 이름1)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이름 왜 저렇게가 아니고 이렇게 부르지요 한 때의 보나파르트가 사막을 지나갑니다 황제의 이름은 낙타라고 불립니다2) 그에겐 금고마金庫馬와 경마 서랍이 있답니다3) 저 멀리 세 개의 이름뿐인 한 남자 이름은 탱탕통일 뿐4) 거창한 존함 따윈 없습니다 조금 더 멀리는 또 그 누군가 아무거나. 훨씬 더 멀리는 아무거나 그런데 이 모두가 어쨌다는 것입니까   내 집에 너는 찾아오리라5) 나는 다른 생각도 하지만 그 생각뿐 그리고 네가 내 집에 들어올 땐 너는 옷을 모두 벗고 하얀 벽에 걸린 붉은 고추와 같은 네 붉은 입술로 다 벗고 가만히 서 있으리라 그리고 너는 누우리라 나는 네 곁에 누우리라 그렇지 내 집도 아닌 나의 집에 너는 오리라     1)유명한 이름 중의 하나로 선택해 본 프랑스의 대시인 빅토르 위고 거기다가   가장 흔한 이름 마르탱을 붙여본 것. 2)문맥 속에서 보통명사인 낙타떼를 대문자로 쓰고 고유명사인 보나파르트를   소문자로 써서 위치를 고의로 바꾸어놓았다. 3)복합명사인 경마용 말과 금고 겸용 서랍의 반씩을 교체시켜 뜻 없는 어휘를    고의로 만들어본 것. 4)탱탕통은 거창한 이름과 뜻 없는 소리를 대비시키기 위하여 지어낸 의성어류   의 말. 5)제 1연의 경칭 이 나의 집(문명이 비어버린 집)의 세례를 통하여 친숙한   로 변신한다. 모든 의례적 절차를 벗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꿈에 도달   한다.   느긋하고 푸짐한 아침 / 쟈크 프레베르   끔찍해 스테인리스 카운터에 삶은 달걀을 깨는1) 그 나직한 소리는 끔찍해 배고픈 사내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달걀 깨는 소리는 끔찍해 아침 여섯 시 백화점 유리창에 비쳐 보이는 배고픈 사내의 낯짝도 끔찍해 먼짓빛 그 낯짝도 끔찍해 포탱 상점2)의 진열장 유리 속에서 그가 바라보는 건 그러나 제 낯짝이 아니야 낯짝이야 아무렴 어때 그가 그리는 건 그가 상상하는 건 다른 낯짝 예컨데 송아지 낯짝 식초 소스로 양념한 송아지 낯짝 아니면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그 무슨 낯짝 그래서 그는 달콤하게 턱을 움직이지 달콤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이를 갈지 세상이 그의 머리를 삶아 먹어도 세상을 어쩔 수야 없으니까 그는  하나 둘 셋 손꼽아 보네 하나 둘 셋 못 먹고 굶은 지 사흘째 이럴 수가 없다고 사흘째 되뇌어도 소용이 없네 이럴 수가 있는 걸 사흘 낮 사흘 밤 굶고 지내걸 이럴 수가 있는걸 저 진열장 뒤에는 저 햄통들 저 술병들 저 통조림들 죽은 생선은 깡통이 보호하고 깡통들은 진열장이 보호하고 진열장은 순경이 보호하고 순경은 공포심을 보호하지 여섯 마리 불쌍한 정어리를 위해 바리케이트도 많아라 --- 좀 떨어진 곳에는 카페 크림 친 커피와 따뜻한 반달빵3) 사내는 비틀거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안개 끼는 이름들 안개 끼는 이름들 먹고 싶은 정어리 삶은 달걀 크림 친 커피 럼을 탄 커피 크림 친 커피 크림 친 커피 피를 탄 크림 친 커피!---- 동네에서 아주 존경받던 한 사내가 백주 대낮에  칼을 맞았네 뜨내기 살인자가 2프랑을 강도질했네 술은 탄 커피 한 잔에 칠십 상팀 버터 바른 빵 두 개 그리고 팁으로 이십오 상팀 끔찍해 스테인레스 카운터에 삶을 달걀을 깨는 그 나직한 소리는 끔찍해 배고픈 사내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그 소리는 끔찍해   1) 프랑스 서민들은 흔히 동네 카페의 스테인리스(사실은 주석) 카운터 앞에 서서     카페 주인이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침 식사하기를 좋아한다. 아침     식사는 주로 버터 바른 빵과 크림 탄 커피, 그리고 삶은 달걀(그 달걀을 카운터     바닥에 대고 깬다)   2) 프랑스에서 한때 많이 볼 수 있었던 식료품 체인 스토어.   3) 아침 식사에 즐겨 먹는 빵인 크루아상.   가정적1)  / 쟈크 프레베르   어머니는 뜨게질을 한다 아들은 전쟁을 한다 어머니는 그게 아주 당연하다 여긴다 그럼 아버지는 무엇을 할까? 아버지는 사업을 한다 그의 아내는 뜨게질을 한다 그의 아들은 전쟁을 한다 그는 사업을 한다 그는 그게 아주 당연하다 여긴다 아버지는 그런데 아들 그 아들은 그럴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아무렇게도 전혀 아무렇게도 생각지 않는다 아들은, 그의 어머니는 뜨게질을, 그의 아버지는 사업을, 그는 전쟁을 한다 전쟁을 끝내면 제 아버지와 사업을 하겠지 전쟁은 계속하고 어머니는 뜨게질을 계속하고 아버지도 계속하여 사업을 한다 아들은 전사하여 이제 계속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덤으로 간다 그들은 이게 모두 당연하다 여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생을 뜨게질로 삶을 계속하고, 사업으로 전쟁을 전쟁으로 사업을 전쟁으로 뜨게질을 사업으로 사업과 사업을 무덤으로 삶을 계속한다.   1) 반전적인 시. 가정의 판에 박히고 무반성한 생활. 그 생활이 연장되어     사회 국가 단위에 이르면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휘한 것인지도  모르는     전쟁에 참여해 죽임을 당하고도 그것을 습관 속에 수용하는, 한편 참담     하면서 한편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의 이라는 삶을 애정과 비판     의 눈으로 시인은 묘사한다.   이 사랑 / 쟈크 프레베르   이 사랑은 이토록 사납고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부드럽고 이토록 절망한 이 사랑은 대낮같이 아름답고 날씨처럼 나쁜 사랑은, 날씨가 나쁠 때 이토록 진실한 사랑은 이토록 아름다운 이 사랑은 이토록 행복하고 이토록 즐겁고 또 이토록 덧없어 어둠 속 어린애처럼 두려움에 떨지만 한밤에도 태연한 어른처럼 자신 있는 이 사랑은 다른 이들을 겁나게 하던 그들의 입을 열게 하던 그들을 질리게 하던 이 사랑은 우리가 그네들을 못 지키고 있었기에 염탐당한 이 사랑은 우리가 그를 추적하고 해(害)하고 짓밟고 죽이고 부정하고 잊어버렸기 때문에 쫒기고 상처받고 짓밟히고 살해되고 부정되고 잊혀진 이 사랑은 아직 이토록 생생하고 이토록 볕에 쪼인 송두리째 이 사랑은 이것은 너의 것 이것은 나의 것 언제나 언제나 새로웠던 그것 한번도 변함없던 사랑 초록같이 진정하고 새처럼 애처롭고 여름처럼 따뜻하고 생명에 차 우리는 둘이 다 가고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잊을 수 있고 우리는 다시 잠들 수 있고 잠 깨고 고통받고 늙을 수 있고 다시 잠들고 죽음을 꿈꾸고 정신 들며 미소 짓고 웃음 터뜨리고 다시 젊어질 수 있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여기 고스란히 멍텅구리처럼 고집 세고 욕망처럼 피 끓고 기억처럼 잔인하고 회한처럼 어리석고 회상처럼 부드럽고 대리석처럼 차디차고 대낮처럼 아름답고 어린애처럼 연약하며 웃음 지으며 우리를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도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몸을 떨며 귀를 기울인다 그래 나는 외친다 너를 위해 외친다 나를 위해 외친다 네게 애원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서로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서로 사랑하였던 모두를 위해 그래 나는 외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내가 모르는 다른 모두를 위해 거기 있거라 지금 있는 거기 있거라 옛날에 있던 그 자리에 거기 있거라 움직이지 마라 사랑받는 우리는 너를 잊어버렸지만 너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 우리에겐 땅위에 오직 너 뿐 우리들 차디차게 변하도록 버리지 마라 항상 더욱 더 먼 곳에서도 그리고 그 어디에서든 우리에게 생명의 기별을 다오 훨씬 더 훗날 어느 숲 기슭에서 기억의 숲속에서 문득 솟아나거라 우리에게 손 내밀고 우리를 구원하여라.   아침 식사 / 쟈크 프레베르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 우유를 넣었지 그이는 우유 탄 커피에 설탕을 탔지 그이는 작은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었지 그이는 커피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내겐 아무 말 없이 그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지 그이는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지 그이는 재털이에 재를 털었지 내겐 아무 말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버렸지 말 한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래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렸지   위대한 사람 1)/ 쟈크 프레베르   내가 그를 만났던 돌 깎는  사람 집에서 그는 후세를 위하여 제 몸의 치수를 재고 있었다.   1) 앞의 이 담고 있는 단단한 것, 모가 난 것, 굳어버린 것의     이미지가 위대한 사람이 현재의 삶보다 후세의 유명에 더 관심 갖     는 끝에 생각하게 되는 동상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유연성이     사라진 자들에 대한 풍자.   멋진 가문 / 쟈크 프레베르   루이 1세 루이 2 세 루이 3세 루이 4세 루이 5세 루이 6세 루이 7세 루이 8세 루이 9세 루이 10세(세칭 고집쟁이) 루이 11세 루이 12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루이 17세 루이 18세 그리고는 끝----- 도대체 어찌된 사람들이 스물까지도 다 셀 줄 모르게 생겨먹었을까?   국립 미술 학교 1)/ 쟈크 프레베르   밀짚 바구니 속에서 아버지는 종이뭉치를 골라냈지 그리고는 궁금한 애들 앞에서 깔대기 속에 그걸 집어넣었지 그러나 오색의 커다란 일본꽃이 솟아나왔지 즉흥의 연꽃 신기하여 아이들은 입 다물고 말 없었네 그 아이들 추억 속엔 저희들을 위하여 문득 핀 이 꽃은 저희 앞에 그 순간에 피어난 이 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겠네.   1) 예술 창조의 신비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종이뭉치와 동양적 신비의   꽃(일본꽃)의 탄생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하여 표현됨으로써 현실 속에 기   적과 같은 꿈을 창조한다.   깨어진 거울 / 쟈크 프레베르   항상 노래하던 키 작은 남자 내 머릿속에서 춤추던 키 작은 남자 청춘의 키 작은 남자가 구두 끈을 터뜨렸네 축제의 침묵 속에서 축제의 폐허 속에서 내 그대 행복한 목소리를 들었네 찢어지고 연악하고 순진하고 비통한 그대 목소리가 먼 곳에서 찾아와 날 부르는 소리를 내 가슴에 손을 얹으니 그대 별빛 어린 웃음의 일곱 조각 난 거울이 피에 젖어 흔들리네   자유 지역 / 쟈크 프레베르     군모를 새장에 벗어 담고   새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외출했더니   그래 이젠 경례도 안하긴가? 하고   지휘관이 물었다.   아뇨   경례는 이제 안 합니다 하고   새가 대답했다.   아 그래요?   미안합니다 경례를 하는 건 줄 았았는데   하고 지휘관이 말했다.   괜잖습니다 누구나 잘못 생각할 수 있는 법이지요 하고   새가 말했다.   불어 작문 / 쟈크 프레베르   아주 젊었을 때 나폴레옹은 말라깽이 포병 장교였네 나중에 그는 황제가 되었네 그러자 그는 배가 나오고 많은 남의 나라를 삼켰네 그가 죽던 날 그는 아직 배가 나왔지만 그는 더 작아졌다네.   일식* / 쟈크 프레베르   태양왕이라 불리던 루이 14세는 구멍난 의자에 앉는 수가 많아 치세의 말기 어둡던 어느 날 밤 태양왕은 침상에서 일어나 당신의 의자에 가서 앉더니 사라져버렸다네   * 과 함께 독재 왕권 루이 왕조를 풍자한 시   태양 같은 왕이  몰락하는 말로와 의자 모양의 단두대로 비유된 처형의  비극을 야유한 희극적인 시이다.   옥지기의 노래 / 쟈크 프레베르   피 묻은 열쇠를 들고 멋쟁이 옥지기여 어디를 가나, 아직 시간이 남았다면 내 사랑하는 여자를 풀어주러 가지. 내 가장 은밀한 욕망 속에 내 가장 속 깊은 번민 속에. 미래의 거짓말 속에 맹세의 어리석음 속에 내가 가두어둔 그 여자를. 나는 풀어주겠네 그 여자가 자유를 얻도록, 나를 잊어버리는 자유일지라도, 떠나가 버릴 자유 되돌아올 자유 그래서 다시 나를 사랑하는 자유, 혹 다른 이가 마음에 들면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도록, 혹 나는 외로이 남고 그 여자 멀리 떠나가 버린들 나는 오직 간직하리 나는 항상 간직하리 내 생명이 다하도록 내 두 손 오목한 곳에 사랑이 지은 그의 두 젖가슴의 부드러움을.   첫날 / 쟈크 프레베르   장 속에 하얀 홑이불 침대 속에 붉은 홑이불 어머니 뱃속에 어린 아기 고통 속에 그의 어머니 복도에 아버지 집 속에 복도 마을 속에 집 어둠 속에 마을 외침 속에 죽음 그리고 삶 속에 어린 아기.   메시지 / 쟈크 프레베르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닫은 문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깨문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넘어뜨린 의자 누눈가 연 문 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 누군가 건너지르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꽃집에서 / 쟈크 프레베르   어느 남자가 꽃집에 들어가 꽃을 고른다 꽃집 처녀는 꽃을 싸고 남자는 돈을 찾으러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꽃값을 치를 돈을 동시에 그는 손을 가슴에 얹더니 쓰러진다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돈이 땅에 굴러가고 그 남자와 동시에 돈과 동시에 꽃들이 떨어진다 돈은 굴러가도 꽃들은 부서져도 남자는 죽어가도 꽃집 처녀는 거기 가만 서 있다 물론 이 모두는 매우 슬픈 일 그 여자는 무언가 해야 한다 꽃집 처녀는 그러나 그 여자는 어찌할지 몰라 그 여자는 몰라 어디서부터 손을 쓸지를   남자는 죽어가지 꽃은 부서지지 그리고 돈은 돈은 굴러가지 끊임없이 굴러가지 해야 할 일이란 그토록 많아.   일요일 / 쟈크 프레베르   고블랭 가街 겹겹이 늘어선 가로수 사이 대리석상 하나가 내 길을 가리킨다 오늘은 일요일 극장은 만원 새들은 나뭇가지 위에서 인간들을 바라본다 석상은 내게 입맞춤하지만 아무도 안 본다 우리에겐 손가락질하는 눈먼 아이뿐.   공원 / 쟈크 프레베르   우주 속의 별 지구 속의 파리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겨울 햇빛 속 어느 아침 네가 내게 입맞춘 내가 네게 입맞춘 그 영원의 한순간을 다 말하려면 모자라리라 수백만 년 또 수백만 년도.   꽃다발 / 쟈크 프레베르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작은 아씨여 갓 꺾은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처녀여 시든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고운 여인이여 떨어지는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늙은 여인이여 즉어가는 꽃을 들고   승리자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바르바라 / 쟈크 프레베르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그날 브레스트에는 끝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지 너는 웃음 지으며 활짝 피고 유열에 차 빗속에 비에 젖어 걷고 있었지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브레스트에는 끝없이 비가 내리고 나는 너를 시암 가에서 마주쳤지 너는 웃고 있었지 나도 같이 웃었지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내가 알지 못했던 너는 나를 알지 못했지만, 기억하는가 그날을 그러나 기억하는가 잊지 마라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한 남자를 그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바르바라 그래 너는 빗속으로 그에게 달려갔지 비에 젖어 유열에 차고 활짝 피어서, 그래 너는 그의 품에 안기었지,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내가 너에게 반말을 한다고 서운해 말아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너라고 부른다 내가 그들을 오직 한 번 보았다 해도 나는 서로 사랑하는 모든 애인들을 너라고 부른다 내가 비록 그들을 알지 못한다 해도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잊지 마라 그 얌전하고 행복했던 비를 너의 행복한 얼굴 위에. 행복한 그 도시 위에 내리던 비를 바다 위에 해군 기지 위에 웨상의 배 위에 내리던 비를 오 바르바라 전쟁은 얼마나 바보짓이냐 무쇠의 이 빗줄기 속에서 피의 강철의 불비 속에서 이제 너는 어찌되었느냐 두 팔로 너를 사랑스레 가슴에 껴안던 그 사람은, 그는 죽었느냐 사라졌느냐 아직 살아 있느냐, 오 바르바라 지금도 브레스트에는 옛날처럼 끝없이 비가 내리지만 그러나 이제는 옛 같지 않고 모두가 부서졌다 기막히고 참담한 죽음의 바다 피의 강철의 무쇠의 폭풍조차 아니로다 다만 개처럼 쓰러지는 구름일 뿐 브레스트의 빗줄기 따라 사라지는 개들 브레스트에서 멀리멀리 떠나가 죽어 썩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개떼들처럼.   바른 길 * / 쟈크 프레베르   발을 옮겨놓는 곳마다 해마다 이마가 좁은 늙은이들이 콘크리트의 몸짓으로 어린애들에게 길을 가리키고 있다.   * 반자유 교육을 풍자한  시. 자유와 삶이 저해하는 굳어버린  정신(똑바른 길, 즉 비인간적 규범의 길, 늙은이들, 콘크리트)  이 속박하는 여리고 때묻지 않은 정신.   난 본래 이런걸 뭐 / 쟈크 프레베르   난 본래 이런걸 뭐 난 본래 이렇게 생긴걸 뭐 웃고 싶을 땐 그럼 깔깔대며 웃지 나를 사랑하는 그이를 난 사랑해 그때마다 사랑하는 그이가 같은 이가 아닌 게 내 잘못인가 뭐 난 본래 이럴걸 뭐 난 본래 이렇게 생긴걸 뭐 그 이상 어떻게 해 날보고 어쩌라고   나만 보면 좋다는걸 그러니 바꿀 수도 없는 일 내 발굽은 너무 높고 내 허리는 너무 늘씬 젖가슴은 너무너무 단단하고 두 눈은 뚜렷해 아니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난 본래 이런걸 뭐 나만 보면 좋다는 걸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나에게 생긴 일 누군가 나를 사랑해 버린 거야 서로 사랑하는 아이들이 그냥 그렇게 사랑할 줄 알듯이 사랑할 줄 사랑할 줄 알듯이--- 왜 자꾸만 묻는 거야 나만 보면 좋다는걸 그러니 바꿀 수도 없는 일.   말馬 이야기 / 쟈크 프레베르   여보세요 벗님네들 내 하소연 들어보소 내 살아온 이야기 좀 귀담아 들어보소 부모 없는 고아가 하는 말이오 딱하고 시시한 넋두리라오 이러이러----1)                                                    1) 말을 앞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모는 소리 어떤 장군이 어느 날 아니 어느 밤이던가 하여튼 어떤 장군이 거느린 말 두 필이 죽었다오 그 말 두 필은 사실은 이러이러---- 삶이란 쓰디쓴 것 그 두 필은 불쌍한 우리 아버지 그리고 불쌍한 우리 어머니였는데 침대 밑에 숨어 있었다오 장군의 침대 밑에 남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 후방에 숨어 있던 장군의. 장군은 말도 많아 밤이면 혼자서 말했다오 대개는 딱하고 시시한 넋두리를, 2)                          2) 넋두리라고 번역한(ennui)는 본래 권태. 따분함을 뜻함.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이러이러---- 어느 날 밤에 따분해서 죽었다오 내겐 가정 생활이 애저녁에 거덜나서 잠자리 탁자에서 뛰어나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오 모두가 다 빛나고 모두가 다 번쩍이는 대도시를 향하여 도망쳤다오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해 보니 사비 앙파로 미안해요 말의 말이거든요 어느 날 아침 나막신을 신고 파리에 도착                   동물의 왕이라는 사자를 좀 만나자고 면회 신청했다가 콧잔등에 몽둥이 세례 전쟁중이라 전쟁이 계속중이라 나는 눈가리개로 눈 가린 채 바야흐로 징집되고 말았다오 전쟁중이라 전쟁이 계속중이라 물가는 올랐고 먹을 것은 귀해졌고 귀하면 귀할수록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이빨을 지근지근 나를 피프테크라더군                                            난 그게 영언 줄 알았죠 이러이러----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날 쓰다듬는 모든 사람들은 내 죽기만 기다렸죠 날 잡아먹으려고. 어느 날 밤 마구간에서 자고 있던 어느 날 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오 나도 아는 목소리가 늙은 사령관과 더불어 유령처럼 돌아오는 늙은 장군의. 그들은 내가 자는 줄 알았던지 그들은 나직나직 말을 했는데. 맹물에 쌀 넣고 끓인 죽은 지긋지긋해 짐승 고기 좀 먹어봤으면 이놈 먹는 귀리 속에 축음기 바늘을 섞어 주면 될 터인데 그 말을 듣자 내 몸속 피는 목마가 돌듯 한바퀴 핑그르 돌아 나는 마구간을 뛰쳐나와 숲속으로 도망쳤소.   이제 전쟁은 끝났고 늙은 장군은 죽었네 제 침대 속에서 죽었네 그래도 나는 살았으니 그게 제일 중요해 그럼 안녕히 안녕히 주무시고 맛있게 드시죠 나의 장군님.       가을 /쟈크 프레베르   오솔길 한가운데 쓰러지는 말 한 마리 그 위에 떨어지는 잎새들 우리들의 사랑이 떤다 그리고 태양도.   시집 전재 끝    
38    쉴러 시모음 댓글:  조회:2572  추천:0  2017-08-20
쉴러 1869. 2. 11 독일 엘버펠트~1945. 1. 22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20세기초 독일의 시인·단편작가·극작가·소설가.   유대계로서 1894년 내과의사 베르톨트 라스커와 결혼(1903 이혼)한 후 베를린에 정착했다. 베를린에서 아방가르드 문학 서클에 자주 다녔으며 서정시와 단편소설들을 정기간행물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도적인 표현주의 잡지의 편집인이었던 헤르바르트 발텐과 2번째 결혼(1901~11)을 했다.   〈슈튁스 Styx〉(1902)라는 제목의 첫번째 시집에 이어 〈나의 기적 Meine Wunder〉(1911)·〈히브리 민요 Hebraische Balladen〉(1913)를 비롯한 여러 권의 서정시집을 발표했다. 그밖에 주요작품으로는 희곡 〈부퍼 Die Wupper〉(1909)와 자전적 소설 〈나의 마음 Mein Herz〉(1912), 단편소설집 〈테베의 왕자 Der Prinz von Theben〉(1914)와 〈바르셀로나의 놀라운 랍비 Der Wunderrabbiner von Barcelona〉(1921)가 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후인 1933년 스위스로 이주하였고, 1940년에는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 다시 정착하였다. 언제나 상도를 벗어난 예측할 수 없는 생을 영위하였고 말년을 가난하게 지냈다. 그녀의 시들은 풍부한 환상의 특질과 상징성을 활용하였으며 부모, 낭만적 열정, 예술, 종교, 다른 주제 등과 어린시절의 개인적인 환기를 비애감과 황홀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열정적으로 써내려갔다. 많은 단편소설들은 아라비안나이트를 재해석한 것으로 시각적 이미지가 풍부한 현대적 감각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녀의 소설들은 분위기와 상징성은 풍부하지만 서사적 초점이 약하고 플롯이 거의 짜여져 있지 않은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커 쉴러는 20세기초 중요한 독일 서정시인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환희의 송가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처녀들이여,   우리 모두 감동에 취하고 빛이 가득한 신전으로 들어가자.   잔악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그대의 다정한 날개가 깃들이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그렇다. 비록 한 사람의 벗이라도 땅 위에 그를 가진 사람은 모두...   그러나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자는 눈물 흘리며 발소리 죽여 떠나가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연의 가슴에서 환희를 마시고   모든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환희의 장미 핀 오솔길을 간다.   환희는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주,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벌레조차도 쾌락은 있어 천사 케르빔은 신 앞에 선다.     장대한 하늘의 궤도를 수많은 태양들이 즐겁게 날 듯이 형제여   그대들의 길을 달려라,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서로 서로 손을 마주잡자, 억만의 사람들이여,   이 포옹을 전 세계에 퍼뜨리자. 형제여, 성좌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신이 계시는 곳이다. 엎드려 빌겠느냐, 억만의 사람들이여, 조물주를 믿겠느냐   세계의 만민이여, 성좌의 저편에 신을 찾아라, 별들이 지는 곳에 신이 계신다."         장갑   사자 우리 앞에서 격투 경기를 기다리며 프란츠 왕이 앉아 있다.   주위에는 귀족들이 둘러 앉아 있고 높은 발코니에는 귀부인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둘러 앉아있다.     왕이 손가락으로 신호하자, 사자우리의 문이 열리고   육중한 발걸음으로 사자 한 마리가 밖으로 나와,   주위를 천천히 둘러 보더니,   입을 크게 한 번 벌리고, 갈기 털을 부르르 떨더니만,   그 자리에 몸을 �혔다.     다시 왕이 신호를 하자 두 번째 우리의 문이 열리고   거기서 호랑이 한 마리가 사납게 뛰쳐 나오더니   사자가 앞에 있음을 보고 커다란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꼬리를 흔들면서 둥그렇게 한바퀴 돌더니   불타는 혀를 드러내고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사자 주위를 빙빙 돌더니만, 으렁거리면서 사자옆에 몸을 �혔다.     왕이 또 신호를 내리자 우리문이 두 개가 열리고 표범 두 마리가 뛰쳐 나왔다.   살기찬 표범들은 호랑이에게 달겨들었다. 호랑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표범을 붙들자,   사자가 위엄있는 모습으로 일어나 울부짖었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맹수들은 살기를 품은 채 원을 그리더니 모두들 자리에 누웠다.     그 때 발코니 윗자리에서 장갑 한 짝이 아름다운 손에서 떠나   호랑이와 사자가 있는 한 가운데 떨어졌다.   쿠니쿤트 공주는 비웃는 듯이 기사 델로게스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기사님, 당신의 사랑이 열렬하고 늘 내게 맹세한 말씀이 참말이라면   저 장갑을 주워 올 수 있겠지요?"     그러자 기사는 즉시 일어나 힘찬 걸음으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맹수들 한가운데에서 겁 없이 장갑을 주워들었다.   놀람과 몸서림을 치면서 모든 기사와 귀부인들이 그걸 보았다.   태연히 장갑을 가져오는 그에게 모든 사람들은 칭송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참다운 행복을 기대하는 쿠니쿤트 공주는   부드러운 사랑의 눈동자로써 그를 맞이하였다. 기사는 공주의 얼굴에 장갑을 던지며,   "공주여, 나는 감사의 말을 바라지 않소." 기사는 그 자리에서 공주를 버렸다.       타향에서 온 소녀     해마다 새 봄이 오고 종달새가 첫노래를 부를 때가 되면   골짜기 가난한 목자들 곁에는 예쁘고 신비스런 소녀가 나타났었네,     그 소녀는 거기 출생이 아니었고 아무도 고향을 아는 이 없었기에   한 번 작별하고 가버리면 그의 행방 또한 알 수 없었네.     소녀가 있는 곳엔 기쁨이 뒤따랐고 사람들 또한 마음 너그러워졌지.   하지만, 소녀가 지닌 높은 위엄 때문에 아무도 희롱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네.     소녀는 아름다운 꽃을 가져왔고 단 맛이든 과일도 가져왔지.   그 과일은 이 곳과는 전혀 다른 곳 행복한 자연의 햇볕으로 익은 것이었지.     소녀는 아름다운 꽃과 익은 과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선물했고   젊은이나 지팡이 든 노인들이나 모두 선물을 들고 집에 갔네.     누구 하나 푸대접 받는 이 없었으나 서로 사랑하는 한 쌍이 찾아왔을 때   소녀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골라 그들에게 주었으니, 그건 예쁜 꽃이었네.     이상과 생명     옛날, 넘치는 정열로 기도하며, 피그말리온이 돌을 끌어안자   마침내 그 차갑게 빛나던 대리석이 감정의 빛을 나타낸 것처럼,     나도 온 정열로 빛나는 자연을 내 시인의 가슴으로 안았다.   그러자 마침내 숨결이, 따뜻함이, 생명의 움직임이 그 자연의 현상 속에서 뛰쳐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모든 정열을 나누어 주었다. 이 무언의 상은 나타내어야 할 말을 생각하고   젊고 대담한 내 키스에도 따라주며, 높이 뛰는 내 가슴의 고동까지도 알아 주었다.     그때 빛나는 자연도 나를 위해 있었고, 은빛 시내물도 노래로 가득 차 흘렀으며   나무도, 장미도 서로가 느낌을 나누어 이야기 했다. 그것은 내 영원한 생명의 메아리였다.       쉴러는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을 인용하여 젊은 가슴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였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이별을 눈물로써 대신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곁에 있던 사람이 먼길을 떠나는 순간,   사랑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져 간다 할지라도   그대 가슴속에 남겨진 그 사랑을 간직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순 례 자   인생의 봄에 벌써 나는 방랑의 길에 올랐다.   청춘의 아름다운 춤들일랑 아버지의 집에 남겨둔 채로     유산과 소유의 모든 것을 줄겁게 믿으며 버려 버렸다.   가벼운 순례자의 지팡이를 들고 어린이의 생각으로 길을 떠났다.     길은 열려 있다. 방랑하라 언제나 상승을 추구하라는,   거대한 희망이 나를 휘몰고, 어두운 믿음의 말이 들린 때문에.     황금빛 대문에 이를 때까지, 그 문 속으로 들어가라고,   그곳에서는 현세적인 것이 거룩하고도 무상하지 않으리라.     저녁이 되고 또 아침이 와도, 나는 한 번도 멈춘 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찾고 원하던 것은 나타난 일이 도무지 없다.     산들이 행로를 가로막았고 강들이 발걸음을 얽매었으나,   협곡 위에는 작은 길을 내고 거친 물살 위엔 다리을 놓았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어떤 강기슭으로 나는 왔다.   강의 길을 즐거이 믿으면서 나는 강의 품속에 몸을 맡겼다.     그 강의 유희하는 물결은 나를 큰 바다로 이끌어 갔다.   내 앞에 드 넓은 허공만 있고, 목적지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어떤 길도 그곳으론 가지를 않고, 나의 머리 위의 저 하늘도   땅과는 한 번도 닿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은 결코 이곳일 수 없다  
37    에이츠 시모음 댓글:  조회:2137  추천:0  2017-08-19
에이츠 시모음 이니스프리 호수 섬  흰새들  죽음  오랜 침묵 후에  버드나무 정원에서  그대 늙었을때  방황하는 인거스의 노래  술노래  하늘의 융단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레다와 백조  쿠울호의 백조  둘째 트로이는 없다  유리 구슬  학생들 사이에서  내 딸을 위한 기도  1916년 부활절  육신과 영혼의 대화  비잔티움  벌벤산 아래  긴다리 소금쟁이  ~~~~~~~~~~~~~~~~~~~~~~~~~~~~~~~~~~~~~~~~~~~~~~~~~~~~~~~~~~  이니스프리 호수 섬  나는 일어나 지금 갈거야, 이니스프리로 갈거야,  조그마한 오두막을 거기에 지을거야, 진흙과 나뭇가지로.  콩을 아홉 이랑 심고, 꿀벌도 한 통 칠거야,  그리고 벌소리 잉잉대는 숲에서 홀로 살거야.  나는 거기서 평화로울 거야, 왜냐면 평화는 천천히,  아침의 장막을 뚫고 귀뚜리 우는 곳으로 천천히 오니까.  거기는 한 밤은 항상 빛나고, 정오는 자주빛을 불타고,  저녁은 홍방울새 소리 가득하니까.  나는 일어나 지금 갈거야, 왜냐면 항상 밤낮으로  호수물이 나지막이 찰싹이는 소리가 들리니까.  나는 차도 위나 회색 보도 위에 서 있는 동안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소리가 들린다.  ~~~~~~~~~~~~~~~~~~~~~~~~~~~~~~~~~~~~~~~~~~~~~~~~~~~~~~~~  흰새들  애인이여, 나는 바다 물거품 위를 나는 흰 새가 되고 싶구려!  사라져 없어지는 유성의 불길엔 싫증이 나고,  하늘까에 나직이 걸린 황혼의 푸른 별의 불길은,  애인이여, 꺼질 줄 모르는 슬픔을 우리의 마음에 일깨워 주었소.  이슬 맺힌 장미와 백합, 저 꿈과 같은 것들에게선 피로가 오오.  아 애인이여, 그것들, 사라지는 유성의 불길은 생각지 맙시다.  그리고 이슬질 무렵 나직이 걸려 머뭇거리는 푸른 별의 불길도,  왜냐하면, 나는 떠도는 물거품 위의 흰 새가 되었으면 하니, 그대와 나는!  나는 수많은 섬들, 그리고 많은 요정의 나라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오.  그곳에선 분명 시간이 우리를 잊을 것이고, 슬픔도 더 이상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며,  곧 장미와 백합, 그리고 불길의 초조함에서 벗어날 것이오.  애인이여, 우리 다만 저 바다의 물거품 위를 떠도는 흰 새나 된다면 오죽 좋겠소.  ~~~~~~~~~~~~~~~~~~~~~~~~~~~~~~~~~~~~~~~~~~~~~~~~~~~~~~  죽음  두려움도 바램도  죽어가는 동물에 임종하지 않지만,  인간은 모든 걸 두려워하고 바라며  최후를 기다린다.  그는 여러 차례 죽었고  여러 차례 다시 일어났다.  큰 인간은 긍지를 가지고  살의(殺意) 품은 자들을 대하고  호흡 정치 따위엔  조소(嘲笑)를 던진다.  그는 죽음을 뼈 속까지 알고 있다 -  인간이 죽음을 창조한 것을.  ~~~~~~~~~~~~~~~~~~~~~~~~~~~~~~~~~~~~~~~~~~~~~~~~~~~  오랜 침묵 후에  오랜 침묵 후에 하는 말 -  다른 연인들 모두 멀어지거나 죽었고  무심한 등불은 갓 아래 숨고  커튼도 무심한 밤을 가렸으니  우리 예술과 노래의 드높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함이 마땅하리.  육체의 노쇠는 지혜, 젊었을 땐  우리 서로 사랑했으나 무지했어라.  ~~~~~~~~~~~~~~~~~~~~~~~~~~~~~~~~~~~~~~~~~~~~~~~~~~~~~~~~~~~  버드나무 정원에서  버드나무 정원에서 그녀와 나 만났었네.  눈처럼 흰 작은 발로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며  그녀는 내게 일러주었지. 나뭇가지에 잎이 자라듯 사랑을 수월히 여기라고.  그러나 난 젊고 어리석어 그녀의 말 들으려 하지 않았네.  강가 들판에서 그녀와 나 서 있었네.  기대인 내 어깨 위에 눈처럼 흰 손을 얹으며  그녀는 내게 일러주었지. 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수월히 여기라고.  그러나 젊고 어리석었던 나에겐  지금 눈물만 가득하네.  ~~~~~~~~~~~~~~~~~~~~~~~~~~~~~~~~~~~~~~~~~~~~~~~~~~~~~~~~~  그대 늙었을 때  그대 늙어 백발이 되어 졸음이 자꾸 오고  벽로 가에서 고개를 끄떡끄떡할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그대 눈이 옛날 지녔던  부드러운 눈동자와 그 깊은 그림자를 꿈꾸어라 ;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의 즐거운 우아의 순간을 사랑했으며,  또 그대의 미를 참사랑 혹은 거짓사랑으로 사랑했던가를,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그대의 편력하는 영혼을 사랑했고,  그대의 변해가는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었음을;  그리고 달아오르는 쇠살대 곁에 몸을 구부리고서,  좀 슬프게 중얼대어라, 어떻게 사랑이  산 위로 하늘 높이 도망치듯 달아나  그의 얼굴을 무수한 별들 사이에 감추었는가를.  ~~~~~~~~~~~~~~~~~~~~~~~~~~~~~~~~~~~~~~~~~~~~~~~~~~~~~~~~~~~~  방황하는 인거스의 노래  내 머리 속에 불이 붙어  개암나무 숲으로 갔었지.  개암나무 한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딸기 하나를 낚싯줄에 매달았지.  흰 나방들이 날고 (아마 이 구절인 듯)  나방 같은 별들이 깜빡일 때  나는 시냇물에 딸기를 담그고  작은 은빛 송어 한 마리를 낚았지.  나는 그것을 마루 위에 놓아 두고  불을 피우러 갔었지.  그런데 마루 위에서 무엇인가가 바스락거리더니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지.  그것은 머리에 사과꽃을 단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가 되어  내 이름을 부르며 달아나  빛나는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나 비록 골짜기와 언덕을  방황하며 이제 늙어 버렸지만  그녀가 간 곳을 찾아 내어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고 손을 잡고서  얼룩진 긴 풀밭 속을 걸어 보리라.  그리고 시간이 다할 때까지 따보리라.  저 달의 은빛 사과를  저 해의 금빛 사과를...  ~~~~~~~~~~~~~~~~~~~~~~~~~~~~~~~~~~~~~~~~~~~~~~~~~~~~~  술노래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내 그대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  ~~~~~~~~~~~~~~~~~~~~~~~~~~~~~~~~~~~~~~~~~~~~~~~~~~~~  하늘의 융단  만일 나에게 하늘의 융단이 있다면  금빛과 은빛으로 짠,  낮과 밤과 어스름의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천으로 짠.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  허나 가난한 나는 꿈밖에 없어  그대 발 밑에 꿈을 깔았습니다.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잎이 많아도 뿌리는 하나입니다.  내 청춘의 거짓 많던 시절에는  태양 아래서 잎과 꽃을 흔들었건만  이제는 나도 진실 속에 시들어 갑니다.  ~~~~~~~~~~~~~~~~~~~~~~~~~~~~~~~~~~~~~~~~~~~~~~~~~~~~~~~~  레다와 백조  별안간의 강한 휘몰아침. 커다란 날개들이 아직  비틀거리는 소녀 위에서 퍼덕이고, 그녀의 허벅지는  검은 물갈퀴로 애무되고, 목은 그의 부리에 잡혀 있을 때,  그는 그녀의 무력한 가슴을 자기 가슴에 껴안는다.  어떻게 놀라고 모호한 그 손가락들이 밀어내겠는가  그녀의 느슨해지는 허벅지에서 깃털달린 영광을?  어떻게 그 하얀 물풀 속에 눕혀진 육체가  느끼지 않을 수 있으리 낯선 심장의 고동을?  허리의 떨림이 거기에 낳는다  파괴된 담, 불타는 지붕 그리고 탑과  아가멤논의 죽음을.  그렇게 잡혀서,  하늘의 그 야만적인 피에 지배되었을 때,  그녀는 그의 힘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받았는가  그 무관심한 부리가 그녀를 놓아주기 전에?  ~~~~~~~~~~~~~~~~~~~~~~~~~~~~~~~~~~~~~~~~~~~~~~~~~~~~~~~~~  쿠울호의 백조  나무들은 가을의 아름다움에 싸여 있고,  숲 속의 오솔길은 메말랐다,  시월의 황혼 아래 호수물은  잔잔한 하늘을 비춘다,  솔 사이로 넘치는 물 위에는  쉰아홉 마리의 백조가 있다.  열아홉 째 가을이 나에게 왔다  내가 처음 세기 시작한 이래.  나는 내가 잘 끝내기도 전에,  모두 갑자기 올라가  부서진 커다란 고리 모양으로 선회하며  요란한 날개소리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빛나는 생물들을 보아왔고,  이제 내 마음을 쓰리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황혼녘에,  이 호숫가에서 처음,  내 머리 위로 그들의 날개짓 소리 들으며  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던 이후로.  여전히 지치지 않고, 연인끼리,  그들은 사귈만한 찬물에서  노닥거리거나 하늘로 올라간다.  그들의 마음은 늙지 않았다.  정열과 정복심이, 그들이 어딜 가든,  여전히 그들에겐 있다.  지금 그들은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다,  시비롭고, 아름답게.  어떤 물풀 속에 그들은 세울까,  어떤 호숫가나 연못가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까 내가 어느날 잠깨어  그들이 날아가버린 것을 발견할 때?  ~~~~~~~~~~~~~~~~~~~~~~~~~~~~~~~~~~~~~~~~~~~~~~~~~~~~~~~~  둘째 트로이는 없다  왜 내가 그녀를 책망해야 하나 그녀가 내 생애를  고통으로 채운 것을, 또는 그녀가 최근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가르친 것을,  또는 작은 거리들을 큰 거리로 내던진 것을,  만일 그들이 욕망에 상응하는 용기를 가졌다면?  무엇이 그녀를 평화롭게 할 수 있었을까,  고상함이 불처럼 단순케 한 마음과,  이런 시대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종류인,  팽팽히 당겨진 활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를,  만일 그녀가 높고 외롭고 매우 엄격했다면?  아니, 무엇을 그녀가 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오늘날의 그녀였다면?  또 하나의 트로이가 있었단 말인가 그녀가 불태워 버릴 ?  ~~~~~~~~~~~~~~~~~~~~~~~~~~~~~~~~~~~~~~~~~~~~~~~~~~~~~~~~~  유리 구슬  나는 들었다 병적으로 흥분한 여인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들은 팔레트와 바이올린 활과,  항상 명랑한 시인들에 넌더리가 난다고,  왜냐면 모든 이들은 알거나 알아야 하기에  만일 근본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비행기와 비행선이 나와서,  빌리 왕처럼 폭탄을 떨어뜨려  도시가 납작하게 두드려 맞을 것이기에.  모두가 자신의 비극을 연출한다,  저기 햄릿이 활보하고, 리어가 있고,  저건 오필리아, 저건 코델리아,  그러나 그들은, 만일 마지막 장면이 되어,  커다란 무대 장막이 내려지려 하더라도,  극 중의 그들의 뚜렷한 역할이 가치가 있다면,  울느라고 대사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고 있다 햄릿과 리어가 명랑하고,  명랑함이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모든이들이 목표했고, 발견했고 그리고 잃었다.  무대 소등. 머리 속으로 빛내며 들어오는 천국,  최대한도로 진행된 비극.  비록 햄릿이 천천히 거닐고 리어가 분노해도,  수십만 개의 무대 위에서  모든 무대 장막이 동시에 내려진다 해도,  그것은 한 인치도, 한 온스도 자랄 수 없다.  그들은 왔다, 그들 자신의 발로 걸어서, 배를 타고,  낙타를 타고, 말을 타고, 당나귀를 타고, 노새를 타고,  옛 문명들이 칼로 죽임을 당할 때.  그 후 그들과 그들의 지혜는 파괴되었다.  대리석을 청동처럼 다루었던,  바다 바람이 그 구석을 쓸어갈 때  올라가는 듯이 보이는 휘장을 만들었던,  칼리마커스의 수공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가냘픈 종려나무 줄기 같은 모양의  그의 긴 등갓은 단 하루만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세우는 자들은 명랑하다.  두 중국인이, 그들 뒤엔 또 한 사람이,  유리 구슬에 새겨져 있다,  그들 위로는 장수의 상징인,  다리 긴 새가 날아간다.  세번째 사람은, 분명히 하인인데,  악기를 가지고 간다.  돌의 모든 얼룩이,  우연히 생긴 틈이나 움푹한 곳이,  물줄기나 사태처럼 보인다,  아니면 아직도 눈내리는 높은 비탈처럼 보인다,  비록 분명히 오얏이나 벗나무인 가지가  그 중국인들이 올라가고 있는 곳의 중간 쯤에 있는 작은 집을 기분좋게 하지만,  그리고 나는 즐거이 상상한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있는 것을,  거기에, 산과 하늘 위에,  그들이 바라보는 모든 비극적인 경치 위에.  한 사람이 구슬픈 곡조를 요청하자,  능숙한 손가락들이 연주하기 시작한다.  많은 주름 속의 그들의 눈, 그들의 눈,  그들의 오랜, 빛나는 눈은, 즐겁다.  ~~~~~~~~~~~~~~~~~~~~~~~~~~~~~~~~~~~~~~~~~~~~~~~~~~~~~~~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질문하며 긴 교실을 걸어간다.  흰 두건을 쓴 친절한 노 수녀가 대답한다.  아이들은 배웁니다 셈하기와 노래하기,  독본과 역사를 공부하기,  재단하기와 재봉하기를, 모든 면에서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잘하기를--아이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놀라서 응시한다  육십세의 미소짓는 공직자를.  II  나는 꿈꾼다 꺼져가는 불 위에 웅크린  레다의 육체를, 그녀가 말한  어떤 어린 시절을 비극으로 변하게 한  거친 책망이나, 사소한 사건의 이야기를--  들었지, 그러자 우리의 두 본성은 섞이는 듯했다  젊은이 특유의 공감 때문에 한 구체로,  아니, 플라톤의 비유를 바꾸어 말하자면,  한 껍질 속의 노른자와 흰자로.  III  그리고 슬픔이나 분노의 그 발작을 생각하며  나는 거기 있는 이 아이 저 아이를 바라보고  궁금해한다 그녀도 그 나이에 저랬을까 하고--  왜냐면 백조의 딸들이라도 모든 물새들의 유산을  조금은 공유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리고 뺨이나 머리에 저 색깔을 지녔었을까 하고,  그러자 내 마음은 미칠 듯했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실물과 같은 아이로.  IV  그녀의 현재의 영상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  십오세기의 손가락들이 그것을 만들었나  마치 바람을 마시고 고기 대신  한 접시의 그림자를 먹은 듯 뺨이 훌쭉하게?  그리고 나는 결코 레다의 종류는 아니지만  한 때 예쁜 깃털을 가졌었다--그것이면 충분하다,  미소짓는 모든 이에게 미소짓고, 보여주는 게 나으리라  편안한 종류의 늙은 허수아비가 있음을.  V  어떤 젊은 어머니가, 생식의 꿀이 드러내어,  회상이나 그 약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잠자고, 고함치고 고망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형체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자신의 아들을, 만일 그녀가 그 머리 위에  육십이나 그 이상의 겨울을 얹은 그 형체를 보기만 한다면,  그의 출산의 고통이나 그를 세상에 내보낼 때의  불확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할까?  VI  플라톤은 자연이 사물들의 희미한 모형 위에  떠도는 거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견실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질을 했다  왕 중 왕의 궁둥이 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금-허벅지의 피타고라스는  바이올린 활대나 줄을 손가락으로 연주했다  별이 노래하고 무심한 시신들이 들은 것을.  새를 쫒아버리는 낡은 막대기 위의 낡은 옷들일 뿐이다.  VII  수녀들가 어머니들은 상들을 숭배한다,  촛불들이 밝히는 것들은  어머니의 환상을 활기차게 하는 것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대리석이나 청동의 평온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들도 가슴을 찢는다--오  정열, 경건, 아니면 애정이 알고  천상의 모든 영광을 상징하는 존재들이여--  오 인간의 일을 조롱하는 스스로 태어난 자여.  VIII  노동은 육체가 영혼을 즐겁게 하려고  상처입지 않는 곳에서 꽃피거나 춤춘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의 절망에서 생기지 않고,  흐린 눈의 지혜는 한밤의 기름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 밤나무여, 크게-뿌리박은 꽃피우는 자여,  그대는 잎인가, 꽃인가, 아니면 줄기인가?  오 음악에 맞춰 흔들린 육체여, 오 반짝이는 시선이여,  어떻게 우리는 무용수와 춤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  내 딸을 위한 기도  폭풍우가 한 번 더 불고 있으나 이  요람 덮개와 이불 아래 반 쯤 덮혀  내 아이는 잠잔다. 그레고리의 숲과  헐벗은 동산 하나 외에는 장애물이 없다  거기에 대서양에서 생긴 바람이 머물 수 있다.  건초더미와 지붕을 납작하게 만드는 바람이,  한 시간 동안 나는 걸으며 기도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큰 어둠 때문에.  나느 한 시간을 걸으며 기도했다 이 어린 아이를 위해  그리고 바다바람이 탑 위에서, 다리의 아치 아래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물이 불은 냇물 위의 느름나무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흥분된 환상 속에서  미래의 세월이 도래했다고 상상했고,  바다의 살인적인 순진에서 나온 격노한 북소리에 맞추어 춤추었다.  선택받은 헬렌은 삶이 단조롭고 무료함을 발견했고  후에 한 멍청이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물보라에서 태어난 그 위대한 여왕은,  아버지가 없었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안짱다리 대장장이를 남편으로 골랐다.  멋진 여인이 그들의 고기와 함께  미치게 하는 샐러드를 먹는 것은 확실하다  그로 인하여 풍요의 뿔은 망쳐진다.  예절에 있어서는 그녀가 주로 배웠으면 한다,  마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름답지 만은 않은 사람들이 수고해 얻는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 바보짓을 한  많은 사람들을 매력이 현명하게 했다,  헤매고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생각한 많은 불쌍한 사람들은  즐거운 친절에서 자신의 눈길을 돌릴 수 없다.  그녀의 모든 생각이 홀방울새처럼 되도록  그녀가 꽃피는 숨은 나무가 되기를,  그 소리의 관대함을 나누어 주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은 하지 않기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면 추격을 시작하지 않기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면 싸움을 시작하지 않기를.  오 그녀가 한 사랑스런 영속적인 장소에 뿌리박은  어떤 푸른 월계수처럼 살기를.  내 마음은, 내가 사랑했던 마음들 때문에,  내가 인정했던 종류의 아름다움 때문에,  조금밖에 번창하지 않고, 최근엔 메말라버렸다,  그러나 증오로 목 메이는 것이  모든 악운 중에서 최고라는 것을 안다.  마음에 증오가 없다면  바람의 습격과 공격이  홍방울새를 잎사귀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지적인 증오가 가장 나쁘다,  그러니 그녀로 하여금 의견은 저주받은 것이라고 생각케하라.  풍요의 뿔의 입에서 태어난  가장 사랑스런 여인이,  그녀의 완고한 정신 때문에  그 뿔과 조용한 본성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모든 선을 분노한 바람이 가득한 풀무와  맞바꾸는 것을 나는 보지 않았던가?  모든 증오가 여기에서 쫒겨나고,  영혼이 근본적인 순결을 회복하고  드디어 그것은 스스로 기쁘게 하고,  스스로 달래고, 스스로 위협한다는 것과,  그 자체의 감미로운 뜻이 하늘의 뜻이라는 알게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녀는, 비록 모든 얼굴들이 지푸리고  모든 바람부는 지역이 고함치거나  모든 풀무가 터져도, 여전히 행복하리라.  그녀의 신랑이 그녀에게 집을 가져오기를  그곳에선 모든 것이 익숙해져 있고, 의식적인 그런 집을,  왜냐면 거만과 증오는 대로에서  사고파는 물건들이니.  어떻게 단지 관습과 의식에서만  순진과 아름다움이 태어나는가?  의식은 풍요의 뿔의 이름이고,  관습은 널리 퍼지는 월계수의 이름이다.  ~~~~~~~~~~~~~~~~~~~~~~~~~~~~~~~~~~~~~~~~~~~~~~~~~~~~~~~~~~~~~  1916년 부활절  나는 잿빛 십팔세기의 집들 가운데서  계산대나 책상으로부터  활기찬 얼굴로 다가오는  그들을 낮이 끝날 때 만났다  나는 지나갔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예의바른 별 뜻없는 말을 하거나  잠시 머물러  별 뜻없는 말을 하거나 하곤,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과 내가 광대옷을 입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클럽의 난로에 둘러 앉아 있는  친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농담이나 조롱을 끝마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고,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고.  그 여인의 낮들은 보내졌다  무지한 선의 가운데,  그녀의 밤들은 토론 가운데 보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질 때까지.  그녀가 젊고 아름다울 때,  말타고 사냥개를 쫓을 때,  어떤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보다 감미로왔는가?  이 남자는 학교를 경영했고  우리의 날개달린 말을 탔다,  이 사람은 그의 조력자이자 친구로  한창 본령을 발휘하고 있었다,  결국 명성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그의 본성은 지극히 민감해 보였고,  그의 생각은 지극히 대담하고 감미로워 보였으므로.  이 사람은 내 생각에  술주정뱅이고, 허영심 강한 촌놈이었다.  그는 매우 심한 나쁜 짓을 했다  내 마음에 가까운 누군가에게,  그러나 나는 그를 노래 속에 넣어준다,  그도, 또한, 이 우연한 희극에서  자기 역할을 그만두었다,  그도, 또한, 자기 차례가 되어 변했다,  완전히 변형되었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 가지 목적만 가진 사람들은  매혹되어 돌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강물을 괴롭히기 위하여.  길에서 오는 말,  말탄 자, 구름에서 휘모는 구름으로  날아가는 새들,  순간순간 그들은 변한다,  냇물에 비친 구름 그림자는  순간순간 변한다,  말발굽이 물가에서 미끄러지고,  말은 그 속에서 텀벙거린다,  다리가 긴 붉은 뇌조들이 잠수하고,  암컷들은 수컷들을 부른다,  순간순간 그들은 살아가고.  그 돌은 이 모든 것 가운데 있다.  너무 오랜 희생은  마음을 돌로 만들 수 있다.  오 언제면 충분할까?  그건 하늘의 몫이다, 우리 몫은  마음대로 뛰놀던 사지에  마침내 잠이 닥쳐왔을 때,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부르듯이,  이름들이나 중얼거리는 것,  그것이 황혼이 아니고 무엇이오?  아니, 아니, 밤이 아니라 죽음이오.  그건 결국 필요없는 죽음이었나?  왜냐면 행해지고 말해진 모든 것에 대해  영국은 신의를 지킬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그들의 꿈을 안다, 충분하다  그들이 꿈꾸었고 죽었다는 것만 알면,  긜고 과도한 사랑이 그들이 죽을 때가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으면 어떻소?  나는 그것을 시로 쓴다--  맥도너와 맥브라이드  그리고 코놀리와 퍼스는  지금과 장래에  녹색 옷이 입어지는 곳 어디서나,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  육신과 영혼의 대화  영혼: 나는 굽이도는 옛 계단으로 부른다,  너의 마음을 모두 가파른 오르막에,  부서지고 무너지는 성벽에,  호흡없는 별빛 비친 공기에,  숨은 극을 표시하는 별에 집중하라고.  헤매는 모든 생각을  모든 생각이 다해버린 그 지역에 고정하라고.  누가 어둠과 영혼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육신: 내 무릎 위의 그 신성한 칼은  사토의 옛 칼로 여전히 예전과 같다,  여전히 날리 예리하고, 여전히 거울같고  긴 세월에 의해 얼룩지지 않았다.  그 꽃무니, 비단의 옛 장식은, 어떤  궁정여인의 옷에서 찢어내어져  그 나무칼집을 묶어 싸고 있는데,  해어졌으나 여전히 보호할 수 있고, 빛바랬으나 장식할 수 있다.  영혼: 왜 인간의 상상은  전성기를 한창 지나서  사랑과 전쟁을 상징하는 것들을 기억해야 하는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밤을 생각하라,  다만 상상이 대지를 경멸하고  지성이 그것이 이것 저것으로  또 다른 것으로 헤맴을 경멸하기만 한다면,  죽음과 탄생의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그 밤을.  육신: 몬타시기, 그의 가족의 셋째가, 그것을 만들었다  오백년 적에, 그 주변에는  어떤 자수인지 나는 모르는--진홍빛의--  꽃들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밤을 상징하는 탑에 대한  낮의 상징으로 놓는다,  그리고 군인의 권리에 의한 것처럼  그 죄를 한 번 더 범할 특권을 요구한다.  영혼: 그 지역의 그러한 충만함은 넘쳐흘러  정신의 웅덩이에 떨어져  사람은 귀멀고 말못하고 눈이 먼다,  왜냐면 지성은 더 이상 구별하지 못하기에  존재와 당위를, 주체와 대상을--  다시 말하여, 하늘로 올라가기에,  단지 죽은 자들만이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걸 생각할 때 내 혀는 돌이 된다.  II  육신: 산 사람은 눈멀어 자신의 배설물을 마신다.  도랑이 불결하면 어때?  내가 그 모든 것을 한 번 더 살면 어때?  자라는 노고를,  소년시절의 치욕을, 어른으로 바뀌는  소년시절의 슬픔을,  자신의 어색함을 직면하게 된  끝나지 않은 사람과 그의 고통을 참아내면 어때?  적들에게 둘러싸인 끝난 사람을 참아내면 어때?--  도대체 어떻게 그가  마침내 저 형상이 자신의 형상이라고 생각하도록  악의에 찬 눈들의 거울이  자신의 눈들 위에 던져준  저 더럽고 일그러진 형상을 피할 수 있는가?  명예가 그를 겨울의 강풍 속에서 발견할 때  도망이 무슨 소용있는가?  나는 이 모든 것을 다시 하는데 만족한다  그리고,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때리는  눈먼 사람의 시궁창의 개구리 알 속으로,  가장 비옥한 시궁창 속으로,  만일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혈족이 아닌 오만한 여인에게  구애하면 그가 행하거나 겪어야만 하는 그 어리석음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삶이라 해도,  나는 또 다시 사는데 만족한다.  나는 행동이나 생각에 있어서의 모든 사건을  그 원천까지 추구하는 데, 운명을 헤아리는 데,  내 자신에게 그 운명을 허용하는 데 만족한다,  내가 이렇게 후회를 내버려서  매우 큰 감미로움이 가슴 속으로 흘러들 때  우리는 웃고 노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에 의해 축복받았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축복받았다.  ~~~~~~~~~~~~~~~~~~~~~~~~~~~~~~~~~~~~~~~~~~~~~~~~~~~~~~~~~~~~~~~~  비잔티움  낮의 정화되지 않은 상들이 물러난다.  황제의 술취한 병사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밤의 메아리도, 밤-보행자의 노래도  대 성당의 큰 종이 울린 후에는 물러난다.  별빛이나 달빛 비친 둥근 지붕은 경멸한다  인간인 모든 것을,  다만 복잡하기만 한 모든 것을,  인간 혈관의 격노와 오욕을.  내 앞에 상이 떠다닌다, 인간인지 허깨비인지,  인간이라기 보다는 허깨비이고, 허깨비라기 보다는 상인.  왜냐면 미이라의 옷에 감긴 하계의 실꾸리가  구불구불한 길을 풀어 놓을 지도 모르니,  습기도 없고 호흡도 없는 입을  호흡없는 입들이 소환할지도 모르니,  나는 환영한다 그 초인을,  나는 그것을 삶-속의-죽음과 죽음-속의-삶이라 부른다.  기적이, 새나 황금 세공품이,  새나 수공품이라기 보다는 기적이,  별빛 비친 황금 가지에 얹혀서,  하계의 수탉처럼 울 수 있거나,  달빛에 격분하여 큰 소리로 경멸할 수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금속을 찬양하여  보통의 새나 꽃잎을  그리고 오욕과 피의 모든 복잡한 것들을.  한밤에 황제의 포도 위에는 날아다닌다  나무도 공급하지 않고, 부싯돌도 부치지 않고,  폭풍우도 방해하지 않는 불꽃들이, 불꽃에서 나온 불꽃들이,  거기로 피에서 나온 영혼들이 오고  격노의 모든 복잡한 것들이 떠난다,  춤 속으로  황홀한 고뇌 속으로  소매도 그을릴 수 없는 불꽃의 고통 속으로 죽어간다.  돌고래의 오욕과 피에 걸터앉아 영혼이  줄지어 온다. 용광로들이 홍수를 부순다,  황제의 황금 용광로들이!  무도장 바닥의 대리석들이  복잡한 것의 격렬한 격분을 부순다,  여전히 새로운 상들을 낳는  그 상들을,  그 돌고래에 찢긴, 그 큰 종의 괴롭힘을 받은 바다를.  ~~~~~~~~~~~~~~~~~~~~~~~~~~~~~~~~~~~~~~~~~~~~~~~~~~~~~~~~~~~~~~  벌벤산 아래  아틀라스의 마녀가 알고 있었고,  말했고, 닭들을 울게 했던  마레오틱 호수 주변에서  성자들이 말한 것을 걸고 맹세하라.  안색과 모습이 초인임을 증명하는  그 말탄 자들, 그 여인들을 걸고 맹세하라,  그 창백하고 얼굴 긴 동료  불멸의 그 태도를  그들의 완전한 정열이 성취했음을.  이제 그들은 겨울 새벽을 타고 간다  벌벤 산이 경치를 보여주는 곳에서.  여기 그들이 뜻하는 바의 요점이 있다.  II  여러 번 사람은 살고 죽는다  종족의 그것과 영혼의 그것인,  그의 두 영원 사이에서,  옛 아일랜드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사람이 자기 침대에서 죽든  아니면 장총이 그를 죽게 하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짧은 이별은  사람이 두려워해야 하는 최악이다.  비록 무덤-파는 자들의 노고는 오래고,  그들의 삽이 날카롭고, 그들의 근육이 강하더라도,  그들은 다만 그들이 매장한 사람을  인간의 마음 속으로 다시 되밀어 넣을 뿐이다.  III  "우리 시대에 전쟁을 보내주소서, 오 주여!"라는  미첼의 기도를 들은 당신은  모든 말들이 말해지고,  한 사람이 미쳐서 싸울 때,  무언가가 오랫동안 멀었던 눈에서 떨어지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의 편파적인 마음을 응시하고,  잠시 편안히 서서,  큰 소리로 웃는다, 그의 마음은 평온하다.  가장 현명한 사람조차도 긴장한다  어떤 종류의 격렬함으로  그가 운명을 완수하거나  자신의 일을 알거나, 짝을 고를 수 있기 전에는.  IV  시인과 조각가는, 일을 한다,  시류를 따르는 화가로 하여금  그의 위대한 선조들이 한 것을 피하도록 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영혼을 신에게로 가져가고,  그로 하여금 요람을 옳게 채우도록 한다.  도량법이 우리 이론을 일으켰다,  힘찬 이집트인이 생각한 형체들을,  보다 점잖은 피디어스가 만든 형체들을,  미켈란제로는 시스틴 성당 지붕에  증거를 남겼다,  거기선 단지 반쯤 잠깬 아담이  지구에 거니는 마담을 혼란케할 수 있다  그녀의 내장이 열받을 때까지,  은밀히 작용하는 마음 앞에 놓인  목적이 있다는 증거이다.  인류의 세속적 완성이다.  십오세기는 신이나 성자의 배경으로  영혼이 편안히 쉬고 있는 정원을  그림으로 그렸다,  거기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꽃과 풀과 구름없는 하늘이,  잠꾸러기들이 깨었으나 여전히 꿈꿀 때,  그리고 단지 침대와 침대틀만 거기 남아 있고,  그것이 사라졌으나  천국이 열렸다고 여전히 선언할 때,  존재하거나 보이는 형체들을 닮았다.  가이어들은 계속 회전한다,  보다 위대한 그 꿈이 사라졌을 때  칼버트와 윌슨, 블레이크와 클로드는,  신의 국민들을 위한 휴식을 준비했다,  팔머의 말로, 그러나 그 후  우리 생각에 혼돈이 일어났다.  V  아일랜드 시인들이여, 당신네의 일을 배우시오,  잔 만들어진 것은 무엇이든 노래하시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형체에서 나온 모든 것  지금 자라고 있는 종류의 것을 경멸하시오,  그들의 기억않는 가슴과 머리는  미천한 침대에서 미천하게 난 산물이오.  농부를 노래하시오, 그리고 그 다음엔  어렵게 말타는 시골 신사를,  수도승들의 성스러움을, 그리고 그 후엔  흑맥주 술꾼들의 요란한 웃음을 노래하시오,  일곱 영웅적인 세기 동안에  땅 속에 매장된  명랑한 귀족과 귀부인들을 노래하시오,  당신의 마음을 지난날에 던지시오  우리가 다가오는 시대에도 여전히  불굴의 아일랜드 인이 되도록.  VI  헐벗은 벌벤 산 정상 아래  드럼클리프 묘지에 예이츠가 누워 있다.  조상 한 분은 그곳의 목사였다  오래 전에, 교회가 가까이에 서 있다,  길 옆에 한 오래된 십자가.  대리석도, 전통적인 구절도 없다,  가까운 곳에서 채석된 석회암에  그의 명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삶에, 죽음에.  말탄 자여, 지나가거라!  ~~~~~~~~~~~~~~~~~~~~~~~~~~~~~~~~~~~~~~~~~~~~~~~~~~~~~~~~~  긴다리 소금쟁이  문명이 멸하지 않도록  큰 전투에 패하지 않도록  개를 조용하게 하고 나귀를  먼 기둥에 매어라.  우리 장군 시저는  지도가 펼쳐진 텐트 속에 있다.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의 마음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의 마음 정적 속에 움직인다.     드높은 탑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그 얼굴을 기억하도록  이 외로운 곳에서 움직여야 한다면  아주 상냥하게 움직여라.  사분의 일 여자에 사분의 삼 아이인 그네  아무도 자길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네의 발은 거리에서 익힌  땜장이의 걸음을 흉내낸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네 마음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사춘기 소녀들이 마음속에  최초의 아담을 발견할 수 있도록  법황청 성당의 문을 닫고  아이들을 들여보내지 마라.  성당 안에서 미켈란젤로는  비게 위에다 몸을 기댄다.  새앙쥐 움직이는 소리 정도로  그의 손은 이리저리 움직인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의 마음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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